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비사 전집
깨어진 北伐의 꿈
효종(孝宗=西紀 1,649-1,659)은 나이 삼십일 세에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그 형 소원세자와 더불어 아홉 해라는 긴 세월을 볼모잡이의 몸이 되어 심양과 북경에서 갖은 풍상을 다 겪은 분이다.
그가 탄생되기는 인조가 아직 능양군으로 있을 때였고, 그의 모후(母后)는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이다. 그는 여덟 살 때 봉림대군에 봉해졌으며 부인으로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따님을 맞았다.
효종은 심양과 북경에서 오랜 볼모잡이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맹세한 사실이 있었다.
( 첫째 군사를 기를 줄 아는 장수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만 병자, 정축의 뼈에 사무치는 부끄러움을 씻을 수 있다. )
이렇게 마음 속으로 깊이 맹세했던 것이다. 효종은 즉위 초에 거유(巨儒)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俊吉), 이유태(李惟台) 등을 불러서 정치를 보좌케 하고, 일단 멈추었던 대동법(大同法)을 다시 시행하고 수차(水車)를 장려하여 농사관계에 쓰게 하는 등 내정 충실에 힘을 섰다.
이리하여 세월이 흐르기를 오 년… 갑오년에 이르러서 웬만큼 국고(國庫)가 충실히 된 뒤에 비로소 삼남 각도에 오영장을 두었다.
그 어느 날 임금은 야반에 갑자기 침전에서 무감을 불렀다. 야반에 급한 어명이라 황황히 무감이 달려서 뜰 아래 국궁 하고 영을 기다릴 때에 임금은 손짓으로 무감을 툇마루 가까이까지 불러서 무감의 귀에 무슨 분부를 내렸다. 그날 밤 자정이 훨씬 지나서 대궐 별감 십여 명은 말을 달려서 장안 각 무신(武臣)의 집으로 향하였다.
지금 예궐하라는 분부가 계시오.
이 분부를 들은 무신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대궐에서 부르는지라 황급히 옷을 입고 혹은 말로, 혹은 가마로 대궐로 달려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이 대궐에 들어서자마자 사면에서 빗발치듯 화살이 날아와서 들어서는 무신은 모두 이 불의의 화살에 맞아서 거꾸러 졌다. 그러나 화살에 촉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단지 한 사람, 빗발치는 살도 모르는 듯이 손을 앞으로 읍하고 국궁 한 채로 정전(正殿)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용상 아래 읍하고 섰던 한 내관의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라는 하문이 계시오.
삼도 도통사 이완(李浣)으로 여쭈오.
우렁찬 대답은 마치 대궐이 드렁드렁 울릴 듯이 터져 나왔다.
오오.
그것은 내관의 소리가 아니었다. 용상 위의 임금의 옥음이었다.
오오, 한 마디 뿐 임금은 용상에서 내렸다. 부축하려는 내관을 물리치고 몸소 옥보를 정전 밖으로 옮겼다.
상감마마, 야반의 급명, 어떤 사연이온지?
저 빗발치는 화살은 어떻게 하고 들어왔소?
상감마마.
이완은 의대 앞자락을 약간 들쳐 보였다. 겉은 예사 의대지만 그 속에는 든든히 갑옷을 두른 것이었다.
그 갑옷은?
예, 야반에 지급 예궐 하랍시는 어명, 범상치 않은 일이옵기 총망중이오나 속에 무장을 하고 왔나이다.
오오, 국가의 동량.
임금은 몸소 이완을 붙들었다. 그리고 몸소 인도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그날 임금은 이완과 단 둘이 밀의로써 밤을 새웠다. 이튿날 이완은 특지로 훈련대장의 임무를 띠게 되었다.
그새 오 년간을 임금 마음 속에만 간직하고 오로지 그 준비 행동으로서 국력 충실에만 힘쓰던 궁극의 목적 북벌(北伐)은 드디어 공포되었다.
최근 오 년간을 두고 보아야 이 대임을 맡을 장신(將臣)은 대장 한 사람밖에 없었소. 그 안식이 틀리지 않아 그날 밤 예궐할 때에 총망 중에도 몸단속을 잊지 않은 점은 가히 대임을 넉넉히 맡을 만하니 나를 도와서 병자의 치욕을 씻어 주시오.
임금이 손을 잡고 간곡히 이렇게 당부할 때에 이완은 눈물을 흘리며 이 성지(聖旨)에 보답하기를 맹세하였다.
임금과 이완은 의논한 끝에 전국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 육백 명을 모아 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술을 연습시키어서 장차 북벌의 웅지를 펼때에 쓰려고 준비했다.
임금은 또한 송시열의 협조를 얻어 정치에도 몰두하여 장차 북벌할 때라도 그 군량이 부족하거나 국력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 방면으로 노심하였다.
갑오년에 드디어 전제(錢制)를 시행했다. 이전까지는 베로써 서로 바꾸어 물물교환(物物交換)을 하던 것을 장차 웅지를 갖고 있는 임금은 그런 불편한 제도를 그냥 두었다가는 큰 일을 할 때에 지장이 되겠으므로 당전(唐錢) 십오만문(萬文)을 사다가 먼저 평양, 안주 등에 사용케 하여 보고, 그 결과가 양호하므로 훈련도감에 명하여 돈을 만들어 퍼치었다. 돈으로 바꿀 물가표(物價表)까지 작성하여 이 낯선 쇳덩이가 퍼지기 편토록 하였다.
군사들의 옷 제도도 너무 거추장스럽다 하여 경편하고 편하도록 개량케 했다. 말하자면 풍속제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세밀하게 관찰하여 개량한 것이다. 그 개량이라는 것은 장차 북벌할 때 유리하도록 하자는 복선에서 나온 것이다.
전국에 금은광(金銀鑛)을 장려하여 거기서 나는 금은을 모두 거두어 올려서 바둑돌 모양으로 만들어 두었다. 이것도 장래 군용금으로 쓰려는 것이었다. (소위 금바둑쇠라는 것으로서 대원군 집정 초까지 그냥 곱다랗게 보관되어 있다가 경복궁 대궐 영조에 쓰였다.)
이렇듯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임금의 마음에 있는 바는 북벌 뿐이요, 무슨 일이든 모두가 북벌에 이용하자는 복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느덧 창고에는 그득히 곡식과 재물이 꽉 차게 되었다.
이리하여 을미(乙未), 병신(丙申), 정유(丁酉), 무술(戊戌)을 지나서 기해년(己亥年)에는 국력과 군력이 아울러 충실하여 인제는 거사(擧事)라는 단 한가지의 과정이 남아있게 되었다.
드디어 출사(出師)의 날까지 결정되었다.
효종 십 년 기해 오월 오일.
이 최후의 결정까지 끝났다.
그 해 봄에 임금은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린(金麟), 송인수(宋麟壽), 이항복(李恒福), 김장생(金長生) 등의 서원에 사액(賜額)을 하였다. 지금 바야흐로 북벌의 대군을 떠나 보냄에 국내의 말썽 많은 유생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썽을 부리다가 다시 당쟁이 일어나면 대사를 그르치겠으므로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선유(先儒)들 서원에 사액을 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 둔 것이다.
삼월에서 사월로 들어서면서부터는 북벌 준비 때문에 온 나라가 뒤끓었다. 이렇게 사월 달도 휙 하니 지나가고 오월 초하루.
인제 나흘이 남았구나.
손꼽아 기다리는 출사일(出師日)을 다시 꼽아 보면서 이완 대장은 엄중히 갑옷으로 몸을 싼 채로 잠깐 잠을 자려고 안석에 기대었다. 안석에 기대는 참에 무슨 불길한 꿈을 걸핏 꾸면서 이완은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귀를 울리는 것은 누군가 대문을 요란히 두드리는 소리였다.
대궐에서 급사(急使)가 달려온 것이었다. 급히 입궐하라는 분부였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슴이 철썩 내려앉은 이완 대장은 까닭 없이 떨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여 등대하는 말에게 올라 곧장 대궐로 달려 들어갔다.
들어가니까 기다리고 있던 승전빗이 곧 이완을 인도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내전 뜰 아래 국궁하고 서 있으려니 안으로 들라는 것이었다. 이완은 국궁하고 황급히 동온 돌 문 밖에서 승후 하였다.
이완, 참내하였습니다.
들, 들어오오.
가슴이 서늘했다. 옥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 우렁차던 임금의 음성으로는 들을 수가 없었다. 분부를 따라 동온돌 안에 들어서면서 힐끗 보매 용안이 검붉게 변하고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는 것이었다.
상감마마
이완은 넙죽 엎드렸다.
대장, 내 몸이 편찮아!
아래 윗 이가 떡떡 머주치기 때문에 분명치 못한 옥음으로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상감마마
좀 가까이
이완은 무릎 걸음으로 나아갔다.
대장, 오월 단오, 오월 단오
예, 출사가 인제 겨우 나흘 남았습니다.
내가 죽는 일이 있을지라도 기어코 북벌은 진행하오.
마마! 그게 무슨 하교이시온지. 마마!
그러나 임금은 인제 기운이 없는지 그 자리에 모로 눕고 말았다.
그날 밤 이완은 내전 뜰에 서서 밝혔다. 천 가지 만가지 생각이 이완의 머리를 오락가락 했다. 출사하기로 결정된 날이 이제 겨우 나흘이 남았고 그 날이 이 용감한 북벌군을 임금이 몸소 모악원까지 배웅하기로 내정이 되고, 그 준비조차 다 되었거늘 갑자기 옥체 미령하니 이 일을 장차 어쩌나.
하늘이여. 우리 전하의 환후를 쾌차케 해주시오.
이완은 밤새도록 하늘을 우러러보며 빌었다. 그러나 이튿날은 환후가 더욱 침중하였다.
이리하여 이틀, 사흘, 나흘(출사키로 작정한 그 전날)에 마흔하나라는 한창 장년으로서 평생의 웅지를 펴보지 못하고 임금은 황천의 길을 밟았다.
禮論으로 지새는 나날
현종(顯宗=西紀 1,660-1,674)은 효종의 독자(獨子)로 부왕이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탄생하였고 부왕이 승하하여 등극할 때는 십구 세의 어린 나이였다.
먼저 현종은 조모가 되는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가 아들인 효종의 승하로 입게 되는 복상 문제로 골치를 앓게 되었다. 즉 어머니 되는 자의대비가 아들을 위하여 일년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삼 년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싸우게 된 까닭이다.
서인 송시열과 송준길(宋俊吉)은 효종은 차자(次子)이니 일년이면 된다 하였고, 남인 허목(許穆)과 윤휴(尹 )는 비록 차자라도 장자로 승격 하였으니 응당 삼 년이라야 된다고 서로 싸우며 양보하지 않았다. 임금도 자기 아버지의 종통(宗統)을 인정하느냐 않느냐 하는 중대문제이므로 이 복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윤선도(尹善道)는 상소를 올려
< 지금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는 삼 년이 옳다고 생각하오. 효종이 비록 차자 라도 대통을 이었으니 장자로 승격된 것이 확실한데 송시열 등은 딴 수작들을 부리니 이것은 일종의 승통을 인정치 않겠다는 것으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소. 만일 송시열의 말과 같다면 그럼 효종은 가세자(假世子)라는 말인지 섭정왕(攝政王)이란 말인지 한 번 묻고 싶소.
효종을 정통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소현세자의 자손을 내세우려는 수작인 것이 분명하오. >
하여 예론(禮論) 싸움에 크게 불을 질러 놓았다. 서인들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내세운다는 말을 들은 궁중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승지 김수항(金壽恒) 등은
윤선도의 상소문은 예론을 칭탁(稱託)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요.
하고 들고 일어났다.
임금도 윤선도의 상소문이 너무 지나친 말이라 하여 그 상소문을 돌려 보내고 근신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만한 처벌로 만족하지 않고 윤선도를 죄 주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면 윤선도를 두둔하는 남인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이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서로 싸우게 되자 임금은 할 수 없이 윤선도의 상소문을 불지르게 하고 삼수(三水)로 귀양을 보냈다.
처음에 예론은 남인측의 주장이 유리하게 전개되더니 과격한 윤선도의 상소문이 도리어 역효과를 낸 셈이 되고 말았다. 예론은 결국 서인들의 주장대로 기년(朞年=일년)을 채용하였다. 이때로부터 송시열의 서인 일파들이 조정에 서게 되어 남인은 세력을 쓰지 못했다.
다음에는 현종 갑인년(甲寅年) 이월에 임금의 어머니 인선대비(仁宣大妃) 장씨(張氏)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임금은 전에 아버지 효종 때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특히 일에 잘못이 없도록 하라고 전교까지 내리었다. 그런데 예조판서 조형(趙珩) 등이 다시 자의대비에 대한 복상 문제를 상주하였다.
< 시왕제(時王制)에 의하면 어머니가 자부(子婦)를 위해 복을 입는 것은 기년(朞年)과 대공(大功=九個月)의 두가지가 있습니다. 전에 효종대왕 때는 대비께서 기년의 복을 입었으니 이번에는 거기에 준해서 대공의 복을 입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
이래서 문제는 또 벌어지게 되었다. 즉 이번에는 효종의 부인이 승하하였으므로 시어머니 자의대비가 며느리를 위해 일년의 복을 입느냐 구 개월의 복을 입느냐 하는 것이다. 임금이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자의대비의 복제를 의논하고 있을 때 대구(大邱)의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를 올려
< 대왕대비의 복제에 대하여 대공으로 마련하는 것은 효종대왕 승하 때와 같이 인선대비(仁宣大妃)를 장부(長婦)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요. 마땅히 기년으로 해야 하오. >
하고 일부 서인(西人)들이 대공(大功)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대하고 나섰다. 임금도 잘못하다가는 자기도 차자의 손(孫)이란 대우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어서
전에 부왕 때 기년제를 채택한 것은 효종을 차자로 취급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번에도 인선왕비를 작은 며느리라는 입장에서 대공으로 하자는 것이 아니요? 더 논할 것 없다. 기년제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고 서인들의 주장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대공(大功)을 주장하던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하여 조형, 김익경(金益炅), 홍주국(洪柱國) 등은 귀양을 가고 말았다.
원래 현종은 어려서부터 몸이 유약(柔弱)하였다. 이 때문에 재위 십사년간을 두고 건강한 날이 드물었고, 따라서 그 체질을 그대로 받아가지고 탄생한 세자(世子)까지 유약다질(柔弱多疾)해서 장차 국사(國嗣)가 근심이 되었다.
어쨌든 왕실이 고적한 것만은 가리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인선대비의 인산(因山)이 끝나고 효복(孝服)을 입은 채 현종은 다시 병석에 눕게 되었다. 현종은 아직도 삼십여의 장년이나 날이 갈수록 환세가 침중해지자 후계자를 튼튼히 세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세자의 나이는 십사 세였다. 미목이 청수하고 기골이 준수할 뿐 아니라 성품이 화순하고 재질이 총명했다. 어느 모로 보든지 믿음직한 인물이 될 만한 싹이 보였다.
그러나 오직 근심되는 것은 그 신체가 건강치 못한 것과, 또 그 나이 아직 어려서 설사 지금 일을 당하게 된다면 아무리 숙성하다 하더라도 그 나이로는 왕위에 오르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였다.
병환이 위독한 아버지는 역시 병중에 있는 동궁을 앞에 앉히고 당신의 사후의 일을 근심하며 이렇게 일렀다.
내가 죽더라도 앞으로 아비와 같이 의지하고 믿을 만한 재상이 있다. 그는 시임 영의정 허적(許積)과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이다. 일 후에 가장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 때에는 그 두 재상에게 부탁하고 믿어서 지내어라.
이렇게 이르고 조용히 두 재상을 불러서 다시 동궁에게 사부(師父)의 예로서 절하여 뵈읍게 하고, 인해서 두 재상에게는 간곡한 말로 고명 유촉(顧命遺囑)을 거듭 부탁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지 한달 후 갑인년(甲寅年) 추석(秋夕), 현종은 임종을 재촉하였다. 만호장 안에서는 추석 차례도 차리지 못하고 초조히 기다리고 있을 때 궁중에서는 벌써 임금이 빈천(賓天)했다는 소문이 들리었다. 재상의 집, 선비의 집은 물론이요, 서인(庶人)이나 천민(賤民)의 집에서도 추석 차례를 지내지 못했다.
그러나 저녁 때부터 기식이 소생된 임금은 병세가 차차 감해졌다. 하룻밤을 그대로 새우고 그 이튿날 아침에 임금은 궁인들에게 할마마마를 뵙게 해 달라고 분부했다. 할마마마는 예론(禮論)으로 늘 골치를 앓는 자의조대비(慈懿趙大妃) 그분이다.
얼마 후 자의대비는 임금의 병상 앞까지 나타났다. 대비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손왕(孫王)의 이마를 짚었다. 이때 젊은 임금은 대비의 손목을 잡으면서
저는 회생할 가망이 없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앉은지 십오년에 아무것도 해놓은 일 한 가지 없이 선대왕의 유촉을 받잡고도 십오년을 벼르면서도 그 이가 갈리게 분한 국치(國恥)도 씻지 못한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나게 되오니 너무나 원통하옵니다.
대비는 이 젊은 임금에겐 어머니 못지않게 차마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대비는 인조대왕의 계비로서 이제 오십일 세의 나이로 봄에 승하한 모후 보다도 여섯 해나 젊었다. 그러나 현종이 어릴 때부터 지극히 사랑해 주었다. 어머니보다도 더 따르고 지냈던 그 분이었다.
일찍이 부왕되는 효종이 빈천할 때에도 효종은 아들 현종을 두 번 세 번 계모되는 이 대비에게 부탁하고 그 후 현종이 이십의 약관으로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임금을 보호하여 내정을 보좌하여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미 어머니 인선대비도 승하하고 이 분을 오직 할머니 겸 어머니로 믿고 의지하는 터이니 그 사모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였다.
할마마마, 불효 손이 죽은 후에는 크고 작고 무슨 일이든지 오직 할마마마께 당부합니다.
그러나 동궁이라는 것이 약질이어서…
대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오열하였다. 옆에 모시고 있는 왕비 명성왕후(明聖王后)도 따라서 울음을 삼키었다. 왕비는 임금보다 두 해가 아래인 삼십이 세였다.
임금은 동궁의 병세를 물어보고 곧 앞에 데려오라 했다. 얼마 후 동궁이 들어왔다. 동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갑자기 숨결이 높아지면서 눈을 감고 정신을 잃게 되었다.
한동안 창황망조하는 중에 저녁 해가 질 무렵에 창덕궁 궐문 밖에서는 기어이 천아성(天鵝聲)이 일어났다. 곧 국휼(國恤)을 반포하고 치상(治喪)의 예제(禮制)를 진행하는 한편 다음 군왕의 즉위식을 하였다.
안에서는 자의대비가 모든 일을 보좌하고 밖에서는 고명 유촉을 받들던 허정승과 김정승이 만조 백관을 영솔해서 대정을 보좌했다. 이번에 등극한 임금이 효종의 독자(獨子)인 숙종(肅宗)이다.
女 難 春 秋
오긍골의 사흘밤
숙종(肅宗=西紀 1,674-1,720)은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올랐으나 그 영특한 자질은 과히 유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근심되는 일은 숙종의 나이 어리고 또다시 병석에 눕게 되자 평소에 보위를 엿보던 그 무리들이 다시 준동하는 기미가 보이게 되는 일이었다. 더욱 세상의 물정이 이리 뒤치락 저리 뒤치락 하는 통에 부왕인 현종이 빈천하는 시간까지 재삼 간곡하게 당부한 말 [아버지 대신 의자하고 믿으라]하던 허적(許積)을 자기 스스로 죽이게까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허적은 무슨 까닭에 칠십 평생을 부귀로서 살아가다가 역모로 몰려서 몸에 사약 사발을 안고 죽게 되고 전 가족이 멸망하는 참화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가. 허적은 그 관직이 혁혁해서 입조 오십 년인 현종 말년에는 지위가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되고 따라서 현종이 승하할 때는 고명유신으로 숙종을 추대하여 다시 숙종의 조정에서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차차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의 세력을 펴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서인들은 이 눈치를 알고 허적을 어떻게 해서든지 치워버릴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허적에게는 아무러한 탈도 잡을 것이 없으므로 그 아들 허견의 하는 일이 암만해도 수상해 보이니 이 자의 일을 뒤쫓아 살펴보아서 미심한 일만 있으면 당장 고변 해서 처분을 내리도록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때문에 이 일을 알게 된 허적은 그 아들에게 이런 세상 물정을 귀띔해 일러 주었다.
그러고도 사람이 믿음성이 없기 때문에 늘 자기의 심복을 내세워서 허견의 행동을 뒤쫓아서 내탐하게 하였다. 그러나 허적의 귀에는 허견에 대한 세상 풍설이 좋지 못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뉘집 양가 여자를 뚜장이를 놓아서 빼어내다가 간통하였다느니, 별별 말이 다 들리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놀랍게 들리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허견을 지목하여 복선군(福善君)이라는 종친을 껴가지고 역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받는 일이었다. 허견을 불러서 주의시키면 펄쩍 뛰면서 그런 일이 절대로 없다고 하지만 허적은 아들로 인해서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러던 중, 허견이 또 일을 저질렀다. 허견은 전부터 역관(譯官) 이동구(李東耉)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항상 잊지 않고 있었는데 후에 그 딸은 역시 역관 다니는 서효남(徐孝男)의 며느리가 되어 들어갔다. 이동구의 딸은 그 이름을 차옥(次玉)이라 하여 그 아름다운 성중에도 소문이 높아서 당시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운 얼굴을 비교할 때에 [이차옥이 만큼이나 예쁘구나]하였다.
허견은 항상 이차옥을 제 손안에 넣어보려고 벼르던 중 어느 날 술 취한 마음에 갑자기 이차옥을 생각하다가 드디어 온당치 못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차옥의 고모부 이시정(李時靖)도 역시 역관 집인데 새로 며느리를 보게 되어 잔치를 베풀자 이 잔치에 이차옥도 청함을 받아서 참례하게 되었다. 이차옥에게는 그 내종 오라비의 장가드는 잔치에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고 손들이 차차 돌아갈 때쯤 이시정의 집에는 낯선 교정(轎丁) 한 사람이 들어서면서
사동 아씨 여기 계시지요? 저 서역관댁 마님이 별안간 위중하시다 하여 모시러 왔습니다.
이런 말을 하니 이차옥은 그 교정이 낯선 사람이지만 의심치 않고 곧 따라 나섰다. 교자는 휭 하니 달렸다. 뒤에는 몸종이 따라 섰으나 중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교정들은 교자를 메고 사동 서역관 집으로 가지 않고 오긍골 어떤 조그마한 집으로 들어가더니
이 댁이 마님 친척되시는 댁인데 여기 오셨다가 병환이 나셔서 이댁 건넌방에 누워 계십니다.
하면서 그 집 마루 앞에 내려놓고 교군을 멘 채 그대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이차옥은 시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말에 마음이 황황하여 아무 정신 없이 그 건넌방문을 열고 보니 그 안에는 시어머니가 누워 계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젊은 사나이가 반가이 맞았다.
오, 차옥이 오래간만이요.
하고는 일찍이 그 친정 부친 이동구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대를 마음에 항상 사모했노라고 중언부언하는데 행동이 괴상했다.
이때에야 비로소 이차옥도 이번 일이 모두 이 흉한 자의 간계로 꾸며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장 문을 박차고 도망가려고 했으나 그때 형편으로 도저히 그 독수를 면할 수 없어 드디어 그 사나이에게 욕을 당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기회를 보아 나가려 했으나 철통 같은 감시로 인해서 도저히 이 집을 벗어나 갈 수가 없었다. 악착을 떤다면 나갈 수도 있겠지만 이웃이 알게 되고 또 시집에게까지 알게 된다면 더욱 창피한 일이었다. 차옥은 아주 벙어리같이 꾹 참으면서 사흘을 지냈다.
연사흘을 계속해서 그 이름도 모르는 음흉한 사나이에게 갖은 욕을 다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 밤 그 사나이는 차비를 구해서 차옥을 집으로 데려다 준다고 이 집에서 내보냈다. 차옥은 이번에야말로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교자 안에서 자주 바깥을 살펴보았으나 밤이 깊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는데다 교정들은 얼마나 왔는지 좀 쉬어가자고 교자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한참이 되어도 교자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궁금해서 밖을 내다보니 교정들은 한 놈 없이 다 도망가 버리고 없었다.
차옥은 얼른 밖으로 나와서 살펴보니 그 곳은 곧 사동 자기 친정 집 대문 앞이었다. 일변 놀랍고 일변 반가워서 뛰어 들어갔다. 친정 부모도 이게 웬일이냐고 깜짝 놀라서 그 곡절을 물었다. 차옥은 감히 대답하지 못하다가 하인들이다 물러간 후에야 울면서 모친에게만 그간 자기가 욕을 본 경과를 이야기했다.
이 집에서는 놀랍고 분한 것을 견딜 수 없어서 그놈이 누구인 것을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인을 시켜서 그 교자의 주인을 찾게 했다. 그 결과 그 교자는 야조개 어느 세물전 셋보교인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 보교를 세주었다는 세물전을 찾아가서 물어보니 그것은 사직골 사는 허대감이 빌려 갔다는 것이었다.
이동구는 벌써 그가 누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는 했으나 아무리 이런 불법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그네들은 지금 세도 재상이니 자기 같은 사람이 이런 문제를 섣불리 꺼냈다가는 도리어 되잡히기가 십상팔구요, 또 이미 딸을 찾았고, 제 시집에서는 모르고 있는 터이니 그저 꿀꺽 참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분기를 억지로 참았다.
차옥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독수리가 병아리 차가듯 잡아다가 수일을 욕 뵌 사람은 과연 허견임에 틀림없었다. 허견의 생각으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담아오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담아냈으니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견이가 이차옥을 데려온 집은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첩 예정(禮貞)이란 여자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청풍부원군이라고 하면 현종(顯宗) 왕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숙종으로 본다면 외조부가 되는 셈이다.
그러면 허견이 어떻게 그런 집에 그것도 남의 첩의 집에 가 있게 되었는가? 원래 예정이란 여자는 허견의 처 예형(禮亨)과 의형제간으로 허견의 집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는 서인과 남인이 서로 그 행적을 내탐해서 무슨 단서를 얻어내기 위해 저편에 자기의 심복을 그 편 모르게 들여보내는 것이 예사처럼 되어 있는 때다. 허견도 서인 김우명의 집안 일을 내탐할 양으로, 처음에는 청풍부원군 집에 침모가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예정을 시골서 떠들어온 사람의 행색으로 들여보냈다가, 차츰 김우명의 마음을 사로잡게 해서 첩으로 들어앉게 했던 것이다.
한번 첩으로 들어앉게 되자 김우명은 예정을 슬그머니 빼내다가 새로 집을 장만해 놓고 살림을 시켜 주었다. 그러던 중 김우명은 세상을 떠났다. 늙은이의 첩실을 면하게 된 예정은 다시 허견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허견의 처는 전에 병사(兵使)를 지낸 홍순민(洪淳民)의 첩의 딸로서 그 성질이 괴벽하고 마음이 착하지 못한 편이었다.
예정과 허견의 사이는 마치 형의 남편과 처제의 사이와 같은 정도로 친숙했지마는 김우명이 죽은 후로 예정이 자주 허견의 집에 드나들고 나서 부터는 허견의 아내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늘 허견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형은 예정의 집에다 심부름하는 계집아이를 첩자로 들여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이 첩자가 와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며 분을 참지 못했다.
어느 날 평일과 다름없이 예정은 예형을 찾아왔다. 마침 허견은 시골에 가고 입에 없던 때였다. 아무러한 눈치가 없이 종일 지내고 이내 예형의 집에서 자고 가려고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정에게 돌연 청천벽력이 내렸으니 일은 이제부터 벌어지게 된 것이다.
냉면으로 밤참이 들어와서 맛있게 먹고 난 후였다. 방은 더웠으나 예정은 냉면을 먹은 후라 달달 떨었다. 예형은 하인을 시켜서 강차(薑茶)를 끓여 오라고 호령을 하면서 예정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호호호호, 아마 인제는 옥동자를 낳으려나 보구먼. 이렇게 더운 방에서도 춥다고 떨고 야단이니…?
이런 말을 했다.
아이구, 형님두, 별말을 다 하시는구료, 하늘에 올라가야 별을 따지 않수.
왜 그래, 내가 들으니 귀동자를 낳을 만하겠던데.
왜 무슨 소리를 들으셨수?
우리 집 대감을 어째서 자네네 집 건너방에 사흘씩 묵혀 두었나?
갑자기 예형의 얼굴에 독기가 팽창했다. 예형은 계속 예정을 보고 코웃음을 치면서
입이 광주리만 해도 할 말은 없겠지?
그렇지만 나는 아무 죄도 없어요.
요, 앙큼한 년! 그래도 변명이야?
예형은 옆에 놓인 퇴침으로 예정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때에는 예정도 암상이 날대로 났다.
그런데 왜 까닭 없는 사람을 땅땅 때리는 거예요? 어디 더 때려봐요.
몸을 예형에게로 들이대면서 이렇게 발악을 했다.
네 깐 년은 죽여놓아도 좋다, 그 따위 버릇을 하다가는…
예형은 한층 더 호통을 치면서 그의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아니, 댁 대감이 어떤 년 하나를 잡아다가 놓고 이틀 사흘 그 따위 짓을 한 것을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내 말이 믿기 어렵거든 대감께 물어보라니까, 누구는 그리 허름한 줄 아우?
아따, 부원군의 첩실이니까 어깨가 으쓱한가 보다. 그 알뜰한 죽은 영감장이의 첩실, 누가 알아 준다고 으쓱거려. 그나마 누가 그 자리에 가게 해주었는데… 그러고 저러고 간에 내 말은 다른 게 아니야. 우리 집 대감이 어떻게 아무 일 없이 남의 집, 그야말로 부원군 첩실의 댁을 찾아가서 그 건넌방을 치우고 버젓이 그런 짓을 했느냐 말이다. 네가 그전부터 그 따위 짓을 하다 하다 못해서 나중에는 다른 계집까지 천거를 하는 게 아니냐 말이다.
예형은 노기충천해서 예정을 넘어뜨리니 예정은 장지에 부딪쳐 쓰러지면서 입에서 피를 쏟았다. 이 두 개가 몽땅 빠져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있던 이듬해 봄이었다. 청풍부원군의 조카 되는 김석주(金錫胄)는 돌아간 그 숙부의 옛 정의를 생각해서 그 서숙모가 되는 예정을 가끔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다.
그러던 중 김석주는 그 서모 예정과 허견의 처 예형과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서 예정의 이까지 빠지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김석주가 그 서숙모를 찾아와서
지금 형편으로는 좀 거북한 일이지만 다시 허견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쪽 내막을 자세히 살펴 주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예정은 김석주가 자기에 대해 마음 쓰는 일을 늘 고마워 해 오던 터라 그만한 부탁을 안 들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정은 다시 예형을 찾아갔다.
형님, 더러운 것은 사람의 정입니다. 그렇게 이가 부러지게 싸우구두 십 년 가까이 든 정을 잊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그대로 견디겠습니까. 기왕 일은 누가 잘했건 누가 잘못했건 그만두고 우리 형님이 그리워서 왔으니 그전대로 의지하고 삽시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그때 무슨 살이 들어서 그랬는지 그 후에 퍽 후회했네. 조금도 예전 일을 생각 치 말고 앞으로는 여전히 잘 지내세. 이렇게 와서 먼저 풀어 주니 고맙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고 두 사람은 전과 같이 왕래를 했다.
김석주는 예정을 통해서 허견의 일을 어느 정도까지 알게 되었다.
< 허견은 매일 만나는 사람이 벼슬아치보다도 아직 벼슬하지 않은 이들, 대개는 모양이 초라하고 자비하나 변변히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그 중에도 복선군이란 종실과 가장 친하다는 것, 그리고 밤중에 남의 이목을 피해서 슬그머니 왔다가는 슬그머니 나가는 사람들이 몇 사람 있다는 것. >
이런 일들을 차차 알게 된 것이다.
김석주는 곧 의관을 차리고 자비를 준비해서 상동에 사는 한성좌윤(漢城左尹) 남구만(南九萬)을 찾아갔다. 김석주는 예정에게서 들은 허견의 이야기를 남구만에게 대강 들려주고 이 기회에 허견을 내쫓고 서인들이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구만은 결기 있는 사나이였다. 이런 단서가 알려지지 않아 애를 쓰며 기회 있는 대로 남인을 쓰러뜨리려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곧 조정에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 신이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이미 작고했으나 그 부실 오씨(吳氏=예정)가 아직 옛집을 지키고 있사온데, 오씨는 허견의 처 홍씨와 결의 형제를 맺은 사이옵니다. 그런데 허견의 처 홍씨는 항상 제 집에 드나드는 오씨가 그 남편과 어떠한 정사 관계가 있다고 해서 마구 때리고 싸우다가 드디어 오씨의 앞니를 몇 개나 빼어놓았다 합니다. 부원군의 첩은 비록 천인이지만 중전의 서모가 되는 분이요, 어찌 이것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
한번 이 상소문이 나오자 세상은 뒤숭숭해졌다.
이튿날 허적이 사연을 밝혀서 상소했다.
< 신의 소자 허견의 처는 죽은 홍순민의 첩의 딸로서 그 성품이 괴악하여 이루 말하기 어렵고 당초에 결혼 때도 속아서 결혼한 것이요. 그간 그의 결의형제라는 예정이란 여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말은 들었어도 서로 싸웠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요. 아마 그의 성품이 흉패해서 그런 좋지 못한 소문이 나는 모양이요. >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우윤(右尹) 신정(申晸)이 다시 상소를 올려 이차옥의 사건을 들어내 놓고 공박했다. 임금은 그 상소를 포도대장 구일(具鎰)에게 내주며 이 사실을 조사해 올리라 분부했다.
구일은 어명을 받들어서 당일로 허견과 차옥을 잡아가두고 문초를 해본 결과 차옥이 그 일을 전연 부인하니 마침내 무근지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남구만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 세상에서 다 아는바 이지만 허견은 집에서 하는 일 없이 친구를 모아가지고 시국을 의논하는 것과 남의 집 유부녀를 겁탈하는 것으로 농사를 삼는 터입니다. 이차옥의 사건으로 말하면 허견의 아내 예형과 그의 결의 형제인 예정이 증거이온 대 그들을 다 젖혀 놓고 허견과 이차옥만을 불러서 물어봤으니 그 일의 진상이 드러날 리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이윤휴(尹 )가 싸고도는 때문에 결국 무소가 된바이오나 윤휴로 말하더라도 바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공공연히 나라에서 금하는 소나무 수천주를 베어다가 자기 집을 지었다 합니다. 국법에 산 소나무 열주만 베어도 사죄(死罪)에 이른다고 했는데, 법을 맡은 자가 이와같이 하니 어떻게 백성을 조종할 수 있겠습니까. >
이 상소를 보고 젊은 임금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즉시 형조판서 이관징(李觀徵)을 불러 듣자니 요즘 권문 세가에서 처지를 믿고 부정한 짓을 하는 모양이니 이 사실들을 전부 밝혀내라.
했다. 며칠 후 이관징이 임금께 아뢰었다.
전후 사실을 조사해 본 결과 허견의 집 일은 지각 없는 낭속들이 터무니 없이 떠들어서 소문이 났던바이오며, 윤휴의 집은 살펴보니 그 집은 새로 지었으나 모두가 헌 재목으로 지었습니다.
이때에 임금은 남구만이 두번이나 올린 상소가 전혀 무근지설을 무소해서 남을 헐뜯으며 임금을 속인 것이라 하여 그 자리에서 남구만의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바로 이 무렵 강화도의 계선돈대(繫船墩台)를 쌓는 역사가 있어서 팔도의 승군(僧軍)들을 불러모아 일을 시키고 수사(水使) 이우(李偶)가 이 일을 감독하게 되었다. 하루는 이우가 병조판서 김석주에게 무명인의 투서를 올려 보내 왔다.
김석주는 그 편지를 보고 그대로 쥐고 있을 수 없다 하여 조정에 내보였다. 그 투서의 내용은 시국을 비방하고 현 조정을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 슬프다. 이때는 정히 나라가 위태하기 짝없는 시기로구나. 임금은 유충하신 중에 다병유약하고 국정은 몇 사람의 재상의 손에서 마음대로 농권되니 백성은 모두 도탄에 빠져서 민심은 점점 불안하여 장차 내란이 일어날 것이니, 남의 나라를 막기 위해 돈대를 쌓는 것은 도리어 우스운 일이로구나. 제공은 이런 일을 치우고 승군(僧軍)을 수백명 모집해 가지고 도성으로 들어가 삼개(麻浦)에서 기다리라, 그러면 의군(義軍)은 승군과 합세해 가지고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臨昌君)을 추대해서 거의(擧義)하려는 터이다. >
이 글을 보던 모든 사람은 창황망조해서 그날로 어전회의를 열어가지고 선후책을 강구하기에 급급했으니 사태는 목첩간에 긴박한 듯이 보였다. 우선 투서한 사람을 찾고자 이우를 문초하였다. 이우의 말에 의하여 사십세 넘은 키가 크고 수염이 많은 자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수소문할 때 또 대궐 근처에 누가 익명서(匿名書)를 던지고 갔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서인과 남인의 감정은 당장 폭발할 듯이 극도로 팽창되었다. 이러한 중에 허적과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허목(許穆)이 상소를 올렸으니, 그 상소는
< 영의정 허적은 선왕의 고명(顧命) 유신으로 주상을 도와야 할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색(黨色)을 가려서 사람을 쓰고 그 교만과 사치가 날로 심한 중에 요즘에는 내시와 궁녀들과도 연결하여 전하의 동정을 시시로 내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자 허견은 아비의 세력을 믿고 양가의 부녀자를 겁탈간음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들이나 조정에서는 그 누구 한 사람 탄핵하는 사람이 없고, 혹시 여론을 일으키는 자가 있어도 번번이 바른 말하는 사람만이 귀양 가고 죄를 입으니 이같이 하다가는 종묘사직이 위태해질 것입니다. 급히 상당한 조처를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
임금은 이 상소를 보고 곧 노염을 지으며
한동안 아무 일이 없더니 또 남구만 같은 자가 생겼구나. 이 무슨 주제넘고 쓸데없는 짓이냐. 영의정 허적은 나라의 기둥인데, 그를 해치려는 자가 누구냐?
이런 말을 하고 도리어 허목을 귀양 보냈다. 숙종이 허적에 대하여 믿고 의지하는 마음은 이만치 깊고 두터웠던 것이다.
허적의 처지가 이와 같이 반석처럼 튼튼해지자 허견의 방종함은 날로 심해서 뜻있는 자가 차마 그 분노를 견딜 수 없었다. 이제는 공공연하게 남의 집 부녀를 겁탈하고 궐내를 출입하고 무기를 대량으로 만든다는 소문이 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그 누구 한 사람도 감히 입을 열어 탄핵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형편을 돌아보던 김석주는 드디어 직접 탑전에 나아가 아뢰었다.
허적은 늙은 간흉이요, 허견은 젊은 역적이오니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오면 훗날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시고 의심의 귀추를 따라서 곧 그들의 생활 이면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허적 부자를 의심하면서 곧 별군직(別軍職) 이입신(李入身)과 어영장(御營將) 박빈(朴斌)을 비밀히 불러서
복선군과 허적 부자의 사생활을 밤낮으로 살펴서 알아 올리라.
분부를 내렸다.
이들은 각각 그 맡은바 집 부근으로 다니면서 동정을 살피는데, 그 동안 이입신은 당당한 벼슬아치면서도 남루한 의복에 교군처럼 차리고 여러 차례 복선군 집에 출입했는지라 궁비(宮婢)들과도 차츰 낯이 익게 되었다.
어느 날 새벽 찬서리를 맞고 덜덜 떨면서 복선군 궁 행랑채 아궁이 앞에서 불 때는 궁비 앞으로 가서 손을 째며 이죽이죽 말을 붙이는데, 의외에도 여기서 이상스런 일을 듣게 되었다.
아니 손끝은 왜 그렇게 다쳤소. 퍽 아프시겠구료.
바느질이 세차서 바늘 끝에 찔린 게 덧나서 그래요.
바느질은 침모가 할 게 아닌가?
한 두 벌이라야지요.
아니 무슨 혼수(婚需) 바느질이요?
아니요.
그럼?
글쎄, 무엇에 쓸 것인지 군복을 한가위에 백 벌을 말랐어요. 그래가지고는 꼭 밤에만 짓는 거예요. 그래서 거진 마쳤는데 또 몇 백 벌을 지을지 모른다고 하니 그 바느질을 어떻게 해낼지 모르겠어요.
아니, 그것은 무엇에 쓴답디까?
낸들 아우.
그래 그것은 모두 궁대감께서 하시는 일이지?
그렇지도 않은가 봅디다. 저 어느 정승의 아드님이라나 그분께서 옷감을 가져온다는데 그분은 꼭 밤에만 왔다가 돌아가시지요.
이입신은 크나 큰 수확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이 내탐 거행을 도맡은 김석주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낱낱이 고했다.
이날 영의정 허적의 집에서는 조부 허잠(許潛)의 충정공 시호(諡號)를 받는 날이었다. 이제 그의 손자 허적이 나라의 중신이 되었으므로 그 공으로 조부까지 시호를 받게 된 것이다.
허적의 집에서는 이날 아침부터 사당에 차례를 지내고 원근 친척과 고구들을 청해서 굉장한 잔치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은 아침 후에 별안간 비가 내리므로 잔치 집에서는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준비해 놓은 음식이며 이미 초청한 손님이며 아무리 해도 하루도 연기할 수가 없었다. 그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려고 우선 비를 막을 수 있는 준비로서 궁중의 차일을 빌려내다가 처 놓고 빈객들을 대접하는 일에 분망했다. 이런 일을 모르는 임금은 이 비 오는 날에 잔치를 치를 허영상집 일을 생각하고 근신(近臣)에게
오늘 허영상댁 잔치라는데 비가 와서 안되었다. 궁중 차일을 내어 보내주라.
이런 말을 하였다. 이때 옆에 있던 내시가 아무 생각 없이
궁중 차일은 벌써 영상댁에서 내어 갔습니다.
하고 대답해 아뢰었다. 젊은 임금은 불시에 자기의 승낙없이 가져간 것이 몹시 불쾌했다.
나라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다니 될 말이냐. 괘씸한 일이로구나.
다음 순간 허적에게 대한 의심이 부쩍 일어났다. 이러는데 김석주가 급히 입궐하여 이입신이 내탐한 정보를 아뢰었다. 임금은 곧 무감을 허적의 집에 보내어 그 빈객들을 조사케 했다. 이날 잔치에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사람은 종친으로는 복선군 형제요, 서인편으로는 오두인(吳斗寅), 이단상(李端相), 김만기(金萬基) 등 몇 사람뿐, 그 외에는 전부가 남인의 재상들 뿐이었다. 그 중에도 훈련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다른 손들의 이목을 집중케 했다.
무감은 이 형편을 정찰하고 대궐로 들어가 위에 아뢰었다. 즉시 내시가 허적의 집으로 나와서 왕명을 전하고 유혁연과 김만기를 곧 입시하라고 말했다. 위에서 병조를 통하지 않고 직접 훈련대장을 부르는 일은 나라에 변고가 있기 전에는 없는 일이다. 훈련대장이 입시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그대로 안연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부제학 유명천(柳命天)이 벌떡 일어서면서 주인 허적을 보고
대감, 대궐의 수비하는 책임자를 불러들이니 수상하옵니다. 삼공(三公)이 들어가 일을 무마시킵시오.
하고 권했다. 허적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다가
작년 가을부터 상감이 우리들을 경계하시는 눈치더니 그 동안 또 무슨 말이 들어간 모양일세.
하고는 유명천의 권고로 우의정 민희(閔熙)와 같이 예궐하였다.
내전 궐문에 이르러 승지에게 알현할 것을 전하니 승지가 들어갔다가 나와서
시방 대할 까닭이 없으니 그대로 물러가라고 하시오.
하였다. 영의정은 우의정의 얼굴을 돌아보고 우의정은 영의정의 얼굴을 돌아보며 모두 흙빛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허적은 허견을 불러 앉히고 최근에 어떠한 일을 했던가를 물어보았으나 허견의 입은 딱 붙은 채 대답이 없었다.
허적은 하룻밤을 그대로 밝히고 날이 밝자 곧 민희를 청해서 만났다.
대감, 이게 어떻게 된 셈이요?
민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낸들 알 수 있소. 시운이 지나서 남인이 몰살을 당하는 판인가 보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당할 일은 없었소이다.
죄 없으면 관계치 않겠지.
그런데 또 기막힌 일이 있소이다.
무슨 일이요?
훈련대장 유혁연 집에 밤 사이에 두 세 차례 사람을 보냈는데 아침까지 퇴궐치 않았다 해서 친한 무감을 통해 알아보니 어제 저녁으로 의금부로 넘어갔다 하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허적은 유혁연이 잡혀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웬일이요?
하, 글쎄 낸들 알 수 있소이까? 꼭 미칠 것만 같소이다.
이런 걱정을 하는 가운데 또 하루가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궐내로부터는 하등 처분이 내리지 않았다.
한편 김석주는 그 동안 자기의 심복 정원로(鄭元老)를 시켜서 또 상소를 올리게 했다.
< 허견은 유혁연과 그밖에 여러 동지를 규합해 가지고 역모를 하여 장차 복선군을 추대하려 하던 일이 최근에 알려졌는데, 불일내로 거사할 모양이니 속히 처분하시옵소서. >
임금은 더 참고 기다리지 않았다. 허적이 가평(加平) 고을로 내려가 숨어버리려고 황황히 가사를 정돈하고 있는데 돌연 의금부 나졸들이 집을 에워싸고 들어왔다. 허적이 의금부로 붙들려 간 뒤에 허견도 도망갔다가 붙들리고, 복선군도 붙들리고 따라서 그 동지로 혐의 받던 자들도 모두 붙들리니 그 수효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 후 임금은 일곱 군데에 국문처를 베풀고 그들을 엄중 국문한 결과 이번 역옥 사건에 주범이 되는 허적 부자, 유혁연, 복선군, 윤휴, 민희, 오시수, 이태서(李台瑞) 등은 모두 처참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귀양 보냈다. 이것이 숙종 육년 경신년의 일이므로 이 일을 경신대옥(庚申大獄)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는 반면에는 김석주와 정원로는 역모를 고변했다는 그 공로로써 보사훈(保社勳) 을 받게 되었으며, 허적의 내각이 쓰러지는데 따라서 김수항(金壽恒)으로 영의정을 삼으니 좌우영상과 육조판서가 모두 서인이 임명되어 어제까지 기세충천하던 남인들은 멸망하고 서인의 세력이 조정을 뒤덮게 되었다.
凝香閣의 嬌聲
숙종이 열네 살 때 아직 동궁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갑인년의 봄이 돌아오고 그때 왕대비로 계시던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의 환후가 위중하게 되었다. 평일과 마찬가지로 밤 문안을 드리려고 할머니(繼會祖母, 莊烈大妃)의 처소로 와서 보니 때마침 할머니는 왕대비(仁宣王后)의 병실로 가서 없고 나인들만이 몇 사람 있었다.
어린 동궁은 혼자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서 앉아 있는데 다른 궁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지고 오직 각시 나인 하나만이 앞에서 거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각시 나인이 어린 동궁의 마음에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동궁은 어깨를 으쓱으쓱 하면서 애를 쓰다가 각시 나인을 보고
얘, 내 등 좀 긁어다오.
이런 명령을 내렸다. 각시 나인은 좀 머뭇머뭇하다가 세자 등뒤로 가서 도포를 들치고 손을 옷 밑으로 넣어 조심스럽게 긁어 드리고 물러나려 하는데 동궁은 각시 나인의 손목을 꽉 쥐고
어디 그 손톱 좀 보자, 어째서 긁는 것이 그렇게 시원치 않으냐?
이런 말을 하고 손을 들여다보았다.
각시는 그만 수줍어서 머리를 돌렸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우냐?
…
너 성이 뭐냐?
사친의 성은 장가라 하옵니다.
몇 살이지?
열여섯이옵니다.
얘, 내 얼굴이 붉어졌나 좀 보아라. 아까 어떤 나인이 장난으로 술을 권해서 한 모금 마시었다. 혹시 얼굴이 붉어져서 꾸지람을 들을까 염려된다.
세자가 이런 말을 하자 아직까지 수줍어하고 있던 각시 나인이 이 말을 듣더니 아무 생각 없이 얼굴을 들어서 생긋 웃으며 세자의 얼굴을 마주 건너다보았다. 마주 건너다보다가 깜짝 무슨 생각이 났던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약간 돌리면서 억지로 대답해 아뢰었다.
소녀가 뵈옵기 에는 아무 기색이 없사옵니다.
실상은 술을 마셔서가 아니요, 각시 나인의 얼굴을 좀 바로 보자는 지혜에서 나온 말이었다. 세자는 비로소 분명히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아름답고 어여뻤다.
바로 이때 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대왕대비 환어하는 기척이었다. 각시 나인은 황황히 문을 열고 나가서 행차를 맞았다. 세자도 밖으로 나와서 할마마마를 모셔 들였다.
그 후부터는 매양 이 궁에 왔다가 각시 나인 장씨를 보면 남의 눈에 띄울세라 몰래 웃음을 보내고 그럴 때마다 장씨는 수줍어서 머리를 돌렸다. 이와 같이 하는 사이에 은연중 사랑은 자라났다.
봄부터 가을까지 지내는 동안에 왕대비와 임금의 국상을 치르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남몰래 기뻐한 사람은 장씨 궁인이었다. 장씨 궁인은 벌써 자기가 세자의 애정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 세자가 왕위에 오르자 다음 날의 영화를 꿈꾸었다.
어느덧 세월은 이년이 흘렀다. 그 해 겨울 어느 눈 내리는 밤, 젊은 임금은 미행으로 장씨 궁인 처소를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장씨 궁인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황공무지하여이다.
하고 그 앞에 엎드렸다.
장씨 궁인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짐작하였고 또 며칠 전 꿈에는 황룡이 자기 몸을 칭칭 감았던 일도 있었으므로 이상히 생각하고 벌써 여러 날 전부터 밤 단장을 하며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그녀는 곧 방장을 두르고 촛불을 대홍촉으로 갈아 끼고 한옆에 공손히 서서 분부만 기다렸다. 이때 장씨의 나이는 열여덟이니 이년 전 그때보다 얼굴은 더 곱게 피어났고 태도도 그 전보다 점잖아졌다. 얼마 후 젊은 임금은 깔아놓은 비단 이불 한쪽을 젖히고 장씨의 손목을 잡아 끌어들였다.
장씨 궁인에게 이런 엉뚱한 꿈이 지나간 후에도 임금은 자주 이런 엉뚱한 꿈을 그녀에게 실어다 주었다. 한번 두 번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두 사람의 애정은 차츰 깊어갔다.
이듬해 봄 임금은 호조판서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으로 왕비를 삼았다. 왕비는 임금과 동갑인 열일곱이지만 그 조성한 지각과 활달한 언동은 벌써 성인을 능가할 만했다. 왕비는 곤순전(坤順殿)의 새 주인이 된지 얼마 안 가서 임금의 은총이 어디에 기울어져 있는가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하루는 대왕대비에게 사후를 갔을 때에 조용히 대비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소녀가 무엇을 아오리까 마는 들으니 주상(主上)은 어느 곳에 총애하는 바 궁인이 있다 하옵는데, 그런 궁인을 그대로 두오면 왕실에 누(累)가 될 것 같사오니 명분(名分)을 달리 하시고 처소를 따로 정해 주시옴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대왕대비는 이 말을 들으니 너무도 기특하고 고마웠다. 진작부터 장씨 궁인을 명분을 달리해주려 해도 새로 들어온 왕비의 마음이 어떠할까 염려되어 마음은 있으나 발설치 못하고 있던 차였다.
중전의 말이 너무도 기특하오. 그러나 궁인으로서 따로 이 무슨 공이 없으면 후궁을 책봉하지는 못하는 법인즉 아직 명분은 정해 줄 수 없고 처소나 따로 정해주랴 하는 바이오.
대비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이후부터 장씨는 응향각(凝香閣)에 옮겨서 거처하게 되었다. 앞으로 장씨 궁인이 왕자라도 탄생하는 날이면 직첩이 내릴 것이다. 그런데 차츰 궁중 여기저기서 쑤군거리는 말들은 심장히 들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왕비 처소와 응향각을 드나드는 나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장씨 궁인은 임금을 대할 때마다 왕비를 비방한다는 것이었다. 왕비는 처음에는 그 말이 모두 중간에서 말을 좋아하는 철없는 궁인들의 지껄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더라도 노상 심상하게만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떤 궁인은
황공한 말씀이오나 나인 차림으로 한번 미행을 납시어 친히 그 거동을 보옵소서.
이렇게 말하는 자도 있었다.
왕비도 마침내 몸소 그 거동을 살피기로 했다. 어느 날 달 밝은 밤 왕비는 나인의 복장을 하고 두어 궁인만 데리고 응향각으로 갔다. 조용 조용히 창 밑으로 가서 귀를 대어보았다.
무슨 말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임금과 장씨 궁인 사이에는 한창 봄바람을 일으키고 꽃을 피우는 때였다.
젊은 임금의 걸걸한 웃음소리와 간드러진 장씨의 웃음소리가 교차되는 이 광경은 귀보다 도 눈이 더 궁금해했다. 얼마 후 장씨의 암상이 난 독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글쎄 중전인지 뚱전인지가 이러더래요, <그까짓 게 무슨 상감이야, 그래 관례도 하기 전에 상복을 입은 채 요사스런 계집년에게 홀려서 왕비가 무언지 임금 노릇이 무언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년의 치맛자락에 휩싸여 헤어나질 못하는 것이… 그년부터 능지처참해서 없애버려야 나라가 될걸.> 이러더라니 이게 차마 입으로 할 소리입니까.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소녀는 정말 치가 떨리고 분해서 못 견디겠어요.
중전이 그랬을 리가 있나.
중전이 무슨 중전이에요?
왕비니까 중전이지 무에야.
왕비는 누가 왕비에요. 상감을 먼저 모셨어요. 먼저 모신 사람이 정궁비(定宮妃)가 아니에요. 호호호호.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뽀루퉁 하던 장씨에게 어디서 그런 간특한 웃음소리가 나오는지, 그 웃음소리에 젊은 임금도 따라서 걸걸하게 마주 웃어버렸다. 이런 정경을 듣게 된 왕비는 너무도 해괴하고 치가 떨려서 차마 더 들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를 물러났다.
자기 처소로 돌아 온 왕비는 곧 봉서나인(封書內人)을 불러들여서 대필을 잡게하여 장씨 궁인의 죄상을 일일이 들어 기록하게 하고
< 아무날 밤에 응향각에서 어떠어떠한 일까지 있는 것을 본 자가 있으니 대개 이런 계집을 일향 관대하신 처분으로 그대로 궁중에 묻어 두시면 훗일 어떠한 회한(悔恨)이 계시올지 모르는 일이며 소비(小妃)의 처지로 보아서 이런 말씀을 아뢰오면 혹 질투로 그런다고 하실지 모르오나 널리 통촉하시옵고 사실을 살피시온 후에 곧 장씨 궁인을 방축하시옵기 바라옵니다. >
하는 것을 다음날 날이 밝은 후에 대왕대비에게 올렸다. 이 글을 본 대왕대비는 크게 놀랐다. 대비는 그 봉서를 자리 밑에 넣어둔 채 따로 지밀상궁을 시켜서 수일 동안 응향각의 동정을 살피게 하니, 참으로 왕비의 말대로 해괴망측한 고로 드디어 장씨 궁인을 불러서 꾸짖고 그 날로 사친의 집으로 방축하는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일은 이것으로 일단락이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장씨 궁인은 원래 덕기가 없는 위인 이어서 자기의 잘못은 추호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왕비의 책동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여 속으로 깊이 왕비를 원망하고 사친의 집으로 돌아가니 사태는 점점 험악해졌다.
장씨 궁인이 궁중으로부터 추방 처분을 받게 되어 사친의 집으로 나온 때는 숙종 오 년 늦은 가을의 일이었다.
이때에 임금의 나이는 십구세요, 장씨는 이십 세였다. 장씨는 집에 나와서 머리를 동이고 드러누워 한숨으로 날을 보내고 그 모친 윤씨는 쫓겨나온 딸을 보고 몸부림 쳐가며 통곡했으나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하루는 이 눈물과 탄식으로 지내는 장씨 모녀의 집 문을 두드리는 허름한 사나이가 있었다.
아니, 대감이 웬일이십니까?
장씨의 어머니 윤씨가 문을 열고는 기겁을 해 놀란다. 사나이는 손을 내저으면서 조용히
떠들지 말게. 남의 이목을 가려서 오느라고 혼이 났네. 그런데 대관절 각시를 좀 보아야겠는데.
원 이런 미안할 데가 있습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윤씨는 손님을 맞아 들이고 장씨 궁인을 불렀다.
손님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전에 윤씨가 침모로 가 있던 숭선궁저(崇善宮邸)의 아들 동평군(東平君)이었다. 승선군은 인조대왕(仁祖大王)의 왕자의 한 분이다.
얼마 후 장씨 궁인이 모친을 따라서 동평군 앞에 나타났다.
대감, 오래간만입니다.
허리를 반쯤 꾸부려서 인사를 드렸다.
듣자니, 너무도 아깝고 가엽고 그런 변고가 어디 있더란 말인가?
모두가 제 팔자이고 운수이지요. 하는 수 있습니까.
지금 밖에서 서두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얼마간 기다리게, 다시 부르실 날이 계실거요.
진정이십니까?
장씨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정신이 드는 듯 물었다.
내가 왜 헛말을 지껄일 리가 있나.
동평군은 장씨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조용히 무슨 말을 일러 주었다.
그 대체를 말하자면 지금 왕비가 아무리 장씨를 괄시하고 내쫓았다 하더라도 임금이 장씨를 총애하던 그 정은 오히려 잊지 못할 것이다. 대왕대비께서 비록 일시적 처분으로 그와 같이 명령은 내렸으나 지금 조사석(趙師錫) 같은 분이 대왕대비한테 들어가서 마음을 돌리게 하려고 서두르는 중이니 재소입(再召入)의 날이 멀지 않았다 라는 것이었다.
조사석이라 하면 대왕대비의 사친이 되는 조창원(趙昌遠)의 사촌 아우로서 대비가 가장 가까이 두고 신임하는 사람이다.
장씨는 이 말을 듣고
이렇게 이 몸을 비호해 주시니 그 은혜를 갚을 바를 아직 못하겠습니다.
하고 사례를 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경신대옥(庚申大獄)으로 인해서 허적(許積) 등 남인일파가 쫓겨나는 바람에 남인측의 한 사람인 동평군과 조사석도 두문불출 근시하는 몸이 된고로 장씨 궁인의 재소입운동(再召入運動)은 한때 주춤하게 되었다.
이러던 중 궁중에는 또다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왕비가 하룻밤 사이에 병을 얻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까닭이다. 모든 국민이 슬퍼하고 아까워하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기뻐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장씨 궁인이었다. 장씨 궁인이 임금을 사모하는 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간절해졌다.
아쉬운 마음에, 공방을 지키다가 쓸쓸함을 못 이기어 혹시나 임금께서 자기를 불러들이지 않을까 기다려지는 것이 근일의 장씨 궁인의 심경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추측하는 것과는 전연 달랐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와도, 다시 여름이 돌아와도 다시 가을이 돌아와도 왕비의 일년 기복을 마치게 되는 때까지도 이렇다 할 소식이 궁중으로부터 들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장씨 궁인은 매일 문 밖만 기웃거리고 새벽녘이면 궁중에서 승은(承恩)하는 꿈을 꾸었다.
이럴 즈음에 장씨 궁인의 가슴을 서늘케 하는 소식이 들리었으니 그것은 숙종이 다시 계비(繼妃)를 간택한다는 것이었다. 장씨 궁인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실망낙담 했으나 역시 하는 수 없었다. 오직 그 누가 왕비가 되는 가가 궁금했다.
새 왕비가 되는 이 거룩한 행운은 수백 명 간택 처녀들 중에서 서인파(西人波)의 거두 민유중(閔維重)의 둘째 딸이요, 송준길(宋俊吉)의 외손녀에게로 떨어졌다. 한동안 쓸쓸하던 곤순전(坤順殿)에는 또다시 봄바람이 깃들기 시작했다. 새왕비와 임금의 금실은 나날이 깊어서 임금은 장씨 궁인을 완전히 잊은 듯이 보였고 또 이런 대로 한해 두 해 지나가니 국가의 기초가 바야흐로 자리를 잡은 듯 튼튼해 보였다.
다시 피는 꽃
새왕비 민씨(閔氏)가 입궐한지 어느덧 육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 동안에 궁중 형편을 살펴보면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하나 내부를 세세히 캐어보면 참으로 복잡다단했으니 근심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 더욱 큰 근심은 새 왕비가 입궐한지 육 년에 아직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일이었다.
임금은 어쩌다가 혹시 곤순전에 들리면 조용히 왕비에게
왕대비를 가서 뵈오나 대왕대비를 가서 뵈오나 모두 왕자 탄생이 늦어지는 것을 보고 큰 걱정들을 합니다. 그러니 전날에 풍정으로 사귀었던 장씨 궁인이 다시 마음에 생각나는구려…
이런 말을 했다. 왕비는 미안하고 죄송한 가운데서도 그 장씨 궁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더욱 마음이 불안했다.
너무나 미안 죄송합니다. 그렇게 장씨 궁인 이라시니 대체 그가 누구이옵니까?
중전을 알 게 없소.
호호… 그래도 좀 말씀해 주셔요.
왜 또 까닭 없이 질투나 하려고?
원 도섭스러워라. 소비가 설마 그렇게야 할라구요. 그런 염려는 마시고 말씀이나 들려 주셔요.
내가 옛날에 아직 어려서 친했던 어여쁜 궁녀가 있었다오. 그런데 그전 왕비가 마음에 꺼려해서 그 여인이 궐문 밖으로 추방이 됐다오. 그것도 벌써 여덟 해나 되니 독수공방에 한탄으로 오죽이나 나를 원망하겠소.
이 말을 듣고 왕비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면서 젊은 임금을 쏘아보며 그 말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살펴보다가
그럼 그 궁인을 만나보고 싶으십니까?
이렇게 물었다.
보고 싶은들 옛날에 추방된 궁인을 다시 부를 체면이 어디 있겠소?
왜요?
궁중 일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말이요.
상감마마
왕비는 사색을 고치면서 임금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감께서 어떠한 처분을 내리시더라도 설마 내보냈던 궁인 하나를 다시 불러들이지 못한단 말씀입니까. 소비에게는 아무런 꺼림을 두지 마시고 하루 바삐 그 가엾은 궁인을 불러 들이게 하옵소서. 그리하셔야 성덕(聖德)에 누(累)가 되시지 않으실 것 같사옵니다.
그러나 나로서 이런 말을 여러 어른께 사뢰고 또 여러 신하에게 할 수 없지 않소?
그러면 소비가 대왕대비전께 사뢰어 보면 어떨까요?
이 말을 듣던 임금은 얼굴에 희색이 돌면서
그런다면 여북이나 고맙겠소. 그러나 미안해서…
호호, 별 말씀을, 소비에게는 미안한 생각을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대화가 있은 후, 어느 날의 일이었다. 왕비는 대왕비전에 사후(司後)하여 다음과 같이 장씨 궁인의 말을 아뢰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비는 나이 이십이 되었으나 몸에 병이 있사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 같사오니 국가의 종사가 끊기기 전에 미리 여기에 대한 계책을 베푸셔야 할 줄로 아롸옵니다.
대왕대비는 놀라운 표정으로 왕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기에 말이요, 만일 아무 일이 없다면 중전이 입궐한지가 벌써 육 년, 아직도 아무러한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근심스러운 일이요.
듣자온즉 예전에 상감의 후대를 받게 되었던 장씨 궁인이 있다 하옵는데 그 궁인이 무엇이 잘못되어 추방 처분을 받아 사가(私家)로 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벌써 팔 년이라 하오니, 그 동안이면 그 궁인도 회과천선(悔過遷善)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하오니 대왕대비께옵서 너그러우신 처분으로 다시 불러들이시오면 곧 사속지망(嗣續之望)이 있을 것도 같사오니 바라옵건대 널리 통촉하시와 부르시옵도록 하옵소서.
중전의 심덕은 매우 갸륵하오. 사람이란 마음이 다른데 있겠소. 누구보다도 장씨 궁인이 들어오는 일을 꺼려야 할 중전으로서 도리어 이와 같이 솔선해서 말을 하니 고마운 일이요. 그러면 내 한번 고집을 세워서 불러들여 보겠소. 그러나 중전의 마음이 끝끝내 고마울는지…
황공하온 말씀이오나 소비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옵고 부디 소비의 소원이오니 장씨 궁인을 불러들여 주시옵소서.
왕비는 이런 말을 아뢰고 물러 나왔다.
때는 숙종 십이 년 병인(丙寅) 사월 어느 날… 젊은 임금은 백화가 난만한 후원 뜰에서 잔치를 베풀고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즐거운 하루의 봄날을 보내고 있었다. 임금은 손수 술잔을 들어 대왕대비에게 올리었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마음이 몹시 불쾌한 듯
이런 놀음에도 모든 일에 근심이 없어야 즐겁지 않겠소.
이런 말을 하였다.
아니 할마마마께서 무슨 근심이 따로 계십니까?
나는 생전에 현손(玄孫)을 보지 못하고 죽을까 보아 그것이 큰 근심이요. 그전 중전도 이십이 되도록 아무 사속지망이 없은 채 떠나가고, 이번 중전도 들어온 지 벌써 육년인데도 도무지 아무 기색이 없으니 아마도 이대로 가다가는 사속지망이 염려될 것 같으니, 후궁이라도 미리 두어서 낭패 없도록 힘써 보는 것이 옳을 듯하오.
그러하오나 상감이 나이 아직 삼십이 못된 이때 이 일이 무슨 근심이옵니까. 미리 서두를 것이야 없지 않을까 하옵니다.
옆에서 왕대비가 이렇게 참견을 했다.
그러나 이렇다고 저렇다고 세월만 덧없이 흘려 보내면 이 일을 후회하게 될 장본인이 아니겠소.
그러하오면 대왕대비마마께서는 어떠한 처분을 했으면 좋으실지요?
궁인을 새로 두는 일보다 이미 득죄하고 추방 처분을 받아서 나가 있는 장씨 궁인이 있지 않소. 그 동안이 벌써 팔 년이요. 그 사이면 저도 무던히 회과천선이 되었을 듯하니 너그러운 처분으로 그 궁인을 다시 불러들이면 첫째 젊은 궁인의 함원(含怨)하는 것을 푸는 일이 성덕(聖德)에 누가 되지 않을 것이요. 둘째는 이미 익히 사귀었던 궁인이니 새로이 들어오는 것보다 숙친한 맛도 있을 게 아니요. 그러한 즉 내 생각으로는 그 장씨 궁인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오.
대왕대비가 이런 말을 하자, 왕대비는 임금과 왕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대왕대비의 의향이 그러하오시면 소녀가 어찌 그 뜻을 막겠습니까. 그러면 내일이라도 날을 가려서 곧 장씨 궁인을 불러들이도록 분부를 내리시는 일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이렇게 말했다.
며칠 후, 명성왕대비(明聖王大妃)가 그의 사촌 오라비가 되는 김석주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왕대비는 김석주에게 이번 장씨 궁인을 불러들이게 된 형편을 말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김석주는 이 말을 듣더니 아연실색 어쩔 줄을 모르고 대답하였다.
왕대비마마, 무슨 말씀이오니까? 새삼스럽게 장씨 궁인을 다시 불러들이신다니 이게 어찌된 일이오니까?
왜 그러시오? 그렇게까지 놀라실 게 무엇이요?
김석주는 크게 뜬 두 눈을 더욱 크게 뜨면서
왕대비마마, 아직까지 자세한 말씀을 올리지 못했으니 모르고 계시겠지만, 장씨 궁인은 그 성품이 교만방자하고 무엄무례했던 까닭에 승은하던 그 몸으로 궁중에서 추방처분을 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랬지요.
그러나 팔 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개과천선은커녕 도리어 상감께 원망을 품으며 궁주을 험의하고, 어쨌든지 다시 한번 들어와서 이제까지 품고 있던 그 원한을 풀으려고 여러 해 째 이를 갈고 기회를 기다리는데, 그 기회가 돌아오지 않자 드디어 엉뚱한 마음을 품게까지 되었습니다.
아니, 제가 엉뚱하면 어떻게 한다는 거요?
참으로 기막힌 말씀입니다. 지금 세상이 모두 서인(西人)의 천지가 되어서 남인(南人)이 항상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이 들어 서보려는 이때에, 이런 기맥을 알고서 남인 거두들을 비밀히 연락해 가지고 어떻게 해서라도 남인을 일으켜서 그 힘으로써 서로 도움이 되어보려는 엄청난 계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씨가 다시 들어와서 총애를 입고 무슨 말이든지 그 말을 들어주시는 날이면 남인은 즉시 다시 일어나서 어느 때이고 기회 있는 대로 서인들에게 묵은 원수를 갚게 될 것입니다.
왕대비는 이 말을 듣고 말이 없이 얼마를 앉아 있다가 난처한 빛으로 그러나 대왕대비께서 주장하시는 일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소? 혹시 상감께서 이 일을 조정에 의논하시게 되면 그때에나 조정에서 이구동성으로 그 일은 안 됩니다 하고 간지(諫止)해 아뢰는 도리밖에 없겠소.
그러나 이런 일까지 조정에 물으실 것 같지도 않사오니 여간 딱한 일이 아니옵니다. 하지만 조정에서도 의논해서 간지할 수 있는 대로는 간지할 것이오니 궁중에서도 장씨 궁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셔야 될 것이옵니다.
김석주는 이쯤 아뢰고 물러나왔다. 그러나 왕대비가 어떻게 이 일을 막아낼까 근심을 하고 있을 때, 대왕대비는 정음(한글) 전교로써 장씨 궁인을 불러들일 뜻을 예조(禮曹)에 내리었다. 예조에서는 당황해서 즉시 이 전교를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도 이미 마음먹고 있던 일이라 그대로 윤허를 하였다. 이때에 김석주가 이런 처분이 내리는 것을 보고 급히 예궐하여 아뢰었다.
대왕대비께서 분부를 내리신 터이오니 이 일에 말을 아뢰옴도 황송합니다. 그러하오나 지각 없는 생각에도 장씨 궁인에 득죄하고 일단 추방되어 여염으로 나간 지 이미 팔년이 지난 이때에 다시 그를 불러들이신다는 것은 도리어 성덕에 누가 될 것이오니 널리 통촉 하시와 이 분부는 곧 거두어 주시옵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듣던 임금은 물끄러미 김석주를 바라보다가
나 역시 이런 일을 하기가 불안하오마는 대왕대비께서 주장하시는 일이니 이제는 하는 수 없는 처지요. 그대로 거행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겠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하오면 장씨 궁인이 다시 궁중에 들어오더라도 궁중과 조정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으로 통촉하시옵니까?
그건 미리 알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면 어른을 섬기는 도리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불러들이기는 하옵지마는 그 궁인을 조종하시는 일은 상감 말씀 여하에 달린 일이오니, 모든 일은 오직 상감의 처분만 믿고 있겠습니다.
경의 말이 모두 충의에서 나온 말임을 나도 짐작 못하는 바가 아니요. 이 일은 이쯤들 알고 물러가시오.
임금은 이런 분부를 내리고 그대로 편전으로 사라졌다.
숙종 십이 년 오월 십육일, 장씨 궁인은 추방 처분을 받은 지 무려 팔년만에 다시 궁중으로 들어오게 되어 대왕대비께 나아가서 뵈었다.
장씨는 대왕대비를 뵙자 먼저 눈물이 두 눈에 핑 돌았다. 배례를 올리고 고개를 쳐드니 대비도 두 눈에 눈물이 어리었다.
오래간만이로구나. 그 동안 얼마나 노심초사로 지냈느냐. 이제부터는 아무쪼록 잘해라.
지금부터라도 너만 잘 하면 네 몸의 영귀는 다 찾아올 게다.
대왕대비는 마치 시집살이를 하다가 오래간만에 친정에 가서 할머니를 대하는 느낌을 주었다. 그 다음으로 나아간 곳이 왕대비의 처소였다. 왕대비의 장씨를 대하는 표정은 너무도 차디 찼다. 먼저 장씨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경멸과 증오의 표정을 지었다.
그 다음은 왕비의 처소다. 왕비는 말하자면 정적(情敵)의 사이다. 마음이 이상스럽게 설레이면서 우선 궁금한 것이 그 얼굴빛이었다. 그 까닭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그 한 가지는 왕비의 얼굴이 얼마나 어여쁜가를 보자는 것이요, 다른 한 가지는 자기에게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로 움직여지는가를 보자는 것이다.
장씨의 마음에는 오히려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아직도 자기가 첫 번 왕비인 셈이요, 상대는 둘째 셋째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냐, 다만 신분 때문에 버젓이 비(妃) 노릇을 못하고 이 아니꼬운 절을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역시 예법은 지켜야 하므로 절을 드리고 우선 그 궁금한 얼굴부터 살펴보았다.
임금보다는 여섯 해 아래이고, 장씨보다는 일곱 해 아래, 이제 이십을 헤이는 왕비는 나이보다 훨씬 노숙해 보였으나 용색에는 어여쁜 티란 조금도 없었다. 여기에서
저런 정도라면야…
하는 그 어떤 자신(自信)을 속으로 뇌이면서 장씨가 그 얼굴을 살피니 왕비는 의외에도 웃는 낯으로
들으니 일찍 승은했던 궁인으로 득죄 추방이 되었다기에 매우 가엾이 여겨서 여러 가지로 애를 써 위에 아뢰고 대비전에 사뢰어서 다시 부르시게 한 터이니 아무쪼록 다음 일을 조심하고 궁중 매사에 화목하게 지내도록 하여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장씨는 의외로 자기를 대하는 폼이 너그러움을 보고
황공 감사하옵니다.
조용히 대답하고 물러나와서 예전에 거처하던 응향각(凝香閣)으로 돌아갔다.
응향각은 여덟 해 만에 옛 주인을 맞아들였다. 오월의 하루 해는 유난히 길었다. 지루한 하루 해를 정각에서 이러 저럭 보내고 밤이 되자 응향각으로 임금이 찾아 들었다. 임금을 맞은 장씨는 그 앞에 엎드리어
상감마마 황공하옵니다.
이 말 한마디를 아뢰자마자 곧 두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 흐르고 흑흑 느껴 울었다. 상감은 장씨의 몸을 일으키고 그 얼굴의 눈물을 씻어주며 달랬다.
울지 마라. 모두가 운수니라.
임금의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장씨의 팔년 간 쌓이고 쌓였던 야속함과 노여움은 좀체 끊이지 않았다.
어서 그만 그쳐라.
상감마마, 어쩌면 그렇게도 야속하시단 말씀이옵니까. 아무리 미천한 몸이기로서니 사람의 마음이야 다를 데가 있겠습니까? 한 번 내어보내시고 그처럼도 모른 척하실 줄이야 소녀는 진정으로 생각 치 못했나이다.
장씨는 이제야 비로소 자기 흉금에 서려 있는 말을 털어 놓았다.
그야 낸들 생각이 없었겠느냐마는 궁중 일이라는 것은 사사집 일과는 아주 판이하게 다르니 내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음을 그치고 좋은 낯으로 대하여 다오.
장씨는 드디어 울음을 그치고 얼굴을 들어 임금을 바라보았다.
어디 좀 옛 모양을 찾아보자.
임금은 장씨의 포동포동한 손목을 잡아보았다. 장씨는 수줍은 웃음을 지으면서 머리를 숙여 외면했다. 임금은 그 얼굴에서 옛날의 애정이 조수같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너는 여덟 해나 지났어도 얼굴은 더 예뻐졌구나.
호호… 나이를 먹으니까 자연 늙어 뵈는 걸 어쩝니까?
아니다. 조금도 늙은 티가 없다.
이 말을 듣는 장씨느 새 정신이 나는 듯 얼굴이 갑자기 명랑해지면서 쌩긋 웃었다.
젊은 임금은 장씨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리하여 응향각은 다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새로 이어진 임금의 애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갔다.
그 해가 지나가고 그 다음 해도 지나갔다. 봄이 되고 여름이 시작되는데 장씨의 몸에는 이상한 반응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년이 하루같이 건강하던 장씨 몸이 쇠약해지고 구미를 잃어 식사를 못하고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임금은 슬그머니 여의(女醫)를 불러들여서 진찰을 시키니 바로 장씨의 몸에는 태기가 있다는 진맥이 나왔다. 임금은 여의에게 단단히 일렀다.
누구에게도 이 일은 발설치 말아라. 만일 발설되면 네가 죄를 당할 줄 알아라.
황송하옵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여의는 물러가고 임금은 장씨를 위로해 주었다. 장씨는 또다시 가이 없이 크나 큰 환희를 느꼈다.
中宮 廢出
장씨 궁인이 태기가 있게 된 것을 안 임금은 궁중의 그 누구에게도 발설치 못하게 신칙을 했으나 역시 숨기는 일처럼 남에게 드러나기 잘하는 것은 없었다. 어느덧 장씨 궁인이 잉태했다는 소문은 궁중에 자자했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임금의 기쁜 마음은 비할 길이 없었다. 왕비 민씨도 이 말을 듣고 우선 임금에게 진하(進賀) 전갈을 보내고 응향각에 상궁나인을 보내서 장씨에게 고마움을 일르는 것이었다. 왕대비도 자기의 피도 뼈도 섞이지 않은 현손이었지만,
현손을 보게 되었다
고 매우 기뻐했다.
온 궁중이 떠들석하는 통에 장씨가 어느덧 궁중에서 버젓하게 되자 임금은 드디어 대왕대비의 권유로써 장씨에게 소의(昭儀)라는 직첩을 내리게 하였다. 장소의(張昭儀)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하고 입지 않아도 등이 더운 듯했다.
일찍이 임금은 장소의에게 여염에 나가 있었을 때 어떻게 지내었나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장소의는 누구보다도 조사석(趙師錫)과 동평군(東平君)이 비호해 준 덕택으로 잔명(殘命)을 보전해 왔다고 아뢰었다.
임금은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동평군에게는 혜민제조(惠民提調)를 임명하고 조사석에게는 예조참판을 임명했다가 얼마 후에 우의정 자리가 비게 되니 정승과 판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약 조사석을 우의정에 앉혔다.
날은 가고 달이 차서 무진(戊辰) 시월 이십팔 일에 장씨는 왕자를 낳았다. 임금은 오직 이 왕자만을 위해서 사는 보람을 느끼는 듯싶었다.
왕자가 두 달이 되는 그 해 정월 초하루, 임금은 만조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게 되어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이하 삼상(三相), 육경(六卿), 삼사(三司), 정부제학(正副提學)들이 모두 한 뜰에 모이게 되었다. 임금은 신하들을 편전으로 불러들여서 술을 내렸다. 어사주(御賜酒)가 한순배 지냈을까 할 때에 임금은 여러 신하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왕자가 없어 국본이 위태하다가 새로 왕자를 낳았으니 하루 바삐 원자의 정호(定號)를 내리려 하는데 이 일에 그 누가 반대할 자가 있겠소마는 혹시라도 반대할 사람이 있다면 곧 이 자리에서 물러가 주오.
너무도 돌발적인 명령이었다. 여러 재상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성급하고 혈기 있기로 유명한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이 썩 나서며 아뢰었다.
이번 원자 정호는 아무리 생각한데도 시기가 너무 이른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제 전하 춘추 삼십 미만이온데 훗일 정궁(正宮)에서 탄생이 없으란 법도 없고, 또 탄생할 가망이 없다 하더라도 이제 생후 불과 백일의 어린 왕자로써 원자 정호한 바 전례가 없사오니 죄송한 말씀이오나 이 분부는 거두시옵소서.
성급한 남용익은 할 말을 다하고 나가버리고 그 다음에 영의정 이하가 차례로 아뢰는 말이 모두 시기상조(時機尙早)라 했다.
그러나 임금은 장소의(張昭儀)의 간절한 소청으로 지금 미리 원자를 책봉하고, 백일이 되는 날에는 세자를 책봉하고, 한돌이 되면 동궁을 봉하고, 이리해서 혹시라도 동궁 자리를 다른 아기에게 빼앗길까 보아 은근히 초조해하는 그 마음을 쓰다듬어 주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터였다. 그런 때문에 신하들이 말리는 것으로 그 문제를 거두어 들일 임금이 아니었다.
국가 대사는 하루가 바쁘니 원자 정호 절차를 예조에 분부해서 거행케 하라.
이런 전교를 내리고야 말았다.
이리하여 생후 백일 남짓해서 장소의의 소생은 원자 책봉이 되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왕자를 탄생해서 원자 정호가 되니 그 왕자의 어머니에게는 정이품(正二品)의 희빈(禧嬪)이란 직책이 내리고, 또 처소를 새로 정해 주니 이곳은 대조전에서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영휘당(榮徽堂)이었다. 영휘당에 자리를 옮긴 장희빈은 낮에는 아들 재미, 밤에는 임금의 귀염을 독차지했다.
이만하면 세상에 더 부러운 것이 없으련만, 그러나 장희빈에게는 아직도 불만이 있었다.
그것은 왕비 민씨를 내쫓고 자기가 그 자리에 들어앉지 않는 이상엔 사라지지 않을 불만이었다.
임금의 총애가 지극해지면 지극해질수록 장희빈은 임금을 보는 대로 공연히 짜증과 암상을 부렸다. 그리고 가지 가지로 왕비의 흉이며 잘못을 고해 바쳤다. 왕비는 까닭 없이 자기를 미워하여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심복 상궁을 시켜서 왕자의 음식에 치독(置毒)하려고 일을 했던 적도 있다고 왕비를 모함했다.
임금은 장희빈의 그런 말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이양 떠는 장희빈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서인(西人)의 거두 송시열(宋時烈)은 조정의 원로요, 사림(士林)의 중진(重鎭)이었으나 숙종 초년에 복제(服制) 문제로 상소했다가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을 김석주의 힘으로 목숨을 보전했다가 경신대옥(庚申大獄) 때에 풀려서 고향으로 내려가 숨어 살고 있었던 까닭으로, 원자 책봉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다.
추후에야 이런 일을 알고 고향에서 상소를 올려 그 옳지 못한 이유를 들어 원자의 정호 절차를 거두어 주십소서 하고 아뢰었다. 임금은
원자를 봉한 이상에는 군신의 분의가 벌써 정해졌거늘 원자 책봉에 대하여 옳지 않다고 상소하였으니 이것은 필시 원자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것이며, 또한 내가 하는 일을 반대한 것이니 용서할 수 없다.
하고 진노하여 친히 빈청에 제신(諸臣)들을 불러 송시열의 상소에 대하여 하문하였다. 이때 에 남인(南人)들과 우부승지(右副承旨) 이현기(李玄紀), 교리(校理) 남치훈(南致薰)등은 그 상소의 잘 못된 점을 상계하고 또한 전날에 송시열이 윤증(尹拯)과 분쟁하여 조야를 시끄럽게 한 일을 책논하였다.
임금은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는 한편 여기에 따라 그의 동조자들을 모조리 처형하니, 영의정 김수흥은 파면이 되고 이사명(李師命), 이익(李益), 김익훈(金益勳), 이순명(李順命), 김만중(金萬重) 등도 유배를 당했다.
이것으로 서인파(西人波)는 완전히 실각 당하고 남인파가 점점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다.
우선 목래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으로 하여금 좌우상(左右相)을 삼고 목창명(睦昌明), 권유(權愈) 등을 승지로 삼았다. 다시 보사공신(保社功臣)이었던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와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 등의 관직을 수탈하였다.
한번 벌어진 사태는 꼬리를 물고 확대되어 갔다. 세자 책봉과 서인파의 실각은 왕비 민씨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왕비 민씨는 본시 서인파의 거두 김석주가 천거하여 봉후(封后)한 관계로 서인과는 운명을 같이 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 처음에는 민비가 장씨를 불러들여 후궁을 삼았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총애가 모조리 장희빈 한 몸으로 쏠리었다.
아무리 점잖고 덕이 있는 민비라 하지만 자연 질투심이 안 생길 수 없었다. 마음에 항상 거리낌이 있을 때는 그것이 아무리 숨기는 한이 있더라도 자연 나타나게 되는 것이니 민비의 질투심을 임금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어느날 장희빈은 임금의 무릎에 매어달리며
신첩을 이 궁에서 내쫓아 주세요. 이 궁에 있다가는 제 명에 죽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흑흑 느껴 울었다.
왜 또 그러오?
중전께서 음식을 많이 보냈기에 즐겨 펴보았더니, 제절이 보통이 아니므로 개에게 시험을 하였는데 저렇게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하고 뜰에 축 늘어져서 죽어 있는 개를 가리켰다.
임금은 불문곡직하고 민비 폐출을 결심했다. 민비가 장씨를 다시 불러들인 장본인이면서 요새 와서는 그 시기하는 품을 보아 지금 장희빈의 한 말이 거짓되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험악하게 감돌던 공기는 드디어 폭발되고 말았으니, 그것은 기사년(己巳年= 숙종 십오년) 사월 이십삼 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날은 왕비의 탄신 일이어서 예년과 같이 축연 절차가 거행되게 되었다. 이때는 장열 조대비(莊烈趙大妃), 즉 대왕대비의 승하 후 삼년상이 채 지나지 않은 때라 궁중 축연을 여러 해째 그치게 되었다가 오래간만에 곤순전 제조상궁의 주선으로 탄신 잔치를 올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왕비 민씨는 월여 전에 사친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이 작고하여 상중에 있는 몸이라 굳이 사양하였지만 사가 친정 복상으로 궁중 절차를 궐하는 법이 없으므로 그대로 진찬(進饌)을 드리게 되는 터였다.
공사(公私) 이중(二重)의 상복을 입은 몸으로 이날을 보내게 되는 왕비의 심정은 착잡하였다. 그러나 예년과 같이 여러 종척의 하표(賀表) 진상과 진찬단자(進饌單子)가 연속해서 들어와야 할 터인데 어찌된 일인지 이 모든 것은 한 장도 곤순전에 들어오지 않았다. 왕비는 각처에서 들어올 문안 단자가 한 장도 없는 일이 매우 의심스럽고 궁금하여 봉서나인(封書內人)에게 이 일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봉서나인도 모르는 일, 궁금한 마음으로 이날 하루를 지내고 저녁 때가 되었다.
사친 오라버니 민진후(閔鎭厚)가 잠깐 사후차(司候次)로 왔다가 나갔다. 이때 왕비는 민진후를 보고
오늘은 문안 단자가 더러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무 곳에서도 들어오지 않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요?
하고 물었다. 민진후는 조용히 손짓을 하며, 오늘 여러 곳에서 들어온 문안단자와 진찬단자들은 모두 정원에서 받아서 상감의 분부로 땅을 파고 묻는다, 불에 태워버린다, 야단법석을 하고 있으니 이런 일을 아는 체도 마시라고 일르는 것이었다. 왕비는 이 말을 듣고 너무도 섭섭하고 야속하게 생각했다.
밤이 되자 임금은 중전의 탄신일이니 곤순전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비는 임금을 맞아 대강 인사 말을 올린 후에, 낮에 들은 바 섭섭한 말을 하였다.
오늘은 여러 곳에서 문안단자가 들어올 줄 알았더니 한 곳도 온 데가 없으니 어찌된 일이니 저에게 대해서는 일가 친척까지도 모두 괄세를 하는 모양이니 야속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무슨 때문인지 갑자기 변색하고 노염을 내며
문안단자가 몇 장 들어왔었소. 중전은 서인을 끔찍이 여기는 때문에 모두가 서인 재상의 집에서 문안단자를 들여왔기에 아니꼬아서 모두 불을 놓아 태워버렸소. 나는 서인놈이라면 그 글장도 보기 싫소.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러기로 사친 족척(私親族戚)들이 자주 만나지 못하고 서면으로 안부하는 것조차 막고 끊으실 게 무엇입니까? 너무 야속하지 않습니까?
임금은 더욱 노기를 띠우며 소리쳤다.
그렇게도 사친 족척이 못 잊을 지경이면 내일이라도 사가로 나가서 지내구료. 그러면 족척들도 마음대로 만날 수 있고 서인놈들도 마음대로 사귈 수 있을 테니까 여북 좋겠소.
이때 왕비도 화가 발칵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말씀은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이 사람에게 서인이 무슨 아랑곳이 있다고 그 분풀이를 저에게 펴시려 합니까? 내쫓으려면 그냥 내쫓으실 일이지 사친이 서인이라 해서 이 사람에게도 서인 대접을 할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희빈은 남인이 뒷배를 보아준다고 합디마다는 이 사람은 서인과 결탁한 일이 없습니다. 이 자리를 장희빈에게 내어주시랴 한다는 말씀은 미리부터 들은 바이오니 내일이라도 나가라 하오면 분부대로 나가겠습니다.
왕비는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까지 하였다.
그렇겠소. 나는 천고에 없는 폭군이고 중전은 세상에 드문 현비(賢妃)이니 어떻게 그대로 궁중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소. 내일은 사친의 집으로 나가시오.
임금은 이 말을 남긴 채 노기충천해서 돌아갔다.
왕비는 이날 밤, 밤이 새도록 슬피 울고 날을 밝혔다. 날이 밝자 임금은 입직 승지에게 분부하여 곧 전교로써
왕비 민씨는 연래에 너무 실덕(失德)해서 궁중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역대 종사가 욕될 것임에 오늘 그를 폐위 서인(廢位庶人)해서 사친의 집으로 내어 보내는 바이니 만조백관들은 딴 말을 말지어다.
이런 뜻을 정원(政院)에 내리었다. 정원에서는 예조판서가 먼저 극간했다. 임금은 정원에 모인 여러 재상을 둘러보고 이렇게 또 말을 했다.
소위 중전이 겉으로는 어진 체하나 속으로는 투기와 간악이 허다하여 최근에는 그 버릇이 더욱 심해서 안으로는 가법을 어그러지게 하고, 밖으로는 왕실의 체통을 보전치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요녀(妖女)와 내시놈들을 부동해서 아직 강보에 싸인 왕자까지 없애려고 갖은 간계를 다하고 있으니 이때에 궁중을 깨끗이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므로 마침내 왕비를 폐위하게 이르렀으니 만조백관들은 그 누구도 이 일에 대해서 말리는 말을 내지 마오.
이런 엄중한 분부를 내리었다.
그러나 재상들 중에 지각이 있는 늙은이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려 간하고 그 중에도 좌승지(左承旨) 이기만(李蓍晩), 수찬(修撰) 이만원(李萬元), 이후정(李後定), 강선(姜銑), 이상진(李尙眞) 같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직간하였으나 임금은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망녕한 늙은이들은 나가서 누워있게 하라.
라고 말할 뿐 그대로 편전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날 낮에는 각조 대신들과 이품 이상의 조관(朝官)들이 빈청에 모여 정청(庭請)하고 삼사(三司)에서는 합문(閤門)밖에 엎드리어 전교의 환수를 청했으나 임금은 모두 물리쳐 버렸다.
정원에서 고간(固諫)한 것을 물리치고 안으로 들어간 임금은 그날 저녁으로 왕비의 직첩을 거두고 폐위 서인해서 소보교(素步轎)에 태워, 두어 시녀만 따르게 하여 안국동 사친의 집으로 내보냈다. 이때 길가에서 이 소보교가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된 여러 사람들은 그 누구나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수십명이나 길가에 엎드려서 소보교를 우러러 통곡했다. 백성들의 반응이 이와 같은 것을 보게 되자 남인(南人)측에서도 지각 있는 이들은 슬그머니 사직하고 숨어 버리는 자도 생겨났다.
한편 전직 구관 즉, 서인 측 구관들 중에 아직 사직만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차차 여론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전임 형조판서 오두인(吳斗寅)은 숙종의 매부 해창위 오태주(海昌尉吳泰周)의 부친이요, 인조조(仁祖朝) 이후 사대를 내리섬긴 원로재상이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리라.
하면서 동지들을 모아 이 일을 바로잡겠다고 열렬히 부르짖었다. 그는 전 참판 이세화(李世華), 유헌(兪櫶), 전 응교(應敎) 박태보(朴泰輔) 등 팔십여명을 모아가지고 여기에 대한 일을 주야로 의논했다. 마침내 오두인은 박태보에게 상소문을 짓게 하고 두 사람의 이름으로 그소문을 올렸다.
< 중궁은 일국의 국모로서 입궐하신지 구 년에 갸륵한 성덕이 조야에 자자할 뿐 아무러한 큰 허물이 없으신 터에 갑자기 그 죄상을 말씀도 않으시고 폐출하시니 신 등은 이 일로 성상께서 성덕을 잃으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오늘이라도 번의(飜意)하시와 곧 국모께 복작 처분을 내리시옵소서. 듣건대 이번에 희빈 장씨는 왕자를 탄생한 것을 내세우며, 전날에 왕비의 대은을 입은 것을 잊어버리고 가지 가지로 왕비를 참소하고 한편으로는 서인으로 지목 받는 재상들을 모함하여 드디어 차례로 조정과 궁중에서 내어쫓으니, 자고로 후궁의 침석지간(枕席之間)의 참소로서 임금이 나라를 그릇치지 아니한 예가 없은 즉, 신들은 이 일을 너무도 통한이 여기어서 주상의 마음에 하루 바삐 깨달으심이 일어나기를 천만 바라옵니다. >
이 상소문이 임금에게 전해지 것은 그날 저녁의 일이다. 임금은 상소문 소두(疏頭)에 적힌 두 사람의 이름과 또 연명장에 적은 팔십여 명의 성명만 보고 상소 본문은 살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 임금은 장희빈 처소로 가서 저녁에 올라온 상소문 얘기를 했다. 그러자 장희빈은 간드러진 웃음으로 조롱 비슷, 응석 비슷 이렇게 말했다.
상감두 딱하시우. 오두인은 해창위의 부친으로 나라의 사돈인데, 이런 일로 팔십여 명을 동원해서 상소한 터이니 그 일이 궁금하지 않아요? 그 글발이 어떤 것인지 살펴서 상당한 조처를 하셔야지 그렇게 내버려 두면 다음날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강화도 교동 밖에는 가실 곳이 없을 터이니 참 기막힌 처신이시오.
한편으로는 그 글을 보게 하고 한편으로는 분기를 돋구워 주었다. 임금은 장희빈의 말을 듣고야 비로소 내시를 시켜서 상소문을 가져오라하여 장희빈과 같이 내용을 살피고는 그야말로 노기가 충천해졌다. 더욱이 장희빈의 얼굴은 푸르락붉으락했다. 임금은 그 길로 정원으로 나가
그 상소한 놈들을 모조리 친국할 터이니 지체 말고 즉각 인정문에 형구를 채리고 오두인 이하 모두 잡아들이도록 하여라.
이리하여 응교 박태보, 판서 오두인, 참판 이세화 등 팔십여 명은 모두 죄를 입고 혹은 형살(刑殺), 혹은 귀양 혹은 파직이 되었다.
또한 전일 세자 책봉을 간하고 상소하다가 제주도에 정배 당한 송시열, 이사명, 김수흥 등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 민씨 일족 중의 유관자도 모두 파직을 시키고, 심지어 지방 관속까지도 민씨와 관계만 있으면 파직을 시켜버렸다.
이처럼 민씨 일족과 그 일파가 전멸되는 반면에 장희빈은 승차하여 왕비로 책립되고 그 부친 장현(張炫)에게는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을 봉하고, 그 모친 윤씨에게는 파평부부인(坡平府夫人)을 봉하고, 주색 잡기와 시정 무뢰배의 출신인 그 오라비 장희재(張希載)는 척신(戚臣)으로 되어 버젓이 어영대장(御營大將)의 인수(印綬)를 찼다.
장비(張妃)는 이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고 거리낄 것이 없었다. 비록 상감이라 하나 그도 장비의 말이면 모두가 엿가래 휘어지듯 녹신녹신해졌다. 그리고 임금은 오직 헛 이름만 가지고 있는데 불과했다. 만조백관이 장비(張妃)의 심복아닌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시드는 毒草
이제부터 궁중에는 다른 후비(後妃) 하나도 없이 오직 장비(張妃)만이 독장을 부리는 판이다.
이때 대궐을 무상출입하며 장비 처소에까지 드나드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종친으로 예전부터 장비와 친숙했던 동평군(東平君)이었다.
동평군은 장비가 궁중에서 쫓겨나 있을 때 크게 보살펴 주었고, 또 장씨 궁인이 장비(張妃)로 되기까지의 큰 공로자, 즉 장비의 공신(功臣)이기 때문에 특별히 궁중을 무상출입시켜 궁중을 정찰하는 책임을 내맡겼던 것이다. 이리하여 동평군은 그전 낙척 당시와 마찬가지로 궁중의 기밀을 아뢴다고 임금이 있건 없건 장비의 침소에까지 출입을 했다.
이렇게 궁중의 정찰을 동평군이 하는 대신에 대궐 밖 모든 위험인물들의 정찰은 장희재가 부랑배들을 부하고 삼아서 정찰을 했다.
어느 날 장희재가 큰 길을 지나며 듣자니까 아이들이 노래를 하는데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
하는 구절이 있었다.
장희재가 가만히 들으니까 다른 뜻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 아이를 불러가지고 그 소리를 누가 가르쳐 주더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이라고 대답한다. 너희 집이 어디냐고 하니까 저기 저 집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장희재는 곧 돌아와서 사령들을 불러
그 아이의 집을 일러주고 아이의 아버지를 잡아오라 했다.
사령들은 그 아이의 아버지를 잡아왔다. 장희재가 아이의 아버지를 보고
네가 아이에게 이런 동요를 가르친 뜻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아이들이 지껄이는 것을 가지고 무얼 그러십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놈, 뭐라고? 너는 민씨편이 되는 서인인 까닭에 이런 동요를 만들어서 인심을 흔드는 것이 아니냐?
호령과 아울러서 어떻게나 지독한 형벌을 가했던지 그 사나이는 그만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이 소문이 세상에 퍼지자, 장희재의 의세남권(依勢濫權)을 미워하고 민비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일부러 아이들에게 돈까지 주어가며 이 노래를 가르쳐서 온 장안에 이 동요가 퍼지게 되었다.
마침내 이 동요 소리는 장비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장비는 이 동요소리를 듣고 마음이 점점 불안해져서 민비를 영원히 치워버릴 생각까지 갖기에 이르렀다. 장비는 폐비 민씨를 또 온갖 소리로 모함하기 시작했다. 왕자가 혹 감기가 들고 머리가 더워도
이건 필시 민녀(閔女)의 장난으로 이렇게 되는 일입니다.
하고 민비를 씹고 욕하기를 되풀이하면서 민녀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라고 졸라대었다.
그러나 임금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비록 일시의 분기로 중전을 내어쫓긴 했으나 마음에는 종종 불안한 생각이 들고 또 장씨의 교만방자와 요악간특함을 차차 알게 된 까닭이었다. 임금이 차츰 자기의 말을 듣지 않게 되자 장비는 젖을 먹이던 왕자를 방바닥에 내던지며
난 모르겠소. 이 자식이 민녀의 저주하는 방예에 걸려서 죽든 살든 알 게 뭐에요. 그리고 폐비 민녀가 그렇게도 소중하거든 오늘이라도 다시 불러들이구료.
이렇게 포달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임금도 화가 터져 나왔다.
너도 인간의 양심을 가졌으면 생각을 해보아라. 왕비를 내쫓고 너를 왕비 자리에 올려 앉힌 것은 오직 이 왕자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한 일인데 너는 무슨 그리 큰 원수가 된다고 폐출된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으려고 하느냐? 에잇, 천하에 악독한 것!
이렇게 호령하자 그제서야 장비도 좀 겁이 나는 듯 금방 간특한 말투로
그러면 모든 것은 제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시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하며 애교를 띤 웃음으로 임금의 노여움을 풀어놓는 것이었다.
최근에 와서 임금은 차츰 장비에게 홀렸던 정신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하는 듯했다. 이리하여 임금의 마음에는 새로운 우울이 깃들기 시작했다. 밤에 잠이 깨면 장차 궁중 일을 어떻게 조처할 것인가, 장비를 그대로 둘 것인가, 왕자는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번민을 하다가는 곧 일어나서 무감 두엇을 불러 뒤따르게 하고 민간 여염집 들창 밑으로 또는 술파는 집으로 미행의 발길을 떼어놓는 것이 항례처럼 되어버렸다.
북촌 어느 여염집 들창 밑에서 새어 나오는 이야기의 한 토막
민중전은 보기 드문 어진 어른이신데 그 요악 간특한 이의 모함을 받아서 오늘날 저 지경이 되었으니 너무나 가엾고 불쌍하다. 어느 때나 상감께서 마음을 돌리시게 될지…
또 어느 선술집에서 들려 나오는 몇몇 늙은이의 대화
암, 그렇고 말고 여부가 있나. 박응교는 참으로 충신일세. 그 분 같은 이가 몇 사람만 된다면 그래도 세상이 이 지경은 안 될 걸세. 장희재 그 놈이 세도를 부리는 후부터 우리네들의 곤란이란 참으로 말할 수 없게 되었거든.
그뿐인가? 장희재의 행악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천고에 듣지를 못한 일일세. 그 자는 재물과 예쁜 계집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인간이란 말일세…
암, 그것도 세도를 하게 되니까 금관자 옥관자들이 쫓아다니면서도 아첨하는 꼴이란 참으로 구역이 나서 못 보겠데. 그런 작자들이 더 더럽지. 예전에 장희재가 시정으로 돌아다닐 때의 친구들이라면 몰라도 버젓한 양반놈들이 장희재의 밑을 씻기러 다니면서 행악을 같이하니 그 놈들이야말로 장희재 이상으로 아니꼽고 더러운 인간이란 말일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들을 듣게 된 임금은 마침내
백성들의 소리는 곧 하늘의 소리다.
이렇게 깨달았다.
어, 이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임금은 다시 밤마다 궁중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한곳을 지나가노라니 밤이 매우 깊었는데 창에 등불이 비치고 사람의 말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왔다. 의심스러워서 가까이 가서 엿들으니 안으로부터는
폐비 민씨는 이 화살 맞은 자리마다 악창(惡瘡)이 나게 해 주십소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도 괴이해서 창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벽에는 민중전의 화상을 그려 붙이고 무당들이 모여서 그 화상을 향해 활을 쏘고 있었으며 또 그 옆에서는 장님이 앉아서 경문을 외어가며 무슨 축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임금은 곧 뒤에 따르던 무감을 불러 즉시 그 무당들과 소경들을 모조리 묶게 하고 무슨 일들이냐고 엄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 무당과 소경들은
그저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소인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직 중전마마의 분부로 거행만 할 뿐입니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 후에도 임금은 밤이 깊어서 궁중 순회를 계속하였다. 어느 날 역시 궁벽 한 곳에서 등불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고 가까이 가 보았다. 불은 켜져 있으나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궁금한 마음으로 그 창 앞으로 가까이 가서 엿보니 그 안에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벽에는 옷 한 벌을 걸어놓고 그 앞에는 여러 가지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놓은 상을 놓고 어떤 젊은 무수리 하나가 엎드려서 울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임금은 드디어 기침을 한번 크게 하고 방문을 두드렸다.
무수리는 곧 문을 열었다. 임금은 안으로 들어서서
네 지금 야심한데 등불을 켜놓고 또 이 음식은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차려놓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냐?
조용히 물었다. 무수리는 말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어서 대답해 보아라.
하는 분부에 그 무수리는
죽여 주십소서.
하고 임금 앞에 엎드렸다.
죽이라고 그저 그러면 알 수 없으니 바른 대로 아뢰어라.
그제서야 무수리는 울면서 벽에 걸린 화상을 기리키며
네, 그저 죽여 주옵소서. 오늘이 바루 폐출 된 중전마마의 탄신이옵니다. 마마를 잊지 못하와…
하고는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싸고 흑흑 느껴 울었다.
임금은 아무 말없이 그 화상을 바라보더니
그렇구나. 내가 잊고 있었다. 오늘이 중궁의 탄신 날. 국모로 있을 때 같으면 온 장안이 즐겨할 날이어늘…
임금의 가슴은 이상하게도 설레였다. 얼마 전만 해도 이런 계집은 당장에 중죄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를 책망은커녕 오히려 회오의 눈물이 핑하고 도는 것이 아닌가…
임금은 얼마 동안 그 방에 머물러서 무수리에게 술을 따르라 하고 울적한 마음을 풀려고 했다. 한잔, 두잔, 잔을 거듭함에 따라 임금은 어느덧 취해서 그대로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무수리는 임금이 몸을 가누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자 벌써 그 뜻을 알아차리고 자리를 펴놓고 조심스러히 물러나려 하는데
그래 나더러 이곳에 혼자 있으란 말이냐?
하고는 무수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수리는 너무나 황송하고 무서웠다. 첫째로 지존의 몸으로서, 나인도 아니오 나인의 비복인 무수리의 신분을 가진 자기에게 이런 손길을 내주는 것이 황공했고 둘째로는 간악한 장비가 이 일을 알면 장차 자기에게 어떤 악형이 떨어질지 모르는 때문에 공포심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니 될 일이옵니다.
하고 거절을 해도 듣지 않는 임금인데는 어쩌는 수가 없었다. 무수리는 그날 밤을 임금과 같이 지냈다. 이 무수리의 성은 최씨(崔氏)로서 아직 출가하지도 않았으며 그 자색은 그래도 열에 뛰어나는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번 인연이 맺어진 후에는 임금은 때때로 최씨를 찾았다. 세상에서 와글와글하도록 떠들어대는 장비와 장희재 일당들의 탐권 행악을 비난하는 소리는 임금의 귀를 아프게 할 지경이 되었다. 임금은 항상 근심으로 지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이면 근심을 잊기 위해서 상궁 나인들을 시켜 고담책을 읽게 하여 들었다. 세상에 흩어져 있는 고대소설이란 소설을 모조리 대궐에서 모아들이게 되자, 이 기회를 타서 임금의 마음을 한번 돌려보겠다는 결심으로써 김춘택(金春澤)이란 사람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란 소설을 한역해서 마치 고대 소설인양 일부러 빛이 바랜 종이에 옮겨 써가지고 궁중으로 들여보냈다.
김춘택은 그전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부친 김만기(金萬基)의 아들로서 별호가 북헌(北軒)이란 문장가였는데,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켜 보겠다고 이런 계획적인 일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러던 어느 날 밤의 일이다. 장비의 심복 조궁인(趙宮人)이 장비 침방으로 들어오더니 장비에게 귓속말로 무엇이라 속삭였다. 궁인의 말을 듣고 있던 장비의 얼굴 빛은 당장 변했다.
그래 네가 그 일을 확실히 아느냐?
아, 알고 말고가 있습니까? 어느 앞이라 사실 없는 말을 아뢰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어서 자세히 말해 보아라.
그런데 그 계집은 나이도 아니요 무수리라 하오니 너무도 해괴합니다.
뭐? 무수리?
예, 예전에 폐비 민씨 처소에서 거행하던 무수리라 하옵니다.
참 기막힌 일이다. 그래 일국의 지존으로 하필 비자(婢子)년 무수리를 가까이 해서 또 그 중에도 아이를 배었다니 이게 웬말이냐? 내일은 그년을 불러들여서 특별한 조처를 해야겠다.
장비는 노기충천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날 밤 장비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러 번이나 이를 갈며 날을 밝혔다. 이년을 불러들이면 어떻게 해서 감쪽같이 죽여 없앨 것인가, 또 뱃속에는 임금의 씨가 벌써 들어 있다니 이것을 죽이고 보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까, 가지 가지로 독살풀이를 해볼 계교를 생각하다가 밤을 밝혔다.
아침 수라 절차가 지나고, 대강 다른 절차도 지난 뒤라 벌써 낮이 가까웠다. 장비는 드디어 측근자를 시켜서 조용히 그 무수리를 불러들여 뒷뜰에 세워놓았다. 무수리는 무슨 처분이 내릴지 몰라서 덜덜 떨고 서 있는데 장비의 무수리를 쏘아 보는 안광은 불이라도 일어날 듯이 날카로왔다.
네가 예전 폐비 민씨 처소에서 거행하던 무수리라 하니 그러하냐?
예, 황공하옵니다.
무수리의 신분으로 상감마마를 뫼셨다 하니 그렇고도 아무런 일이 없을 줄 아는가?
…
어째 대답이 없느냐?
장비의 독살스레 외치는 소리는 깁을 찢는 듯이 날카로왔다.
황공무지하오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런 일은 애매하다는 말이냐? 어디 네 배를 내어 뵈어라. 억울하면 억울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게 해줄 게다.
…
네, 저 계집을 잡아 젖히고 옷을 풀어보아라. 벌써 만삭이 돼 있을 게다.
장비의 호령 소리에 모시고 섰던 나인들은 당황하면서도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너희들도 그러기냐? 냉큼 벗기지 못할까?
그때야 여러 궁인들이 내려가서 최무수리의 웃옷을 벗기었다. 최씨는 속옷만을 입은 채 어찌할 바를 몰라 울고 있었다.
네 저 계집의 속옷까지 벗기어라.
호령이 다시 내렸으나 나인들은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장비의 표독스런 호령에 최무수리는 드디어 나체(裸體)가 되어 앉지도 서지도 못해서 쩔쩔 매며 돌아서서 울고 있었다.
너는 그래도 변명할 길이 있느냐? 대관절 너는 무슨 목숨을 가졌기에 천한 몸으로서 감히 상감을 가까이 모셔서 왕자까지 배고 살기를 바랐더냐?
황공하옵니다. 제가 그러했던 것이 아니오라 상감마마께서 저의 처소로 오신 것을 피하지 못한 죄가 있을 뿐이옵니다.
무수리는 울음 섞인 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 천하에 앙큼한 년! 네가 가만히 있는 것을 상감께서 건드렸더냐? 무슨 뜻으로 궁중에서 요망스럽게 폐서인된 악독한 계집 민가의 생일을 지낸다고 음식을 차려놓고 했더란 말이냐? 네가 앙큼한 마음에 평소에 버정대던 무감놈을 꾀어 그 곳으로 상감의 미행길을 인도하게 했던 일이 아니냐? 그러고도 모든 일을 상감께만 밀어버릴 작정이냐?
그 말씀은 너무 애매하옵니다.
뭐 애매하다고? 네 저년을 기둥에 단단히 묶어 놓아라!
장비가 발을 구르고 요망을 떠는 통에 화관(花冠)이 떨어지고 첩지가 삐뚤어졌다. 암상이 났던 판이라 장비는 그 화관을 떼어내서 방구석에 동댕이를 치고 마루 아래로 뛰어내려가서 준비해 놓았던 싸리비를 뽑아들고
흥! 네가 요만치 안팎으로 절색이니 무수리 아니라 아무 것이기로니 상감의 마음을 끌지 않을 수가 있느냐?
이런 소리를 하다가는 싸리채를 들어서 무수리의 하복부와 넙적다리를 한데 얼러서 훔쳐 때리며 호통을 한다.
너 이년, 바로 대지 못하겠느냐? 번연히 어느 무감놈과 정을 통해서 자식을 배고 못된 꾀로써 무감놈을 시켜 미행을 해오게 해서 상감을 농락한 다음에 왕자를 잉태했다고 하는 것이니, 이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그러나 항복하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어느 무감놈과 정을 통했는지 바로 일러라.
너무도 억울한 호령이었다. 무수리는 별안간 하복부를 무수히 회초리에 얻어맞고 신음소리를 내며
그 말씀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너 이년! 그래도 억울하다고 하느냐? 어서 바른대로 대어라. 그 놈이 어느 놈이냐?
장비는 또 새로 싸리비를 뽑아내서 두 세 개를 합쳐가지고 있다가 말이 끝나자마자 무수히 전신을 휘갈기니 무수리의 몸에는 손가락 굵기만한 기다란 선(線)이 시뻘겋게 일어났다.
무수리가 악을 쓰자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무수리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너 그래 자백하지 못할까?
장비는 또 다시 싸리채를 뽑아 들고 전신에 잔채질을 했다. 아까 맞아서 부르텄던 자국이 터져서 피가 흘렀다. 무수리의 몸은 어느 한곳 성한 곳이 없게 되었다.
참, 고년 독물 중에도 무서운 독물이다. 이제는 낙형(烙刑)을 할 수밖에 없다. 백탄을 피어 놓은 화로와 인두를 어서 가져 오너라.
화로와 인두는 미리 준비했던 듯이 즉시 가져왔다.
너 이년, 그래도 꿈쩍 않고 서서 자백을 안 할 모양이구나. 어디 불 찜질 맛을 한번 보아라.
장비는 새빨간 백탄 숯불 속에서 인두를 꺼내 들더니 거침없이 무수리의 하체로 가져다가 지지는 것이다.
이년 네가 상감을 모시던 때에도 이만치는 좋았으리라. 너 이 맛이 얼마나 좋은가 맛보아라.
장비는 오히려 미소까지 지어가며 이 짓을 하는데 무수리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얼굴을 찡그리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누린내가 끼쳐 장비의 코로 들어가고 살이 타는 연기가 인두 밑에서 보얗게 일어났다. 모시고 있던 나인들도 모두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고는 코를 막았다.
너, 그래도 뱃 속의 아이가 왕자라고 엉뚱한 말을 할까? 어서 그 아이의 아비놈을 자백하여라.
장비는 또 얼러대면서 다른 인두를 다시 빼어 드는 것이었다. 이번 인두는 아주 빨갛게 달구어져서 나무라도 당장 탈 지경이었다. 이 인두를 들고 악착스럽게 아귀같이 무수리를 바라보는데 돌연 내전 저편으로부터 설레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비는 이 설레이는 소리에 귀가 쫑끗해서 새빨갛게 달구어진 인두를 도로 화로에 꽂고 나인을 돌아보며 조용히 일렀다.
너 급히 나가 동정을 살펴 보아라.
나인이 재빨리 뛰어나가더니 곧 되돌아 와서 황황히 아뢴다.
이를 어쩝니까. 상감마마께서 듭신답니다.
이 말을 듣던 장비는 금방 눈이 휘둥그래지며 두 눈을 갈팡질팡 사면으로 돌리다가 저편 추녀 끝에 낙숫물 받느라고 세워놓은 큰 독을 보았다.
얘, 이 계집을 번쩍 들어다가 저 담 밑에 앉혀놓고 이 독을 들씌워 놓아라.
나인들은 황황히 묶은 것을 끄르며 입을 틀어 막은 것을 꺼내며 해서 옷에 피를 묻힐세라 조심조심 사지를 드는데 잘 들지를 못하니까 장비가 겁과 암상이 일시에 일어나서 곧 달려들어 계집을 잡아 끌다가 잘못하여 옷에 피를 묻혔다. 그러나 장비는 당황 중에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때 조궁인이 옆에서
중전마마께옵서는 화관을 쓰십소서.
말하니까 그제서야 화관을 벗어 동댕이친 생각이 나서 얼른 방으로 들어가 화관을 들쓰며 앞에 흐트러진 것을 치우라 하고 편전으로 나가려 하는데, 벌써 임금은 내전 툇마루까지 나와 서서 눈을 좌우로 돌리며 무엇을 살피는 기색이었다.
장비는 너무나 황황망조 어쩔 줄을 모르면서 그래도 가능한 한 꾀를 내어서 간특한 애교의 웃음으로 임금을 맞았다.
에그, 오늘은 별일이십니다그려. 웬일이십니까?
그러나 임금은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여전히 담 밑이며 뜰이며 살펴보는 것이었다.
장비는 간이 콩알만 해졌다. 필시 어떤 년이 임금에게 고급(告急)을 해서 들어온 모양인데 이 일이 탄로나고 보면 이 노릇을 어쩌는가 애가 바작바작 탔다. 이러면서 언뜻 보니 퇴 앞을 치웠다는 꼴이 핏방울이 두어 곳 떨어진 채 있으므로 이것이 임금의 눈에 띄울까 보아 얼른 임금 앞을 가리워서서 무엇이라 말을 붙이려 했다.
이때 임금의 눈에는 장비의 옷고름에 붉은 피가 밤톨만치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장비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임금은 옆에 있는 무관을 돌아보고
네 지금 내려가서 저 담 밑에 놓인 저 독을 치워보아라.
이런 말을 하며 장비의 낯빛을 살폈다. 아니나 다르랴, 이 말이 떨어지자 장비의 얼굴은 순간 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장비는 곧 태연한 태도로 돌아가며 차디 찬 웃음을 입가에 지으면서
원, 상감께서는 별 것을 다 시키십니다. 그 독은 왜 별안간 치우라 하십니까?
그러나 임금은 이 말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또 한번 재촉을 하였다.
네 머뭇거리지 말고 곧 거행하지 못할까?
분부가 다시 떨어지자 머뭇거리던 무감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다.
글쎄, 무엇 때문에 독을 옮기시려는 겁니까.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제발 그대로 두어주십시오.
장비의 태도는 극도로 당황해 하는 눈치가 보였다.
글쎄 무엇 때문에 그 독은 기어이 옮겨놓지 못하게 하오. 알 수 없는 일이구료. 제발 그런 참견은 말아 주오.
이렇게 대답하며 무감을 재촉해서
그, 머뭇거릴 게 무에냐. 냉큼 가서 치워라.
무감은 드디어 그 담 밑으로 가서 독을 치웠다.
앗! 이게 웬일이냐?
독을 누이자 그 밑에는 한 젊은 계집이 몸에 실오리 하나 감지 아니한 채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져 있지 아니한가. 그 계집은 정신을 잃고 죽은 듯이 보였다.
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임금은 나인을 돌아보고 물었으나 모두 얼굴빛이 빨개져서 대답을 못하고 있다.
무감은 나체가 된 시체가 나오자 놀라우면서도 역시 남자라 미안쩍어서 그대로 외면하며 서있는데 임금은 무감을 보고
너는 그만 나가거라. 나가다가 대조전에 지밀상궁이 있을 터이니 곧 들어오라 해라.
무감은 말없이 국궁하고 물러갔다. 이때 임금이 그 시체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의심 없는 최무수리가 분명했다.
임금은 더욱 놀라왔다. 장비를 돌아보고 지극히 조용한 말씨로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요?
장비는 오히려 웃는 낯으로
저 계집이 무수리온데 어느 무감과 간통해서 자식을 배고 앙큼스럽게 상감을 모셔서 왕자를 잉태했다 하며 상감마마를 욕되게 하였기에 그 죄를 다스렸던 것입니다.
…
임금은 대답 없이 한동안 의아와 분노의 눈초리로 장비를 쏘아보았다.
호호… 왜 이리 쏘아 보셔요? 만일 이 말을 내이신다면 도리어 상감 위신이 손상되십니다. 그대로 나가주십시오.
분명히 궁중 비자를 가까이 했다는 것을 조소하는 뜻으로 경멸의 눈초리를 던지는 것에 틀림 없었다. 너무나 방자한 행동이었다.
그런 죄에는 저런 형벌을 해야 하는 법이요?
호호… 왜 잘못된 일이 있습니까?
여전히 비웃는 말소리였다. 임금은 그만 격분했다.
에잇! 악독한 계집, 썩 물러가지 못할까.
임금은 드디어 두 눈을 부릅뜨고 발을 굴렸다. 이때에야 장비는 주춤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아니 왜 이러세요. 저 계집이 무감과 간통했던 사실이 있고 증거가 있어도 그렇게 싸고 도시겠어요?
뭐라구?
참 딱한 노릇입니다. 저 계집을 가까이 하셨대서 이다지도 저 계집을 옹하시지마는 너무나 딱합니다. 체면을 생각하십시오. 상감의 몸으로서 그래 겨우 궁 비자 저 계집을…
무슨 딴 말인가? 냉큼 물러나지 못할까?
임금은 또 발을 굴러 호령했다. 그러나 장비는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그대로 서서 임금을 맞 쏘아보고 있다. 이때 지밀 상궁이 들어왔다.
무슨 분부이십니까?
저 담 밑을 보오.
앗! 저게 웬일이옵니까. 누구이옵니까?
늙은 상궁은 임금을 바라보고 또 장비를 바라보고 눈치를 살핀다.
그 말은 나중에 하고 급히 나아가 옷 한 벌을 들여다 입히고 누구에게 일러서 저 계집을 급히 구하도록 하오. 우선 상궁의 처소로 데려다가 조섭을 시키게 해야겠소.
늙은 상궁은 맨발로 뛰어내려가서 자기가 입고 있던 옷 치마를 벗어 그 알몸을 덮어 주고 곧 황황히 나가서 나인 몇 사람을 불러가지고 들어왔다.
임금은 상궁을 보고
아직 숨기가 붙었나 만져보오.
상궁은 자세히 맥과 가슴을 짚어보고는
아직 따뜻한 기운이 있으니 소생할 가망이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답하고 나인에게 업혀 가지고 자기 처소로 돌아가자 임금은 격노한 빛으로 한번 훑어보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다행히 최씨는 그 후 구호를 받아서 소생이 되었다.
임금은 최씨에게 소원(昭媛)이라는 직첩을 내리고 그 다음에는 금위(禁衛)와 여관을 수십 명씩 교대해 가면서 최소원을 극진히 보호케 하였다.
이런지 한 달이 지난 숙종 이십 년 구월 십삼일 새벽에 최소원은 드디어 옥동자를 낳으니 이때 임금의 나이는 삼십사 세였다.
임금은 새로 태어난 왕자를 보고 전날 제일 왕자 탄생 때보다 한층 더 기뻐하였다. 이때 최소원은 조용히 일어나서 임금에게 절하며
이 왕자는 전날 마마께서 탄신망례(誕辰望禮)를 드렸던 까닭에 탄생된 바이온 즉 그 일을 생각하시더라도 하루 바삐 전 중전마마를 복위시켜 주옵소서.
이런 말을 아외었다.
오냐, 낸들 생각이 없겠느냐 마는 아직 무슨 일을 생각하는 중이다. 네 정성이 그러하니 곧 복위를 시키겠다.
임금은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이럴 즈음 장비는 임금에게 그런 지경을 당하고도 오히려 최소원을 살해하려고 최소원의 처소에 장희재를 시켜서 독약을 들여가려다 탄로되었다. 임금은 극도로 진노하고 그날로 왕비의 직첩을 거두고 장씨를 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와 동시에 장희재도 즉각 의금부에 잡어 가두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한때 자기의 은인인 민중전의 지위를 찬탈해서 스스로 왕비의 자리에 나아간지 무릇 육 년이오, 민비의 은혜를 입어서 재입궐한지 무릇 구 년 만에 장씨는 재추방을 당하게 된 것이다.
장씨가 이렇게 되고 민비의 복위전지(復位傳旨)가 내리게 되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러면 그렇지. 우리 상감께서 착한 민비를 그대로 둘 리가 있나. 이제야 나라가 바로 잡히게 될 것이다.
이런 말들을 하였다.
張禧嬪의 最後
민비(閔妃=仁顯王后)가 복위해서 환궁하니 이때 민비의 나이는 이십팔 세였고 임금은 삼십사 세였다.
이때부터 양전(兩殿)의 부부애는 재출발이 된 듯 다정스러웠고 최숙빈도 이십여 세의 나이로 양전의 사랑을 받으면서 화합한 날을 보내게 되니 궁중은 저으기 안정되었다.
이런 반면에 장비는 장희빈이란 예전 작호 그대로 초전골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처량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은 오늘날 이 지경이 되었어도 오히려 민비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자기 죄과에 대한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또 민중전과 최숙빈을 욕하고 저주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들의 원수를 갚아 볼까 악착스럽게 벼르고 있었다.
민비가 환궁한지 어느덧 팔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민비는 무엇 때문인지 항상 신체에 잔병이 생겨서 자리에 눕는 날이 많았다. 한번은 병세가 좀 회복되어서 기동을 하자 구미를 돋구어 드린다고 최숙빈이 게젓을 갖다가 바친 일이 있었다.
아직 첫가을이라 마침 쓸 만한 것이 없어서 궁중에 있던 것을 몇 개쯤 미음 반찬으로 올렸더니 민비는 여기에 구미를 붙이고
여보게, 이 게장이 유난히 다니 웬일인가? 이렇게 맛 좋은 게장은 처음 먹어보네.
이런 말을 하였다.
아무것이라도 잡수시고 구미를 얻으셔야 하지요.
최숙빈은 너무나 다행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러는 한편 사람을 또 보내서 햇 게젓이 결이 삭는 대로 들여오라 일렀다. 그런데 왕비는 이 게젓을 먹고 별안간 정신을 잃는 듯 누워버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최숙빈은 그 증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았다. 두어 시간 후 왕비는 서둘 새 없이 임종을 맞이했다.
왕비는 호흡을 모두어 쉬게 되는 마지막 시간까지 임금을 보고
저 세자를 생각하시더라도 아무쪼록 그 친 생모를 너무 슬프게 대접 치 말아 주옵소서.
이런 말을 하고 열네 살 된 세자를 앞에 불러 어루만지며 네 어미가 덕이 박해서 네 친생모(親生母)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다. 훗일에 친생모를 보거든 부디 내 말을 전해다오.
이렇게 말을 한 후에 즉시 숨이 가빠지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비가 이렇게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하자 임금을 비롯하여 모든 측근들은 의심을 잃으키게 되어서 드디어 식사 진공했던 일을 살피게 되었다.
숙빈은 언뜻 게장밖에 의심 나는 게 없어서 그 게장을 조금 맛을 보니 과연 게장의 단맛이 좀 이상스러웠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게장 속에 꿀을 넣었던 것이다. 숙빈은 곧 게장이 궁중에까지 들어오게 된 그 경로를 살펴 보았다.
이 게장을 수랏간에서 편전까지 올리기는 김나인(金內人)이다. 편전에서 최숙빈이 몸소 미음상을 드려서 올렸던 터이다.
최숙빈은 곧 김나인을 은밀한 곳에 가두어 놓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은 즉시 친국을 시작했다.
금부나장(禁府羅將)이 몇 번 때리지도 아니해서 자백은 순순히 나왔다. 김나인은 장희빈의 밀계를 그대로 받아서 이번에 그런 금기(禁忌) 음식을 이용해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임금은 더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 김나인을 금부로 내보내고 그 즉석에서 장희빈에게 사약(賜藥)을 내리었다.
이 전교가 내리자 열네 살 된 세자는 가뜩이나 모비상(母妃喪)을 당해서 망극한 중에 이중(二重)으로 친생모(親生母)의 극형 처분을 듣게 되니 그 애통해하는 정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후까지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구해보리라 결심한 어린 세자는 부왕(父王)의 처소 앞뜰에 거적을 펴고 석고대죄하며 아뢰었다.
소자를 어미와 함께 죽여 주소서.
이렇게 아뢰면서 통곡하고, 한편으로는 입직 대신들을 보는 대로
우리 어머니를 구해 주시오.
하고 애원했다. 그러나 임금은 처음부터 결심한 바가 있는 듯 조금도 세자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한편 장희빈은 최후의 민비 치독사건(置毒事件)이 탄로되어 사약까지 받게 되자 갑자기 마음이 이상하게 변하며 사약을 받아놓고 나인을 궐내로 보내어
사약을 내리시니 먹기는 하겠사오나 생전에 모자(母子)가 마지막 영결이라도 하고자 하오니, 세자를 잠깐만 만나게 해주시면 유한이 없이 죽겠나이다.
이런 말을 전하게 했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무엇보다도 애걸 통곡하는 세자가 측은해서 우선 세자를 위로해 줄 양으로
네가 가서 마지막 네 어미를 대면하고 오너라.
이런 말로 이르고 늙은 내시를 따르게 하여 내어 보냈다. 세자는 그 친생모를 대하자 눈물을 좌르르 흘리면서
어머님 이 노릇을 어떻게 한단 말씀입니까?
하면서 어머니의 앞으로 달려들어 통곡을 했다. 그러나 장희빈은 세자를 대하자, 갑자기 정신에 이상이 생기고 마음은 아주 악독하고도 광란적으로 변했다. 으레 눈물로 세자를 맞이 하련마는 돌연 눈빛이 싸늘해지고 얼굴에 독기가 서리었다.
그러다가 세자가 자기를 향해서 어머님! 하고 울며 달려들 때에 장희빈은 번개같이 세자의 하체를 부여잡고 죽어라 하고 아래로 나꾸어챘다.
울고 있던 세자가 금시에 비명을 울리고 당장 까무라치는 바람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어 장희빈을 떼어놓았다. 장희빈은 여전히 독기가 서린 말로
내가 이지경이 되어 죽게 되는 처지에 너를 남겨 두어서 이가의 혈통을 잇게 하고 민가 년의 제사를 지내게 할 내가 아니다. 너 죽이고 나 죽으면 그만이다.
이런 소리를 하며 놓쳐버린 세자의 하초를 다시 잡으려고 세자에게 달려드는 것을 사람들이 억지로 떼내어 밀쳐놓고 그대로 세자를 안아서 밖으로 내갔다.
세자의 일행이 그렇게 돌아가자 장희빈은 약사발을 들어서 동댕이치고 대청마루 보꾹에 줄을 매어 목을 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희빈은 이와 같이 악독한 최후를 마쳤으나 궁중에서는 갑자기 시체로 변한 세자가 들어오게 되자 소동을 일으키고 급히 응급치료를 가하는 한편 어의(御醫)들이 있는 대로 모여들어서 구호를 하게 되었다.
임금은 이 광경을 보고
오, 이게 무슨 실수란 말이냐? 이제 나이 사십에 이다지도 파란이 많다는 말이냐. 이럴 바에는 차라리 천인(賤人)의 집에라도 태어나서 일생을 마음 편히 살다가 죽느니만 못하다.
이런 말을 하며 한숨만 쉬었다.
세자는 얼마 후에 명의(名醫)와 약의 효과로 소생되고 차차 기운을 차려서 기동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원체 급소를 다친 상처라 끝끝내 그 결과가 좋지 못해서 세자의 정신은 희미해지고 양쪽 어깨가 으쓱 올라가며 걸음걸이가 내시처럼 되고 말았다. 이런데다가 한 달이면 두세 차례씩 누워 있게 되니 이럴 때마다 부왕의 초조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이듬해 구월 삼십일 인현 민비(仁顯閔妃)의 복제가 끝나자 대신들 중에서는 임금에게 다시 왕비 간택을 고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임금은 신하들의 권고로 재삼 왕비 간택의 영을 내리고 왕비를 물색하게 하였다. 이때는 조정의 재상들이 대게 서인들이었는데 서인의 집정한지 여러 해가 되자 이들은 자기네들끼리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두 파로 갈려서 서로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임금은 이러한 당파싸움하는 집안에서는 아무리 좋은 왕비 재목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간택하지 않을 결심을 했다. 임금은 외척과 당파싸움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껴왔던 것이다.
여러 방면으로 살펴본 결과 경주 김씨인 김주신(金株臣)의 집에 십육세 된 규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상궁을 보내서 간선한 결과 마음에 들게 되어 즉시 김주신의 딸로 왕비를 삼으니 이가 인원 김씨(仁元金氏)인 것이다.
김주신은 그 친척들이 소론이므로 대개 소론으로 지목을 받기는 하나, 그 자신은 어떠한 당색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집을 택했던 것이다.
세자는 십육 세 때에 병중인데 불구하고 청송부원군 심호(沈浩)의 따님으로 세자빈(世子嬪)을 맞이하니 세자빈의 나이는 두해 위가 되는 십팔 세요, 모비(母妃) 인원왕후(仁元王后)보다 한 살 위가 되었다.
이와 같은 나이로 입궐한 세자빈 심씨는 현숙한 여성이긴 하지만 남편이 병신의 몸인 까닭에 늘 우울한 세월을 보내고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러다가 숙종 삼십일 년 가을부터 동궁의 병이 저으기 평복되는 듯하므로 임금은 동궁에게 국정을 대리시키겠다는 분부를 내리고 스스로 물러나 앉았다.
동궁의 존재는 뚜렷해졌다. 그러나 아직 왕위에 오르기도 전이었는데 제일왕자를 싸고 돌던 일당, 즉 남인 일당들은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동궁의 마음을 사서 저 서인들을 있는 대로 전멸시켜 볼까…
이런 생각을 하기에 여가가 없었다. 이 눈치를 알아차린 서인들도 남인을 어떻게 하면 억누를까 해서 여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에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제일왕자 연영군(延英君)과 제이왕자 연잉군(延 君) 형제 사이는 그 우애가 지극하였다. 동궁은 여섯 해 아래 되는 아우를 극진히 사랑하고 아우 되는 제이왕자는 그 형을 극진히 공경하고 따랐다. 그런 처지였지마는 큰 왕자를 옹호하는 당파(남인)들은 큰 왕자를 해하려고 겨루어서 드디어 이 형당(兄黨)과 제당(弟黨)끼리 왕위를 다투는 큰 싸움을 또 한번 일으키고야 말았다.
동궁이 대리 청정(聽政)의 어명을 받은 후에도 종종 자리에 눕게 되자 제당(弟黨)들은 동궁의 건장이 좋지 못하니 아우로 자리를 바꾸자고 여러 차례 여론을 일으켰던 것이다.
동궁이 국정을 대리하게 되어 사 년이 지나간 경자년(庚子年), 숙종은 환후가 침중해지기 시작하더니 그 해 유월 팔일 드디어 육십 세란 나이로 빈천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숙종이 재위 사십육 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서 동궁이 즉위하니 이가 곧 경종(景宗)이다.
暗雲 짙은 宮中
경종(景宗=西紀 1,720-1,724)은 사년간이나 부왕을 보좌해서 국정을 대리한 경험이 있으므로 정사가 그다지 서툴지 않았다. 그러나 신왕은 원체 약질이어서 전날의 병이 재발하여 자주 병석에 눕게 되니, 차츰 정신까지 흐려져서 의식이 똑똑 치 못한 때가 많았다.
며칠에 한번씩 의식이 회복되는 때를 타서 공사를 처단하게 되니 궁정이 침체되고 백반 정령(政令)이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따금 경종은 의식이 회복되면
내가 병들어 누워서 국정을 돌아보지 못했으니 나라 일이 오죽 문란하랴. 어서 밀린 공사를 들여다 곧 처단해 치우리라.
이렇게 말하다가도 산적된 공사를 대하고 보면 그만 진력이 나서
얘 모두 귀찮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나는 좀 쉬어야겠다.
이런 말로 대소 사건의 처단을 모두 승지(承旨), 사관(史官), 주서(注書)들에게 맡겨버리는 것이었다. 또 어느 조관이 소대(召對)를 청할때면 눈살을 찌푸리고 불러들여서 그의 아룀을 듣다가 지루한 생각이 날 때면
그만 말해도 알아 듣겠다. 그대로 나가서 기다려라.
내어 보내고 하루 이틀 수일이 지나도 하등 비답이 없는 것이었다.
측근자들이 궁중형편을 아뢰고 어찌하오리까 하고 청할 때도 신왕은 그저 귀찮게만 생각하고
너희들 생각대로 좋게 처리해서 대과 없이 거행하려무나.
이러는 것이었다.
이쯤 되니 국정이 침체하고 혼탁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승지나 사관을 비롯하여 나인과 환관들은 이런 것을 기회 삼아서, 무슨 중대한 주청(奏請)이나 상소가 들어오면 그대로 끼고 있다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또는 자기의 생색이 나도록 처결해서 내어 보냈다. 그러니 나라 일은 국왕이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측근자들의 장중(掌中) 일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이듬해 신축년(辛丑年)이 되었다. 이 해가 경종 원년(景宗元年)이었다. 국정이 더욱 침체해지는 중에 신왕의 환후도 가일층 침중하게 되니 무엇보다도 국본(國本)을 내세우는 일이 급하다는 의논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해 팔월 이십일에는 우의정 조태구(趙泰耉) 하나만을 제외하고 모든 노론파 대신들이 문무백관들을 거느리고 궐내에 들어와 합문(閤門)밖에 엎드리며 성상의 환후가 침중한 이때이오니 하루바삐 세제(世弟)를 동궁으로 책봉하시와 국본을 튼튼케 하옵서소.
하는 상소를 올리고 비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느 때이고 반대파는 있는 법이어서 화단(禍端)은 다시 일어나 크나 큰 참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경종이 아직 동궁으로 있을 때에 그 세자빈 단의 심씨(端懿沈氏)는 아깝게도 이십육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에 어유구(魚有龜)의 딸을 맞이해서 계빈(繼嬪)을 삼았다.
계빈의 아버지 어유구는 외척의 이해 득실을 밝히면서도 궁중 형편을 살펴서 자기의 진퇴 향배를 민첩하게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까닭에 노론 재상의 영수 김창집(金昌集)은 어유구의 모든 행동을 경계하고 그를 감시 할 양으로 은밀히 그의 집으로 밀정을 들여 보냈으니 그 밀정은 바로 어유구의 매부 김순행(金純行)이었다. 김순행은 김창집의 심복이 되어 가지고 어유구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친한 척하고 어유구의 동정을 살핀 결과 어유구가 딸 어비(魚妃)를 책동해서 경종(景宗)이 아들을 낳을 가망이 없음을 기화로 소론들과 한패가 되어서 은근히 종친 중에서 적당한 아이를 데려다가 세자를 책봉하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지경이 되면 제이왕자 연잉군(延 君)을 옹호해 오던 노론 당파는 여지없이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 와서 경종이 양자(養子) 문제를 일으켜서 새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어유구 일당의 음모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노론파에서는 마침내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이 이조판서 이의현(李宜顯), 호조판서 민진원(閔鎭遠), 병조판서 이만성(李晩成), 형조판서 이관명(李觀命), 공조판서겸훈련대장 이홍술(李弘述), 한성판윤 이우항(李宇恒), 대사헌 홍계적(洪啓迪), 대사간 홍석보(洪錫輔), 도승지 조영복(趙榮福) 등을 인솔하고 입궐해서 세제 동궁 책봉을 주청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다만 자기들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일로 했던 것이 아니고 이들의 선배요 동지가 되는 이이명(李 命)이 일찍이 선왕으로부터 간곡한 유촉(遺囑)을 받았던 때문에 그 유촉을 받들겠다는 충의로써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면 이이명(李 命)은 숙종으로부터 어떠한 유촉을 받았던가? 이야기는 잠깐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때는 숙종 사십삼 년 팔월 어느 날.
숙종은 환후가 침중해지자 그날은 평소부터 신임하던 우의정 이이명이 약방에 입적하게 되었다. 원래 국가의 규칙으로 말하면 평시든지 병환중이든지 군왕이 정승과 대할 때는 반드시 승지가 그 군신 사이의 범절을 살피고 사관(史官)이 군신 사이의 대화를 그록하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때는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고 소위 독대(獨對)를 허락하였다.
임금은 이이명을 가까이 불러 세우고
동궁이 병이 많으니 이번 기회에 용단을 내려서 제이왕자로 동궁을 고쳐 세우고 싶소.
이런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이명은 임금의 분부가 지당한 의견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정과 의리를 전혀 몰각 할 수도 없어서 이이명은 임금의 표정을 살피며
지금 하교하신바 동궁의 자리를 바꾸겠다 하시는 것은 신등이 아무리 무식하오나 감히 봉행 치 못하겠사옵니다. 동궁이 아무리 건강치 못하오나 신 등이 힘을 합해서 보필하오면 대리청정쯤 못하실 바 없으니, 정 몸이 괴로우시면 동궁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이라도 내리시는 게 마땅한 줄 아룁니다.
하고 아뢰었으므로 임금도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다음날로 세자 대리청정을 분부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우의정의 이 독대사건을 제각기 억측하며 이이명이 자기의 의견을 임금에게 고해서 세자의 대리청정을 억지로 하게 만들었다고 떠들어댔다. 독대라는 것도 깜짝 놀랄만한 변고인데다가 더욱이 그 독대의 자리에서 임금에게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것은 도저히 그대로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안산(安山) 고을에 은퇴해 있던 원임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소론의 영수로서 당년구십 노인이었으나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놀라와서 펄펄 뛰면서
이런 목을 베어 죽일 놈이 있나. 주상께서 살아 계신데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라니, 그래 그런 역적놈을 그대로 둔단 말이냐? 내 아무리 구십 노병(老病)이지마는 이 역적놈을 죽이고 올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승 명색으로 군왕께 아첨해서 밀실에서 사사로이 독대해 가면서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이놈을 그대로 두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하루 바삐 올라갈 터이나 노상에서 죽을지도 모르니 아주 관을 짜가지고 자비 뒤에 이끌고 가야겠다.
이런 말을 외치고 즉시 관을 짜서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서울 올라와서 소론 당파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니 시골서 듣던 바와는 딴판이었다. 즉 원래 이이명이 독대 하는 자리에서 임금이 자진 동궁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는 것을 이이명은 동궁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을 핑계 삼아서 동궁의 자리를 제이왕자 연잉군(延 君)에게 바꾸어 연잉군으로써 대리청정을 시키시라고 아뢰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노론 이이명을 몹쓸 곳으로 몰아넣기 좋은 말이라 윤지완은 더욱 분기해서 이이명이 왕위를 제이왕자에게 옮기려는 전제(前提)의 행동이니 그대로 둘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여론을 일으키고 드디어 상소를 지어서 위에 올렸다.
< 명분이 일국의 정승으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되어 밀실에서 주상께 독대하고 그러는 중에도 주상 다음으로 받들어야 할 동궁을 까닭 없이 모해하고 임금의 권위를 세자에게 옮기십시오 하는 이런 무도무엄한 말을 아뢰었다 하오니 이런 자는 곧 목을 베어서 국가의 기강을 세워놓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
이런 상소가 들어오자 임금은 윤지완에게
< 동궁에게 대리청정을 시키자는 것은 나의 병세를 염려해서 내가 말한 바이며 이이명이 그와 같이 한 것이 아니고 또 동궁에게 기위 대리청정을 시킬 바에는 병약한 동궁보다는 튼튼한 연잉군을 동궁으로 봉하겠다고 하니까 이이명은 도리어 인정과 의리상으로 차마 큰 왕자를 버릴 수 없다고 도리어 동궁을 두호했던 바이다. 그리고 승지와 사관만 없었지 측근자들이 다 옆에 있었던 일인데 독대라는 말이 어디 당한 말이냐? 허무한 풍설을 듣고 구십 노병으로 관을 끌고 올라와서 이와 같이 세상의 이목을 소연케 하니 이런 경솔한 처사로 어찌 일국의 원로 체면을 보존할 것이랴. 너무 한심하도다. >
이렇게 비답을 내리고 그 상소를 일소에 붙였다.
이런 주목이 있는 가운데 동궁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고, 사 년 후에는 동궁이 즉위하고, 즉위한 후에 다시 임금의 환후가 치중해지니 나라의 앞길을 근심하는 대신들이 예전 숙종이 제이왕자를 부탁하던 그 유지를 좇아서 하루바삐 왕세제(王世弟)로 동궁을 책봉하려는 것은 조금도 그릇된 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그 형당(兄黨) 소론파들은 이일을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도리어 환후 중에 있는 군왕의 지위를 엿보는 행동인즉 도저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났다.
원래 영의정 김창집 이하 여러 신하들의 연좌건백(連坐建白) 때에, 대신들 중에서 오직 우의정 조태구만이 빠져 있었다. 그 까닭은 이때 있으면 반드시 이 일을 반대해서 연좌건백에 방해가 될 것이므로 마침 그가 향제로 내려가 있는 동안을 택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조태구가 서울로 돌아와서 모든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소론들과 손을 맞잡고 세제 동궁 책봉문제를 절대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번 연좌건백의 비답이 < 상소한 뜻은 여러 가지로 더 생각해 본 후에 신중히 처단할 터이니 아직 기다리라. >
이런 뜻으로 보낸 것을 필시 불윤(不允)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부원군이 유구와 함께 왕비 어씨(魚氏)를 움직여서 임금에게 양자를 들여 동궁을 세우라고 권했다. 그러나 임금은 이런 말에는 도무지 대답을 안하고 더욱이 왕대비 인원 김씨(仁元金氏)가 이 말을 듣고서
< 효종, 태종 이래로 그 혈통이 계승되는 왕실이요. 또 임금의 춘추가 아직도 젊거늘 그 누구가 양자를 의논하며, 만일 무슨 변고가 있다 하더라도 선왕의 혈통이 또 한 분 있어 아주 혈통이 끊이지 않을 터인데 그 누가 망녕 된 짓을 한다는 말이냐? >
이러한 엄교(嚴敎)가 내리게 되어서 드디어 형당(兄黨)들은 목을 움찔하고 물러나고, 왕대비의 주장대로 왕세자가 동궁에 책봉이 되었던 것이다.
그 해 시월 십이 일에 조성복(趙聖復)이 또 상소를 올리었다.
< 상감께서 나날이 환후 침중하시고 나라의 일이 허다히 지체되고 있는 이때에 왕세제께서 이미 동궁에 책봉되었은 즉 이대로 환후 평복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동궁에게 국정을 대리청정케 하시는 일이 당연한 줄 아뢰는 바입니다. 바라옵건대 널리 통촉하여 처분하시옵소서. >
이 상소가 한번 오르자 세상은 또다시 소란하게 되었다. 조성복은 상소가 오르던 때는 한창 경종(景宗)의 환세가 침중하게 된 때라 무슨 일이든지 그저 귀찮게만 생각하던 무렵이다. 이런 때에 이런 상소를 받으니 임금은 매우 반가와 하였다. 더욱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종은 그 아우를 극진히 사랑하고 믿는 처지이므로 상소를 받은 즉시로 어떤 굳은 결심을 하고 다음날 정원에 전지(傳旨)를 내리었다.
< 나의 병세가 한결같이 침중하여 회복될 가망이 없고, 나라의 일이 침체되어 하루가 바쁘니 왕세자에게 국정을 대리케 하여 만기(萬機)를 처단케 하노라. >
이 전교가 한번 내리자 조정은 갑자기 슬렁거렸고, 더욱이 소론 재상들은 큰 변이나 일어난 듯이 청황망조했다. 이번 처분에 대해서는 노론 일당들도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금의 병세가 침중하여 국정을 세제(世弟)에게 맡긴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그 임금을 섬겨오던 처지로서 너무나 섭섭하고 송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먼저 삼사(三司)에서 간지(諫止)했으나 듣지 않았고, 다음에 사대신(김창섭, 조태채, 이건명,이이명)이 연좌 합계로서
연전에 선대왕 생존시에 동궁으로 계셔서 청정하던 그 정도로 보필만 시키실 뿐이지 만기(萬機)를 다 맡기신다 함은 너무도 황공 불안하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불윤하였을 뿐이다.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은
이번 전교는 만만부당하오니 곧 거두어 주옵소서.
하고 끝까지 역설했으나 다만
그만 물러 가거라.
한 마디로 물리쳐 버리고 왕세제 대리청정을 고집하였다. 이 쯤 되고 보니 소론파의 양자 책립계획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노론파에서 옹호하던 세제 추대계획은 거의 이루어진 셈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소론들은 장차 노론의 압박을 받을 생각을 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조태구는 밤중에 갑자기 내전으로 들어가서 정원을 통해 소대(召對)를 청했다. 이때 입직승지는 밤중에 정승의 소대는 정원에서 아뢰어 올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조태구는 너무도 괘씸했다.
입직승지가 괘씸한 것이 아니라 노론파 정승은 마음대로 소대를 허락하고 소론 정승에게는 이와 같이 미리 방어진을 쳐둔 노론파의 행패가 괘씸했던 것이다.
그는 분기를 참다 못해 무감을 시켜서 이 뜻을 곧 곤순전에 아뢰었다.
시급한 국사로 밤을 가리지 않고 알현을 청했던 바인데, 정원의 입직승지가 알현을 허락 치 않으오니 곧 전하를 뵙게 주선해 주십소서.
하고 간청했다.
조태구라 하면 왕비 어씨도 그가 부친의 동지인 것을 알고 있는 터라, 곧 어비는 임금의 침전으로 가서 임금에게
지금 좌의정 조태구가 시급한 일로 야반인데도 불구하고 입궐을 했는데 건방진 입직승지가 들이지 않는다 하오니 군신지간을 이와 같이 막는 자를 치워버리시고 곧 좌의정을 인견하옵소서.
이렇게 아뢰었다.
요즘 병세가 더욱 침중해짐에 따라 정신이 시시각각으로 변태를 일으키는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노기를 띄우며
저런 죽일 놈이 있느냐. 어째서 대신의 고급(告急)하는 길을 막는단 말이냐. 곧 입직승지라는 놈을 불러들여라.
하고 내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조금 후에 조태구가 들어왔다. 조태구는 밤이 깊도록 이번 왕세제 대리청정이 만만부당 할 뿐 아니라 이렇게 하면 민심이 동요되고 불길한 일까지 일어날 기미가 있다, 하고 역설을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이러한 조태구의 말까지도 물리치고 듣지 않았다.
김일경(金一鏡)은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의 족질(族侄)로서 김만기가 부귀할 때에 그 집을 출입했다. 그는 문장과 변론이 뛰어나고 지략이 있는 인물로서 김만기의 후대를 받아 엄연히 노론과 선비로서 한 몫을 볼만하였다. 그런데 김만기가 얼마 동안 지내면서 살펴보니 그의 본심이 흉악무도하므로 괄세를 하고 배척을 했다. 그러자 그는 김만기에게 감정을 품고 소론의 거두 이사상(李師尙), 유봉휘(柳鳳輝) 등을 찾아가서 아첨을 했다.
김일경이 영변부사(寧邊府使)로 있을 때 궁중 장번내시(長番內侍)로 있는 박상검(朴尙儉)이가 영변 출신으로 그 세력이 등등한 것을 알고 박상검의 일족을 잘 보살펴 주었다. 한번은 박상검이 고향에 왔다가 김일경이 자기 일족에게 고맙게 구는 것을 알고 손수 찾아가서 치사하며 이 은혜는 언제든지 꼭 갚겠노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그 후 김일경이 서울로 돌아와서 박상검의 집을 드나들게 되니 두 사람은 창자를 서로 맞대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박상검은 장희빈 득세 당시에 그의 신임을 받아서 남인과 소론들에게 충성을 바치며 지내온 자였다. 이사상, 유봉휘를 사사(師事)하던 김일경은 그들을 통해서 소론들과 친했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조태구와도 친한 교분을 갖고 있었다.
소론 일파는 드디어 김일경을 통해 박상검을 움직이고, 박상검은 그의 심복 내시 문유도(文有道)를 통해 나인 석렬(石烈), 필정(必貞) 등을 시켜 궁중 연락을 했다. 이러한 기구(機構)를 짜놓은 다음에 김일경은 이진유(李眞儒) 등 여섯 사람의 동지와 함께 상소문을 올렸다.
<이번 사대신(四大臣)이 왕세제 대리청정을 간지(諫止)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그 일을 일찍부터 권주(權契)하려 했던 일인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런 권주를 하려는 뜻은 틀림 없이 왕세제를 추대해서 왕위를 엿보려는 흉계이오니 그 흉계를 사전에 밝혀서 다스리옵소서.>
이런 상소를 올린 후에 김일경은 다시 목호롱(睦虎龍) 같은 늙은 원로를 시켜 또 한번 사대신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 사대신(四大臣)이 이번에 군왕에게 강박으로써 대리청정을 시켰다 하오니 이것은 역죄 의 죄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노론 재상들은 갖은 음모로써 병중에 계신 상감의 신변을 살피면서 불칙한 흉계를 꾸미고 있습니다. 당장 처벌을 내려 주십시오. >
이런 묵호룡의 상소는 이진유의 상소를 더욱 힘있게 밀어 주는 것이 되었다.
이때 임금의 병세가 더욱 위중하여지자 박상검은 이 상소문을 나인 석렬을 시켜 왕비께 올리게 하였다. 왕비는 이 글을 보고 너무나 놀랍고 기가 막혀서 곧 신임하는 박상검을 불러 그 처리 방법을 물었다. 여기서 박상검은 왕비에게 자기의 의견을 낱낱이 다 아뢰었다.
왕비는 즉시 왕명을 칭탁하고 병석에 누운 임금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대신의 관직을 삭탈하고 하옥시키라는 전교를 내렸다.
그날로 최석항(崔錫恒)이 위관(委官)이 되고 남인 심단(沈檀)이 금부당상이 되고 소론 이삼(李森)이 포도대장이 되어서 마음대로 혹독한 형벌로 사대신을 형살(刑殺)시키고 거기에 연결시켜서 노론과 한편이 되었던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내쫓고 하니, 그 수효가 실로 수백 명에 달했다. 이 일이 경종 원년 신축년(辛丑年)서부터 그 이듬해 임인년(壬寅年)까지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인 때문에 신임무옥(辛壬誣獄) 또는 사화(士禍)라 한다.
이렇게 노론 조정이 쓰러진 후에는 조태구가 영의정이 되고 최규서(崔奎瑞)가 좌의정이 되고 최석항이 우의정이 되고 이하 육조판서가 차례로 소론으로 돌아가니 세상은 갑자기 갑술년(甲戌年) 장비(張妃) 폐출 이전의 소론 시대로 돌아간 듯이 보였다. 이제 소론은 부귀영화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소론들이 오직 두려워하는 것은 왕세제의 존재였다.
언제든지 왕세제가 즉위하는 날이면 반드시 노론이 다시 일어날 것이므로 이번 기회에 아주 그 뿌리를 뽑아버리자고 덤비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목호룡과 김일경이었다. 목호룡과 김일경은 조태구와 최규서, 최석항의 주구(走狗)가 되어서 다시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시작했다.
우선 임금 가까이 거행하고 있는 석렬과 필정을 시켜서 임금과 왕세제 사이를 이간시키게 하고 세제를 동궁 처소에 구금시킨 채 사후조차 드리지 못하게 했다.
왕세제는 너무도 갑갑하고 우울해서 하루는 미친 듯이 처소를 뛰쳐나와 형왕(兄王) 침전으로 가서 친히 형왕에게
내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렇게 구금하신단 말이요?
하고 그 내막을 알아볼 양으로 침전 복도까지 갔을 때에 궁인 석렬이 깜짝 놀라면서
지금 위독하신 때라 아무도 뵙지 못할 처지인데 더구나 처분을 기다리고 계신 동궁께서 어쩌자고 이렇게 야반에 뛰어들어 오십니까? 어서 돌아 가십시오.
앞을 막고 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제는
내가 내 형을 뵈우러 왔는데 네가 무슨 참견이냐? 냉큼 길을 열어 놓아라.
하고 호령을 하였다. 허나 석렬은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악착같이 그대로 버티고 서서
이러시지 않더라도 동궁이 임금이 되실 터인데 왜 이리 벌써부터 왕위에 오르지 못해 야단이십니까?
하고 사뭇 깔보는 말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 입직승지 김일경이 들어오고 별입시 환관 박상검이 나오더니 세제의 팔을 잡아 끌면서 저마다 두 눈을 크게 부라리고
이게 무슨 거조이십니까? 지금 야반에 처분을 기다리시는 세제의 몸으로서 될뻔이나 하신 일입니까? 어서 곧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꾸짖듯 타이르듯 하는 것이었다.
이제 삼십이 가까운 세제였다. 분한 생각으로 한다면 당장 그놈 그년들을 한 주먹으로 죽여버리고도 싶었으나 왕실의 규례 법칙이니 어쩌는 수가 없었다. 왕세제는 환관이 되 쫓는 감시를 받아가며 동궁 처소로 다시 돌아와서 그 분하고 야속함을 견디지 못해 단식으로 목숨을 끊고 이 더러운 세상을 잊으려고 했다.
너무나 야속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처분을 내리시나.
이렇게 형왕을 원망해 보다가도 그자들이 임금의 침전 뿐 아니라 대비전에도 못 가게 하는 것을 생각하고는 필시 그들이 사사로이 감금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에잇! 무도한 놈들, 이놈들을 어떻게 하면 한 칼에 다 죽여 버린단 말이냐.
세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때 동궁 가까이 모시고 있던 설서(說書) 송인명(宋寅明)이 충심으로 세제를 위로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가다가는 세제가 아사(餓死)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간신들의 모해로 화를 입든지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송인명은 세제에게 여러 가지 말로 분발을 일으키게 하고 저녁식사를 든든히 들게 하고 밤 되기를 기다려서 몰래 동궁 처소를 빠져나가게 했다.
아무쪼록 정신을 차리셔서 대비 처소에만 가시면 살아나실 게고 살아나시면 훗날에 반드시 왕위에 오르게 될 것이오니 그때에는 이 한심한 세상을 바로 잡아 주십시오.
이런 말로 격려해 가면서 세제를 목마에 태워 담을 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제는 대비 처소로 갈 수가 있었다. 대비라야 왕세제보다 일곱해 위밖에 안 되지만 제이왕자를 사랑하는 품은 퍽 지극한바가 있었다. 세제는 대비를 대하자 눈물을 쏟으며 소리쳐 울었다.
대비도 역시 목이 메어 울었다. 대비는 세제를 보고
왕실과 국가가 아무리 망했기로니 이럴 수가 있느냐? 너무나 한심하고 참담하다. 그러나 아무쪼록 동궁이나 건강하게 있다가 때를 기다려서 국정을 쇄신시켜야 대대로 내려오는 왕가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국가 대세가 바로 잡힐 터이니, 마음을 활달하게 가지고 내 옆에 가까이 있어 몸을 보전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라.
이런 말로 달랬다.
세제는 이 말을 듣다 너무나 고맙고 황공해서 마음을 새로이 굳게 가지고 다음날의 국가를 위해 힘쓸 바를 생각하면서 대비를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을 알게 된 김일경과 그 일당들은 별별 구실을 다 내세워가며 세자가 빨리 동궁 처소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이때 대비는 들어내놓고 김일경과 박상검 등을 호령해 물리쳤다.
너희들이 무슨 흉계로 동궁을 유폐해 놓고 내 처소에도 상감의 처소에도 가지 못하게 했느냐? 선대왕의 당년 일을 생각하든지 누대 혈통이 끊어지는 일을 생각하든지 너희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더란 말이냐.
이러던 중 경종의 병세는 점점 침중해져서 재위(在位) 사 년 갑진(甲辰) 팔월 이십오 일에 세상을 떠나니 드디어 왕세제가 왕위에 나아갔다. 이가 바로 영조(英祖)이며, 때의 영조의 나이는 삼십일 세였다. 세상은 이렇게 해서 또 급각도로 변해지게 되었다.
이조 이십일 대의 국왕 영조는 매사에 사려(思慮)가 깊은 임금이었다. 영조가 이제까지 뼈저리게 느껴온 바는 무엇보다도 당파의 쟁탈로 인해서 왕실과 조정이 모두 이 싸움에 휩쓸려 들어서 헤어나지를 못한다는 점이었다. 우선 왕실의 일만 보더라도 최근의 일로서 자기 친생모의 저 끔찍한 수난(受難)이 너무나 분하고 가엾게 생각되고 또 적모비(嫡母妃)되는 인경 김비와 인원 김비 두분 왕비의 생전 사후 모든 일이 역시 황송하고 가엾게만 생각되었다.
최근에 자기가 동궁의 처지로서 남도 모르게 비참한 생활을 하던 일을 생각할지라도 당색을 옹호하고 사리(私利)를 꾀하는 간신배들의 행위가 너무도 가증스러웠다.
돌아보건대 남이장군(南怡將軍)을 모함해서 죽인 유자광(柳子光)의 작간이 있던 이후로 사화(士禍)라는 것이 생겨나고 마침내 당파가 생겨서 서로 죽이고 넘어뜨리고 자기의 고집만을 세우고 자기의 이익만을 도모하기 위해서 나라와 조정을 마음대로 이리 끌고 저리 끌고 하니 이런 무엄무도하고 한심 개탄할 일이 어디 있으랴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이런 때문에 영조는 즉위초에 정사를 당쟁 조화주의(調和主義), 즉 당쟁을 조정해서 화등 시키자는 주의로써 할 생각으로 탕평론(蕩平論)을 역설한 돈유(敦諭)를 정원과 원로 대신들에게 내렸다.
이렇게 하는 한편, 국정에 있어서도 즉위 당시 삼상 육경(三相六卿)이 모두 소론파였던 것을, 어느 한 당파에게 국정을 맡길 수가 없다는 뜻에서 노론의 홍교중(洪敎中)으로 영의정을 삼고, 소론의 조문명(趙文命)으로 우의정을 삼고, 남인 가운데서 좌의정을 뽑았다. 그리고 육경도 역시 이와 비슷 조화주의로 임명하였다.
그런 다음에도 아무리 조그마한 일이라도 일일이 감시를 하며 혹시나 당색의 구별이 없는가를 살펴서 엄한 처분을 내리니 이제부터는 삼상육경이 제 아무리 조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한편 영조는 일생의 의혹으로 생각하던 신임무옥(辛壬誣獄) 사건을 다시 검안(檢案)할 생각으로 과거의 기록을 모두 들여오게 하였다. 벌써 수년이 지나간 옥사를 이제 또 새삼스럽게 바로잡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소론 일당들, 특히 전날 가장 추악한 것으로 수백 명의 생명을 빼앗은 김일경 일당들은 간이 콩알 만해져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면서도 김일경은 천연스럽게
과거의 옥사를 다시 추궁하실 필요는 없을 듯하오니 이 일만은 그쳐 주시옵소서.
이 거동을 유심히 살피던 영조는 즉시 김일경과 박상검, 문유도, 석렬, 필정 등을 전격적으로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추궁한 결과 모두가 임금을 속여가며 거짓 전교로 충신과 열사(烈士)를 애매하게 죽인 일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영조는 이 일을 다 살피고는 너무도 통분하여 몸을 떨었다. 무엇보다도 충의 있는 국가의 주석지신(柱石之臣)을 한꺼번에 세사람이나 죽여 버리게 된 일이 애석했던 것이다.
영조는 이 간흉간학했던 김일경 일당을 처참히 해치우고 김일경의 여당이 되는 이인좌(李麟佐)의 도당까지 깨끗이 치워버리었다. 그러나 한번 원통한 원을 품고 참혹한 형벌을 입고 애매하게 세상을 떠나간 사대신의 모습은 다시 찾을 길이 망연했다.
思 悼 世 子
그늘에서 자란 龍
제 이십 대 임금 경종(景宗)은 임금 노릇도 겨우 사년밖에 못하고 삼십칠 세의 장년으로 슬하에 왕자도 못 둔 채 세상을 떠났다. 경종이 승하하기 전에 다음 임금을 이을 세자책립(世子冊立) 문제로 궁중과 조정에선 물의가 일어났다.
이때 숙종(肅宗)의 둘째 왕자 연잉군(延 君)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립되었다. 연잉군은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생모(生母)가 천한 무수리였으므로 소론파가 끝까지 반대하여 임인사화(壬寅士禍=辛壬士禍)를 일으킨 참혹한 당파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연잉군의 생모는 그 많은 궁녀도 아니고 궁녀의 심부름을 하던 최소녀(崔少女)였다. 숙종과 자리를 같이 한 후 십삭 만에 왕자가 태어났다. 최소녀는 농부의 딸로 얼굴은 못생겼으나 몸이 튼튼했으므로 태어난 왕자도 튼튼했다. 숙종은 왕자를 낳은 최소녀를 정이품(正二品)의 소의(昭儀)로 봉했다.
영조는 생모가 천한 여자였으므로 존재조차 없이 소년시절을 궁중에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그늘 속에서 자랐다. 이러한 선천적인 열등감은 성격형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연잉군은 이복형 경종이 무후(無後)했고, 자기를 밀어 준 당파의 덕택으로 왕세제로서 동궁에 추대되었다가,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라서 영조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론에서는 즉위 후에도 실력으로 폐왕(廢王)시키려는 반란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경종 사 년에 왕이 승하하고 영조 원년으로 임금이 바뀌어지자, 이에 임금자리를 바라던 왕족들과 소론 정객들은 뒤에서 영조를 쫓아낼 음모를 진행스키고 있었다.
궁녀가 부리던 천한 종의 몸에서 생긴 사생아가 지존한 왕위에 오르다니, 이런 해괴한 왕실 모욕이 어디 있느냐. 민가의 양반집에선 상상도 못할 패륜의 불상사가 왕실이라고 해서 그럴 수가 있느냐. 그것도 어엿한 왕족의 잘난 자제가 많은데…
연잉군이 왕세자로 책립되자마자 맨 먼저 경종에게 반대 상소를 올렸던 유봉휘(柳鳳輝)는 귀양을 갔다. 그러던 차에 경종의 건강이 약해지자 소론파의 조성복(趙聖復)이 동궁(東宮=延 君)에게 섭정을 시키라고 상소했고 이어 경종은 동궁에게 국정을 맡겼다. 그러나 좀 있다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최석항(崔錫恒)이 왕에게 상소를 올려 거사를 음모했다 하여 조성복을 진도(珍島)로 귀양 보냈다. 그러자 소론파에서 다시 들고 일어나 노론파의 김창집, 이이명(李 命), 조태채(趙泰采)등을 귀양 보내고 조성복을 불러들이게 했다.
노론파 소론파가 서로 귀양살이를 번갈아 다닌다. 귀양 번복은 약과지만 피를 흘리고 말 당파 싸움의 징조다.
연잉군이 임금이 되건 밀풍군(密豊君)이 임금이 되건 백성에겐 상관 없지만, 노론파 정객이 연잉군을 밀고 소론파가 밀풍군을 미는 것은 모두 저희들이 세도를 부리기 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 싸움에 싫증이 난 백성들은 그들 쌍방을 모두 다 싫어했으나 세도에 눈이 어둔 당파들의 암투는 계속되었다.
경종 이년에는 소론파의 승지(承旨) 김일경(金一鏡) 등이 궁중의 궁녀들과 궁녀를 감독하는 환자(宦者) 박상검(朴尙儉) 및 문유도(文有道) 등과 결탁하고 동궁을 직접 살해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소론파에서는 이 사건 배후에는 이미 귀양 보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李健命), 조태채까지 이 동궁 모살에 연죄 했다고 몰아서 전부 사형에 처해 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임인사화(壬寅士禍)였다.
경종 사 년에 왕이 승하하고 동궁이 영조로 등극하자, 소론파에서도 이제는 왕에 대하여 반대는 하지 못했으나, 은근히 배후에서 지난 일을 가지고 들먹거렸다. 영조는 어려서부터 궁중과 조정에서 성행하는 당파싸움을 눈이 아프도록 보아 왔고 골치가 아프게 고민해 왔으므로 당파싸움을 엄금하는 탕평책(蕩平策)을 통감했다.
내가 임금이 된 이상 정치 부패의 고질인 당파싸움만은 엄금하겠다.
이런 생각은 영조의 가장 현명한 정책이었다. 그래서 신임무옥이 조작된 흉계였다는 여론에 따라서 영조가 친히 김일경, 목호룡, 이의연(李義淵)을 고문한 끝에 김일경은 사형에 처하고, 목호룡과 이의연도 전형(典刑)에 처했다. 그리고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한 소론파의 이천해(李天海), 윤취상(尹就尙)도 사형에 처하고 유봉휘, 이광좌(李光佐), 조태구(趙泰耉) 등도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신임사화로 사형에 처했던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을 복권시키고 관작을 추증(追贈)했다.
이러한 영조의 당파싸움을 금하려는 탕평책으로 노론파의 원한은 어느 정도 풀어졌으나 소론파의 불평은 더욱 격화되었다.
탕평이 무슨 탕평이냐. 우리를 잡아 죽이는 것은 당화(黨禍)가 아니고 무엇이냐. 허울 좋은 가짜 탕평책이다.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金寧海), 목호룡의 형 목시룡(睦時龍)과 그 일당의 아들과 손자들은 영조를 원망하고 반란 음모를 진행해 오다가 영조 사 년에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들은 이유익(李有翼)과 조덕징(趙德徵), 또 그들이 성사 후에 임금으로 추대할 밀풍군을 암암리에 충동질했다. 조덕징은 밀풍군의 처질(妻姪)이었으므로 그와의 연락을 주로 맡아 했다.
조덕징은 한세홍(韓世弘)과 함께 청주로 내려가서 교묘한 거짓말로 이인좌(李麟佐)를 충동하여 반란군의 대원수(大元帥)로 추대하겠다고 권했다.
선왕 경종을 시역하고도 병사라고 세상을 속이는가 하면 소론파를 죄없이 잡아 죽였소.
그래서 왕비께서도 천한 여자 소생인 임금 영조를 몰아내고, 어엿한 왕족의 혈통을 이어 받은 소현세자의 손주님 밀풍군을 임금으로 세우라는 밀령을 주셨소.
그러면 서울에서 거사에 호응할 군력(軍力)은 어떻소. 거사에 실패하면 역적으로 몰려 죽을 테니까 계획이 소홀해선 안 되오.
서울 군비는 되었소.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 장군과 금군대장(禁軍大將) 남태징(南泰徵)도 호응하기로 맹세했고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도 동지요. 김영해와 목시룡도 영남의 군사를 얻으려 내려갔으니, 권서봉(權瑞鳳)이 곧 군사와 무기를 이끌고 이곳으로 와서 장군과 행동을 같이 할 것이요. 그리고 서울에서는 이유익(李有翼)이 모사(謀事)의 책임을 맡고 만반 태세를 갖추고 있소. 이제는 이 장군이 의군(義軍)의 대원수로 행동만 개시하면 되오.
좋소. 그럼 나는 여기서 영남 의군과 합쳐서 청주 군영을 점령하고 의군을 일으켜서 서 울로 진격해 올라갈 테니 도중의 수령들을 내응 케 하고 서울에서 의거(義擧)의 풍문을 미리 퍼뜨려서 민심을 소란케 하시오.
하고 이인좌는 반란군 대원수로 나설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반란사건의 정보를 미리 알게 된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맨 먼저 궁중으로 달려가서 왕에게 급변을 알리자 왕실과 조정에서는 깜짝 놀라서 반란군 진압에 대한 긴급대책을 세우는데 분망했다.
한편 서울 장안에는 모의를 꾸미는 자들이 선동하는 말, 격문 등이 나돌고 유언비어가 인심을 흉흉케 했다.
지금 임금은 어미도 없는 가짜 임금이다. 왕대비 명령으로 가짜 임금을 몰아내고, 진짜 임금으로 남원군을 모시려는 의병이 일어난다.
영조에게 억울하게 죽은 김일경 일파가 밀풍군을 업고 나서는 반란이 아닐까.
반란군이 남쪽과 북쪽에서 쳐들어 와서, 서울에 잠복한 반란군과 합쳐 궁중을 점령한다지.
난리가 나면 장안이 불바다가 될 테니 빨리 피난을 가야 한다.
이런 풍설은 모두 일부러 꾸며서 미리 퍼뜨린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그런 방문을 붙이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범인을 잡으려고 애썼으나 허탕만 쳤다. 그러던 차에 청주에서 반란의 불길이 올랐다.
이인좌가 반란군의 대원수를 자칭하고 청주 병영을 점령했다.
이 정보에 접한 조정에서는 양성(陽城), 진위(振威), 안성(安城), 용인(龍仁)의 수령(守令)을 모두 무관(武官)으로 갈고,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사로 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삼은 후, 박찬신(朴纘新)을 중군(中軍)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청주에서 병영을 점령한 이인좌는 영남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합류한 권서봉과 함께 청주 병사 이봉상(李鳳祥)이 술에 취해서 기생과 동침 중에 있는 것을 잡아 죽이고 의기양양하게 서울을 향해서 진격했다. 관군은 안성에서 반란군을 맞아서 싸웠는데, 반란군 선봉장 박종원(朴宗元)을 잡아서 목을 베고, 대원수를 자칭하는 이인좌와 청주 목사를 자칭하던 권서봉까지 사로잡았으므로 이른바 이인좌 반란은 곧 진압되었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킬 때에 천하에 선언한 격문도 한 장의 허장성세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 선왕 경종대왕께서는 성명(聖名)하신 상주(上主)였으나 흉악한 간신배들이 시역하였다. 그 뒤에 그 간신들이 즉위시킨 현재의 임금은 숙종대왕의 아드님도 아닌 신분 불명의 허수아비다. 우리 충의의 동지들은 왕대비(경종의 왕비 魚氏)의 밀조(密詔)를 받고 종사(宗社)의 정통을 바로 세우려는 의거(義擧)이다. 우리 의군은 억울하게 시역 된 선대왕 위패를 모시고 서울로 쳐들어 간다. 모든 백성들은 우리 의군의 뜻을 양해하고 힘을 모아 성원하기 바란다. >
그러나 이런 격문은 역적죄의 증거품이 되는데 그치고 말았다.
반란이 진압된 후에 이인좌를 비롯한 주모자 육십여 명은 참형을 당했고, 밀풍군도 엄중한 감시를 받다가 일년 만에 사약을 받았다. 한편 난리중에 산승(山僧)과 협력해서 이인좌를 사로잡아 올린 농민 신길만(申吉萬)은 그 공으로 일약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감투를썼다.
영조는 이번 반란의 원인이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서 생긴 것을 통탄했다. 그리고 이른바 탕평(蕩平)으로 양파 화해를 붙였다. 왕은 양파의 거두를 불러서 좌우에 앉히고 친히 두 손으로 양파 대표의 손을 잡았다.
이처럼 나라가 어지러워진 원인은 경들과 나와의 사이에 간격이 생겼기 때문이요. 경들과 경들의 동지는 오늘부터 분쟁을 말고 이처럼 모두 나와 손을 잡고 국사에 함께 힘써 주기 바라오. 나도 앞으로는 노론, 소론에 전연 구애하지 않고, 오직 인물의 능력과 충성만을 믿고 어진 사람을 쓰겠소.
하고 친히 약속을 했다. 그러나 경종 때부터 원수가 된 노론과 소론의 간격은 영조의 악수극(握手劇)으로 간단히 화해되기에는 너무도 심각한 것이었다. 그들 대표자는 나가서 다시 상소하겠다는 말만 했다. 왕은 지금 당장 화해를 약속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든지 그들의 손을 놓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웃으면서
비록 부형(父兄)과 선배들이 원수로 지냈다 하더라도 대대로 원수가 되어서야 되겠소.
더구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을 먼저 한다면 사사로운 원한을 풀 수 있지 않소. 경들이 나라와 나를 도우려면 당장 화합해서 국사에 전념해 주어야 하겠소.
라는 말을 반은 명령이요, 반은 애원으로 정적(政敵)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신은 벼슬을 그만두고 산림에 은퇴해서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겠습니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는 국사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신도 전의 잘못을 책임지고 조정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파당의 해소와 협력을 거부했다. 그러나 왕의 분부는 끈덕져서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입을 모아서 일 개월 동안만 조정에서 함께 일하면서 장래의 방침을 정하겠다는 말을 하고야 왕의 악수공세에서 해방되어 나왔다.
그 후에도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오직 우의정 송인명(宋仁明)과 명어사(名御使)로서 이인좌 반란 때의 공으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진 박문수(朴文秀)만이 영조의 탕평론을 진심으로 지지했다.
노론과 소론은 물과 기름 같다. 그것을 합치려는 것은 어리석은 정책이다.
하고 양파에서 모두 반대했다.
탕평 타령으로 탕평당(蕩平黨)이 한 개 더 생겼을 뿐이다. 그러나 탕평당원은 영조, 송인명, 박문수 세명밖에 없다.
하고 양파에선 빈정댔다. 그뿐 아니라 무능한 팔방미인을 탕평당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고 탕평선(蕩平扇)이라는 비유로 야유하기도 했다. 그것은 종이와 대를 억지로 부착해서 만든 부채라는 뜻이었다. 그토록 당파간의 원한은 그들의 골수 속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昭寧陵의 福 향나무
영조는 팔십삼 세의 장수를 하고, 임금 노릇도 오십이 년간이나 해서 재위(在位)에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농민의 딸로서 궁녀의 하인 노릇을 하던 천한 여자를 빌어 숙종의 씨를 받고 탄생한 영조는 그 불행한 모계(母系)를 생각해서인지 성격도 이상해져서 일생 고난을 겪었다. 그러한 이상한 성격의 영향으로 만년에는 노망해서 냉대로 정신병자가 된 친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 속에 넣어서 참살한 해괴한 사건까지 일으켰다.
그러나 영조의 유일한 공적은 당파싸움을 일생 동안 엄금한 고집이었고, 인간적 미덕은 천한 생모(生母)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었다. 생모가 천한 여자였기 때문에 왕위에서 몰아내려는 이인좌의 반란도 당했고, 그런 당파를 타파하려다가 당파의 반감을 사서 또다시 윤지(尹志)의 반란까지 당했다. 그래도 생모에 대한 효성은 지극했다. 생모가 죽은 지 오랜 후 왕이 늙은 뒤에야 구차한 표시를 묘전(墓前)에 했다. 일국 왕의 위력으로서도 신하들의 당파싸움은 막지 못했고 서족(庶族) 멸시의 철칙을 타파하지 못한 열등감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의 생모 최씨는 천한 서민의 딸로서 생전에는 물론 빈(嬪)의 대우도 받지 못했다. 죽은 뒤에는 양주땅 고령산(楊洲高靈山) 기슭에 묻혔으나, 그것은 초라한 묘(墓)로서 대신들의 산소에 비해도 형편이 없었다. 궁중 예법에 따르는 능호(陵號)는 물론이요, 원호(園號)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최씨는 숙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숙종이 임금으로 있을 때도 그 묘는 원으로 봉하지 못했다. 영조가 임금이 된 후도 생모의 신분 때문에 반란까지 일어났으므로 영조는 환갑이 되도록 생모의 성묘(省墓)조차 못했다.
내가 임금으로서 죽기 전에 어머님 묘소를 능으로 봉하고 떳떳이 성묘라도 해야겠는데, 완고한 구법(舊法)과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인륜의 도리도 못한다.
하고 영조는 늘 한탄했고 이 문제로 신하들과 여러번 충돌까지 했다. 그러나 언제나 영조의 효성의 뜻은 꺾이고 말았다.
선대왕께서 원으로도 능으로도 봉하시지 않은 것은 궁중예법과 또 선대왕의 성려(聖慮)에서 그러하신 것입니다. 상감께서도 사정(私情)으로는 비록 능으로 봉하고 싶으시더라도 부왕께서 안 하신 일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예법을 어기고 부왕의 뜻에도 어긋나는 봉능(封陵)은 모후(母后)에 대한 효성이 도리어 부왕에 대한 불효가 되기 때문에 될 수 없습니다.
신하들의 반대 이유는 이런 식이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신하들은 양반 집안에서도 서족은 조상 제사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다는 범절을 은연중에 암시했으므로 왕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타고 난 핏줄의 숙명은 어찌 할 수 없었다.
내 차라리 임금의 씨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모친 성묘쯤은 자유롭게 할 텐데, 임금이 됐기 때문에 성묘도 못하니 임금은 불효를 해도 좋단 말이냐?
이런 기묘한 신세 한탄까지 했지만 입으로는 누구에게 하소연하지 못할 가슴 속에서 썩는 고통이었다. 가난했던 농부 외조부도 세상을 떠났고 외삼촌 같은 외가의 친척도 없었다.
왕은 외가의 유족이라도 있으면 특명으로 벼슬을 시켜서 차차 양반의 지체로 끌어 올릴 생각이 있었으나 그럴 사정도 못되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름만 겨우 알아낸 외조부 최효일(崔孝一)에게 추증(追贈) 형식의 허위(虛位)의 벼슬이나 시킬 생각을 했다. 이런 문제까지도 대신들은 반대하고
국가에 공로도 없는 무명한 농민에게 무슨 명분으로 무슨 벼슬을 주층할 지 전례가 없어서 난처합니다.
하는 핑계로 미룬 것이 영조가 임금이 된 이후 이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임금의 외조부에 대한 나라의 예우(禮遇)도 못한다면 나의 체면은 어찌 되느냐?
왕은 그런 호령이 당장 치밀었으나 왕의 생모를 천한 여자로 경멸하는 신하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자기 얼굴에 스스로 침을 뱉는 것 같아서 감히 입 밖엔 내지 못했다.
그 후 영조는 임금 노릇을 이십여 년이나 하고 이제는 노망의 고집을 밀고 나갈 배짱도 생겼으므로
내 체면으로도 죽기 전에 외가에 대해서 벼슬을 추증 해야 되겠소. 경들도 모친과 외가에 대한 효도와 의리를 알고 있다면 나의 이런 충정(衷情)을 양해할 것이요.
하고 강경히 말했다.
상감의 지극하신 효성에는 감복하오나…
에잇, 죽은 그분들이 생전에 노론파였소? 소론파였소? 죽은 분들에게 추증하는데 어떤 대감의 벼슬을 갈아 치우는 거요? 경들의 그 인색은 오직 나를 괴롭히려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요.
왕은 주먹으로 상을 치면서 노했다.
황공하옵니다. 상감 생각대로 하십시오. 신들은 상감 분부대로 절차를 밟아 올리겠습니다.
왕의 무모한 강제 명령에 마지 못해서 하지만 자기들은 책임을지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왕은 불쾌했지만 이제는 자기 뜻대로 강행하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추증 관직의 품위는 잘 감안하여 분부하시기를…
높은 벼슬은 삼가라는 주문이었다. 왕은 또 화가 났다. 그래서 기왕이면 최고의 영위(榮位)를 추증하려고
외조부(崔孝一)께는 영의정, 외증조부(崔泰逸)께는 좌찬성(左贊成), 외고조(崔未貞)께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게 하오.
대신들은 물론 처음 듣는 시골 상놈의 이름들이었다.
예.
마지 못해서 대답한 대신들도 속으로는 대단히 못마땅했다.
(상감이 또 노망하셨군.)
하면서도 왕의 명령대로 추증수속을 했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가 사대(四代)에 최고 벼슬을 추증을 한 뒤에 왕은 최후의 목표인 생모의 묘를 능으로 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봉능(封陵) 문제는 왕실의 예법과 선대왕 재위(在位) 때 없던 일이오라 사헌부(司憲府)에 물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신하들은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는 심중히 토의한 끝에, 아무리 임금의 사친(私親)이라도 이런 경우에는 봉능할 수 없다는 유권적(有權的) 판단을 내렸다.
전에 광해군(光海君)도 모친을 봉능한 예가 있었고, 연산군(燕山君)도 폐비(廢妃)를 봉능하지 않았는가?
영조는 대사헌(大司憲)을 불러서 노기 띤 음성으로 추궁했다.
황공하온 말씀이나 그런 무리를 한 뒤가 좋지 못하였습니다. 상감께서는 그런 불길한 예를 따르지 마십시오.
대사헌은 역시 강직한 간언(諫言)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친모를 초라한 묘소로 방치하면 내 생전에 무슨 얼굴로 성묘를 하겠는가.
노했던 왕도 대사헌의 유권적이고 불길한 징조라는 말에는 애원하다시피 통사정을 했다.
상감마마 생모로 생각하시면 민망스러우시지만 숙종대왕의 후궁이라는 점에서 생각하시면 사리가 명백하지 않습니까?
왕실에는 그런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세자 책립도 하지 않소.
세자에 적서를 구별 않는 것과 후궁 봉능과는 별개 문제입니다.
하고 대사헌을 비롯한 소론파의 대신들은 끝내 반대했다. 왕은 궁중예법만 내세우는 명분론을 당파적인 반대라고 추궁할 수도 없었다.
(이놈들 어디 두고 보자. 내가 죽기 전엔 모친 묘소를 능으로 봉하고 말겠다.)
하고 영조는 다음 기회를 벼르고 꾹 참았다. 그리고 은인자중하다가 몇 해 후에 다시 생모의 봉능을 요구했다. 이때도 대신들은 여전히 반대했다. 그러나 영조는 끝까지 고집을 부려서 반대하던 대신들의 주장을 꺾고 타협하는데 성공했다.
그럼 능은 지나친 특례니까 봉원으로 하십시오.
능과 원이 얼마나 다르기에 그렇게 인색하오.
영조도 삼십 년의 소원이 거의 이루어졌으므로 웃으면서 말했다.
능이나 원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신들이 선심이나 쓰듯이 대답하자 영조는 농담 비슷하게 덧붙였다.
그럼 아주 능으로 봉하지.
깜짝 놀란 대신들은 어이가 없었으나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려 넘겼다.
이만 해도 내가 비로소 성묘할 면목이 섰소.
하고 소녕원(昭寧園)으로 승격시키고 곧 소녕원에 거동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서 묘문(墓門)과 정자각(丁字閣)도 세웠다. 원이라고 하지만 여느 능에도 못지 않은 건물과 석물(石物)을 세우고, 참배 후에는 친히 비문을 써서 각자(刻字)한 큰 비석도 세웠다.
생모의 묘소에 처음 참배한 영조는 묘전에서 통곡하고
제 생전에 능으로 봉해 올리겠으니 잠깐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모친의 영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능으로는 승격시키지 못했다. 영조는 생모가 생존할 때에도 궁중의 뒷방에서 숨어서 지내다시피 했고 사후에도 왕모(王母)의 대접을받지 못하는 초라한 묘소에 묻혀 있던 어머니를 위해 효성으로 삼십 년이나 신하들과 싸워서 겨우 원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아직도 능으로는 대우하지 않으려는 소론파의 완고한 반대에 대한 반발로서, 어떤 능보다도 치산(治山)을 잘하고, 능참봉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했다. 원소 부근의 산림 감독도 특별히 엄하게 했으므로 나무가 무성해서 소녕원의 경치가 좋아지고 명승지로서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능참봉을 비롯하여 모두를 원근처의 산림 도벌을 엄하게 단속했다.
그래도 부근의 농민들은 원소의 나무를 몰래 베어다가 때고, 재목을 베어다 집도 짓고, 좋은 관상목(觀賞木)을 몰래 캐다가 서울로 갖다 정원수(庭園樹)로 팔았다.
소녕능의 나무를 훔치는 자는 엄벌에 처하라.
영조의 명령을 받은 능참봉은 도벌하는 자를 잡으면 큰 죄인으로 다루었다. 그래도 근처의 가난한 농민들은 밤으로 능림(陵林)을 침범했다. 소녕원은 그 때문에 농민의 원망도 샀지만 영조의 엄명으로 울창하고 좋은 임상(林相)을 자랑할 수 있었다. 소녕원이라는 이름은 제도상의 명칭이긴 했지만 일반에게는 그런 까다롭고 무의미한 격식은 알지도 못하고 필요도 없었다. 어떤 능보다도 훌륭하고, 어떤 능참봉보다도 대우를 잘 받는 탓으로 소녕능은 과연 금상(今上)의 생모 능인만큼 훌륭하다. 능 나무를 베면 그대신 백성의 목이 달아난다.
그럴 정도로 소녕원은 입산금지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그 근처에 사는 박서방이라는 중년 빈농(貧農)은 그 엄금된 능림의 향나무를 캐서 서울에서 팔려다가 공교롭게도 미행(微行)하던 영조에게 발각되었다. 영조는 새문안에 있는 경희궁(慶熙宮)에 있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민간인의 옷을 입고 혼자 미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상감, 너무 자주 미행을 하시다가 무슨 변을 당하실지 모르오니 염려되옵니다.
측근자가 아뢰어도 영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혼자 미행을 하면 마음대로 산책을 즐길 수도 있고, 백성의 실정을 잘 알게 돼서 정사에도 큰 도움이 된다.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이럴 정도로 영조의 미행은 측근자들도 말리지 못했다.
영조는 어느 봄날, 아침 일찍이 홀로 궁을 나와서 서대문 밖을 산책하고 있었다. 마침 시골 농부가 지게에 지고 온 싱싱한 향나무를 내려놓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조는 그 향나무를 사다가 궁중 정원에 심고 감상하고 싶어졌다.
여보, 그 향나무 팔 거요?
영조는 농부에게 물었다. 농부는 오늘은 첫손님을 아침에 맞았으므로 재수가 좋으리라고 기뻐하면서
예. 첫손님이니 싸게 들여 가십시오. 보시다시피 좋은 향나무입니다. 양주 고령산에서 난 유명한 향나무입니다. 생원님 댁 울안에 심으면 복을 받으실 겁니다.
물론 영조의 평복 미행인 줄은 꿈에도 모른 농부는 신수가 훤하게 생긴 상대자를 어떤 부잣집 노인으로 알고 생원님이라고 부르며 권했다. 영조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 온 향나무라는 말에 얼핏 생모의 소녕원 생각이 떠올랐다.
아, 양주 고령산에서 난 향나무요?
예, 고령산은 명산입니다. 산 밑에는 유명한 소녕능이 있지 않습니까? 그 명당이 있는 고령산입니다.
영조는 그 시골 백성들이 조정의 대신들이 까다롭게 따지는 소녕원을 당연하다는 듯이 소녕능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선 반가웠다.
설마 그 능림에서 캐어 오지나 않았소?
영조는 문초하려는 생각에서가 아니고 무심코 물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겁을 집어 먹은 농부는
천만에요. 제가 아무리 무식하기로서니 어찌 감히 소녕능의 나무를 캐오겠습니까. 나라의 영과 능참봉의 감독이 어찌 심한지 나쁜 심보를 가진 나무꾼도 능림 근처엔 얼씬도 못합니다.
아암, 그렇겠지, 그런데 그 곳 사람들은 소녕원이라고 하지 않고 소녕능이라고 부르오?
소녕원..이라니요. 소녕원이라고요? 아니올시다. 그냥 소녕능이라고 합니다.
농부는 소녕원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이름이라 소녕능이라고 했다. 원과 능의 구별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생원님 복향나무를 들여가십시오.
영조는 그 복향나무보다도 농민이 소녕능이라고 불러 준 것이 반가웠다. 그래서 농부가 부르는 대로 값을 주겠다고 선뜻 흥정을 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지고 갑시다.
예, 생원님 댁이 어디신지요?
나를 따라오시오.
영조는 향나무를 진 농부를 데리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경희궁으로 따라 들어가면서도, 어떤 대감댁 이려니 했다. 그리고 그 생원은 이 대감 집의 집사거나, 아니면 이 댁에 나무를 선사하려는 문객 정도로 짐작했다. 그러나 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황급히 나와서 공손히 생원을 맞아 들이는데 좀 이상스러웠다.
이 나무를 받아 두고 나무장수는 행랑방에 기다리게 하라. 그리고 시골서 새벽에 떠나서 조반도 못했을 테니 주식 대접을 잘하라. 귀한 손님이다.
귀한 손님이라. 영조의 말에 이번엔 관원과 하인들이 놀랐다. 그들은 그 나무를 지고 온 농부를 행랑방이 아닌 나은 방으로 안내하고 좋은 반찬으로 아침상을 차려다 대접했다.
나으리, 이 댁이 어느 대감 댁입니까?
농부는 비로소 관복 입은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직도 모르오?
관원도 왕이 귀한 손님이라고 했으므로 당신이라고 공대하면서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아까 그 분은 누구십니까?
여기는 경희궁이고, 아까 뵈 온 분이 상감이신데… 당신은 누구시오?
앗, 상감님!
농부는 깜짝 놀라서 이젠 목이 달아났다고 벌벌 떨었다. 상감 어머니의 능림에서 캐다 팔려던 향나무를 지고 죽으러 들어온 것이로구나 싶었다.
나으리, 저는 소녕능 근처에 사는 농부입니다. 그러나 저 향나무는 능림에서 캐어 온 것이 아니고 고령산 산 속에서 캐어 왔습니다. 상감께서 소녕능에서 캐 온 줄 잘못 짐작하시고 저를 벌하러 끌고 오신 모양입니다마는 천지신명께 맹세하지만 백성이 어찌 감히 능나무에 손을 대겠습니까?
관원도 어리둥절했다. 상감께서는 귀한 손님이라 식사 대접을 잘하라 하셨는데, 이 귀한 손님은 자기의 죄를 변명하면서 애원하는 것이었다.
좌우간 기다려 보시오. 상감께서 무슨 분부가 계실 테니까.
나으리, 제가 능나무를 캐다 파는 그런 죄인이 아니라고 상감께 잘 말씀해 주시오.
글세, 벌을 주시든지 상을 주시든지 낸들 알겠소?
이런 수작을 하고 있을 때, 아까 생원이라고 부른 영조가 용포(龍袍)의 임금 모습으로 고
관들을 거느리고 나와서 농부를 대했다. 농부는 마당으로 뛰어나가서 땅바닥에 엎드렸다.
아까는 상감을 못 알아 뵙고 생원님이라고까지 불경(不敬)한 말을 올렸습니다. 그 죄로는 죽어도 마땅하옵니다 마는 저 향나무는 소녕능 능림에서 캐 온 것이 아닙니다.
오오, 알았다. 그런 걱정은 말고 향나무 값을 받아라.
황공하옵니다. 향나무는 진상하겠으니 값을 그만 두십시오.
아니다. 어려운 백성의 물건을 거저 받을 수야 있겠느냐?
영조는 시관이 준비해 왔던 묵직한 전대(錢袋)를 농부에게 내주었다. 나무 값이 아니라 막대한 상금이었다. 농부는 자기가 <소녕능>이라고 지방민들이 다 부르는 대로 말한 것을 기뻐한 왕의 상금인 줄은 모르고 사형 대신에 큰 상금이 내린 것을 꿈같이 생각했다.
보아 하니, 자네는 충성되고 정직한 인물 같다. 무슨 벼슬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라.
상감마마 그 말씀이 정말이십니까?
순박한 농민은 생각대로 정직한 질문을 왕에게 했다.
허허, 임금이 백성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좌위의 고관들도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자네 인물을 충성되게 보았으니, 무슨 벼슬을 시키고 싶어서 그런다.
황공하옵니다. 무식한 백성이 땅이나 파 먹고 살지 무슨 벼슬을 할 자격이 있습니까?
음, 자네 생각이 충직해서 더욱 믿음직하다. 다행히 소녕능 근처에 살아 그 지방 사정을 잘 알 테니 능에서 봉사할 생각은 없느냐?
감사하옵니다. 그러면 능참봉 밑에서 청지기라고 시켜 주시면 충성 껏 일 하올까 합니다.
음, 나도 그것을 바랐다. 그럼 소녕능 참봉을 시키겠으니, 능을 잘 지켜서 충성을 다하라.
네? 저에게 능참봉을! 그런 자격이 없으니 능 청지기를 시켜 주십시오.
하고 농부는 사양했다. 그러나 <소녕능>이라고 불러 준 말을 첫 번 들은 영조의 감격은 그 농부에게 능참봉이란 벼락감투를 씌웠다.
(사람의 팔자 운수는 알 수 없구나. 만일 능참봉이나 능 청지기에게 향나무 캔 죄가 발각 되었으면 다리 하나쯤 부러졌을 텐데, 요행히 임금을 만났기 때문에 상금과 함께 벼슬까지 했구나!)
농부는 농림을 범한 양심의 가책도 느꼈으나 자기를 위한 복향나무의 복을 못이기는 척하고 받았다.
魔力을 지닌 肉體
영조에게는 중전(中殿)인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와 계궁(繼宮)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있었으나 모두 소생이 없었고 다만 여러 궁녀들로부터 이왕자와 십이옹주를 얻었다.
정성왕후가 혈육을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게 되자 영조는 여러 빈궁과 귀인이 있었지만 정실(正室) 중전을 또 맞아들이려고 했다. 이때 영조는 나이가 이미 육십육 세였으나 아직도 여자에 대한 정력을 왕성했다. 이때는 영조도 매사에 고집을 부려서 <영조의 노망>이라는 욕을 먹고 있었다. 특히 영조의 사십년 가까운 고집정치와 말년의 노망을 싫어한 당파에서는 빨리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왕위에 세우려는 음모조차 있었다. 그래서 궁중과 조정에서 는 부왕파(父王派)와 자왕파(子王派)로 갈려서 암투하게 되었다.
육십육 세의 늙은이가 열다섯 소녀를 후비로 하여 중전을 삼으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있는가.
손녀, 증손녀 같은 어린 계집애를 향락하려는 칠십 노인은 노망이겠지만, 국구(國舅)의 세도를 하려고 어린 딸을 늙은 산송장에게 팔아먹은 김한구(金漢耉)가 더 미친 놈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욕들을 했다. 그러나 궁중의 많은 궁녀들 사이에는 질투 섞인 비상한 화제가 되었다. 더구나 아직 삼십이 못된 젊은 몸으로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옹주까지 낳은 문숙의의 질투는 폭발할 지경이었다. 문씨는 자기가 아들을 낳아서 한번 왕모(王母)로 올라서려는 야심까지 품고 있었던 만큼, 이 정실 왕비의 문제가 났을 때부터 갖은 아양과 연극으로 왕을 농락하려고 했다. 왕과 사도세자와의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당파싸움에서도 궁중에서 주동역할을 한 간사한 여자였던 만큼, 자기보다도 어린 처녀가 자기의 천한 집안보다 문벌이 높은 재상 집에서 들어오려는 것을 막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상감, 제 몸에 태기가 또 있는 모양입니다. 이번엔 꼭 왕자를 낳아서 상감님 은총에 보답하겠습니다.
뭐, 네 몸에 태기가 있어? 그래 이번엔 꼭 아들을 낳아라.
하고 늙은 왕은 기뻐하면서, 젊은 문씨의 탄력 있는 배를 이불 속에서 어루만지면서 기뻐했다. 그러면 문씨는 아랫배에 힘을 주어 불룩하게 내밀어서 왕을 속이며 아양을 떨었다.
효장세자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지금 동궁(東宮=思悼世子)은 공부는 않고 부랑자들과 어울려서 주색에만 빠져 있으니 걱정입니다.
그래서 나도 걱정이다. 그러나 내 나이 이미 칠십이 가까운데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느냐? 너 설마 어떤 젊은 놈의 씨를 밴 것은 아니겠지?
왕은 질투나 의심보다도 문씨가 귀여워서 콧소리로 흥흥거리며 농을 했다. 아직도 자기의 정력으로는 여자를 얼마든지 즐길 자신이 있었으므로, 문씨의 태기가 있음직도 해서 기뻤던 것이다.
상감마마 그게 무슨 농담이십니까. 그보다도 상감님의 이런 정력이시면 칠십 아니라 백 살이 되셔도 생남하십니다. 제가 꼭 상감님 아들을 낳아 드리겠습니다.
아아, 그럼 얼마나 경사스럽겠느냐. 그러면 내가 너를 더 귀여워하마.
상감님 싫어요. 제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 싫어하셨구만요.
허허, 언제 너를 싫어했니? 지금까지 나는 중전이나 빈궁들보다 너를 제일 귀여워하지 않았느냐?
그럼 왜 정성마마가 승하하시자, 중전이 비었다는 핑계로 계궁(繼宮)을 또 들여놓으시려고 하세요?
아아, 그걸 네가 투기하느냐? 신하들이 권하니까 생각 중이지 아직 정한 것도 아니다.
만일 저보다 젊은 여자를 중전으로 들여놓으시면, 저는…
너야, 중전이 또 들어오건 말건 이렇게 귀여워 할 거 아니냐?
싫어요. 그럼 우선 뱃속에 든 아기를 떼어버리고 저도 죽어버리겠어요.
하고 문씨는 원망스러워 하면서도, 갖은 애교를 육체의 유혹과 함께 부렸다.
후후후. 걱정 말고 왕자나 하나 잘 낳아라.
하면서 늙은 왕도 젊은 문씨에게 늙은 정력을 쏟았다. 문씨는 왕이 밤으로 어루만져 볼 때 는 배에 힘을 주어서 속였고, 낮이면 치마 속에 솜뭉치를 넣어 배 부른 모양을 보여서 왕의 계궁(繼宮) 맞는 것을 중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영조에게 아첨하는 신하들은 계궁을 허위(虛位)에 두는 것은 왕실의 내허(內虛)라고 주장했으며, 노망한 왕도 또한 재상집 어린 처녀에 대한 호기심을 금하지 못해서, 마침내 김한구의 딸 십오 세 처녀는 정순왕후(貞純王后)로 맞아들였다.
거짓말로 아들을 배었다고 왕을 속이려던 후궁 문숙의도 단념하고
상감마마가 저를 소박하시고 어린 중전을 맞았기 때문에 산신(産神)께서도 실망하신 모양입니다.
왕은 정순왕후를 맞은 뒤에도 문숙의의 침실 매력을 잊지 못하고 자주 밤으로 그 침실을 찾아왔다. 문씨는 어느 날 밤에 밥까지 굶은 배에 힘을 빼고 울면서 호소했다.
너 그게 무슨 말이냐?
역시 제 복이 없는지 낙태하고 말았습니다.
하고 흑흑 느껴 울었다. 눈물까지 줄줄 흘렸으므로 왕은 문씨의 슬픔을 정말로 알고
어디 보자.
하고 문씨의 배를 만져 봤다. 과연 전에 핑핑하게 부르던 배가 착 까부러져 있었다. 분명히 낙태한 것 같았다.
네 복보다도, 내 복이 없나보다. 기왕 낙태했으면 하는 수 있느냐. 몸을 잘 조리하고 슬퍼하지 마라.
상감, 몸이 괴로우니, 오늘밤엔 제 방에 모시지 못하겠습니다.
아, 알았다. 몸조리나 잘하거라.
하고 왕은 누웠던 몸을 일으키고 옷을 입으려고 했다. 침실에서 나가려는 왕의 동정을 본 문씨는 왕이 이 길로 다른 여자의 방으로 갈 것이 샘 났다.
상감마마, 늦은 밤에 침소를 옮기실 것까진 없습니다. 저도 고적하니 저쪽 상감마마 금침에서 그냥 주무십시오.
오오 그러마. 아주 이 방에서 쫓아내는 줄 알았구나. 허허허.
문씨는 그런 연극으로 낮에 솜덩이를 치마 밑에 넣고 다니던 거짓말의 고통을 무난히 면하고 혼자 웃었다. 간사하고 영리한 문씨는 거짓 잉태도 무난히 숨겨 넘기고 그 때문에 도리어 왕의 동정과 사랑을 더 끄는데 성공한 것이다.
제가 아무리 상감을 충성 껏 섬기고, 상감께서 사사롭게 귀여워해 주셔도 조정의 양반들은 상놈의 궁녀 출신이라고 해서 저를 멸시합니다. 양반이래야 별종잔가요. 당파싸움과 백성재물, 나라재물만 도적질하는 놈들 아닙니까?
그래 당파싸움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같다.
상감, 당파싸움 못하게 하는데 묘안이 있습니다.
허허, 너한테 그런 묘안이 있느냐?
문씨는 눈웃음을 치면서, 제법 심각한 문제라도 말하듯이 입을 열었다.
당파싸움은 지금 행세하는 양반들로선 아무리 상감님 명령이라도 고쳐지지 못합니다.
모두 할아비 아이들 때부터 내려온 대대원수니까 피에 밴 당파싸움이라 그렇습니다. 차라리 당파싸움에 전연 물들지 않은 사람을 등용해야 합니다.
당파에 물들지 않은 유능한 사람이면 얼마든지 등용할 방침이지만…
양반들은 모두 당파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니 당파와 아주 관계 없는 소위 중인(中人), 상민(常民)을 벼슬시키는 용단을 내리시면 그런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허긴 그도 그렇다.
중인과 상민에게 벼슬을 시킨다. 그것은 분명히 뿌리 깊은 신분제도(身分制度)의 봉건성(封建性)을 타파하는 일종의 계급혁명(階級革命)이다. 그러나 실지로는 유명한 영조의 고집으로도 내릴 수 없는 용단이었다. 만일 그러 하자면 현재 각파의 양반들과 전국의 유림이 서로 일치 단결해서 반해하고 일어설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상감마마, 이런 말을 하면 황송하오나 성모(聖母)께서도 제 몸과 똑같은 후궁의 신분이라 일생을 양반들의 천대를 받으셨으며, 심지어 상감까지도 천한 여자의 아드님이라고 해서 여러 번 반역소동까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저는 물론 중인 태생이지만 상감님 피에도 역시…
그것은 짐도 원통한 바이다.
그러니, 마마 생전에 상반(常班)의 폐단을 없애고, 중인, 상민도 벼슬을 시키십시오.
영조의 피에도 천민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문씨의 이런 신분 한탄은 바로 왕자신의 울분이기도 했다. 신하들도 양반 자세로 영조의 생모는 인간대접을 하지 않았던 것이 분했다.
그런 피에 밴 서민성(庶民性)은 영조의 성격의 큰 요소(要素)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가 배척한 당파싸움에는 양반근성과 적서(嫡庶) 차별에 대한 반항도 겸해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전에 냉랭하던 서북인(西北人)도 등용하려고 했고, 중인도 약간 벼슬을 시켜서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문씨는 그런 큰 문제보다도 우선 자기 친정 동생에게 감투를 주어서 중인의 지체를 면하고, 친정 자손들에겐 양반대우를 받게 하려는 야심에서 이런 거창한 문제를 꺼냈던 것이다.
가까운 예로 제 지체를 좀 올려 주셔요.
네 지체라니? 내 사랑 이상의 무슨 높은 지체가 있느냐. 남자라면 벼슬이라도 주겠지만 말이다. 나는 네가 남자가 되어 훌륭한 영의정이 되는 것보다, 귀여운 여자가 된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모르겠다.
저야, 그까짓 빈궁(嬪宮) 대우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 나도 너를 빈궁으로 삼고 싶었지만, 중전보다 더 사랑하는 귀인(貴人) 대우가 좋지 않으냐. 궁주범절이 야속하게 너를 빈궁으로 올릴 수도 없구나. 때도 늦었고…
상감 제 말이 아닙니다. 제 친정 동생이 어느 양반보다 학문도 인품도 잘났지만, 조상이 중인이고 제가 천한 궁녀 출신이라, 썩어빠진 양반에게도 굽실거리며 천대 받고 있습니다.
제 친정 동생이 벼슬을 해서 양반이 되면 제 지체도 오르고 자손들에겐 그런 천대를 면할까 합니다.
아, 네 친정 동생에 그런 잘난 인물이 있었느냐. 그럼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대신들은 제 사돈의 팔촌까지 벼슬도 시키고 중인들도 양반의 족보에 넣어 가며 돈으로 감투를 팔지만, 저는 그런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상감께서 알아서 하실 때만 기다렸습니다.
어, 그러냐? 갸륵한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남의 존재까지 모르는 불찰을 저질렀구나.
왕은 문씨의 동생을 처남이라고까지 하면서 웃었으므로 문씨는 기뻤다.
제 친정은 그전부터 후궁관계로 어떤 재상집 양반 못지 않게 왕실과는 혈통이 통합니다.
제 동생 자랑이 아니라 어떤 양반집 자제만 못하지 않으니, 한번 불러 보시고 적당한 벼슬 한자리 시켜 주십시오.
아, 보나 마나, 네 동생이면 내 처남인데 그냥 둘 수야 있나. 무슨 벼슬이 소원이냐?
그야 단번에 대감까지 바랄 수 있습니까? 그러나 나으리 지위는 너무 낮으니 과거 치루지 않고 할 수 있는 영감자리 하나 시켜 주십시오.
하고 문씨는 중인으로는 일약 영감지위를 소망했다.
음, 좋아. 우선 대신들 간섭 없이 시킬 벼슬은 왕실관계 관직인데… 마침 육상궁 소감(毓祥宮少監) 자리가 비었으니 어떻겠니?
육상궁 소감이면 더욱 적임입니다. 저의 시어머님의 제를 제 동생이 대신 받들 수 있으니까요.
하고 문씨는 기뻐했다. 제 동생이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벼슬을 하게 된 것이 더욱 반가웠던 것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 최씨의 영혼을 모신 별묘(別廟)로서 소감이라는 직명이지만 별묘의 최고직이었다. 일이라고는 일정한 절차에 따른 제사를 지낼 뿐, 한가롭고 수입 좋은 벼슬이었다.
문숙의의 친정 동생 문성국(文聖國)은 글깨나하는 청년으로서 장안의 호걸을 자처하던 유명한 건달이라, 장안의 건달과 깡패가 그를 중심으로 육상궁에 모여들어서 밤낮으로 도박을 하면서 술을 마셨다. 그러는 한편 문성국은 그들 일당의 두목으로서 궁중의 누이와 결탁하고 소위 자왕파(子王派)로서 영조를 몰아내고 사도세자를 왕으로 세우려는 당파를 제거하는 행동파 구실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영조를 옹호하는 부왕파 가운데서 은연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육상궁 관비를 유용하고 누이 문숙의로 부터 받은 기밀비로 장안의 유흥가를 판치고 돌아다녔다. 장안의 건달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해만 지면 말을 타고 유명한 기생집 순례를 하는 것이었다.
문성국은 단순한 제관(祭官)도 건달도 아니라 문귀인의 밀령으로 자왕파라는 소론을 잡아죽이려는 무서운 밀정이다.
이런 소문이 장안에 돌자 소론파에 속하는 자들은 술집에서 술김에 토하던 시국의 불평을 삼가야 했다. 문성국의 부하 건달들이 모두 부왕파의 밀정 같았기 때문이다.
윤지(尹志)의 반란이 실패한 후에 소론파는 자기들 신변의 안전과 장래의 희망을 사도세자에게 걸고 움직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자왕파의 시초였다. 당시 노론만 득세시키는 영조의 세력을 꺾으려면, 영조와 사이가 좋지 못한 다음 임금이 될 사도세자에게 붙어서 역시 왕실에 충성을 다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자왕파인 소론에서는 우선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유언비어를 조작하고 미신까지 이용했다. 그 예로서 황해도에 예언(豫言)하는 생불(生佛)이란 여자가 나타나서 기묘하게도 민심을 끌었다. 이 생불을 자칭하고 나온 여자는 자왕파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한 일종의 무당이었다. 그러나 자기는 무당이 아니고 생불의 선녀라고 하면서 우선 무당들을 공갈해서 자기 세력 밑에 넣으려고 공작했다.
유교와 무당의 사교(邪敎)는 장차 망한다. 지금 궁중에서는 늙은 왕이 망녕을 부려서 썩은 노론에게 세도를 시키고 여색에만 빠져 있다. 세자가 공부를 않는다고 죽인다 살린다 하는 것은, 현명한 세자가 유교책을 버리고 불교책만 믿고 공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위력과 공덕은 세자를 성군(聖君)으로 모시고 모든 백성은 지상의 극락 생활을 하게 된다. 너희들 무당도 말세의 불바다에서 살아나려면 생불인 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생불이라는 여자는 무지한 무당들에게 세자를 지지하는 정치적 목적의 선동을 불교도 아닌 생불의 이름으로 퍼뜨렸다. 그러자 무당이 겁을 집어먹고 귀신단지를 태워 버리고 여승도 아닌 괴상한 무당으로 전향했다.
이런 사실을 안 조정에서는 이경옥(李敬玉)을 암행어사로 삼아서 황해도로 파견했다. 허술한 백성 옷으로 변장한 암행어사는 봉산(鳳山) 어느 시골에 가서, 생불이라는 새로운 무당이 기도하는 구경을 했다. 치성 온 사람들에 대해서 부자가 되게, 생남하게, 벼슬을 하게 기도한 뒤에 생불의 교훈을 받은 무당은 그러나 이 모든 영험은 부처님께 치성을 드려야 한다. 그리고 특히 벼슬을 하려면 늙은 세력을 없애 버리고 젊은 세력이 일어서야 한다. 늙은 세력은 노망한 임금과 완고한 노론의 간신들이다. 그리고 젊은 세력은 현명한 왕세자와 소론의 중신들이다. 그러니 당신들 자손이 벼슬하고 귀하게 되려면 늙은 세력이 멸망하라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고 역시 무당 기도식으로 징을 울리면서 정치적인 넋두리를 했다. 암행어사는 그런 사실을 직접 보고 들은 뒤에 황해감사와 각 읍의 수령에게 지시해서 그런 무당을 검거해서 엄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그럴수록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노망한 임금이라고 저주 받는 영조도 무지한 무당들까지 부처의 명목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데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반역심을 갖고 있을 듯한 의심이 생겼다. 글은 읽지 않고 무술에 골몰한 것도 그런 변란을 준비하는 것처럼 생각됐다. 그 전에도 글을 배우지 않고 잡패들과 어울려서 시중으로 미행(微行)하면서 주색에 방탕한 것만 꾸짖었지만, 이때부터는 아비를 죽이고 임금이 되려는 역적의 자식으로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증거가 없으므로 소위 자왕파인 소론의 잔당을 경계했다.
문숙의와 내통하는 부왕파에서는 이 기회에 자왕파로 지목되는 소론파를 소탕하려고 별렀다. 문숙의의 동생 문성국은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의 집을 밤중에 찾아갔다.
아, 자네가 밤중에 웬일인가?
영의정도 영조의 총애를 받는 문숙의의 동생인 만큼 귀한 손님 대접으로 맞았다. 무슨 중대한 비밀로 온 줄 짐작했으나 태연한 태도로 대했다.
대감께서는 황해도의 생불 소동의 진상을 아십니까?
아, 암행어사의 보고로 알았네.
그럼 상감께 정식으로 아뢰셨습니까?
대강은 아뢰었지.
대강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 소론파들이 상감을 없애고 왕세자를 등극시키려는 음모라는 점을 여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 그런 끔찍한 소리를 어찌 풍문만 듣고… 아니 사실이라도 감히 아뢸 수 있나.
우리는 상감의 신하인 동시에 동궁의 신하가 아닌가. 그런 말씀 아뢰다가는 도리어 상감께 노염을 사서 목이 달아날 텐데. 시일을 두고 경계만 하면 자연 사필귀정(事必歸正)할 것 아닌가?
대감, 그러시다간 대감도 늙은 파로 몰려서 큰 변을 당합니다. 상감께서도 이런 문제는 비록 짐작을 하시더라도 대신들의 공신 상주(上奏)가 없으면 친히 발언하시진 못합니다.
영의정 김상로는 어디까지나 몸을 사리는 신중한 태도였다.
제가 벼슬이 좀 더 높으면 직소(直訴)하겠습니다마는…
차차 문성국은 은근히 김상로의 태도를 비굴하다고 암시했다.
아차, 자네 누님(문숙의)은 종종 만나지 않겠나?
웬걸요. 아무리 누님이라도 제가 어찌 궁중에 출입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문성국은 뻔한 거짓말을 했다.
허긴 자네가 누님을 통해서 상감께 알려 드리면 제일 무난하겠는데.
대감께서 그런 의향이면 제가 누님을 만나서 말해도 좋습니다.
뭐 내가 시켰다고 해선 안 되네. 자네 의견대로 해야지.
예, 알겠습니다.
문성국은 영의정의 내탁으로 일을 하려는 다짐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중대한 문제가 조정에 상정되었을 때는 영의정이 책임지고 증언하게 되겠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문성국은 궁중으로 가서 누이 문숙의에게 침소봉대로 사도세자의 반역음모가 뚜렷하다고 고자질했다. 문숙의는 아우의 말을 더욱 과장되게 거짓말까지 붙여서 영조에게 밀고했다. 문숙의는 입에 담지 못할 말까지 해서 왕 부자간을 이간시켰다.
글세 임금 자리에 눈이 어둔 동궁은 노망한 임금은 없애버려야 한다고 벼르면서 창덕궁에선 늙은 개만 봐도 이 늙은 놈하고 칼로써 개백정 짓까지 한답디다. 영의정도 그런 사실을 알면서 너무 황송한 말이라 아뢰지 못한다고 제 동생에게 고충을 말하고 있다 합니다.
하고 문숙의는 자기의 과장한 이간책의 책임을 영의정에게 전가시켜서 왕으로 하여금 더욱 믿게 했다.
설마, 그놈이 아무리 미쳤기로서니 제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될 생각을 할까?
늙으신 상감의 자부(慈父)의 은혜도 모르니 정말 망측합니다. 모두가 소론파들이 충동이는 음모이니, 우선 동궁 측근자들을 처단하십시오. 그러면 일시 잘못했던 동궁도 후회하고 잃었던 효심(孝心)을 돌릴지도 모릅니다.
영리한 문씨는 왕자도 동정하는 척하면서 우선 동궁이 타고 있는 말부터 잡아 죽이라고 권했다. 이런 풍문이 돌기 시작하자 동궁을 가깝게 모시고 있는 이천보(李天輔), 이후 등이 불안해 했다. 그러던 차에 사도세자는 종기로 앓았다.
온양 온천으로 행차해서 탕치(湯治)하는 것이 좋소이다.
시의들이 권고하자 세자는 왕의 하락을 창했다. 왕 부자지간에 큰 불상사가 날지 모른다는 풍문은 이미 세상의 상식으로 되어버렸다. 왕은 세자가 괘씸스러워서 종기로 죽기라도 했으면 시원하겠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세자가 미워서 병을 고치려는 온양행차조차 금했다는 풍문이 두려워서 마지 못해 허락을 했다.
그러나 부왕파의 노론측에서는 세자의 언동을 감시하려고 일시도 세자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좌의정으로서 직접 세자의 사부(師傅)의 중책을 맡고 있는 이후도 세자에게 무슨 변이 있을까 걱정하면서 수행했다. 행궁(行宮)에서 세자는 이후에게 심중의 고민을 토로했다.
나는 죽고만 싶소.
옥체의 종기도 이 온천 영험으로 나으실 것이니 안심하고 조리하십시오.
몸의 종기보다 마음에 더 큰 병이 들었소. 욕되이 죽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결하고 싶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동궁께서 만일의 일이 있으면 저도 살지는 않겠습니다.
이후는 이미 대세가 세자에게 불리해서 무슨 참변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나에겐 부왕이 어려워서 감히 가깝게 하지 못한 죄는 있지만 어찌 다른 불효의 뜻이야 있겠소. 그러나 아버님 주위에는 흉한 요기(妖氣)가 아버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있소. 또 공연히 당파의 불만으로 나를 업고 일을 꾸미려는 자들도 못마땅하오.
망극하옵니다. 모두 신들의 불민한 죄올시다.
하고 세자와 선생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온천은 효과가 있어서 서울로 환궁했지만 세자는 마치 죽음의 길에 오르는 것처럼 불안했다.
(아아, 그냥 서인(庶人)이 돼서 자유롭게 유람이나 다니고 싶다.)
세자의 지위도, 왕대리의 권한도, 장차 임금의 지위도, 다 버리고만 싶었다. 그러나 온천에서 돌아오자 궁중과 조정의 공기는 아주 험악해져 있었다.
동궁의 반역심을 조장한 것은 동궁측근의 소론들이다. 그들의 대죄는 마땅히 엄벌해야 한다.
이런 노론파의 공격을 받게 되자 영부사 이천보와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차례로 자결했다. 그들은 결국에 가선 자기들이 역적으로 몰려서 죽을 것을 겁냈으며, 기왕 죽을 바에는 스스로 깨끗이 죽어서 왕세자의 목숨만이라도 구하려는 충성에서 한 억울하고도 비장한 자결이었다. 온양온천에서 같이 가서 세자와 울고 돌아온 이후도 임금 부자지간의 싸움이 피를 보지 않고는 그치지 않을 것을 알고 역시 자결했다.
(아아, 나를 오랫동안 교육해 주던 세 사람이 모두 나 때문에 억울하게 자결했다. 충신을 셋이나 죽이고 나만 살 면목이 있으랴.)
왕세자는 마침내 자포자기하고 실성한 사람같이 되어버렸다. 울화증이 난 왕세자는 평복단신(平服單身)으로 동궁처소를 버리고 어디론지 먼 길을 떠나려고 서둘렀다. 깜짝 놀란 시신(侍臣)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앞을 막았다.
동궁께서 어디를 미행하시렵니까?
글세, 서울서 아주 멀리 가버리고 싶소.
안 되십니다. 그러지 않아도 상감께서 동궁의 동정을 감시하시는 중인데, 정 어디로 행차 하시려면 상감께 아룁고 가셔야 합니다.
평양에라도 놀러 가려는 것을 용서하시겠소.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내 길을 막지 마시오.
하고 왕세자는 단신으로 창덕궁의 동궁처소를 나섰다. 멀리 떨어진 경희궁에 있는 부왕은 이런 세자의 미행을 알지 못했다.
우리도 상감의 노염을 사서 죽더라도 동궁을 따라 모시고 가자.
동궁의 시신과 선비 몇 명은 죽을 각오를 하고 왕세자의 평양 미행에 따라 나섰다. 그 후에 이런 사실을 안 대신들도 쉬쉬하고 영조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
女體 彷徨
사도세자는 수명의 시신과 선비만 거느리고 부왕 영조 몰래 평양으로 유람의 길을 떠났다. 부왕이 언제 역적으로 몰아서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감돌고 있는 궁중에서 잠시 해방되려는 생각과 부왕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이기도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를 몸이니 청춘의 향락이나 실컷 채워보자.)
하는 자포자기의 방탕한 기분이었다. 영조 삼십칠 년 사월, 평양 가는 연도의 산천에는 신록이 무르익고 늦봄의 꽃이 만발했다. 거의 반광인(半狂人)이 된 이십오세의 왕세자는 객사(客舍)의 달밤 두견새 우는 소리에도 단장(斷腸) 눈물을 흘렸다.
비록 왕 몰래 하는 미행이었지만 대신들도 거의 광증(狂症)의 왕세자가 도중에서 무슨 변이 생길까 해서 연도 수령들에게 비공식적으로 대접하라는 통첩을 내렸다. 그런가 하면 노론파에서는
왕세자가 자주 지방으로 돌아 다니는 것은 무슨 음모를 꾸미려는 계획인지 모르니 불온한 언동을 내사하라.
하고 각도 수령에게 비밀 지령도 내렸다. 그러나 왕세자의 평양미행은 철두철미한 방탕의 만유(漫遊)였다. 평양은 자연도 좋았지만 색향(色鄕)으로 유명했다. 세자는 평양기생들과 마음껏 놀았다. 주색을 즐기는 그의 습성은 정치싸움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데에 가장 좋은 약이었다.
궁중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인으로서 마음껏 방탕한 유흥을 즐기는 세자는 평양의 일류 기생은 모조리 수청을 들리겠다는 기세를 올려서 평양 화류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심지어 산에 놀러 갔다가 기생에서 여승으로 전향하고 수도하던 가선(假仙)이까지 농락했다.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는 그 동안 정들인 평양 미인을 오륙 명이나 가마에 태워 가지고 몰래 돌아왔다. 그들은 가선을 비롯한 평양 기생들이었다.
사도세자(思悼世子)는 기생들을 몰래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처음에는 부왕 영조의 노염을 두려워해서 동대문 밖에 숨겨 두고 밤으로 미행해서 정치적 공포를 방탕한 향락으로 풀곤 했다. 정숙하기로 유명한 세자비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는 질투의 기색은 보이지 않고 다만
대조(大朝=영조)께서 평양을 다녀오신 것도 아직 모르시지만 불원 아시면 또 엄교(嚴敎)가 내릴 것입니다. 더구나 기생들까지 데려다가 밤으로 보러 다니시는 것을 아시면 큰 변이 날지 모릅니다. 그러지 않아도 대조께 반역의 뜻이 있다고 참소하는 무리가 있는 때인 만큼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동궁비답지 못하게 질투하는 거요. 언제 역적으로 몰려 죽을지 모를 몸이니 죽기 전에 지랄이라도 싫도록 해보겠소.
사도세자는 영조로부터도 미친 자식으로 구박을 받아 온지가 오래였고 영조를 극도로 무서워하는 공포증은 마침내 일종의 정신병 환자의 증세를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조가 세자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오해하고 대노 한 사건도 이미 십 년 전인 영조 이십육 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사건은 사도세자가 홍역으로 죽다 살아난 병후였는데 마침 대간(臺諫) 홍준해(洪準海)가 영조에게 세자를 너무 엄하게 다루지 말고 인자하게 다루라는 의미의 상소를 올렸다.
그때는 아직 당파들이 세자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고 순수한 교육적 의미에서 올린 홍준해의 상소였다. 그러나 영조는 대노하고 소년 세자를 더욱 엄하게 몰아대었다. 세자는 중병 끝의 약한 몸으로 눈이 쌓인 마당에 엎드려서 용서를 빌었다. 눈이 펑펑 내려서 세자의 몸을 파묻어도 용서할 때까지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노기는 다시 폭발해서 그 해 섣달 십오 일에는 영조가 창의궁으로 가서 왕실의 어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에게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겠습니다.
하고 화풀이까지 했다. 그러나 노령으로 귀가 어두운 인원왕후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상감 좋을 대로 하오.
하고 지나는 말로 대답했다. 그러나 영조는 자교(滋敎)의 허락까지 받았으니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 물러나겠다고 역정을 부렸다.
이에 대해서 세자는 망극해서 시신에게 곧 영조의 번의를 애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리고 인원왕후도 귀가 어두워서 내용도 모르고 한 마디 잘못 대답한 것을 알고 영조에게 빌다시피 해서 겨우 무마시켰다.
이때 세자는 망극해서 손지각(遜志閣) 뜰 얼음 위에 짚자리를 깔고 대죄(待罪)하다가 다시 창의궁 앞에 엎드려서 빌었다. 그때 세자는 부왕의 노엽게 한 불효를 탄식하고 머리를 돌에 부딪혀서 망건이 찢어지고 이마에 피가 흐르는 상처까지 입었다. 이로써 영조는 화를 풀었으나 그때부터 세자는 정신적으로 광병의 징조가 나타났다.
세자는 부친을 염라대왕같이 무서워했다. 낮에도 귀신이 보인다고 야단을 했다. 그리고 부왕과 스승이 강권하는 유학경서(儒學經書)는 읽지 않고 불경과 도경(道經)을 읽는 버릇도 생겼다. 도경의 하나인 옥추경(玉樞經)을 읽고 도를 닦으면 잡귀를 물리치고 도술을 부리게 된다고 마음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옥추경을 읽은 뒤에는 더 귀신을 무서워했다. 이 귀신은 공포증에서 생긴 변형된 영조의 환영(幻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옥추(玉樞)라는 글자조차 무서워 했고 옥추단(玉樞丹)이라는 패물까지 무서워서 가지지 못했다.
천둥소리나 번갯불도 무서워해 정신을 잃었고 그런 글자만 봐도 혼돈하는 경계증(驚悸症)이 고질이 되었으니 일종의 광병(狂病)이었다. 그러다가 여관(女官=英嬪朴氏))을 가까이 해서 아이를 배자 영조의 꾸중이 두려워서 낙태시키려고 하다가 못하고 영조 삼십 년에 은언군(恩彦君) 인( )을 낳은 후, 영조의 엄한 꾸중으로 벌벌 떨며 지냈다.
영조 삼십이 년에 세자는 모친상을 당해서 정신상에 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 영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 문숙의와 친정 동생 문성국(文聖國)이 사사건건 세자의 욕을 고자질 했다.
그래서 영조는 신화와 궁녀들 면전에서도 죽일놈 미친놈하고 엄한 꾸중을 했다.
세자는 이때부터 울화병이 점점 격화해서 궁중의 내관(內官)들을 매질하는 광증이 생겼고, 칼로써 직접 궁중비복을 찔러 죽이는 살인극도 여러 번 저질렀다.
동궁은 살인광(殺人狂)이다. 걸리면 죽는다. 피하는 게 제일이다.
하고 궁중의 내관들과 비복들은 세자를 두려워하고 벌벌 떨었다. 그리고 다음해 영조 삼십삼 년부터는 해괴하게도 옷에 대한 광증이 생겼으니 의대병(衣帶病)이라고 불렀다. 아내 혜경궁 홍씨는 이 의대병 때문에 수십 벌의 새 옷을 해대느라고 죽을 고생을 했다. 궁중의 비용으로도 동궁에 대한 예산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혜경궁 홍씨는 친정 부친 홍봉한(洪鳳漢)에게 호소해서 친정 신세를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자는 귀신을 위해 놓고 새 옷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찢어 버리고, 또 옷 입히는 시중을 잘못 든다고 마구 때려서 상하게 했다. 이런 의대병은 죽을 때까지 육, 칠 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 벌을 입으면 그 옷이 더럽고 해질 때까지 벗지 않아서 마치 거지 같은 주제로 지냈다. 그럴 때 새 옷으로 갈아 입히려고 하면 그 사람을 또 때려서 피 흐르는 것을 보고 웃었다.
그러나 정권욕에 눈이 어둔 당파들은 이렇게 부자간의 불화로 정신병까지 든 세자를 업고서 반역음모를 꾸몄으니 실로 무자비한 망동이었다.
부왕에 대한 공포증과 정신착란증은 그런 것을 다 잊어버리려는 핑계 비슷한 자포자기의 방탕으로 날로 기울어졌다. 동궁 처소 후원에서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로 울화를 풀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대조(大朝)께서 내가 무술놀이 하는 것을 위험한 음모 준비로 뒤집어 씌우려 한다.
하고 누가 고하지 않은 일을 지레 겁을 먹고 모조리 파괴해버렸다. 그리고
대조가 나를 잡아 죽이려 하니 깊이 숨어야겠다.
한 후 횐취정(環翠亭)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후원에 땅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서 숨기도 했다. 굴로 내려가는 출입구 뚜껑 위에도 뗏장을 덮고는 어두운 굴 속에 틀어박혀서 오뉴월의 한증막 같은 더위도 참았다. 그래서 정신적인 광증은 마침내 육체적 건강까지 상케 하고 중병이 들어버렸다.
그래도 밤으로는 동대문 밖에 데려다 숨겨 둔 가선(假仙)을 비롯한 평양기생을 보러 다녔다. 그런 방탕은 점점 심해져 마침내는 궁중에까지 데려다가 건달패, 동궁 시신들을 데리고 밤을 세우며 놀았다. 세자비 혜경궁은 모든 것을 병으로만 돌리고 질투 같은 것은 한 번도 나타내지 않았다.
어느 날 무슨 바람인지 세자는 오래간만에 돌연 혜경궁 방을 찾아와서는 우는 소리를 했다.
대조의 노염이 아무래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소.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하고 세자비는 남편을 위로했다.
세손만은 귀여워 하시니까, 나는 죽여버려도 국본(國本)엔 지장이 없을 거 아니요.
병환 때문에 그런 지나친 공포를 느끼시지만 그럴수록 대조께 안심하시도록…
흥, 모를 소리. 나를 점점 더 미워만 하시니까, 동궁을 폐위(廢位)하고 죽여버린 뒤에 세손은 죽은 형님 양자로 빼앗아 가실 거요.
혜경궁은 이럴 때의 남편 동궁의 정신이 성한 사람 같으므로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가선을 비롯한 계집들과 밤을 새우며 방탕한 잔치를 하는 광경은 마치 상가(喪家)와 같았다.
주효가 낭자한 잔치상도 마치 귀신의 난장판 같은 것을 만들어서 그 속에 들어가서 송장처럼 누워서 잤으며, 나인들도 함부로 강간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살상하기를 예사로 했다.
세자의 이러한 방탕과 광증의 행패가 심해지자 부왕파에 속하는 노론파에서는 세자를 위하는 소론파를 숙청하는데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흉계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것도 세자를 직접 해치는데 충분한 증거를 잡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영조도 이제는 형식상으로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키고 직접 정치엔 관계하지 않았으므로 어린 세손에게 글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근력도 노쇠해서 전과 같이 당파싸움도 강경히 금하지 못하고 오직 고집만을 전보다 심해서 일종의 노망증까지 걸려 있었다.
너는 아비를 닮지 말고 공부를 잘해서 장차 좋은 임금이 되어야 한다.
아들에 대한 실망과 증오심은 어린 손자에게까지 이런 말로 훈계했으나, 세손은 어린 마음에도 조부와 부친의 나쁜 사이가 자기 부자지간까지 이간하는 듯하여 민망하고 가슴 아팠다.
영조 삼십팔 년 여름 마침내 세자와 영의정 신만(申晩)과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했다. 신만은 영조에게 세자에 대한 걱정을 여러 가지로 말을 올렸는데 그것이 모두 세자의 잘못에 대한 선후책이었다.
영의정 신만이 대조께 내 욕을 고자질해 바쳐서 대조의 노염이 심하였다.
세자는 그런 생각에서 울화를 터뜨렸다. 그러나 세자의 지위로서도 영조의 신임을 받는 영의정 신만에게 직접 화풀이를 할 수가 없자 그의 아들인 영성위(永城尉)를 아비 대신 잡아다 죽인다고 별렀다. 영성위는 세자의 누이동생 화협옹주(和協翁主)의 남편이었다.
영성위를 잡아다 죽여야 한다.
세자는 날마다 별렀다. 만일 세자와 만나기만 했으면 직접 칼로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겁을 낸 영성위는 세자의 그런 눈치를 알고 일체 궁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큰 소리로 벼르기만 하면서 화합옹주에게 자기 일을 영조께 잘 말해 달라고 편지로 애원한 것도 처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효과가 없자 영성위를 위협하려고 영성위의 집에 관원을 보내서 관복을 비롯한 그의 패물과 일용품을 압수해다가 불살라버렸다.
내가 직접 대조께 가서 억울한 사정을 아뢰겠다.
하고 영조를 만나려고 했으나 부왕과 세자를 싸움 붙이려고 안내할 신하들은 없었다.
뒤주 속에 世子가
노론파의 행동파 구실을 하는 중인(中人) 건달 나경언(羅景彦)은 영조 삼십팔년 윤 오월 십일 일에 형조참의(刑曹參議) 이해중(李海重)에게 중대한 밀고를 했다.
대감, 요즘 세자께서 큰 일을 꾸미신다는 소문이 있는데 알고 계십니까?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는가?
소인의 형이 액정별감 상언(尙彦)이 아닙니까.
액정별감은 궁중 하인들의 감독역이다.
아, 그렇지.
대감, 실은 소인 형의 말이온데, 세자께서 노망든 부왕을 들어내고 임금이 되시려고 바로 무슨 변을 일으키신답니다.
에잇, 그런 망극한 말을 함부로 하는 법이 있는가?
대감께서 형조참의시니까 미리 아시지 않습니까?
이해중은 전 영의정이요,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에게 그런 밀고 사실을 말했다.
형조참의의 직책상 이런 사건을 상감께 아뢰지 않을 수도 없고, 그러자니 부자 사이의 의를 끊는 것 같기도 해서 망극하오. 홍대감은 국구(國舅)의 관계이기도 하니, 이 문제를 잘 조정해서 무사하게 해주시오.
그러나 홍봉한으로서도 사위를 역적으로 고발 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이 분명히 어떤 일파의 날조한 음해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사위를 두둔하고 변명하기도 거북해서 망설였다.
나로서 어찌 이런 문제의 시비를 따질 수 있소. 이참의가 상감께 잘 말씀 드려서 공연한 풍설이라고 사실을 밝혀 주시오.
나로서도 실로 난처합니다.
이해중과 홍봉한은 서로 책임을 미루려고 했으나 결국 이해중이 변(變)을 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에잇, 궁중에서까지 대역(大逆)의 변이 생기다니. 내가 친히 조사하겠다.
하고 영조는 상을 치면서 대노했다. 좌우의 신하들은 깜짝 놀랐다. 여기서도 노론파와 소론파의 반응은 정반대로 달랐다.
이 문제는 심중히 사실을 밝혀야 하겠으니 상감께서는 진정하시고 일단 사헌부에 맡겨주십시오.
이런 의견은 세자를 두둔하는 소론파의 의견이었다. 그들도 대노하는 영조 앞에서 그것이 노론파의 중상모략이라고 단언하고 나서진 못했다.
사세가 급박한지도 모릅니다. 빨리 친국(親鞫)하시되, 상감님 신변이 위험하오니 경호군을 풀어서 주위를 엄중히 경호해야 하옵니다.
음, 곧 경호군을 대령시켜라. 그리고 모든 궁문을 굳게 닫아라.
성낸 영조는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전임 시신과 현임 대신들을 급히 소집했다. 이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인심은 흉흉했다.
이크, 기어코 궁중에서 골육지간에 피를 흘리게 됐군.
동궁이 하도 방탕만 하고 미친 병까지 걸렸으니 노론파에서 동궁파를 없앨 흉계다.
아냐, 동궁이 미친 행세한 것도 대역의 흉계를 숨기려는 거짓 미친 짓이었다는군. 정말 미친 사람이 그렇게 계집을 밝힐 수 있어. 글공분 않고 무술만 익힌 것을 봐도 알 거 아닌가.
민간의 유언비어도 자연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것은 반대파 쌍방에서 풍설을 서로 조종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좌우간 나라 꼴은 말이 아니다. 노망한 부왕이 미친 왕자를 잡아 죽이려는 판국이다.
자식을 죽이지 않으면 아비가 죽을 테니까. 왕위와 목숨을 지키려면 그럴 수밖에 있겠나?
이런 흉흉한 소동은 궁중에서 더욱 심했다. 세자도 죽을 각오를 하고 오월 십삼 일에는 혜경궁에게 비장한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 어젯밤의 소문이 심상치 않고 무섭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죽어서 모르거나, 요행히 살면 종사(宗社)를 붙들어야겠지만, 죽을지 살지 모르겠소. 그러나 내가 죽어야지 세손의 목숨이 보전될 것 같소. 그러니 이대로 죽은 후엔 빈궁을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소. >
혜경궁은 남편의 비장한 편지를 보고 천지가 무너지는 듯 아득했다. 한편 세자의 모친 선희궁도 왕실의 참변을 어떻게 해서든지 잘 수습하려 했다. 남편 영조의 끔찍한 각오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참변이 세자 뿐 아니라 세자비와 세손에까지 미칠까 두려웠다. 그러면 국본(國本)의 계승조차 끊어지고, 궁중의 혼란은 격화되는 동시에 당파와 먼 촌 왕족들까지 왕위계승의 쟁탈전을 벌일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희궁은 영조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었다.
상감의 결심을 아오며 더는 말 드리지 않겠습니다. 동궁의 하는 일은 사실이거나 아니거나 모두 본 정신이 아닙니다. 병으로 그러니 어찌 책망하겠습니까. 처분은 하시더라도 부자지정으로 은혜는 베푸셔야 하옵니다.
처분을 하면 그만이지 무슨 은혜를 베푼단 말이요?
세손 모자를 평안케 하시도록…
그 아비의 죄를 모자에게까지 씌울 생각은 없소마는 아비를 죽이려는 미친 자식은 용서 못하오. 그것도 왕실의 일이라 열성(列聖)께 대한 면목으로도 처분하지 않을 수 없소.
영조가 세자를 처분할 결심은 이미 요지부동이었다.
마침내 친국이 휘녕전(徽寧殿)에서 열렸다. 사도세자는 그 곳으로 끌려 나가기 전에, 세자비 혜경궁이 있는 덕성각(德成閣)에 잠시 들려서 최후의 상면이 될지도 모르는 잠시를 함께 지냈다. 그리고 거기서 담을 격한 휘녕전으로 간 뒤에, 바로 부왕의 노성이 들려서 혜경궁은 피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그러나 나인을 담 밑으로 보내서 동정을 살피라 하고 남편의 운명을 빌었다.
친국의 장소는 살기가 돌고 있었다. 남태제(南泰齊)를 지의금(知義禁)으로, 한익모(韓翼謨)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임명했다. 이런 사람들을 거느리고 영조가 직접 재판을 통솔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모든 권한은 영조에게 있었다. 그리고 여러 대신들이 배석했다.
먼저 고변(告變)한 나경언의 증언을 듣자.
영조의 명에 따라서, 역시 죄인 취급을 받는 나경인이 법정에 끌려 나왔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태도로 어전(御前)에 엎드려서 입을 열었다.
소신은 이번 일을 미리 알고서 상소코자 하였으나 미천한 몸 이오라 상소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형조에게 사실을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사건 내용을 상세히 글로 기록해 왔사오니, 먼저 이 글월을 올리옵니다.
하고 미리 준비한 고발문을 올렸다.
< 동궁이 장차 나라를 새로 만든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신이 그 내용을 알아 보고… >
임금은 여기까지 읽고서 화를 버럭 내고, 그 문서를 세자의 장인 홍봉한에게 휙 던져 주었다.
영상이 이 흉서를 읽어 보시오.?
홍봉한은 영조가 자기에게 역정을 내는 태도에 황공해서
황공하옵니다. 신을 먼저 죽여 주십시오.
하고 엎드렸다. 그 흉서는 다른 법관과 대신들에게 회람되었다. 모두 침울한 안색으로 말이 없었다.
나경언은 벼슬도 없는 일개 서민으로도 나라에 대한 충성에서 이런 흉사를 고발했는데 여러 대신은 다들 알면서도 나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그 심사를 알 수 없소. 저 나경언에게 부끄럽지도 않소?
대신들은 여전히 묵묵히 앉았을 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홍봉한은 더욱 책임을 느끼고
동궁을 불러 들여서 엄중히 책망하십시오.
이런 정도의 말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세자는 홍화문(弘化問) 밖에 엎드려서 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조는 세자를 불러 들이라고 명했다. 홍봉한은 다시
그러나 죄인 나경언을 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 미안하오니 나경언을 잠시 물러나게 하십시오.
나경언은 군사에게 끌려서 일단 퇴장하면서도 태연한 태도로 홍봉한을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나경언이 퇴장한 뒤에 세자는 휘녕전 섬돌 아래 엎드렸다.
너는 나의 대리로서 정사는 버리고 지방으로 다니면 방탕한 짓을 했고, 인제는 해괴한 계집들과 여승까지 궁중에 들여서 후궁을 삼았으니, 중년의 자식을 낳아서 왕자를 삼을 작정이냐? 더구나 너는 나를 죽이고, 여승은 왕손의 어미를 죽인 뒤에 무슨 꼴로 나라의 임금이 될 작정이냐?
영조는 부친으로서나 왕으로서나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토하면서 노발대발 했다. 듣던 대신들이 민망해서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런 놀라운 광경을 홍화문 밖에서 지켜보던 소년 세손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할아버님, 아비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울면서 애원했다. 대신들은 어린 세손의 효성에 측은한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나 영조의 아들에 대한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너는 나가거라!
하고 세손에게 호령했다. 세손은 하는 수 없이 쫓겨 나와 왕자재실(王子齋室)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혜경궁은 남편이 처형되기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나려고 칼을 들었으나 측근에 있던 사람들이 칼을 빼앗고 말았다. 혜경궁은 숭문당(崇文堂)과 휘녕전 사이의 건복문(建福門) 밑으로 가서 세자가 친국 당하는 휘녕전 안의 동정을 살피려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영조가 칼을 휘두르면서 호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세자가 겁에 질려서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그전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금후로는 아버님 분부도 잘 듣고 글도 읽겠습니다.
여승과 기생들을 궁중에 들여다가 난잡한 행동을 하고, 심지어 대역의 음모를 한 죄를 뉘우치고 하는 말이냐?
그런 죄상은 억울한 말씀입니다. 그런 풍설의 출처가 알고 싶습니다.
네 가슴에 물어 봐라. 임금의 대리인 동궁 네가 죄인과 따지면 체면이 어떻게 되겠느냐?
전부터 화증병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실수하는 일은 있었사오나, 이런 억울한 말씀에는 정말로 미치겠습니다.
그 이상 더 미치겠느냐? 아주 미쳐 죽든지 자결하든지 해라. 보기고 싫다. 밖으로 나가서 기다려라.
세자는 휘녕전을 나와서 금천교(禁川橋)에서 죄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자가 나간 뒤에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영조에게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상감마마, 불충불효한 무고를 하여 상감 부자지간을 이간시킨 나경언을 극형에 처해서 다시는 이런 흉화(凶禍)가 없도록 하십시오.
흉악한 죄를 고발한 충성된 백성을 왜 처형하란 말이요. 차라리 이런 흉한 죄를 덮어 두려던 대신들을 벌할망정 정직한 백성은 벌할 수 없소.
다른 대신들도 홍봉한의 변호에 동조해서 부자지간의 참변을 막으려고 애썼다.
상감, 대저 동궁께서 잘못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신하로서 그 죄를 들추는 것은 임금의 잘못을 폭로하는 불충이니 나경언의 소행은 엄벌해서 후세를 경계케 해야 하옵니다.
나경언은 일개 무식한 서민이지만, 그 충성은 대신들 보다 극진한데, 어찌 죄를 주겠소.
군주에 대한 고변자(告變者)는 자고로 죄를 주었습니다.
대신들은 나경언의 죄를 주장했다. 그것이 비록 사실이라도 죄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노론파의 벼슬아치들은 나경언 같은 건달을 이런 경우의 행동대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경언이 죄인으로 옥에 갇히게 되자, 그는 비로소 자기가 희생물로 죽지나 않을까 하는 겁이 났다. 그는 옥으로 끌려 가면서
나는 동궁마마를 모함한 죄로 죽어 마땅하오나, 나에게 그런 고변을 하라고 시킨 김한구(金漢耉)와 홍계희(洪啓禧) 등 노론파가 있습니다.
하는 배후관계를 폭로했다. 이에 당황한 노론파에서는 곧 나경언의 구명운동을 개시했다.
문성국은 영조의 후궁 문숙의를 찾아가서
누님, 나하고 친구이며 우리 파를 위해서 동궁의 죄를 고발한 나경언이 도리어 불경죄로 죽게 되었소. 동궁의 죄를 자세히 상감께 여쭈어서 억울한 나경언의 목숨을 살려 주시오.
염려 마라. 이번에 미친 동궁을 처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큰 화가 미칠 것이다. 내 힘껏 상감께 말하겠으니, 옥중의 나경언에게 연락해서 안심하게 해라.
하고 간악한 요부 문숙의는 그날 밤에 영조를 선동해서 세자를 더욱 미워하도록 갖은 말을 고자질했다.
다음날도 친국은 계속되었는데 영조는 우선 나경인을 귀양 정도로 가볍게 다루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장격인 남태재와 홍낙순(洪樂純) 등이 반대했다.
신하로서 임금 대저를 고발한 것만으로도 대역죄가 성립됩니다.
역적을 고발한 자는 상을 주어야 한다.
왕의 고집은 대단했다.
세자를 역적이라고 부르시면 상감의 경우가 어찌 되십니까?
경들의 왜 형식만 갖추려 하고 죄의 진상 조사는 피하려고만 하오.
하고는 영조도 나경언의 구명을 포기했다. 그래서 나경언은 노론파에게 이용만 당하고 억울한 희생을 당했다. 그가 처형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영조는 또 대신들을 조롱했다.
경들도 나경언같이 충성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용기를 가지시오.
…
대신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영조는
나경언의 유족을 후하게 대우하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영조가 일개 서민인 나경언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관대한 것은 세자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던가를 증명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이때야말로 소위 부왕파라는 노론과 자왕파라는 소론들은 숨가쁜 암투를 벌였다. 나경언이 처형되자 문숙의를 중심으로 세자배척의 운동이 더욱 속도가 가해졌다. 그와 동시에 위급해진 세자를 구하려는 운동도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세자를 살리려는 구명운동을 영조의 노염에 불을 지르는 역효과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충신의 말보다도 후궁인 요부 문숙의의 말을 믿게 된 영조의 마음은 아들을 원수로 삼는 악마로 화해 버렸다. 문숙의는 세자의 생모까지 위협적으로 농락했다.
이번 사건으로 상감의 감정을 더 상하게 하면, 동궁 뿐 아니라 동궁빈과 세손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이런 협박에 놀란 세자의 생모까지도 영조에게, 세자는 처분하더라도 빈궁과 세손은 보호 해 달라는 애원을 했다. 이것은 생모까지도 세자를 죽이라고 승낙한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세자 처단을 결심한 영조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선원전(璿源殿)에 참배하고 중대한 결의를 고했다.
불효 자식 때문에 열성께 큰 죄를 지을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아비 왕을 시역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자식에게 자결을 권하겠으니 저의 이 고충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런 최후의 절차를 밟은 뒤에, 영조는 친국장소인 휘녕전으로 나왔다.
인젠 동궁이 죽었구나.
혜경궁은 남편이 오늘로 죽을 것을 직감하고 기절해 버렸다. 세자를 불러 낸 뒤에 승지를 시켜서 세자의 관과 버선을 벗기고 뜰아래 엎드리게 했다.
더 말하지 않겠다. 속죄하려면 이 자리에서 자결하라.
냉혹한 선언이었다. 부친이 아들에게 자살하라는 형식으로 죽이려는 것이었다.
영의정, 세자가 자결하기 전에 먼저 세자위(世子位)를 폐하게 하오.
그런 것은 대신들에게 분부하셔서 심중히 정하도록 하십시오.
영의정 신만도 민망스러워서 이렇게 아뢰었다.
왕실에 관한 일은 내 집안 일이요. 내 말대로 하시오.
영조는 영의정에게 호령했다.
아버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세자도 이때만은 본 정신으로 목숨을 빌었다. 이마로 땅을 부딪쳐서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대신들은 다 밖으로 나가시오. 내 집안 일로 경들의 수고를 끼치지 않게 하겠소.
대신들도 하는 수 없이 밖으로 퇴장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문 밖에서 동정을 살피던 소년 세손이 울면서 들어왔다. 세손은 땅에 엎드린 부친(세자)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비 대신 저를 처벌해 주십시오.
네가 또 왜 왔느냐?
하고 시신을 시켜서 세손을 밖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했다. 영조는 그 뒤에 칼을 빼어 들고 세자 앞으로 내려갔다.
어서 이 칼로 자결해라.
동궁의 시신들이 하는 수 없이 세자를 묶은 포승을 풀었다. 자살할 손을 자유롭게 해준 것이다.
동궁의 시신들도 물러가라.
영조는 또 명령했다. 시신들도 하는 수 없이 물러났으나 한림(翰林) 임덕제(林德 )만은 세자 옆에 엎드려서 함께 죽으려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군사를 시켜서 그도 끌어내 보냈다. 세자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듯이
한림, 한림까지 가면 어떡하오.
하고 한림의 옷자락을 잡고 울었다. 그러나 군사들은 세자의 손을 잡아 떼고 한림을 끌어냈다.
아버님, 살려 주십시오.
모든 신하가 쫓겨 나가고 군사들만 남은 적막한 휘녕전 안에는 냉혹한 살기만 등등했으나 세자는 부자지간에만 통할 수 있으리라는 최후의 애원을 했다.
네 죄를 알거든 어서 이 칼로 자결하라.
영조는 아들에게 자살을 권했다. 그러나 세자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차라릴 부친이 직접 죽일지라도 자살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설마 죽일까 하는 일루의 희망이 없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들 뒤주를 가져 오너라.
영조는 자결하지 않는 세자를 뒤주 속에 넣어서 죽일 생각으로 내관(內官)에게 명했다.
내관들은 소주방으로 가서 큰 쌀 뒤주를 운반해 왔다.
너 죄를 용서 받으려면 이 속에 들어가서 천지신명에게 조용히 빌어라.
아버님, 그러면 용서하시겠습니까?
세자는 망설이면서도 칼보다는 좀 안심한 듯이 물었다.
어서 들어가서 속죄하라.
세자는 하는 수 없이 뒤주 속으로 들어갔다. 큰 뒤주였지만 간신히 무릎을 세우고 앉을 정도의 넓이였다. 영조는 손수 뚜껑을 탁 닫고, 쇠를 철컥 잠갔다. 그 순간 뒤주 안은 암흑세계로 변했다.
(언제나 용서하고 뒤주에서 내주실 것인가)
세자는 그런 일루의 희망을 걸었으나 그것이 산송장의 관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왕은 쇠 잠긴 뒤주를 엄중히 감시하라고 명령하고, 풀을 뜯어다가 퇴비(堆肥)처럼 덮어 쌓았다. 폭양 아래서 풀 더미는 찌는 듯한 열기로 뒤주 속의 세자를 질식시켰다. 그리고 사흘 만에 세자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서인(庶人)이 된 세자의 아내 혜경궁은 영조께 상소하고 세손과 함께 친정 홍봉한 집으로 물러 나갔다. 혜경궁은 자결하고 싶었으나 아들(세손)의 장래를, 위해서 모진 목숨을 끊지 못했고 그때부터 늙을 때까지 눈물로 쓴 사도세자의 장편 비극을 남겼는데, 이 저술이 국문학의 중요한 고전(古典)의 하나인 [한중록(恨中錄)]이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서 죽인 노망한 영조도, 나중에 노론파의 음모인 것을 깨닫고 후회 했으나, 죽은 아들을 살릴 수는 없었다. 총애하던 후궁 문숙의를 귀양 보내고 음모에 관련한 노론파를 처형했으나 그래도 영조는 즉위 이래 오십여 년 동안이나 당파싸움을 금지하려고 소위 탕평정책(蕩平政策)을 써보았으나, 자신도 노망한 만년에 가서는 그 당파싸움에 말려들어서 자기 아들 사도세자까지 참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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