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AN: Yet Another Nostalgia

Nostalgia, 향수’병’ 鄕愁病… 허~ 이것도 이제 보니 병 病 그러니까 주로 ‘정신 질병’이다. 몸과 마음, 특히 마음이 아픈,  분명한 병은 병인 모양이다. 나에게는 특히 친숙한 이 ‘병’, 약 7 년 전에 우연히 신문기사 New York Times 에서 이것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쓴 적이 있었다. 당시에 이런 것도 연구 대상이 되는구나 의아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유별나게 아련한 감정에 자주 휩쓸리는 나의 모습을 숨기고 사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나의 중년 이후의 모습이기도 했다. 고향도 그렇지만 지난 시절을 유별나게 그리는 것, 간혹 이것 병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긴 했다. 그러다가 그 ‘과학적 연구’의 기사를 읽고 많이 위안을 받고 이해를 하게 되었다. 내성적인 성격과 향수병에 쉽게 걸리는 type은 흔히 우려하는  mental disorder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더욱 재미있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번에는 지나간 Atlantic Magazine 이 그 출처가 되었다. 기사의 제목이 유별나게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이름하여: Study: Nostalgia Makes Us Warm, and Cold Makes Us Nostalgic… 그러니까.. “향수’병’은 우리를 따뜻하게 하고, 추위는 우리에게 향수병은 가져다 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부제 副題다.  ‘쉬지 않고 지나간 12월의 추억에 빠지면 집의 난방비가 줄어든다’. 와~ 과연 무슨 뜻일까…

대강 짐작은 간다. 포근한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에 빠지면, 그러니까 ‘향수병에 빠지면 몸도 따라서 따뜻해 지고,  또한 추위는 우리에게 향수병을 가져다 주고, 따라서 난방비가 줄어든다’ 는 논리다. 조금은 웃기는 듯 하지만 나는 150% 동감이 간다.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하지만 이 Atlantic의 기사는 과학적으로 그것을 증명하고자 시도한 것이고 그들의 가설은 충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이 연구의 결론은: ‘춥거나, 슬프거나 외로울 때, 특히 holiday season에는 지나간 행복했던 시절의 생각에 빠져라’ 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을 즐기며 따뜻하게 살고 싶고 난방비 절약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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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Nostalgia Makes Us Warm, and Cold Makes Us Nostalgic

Lindsay Abrams  December 4, 2012

 

Non-stop reminiscing about December past may cut down your gas bill.

PROBLEM:  Why do we get so nostalgic in December? Smell, touch, and music have all be proven to evoke it, and the holidays have all three (though, apologies if you’re not being touched enough this seasons.) While they can spur us to give love to our fellow men, or remind of us what’s important in life, they may also serve a more utilitarian function.

METHOLOGOGY: Researchers at the University of Southampton recruited college students to participate in five relatively basic studies centering around nostalgia to warmth. Some of them would probably make great holiday party games.

  1. Participants were asked to keep a journal of nostalgic feelings over 30 days, which were then compared to each day’s weather.
  2. Participants were placed in rooms ranging from cold to comfortable to over-heated, and then asked how nostalgic they felt.
  3. In an online study, participants listened to music and were asked about how nostalgic it made them feel, along with how warm they currently felt.
  4. Participants were placed in a cold room and instructed to reflect on nostalgic or ordinary memories, and to then guess the room’s temperature.
  5. After being asked to recall a nostalgic or ordinary memory, participants placed their hands in iced water and were instructed to keep them there for as long as they possibly could.

Different participants were used for each study.

 

RESULTS:

Success on all fronts. The journalers recorded more nostalgic thoughts on colder days. The people in cold rooms rated highest on nostalgia scales. The people for whom the music evoked the most sentimentality reported feeling warmer. The people told to think nostalgic thoughts while in the cold room had the warmest estimates for what the temperate actually was. And the unlucky participants in the ice water experiment lasted longest when they focused on nostalgic memories.

CONCLUSION:  Nostalgia appears to both to be evoked in chilly atmosphere and to have a protective effect against the cold – either by making us feel warmer or at least increasing our tolerance.

IMPLICATIONS: If you’re cold, sad, and lonely this holiday season, lose yourself in memories of happier times. That will take care of at least one of your problems.

 

The full study, “Heartwarming Memories: Nostalgia Maintains Physiological Comfort,” was published in the journal Emotion.

LINDSAY ABRAMS is a former editorial fellow at The Atlantic.

칠십이 년과 마흔 번째..

Ruby Anniversary, 연숙아, 우리들 오래 살았다…

 

¶  지나가는 일주일 동안 나는 칠십이 년을 살아온 ‘태어난 날’ 과, 배우자와 같이 가정을 이루며 산 세월 40년의 기념일을 연속으로 맞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72세 생일, 결혼 40주년 기념일을 4일 간격으로 맞은 것이다.

항상 ‘기념일’로 바쁜 느낌을 받는 1월이어서 솔직히 근래에 들어서는 은근히 스트레스까지 느끼곤 하였다. 그래서 올해는 ‘아이들’에게 모든 기념일 축하는 사절한다고 충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확실히 마음이 조금 편한 듯함을 느낀다.

생일이 그렇게 즐겁지 않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렇게 ‘축하 거부’하는 나 자신도 웃긴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모두 올해는 바쁜 모양이어서 나의 전략은 성공했고 비교적 조용히 ‘미역국만 먹는 하루’를 즐기게 되었다.  진짜 옛날 ‘어렵던 시절’의 생일이 되살아난 듯 해서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이 일흔둘… 허.. 어쩌다가 이렇게 오래 살았는가? 100세 시대라는 말도 웃기지만, 70세면 어떻고 100세면 어떤가?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그렇게 좋은가? ‘적당한 세월을 적당한 건강으로 적당한 모습으로’ 살다 가는 것, 나는 그것을 바란다. 제발 주위에 큰 부담 안 주고 가면 더욱 더 좋고. 이 세상에 있는 기간과 저 세상의 무한한 세월을 어떻게 비교를 할 수 있을까? 이런 사실을 잊고 사는 우리들이 바보가 아닌가?

가정을 이루고 산 세월이 40년, 이것은 조금은 자랑스럽다. 이유는 자명하다. 그렇게 못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렇게 세상이 변하고 있는가?  결혼 초에 40년 뒤를 내다본 적이 있었을까? 없다. 절대로. 그저 미래는 안개 속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간 우리의 인생,  이제는 조금 피곤을 느끼기도 한다. 무언가 쉬고 싶은 그런 것, 이것이 칠십 년 세월의 느낌일까?

생물학적, 육체적 죽음이 진정한 끝이 아님을 안 이후 이제는 마음만은 편하다. 궁극적 희망이라는 것을 찾았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높은 진리를 늦게나마 알게 된 것을 감사하며 일흔두 살의 생일과 마흔 번째 결혼기념일을 조용히 지낸다.

 

연호 친구들, 1968년 9월, 관악산에서..

 

¶  ‘연호 延護’ 옛 친구들:  1월 중순 즈음이 되면 불현듯 떠오르는 옛 친구의 생일 1월 15일이 나를 반세기 전으로 되돌아가, 생일의 주인공인, 잊고 싶지 않은 친구 양건주와 당시 연세대 캠퍼스주위를 중심으로 같이 어울렸던 ‘연호’ 클럽 친구의 모습들이  함께 삼삼하게 떠오른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어서 정확히 1월 14일 저녁, 그러니까 대한민국 시간으로 1월 15일 오전 즈음에 근래에 우리들이 가끔 이용하는 카카오톡으로 생일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솔직히 주인공인 건주의 반응 메시지는 기대했지만 의외로 ‘모두들’이 즉각적으로 생일축하 인사를 보냈고 정말 오랜만에 모두 한마디씩 신년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이런 뜻밖의 ‘모임’은 정말 즐겁지 않을 수가 없다.

반세기를 뛰어넘는 ‘늙은 우정’을 다시 확인한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모두 어떻게 사는지, 어떤 모습으로 70대를 맞이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모두의 정확한 생일날짜도 서로 확인을 하고 최소한 생일날에는 서로 이렇게 축하를 하자고 하였다.

그 옛날의 철없던 시절의 사진을 다시 보며 나는 숙연한 기분에 빠진다. 전보다는 이런 때의 기분을 잘 조절을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유 없이 즐겁게만 느껴지는’ 옛날의 추억을 나는 어찌할 수가 없다. 그저 포근하고 아름답게만 느껴지니…

 

 

¶  오늘은 신년 들어서 첫 ‘등대회’ 월례모임엘 참석을 하게 되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유일한 ‘장년층’ 친목단체인데, 사실 옛날 같으면 ‘노인들 단체’로 분류될 법도 한 연령층인 60~70대가 주 멤버들이지만, 80대 이상의 그룹이 별도로 있기에 ‘노인’이란 말은 피하게 되었다. 우리는 1년 전에 다른 친목단체인 ‘구역모임’을 안 나가게 되었기에 이제는 이곳이 유일한 social group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더 정성 쏟으며 이 단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을 한다. 오늘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1월 달 생일을 맞는 멤버를 축하하는 모임이기도 해서 내가 혼자서 축하를 받게 되었다. 생일을 미역국으로 때우려고 했던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뜻밖으로 이곳에서 정식으로 케이크와 ‘생일축하’ 노래까지 받게 되었다. 멤버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나는 듯한 이 모임, 앞으로 어떻게 변화, 발전이 될 것인지 모르지만 제발 ‘분열과 갈등’이 없이 건강하게 지속되기를 우리는 기도하고 있다.

신년 벽두 장례미사有感

 

장례식, 장례미사, 연령회 연도..  이제 나에게는 너무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 말들은 모두 죽음에 관련되는 말들이다. 불과 10여 년 이전만 해도 나는 이런 것들을 거의 모두 피해가며 살아왔었다.  ‘죽음의 진리’를 요리조리 피하며, 모래 밑으로 얼굴을 파묻고 살았다는 표현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이 ‘죽음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기리며 보내는 것이 거의 습관화가 될 정도로 많아졌고, 나름대로의 ‘망자 亡者와의 이별’ 하는 방법과 철학까지 생기게 되었다. 물론 기본적인 철학은 가톨릭적인 것이지만 이제는 내 생각의 일부가 되었음을 느낀다.

각양 각색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을 보내는 모습도 모두 다르겠지만 그런대로 경건함을 지키는 가톨릭 장례미사는 그 나름대로의 ‘장엄 의식’이 있고 그에 따른 조문객들의 엄숙함이 보인다. 일반 장례식은 물론이고 개신교 의식 조차도 이에 비해서 나의 눈에는 너무도 ‘사회적 모임’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한마디로 고인의 궁극적인 삶의 의미, 목적, 가는 곳, 등등에 대한 것들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은 올해 들어서 첫 장례미사에 가게 되었다. 작년에는 1월 초에 간 기억인데 올해는 조금 늦은 셈인가. 오늘의 주인공은 40여 년 전, 우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창립멤버로 활약을 했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사회봉사활동을 해서 이 지역에선 잘 알려진 분이었다.  지병으로 한국의 어떤 요양원에 계시다 며칠 전, 향년 80대 중반에 선종하시고 유골함이 다시 이곳으로 왔는데, 고인의 경력을 감안하셨는지 신임주임신부님, 최대한의 예우로 장례미사를 거행하셨다. 예를 들면 부활초가 켜지고 제대의 초의 숫자 등, 모두 평소의 장례미사와는 달랐던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생전의 고인을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이런 분의 영결식에 참여하는 것은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의무로도 생각되어서 ‘갈까 말까’하다가 온 것이었고 신부님의 고별사도 다시 기억하고 싶은 ‘신학적 깊이’를 더해 주는 그런 것이어서 ‘오길 잘 했다’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성당을 떠날 즈음의 느낌은 그것이 아니었다.

 작년 이맘때에 있었던 장례미사의 ‘악몽’이 떠올랐고, 그 이전에도 간혹 겪었던 좋지 않던 기억도 되살아 난 경험을 다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지나간 두 가지의 비슷한 경험은 모두 ‘너무나 무리하게, 길고 길었던 미사’라는 것, 놀랍게도 그것이 오늘 다시 찾아온 것이다.

장례미사는 일반 장례식과 조금은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고별식’이란 것, 각종 지인들의 고인에 대한 고별사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짧지 않은 강연을 하기도 하는데 한국말을 모르는 조문객들이 거의 없는데 모든 말을 영어로 번갈아 가며 하기도 한다.  제일 괴로웠던 경험은 ‘정말 보기 언짢은 태도’로 한 없이 계속되는 ‘우리 사상 최고의 영웅’ 아빠에 대한 추억들.. 정말 끝도 한도 없었다. 내가 죽었을 때 딸들이 그렇게 하는 것, 관속에 들어가 내가 듣게 된다면 아마도 관 뚜껑을 열고 나올 정도가 아닐까..  어제도 큰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번엔 ‘반세기 추억의 영화’까지 가미가 된 것이 이채로웠다. 일반 장례식장에 가면 예식 전후에 뒤 배경으로 계속 보여주던 video를 이번엔 성당 미사 중에, 그것도 ‘끝이 안 느껴질 정도로’ 무수한 영상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앉았던 위치로 보아 도저히 탈출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나에게 이것은 완전한 show stopper로 느껴진 셈이고 앞으로 ‘장례미사 공포증’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생긴다.

이래서 크건 작건 성당의 연령 행사는 ‘상식을 가진 책임자’가 책임을 지고 시작부터 끝까지 행사에 참여한 조문객들의 사정도 조금은 사려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애석하게도 이제까지 이런 것들에 대한 책임자의 존재여부는 정말 불확실한 것이었다.  또한 앞으로 장례미사에 올 때는 끝나는 시간을 먼저 확인 받고 싶은 간절한 심정을 뿌리칠 수가 없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Lofty shelf coming down…

몇 달 전부터 생각하던 귀찮은 일을 드디어 해치웠다. 거의 20년 전인 2001년 9.11 테러사건이 난 후에 울적한 심정으로 만들었던 두 개의 giant hanging shelve 중에 하나를 해체한 것이다. 우리 집의 garage ceiling이 유별나게 높기에 이사 오면서부터 항상 그 천정의 공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거의 2층 deck정도의 높이라서  차고 공간의 절반이 ‘놀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storage용으로 거의 다락방 크기로 선반을 만들어서 천정에 매달아 놓은 것이다.  공간 재활용이 목적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의 쓸모가 없이 방치된 상태로 20년이 지나갔다. 방치된 것은 아니지만 storage용도로는 너무나 높고, 깊어서 한번 쓰려면 차를 빼고 사다리를 써야만 하는 불편함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잡동사니를 하나 하나씩 버려야 하는 나이에 이런 bonus storage은 바람직한 것이 절대로 아님을 알기에 미련 없이 없애 버렸고 나머지 하나도 곧 사라질 것이다. 4시간 노동의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冊: 나가사키의 노래

나가사키의 노래, 영문판(원서) 표지

손가락이 저려온다. 아니 가끔씩은 거의 마비가 된 느낌도 든다. 거의 일주일 동안 빠른 속도로 typing을 했던 것에 대한 후유증일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나의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책을 ‘필사’를 하며 읽기 시작해서 이제는 거의 끝이 나고 있다.

‘지난해’  12월 22일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빌려온  제목  ‘나가사키의 노래, 원제 原題: A Song for Nagasaki‘ 라는 300 page가 조금 넘는 결코 짧지 않은 책으로, 저자는 호주 Australia 출신 폴 글린 Fr. Paul Glynn 신부,  옮긴이는 [개신교 신자] 김숭희 씨로 되어있다.

이 책은 한마디로 ‘서양’ 신부가 뒤늦게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  ‘동양인’,  ‘일본의 간디’로 불리며 추앙 받는,  ‘나가이 다카시 永井隆’ (방사선학 의학) 박사에 대한 책이다.

가톨릭 신부가 저술하였으므로 분명히 이 책의 배경에는 ‘가톨릭, 천주교’가 있음이 분명하고, ‘나가사키 長崎’라는 지명이 들어가 있으니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시,  히로시마 廣島에 뒤따른  ‘제2의 원자폭탄 피폭지’가 또 다른 배경으로 깔려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성당 도서실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선뜻 손이 가지를 않았다. 불현듯 느낌에 이 책의 원류에는 ‘엔도 슈사쿠 遠藤 周作’의 책과 그에 따른 Hollywood 영화, ‘침묵‘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했고, 17세기 나가사키의 기독교인 성 ‘미키’를 포함한 26명의 순교자들의 생각도 났다. 일전에 그 책 ‘침묵‘을 빌려 읽었던 연숙의 얼굴표정을 읽었을 때, 나는 그 책에 언뜻 손이 가지 않았다. 순교를 하는 장면을 너무나 실감나게 표현하는 글들을 나는 피하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원자폭탄이 바로 옆에서 폭발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사랑하는 아내가 흔적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들,  그와 관련된 오랜 전 역사적 사진, 실화도 접했을 때, 솔직히 나는 이런 가공할 ‘지옥의 모습’들은 모두 없는 것처럼 피하고 싶었던 역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불현듯 이 책으로 손이 갔고, ‘무조건 읽자’ 라는 생각이 스쳤다. 책꽂이에는 같은 책이 무려 4권이나 있었던 것을 보고 ‘아,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읽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도 도움이 되었다.

성탄절을 며칠 앞둔 날 이 책을 빌려와서 읽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필사’를 하며 읽기 시작한 것은 새해를 맞이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올해 2020년 경자년의 새해벽두부터 나의 머리 속은 1940년대 중반 일본 나가사키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일본 정세 등 자세히 몰랐던 역사의 속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이 책의 특징,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필사’와 완독을 할 수 있었고, 그 이후는 이 책의 내용이 나에게 주는 교훈,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침략적 패전국의 군의관이었지만 그는 적국의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치료를 했으며, 과학자의 입장에서도 용감하게 신앙을 살았고, 대학 방사선과 연구의 후유증과 원폭시의 심한 상처로 백혈병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주위에 버려진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았다. 굽힐 줄 모르는 불굴의 용기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 그에 따른 거의 완전한 인간애, 이 책은 주인공 나가이 다카시는 그야말로 한마디로 전형적인 ‘성인’ 후보감 이었다. 공식적으로 성인의 품에 오르는 첫 단계인 ‘주님의 종’ 이지만 분명히 다음 단계인 ‘가경자 venerable’, ‘복자 blessed’ 을 거쳐 언젠가는 완전한 성인이 되리라 확신한다. 나가사키의 노래,  ‘필사본’은 이곳에 한정적으로 보관되어 있다.

 

이천 이십 년?

 

이천 이십 년? 허… 지나가는 10년 동안 부지런히 이천 십…을 되뇌며 살아서 그런지 이천 이십 어쩌구… 하는 것이 이렇게 이상할 수가 없다. 십진법의 ‘십’이란 숫자의 마술인가. 이제 두 시간 정도가 지나면 부지런히 부지런히 이천이십을 되풀이해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퉈니 퉈니, twenty twenty 2020, 20/20 (2.0 시력) 로 되니까 조금은 익숙한 느낌인가…

아~  이것이 decade적인 세월인가, 10년마다 겪는 이런 것을 돌아보니 사실은 20년 전에 우리는 대사건을 겪은 경험이 있었다. 1999에서 2000으로 바뀌던 그 무렵..  이런 것들로 1900년대 중반 이전부터 살아온 덕분에 이런 멋진 ‘세월의 숫자’들을 몸소 경험하게 되었다.

 

올해의 섣달 그믐날 밤에는 예상을 벗어나 3-2-1, Happy New Year! Countdown 하는 요란한 모습, 그것도 뉴욕에서 생방송 하는 것 보는 것을 지나치기로 하고 자정 몇 시간 전에 잠자리에 들어버렸다. 원래 계획은 바쁘고 피곤한 아이들이 안 온다기에,  모처럼 우리 둘이서만  ‘멋지게’ Champaign잔을 마주치며 ‘HAPPY NEW YEAR!!’을 외치려 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설날 아침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의무대축일 미사가 있기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핑계로  이 몇 년 된 전통을 포기한 것이다.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사실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3-2-1의 뉴욕의 생방송은 꺼졌지만 이번에 집 주변에서 요란하게 터지는 firework소리가 생각보다 요란하였다. 올해는 아이들의 장난이 아니고 아주 pro들이 즐기는 모양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몇 시간 동안은 아예 ‘새해의 기분’ 을 즐기는 셈치고 누워있게 되었다.

2020의 요상한 숫자의 느낌을 떠나서 심각하게 ‘늦은 세월’의 의미를 찾아 보았다. 내 나이 이제는 절대적, 긍정적으로 젊어지지는 않는다. 70대의 나이는 또 따른, 가볍지 않은 짐을 지고 나아가는 느낌, 그것은 육체적인 건강상태다. 수치상으로 나는 현재까지는 큰 issue가 없지만 머리 속으로 느낌은 그것이 아니다. 나의 나이는 나이인 것이고 그것이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가 아닐까. 겸손하게 살자, 겸손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