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9월호

단독인터뷰 – 영국에서 귀국한 김대중 씨 (1)

통일과 민주화에 이 한 생을

임경숙 생활성서 기자

 

영국에서 5개월 동안의 연구생활을 마치고 지난 7월 4일 귀국한 김대중 (토마스 모어 67) 선생을 8월 7일,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만나보았습니다. 자신이 손수 가꾼 30여 종의 갖가지 작은 꽃들이 활짝 핀 정원에서 참새들의 모이를 뿌려주는 모습이 무척 평화롭게 행복해 보였습니다. 지면관계상 인터뷰 내용을 2회에 나누어 싣기로 했습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오랜 시기 동안 기자의 질문에 솔직하고 성실하게 응답해주신 김대중 선생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 <생활성서>를 통해서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8월 초의 여름휴가는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이번 여름휴가는 세 아들 내외와 (저는 딸이 없습니다) 손자, 손녀 여섯 명과 같이 먼저 지리산을 보기 위해서 남원에서 2박 3일을 지냈습니다. 광한루에 가서는 아이들에게 춘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춘향전을 흔히들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들 하는데 사실은 그보다 훨씬 뛰어난 점이 있지요. 즉 혹독한 매질을 당하면서도 춘향이는 천한 신분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사랑하는 이 도령과 같이 사랑을 나눌 권리가 있다고 자신의 인격과 여권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온갖 고문에 저항하고, 서둘러 방자를 이몽룡에게 보내고 장님을 불러다 점쳐보고 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몸부림을 통해서 우리 민중들의 한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면서 춘향전은 단순한 사랑의 이야기 이상의 높은 가치가 있어서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교할 수 없다고 일러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은 세익스피어라는 한 작가의 머리에서 나왔지만 춘향전은 광대와 장꾼 등 순수한 민중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또 남원에 있는 만인의총에도 들러서 임진, 정유재란 당시의 우리 국민의 위대한 업적을 기렸습니다. 또한 지리산, 제주의 서귀포 해안선 등을 보면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휴가 때 손자 손녀들이 만족하게 이 휴가를 지내준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제 휴가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지요. 저는 가족들에게 너무도 많은 고생을 시켰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여름 휴가 때는 지방 나들이를 하는데 이번이 다섯 번짼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반시민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너무도 친절히 대해줘서 저로서는 행복한 휴가를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 영국에서 돌아오신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귀국 후에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귀국해서 약 일주일 동안은 동교동 저의 집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그 후 일산에 얻어놓은 아파트로 옮겨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로 우리나라의 통일문제와 아시아 민주화 문제, 이 두 가지를 기본목표로 세워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계획대로 하면 연말까지는 통일문제에 대한 원고를 마쳐서 내년 초에는 이것을 출판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지금 구상중인 평화재단을 설립하는 일도 서서히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 금년 가을에는 독일, 러시아, 혹은 미국 등지를 가서 폰 바이체커 대통령, 고르바초프 소련 전대통령, 카터 미국 전대통령 등 각국의 지도자들을 만나서 한국 통일 문제 등을 논의하고 모스크바 대학 등에서 강연도 할 예정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구상도 지금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 영국에서 머무르시는 동안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강연을 하셨는데, 특히 인상 깊었던 점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저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5개월 동안 있었습니다. 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캠브리지는 세계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학원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 도시가 오로지 캠브리지를 위해서 존재하는 듯, 모든 전통적인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건물들도 6~7백 년 된 것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고 특히 캠브리지 대학의 킹스 칼리지 건물 그리고 각 대학마다 있는 교회 등은 정말로 뛰어난 건축미와 그 시대 양상들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한마디로 전통의 나라, 과거를 지나치리만큼 보존하고 있는 나라로서,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불편도 감수하는, 영국민들의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오늘날 영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는 면도 없지 않지요.

저는 영국에 있는 동안에 캠브리지 대학, 옥스포드 대학, 런던 대학, 영국 왕립 국제문제연구소 그리고 독일의 독일사회무제연구소, 이스라엘의 히브리 대학 등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영국의 각 대학에서 연설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거기에 온 학생, 교수들이 정말로 진지하고 열띤 자세로서 토론에 참가해주었고, 질문을 해주었습니다.  자랑 같지만, 저도 그 질문에 잘 응답을 해서, 관례와 달리 강의 도중에도 박수가 여러 차례 나왔고 또 폭소가 터지는 등 대단한 호응을 얻었습니다. 나중에 우리 유학생들이 정말로 자랑스럽다고 기뻐하는 것을 보며 저도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거기에서 연설할 때 하나 인상에 남는 것은 일본 유학생들이 와서 거의 빠짐없이 질문을 했는데, 질문의 요지는 ‘2차대전이 끝나고 반 세기가 다 됐는데 왜 한국은 아직도 일본에 대해서 그렇게 원한에 차 있느냐? 영국이나 프랑스는 많은 식민지를 가졌지만 그 식민지들하고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일본학생들의 질문하는 태도를 보고 조금도 악의가 있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자기 나라가 어떻게 했으며, 전후 처리조차 제대로 안 했던,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영국이나 프랑스 얘기를 하지만 그것이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스린 것하고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는가? 일본이 우리 나라를 다스릴 때, 우리 국민이 생명같이 생각하는 성을 바꿨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어디 가서 그런 일을 했는가? 그리고 일본은 우리에게 조선말을 못 쓰게 하고, 조선 역사를 배우지 못하게 했고, 매일 아침 천황이 있는 도쿄를 향해서 큰절을 하게 했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수십만 명의 우리 젊은이들을 징병, 징용에 강제로 동원했고, 마침내는 10만이 넘는 우리 한국여성들을 정신대로 동원해서 일본 군대의 성의 노리개로 만들지 않았느냐? 그리고 해방 후에는 사할린에 우리 교포들을 방치해놓고, 히로시마 원폭피해자에 대해서도 일본인과 한국인을 차별하는  등, 일본이 취한 과거의 태도가 어째서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다고 생각하느냐?

그뿐 아니라 전쟁에 패배한 후 일본의 태도는 너무도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고, 거기에 대한 정당한 시정과 보상이 없다. 독일을 예로 들어 비교해보면, 독일은 전쟁에 지고 나서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 진실을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철저하게 과거에 대해 사죄했다. 그런데 일본은 지금까지도 분명한 사죄를 안 하고 있다. 독일은 과거의 나치스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 어릴 때부터 철저히 교육을 시키는데 여러분은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이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독일은 유태인 등 나치스의 희생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했는데 일본은 단돈 3억 불 줘놓고 그걸로서 모든 것을 끝내려 하고 있다. 또 독일은 당시에 비밀경찰이었던 게슈타포 같은 데 협력한 사람이 발견되면 지금도 체포를 하는데, 일본은 전후에 전범으로 처벌된 사람도 일본의 총리가 되는 등 과거에 죄악을 행한 자들이 다시 세도를 누려왔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전쟁에 진 것을 패전이라고 하고 연합군을 점령군이라 하는데, 일본은 ‘종전’이라 하고 ‘진주군’이라 한다. 누가 전쟁에 진 것인지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일본인은 전쟁에 진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걸 볼 때 결국 일본은 과거에 대해서 분명한 반성과 시정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가지고 시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해서 이렇게 반성이 없는 일본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으므로 또다시 옛날을 되풀이하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 때문에 문제를 삼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전에는 우리 한국이나 아시아 주변국들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유엔 상임이사국이 되고 세계대국이 되려는 일본국민의 심정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주변국가, 특히 가장 가까운 한국으로부터 이해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일본이 어떻게 세계대국이 될 수 있는가, 여러분이 잘 생각해보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과거의 원한에 사로잡힌 것도, 반일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하루속히 청산하고 양국이 진정한 친선을 맺기를 바라는데, 그러려면 양 국민이 진심으로 상호 이해하고 협력해야지 지금까지처럼 일본이 한국의 군사독재자들하고 유착해서 아무리 왕래하고 서로 ‘일-한 새시대’를 떠들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한일양국의 밝은 내일을 위해서 이 말을 한다.”

그때 엄청난 박수가 터지고 나중에 질문했던 일본 유학생이 일어나서 ‘정말로 우리는 그런 사정을 몰랐다.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참 느낀 바가 많다. 우리도 앞으로 노력하겠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토론에 대해서 우리 한국학자나 학생이 너무도 기뻐함은 물론 영국 등 외국사람들도 퍽 감동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 영국에서의 연구생활을 통해 얻은 점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제 연구생활의 목적이 ‘우리의 통일을 위해서 내가 여기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독일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몰두했습니다.

독일은 지금 한마디로, 급격한 통일, 잘못된 통화 단일화 등으로 해서 엄청난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지금 독일경제는 아주 휘청거리고 있고 당초 10년에 5천억 마르크 정도로 예상했던 일이 2조 마르크를 가지고도 되지 않을 정도로 차질이 와서 엄청난 경제적 난관을 겪고 있습니다. 금년에는 독일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되었으며, 실업자가 엄청나게 늘어나서 구 동독의 9백만의 노동력 중 4백만 가까이가 실업자가 된 상황에 있습니다.

또한 정신적 갈등의 심각성은 경제문제보다도 더 큽니다. 지금 독일은 과거에는 1민족 2국가였지만 지금은 1국가 2사회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동독-서독은 없어졌지만 동독인-서독인은 엄연히 남아서 ‘동독인은 2등 국민, 서독인은 1등 국민’이라는 식의 상황 속에서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외세에 의한 분단은 끝나고 정치적 통합은 이루어졌지만, 내부적인 경제적 사회적 분열은 이제부터 시작되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제가 재작년에 폰 바이체커 대통령, 당시 생존해 있던 빌 브란트 전 총리 그리고 겐셔 외상 이런 분들을 만났을 때 그분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백림 장벽은 무너졌지만 마음의 장벽은 무너지지 않았다’라고. 동-서독은 우리 같은 동족상잔의 전쟁도 없었고, 어느 정도 왕래와 서신 교환도 있었고, 매일같이 상대방의 텔레비전 방송을 볼 수 있었지요 이런 여건 속에 있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전혀 다른 이질성을 느끼고 있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프랑스인과 서독인은 말은 서로 안 통한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생활양식이나 문화의식은 통합니다. 그러나 동독-서독 간에는 독일어가 통한다는 것 외에 나머지는 안 통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 정도로 이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독일과 같은 졸속한 통일을 서둘러서는 안 되고 경제를 무리하게 하나로 통합시켜도 안 되며 점진적으로, 착실하게 통합시켜나가야 한다는 것,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제가 지난 20여 년 동안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주장해온 주장 즉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의 3원칙에 제1단계 국가연합단계(공화국 연합제), 제2단계 연방제단계, 제3단계 완전 통일, 이런 식으로 정직하고 착실하게 통일해나가야 한다는 저의 3단계 통일 주장이 정말로 옳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독일통일을 볼 때 물론 통일은 민족이 자주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만, 주변국가와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절실히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 또 미국의 적극적인 협력, 소련의 고르바초프의 이해와 협력이 없었던들 독일은 결코 통일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민족에 의한 자주적 통일의 추진과 미-일-중-러 등 주변 4대국과 세계 여론의 지지를 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이 제가 이번 유럽에서 우리 통일문제와 관련해서 배우게 된 큰 줄거리인데, 이외에도 기회가 있으면 오늘의 핵 문제의 해결 그리고 우리 통일의 당위성과 가능성만이 아니라 우리가 통일을 하면 세계적인 일류국가가 되고, 통일 안 하고 앞으로도 거액의 국방비를 쓰면서 남북대결을 계속해나가면 우리는 경제적 경쟁국가에 밀려서 3류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는 점 등에 대해서 국민 앞에 알리겠습니다.

 

– 귀국 바로 전에 성지순례 차 이스라엘에 들르셨는데 거기서 어떤 것들을 보고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가서 성지를 돌아봤습니다. 제가 느낀 감격은 참으로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성서를 통해 익히 알았던 수많은 장소들이지만, 직접 그 땅에 발을 딛고 눈으로 볼 때의 감격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 여기 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갈릴래아에서 많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생각보다는 큰 호수였습니다. 저는 티베리아에서 배를 빌려서 그 갈릴래아 호수 주변일대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아시다시피 티베리아 호수라고도 하는데, 티베리아에서 출발해서 카파르나움까지 갔습니다. 도중에 왼쪽에 막달라 마리아가 살았다는 막달라 마을도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우리 주님께서 물고고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가지고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장소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자렛 마을에도 가봤습니다.

결국 이 갈릴래아가 바로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 등 영두 제자를 만나신 장소이고, 당신이 탄 배를 호수에 띄워놓고 군중들에게 설교하신 장소이고, 풍랑이 일어났을 때 바다를 꾸짖어서 잠재운 장소이고,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신 장소라는 것을 생각할 때 땅과 풀과 나무들, 그리고 모든 것 하나하나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을 가지고 새로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생애의 대부분 시간을 갈릴래아에서 보내셨는데, 가난과 멸시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같이 일생을 보내고 마지막으로는 그들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기독교와 더불어 세계 4대종교라는 이슬람교나 불교, 힌두교, 혹은 유교의 창시자들이 그 시대에도 이미 영광을 누리고 상당히 안정된 생활을 했던 것에 비하면,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이 이러한 고통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다는 것은 얼마나 대조적이고 그 의미가 큰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예루살렘에서 주님과 관련된 모든 장소가 그렇게 근접해 있으며 전체가 좁은 땅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올리브 산, 키드론 계곡, 게쎄마니 동산, 그리고 성전과 대제사장의 집, 빌라도 총독이 재판하던 장소 이것들이 거의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재판을 받으시고 마지막에 골고타에서 처형당하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참으로 새삼스럽게 슬픔과 분노의 심정을 느꼈습니다.

한 가지, 저는 예루살렘 성전이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람 세계 사이에 해결이 불가능할 정도로 최대의 분규의 원인이 돼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성전은 지금 이슬람교, 유다교, 기독교, 아르메니아정교 이 네 교파가 성전의 네 모퉁이를 각기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이 성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요르단 강 송환 문제나 가자 지구 문제 그리고 골란 고원 문제도 해결이 가능하지만, 이 성전만은 어느 쪽도 양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중동평화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오고 화해를 가져오는 본질과는 달리 오히려 이것이 평화와 화해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서 저는 참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종교가 감히 세계인 앞에서 그 본연의 사명인 평화와 화해와 협력을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번 8월 8일은 선생님께서 일본에서 납치된 지 꼭 20년이 되는 날입니다. 당시 납치되었다가 극적으로 돌아오셨을 때의 상황과 내적 체험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73년의 사건은 단순한 납치가 아니라 박정희 정원에 의한 납치살해 미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해외에 망명해서 유신 반대투쟁을 하고 또 그것이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으니까 그들은 이것에 대해서 상당히 초조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박정희 씨의 지시에 의해서 중앙정보부가 저를 납치해서 살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호텔 복도에서 저를 납치해 옆방으로 끌고가서 마취시켰기 때문에 몇 분 동안 저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때 납치범들은 사실은 목욕탕에서 저를 죽여가지고 제 몸을 토막을 갈라서 륙색에 집어넣기 위해서 륙색 세 개하고 많은 휴지와 노끈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들의 그 방을 뜬 이후 경찰이 와서 압수, 일본의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보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다가 이북 백두산 담배를 놔둬서 마치 공산당이 한 일인 것 같이 위장을 했습니다. 그들의 거기서 나를 죽이지 못했던 것은 제가 끌려 들어갈 때 소리를 쳤고 저와 동행했던 사람들도 있고 해서 발각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를 거기서 못 죽이고 계획을 바꾸어 바다로 끌고 나갔습니다.

바다에 끌려간 저는 처음엔 란치에 실렸는데, 거기서 죽는 줄 알고 성호를 그었다가 그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죽인 건 아니고 다시 큰 배로 끌어올려 태웠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배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인 용금호였습니다. 거기서 납치범들은 나중에 흔적이 남지 않도록 저의 옷을 전부 갈아 입혔습니다. 그리고는 저의 전신을 결박하고 입을 막고 눈을 테이프로 붙여 붕대로 가리고, 오른쪽 팔목과 왼쪽 다리에다가 각기 30~40킬로 무게의 물체를 달고 등에다는 판자를 붙여서 다시 묶고, 이렇게 옴싹도 못하게 묶어서 바다에 던지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좀 당황을 했던지 기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뭐 이대로 물속에 던져지면 몇 분이면 죽겠지, 그 동안 고통스럽던 생활이 이제 이로써 끝났다, 차라리 잘됐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은 또 ‘상어에게 하체 반 토막을 물려 뜯기더라도 윗부분만은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이렇게 잡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제 옆에 서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옷소매를 붙잡고 ‘나를 살려주십시오. 나는 꼭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나는 우리 국민을 위해서 할 일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기도도 정치적으로 했습니다(웃음).

바로 그때 눈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밝은 빛이 눈에 번쩍 들어오면서 펑!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자 거기 있던 5~6명의 중앙정보부원들이 “비행기다” 하고 뛰어나갔습니다. 펑펑 소리는 계속 나고, 배는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한 30~40분 그렇게 지나자 어떤 청년이 뛰어들어오면서 경상도 사투리로 ‘김대중 선생님 아니십니까? 해서 제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와서 귀에다 대고 ‘이제 산 것 같습니다. 나는 부산서 선생님한테 투표했습니다’ 하더군요. ’71년 선거 때 투표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죽고 사는 갈림길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다가 결국 13일 날 저희 집 주변에서 석방이 돼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지키고 살려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로써, 저의 생환날짜인 매년 8월 13일에 감사의 미사를 드리고 기념해왔습니다. 납치를 기념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살려주셨음을 기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바닷속에서 예수님이 제 곁에 서신 그 문제에 관한 것인데, 저는 그것이 정말로 예수님이 제 곁에 오셨던 것인가, 혹은 환상이었는가를 잘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김수환 추기경님께 그 말씀을 드리면서 추기경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추기경님께서는 ‘그것은 당신이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났다면 혹시 환상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당신이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타났다면 그것은 다분히 주님이 직접 나타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하나의 해석이고, 그 판단은 어디까지나 당신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신의 모든 정황으로 봐서 주님이 그때 저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80년 전두환 정권의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그들이 저한테 제안하기를 ‘우리한테 협력하면 살려주겠다. 그리고 대통령을 빼놓고 뭐든지 시켜주겠다. 만일 우리한테 협력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이겠다.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양자택일해라’ 이렇게 요구해왔습니다. 물론 저도 살고 싶었지만, 국민과 우리 젊은이들 그리고 제 가족을 배신할 수 없어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참 많은 고민의 시간을 보내며 주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하루 저녁은 제가 밤새 기도를 하는데 제 머리 속에 주님의 음성이 바로 옆에서 하시는 것 같이 들려왔습니다.  성서 속에 있는, 회당장 아이로의 딸이 죽게 됐을 때 예수님을 초청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즉,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 가까이 갔을 때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을 보고 ‘당신의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이상 괴롭힐 것이 없지 않습니까?’ 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믿기만 하여라, 그러면 네 딸이 살 것이다’ 하신 그 장면과 말씀이 제 바로 옆에서 하시는 것 같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구원을 믿고 매달리면 주님은 나를 살려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도 네 번이나 주님은 나를 살려주시지 않았던가!’ 이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하신 기도 즉,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 하신 말씀도 기억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93년 10월호

단독인터뷰 – 영국에서 귀국한 김대중 씨 (2)

주님의 옷소매를 붙잡고

임경숙 생활성서 기자

 

– 선생님의 이번 연구주제가 ‘유럽통합과 독일통일 그리고 한반도 통일’이었고, 또 앞으로도 조국통일과 민주발전을 위한 연구활동에 주력하실 계획임을 이미 여러 차례 밝히신 바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통일에 대한 선생님의 구체적인 방안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위성은 이제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미소의 냉전대결에 의해서 분단되었습니다. 미소냉전체제 하에서는 분단이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당위성이 있더라도 통일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미소냉전도 끝났고 현상고착도 끝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냉전의 잔재의식 속에 그대로 갇혀서 스스로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마땅히 냉전의 잔재에서 풀려 나와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만일 통일을 안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면 우리에게는 앞날이 없습니다. 결국 삼류국가로 떨어지는 길밖에 없죠. 왜냐하면 과거에는 우리의 경쟁국가들도 국방과 경제발전 양쪽에 국가의 재원과 인력을 투자했지만, 이제는 냉전이 끝났기 때문에 대부분 경제발전 쪽으로 모든 걸 집중시킵니다. 그런데 우리만 여전히 양분되어 대결하고 있으면, 지금도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인데 경쟁에서 우리가 질 것은 틀림없고, 그렇게 되면 삼류국가로 전락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통일을 해서 남북이 협력하게 되면, 동서독과는 달라서 남한도 큰 이득을 보게 됩니다. 북한의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고 북한의 지하자원이라든가 관광자원을 활용하게 되어 우리 대한민국 쪽이나 북한 양쪽이 모두 큰 이득을 보게 됩니다. 그 증거로 지금 1백 수십 개 기업의 기업인들이 북한에 진출하려고 통일원에 신청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돈벌이가 되기 때문에 가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장차 만주, 시베리아, 몽고,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쪽의 연해주 등지로 뻗어나가야만 풍부한 지하자원을 이용해서 중국 11억의 시장과 세계시장으로 발전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래야 우리는 일부 학자들의 말대로 통일하면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초강국이 되는 길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통일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북방진출을 위해서는 천상 북한을 통해서 고속도로를 놓고 파이프라인을 묻고 부동항을 이용해야만 북방의 광대한 자원을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독일식으로 졸속한 통일을 했다가는 남한조차도 파탄의 지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남한의 경제는 구 서독경제의 6분의 1밖에 안 됩니다. 서독 영토는 동독의 배 이상인데, 우리는 북한 땅이 남한보다 20퍼센트 더 큽니다. 서독은 인구가 동독에 비해 4배입니다. 말하자면 네 사람이 한 사람 먹여 살리면 됐어요. 그러나 우리 남한인구는 북한의 두 배밖에 안 됩니다. 이렇게 서독은 우리보다 훨씬 우월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오늘날 저렇게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정신적 문제는 더욱 크지요.

따라서 급속한 통일은 경제적으로는 파탄을,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큰 혼란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통일은 결코 서두르지 말고 착실하게 그러나 쉬지 말고 단계적으로 해나가야 합니다. 저는 과거 20년 동안, 통일에 있어서는 북한과의 평화공존, 평화교류 속에서 단계적으로 평화통일을 추구해가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멸공을 해야 하는데 북한과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심지어 용공으로 몰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주장이 올바른 주장이었다는 것이 이제는 입증이 됐습니다.

독일에서도 뜻있는 사람들은 제가 주장했던 것과 같이 단계적 통일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서독집권당의 정치적 목적과 동독인의 성급함 때문에 그것을 졸속히 서두르다 오늘날 저렇게 됐지요. 통일방안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제1단계는 국가연합 형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국가연합(공화국연합) 아래서는 내정, 외교, 국방 모든 것을 지금과 같이 두 개의 독립정부가 장악합니다. 그리고 양쪽에서 동수의 대표를 내서 연합을 만들고, 거기에서 평화공존과 평화교류와 평화통일 문제만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하 10년 해나가는 동안 양쪽이 경제교류와 인적 교류, 기타 모든 교류를 통해서 북한의 경제도 어느 정도 좋아지고 민족의 동질성도 상당수준 회복하면 그 다음에 제2단계 연방제로 들어간다는, 이런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점은 김영삼 정부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고, 북한에서는 수년 전부터 ‘김대중의 공화국연합제 안을 우리는 긍정적으로 검토할 용의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혹은 비공개적으로도 거듭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의 공화국연합제 방식으로 하면, 통일에 대한 어떤 회의론자나 공포증을 가진 사람도 누구나 안심할 수 있는 그런 통일의 길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서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요소는 무엇이고, 가장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작업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상황에서 통일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는 것은 북이나 남이나, 통일을 기피하고 통일로 인해서 자기의 기득권이 상실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안보나 상대방에 대한 불신을 명분으로 해서 갖는 방법으로 통일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은 국민의 정서와는 너무 동떨어지게 통일지상주의로 밀고 나감으로써 심지어는 국민으로부터 ‘저 사람은 북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구실을 주어서 통일에 큰 장애가 되어 온 것도 우리는 그 동안의 쓰라린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점들은 둘 다 국민의 힘에 의해서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점들은 둘 다 국민의 힘에 의해서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문제에 있어서 가장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문제는 우선 북한이 핵무기의 개발을 전적으로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은 완벽하게, 1퍼센트의 여유도 없이 포기해야 합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곧 일본이 핵대국으로 등장하게 되고, 이것은 우리 민족의 안전은 물론이고 아시아와 세계질서에 큰 위협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도 북한은 핵무기를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남이건 북이건, 핵무기를 가지고 동족끼리 상대방을 몰살시키는 행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북도 남도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되고 핵무기를 써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둘째로 북한은 남한에 대하여 어떠한 공산화를 위한 내부공작이나 침략의도도 완전히 포기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그와 같은 것은 완전히 포기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현실적으로 군사면에 있어서도 그러한 기습공격의 가능성을 내포한 배치라든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분명히 북한은 포기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도 북한의 안전에 대하여 충분히 보장을 해주고, 팀스피리트도 포기해야 합니다. 서방세계는 우리가 주장했던 교차승인을 실천해야 합니다. 북한 승인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하루빨리 북한에 서방세계의 대사관도 들어가고 기업인, 관광객도 가야 합니다. 가서 북한 사회를 보고, 많은 영향을 줘서 그들을 개방으로 유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공적인 통일의 길입니다.

 

–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정교분리’라 할 때 이것은 교회가 정치에 개입을 안 한다는 것, 예를 들면 교회가 정당을 만든다든지 정권을 잡는다든지 여야 어느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든지 하는, 이런 것을 안 한다는 뜻이지, ‘교회가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해야 한다’ ‘정치가 잘하건 못하건 입다물고 있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것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행동하고도 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당시의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하셨습니다. 로마 총독은 그저 치안을 유지하고 세금을 받는 일 외에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았고, 유다교의 의회인 산헤드린에서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국내정치까지도 모두 관여를 했습니다. 그때는 종교와 현실 정치가 하나인 신정정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산헤드린의 대사장,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같은 지배계급들이 안식일이니, 혹은 정결례니 기타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만들어 민중을 차별하고 착취하고 멸시했던 데 대해서 우리 주님은 분노하고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이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잘못된 정치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조금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성서에서 본 대로 때로는 그들을 향해 ‘악마의 자식’이라고 저주까지 하면서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마리아의 노래라든가, 예수님이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말씀하신 루카 복음 4장이라든가, 혹은 마태오 복음 25장의 가장 작은 자에게 대해여 말씀하셨던 것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현실사회에서 좋은 정치, 바른 사회질서를 강력히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실정치에 대한 그러한 비판 때문에 ‘유다의 왕이 되려 한다’고 처형당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정치범으로서 처벌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교회가 하느님의 차원에서, 예수님의 현실비판과 같은 차원에서 정치에 대해서 잘한 건 잘했다, 못한 건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당연히 교회가 해야 할 일이고, 이것을 안 했을 때 오히려 교회는 그 책임을 다사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 평소에 마음에 깊이 새기고 좌우명으로 삼고 지내시는 성서구절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좋아하는 성서구절은 많지만, 우선 주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모든 가르치심의 핵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은 평범한 것 같지만 정말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첫째가는 주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웃에는 개인적인 이웃도 있고 사회 전체의 이웃도 있습니다. 개인의 구원과 더불어 사회의 구원, 이 두 가지가 아울러 이루어져야 하는데 저는 정치를 통해서, 때로는 생명까지 바치면서 이 이웃사랑의 정신, 사회 전체에 주님의 정이가 실현되는 사회를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제가 감동을 받는 성서구절은 루카 복음 4장 18절과 19절에 주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두 구절을 저는 가장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 대목과 마찬가지의 정신이 루카 복음 1장의 마리아의 노래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의 노래는 그 말 자체도 소중하지만 마리아가 그 말을 하는 환경과 마리아의 태도가 주는 감동입니다. 마리아는 처녀입니다. 처녀가 애비도 모르는 아기를 배게 되었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당시 유다의 율법에 의해서 당연히 돌로 쳐서 죽일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 마리아는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순종했습니다. 이 얼마나 거룩한 신앙입니까. 아브라함 이외에 이에 견줄 신앙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 내용은 얼마나 큰 정의의 소리입니까. 오늘날 개신교의 신학자들 간에는 이 마리아의 노래로 해서 마리아에 대한 재평가가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 언젠가 선생님께서 “세상에서는 항상 악이 승리하는 듯 보이는 이유에 대해 답을 찾다가 혼자서 그 답을 얻었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혹시 그것에 대해 지금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제가 옥중에 있을 때 ‘정말로 하느님이 계신가, 내가 지금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이번에 사형이 집행돼서 저승에 갔을 때 하느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할까’ 하는 심각한 의문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었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왜 이 세상은 악이 승리를 하고 선이 자꾸 짓밟히는가, 여기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이 두 가지에 대해서 큰 회의를 가졌고 이것을 나름대로 해석하기 위해서 신학책, 철학책도 읽고 했습니다만, 어디에도 시원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해답의 탐구에 노력했고, 저 나름대로 일단 해석은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좀 깁니다.  오늘은 너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해서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겠습니다.

 

– 특별히 신앙인으로서, 우리 나라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몫은 어떤 것일까요?

참 좋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나라는 신-구 양측 기독교인 수가 지금 엄청난 속도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서구 사회를 보면 교회가 텅텅 비고 있는데 거기서도 우리 한 국 사람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건 교회가 가득 차 있습니다. 국내는 말할 곳도 없고요. 이것을 우리는 상당히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또 자랑인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냉철히 생각해볼 때, 우리 사회가 정말 기독교 정신으로써, 기독교 윤리와 기독교 사랑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가 하면 거의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그것이 일종의 타성이건 어쨌건 간에, 기독교적 윤리와 규범이 사람들의 사고방식, 행동 그리고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 교회의 오늘의 위상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민주화 과정에서 교회의 일부 인사들이 역할을 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크게 볼 때 교회가 얼마만큼 민주화에 협력해왔느냐 하는 것은 참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사독재들이 그렇게 기승을 부리고 국민을 탄압하고 부를 소수에게 집중시키고 부정부패를 저지를 때, 우리 주님이 계셨더라면 과연 오늘의 교회 같이 입다물고 계셨을까 생각해볼 때 참으로 주님 앞에 두렵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 문제도 그렇습니다. 과연 우리 교회가 통일에 대해서 어느 만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금 통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남북간의 민족적 화해입니다. 우리 안에는 냉전의 시대에 굳어져온 상호불신, 증오, 악의가 가득 차 있어서 이것이 통일에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공산당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공산주의는 세계적으로 몰락했습니다. 크게 보면 국한 공산정권도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좀더 여유를 가지고 북한을 동족애로써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야말로 교회가 민족상호간의 화해와 민족적 사랑의 회복에 앞장서는 것은 바람직하고, 또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지금 이 한국에 계신다면 반드시 이 일을 하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니, 지금도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셔서 열심히 이 일을 하시면서 우리들이 동참하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 선생님의 가족들 사이에 종교가 다른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가족의 종교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조금 과장돼 있는데, 저의 집은 아내와 둘째 며느리가 개신교이고, 그 외 다른 가족은 전부 가톨릭입니다. 아내도 개신교지만 우리와 같은 기독교지 다른 종교는 아닙니다. 아내는 저와 결혼할 때 대한 YWCA 전국연합회 총무였고 처가도 오랜 개신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할 때 교회의 관면혼배를 받았습니다. 교회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이 결혼한 것입니다.

 

-고희를 앞두고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감회가 깊으실 텐데요.

저는 제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과연 내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내 인생은 실패한 거냐 혹은 성공한 거냐 이런 생각을 간혹 해봅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 인생이 실패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대통령후보를 세 번이나 하고서도 대통령이 못 되었으니까 실패한 거라고도 할 수 있지요. 무엇이 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국민과 역사 앞에 또 우리 하느님 앞에 바르게 살아왔는가 생각할 때, 저는 결코 바르게 살았다고는 말 못하지만,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사는 것과 제 목숨을 걸어놓고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했을 때 저는 주님에 대한 믿음 속에 바르게 사는 것을 택하고 목숨을 버렸습니다.

결코 겸손이나 위선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옛날에 신앙의 조상들, 예를 들면, 다윗이 잘못했을 때 주님께 고백하고 다시 일어선 것과 같이 저도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야곱은 많은 과오를 범했지만 끝까지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래해서 하느님은 그를 유다인의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저는 오직 행동하는 양심으로써 살려고 했기 때문에 일생에 다섯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6.25 때 공산당한테, ’72년 박정희 씨 정권 때 자동차 사고로 가장하여 죽이려 했던 위장교통사고 사건, ’73년의 납치사건 때 처음에는 호텔목욕탕에서, 다음에는 바다에서 죽이려 한 사건, 그리고 마침내는 ’80년 전두환 씨에 의해서 군법회의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6년을 감옥살이를 했고 10년 동안 망명과 연금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번도 독재에게 굴복하거나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국민과 같이 민주주의, 정의, 통일 이런 대의를 위해서 싸우는 데 최 선두에서 동참해 살아온 제 인생에 대해서 저는 감사하고 긍지를 느낍니다. 저는 간혹 거울 속의 저의 얼굴을 보고 용케도 40년 동안을 잘 견디어준 저 자신에게 감사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런 고통스런 인생이었지만, 다시 그 삶을 살라 하면 기꺼이 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끝까지 바르게 살아서, 역사를 통해 우리 후손들에게 이 시대를 살아간 김대중이가 조그마한 모범이라도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저를 통해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 국민 대중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시기 바립니다.

국민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마는 오늘은 꼭 한 가지만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국민이 잘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이 잘나야 대접을 받습니다. 그래야 위정자가 국민을 두려워하고 좋은 정치를 하려고 힘씁니다. 민주주의는 그 국민의 수준 이상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이 잘해야 합니다. 국민이 선거는 잘못해놓고 정치만 잘 되라 한다 해서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잘난 국민만이 잘난 정부, 잘난 국회, 잘난 사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참으로 잘난 국민으로 발전해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 국내정치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분명히 말씀 드리고, 앞으로 두 가지 방향에 힘쓸 계획입니다. 하나는 우리 조국의 통일에 올바른 정책방향을 제시하는 데 일익을 하고 싶습니다. 독일통일을 현장에서 보면서, 한번 정책을 실패하면 참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고 학자들과 만나고 또 국내 각계의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어보면서, 제가 20년 이상 주장해온 통일정책 3단계의 주장이 이 시점에서 취할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노력입니다. 지금 아시아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날로 커져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에는 지금 경제가 노동집약적인 단계로부터 정보산업, 지식산업, 첨단산업 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하지 않고서는 경제적 성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시아는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그런 방향에서 앞으로 아시아의 많은 지도자들과 함께 이 일을 추진해나갈 계획입니다.

 

– 지금까지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끝으로 선생님의 신앙관이랄까, 신앙생활에 대해 평소에 갖고 계시는 신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일생에 많은 고초를 겪어오면서도 지금 제가 살아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주님이 제 옆에서 지켜 주신 덕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언제나 저와 같이 계신 주님과 상의를 하고, 그분의 도움을 청합니다. 저는 주님이 언제나 저와 같이 계신 것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은 제가 의인이기 때문에 수많은 죽음의 골짜기와 고난에서 저를 구하고 저를 오늘 같이 있게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역사하시는 데에 조그마한 도구로서 필요하기 때문에 저를 지금까지 살려주시고 이끌어주신 걸로 믿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산 신자로서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모든 걸 주님과 상의하고 주님께 고백하고 주님의 가르침과 도움을 받아가면서, 주님의 옷소매를 붙잡은 채로 같이 동행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 선생님께서 계획하고 계시는 일들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빕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성실히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994년 8월호

독일 통일에서 우리가 교훈 삼을 일

김대중

 

’93년 10월 5일, 미국 카터센터를 방문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 부부가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부부와 나란히 포즈를 취했다. 올 봄 미국 내셔널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김 이사장은 ‘카터 북한 파견’을 제안했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전운이 감돌던 한반도의 위기상황이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계기로 대화국면으로 전환되는 듯하였으나 김일성 주석의 돌연한 사망으로 남북한 관계와 핵문제는 다시 예측하기 어려운 안개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절대적 카리스마를 행사하던 김일성이 없는 북한은 누가 권력을 승계한다 할지라도 정권의 안정성이 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예상되는 북한의 불확실성에 대비하여 독일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통일의 후유증을 극소화하면서 민족의 번영과 화해를 위한 우리의 바람직한 통일방안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것은 퍽 시의적절한 작업일 것이다.

 

독일은 어떻게 통일하였나

나는 지난해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연구차 6개월 가까이 체류하는 동안 독일을 네 번이나 방문했다. 과거 동독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온 터라 그곳의 사물까지 샅샅이 돌아보면서 공장, 가정집, 행적기관에도 가보고 농민들도 만나보았다. 그리고 폰 바이체커 대통령, 겐셔 외상 그리고 동독의 마지막 수상인 드 메지에르 등 지도급 인사들을 만나 그들의 통일에 대한 지혜를 구하였다.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성공한 것은 무엇이며 실패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점들을 집중 연구하여 우리 통일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독일이 통일에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서독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민주적 내정개혁에 성공해서 튼튼한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고 유럽에서 최대의 힘을 가지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이러한 서독 상황을 텔레비전 (동독의 서독 텔레비전 가청지역 내 주민 72퍼센트가 서독 텔레비전을 시청함)과 신문 등을 보고 동독 사람들이 가지게 된 잘사는 서독에 대한 동경심이다. 이러한 동경심에 바탕을 둔 통일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통일에 성공한 또 다른 이유이다.

셋째 이유로는 동서독 간의 활발한 교류와 협력을 들 수 있다. 동서독은 ’72년 ‘기본조약’에 서명한 이래 경제 문화 사회 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교류를 확대해왔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동서독 교회의 교류로서, 이것이 또한 결과적으로 통일에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국가, 다른 사회체제 아래에서도 신학적으로 보면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신자나 교회 지도자들의 의견 교환과 상호 방문, 물질 지원 등이 국경을 초월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서독 교회는 50년대부터 동독 교회, 나아가 동독 주민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해왔다. 이와 같은 동독 지원에는 서독의 신교 단체뿐만 아니라 구교 단체도 참여했는데 그것은 동독의 교회와 교회기관 유지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물질적인 혜택과 함께 복음이 전파되어 무신론적 사회에서 교회가 생존하고 결과적으로 동독내 체제 저항세력 양성의 밑거름이 되었다. 동독의 교회 지도자들은 ’89년 동독의 대변혁시 시민운동 단체를 조직하였고, 교회는 민주 단체들에게 활동의 근거지를 제공함으로써 민주화 과정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드 메지에르는 민주화 과정의 교회 역할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교회는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보호처를 제공하고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들을 변호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비폭력을 옹호함으로써 정치적인 혁명을 평화롭게 완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넷째로 서독은 흡수통일 과정의 난제였던 국제적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소련은 처음에는 조속한 통일을 반대했고, 미국, 영국, 프랑스도 회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폴란드는 국경선이 변경될까 봐 굉장히 우려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 모든 나라를 설득해서 지지를 얻어냈다. 참으로 뛰어난 외교솜씨를 발휘하였다.

통합 당시 서독 기본법에 의하면 통합에는 국가창설 형태 (서독 기본법 146조)와 동독 5개주가 서독에 흡수 편입되는 방법 (서독 기본법 23조)이 있었다. 결국 동독이 우리도 서독 사람처럼 잘살고 싶다고 하는 극도의 조급한 심정에서 대등한 통합보다는 서독에 흡수편입되는 통합을 선택함으로써 자발적인 흡수통합을 하게 된 것이다.

 

흡수통일의 부작용과 교훈

그런데 흡수통일을 해놓고 보니까 엄청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기적으로 유럽 최고의 국민국가가 되는 기초를 마련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당장은 급속한 통일의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첫째, 연간 5백억 마르크 내외가 드는 막대한 통일비용 (경우에 따라 평가가 조금씩 다름) 때문에 고용악화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91년 10.4 퍼센트에서 ’93년 15.58 퍼센트로 증가했으며 ’95년에는 17.9 퍼센트로 예상됨). 경기침체 (경제성장률은 ’90년 5.7 퍼센트였으나 ’93년 1.9 퍼센트를 기록), 물가상승 (’90년 2.9 퍼센트였으나 ’92년 4.2 퍼센트를 기록), 부채증가 (’93년말 현재 2조 3천억 마르크, 1인당 부채부담액은 2만8천6백 마르크로 통일 당시의 두 배나 됨) 등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독의 강력한 경제기반이 없었다면 이미 독일 경제는 수습 불가능한 파국의 길로 가게 되었을 것이다.

둘째, 40년에 걸친 분단의 결과 동서독인 간에 엄청난 상이점과 갈등이 생겨났다. 과거에는 ‘1민족 2국가’ 였는데 현재는 동서독 간의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1국가 2사회’로 분열되어가고 있다. 외적 분단은 끝났지만 경제 사회적 내적 분단이 오히려 통일 이후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폰 바이체커를 만났을 때, 그가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마음의 장벽은 아직 그대로 남이 있다’라고 개탄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와 같이 엄청난 통일비용으로 인해 경제적 곤경, 사회적 갈등 등 지금 독일을 괴롭히고 있는 커다란 어려움들이 결국 갑작스런 흡수통일에 그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독일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면 독일 통일 과정과 그 결과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이겠는가?먼저 통일이 그토록 급속히 이룩될 수 있도록 한 요인을 깊이 음미하고 배워야 한다. 이미 말한 대로 그것은 무엇보다도 독일이 튼튼한 민주기반을 서독내에 마련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역할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교훈은, 단계적이고 착실한 접근만이 바람직하고 성공적인 통일에의 길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나

과거에 통일은 당위였을 뿐 가능성은 아니었다. 미소 간의 냉전체제하에서는 통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냉전이 종료되면서 우리가 통일을 하려고만 하면 충분히 가능한 시대가 왔다. 더욱이 우리가 명심할 것은 통일은 가능한 문제만이 아니라 절대로 필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통일의 절대필요성에 대해서는 지난 번 <생활성서> (’93년 10월)에서 밝힌 바 있지만, 우리가 통일을 하면 세계 10대국 이내로 들어가고, 안 하면 3류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독일 통일이 주는 교훈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흡수통합을 염두에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급격한 통일의 후유증으로 독일은 경제적 어려움과 구 동서독 간의 심각한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의 창립기념식에 왔던 드 메지에르는 “조금한 통일을 추진한 것은 우리의 실수였다. 한국만은 우리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반드시 점진적으로 남북 서로가 만족하고 합의하는 방식으로 통일해야 한다”라고 충고해주었다. 우리가 여기에서도 산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흡수통일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통일 후 남한은 분명히 경제파탄과 말할 수 없는 사회적 대립 및 정신적 갈등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설사 흡수통일을 하려고 해도 객관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동독 사람들이 서독을 동경하는 것과는 달리 북한의 주민들은 남한을 동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북한 주민이 남한의 실상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없었고, 북한 당국의 선전에 전적으로 의존해왔기 때문에 남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백만이 넘는 북한 군대는 북한 정권이 붕괴될 경우 자신들의 이익 고수를 위해 즉시 군사독재를 실시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북한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남한이 북한을 인위적으로 붕괴시키려 한다면 북한은 군사도발도 불사할 것이다. 또한 중국이 주변에서의 위협을 방치하지 않고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독일의 조속한 통일이 주는 교훈과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가 흡수통일을 바란다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통일의 해법은 무엇인가? 우리의 통일은, 시작은 서두르되 진행은 단계적으로 이루어 민족의 번영과 화합을 약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3원칙과 3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3원칙은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이다. 3단계는 1단계 남북공화국연합제 <남북연합제> 즉 1연합 2독립정부이고, 2단계 연방제 즉 1연방 2지역자치정부이며, 3단계는 1민족 1국가 1정부의 완전통일이다. 남북공화국연합체는 핵문제만 해결되면 남북한이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1단계의 남북공화국연합 (남북연합)에서는 1연합 2독립정부체제 아래 남북한 정권은 현재대로 외교, 국방, 내정의 권한을 행사한다. 한편 양 정권은 동수의 대표로 남북연합을 구성한다. 남북연합에서의 결의는 만장일치제를 채택해서 어느 쪽도 책략에 의해서 지배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 남북연합은 다음의 세 가지 임무를 가지고 구성하게 된다.

첫째는 평화공존의 실현이다. 평화공존을 위해서는 군비의 축소, 비무장지대의 확장, 상호감시 등을 실시해서 어떠한 무력대결의 가능서도 배제해야 한다. 둘째, 남북의 평화적 교류를 실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경제적 교류, 이산가족 교류, 문화 교류, 사회적 교류를 한 10년 쯤 하게 되면 남북 간에는 확고한 평화가 정착되고 서로간에 화해와 협력이 증진되며 민족의 동질성도 크게 회복될 것이다. 북한은 복수정당제도와 자유선거 그리고 시장경제체제를 수용하게 될 것이고 남한도 소외계층의 권익과 사회복지제도를 더욱 강화하는 변화를 보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양측이 크게 접근한 뒤에 제2단계인 연방제로 들어간다. 연방제 아래에서는 연방대통령, 연방국회의원을 남북이 같이 선출하고, 외교 국방은 연방이 관장하며, 주요내정은 연방이 관여하되 일반적인 내정은 양쪽의 지역자치정부에서 관장한다.  이때는 양쪽의 독립정부가 소멸하게 된다. 이렇게 약 5년쯤 연방제를 실시하게 되면 완전통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1천3백 년 동안 통일국가를 유지해온 우리가 불과 50년의, 그것도 타의에 의한 분단 때문에 통일을 이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3단계 통일방안 특히 제1단계의 남북공화국연합제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어떠한 통일기피론자들도 어떠한 공산주의 공포증환자도 안심할 수 있는, 오히려 분단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이 보장되는 통일방안인 것이다.

핵문제가 해결되고 남북정상회담 등을 통해서 화해와 협력의 길로 들어서기만 한다면 남북연합은 어렵지 않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그리고 통일은 자주적으로 하되 독일의 경우처럼 주변 강대국들의 협조와 지지를 유도하면서 추진하여야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이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통일을 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통일의 시작은 빨리 해야 할 것이나 진행은 단계적으로 해서 부작용을 덜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우리 교회의 역할에 대한 나의 견해를 얘기하고 싶다. ’95년을 맞이하는 분단 50주년의 희년 喜年 은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 희년은 우리 민족의 모든 성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해방의 해이다. 이산과 분단의 고통 속에 살아온 민족과 국토를 재결합하는 해이기도 하다. 통일이야말로 희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 최대의 사명이다. 교회는 과거 유신체제에 대해 유신반대와 민주회복의 선두에 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통일운동의 선두에 서야 한다.

통일을 위한 독일 교회의 역사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참고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분단상황 아래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를 다짐하고 상호 방문하고 서로 협의하고 협력했다. 물질적으로 지원해서 동독교회가 동독내에서 많은 사회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교회의 자리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통일과정에서는 본회퍼의 정신에 입각한 ‘노이에스 포름’, 혹은 라이네 에펠만 목사 등에 의한 ‘민주주의 발흥운동’ 이 동독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온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독일 통일과정에서 행한 교회의 역할은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 교회도 독일 교회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