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산에 앉으니 햇살 한 번 와장창하다. 어느새 세상 만물은 이렇게 찬란하게 변했는지 눈부시기 그지없다.

 

곰곰이 돌아보면 산 아래에서 일상은 무미건조였고, 매일 매일의 풍경은 시멘트와 도로에 포장되어 있으니, 사시사철 변치 않는 삭막함이 아니던가.

 

햇살 아래 이런 산 풍광들과는 비교조차 필요치 않다.

 

장승같은 검푸르릇한 바위, 군자풍의 소나무 군락, 너럭바위들의 집합, 연녹색이 감돌기 시작하는 골짜기, 겨울바람을 털어 내고 다시 원기를 찾기 시작하는 억새풀, 바람에 흔들리는 관목 숲 그리고 그 사이로 끊어졌다 다시 이어 오르는 오솔길.

 

가슴이 뭉클하다.

 

봄바람에 이마를 닦으며 한 주일 동안 내가 걸었던 길을 되돌아본다.

 

아파트에서 나와 포장된 길을 따라 걸었고, 버스 안에서 여러 걸음 걸었고, 계단을 내려가 터널 속을 걷다가 지하철 안에서 앉고 내리기 위해 조금 걸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스팔트 위를 지나 육교를 건너 시멘트로 만들어진 건물로 들어왔다.

 

길이라고 불리기 싫은 길들을 일상에서 걸었던 셈이니, 오늘 올라온 산길과는 천지 차이.

 

그러나 어린 시절 오가던 길은 얼마나 환상적이었나. 늘어진 풀섭 사이로 여치가 울고, 개구리가 튀어나와 반대쪽으로 건너갔다. 나비와 잠자리가 서로 앞서듯 가로지르고 흙 내음 그득한 미풍이 뺨을 쓰다듬고 지나가지 않았던가. 마을 입구의 의원 집에서는 늘 유성기 소리가 흘러나왔으니, 가던 길을 멈추고 귀를 쫑긋거리며 줄을 타고 올라가는 나팔꽃을 유성기 스피커처럼 바라보았다.

 

가끔 마음 고운 할머니가 불러 ‘아가야 덥지?’ 수박을 나누어주시고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가 부채를 휘적이며 지나가시던 흙 길.

 

많은 자연의 존재들은 변화라는 이름으로 소멸되었으니 이제 일상에서 그런 길은 모두 잃고 땅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러니 길을 가도 길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 걸었던 길들은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저장되어 있으나, 도시에서의 그제의 길, 어제의 길, 오늘의 길 그리고 내일의 길은 아무런 의미 없는 동작의 일부로 기억에 남겨지지 않는다.

 

내가 살던 곳도 삼각대를 든 측량사들이 나타나더니 모두들 짐을 사들고 뿔뿔이 헤어지고 이어 불도저들이 밀고 지나갔다. 결국 이제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차들로 가득 매워진 도로가 되었다.

 

문명의 발전이라는 경탄과 칭송 뒤에 서서 잃어버린 과거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화들은 평야, 구릉을 지나 결국 백두대간까지 곳곳에 신음소리 요란하다.

 

사라져 버린, 여치, 메뚜기, 나비, 잠자리, 개구리, 오솔길, 야생화, 작은 숲, 새, 매, 독수리, 나지막한 구릉 그리고 푸른 하늘.

 

내 아이들은 훗날 산에서나마 길다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도로에서 컨츄리 클럽을 지나 리조트와 콘도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까. 그리고 자연을 만끽했다고 만족하지는 않을까.

 

산을 오르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이렇게 잃어버린 길을 찾기 위함이다. 도시에서 고향은 물론 길을 잃은 소시민이 의미 있는 기억의 길을 찾기 위한 걸음걸음이다. 산은 아직 건재한 곳이 많으니 우리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남아 있는 것을 지켜야한다.

 

힘들게 올라와서일까. 얼굴은 물론 목까지 빨갛게 달구어진 봄날 같은 20대 여자가 옆에 앉는다. 그러더니 시선을 멀리 던지며 한 마디 한다.

 

“와, 좋다”

 

그래, 정말 눈에 닿는 모든 곳이 ‘와, 좋은’ 봄날이다. 여자는 물통을 꺼내 한두 번 흔들더니 맛있게 마신다. 어느새 세상은 이렇게 눈부시게 변했을까.

 

여자는 말을 잇는다.

 

“죽인다, 죽여–.”

 

고등학교 2학년 국어시간. H 선생님은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자마자 칠판에 두 글씨를 쓰셨다.

 

관조였다.

 

단어의 뜻을 아는 사람 손을 들라 했으나 모두들 벙어리 흉내였다. 선생님은 고등학생이 이 단어의 심오한 의미를 완벽하게 알기는 어렵다며, 관조의 깊고 넓은 뜻을 오랫동안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는 남보다 뛰어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무기라며 이 단어를 잊지 말고 살기를 당부하셨다. 모르기는 해도 많은 친구들은 노트나 책 구석에 이 단어를 적어 놓았으리라.

 

세상의 존재들은 하나의 커다란 법칙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통일장이라 표현되는 그 힘 안에서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각자의 존재를 유지한다. 사실 우주를 끌어가는 통일장을 발견한 것도 관찰과 조망의 결과였다.

 

동물-곤충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한 파블로를 위시해서, 파스퇴르, 고흐, 멘델, 다윈, 아인슈타인, 호킹을 포함한 수많은 석학들은 관조를 통해 세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생존의 법칙과 우주에 편재한 과학의 질서를 읽어냈다. 또한 성인으로 불려지는 동서양의 스승들은 자연과 인간에게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조망으로 종교의 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소시민은 아무런 관찰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더불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나를 포함한 그들은 이미 관조를 통해 밝혀낸 것들을 교육받고 따르면서 살아간다. 교과서를 가득 채우는 수학, 물리, 생물, 윤리, 지리, 천문학 등등은 관조를 통한 발견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다. 심사숙고로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학적 방정식을 도출해낸 사실들을, 우리는 배우고 시험을 치른 후 생업에 적용한다.

 

양자이론에서 가장 매혹적인 핵심은 ‘관찰이 그 대상의 실재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더욱 발전해서 ‘관찰하는 정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전자가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마이크로 세계와 마크로 세계-즉 미시와 거시의 세계가 둘이 아님이 밝혀진 지금, 이 놀라운 사실은 이미 불가와 힌두교에서 중생을 위해 이야기되어 왔으니, 우리는 자연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자연의 일부임을 말해왔다.

 

자연은 물론 우주를 관찰하면 할수록 대상은 빠르게 변화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관조는 계속 이어져 누군가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다.

 

또한 양자이론은 수행으로 인간 내부를 스스로 관찰하면 할수록-위빠사나-내부의 에너지는 변화가 일어나 소위 말하는 사리舍利가 만들어지는 과학적 근거까지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산을 바라보면 산의 변화는 더욱 극적으로 일어나니,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자연파괴를 막고 산은 더욱 아름답게 변할 수 있음을 말한다.

 

오늘의 산은 얼마 전보다 연녹색으로 물들고 잎새들은 넓어졌으며, 가슴을 파고드는 찬 기운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나의 관조 수준은 이렇듯 피상적으로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아무리 범인이라 해도 봄 산에 오르면 얼마 전보다 확연하게 변화한 것을 관조한다-안다.

 

여름에 피는 꽃들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봄에 피는 꽃들의 이름,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등등 몇 가지를 쉽게 나열 할 수 있음은 지나간 겨울에 비해 변화무쌍한 봄(계절)-봄(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봄은 누구나 쉽게 관찰자로 만든다.

 

사실 관조의 깊은 의미를 아는 이들은 수행자다. 깊은 산 속의 눈푸른 납자(선승)들은 오늘도 자신의 내부를 조망하고 우주를 관찰하여, 온갖 것들에서 진리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봄 산에 엄청난 변화는 평범한 사람들조차 관조자로 만들어 자연에서 8만4천가지 법문을 듣게 만드니 수행자에 근접시켜 준다.

 

이것이 봄 산을 오르는 또 다른 이유다. 봄 산에 오르는 것은 단순한 등정이 아닌 변화를 관(바라보다)하는 산 가람에 드는 수행이다.

 

산은 이밖에 많은 것을 주지 않는가. 투기꾼과 개발에 의해 땅은 있되 흙은 없는 저잣거리 세상에서 땅과 흙이 모두 있는 수목의 넓은 가슴으로 끌어 안아준다. 또 변화해 가는 자신의 몸을 보여주며 우리네 인생이란 세월 따라 계절 따라 자연의 호흡처럼 그렇게 변해 간다는 간단한 명제에 도달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가르침 그득한 봄 산에 안 오를 재간이 있는가.

 

생명을 만드는 햇살이 참으로 원초적이다. 도시의 혼탁을 털어 낸 자리에 푸른 솔바람을 채워주고 나 역시 산 그림자의 일부가 되어 이렇게 앉아 있다. 이런 산을 바라보면 산에서 사는 스님네가 부럽다.

 

보이지 않을 듯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북쪽으로 이어진다. 다시 한줄기 바람이 불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또다시 이야기한다. 얼굴은 아직 볼연지를 찍은 듯 붉다.

 

“야, 정말 좋다.”

 

그래, 정말 좋은 시간이다. 가슴이 또다시 뭉클하다. 저 아래 세상까지 이렇게 좋으면 얼마나 기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