민족과 문화 – 길현모
40년 만에 다시 읽는 명 논설, ‘민족과 문화’. 내가 이 논설을 읽었던 때가 1978-9 년 경이었을 듯하다. 당시 ‘월간중앙’ 창간 10주년 기념호의 별책부록으로 ’10년간 게재 월간중앙 명논설집’이란 것이 나의 손에 들어왔다. 1978년 4월호의 부록이었다. 그 중에 인상 깊게 읽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는 논설이 바로 이것이었다.
당시 나이 30세에 읽었고 40년 후에 다시 읽은 것인데, 아직도 나는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변했나’ 하는 것에 주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당시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을 비교하는 것이다.
고유한 문화와 그릇된 애국심의 허구성을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글, 그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논설이 원래 발표된 것이 1974년이고 당시의 국내정세는 추측하기 힘들지 않다.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럴 때, 이 저자는 왜 고유문화, 국수주의적 애국심을 비판했을까? 그것이 유신체제를 간접적으로 공격한 것이라면 어떻게 이 글이 무사히 게재가 되었을까?
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런 ‘제약’을 멋지게 우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의 개방, 인류의 공통적 재산임을 주장하는 이 글은 결국 40년 뒤의 현 대한민국의 일반적 실상을 예언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100년 동안이나 서구문명을 수용했던 일본의 성장을 부러워하던 저자의 글대로 대한민국도 이제는 그에 못지 않은 개방적 문화를 자랑하지 않는가? 이런 문화적 발전이 정치적 발전의 도움을 받았는지는 나는 아직도 단언은 못하지만, 아마도 방해는 안 되었을 것이다.
民族과 文化
길현모 吉玄謨 서강대교수 서양사
약력
1923년 평북 희천 熙川 生
1949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졸업
1963년 서강대 교수
文化方向의 倒錯
근래 강화되고 있는 문화의 국수주의적 경향을 경계해야 하며 민족정신론에 대한 비판을 서둘러야 한다.
모든 정책이 그러하듯이 문화정책이란 문화라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해서만 올바르게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란 결코 용이하게 이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여기서 오늘날의 우리의 문화방향이 올바른 방향을 지향해 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물론 표제가 이미 말해주고 있듯이 필자의 문제에 대한 견해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필자는 자신의 비판적인 견해가 감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까닭에 다만 결론뿐만이 아니라 지면이 허용하는 한 자신의 논거를 윤곽이나마 제시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문화란 원래 인류의 공동의 재산이다. 거기에는 국적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국적을 붙일 수도 없다. 설사 국적을 붙여 본다 한들, 기득권이 행사될 수도 없고 특허나 독점 등의 권리가 설정될 수도 없는 문화에 대해서는 그것은 완전히 무의미한 일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군사력이나 정치권력에 의하여 一國民의 독점물이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기원이나 출처 여하를 막론하고 오직 그 힘을 필요로 하고 그 가치를 이해할 줄 아는 자들만이 주인이 될 수 있는 개방된 寶庫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은 문화국민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의 국적이나 계보나 고유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국민복지에 이바지할 수 있는 문화적 총역량만이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명백한 사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전시대의 신화처럼 퇴색해 버린 문화의 고유성과 문화의 순수성에 대한 숭상이 새로운 활기를 얻어 팽배하고 있으며 외래문화를 국적 없는 문화로서 배척하는 국수주의적 경향이 급격히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문화의 배타성과 폐쇄성은 언제나 문화의 불모, 문화의 자살을 향한 첩경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은 근래에 와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 국수주의적 경향을 크게 경계해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은 도착된 문화방향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민족정신론과 고유문화론의 핵심에 대하여 검토와 비판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문화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과제이며 또한 그것은 때늦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것은 하나의 ‘터부’로 化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民族 文化論의 系譜
요즈음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표현을 빌린다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의 도의는 땅에 떨어졌고 국적 없는 문화가 잡초처럼 무성한 가운데서 소비성 문화가 범람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문화 현황에 대한 이와 같은 진단은 우선 그 비관적인 색채에 있어서 안정과 번영을 구가해온 정치나 경제계의 진단과는 극히 대조적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이와 유사한 암담한 문화 진단은 수십 년을 두고 되풀이 되어왔을 뿐 그간에 아무런 進境을 보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핵심도 없고 두서도 없는 피상적인 문화 진단이 문화적 소양을 기본자질로 삼지 않는 일반 정치인이나 지적으로 미숙한 대학초년생 정도가 내려본 것이라면 구태여 문제 삼을 일은 못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수준의 문화 진단이 우리나라의 문화계의 제일선에서 지도적 지위를 독점해온 사람들의 입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어 왔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문화위기에 대한 감상적인 개탄만을 토로해 왔을 뿐, 최소한도의 진지한 문화 분석의 결과를 제시한 일이 없으며 더구나 이에 대한 납득할 만한 원인 규명의 노력을 제시해 본 일도 없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는 이직도 초보적인 문화론조차도 없이 문화위기의 단정만이 되풀이 되어온 셈이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서도 그들이 일치하여 내세운 한가지 논점은 있다. 즉 그것은 문화적 위기의 유일한 원인은 민족정신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지극히 당연하게도 이에 대한 유일한 대책은 민족정신을 진흥 고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필자로서는 오늘날의 우리의 문화 상황이 민족정신의 저하 내지는 추락을 반영하는 것인지, 그 서서한 혹은 급격한 상승을 나타내는 것인지에 대해서 판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앞서서 필자에게 있어 우선 문제되는 것은 그들이 항상 자명한 것처럼 내세우는 민족정신이란 그 명확한 내용과 속성이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명한다는 일은 필자에게는 오랜 숙제의 하나이었던 것이다.
사실 오늘날 4,5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민족정신이란 말은 이미 오랜 세월을 두고 낯익어온 말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 우리 주위에서 보급되는 민족정신론의 발상과 표현 상태와 선전 방식의 어느 것에 대해서나 거의 생소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일제치하의 10대, 20대의 어린 시절부터 민족정신에 대한 무수한 강론을 들어왔고 이를 고취하기 위한 허다한 운동을 체험해 왔기 때문이다.
먼저 일제는 일본민족의 민족정신이 세계에 유례없는 가장 우수한 정신이라고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따라서 우리들은 그들의 지배하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리의 지도자들은 한 민족에게는 오히려 일본의 민족정신보다도 더욱 우수한 고유의 민족정신이 있으니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서 독립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응수했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한국의 민족정신과 일본의 민족정신과의 싸움 속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민족정신론의 모방성
이상과 같은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들은 얼마 안 가서 자기 나름대로 이 문제를 졸업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렇게도 많은 노력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내세우는 대화혼 大和魂 즉 일본의 민족정신이라는 것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따라서 무엇이 고유하고 무엇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정신인지를 전연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일에 이르러서 필자는 다시 자신이 이 문제의 이해에 심히 미흡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유는 민족정신론의 기수로서 자처한 일본인들의 배후에는 이 분야의 대선배가 있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민족정신론의 계보에서의 시조로서 독일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줄리앙 방다’의 말에 의하면 국가간의 정치적인 싸움을 민족문화의 싸움으로 확대하고 민족정신론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창안해 쓰기 시작한 것은 독일인들이며 그 정확한 시점은 1813년이라는 것이다. 또한 문화인들이 자기들의 문화활동의 소산을 민족정신의 발현이라고 의식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도 역시 독일의 ‘레싱’과 ‘쉴레겔’ 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발상의 사상적 배경이 개성숭배를 모태로 한 독일 낭만주의였다는 사실은 지적할 필요조차 없다.
이리하여 민족정신론의 조국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는 이를 숭상, 고취한 수많은 문화인들을 배출하였는데 마침내 그 최고의 완성은 ‘프러시아’ 군국주의의 어용사가로서 유명한 ‘트라이츠케’에 이르러서 이루어졌다. 필자는 근래에 독일인들의 민족문화론 내지는 민족정신론과 일본인들의 그것과는 대비해 보기 위해서 일제 후기의 일본 문화계의 대표적 저작들을 읽어 보고 그들의 민족정신론이 독일의 선배들을 모방, 표절한 아류임을 다시 확인하면서 일종의 감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필자는 오늘의 우리나라의 민족문화론자들의 선의 善意를 의심하고 싶지 않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박한 심정의 소유자일 것이며 애국의 충정에 차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기필코 다짐해 두어야 할 일은, 만일 그들이 우리나라의 문화건설의 핵심적 토대를 민족정신론에 두고자 한다면 자신들의 논의 의 발상과 표현 방식을, 선전과 운동의 전개 형식을, 표어와 선언문과 내용 및 어조를 이상과 같은 민족정신론의 역사적 계보에 비추어서 대비 검토해 달라는 일이다.
만일 그들이 의식 못하는 가운데서 현대사상 전율할 만한 문화적 파괴와 민족적 죄악을 남긴 불길한 사상적 계보와 너무나도 놀라운 친연성 親緣性 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에는 하루 속히 이를 청산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復古
문화 내용의 분석-검토를 위해서나 문화 건설의 효과 있는 계획을 위해서나 이에 앞서 이룩되어야 할 여건은 문화 형성의 기본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고등한 문화는 반드시 고등한 종교를 토대로 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를 보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등한 문화는 하나의 고등종교 내지는 신앙의 경지로까지 숭앙될 수 있는 하나의 이념 체계를 핵심으로 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다시 말해서 문화란 이상과 같은 핵심 이념을 향해 바쳐진 사회 구성원들의 헌신의 소산인 것이며, 그들의 순교적 신앙과 희열에 따라 찬란한 광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과거 역사 속에 나타난 불교문화나 유교문화의 문화 소산을 통해서 이상과 같은 이치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상과 같은 문화이념은 구체적으로는 해당 사회의 원대한 목표 즉 이상으로서 구현되며 이로부터 반드시 황금시대를 동경하는 지향성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의 문화가 이상사회를 실현할 황금시대를 미래 속에 설정하게 될 때에는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지니게 되고, 과거역사의 특정시대 속에서 그 모형을 발견하게 될 때에는 復古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복고란 그것이 정당한 것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가피한 이유가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일정한 질서 즉 특정의 대상과 시기가 설정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현재에 지향할 이상적인 문화이념이 불교적인 것이어야만 한다면 우리의 역사 속에서 불교문화의 최고의 황금시대가 복고 대상이 될 것이며 이 때에는 천여 년 전의 불교문화의 모든 유산들이 성스러운 후광을 지니고 우리들의 새로운 숭앙의 대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또한 만일 우리가 추구할 문화이념이 유교이념이어야만 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숭앙은 유교문화의 황금시대로 되돌아 갈 것이며 이때에는 유교문화가 남긴 단편적 유산조차도 우리들의 무한한 감동의 대상이 될 것이다. 복고시대의 문화창조의 정신적 ‘에너지’는 바로 이러한 성질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크로체’의 이른바 ‘노스탤지어’의 역사서술도 그것에 수반되는 커다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에 한해서는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의 경우와 같은 무질서, 무한정한 ‘노스탤지어’는 도대체 어떠한 정당한 근거를 가진, 무엇을 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왜 우리들은 지난 시대의 모든 유물, 풍습의 보잘 것 없는 흔적에 까지도 그다지도 깊은 감동을 느껴야만 하는 것인가.
구석기시대로부터 현대에까지 이르는 조상들의 모든 행적과 유물에 무조건의 숭상과 애착을 강요하는 이와 같은 복고란 정신분열적인 지력과 감정의 낭비 이외의 것이 아니며 필경은 그릇된 복고, 맹목적인 복고의 통탄스러운 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사이비 似而非 문화인들은 정책적인 노선에 부화뇌동하면서 복고의 환상을 끈임 없이 확산하여 국민들의 맹목적인 好古 性向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기원보다 중요한 변화와 발전
아마도 그들은 복고의 이념을 우리의 민족정신 그것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해온 것처럼 우리의 민족정신의 고유성은 예의와 정결성의 존중, 그리고 평화애호의 미덕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상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인 이상과 미덕들이 어찌하여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예의의 근본은 인가니 개개인의 인격과 인권에 대한 존중을 토대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또한 정결의 근본은 비단 심미적 성향 뿐만 아니라 위생과 사회기풍의 정결성을 토대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만일 오늘날 이러한 점에서 우리를 앞지른 국민들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정신을 앞질러 모방했다는 논리가 성립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한 학문적 근거 자체가 모호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천 수백 년 전의 중국의 사적史籍 중의 몇 구절, 논거가 극히 의심스러운 가설 수준의 몇 편의 신화해석 등이 모두 의심할 수 없는 확증적인 자료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자료의 타당성에 대한 올바른 비판도 없이 역사적 방법도 아니요 언어학적 방법도 아닌 애매모호한 방법을 통하여 계시적 啓示的 인 결론만이 도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근거 위에 민족의 제단 祭壇 을 설치할 수는 없다. 만일 그들이 내세우는 정신적 대상에 대한 민족의 귀의 歸依를 요구하려 한다면 이를 위한 하나의 신학 神學 내지는 철학 체계를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이리하여 민족정신이 딸에 떨어졌다, 이를 진흥하기 위해서는 자각을 해야 한다라는 식의 상투적인 사고방식부터가 청산되어야 한다. 도대체 민족정신이 영원히 우리 역사를 관철하는 지고 至高의 정신이라면, 왜 그렇게도 쉽사리 땅에 떨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자기모순 내지는 자기모독적인 표현이 아니겠는가. 만일 우리의 민족정신이 땅에 떨어졌다면 그것은 어떤 원인으로 어떤 시기부터 그리 되었다는 것인가.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일제의 침략의 결과라고 한다면 우리의 민족정신은 그들에게도 대항할 수 없으리만큼 그렇게도 무력한 정신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것이 우리들의 무자각의 결과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왜 자각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인가. ‘게르만’의 자연신이 전투에 효험이 없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에 개종했다고 하는 ‘클로비스’의 지력에도 못 미칠 이런 수준의 논리가 왜 우리들에게는 오늘날까지 방치되어만 왔단 말인가
민족정신론자들이 상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해당 민족이 이룩한 역사상의 두드러진 업적과 인물들을 모두 민족정신의 구현이라고 주장하는 방법이다. 이런 경우에는 민족정신의 내용은 더욱 모호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마침내는 각 국민 간의 민족정신의 경쟁적인 전시가 현출될 수 밖에 없다. 소련인들은 1930년대에 이런 경쟁에 비상한 열의를 발휘하여 근대과학의 주요 발명과 창안들은 물론, 심지어는 ‘스포츠’의 주요 종목도 모두 자 국민의 창안이라고 발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결과가 세계의 냉소를 초래했을 뿐이었음은 우리들의 기억에도 생생한바 있다.
가령 ‘플라톤’ 과 ‘아리스토텔레스’ 가 ‘그리스’인이었다고 해서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자질이 특출하다고 보아주는 사람은 없는 것이며, ‘코페르니쿠스’가 ‘폴란드’ 인이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서 ‘폴란드’인의 탁월한 천문학적 자질이 증명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류문명의 토대 자체를 타민족들에 앞서서 형성했던 ‘이집트’ 인조차도 오늘날에 와서는 문화민족의 대열에서 탈락된 지 이미 오래다. 역사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기원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의 과정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역사가 ‘마르크 불록’은 기원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역사가들의 병폐의 하나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고유문화의 환상
위에서 우리들은 그릇된 민족정신론의 모순의 일단을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민족문화론이 낳아 놓은 쌍생아 雙生兒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시 그들의 또 하나의 거점인 고유문화론에 대하여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원래 고유의 숭배는 개성적인 것에 대한 예술적인 영탄 映嘆 에서 비롯된다. 그런 까닭에 “개성적인 것은 형용을 초월한다”라는 유서 깊은 어구가 되풀이 인용되고 있다. 만일 그것이 개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예술적인 감흥으로만 시종되는 것이라면 거기에 하등의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개성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을 고유의 것이라고 단정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가장 우수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고유성의 기원을 판별하는 역사의 기능과 가치의 판별이라는 철학의 기능과 를 불가피하게 개입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의 문화가 가장 우수하다, 따라서 가장 가치가 있다는 단정은 타 문화와의 비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고유문화론자들이란 이성과 논리에 대한 기피성향을 본색으로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찾을 수 있는 귀착점은 논리를 포기한 무조건-절대절대라는 영역이다. 이로부터 그들이 신봉하는 표어로서 “내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절대 우수하다”라는 말이 탄생된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 이기주의의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다음으로 고유성의 단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이 찾을 수 있는 길은 학문으로부터의 도피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역사적인 추적이 불가능한 환상의 세계나 신화의 세계, 혹은 이론적인 분석이 지난 至難 한 예술의 세계로의 도피습성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서 ‘나치’ 독일의 민족이론의 귀착점이 ‘고대 게르만 영웅족’이라는 환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일본의 고유문화론자들의 중심 거점이 신화의 세계이었다는 사실만을 상기함으로써 족할 것이다.
원래 역사상 이름 붙일 수 있는 고급한 문화란 예외 없이 왕성한 문화교류의 소산인 것이며 반드시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만일 그 기원에 있어서 고유한 것을 찾으려고 한다면 사회생활의 완전한 폐쇄성을 상정할 수 있는 원시시대로까지 소급할 수 밖에는 없다. 문화의 고유성내지는 순수성이란 설사 그러한 것을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해당 문화의 저급성을 말하는 것일 뿐 결코 명예로운 표지가 될 수는 없다.
‘애국’이라는 이름의 문화적 폭력
물론 문화의 영역 내에는 지역적인 혹은 지리, 풍토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요인들은 고급한 문화에 있어서는 그 핵심 부분이 아닌, 다만 거기에 첨가되고 가미된 부분일 따름이며 전형적으로는 문화의 외곽산물일 따름이다. 즉 축제의 형식, 복장, 음식 등의 민속적 부분이 모두 그러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축제 형식의 특수성이나 복장, 음식 등을 가지고 문화의 우열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들의 보다 신중한 검토를 요구할 만한 대상은 언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언어가 민족문화론에서 항상 큰 비중을 차지해 온 첫째의 이유는 그것이 민족을 구분하는 가장 유용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흔히 사용되어 온 혈통이라든가 국토경계선 등의 기준에 비하여 민족의 구분기준으로서 언어가 지니는 개연적 蓋然的인 효용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고유한 언어이기 때문에 우수하다든가 언어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든가 하는 문제와 혼동될 수는 없다. 언어도 그 밖의 문화분야와 마찬가지로 교류와 상호 영향하에서만 풍부해질 수도 있고 발달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 언어의 고유한 순수상태를 되찾는다고 말하면 과연 어느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경 그것은 언어의 원시화를 제창함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 언어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싶어하고 자랑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의 한 작가는 ‘이탈리아’어를 자랑하면서 그 이유를 그것이 자기들만이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일이 있다. 이에 비하여 불어는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저급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날의 어리석은 웃음거리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는 반드시 하나의 웃음거리만은 아닌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도 같이 고유문화론 이란 문화와 역사의 본성을 무시한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고 고유성의 숭상 崇尙 이란 하나의 역리 逆理 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인 정확성을 숭상함에 있어서 그렇게도 지극한 이 나라의 일류학자들이 어찌하여 고유문화론 앞에서는 한결 같이 학문을 포기하고 공순 恭順 의 뜻만을 표시해 왔던 것일까. 이에 대하여 필자는 하나의 중대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이들 고유문화론자들이 ‘애국’이라는 고지 고지를 이미 점령하고 그들에게 추종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비애국자’ 내지는 ‘반역자’ 의 낙인을 찍을 위협적인 태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안출 案出 한 성공적인 음모의 하나이었으며 그들은 이를 통하여 사실상 이 나라의 문화계를 위압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이러한 문화적 폭력을 이 이상 좌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권력층에 독점될 수 없는 애국심
이들은 진정한 애국심은 고유문화와 고유정신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신념을 토대로 해서만 비로소 발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래 애국심이란 고유문화 의식과는 무관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심정인 것이다. 그것은 향토와 동포에 대한 사랑의 자기 희생적인 발로 이외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립은 원시시대로부터 기본집단의 존립에 좌우되었기 때문에 집단의 존립과 방어를 위한 희생적인 헌신은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속성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들은 부모형제가 문학적으로 우수해야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동포가 아무리 무식해도 우리의 국토가 아무리 빈약해도 그 수호를 위하여 우리의 애국심은 발동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애국심이란 소박한 부족애의 국민적 발현 이외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 발현은 자연적인 것이며 문화적 가치나 고유의식 등이 그 필수적 전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리를 허다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충분히 설명할 수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중국문화에 대한 지극한 존숭감 尊崇感 을 지니면서도 그들의 침략에 대해서는 항상 열렬한 애국심을 발휘하여 국토를 방어해 왔다. 우리들의 오늘날 있음은 민족정신이 무엇인지 고유문화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이름없는 조상들의 거룩한 애국심의 결과인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그리스’문화를 높이 숭상하는 가운데서도 ‘그리스’인들을 능가하는 애국심을 발휘하여 그들을 정복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의 문화를 이어받은 미국인들은 열렬한 애국심을 발휘하여 그들과 싸워 독립하였다. 아니 그보다도 ‘아메리카 인디언’ 의 부족애가 미국인들의 애국심에 비해 참되지 못하다거나 강하지 못하다고 누가 감히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애국심을 고유문화론과 결부시킴으로써 이를 권력층들과 더불어 독점하려고 하는 일부 문화인들의 독선적, 배타적인 기도 企圖 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 우리의 문화관을 보편적인 이성의 토대 위에 수립할 것인가 혹은 이기적인 감정의 토대 위에 수립할 것인가를 결정할 시점에 위치해 있다. 역사가 ‘크레블리언’은 ‘영국사’의 첫 대목에서 영국인들은 역사과정을 통해서 여러 민족들의 피를 섞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우수한 자질을 지니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또한 개성숭배의 사상적 계보를 계승한 ‘마이네케’ 조차도 ‘민족정신의 우수성을 나타내려는 공허한 의도’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의도는 ‘타민족들의 냉소’를 초래할 뿐이라고 말하였다. 민족의 자주성과 자긍은 문화의 고유성이라는 근원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다 확고한 기반, 즉 인류가 분유 分有 하는 존엄한 평등성 위에 확고히 수립하여야만 할 것이다.
‘호이징하’의 말 – 선택에 대한 책무
해방 후 수십 년간에 걸쳐서 우리들은 이 나라의 문화인임을 자처해 왔고 또한 학자임을 자처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회고해 보건대 그 동안 우리들은 하나의 뚜렷한 문화적 경륜조차도 제시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우리의 족적은 지식의 빈곤, 철학의 빈곤, 역사적 안목의 빈곤을 나타내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이 땅의 일부 기성 문화인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단체를 결성하고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당파싸움과 자리다툼에 몰두하고, 정치권력과 금력에 아부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들의 근래의 기치는 민족적인 것 다시 말해서 한국적인 것을 고취한다는 점에서 더욱 뚜렷해졌다. 그리하여 ‘한국적 민주주의’ ‘한국적 문화’ ‘한국적 사고방식’ 등이 그들의 열렬한 숭상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이러한 한국적인 것을 가지고 국민학교로부터 대학과정에까지 이르는 교과서의 내용을 채워야만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이들은 국민문화와 국민교육 전반에 걸친 일대 변혁운동에 착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현하의 모든 부조리의 근원을 한국적 특수성을 가지고 합리화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끝내 개별적인 가치가 보편적인 가치에 우선하고 개별적인 판단이 보편적인 판단에 우선한다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1935년에 ‘네델란드’의 사가 史家 ‘호이징하’는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암담한 역사적인 파국을 내다보면서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들이 체험하고 있는 무거운 정신적 압박의 시대는 젊은이들보다도 노인들에게 있어 견디어내기가 보다 쉽다. 노인들은 시대의 중압을 조금만 더 끌고 나가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공포와 근심은 죽음의 접근으로 해서 경감된다. 그들의 희망과 신뢰, 그들의 행동에의 의욕과 용기는 앞으로 더 살아나가야 할 젊은이들의 손에 넘겨진다. 판다, 선택, 노력, 활동에 대한 중대한 책무를 맡게 되는 것은 이들 젊은이들이다.”
‘불크할트’를 이은 20세기 최대의 문화사가라고 불리어지는 ‘호이징하’의 이상과 같은 겸허한 자세에서 오늘날의 한국의 기성 문화세대들은 많은 것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자신들의 희망을 최소한도로 정리하여 앞날의 문화건설의 고귀한 책무를 다음 세대에 맡겨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자신의 지적인 빈곤과 무기력을 넘겨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앞길을 더 이상 흐려 놓아서는 안 될 것이며 오직 그들을 위한 한 주먹의 거름이 되고자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 민족이 계속해서 지향해야 할 이상은 보다 많은 자유, 보다 많은 평등, 보다 많은 부 富의 실현이기 때문에 이러한 복지를 보다 앞서 실현한 선진 국민들의 문화이념을 겸허하게 배워야 한다고 당부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일부 인사들은 필자의 이러한 심경을 국적 없는 사이비 문화인의 비애국적인 감상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들에게 오늘날 이미 세계적 강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경우를 허심탄회하게 관찰할 것을 권고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늘날 지니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역량은 일본민족의 고유문화의 힘이 아니라 그들이 백 년간을 숭상하며 섭취한 서구문명의 힘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백 년이 꼭 우리의 백 년이 되라는 법은 없다. 또한 백 년이라 한들 필경은 역사의 일순간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오늘날의 선진국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화적 제諸문제를 우리의 문제로서 앞질러 근심할 필요도 없다.
역사는 각시기에 따라 그에 해당한 과제들을 인류에 부과해 왔으며, 인류는 그들 나름대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왔기 때문이다.
– 월간중앙 1974년 1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