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비사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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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편 1

조선편 2

조선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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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편 6

조선편 終

 

찾아온 행복

 

세조는 천수를 오십이 세로 흉악한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승하했다. 아들이 둘 있었으나 장자는 세자로 책립된 후 나이 이십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둘째 아들 또한 즉위하고 이년 만에 이십 세의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정순왕후는 삼십 안에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녀에게 이제는 이 퇴락하고 넓은 구옥이 싫어졌다. 아니 서울 문안이 지긋지긋하도록 싫었다. 어디 조용한 문 밖으로 옮겨서 살고 싶었다. 상감이 계시던 영월을 향한 동문 밖으로 나가서 상감을 바라보며 늙어가고 싶은 것이었다.

그녀는 이 뜻을 정미수에게 의논했다.

정미수는 홀로 있고 싶어하는 뜻을 헤아려 조용한 집 한 채를 동문 밖에다 주선해 주었다. 그들은 간단히 짐을 꾸려 문 밖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일한 방문객은 정미수가 있을 뿐 일과는 단조 그것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영월 땅을 향해서 삼배를 드리고 무엇이든지 소식을 올렸다.

“상감마마,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수양대군은 세상을 떴다고 하옵니다. 하늘은 무심치 않은 법입니다. 신첩은 오래 이 땅에 살아 있으면서 그의 최후를 목격했습니다. 그의 두 아들 중에서 큰 아들은 세자로 책봉되자 죽고 작은 아들은 재위 이년 만에 또 세상을 버렸사옵니다. 이제는 이 몸도 하루 빨리 천명을 마치고 상감 곁으로 가고 싶사옵니다.”

그녀의 삶은 문자 그대로 미망인이었다. 아직 죽어지지 않는 몸이니 목숨을 부여잡고 있는 것 뿐이었다.

월선이도 서른 살이 되었다.

“중전마마, 대감께서 보내 오신 약식 좀 잡수시겠사옵니까?”

“아니다. 이따가 점심때나 먹자. 그럼 한끼 그걸로 메꾸지 않겠니?”

“마마께오서는 쌀이 많사온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끼십니까?”

“그런 소리 아예 말아라. 부원군께서 우리 양식을 대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되는 줄 모르느냐?”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엊그제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가끔 떡도 해서 봉양하고 식혜도 해 올리라고 말씀하셨사옵니다.”

“고맙기도 하신 양반! 벌써 근 십여 년을 여일하구나.”

정미수의 정성은 지극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더욱 그의 정성이 뚜렸했다.

얌전히 꾸며진 앞마당의 일년초가 피어난 여름날이었다. 분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으니 저녁 지을 때가 됐나 보다 고 월선이가 분주해 했다. 이때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 오너라.”

월선이가 뛰어나가 맞았다. 정미수였다. 회색이 만면한 걸 보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지면서 그녀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중전마마, 문안드리옵니다.”

“어서 오시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시오? 그러히 회색이 만면하니…”

“예, 마마! 이제는 마마께오서도 한숨 푹 쉬시고 사실 수 있게 되시옵고 저희들도 뜻을 얻었는가 하옵니다.”

월선이는 부엌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뛰어 나왔다.

“다름 아니오라 지금의 상감(성종)께오서 중전마마의 정경을 인편에 들으시옵고 그런 분을 여지껏 초토에 묻혀 놓고 있었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진노하셨다 하옵니다.”

“그 소식은 어디서 들으셨소?”

“예! 저의 집을 드나드는 참판의 조카가 한 사람 있사온데 그 사람이 어저께 집으로 와서 하고 간 말입니다.”

월선이는 참견을 아니 할 수 없도록 기쁨이 넘쳐왔다.

“대감마님! 정말이오니까? 상감마마, 감사하옵니다.”

그녀는 그대로 동향하여 삼배를 올렸다.

“중전마마, 아마 무슨 소식이 분명 일간 궁에서 나올 겁니다. 아제부터는 안심하시고 여생을 제게 의탁하셔서 오래 오래 사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오. 이제 조금은 억울한 상처를 닦아 드렸으니 지금 죽어도 한이 없소!”

“아니옵니다. 마마께서는 천세 만세하셔야 되십니다. 만일 일찍 돌아가셨다면 이 일을 어떻게 아셨겠습니까? 그저 인간은 오래 살아야 싫은 일도 좋은 일도 보는 것이옵니다.”

정미수는 다시 오겠다면서 부디 귀하신 몸 보존하시라고 이르고 돌아갔다.

정미수는 보낸 정순왕후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곧장 앞마당에 있는 늙은 향나무 앞으로 가서 조용히 섰다. 그리고는 동향하고 삼배를 드렸다. 언제나 어떤 기원을 드리려고 할 때 하는 자세였다.

“상감마마! 신첩 지금 죽어도 진정으로 한이 없사옵니다. 상감의 생질인 해평부원군의 소식이 제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신첩 이제라도 곧 상감 곁으로 달려가고 싶사옵니다. 지금의 상감인 성종(성종)께오서 신첩이 이렇게 살아서 초토에 묻혀 있는 소식을 들으시옵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진노 하시더라는 소식이었사옵니다. 세상은 항상 옳은 일은 옳게 평가 받게 되는 것이라고 신첩은 굳게 믿게 되었사옵니다. 상감께오서도 이제는 더욱 평안히 명목(명목)하시고 낙원에서 기뻐해 주시기를 신첩은 삼가 비옵니다.”

마치 옆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같이 중얼거렸다.

그 후 며칠이 지났다.

동문 밖 여기 박명한 여인들이 사는 집에 볕이 들었다.

성종의 칙사(칙사)가 초옥삼간 그녀의 집을 심방한 것이다. 그녀는 마루 한가운데 그대로 앉은 채로 칙서(칙서)를 받아 보았다.

오늘부터 곧 궁중으로 들어와서 살 것과 영빈(영빈)의 호를 하사한다는 황공한 내용이었다.

칙사는 곧 가마를 보내겠으니 듭시라고 말하고 즉시 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얼굴에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오히려 월선이가 기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상감의 칙서가 고맙고 황감하지 않을 리 없었으나 궁으로는 다시 들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궁이라면 시기와 음모의 화신으로만 여겨졌다. 도시 지긋지긋했다.

“중전마마, 지금 곧 가마가 온다고 했사옵니다. 준비를 서두를까요?”

월선의 물음에 영빈으로 봉해진 그녀는 얼굴에 노여운 빛마저 띠우며”너는 아직도 궁 안에 미련이 남았느냐? 나는 결코 아니 들어 가겠다. 금상의 하명을 거역하는 듯하여 황공하온 얘기지만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

단호한 태도였다.

궁으로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의에 성종의 마음도 움직여”그러면 영빈은 자유대로 아무데서나 살아도 좋다!”

는 고마은 분부를 내렸다.

그녀는 가마를 돌려보내고 다시 영월땅을 향해 오늘의 일을 보고 했다.

“상감마마, 안심하시옵소서. 살아 남은 신첩만이 영광을 입는 듯하여 황공무지로소이다.

금상께서 신첩에게 영빈이라는 호를 봉하여 주시고 곧 궁중으로 들어와 여생을 안심하고 지내라는 분부시었습니다. 지금의 상감은 성종이시고 세조의 큰아드님의 차자라고 들었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신첩은 굳이 궁중에 들어가는 것은 사양하였사옵고 이 우거에서 상감을 동향해서 추모하는 재미로 여생을 바칠까 하옵니다. 지금 신첩에게는 이 초가삼간이 어느 훌륭한 궁보다도 귀하고 기꺼운 곳이라는 것을 상감께오서만은 굽어 살펴 주시리라 믿사옵니다.”

그녀는 기쁘다기보다 후련했다.

이제는 월선에게도 적당한 짝을 지어주어서 부부의 낙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 일을 위해서 해평부원군 정미수를 청했다.

상감의 은총이 내린 소식을 들은 정미수는 단숨에 달려왔다.

“중전마마, 축하 드리옵니다. 무슨 말씀으로 경하 올려야 하올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고맙소! 그러고 더욱 고마운 것은 이제부터는 부원군에게 큰 걱정을 끼치지 않아도 연명을 할 수 있는 일이요?”

“그건 무슨 말씀이오니까?”

“아까 칙사에게서 받은 칙서 속에 쌀과 피륙과 또 무엇이 적혀 있었는데 우리 두 식구는 살아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러하오나 제가 할 일은 제가 할 일, 그런 말씀은 아예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고 영빈이라는 호를 받은 것도 아시겠지요?”

“예, 이미 다 알고 왔사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빈마마로 고쳐 불러 뫼시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시오. 그래야 나도 떳떳하게 들을 수 있는 칭호가 아니겠소? 오늘은 내가 부원군과 긴히 의논할 일이 있소.”

“무엇이오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다름 아니고 월선이 저 사람 말이요. 이제 나이가 서른이니 된 늙은 처녀! 아무래도 처녀는 면해 주어야 하지 않겠소? 부원군 의견은 어떻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저도 벌써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사온데… 혹시 홀아비라도 괜찮겠사옵니까?”

“그야 이를 말이요! 저 사람 나이가 몇 살인데 지금 고르고 있겠소. 착실하고 아내 아껴 주는 사람 어디 있으면 꼭 좀 주선해 보시오.”

“예! 곧 주선해서 다시 오겠사옵니다.”

정미수는 기쁜 얼굴로 돌아갔다.

이튿날은 대궐에서 백미 열 가마, 비단 두 필, 인삼 두 상자가 하사 되었다.

그녀는 정미수의 신세를 아니 져도 먹고 입고 지내게 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며칠 후에 월선이의 혼처를 물색해 가지고 정미수가 찾아왔다. 사십이 넘고 슬하에 아들 하나를 거느린 홀아비라고 했다.

월선이가 죽어도 마마 곁은 떠나기 싫다고 해서 행낭방을 하나 말끔히 치우고 신랑되는 홀아비를 맞아들이기고 했다. 영빈으로서는 더욱 잘된 일이었다. 집 안팎 일을 모조리 그들 내외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때문이었다. 정미수도 잘된 일이라고 같이 기뻐했다.

그녀의 생활은 안온했다. 일과도 여전했다. 많은 음식을 해먹을 수 있고 좋은 비단옷을 차려 입을 수 있는 처지가 된 지금에 와서도 소의소식(소의소식)으로 만족했다.

다만 인삼만은 월선이가 달여서 바치는 대로 받아 마셨다.

이제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느 때보다도 안정된 마음이었다.

그러나 슬픔이 엄습해옴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인삼차를 마셔도, 대궐에서 나오는 진귀한 음식을 먹어도 목에 걸려 넘어가지를 않았다.

“마마! 조금 더 드셔요.”

“아니다, 네 아이나 갖다 주고 애 아범이나 내다주어라.”

“마마께서는 이러히 좋은 음식도 구경만 하셔요? 몇 해를 두고 맛도 못 보신 좋은 대궐 음식 좀 많이 잡수시지 않고…”

영빈과 월선의 대화는 판에 박은 듯 같은 말이었다.

월선이는 시집간 이듬해 가을 딸을 낳았다.

본인의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영빈의 즐거움은 이를데 없었다. 손수 저고리를 하나를 명주로 꿰매서 주고 두렁이도 만들어서 입혔다.

월선이 내외는 전보다 한결 더 알뜰하게 영빈을 받들었다.

정미수도 변함없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리 좋은 음식을 대해도, 좋은 비단 피륙을 보아도 마음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언제나 가슴 속은 회한으로 홍건히 젖어 있었다. 상감의 참사정경을 생가해서도 그랬고, 아버지가 귀양지에서 받은 사약을 생각해 보아도 그랬고, 더구나 임종할 때

“아..기..야..”

하고 뜸뜸히 부르다가 숨져간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아도 그랬다.

세월은 흐르고… 영빈의 쓰라린 추억은 흐르는 세월따라 가시지를 못했다.

이제는 사십 고개로 접어든 영빈, 달라진 일이 있다면 조석으로 문안 오는 객이 많아졌다는 것 뿐이었다.

정미수는 장성한 아들을 동반해서 곧잘 문안을 왔다. 성종도 성의를 다해 영빈을 돌보았다. 이제는 미운 사람도 원망스러운 사람도 없어졌다. 찾아오는 사람은 반겼다. 가는 사

람은 다시 만나자고 기약했다.

어떤 사람은 마치 마마께오서는 살아 계신 부처 같다고 했다. 사심(사심)이 없는 그녀는 진정 부처 같기도 했다.

월선이는 후에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그들 내외는 금실도 좋았고 애들도 잘 키웠다.

영빈은 억울하게 세상을 따난 상감의 제사와 양친의 제사를 한 번도 빠짐없이 지내는 일과 월선의 두 아이들 재롱을 보는 일을 생활의 낙으로 삼았다.

밖은 소복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방은 군불을 많이 지펴 따뜻하고 아늑했다.

언젠가 이런 날, 대궐에서 며칠이나 상감이 중전인 자기 처소로 들지를 않아 초조한 가슴으로 기다리던 기억이 되살아 왔다.

갑자기 단신으로 찾아온 상감이 더 이상 왕위를 지킬 수 없게 되어 양위해야 되겠다는 말을 하던 때의 모습이 너무나 똑똑히 떠오른다. 그 음성이며 표정까지가 모두 새삼스러워졌다.

영매(영매)하기만 한 상감의 용안이 흐려지다 못해 찡그려져 뵙기 너무나 민망했다.

바로 이런 눈오는 밤, 궁전의 화려한 중전 처소는 지금 이 방과 같이 더웁고 훈훈했었다.

영빈은 회상 속에서 깨어나 조용히 일어났다. 방문을 열었다. 대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좁은 단 두간짜리 마루였다.

영빈은 뜰로 내려섰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 오히려 시원했다.

그 자리로 내려가 섰다.

그리고 영월땅을 향해 삼배를 드렸다.

“상감마마, 신첩 오늘은 잠을 못 이루겠사옵니다. 양위를 결심하시던 날 신첩에게 오셔서 심중을 말씀하시던 그날이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아니었사옵니까? 상감! 빨리 이 몸도 상감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이제는 진정 이 이상 이승에 머물러 있을 까닭을 못 찾겠습니다. 어서 데려가 주십시오.”

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아니 하고 그대로 쏟아지는 눈을 함빡 맞았다.

세월은 흘러갔다. 정미수는 자꾸만 영빈에게 자기 집에 기거하도록 청했다. 그러지 않아도 어떤 결정이 있어야 될 때라고 영빈은 요즈음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의 머리에 백발

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월선이 내외에게도 자유를 주고 마음대로 살게 두고 싶어서였다. 마침내 영빈은 하루를 잡아 정미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였다.

지금 이 집은 월선 내외와 아이들에게 주기로 했다.

새로 얌전하고 조용한 몸종이 하나 영빈을 시중하게 되었다.

영빈의 거처는 후원에 자리잡은 별당이었다. 역시 영월 하늘을 쉽게 바라볼 수 있고 초목과 화초가 우거진 넓은 뜰이어서 좋았다. 영빈의 나날은 어디 가서나 어느 때나 조용하면서 기품에 넘쳐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절로 머리가 숙어지게 하는 일과였다.

 

 

꿈길에서

 

정미수 집으로 영빈이 옮긴 지도 어언 반년, 댓돌 밑에서 울어예는 귀뚜라미 소리가 날로 길어 가더니 벌써 겨울도 지났다.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다. 후원에는 매화가 피고 철쭉도 피었다.

후원 별당의 늙은 여주인 영빈은 오늘도 조용히 마당을 거닐었다. 뒤에는 정란이라는 몸종이 따른다.

“얘, 저기 철쭉이 피었구나!”

“예, 어제까지도 봉오리로 있었사온데 아침에 일찍 나와보니 피어 있었사옵니다.”

“정란아! 초목은 이러히 다시 살아나는데 어찌하여 인간만은 그것이 안 된단 말이냐.”

정란이는 영빈마마의 심중이 짐작갔다. 월선이같이 영빈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그 마음을 헤아리고 점치지는 못하나 벌써 반년이나 모시고 보니 영빈의 심중을 어언 짐작하게 되었다.

“너만은 봄 같은 나이를 나 때문에 버리게 하지 말고 빨리 시집을 보내야 하겠다.”

조금도 거짓 없는 걱정거리였다. 월선이를 삼십이 되도록 그냥 두었다가 남의 헌 신랑한테 보낸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미안스러운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정란이는 영빈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귀밑까지 빨개졌다.

“아니다, 분명히 때가 있는 법! 그 순이 엄마 보아라. 나 때문에 삼십이나 돼서 시집을 가지 않았겠니? 그 사람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느냐! 말이 상인(상인)이고 태어나기 그렇

지… 그 사람한테 부족한 데가 무엇이 있겠느냐? 행동거지하며 바느질, 음식솜씨, 게다가 어깨 너머로 얻어 배운 글도 웬만한 문자는 다 알아 볼 정도이고… 단지 시집갈 나이가 넘어서 늙은 처녀라고 홀아비한테 가지 않았겠느냐. 그것이 말이 없고 점잖아서 그렇지 남의 자식 기르느라고 얼마나 속을 썩였겠느냐! 그걸 생각하면 오로지 내 죄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너는 올 가을이나 늦어도 내년 봄에는 시집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마마께서는 그저 저만 보시면 그 말씀만 하시네요.”

“얘, 넌 지금 열여섯이라고 했지?”

“네.”

“그럼 어서 서둘러야지! 늦었다 늦었어. 난 열세 살에 궁중으로 들어가서 으젓이 중전 노릇을 했는데…”

“마마께서야 어찌 저희들 같은 상것에 감히 비할 수 있겠습니까?”

양반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기들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마! 쇤네는 말이예요, 순이 어머니 같이 오래오래 마마님 모시고 이대로 살고 싶사옵니다.”

“아니다. 그건 죄스러운 일! 다시는 난 그런 죄는 안 저지르겠다.”

“뭐이 그리 죄이오니까? 순이 어머니는 마마님 오래 정성껏 뫼신 덕택으로 시집을 잘 가서 그렇지… 그렇지 못한 저희들 같은 사람들은 그 시집간 후에 고생이 말이 아니온데요.”

“그런 소릴 어찌 하느냐? 잘 살고 못 사는 건 누구나 제가 지닌 팔자! 그것만은 억지로할 수 없느니라.”

영빈은 마치 자신에게 타이르기라도 하듯이 말을 마치고 항상 마당에 나서면 한 번씩 바라보던 먼 영월 하늘을 바로보는 것이었다.

지아비가 참사를 당하는 마당도 가지 못했던 팔자는 무슨 팔자일까? 상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녀는 분명 밤을 도와서라도 남편의 시체를 뫼시러 갔을 것이다.

영빈은 근래 더욱 흰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늘었다.

정란이는 언제나 보는 마마의 뒷모습이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쓸쓸해 보였다.

언제까지나 마마님을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쓸쓸하게 늙어가는 영빈을 위로할 사람은 자기 뿐이라는 마음이었다.

정란은 월선이 못지 않게 영빈을 알뜰하게 모셨다.

영빈에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영빈의 은은한 체취와 너그러운 기품이 사람을 감화시키는 때문인지도 몰랐다.

영빈은 얼마 전부터 무언지 눈에 안 보이는 어떤 큰 힘이 온 우주와 인간을 보살피고 키우고하는 것 같은 막연한 신심(신심)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것은 낙원에 있으리라고 믿는 상감에 대한 추모와 자기 몸을 낳아주고 길러준 양친 두 분에게 대한 회상과 함께 더욱 절실해지고 있었다.

“영빈마마! 제가 왔사옵니다.”

한가한 한나절, 매화고목에서 우짖는 새소리만이 낭랑히 들려오는 영빈의 별당 앞에 정미수가 와서 문안을 드렸다.

“어서 안으로 드시오. 웬일이시오? 대낮에”

“예! 대궐에서 사람이 나와 내일 경북궁에서 중전마마가 베푸시는 꽃놀이가 있사온데 재백사(제백사)하시고 빈마마께서 듭셔서 같이 하루를 즐기시자는 중전마마의 직접 분부를 가지고 왔습니다.”

“고마운신 중전마마의 은총이오만 어찌 내가 그런 호화로운 지리에 나가겠소?”

“마마! 그러지 마시옵고 꼭 듭셔서 꽃놀이를 즐기고 나오십시오.”

“무슨 말을 하시오.!”

그녀의 얼굴빛은 누구도 감히 더 권유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섭고 찼다.

아무리 좋은 놀이라도, 아무리 호화스런 모임이라도, 영빈에게는 즐거운 일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정미수는 황공한 태도로 묵묵히 앉았다가 자리를 물러났다.

정란이는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생각해 내려고 애를 쓰다가 마마의 얼굴빛을 살피며 마마를 불렀다.

“마마! 쇤네 대궐 구경 좀 하고 싶사와요. 내일 꽃놀이를 가셔야 쇤네도 마마님 뒤를 따라 가보지 않겠사와요?”

응석 섞인 목소리로 조르듯이 영빈 얼굴을 올려보며 하는 소리였다.

“오냐, 네 마음 어찌 내가 모르겠느냐! 그러나 너도 무슨 인연으로 이런 늙은 나를 주인으로 섬기게 되었는지 민망하구나.”

“마마! 쇤네 공연히 한 말을 드려 본 것이옵니다. 쇤네는 이대로 마마님 뫼시고 곁에 가깝게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누구부다 행복하게 여겨오고 있사옵니다.”

“내 일찍 양반집 규수로 태어나 지아비를 일국의 왕으로 모신 것을 가장 불행한 일이라고 알고 지낸 날이 얼마인지 헤아릴 길이 없구나. 그러나 내가 철들 때부터 충성스런 월선이가 곁에 있어 나이 오십이 되도록 수족처럼 따르더니 이제 또 너 같이 영리하고 예쁜 애가 나를 도웁고 충비가 되어 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영빈의 노안(노안)에 빛이 보였다. 이슬이 눈에 맺혔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 전에 언제나 하던 버릇대로 뜰로 내려가 영월땅을 향해 재배를 잊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이제는 고만 침소로 듭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오냐”

요사이는 그렇게도 보고 싶은 상감이 꿈길에서나마 안 나타나 주었다.

이것도 한(한)스러운 일이었으나 이제는 그대로 체념을 한 채 나날을 지냈다.

영빈은 명주로 만든 누비 잠옷을 입고 궁에서 보내온 비단과 솜으로 새로 마련한 푹신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수강궁을 나온 후에는 처음 입는 명주옷이요, 비단 이불이라 굳이 사양했으나 정미수와 그의 며느리가 권하고 정란이가 소복을 벗게 하고 입힌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원컨대 상감을 한 번 그전같이 꿈길에서나마 만나게 해줍시사 하고 무언의 기원을 하면서…

가시밭길이었다. 영빈은 당황했다. 꼭 이길을 빠져나가야 상감을 뵈옵게 된다고 자꾸 생각이 들어서였다.

도저히 늙은 자기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이 험난한, 가시가 솟아 있는 좁은 길이었다.

영빈은 무의식중에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늘하던 대로 무조건 빌어 보자는 심산에서였다.

“저는 꼭 이길을 빠져나가야 되겠습니다. 이 가시밭길을 뚫고 나가야 상감을 뵈올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전 이제 더 이승에서 살 아무 희망도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이 눈으

로 똑똑히 보고 듣고 했습니다. 이제는 지아비되시는 상감곁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이 험한 길을 걸어나갈 힘을 주시옵소서.”

간절한 기원이었다.

그때 기적이 나타났다.

형체는 아무것도 안보였다. 음성만이 낭랑히 들려올 뿐이었다. 뚜렷하게 들려왔다.

“네 정성은 하늘에 사무쳤다. 그대로 안심하고 가시를 밟고 걸어가라!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물면 안 되느니라. 너는 아직 갈 때가 안되었으니… 이말을 명심하고 너의 지아비를

만나고 곧 돌아서야 되느니라.”

고개를 숙이고 숙연(숙연)히 듣고 있던 영빈은 음성이 끝나자 소리 있던 곳을 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무것도 안 보였다.

과연 신은 눈에는 안 보이는 것인가 보다.

영빈은 매무새를 다시 했다. 그리고 용기를 냈다.

한 발자국을 내놓았다. 마치 발이 공중에 떠있듯 절로 걸어졌다. 얼마를 갔다. 마치 구름에 뜬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인가 했다.

앞에 꽉 막힌 게 보였다. 살펴 보니 큰 대문이었다. 대문도 붉은 칠을 한 홍대문이었다.

그문은 절로 양쪽으로 열렸다.

그대로 들어섰다. 굉장히 넓은 마당이었다. 마당이라지만 오히려 대궐 안 정원보다 더 넓고 훌륭했다. 갖가지 수목이 우거져 있는데 백화(백화)가 만발해 있었다. 경회루 같은 못도 있었다.

경회루의 물은 그렇게 푸르고 맑지 못했다.

그런데 이 못의 물은 마치 가을 하늘의 짙푸른, 그 고운 빛이었다. 어찌도 맑은지 감히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저쪽 끝에 남향한 정자(정자)가 보였다. 왠지 그리로 가면 상감이 계실 것만 같았다. 소녀처럼 가슴이 떨렸다.

(만일 상감마마는 아니 늙으시고 영월땅에서의 열일곱이던 그때대로 계신다면 나를 몰라 보시겠지! 그렇다면 나는 어쩐단 말인가! <과인은 너같이 늙은 여인은 모른다. 썩 물러 가라!>하고 역정을 내시면 어떻게 하나?)

영빈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다시 기시밭 앞에서 하던 대로 꿇어앉았다.

“저를 한 번만 더 굽어 살피셔서 그전에 상감을 뫼셨던 때 그대로의 젊은 여인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런 말을 올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우둔한 일이라는 것을 저 역시 잘

아옵니다는… 여기까지 와서 상감을 진노케해드리고 가는 슬픔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사옵니다.”

영빈은 또 아까 그 음성을 들었다.

“안심하고 일어서라! 너는 바로 그 수강궁에서의 모습 그대로니라.”

영빈은 떨리는 다리를 버티어가면서 일어섰다. 홍차마에 연두 반호장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족두리를 얹은 중전 평상복(평상복)이 눈에 들어왔다. 발에도 비단신을 신고 있었다.

영빈은 힘이 절로 났다. 너무나 기뻐서 그대로 <상감마마!>하고 그 정자를 향해서 뛰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중전의 몸! 희로애락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막중한 중전의 몸! 이렇게 입 속으로 외우면서 사뿐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울이 없어 얼굴을 볼 수는 없는 영빈은 손 등을 가만히 살펴 보았다. 분명 그때, 그 중전마마이던 그때의 희고 부드럽고 포동포동한 손이었다.

이제는 안심이 되었다.

손은 얼굴과 같이 늙어가는 것이라고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었다. 상감이그 곳에 계신가 알고 싶어서였다.

아! 저기 계시다. 시동(시동)들을 거느린 상감이 곤룡포를 입고 담소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그 앞에서 읍했다.

“상감마마! 신첩이 왔사옵니다.”

“오! 중전, 얼마나 기다렸었는지!”

상감의 감격은 그녀를 능가했다.

“상감마마! 신첩 멀리 가시밭길을 넘어서 뫼시고 싶어 이러히 왔사옵니다.”

“어서 올라오시오. 그리고 내 옆에 앉으시오.”

이렇게 말한 상감은 좌우 시동을 물리쳤다.

“중전,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얘기 좀 해 보시오.”

“예! 신첩 그저 이러히 우러러뵈온 기쁨에 아무 말도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오, 중전!~”

상감도 말을 못했다. 영빈은 할 얘기가 너무나 많았다. 무슨 얘기부터 먼저 해서 상감을 기쁘게 해줄지를 몰랐다.

“중전, 어서 얘기 좀 해주오! 속세에서는 어떻게 지내셨나 못내 궁금하구료.”

“상감마마!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사옵니다. 모든 것이 저희들 중생(중생)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규칙으로 끝이 난 것이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어서 차근차근히 말 좀 하구료.”

“예, 상감마마! 신첩의 지난 생활은 이 좋은 곳에서 이제는 말을 드릴 필요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금상께옵서 영빈이라는 호를 하사 하시고 먹고 입고 지내기 넉넉하게 성은을 베푸신 것과 상감의 생질 해평부원군 정미수가 신첩에게 바쳐온 충심은 이루 둔한 입으로 말씀 드리기가 난감하옵니다.”

“오, 갸륵한 일이로다! 지금의 상감이 누구시란 말이요?”

“예! 세조는 탈위 이후 겨우 십삼년을 있으면서 못된 피부병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슬하에 이자(이자)를 두었으나 장자는 세자로 책봉한 직후 나이 스물에 세상을 떴고 둘째는 즉위한 후 재위 이년 만인 스무살에 또한 세상을 떠났사옵니다.”

“오! 하늘이 무심치 않으셨구나!”

“그 후에 즉위하신 분이 바로 지금의 상감인 성종이옵니다. 그 망극한 성은을 신첩 혼자만 분에 넘치도록 받자오니 황공하기 그지 없사옵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오? 당연하고 또 지당한 처사! 무엇이 황공하단 말이요?”

“그리고 지금은 아무 걱정없이 정미수에게 이 몸을 맡겨놓고 있사오니 모두가 하늘이 하시는 차사인 줄 아옵니다.”

“중전의 고생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일, 그리고 여양부원군의 화도 짐작이 가긴가오마는…”

“예, 상감께오서 참사를 당하시고 곧 후에 귀양갔다가 사사당하셨사옵니다.”

“오, 고얀지고! 부친도 안 계신 민가에서 얼마나 그 고생이 지대하였겠소? 짐작하고도남음이 있는 것 같소!”

“상감, 이제는 그런 슬픈 얘기는 필요없는 때… 어서 빨리 신첩도 여기 와서 친히 이러히 뫼시고 나날을 즐기고 싶사옵니다.”

“아무렴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얼마나 많이 중전을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인데…”

“그러나 전 아직 여기에 올 때가 못됐다고 하더이다.”

“아니 그 말을 누가 했단 말이요?”

그녀는 아까 본 기적을 빼놓지 않고 얘기 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 이곳의 시간이라는 것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데라오. 세상에 나가서 머물러 좀 더 세상되는 구경을 좀 하다가 천수를 마치는 날 내 곁으로 오시오.”

“그러나 신첩은 저 세상에 나가면 다시 육십을 바라보는 늙은 몸이옵니다. 이러히 젊어질 수가 없사옵니다. 세상에 가서는 늙으면 늙은대로 더 대견해지지만… 하나 상감 계신 이곳으로 올 때 그렇게 늙은 몸이 되어서 오면 상감께서 보기 싫은 늙은 여인이라고 거들떠도 아니 보실 것. 신첩은 그 일만이 슬프기 짝이 없사옵니다.”

“그렇지는 않을 거요. 나와 그대에게 지금 여기 올 때에 기적이 있었듯이 그런 기적은 우리들을 영원히 즐겁게 해줄 것이요.”

“상감마마! 그럼 약속 드린, 눈에 안 보이는 그분에게 나무램을 당하지 않도록 이 몸 고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그렇게 하시오. 그러나 언제까지나 기다려야 할까!”

침통한 표정의 상감 용안은 차마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상감마마! 옥체균안하시옵소서!”

섭섭했다. 불급(불급)하게도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발길을 옮겼다. 몇 발자국 옮기다 발밑의 돌에 걸려 쓰러졌다. 순간 잠이 깼다.

분명히 꿈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꿈이냐? 영빈은 꿈에 취한 듯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는 상감 곁에 가는 날까지 후사는 전부 정미수와 그의 자제에게 맡기고 조용히 늙음을 맞이할 작정이었다.

영빈은 천수를 팔십에서 두 살을 더했다고 전한다.

영빈의 위폐와 단종의 신위(신위) 양위는 정씨 문중에서 모시고 그들이 오래오래 제사 지냈다고 전해진다.

 

 

 

龍顔의 손톱자국

나비와 꽃들

 

성종대왕(成宗大王=西紀 1,470-1,494)은 세조(世祖)의 맏아들인 덕종(德宗)의 둘째 아들로서 자기 아버지 덕종이 일찍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조의 손자 자을산군(者乙山君)이라 하였다가 아저씨인 예종(睿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예종은 본래 몸이 약하여 재위 일년도 넘기지 못하고 나이 이십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왕실(王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지위도 높은 이가 세조대왕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였다. 이제 누구에게 왕위를 전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정희왕후 윤씨의 말 한마디로 작정이 되게 되었다. 정희왕후는 원로공신(元老功臣) 신숙주(申叔舟)에게 물었다.

신숙주는 대답했다.

그전부터 세조께서 자을산군을 가장 귀여워 하셨으니 속히 상주(喪主)로 정하여 민심을 안정시키소서.

벌써 신숙주와 정희왕후 사이에는 자을산군을 내세우기로 의논이 다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도 여기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차례대로 말하면 덕종의 맏아들 되는 월산대군 (月山大君)이 될 것이지만…

이리하여 성종은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그때 성종의 나이는 열 세 살이었다.

예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성종은 열세살 때에 당시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던 한명회(韓明澮)의 딸과 결혼하고 있었으며 성종이 임금이 되자 한씨로 왕비를 정하였다.

성종은 점차 자라남에 따라 성질이 너그러우며 모든 일을 재치 있게 잘 처리해 나갔다.

대궐 안에서는 할머니가 되는 정희왕후 윤씨며 어머니되는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며 숙모되는 예종 왕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 등이 있어 성종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곧잘 후원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특히 성종은 자기 형님인 월산대군에 대하여는 늘 미안한 생각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큰 저택을 지어 월산대군을 모셨는데 그 곳이 오늘날 덕수궁(德壽宮) 자리가 되었다.

성종의 나이도 이제 이십이 되었다. 평화로운 세상이 계속되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쌓아 준 평화의 혜택은 손자 대에 와서 꽃이 핀 것이었다. 세종(世宗) 때도 평화스러웠지만 그때는 새로운 일을 하느라고 별로 놀아보지 못했다. 이제는 그때와 다르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는 평화스러운 노래소리가 들렸다. 대궐 후원에서는 매일같이 유량(流亮)한 풍악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수록 임금의 술은 늘어가고 군신 사이의 놀음은 심해갔다.

성종은 이 무렵, 전날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로 있던 윤기무(尹起畝)의 딸을 사랑하여 숙의(淑儀)를 삼았다. 윤씨는 그 당시 장안에서 절세 미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성종이 사랑하는 후궁도 많았지만 그중에 뛰어나게 잘 생긴 윤씨는 특별한 사랑을 한몸에 독차지했다. 밤에 궁중 후원에서 잔치가 벌어지면 각지에서 불러들인 기녀들이 노래와 춤과 재담으로 취흥을 돋구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뒤에는 임금은 신하들에게 직접 큰 잔으로 술을 권했다. 신하들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게 취하여 거의 매일 밤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렇다고 해서 성종은 주색(酒色)에 빠져서 다른 일을 돌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낮에는 정치에 유의하여 공명정대한 처결이 많았기 때문에 국태민안(國泰民安)의 황금시대를 이루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성종을 평하기를 주요순, 야걸주(晝堯舜, 夜桀紂)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낮에는 중국의 옛날 요(堯)와 순(舜) 임금과 같이 선정(善政)을 하고 밤에는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처럼 주색을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걸(桀)과 주(紂)는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치고 말았지만 성종은 그렇게 놀고 주색에 빠졌다 할지라도 낮에는 요순(堯舜)과 같이 선정을 베풀어 나라를 부강케 했다는 것이다.

성종이 이루어 놓은 가장 두드러진 사업 몇 가지만 들더라도 이 점은 곧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등의 편찬과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완성 등이 모두 이때에 이루어진 사업들이었다.

이렇듯 성종은 명철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정치도 공명정대하게 잘하는 임금이었지만 연락(宴樂)과 동시에 색(色)을 좋아하는 단점이 있었다. 성종은 그 후에도 윤호(尹壕)의 딸 윤씨를 숙의(淑儀)로 맞아들이고 이어 권숙의(權淑儀), 엄숙의(嚴淑儀), 정소용(鄭昭容) 등을 사랑하였다.

성종대왕 오년 사월 십오일에 왕비 한씨가 나이 열아홉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년 후에 숙의(淑儀)로 있던 윤씨(윤기무의 딸)를 승차시켜 왕비로 정했다. 윤씨는 왕비로 승차한 넉 달 후에 원자(元子)를 낳았다. 첫아들을 낳았으니 임금의 사랑은 높아질대로 높아졌고 따라서 윤비의 교만한 생각도 이만저만한 지경이 아닐만큼 도에 넘치게 되었다.

윤비(尹妃)는 워낙 규모 없는 가정에 태어난 몸이어서 어려서부터 별로 보고 들은 것 없이 자란데다가 타고난 성품이 간악하여 투기가 자심(滋甚)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국모의 지위까지 차지하게 되었으니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다. 이제는 자기 명령만 내리면 무엇이나 소원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윤비의 교만과 사치는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지존(至尊)의 사랑을 자기 혼자만 독차지 하려는 욕심이었다. 질투심이 강한 윤비는 임금이 다른 비빈(妃嬪)의 방으로 들어가는 날 밤이면 시기심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그날 밤은 한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후원에는 임금의 후궁이 많아 오늘은 이곳 내일은 다른 곳, 나이 이십여세가 된 임금은 호색하는 심정도 더욱 늘어갔다. 그 중에서도 권숙의(權淑儀), 엄숙의(嚴淑儀), 정소용(鄭昭容) 등 세 후궁은 임금의 방탕한 생활을 북돋아 주었다.

성종은 물론 윤비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 성품이 호탕한 임금은 왕후 한 사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윤비가 제아무리 시기를 하더라도 다른 비빈에게도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고 있었다. 청초한 정소용, 산뜻한 엄숙의, 구수한 권숙의 등 사람마다 대해 주는 맛이 각각 달랐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왕비와 숙의 소용 사이의 투기는 날이 갈수록 심해 지기만 했다.

성종 팔년 삼월 어느날, 누구의 소위인지는 모르지만 편지 한 장이 권숙의 집에 전해졌다.

보낸 사람의 성명은 물론 씌어 있지 않았고 다만 감찰가 소송(監察家所送)이라고 씌어 있을 뿐이었다. 그 글 내용인즉 정소용과 엄숙의가 비밀히 서로 협력하여 중궁(中宮) 즉 왕비 윤씨와 원자(元子)를 살해하기를 계획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숨겨 두었다가 발각이 되는 날이면 큰 벌을 받을 것이요, 이것으로 고발을 하면 정소용이나 엄숙의의 생명이 위태할 것이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는 걱정에 치들만 떨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까지든지 이것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정원(政院)으로 보냈더니 정원에서는 다시 임금께 드렸다. 임금은 곧 중신들을 불러 이것이 궁중의 비밀이라 할지라도 중대한 일이니 만큼 어떻게 하였으면 좋으냐?

하는 의견을 묻게 되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이것은 아마도 정소용의 소위인 듯 하나 정소용이 현재 임신(姙娠)중에 있으니 해산(解産)한 후에 국문(鞠問)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므로 성종도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윤비의 마음은 더욱 허전해졌고, 후궁들이 자기 모자를 음해하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자 불현 듯이 두 후궁을 없앨 계획을 세우고 비상(砒霜)을 준비하여 간직해두었다.

임금은 자라나는 아들의 재롱이 귀엽기 한이 없어 낮에 틈만 있으면 윤비의 방으로 곧잘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하루는 윤비 방에 앉아 있다가 머리맡 서안(書案) 위에 비단 주머니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무심히 열어 보다가

앗!

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임금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비단 주머니 속에는 천만 뜻밖에도 비상 한 덩어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은 또 서안 밑에 놓여 있는 작은 상자 하나가 눈에 띄는대로 얼른 그 상자도 집어서 열어 보았다.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은 하연 종이 한 장 뿐이었다. 옆에 있는 윤비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서 떨기만 할 뿐이었다. 그 종이를 꺼내서 읽어 내려가던 임금은 또다시 놀랐다. 거기에는 정소용과 엄숙의를 방양(方穰)하는 글이 씌어 있었던 것이다. 방양이라는 것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그 종이를 땅에 묻고 날마다 그위로 밟고 다니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일종의 저주문(詛呪文)인 것이다.

음, 악독한 계집이로군!

임금의 입에서는 그런 노여움이 무심중에 새어 나왔다. 하마터면 무서운 참극이 궁중에 벌어질 뻔했다고 생각하니 이 사실을 발견한 이상에는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윤비도 이미 임금의 그런 뜻을 깨달았는지 이제는 고개도 들지 못했다.

이것이 모두 어디서 생긴 것이요?

이윽고 임금이 입을 열었다. 중궁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요전에 친잠(親蠶)하러 나갔을 때 삼월이라는 종년이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임금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것이 심상한 일이 아니라 곧 삼월을 불러다가 자백을 시켰다. 삼월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다가 마침내 형장(刑杖)과 고문(拷問)에 이기지 못하여 모든 것을 순순히 자백했다. 그 공술(供述)에 의하면 방양서에 쓴 글씨는 사비(四非)라는 종년과, 또 윤비와 인척이 되는 선전관(宣傳官) 윤구(尹 )의 처와 둘이서 쓴 것이고, 비상 주머니는 장흥부인(長興夫人) 즉 윤비의 어머니 신씨(申氏)가 내어준 것이며, 그리고 석동(石同)이라는 사람을 시켜 윤비와 원자를 해치겠다는 글을 권숙의 집에 던지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성종은 신씨의 작위(爵位)를 빼앗고 삼월은 교형(絞刑)에 처하고, 사비는 장(杖) 일백 개를 때려서 변방(邊方)의 관비(官婢)로 내쫓았다.

이 사건은 중궁이 임금을 해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마는 정소용과 엄숙의를 없애려고 한 것이니 이는 투기심에서 나온 행동이라, 투기는 좋은 일이 아니다. 만일 그 마음이 자라나는 날에는 자기의 뜻대로 안 될 때 여기서 더 심한 생각도 들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하여 임금은 몇몇 중신들에게 말하기를 중궁이 이미 국모(國母)가 될 뿐 아니라 원자까지 낳았으니 어떻게 처리하였으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중신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그만 기가 질려 아무 말도 하는 이가 없었다. 임금은 중신들이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불유쾌하게 생각하여, 다시 그러면 중궁에 대한 죄목을 정하라.

하고 명령을 내렸다. 예조판서(禮曹判書) 허종(許琮)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중궁에게 죄를 정하는 일은 천하에 드러내어 발표하지 마시옵고, 대궐 안 한적한 곳을 택해서 별처(別處)케하여 이, 삼년 동안 개과천선(改過遷善)할 때까지 기다려서 그때 복위(復位)케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그때 가서 폐출(廢黜)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주장했다. 이에 중신들의 의견에 따라 왕비 윤씨를 별궁에 있게 하고, 선전관 윤구를 옥에 가두었다. 이것이 성종 팔년 사월에 일어났던 일이다.

 

 

 

질투와 질투가

 

그 후로 중궁과 세 후궁 사이의 암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임금은 가끔 별궁에 있는 윤씨를 잊지 못해 그리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면 그때마다 질투에 불타는 윤씨와 임금 사이에 사랑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하루는 싸우는 정도가 너무도 지나쳐 윤씨가 손톱으로 임금의 얼굴을 할퀴어 용안에 손톱자국이 완연히 드러나게 만들었다. 임금도 분개하려니와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韓氏) 즉 성종의 어머니는 이것을 보고 크게 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수대비는 여러 중신들 앞에서 임금의 얼굴을 보이면서 임금의 몸은 옥체(玉體)인데 누가 얼굴에 손을 댈 수 있는 일이냐? 이것은 임금을 해치려는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이니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 야단을 했다.

인수대비는 워낙 윤비를 평소부터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윤비가 아직 숙의(淑儀)의 한사람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고 있을 때부터 그의 성품이 교만하다하여 내심으로는 은근히 미워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를 왕비로 승격시킬 때에도 마음에 매우 마땅치 않았으나 왕비가 궐위(闕位) 중인데다가 윤씨가 덜컥 원자를 낳았는지라 어쩔 수 없이 승낙했던 것이다.

인수대비가 윤비를 싫어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수대비가 정소용, 엄숙의 두 빈궁(嬪宮)을 각별히 사랑하건만 윤비는 그들 두 빈궁을 오래 전부터 미워하고 시기 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시어머니 되는 인수대비와 며느리 되는 윤비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인수대비는 따로 우의정(右議政) 윤필상(尹弼商)을 불러

임금의 옥체에 손을 댄 왕비를 조정에서 논의하여 폐위(廢位)시키도록 하오.

하고 당부했다. 바로 이 윤필상은 세조 왕비 정희왕후의 친정 일가로서 당시 자기의 친척 윤호(尹壕)의 딸이 궁중에 들어와 후궁에서 임금의 숙의(淑儀)로 있었다. 말하자면 같은 자기의 친척의 딸을 왕비의 자리에 앉혀 놓고 윤씨들의 세력을 잡아보고자 하던 때였다.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윤필상은 왕비를 쫓아내려고 획책했다.

성종 십년 유월 삼일 아침 일찍이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상당부원군(上堂府院君) 한명회(韓明澮),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심회(沈澮),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 우의정 윤필상 등이 대궐에 모여 어전 긴급회의를 열었다. 물론 윤비 폐위에 관한 회의였다. 윤비의 폐위 문제는 중대한 국가지사인 만큼 비록 대비의 분부가 있었다 하더라도 임금은 만조백관의 결의에 의하여 최후의 결정을 내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임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날에 중궁의 실덕(失德)이 매우 컸기 때문에 폐위를 시키려 하였는데 경(卿) 등이 모두 옳지 않다고 반대를 하였고, 과인도 중궁이 뉘우치기를 바랐으나 언제까지나 뉘우치는 기색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과인까지도 능멸(凌蔑)히 여기게 되었으니 중궁의 실덕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뒤에 무슨 중대한 일을 저지를지도 알 수 없으니, 인제 마땅히 왕비의 지위를 빼앗아 서인(庶人=보통 사람)을 만들 것이다.

영의정 정창손 등은 중궁은 원자를 두신 분입니다. 이제 하루 아침에 폐위하게 되면 여염집으로 가야 합니다. 전날 정인지(鄭麟趾) 등이 중궁의 집안과 인품을 본 후에 정하신 왕비입니다. 내보내지 말고 따로 궁전을 지어 거처케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임금은 노여움이 더하여

정승들은 모두 물러 가거라. 과인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결단코 이 결심을 번복할 수없다.

하여 기어이 폐위의 뜻을 보였다.

그러나 도승지(都承旨) 홍귀달(洪貴達), 좌승지 김승경(金升卿), 우승지 이경동(李瓊同), 좌부승지 김계창(金季昌), 우부승지 채수(蔡壽) 등만은 남아서 여러번 간청하였다. 임금은 더욱노여워 경 등이 물러가지 않으면 과인이 먼저 내전으로 들어간다.

하면서 일어서 나갔다.

중궁 윤비는 자기를 폐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통곡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인교(四人轎)를 마련해 가지고 온 승지는 통곡하는 중궁의 옆을 받들어 일으키며 어서 수레에 오르십시오.

하고 사인교에 타기를 재촉하였다.

여보 승지! 대궐에서 쫓겨나가더라도 내 아들 동궁이나 한 번 만나고 갈랴오!

중궁은 목을 놓아 통곡하면 애원하였으나 이미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동궁은 인수대비의 어명으로 이미 중궁과의 상봉이 엄금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제까지는 일국의 국모로 갖은 영화와 부귀를 누리던 왕비 윤씨는 오늘은 초라한 사인교에 몸을 실고 통곡을 하면서 대궐문 밖으로 축출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홍귀달 등의 승지들은 차비문(差備門) 안에 나아가 또다시 왕비 폐위의 처분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하는 동시에 인수대비에게까지 가서 청원하였다. 임금은 홍귀달 등이 인수대비에게 청하여 왕비 윤씨를 구원하려는 행동을 미워하여 홍귀달, 김승경, 이경동, 김계창, 채수 등을 옥에 가두게 하였다.

이에 대사헌(大司憲) 박숙진(朴叔秦)과 대사간(大司諫) 성현(成俔) 등이 정식으로 왕비의 죄상을 임금에게 묻게 되었다.

임금은 중신들 회의에서 결정지은 것이니 정원(政院)에 물어보라 했다. 홍문과 직제학(弘文館直提學) 최경지(崔敬止) 등은 또한 임금에게 왕비의 죄상을 물었다. 소위 삼사(三司)에서 연합하여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홍문관 전한(典翰), 이우보(李祐甫)에게 왕비를 폐위시킨다는 일을 종묘(宗廟)에 고제(告祭) 드릴 글을 지으라 하였다.

이때 이우보가 듣지 않으므로 임금은 이우보를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고 다시 조위(曺偉)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했다. 그 후 육조판서(六曹判書)들이 또한 연합하여 폐위의 불가함을 진정하였지만 끝내 임금은 듣지 않았다.

임금은 기어이 왕비 폐위의 이유를 종묘에 봉고(奉告)하는 동시에 왕비 윤씨를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교서를 널리 발표하였다.

한편 폐비(廢妃)가 된 윤씨는 친정에 있으면서 날마다 슬픈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성종에게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성종은 아무리 윤씨를 사처로 내 보냈다 하지만 그래도 아들이 있으므로 날마다 사람을 보내 윤씨의 행동을 살피게 할 뿐 아니라 글로 아무쪼로 회개하라고 타이르고 만일 회개만 한다면 다시 왕비의 지위를 회복하여주겠다고 달래보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회답이며 회개의 태도가 확실히 보인다는보고가 성종에게 전하여질 길이 없었다. 그것은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 한씨의 방해로 인한 것이었다. 인수대비는 고자(宦臣)를 시켜 날마다 윤씨가 소세(梳洗)와 화장에만 힘쓰고 도리어 임금을 원망하는 태도로 교태만 부린다고 임금에게 알리었기 때문에 임금은 그 말을 믿고 더욱 윤씨를 미워하게 되었다.

이렇듯 인수대비의 방해와 투기로 인하여 진정한 윤씨의 생활상태가 임금에게 알려지지 않는 까닭에 윤씨의 처지는 더욱 불리하게만 될 뿐이었다. 그러나 인수대비에게도 근심 걱정은 있었다. 장래에 윤씨의 아들이 왕세자가 되고 필경 지존의 자리에 나아가게 될 것이 뻔한 사실인즉, 그렇게 되면 윤씨가 그 아들에게 모든 사실을 일러 바치게 되고 그런 날에는 궁인들 가운데 큰 살육이 일어날 것이요, 이 일이 벌어져 자기에게까지 해가 미칠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서 어떤 때는 혼자서 근심과 걱정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내친 걸음이라 인수대비는 원자(元子)가 좀더 자라나 철들기 전에 윤씨를 없이 하여 원자로 하여금 이 사실을 영원히 모르게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인수대비는 마침내 임금에게 윤씨를 비방하여 말하기를

내 아들이 자라기만 하여라, 하고 벼르고 있는 모양이니 이대로 버려 두었다가는 장차 대궐 안에 무리 장사가 날 터이니 윤씨를 빨리 처치하라.

고 했다. 임금도 윤씨가 회개하지 않는 한에는 그 성질도 반드시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드는 터에, 자기 어머님의 말씀도 있고 보니 어떤 기회에 윤씨를 처치하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

왕비 윤씨가 대궐에서 쫓기어 자기 친정으로 들어간 것이 성종 십년 유월 삼일이다. 그로부터 어느덧 삼년이란 세월이 흘렀갔다. 그 동안에 임금은 또 다른 숙의 윤씨 즉 윤호(尹壕)의 딸을 승격시켜 왕비로 정하여 천하에 발표했다.

인수대비의 감독과 주의가 면밀하여 폐비 윤씨의 현상을 그대로 임금에게 알리는 사람도 없었고 또 알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사실이 감추어질 수는 없었다. 윤씨가 회개하는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이 차츰 세상에 퍼졌다. 여기에 놀란 사람들은 백관(百官)들이었다. 백관들은 직접 사실을 임금에 알렸다가는 어떠한 명이 내릴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요, 또 인수대비에게 불리할 것이라하여 감히 말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떠돌게 되고 윤씨에 대한 동정이 많이 전하게 되어 아무리 요순(堯舜) 같은 성종 임금이라 할지라도 윤씨에 대한 처사만은 공평치 못하다고 당시 백성들이 의심을 품었다.

이에 성종 십삼년 팔월 십일일에 이르러 시강관(侍講官) 권경우(權景祐)는 임금 앞에 나아가 폐비 윤씨가 여염집에 애처롭게 처하여 있는 것은 온 국민이 모두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는 터인즉 어떤 특별한 곳을 택하여 거처케 하는 동시에 생활품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다. 이때 옆에 있던 대사헌 채수(蔡壽)와 한명회 등도 한경우와 입을 모아 폐비 윤씨의 별처 공봉(別處供奉)을 청했다.

임금은 소리를 높여

경 등이 윤씨를 여염집에 있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원자에게 아부하여 다음 대에까지 영화를 바라보자는 그런 천박한 생각에서 하는 소리가 아니냐?

하고 호통을 쳤다.

동지사(同知事) 이극기(李克基)며, 대사헌 채수며, 검토관(檢討官) 안윤손(安潤孫) 등은 신 등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임금은 또한 말을 이어

경 등이 만일 원자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 무슨 까닭으로 군부(君父)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인가? 근일에 박영번(朴英蕃)이라는 사람이 글을 올려 윤씨의 말을 했으나 이 사람은 현직이 아니니 그냥 둘 수도 있지만, 지금 경 등이 말하는 것은 모두 윤씨만을 위한 것이지 과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고 공박했다. 권경우와 채수 등은 그래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다.

임금은 이것을 매우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임금은 마침내

너희들이 경연관(經筵官)으로서 과인의 뜻을 알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자꾸만 하니 과연 너희들은 윤씨의 신하인지 이씨의 신하인지 알 수가 없다. 현재 윤씨가 처형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이것은 필경 윤씨의 집안과 불초(不肖)한 무리들이 서로 인연이 되어 말을 전한 모양이다.

하고 윤씨의 배다른 오라버니 윤구, 윤우 등을 의금부에 가두어 버렸다.

십이 일에는 임금이 채수와 권경우를 불러 폐비 윤씨의 일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물어 보았다. 채수와 권경우는 전날처럼 똑똑히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나라 일이 나날이 그릇되어 간다고만 할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윤씨는 원자의 어머니이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귀에는 이런 말이 윤씨에게 아부하는 것처럼 들리기만 했다. 노기등천한 임금은 중신들을 불러 채수와 권경우의 죄를 의논케 하고 그러고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 전에 상소문을 올린바 있는 박영번을 금부에 가두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번갈아 가면서 윤씨를 그대로 여염집에 두어서는 안 된다느니, 원자가 있는 이를 그렇게 할 수 없다느니하여 임금과 인수대비의 심정을 괴롭히자, 이것이 비록 윤씨를 위한 말이라 할지라도 도리어 윤씨를 위해서는 크게 불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대사헌이니 대사간이니 무슨 사림(士林)이니 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상소(上疏)질을 하는데, 이것이 하루도 빈 날이 없이 들어오니 임금은 마침내 성이 가시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임금은 이제 더 윤씨를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까지 생각이 들게 되었다.

십육 일에는 임금이 인수대비와 의논하고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임금은 곧 문무백관을 불러 놓고 폐비 윤씨는 원래부터 음흉한 여자로서 반역적인 마음을 먹었다. 원자가 점차 자라남에 따라 인심이 그를 동정하는 기미가 생겼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훗일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알 수 없다. 과인은 윤씨가 폐비되었어도 거의 매일 궁중을 저주하고 세자의 장성을 기다려 복수한다는 말을 들었다. 훗일에 폐비는 세자가 임금이 된 후까지 오래 살아서 국정을 어지럽힌다면 종사를 어찌 구하겠느냐? 과인이 여기서 결심하고 폐비 윤씨에게 사사(賜死)한다.

이 말이 떨어지자 아무도 무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듣고 있는 문무백관의 등에는 진땀만이 흘렀다. 임금은 이내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극균(李克均) 두 사람을 불러

좌승지는 전지(傳旨)를 받들고 의금부도사는 약사발을 담고 가라!

하고 최후의 분부를 내렸다. 이미 최후 단계의 어명은 떨어지고야 말았다. 폐비 윤씨의 생명은 이제 구원될 길이 영영 막히고 말았다.

임금은 사사(賜死)의 어명을 내리고 곧 편전으로 들어갔다. 비록 사직의 백 년 대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폐비에게 사약의 어명은 내렸으나 임금의 심회는 매우 앙앙하였다. 폐비 윤씨는 일찍이 눈에 넣어도 아픈 줄을 모를 만치 사랑하던 여인이었다. 일개 숙의로 있던 그가 원자를 낳자 그로 하여금 중궁으로 삼았을 때에는 그와 더불어 백 년을 해로하려던 여인이었다. 사사롭게는 사랑하던 아내요, 공적으로는 원자의 생모이기에 공사간에 결코 홀대할 수 없는 여인이기도 했다.

(그가 조금만 회개하는 빛을 보여 주었더라도 좋았을 터인데..)

임금은 창가에 홀로 앉아 정원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무심중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임금의 눈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맥없이 흘러 떨어졌다.

 

 

 

피 묻은 손수건

 

이날도 폐비 윤씨는 그의 어머니 신씨와 함께 적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때는 초가을, 아무리 황폐한 정원에도 녹음만은 제대로 우거졌다. 폐비 윤씨는 방문을 열고 정원에 무성한 녹음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나절쯤 되어 어디선가 벽제소리가 아득히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그소리는 시시각각으로 가까이 울려졌다.

아니, 저게 웬 벽제소리요?

두 모녀는 동시에 깜짝 놀랐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는 것을 보면 이 집을 찾아오는 벽제 소리가 분명해 보였다. 이윽고 벽제 소리는 담장 밖에서 요란스럽게 나더니 뒤미처 내시가 대문을 밀고 들어서며

어명이요!

하고 내놓는 것은 뜻밖에도 사약이었다. 어머니 되는 신씨는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사약이 웬일이요?

하고 펄펄 뛰었다.

좌승지 이세좌는 사사전지(賜死傳旨)를 한 구절 한 구절 읽기 시작했다. 폐비 윤씨는 물론 신씨 부인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전지를 받든 사람들로서는 어명을 이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좌승지 이세좌가

속히 분부 거행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엄숙히 말했다. 이세좌의 명령이 내리자 내시들은 목욕물을 데우고 방안을 뜨겁게 하기 위해 아궁지에 장작을 지피기 시작했다.

옛 부터 사약을 받드는 데는 일정한 법도(法度)가 있었다. 즉 약사발을 받는 자는 그 약을 마시기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를 하고 의관을 정제해야만 하였고, 그런 뒤에는 약사발을 상에 받아 놓고 임금 계신 방향을 향하여 세 번 절하고 마셔야 한다. 그리고 그 방에는 방다닥에 발을 대지 못할 만치 불을 뜨근뜨근하게 지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방안이 그처럼 뜨거워야만 약 기운이 몸에 쉬이 퍼지기 때문이었다.

폐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각오한바 있음인지 겁내는 빛은 별로 없었다. 이제는 치를 떨기는커녕 오히려 놀랍도록 침착하기까지 했다.

폐비가 약사발을 마지막 한 모금까지 들이마셨을 때에는 이미 그의 얼굴에는 붉은 핏 기운이 화악 내솟았다. 뒤이어 폐비의 코와 입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 폐비 윤씨는 수건에다 그 입과 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한웅큼 받아 그것을 어머니 신씨에게 내밀어 주면서

어머니, 나는 죽소. 어머니는 이 피묻은 수건을 잘 간직하였다가 다음날 원자가 자라나서 임금이 되거든 그때에 내가 이렇게 죽었다는 증거로 이것을 보여 주오.

하고 신신부탁을 하고 죽었다.

이것을 본 신씨는 금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멀거니 앉아 있다가 딸의 몸을 어루만지며

불쌍하게 고만 죽었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하고 통곡을 했다. 그날로 신씨도 장흥(長興)으로 귀양의 길을 떠났다.

이렇게 하여 폐비 윤씨의 한 많은 생애는 슬픔 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남겨 놓은 한 조각의 피 묻은 수건! 그것은 장차 어떤 비극을 자아낼는지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세좌는 곧 폐비 윤씨의 죽음을 궁중에 알리고 동시에 그 시체를 수습하여 동대문밖에 묻어 주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이세좌는 자기 부인과 마주 앉아 근심에 싸였다.

우리 집 자식들의 앞길이 이제는 막혀버렸소. 동궁이 다음날 임금이 되면 제일 먼저 우리 집 자식들이 걱정이 되는구료.

이세좌가 한숨을 몰아쉬며 마누라에게 하는 말이었다. 마누라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자식들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장차 너희들의 앞길이 걱정이구나.

하고 함께 한숨만 쉴 뿐이었다.

성종은 윤씨를 내쫓고 마침내 죽음을 주었지만 그 쓰라린 마음은 씻을 길이 없었다. 원자를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든지 검은 구름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

다. 원자에게는 자기 어머니를 내쫓았다는 말을 누구에게나 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단단히 한 까닭에 그말을 알리는 이가 없었다. 때문에 원자는 철 모를 때에는 <자기는 본래부터 어머니가 없이 태어났나보다> 하는 생각을 가졌고, 좀 철이 든 다음에는 자기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려니 생각하고 별로 어머니에 대한 일은 관심에 두지 않았다. 원자가 태어난지 네 살 때에 왕비가 쫓겨났으니 자기 어머니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요, 일곱 살 때에 죽었지마는 쫓겨 난 후에는 만난지 못하였으므로 역시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종으로서는 원자에게 대하여는 애연한 생가기 없지 않았다. 한 번은 원자가 훈련원(訓練院) 구경을 하고 온 일이 있었다. 그날 저녁 대궐로 돌아온 원자를 보고 성종은 이렇게 물었다.

너 오늘 훈련원에 가서 무엇을 구경하고 왔니?

성종은 그냥 무심히 물어본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원자의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다.

다른 것은 하나도 볼 것이 없었습니다마는 남문 밖으로 나갔더니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 것이 있었는데 어미가 부르면 송아지가 대답하고, 송아지가 부르면 어미가 대답하면서 서로 정답게 걸어가는 것이 퍽 그립게 보였습니다.

임금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동시에 임금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내가 역시 잘못이었던가? 자식의 어머니에게 대한 정리는 생각하지 않고 원자의 생모를 죽게 하였으니 그것은 역시 잘못이었던가?)

원자가 어전을 물러나간 뒤에, 임금은 편전에 혼자 앉아서 무한한 괴로움에 헤매었다. 더구나 원자가 자기 생모의 바참한 운명을 이미 알고서 그런 소리를 했다 하더라도 모르겠는데 그런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하는 원자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으니 임금의 심정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세월은 또 흘렀다. 성종의 풍류 좋아하는 것은 윤씨가 죽었다고하여 조금도 줄어지지는 않았다. 윤씨가 죽은 뒤 얼마 안 가서 할머니 되는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복인(服人)으로 그 기한을 지르는 동안만은 정지되었던 대궐 안의 곡연(曲宴)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성종은 부지런하고 건강하여 낮에는 정무(政務)에 바쁘고 저녁에는 연회에서 노래를 듣고 춤추다가 밤이 깊으면 왕비, 소용, 숙용, 궁녀들 중 어디든지 마음 내키는 데로 찾아드는 것이 일과였다.

성종은 특히 숙의 하씨(河氏), 귀인(貴人) 정씨(鄭氏), 숙의 홍씨(洪氏), 숙용(淑容) 심씨(沈氏), 귀인 권씨(權氏) 등의 미인을 사랑하여 십육남, 십이녀 종합 이십팔남매를 두었는데 이것은 조선 여러 임금 중에 가장 많은 자녀들인 것이다.

 

 

 

 

燕 山 君

荒淫의 싹

 

성종의 원자가 바로 후세에 폭군이라고 부르는 연산군(燕山君=西紀 1,498-1,506)이다. 연산군은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살아 있으면서도 서로 만나보지 못한 채 자라나서 자기는 어머니 없이 세상에 태어난 특별한 사람이거니 스스로 생각하여 어머니가 약사발을 받아 먹고 죽은데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인수대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대궐 안에서 누구든지 원자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은 인수대비가 누구든지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에게는 남녀를 막론하고 목을 베인다는 선언을 하고 항상 감시를 해왔기 때문이다.

대개 조선의 전례에 의하면 왕의 원자가 여덟 살이 되면 왕세자(王世子)로 책립(冊立)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연산군도 이런 예에 따라 그가 여덟 살 되던 해 즉 성종 십사 년 정월에 왕세자 책립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연산이 열두 살 되어 입학(入學)하던 해 삼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 신승선(愼承善)이라는 이의 딸로 왕세자빈(王世子嬪)을 삼기로 약혼을 정하고, 이어 춘궁(春宮)을 따로 건축하였으니, 춘궁이란 왕세자가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그 이듬해 이월 육일에 선정전(宣政殿)에서 초례(醮禮)를 행하고, 왕세자가 신승선의 집으로 가서 신씨(愼氏)를 대궐로 맞아들였다.

왕세자는 어려서부터 여간 고집이 강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하건 자기 의견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권하고 달래어도 듣지 않았다. 다만 부왕 성종에게만은 자기 고집을 부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에게도 사실은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만 어쩔 수가 없어서 순종한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성종이 사슴(鹿) 한 마리를 구하여다가 대궐 안에 두고 기르는데 이 사슴이 매우 영리하여 사람을 잘 따르고 이르는 말도 잘 들어서 누구에게나 반가이 달려와 뛰어오르면 혓바닥으로 손이나 얼굴을 핥기도 하였다. 그토록 영리하고 다정한 동물인지라 성종은 각별히 귀해하였거니와 궁중에 드나드는 문무백관들도 누구나 한결같이 그

사슴을 사랑했다. 하루는 왕세자가 부왕을 뵈러 왔더니 사슴이 마주 나아가 왕세자의 손과 얼굴을 핥으며 뛰어올랐다. 제 딴에는 반갑다는 시늉이었다. 그러나 이때 왕세자는 그것이 마음에 언짢았든지 발길로 사슴의 배를 걷어찼다. 사슴은 그만 대궐 뜰 위로 굴러 떨어졌다.

앗!

순간 성종 부왕 뿐 아니라 옆에 있던 제관(諸官)들도 모두 놀랐다. 사슴은 가벼운 몸이라 놀라기는 했으나 별로 상한 데는 없었다. 그러나 부상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를 따르는 동물을 너무나도 무참히 대하는 왕세자의 포악한 행동에는 모두가 몸서리를 아니 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왕은 단박 얼굴에 진노의 빛을 띠우며

동궁아, 그 짐승이 무슨 죄가 있다고 발길로 차기까지 하느냐? 짐승도 사람을 믿고 사람을 위해 사는 법인데 그렇게도 천대를 한단 말이냐? 사람이란 짐승에게도 덕을 입혀줘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그것을 발길로 찬단 말이냐?

하고 큰 소리로 나무랐다.

왕세자는 고개를 수그린 채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임금은 다시 추상 같은 질책을 내렸다.

너, 듣거라. 짐승을 천대하는 버릇이 점점 자라게 되면 필경 백성들까지도 그렇게 천대하게 될 것이니, 네가 그렇게 되는 날이면 이 나라의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임금의 책망은 아주 엄했다. 왕세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이때 그렇게 책망 들은 것이 얼마나 아프게 여겨졌던지 왕세자는 부왕이 돌아가고 자기가 임금 자리에 나아간 지 아튿 날에 제일 먼저 자기 손으로 활을 쏘아 그 사슴을 죽여버렸다. 이 한 가지로 왕세자의 성격이 어떠하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왕세자가 입학할 당시에는 유명한 학자 서거정(徐居正)으로 스승을 삼았다가, 그가 늙어서 돌아간 후로는 조지서(趙之瑞)와 허침(許琛)이라는 두 사람을 맞아 왕세자의 스승을 삼았다.

한사람의 동궁을 가르치기 위하여 불행하게도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조지서는 워낙 성질이 강강한 사람인지라 남을 용서할 줄을 몰랐다. 그의 자(字)는 백부(伯符)요 호(號)는 지족정(知足亭)이라 하였으며 성종 때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고 어유소(魚有沼)가 만주(滿洲)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에 그의 막하(幕下)로 출정한 경력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왕세자가 장난하기만 좋아하고 공부할 생각을 갖지 않으면, 조지서는 비록 왕세자라 할지라도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를 책망하였다.

저하(低下)는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이 되실 분입니다. 그러한 동궁께서 글 읽기는 싫어하시고 장난만 좋아하시면 장차 이 나라가 어찌 되겠습니까? 부디 장난을 삼가시고 글공부를 부지런히 하십시오.

조지소는 이 모양으로 번번히 왕세자를 꾸짖었다. 그러나 왕세자는 이런 조지서의 책망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부왕의 분부도 있고 해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늘 원수같이 미워하고 무서워 했다.

(이 늙은이가… 어디 두고 보자!)

왕세자는 자기를 위해 애써 주는 조지서에게 이런 앙심까지 먹는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허침이라는 이는 성질이 온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의 자(字)는 헌지(獻之)라 하고 호(號)는 나헌(懦軒)이라 했다. 그때 북정원수(北征元帥)로 이름을 날리던 허종(許琮)의 아우였다. 허침은 왕세자가 장난이나하고 뜀뛰기를 좋아하며 공부에는 마음을 두지 않아도 별로 책망하는 일 없이 방임주의(放任主義)를 썼다. 그는 다만 왕세자에게 이르기를

공부란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놀 때는 놀더라도 일단 공부를 하게 되면 그때 만은 열심히 할 것입니다.

하여 별로 책망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왕세자도 그의 앞에서는 가끔 책을 읽고 혹 토론도 하는 일이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조지서 선생이 글을 가르치려고 왕세자 방으로 나가보니 왕세자가 보이지 아니하고 바람벽에 커다란 글씨로 대성인(大聖人)에 허침(許琛)이요 대소인(大小人)에 조지서(趙之瑞)라 하고 씌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필적을 보니 왕세자의 글씨가 분명했다. 조지서는 매우 불유쾌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곧 사표를 쓰고 시골로 낙향(落鄕)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기를 지금 자기가 사표를 내면 왕세자의 흠점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인즉 이것은 자기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곧 마음을 고쳐먹고 모든 것을 꾹 참았다.

훗일 왕세자가 임금이 되자 조지서는 자진하여 서울 같은 번화한 곳이 싫으니 지방관이나 되기를 청하여 창원군수(昌原郡守)로 취임하였다가 얼마 아니 되어 그것도 사직하고 지리산(智異山) 속에 숨어버리고 말았다. 이를테면 장차 어지러워지는 세상을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바로 잡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진작 세상과 인연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조지서는 지리산으로 들어온 이후로 그 곳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지족정(知足亭)이라 정하고 날마다 산천을 즐기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니나 다르랴, 연산군 십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걸려 조지서도 극형을 당하여 시체는 강물에 띄워 버린바 되고 가산은 몰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와는 반대로 허침은 연산군이 등극한 후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가 좌의정(左議政)까지 승진되어 무사히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동궁 왕세자는 글 읽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대신에 여색(女色)이라면 어려서부터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호탐하였다. 이미 열세살에 세자빈(世子嬪)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궁녀들을 하루도 유인하지 않는 날이 없더니,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에는 곽린(郭璘)의 딸이 미모였던 까닭에 그를 양원(良媛)이라 하여 세자궁에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황음(荒淫)의 싹은 이미 이때부터 트고 있었던 것이다.

동궁 왕세자는 열아홉 살 되던 해 십이월에 성종이 병환으로 돌아가자, 이듬해 일월 이십구 일에 창덕궁에서 즉위식(卽位式)을 거행하였다. 이때 인수대비와 인혜대비(예종 왕비)를 높여서 대왕대비(大王大妃)라 하고 대행왕비(大行王妃) 윤씨를 왕대비(王大妃)라 하고 세자빈(世自嬪)이었던 신씨를 왕비로 승격시켰다. 대행왕(大行王)이라는 것은 임금이 돌아가신 후에 아직 시호(諡號)를 올리기 전에는 대행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例)로 되어 있었다.

연산군은 이제 신왕(新王)이 되었다. 나이는 꼭 이십 세였다. 조선 열 번 째의 임금으로서 일찍이 역사상에서 그 유를 찾아보기 힘들 만치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연산군의 폭정은 이때를 기하여 시작된 셈이었다.

 

 

 

戊午士禍

 

연산군이 등극하던 해 삼월 십육일의 일이었다. 성종이 승하한지도 어느덧 삼개월이 흘러 연산군은 선릉(宣陵)에 써서 올릴 지문(誌文)을 읽어 보고 있었다. 지문을 얼마간 읽어 내려가다 보니 마침 그 지문속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라는 이름이 나오고 또 폐비에 관한 사실이 나왔다.

연산군은 승지를 불러

윤기무가 무엇하는 사람인데 대행왕의 지문에 나오게 되느냐?

하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승지는 얼른 대답할 바를 몰랐다. 왜냐하면 판봉상시사 윤기무 란 폐비 윤씨의 친정 아버지로서 신왕 연산군에게는 바로 외조부(外祖父)가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윤기무는 자기 딸 윤비가 왕비로 책봉되기 이전에 죽었으므로 연산군이 외조부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만, 연산군에게 만약 그 사실을 그대로 알렸다가는 연산군이 아직도 전연 모르고 있는 생모 윤씨에 대한 모든 비밀이 대번에 탄로(綻露)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신하 된 몸으로 임금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말 난처한 입장이었다.

승지는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된 채로 엎드려 있기만 했다. 그러자 연산군은 답답하다는 듯 어탑(御榻)을 한 손으로 두드리며

왜 대답을 못하느냐? 윤기무가 어떤 사람이냐?

하고 대답을 재촉하였다. 승지는 마침내 할 수 없다는 듯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윤기무는 폐비 윤씨의 아버지로서 윤씨가 아직 왕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분으로 금상전하(今上殿下)의 외조부가 되는 분입니다.

뭐? 윤기무라는 사람이 과인의 외조부라고?

연산군은 깜짝 놀랐다.

과인에게는 외조부가 따로 있는데, 어째서 윤기무가 과인의 외조부가 된단 말이냐?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이제는 비밀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승지는 폐비 윤씨의 비밀을 연산군에게 낱낱이 다 말하고야 말았다.

여쭙기 황공하오나 전하의 생모는 따로 계셨습니다. 전하께서 아직 어리셨을 때 선왕께서 전하의 생모님에게 폐위의 분부를 내리셨는데, 그때 선왕께서 모든 것을 비밀로 하라는 특명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인의 생모는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이미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승지는 폐비 윤씨가 약사발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까지는 차마 알리지 못했다.

음–.

연산군은 생모 윤씨가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에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연산군은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눈 앞이 캄캄하여 그날부터는 수라도 들지 않고 슬퍼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인수대비를 찾아 뵈고 생모 폐위의 경위를 물어보았다. 인수대비는

선왕께서 왕세자의 생모에게 폐위의 분부까지 내리게 되었을 때는 본인에게 그만한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하고 암암리에 생모 윤씨에게 좋지 못한 행실이 있은 듯이 말했다.

(나의 생모에게 반드시 무슨 잘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둘도 없는 어머니가 아니더냐!)

연산군은 그날부터 생모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을 했다. 자기의 생모 윤씨가 궁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필경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이나 홍문관(弘文館)의 유생들이 소위 칠거지악(七去之惡)이니 뭐니하는 유학의 이론으로 임금께 자꾸만 상소(上疏)질을 하여 마침내는 부왕도 어쩔 수 없이 폐비시킨 것이 아닐까 하고 제멋대로 짐작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연산군은 유생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다.

(이놈들! 어디 두고 보자.)

이렇게 앙심을 먹은 연산군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어려서부터 자기에게 잔소리만 헤오던 조지서 선생이었다. 조지서! 모든 유학자들이 조지서 선생같이 밉기만 했다.그때 유학자들은 대개 김종직(金宗直)이란 사람의 제자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간(大諫)에 이른 사람들이 많았다. 성종 때에 폐비 윤씨를 옹호한 사람도 그들이었고, 연산군을 가르친 이도 모두 유학자들이었다.

김종직은 조선 유학계(儒學界)의 사표(師表)로 비록 야인(野人)으로 있을 때에도 그의 일거 일동은 당시 정치계에 큰 영향을 주어, 선왕 성종은 그를 일부러 서울로 불러 올려서 형조판서(刑曹判書)의 벼슬을 시킨 일까지 있었다.

유학자들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따른다하여 모든 것을 중국에 의뢰하고 중국을 모방하기에 힘썼다. 특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 그들의 중심 사상이었다. 만약 임금이 유학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죽음에 이를 지라도 기어이 그 일을 중지시키도록 하여야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요, 임금이 듣지 않는다고 그만두어서는 충성이 아니라고 믿었다. 특히 이러한 일을 맡은 사람들이 소위 삼사(三司)라고 하여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청백하고 학

문으로나 인격으로나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라야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임금도 이 사람들의 말이라면 꺾지를 못했고, 동시에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대신들보다도 이 사람들의 의견을 더 많이 참작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유학자들을 연산군은 가장 미워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 유자광(柳子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세조대왕(世祖大王) 시절에 이시애(李施愛)를 정벌함으로써 강순(康純), 남이(南怡) 등 장수와 함께 나라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사람이었다. 허나 후에 강순과 남이는 원훈(元勳)이 되고 유자광은 차훈(次勳)이 되었다.

유자광은 그 점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 사회제도는 첩의 아들 즉 서자(庶子)는 아무리 하늘에 올라가 별을 따는 재주가 있더라도 행세할 수가 없었다. 유자광은 바로 유규(柳規)라는 사람의 첩(妾)의 아들이었던 까닭에 차훈에라도 들게 된 것은 세조대왕이 그의 공이 크다 하여 특별히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유자광은 은근히 남이를 시기하였다. 강순은 나이도 많고 군사에 대한 경험도 많은 소위 원로(元老)격인 만큼 원훈이 되더라도 나무랄 점이 없지만, 남이로 말하면 자기보다도 나이도 어리고 재주도 부족한데, 또는 이번 싸움에 자기의 활약으로 남이의 이름이 드러났는데 지위가 자기보다 위요, 상을 받는데도 자기보다 몇 갑절이나 더 많이 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이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승격하여 그 흥청대는 꼴을 유자광으로서는 눈이 아파 볼 수가 없었다. 유자광은 어디까지나 남이가 그렇게 된 것은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문벌(門閥)이 좋아 출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이는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외손자요, 세조대왕을 도와 혁명에 공을 세운 권남(權擥)의 사위인 것이다. 당시의 사회제도로 남이에게는 유자광과 같은 서자(庶子)쯤은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남이를 사랑하고 아껴주던 세조대왕이 돌아가고 예종(睿宗)이 임금이 되었다. 예종은 남이가 태종대왕의 외손자로 대궐 안에서 모두 떠받치는 사람이지마는 공주와 연애 사건이 있은 후로는 남이를 몹시 괘심하게 생각했다.

하루는 남이 장군이 대궐 안에서 숙직을 하는데 그날 밤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이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남이는 그것은 [除舊布新之象] 즉 옛 것을 없이 하고 새로운 일이 나타날 기상이라고 말했다. 옆방에서 이 말을 들은 유자광은 예종에게 달려 나아가 이번 혜성을 보고 남이가 한 말은 역모를 경영하는 사람의 말이라고 모함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남이를 좋게 여기지 않던 예종은 곧 남이를 잡아다가 극형을 내려 죽여버리니, 남이는 순전히 유자광의 고자질로 인하여 죽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유자광이 임금에게 고자질한 것이 나쁘다고 소인(小人)이라고 했다.

김종직도 유자광을 소인놈이라고 욕했다. 하루는 김종직이 함양군수(咸陽郡守)로 있을 때 동헌(東軒) 누마루에 유자광의 시(詩)가 현판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있는 동헌마루에 유자광이 같은 소인의 시를 걸어둘 수 없다하여 그 현판을 당장에 떼어내려 불을 질러버린 일이 있었다. 나중에 그런 사실을 풍문으로 들은 유자광은 내심 크게 분개했으나 감히 김종직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속으로만

흥, 어디 두고 보자!

하고 앙심을 먹고 앙갚음의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 후 김종직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내다가 당시의 왕세자인 연산군의 눈 모양이 사나움을 보고 그가 암만 해도 장차 나라에 큰 일을 저지를 인물이라 하여 자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였다가 성종 이십삼년 팔월에 세상을 떠났다. 유자광은 김종직이가 죽었으니 이제는 그의 제자들에게라도 앙갚음을 해야겠다고 암암리에 계획했다.

이때 김종직이 가장 사랑하면 제자 김일손(金馹孫)이란 사람이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사관(史官)이란 곧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 즉 그날 그날 대궐에서 일어난 일이나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벼슬을 말함인데, 지금 우리가 조선실록(朝鮮實錄)이니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니 하는 것이 다 그러한 종류의 역사책들이다. 따라서 사관들이 기록하는 사초(史草)는 어디까지나 사실 그대로 써야 하며, 또한 다른 사람이 이것을 함부로 볼 수 없고임금도 자기 시대의 사초를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성종이 승하하고 신왕 연산군이 들어 앉은 지 얼마 아니하여 김일손은 사관을 사직 하고 이극돈(李克墩)이란 사람이 성종 실록을 편찬할 사국당상(史局堂上)이 되었다. 이극돈이 사국당상이 되어 선왕 때의 사초를 읽어 보니, 그 사초 중에는 놀랍게도 이극돈 자신의 불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대목이 있었다. 그 내용인즉 일찍이 이극돈이가 전라감사(全羅監司)로 있을 때에 정희왕후(貞喜王后) 즉 세조대왕비 윤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국민이 경조(敬吊)의 뜻을 표하여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특히 이극돈은 지방장관으로서 관기(官妓)를 불러 연락(宴樂)을 한 것은 풍교(風敎)에 매우 어그러지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극돈은 그 사초를 보고 크게 놀랐다. 만약 그 기록을 그대로 둔다면 오명(汚名)을 천추에 남기게 될 것이므로, 이극돈은 곧 김일손을 찾아가서, 사초에서 자기에 관한 대목을 좀 고쳐 줄 수 없는가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강직한 김일손은 이극돈을 책망하여 그대도 사관이 아닌가? 사관은 사실 그대로 쓰는 것이 직책이 아닌가? 그대가 사관이 아니라면 혹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관으로서 어떻게 한 번 사초에 씌어진 것을 고치라고 하는가?

하고 단단히 타일렀다. 이극돈은 그의 위엄있는 말에 기가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를 물러났으나 내심으로는 크게 분개하여 언제든지 김일손에게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극돈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유광이 김일손 등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음을 알고 마침내 유자광을 찾아갔다. 유자광도 일찍이 김종직에게 모욕을 당한 일이 있는지라 그의 제자인 김일손에게 평소의 원한을 풀어 볼 생각에서 이극돈과 함께 그들에게 복수할 방도를 강구했다. 유자광은 이극돈에게 김일손 등에게 복수할 방도를 세우자면 내가 그 사초를 한 번 읽어봐야겠소.

하고 말했다. 원래 사초는 임금도 마음대로 못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복수할 생각에만 눈이 어두어 유자광에게 사초를 보여 주었다.

유자광이 그 사초를 읽어본즉 세종대왕(世宗大王)에 대한 기록에서 세조(世祖)를 비방하는 대목이 많았다. 즉 세조가 한 번은 자기 아들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인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라든지, 또 후전곡(後殿曲)이라는 슬픈 노래를 듣고 세상일을 근심한 것이라든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가 죽은 것을 사절(死節) 즉 절개를 위하여 죽었다든가, 또는 성종 때 일에 세종대왕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永應大君) 부인 송씨(宋氏)가 군장사(窘長寺)에 가서 설법을 듣다가 시비(侍婢)들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학조(學祖)라는 중과 정을 통했다는 등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유자광은 이것을 보고 노기를 띠어 이대로 있을 수 없다 하여 곧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 중신들을 찾아 보고 당신들은 세조대왕에게 사랑을 받은 중신들인 만큼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묵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위협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중신들은 이것을 임금께 알린다면 당장 큰 사건이 벌어질 것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그러나 한편 알고도 잠자코 있으면 지정불고죄(知情不告罪)라는 중대한 죄과를 범하게 되는 것이므로 할 수 없이 임금께 고발하게 되었다.

연산군 사년 칠월 초하룻날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 유자광 등은 차비문(差備門)으로 나아가 임금께 비밀한 일을 여쭙겠다고 청했다. 중신들이 임금에게 비밀한 일을 여쭈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승지(都承旨) 신수근(愼守勤)이가 부랴부랴 마중을 나왔다.

대감들께서 어떻게 이렇게 함께 오셨습니까?

도승지 신수근이가 묻자 유자광이 얼른 신수근의 귀에 입을 갖다대고 뭐라고 한동안 소곤거렸다. 도승지 신수근은 처음에는 건성으로 듣고 있다가 나중에는 연신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자광이 속삭이는 내용은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김일손을 비롯하여 선비들을 없애버리자는 유자광의 말에 신수근이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도승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비(妃) 신씨(愼氏)의 원척(遠戚)이었다. 그가 도승지로 임명될 때에 대간(臺諫)들은 만일 신수근이가 도승지가 되면 외척(外戚)이 권세를 휘두를 우려가 있

다하여 그를 극력 반대했었다. 이런 관계로 신수근도 유신(儒臣)들인 대간들에게 앙심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신수근이 유자광의 속삭임을 듣고 앞장 서서 중신들을 곧 대궐 안으로 인도했다.

연산군은 유자광이가 늘어놓은 말을 듣고 노기가 충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웁기 짝이 없던 유생들이다.

가뜩이나 미웁던 판에, 사초에 세조대왕에게 대한 추문까지 기록하였다니 연산군의 노여움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연산군은 곧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홍사호(洪士灝), 도사(都師) 신극성(愼克成) 등을 경상도 청도(淸道)로 보내 김일손을 붙들어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칠월 십일일에는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대궐 안으로 가져오라고 분부를 내렸다. 이때 이극돈은 그것을 전부 드린다면 다음날 사관들이 역사적 사실을 바른 대로 쓸 사람이 없을 것이라 하여 김일손이가 쓴 사초 중에서 왕실에 관계되는 부분만을 골라 대궐로 들여보냈다.

김일손이 억울하게도 큰칼을 쓰고 서울로 끌려 올라오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친히 국문(鞠問)할 생각으로 그를 수문당(修文堂) 앞으로 끌어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는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 유자광, 신수근 등과 주서(注書) 이희순(李希舜) 이외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뜰 아래 큰 칼을 쓰고 엎드려 있는 김일손을 보고 연산군은 큰 소리로 호령을 했다.

네가 성종대왕의 실록을 기록할 때에 어찌하여 세조 때의 일까지 기록하였는지 바른 대로 그 이유를 말하여라!

김일손은 이극돈이란 놈이 사초를 보고서 임금께 고자질을 한 것이라 깨달았다. 김일손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역사를 기록할 때에 전왕(前王)의 사실도 기입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일입니다.

임금은 더욱 노기를 띠어

그러면 세조대왕께서 예종의 후궁 권씨를 귀여워하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불러보려고 했으나 권씨가 듣지 않았다는 일은 네가 꾸며 가지고 세조대왕을 헐뜯으려고 한 것이 아니냐!

연산군의 국문에는 점점 살기가 감돌았다. 김일손은

아니옵니다. 그것은 소신이 지어서 한 것이 아니라 권부인의 조카뻘 되는 허경(許磬)이란 사람한테서 들은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연산군은 점점 대노하여 곧 허경이란 자를 붙들어다가 물어보았다. 허경은 김일손에게 그런 사실을 말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표정이 너무나 험악한 것을 보고 소신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마 김일손 대감이 정신이상이 생겨서 그런 소리를 하나 봅니다.

하고 부인하면서 모든 죄를 김일손에게 씌여버렸다.

임금이 직접 여러 사람을 불러 며칠 동안 계속 심문하는 동안 하루는 유자광이 소매 속에서 책한 권을 꺼내어 연산군에게 보이면서

이 책을 좀 보옵소서. 이 책은 김종직의 글이온데 이 책 하나만 가지고도 그들이 넉넉히 세조대왕을 조롱하여 불충(不忠)한 뜻을 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다.

연산군이 받아보니 그것은 조의제(吊義帝)라고 쓴 글이었다.

조의제? 조의제란 말이 무슨 뜻이요?

연산군이 유자광에게 물었다.

조의제라 하옵는 것은 옛날 한(漢)나라의 의제(義帝)가 항우(項羽)의 손에 시살(弑殺)된 것을 조상한다는 뜻으로, 김종직이가 그런 글을 쓰게 된 본뜻은 세조대왕을 항우에게 비유하고 의제는 단종(端宗)에 비하여 세조대왕께서 단종을 죽이시온 것을 직접 쓸 수가 없으니까그렇게 돌려서 쓴 글이옵니다. 한 번 친히 읽어 보옵소서.

이 말을 듣자 연산군은 살기등등한 기세로

음, 읽어볼 필요도 없겠소. 이제 김종직, 김일손 등의 죄상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놈들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하고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중신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유자광은 연산군이 노한 기회를 이용하여 평소 원수처럼 여기던 김일손 등 유학자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에서

김종직이나 김일손 등의 죄악은 무릇 신자(臣子)된 사람으로서는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로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무리들을 조사하여 모조리 없애버려야만 조정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안 한다면 나머지 무리들이 암암리에 다시 일어나 화란(禍亂)을 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하고 임금에게 주장했다.

실로 무서운 주장이었다. 김종직과 김일손의 무리라면 삼사(三司)의 대간(臺諫)들을 비롯하여 조정 요직에 허다히 있다. 그들을 모조리 잡아 없애자는 것이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중신들은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의(異議)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곧 임금의 명령이 내렸다. 세조대왕으로 말하면 국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간신들이 내란을 일으키려고 한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역도逆徒)들을 박멸하고 종사(宗社)를 안정시켜 자손이 계승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김종직과 그 문도(門徒)들이 성덕(聖德)을 비방하고 김일손으로 하여금 사초에 무서(誣書)케 하였으니 그 죄는 대역(大逆)이라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벌을 내렸다. 즉 부관참시란 그때 김종직이가 몇 해 전에 죽었기 때문에 무덤을 파서 그 시체가 들어 있는 관(棺)을 깨치고 시체의 허리를 베는 형벌이니 그것은 인생으로서 최대의 극형인 것이다.

칠월 이십육일에는 김일손 등의 죄를 정하였는데,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대역죄로 능지처참(陵遲處斬)에 처하고, 이목(李穆), 허경 등은 참형에 처하고, 그 나머지 김종직의 제자, 친구 등은 형장(刑杖)을 때려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로써 유학을 숭상하던 사람으로서 이번 혹화(酷禍)를 면한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였다. 이것을 무오사화(戊午士禍)라 한다.

연산군의 뜻을 거 스릴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삼사의 대간들이며 그 밖의 유학자들이 임금의 하는 일에 대하여 걸핏하면 상소질하기가 일쑤이더니 이번 무오사화가 있은 후부터는 누구 한 사람 감히 임금이 하는 일에 이러고 저러고 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제 연산군은 마음 놓고 자기의 생각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행할 수가 있게 되었다.

 

 

妖女 張綠水

 

무오사화가 있은 것은 연산군이 등극한지 사 년째 되는 해였으니, 연산군의 나이는 그때 스물세 살이었다.

나이가 스물세 살이면 색(色)에는 완전히 눈을 뜬 판이요, 게다가 무슨 일이나 맘대로 하게 되었으니 그의 음탕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연산군은 왕비 신씨와 궁인 곽씨(郭氏) 이외에 따로 윤훤(尹萱)의 딸을 맞아 숙의(淑儀)를 삼았다. 연산군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차츰 세상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 눈치를 알아차린 김효손(金孝孫)이란 사람은 자기 처매(妻妹)인 장록수(張綠水)란 여자를 연산군에게 천거했다. 당시 장록수는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여자 종(婢)으로 있었다. 그녀는 성질이 영리하고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 목소리는 매우 맑고도 깨끗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히 기쁜 마음을 갖게 했다. 나이는 그때 삼십이며 연산군 보다도 몇 살 위이지만 이팔의 소녀와도 같이 앳되게 보이고 아름다왔다.

연산군은 장록수를 한 번 만나보고 매우 마음에 흡족하였다. 곧 장록수를 맞아들여 숙원(淑媛)을 봉하였다. 연산군의 장록수에 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이후부터 임금이 조회에도 나아가지 않고 더욱이 경연은 물론 다른 대궐에 거동도 않고, 그저 장록수 옆에 있는 것이 가장 기쁘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이제 장록수의 옆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이 만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임금이 장록수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장록수는 차츰 교만해져서 마침내는 임금을 조종하게 되었다. 임금은 마치 장록수 앞에서는 죽은 사자와도 같이 온순할 뿐이었다. 임금은 아무리 노여웠다가도 장록수만 보면 웃음이 저절로 피오 올랐다. 따라서 장록수의 일거수 이투족(一擧手一投足)은 온 백성에게 영향 주는바가 컸다. 그때 벼슬자리를 얻으려든가 감투를 쓰려든가 무슨 청할 일이 있으면 임금이나 조정 비변사(備邊司) 등에 청하기보다 장록수에게 청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제일 빠른 길이었다.

이 때문에 장록수의 집 앞에는 인마(人馬)가 끊일 새 없었고 값비싼 물건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장록수의 말 한 마디면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었고, 살 사람도 죽일 수 있어서, 그는 실로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장록수의 부귀와 영화가 어찌나 극진했던지 그때의 사람들은 아들 낳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딸 낳기를 원하여 다음과 같은 노래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즉

 

張使天下父母心

( 장록수는 천하의 부모들 마음에 )

不重生男重生女

( 아들보다 딸을 더 중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

 

연산군은 장록수를 기쁘게 해줄 양으로 각 관청의 비자(婢子)나 여염집 딸이라도 여덟 살부터 열두 살까지 얼굴 예쁘게 생긴 소녀들을 대궐로 들여다가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회에 참가케 하였다. 이 밖에도 당시의 유명한 기생인 해금기(奚琴妓), 광한선(廣寒仙) 등 네 사람을 택하여 대궐로 불러들이고, 또는 가야금, 아쟁牙箏) 잘 타는 기생들도 각각 한 사람씩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궁중에 곡연(曲宴)이 없는 날이 하루도 없었고, 연산군은 하루도 취하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연산군의 곁에는 늘 장록수가 앉아 있었다. 정사야 잘 되거나 못 되거나, 백성들이야 죽거나 말거나 연산군은 술이면 그만이요, 장록수면 그만이었다.

그때만 해도 창덕궁의 담이 낮아서 담 밖에서 대궐 안을 엿볼 수가 있었다. 대궐 안에서 매일 연회가 벌어지고 노래 소리에 춤을 추며 야단법석을 떨면 그것을 구경하느라고 담밖에는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나중에는 잘한다 못한다 하는 소리까지 군중들 입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실로 대궐 안의 체모에 손상되는 일이 많았다.

연산군은 당장에 도승지 이극균(李克均)을 불러 아래와 같은 어명을 내렸다.

대궐 담장을 새로이 두 길 높이로 쌓아 올리고 담장밖에 있는 민가(民家)들은 모두 무너 버려라. 그리고 대궐 안이 내려다 보일 만치 높은 곳에 있는 복세암(福世庵), 인왕사(仁旺寺), 금강굴(金剛窟) 등도 모조리 철폐시키고 또한 백악(白岳)이나 인왕산(仁旺山)이나 사직산(社稷山) 같은 데는 잡인(雜人)의 입산을 일체 엄금하라!

기막힌 어명이었다. 곧 경복궁 담장밖에 있는 집들이 헐리고, 경복궁에 가까이 있는 복세암, 인왕사, 금강굴 등도 철폐당하고 동시에 동소문(洞小門) 밖 동구에는 경수소(警守所)를 설치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잡인들의 북문 밖 각 산에 올라 대궐 안을 바라보는 것을 엄금케 하였다. 이러한 것이 모두 장록수라는 일개 요부와 음탕한 애욕을 즐기기 위해 내려진 명령이었던 것이다.

어느 해 봄날이었다. 연산군은 대궐 안에서 장록수와의 연락에도 염증이 생겼든지 하루는 내시(宦官) 몇을 거느리고 정업원(淨業院)으로 미행(微行)을 나온 일이 있었다. 전부터 이 정업원은 늙은 후궁들이 살 곳이 없으면 이곳에 와서 여생을 편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후궁이 나가 살게 되면 젊은 궁녀들도 몰래 빠져 나와 함께 지내는 일이 많아서 이러한 여승들 중에는 뜻밖에도 미인이 섞여 있었다. 연산군은 이런 자를 엽색(獵色)하려는 것이다.

연산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 정업원에 나타났다. 법당 안에서는 여러 비구니들이 불경을 읽다가 불시에 나타난 임금을 보자 일제히 일어나 합장하고

대왕마마 만수무강하사이다.

그러면 임금은 그저 웃음만 띠고

여러 비구니들 어서 독경을 계속하여라.

하고 옆에 서서 조용히 독경하고 있는 비구니들을 번갈아 바라본다. 머리에 곱게 접은 고깔을 쓰고 흰 손에는 염주를 들고 눈을 감은 채 소곤소곤 독경하는 비구니들! 그 중에는 정말 아리따운, 매력 있는 젊은 비구니들도 많이 있었다.

연산군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연산군은 여러 비구니들 중에서 젊고 아리따운 비구니들만 몇을 헤아려 보고

자, 이제 모두들 물러가거라, 그리고 과인이 지적하는 다섯 명만 남아 있거라!

연산군은 손을 들어 젊은 비구니 다섯 명을 일일이 가리켰다.

속세를 떠난 비구니라 할지라도 어명을 거역할 길은 없었다. 물러가라는 명령을 받은 늙은 비구니들은 제각기 염불을 외우며 합장 배례를 하고 선원(禪院)으로 사라져 갔다.

… 이날 연산군의 황음(荒淫)은 차마 눈을 뜨고서는 볼 수가 없도록 어지러웠다. 일찍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성을 상대로 음탕한 행동을 한일은 많았으나, 일시에 여러 계집을 상대로 그토록 어지러운 행동을 취해 보기는 연산군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어 대궐로 돌아와 광한선과 또 희롱하니, 이때부터 연산군의 황음이 본격적으로 심해지게 되었다.

한 번은 연산군의 계모인 왕대비 윤씨가 임금을 위로하기 위해 창경궁(昌慶宮) 안뜰에서 큰 잔치를 베푼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정승(政丞), 사헌부(司憲府), 승정원(承政院)의 고관들도 배석하고 있었다. 이날 왕대비는 연회를 흥겹게 하기 위해 여기(女妓) 광한선, 내한매(耐寒梅) 등을 불러 임금을 모시게 하였는데 연산군은 술이 취하자 왕대비를 비롯하여 여러 중신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한매, 광한선의 두 기녀를 한 품에 껴안고

자, 모두들 이 어여쁜 기생의 이름을 시제(詩題)로 삼아서 시를 지어 보아라.

하고 분부를 내렸다.

기생의 이름을 시제로 해서 중신들더러 시를 지으라니 그처럼 중신들을 모욕하는 일은 없었다. 중신들은 모두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그렇다고 감히 불평을 말하는 자도 없었다. 그러던 중 대사헌 이자건(李自健)이가

기생의 이름으로써 시를 짓게 하는 것은 중신들의 체면을 손상케 하는 분부로 아룁니다.

하고 용감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이런 반대가 통할 리 없었다. 연산군은 끝내 고집을 부려 중신들로 하여금 기생의 이름으로써 시를 짓게 하였다.

이렇듯 연산군의 고집과 황음이 날이 갈수록 심해가지만, 조정에 중신이 많되 이제는 간언(諫言)을 올리려는 사람조차 없게 되었다.

 

 

 

甲子士禍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 윤씨가 폐위를 당하였다가 약사발을 마시고 죽었다는 일은 대강 눈치로 알았으나, 다만 그 일은 부왕이 윤씨를 미워하여 그렇게 한 일이라고만 알았지,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연산군 신하 가운데 가장 신임 받는 사람은 연산군의 처남되는 신수근(愼守勤), 그 다음이 임사홍(任士洪)이라는 사람이었다.

임사홍은 일찍이 성종 때에 당상관(堂上官)의 벼슬까지 지낸 자로서 그의 맏아들 임광재(任光載)는 예종의 부마(駙馬=사위)였고 둘째 아들 임숭재(任崇載)는 성종의 부마였다. 선왕 성종과는 그렇듯 깊은 관계의 인물인지라 임사홍은 그것을 핑계 삼아 임금께 잘 보여가지고 자기의 부귀와 영화, 권력을 유지하려고 갖은 방법으로 임금께 아첨하였다. 더욱이 그 둘째 아들 숭재는 남의 미첩(美妾)을 빼앗아다가 임금에게 드린 까닭에 연산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그의 셋째 아들 임희재(任熙載)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고 성종 때 생진(生進) 시험에 급제하고 연산군 사 년에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 해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던 해여서 김종직의 제자라 하여 임희재도 귀양을 갔었다. 임희재는 자기 형들이나 아버지와는 달라서 남에게 아첨하여 권리를 얻어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을 천하게 여긴 때문에 늘 형제 사이나 부자간에 뜻이 맞지 않았다.

그는 글만 잘할 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다. 자기 집 병풍에 이러한 글을 써 붙인 일이 있었다.

 

祖舜宗堯自太平

( 순 임금과 요 임금을 본받는다면 저절로 태평세상을 이룰터인데 )

秦皇何事苦蒼生

( 진나라 시황제는 어찌하여 국민을 괴롭혔던가 )

不知禍起蕭墻內

( 화가 자기 집 담장 안에서 일어날 줄은 모르고 )

虛築防胡萬里城

( 공연히 쓸데없이 오랑캐를 막는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

 

이 시는 김종직이가 조의제문(吊義帝文)을 지어 세조대왕을 비방한 것과 마찬가지로 진나라 시황제의 이름을 빌어 연산군을 조롱한 것이다. 즉 연산군이 백성들로 하여금 궁중의 연락(宴樂)을 엿보지 못하게 하려고 대궐 담장을 높이 쌓은 사실을 전시황에 비겨서 비난한 시였다.

그런데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 집에 미행(微行)을 나왔다가 병풍의 시를 보고 크게 노하였다.

이것이 누구의 글이냐?

연산군은 시를 읽다가 무섭게 임사홍에게 물었다. 임사홍은 속임 없이 사실대로 자기의 아들 희재가 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연산군의 노여움은 점점 고조되어

그대의 아들이 이렇게 불초(不肖)하니 과인이 그대로 둘 수 없어 죽이려고 하는 바이니, 그대의 의견은 어떠하냐?

하고 물었다. 임사홍은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소신의 자식이 과연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불초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진작 전하께 여쭈어 형벌을 하려 하였으나 애비 된 마음에 차마 용단을 내리지 못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하고 간절히 빌었다.

연산군은 곧 임희재를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에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그런데 임사홍은 자기 아들이 참형을 당하여 죽는 날, 조금도 슬퍼하거나 언짢아 하는 일이 없이 도리어 자기 집에서 대연(大宴)을 베풀어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놀고 있었다. 이것을 보면 임사홍이 얼마나 간악하고 냉혹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전해 들은 연산군은 더욱 임사홍을 신임하게 되어 그 후에도 가끔 임사홍 집에 행차하게 되었으니, 임금이 이렇듯 자주 신하의 집에 행차하는 까닭은 임사홍이 많은 미희(美姬)들을 미리 마련해 두었다가 연산군의 행차가 있을 때마다 그 미희를 임금에게 바치는 까닭이었다.

하루는 옆에 모시는 사람도 없는 조용한 틈을 타서 임금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폐비 윤씨에 관한 얘기를 끄집어내었다.

폐비 윤씨로 말씀 올리자면 본래 성질이 나빠서 성종대왕의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엄숙의 정숙의가 투기심이 강하여 성종대왕께 자주 고자질을 하여 결국 성종의 노여움이 극도에 이르러 그렇게 폐출 당한 것이옵니다. 돌아가신 것도 약사발을 내려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그만 정신이 아찔하였다.

뭐 엄숙의와 정숙의가?

지금은 후궁에서 안일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선왕의 총애를 받아오던 엄숙의와 정숙의가 생모에게 그처럼 원수일 줄은 전연 몰랐던 일이기 때문이다.

(생모의 원수를 바로 눈 앞에 두고도 여지 껏 모르고 있었구나!)

연산군은 이제 의심해 볼 생각조차 없었다. 그는 그만 분통이 터져 올라 그 길로 대궐로 돌아와 엄씨와 정씨 두 숙의를 불러내다가 대궐 뜰에 세우고

네 년들이 과인의 생모를 독살시켰지? 이 죽일년들아!

하고 자기 주먹으로 당장에 두 사람을 때려 죽였다. 연산군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엄씨와 정씨의 시체를 여러 갈래로 찢어서 소금에 절여가지고 까막 까치나 뜯어 먹으라고 산에다 그냥 버려두게 하였다.

대궐 안에서 이렇게 큰 소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궁녀들이나 하녀들은 그냥 벌벌 떨고만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인수대비가 시녀들의 부액을 받으면서 나타났다. 연세가 이미 칠십이 가까운지라 후궁에서 한가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는데 연산군이 대궐에서 엄숙의와 정숙의를 때려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었다.

인수대비는 노여움이 북받쳐 임금을 향해

아무리 그 두 사람의 숙의가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선대왕(先大王)께서 사랑하던 사람인데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고 소리를 높여 호령을 하였다.

그러나 꾸짖는 말을 공손히 듣고만 있을 연산군이 아니었다. 연산군은 한참 인수대비를 노려보고 있다가

이 늙은 게 뭐 어쩌구 어째?

하고 비호같이 덤벼들어 가슴팍을 머리로 받아서 쓰러뜨렸다. 인수대비는 쓰러지면서

이럴 법이 있나. 이럴 법이 있나.

몇 마디 이렇게 주워대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연산군이 이어 정숙의 몸에서는 난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 형제에게 큰칼을 씌워 옥에 가두어 버렸다. 때는 연산군 십 년 갑자(甲子) 삼월 이십일이었다.

인수대비는 이때 쓰러진 것이 원인이 되어 얼마 동안 신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수대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든지 폐비 윤씨에 대한 일을 입밖에 내어서는 아니 된다 해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더니 그만 임사홍이가 발설하여 이러한 참극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이제는 아무런 제한도 없게 되었으므로 폐비 윤씨의 생모되는 신씨(申氏)가 자유로이 대궐 안에 출입하게 되었다. 폐비 윤씨가 죽을 때 피 묻은 수건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얘기한 바 있거니와, 신씨는 인수대비의 감독이 심해서 대궐에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인수대비가 돌아간 기회를 타서 대궐로 들어가 그 피 묻은 수건을 연산군에게 보이며 그때의 현상이며 윤씨의 전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피 묻은 수건을 보자 연산군은 더욱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뛰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그 심정, 어머니가 마지막 흘린 피 수건을 받아 들고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기 어머니의 최후의 일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연산군에게 남은 일은 오직 복수 뿐이었다.

엄씨 정씨의 죽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춘추관(春秋 )에 명령하여 폐비사약 시말단자(廢妃賜藥始末單子)를 작성하여 올리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생모 윤씨의 사사(賜死) 사건에 관계되는 모든 인물을 조사하여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폐비사약 시말단자]에 의하여 최초로 희생을 당한 사람은 선왕 성종 때에 승지(承旨)로 있던 이세좌(李世佐)였다. 이세좌는 왕명에 의하여 폐비 윤씨에게 약사발을 들고 갔던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승지로 있는 놈이 반대는 못할망정 사약을 가지고 갔으니 이는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다. 그 놈을 거제도(巨濟島)로 귀양을 보내라!

연산군은 이세좌에게 처음에는 그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암만해도 그런 정도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이세좌가 거제도로 귀양을 떠나간 지 사흘 후에 연산군은 그를 죽이라 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사사(賜死)의 명령을 귀양 가던 길인 곤양군(昆陽郡) 양포역(良浦驛)에서 받은 이세좌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그날 밤에 스스로 목을 매고 죽어버렸다.

폐비사약 시말단자에 기록된 인원은 한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윤비를 폐출하는데 적극적으로 찬동한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비록 찬동은 아니 했더라도 반대를 못한 사람들까지 모두 조사해 올리라는 명령이었으므로 시말단자에 기록된 명단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폐비 사건에 관련이 있는 사람은 모조리 대역죄로 삼족(三族)을 멸하였는데 아무리 경한 형벌을 당한 사람이라도 팔촌(八寸)까지는 형벌을 면지 못했다. 그러므로 형벌의 범위는 거의 전국에 미쳐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한 형벌을 받은 사람들은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이세겸(李世謙), 심회(沈澮), 이파(李波), 김승경(金升卿), 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등의 열두명으로서 연산군은 그들을 이륙간(二六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 중에 살아 있던 윤필상, 이극균, 이세좌, 권주, 성준 등은 참형을 당하고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대하여는 김종직의 예(例)에 따라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는데, 이번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쇄골표풍(碎骨飄風)이라고하여 무덤을 파고 송장 허리를 잘라 그 뼈를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바람에 날리기까지 했었다.

이 해가 바로 갑자년이고, 또 대역죄로 죽은 사람의 대부분이 선비들이었으므로 후세에 이 사건을 가리켜 갑자사화(甲子士禍)라 부르게 되었다.

 

 

 

酒池肉林 속의 歲月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기보다 더 쉽게 하고 보니 착한 임금이란 말을 듣기는 틀린 일이라고 생각한 연산군은 이제는 될 때로 되어라 하는 기분이 되었다. 남이야 욕을 하거나 말거나 백성이야 죽거나 말거나 이왕 내친 걸음이니 마음대로 놀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다 처남(妻男)되는 신수근이나 사돈인 임사홍이 임금의 비위만 맞춰 충실한 종 노릇을 하였으니 나라 꼴은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민심은 나날이 흉흉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록수의 집에 난데없는 글발 한 장이 날아 들었다. 그 내용인즉 임금이 장록수를 너무 지나치게 사랑함을 조롱한 글이었다. 연산군은 이것을, 전에 정소용이나 임숙의 밑에 있다가 지금은 귀양을 가 있는 궁녀 전향(田香)과 수근비(水斤非)가 한 짓이라하여 그 두 사람의 부모 형제와 친척들을 모두 붙잡아 들여 때리고 불로 지지고하여 여러 가지로 고문하였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자백하는 사람은 없었다. 임금은 의금부 낭청(郎廳)을 강계(江界)와 온성(穩城) 각각 보내어 전향과 수근비를 능지에 처해 버렸다.

생모 윤씨의 원한을 풀어준다하여 전국 각지에 걸쳐 여러 천명의 선비와 그의 가족을 죽인 연산군은 또다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전향과 수근비를 죽이고도 다시 전향의 친척인 최금산(崔今山), 그의 어머니, 아우 춘금(春今), 향비(香非) 등도 능지를하여 죽이고, 그 친척이며 수근비의 부모, 동생, 숙모(淑母) 등은 형장을 때려 국경 지방으로 쫓아 버렸다.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아무리 무력하고 순박한 백성들이라도 이제는 더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도대체 이런 놈의 세상이 어디 있담!

이놈의 세상이 언제나 망하려는고

순직한 백성들의 입에서 이런 불평이 나왔다. 연산군도 그것을 전연 모르지는 않았다.

백성들의 불평을 짐작하고 있기에 내심으로는 불안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연산군은 그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이제 더 한층 술과 계집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장록수도 역시 같은 불안한 생각은 있었다. 장록수의 생각에는 중신들이 모여 있는 정원政院)이나 삼사(三司)에서 또다시 무슨 상소(上疏)질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일 두려웠다. 그래서 장록수는 임금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어서(御書)를 내리게 하였다.

 

<< 오월에 우박(雨雹)이 내리는 것은 큰 변괴다. 이것은 사람을 많이 죽이기 때문에 화기(和氣)를 잃어서 그러한 것이다. 근일에 더위로 인하여 국사를 폐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덥다 하더라도 억지로라도 일을 보아야 할 것인가. 대궐 안에서 연회를 자주 여는 것은 국비(國費)를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 백성들의 집을 철거시키는 것은 민원(民怨)을 사는 일이 아닌가.>>

 

이러한 글을 내려 중신들의 의견을 떠보게 했다.

정원과 대간(臺諫)들은 벌써 임금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뭐라고 대답만 하면 죽이거나 쫓아버릴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장록수와 연산군은 이만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귀에 거슬릴 말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매우 만족한 미소로 중신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 해 칠월 십구 일이었다. 이른 새벽에 신수영(愼守英)이라는 사람이 임금 앞에 나아와 비밀한 일을 알리었다. 신수영은 머리를 조아리며

오늘 아침 한 사나이가 소신을 찾아와서, 자기는 제용감정(濟用監正)  이규(李逵)의 심부름꾼이라고 하면서 난데없는 글 한 장을 주고 갔는데 그 글을 보온 즉 거기에는 전하를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무엄한 사연이 씌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신은 우선 그 사실을 알려 드리고자 배알한 것입니다.

그래 그 글에 나를 뭐라고 비방을 했는고?

내용인즉 다름이 아니오라 전하가 몹시 난폭하시고 또 너무 호색을 하신다는 비방이 씌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투서의 글자는 한문이 아니라 모두 정음(한글)인데다가, 대궐에 여의(女醫)로 있는 개금(介今), 덕금(德今), 고온지(古溫知), 조방(曺方) 등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전하를 그렇게 비방하더라는 사연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연산군은 당장 이규를 불러다가

그대는 신수영에게 이런 글을 보낸 일이 있느냐?

하고 손에 들고 있던 투서를 이규 앞에 내던졌다. 이규는 자기 앞에 던져진 서장을 주어 보았다. 그러나 전부가 정음으로 씌어있는지라 정음을 모르는 그로서는 읽을 재주가 없었다.

그는 정음을 몰라 이 글을 읽을 줄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음, 그대는 정음을 모른다.

정음을 모른다면 그가 투서를 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연산군은 다시 그 투서 속에 씌어 있는 개금, 덕금, 고온지, 조방 등 여의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투서에 대한 문초를 시작했다. 허지만 누구 하나 투서를 했다는 사람이 없었다. 연산군은 그만 노여움이 북받쳐 그 글 쓴 사람이 도망칠까봐 서울 성 주위에 있는 여덟 문을 굳게 닫아 교통을 끊어버리고 군사들로 하여금 성문을 지키게 하는 동시에 중신들을 불러 현상체포(懸賞逮捕)의 방침을 세우고 죄인을 붙잡는 사람에게는 베(布) 오백필을 상으로 준다는 것을 의금부 문에다가 크게 써 붙였다.

그와 동시에 이후부터는 정음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을 금지시키고, 이미 배운 자는 다시는 정음을 쓰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한편 연산군은 정음을 아는 자를 한성(漢城) 오부(五部)로 하여금 조사하여 정원에 알리게 하는 동시에 그 필적으로 투서와 대조하였다.

즉 정음 아는 사람은 각각 한문과 정음 글씨를 쓰되 네 벌씩 써서 그것들을 모아 큰 책을 만들어서 의정부, 사헌부, 승정원에 각각 배치하여 때때로 투서의 글씨와 대조케 한 것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정음을 아는 것을 한 개의 수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문을 진서(眞書)라 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언문이라 한 것도 그러한 뜻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이렇듯 정음이 천대와 멸시를 받던 그때에 설상가상(雪上加霜)격으로 연산군의 학대를 당하고 보니 세종대왕께서 애써 만들어 놓은 우리의 글이 그만 오유(烏有)에 돌아갈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연산군은 정음을 배우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미 정음으로 써놓은 책들도 모두 불에 태워버렸다. 다만 중국말을 해석하거나 그 발음에 대한 설명 같은 것만 남기

고는 무슨 기록이건 소설이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불질러 버렸던 것이다.

서울 여덟 대문이 칠월 십구 일에 닫혔다가 팔월 육 일에야 열리게 되었지만, 그 동안 죄인은 잡지 못하고 공연히 교통 차단으로 백성들만 괴롭힌 결과가 되었다.

이렇게 교통을 차단한다, 정음 배우는 것을 엄금한다, 정음 책을 불사른다 하고 보니, 백성들만이 아니라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내시들까지도 임금이 잘못한다고 비난을 하기에 이르렀다. 연산군은 이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내시들에게 목패(木牌)를 하나씩 채워주어 그 목패에 씌어진 대로 지키지 않으면 엄벌에 차한다고 선언을 했다. 그 목패에는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즉 입은 화난의 문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라, 즉 혓바닥은 몸을 베이는 칼이니,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이면, 즉 입을 닫치고 혓바닥을 깊이 감추면, 안심처처뇌(安心處處牢)라, 즉 안심하고 간 데마다 편할 것이라는 뜻이다.

연산군은 날마다 궁녀들에게 갖은 음란을 다 부리면서도 장록수에게 대한 사랑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장록수의 세도는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 이제는 팔도강산을 마음대로 뒤흔들게까지 되었다.

장록수는 대궐 안에서만 연락(宴樂)에 취하느니보다는 산과 들로 돌아다니면서 사냥도 하고 잔치도 열어보는 것이 더욱 흥미 있으리란 생각을하여 그 뜻을 임금께 말했다. 누구의 말이라고 그 말을 연산군이 거부하랴. 곧 서울을 중심 삼아 사방 몇 십 리의 주위를 사냥과 오락장으로 만들어 거기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공사(公事)이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즉 동쪽으로는 한강(漢江), 삼전도(三田渡), 광나루(廣津), 묘적산(妙寂山), 퇴현(槌峴), 천마산(天摩山), 마산(馬山), 주엽산(注葉山)에 이르는 곳까지요, 북쪽으로는 돌참(石岾), 홍복산(洪福山), 게넘이참(蟹踰岾)까지요, 서쪽으로는 파주 보곡현(坡州寶谷峴)까지요, 남쪽으로는 용산(龍山), 한강, 노량진, 양화도(楊花渡)까지 이르는 광대한 범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그 금표 안에는 사람의 통행을 금지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살던 사람들도 모두 다른 곳으로 철거 시키고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한 후에 임금은 장록수와 그밖에 미인들이며 호위하는 군사들이며 사냥꾼들을 거느리고 산곡과 숲 사이로 돌아다니며 노루와 산돼지, 꿩, 토끼 등을 잡는 것을 큰 재미로 여기었다.

한편 장악원(掌樂院)의 기녀(妓女)들을 그전보다 갑절로 늘이되, 될 수 있는 대로 나이 이십미만으로 얼굴이 예쁜 처녀만 선택하여 그들에게 취악(吹樂)과 현악(絃樂)을 가르쳐 연회에 참여케 하는 동시에 처용무(處容舞)도 가르치게 했다. 그리고 악공(樂工)을 광희(廣熙), 기악(器樂)을 흥청(興淸) 혹은 운평(運平)이라고 하였는데 흥청악은 삼백, 운평악은 칠백으로 수효를 정하였다. 흥청은 사예(邪穢) 즉 더러운 것을 씻어버린다는 뜻이요, 운평은 운태평(運太平) 즉 국운이 태평한 때를 만났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처용무라는 춤을 출 때에는 여러 가지 난잡한 행동을 보여 심지어는 옷을 입지 않고 춤을 추는 일도 있어 그 추잡한 꼴을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내시에 김처선(金處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처선은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차마 못 본 척할 수가 없어 임금에게 여러 번 간언(諫言)을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런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김처선을 미워하기에 이르렀다. 하루는 김처선이 대궐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 집 가족들에게

상감께서 처용문가 뭔가 하는 추잡한 춤을 추는데, 오늘은 내가 끝까지 강경하게 반대할 생각인즉 아마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그날도 역시 궁중에선 처용무가 벌어졌다. 김처선은 보다 못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이 늙은 것이 세조대왕 때부터 사대(四代) 임금을 모시고 대궐 안에서 살아왔지만 이처럼 추잡한 춤은 처음 보았습니다. 소신은 사기(史記)도 읽어 임금의 몸으로서 이토록 황음에 빠지신 임금은 고금에 없는 일인 듯하오니 상감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몸을 삼가시기 바라옵니다.

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기탄없이 떠들어 대었다. 늙은이가 호령이라도 하듯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지라 춤을 추며 돌아가던 기녀들은 그만 질겁을 해서 한편 구석으로 피해버렸다.

그 모양을 본 연산군은 크게 노하였다.

이놈! 이 늙은 것이 무엇이 어떻다고 주둥이를 놀리느냐? 썩 물러가지 못하느냐!

그러나 김처선은 결심한 바가 있는 듯 물러서려는 기색도 없이 상감께서는 국가 장래를 생각하시고 부디 이 어지러운 꿈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이에 연산군의 분노는 극도에 달하고 말았다. 시녀에게 활을 내어라 하고는 잔뜩 활시위를 메워 김처선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화살은 김처선의 갈빗대에 가서 푹! 하고 박혔다.

그러나 김처선은 아픔을 참아가면서 다시 큰 소리로

조정의 충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거늘 이 늙은 고자놈이야 무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다만 원통한 것은 우리 상감께서 저러다가 임금 노릇을 오래 못할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연산군은 그 소리에 더욱 화가 나서 또 한 번 활을 쏘아 갈겼다. 김처선은 마루바닥에 쓰러졌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다리 하나를 찍어 버리고

일어서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김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상감께서는 부러진 다리로 걸어갈 수 있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이에 연산군은 그 혓바닥마저 잘라버렸다. 그러자 김처선은 자기 손으로 자기 배를 갈라서 창자를 끊고 숨이 질 때까지 입으로 무엇이라고 지껼였다. 연산군은 더욱 노하여 그 시체를 호랑이에게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분노가 풀리지 않아서

김처선이라는 놈은 나쁜 놈이니까 김처선이라는 처자(處字)가 들어 있는 글을 읽거나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명령까지 내렸다. 그리고 또 김처선의 양자인 김공신(金公信)을 죽이고 그의 재산과 가옥을 몰수하는 동시에, 그의 본관(本貫)이 전의(全義)라 하여 전의읍(全義邑)을 폐해 버리고 그의 부모의 무덤을 파헤쳐 평지를 만든 뒤 그의 일가를 칠촌까지 중벌을 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김처선의 이름인 처자(處字)가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르기 싫다하여 처서(處暑)라는 절계(節季)의 이름을, 저서( 暑), 또 처용무(處容舞)를 풍두무(豊頭舞)라고 까지 고치었다.

이 후로는 조정에 중신이 많다 하되 어느 한 사람 임금에게 간언을 올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섣불리 귀에 거슬리는 상주를 했다가는 김처선 처럼 즉석에서 목숨이 달아날 것은 뻔한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의 황음무도한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제는 황음무도 그 자체에서 어떤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게 괴롭고 무엇인지 모르게 두려운 심정을 잊어 버리기 위해서도 술과 계집이 기어코 필요하였다.

연산군은 장악원의 기녀들 수를 좀더 늘이어 규모를 크게 하려고 구영수(具永壽)라는 사람으로 장악원 제조(提調)를 임명하였다. 제조라는 것은 지금 말로 총감독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파고다] 공원에 있던 원각사(圓覺寺)의 중들을 모두 내쫓고 장악원을 그 곳에다 옮겨 가흥청(假興淸) 이백, 운평 천, 광희(廣熙) 천을 두고 총률(總律) 즉 음악 지휘자 사십 명을 두어 그들을 가르치게 했다.

연산군 십일 년 오월 오일에 대궐 안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왕후들의 친족을 비롯하여 남자 손님이 천여 명에 여자 손님이 이백팔십 명이나 되었다. 하니 얼마나 큰 잔치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연산군은 여자들 손님 윗 저고리 가슴에 누구의 아내 아무개라고 명패를 써서 붙이게 했다. 그 까닭은 그 중에 나이 젊고 얼굴이 예쁘게 생긴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훗일에 다시 불러보려는 심산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 후에도 중신들이 연회에 참석할 때에는 반드시 동부인 출석하도록 분부를 내렸다.

연회에 참석하였던 여자 가운데 남보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푸른 옷을 입은 하인을 시켜 대궐에 들어오는데 화장을 잘못하여 예의에 어그러졌다.

하며 책망하는 듯 비밀실로 끌고 오게 한다. 그러면 그 비밀실에는 연산군이 지키고 있다가 맞아들여 욕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니 정경부인(貞敬夫人)이나 정부인(貞夫人)이나 숙부인(淑夫人)이나 하는 양반의 부인일지라도 결국 임금에겐 반항하는 도리다 없어 욕을 보게 마련인데 일단 욕을 당한 부인들은 그것이 창피하여 말을 내지도 못했다. 그 중에는 그 것을 영광으로 알고 대궐 안에서 며칠씩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 곳을 한 번 거쳐 나온 여자의 남편은 그 이튿날 벼슬자리가 한 급 혹은 두 급씩 뛰어오르는 게 항례였다. 이리하여 승진을 갈망하는 사람이나 감투를 바라는 사람은 은연중 자기 아내가 임금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동은 물론 연산군 자신의 호색 취미도 있기는 했지만 실상은 그보다도 장록수의 지휘에 의한 것이었다. 장록수도 여자라 투기심은 남보다 갑절이나 강했다. 그러한 장록수가 비록 유부녀일지라도 다른 여자를 임금에게 안겨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같은 종의 계급이나 미천한 여자라면 물론 장록수도 투기심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고관의 부인 즉 양반 계급의 여자들인 것이다. 장록수가 자신이 종의 딸로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던 몸이라 그 아니꼬운 양반의 부인네들

을 좀 욕보여 복수를 해보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양반의 부인네들이 얼마나 정조를 지키며 얼마나 점잖을 빼나 두고 보자는 태도로 연산군을 시켜 그 정조를 유린케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장록수가 장난 삼아 시험해 보았던 것이 이제는 그만 버릇처럼 되어 장록수도 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연회 때에만 부르는 것이 아니고 일단 미인이라고 지정된 여인은 아무 때나 임금이 마음 내키는 대로 불러들였다. 연산군은 유부녀 농락에 새로운 맛을 붙인 것이다. 이렇게 많은 여자를 사랑하는 가운데 연산군은 투기심도 차츰 강해져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연산군은 유생(儒生) 황윤묵(黃允默)의 소실 최보비(崔寶非)라는 여인을 사랑하였는데 최보비는 말이 적고 웃음을 잘 웃지 않았다. 최보비가 웃지 않는 것은 본 남편 황윤묵을 생각하기 때문이라 하여 연산군은 아무 죄 없는 황윤묵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또 영남(嶺南)서 데려온 어떤 유부녀가 음식상에 돼지머리를 통으로 삶아 놓은 것을 보고 혼자 웃음을 지우자 연산군은 즉석에서 그 연유를 물었다.

왜 까닭 없이 웃느냐?

다름이 아니오라 소첩의 전 남편이 돼지처럼 생겼는데 지금 돼지머리를 보온 즉 남편 생각이 떠올라서 웃었습니다.

연산군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승지를 불러다가 그 여인의 남편 목을 잘라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며칠 후에 그 사나이의 목을 소반에 놓아 그 여인에게 보여 주면서 자, 네가 그리워하던 돼지 서방을 실컷 보아라.

하였다.

이 무렵 연산군은 경복궁 안에 서총대(瑞 臺)라는 큰 역사(役事)를 일으켰다. 서총대란 원래 성종대왕 때 후원에 파가 났는데 한 줄기에 아홉가지가 뻗었으므로 그것을 서총(瑞 )이라하여 그 주위에 돌을 둘러쌓게 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을 연산군은 새로 돌을 다듬어 열 자 높이로 쌓아 올리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놀이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쌓을 재력(財力)이 모자라 백성들에게 베(布)를 짜 바치게 하였다. 허나 연산군 학정 십여 년에 피를 말릴 대로 말린 백성들에게 그런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이불 솜을 뽑고 옷의 솜을 뽑아서 베를 짜 바치었다. 그 모양으로 낡아 빠진 솜으로 베를 짜 바치니 그 베가 좋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서총대포(瑞 台布)란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품질이 엉망이고 나쁜 베를 가리켜 말하는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경회루(慶會樓) 옆 연못가에 만수산(萬壽山)이라는 커다란 산을 쌓아올린 뒤에 봉래궁(蓮來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훼주궁(蘂珠宮) 등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오색이 영롱한 비단으로 꽃을 만들어 장식하고, 연못 속에는 은금 보화로 산호림(珊瑚林)을 만들어 세우고 물 위에는 용주(龍舟)를 띄워 놓았다. 이 모양으로 산은 산대로 백화가 만발한 듯 오색이 영롱하고 연못은 연못대로 호화찬란한데다가 다락 위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쳐놓으니 바람이 불 때마다 꽃과 장막이 물결처럼 흔들리는 폼이 하늘의 무지개조차 무색할 지경이었다.

연산군 십일년 유월에는 이계동과 임숭재를 채홍준사(採紅俊使)라하여 전라도와 충청도로 각각 보내어 좋은 말(馬)과 미녀를 구해오게 했다. 팔월에 이르러 미녀 육십삼명, 양마(良馬) 백오십필을 구해오자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두 사람에게 노비 열 사람씩을 주고 지위도 높여주었다. 구월에는 이손(李蓀), 홍숙(洪淑), 조계상(曺繼商), 성몽정(成夢井) 등을 평안도로 보내어 다시 한 번 채진(採進)케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채청사(採靑使), 채응견사(採應犬使)를 팔도로 보냈는데, 채청사란 아직 출가치 않은 처녀로서 얼굴이 잘 생긴 여자를 채택하는 것이고, 채응견사란 좋은 매(應)와 영리한 개를 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산군은 남의 아내이건 처녀이건 할 것 없이 그저 잘 생긴 여자라면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붙들어 오게 하였다.

이렇게 전국에서 붙들어 온 남의 아내, 첩, 색시, 기생, 시종들, 무당들의 총 수효가 만여명이나 달하고 보니 이제는 그 거처할 곳과 그들의 생활품 조달이 큰 골치덩이가 되고 말았다. 원각사에다 방도 많이 만들고 대궐 안에도 방을 만들었건만 그래도 부족하였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 가운데 한 번 임금의 부름을 받아 사랑을 입은 여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부르고, 아직 기다라고 있는 여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 불렀다.

연산군의 황음과 학정은 조금도 잦아들지를 않았다. 아니, 나아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그 규모와 사치가 심해지더니 이제는 아예 주색잡기에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의 눈에는 이미 국가도 백성도 없었다. 오직 아리따운 계집과 그 육체가 있을 뿐이었다. 연산군이 여색에 그토록 철저히 미치게 된 것은 요부 장록수의 죄였는지도 모른다. 장록수는 처음엔 양반집 부인들에게 욕을 보이기 위해 연산군에게 황음을 조장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장록수의 수단으로도 연산군의 황음을 막아낼 도리가 없게 되었다.

 

 

 

歡樂이 끝났을 때

 

임사홍의 며느리요, 임숭재(任崇載)의 부인인 휘숙옹주(徽淑翁主)는 선왕 성종의 서녀(庶女)로서 연산군에게는 서매(庶妹)에 해당하는 여인이었다. 그렇건만 연산군은 임사홍 집에 자주 드나드는 사이에 자기 서매에게조차 욕심이 생겨서 마침내는 그를 능욕하였다. 임숭재는 임금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남의 미첩(美妾)을 빼앗아다가 들인 까닭에 임금에겐 특별한 총애를 받아오던 터이나, 이제 자기 부인까지 욕을 당하고 보니 그 심정은 좋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임숭재는 겉으로 그런 표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은 임숭재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건만, 혹시나 그가 딴 생각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그에게 아무 잔소리도 말라는 뜻으로 쇳조각을 입에 물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임숭재는 그만 풀이 죽어서 말조차 자유로이 할 수 없어 상심(傷心)한 끝에 심홧병으로 죽고 말았다.

연산군이 왕족 부녀를 능욕한 사실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성종대왕의 형님이요, 연산왕의 백부(伯父)인 월산대군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부인 박씨(朴氏)는 미인으로 유명하였는데 월산대군이 돌아간 후에는 과부로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연산왕은 이 박씨가 뛰어나게 예쁜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백모(伯母)가 되는 것도 잊고 능욕을 하였다. 박씨는 한편으로 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연산군은 박씨의 그 수줍어하는 태도가 도리어 예쁘게 보여 더욱 마음이 달아서 사랑했다. 이리하여 그를 승평부대부인(昇平府大夫人)이라는 존호(尊號)를 주고 그의 아우인 박원종(朴元宗)에겐 관직의 한 계급을 높여 주었다. 부부인(府夫人)이라는 것만 하여도 대군(大君)의 부인이라야 갖는 칭호인데 부대부인(府大夫人)은 그보다 더 높은 지위 이며 정일품(正一品)이상이었다.

박씨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그러나 임금 앞에서는 그러한 태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도 없어 그날 그날 살아가는 것이 죽기보다도 괴로왔다. 그러다가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박씨는 이제 이 아이까지 낳으면 무슨 낯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놓으랴 하고 고민하다 못하여 필경 독약을 마시고 자살함에 이르렀다. 죽을 때 자기 아우 박원종에게 나는 이렇게 인륜(人倫)에 어그러지는 일을 당하고, 사람이라고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죽음으로서 청산하는 바이니 이 억울하고 분통한 일을 네가 갚아라.

하는 유서를 남긴 채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박씨가 죽기 전에 너무나 마음 고통이 심하여 신병이라 핑계하고 임금의 연회에도 잘 나타나지 않으므로 연산군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북도절제사(北道節制使)로 가 있던 박원종을 서울로 불러 올렸다. 그러나 연산군 십이 년 유월 이십일에 박씨가 세상을 떠나고 보니 박원종의 분노와 침통한 심정은 여간 크지가 않았다. 박원종은 이때부터 누님의 원통한 일을 설분(雪憤)하고 저 망나니 같은 임금을 몰아낼 생각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성희안(成希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이란 벼슬자리에 있었는데 하루는 연산군이 양화도(楊花渡) 월산대군 별장에서 연회를 열고 중신들에게 시를 짓게 할 제, 성희안은 임금이 하는 일이 하도 마땅치가 않아서

성심원불애청류(聖心元不愛淸流)

라는 글을 지어올렸다. 즉

우리 임금께서 원래 청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하는 뜻이다.

이 글을 본 연산군은 자기를 조롱한 것이라하여 곧 성희안을 파직(罷職)시켰다. 이후 성희안은 관계(官界)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친구들과 함께 시나 짓고 술이나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연산군이 뉘우칠 날만 기다렸다. 그러나 연산군의 황음과 폭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하여 갈 뿐이라 성희안 역시 어떻게 하면 저러한 임금을 하루 빨리 퇴위(退位)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큰 일을 경영하려면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여기서 성희안은 동지를 구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마침 박원종은 그 사람됨이 충실하고 사심(私心)이 적은 까닭에 무사(武士)들에게 추앙을 받고, 또 근일에는 자기 누이가 음독자살까지 하였으니 그 심정이 움직일만 한데 어떻게 하면 그와 만나볼 수 있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같은 동리에 사는 군자부정(軍資副正) 신윤무(申允武)란 사람이 박원종과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란 것을 알았다. 신윤무는 벌써 성희안과는 그때 의기상통해 있는 우국지사(憂國之士)의 한 사람이었다. 성희안은 신윤무를 통하여 박원종의 의향을 슬며시 떠보게 하였다.

한편 박원종은 신윤무한테서 성희안의 인물이며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을 듣자, 당장 팔을 걷어 붙이며

그러한 생각은 내가 누구보다 지지 않을 만치 가지고 있소. 그런데 누구와 어떠한 방법으로 일을 일으켜야 될지 알 수가 없어서 오늘날까지 참고 기다려 오던 중이요.

하고 자기의 뜻한 바를 신윤무 편으로 성희안에게 전하였다. 성희안은 곧 박원종의 집을 찾아가 서로 손목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사내 자식으로 나라가 장차 위망(危亡)해 갈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어찌 그대로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 자 오늘부터 생사를 걸고 큰 일을 같이 도모해 봅시다.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굳은 언약을 했다.

성희안은 박원종과 뜻을 통하게 되자 일시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기뻤다.

박원종과 성희안은 그때부터 함께 극 비밀리에 동지들을 널리 규합한 결과 이조판서(吏曹判書) 유순정(柳順汀)과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을 끌어들였다.

연산군 십이 년 구월 일일, 이날은 연산군이 미인들을 거느리고 장단 석벽(長端石壁)에 새로 지은 정자로 놀러 갈 생각을 하고 있던 날이다. 박원종과 성희안 등은 이날을 기하여 임금이 장단에 놀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임금을 붙들어 가두어 두고 임금의 아우되는 진성대군(晋城大君)을 모셔다가 임금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군자부정(軍資副正) 신윤무, 전수원부사(前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周) 등을 시켜 무사들을 모아일일 저녁에 훈련원에 모이게 했다.

그런데 연산군은 이러한 일이 있는 줄 알 길이 없는데 무슨 예감이 들었는지 갑자기 장단행(長端行)을 중지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떠들썩하니 준비하던 일을 중지하고 말았다. 그러나 박원종과 성희안 등은 애써 모아놓은 무사라든가 그밖에 여러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냈다간 비밀이 탄로될 것이라 하여 그대로 예정한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박원종은 이때 유자광이 꾀가 많고 여러 번 이런 일에 경험이 있다 해서 그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이 일에 참가를 시켰다.

우선 신윤무를 보내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의 집으로 가서 임금을 잘못 인도했다는 뜻으로 때려 죽이고, 개성유수(開城留守)로 가 있는 신수근의 동생되는 신수겸(愼守謙)은 따로 사람을 보내 죽이게 했다.

한편, 무사들이 훈련원에 모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서울 장안에 기운깨나 쓰는 사람들은 대개 모여들었다. 이에 그 많은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부서를 정한 후 그들을 인솔할 사람도 대개 작정되자, 윤형로(尹衡老)를 진성대군 관저로 보내 뜻 있는 사람들이 의기(義旗)를 들고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동시 무사 수십 명으로 하여금 시위(侍衛)케 하였다.

이날 밤 성희안 등은 돈화문(敦化門) 앞에 나아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대궐 안에 연산군을 모시고 있던 장사(壯士)며 시종 들던 내시 등이 대궐 밖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자 모두 하수도 구멍으로 빠져 도망쳐 버려서 대궐 안은 이미 사람 없는 쓸쓸한 곳이 되고 말았다.

입직승지(入直承旨) 윤장(尹璋), 조계형(曺繼衡), 이우(李 ) 등이 사변을 일어난 것을 알고 창황히 들어가 임금께 알리었다. 연산군은 곧 활과 칼을 가져오라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연산군은 놀라고 황겁하여 달아나려고 하다가는 다시 되돌아 와 승지들의 손을 잡고 부들부들 몸을 떨고 뭐라고 말을 하려다간 말문이 막혀 다시 입을 다물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것을 본 승지들은 대궐 밖의 일을 살펴본다는 핑계를 하고 모두 하수도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박원종은 내시 몇 사람을 앞장 세워 장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 임금께 국보(國寶) 즉 옥새(玉璽)를 내놓으라 하고, 임금 앞에서 아첨만 떨던 전동(田同), 심금손(沈今孫), 강응(姜凝), 김효손(金孝孫) 등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궁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려 경북궁으로 나아가 성종대왕의 계비(繼妃) 윤씨를 뵙고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천명과 인심이 벌써 진성대군에게로 돌아갔으므로 여러 중신들이 대비전하(大妃殿下)의 뜻을 받들어 진성대군을 맞아 모시려 하는 바이오니 성명(成明)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청했다. 이에 대비도

모든 준비를 예도(禮度)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거행하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곧 유순정이 진성대군의 잠저로 가서 진성대군을 경북궁으로 맞아들였다. 이날로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여 백관의 치하를 받으며 새 임금이 왕위에 올랐다.

한편 즉위식을 거행하고 만세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올 때에 연산군은 승지를 불러도 누구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고, 장록수, 전비(田非), 김귀비 등 가장 사랑하던 여인들은 부들 부들 떨면서 울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박원종이 대궐로 들어와 연산군이 보는 앞에서 장록수, 전비, 김귀비 등을 붙들어다가 다른 곳에서 죽여버리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때에 장록수의 재산은 국고(國庫)의 절반을 넘었다 한다.

그리고 연산군은 강화(江華)섬밖에 있는 교동도(喬桐島)에 유폐시키고 세자(世子)는 강원도 정선(旌善)으로 귀양 보냈다.

 

 

 

外戚의 싸움과 垂簾聽政

사랑의 痛哭

 

진성대군(晋城大君) 곧 중종(中宗=西紀 1,506-1,544)이 연산군(燕山君)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 열아홉 살 때이다.

진성대군의 아내 신씨(愼氏)는 박원종(朴元宗)일파에게 임금을 잘못 인도했다는 죄목으로 제일 먼저 피살된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중종이 즉위식을 올린 날 저녁 경북궁에서 왕비 신씨를 맞으러 사람이 나왔다. 신씨는 이때 어젯밤 자기 아버지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 있던 중이었다. 남편이 임금이 되고 자기는 왕비가 되었으나 그렇다고 역적으로 몰린 친정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착잡한 심정으로 신씨는 경북궁으로 들어갔다.

회색이 만면한 임금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신씨를 반가이 맞아들였다.

그날 밤 중궁의 처소로 찾아간 임금을 붙들고 왕비를 그저 눈물 뿐이었다.

울지 마오, 중전. 옆방에 나인들이 있소. 왕으로서의 체통을 지켜야 할 게 아니요?

임금도 왕비의 친정 아버지가 살해된 것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얼마를 울다가 왕비는 겨우 진정하고 고개를 들었다.

상감, 이 몸의 운명도 길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왕비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이제 일국의 국모인데.

아니올시다.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이 이 몸을 역적의 딸이라 하여 내쫓게 되오면 상감도 도리없이 그들 말을 따를 수밖에요…

그건 안 되오. 아무리 반정공신들의 말일지라도 안 되오. 안 되오.

임금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있게 말하였다. 이들 젊은 부부는 그 당시 조혼의 풍습으로 벌써 팔 년 전인 진성대군 열한 살 때 열두 살 난 소녀 신씨를 맞아 결혼하여 이제는 애정으로 깊이 결합된 사이였던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될진댄 차라리 나도 임금의 자리를 내버리고 전날과 같이 대군으로 돌아가겠소.

임금도 어느덧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신씨가 궁중에 들어온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다. 그 동안 임금은 새로운 정치를 하느라고 분망한 나날을 보냈다.

우선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유자광(柳子光), 신윤무(辛允武), 박영문(朴永文), 장정(張珽), 홍경주(洪景周) 등 여덟 사람을 일등공신(一等功臣)이라 하고 차례차례로 사등 공신까지 봉했다. 그리고 전에 연산군에게 아첨하던 무리들을 몰아내고, 영의정 유순(柳洵), 좌의정 김수동(金壽童), 우의정 박원종 등과 의논하여 연산군 때의 비정(秕政)을고치기에 힘썼다.

하루는 영의정 유순을 비롯하여 박원종, 김수동, 유자광, 성희안, 유순정 등 중신들이 임금 앞에 나아와

신 등이 여러 날을 두고 생각건대 신수근의 딸을 중궁으로 두는 것은 천하에 의심을 사는 일이며, 은연중 화근을 기르는 일이온 즉, 사직을 보존하자면 신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게 하심이 가하오이다.

하고 말했다.

임금은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생각하고, 중신들을 한 번 내려다본 후에

비록 과인이 경(卿) 등에 의하여 이 자리에 앉았다 하더라도 그 일만은 좇을 수 없소. 죄 없는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내쫓다니 못할 노릇이요.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박원종은

신 등도 그 점은 짐작하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종사(從社)에 관한 일이오니 사은(私恩)으로 인하여 대사를 그르치지 마시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임금은 더 이상 듣기도 싫다는 듯 침전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물러날 신하들이 아니었다. 박원종은 승지를 시켜 어서 결단을 내리라고 졸랐다. 박원종 등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씨를 몰아내는 일은 그들의 생사(生死) 문제와 직접 관련되는 일이었다. 신씨를 만약 그냥 중궁에 머물게 해둔다면 다음날 원자가 태어났을 때 언젠가는 살부지수(殺父之讐)의 혐의로 몰살당할 것이 뻔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데 박원종 등은 물러갈 생각도 않고 그날 밤으로 중궁을 내보내라고 아우성이었다. 만약 임금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장차 또 무슨 변이 날지 모를 기세였다.

이미 신씨가 타고 나갈 가마까지 마련하여 중궁 뜰 앞에 대놓았다. 임금은 더 이상 버티어 보아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임금으로서는 자기 입으로 신씨에게 나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임금은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임금의 마음은 오직 괴롭기만 했다. 신씨는 임금의 품에 안겨 흐느끼기만 하고 임금은 신씨의 등을 어루만져 달래어 줄 뿐이었다. 임금의 눈에서도 눈물이 비 오듯 했다.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임금의 신세를 스스로 한탄하며 흘리는 눈물이었다.

얼마 후 신씨는 울음을 그치고

상감, 이제는 할 수 없습니다. 이 몸은 물러가야만 하겠습니다. 상감께서 이 몸 하나를 생각하시다 혹 용상마저 버리게 되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신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일어섰다. 임금은 그저 넋을 잃고 허공만 바라보았다. 한참 후 임금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신씨가 시녀들에게 싸여 가마를 타고 궁중에서 물러 나간 뒤였다.

신씨는 그전 진성대군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박원종 등은 그것도 안 된다 하여 하는 수 없이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갔다.

신씨 부인이 중궁의 자리에 앉은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생긴 일이다. 이 소문이 한 번 세상에 알려지자 백성들, 특히 학자들은

임금의 조강지처까지 몰아내는 신하가 어디 있느냐? 박원종, 성희안 등 강신(强臣)들을 몰아내야만 한다.

하고 떠들어댔으나 그것은 한낱 헛소리로 그쳤을 뿐 감히 그들 강신들을 몰아낼 만한 세력은 아직 조정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박원종은 그의 처형(妻兄)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왕비로 책봉케 하였다.

이분이 바로 장경왕후(章敬王后)이다.

그러나 장경왕후 윤씨(尹氏)는 중종 십년 삼월 이일 아들을 낳은 지 일주일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폐비 신씨가 궁중에서 쫓겨난 지도 벌써 십년 이란 세월이 흐른 셈이다. 그 동안 권세를 부리던 박원종은 이미 죽고 없었으나 그래도 임금은 다른 강신들의 눈이 무서워 한 번도 신씨 집을 찾아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에 폐비 신씨를 다시 맞아 들이자는 의논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은 영남 학자들과 교제하면서, 그전부터 박원종 등이 신씨를 폐비시킨 데 대하여 불만을 품어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장경왕후가 죽고 다시 계비(繼妃) 문제가 조정 안에서 떠돌고 있을 때, 김정과 박상은 서로 만나서 의논하기를 지금 원자(元子)는 강보 중에 싸여 있는데 일부 정객들은 후궁 박숙의(朴淑儀) 소생 복성군(福成君)을 싸고 돌며, 복성군의 어머니 박씨를 정식 왕비로 삼으려는 기미가 보이오. 잘못하면 원자의 위치가 불리하게 되겠소. 그렇소. 후궁이 세력을 잡으면 나라가 망하오. 그러니 박씨를 왕비로 승격시키는 것 보다는 오히려 전에 내쫓은 폐비 신씨를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요.

김정과 박상 등은 이런 결론을 내리고 곧 상소문을 썼다. 물론 자기네들이 쫓겨나더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할 일을 해야만 되겠다는 비상한 각오 밑에 붓을 든 것이다.

 

<< 전에 신씨가 폐위 당한 것은 당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신수근을 죽이고, 그 딸을 왕비로 그냥 두면 훗일 자기네들이 해로울까 보아 한 짓입니다. 신씨는 아무런 죄 없이 강신(强臣)들의 억압으로 쫓겨났습니다. 이제 장경왕후가 돌아가시고 중궁의 자리가 비었는데 전하께서는 이 기회에 신씨를 다시 복위시키어 부부의 길을 밝힘이 대의에 맞는 일인가 하나이다. 만일 숙의(淑儀) 박씨를 승격시켜 왕비에 앉히거나 다른 분으로 왕비에 앉히게 되오면 승통(承統)을 주로하는 종사(宗社)의 일로 볼 때, 이는 원자의 위치를 위태롭게 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

 

이러한 상소문이 정원에 들어오자 조정 안은 때아닌 풍파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사간(大司諫) 이행(李荇)이나, 대사헌(大司憲) 권민수(權敏守) 등은 김정과 박상 등의 상소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이것은 공연히 평지에 파란만 일으키는 사론(邪論)입니다. 나라가 태평한 이때 사론으로 사직을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이들을 잡아다가 문초하여 처형해야 합니다.

문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임금도 그 중대성을 인정하고 곧 영의정(領議政) 유순(柳洵), 좌의정 정광필(鄭光弼), 우의정 김응기(金應箕), 좌참찬(左參贊) 장순손(張順孫), 우참찬(右參贊) 남곤(南袞) 등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케 했다. 중신들은 즉시 모여 의논한 후 임금께 아뢰었다.

신씨를 다시 세웠다가 신씨한테서 또 왕자가 태어나면, 지금의 원자와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지기만 할 따름입니다. 즉 가례한 순서로 보면 응당 신씨가 원실인즉 장경왕후의 소생은 곧 계실의 소생이 되겠으니 이런 모순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김정과 박상 등은 나라의 대사를 경솔히 지껄인 죄로 엄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이러하여 박상은 남원(南原), 김정은 보은(報恩)으로 각각 귀양을 보내 평지의 풍파는 일단 가라앉았다.

그 후 중종은 새로이 윤지임(尹之任)의 딸을 책봉하여 계비를 삼으니 이가 곧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己卯士禍

 

중종(中宗)은 재위 오년 동안을 공신들에 의하여 휘둘려오기만 하다가 안당(安 )을 이조판서에 앉힌 후부터는 새로운 이상적 정치를 해보려고 힘썼다. 안당은 성종(成宗) 때부터 벼슬하여 연산군 같은 폭군 밑에서도 무사히 지내온 사람이다. 그가 중종으로부터 새로운 정치를 해보라는 특별한 분부를 받아 이조판서 자리에 들어 앉은 후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어질고 학문 있는 사람을 천거한 것이었다.

조광조(趙光祖)도 안당이 천거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데 이때부터 지방에 있던 학자들이 차츰 서울로 올라와 정치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젊은 사람으로서 특히 나라의 언론을 맡은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일하며, 정치를 감독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전에 박상과 김정이 신씨 복위(復位) 문제로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에도, 정언(正言)인 조광조는

대간(臺諫)에서 상소하는 사람을 그르다고 도리어 벌을 주었으니 이는 임금에게 상소하는 길을 막는 것이요.

하고 권민수, 이행을 공박하여, 결국 그들을 파직(罷職)케하여 귀양보내고 이장곤(李長坤)으로 하여금 대사헌을 삼고, 김안국(金安國)으로 대사간을 삼은 일까지 있었다.

이때 젊은 학자들의 중심은 조광조였다. 그는 학행과 덕망이 아울러 높았던 사람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삼년이 채 못 되어서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그 해 겨울에는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임금의 신임을 한몸에 지니었다.

그는 부제학 당시 만조백관들이 결정한 여진(女眞) 토벌을 한 마디로 반대해서 중지케 만들었고, 또 판서 고형산(高荊山)이 거만하다하여 그 부하를 잡아서 옥에 가두고, 또 대비(大妃)가 소중히 아는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는 조정의 세력이 점점 조광조 일파에게 집중되어 그들의 세력은 한때 원로 대신들도 어쩌지 못할 정도였다.

기묘년(己卯年)에 들어서면서부터 조광조 등 신진들의 득세는 더욱 심하여 원로 대신들을 개몰 듯 몰아대었다. 소위 사림(士林)과 정객들의 반목이었다. 젊은 학자들은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대하여는 함께 조정에 있기도 싫어하는 배타적 태도로 나와 자연 적을 많이 만들게 되었고 또 반대당들은 기회만 있으면 조광조 일파를 조정에서 몰아내려고 더욱 굳게 뭉치었다.

병인년(丙寅年) 반정 때의 공신록(功臣錄)은 엉터리요. 거기 이름이 적힌 공신의 대부분은 아무런 공도 없이 박원종에게 아부해서 된 사람들이 많소. 이제 이것을 가려내어 공신록을 대폭 삭제해야 하오.

하고 들고 나섰다.

이 결과 공신록에서 삭제 당한 사람은 칠십여명이나 되었다. 삭제 당한 공신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들은 또 이들대로 연합하여 조광조 일파를 원수처럼 여기고, 이를 제거코자 하였다. 당시 희빈 홍씨(熙嬪洪氏)의 부친 홍경주(洪景周)도 공신의 한 사람으로 조광조 일파에게 배척을 당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홍경주와 남곤(南坤)이 서로 만나,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의논을 하였다. 남곤으로 말하면 조정 안에서 조광조 일파와 직접 맞서서 싸우는 반대파의 중심이었다.

젊은 것들이 자기 세상인 양 소란을 피우는 꼴은 정말 두고 볼 수가 없소.

그렇소. 언젠가 희빈(熙嬪)을 만났더니 상감께서도 젊은 것들 잔소리에 화를 내시더라고 하오.

두 사람은 서로 뜻이 맞아 다시 불평을 품은 동지들을 규합했다. 총관(總管) 심정(沈貞)이 적극적으로 여기에 가담했다.

홍경주는 이때부터 궁중으로 들어가서 자기 딸을 자주 만나며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공작을 했다. 어느 날 임금이 희빈 홍씨의 처소를 찾아 갔을 때 홍씨는 허리춤에서 벌레 먹은 나무 잎을 하나 꺼내어 임금에게 보였다.

이게 뭐요?

임금은 눈이 휘둥그래서 그 나무 잎을 받아 자세히 보았다. 푸른 뽕나무 잎은 이상스럽게 벌레가 먹었는데, 그 벌레 먹은 자국은 글자 형용이 뚜렷하고 그 글자는 대게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되어 있었다.

주초(走肖)란 곧 조(趙)자를 말함이요, 장차 조씨(趙氏)가 임금이 된다는 뜻이다.

주초위왕이라? 무슨 뜻이요?

임금은 이상스런 기색으로 홍씨에게 물었다.

후원 뜰 뽕나무 밭에서 주워온 것이온데, 지금 세상에서는 조가가 임금이 된다고 떠들고 있다 하옵니다.

임금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곧 입적 승지를 불러 그 나뭇잎을 보이며 아는 대로 말해보라 했다.

입직 승지는 깜짝 놀라면 한참 동안 말을 못하다가 임금이 하도 엄하게 다구쳐 묻는 말에

조(趙)가가 왕위에 오른다는 뜻으로 해석되옵니다.

하고 역시 희빈 홍씨와 같은 대답을 했다.

다음날 여러 신하들에게 이 뜻을 또 물었다.

신하들의 대답은 대게 조광조가 근자에 그 세력이 커져서, 감히 아무도 그에게 대항을 못하더니 이번에 이런 도참(圖讖=예언)이 뵈이는 까닭은 필시 무슨 일이 벌어질 조짐이라 생각됩니다. 한시 바삐 조광조 일파를 엄중 문초하여 처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임금은 조광조 등이 매사에 임금 하는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러 드는 것을 매우 불쾌히 여겨오던 참이다. 더구나 조광조가 너무 일찍 성망이 높고, 또 그들의 도당이 여간 많지 않아서 진작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하던 때이다.

이때 또 조광조 등이 서로 모이기만 하면, 역모 의논하는 것으로서 일을 삼는다는 말이 자주 들려오고 있었다. 임금은 곧 이자(李 ), 김정(金淨), 조광조(趙光祖), 김구(金絿), 김식(金湜), 유인숙(柳仁淑), 박세희(朴世熹), 홍언필(洪彦弼), 박훈(朴薰) 등을 잡아들이라.

했다. 으로써 유명한 기묘사화(己卯士禍)는 벌어졌다. 그때 사람들은 기묘사화는 남곤, 홍경주, 심정 등이 꾸며낸 것이라 하여 이들을 소인이라 욕을 했다.

다음날부터 죄인을 끌어내어 문초를 하고, 김전(金詮), 이장곤(李長坤), 홍숙(洪淑) 등을 추관으로 하여 그 죄를 정하도록 했다. 이때 조광조의 나이는 삼십팔 세, 김정은 삼십사 세, 박훈은 삼십육 세로서 모두 삼십 대의 청년들이었다. 젊은 세대 사람들이 이상적 정치를 해본다고 하다가 너무 급진적으로 흘러 실패한 것이었다.

<< 역적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는 참형(斬刑) 윤자임, 박세희, 박훈 등은 장류(杖流) >>

이렇게 각각 죄목이 내려졌다.

그러나 정광필(鄭光弼), 안당(安 ) 등 온건한 중신들은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여 결국 조광조는 능성, 김정은 금산, 김식은 석산, 김구는 개녕, 윤자임은 온양, 박세희는 상주, 박훈은 성주로 각각 귀양 보냈다.

이러한 소문이 전해지자 당시 유생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광화문밖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조광조 등의 무죄한 것을 상소한다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또 문지기는 유생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옥신각신했다. 마침내 대궐 문이 열리었다. 유생들은 그 자리에 연좌(連坐)하여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통곡소리는 임금 있는 처소에까지 들렸다.

임금은 금군(禁軍)을 동원하여 대표자를 잡아 가두게 하고 유생들을 몰아내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유생들은 금군이 휘두르는 몽둥이질 밑에서도 물러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금군은 반항하는 자 약 삼백 명을 잡아넣고 간신히 유생들을 쫓아냈다. 다음날에도 유생들은 다시 몰려와 떠들어댔다. 그 결과 전날에 가둔 삼백 명을 전부 방면하고 돌려 보냈다.

궁중과 궐문 밖이 이와 같이 소요하고 전국의 인심이 동요되자 임금은 도리어 마음이 약해져서 조광조 등을 슬그머니 놓아줄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때 박배근(朴培根), 정귀아(鄭歸雅) 등 무사(武士)들이 떼를 지어서

<< 아직도 조광조 일파의 무리가 그대로 있어 소란을 피우니, 이런 자들을 모두 격살해야 한다. 그들은 무(武)를 경멸하고, 우리를 욕한 자들이다. 무사들은 단결하여 그들을 없애야 한다. >>

이렇게 선동하며 나섰다.

그리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사헌 이항(李況), 대사간 이빈(李 ) 등도 조광조 등을 사형에 처하게 하고 유생들의 등용문인 현량과(賢良科)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돈상태는 더욱 계속되고 좀체로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임금은 각일각 험악해 가는 형세를 염려하고 할 수 없이 능주(綾州)로 귀양보낸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고 다른 사람들은 절도(絶島)로 다시 귀양처를 옮기도록 했다.

 

 

 

灼鼠의 變

 

조광조 등 젊은 학자들이 몰려나자 조정에서 일약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일파였다. 그러나 이들은 조광조 일파를 몰아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장차 정권을 독점할 생각으로 다시 자기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고하기 시작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년 후인 신사(辛巳)년, 심정과 남곤은 사헌부와 짜고 전부터 조광조 등과 가깝게 지내오던 우의정 안당을 비롯하여 문근(文瑾), 유운(柳雲), 유인숙(柳仁淑), 정순붕(鄭順朋), 신광한(申光漢), 박영(朴英) 등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안당은 조정에서 물러난 뒤로 고향 음성에 내려가 한가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처겸(處謙), 처함(處 ), 처근(處謹) 등 삼형제는

남곤과 심정이 자기 아버지까지 몰아내고 정권을 독차지하고 있음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남곤과 심정은 전에 조광조를 몰아내더니 이제 또 우리 아버지까지 없애려 든다.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고는 외숙 시산정(詩山正=正淑), 권진(權 ), 안정(安珽) 등과 함께 의논하여 남곤과 심정 등 간신배들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은 뜻하지 않게도 안씨 집안의 서얼(庶蘖)인 송사련(宋祀連)이란 자의 고발로 탄로가 나서 안씨의 일족은 모두 역적으로 몰려 거의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였다. 송사련으로 말하자면 안당은 그의 외삼촌이 된다. 즉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安敦厚)는 나이 많아 상처(喪妻)하고 종 중금(重今)을 첩으로 데리고 살았는데 중금은 딸 감정(甘丁)을 낳았다. 감정은 자라 백천(白川)에 사는 송린(宋璘)에게로 시집을 가서 아들 사련(祀連)을 낳았던 것이다.

사련은 어려서부터 서울에 올라와 외가인 안당의 집에서 살았는데 이번에 송사련이 안처겸 등 형제를 역적으로 고발한데 대해서는 까닭이 있었다.

당시는 양반과 상놈의 관계를 몹시 따지던 때이라 송사련은 외사촌들에게 천대만 받고 자라났다.

(사람은 매일반인데 그래 양반만 사람이고 상놈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나도 양반이 되어야겠다. 어떻게 하면 나도 이 원수의 신분 관계를 벗어나 한 번 득세를 해보나?)

송사련은 늘 이러한 생각을 먹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중 안처겸 형제들이 무슨 모의를 하는 것을 보고 자기고 한몫 들 것을 주장했으나 처겸은

상놈의 새깨가 어른들 얘기하는데 감히 한몫끼러 들다니!

하고 상대도 하지 않았다.

송사련은 그 길로 처남 정상(鄭 )을 찾아가 처겸 등에게 모멸 당한 얘기를 하며 신세 한탄을 했다. 정상도 양반들에게 늘 업신여김을 받아오던 신세라 자기네들이 양반이 될 기회는 바로 이때라고 하면서 그들의 모의를 정원에 고발하자고 했다.

다음날 송사련과 정상 등의 고발을 들은 남곤과 심정 등은 우선 안처겸을 잡아 가두고 그의 일당이라고 지목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올렸다. 이로써 볼똥은 안당에게도 비화하여 결국 안당은 아들의 음모를 알면서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교살되고 만 것이었다.

이때부터 조정은 남곤, 심정, 이항, 김극복 등이 마음대로 뒤흔들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불만을 품지만 그들의 세력이 두려워 감히 겉으로 대항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김안로(金安老)도 전부터 조정 안에서는 은연한 일련의 세력이었는데 근자에 남곤, 심정 등의 득세로 자꾸만 밀려나게 되자 부제학 민수천(閔壽千), 장순손(張順孫)등과 제휴하여 곤정(袞貞) 타도에 팔을 걷고 나서게 되었다. 바야흐로 조정은 두 갈래로 갈라져 서로 기회만 있으면 상대편을 꺾으려는 판이었다.

김안로는 이 무렵 자기의 기반을 단단히 할 계획으로 아들 김희(金禧)를 효혜공주(孝惠公主)에게 장가보냈다. 이제 부마(駙馬)의 아버지로서 당당히 세력을 잡을 만하게 되었다. 김안로가 대사헌이 되자 세상에 소문이 돌기를 사헌부에서 대신 하나를 칠 모양인데 아직 시기가 아니어서 의론이 통일될 때까지 기다리는 모양이라 했다. 남곤은 이 소문을 듣고 버썩 의심이 들었다.

그 후 김안로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자 조정신하 중에 그리로 붙는 사람이 많아지고 무슨 공론이 일어날 때마다 우선 이숙( 叔=김안로의 자)의 생각은 어떻소?

하고 묻는 일이 많게 되었다. 김안로의 세력이 이렇게 커진 것을 보고 남곤 일파는 더 내버려 둘 수 없다 하여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남곤은 우선 대사헌 이항(李沆)을 시켜 상소케 했다.

<< 김안로는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불화케 하고 있소. 즉시 내보내는 것이 좋겠소. >>

다음에는 홍문관의 응교(應敎) 심사손(沈思遜), 수찬(修撰) 조인규(趙仁奎), 정자(正字) 송인수(宋麟壽) 등이 글을 올리기를

<< 김안로에 대하여는 대신과 대간(臺諫)이 아뢰어도 윤허(允許) 를 아니하시니 한심함을 이길 수 없나이다. 전일에 조광조에 대하여 당초에 전하가 미리 알고 내쫓지 못한 고로 마침내 방자하게 권세를 휘둘러 나라 형세가 위태하였으니 어찌 이를 거울삼지 않으오리까.

상감께서 만일 김안로의 정적(情迹)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하여 차마 죄를 주지 못한다면 훗일에 근심될 것이 어찌 조광조 때 같기만 하오리까. 대저 간사한 것을 알기가 쉽지 아니

하고 그것을 내쫓기는 더욱 어려우니 알고도 내쫓지 못하면, 모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상감께서는 속히 결단하여 먼데로 귀양 보내서 조정에 발 들여놓지 못하게 하소서. >>

하였다.

이러한 상소가 연달아 올라오니 임금도 처음에는 부마의 아버지라하여 두둔하다가 마침내는 할 수 없이 가까운 풍덕(豊德)으로 귀양을 보냈다. 김안로를 쫓아낸 것은 물론 남곤이 주모자가 되고 대사헌 이항과 응교 심사손(심정의 아들)이 앞장을 서서 한 일이다. 이 때문에 김안로는 이 몇 사람들에게 몹시 원심을 품게 되었다.

김안로를 쫓아내긴 했으나 조정 안에서 또다시 신진(新進) 정객들이 밀고 들어 서서 말썽을 부렸다. 즉 남곤 일파인 이항이 우의정이 될 때 이들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하기 때문에 이항은 취임을 못하고 말았다. 이항이 우의정에 임명된 것이 정해년(丁亥年) 정월의 날이니, 남곤이 죽기 바로 한달 전이다. 남곤이 죽은 정해년은 기묘년에 조광조 일파를 쓰러 뜨린지 구 년째가 되는 해였다. 그리고 신사년(辛巳年) 안당의 옥사로 무수한 사람이 죽어서 완전히 정권을 잡은 후로는 불과 육 년이었다. 남곤은 오십칠 세로 죽을 때까지 영의정으로 있었다.

남곤이 죽은 후 신진(新進) 대간들과 심정 일파와의 대립은 매우 심각하였다.

이러던 중 세자(世子) 생신날에 대궐 후원 나무 가지에 쥐의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주둥아리와 두 귀와 두 눈을 모두 불에 지져서 걸어둔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작서(灼鼠)의 변(變)>>이라 했다. 그 후에도 계속 임금의 침실 난간에 불에 지진 쥐가 버려져 있어 일은 점차로 거칠어졌다. 처음에는 궁 안에서 생긴 일이라 대신들도 모르고 있었는데, 세자의 외조부가 되는 윤여필(尹汝弼)이 이것은 세자를 저주한 것이라 하여 들고 일어났다. 심정도 좌의정 이유청(李惟淸)과 함께 어전에 나가 범인을 잡아 낼 것을 상주했다.

다음날 많은 궁인(宮人)들이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나타나지 않게 되자 결국 대비(大妃) 윤씨의 전지(傳旨)로 경빈(敬嬪) 박씨에게로 지목이 가게 되었다. 대비는 이유청에게 정음으로 전지를 써서 내리기를

 

<< 이번 작서 에 관한 일은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다. 내가 곧 문초하여 알아내려 하였으나 조정에서 문초한다 하기에 알아낼 줄 알았더니 여러 날 문초하여도 죄지은 사람을 잡지 못하니 내가 의심 나는 대로 알린다. 동궁의 작서는 나도 잘 알지 못하지만, 임금 침실 옆에 걸어 놓은 작서는 아무래도 경빈 박씨의 소행 같다. 그때 그 쥐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거기에는 경빈 한 사람만이 있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쥐를 갖다 놓았다면 경빈이 보았을 것이다. 쥐가 움직일 때에 상감이 보시고, 이 쥐를 내다버리라 하여서 시녀가 쥐를 싸 가지고 나갔는데 그때 경빈이 급한 말로 그 쥐는 상서롭지 않습니다. 하고 말했다 한다. 달리는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 일이 사소한 일이 아니므로 얼른 말하지 않았으나 그동안에 경빈은 궁 안에서 여러 사람이 나를 의심한다. 고 혼자 성이 나서 푸념을 하였다고 하니 이상스럽다. 그리고 또 며칠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경빈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가 비자(婢子)들과 가인상(假人像)을 만들어 목을 베어 죽이는 시늉을 하면서 작서를 발설 한사람은 이렇게 죽인다고 하고 몹시 꾸짖고 떠들며 방자(詛呪=저주)를 했다고 한다. >>

 

이 전지를 받은 대신들은 곧 임금 앞에 나아가

대궐안의 일은 신(臣) 등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비께서 내리신 전지로 보아서 하루라도 박빈을 궁중에 둘 수 없나이다. 박빈을 폐하여 서인을 만들고 복성군(福成君)의 작호(爵號)를 삭탈하여 내쫓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임금도

대신들의 하는 말이 옳다. 박빈과 복성군은 조정의 공론대로 죄를 주라.

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일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경빈 박씨로 인연하여 조정의 벼슬자리를 얻은 자들까지 한꺼번에 몰아 내는 책동이 일어났다. 경빈 박씨가 궁중에서 쫓겨나자 대간들은

좌의정 이유청은 처음에 이 일을 아뢰자 할 수 없이 아뢰었고, 또 문초할 때에도 죄를 주지 아니하려다가 여럿의 주장으로 치죄하게 되었으니 죄상 자격이 없으므로 갈아야 하고, 또 박빈과 연인(蓮姻) 관계 있는 이들도 모두 내쫓아야 합니다.

하고 주장했다. 박빈과 연인 관계가 있다 함은 곧 이조판서 홍숙(洪淑), 예조참판 김극개(金克塏), 문학(文學) 홍서주(洪 疇), 병조좌랑(兵曹佐郞) 김헌윤(金憲胤) 등을 가리켜 말함이었다.

홍숙은 당성옹주(唐城翁主)의 남편인 홍려(洪礪)의 조부요, 홍서주는 그의 아버지다. 또 김극개는 혜순옹주(惠順翁主)의 남편인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의 조부요, 김헌윤은 그의 아버지인데, 이 두 옹주는 모두 경빈 박씨의 몸에서 난 임금의 딸들인 것이다. 박빈이 죄를 얻고 쫓겨난 이상 그 딸의 시아버지나 시조부도 물러나야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홍숙이 동궁빈객(東宮賓客=세자를 기르치는 직책)으로 있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다. 박빈이 세자를 헤치려고 요사를 부렸는데 그 딸의 시조부가 어떻게 세자와 가까운 직책에 있을 수 있

느냐 하는 것이다.

또 박빈이 죄를 지은 이상, 그 친정 아버지인 박수림(朴秀林)이나 그의 오라버니인 박인형(朴仁亨), 박인정(朴仁貞) 등도 모두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이로써 박빈의 일족과 그와 관련되었던 신하들까지 모두 쫓겨나게 되었다. 박씨는 이십여년전에 떠났던 고향 상주(尙州)로 갔다. 그리고 오년 후에는 다시 북성군과 함께 사사(賜死)로 모자가 일시에 죽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광조 일파가 죽을 때에 남곤 일파와 줄을 대어서 궁중에서 여러 가지 작용을 하였다는 말을 듣던 박씨는 그 파란 많은 생애를 닫았다. 경빈 박씨는 조광조가 죽을 때가 가장 세력이 강하던 때였다. 당시 임금의 사랑하는 품이 궁중에서 그를 덮을 사람이 없었다.

박빈은 경상도 농촌에서 자라난 가난한 선비의 딸이었다. 그 집이 비록 사족(士族)이라고는  하나, 그의 아버지 박수림은 정병(正兵)이 되어 간신히 먹고 살았다. 그러나 기구한 박씨의 운명은 일대의 폭군 연산군에 의하여 열렸다. 연산군이 한창 극도로 음란할 때에, 이미 보통 궁녀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각도에 채홍사를 보내서 민가의 어여쁜 처녀를 뽑아 올릴 때 그녀의 절색(絶色)도 뽑히어 올라왔던 것이다.

연산군이 쫓겨난 후 채홍사에 의하여 징발되었던 미인 수백명은 그대로 반정 공신 박원종(朴元宗)에게 하사하였었다. 그 후 박원종은 다시 박빈을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이러니 박빈은 박원종을 위시한 반정 공신들 손에 쥐어져서 그들에게 내통해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여간 상주 농촌에서 자라난 빈한한 농민의 딸이 임금의 배필이 된 것은 행운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충분한 교양이 없는 여자의 흔히 있는 버릇으로 박빈도 아양을 떠는 수단에만 힘을 써서 임금의 은혜를 믿고 방자히 굴다가 이번 화(禍)를 당한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했다.

임금이 지나치게 사랑한 때문에 박빈은 죽게 된 것이다.

 

 

 

불붙는 東宮殿

 

<작서(灼鼠)의 변(變)>이 날 때에 세자(世子)의 나이는 십삼세 소년이었다. 사사집이나 궁중이나 전실 아들을 계모가 그리 사랑하지 않음은 마찬가지다. 세자의 계모 문정왕후에 대한 정성스런 효도는 천성이라 할 만하였다. 그러나 계모 문정왕후는 세자에게 좋게 대하지 않았다.

한편 세자의 할머니인 자순대비(慈順大妃)는 나라의 전도를 생각하여 세자가 소중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할머니로서, 어머니 얼굴도 못보고 계모 슬하에서 구박을 받으며 자라나는 손자를 측은히 여겨 늘 보호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더구나 이 자순대비는 성종의 계비로서 어머니 없던 연산군을 길러낸 경험이 있으므로 계비인 문정왕후와 세자 사이의 미묘한 관계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왕실의 집안 일을 가장 잘 이용하려 한 것이 김안로(金安老)였다. 남곤 일파에게 배척되어 풍덕(豊德)으로 귀양 가 있는 김안로는 낮이나 밤이나 다시 정권 잡기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남곤 일파의 전횡을 싫어하는 신진파들과 그리고 기묘사화에서 조광조 일파로 몰렸던 사람들과 합세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궁중의 미묘한 공기를 이용하여 김안로가 다시 정계로 나와야 세자(世子)를 보호할 수 있다는 말로 대비와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작서의 괴변이 나던 전해인 병술년(丙戌年)에 경기감사 민수천(京畿監事閔壽千)은 김안로 를 찾아갔다. 김안로도 반가이 맞았다.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맙소이다.

원 천만의 말씀을. 진작 찾아 뵙고자 했으나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그렇게 되었습니다.

민수천은 그동안 조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얘기하고 지금이 바로 좋은 기회입니다. 대감이 다시 나오셔야 심정, 이항, 김극복 등을 누를 수 있습니다.

나야 지금 귀양살이를 하는 몸인데…

아닙니다. 지금 심언경(沈彦慶), 심언광(沈彦光) 형제가 언론을 좌우하며 기묘사화에 몰린 사람들을 다시 끌어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밀어 주는 사람이 없어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감께서 기묘사화에 몰린 사람들을 수용(收用)하겠다고 말씀만 해보십시오. 당장 권세를 잡을 수 있습니다.

김안로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옳은 말씀이요.

하고 기쁜 낯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김안로는

만일 내가 정권을 잡으면, 기묘년에 몰린 사람들을 수용하겠다.

는 말을 퍼뜨려 신진(新進)들의 마음을 사는데 힘썼다. 그러던 중 경빈 박씨가 쫓기어났다.

김안로는 아들 김희를 시키어 이면 공작을 하기 시작했다. 김희는 대비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저의 아버지는 아무 죄 없이 남곤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서 귀양을 갔습니다. 이제 귀양 간지도 육 년이나 되는데 여러 번 은사(恩赦)는 있었으나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원래 병이 있는데다가 또 수토(水土)로 생긴 병으로 거의 죽게 되어, 원통하기 그지없습니다. 대비께서는 이 원통한 일을 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김희는 또 자기 부인 효혜공주를 시키어 궁중에 발이 닳도록 드나들게 하면서 대비나 중전(中殿)에게 원통함을 호소하고 임금을 움직이게 했다. 자순대비는 어머니 없이 자란 효혜공주와 세자를 극진히 사랑했다. 세자가 난지 닷새 만에 그의 어머니 장경왕후가 죽으니 대비는 그 손자인 세자를 기르는데 더할 수 없이 극진했던 것이다. 이러한 궁중의 사정을 아는 심언경 형제들도 동궁을 보호하려면 김안로를 데려와야 한다.

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안로를 데려오려면 대비가 임금에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될 수가 없었다. 원래 김안로는 조정의 의논으로 귀양을 보낸 것이니 귀양을 푸는데도 정부의 의논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우의정 이행(李荇)도 박빈이 비록 지금은 쫓기어 났어도 그와 인척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권세 있는 재상(宰相) 자리에 있고, 또 복성군을 임금이 사랑하시는 품이 여러 대군들 중에 제일 가는 처지이니 훗일에 무서운 일이 동궁(세자)에게 미칠는지도 모릅니다. 이때에 김안로를 놓아서 오게 하면 동궁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는 말을 했다. 이리하여 궁중으로는 대비가 측은히 여기고, 임금으로는 사위 김희를 몹시 사랑하고, 조정으로는 이행이 주장하고, 공론으로는 심언경 형제가 주장하게 되어, 김안로는 마침내 풍덕에서 귀양이 풀려, 기축년(己丑年) 오월 이십사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육 년 만에 다시 조정에 돌아온 김안로는 기묘년 사화 당한 사람들을 기용하고 당면의 정적(政敵)인 심정, 이항 등을 죽이고, 정광필(鄭光弼)을 귀양 보내고 박빈을 죽이고, 또 자기의 귀양을 풀리게 한 이행까지 귀양을 보냈다.

이제 김안로는 왕실의 인척으로서 동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들어와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김안로는 마침내 대제학(大提學)에 좌의정(左議政)까지 지내 그의 이름은 명나라까지 알려졌다. 이때 중종에게는 아들 아홉 명에 딸 열한 명이 있었다. 딸들이 다 각각 시집가서 사위도 열한 명이나 되었다. 이 중에 특히 정비(正妃)의 몸에서 난 딸은 장경왕후(章敬王后) 가 낳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낳은 의혜공주(懿惠公主) 두 사람 뿐이었다. 중종은 어머니 없이 계모 슬하에서 자라난 효혜공주에 대하여 늘 측은한 생각을 가져서 그 사위인 김희까지도 특별히 사랑하였다.

김안로는 이러한 임금의 심정을 잘 이용하였다. 그러나 운명은 때때로 짖궂은 장난을 했다. 김안로가 정계에 자리를 잡고 권세를 부릴 만하게 되자, 신묘년(辛卯年) 사월 이십일에 효혜공주가 죽었다. 김안로가 보배상자처럼 소중히 여겨 오던 공주인 만큼 그때 김안로의 실망은 여간 크지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 해 십월 십일에는 아들 김희 마저 죽었다. 그리고 효혜공주의 친동생인 세자를 극진히 보호하던 자순대비가 그 일년 전인 경인년(庚寅年) 팔월 이십이일에 돌아간 것도 김안로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까지 자순대비

는 계비 문정왕후와 세자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궁중의 어른으로서 잘 조화(調和)시키며 세자를 따뜻한 날개로 휩싸 주던 분이다.

김안로는 이때부터 자기의 처(妻)편 되는 채무택(蔡無擇)이나 그밖의 심복들을 대할 때마다 이제 중궁의 친형제되는 윤원로(尹元老)나 윤원형(尹元衡) 등이 정권을 잡을려고 책동할 것이다. 너희들은 그들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늘 경계를 해오고 있었다. 대비가 돌아간 지 사년 후에 세자의 동생인 경원대군(慶原大君=뒤의 명종)이 중궁 문정왕후 몸에서 태어났다. 경원대군은 갑오(甲午)생이니 그 형인 세자(뒤의 인종)가 이십세 되던 해이다.

임금은 맏아들 세자가 이미 이십 세나 된 고로 세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인 경원대군은 아직도 젖먹이다. 그리고 임금 자신은 그때 사십칠 세로 이미 노년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어느 날 임금은 젖먹이인 경원대군을 안고서 내가 죽은 후에 네가 목숨을 부지하고 살는지?

하고 한탄하였다. 임금은 자신이 형 연산군 밑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던 것을 회상 하고 하는 말이었다. 정권을 잡기 위하여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정객들, 거센 비바람이 쉴새없이 뿌리치는 정계(政界)에서 자신의 피를 받은이 어린 것이 그대로 목숨이 붙을 것 같지 않았다. 임금은

네가 공주였더라면 왜 목숨 보전 못할 것을 염려하겠느냐. 네가 아들로 태어난 것이 몹시 불행이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 옆에 있던 왕비 윤씨(문정왕후)가 임금의 소매를 잡고

상감!

한 마디 하고는 흑흑 느껴 울었다.

여보 중전, 울지 마오. 내가 눈물을 보인 것이 잘못이었소, 자….

하고 임금은 다정하게 왕비를 위로하였다. 한참을 느껴 울던 왕비는 고개를 들고 눈물 어린 얼굴로 임금을 우러러보았다.

어린것도 어린것이려니와 이 몸도 곧 폐위되게 되었나이다.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내놓는 말에 임금은 저으기 놀란 표정으로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다.

대군(경원대군)이 태어난 후로 김안로 일파에서는 이 몸이 외척들과 짜고서 동궁을 없애려 한다고 모함을 하고 있답니다. 이런 억울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자기의 동생 원로와 원형도 김안로에게 쫓겨 나게 된 사연을 고하였다.

임금은 크게 노하였다. 다음날로 김안로 일파를 잡아들이라 하고 역적으로서 처벌케 했다. 김안로는 죽는 마당에 있어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나 한몸 죽는 것은 상관 없지만 장차 중궁 윤씨의 외척들이 권세를 잡을 것이 걱정이다.

하고 조용히 왕명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가 권세를 부린지 칠 년만이었다.

김안로 일파가 쫓겨난 후에도 조정은 여전히 뒤숭숭했다. 이번에는 그전 왕후 장경왕후 의 오라버니인 윤임(尹任)이 동궁 편에서, 그리고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로와 윤원형 등은 문정왕후 편에서 서로 세력을 잡으려고 으르렁댔다.

이들은 원래 자순대비(慈順大妃)와 같이 파평(坡平) 윤씨로서 세조(世祖)의 국구(國舅)인 윤번(尹 )의 자손들이다. 윤임은 윤원로, 윤원형 형제와 구촌간으로서 아저씨뻘이 되는데 김안로의 세력을 꺾고 그를 쫓아낼 때는 서로 연합하여 힘을 뭉쳐 싸웠으나 이제 김안로가 쫓겨난 뒤로는 어딘지 모르게 화합하지를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궁의 나이 이미 삼십인데도 아들이 없었다. 동궁이 장차 왕위에 오를 것은 뻔한 일이지만 아들이 없으니 경원대군을 세제(世弟)로 봉해야 한다는 것이 원로와 원형 형제의 주장이었다.

그럴수록 윤임 쪽에서는 동궁에게 후사(後嗣)를 얻게 한다고 후궁을 많이 끌어 들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아무데서도 소식이 없었다. 원형과 원로 형제는 누님인 문정왕후를 자주 찾아가서 졸랐다.

누님, 경원대군의 세제 책봉 문제에 대해서 상감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응, 여러 번 말씀을 드려봤는데 워낙 결단심이 없으신 상감이라 좀체 확답을 안 하셔.문정왕후는 매우 안타까운 어조로 대답했다. 욕심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동궁을 없애고 자기의 소생을 동궁으로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원형은 지금 조정 안의 공기는 동궁과 누님의 사이가 화합치 못한 것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빨리 상감의 응낙을 얻어 놓지 않으면 장차 일만 시끄럽게 될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 과연 며칠이 못 가서 대사간(大司諫) 구수담(具壽聃)과 대사헌(大司憲) 정순붕(鄭順朋) 등이 요즘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하면서 대윤은 동궁을 보호하고 소윤은 경원대군을 보호한다고 서로 싸우고만 있으니 이 두 사람을 내보내야 합니다.

하고 들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요?

임금은 놀래어 그 출처를 밝히도록 추궁했다. 이 바람에 윤임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려고 했으나,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배경을 믿고 물러날 생각을 아니했다. 임금도 할 수 없이 윤임을 만류하여 그대로 눌러 앉히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싸움으로 입장만 곤란해진 동궁은 워낙이 효성이 지극한 천성이라 계모에 대한 미안한 생각만이 앞서서 경원대군과 자기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틈이 없다는 점을 일부러 글로 써서 정원으로 내보냈다. 이로써 임금도 더 묻지 않고 이 중대한 일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대윤과 소윤의 암투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고 더욱 치열해져 가기만 했다. 문정왕후는 임금을 대하기만 하면 경원대군을 어서 빨리 세제로 봉해 달라고 앙탈을 하며 조르기만 했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듯이 임금도 이제는 외척들 싸움에 진저리가 나고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마침내 왕세자에게 선위를 한다는 조서(調書)를 내렸다. 임금의 생각으로는 왕세자를 왕위에 앉혀야만 경원대군을 세제로 세울 수가 있다고 느낀 때문이었다. 만조백관들은 깜짝 놀랐다.

웬일인가?

아직도 근력이 정정하신데.

윤임하고 윤원형이하고 세도 싸움을 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선위를 하신다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수군거렸다.

즉시 영의정 윤인보(尹仁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김극성(金克成), 좌찬성 소세양(蘇世讓), 우찬성 윤임(尹任), 호조판서 조계상(曺繼商), 이조판서 윤인경(尹仁鏡), 형조판서 성세창(成世昌), 공조판서 이구령(李龜齡), 병조판서 양연(梁淵), 한성판윤 이기(李 ) 등은 물론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까지 모두 일어나서 반대상소를 올렸다.

동궁도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죄인으로 자처하여 거적자리를 합문밖에 깔고 머리 풀고맨발로 꿇어앉아서 대죄를 드렸다.

아바마마, 생전에 선위를 하시다니 이것이 웬 말씀이십니까. 이것은 저에게 죽으라는 말씀이옵니다. 다시 성명(聖命)을 거두어 주십시오.

동궁은 이틀 밤을 꼬박 세우면서 통곡을 하여 석고대죄를 계속해서 드렸다.

임금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문정왕후의 앙탈과 신하들의 만류 틈새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과 욕심으로 신하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문정왕후의 요구를 들어 주고 여생을 편안히 보내고 싶었다. 허나 임금은 이것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정과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모든 신하들의 의사는 일개 왕비의 주장보다도 더 존중해야 한다는 것도…

중전의 앙탈이야 나 혼자 견디면 되지. 그걸로 나라를 그릇 칠 수야 있나

임금은 결국 이렇게 마음을 먹고 다음날 양위한다는 조서를 도로 거두어 들였다.

이로부터 중종은 말년에 이를수록 후궁을 많이 두고 어색(漁色)으로 모든 고민을 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때 중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후궁에 숙용(淑容) 안씨(安氏)가 있었다.

숙용 안씨는 원래 안산(安山)이 고향으로 안단대(安坦大)라는 농부의 딸이었다. 가세가 빈한하여 어려서부터 서울에 사는 고모 집에 와서 일하며 얻어먹고 있었는데, 안씨의 나이 십칠 세 되던 해 옆집에 사는 김상궁(金尙宮)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궁 안으로 데려다가 무수리로 부렸다. 이 어린 무수리가 궁에서 지내는 동안 이럭저럭 이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제법 촌티를 벗어 말끔한 궁중 여인이 되었다.

어느 날 안씨는 김상궁의 처소에서 뜻밖에도 순회를 나온 임금을 뵈었다. 늘 김상궁 처소에서만 잔심부름을 해온 까닭에 임금을 직접 대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씨는 김상궁의 등 뒤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임금을 맞았다. 반달같이 탐스럽게 생긴 처녀의 자태는 곧 임금의 눈에 띄었다.

저 애가 누구냐?

임금은 시종에게 물었다. 그러자 시종이 채 대답하기 전에 김상궁은

황송하옵니다. 안산에서 온 무수리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뉘 집안이지?

예, 농부의 딸이옵니다.

음, 농부의 딸이라? 저 애를 이리 가까이 오라고 일러라.

김상궁이 옆으로 물러서고 앞으로 나오기를 이르자 어린 안씨는 약간 홍조 띤 얼굴을 하고 외씨 같은 버선 끝으로 치마 기슭을 가볍게 차면서 임금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오는데 그 얼굴은 바야흐로 피어나는 꽃송이 같아 황홀하게 아름다왔다. 임금의 눈에는 기쁜 빛이감돌았다.

너 몇 살이냐?

황송하옵니다. 금년에 열아홉이 되옵니다.

음…

임금은 감탄을 마지 않았다.

(이런 애가 궁중에 있었나?)

임금은 즉시로 궁녀들에게 이 애를 치장해서 보내라고 일렀다. 얼마 후 안씨는 새로 몸치장을 하고 궁녀들의 호위를 받아가며 임금이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좋은 옷을 입으니 더욱 곱구나

임금은 이렇게 말하며, 안씨의 섬섬옥수를 붙잡아 앉도록 했다.

너도 이제부터 귀인(貴人)이 된다. 자, 술이나 한잔 부어라.

안씨는 은주전자를 들고 공손히 술을 부었다. 임금은 안씨가 따라 주는 술잔을 손에 든 채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더니 기쁜 미소를 지으며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날 밤 안씨는 한 번 임금과 금침(衾枕)의 정을 맺은 후로 어엿한 후궁으로서 숙용(淑容)이라는 내명부(內命婦)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수년 후에는 영양군(永陽君)과 덕흥군(德興君)을 낳았다(이 덕흥군의 소생이 바로 이조 십사 대 왕 선조이다).

매사에 표독스럽고 투기심이 많은 문정왕후는 숙용 안씨가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 하여 구박이 자심하였다. 더욱이 임금의 사랑이 안씨에게 많이 기울어지자, 왕후는 안씨를 내쫓을 생각까지 먹었다. 그러면 무던한 심덕을 지닌 안씨는 왕후의 비위를 잘 맞추어 조금도 거역할 줄을 몰랐다.

중종 삼십팔 년 정월 초의 일이다.

어느 날 밤 동궁과 빈궁(嬪宮)이 깊이 잠들어 있는데 별안간 불이 일어나더니 그 침전 일 대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어느 누구의 짓인지 동궁과 빈궁의 침전 문은 밖으로부터 굳게 잠기고 벌써 검은 연기는 방안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빈궁은 먼저 잠에서 깨어나 문을 부스고 동궁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려 했다. 그러나 동궁은 지금이 바로 내가 죽어야 할 때인가 보오. 지금까지 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했음은 오직 부모님께 악한 소문이 돌아갈까 두려워서였소. 그러나 이제 밤에 잠자다가 불에 타 죽었다면 그런 염려는 없을 것이요. 나는 피하지 않기고 했으니 어서 빈궁이나 피하오.

하고는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 말을 들은 빈궁은 통곡을 하면서

저만 혼자 살면 무엇하리까.

하고 함께 죽기를 원했다.

갑자기 일어난 불에 동궁 이속(吏屬)들이 달려와서 동궁에게 속히 피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이미 죽기를 마음 먹은 동궁이 그들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이속들은 하는 수 없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잠자던 임금은 뜻밖의 말에 창황망조하여 곧 동궁의 처소로 와보니 이미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임금은 위엄이고 무엇이고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백돌(伯乭)아, 백돌아.

하고 동궁의 아명(兒名)을 목놓아 부르짖었다. 안에서 조용히 앉아 타 죽기를 각오한 동궁이었으나 부왕의 이 울음소리를 듣자 그 효도(孝道)스러운 마음에 그냥 더 있을 수가 없어

예.

하고 대답한 후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아바마마!

임금의 눈에는 궁금하던 동궁의 모습이 비쳤다.

오, 백돌아!

임금은 떨리는 가슴으로 동궁을 껴안았다.

아바마마! 불효의 죄 크옵니다. 놀라시게 하여 황공하옵니다.

목 메여 호소하는 동궁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네가 살았구나!

늙은 임금의 용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불이 꺼진 뒤에 화재의 원인을 추궁했으나 실마리를 잡을 길이 없었다. 다만 조정에서는 수군수군 공론들이 많았다.

뻔한 일이지. 동궁에 불이 일어난 것은 동궁을 없애버리자는 고약한 놈의 짓이 아닌가?

그렇다면 윤원형의 짓이란 말인가?

선비들은 수군거렸다. 이러한 수군대는 공론은 마침내 밖으로 터져 나와 버리고 말았다.

대사간 구수담은 마침내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이번 동궁에서 일어난 화재 원인은 윤임과 윤원형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져서 마침내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고 바른대로 쏘아 붙였다. 이어서 정언(正言) 심령(沈 )도

이번 화재에 대해서는 궁중 안 사람들이 모두 간신 윤원형의 소위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윤원형을 죄 주어야 합니다.

기막힌 폭로였다. 만좌는 악연히 놀라 얼굴빛들이 하얗게 질렸다. 임금도 하도 엄청난 소리라 얼른 무엇이라 대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때 이 자리에는 윤원형의 심복 임백령도 경연관으로서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중대한 일을 가지고 경솔하게 사람을 지적하여 말한다는 것은 경연관의 체통이 아니라 생각하오. 이번 동궁의 실화에 대해서는 상감께서는 친히 궁중 예속들에게 엄하게 물으시어 아직도 조사를 하시는 중이 온데 함부로 경연관이 유언비어를 내어 경솔한 입술을 놀리니 이는 요망하기 짝이 없소. 경솔한 대사간과 요망한 정언을 죄 주시오.

임백령의 이런 말에 임금도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은 사건이 크기는 하나 무사주의를 택하고 싶었다. 이제 또 옥사를 일으키는 것이 지긋지긋하도록 싫었다. 이리하여 얼마 안 가서 구수담과 심령은 벼슬이 갈려버리고, 임금도 여기에 대해 더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로써 중대한 일은 흐지부지 되어갔다.

동궁에 불이 난 사건이 있은 뒤부터 임금의 마음과 몸은 더욱 피곤하고 늙어 갔다. 임금의 몸이 쇠약해질수록 조정에서는 윤임과 윤원형의 싸움은 절정에 올랐다.

임금은 마침내 병이 들었다. 효성이 지극한 동궁은 식음을 전폐하고 병상에 누운 임금을 밤과 낮으로 모시었다. 임금은 병이 든 지 이십여 일에 자기는 일어나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임금은 병환 중에 특별히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윤인경(尹仁鏡)을 불러

나는 이제 다시 일어날 것 같지 않소. 오늘부터 세자에게 전위(傳位)를 하니 경들은 이 뜻을 받아 세자를 도와서 나라 일을 보살피도록 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임금은 옥새를 대신에게 전했다. 대신들은 옥새를 받들고 물러나와 이 뜻을 세자에게 전하고 옥새를 세자께 올렸다. 세자는 통곡하면서

내일이라도 상감께서 병세가 쾌차하실 텐데 내가 전위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하오.

하며 끝끝내 옥새를 받지 아니했다. 대신들은 하는 수 없이 이런 사유를 임금께 다시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은

안 된다. 세자에게 옥새를 전해라.

하고 병석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임금은 마침내 세자에게 전위한 다음날에 숨을 거두니, 재위 삼십구 년에 나이는 오십칠 세 였다. 동궁이 곧 즉위하게 되니 이가 곧 인종(仁宗)이다.

 

<조선편 4> 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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