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종점에서 아란은 집을 지나쳐 조각공원 쪽으로 갔다. 옥죄는 가슴을 펴고 마음을 진정시키기에는 집은 너무 좁아 터졌다. 마을 사람들이 조각공원이라  부르는 곳은 그냥 넓은 초원이었다. 왕년의 어떤 조각가가 인근의  농가를 개조해 찻집을 차리고  주변의 공터에다 조각물을 설치하고 공원처럼 꾸몄다고 한다. 찻집 자리가 어디쯤인지  지금은 그 흔적도 없지만, 공터에 조각물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조각가는 죽었다고도 하고 이민을  갔다고도 하는데 남아있는 조각들은 거의가 온전치 못하거나 흉물스러워 아란은 거기 갈 때마다 조각가가 공원을 임대를 했었을까 무단점거를 했었을까 궁금해하곤 했다.

  땅에도 팔자라는 게 있는지 도심으로부터의 거리나 교통편이 나쁘지 않은 편인데도 땅 값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 동네였다.  평범한 서울 근교였을 적에 철거민들한테  열 평 미만의 땅을 나누어주고 그들을 여기다가 쓰레기처럼 실어다 부려놓고 간 후에 생겨난 동네라고 했다. 시작이 그렇게 잘못되고 보니 그 후에 많이 발전했다는 게 고작 임대아파트와 연립주택 단지였다. 둘 다 평수가 열 평 남짓한 영세민용이었다. 아란이 최초로 장만한 다세대 연립은 동네 끄트머리여서 버스 종점에서 멀고 외졌지만  공원을 바라볼 수 있어서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편이었다.

  공원엔 벤치 같은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  남아 있는 조형물의 잔해가 벤치 구실을  했다. 간혹 작가의 이름과 작의 같은 게 새겨진 팻말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작품과 팻말이 제대로 짝이 맞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작품은 없이 팻말만 남아 있는  것은 빈 무덤가에 서 있는 비석처럼 처량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팻말이 설명문치고 겸손한 건 하나도 없었다.

  “이 작품은 주석을 재료로 한 것이다. 주석이란 무엇인가. 주석은 인간이 대지로부터  불을 써서 얻어낸 것이다. 인간과  대지와 불이라는 팽팽한 긴장관계는 늘  내 영혼을 떨리게 한다. 영혼의 떨림 없는 창조적 충동을 나는 믿지 않는다.”

  거의가 이런 투였다. 잘난 척은… 시커먼 고철더미  옆에 이런 팻말이 붙어 있는 걸  보고 아란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용암이  흘러내린 것처럼 생긴 조형물 끝부분에 맷돌처럼 편안한  자리가 있기에 걸터앉아 블라우스  소매를 걷었다.

우윳빛 나긋한 팔뚝에 헌이 담뱃불로 지진 자리가 아직도 세 개 나란히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앵두처럼 고운 빛깔로 부풀어져 있던 게 찌그러들면서  갈색으로 변했다고는 하나 누가 보기에도 화상자국이라는 걸 숨길 수 없는 흉터였다. 담배를 자주 피는 편은 아니었다. 사는 게 곤곤하고 구질구질하고, 도대체 희망을 가져야 하는지 안 가져야 하는지 자신을 그 어느쪽으로도 처리할 수 없을 때 문득 한대 피워물게 되는 것은 담배맛을 알아서가 아니라 미스김의 담배 피는 모습에 반해서였다. 미스  김은 아란이네 집에 세든 여자였다. 교외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경리일을 보는 얌전한 아가씨인데 늘 돈, 돈, 돈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버는 건 얼마 안되고 쓸 데는  많고, 손 내밀 데는 마땅찮은데 손  내미는 식구는 쏠쏠하니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지배인이 담배냄새 맡으면 당장  쫓아낼 거라고 두려워하면서도 담배를 끊지 못했다. 근무하는 동안 참다가 피워서 그런지 아주 맛있게 피웠다. 그렇게 맛있냐고 물어보면 맛으로 피는 게 아니라, 이 개같은 기분 대신 평화를 얻으려고 핀다고 했다. 어머, 그렇게 좋은 거니? 나도 한번 피워볼까. 이렇게 해서 꼬나물어보긴 했어도 열심히  미스 김 폼만 흉내내다 말았지 담배맛도 평화의 맛도 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헌이 사법고시에 네 번째 낙방한 걸 알았을 때는 정말 개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또 미스 김 담뱃갑에 손이 갔던 것인데 연거푸 세대나 피워서  좁아터진 거실 겸 부엌이 매케해졌을 때 하필 헌이 들이 닥친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 담뱃불을 빼앗아 아란의 팔뚝을  지지면서 겨우 네 번 떨어진 걸 가지고 이렇게 지지궁상을 떨기냐고 눈을 부라렸다. 아란은 서른살이었다.  겨우 네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헌이 다음에 겨냥한 건 서른살의  조바심이 아니라 서른살의 몸뚱이일 터였다. 현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팔뚝의 화상자국을, 얻어맞고 들어온 손자의  피멍에 놀란 할머니처럼 애간장이  녹는 표정으로 호호 불어주면서  서서히, 그러나 능숙하게 아란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농익은 수밀도처럼 자포자기한 단내를 풍기면서 허망하게 무너져내렸다. 일이 끝난 후에도 아란은 헌의 몸을 감고 놓아주지 않아, 누가 올드미스 아니랄까봐 점점 더 바치긴,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아란이  절절하게 바친 건 색이 아니라 자꾸만 희미해지려는 한가닥의 희망, 쥐어도 쥐어도 쥐어지지 않는 한줌의 가능성이라는 걸 헌은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아란이만한 미모가 서른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갔다는 건  회사에서도 화제였다. 이제 사내에서는 군침을 삼키는 상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헛물을 켜던 총각들은  다들 아기 아빠가 돼 있고, 그녀만 못한 외모  때문에 그녀에게 주눅이 들었던 아가씨들도  짝을 찾아 회사를 그만두기도 하고 달덩이처럼 부풀어오른 배를 당당하게 내밀고 계속 출근하기도 했다. 그런 여자들에게 자신의 미모가 얼마나 같잖아 보일까. 아란은 불을 보듯이 빤히 알고 있었다. 미모뿐 아니라 가난까지 겸비한 그녀가, 그러나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게 서른이 될 때까지 한 회사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찬탄과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를 자신의 모습에 대한 매혹 때문이었다. 사법고시 합격생과의 결혼 청첩장을 꼭 이 직장에다 돌리고 말리라. 아란이 죽자구나 매달린 것은 헌의  식은 몸뚱이가 아니라 언젠가는, 언젠가는, 아아 언젠가는 개천에서 용 날 날이었다.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아란은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폭발적인 성량을 허공에 날리고 나서 옷소매를 내렸다. 회사에서 갈아입은 유니폼이 반소매로 바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아란은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전에 회사를 그만둬도 그만일 것처럼 그  일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이제부터 아무것도 참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개새끼한테 개새끼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여직원은 아무리 오래 다니고  열심히 일해봤댔자 터줏대감 자리가 최고위직인 회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것도, 열네 평짜리 집이라도  혼자 쓰고 싶은 것도 참을 필요가 없다. 이게 꿈이 아니고 생시일까. 이 현실적인 기쁨을 누구하고라도  교감하지 않으면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미스 김은 아니었다. 천만원짜리  적금도 들기만 여러번 들었지 번번이 도중 해약을 할 일이 생겨 평생에 한번이라도 천만원을 목돈으로 만져보는 게 소원인 미스 김에게 천만원의 서른 배가 넘는 돈은 너무 잔혹한 거액이 아닐까. 그건 고문과 다름없는 가혹 행위이다. 사람은 고문을 당하면 자기 보호 본능처럼 독기를 뿜게 마련이다. 그녀는 자신의 행운을 독기에 오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미스 김을 떠올린 것은 질한 일이었다. 미스 김이 아무리  기어오르려고 발버둥쳐도 도달해본 적이 없는 천만원의 서른다섯 배라는 곱셈으로 자신이 거머쥔 행운의 부피를 어느정도 어림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아란은 자신의  존재도 덩달아서 우스광스러운 잔해인  주석 조형물의 한 자락으로부터 둥실 몸을 일으켰다. 아란은 자신이 지금 걷고  있는 게 아니라 땅과는 어느만큼 거리를 두고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그건 희열인 동시에 불안이었다.

  ‘존재의 아픔’은 조형물은 사라지고 홀로 꽂혀 있는 팻말  속에 남은 작품명이었다. 잘난 척은..이렇게 코웃음을 쳐주고 지나치려다 말고 아란은 문득 땅에 발이 붙는 느낌으로 그 앞에 멈쳐 섰다. 생각나는 이름이었다. 이  초원의 빛깔이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울  때였으니 작년 이맘때가 아니었을까. 세번째의 낙방을 경험한 헌이 어디  가서 머리나 식히고 오겠다며 여비를 타가지고 잠적한 후  소식이 없을 때였다. 화창한 휴일날  행여나 해서 고시촌에 전화를 걸어보고 나서 참담한 마음을  달래려고 조각공원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을 때였다.

그날도 작품은 없고 ‘존재의  아픔’이란 작품 이름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때도 아란은 ‘존재의 아픔’이 자신의 마음 아픔, 가슴 아픔, 골치 아픔에 비해 너무도 유치 찬란한  말장난만 같아서 코옷음을  쳤던 것 같다. 마침 멀리서 아란 앞으로 공이 하나 굴러왔다. 공을 굴린 사람들은 저만치 나득한 곳에서 손뼉을 치며 웃고  있었다.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와 젊은 부부였다. 아기가 걷어찬 공이 그렇게 마냥 구른 것은 초원의 경사면 대문이었다. 그러나 젊은 부부는 아기의 발힘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고 싶은  것 같았다. 부부는 깔깔대며 손뼉을 치고 아이는 공을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하얀 공은 야구공보다는 훨씬 큰, 어른 두 손바닥 안에 겨우 들 만한 말랑한 고무고이었다. 아란은 숨을 죽이고 요새는 흔치 않은 그 너무도 평범한 고무공의 행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득한 기분이었다. 그 공의  시발점은 아이의 발힘이 아니라 아란의 유년기였다. 아란은 그녀의 유년기로부터 굴러오는 공을 맞기 위해 과녁처럼 상기해 있었다.

  아마 어린이날이었을 것이다. 판자촌의 아이들도 싸구려지만  다들 선물 한가지씩은 얻어가져서 골목 안이 명랑한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아란이 골라잡은 선물은  고무공이었다. 전날 밤 늦게야 돌아온 엄마는 미처 선물을 준비 못한 걸 미안해하며 아린을 동네 문방구점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린이날을 겨냥해 학용품 외에도 이것저것 다양한 장남감을 준비해놓고 있었지만 빈촌의 문방구점답게 날림제품이었다. 아란은 그중에서도 제일 싼 고무공을 골랐다. 그런 아란이가 안됐는지 인형이라도 하나 더 사자고  엄마가 권했지만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갖고 싶은 걸 골랐을 뿐이지 엄마를 생각해서  일부러 싸구려를 산 건 아니었다. 아란은 그 공이 저절로 탄력이 없어질 때까지 꽤 여러날 가지고 놀았다. 한 손으로 공을 치면서 한버도 놓치지 않고 동네를 한바퀴 돌기도 하고, 골목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오른쪽 왼쪽다리를 번갈아 휙휙 공 위로 돌려가면서 공치기 하는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까짓 거 나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공을 빌려줘봐도 아란이처럼 할 수 있는  아이는 없었다. 그 하얀 공이 어디를 갔다가도 아란의 손바닥 안으로 되돌아왔다. 공이 되돌아올 수 있는 탄력을 잃었을 때 비로소 아란은 공놀이에 싫증이 났다.

  아이가 찬 공이 마치 자석에 끌리는 괴붙이처럼 그녀에게로 곧장 다가오리라는 것을 의심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돌연 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공을  따라 달려오던 아이도 멈쳐서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바라보고만 있던 엄마 아빠가 웃음소리를 바람에 흩날리며 아이에게로 달려왔다. 아란은, 아가 내가 찾아줄께 울지 마, 아이를 달래는 한 편 공이 감쪽같이 사라진 지점의 풀숲을 손으로 더듬듯이 살펴보았다. ‘존재의 아픔’ 팻말  근처에 깊은 구멍이 두 개나 나 있었다. 아나 조형물을 누가  철거했거나 훔쳐가고 난 흔적일 터였다. 밝은  햇살에 익은 눈으로는 구멍 속이 식별 안돼 손을 넣어보았다. 속이  어찌나 깊은지 팔을 어깨 있는 데까지 들이밀고 나서야 겨우 공의 탄탄한 탄력이 만져졌다. 다행히 첫째 구멍에서였다.  찾았다, 아가야, 누나가 곧 꺼내줄께 조금만 기타려. 이제 울음을 그친 아이 쪽을 볼 겨르르도 없이 아란은 연방 말로 아이를 달래가며  공을 그 안에서 꺼내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공과 구멍의 지름은 거의 맞먹는 것 같았다. 만져진다고 쉬 잡아낼 수 있는게 아니었다.  아란은 팔을 어깻죽지까지 집어넣고 손툽으로 공 주위의 흙을 후벼파고 나서야 가까스로 공을 그 안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고 저만치 양손으로 엄마 아빠의 손에 매달려 그네를 타면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젊은 부부의 재잴거리는 듯한  속삭임과 아이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산들바람에 나부끼면서 아란의  볼을 약올리듯이 간지럽혔다. 그녀는 화끈한 모욕감에 얼굴을 붉히며 주인에게  버림받은 공을 그 구멍 속으로  되돌려주었다. 손툽 밑의 시커면 흙보다 더 더러운 기분이었다.

 

  ‘존재의 아픔’ 팻말 근처의 두개의 구멍은 여전했다. 아직도 그  하얀 공이 그 구멍 안에 있을까. 아란은 땅에 엎드려서 구명 안에 팔을 갚숙히 밀어넣었다. 첫번째 구멍에서는 비닐봉지와 눅눅한 흙이 만져졌고 두번째 구멍에서 공이 만져졌다.  공은 그안에서 탄력을 잃은 듯 둘레의 흙을 손톱으로 후벼파지 않고도 꺼낼 수가  있었다. 일년 동안 흠뻑 더러워진 공을 수돗가로 가지고 갔다. 근처 주민들이 약수라고 믿고 길어가던 지하수였다. 식수로  부적격 판정을 받은 후 버려진 수도꼭지는 비트니까 물이 나왔다. 아란은 뽀얗게 씻어낸 공을 잔디밭에 풀어줬다. 잔디 위에서 햇볕을  받으면서 다시 팽팽하게 부불어오른  공을 아란은 발끄트머리로 살살 건드리기 시작했다. 아란은 푸르디 푸른 초원  위로 흰 공을 자유자재로 굴리면서 발끄트머리로부터 짜릿한 쾌감이 실핏줄처럼 온몸에 고루 퍼지는 걸 느꼈다. 전혀 뜻하지 않은 공과의 황홀한 교감이었다. 실은  공을 굴리는 게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공이 되어 있었다. 옴작달싹도 할 수 없이 답답하고 어두운 정해진 팔자에서 비로소 열린 세상의 햇빛 속으로 나온 자유의 기쁨을  공과의 동일시를 통해 차츰 몸에  익히고 있었다. 어떻게 그 꿈같은 사실에 단박 익숙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진혁부 회장의 부움을 신문에서 본 것은 달포쯤 전이고 그의 장남인 정기씨의 전화를 받은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아란이  진회장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엄마가 그 노인보다 먼저 죽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정도였다.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아란이 진씨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건 아랑곳없이 사람의 도리를 내세워 그 집에 가서 상제 노릇을 애걸하도록 강요했을 것이다. 열살도 안됐을 어린 나이에 진회장의 소문난 칠순잔치에 엄마에게 떠다밀려 참석했다가 그 집 식구들한테 당한 모욕은 아란에게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그 사건은 엄마가 죽을 때까지 아란으로  하여금 엄마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그녀는 엄마하고 싸울 때마다 그때  당한 걸 낱낱이 열거해서 엄마를 공격하고 능멸할 수 있는 무기로 삼았지만  일부러 빼먹고 말하지 않은 게 딱 한가지 있었다. 철들고 나서 처음으로 아버지 품에 안겨본 느낌이었다. 한창 무르익은 화려한  파티장 주빈석으로 아린이 곧장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용기가 있어서도, 당차서도 아니고 나는 엄마가 쏜 화살에 불과하다는 정신적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 계집애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하면서 그 노인의 직계 가족이 일제히 송곳  같은 시선을 아란에게 꽂으며 에워쌌을 때 그녀는 입술을 비죽대며 울음을 참는 게 고작이었다. 그때 진회장이 사람들을 헤치고 아란에게로 다가와 어린 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면서  아이를 안았다. 아란은 작은 새처럼 할딱거리는 노인의 가슴 소리를 통해 노인이 뭇 사람의 해코지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매우 필사적일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노인은 아란을 양팔로 보듬은 채 사람들을 헤치고 파티장을 나와 누군가에게 아란을 인계했다. 아마 호텔 웨이터였을 것이다. 그는  아란을 엘리비이터에 태워 현관까지 데리고 나와 택시까지 태워주고 들어갔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그 노인은 아란의 아버지일 터였다.  할아버지라고 해도 젊은 할아버지 축에도  못 끼일 그 저승꽃 핀 신사가.

  그렇다면 엄마는 아마 그 노인의 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란은 엄마의 첩노릇을 본 적은 없었다. 세상에서 첩이라는 족속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일반적인  통념, 요망스러운 미모, 나태와 사치에 대한 남다른 성벽, 감추려야  감출 길 없는 화냥기, 불로소득에 대한  치사한 갈망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는 죽을 때까지 남의 집 파출부 노릇을 했지만 이리저리 옮겨다니지 않고 서너군데의 단골집만 다녔는데 하나같이 처녀나 과부로 교수나  교장자리에 오른 전문직 여성들 집이었다.  그들이 더 좋은 데를 소개해  준다 해도 홀아비나 부부가 같이 있는 집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좀 유난스러운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의 첩 노릇은 오직 빛바랜 사진첩 속에나 남아 있었다. 진회장과 엄마는 부부라기보다는 부녀간처럼 보였고 둘 사이에는 어린 아란이 반드시 끼여 있었다. 둘만의 사진이 신기할 정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아란을 위한  사진첩인 것 같았다. 사진 속의 진회장은  첫 손자를 본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고 달콤한 시선으로 아란을 바라보거나  보듬어안고 있었다. 아란의 기억 이전의 가족 모습이었다. 이  시기는 아마 이 숨겨진 가족이  큰집에서 발각되기 이전일 것이다. 그 시기가 길지 않았다는 것은 사진 속의 아기가  더는 자라지 않고 유아기에 정지돼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빛 바랜 낡은 사진들이 흔히  그렇듯이 표정이나 의상은 진부하고 생기없어 보였지만 나른한 불안 같은 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었다. 어떤 계기나 경로로 큰집에 엄마의 존재가 들켰는지 엄마는 한번도 말하려 들지 않았고, 아란 또한 묻지 않았다. 보나마나 생각하기도 입에 담기도 싫은 한바탕의 추악하고 통속적인 풍파가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진회장과 깨끗이 헤어지는 대신  아란을 진씨가의 호적에 입적시켜달라는  조건을 달지 않았나 싶다. 그게 뜻대로 안되자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약속이 틀리다고 분해하고 한숨 짓는 엄마를 아란은 여러번 보았다. 그 일에 관한 한 한숨만 짓고 가만히 있을 엄마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회장과 다시 만나는 일 같은 건 없었지만  아란의 존재를 그 집에 알리려고 온갖 수를 다 썼다. 진회장 앞으로 아란이 졸업식이나 입학식의 초대장은 물론 성적표나 미술대회 글짓기 대회의 상장 같은 것까지도 복사를  해서 우송할 정도였다. 칠순잔치에 아란을 밀어넣은 것도 아마 그런 존재 과시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란이 진씨가의 입적이 된 것은 그로부터 십년이나 지난 그녀의 고등학교 때였다.  그때 처음으로 그 집 장남 정기와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그가 먼저 만나기를 제의해온 것은, 회장님은 벌써 몇년 전에 기업 일선에서 은퇴를 했고, 은퇴와 동시에 기업체의 인수인계와  재산의 분배도 깨끗이 마무리 되었다는 걸 통고하기 위함이었다. 덧붙여서 입적을 시켜주는 대신 남남처럼 살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겨우 고등학생이었다. 알 건 다 알았던 것도 같고, 아무것도 몰랐던 것도 같다. 그건 정기로서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화  상대는 엄마이고 아란은 간접통화의 도구에 불과했을 테니까.

  “느이 어머니가 네가 아버지 핏줄이라는 걸  인정해주길 왜 그렇게 바랐는지 모르겠구나.

실지로 돌아갈 재산은 땡전 한 푼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 집안이 대단한 명문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노가다 십장 하면서 재산을 늘린 집안이다 너.“

  이렇게 아주 않됐다는 듯이 비웃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겠지만 동기간에 대한 최소한도의 배려도 안하려 들었다. 놀부 같다고나 할까. 남 줄 물건에는 침을 뱉든지 흠집이라도 내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심술궂고  야비한 인간이었다. 그후 아란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장남이 한 말과 똑같은 말로 엄마를 비웃곤 했다. 이렇듯 엄마는  아란의 진씨집 입적이 성사된 후 훨씬 더 지독한 구박을 딸한테서 받아야 했다. 엄마의 대답은 늘 똑 같았다. 재산이나  가문이 탐나서가 아니라 다만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받고 싶었노라고. 끝끝내 잘난 척은… 아란은 엄마의 잘난 척에 신물이 났다. 아란은 엄마가 속 다르고 겉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여한이 없다고 맥을 놓더니 곧 병을 얻어 아란이 대학을 가기 전에 세상을 떴지만, 과연 여한이 없었을까. 오랜 투쟁 끝에 아무것도 거머쥐지 못한 낙담과 충격으로 그렇게 쉽사리 목숨줄을 놓은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다.  아란은 복잡한 건 질색이었다. 아란이 엄마가 싫은 것도 그  난해함 때문이었다. 완벽한 위선의 그  꼬이고 꼬인 난해함에는 넌더리가 났다. 엄마가 죽고 나서 삼년 안에 진회장도 상처를 했다는 걸 풍문으로 들었지만 그때 아란은 직장 다니면서 야간대학 다닐 때라 살기에 바빠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지지리 복도 없는 엄마, 혹시 살아 있었다면 그 잘난 진씨집  호적이 정식으로 오를 수도 있었으렴만… 하다 못해 이런 생각도 못했던 것은 살기에 바빠서라기보다는 그 징글징글하도록 번족하고 배타적인 그 집 식구에 대해선 생각하기도 싫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적에만 올랐다뿐 이렇게 남남과 다름없이 지내던 진씨가에서 느닷없이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이상하게 여기긴 했어도 겁날 것은 없었다. 진씨가에서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는 기정사실이 아란의 배짱을 두둑하게 만들었다. 또 진씨가가 비록 야비할지언정 남해하지 않다는 것도 아란을 마음 편하게 했다. 만나자는 장소는 회사가 아니라 어떤 아파트였다. 그러나 아란이 약속시간에 지정된 아파트에 당도했을 때 분위기는 냉랭하고 근엄했다. 정기씨를 비롯해 나이 지긋한 신사들이 여러 명 대기하고 있었고 머리가 허연 노부인을 비롯해서 중년 부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부인들은 하나같이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생전 웃지도 않을 것 같은 그들의 경직된 표정과 잘 어울렸다. 아미 진혁부 회장의 딸이나 며느리들일 것이다. 상을 당한 지 달포가 됐는데도 집안에서까지 일제히 상복을 입고 있는 게 아란이 보기엔 과시용처럼 보였다. 아란은 개나리 빛깔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빛깔에나 자신이 었었지만 특히 노란색이 그녀를 도전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사에도 안 오고 만 년을 그래도 딸이라고…”제일 나이 맣아 보이는 노부인이 아란의 위아래를 날카롭게 훑고 나서 저만치 딴전을  보면서 중얼댔다.“형님, 쟤 옷 입은 거  보세요. 탄할 만해야 탄하지요. 참으세요.”“그 말씀 하시려고 저를 부르셨나요. 남남처럼  살자고 한 게 누군데요.”아란은 부인들을 무시하고 정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누님, 자리를 좀 비켜주시지요.”정기의 그  말 한마디에 상복 입은 여자들이  슬금슬금 안방 쪽으로 사라지고 남자들만 남았다. 정기 빼고는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는 낯선 남자들이었다. 그중 한 신사가 아란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직업적인 정중함이 몸에 밴  신사였다. 그는 진씨가 아니고 이씨 성을 가진 변호사였다. “아버님의 유언을 집행할  변호사시다. 아버님이 이 집을 너에게 남기셨다는구나.”정기가 남의 말 하듯 덤덤하게 말했다. “이 집을요? 누굴 놀리시는 거예요?”“사실입니다.”방금 명함을 건네준 변호사가 말했다. 변호사 쪽이 훨씬 덜 사무적이었다. “그분의 뜻이 그렇다고 해도 당신네들이 줄 사람들이 아니잖아요?”“당신네들이라고? 당찬 건 좋은데 버릇이 너무 없구나. 아닌게 아니라 안주고 싶다만 유언장을 공증까지 하고 돌아가셨으니 어쩌겠니.”

  아란은 변호사한테 말했는데 대답은 정기가 했다. 아란이 독기를 뿜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기는 웃고 있었다. 억지로 꾸민 웃음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 뵈는 능글능글한 웃음이었다. 숫제 가지고 노는구나, 가지고 놀아. 아란이 그런 모욕감으로부터 미처 자신을 추스르기도 전에 정기가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우리 집안끼리는  너를 입적시키기 전에 상속을 끝냈으니까 이집이 아버님께서 당신 명의로 가지고 계시던 마지막 재산이란다. 당신이 운명하신 것도 이 집에서였고. 그래 그런지 우리 식구들은 아버님이 당신의 모든 것을 너에게만 주고 가신 것처럼 느낀단다. 아머님이 생전에 우리 형제들에게 주신  것에다 대면 이 집 한채는 극히 약소한데도 말이다. 왠지 액수로 비교가 되지 않고, 우리는 나눠가졌는데 너는 전부를 가졌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건  일종의 배신감이기도 하단다. 특히 누님이  아버님의 처사를 가장 뼈아파하셔서 한때는 혼절을 하다시피 하셨지. 어째 안 그렇겠니. 아버님이  몸져누우시자 누님이 이 집하고 같은 라인의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하실 정도로 전적으로 아버님 병수발을 책임지셨거든. 출가외인이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니. 그렇지만 며느리가 시아버지 병구완하기는 더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누님이  희생양이 되기로 작정을 하신거지.

그러기를 자그마치 오년이었어. 아들들은 아들대로 누님한테 빚진 기분이었고.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다들 누님에게 꼼짝을 못한단다. 누님은 이 아파트에 네가 들어와 사는 꼴만은 정말 못 보시겠다는구나. 그것만은 막아달라시는 걸 어쩌겠니?  누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속죄로서는 가벼운 편이지. 그렇다고 아버님 유언을 집행 안할 도리도 없구. 그래서 이 아파트를 우리가 너한테서 사기로 했단다. 알아듣겠느냐?”아란은 못 알아듣겠어서 고개를 저었다.

눈이 마주친 변호사가 안심하라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떡여 보였다. “이 아파트 시세가 작년만 해도 사억오천은 나갔는데, 너도 아이엠에프는 알 테지만, 그놈의 아이엠에프 이후  집값이 뚝 떨어져 삼억오천이라도 살 사람이 없어. 급매물은 삼억짜리도 나와 있다더라. 못 믿겠으면 이따 부동산에 들러보면 알 게다. 이변호사님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네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계신 분이다. 네 충실한 대리인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게다.

이변호사님하고 우리가 미리 합의한 건데 제반  비용 다 제하고 삼억오천을 너에게  주기로 했다. 제 값 이상을 주고 이 아파트를 우리가 사는 셈이지. 넌 그 돈 가지면 요새 얼마든지 이보다 훨씬 더 좋은 아파트를 살 수도  있고 또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도 금리로 따지자면 아이엠에프 전의 사억오천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을 게다. 알아듣겠니? 이왕 이 집을 너에게 주는 걸 피치 못하게 된 이상 너한테 손해나는 일은 안한다. 차라리 벼룩의 간을 내먹으면 먹었지. 다만 네가 여기 들어와 사는 걸 보기 싫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협상을 하게 된거야. 누님만 이 위층에 사는게  아니라 우리 형제들 대부분이 같은  단지나 근처에 살거든.”

“그렇게 하시죠.”변호사가 훈수 두듯이 아란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며 서류뭉치를 내놓았다. 아란은 혼이 빠져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여러 군데에다 도장을 찍고 또 찍었다. 가끔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적진에서 만난 유일한 내 편과 암호를 주고받은 것처럼 마음이 놓이곤 했다. 계약금이고 중도금이고 따로 없이 일주일 후에 삼억오천을 한꺼번에 지불할 테니 그동안에 모든 것을 깨끗이 끝내달라고 정기가  변호사한테 요구했다. 그때 안방 쪽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 뛰어나왔다. 아이고 형님, 고정하셔요, 이젠 다 끝난 일이에요. 여자들은 눈부신 백로떼처럼 그 뒤를 따랐다.“이년 호적도 아주 깨끗이 파 가라. 요 요 요망한 년. 대를 물려 우리 아버지를 홀린 이 백여우 같은 년.”

  이변호사가 황급히 아란을 일으켜 세우더니 등뒤로 감싸주면서 총총히 그 집을  빠져나왔다. 잠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정기가 따라나와 앞으로의 일에 별 차질이 없을 테니 걱정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이변호사는 아란에게 택시까지  잡아주고 나서 주차장쪽으로 갔다. 아란은 이변호사가 진혁부씨 칠순잔칫날의 웨이터처럼 느껴졌다. 그 영감님 오래도 살았지. 정기의 누님이란 이도 아란보기에는 거의 칠십대로 보였다.

  그리고 나서 오늘이 바로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지난 일주일동안  아란은 삼억오천에 대한 현실감이 거의 없이 지냈다. 그런 거액이 정말 나에게로 올까 하는 의구심이나 조바심 같은 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런 욕심 없이도 지난 일주일은 지옥이었다. 그런 면으로 아란은 엄마를 쏙 빼닮았달 수도 있었다. 엄마는 횡재나 금시발복을 믿지 않았다. 얘야. 이 세상에 웬 떡이란 없단다. 그게 바로 엄마의 생활신조였다. 아란은 삼억오천의 횡재보다도  그런 거액을 들여서라도 아란을 자기네 핏줄공동체 안에 들이지 않으려는 그 집 식구들이 무서웠다. 그들 보기에 나는 어느만큼 더럽고 천하고 불길한 것 일까. 엄마는 왜 날 낳았느냐는 아란의 포악을 제일 싫어했었다. 그런 엄마가 없는게 천만 다행이었다. 죽은 엄마에게  맹려한 살의를 느꼈다. 아란아, 너는 어느만큼 더럽고  천하고 불길하냐? 첩질은 용서할 수  있어도 이런 나를 낳은 엄마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죽이고 싶었다.

  정확하게 일주일째 되는 날 아침에  이변호사한테 연락이 왔다. 전번의  아파트가 아니라 정기 회사 사장실로 나오라는 전갈이 왔고 이변호사도 동석한 자리에서 천만원짜리 수표 서른다섯 장을 건네 받은 것이다.  새삼스럽게 정기가 칠순잔칫날의 부친을 연상시켰다.  거의 그만큼 늙어 보이기도 했지만 첫 대면 때와는 다른 낯익음  때문인 듯도 했다. 아란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친근감이 수치스러워서 삼억오천만원어치 수표에 대해서는 짐짓 덤덤하게 굴었다. 그런 아란이 가소로웠던지 정기씨는 한쪽 입가로만 웃는 이상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동안 네가 집값을 따로 알아보고 다녔는지 말았는지 잘은 모르지만 이만하면 현 시세로 과히 억울한 값은 아니니라.  이변호사도 기꺼이 동의하셨고. 금리로 따져도  아이엠에프 전 사억오천보다 오히려 더 많이 금리를 챙길 수 있을  게다. 집을 사든지 현금으로 굴리든지 그건 네 자유다만 네가 원한다면 가장  높은 이자로 안전하게 굴릴 수 있는 금융상품을 알아봐 줄 수도 있다. 한달에 사오백을 나오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게다. 이건 내 생각이다만 아직 시집도 안 갔는데 집을 사기보다는 돈을 늘리는 게 좋을 것 같다. 혼잣몸에 한달에 사오백이면 뭘 하겠니. 보아하니  혼기도 늦은 모양인데 유학도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 아니겠니. 커리어 우먼, 그거 별거 아니다 너. 이  돈을 집보다는 네자신에게 투자해서 당당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만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  그러고 말고는 어디까지나 네 자유다. 삼억오천의 원금은 끄떡없이 살아 있고 한달에 사오백이면 그거 너 적은 돈 아니다.”

  삼억오천만원에는 원금처럼 흔들리지 않던 아란의 심지가 한 달의 사오백에 비로소  강한 충격이 왔다. 오싹하고도 기분 좋은 전율과 함께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웬 떡이야말로  엄마와 나의 숨은 욕망이었던가?

  글쎄 유학을 갈 수도 있다는구나.  아란은 그의 발밑에서 맴돌고 있는  하얀 공에게 말을 시켰다. 그리고 멀리멀리 날려보낼 셈으로 힘껏 걷어찼다. 그러나 힘이 부쳤는지 공이  시원치 않았는지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공은 충실한 강아지처럼 그녀한테로 되돌아 왔다. 에이, 바보. 아란은 공을 가볍게 원래의 구멍에다 밀어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란은 우선 회사에다 전화를 걸어서 들뜬 목소리를 가까스로 억제하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감기가 심해 며칠 못 나갈 것 같다고 말했다. 처음 있는 일이라 과장은 비교적 친절한 편이었지만 나중에 친한 동료로부터 받은 전화는 지금이 어느 땐데 그까짓 감기 정도로 결근을 하느냐고 염려가 대단했다. 진심으로 아란이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게 분명한데도, 글쎄 말이다, 내가 왜 이런지 몰라, 별안간 귀골이 된 것처럼 푹쉬고만  싶네, 라고 무성의하게 받아넘겼다. 아란보다 귀가는 늦어도  출근은 이른 미스 김도  다음날 늦게까지 드러누워 있는 아란을 보고 대뜸 언니 잘렸구나 하고 단정을 했다. 아란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안하고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잘린 사람치고 태평한 아란을 보고 미스 김은 부럽다는 듯이 또 그놈의 천만원짜리 적금 타령을 했다.“언니야, 언니는 돈 좀 모았구나.  좋겠다. 집도 있구, 딸린 식구는 없구. 난 짤리면 안돼. 어떡하든지 천만원짜리 적금 한 꼭지는 타고 나서 짤리든지 그만두든지 할거야. 두고 봐.”

  미스 김은 내가 모은 목돈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란은 천만원 근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미스 김의 빈약한 상상력을 생각하고 연민을 느꼈다.

  그로부터 꼬박 사흘 동안 아란은 삼억오천만원 때문에 먹지  않고도 배부르고, 잠자지 않아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하룻밤은 붕뜬 기분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다음날부터는 열네 평짜리 집구석에 간수하기엔 너무 버거운 수표다발 때문에  입맛을 잃었다. 입맛뿐 아니라 돈 생각외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집중력을 잃고 온종일 허둥거렸다. 수표다발은 가지고 나가기도 겁나고 두고 나가는 것은 더군다나  말도 안되고, 그러자니 지키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잠시 골목으로 나가 집을 쳐다봐도 제 값의 몇갑절을 복장에 품고 있는 집은 표정부터 달라 보여 더럭 겁이 났다. 내눈에도  이렇게 달라 보이는데 전문가 눈에 어찌 안 뛰고 배기랴 싶었다.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이들은  모조리 전문적인 도둑놈처럼 보였다. 집뿐 아니었다. 아란은 마치 몸에도 황금비늘이 돋아난 것처럼 아주 귀하게도  낯설게도 느끼고 있었다.

  온종일 수표뭉치를 부피로 만져보다가 장수를 세어보다가,  몇장씩 나누어 간수했다가 함께 간수했다가, 하루에도 몇번씩 변덕을  부리느라 지칠 대로 지쳐서 딴  일에는 손끝 하나 까딱하기도 싫었다. 밤에도 수표를 책갈피에 넣었다가 옷갈피에 넣었다가 자리 밑에 깔았다가 하느라고 정작 그 돈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삼억오천의 파수꾼 노릇이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거액을 현금으로 바꿔다가 밤새도록 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으니까. 이렇게 아란이 삼억오천에 적응하기 위해 몸살이 날 정도로 지쳐 있을 때 정기한테서 전화가 왔다. 정기도 돈의 안부를 물었다.“아직 주신 상태로 간수하고 있어요. 왜요?”“잘했다. 나는 그동안 네가 그래도 나한테 의논을 해오리라고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아무 소리가 없더구나. 너도 그동안 쭉 사회생활을 해온 아이니까 세상물정에  어둡지는 않으려니 믿고 있다만 요새는 훌륭하게 공직생활을 마무리한 이도 눈 뻐언히 뜨고 퇴직금을 날리는 일이 비일비재니만치 너한테 신경이 안 써질 수가 없구나. 아버님의 뜻도  너도 남부럽지 않게 살도록 해주는 것이지 일정액을 떼주고 나 몰라라 하라는 건 아닌 줄 안다. 그래 말인데 요새 부동산은 값이 바닥이긴 하지만 당분간 오를 가망도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금리도 점차 내려갈 추세지만 아직은 고금리야. 우리처럼 사업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지만 예금생활자는 천국이지 뭐. 더 내리기 전에 금리가 그중 높은 금융상품에 투자하도록 해라. 현재로선 그게 최선이다. 마침 잘 아는 투자신탁에서 나한테 예금유치를 하려고  이것저것 구미 당기는 상품을 권하러 왔길래 네 생각이 나서  전화 거는 건데 네생각은 어떠냐? 전번에도  말했지만 예금 종류를 선택하기 따라서는 한달에 사오백 이자는 거뜬히 보장되겠더라.”

  몇억보다 몇백에 더 구미가 당기고  현실감각이 생기기는 그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는 그랬다. 정기는 투자신탁직원을 집으로 보내주마고 했다. 두어 시간 후 여직원한테 선물 꾸러미까지 들려가지고 나타난 직원은 보통 직원이 아니라 지점장이었다. 지점장이 도착하자마자 그를 믿고 모든 것을 맡기라는 정기의 전화가 다시 한번 걸려왔다. 지점장은 요새 삼억오천이면 하루 금리도 얼만데 며칠씩이나 장롱 속에 묵혀두었느냐고  아란의 무심한 경제감각을 나무랐다. 그리고 세금우대, 확정금리 육개월 만기, 일년 만기, 다달이 이자를 찾을 수 있는 예금 등 네 종류로 구분해서 예금하는 게 아란에게 가장 유리할  거라고 말했다. 서로 합의가 되자 지점장은 하루라도 이자를 밑지지 않도록 오늘 날짜로 집어 넣겠다며 보관증을 써주고 나서 보증수표 다발을 인수해갔다. 당장  지금부터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하루에 십만원 이상이 굴러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홀가분하기는  또 얼마나 홀가분한지. 왜 진작 이렇게 못했을까. 그동안 가만히 앉아서 몇십만원을 손해본 것은 또 얼마나 바보짓인지. 그러나 정기가 연락할 때까지 그 돈을 가만  놓아둔 것은 잘한 짓이다 싶었다. 정기한테 되바라져 보이지 않고  순진해 보였을 건 확실하니까. 무엇보다도  지점장이 몸소 방문해서 예금을 받아가는 입장이 돼보니 신분상승의 맛이 바로 이거로구나 싶게 황홀했다. 아란은 지점장이 가져온 오렌지 주스를 느긋하게 음미하면서 나른한 만족감에 빠졌다.

  잠깐 낮잠이 들었던가. 들뜬 듯 편치 못한 낮잠에서  깨어나면서 지점장이 집까지 예금을 유치하러 오는 신분은 상류사회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을걸 싶던 허영심이 퍼뜩  의구심으로 바뀌었다. 지점장이 집까지 찾아와서 예금을 받아가는 일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일이 아닌가. 내가 무엇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지. 평소에 욕심이라곤 없던 사람도 길에서  네다바이를 당할 때는 잠시 욕심에 눈이 가리어 그리 된다고 들었는데 나야말로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지. 하루의 이자에 눈이 멀다니.  그런 생각이 들자 미칠 것  같았다. 수표를 숨겨둘 자리를 이리저리 바꾸느라 잠을 못 이루던 밤의 고통은 여기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기가 설마, 하고 그를 믿게 되다가도 그 집 족속들이라면 능히 줬다 뺏고 나서 용용 죽겠지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 같았다. 그 족속들의 낭자한 조소소리가 환청이 되어 그녀의 귓가에 잉잉거렸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은 잠깐이었다. 그가 그런 계략을 쓸 까닭이 없다는 생각보다는  계략에 넘어갔다는 생각이 훨씬 우세했다. 그러면서도 정기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를 확인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일확천금한 가난뱅이 티를 드러내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지점장은 다음날 사람을 보내거나 자기가 직접 통장을 가져오겠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기다려보는 게 체면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이라고 자신을 달래가며  겨우겨우 그날 밤을 넘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온다고 해도, 그 남자를 못 믿기 시작했는데 그가 가져온 통장은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새로운 의혹이 솟구쳤다. 다시는 그런 바보짓을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아란은  떨리는 마음으로 지점장 명함이 있는 전화번호를 돌렸다. 꼭 엉뚱한 데가 나오든지,  사용하지 않는 전화번호라는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점장하고  곧바로 연결이 되자 아란은 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오실  것 없다고, 마침 그 근처로 나갈 일이  생겼으니 그리로 들르겠노라고 했다. 도심에 자리잡은 지점 건물은 장중하고 으리으리했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귀빈처럼 정중하게 지점장실로 안내된 아란은 푹신한 소파에 다리 꼬고 앉아서 향기로운 녹차를 대접 받았다. 여직원이 아란의 통장을 지점장실까지 자지고 왔고, 아란은  그것을 건네받기 전에 예금 종류에 따라 약간씩 다른 이율과 이점과 특징에 대한 자상한 보충설명을 지점장으로부터 다시 한번 들었다. 곧 유학  가신다면서요? 마지막으로 지점장은 눈웃음을 치면서 아란에게 물었고 현관까지 배웅해주었다.

  아란은 귀빈 대우에 어울리도록 우아하고 품위있게 걸어나오다가 뒤돌아서서 한참 그  건물을 쳐다보았다. 저 웅장한 건물이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않는  한 내가 거머쥔 삼억오천은 요지부동이였다. 악몽이 사라지자 세상은 아름다웠다. 아란은 깨끗하고 반듯한 건물만  모여 있는 거리를 이방인처럼 달착지근한 향수에 젖어 유유히 거닐다가 그럴듯한 찻집에  들어가 랩을 들으면서 비 오는 날은 일 나가지 않고 샹송을  듣는 것이 소원이었던 바보같은 엄마, 별난 파출부를 생각했다. 지금도 거금을 가지고 있긴 마찬가지인데 거짓말처럼 불안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렀다고나 할까, 면역성이  확실한 열병을 앓고 났다고나 할까, 아무튼 다시는 그렇게 못나빠진 불안증에 걸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따개비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살던 세상에서  어느만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맛을 여유있게 즐기고 나서 아란은 집으로 향했다. 너절한 동네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여유를  두고 바라보니 영화 세트처럼 재미가  쏠쏠했다. 세상과 나 사이에 돈이라는 윤활유가 넉넉해지면 세상은 이리도 아름다운 것을.

  조각공원이 보이자 아직도 구멍 속에 갇혀 있을 공 생각이  났다. 초원을 구르는 맛을 안 공을 구멍 속에 처박아두는 것은 못할 짓이다. 불쌍한 나의 공, 아란은 동네로 가지 않고 곧장 조각공원 쪽으로 갔다. 구멍  속에 처박힌 공을 꺼내 저만치  자유롭게 굴려주려다 말고 살살 발끝으로 희롱을 하기 시작했다. 속이 근질근질하면서 탄산수처럼 상쾌한 즐거움이 복받쳤다. 집에 가면 우선 헌이한테 전화부터 걸어야지. 헌이하고 잔 게 얼마 만인지. 어서 헌이하고 자고 싶었다. 헌이 자기한테 시키던 온갖 굴욕적이고  야비한 짓거리를 그에게 시켜가며 데리고 놀고 싶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주도권이란 이렇게 간단히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을. 그의 비리비리한 팔뚝을 담뱃불로 지질 수도, 그로 하여금 방바닥을 기게 할 수도, 개처럼 헐떡이며 온몸을 핥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란은 혼자서 미친 듯이 킬킬거렸다.

  헌하고 급하게 하고 싶은 것은 자는 것만이 아니었다.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꿈은 더이상 일편단심 개천에서 용 나기를 기다리다가 기어코  개천에서 난 용의 조강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아니라도 개천에서 용 날 꿈에 매달려 사는 너의 여덟 식구만 해도 너에게는 버거운 악몽일 테니 나는 이제 개천바라기에서는 빠지겠노라고. 그렇더라도 헌의 쓸모가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용은  아니라도 필요에 따라 기둥서방을 삼을 수도,  싫증나면 헌신짝처럼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훗날 헌신짝처럼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 두려워해야 할 이는 이제 내가 아니라 헌이  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네가 아니라 나다. 여태껏 모든 주도권이  남자에게 있었던 것은 이 세상의  주도권은 항상 가진 자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쯤은 너도 알 것이다.

  아란이 지금 발끝으로 살살 굴리고 있는 것은 공이 아니라 헌이었다. 자신을 공과 동일시할 때보다 훨씬 더 재미가 있었다. 힘을 모아 힘껏 걷어차보았다. 공은 한참 날아가 땅에 떨어지자마자 감쪽같이 없어져버렸다. ‘존재의 아픔’언저리였다. 나쁘지 않은걸, 이런 게 홀인원이라는 건가? 아란은 들은풍월로  중얼거리고는, 그러나 공을 구멍에서  꺼내줄 생각은 없었다.

  결국은 이렇게 진씨집과 화해를 하게 될 줄이야. 돈독인지  돈힘인지를 맛보고 나서야 진씨집에서 여태껏 당한 것을 용서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자신에게 아란은 문득 비애를 느꼈다. 도시 한가운데서도 문득 지난날의 향수처럼 풀이나 거름냄새 같은 게 코끝을 스쳐갈 때가 있듯이, 잡힐 듯 말 듯 모호하고도 생뚱스러운 비애였다.

(당대비평 1998년 여름호)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