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쓴 박완서 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

 

연재에 앞서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이건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일기입니다. 훗날 활자가 될 것을 염두에 두거나, 누가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같은 것을 할만한 처지가 아닌 극한상황에서 통곡대신 쓴 것입니다.

1988년 여름, 아들을 잃었습니다. 다섯 자식 중에 하나였지만 아들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습니다. 그 최초의 충격을 어떻게 넘기고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통곡하다 지치면 설마 이런 일이 나에게 정말 일어났을라구, 꿈이겠지 하는 희망으로 깜박깜박 잠이 들곤 했던 게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그런 경우에도 희망이 있다는 게 남 보기엔 우스웠을지 모르지만 본인으로서는 참담의 극한이었습니다. 안 먹겠다는 의지 없이도 몸에서 저절로 음식을 받지 않았으니 몸도 필시 쇠약해 있었겠지요. 부산에 사는 큰딸이 와보고 강제로 자기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아주 강제는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억장이 무너지는 비통 외에는 매사가 몽롱한 중에도 서울을 떠나면 조문을 안 받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구원처럼 떠올렸으니까요. 상을 당산 이에게 정중한 조문을 하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도덕입니다. 그러나 참척을 당한 에미에게 하는 조의는 그게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위로일지라도 모진 고문이오,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습니다. 자식이 내 상을 당해 조문을 받는 게 순리이거늘 그 복도 못 타 역리 逆理에 굴복해야 되는 비참한 처지에서 잠시나마 비켜나 있고 싶은 저의가 아주 없었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큰애는 맏이로서의 책임감과 극진한 애정으로 에미를 보살폈고, 에미의 숨은 마음까지 알아차리어 친구나 이웃의 방문까지 금해놓고 있었지만, 그래도 집만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건 울고 싶을 때 울 수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딸네 집만 해도 사위와 손자들의 생활이 있는, 이미 예전에 나로부터 분리된 남의 가정입니다. 수시로 짐승처럼 치받치는 통곡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통곡을 고스란히 참기가 너무 힘들어 통곡대신 미친 듯이 끄적거린 게 이 글입니다.

이 자리가 만일 생활성서 지면이 아니었다면 그런 사적인 비탄의 기록에다 일기라고 이름 붙여 감히 발표할 엄두를 내진 못했을 것입니다. 생활성서 지면을 만만하게 보아서가 아닙니다. 저도 세례 받고 나서 비로소 생활성서를 관심 있게 보아왔듯이 독자의 대부분이 교우이거나 적어도 하느님이 계시다는 걸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는 분이려니 하는 친밀감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이 신앙고백이란 소리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받아들여질 여지 또한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저도 근래에 처음으로 그때 쓴 걸 다시 읽어보면서 적지 아니 놀라고 민망했습니다. 순전히 하느님에 대한 부정과 회의와 포악과 저주로 일관돼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한 부정은 가장 강한 긍정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만일 그때 나에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분조차 안 계셨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생각해봅니다만 살긴 살았겠죠. 사람 목숨이란 참으로 모진거니까요.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더 불쌍하게 살았으리라는 것만은 환히 보이는 듯합니다.

하느님은 제아무리 독한 저주에도 애타는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고, 그리하여 저는 제 자신 속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러기 위해선 아무한테나 응석부리고 싶은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요.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우리 집 안방 아랫목 제일 높은 자리엔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만한 작은 십자고상이 걸려있습니다. 세례 받을 때 선물 받은 거여서 비슷한 게 이 방 저 방에 더 있습니다만 제가 가장 자주 대하고 따라서 가장 많은 원망을 받고 언젠가는 내팽개쳐지는 행패까지 당산 이 못박힌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건 최근의 일입니다.

‘오냐 실컷 욕하고 원망하고 죽이고 또 죽이려무나, 네가 그럴 수 있으라고 나 여기 있지 않으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분의 표정은 생생하게 슬프고 너그러워 보였습니다. 이 일기는 똑같이 찍어낸 주물에 지나지 않던 성물과 이렇게 아무하고도 똑같지 않은 특별한 관계를 맺기까지의 어리석고도 고통스러운 기록의 일부입니다.

정리하면서 활자화시키기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무엄한 포악과, 비통의 지나친 반복만 빼고는 거의 고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2 주기까지 넘겼건만 아직도 제 회의와 비통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제 자아 속에 꼭꼭 숨겨 놓았던 채송화씨보다도 작은 신앙심을 누구에게 떠다 밀린 것처럼 마지 못하긴 하지만 마침내 어디론가 던졌다는 사실입니다. 거기가 흙인지 양회바닥인지조차 아직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싹이 틀 수 있는 좋은 땅 이길 바라는 마음이 이 지면의 연재 요청에 응할 엄두를 내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88년 9월 12일

눈을 뜨니 낯선 방이었다 옆에서 손자가 곤히 자고 있었다. 꿈이었으면 하는 몽롱한 착각을 즐길 새도 없이 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서운 괴물처럼 가차없이 육박해왔다. 집에서 같으면 설마 꿈이겠지 하고 현실감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 꽤 길었으련만.

아쉬운 건 그뿐이 아니었다.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그 다음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그 일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식인지 아무도 모른다. 목청껏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면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반사되면서 곧 환장을 하거나 무당 같은 게 되어서 죽은 영혼과 교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한 번도 실지로 그런 경지까지 도달한 적은 없다. 번번히 그 직전까지 갔다고 되돌아오곤 했다. 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미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내 강철 같은 신경이 싫고 창피스럽다. 그러나 미치기 위한 노력도 안 하고 어떻게 막은 정신으로 긴긴 하루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긴 평화롭고 화목한 딸네 집이었다. 아마 나를 의식해서겠지, 낮은 소리로 주고받는 딸과 사위의 음성이 거실 쪽에서 들려왔다. 통곡을 삼켜야 한다는 게 너무도 고통스러워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한동안 신음하다가 벌떡 이러나 거실로 해서 베란다로 나갔다. 둘이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딸 내외가 어쩔 줄을 모르고 엉거주춤했다. 나는 그들의 눈치 볼 겨를 없이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 더운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소리를 내진 않았다.

원태야, 원태야, 우리 원태야,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하느님도 너무하십니다.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지 25년 5개월밖에 안 됐습니다. 잔병 한번 치른 적이 없고, 청동기처럼 단단한 다리와 매달리고 싶은 든든한 어깨와 짙은 눈썹과 우뚝한 코와 익살을 잘 부리는 입을 가진 준수한 청년입니다. 걔는 또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젊은 의사였습니다. 그 아이를 데려가시다니요. 하느님 당신도 실수를 하는군요. 그럼 하느님도 아니지요.

딸이 뒤에서 잘 주무셨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과연 안면이었을까. 어젯밤 사위하고 맥주를 여러 병 마신 생각이 났다.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와 수면제를 털어 넣고 자리에 들었었다. 오늘이 며칠이냐고 내가 물었다. 9월 12일이라고 딸이 대답했다. 아들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지가 2주일이나 됐구나. 어떻게 그 동안을 견디었는지 악몽을 꾼 것 같고, 지금 이러고 있는 것 또한 꿈 갠 후의 또 꿈 같다.

어제 딸이 데리러 왔을 때, 싫다고 할 기력도 없었거니와 싫고 좋고 하는 마음도 우러나지 않아 물건처럼 순하게 따라왔다. 가을비가 제법 세차게 내려 공항으로 갈려다 말고 서울역으로 가서 12시 새마을호를 아슬아슬하게 탄 생각도 나지만 화면을 통해 본 남의 일처럼 그때의 느낌은 공백상태다. 그러나 불과 이삼 분을 남겨놓고 지느러미처럼 휘청거리는 다리로 계단을 뛰어내릴 때의 느낌은 왜 그렇게 생생한 것일까. 딸의 도움으로 그렇게 급히 달릴 수 있었으련만 지금 남아 있는 느낌은 층층다리가 활처럼 휘면서 내 발 밑으로 맹렬한 속도로 달겨드는 것 같은 공포감밖에 없다. 아마 발을 헛디딜 것 같은 위기의식 때문에 그때의 느낌이 그렇게 생생하다면 내가 죽고 싶다는 건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인가. 나는 지금까지 내 몸에 남아 있는 어제의 위기의식에 치욕감을 느꼈다. 그래도 내가 죽고 싶은 건 정말이다. 지난 십여일 동안 거의 먹은 게 없다 아이들 성화로 먹는 척한 유동식도 토하거나 설사 아니면 변비로 먹은 것 몇 배의 기운을 빼갔다. 몸이 음식을 받지 않는다는 건 죽을 징조가 아닌가. 나에게 지금 희망이 있다면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뿐이다.

아이들이 베란다로 의자를 내주어 편안히 앉았다. 뒤로는 장신이란 수려한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수영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파트라기보다는 콘도같은 터가 좋은 딸네집이다. 날씨는 쾌청하고 수영만에 떠 있는 요트가 그림 같다. 거기서 88올림픽 요트 경기가 열릴 거란다. 오나 가나 그 놈의 팔팔 올림픽, 정말 미칠 것 같다. 서울집도 잠실 경기장과 올림픽 공원 사이에 있어 그 들뜬 야단 법석이 싫어도 들리고 보일 것 같더니만 여기까지 그 축제가 따라올 게 뭐람.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참아줬지만 88올림픽이 여전히 열리리라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춤들을 추는 걸 어찌 견디랴. 아아, 만일 내가 독재자라면 팔팔년 내내 아무도 웃지도 못하게 하련만.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본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 저녁 땐 부산에 오기 잘 했다 싶었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전화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랄 필요가 없었다. 이 지경이 되고도 무슨 볼 체면이 남아 있다고 내 꼴을 남에게 보이기가 그리 싫은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상대방을 볼 때는 그 자리에서 당장 꺼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생각해낸 말이 잊으라는 소리다.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잊으라는지. 세월이 약이라는 소리도 잊으라는 소리의 딴 표현이겠다. 잊으라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격렬한 반감이 솟구칠 때도 없다.

그 애는 25년 5개월 동안이나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내 기쁨이요, 보람이요, 희망이요, 기둥이었다. 우리는 자식을 가르칠 때 남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가르친다 배은망덕은 가장 타기할 부도덕으로 친다. 곤궁했을 때 받은 얼마 안 되는 금전적인 도움이나 우울한 날 말동무 해준 친구의 우정도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는 게 사람의 도리이거늘 어떻게 이십 오 년 오 개월 동안이나 나를 그렇게 기쁘게 해주니 아들을 잊는 게 수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나에게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까닭이 남아 있다면 그 애를 기억하며 그 애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로 인하여 고통 받는 일뿐이거늘.

자기 전에 또 맥주,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이 마셨다. 밥도 죽도 잘 안 넘어가는데 맥주는 얼마든지 마시겠고, 문어나 소라 같은 안주도 꽤 집어먹는데도 아직은 별 이상이 없다. 그러나 수면에는 별로 도움이 안 돼 한 밤중 수면제 복용.

 

 

9월 13일

텔레비전 소리에 눈을 떴다. 꿈자리가 뒤숭숭했지만 무슨 꿈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꿈에라도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고 잤건만 또 허탕이었다. 진실한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소리도 말짱 헛소리다. 인간의 애절한 소망을 일일이 이루어주진 못한다 해도 귀라도 기울여줄 초월적인 존재가 과연 있기나 있는지. 있다면 예서 더 어떻게 해야 당신과 통하리까. 눌은밥을 끓여놓고 조금 먹어보란다. 못 먹을 것 같았지만 소라와 문어도 먹은 주제에 멀건 눌은밥도 못 먹겠다면 응석을 부리 것처럼 보일 것 같아 구수하다고 칭찬까지 해주면서 한 공기를 다 먹었다. 남은 자식들한테 내 슬픔을 빙자해 응석을 부리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오 주여, 당신이 계시다면 저를 제발 이 마지막 자존심이나마 부지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게 하소서.

딸 몰래 눌은밥 한 공기를 다 토해냈다. 어제 먹은 문어와 소라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변비 생각을 하면 속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좌약은 준비해왔지만 그 몸부림을 또 치루긴 정말 싫다. 사람이 단지 배설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생리작용을 위하여 그렇게 치열하게 몸부림쳐야 하다니.

행복했을 때는 아침이 좋았는데 요샌 정반대다. 내 앞에 펼쳐진 긴긴 하루를 살아낼 생각이 지겹도록 아득하게 느껴진다. 시시때때로 탈진하도록 실컷 울면 그 동안이라도 시간을 주름잡을 수가 있는데 그것도 용납 안 되는 하룻동안이란 얼마나 가혹한 형벌인가.

손자들이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오늘도 지치지도 않고 팔팔 올림픽타령이다 성화를 실은 대한항공이 부다페스트를 떠나 헬싱키에서 급유를 받고 소련상공을 열 한 시간이나 날아왔다는 흥분한 목소리와 함께 기체와 승무원까지 비쳐주고 난리다. 손자 형제도 저희들끼리 금메달의 수를 점치며 희희낙락 들떠 있다. 딸이 뒷산으로 산책을 나가자고 해서 조금 망설이다 따라 나섰다. 그 애는 내가 즈이 집에 와서 많이 좋아졌다고 믿고 싶은 눈치였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꼿꼿하게 걸을 수가 있었다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허리를 펼 수가 없어서 보행이 어려웠었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기운이 없어서 그렇게 허리를 못 편 게 아니라 너무 울어 배창자가 땡겼기 때문이었다. 딸은 엄마가 한결 기운이 나 보인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겨우 이틀 울지 않았으니까 깨끗이 배의 통증이 가시는 내 건강이 혐오스러웠다. 절이 있는 데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닥 힘들지 않았다. 먹은 건 없는데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는 걸까. 정말 싫다. 예전 우리 시골에선 자식을 앞세운 에미한테 자식을 잡아먹었다고 말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소리가 끔찍해 소름이 끼쳤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한테 해당하는 소리가 아닌가. 나야말로 자식을 잡아먹은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줄창 먹지 않고도  배부를 수가 없고, 먹지 않았는데도 수족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을 수가 없지 않은가.

산을 내려오다가 길가 풀섶에서 신기한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연분홍의 장미꽃 봉오리같이 생긴 꽃 한 송이가 풀 끝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었다. 꽃의 품위가 결코 잡초 따위에서 필 꽃이 아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꽃의 줄기를 더듬어 내려간다는 게 그만 그 가냘픈 식물을 뿌리째 뽑아 내는 결과가 되었다 줄기에 달린 잎을 보니 봉숭아였다. 봉숭아 주에도 분홍 봉숭아는 흔치 않은데 어쩌다 씨가 하나 풀섶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잎이 돋고 간신히 꽃까지 핀 모양이었다. 뿌리째 뽑았으니 할 수없이 집까지 가져왔다. 피곤해서 한동안 누었다 일어나 보니 무심히 뽑아온 한 포기의 봉숭아는 문갑 위에서 이미 형제도 알아볼 수 없게 시들어 있었다.

 내 아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땅 속에 누워 있는 것일까? 내 아들이 어두운 땅 속에 누워 있다는 걸 내가 믿어야 하다니. 발작적인 설움이 복받쳤다. 나는 내 정신이 미치기 직전까지 곧장 돌진해 들어갔다가 어떤 강인한 저지선에 부딪쳐 몸부림치는 걸 여실하게 느낀다. 그 저시선을 느낄 수 없어야 미칠 수 있는 건데 그게 안 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정말 있다면 내 아들의 생명도 내가 봉숭아를 뽑았듯이 실수도 못 되는 순간적인 호기심으로 장난처럼 거두어간 게 아니었을까? 하느님 당신의 장난이 인간에겐 얼마나 무서운 운명의 손길이 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당신의 거룩한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이렇게 막 가지고 장난을 쳐도 되는 겁니까.

아이들이 불러서 베란다로 나가보니 저녁때인데도 대마도가 뚜렷이 보인다 어제 쾌청한 날에도 안 보이던 대마도가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나타나 보인다. 우리 눈에 안 보일 때도 대마도는 거기 있었을 게 아닌가. 그렇다고 보인다고 다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환상일 것도 같다. 어쩔거나, 이 인생의 덧없음을.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 (시편 15-16).

주여,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다 왜 이렇게 진한 사랑을 불어넣으셨습니까.

 

 

88년 9월 14일

어젯밤에도 상당량의 맥주를 마셨고 잠자리에 들기 전엔 수면제도 복용했건만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꼬박이 못 자보긴 처음이다 집에서 실컷 울 수 있었을 때는 간간이 탈진상태와 깊은 수면이 겹쳐 깨어나서도 한동안은 ‘흉칙한 꿈이었을 거야,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났을라구’ 하는 몽롱하고도 아슬아슬한 평화를 즐길 수가 있었다. 희망이 없을 땐 평화도 없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간간이 일어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내 뜻과는 상관이 없었다. 뜨거운 철판 위에서 들볶이는 참깨처럼 온몸이 바삭바삭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탈진해서라도 잠들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매일 몇 병씩 마시는 맥주의 영양가 때문인가, 부산으로 오고나서 왜 이렇게 기운이 나는지 모르겠다. 지치지도 않고 망상에 망상을 거듭한다.

나는 아들을 잃었다. 그 애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아듣는 걸 견딜 수가 없다. 그 애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이제 순전히 살아 있는 자들의 기억밖에 없다. 만약 내 수만 수억의 기억의 가닥 중 아들을 기억하는 가닥을 찾아내어 끊어버리는 수술이 가능하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련만. 그러나 곧 아들의 기억이 지워진 내 존재의 무의미성에 진저리를 친다. 자아 自我 란 곧 기억인 것을. 나는 아들을 잃고도 나는 잃고 싶지 않은 내 명료한 의식에 놀란다. 고통을 살아야 할 까닭으로 삼아서라도 질기게 살아가게 될 내 앞으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늙은인 싫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아들이 내 속을 썩이거나 실망시킨 일을 생각해내려고 애쓴다. 물에 빠져 검부락지라도 잡으려는 노력처럼 허위적댄다.

하다못해 남에게 흉을 잡힌 일이나 좋지 못한 버릇이라도 생각해낼 수 있다면 다소 숨통이 트일 것 같다. 이 비참한 자구노력도 허사가 되고 만다. 그 애는 완벽했다. 그 애가 한 징 중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단 한 가지도 없단 말인가. 그 애가 완벽했다는 확신은 그 애를 잃은 상실감 또한 천벌처럼 완벽하게 한다. 바늘구멍만한 구원의 여지도 없다. 그 애 없이 사는 걸 견디어내야 하다니, 무시무시했다.

많이 마신 맥주와 불면 때문에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렸다. 변기 위에서 문득 아들의 나쁜 버릇 하나가 생각났다.  그 애는 출근 시간이 촉박한 아침시간에 화장실에 들렀다가 물을 안 내리고 그냥 뛰어나가는 버릇이 있었다. 건강한 청년이 변을 보고 그냥 나간 변기 속은 에미가 보기에도 질겁을 할 만했다. 그래서 “얘야, 너 그 버릇 못 고치고 장가들면 색시가 도망간다” 이렇게 무안하지 않도록 우스갯소리고 야단치던 생각도 났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면서 빙긋이 웃었다. 가슴 속에서 훈훈한 것이 꼼지락대는 것 같았다. 일껏 생각해낸 못된 버릇 하나가 가장 사랑스러운 버릇이 되어 잠시나마 내 상실감에 위안이 되다니. 못 말릴 노릇이었다.

나는 결코 남의 나쁜 버릇이나 약점에 관대한 편이 못 된다. 특히 백화점이니 고속버스 휴게소 등 공공 장소의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고장도 아닌 멀쩡한 변기에 물을 안 내려 변이 차 있는 걸 보았을 때의 내 울분은 곧장 우리 민족성을 들먹이는 거창한 비분강개로까지 치닫기 일쑤였다. 만일 나에게 남의 결점을, 우리 아들의 결점도 귀여운 사랑의 십 분의 일만 되는 아량으로 봐줄 수 있다면 내 생애가 훨씬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으련만.

새벽엔 어렴풋하나마 잠이 올 것도 같은데 달걀인가 뭔가 사라는 장사꾼의 마이크 소리가 사정없이 시끄럽게 귀청을 때린다. 이 동네는 인심도 좋지, 서울의 아파트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짓이다. 밤새 못 잤건만 꼭 그 소리 때문에 잠을 놓친 것처럼 짜증이 난다. 어쩌면 그 소리 때문에 졸음 비슷한 거라도 유발이 됐는지도 모르는데, 요컨대 나는 무엇엔가 끊임없이 핑계를 대고 싶어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부엌에서 달그락대는 소리가 나더니 아침상이 푸짐했다. 딸 내외와 손자 형제가 큰 절을 했다. 음력으로 내 생일이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욕된 생일날이다.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 버려라”라고 자기 생일을 저주한 욥 생각이 났다.  서울에서의 이주일 간의 기억이 몽롱한 가운데서도 여러 사람이 욥기를 들어 나를 위로하고자 했던 게 생각났다. 구약 중 욥기를 제일로 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치기 전에도 욥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의인을 속여먹는 속임수 같았다. 욥기 속에 하느님은 욥에게서 빼앗은 걸 고스란히 또는 두 배로 돌려주셨지만 현실 속의 의인이 부당하게 빼앗긴 걸 돌려받는 걸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는 물론 의인도 아니지만 의인이라 해도 내 아들이 살아올 리 없다. 그게 확실한데 욥기가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아침부터 술을 마셨다. 서울서 딸 사위들로부터 각각 전화가 걸려왔다. 에미 생일을 기억한다는 표시이겠지만 서로 축하라는 말은 삼간다. 예절, 체면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늘 아침을 걸렀건만 생일이라 그런지 딸은 그게 신경이 써지는 모양이었다. 점심은 나가 먹자고 했다. 뭐든지 구미가 당길 만한 것을 생각해보라기에 우동을 먹고 싶다고 했다. 우동 국물을 마시고 싶었다. 광안동 해변가에 우동을 맛있게 하는 집을 알고 있다고 했다. 맛있게 먹으려고 좀 늦게 갔는데도 조그만 식당 안은 꽉 차 있었다. 우동 국물을 달게 마셨다. 맛은 잘 모르겠는데 균열이 생긴 것처럼 메마른 위장에서 잘 받았다. 집에 가면 낮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밤에 잘 욕심으로 산책을 하자고 했다. 해변가로 나갔다. 광안동 쪽은 해운대보다 유흥가는 더 발달한 것 같은데 해변은 그 쪽만 못한 것 같았다.

모래사장에 앉아 요트를 타는 청년을 아슬아슬하게 지켜 보았다. 해풍에 돛이 옆으로 기울면 청년의 몸도 파도에 휩싸여 보이지 않게 된다. 나는 청년의 몸이 다시 균형을 잡아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게 긴장한다. 한참 동안이나 요트가 죽지 꺾인 큰 새처럼 옆으로 누워 흐르고 청년이 보이지 않자 큰 소리로 구원을 청해야 할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산책 나와 나처럼 바다를 보고 앉았는 어느 누구도 큰일났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럼 아무 일도 아닌가. 그래도 가슴이 울렁거려 눈을 감고 묵주기도를 한다. 나중에 뭍으로 오른 요트의 주인을 보니 청년이 아니라 육십이 훨씬 넘었음직한 노인이었다. 나는 그 동안 혼자서 애를 태운 게 화가 났다. 공연한 헛수고를 했다 싶었다. 마치 늙은이가 빠져 죽어도 그만이라는 듯이, “늙은이가 주책이야” 내가 불쾌한 듯 중얼거리자 영문을 모르는 딸은 “어때요. 멋있잖아요” 하고 대답했다.

저만치서 노파가 앉아서 김을 매듯이 땅을 뒤지고 있다. 무엇을 하고 있나 궁금해서 가까이 가보니 자루에다 돌을 골라 담고 있다. 그 쪽은 모래사장이 아니고 작고 매끄러운 돌이 깔려 있다. 자세히 보니 조개껍질 같기도 하고 아기 이빨 같기도 한 연분홍의 예쁜 돌이 그 일대에 쫙 갈려 있다.  화분 같은 데 깔면 보기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노파는 그런 용도에 쓰기에는 너무 많은 돌을 마대자루에 골라 담고도 한눈 한 번 안 팔고 그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하도 이상해서 그걸 다 무엇에 쓸 거냐고 물어보았다. 기념품을 만드는 공장에 갖다 팔 거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노파는 앞니가 두 개밖에 없었고, 나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주름이 깊었다. 아무리 없이 살아도 헐벗지는 않는 세상이라 그런지 노파의 입은 옷은 좀 너무하다 싶을 만큼 남루했다. 머리카락도 센 건제 바랜 건지 말총 빛깔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런 노파의 노동을 보면서 기껏 자기 집 화분을 장식하려고 극성을 떨자고 밖에 생각 못한 내 한심한 상상력에 나는 수치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해변에서 파는 싸구려 액자나 거울 틀에 그런 돌을 박은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걸 만드는 공장에서 노파의 수고비를 얼마나 박하게 쳐줄지는 물어볼 것도 없이 뻔했다. 그렇지만 밑천은 안 드는 돈벌이였다. 9월 중순의 한낮 햇볕은 사정없이 이글거렸다. 노파는 여름내 그 밑천 안 드는 돈벌이에 종사해온 듯 드러난 팔과 종아리는 새까맣고도 기름기라곤 없어 비듬이 히끗히끗했다. 나는 밑도 끝도 없이,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노파에게 몹쓸 병이 들거나 술주정뱅이 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같이 늙어가는 영감을 위해서라면, 또는 의지할 데라곤 없는 처지여서 자기 한 몸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라면 양로원에 가고 말지 그 보잘것없고 영세한 돈벌이에 그렇게 전력으로 종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로지 아들을 위해서만 그 보잘것없는 일이 타당하고도 거룩하게까지 보였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미친년처럼 화끈한 열정으로 그 생각에 탐닉했다. 조금도 거짓없이 나는 그 노파가 부러웠다. 아들의 약값을 위해서든 아들에게 뜯기기 위해서든 아들을 위한 일 외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노파가 부러웠다. 나는 나도 모르게 노파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그 일은 보기보다 수월하지 않았다. 분홍빛 예쁜 돌만 쫙 깔려 있는 것 같아도 역시 모래와 잡석 속에서 추려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노파는 내 서툴고 미미한 도움을 의식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대자루가 차자 질질 끌고 말없이 가버렸다. 나는 노파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배웅했다. 어쩌면 나는 내 내부의 교만이 무너진 자리를 응시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에미 눈에 자랑스럽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을까마는 자식들마다 건강하고 공부 잘해 한 번도 속 안 썩이고 일류학교만 척척 들어가고 마음 먹은 대로 풀릴 때, 그 에미의 자랑은 기고만장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그랬었다. 기고만장 정도가 아니라 서슬 푸른 교만이었다. 그래서 남의 공부 못하는 자식, 방탕하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을 속으로 은근히 깔보았었다. 그것도 학교라고 허리가 위게 번 돈을 등록금을 대야 하다니, 이런 마음으로 내 눈엔 도무지 차지 않는 대학에 보내고도 좋아하는 친구나 친척을 겉으론 축하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론 불쌍해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뇌성마비로 태어난 남의 자식을 보고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걸 하는 모진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내가 노파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가장 못난 최악의 아들을 가정해도 역시 노파가 부러웠다. 가슴이 아리게 부러웠다.

내가 받은 벌은 내 그런 교만의 대가였을까. 하느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게 교만이라니 나는 엄중하지만 마땅한 벌을 받은 것이었다.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나는 내 아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견디기 위해서 왜 그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알아야만 했다. 아들을 잃은 것과 동시에 내 교만도 무너졌다. 재기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그러나 교만이 꺾인 자리는 겸손이 아니라 황폐였다. 내 죄목이 뭔지 알아냈다고 생각하자 조금 가라앉는 듯하던 마음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교만의 대가로 이렇듯 비참해지고 고통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자. 그럼 내 아들은 뭔가.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에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란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금 맹렬한 포악이 치밀었다. 신은 죽여도 죽여도 가장 큰 문제거리로 되살아난다. 사생결단 죽이고 또 죽여 골백번 고쳐 죽여도 아직 다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최대의 극치인 살의 殺意, 나의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암 있어야 하구말구.

 

 

9월 15일

아침에 눈을 뜨자 잘 잤다는 느낌이 왔다. 그러나 그 애를 잃은 게 꿈이기를 바라는 몽롱한 순간 없이 곧장 의식이 명료해지고 말았다. 또 하루를 살아낼 일이 힘에 겨워 숨이 찼다. 이런 속도로 세월이 가서야 언제 내 아들에게 이르를꺼나. 밖에서 아이들이 자꾸 방안을 엿보는 눈치길래 죽지도 않고 또 이렇게 깨어났다는 심술 같은 기분으로 벌떡 털고 일어났다. 마루에 나가보니 어젯밤에 마신 맥주병이 굉장했다. 저녁이면 으레 사위가 대작해주는 양으로는 모자라 더 마시겠다고 때를 쓴 생각이 났다. 밤중에 배달시킨 한 상자의 맥주도 다 빈 병만 남아 있었다. 어제는 생일이 핑계였지만 무작정 양을 늘여갈 수는 없으리라. 질을 높이는 수밖에. 독산 술, 편한 잠, 그리고 노추 老醜…. 나는 남의 운명을 점치듯이 담담하게 내 앞날의 모습을 내다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베란다에 나가보니 수영만의 바다빛이 꼭 잉크를 풀어 놓은 것 같다. 문인들하고 유럽을 여행하면서 탄성을 지른 지중해 빛깔도 저러했던가. 그때가 언제더라. 먼먼 옛날의 일 같았다. 내가 문인이었던 것도.

딸네 아파트는 십삼 층이다. 베란다엔 삿슈도 없다. 순간적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기회는 당장 발 밑에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위인이 못 된다는 걸 안다. 또한 그것만이 아직도 못 보리고 잇는 내 나름의 경신 敬神의 한 방법이다.

이해인 수녀의 방문을 받았다. 남편의 병중, 상중에도 기도와 위로를 아끼자 않아 큰 힘이 되었는데 여기서 또 이런 꼴을 보이다니, 부끄럽고 숨고 싶었다. 딸애가 있는 대로지만 정성껏 점심을 지어 대접했다. 식사 후 수녀님한테 눈물을 보이고부터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사진첩까지 꺼내놓고 아들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그 애가 얼마나 특별한 아인지, 나에게 꼭 있어야 할 아들일 뿐 아니라 직업인으로서도 이 사회에 얼마나 필요한 인물인지, 그리고 동기간과 일가친척 사이에서 얼마나 사랑과 기대를 모았었는지, 눈에선 눈물을 쉴새 없이 흘리며, 입에선 침이 마르게 늘어놓았다. 그 동안 가족들 사이에선 상처를 피하듯이 조심스럽게 화제에 올리기를 삼가던 아들 얘기를 그 애를 전혀 알지 못하는 수녀님을 상대로 마치 걸신들린 것처럼 지칠 줄 모르고 해댔다. 특히 우리가 얼마나 특별하고도 완전한 모자 母子 사이였다는 걸 강조할 때 내 허망한 열정은 극에 달했다. 막연한 불안과 함께 예전에 본 미국 영화 속에 싸이코 엄마 생각이 났다. 나도 이러다 싸이코가 되는 게 아닐까.

수녀님도 내 정신의 불균형을 감지한 듯 얼마 동안 부산의 분도 수녀원에 들어가 있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번거로운 인간관계도 피할 수 있고, 공기 좋고 조용해 심신의 안정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신앙이나 기도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소리가 안 들어간 권고여서 마음에 들었지만 그럴 엄두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부산 분도 수녀원은 수녀님이 쭈욱 몸담고 잇는 데지만 성체대회 준비관계로 올해는 서울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수녀님을 알게 된 것도 서울에서 내는 홍보용 책자에 원고 청탁을 받은 게 기회가 되었었다.

수녀원에 쉬러 들어가는 문제는 확답을 못 하고, 수녀님을 떠나 보냈다. 틈틈이 읽으면 위로가 될 거라며 얇은 책자 두 권을 놓고 가셨다.

 

 

9월 16일

엉망으로 취한 속에 수면제를 털어 넣었는데도 깊이 잠들지 못했다.  새벽엔 뒤척이기도 지겨워 베란다로 나가 앉아 날이 밝아오는 걸 지켜보았다. 엷은 어둠이 지워져 가는 동안의 바다 빛깔의 변화가 말할 수 없이 미묘했다.

어느 순간 수영만의 빛깔이 정신이 아찔하도록 새파란 속살을 드러내면서 눈 높이까지 차 올랐다. 아아, 나는 무엇에 찔린 것처럼 신음했다. 먼먼 옛날, 어느 행복했던 날, 정다운 이와 분위기 있는 스카이 라운지에 마주 앉아 뭔가 작은 축복을 주고 받으며 눈 높이까지 쳐든 페퍼민트의 빛깔이 저러했던가?  햇빛이 빛나자 눈 높이까지 부풀어 오르던 한 잔의 페퍼민트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바다는 거대한 물고기처럼 은빛 비늘을 번득이며 완만하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저 바다는 정말 저기 있는 것일까? 내 아들은 이 세상에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 내 기억력 말고는 아들이 존재했었다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세상이 도무지 낯설고 싫다. 그런 세상과는 생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부산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걱정하면서 살려내기 운동까지 벌였던 더러운 수영만이 진짜 수영만일까, 작은 술잔 속에 이상한 푸르름으로 농축됐던 수영만이 진짜 수영만일까. 보이는 것이라고 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억하는 것이라고 다 존재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 않나. 연일의 불면 때문인가, 기억과 보임, 실재와 감수성이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진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은 다행히 몽롱하다.

아침엔 눌은밥을 푹 끓인 걸 한 공기나 먹었다. 균열이 생긴 것처럼 메마른 해와 식도에 상쾌한 통증을 느꼈다. 구수한 냄새도 좋았다. 딸이 눈을 빛내면서 좋아했다.

이렇게 해서 차츰 먹고 살게 되려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이내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반발이 치밀었다.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겠다고 구역구역 음식을 처넣는 에미를 생각하니 징그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격렬한 토악질이 치밀어 아침에 먹은 걸 깨끗이 토해냈다. 그러면 그렇지 안심이 되면서 마음이 평온해졌다. 정신과 육체의 생각이 일치할 때의 안도감 때문이지 낮잠을 좀 잘 수가 있었다.

점심엔 커피만 마시고 책을 읽었다.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라는 책을 다 읽고 나서 <연옥실화>를 읽었다. 육체라는 물질 없이도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고 싶었다. <연옥실화>를 읽으면서는 왠지 망자와 만나 회포도 풀고, 한풀이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무속의 지노귀굿 생각을 했다.

남의 지노귀굿을 구경한 적도 몇 번 있고,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지노귀굿 땐 할아버지 혼이 든 무당이 나를 알아보고 얼싸안더니 엉엉 울면서 생전에 있었던 일을 영낙없이 그려낸 경허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게 할아버지의 진짜 혼령이라는 걸 믿지 않았었다. 아무리 영한 무당의 지노귀굿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속의 많은 부분을 긍정하면서도 몰입은 할 수 없도록 가로막던 벽은 종교를 갖고 나서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딴에 이성이나 지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절망적인 내 정신의 한계를 느낀다. 눈 딱 감고 부수든지 뛰어넘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못 그러도록 나를 강하게 옭아매고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느낀다.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는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는 낡은 책인데 부산 오면서 챙긴 몇 권 안 되는 책 중에 들어있다. 직접적인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제목 때문이었으리라. 흥미 본위로 대강 읽은 걸 다시 꼼꼼히 꼭 뭔가 찾아내고 말 기세로 들이덤볐다. 번역한 사람이 믿을 만한 분이고, 의학박사가 임상학적으로 사망이 확인된 후 다시 소생한 이들의 진술에 근거하여 썼다는 서문도 이 책을 썩 믿을 만하게 했다.

과연 그들의 진술의 공통점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들이 정말 죽었었다는 증거는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들 육신이 부식하기 전에 깨어났으니까. 의사가 아무리 사망진단을 해도 신이 사망진단을 내리지 않는 한 육신은 썩지를 않는다. 신의 사망진단이 내리고 나서 살아난 사람은 아직 없고 따라서 사후세계를 보고 온 이도 있을 수 없다. 아들이 가 있는 세계와의 무한한 거리, 완벽한 무지에 대해 그 책은 도움이 됐다기보다는 그것들을 더욱 확인시켜준 데 불과했다. 그러나 그런 책들 때문에 하루를 훨씬 수월하게 보낼 수는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죽자구나 고통스러운 하루를 낱낱이 반추하려 드는가?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다고 수시로 미친 상태를 동경하면서도 실상은 미치는 게 두려워서 하루하루의 정신상태를 점검하려는 게 아닐까? 체면도 생의 의욕 중의 일부분이 아닐까. 나를 남처럼 바라보면서 끔찍한 여자라고 생각한다. 시시각각 추락해가는 비행기 속에서 그 마지막 순간의 기록을 남긴 어느 일본사람 생각도 났다.

 

 

9월 17일

어젯밤엔 맥주 대신 소주를 마셨더니 좀 잔 것 같다. 꿈을 꾸었으니까. 난리가 나서 허둥거리며 피난을 가고, 사람들이 죽고, 거리가 삼엄하고, 양식이 동이 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도 올림픽 첫날에 난리가 나서 다 중단됐다고 했다. 내란 같기도 하고 천재지변 같기도 한 묘한 공포분위기였건만 깨어나니까 좋은 꿈을 놓치고 난 것처럼 허전했다.

내 아들이 없는데도 온 세상이 살판난 것처럼 들떠 있는 올림픽의 축제 분위기가 참을 수 없더니, 내 아들이 없는 세상 차라리 망해버리길 바란 거나 아니었을까. 내 무의식을 엿본 것 같아 섬칫했다. 아아, 천박한 정신의 천박한 꿈이여. 내 아들아, 어쩌면 에미를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니.

그러가나 말거나 오늘은 88 서울 올림픽의 개막식날이다. 날씨는 쾌청하고 개막식도 잘 돼가는 모양이다. 딸, 사위, 손자들이 텔레비전으로 그 광경을 시청하면서 연방 탄성을 지르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훼방놓지 않을 만큼 대범해야 된다는 건 이내가 아니라 고투다.

그저 만만한 건 신 神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기자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殺意, 내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오후 세시 경에 서울에서 둘째와 셋째와 손자가 내려왔다. 딸들을 다시 만난 게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그 애들의 지극한 염려도 그저 귀찮고 시들했다. 나는 그 동안 그 애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아들 생각만 했다.

문득 내가 아들 대신 딸 중의 하나를 잃었더라면 이보다는 조금 덜 애통하고, 덜 억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해보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 자체가 두려워 나는 황급히 성호를 그었다. 행여 또 그런 생각이 떠오를까 봐 속으로 주모경을 외웠다. 그래도 두려워 화장실에 가서 울며 용서를 비는 기도를 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기도였다. 그래도 두려움과 가슴의 울렁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신이 생사를 관장하는 방법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고, 특히 그 종잡을 수 없음과 순서 없음에 대해선 아무리 분노하고 비웃어도 성이 차지 않지만 또한 그런고로 그분을 덧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직 그분만이 생사를 관장하고 있다고 신의 권위를 믿고 있었고, 불쌍하게도 깊이 공구 恐懼[필사주: 몹시 두려움] 하고 있었다.

저녁 때는 여럿이 해운대로 나갔다. 수영만이 올림픽 요트경기장이라 외국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느끼는 기온은 긴 소매도 썰렁한데 털이 노란 거구의 남녀가 비키니 비슷한 차림으로 거침없이 활보하는 게 괜히 꼴보기 싫었다.

손자들이 환성을 지르며 바다를 향해 질주하다가 큰 파도가 몰려오면 더 크게 악을 쓰며 도망을 쳐서 모래사장으로 되돌아오는 놀이를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했다. 특히 서울서 온 네 살짜리는 목이 쉬고 옷이 다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놀이에 광분하고 있었다.

손자 중 제일 나이 어린 그 녀석은 자주 제 키의 몇 배나 되는 물벼락을 맞느라 고습이 보이지 않다가 나타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바다가 그 녀석을 아주 삼켜버릴 것만 같아 간이 오그라붙는 것 같았다. 나란히 앉은 걔들 에미들은 태연히 담소를 즐기는데 나 홀로 그 모양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나서 한 생각 중 꽤 괜찮은 생각은 앞으로 나에겐 기쁨도 없겠지만 근심도 없으리라는 거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람. 남이 안 하는 걱정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내 걱정을 요약하면 또다시 사랑하는 이가 죽는 것을 볼까봐였다. 아직도 나에게 걱정거리가 많은 것은 아직도 사랑이 안 끝났음인가. 병적인 걱정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도 돌아왔다.

큰애가 내 과음에 대해 동생들에게 일러바쳐서 세 아이가 합세를 해서 걱정을 하고 법석을 떠는 바람에 목을 추기는 정도로만 마시고 일찍 혼자서 방으로 돌아왔다. 술 대신 책으로 잠을 청할 궁리를 한다.

법정 스님이 쉬운 말로 옮긴 법구경을 읽었다. 짧은 운문을 집대성한 사화집 같은 거여셔 쉽게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다 옳은 말씀이고 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자주 인용된 구절도 많아 친근감을 느꼈지만 내가 원하는 걸 찾아내진 못했다. 내가 원하는 건 육신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남아 있다는 확답이었다. 그 밖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다 건성이었다.

다 읽고 나서 옮긴 이의 해설을 보니 이 시는 후딱후딱 건성으로 넘기지 말고 한편 한편 마음의 바다에 비추어 보면서 차분히 음미하듯이 읽는다면, 맑은 거울이 되어 그 속에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는 당부의 말이 실려 있었다. 내 속을 들여다 보고 한 말 같았다. 이 세상에 진리의 말씀이 사람 수효보다 많다고 해도 내 마음의 껍질을 뚫고 들어와 속마음을 울리는 한 마디 외에는 다 부질없는 빈말일 뿐인 것을. 세상이 아무리 많은 사람과 좋은 것으로 충만해 있어도 내 아들 없는 세상은 무의미한 것처럼.

남편이 별세한 후 반야심경을 해설한 카세트테이프를 마냥 반복해 들으며 위로 받은 생각이 났다. 그때만 해도 내 마음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좋은 말에서 마음의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너무도 큰 슬픔이 내 마음을 돌처럼 딱딱하게 만들어버렸다.

이해인 수녀로부터 받은 세 권의 책 중 <샘>과 <종교박람회>도 법구경처럼 단숨에 읽었다. 두 권 다 안소니 드 멜로 라는 처음 들어보는 신부님이 쓴 짧고 재미있는 이야기 모음이었다. 쉽고 단순한 그들이었지만 조급하게 읽어도 되는 글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법구경 때와 마찬가지로 느릿느릿 음미할 마음이 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사후의 생명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보증이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납득할 수 있는 신의 명확한 계산서였다.  이런 나에게 나 자신도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나머지 한 권은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G. 로핑크 지음) 라는 50쪽 정도의 얇은 소책자였지만 그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한 편의 시 때문에 날이 샐 때까지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비밀에 싸인 개인적인 세계를 지닌다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좋은 순간이 존재하고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처절한 시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진 것

 

한 인간이 죽을 때에는

그와 함께 그의 첫눈[初雪]도 녹아 사라지고

그의 첫 입맞춤, 그의 첫 말다툼도…

이 모두를 그는 자신과 더불어 가지고 가낟

벗들과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참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라져 가고…

또다시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들의 숨은 세계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아하 매번 나는 새롭게

그 유일회성 唯一回性 을 외치고 싶다.

 

베개가 젖도록 흐느껴 울었다. 죽음이 왜 무시무시한지, 아들의 죽음이 왜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지 정연한 논리로써가 아니라 폭풍 같은 느낌으로 엄습해왔다. 하나의 죽음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사랑과 기쁨, 고통과 슬픔, 체험과 인식 등, 아무하고도 닮지 않은 따라서 아무하고도 뒤바뀔 수 없는 그만의 소중하고도 고요한 세계의 소멸을 뜻한다.

그러나 그 시 속에 묘사된 한 인간의 죽음과 더불어 소멸되는 세계 속엔 그의 고유하고 신비에 싸인 체험만 있지 미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젊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세계 속엔 그 자신과 그의 부모형제가 걸던 얼마나 다채롭고 풍부한 미래가 포함돼 있는가. 특히 자식이 부모의 소망은 물론 허영심까지 충족시켜줄 만큼 잘 자라 부모가 한참 우쭐해 있을 때, 부모는 어리석게도 자식이 성취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랬었다. 아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동일한 축 軸을 가지고 마냥 팽배해가고 있었다. 그 나름의 독립, 혹은 연애나 결혼 등으로 에미로부터 분화 분화 해 나가기 직전,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공유하던 에미로서는 가장 행복한 착각의 시절에 아들은 홀연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그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의 소멸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의 소멸을 뜻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들이 인턴 과정을 끝마치고 전문의는 무슨 과를 택할까 의논해왔을 때 생각이 났다. 그 애는 나만 반대하지 않는다면 마취과를 하고 싶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나는 아들로 인하여 자랑스럽고 우쭐해 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누가 시키거나 애써서가 아니라 그 애 스스로가 선택한 학교나 학과가 에미의 자긍심을 충분히 채워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으레 그러려니 했다. 내 무지의 탓도 있었지만 마취과는 어째 내 허영심에 흡족하지가 못했다 나는 왜 하필 마취과냐고 물었다. 그 애는 그 과의 중요성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 식으로 말해서 중요하지 않은 과가 어디 있겠니? 이왕 임상을 하려면 남 조기에 좀더 그럴 듯한 과를 했으면 싶구나.”

나는 내 허영심을 숨기지 않고 실토했다. 그때 아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어머니,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장에서 환자의 의식과 감각이 없는 동안 환자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가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별볼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자나 환자 가족으로부터 고맙다든가 애썼다는 치하를 받은 일이 거의 없지요. 자기가 애를 태우며 생명줄을 붙들어준 환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어요. 전 그 쓸쓸함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그 아들에 그 에미랄까, 나 또한 아들의 마음이 끌린 쓸쓸함에 무조건 마음이 끌려 그 애가 원하는 것을 쾌히 승낙했다. 늘 사랑과 칭찬만 받으면서 자라 명랑하고 거침이 없고 남을 웃기기 잘하고 농담 따먹기에 능하던 아들의 전혀 새로운 면이었다.

나는 그때 아들에 대해 새롭게 알았다. 품 안의 자식인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알아버렸다가 아니라 알아야 할 무진장한 걸 가진 대상으로 우뚝 섰을 때 얼마나 대견했던지, 그리고 그때의 그 앎의 시작에 대한 설레임까지 꼬박이 밝은 새벽 빛 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9월 XX일

해가 벌써 이렇게 짧아졌는지 날이 흐렸는지 일곱시까지도 방안이 침침하다. 며칠째 시간감각이 마비가 된 건지 착란을 일으킨 건지 시시각각이 여삼추 같다가도, 지내놓고 보면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건너뛴 것처럼 기억이 지워지곤 한다. 죽음이란 숨쉬지 않음인가, 기억 없음인가.

요 며칠 동안 술을 줄이고 책만 읽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깨어 잇는 동안은 읽다가 잠이 오면 또 밤이건 낮이건 따지지 않고 깜박깜박 졸곤 했다. 주로 신과 내세 來世에 관한 책이었지만 지금 머리에 남이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 부질 없는 짓이다. 그런 독서로 시간을 죽이는 것 외에 조금이라도 얻은 것이 있다면 신과 내세의 문제야말로 죽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정도다.

그런 종류의 책 말고 <여자란 무엇인가>를 비롯해서 김용옥의 책도 세 권이나 읽었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딸의 서가에서 그이 저서를 골라낸 내 의식의 흐름은 역시 신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무심히 책장을 펄럭이다가 신부 놈들이란 낱말이 눈에 띄길래 신부님의 오자인줄 알고 그 앞뒤의 문맥을 더듬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신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앙분 때문이었을까, 신부를 욕하는 소리가 그렇게 상쾌하고 고소하게 들릴 수가 없어서 이끌린 책이었다.

베란다까지 걸어나가는 것도 버거워 안방 창틀에 걸터앉아 버릇처럼 수영만 쪽을 바라본다. 요트경기장의 성화가 아주 잘 보여 아직도 올림픽기간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하루 중 아마 이맘 때가 제일 잘 보이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밤엔 주위의 휘황한 불빛 때문에 낮엔 햇빛 때문에 거의 거기서 타오르는 성화를 보지 못했다.

오늘의 바다빛깔은 오염이 심할 때의 한강의 해빙기 같다. 해변 가까이는 얼음판 같은 빛깔이고 먼 바다는 탁한 회색이다. 그리고 그 두 빛깔 사이의 경계 또한 강의 얼음장이 수심이 얕은 데만 남아 있을 때처럼 부드럽고 모호하다. 수평선도 다른 날보다 훨씬 다가와 보이건만 대마도는 지워진 듯 안 보인다. 나는 이런 풍경을 망막에 새기듯이 무턱대고 마냥 주시한다.

내 아들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의 무의미성에 그만 진저리를 친다.

잡다하게 읽은 책 중 어떤 목사님이 죽었다 개어나서 보고 왔다는 천당 생각이 났다. 그가 보고 온 천당은 바닥은 온통 황금이고 궁전 같은 집은 화려한 보석으로 되어 있더라고 했다. 내가 상상한 천당하고 나무 달라서 더 읽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내가 그랬으면 하고 그려보는 천당은 내 고향 마을과 별로 다르지 않다.  풀밭, 풀꽃, 논, 밭, 맑은 시냇물, 과히 험하지도 수려하지도 않지만 새들이 많이 사는 산,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좋아 맨발로 걷고 싶은 들길, 초가집 등이 정답게 어울린 곳이다. 내 고향 마을에서 천당으로 옮겨놓고 싶지 않은 건 터무니없이 크고 과히 깨끗지 못한 뒷간뿐이다 그러나 천당 바닥이 풀밭이 아니면 또 어떠랴. 황금이나 양탄자라 해도 사후에도 뭔가 보이는 것만 있다면 말이다.

 

오후엔 딸의 친구가 먹을 걸 해가지고 나를 보러 왔다. 아들의 조문을 받아야 하는 고통과 수치를 피하고 싶은 것도 부산으로 내려온 까닭 중의 하나였다. 딸도 에미의 이런 심정을 뻔히 아는지라 제 집에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게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눈치였는데 그 친구는 좀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나는 딸 또래의 젊은이로부터 듣게 될 어색한 위로의 말이 지레 겁이 나 숨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내 아픈 곳은 한번도 안 건드리고 자기가 해온 음식의 맛과 영양가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그 태도가 티없이 맑으면서도 공손해서 은연중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은 좋은 품성을 풍겼다.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가 내 고통을 함부로 건드릴까 봐 잔뜩 도사려먹은 마음을 풀고 편안해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이가 가지 나는 딸에게 참 좋은 사람이더라고 그이 칭찬을 했다. 딸도 제 친구가 엄마 마음에 든 게 기쁜지 묻지도 않은 그의 가정환경까지 들려주었다.

그는 양친이 구존해 계시고 형제자매도 여럿인데 하나같이 좋은 학교 나와 출세하고 경제적으로도 유복하게 산다고 했다. 또 그 여러 형제자매들이 낳은 손자녀까지 합이면 그의 양친이 퍼뜨린 직계가족이 오십 명 가까운데 여지껏 한번도 참척 [필사주: 慘慽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겪은 일이 없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듣기가 좋았는데, 그 집안이 그렇게 잘 되는 것은 그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과 끊임없는 기도생활 덕분이라는 것을 자손들이 느끼고 늘 감사하며 산다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마음이 몹시 상하고 말았다. 상한 정도가 아니라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기분이었다. 딸도 들은 대로 말했을 뿐 그 한마디가 에미를 그토록 아프게 한 줄은 미처 몰랐으리라.

나는 그럼 기도가 모자라서 아들을 잃었단 말인가. 꼭 그렇게 들려서 고깝고 야속했다. 세상에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은 에미가 어디 있단 말인가. 가톨릭에 입교한 지가 사 년밖에 안 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한 지는 그 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전에 기도가 없었을까. 영세받고 성당이나 집에서 격식에 맞게 올리는 기도보다, 그 전에 마음에서 우러날 때마다 자연발생적으로 바친 기도, 기도하듯 삼가는 마음가짐이 훨씬 더 순수하고 간절했었다.

다섯 아이를 다 젖 먹여 기를 때, 어린 것을 가슴에 안고 내 몸안에서 가장 좋은 것뿐 아니라, 내 심성 속에서 가장 좋은 것만이 자식에게 아낌없이 주어지길 비는 마음은 거의 접신 接神 의 경지였다. 그럴 때 나는 내 자식이 커서 무엇이 될지는 감히 예측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악 惡 하게 되지는 않을 것만은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으니까.

 그걸 믿고 의지하기 위해 자식을 놀러 내보낼 때나, 학교에 보낼 때나, 잠 재울 때나, 도시락을 쌀 때나 기도하듯 삼가는 게 보통 에미들의 공통적인 마음가짐이다. 영세를 받고 나서 틀에 박힌 기도의 격식과, 믿고 기도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열렬한 신자의 간증 때문에 되레 기도하는 심성은 주눅이 들어버린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게 죄였을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이름만 부르며 매달리지 않아서? 그건 말도 안돼.

남색 프레스토 생각이 났다. 아들이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해 사준 소형차가 남색 프레스토였다. 그때만 해도 고루한 내 상식으로는 인턴 주제에 제 차는 사치였다. 그러나 꼭두새벽에 나가 오밤중에 들어오는 고되고도 고된 인턴 생활에서 출퇴근에 소모하는 시간과 체력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 그 차를 사도록 했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너무 멀고 교통편도 불편한지라 그 애의 자가용만은 사치품에서 제외 시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크나큰 걱정거리를 떠맡은 셈이었다. 첫 새벽에 단잠이 덜 깬 부수수한 얼굴로 커피도 마시는 둥 마는 둥 그 차를 끌고 출근을 하고 나면 꼭 졸면서 운전하다 큰 사고를 낼 것만 같은 방정맞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퇴근 때는 그런 방정맞은 생각이 아침보다 덜했다. 들어올 시간이 지나고부터 온갖 망상에 시달려야 했다.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차를 몰고 오다가 깜빡 졸면서 교각이나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끔찍한 망상을 물리치는 길은 그래도 기도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영세를 받은 후였으니까 주로 묵주기도를 바쳤다. 아파트 진입로가 보이는 뒷베란다로 나가 남색 프레스토를 목 빠지게 기다리며 나는 얼마나 수도 없이 손가락의 묵주반지를 돌렸던가. 그 놈의 프레스토가 웬수다 싶다가도 막상 아들의 상체가 보이는 프레스토가 나타나면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아들과 함께 남색 차까지도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당직이라 안 들어올 때는 내가 직접 먹을 것과 잠자리를 챙겨주지 못하는 허전함을 기도로써 대신하려 했고, 그 애를 위해 기도할 때처럼 내 정성이 하늘에 닿는 것처럼 느낀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내 정성은 결코 하늘에 닿지 않았다. 그러니까 하느님 같은 건 있지도 않다. 나는 억지를 부리듯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래도 신의 문제는 나를 쉽사리 해방시켜주지 않는다.

신앙 깊은 어머니 덕에 자손이 다 잘 된 얘기가 나에게 그렇게 뼈아프게 와 닿았음도 내가 당산 고통의 의미를 내가 저지른 죄를 통해 찾아내려는 종교적 심성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금 현지 신의 문제는 나에게 늪과 같다. 집요하고 수렁 깊은 늪.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점점 더 끌려들어가는 느낌이다. 아무리 깊이 빨려 들어가 그 밑 바닥까지 도달한다 해도 신을 만나지는 못하리라. 적어도 이 늪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신의 얼굴은 요원할 뿐이다. 끔찍스러운 모순이다.

 

서울서 심 신부님이 전화하셨길래 반갑기도 하고 설움도 복받쳐 서울 가서 혼자 있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다들 앞으로 내가 내 아파트에 다시 들어가 혼자 사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신부님은 참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해주셨다. 조금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딸한테는 입밖에 내서 말하지 않았다. 아직은 가망 없는 일이었다. 그 애는 나를 중환지 취급하고 있었다.

 

 

9월 XX일

어젯밤에 다시 많은 술을 마셨더니 아침까지 골치는 좀 욱신거렸지만 늦잠을 잘 수가 있었다. 습관처럼 제일 먼저 베란다로 나갔다. 올림픽이 개막되기 전엔 되레 요트가 떼지어 먼 바다로 나가는 게 종이배처럼 보이더니만 막상 요트 경기가 시작된 수영만엔 햇빛의 농도에 따라 성화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할 뿐 요트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나갔나. 나갔으면 돌아올 때가 있겠지. 나는 요트가 눈에 뜨일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것도 시간을 주름잡는 한 방법이었다.

“엄마가 시방 소리개 고개까지 왔으면 내 엄지 손가락이 가운데 손가락에 척척 붙어라” 이러면서 읍내 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을 주름답던 어린시절부터 나는 지금 얼마나 멀리 와 있는 것일까. 삶의 노독인양 가슴과 뼈마디가 둔하고 깊게 욱신거렸다.

도대체 이 무의미한 항해는 언제 끝날 것인가. 남편이 꼭 남자의 평균 수명을 살고 갔으니 나도 영자의 평균수명만 산다고 가정해도 아직 십삼사 년은 더 살아야 한다. 아직도 십삼사 년을 더 살아내야 하다니. 태어난 게 잘못이다. 또 서울 가서 혼자 사는 문제를 생각해본다. 생활의 변화에 대한 꿈이 있어서는 아니다.

나는 나를 남처럼 저만치 떼어놓고 그 속을 빤히 들여다 본다. 나는 여기 딸네 집 베란다에서 수영만을 목적 없이 바라다보는 것보다 우리집 뒷베란다에서 남색 남색 프레스토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싶은 거였다. 마냥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우리 아파트 진입로로 운전대를 꺾는 아들의 준수한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쳐서라도 좋으니 그렇게 되고 싶다.

부우연 안개가 걷히면서 수영만에 푸른 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분청사기처럼 불투명하고 고르지 못하다. 커피도 베란다에서 마시면서 기다린 보람으로 마침내 요트들의 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열 시경이었다. 너무 느리고 한유로와 보여 조금도 경쟁이나 승리를 위한 출범같지가 않았다.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손자들이 환호하며 외치는 금메달이니 신기록이니 하는 올림픽 열기와는 동떨어진 별세계의 풍경화처럼 보인다.

돛단배들이 아물아물 먼 바다로 작아져가는 걸 지켜보는 사이에 몽롱한 조으름이 왔다. 아렴풋한 희망이 조으름을 더욱 감미롭게 했다. 아아, 꿈이었으면, 그 모든 일들이 한바탕의 꿈이었으면. 그리하여 퍼뜩 일어나보니 내 악몽을 근심스럽게 흔들어 깨워준 게 내 아들이었으면. 그러나 그런 희망으로 가슴이 울렁거려 곧 눈이 말뚱말뚱 해지고 말았다.

한낮의 수영만은 좀더 밝아져서 평평한 사막 같다. 그러나 구름 낀 하늘과의 사이의 수평선이 자를 대고 푸른 물감으로 그은 것처럼 선명한 게 좀 기이해 보인다. 이렇게 불투명한 날에 대마도가 보이는 것도 이상하고, 마치 아지랑이가 가물댈 때의 봄동산처럼 몽롱하고 푸르게, 그러나 꽤 가까이 보인다.

마침 배달을 온 청년이 ‘이 집 참 전망 좋다’며 베란다를 기웃대다가 대마도를 보더니 ‘내일 비 오겠군’ 하면서 일기 예보를 한다. 대마도가 보이면 다음날 영낙없이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내가 안 믿는 눈치를 보이자 청년은 나더러 내기를 하잔다. 여간 자신만만하지가 않다. 순전히 경험에 의한 지혜도 젊은이에게 못미치는 내 나이가 더욱 초라하게 느껴져 나는 열없이 그냥 웃기만 했다.

저녁 무렵 노순자 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들 잃고 나서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울음부터 치밀었다. 내 아들 자라는 걸 어려서부터 지켜보았고 그 또한 외아들을 기르고 있으니 내 비통을 헤아리는 마음도 남 다르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복받치는 통곡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몇 마디 하다가 그냥 끊었다. 울음과 함께 온 종일 살얼음판을 밟듯이 참아내던 포악과 물음이 복받쳤다.

내 아들의 죽음의 의미는 뭘까? 죽음 후에도 만남이 있을까? 그 애의 죽음은 과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신이 있기나 있는 것일까? 인간의 기도나 선행과는 상관없이 인간으로 하여금 한 치 앞도 못 내다보게 눈을 가려놓고 그 운명을 마음대로 희롱하는 신이라면 있으나마나 가 아닐까?

여지껏 지녀온 신의 개념 중에 자비로움 공정성 같은 걸 빼버리면 신 또한 시체만 남게 된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시기 직전에 큰 소리로 남기신 말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 뜻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작 숨은 뜻은 “하느님, 하느님, 결국 당신은 안 계셨군요?” 가 아닐까.

지치도록 울다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서울서 가져온 가방을 뒤지는데 묵주가 만져졌다. 남편의 투병 중 문병을 와준 친구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주고 간 묵주였다. 친구가 몇 년 전 성지순례 하면서 성모님이 몇 번씩이나 기적을 보이셨다는 유럽의 어떤 성당에서 산 건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묵주로 기도를 바치면 영락없이 잘 들어 주시더라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자기에겐 마음의 든든한 지주 같은 특별한 묵주니 아주 줄 수는 없고 빌려주는 거니 나도 열심히 기도를 바쳐 그런 은총을 받도록 하라고 했다.

나는 그 묵주로 구일기도도 바쳐보고 단식기도도 바쳐봤지만 남편의 생명을 붙들지는 못했다. 그 묵주가 어떻게 짐 속에 들어 있었을까? 아마 둘째가 짐을 싸면서 에미가 너무 힘들 때 혹시 위로가 될까 해서 챙겨 넣은 모양이다.

나는 그 묵주가 특별히 영검하다는 걸 믿지 않는다. 처음부터 믿지 않았었다. 내가 그걸 굳게 믿을 수 있었다면 아마 그 묵주로 남편의 병을 고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묵주를 보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아 얼른 주모경을 바치고 나서 작은 주머니 속에다 넣어 두었다. 그리고 나서 “주님,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믿어서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계실까 봐, 계셔서 남은 내 식구 중 누군가를 또 탐내실까 봐 무서워서 바치는 기도입니다”라고 내 기도에다 주석을 달았다.

주를 믿어서도 사랑해서도 아닌, 단지 공포 때문에 올리는 기도란 얼마나 참담한가. 참담 그 자체, 그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예수는 왜 당신이나 십자가에 매달리고 말지, 왜 수많은 예수쟁이들까지 줄줄이 그의 못 박히고 피맺힌 팔다리에 매달리게 하는가. 그래서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손톱 발톱까지 나눠 갖게 하는가.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메달을 많이 따나 보다. 밤늦도록 손자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 아들이 없는데도 축제가 있고 환호와 열광이 있는 세상과 내가 어찌 화해할 수 있을 것인가. 혼자가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다.

 

 

9월 XX일

추석날이다. 딸애가 추석상을 잘 차렸다. 사위, 손자들까지 둘러앉아 서울식으로 차린 추석상을 받았다. 원은 어제부터 시골 큰댁으로 갔어야 할 아이들이 나한테 마음을 쓰느라고 안 가고 있는 것이다. 딸의 시댁 어른들이 그 애들을 못 오도록 극구 말렸다니 그 인품의 너그러움과 자상함이 고마우나, 사돈댁의 동정까지 받고 있단 생각은 심히 처량하고 민망하다.

또 추석 명절날 하루만이라도 혼자 있을 수 있으려니 기대했던 게 어긋난 것도 속이 상한다. 혼자서 뭘 어째보겠다는 요량이 잇는 것도 아니면서 때때로 혼자 있고 싶어 미칠 것 같을 때가 있다. 좋은 딸들을 둔 것도 복에 겨워 저런다고 흉잡힐만한 청승인지라 될 수 있는 대로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이런저런 부자유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오후에 샤워하고 손자들은 친가 쪽 시골로 성묘 떠나고 딸하고 단둘이 남는다. 슬픔과 외로움에 처했을 때, 명절이 얼마나 힘들다는 걸 딸도 모르지는 않는지라 조심스럽게 서울서도 오늘 모두 성묘를 가기로 대 있다고 알려준다. 둘째, 셋째네 그리고 장조카네 식구 모두에게 그 애의 친구들까지 간다고 했으니 버스 한 대쯤 대절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불필요한 혼자 말까지 덧붙인다. 그런 소리까지도 동기간들이 번족한데 명절날 그 애가 홀로 쓸쓸하게 누워 있도록 내버려둘까 봐 그렇게 청승맞은 얼굴을 하고 있느냐고 나무라는 말로 들린다.

온몸의 살갗이 다 까진 것처럼 그저 닿는 데마다 쓰리고 아프다. 이런 내가 스스로도 부담스러우니 자식들은 또 얼마나 짐스러울까. 이곳 해운대 성당에 연미사를 신청했으니 미사참례하러 가자고 했다. 그 애가 죽고 나서 처음 가보는 성당이다. 생전 처음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보는 것처럼 쭈볏쭈볏 몸둘 바를 모르겠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건만도 모다 나를 알아보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다. “저 여편네가 아들 잡아먹은 여편네래” 하고.

어렸을 때,우리 시골에선 일찍 과부가 되거나 참척을 본 팔자 사나운 여자들 가리켜 남편 잡아먹은 X, 혹은 새끼 잡아먹은 X이라는 심한 말로 손가락질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참 끔찍한 말버릇이라고 생각했건만 그 애를 잃고 나서 자주 그 말이 떠오르곤 한다. 그건 결코 심한 말이 아니라 생생한 실감이었다.

가슴에 곽 가로막힌 이 무겁고도 생전 삭아 없어질 리 없는 응어리와 수치감에 그 이상 들어맞는 비유가 어디있을까.

미사 보는 동안도 내내 자식 잡아먹은 내 모성의 독함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그 애가 누워있는 산에도 못 가봤다. 즈이 아버지 발치에 누워 있다니 내 발길이 여러 번 미친 산이건만, 그 애가 묻힐 때도, 묻힌 후에도 못 가봤으니 그 산은 나에게 미지의 산일 수밖에 없다. 에미가 눈뜨고 살아 있으면서 그 애가 어떻게 묻히고 어떤 모양으로 누워 있는지 확인도 안 해봤으니 세상에 그런 못된 에미가 어디 있을까.

나는 주위의 만류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들의 장례에 달려갔었다. 못할 노릇인 줄은 남이 말해주기 전에 이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식 잡아먹은 죄로 어떡하든 그 벌을 받아내지 못하면 따라 죽게 되든지 하다 못해 까무러치기라도 할 줄 알았다. 정신의 고통이 어느 한계까지 차 올랐을 때, 기절할 수 있는 장치가 돼 있는 몸을 가진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내 몸과 마음에는 불행히도 그런 장치가 빠져 있었다. 내가 자신을 독종이라고 저주하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그때 분명히 기절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 주사로 일부러 기절을 시켜 장례에서 빼돌려버렸다. 당해야 할 고통은 아무리 못할 노릇이라도 그 자리를 피하지 않는 게 옳다. 일생 피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추석날이라 그런지 그 애의 산소도 떠올릴 수 없는 게 몹시 고통스러웠다.

연미사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미사 후 딸이 나를 신부님에게 인사시키려고 했다. 나는 그분이 무너가 위로의 말을 찾으려고 머뭇대는 걸 보자 얼른 인사도 하는둥마는둥 그 자리를 피했다. 내가 나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애물덩어리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막연한 듯하면서도 확실한 돌파구로 다시 한번 혼자가 되는 방법을 궁리해본다. 그렇게 수시로 눈물을 짰건만도 생전 울어보지 못한 것처럼 정말로 순수하게 혼자가 됐을 때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실컷 울어보는 거다.

미사 보고 나서 딸은 어디 좋은 데 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추석날이니까 딸은 아마 살아 잇는 조상을 기쁘게 해주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어떻게 기쁜 척해야 하나는 이 몸의 고달픈 업이다. 파라다이스 호텔 삼층 화식부로 따라갔다. 경치가 좋았다. 창밖에선 파도가 부서지고 산책 나온 젊은이나 어린이들 중엔 고운 한복을 입은 이도 많이 눈에 띄었다. 오른쪽으로 바라보이는 게 동백섬이라는데 조선비치호텔이 그 경관을 가로막고 있는 게 옥의 티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앉은 자리를 본위로 한 관점이리라. 너무 좋은 식당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우동 국물만 훌쩍였다.

집에 오는 동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욱한 안개비더니 조금씩 빗발이 굵어지면서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 딸은 아이들을 태우고 시골길로 차를 몰고 간 제 남편 걱정을 하는 눈치고 나는 아들의 무덤이 비에 젖을 생각을 한다.

학교 갔다 비 맞고 돌아왔을 때의 그에 생각이 났다. 국민학교 때도 과보호가 될까 봐 웬만한 비에는 우산을 가지고 학교까지 마중가지 않았었다. 그 애도 으레 그러려니 기다리지 않고 비 맞는 걸 오히려 즐거니 듯 홈빡 젖어서 씩씩하게 돌아오곤 했다. 비에 젖을수록 체온이 뜨거운 건강한 사내아이한테서는 흙과 식물과 동물을 합친 것 같은 강렬하고도 싱그러운 생명의 냄새가 풍겼었다. 그 애에게서 생명이 없어지다니. 들꽃으로라도 풀로라도 다시 한번 피어나렴.

나는 그 애에 대한 갈증을 참을 수가 없어 집에서 가져온 그 애의 사진첩을 꺼냈다. 너무 힘들어 스스로 자제해온 일이건만 오늘은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생전에 무심히 그저 잘 나왔다, 못 나왔다 정도의 평을 하며 보던 사진들이 한 장 한 장 생전의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나 에미의 살갗을 으스러뜨리며 에미 안으로 스민다. 친구들과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핀 교정에서 찍은 사진은 그 애의 설레이는 행복감은 물론, 대기 중에 충만한 봄내음, 친구들과의 악의없는 농지거리, 벌들의 잉잉거림까지 현장에 잇는 것과 다름없이 느끼게 해준다. 그 애의 졸업식 날은 왜 그렇게 추웠던지, 졸업식 때 찍은 사진에선 얼굴에 살짝 돋은 소름, 분주하게 돌아다니느라 가빠진 숨결, 발리 맛있는 거나 먹으로 가고 싶은 왕성한 식욕, 추위와 가족들의 만족감이 자아내는 묘한 축제 분위기를 눈앞에 또렷이 보고 느낀다.

사진 중에 며칠 전 딸애가 찾아온 것도 있다. 딸은 제 카메라의 필름을 빼다 맡긴 걸 찾아오더니 ‘어머’ 하면서 탄성을 삼켰다. 거의가 다 요새 즈이 아이들을 찍은 거였는데 그 중엔 여름방학 때 서울 와서 찍은 것도 몇 장 있었다. 그 중 한 장이 아들의 독사진이었다. 날짜를 보니 그애가 죽기 바로 며칠 전에 밤의 한강유람선에서 찍은 거였다.

그날 그 애의 귀가가 다른 날보다 조금 일렀던지, 아무튼 나는 그 애에게 부산서 올라온 손자들한테 한강유람선을 태워주라고 부탁을 했다. 촌스럽게 유람선은요, 하면서도 그 애는 마다하지 않았다. 차 가진 죄였다. 결국 우리는 촌스럽게도 어른들까지 따라나서서 유람선을 타고 밤바람에 더위를 식히며 오징어 다리를 씹었던가? 강변의 야경이 환상적이었다. 그때 배의 난간에 기대선 그 애의 모습은 여간 피곤해 보이지 않는다. 손자들을 즐겁게 해준답시고 주책을 떠느라 그땐 미처 보지 못한 그 애의 피곤을 카메라는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그게 그 애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놀란 건, 그 애의 피곤보다도 그 크림통보다도 작은 필름통 속에 유명 幽明이 함께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유람선 사진 몇 장만 빼고는 다 그 애가 죽은 후의 날짜로 돼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리의 단위나 감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길 없이 멀고 먼 이승과 저승이 어쩌면 그 작은 필름통 안에 그리도 치근하게 밀착돼 있었더란 말인가. 나에겐 그 필름통이 마치 한치 앞도 못 내다보는 가련한 인간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밤이 깊어가는데도 성묘 간 사위와 손자는 안 돌아온다. 나에게 걱정이 남아 있다는 게 싫지만 걱정이 된다. 베란다로 나가본다. 13층이다. 뛰어내릴 용기가 없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뛰어내리기를 꿈꾼다. 베란다에 샷슈가 없어 더욱 발 밑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필름통 속에서나 다름없이 삶과 죽음은 도처에 분명한 잇잠도 없이 그냥 이어져 있구나.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떠다 밀지 않는 한 아무도 이의로 그걸 뛰어넘지 못하고, 일단 뛰어만 넘으면 그 거리는 무한대로 멀어지고 만다.

발 밑이 짜릿짜릿해져서 조금 뒤로 물러선다. 아무리 물에 빠져 죽고 싶어도 물귀신이 잡아당기지 않으면 못 빠져 죽는다는, 들은 풍월이 생각난다. 자유의사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이가 있다면 사람도 아니다. 초인이다. 수영만의 성화가 빗속에서 아주 잘 보인다. 촛불만한 크기와 흔들림으로.

성묘 간 아이들이 한밤중에 돌아왔다. 할아버지댁에서 텔레비전으로 유도가 금메달 따는 것까지 보느라고 그렇게 늦었다고 했다. 금메달이 그렇게 좋은지 아이의 표정이 함박꽃 같다. 꽤나 악을 쓰고 응원을 했나 보다. 산에서 신나게 논 얘기를 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쉬어 있다. 아이는 할머니한테 선물이라며 주머니에서 산에서 주웠다는 알밤을 주섬주섬 꺼내놓는다. 고맙다, 고마워. 나는 선물도 고맙고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온 건 더 고마웠다.

 

 

9월 XX일

공휴일이다. 어제부터 오늘 경주로 놀라간다고 벼르더니 아이들이 일찍 깨서 와아, 날 좋다고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아닌 게 아니라 수영만의 빛깔이 내가 부산 와서 관찰한 바다 빛깔 중에서 가장 투명하다. 에메랄드가 빛을 반사할 때 같다. 아이들의 올림픽 열기가 왜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요트 경기에 있어서는 그렇게 시들한지 모르겠다.

서울 아이들로부터 전화로 산에 갔다 온 얘기를 들었다. 떼도 잘 자랐거니와 산에 가는 길이 그리 좋다라고 했다. 서울을 벗어나서 산까지 줄창 코스모스가 어찌나 청초하고 화사하게 피었던지 꿈길 같기도 하고 천국 가는 길 같기도 하더라나. 너무 좋아서 너는 참 좋겠다고 먼저 간 동생을 부러워 했단 얘기도 했다. 약간 들뜬 것 같은 목소리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들으니 짐짓 나를 위로하려고 저런다 싶으면서도 역시 자식하고 동기간은 다르다고 어른스럽지 못하게 고까운 생각이 들었다.

경주 가는데 안 따라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딸애가 그 일을 꾸민 건 에미에게 기분전환을 시켜주는 게 목적인 듯 했다. 벌써 며칠 전부터 아이들이 말썽을 부릴 때면 너 그 따위로 말 안 들으면 이번 공일날 할머니하고 경주로 드라이브 갈 때 너만 떼놓고 갈 거라고 위협을 하곤 했었다. 나를 위주로 한 드라이브 같이 말하면서도 내 의견은 한 번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 역시 가기 싫다고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혼자 있고 싶어, 제발 날 좀 내버려 뒤 줘’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미는 걸 자세하고 우쭐우쭐 좋아하는 아이들과 어울려 차에 올랐다.

청명한 가을날의 드라이브는 쾌적했고, 아이들은 또 어찌나 좋아하는지. 이곳 역시 길가의 코스모스는 색색아지 무수한 호접이 춤추듯 미묘하게 하늘대고 마산홍엽은 꽃보다 요요했다. 딸네 식구들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나 역시 내 새끼, 내 손자들의 행복이 보기 싫은 까닭이 없다. 내가 복받치는 분심으로 신을 원망하고 저주하다가도 문득 두려워지면서 기도하는 마음이 돌 수 있는 것도 남은 딸자식들 내외와 손자들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경치와 좋은 구경과 딸과 사위의 극진한 보살핌과 손자들의 즐거운 환성이 견디기 힘들었다면 딸은 섭섭하겠지.

그러나 딸아. 그건 네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란다. 아무리 좋은 일도 그걸 못이 막힌 가슴으로 느껴야 할 때 어떠하다는 걸 네가 알 리가 없지, 또 알아서도 안 되고. 그러나 너도 손가락에 가시 같은 게 박혀 본 적은 아미 있을 것이다. 가시 박힌 손가락은 건드리지 않는 게 수잖니? 이물질이 닿기만 하면 통증이 더해지니까. 에미에게 너무 잘해주려고 애쓰지 말아라. 만약 손가락 끝에 가시라도 막힌 경험이 있다면 그 손가락으로는 아무리 좋은 거라도, 설사 아기의 보드라운 뺨이라도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만져볼 수 없다는 걸 알 테지. 그런 손가락은 안 다치려고 할수록 더욱 걸치적거린다는 것도 못박힌 가슴도 마찬가지란다. 오오, 제발 무관심해다오. 스스로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오래간만에 와보는 경주는 많이 변해 있다. 도처에서 아련한 비애와 감동을 자아내던 천 년의 고도가 전형적인 관광지가 돼 있었다. 천마총 관광 중 소나기가 왔다. 소나기 채고는 꽤 오래 와서 아이들은 비를 긋다 말고 뛰어다녀 흠빡 젖고 말았다.

경주시내에서 식사를 하려 했으나 추석 끝이라 문 연 집이 거의 없어 한참 돌아다녔다. 사대부집이라는 한식집이 영업을 하는 걸 사위가 간신히 찾아냈다. 그러나 불고기밖에 안 된다고 해서 모다 그걸 시켰다. 그 애를 잃고 나서 아직 고기를 입에 넣은 적이 없다. 소화가 안 된다는 핑계였지만, 그 애가 죽던 날 밤, 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유난히 맛있게 등심구이를 아귀아귀 먹은 생각을 하면 진저리가 쳐져서 생전 고기를 먹을 것 같지가 않다. 집에서처럼 따로 눌은밥을 좀 끓여달래서 먹었지만 누린내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9월 XX일

작은 손자가 학교 갔다 오자마자 해운대 나가자고 졸라 다들 같이 나갔다. 바다가 목적이 아니라 일전에 호텔에서 먹어본 샤베트가 목적인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즈이 에미가 그런 비싼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몇 번씩 다짐을 하고 나서 사주었다. 나는 마지막이란 소리가 듣기 싫어 얼굴을 찡그렸다.

날씨가 좋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수영복을 입은 건 외국사람들 뿐이다. 북구라파 쪽 사람에겐 이 좋은 날 옷을 잔뜩 껴입고 바다를 구경만 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이상해 보일 법도 하다. 파도가 장난을 치다가 신발을 적신 김에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어 즐기는 건 역시 아이들뿐이다. 그런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는 외국인을 보면서 혹시 수영복도 없는 한국 아이라고 즈희 나라에다 왜곡보다나 하지 않을까, 60년대 식의 궁상맞은 근심을 해본다.

하늘을 지나는 구름과 햇빛의 농도에 따라 바다 빛깔은 시시각각 요변을 한다. 어느 땐가는 수평선 쪽이 초록색 띠를 두른 것처럼 선명하게 바다의 남색과 경계를 이루면서 그 쪽에 떠 있는 양식장의 흰 스치로폴이 초원에 노니는 양떼처럼 보였다. 이 환상의 초원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쪽에 초원이 있고 없음이 뭐 그리 중요한가. 이 세상의 수 많은 사물 중 다만 보였다는 것 이상의 관계를 맺은 게 몇이나 된다고.

백사장의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인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연방 귀여운 모습을 찍어대는 젊은 부부가 보기 좋다. 지나간 시간을 가정 않기 위해서라도 단 생각을 해야겠다. 아주 초라하고 더러운 소년이 내 곁에 누워 있다.

처음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했는데 자는 것 같았다. 백사장을 거니는 사람들 발길에 채여도 꼼짝 을 안 했다. 나는 그 소년을 열심히 관찰했다. 슬리퍼만 꿴 맨발에도 얼굴에도 땟국이 얼룩져 있다. 소년에게 몰입하기 위해 땟국을 벗긴다. 코가 우뚝하고 준수한 얼굴이 된다. 저 모습에다가 내 아들의 영혼을 불어넣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내 망령된 생각에 스스로 놀라 일어섰다. 밑도 끝도 없이, 미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임의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녁 무렵 분도수녀원의 수녀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해인 수녀님으로부터 내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찾아오고 싶다고 했다. 마침 집에 나 혼자 있을 때였다. 나는 마침내 어떤 기회가 온 것처럼 느꼈고, 그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기회란 혼자 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홀로 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오실 것 없다고 내가 가겠다고 했다. 일방적으로 갈 날짜까지 예약을 하면서 있을 만한 방을 하나 비위 달라고 부탁을 했다. 분도수녀원은 같은 부산일 뿐 아니라 수영 쪽하곤 지척인 광안동에 있었다. 딸도 마다 고는 못하리라.

 

 

10월 XX일

수녀님과 약속한 날이 되었다. 딸한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짐까지 다 싸놓았다. 변비약을 끊어보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라 속이 가슴까지 차오른 느낌이지만 아침엔 처음으로 된밥을 달라고 해서 딸 보는 앞에서 여봐란듯이 반 공기 가량 거뜬히 먹어 치웠다. 그 애가 에미를 자기만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까닭은 바로 식사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제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서 오늘 수녀원에 들어가겠노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몰래 화장실에서 아침에 먹은 걸 다 토해내고 말았다. 생생하게 살아 잇는 밥풀이 섬칫했다. 자식의 보호를 벗어나려는 게 객적은 오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벗어나겠다는 게 아니라 벗어나면 내가 어떻게 되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 또한 걷잡을 수가 없다. 뭔가 내 정신이 아니다.

딸애는 그 동안 그렇게 지성껏 봉양을 했건만 뭐가 부족해서 저러나 싶은 얼굴로 쳐다봤지만 나는 그 애에게 딴소리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디서 뭔가 강력한 힘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도무지 지접을 못하는 에미를 딸은 딱한 듯, 슬픈 듯 바라보더니 말없이 짐을 들고 따라나섰다. “모셔다나 드릴께요.” 딸의 지친 듯한 목소리를 듣고 나는 문득 나를 그 애의 에미가 아니라 자식처럼 느꼈다. 자식 중에서도 에미 속이나 썩이는 못된 자식처럼.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은 마음과 ‘아직은 안돼’라는 오기가 속에서 싸움질하듯 보깼다. 늙은이의 어리광이야 망령밖에 더 되나. 딸네서 분도 수녀원까지는 차로 십 분 가량밖에 안 걸렸다.

초면의 마리로사 수녀님은 야생의 과실 같은 인상이었다. 수녀복 속에도 사람이 저렇게 싱싱하고 활기찰 수 있다니. 나는 신기하다 못해 조금은 질려서 바쁘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수녀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침 수녀원에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몸이 자유롭지 모한 노인들을 모셔다가 대접한 후 막 떠나 보내려는 시간인 듯했다. 마당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까지 모셔다가 부축해서 태워드리기도 하고 작별을 아쉬워하기도 하는 여러 수녀님들 중에도 그 수녀님은 유난히 민첩하고 발랄해 보였다. 나이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내가 기대하고 상상하던 것과 판이했다. 나는 긴긴 회랑 回廊 이나 연도 羨道 [필사주: 고분의 입구에서 시체를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 의 끝처럼 어둑시근하고 적막한, 속세와 절연된 고장에서 오로지 나만을 기다리고 있을, 손이 마더 데레사를 닮은 수녀님을 상상했었다. 얼굴은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겐 잡아줄 손이 필요했다. 죽는 날까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건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원통 寃痛 함에서만은 놓여나고 싶었다.

손님들을 배웅하고 난 수녀님이 우리를 언덕방으로 안내해주었다. 수녀원을 방문하는 수녀님들의 가족이나 일반 내방객들을 접대고 하고 묵어가게도 하는 곳인 듯했다. 이인용 침실이 두 개, 여럿이 잘 수 있는 방이 한 개, 독립된 두 개의 응접실, 차를 끓여 마시거나 물을 데워 쓸 수 있는 주방, 화장실, 응접실을 겸한 넓은 복도, 수부 등으로 되어 있었다.

속된 말로 방방 뜬다는 표현이 그대로 들어맞는 걸음걸이로 우리를 안내해 준 마리로사 수녀님과 언덕방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수녀님은 나하고보다 딸하고 더 많이 얘기를 했다. 나를 위로하는 말도 별로 안 했고, 안 됐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지도 않았다. 수녀님의 음성은 명랑하고 리드미컬 했다. 음악을 듣는 것 같았다.

이상도 해라. 수녀님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이상했고, 내가 여기 무작정 이끌린 것도 이상했다. 여기 오기 위해 나는 며칠 동안 거의 음모를 꾸미듯이 몰래 계획을 짜고 가슴을 조이고 했었다. 내가 앞으로 있을 방에 짐을 풀었다. 딸하고 단둘이 되자 달이 말했다. “마리로사 수녀님을 뵈니까 엄마를 여기 떼어놓고 가도 될 것 같아. 계시고 싶은 만큼 계시다 오세요. 매일 한 번씩 뵈러 올께요.” 나는 그럴 거 없다고 극구 말리면서 어서 가라고 재촉했다.

이곳의 분위기는 내가 상상한 것하고는 너무도 달랐지만 딸이 마리로사 수녀님을 대번에 믿음직스러워한 것은 뜻밖의 성과였다. 언덕방 침실은 전망이 좋고 청결하고 검소했다. 불편한 것도 불필요한 군더더기도 없었다. 딸은 책상 설합까지 열어보고 봉투, 우표, 편지지 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딸은 특히 달력종이를 오려서 만든 메모지를 보고 감탄을 했다.

그러나 떠나갈 땐 주제넘게도 어린 자식을 험한 고장에 떼어놓고 가는 에미 같은 얼굴을 하더니, 기어코 눈물을 보였다.

그 애가 떠나고 나서 잠깐 혼자가 되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어떤 고비를 맞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고비였지만 두려웠다. 창밖으로 수녀님들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바빠보였다 멀리 밭에서 일하는 수녀님도 바라보였다. 복장과 머리수건이 조금씩 달랐다. 하는 일에 따라 옷을 다르게 입는 건지 이 안에도 계급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리로사 수녀님만 특별히 명랑하고 발랄한 게 아니었다. 다들 그늘이라곤 없이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수녀님도 있었다. 이상도 하지, 저 젊음과 저 미모로 무얼 못해서 하필 수녀가 되었을까. 나는 누가 부른 것처럼 이곳에 이끌렸고, 지금 여기 당도해 있건만 왜 이런 곳이 있어야 하는지, 어떻게 세속의 한가운데 이런 곳이 있을 수 가 있는지 그저 이상하기만 했다.

곧 마리로사 수녀님이 와주었다. 바쁜 틈을 내서 와준 것 같았다. 늘 바쁘고 자기 일로 인하여 충분히 충만된 사람 특유의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뒷산으로 산책을 가자고 했다.  고마웠지만 이 수녀님이 나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 안에서만은 완벽하게 혼자이고 싶었다. 누구에게 짐이 되기는 더군다나 싫었다. 그래도 안 가겠다고는 못하고 따라 나섰다.

수녀원에 속한 뒷산은 가꾼 티 안 나게 잘 가꿔져 있었다. 명상의 길이라는 산책로는 십사처를 소박하게 조각한 돌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안배되어 있었으나 예수의 열네 자리의 고난은 행인을 압도하지 않고 적당히 숨어 있어서 편한 마음으로 산책을 할 수가 있었다. 명상의 길에서 조금만 빗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근사한 자리가 있다는 것도 수녀님은 가르쳐주었다. 낡은 벤치까지 놓여 있는 그 자리에서 바라다본 바다는 정말 기가 막혔다.  딸네 집 베란다에서 매일매일 색칠할 물감을 고르듯이 감각적인 시선으로 바라다본 바다하곤 영 딴 바다였다.

내가 발을 딛고 선 입지적 조건 때문이었을까, 뭔가 영적이었다. 유난히 잔잔하여 꼭 호수 같으면서도 한없이 너그러워 보였다.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갈릴래아 바다를 연상했다. 괜히 한숨이 나왔다.

다시 오솔길로 앞장선 수녀님은 느릿느릿 걸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이제부터 수녀님이 정식으로 나에게 조의를 표하고, 하느님이 내 아들을 데려간 까닭을 설명하며 하늘 나라에서 만날 수 있다고 보증을 서줄 줄 알았다. 천주교도건 개신교도건 예수를 믿는 사람이 즐겨 쓰는 이런 판에 박은 위로의 말을 또 들을 생각을 하니 여기 들어온 게 슬그머니 후회가 되었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먼저 데려가신다는, 예수쟁이들의 상투적인 위로는 닥 질색이었다. 내 아들은 물론 의인도 아니었지만, 만약 그런 소리를 조금이라도 믿어야 한다면 세상에 어느 에미가 자식에게 적의나 도덕을 가르칠 수가 있단 말인가. 하기야 그런 말 잘하는 사람일수록 돌아서선 저 여편네는 무슨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길래 외아들을 앞세웠을까 하고 에미의 죄를 묻기에 급급하리라.

참척의 쓰라림으로 내 마음은 비뚜러질 대로 비뚜러져 있었다. 그러나 수녀님은 딴소리만 했다. 어떻게 해서 화제가 거기 이르렀는지는 모르지만 수녀님은 아주 열렬하고 감동적인 어조로 교황 요한 23세 얘기를 했다. 명색이 가톨릭신자지만 가톨릭의 역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교황님이었다.

하긴 내가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교황님은 현 교황님밖에 없었다. 한국 성인 성녀 시성식 때 내한하신 교황님은 특히 손이 인상적이었다. 천상의 손처럼 아름답고 손놀림의 유연함과 거룩함은 환상적이었다. 고작 그 정도가 현재의 교황님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지만, 또한 은연중 내 속에는 관념화된 교황님의 최소한의 자격요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녀님은 전혀 파격적인 교황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요한 23세는 키가 작고 얼굴이 잘 생기지도 않았고, 소박하고 털털하기가 평범한 농사꾼과 다르지 않았다. 재위기간도 오 년도 채 안 되는 짧은 동안이었지만 그 동안에 교황은 역대 어떤 교황보다도 위대한 일을 했다. 그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가톨릭교계뿐 아니라 전세계에 위대한 새 바람을 일으킬 만한 대 회칙을 선포한 일이라는 요지의 얘기를 수녀님은 일화중심으로 어찌나 재미있게 하는지 나도 모르게 빨려 들고 말았다.

수녀님이 요한23세를 얼마나 경애하고 있는지는 수녀님의 표정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가뜩이나 혈색 좋은 얼굴이 소녀처럼 상기하고 눈이 빛났다. 좋아하는 사람 얘기를 할 적에 말이 유창하고 재미있어 한다는 것은 수녀님도 속인과 다르지 않았다. 수녀님은 굉장한 이야기꾼이었다.

그냥 재미 있으라고 요한23세 얘기를 꺼낸 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국의 가톨릭교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거였다. 수도원 하면 우선 속세와 단절된 신성한 분위기와 엄한 규칙만 생각하고 있을 나의 속된 고정 관념을 깨고 싶은 거였다. 그리하여 수도의 목적이 인간적인 고뇌와 불행으로부터 초월이 아니라 얼싸안음이라는 것을, 자기 혼자만의 평화가 아니라 지상의 평화라는 것을 말해줌으로써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이었다.

수녀님은 어린애한테 위인전 얘기를 해주듯이 재미있고 신바람 나게 요한23세 얘기를 다해주고 나서 비로소 나더러 이곳에 잘 왔다고, 마음 편히 지내길 바란다는 뜻의 인사말을 했다. 연민이 섞이지 않은 담담한 말투여서 고마운 한편 조금은 서러웠다. 그 동안 나는 싫어하는 것처럼 굴면서도 실은 얼마나 남이 나를 불쌍히 여기면서 비위 맞추고 위해주는 데 길들여졌던가.

오솔길이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가면 수녀님들의 묘지가 나왔다. 북한 연변 등지에서 돌아가신 수녀님들을 위한 위령비도 있었지만 무덤이 여나문 기 基 밖에 안 되는 묘지는 여염집 정원처럼 아담하고 아늑했다.

나는 비명 중에서 낳고 죽은 날만 하나하나 읽으면서 재빠르게 수명을 계산했다. 거의 천수를 다 했다 싶은데 딱 한 분 삼십 대에 돌아간 분이 있었다. 수녀님이 오지항아리에 준비된 성수를 묘지에다 뿌리면서 잠깐 기도를 했다. 나도 덩달아 성수를 뿌렸지만 젊은 죽음 위에만 뿌렸다. 그의 유족이 된 듯 애절한 슬픔이 복받쳤다. 속으로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이 젊은 무덤만을 사랑하고 마음을 붙이리라 다짐했다. 잔뜩 꼬인 마음 때문인지 무슨 앙심처럼 걷잡을 수 없이 편애 偏愛의 욕구가 치밀었다.

이래저래 심신이 고단했지만 당분간 여기 식구가 돼보기로 마음 먹은 게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순전한 자유의사인 바에야 여기 법도를 따르는 게 마땅할 듯 싶었다. 저녁식사 전에 올리는 저녁기도에 참석하고 나서 이곳에서의 처음 저녁상을 받았다. 마리로사 수녀님이 겸상을 해주어 혼자 먹지 않았지만 손님은 수녀님들과 따로 식사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시중드는 수녀님은 친정 어머니처럼 인자한 눈길을 하고 있었다. 반찬도 검약한 중류가정 정도는 되었고 기명이 깔끔하여 수녀님들도 먹는 즐거움을 아주 외면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니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유동식만 억지로 먹던 끝이라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수녀님들한테 걱정만 끼쳤다.

언덕방으로 돌아왔더니 수부에서 일보는 수녀님이 차랑 과자랑 방까지 갖다 주면서 권했다. 쉬어도 된다고 했지만 밤기도까지 참석하고 돌아왔더니 마리로사 수녀님이 따라와 읽을 거라도 갖다 주고 얘기도 좀 하다가 문단속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돌아갔다. 손님이 나 혼자라 그 넓은 언덕방 건물에 나 홀로 남게 되었다. 현관 옆에 있는 화장실까지의 거리가 아득한 큰 건물이었다. 외부로 난 현관 열쇠는 내 손안에 있었지만 수녀님들의 숙소로 통하는 복도 쪽 문은 저쪽으로부터 잠겨 있었다.

이제야말로 혼자가 된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왜 그렇게 혼자 있고 싶어 했는지 생각도 안 나고 이해도 안 되어 우두 망찰을 했다 그리고 누가 떠다민 것처럼 비실비실 방구석으로 가서 찰싹 붙어 섰다. 인기척 없는 언덕방의 공기가 사방에서 화살처럼 내 몸에 꽂혀오는 것 같았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잖아. 자업자득이야. 이렇게 자신을 윽박질러 보았지만 완벽한 고립감은 고약했다.

워낙 정신적이지 못한 나는 고립감도 감각적이었다. 무서움증만 해도 상상의 소산이니 정신적이라 하겠다.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고 다만 등더리에 누가 자꾸자꾸 눈덩이를 한웅큼씩 집어넣는 것처럼 차가운 전율이 간단없이 지나갔다.

마침 침대머리 높은 곳에 걸린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성당이나 가톨릭신자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고상이 아니라 그냥 십자가였다. 수난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물론 대패질도 니스칠도 생략한 채 목공소에서 주운 것 같은 나무막대기 두 조각으로 만들어놓은 십자모양엔 나무껍질도 남아 있고 옹이 자국도 남아 있었다. 그 간결소박한 십자가가 벼락치듯 나에게 거기 온 까닭을 일깨워주었다.

그래, 나는 주님과 한번 맞붙어보려고 이곳에 이끌렸고, 혼자 돼보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알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 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

애걸해서 안 되면 따지고 덤비고 쥐어뜯고 사생결단을 하리라. 나는 방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몸부림을 쳤다. 방안을 헤매며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마침내 하나의 작은 돌멩이가 되었다. 돌멩이처럼 보잘것없었고, 돌멩이처럼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돌멩이가 말랑말랑해지려고 기를 쓰듯이 한 말씀을 얻어내려고 기를 썼다. 돌멩이가 말랑말랑해질 리 없듯이 이 한 말씀은 새벽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도 들려오지 않았다. 처절한 밤이었다.

 

 

10월 XX일

내리 사흘 밤을 그렇게 보냈다. 그러나 신의 한 말씀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비록 이 세상 소리를 듣는 데는 귀 밝으나, 영적인 소리를 듣는 데는 절벽이나 다름없는 귀머거리였다. 그래도 날이 새면 수녀님들의 일과를 따라 새벽미사부터 낮 저녁 밤 기도시간을 지키고 나머지 시간은 산책도 하고, 방에서 울거나, 깜빡깜빡 낮잠도 자면서 아무의 간섭도 안 받고 자유롭게 지낼 수가 있어서 좋았다.

특히 명상의 길을 따라 걷는 아침산책은 뜬 눈으로 몸부림치고 난 후의 지치고 암울한 정신에 찬물을 끼얹듯이 상쾌한 자극이 되었다. 산책길의 나무와 풀과 공기가 하루하루 조금씩 가을빛을 더해가는 것도 바다빛깔의 변덕보다는 위안이 되었다. 녹슨 빛깔로 물들어가는 갈잎나무들 사이에서 옻나무는 어떤 꽃도 흉내 못 낼 선연한 붉은빛을 자랑하는가 하면, 서울 같으면 겨울엔 실내에서나 자랄 팔손이나무가 야성인 채로 크게 자라 양산만한 이파리를 청정하게 너울대는 그늘에서 마타리꽃이 샛노랗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공기는 또 어찌나 청량한지 체내에 침체했던 피돌기가 화들짝 깨어나는 걸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밝아오는 아침햇살. 이 모든 것들은 너무도 생생하여 절망과 비통에 몰입했던 나에게는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그렇다고 어젯밤의 내 골에 실감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른 정신이 육체와 경험을 벗어나 붕 뜨는 느낌이었다.

산책길엔 다리도 있었다. 그러나 다리 밑 계곡엔 물이 흐르고 있지 않았다. 깊지 않은 계곡이지만 여름엔 필시 물이 흘렀으려니 싶은 질펀한 곳에 지금은 보라빛 잦다란 꽃이 쫙 깔려 있었다. 종같이 생긴 잔 꽃이 모여 원추형의 꽃 한 송이를 이루고 있는 그 꽃의 이름을 알 수는 없었지만 서울의 꽃집에선 돈 받고 파는 매우 우아하고 세련된 꽃이었다. 무리지어 지천으로 깔려 있는 걸 보면 혼자 보기 아까워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계곡으로 내려가긴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 꽃을 따서 두 개의 꽃다발을 만들었다. 다리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수녀님 묘지가 나왔다. 꽃다발 하나는 젊어서 죽은 수녀님 묘 앞에 바치고 나머지 한 개는 언덕방 책상 위 내 아들의 사진틀 앞에 바칠 거였다. 성수도 젊은 죽음한테만 뿌리고 기도도 거기다만 바쳤다. 젊은 죽음에 대한 이런 편애야말로 내 산책길의 하이라이트였다.

나는 그 산책길을 ‘시인의 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명사의 길’이라는 원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 같은 건 명상하고 싶지 않았다. 내 고난도 벅찼다. 행복에 겨운 자들이나 실컷 명상을 하든지 감동을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의 길이라고 생각한 건 이해인 수녀 때문이었다. 지금 그 수녀님은 여기 없지만 여기가 본원이니 이 길을 무수히 산책했으리라. 신과 자연을 그지없이 원만하고 행복스럽게 일치시킨 수녀님의 시세계과 이곳의 자연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생각하며 나는 그 길에 깊은 친화감을 느꼈다.

산책길을 돌아 내려오다 보면 수녀님들의 빨래터가 보였다. 수녀원 건물에 가려진 뒷마당이어서 방문객들에겐 잘 안 보이는 곳이지만 꽤 넓었다. 검소하나 정결한 옷차림을 유지하려면 빨래도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다. 평행선으로 맨 빨래걸이엔 늘 많은 빨래가 널려 있었고 앳된 수녀님들이 빨래를 하고 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빨래터뿐 아니라 밭에서 일하는 수녀님, 이른 아침에 병원이나 유치원, 학교 등으로 출근하는 수녀님, 수녀원 내에 있는 유치원,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는 ‘어버이의 집’ 에서 일하는 수녀님 등 모두 수녀님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용노동자처럼 한시 반시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용노동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이상하리만치 꾸밈없는 명랑함이었다. 세상에, 참 이상도 하지. 나는 여기 들어온 후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소리를 속으로 뇌까렸는지 모른다. 한창 예쁜 옷과 재미난 일을 탐하고 이성에 이끌리고 행복한 가정을 꿈꿀 나이였다. 좀 특별한 능력이나 야망이 있다고 해도 이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 안에서 노력을 하든지 팔짝팔짝 뛰는 걸 정상으로 보는 게 내 상식의 한계였다.

어제는 어린이들이 귀가한 후 텅 빈 교실을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다가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는 게 ‘어버이의 집’ 안을 엿보게 되었다. 깨끗하고 정정해 보이는 노인들이 서너 명 모여 앉아 부침질로 간식을 들고 있는 방도 있었고, 미닫이문이 닫힌 방도 있었고, 반쯤 열린 문으로 자리보존하고 누워 있는 노인이 보이는 방도 있었다.

부엌에선 수녀님 둘이서 부침질을 하고 있는데 닫힌 방이 열리면서 복스럽게 생긴 젊은 수녀님이 변기를 들고 나왔다. 방금 받아낸 것 같은 질펀한 다량의 똥오줌이었다. 세상에, 이상도 하지.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얼굴로 남의 똥을 칠 수 있을까. 꼭 꽃병이라도 들고 나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버림받은 노인으로 하여금 이 집에서 한 송이 꽃을 피우듯이 똥을 쌀 수 있는 황홀한 말년을 누리도록 저 수녀님은 여기 있는가?

나는 괜히 무안해서 얼른 그 자리를 피했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곳에 있을 줄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조차 알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왜? 누가 부른 것처럼 여기 이끌렸기 때문이고 나에게 여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으로 부르심의 힘에 대해서 생각했다. 여기 수녀님들도 부르심에 순종하여 여기 모여 사는 게 아닐까 하고, 왜 부르셨을까. 세상만물 중 하나도 필요하지 않은 건 만드시지 않은 분이 아닌가. 이런 고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런 곳을 만드실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런 곳이 필요한데 있어서, 나와 지금 방안에서 똥을 싸질르는 노인과 무엇이 다른다.

여기 이렇게 의탁해 있으면서도 여기가 전혀 딴 세상처럼 보이는 것은 여기에는 내가 여지껏 생각해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사랑의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핏줄로 연결된 부모형제나 친족간의 사랑, 본능적이면서도 신비한 이성간의 사랑, 오랜 상호이해와 노력 끝에 도달한 우정 외의 인간끼리는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도와야 한다는 박애정신을 믿지 않았다. 그건 인류의 이상일 뿐 실행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실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아니꼬운 위선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 세상엔 가족애로부터 버림받고 친구로부터 소외된 사람도 수없이 많은 걸 어찌하랴. 박애에 의탁할 수박에 없는 사람이 있음으로 가족을 떠나 보다 넓은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을 따로 부르실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나는 느릿느릿 그리고 골고루 수녀원의 이곳저곳을 싸질러 다니면서 보이지 않는 분의 부르심이랄까 안배 按排의 신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산책의 마지막 쉼터는 유치원 마당이 된다. 마당에는 아이들 놀이기구들이 많다. 내 엉덩이에는 빠듯한 그네도 타고 말도 타면서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라본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놀기도 하고 교실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손자 생각이 난다. 이미 태어난 손자는 물론 태어나지 않은 손자까지. 놀이기구 중 미끄럼틀이 제일 재미있게 생겼다. 코끼리처럼 생겼는데 꼬리부분으로 올라가서 코로 내려오게 돼 있다. 코를 땅에 대고 있는 코끼리는 실물 크기에 가깝다. 다 타봤지만 그것만은 안 타봤다. 그 앞에서 손자들 하고 사진을 찍으면 재미있는 사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작은 일이지만 미래를 설계한 자신에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는 살고 싶은가? 불안했다. 방으로 돌아와 산에서 만든 꽃다발을 물컵에 꽂아 아들의 사진 앞에 바쳤다. 접을 수 있는 사진틀이어서 사진이 두 장 꽂혀 있는데 둘 다 강가에서 찍은 사진이다. 하나는 강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하나는 강을 굽어보고 있어서 뒷모습에 가깝다. 아들의 사진 중 그닥 잘된 사진은 아니나 나는 그 사진들이 좋다. 흐르는 강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들의 생각과 내 생각과 닿은 느낌 때문이다.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그 애가 없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10월 X일

어젯밤엔 여기 온 후 처음으로 깜박 잠을 잘 수 있었다. 깜박 잤다고 하지만 새벽미사를 알리는 종소리에 깨어났으니 몇 시간은 잔 셈이었다. 그 동안 아들을 꿈에서 보았다. 생각하는 대로 꿈을 꿀 수 있는 거라며 매일 아들 꿈을 꾸련만 그 애를 꿈에라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애를 왜 데려갔는지 한 말씀만 하시라고 처절하게 기도하고 몸부림친 끝에 꾼 꿈이었다. 무너가 내 인식의 한계를 초월한 신의 계시 같은 게 있어 마땅했다.

꿈에 나는 둘째 딸과 함께 서울역으로 친정 숙모를 배웅하갔다. 이 년 전에 돌아가신 숙모였다 숙모는 아주 무겁고 큰 네모난 짐과 올망졸암한 작은 보따리들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까지 그것들을 어떻게 가져왔는지 분명치 않았지만 숙모가 그 중 큰 짐을 머리에 여달라고 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들 수가 없었다. 뭐가 들었는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딸에게 입장권을 사오라고 시켰다. 여럿이 같이 들어다 드려야 할 것 같았다. 역구내는 아무도 없이 괴괴했다.

입장권을 사러 어디론지 사라진 딸이 돌아오기도 전에 숙모는 기차시간이 다 됐다고 조바심을 치더니 별안간 그 무거운 짐을 혼자 힘으로 거뜬히 이고 개찰구를 휭하니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고 뒤에서 부르면서 숙모 뒤를 따라 달음질을 쳤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들이 내 치마꼬리를 선뜻한 느낌으로 스치면서 앞지르는 게 아닌가. 여나문 살 적의 아들이었다. 볼이 붉은 동안에 그때 내가 떠준 곤색 쉐타를 입고 있었다.

아들은 쏜살같이 앞의 숙모까지 앞질러 층층다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이미 숙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쟤가, 저 녀석이 무슨 짓이야. 나는 애타게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허위적거렸다. 아들은 명랑하고 장난스러운 얼굴로 흘금흘금 뒤를 돌아다볼 뿐 달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층층다리 밑에는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냉큼 기차를 타는 게 보였다. 아니 저 녀석이, 나는 아들의 장난끼에 화가 나고, 뭐라고 말할 수 없이 불안해서 목메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허둥지둥 뛰었다. 그러나 숙모도 앞지르지 못하고 숙모가 먼저 기차꽁무니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드디어 나도 기차 옆까지 갔으나 올라타지는 않고 밖에서 아들을 불러내리려고만 했다. 기차는 칸마다 안에서 환하게 불을 켜고 있어서 타고 있는 사람들이 밝게 비쳐 보였다. 아들은 나를 놀리는 것처럼 기차칸에서도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연방 나에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내면서 앞칸으로 앞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어서 내리라고 손짓을 하면서 그 애를 따라 그 애와 평행선으로 앞으로 앞으로 달렸다 만약 그 애가 내리기 전에 기차가 움직이면 그때 얼른 올라타도 늦지 않다는 속셈이었다.

아무튼 그 애를 거기서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꿈 속에서도 매우 절박했다. 그러나 웬걸,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게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로케트처럼 사라져버렸다. 허망하고 기가 막혔다. 기차가 빠져나가고 난 후의 플랫호옴은 원통형의 기나긴 동굴처럼 어둑시근하고 나 홀로였다.

그 애가 걱정이 되고, 진작 기차에 올라타지 못한 게 미칠 듯 후회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적막과 고독감이 뼈에 스몄다. 자아, 이제부터 어떡한다지? 그 애를 붙잡기 위해선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다음 기차를 타고 가면 그 애를 만날 수 있을까? 회의와 불안이 엇갈렸지만, 그 수밖에 없는데 다음 기차를 안 기다리고 어쩔 거나. 그러다가 다음 기차가 오기도 전에 깨어나고 만 것이다.

그 애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은 내가 죽은 후에 기대할 수밖에 없고, 죽으면 정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게 내가 줄창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문제였다. 사후에 만난다는 것만 확실하게 믿을 수 있어도 그 애 없는 나날을 견디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그러나 꿈속의 플랫호옴에 회의와 불안에 떨며 서 있는 내 모습은 현실의 나 자신 그대로일 뿐 거기엔 아무런 신의 계시도 들어 있지 않았다. 며칠 밤 한잠도 안 자고 신에게 사생결단 대들기도 하고 애걸복걸 사정도 해서 얻어낸 꿈이 고작 내 이성의 인식의 한계를 못 벗어난 데 대해 나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역시 당신은 안 계셨군요. 그를 부정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앙갚음의 한 방법이었다.

낮엔 마리로사 수녀님이 방까지 찾아와서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가까운 광안동 바닷가는 가을 해수욕장답게 한산하고 쓸쓸했다. 수녀님하고 나란히 앉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복받쳤다. 위로받고 싶었다. 요한 이십삼세 얘기를 들려줄 때처럼 명랑하고 자신있는  목소리로 그가 체험한 하느님 얘기를 해주길 바랐다. 수녀님을 통한 간접체험이라도 좋으니 신으로부터 계시받은 영적체험이 목말랐다.

내 집요한 물음에 수녀님은 조심스럽게 그가 살아오면서 부딪힌 개인적 혹은 가족적 어려움의 고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넘겼는가를 얘기해주었지만 흡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건 신의 개입 없이 인간의 능력만으로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일로밖에 안 보였다. 수녀님도 힘든 고비마다 하느님을 찾고 매달렸다고만 했지 어떤 계시나 신령한 도움을 얻어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긴 수녀님이 겪었다는 어려움이 죽음의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죽음의 문제야말로 신이 개입하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건만 나는 그 문제에 얼마나 아둔한가. 신을 느끼고 깨닫는 능력에도 지능지수라는 게 있다면 나는 저능도 못 되는 백치수준이었다. 그러 주제에 어떻게 그걸 답답해 할 줄은 아는지.

나는 울며불며 내 미칠 듯한 고통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내 방에서 혼자 뒹굴며 신에게 퍼붓던 포악과 별로 다르지 않은 푸념이었다. 나는 열심히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왔다. 아이들을 건강하고 바르게 잘 길렀고 깊이 사랑했다. 남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고 마음의 상처가 될 것도 안 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벌을 받을 까닭이 없다. 고약하고 못된 사람도 자식을 앞세우는 벌은 좀처럼 안 받던데 이게 무슨 처사냐? 억울하고 원통하다. 요약하면 그런 얘기였다.

나는 마치 귀중품을 훔쳐간 소매치기를 고발하듯이 열렬하게 악다구니를 치며 수녀님에게 하느님을 고발하고 있었다. 부당하게 빼앗긴 건 깜쪽같이 돌려받는 것 외에 달리 위로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을까마는 수녀님은 참을성 있게 내가 제풀에 지쳐서 그 집요한 행복의 반추를 그만둘 때까지 다 들어주고 나서 말했다. 세상만물 중 단 한 가지라도 불완전하게 만든 것이 없는 창조주가 어떻게 당신을 닮게 존엄하게 만든 인간의 문제를 불완전하게 내버려두겠는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복잡한 삶의 방정식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은 방정식은 불완전한 거고 반드시 해답이 있을 것이다.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라도 내세는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수녀님의 대답의 요지였다.

내가 극도로 감정적일 때 될 수 있는 대로 이성적인 방법으로 신을 제시해보려는 게 역시 수녀님다웠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분을 믿기 위해서 한번 크게 건너뛰는 일은 내 소관이지 누가 도와줘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저녁식사는 뜻밖에도 여러 젊은이들과 함께 들 수가 있었다.  수녀님을 만나러 온 여성들인데 언덕방에서 묵어갈 작정이라고 했다. 혼자 자던 그 휑한 건물 안에 왁자지껄 인기척이 날 생각을 하니 기뻤고 식탁에 웃음꽃이 만발하니 또한 즐거웠다. 어른에게 예의바를 뿐 아니라 저희들끼리 하는 대화엔 유머가 넘치면서도 경박하지 않고 깊은 심지를 느끼게 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 중 서울서 온 한 여학생은 알고 보니 나하고 같은 신천동 본당 교우였다. 반갑고도 세상은 참 좁단 생각이 들었다.

 

 

10월 X일

가을이 깊다. 밤이 어찌나 길어졌는지 새벽 미사를 드리러 성당으로 올라가는 언덕 길도 사람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다. 신체의 장애가 있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고리의 집 식구들은 이제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낯이 익다. 아니, 낯은 정확하지 않다. 정상인과 조금씩 다른 신체적 특징 때문이다.

허리가 직각으로 휜 노인 한 분은 지팡이에 의지해 참으로 어렵게 언덕길을 오른다. 앞질러 가기도 미안하고, 보조를 맞추자니 답답하고, 부축을 하자니 그의 몸과 지팡이와의 균형 사이엔 도무지 남의 도움이 파고들 만한 허점이 느껴지지 않아 그것도 단념한다. 인사만 하고 앞지르면서 저렇게 힘들게 곡 미사참례를 해야 되는 것일까? 딱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성당에서 그 노인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내 생각을 고쳐먹는다. 순하고 고운 표정 때문이다. 매일 아침 주님을 만나는 일이, 매일 아침 거울을 보는 것처럼 자신을 저렇게 곱게 가꿀 수 있는 거라면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잡념에 빠져 있다가 포근하고 따사로운 느낌 때문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딸들 사위들이 주른히 내 옆에 앉아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둘째 내외가 어젯밤에 내려와 맏이네 서 자고 새벽에 미사참례도 하고 에미도 만나러 온 것이었다. 피정의 집에 단체로 피정 온 이들이 묵고 있어 외부사람이 뒷좌석을 가득 메운 미사여서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내 식구란 왜 이렇게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아리는 것일까.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는 수녀님들의 목소리는 귓전이나 감정에 남는 찌꺼기가 전혀 없이 다만 투명하다. 영혼을 울리는 영혼의 소리라고나 할가.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고 있으면 내 안에 감정과 이성을 포함한 마음이라는 것과는 따로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미묘하게 떨고 있음을 느낀다. 성가가 현 絃 이고 영혼이 악기인 양.

미사 후엔 수녀님들이 우리 식구들이 다 먹을 수 있게 식탁을 차려주어 같이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있는 방도 보여주고 산책로도 안내했다. 이곳이 나에게 얼마나 좋은 곳이고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그 애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점심은 맏이네서 먹자고 해서 나도 그 애들과 함께 외출을 했다. 큰딸네를 떠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견딜 수 없을 때마다 나가 앉아 수영만의 바다빛깔을 헤아리던 베란다 쪽을 왠지 바라보기가 싫었다. 견딜 수 없는 느낌이 도질 것 같았다. 그럼 지금은 견딜 만한가? 적어도 내 몸이 곧 주어져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지는 않게 되었다. 따라 죽을 수 있으리라는 것도 교만이요, 환상이라는 걸 받아들일 차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은 살 궁리인가? 역겹고 비참하지만 자신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그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걸 어쩌랴.

저녁을 먹고 나서 손자들까지 온 식구가 해운대로 나갔다.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손자들한테는 샤베트를 먹이고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요상하게 생기고 비싼 케익도 먹고 싶다고 해서 막 사주었다. 서울서 온 아이들한테 사우나를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예매한 기차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했다. 오래간만에, 실로 오래간만에 내 지갑을 열고 그런 짓을 하면서도 나는 내 생활습관이 정상으로 돌아갈 조짐 같은 걸 느꼈다. 나는 어려서부터 검약이 몸에 뱄기 때문에 오히려 가끔 가다가는 주책스러운 낭비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버릇이 있었다.

둘째 내외하고는 해운대에서 바로 작별을 하고, 큰딸네 식구들은 수녀원까지 따라왔다. 나를 배웅한다는 게 그렇게 됐는데 손자들이 놀이터에 재미를 붙여 가려고 하지를 않았다. 코끼리 미끄럼틀을 배경으로 손자들하고 사진도 찍었다. 거기서 아이들하고 자신을 찍으면 재미있을 거라고 문득 생각한 게 바로 엊그제였다. 아아, 작은 꿈의 이루어지기 쉬움이여.

오늘 저녁식탁도 푸짐하고 왁자지껄했다. 언덕방에 유하고 있는 아가씨들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고 했다. 그들의 왕성한 식욕은 내 위장까지 자극하는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아가씨들은 날더러 식사를 그렇게 조금하고 어떻게 사느냐고 했지만 나는 내심 요 이삼일 사이에 늘어난 내 먹는 양에 놀라고 있었다. 매끼 된 밥을 먹고도 토하거나 부대끼지 않았다. 그 무서운 변비의 고통을 안 겪은 지도 한참 된다.

아가씨들 중 서울서 온 루시아는 한 성당 교우라 그런지 특히 하는 짓마다 곱게 보인다. 아직 고등학생이니 나이도 제일 어리고 얼굴도 제일 수수하게 생겼는데도,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인기가 있다. 오늘 저녁도 루시아 때문에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웃고 떠들었다. 내가 억지로 꾸미지 않고 저절로 웃을 수 있다는 게 계면쩍고도 신기했다. 남이 옮기면 별로 우습지도 않은 소리를 그 애는 시침 닥 떼고 그렇게 우습게 한다. 그렇지만 개그맨적인 소질하고는 다른 훨씬 세련되고 품위 있는 유머 감각이다. 말끝에 자연스럽게 내비치는 부모님에 대한 깊은 경애와 올림픽 등 시국과 현실을 보는 예리하고 신중한 시각이 그녀가 점잖은 가정교육을 받았음을 은연중 느끼게 해준다.

저녁 후에도 혼자 내 방에 틀어박히지 않고 그 아가씨들과 어울렸다. 아가씨들은 내일 떠난다고 했다. 아가씨들과 친구인 예비수녀님들 몇 명이서 잠시 짬을 내서 주전부리거리를 마련해가지고 언덕방으로 와서 큰 방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며 회포를 풀었다. 나는 여기 와서 텔레비전을 처음 본다. 그 동안에도 바깥세상은 올림픽의 열광으로 날이 새고 지는 듯 들뜬 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소리뿐이어서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중 어린 수녀님이 속세의 친구에게 하는 소리가 문득 내 관심을 끌었다.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 얘기였다. 남동생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왜 하필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 비관도 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엔 속 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래서는 안 되란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뭐관대…’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이 되더라고 했다.

‘왜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와 ‘왜 내 동생이라고 저러면 안 되나?’는 간발의 차이 같지만 실은 사고 思考의 대 전환이 아닌가? 나는 신선한 놀라움으로 그 예비수녀님을 다시 바라보았다. 내 막내딸보다도 앳돼 보이는 수녀님이었다. 저 나이에 어쩌면 그런 유연한 사고를 할 수가 있었을까? 내가 만약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 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한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 먹을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구원의 실마리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다.

어려서 무서운 꿈을 꾸다가 흐느끼며 깨어난 적이 있었다. 꿈이었다는 걸 알고 안심하고 다시 잠들려면 옆에서 어머니가 부드러운 소리로 말씀하셨다.

“얘야 돌아눕거라, 그래야 다시 못된 꿈을 안 꾼단다.” 돌아누움, 뒤집어 생각하기, 사고의 전환, 바고 그거였어. 앞으로 노력하고 힘써야 할 지표가 생긴 기분이었다. 나는 내 속에 생긴 희미한 희망 같은 것을 보듬어 안고 그들이 헤어지기 전에 먼저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막상 혼자가 되고 나니 그게 아니었다. 바로 거기서 거기  같던 사고의 차이가 나로서는 절벽 끝에서 다른 절벽 끝을 향해 심연을 건너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10월 X일

루시아가 오늘 떠난다면서 나에게 예쁜 그림엽서를 주었다. 따뜻한 사연과 함께. 나에게뿐 아니라 그 동안 여기서 사귄 모두와 친해지고 신세 진 수녀님들에게 드릴 그런 자다란 걸 미리 준비한 루시아에게 새삼 자신이 부끄럽다. 명색이 어른이 그에게 줄 아무것도 없을 뿐 아니라, 이곳을 떠나는 날 역시 나눌 거라곤 통곡보따리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루시아와 또 한 아가씨가 먼저 떠나자 수녀원이 텅 빈 것 같다. 그 동안 젊고 건강한 아가씨들의 왕성한 식욕과 발랄한 재기 때문에 밥도 많이 먹고, 한번도 식탁에서 눈물로 목이 메인 적도 없었는데. 인간을 피해 수녀원까지 들어왔건만 이 안에서조차 나는 보이지 않는 분으로부터 위로받지 못한다. 그저 인간으로부터의 위로가 제일이다.

남은 아가씨들 중 대전에서 왔다는 이는 오후에 떠난다면서 그 동안 나더러 같이 다락방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여기선 그 아가씨보다 내가 고참이건만 나는 거기가 뭐하는덴지 또 어디가 붙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다락방이라니까 열두 제자들이 모여 있는데 성령이 혀의 모양으로 내려왔다는 다락방 생각이 나서 어쩌면 신비한 방범으로 영적인 위로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가자고 말한 아가씨의 표정 또한 나에 대해 다 알고 있으며 바로 그런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어른스러운 연민에 차 있었다

나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성체를 모신 방이었다. 간소한 방에 두 분의 수녀님이 지키고 있었고, 기도인지 명상인지 마치고 나가는 수녀님도 있었다. 같이 간 이의 눈치를 봐가며 그가 하는 대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통곡이 치받쳤다. 며칠 동안 주리 참듯 참던 울음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짐승같은 울음소리를 참으려니 온몸이 격렬하게 요동을 쳤다. 엄숙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에 차마 소리내어 울 수가 없었고 그게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중엔 명치의 근육이 땡기면서 찢어질 것 같았다. 무너가 안에서 엄청난 힘을 파열할 것 같아서 먼저 다락방을 뛰쳐나왔다. 내 방도 대낮에 엉엉 울만한 곳은 아니어서 허둥지둥 산으로 올라갔다. 평소의 산책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둥치에 몸을 내던지면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추하고 외롭고 서러운 짐승이 된 느낌이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나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응석이라 해도 좋았다. 아무리 미량이라 해도 그 감미로움에는 고통을 견딜만하게 해주는  진통제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오직 참척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끔찍한 극형에 당해서는 그 영문을 물을 권리가 있다. 신의 권위가 장난질칠 권리가 아닌 바에야 의당 그 극형이 무슨 잘못에서 연유했는지 밝혀줘야 한다. 신,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음흉한 힘이다. 영원히 순화될 것 같지 않은 원색적인 포악이 거침없이 치밀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신의 문제는 나는 무엇일까 하는 나의 내면 응시로 귀착되고 만다. 실컷 울고나서 한결 개운해진 정신으로 법구경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어리석은 이는 한평생을 두고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길지라도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숟가락이 국맛을 모르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이라도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기면 곧 진리를 깨닫는다

혀가 국맛을 알듯이.”

신을 느끼는 감수성에 있어서 나는 철두철미 숟가락일 뿐이다.

대전서 온 아가씨까지 떠나보내고나서도 나는 방으로 돌아오지 않고 산책길을 몇 바퀴 더 돌았다. 미사보를 쓰고 기도서를 들고 경건한 기도를 바치며 명상의 길을 도는 사십대 초반의 점잖은 부인과 그의 딸인 듯싶은 여고생과도 몇 번씩 엇갈렸다. 저 부인은 참척의 고통이 뭔지 모르리라. 그러니까 저렇게 평화롭고 거룩한 얼굴로 성호를 그으면서 기도를 할 수가 잇지 나 같으면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서른다섯도 안 된 청청한 나이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은 예수를 명상한단 말인가. 나는 아들의 죽음이 뭔지를 모를 것 같은 평범한 부인에게 공연한 심술이 나면서 마음이 한없이 꼬였다.

모다 떠나버려 오늘 밤엔 그 넓은 언덕방 건물 안에 다시 혼자 있게 될 줄 알았는데 저녁식탁엔 또 새로운 손님이 와 있었다. 나보다 몇 살 아래로 보이는 부인은 여간 침울해 보이지 않았다. 수녀가 되기 위해 여기 들어와 있는 따님을 면회왔다는 것 밖에는 더는 물어보거나 알아내지 못했다. 근심이 가득찬 말투와 표정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저녁식사는 자연히 젊은 아가씨들이 있을 때와는 딴판의 가라앉은 분위기가 되었다.

만약 내 딸 중에 하나라도 수녀가 되겠다고 했다면 내 마음이 어떠했을까. 한번도 상상을 해본 적이 없는 일이고, 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굉장한 충격이 되었으리라. 사생결단 말렸을 게 번하다. 여기 와서 비로소 인정하게 된 안배의 신비함과 부르심의 힘에 맞서 미련하게 싸웠을 자신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수녀님들의 생활과 하는 일을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해서 내 딸에게 시키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 동안 딸들에게 대해서는 너무 생각을 안 했다. 딸을 아들만 못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근심을 안 시켰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닐까. 자식 낳은 기쁜 뒤에 치러야 하는 어머니들의 몸고생, 마음고생의 다양함과 끝간 데 없음을 새삼스럽게 엿본 느낌이었다.

그 부인은 바로 내 옆방에 묵었다. 남편까지 왔는지 남자 소리도 나고 밤새도록 두런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기도소리 같기도 하고 흐느낌 같기도 한 소리도 들렸다. 옆방에서 잠들지 못하는 모정 때문에 나도 덩달아 잠을 설치며 그럭저럭 날이 샌 듯했다. 그러나 아직도 새벽미사까지는 먼 시간에 내 방문을 가만가만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열어보니 옆방 부인이었다.

깨었었기에 망정이지 남을 깨우기에는 무례한 시간이었다. 나는 들어오라고 하지 않고 복도의 불을 켜고 거기 설치된 소파로 나갔다. 부인은 삼남 이녀의 자녀를 두었다고 했다 수녀원에 들어온 딸은 막내인데 혼기를 앞두고 신병을 얻어 애간장을 태우더니 극진한 치료의 보람으로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수녀가 되겠다고 해서 또 한번 부모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한번 잃을 뻔했던 자식이라 기쁘게 하느님께 바칠 생각을 했노라고 했다.

그러나 일 년도 안 돼 다시 신병이 도졌다는 소식을 받고 와보니 암만해도 집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보낼 때 서운하던 것과는 댈 것도 아니게 속이 상해 밤새 지접을 못하다가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말동무라도 하려고 나를 깨웠노라고 했다.

쪼들쪼들 마른 입술과 충혈된 눈으로 그 부인은 나로부터 위안을 얻어내려고 갈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 정도의 자식 걱정으로 그렇게 초췌하고 약하게 구는 부인에게 화가 났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나는 외아들을 잃었답니다. 그래도 이렇게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살아 있습니다.” 내가 듣기에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드라이한 목소리였다. 내 입으로 그 말을 하다니, 차마 어떻게 그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내 입으로 그 말을 하고 그 말을 내 귀로 들었음에 경악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 사실에 승복하고 만 것이 소름 끼쳤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몇 남매나 두셨습니까?’라는 예사로운 대화끝에, 그 말을 해야할 경우에 수도 없이 부딪히리라.

부인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황망히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몇 마디 사과의 말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부인의 얼굴에 생기가 돈 것을 분명히 보았다. 부인도 아마 순식간에 자기의 근심이 가벼워진 것에 놀라고 있겠지. 세상엔 남의 불행이 위안이 되는 고통이 얼마든지 있다. 세상사람들이 예서 제서 자기들의 근심이나 걱정을 위로받으려고 내 불행을 예로 들어가며 쑥덕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남의 고통에 쓸 약으로서의 내 고통, 생각만 해도 끔찍한 치욕이었다.

주여, 어찌하여 나를 이다지도 미천하게 만드시나이까. 나는 마음으로 무릎을 꺾으며 이렇게 탄식했다.

 

 

10월 X일

옆방 부인이 돌아가자 비로소 창밖에서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어둡고 혼란스러워졌다. 아들을 잃은 후 몸부림쳐 애통해 하기도 수없이 했고, 애도와 위로의 말도 수없이 들었지만 피차 묵계에 의한 인정일 뿐, 아무도 그 애가 죽었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스물여섯 살이란 나이는 죽음과 함께 입에 올리기에는 너무도 싱그럽고 빛나는 나이가 아닌가. 아아, 스물여섯 살… 어찌 에미가 그 말을 그렇게 태연히 입에 담을 수가 있을까.

온 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진 않았다.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순간적으로 밝게 빛나던 부인의 얼굴이 집요하게 내 마음에 늘어붙어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마치 사수 死守 해야 할 비밀을 누설한 것처럼 허탈하고 처량했다. 새벽미사를 올리는 동안도 스스로에 대한 이런 참담한 느낌은 가셔지지 않았다. 아침은 커피로 입만 축이고 뒷동산에 올랐다. 묘지까지 오를 기운도 없어서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 애를 잃고도 죽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 앞날이 얼마나 치욕스러우리라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나는 거러지만도 못하게 헐벗은 마음으로 오래도록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애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 후 이렇게까지 수치스럽고 피폐한 심정이 되어보긴 처음인 것 같았다. 이곳을 떠나기로 속으로 정해놓고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수녀가 될 수는 없는 바에야 세속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 최소한의 염치였다.

그러나 지금 같아서는 도무지 그럴 엄두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세상사람들이 다 내 고통을 입초시에 올림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위로받고, 내 불행을 양념 삼아 자신의 행복을 더욱 맛있게 음미하고저 대기하고 있을 것 같은 망상에 망상이 꼬리를 물었다. 나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을 적에도 남의 불행에 접했을 때, 마음 아파하기에 앞서 내 행복을 재확인하며 대견해 하기에 급급하지 않았던가.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세상으로 돌아갈 일은 두려웠고, 나에겐 죽음보다 무서운 고통이 타인에겐 단지 흥미나 위안거리밖에 안 되는 인간관계가 무서워서 떨고 있었다.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지어내셨다는 말씀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그다지도 잔인하고 천박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낮기도 시간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못해 낮기도에 참여했다. 점심은 카레라이스였다. 그리고 옆방 부인과 겸상이었다. 내가 그 부인에게 결정적인 위안거리가 되었다고 여긴 건 착각이었나? 그 부인은 여전히 수심에 싸인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둘이의 식사는 괴로웠다. 부인은 거의 식사를 하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도 사는데 그 정도의 자식걱정으로 저다지도 상심을 하다니.

나는 슬그머니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봐란듯이 카레라이스를 아귀아귀 먹었다. 수녀원에 온 후 그렇게 많이 먹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왜 이럴까? 그 부인의 하소연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에 거짓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말도 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심통이 났고, 내 고통에다 대면 당신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갈보는 마음까지 생겼다. 나는 정말 왜 모양일까? 어쩌자고 고통에 있어서조차 교만하고 싶어하는가? 내가 왜 주님을 느낄 수가 없는지 알 것 같았다. 주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나는 주의 눈밖에 날 밉상만 고루 갖추고 있으니까.

점심에 과식한 게 속에서 보깨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심해졌다. 속이 뒤틀리면서 식은땀이 나고 목구멍에서 카레 냄새가 치밀었다. 소화제를 먹었지만 가라앉지 않았고, 주방에서 더운물을 갖다가 녹차를 만들어 마셔봐도 카레 냄새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진땀에서도 카레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몸을 어떻게 하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 가서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토해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물만 먹고도 잘만 토하던 버릇이 불과 십여 일만에 이렇게 달라져 있었다. 가슴에 완강한 빗장이 잠긴 것처럼 배에서 왈칵 치밀다가도 가슴에서 완강한 빗장이 잠긴 것처럼 배에서 왈칵 치밀다가도 가슴에서 막히고 했다. 가슴까지 빠개지는 것 같았다. 지난 일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진통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언덕방에서 화장실에 가려면 수부를 통과해야 한다. 수부에서 일 보시는 인자한 수녀님이 눈치챌까 봐 전전긍긍했다. 내가 통 식사를 못한다고 수녀님마다 걱정을 해주시는데 과식하고 체해서 쩔쩔매는 꼴을 보여줄 순 없었다. 그 중에도 그런 체면은 차리려 들었다.

마침내 가슴에 걸린 빗장이 부러지는 것처럼 격렬한 통증이 오면서 점심 먹은 걸 고스란히 토해냈다. 복통이 없어지자 내 존재도 소멸한 것 같았다. 완벽한 평화였다. 고통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변기의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짚고 무릎 꿇은 자세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 만이었을까, 한 생각이 떠올랐다. 텅 빈 머리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어서인지 그건 내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기보다는 계시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미사시간에도 기도시간에도 산책하면서도 긴긴 반 잠 못 이루면서도 신에 대한 내 물음은 딱 한가지였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렇게 크게 잘못했기에 이런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포악이요 항의였다. 그러니까 내가 신의 부당함을 하의하고 내가 억울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나는 그닥 죄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죄가 있다면 어디 말해보시지 하는 신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었다. 십자가 밑에서 밤새도록 몸부림치며 구해도 얻어낼 수 없었던 응답이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고 앉았을 때 들려올 게 뭐였을까? 그때 계시처럼 떠오른 나의 죄는 이러했다.

나는 남에게 뭔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돼 있었다. 그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위선으로 사랑한 척한 적조차 없었다. 물론 나을 해친 적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모르고 잘못한 적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의식하고 남에게 악을 행한 적이 없다는 자신감이 내가 신에게도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근거였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나는 그 정답에 머리 숙여 승복했다. 나중에 나의 간지 奸智가 또다시 빠져나갈 구멍을 찾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건 꼼짝달싹 도 할 수 없는 정답이었다. 그리고 구원이었다. 고통도 나눌 가치가 있는 거라면 나누리라.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내게 있는 것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소서. 나의 고통까지도. 당신이 내게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내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나이다.

 

이윽고 기운을 차리고 화장실을 나왔다. 침대에 누우니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난 육신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몸이 아무데도 불편하거나 아프지 않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해야 마땅할 것 같았다. 세상 모든 즐거움에 뜻이 없다고 여겼는데 몸에 아픈 데가 없다는 사실에 거의 행복감에 가까운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감미로운 잠이 엄습했다.

얼마만인지 바람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창 밖에서 나무들의 검은 그림지가 극렬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내가 묵고 있는 언덕방과 수녀님들의 숙소는 네모반듯한 정원을 끼고 디귿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한 쪽이 열린 네모꼴 속을 회오리치는 바람소리가 꼭 사람의 애곡소리 같으면서도 육성보다 훨씬 만감이 서려 있었다. 나는 어린애처럼 경망스럽게 두근대는 가슴을 베개로 누르며 엎드렸다. 무서움증 때문에 정신이 말뚱말뚱해졌다. 마리로사 수녀님이 갖다 준 <사목 司牧>지에서 특집으로 다룬 현대신비사상체험을 통독했다. 잡념이 하나도 안 생기고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재미가 없어서 읽다 만 <십자가의 성 요한>에 대해서도 새로운 지식이랄까, 관점을 얻은 것처럼 느껴졌다.

 

 

10월 X일

좋은 날이다. 며칠 날이 궂은 뒤라 그런지 공기가 닦아놓은 유리처럼 다만 투명하게 반짝거린다. 그러나 투명한 것, 보이지 않는 것의 며칠 사이의 역사는 얼마나 엄청난가. 산의 빛깔이 어제의 빛깔이 아니다. 나무에 따라서는 그 노랑 빨강 주황이 꽃보다 곱건만 그 찬란한 빛깔 사이를 지나는 바람은 소슬하여 마음까지 시리게 한다. 우리 방에서 내다보이는 디귿자 모양의 마당 한가운데 구심점처럼 서 있는 이름 모를 나무도 어제까지도 청청한 줄 알았는데 어찌나 곱게 물들었는지 “어머나!”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이파리 하나하나에 광활하고 처절한 노을 빛을 구현하고 있었다. 그날 밤 저 빛깔을 짜내느라 그리도 슬피 애곡한 것일까? 가슴이 찡하여 역설적으로 “최후의 발악” 이란 별명을 붙여주고 혼자서 쓸쓸하게 웃었다.

새벽미사 후 버릇처럼 산에 오르려고 했지만 기운이 빠져 다리가 후들댔다. 하루 빼먹기로 하고 유치원 마당 그네에서 흔들대며 아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 저만치서 장난치며 걸어오는 아이, 늦지도 않았는데 뛰어오는 아이, 강아지처럼 엉겨 붙은 아이, 외톨이인 아이, 귀여운 것들. 조회시간에 선생님은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열네 개나 따고 종합 4위를 했단 얘기를 또 했다. 아이들 또한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아이들 마음의 우쭐댐이 나한테까지 기분 좋게 밀려온다. 올림픽의 축제 분위기가 그렇게도 싫더니만 그 축제가 아이들에게 남기고 간 긍지를 생각하니 잘한 일이다 싶기도 했다. 앞으로는 그 애들 세상이다. 긍지를 물려받지 못한 세대와 긍지를 물려받은 세대와의 세대차이는 결코 쓸쓸하지만은 않으리라.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간 후 무우밭이 있는 쪽으로 슬슬 걸어가봤더니 수녀님 몇 분이서 앞치마를 두르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엔 원장 수녀님도 계셔서 나는 얼른 되돌아섰다. 나는 앞치마 두르고 일하는 수녀님은 이 안에서의 신분이 낮고, 정장을 한 수녀님은 높으려니 했었다. 어디서건 눈치껏 사람에게 계급을 매기고 싶어 하는 내 천박한 버릇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무우밭의 청정함만큼이나 내 부끄러움도 오랜만의 상투적이 아닌 싱그러운 거이었다.

방에서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을 읽었다. 일다 만 <십자가의 성 요한> 때문에 성인에 대한 이야기라면 읽기도 전에 뜨악하여 경원하는 마음이 앞섰는데 이 성녀의 자서전엔 깊이 빠져들었다.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거나 초인적인 고행으로 자신을 단련하지 않고도 성녀가 된 소화 데레사의 천진난만은 얼마나 유쾌한가. 그러나 고행은 흉내라도 낼 수 있지만, 성녀가 죽는 날까지 잃지 않은 어린애 같은 투명한 직관력과, 무지하지 않은 천진난만은 아무도 함부로 꾸며서 할 수 없는 성녀만의 것이었다. 하느님이 아무리 그를 특별하게 어여삐 여기신다 해도 하느님다움에 힘이 되지는 않으리라고 여겨질 만큼 그 성내의 품성엔 만인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어린애다움과 거룩함의 행복한 조화라고나 할까. 세상의 불공평에 대해 고민하던 소녀적 데레사가 얻어낸 대답은 또 얼마나 귀여운지.

“예수께서는 그 신비를 제게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는 제 눈앞에 자연이란 책을 펴주셨고, 저는 그가 조성하신 모든 꽃이 아름답다는 것과 장미의 화려함이며 백합화의 결백함으로 인해서 작은 오랑캐꽃의 향기나 들국화의 순박한 매력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한 만일 작은 꽃들이 모두 장미가 되려 한다면, 자연은 그 봄 단장을 잃어버리고, 들은 이미 가지가지의 작은 꽃으로 꾸며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얼마나 단순 소박하고 귀여운 발상인가. 그러나 가장 심오하고도 난해하다는 노자 老子 의 세계관과 신기하도록 닮아있지 않은가. 이 자서전에 빨려 든 나는 낮기도시간도 아까워서 가지 말까 했다. 그러나 기도시간을 거르면 점심도 굶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성당에서 기도시간을 마치고 나서, 들어간 문과 반대쪽 문으로 나가면 바로 손님을 위한 식당이고 식당엔 그 시간에 맞춰서 따뜻한 점심이 차려져 있기 마련이었다. 기도는 빼먹고 무슨 염치로 밥을 먹으러 어정어정 식당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아무리 기도시간이 싫어도 그럴 용기는 없었다. 나는 순전히 점심을 얻어먹으려고 성당으로 올라갔다. 기도시간 내내 성무일도 소리는 듣는둥 마는둥 부엌 쪽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밥 냄새와 된장국 냄새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건 어쩌면 환각일 수도 있었다. 점심에 된장국은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된장국보다 더 맛깔스러워 보이는 비빔밥이었다. 나는 짐승 같은 식욕을 느꼈다. 뱃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옆에서 시중드는 수녀님에게 숨기려고 나는 괜히 바튼 기침을 하면서 몸을 흔들었다. 색색아 지 나물에다가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고 듬뿍 비비고 싶었지만 수녀님 눈치가 보였다. 내가 식사를 너무 조금 한다고 늘 근심스러운 얼굴로 지켜봐주던 수녀님 앞에서 그렇게 잘 먹으면 수녀님은 더는 내 걱정을 안 할게 아닌가. 나는 더 오래 수녀님의 근심에 엉석부리고 싶었다. 도 엊그저께의 악몽과 같은 복통도 나의 식욕을 자제토록 했다. 좀 모자라는 듯싶게 밥을 덜어다 비볐다. 기막힌 맛이었다.

집에서는 자식들이 성화를 해대서, 수녀원에서는 수녀님들이 조심스럽게 걱정을 해줘서 할 수 없이 먹는 척 해왔다고 여기고 있었다. 먹고 싶어서 먹은 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먹어준 거였다. 아니꼽게도 선심을 쓰듯이 먹어준 거였다. 먹어준다는 의무감만 없다면 죽 한모금 입에 넣고 싶지 않을 만큼 식용이 없던 것도 사실이었다. 참척을 겪은 에미는 그래 마땅했다. 살고 싶지 않는 게 거짓이 아닌 바에야 육체가 정신의 소망을 따라주는 건 당연했다. 나는 이렇게 내 식욕 없음에 체면과 자존심을 걸고 있었다. 아니 희망까지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먹기 싫으니 차츰 쇠약해지면서 죽어가겠지 하는. 그리하여 나의 식욕 없음은, 미구에 아들 뒤를 고통 없이 따라갈 수 있으리란 희망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남을 위해 먹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먹고 있다는 자의식은 나를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하게 했다 싫은 사람과 마주 앉아 커피만 같이 마셔도 속이 거북하던 내 육신이 아니던가. 이렇게 정신과 밀접하고도 예민하게 맞물려 있는 육신의 이 뜻하지 않은 반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비빔밥을 꿀같이 달게 먹고 내 방으로 도망치듯 돌아온 나는 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는 이제 살고 싶으냐’고.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라고 나는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저녁기도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다시 배가 고팠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하루를 반성하기 위해서도 아닌, 단지 식욕을 채우기 윟 허위허위 성당으로 가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양을 자제했기 때문에 더욱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내려오면서 나는 내 육신과 정신의 분열이 한없이 창피하고 슬퍼서 몸 둘 바를 몰랐다. 할 수 있는 말은 다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후의 나날들

그날 이후 내 배는 영락없이 끼니 때만 되면 고파왔다. 그 이상 얘기한다는 것은 너무도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다. 참척을 겪은 기막힌 애통과 절망은 당연히 에미의 목숨을 단축시킬 줄 알았다. 살고 싶지 않은 게 조금도 거짓이 아닌 이상 육신은 의당 거기 따라주려니 했다. 그러나 내 육신은 내 마음과는 별개의 남처럼 끼니 때마다 먹고 살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내 육신에 대해 하염없는 슬픔과 배신감을 느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식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수녀원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실은 짐승 같은 본능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병들거나 다친 짐승은 누가 가르쳐준 바 없이도 그에게 맞는 약초를 가까운 데서 찾아낸다고 한다. 나 또한 내 속에 잠재된 짐승처럼 질기고 파렴치한 생명력이, 죽고만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염치를 거역하고 살 길을 냄새 맡고 수녀원 쪽으로 강력하게 이끌린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짐승과 인간이 가장 닮은 본능이야말로 신이 준 능력이거늘 내가 무슨 수로 거역하랴.

나는 떠날 준비를 했다. 일기를 정리하고 책들을 분류했다. 가져온 책과 마리로사 수녀님으로부터 빌린 책, 받은 책이 꽤 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 동안 정든 산책길을 천천히 걸었다. 여름 동안은 초록일색이었을 나무들이 일년 중 가장 아름답게, 가장 개성있는 모습으로 단장하고 화려하고도 쓸쓸한 가을 숲을 이루고 있었다. 물 마른 계곡에 무리지어 핀 초롱같이 생긴 꽃의 보랏빛도 여전히 우아했다. 머지않아 찬 서리에 시들고 눈에 덮일 꽃이기에 오히려 자수정보다 고와 보였다. 나는 그 꽃을 꺾지 않았다.

빈손으로 묘지까지 올라가 아늑하고 겸손하게 누운 수녀님들에게 골고루 작별의 성수를 뿌렸다. 오늘만은 유치한 편애를 삼가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어서 죽은 수녀님의 묘하고는 기어코 눈물의 작별을 하고 말았다. 산책길을 벗어나 철조망이 쳐진 데가지 산으로 올라가 보았다. 출입할 수 있는 문이 달려 있어 조금 더 올라가니 수녀원과 광양만이 한 폭의 그림처럼 시야에 안겨오는 지점이 있었다.

내가 매일매일 산책하며 서럽고 헐벗은 마음으로 낱낱이 본 풀포기, 들꽃, 나무들 그리고 지금 한꺼번에 보고 있는 풍경들을 나는 꼼꼼히 내 기억 속에 챙겨 넣었다. 비록 육신의 소멸과 하게 사라질 덧없는 기억이지만 나는 충만감을 느꼈다. 내 육신이 밥을 먹지 않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것처럼 내 마음 또한 좋은 추억의 도움 없이는 최소한의 인간다움도 지킬 자신이 없었기에.  가장 어려울 때 신세 진 이곳에서 얻어 가진 좋은 추억의 힘을 믿을 수 있어서 한결 마음이 가라 앉았다.

 떠나기 전날 밤에는 수련중인 예비수녀님들이 나를 위해 과분한 송별 모임을 베풀어주었다. 아마 마리로사 수녀님이 그런 모임을 꾸몄을 것이다. 젊고 예쁜 예비수녀님들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말도 잘하고 웃기도 잘했다. 세속적인 욕망이 쑥 빠져버리고 청빈과 극기와 봉사에의 열망만이 한창 고조된 젊은 수녀님들의 명랑함은 자연의 명랑함만큼이나 순수하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실로 오래간만에 소리내어 웃기도 하고, 간간이 질금질금 울기도 했다. 앞으로 내 아들이 없는 세상에 나가서 시도해야 할 홀로서기가 한결 덜 두렵게 여겨졌다. 그래, 나에겐 딸들이 넷이나 되지 않나. 그 애들이 내 홀로서기를 힘껏 도와주리라. 나는 그 동안 딸들 생각을 너무 안 했다. 어쩌면 피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외아들을 잃었다는 무서운 사실을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때, 만일 딸들 중 하나를 잃었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치밀려고 했었다. 사람의 수효가 모래알처럼 흔하다고 해도 각자에겐 일회적이고 고유한 목숨을 바꿔치기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가사일지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생각이었다. 설세 제왕을 위해서라도 노예가 그의 생명을 바꿔치기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거늘, 하물며 같은 자식을 놓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하늘 무서운 짓인가. 또한 아들과 딸을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주시는 대로 받아 소중하게 키워왔다는 나의 에미로서의 자부심에도 크게 어긋나는 짓이었다.

나는 무서워서 피하던 생각과 이제 두려움 없이 직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잃은 게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고 해도 애통이 조금이라도 덜하진 않았겠지만 남들이 나를 덜 불쌍하게 여기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 그건 인정하자. 그러나 내가 나를 아들 딸에 의해 더 불쌍해 허거나 덜 불쌍해 하지는 말자. 어디선가 모르게 그런 자신이랄까, 용기 같은 게 생겼다. 수녀님들 덕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수녀생활을 세상일이 잘 안 풀린 여자들의 마지막 도피처쯤으로 여겨왔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여기서 수녀님들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수도생활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이 세상 밑바닥에 깔린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못 가진 이들, 버림받아 외로운 이들과 함께 있으려는 크나큰 용기라는 걸 확연히 알 수가 있었다. 이곳 수녀님들은 내가 보기엔 더할 나위 없는 청빈과 근면과 봉사의 생활을 하면서도 여기 생활이 안일한 게 아닌가 늘 반성하는 것 같았다.

“우린 이 안에서 너무 호강이에요.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면서 온갖 밑바닥 인생에 직접 뛰어들어 가난과 병고와 소외의 고통을 함께하는 수녀님들 얘기를 들려주는 수녀님도 여러 분 만났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수도생활을 택한다는 것은 용기 이상의 그 무엇, 하느님의 부르심이나 안배에 의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진실한 수도자라면 용기 있어 보일 뿐 아니라 거룩해 보이기까지 할 까닭이 없었다.

나는 인간의 다양한 고통에 대해 신부님보다 훨씬 민감한 수녀님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친화감을 느꼈다. 사람에게 층수를 매기고 싶어 하는 속된 눈으로 볼 때, 수녀님보다는 신부님이 더 높고 그럴듯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함부로 대들고 포악을 부리긴 했지만 실은 깊이 좋아하는 나의 하느님은 좀 다를 것 같다. 그분은 분명히, 황홀한 제의에 싸여 우아한 손으로 만인 위에서 만인을 축복하는 교황님보다는 기운 옷을 입고 험한 손으로 병든 이가 혼자 죽어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데레사 수녀를 더 어여삐 여기시어 높은 자리로 영접할 것 같다.

송별연에 나와준 수녀님들 중에는 조 데레사 수녀도 기어 있었다. 그는 착해 보인다는 것 말고는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수녀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특별한 수녀였다. ‘하필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하는 원망으로 똘똘 뭉친 내 마음에 ‘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 되는가? 라는 당돌한 반문을 불러일으킨 수녀였다. 그는 알까. 그가 무심히 던진 한마디가 내 딱딱한 마음에 일으킨 최초의 균열에 대해.

아마 모를 것이다. 나는 거이 모인 젊고 씩씩하고 명랑한 예비수녀들이 모다 훌륭한 수녀가 되고저 하는 뜻을 이루고, 또한 본인은 의식하지 않고 한 언동도 타인에게 이르러 반드시 선 善을 이루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춤과 노래를 밤 늦도록 즐겼다.

 

수녀원을 나와 딸네 집에서 며칠 더 유하고 나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나는 다시 홀로서기에 자신이 없어졌다. 하루 세끼 밥을 찾아먹고 그 밥을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 몸이 회복됐다고 해서 살아갈 능력이나 의욕까지 회복된 건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내 아들이 없어진 동네에서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풍경과 길과 상가와 동네 사람들을 대하며 살아갈 일이 무서워서 가슴이 떨렸다. 내가 도처에서 한시도 잊지 못할 내 아들 없는 빈자리를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느끼지 않고 태연하게 히히덕대며 살아갈 게 아닌가. 그걸 참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순 어거지 같은 생각이었다.

서울에 있는 둘째 셋째도 내가 집으로 들어가는 걸 반대했고 나는 다시 울보가 되어 둘째네 집에 아예 자리 보존하고 누워 울 구실만 찾았다. 눈물이 마르면 아들의 사진을 벽에다 주룬히 기대놓고 보면서 새로운 눈물을 짜냈다. 그러다가 이 세상에 그 애가 없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으면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둘째네는 우리 동네하고는 두 블럭쯤 떨어진 거리여서 창으로 우리 아파트와 거기까지 뻗은 곧은 길이 빤히 바라보였다. 우리 아들이 무수히 다니던 길이었다. 그 애는 둘째 매형을 특히 좋아해서 저녁 시간이 조금만 나도 매형네 집에 가서 맥주 한 잔 하고 오겠다며 나가곤 했었다. 그럼 나는 ‘네 나이가 몇인데 연애 하나 못하고 매형 꽁무니나 따라다니냐?” 하고 핀잔을 주었었다. 그 애가 툭하면 파란 프레스토를 몰고 달려오던 길엔 그때나 이때나 차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나는 유리창을 열고 두억시니 같은 머리칼을 찬 바람에 내맡기고 파른 프레스토를 기다렸다. 내 아들은 죽지 않았어. 나는 악몽을 꾼 것뿐이야. 뼛속까지 시린 찬 바람이 나에게 미친년 같은 확신을 주었다. 드디어 파란 프레스토가 나타나면 가슴이 터질듯이 부풀고, 그 차가 얼토당토 않은 옆얼굴을 잠깐 보이고 쏜살같이 사라져버려도 실망하지 않고 더욱 고조된 기대로 다음 차를 기다리곤 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ㅕㄴ 환각으로라도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리의 기운과 줄기찬 희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이러다가 내가 미치고 말지 싶은 참담한 현실감이 돌아오곤 했다. 식구들이나 나나 피차 못할 노릇이었다 서울 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와주는 친구나 친척을 대하는 일은 더욱 못할 노릇이었다. 사람 만나는 게 극도로 싫었다. 아는 사람뿐 아니라 길에 지나다니는 모르는 사람까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자연 외출도 두려워하게 되었다. 달이나 사위가 자기네 친구가 찾아오는 것까지 내 눈치를 보며 쉬쉬 하기에 이르러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남의 처지나 고통을 헤아리는 마음이 마비돼 있었다.

그 무렵 여행사에서 미국 비자를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미국 가 있는 막내를 보러가려고 아들을 잃기 전에 신청해놓고 면접도 끝낸 비자였다. 그 동안 나하고 연락이 끊겨서 여행사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어찌어찌 연줄이 닿아 연락이 온 거였다. 나 역시 까맣게 잊고 있던 거였지만 문득 새로운 희망 같은 게 생겼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의 나날로부터 빠져나갈 구멍이 홀연히 트인 것 처럼 느껴졌다. 그래, 아는 얼굴 만나는 게 그렇게도 싫으면 아는 얼굴이 없는 고장으로 가버리면 그만 아닌가. 내 설움, 내 고통 외의 일들은 다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여겨졌다.

떠날 날을 정해놓자 딸이 본당신부님한테 인사나 여쭙고 떠나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아들의 장례 때 그 어른의 도움을 많이 받았노라고 했다. 사제관 응접실에서 신부님을 뵙고 긴 위로의 말씀을 들었으나 자식도 낳아보지 않은 분이 내 마음을 어찌 알까 싶어 그저 괴로운 마음으로 경청했다. 그러다가 탁자 위에 놓인 백자 필통이 눈에 띄었다. 거기 쓰인 “밥이 되어라”라는 글귀 때문이었다. 신부님이 손수 쓰신 건지, 아니면 어떤 주교님이나 추기경님이 쓰신 건지 그건 분명치 않았다.

누가 썼건 실상 그건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밥이 되어라, 밥이 되어라’를 입속으로 되뇌면서 나는 분도수녀원에서 맡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 냄새를 떠올렸고, 어쩌면 주님이 그때 나에게 밥이 되어 오시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났다. 그때 나는 몇 날 며칠을 밤이나 낮이나 주님을 찾아 대들고 몸부림쳤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 한 말씀만 하시라’고 애걸복걸도 해보았다. 그러나 주님은 끝내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어쩌면 나직하고 그윽하게 뭐라고 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늦게 난 철처럼 슬며시 왔다.

그래, 분명히 뭐라고 그러셨을 거야. 다만 내 귀가 독선과 아집으로 꽉 막혀 못 알아들었을 뿐인 것을. 하도 답답해서 몸소 밥이 되어 찾아오셨던 거야. 우선 먹고 살아라 하는 응답으로, 그렇지 않고서 그 지경에 밥 냄새와 밥 맛이 그렇게 감미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국으로 떠나면서 아이들에게는 겨울이나 나고 오겠다고 말했지만 내 속셈은 내 감정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였다. 나에게 가장 시급한 건 감정의 독립이었지만 그 시기는 기약이 없었다.

 

로스엔젤레스 남쪽 오렌지 카운티는 풍치가 아름답고 기후가 온화했다. 여기서는 초겨울로 접어들 무렵에 떠났는데 그곳 날씨는 봄의 한가운데 같았고 수목의 푸르름은 한여름 같았다. 침실이 있는 이층 창을 가리게 무성한 나무에는 능소화 비슷한 새빨간 꽃이 한창이어서 굴을 빨아먹으려는 벌새가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뜨곤 했다. 벌새는 새 중에서 가장 작은 새라던가, 곤충의 대롱처럼 긴 주둥이로 꽃의 굴을 빨아먹고 산다고 했다. 세상에 별난 새도 다 있지. 한동안은 보는 것마다 다 신기했다. 나무마다 꽃나무 아닌 게 없었다. 꽃 지고 잎 피는 게 아니라 꽃과 잎이 동시에 무성한 것도 신기했고 새파란 잔디 위로 노오란 은행잎이 지는 것도 신기했다.

차로 삼십 분도 안 되는 거리에 바다가 있었다. 태평양이었다. 아아, 태평양. 그곳 바닷가에 서면 바다가 크다는 느낌이 가슴이 뿌듯하게 차 올랐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수평선이 직선이 아니라 거대한 호 弧 라는 걸 알았다. 앞이나 좌우로 시야를 가로막는 섬도 곶 도 없는, 다만 광대무변한 해안선에서 바라본 수평선은 앞이 부풀고 좌우가 아스라이 휘어 보였다. 과연 지구가 둥글긴 둥근가 보다. 나는 그 사실을 내가 처음 발견한 것처럼 신기했고 한편 자신의 존재를 바닷가 모래알보다도 미소하게 느꼈다. 자연으로부터 받는 위안처럼 편안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밖에 미국적인 구경은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다. 집안에 큰 불행이 닥친 걸 이국땅에서 소식만 듣고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막내의 고통도 컸으련만, 그 애는 다만 동참하지 못한 것만 죄스럽게 여겨 너무 잘해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딸과 사위가 힘을 합해 주중엔 가까이, 주말이면 멀리 그저 어디든지 끌고 다니려고만 했다. 온종일 달려 밤중에 산중 오두막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자고 새젹에 일어나 거대한 자연에 접하고 다시 온종일 달려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래 봤댔자 캘리포니아도 못 벗어났단 소리를 듣고 이 놈의 땅덩어리가 과연 크긴 크구나 싶을 뿐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놀러 나갔을 때마다 직은 사진이 한보따리나 되었다. 어느 날 막내가 그것들을 날짜 별로 정리하는 걸 옆에서 보가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나를 넣고 찍은 사진이건만 나는 거기 가본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사진마다 그러했다. 풍경과 나는 억지로 갖다 붙여놓은 것처럼 부조화스러울 뿐이었다 그 애들은 성심성의껏 한 효도를 헛수고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아 내심 미안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우리 아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고장이다’ 라는 생각이 처음에는 홀가분하고 편하더니만 점점 그것도 별게 아닌 게 되었다. 내 아들의 추억과 전혀 연관 지을 수 없는 이국의 풍경과 사람들은,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히히덕대며 일상을 영위하는 내 나라 사람들이 꼴 보기 싫은 것과는 다른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외로움이라고 해도 좋았다. 별안간 악이라도 써서 구원을 청해야 할 것처럼 그 외로움은 절박했고, 집에서보다 밖에 나가 많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 한결 더 했다.

디즈니랜드를 구경간 날이었다. 주말이어서 각양각색의 인종이 모여들어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지만 워낙 면적이 넓고 구경거리가 다양해서 인기 있는 몇몇 관을 빼고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지딱지딱 돌아볼 수가 있었다. 딸 내외도 손녀도 그렇게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오후가 되자 다리의 피로보다 사람에 치인 신경의 피로가 견딜 수 없어졌다. 노천식당에 가까스로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나서 딸과 사위는 먹을 것과 음료를 파는 데 줄 서러 가고 나는 손녀를 데리고 앉았는데 또 그 절박한 외로움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 그리고 내가 참을 수 없어 하는 게 무엇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건 말 못 알아들음이었다. 내 나라에서건 남의 나라에서건 사람 모이는 데 가면 들리는 건 사람들의 말소리라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구태여 남의 말을 엿들으려고 노력을 안 해도 내 나라에서 들리는 건 당연히 내 나라 말이고, 어려서부터 들어온 내 나라말의 리듬엔 공기처럼 의식할 필요없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정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거긴 남의 나라였다. 신경을 곤두세워도 한두 마디 알아들을까 말까 한 것도 괴로웠지만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이질적인 리듬이었다. 그 이질감은 여기는 네가 놀 물이 아니라는 소외감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만약 어떤 피치 못할 운명이 나를 이 땅에 죽을 때까지 묶어두는 일이 생긴다면, 생전 호강을 보장해준가도 해도 아들을 잃은 고통 다음 가는 고통이 되리라고.

 그런 건 깨달은 게 잘못이었다. 귀국하고 싶은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더는 구경하기 싫었다 다만 바닷가에 나가는 것만은 싫증이 안 났지만 그 도한 그 바다가 태평양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 나라까지 닿아 있을 태평양의 화려장엄한 낙조를 바라보면서, 내 나라에선 지금쯤 저 태양이 중천에 떠있겠지 싶을 때의 감상은 찝찔하고도 절절했다. 겨울을 나기는커녕 그 해도 넘기기 전에 귀국을 서둘렀다. 무엇을 잘못했기에 엄마가 저러나 딸이 영문을 몰라 섭섭해 하는 것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둬다오, 엄만 다만 자유롭고 싶단다.” 이렇게 큰소리 쳤다.

그리고 드디어 사방에서 들리느니 내 나라 말만 들리는 고장으로 돌아왔다. 내 나라 말은 바로 내가 놀던 익숙한 물이었다. 공항의 아우성, 엄마, 할머니 하는 아이들의 외침, 그런 소리들이 어우러진 우리 말만의 독특한 가락에 나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땅에 입 맞추는 대신 나는 그 가락을 깊이깊이 심호흡했다.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조금씩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소설도 썼고, 중단했던 장편연재도 다시 시작해 마무리를 지었다. 이국에서 경험한 우리 말에 대한 그리움은 곧 글을 쓰고 싶은 욕구의 다른 표현이었을 뿐임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다시 글을 쓰게 됐다는 것은 내가 내 아들이 없는 세상이지만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는 증거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안다. 내 아들이 없는 세상도 사랑할 수가 있다니, 부끄럽지만 구태여 숨기지는 않겠다. 그 후 지금까지의 내 홀로서기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지켜보던 딸들도 엄마가 마침내 해냈다고 일단은 마음을 놓았으리라.

역설적인 얘기가 도리지도 모르지만 나의 홀로서기는 내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가까이서 멀리서 나를 염려해 준 여러 고마움 분들을 비롯해서 착한 딸과 사위들, 사랑스러운 손자들 덕분이다 나만이 알고 느끼는 크나큰 도움이 또 있다. 먼저 간 남편과 아들과 서로 깊이 사랑하고 믿었던 그 좋은 추억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가 설사 홀로 섰다고 해도 그건 허세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요즈음 들어 어렴풋하고도 분명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이런 도움이야말로 신의 자비하신 숨결이라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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