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지은이: 한국역사연구회

출판사: 청년사

 

정치의 격동 속에서 왕건은 어떻게 통일대업을 이룩하였나

김갑동(원광대 교수)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한 것은 토지를 욕심내서인가, 반역을 토벌하여 해서인가. 오직 반역을 토벌하려 했기에 한 번 싸워 후백제 수천리의 강역을 항복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려 태조의 위덕일지라도 응당 이와 같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땅을 얻고 나서 원흉을 용서하였으니 인의로 시작하고 이익으로 끝낸 것이라. 어찌 심히 애석하지 않은가.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을 토벌하고도 그를 살려준 것에 대해 조선 후기 유학자인 유계가 평한 기록이다. 여기서 유계는 아버지 견훤을 배반한 신검을 혹평하는 한편 그런 신검을 토벌하였기에 왕건이 쉽게 승리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역사의 주인이 된 것은 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신라말의 난세에 나타나 궁예와 견훤을 제치고 통일 대업을 이룩한 것은 그만한 노력과 자질이 있엇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객관적 시각에서 왕건이 어떻게 후삼국을 통일했는가 분석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민족의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생각하고 앞으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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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견훤. 왕건의 출현과 ‘후삼국 시대’의 성립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하대로 접어들면서 통치제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김양상이 혜공왕을 죽이고 선덕왕으로 즉위하여 하대가 시작된 이후 김경신과 김주원의 왕위 다툼은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흥덕왕이 죽은 뒤에는 상대등 김균정과 시중 김명이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귀족이나 사원은 불법적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탈점하였다. 권력이나 문서위조, 고리대 등의 방법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던 것이다. 그러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유민화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889년(신라 진성여왕 3) 조세독촉을 계기로 농민봉기가 전개되었다. 이 농민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 틈을 타 지방의 세력가(호족)들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였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연출되었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궁예가 세운 태봉, 그리고 종래의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궁예는 신라의 왕실 출신으로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나면서부터 이빨이 있었고 태어나는 날 지붕위에 상서롭지 못한 광채가 있었다. 그래서 왕은 사신을 보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계집종이 구출하여 도망하였다. 10여 세가 되자 세달사(지금 영월의 흥고사지로 추정)라는 절에 들어가 살았는데, 까마귀가 떨어뜨린 나뭇가지가 주발 위에 ‘왕’자 모양을 그렸다. 이에 그는 자부심을 품고 속세로 나왔다고 한다. 그는 891년에 죽주(경기도 죽산)의 양길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그 곳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원주, 강릉을 거쳐 철원, 금화 등지를 장악하는 대세력으로 발전하였다. 급기야는 양길까지도 격파하고 태봉을 건국하였다.

궁예는 집권 초기에는 사졸들과 침식을 같이하는 등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보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불교에 심취하여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고 아들들에게는 신광보살, 청광보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른바 미륵신앙을 이용한 전제정치를 지향한 것이다.그러나 종교를 이용한 정치는 한계가 있었고, 세월이 갈수록 궁예는 의심이 많고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었다. 많은 신하들을 죽인 것은 물론 자기 부인까지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신라에 대한 극심한 적대의식으로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 이러한 파행적이고 흉폭한 행동은 더 이상 그를 왕좌에 앉아 있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궁예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왕건이 추대되었다.

 

견훤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상도 상주 가은현(문경군 가은면)에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자개는 원래 농민이었다가 뒤에 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에서는 견훤을 진흥왕의 후손이라 하였고, 같은 책에 인용된 <고기>에서는 광주의 북쪽마을에서 지렁이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상주출신인가 광주출신인가. <삼국사기가> 대체로 유교사관에 입각한 합리적인 사실만을 기록하였다고 볼 때, 상주태생이라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광주 북촌에서 지렁이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화는 지금의 전남. 북 지역에 주요 근거지를 두고 있던 견훤이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즉 그가 광주지역의 토착민임을 내세워 그 지역 주민들을 포섭하려는 일종의 정치적 술책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견훤은 체격이 장대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그는 농민봉기로 혼란한 시기에 신라의 군인으로 들어가 서남해안 지역을 지키다가 세력을 키워 무진주(광주)를 점령하였다. 나아가 북쪽으로 진출하여 완산주(전주)를 점령하고 드디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러던중 나주지역이 궁예에게 귀부하자 이를 공격, 탈환하기도 하였으며 덕진포에서 궁예휘하의 왕건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 후 궁예를 내쫓고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왕건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왕건은 송악(개성) 출신이었다. 그의 선대는 본래 고구려 계통으로서, 남하하여 개성지역에 정착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서해를 무대로 한 해상무역에서 부를 축적하여 호족이 되었다. 왕건의 증조할아버지가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 숙종이라거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는 등의 기록은 선대의 해상무역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다가 왕건은 아버지 용건이 896년 궁예에게 귀순함으로써 궁예 휘하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왕건은 궁예 밑에서 양주 등지를 공략하고 이어 청주, 충주, 괴산, 남양 일대를 점령하는 대활약을 보여싸. 또한 금성군(나주)을 공략한 후 해군대장군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중앙에 올라와 수상격인 시중 직책에 있기도 했지만, 궁예의 폭정이 심해지자 위험을 피하려 다시 나주에 내려가 전초기지를 수비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철원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홍유. 신승겸. 복지겸. 배한경등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건과 견훤의 힘겨루기

황건과 견훤은 초반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견훤은 왕건이 왕으로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 공작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하였다. 또 고려의 영역을 공격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그러다가 920년(태조 3) 견훤이 신라의 합천, 초계를 공격하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 이에 왕건이 원군을 보내 신라를 도와줌으로써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본격적인 대결은 태조 8년 조물군(현재 지명 미상) 전투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그 전 해인 924년 견훤측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장군 애선이 전사하는 등 전세가 고려측에 불리해지자 이금해인 925년 왕건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견훤과 싸웠다. 그렇지만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자 화친을 맺고 서로간에 인질을 교환하였다.그러나 이러한 화친은 다음해에 깨지고 말았다. 전년에 인질로 고려에 온 진호가 병으로 죽자, 견훤은 진호가 살해당했다고 의심하여 왕건측 인질인 왕신을 죽이고 고려의 영역이었던 공주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927년 왕건이 용주(예천)을 선제공격함으로써 다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군사력 면에서 볼 때 견훤 쪽이 우세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늘 살해할 때 왕건은 이를 구원하려다 죽을 위기를 맞기까지 하였다. 대구 부근의 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친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후백제군에게 포위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개국 1등공신이었던 신승겸이 장군 김락 등과 함께 힘껏 싸워 태조를 피신시키고 전사하였던 것이다.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는 이두 장군을 애도하는 노래이며, 현재 대구시 저묘동에 있는 표충사는 신숭겸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그러나 왕건은 그 후 명주(강릉)의 호녹 왕순식으로부터 군사적인 도움을 받는 등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929년 12월부터 시작된 고창군(안동) 전투에서는 왕건이 크게 승리하였다. 이 승리는 그 곳의 토착세력인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의 도움도 크게 작용하였다. 현재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삼태사묘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11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의 세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듬해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귀순할 뜻을 알려오기도 하였다.

이후 견훤은 수군을 동원하여 몇 차례의 공격을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더욱이 내부의 분열은 견훤 측의 패배를 부채질하였다.

견훤이 넷째 아글인 금강을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자 그 형 신검. 용검. 양검 등이 난을 일으켜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금강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에 견훤은 나주로 도망하여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곧이어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귀순함으로써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눈앞에 다가오게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신검과의 마지막 결전이었다. 이보다 앞서 왕건은 견훤의 사위로서 승평군(승주)를 지키고 있던 박영규의 내응을 약속받는 한편, 반역한 자식을 죽여달라는 견훤의 청을 받고 결전에 대비하였다. 결국 왕건은 군사를 출동시켜 경북 선산군 해평면 일대의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신검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 때 왕건은 지형을 살피기 위해 도리사가 있는 산에 올랐는데 이런 연유로 지금 그 산을 ‘태조산’이라 하고 신검과 싸운 들판은 ‘어견평야(견씨를 제압한 들)’ 또는 경상도 말로 ‘어갱이들’이라 부르고 있다.이 때 고려측에서는 중앙군은 물론 각 지역에서 온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였다.그 병력음 무려 9만 여명에 달하였다. 이 전투에서 신검군은 패배하여 황산군(지금의 논산군 연산면)으로 달아났다. 왕건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살육하였다.

이로써 왕건은 왕위에 오른 지 19년 만인 936년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왕건은 승리를 기념하여 연산에 개태사를 세우고, 이 절의 뒷산 이름을 하늘이 도와 주었다 하여 천호산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견훤 자신도 이 전투에 참가하여 신검을 죽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히려 왕건은 신검이 자의로 아비를 배반한 것이 아니며 끝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하여 살려주었다. 견훤은 이를 분해하다 병이 나서 황산군의 어느 절간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이하였다. 지금 충남 논산군 연무읍 금곡리에는 견훤묘라고 전하는 무덤이 황량하게 자리잡고 있다.

 

민심, 승패의 갈림길

그렇다면 왕건이 견훤을 이기고 후삼국을 통일한 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반대로 견훤이 왕건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요인은 무엇인가. 양자의성격이나 정책의 일면을 비교하여 살펴보자.

견훤은 앞서 본 대로 군사력 면에서는 왕건보다 우세하였다. 견훤의 군대는 궁예시대에는 물론이고 왕건이 등극한 후 태조 13년(930)까지 패배한 적이 별로 없었다. 또 외교정책에서도 왕건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견훤은 이미900년(효공왕 4)부터 중국의 오월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또 925년(태조 8)에는 북중국의 후당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왕건은 926년에 와서야 후당에 사신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견훤은 경애왕을 살해하여 민심이 떠나게 되자 이러한 외교활동을 이용하여 고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927년 11월 오월국의 사신이 후백제에 와서 고려와의 화친을 권유하는 편지를 전하자 견훤은 이를 고려에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우세에도 불구하고 견훤이 패배한 것은 우선 백성들이 바라는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면은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관제의 면에서 볼 때 그는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또 다른 요인은 후백제 정권의 내부 분열이었다. 부자나 형제간에 권력을 다투었던 그들의 이기심은 견훤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패배 요인은 신라인들의 민심을 얻지 못한 데 있었다, 그는 신라의 군인 출신이었으므로 신라인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권위이며 상징인 왕을 등에 업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왕건에게 선두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경애왕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의 신하로서 왕을 죽인 자기모순이며,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신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민심까지도 점차 그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도 신하로서 왕을 시해했다는 비난이 주된 것이었다.

반면 왕건은 신라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같은 그의 정책은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예에 대한 반동정책이기도 했다. 왕건은 궁예의 극렬한 반신라정책이 결과적으로 화를 자초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신라에 대한 유화정책과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때로는 신라를 구하기 위하여 사지에 뛰어들기까지 하였다.

또 다른 성공 요인으로는 호족들에 대한 정책을 들 수 있다. 왕건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겸양의 덕을 발휘하여 호족들을 포섭하였다. 또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각 지역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는 29명에 달하는 부인을 거느리게 되었다. 또한 중요한 호족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왕’성을 하사하여 가족과 같은 대우를 하였다. 반면에 호족의 자제를 개경에 머물게 하여 유사시 호족들을 견제하는 방책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많은 호족들이 귀순해 왔으며 급기야는 경순왕까지도 나라를 들어 바쳤던 것이다.

한편 왕건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책을 강구하였다. 스스로 근검. 절약을 강조하면서 과중한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궁예 시절에는 수확의 반 가량을 수탈해 갔지만 그가 즉위하면서는 수확의 10분의1만 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흑창이란 기관을 설치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기도 했으며 억울하게 남의 노비가 된 자는 모두 풀어주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여 진정한 민족사적 통일을 이루려는 포부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제2의 수도로 삼아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그결과 통일신라 때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국으로 생각하여 발해국에서 망명해 온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민심을 얻게 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도자로서 가져서는 안 될 생각도 일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죽으면서 남긴 <훈요십조>에서 찾을 수 있다.10조 중 제8조의 내용을 보면 차현 이남 공주강(현재의 금강)밖의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그 진위여부와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떠나 정치적 지도자가 지녀야 할 태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와 비교해 보면 후삼국기의 역사 상황이 지금의 정치.사회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가는 지혜와 덕,용기 등을 갖추어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진정한 민심의 향방을 아는 것이다. 말로만 ‘민주’. ‘민의’를 내세워서는 안되고 진정으로 백성들,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야 한다. 나아가 사심이나 적대의식을 지양하고 같은 민족을 포용함으로써 민족의 재통일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왕의 업적은 아내와 후손의 수에 비례한다.

김기덕(건국대 강사)

 

왕의 후손은 많을수록 좋다?

남편 한명에 부인 한명(일부일처제)이 원칙인 오늘날 입장에서 본다면, 예전의 왕들은 많은 아내를 두었다는 점에서 우선 특이한 존재다. 물론 전근대에는 왕뿐만이 아니라 일반인 특히 귀족들도 다처가 가능했다.그러나 귀족의 다처는 본부인(처)외에 첩 한명을 두는 정도가 일반적이었으나, 왕은 여러 명 심지어는 1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왕은 왜 일부다처였을까? 왕은 절대권력자이므로 그만큼 많은 여자를 아내로 두는것은 당연하다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복적인 이유는 왕의 경우 대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들이 없어서 대가 끊겼을 경우 다음 왕이 누가 되느냐 하는 점은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커다란 문제였다.

신라시대에는 여자쪽으로 왕위가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왕위는 항상 남자쪽으로만 계승되었다. 이 경우 왕위가 단절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아들이 하나만 있으면 되었다. 사실상 장남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은 일종의 ‘스페어 타이어’격이었다. 본 타이어가 펑크나지 않는다면 스페어타이어는 없어도 된다. 마찬가지로 장남이 제대로만 자라서 오래 산다면 나머지 아들이 없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남이 일찍 죽거나, 능력이 현저하게 모자라거나 혹은 그에게서 다시 대를 이을 아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국가의 보존이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왕의 후손이 많음에 따라 불필요한 왕위경쟁이나, 혹은 왕족파워의 형성 등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었으나 그것은 차후의 문제였다. 일반 신하들의 입장에서도 일단 왕실은 번성하여 후계가 안정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신라말 진골왕족의 극심한 왕위쟁탈전으로 인한 폐해를 경험한 고려왕조는 처음부터 왕족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제한하였다. 왕족들에게는 공작,후작,백작 등 명예로운 작위를 수여하고 그에 따른 충분한 경제적 대우를 해 주는 대신, 관직을 갖고 실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금지하였다. 고려초부터 시행되었던 왕족들의 사환(벼슬살이)금지는 이처럼 신라말 역사적 교훈의 소산이었고, 이는 원칙적으로 다음 왕조인 조선시대 끝까지 관철되었다.

다음의 표는 고려시대 왕의 부인과 자녀의 수를 제시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부인과 자녀의 수가 단연 많은 왕으로는 제1대 태조, 제8대 현종, 제11대 문종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왕의 가족관계는 몇가지 점에서 조선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먼저 왕의 부인의 경우 조선은 정비와 후궁으로 명확히 구분하였다.정비는 한 명이며, 죽거나 폐비되었을 경우 다시 간택되었다. 정비와 후궁의 차별은 그 소생자녀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정비와 후궁의 구별이 원 간섭기 이전까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원 간섭기 때에는 원나라 출신 왕비가 정비였고, 나머지 고려인 왕비는 후궁이었다. 그 이전에는 왕비의 호칭이 왕후.비.궁주.부인.궁인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 중 명칭상으로는 왕후가 정비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후가 한 명이 아닌 경우도 있었으며, 천인 출신의 궁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왕비들 사이에는 별다른 차별이 없었다.

물론 어느 왕 때나 제1왕비 즉 정비로 인정되는 왕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 왕의 무덤 옆에 나란히 안장되는 왕비나 종묘에 왕과 같이 모셔지는 왕비는 원칙적으로 1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왕비들 사이에는 조선시대처럼 큰 차이가 없었다. 또한 여러 왕비들의 소생자녀들도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저이 소생의 아들을 군, 딸을 옹주라 하여 명칭에서도 구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대우도 달랐다. 또한 그들의 배우자나 후손들도 다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고려시대 왕비의 경우 정비와 후궁의 구별이 크지 않았던 것이나 그들의 소생자녀들 또한 차별이 없었던 점은, 고려시대가 처첩의 구분이나 적서의 구분에 있어 조선시대와는 매우 달랐음을 말해준다.

 

태조 아내 스물 아홉의 다양한 삶, 갖가지 사연들

왕실의 후손이 많을수록 좋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태조의 아내는 29명이나 되었을까? 태조 왕건은 본래 궁예의 밑에서 수상을 맡고 있었으나,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의 부인은 신혜왕후 유씨와 장화왕후 오씨 두 명뿐이었다.

태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 전국의 유력 호족의 딸과 지속적으로 혼인하였다. 이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른 태조의 지방호족 포섭책이었다. 태조 즉위년(918)직후의 고려 정치상황은 상당히 불안하여, 태조를 반대하는 반란이 6개월여동안 수차에 걸쳐 일어났다. 이같은 상황에서 태조는 자신의 지원세력을 광범하게 확대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의 호족의 딸을 자신의 왕비로 맞아들이는 이른바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다. 태조는 이와 같은 지방세력가와의 혼인을 통하여 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후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조의 아내 29명중 거의 대부분인 25명의 혼인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출신지는 황해도와 경기도가 12명으로 양도에 집중되어 있고, 다음이 경상도 그리고 기타 충청. 강원. 전라도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태조의 혼인이 일종의 혼인정책의 일환으로 성립된 것이므로, 태조의 아내들의 삶은 각각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그 자녀들이 모두 수도인 개경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다.

태조의 제1왕비였던 신혜왕후 유씨는 호족의 딸답게 대단히 뱃심이 세었던 것 같다. 궁예 말년에 신하들이 태조의 집에 와서 쿠데타를 권유하자 태조는 자꾸 거절했다. 이에 몰래 엿듣고 있던 왕후는 뛰쳐 나오며 ‘궁예의 폭정은 저도 의분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손수 갑옷을 가져다 남편에게 입혀 주었고, 여러 장군들이 왕건을 앞세우고 나감으로써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다.

918년 42세의 나이에 즉위한 태조는 신혜왕후 유씨와 장화왕후 오씨 2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당시 아들로는 장화왕후 소생의 무(뒤의 혜종)가 유일하였다. 태조는 즉위한 뒤 곧 일곱 살 난 무를 후계자로 정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후계자 책봉을 서두른 이유는 무엇보다 왕조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결국 태조의 뜻을 헤아린 박술희의 주청으로 921년(태조 4) 무는 열살의 나이에 후계자로 책봉되었다.

태조가 뜻을 세운지 3년 뒤에나 책봉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혜종의 외가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처음에 왕후의 가문이 한미한 탓에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피임방법을 취하여 정액을 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왕후는 그것을 흡입하여 드디어 임신해서 혜종을 낳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탓으로 혜종의 얼굴에는 돗자리무늬가 있었으며 세상에서는 혜종을 ‘주름살임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화왕후 오씨의 출신지인 나주지역은 사실상 왕건보다는 견훤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후삼국 정립기에 서남해안 일대 전라도의 호족세력들은 왕건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태조 왕건이 유언으로 남겼다는 <훈요십조>에 보면 차령 이남 지역은 반역의 땅이니 그 곳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오늘날 지역갈등의 근원으로까지 얘기되고 있는데, 정작 태조는 차령 이남의 인물도 많이 기용하였고 나주 여인이 낳은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훈요십조>가 위작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후 나주는 고려정부와 항상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거란족의 침입으로 제8대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할때 전주절도사가 마중 나와 전주로 가기를 청했으나 굳이 나주를 피난처로 정한 점, 뒤에 담양 일대를 기반으로 무신정권 말기에 전라도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1236-1237년)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평정하고자 파견된 김경손이 나주는 어향(왕의 고향)이므로 반란군에 동조하지 말 것을 강조한 점, 또한 삼별초 항쟁기에 전라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나주의 호장세력은 끝까지 삼별초에 대항한 점 등은 고려를 개창한 태조의 처향이자 뒤를 이은 혜종의 탄생지로서 나주의 친고려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조의 혼인은 다분히 정략적인 것이었으므로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대서원부인 김씨와 소서원부인 김씨는 다 황해도 서흥지역 호족 김행파의 딸인데, 태조가 평양에 가는 길에 그의 집에 머물면서 그들 자매와 하룻밤씩 잤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행차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모두 집을 떠나 여승이 되었다. 제1왕비인 신혜왕후도 태조를 모신 뒤 한참 동안 소식이 끊어져 여승이 되었다가 뒤에 태조가 다시 데려왔던 것이다. 그 성씨나 가계도 알 수 없는 서전원부인이나, 성씨를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는 숙목부인. 월화원부인. 소광주원부인 등도 하룻밤의 정략인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들 29명의 왕비들의 아들이 대부분 태자 칭호를 띠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총 25명의 아들 중 왕이 되었거나 승려가 된 자 7명을 제외한 18명중 11명이 태자를 칭하고 있으며 나머지 7명은 군을 칭하고 있다. 태자는 왕위계승권자를 의미한다. 이미 신라시기에 태자제조가 운용되었으므로 고려 태조가 태자의 의미를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태조의 아들들은 저마다 자신이 왕위계승권자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호족과의 혼인정책이 추진되던 고려초의 상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즉 각 지역 출신 왕비들은 자신의 아들도 왕위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그 결과 이 때부터 태자는 단지 왕자칭호의 하나로 일반화되었고, 왕의 정식 후계자는 따로 ‘정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뒤에 왕권강화가 이루어진 제4대 광종 16년(965)에 아들 주(뒤의 경종)를 ‘태자’로 책봉한 이후 일반왕자들의 태자칭호가 사라졌다. 이 때부터는 ‘태자’의 호칭이 명실상부한 왕위계승권자를 뜻하게 되었다.

 

고려 전기 국왕 혼인의 추이

태조의 혼인정책은 자신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호족세력의 힘이 상존하는 한 비록 태조만큼 다수를 대상으로 혼인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방식은 계승되었다. 고력 제2대 혜종은 4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중 궁인 신분인 제4비는 별개로 하더라도 나머지 3명 전부가 군사력을 지닌 지방호족 출신의 딸이었다.역시 태조의 아들로 제3대 왕인 정종은 3명의 부인이 있었다. 2명은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로 후백제 지역의 호족세력을 무마할 필요성에서 혼인관계가 이루어졌으며, 1명은 청주호족 김긍률의 딸로 역시 정략혼인의 일환이었다.

태조의 아들인 제4대 광종은 2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이복여동생과 조카(혜종의 딸)였다. 이러한 근친혼은 고려 이전 신라왕실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진 혼인형태였는데, 고려 초창기의 일시적인 과도기를 거쳐 광종의 혼인에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국왕의 근친혼은 광종 이후 원 간섭기 이전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특히 제4대 광종에서 제7대 목종까지는 총 11명의 왕비 중 8명이 왕실 내의 근친혼이었다.

그런데 다음 제8대 현종은 총 13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 중 3명의 궁인은 별개로 하더라도 10명 중 3명이 왕실 내의 근친혼이고 7명이 이성혼이었다. 근친혼이 계속되기는 하였지만, 당대 유력가문 및 공신들의 딸과 폭넓은 이성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전기 국왕혼인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호족의 협조하에 국가를 이끌어가야 할 시기에는 호족과의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다(1대 태조~3대 정종). 다음으로 왕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근친혼을 중점적으로 시행하였다(4대 광종~7대 목종). 이후에는 오히려 왕실의 번영을 위하여 왕실혼인을 개방하였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하였다(8대 현종 이후).

한편 근친혼을 하였던 왕비들은 그 성을 칭함에 있어 독특하였다. 그들은 실제 왕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근친혼하였을 경우에는 어머니 성 즉 외성을 칭했던 것이다(대목왕후황보씨의 사례). 그것은 근친혼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으나 실제 외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고려의 사회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첩된 근친혼으로 인해 때로는 부모 모두 왕씨인 왕비도 있었다. 이 때는 어머니의 외성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의 외성, 즉 친할머니의 성을 따르고 있다(대명궁부인 유씨의 사례).

태조의 아내는 29명이었고 그 자손이 많았으나, 4대 광종 때 왕권강화 과정과 7대 목종 때 정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도태되었다. 따라서 고려왕실은 실제 현종 때에서 새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11대 문종은 5명의 부인에게서 13명의 왕자와 7명의 공주를 두어 왕실을 확실하게 번성시켰다.

이후 왕실의 주된 가닥은 전부 문종의 후손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태조의 아내가 29명에 자녀가 35명, 현종의 아내가 13명에 자녀가 13명, 문종의 아내가 5명에 자녀가 20명인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겠다. 그만큼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대체로 전근대사회 국왕의 경우, 할 일 많고 실제 뛰어난 업적을 수행한 임금들은 아내도 많았고 자식도 많았다. 국왕의 업적은 대체로 아내와 자식의 수와 비례한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오영선(서울학연구소선임연구원)

 

1144년(인종 22) 12월 00일(39세)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고향 해주를 떠나 군대에 들어온 후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저 새파랗게 젊은 놈한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자랑스러웠던 내 수염은 검게 그슬려 있다. 김부식과 그 아들 김돈중, 정말 씹어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밤도 여느 섣달 그믐날 밤처럼 귀신을 쫓는 나례가 행해졌다. 온갖 잡기가 벌어졌고, 임금께서도 친히 나오셔서 구경을 하셨다.

내시. 견룡 등 시종하는 신하들도 모두 나와 뛰놀며 즐겼고, 나 역시 견룡군의 장교로서 참석하였다. 그런데 내시 김돈중이라는 놈이 갑자기 촛불을 내 얼굴에 들이대는 바람에 수염이 타 버렸다. 놈은 올해 5월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자기 아버지 김부식의 위세를 믿고 기세가 등등하다. 원래 2등으로 합격한 것을 임금께서 김부식의 체면을 봐서 1등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혼자 잘난 척하는 놈이다. 딴에는 무신인 내가 임금의 관심을 받는 게 샘이 나서 그랬겠지. 놈을 늘씬하게 패주기는 했지만,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그놈의 잘난 아버지 김부식은 전후 사정은 아랑곳없이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이었다. 다행히 임금께서 나보고 어서 도망하라고 하시고 김부식을 달래셔서 화는 면했지만. 임금께서도 내 수염을 보시고는 어이없어 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실 요즈음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후로 유교를 바탕으로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느니, 제도를 정비했다느니 하면서 이전에 있었던 개혁의 바람을 잠재우기에 열심이다. 현 임금께서 초기에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신 후로는 묘청. 정지상 등의 말에 따라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려고 노력하셨는데. 약간 과격하긴 했지만, 개경의 문벌가문을 중심으로 굳어져 있는 보수적인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불가피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결국 문벌가문들의 반격으로 좌절되고 말았지.

묘청이 성급하게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김부식이 토벌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난을 진압한 후 완전히 제멋대로다. 임금도 두 번이나 과오를 반성하는 성명서를 낼 정도로 위축되셨고, 김부식에 적대적이었던 정지상. 백수한 등 서경 출신의 관리들은 모두 숙청당해, 이제 그들의 주장은 모두 배척되었다. 하지만 군인인 내 입장에서 볼 때 이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금나라를 공격하자는 주장은 좀 무리였는지 모른다. 또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는 주장은 서경 출신 관리들의 지역적인 의도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임금께서 황제를 칭하고 우리 나라의 연호를 따로 정하자는 주장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사실 금나라가 현재 비록 강국이라 하나 원래는 오랑캐가 아닌가. 오랑캐인 주제에 우리에게 도대체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것 때문에 쳐들어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설사 쳐들어온다고 해도 한번 붙어보면 그만이지. 예전 그 막강한 요나라도 무찔렀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한 것은 너무 한심스럽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총사령관이 되었던 일만 해도 그렇다. 문신과 무신을 나눴으면 그 직책도 정확히 구분해야지. 총사령관은 항상 문신이 담당하고, 무신들은 그 밑에서 단위 부대나 지휘하게 하고 있으니, 도무지 말이 안 된다. 물론 예전에 강감찬이나 윤관도 문신으로서 군대를 지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문무반의 구별이 지금같지는 않았다. 문신들도 무예나 군사지휘에 익숙하였고, 강감찬이나 윤관 같은 이는 특히 군사방면에 뛰어나 장군이라고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무신들도 문신의 직책을 맡을 기회가 종종 주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문신의 직책을 무신이 전혀 못 맡게 하면서 출정군의 총사령관을 문신들이 독점하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된다.

 

1147년(의종1) 12월 00일(42세)

요즘은 정말 신나는 날의 연속이다. 새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시니, 사회 전체가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다. 나도 대정에서 한 등급 승진하여 교위가 되었다.

임금께서는 수시로 나를 비롯한 몇몇 무신들을 불러 관심을 보여 주신다. 오늘도 어사대에서 나와 산원 사직재가 봉쇄되어 있는 수창궁 북문을 마음대로 열고 출입한 것을 문제삼아서 탄핵했으나, 임금께서 물리치셨다고 한다. 아무래도 임금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시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사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과정에는 곡절도 많았다. 태자로 책봉되실 때에도 선왕께서는 못 미더워하셨고, 태후께서는 아예 둘째 아들 대령후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셨다. 정습명이 힘쓰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최근 임금께서 태후를 모시고 앉아 있다가 동생을 세우려 했던 일에 대해 섭섭한 말을 하자, 태후께서 맨발로 뜰에 내려가 하늘을 보면서 원망하셨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심하게 쳐서 임금께서 겁을 먹고 태후의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가자 벼락이 바로 궁전 기둥울 쳤다는 것이다.

임금께서 심약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설마 일국의 제왕으로서 그랬을 리는 없다. 저 김부식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부류들이 임금이 즉위하는데 자신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중 정습명은 임금께 큰 은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김부식이 그랬듯이 신하로서 임금이 하시는 일에 지나치게 간섭해서는 아니될 일이다. 임금께서 우리 무신들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이유도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1164년(의종18) 2월 00일(59세)

요즘 임금께서 예전같지 않으시다. 즉위 초기 의욕과 활기에 넘치시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임금께서는 오늘도 인지재로 놀러가셨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놀러만 다닌다. 아무데나 가다가 문득 경치가 아름답다 싶으면 행차를 정지시키고 연회를 베푸는 것이 일상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간사한 문신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짓거나 글을 읊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궁궐에는 아예 돌아갈 생각도 안한다. 나같은 무신들은 글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라고 실컷 문신놈들 노는 것을 호위하고 있어야 하는 내 신세가 정말 한심하다. 그래도 한때는 무관들도 신임하시고, 큰 일을 하시려는 포부도 있었는데, 요즘은 젊은 문신들하고만 어울려 쳐다 보지도 않는다. 성질이 괄괄한 젊은 무관들은 불평이 대단하다. 무관들의 대표로서 그들을 달래야 할 입장이지만, 도리가 없다.

 

1170년 4월 00일(65세)

오늘 견룡군의 행수로 있는 산원 이의방과 이고가 정변을 일으킬 것을 제의해 왔다. 사실 이들이 오래 전부터 정변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듣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우학유 장군을 찾아가 정변을 주도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때 우장군은 “문관이 해를 당하게 되면 우리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니, 너는 조심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들어 거절했다고 한다. 사실 같은 무관이라고 해도 우학유 장군은 집안이 좋아 문신들에게도 어느 정도 대접을 받고 있으니,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겠지. 하지만 나같은 무신들은 언제나 대접을 받겠는가. 그래서 아마도 다음에는 나를 찾아올 것이라 짐작했었다. 이의방. 이고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하기는 했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여하튼 이런 세상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이런 줄도 모르고 임금은 지금도 스스로 ‘태평세월에 글을 좋아하는 임금(태평호문지주)’을 자처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1170년 8월 30일

아직도 치가 떨린다. 한뢰, 이 놈의 새끼. 새파랗게 젊은 놈이 왕의 총애만 믿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있으니. 임금도 같은 족속이다. 옛날의 정은 손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의욕을 잃고 술과 계집에만 빠져 있고, 모든 정사는 승선 임종식이나 한뢰 손에서 이루어진다. 요즘 무신들 분위기가 어떤지도 모르고 이놈들이 무신 알기를 발가락에 낀 때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다.

임금이 어제 흥왕사로 갔을 때 이제는 한번 거사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의방. 이고에게, “이제는 우리가 거사할 만하다. 왕이 만약 바로 궁궐로 돌아간다면 좀더 참고 기다리자. 만약 또 보현원으로 옮겨간다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약속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임금은 오늘도 궁궐에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이 보현원으로 가자고 했다. 가다가 오문 앞에 행차를 멈추고 여느 때처럼 술판을 벌이고는, 술에 취하자 우리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를 하라고 했다. 딴에는 무신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 오병수박희가 끝나면 술 한 잔 주고 달랠 생각이었을테지,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

그런데 한뢰 이 놈은 그것도 배아파서 못 참고 있으니. 나이 많은 이소응장군이 재수없게 팔팔한 젊은 무관과 상대를 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물론 이장군이 이길 수는 없었지. 그래서 적당히 상대하다가 기권하고 물러난 건데, 한뢰 이 놈이 갑자기 이장군 앞으로 가서 뺨을 치다니. 쳐죽일 놈. 아무리 무신 알기를 우습게 안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장군은 명색이 삼품인 대장군인데, 젊은 내시놈이 그런 짓을 하다니. 임금이나 나머지 놈들도 마찬가지다. 임금은 완전히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했고, 임종식, 이복기 이런 놈들도 이장군을 욕하고 비웃었다. 주위에 있는 무신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고, 모두 나를 주목했다. 나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뢰 이 놈에게, “이소응이 비록 무부이지만 벼슬이 삼품인데, 어찌 이리 심한 모욕을 주는가?” 큰 소리를 쳤다. 성질 급한 이고가 칼을 빼어들고, 내 눈치를 살폈다. 임금도 그때서야 내 손을 잡고 위로했지만, 그게 어디 진심이었겠는가. 하지만 오늘밤의 거사를 생각해서 일단 참기로 했다. 이제 거사가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이의방과 이고가 모든 준비를 잘 해놓았을까. 실패하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아!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딜까.

 

1170년 9월 1일

내가 다시 일기를 쓰고 있다니. 지금도 거사가 성공한 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까 김돈중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 한순간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임금은 어제 일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보현원으로 향했다. 한뢰 이 놈들도 임금에게 궁궐로 돌아가자고 할 생각을 못했다. 물론 궁궐로 돌아가자고 했으면 계획을 바꿔서 바로 거사할 생각이었지만. 거사가 계획대로 보현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임금이 보현원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신하들이 밖으로 나올 때 이의방과 이고를 시켜 임금을 시종하던 무신과 대소 신료 및 환관들을 모두 죽일 계획이었다. 한뢰, 임종식, 이복기 이 놈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보현원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이고가 공격했다. 임종식과 이복기는 그 자리에서 쳐죽였는데, 한뢰 이 놈은 혼자 살아보겠다고 보현원으로 다시 들어가 왕의 침상 아래 숨었다. 가능하면 임금 몰래 처단하고 나중에 알릴 생각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임금에게 한뢰를 내보내라고 강요한 후 한뢰가 나오자 바로 처단하였다.

문제는 김돈중이었다. 이 놈은 예전의 원한도 있고 해서 내가 직접 죽이려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약삭빠른 놈이 벌써 사태를 눈치채고 술에 취한 척해서 중간에 빠져나간 것 같았다. 만약 이 놈이 도성 안에 들어가서 태자를 중심으로 성문을 닫고 우리를 역적으로 몰면 거사는 끝장이었을 것이다. 이의방은 벌써부터 “만약 그렇게 되면 남해로 피신하거나, 북쪽 오랑캐에게 투신하자”고 난리였다. 먼저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성안에 있는 김돈중의 집에 가서 동정을 살피게 하였더니, 돌아온 흔적이 없다는 보고였다. 다행이다 싶어 바로 순검군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무릇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치게 하니, 군졸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우리에게 호응하였다. 그 동안 무신들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현 정부에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을 적절히 이용한 거지. 아직 얼마나 죽였는지 정확한 숫자는 보고받지 못했으나, 수백 명은 죽었을 것이다. 임금이 나에게 난을 진정시켜 달라고 애원했으나,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난 혁명(?), 혁명은 희생과 피를 요구하게 마련이지. 아직까지 우리에게 동조하지 않는 무신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도 문신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을 북돋을 필요도 있고. 그나저나 김돈중 이 놈은 어디로 숨었을까. 기껏 자기 혼자 살아보겠다고 도망쳐버리다니, 정말 비겁한 놈이다.

 

1170년 9월 2일

요즘은 피비린내 나는 날의 연속이다. 오늘도 숱하게 많은 무신들을 잡아 죽였다. 무엇보다 통쾌한 일은 김돈중을 잡아 죽인 일이다. 놈이 도성으로 돌아갈 생각은 못하고 파주에 있는 감악산으로 도망했는데, 현상금을 걸고 수배하니, 놈을 따라가던 하인이 현상금을 노리고 고발해 왔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처치하게 했다.

정말 큰 문제는 임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사실 거사할 때는 폐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임금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 왕광치란 놈이 우리를 공격할 것도 어쩌면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제 우리가 밤늦게 임금을 강안전으로 데려갈 때 왕광치란 놈이 우리를 공격하려 했다. 다행히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 그 일당을 잡을 수 있었는데, 모두 임금 주변에 있던 내시와 환관놈들이었다. 약 스무명 쯤 되었는데 모두 죽였지만, 임금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는 술을 마시고 있다가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죽이자는 사람도 있고, 살려두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내 생각에도 지금 당장 임금을 죽이는 것은 곤란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임금 자리에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금을 폐위시키지 않았더라면 혁명의 명분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거제도로 추방시키고 태자는 진도로 쫓아버렸다. 태자의 아들은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죽여 버렸다.

새 임금으로는 전 임금의 아우 익양공을 맞았다. 대부분의 무신들의 생각을 따른 것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이전 정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텐데, 모든 것이 막막하다. 앞으로 잘 할 수 있을까. 이의방, 이고를 비롯한 많은 무관들은 벌써부터 제 세상을 만났다고 저 난리들인데. 나를 비롯하여 이의방, 이고 등 무관들이 고위관직을 모두 차지하였고, 장교들도 모두 벼슬을 몇 등급씩 올려주었다. 이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잡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문신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늘도 중방에서는 이고가 남아 있는 문신들을 모두 죽이자고 주장하였으나, 내가 말렸다. 이제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걱정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를 비롯해서 무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할지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문극겸, 이공승 등 비교적 우리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문신들은 앞으로 여러모로 이용할 가치가 많을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적대적인 문신들은 살려둘 이유가 없겠지만.

 

에필로그

정중부는 이후 이의방, 이고 등을 제거하고 최고집권자의 위치에 오른다. 거제도로 쫓겨난 전 임금 의종은 1173년(명종 3) 김보당의 난에 연루되어 결국 천인출신의 장군 이의민에게 잔인하게 살해된다. 하지만 정중부 역시 명종 9년 청년장군 경대승에 의해 살해된다. 경대승. 이의민에 이어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1258년(고종 45) 까지 60여 년간 최씨집권기가 지속된다.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웠나

이익주(천안공전교수)

 

삼별초는 어떠한 존재인가. 몽고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끝까지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호국의 화신인가? 하지만 이렇게 단순 명쾌한 설명이 혹 과장되거나, 조작된 신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 볼 필요는 없을까? 실제로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벌였던 1270년대를 중심으로 앞뒤 시기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면 이러한 의문을 좀처럼 지우기가 어렵다. 그 앞뒤의 상황이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민중을 억압하기 위해 ‘야별초’를 조직하다

삼별초란 좌별초와 우별초, 신의군 등 세 개의 별초군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그것이 설치된 것은 대략 1220년대의 어느 때이며, 당시는 최씨무인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 최우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사정을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으므로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 순찰하면서 폭도들을 막게 하고,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뒤에 도적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 막도록 했는데, 그에 따라 야별초 군사가 많아졌으므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한 몽고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신의군이라 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이다.

여기서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삼별초의 모체가 되는 야별초가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 몽고와 전쟁이 시작되자 여기에 신의군을 합쳐 삼별초로 만들고 전투에 투입하였다. 따라서 삼별초의 성격을 밝히기에 앞서 야별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도적과, 도적을 막기 위한 경찰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하지만 도적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달랐고, 여기에 ‘도적의 사회사’ 가 있다. 최우가 야별초를 두어 막으려 했던 도적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들을 막기 위해 따로 군대를 설치했을 정도라면 당시 도적의 기세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특별 군대를 만들어야 할 만큼 도적이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무인정변 이후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한편으로는 집권자들이 권력쟁탈전에 급급한 나머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이완되자 백성들이 그 틈을 이용하여 항쟁하였다. 망이. 망소이나 김사미. 효심 등은 지배층의 수탈에 대항하여 봉기하였고, 여기에는 그 지역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이 있었다. 그러나 1196년(명종 26) 에 최충헌이 집권하여 항쟁을 강력하게 진압하자 이전처럼 군현을 단위로 하는 대규모 항쟁을 벌이지 못하고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 모여 활동하는 수준으로 규모가 작아졌다. 이러한 사람들을 도적, 산적, 화적 등으로 부를 수 있을 텐데, 당시 사료에는 초적이란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최우가 야별초를 만들어 진압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즉, 야별초가 상대했던 도적이란 그저 남의 물건이나 훔치는 좀도둑이 아니라 지배층의 불법적인 수탈에 저항하던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삼별초의 모체가 된 야별초의 반민중적 성격이 있다.

더욱이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핵심적인 군사력이었다. 최우가 야별초를 조직한 뒤로는 거의 집권자의 사병처럼 이용되어 백성들의 항쟁뿐 아니라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도 동원되었다. 그 대가로 이들은 녹봉도 다른 군인들보다 더 많이 받고 권력자로부터 보너스도 두둑하게 지급받았으며, 진급에서도 특혜를 누렸다.

몽고와 전쟁이 시작되자 항몽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본래 역할은 최씨정권을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었다. 현대 한국사회를 조금이라도 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국가 안보와 정권안보를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리라 믿는다.

 

최씨정권, 대몽항전을 정권유지에 이용하다

1231년(고종 18) 몽고의 공격이 시작되자 고려는 총력을 기울여 맞섰다. 전반적인 열세 속에서도 구주(평북 구성), 자주(평남 순천)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충주에서는 성을 지킴으로써 몽고군이 더 이상 남하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이 때에는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초적들조차 자원하여 몽고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처럼 몽고의 1차 침입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말 그대로 총력적이었다.

몽고군이 일단 돌아간 뒤 고려에서는 항전과 강화의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되었다. 최우를 중심으로 한 무인정권은 항전을 주장했고, 문신관료들은 대부분 강화를 희망하였다. 당시 최씨정권의 항전론은 정권 유지책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즉, 최우는 몽고와 강화를 하면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게 되리란 점을 경계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몽고와의 전쟁 상태를 이용하여 정권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최씨정권은 전쟁 상태를 적절히 이용하여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다.

항쟁론과 강화론의 대립은 일단 강화도로 천도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표출되었다. 그러나 천도와 그를 통한 항전은 최씨정권의 유지와 직결되는 문제였고, 따라서 강화를 전제로 천도에 반대하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다. 결국 최우가 다수의 반대를 억누르고 천도를 결행함으로써 이제 대몽항쟁은 고려의 국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천도는 지배층 안에서조차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은 채 최씨정권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더욱이 백성들에게는 이 천도가 국왕과 소수 권력자들의 안전만을 지키려는 일종의 배신 행위로 받아들여져 항전에 대한 공감대는 처음부터 매우 취약한 편이었다.

국왕과 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갈 때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몽고군을 피해 가까운 섬이나 산성으로 들어가라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따라서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처지에 놓인 백성들은 각지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을 힘겹게 벌여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끈질기게 항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는 수십 년 동안 몽고와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 또한 대단히 클 수밖에 없었다. 1254년의 경우, 한 해 동안 몽고군에 잡혀간 사람이 무려 206,800여 명이고, 살륙당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항재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몽고에 투항하는 사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드는 1253년 이후 점차 많아졌다.

더욱이 강화도의 정부는 육지에 남아 있는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평상시와 같이 거두어들였다. 단적인 예로 1256년에는 정부의 무자비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몽고군이 이르는 것을 오히려 반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몽고, 정부, 민중의 삼각 대립

한동안 뜸했던 백성들의 항쟁도 다시 나타났다. 전쟁 중이던 1236년 경에 전라도 일대에서 초적 이연년 형제가 백제부흥을 내세워 봉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이것은 몽고군이 전라도 지역에 침입했다 돌아간 직후에 발생하였는데, 전란으로 정부의 통치력이 이완된 틈을 이용하여 일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고려 정부, 몽고 침략자, 그리고 고려의 일반 백성들이 꼭지점 하나씩을 차지하는 삼각형의 대립 관계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의 피해가 커지고 백성들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강화론이 차츰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문신관료들이 주도한 이 흐름은 일찍이 강화 천도에 반대하면서 큰 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조심스럽게 표현된 적이 있었지만, 최우의 항전 의사가 워낙 강경하여 받아들여질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지나자 문신관료들은 전쟁의 피해를 명분으로 강화론을 적극 주장하였다. 마침 이 무렵에는 항전을 고집하던 최씨정권이 내부의 분열로 약해져 있었고, 여기에 더하여 몽고에서도 요구 조건을 누그러뜨려 결과적으로 강화론자들의 입지가 더욱 넓어졌다.

강화론이 현실적인 정책으로서 설득력을 더해가고, 반대로 최씨정권이 내분으로 약화되어 강화론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최씨정권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결국 강화론자를 대표하던 문신 유경이 정변을 일으켜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변에 동원된 군대는 최씨정권 말기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준이 지휘하는 삼별초였고, 이들은 강화에 반대하였다.

이처럼 강화 이후 고려에는 강화파 문신들과 무인정권의 잔여세력이 공존하고 있었으나, 강화의 대세 속에서 항전을 주장하던 무인정권의 입지는 불안하였다. 더욱이 몽고에 파견되어 친히 강화 교섭을 벌였던 태자가 왕위에 올라 친몽고 정책을 추진하면서 무인정권과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인정권 내부에서는 국왕 원종을 폐위하고 몽고와 다시 항쟁하자는 주장이 일어났고, 무인정권 안에서도 강경파였던 임연이 삼별초를 동원하여 김준을 제거하고 이어 국왕마저 폐위한 뒤 재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몽고가 군대를 보내 시위하면서 원종을 복위시키라고 요구하자 곧 굴복하고 말았다.

임연의 원종 폐위는 강화 이후 궁지에 몰리던 무인정권이 감행한 정치적 모험이었다. 한편, 몽고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은 원종은 개경 환도를 서두르는 등 친몽고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띠어 갔고, 급기야는 직접 몽고에 가서 무인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한 군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원종이 몽고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강화도의 무인정권에게 개경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강화도에서 이에 호응하는 정변이 일어나 무인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1270년의 일이다.

 

또 하나의 고려 정부,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웠나

무인정권의 붕괴는 1170년 무인정변으로 탄생한 하나의 정치체제가 꼭 100년 만에 종식되었음을 뜻하였다. 동시에 그것은 앞으로 외세의 간섭이 전개되리란 것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하였다. 그 간섭은 10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전환점에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움직임으로서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자리잡고 있다.

무인정권이 붕괴되자 무인정권의 주력 부대였던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폭동을 일으켰다.이에 국왕과 강화파로 구성된 정부는 삼별초를 없애고 명단을 압수하였는데, 이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배중손을 중심으로 모여서 새 왕을 세우고 관리를 임명하는 등 개경으로 돌아간 고려 정부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정부를 세웠다. 이어 강화도 안의 재물과 곡식, 사람을 휩쓸어 배에 싣고 진도로 ‘천도’하였는데, 이때 천여 척의 배가 꼬리를 물고 내려 갔다고 한다.

진도에 자리잡은 삼별초 정부는 이듬해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1273년까지 고려. 몽고 연합군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 동안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를 중심으로 남해도 거제도와 마산, 김해, 동래 등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내륙 깊숙이 나주와 전주, 심지어는 인천 근방까지 진출하여 위력을 떨쳤다. 이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세를 실은 조운선이 삼별초의 수중에 떨어지는 등 개경정부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몽고에서도 고려에 이어 일본을 공략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삼별초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하고 여러 해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삼별초의 병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에 삼별초가 또 하나의 고려정부로 존재하면서 몽고 및 몽고와 결탁한 개경 정부와 계속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삼별초가 봉기하자 몇 달 뒤에 경상도 밀양 사람들이 삼별초에 호응하여 개경정부에 반대하는 항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세를 실은 조운선이 삼별초의 수중에 떨어지는 등 개경정부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몽고에서도 고려에 이어 일본을 공략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삼별초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하고 여러 해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삼별초의 병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에 삼별초가 또 하나의 고려정부로 존재하면서 몽고 및 몽고와 결탁한 개경 정부와 계속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삼별초가 봉기하자 몇 달 뒤에 경상도 밀양 사람들이 삼별초에 호응하여 개경정부에 반대하는 항쟁을 벌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 개경에서는 관청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몽고에서 파견한 다루가치와 관리들을 죽이고 진도로 들어가 삼별초에 가세하려던 사건이 일어났다. 곧이어 경기도 화성군의 대부도 사람들이 개경 관청 노비들의 봉기 소식을 듣고 섬 안의 몽고군을 죽이고 합세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는 이와 같은 사례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삼별초의 세력이 왕성해지자 각 지방 사람들이 항복하고 진도에 가서 삼별초가 세운 왕을 진짜 국왕으로 섬겼다고 한다.

사실 당시 삼별초에게 일반 백성들의 호응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진도로 내려가면서 용손, 즉 용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 고려 왕실이 12대째로 끝나고 남쪽으로 내려가 황제의 서울을 세우리라는 참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민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만한 강제력이나 시간적 여유가 없던 상황에서 그처럼 백성들이 삼별초를 지지한 것은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 할 수 있다.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무인정권의 붕괴와 강화파의 승리는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일 따름이었고, 몽고와의 강화는 새로운 권력층과 침략자의 결탁이었다. 따라서 전쟁 중에 몽고 침략 및 지배층의 과중한 수탈에 맞서 싸워 왔던 이들로서는 이제 몽고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쳐오고 또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해질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다시금 항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중에 그려졌던 삼각형의 대립 관계가 이제 고려정부. 몽고 연합 세력과 반몽고 세력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단순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 삼별초의 항쟁 대상과 일치함으로써 그에 호응하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진행된 삼별초의 항전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성격의 항쟁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지배층 내부의 정쟁에서 패배한 무인정권의 잔존세력이 일으킨 정치적 반란이고, 다른 하나는 12세기 말 민란의 전통과 대몽항쟁의 전통을 계승한 백성들의 항쟁이다.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물론 위의 것이며, 그 의미는 외세의 침략과 그에 결탁한 지배층에 반대하는 백성들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데서 찾을 수 있다.

사실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고려와 몽고 연합군에 의한 제주도 함락은 삼별초뿐 아니라 각지에서 일어난 백성들의 항쟁이 진압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12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백성들의 항쟁이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음을 뜻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인가.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무력 기반이었고, 권력 내부의 정쟁에서 무인정권이 패배하자 그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그 해답은, 삼별초가 떠받들고 있었던 무인정권을 회복하고, 가깝게는 눈앞에 닥친 정치적 보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인정권을 붕괴시킨 세력이 몽고와 결탁했기 때문에 삼별초의 반란이 대몽항쟁의 연장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이 무인정권의 앞잡이였던 삼별초의 전력이나 권력 투쟁에서 파생된 정변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한다.

 

역사의 심판대에 오른‘삼별초’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내려져 왔다. 이것이 처음 부각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현실에서 삼별초의 대외항쟁은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또한 5. 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결핍된 정통성을 만회할 목적으로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란 구호를 내걸었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되었다. 더욱이 여기에는 고려의 무인정권을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군사정권의 상징을 조작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외세와 싸웠다는 것만으로 ‘민족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무인정권에 기생하며 각종 특혜를 받고 백성들의 항쟁을 억압하는 역할을 했던 군사 조직이 무인정권 붕괴 이후 갑자기 ‘민족적’인 군대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최씨정권의 항전론이 국가안보를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정권유지를 위한 것이었나를 구분했던 것처럼, 삼별초의 항쟁 역시 항쟁의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엄정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21세기를 바라보며‘세계화’를 외치는 오늘에도 유용한 개념이다. 그러나 민중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채 민족만을 앞세우다 보면 전체주의나 국수주의 같은 극우의 논리로 빠져들 위험이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삼별초의 예에서 보듯이 반민중적인 존재는 절대로 민족적일 수 없다. 독재자가 표방하는 민족주의 진정한 민족주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한 까닭

 

홍영의(국민대 박물관 학예원)

 

신돈(? – 1371)은 1365(공민왕 14)부터 1371년까지 6년동안 공민왕의 명에 따라 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한낱 승려 출신으로 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정권을 장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관심이 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미천한’, ‘글도 모르는’, ‘대역을 저지른 사람’이라느니, ‘요사한 승려’라는등 부적적으로 묘사된 인물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 편찬된 <고려사>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통념이 사람들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역사 소설에서 그러한 모습을 가장 많이 드러내고 있다.

신돈이 집권한 시기에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권문세족을 억누르며, 일반민을 위해서 개혁을 추진한 그는 당시에‘성인’이라고도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거나 실각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가 유독 이렇게 용서받지 못할 인간으로 역사책에 기록된 까닭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는 신돈을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개혁이 무엇이며, 개혁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개혁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법명보다 속명으로 더 알려진 신돈 신돈의 출생에 관한 것으로는 아래의 <고려사>기록이 유일하다.

 

신돈은 영산사람이고 어머니는 계성현에 있는 옥천사의 여자종이었다. 어려서 중이 되었으며 법명을 편조라 하고 자를 요공이라 했다. 어머니가 천하였기 때문에 같은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산방에 거처하였다.

 

어머니가 절의 종이라서 천한 신분이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지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신돈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려고 의도한 <고려사>편찬자가 아버지의 추한 면을 들추어내지 못하자 어머니 쪽만 강조한 것 같다. 아버지의 묘가 창녕에 있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아버지 계통은 명백하였던 것 같다. 고려에서는 1135년(인종 13)이래 노비는 중이 되지 못한다는 금령이 시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신돈은 어려서 중이 되었으므로 천한 신분이 아니었다고도 생각된다. 물론 부모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신분이 천하면 자식은 천인이 된다는 규정에 따른다면 신돈은 어머니가 종이기 때문에 당연히 천인이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가 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쪽 가문이 영산에서 유력하거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신돈의 학식은 어땠을까? 신돈전에는 ‘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의 무식을 혹평했지만, 어느 정도 학문적 소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부터 승려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지배사상인 유학적 소양이 원숙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총명하고 자혜스러웠으며, 매사를 명백하게 논증했고 스스로 도통했다고 하였다’라는 표현이나, 국사를 기록하는 사관에게 ‘국사를 망령스럽게 쓰지 말라. 내가 장차 살펴보리라’라고 한 말과 그 밖의 행적을 살펴볼 때, 신돈은 학문적인 소양뿐 아니라 국정에 대한식견도 있었다고 짐작된다.

신돈은 어떤 성향의 승려였을까? 그는 1359년(공민왕 8) 무렵 김원명의 천거로 중앙에 등장하였다. 왕의 신임을 받아 집권한 신돈은 선종 계통의 왕사인 보우를 축출하고, 화엄종 계열의 천희를 국사로, 선현을 왕사로 추천하여 책봉받게 하였다. 또한 그의 법명인 편조는 ‘광명편조’를 줄인 말로 ‘무한한 빛이 널리 비친다’는 뜻이다. 이는 비로자나불을 일컫는 산스크리트어의 ‘비로카나(Vairocana)’를 의역한 것인데 부처의 몸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비로자나불은 화엄종에서 주존불로 모시는 부처였다. 그리고 신돈은 당시 ‘문수의 후신’으로 칭송받고, 화엄법회인 문수회를 8회에 걸쳐 개설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가 선종과는 대립하고 화엄종파와 밀접한 승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세에 물들지 않은 사람, 신돈을 앞장 세우다

고려의 왕위 계승자를 원나라가 결정하던 당시에 공민왕은 왕위 계승에서 두 번이나 밀려나는 어려움을 겪은 끝에 왕위에 오를수 있었다. 즉위한 뒤에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격적으로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근 100년동안 고려에 영향을 끼쳐 온 원나라의 영향이나 부원배를 한 번의 개혁으로 완전히 일소할 수는 없었다. 공민왕 10년에는 15만 명이나 되는 홍건적이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국왕도 안동까지 피난을 떠나야만 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국왕의 권위는 실추된 데다 홍건적을 물리친 뒤 측근세력들의 정권 쟁탈 와중에서 주요한 측근세력이 모두 제거되어 버렸다. 바깥으로는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워서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이 도전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홍건적과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무장들의 입지가 강해졌고 측근세력들을 상실한 공민왕의 정국 주도력은 크게 약해졌다.

당시 조정의 관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대로 고위직을 지낸 세신대족, 처음 정계에 진출한 초야신진 그리고 유생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런데 세신대족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져 있어 서로 허물을 가려 주고, 초야신진은 감정을 감추고 행동을 꾸며 명망을 탐하다가 지위가 높아지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로 이름있는 집안과 혼인하여 처음의 뜻을 다 버리며, 유생은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 좌주, 동년이라 칭하면서 당을 만들고 사사로운 정을 따른다고 할 정도로 서로가 얽혀 있었다.

공민왕은 이 모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돈이 등용된 것이다. 공민왕은 신돈을 내세워 그에게 일반 정치에 관해서 거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신돈은 지방의 이름없는 승려 출신이어서 기성 정치세력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신돈자신이나 일가붙이가 토지와 종을 수도 없이 거느린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개혁을 주저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고려 사회를 전반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공민왕에게는 이렇게 속세에 물들지 않은 신돈이야말로 자신의 정치를 일선에서 대신해 줄 사람이었던 것이다. 신돈은 집권하면서 가장 먼저 최영을 비롯한 무장세력을 축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기성 정치세력 모두를 대상으로 한 인사 개편을 대대적으로 착수하였다.

 

개혁의 물밑에서 움튼 신진사대부

기존 체제에서 한 발 떨어진 신돈이 집권했다고 해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혁을 효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 방향에 동의하고 그것을 밀어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하였다. 예나 이제나 앞서서 나가는 한 명의 선구자가 사회의 개혁을 가져올 수는 없는 것이다. 수백 년 고려왕조에서 지배세력으로서 부와 지위를 자손 대대로 물려가며 누려 온 자들이 정권에서 밀려난 다음 ‘이것이 대세려니…’하고 가만히 있는 법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축출된 자들이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무장인들인 다음에야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신돈을 모함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때로는 직접 제거하려고 모의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추진세력의 형성은 더욱 절실하였다. 기성 정치세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다른 정치세력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기성 정치세력과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어느 정도 다르고 그래서 새로운 정치를 추구할 수 있는 젊은 유학자들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신진사대부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들 중 이색을 비롯하여 정몽주, 정도전 등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이들은 신돈 정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하여 차차 성장해 갔다. 이들이 일부는 고려의 충신으로, 일부는 조선의 공신으로 정치적 갈 길이 갈라지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신돈 개혁의 본질은 ‘삶의 질 향상’

신돈은 집권한 뒤 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의 소유주를 밝히고 사람의 신분을 바로잡기 위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한 것이었다. 권세가들은 넓은 토지를 차지하고 거기에다가 사람을 끌어 모아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힘없는 평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기도 하고 때로는 국가의 땅을 모래 치지하기도 했다. 토지를 경작할 인력을 끌어 모을 때에는 일반 평민들까지 강제로 노비로 삼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유랑하게 되는가 하면, 국가는 세금을 거둘 토지와 농민이 줄어들어 재정이 고갈되었다. 권세가 개개인은 부한 반면 국가는 점점 가난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왕권을 행사하기도 어려웠다.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빼앗긴 토지를 되돌려 주고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본래대로 국가의 공민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개혁은 신돈이 집권하기 전에도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권세가들의 계급적 이해와 어긋나는 것이었으므로 번번이 실패하였다. 모순의 주체가 그 모순을 해결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신돈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은 기존의 권세가를 배제하고 추진하였으므로 철저하게 시행될 수 있었고, 그 성과도 그전과는 크게 달랐다. 신돈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고려사> 편찬자들조차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이 명령이 발표되자 권세가들이 많이 빼앗은 땅과 백성들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므로 온 나라가 기뻐하였다. 신돈이 겉으로는 공평한척 꾸미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사고자 무릇 천한 사람들이 양인되기를 호소하면 한결같이 양인으로 해주었다. 그러자 노비로서 주인을 배신한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성인이 나왔다”고 하였다.

신돈은 이와 같은 개혁을 뒷받침해 줄 정치제도를 개편했다. 지방으로 물러난 전직 관리들이 백성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책을 마련했고, 권세가의 자제가 남보다 빨리 승진하는 것을 막고 관리들이 자격에 따라 차례대로 승진하게 하는 제도를 정했다. 또 학문의 전당인 성균관을 다시 세우고 과거제도를 개혁하였다. 이러한 개혁적인 분위기에서 신진사대부들은 그전처럼 관료로서 성공하여 새로운 권세가가 되려는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고려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점차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돈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공민왕은 어째서 신돈과 같은 전혀 새로운 인물에게 개혁을 추진하도록 하였을까? 공민왕 자신의 정치적 한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결과가 어느 정도 예상되는 상황하에서 개혁의 일선에 나선다면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는 완강한 신하와 대립될 소지가 충분하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일까. 공민왕은 자신의 왕권의 확보와 지배체재의 재정비를 위해 대내적인 재정비를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정치일선에 나서서 수많은 반대세력과 싸우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때문에 실패하면 소생하기 어려운 개혁이라는 멍에를 신돈에게 들씌웠던 것이 아니였나 싶다. 만일 신돈의 개혁이 지속되었더라면 고려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돈의 등용과 그의 개혁은 근본적으로 공민왕이 의도한 것이었으므로, 정치적인 면에서 공민왕의 신돈을 통한 정치운영은 측근정치의 한 변형이라는 면과 국왕에 의한 개혁 추진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 개혁은 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친 당시로서는 포괄적인 조처들이었다.

그 중 신돈의 대표적인 개혁은 ‘전민변정사업’이었는데,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변정사업이 급진적이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신돈의 판결이 일반민의 입장에서 처리되었기 때문에 토지나 일반민을 불법적으로 소유한 권문세족들의 불만과 원성이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개혁이 점차 가속화되어 감에 따라 권문세족들은 정치 일선에서 밀려났고, 그들이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는 몰수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결제기반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한 그들은 신돈을 제거해야만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국왕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은 유학자들, 즉 신진사대부들도 신돈이 정치를 주관하는 현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내적인 갈등은 신돈과 공민왕의 관계가 지속되지 못할 정도에까지 이르렀고, 그것이 드러나게 된 계기는 신돈이 집권하는 동안 계속된 자연재해였다. 하늘의 뜻이 인간 세상에 반영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자연재해란 위정자의 실정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신돈이 정치를 잘못하고 있다고 공격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이 때 중국을 통일하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명나라도 공민왕이 직접 정치에 임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이러한 분위기에, 개혁의 일정부분이 성공하고 자신의 왕권강화를 어느 정도 이룬 공민왕은 더 이상의 대행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권에 버금가는 신돈과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해야 하는 현실적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신돈을 등용할 당시 “스승은 나를 구원하고, 나는 스승을 구원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다”라고 손수 글을 써서 맹세까지 하였던 공민왕.이제 공민왕은 자신에게 미칠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신돈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신돈은 왕이 자기를 꺼릴까 두려워하여 반역을 꾀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인이라는 사람이 신돈의 반역을 고발하였는데, 이 고발을 계기로 공민왕은 신돈뿐 아니라 그의 무리로 지목된 자들까지 처형하였다. 신돈은 이틀간 감금되었다가 수원에 유배되었다. 다시 그 이틀 후 살해되었다. 두 살난 아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처와 첩은 몰수되어 나라의 종이 되었다.

신돈이 처형되고 나서 정치 분위기는 일변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한 뒤에 지속적으로 추진해 오던 개혁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 몇 년 뒤 공민왕도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서는 그 전의 권세가들이 다시 정치 일선에서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돈 개혁의 역사적 경험

고려 후기 14세기의 개혁정치는 12, 13세기 이후 농민항쟁에서 드러난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몽고와의 전쟁 이후 드러난 민족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반원개혁으로 민족모순은 해결되었지만, 신돈의 개혁에서도 사회경제적인 모순은 해결되지 못하였다. 물론 당시로서는 그 어떤 개혁보다도 일반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신돈의 개혁은 그 모순에 대한 지배층의 일시적인 대응이라는 왜곡된 형태로 변질된 것이었다.

특히 신돈 개혁의 실패와 그의 죽음은 개혁을 추진하거나 실무를 맡았던 인물들이 개혁의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데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아무리 신돈이 토지나 노비를 축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일반민의 기대가 있더라도 개혁의 호응도 역시 그만큼 반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개혁을 추진할 만한 신돈의 정치세력이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승려 출신이라는 신분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성리학적 유교정치이념이 팽배한 당시 상황하에서 정치적 경륜과 유학적 학문소양의 부족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신돈의 개혁 성향이나 당시 정치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 개혁의 의의는 비록 그의 죽음으로 개혁이 실패하였다고 하더라도 권세가를 억누르며 일반민의 입장에서 개혁을 추진하였고, 공민왕의 왕권강화를 뒷받침해 주고, 새로운 정치세력인 신진사대부가 그의 개혁 속에서 성장하였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현 사회의 틀도 이와 유사하다. 지배층 일부는 여전희 개혁을 표방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혀 개혁을 표방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사회를 개혁한다고 할 때 누구와 손잡고 무엇을 개혁하려는 것일까? 개혁의 한계점은 어디까지일까? 우리에게 그 의미는 무엇일까?말없는 대중에게 또 다른 실망을 안겨 주는 그 개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금 신돈을 생각하게 된다. 과거의 역사가들이 그렇게도 목청 돋우어 ‘패륜아’로 낙인 찍었던 신돈을.

 

 

 

 

최영과 이성계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까닭

 

이형우(고려대 강사)

황금을 돌같이 여긴 최영, 명궁 이성계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꾸준하게 민족의 역사를 배워왔다. 선사시대부터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는 때때로 ‘그때 만약에 이렇게 되었더라면’하는 가정을 해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가정들은 하나의 양념이 되어 우리가 선조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또 다른 재미를 더해준다. 그런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그려 보았을 가정은 잃어버린 만주벌판에 대한 것일 것이다.

최영 장군이 추진하였던 요동정벌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가정을 하게 해주었다. 만약 요동정벌이 성공을 거두었더라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를 최영이 물리쳤더라면 등등이 그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이 때의 요동출병과 뒤이은 위화도 회군은 고려말 두 거목 최영과 이성계의 명암을 갈라놓았고, 결국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최영은 당대의 명문 집안 철원 최씨 출신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직계 선조들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했고 아버지도 그의 나이 16세때 일찍 죽었다. 그런 까닭에 최영도 과거 등을 통하여 문신으로 출세하지 못하고, 남보다 뛰어난 완력을 바탕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아버지의 유훈인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를 생활신조로 삼고, 공민왕. 우왕때에 여러 차례의 군공을 쌓으며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공민왕 말기는 물론 우왕 재위 기간 내내 막강한 권력자의 지위를 누렸다.

이성계는 전주 이씨 출신이다. 고조 할아버지인 이안사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 지역은 당시 원나라의 통치 아래 있었고, 이안사를 비롯하여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에 이르기까지 원나라의 벼슬을 받았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반원 개혁정치를 단행할 때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하면서 다시 고려의 관직을 받고 활동하였다. 이성계는 개경에 기반이 없던 자신의 불리함을 뛰어난 활솜씨 등 탁월한 무재를 바탕으로 극복하여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중국대륙 정세의 급변, 그리고 홍건적의 침입

고려는 30여 년 동안 몽고와 전쟁을 치룬 끝에 강화하여 이후 근 100년 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원나라는 그 기간 동안 고려가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1356년에 원나라의 세력을 몰아냈을 당시에 고려는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하였다. 군사적으로 취약하다고 해도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보호 아래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몽고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의 반란으로 중국대륙이 혼란해지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하였다.

홍건적은 원나라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 중의 하나였다. 한산동. 유복통 등이 중심이 되어 하북성 영평을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한족 반란군의 선봉이 되었다. 그들은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둘러 표식을 삼았기 때문에 홍건적 또는 홍두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백련교를 등에 업고 몽고족에 대한 한족들의 반원 감정을 이용하였다. 한산동을 송나라 휘종의 8세손이라고 선전하면서 빠르게 세력을 키워, 1355년에는 그의 아들 한림아가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국호를 송이라 정하였다. 그 뒤 원나라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그들 중 한 무리가 원나라 군대의 반격을 받고 고려 쪽으로 쫓겨 들어와서 노략질을 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홍건적의 침입이라고 부른다. 대륙의 정세가 급변하자 고려는 이유도 없이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홍건적은 두 번 침입하였다. 첫 번째는 1359년 12월에 있었다. 모거경 등이 4만의 무리를 이끌고 평안북도 의주와 정주를 함락시키고 순식간에 평양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열을 정비하여 이듬해 1월에 평양을 탈환하고, 도망치는 홍건적을 추격하였다. 이 때 압록강을 넘어 살아 돌아간 홍건적이 수백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그 뒤에도 홍건적은 간헐적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다가, 1361년 10월에 두 번째로 쳐들어왔다. 이 때는 반성. 사유. 관선생이 무려 10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고려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수도이 개경까지 압박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공민왕과 관리들은 어쩔 도리 없이 하룻밤에 수도를 버리고 안동까지 도망갔다. 홍건적은 11월 하순에 개경까지 하락시켰다.

고려에서는 전열을 정비하고, 군대를 징발하는 데 황급한 시간을 보낸 다음, 다음해 1월에야 20만의 군대로 개경을 포위할 수 있었다. 이 때 활약한 장수 중에는 안우, 이방실 외에 최영과 이성계가 있었다. 때마침 1월 엄동설한에 눈비가 섞여 내렸는데, 적들은 향수에 젖었는지 방심하고 있었다. 그 때를 틈타 고려의 군대는 기습하여 비교적 쉽게 10여 만 명 가까운 수의 적을 무찌르는 큰 전과를 올렸다. 개경 성안에서 어린아이까지 삶아 먹으면서 만행을 저지르던 적이 고려군의 기습에 자기들의 처자식도 데리고 가지 못한 채 압록강을 바라보며 도망가기에 바빴다. 군사적으로 취약했던 고려는 홍건적의 공격에 기선을 제압당하여 처음에는 고전하였지만, 곧바로 반격하여 두 차례 모두 적을 거의 섬멸할 수 있었다.

 

고려 말기의 바이킹, 왜구

홍건적이 침입한 것은 두 번뿐이었지만, 왜구는 고려말과 조선초에 걸쳐 지속적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해 왔다. ‘왜구’라는 말은 본래 ‘왜가- 를 노략질하였다’라는 말인데, 고려말과 조선초에 왜가 우리 나라와 중국을 너무 빈번하게 침입하였기 때문에 일본 해적을 가리키는 명사가 되어 버렸다. 왜구가 우리 나라에 침입한 것은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말 왜구의 침입은 지속적이고 그 피해가 매우 컸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와는 달랐다. 그들은 고려의 수도까지 위협하여 정부에서는 빈번하게 계엄을 선포하기도 하였으며, 수도를 보다 안전한 내륙으로 옮기자는 논의도 있었다. 공민왕 때부터 공양왕 때까지 41년 동안 왜구는 총 506회, 1년 평균 약 12회 이상 침입하였다. 우왕대에 제일 극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1377년(우왕 3)에는 월 평균 4회 이상인 총 52회 쳐들어와서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렇다면 왜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결사적으로 고려를 침략했을까? 첫째 이유로는 일본의 국내 사정을 들 수가 있다. 왜구가 창궐하던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1333년 멸망하고 무로마찌 막부가 들어섰으며, 동시에 황실이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대적하는 남북조시대였다. 당연히 중앙의 통치권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였고, 그 틈을 타서 각 지방의 무사들은 자신들의 영지 획득에 혈안이었으며, 그 와중에서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수많은 해적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 연안까지도 출몰하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특히 곤궁했던 남서부 지역의 왜’들이 가장 빈번하게 쳐들어 왔다.

두번째 이유로는 고려의 취약한 군사력을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대부분 공민왕 때와 우왕 때에 해당한다. 반원 개혁 이후 공민왕은 국가를 정상화하려고 노력했지만 기존의 권세가들이 반발하여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그 와중에 공민왕이 암살당하고, 나이 10살의 어린 우왕이 즉위하였다. 개인적인 치부와 세력 확대에 골몰했던 집정자들은 새로운 상황에 맞는 군사제도를 확립하지 못하였고, 군대의 기강도 해이하였다. 특히 수전에 강한 왜구를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가 없었다.

왜구의 주된 약탈 품목은 곡식이었다. 일본은 본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서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쌀을 교역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남북조 전쟁으로 더욱 생활고에 허덕이게 되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왜구가 되었던 만큼 곡식 약탈에 혈안이 된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고려의 조운선을 습격하였고, 나아가 연안의 곡물창고를 직접 노략질하는 등 침입 초기에는 주로 해안지방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조세를 거두어 육로를 이용하고 조창을 옮기자 왜구는 내륙지방까지 쳐들어오기도 하였다. 해적으로 출발한 왜구가 기병부대까지 만들기도 했다. 그들이 내륙까지 침략해 들어오면서 고려 백성들이 입은 피해는 더욱 심각하였다. 곡식 이외에 사람도 마구 잡아가고 죽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사로잡은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였고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다고 전한다. 이런 모습은 중세 유럽의 해적인 바이킹이 해안 지역을 약탈하다가 뜻대로 안되면 내륙지방까지 침입하여 노략질한 사실과도 비교된다. 해적의 실상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유사하였던 것 같다.

 

무장세력이 득세하던 시절

고려는 홍건적과 왜구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고, 당연히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홍건적은 단 두 번 침입하였지만, 너무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외교정책도 변화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다시 원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또 있을지도 모르는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왜구 침입은 지속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정부의 대책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수립되어야만 하였다. 고려는 화친과 전쟁 양면 정책을 사용하였다. 회유책으로는 첫째로 왜구의 투화를 받아들였지만, 이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둘째로 일본 정부와 직접 교섭을 벌여 왜구를 금지시키려고 하였다. 이 방법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1377년(우왕 3)에 일본 구주지방의 실권자에게 사신으로 갔던 정몽주는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 수백 명을 데리고 왔다.

이런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을 쌓고 수군을 강화하며 새로운 무기인 화포를 개발하는 등 국방력을 강화하여 왜구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왜구의 퇴치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389년(창왕 1)에는 박위가 100여 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직접 정벌하였다. 우왕 말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많이 줄어 들었다.

적극적인 왜구 토벌이 효과를 거둠에 따라 무장들의 정치적인 지위가 높아졌다. 그 중에서도 최영과 이성계가 중심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격심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들은 고려의 장수들 중 최영과 이성계만을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우왕 때의 왜구 토벌에서 명성과 권력을 함께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이성계는 그의 근거지인 동북면 출신으로 이루어진 사병을 거느렸는데, 이들은 이성계가 출세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고려사) 나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 기록에서는 최영과 이성계의 눈부신 무용담을 찾아 볼 수 있더, 최영의 경우 흥산전투가 유명하다. 삼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한 길만이 통할 수 잇는 곳을 왜구가 먼저 차지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은 겁나서 전진하지 못하고 있엇는데, 최영이 61살의 노구를 이끌고 앞장 서서 돌격하니 적이 무너졌다. 이 때 숲속에 숨어 있던 왜구가 최영을 쏘아 입술을 맞히자, 피가 철철 흘렀다. 그러나 그는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 적을 쏘아 쓰러뜨린 다음 화살을 뽑고, 더욱 세차게 싸워서 적을 거의 섬멸시켰다.

이성계의 활약은 그가 조선의 건국자이므로 더욱 과장되게 묘사되었다. 그는 싸우기 전에 신기에 가가운 활솜씨를 이용하여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백 수십 걸음 밖에 놓여 있는 투구나 새 등을 목표물로 삼은 뒤, 화살 몇 발을 정해 놓고 ‘이것이 모두 명중하면 이번 전투는 이길 것이다’ 하고는, 모두 쏘아 맞추었다. 그의 활솜씨는 지금의 전북 남원 지역인 황산전투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얼굴까지 갑옷으로 가려서 화살을 맞출만한 틈이 없었다. 이성계가 활로 투구 꼭지를 쏘아 적중시키자 투구가 떨어졌다. 이 틈에 얼굴을 쏘아 죽이니 적은 기세가 꺾여 도망가고 고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들이 흘린 필로 냇물이 온통 붉어져 6, 7일간이나 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마시지를 못하였다 한다. 지금도 남원에는 그 지역의 땅이 붉은 빛이 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최영과 이성계 두 사람은 뛰어난 무장으로서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며 출세할 수 있었다. 이후 그들의 행보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으로 연결된다. 최영은 명나라의 강압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을 단행하였고, 이성계는 그것을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전환기의 갈림길, 고려의 충신이냐 조선의 공신이냐

 

도현철(연세대강사)

고려 후기 사대부 앞에놓인 두길

 

조선왕조의 건국을 둘러싸고 고려 후기 사대부는 정치적 행보가 달랐다. 우리 나라 유학의 종장이라는 이색, 전죽교에서 맞아 죽은 정몽주, 이승인 등 많은 사대부들은 고려에 절의를 지켰다. 성씨 문중에서 흔히 자랑스런 조상으로 받드는 두문동 72현도 같은 길을 간 사람들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절의를 다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도덕에 충실했던 인물로 평가하였다. 반면 고려말 최고의 경세가라는 정도전과 조준, 그리고 윤ㅅ종 등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너져가는 고려왕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새 왕조 조선을 세웠다. 이들은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권세가를 비판하고 정적을 가차없이 숙청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주자학이라는 신사상을 이념으로 받아들이 사대부들이 고려말이라는 시점에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한 쪽은 고려를 지키려는 수성파 사대부로, 한 쪽은 새로운 왕조를 세워 개혁을 하려는 창업파 사대부로 나뉘어지고, 궁극에 가서는 고려의 충신과 조선의 공신으로 갈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사대부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논리사대부에게는 정치. 경제 운영에 대한 견래 차이가 있었다. 우선 누가 정치 운영의 주체가 되느냐, 인재를 어떻게 선발하느냐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색. 정몽주 등은 기존의 인재 등용법인 음서제와 좌주문성제에 찬성하였다. 음서제란 조상이 끼친 음덕으로 그 후손은 과거에 합격하거나 특별한 공이 없어도 관리가 될 수 있는 제도이고, 좌주문생제란 과거에서 시험관인 좌주와 문생이 뒤에도 부모. 자식 관계처럼 돌봐주고 받드는 관습이다. 이색은 15살 때 아버지의 음덕으로 별장이 되었고 이색 계열의 한수. 우홍수 등도 음직을 받아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 음서제를 실시하면 고급 관리의 자손은 어려서부터 관리가 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다른 관리들보다 고위직에 빨리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좌주문생제에도 찬성하였다. 이색 계열의 사대부는 좌주를 중심으로 문생을 세력화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색은 좌주와 문생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보고 그들 사이의 사적인 은혜와 의리가 국가의 원기를 배양한다고 하였다.

반면에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음서제와 좌주문생제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권세가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를 맺지도 않았고 다른 사적인 인연도 없었다. 관직에 나아갈 때에도 좌주문생제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윤소종은 이승인. 권근 등과 더물어 이색의 문생이었으나, 이승인. 권근이 우왕. 창왕대에 요직에 있었던 것과 갇ㄹ리 윤소종은 향리에 내려가 있거나 한직에 머물렀다. 조선의 개국공신이 도니 남재는 공민왕 20년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종 9품 벼슬에 9년간이나 머물러 있어서 장인에게도 예를 갖추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좌주문생 관계를 “공적인 선발로서 사사로운 은혜를 삼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경제제도 측히 토지제도를 어떻게 다룰까 하는 점에서 방법상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는 요즘처럼 화폐가 널리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관리들에게 봉급을 주는 방법도 요즘과 달랐다. 국가는 토지 주인에게서 생산물의 일정량을 토지세로 거두었는데, 관리들에게 그들의 지위, 직책에 따라 규정된 토지의 세금을 거둘 권리를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나누어 준 토지를 사전이라 한다. 관리 개개인이 토지 주인에게서 직접 토지세를 거두어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인정변 이후 토지제도 운영이 법대로 되지 않았다. 권세 있는 자들은 사전을 자손에게 불법적으로 세습시키고 힘없은 농민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을 뿐 아니라, 농민들에게서 규정 이상의 토지세를 3- 4번, 심지어 8- 9번까지 내기도 했다. 그 결과 농민 생활이 곤궁해지고 국가 재정도 점점 어려워졌다.

이에 대하여 이색과 권근 등은 농민이 곤궁하게 되는 이유가 하나의 토지에서 1년에여러 번 세금을 거두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농민의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전 주인을 규정대로 잘 가려서 1년에 한 번씩만 세금을 거두면 된다고 하였다. 반면 조준 등은 관리들에게 사전을 나누어 주는 제도 자체를 혁파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사전을 전부 없애고 경기에만 지급한다는 원칙에서 다시 분배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는 관리 개개인이 농민에게서 직접 세금을 거두는 사전을 축소하는 가운데 국가의 조세수취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수조권에 의한 중간 수탈을 없애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이들의 경제적 이해 기반과 무관하지 않다. 사대부들은 지배층이고 대개 지주였지만 그들간에는 차이도 컸다. 이색과 같은 수성파 사대부는 상대적으로 경제 생활이 윤택했다. 이색은 한산. 면주. 여흥. 광주. 덕수. 장단. 개경과 유포. 적제촌 등 10곳에 토지를 소유하였다. 또한 그는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토지와 자신이 직책에 따라 받은 사전이 있었고,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까지 공민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토지 100결, 노비 10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중소 지주 출신이었지만, 이제는 대토지소유자이자 중앙 정계의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같은 지배층으로서 과거나 군공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서 봉급마저 지급되지 않았고 직책에 따라 받은 사전조차 권력자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정도전은 우왕 초에 나주 지방의 거평부곡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하고 선향인 영주와 생가인 삼봉을 왕래하면서 4년을 보냈으며, 그 뒤에 유배가 완화되어 서울 근교에 오게 되었다. 이 때 그는 띠풀로 집을 짓고 스스로 밭갈이도 하였다. 그의 부인은 집안 사정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평일에 부지런히 독서하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아, 집안 형편은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식량도 없고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 때 그 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 입신양명하여 처자가 우러러 의지하고 가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끝내는 나라 법에 저촉되어 이름은 욕스럽게 되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며,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은 흩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도전은 사대부였지만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두 파 사대부의 사상적 차이

이 시기 사대부가 정치 현장에서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된 것은 사상 차이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유학자로서 주자학을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주자학에서 제시하는 질서를 지향하였다. 원래 유교의 예를 구성하는 원리로는 혈연 관계를 중시하는 친친과 인위적인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존존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 앞의 것은 혈연을 매개로 한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 간계를 설명하고 혈연에 의한 인정이나 사사로운 정감을 중시한다. 뒤의 것은 혈연보다 인위적이고 2차적인 인간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 관계를 설명하고 공공성을 강조한다. 이 두 측면은 결합되어 있지만 강조점의 차이는 있다.

수성파 사대부능 혈연을 매개로 하는 가족 중심의 인간관계를 중시하였다. 중국의 한나라 때 요서 지방을 방비하던 조포라는 관리가 있었다. 이민ㅈㄱ이 침입하여 어머니와 처자식이 인질로 잡히자 이민족을 공격하여 격퇴시켰으나, 그의 어머니와 처자식의 장례를 치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대하여 이색의 아버지인 이고은 조포가 ‘어머니를 죽이면서도 공적을 세우는 것이 충이라는 것만 알았지 자신을 보전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효라는 것을 몰랐다’라고 비판하였다. 자신을 보존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진정한 효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조포는 관직을 버리고 인질로 잡힌 어머니를 구해 은둔하여 섬기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공적인 관계, 혹은 군신 관계보다는 혈연을 매개로 한 부모와 가족 관계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는 대의보다 사적인 인정을 강조한다. 이색의 제자인 이승인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었으나 시험관이 되었다. 그 이유는 늙고 병든 아버지가 생전에 아들의 영화를 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상중에는 벼슬에 나갈 수 없었고, 국왕이 명령하는 경우에만 벼슬할 수 있었지만, 이승인은 이를 어기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이는 부모의 뜻을 따르는 효자의 마음, 곧 혈연에 입각한 인정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가족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에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달리 정도전과 같은 사대부는 주자학을 통하여 국가의 공적 관계, 사회적 명분을 중시하였다. 이들은 (춘추) 의 ‘대의는 부모, 자식 관계에 앞선다’는 명분을 ‘선’으로 내세우면서 사적인 인정에 치우치는 것을 ‘악’이라 하여 공적 의리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혈연 가문을 중시하는 음서나 인적으로 결합하는 좌주문생제를 비판하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차이점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군신관과,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하는냐 하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이색 계열의 수성파 사대부는 절대적인 군주관을 견지했다. 사회적 관계는 의리로 맺어졌기 때문에 의리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러나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로 비유된 인간 관계, 불변의 관계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혈연 관계로 비유된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절대 불변의 인간 관계가 되므로 영원하고 변경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들은 이미 주어진 군신 관계를 어떠한 여건에서도 받아들이고 지키려 하였다. 선왕인 공민왕의 말에 복종해야 했고 군주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이었다. 이들이 많은 문제점을 보면서도 결국 고려왕조를 부인하지 못하고 충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주자학의 대의명분에 충실하였다. 이들은 ‘대의’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혈연적이고 사적인 가치관을 비판하였다.

과거 춘추시대의 역사적 사례를 통하여 신하의 왕위 찬탈에 관한 시시비비를 가리고 엄정하게 평가하였다. 군주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충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합치될 때에만 정통이며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경전에 나오는 천명사상이나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역설하고, 왕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논의의 초점으로 삼았다. 동양 고대의 대표적 성군이라는 탕 임금이나 주나라의 무왕을 이상군주로 제시하였다. 혈연으로만 보증되는 군주상에 만족하지 않고 천명과 인심에 순응하는 군주상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명분에 맞는 정통의 군주를 원하게 되고 이에 어긋난다면 이를 정정하고 바꿔야만 했다. 그래서 유교의 명분론과 춘추대의에 비춰볼 때 우왕이 왕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명분에 맞지 않은 우왕과 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창왕을 물러나게했다. 나아가 명분에 맞는 군주의 즉위와 새로운 군신 관계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명분론은 혈연을 기조로하는 고려의 예론과 배치되므로 고려에 대한 비판은 근원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를 부정하는 논리가 나왔던 것이다. 정도전과 같은 사대부가 고려의 신하였으면서도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 새 왕조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이유도 사상적 차이에 있었던 것이다.

 

 

충신과 공신의 차이

조선왕조는 개국 11일 만에 고려말에 당을 만들어 반란을 꾀했다고 하여 이색, 우현보 등 56명에게 죄를 주었다. 그리고 두 달후 정도전, 조준 등 44명을 개국공신으로 임명하였다.충신과 공신이란 하나의 500년 왕조가 망하고 다른 하나의 500년 왕조가 들어서던 정치적 격변기에 사대부들이 택할 수 있었던 두 가지 길이었다. 그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떠했든,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들은 자기네의 이념에 충실하게 정치적 행보를 하였다. 때론 목숨까지 버리면서. 강남의 귤이 양자강을 건너면 탱자가 되듯, 같은 사상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빛깔로 나타난다. 그리고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그런 빛깔의 차이는 때로 커다란 변혁의 물줄기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자주와 사대의 사이

 

황제국체제를 지향한 고려국가

김기덕(건국대 강사)

황제. 천자. 왕

 

왕조사회에서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칭호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흔히 ‘왕’이라 했다. 그러나 중국은 ‘황제’ 일본은 ‘천황’이라 했고, 그 밑에 각지역의 통치자로 봉건제후인 여러 ‘왕’들이 있었다. 우리의 경우도 ‘황제’나‘천황’처럼‘왕’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대왕’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왕’이라 칭했다.

중국의 경우 원래 군주 칭호는 ‘왕’또는 ‘천자’였다. 왕은 ‘훌륭한 사람’, 천자는 ‘상제의 아들로서 천명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후 ‘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었다. 이후 중국의 최고책임자는 항상 황제라 했고, 이는 191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할 때까지 2천여 년 계속되었다. 흔히 황제는 건설적인 중국의 임금인 삼황과 오제를 한 단어로 줄여서 만든 칭호라고 한다. 그러나 황제의 ‘황’은‘빛이 난다’‘위대하다’‘크다’는 뜻이고, ‘제’는 상제 즉 천계에 살면서 우주만물을 주재하는 최고의 절대신을 뜻한다. 따라서 황제는 ‘빛나는 우주의 주재자’라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왕’또는‘천자’대신, 보다 초월적인 절대신의 의미를 갖는 ‘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는 자신을 지상에 출현한 상제 그 자체로 인식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개념의 황제는 원칙적으로 천하에 단 한 명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진시황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 조. 짐등의 각종 용어를 제정하였다.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 중국은 여러 왕조로 이어지며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였다. 중국왕조와 우리 나라의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의 왕조는 서로 교류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교류는 외형적으로 책봉의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책봉은 중국이 황제국의 입장에서 우리를 제후왕으로 봉작해 주는 외교적인 의례행위였다.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중국의 왕조는 송. 요(거란). 금. 원. 명이였다. 고려는 국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사신을 보내 형식상 승인을 요청하였고, 중국은 ‘고려국왕’이라 책봉해 주었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는 중국이라는 황제국에 제후국으로 신속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단지 외교적이고 의례적인 관계였을 뿐 실제적인 구속력은 거의 없었다.

 

제왕과 왕작의 수여

고려국가는 실제 여러 면에서 황제국체제로 운영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형식적인 국제질서를 인정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체제를 지향하였다. 무엇보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은 ‘제왕’의 존재였다.고려는 가까운 왕족이나 공훈이 있는 신하에게 봉작 즉 작위를 수여해 주었다. 작위는 공. 후. 백. 자. 남의 5등작이 있었다. 왕족은 5등작에서 상위의 공작. 후작. 백작3단계까지를 수여해 주었다. 그리고 수여된 작위는 다른 나라와 달리 상속되지 않고 자신의 당대에서 그 혜택이 끝났나. 단 왕족의 경우 작위를 가진 자의 자식(아들 및 사위)에게 사도 혹은 사공의 최고관직을 명예직으로 수여하였다.

그런데 고려는 공작. 후작. 백작을 수여받은 왕족과 그들의 다음 대(아들 및 사위) 사도. 사공을 수여받은 자를 총칭하여 제왕이라고 했다. 제왕은 본래 왕작을 수여받은 사람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중국은 황제국이어서 실제 왕작이 수여되었는데, 왕작에는 친왕. 사왕. 군왕의 등급이 있었고 이들을 모두 제왕이라 했다.

그러면 고려는 중국처럼 왕으로 봉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제왕이라 했을까? 고려는 건국 초기에 항복해 온 신라 경순왕에게 낙랑왕을 봉해주고 일부 왕족에게 대왕을 봉한 예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여 황제만이 수여할 수 있는 왕작을 직접 수여하지는 않았다. 대신 고려는 왕족으로 봉작받은 자와 다음대의 사도. 사공을 총칭하여 제왕이라 함으로써, 실제 왕작은 없었으나 왕작을 수여한 것과 똑같은 효과를 냈던 것이다. 고려시대 기록을 보면 ‘제왕’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고 있다.아울러 ‘친왕’이라는 표현도 나오고, 또 후작을 받은 자를 후왕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봉작제는 황제가 제후왕을 봉해 준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점은 작위와 함께 주어진 식읍에서도 나타난다. 식읍의 구체적인 내용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 식읍의 규모와 형식은 중국과 거의 같았다.

이처럼 고려는 중국에 대해 외교적으로 제후국의 입장을 취하였으나, 국내에서는 황제국의 제도와 형식을 취한 이중체제로 운영하였다. 이는 당시의 세계국가인 중국과 가장 근접해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염두에 둔 외교적 방안의 하나로 이해된다. 반면 일본은 중국과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어 군사적 위급성이 적었으므로 중국을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따라서 굳이 고려처럼 이중체제를 취하지 않고 바로 천황을 칭하였다.

 

왕실 용어에 반영된 황제국체재

고려의 국가체제는 황제국체제였으며, 고려의 국왕은 실제로는 황제였다. 이 점은 왕실관계 용어가 황제국이었던 중국과 같았던 점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국왕의 명령은 성지, 조, 칙, 제라 하였다. 왕위계승자를 태자라하고 국왕의 어머니를 태후라 하였다. 이러한 용어들은 진시황이 황제칭호를 제정하면서 황제국만이 사용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기타 복장이나 의식에 있어서도 중국과 대등하게 하였다. 한편 국왕을 공식적으로 황제라 부르지 않았고, 왕비 또한 황후라 하지 않고 왕후라하였다. 다른왕실 용어들은 전부 황제국 용어로 하면서, 최고 통치자와 그 부인은 왕과 왕후라는 제후국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 때문이었다.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대외적으로 중국의 책봉을 받는 왕과 왕비는 제후국 용어를 그대로 쓰고, 역시 황제만이 사용하는 당시 국제적인 연대표기인 연호는 중국연호를 썼다. 그러나 그 외의 왕실 용어는 전부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 묘지명이나 금석문을 보면 돌아가신 왕을 ‘선황’이라고 표현하거나, 당시의 국왕에게‘황제가 만세토록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표현하고 있어 고려의 백성들은 실제로 고려국왕을 황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고려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칭제건원 즉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한 시도가 두 번 있었다. 제4대 광종은 황제를 칭하고 광덕, 준풍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제17대 인종때 묘청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과 칭제건원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의킨 묘청은 국호를 대위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황제국을 지향했지만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제후국을 인정한 고려의‘이중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명실상부하게 황제국을 천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왕의 이름은 묘호라고 하는 것이다. 묘호는 왕이 죽은 뒤 신위를 모시는 종묘의 각 현실에 붙이는 이름이다.고려의‘태조, 혜종, 정종, 광종…’이나 조선의 ‘태정태세문단세…’가 다 묘호이다. 묘호는 첫 글자 다음에‘조’나 ‘종’을 붙이는데, 이러한 조나 종의 묘호 또한 사실은 황제의 묘호인 것이다. ‘조’는 창업한 왕이나 공이 큰 왕에게만 붙이고, 보통은 ‘종’이었다.조선시대에는 창업한 왕인 태조(이성계)외에도 ‘조’가 붙는 왕이 일곱 명이나 되어 어떤 이유로 ‘조’가 붙었는지 자세히 따져 보아야 하지만, 고려의 경우는 창업한 왕인 태조(왕건)외에는 ‘조’를 붙인 왕은 없었다. 뒤에 설명되겠지만 원 간섭기에 제후국체제가 되면 이러한 황제식 묘호인 ‘조’나 ‘종’은 쓰지 않게 되었다.

 

각종 제도에 반영된 황제국체제

왕조국가의 제도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종묘와 사직이다. 특히 종묘는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으로, 조상숭배와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종묘에서 제사를 모시는 역대 왕들의 수는 황제의 경우 7대조까지 모시는 7묘제, 제후는 5묘제였다. 고려는 성종 때 처음 종묘를 세우면서 5묘를 택하고 있어 제후국의 예를 따른 것으로 보이나, 실은 중국의 경우도 건국 초기에는 7묘를 채우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의종 때 7묘제가 되었다.공민왕 때에는 종묘제도가 다시 정비되는데, 불천지주(영원히 옮기지 않는 신주)와 좌우 각각 2묘씩을 두어 언뜻 보면 5묘제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태조만이 아니라 혜종과 현종의 신주도 불천지주였다. 따라서 결국 자연히 7묘제가 되었던 것이다. 황제국체제는 제천 즉 하늘에 대한 제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본래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존재는 황제만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왕은 황제만이 할 수 있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였는데, 그것을 원구제라 하였다. 원구는 제천을 하기 위한 제단의 모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하늘의 형상이 둥근것과 제단을 높게 쌓아 하늘에 가깝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고려국왕이 제천한다는 것은 고려왕실이 천명을 받았다는 정치적의미를 확인하는 것이며, 하늘의 신인 상제를 대리하여 백성과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을 과시하는 행위이다. 뒤에 제후국체제를 취한 조선에서는 무례하다 하여 없앴으나, 고려는 일찍부터 원구제를 거행하였다.

황제국체제의 모습은 중앙정치제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려의 중앙관제는 당제를 받아들여 황제국체제하의 3성6부체제로 운용되었다. 3성이란 조칙을 작성하는 중서성, 그것을 심의하는 문하성, 그리고 이를 집행하는 상서성을 말한다. 6부는 상서성 밑의 6개 부서로 국가행정의 주무부서였다.

이 외에도 군대가 적과 전투를 하기 위해 출정할 때의 군대편제를 제후국체제의 3군편성이 아닌 황제국체제의 5군편성으로 한 점이나, 수도인 개경을 황도라고도 하고 개경의 내성을 황성이라고 표현한 점등은 다 황제국체제를 지향한 고려국가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각종 제도가 실제에 있어서는 다분히 형식적인 점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세계제국인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근접하여 있으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외교적 측면에서 제후국으로, 국내에서는 실제로 황제국이라는 이중체제로 운영한 고려의 국가체제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원 간섭기, 제후국체제로의 변화

고려의 황제국체제의 모습은 후기에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변하였다. 충렬왕 떼에 원나라는 자기들과 같은 황제국 수준의 제도와 칭호를 무례하다고 하여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는 원과 유사한 것은 모두 고쳤다. 당연히 3성체제는 폐지되었다. 그리고 왕실 용어도 선지를 왕지로 짐을 고로 사를 유로하는 등 여러 칭호를 바꾸었다. 태자도 세자라 하였으며, 묘호 또한 종을 칭하지 않고 충선왕, 충혜왕처럼 제후왕의 묘호로 강등되었다. 더구나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왕의 이름에 ‘충’이라는 글자를 돌림자로 넣었다.

이와 함께 황제의 입장에서 제후왕을 봉해 준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던 봉작제는 폐지되었다. 아울러 봉작에 따른 식읍의 수여 또한 없어졌다.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원 간섭기에 와서 고려의 체제가 황제국체제에서 제후국체제로 바뀌었음을 말해 준다.

원의 지배를 받는 한 제후국체제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 간섭기나 조선의 제후국체제를 사대적인 것으로 단정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 간섭기 때에도 나름대로 고려왕조 고유의 풍속과 제도를 지키려고 줄기찬 노력을 하였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오히려 세계제국인 원의 지배하에서 제후국체제일 망정 독립국가를 유지한 점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의 경우 건국 초기에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가의 위상을 제후국체제로 하느냐 고려처럼 실질적인 황제국체제로 유지하는냐는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제후국체제로 정리되었다. 그결과 비록 묘호는 조와 종의 황제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원칙적으로 제추국체제로 운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이러한 점은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했기 때문에 성리학의 명분론과 그 연장으로서의 화이론(중국은 황제국‘화’, 주변국가는 제후국‘이’)을 엄격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제후국체제라 할지라도 역시 현실적인 구속력은 거의 수반되지 않았다.과거 식민사관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관계 즉 황제국과 제후국관계를 전부 우리 민족의‘사대성’으로 설명하였고, 한국사의 국욕적인 상징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이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외교관계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중국 주변의 수많은 민족들이 사라진 지금, 중국이라는 세계제국 바로 옆에서 항상 독립국가를 유지해 온 우리 민족의 역사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조선왕조의 마지막인 1897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새로 만든 원구단에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우리도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당시 내용이 수반되지 않는 명분만의 조치였지만, 왕조사회에서 유지되어 온 황제국 중국과 제후국 조선의 형식적인 관계마저 부정하고 조선국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자 한 것이었다. 실로 우리 역사상 고려시대 광종의 칭제건원 이후 처음 나타난 황제체제의 공직적인 선포였다.

 

 

 

세계제국 몽고와 맞선 고려 민중의 힘

 

  심재석(한국외국어대 강사)

  역사를 보는 눈, 현재를 보는 눈

 

  고려는 승패가  달리 결정났더라면 민족의 운명이  크게 위태로웠을 외침들을 물리치며 500여 년을 지속하였다.  양규의분전,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과 같이 나라의 운명을 가름한 중요한 전투들을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공로를 전투  지휘관에게 돌려버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들의 뛰어난 자질과  업적은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영웅들이  성공한 이면에는 결의에 찬 백성들이 있었음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추운 겨울날 삼베 옷에 맨손으로 병장기를 잡고 적진에 뛰어들던 평민 군사의 모습을 연상하지 못한 채 지휘관에  대한 찬양에만 여념이 없다면, 그는 역사의  반쪽만을 이해하며, 나아가 현실도 반쪽 밖에 보지 못한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장군이나 성군을  떠들썩하게 재조명하고 현창상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에  대한 반쪽짜리 시각을 은연 중에 현재에  적용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게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배층이 쓴  역사책에는 지배층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는 사건이 주로  수록되었고, 이로부터 독자는  위인에 대한 강한 인상을 갖게 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독재를 합리화하고 독재자를 미화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책에서는 지배층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반 백성만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한 전투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전투들은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전투들은 수록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층 스스로 자신들의 낯을  깎아내릴 승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엇인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러한  기록들은 대개 몽고 침략기에 집중되어 있다.

 

  몽고의 1차 침입

  몽고족은 고려에서  최시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에 흥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초원에서  약탈을 일삼던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접촉하는  모든 민족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들은 대다수의 농경민족이 취하고 있던  중간의 길- 적당한 군림과 복종- 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몽고족의 공격에 직면하여 택할 수 있는 것은 저항 아니면 무조건 항복뿐이었다.

  항복하면 그들의 노예가  되어 상상하기 힘든 부담을 져야 했고,  견디다 못해 저항하면 모든  주민은 학살당하고  도시와 마을은 불태워졌다.  바그다드에서는 하루 사이에  수십만 명이 살육당했고,  러시아의 귀족들은 모고군의  승전 기념 술자리 밑에 깔려 질식해 갔다.서하, 금, 호라즘제국, 러시아의 공국들, 압바스 왕조, 대리국, 동진, 남송  등 많은 나라가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농경민의 생활방식을 이해하기 전까지  그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동방의 작은 나라 ‘고려’는 끝내  독립을 유지하였고 오히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먼저 망해 버렸다.

  1231년(고종18)몽고는 고려에 대한  1차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이들은 고려에서 저고여를 살해했다는 것을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저고여는 공물을 거둬가기 위해 몇 년  전 몽고에서 파견한 사신이었다. 몽고는 고려와  관계를 맺은 이래 과중한 물품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그것은 고려측으로서는  요나라나 금나라에 했던 것과 같은 의례적인 조공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수탈이었다.  사신 한 떼가 가면 곧바로 또 한 떼가 오고,  뒤에 온 자는 먼저 가지고 간 물품 중 나쁜 것을 왕  앞에 던지면서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저고여도 이렇게 행패를 부리던 사신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자가  공물을 받아 가던 도중  압록강 부근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조사하러 나왔던 몽고인들은 고려  복장을 한 군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에 쫓겨 도망하고  말았다. 이에 몽고에서는 고려와 관계를 끊고  급기야 침략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저고여를 고려에서  죽였는지 아니면 고려를 모함하려는 다른 세력이  죽였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물론 고려에서는 금나라 장수가 한 짓이라고 강변했지만.

 

  고려 백성의 적극적인 저항

  고려에서는 몽고의 침략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고려의 중앙군이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북상할 때, 몽고군은  서북지방의 여러 성들을 공격, 함락시키고 있었다.  함락되면 닭이나 돼지의 소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도륙당하였다. 철주(평북 철산)에서 벌어진 전투는 당시 서북지역이 겪어야 했던 고콩을 잘 대변해준다.

  철주는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는  적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요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몽고군은 이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 문대’라는 사로잡은  장교를 시켜 “ 진짜 몽고병이 왔으니 항복하라”고 외치게  했다. 그러나 문대는 “ 가짜 몽고병이니 항복하지 말라”고 외치고 죽임을 당했다.  문대를 죽인 몽고병은 철주성에 맹공을  퍼부었고 공방전은 보름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자 성을  지키던 관리 이세화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창고에 넣고 불을 질렀으며, 자신은 장정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성이 무너지면 부녀자는 욕을 당하고 아이들과  함께 끌려가 노예가 되며, 저항한 장병들  모두 처참하게 살육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에서 파견한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서북의 여러 성들은 거의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몇몇 성들은 끝내  항복하거나 함락되지 않았다. 이 가운데 지휘관 박서를 중심으로 단결한  주민들이 끝내 성을 지킨 구주(평안북도 구성) 전투가 가장 유명하다. 몽고군은 큰 돌을 날리는 포차를 만들어 성을 파괴하였고, 소가죽을 씌운 큰 수레에  병사를 태워 성밑에 접근시킨 다음 성벽에 구멍을 뚫었으며, 심지어는 마른 풀에  사람 기름을 적셔 두텁게 쌓아놓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성에서도 포차를 만들어 반격하고, 구멍에 쇳물을 녹여 부어 수레를 태워 버렸으며, 물에  갠 진흙을 던져 불을 끄는 등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 결국 몽고군은 구주를 그대로  둔 채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3군으로 편제한 고려의 대군은 황주(황해도 황주)에서 몽고군과 첫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기병을 주축으로 한 몽고군 선봉이 기습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 놀란 고려군은 일시  무너질 뻔하였으나 몇몇 장군들의 분전으로 겨우 몽고군을 격퇴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 마산(경기도 파주)의 초적[산골에서 물푼을  터는 도적]으로 종군한 두 사람이 몽고병을 쏘니 대로 엎어졌다.  관군이 이긴 기세를 타 쳐서 패주시켰다’고  하여 실제로는 지배층의 부패에 항거하다 국난을  맞아 정부에 협력하게 된 초적 출신 병사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황주에서 적의 선봉을  격퇴한 후 중앙군은 북상을 계속하여  안북부(평안남도 안주)에서 몽고 주력부대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의 결과는 고려측의 완전한 패배였다. 고려군의 태반이 살상당하였다. 이 싸움은 고려 중앙군이 몽고병과 접전한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고려 정부에서는 몽고의 힘에 놀라  화친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친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몽고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충주성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전토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당시 충주의 주민은  지배층인 양반별초와 피지배층인  노군 잡류들에게 혐의를  씌워 죽이려 하였다.  이에 노군 잡류부대는 “ 몽고군이  오자 다 달아나 숨어버리고 성은 지키지도  않더니, 이제는 몽고군이 약탈해 간  것까지 우리게게 죄를 돌려 죽이고자 하는가?” 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역사는 승리와 반란이 동시에 부각되는  쪽으로 서술되고 말았다. 할 말 없는 지배층이 권위를  회복하고자 큰 공로를 세운 피지배층을 몰아붙인 안타까운 사례이다.

 

  몽고의 2차 침입    

  충주성 전투를 마지막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몽고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화의의 결과는 고려의 주권을 크게 침해할 뿐만아니라 최씨 정권에게도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몽고에서는 점령한 지역과 개경에  다루가치를 두어 내정을 간섭하게 했다. 또한  국내에서 몽고의 간섭이 심화될수록 최씨 정권의  입지는 점점 더 위험해 질 것이었다. 이에 따라 최우는  대다수 관료들의 반대 속에 다루가치를 모두 죽이고 수도를 강화로 옮겨 몽고에  대항할 것을 결정하였다. 몽고에 대한 전쟁이 재개된 것이다. 당시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30여 년에 걸친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강화천도와 대몽항쟁은 정권 유지 차원에서 결정된 것이었기에 사실상 백성들을 몽고병의 말발굽 아래 아무 대책 없이  노출시킨 것과 다름 없었다. 강화천도 이후 기나긴 대몽항쟁  기간동안 중앙에서 출동한 대군이 몽고군과 정면대결을 벌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정예병은 담나 좁은 강화도에서  권력층의 안일한 삶을 보호할  뿐이었다. 중앙에서 백성들에게 한 일이란 기껏해야  정든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산성이나 해도로 들어가도록 독려 혹은 위협한  것 뿐이었다. 백성들은 몽고군의 침략에 맞서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이렇듯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꿋꿋하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이 시기에 백성들의 힘으로  몽고병을 격퇴한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자주 발견된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처인성 전투가 있다.

 

  처인성 전투    

  눈발이 몹시나 휘몰아쳤을 1232년 12월 16일,  몽공장군 살리타이는 용인땅 아골리 처인성에서  맥없이 꺼꾸러져 이국땅의  외로운 혼이 되었다.  그는 몽고의 고려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왔다가 용인의 처인성에서 피살되었다. “  태종 4년 8월, 다시 살리타이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케 했는데, 왕경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을 공격하던 중 유시에 맞아 죽었다”“ 몽고의 원수 살리타이가 성을 공격하자 김윤후가 이를 사살하였다”. 이상은 <원사>와 <고려사>의 기록이다.

  그러면 처인성은 어떤 곳일까? 몽고군의 침입을 격쾨하고 그 장수를 죽였으니만큰 험한 지형, 돌로 쌓은 튼튼한 성벽, 높은 망루등과 같은 난공불락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을까? 실상은  이와 정반대이다. 성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 2리에 있다. 이 성은 둘레가 650여 보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마한 토성으로 총면적 5,820평에 불과한 작은 동산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잡목들만이 어지럽게  서 있을 뿐, 이곳이  ‘ 경기도 기념물 44호’라는  사실은 인근의 주민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조그마한 성에서 세계역사상  크게 기록될 만한 사건이 지금부터  760년 전에 발생하였다. 세계를 제패하던  몽고군의 고려정벌군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이 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것이다.

  1232년 10월 살리타이를 사령관으로 한 몽고군의 제2차 원정군은 강화도 정부를 비켜지나  지금의 서울인 남경을  노략하면서 큰 저항없이  광주에 이르렀다. 이 때 몽고군은 특정 지역을 목표로 공략에  나섰던 것이 아니라, 육지를 무제한 노략하여 고려정부가 스스로 백기를 들게 하려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몽고의 주력군이 광주에 이르는 동안  그들의 별동부대는 대구까지 내려가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을 불태웠다.

  남경을 수비하는 중요한 요충인 광주에 살리타이가 휘하병력을 이끌고 도착한 것은 1232년 11월  중순이었다. 그는 쉽게 광주성을 공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사 이세화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일장산성(지금의 남한산성)에 응거하여 강력히 저항하자 공략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살리타이는 말머리를 돌려 수주(경기도  수원)에 속했던 처인부곡을 지나 충주로 남하하고자 했다.  이 길목의 한편에 흙으로 쌓아 올린  처인성이 초라하게 서 있었고, 그 안에는 인근 부곡에 사는 주민들이 대피하고 있었다.

 

  일반 주민의 힘으로 살리타이를 사살하다    

  처인부곡민들은 몽고군의 말머리가  자기네 고장으로 향하자 가까운 처인성에 들어갔다고 짐작된다. 이렇게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백원현에서 온 승려 김윤후도 있었다. 대덕이나  선사등과 같이 지배층 출신이 거의 독점하는  승계를 띠지 않고 다만 ‘ 승려’라고  표기된 것을 볼 때, 그는 일반  백성 신분의 승려였던 것 같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그가 처인성에 피난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는 피난을 한 것이 아니라 전투를  위하여 처인성에 포진한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피난하려는  승려가 몽고군이 이동하는 길목으로  찾아들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성 공략에 실패한 살리타이는 준마에 높이  올라 남하를 시작하였다. 그의 눈에 비친 처인성은 그야말로 싸울  만한 그리고 점령할 만한 가치도 없어 보였으리라. 다만, 지나치는 길목 그 한 귀퉁이 조그마한 토성에서 감히 자신에게 대항하는 ‘ 애교의 화살’을 둔  채 남진하는 것은 그의 체면이 허락하지 않았으

리라. 살리타이는 처인성의 맞은편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구릉에서, 가볍게 치고 남하를  계속할 요량으로, 휘하  군사들에게 시급히 함락시킬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 때 처인성 안에서는  주민들 모두가 필사적으로 대항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여기서 구심점으로  활약한 사람이 바로 승려 김윤후였다. 그를 중심으로 단결한 주민들은 몽고군의 공격에 대해  응사하기 시작하였고, 필사적인 전투가 한창일 때 맞은편  언덕위에서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던 살리타이가 느닷없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처인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은 것이다. 사령관이 어이없게도 쓰러져 버둥거리자  몽고의 기마부대는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총사령관이 죽을 경우 전투를 중단하는 것이  몽고의 관습이었다. 그들은 살리타이의 싸늘한 시체를 거두어 황급히 퇴각하고 말았다.

  살리타이의 뒤를 이어 몽고군을  지휘한 테케는 강화도정부와 몇 가지 가벼운 조약을 맺어 체면을 세운  뒤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처인성의 승리는 몽고의 침략기간 중 고려가 세운 가장 큰  전승이었다. 정규군이 아닌 주민들이 자위적으로 항전하여 대륙을 헤집고  다니던 몽장 살리타이를 죽이고 나라를 구했다는 점에서 크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이 남긴 울림    

  이후로도 오랜 기간 전쟁이 계속되었다. 산성과  해도로 들어간 백성들은 결국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더 이상 항전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몽고족도 어느덧 농경민족의  삶을 이해하고 그전처럼  약탈과 살육을 즐기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시일이 지날수록  요구조건을 대폭 낮추어 제시하였다.  최씨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러다가 지배층  전체가 망할 것이라는 위기의식 속에서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태자가 직접몽고에 가서 화친을 요청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고려가 몽고로부터 승인받은 조건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예로부터의 관습과 제도  또한 그대로 유지할 것을 허락받으며, 국력이 회복될 동안은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배려까지 있었다. 이 때 태자[뒷날의 원종]와 쿠빌라이[원 세조]간에 합의된 사항들은 ‘  세조구제’라 하여 중요한  협정으로 취급되었고, 이후 원의 간섭으로 고려의  독립이 위협받을 때마다  이를 방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많은 나라가 멸망하는 속에서도 끝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가 몽고제국체제하에서 이러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고려 백성들의 장기간에 걸친  피어린 항쟁의 결과였다. 백성들은 지배층 출신의  훌륭한 장수가 지휘할 때 물론 그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몽고병을 격퇴했거니와, 지배층이 도망했을 때조차 스스로 단결하여 성을 고수했던  것이다. 초적출신 병사들의 대활약, 양반과 지휘관이 모두 도망한 성을 노군 잡류들이 끝내 지킨 충주성 전투, 아예 지배층의 지휘를 받지 않고 부곡민 스스로 단결하여 침략군 총사령관을 죽인 처인성 전투, 백성들의 이러한 항쟁이 고려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일개 지휘관이 모든 것을  다 했고, 그 인물이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라는 ‘ 누구의 무슨 대첩’식의

역사이해는 그릇된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일반 백성을 국난  극복의 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보는 역사인식은 현재를 올바로 보고 더욱 나은 사회로 만드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려판 정신대 ‘공녀’

  김정현(고려대 강사)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성의 해방은 시대적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편승하여 성을  상품화함으로써 돈을 벌려는  풍토가 유행하는 형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사람들이 성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성 폭행은 여전히 강간으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는다. 성은 인간의  자존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이므로 강요된 성은  자아를 파괴한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집단적인  성 범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시에 남자들은 목숨을 위협받는  대신에 여자들은 성의 헌납을 강요당하는 적이 많았다. 힘이 약한  민족이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는 경우  여자들의 성은 파괴될 위험에 노출되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  때 우리의 여인들은 ‘정신대’라는 미명하에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야욕에 희생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조선의 여인들이 일본과 청나라에  끌려갔다. 특히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은 더렵혀진  몸을 깨끗이한다는 명목으로 수차례 목욕을 하였지만 ‘환향녀’라 하여  부모나 남편에게까지 배척당하였다. 원래  외적의 방어는 전통적으로 남자의 임무였다. 그런데도 조선의  남자들은 외적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전가시켰으니 그녀들은  졸지에 ‘화냥년’의 기원이 되는 누명을 뒤집어썼던 것이다. 집단적인  성 범죄는 명백한 ‘강간’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것으로 포장되기도 하며, 가해자가 개인적인  죄책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데 심각성이 더 크다.

 

  공녀가 발생한 사연은

 13세기는 세계사적으로 태풍의 시대였다. 칭기즈칸에  의해 통일된 몽고가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수행해 나감에 따라  사방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그 여파는 우리 나라에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몽고군은 1231년(고종18)에 마침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고려인들은  침략군에 맞서 수십  년 동안 대대적인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기간 동안  고려는 대부분의 지역이 유린당하여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하였다.  특히 고려 여인들이 몽고군에게 당한 수모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몽고군은 저항하는  방어대를 격파하고 성을 점령하면 성인 남자는 대부분 살해하고 남자 아이와 여자들을  사로잡아 가곤 했다. 몽고의 제6차 침략이 시작되는 때인 1254년(고종41)  한 해 동안에 무려 206,800여 명의 남녀 고려인이 몽고군에게 사로잡혀 갔다는 기록을  참고하건대, 전쟁기간 동안 몽고군에게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다한  고려 여인의 수는 수십만 명이 되었을 것이다. 몽고에  끌려간 고려인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했으며 특히 여인들은  그 위에 성적인 학대까지 받아야만 했다.

 고려 여인들은 전쟁  기간에만 수난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1259년(고종46)강화가 성립되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또 다른  형태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유목생활을 하는 몽고족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그 지역의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공물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으며 여기에는 사람, 특히 여성까지 포함되었다. 고려는  오랫동안 저항한 대가로 왕국을  유지하였지만 속국의 처지였기 때문에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  원은 일본정벌을 단행하는 데 드는 막대한 경비를 고려에게 대부분 전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배기간 내내 여러 가지  명목으로 특산물을 요구하는 등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정부는 금과 은, 사냥용 매, 인삼, 잣 약재 등을 마련하여 보내느라 백성들을 수시로 닥달하였다.

 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한 분야에 종사할 사람들을 선발하여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다. 고려인들은 공물로서 원에 끌려갈 운명에 처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성의 일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거세되어  궁중의 환관으로 보내졌으며, 여성의 일부는 처,  첩, 궁녀, 잡역부 등으로  끌려갔다. 이처럼 고려여성의 일부가 마치 공물처럼  원나라에 바쳐졌으니  이들이 바로 ‘공녀’였던것이다.  공녀의 선발은 일방적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1274년(원종15) 원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녀  140명을 요구한 것이 공녀로 끌려간 시초이다.  이는 원에 투항한 남송의 중국인에게 처를  얻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전례에  없는 ‘결혼도감’이라는 임시관청을 설치하고 마을을 샅샅이 뒤져 그 인원을 채워줄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 고려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찼다 한다.  색출당한 고려 여인들은  말만 처이지 사실상 그들의 노리개감이었다. 1275년(충렬왕1) 원은 칭기즈칸이 13국을 정복한 이래 그 나라들이 미녀를 바치고  있다면서 고려도 여자를 바칠 것을 은근히 종용하였다. 이러한 압력을  받은 고려는 즉시 혼인금지 명령을 내리고  처녀를 색출하여 원에 보냈다.  당시 여기에 선발된 어린 소녀들의 심정을  김찬이라는 시인의 동녀시가 잘 대변하고 있다.

 

  온 세상이 갑자기 한 집이 되니

  동쪽 당에 명령하여 궁녀를 바치라 하네

  규중에 거처하여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였더니

  관청에서 선발함에 심사하는 많은 눈을 어찌 감당할까

  살짝 다듬은 근심어린 두 눈썹이 파란데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억지로 들게하니 온통 발개지누나

  어린 꾀꼬리가 깊은 숲속 나무를 떠나려 하고

  젖내나는 제비가 날아 옛 둥지를 잃으려 하네

  낭원에 옮겨심은 꽃은 금방 핀다 하고

  광한에 붙여진 계수나무는 편안히 자란다 하지

  떠나가는데 미적미적대지만 솜털깔린 수레에 실리고

  바쁘게 떠나려 하자마자 준마가 달리누나

  부모의 나라가 멀어지니 혼이 바로 끊어지고

  황제의 궁성이 가까워질수록 누물이 비 오듯 하는구나

(*낭원은 신선이 산다는 곳,  광한은 달의 궁전을 의미하며, 모두 원나라  궁궐을

비유한 것임)

 

 규중에서 세상  모르고 자라던 어린 소녀들이  선발위원들 앞에 끌려나와 발발 떨며 얼굴과 몸매를 자세히 심사받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불행하게 심사에 통과된 소녀들은 떠나려  하지 않지만 강제로 수레에 실렸다. 혼절하였다  깨어 보니 고국은 이미 멀어진지라.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들은 과연 누구를  원망하였을까? 그녀들이 구박받거나 병들었을 때 도움줄 이 어디 있으랴!  이후 공녀의 헌납은 본격화하여 고려는 원나라가  요구하는 대로 여자를 바쳐야만  했다. 고려는 계속되는 공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과부와 처녀를 색출하여  원나라에 보내기 위해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하였다.

 몽고인들이 고려 여인을  고토록 탐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정복자로서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심리적 요인과 다처의 풍습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환경적 요인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들은 춥고 건조한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도 태어나면서부터 말과 함께  생화하여 성질이 드셌다. 몽고여인들은 춥고  건조한 기후 속에서  생활한데다 말젖을 주식으로  하여 곡물, 채소, 과일 등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피부가 빨리 노화되어 윤기가 없었다. 이에 비해 네 계절이 뚜렷하여 습도와  온도가 알맞는 기후 속에 살며 곡물, 채소, 과일 등을 적당히 섭취한 고려 여인들은 피부가  뽀얀 미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일 잘하고 다소곳하고 나긋나긋한  고려여인들은 몽고남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한다. 이러한 연유로 고려여인들은 피눈물을  쏟으면서 머나먼 타국으로 끌려가 노동력 착취와 성적인 학대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눈물 실은 마차는 끊이지 않고

 고려의 지배층은 원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공녀 색출에  광분하였다. 백성들의 원망 따위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공녀를 색출하는 방법은  한 마디로 ‘인간사냥’이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로 충렬왕비가  되어 위세를 떨친 제국공주가 측근들에게 양가의 자녀로 나이가 14세에서 15세인 자를 뽑아올리라고 명령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순군(경찰)과  홀치(왕의 경호부대)등에게 인가를 수색하도록 하였는데, 밤중에 침실로  돌입하거나 노비를 결박하여 자녀가 숨은 곳을  캐물었다. 그러자 비록 자녀가 없는 집이라도  놀라고 소란하였으며 원망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찼다고  한다. 제국공주는 친정인 원나라에 고려의  자녀를 선물로 가져간  셈이다. 고려 여인들은  공녀로 선택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여  기피하였다. 딸을 가진 집에서는  나이가 어리더라도 일찍 혼인을 시키는  풍조가 생겨났다. 딸이 공녀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사위를 맞아들인 것이다. 이로  인하여 원나라가 요구하는 인원을 채우기 힘들어지자,  고려 정부는  혼인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1287년(충렬왕13)에는 “양가 집 처녀는 먼저 관청에 신고한 다음에 혼인시켜라. 어긴 자는 처벌하라”라는  왕명을 내리고 어린 여자들을  색출한다. 1307년에는 “나이 16세 이하 13세 이상의  여자는 마음대로 혼인할 수 없게 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여기에서 공녀는 나이가 대략 10대  초반에서 중반의 앳띤 소녀가 선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녀의 대상으로는 초기에는 독신녀, 역적의 아내,  승려의 딸, 과부 등이 포함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원은 양가의 처녀를 계속 요구하였으며 그  때마다 민가를 뒤졌다. 공녀에는  완족이나 관인의 딸도 포함되었지만,  주 대상은 일반 백성의 딸로서 ‘동녀’라 표현된 어린 미녀들이었다. 공녀들은  지배층 출신인 경우 황제의 후궁, 귀족 내지 고위관료의 처 혹은 첩이 되어 그런대로 지낼 만하였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백성의 딸들은 원에 귀부한  여러 나라 군인의 처, 원나라 궁실의 궁녀 혹은 잡역부가 되어 고달픈 생활을 해야 했다.

 일단 공녀로 선발되면 빠져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한번은 충렬왕 때 세자(후일의 충선왕)가 마음  속으로 점지한 왕족의 처녀가 공녀에  초함되어 길을 떠난 일이 있었다. 세자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한 신하가  그 이유를 알아내고는 모후인 제국공주에게 아뢰어 그녀는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는 세자의 모후가 원 황제의 딸로서 남편인 충렬왕을 쥐고 흔든 여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사건은 공녀로 선발되면 어떤 막강한 배경을  지니더라도 거기에서 빠져나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공녀로 뽑힌 딸을 구하려다 갖은 수모를 겪은 한 아버지의 일화는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충렬왕과 왕비 제국공주가 양가의 여자를 뽑아서 원나라 황제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홍규의 딸도 그  중에 뽑혔다. 그는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쳐보기도 했지만 그의 딸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는 한사기에게  “내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한사기는  “화가 공에게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홍규는  한사기의 충고를 듣지 않고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제국공주가  이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홍규를 가두어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그 집의 재산을 몰수하게 하였다.  제국공주는 또한 그의 딸을 가두어 심문하였다. 딸은 “제가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아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제국공주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땅에  처박아 쇠로 만든  채찍으로 마구 때리도록  하였다. 그녀의 몸뚱이에는  피부가 온전한 곳이 없었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홍규는 무인정권  최후의 집권자 임유무를 제거하여  왕권을 회복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딸을 구해낼 수 없었다. 그는 권세가에게 뇌물을 주어 사정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  것이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아버지는 섬으로 귀양가고 딸은 원나라 사신에게 선물로 바쳐지고 만다.

 한편 공녀로 끌려간 고려  여인이 원나라 실력자의 총애를 입어 출세하는 경우도 간혹 보인다.  하급관료를 지낸 기자오의 막내딸은 고려 출신  환관의 도움으로 원나라 궁중에  들어가 황제인 순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그녀는 결국 황후가 되었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더욱 세력을 떨친다. 그녀와 고려 출신 환관들은 큰 세력을  형성하여 원나라의 정치를 좌우하였으며, 고려 정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고려에  남아 있던 그녀의 친족들은 하루 아침에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에  자극받은 고려의 고급 관인들 중에는 일부러 자신의 딸을  원나라의 실력자에게 바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좌정승(종1품)을 지낸 노책은 원나라 황제에게, 판삼사사(종1품)를 지낸 권겸은 황태자에게 딸을 바쳐 권세를 부렸다.

 

  그녀들의 넋이 떠돌고 있다면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천륜에 어긋나는 만행이었다. 어떤 묘지명에는 “동방의 딸들이 뽑혀 서쪽(원나라)으로 가기를 거른 해가  없었다… 모녀가 한번 헤어짐에 아득하여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하니, 아픔이 골수에 사무처  병에 걸리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  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천하에  무엇이 있어 지극히 원통함이 이보다 더하단  말인가” 라고 새겨져  있다. 이 묘지명의  주인공은 경주김씨 문벌가문  출신으로 왕족에게 시집간 여자였다. 그런데 그 딸이 공녀로 원에가  있어서 근심과 번민 끝에 병이 생겨 일찍 죽었다 한다. 그 딸은 원나라 고급관리의 처가 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알이 끝에 병들어 죽었으니  일반 부모들은 어떠하였으랴.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그 사실을 숨겨 이웃이 찾아와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당시의 기록은 과장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통한  심정은 고려말 대학자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1335년(충숙왕 복위4) 원나라에 올린 상소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여자들을 모아들여 공녀를  선발하는데, 예쁜 여자도 있고 미운  여자도 있습니다. 사신에게 뇌물을 먹여 그 욕심을 채워주면  비록 미인이라도 놓아 주고 다른 데에서 구합니다. 이러다 보니 한 여자를 얻으려 수백 집을 뒤지게 됩니다. 오직 사신의 말만 통할 뿐, 누구도  어길 수 없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띠고 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아니면 2년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번에 데려가는 여자의 수는 많게는 40명에서 50명에 이릅니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이 서로 모여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공녀를 나라 밖으로 떠나보내는 날이 되면, 옷자락을 부여잡아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자도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거나  피눈물을 흘려 실명한 자도 있습니다. 이런 예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 애절한 상소를 접한 원나라 황제는 고려 여성의 헌납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아 이후에도 고려  여인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결국 공녀는 12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정책을 실시한 후에야 비로소 중단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이곡의  상소에 따르면 공녀는  한번에 많게는 40에서 50명이 선발되었다. 80여 년에 걸친 원간섭기  동안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아니면 2년에 한  번 바쳐졌으니 수천 명이 끌려갔던 셈이다. 원나라의 사신이나 귀족.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데려간 자들까지 계산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고려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  다음에야 그녀들은 성적  수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조선 초기까지도 가끔 공녀가  보내지지만 그 규모나 횟수에 있어서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고려 여인들은 몽고와의 전쟁 중에 이미  수십만 명이 끌려갔다. 전쟁이 끝나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수천 명이 ‘공녀’라는 이름하에 끌려가서 노리개감이 되었다. 고려 왕조는 결국 백성의 딸을  제물로 바쳐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세월이 너무 흐른 지금에 와서 당시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현재의 몽고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하기는 좀 무리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 때 우리 나라 여인들을 ‘정신대’란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끌어가서 일본군의 위안부로 만든 만행을 납득할만한  사과와 배상을 받지도 않고 용서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먼 훗날 고려시대의 공녀처럼 아물지 않는 수치로 남으리라.

 

 

 

 

원나라의 마지막 황후가 고려 여인이었다는데

 

 이익주(명지대 강사)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중국에서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잡는 대변동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몽고족의 지배를 받아왔던 한족 농민들의 봉기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원나라 조정에서는 황제 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거듭되고, 권신과  환관들이 발호하는 등  왕조의 말기적 현상이 두루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의 한 가운데에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순제)의 황후였던 고려 여인 기씨-  기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나라에  공녀로 들어갔다가 순제의 눈에 들어 황후의 지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순제의 다른 황후들과 벌였던 암투는  우리 ‘왕비열전’을 능가하는  궁중 비사였다. 결국  그녀가 낳은 아들이 황태자가 되었는데, 만일에 원나라가 망하지  않고 순조롭게 황위가 계승되었다면 고려의 피가 섞인 황제가 출현하였을 것이다.

 고려 여인이 원나라의  황후가 되고, 그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이 과연 고려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보다 먼저,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이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서는 고려와 원나라의관계가 어떠했는가 하는 문제부터 차근차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와 원나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나?

 13세기에 고려는 몽고족의  침략에 맞서 30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싸웠다.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몽고족과 그토록 오랫동안 싸운 나라는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항전의  주체가 되었던 고려 민중의 투쟁담은 역사  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

 항쟁의 결과, 고려는  몽고에서 요구하는 강화의 조건을 대폭  완화시켜 강화를 성립시킬 수 있었다. 강화교섭을 위해 몽고에 간 태자가 쿠빌라이(뒤의 원 세조)를 만났을 때,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리나 되는 큰 나라이다. 당나라 태종이 친히 공격했어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쿠빌라이가 고려를,  고구려를 계승한 강국으로 인식하였던 것은 끈질긴 고려의 항전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때 쿠빌라이는  동생 아릭부게와 황제 자리를 다투고 있었으므로 고려 태자가 자신에게  찾아 온 것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음직하다.  결국 쿠빌라이가 황제가  되었고, 태자가 쿠빌라이  쪽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중요한 고비에서 외교적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고려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외교교섭에서 실리를 얻을 수 있었다.

 고려는 몽고와의 이 첫 교섭에서 전통적인  풍속, 즉 ‘토풍’을 고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로써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고려의 문화뿐  아니라 독자적인 국가체제의 존속을 인정받은 것으로,  이를 근거로 ‘고려’라는  국가와 왕실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몽고에서 볼 때  고려는 엄연한 하나의 외국이었고, 고려와 몽고의 관계는 외교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몽고족이 이 때까지  정복한 지역을 모두 자기 연토로 편입시켰던 것과 비교할 때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강화에 반대하는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 과정에서 몽고의 군사력이 개입하였고, 이에 따라 고려의  자주성은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몽고의 군대와 다루가치가 고려에 상주하고 내정에 간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렬왕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여 원 황실의 부마가 되어 있었다.  이 점은 이후 두 나라의 외교  과정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유목민족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원나라에서는 국가의  중대사를 쿠릴타이라고 하는 회의에서 결정하였는데, 부마도 왕자들과  나란히 참석할 수 있었다. 이같이 부마의 지위가 왕자와 동등하였으므로, 충렬왕은 이러한 지위를 활용하여 원나라의 간섭을 줄이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 할 수 있었다.

 충렬왕은 직접 원나라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나  담판을 벌였고, 그 결과 원나라의 다루가치와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고려에는  원나라의 관리나 군대가 주둔하지 않게 되었다. 또 호구 조사를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시행하기로 합의하였다. 호구 조사는 일차적으로  세금을 거두기 위한 것이므로, 이 합의를  통해 고려의 백성들은 원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원나라가 고려에 대한  지배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필요할 때마다 사신을  보내 내정에 간섭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필요할  때마다 사신을 보내 내정에 간섭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이런  정도의 느슨한 지배방식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책봉이란, 중국  왕조와 주변 국가 간의 사대관계에서 조공의  반대급부로 주어지던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나라의 왕위 문제에 직접 간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왕위 계승을 추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는 책봉의 기회를 이용하여 고려의  왕위 계승에 개입하였고, 이 때문에 국왕이  갑자기 바뀌거나, 아버지와 아들이 왕위를 두고 다투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원나라에서는 책봉권을 이용하여 고려 국왕을 조종할 수  있었고, 그를 통해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당시 몽고족이 지배하던 세계질서 속에서는 드물게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하였지만, 대신 원나라의  간섭을 강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주와 사대라는  기준으로 볼 때 분명히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이중성을 어떻게 수용할 것이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고민 꺼리였을 것이다.

 

 

자주와 사대가 종이 한 장 차이?

 당시 고려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는 많지 않지만,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일연(1206- 1289)의 <삼국유사>와 이승휴(1224-  1300)의 <제왕운기>가 모두 충렬왕  때 쓰여진 역사책들이다. 이 두책은  무엇보다도 단군신화를 처음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우리 역사의 유구함을  강조하고, 또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지 무려 600년이 지난 뒤까지도 각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계승의식을 극복하여 민족의 일체성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몽고와의 전쟁을 전후하여 신라부흥운동, 고구려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이 각각 일어났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제왕운기>의  우리 역사에 대한 서술은  “요동에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 왕조와 뚜렷히  구분된다”는 말로 시작된다.  중국과 구분되는 딴  세상이란 곧 우리의 독자적인 혈연 및 문화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때 새삼스레 이 점을 강조한  것은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토풍’으로  표현되는 독자적인 문화와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들보다 한세대 뒷 사람인  이곡(1298- 1351)이 자기 시대를 말하면서 “오늘날  천하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백성과 사직이  있는 곳은 우리 삼한뿐이다”라고 한 것도 원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고려가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의 표현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몽고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서 인정하고 있었다. <제왕운기>에서는 원나라를 중국의 정통 왕조로 인정하면서, “토지는 광대하고 인민은 많으니, 개벽한 이래로  이런 나라 처음이네”라고 노래하여 융성함을 극찬하였다. 또 충렬왕이 쿠빌라이의 부마가 되고, 그 아들인 쿠빌라이의 외손자가 세자가 됨으로써 고려의 왕업이  빛나게 되었다고 찬양하였다. 따라서 원의 간섭 역시 부정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종족에 관계없이 중원을 차지한 나라가 곧 중화이고, 그에 대해 사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로써 합리화되었다.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전통에 대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민족의 간섭을 인정하는 이중적인 가치관이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고려가  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 원의 정치적  간섭을 강하게 받던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고, 그  현실과 타협하는 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원에서  고려의 노비법을 고치려 한다던가, 고려를 원의  한 행성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하면서도,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그 곳에서 관직에 오른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그러한  태도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원간섭기를 생각하면서 반원과 친원,  또는 자주와 사대라는 술어를 사용할 때, 그것들은 모두 제한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제왕운기>에 보이는 이승휴의 역사인식은 단군신화를  수록하고‘요동의 별천지’를 강조한 데서 보듯이 자주적이지만, 동시에 사대의 논리를 들어  원의 간섭을 현실로서 인정한다는 점에서  그의 ‘자주’는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당시 현실에서 자주와 사대, 반원과 친원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던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원의  정치적 간섭을 현실로서 인정하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였지만, 고려가  독자적인 국가체제와  문화전통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에 단군신화가 기록된  것은 몽고족이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서나마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지탱해가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반면, 원나라의 간섭에 빌붙어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의 책동은 궁극적인 고려의 국가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데 이르렀다.  이러한 사람들을‘친원파’또는 ‘부원배’라고 부를 수 있을것이다.

 두가지 생각은 모두 원의 간섭을 현실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종이 한  장의 작은 차이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차이가 현실 정치에 있어서는 고려왕조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고려왕조를 없애고 원의 영토로 편입될 것인가 하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로  발산되어 나타났다. 좀 더 적극적으로 원의 간섭을 부정하고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그 시대의 한계였다.

 

 원에 기대어 출세하려는 자들

 고려에서 부원배가 출현한  것은 몽고와 전쟁을 할 때부터였다.  몽고족의 침략을 맞아 고려의  군민들은 치열한 항쟁을 벌였지만,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때에도 외적에게 항복하여  그 앞잡이 노릇을 한 반역자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홍복원(1206∼1258)으로, 그는 일찍이 몽고가 고려를 처음 침략해왔을 때 항복한 뒤로 몽고군을 안내하며 고려  침략을 도왔다. 이 공으로 몽고에서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이로부터 아들 홍다구와  손자인 홍중희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고려 조정에 반역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밖에도 전쟁 중에 항복했던  사람들이 원나라의 위세를 업고 폐해를 일으키는 일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몽고에 있으면서  고려의 어느 지역에서 어떤 특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하고는 고려에 파견되어  토색질을 일삼거나, 이것을 빌미로 고려에서 관직을 얻기도 하였다. 몽고에서 배운  몽고어 실력을 앞세워 통역관으로서 두 나라  사이를 오가며 사실대로 전달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움으로써 국익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수록 두 나라 사이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원나라에 연고를 갖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확대하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한 예로  공녀라고 해서 원나라에 처녀를  보냈는데, 그 때문에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소란이 일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거꾸로 자기 딸을 원나라의 실력자와 혼인시켜 그 덕을 보려는 사람들로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원의 요구에 따라 환관도  많이 보냈는데, 그것이 출세의 한 방편이 됨으로써 원나라에 환관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기 스스로 거세하는 사람들 조차 있었다.특히 충숙와 이후로는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정쟁에 패배한 사람들이 원나라로 도망해 들어가 부원비로 변신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원나라로 도망해 들어가 부원배로 변신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원나라에 있으면서 고려를 워의 영토에 편입시키려는 책동을 벌였다.

  이처럼 원간섭기에는 환관이나  공녀의 친족들과, 정쟁에서 패하여  원으로 도망한 사람들이 주로  부워배가 되었다. 이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고려의 정치질서를 문란케 하고, 더 나아가서는 고려의  국가체제 자체를 없애려고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원배들의 도움을  받아 고려의 기씨  여인이 원나라의 황후가 될 수 있었다.

 

  원나라 기황후는 고려의 공녀

  기황후는 행주를 본관으로 하는  기자오의 막내 딸로 태어나 원나라에 공녀로 보내졌다. 1333년(충숙왕 후4)경에 원나라  황궁의 궁녀가 되었고, 1339년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은 뒤 이듬해 제2 황후에 봉해졌다.  그녀는 먼저 가 있던 고려인 환관들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고, 황후가 된 뒤에도 고용보,박불화 등 고려인 환관들이 그 주변에서 활약하였다.

  기황후와 고려인  환관들은 원나라에서  막강한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기씨가 제2황후에 봉해진 바로 그 해에  자정원이라는 황후의 부속관청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고려인 환관 뿐아니라 원나라의 고의 관리들도 포함되어 ‘자정원다’이라 불리는 당파를 형성하였다. 당시 이들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어서 관리들의 인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당시 원나라의 재상이 이들과  가까이 하였다가 “권세에 아부한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였다.

  1353년(공민왕 2)에 기황후의  아들이 황태자에 책봉되자 자정원의  세력도 더욱 강해졌고, 그로부터  몇 해 뒤에는 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하도록 압력을 사한 일도 있었다. 기황후의 득세에 대하여 원나라 말, 명나라 초에 살았던 권형은 <경신회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색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기황후가 고려의 미인을 많이 데리고 있으면서 대신 중에 권력이 잇는 사람들에게 보냈는데, 당시  원나라 서울의 고관들과 귀인들은 반드시 고려  여자를 얻은 뒤에야 (명가)라고 하였다.  고려 여자들은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며 섬기기를 잘하여 이들이  이르면 대부분 사랑을  빼앗았다. 수제 이후로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태반이 고려 여자였으므로  의복과 신발, 보자, 물건 등이 모두 고려의 것을 따르게 되었다.

  말하자면 기황후가 원나라의  실력자들을 상대로 미인계를 썼다는  것인데, 이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황후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유지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기황후의 존재는 고려의  정치에도 당연히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고려에 있던 기황후의 일족들이 권세를 부렸다.

 

 

이규보의 과거시험대책은 어떠했을까

  과거시험으로 가는 길

 

  촛불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절의 강당에는 이따금 한숨소리만 들릴  뿐 모두들 조용한 침묵으로  자기 앞의 종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더운  여름 날씨였지만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절의 강당은 바깥의 따가운 했볕과는  다르게, 시원한 바람이 이따금 스며들었다.

  그래도 수십 명이 앉아 있는 데다가 무언가  모를 열기가 이들을 감싸고 있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느덧 땀이 흘러내렸다. 밝은  대낮인데도 절의 강당 앞 쪽에는  붉은 빛의 커다란 양초를 켜놓았고, 방  안으로 파고드는 약한 바람에 촛불의  심지는 껌벅거리면서 점차 짧아져만 갔다. 그에  따라 가끔씩 머리를 들어 촛불이 타들어 가는 것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사람들의 표정도 굳어져 갔다.

  어린 나이의 이규보도  강당 한 구석에 않아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심호흡을 하면서, 머리  속으로는 싯구를 짜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미소, 그리고는 하얀  종이 위에 붓이 흐르듯 날아갔다. 아직 초가 반쯤 남아 있을때, 그는  일어나 자신의 답안을 제출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그를 감싸안을 때, 가슴 속에도 청량갈이 스치고 지나갔다. 방 안에 남이 있는 나머지 학생들은  그를 바라보면서 내심 부러운 눈치였다. 이윽고  붉은 초가 다 타들어 가 촛농만이 남자. 시험관 중 한 사람이 일어나 조그만 종을 쳤다.

  답안지들이 걷히고, 모두들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웅성거리면서 학생들이 강당에 다시  들어오자 시험관은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일어섰다. 일등은  역시 이규보였다. 모두들 예상했던 일이라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머리속에는 관복과 모자를 쓴 이규보의 장래  모습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 자리에서 작은 연회가  벌어졌다. 그러나 시끄럽고 떠들썩한 연회기 아니었다. 나이에  따라 차례로 술잔을 주고 받으며를 화답하는  그런 연회자리였다. 연회는 종일토록 계속되다가 저녁 때에야 끝났다.

 

  위의 장면은 흔히 각촉부시 라고 불리는 일종의 문장 시헙에서 이규보가 일등이 되었던 장면을  그려 본 것이다. 이규보가 살았던 고려  중기에는 사립학교에서 하고라고 하는 일종의 과거시험대비 여름수련회를 산 속에 있는 절에서 가졌다. 이 때 치루어진  각촉부시란 시함은 촛불이 다 타기 전에  글어 지어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일명 급히 짓는다고 해서 급작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형식에 맞추어 빠르게  문장 짓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관료를 꿈꾸는 이규보의 과거시험준비

  이규보(1168- 1241)는 무인정변이 일어나기 두 해 전에  태어나 주로 최씨정권기에 활약한 대표적 문신  관료였다. 우리들에게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동명왕편)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인 이윤수가 호부낭중이라는 중앙 정부기관의 벼슬을 지내기 전까지도 경기도 여주에 기반을 둔 토호집안 출신이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지방에서 거주하던  토호집안은, 자신의거주지에서 일부는 향리가 되어 그  지역사회를 지배하기도 하고, 또 일부사람들은 서울인  개경에 진출해 중앙관료로 출세하면서  서로 인적인 연관을 지녔다. 이 때  중앙관료로 진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  할 것도 없이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무숙실력을 인정받아  무관으로 진출하는 길도 있었다. 이럴  경우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거나, 탁월한 무술실력으로 국왕이나 중앙권력자들의 눈에  띄어 발탁되면 더욱 쉽게 출세할 수  있었다. 특히 이규보가 활약했던 시기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무인정변을 주도한 정중부나 이의민등은 그런 경우의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문관으 등용문인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료가 되는 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그러기에 부친으 음덕으로 벼슬을 시작한 고의 관료의 자제들마저도  또다시 과거시험을 보았던 것이다. 하물며 중앙정계에 배경이 별로  없는 지방출신은 더욱더 과거시험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이규보의 집안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의 연보에는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이규보)의 처음 이름은 이저였다. 기유년(1189)사마시를 보려고 할 때, 꿈에 노인들이 검은 베옷을  입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 사람이  이르기를 “이들은 28수이다”라고 했다. 공은 깜작놀라  두 번 절하고 물었다. “제가 이번 과거시험에 합격할 수 있겠습니가?”  그러자 한 사람이 옆에 있는 살마을 가리키면서 “저 규성이 알 것이다”고 하였다. 공이 즉시  그에게 나아가 물었으나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꿈에 깨였다. 조금 후에  다시 꿈을 꾸었는데, 그 노인이 찾아와, “자네는 꼭 장원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이는 천기인 만큼  절대로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하였다. 그래서 이름을 규보로 바꾸고 시험을 치뤘는데, 과연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처럼 이름을 고칠 정도라면 다시 과거 합격에 대한 바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성취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11살 때 숙부인 이부가 그를 관청에 데려가 동료들 앞에서 자랑삼아 글짓기를 시킬 만큼 신동이었던 이규보도 고거시험준비를 위해서 14살이 되자 당시으 명문 사립학교인 9재학당에 입학하였다.

  해동공자라 불렸던 치충이 세운  이 학교는 1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많은 문신관료를 배출한 곳이었다. 그래서 고려 후기  유명한 문신인 이제현은 이곳을 ‘위로는 재상집 자제에서  아래로는 지방의 과거응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9재 학당에 이름을 걸고  성인의 길을 익혔다’고 했으며, 또한 조선시대  문신인 서거정도 “이곳에서 뛰어난 문장가가 많이 배출되어 중국에서도 시서의 나라라고 칭송하였으니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최충위 공이다”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이 곧 과거에 합격하는 지름길  이었으며, 그만큼 자신의 출세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곳 출신으  관료가 정부기관 곳곳에 깔려 있었으며, 이들이 대부분  과거의 고시관이 되었으므로 출제경향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또한  합격한 후에도 곳곳에 있는  선배관료들의 지원을 받아 출세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좋은 학교출신이란 것이 명예롭고 중요시 여겨졌으므로, 이 학교출신들은 설립자인 최충의  호를 따서 문헌공의 무리라고 불렸다.

  물론 고려시대에는 사립학교 외에 공립학교도 있었다.  수도 개경에는 최고 학부인 국자감과 중등학교인  학당이 있었고, 지방에는 중등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다. 그러나 이규보가  입학했을 당시에는 사립학교가 과거시험공부에  보다 유리하였으므로, 당연히 사립학교에는 중앙관료나  명문가의 자제들이 주로 입학하였다.

  한편 이규보가 학교에 입학한 후 공부한  교과목은 대부분 유교의 경전이었다. 학교에서는 주로  9가지의 경서와 3가지 역사책을  가르쳤다. 9가지 경서란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주례>,  <의례>,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등이고, 3가지  역사책은 <사기>, <한서>, <후한서>와 같은 중국역사책을 말한다. 이런  책들을 정해진 해석에 따라 암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컨대   <주역>은 글자수가 24, 107자, <예기>가 99,  010자, <춘추좌씨전>은 무려 196,  845자나 되니, 머리 좋은 이규보도  암기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 시부등과 같은 문장 짓는 수업도  받았다. 경전이나 역사책에 나온 고사성어나 음률 등이 문장을 지을 때 기초가 되었으므로 경전에 대한 암5년 동안 술에 쏠기는 중요하였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이류보는 뛰어난  글재주를 자랑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여름에 치류어진 수련회인  하과에서 그는 계속 일등만을 했던 것이다.

 

  네 번 재수 끝에 턱걸이

  하과에서 계속 일등만 했던 그도  16살 때 처음 치른 시험인 사마시에서 보기좋게 낙방했다. 본고사는커녕  예비시험에서도 합격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8살 때  두번째로 본 사마시에서도  합격하지 못하자, 그는  아버지가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수원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절치부심하면서 2년 동안 공부했지만 그는 세 번째 시험에서도 역시 낙방하고 말았다.

  1차 시험에서 세번이나 낙방한 일은 천재소년이라 불리던 그의 자존심을 무척이나 상하게 했던 것  같다. 그의 연보에는 이에 대한 벼명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즉 “공은 이 4, 5년 동안 술에 쏠려 멋대로 놀면서 마을을 단속하지 않고 오직 시 짓기만 일삼느라고 과거에  대한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아서 계속 응시 했어도 합격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요즘 재수생의 방황을 엿보는 듯하다.

  22살 때 치루어진  사마시에서야 그는 비로소 일등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학교 입학 이후 관료로  가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과거시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관문인 예부시가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는 1차 시험의 합격자 중 33명을 예비관료로 선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시험은 제술업과 명경업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에서 제술업을 통과하는 것이 관료로 진출하여  승진하는 데 가장 유리하였다. 제술업의 합격  기준이 주로 문장능력이었으므로 이 같은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반면에 명경업은 유교경전의 애해 능력을 시험 하였다.  예부시의  이 두 시험은 오늘날의 2차고시와 비슷하며, 흔히 대과라고도 불렸다. 이 밖에 법률지식이나 통역, 천문, 지리학 등에 밝은 사람을 뽑는 기술고시가 있어, 잡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교를 선발하는 무과시험은 없었던 것이다.

  이규보가 응시한 시험이  바로 제술업이었다. 그는 사마시에  통과한 이듬해에 예부시에 합격하기는 했지만 합격 등수는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에도 합격 등수가 현직  관료로 보직을 받는 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낮은 등수에 실망한  그는 합격을 사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심한  아버지의 꾸지람과 주변에서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말리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합격통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 이유는 과거시험의 문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험에 쓰이는 형식적이고 화려한 문체가 불만이었다. 그는 시험에 쓰이는 형식적이고  화려한 문체가 불만이었다.  그로 인해 글짓는  감성과 세상 사는 도를 잘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훗날 그가 중국 당나라 유학자인 한유가 벌였던 고문체  복귀운동을 고려에서 실천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 연유하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이규보가 시험을 올바로 볼 리가 없었다.  그는 과거시험장에서 시험관 중 하나가 그를 부르자, 큰 잔으로  술을 한 잔 마시고는 곧 취해서 휘갈겨 쓴 글을 찢어  버리려 하였다. 옆 삶이 그의 글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불합격했을 것이다. 당시  고시관아던 이지명이 그의  싯구를 좋아해서 낮은 등수로나마 합격시켜 주었다.

  이처럼 어렵게 과거시험을 통과했다고  해도 곧바로 관직에 등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는 합격  후 3, 4년 내에 지방관으로 임용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규보가 살던 무인집권기에는 심지어  30년 가까이 임명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는  과거시험이나 정상적인 관료승진절차를 거치지  않고 권력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로  추천되어 지방관으로 진출하는 사람이  당시에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규보처럼  중앙의 권력자들과 줄이 닿지  않았던 사람들은 임용되기 어려웠다. 이규보 역시 23살에 합격하였지만  정작 관직에 임용된 것은 9년이나 지난 32살 때였다. 그 동안에  그는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를 자칭하면서 술과 시, 그리고 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오늘날 되짚어 보는 과거시험의 의미

  고려시대 과거시험은 대체적으로 문신관료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였다. 그러나 무인집권기와 같은 정치적 격동기에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  이규보처럼 전형적인 문신관료들은 무인들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던  정치제도를 가능한  한 정상화시키려고 생학하였다.  이규보가 추구한 방법 중의 하나가 백성들을  올바로 통치할 수 있는 관료를 선발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바로  과거제도의 정상적 운영이었다. 말하자면 행정능력이 있으면서 백성과 국왕을 위해 올바른 관료가 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선발하는 일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고려 후기에 이르면 과거ㅅ험제도 자체를  이 목적에 맞도록 개정 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고려시대 과거시험은  한 개인의 출세를 보장하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신분상승을 가능케 하는 국가고시가  존재한다. 모든 국민에게 ‘기회균등’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이 시험의 통과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고생하며 매달리고 있다.

  또한 대학입학시험도 고시공부와 사정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좋은 대학출신이 이 사회에서 쉽게 출세한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이 된 지는 오래 전이다. 따라서 조은 대학을  가기 위해 초등하교ㄱ부터, 아니  최근에는 영재교육바람에서 보듯이 아예  갓난아이 때부터 경쟁을 시작한다. 아무도 이런  모습이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식을 그러한 경쟁의 장으로 몰아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재상 이자연의 관료생활

 

  박재우(서울대 강사)

  이자연의 수상 취임

 

  집안은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관료 중에서  최상의 지위인 문하시중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재상이  된 지 9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수상이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재상이 된 다음에 정기 인사 과정을  밟아 승진한 것이기는 했지만 53세의  나이로 수상에 취임하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개인과 집안의  영광이었다. 아내와 아들 딸 부부로부터 이미 축하 인사를 받았고 소식을  들은 친척과 동료들의 축하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음식 장만이나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이 분주하였지만 모두 즐거운 표정들이다.

  출세가 이렇게  빨랐던 것은 개인적인 능력도  능력이지만 가문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 이한은 중추원부사까지 승진한  고급 관료였고 게다가 고모부가 현종의 장인인 김은부였다.  그가 1024년(현종 15)에 22세로 과거에 급제한 것은 물론 능력도 있었지만 현종의 왕비에  대한 배려가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고종사촌이 현종의 셋째 왕비가 되어 덕종과 정종을 낳고 또 다른 사촌은 넷째 왕비가 되어 문종을 낳았다. 사실 이자연은  지금 왕인 문종과의 곤계도 매우 각별하였다. 그는 문종의 외가쪽으로 촌수가 높았고  나이는 문종보다 16세나 많았다. 또 문종은 형들인 덕종,정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때에 그가 곁에서 성실하게 보필한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래서  문종은 이자연을 매우 신임하였다. 28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왕위에 오른 문종은 곧 45세의  이자연을 이부상서 창지정사로서 재상에 임명하였다. 그 뒤에도  빠른 승진을 거듭해서 평장사를 거쳐 마침내 수상인 문하시중이 되었다. 맏딸이  문종의 왕비볼 선택된 지 3년에 또 다시 커다란 경사를 맞이한 것이다.

 

  왕명을 전달하던 중추원 시절

  생각해 보면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과거에 급제하고 관리가 되어 온 친척들의 찬사를 받으며 기뻐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조정의 온갖 중요한 직책을 다 맡아 보고 나이도 벌써  50중반이나 되어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옛날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 처음  임명된 곳이 왕이 마시는 술을 빚는 일을 하던 양온서였는데,  출근한 첫날 어찌나 흥분하고 긴장했던지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보내고 말았다.

  그 뒤 실록이나 시정기를 편찬하는 사관이나,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관리들의 비행을 감시하는 어사대등  여러 관청에서 근무하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중추원  승선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승선은 국왕의 명령을  해당 관청이나 관료에게 전달하고, 또 관청이나 관료들이  아뢰는 문서를 국왕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물론 승선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기능만  했던 것은 아니고 문서의내용에 따라  전달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그 밖에 국정의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국왕의 자문에 대답하는 측근관료의 기능도 하였다. 국왕을 늘 가까이 모시는 직책이었던 만틈  정치적인 부담도 컸고 또 혜택도 많았다. 이자연이  승선에 올라 국왕을 보필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을 막 넘긴 때였다. 그 나이에 승선이 되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였으므로 주위의 부러운 눈총을 한 몸에 받았다. 물론 왕실의 외척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지만.

  이자연이 승선이 되였을 때는 덕종이  나이 겨우 16세로 왕위에 오른 다음 해였다. 국왕의 나이가 어리다고 볼 수는 없지만  경륜이 길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승선으로서 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였다. 왕명이나 신료의 결재요청서류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덕종은 이자연에게 종종 자문을 구했고 그 때마다 적절히 대답해야만 했다.  특히 당시는 거란과 화평을 맺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경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어서 신료들  사이에 외교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던 시기였으므로 국왕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보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업무 자체의 성격상 늘 긴장해야  했고 이틀에 한 번은 숙직을 해야 했으므로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파김치가 되었다. 이러한  생활을 1040년(정종 6)까지 근 10년 가까이 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승선은 당시 관료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였고 이 곳에서 능력을 인정받기만  하면 재상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일종의 승진코스였다. 지금의  왕 문종은 덕종, 정종 때 이자연의 활동을 눈여겨보면서 민첩한 업무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자연은 30대를 그렇게 국왕 가까이서 보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행운이었다.

 

  관리의 인사를 관장하던 이부 시절

  중추원이 궁궐  안에 있었던 반면 6부는  광화문 밖에 있었다.  이자연은 잠시 형부에서 근무한 적도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이부에서 활동하였다. 이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것은 승선으로 활동하던 덕종  때부터였다. 고려의 관직은 겸직제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자연도 이부와 중추원 두 곳의 업무를 겸직하였던 것이다. 상서성은  상부의 상서도성과 하부의 6부로  구분되었는데, 상서도성은 주로 중앙관청과 지방관청 사이에서  문서를 전달하는 사무를 담당하였던 반면 6부는 각각 기능에 따라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 등으로 구분되어 행정 업무를 분담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던 것은 인사를 담당했던 이부였다.

  이부에는 관리들의 인사기록부인 정안이 있어서 평소에는 주로 이것을 정리하였다.  그러다가 정기  또는 임시 인사가 있을 때면 각  관료들의 승진과 탈락을 심사하여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때 근무  실적을 평가하는 방식은 중앙관료의 경우 출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켰는가, 휴가  일수를 초과하지 않았는가, 업무를 공평하게 처리했는가 등을  평가하고, 지방관료의 경우는 농사를  장려하고 있는가,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하였는가, 재판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는가 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업무는 이부에 소속된 고공사가 담당하였는데, 인사이동이 있을 때 자료를  이부에 제출해서 인사 행정의 근거로 삼았다.  이부는 각 사람의 인사기록부와 고과성적표를  참고해서 승진과 탈락을 심사했던  것이다. 대개 승진은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30개월을  근무하면 가능하였고, 서리는 90개월을 근무해야 했다.

  관리 인사는 매년 6월과 12월에 각각 한  차례씩 있었다. 대개 전자를 임시 인사, 후자를 정기 인사라고  불렀다. 이부의 모든 관료들이 모여 함께 논의하면서 합의제의 방식으로  인사를 결정하였지만, 워낙  많은 사람을 다루어야  하고 또 인사서류의 양이  많았으므로 자칫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이때만 되면 며칠 동안 퇴근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든 인사 문서를 국왕에게 아뢰면 국왕이  최종 판단해서 결재하였고 그것에 따라 인사이동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 밖에 국왕의 특별한  명령이 있거나 공로를 세운 경우에 왕명에 따라  해당 관료에게 수여할 적절한  관직을 심사하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이자연은 오랜 이부 근무가  자신의 관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동안 수많은  관료들의 인사 기록을 낱낱이 볼 수  있었고 또 인재들을 어떻게 적절하게 뽑아서 어느 관청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 개인적으로  커다란 수확이었다. 뿐만 아니라 문종이 즉위한  뒤에 그는 이부상서로 있으면서 참지정사에 올라 처음 재상이 되었던 만큼 이부 시절이 그의 관직생활에서 중요한 획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원래 고려에서는 대개  상서성의 복야나 6부의 상서가 참지정사를 겸직하면서 재상이 되기 시작하여  중서시랑이나 문하시랑으로 승진하면서 자연스럽게 평장사를 붙여 상위  재상이 되었고 문하시중이 되면서 최고 관직을  받았다. 지문하성서나 정당문학도  재상이었지만 이들 관직에 임명된  사례는 이자연이 재상이 된 당시까지만 해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따라서 재상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참지정사, 평장사, 시중이었다. 이자연도 이러한  승진과정을 거쳐 시중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왕을 견제하는 중서문하성 생활

  이자연은 수상이 된 다음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는 중서문하성에 출근해서 우선 출근기록부인 공좌부에 성명을 하였는데 이것은 뒤에 인사 고과에 참고 자료가 되었다. 원래 관료들은 사시에 출근하여 유시에 퇴근하였는데, 문종 2년부터 해가 길 때는 진시에  출근하고 해가 짧을 때는 종래처럼 사시에 출근하라는 왕명에 따라 업무시간이 길어졌다. 물론 한달  내내 쉬지 않고 업무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매달 1일, 8일, 15일, 23일은 정기 휴일이었고 그밖에 설날,  입춘, 한식, 입하, 칠석, 입추, 추석, 추분, 연등, 팔관 등 연간 54일 이상을 특별 휴가로 보내었다. 하지만 휴가의 전체 날수가 100일을 넘지는 못했다.

  이처럼 휴가가  많았던 반면에 업무에  임해서는 부지런히 일해야  했다. 우선 그는 중서문하성에 출근해서  일상 업무를 보아야 했다. 이러한 업무  중의 하나는 국왕의 명령  문서인 제서를 심의하는 일이었다. 고려에서는 모든  국정이 원칙적으로 국왕의 명령으로 반포되었고 그것은 문서로 내려졌는데 시행되기 전에 먼저 중서문하성의  심의를 거쳐야 했다.  이자연은 시중이 된  다음에 하루에도 몇 통씩 내려오는  제서를 읽고 그것을 처리하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혹시 잘못을 범할 경우에는 탄핵을 받거나 문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그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1035년(정종 1)에 급사중이 되어 몇 년간 제서를 검토하는 일에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제서의 내용은 이의 없이  처리될 수 있었으므로 조금만 조심하면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제서에 대한 이의 제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왕인 문종이 즉위한 뒤에도 벌써  몇 차례나 중요한 이의 제기가 있었다.  대부분 인사 문제였다. 1057년(문종 11)  정월의 일이었다. 어느 날 이자연이 업무를  보고 있는데, 승선이 왕명을 전달하므로 열어 보았더니  고유를 우습유에 임명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관료들  사이에서 상당한 재능이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탐라(제주도)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자연은 문하시랑평장사, 급사중과 함께  이 문제를 의논한 결과 출신 배경상  간관에 임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자연은 그가  간관에 임명될 수 없는 이유를 기록하여 국왕에게 올리면서 재능이 아깝다면 다른 관직을 제수하라고 청하였는데,  왕은 그의 주장이 옳다고  하면서 따라 주었다. 이처럼 중서문하성은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국왕이 자의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권한은 인사 문제만 아니라  왕명으로 내려오는 모든 사안에 대하여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서문하성에서 이의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자기의 주장대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자연이 시중이 된 직후인  문종 9년의 일이었다. 문종이 갑자기 왕명을 내려서 좋은  땅을 선정하여 흥왕사를 창건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굳이 사찰을  건립할 필요가 없고, 또 사찰을  지을 경우에 백성들이 노역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입장에서 반대하였으나 문종은  끝내 따르지 않고 일을 강행하였다. 왕명에  대한 이의 제기는 국왕과 직접 대립하는 것이므로 위험 부담이 따르는 것이었다.

  또 중서문하성은 관청이나 관료가  왕에게 아뢴 업무가 결재되어 반포되는 과정에도 관여하였다.  즉 고려의 관청과  관료들은 고유 업무를  국왕에게 아뢰어 결재를 받아 시행하였는데, 결재받은 문서가 해당  부서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중서문하성이 심의함으로써 국왕의 일방적인 결정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정 결정을 보좌하는 재상 활동

  이자연은 재상의 으뜸인  수상으로서 더욱 중요한 일을  수행하였다. 고려에서는 흔히 재상의  임무를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자연은 때로 중서문하성에 부속된  정사당에서 다른 재상들과 함께 국정을 의논하고, 시행해야 할 일이 있으면 국왕에게 아뢰어 결재를 받아 추진하였다.

  문종 10년의 일이었다.  당시 추진되던 흥왕사 창건 사업으로 개경  인근 덕수현의 백성들이 노역에 시달려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이자연은 다른  재상들과 논의한 끝에 덕수현의 부역을 적어도 1년간은 면제해 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사실 흥왕사 창건 사업은  문종이 중서문하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행한 일이어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재상들 중에서 문종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수상 이자연이 대표로 이 문제를 건의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문종은 뜻밖에 2년간의 부역을 면제하라고 허락하였다. 재상으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국왕은 외교, 군사나  인사 문제와 같이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이 생기면 언제든지 재상에게 자문을  요구하였다. 이 때 재상은 국왕의 자문을  받아 국정을 논의하면서 확대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문종 12년의 일이었다. 제술과를 10번이나 응시했다가 낙방한 강사후에  대한 처리 문제를 두고 열린 확대회의에서 논란이 있었다. 시중  이자연의 견해에 동조한 관료들은, 원래 10번 낙방하면 나라에서 관직을 주는  관례에 따라 강사후를 등용해야 하지만, 그의  출신이 잡로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국법에 잡로는 과거에 급제하거나 국가에  공을 세운 경우에만 등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참지정사 김현의 견해에 공감하던 사람들은 10번이나 과거에 응시한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등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 경우에는 대개 국왕이 여러  가지 논의를 참작해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이 때  문종은 이자연 등의 견해가 옳다고 하여 수용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재상은 국정을  발의하거나 국왕의 자문에 응하여 결정적인 의견을  제출할 수 있었으므로 국정  결정 과정에서 국왕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고려의 국정 의결은  권력구조상 대부분 행정 업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정치운영에 효율성을 거둘 수 있었다.  참지정사등 일부 재상들이 행정관청의 관료직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6부와  같은 행정관청에 소속된 재상이 해당 관청에서 논의할 범주를 벗어나는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정사당에 가서 안건을 제기하고 다른 재상들과 함께 논의할 수  있었다. 또 행정관청에서 아뢴 업무를 국왕이 혼자 결정하지 못할  경우에 해당 관청에 소속된 재상이 자문에 참여함으로써 결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이부상서 참지정사인 이자연이 이부의 업무인 인사문제를 국왕에게 아뢰어 결재를 요구하는 경우 국왕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재상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이  때 이자연은 당연히 참지정사의 자격으로 정사당에서  그 문제를 함께 논의하게 되므로 이부의  입장을 가장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자문회의도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었다.  국왕도 자문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을 참고함으로써 이부의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적절한 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정치체제가 매우 뛰어난 효율성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수상의 임무가 마냥 공식적이고 딱딱한 것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국왕이 베푸는 술자리에서 조금은  사적인 형식으로 만나기도 하였다. 이 때는  술잔을 돌리거나 시를 짓는 등 여흥을 즐겼다. 이자연은  다른 재상들과 함께 문종이 베푸는 술자리에 여러 차례 참여하여 흥취를  맛보기도 하였고 또 문종이 직접 따라 주는 술잔을 받기도 하였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이자연은 자신이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동안 지내  온 관료생활이 매우 만족스러웠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비록 하나가  일찍 죽어 7명이 되었지만 모두 잘 자라준 아들들이  있고 세 딸이 모두 문종의 왕비가 되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모두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덕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틈만 나면  승려가 된 아들 소현이 머물고 있는  절에 찾아가 시주도 하고 아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면 고려의 모든  관료들이 이자연과 같은 영화를 누렸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이자연의 출세는 고위 관료 집안에 태어났고 왕실의 외척으로서  국왕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또 딸들이 모두 왕비로 뽑혔던 특수한 사정이 작용한 것이었다.

 

 

 

 

고려인들이 선망하던 최고의 직업 ‘관료’의 삶의 모습

 

  이혜옥

 

 

  나는 시골에서 쓸쓸히 지내니

  세파의 곤궁함을 어찌 견디리

  목 내밀고 한번 나가고 싶으니

  부디 도와 주시면 얼마나 좋겠소

  이규보

 

  고려인들이 꿈꾸던 최고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앞의 이규보의 노래에서 보듯이 바로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관료는 당대 최고의 신분층이며,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곧 경제적으로 생활이 보장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고려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는 지배층인 그들에게는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가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에서는 사민가운데 선비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하였는데 여기서 선비란 곧 관료층을 의미한다. 당시 관료는 중앙, 지방의 현임으로 녹을 받는 관원이 3천여 명이고 실직이 없는 관원으로서 녹은 없이 토지만 받는 사람이  1만 4천여 명이라 하였으니, 당시에는 1만7천여  명의 관료층이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지배층으로서  누리던 특권과 그것이 반영된 일상적인 삶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색깔로 차별한다

  우리 나라 모든 신하들의 관복은 이미 풍토에 알맞게 만들어서 상하을 구별하였으니 이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공민왕

  당시 관료들에게도 소위  유니폼이란 것이 있었다. 유니폼의  상징성은 ‘색’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곧 관직의 차등을  뜻한다. 고려초기에는 관복을 자주색, 붉은색, 진홍색, 녹색의 4단계로 구분하여  차별성을 분명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착용하는 모자와 허리띠에도 모두 정해진  재료와 색깔이 있었다. 이규보의 시에 ‘옷의 무늬로 귀천이  나뉘니 세상에선 이 일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든가. ‘옛날 푸른 적삼 입었을 땐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더니 이제 붉은 옷 입으니 뭇사람 다투어  따르네’라 한 것에서도 당시  색에 부여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이후 관복은 점차 실용성을  중시하여 검은 옷으로서의 통일을 이루지만, 모자와 허리띠 등의 규정에는 여전히 차별이 남아 있었다.

  당시 의복은 일반적으로 삼베와 모시로 만들었다.  면화는 아직 재배되지 않았고 견직물은 값이 비쌌다. 일부 고급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극히 섬세하고 수준 높은 직물을 만들기는 하였지만  대부분 왕실과 귀족들이 쓰거나 조공품으로 이용되었다. 고급 견직,  모직, 면직물류는 염색기술이 미흡하여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비단  한 필은 은 10냥이나  되었고, 부인들이 외출시 썼던 너울도 은 한 근과 맞먹을  정도였으니 가난한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최자가 “불면 날 듯, 연기인가 안개인가. 희디  흰빛, 눈인가 서리인가. 청, 홍, 주, 녹으로 물들여  비단을 만들어 공경사년들이  입어 끌제, 바스락  바스락 떨치며 반짝이네”라고 노래 하였던 것도 단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이러하였으니 의복의 색은 단지  시각적 효과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차별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관료라 해서  항상 고급 직물의 옷만 입었던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는 이들도 흰모시옷을 입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왕가의 처, 첩과 귀인으로부터 일반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복의 구별이 없고,  다만 베의 곱고 거친 것으로 구분을 하였다고 한다.

 

  좋은 벼슬과 많은 녹

  안개인 양 구름인 양 반공중에 노니니 좋은 벼슬 많은 녹이 날 잡지 못하리  고려의 관료들도 일단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퇴근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주로 사시에 출근해서 유시에 퇴근한느 것이  규정으로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관직종사에 뒤따르는 수입의 형태는 크게 달랐다. 당시 관작은 9품으로 차등화되어 있었고 관료들은 각각 등급에 따라 규정된 전시과와 녹봉을 받았다. 전시과는 근무의 대가로 토지를 분급받는  것이며 녹봉은 현물인 미곡으로 받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전시과’는  문무백관에게 등급에 따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전지와 땔나무를 베어 낼  수 있는 시지를 주는 것으로 이 전과 시를 합한 것이다.

  이 제도는 976년에 처음 제정된  이래 목종 때에 정비되고 다시 문종 때에 완비되었다. 초기에는 인품과 공로에 따라 지급한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목종 때부터는 관직의 등급만으로  분급한 데서 제도적 변화상을 살필 수  있다. 관직별로 18과로 나뉘어 지급된 것을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 공무원 제도가 9급으로 나뉘어 차등적인 보수로 지급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실제 수입은 얼마나 되었을까. 문종  때의 전시과 규정에 따르면 제1과에 속하는  문하시중, 중서령, 상서령  등의 최고위재상들은 전지  100결, 시지 50결에 비하면 아주 적지만, 당시 호구당  실제 경작지가 1결에도 미치지 못하던 실정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토지를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소유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시과는 토지 자체를 ‘주는’것이 아니라 계권 또는  문계라는 증빙문서를 통하여 그 토지에서 나오는 수확량의 일부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제1과의 경우 토지의 비옥도에 딸라 200석에서  400석 정동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시지에서는 주로 땔감을 채취하였지만 개간하여 경작지로 이용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짭잘한 수입도 기대할 수 있었다. 전시과는  관료가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실제로는 유족의 생게유지라는  명목으로 세습되었다. 따라서  전시과는 관료들의  근무수당으로서의 성격에 그치지  않고 그들 가족의 지속적 경제기반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공식적 수입원인 녹봉도 문종 때에 완비되었는데 400석을 받는 1과부터 10석을 받는 47과까지 세분하였다. 녹봉은 정월7일과 7월7일, 일년에 두 번 받았다. 관료들의 녹패를  팔기도 하였다. 녹봉은 주로 쌀, 보리  등의 곡물로 지급하였으나, 베나  비단 등을 주기도 하였다.  관료들이 받는 녹봉과 전시과에서 얻어지는 수입은 대략 비슷한 양이었다고 추정되는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시과는 원칙적으로 평생을 보장하는 데 반하여 녹봉은 현직자에게만 보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밖에도 관료들은 공로에 대한 포상 등을 이유로 보너스를 받거나 고위관료에 한해 공음전이라는 특혜적 성격의 토지를 지급  받았다. 그 외에도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서 남의 토지를 빼앗기도 하였으며 고리대나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많을수록 좋은 것 몇가지- 노비, 여자, 부

 

  가지런히 늘어서 수많은 집들 멀리서  바라보니 옥두 높은 곳에 비단 장막 걷

혀 있네 필시 잔치 벌렸으니  붉은 비단 찬란하리 멀리 바람따라 이련한 풍악소

리 기녀들은 소매 걷어 팔목을 드러내고 애교 띤 얼굴로 술잔을 드리며 살풋 눈

을 흘기니 사람들은 해가 져도 흩어질 줄 모르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가족은  5인 정도로 구성되는 소가족 형태가  주였다. 그러나 그 당시 관료들의 생활에는 노비와 여자가 항상 따라다녔다.

  토지와 함께 관료의  주요한 경제기반은 노비였다. 목종 때 경주  사람 융대는 양민 500여명을 사노비로 만들어 궁인 김씨와 고위 관료 김락 등에게 뇌물로 주었으며 종친, 대갓집 중에는 100여 구이상의 노비를 소유한 사례도 있었다. 모든 노비가 한 집안 내에서 존재임에는 틀림없었다.  실제로 노비는 주인집과 떨어져서 그의  땅을 경작한는 외거  노비가 대부분이었으나, 함께  거처하면서 잡일에 종사하는 노비들도 다수 존재하였다.

  가난한 시절의 이규보의  집에도 몇 명의 노비가 있었다고 하며,  김부식의 형인 김부일이 구차하게 지내던  시절에 채마밭을 갖고 있었는데 여기서 노비들이 과일이나 채소류를 가꾸었다고 한다. 당시 부잣집에서는  여름날 큰 자리를 깔아 놓고 여종들이 곁에 늘어서서  수건과 정병을 들고 시중하였으며 부인들이 나들이할 때에는 종자2, 3명이 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당시 고위 관료들은  양민을 억지로 노비로 삼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도 전하는데  어떤 양민이 가아제로 종이  되어 관에 고소를 하자,  관리 김서와 그 동료들이 그의 원통한 사연을 알면서도 권력가의 세도를  겁내어 권력가에게 유리하게 판단을 내렸다.  그러자 꿈에 하늘에서 날카로운  칼이  내려와 그들을 모조리 내리 찍었다.  이튿날 실제로 김서는 등창이 나서 죽었고  그로부터 한달을 넘기지 않고 그  동료들 역시 다 죽었다고 한다. 여기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양민들의 사무친 원한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칼이 모든 것을  지배했던 무인집권기에는 일상적 의미의 노비보다는 전투적 의미에서 자신에게  충성할 인물이 필요해졌다. 사병화된  가노들을 비롯하여 자발적으로 권세가에 뛰어들었던 문객들이 세력가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권력가의 문에 모여들어서 혼돈의 시대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충성의 대가로는 물질적 보상이나 관직을 받았는 그 주군의 세력 비호하에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일도 많았다. 경대승 집권기에는 그이 문객이  양가 자제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경대승이 비호하여 처벌받지 않고 풀려난 일도 있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당시 부유층들은 서너 명의 부인을 두고 조금만 성격이 맞지 않아도 쉽게 이혼을 한다고 하였다.  당시에 일부다처제가 풍미했던 것으로는 볼 수 없으나 세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충분히 여러 여자를 거느릴 수 있었으며 사랑하는 기녀을 두기도 하였던 것이다. 

  문집들을 보면 지바으로 부임된  관리들과 관기 사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간간히 전하고  있다.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기생이 남쪽  지방에 있었는데 그 기생에게 정을 주었던 군수가 임기를 마치고돌아가게 되자 크게 취하여 “내가 이곳을 떠나면 다른 놈이 널 차자하겠지”하고는 바로 촛불로 그녀의 양볼을 지져버렸다.

  임춘에게도 이러한 슬픈  일화가 있다. 그가 벼슬에 싫증이 나서  성산군에 가서 묵을 때의 일이다. 그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군수가 기생 하나 보내어 모시게 했으나 밤에  도망쳐 버려, 이에 상심한 임춘이 원망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시대를 풍자하는 양날의 칼, 푸른 기와집과 비 새는 초가집

  백성들을 긁어 먹고 윗사람에겐 아첨하는 풍속이 오래니

온 나라에 즐펀히 속임수만 따르도다  후한 벼슬 높은 지위는 

그리워할지라도 청천백일이야 속이기 어렵도다.

 

  관료들은 관직과 가문의 성쇠 또는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관료들의 경제 기반은 국가에서  보장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문의 성쇠  또는 능력에 따라 그들의 생활은 천차만별이었다.  대대로 고위관직을 누려왔던 자들은  많은 재산을 모아서 사치스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평소 거처하는 집 이외에도 별업이라는  별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오ㅔ에 엄청난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무인집권기 권력자인 최충헌 집안은 호사가 극에 달해 누각이 새가 날아 다니는 길을 끊을 만큼 높고 해와 달을 가리울 만큼 컸다고 한다. 이  같은 사치는 최고위 권력자층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공경들의 저택이 10리에  뻗치니 커다란 누각은 춤추는 듯 서늘한  마루, 따스한 방이 즐비하게  갗춰 있어 금벽이 휘황하고 단청이 늘어섰네.  비단으로 기둥 싸고 오색 양탄자로 땅을 깔고 온작 진기한 나무와 이름난 화초들 봄의 꽃과 여름의 열매, 푸른 숲에  붉은 송이 그윽한 향내 서늘한 그늘이  한껏 곱게 아양을 떠네.

  최자는 이렇게 사치풍조를 노래했으며, 이규보도 일천집  여기 저기 푸른 기와가 즐비하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치의 뒤에는 반다시  빈곤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벼슬을 잃거나  가문이 한미한거나 혹은  청백한 성품의 소유자인 경우에는 관료라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였다. 벼슬을  잃은 이규보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 땅에 재상이 몇 명이나 되는가.

  나 또한 외람되이 재상했던 몸이로세.

  나만이 청렴하고

  남들은 그렇지 않은 것 아니련만

  아찌타 가난 걱정 홀로 면치 못하는고.

 

  공정하고 검소하기로 이름난 설문경의 경우를 보자. 그가 병이 들어, 채홍철이 진찰을 하러 안채에 들어갔더니,  다 낡은 베 이불에 누워 있는  광경이 마치 중이 거처하는 방 같았다. 채홍철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나와 비교하면 흙벌레와 황학 같구나”라고 하였다.

  또한 학사 팽조적은 책을 탐독하는  버릇이 있어 두어 개 서까래에 띠로 지붕을 이은 초라한 집에서 사방에서 비바람이 들이치고 땔나무와 지을 쌀이 없어도 항상 태연하고 침착했다고 한다.

  한편 임춘의 가문은 건국 때부터 공이 있어 국가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은 적이 있었고 대대로 문장가와  관료를 배출하였다. 임춘 자신도  문장으로서는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한 번도 벼슬을  하지 못하고 일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그가 쓴  편지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있다.

 

  고향을 떠나서 오랫동안 강남에서 입에 풀칠을 했습니다.

  아침에 저녁거리를 걱정할 만큼 구차스럽고 가난하니

  고을에서 비웃고 친구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절교합니다.

  운명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임춘의 편지는 가세가 기울고 관직을 얻지 못하면 비록 관료의 집안이라도 비참한 처지를 면치  못함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관직을 지낸다손  치더라도 가문이 든든하지 못하고 이재에 밝지 못하면 역시 가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시대에 자린고비의 원조랄 수 있는 지씨성을 가진 인물의 이야기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는 충렬왕대의 재상인데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가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였다. 설날과 한식날마다 묘지에 사람을 보내어  장례에 쓰는 돈 모양의 종이인 지전을 주워 오게 하여  다시 종이로 만들어 썼고, 또 버린 짚신을 주워서 거름으로  땅에 묻고 동과라는 수박  비슷한 채소를 심어서 많은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게다가 남의 제삿날에  부조로 쌀 1말만가지고 가면서 하인은 10명이나 데리고  가 포식시키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반쯤  와서 하인들에게 수저를 하나씩 거두었다. 하루는 모두  수저를 내놓는데 하인하나가 우물쭈물하며 내놓지 않아  그까닥을 물으니 수저를 얻지  못하고 바리때를 얻었다 하였다.  그러자 지씨가 웃으며 “내가  욕심내던 것이 사발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단지 자린고비의 원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대가 풍자하는 양날의 칼, 사치와 빈곤 속에서 배어 나온 시대적 반향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 늘어선 푸른 기와집들을 상상해 보라.

  무수한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푸른 기와으이 빛이 바래지 않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 쉬지 않고 달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기와집 뒤편 개미굴 같은 초가에

서 가난한 사람들은 노래한다.

  차마 이대로 죽어 한데 길에 버려지길 기다릴 순 없어

  마을을 비우고 산에 올라 도톨밤을 집는다네

  그 말이 처량하고 절실도 하구나

  듣고 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라

  그대 보지 않았나

  고관집 먹는 것이 하루에 만전어치

  맛난 음식이 솥마다 가득가득 별처럼 널려 있네

  하인들도 술 취하여 비단 요에 토하고

  말은 배불러 금마판에서 소리치네

 

 

 

 

고려시대 내시는 환관이 아니었다.

 

  박한남(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안양도 내시였다는데

 

  일반적으로 내시라고  하면 국왕의 측근에서 왕명을  전달하는 거세된 남자인 환관을 연상하게 된다. 궁중사극에 감초로 등장하는  환관은 쪼그라진 어깨에 음흉한 눈초리와 가냘픈 목소리를 가지고, 오아실  내부의 패권다툼이나 국왕의 향락을 자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였던 국왕의 곁에는 환관이 있었던 예가 많다.

  조선시대 폭군 연산군과  김자원의 관계는 널리 알려진 예이다. 고려  의종 때에는 정함.백선연 등과  같은 환관들이 국왕의 총애를 믿고 파행적인  정치 운영을 부추겼던 결과 마침내 무인정변이 일어나서 의종은 왕위에서 쫓겨난 뒤 처참히 살해되었다.  또 공민왕도 환관  김만생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그가 추진했던 반원개혁 정치가 수포로 돌아가고 고려왕조의 재건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온몸이 찢겨지는 고통속에서도 연산군에게 선정을 베풀 것을 간언하였던 김처선 간은 환관도 있고, 중국에는 종이를  발명한 채륜과 같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환관이 있엇다. 또 성경에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제일  먼저 받아들인 이방인이 이디오피아 간다게 여왕 때의 환관인 유우너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동, 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군주의 곁에는  그의 심복으로서 환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당연히 환관이 있엇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고려에서는 환관과 내시가 별도로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즉 고려의  내시는 환관 즉 남성이  제거된 고자가 아니고, 오히려  대개가 귀족 자제로서 용모가  단정하거나 유학적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내시로 선발되엇다. 내시는  여러 시종들과 함게 왕의  행차에 동행한 것은 물론  왕명의 초안을 작성하거나 국가 기무를 관장하고 때로는 유교경전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내시의 선발기준

  고려시대에 내시가 언제 어떠한 직급으로 설치되엇는지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918년(태조 1)에  오늘날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광평시랑 직예를 내시서기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당시  내시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는 있겠다. 내시의 선발기준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기준은  문정 때에야 확인할 수 있다. 앞의 최사추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문종은 재능과  공로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용모가 수려한 사람  20명 정도를 내시로 뽑아자신을 시종하게 하였으며 그 수고의 대가로 별사미를 주었다. 이러한 원칙은  그 후 인종 때까지 준수되다가, 의종 때에 이르러 귀족자제로 구성된  좌번내시와 유신으로 구성된 우번내시의 이원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내시의 선발기준이 주로 가문과  재능 및 용모를 중시하였다고는 하지만 국왕의 근시직인 만큼  내시가 되는 첫째 요건은 국왕의 총애가  우선이었다. 과거합격자로서 성적이 우수하거나  가문이 뛰어난 집의 자손이  대부분이었으나, 과거합격자는 아닐지라도 서리직에  있으면서 실무능력을 인정받아 내시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뿐만아니라 왕의  병을 치료하였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또는 오늘날의 폴로경기와 같은 격구 등의 잡기에 재주가 있어 내시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가진 것이  돈밖에 없는 사람이 뇌물을 써서 내시가 되려고 하기도 하였다. 국왕의 측근에 있으면 기회를  포착하여 잘만 하면 뜻밖의 출세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풍류를  즐겼던 의종 때에는 각종 행사비용을 후원했던 부유층의  자제들이 내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의종 때 내시들 가운데에는  왕의 선정을 위하여 좋은 정책을 입안하는 경우보다는 왕의 향락과 사치를 부추기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집안 형편이 어려운 일부 내시들은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빚까지 얻어 자금을 마련하였다가 이를 갚지 못해 빚쟁이들이  궁궐까지 찾아와 성토하는 진풍경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시의 일반적인  성격을 유학자로서의 면모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 임금을 사모하는 노래인(정과정)을 지은 정서를 들 수 있다.

 

  내 님 그리워 우니나니

  옷깃 적시지 않은 날 없어라.

  봄 밤 깊은 산속의 두견새야

  내 신세도 꼭 너 같구나.

  묻지 말아라 사람들아

  지난 날 나의 잘못을.

  다만 내 가슴 알아 주는 것은

  저 조각달과 새벽별뿐이리.

 

  이 고려가요에서 정서는 깊은 산속에 홀로 떨어져 슬피 우는 두견새에 자신을 비유하며 자신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려 다시 국왕이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심정을 그리고 있다. 정서는 동래 정씨 문벌출신으로서 의종의 이종사촌이었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뛰어난  문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내시로 발탁된 정서였지만 의종 때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내시는 국왕의 측근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남보다 승진을  빨리 할 수도 있었지만, 때로는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자가 될 소지도 적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문신에 한정되었던 내시의  자격은 1170년 무인정변후 변화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은 그들에게도  내시직을 개방할 것을 요구하여 비로소 무신들도 내시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최씨정권하에서는 최충헌의 사위나, 혹은 최충헌에게 충성을 바친  사람들, 또 최충헌의 총애를 입은 사람들이  내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고려 내시직이 두드러지게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원 간섭기 이후라 하겠다.

  13세기 이후 100년간의 원나라에  의한 정치 간섭과 그에 따른 정치조직의 변질, 각종 전란은 고려의 정치구조와 국가 운영체계를 전면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몰락하는 문벌가문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예전에는  출세의 꿈도 꾸지 못했던 하층신분 사람들에게 내시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이제 내시가 되는 길도  가문이 좋고 재능이 뛰어난 자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았다. 항몽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군인들, 원나라와의 외교에서  실력을 발휘한 몽고어 통역자들과 환관들이 내시로  선발되었고, 때로는 군역 기피자들의  피난처로 이용되기까지 하였다. 특히 홀치.  필자적 등과 같은 원나라 숙위기구가 수용되면서 고려 고유의 여러 근시기구가  변질되는 것과 같은 원나라 숙위기구가 수용되면서 고려 고유의 여러 근시기구가 변질되는  것과 함께 고려 내시는 잊 출발 초기에 보여 주었던 소수의  엘리트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1391년에는 개선책을 마련하여 호적이 분명하고 용모가  단정하며 글씨. 셈. 활쏘기. 말타기 가운데 한 가지라도 잘하는 사람을 택하여  좌,우번에 각가 50명씩 두어 둥중 숙위를 맡게  하였다. 원래 재능이 뛰어난 문인들로 구성되었던  내시가 고려말에는 여러 궁중 숙위군의 하나로 변질된 것이다.

 

  내시와 국왕의 관계

  고려시대 내시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몇 사람의 사례를 들어 내시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정서의 아버지 정항은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고을 원님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왕명을 작성하는 한림원의 직책을 맡았다.  예종은 이러한 전력을 높이 여겨 다시  내시로 선발하여 국가 기무를  관장케 하였다. 특히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세도가에게도 사정의 칼을  휘두르다 오히려 외직으로  좌천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청림함으로도 이름이 높아 1125년에 사망하였을 때  그의 집에 쌀 한 말도 모아 놓은 것이 없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30년 근시오, 11년 승제를 지낸사람이 이렇게 가난하게 지냈으니 진실로  가상하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규정상 내시의  임기는 9년을 상한으로 하였다.  그렇지만 정항이 30년  동안 역임했던 것처럼 한번 내시적에 오르면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계속 겸임할 수도 있었다.

  한안인은 과거에 급제한  뒤 한림원의 말단직을 거쳐 예종 때  내시가 되었다. 이후 그는  가문의 배경도 없으면서 눈부시게  출세하고 신진관인들을 규합하여 당시 회척이었던 이자겸과 권력을 다툴 정도의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내시로서 국왕을 측근에서 보필할 수 있었고,  국왕에게 업무 추진능력과 충성심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를 중심으로 하여 세력이 결집되면서 이자겸 세력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인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평소 한안인의  득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자겸은 왕의 외할아버지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그를 역모죄로 몰아 섬으로  귀양보냈다가 곧 죽여버렸다.  당시 한안인과 함께  숙청된 사람들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20여  명의 상당수가 한안인과 마찬가지로 내시직을 거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들은 한안인을 중심으로 하여  국왕 측근세력으로까지 성장하였던 것이다.  비록 한안인은 외척이자 당대  최대 문벌세력이었던 이자겸과의 대립에서  패배하여 비극적인 종말을 맞하였지만,  한미한 출신이었던 그가 기존의  문벌기존세력과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을 성장 시킬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고려 전기 내시의 정치적 위상을 잘 살필 수 있다.

  유응규는 여러  차례의 응시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다.하지만 그의 수려한 용모와 문장력을 높이 산 인종에  의해 내시로 발탁되었다, 그는 내시로서 매상에 정확한 판단력으로  매끄럽게 일을 처리하여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후에 지방관이 되었을 때에도  진정으로 주민들을 아끼는 청백리라고 명성이 높았다. 때문에 무신란이 일어나  많은 문신들이 숙청되었지만 그의 명망을 아끼는 명종에 의해 내시로 활동할 수  있었다. 특히 유응규는 명종이 금나라 황제로부터 왕위 계승을 승인받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금나라  조정에서는 무인정권이 마음대로 국왕을  갈아치운 것을 빌미로 하여 명종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외교적 압력을  가하였다. 고려에서 보낸 공문의 내용이  거짓이라고 하면서 회신을 거부한 것이다. 이  때 사신으로 갔던 유응규는 이  문제를 타결하지 못하고 귀국하는  것은 왕명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하며 죽을  각오로 단식투쟁을 하였다. 이에 놀란 금나라 조정에서는 회유와  협박으로 죽이라도 먹이려 하였으나 그는 단식을 계속하였다.

  1주일 단식으로 의식조차 희미해진  그를 본 금 황제는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명종의 왕위계승을  인정하는 답장을 써 그를 귀국시켰다. 따라서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신들조차 유응규가 금나라 조정에서 보여 준 행동이 아니었다면 자신들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라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유응규의 이러한 행동은  사신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명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내시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왕과 내시와의 상호  신뢰관계는 희종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는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희종 때  내시 왕준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당시 무인집정인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모의 가담자 전원이 사형에 처해졌고 희종 역시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려시대 환관은 어떠하였나?

  은나라 갑골문자에도 보이고 있는 환관제도가 우리 나라에서는  826년(신라 흥덕왕1)때 처음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도  국초부터 환관이 있었으나 그 정원은 10여 명에 불과하였으며  특별히 왕의 총애를 받아 승진한다 하여도 7품까지밖에 오를 수 없었다. 당시 이들의 역할은  궁중 청소나 내명부의 궁녀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원래 환관이란 고자  또는 환자. 엄인으로서 궁궐에 입사한 사람을  일컫는 호칭이다. 중국은 형벌로 궁형을 받은 죄인이나  전쟁포로를 거세시켜 환관직에 투입하였으며 환관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이들을 양성하는 학교도 운영하였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궁형제도도  없고 전쟁 포로를  환관으로 삼지도 않았다. 따라서 성불구자로 태어났거나 사고로 고자가  된 천인들이 환관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  가운데는 임백안독고사. 방신우. 고용보 등과  같이 원에 끌려갔다가 타고난 수완으로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아 오히려 고려 정국을 흔들 정도의 권세를  누린 경우도 많았다. 그리하여 고려 후기에는  농장의 확대와 조세의 가중으로 살길이  막연해진 일반 양인들이 신분을 낮추어 세금착취를 당하지 않는 노비의  길을 택하든지, 스스로 거세하거나 자식 또는  동생을 고자로 만들어 환관으로 삼아 팔자를 고치려는 경우가  많았다. 수수 후 상처가 아물기까지 걸리는 100일 동안의 고통과 고자라는 평생의 수치심보다도 관리의 횡포와 배고픔의 고통을 더 견딜 수 없어 택한 길이었다.

  이렇게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환관들의 권력이 증대하고 수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민왕 때에는 내상시.  내시감. 내승직. 내급사등 그들만의 독자적인  관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1356년(공민왕 5)내시가 설치되어 정2품으로부터 종9품에 이르기까지 121명의 환관들이 정식 공무원으로 등록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 환관들로만 구성된 내시부가 출범한 것에  비하여, 내시는 본래 가지고 있던 여러  기능 가운데 궁중 숙위의 기능을 갖는 성중애마의 하나로 위축된 채, 조선 전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일 뿐, 세종 때에는 이 내시가  환관내시와 용어상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이유로 내직으로 개칭되었으며 이것마저  1466년(조선 세조 12년) 완전히 폐지되어  그 소임을 궁궐 숙위병인 충의위. 충찬위에서 대신하게 하였다. 이로써 환관과 구별되는 고려의 내시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나라 살림의 벌이와 쓰임새

 

  안병우(한신대 교수)

 

  매년 가을 열리는 정기국회에서는  다음해에 집행할 예산과 지난해 집행한 예산을 심의하고 결산한다. 예산안 심의를 정치  문제와 연결시키는 고질적인 관행 때문에 정작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예산안은 불과 2~3일 정도 형식적으로 심의하고 졸속으로 통과  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예산 심의는  국민에게서 세금을 얼마나 거두고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국민의 기분의무와 권리에 관계된 중요한 일이다. 고려시대에는 어떻게 예산을 세우고 집행했을까?

 

  토지로 편성한 1년 예산

  고려시대에는 현대적 의미의 예산 수립과 집행  절차를 밟지는 않았고, 지금의 재정경제원처럼 국가의  재정을 일원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관청도  없었다. 국가에서는 토지를 기준으로 예산을 짰다. 그것은  조준이 1391년 토지제도를 개혁하자고 주장하면서 올린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 6도의 관찰사가  보고한 개간된 토지의 수는 50만 결이  채 못됩니다. 왕실에 지원하는 경비는  넉넉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10만 결을  우창에, 3만 결을 왕실에 속한 네 개의 창고에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녹봉용으로 10만 결을 좌창에 주고, 문무관리에게 과전으로  경기도의 토지 10만 결을 나누어 주면, 17만 결 정도만 남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6도의 군사·나루·원·역·사원에 지급할 토지와 향리나 지방관리의  녹봉 등 지방관청에서 사용하기에도 오히려 부족하여, 국방비가 나올 곳이 없습니다.

 

  이처럼 지출할  용도별로 토지를 해당 기관에  나누어주는 방식이 재정구조의 기본 특징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조세를 화폐가 아니라 쌀이나 포  같은 현물로 거두어야 했던 경제발전 수준  때문에 국가운영에 필요한 현물을 중앙정부가 모두 거두었다가 다시 나누어 줄 수 없어서 생겨난 것이다.

  모든 토지가 정부의  세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과전이나 사원전  같은 토지는 관리나 사원에 토지세를 거두는 권한을  위임하였고, 왕실의 토지도 왕실에서 직접 세를 거두어  사용하였으므로, 정부의 재정에서는 제외시켜야 한다. 실제로 정부가 조세를 거두어서  사용하는 토지는 1년 예산의 규모를  나타낸다. 과전법을 시행할 때 6도의 토지는 대략 50만 결, 경기의 토지가 13만 결이었다. 경기도의 토지는 과전으로 지급했고 왕실에 3만 결을 지급했다고 보면 47만 결 정도가 정부재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결에서 2석씩  거두는 것으로 보면 일년 예산은 약 90여 만석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양계의 조세는 현지에서 국방비로 사용하였으므로 재정규모는 실제 이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재정운영의 관리와 통제

  재정운영을 담당한  관청은 호부와 삼사였다.  호부는 가장 중요한  재정 담당 관청으로서, 기본재정원인 토지와  호구를 파악하고 관리하였다. 호부는 고려 이전까지 여러 관청이 나누어 맡아 오던  재정업무를 통합하여 수행한 관청으로서, 성종 때 설치되었다. 호부의 설치로 전국의  세원을 집중적이고 효율적으로 파악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호부가 파악한 세원을 바탕으로 조세를 거두고 지출하는 일 즉 재정운영을 계획하고 총괄한 것은 삼사였다. 그러므로 모든  재정부문이 직간접으로 호부와 삼사의 지휘와 통제를 받았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재정을 운영하는 관청이 독립적으로 세원을 배분받아 세입과 세출을 관장하였으므로,  호부와 삼사의 관리 기능은 제한을 받았다.  특히 삼사는 조세와 녹봉에 관한 행정을  담당하고 재정출납에 관한 회계사무를 관장하는 정도에 그쳤다.

  삼사가 회계의 출납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는 가운데, 국가 운영의  중심이 되는 쌀이나 베를 저장하고 지급하는 일은 창이라고 불린 관청이 나누어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좌창은 관리의 녹봉을, 우창은 일반 비용을, 용문창은 군량을, 상평창은 물가조절을, 그리고  의창은 진휼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독립관청인 동시에 거기에 소요되는 곡물을 보관하는 창고의 기능도  하였다. 창과는 달리 각 관청에는 시탄고, 유밀고 같은 부속창고가 있었다. 여기에는 보물, 무기, 잡다한 물건을 보관하였다.

  곡물을 보관하고 지출하던 좌창이나  우창의 관리자는 왕의 측근인 재시로 임명하였는데. 이를 통해 왕이 재정운영에 마음대로 간여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국왕과 관리들이 충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또한 재정을 맡은  관리들도 멋대로 집행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왕이나 담당  관리가 마음대로 지출할 수 없도록 여러 부서가  지출에 간여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녹봉용 곡물을 관리하고 지급한  것은 좌창이었지만, 관리들이  정월과 7월에  지급하는 녹봉을 받기 위해서는 녹패가  있어야 했다. 녹봉 지급 증명서인 녹패는  삼사가 발급하였다. 녹패 발급을 통해  좌창이 멋대로 녹봉을 지급할 수 없도록 견제하였지만, 그래도 비리가 발생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사대의 감찰어사가 지출 과정을 감독하였다.

 

  어디에 지출하였나

  중앙정부는 관리의 녹봉과  일반 비용, 국방비,그리고 왕실재정 따위를 지출하였다. 녹봉은 현직 문무관리는 물론 왕비, 종실, 퇴직관원, 공장 등에게까지 지급하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당시 녹봉을 받는 관리가 3천여 명이라고 하였다. 문종 때 좌창에 들어오는 쌀, 보리, 조 등은  약 14만 석으로, 이는 조선 정종 때 10만 석이나 태종 때 12만 석보다 약간 많은 수준이었다.

  일반 비용에 속하는 지출항복은  왕실의 공적이 경비, 각종 제사와 연등회, 팔관회에 드는 비용, 왕의 하사물, 건물의  건축비나 수리비, 전함이나 무기 제조비 따위였다. 일반비용의 규모는  녹봉과 비슷하였다. 그런데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은 별도의  재원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팔관회는 팔관도감 혹은 팔관보에서 관장하였는데,  팔관보는 원금을 마련해놓고 거기서  생기는 이자를 받아 팔관회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국방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요즈음에는 1년예산의  4분의 1정도가 방위비로 들어가 교육이나 사회보장 등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을 크게 한정시키고 있다. 고려시기에도 거란 족과 여진족, 그리고 몽고와 계속하여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때로는 수십 년  동안 전쟁을 치뤄야 했기 때문에 막대한 방위비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군인의 개인용 무기는 스스로가  조달해야 했고, 식량도 본인이 조달해야 하는  등 요즈음과는 다른 국방체제를 유지하였으므로, 오늘날의 군대  유지에 드는 비용이 그대로 드는 것은 아니었다.

  방위비를 조달하기  위해 군인에게는 군인전이라는 토지를  주어 생활비와 군 복무기간 동안의 식량 따위를 조달하게 하였다.  또 접적지역이어서 군량미가 가장 많이 필요한 양계지방에는 개인이 토지세를 거두는  사전은 두지 않고, 그 지역에서 거둔 세금을 모두 방위비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양계에서 거두는 조세만으로는 부족하여 남도의  조세도 운송하여 국방비에 충당하였다.  특히 개경으로 조운하기 어려운  경상도, 강릉도, 교주도 등  동해안지역의 조세는 해로를 통해 동계로 옮겨  군량으로 사용하였다. 국방비는  남쪽 지방에서도 필요하였으므로, 요충지에 군량을 비축하는 창고를 두어 가까운  군현의 미곡을 보관하였다. 한편 변방 국경지역처럼  군대가 항상 주둔하는 곳에서는  군인들을 동원하여 토지를 경작시키고, 그 생산물을  군량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토지는 군둔전으로 불렀다.

 

  관청 운영 경비의 조달

  중앙과 지방의 관청은 나름대로 독립된 재정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에서는 시행하는 사업에  드는 예산은 우창에서  지급하였지만, 각 관청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관리하였다.  이러한 운영경비를 조달하는 재원으로 공해전이라는 토지가 있었다.  중앙관청이 가지고 있던 공해전의  규모를 보여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단지 태자궁을 관리하는 관청인  첨사부에 공해전 15결을 지급한 기록이 있을뿐이다.

  관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무용품비, 점심비,  숙직비 등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공해전의 수입은  관청의 운영 경비로 넉넉치  못하였기 대문에 운영 경비의 일부를 사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관직도  있었다. 물론 그러한  관직에 근무하기 위해서는 집안이 부유해야  했다. 권수평이라는 사람은 군세가에게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선망의 직책인 견룡직에 임명되었지만, 집에 가난하여 사양하였다. 또한 최고 관청인 중서문하성이 녹사와  중추원 당후관은 해당 관청의 관리들이 궁궐에서 숙직할 때 드는 비용을 사적으로 조달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직을 맡으면  승진할 때 매우 유리하였으므로, 재산이 많은  집안의 자식들이 맡는 것으로 여겨졌다. 때로는 그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빚을 내었다가 뒤에 지방관으로 나가서 백성에게 강제로 빼앗아 갚는  폐단까지 있었다. 권수평은 돈 많은 부인을 얻어서라도 견룡직을 맡으라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쳤지만, 그 손자 권단이 부유한 아버지의 배려로 문하부 족사가 된것은 재미있는 일화이다.

  지방관청 역시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중앙정부에 납부하려고 거둔 세금 가운데 일부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경비를 마련하도록 토지가 지급되었다. 이 역시 보통 공해전이라고 불렀다. 지방관청의 공해전에는 지방관의 녹봉을 비롯한 운영비를  조달하는 공수전과 종이를 마련하는 지전 따위가 있었다. 지방관이 녹봉은 반은 중앙에서,  반은 현지에서 지급하였으므로, 현지에도 토지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공해전 역시 경비를  조달하기에 넉넉치 못하였고, 그 때문에  지방관청이 독자적으로 토지를 개간하여  소유하는 현상도 발생하였다. 또한 교통시설인  역이나 관에도 공해전을 지급하여  경비를 자체적으로 조달하도록 하였다.

 

  나라의 벌이, 세금 걷기

  수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국민에게서 거두는  세금이다. 세금은 토지서  거두는 토지세와 집집마다 거두는  공물, 그리고 부역이 있었는데, 거두는 기준과  내용은 매우 복잡했다.  무역은 직접 사람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었으므로, 가장 고달픈 세금이었다.  그래서 ‘부역 나가서 땀 흘리면 3대가 주린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부역은  현물의 형태로 정부에 들어오지는 않으므로, 재정에 포함시키기는  곤란하다.  역시 국가의 기본이 되는 재정은 쌀과 포 같은 현물 수입이었다.

  세금을 부과하는 대상은 토지와 호구였다. 토지는  논과 밭으로 나누어 조세를 거두었는데, 비옥도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나누어 거두었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로, 이것은 ‘천하통법’으로 여겨졌다. 교회에서는 예전부터 십일조를 내도록 정해져  있고, 소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요즘의  봉급생활자들이 대략 10분의 1을 갑종근로소득세로 내는 것을 보면,  수입의 10분의 1을 내는 것은 동서양 모두 오랜 옛날부터의 전통이었다.

  고려말 과전법에서는 쌀 20석이 생산되는 땅을 1결로 삼아서 2석을 조세로 받았다. 그러나  이전에는 일정한 면적을 1결로  삼앗기 때문에, 1결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양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면 성종  당시에는 상등전 1경의 생산량이 18석정도  였다. 따라서 토지세는 토지의 비옥도를  기준으로 3등으로 나누어 매겼다. 공물은  특산물을 호구에서 거두는 것으로, 주로 베로 거두었다. 특정한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을 소로 지정하여 생산된 물품을  중앙에 납부하도록 하였다. 물론 흉년이 들면  그 정도에 따라 세금을 깎아 주었다.

  세금을 거두는 일은  수령의 책임이었고, 향리들이 실무를 담당했다. 군현마다 논밭과 인구의 크기를 기준으로 중앙에 납부해야 할 세금의 액수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군세가 있는 어떤 집이 세금을  안 내면 힘이 없는 다른 집이 그 세금을 대신 내야했다. 이 때문에 힘없는 백성이 피해를 많이 입었고, 마침내는 조세부담을 견디지 못해 몰락하거나 도망가는  경우도 생겼다. 백성에게서 거두는 것만으로 중앙에 잡부해야 할 세금이 모자라는 경우에 대배하여 군현이 스스로 토지를 확보하고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은 개인이나 관청은 직접  토지세를 거두었다. 관리는 자기 집의 노비를  보내 과전에서 토지세를 거두어 갔으며, 공해전을  받은 관청도 직접 토지세를 거두었다. 군현에서는 과전을 제외한  백성의 토지에서 조세를 거두어 정해진 곳에 냈다. 즉 녹봉용 미곡은 좌창으로, 일반 비용 미곡은 우창으로 정해진 기일 안에 납부했으며, 일정한 액수의  곡물은 지방의 창고에 군수용이나 진휼곡으로 보관하였다.

 

  왕실의 재산과 국가재정 운영

  ‘화가위국’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왕조국가에서는 왕실과 국가는 엄격하게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또한 ‘모든 땅은 왕의 땅’이라는  왕토사상이 관념적으로나마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때이므로 왕실의  재산과 국가의 재산, 왕실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도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왕실과 국가의 재정을 구분하여 편성하고 운영하려고 노력하였다.

  왕실의 재정은 내장택. 내고 같은 관청에서 관장하였다. 내장택은 왕실의 소유지인 내장전과 장처전을 관장하였다. 장처전은 왕실에  예속된 마을인 장과 처의 토지였는데, 이러한 장  처는 360여 개나 되었다.  왕이 거주하는 왕궁에 속하는 토지가 있었던 것은 물론 왕비에  딸린 궁이나 왕족이 거주하던 궁에 예속된 토지도 있었다. 궁장이라 불린 이 토지는 왕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으므로, 왕자나 공주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이러한  왕실 토지 이외에도 왕실경비를 조달하도록 국가가 따로 지급한 토지도 있었다.  또한 국가에서는 상숭국(말). 상사국(포설). 상의국(옷).  상약국(약품). 상식국(음식)의 5국과 중상서(그릇).  양온서(숙). 수궁서(장막)등의 관청을 설치하여 왕실을 지원하였다.

  국가의 재정은 기본적으로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고, 고려시기 세금의 원천은 토지와 백성이었다. 특히 토지는 부와 조세의 원천이었으므로, 토지를 개인이나 관청에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재정구조를 짰다.  이 점의 고려를 포함한 우리 나라 중세 재정구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낸 세금이  어떻게 쓰여지는가, 내가 얼마나 세금을 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과정에 국민이  참여하는 것이 민주의 시작이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는 백성이 이 권리를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세금은 위정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였고, 백성은 이를 내는  의무만 지고 있었으며, 백성들은 최소한이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여건에서는  생산활동을 포기하고 저항하였다. 이러한  관계에 의해서도 고려의 재정구조는 결정되고 운영되었다.

 

 

 

 

뭍길따라 뱃길따라 열리는 고려의 교통로

 

  이인재(연세대 국학연구원 계약연구원)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당산철료의  통행이 금지되었을 때, 사람들은  단순히 길이 끊겼다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강 건너 있던  직장을 몇 배의 시간을 투자하여 돌아가야 했고, 주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손님을 부르는 방식이 달라졌다.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길이  지역과 지역을 연결시켜 줄 뿐만 아니라  산업과 산업, 생활과 생활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우리는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길이 한  국가의 생명을 이어주고 핏줄고 같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교통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와는 그 역할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국가경영에서 교통로의 의미가 처지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전국을 잇는 스물 두 개의 뭍길

  <고려사>를 보면 당시  전국에는 525개의 역이 있고, 이  역들은 22역도로 묶여 있었다. 역도는  지금의 국도를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22역도 가운데 8개는 수도인 개경 북쪽에 있고, 그 남쪽에 14개가 있었다.

  우선 개경에서 황해도 방면으로 나가는 길은 서해안을 따라 배천- 연안- 해주를 거치는 산예도가 있고,  내륙으로는 금천을 지나 평산- 신계- 곡산에  이르는 금교도가 있다. 그리고 지금 철원- 금화-  평강- 회양을 잇는 도원도가 있다. 이 길로 쭉 가면 철령을 지나 금강산이나 원산까지 갈 수 있다.

  개경에서 서경(평양)길은 금교도와  절령도이다. 그교도의 평산에서 서흥을 지나 자비령을 넘다 보면 평양 남쪽인 절령도와  만나게 된다. 절령도는 황주와 봉산, 재령과 수안을 거쳐 평양까지 가는 길이다. 연안지역으로 태뻗은 산예도에서 황주를 지나 평양에 이르는 길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 개경에서 직접 배를 타고  평양에 갈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상방으로 뻗어 나가는  여러 길이 홍교도이다. 홍교도의 한 방면은  평양에서 서남방향으로 강서를 지나 용강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한 방면은  숙천- 안주- 박천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을 연이어 당시 국경지대인 의주방면을 중심으로 뻗은 길을 홍화도라 하고, 평북 내륙지방으로 이어진 길을 운중도라 한다. 홍화도는 안북도호부가 있던 안주 북쪽 지역인 선천-  철산- 의주까지 이어지는 길이 중심이 되고,  운중도는 안주 동쪽인 영변- 개천- 맹산등지를 잇는 길을 말한다. 이 지역의 여러  역들을 매우 세밀하게 파악한 것은 국방상의 이유였을  것이다. 개경과 원산지역을 잇는 도원도와 연결되었을 것이  삭방도이다. 삭방도는 지금의 함남지역과  강원도 북부지역을 이어  주는데, 그역시 국방상 필요에  따라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삭방도 밑으로 강원도 동해안을 끼고 명주도가  있다. 명주도는 강릉을 중심으로 연곡-양양으로 이어지는 길과 남쪽으로는 옥계- 삼척으로 해서 울진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길로 짜여져 있다.

  다음 개경 남쪽으로 뻗은  길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개경과 남경(서울)을 잇는 청교도이다. 청교도는  개경의 청교역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개경- 파주- 서울에 이르는 길을  중심으로 서울과 부평, 인천 및 고양과 양주 주변을 잇는 길을  통칭한다. 이 길을 따라 가평- 춘천- 인제로 이어지는  길이 춘주도이고, 이천- 원주-  제천- 단양을 지나 영주- 안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평구도이며, 과천- 용인-  죽산- 음성- 괴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광주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반도  내륙지역은 모두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길이 뻗어 있었다.

  그 아래로는 충주청주도와  전주공주도와 승주나주도 등 3개의 길이 내륙지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충주청주도는 지금의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수원- 청주- 연기길과 온양- 예산- 해미- 공주- 부여길을 모두 포괄하며, 전주공주도는 전주- 여산- 공주  길과 고부-태인- 정읍 길로  짜여져 있다. 승주나주도는 고창- 영광- 함평- 영암- 해남길과 담양- 광주- 나주- 화순길로 구성되어 있다.

  남해안 지역에는 전라도쪽에 남원도, 경상도쪽에 산남도가 있으며, 동남해안을 끼고 금주도가 있다. 남원도는  지리산쪽의 임실- 남원- 구례- 운봉길과 남해안쪽의 순천- 낙안- 보성-  장흥길이 있는데, 장흥길로 해서 승주나주도와 연결할 수 있었다. 산남도는 전주-진안- 진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전공주도와 연결되며, 거창- 합천-  고성길로 해서 금주도와 연결된다.  금주도는 김해를 중심으로 창원-밀양-청도-현풍을 잇고, 밀양에서 양산-동래- 울산- 언양으로 이어진다.

  경상도 내륙지역에는 경상도와 상주도,  경주도가 있다. 경산도는 성주- 김천- 횡간으로 해서 옥천- 보은에 이르는 길이고, 상주도는 문경- 예천- 안동길과 선산- 군위로 이어지는 길이다. 경주도는 경주를 중심으로 영천- 대구- 경산에 이르는 길과 동해안을  끼고 영덕- 평해로 이어지는 길이다.  경산도는 충주청주도로 이어지고, 상주도는 광주도와 연결되며, 경주도는 명주도와 연결된다.

  이상이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을 거미줄처럼 짜  놓은 22개의 뭍길이다. 자동차를 타고  국도를 달려 본 사람이면,  지금도 그 때의 교통로를  이용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전국의  70퍼센트가 산악지대인 우리 나라에서는 길을 낼 수 있는  지형 조건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뭍길의 관리와 이용

  요즈음은 건설교통부에서 도로를 건설하고 관리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병부에서 관할하였다. 병부  아래에 있는 공역서라는  관청에서 각 지방에  보내는 문서가 제대로 격식을 갖추었는지,  사신들이 지방에 갈 때 역에서 사용하는  말의 수가 규정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를  감독하였다. 이 일을 담당하는 관리가 관역사이다. 그러면 고려국가가  어떠한 목적과 필요성에 따라  525개의 역과 22개의 역도를 관리해 나갔는지 살펴보자.

  개경 북쪽에서 북계를 관통하는 6개의 뭍길 121개 역 가운데 53퍼센트에 달하는 64개 역과 개경 동쪽에서  동계의 남북을 관통하는 3개 물길 91개 역 가운데 57퍼센트에 이르는 52개 역,  그리고 개경남쪽에서 서울을 지나 춘천, 제천 방면 2개의 뭍길 54개  역 가운데 33퍼센트에 해당하는  18개 역을 6등급으로 나누어 특별히 관리하였다.  이 가운데 춘추도와  평구도에 소속된 역을  제외하면 크게 북계방면과 동계 방면에 해당되는  9개의 뭍길 212역 가운데 55퍼센트에 달하는 116개의 역이 특별관리된 셈이다. 이를 22역도제와 별도로 6과체계라고 한다.

  과에 따라 1과역은 75명의 역정이 있었으며,  2과역은 60명, 3과역은 45명, 4과역은 35명, 5과역은  12명, 6과역은 7명을 두도록 하였다.  역정은 경제력이 있는 사람인 정호로  충당하였는데, 부족할  경우에는 일반농민인 백정이라도  충당할 수 있었다. 역에 필요한 인원은 반드시 채워 좋아야 했기 때문이다.

  22뭍길에 소속된 역  가운데 6과체계로 편성된 역을 보면, 1과역은  개경과 서경을 잇는 역들이고,  2과 역은 북계방면, 3과역은 동계방면의  역이다. 이들 6과체계는 개경과 서경 간을  연락하고, 군사. 행정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묶기 위한 도로망이었다.

  역에는 역장과  역리, 역정이 있었다. 역장은  역에 관한 모든  일을 책임졌다. 역리는 문서를 전달하고, 필요한  말을 뽑아 내고 인원을 충원하였다. 역정은 직접 문서를  들고 뛰거나 사신들의  심부름을 하였다. 역의  운영명목으로 공해전 명목의 토지, 용지 조달을 위한 지위전, 역장을  위한 장전, 말 사육을 위한 마위전을 지급하였다.

  사신이나 문서를  보낼 때, 각 역은  자기 역에 도착한 사람이나  문서를 다음 역으로 보내는 일을 하였다. 사신의 지위에 따라  역에서 조달하는 말의 수가 달랐는데, 2품 이상의 재추면 10마리,  3품관원이나 안렴사는 7마리 등이었다. 이들은 각 역에서 말을 쓸 수 있다는 문서를 받아 그 말을 사용하여 다음 역까지 가는 방법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중앙 관청의 공문서는  먼저 상서성에 보고한 후 각 지방에  보냈다. 공문서는 보통 가죽주머니에 넣어  역졸이 릴레이하는 식으로 역에서  역으로 전송하였다. 급한 문서인 경우에는 가죽주머니에 방울을 달아  보낸다. 아주 급하면 방울 3개를 다는데, 격이  떨어지면 2개 혹은 1개를  달았다. 그러나 역졸이 천천히 달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규제도 마련해  놓았다. 예를 들면 2월부터 7월까지는 방울 3개 달린  문서를 가진 역졸은 하루에 6개의 역을 지나야  하고, 2개 달린 문서는 5개의 역, 1개 달린 문서는 4개 역을 달려야 했다. 그러나 8월부터 정월까지는 각각 1개  역씩 줄여서 달리도록 하였다. 이렇게 문서를  들고 뛰는 사람들이 요즈음 마라톤을 했다면 메달 몇 개씩은  땄을 것이다. 이로 보면 오늘날 역전마라톤의 기원은 무척 오래 된 셈이다.

  그런데 각 역에서는 주어진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힘든 일은 사신이나 승려가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경우이다.  승려가 관역에 머물면서 영접이나 음식대접이 소홀하다고 해서  역리나 역정을 매질하거나, 사신의  노비가 주인을 빙자하여 공적으로 사용해야  할 말을 함부로 타고 돌아 다니기도  하였다. 혹은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특산물을 사다 파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매우 피곤하다.

 

  뱃길 하나로 묶어진 13곳의 창고

  각 지역에서 생산된  곡식은 조창에 모아 배로 운반하였다. 뭍에서  가까운 곳으로 곡식을 옮길  때에는 지게나 달구지를 이용하였고, 소 등에  기르마를 올려 운반하기도 하였다. 그 중 가장 많이 실을 수  있는 달구지는 보통 벼 15에서 20가마니를 나를 수 있었다. 그런데 개경과 같이  먼 거리일 경우에는 배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운반하였다.

  전국 각지에는 13곳의 조창이 있었다. 충청도에는  아산의 하양창과 서산의 영풍창이 있고, 전북에는 부안의 안흥창과 임피의 진성창이 있다. 전남에는 조창이 네 개가 있는데, 나주의  해릉창과 영광의 부용창, 영암의 장흥창과 승주의 해룡창이 있다. 경남에는 사천의  통양창과 창원의 석두창이 있다. 이 외에 남한강을 따라 충주의 덕흥창이 있고,  원주에 흥원창이 있고, 황해도 장연에 안란창이 있었다.

  조창에는 역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영역과 주민이  있었다. 이들이 조세로 거두어 들인 쌀을 보관하고 조운하였다. 이 일을  총책임을 지며 감독하는 이를 판관이라고 하였다.  판관 밑에는 색전이라는 향리가  있었는데, 실제로 조세 등을 거두고 개경의 창고로  옮기는 일을 맡았다. 이들 이외에 조창에는  뱃사람과 잡일꾼도 있었다.

  배로 곡식을 나를 때에는 난파와 약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선단을 짜서 운반하였고, 한 배에  실을 수 있는 곡식량도  정해 놓았다. 충주나 원주에서 출발하여 한강을 따라 운반할 때에는 각각 배 21척과  20척으로 선단을 짜서 운반하되, 곡식 200가마니를 실을 수 있는 밑이  평평한 평저선을 이용하였다. 연해안을 따라 곡식을 옮길 때에는 큰  배 6소(배를 세는 단위)로 선단을 구성하되  곡식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을 이용하였다.

  운반비는 곡식량과 출발 지역에 따라 책정하였다.  즉 개경까지의 수송 거리와 난이도에 따라 달랐는데,  개경에서 가장 먼 남해안 지역에서 쌀  5석에서 6석의 운반비는 쌀  1석이었다. 전남 서해안 지역에서  옮길 때에는 쌀  8석에서 9석의 운반비가 쌀 1석이었다.  결국 개경에 가까울수록 운반비가 싸져서  13석에서 15석, 20석에서 21석의 운반비가  쌀 1석의 운반비가 쌀 1석으로 매겨졌지만, 그것도 적은 것은 아니었다.

  곡식을 옮기는 기간에  대한 규정도 있었다. 개경과 가까운  조창에서는 2월까지 거두어 보내도록 했는데 늦어도 4월까지  도착해야 하고, 먼곳이라도 5월까지 도착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제때에 출발하더라도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거나 풍랑을 만났을 때에는 사고 정도를 감안하여 조세를  받지 않기도 하였다. 이 기준은 키잡이 3명과 잡부  5명이 미곡과 함께 침몰할 때이다. 이  경우 조세를 다시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늦게 출발하였거나 동원된 키잡이나  잡부의 3분의 1만이 빠져 죽은  경우에는 해당 고을의 수령이나  담당 아전, 키잡이, 잡부에게 분담시켰다. 키잡이나 잡부의  처지에서는 그 부담을 지는 것보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거짓으로 배가 침몰했다고 하여 곡식을 국가나 해당 주인에게 바치지 않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문종 때에는 키잡이나 잡부들이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되었다거나 파괴되었다고 거짓 보고한 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진 자들에게, 모두 곡물을 내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

 

  뭍길과 뱃길로 엮인 국가의 동맥

  22뭍길과 뱃길은 중앙과  지방을 묶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앙에서 각종  공문서를 보낼 때도 길을  통하여 전달하였고, 조세를 거둘  때도 길을 통해야 하였다. 임금이나 관리가  이 길을 따라 지방을 여행하였고, 군사나 상인도 이 길을 이용하였다.  길 가는 도중에 잠을 자거나 물건도  쌓아 놓을 공간도 필요하였다.

  미곡 따위를 실은 조운선은 대부분 연안  항로를 따라 운항하였고, 내륙지방의 경우는 남한강 등을 이용하였다. 육지가 바라다보이는  근접 연안을 따라 항해했지만 조난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 중기에 충청도 서산  안흥량에 운하를 파려고 했던 것은 해난을 방지하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계속 개척하고 보수하는 가운데 우리의 교통로는 국가 동맥으로서 발전하여 왔다.

 

 

농장은 과연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나

  이정훈(연세대 박사과정)

 

  요즘 우리는 농장이라는  단어를 보고, 서울사람들은 전원생활을  동경하여 근교에 있는 한두 평 규모의 땅을 빌려 주말에 배추나 오이와 같은 채소를 키우는 주말농장을 떠올리기 쉽다.  아니면 영화 ‘뿌리’에서처럼 흑인  노예들이 백인 감독원에게 매를  맞아가며 목화를 따는  목화농장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농장은  주말농장이나 목화농장이 아니라, 고려  귀족의 경제적 기반으로서 14세기 고려사회의 가장  큰 사회문제가 되었던 농장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당시 농장은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그 정도의 농장이라면,  농장주에게 남들과 다른 특권이 있었을 것임을 연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가졌던 특권과 농장경영의 방식이 어떠하였기에 그런 표현이 남은 것일까?

 

  귀족다운 삶의 권리, 농장

  고려사회는 신분제사회이다.  세습되는 신분에 따라  사회적 역할이 달라지고, 권리와 의무도 차이가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점은 농장을 조성하고 경영하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농장은 원래 많은  토지와 노동력을 갖춘 대토지소유를 말한다. 토지가 없다면  농장이 아니다. 이 시기 농장을 파악하려면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개간에 전념하여 토지를 늘렸다고 하자. 이 경우  개간 자체에도 많은 노동력과  비용이 들지만, 개간 후  토지를 경작할 때에도 노동력  동원이 필수적이다. 신분제사회에서  이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계층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  대부분의 농장주가 국왕이나 국왕의 집안, 귀족관료  및 사원이나 승려에 국한된 것은 당시  사회가 신분제사회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가는 이들이 신분적 특권을 활용하여 대토지소유자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었다. 국가가 보장해 준 이 권리를  우리는 수조권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려귀족이 치자로서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로, 국가가 농토의 수확물 가운데 1/10을 거두는  토지세를 수조권자가 대신 걷을 수 있도록 위임해  준 권리를 말한다. 전시과나 녹과전, 과전법은 각각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두 왕실이나 고급관료, 사원, 군인,  기인 등에게 수조권을 분급해 준 제도이다. 이 경우 수조권을 행사하는  사람을 전주라 하고, 대상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전객이라고 한다.

  귀족이 관료 등이 되어 수조권을 분급받으면,  가문의 경제력은 확실히 보장받게 된다. 만약 자신의  토지가 수조지가 되면, 소유지와 수조지가 일치되어 일종의 면조의 특권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의  토지에 수조지가 설정되면 그 사람의 토지에 영향력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문종 때 바뀐 전시과의  지급 규정대로 문하시중이 되어 100결의 토지에  관한 수조권을 받게 되면, 수확량의 10^34^1을 획들할 수 있으므로  실제로는 10결의 토지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왕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던 농장주라면 수조권 행사를 통해 토지확보에 나설 수 있고, 토지가 없었던 사람이라도 이를  근거로 새로이 농장을 조성할 기반을 닦게 되는 것이다.

  수조권은 토지를 늘이는 데에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소유하는 토지에 국가가 아니라  특정 개인이 수조권을 행사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나는 그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예속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수조권자가 마음을 고약하게 먹는다면, 내  토지는 졸지에 빼앗길 수도 있다. 수조권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려  국가가 수조권분급제를 시행했다는 것은  바로 국가의 토지.농민지배력을 수조권자에게 나누어  주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를 봉건 원리가 관철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농장이란 문무관료나  사원이 자신의 경제 생활을 위해 신분적인 특권을  바탕으로 많은 토지를 모아서 피지배층의 노동력을 이용한 농업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토지와 노동력의 확보

  농장주들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상속이나 매입, 고리대, 기진, 개간, 모수사패, 탈점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매입은 땅을 사서 확대하는 방법이었고, 또 주변 농민들에게  고리대로 곡식이나 포를 빌려 주고 갚지  못할 경우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기도 하였다. 최씨  집권자였던 최항은 젊었을  때 쌍봉사의 주지가 되어 50여 만석의 쌀로 고리대를 하면서  재물을 모았는데, 만일 갚지 않으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받아 냈기 때문에 농민들은 국가에 조세조차 납부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기진은 토지를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 기증하는 것인데, 왕실이나 귀족관인들은 신앙심이나 개인의 안녕을  위해 사원에 많은 토지를 기진하였다. 공민왕은 부인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운암사에 토지  2, 240결을 기진한 일이  있다. 그리고 간혹 하급관리가 높은 관직을 얻기 위하여 고위관리에게 뇌물로 토지를 바치기도 하였다.

  황폐한 토지나 산을  개간하여 토지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몽고와의 전쟁으로 농토가 황폐해지면서 국가에서 수조권 지급이 어려워지자 수조권 대신에 황폐해진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개간하면 자신의 소유지가 된다. 그러면 개간자는 소유자이면서 수조권자가 되어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토지는 사패라는  증명서와 함께 지급되었는데, 국가에서는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규모면에서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일부 농장주는 이러한 점을 악용하여 문서를 위조하여 좋은 토지나 주인이 있는 토지인데도 불구하고 국가로부터  사패를 받았다고 속여 자신의 토지로 만들었다. 이것을 모수사패라고 하였다.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야 할 국왕마저도 사원이나 권세가처럼  앞을 다투어 모수사패로  토지를 확대하였고, 그  규모도 수백 결에서 큰 것은 수천  결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그 밖에  농장주가 수조권을 행사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빼앗거나 문서를  위조하여 자신의 토지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국가에 조세를 부담하는 토지가 계속  줄어 들게 된다. 이 때문에 고려 후기에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다.

  농장주들은 토지를 확대하기 위해 앞의  여러 방법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가지 방법을 절충하기도 하였다. 매입.  개간으로 토지를 확대한 다음  수조권을 획득하거나, 사패를 받아 개간을 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도 하였다. 또  자신의 소유지가 다른 관리의 수조지로 주어졌을  때 그들에게 일정정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으므로, 그  토지를 자신의 수조지로 지급받아 원래의 토지에  대하여 간섭을 받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농장주는 소유지에 수조권을 받은  방향으로 토지를 확대해 나갔고, 그 위에서  농장을 운영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농장주들에게는 더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토지 확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노동력의 확보였다. 토지를 확보하였다고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있어야만 농장은 제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비 농민은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거나 새로 매입하기도 하였고, 기증을 받거나 불법적으로 관가의 노비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고리대를 이용하여 빚을 갚지 못하였다는  것을 구실로 양인 농민을 협박하여 노비로  만들거나, 권력을 이용하여 노비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려 후기에 토지탈점과  함께 국가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양인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농장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이들은 여러 종류의 조세를 부담해야 했는데, 그 부담이  매우 컸기 때문에 양인 농민들은 자신의 소유지를 팔거나 심한 경우에는 처자식을 노비로 팔아 조세를 납부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양인 농민들  중에서는 무거운 조세부담을  피하기 위해 권세가인 농장주의 농자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농장의 규모와 분포

  농장은 소유 계층만큼 규모도 다양하였다. 얼마 이상의 토지이면 농장이 되고, 그 이하이면 농장이 아니라고 하는  기준을 정할 수 없기 때문에 농장의 규모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고려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농장이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다거나 군현을 넘나들  정도로 컸다는 기록이 있다. 또  모수사패로 토지를 탈점한 것이 수백 결에서  수천 결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고, 앞서 말한  쌍봉사가 50만석의 쌀로  고리대를 행하였다는 것을 보면 쌍봉사에 농장의 규모도 대단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농장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보면, 국토의 반 이상이 산지로서 평야가 그렇게 많지 않으며, 호남평야나 나주평야를 제외하고 사방을  둘러보아 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것은 드물다. 또한  고려시대의 행정단위가 지금의 군이나 읍.면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책에 보이는 표현들은 과장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농장의 규모가 작은 경우는 농장주가 거주하는  지방에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규모가 큰 경우에는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수도인 개경을 중심으로 경기.황해도 일대만이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에 걸쳐 분포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통도사는 양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최충헌 집안도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  농장이 있었다. 또한 장안사는 함열. 인의. 부녕. 행주. 백주.  평산. 안산 등 여러 지역에 농장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고려말 이색도  개경 인근. 면주. 이천.  여흥. 덕수. 장단.광주. 광릉촌. 유포. 적제촌. 한산 등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농장주는 자신의 토지와 다른 사람의 것을 구분하기 위해 사방 경계표시를 하였다. 한 예로 사원에서는 장생표는 세웠는데, 각 소유지의 중앙 혹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사방이 사원의 소유지임을 나타냈다. 경상도 일대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던 통도사는 일부 지역에 12개의 장생표를 세워 자신 소유의 토지임을 표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소유지임을 입증받았다.

 

  농장의 관리와 경영

  농장이 규모도 컸고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장주가 직접 경영을 하거나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특히  왕실이나 귀족관료들은 주로 수도인 개경에서  거주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어 자신을 대신해서 조직적으로 농장을 감독하고 관리할 사람들이 필요하였다.

  농장을 관리하는  곳을 농사나 장사라고  하였다. 농사와 장사는  여러 지역에 있었는데, 그 곳에는 농장  책임자와 함께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이 살았고, 농장에서 나는 농산물을 저장하기도 하였다. 농장의  총책임자는 주로 장사의 업무를 담당하고 감독하였다는 의미에서 장주 또는 장두라  불렀다. 이들은 주로 농장주의 노비들로, 장사나  농사를 중심으로 농장 내 토지를 관리하고  농장민을 상대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농장주가 권세가인 경우 권력을 믿고 주변의  토지를 강탈하며 인근 농민들에게 강제로 농장 일을 하도록 하였으며 심지어는 쌀이나 포로 고리대를 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염흥방의 노비인 이광은  주인의 권력을 믿고 전 밀직부사였던 조반의 땅을 빼앗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또 이들 장주를  통괄하는 상급관리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토지와 노비문서를 관장하고 농장주가 거주하는  곳으로 곡식을 옮기는 일을  하였다. 귀족관료들은 가신. 가인이,  국왕의 경우에는 조신.  환관이, 그리고 권력기관의  경우는 전전. 상수등이 이 일을  맡았다. 무인집정자 김준은 여러 곳에 농장을  설치하고 가신인 문성주를 전라도에, 지준을  경상도에 보내 관리하게 하였다. 또 충렬왕은 조신을 각도에 파견하여 공사의  좋은 토지를 선택하고 농민들을 모아 경작하도록 하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보허의 예이다. 다음 기록을 살펴 보자.

 

  보허(보우)는 호가 태고인데,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중국 강남에 가서 석옥화상으로부터 의발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미원장에 가서 친척들을 모아 살았다. 보허가 왕에게 말하여  미원을 현으로 승급시켜서 감무를 두었지만, 일체 지휘는 보허  자신이 하고 감무는 단지 드나들 따름이었다. 밭과 들을 넓게 차지하였으며,  온 들에 말을 놓아 먹이면서 이것을  모두 내승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말들이 곡식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어도 사람들이 감히 쫓아내기 못하였다.

  1356년(공민 5)국사인 보허는 양근국에 속해 있던  왕실 장처의 하나인 미원장 소설암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밭과 들을 넓게  차지하여 집안사람들을 모아 살게 하였다. 그런데  그 곳은 인구수나 토지의 양이 현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부탁하여  미원장을 현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국가에서는 당연히 감무를 파견하였는데,  그조차 보허의 눈치를 보느라고  지방수령으로서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당시에는 권력과 농장경영은 밀착되어 있었다.

  농장주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확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농장을 경영하였다. 노비들에게는 집안의 허드렛일과 함께 자기의 농장이 있는 곳에 가서 농사를 짓게 하기도 하였다.  노비를 동원한 농장경영은 노비를 자유롭게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리하였다.  농장주는 노비농민에게 수확의 반과  함께 노주로서의 권리인 노비 신공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토지를 노비농민만으로 경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농장주는 몰락한  양인 농민들과 농장  주변의 농민들에게 토지를 빌려 주고  생산물의 50퍼센트에 해당하는 지대를 받기도 하고,  일정 면적의 토지를 경작한 대가로 자신의 소유토지 일부를  떼어 주기도 하였다. 또 일손이 많이 필요한 경우에는 품을 사서 농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귀족의 본업과 별업

  고려 귀족은 여러 경로를 통해 관료나 승려가  되어,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닦아 온  정치. 사회 사상으로 개경과 지방사회를 이끌어  갔다. 정치. 사회 활동이야말로 이 시기  귀족들이 치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고, 자신의 본업이라 자부할 만한 것이었다. 당연히 귀족들은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을 만한 경제력도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농장이라고 부르는 고려시대의 대토지소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농장을 소유하고 경영하는 것을 본업에  대한 별업으로 간주하였다.   

  별업이라고는 하였지만, 실제로 농장 경영이 귀족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제나 그제나 정치나 사회  활동을 원만하게 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 활동과  농장 경영은 귀족들이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는 요건이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사원의 농지경영과 상업활동

 

  이병희 (목포대 교수)

 

  사원은 승려들이 수행하며  생활하는 공간이자, 신자들이 찾는 장소이다. 불교의 종교행사도 이곳에서 주로 열린다. 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주로 사원의 건물을  보수하거나 증축하는 데, 종교행사를 치루는 데, 승려들을 부양하는 데, 그리고 사회사업을 수행하는 데 사용되었다.

  현재 사원이나 승려는 대부분  생산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 종교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외부로부터 조달한다. 이러한 경비는  주로 신자의 시주, 입장료. 임대료의 수입, 기타 불교행사  때의 수입 등으로 조성된다. 그런데 사원이 경제기반을 마련하는 방법이나 운영하는 형태는 시대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다.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구실을 하고 정치세력의 지원을  받았던 고려시대에도, 사원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든든한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사원의 승려는 생산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 종교생활에 몰두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인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농업이 주요 생산업이고 경제의 핵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사원의 가장 중요한  경제기반은 농지경영이었다. 사원을  이를 통해 농민을 지배하였으며,  획득한 부를 기초로 상업활동이나 고리대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사원의 대토지 경영

  사원의 농지는 시납,  개간, 매득 그리고 국가의  사급 등 다양한 계기에 의해 형성되었다. 고려는 불교사회로 국왕이나 귀족 및  일반 농민들은 불교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토지를 사원에 시납하는 일은 흔하였다. 그런데 토지를 시납할  수 있는 층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왕실이나 중앙의  고관, 지방의 토호가 중심이었다. 농지를 소규모 소유하거나 혹은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이 토지를 시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사원은 또한 매득이나  개간에 의해서도 농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사원은 인력이나 재력 양면에서  우월하며, 소를 소유하고 있는 예가 많았기  때문에 소농민보다 개간을  통해 농지를 확대하는데  유리하였다. 이와 달리  사원은 때때로 권세가 사이에 성행하고 있던 토지의 탈점, 겸병을 통해서도 농지를 확대하였다. 그리고 국가 내지 국왕의 토지 사급을 통해서도 사찰은 농지를 마련하고 확대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렇게 마련한 사원의  농지는 그 규모가 상당하였지만, 일정한 지역  특히 사원 주위에 집중되어 있지는  않았다. 금강산에 위치한 장안사의 경우, 성종 때에 1,050결의 토지가 지급되었는데, 전라도, 양광도, 서해도 일원에 분포하고 있었다. 고종 때 송광사의 토지는 전남 일원에 산재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사원의 농지는 이처럼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생표가 설치된  경우는 예외적으로 토지가 집중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배의 내용에 있어서도 상이하였다. 곧 사원은 장생표내의 농지만이 아니라  산림농민에 대해 배타적인 지배를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예를 통도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통도사에는 국가의 허락을 받아 12개의  장생표가 세워져 있었는데, 장생표 내에는 공사의  다른 토지가 없었으며, 표내의 농지 산림 농민은 통도사의 지배를 받았다.

  사원은 농업생산에 필요한 것들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경작농민에게 그것을 대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현화사, 왕륜사, 석방사는 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소는 사원전의 경작에 사역되었을 것이다. 또한  종자를 대여하여 농민의 영농을 돕기도 하였다.

  사원전을 경작하는 농민은 양인농민. 노비. 하급승려. 등 다양하였다. 사원전을 경작하는 핵심적인 부류는 양인농민이었다. 사원 노비는  사원 소속의 토지를 경작하는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주임무는 아니었다. 송광사의 경우 농지는 240여 결인데 반해 노비는 17명에  불과하여, 그들이 모두 경작할 수는 없었다. 사원노비는 주로 음식을  준비하고 땔나무를 마련하며, 사원의 유지를 위한  여러 가지 잡역에도 동원되었다. 그리고 수공업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사원에 소속된  하급승려가 사원전을 경작하기도  하였다. 그 예는  문종 때에 피역을 꾀하여 사문이 된  자가 경축을 업으로 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고려초 이래 역을 피해 승려가 된 자들이 대개 하급승려로서 사원전을 경작하기도 하였다. 고려 전기에  수원 승도, 재가화상이라 불리는 자들도 이러한 하급승려의 한 부류였다. 재가화상의 모습을<고려도경>은 다음고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정색 깁으로 허리를 묶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차할 집을 자신이 만들며 아내를 얻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도랑을  내고,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들에 모두  종사한다. 또한 변경에 경보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 데 익숙하지는 않으나 자못 씩씩하고 용감하다.

 

  후기에 가면서 토지제도의 문란, 농민의 동요로 출가하는 자도 더욱 늘어갔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  승려가 10만을 상회한다거나 민의 10^3에 이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산업과 유통망을 관장하는 사원

  사원은 다량의 물품  구매자임과 동시에 판매자이기도 하였다.  사원은 건축시의 자재, 불구제작을 위한 재료, 불교행사에  필요한 물품, 승려들의 생필품 가운데 상당한 양을 구매하여 조달하였다. 그리고 사원이 생산한 잉여물품, 가공품을 판매하였다.

  사원이 이렇게 상업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불교의 교리와도  연관이 있다. 불교는 성립할 당시부터 상업활동이나 대부 행위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불교가 인도에서 성립할  당시부터 또 중국에 들어온 후에도, 사원은  그러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불교의 교리 자체가 상업활동이나  고리대에 참여하는 것을 죄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원이 교역활동을 통해 판매하고 있는 품목은  다양하였다. 그중 파와 마늘을 판매한 것이  주목된다. 파나 마늘은  승려가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작물인데도 재배하고 나아가 판매까지  하고 있어 자주 문제시 되었다. 파나  마늘보다는 곡물이 일반적인 교역물이었을 것이다. 사원은 농지경영을  통해 지대나 지세로 곡물을 확보하였는데 소비되고 남는 것은 직접  팔거나 가공하여 판매하였다. 곡물이 가공되어 판매된 사례로 술을 들 수 있다. 현종 때 경기도 양주의 장의사, 삼천사, 청연사 등의  승려들이 금령을 어기고 양조한 쌀이 360여  석에 이르러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사원은 수공업제품의 생산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원은 불상이나 불구의 제작을  위해 목공과 금속가공 기술자를 다수 거느리고  있었다. 전영보는 제석원의 노비로서 금박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충렬왕 때의 어떤 비구니는 직조기술이 뛰어난 여자노비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기와를 훌륭하게 구워 만드는 육연이라는  승려도 있었다. 이들이 생산한 물품은 자체  소비하고 남을 경우 판매하였을 것이다. 때로는 판매를  겨냥하고 생산하는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사원이 판매해서 잉여를  축적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는  염분이었다. 소금은 생필품이기 때문에 이것을 판매하여 부를 증대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사원은 기름과 벌꿀을 생산 판매하기도 하였다.

  사원은 이처럼 물품을 판매하는  것만 아니라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도 하였다. 정혜사에서는  쌀이 떨어져가자 구입을  논의하였고, 흥왕사에서는 흥교원을 중수하면서 재목을  구입하였다. 그 밖에도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일은 흔히 있었다. 이처럼 사원은 잉여생산물의 판매와 필요한  물품의 구매를 통해서 상업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사원은 교역의 중요한 장소였다. 불교행사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으며, 상호간에  자연스럽게 교역이 이루어졌다. 예컨대  전주의 보광사 낙성회 때 모인 대중이 3천 명에 달하는데 그 행사가  50일간 지속하였다. 이 때에 모인 사람 사이에 교역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개경의 팔관회 행사에는  외국 상인까지 참여해서 물품을 거래하였다.

  지방 사찰이 개경의 거래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금강산 장안사가 개경에 점포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 곳을 통해 수취한 물품이나 교역에서 확보한 물품을 처분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조당하였다.

  사원은 공물납부와 관련해서도  상행위를 하였다. 대납이 그것이다. 이는 국가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또한  사원은 중국에서 경전이나 단청 원료를 구입하기 위해서 국제교역에 종사하였다.

  교역에는 원거리수송도 있었는데 이 때에는 말이  필요하였다. 사원이 말을 가지고 있거나  승려가 말을 타고 다니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도로가  좁기 때문에 수레는  적합하지 않았다. 또  운송수단으로는 소보다 말이 적합하여  널리 활용되었다. 말에 짐을  싣는 방식은 두 개의  용기를 말등 좌우에 걸쳐 놓고 그 속에 물건을 넣는 것이었다.

 

  휴게소 역할의 원 운영

  승려들은 원거리 교역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개  하루만에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없어서 숙박을 해야 했다.  이에 사원이나 승려들은 원이라는 독특한 숙박시설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원은 사람의 통행이  많지만 거주지역과는 떨어져 있어 맹수가  나타나거나 도적이 출몰하기 쉬운 곳에 세웠다.  원을 활용하여 피곤한 사람은  쉬어가고, 자야 할 사람은 자고, 비를  피하고 그늘을 얻고, 도둑의 근심을 덜고 짐승의 해를 없앨 수  있었다. 원에서는 숙박은 물론 음식과 우마의 꼴을 제공하였다.  불교계는 원을 관장함으로써 고려사회의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었다. 원을 중심으로 한 고려의 유통망은  조선 건국 후 국가가 장악하였다.

 

  사원이 하는 대부활동

  사원의 농지경영을 통해 확보한 잉여물이 양식이나 종자로 농민에게 대부되기도 하였다. 당시  농민은 부족한 양식과 종자를 빌리곤 하였다.  농민이 홍수. 가뭄. 병충해 등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의창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사원의 미곡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빈민구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사원의 미곡대부에는  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원은  대부행위를 통해서 농민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원에서 운영하는 고리대의 규모는 상당하여서, 보통  수백에서 수천 석에 달했는데, 송광사는 만여 석을  11개 말사를 통해 운영하였다. 최우의 아들 만종과 만전은 승려로서 무려 50여 만석이나 되는  고리대를 운영하였다. 이러한 고리대는 보라는  이름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보는  존본취식, 즉 본전은  두고 이자만 가지고 특정 용도에  사용하기 위한 기금이었다. 불법을 배우는 것을  돕기 위한 광학보, 종의  유지를 위한 금종보, 그리고  부모의 제사비용을 위한 부모기일보 등 다양한 명목의 보가 있었다.

  법정 이자율은 연간 3^34^1로 쌀 15두에 5두, 포  15필에 5필이었다. 그런데 사원과 농민 사이에는 경제적  예속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속인이 운영하는 고리대보다 고율이  되는 수도 있었으며,  강제성마저 띠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예컨대  명종 때 어떤 승려는  질이 나쁜 종이와 포를  강제로 백성에게 떠맡겨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만종과 만전도 50여 만석을 대여한  후 재촉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남은  곡식이 없어 국가에 조세를 바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리대를 통해서 사찰이나 승려가  백성의 잉여물을 철저히 흡수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양인농민의 고리대를 갚지  못해 이자가 계속 늘어갈 경우, 토지나  노비를 팔아 변제하거나 처자를 팔아서 해결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도망가거나 노비가 되었다. 송광사 주지인  진각국사 혜심은 지나친 고리대 행위로 인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한 자가  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고리대 자체를 죄악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탈법적인  고율의 고리대를 문제삼았을 뿐이었다.

 

  경제력에 바탕한 사회적 영향력

  사찰은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불상과 불탑을 조성하였고, 화려한 불화를 남길 수 있었다. 또한 승려들은 생산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종교적 수행에 몰두할 수 있었다.

  사원과 승려는 백성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위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외침이   있을 때 크게 활약할 수 있었다. 거란 침입을 막는 데 승려들의 활약이 컸고, 여진정벌시에는 별무반의 항마군으로 참전하였다. 또 몽고와의  항쟁 때는 승려 출신 김윤후가 몽고 장수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역사상 이런 사례는 허다하다.

  그러나 모든 사찰의  경제기반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규모가 작고  낮은 신분출신의 승려가 거차하는  사찰은 사정이 달랐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직조와 농경에 종사하였으며, 직접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처자를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는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사원이나 그 소속 승려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사원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사원의 경제력은 크게 축소되었고, 승려의 지위나 사회적 영향력도 크게 위축되었다.

 

 

고려시대 권력형 비리의 결정판 ‘영흥방 토지탈점 사건’

  한정수

  우왕 때의 최대 토지탈점 의혹?

 

  우왕 14년 정월 초하루, 고려 조정을 발칵 뒤집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순군 상만호 염흥방의 급보에 따르면  밀직사의 고위관료였던 조반이 반란을 일으켜 개경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시 조정에서는 조반의 체포명령을 내렸다. 도대체 백주에서 토지를 마련하여  농장을 가꾸며 나름대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던 조반이 왜 이렇게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먼길을 달려 개경으로 들어오려 하였을까? 정말로 그는  역모를 꾀하기 위하여 고작 5, 6명  정도의 인원을 데리고 들어왔을까?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의문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조반이 염흥방의 가노인  이광과의 토지 분쟁 끝에 그를 죽이고 이를 해명하려고 개경에 급히 입성하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염흥방은 그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가노들이 저지른 토지탈점으로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지위를 이용하여 오히려 조반에게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 사실 가노들을  이용하여 토지를 빼앗는 일은 당시  권세가의 토지집적 수단이었고, 이를 수행한 가노들  및 그들에게 줄이 닿는  이들은 주인의 세력을 믿고  전직 고위관료나 현직 지방관조차 무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조반 역모 사건’이었다. 특히 이 사건이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조반이 밀직사라는 고위 관료출신이었고 그것을 빼앗다가 조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광은 염흥방의 가노라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건에 은폐되어 있는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

 

  염흥방이 조반의 토지를 빼앗은 까닭은?

  염흥방은 본래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아들로 명문대가의 촉망받는  인재였다. 공민왕 때 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학식이 뛰어나 문집인 <동정집>을 남기기도 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정3품의 밀직사 좌대언까지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그 동안 그는 국학의 재원확보를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우왕 때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면서 외교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 뒤 그는 밀직제학까지 승진하였다.

  그렇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인지라 자신의 능력과 집안의 후광을 갖고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우왕 2년(1376) 순탄하게 승진을 거듭해왔던 그도 한 차례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간관인 이첨과 전백영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던 이인임과 지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염흥방이 연루되어  이인임을 모해한 혐의로 귀양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염흥방은  가문의 위세로 풀려날 수 있었지만 여기서  그는 심경의 변화를 겪은 듯하다. 아무리 자신이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도 자신의 의지대로 관료생활을 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살아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곤 귀양살이라 몹시 억울하다고 생각하였다.

  곧 귀양에서 풀려난 그는  임견미, 이인임 등과 어울리면서 뇌물 수뢰와 청탁, 권력형 부정축재 등 관리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자행하였고 이제 그런 그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악행에 대한 도덕적  각성이 무뎌지면 아무리 부정한 일을 한들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고 또 그렇게  행하기가 십상이다. 이러한 행적은 치명적인  정치적 결함이 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아버지인 염제신이 세웠던 모든  공로를 무너뜨리고 가문의 문을 닫게 만들었으니,  최상의 위치에서 최악의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차츰 썩은 권력의  냄새에 취한 염흥방은 경쟁하듯 재화를 축적해  나갔다. 모든 상황은 그를  더욱 부추기는 듯하였다. 해바라기성 관료와 뇌물로  얻고자 문 앞에 줄  선 사람들, 유죄를 무죄로  바꾸기 위해 청탁하는 이들이  권력의 맛을 더욱 달콤하게 하였다.가령 평소에 유능한 관리라는  칭잔을 받았던 배원룡이 염흥방에게 아부하여 계림부윤이 되어서  백성의 재물을 긁어 모으고 심지어 쇠스랑까지 실어  고향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철문어부윤’이라고 불렀다. 문어와 쇠스랑의 형상이 비슷해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염흥방의 이러한  행태는 비단 그  자신만에 그치지 않았다.그의  가노들이 더 위세를 부렸다. 염흥방과 그의 동모형인 최렴의  가노들이 부평에 거주하면서 주인들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자, 부사 주언방이 아전과 병정을  시켜 그들을 잡게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가노들이 주민 40여 명을 데리고  아전을 구타하여 거의 죽게  만들었다. 이에 주언방이 직접  징집 영장을 가지고 그  장소에 가자 도리어 가노들이 주언방마저 구타하고 데려간 두 명의 하인까지 마구 때려 이빨을 부러뜨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물론  뒤에 이사실이 도당에  보고되자 우왕이 관리를 파견해서 그들을  체포하여 모두 목을 베어 죽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왕이 직접 나서야 했던 것을 보아도 당시 권세가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 알 수 있게 해 준다

  대부분의 권세가도  이와 마찬가지였다.약간의  권력이라도 있고 또  권력가에 줄을 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다른 이들을 핍박하거나 속여서 재산을 늘려 갔다.  그래서 개경과 경기의 땅 중에 그들의  토지가 아닌 것이 없었다.이렇게 되자 열흘의 저축도 없게 될 정도로 국고가 바닥이 났다.

  염흥방은 나날이 늘어가는 권력과 재화에 심취해 이성적으로 판단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배운 모든 경전에서는 이러한  못된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었건만 그는 이 모든 것을 까막득히 잊었다.  그는 언젠가 이부형 이성림과 함께 고향 집에 갔다온 적이  있었는데 그를 따르는 자들이 길을 메웠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이 연극으로 세상  풍자하고 있었는데, 내용은 극악한  권세가의 가노들이 백성들을 약탈하고 조세를  수취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이성림은 부끄러워 했는데 염흥방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좋다고 보기만 하였다.  자신을 풍자하고 있음을 알고 부끄러워 해야 하건만 그는 약에 중독된 듯 그저 즐거워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염흥방 무리의 몰락

  권력의 정점에 선  염흥방이지만 그것의 천년 만년 지속될 수는  없었다. 이제 그의 영화는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우왕 14년이 되자 염흥방과 임견미, 이인임 등이 모두 처형당하거나 실각한 것이다. 여기서 조반사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왕 13년 무렵 염흥방의 가노  이광이 전 밀직부사 조반이 소유한 백주의 전토를 강탈하자, 조반은  그래도 전일에 안면이 있던 염흥방에게 돌려줄  것을 청하게 되었다. 염흥방은 일단 가노가 저지른 일이고  또 조반과의 안면도 있어 그 땅을 반환해 주었다.  그렇지만 주인의 권력을 믿고 주인보다 더한  세력을 부리고 있던 가노 이광은 다시 그 땅을  강탈하고 조반을 능욕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조반은 차마 가노인  이광과 시비를 가리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았다.  자신은 정 3품의 밀직제학의 지위에까지 올랐었는데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토지도 자신이 그  동안 모은 봉록과 이래저래 저축한 돈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어찌보면 당시의  관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도  관향에 조그만한 농장을 마련하여 근거지로 삼으려 하였던 것이다.

  조반은 할 수 없이 이광을 방문하고 사리를  들어 그 반환을 간곡히 청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광은 거만을 부리면서 더욱 포학하게 굴었고 이는 결국 참화를 불러왔다. 자신의 입장과 지위가 있는 만큼  조반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수십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포위한 후 이광을 죽이고  그 집을 불질렀다. 홧김에 했지만 일이  벌어진 후 그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상대는  최고의 권력가인 염흥방이 아닌가. 그는  곧바로 염흥방에게 그 사유를 말하려고 말을  달려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그 소식과 함께 조반이 기병들과 함께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염흥방은 크게 노하여 조반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그를 체포케 하였다.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것은  가장 큰 죄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심문을 맡은 이들은 소송  대상자인 염흥방과 임견미의 족당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하니 그 심문 결과야 보나마나였다. 이 때 조반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당시 있었던 부정과 부패,  그리고 그 가노들의 횡포가 잘 나타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6~7명의 탐욕스런 재상들이 가노를 사방으로 보내어 타인의 땅을 강탈하고 백성을 잔인하게 짓밟고  있으니 이것은 대적이다. 내가 이번에 이광을  죽인 것은 오직 나라에 도움을  주고 백성의 도적을 제거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염흥방은 그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참혹한 고문을 가하였지만 조반은 입이 찢기는 형을 당하여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반의 억울한 옥사에 대한 전말을 들어 그 사정을 알고 있던 우왕은 곧 염흥방 무리에 대한 조사를 거쳐 최영과 더불어  그 처리를 논의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 동안  그들은 가노를 시켜 수정목(물푸레나무)으로  토지소유자들을 고문하여 그 토지를  강탈하는 일도 있었다.  사람들이 이를 ‘수정목  공문’이라 부르며 조롱하였다. 마침내 우왕은  국가의 군사력을 잡고 있던 최영을 통해  이들을 처벌하고자 염흥방을  순군에 가두고 곧  임견미 등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임견미는 왕명을 거부하고 도당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함께 반란을 도모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군사들이  모든 통로를 차단한 뒤였다. 드디어 정권의  향방이 바뀌는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염흥방 무리와 그 처자, 가노들을 처벌하거나 사형에 처하였고, 재산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농장들을 모두 나라에 귀속시켰다. 이로써 정국은 일단락되었다.  이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렇게 정권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매관 매직하면서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으니 온 산과 들이 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노비를 강탈하니 천백이나 되는 무리가 그러하였다. 심지어는 능침과 궁고, 주현과 전역의 토지에 이르기까지 그들에 의해 점거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주인을 배반한 노비들과 부역을 기피한 백성들이 모여드는 것이 연못이나  늪과 같았는데 안렴사와 수령들이 감히 징발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흩어져 도적이 되었고 공사의  재물이 고갈되니 중외에서 이를 갈았다. 최영과 태조(이성계)가 그 소행을 분하게 여겨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우왕을 도와  그들을 제거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도로에 나와 노래하면 춤을 추었다.

 

  고려말 토지개혁의 방향

  우왕 14년에 벌어진 조반 옥사 사건은 결국 염흥방의 토지탈점과 이를 은폐하려는 기도 때문에  발생하였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당시  집권층들의 부와 권력의 축적 수단이  이러한 문어발식의 토지의 탈점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바로 권력형 비리의  한 형태로 보여지는 것이며,이 형태가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점이다.<고려사>에서는  이를 “근년에 이르러서는 겸병이  더욱 심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주를 넘고 군을 포괄하면서 산천을 경계로 삼고 모두 가리켜 조업지전이라고 하고는  서로 훔치고 빼앗으니 1무의 주인이  5,6명을 넘으며 한해의 조세가 수확의 8,9에 이르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탈점의 구체적인 방법은 사급전의 사칭, 불법적 탈점, 정상가격을 무시한 강압적인 매매,  권력가에 대한 토지의 기탁,  토지문서의 허위기재 등을  통한 점유, 지방 수령 및 아전들과 결탁하거나 자신들의 가노를 동원하여 전토를 빼앗는 경우 등 매우 다양하였다.

  이를 통하여 산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의 농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권세가의 강력한 전치권력을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도덕적  각성과 철저한 사정 및 처벌이 요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토지제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토지제도를 개혁하려는 노력은 있었다.  몽고와의 전쟁 이후 불법적인 토지소유에  대한 처벌 등이  추진되었고, 공민왕 때도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만일 이 개혁이 온전하게  추진되어 토지제도의 개혁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시점에서 염흥방 같은 권세가의 힘이 서서히 대두하여 개혁의 물줄기를 바꾸고, 더 나아가  토지탈점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결국 권력을 매개로 행해진 불법적인 사전과 농장의  확대는 바로 고려식 권력형 비리의 결정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고려도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조반사건을 전후하여 사전 개혁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력형 비리의 주역들은 몰락하고 개혁세력들이  득세하였다. 이들의 주도하에 과전법이 수립되면서, 고려왕조는 망하고 마침내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바다를 건너온 보따리 장사부대

 

  이종서(서울대 박사과정) 

 

  옛날에 중국 상인단의 두목(두강)으로 하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둑을 잘 두었는데, 고려의  예성강에 이르러 한 아름다운 부인을 만났다. 하두강은 그녀의 남편에게 내기바둑을 걸어 일부러 지고는  다시 두 곱을 걸었다. 남편은 입맛을 붙이고 부인을 걸었다. 하두강은 단번에  이기고 부인을 배에 싣고 갔다. 남편은 후회하고 한탄하면서 노래를 지었다.

  한편, 그 부인은  옷 매무새를 견고하게 하였으므로 하두강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인을 실은  배가 바다에 들어섰을 때, 뱃머리가 돌고  가지 않았다. 점을 치니 `정절 있는  부인이 신명을 감동시켰다. 돌려보내지 않으면 파선하리라`는 점괘가 나와 두려워 돌려보냈다. 부인 역시  노래를 지었는데 후편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사>의 편찬자는 ‘예성강곡’이라는 노래가 세상에 불리게된 사연을 알리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을 다른 면에서 보면 중국 상인이 고려에 와서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무역선의 최종  정박지는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였다.  이규보는 “조수가 들고 나니 오가는 배는  머리와 꼬리가 잇대었어라. 아침에 이 다락(예성강루)밑을 지나면 한낮이 채 못되어  남만(남방의 이국)의 하늘에 들어 가는구나”라고 노래할 정도로 벽란도는 번창했다. 이들  벽란도에 정박한 무역선은 어떠한 위험을 겪으며 고려에 왔을까? 선주와 상인들은 대개 어느 나라 사람있을까? 무엇을 팔고 무엇을 사 갔을까?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

  고려시대에 바다에서 배를 추진시키는 기구는 노와 돛뿐이었는데 노는 근해의 짧은 거리나 좁은 해협을 항해하는 데는 유용하였다.  그러나 속도가 느려 먼 거리를 가기에는 무리였고, 역풍이라도 불면 무용지물이 되었다. 상선은 온전히 돛에 의지하여 먼 거리를  항해하였다. 그리고 돛을 빌어 배를 가게  하는 것은 계절에 따라 한편으로만 부는 계절풍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오는 무역선들은 주로  절강성의 명주(현재의 닝뽀)에서 출발하여 연해를 따라 북상하다가 정동으로 방향을 잡아  우리 나라 흑산도를 경유, 예성강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올 때는 남서풍을 타고, 갈 때는 북동풍을 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월별 평균 풍향을 보면,  겨울(12- 2월)에는 북서풍이 많이 불고, 여름(6- 8월)에는 남동풍과  남서풍이 많이 분다. 그리고 봄과 가을에는 풍향의 변화가 몹시 심하다.  이 때문에 정확히 일치하는 바람을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당시 사람들은 선박 건조술과 항해술로 해결하였으니,  여덟 방향의 바람 가운데 정면에서 부는  역풍만 아니면 원하는 대로 갈  수 있었다. 이해를 위하여 고려 전기  송나라 사신을 따라 왔던 무역선 한 척을 기록대로 복원해 보자.

  길이는 대략  30여미터이고 깊이는 9미터,  너비 5. 5미터이다.  위는 평평하고 아래는 V자형으로 가파르게 좁아들었다.  이렇게 하면 밑이 넓은 배보다 심하게 흔들리는 대신 쉽게 전복되지  않아 큰 물결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돛대는 둘인데 앞의 것은 24미터, 뒤의 것은 30미터이다. 돛의 너비는 50폭으로 양 옆에는 풀로 짠 날개 모양의 돛인 뜸을 별도로  두었다. 큰 돛대 꼭대기에는 야호범이라는 풍향 조절용의  작은 돛을 달았다. 야호범이란 이름은 들여우와  같이 조화가 많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뱃머리(이물) 양 기둥 사이의 바퀴에는 약 150미터 길이의 닻줄을 감았다. 선미(고물)에는 중심키 하나와  보조키 셋을 달았다. 그리고 양쪽에 5개씩 노 10개를 정착하였다. 쌀  2천가마를 실을 수 있고 승선인원은 모두 60명이다. 이 배는 다른 배들에 비해 특별히 큰것이 아니다.

  상인들은 바람이 바로 뒤에서 불면 고정 돛을  높이 올렸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흔히 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양 옆의 뜸을  펼쳐 이리 저리 움직여 방향을 잡았다. 뜸과 키를  이용하면 비록 옆에서 부는 바람을 타더라도  갈지자를 그리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너무 강하거나 약하면 야호범을 조정하여 속도를 조절하였다.  역풍이 불거나 돌풍에 밀리게 되면 돛과  뜸을 황급히 내리고 닻을 던져 배를 고정시켰다. 조류가  급히 흘러 배가 밀리거나 암초사이를 지날  때는 온 선원들이 노에  매달려 정확하게 길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송나라 명주에서 출발한 배들은 대력  10일에서 20일이면 고려에 짐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계절풍이 돕고 항해술이  발달했다 해도 그것이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했다.봄 가을 기압이  바뀔 때면 느닷없이 돌풍이 일었고 여름에는  태풍이 엄습하여 돛대를 부러뜨리거나 배를 한쪽으로 급하게  기울였다. 거기에다 큰 물결이 일어 배를 쳐  전복시켰다. 또한 겨울 바람은 지나치게 거세어  항로를 바로잡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에 따라 많은  배들이 물속에 가라앉거나 남방으로 떠밀렸다. 사신을 실은 배조차 상당수 파선하여 국가  예물을 잃은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익사했다. 고려말 정몽주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가 깨어져 표류하다 간신히  구원되었는데, 이 때 10명의  사절단 가운데 겨우  2명만이 살아 남았다.  

  좋은 장비를 갖추고 특별히 경험 많은 선원들을 채용했을 사절단의 배가 종종 난파했을 정도이니  그보다 낡고 규모가  작은 상인들의 배는  더욱 위험하였다. 따라서 상인들은  반드시 좋은 바람을  기다려 출항하였는데, 올때는  대개 하지 무렵부터 부는 부드러운 북풍을 타고,  갈 때는 음력 8, 9월 무렵의 아직 거세지지 않은 남풍을 탔다. 그러나 때로는 해가  바뀌도록 알맞은 바람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갈 때가 올 때보다 어려움이 심하였다. 가을에는 바람이 변덕스러워, 바다로 나갔다가도  역풍에 떠밀려 되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하두강도 바로 이 역풍에  곤욕을 치렀다고 짐작된다. 결국 2년 혹은  3년이 되도록 돌아가지 못하여 끝내는 고려에서 부인을 얻고 자식까지 두는 상인도 있었다.

 

  황해를 가로질러

  송나라에서 오는 항로로는 우선  산뚱반도 북단의 등주를 떠나 동쪽으로 황해도 북부에 이른 다음 장산곶을 돌아 예성강으로  들어오는 북로가 있었다. 이 길은 거리도 짧고  큰 위험도 없었으며 비록  난파하더라도 어쨌든 해안에 도착할 확률이 컸다. 다만  장산곶을 돌 때, 물결이  급하여 파선할 위험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북로로  가는 배들은 장산곶 부근에 이르면 용왕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 곳이 곧 심청이 공양미 300석에 몸을 던진 인당수이다.

  이렇듯 좋은 항해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왕래하는 배들은 점차 줄어 들었다. 대신 남로의 교통이 활발해졌다. 거란,  여진 등 송나라에 적대적인 북방민족이 중국 북쪽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로를 이용하면 자칫 그 경내로 들어갈 위험이 컸다.

  한편 송나라에서는 강남 개발이 진척되어 중요한 물산은 대개 그 곳에서 산출되었다. 동남아시아나 인도, 아라비아의 물품을 실은 배들도 강남의 항구들에 기착하였다. 따라서 고려에 오는 상선들은 대개  강남에서 물품을 싣고 출발하였으니, 출발지로는 명주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 길은 북로에 비해 거리가  배나 되었다. 바다 또한 위험하였다.

  서해는 깊이와 바닥의  구성물질, 해류에 실린 먼지 등으로 여러  가지 빛깔을 나타낸다. 선원들은 바다  빛깔을 보고 출항지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짚어낼 수 있었다. 명주에서 출발한 배는 백수양에서 황수양, 흑수양의 순으로 바다를 지났다.

  백수양은 양쯔강의 앞바다로 희뿌연 민물이 다량 흘러들고 수심이 얕아 흰 빛을 띠었다. 중국에 가는  배는 바다 빛깔이 희게 변하면 목적지에  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수양은 누런 빛을 띠는 데서 얻은 이름이다.  서해를 보통 황해라 하는 것은 이 황수양으로 서해를 대표하는 것이다. 몽고  고비사막에서 봄날이면 강한 서풍이 불어 황토 먼지(황사)를  날리는데 그것이 두텁게 쌓인 대지 위로  황하가 흘러 이렇게 된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일이 지나도 되지 않을 일을 `백년하청`이라 하는 것은 황하의 물 빛깔이 결코맑게 될 수 없음을 빗댄 말이다.

  이 바다에 이르면  선원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어야 했다. 이는  물빛이 사람을 현혹시켜서가 아니라 바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황하에서 유입된 많은 토사는 물줄기를 따라  천여 리를 흘러 내리다가  마지막에 군데군데 모래 언덕을 높이 쌓아 놓았다. 그런데 물빛이 누렇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다.

  배가 이 위를 스쳐 키가 부러지는 것은 그래도 다행이었다. 및창이 V자형으로 좁아든 형태였으므로 얹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곧  전복될 판이었다. 그래서 황수양을 지날  때면 추를 드리워 깊이를  재면서 조심조심 나가야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여행기에는, “배가 갑자기 모래톱 위로  올라가기에 엉겹결에 돛을 내렸더니 돛대가 두  동강이 났다”,“낮에 세 개의 보조키가 부러졌고  밤에 중심키가 또 부러졌다”는 등의 기록이  있어, 이 곳의 위험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어려운 황수양을  지나면 이번에는 바다가 점점 검은 빛을  띠게 된다. 이는 깊이가 깊어지면서 햇빛이 투과하지 못하여 생긴 현상인데 깊은 만큼 파도 또한 높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 바다를 끝이 없다는 뜻에서  ‘무저곡’이라 불렀다.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이 곳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 물빛은 어둠이 깊이 파고들어 검기가 먹과  같다. 졸지에 그것을 보면 정신과 담력을 다  잃는다. 성난 파도가 내뿜고  닥치는 것이 산들이 치솟는 듯하다.

배가 파도 위로 오르면 바다가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오직 하늘의 해가 밝고 쾌청할 뿐이다. 그러다  우묵한 파도 밑으로 내려가게 되면 파도의  높이가 하늘을 가려,위장이 뒤집히고 헐떡이는 숨만 남는다. 쓰러져 토악질을 하며 밥알이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흑수양을 거의 지나면 물빛이  차차 맑고 푸른 빛을 띠게 된다.  이 바다에 이르면 뱃사람들은 그간의 위험에서 벗어났음을 축하하고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맑고 푸른 물빛은  고려에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기 때문이었다. 대개 흑산도 부근의 바다가 이에 해당하는데, 현재에도 인천  앞바다의 누런 물빛이 만리포나 변산에 이르면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선은 흑산도를 스쳐 군산도(군산은 조선말까지만 해도 섬이었다)에 이른 다음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왔다. 도중에 태안반도 부근의 사나운  조류만 조심하면 이제 벽란도에 도착한 것이나 진배 없었다.

 

  뛰어난 조선술, 빈약한 해외진출

  고려와 송나라 간의  무역품은 주로 송나라 상인들이 실어 날랐다.  이들은 중국과 남방의 물화를 싣고  와 고려의 물건과 교역해 갔다. 물론  고려 상인도 중국에 진출하였고, 일본 상인도 가끔 드나들었지만, 송나라 상인의 활동에 비하면 미약하였다.

  그렇다고 고려의 선박건조기술이  송나라에 뒤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배는 이미 통일신라 때부터 튼튼하기로 해외에 정평이 나 있었다. 고려 후기 고려. 원 연합군이 일본정벌에 나섰다가 돌풍을 만났을 때에도,  중국 배는 다 부서졌지만 고려의 배만은 온전하였다.  이처럼 뛰어난 조선술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무역을 주도하지 못한 원인은 주로 국내의 시장 규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려는 값비싼 물화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  아니었다. 또한 고려에서 소비하는 해외의 산물은 대개  지배층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치품에 국한되었다. 이 때문에 고려에는 대규모 선단을 운영할  정도의 상업자본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송나라에서는 재정안을  타개하는 방편으로 대외무역을 장려하였으며, 상업자본도 급속히 성장하였다.  조선술이 뛰어난데다 나침반의 발명  등으로 항해술 또한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앞시기에 아라비아 상인들이  인도와 동남아의 물품을 실어 날랐던 것과  달리 이제는 송나라의 선단이 멀리 인도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와 송나라간의 무역은 주로  송나라 상인의 손을 빌어 이루어졌다. 이들의 방문 기록을 통계로 보면 260여년  동안 약 130여회에 걸쳐 총인원 5천명 정도가  내왕하였다. 남아 있는 기록이 이 정도이니  기록에 빠진 것과 밀무역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이처럼 송나라 상인이 대부분인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상인단이 고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식국 상인들이 바로 이들이다. 대식국은 아라비아를 일컫는 이름으로 1024년(현종 15)과 이듬해, 그리고 1040년(정종  6)에 와서 열대 특산의 몰약, 베트남 남부지방의  향료, 수은 등을 바쳤다. 이들의 방문은  세 차례에 그쳤는데, 이는 이익이 작아  굳이 내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들은 송나라 상인의 중계로 고려 물품을  계속 사갔고, 이러한 과정에서 ‘코리아’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비단장수 왕서방과 고려인삼

  벽란도에 도착한 상인들은  대개 사헌무역의 방식으로 물화를  교환하였다. 사헌무역이란 물건을 왕에게 바치면 왕은 대가를  사여해 주는 교역방식이다. 고려에서는 외국 상인을 일종의 사적인 사절단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지고 온 것을 모두 바치는 것은 아니었다. 궁중이나  관에서 필요로 하는 좋은 물품만 바치고 나머지는 시장을 열어 팔도록 하였으므로 민간인도 해외의 물품을 살 수 있었다.

  송나라 상인이 가져온 물품을 대금으로 환산하면,  비단류가 가장 많은 액수를 차지할 것이다.  당시 송나라의 수출품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단과 자기였다. 그러나 고려는 중국에 뒤지지 않는 고려청자를 만들었던 만큼 자기 수입은 소량에 그치고 주로 비단을 수입하였다. 재수 없는  어느 송나라 상인은 비단을 무려 6천여 필이나 고려 관청에 떼였으니  한 번에 얼마나 많은 양을 싣고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단 다음으로는 차와 약재를 들 수 있다.  고려는 불교의 영향으로 차 마시는 풍습이 귀족과 승려간에 퍼졌으므로 양질의 중국차를  많이 수입하였다. 또한 중국 의서에 따라  약을 처방했으므로 중국 및 남방의 약재를  수입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문종이 중풍에 걸려 송나라에 약재를  요청했을 때, 100여 가지를 보내온 사례를 볼 수 있다.

  서적 또한 중요한  수입품이었다. 고려 지배층은 문화적  욕구에서 송나라에서 펴낸 책들을  적극적으로 구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잡음이 일었다. 고려인은 송나라에서 유출이  금지된 지도와 지리서까지 사오려  하였으며, 송나라 상인들은 우방국 고려에 판다는  명목으로 책을 싣고는 슬쩍 북방의 적국 요나라로 들어가  10배의 이익을 챙겼던  것이다. 서적을 둘러싸고  국제 정보전이 벌어졌던 셈이다.  악기와 음악도 수입되어  고려의 음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다양한 상품들이 수입되었다.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만도 향료, 향목, 칠기, 남방의 과일, 물소뿔, 상아, 비취, 마노, 수정, 호박등  다양하다. 재상가에서 기르던 공작도 여기에 추가될 것이며 앵무새를 가져왔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그러면 고려에서는 무엇으로  이들 물화를 사들였을까? 당시 국내에서는 화폐가 활발하게 유통되지  않았으므로 물품으로 대금을 지급하였다.  일종의 구상무역이었다. 이 때 가장 많이 나간 것은 삼베와 인삼이었다. 삼베는 국내에서 화폐 대용으로 사용한 품목인 만큼 매우 많이 생산되었다.  특히 모시는 질이 좋아 한 번에 몇만 필 단위로 수출되었다. 인삼은 중국에서 가장 오랜 약초서인(신농본초경)에 이미 상품의 약재로 정평이 나서 송나라 상인에게 큰 이익을 남겨 주었다.

  종이, 먹  등도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고려의  종이는 매우 질긴데다 백옥같이 희고 윤이 나 최상품으로 간주되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좋은 종이를 평할 때 “고려 종이 같다”고 할 정도였다. 먹도 많이  수출하였는데 종이와 달리 큰 호평은 받지 못하였다. 색은  칙흑같이 검으나 광택이 없기 때문이었다. 소동파는 “고려먹을 가는 것은  숯을 가는 것 같다”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고려먹은 입자가 미세하고 색이  검은 장점이 있어, 중국먹과 혼합하면 좋은  먹이 되었으므로 수출이 끊이지  않았다. 수출품 명단에서는  이밖에도 잣, 연적,  자수정, 돗자리, 칠, 부채, 나전칠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귀족의 사치품 수입과 금. 은의 유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고려는 무역수지면에서 적자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에서는 발달한 문화와 값비싼 사치품을 주로  수입한 반면, 수출품은 인삼을 제외하면 별로 고가품이라  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수출로  수입을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따라  국제 거래에서 화폐로 대용하던 금, 은 등의 귀금속으로 적자분을 메워야 했다. 국내의 재화가  송나라로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상당량의 금. 은을 비축했던 것 같다. 문종 때 흥왕사에 세운 금탑은 무려 427근의  은으로 속을 대고 금 144근으로 겉을  입혔다. 한 근이 600그램이니,  은이 256.2킬로그램, 금이  86.4킬로그램에 이르는 막대한 양이다. 또 몽고의 1차 침입 때, 그들을 달래려고 보낸 금과 은이 각각 140여 근과 3천4백여근이었다. 정부에서는 금  수백 킬로그램과 은 수천 킬로그램  정도는 늘 확보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금. 은은 거의가 백성에게서 거둔 것이었다. 공물의 양을 정한 규정 가운데 ‘황금10량, 은 2근’이라는  기록이 있고, 금과 은이 나는 고장은 특별히 관리하여 별도로 많은 수량을  수취하였다. 고려 지배층은 백성들이 애써 바친 금. 은으로 그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적자분을 메워 나갈 수 있었던 이면에는 ‘신분별 소비 제한’이라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일례로 최승로의 주장을 들어 보자. 그는 “신라 때는 귀천의 구별을 위해 백성이 중국산 비단을 입는 것을 금지하였으므로 관리들이 충분히 입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귀천을 막론하고 재력만  있으면 중국 비단을 입으니, 가난하면 비록  벼슬이 높아도 갖출 수 없습니다. 관리들만 중국비단을 입게 하고 평민은 거친 국산  명주만 허락합시다”라고 건의하였다. 아마도 고려에 들어와서는 소비에 제한을  두지 않아 수입비단 값이 꽤나 올랐던 모양이다. 그는 신분간의  귀천을 밝힌다는 명분하에 피지배층의  소비를 규제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고려시대 돈 이야기

 

  최연식(서울대 강사)

  우리 나라 최초의 돈, 고려 동전

 

  현물화폐가 아닌 순수화폐로서 우리  나라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의 동전이다. 삼국시대나 그 이전의 유적에서 명도전이나  오수전과 같은 중국의 동전들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던 지역 혹은  중국과 교역하던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유통된 것일 뿐 우리 나라 자체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화폐가  사용된 사실은 물론  당시 경제상황의 커다란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와 아울러 문화. 사상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동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비록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같은 비중은 아니지만 ‘돈’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기능은 전근대사회에서도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의 동전에는  ‘동국통보’,‘동국중보’,‘삼한통보’,‘삼한중보’, ‘해동통보’,‘해동중보’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름만 다를뿐 형태와 크기는 거의 동일하였다. 고려의 동전은 명칭과 형태,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의 동전을 모델로 하였다. 중국은 이미  천 년 이상 동전을 사용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고려와 활발한 무역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려가 새롭게 화폐경제를 수립하려 할 때  쉽게 모범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 동전의 형태와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동전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 최초의 동전은 춘추전국시대에 나타났다. 이  시기는 각 국이 부국강병을 위해 상업장려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가운데 동전이 출현하였다. 당시 최고의 부국이던  산동지방의 제는 포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도전과 포전은 당시에 사용하던,  구리로 만든 칼과 쟁기를 일정한 규격으로  통일시킨 것으로 화폐와  생활용구의 기능을 겸하던  반 순수화폐였다. 더욱이  크기가 커서 소액의 거래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 후 경제적  발달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일상  경제생활에도 사용할 수 있는 소규모의 동전이 나타났다. 둥근 형태의 이 동전은  원래 둥근 구멍을 가지고 있었는데, 진시황에  의해 통일제국의 법정화폐가  되면서 원형방공으로 바뀌었다. 둥근 외형과 네모  구멍은 각기 하늘과 땅을 상징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동전은 이후 중국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 나아가 중세 일본 화폐의 모델이 되었다.

  진시황 때의 동전은 그 무게가 반량(18. 75그램)이었기 때문에 ‘반량전’으로 불렸는데, 한나라 때에는 무게가 반 이하로  줄어 ‘오수(약7. 8그램)전’이 되었다. 이처럼 동전의 크기가 작아진것은 상업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장에서 필요한 화폐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세계제국으로서  경제적 번성을 구가했던 당나라에서는 동전의 크기가 더욱 줄어 3. 75그램이 되었다. 당나라 이후에도 경제적 번영은 계속되었지만, 그 이상 동전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더 작은 크기의 동전을  만들기도 어려웠으므로, 이제  동전의 크기를 줄이는  것보다 은화나 지폐와 같은 새로운 화폐의 제작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3.  75그램 짜리 동전은 화폐제도뿐 아니라 도량형  특히 중량의 단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원래 고대 중국의 중량단위는  량(37. 5그램)을 기본으로 하여 작은 단위로는 량의 24분의 1인 수(약1. 6그램)가 있고 큰 단위로는 16량(600그램)에 해당하는 근이 있었다. 그런데 3.  75그램 죽 량의 10분의1에 해당하는 동전이 일상화되면서 이  동전 하나의 무게가 독립된 중량단위로 등장하였다. 이 단위는 돈의  무게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전이라고 불렀다. 한편 고액의 거래에서는 동전 천 개를 하나의 줄에 꿰어 사용하였으므로 천 개 꿰미를 관이라고 불렀는데, 그 결과  동전 천개의 무게 즉 3. 75킬로그램을 나타내는 관도 곧 새로운  도량형단위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동전 하나의  무게를 기초로 하여 전(1개),- 량(10개)- 관(1000개)의 10진법  도량형 단위가 자리잡게 되자 량과 관의 중간에 있던 근에도 변화가 생겼다.  즉 기존의 600그램 근과 별도로 10량 즉 동전 100개에 상응하는 375그램도 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고려가 모델로  한 송나라의 동전은  당나라의 동전과 같은  형태였다. 따라서 고려의 동전도 하나의  무게가 3. 75그램이었고, 그  결과 우미 말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3. 75그램의 무게를 가리키는 용어와  화폐를 가리키는 말이 같게 되었다. 한돈의 무게를  갖는 동전이 우리 나라 최초의 화폐였으므로  화폐를 돈이라고 하였는지, 돈 하나의 무게와 같기 때문에 3. 75그램을 돈이라고 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원래  동전 하나를 가리키던 말이  그 동전의 무게와 화폐자체 두가지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물건의 종류에 따라  한근의 중량을 600그램 혹은 375그램으로 다르게 계량하는 것도 동전의 사용과 관련된 현상이다.

  당나라의 동전은 크기뿐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이후 중국 동전의 모델이 되었다. 그 이전의 동전들이 화폐의 앞면에 반량, 오수와 같은 동전의 무게를 새겼던 것과 달리, 중앙정부의 화폐발행권을 더욱 공고히  한 당나라에서는 황제의 연호를 동전의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즉 개원, 건원과 같은 연호에 통보 중보라는 용어를 결합한 개원통보, 건원중보라는 동전의  이름을 구멍의 사방에 새겨넣었다. 통보와 중보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보배라는 뜻으로 해당  연호 기간 중 첫번째로 만든  동전을 통보, 그 후에 추가로 발행한  것을 중보라고 하였다. 고려에서는 연호 대신에 동국이나 해동 삼한  같은 용어를 사용한 중국과 다른 고려 자체적으로 발행한 동전임을 나타내었다.

 

  동전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려에서는 국가재정과  유통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정책하에 동전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화폐경제의 발전이 일반인들의 경제상황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는 자연히  동전의 사용에 대하여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갖게 하였다. 특히 동전이 중국의  것을 모델로 하였다는 점에서 외국제도의 수용에 대한 입장 차이도 나타났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몸은 하나이지만 기능이 네 가지입니다. 먼저  그 생김새를 보면 몸은 둥글고  구멍은 네모난데, 둥근 것은 하늘을 본  뜬 것이고 네모난 것은 땅의 모양입니다. 이것은(하늘과 땅처럼)만물을 완전하게 덮고 받쳐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돈은 샘처럼 끝없이 흘러 한이 없습니다. 셋째로 돈을 민간에 퍼뜨리면  위와 아래에 골고루 돌아다녀  영원히 막힘이 없게 됩니다. 넷째로 돈은  이익을 가난한 사람과 부자에게 나눠주는데 그  날카로움이 칼날과 같아 매일 써도 둔해지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일어나는 그 많은 불행을 매일같이 경험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순진하게 들일 이 돈  예찬론은 다름아닌 고려 중기의 고승 의천이 국왕에게 동전의 사용을 건의하기 위하여 지은 글의  일부이다. 재물에 초연해야 할 승려가 돈의 사용을 건의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라고 생각되겠지만, 당시 의천은 국왕인 숙종의 동생으로서 국정에 적지 않게  관여했던 인물이었다. 독실한 승려로서 청정한 생활을 이상으로  삼았던 그가 돈을 예찬하면서 적극적으로 사용하자고 주장한 것은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돈을 사용하자는 주장은  의천 자신의 실제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2년 동안 송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발전된  화폐경제의 편리성을 경험한  후, 화폐의 사용이야말로 중국 정부와 백성들이 부유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하였다. 반면 고려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백성들이 실생활에 사용할 쌀이나  옷감으로 상거래를 하기 때문에  물자가 부족하게되고, 나아가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이  쌀에 흙을 섞고 옷감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농간을 부려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가난한 백성들이 시장에서 어렵게 구한  쌀로 제대로 밥을 해먹을 수도 없고 옷감으로 옷을 해입으면 속이  훤히 드러날 정도여서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 또한 일부 권세가와 부자들은 곡식이 부족한 시기에 쌀을 빌려준 후 몇 배의 이자를 쳐서 받기 때문에 일반 백성뿐  아니라 청렴한 관료들까지도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금속화폐는 실생활에 사용되지  않는 그리로 만들기 때문에 쌀과 옷감의 부족과  품질 저하를 막을 수 있고, 부자들의  모리행휘도 근절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의천은 이러한 자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중국 역대 화폐정책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들고 그  원인을 설명한 후, 결론적으로 금속화폐의 사용은  국가와 백성들에게 만세의 복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의천은 화폐의  역사와 기능을 비교적 정확하게 이해한 후  화폐정책을 통하여 경제발전과 부의 균등한 분배를 이루려 한  우리 나라 최초의 화폐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천보다 한 세기 뒤에는 동전의 사용을 반대하는 다른 경제이론이 제기되었다.

 

  공방(돈)은 겉은  원만하지만 속이 모나고 시세에  따라 임기응변을 잘하였다. 한나라에서 벼슬하여  홍로경(재무장관)이 되었다.  성격이 탐욕스럽고 청렴하지 못하였다. 재물을 관장하면서 백성들과 작은 이익을 다투고, 물가를 조작하여 곡식을 싸게 하여 백성들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몰려 농사를 망치게 하였다. 또 권귀들과 사귀어 그 집에 다니며  벼슬을 사니 관리들의 승진이 모두 그 손에서 결정되었다. 관료들이 지조를 꺽고 다투어 뇌물을  바치니 거둬들인 문서가 산더미 같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사람을 사귈 때에는 인간성을  따지지 않고 시정 잡배라도 돈 있는 사람이면 함께 몰려 다녔다.

 

  돈을 공방(네모구멍)이라는 인물로 의인화하여 화폐가  갖는 탐욕과 부패를 예리하게 풍자한 이 글은 무인 집권기의 문인 임춘이 지은 <공방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글에서  중국 역대의 화폐정책은 공방 집안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이들은  부국강병을 추진한 임금들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끝내는 탐욕과  부패 때문에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사회의 혼란과 부정부패는 늘 이들과 함께 하였다.

  이처럼 돈의 부정적 성격을 강조한 임춘은 동전이 사용되면서 인간 사회의 탐욕과 이기심이 증대한다고 보았다. 또 국가재정의  확대만을 목표로 하는 정책은 은율을 내세우는 부패한 관료만  득세하게 하고 정직한 관료와 선량한 백성들은 피해를 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하였다. 비록 화폐의  기능에 대하여 의천과 같이 논리적인 주장은 제시하고 있지 못하지만 단순히 화폐만이 아닌 화폐와 재정정잭과의 관계 민생보다 부국강병에만 치중하는 재정정책의 단점을 지적한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의천과 임춘이 이처럼 상반3된  화폐관을 가진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달랐던 데 연유한다.  의천은 고려가 활발하게 발전적인 사회를 만들려  했기 때문에 동전을 사회 구성원 모두의 부를 창조하는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임춘은 정통성 없는 무인들이  권력을 장악한 시기에 끝내  등용되지 못하고 소외된 채 경제적으로도 불우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으므로 화폐경제의 발전이 일부 권세가와 부자들의 재산 축적에 기여할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돈 그 자체는 우리의 경제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도구일뿐 그것이 우리의 삶을 궁핍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하는가는 오히려 사회제도에 관한 것으로서  실제적으로는 사회에 부가 얼마나 고르게 분배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고려시대의 화폐; 쌀, 옷감, 은, 동전, 지폐

  동전이 사용되기 이전에 고려에서는  주로 살이나 옷감과 같은 현물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금속화폐를  사용했고 일본에서도 8세기 초부터 동전이 유통되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 금속화폐의 사용은 상대적으로 늦었다. 일반적으로  화폐의 발전은 상업의 발전과  비례하는 것이므로 금속화폐의 사용이 늦은 것을 우리 나라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상업이 그렇게 부진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상업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은 은의  활발한 유통이다. 고려의 시장에서는 은이  가장 중요한 교환수단으로  유통되었고, 대부분의 상품은  은으로 그 가격이 환산되었다. 귀금속인 은을 화폐로 활발하게  사용할 정도로 당시의 상업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한편 옷감도 단순한 옷의 재료로서의 기능을 벗어나 순수한 교환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강화시켜가고 있었다. 고려말 이전에는 아직  목화가 전래되지 않아 면포는 없었고, 비단과 마포(삼베), 저포(모시)가 주요한 옷감이었는데 이중 시장에서 교환수단으로 유통된 것은 일상복의 재료가 되는 마포와 저포였다.

  마포와 저포가 순수한 교환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던 것은 당시 시장에서 품질이 조악한 옷감이 유통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원래는 5승포, 즉 400올이 들어간 것이 마포와 저포의 표준 규격이었지만 시장에서는 날실의 수를 대폭 줄인 2승포 혹은 3승포가 유통되었다. 만일 이러한  옷감으로 옷을 해입으면 의천이 말한 것처럼 추위를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속이 훤히 비쳐 옷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옷감은 원래부터 옷을  해입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화폐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옷감의 가치는 들어간 실의 양에 따라 결정되었으므로,  2승포나 3승포는 각기 정포 즉 5승포의  5분의 2 또는 5분의 3의  가치를 갖는 교환수단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량옷감의 사용이 유통질서에  커다란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경우 옷을 해입기 위해서서는 5승포 이상을 구했지만 보통의 상거래에서는 별다른 불편함 없이 2승포나 3승포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품질이 떨어지는 옷감의 출현은 상거래의 문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업이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하지만 당시에 금속화폐의 필요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적은 액수의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는 경우에는 은이나  포로 거래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쌀을 사용하였는데, 주식인 쌀을  식용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쌀에 흙을 섞어 유통시킬 경우 그 피해는 심각하였다. 은에 비하여 훨씬 가치가 적은 동전을 사용할 경우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국가의 재정운영에서도 동전의  사용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재정은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곡식과 옷감  같은 현물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흉년이나 세금 운송사고를  당할 경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실제로  지방의 세금이 중앙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해 관료들의 녹봉을 몇 개월씩 지급하지 못하고 미루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현물 이외에 동전을 사용할 경우 국가의 재정을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더욱이 동전과 같은 금속화폐는 원칙적으로  정부만이 만들 수 있었으므로 경제생활에서 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려정부는  여러 차례 금속화폐의 유통을  추진하였다. 이미 의천의 건의가 있기 한 세기 전인 996년(성종15)에 첫 시도가 있었고, 숙종은 의천의 건의를 받아들여  보다 적극적으로 동전사용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때 정부에서는 동전의 원활한 사용을  위하여 동전만을 사용하는 술집과 음식점을 설치하기도 하였고, 관료들의  봉급을 동전으로 지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강제력에도 불구하고 일반 백성들은 동전의 사용의 회피했던 것이다.

  은이나 옷감, 쌀과  같은 현물화폐에 익숙해 있던 당시에 동전이  매력을 갖기 위해서는 상업의 발전이 한 단계  비약하거나 조세를 돈으로 걷는 것과 같은 변화가 필요했는데, 그러한  변화는 17세기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도 여러  차례 동전을 만들고 상거래에서  사용하도록 강제하였지만, 언제나 고려에서처럼 외면 당하고 정부는 화폐정책을 변경해야만했다.

  동전과 달이 또다른 법정화폐인  은병은 별다른 무리없이 사용되었을 분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은병은 공식적으로는 은 1근 즉 16량의 가치를 가졌는데, 실제로는 은 12.5량과 구리 2.5량을 혼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공식가치와 실제함량 사이의 차이는 정부에서 주조비와 조주이익으로 차지하였다. 은병은  쌀 수십 석의 가치를  갖는 초고액화폐였지만, 실제 상거래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12세기에  고려를 방문했던 중국 사신은 개경 시내 시장에서의 주된 유통수단으로 은병을  들고 있다. 동전과 달리 은병이 법정화폐로서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은 당시 고려 사회에서 은이 이미 중요한 유통수단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원 간섭기에는  일시적으로 원나라의 지폐가 고려에서  유통되었다. 송나라 이래 상업 특히 먼  지역간의 거래가 크게 발전했던 중국에서는 상인들 사이에 약속어음 종류의  문서가 활발하게 이용되었는데, 원나라에서는  이러한 제도를 국가에서 관장하여 정부가 직접 동전의 지급을 보장하는 지폐적 성격의 보초를 발행하여 유통시켰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고  있던 고려는 간접적으로나마 원나라의 경제권에 편입되었으므로  이 보초가 유통되었는데, 세게  제국인 원나라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보초는  고려 국내세서도 별다른 저항없이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하지만 원나라가  몰락하면서 보초의 가치는 땅에  떨어져 종이조각에 불과하게 되었다. 고려말과 조선초에는 이러한 보초를  모법으로 하여 지폐인 저화를 발행하고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였지만 동전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외면받아 곧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