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y 2013


그린위치행 유람선에서의 해프닝 이후

2013.05.28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국내 한 국책(國策)연구소에 재직하던 1980년 가을 혼자 해외출장 중 불란서에서 스웨덴, 이태리를 거쳐 영국 런던에서 일요일을 맞은 적이 있었다. 주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한 후 가능한 주일미사에 참석하려고 여기저기 물어가며 가톨릭성당을 찾다가 제대로 찾지를 못하고 헤매던 중 눈앞에 갑자기 테임즈(River Thames)강이 보이고 그곳 선착장에 각 행선지를 표시한 유람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서 특히 그리니치(Greenwich)행이 눈에 띄자 그냥 배에 올랐는데 아무래도 어릴 적 어느 공부시간에 배운 바 있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문득 떠올랐던 때문이리라.

 배는 100명 이상을 태울 정도로 제법 컸지만 승선손님은 15명 정도로 별로 많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되자 배는 제시간에 출발하였다. 얼마 후 손님 중 중년이 넘은 한 미국인 부인이 혼자 여행 중이냐며 말을 걸어와 우리는 자연스레 같이 유람하는 입장이 되었다. 테임즈 강폭 여기저기에 전시해 놓은 Pax Britanica시대의 영국 해군력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큼직한 여러 척의 전시 군함들에 눈길을 주며 이런저런 얘길 하는 사이에 유람선은 유유히 테임즈 강 하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배는 중간 중간에 몇 군데를 들러서 가는 배였다. 중간 선착장에 들릴 때마다 배를 정박시키려고 젊은 배꾼 하나가 배가 육지에 닿기 바로 직전에 뛰어 내려 배를 고정시키려고 선착장 기둥에 밧줄을 재빠르게 묶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눈이 졸려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막 잠에 뻥 떨어지려는 것 같은 깊은 졸음에 취한 상태로 보였다.

 그러던 중 한번은 졸음에 거의 감긴 눈으로 선착장을 향해 뛰어내리다가 삐끗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강에 빠질 뻔했다. 나도 모르게‘조심해!’하고 소리를 질렀고, 그 친구는 놀라 깨면서 가까스로 몸을 가누어서 물에 빠지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졸면서 일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영국의 노동법 때문이라며 멋쩍게 웃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는 나의 물음에 그의 대답은, 바로 1년 전 1979년에 수상이 된 대처(Thatcher)가 정부를 출범시키자마자 노조(勞組)의 스트라이크(Strike)를 막기 위한 노동법을 만들었는데, 그 법에서는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는 72시간을 1년에 한번 인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었는데‘오늘이 바로 그 법 첫 시행의 이틀째’라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당시 필자가 직접 확인한 바가 아니고 단지 그 친구의 설명이었기 때문에 그 법적 배경이라든가 논거는 알 수가 없고 또한 지금까지도 그와 같은 법조문이 여전히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때 그 친구가 지난해 언젠가 선주(船主)에게 대들었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그 선주가 노동법에서의 그 취지를 십분 살려 자기로 하여금 업무를 계속하도록 명(命)했고 그래서 48시간 동안 거의 한 잠도 못자고 계속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기간에 선주의 업무명령을 어겨서 해고를 당하면 아무런 법적보호를 못 받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당시 영국은 소위‘스트라이크(Strike)병’을 깊이 앓고 있었다. 그래서 대처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그 치유책의 일환으로 그런 법을 만들었던 것으로 유추되었다. 참으로 노사(勞使) 양측 모두에게 특히 노측에게 극단(極端)으로 치닫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나의 추론은 ‘앞으로는 절대로 선주에게 막 대들지 말아야겠다.’는 그 친구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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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자연의 섭리(攝理)를 따르도록 부여된 자유

 2013.05.28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의 연구세계와 학문세계에서 그간 견지해 온 우주관과 세계관의 골격은 한마디로‘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인과율(因果律)이다. 요컨대 사업경영, 기업경영, 산업경영, 국가경영의 그 어느 레벨에서든 인과율이라는 확정적 질서(deterministic order)가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기초로 필자 나름의 연구세계와 학문세계를 펼쳐왔다고 감히 생각한다.

 그런데 필자로 하여금 이런 인식을 굳히기까지는 몇 번의 계기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 계기는 자연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연적 질서에 대한 귀납적 추론이었다. 우선,

 

1) 빨간 페인트와 파란 페인트를 섞으면 페인트 색깔은 무슨 색이 될까?

상 온(常溫)에서 보라색이 된다는 것은 물론 어린 시절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 보라색의 페인트에 열(熱)을 가하면 빨간색으로 변했다가 계속해서 열을 더 가하면 파란색이 된다는 사실과 이제 이 파란색의 페인트를 식히면 다시 빨간색이 되었다가 드디어 상온이 되면 또다시 보라색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소위 화학 시계(chemical clock)라고 불리는 범주의 것으로, 하나의 확정적 질서(deterministic order)가 무생물의 세계에도 존재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 만약 초식동물에 육식사료를 먹이면 어떻게 될까? 초식동물은 초식사료를 먹도록 조성된 자연적 존재이므로 만약 초식동물에 육식사료를 먹이면 결국 자연 질서를 어긴 탓에 그에 상응한 반대급부를 치루 게 되는 질서가 엄존할 것임도 추론 가능하므로, 소에게 육식사료를 장기간 먹이면 결국 그 소가 미칠 것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달기가 어려워진다.

 3) 또한 식물에게나 동물에게 들려주는 음악을 달리 하면 어떤 차이가 생길까? 헤비메탈을 들려주는 경우와 바로크음악을 들려주는 경우를 비교해 보면 식물의 생장(生長)에 있어서 헤비메탈의 경우가 바로크 음악의 경우보다 생장속도가 느릴 뿐만 아니라 생장 방향이 음악이 들려오는 반대방향으로 향한다는 실험이 있고, 또한 개에게 영영가가 높은 먹이를 주면서 헤비메탈을 들려주었더니 결국 그 개가 미치더라는 실험결과도 보고되고 있는 걸 보면 식물도 동물도 주어진 질서대로만 존재하게끔 되어있는 존재라는 추론도 또한 가능하다.

 4) 그리고 수간(獸姦)과 동성애로 인해 AIDS가 창궐하는 현상도 작용=반작용의 엄존하는 하나의 확정적인 자연 질서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런 몇 가지 예를 위시하여 온 우주천체의 운행과 자연계의 변화 및 계절의 변화 , 해와 달의 뜨는 시각과 지는 시각 그리고 밀・썰물의 시각 등등을 우리가 사전에 알 수 있는 것도 자연계에 내재되어 있는 확정적 질서(deterministic order)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가능케 함으로서,‘자연계내의 온 만물 안에는 어떤 의지(a will)의 자연 질서가 내재되어 있으며 만물은 오직 그 자연 질서대로만 반응한다.’는 추론이 귀납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는 인식이 첫 번째 계기였다.

 

두 번째 계기는 자연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을 존재케 한 메이커(maker)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메이커는 존재물보다 한 차원 높은 존재이며, 각 존재물에는 그 메이커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각 존재물은 오직 그 의지만을 따른다는 귀납적 추론도 가능하다는 인식이었다. 그리고 이를 확대해 보면 자연계 자체도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물이므로 자연계를 존재케 한 메이커(Maker)가 존재할 것이며 이는 자연적 존재(natural being)보다 한 차원이 높은 초자연적 존재(super-natural being)로서 조물주 또는 창조주(Creator)라 불리어질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자연계내의 온 만물 안에는 그 창조주의 절대의지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으므로 ‘자연계내의 온 만물 안에는 어떤 의지(a will)의 자연 질서가 내재되어 있으며 만물은 오직 그 자연 질서대로만 반응한다.’는 앞의 귀납 추론은‘자연계내의 온 만물 안에는 창조주의 절대의지(absolute will of God)가 내재되어 있으며 모든 만물은 오직 창조주의 절대의지대로만 반응 한다.’것으로 보강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계기는 인간의 사고와 관련한 것이었다. 즉, 백만 원 빚진 사람과 천만 원 빚진 두 사람이 있는데 이들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음을 알고 돈을 빌려준 사람이 빚을 탕감시켜 주었다면, 두 사람 중 누가 더 감사해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응답과 관련하여,‘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다.’‘아니다, 적게 탕감 받은 사람이다.’‘아니다, 금액의 다과에 관계없이 다 같이 감사할 것이다.’‘상황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각 개인마다의 돈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심지어는 누가 탕감시켜달라고 그랬느냐 따라서 감사할 이유가 뭐 있느냐’는 등의 의견을 내보이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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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소총(古今笑叢).. 벌레 먹은 장미..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에 생각하고 조심스레 써본 조금은 ‘숨기고 싶은’ 이름들이다. 고금소총은 아마도 태고 적부터(아마도 고려시대?) 있었을 ‘고전’ 책 이름일 것이고, ‘벌레 먹은 장미’ 는 1950년대에 나왔음직한 책의 제목이었다. 옛날 옛적을 추억하며 이 책 두 권을 언급하지 않으면 사실, 너무나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두 권의 책은 ‘절대로’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책들이 어디 한 두 권이겠는가? 한마디로 그 당시 도덕적, 사회적 기준에서 들어내 놓을 수 없는 책들인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상에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기의 이 책들은 사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풍기문란’ 죄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내가 이 책들을 읽고 본 것이 중학교(서울 중앙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1962년 경인가.. 여학생들은 모르겠지만 남학생들은 그 나이 정도에서 이런 ‘금기 도서’ 목록을 조금씩은 거쳐 나갔을 것인데, 조금 조숙한 아이들은 그 훨씬 이전에 읽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나이에서야 읽게 되었다. 물론 친한 친구들의 ‘권유’로 알게 되고 읽게 되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그 읽던 때를 기억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이런 것들은 사실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했다. 아주 옛날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1960년 대 만 해도 고등학교까지는 철저한 ‘남녀유별’의 사회적 규율이 엄존했다. 남녀공학은 ‘거의’ 없었고, 만약 공개적인 연애를 하다 ‘걸리면’ 정학처분 같은 벌을 받곤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레 발동하는 남성 호르몬의 영향은 자연스레 ‘지하’로 들어가며, 음성적, 비공개적, 밀담 같은 것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조금만 노출된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는 물론 ‘학생입장불가’ 라는 말이 붙어서 그저 영화광고 벽보 앞에서 침만 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환경 하에서 비밀리에 돌려가며 읽는 책 중에 아마도 위의 두 책이 제일 유명했을 것 같다. 나의 또래 사람들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예외 없이 모두 보았다고 했으니까.. 또한 같은 또래의 여성들에게 은근히 물어보면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예상하기 쉬운 반응을 보곤 했다. 이렇게 여자와 남자가 다른가.. 놀라기만 했다.

 

고금소총은 글자 그대로 ‘옛날과 오늘날의 웃음거리 이야기를 모은 책’ 인데, 100%가 ‘성(性)’ 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들은 요새도 인터넷에 가면 특히 dirty old men들이 즐기는 소일거리이지만 그 옛날에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노골적인 묘사를 피하며 교묘하게 그것도 ‘한자’가 많이 섞인 글을 읽으면 아닌 게 아니라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어휘들, ‘양물, 옥문‘ 같은 말들.. 처음에 읽을 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는 놀라다가 웃게 되었다. 또한 옛 사람들의 과장법도 상당해서 그 당시 남녀는 모조리 ‘성 중독자, 도착증 환자’로 묘사가 되어 있었다. 모든 이야기들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그렇게 성이 억압을 받던 시대에도 그렇게 모두 ‘숨어서’ 이런 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통을 잇거나, 아마도 일제시대에 흘러 들어온 일본의 개방적인 성 문화의 영향까지 겹치고, 6.25 전쟁의 상처가 아물던 1950년대에 그런 ‘삶의 돌파구’가 없을 리가 없었다. 비록 책방에서 들어내 놓고 팔 수는 없었어도, 길거리의 카바이드 등불 아래 ‘포장마차’ 책방에서 이런 종류의 책들은 잘 팔렸을 것이고, 이제는 일본 이외에 미국문화가 전쟁 후에 쏟아져 들어오며 한창 잘 나가던 미국 판 잡지들 (대부분 PLAYBOY같은) 까지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그 시절 굶주린 남성들을 유혹하곤 했고, 학생들도 거기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었다. 그 중에 나에게 ‘흘러 들어온’ 책이 바로 그 유명한 ‘현대고전’, ‘벌레먹은 장미’였다. 중학교 3학년 내가 가회동에 살 때, 골목 친구가 시간제한을 두고 빌려주었던 책이었다. 불과 몇 시간 밖에 없어서 빠른 속도로 읽고 돌려준 책이었다. 그런 책의 내용이 반세기가 훨씬 지난 후에 거의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을 알고 나도 놀란다. 그 정도로 ‘강하게’ 뇌리의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고금소총과 달리 완전히 이야기의 배경이 현대, 그것도 6.25 이후의 사회적 풍경을 담아서 그야말로 100% 실감이 갔던 이야기들.. 당시로써는 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요 묘사였다. 이 책의 저자는 분명히 그 유명한 ‘방인근‘ (일제 당시 소설가) 선생이었지만 소위 문학의 대가가 그런 책을 썼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도 돈이 필요한 선생께서 이름을 빌려 주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 이후에도 이런 종류의 책들을 접할 기회가 적지 않게 있었고, 그런 것을 내가 피했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위선에 불과할 것이다. 이전에는 그런 것들을 ‘자라면서 꼭 거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자위하며 ‘괜찮다’ 로 일관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후회가 되는 것이다. 꼭 그렇게 ‘음성적’으로 성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지하, 음성적’인 습관이 깊어지면 아마도 소위 말하는 중독증으로 빠질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도움’으로 요새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런 것들을 ‘통제’하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1 한마디로 이제는 ‘장난’이 아닌 것이다. 동네 골목에서 숨어서 몇 시간 동안에 보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편하게 집에 ‘숨어서’ 24시간이고 보고, 듣고, 보내고, 받고.. 이것이 바로 우리 신부님2이 말하는 ‘어두운 밤’의 시작일 것이다.

 

  1. 최근 영국에서 이런 것을 대처하는 법안이 나옴.
  2.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하태수 미카엘 주임신부님.

마이클 포터 그룹이 촉발시킨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2013.05.21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에게 누군가가 경제학과 경영학 분야에서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 실제의 문제해결에 크게 기여한 사람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필자는 경제학 분야에서는 사회다윈주의에 기초하여‘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자유방임(laissez faire)’, ‘분업(division of labor)’의 명쾌한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제시해준 국부론(The Wealth of the Nations: 國富論, 1776년)의 저자 아담 스미스, 그리고 1900년을 전후한 대량생산혁명에 힘입어 그간의 적체(積滯)수요가 대충 해소되면서 점차 공급과잉과 수요 부족현상을 나타내다가 결국 수요와 공급 간의 불균형(imbalance)으로 말미암아 터진 세계대공황(1929)에 대한 치유책으로 부족한 수요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서라도 해결하자는 유효수요 이론의 처방전을 제시한 케인즈를 꼽고 싶다.

 그리고 경제성장발 전의 동인인 혁신의 관점에서는 경제발전의 주역은 기업이며 기업의 진수는 혁신임을 주장한 슘페터와 더불어 생태생물학을 논거로 기술변화(돌연변이)에 적응하는 기업의 루틴(routines, 무형자산)에 의한 경쟁선택으로 산업이 진화하며 경제가 발전한다는 진화경제학을 주창한 넬슨과 윈터을 꼽고자 한다.

 

한편 경영학분야에서는 1900년대부터 1980년까지 8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대량생산체제하에서 과학적 관리로 능률향상을 지향하는 전통경영학의 기초를 닦은 테일러와 더불어 2차 오일쇼크(1979)로 1980년대 들어서면서 환경이 격변(激變)하는 가운데 초경쟁상황이 전개되자 이에 적응하기 위한 논리/방식을 다루기 위해 등장한 전략경영분야에서 산업레벨의 5-force model과 기업레벨의 value chain 개념을 개발하고 이들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본원적 전략을 제시한 마이클 포터 교수를 꼭 뽑고 싶다. 왜냐하면 역동적 환경에서 어떻게 기업성과가 얻어지는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우선 산업과 기업을 동시에 다루어야하는데, 전략경영이 등장한 1980년 이래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산업레벨과 기업레벨을 동시에 다루며 이들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여전히 희소한 중에서도 포터의 경쟁전략 틀은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 가장 돋보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포터의 경쟁전략 틀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대량생산체제의 연장선상에서 우선 1980년대 들어 격화하는 경쟁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논리를 다루려고 개발된 것이고 또 그 후 기업의 동태이론 추구라는 시도는 있었지만 이렇다 할 별다른 발전된 콘텐츠를 갖추지 않고 있었음에도 5-force model, value chain(가치사슬), generic strategies(본원적 전략유형)이라는 것들이 워낙 명쾌하고 창의적이어서 연구자들에게 오랫동안 어필하여 왔다.

 

그러다 2000년을 전후한 인터넷/스마트 혁명이 일어나면서 고객의 니즈가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니즈 변화가 빈발하며 상례화 되어가며 점차 기업에서 고객으로 힘이 옮겨가는 권력이동(power shift)현상이 심화하면서 한계를 내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이들은 대량생산체제에서나 기업이 힘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여전히 유용한 전략도구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 틀은 2차 오일쇼크(1979)로 초(超)경쟁상황이 전개되던 상황에서 대단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1983년에 마이클 포터 교수를 비롯한 하버드 인맥의 8명이 기업 및 정부의 고위직을 상대로 하는 전략전문 컨설팅회사 Monitor Group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Monitor Group는 지난 30여 년간 포터의 경쟁전략 틀에 기초하여 전략컨설팅분야에서 독특한 브랜드를 쌓으며 Bain & Co. 와 Boston Consulting Group과 같은 세계적인 거물 컨설팅사와 경쟁하는 수준까지 성장하며 고객밀착형의 문제해결책 제시와 세계적 수준의 지적재산과 사고(思考)의 리더십을 발휘해 온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어떤 연유인지 2012년 11월 파산하여 Deloitte에 합병되는 운명을 맞았다.

 Monitor Group의 파산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과 추정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지만 Monitor Group이 그간 사용해 온 포터의 전략적 분석 틀과 분석도구들에 대한 논거가 2010년대의 글로벌 상황과 클라이언트들의 니즈를 제대로 충족시키기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인 듯하다.

 필자가 새삼 Monitor Group을 거론하는 이유는 1980년대 후반 한국통신공사(KTA: 현재의 KA, 한국통신의 전신)에 대한 Monitor Group의 컨설팅 결과에 대한 심사 평가에 참여했던 필자의 경험으로부터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를 주창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 하고자 함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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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생금융상품 망국론을 또다시 제기하는 이유

2013.05.13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는 2008년 이명박(MB) 정부 출범 바로 이틀 후인 2008년 2월 27일에 ‘파생상품에 대하여 주목하는 이유’라는 칼럼을 한국경제신문에 게재한 바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시절부터 솔솔 나오더니 MB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우리도 두바이처럼 금융허브를 만들자, 금융선진화를 이루자, 금융 산업경쟁력을 높이자, 등 금융과 관련한 주장들이 갑자기 매체에 부쩍 등장하는 형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지금이야말로 금융선진화를 이룰 절호의 찬스이니 법으로 규제를 완화해서 선진금융기법을 습득하자며, 당시의 금융전문가들(요즘도 여전히 이런 분들이 계시지만)의 주장이 여러 일간지의 시론란을 덮더니만 유력 일간지의 사설로까지 이를 두둔하는 희한한 작태가 연출된 얼마 후 Citi 그룹에 20억불을 투자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 투자한 20억불은 결과적으로 몽땅 털리는 꼴을 당했지만 이런 배경에는 어떤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는데, 이런 나의 직감은 산업은행으로 하여금 파산직전의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를 인수시키려는 획책을 꾀하던 세력이 거론되면서 더욱 분명해졌었는데 그 뒤 이들은 슬그머니 물밑 속으로 숨겨졌다.

 

파생금융상품의 위험성과 그 사기성을 지적한 필자의 경고성 칼럼에 대해 당시 관심을 두는 이는 별로 많지 않았지만 정확히 7개월 뒤 9월에 월가붕괴(Wall Street meltdown)가 터졌다. 만약 조금 더 늦게 월가가 붕괴되었다면 그래서 산업은행이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하였다면 어떤 파국이 초래되었을까를 생각하면 기가 차고 아찔하기까지도 하다.

 2008 월가붕괴 후 파생금융상품문제는 일단 리먼 브라더스 하나의 희생양으로 외형적으로는 일단락된 듯하지만 그 초강력 시한폭탄으로서의 본질적 문제는 2013년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나 역시 물밑에 가려진 상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강하게 이 문제를 제기하는 주장은 간혹 모기소리처럼 잠깐씩 들리곤 하다가 금방 또다시 수면 아래로 가려지는 구도가 아직도 여전히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필자가 이를 재론하는 이유는 또다시 박근혜정부의 출범에 즈음하여 이제 금융은 실물경제 특히 제조업을 지원하는 수준에만 머물질 말고 금융과 관련한 규제를 확풀어서 금융자체를 하나의 산업으로 키워서 먹고살자는 주장이 또다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어떤 형태로든 필시 파생금융의 아이디어가 깊숙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파생금융상품 문제를 이해하려면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세계경제 특히 미국경제의 흐름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 계2차 대전(1939-1945)은 미국을 제외한 승전국과 패전국 모두에게 심대한 피해를 주었고 물자절대부족시대를 맞게 되었는데 이는 절묘하게도 대량생산혁명을 주도해 온 미국기업들로 하여금 대량생산체제를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미국 기업들은 산업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다각화를 통해 인류역사상 초유의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로 이어지는 대량경제시대를 주도할 수 있게 되면서 미국은 세계경제의 반(半)을 점하는 막강한 경제력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기업들은 이런 과정에서 점점 오만/교만해 지면서 혁신노력을 게을리 하게 되었고 여기에 더해 노조가 막강한 힘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더더욱 혁신활동이 뒷전으로 밀리는 현상이 여기저기서 생기게 되었다.

 여기 에 더하여 패전국인 서독과 일본이 1950년대에 전후 복구체제를 갖추고 1960년대 들어 미국을 맹추격하자 미국의 주종산업인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어가며 미국의 경제력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71년에 이르러서는 1944년 결성된 고정환율제의 브래튼 우즈 시스템이 깨지면서 변동환율제로 전환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래서 환율변동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73년에 터진 1차 오일쇼크로 환율변동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금융기관들은 위험을 잘 관리할 수 있는 헤지(hedge)형 금융상품을 개발하게 되었다. 그러다 1979년 2차오일 쇼크가 또 터지면서 세계가 초(超)경쟁상황으로 심화되는 가운데 위험변동이 더 불확실해지고 상례(常例)화되는 분위기에서 1980년대 초반 레이건 정부가 추구한 신자유주의 기치아래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완화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많은 신규 금융 중개업자들이 진입하게 되었고 이들이 컴퓨터를 활용한 정보 분석을 기초로 위험을 여러 구성단위로 쪼개어 고객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 예컨대 선물(futures), 포워드(forwards), 옵션(options), 스왑(swaps) 등의 금융상품들을 재무공학(financial engineering)이란 이름으로 제공하게 되면서 파생금융상품 시장이 형성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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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 일제 산요 ‘플라스틱’ 5구 수퍼 가정용 라디오 credit: 일본 라디오 박물관

5구球 수퍼.. 5 tube super… huh.. 이것이 무슨 ‘괴상한’ 말인가? 튜브 5개가 super, 최고라고? 여기의 tube는 사실 vacuum tube의 ‘준말’이고 이것은 그 옛날 한때 전자기술의 총아, ‘진공관’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super는 무슨 말인가? 5개의 진공관이 super, 최고라고.. 이것도 준말이다. super heterodyne(줄여서 superhet)이란 radio기술계통의 전문용어의 준말인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한마디로 라디오, radio란 말이고, 1950~60년대에 널리 보급되었고 쓰이던 가정용 전자기기의 하나였던 radio-receiver 중에서 제일 발전되고 널리 보급된 것 중에 속한다. 1960년대에 집에 ‘잡음 없이 긴 시간 방송을 듣게 해준’ radio가 있었으면 99.9% 그것은 바로 이것이고, 그것을 보통 한글로 ‘5구 수퍼’라고 불렀다. 이것은 AM radio receiver(AM 라디오 수신기)로서 5개의 진공관을 사용하고 super heterodyne 이란 수신 방식으로 AM 전파방송을 받는 방식이었다.

내가 중,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닐 당시 그러니까 1960년대에는 ‘거의’ 진공관을 사용한 전자기술이 ‘판을 칠’ 때였다. 트란지스터(transistor)가 비교적 자리를 잡기 시작은 했지만 상대적으로 비싸고, 성능이 진공관에 비해 큰 차이도 없을 뿐 아니라 진공관에 비해 성능과 출력이 떨어지는 분야 (예를 들면, stereo amplifier, 전축 같은)도 있었다. Transistor가 제일 각광을 받던 쪽은 역시 portable radio (휴대용 라디오) 쪽이었다. 특히 일본 아이들이 잘도 만들어 내던 ‘정말로 조그만 라디오’는 대중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던 일본의 전자기술은 그때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그들 ‘기술 번영’ 시대 서막을 알리는 주역 노릇을 했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꿈이었던 전기,전자기술 분야는 사실 일반인들에게 그렇게까지 인기 있고 알려진 분야는 아니었다. 그저 유일하게 알려진 것이 라디오와 전축, 녹음기, 전화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 당시는 전기 에너지를 쓰는 분야, 전기 다리미, 전열기, 형광등, 전등불, 선풍기, 초인종.. 같은 것이 전부였다. 전파를 보내고 받는 쪽인 라디오, TV.. 그리고 녹음된 음성, 음악을 듣게 해주는 전축, 녹음기 가 시대를 앞서가는 주역을 했다. 미국은 이미 그 당시 ‘고철’ 컴퓨터의 최 전성기에 돌입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에게 그것은 거의 ‘환상적’인 idea에 불과했다.

대학 진학할 때 많이들 전공을 정 하는데 애 먹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전혀’ 걱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전기, 전자’에 목을 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공을 고르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대학 자체를 고르는 것은 문제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입학 시험을 보았다가 ‘떨어지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당시의 ‘입시 유행’이 공부를 잘하는 순서로 전공을 고르는 정말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풍조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전국 고등학교에서 제일 공부를 잘 하면 (남자 중에서) 그건 ‘서울공대 화공과’, 그 다음은 ‘전기공학과’, 이런 식이고 여자라면 제일이 ‘이대 영문과’, 그 다음은 어쩌구.. 하는 식.. 이런 풍토에서 나는 떨어질 확률이 꽤 높은 경기,서울,경복,용산 고교의 독차지 였던 서울공대 전자공학과에 지원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면 ‘전기, 전자’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알아도 전혀 정열이 없는 그런 애들, 하지만 수학 모의고사는 top..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전기,전자공학을 하려면 수학을 잘 해야 하지만 거꾸로 수학을 잘 한다고 해서 전기,전자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는 (아마 그 이후에도) 그런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연세대 전기공학과엘 가게 되었다.

당시 우리 같은 전기,전자 공학도에게는 전축, 라디오를 직접 만드는 것이 제일의 꿈이었다. 물론 이것을 ‘설계’를 하고 ‘조립’을 하는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설계’의 기술은 더 배울 것 투성이여서 ‘조립’ 쪽에 시간을 더 보냈다. 전축은 하도 종류가 다양해서 ‘표준화’ 된 것이 적었지만 위에 말한 AM 라디오 쪽은 거의 ‘완전히’, ‘5구 수퍼’라는 것으로 표준화가 되어있어서 각종 회로와 기술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거의 모두가 이것 하나만은 직접 만들어 보는 경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비록 이것은 분명히 ‘전자기술’에 속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노력은 ‘기계적 기술’이 필요할 정도로 기계적인 작업이 많았고 전자 쪽이었던 진공관은 100 볼트가 훨씬 넘는 shock energy를 요구하는 등, 조금은 등골이 오싹한 때도 있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제작비를 줄이려고 power transformer(트랜스) 없애고 100 볼트 가정용 전기를 ‘그대로’ 쓰게 하는 방식을 쓰면서(trans-less), 그런 위험이 더 커진 것이다. 이것을 조립하고, 만지고 할 때는 항상 전기 감전의 위험성에 시달리곤 했다.

대학 2학년 때 내가 직접 만들었던 ‘전자기기’들 중에 ‘표준 5구 수퍼’가 제일 기억에 남고 사진도 남아있어서 당시의 ‘흥분감’도 그대로 느끼게 된다. 5구 수퍼 라디오의 회로는 대부분 ‘표준화’ 되었지만, 문제는 그곳에서 쓰이는 부품들은 대부분 ‘조잡한 국산’ 수준이어서 조립 후에 ‘라디오의 수준’은 엉망진창이었다. 비록 진공관 자체는 대부분 일제였지만 나머지가 문제인 것이다. 조립 후에는 사실 ‘고가의 측정기기’가 필요한데 그것이 없으니.. 그저 흘러나오는 ‘저질의 음성’을 듣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디오의 ‘수학적 이론’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결과의 기쁨’은 상상외로 엄청나서 두고두고, 50년 뒤에도 이렇게 느낄 수 있으니.. computer simulation으로 전자 회로를 공부하는 요새 ‘전자공학도 아해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시절에는 electric guitar의 전성기여서 그것을 hacking하는 것도 매력적인 취미였는데, 전공분야의 이점을 살릴 겸해서 guitar amplifier(기타 앰프)도 만들어 보았다. 지금은 transistor 로 너무나 쉽게 만들 수 있는, $20정도면 살 수 있는 stompbox같은 것이 있지만 그 당시는 적어도 3개 이상의 진공관을 사용해서 같은 distortion effect를 내곤 했다.

50년 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이런 추억의 의미는 복잡하다. 영리한 인간들의 ‘기술적 진보’의 속도가 소위 말하는 Moore’s Law1를 따르며 현재까지 질주를 했는데, 비록 조금 주춤하는 예측도 있지만, 내가 그 동안 ‘속수무책’의 눈으로 경험한 것은 실로 예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진공관 5개의 ‘두뇌’가 지금은 소금 결정만한 크기에 수백만 개가 넉넉히 자리잡게 되었고, 앞으로 50년 내에 사람 두뇌세포를 닮은 지능까지도 그곳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 뒤는 어떨까? 누가 알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 과연 ‘혼’ 이란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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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산요 Sanyo ‘플라스틱’ 5구 수퍼 라디오 내부 모습 
photo credit: 일본 라디오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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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경 우리집에 있었던 일제 Monarch 5구 수퍼 플라스틱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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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경 내가 만들었던 5구 수퍼 ‘open frame‘ 중파 라디오
쓰인 진공관: 12BE6, 12BA6, 12AV6, 30A5, 35W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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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공관 plate의 150V ‘고압’이 노출된 라디오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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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의 ‘전자기기 공구’의 일부, 흡사 ‘철공소’를 연상하게 하는..

 


  1. 2~3년 만에 기술의 양과 질이 2배로 불어난다는 법칙, 주로 IC silicon chip에 들어가는 transistor의 숫자로 계산을 함.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생각해 본다

피의 혁명이 준 교훈

2013.05.08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가 40대 중반 때, 미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불란서로 출장 갈 때마다 몇 차례 베르사유 궁전에 갈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그곳 파리에 살고 있는 지인 가족들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 뒤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십자형 인공호수의 어느 한편 잔디 위에서 바비큐를 즐긴 다음 궁전 전시관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여기저기 역사미술관을 둘러보다가 어느 전시실 입구에서 주춤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 몇 번을 갔어도 그 전에는 한 번도 본바 없는 전시실에 온통 피를 뿌려놓은 듯한 그림들로만 꽉차있었던 때문이었다.

 특히 콩코드 광장에 설치해 놓은 기요틴(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장면과 목이 잘리려고 쭉 줄지어 서 있는 풀죽은 사람들의 행렬과 잘린 목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가 콩코드 광장을 지나 세느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 제일 소름끼쳤고 또 너무나 사실처럼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방의 전시물이 전하는 시기가 도대체 언제 것들이기에, 온통 핏빛으로 장식되다시피 한 것일까? 도대체 그 시기의 상황이 피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궁금하여 설명을 읽어보니 바로 루이 왕조가 무너진 1789년 불란서 혁명 발발 때부터 나폴레옹이 등장하기까지 10여 년 간의 것이란다.

 

불란서는 18세기 루이 14세 때 유럽에서 최강의 국가였으나 루이 16세 치하 때인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불란서 혁명으로 왕정을 포함한 구체제(앙시앙레짐 Ancient Regime)가 무너지고, 민간 혁명정부가 들어섰으며 동년 10월 5일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하는 ‘인권시민장정(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the Citizen)’이 선포되었단다. 그러나 얼마 뒤 민간 혁명정부에 의한 교회재산의 몰수, 뒤이은 중과소득세의 징수, 곡물가의 동결, 정부 가격제 불이행에 대한 극형실시, 개인 신분증 소지의 의무화, 이웃상호간의 감시제도 실시, 중상주의에 의한 경제정책의 실패와 지나친 지폐의 남발로 인한 재정혼란 등이 가중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792년에 제1차 공공안전위원회가 발족되자마자 반역자 처단명분으로 피의 학살이 파리 시가를 휩쓸게 되었고 뒤이어 정권이 여러 번 교체되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져갔는데 불란서 대혁명 후 4만 명 이상을 죽인 이 피의 잔치는 1799년 나폴레옹의 독재정치가 등장할 때까지 10년간 지속되었다는 설명이었다. 필자는 바로 그 시기의 미술품들을 전시한 방을 본 것이었다.

 불란서가 220여 년 전 불란서 혁명을 통해 왕정에서 민정으로 또 다른 민정으로 바뀌는 와중에서 무정부 상태와 국가주의를 경험한 후 결국 전체주의의 독재로 옮겨가는 약 10년간 흘린 그 엄청난 피범벅과 살육으로 과연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결국 나폴레옹 독재체제를 얻기 위해 그 많은 피를 흘렸단 말인가?

 그리고 가깝게는 1969년부터 1975년 사이에 캄보디아 폴포트(Pol Pot)가 자행한 인종말살(genocide)획책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해골더미가 보여주듯 그 잔학상이 끔직한데 그들은 이를 통해 또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해골더미가 현재는 관광자원역할(?)을 하고 있는데 과연 지금의 관광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그토록 그 많은 살육을 자행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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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가끔 보는 인터넷 Youtube의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60년대의 ‘방화, 국산영화’ 들 중에 예전에는 별로라고 생각되었던 배우들이 이제는 다른 느낌을 주는 예를 즐겁게 발견하기도 하고, 정말 내가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었던 서울 시내의 정들었던 모습도 다시 보게 되는 즐거움도 느낀다. 예를 들면 나의 대학시절 초기에 없어졌던 그 정든 ‘거북이 전차‘들의 모습들과, 서울 사람이면 예외 없이 정 들었던 일제의 잔재 서울역사와 바로 옆, 염천교 밑으로 검은 연기를 뿜으며 지나가던 ‘화통기차‘, 남산에서 본 반도호텔만 보이던 ‘아담했던’ 서울시내와 멀리 바라보이던 인왕산, 북악산과 그 뒤에 까물거리며 보일 듯 말 듯한, 병풍처럼 둘러선 북한산(백운대, 인수봉, 도봉산 등).. 명동입구에서 보이는 지지리도 못생겼던 시내버스, ‘도라무 깡’을 두들겨 패서 만들었던 국산차 제1호 ‘시발택시‘들.. 이런 것들이 비록 흑백의 배경에서나마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은 나이가 든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영화배우들은 그 시대의 ‘최첨단’의 유행을 자랑하는 특별 난 직업의 소유자이기에 우리들은 그렇게 돈을 내며 그들을 보고, 관심을 갖는지 모른다. 비록 시나리오와 감독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준準 로봇 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럴까? 그렇지 않기에 ‘성공한 인기배우’와 나머지로 구분이 되는 것이다. 60년대의 영화를 다시 보며 내가 제일 놀란 것은 신영균과 최무룡 이다. 내가 그 당시 그가 출연했던 영화를 나이제한 때문이 거의 못 보았지만, 그 당시 나는 신영균은 겹치기출연의 명수, 돈에 환장한 배우, 유들유들한 인물로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요새 다시 여러 편에서 그를 보니,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연기가 정말 요새의 수준으로 보아도 진실된 ‘수준급’, 아니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최무룡은 김지미와의 간통사건으로 어린 우리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린아이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왜 여자들이 그렇게 최무룡이라면 오금을 못 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남’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기와 함께 그의 연기를 자세히 보니, 역시 매력적인 남성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너무 어려서 잘 못 알았거나, 내가 그를 보는 눈이 ‘성장’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희 - 영화 초우, 감독 정진우, 신성일 주연, 1966

문희 – 영화 초우(草雨), 감독 정진우, 신성일 주연, 1966

그 반대의 case가 바로 당시 (60년대 말)의 잘 나가던 여배우 문희였다. 그녀는 내가 그 당시 실제로 보았던 영화의 주연급이었고, 안 본 영화도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지켜 보았던 것이다. 당시의 기억에 나는 분명히 ‘멋지고, 귀엽고, 신비롭고, 알고 싶던’ 그런 문희였다. 그녀가 나온 영화를 안 본 것도 분명히 잡지를 통해서 관심 있게 본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인기의 절정기에서 하루아침에 한국일보 장기영의 부잣집 아들 장강재에게 시집을 가 버리고 완전히 망각의 세계로 가버렸다. 그리고 반세기 뒤에 다시 그녀의 연기를 자세히 보게 된 것이다. 신성일의 연기까지 망치게 한, 그럴싸한 이름의 영화 <초우>, 남궁원과 남진 등 남씨들 조차 살리지 못했던 <벽 속의 여자>, 그리고 신영균과 전계현의 도움으로 간신히 hit를 했던 <미워도 다시 한 번>등을 다시 보고, 최소한 현재까지는 그녀의 신화는 완전히 100% 깨지게 되고 50년 간의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제 자리를 다시 잡게 되었다. 한 마디로 ‘못 봐 주겠다‘.. 인 것이다. 처음에는 혹시 내가 중요하지 않은 그 당시 ‘촬영 기술’ 때문인가 의심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 ‘지겨운, 성우들의 예쁜 목소리 dubbing’ 같은 것이다. 동시녹음이 너무나 비쌌던 당시의 경제사정은 이해하지만 왜 그렇게 ‘인형 같은 목소리‘만 고집을 했을까. 문희의 경우에는 그 수준이 극치에 달했다. 영상의 느낌과 너무나 동떨어진 그 ‘예쁜 성우의 떨리는 목소리’.. 그것과 문희의 연기와 너무도 잘도 어울리는 ‘신파 극’의 모습들이었다. 다른 인기배우 김지미도 같은 운명의 동시녹음 희생자였지만, 그녀의 연기는 그 목소리의 문제를 잘 cover해 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문희는 누가 어떻게 발굴을 했었는지는 몰라도, 완전한 ‘허구, 껍데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황급히’ 부자 아들과 결혼을 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50년 만에 나만이 알게 된 ‘진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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