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작가회의에서 북한동포돕기 시낭송회를  한 적이 있다. 시인들만  참여하는 줄 알았더니 각계 원로들도 자기가 평소 애송하던 시를 낭송하는  순서가 있다고, 나한테도 한편 낭송해달라고 했다. 내가 원로 소리를 듣게 된 것이 당혹스러웠지만, 북한돕기라는 데 핑계를 둘러대고 빠질 만큼 빤질빤질하지는 못했나보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낭송하고 싶은 시가 있었다는 게 아니었을까. 그 무렵 나는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에 사로잡혀 있었다. 김용택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한 사람일 뿐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마찬가지로 (그 여자네 집)이 그의 많은 시 중 빼어난 시에 속하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그 여자네 집)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이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자네 집  어느날인가

그 어느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 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내가 (녹색평론)에서 그 시를 처음 읽고 깜짝 놀란 것은, 이건 바로 우리 고향마을과 곱단이와 만득이 이야기다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칠순이 훨씬  넘은 장만득씨는 아직도 문학청년 기질을 가지고 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신춘문예 철만 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가슴만 울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응모도 해봤으리라고 나는 넘겨짚고 있다. 그 울렁거림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울렁거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시가 김용택이라는 유명한 시인의 시가 아니라 처음 들어보는 시인의 시였다면 나는 장만득씨가 가명으로 등단을 했으리란 걸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 희미했던 영상이 마치 약물에 담근  인화지처럼 점점 선명해졌다. 숨어있는  수줍은 아름다움까지 낱낱이 드러나자 나는 마침내 그리움과 슬픔으로  저린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혼자서 느릿느릿 포도주 한 병을 비웠다.

  곱단이는 범강장달이 같은 아들을 내리 넷이나 둔 집의 막내딸이자 고명딸이었다. 부지런한 농사꾼의 아버지와 착실한 아들들은 가을이면 우리 마을에서  제일 먼저 이엉을 이었다. 다섯 장정이 휘딱 해치울 일이건만 제일  먼저 곱단이네 지붕에 올라앉아 읍내  중학생이라 품앗이 일에서는 저절로 제외되곤 했건만 곱단이네가 일손이 모자라는 집도 아닌데 제일 먼저 달려들곤 했다. 곱단이 작은 오빠하고 만득이는 친구 사이였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만득이가 곱단이네 집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고 싶어하는 게 친구네 집이라서가 아니라 그 여자, 곱단이네 집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부엌에서 더운 점심을 짓느라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따뜻한 가을날, 곱단이네 지붕에 제일 먼저 뛰어올라 깃발처럼 으스대는 만득이를 보고 동네 노인들은 제 색시가 고우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더니만, 하고 혀를 찼지만 그건 곧 만득이가 곱단이 신랑이 되리라는 걸 온 동네가 다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둘 사이는 그들보다 어린 우리 또래들 사이에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리들은 그들 사이를 연애를 건다고 말하면서 야릇하게 마음 설레곤 했다. 40년대의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도 젊은 남녀가 부모 몰래 사랑을  나누는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나보다. 누가 누구하고 바람이 났다던가, 눈이 맞았다던가, 심지어는 배가 맞았다는 소문까지 날 적이 있었다. 그건 부모가 얼굴을 못 들고 다닐만한 스캔들이었고, 그 뒤끝도  거의 다 너절하거나 께적지근한 것이었다.

  곱단이하고 만득이가 좋아하는 것을 바람났다고 말하지 않고 연애 건다고 말한 것은 그런 스캔들과 차별짓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마을사람들로서는 일종의 애정이요 동경이었다. 남자들은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고 여자들은 어깨 너머로 언문을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까막눈은 면했다 하나 읍에서 이십여리나 떨어진 이 마을에서 신식학교 교육은 아직 먼 풍문이었다. 그러나 기회만 닿으면 자식에게만은 시켜보고 싶은 거였다. 연애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도시에서 배운 사람들이 하는  개화된 풍속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트집잡기 좋아하는 노인네들 한테까지 그들의 연애는 일찌거니 인정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처 연정을 느끼기 전부터 둘이 짝이 된다면 얼마나 보기 좋은 한쌍이 될까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거워한 게 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만득이나 곱단이네나 일년 계량하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을 만한 토지를 가진 자작농이었고 인품이 후하여  어려운 사람 살필 줄 아는 집안이었다.  만득이는 위로 누나들만 있고, 곱단이는 오빠들만  있어서, 기다리던 귀한 아들 딸이었다. 제집에서 귀히 여기는 자식은 남들도 한 번 볼 거  두 번 보면서 덕담을 아끼지 않는 법이다. 그들 또한 그러하였다.

  곱단이는 시골 아이답지 않게 살갗이 희고, 맑은 눈에 속눈썹이 길었다. 나는 그녀의 속눈썹이 얼마나 길었는지 표현할 말을 몰랐었는데 김용택의 시 중에서 마침내 가장 알맞은 말은 찾아냈다. 함박눈이 내려앉아서 쉴 만큼 길었다. 함박눈은 녹아 이슬방울이 되고  촉촉이 젖은 눈썹이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우면, 목석의  애간장이라도 녹일 듯 애틋한 표정이 되곤 했다. 만득이는 총명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고  생긴 것 또한 관옥 같았다. 촌구석에서는 드문 인물들이었다. 만득이가 개천에서 난 용이라면 곱단이는  진흙탕에 핀 연꽃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 장차 신랑  각시가 되면 얼마나 어여쁜 한쌍이 될까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이구동성으로 두 사람의 천생연분을 점친 것이다.  양가의 처지 또한 서로 기울지도 넘치지도 않았고 어른들은 소박하고 정직하여 남들이 사윗감 며느릿감으로 점찍어준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눈여겨보며 아름답고 늠름하게 자라는 걸 서로  기특해하며 귀여워하였다. 곱단이와 만득이는 우리 마을의 화초요 꿈이었다. 그러나 한두 번이라도 중매를 서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남 보기에 하늘이 정해준  배필처럼 어울리는 한쌍이 있어 그들을 맺어주는 것은 거의 소명의식 같은 걸 느끼고 중매에 나서지만 본인은 의외로 냉담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남자와 여자가 서로 연정을 느끼는 건 신의 장난질처럼 인간의 계획 밖의 일이다. 남이 나서서 잘되기를 꾀하거나 도와주려고 하면 되레 어깃장을 놓는 속성까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만득이와 곱단이는 마을 사람들의 꿈을 배반하지 않았다. 곱단이가 만득이만 보면 유난히 부끄럼을 타기 시작한 게 그 증거였다. 곱단이가 만득이 때문에 방구리를 깨트린 일은 두고두고 동네 사람들의 입초시에 오르내렸다. 윗말 아랫말 합쳐야 이십여호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라 우물이 하나밖에 없었다.  물긷는 일은 전적으로 아낙네 몫이었고,  물동이를 이고도 동이를 손으로 잡는 법 없이 두 손을 자유롭게 놀리며, 고개도 이리저리 돌려 볼 것 다 보고 다닐 수 있어야  비로소 살림에 관록이 붙은 주부였다.  계집애들은 엄마들의 그런 솜씨에 찬탄의 눈길을 보내는 한편, 언젠가는 자기들도 그런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압박감을 가졌음직하다. 계집애들은 어려서 물동이를 이고 싶어했다.  아이들도 능히 일 수 있는 작은 물동이를 방구리라 했다.  방구리는 실용보다는 딸애들의 놀이기구에 가까워서 깨트리기도 잘 했다. 계집애를 얕볼 때, 쬐그만 계집애란 말 대신 방구리만한 계집애로 통하는 게 우리 마을이었다.

  곱단이는 귀한 딸이고 올케가 둘씩이나 있어서 물동이 같은 거 안 이어도 됐건만 자기 몫의 방구리는 가지고 있었고, 동무들이 하는 건 다 해 보고 싶은 나이였다. 그러나 머리에 인 방구리 손잡이를 양손에 움켜잡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못  떼는 초보였다. 그렇게 방구리로 물을 길어 가는데 저만치서 만득이가 오는 게 보였다.  만득이는 방구리를 들어주려고 급히 달려오고 그걸 본 곱단이는 에구머니나, 흘러내린 치마말기를 치켜올리려고 급히 방구리 손잡이를 놓아버린 것이다. 방구리가 깨진 건 말할 것도 없다. 곱단이가 열너덧살 가슴이 살구씨만큼 부풀어 올랐을 무렵이었다. 저고리를 짧게 입고 치마말기를  가슴에 동일 때라 임질을 할 때면 겨드랑과 가슴이 드러나게 돼 있었다. 그  무렵의 우리 고장의 풍습으로는 젊은 여자들도 수치감이 별로 없었다. 임을 이고 가는 엄마 뒤에  업힌 아이가 겨드랑 밑으로 엄마의 앞가슴을 더듬거나 끌어당겨 빨기까지  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가슴에 대한 수치심도 일종의 문화현상이 아닐까. 그 시절엔 엄마의 가슴은 아이들의 밥그릇 정도로 여겼던 반면 배꼽을 드러내는 건 수치스럽게 여겼다. 처녀는 좀 달랐겠지만 그런 풍토에서 방구리를 깨트리면서까지 가슴을 가리고 싶어했던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마을에서 만득이가 제일 먼저 읍내 중학교로 진학하자 곱단이는 아버지를 졸라 십리 밖에 새로 생긴 소학교 분교에 입학했다. 방구리 사건이 있고 나서였다. 분교를  간이학교라고 불렀고 입학하는 데는 연령제한 같은 것도 없었다. 남학생  중에는 아이 아범도 있을 정도였다. 중학교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만득이도 소학교만 나오고 나서 몇년 집에서 농사를 거들다가 서울로 시집간 큰누나가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해서 상급학교에 가게 됐으니  늦공부인 셈이었다.

  간이학교는 우리 마을에서 읍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긴내골이라는 오십여호가 넘는, 인근에서는 가장 큰 마을에 있었다. 고개를 두  번 넘고 시냇물을 한 번 건너야 했다.  만득이와 곱단이가 등하교길을 자연스럽게 같이 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이 유별나 보이지는 않았다. 늘 곱단이가 한참 뒤져서 걷고 만득이는 휘적휘적 앞서 가다가 기다려주곤 했다. 부부가 같이 외출을  해도 나란히 걷지를 못하고 아내가  한참 뒤에서 걷는 걸 예절처럼 알던 시대였다. 곱단이보다 갈 길이 곱절이 되는 만득이가 갑갑한 곱단이의 걸음걸이를 참지 못하고 휭하니 먼저 가버린 적도 있었다.

  들을 적시는 개울물이 도처에 그물망처럼 퍼져 있는, 물이  흔한 고장이었지만 다리를 통해 건너야 하는 긴내골의 시냇물은 유난히 아름다운 강이었다. 물은 깊지 않았지만 골이 깊어서 길에서 수면까지 비스듬히 가파른 둔덕에는 잗다란 들꽃들이 봄 여름 가을 내 쉼없이 피었다 지곤 했고, 흰 자갈과 잔모래와 꽃그림자 사이를  무리지어 유영하는 물고기들과 장난치듯 부서지는 잔물결은 수정처럼 투명했다.  그 시냇물에는 흙다리가 놓여 있었다.  양쪽 둔덕을 두 개의 기둥목으로 가로질러 놓고 그 사이를 새끼줄이나 칡넝쿨 같은 것으로 엮고는 진흙으로 빤빤하게 싸바른 흙다리는 마치 오솔길의 연속처럼  편안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거나 봄의 해토 무렵엔 흙다리 곳곳에 구멍이 뚫리기도 하고 미끌거리기도 했다. 그런 불편은 잠깐, 곧 누군가의 손길로 감쪽같이 보수가 되곤  했지만 문제는 장마중이거나 미처 보수를 하기 전이었다. 특히 계집애들은 구멍난 흙다리를 건너기를 무서워 했다. 차라리  둔덕을 내려가 신발 벗고 점벙점벙 강물로 들어가는 게 안심스러웠다. 물이 불어 봤댔자 허리 정도밖에 안 찼지만 그럴 때는 앞서서 작대기로 물의 깊이를 알려주고 계집애들을 인도하는 게 남학생들의 중요한 사내 구실이었다. 그러나  만득이는 곱단이가 사내녀석들하고 치마를 배꼽 위까지 걷어올리고 속바지를 적셔가며 물을 건너는 걸 참을 수 없어했다. 등교길은 물론 하교길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 지키고 있다가 구멍 뚫린 흙다리 위로 건너게 해주었다. 흙다리를 건너면서 곱단이가 얼마나  무섬을 타고, 앙탈을 하고,  그러면 만득이는 그걸 다 받아주며 다독거리느라 길지도 않은 흙다리 위에서 둘이 몇번씩이나 서로  얼싸안는다는 소문이 자다하게 퍼지곤 했다. 그러나 구닥다리 노인들도 그런 소문을 망신스러워하지 않고 귀엽게 여겼다. 둘은 어차피 혼인할 테고 둘이 서로 좋아하는 것은 아름다 운 한창의 새가 부리를 비비는 것처럼 예쁘게만 보였다.  흙다리가 아니라 연애다리라는 소리도 악의라곤 없었다.

  중학교 상급반으로 오르면서 만득이는 문학에 눈을 뜨게  된 것 같다. 한동안 그는 (오뇌의 무도)라는 시집을 책가방에 넣지 않고 옆구리에 끼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이도 남자들은 한문을 다 읽을 줄  알았다. 서당이 마을 사내애들의 의무교육기관처럼 돼 있었다. “오뇌의 무도”라고 붙여서 읽을 수는 있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확  오는게 아니었다. 글자는 한자건만 그  낱말이 불러 일으키는 이미지는 이국적이고 하이칼라한 것이었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말인지 하이칼라란 말이 우리 마을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할 때였다. 어딘지 이국적이고 약간 겉멋 들어 보이는 건 뭐든지 하이칼라라고 했다.

  마을 젊은이들 사이에 춘원 바람을 일으킨  것도 만득이였다. (흙) (단종애사)(무정) 같은 춘원의 책이 젊은이들 사이를 돌며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읽혔다. 책은 나달나달해졌지만 거기 한번 맛들인 청년들의 눈빛은 별처럼 빛났다. 그러나 곧 춘원이 창씨개명에 앞장서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연설을  했다는 말을 퍼트려 청년들을  실의에 빠뜨리고, 헷갈리게 만든 것도 만득이였다. 그가 마을  청년들의 정신의 맥을 쥐었다 폈다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마을의 형편도  날로 어려워지고 있었지만 젊은이들의 정신의 기갈은 그보다 더 심각하였기 때문에 먹혀들기도 그만큼 쉬웠다. 만득이가 퍼트린 책 때문에 마음이 통하게 된 젊은이들이 모여서 문학 얘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울분을 토로하기도 하는 모임이 자연히 형성됐는데, 거기서도 중심인물은 물론 만득이였다. 그러나 고작 만학의 중학생이었다. 식민지 청년의 의식있는 모임이라기보다는  만득이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장이었다. 그는 가끔 자기가 쓴 시를 비장한 어조로 읽어주곤 했는데 그 중 곱단이가 눈물이 글썽할 정도로 좋아한 시가 나중에 알고 보니 임화의 시  뒷부분이었다.

 

 오늘도 연기는

구름보다 높고,

누구이고 청년이 몇,

너무나 좁은 하늘을

넓은 희망의 눈동자 속 깊이

호수처럼 담으리라.

벌리는 팔이 아무리 좁아도,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이런 시였는데 팔을 벌리고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할때는 어찌나 격정적으로 목메어 부르는지 곱단이는 그때마다 만득이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내놓아야 할 것 같아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곱단이는 나에게 가끔 만득이가 보낸 편지를 보여줄 적이 있었다. 누가 보여달랜 것도 아닌데 보여주는 게 계면쩍었던지 혼자 보기 아까워서…라는 말을 덧붙이곤 하였다.  연애편지를 혼자보기 아까워한다는 건 실상 말이 안되는 소리다. 그건 보여줘도 무관한 담백한 편지라는 뜻도 되지만, 곱단이 보기에 그럴듯한 문학적 표현을  자랑하고 싶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중 아직도 생각나는 것은 곱단이네 울타리 밑의 꽈리나무를 ‘꼬마 파수꾼들이 초롱불을 빨갛게 켜들고서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한 거였다. 당시  우리 동네 집들은 거의 다 개나리로 뒤란 울타리를 치고 살았다. 그리고 뉘 집이나 울타리 밑에서 꽈리가 자생했다. 봄에서 여름에 걸쳐서는 거기에 꽈리나무가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전혀 눈에 안 띄는 잡초나 다름없었다. 꽈리가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울숲이 누렇게 생기를 잃고 난 후였다. 익은 꽈리는 단풍보다 고왔고, 아닌게아니라 초롱처럼 앙증맞았다. 그러나 그맘때면 붉게 물든 감잎도 더 고운 감한테 자리를 내주고, 들에서는 고추가 다홍빛으로 물들 때였다. 꽈리란 심심한 계집애들이 더러 입안에서 뽀드득대는 것 외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하찮은 잡초에 불과했다. 우리집 울타리 밑에도 꽈리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흔해빠진 꽈리 중 곱단이네 꽈리만이 초롱에 불켜든 꼬마 파수꾼이 된 것이다.  만득이는 어쩌면 그리움에 겨워 곱단이네 울타리 밑으로 개구멍을 내려다 말고  발갛게 초롱불을 켜든 꼬마 파수꾼  때문에 이성을 찾은 거나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흔해빠진 꽈리 중에서 곱단이네 꽈리만을 그렇게 특별한 꽈리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마을엔 꽈리뿐 아니라 살구나무도  흔했다. 살구나무가 없는 집이 없었다.  여북해야 마을이름도 행촌리였겠는가. 봄에 살구나무는 개나리와 함께  온 동네를 꽃대궐처럼 화려하게 꾸며주었지만, 열매는 시금털털한 개살구였다. 약에 쓰려고 약간의 씨를 갈무리하는 집이 있긴 해도 열매는 아이들도 잘 안 먹어서 떨어진 자리에서 썩어갔다.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엔 자운영과 오랑캐꽃이 들판과 둔덕을 뒤덮었다. 자운영은 고루 질펀하게 피고, 오랑캐꽃은 소복소복 무리를 지어가며 다문다문 피었다. 살구가 흙에  스며 거름이 될 무렵엔 분분히 지는 찔레꽃이 외진 길을 달밤처럼 숨가쁘고 그윽하게 만들었다.

  (그 여자네 집)을 읽으면서 돌이켜보니 행촌리의 그 흔한 살구나무 중에서도 곱단이네 살구나무는 특별났던 것 같다. 다같은  초가집 중에서도 만득이에겐 곱단이네  지붕이 유난히 샛노랬던 것처럼, 그 흔해빠진 꽈리나무 중에서 곱단이네 꽈리나무만이 특별났던 것처럼. 곱단이네는 행촌리 윗말 첫 집이었다. 됫동산에서 흘러내린 개울물이 곱단이네를 휘돌아 아랫말로 흐르면서 만득이네 문전옥답 논배미를 지나게 돼 있었다. 곱단이네 살구나무는 곱단이 아버지가 딸과 딸의 동무들을 위해 튼튼한 그네를 매줄 정도로 큰 나무였다. 만득이는 아마 개울물이 하얗게하얗게 실어나르는 살구꽃을 연서처럼 울렁거리며 바라보았을 것이다.

  1945년 봄에도 행촌리에 살구꽃 피고, 꽈리꽃, 오랑캐꽃, 자운영이 피었을까. 그럴 리 없건만 괜히 안피고 말았을 것 같다. 그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만득이와 곱단이의 연애도 끝나고 말았을까. 만학이었던 만득이는 읍내의 사년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징병으로 끌려나갔다. 며칠간의 여유는 있었고 양가에서는 그 사이에 혼사를 치르려고 했다. 연애 못 걸어본 총각도 씨라도 남기려고 서둘러 혼처를 구해 혼사를 치르는 일이 흔할 때였다. 더군다나 만득이는 외아들이었고 사주단자는 건네지 않았어도 서로  연애 건다는걸 온 동내가 다  아는 각싯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혼사 치르기를 거부했다. 그건 그의 사랑법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다 안 알아줘도 곱단이한테만은 그의 사랑법을 이해시키려고, 잔설이 아직  남아 있는 이른봄의 으스름달밤을 새벽닭이 울 때까지 곱단이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곱단이가 그의 제안에 마음으로부터 승복  했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끌고 다니지를 않고 어디 방앗간 같은 데서 밤을 지냈다고 해도 만득이의 손길이 곱단이의 젖가슴도 범하질 못하였으리라는 걸 곱단이의 부모도, 마을 사람들도 믿었다. 그런 시대였다. 순결한 시대였는지, 바보 같은 시대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우리가 존중한 법도라는 건 그런 거였다.

  만득이네 대문에 일본 깃대와  출정 군인의 집이라는 깃발이  만장처럼 처량히 휘날리고, 그 집 사랑에서 며칠씩 술판이 벌어져도 밀주 단속에도  안 걸리고…그렇게 그까짓 열흘 눈 깜박할 새 지나가 만득이는 마침내 입영을 하게 됐다. 만득이가 꼭 살아 돌아 올 테니 기다리라고 곱단이를 설득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곱단이가 딴데 시집갈 아이도 아니거니와 식구들 역시 딴데 시집보낼 엄두라도 낼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설득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그럴 것이면 왜 혼사를 치르고 나서  떠나면 안되냐는 곱단이의 지당한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곱단이는 이름처럼 마음씨도 비단결 같은 처녀였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걸 굽힐 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았으니까. 사위스러워서 아무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만득이가 사지로 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곱단이를 과부 안 만들려는 그의 깊은 마음을 내심 여간 대견히 여기는 게 아니었다. 만득이와 곱단이는 요샛말로 하면 마을의 마스코트라고나 할까. 둘 다 행복해지지 않으면 재앙이라도  내릴 것처럼 지켜주고 싶어했고, 만득이의 처사는 그런 소박한 인심에도 거슬리지 않는 최선의 것이었다.

  만득이가 떠난 후에도 마을 청년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  마을에 남자라고는 중늙은이 이상만 남게 되었다. 곱단이 오빠들도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한 셋째오빠와 부모님을 모시는 큰오빠 빼고 두 오빠가 징용으로 나가 아들 부잣집이 허룩해졌다. 장정만 데려가는 게 아니라 양식 공출도 극악해져 그  풍요하던 마을도 앞으로 넘길 보릿고개 걱정이 태산같았다. 궂은날 부침질만 해도 서로 나누느라 한 채반은 부쳐야 했던 인심도 스스로 금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주 나쁜 소식이 염병보다 더 흉흉하고 걷잡을 수 없이 온 동네를 휩쓸었다 전에도  여자 정신대에 대해서 아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본토나 남양군도에 가서 일하고 싶은 처녀들은 지윈하면 보내주고 나중에 집에 송금도 할 수 있다는 면사무소의 공문이 한바탕 돈 후였지만 그럴 생각이 있는 집은 한 집도  없었고, 설마 돈벌이를 강제로 보내리라고는 아무도 짐작을 못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문은  그게 아니어서 몇사람씩 배당을 받은 면사무소 노무과 서기들과 순사들이 과년한 딸 가진 집을 위협도 하고 다짜고짜 끌어가는 일까지 있다고 했다. 설마설마  하는 사이에 더 나쁜 일이 생겼다. 그건 같은 면 내에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소문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동구 밖에서 감춰놓은 곡식을 뒤지려고 나타난 면서기와  순사를 보고 정신대를 뽑으러 오는  줄 지레짐작을 한 부모가 딸애를 헛간 짚더미 속에 숨겼다고  했다. 공출 독려반들은 날카로운 창이 달린 장대로 곡식을 숨겨두었음직한 곳이면 닥치는 대로 찔러보는게 상례였다.  헛간에 짚가리로 창을 들이대는 것과 그 부모네들이 안된다고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창 끝에 처녀의 살점이 묻어나왔다고도 하고, 꿰진 창자가 묻어나왔다고도  하고, 처녀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피를 많이 흘리면서 달구지로 읍내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고도 했다. 아무튼 그 소문의 파문은 온 면내의  딸 가진 집을 주야로 가위 눌리게 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도시에서 군수공장에 다니는 곱단이 오빠가 종아리에  각반을 차고 징 달린 구두를  신은 중년남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신의주에 있는 중요한 공사판에서 측량기사로 있는, 한번 장가갔던 남자라고 했다. 곱단이 부모로부터 그 흉흉한 소문을 듣고 급하게 구해온 곱단이 신랑감이었다. 첫장가 든 부인이 십년이 가깝도록 아이를 못낳아  내치고 새장가를 든다는 그는 곱단이의 그 고운 얼굴보다는 별로 크지 않은 엉덩이만 유심히 보면서, 글쎄,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을까? 연방 고개를 갸우뚱, 그닥 탐탁치 않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총각이 씨가 마른 시대였다. 게다가 지금 그 늙은 신랑감이 하고 있는  일은 군사적인 중요한 일이라 징용은 절로 면제된다고 한다. 곱단이네는 그 고운 딸을 번갯불에  콩 궈 먹듯이 그 재취자리로 보내버렸다.

  곱단이가 어떤 심정으로 그 혼사에  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피를  보면 멀쩡한 사람도 정신이 회까닥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피 묻은 소문도 마찬가지였다. 곱단이네 식구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이성을 잃고 말았다. 만득이와 곱단이의 연애를  어여삐 여기고 스스로 증인이 된 마을 어른들도 이제 곱단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일본군한테 내주지 않는  일뿐이었다. 더군다나 곱단이 어머니는 피가 무서워 닭모가지 하나 못 비트는 착하디 착한 위인이었다. 그 피 묻은 소문에 살이 떨려 우두망찰했을 것이다. 곱단이는 만득이와의 언약을 저버리고 딴데로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도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 만큼 모질지는 못했다.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넋을 놓아버리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곱단이네서 혼사를 치르고 사흘 만에 신랑을 따라 집을 떠나는 곱단이는 사자를 분단장해놓은 것처럼 섬뜩하니 표정이라곤 없었다.

  멀고먼 신의주로 시집가 첫 근친도 오기 전에 해방이 되었다. 그녀는 열아홉에 떠난 지붕 노란 집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고장은 아슬아슬하게 38 이남이 되어 북조선의 신의주와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만득이는 살아서 돌아왔다. 그 이듬해 봄 만득이는 같은 행촌리 처녀인 순애와 혼사를 치렀다. 순애는 투덕투덕 복 있게 생긴 처녀였지만 곱단이에겐 댈 것도 아니었다. 혼삿날 마을 풍속대로 신랑을 달았는데 군대나 징용 갔다가 심성이 거칠 대로 거칠어져 돌아온 청년들이 어찌나 호되게 신랑 발바닥을 때렸던지 만득이가 엉엉  울었다고 한다. 만득이 또한 군대가서 고초를 겪을 만큼 겪었는데 그까짓  장난삼아 치는 매를 못 견디어 울었을까? 울고 싶어, 실컷 울고 싶어 울었을 것 같다. 이렇게 만득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곱단이와 연관지어 생각하고 싶은 게 아직도 두 사람의 어여쁜 사랑을 못 잊어 하는  마을 사람들의 심정이었으니 그리로 시집간 순애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이 금실을 확인해볼 겨를도 없이 곧  서울로 세간을 냈다. 외아들이었지만 서울 누나가 동생의 일자리를 구해놓고 데려갔다.

  6·25 동란 후 38선 대신 그어진 휴전선은 행촌리를 휴전선 이북땅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동안 서로 만나지는 못했어도 귀향길에 만득이가  순애하고 곧잘 산다는 소식 정도는  들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 못 듣게 되었다. 6 25때 죽지 않았으면 같은 서울 하늘 밑 어디메 살아 있겠거니, 문득문득 생각이 나던 것도 잠시 만득이는 내 기억 속에서 아주 사라져버렸다. 서울살이라는 게 촌수 닿는 친척도 결혼청첩장이나 부고나 받아야  마지못해 챙길 정도로, 이해 관계가 닿지 않는 인간관계는 지딱지딱 잊게 돼 있었다.

  만득이를 서울에서 다시 만난 지는  채 십년도 안된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때까지는 생존해 계시던 삼촌이 우리 고향 군민회에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간 자리에서였다. 실향민들이 마음을 달래려는 자리가 흔히 그렇듯이 노인네들 천지였다. 매년 열리는 군민회라지만 삼촌처럼 처음 간 분은 서로 알아보는 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알아보는 걸 도와주려는 주최측의 배려로 면 단위로 나눠서 자리를 잡았고, 우리끼리 다시 리 단위로 무리를 만들었다. 행촌리는 나하고 삼촌하고 낯 모르는 노부부 네 사람밖에 없었다. 그 이듬해 돌아가신 삼촌은 그때도 이미 여든 가까운 연세셔서 고향의 흙냄새 대신 고향 사람 채취라도 맡고 싶은 마음에 느닷없이 군민회 나들이를 하고 싶어한 것  같다. 죽을 날이 가까우면 안하던 짓을 하게 되는 걸 자손들은 가벼운 망령 정도로  취급했다. 오죽해야 조카가 모시고 가게 됐을까. 행촌리 노신사도 삼촌을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어른 대접으로  행촌리 살던 아무개라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지만 나는 별로 귀담아듣지  않아 못 알아들었다. 나중에 그가 나에게 명함을 주며  인사를 청하지 않았으면 아마 끝까지  못 알아보았을 것이다. 무슨 전업사 대표 장만득으로 돼있는 명함을 보고 나서야 뭔가 이상해서 다시 한번 쳐다보니, 젊은 날의 그가 어디 숨어 있다가 고개를 내밀듯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몸집도 별로  불지 않고 얼굴도 잘 늙지 않은 동안이었다. 나하고 그는 그닥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곱단이 것이었으므로 당시의 우리 또래들은 다들 그를 소 닭 보듯 하는 걸 예절로 알았다. 그건 장만득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워낙 마을에서 유명했지만, 유명인사가 팬을 알아보란 법은 없다. 나는 그에게 하나도 안 변했다고 말하고 나서 쑥스럽게 웃었다. 한참  동안 못 알아본 주제에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순애를 떠올리는 건 더욱 불가능했다.  이 유복하고 금실 좋아 보이는  노부부 중 한쪽이 순애인지도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순애 쪽에서는 나에게 아는 척을 하며 하나도 안 변했다고 해줘서 순애려니 했다. 나는 학교 다닌답시고 학교도 안 다니는 집에서 바느질이나 배우는 나이 많은 애들하고 동무한 적이  없었다. 만득이하고 순애는 보기 좋은 부부였다.  그냥 헤어지기는 섭섭하여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했는데 뜻밖에도 순애가 자주 전화를 해서  점심도 같이 하고 쇼핑도 같이  하는 교분이 이어졌다. 그 여자는  장만득씨가 아직도 곱단이를 못 잊고 있다는 얘기를 하소연했다.

  아우님, 다들 나더러 팔자 좋다고 하지만 나 같은 빚 좋은 개살구도 없다우. 아우님이니까 얘기야. 딴사람들한테 아무리 얘기해 봤댔자 나만  이상한 사람 되지 누가 내 속을  알겠수. 돈 잘 벌고 생전 외도라곤 모르고, 애들한테 잘하고, 나한테도 죄지은 것 없이 죽는  시늉도 하라면 하는 그런 남편이 어디 있냐고들 하지만, 아마 나처럼  지독한 시앗을 보고 사는 년도 없을 거유. 곱단이년이 내 남편한테 찰싹 붙어 있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머리채를 잡을 수가 있나, 망신을 줄 수가 있나, 미칠 노릇이라우. 그래도 내가 아우님을 만났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 억울한 사정을 누구한테 말이라도 할 수가 있겠수. 그 영감  지금도 글쎄 그년한테 연애 편지를 쓴다니까요. 설마라고? 나도 처음엔 설마했지. 지도  쑥스러운지 시를 쓴다고 합니다. 내가 몰래  훔쳐봤더니 뭐 ‘그대 어깨에  살구꽃 내리네’‘살구꽃은 해마다 피는데, 우리 임은 왜 한번 가고 다시 아니  오시나’ 이따위가 연애편지지 그래 시란 말이유. 그뿐인 줄 알아요? 우리가 작년에 중국여행을 갔을 적에도 얼마나 내 오장을 뒤집었다구요. 속 모르고 따라간 나도  배알 빠진 년이지만. 백두산  구경하고 나서, 단동인가 어디서 배 타고 북한땅 가까이까지 가보는 압록강 유람선 관광이라는 걸 했는데, 정말 저쪽 북한땅 강가에 놀이 나온 아이들까지 보이게 배가 가까이 가니까 나도 마음이 좀 이상해집디다. 그냥 뱃놀이를 편하게 즐기는 건  다 중국 사람들이고,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지는  건 다들 남한 사람들이더라구요. 그 정도는 당연한 거지. 근데 우리 영감은 별안간 뱃전에다 고개를 떨구고 소리내어 엉엉 울지를 않겠수.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온몸을 들먹이면서,  분단의 슬픔이라구? 아이구, 그게 아니라 거기서 보이는 땅이 신의주였어요. 곱단이년 사는 데가 닿을 듯, 닿지는 않으니까 미치겠는 거지 뭐. 단장  강으로 밀어 처넣고 싶더라구요. 헤엄쳐서 어서 그년한테 가라구요. 그뿐인 줄 알아요. 여기서 돈 잘 벌고 사업을 잘 하다가 느닷없이 아이들은 여기서 키우고 싶지 않다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잔 적이 다 있었다니까요. 지나 내나 영어 한마디 못하는 주제에 이민을 가자는 속셈이  뭐였겠수? 뻔하지. 미국 시민권을 얻으면 북한을 마음대로 드나든다면서요. 내가 그 꼬임에 넘어갈 성싶어요. 가려면  혼자 가라구. 가서 그년 데려다 잘  살아보라고 했더니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주저앉습니다. 아이들한테는 끔찍한 양반이니까요. 실상 그거 하나 믿고 여지껏 서러운 세상 견딘 거죠.

  간추리면 대강 그런 얘기였다. 아닌게아니라  그런 얘기는 곱단이와 만득이가  연애 걸던 시절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먹혀들것 같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여자 레퍼토리는 그 몇가지의 에피소드에 국한돼 있었다. 아직도 만득이가  곱단이 생각만 한다는 증거를 더는 대지 못했고, 나도 비슷한 얘기를 하도 여러번 반복해서 들으니까 넌더리가 나면서 그 여자보다는 장만득씨가 불쌍해질 무렵 그 여자의 부음을  듣게 됐다. 장만득씨가 상처를 한 것이다. 고혈압으로 몇년째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돌연 쓰러진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문상을 가서 그 여자의 영정 사진을 보고 섬뜩했다. 이십대 후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사진이었다. 요샌  영정 사진도 너무 늙은 건 보기  싫다고, 아주 늙기 전에 찍어놓는다고는 하지만 칠순의  남편이 눈물을 떨구고 있는 앞에  이십대의 사진은 너무했다 싶었다. 자식들이 문상객들의 그런 눈치를 채고, 어머니는 평소에도 나  죽거든 늙어빠진 영정 쓰지 말라고 부탁하시더니, 돌아가신 후  보니까 손수 마련해놓으신 영정 사진이 있더라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여자의  젊었을 적과 곱단이의 젊었을 적을 머릿속으로 비교하고 있었다. 댈 것도 아니었다. 내 상상 속에서 곱단이는 더욱 요요해지고, 그 여자는 젊다는 것 외엔 흔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제야 그 여자가 불쌍해졌다.  아아, 저 여자는 일생 얼마나 지독한 연적과 더불어 산  것일까. 생전 늙지도, 금도 가지 않는 연적이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적이었을까.

  그 여자가 죽고 나서 만득이를 따로 만날 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를 우연히 만난 것은 그가 상처하고 나서도 이삼년 후 엉뚱하게도 정신대 할머니를 돕기 위한 모임에서였다. 뜻밖이었지만, 생전의 그의 아내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주입된  선입관이 있는지라 그가 그 모임에 나타난 것도 곱단이하고 연결지어서 생각되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모임이 끝난 후 그가 보이지 않자 나는  마치 범인을 뒤쫓듯이 허겁지겁 행사장을 빠져나와 저만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는 그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다짜고짜 따지듯이 재취장가를 들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말하고 나서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덧붙이는 것이었다.

  왜요? 곱단이를 못 잊어서요? 여긴 왜 왔어요? 정신대에 그렇게 한이 맺혔어요? 고작 한 여자 때문에. 정신대만 아니었으면 둘이서 혼인했을 텐데 하구요? 참 대단하십니다.

  내 퍼붓는 말에 그는 대답 대신 앞장서서 근처 찻집으로  갔다. 그 나이에 아직도 싱그러움이 남아 있는 노인을 나는 마치 순애의 넋이 씐 것처럼 꼬부장한 마음으로 바라다보았다. 그가 나직나직 말했다.

  내가 곱단이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건 순전히 우리집 사람이 지어낸 생각이에요. 난 지금 곱단이 얼굴도 생각이 안 나요. 우리집 사람이 줄기차게 이르집어주지 않았으면 아마 이름도 잊어버렸을 거예요. 내가 곱단이를 그리워했다면 그건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젊은 날에 대한 아련한 향수였겠지요. 아름다운 내 고향에서 보낸 젊은 날을 문득문득 그리워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내가 유람선상에서 운 것도 저게  정말 북한땅일까? 남의 나라에서 바라보니 이렇게 지척인데 내 나라에선 왜 그렇게 멀었을까? 그게 서럽고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복받친 거지. 거기가 신의주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오늘 여기 오게 된 것도, 글쎄요, 내가 한 짓도 내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아마 얼마전 우연히 일본 잡지에서 정신대 문제를 애써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려는 일본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분통이 터진 것과 관계가 있겠죠. 강제였다는 증거가 있느냐? 수적으로 한국에서 너무 부풀려 말한다. 뭐 이런 투였어요. 범죄의식이 전혀 없더군요. 그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비록 곱단이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어요. 곱단이가 딴데로 시집가면서 느꼈을 분하고 억울하고 절망적인 심정을요. 나는 정신대 할머니처럼 직접 당한 사람들의 원한에다 그걸 면한 사람들의 한까지 보태고 싶었어요.  당한 사람이나 면한 사람이나 똑같이 그 제국주의적 폭력의 희생자였다고 생각해요. 면하긴  했지만 면하기 위해 어떻게들 했나요? 강도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얼떨결에 십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강도는 죄가 없고 자살이 되나요? 삼천리 강산 방방곡곡에서 사랑의  기쁨, 그 향기로운 숨결을 모조리 질식시켜버리니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죠.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내 마음 알겠어요? 장만득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13월의 사랑, 예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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