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Monthly Archives: February 2020

 

지난 연말에도 연세대 동창회를 못 갔다. 물론 매년 못 가긴 했지만 더 ‘늦기 전에’ 한번 나갈까 몇 년 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꼭 가야 하나’ 하는 게으름 반, 두려움 반으로 버티고 있다. ‘게으름 반’은 언제라도 극복할 수 있을 듯하지만, ‘두려움 반’은 솔직이 자신이 없다.

20년도  전에 유일하게 한 번 가본  것이 전부였는데 지금 다시 나가면 도대체 어떤 분위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어색할 것 같은 것… 그런 것을 나는 제일 싫어한다.

성당 교우 중에 선배님이 계셔서 가끔 동창회엘 다녀오셔서 ‘연세대 달력’을 챙겨주시곤 했는데 올해도 고맙게 도 하나를 나누어 주셨다. 이 선배님은 비교적 대 선배에 속하지만 친구처럼 자상하신 분이라 아마도 우리가 다시 동창회에 나가면 조금은 덜 어색할 것 같다.

연세대 달력을 걸고 보니 첫 장, 1월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가볍고 아담하게 쌓인 눈을 배경으로 연세대의 ‘다른’ 얼굴, 이공대학 건물이 반갑게 나를 반긴다.  주로 언더우드 동상을 앞세우고 문과대학이 간판 건물로 나오는데, 올해는 어떻게 이런 행운이 있을까? 다른 이공대학과 함께 우리 전기공학과도 이 건물에 있었다. 날씨 좋은 날 이 건물 바로 앞의 bench에 앉아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아 ~~  연세대의 추억이여…

추억, 추억하지만 이제는 추억을 넘어서서 연세대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낸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추억 만으로는 너무나 짧았던 시절이 아닌가…

입학 직후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완전 자유’ 분위기, 이것이 나에게는 조금 문제였고 결국 상처도 입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학 교육의 의미를 느끼게 되었다. 비록 절대자,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지만 이곳에서 조용하게 느껴지는 신앙적인 분위기, 이것도 학교를 떠난 오랜 후에야 감사하게 되었다. 또한 항상 ‘세계를 향한 눈’을 강조하시던 총장님의 말씀도 좁은 곳을 떠나 미국 유학을 꿈꾸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우연히 옛 시사잡지 ‘신동아’를 보다가 소설가 최인호 씨의 ‘연세대 추억’ 글을 읽게 되었다. 이분이 연대 영문과출신이고 나이도 3년 위여서 최 동문, 최 선배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1978년의 글이니까 소설계의 혜성으로 등장한 직후였을 것이다. 최인호 동문선배의 글을 읽고 보니 역시 ‘문과대’ 출신답게 보는 눈, 묘사하는 기술도 색달랐다.  당시의 풍조를 반영하듯 ‘연고대, 서울대’를 중심으로 비교, 분석한 것이 아주 이채롭지만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돈이 생기면) 연대생=구두닦기, 고대생=막걸리, 서울대생=책…  등이 그것이다.

1학년시절 지나친 영화관람으로 인한 낙제, 빠른 결혼, 결국  8년 걸린 졸업.. 등등 조금은 고생하며 보낸 학창시절이었다. 군대에서 보낸 3년 반의 공백과 학생결혼생활 등등은 나로서는 너무 감당하기 힘든 것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밑거름이 되어서 졸업 후에 그렇게 소설계의 혜성으로 등장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도 언급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최인호 선배가 바로 ‘대표적인 연세인’의 모습이 아닐지…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알기 힘들어서, 어떻게 그렇게 한창 일할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 아쉽기만 하다.

 

 

延世8年에 배운 眞理

崔仁浩 (作家, 延大 文科大英文學科卒)

 

 

가슴에 새긴 푸른 문장 紋章

 

내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19]64년 3월이었고 졸업한 것은 [19]72년 9월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꼬박 8년간의 아까운(?) 청춘을 대학생활에 바친 셈이다.

그렇게 오래 연세대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학교 1학년 때 철모르고 영화구경 다니다가 학점이 모자라 낙제하여 1학년을 재수하였기 때문이요, 김신조 金信朝 아저씨 덕분에 3년 복무하기로 약속되었던 군생활을 3년 반 꼬박 군대에서 청춘을 바쳤기 때문이요, 거기에다 어영부영 연애랍시고 하다가 에라 이처럼 만나고 헤어질 바에는 아예 둘이서 살림 차려도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진 것은 쥐뿔도 없이 결혼식을 올리고 학생남편 노릇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막상 졸업식이라고 학사모를 뒤집어쓰고 누가 입었던 가운인지 하루만 빌려 입고 “제군들 앞길은 창창하오” 라는 식의 축사를 들으며 졸업식을 할 때 내 가슴은 우라질 학교를 드디어 졸업하게 되었다는 감개와 비애로 찢어지고 있었으며 여편네는 애를 배어 오늘 내일 하는 오똑이 같은 배를 하고서 남편 졸업식을 축하하러 나와 주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지겹기만 했던 연세대학교에 있어서의 학창시절은 내 의식의 녹을 벗기고 날로 푸르게 이끼가 자라고 있으며 연세의 푸른 紋章은 내 가슴에 뚜렷이 인 印 박혀갔다.

나는 연세대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던가. 가끔 나는 돌이켜 생각해 보곤 한다. 배운 것은 술과 담배와 적당한 퇴폐와 적당한 학문과 상식, 절망과 슬픔, 은행의 박한 이자와 같은 욕망과 교활한 이기주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처음 몇 년간은 내 가슴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본다면 연세의 그 깊은 손길은 천천히 다가와 나를 이루고 조각하여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빛깔과 향기를 주어 나를 달성시켜주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4.19 [학생혁명] 직후 한 소설가가 각 대학의 성격을 카리카츄어 하면서 돈 백 원 있으면 서울대학 학생들은 책을 사고 고려대학 학생들은 막걸리를 마시고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구두를 닦는다는 식의 내용을 발표한 뒤 지독한 곤욕을 치렀다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있었다.

어쨌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무지무지 실망해서 그 소설가의 지적이 맞는 표현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었다. 고등학교 무렵에 느끼던 대학생활의 기대는 얼마나 높은 것이었던가.

‘백양’ 담배도 마음대로 피울 수 있으며 술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고 낡은 가방에 염색한 군복바지를 입고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책을 읽으며 예쁜 애인과 연애도 마음대로 걸 수 있다는 대학생활에의 선망은 마악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깨어지고 말았다.

대학생활은 전국 각도에서 모여든 국적 없는 노무자들의 집합소 생활과 다름없었다. 나는 이내 실망을 하고 학교에 나가느니보다는 씨네마코리아라는 싸구려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눈알이 돌도록 영화를 보는 것으로 대학 일년을 보냈으며 번번히 낙제를 하는 비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연세대학교에는 솔직히 서울 문리대생들의 그 악바리같은 엘리트 의식, 겉으로는 만민평등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선민이라는 계급적 모순을 안고 있는 엘리트의식, 혹은 땅 팔아 논 팔아 공부 공부 공부하여 고등고시 합격하려는 끈질긴 완행열차 상경파들의 결심 같은 것도 연세대학교에는 없었으며 그렇다고 고려대학생들의 촌놈의식도 없었다. 민족자본이 만든 학교라는 자부심아래 농악에 막걸리에 여드름 툭툭 불거진 얼굴로 애써 백의민족의 후예라는 전근대적 고집을 내세우려는 촌놈의식 같은 집요한 딴 학교들의 칼라는 연세대학교에서는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연세대학교에 실망을 하였던가. 마치 선교사들의 뜨락만 같던 교정. 찬송가소리. 일주일에 한 번씩 예수그리스도의 고행을 칭송하던 목사님의 열띤 주기도문. 어딘지 매끄러운 집 출신 아이들이 모인 것 같은 친구들. 부모 잘 만나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라난 것 같던 아이들의 반짝이는 구두. 차비도 꿔주지 않던 극도의 이기주의.

나는 허락된다면 학교를 때려치고 싶은 적도 있었다. 이건 대학교도 아니다. 이건 대학교가 아니라 부모 잘 만난 학생들이 모였다가 떠나가는 유치원이다.

그러나 나는 감사한다. 나는 이제 나를 키워준 연세대학교에 감사한다. 아주 먼 훗날에서야 나는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의 강점이라는 것을 배웠다.

연고전 때면 으레 고대에서는 농악을, 연대에서는 서양 나이트기사가 출연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그러나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가 가질 수 있는 유일의 성격이며 특색인 것이다. 나는 연세대학교에서 모난 편견을 버렸다.

 

 

세계 世界를 호흡하는 연세인 延世人

 

나는 ‘용비어천가’ 만이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문학이라는 감정적 차원에서 ‘셰익스피어’와 ‘T S 엘리오트’의 무서운 세계인들의 공통분모를 터득하였다.

연세대학교는 만인이 알다시피 외국선교사가 세운 학교로 어딘지 그런 성격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연세대학의 심장부 문과대학 앞에는 ‘언더우드’ 의 눈 파란 외국인 동상이 우뚝 서 있는데 그리하여 어딘지 영국식 정원 같은 교정을 지나 담쟁이 넝쿨 우거진 서양 목사관 같은 문과대학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왠지 성균관의 문을 드나드는 유생이라는 느낌보다는 갓 유학 떠난 식민지시대 때의 문부대신 이웃 집 서생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가 내게 눈뜨게 해준 의식의 세계였다.

내가 선 땅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극동 그 지역에서 벗어나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민족적 자각과 더불어 지구인 地球人 이라는 범세계적 의식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연세대학생들이 백 원 있다면 꼬옥 책을 사거나 막걸리를 마시지 아니하고 구두를 닦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비난 받아야 할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강점임을 나는 배웠다.

한마디로 연세대학 학생들에겐 이상하게도 스마트한 특색이 있다. 좋은 의미의 개인주의자들이며 구태여 남에서 참견하느니보다는 남의 도움도 외면하고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려 하지 않는다.  혼자의 일은 자기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는 서구적 개인주의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 역시 강점이다.

언젠가 대학시절 연극반이었던 나는 다른 대학 연극반 학생들과 합동 미팅을 한 적이 있는데 다른 대학학생들은 술이 취하자 모두들 ‘두만강’이라든가 ‘타향살이’를 불렀는데 유독 연대생들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캔서스 시티’를 부르는 것을 보았었다.

노래 부르는 것으로 꼭 학교 나름의 특색을 구별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애써 대학생인 만큼 평소 부르지 않던 ‘두만강’을 부름으로써 과잉 대학생 자부심을 만족하려는 위선보다는 나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캔서스 시티’를 부르는 학생들이 더 솔직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홀로 미소를 김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연대 延大의 강점 强點, 연대생 延大生의 특징 特徵

 

지금 내 아내는 연세대학교에서 만난 클라스 메이트인데 간혹 이런 얘기를 하곤 한다.

“남자들은요, 연세대학교 출신들이 제일 좋아요.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우리 친구들은 누구나 그런 말을 한다구요. 연대출신 남자들은요, 다정하구, 모나지 않구, 가정적이며 아내들을 아껴주는 성격이라구요. 우리 친구들은 이런 말을 해요. 가령 봄이라서 대문에 페인트 칠을 하는 경우가 있으면 서울대 출신 남편들은요, 말로는 가정을 가정을 위한다 라고 하면서도 ‘페인트칠 좀 해주셔요’ 하면 사람을 사서 페인트칠을 하구요. 고려대출신 남편들은요, 페인트칠 좀 해달라고 하면 ‘남자가 어찌 가정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당신이 해’ 하고 모른 체 하지만 연대출신 남자들은요, 천천히 일어나 자신이 페인트칠을 한대요. 나는요, 이담에 우리 딸애가 시집갈 때두 연대생 출신 남자에게 시집 보낼 거예요.”

나는 이 말을 참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연대가 맹목적으로 왜소하고 나약하다고 비난 받는 점이기도 하지만, 이 점이 바로 연세대학교 성격의 강점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때문에 감히 단정하건대 연세대학교 출신들은 졸업 후에 별로 크나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 겨울 우연한 기회로 고려대학교 총장이신 김상협 박사님을 만나 뵈온 적이 있었다. 잔설이 쌓인 고려대학교에 김총장님을 만나 뵈러 들어가면서 나는 이 촌놈의 학교를 바라본 순간 가슴이 찡해와서 감격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저 식민지시대 암울한 민족의 의식 속에 통렬한 폭죽을 터뜨린 우리 민족의 학교 고려대학교의 위풍을 보며 아, 그렇구나, 바로 이것이 대학이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오늘날 무엇이든 천편일률로 똑같아지는 이 획일주의적 문화, 철학, 예술 속에 대학만은 그 나름대로의 칼라를 고집해야만 한다고 나는 느꼈었다.

고려대학교는 고대의 특색으로 서울대학은 서울대의 특색으로 연세대학교는 연대의 특색으로 뻗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제발 대학교에게 한가지 빛깔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대학을 자유롭게 하라.

고려대학교에서 김총장을 만나 뵈온 뒤 나는 그 느낌을 신문에 이렇게 썼었다.

 

“대학교문을 들어선 순간 모자를 벗어라. 교문을 들어선 순간 일체의 권위와 일체의 체면을 버려라. 아무도 이곳을 무단침입 할 수는 없으며 이곳에 들어선 순간 경례하라.

이곳은 우리의 미래를 짊어지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진리를 닦고 연마하는 곳. 목소리를 낮춰라. 저 책 속에 파묻힌 젊은이들의 머리를 혼란케 하지 마라. 그리고 용서하라. 그들이 설혹 그릇된 시행착오를 하더라도.

대학교. 이곳은 당신들이 불어나는 이자를 꿈꾸며 사고파는 증권회사가 아니며,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자가용 족이 아니다. 당신의 어깨 위에 빛나는 계급장을 떼어라. 이곳은 신의 은총을 갈구하는 교회가 아니다. 이곳은 당신의 위장을 채우는 음식점도 아니다. 이곳은 돈만 더 주면 탈 수 잇는 일등칸 급행열차도 아니며 또한 어울렸다 떠나가는 대합실도 아니다.

대학은 당신에게 배부르게 하지 아니하며 당신을 편하게 하지 아니하며 당신의 영혼을 채워주지도 않는다.

대학 大學, 이곳은 단지 수많은 눈감은 사람들의 손끝을 위한 점자 點字, 그 진리를 샘솟게 용기 있는 자라면 저 돌계단이 여늬 돌 [石] 이 아니라 수많은 방황하던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때로는 고뇌하고 때로는 두려워하고 때로는 슬퍼하던 청춘의 푸른 문장 紋章 임을 인정하고 풀포기 하나 강의실 벽의 낙서 하나 꺾거나 지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날 김총장은 오늘날 대학교육에 대해 걱정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영국식 교육처럼 사회지도자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할 것이냐, 아니면 미국식 교육처럼 건전한 시민으로 키울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 일선 책임자로서 가장 큰 난점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대학교육이 사회 지도자를 키우고 그 본래의 목적에 치우친다면 그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팽배한 오늘날의 대학교육은 암초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延世가 가르친 眞理

 

나는 여기에서 우리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왜 졸업한 뒤 막상 사회생활에 부딪친 후에도 잘 적응하여 그 본래의 빛깔을 잃지 않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 연세대학교에서 내가 배운 그 진리였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에서 배운 진리는 분명히 말해서 극단의 이상주의적 이론이 아니었다.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사회에 나가서도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적 이론과 사회와의 거리감은 별로 느끼지 않았으며 충격을 덜 받게 되었던 것이다.

타 대학생들이 학창생활에서는 그들이 비난하는 대상을 뚜렷이 하다가도 졸업 후에는 한시 빨리 그들이 비난하던 대상이 되고 싶어 안달을 하거나 막상 그 대상의 일원이 되지 못하면 그저 뒷전에 물러서서 갉아 내리는 열등감 투성이의 지 知적 소모품으로 전락되는 괴리감의 노예가 되는데 비해 연대생들은 대부분 각자 그들이 원하는 분야에 별로 드러남 없이 박혀 있다.

이것이 바로 연세대학교가 입학 때부터 배워주는 그 진리인 것이다.

연세대학교는 바로 학생들에게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책임의식을 처음부터 가르치고 있으며 때문에 4년의 과정 동안 터득한 진리는 바로 타인 위에 있다는 우월의식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그 타인의 구성원이라는 명제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新東亞 1978年 6月號]

지울 수 없는 잊혀진 대의명분, Stone Mountain, Georgia

 

미국 조지아 주,  수도 아틀란타, ‘바람과 함께 사라진’  lost cause의 역사, 공립고등교육수준  미국에서 ‘거의’ 최하위,  racist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득실득실, 남북전쟁 전후 노예제도 천국, 깊은 산속에 숨어사는 해괴한 백인들…  알아들을 수 없는 지독한 사투리 southern accent, 이런 모든 조지아 주의 ‘사실이건 아니건’ 불명예는 정확히 30여 년 전에 ‘북쪽’에서 이곳으로 직장을 찾아 온 가족이 내려오면서 어렴풋이 들었던 숨길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들이었다.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조지아와 모든 것이 정 반대의 극에 있는 ‘추운 동네’ Madison, Wisconsin을 떠나 새로 찾은 직장이 바로 Atlanta, Georgia에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대단한 결정을 하게 된 것이지만, 사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대부분 사람들, 남쪽 특히 조지아 주로 가는 것에 대해 불쌍한 듯, 이맛살 찌푸림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치 사회적, 문화적으로 뒤 쳐진 곳’으로 가는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사를 올 당시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것 중에는 ‘무식 無識이 자랑인, 무지랭이 중의 극치 極致’, 감추고 싶은 미국 역사의 수치 羞恥’인  KKK (Ku Klux Klan) 가 ‘패전 敗戰, 조지아 주’와 직접 관련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남북전쟁 패전 직후 테네시 Pulaski, TN 주의 ‘한 동네에서’  갑자기 할 일들이 없어진 ‘패전 남부 confederate 퇴역군인, 동네깡패’들로 로 출발했던 이 hate group은,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급변하는 세상의 불안한 심리[흑인해방, 동유럽 이민, 가톨릭]를 적절하게 이용해서 급성장 수백만 명의 member를 확보하기도 했는데 이 무렵에는 이미 ‘장난적인 hate group’에서 벗어나 당당한 정치적 그룹이 되었고 수 많은 정치인들도 가입을 한 상태가 되었다. 이 재건된 KKK의 시발점이 바로 아틀란타 교외의 Stone Mountain[현재는 州 공원]이란 곳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Stone Mountain [Park]은 사실 이곳으로 이사오자 마자 중앙고 후배 윤주네 집의 안내로 주말에 가끔 놀러 가던 곳이었다.  가족들 picnic장소로 적당하고 거리가 우리 살던 곳에서 20분도 안 걸리는 곳의 위치, ‘세계에서 제일 큰 돌 바위 산’으로 비교적 쉽게 정상으로 hiking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제일 큰 ‘행사’는 Laser Show였다.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남부의 영웅 3명[R. Lee, Jackson, J. Davis]’ 조각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laser image는 어둠이 깔리는 잔디에 누워서 보는 것은 정말 대단한 show였다.

 

3 heroes alive with Laser

 

비록 ‘적진 敵陣’으로 이사온 기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으로 보이는 피해를 본 기억은 전혀 없다. 1990년대 이후의 아틀란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도시 문화를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온 지 몇 년 후에는 올림픽까지 치렀다. 내가 일하던 직장은 대다수가 나와 비슷하게 타 주에서 직장을 찾아 내려온 사람들이고, 최소한 수도권 안에서는 어렵지 않게 많은 이민자들이 정착해 있었다. 그 옛날 유색인 전용 화장실은 전혀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이사온 지 30년이 지난 현재, 서울-아틀란타 비행기가 매일 뜨고 내리게 되어서 이제는 서울의 공기가 지척에서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아직도 조지아는 평균적으로 뒤 떨어진 곳이지만 부분적, 지역적으로는 진보, 발전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비록 평균적인 중고등 교육수준은 최하위에서 맴돌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Georgia Tech이나 Emory University같은 곳은  대표적 예외에 속하는  case다.  온화한 날씨, 경제적인 부동산, 활발한 경제 등으로 이제는 너무나 많은 외부, 타 주 인들의 유입이 문제가 될 정도가 되었으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KKK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세계사를 통해서 이런 ‘반동, 증오’ 그룹은 언제나 있었고 그것에는 분명히 원인과 결과가 교훈으로 남는다. 미개한 것이나 덜 개화된 것이 전부가 아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그 중에서 제일 큰 원인을 제공한다. 미국의 KKK의 교훈을 보아도 분명하다.  노예들 덕분에 편안했던 시절이 끝나게 됨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듯하고, 설상가상 ‘종교가 불확실한, 못사는’ 유럽으로부터의 대량이민, 종교적으로 증오대상이었던 ‘가톨릭’의 출현, ‘보기 싫은’ 유대인들 등등,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을 증오했던 ‘백인우월주의’,  어는 정도 민중의 호응이 없었을 리가 만무하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하면 모든 것은 끝이다.

이런 모든 것들의 실험장이 바로 미국의 19~20세기 역사가 아닐까?  이것은 전형적인 challenge-and-response의 반복 실험이다. 미국은 결론적으로 이제까지 이런 치명적인 도전을  거듭해서 물리치고 있는 형편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지만, 현재 우리의 코앞에 있는 challenge 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위의 교훈들에 비추어 보아서 현재 우리의 ‘우려, 공포, 관심’은 무엇인가? 그것을 자기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거나 잘못 판단하고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이끄는 ‘주체 세력, 정치인’들은 과연 누구인가? 희망과 긍정보다는 불안과 공포를 들추어내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세력, 인간들은 누구인가? 우리와 같은 소수민족을 더욱 불편함과 불안함을 더해 주는 정치인은 누구인가? 그와 반대로 ‘지나친 방종적 자유, 비도덕적에 대한 무감증’을 부추기는, 한 마디로 ‘내가 법이고 도덕’이라고 떠벌리는 한심한 부류들은 누구인가? 이런 것들, 결코 쉬운 도전이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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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서 내가 살아왔던 20세기 중엽을 전후로의 ‘세계, 미국사’를 사회적 관점에서 공부하는 데 안성맞춤인 당시의 미국 주간지 LIFE magazine에서 바로 KKK on the Stone Mountain, 기사를 읽게 되었다. 화보중심의 주간지라서 이곳에 실린 사진들은 과히 역사적 가치가 있었다.  사진기자가 어떻게 ‘변장’을 하고 이들의 ‘행사’에 잠입하여 당당하게 사진을 찍었는지, 과연 LIFE journalism의 우수성이 대단했다.

여기에 보이는 ‘신 단원 선서식’에서 많은 ‘인간’들이 관공서, 경찰 들의 member라는 것으로 당시의 ‘개화된 아틀란타’ 교육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채로운 것은,  이 사진의 설명들에서, 객관성을 자랑하는  LIFE 편집자들의 ‘이 그룹에 대한 혐오감’ 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 anti-Negro, anti-Catholic, anti-Semitic, anti-foreign, anti-union, anti-democratic”, “The ghastly spectacle of hooded human beings”, “Childish ritual”, “march in lock step, like old Georgia chain gang prisoners”, “the mumbo jumbo of initiating”…  이 중에서도 Georgia chain gang prisoners라는 말로 보아서 이들 [북쪽 사람들]이 얼마나 [바람과 함께 사라진] 조지아 주를 경멸, 조롱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On the evening of May 9 [1946] at 8 p.m. a mob of fully grown men solemnly paraded up to a wide plateau on Stone Mountain, outside Atlanta, G., and got down on their knees on the ground before 100 white-sheeted and hooded Atlantans. In the eerie light of a half-moon and a fiery 200-by-300 foot cross they stumbled in lock step up to a great stone altar and knelt there in the dirt while the “Grand Dragon” went through the mumbo jumbo of initiating them into the Ku Klux Klan. Then one new member was selected from the mob and ceremoniously “knighted” into the organization in behalf of all the rest of his fellow bigots. During the two-hour pageant the more privileged members of the Klan padded about with an electrically lighted cross. Said a local Baptist minister of the exhibition, “The ghastly spectacle of hooded human beings trekking…to Stone Mountain to burn a cross…is a sad commentary on the words of the Son of God: ‘And I, if I be lifted up from the earth, will draw all men unto Me.'”.

This was the first big public initiation into the Klan since the end of World War II. It was put on at a carefully calculated time. The anti-Negro, anti-Catholic, anti-Semitic, anti-foreign, anti-union, anti-democratic Ku Klux Klan was coming out of wartime hiding just at the time when the C.I.O. and the A.F. of L. were starting simultaneous campaigns to organize the South and just at the time when Southern politicians were starting their campaign for state and national offices. Georgia’s former “white supremacy” Governor Gene Talmadge is trying a comeback this year and has said that he will “welcome” the support of the Klan. But it is doubtful that the Klan can become as frighteningly strong as it was in 1919. One indication of the Klan’s impotence was its lack of effect on Negroes, who were once frightened and cowed by the white-robed members. More than 24,000 Negroes have already registered for next July’s primaries in the Atlanta vicinity alone, where the Stone Mountain ritual was held.

 

THE KLANS “GRAND DRAGON,” SAMUEL GREEN, AN ATLANTA DOCTOR, IS SURROUNDED BY HIS ASSISTANTS

THE “NEW MEMBERS” march in lock step, like old Georgia chain gang prisoners, up to the Klan’s big altar. The Klan exultingly announced they had initiated 600 new members in one night. But observers’ best guesses were from 150 to 200.

A BURNING CROSS DURING MAY 9 INITIATION, STONE MOUNTAIN CEREMONY WAS PUT OFF MANY TIMES, KLANSMEN SAID, BECAUSE OF WARTIME SHEET SHORTAGE.

BEFORE THE GRAND DRAGON initiates kneel, repeating the ritual. The crowd included some Atlanta policemen. The five Atlanta “klaverns”(branches) are strong because many members of the police force are also members of the Klan.

 

 

 

‘비오는 날 오후 3시’의 파고다 공원, 1959년

 

파고다 공원, 옛 서울 그러니까 강북이 서울의 전부이던 시절 낙원동 오른 쪽에 있던 유서 깊은 시민의 휴식공간 역할을 했던, 요새 기준으로 보면 정말 아담하고 작은 공원이었다.  역사적으로 까마득한 옛날 옛적에 원각사 圓覺寺 라는 절이 있던 자리여서 그곳에는 절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탑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그런지 일명 ‘탑골공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그곳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는  ‘팔각정’ 과 비슷한 정자 亭子가 [정확히 8각角 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있는데, 그곳에는 그 유명한 3.1 운동의 33인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던 역사가 남아있다. 

얼마 전에 문득 1950~60년대 대한민국 추억의 옛 영화들[한국영상자료원 제공]을 보다가 한 영화 첫 장면에서 그곳, 파고다 공원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오는 것을 보았다. ‘서울의 지붕 밑‘이라는 1960년에 나온, 당시로서는 크게 성공한 조흔파 원작,  신상옥 감독, 제작의 코미디 영화다.  이 영화에는 서울의 중심 세종로 일대와 주택가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보이고, 구형 시내버스, 택시들 특히 시발택시도 보게 되는데, 사실 영화의 줄거리나 배우들 보다는 이런 쪽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역시 ‘못 말리는’ nostalgia 향수병 탓일 것이다.

 

‘서울의 휴일, 1956년’의 파고다 공원

 

다른 추억의 영화들에도 파고다 공원의 모습이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1956년의 ‘서울의 휴일‘, 1959년의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라는 영화는 첫 장면 배경만이 아니고, 주인공들이 공원 안에서 연기하는 모습까지 나온다. 이런 옛모습들을 보면서 그 옛날을 회상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비오는 공원에서 추억에 잠긴 주인공 ‘이민’

그 5년 전, 비오는 공원 벤치에서 김지미와의 만남

 

처음으로 이 파고다 공원엘 갔던 기억이 60년 이상이 지난 아직도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란다.  재동국민학교 3학년 때 원서동 시절, 동네 골목에서 나를 아껴주던 ‘영순 형’이 있었다. 나보다 몇 살 위였고,  학교는 우리들 모두가 다니는 재동학교와 달리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는,  약수동에 있는 ‘약수국민학교’에 다녔다. 왜 그렇게 먼 곳엘 다녔는지 그 때에도 의아스럽기만 했다. 그 형이 어느 날 나를 비롯한 몇 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간 곳이 바로 파고다 공원이었다.

원서동 골목을 따라 뛰어가서 신작로가 나오면 가회동에서 내려오는 큰 길 어귀에서 남산 을 바라보며 내려가면 교동학교, 문화극장, 덕성여대, 천도교교회 등이  양쪽에 보이고, 더 내려가면 앞에 종로(2가)가 나올 쯤 오른 쪽에 공원입구가 나타난다. 공원이라곤 북악산 쪽으로 산과 숲 속의 삼청공원이란 곳만 알았던 때 이런 시내 한 복판의 공원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들 모두 정신 없이 공원 안으로 뛰어들어서 귀신들린 듯 뛰어 놀았던 기억, 너무나 생생한 것.. 지금도 그 신나게 놀던 우리들 모습,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립기만 하다. 그때 영순형이 공원 안으로  뛰어들어가며 ‘여기 돈 안 받아!’ 라고 소리치던 것도 기억에 너무나 또렷하니… 영순형, 보고싶습니다!

그때는 1956년 경이었을 것이다. 그 해에 나온 ‘서울의 휴일’이란 영화에 나오는 공원의 모습이 바로 이때 내가 보았고 놀았을 때의 모습이었을 듯하다. 팔각정, 원각사 탑(파고다, 탑골), 도처에 있는 추억의 벤치들… 그런 모든 것들은 바로 내가 예상했던 공원의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무직자들이 널려 있었던 당시, 이곳은 그들의 휴식처이기도 했고, 가정불화로 집을 뛰쳐나와 무료로 시간을 보낼 곳이기도 했다. ‘서울의 휴일’에도 영감님이 벤치에 누어 잠에 떨어진 모습도 보이고, ‘서울의 지붕 밑’에서도 주인공 김승호가 시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후 ‘가출’을 한 후에 간 곳도 바로 이 파고다 공원이었다. 

영화 ‘서울의 지붕밑, 서울’, 파고다 공원, 1960년

시의원 낙선 후 가출, 파고다 공원의 김승호, 서울의 지붕밑 1960년

 

1957년 경, 그러니까 재동국민학교 4학년 때, 나는 다시 이곳에 남은 추억이 있다. 담임 김경구 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가정방문을 온다는 ‘통고’를 들은 후에 나는 ‘혼비백산’한 심정으로 방과후에 간 곳이 바로 이 공원이었다. 왜 당시 나는 그렇게 선생님이 집에 온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있었는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속의 공원에서 ‘무직자, 가출자’ 같은 심정으로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던 기억. 집에 내가 없으면 선생님도 돌아가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일까… 그것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그러다가 새로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1959년경의 영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란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하도 영화 보존상태가 나빠서 처음엔 무시하고 넘어갔지만 자세히 보니 이것이야 말로 ‘파고다 공원 영화’였다.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는 바로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이야기였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진흙 속에 감춰져 있던 진주’였다. 기라성 같은 1급 배우들[이민, 최무룡, 김지미, 최지희 등등] 이 총 출연했는데 특히 주인공 이민 씨의 연기가 아주 돋보였다. 그 2년 전에 내가 경험했던 ‘비 오는 공원’이 바로 이곳에서 영화로 재현되고 있었다.

이 ‘오후 3시’ 영화에는 그 유명한 추억의 발라드 ‘검은 장갑’ 을 ‘전설적인 가수’ 손시향이 부르고, 박재란 도 노래를 부르며 출연한다. 그러면서 주제곡인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멜로디를 자꾸 들으며.. 어렴풋이 기억에 떠오른다. 아마도 이 곡, 거의 60년 만에 듣는 것은 아닐까?

 

‘검은 장갑’을 부르는 가수 손시향

 

요새 거의 매일같이 쏟아지는 겨울 비를 창 밖으로 느끼고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래… 나이를 깊이 먹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거리도 깊이 쌓여가는 게 아닐까? 물론 그것이 나만의 특권은 아닐지라도…

지나간 10여 년 이상 나에게 일어난 큰 변화 중, 주변에서 거의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사실은 나도 잊고 사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서 technical book을 거의 산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technical 한 것은 물론 electronics, computer에 관한 것이다. 이 사실은 사실 나도 가끔 놀라는데, 어찌하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쉽게 말해서 나의 주 관심사가 지난 10년 동안 크게 변했다는 사실에 있다. 공학, 과학에서 신학, 인문학, 문학 쪽으로 갔다고나 할까..  신학 중에서는,  전통적 신학이라기 보다는 ‘과학과 종교의 대화’ 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역시 spark가 번쩍이는 ‘전기의 기운’을 보면 본능적으로 흥분이 되고, 본능적인 희열을 느낀다. 어릴 적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것이 나의 일생 직업이 될 것도 의심치 않았다. 비록 전문직종에서 직장생활의 인간관계가 힘들 때가 있어도 일 그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이 극복되곤 했다.

모든 전문성이 사라진 이 나이에서도 나를 제일 흥분시키는 것은 다름이 아닌 spark가 번쩍이는 ‘전류가 흐르는’ 전깃줄 바로 그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혼’, electron들의 마력에 빠진 이후 나는 그것을 즐기는 인생을 살았지만 근래에 들어서 그런 시간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유일하게 그것들을 손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는 가끔 찾아오는 ‘가전제품이 망가지는’ 그런 불편한 때 밖에 없다.

 

부분적 고장이 난 space heater, 타버린 power diode, troubleshooting ready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값싼 parabolic  electric space heater란 것, 이것은 분명히 ‘값싼 중국’에서 온 것이고, 수명이 그렇게 길지 못함은 값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그런 ‘일회용 제품’ 에 속한다.  몸에 직접 햇볕을 쬐는 효과를 최대한 살린 것이라 겨울에 몸으로 느끼는 추위를 순식간에 없앨 수 있는 이점으로 꽤 유행을 했고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 중에 한두 대는 이미 고장이 나서 버렸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고장이 난 것이 아니고 ‘强, 弱’ 중에 ‘弱’ setting에 고장이 났다. 내가 주로 쓰는 것이 바로 ‘弱’인데, 이것이 안 되면 또 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고쳐보기로 해서 결과적으로 $5.00 part와  일주일의 시간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번에 값싸게 ‘강,약’을 조절하는 그들의 방식을 알게 되었다. AC power에 heating element 가 직접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강’ 이고 power (solid state) diode를 통한 것이 ‘弱’ setting이었다. 그러니까, 60 cycle 중에 절반의 power를 쓰는 것이므로 half power를 그야말로 ‘간단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번의 문제는 물론 값싼 diode가 일찍 수명을 다하고 타버린 case였다. 이 diode만 교체하면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인데 이 ‘값싼 중국’제 part를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Corona Virus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쪽에서 이 part를 ‘수입’하는 것, 불가능한 것이었고 할 수 없이 다른 곳에서 다른 part로 대체하는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과 비슷한 power diode는 미국 내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싼 것은 절대로 아님을 알게 되고, 다시 이 heater를  ‘버릴까 말까’하는 선택에 봉착하게 되었다.

 

60 hertz 117V power cycle, diode로 half cycle이 차단 됨

 

문제는 망가진 diode와 specification이 비슷한 것, 아무 것이나 OK라는 간단한 결론이고, 또한 simple diode가 아니고 bridge rectifier diode[diode가 4개나 내장된] 도 ok일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이런 종류의 것은 이곳 미국 내에서도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으로 $5.00 정도로 손쉽게 그것도 그 값으로 2개나 묶음으로 사게 되어, 곧바로 고치게 되었고,  다른 heater에 이 문제가 나면 나머지 남은 part로 문제없이 고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1주일도 못 되는 ‘수리과정’에서 느낀 것은 ‘행복’ 그 자체였다. 멀쩡한 것 landfill로 가는 것도 방지했지만, 전기의 spark가 손끝에 느껴지는 순간들을 오랜만에 맛 보았던 그 사실이 나를 너무나 행복하게 한 것이다. 앞으로 더 신경이 둔화되기 전까지는, 이것도 perfect time-killer가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대체 부품 bridge rectifier diode, 4개 중에서 하나만 사용됨

눈이 쏟아지기 시작, 길에 쌓이기 전

드디어 눈이 온다… 그것도 함박눈이. 비록 땅에 떨어지면서 녹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것이 웬 떡이냐? 하느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제 소원을 풀어주셨습니다. 이런 날을 꿈 속에서만 그렸습니다. 비록 이런 날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Trappists 수도원으로 드라이브 하는 것은 쉽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대숩니까?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 시간이면 우리 동네 Holy Family 성당의 아침 미사가 시작되었을 텐데… 미사를 보면서 유리로 된 제단 뒤쪽,  밖으로 눈 쏟아지는 모습을 보고 있을 우리  ‘매일미사 친구 아줌마, 아저씨’들, 얼마나 한눈을 팔까… 궁금하다. 신부님도 미사 집전에 신경을 쓰는 것이 어렵겠다는 즐거운 생각도 든다.

결국은 나의 소원은 풀어졌다. 작년에 안 왔던 이 하얀 추억의 선물을 나는 얼마나 기다렸던가. 2014년의 괴로운 추억도 이제는 아련하고 포근한 추억으로 퇴색이 되고 있지 않은가? 세월의 마력이고 매력이 아닌가?

 

이번 ‘진짜’ 눈은 거의 2시간 동안 ‘쏟아졌다’. 며칠 전부터 피기 시작한 수선화, 매화 위로 소복한 눈이 쌓인다. 내가 그리던 최소한의 소원은 풀어진 셈이다. 조금만 기온이 더 낮았으면 아마도 불편함을 느끼게 될 정도가 될 뻔했다. 오늘 것은 정말 눈으로, 기분으로 너무나 포근하고 즐겁고 아련한 것이지만 움직이는 사람들에겐 큰 불편이 없는 그런 ‘뜻밖의 사건’이 될 듯하다. 감사, 감사, 감사…

 

 

2월의 매화, 그리고 수선화, 또 피었구나 올해도… 반갑다…

 

¶  2월로 달력이 넘어가면서부터 나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2월 초면 거의 시계처럼 피어나는 ‘청초하고 노오란 것’,  늦겨울 황량한 우리 집 뒷마당 먼 쪽으로 오롯이 피어나는 수선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매년 이 꽃이 피는 것을 보며 봄이 아주 멀지는 않았음을 느끼곤 하는데, 올해는 왜 유난히도 이 모습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일까? 이런 모습을 앞으로 얼마나 더 보게 될 것인가.. 하는 아주 sentimental 한 느낌도 없지 않다.

올해는 bonus로 그 옆에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매화꽃이 같이 피어 올랐다. 전에 못 보았던 것인데 아마도 연숙이 언젠가 이곳에 심어 놓은 모양인가 보다. 매화꽃, 연숙이 문인화에서 즐겨 그렸던 것, 나는 사실 처음으로 가까이 실물을 보는 셈이다. 그러면서 일본애들의 전통적 ‘화투’의 2월에 이것, 매화가 있었음을 알고 실소 失笑를 금치 못한다. 어떻게 이 나이에야 이런 사실을 깨달았단 말인가?

올 겨울은 나에게는 정말 재미없는 계절이 되고 있다. 비록 12월은 겨울답게 춥고 싸늘하긴 했지만 겨울의 꽃, 눈이나 진눈깨비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평균적으로 한두 번씩 찾아오는 snow day같은 ‘괴롭지만 즐거운’ 그런 긴장감의 기회가 현재까지 전혀 없었다.  올 겨울에 만약 ‘첫눈’이 온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Conyers1 의 수도원을 방문하리라 던 나의 소년 같은 희망도 이제는 포기할 때가 된 듯하다.

 

¶  봄이 오면 나는…  비록 2월 초이긴 하지만 경험상 2~3월은 겨울답지 않아도 겨울이다. 언제고 ‘날씨의 놀람’은 찾아온다. 특히 이때에 느끼는 ‘추위’는 한 겨울의 그것과 질적으로 종류가 다르다. 한마디로 더 ‘심한 싸늘함’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때가 되면 각가지 ‘봄의 기대’ 에 대한 추억과 생각이 떠오른다. 또한 가톨릭 전례로 이때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가 있어서 올해의 부활절을 떠올린다. 이제는 이때가 나의 일년을 돌아보는 시기가 되고 있다.

요새 즐겨보는 이해인 수녀님의 오래된 1990년대 수필집 ‘꽃삽‘, 이곳에서 수녀님이 생각하는 봄의 모습을 본다.

역시 수녀님, 시인답게 ‘봄은 꽃’이라는 서두로 시작한 단상이다.  이 서문을 읽으며 나도 어린 시절의 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나이차이가 그렇게 나지도 않고 그 무렵 서울 가회동에도 인연이 있기에 더욱 그 시절 봄의 정경이 떠오른다.

난방시설이 초라했던 그 1950년대 그 시절, 겨울을 서서히 벗어나던 때는 정말 황홀한 느낌뿐이었다. 수녀님의 묘사, 포근한 흙 내음새, 어김없이 피어나던 각종 꽃들,  어디 있다가 다들 모여왔는지 그 각종 새들, 그 중에서도 나에게 ‘즐거운 추억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역시 ‘이슬비’가 아닐까? 꽃이 피어나는 앞마당으로 잔잔히 내리는 이슬비를 바라보며 내가 하늘로 떠오르는 착각 속에 빠지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동요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단순하면서도 즐겁고 멋지던가.

추위에서 해방이 된 아이들, 갑자기 밖에서 노는 시간이 배로 불어난 즐거움 속에서 얼마나 흙과 나뭇가지를 가지고 놀았던가. 그 시절의 코흘리개 ‘남자’ 친구아이들, 이제는 모두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이 가져다 준 각종 ‘편리함’이 앗아간 것들을 아쉬워하면 다음 세대와 그 다음세대를 본다.

 

***************

 

봄이 오면 나는 – <꽃삽>, 이해인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앓이를 하고 싶다.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안뜰에 작은 꽃밭을 일구어 꽃씨를 뿌리고 싶다. 손에 쥐면 금방 날아갈 듯한 가벼운 꽃씨들을 조심스레 다루면서 흙냄새 가득한 꽃밭에 고운 마음으로 고운 꽃씨를 뿌리고 싶다.

 

 ‘조금 답답하겠지

그렇지만 꾹 참아야 해

땅은 엄마니까

꼬옥 품어줄거야

한잠 푹 자고 나면

우리 또 만나게 될거야’

 

언제 읽어도 정겨운 김교현 시인의 동시를 외우면 흙을 덮어주면 꽃씨들은 조금쯤 엄살을 부리다가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알았어요’ 라고 대답할 것만 같다.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새들의 이야기를 해독해서 밝고 맑은 시를 쓰는 새의 시인이 되고 싶다. 바쁘고 힘든 살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잇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이 오면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이슬비를 맞고 싶다. 어릴 적에 항상 우산을 함께 쓰고 다니던 소꿉동무를 불러내어 나란히 봄비를 맞으며 봄비 같은 이야기를 속삭이고 싶다. 꽃과 나무에 생기를 더해 주고 아기의 미소처럼 사랑스럽게 내 마음에 내리는 봄비. 누가 내게 봄에 낳은 여자 아기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면 서슴없이 ‘봄비’ ‘단비’라고 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풀 향기 가득한 잔디밭에서 어린시절 즐겨 부르던 동요를 부르며 흰 구름과 나비를 바라보는 아이가 되고 싶다. 함께 산나물을 캐러 다니던 동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친하면서도 가끔은 꽃샘바람 같은 질투의 눈길을 보내오던 소녀시절의 친구들도 보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우체국에 가서 새우표를 사고, 문방구에 가서 색연필, 크레용, 피스텔, 그리고 마음에 드는 편지지와 그림엽서를 사고 싶다. 답장을 미루어둔 친지에게 다만 몇 줄이라도 진달랫빛 사연을 적어 보내고 싶다. 동시를 잘 쓰는 어느 시인으로부터 맑고 고운 무리 말을 다시 배워서 아름다운 동심의 시를 쓰고 싶다. 시를 외우다가 잠이 들고, 꿈에서도 시의 말을 찾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모양이 예쁜 바구니를 모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솔방울, 도토리, 조가비, 리본, 바느질 거리, 읽다가 만 책, 우편물 등을 크고 작은 바구니에 분류해 놓고 오며 가며 보노라면 내 마음도 바구니가 되는 듯 무엇인가를 오밀조밀 채우고 싶어진다. 바구니에 담을 꽃과 사탕과 부활달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선물들을 정성껏 준비하며 바쁘고도 바쁜 새봄을 맞고 싶다

사계절이 다 좋지만 가을엔 ‘달맞이 마음’, 봄에는 ‘해맞이 마음’이 된다고 할까? 꽃들이 너무 많아 어지럼증이 나고,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 봄은 힘들다고 말했던 나도 이젠 갈수록 봄이 좋아지고 나이를 많이 먹고서도 첫사랑에 눈뜬 소녀처럼 가슴이 설레인다.

봄이 오면 나는 물방울 무늬의 앞치마를 입고 싶다.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와 연못이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먼지를 털어낸 나의 방 하얀 벽에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 사제가 그려준 십자가와 클로드 모네가 그린 꽃밭, 구름, 연못을 걸어두고, 구석진 자리 한곳에는 앙증스런 꽃삽도 한개 걸어두었다가 꽃밭을 손질할 때 들고 나가야겠다. 조그만 꽃삽을 들고 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름다운 음성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나는 멀리 봄 나들이를 떠나지 않고서도 행복한 꽃마음의 여인, 부드럽고 따뜻한 봄 마음의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1994>

  1. Atlanta, Georgia의 subur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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