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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편 終

 

淸凉浦의 어린 넋

癸酉靖亂

단종은 이조 제 오대 임금 문종(文宗)의 오직 하나의 아들로 휘를 홍위(弘暐)라 불렀다.

세종 이십삼년 신유(辛酉=西紀 1,441년) 칠월 이십삼일에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서 출생하여 무진(戊辰)에 왕세손(王世孫)으로 경오(庚午) 칠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임신(壬申) 오월 십육일에 경북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으며 을해(乙亥) 육월 십일일에는 왕위를 세조에게 선양(禪讓)하고 상왕(上王)이 되었다가 정축(丁丑) 육월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고 십월 이십사일에 영월(寧越)에서 십칠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재위(在位) 삼년 재상왕위(在上王位) 이년이었는데 슬하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조 제 사대 임금 세종에게는 왕자가 십팔명이나 있었는데 모두 다 기승스런 인물이었고 그 중에서도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왕비 소생의 둘째 아들로서 야망과 수완이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 외의 모든 형제들은 문객을 맞아 세력의 확대를 꾀하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에게는 유달리 무사(武士)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이는 수양대군의 책사(策士)로 권남(權擥)이 있게 되자 한명회(韓明澮)가 드나들게 되었고, 여기에 따라 홍달손(洪達孫), 양정(楊汀) 등 무인다운 무인 삼십여명이 또 드나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문종의 친아우였고 단종의 둘째 삼촌이었다. 처음엔 진평대군(晋平大君)이라 불리웠는데 훗일에 이르러 수양대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문종이 돌아가자 단종은 그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로 나아갔는데 당시의 나이 십이세였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은 신왕(新王)을 젖먹이로 멸시하고 비밀히 이지(異志)를 품고 신왕의 자리를 찬탈(簒奪)할 음모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권남이란 책사가 필요하게 되고 한명회란 장사가 또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수양대군에게 있어서 하루도 없지 못할 존재였다. 권남도 한명회도 밤낮으로 수양대군저로 나아가 대군에게 진언도 하고 헌책(獻策)도 하였다.

한명회는 흔히 종부시정(宗簿寺正)이라 가칭하고 출입했지만 심야(深夜)의 출입은 장원밖에 늘어져 있는 밧줄을 이용하였다. 단종 왕위의 찬탈계획은 한명회가 거의 다 생각해 낸 것이었으므로 수양대군은 사람을 보기만 하면

한명회는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다.

하며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때는 단종 원년(元年) 西紀 1,483년(癸酉) 십월 십일이었다. 이날을 기하여 수양은 단종을 수호해 오는 세 정승을 모조리 죽여 없애려 하였는데 수양의 음모가 사전에 누설되었으므로 수양대군 일파는 이를 크게 걱정하였다. 이를 알게 된 수양은

무엇! 누설되었다고? 정말 누설되었으면 먼저 우의정 김종서(右議政 金宗瑞)를 없애기로 하지. 김종서(삼정승 중 김종서는 담력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호랑이라고 불렀다.)만 없애면 그 외의 영의정 좌의정쯤은 문제도 되지 않아.

라고 말한 후 홍달순, 양정 등 유능한 무사 칠, 팔인을 자저(自邸)로 불렀다. 그리고 후원에서 술잔치를 베풀고 거사할 것을 비밀히 의논했다.

그러나 의논이 백출될 뿐 별 해결이 없었다. 이때

집을 길 가에 짓는데 삼년이 경과되어도 준공되지 않았다는 말이 있소이다. 대군께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한명회가 입을 열자 홍달손이 뒤를 이어

좋은 말씀이올시다. 용병(用兵)에 유예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 덧붙여 말을 했다.

수양은 한명회와 홍달손의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려 할 때 누군가 옷자락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노기를 얼굴에 띄고

옷자락을 왜 끄는 것이냐? 너희들은 내가 무슨 음모를 하고 있다고 알릴 수 있는 대로 알리고 고해 바칠 수 있는 대로 고해 바쳐라. 나는 계획한 대로 단행하고야 말겠다.

만류하는 자에게 화살을 쏘려 하다가 이를 멈추고

나는 너 같은 자는 환영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자는 가고 있고 싶은 자는 있어라. 나는 대장부다. 나는 국가 사직을 위하여 죽고 말련다.나 혼자만이라도 가겠다. 만약 우유부단(優柔不斷)하며 기회를 그리치게 하는 자가 있게 되면 용서하지 않고 참하겠다.

하며 중문으로 나섰다. 이때 수양의 뒤를 따라 중문에까지 나온 사람은 가노(家奴) 임운(林芸) 뿐이었다.

한명회는 이를 보고

대군께서 혼자 가신다. 혼자 가시게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모시고 가야 한다.

부르짖었다. 그리하여 무사 몇 사람이 두패로 나뉘어 한패는 돈의문(敦義門) 성상에 매복하고 또 다른 한패인 양정, 홍순손, 유수(柳洙) 등은 미복(微服)으로 대군을 따랐다.

수양이 성문을 나서자 말탄 장사 십여명이 길가에 서 있었다. 그러자 이들 말탄 장사들은 수양이 눈에 띄자 어디론지 흩어져 버렸다. 이런점으로 보면 수양대군의 위망(威望)이 여간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양이 김종서의 집에 이르자 김승규(金承珪=김종서의 아들)는 신사면, 윤광은이란 사람과 문전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 수양은 승규에게

춘부 대감 계신가? 내가 좀 뵈오려 왔다고 알리라.

는 말을 했다. 김종서는 수양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뛰어나가 수양을 보기가 무섭게 절을 했다. 그리고는

좀 들어오십시오.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고맙소. 그러나 날도 이미 저물어 사대문(四大門)이 닫혀지겠는데 들어가면 뭘하오.

하며 들어가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승규는 자기 아버지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준비했던 각(角) 떨어진 사모(紗帽)를 벗어가지고

여보 대감! 청할 것이 하나 있소.

말을 걸었다.

무슨 청이온데?

사모의 각이 떨어져 없어진 모양인데 대감의 각을 좀 빌려 주셔야 하겠소이다.

그거 안 되었습니다.

종서는 이와 같이 대답하고 아들 승규에게 안으로 들어가 사모의 각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때 수양대군의 가노(家奴) 임운(林芸)은 이 틈을 타서 종서에게 철퇴로 일격을 가하여 쓰러뜨렸다.

승규는 이 기척을 알고 나는 듯이 수난 장소로 달려들어 아버지의 시체를 감쌌다. 그러나 옆에서 보고 있던 무사 양정은 칼을 빼어 승규에게 일격을 가하였다. 이때 수양대군은 이를 보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수양대군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한명회는 얼마만큼 마중을 나와 있었다. 대군은 명회를 보고

일이 이젠 계획대로 추진되어 간다.

하며 만족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수양은 명회로 하여금 무사를 거느리고 행재소(行在所) 문전에 배열시켰다. 무사들을 배열해 놓은 후 명회는 생살부(生殺簿)를 가지고 문안에 앉아 있었다. 수양은 왕명을 빌어 여러 중신(重臣)을 참내케 하고 사부(死簿)에 등록된 대신이며 중신들을 홍윤성(洪允成), 유수(柳洙), 구치관(具致寬) 등 여러 무사에게 철여의(鐵如意)를 가지고 격살케 하였다.

이 때에 격살된 중신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이조판서(吏曹判書) 조극관(趙克寬), 찬성(찬성(贊成) 이양(李 ) 등이었다. 이 반대파 중신들은 궐문에서 살해되고, 좌의정(左議政) 정분(鄭 ), 조극과의 아우 조수량(趙遂良) 등은 처음엔 귀양을 보냈다가 곧 죽여 없앴다. 안평대군은 김종서와 내통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강화에 귀양 보냈다가 나중에 약사발을 내려죽게 하였다.

그런데 임운의 철퇴를 맞고 쓰러졌던 김종서는 다시 회생하였다. 종서는 대궐로 들어가려고 몸에 여복(女服)을 떨치고 가마에 몸을 담은 후 숭례문(崇禮門=남대문) 앞에 이르렀으나 문이 굳게 닫혀져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종서는 부득이 아들 승규의 처가에 숨어 있게 되었다. 종서가 회생하여 아들의 처가에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수양은 재빨리 사람을 내놓아 그 집을 습격하여 종서를 끌어내게 하였다. 끌려 나온 종서는

나는 어디든지 걸어서는 못 가겠다. 초헌( 軒)을 가져 오너라.

하고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에 칼이 번쩍이면서 그의 상체에 이르고 말았다. 이로써 인간대호(人間大虎)라는 종서도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고 말았다.

수양은 김종서를 이렇게 죽인 후 단종에게로 나아가

김종서가 음험하게 모반함으로 살해하였습니다. 일이 너무나 절박해서 사전에 아뢰지 못 하였습니다.

하고 상주(上奏)하였다.

이 정변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실권(實權)을 얻게 된 수양대군은 바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란 최고의 벼슬을 갖고 그 일파는 이조판서(吏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그리고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란 군부 최고의 벼슬까지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일국의 정권도 일국의 병권도 그의 장중(掌中)에 있게 된 것이다.

이 때에 있어서 단종(端宗)의 존재란 정말 ‘바지 저고리’에 불과 하였다.

천하의 권력을 독차지한 영의정부사 수양은 일찍부터 동지적(同志的) 관계를 맺고 지내오던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左議政)으로 한확(韓確)을 시켜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고 이것을 왕의 이름으로 받았다.

수양대군의 위세(威勢)와 권위(權威)가 여간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임금의 자리만 지키고 있어야 무슨 묘책이 생길 것 같지 않고 권남, 정인지의 주청에 못견디어 단종은 단종 삼년(열네살 때)곧 서기 1,455년 을해(乙亥) 육월 십일일에 눈물을 머금고 왕위(王位)를 수양대군에게 내주었다. 말은 선양(禪讓)이었지만 실상은 강탈(强奪)이었다. 이렇게 강탈하여 단종의 뒤를 이은이가 곧 세조(世祖)이다.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자 전왕 단종은 상왕(上王)이 되어 ‘골방 마누라’ 격이 되고 말았다.

집권욕(執權慾)은 인륜대의(人倫大義)를 모르는 살인욕(殺人慾)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死六臣

단종이 임금의 자리를 세조에게 내주었을 때 좌우에 있던 신하중에서 입을 열고 단종을 위하여 시(是)와 비(非)를 가려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있던 성삼문(成三問)은 국새(國璽)를 안고서 크게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고 또 박팽년(朴彭年)은 경회루에 이르러 자살하려 하였다. 이때 삼문은 이를 발견하고 굳이 만류하면서

지금 왕위가 옮겨가고 국새가 전해졌지만 전왕이 아직 상왕으로 계시니 죽지 말고 좀 때를 기다려 봅시다.

하고 박팽년을 달랬다. 박팽년도 보다 이상 고집하지 않고 삼문의 말에 응하였다.

한편 단종 상왕은 수강궁(壽康宮)에 칩거하여 우울히 그날 그날을 보낼 뿐이었다. 이때 집현전 학사 성삼문은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成源) 또 전절제사(前節制使) 유응부(兪應孚) 및 삼문의 아버지, 단종 상왕의 장인 등과 손을 잡고 단종을 복위(復

位)시킬 계획을 비밀히 세웠다. 그런데 때마침 명나라 사절(使節)이 와서 태평관(太平館)에서 여장(旅裝)을 풀었다.

그리하여 세조는 일정한 시일을 정하여 상왕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절을 위하여 대연(大宴)을 베풀기로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성삼문, 박팽년은

좋은 기회는 왔다!

고 좋아하였다. 그들은 연회일을 이용하여 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응부를 운검(雲劒)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는 다름이 아니었다. 연회에 이르러 거사할 때 세조의 우익(羽翼)을 모두 삼제(芟除)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한명회는 세조에게로 나아가 진언했다.

연회장으로는 창덕궁이 좁고 또 더웁소이다. 그리고 세자(世子)의 참석도 운검의 입장도 필요치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조는 이 말을 이의 없이 받아 들였다. 성승(成勝)이 운검(雲劒=의장에 사용하는 큰 칼)을 허리에 차고 연회장으로 들어가려하자 이를 본 한명회는

운검을 차고서는 못 들어오기로 되어 있소. 공도 패검(佩劒)하고선 못 들어옵니다.

이 말을 듣고 분개한 승이 물러나 한명회를 격살하려 하자 삼문이

세자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한명회 쯤을 죽인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하고 명회 격살을 말렸다. 그러나 응부는 이 말에 찬동하지 않고 기어히 명회를 격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팽년과 삼문은 응부에게 차근히 말했다.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출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다 운검의 입장도 불허하니 어찌한단 말이요? 만약 억지로 일을 일으키면 세자는 경북궁을 중심으로 대항할 것 같소.

우리에게 해는 있을지언정 이는 없을 것이요. 딴 날 수양과 세자가 같이 있을 때를 엿보아 거사를 하면 쉽사리 목적이 달성될 것이로 생각되는데…

그러나 응부는 여전히 우겼다.

이런 일은 신속히 끝을 내야 하는 것이요. 만약 딴 날로 연기하면 사전에 일이 누설되고 맙니다.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다 하지만 모신적자(謨臣賊子)가 모두 수양에게 붙어 있지 않소! 오늘 이 무리들을 깡그리 도륙하고 상왕을 복위케 하며 호령을 내려 무사로하여금 일대(一隊)의 군사를 거느리고 경북궁에 들어가게 하면 세자의 도망갈 데가 어디란 말인가? 때는 왔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때는 왔습니다.

그래도 팽년과 삼문은 여전히 호기가 아니라고만 고집하였다. 이때 삼문, 팽년의 동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金 )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재빨리 장인 정창손(鄭昌孫)을 찾아가 의견을 물었다.

우리가 계획한 상왕 복위운동이 뜻대로 될 것 같지 않사온데 태도를 어떻게 갖는 게 좋을까요? 사전에 밀고를 하면 그 공으로 부귀는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사온데…

창손도 사전 밀고에 대하여 반대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창손은 즉일로 사위 김질과 함께 대궐로 들어가 김질이 상왕복위 계획에 관여했음을 고하였다.

세조는 처음엔 창손과 질에게 형(刑)을 가하려하였으나 밀고한 것을 기특히 생각하고 공신(功臣)으로 대우하였다.

이 밀고에 의하여 복위운동 배후의 인물이 일일이 알려지고 성삼문, 박팽년 등은 체포되어 국문(鞠問)을 받게 되었다. 세조는 평소에 팽년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고 지냈음을 사람을 시켜 팽년에게

네가 나에게 잘못을 깨닫고 계획한 것을 솔직히 고백하면 살려 주겠다.

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팽년은 이 전하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웃음만 지우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칭함에 ‘상감’이라 부른 일도 없고 ‘전하’라 부른 일도 없었다. 어느 때나 세조를 칭하여 ‘나으리’라 불렀다. ‘나으리’란 나라 종친(宗親)을 부름에 있어서 경어(敬語)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조는 대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팽년의 입을 난격(亂擊)케 하면서

너는 벌써부터 신(臣)이라 칭하면서 내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지 않으냐? 네가 지금에 이르러 ‘신’이라 칭하지 않는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러나 팽년은 여전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상왕의 ‘신’이 되어 충정감사로 있을 때 ‘신’이라 써서 장계(狀啓)한 일은 있으나 ‘나으리’에게는 한 번도 ‘신’이라 하고 장계한 일이 없소. 찾아보면 아실 것이요.

세조는 팽년의 장계를 모두 검사해 보았다. 과연 팽년의 말과 같이 신(臣)이란 글자는 한 자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다음으로 세조는 승지(承旨) 벼슬을 하고 있던 삼문을 무사에게 명하여 끌어내게 하였다.

세조는 김질이 밀고한 내용대로 국문하기 시작했다. 삼문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김질이 밀고한 것이 모두 옳소이다.

대답하면서 김질을 돌아다보았다.

네가 밀고한 것이 좀 덜 분명하고 좀 덜 철저하다.

삼문은 김질을 비웃었다. 세조가 다시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하려 하는가?

라고 묻자 삼문은

일편단심(一片丹心) 전왕(단종)을 다시 모시기 위함이요. 우리의 마음은 모든 백성이 다 알고 있소. 나으리는 우리가 어째서 이런 맘을 갖게 된 것을 모르시오? 나으리는 남의 나라를 강탈한 사람이요. 인신(人臣)이 되어서 임금이 망하는 것을 어찌 좌시한단 말이요?

그래서 우리가 일어난 것이요. 그런데 나으리는 평소에 주공(周公)을 들어 이말 저말 하십디다. 주공도 이런 일을 감행하였나요?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이 대답에 세조는 발을 구르면서 소리쳤다.

왕위를 나에게 선양할 때에 받지 말도록 할 것이 아니냐? 지금 와서 이말 저 말 별 말을 다하면서 배반하려 하니 그게 무슨 심사냐?

삼문은 이 말에 새삼스레 세조를 바라보면서 냉소를 했다.

나으리 야심이 전부가 왕위 찬탈에 있었는데 우리가 말린다고 들어 주시겠소? 그런 말씀은 어린애 게나 하십시오.

그런데 너도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 부르는 모양이다. 도대체 그러면 너희가 먹고 사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니 모르느냐? 나의 녹(祿)을 받고 살면서 나를 배반할 수 있느냐? 너는 반복한(反覆漢)이 아닐 수 없다.

세조가 이렇게 말하자 삼문은

그게 무슨 말씀이요?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는 무엇을 가지고 나를 신(臣)으로 부리고자 하시오? 또 나는 나으리의 녹(祿)을 받아 먹지 않았소. 나의 말이 정말로 믿어지지 않으면 사람을 보내 우리 집을 털어 보면 알 것이요.

역시 거침없이 대답하자 세조의 노기(怒氣)는 한층 더 만면(滿面)해졌다. 세조는 무사를 불러 세우고 철봉(鐵棒)을 불 속에 넣어 달군 후에 그것으로 삼문의 다리와 팔꿈치를 사정없이 지지게 하였다. 그러나 삼문은 태연한 태도로 말했다.

나으리 너무 심하지 않소? 나으리의 형(刑)은 참혹하구료.

그런데 때마침 신숙주(申叔舟)가 세조의 곁에 있었다. 삼문은 숙주가 눈에 띄자 크게 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지난날에 너도 집현전의 한 사람으로 있었지? 그때 영묘(英廟=세종)께서는 원손(元孫=단종)을 안으시고 정중(庭中)을 거니시다가 우리들에게 부탁하시기를 <과인이 세상을 떠난 후 라도 경 등은 모름지기 이 애를 염두에 두고 잘 수호해 달라>고 천탁(千托), 만탁(萬托)하시지 않았나? 그때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한데 너는 하루 아침에 그 어른의 부탁을 잊고 말았구나? 네놈의 마음이 그렇게 더럽게 변할 줄 뉘 알았겠느냐?

삼문의 말씨가 이러하자 세조는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신숙주를 전각(殿閣) 뒤로 피신케 하였다.

이때 제학(提學) 강희안(姜希顔)도 국문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강희안도 굴복하지 않았다. 세조는 삼문에게 물었다.

희안은 너희의 음모에 가담한 일이 없느냐? 숨김없이 말을 해라.

삼문은 이 물음에

희안은 당초부터 우리와 가까이 한 일이 없소이다. 나으리는 전조(前朝)의 명신이라면 모두 다 참살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남은 사람은 강희안 뿐인 것 같습니다. 좀 남겨 두어서 등용하시는 것도 유리할 것입니다. 강희안은 정말 현자(賢者)올시다.

하고 증언하였다. 그리하여 강희안은 세조의 손에 죽지 않게 되었다.

다음으로 세조의 국문은 유응부에게로 옮겨졌다. 세조는 응부를 불러 세우고

너는 연회석에 왜 참가하려 하였노?

묻기 시작했다. 유응부는

연회일에 참가하려 한 것은 다름이 아니요. 첫째, 일척검(一隻劒)으로 족하(足下)를 몰아내고 전왕 단종을 모시려 함이었소.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동지 중에 간물이 있어 그 자의 밀고로 일이 망쳐지게 되었소. 족하! 더 물을 것 없소. 한시 바삐 나를 죽여 주오.

세조는 이 말에 격노하여

너는 상왕의 이름을 빌어 일을 하려 하는 것이 아니냐? 너의 심사를 알겠다.

그리고는 무사로 하여금 몸의 가죽을 벗기고서 고문케 하였다. 이때 응부는 삼문을 돌아다보며

사람들이 말하기를 학자님들과는 일을 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더니 그들의 말이 옳은 것 같소. 지난날 연회 일에 내가 칼로 세조의 도배를 도륙할 할 때에 당신들의 만류로 부득이 멈추고 말았는데 이 때문에 오늘날 이런 치욕을 당하게 됐소. 당신들은 책략이란 것을 모르니 짐승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요? 더 말하고 싶지 않구료.

하고서 다시 세조에게

딴 무슨 물을 것이 있으면 저 학자님들에게 물어보시오!

세조는 이 말에 격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빨갛게 달군 철봉을 배 아래 두 다리가 회합(會合)하는 곳에 놓은 후 거기에다 기름을 부어 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의 피육(皮肉)은 익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응부는 비명도 울리지 않고 철봉이 냉랭해지기를 기다

리고 있다가

철봉이 이제 다 식었다. 다시 불에 달구어 가져 오너라.

하고 철봉을 땅에 내던졌다. 철봉은 다시 달구어져서 그의 사타구니를 지졌다. 그러나 응부는 최후의 일각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이개(李塏)가 작형(灼刑)을 받게 되었다. 이개는 그때

이런 형벌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 있나요?

세조에게 물었으나 세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작형은 다음으로 하위지(河緯地)에게로 옮겨졌다. 하위지는

우리들의 행위가 반역(叛逆) 행위라면 참(斬)하는 게 국가의 정법(正法)인데 무엇을 묻고 또 국문한단 말이요?

하고 점잖게 입을 열었다. 그리하니 세조도 그 말에 감동했던지 하위지에는 작형을 가하지 않고 말았다.

국문을 다 받은 성삼문은 궁문(宮門)에서 나오려할 때 좌우신료(左右臣僚)들에게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 태평을 누려라. 삼문 나는 지하로 돌아가 고주(故主=세종)를 뵈옵겠다.

하는 말 한마디를 남겨 놓은 후 수레에 실려 참형장(斬刑場=새남터)으로 끌려갔다. 때는 가을해가 뉘엿뉘엿 저물려하고 있었다. 삼문은 형을 받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와 시조를 남겼다.

 

擊鼓催人命, 西風日欲斜.

(가을 바람 소슬하고 해는 저물려하는데, 북을 치며 죽이라 재촉하네)

黃泉無客店, 今夜宿誰家

(저승엔 객주집이 없다는데, 오늘 이 밤을 뉘집에서 새울고?)

 

<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

 

삼문이 죽은 후 그의 집을 검색하였더니 과연 을해(乙亥) 이후 곧 세조가 즉위한 후부터 받은 녹봉(祿俸)을 모두 다 별실에 넣고 월일(月日)까지 기입해 두었다 한다. 이것을 보면 세조가 준 녹봉에는 손하나 건드리지 않은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개(李塏)도 역시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갔는데 그의 절명시(絶命詩)는 다음과 같다.

 

禹鼎重時生亦大

(목숨이 우정처럼 무거워진 때엔 사는 게 명예롭지만)

鴻毛輕處死猶榮

(목숨이 홍모처럼 가벼워진 때면 죽는게 오히려 영광스러우리)

< 창안에 혓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데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촛불 날과 같아야 속타는 줄 모르더라. >

 

이밖에 몇 사람의 절명시와 시조 같은 것은 입수(入手)되지 않아서 여기에 기록하지 못했다.

끝으로 유성원(柳誠源)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써보기로 하자. 성원은 사예(司藝)란 벼슬을 가지고 성균관에 있었다. 성삼문 등이 국문을 받던 날 성균관의 여러 유생이 성원에게로 와

선생님! 세조의 국문이 참혹한 모양입니다. 국장으로 끌려가시면 선생님도 작형(灼刑)하에서 국문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고 알렸다. 그러자 성원은 당장에 수레 몸을 담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기가 무섭게 자기 아내에게 술상을 차리게 한 후 그 아내를 상대로 술을 마셨다. 이와 같이 부부가 대작한 후 성원은 가묘(家廟)로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간 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나오지를 않아 이를 의심스러이 생각한 부인이 가묘로 들어가보니 성원은 관대도 벗지 않고 패도(佩刀)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이었다.

부인은 물론 가인들도 왜 자살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경과되자 포교(捕校)가 와 죽은 시체를 가져갔다. 세조는 성원의 시체가 국문장에 이르자 형리를 시켜 다시금 육시를 하게 했다.

 

 

 

端宗의 最後

전왕 단종은 상왕(上王)이 된 후부터 별궁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삼문 등의 상왕복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하고 끝나자 정인지는 세조에게 글을 올렸다.

< 상왕께서는 성삼문의 음모를 벌써부터 아시고 계셨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체하시고 비밀에 붙이신 것은 이 나라에 죄를 범하신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다. 그 어른에게 여전히 상왕의 위호(位號)를 갖게 하는 것은 생각할 일이올시다. >

하는 글을 올렸다.

세조는 이 소문(疏文)을 보고 정인지 등 여러 궁신들을 불러놓고 상왕 폐립에 대하여 문의하기 시작하자 모든 중신의 의견은 상왕 폐립으로 귀일(歸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세조는 상왕(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강원도 영월(江原道 寧越)로 추방하여 거기서 귀양살이를 하게 했다.

다음으로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를 순흥부(順興府)로 추방하여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

금성대군은 매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만나 비분강개(悲憤慷慨)의 눈물을 흘려가면서 비밀히 노산군 복위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동지를 모집하였다. 어느날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자기 처소로 불렀다. 보흠이 오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후 단둘이 앉아서 시국이 되어가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가 땅이 꺼지게 긴 한숨을 지으면서

이부사는 이 시국을 어떻게 보오? 내버려 두는게 옳겠소? 좀 의견을 들어봅시다.

하고 말을 걸었다. 이부사도 마음이 단종에게 기울어져 있었으므로 금성대군과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글쎄올시다. 마음이 옳게 박힌 사람은 수수방관(袖手傍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좋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반문하는 것이었다.

무슨 좋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요. 하지만 네 멋대로 하라고 내버려두기는 싫소. 나는 이런 내용의 간단한 격문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하나 좀 만들어 주겠소?

글은 부족합니다마는 만들어 보겠소이다. 그런데 내용은요?

세조는 인륜대도를 짓밟으면서까지 왕위를 약탈한 천하의 대죄인임을 천명하고 다음으로 단종을 복위(復位)케 하는 것은 나라를 올바로 살리며 동시에 백성을 살리는 첩경이라고 역설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잘 생각해서 만들어 보오.

대군의 지시대로 이부사는 격문을 만들어 금성대군에게 올렸다. 대군은 이것을 순흥병영(順興兵營) 및 남중(南中)의 동우자(同憂者)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그런데 순흥의 관노(官奴) 하나(성명미상)는 벽과 벽 사이에 몰래 숨어서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목적으로 격문을 만들어 각지에 뿌리게 한 사실을 엿들은 후 대군의 측근에서 시종하는 시녀(侍女)의 손을 빌어 격문 몇장을 얻어 가지고 분주히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때 기천(基川=지금의 풍기) 현감(縣監)은 이 기밀을 알아내자 말을 달려 관노를 쫓아가서 증거물인 격문을 빼앗아 가지고 상경하여 격문을 증거로 고변하였다. 세조는 고변한 현감에게 특상을 줌과 동시에 훗일에 중용(重用)할 것을 약속하여 돌려 보냈다.

금성대군의 복위 음모를 알게 된 세조는 대군과 동조한 사민이라면 한 사람도 남겨 놓지 않고서 모두 참살하여 죽계(竹溪)란 시냇물에쓸어넣게 하였다. 그리하여 죽계수가 핏물로 한때는 홍하(紅河)가 되었고 또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안동으로 끌려가 안동옥에서 그날 그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대군은 혼자서 어디로인가 없어졌다. 이 때문에 금부도사(禁府都事=죄인을 맡아 보는 관직)는 말할 것도 없고 부사도 책임상 사면팔방으로 사람을 내놓아 대군을 수색하게 했다. 그러나 종적은 묘연하였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쯤 되어 대군은 설렁설렁 돌아 왔다. 그는 돌아오기가 무섭게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면서

너희들은 수만 많지 쓸데없는 존재구나. 나 하나를 못 잡으니 말이다. 내가 도망하려면 얼마든지 하겠다만… 그런데 내가 돌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을 것 같아서…

하고 여전히 웃음섞인 말을 했다.

대군은 죽음에 이르자 의관을 다시금 정제하고 호상(胡床)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이때 금부도사는 금성대군에게 일어나 서향(西向)을 하라고 하면서

대군전하! 여기 모신 전패(殿牌=세조의 위패)에 절을 하셔야 합니다.

고 절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대군은 이 말에 대경실색(大驚失色)하면서 절을 하라고? 나의 임금은 영월에 계시다.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입밖에 내지 말라.

하고는 북으로 향하여 서서 통곡사배(痛哭四拜) 한 후 약사발을 마시었다. 그러나 마신 약으로 절명되지 않아서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남녀노소(男女老少) 누구나 다 대군이 불쌍해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었고 세조의 다섯째 아우였다. 집권욕(執權慾)에 눈이 어두어진 세조의 눈은 아우도 조카도 분간하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금성대군을 죽인 세조는 뒤이어 노산군(魯山君=단종)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賜藥)을 받들어 가지고 영월로 갔다. 그러나 당도해서부터는 단종이 계신곳으로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저하고 있으려니 나장(邏將)이 주의를 시켰다.

그렇게 주저하시다간 시간에 지오(遲誤)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도사는 여전히 용기가 나지 않아 간신히 뜰 안으로 들어가 엎드렸다. 이때 노산군은 당중(堂中)에서

나를 부르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나를 부르는 것이냐?

고 부르는 연유를 물었다. 도사는 이 물음에 대하여 쾌히 대답할 용기도 내지 못하고 그저 어름어름하고만 있었다. 그러자 노산군이 입산한 이래 측근에서 시종을 하고 있던 젊은이가 노산군을 교살(絞殺)할 것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그는 한 줄 궁현(弓弦=시위)으로 단종의 목을 졸라 질식을 시켰다. 그러나 절명(絶命)하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허리띠를 이어서 조르고 또 졸라 절명케 하였다. 때의 단종의 나이는 십칠세에 불과하였다.

이때 노산군은 교살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이며 염구가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연소한 승 하나가 와서 며칠간을 애절히 통곡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 젊은 승은 단종의 시체를 짊어지고 어디론지 가버렸다.

그후 이러한 두 가지 말이 떠돌게 되었다. 그 하나는 시체를 산 속으로 가져다 태우려 한다는 말과, 또 다른 하나는 시체를 강중에 던져 없애려는 것인가 보다라는 말, 이 두 가지 말이 떠돌았다. 이 두가지 말 중 점필재( 畢齋=金宗直의 호)가 쓴 글, 즉 투강설(投江說)이 가장 옳은 것 같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 말을 쫓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 젊은 승이란 기실은 간신도배의 개노릇을하는 자였던 모양이다. 단종의 넋은 지금도 여전히 강중에 표탕(漂蕩)하고 있을 것이다.

 

 

端宗 在越時의 斷 詩

 

一自寃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 한번 대궐에서 쫓겨난 이 몸, 벽산중에 외톨의 몸 되었네. ]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 밤마다 가면(의관을 입은 채 자는 것)을 하건만 잠만은 거짓이 없고, 끝없는 한은 해마다 더욱 궁진해지질 않네. ]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 두견소리 새벽 언덕에 끊어지고 새벽달이 밝은데, 피는 봄 골짜기에 흘러 낙화가 붉어졌네. ]

天聾?未聞哀訴, 胡乃愁人耳獨聰

[ 하늘은 귀먹어 아직도 애소(哀訴)를 못 듣고 있는데, 어째서 수인(愁人)의 귀만이 밝은고. ]

 

위에 기혹한 한시는 단종이 십오 세 때 강원도 영월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자기의 심중을 피력하여 쓸쓸히 읊은 것이다. 이 시를 보면 단종이 얼마나 재인(才人)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도한 세조의 집권욕(執權慾)은 이런 재주 있고 착한 조카를 내쫓아 죽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조 제육대 임금인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는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領敦寧府事礪良府院君) 현수(玹壽)의 딸이다.

세종 이십이년 경신(庚申=西紀 1,440년)에 탄생하여 갑술(甲戌) 정월 이십이일에 왕비로 택봉되었다. 을해(乙亥) 칠월에 세조가 수선(受禪)하자 세조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존칭하였다가 정축 육월에는 부인으로 봉했다. 부인은 중종(中宗) 십육년 신사(辛巳=西紀 1,512년) 육월 사일에 팔십이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송씨는 단종이 십칠세에 처참히 시해(弑害)되자 소년 과부(당시의 나이 십팔세)로 팔십이세까지 외로이 지내다가 세상을 등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생활은 자녀를 가질 수 있는 결혼생활이 못 된데다 수난생활이 그들을 별거시켰기 때문에 슬하에는 자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송씨는 정말 쓸쓸히 외톨의 몸이 되어 팔십 평생을 보내고 말았다. 송씨의 한(恨)은 정말 끝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종의 부인 송씨의 무덤은 단종의 생질 해평부원군 정미수(海平府院君 鄭眉壽)의 묘산(墓山) 속에 들어있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건천면(乾川面)이다.

부인은 재세중(在世中) 서울 안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부인은 동교(東郊)에다 집을 짖고 죽을 때까지 영월을 바라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의 조정도 이 원만은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부인은 왕가에서 지어준 집에서 잠시 기거하다가 따로 수간 초옥을 짓고 나아가 여기서 소의소식(素衣素食)을 하면서 최후의 날까지 단종의 명복을 빌다 세상을 등졌다.

이조 제칠대 임금 세조는 이조 제사대 임금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다. 휘(諱)는 유( ), 자(字)는 수지(粹之)다.  태종 십칠년 정유(丁酉=西紀 1,417년) 구월 이십구일에 본궁에서 출생하였고 세종 십년 무신(戊申)에 처음으로 진평대군(晋平大君)에 책봉되었다가 나중에 함평대군(咸平大君), 진양대군(晋陽大君) 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쳤다. 을해(乙亥) 윤 유월(閏六月) 십일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선양(禪讓)을 받았으며 무자(戊子) 구월 칠일에 예종(睿宗)에게 전위한 후 다음날 – 곧 팔일에 수강궁(壽康宮) 정원에서 별세하였다. 재위 십삼년이었고, 춘추는 오십이세였는데 슬하에는 삼남 일녀가 있었다.

위에서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고 문종의 둘째 아우인 동시에 문종의 아들인 단종의 친 삼촌이었다. 그러나 그의 왕위 찬탈의 야욕은 이것들을 다 생각하지 않고 빼든 칼을 함부로 휘둘렀다. 그리하여 그는 형님인 문종시대의 모든 유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조카인 단종에게 충성을 하려는 신하며 사민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천하를 수중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인이 공노(共怒)할 살육행위를 감행한 것이다.

그 하나는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산골에서 잔명을 이어가는 단종을 교살해 그 시체를 강중에 던져 어복(魚腹)에 장사지내게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양씨에 관한 처리이다. 혜빈 양씨(惠嬪楊氏)는 일찍이 세종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와 혜빈이란 정일품(正一品) 품계까지 갖게 된 숙녀였다. 이 양빈은 세종의 다섯 후궁 중 가장 부덕이 완비된 여인이었었기 때문에 세종 재세시에는 가장 위함을 받고 지냈다.

그러다가 세종 신유(世宗辛酉)에 세종의 큰 아들 문종(文宗)의 비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지 아흐레쯤 도어 돌아가자 세종은 단종의 양육을 양씨가 맡도록 하였다.

양씨는 세종의 분부를 받들고 단종을 양육함에 전심 전력을 다하였다. 덕택으로 단종은 열두살이 되도록 병 없이 자라 문종의 뒤를 잇게까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공은 더욱 뚜렷해져 세종의 사랑과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다. 어느 날 세종은 양씨에게

왕자가 많기도 하지만 너무 기승해서 안심이 안 되는데 이 국새(國璽)를 맡길 일이 걱정된다. 이를 특별히 그대에게 맡기노니 소용 될 때마다 상감께 주었다가 도로 그대가 맡고 있으라.

하고 신신부탁하였다. 그런데 세종, 문종이 다 돌아간 후 을해(乙亥)에 이르러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옥새를 가져오라.

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양씨는 한사코 이에 응하지 않고

옥새만은 죽어도 바치지 못하겠나이다. 대군의 부왕마마께서 생존해 계실 때에 소녀에게 이를 맡기시며 <세자, 세손이 아닌 자로서 옥새를 내놓으라 하면 단연히 거절하라.>고 부탁 하시었나이다. 소녀는 부왕 세종의 부탁을 받들고자 하나이다.

대답할 뿐이었다.

양씨에게는 소생이 한남군(漢南軍) 어(?=王+於:), 수춘군(壽春君) 현(玹), 또 영풍군(永豊君) 전( ) 등 세 왕자가 있었다. 양씨는 세조에게 생모는 아니었지만 명분상으로는 훌륭한 어머니였다. 그러나 양씨가 자기의 명령에 불응하자 그는 서슴치 않고 당장에 죽이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동생뻘인 양씨 소생의 세 왕자까지도 세상을 등지게 하였다.

세조는 단종의 임금 자리를 찬탈함에 앞서 첫째로 모사(謨士)를 몰색하였는데 이 물망에 오른 것이 권남(權擥)이란 사람이었다. 권남은 경상도 안동 사람으로 기지(奇智)가 대단하기로 이름났고 또 하나의 모사는 권남이 천거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권남의 동지로서 기계(奇計) 그것보다도 힘으로 한몫을 단단히 보는 한명회(韓明澮)란 인물이었다.

전자(前者) 권남은 유위(有爲)의 인재였지만 나이 서른다섯이 넘도록 알아 주는 사람이 없어 출세를 못했고 또 후자(後者) 한명회도 권남만 못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나이 사십에 겨우 경덕궁(景德宮=송도에 있음)지기로 출세를 했다. 이 두사람은 그들의 처지가 이러했으므

로 자연히 서로 지기가 된 것이다.

권남이 세조의 책사(策士)로 뽑혀 들어가자 한은 권의 추천으로 행동파의 제일인자로 되어 세조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세조의 찬탈 계획은 거의 다 권남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고 이 계획이 순순히 실행으로 옮겨진 것은 한명회의 공이었다. 이 두 사람은 세조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되었던 존재였다. 다시 말하면 권남과 한명회는 세조에게 있어서 대공신인 것이다. 따라서 권은 좌익 일등공신(佐翼一等功臣)이 되어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이르러 부귀와 공명이 하늘을 흔들었으며 또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익평공(翼平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림과 동시에 세조묘에 배식(配食)케 하였다.

한은 좌리일등공신(佐理一等功臣)이 되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으로 봉작되었고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이르렀으며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충성공(忠成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도 권남과 다름없이 여생을 부귀 속에서, 영달 속에서 살다 세상을 등졌다. 그러나 그 영광이 후세에 전하지 않음은 권, 한의 부귀와 영달이 불의(不義)와 동조(同調)하였음에서 생겨진 것이 아닐까?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정정공(貞靖公) 윤번(尹 )의 딸이다. 태종 십팔년 무술(戊戌=西紀 1,418년) 십일월 십일일에 홍천 공아(洪川公衙)에서 출생하였고 세종 십년 무신(戊申)에 가례(嘉禮)를 거행하여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으로 봉했으며, 을해(乙亥)에 이르러 세조가 선양을 받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종(成宗) 십사년 계묘(癸卯) 삼월 삼십일에 온양행궁(溫陽行宮)에서 육십육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는 이남 일녀가 있었다.

 

王妃 所生의 王子와 公主

일남 덕종대왕(德種大王)

이남 예종대왕(睿宗大王)

일녀 의숙공주(懿淑公主)

 

後宮 所生의 王子

일남 덕원군(德源君=이름은 曙)

이남 창원군(昌原군=이름은 晟)

 

위에 기록한 두 왕자는 후궁 박씨의 소생이고 딴 후궁에게서는 소생이 없었던 모양이다.

 

 

 

생육신의 절개

단종(단종)이 수양대군(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하고 이름만의 상왕(상왕)이 되어 수강궁(수강궁)에서 비탄에 잠긴 세월을 보내는 때였다. 당시의 집현전(집현전) 학사들은 단종의 복위를 위해서 은밀한 중에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모자(동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김질)이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대세가 그른 것을 일찍이 점치고 이 음모를 밀고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서 사전에 발각되어 형을 당한 집현전 학사들이 후세(후세)에 일컫는 사육신(사육신)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얘기이다.

세조(세조)는 이들을 친히 국문하고 온갖 악형과 감언이설로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권하였으니 끝내 그들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장렬한 죽음을 택하여 세조와 그를 따르는 인사들의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와는 달리 단종 복위를 위해서 직접적인 가담은 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 단종을 보필한 사람들을 일컬어 단종 생육신(단종 생육신)이라고 한다. 어린 단종을 보필한다는 미명 아래 왕위를 빼앗은 세조(세조)에게 국록(국록)을 받는 것은 일대치욕(일대치욕)이라고 생각한 그들 생육신은 김시습(김시습), 남효온(남효온), 이맹전(이맹전), 조여(조여), 성담수(성담수), 원호(원호) 등으로 단종의 신하였던 것을 잊지 않고 두문(두문하여 세상을 등진 채 늙어 죽었다.

 

여기에는 생육신 이외에 두 사람이 더 소개되어 있다. 즉 권절(권절), 조상치(조상치) 두 사람인데 그들도 생육신에 못지 않은 절신(절신)이었으므로 여기 넣어서 생팔신(생팔신)의 얘기를 쓰기로 한다.

 

1 . 매월당 김시습

김시습(김시습)은 강릉(강릉) 사람으로 자(자)는 열경(열경) 호(호)는 매월당)매월당)이라고 했다. 고고의 소리를 내며 세상에 나오는 시간부터 마치 글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이 천부(천부)의 글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세살 때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다섯 살에는 시문(시

문)을 지을 수 있었다 하니 그의 재간이 어떠했는가 가를 넉넉히 알 수 있다.

중용(중용), 대학(대학)을 다섯살 때 통해 당시에는 신동(신동)이란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때 집현전 학사의 한 사람이었던 최치운(최치운)이 어린 그를 보고 천하의 기재(기재)라고 칭찬하면서 지어 준 이름이 시습이라는 이름이다.

이조의 성군인 세종(세종)은 시습의 소문을 듣고는 어린 그를 승정원(승정원)으로 불렀다.

세종은 지신사(지신사) 박이창(박이창)에게 하명하여 시습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였다. 거의 땅에 닿을 정도의 작은 키에 작은 몸매를 본 박이창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네가 시습이라는 얘냐?”

“예! 그러하옵니다.”

체구에 비해서 또렷하고 낭랑한 목소리에 이창은 다시 한번 어린 시습을 자세히 보았다.

“너는 오늘 황공하옵게도 상감마마께오서 직접 네 재주를 시험하시려고 하시었으나 사정상 내가 대신 시험하니 그리 알고 잘 듣고 대꾸하여라. 알았느냐?”

“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좌중의 모든 사람은 그의 대답에 다시금 놀랬다. 이창은 웃음 띠운 얼굴로 시습을 향해서 한마디 읊었다.

동자지학 백학무 청공지말

( 어린 아이의 배움은 흰 학이 푸른 하늘가를 날아서 춤추는 듯하다. )

눈을 반짝이며 박이창의 첫 마디를 듣던 시습의 댓귀(대구)는

성주지덕 황룡번 벽공지중

( 어진 임금의 은총은 누른 용이 푸른 하늘 한가운데서 번득임과 같도다. )

시습의 화답이 너무나 엄청나서 박이창은 몰론 거기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은 놀라고 과연들은 대로 신동이라고 칭송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박이창은 눈만 반짝이고 앉아 있는 시습을 얼른 안아 무릎에 앉혔다. 몇 번이나 시(시)로서 어린 시습을 시험했으나 회수가 거듭될수록 그의 글재주에는 아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은 이창의 보고를 듣고 곧 시습을 내전에 들도록 하라고 분부하였다. 아직도 어머니 품에서 젖이나 빨게 생긴 어린애였으므로 세종은

“시습이가 바로 너냐? 가까이 오너라.”

“예!”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조용히 상감 앞으로 가까이 나갔다.

“많은 글을 배워서 성취하면 장래에 과인이 좋은 인재로 쓰리라. 알았느냐? 시습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세종의 용안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시습의 천재에 감탄한 세종은 그에게 상으로 비단 오십필을 하사하면서

“비단을 하사하겠으니 네가 직접 가지고 가거라.”

하였다.

시습은 머리를 조아린 채 곰곰 생각하는 것 같더니 비단 필을 모두 풀어 끝과 끝을 서로 이었다. 이렇게 오십 필을 이어가더니 상감께 공손히 하례(하례)를 하고는 비단 한 끝을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때 아닌 비단 사태(사태)가 대궐 문 밖까지 펼쳐져서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어쩌면 저리도 어린 것이 머리를 씀이 기발한가?”

이 소문이 퍼져 하루 사이에 온 장안이 어린 김시습은 신동인 게 분명하다는 얘기가 자자하게 되었다.

시습의 나이 열세살이 되었을 때는 당시의 대석학(대석학)인 김반(김반), 윤상(윤상)에게 학문을 구하고 있었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문종)이 병약하여 계속해서 승하하니 뒤를 이어 나이 열두살에 왕위에 오른 것이 단종이었다. 시습은 그때 스물 한살의 청년으로 삼각산(삼각산)으로 들어가서 독서를 일삼고 있었다. 어린 단종의 자리를 탐낸 수양대군이 마침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이 그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땅을 치며 무심한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 성군이신 세종이 승하하고 인자하신 문종이 잇달아 승하셨다. 그런데 대도(대도)가 아닌 왕위 찬탈이 웬말이냐? 이런 나라 꼬락서니 속에서 글을 배워 어디다 쓰고 시는 지어 무엇하겠느냐? )

그는 신변에 있던 서적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주저함이란 없었다. 정도(정도)를 살아가려고 배운 글이므로 정도가 무너진 세상에서는 소용이 없어진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를 깎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는 스스로 승호(승호)를 설잠(설잠), 청한자(청한자), 췌세옹(췌세옹) 등으로 불렀다.

남달리 작은 키에 몸매도 작아 어디 한 군데도 위엄이 있어 보이는 데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무섭지 않고 두렵지가 않았다. 뛰어나게 영민한 두뇌에 지나칠 정도로 마음이 곧아서 누구도 용납이 안 되었다. 지나치게 영민한 그의 머리는 화도 되었다.

삭발한 머리로 어느 한 절간에서만 수양을 하지 않고 온나라 산천을 메주 밟듯 쏘다녔다.

혹시 어느 사람이 그에게 학문을 구하려고 하면 마치 미친 사람 모양 돌을 던지고 활을 쏘면서 고함을 쳤다.

“이런 세상에서 학문은 닦아서 무얼 하느냐? 논밭이나 갈아서 배나 부르게 살면 된다. 그것이 제일이다.”

일리가 있는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그의 언행을 이상히 보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어쩌다가 벼슬아치들이 그의 눈에 띄게 되면 또 시비감이었다.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 너희 놈들은 백성만 들들 볶아 대느냐?”

말을 마치고는 대성통곡(대성통곡)하니 당시의 벼슬아치들도 그를 미친 사람으로 대접하고 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달 밝은 고요한 밤이면 냇가에 나가 앉아 글을 쓸 백지가 넉넉히 있을 리 없으므로 종이 한 장을 잘게 썰어 놓고는 시를 읊으며 붓을 들어 작은 글씨로 써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종이가 까매 없어질 때까지 계속하곤 했다. 이미 붓을 버리고 시를 아니 짓기로 맹서

한 그였지만 섬광처럼 지나가는 시심(시심)을 그냥 두기에는 안타까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손재주도 남달리 뛰어났다. 벼슬아치들을 저주하고 미워하는 그는 자연히 순박하게 땅을 파고 세상을 살아가는 농부를 좋아해서 그들의 모습을 나무로 다듬어 만들었다. 이렇게 형형색색의 농부 인형들을 늘어 놓고 하루 종일 보고만 앉아 있다가 끝내는 시를 적은

종이 조각과 함께 나무인형을 불살라 버리고 한숨을 몰아쉬며 울분을 삭였다.

목청이 남달리 좋은 그는 달밤을 즐겨하였다. 고요한 산중은 정적 뿐 아무도 없고 오직 달만이 벗이었다. 그러면 그는 그의 낭랑하고도 우렁찬 음성으로 굴원(굴원)의 이소경(이소경)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노라면 너무나 지금의 자기하고 닮은 굴원의 심중을 절절이 알 수 있었다. 세상이 모두 탁하고 더러운데 유독 혼자만 깨끗하려니 미친 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시습은 세종이 내전으로 불러서 하던 옥음이 아직도 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글을 성취하면 훗날 크게 쓰리라.”

하던 음성이다. 그는 묵묵히 무릎을 꿇었다. 세상 인심은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옷깃이 젖어와도 그는 영릉(영릉=세종대왕의 묘소)을 멀리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씻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당시의 현관(현관)인 서거정(서거정)을 시중에서 만났다. 그의 신랄한 입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다 떨어진 옷에 허리를 새끼로 두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강중(강중)은 그동안 살아 있었소? 불의(불의)의 부귀란 부운(부운)과 같은 것! 그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다니 답답하구료.”

서거정은 언제나 시습을 국사(국사)로 존중할 줄 아는 너그러운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으므로 그저 묵묵부답(묵묵부답)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고 듣고만 있었다. 이러한 얘기들이 세조의 귀에 아니 들어갈 리가 없었다. 어느 날 세조는 내전에서 열리는 법회(법회)에 시습을

불렀다.

임금의 명을 차마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 신하 된 몸이다. 직접 벼슬에 참례하지는 않았어도 만 백성은 임금의 신하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싫어하면서도 법회에 참례할 수 밖에 없었다. 법회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더 앉아 있기가 이제는 진정으로 지루하고 먼동이 터오자 몸이 비틀리는 듯 했다.

아까부터 빠져 나갈 구멍만 찾고 있던 시습은 모두들 밤을 세운 새벽이라 피곤하여 눈이 몽롱해져 있음을 틈타서 슬그머니 일어서서는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어느 누가 감히 상감이 친히 연 법회 자리를 도중에서 뛰어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모두들 정신이 번쩍 들고 아연해져서 곧 세조에게 품하자 상감은 진노해서 곧 잡아들이라고 추상 같은 하명을 내렸다. 사령(사령)은 뒤쫓아 나갔다.

그러나 쫓아가던 사령은 기가 막혔다. 똥과 오줌과 가진 오물(오물)이 범벅이 되어 있는 구덩이 속에 으젓이 얼굴만 내어 놓고 있지 않은가? 마구 휘저어 놓아서 냄새는 천지를 진동했다. 사령은 고함을 쳤다.

“어서 나오지 못하겠는가?”

“안 나가겠다. 어서 데려가고 싶으면 이리로 들어와서 안고 나가거라 하하….”

시습은 가가대소를 하며 사령을 골려 주고 있었다.

“고얀놈! 감히 누구의 명령이라고 네가 어기느냐?”

“이 똥만도 못한 더러운 앞잡이 놈아! 똥과 오줌이 무서워서 앞에도 못 오느냐?”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사령은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별 미친 놈 다 보겠군!”

하고 투덜거리면서 돌아가 버렸다. 그야말로 욕해도 통하질 않고 미친 척하니 속수무책(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살다가 나이 마흔일곱이 되는 해에 무슨 생각에선지 머리를 기르고 부인을 맞아 들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이제야 자기 정신으로 돌아간 줄 알고 이제는 세조에 나가 벼슬도 하고 부인과 부귀도 함께 누리라고 제가끔 그에게 권해 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전과 마찬가지로 생활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이대로 초토에 묻혀 사는 것이 훨씬 좋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는 또 죄 없고 명리(명리)를 모르는 순진한 애들과 놀기를 즐겨했다. 하루는 거리에서 애들과 놀고 있는데 영의정(영의정) 정창손(정창손)이 그 앞을 지나갔다. 그의 험구(험구)가 또 시작되었다.

“여봐라! 정창손아!”

당대의 세도가인 정창손을 함부로 이름을 불러대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상감도 영의정이나 기타 대감(대감) 청호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대를 못하는 법이었다. 오로지 시습만 할 수 있는 행동과 언행이었다. 시종들도 정창손도 발을 멈추었다. 이 꼴을 보던 사람들도

가슴을 떨며 그 귀추를 겁 반 호기심 반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욕을 해대었다.

“정창손아! 네놈이 영의정 자리에 올라 섰구나. 그래 그 자리가 그다지도 연연하더냐? 십년세도가 없다는 진리를 모르고 살지는 않을 텐데…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다. 전비(전비)를 뉘우치고 깨끗이 물러서거라! 어떠하냐? 내 말이…”

미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듯이 정창손은 탓하지도 않고 초헌(초헌)을 재촉해서 자리를 피했다.

시습은 그 뒷모양에다 대고 가가대소를 퍼부었다. 필시 후환(후환)이 무서울 거라고 거기 모여선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했다.

시습의 언행이 이렇게 두려운 것이 없이 거칠었기 때문에 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와 가깝게 지내면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지목당하고 자기 몸에 화가 미칠 듯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종실 중의 한 사람인 수천부정(수천부정) 정은(정은)을 비롯하여 남효온(남효온), 안응세(안응세), 홍유손(홍유손) 등은 여전히 그를 비호하고 친교를 끊지 않았다. 세상사란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줍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진리이다. 그들은 시습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 수있었다. 그리고 천재는 기인(기인)이라고 하는 말은 곧 이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 어린 상감이 왕위에 있는 것을 기화로 대군의 신분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미워하는 그의 기백이 가상하기도 해서 그들은 시습을 높이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 부인 복도 못 타고난 모양인지 시습은 늦게나마 얻은 부인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흔연했다. 별로 크게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세상과 벗하고 살 팔자가 못 된다고 일찍이 체념을 하였기 때문일까?

그는 다시 머리를 깎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전처럼 강릉, 양양간을 왕래하면서 산천과 더불어 살아갔다. 그때에 양양 원으로 있던 유자한(유자한)은 그를 대할 때마다 특별한 예로서 대했다. 그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유자한은 항상 자기를 찾는 그에게 극진한 예로서 충고를 잊지 않았다.

“다시 가업을 이으시고 안온한 생활을 하십시오.”

“아니요. 세상 꼴이 하두 뒤승숭하니 산이나 물이나 벗하고 사는 편이 훨씬 마음에 편안하오.”

시습은 언제나 이렇게 대답하면서 유유자적(유유자적)하는 것이었다.

시습은 탁월한 손재간으로 산에서 나무를 잘라 잘 다듬어서 자화상(자화상)을 두 가지로 만들었다. 하나는 젊었을 때의 자기의 얼굴이요, 또 하나는 늙었은 자기였다. 그는 한적할 때면 두 화상을 꺼내 놓고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네 얼굴이 지극히 못났고 네 말이 망언(망언)으로만 일관하니 이렇게 초토에 묻혀서 고생 함이 마땅하다.”

이 말이야 말로 자신을 한탄해 마지 않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일찍이 세 살에 글을 이해하고 다섯 살에 중용, 대학을 통독하여 작시를 일삼은 천재도 이군(이군)을 섬길 수 없는 지조로 인해 초토 속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으니 후세에 뜻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배울 점과 아울러 생각할 점을 남기고 있다.

그는 쉰아홉 천명(천명)을 다하는 날까지 산천을 소요하면서 지냈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가 가진 천부의 재간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를 모르고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미친놈>이라고 가벼이 부르며 천대했다. 그가 나이 쉰 아홉에 세상을 뜬 후 숙종(숙종)조에 와서 그에게 집의(집의)의 벼슬을 내렸다가 다시 정조(정조) 때에는 이조판서(이조판서)를 내리고 청간공(청간공)이라는 시호까지 하사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자손이 없었으므로 홍산(홍산)에 있는 무량사(무량사) 곁에 빈소(빈소)가 마련되고 삼년을 지냈다. 삼년의 춘풍 추우가 지난 후에 그를 장사지내려 개관(개관)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시습의 시체는 살아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절에 있던 중들은 혀를 내두르며 모두들 탄성을 올렸다.

“과연 부처님이 되신 게 틀림없다.”

그들은 시습이 생전에 있을 때도 안하던 일을 서슴지 않고 했다.

합장을 하고 그를 가리켜 <부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제가끔 고개를 숙이며 염불을 했다.

그들은 두렵기까지 했다. 시습이 생존했을 때 미친놈 취급을 하던 자기들 스스로가 큰죄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2 . 추강 남효온

남효온(남효온)은 의령(의령) 사람으로 호(호)를 추강(추강)이라고도 하고 행우(행우)라고도 불렀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글 보기를 좋아하고 글 짓기를 천적인 양 글 속에 묻혀서 지냈다.

일찍이 대학자인 김종직(김종직)의 문하에서 글을 닦고 인격을 기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취월장(일취월장)하여 가는 제자의 학문에 김종직도 항상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효온을 대할 때마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우리 추강! 우리 추강!”

하면서 그를 경칭(경칭)해 마지 않았다.

당시 석학으로 유명한 김굉필(김굉필), 정여창(정여창), 김시습(김시습), 안응세(안응세) 같은 대선배들도 효온을 형제와 같이 애지중지 아끼고 사랑했다.

성종(성종)시대, 그의 나이 이십칠세 때였다. 그는 임금께 소릉(소릉=문종의 왕후의 능)을 복구(복구)시켜 달라는 상소(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상소문이 무시당한 것을 알게 되자 이때부터 세상을 등지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명승지와 명산을 벗삼고 세월을 보내자는 심산이었다. 울적한 마음을 풀길 없는 생활이 계속 진행되었다. 높은 산에나 올라가자! 그리고 마음껏 이 마음을 달래어 보자! 그래도 시원치 않으면 소리를 높여 통곡이나 해보자!

얼마 후 그는 다시 마음을 고쳐 부중(부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조정의 일이나 부중의 일이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참고 있을 수가 없도록 모든 것이 눈에 거슬리고 귀를 시끄럽게 했다.

그가 사건 하나 하나를 예리하게 비평하며 비난을 일삼자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함부로 해도 괜찮단 말인가?” 하고 마치 자기 일 모양 걱정을 해 주었다.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는 김굉필, 정여창은 항상 그의 말을 위험하게 느껴서 충언을 잊지 않았다.

“여보게 추강! 옛부터 입은 화의 문이라고 해왔네. 제발 아무리 비위에 안 맞는 일이 있어도 참고 함부로 떠들지 말게.”

그러나 그의 귀는 선배들의 충언이 들리지를 않는 듯 여전히 위언(위언)과 격론(격론)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대했다.

어느날 매월당 김시습은 효온을 찾았다.

“여보게 추강! 그대는 무엇 때문에 부귀를 등지고 백면서생을 일삼으려 하나?”

“형은 왜 그렇게 석학의 머리를 썩히고만 있소?”

효온의 재빠른 반문에 시습은 서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야 일찍이 세종대왕의 지우(지우)를 얻어 성은에 보답하려고 학문을 닦았으나… 그대는 무엇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하느냐 말일세!”

“모르시는 말씀이요. 매월당은 소릉사(소릉사)를 천지의 변으로 아시우? 그렇지 않으면… 나는 소릉이 복구되지 않는 한 부귀도 영화도 안중에 없소이다.”

“과연 추강의 말이 옳소. 나 역시 오늘날의 고생이 낙으로만 여겨지는 터이니.”

과연 열사의 기풍이 역연했다. 세상꼴이 보기 싫으면 효온은 표연히 산 속으로 들어가 가슴을 달랜 후에 다시 부중으로 들어오곤 했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는 도중 그는 문득 <사육신>의 유지(유지)를 후세의 사람들에게 전해서 충의의 본보기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드디어 만난을 무릅쓰고 이들 학자들의 충성심을 청사에 남기기로 결심하고 붓을 들었다. 성삼문 등의 갸륵한 얘기들 즉, <사육신전>을 기록하려는 결의였다.

효온의 아들이며 부인은 걱정이 되어 말렸으나 누구도 그의 뜻을 꺾을 사람은 없었다.

어느날이었다. 사랑에서 붓을 들고 목숨과 바꾸는 대사업에 착수하고 있는 효온은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선생님! 그 일만은 제발 고만두십시오!”

<사육신전>이라는 말까지도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은 <그일>이라는 말로 대신 하였다. 그러나 효온은 시치미를 딱 떼었다.

“아니! <그일>이라니 무슨 소리냐?”

“아니올시다. 지금 집필중에 있으신 것 말씀입니다.”

“너희들 하고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어서들 물러가라.”

“선생님!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선생님 신변을 염려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발 삼가주십시오.”

“듣기도 싫다. 너희들은 학문이란 무엇 때문에 연마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는 위인들이다.”

“그러나 군자는 위험한 곳에 가깝게 가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지금 이런 세상에서는 근신하는 길만이 잘하는 거라고 저희들은 생각됩니다.”

“그러면 너희들 잘 들어라. 모두들 글을 쓸만한 문인(문인)들이 조정의 행패가 두려워 현인들의 충의를 기록해서 남기지 못한다면 길이길이 한이 될 것이 아닌가?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세상이 하두 뒤숭숭해서 말씀을 여쭙는 것입니다.”

“자네들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나도 아니지만 현세에 내가 아니 쓰면 감히 이 대사업을 해낼 용기 있는 학자가 없을 걸세. 그러니 나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사육신전>만은 완성해서 세상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하도록 하겠네.”

그의 뜻이 너무나 거룩하고 간절하였으므로 그 다음 말을 누구도 잇지를 못하고 숙연히 앉아만 있었다.

붓을 다시 잡은 그는 문장의 진행과 더불어 같이 울고 같이 한숨지으며 끝내 힘찬 기백으로 <사육신전>을 탈고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남효온이 없었던들 아무도 사육신의 원통한 혼을 위로할 사람이 없었고, 사육신의 충성스런 면모를 들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다. 울적해서 한잔, 세상꼴이 답답하다고 한잔, 위언격론을 일삼기 위해서 한잔, 거의 사시 장취(장취) 속에서 지냈다. 언제나 취중에서 사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 그래서 효온의 어머니는 기어코 그에게 충고를 하기로 결심하고 어느날 그를 불러 앉혔다.

“얘야! 술은 과하면 광약(광약)이 되는 법. 네가 그것을 모르고 마시는 건 아니겠지만 어미 마음이 너무나 답답만 하구나.”

그의 몽롱한 정신에서도 어머니의 이 말은 귓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예. 소자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취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는 못 사는 자식이오니 어머님께서는 양해하시고 너무 허물하지 마십시오.”

“아니다. 네 어미가 너를 허물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네 몸을 위해서나 집안을 위해서나 아주 술을 입에다 대지 않고 지내도록 힘써다오.”

어머니의 눈이 빛나고 있음은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으로 얼마 더 사시지도 못하실 어머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고는 싶지 않았다. 그는 단주(단주)를 순간적으로 결심하고 머리를 들고 어머니 앞에서 맹서를 했다.

“어머님!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단연코 오늘부터 술을 끊어 어머님 말씀에 부응(부응)하겠사오니 소자를 용서하시고 걱정을 놓으십시오.”

어머니는 기뻤다. 그러면서도 잘난 아들이 세상을 잘못 만나 괴로워하며 술로 잊어버리려는 것을 슬퍼하였다…

그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술을 한 모금도 안마시고 지주부(지주부)라는 글을 지어 어머니에게 드렸다. 모든 세상사를 잊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은 술의 힘을 빌리는 일이었으나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십년이라는 긴 세월을 단음(단음)하고 지켜 나갔다. 그는 울적할 때는 더욱 학문을 닦았고 글을 썼다.

세조 치하에서는 과거를 아니 하려고 결심한 그였지만 울적한 마음의 분출구는 글과 벗하는 것뿐이었다.

세상을 탄하면서 글 속에서만 묻혀 사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는 그 일도 답답하게 보였다.

“얘야, 넌 학문만 닦아서 무얼 하겠다는 거냐? 남과 같이 과거도 해서 세상에 그 재주를 알려야지. 그대로 머리 속에만 쌓아 두어서는 소용이 없지 않으냐?”

어머니 걱정은 보통이 아니었다. 늙은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저려온 그는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는 무엇이나 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생각했다.

(옳지! 장원급제를 해서 어머니를 또 한 번 기쁘게 해드리자. 그러나 벼슬은 하지 말자.)

“그럼 이번에 진사과거(진사과거)를 응시하겠습니다. 어머님의 소원이시라면…”

“오냐! 과연 효자로다. 그렇듯 싫어하면서도 이 에미를 위해서 과거에 응하겠다니… 과연 내 아들이다.”

어머니의 기쁨은 상상 외로 컸다.

그는 약속대로 과거에 응시하였고 무난히 급제할 수가 있었다. 온 집안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이 컸고 그 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그의 제자들도 이제는 선생님이 정신을 차리시고 출세를 꿈꾸시나 보다고 자기 일처럼 기뻐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누가 권해도 그는 결코 벼슬은 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도 효성스런 아들이었지만 벼슬하기를 권하는 어머니의 말은 한사코 듣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양해를 구했다.

“어머니, 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소자는 절대적으로 이 세조치하에서만은 국녹을 아니 받겠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소자의 결심은 동요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너 혼자만 버티어서 무얼 하겠다는 거냐? 신숙주 같으신 대학자님도 지금의 상감을 받들어 많은 일들을 해 오시고 있다는데…”

“그런 역적의 얘기는 어머님 입에 올리지도 마십시오. 어머님 입이 더러워질까 소자 저으기 걱정이 됩니다.”

“아니다. 세상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너 혼자만 유독 그렇게 곧은 척해보아야 세상이알아 주는 법이 아닌데. 네 생각이 이 에미로선 여간 답답하고 안타까운 게 아니구나?”

“어머님! 어떤 말씀으로 저를 나무라시고 권하셔도 그 결심만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불효막심한 소자를 용서하십시오.”

말을 마치고 두 모자는 함께 울음을 삼켰다. 아들은 아들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의 슬픔을 동시에 터뜨린 것이다.

그는 길지 않은 생애를 마쳤다. 천수가 삼십구세였다니 너무나 그의 글이 아깝고 또 충성이 아깝다.

세월이 흘러 이조 정조(정조) 갑진(갑진)에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란 높은 벼슬로 고인의 충혼의백(충혼의백)을 위로하고 시호를 문정공(문정공)이라고 내렸다.

 

 

3 . 경은 이맹전

이맹전(이맹전)은 벽진(벽진) 사람으로 호(호)를 경은(경은)이라 일컬었다.

세종(세종) 정미(정미)에 문과(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정언)으로 출세하였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상왕초(상왕초)에 지방관으로 내려가 거창 현감으로 있었다.

청백리(청백리)로서 그 이름이 청사에 빛나는 너무나 유명한 그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소문이 자자한 세조의 횡포를 귀 가지고 들을 수없고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감연히 벼슬자리를 내 놓기로 결심했다.

벼슬을 사는 동안에도 청백리로 이름이 떨쳤으므로 현감을 내놓고 선산(선산)으로 물러나온 후의 생활은 이루 형용하기 난감할 정도였다.

세조는 그의 뛰어난 문장을 아깝게 여겨 사람을 시켜 몇 번이나 재고를 권고해 왔다. 그러나 그는 굳이 고집하고 응하지를 않았다. 삼십여년 두문불출(두문불출) 사랑방만 지키고 산 그는 단 한 번도 북향(북향)해서 자리를 앉은 일이 없기로도 유명했다.

당시의 선비가 벼슬을 아니 하면 궁색하기란 불을 보는 것과 같이 환한 얘기였다. 날이 갈수록 집안 살림이 궁핍하다 못해 끼니가 간데 없이 되고 방은 뚫어지다 못해 흙이 꾸역꾸역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막을 만한 자리하나 마련할 형편이 못되었고 어쩌다 지어낸 밥상에는 똑똑한 수저 한 벌이 없었다.

진정 적빈(적빈)이란 씻은 듯하다더니 이 경우를 두고 한 말이 틀림없었다.

그는 항시 세상을 귀찮게 여기고 그를 긴히 만나고자 찾는 사람도 만나기를 꺼려 하였다.

그의 자제들은 이 일을 걱정하다 못해 가장인 맹전에게 물었다.

“왜 모처럼 찾아오는 친지들도 아니 만나시고 사절하십니까?”

“그런 것은 너희들이 걱정할 문제가 못된다. 나는 몸이 불편해서 수양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이다.”

밥도 제대로 못 끓이는 이 집 형편에 약을 구할 도리가 없으므로 그의 부인이나 자제들은 근심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외부 사람을 늘 사절하는 그였지만 매달 초하룻날이 되면 새벽같이 자리를 걷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동천에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재배 삼배를 공손히 마쳤다. 그의 이런 행동은 식구들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넉넉했다. 궁금한 식구들은 그에게 또 물었다.

“매월 초하룻날이면 동천을 향해서 해에다 배례를 하시니 그건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은 몰라도 좋으니라. 그저 내 몸에 병이 들어서 하느님께 완쾌를 기도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하늘에 기도를 하시지 왜 동배(동배)를 하시는지 참말로 이상하군요?”

“그런 것은 모두 몰라도 좋은 일. 아예 걱정들은 할 필요가 없느니라.”

맹전의 대답이 이러하니 가인(가인)들도 더 이상 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날 김종직(김종직)이 맹전을 찾아왔다. 맹전이 아무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을 일삼는다는 얘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찾는 것이 옳은 일인지 주저되었지만 위문도 할겸 만나자는 청을 들여보냈다.

가인이 이 말을 맹전에게 전하자 그는 거의 뛰다시피 나가서 종직의 손을 마주잡고 맞아 들였다. 집안 모든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납득이 가지 않아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김종직은 들은 바와 달라 그의 병이 완쾌되었나 싶어 물어 보었다.

“선생의 병환이 좀 쾌복(쾌복)되신 것 같사온대 어떠십니까?”

“병이 하룻동안에 완쾌될 리야 있겠습니까? 하오나 선생과 같은 대인군자를 만나 뵙고 흉금을 털어 놓고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오늘 얻은 것 같아서 이렇게 기운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야 김종직도 그의 흉중을 살필 수 있는 것 같아 흐뭇했다.

“이선생, 그 심중과 뜻을 얼마쯤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더욱 서로 자중자애(자중자애)하여 세상을 큰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나가십시다.”

“예! 김선생도 부디 오래오래 사셔서 나라가 되어가는 꼴을 지켜보십시오.”

그들은 이와같이 뜻 깊은 약속을 교환하고 재회를 얘기하며 헤어졌다.

김종직은 그제서야 맹전의 병은 신체의 병이 아님을 깨닫고 은근히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맹전의 부인이 들어왔다.

“영감, 이러다간 모두들 굶어 죽겠소이다. 어떻게 조치를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글쎄, 난들 어떻게 하오?”

“그러니 걱정입니다. 애들까지도 영감 때문에 길이 꽉 막혀버려서 과거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땅 한뙤기 없으니 농사를 짓는다고도 할 수 없고… 기가 막히기가 이를데 없군요.”

“그럼 당신을 날 보고 어떻게 하라는 얘기요? 얘기나 시원히 해보시구료.”

“생각컨대 그전까지는 몸에 병환이 심하셔서 그런 줄만 알고 약을 대접 못하는게 죄스럽더니 이제는 그렇지도 않으신 것 같고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니, 내 병이 그럼 하루 아침에 이슬 사라지듯 사라졌단 말이요? 무슨 말이요?”

“그게 아니라 김종직 선생이 오시던 날은 몇 시간이나 일어나 앉으셔서 아무 병환도 없으신 것같이 오랜 시간 얘기도 나누시고 얼굴빛도 참으로 좋으시던데요.”

“그야 지지지우를 만나니 어찌 반갑지 아니했겠소.”

“그러시겠지만 옆에서 뵙기에도 조금도 병환이 있으신 분 같지도 않더군요.”

“그렇게 알면 되지 않소.”

“그러지 않아도 한 걱정 덜어서 요사이는 집안이 한결 명랑해진 듯해서 드리는 말씀이예요.”

“아뭏든 잘 된 일이요.”

“여보, 영감! 제발 못 이기는 척하시고 조정에 좀 참례해 보시구료. 이렇게 더 가다간 영감은 물론 식구들 전부가 굶어 죽기 알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일!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있지 않소. 그 더러운 나라 안에 들어가 국록을 받아먹고 생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고 죽어 없어지는 게 얼마나 장한 일이라는 걸 언제나 나는 주장하고 있으니 다시는 내게 그런 말로 괴롭히지 마시오.”

부인은 어지간히 답답했다. 진정으로 모진 목숨을 억지로 끊을 수도 없고 살아 나가자니 조석으로 먹을 양식을 걱정해야 하므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남편의 청백한 성격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부인은 더 권해 보아야 영감만을 괴롭히고 아무 소득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집안에 재산이 있어서 생활을 걱정하지 않고 지내는 터라도 이렇게 벼슬을 고사(고사)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조반석죽도 못 이어가는 이러한 처지에 벼슬을 사양하는 것은 그가 아니면 감히 아무도 흉내도 못낼 일이었다.

상인(상인)이 아닌 양반의 자제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고 벼슬을 못하여 생기는 궁상이란 지금의 우리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비참한 일이었다. 혹 뜻있는 사람이 있어 그를 동정하여 얼만큼은 보태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번이지 사시사철을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또 나라와 등지고 공공연히 임금을 반대하는 역적과 비슷한 이들 선비와 식구들을 도와줄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는 구십을 살았다고 한다. 그 동안에 그의 굶주림과 헐벗음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그가 세상을 뜬 후 정조(정조) 신축(신축)에 이조판서(이조판서)의 벼슬을 증(증)하고 동시에 정간공(정간공)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한결같은 충혼(충혼)을 위로하였다.

 

 

4 . 어계 조여

조여(조여)는 함안(함안) 사람으로 호(호)를 어계(어계)라 했다.

단종 계유(계유)에 진사문과에 무난히 등제(등제)하여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의 문장은 탁월해서 사림(사림)으로부터 많은 신망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여는 돌연히 유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무슨 일인가 의아한 눈으로 보는 동문들에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밝혔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온 이래 을해(을해)년 들어서부터는 대과에도 참가하지 않고 두문불출을하고 지냈다.

을해년은 단종이 수야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바로 그해다.

조여는 수양대군 곧 세조의 신하가 되기 싫었고 그의 정도(정도)가 아닌 찬탈이 밉기 그지 없었다. 어린 왕을 보필해서 선정을 해야 하거늘 어린 상감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많은 충신을 죽이고 일가를 몰살하는 그 야망이 미웠다. 그의 시문(시문)에는 항상 고사리를 채식(채식)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어 하는 뜻이 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대도가 짖밟히는 세상꼴이며 나라 사직이 근심되었다. 이런 면에서 조여는 김시습과 뜻을 같이 했고 서로의 학문을 존경했다.

그 무렵 상왕이던 단종은 노산군(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산골 영월(영월)로 귀양살이를 떠났다.

청량포(청량포) 근처에 자리잡은 노산군의 우거(우거)를 가려면 나룻배가 그 강을 건너다 주어야 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억울한 노산군을 찾을 충신들과 뜻있는 사람들의 왕래를 막기 위해 교통을 두절시켰다. 따라서 청량포에 있는 모든 나룻배는 누구도 움직일 수 없도록 엄명이 전달되어 있었다.

조여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초옥에서 글만 읽고 지냈으나 어린 상감의 생각이 떠날 때가 없었다. 멀리 상감이 계신 곳은 오백리나 상거한 곳이다. 지금은 무얼 하시고 계실지, 중전까지 헤어지시고 홀로 산골 두메에서 무엇을 잡숫고 어떠한 지경에 놓여 계신지가 자못 궁금하고 염려 스러웠다.

그렇게도 총명하신 중전께서는 또 얼마나 지아비를 생이별한 슬픔을 안고 지내시는지 모두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상감이 계신 곳에 가서 한 번 뵙고 싶었다.

그러나 왕래를 끊고 배를 금지했다니 그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여간 그는 아침 일찍 단종이 있는 강원도 영월 땅으로 향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오백리 길이니 하루에 칠, 팔십리씩 걸어가도 칠일은 걸린다. 직접 용안을 못 뵈어도 상관없고 그저 옥체가 만강하신 것만 듣고 오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그 이튿날 새벽녘에 일어나 길을 떠났다.

첫날은 거의 백리길을 걸을 수 있었으나 다음날은 조금 피로했으므로 걸음이 느려지고 그 다음날, 또 다음날은 점점 걷는 거리가 짧아졌다. 그러나 상감의 옥체를 염려하는 그의 마음은 몸의 피로를 잊을 수 있게 하였다.

일주일안에 그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몸은 정말 솜같이 피로해 있었다. 그는 멀리 상감의 동헌이 바라보이는 청량포 앞에 와 닿았다. 바로 강 건너 있을 상감의 용안을 우러러뵙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눈물이 마냥 흘렀다.

“상감마마! 소신 조여가 멀리 용안을 우러러 뵈오려 오백리 길을 멀다 않고 왔사옵니다. 굽어 살피옵소서.”

그는 상감이 계실 동헌을 향해 마치 앞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국궁배례를 하였다. 그리고 곧 근처에 있는 친구인 원관란(원관란)의 집을 찾았다. 원관란의 집에서 유숙하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상감의 근황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유관란은 놀라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면서 조여를 반겼다.

“이것이 웬일이시오? 오백여리 먼 길을… 과연 그 충심이 하늘에 닿겠소이다.”

“무슨 말씀을. 자나 깨나 귀양 오신 상감 옥체만이 나의 관심의 전부인 것을… 수일 폐를 끼치게 될 것이 걱정이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푹 쉬시고 몸이 다풀리신 다음에 떠나시도록 하십시오.”

“고맙소이다. 항상 친구같이 좋은 것은 없는가 여겨집니다. 그건 그렇거니와 상감께서는 옥체만강하옵신지 궁금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예, 바로 상감께서 유합시는 근처에 사는 촌부를 한 사람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늘 동안에 홀로 나가 앉아 계신답니다. 예전대로 곤룡포를 입으시고 으젓이 앉아 계신 용안을 뵈올 때마다 그 고을 모든 사람이 눈물로 옷깃을 적신다 하더군요.”

“오호! 과연 상감마마는 위풍당당하시군요. 어떻게 하면 한 번 가뵐 수 있을지…”

그는 혼자서 상감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잡숫고 지내시는 일을 어떠 하시온지 알고 계십니까?”

“예, 그 얘기도 촌부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근처에서 잡히는 좋은 생선은 모조리 제일 먼저 상감께 진상하는 사람이 많이 있고 또 수라를 받드는 하인도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하늘의 비호입니다. 제발 성수무강하시어서 다시 햇빛을 보시고 억울함을 씻으실 날이 있어야 하겠는데…”

두 사람은 한숨만 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밤마다 어두어진 청량포 강가에 나와 앉아 건너편에 보이는 상감의 동헌을 향해 만수무강을 빌고는 큰 소리로 성수만세(성수만세)를 호창(호창)하였다.

그저 오래 오래 살아주어야만 일이 다 성취될 듯 싶은 마음이 이런 행동을 낳게 한 것이었다.

며칠을 유숙하고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날부터 그는 또 상감의 소식이 알고 싶어졌다. 솜같이 피곤해진 몸을 쉴 말미도 아니 주고 그는 다시 영월로 떠났다.

이렇게 그는 영월과 고향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한달에도 날짜가 허락하는 한 상감 곁 영월 땅에서 살기를 즐겨했다.

세월은 흘러 상감이 영월로 정배를 가고 삼년째 되는 정축년(정축년) 정월 초열흘.

바로 하늘도 땅도 같이 호곡해 마지 않은 단종의 마지막 날이었다.

조여는 마침 고향에 와 있었다. 영월을 등지고 온지 열흘도 채 안 된 날이었던 것이다.

그는 가슴이 메어지듯 아파 오는 것을 가눌 길이 없었다. 땅을 쳐도 보았다. 가슴을 쥐어 뜯어도 보았다. 그러나 원통함은 풀리지 않았고 이제는 이미 가신 님에게 대한 단심만이 영월 땅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는 곧 길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상감의 눈감으신 용안이라도 뵙고 쓸쓸한 정배지에서 상감의 옥체나마 수렴하고 싶어서였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발길을 재촉하여 청량포 강가에 이르렀다.

때는 한밤중이었다. 배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강을 건너야만 단종의 빈소로 들어갈 수있을 것이 아닌가?

그는 우왕좌왕 어쩔 바를 몰랐다. 하늘을 우러러도 보았다.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두 뺨을 적시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며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마를 통곡하다 자기 정신으로 돌아간 그는 결심을 새롭게 했다.

(이렇게 지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강을 건너가자.)

그는 훌훌 의관(의관)을 벗어 꽁꽁 묶어 등에 짊어졌다. 그냥 알몸으로 강을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막 한 발을 강 속에 집어 넣으려는 순간 무엇인가 뒤에서 잡아 당기는 것이 있었다. 그가 깜짝 놀래 멈칫하자 뒤에서 짊어진 옷을 또 한 번 잡아 당겼다. 머리칼이 하늘로 솟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그는 <흑!> 하고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옷을 잡아당긴 장본인은 사람도 아니고 더욱 귀신도 아니었다. 그것은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빛나는 대호(대호)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마음을 도사렸다.

무서운 생각을 누르고 산중의 왕인 호랑이에게 자기의 마음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는 목소리를 굳건히 가다듬었다.

“너 호랑이야! 내 옷을 왜 잡아당기느냐? 나는 불원천리 영월적소에서 한을 품고 처참히 세상을 떠나신 상감을 뵙고자 온 것이다. 그런데 청량포가 길을 막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하늘이 나를 도와서 이 나루를 건너거게만 되면 상감의 빈소로 가서 왕의 옥체를 수렴(수렴)도 하겠지만… 만일 이 강을 못 건너간다면 나는 이대로 강속으로 걸어갈 작정이다. 가다가 가다가 못 가면 이대로 창파의 귀신이 될 각오도 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내 갈 길을 방해하며 끌어 잡아당긴단 말이냐? 너는 만가지 동물중의 명물이라고 들었는데 네게 어떤 꾀라도 있단 말이냐? 그렇다면 내게 지시를 해주렴!”

아무리 동물 중에도 영물이라고 한들 그의 말이 들릴 리 없고 그의 뜻을 알 까닭이 없지만 하도 다급한 끝이라 그는 이렇게 사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가끔 세상에는 상식과 지식으로는 이해 안 되는 일이 생기는데 바로 이때 그런 일이 생겼다.

조여의 말을 듣고 눈만 번쩍이고 있던 호랑이는 마치 말을 알아듣기나 한 것처럼 고개를 크게 두어번 끄떡끄떡하더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넓죽이 엎디었다.

조여는 급한 김에 말을 했지만 이렇게 되자 과연 호랑이가 영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라. 네가 나를 업어다 준다는 것이 틀림없으렷다. 이것이 천우신조가 아니면 무엇이랴. 과연 불쌍하신 상감을 위한 하늘의 뜻이로다.”

그는 급히 호랑이 등으로 뛰어 올라탔다. 분초가 급했다.

“어서 가자. 네 덕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어서 강으로 내려서라!”

그는 마치 말을 몰 듯 대호 등에 업혀서 명령하였다. 호랑이는 주저 없이 강물로 뛰어 들어 단숨에 청량포 대안에 와 닿았다. 마치 그의 명령을 알아듣기나 한 것처럼 섬광같이 빠른 동작이었다. 호랑이 덕에 강을 건너간 조여는 호랑이 등을 어루만지며 인사를 했다.

“과연 영물이로다. 네 은혜는 길이 잊지 않으마.”

호랑이도 조여의 말을 알아듣고 기쁜 듯이 고개를 끄떡이더니 그 큰 몸집을 서서히 산 속으로 숨겼다.

그는 상감의 빈소를 찾아 들어갔다.

빈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단종의 시체를 지키는 수직자(수직자) 두 사람이 어이없이 앉아 있었다. 일국의 국왕이었던 사람의 빈소가 이럴 수가 있을 것인가 생각하며 그는 통곡하였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땅을 치고 인지상정을 탄해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곧 눈물을 거두고 일어섰다. 그리고 사배(사배)를 올렸다. 그의 눈에서는 또 새로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그는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수의(수의)도 따로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입고 있는 옷 그 대로에다가 공들이고 정성을 다해 수렴을 마쳤다. 그리고 또 손 모아 명복을 빌고 사배를 드린 후 빈소를 나와 캄캄한 강가로 나와 섰다. 이제는 이 강을 걸어 건너야만 할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었다. 시체나마 상감의 용안을 오로지 자기 혼자만 뵐 수 있었다. 게다가 수렴도 정성을 모아 해드렸다. 이제는 죽어서 님을 따라 가는 길도 헛되지 않게 생각되었다. 그의 눈에서는 또다시 끝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 아까 산속으로 들어갔던 호랑이가 다시 그의 앞에 오더니 넓죽이 엎드렸다. 어서 타라는 듯했다.

“오! 넌 아까 그 호랑이가 아니냐! 불쌍하신 상감의 용안도 돌아가신 후나마 뵈옵고 또 직접 내 손으로 소원이던 수렴도 해 올렸다. 그러나 어찌 이다지도 세상 인심은 냉랭하더란 말이냐! 촌부 한 사람도 빈소에 참배 온 사람이 없으니! 너희 동물의 세계가 오히려 부럽고 또 부끄럽기도 하구나!”

그는 말이 통하는 인간에게 지껄이듯 이렇게 자기의 심회를 털어놓고는 다시 호랑이 등에 업혔다. 조금 전과 똑같이 그는 호랑이 덕으로 청량포를 단숨에 넘을 수 있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도와주신 것. 그러나 네 은혜는 내가 세상에서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잊지 못하겠다.”

여전히 호랑이는 그의 말을 알아들은 양 서서히 산중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고향에 돌아온 조여의 얘기를 전해 들은 사람은 누구나 감동하여 그의 충의심을 찬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추강 남효온이 이 말을 듣고 감격해서 읊은 시 한수를 여기 소개 한다.

 

호도청량포

( 호랑이가 조여를 업어 청량포를 건너 주니)

조옹감노산

( 조여는 노산군의 시체를 염하고 돌아오도다.)

 

 

5 . 문두 성담수

성담수(성담수)는 창녕(창녕) 사람으로 호(호)를 문두(문두)라 일컬었다. 세종 경오(경오)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교리)로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유명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과 한 집안 사람이었다. 성담수는 항상 성삼문과 만나기만 하면 사직(사직)에 관한 걱정만을 얘기했다.

“자네와 나는 어디까지나 왕실을 위해 이 목숨 다하기까지 어떠한 난관이 닥쳐와도 뚫고 나가야 하네!”

대하기만 하면 성삼문은 이 말로 인사를 대신 하다시피 했다.

그도 성삼문에게 못지 않은 충심을 그에게 맹서했다.

“저도 생명이 진하도록 어리신 상감을 위해서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일은 끝나고 말았다. 상왕으로 수강궁에서 비탄에 젖어 있는 어린 상감을 받들어서 다시 왕위에 모셔야 되겠다는 집현전 학사들의 모의가 사전에 탄로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조가 조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성삼문을 죽여 없애자 담수도 성삼문의 친척이기 때문에 국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네 이놈! 성삼문과 모의한 사실을 낱낱이 얘기하면 살려둘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너도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아라.”

추상 같은 호령과 무서운 매틀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담수는 끝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너희들 맘대로 죽이겠으면 죽이고 살리겠으면 살려라.”

그의 태도는 태연자약했다. 그는 어떠한 형이 가해져도 끄떡 안하고 냉소만 띠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김해(김해)로 추방되어 삼년이라는 세월을 귀양살이 하게 되었다. 그는 삼 년후에 대사(대사)가 내려 공주(공주)로 갔다.

담수는 박학다식(박학다식)한 사부(사부)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향리에서 일개 농부와 똑같은 옷과 음식을 취하면서 지내기가 일쑤였다.

향리 사람들이 일개 전부(전부)로만 알 뿐 어떤 사람인가를 알지 못할 정도로 그는 자기를 숨기고 소박하게 살았다.

담수에게 육촌(육촌) 형의 아들이 한 사람 있었는데 이름을 몽정(몽정)이라 하고 경기감사(경기감사)로 있었다.

몽정은 경기감사가 된 후 담수를 친히 찾아보았다. 그러나 문 앞에 당도한 몽정은 담수의 집 대문이 일개 춘부에 집만도 못한 것을 보고 놀랐다. 더구나 집만도 안내된 몽정은 집 속이 어찌나 퇴락하였는지 비바람도 막지 못하게 된 형편인데다 방이란 방은 모두가 흙방이고 깔자리 한 닢 변변한 게 안 보이는데는 더욱 놀래버렸다.

담수의 성품을 잘 아는 몽정은 인사만 치르고 그대로 하직을 하고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곧 돗자리 몇 닢을 담수의 집으로 보냈다. 아무리 강직한 그일지라도 돗자리마저 아니 받을 리야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가인이 이 일을 담수에게 알리자 그는 곧

“이 돗자리는 흙방에 깔기에 지나치게 좋은 자리다. 우리 집 방에는 가당한 돗자리가 아니지 않느냐? 어서 빨리 돌려 보내라.”

하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흉하기 그지없는 방안에다 이 돗자리를 깔면 흙이 나오는 것을 막는다 생각한 가인들은 그것을 돌려 보내가기 아까왔다. 그래도 담수는 재삼 재사 돌려보내야 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인들은 입을 모아

“그건 너무 하시는 처사십니다. 이 돗자리가 무슨 뇌물로 들어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보낸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담수는 가인의 말을 다 들은 후

“너희들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이 돗자리는 우리 집에 가당치도 않은 물건이란 말이다. 어서 두말하지 말고 곧 돌려 보내라!”

역정을 내는 가장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세조 치하의 어느해였다. 죄인의 자제를 등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세조가 인심수습을 위한 한 수단으로 벌인 일이었다. 이 벼슬은 벼슬중의 말단직인 참봉(참봉=종구품)의 자리였다.

죄인의 자제들은 호기도래(호기도래)라 생각하고 누구나 머리를 싸매고 이 자리를 차지하려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담수만은 이 권내에서 벗어나 참봉 벼슬을 헌신짝같이 여겼다.

가인들은 그에게 나가기를 종용해 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강요로 그의 마음이 움직일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다.

그는 유유자적 낚시질을 일삼았다. 나물죽을 한 술 떠 먹고는 낚싯대를 걸머메고 낚시터로 향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고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아서 가는 낚시는 세상 도피행이라고 볼 수 있다.

집에서는 시를 읊어 우울한 심사를 풀곤 했다. 그의 조어시(조어시) 한 수를 보면 뛰어난 시재(시재)를 알 수 있다.

 

파간종일진강변

( 하루 종일 낚싯대를 드리우고 강변에서 머물러 있다가 )

수족창낭단일면

( 푸른 물결 속에 발을 넣고 졸기도 하는도다. )

몽여백구비만리

( 꿈속에서 백구와 짝이 되어 만리창공을 날다가 )

각래신재석양천

( 문득 꿈에서 깨어나니 몸은 석양이 비낀 하늘 아래 있구나. )

 

죄인의 족질(족질)로 아니 직접 주목 받아서 국문을 받고 귀양살이를 삼 년이나 하고 지낸 그에게 어찌 그런 여유가 있었는지? 오히려 지금의 우리들 심경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얘기다.

그는 죄인들의 자제를 붙들고 그런 치욕적인 벼슬은 단념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이구동성(이구동성)이었다.

“아 이기회에 우리들이 나라 혜택을 못 받으면 언제나 다시 햇빛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세상 일이란 그런 것만은 아닐세. 자네들은 역사를 무엇 때문에 배우고 학문을 무엇 하려고 배웠나? 지금 이런 나라에서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서 국록을 받아 벼슬을 한다는 것은 아버지나 할아버지께 면목이 없고 집안 선조들에게 욕보이게 하는 결과밖에는 아니 되는

것일세!”

그의 이런 충언이 벼슬에 급급한 그들의 귀에 옳게 들어갈 수는 없었다. 오히려 뒤돌아 세워 놓고 욕하기가 상례였다.

그는 그들이 자기 말을 듣거나 아니 듣거나 개의하지 않고 벼슬을 탐내어 법석대는 사람들에게 향하여 일일이 충언을 잊지 않았다.

그는 늙는 날까지 이 어지러운 세태를 목도할 수가 없었다. 우선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조의 태도가 미웠다.

세종, 문종, 단종 대대로 충의를 맹세한 중신들의 손바닥을 뒤집는 듯한 배반도 증오스러웠다. 이래가지고 어찌 나라가 제대로 잘되어 나갈 것인지 저으기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비분강개(비분강개)하는 나날의 삶이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고 흉중을 털어놀 동조자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채 몸이 늙기도 전에 충분(충분)에 못이겨 죽고 말았다.

정조(정조) 신축(신축)년에 이르러 상감은 그의 고절(고절)에 감동하여 이조판서의 벼슬을 증하고 다시 그에게 정숙공(정숙공)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충혼과 의백을 위로해 주었다.

 

 

6 . 관란제 원호

원호(원호)는 원주(원주) 사람으로 호(호)를 관란제(관란제)라 불렀다. 세종(세종) 계묘(계묘)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직제학(직제학)까지 올라선 사람이다.

단종(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그는 결연히 이 자리를 내놓고 초야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영월)땅으로 정배를 떠나게 되자 그는 조석으로 호곡하면서 지냈다. 그리고는 하루 빨리 천우신조가 있어 어린 임금의 왕위복구가 이루어 지기를 하늘에 기원하며 나날을 지냈다. 그러나 하늘도 강자에게 가담하는 모양인지 이 모든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생활은 죽기가 원이었다. 그래도 단종이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그의 소망과 희망은 한가닥 없어지기 않고 있었다. 상감이 살아 있는 동안은 자기도 살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금성대군(금성대군)의 왕위복구 모이도 탄로되고 말았다.

하늘이 도와 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힘이 모자랐고 세조는 국가와 온 백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지방 벼슬아치들의 의분과 거사는 세조의 눈에는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세조는 이렇게 역도가 도량(도량)하는 것은 노산군이 살아 있는 연유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곧 영월의 노산군을 세상에 살려 둘 수 없다고 결정지었다. 물론 거기에는 세종 때부터 많은 은총을 받아오던 변심한 중신들이 시사한 바가 컸던 것이다.

영월 적소에서 아무 소식도 모르고 한적한 시간을 무료히 보내고 있던 단종이 열일곱의 어린 나이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금성대군의 모의 탄로가 약간의 책임을 가질 수도 있다.

단종의 죽음은 온 백성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번져갔다.

온 백성은 소리 없이 울었다. 세조 치하의 벼슬아치들의 눈이 무서운 착한 백성들은 서로 서로 몰래 가슴을 태우고 쥐어뜯으며 오열을 금치 못했다.

벼슬을 살아서 세조의 국록을 먹는 인간들도 몰래 눈물을 감추고 가슴으로 울었다. 죄 없이 사사(사사)당한 어린 임금의 기구한 운명이 뼈가 저리도록 슬펐다.

원호는 예기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실신할 정도로 비탄에 잠기고 말았다. 이제는 진정 세상을 살아나갈 아무 의의도 보람도 없었다.

그는 하룻밤을 그대로 영월 땅을 향해 배례하고 앉아 묵상하고 울며 지냈다. 동이 텄다.

그는 홀연히 영월 땅으로 향해 집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가인에게 이 뜻을 전했다.

“무엇 때문에 그 먼 데를 가려고 하십니까?”

모두들 이와 같이 말하며 말렸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요지부동(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삼 년 동안을 집에는 아니 돌아오겠소. 상감의 복상(복상)을 삼년간 할 예정이요.”

“아니 어디서 무얼 먹고 지내면서 삼 년 동안이나 지나겠습니까?”

당연한 물음이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한 빛을 나타내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천상 천하에 오로지 한 분이신 귀하신 옥체가 죽음을 당하셨는데 내 한 몸쯤은 어디서 무얼 먹으면 어떻단 말이요. 살다 살다 못 살면 우리 님을 따를 뿐이요.”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결의를 막을 힘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가인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는 입은 채로 곧 길을 떠났다.

영월 땅은 원주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그는 곧 영월 땅에 가 닿았다.

잠잘 곳이 있을 리가 없었고 더구나 그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월은 산골 두메였다. 그런데다 그는 상복(喪服)을 입고 있었다. 정월 달이니 춥기가 말할 수 없었다. 하루 이틀은 어떻게 구걸해서라도 잠은 잘 수 있을 것이고 밥도 얻어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왕 삼 년이라는 세월을 복상하기로 작정하였으므로 하루 이틀만 편안히 자기를 원치 않았다. 며칠이라도 따뜻한 잠자리가 그에게는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는 한 발 한 발 산중으로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토굴을 하나 발견해서 삼 년간의 거주지로 삼을 작정으로…

그는 드디어 비바람을 막을 만한 토굴을 하나 발견했다. 삭풍이 휘몰아 쳐오는 겨울도 여기서 나야 할 것이고 숨이 탁탁 막힐 정도로 뜨거운 여름도 이 토굴에서 지내야 했다.

단종을 위한 복상의 토굴생활은 이만저만 비참한 게 아니었다. 비바람은 막아 준다고 해도 눈보라 쳐오는 겨울 밤을 몇 밤이나 뜬눈으로 보냈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짐승이 무서워 찌는 듯한 여름 밤도 토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야만 했다. 따로 이 먹을 음식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연명만 되도록 온갖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다 뜯어다 먹었다. 잡아 먹을 수 있는 작은 짐승들은 닥치는 대로 잡아 먹었다.

삼 년이란 긴 세월은 그에게 눈물과 한숨의 연속이었다. 드디어 삼 년의 복상이 끝났다.

남아 있는 목숨을 달래면서 그는 자기 고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많은 날이 새삼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몇 번이나 죽기보다도 어려운 삶을 저주하고 죽으려고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살아 있는 육체를 지탱하려면 또 그의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마침내 삼년상을 마친 그는 원주로 돌아왔다. 모든 고향 사람들은 어디서 죽었던 사람이 살아 온 듯 반기며 인사를 하였다.

그는 돌아오는 날부터 자기 방 속에서 두문불출을 일삼았다. 으레 앉는 자리는 동쪽을 향하고 어린 임금의 참사를 추모하며 지냈다. 가인들이 그를 보고 그의 좌와(坐臥)를 이상히 여겨 물었다.

“어찌해서 꼭 그 자리에만 계십니까?”

“상감이 돌아가신 곳이 영월 땅! 나는 항상 그 분을 추모하는 의미로 이렇게 자리를 하고 앉아 있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의 삶은 오로지 단종의 추모를 위한 것이고 단종을 생각하는 일념 뿐이었다.

정조(正租) 신축년(辛丑年)에 상감은 그의 고고(呱呱)한 단심을 높이 평하여 이조판서의 벼

슬을 내렸다. 정간(정간)이란 시호는 그의 곧은 절개를 뜻함이다.

 

 

7 . 율정 권절

권절(권절)은 안동(안동) 사람으로 호(호)를 율정(율정)이라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비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힘이 장사였던 그를 사람들은 남이(남이) 장군에 비해서 말했다.

또 문장에도 통달하여 그 재주가 월등하였다. 세종 정묘(정묘)에는 문과에 급제하고 마침내 문무를 겸전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무(무)로는 사복시(사복시) 직장(직장)으로도 있었고 문(문)으로는 집현전 교리로도 있었다.

수양대군으로 있던 세조가 그런 인재를 놓칠리가 없었다. 더욱이 대사를 성취하려면 기어이 이러한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수양대군이 친히 그의 집을 찾아갔다.

“난 권공을 꼭 동지로 맞고 싶으니 미의(미의)를 살펴 주시면 무상의 영광이겠소이다.”

그가 수양의 야망을 모를 리 없었다.

“저어 뭘! 많은 좋은 인재들이 대감의 주위에는 많사온데…”

그는 어쨌던지 간에 자리를 회피할 생각만이 앞섰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끈질기게 몇 번이나 그의 대답을 들으려고 찾아왔다. 그는 난처했다. 죽어도 그의 야망에 야합하기는 싫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은… 종친이라는 것보다 상감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육박해 가는 때였다.

자신의 생명이 중하기는 하지만 수양대군과 같이 자리를 하고 음모를 얘기하기란 죽는 일보다도 더 싫었다. 수양은 지치지 않고 문무를 겸한 그를 얻으려고 백방으로 손을 써왔으나 그는 수양대군을 피해서 은신을 일삼았다. 그러나 은신도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어렵기 짝이 없었다. 친척 집에 숨어 있는 권절을 찾아낸 수양대군은 단신 또 그를 찾아왔다.

“권공! 내 말을 들어 주시오. 권공 같으신 분을 얻게 되면 귀신에게 쇠몽둥이와 같은 역할이 되고도 남을 줄 익히 알고 이렇게 재삼재사 권공을 괴롭히는 겁니다.”

“대감! 벌써 여러 차례 사양의 말씀을 올립니다마는 저로서는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아 국록을 먹고 지낸 몸이라 그 전통을 무시하고 어리신 왕을 보필은 못할망정 그 자리를 찬탈하려는 음모에는 하늘에 머리를 두고는 감히 가담할 수 없사옵니다.”

“권공의 말씀은 지극히 곡해(곡해)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절대로 단종의 자리가 탐나서 음모를 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시다면 무엇 때문에 이 나라에 있는 병력을 무시하고 사병(사병)을 기르시기에 골몰 하십니까?”

그의 음성은 노해서 약간 떨렸다.

“그것은 권공이 진정 모르는 말씀입니다.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어리신 상감을 위해서 충성을 다해서 보필할 작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근래 들어온 극비에 속하는 소식인데 좌의정 김종서가 상감을 없애려고 갖은 흉계를 다 꾸미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어리신 상감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을 수 있으며 사직을 지켜 주는 사병을 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권절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아니 구토증이 나도록 속이 들어다 보이는 그의 권모술수(권모술수)가 미웁고 비겁해 보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김종서같이 오로지 사직과 상감만을 위하고 생각하는 일념으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을 모독하다니…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이제 곧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야기될 것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이다지도 정권욕이라는 것이 크고 대단한 것이란 말인가?

그는 더욱 더 근신하고 한 발자국도 밖에는 나가지를 않았다. 거처도 다시 옮겼다. 가인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수양대군도 이제는 단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양의 음모는 착착 진행되어 김종서 등 눈에 가시 같은 존재를 다 처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일년 후 단종을 허울좋은 상왕(상왕)으로 만들고 단종 스스로 양위(양위)한다는 대의명분(대의명분)을 세워서 세조 원년으로 호를 바꾸게 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곧 권절을 내버려 둘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권절 같은 준재(준재)를 초야에 묻혀 놓기가 아깝게 생각되어서였다. 과연 세조는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혜안(혜안)을 가진 영매(영매)한 인물이었다.

세조는 권절에게 첨지중추부사(첨지중추부사)란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금병(금병)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권절이 이 벼슬을 받을 리가 없었다. 그는 임금이 내린 벼슬을 고사하기가 무엇 보다도 어려웠다. 이 땅에서 생명을 향유하고 사는 한 상감의 하명을 거절하는 길은 단 한 길밖에는 없었다. 미친 척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올바른 정신으로는 조정을 잡고 휘두르는 세조의 엄명을 거역하기란 정말 난감했다.

그는 미쳐버렸다. 그 편이 훨씬 편안했다. 주변 사람들의 근심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고 가인들의 걱정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미친 모양이다. 저렇게 훌륭하신 분이 어떻게 저런 모양으로 되어버렸을까?”

이것은 그를 아는 친지들의 걱정스런 화제였다.

“어떻게 하면 좋담. 벼슬은 마다 하시고 이제는 저런 꼴이 되셨으니…”

이것은 집안 식구들이 맹랑한 그의 모양을 근심하다 못해 토한 얘기였다. 이제는 미쳤으니 미친 척해야만 했다. 그는 거리로 나섰다. 미친놈이 되려면 본격적으로 미친놈이 되어야 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미쳐 있었다. 세조 치하에서 국록을 먹는 높은 벼슬자리의 대감을 만나도 그랬다. 말단 벼슬을 천직으로 알고 지내는 미관(미관)인 사람들에게도 그러했다.

그는 입가에 정말 미친 사람에게만 있는 헤픈 웃음까지 흘리며 입버릇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이렇게 지껄였다.

“나라가 태평해져 잘 사시리라. 나라가 태평해져 성주(성주)의 덕이 크시리다!”

그의 야유였다. 이제는 길가는 애들까지도 미친 권절을 만나면 그의 말을 흉내내기가 보통이었다.

“나라가 태평해져 잘 사시리다! 나라가 태평해져 성주의 덕이 크시리다!”

동심이 그의 뜻을 알 수는 더욱 없었다. 그의 옆을 따르면서 또 한 번 외우고는 꺄르르 웃고 흩어지면 권절은 쓸쓸했다. 진정으로 미친 사람이 되어버린 자신이 가증스러웠다. 이렇게 하면서도 사는 것이 과연 잘 하는 것인지도 분간이 안갔다. 그는 결국 이와같이 일생을 마쳤다.

이조 숙종(숙종)조에 와서 숙종은 그의 충의를 높이 평하여 이조판서란 벼슬과 충숙공(충숙공)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찬하였다.

 

 

8. 정제 조상치

조상치(조상치)는 창녕(창녕) 사람으로 호를 정제(정제)라 부르기도 하고 단고(단고)라고 부르기도 했다. 세종 기해(기해)에 생원 문과(생원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부제학(부제학)으로 출세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선양(선양)을 받자 높은 지위에 있는 벼슬아치들이나 낮은 자리에 급급하는 미관말직들까지 앞을 다투어 세조에게 나아가 아부를 겸한 하사(하사)를 올리기에 혈안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조상치만은 신병을 핑계삼아 입하(입하)를 하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세조에게 올리고 벼슬을 사퇴하고 말았다.

< 군자(군자)의 도에는 여러 길이 있사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도 군자가 취할 태도입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에 뒤로 물러설 줄 아는 것도 군자의 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컨대 소신은 말직을 이 시기에 물러나고 싶사오니 부디 청허(청허)하여 주시기 비옵니다.>

이 글을 받아 쥔 세조는 이렇게 뛰어난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 결심하고 그를 중용(중용)해서 그 마음을 잡아 두기 위해 그의 사퇴 글을 반려(반려)하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오히려 과할 정도의 예조참판 벼슬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상치에게 예조참판이눈에 들어 올 리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도대체 벼슬이 우습게만 보였다.

그는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는 세조의 성화 같은 참정(참정) 권고가 시끄럽고 나중에는 뜻하지 않은 화로 발전될 것을 염려하여 곧장 동대문으로 나와 고향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만인이 바라는 좋은 벼슬자리를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서 초야에 묻히기로 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조상치를 본 우국지사(우국지사)의 한 사람인 박팽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분은 우리 사림(사림)의 스승이시다. 그 높으신 절개를 감히 누가 따를 수 있으리오!”

다시 성삼문은

“그분은 영주(영주=영천)의 청풍(청풍)이시다. 우리들은 그분에 비하면 죄인에 불과한 몸이다.”

하고 그를 칭송하였다.

마침내 그는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 와서 세상을 잊고 지냈다.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향촌의 촌부들 뿐이었다. 아무 야망도 야심도 없는 소박한 인심이 그를 끌었다. 그의 머리 속을 오락가락하는 것은 어린 상감이 누구의 비호도 없이 산골 두메 영월 적소에 있을 것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일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초야에 묻히겠다는 뜻을 밝히자 그를 높히고 칭송해 마지 않았던 박팽년, 성삼문을 생각하였다.

그들은 뜻이 맞는 동조자들과 왕위 복구를 도모하다 사전에 세조의 귀에 들어가서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목숨이 붙어 있을뿐이지 살아 있다는 심정이 아니었다.

아니 이땅에서 살고 싶지도 않았다. 많은 우국지사들이 참변을 당한 이때에 게다가 수없는 종친들이 귀양살이를 떠나고 박해를 받고 있는 이때에 혼자만이 알뜰하게 목숨이라고 보존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단종이 살아 있다니… 끝내 멀리서나마 바라 뵙고 살고 싶었다.

(열다섯 되던 해에 영월 적소로 떠나셨으니 금년은 열여섯이 되셨으리라! 부디 사육신들의 사무친 원한이어! 눈감고 나라를 지켜 보아주오!)

하루종일 감회는 이러한 우수 속에서만 교차되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어린 상감의 소식이 그의 가슴을 적시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단종은 일찍이 문장에 뛰어났다. 할아버지 되는 세종이 그렇게 탁월하게 글에 치중하던 사람이요, 또 아버지 되는 문종이 병약해서 일찍 승하는 하였을망정 뛰어난 글재주를 지녔던 사람이라 그 혈통에서 나온 단종도 문장력은 타인이 감탄할 정도였다.

단종은 영월 적소에서 홀로 지내면서 많은 피눈물 나는 시문(시문)을 엮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중에 단종이 열여섯 되던 해에 지은 시가 바로 앞에 소개된 자규사(자규사)이다.

단종은 즉위한 이래 하루도 마음 편안한 날이 없었다. 수양대군은 좌의정 김종서가 상가 이 어림을 기화로 단종을 폐위하려는 음모를 한다고 죽여 없앴다.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두렵고 못마땅한 존재가 김종서였기 때문이었다.

총명한 단종은 비록 어렸을망정 그의 무서운 야망을 몰랐을 리는 없었다. 그는 전전긍긍 속에서의 나날이 역겨워 수양대군에게 <양위>라는 미명하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더 피비린내 나는 일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칠 줄 모르는 충신들의 단종 왕위복구를 위한 모의는 단종을 사고무친하고 두메 산골인 영월 땅으로 몰라 넣게 하고 말았다. 겨우 나이 열다섯살 되던 해였다.

단종의 적소 근처에 있는 향촌 사람들은 어린 임금의 도도하고 으젓한 풍모와 태도에 놀라고 감복했다. 그러나 단종은 항상 우수에 잠긴 생활이었다. 결국 그의 이 쓸쓸한 심중이 <자규사>로 나타난 셈이다.

조상치는 이 시를 전해 들은 후부터는 거의 매일 이 <자규사>를 외우면서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영천으로 돌아온 후 단 한 번도 세조가 있는 서향(서향)을 해서 자리를 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조상치는 <자규사>에 화답해서 이렇게 노래 불렀다.

 

자규제자규제

( 두견이 우는구나! 두견이 울어! )

야월공산하소소

( 달밝은 밤에 하늘에 호소하는 것인가! 산에 호소하는 소린가! )

간야중조총안소

( 뭇새들은 모두 보금자리에 들어 편히 자고 있는데, )

독향화기혈만토

( 너 혼자만이 외로이 꽃가지에 앉아서 피를 토하고 있구나! )

형단영고모초래췌

( 외로운 그 모양도 애닯어라! )

불긍존숭수이고

( 그러나 누구도 네 소리가 아름답다고 들어주고 돌보아 줄 사람이 없구나! )

오호인간원한개독이

( 오호라! 인간 원한도 많은데 너만이 울어 예면 무얼 하는가! )

의사충신격불평, 굴지난진수

( 나라일을 걱정하는 의사 충신의 수는 손꼽아 헤아릴 수도 없건만. )

 

조상치는 두견이, 즉 상감이 피를 토하듯이 울며 사는 세월을 생각하고 이렇게 슬픈 시를 읊었던 것이다.

단종은 마침내 큰 한을 안고 그의 나이 열일곱되던 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조상치는 통곡을 그칠 줄 몰랐다. 찾아오는 사람도 일체 맞지 않았다.

외부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집안 사람들까지도 만나기를 싫어하였다.

이제는 진정으로 목숨을 부지할 힘을 잃어버렸다. 그보다도 살아나가야 할 아무 의의가 없었다. 성군이신 세종치하에서 많은 성은을 입고 살아온 그였다. 어린 단종을 보필해서더욱 견고한 사직을 이룩하려고 결심을 굳게 한 그였다. 그러나 단종은 이미 가고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표표히 집을 나섰다. 우울한 가슴을 달래기는 강가가 좋았다. 늘 이럴 때면 즐겨 가는 장소다. 낚시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은어(은어)가 노니는 잔잔한 맑은 물 속을 무심히들여다보며 앉아 있었다.

번거러운 생각을 없애려면 걷는 일이 그로서는 제일 쉬웠기 때문이다. 얼마를 걷다가 보니 저 멀리 길고도 넓적한 돌이 눈에 띠었다.

그는 그 돌을 자세히 보고 싶어 걸음을 빨리했다.

그것은 길고도 적당한 넓이의 완석(완석=탁마(탁마)를 가하지 않은 돌)이었다. 문뜩 생각 되는 것이 있었다. 이 돌로 그가 죽은 후에 세워 놓을 비석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 돌을 집으로 운반케 하였다.

자기가 죽는 날을 예기나 하고 있던 양 강변에서 발견하여 운반해다 놓은 돌의 표면에다 다음과 같은 문귀를 써 놓고 이를 조각시켰다.

< 노산조부제학포인조상치지묘 > 라는 비문이었다.

즉 노산군 시대에 부제학을 지낸 조상치의 무덤이라는 뜻이었다.

세조시대에 지낸 부제학은 아니라는 뜻이다.

단종조에서 지낸 벼슬이 부제학이지 세조조에 지낸 벼슬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후세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그의 곧은 성품의 일면이 나타나 있다. 이렇게 비문을 만들어서 세워 놓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간 후 후세의 사람들은 자기를 이군(이군)을 섬긴 사람으로 간주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손수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 죽음으로 뜻을 바친 사육신과 똑같은 서열에 올려 놓고 싶은 생팔신의 행상을 낱낱히 기록했다. 그대로 천수를 다할 때까지 세상에 살면서 빈한과 싸우고 혹은 세조의 횡포에 무언의 항거를 일삼은 사람들이었다.

 

 

 

허공에 그린 일월

송부사 집 경사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오냐! 게 앉거라.”

여기는 판돈영부사(판돈영부사) 송현수(송현수)가 거처하는 사랑방이다. 옆에는 송부사의

부인이 입가에 보일락말락한 미소를 담고 출중하게 뛰어난 딸의 용태를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어머님도 계셨군요.”

“오냐, 너를 보는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실컷 보아 두려고…”

송부사는 부인의 이 말을 점잖게 한 마디로 나무랐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이제 곧 동궁빈(동궁빈)이 될 막중한 몸인데… 우리가 보고 못 보고가 무슨 상관이오? 이제는 난 선조(선조)에 대해서나 가문을 위해서나 할 일을 다한 것 같아 마음이 오히려 편안하오.”

송부사의 딸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인 채 얼굴도 들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치렁치렁 땋은 새까맣고 윤이 나는 머리 끝이 갑장 장판에 닿아 아른히 비쳐지고 있다. 송부사는 숙성히 자란 딸의 여름옷에 싸인 몸매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얘, 이제 앞으로 열흘 남짓하면 궁으로 들어가는 몸이라는 걸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예! 소년 두분 양친님께 배운 교훈과 가훈을 힘삼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왕비가 되려합니다.”

혹단 같은 머리와 희고 반듯한 이마는 그의 총명을 말해 주고 야리야리한 살결은 고운 마음씨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송소저는 올해 열세살이다. 정숙한 어머니의 가르침은 실로 그녀를 성숙하고 으젓한 육체와 정신을 가진 숙녀로 키워놓은 것이다.

“얘, 아가야. 이제부터는 수놓는 일이나 책읽는 일은 고만 두고 몸과 맘을 푹 쉬도록 해라.”

“야유 어머님도… 언제는 제가 별일을 하고 지내는 줄 아십니까?”

하면서 얼굴을 드는 그녀의 눈까풀은 얇은 은행껍질 같았다.

“아니다. 네 어머님 말씀이 옳다. 네 나이에 너만한 처녀도 아마 없을 것이니라.”

“아버님도! 제가 뭘…”

아직도 애티가 벗어지지 않은 포동포동한 두볼이 홍조를 머금고 몸둘 곳을 몰라 한다.

“오냐, 일찍 네 처소에 나가서 쉬어라. 네 몸은 너 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하느니라!”

“녜! 아버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어머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는 사뿐히 일어서서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 영창문을 열고 나가는 소저의 모양이 송부사부처의 눈에는 으젓하게만 보였다.

“여보! 부인 저아이가 누구를 닮아서 저리도 으젓하고 출중하오?”

“대감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저를 보고는 예전에 그런 말씀 안하셨어요?”

“하하… 부인 말씀이 옳소! 내가 처음 장가 들었을 때는 저 아이만큼이나 부인도 좋긴 좋았소만…”

송부사 부부는 기뻤다. 이 경사를 송부사는 모두 부인의 공으로 돌려 주고 싶었고 부인은 부사인 자기 남편에게 돌리고 싶었다.

사랑채에서 몰러나온 송소저는 무더위가 가신 후원으로 발을 옮겼다. 약간 기운 달이 중천에 맑다. 열흘만 있으면 십삼년을 자란 이 집을 뒤로하고 궁중의 사람이 된다. 궁중의 사람으로도 보통 궁인(궁인)이 아니라 일국의 국모인 왕후가 된다. 말하자면 여성으로서는 제일인자의 신분으로 되는 것이다. 기쁜지 슬픈지 분간할 수 없이 그저 가슴이 마구 뛰는 듯했다. 아버지의 인자한 교훈과 어머니의 알뜰한 보살핌으로 그녀는 잔뼈가 굵었다.

송소저가 후원 별당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자기 처소 마루로 올라서자 주인 아가씨의 기척을 들은 몸종이 쪼르르 뛰어 나왔다.

“아가씨! 대감마님께서 왜 부르셨어요?”

“응 그저 보시고 싶으셔서들 그러시지 별일이 있으시냐.”

“아가씨! 일찌감치 자리에 드세요. 아까 낮에도 대방마님께 불려가서 쇤네가 말씀을 많이 듣고 왔습니다.”

“뭐라고 어머님이 말씀하시더냐?”

“아주 잘 모셔야지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으면 쇤네를 아가씨 따라서 궁궐에 들여 보내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겠어요?”

“얘! 월선아! 너는 꼭 날 따라와야 한다. 구중궁궐 깊은 속에 너 아니면 내가 누구를의지하겠니?”

“아이구 아가씨도… 나중엔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대방마님께서 낮에 저희 쇤네들을모두 불러 놓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신지 아세요?”

“그래? 어머님께서 너희들을 불러 놓으시고 뭐라고 하시더냐?”

“글쎄요. 열밤만 주무시면 궁중에 들어가셔서 지금 동궁마마와 나라잔치가 있으시다고 하시면서… 그 후부터는 너희들 같은 것은 뵐래야 뵐 수도 없는 높은 분이 되신다고 하시지 않아요.”

“그런 소리 말아 얘! 난 언제까지나 이 집을, 그리고 너희들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터인데…”

“그리고 또 대방마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아셔요. 너희들 뿐 아니라 나도 궁에 아가씨께서 들어가신 뒤에는 뵐 수도 없다고 하시면서 글쎄 눈물을 글썽글썽하시던데요.”

송소저는 가슴이 뭉클했다. 온화하신 어머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살아야 할 궁중생활이 걱정이 되다 못해 두려워지기까지 하였다. 주인 아가씨가 며칠만 있으면 동궁빈이 되고 월선이는 동궁빈을 모시는 시녀가 된다. 아가씨도 열세살, 월선이도 열세살 동갑이었다. 벌써 오년 전부터 아가씨의 몸종이다.

아니 몸종이라니 보다는 소꼽친구로 주종관계를 떠나 진정한 친구였다. 둘이는 못할 일이 없었고 못할 말이 없이 다정했고 눈을 뜨면서부터 자리에 들어 눈을 감는 시간까지 둘이는 붙어 살았다. 좋은 일도 궂은 일도 서로 감싸 주고 칭찬하며 서로를 아꼈다. 친형제지간도 이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송부사도 부인도 늘 그들의 귀여운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보았다.

송부사의 부인은 오늘이 있기를 점친 것은 아니라도 딸 하나를 글로나 예절로나 침사(침사)로나 빠짐없이 키웠다. 어디를 내세워도 그 나이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처자로 자라 있었다.

“아가씨, 어서 침소에 드셔요. 또 대방마님 나오시면 쇤네가 꾸중 듣습니다.”

같은 나이의 몸종 월선이도 주인 아가씨에게 별로 손색이 없다.

주인 아가씨가 뛰어난 데가 있다면 반짝반짝하고 윤기있는 살결과 새까만 눈빛이 총명하게 빛나는데 있을까?

“얘! 월선아! 네 생각은 어떠냐? 내가 동궁마마를 잘 섬길 수 있는 왕비의 자격이 있을까?”

“참 아가씨께서는 벌써 그 말씀을 오늘도 몇 번째 물어 보시는지 모르겠네요. 저희들은 모두 모이면 아무래도 우리 아가씨께서 월등히 세자마마보다 훌륭하실 것이라고 수군댄답니다.”

“얜, 또 그런 소리. 동궁마마께서 늠름하시고 훌륭하시다는 소리 너도 들었다면서?”

“어마 또 물어보시네! 아까 쇤네가 말씀드렸지 않아요. 사랑에서 대감마님께서 대방마님과 말씀하시는 걸 청지기가 들었다는 얘기 말씀예요.”

“그래! 그럼 난 어떻게 할까? 얘! 넌 꼭 거짓없이 내게 일러 주렴. 안동 김대감댁 둘째 따님을 너도 알고 있지?”

“알고 말고요. 두 번이나 아가씨 모시고 갔다 오지 않았어요?”

“그 아가씨하고 나하고 동갑네라는 것도 넌 알지?”

“그럼요!”

“그 아가씨하고 나하고 외모와 다른 여러 가지가 네 눈으로 누가 낫다고 보느냐?”

“아유 아가씨도… 그걸 말씀이라고 하셔요? 첫째 아가씨는 그 아가씨보다 몸매가 얼마나 아름다우세요? 둘째로는 아가씨의 그 고운 목소리, 마치 꾀꼬리 노래를 듣는 것 같은데요. 셋째로는 모두들 붓글씨나 침소 배운신게 아예 비할 데다 못된다고 그러시던데요.”

“넌 우리 집 사람이나까 그렇지만 남들이 보는 눈도 그래야지. 우리 식구들이 하는 소릴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니.”

“또 그 말씀이시네! 마님 모시고 있는 순례 언니 말을 제가 어제 아가씨에게 말씀 드렸지 않아요?”

“정말 그럴까?”

“그렇구 말구요. 전 어떤 댁 아가씨를 뵈도 우리 아가씨를 따를 분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 어서 자자! 어머님 또 내려 오시면 안잔다고 걱정하실라.”

자주빛 누비 이불을 목까지 덮고 송소저는 눈을 감았다.

드리운 발 사이로 스며드는 교교한 달빛이 송소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송소저는 한번도 뵙지 못한 동궁마마의 훌륭한 자태를 상상해 보았다. 이런 짓은 점잖은 집 규수가 할 것은 아니라고 한편 꾸짖어도 보지만 자꾸 눈 속에서, 아니 가슴 속 깊이에서 아롱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월선이도 제방인 옆방으로 물러갔고 집 안팎이 모두 고요했다. 안채 어머니도 잠이 들고 사랑채에서도 아버지가 깊은 꿈나라로 들어간 모양이다. 아무리 숙성하고 으젓이 자란 처녀였지만 열세살의 어린 아가씨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송소저는 꿈속에 있었다. 궁중이라고 생각되는데 역시 달이 밝고 후원 같은 곳이었다.연못도 있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무수히 달빛을 받아 흔들리고 있었다. 자기 집 후원 같지는 않고 분명히 궁중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조그만 문을 열고 머리를 숙인 채 들어서는 도령이 있었다.

(아! 저분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동궁마마이신 게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도령은 어느덧 옆에 와서 있었다. 송소저는 자기 가슴이 터지거나 않을까 두려웠다. 가슴에서 방망이질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소저가 송부사의 따님이시오?”

(어쩌면 이렇게 부드럽고 사람을 끌어 잡아당기는 것 같은 옥음을 지니고 계실까?)

“예!”

간신히 대답을 올렸다.

“소저! 이제부터는 그대와 내가 한 사람 노릇을 한다고 들었소. 그렇게 부끄러워하지만 말고 고개를 드시오.”

너무 부끄러워만 하는 것도 동궁빈이 취할 태도는 아니라고 늘 어머님께 들었던 것을 생각하고 조용히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일까? 옆에 서 계시던 동궁이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놀란 가슴이 뛰면서 동시에 잠겼던 눈이 떠졌다. 꿈이었다.

 

 

 

불안한 소년왕

무더위에 있었던 잔치는 빈을 괴롭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무슨 일이 있으나 동궁을 위해서 참아야 했다. 상감은 전달부터 조회도 참례 못하고 침상에서 일어나지를 못하게 되어 동궁이 시탕(시탕)을 드는지가 벌써 이십여일이 넘는다. 젊은 빈이 동궁을 못 본지도 벌써 십여일이 넘었다. 선대왕 세종이 승하하고 겨우 이년을 제위에 있다가 상감은 병환으로 눕고 만 셈이다.

친정에서 데리고 온 시녀 월선이가 어제 저녁 때 하던 말이 귀에 쟁쟁했다.

“동궁마마, 상감마마께서 아무래도 기력이 점점 쇠잔해 가신다고 의원에서 걱정이 분분하답디다.”

그렇다면 동궁이 상감이 된다. 이제 겨우 열두살이 되는 동궁이 그 막중하기 이를데 없는 지존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동궁빈인 자기도 중전의 몸이 된다. 무언지 맑지 않은 것이 요즈음 궁중 공기다.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모두들 쑤군쑤군 거린다. 그러나 빈은 그것이 나이 어린 동궁이 상감자리에 오르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가 그들의 관심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상감의 용태는 차도가 없는 대로 그날 그날이 지나갔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로 접어 들었다. 상감의 용태가 이제는 심상치 않다고 궁중 안팎이 술렁거렸다. 젊은 빈은 걱정스런 마음을 달래려고 책을 들고 앉았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월선이가 불렀다.

“빈마마, 잠깐 들어가도 괜찮겠사오니까?”

월선이의 목소리에서 그녀는 무언지 급을 고하는 일이 생겼음을 판단했다.

“오냐! 어서 들어오너라!”

“빈마마, 상감께서 곧 승하하실 것 같다고 야단들이옵니다.”

“그러냐? 세상에 너무도 망극하신 일이로구나. 근 반년이 넘도록 병상에서 싸우시기만 하셨으니 오죽이나 기진맥진하셨을까.”

“예! 그러하옵고 빈마마께서는 상감 승하하실 것을 생각하옵고 모든 준비를 하셔야 되겠다고 김상궁께서 말씀하셨사옵니다.”

가을도 깊은 어느날 선정과 어진 마음으로 신하를 사랑하던 문종은 외아들인 동궁을 두고 서른아홉의 장년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동궁은 열두살이었고 동궁빈은 한 살 위인 열세살 이었다. 문종은 승하하려는 순간 동궁을 불러 세우고 앞에 늘어서 있는 중신들에게 몇 번이나 떨리는 옥음으로 세자를 보필함에 부족이 없도록 해달라고 당부하였다.

“부디 경들은 나이 어린 동궁을 도와서 사직을 든든히 해주기 바라오.”

당시의 중신들은 영의정 황보인(황보인), 좌의정 남지(남지), 우의정 김종서(김종서), 집현전 학사들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었다. 모두들 엎드려 통곡하며 세자를 받들어 보좌해서 선정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어린 왕자가 문종의 뒤를 이어 용상에 앉게 되었으니 그이가 단종이었다.

아무리 늠름하고 훌륭히 자란 임금일망정 너무나 어렸다. 중전이 된 동궁빈도 뵙기 너무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상감이 된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승하를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내려쪼이는 폭양이 중복을 가리키는 여름 저녁 바람 한 오리 없고 숨이 탁탁 막혔다.

바로 오늘이 지금의 상감과 중전이 성혼을 한 일년째 되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방안의 문마다 가는 발을 드리고 앉아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이 상감이었다.

“중전! 작년 이맘 때가 생각 나시오?”

중전이 되고 이제는 궁에 들어와서 지내는지도 일년이 되었건만, 그리고 상감을 모신지도 일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언제나 처음 만나는 순간마냥 수줍기만 했다. 왜 그런지는 중전인 자신도 몰랐다.

“예! 신첩 상감의 은총을 받아온지 일년이 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중전, 궁중생활이 어떠시오? 민가인 친가에 있을 때 생각하던 것보다 어떻게 다르오?”

“신첩 그저 상감의 나래 아래서 무엇을 알겠사옵니까!”

“중전, 나를 왜 그렇게 두렵게만 여기시오? 오늘은 우리 가슴을 탁 터놓고 얘기 좀 나눕시다. 조정에서 체면 차리기만도 급급할 지경인데 중전 앞에서나 편안해야지. 그리고 나와 중전 사이에 못할 말이 어디 있겠소.”

“상감마마, 황공하옵니다. 신첩도 무언지 이 가슴이 시원하도록 드리고 싶은 말이 한두가지가 아니옵니다.”

“더욱 그렇다면 우리 좌우 사람을 물리치고 밤이 새도록 얘기나 해봅시다.”

단종은 주위 사람들을 멀리 물리쳤다.

“상감마마, 신첩에게는 요사이 상감 용안이 부드럽지 않으신 것만 같이 보여집니다. 아녀자의 몸인 신첩이 무얼 알겠습니까마는 신첩에게나 시원스러이 상감의 흉중을 말씀해 주시면 신첩 자신의 불평과 불안은 일조에 사라져 없어지겠사옵니다.”

이것은 중전의 진정한 마음이었다. 가끔 우러러보는 용안이지만 보는 회수가 거듭될수록 어떤 짙은 그림자 같은 것이 따라 다니는 듯한 모습이라고 느껴졌다.

“중전, 그렇게 보이오? 아무래도 나에게는 벅찬 자리인 게 분명하오.”

상감자리에 오른지 얼마 안 되기는 했지만 믿음이 가는 중전 앞이라 그런지 말이 고르지가 않았다. 자기를 말할 때 누구 앞에서나 <과인>이라든지 <짐>이라야 옳을 일인데 중전 앞에서는 <나>라는 소리가 자주 나왔다. 아마 중전 앞에서야 괜찮겠지 하는 마음인 듯하였다.

“상감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중전인 그대도 공기로나 도는 말로 귀 있어서 들었겠소만 삼촌인 수양대군이…”

상감은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좌우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무릎으로 더욱 중전 옆으로 바짝 다가 앉았다.

“중전!”

다시 한 번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고는 중전의 손을 잡았다.

“중전의 손은 어찌 이리도 고우시오! 손 뿐이 아니지만…”

“상감께서는…”

중전은 말을 못하고 왈칵 수줍어졌다. 그러나 상감께서 이런 말을 할 때 싫지 않은 기분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중전! 이제 겨우 즉위한지 일년밖에 안 됐는데 나는 그 자리가 역겹기만 하니 웬일일까? 이것이 법도가 아니라면 하고 싶어 하는 놈한테 냉큼 내놓아 주고 싶소. 그리고 중전하고 둘이서 어디 향촌에나 내려가서 이 시끄럽고 무서운 궁중을 꿈에도 보지 않고 살다 가고 싶소!”

“상감마마, 신첩의 심경도 마마의 심중과 손톱만치의 차이가 없사옵니다. 하오나 그 전에 저의 친가 모친이 말씀하시기를 만인지상의 지존한 자리는 춘풍 모양 부드럽고 따뜻한 것만은 아니라고 하더이다.”

“중전, 고맙소. 중전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슬기가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절로 힘이 나는 것 같구료!”

“상감마마, 모든 사람이 다 적일지라도 지금의 중신들이 상감 앞에서 보필하는 데야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그리고 신첩 미약한 여자의 몸일지언정 상감을 모시는데 이 목숨 다할 작정이오니 심려를 놓으시옵소서.”

“부디 힘이 되어 주시오. 중전을 믿는 이 마음이 얼마 만큼 큰지 중전은 아마도 모를 것이요.”

어린 상감과, 중전 둘은 마치 완전히 성장한 남자와 여자가 말하듯 했다.

지존한 상감의 마음도, 그의 배필인 유일한 존재 중전의 눈물도, 아랑곳 없다는 듯이 세월은 흘렀다. 왕위에 오르고 이년이 되는 오늘! 궁중은 잔치가 며칠째 계속되었다. 종친인 상감의 삼촌들,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많은 친척들이 모이고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하여 많은 문무백관들이 참례하였다. 특별히 마련한 용상에는 어린 임금이 양측에 시녀들을 거느리고 으젓이 앉아 있었고 따로 마련한 자리에 역시 좌우에 많은 시녀를 거느리고 앉아 있는 중전은 오늘 따라 더욱 아름다왔다.

그러나 중전은 춤도 노래도 악기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상감의 용안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린 용안이 오늘 따라 더욱 위엄이 서리어 있었으나 그 위엄 위에 이름 모를 우수가 깃들어 있었다. 근래 더욱 심해가는 종친간의 반목과 수양대군의 횡포는 어느 누구도 막을 사람이 없었다. 초미(초미)의 일이라고 통탄하면서도 아무도 어떻게 수습의 손을 뻗치지 못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아는 상감으로서는 기쁜일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중전은 눈시울이 슴벅거려 왔다. 그러나 그걸 나타낼 수도 없고, 나타내서는 안 되는 위치가 바로 이 영광의 자리라는 중전의 자리였다.

기어코 상감께서는 자리를 일어섰다. 더 지탱하고 앉아 있기가 역겨웠던 모양이었다. 중전도 상감이 안 계신 자리가 제아무리 흥겨웁고 호화로운 자리로서니 앉아 있기는 싫어 눈짓으로 일어서자는 뜻을 전하자 지밀상궁인 김상궁이 먼저 앞에와서 읍했다.

온갖 소음 속에서 세월은 끊임없이 흘렀다. 중전 처소에서 오늘도 책읽기에 여념이 없는 여심(여심)은 항상 상감이 계신 처소로만 달렸다.

(억지 정무(정무)에 시달리시나? 그렇지 않으면 책이라도 읽고 계실까? 아니면 임금 앞에서 아부만 일삼는 내시들이 예쁜 궁녀라도 데려다 바쳐서 그와 희롱하고 계실까?)

별로 여색은 즐기지 않는 편인 상감이었지만 못된 내시들의 장난이 임금의 마음을 사로 잡기도 했다. 언제나 귀찮고 시끄러운 정사(정사)와 수양대군의 횡포를 미워하는 상감은 가끔 어린 궁녀들과 희롱하기를 즐겨하는 것이다.

중전은 책에서 눈을 떼고 멀리 아롱거리는 아지랑이를 바라보았다.

(상감도 열네살이 되셨지! 이제는 여자의 미를 아실 나이기도 하시니!)

여기까지 생각의 날개를 펼치던 중전은 충신들을 잃고 슬퍼하신 상감의 작년 가을을 또다시 생각하였다. 이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세도가가 된 수양대군이다. 말이 영의정부사(영의정부사), 이조형판서, 내외병마도통사(내외병마도통사)의 겸직을 갖고 있다 뿐 그 실제 세력은 단종인 상감을 억누르고 휘두르는 판국이었다.

그리고 집현전을 시켜서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교서)를 만들어 이것을 상감이 하명한 것이라고 펼쳐 민중의 귀에 들어가게 하였다는 것이다. 중전은 날이 가고 달이 지날수록 궁중의 생활은 즐거움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중전은 어리고 아녀자의 몸인 자기가 이리도 몸서리가 쳐지는데야 상감의 그 흉중은 어떠할까 생각했다. 이런 자기의 마음이 지아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울어나온 것임을 자기도 모르는 중전이었다. 그중에도 상감을 모시는 중전의 몸으로 상감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나서 다른 궁녀들과 희롱하리라 상상만 하는 것도 부덕에 어긋난 일이라고 마음을 고쳐도 보았다.

(오늘은 내 처소에 발을 옮겨 주실까? 그러면 용안을 우러러 뵙고 그 심중도 헤아려 볼텐데…)

중전은 이래도 답답했고 저래도 허전했다. 며칠째 상감이 들어오지 않아도 허전했지만 어쩌다가 침소에 들어도 답답하기만 했다. 상감의 용안이 부드럽게 개인 날은 거의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상감의 자리도 중전의 자리도 호화를 극한 자리건만 즐겁지가 않았다.

세월을 흘러 단종 삼년째로 들어섰다. 중전이 거처하는 정원에도 매화가 그 풍취있는 자태를 자랑하고 피어 있었다. 밤눈에도 아련히 떠올라 오는 애련하고 작은 꽃들은 중전을매혹시켰다.

“상감마마 납시오.”

상감의 지밀상궁이 먼저 와서 품했다. 중전은 가슴이 뛰었다. 거울을 한 번 보고 옷매무새를 잠깐 만진 후 상감을 마지하러 나갔다.

“중전, 참으로 오래간만이구료! 어디 얼굴 좀 드시오.”

열다섯의 상감은 이제 옥음마저 어른다웁게 우렁찼다. 아랫목에 깔린 보료에 앉은 상감은 중전을 눈으로 불렀다.

“중전은 무엇이 그리 부끄럽소? 이제는 삼년이나 지난 중전과 내 사이가 아니요. 지아비를 보고 그리도 수줍어하는 지어미는 책에도 못본 얘기구료. 어서 내 곁으로 와 앉으시오.”

“예! 신첩 용안 우러러뵈온지 너무나 오래 된 것 같사옵니다.”

“참 나무나 격조했나 보오. 언제나 중전 신상을 생각 안하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는 것만은 잊지 마시오.”

“신첩은 상감의 용체가 나날이 훌륭해지시는 것을 뵈옵고 불경하옵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옵니다.”

“중전! 더 가깝게 오시오. 그리고 손 좀… 그 부드러운 손 좀 쥐어 봅시다.”

이 말을 마치고 상감은 천장으로 머리를 쳐들었다. 중전은 왠지 가슴이 뻐근해 왔다. 상감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천장을 올려다보려니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중전, 나는 요즈음 아무래도 수양대군에게 양위를 하는 게 편안할 것같이만 생각이 드오. 이런 얘기 중전에게 해서 걱정 끼치고 싶지는 않지만 더 견디어 나갈 것 같지가 않구료.”

그녀는 무어라고 대답을 드려서 상감의 마음을 위로할지 잠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측은했다. 너무나 불쌍한 상감이었다. 열두살에 즉위하여 오늘까지 하루도 마음 평안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단종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나는 국왕이 되었을까?”

그 말 한 마디를 하고는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중전은 괴로왔다. 따라 울 수도 또 복받치는 울음을 참기만 하기도 어려웠다. 중전은 어쩔 수가 없지만 가만히 마음을 도사렸다.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상감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슬픔을 덜어 주는 일이라고 단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상감마마, 신첩은 일찍이 진인사대천명(진인사대천명)이라는 글을 읽었사옵니다. 마마께서는 대세를 역행하시지 말고 천시와 지리와 인화를 얻으셔서 양위를 하셔도 하시옵고 수위(수위)도 하셔야 될 줄 신첩은 미련한 생각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오, 중전, 고맙소. 어찌 그런 생각이 중전의 머리에서 나오시오. 나는 어느 때나 중전에게 힘입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소. 그렇지! 옳은 얘기요. 진인사대천명해야지! 역행은 우자(우자)들이나 범하는 것일 테니까.”

 

 

 

영월로 가는 길

수양대군에게는 모사(모사) 권남(권람), 무사(무사) 한명회(한명회) 양인을 비롯하여 문종 선왕 때부터 중용(중용)을 받았던 정인지사가 있었다. 때는 단종 삼년 육월 임금은 끝내 야위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빌린 그들의 탈권에 아무 힘없이 대보를 물려 주고 말았다.

그가 곧 세조(세조)이다. 단종과 단종비는 수강궁(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름 좋은 상왕이라는 존칭을 받았다. 수강궁을 드나드는 종친 혹은 야인들에게 듣는 소식이 중전에게는 하나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세조의 탈권이 어긋나는 일이라고 보는 몇몇 구신(구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특히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 형조참판 박팽년, 직제학 이개, 예조참판 하위지, 사예(사예) 유성원 등이었다. 거기다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성승), 전절제사(전절

제사) 유응부의 일곱 사람이었다.

상왕의 내종(내종) 권자신(권자신)이 가담한 이 왕위 복구의 대사는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중전 귀에도 들어왔다. 중전에게는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그 무서운 세조가 알게 되면 일가멸족은 물론일뿐더러 상감의 신상에도 절대로 이롭지 않으리라는 것은 작은

가슴으로도 추측을 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슴은 설레이다 못해 답답해지고 미어지는 듯 했다. 상감은 무엇을 하는지, 이런 것을 아는지, 궁금이 지나쳐 초조해졌다. 이 일을 상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자기 발로 상감 처소로 쭈르르 갈 수는 더욱 없었다. 금해진 법은 아니지만 언제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어머님 말씀이 생각나서였다. 잠깐이라도 자기 처소로 거동을 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간절한 염원은 상대쪽에도 통하게 되는 법인 듯했다.

한나절이 지나서 고요하기 이를데 없는 중전 처소로 단신 상왕이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벌떡 일어났다. 아무 예고없이 대낮에 이렇게 자기 처소로 용체를 옮기는 일이라는 건 별로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전! 무엇을 하시오. 하두 무료하기에 중전은 무엇을 하나 엿보러 왔소…”

상왕은 기색이 혼연하여 농담을 던졌다.

“신첩 낮이나 밤이나 상감 용체만을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어디 그럼 얘기해 보시오. 중전, 아니 이제는 중전도 아니고 나도 실은 상감도 아니지만…”

“상감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옵니까? 신첩에게는 언제나 어디서나 상감임에 틀림없사옵니다.”

“하하… 그럴까? 모르겠소. 우리들만의 세상에서는 상감인들 어떻고 그저 지아비라고 부르면 어떻겠소. 그렇지 않소? 중전!”

“예, 황공하옵니다.”

지당한 말이지만 그녀는 듣기에 황공하였다. 상왕이 되고 이궁으로 옮겨 온 후로는 더욱 상감과 가까워진 것 같은 나날이었으므로 그녀로서는 다시 없이 흐뭇하고 즐거운 일의 하나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어린 부부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먼저 중전이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듣자옵건대 성삼문이하 많은 중신들이 상감의 왕위 복구를 위해서 모의하고 있다고 들었사옵는데. 더구나 신첩의 아비도 연관이…”

“응, 그것이 걱정이요. 또 그 동안에 겪은 피비린내도 지긋지긋한데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하루도 마음 편안할 날이 없구료!”

“상감께서는 일을 아신지 오래 되셨습니까?”

“오래 되었나 보오. 종친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한 소리지. 또 드나드는 사람도 일일이 뒤따르고 한다는데 가지가지가 마음 안 쓰이는 일이라곤 없구료. 상왕이고 궁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언젠가 중전에게 말한 것같이 우리 둘이 초토에나 묻혀서 자연과 벗하고 살고 싶구료. 진정이요. 그러나 그것도 맘대로 못하는 신세가 바로 나와 비의 신세가 아니겠소?”

그녀는 가슴을 치고 대성통곡이나 하면 조금은 시원해질까 생각했다.

“상감마마, 하오나 마음을 굳건히 하시고 또 인간이 할 수 있는 진인사대천명을 잊지 말아 주시옵소서.”

“옳소. 비의 말이!”

“그리고 상감께서는 그 일을 막도록 할 생각을 하신 일은 없사옵니까?”

“내게는 아무 힘도 없소. 빼앗겨도 어쩔 수없고 찾아 준다 해도 어쩔 수는 없는 몸! 그렇지 않소? 중전.”

(그렇다! 지존이신 상감의 자리가 힘없고 나이 어린 상감이시니 이렇게 불우해야 되는 것이구나!)

중전은 어디 눈에 안 보이는 그 무엇에라도 호소하고 싶었다. 이 어리고 착하기만 한 임금에게 힘이 되어 줍시사 합공하고 빌고 싶었다.

삼종지의(삼종지의)를 배운 그녀가 의지하고 바랐던 존재는 하늘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었다. 다만 이 나이 어린 상감 하나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상감을 조용히 불렀다. 이시간! 지금! 그녀의 취할 태도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상감마마! 힘을 내시어요. 신첩 아녀자의 몸으로 아무것도 모르옵니다마는 어디까지나 상감을 따라 죽거나 살거나 할 작정이옵니다.”

“중전!”

“상감마마!”

두 사람은 두 손을 마주 쥔 채 바라보았다.

단종의 수강궁 생활은 하루도 즐거울 날이 없었다. 따라서 중전의 아리따운 자태도 발랄 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지금 이순간이 그들에겐 좀처럼 찾기 힘든 시간이었다.

김상궁이 기쁜 얼굴로 밖에서 읍했다.

“김상궁! 무엇 좋은 일이라도 생겼소?”

오십이 가까운 김상궁은 대대로 동궁빈을 모시던 지밀상궁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중전의 눈에 들어 중전 지밀상궁으로 올라선 여인이다. 언제나 변함없는 충성심과 과묵한 태도가 누가 보아도 믿음이 가는 노년으로 접어든 상궁이었다.

“예! 황공하옵니다. 이번에 명(명)나라 대사가 오셨사온데 내일은 창덕궁에서 연희가 베풀어 진다 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 그리 기뻐서 상궁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오?”

“그런게 아니오라 상감마마께옵서 수강궁으로 듭시옵고는 한 번도 거동을 아니 하시지 않았사옵니까?”

“그야 유폐되시다시피 하신 용체가 어찌 상감 마음대로…”

여기까지 말하고는 중전은 가슴이 메어온다.

“중전마마! 그렀사온데 내일 연회에 상감마마께서 참례를 하신다 하옵니다.”

“김상궁! 상감마마께서 그 일을 허락하셨소?”

“예! 그렇게 들었사옵니다.”

(오래간만에 거동이시니 기쁘실까?)

다른 사람들은 다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중전인 자기만은 결코 상감이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튿날은 명나라 사신의 환영을 위한 연회가 창덕궁에서 벌어졌다. 한편 성삼문, 박팽년등은 호기(호기)가 왔다고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그들은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운검(운검)을 잡기로 결정하고 대사를 성취시키려고 모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모(지모)의 사람으로 세조의 한 팔인 한명회가 이 기미를 알아차렸다. 몇 달만의 거동으로 상쾌해 하던 상왕의 모습이 흐려졌다. 상왕의 연회거동을 중지하라는 세조 명이 온 것이다. 성삼문 등도 상왕이 참례 안하는 자리에서의 혁명은 허사라고 깨달았다.

운검을 가지고 들어가려던 무인 유응부는 한명회가 연회석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태도가 괘씸하기 이를데 없었다.

“생각컨대 연회장소가 좁아서 운검을 잡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응부는 한명회를 치려고 했다.

성삼문 등은 굳이 만류했다.

“상왕이 안 계신 이 자리! 무엇 때문에 만용을 내시오? 제발 참으시오.”

응부는 이를 갈고 참아야만 했다. 무릇 무사와 문사의 다른 점은 이런 것이리라.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이미 일이 틀린 것을 눈치 챈 김질(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정창손)의 고발이 기어코 일을 벌여 놓고 말았다. 유여가 있을 리 없었다. 성삼문, 박팽년 등 여섯 사람이 입은 화(화)는 여기서 길게 부연하지 않아도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다. 수강궁의 봄은 봄을 외면한 듯 싶었다. 상하가 수심에 싸인 가운데 어디를 들어서나 찬바람이 불었다.

중전의 처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어제 와서 모든 경위를 비분강개(비분강개)하며 얘기하던 금성대군(금성대군)의 말이 소름이 끼치면서 되살아 왔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언제나 단종의 편에 서 있었다. 호탕하고 뛰어난 무예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그였지만 이미 정권을 장악해서 상감자리에 오른 형 세조와 겨루기에는 너무도 적은 힘이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호읍(호읍)했다. 땅을 치며 하늘을 쳐다보며 나라 형편을 비탄했다. 상왕인 단종도 상왕비도 같이 소리 없이 울었다. 더구나 비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다. 삼족을 멸할 일! 즉 모의를 했으니 그 형이 극심할 것은 명약관화(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걱정을 얼굴에서 감추지 못하는 상왕비의 연연하 모습이 금성대군으로서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상왕비마마, 심려를 놓으십시오. 설마 강도 같은 그들이기로서니 상왕비마마의 친가를건드리기야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중전은 더 길게 친가 걱정만 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고 깨달았다. 언제 어느 때 상왕인 단종에게 화가 올는지 예상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을 태연히 가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어떤 불행한 소식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지니려면 굳은 마음 가짐이 있어야 한다는것이 중전의 마음이었다.

상왕비 처소에서 느끼는 계절은 앞마당에 피었다 졌다 하는 초목들에게 있었다. 모란이 피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 까닭이 없다는 듯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상왕비는 아침부터 이름 모를 불안감에 사로 잡혀 좌정을 할 수가 없었다. 책을 펴놓고 앉아 있어도 눈이나 머리로 새겨 들어가지가 않았다. 꽃을 둘러보아도 마음의 평화는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가슴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혹시 친가에 무슨 변이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상감에게 좋지 못한 일이라도생길 징조인가?)

맑은 예지(예지)를 지닌 여자의 가슴은 예민하다. 드디어 일이 난 것이다. 상왕도 그녀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예기했던 일이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성삼문 등이 역적모의한 일을 상왕이 몰랐을 리 없다고 핑계삼아 그의 허울 좋은 상왕의 존칭마저 빼앗아 버린 것이었다. 노산군(노산군)으로 강봉이 되었다. 자연 상왕비인 그녀는 노산군 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사자의 전서(전서)는 추상 같기만 했다. 노산군 부인이 된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어야 했다. 다음 말이 더욱 무서운 것이라고 예측하기 과히 어렵지 않기 때문이었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상감의 용안은 별로 흔들림이 없었다. 사자는 계속해서

“군사 오십명의 호송하에 강원도 영월(영월)로 내일 안으로 떠나십시오.”

노산군 부인의 가슴은 오히려 담담했다. 여필종부(여필종부)라는 진리를 배운 이상, 그것을 아는 이상, 당황할 일이 없었다. 자기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상감을 따라 나서기만하면 되리라고 마음 먹으니 별로 초조할 것도 없었다.

사자도 물러가고 노산군 부인은 짙어오는 황혼을 받고 앉아 있었다. 노산군이 올 것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서 보고, 위로도 해드리고, 앞으로의 삶의 계획에 대한 말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황혼이 짙어오는데도 노산군은 오지를 않았다.

그녀는 참기가 어려웠다. 오늘밤이 수강궁에서의 마지막 밤인데 어찌하여 상감은 이렇게도 무정하신지 원망스러웠다. 술시경(술시경)이나 돼서야 노산군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상감마마! 신첩 많이 기다렸사옵니다.”

“응”

침통 그대로의 용안이었다.

“비는 어째 아직도 침소에 안 드셨소?”

“수강궁에의 밤이 오늘 뿐이온데 어찌 신첩 안온히 자리에 들겠사옵니까?”

“이제는 중전도 비도 아닌 노산군부인이요. 지금부터는 부인이라고 부르리라. 부인! 얼마나 친근하고 좋소. 부인! 어디 그 얼굴 잊지 않게 눈 속에 새겨 둡시다.”

“상감께서는 무슨 말씀을… 죽는 날까지 상감을 따라야 하는 이몸! 새겨 두시지 않아면설마하니…”

“부인! 참을 답답하구료.”

노산군은 그 말을 한숨과 함께 내뱉다시피 하고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상감마마 신첩이 아뢴 말에 어디 잘못이라도 있사옵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부인이 너무나…”

노산군은 또 말끝을 맺지 못하고 부인의 얼굴만 뚫어지라고 바라 보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어떤 걱정이 상감 위에 생긴 것이라고 부인은 생각 하였다.

“상감마마! 신첩에게 못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오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신첩의 몸이오나 언젠가도 말씀한신 것같이 신첩의 몸과 말이 힘이 된다고 하시지 않았사옵니까?”

노산군도 이제는 할 말은 해야 되겠다는 듯 말을 시작했다.

“부인! 나를 똑똑히 보시오. 그리고 언제나 부인의 마음은 여전하리라고 믿고 있소마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들어 주시오.”

노산군 부인인 그녀에게 번개같이 머리 속을 스쳐간 것이 있었다. 예상하기 어렵지 않던 친가의 불행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부인, 내가 가는 길이 무슨 길인지 아시오? 노산군이라는 것도 급작스레 상왕이라는 칭호를 빼앗기 어려워 그렇게 붙여 준 것 뿐이요. 나는 임금으로서 아니 왕자의 몸으로서 강원도 두메 산골 영월로 정배를 당하는 몸이요.”

“그러나 상감, 신첩은 오히려 이 궁을 벗어나 상감마마와 둘이서만 지낼 수 있는 그 길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지는데 아녀자의 미련스런 마음이오니까?”

열다섯의 어린 노산군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부인 얼굴을 정시하지 못했다.

(어서 빨리 정확하게 이 처지를 알려 주고 납득시켜야만 할 텐데. 착하고 순박하기만 한 부인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

그녀도 상감의 용안이 말 못할 무슨 괴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헤아렸다.

“상감마마! 신첩은 어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사와도 마음 흔들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사오니 심려를 놓으시고 시원하게 이 몸에게 들려 주시옵소서!”

“오! 중전!”

노산군은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이런 일은 일찍이 한 번도 없던 일이었으므로 상감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중전은 뛰는 가슴을 진정할 길이 없었다.

“부인!”

노산군은 드디어 가슴에 안았던 부인의 머리를 가만히 풀고는 조용히 부인을 불렀다.

“예, 상감마마.”

“내일 아침 동이 트자 나는 영월로 떠나야 하오!”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럼 혼자서만 가신단 말인가?)

온 신경을 모은 채 상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부인은 친가에 가서 계셔야 하오!”

“예? 상감, 무슨 말씀이오니까?”

“나는 정배를 당하는 몸! 부인도 그만한 것쯤은 알고 있을 터인데… 정배를 당하는 사람이 어디 부인을 동반하는 법이 있겠소!”

상감은 너무 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럼 신첩은…”

부인은 기어코 자제를 잃고 그대로 몸이 내동댕이쳐지듯 방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대로 큰 소리로 무정한 나라법을 욕하고 울고 항거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떠한 불행한 처지가 닥쳐와도 국모의 체모를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언제나 목숨과 바꾼다고 생각하면 못하고 안 되는 일이 없느니라!>

전에는 서릿발 같은 교훈이라고 생각했으나 바로 지금이 그 경우라고 어린 가슴에도 무언가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부인, 일어나 앉으시오!”

그녀는 엎드려서 눈물을 닦고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허트러진 옷과 머리를 매만졌다.

“상감마마! 신첩 상감에게 잠시라도 심려를 끼쳐 드려 황공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것은 안 되는 일. 부질없는 아녀자들이나 일삼는 일. 나는 중전이다. 나는 나라의 왕비였다. 어머니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전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였다.

“부인! 친가는 아무 화가 없다고 들었소. 모의에는 직접 가담도 아니 했을 뿐더러 그럴 수는 없다고 해서 그 화는 면했다고 합디다. 그러니 내일 내가 떠난 후 부인은 친가에 나가서 몸과 마음을 수양하다가 하늘의 뜻이 있어 다시 만나게 되는 날까지 부디 평강히 지내시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 것일까? 하늘도 무정하였다. 분명 궁중은 낙토가 아니었다.

 

 

 

단장의 곡

중전은 초라한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떠났다. 시종도 없이 친가에서 궁으로 들어갈 때 같이갔던 몸종 월선만이 따랐다.

궁으로 가는 길과 민가로 나오는 길은 판이했다. 가마 속의 노산군 부인은 이제 얼굴에눈물자국마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마를 따르는 월선이가 눈물을 흘러 길이 보이지가 않았다. 길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중전의 가마라고 앉아서 절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월선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왔다. 군사 오십명이 호위하는 가운데 따나던 상감과 중전의 이별 장면이 지금도 월선의 눈에 아롱거렸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서러운 이별이었다. 호송대장인 금부도사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친가에서는 노산군 부인인 딸의 후원 별당을 깨끗하게 치워 놓았다. 온 세상이 다 변했는데도 친가의 후원 별당만은 변하지 않았다. 나무나 꽃도 돌도 이끼도 여전했다. 어머니의 깊은 배려는 딸을 위해서 새로이 장판, 도배, 창호지를 깨끗하게 해놓았다.

그녀는 진정으로 방성통곡(방성통곡)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은 가슴이 후련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순간으로 지나가는 여심(여심)에 지나지 않았다.

늙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불쌍해서 울 수도 없었다.

처녀의 몸으로 온갖 궁중의 양상(양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한 여인에게 매어서 산 월선이도 불쌍했다. 울음도 맘대로 울 수 없는 몸이 양반의 몸이란 말인가? 지아비를 맘대로 지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하늘같이 우러러보며 지낸 짧다면 짧은 사년 동안의 생활, 그것은 왕후가 된 죄이던가?

“중전마마 자리를 보았습니다. 어서 침소에 드셔야 됩니다. 마마의 양안(양안)이 뵐 수 없도록 피가 서려 있사옵니다.”

“오냐! 월선이 네 고생이 말이 아니구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니까? 대방마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옵니다. 진지를 안 드셨다고 깨죽을 쑤어 올리라고 하시어 지금 또 부엌에서는 깨죽을 쑤고 있사옵니다.”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어라. 나야 이렇게 편안한 친가에서 양친님 비호 아래 무슨 걱정이 있느냐? 상감께서는 무딘 두메에서 어떻게 소일하시는지…”

입만 벌리면 상감 얘기였다. 상감의 옥체가 걱정이 되었다.

“얘, 월선아. 깨죽은 고만두라고 하고 잠이나 들고 꿈이나 꾸자. 꿈 속에서 뵈옵는 상감은 어떻게 그렇게도 어지신지…”

그녀의 입가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었다. 너무나 순간적이었기 때문에 월선이 눈에도 띄지 않았다. 그것은 노산군을 그리는 부인의 즐거움 같은 표정이었다.

친가에 온지도 한달이 지났다. 꿈을 꿀 만큼 잠을 이룬 날이면 상감과 회포를 풀었다.

생시와 똑같았다. 오히려 생시에는 그렇게 정다운 눈길과 부드러운 음성을 들은 일이 없었다. 잠이 안 온다. 눈을 감고 꿈길을 더듬어야 그리운 상감을 만나볼 수 있으련만…

청량포(청량포)의 한 객사, 거기가 노산군이 지내는 우거(우거)였다. 그녀는 청량포인지무언지 그 강의 이름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녀는 민가에서 입던 옷 위에 중전의 예복을 덧입고 머리에는 중전의 족두리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뛰어 상감이 계실 동헌으로 가고 싶었으나 왕후의 몸임을 생각하고 마구 행동할 수 없었다.

이윽고 상감이 보였다. 용상(용상)이 아닌데 용상에 올랐던 그 자태와 조금도 다름없이 위엄이 서린 용태로 곤룡포(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황송스런 걸음으로 그녀는 상감 앞으로 조용히 한발 한발 다가갔다.

왜 멀리 이 곳을 자주 찾아오느냐고 역정을 낼까 두려웠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상감을 불렀다.

“상감마마, 신첩 우러러 뵙고 싶어 다시 왔사옵니다.”

단정히 앉아서 무엇엔가 골몰하던 상감은 무척 반색을 했다.

“아, 부인! 어서 올라 오시오! 하루종일 기다렸소이다.”

그녀는 다시 없이 기뻤다. 그 한마디를 위해서 며칠을 지냈던가?

“상감마마, 수라는 무엇을 드셨사옵니까?”

“응! 나야 여기서 갖가지 생선이 좋아 많이 먹고 지내오. 부인은 오늘도 식음을 전폐한거야 아니겠지? 거듭하는 부탁이오마는 많이 자시고 푹 쉬어야 몸과 마음이 더불어 평안해서 오래 사는 법이요. 또 오래 살아야 하늘의 도움을 얻어 그대와 내가 다시 가깝게 만나 평생을 지낼 게 아니요?”

중전은 가슴이 뛰도록 기뻤다.

“예, 상감! 신첩도 상감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정진하겠사옵니다.”

오래 오래 상감과 정다운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니 말없이 그대로 곁에 앉아만 있어도 좋았다.

그러나 벌써 동창이 밝아지고 있었다.

덧없는 꿈이었으나 꿈 속에서 만나는 상감이 그녀에게는 사는 힘을 공급하는 근본이 되었다. 소세를 마치고 머리를 빗었다. 분단장은 아니 했다. 소세를 하는 거나 머리를 빗는 것도 그리운 님을 꿈길에서나마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랑에서 대감마님께서 올라오시라는 분부를 월선이가 전했다. 왠지 불안한 예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어서 들어오오!”

그녀는 늙은 아버지에게 사뿐이 절을 하였다.

“거기 앉게나. 그래 요사이는 음식을 좀 드오?”

“예, 아버님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많이 먹고 많이 자고 하옵니다.”

“암 그래야 하오. 세상 일이란 그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것, 언제 다시 햇빛이 비칠 날이 올지 알겠소. 그러니 오래 몸을 보중하는 게 제일이요.”

“예! 저도 그렇게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벌써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안 잔다고 해서 말을 못 드리고 있었소. 다행히 요사이는 마음을 고쳐 음식도 하고 잠도 이룬다고 해서 드리는 말이니 마음 든든히 먹고 들어 주오. 알겠소?”

“예!”

그녀의 가슴은 많은 슬픔과 겹친 불행으로 이제는 거의 무감각의 상태가 된 것을 아버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름 아니라 현덕왕후(현덕왕후)께도 화가 돌아가서 서인으로 추폐(추폐)가 내렸다는 것이요. 그리고 금성대군도 순흥(순흥)으로 귀양을 가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상감의 생모인 돌아간 양반에게까지 화를 입힌 것을 생각하고 또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면서 조정 소식을 알려 주고 왕위 복구를 위해서 애쓰던 금성대군을 생각해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아버님! 내려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오. 너무 심려를 하지 마시고 몸 조심에나 힘을 쓰오.”

송부사의 얼굴도 그림자가 자욱했다. 그는 그대로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다.

한편 경상북도 순흥으로 귀양을 간 금성대군은 며칠을 번민 속에서 지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이 형인 세조의 탈권이었다. 탈권에만 그치면그대로 참을 수 있었다. 어린 상왕을 왕위복구에 가담했다는 구실로 정배를 보낸 일에 대해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며칠 몇 밤을 울어 새웠다. 기어코 그는 동지 규합에 나섰다.

원래가 호탕하고 잘난 대군의 모습은 많은 사람의 공명을 일으키게 했다. 그 중에 부사(부사) 이보흠(이보흠)과는 흉금이 맞고 뜻이 맞았다. 그리하여 노산군 복위를 위한 모의는 착착 진행되었다. 여기에 집합되는 우국지사와 순흥병사(순흥병사)는 굉장한 숫자였다.

그러나 이 또한 천시를 못 얻었으니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금성대군에게 가깝게 있던 시녀와 순흥 한 관노(관노)는 이 일을 사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는 얘기였다.

금성대군의 하옥(하옥)은 물론 영남 인사들의 주살은 고을의 냇물을 붉게 물들였다. 한편 세종의 아들 한남군(한남군), 영풍군(영풍군) 등도 이때 연루자로 귀양을 가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금성대군은 사사(사사)를 받게 되었다. 그는 단정히 꿇어 앉아 영월땅을 향해 서배(서배)하고 통곡하면서 죽음에 이르렀다. 이 참혹한 소식이 노산군 부인의 귀에 아니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안절부절했다. 이 일을 상감께서 모를 리 없고 이 일을 알 상감의 흉중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했다. 물론 금성대군의 참사를 안 순간 가슴이 덜컥 떨어져 없어지는 것 같은 것을 감출 수는 없었으나 그보다 으레 뒤에 상감에게 닥쳐올 후환이 더욱 더 몸서리가 쳐지면서 두려웠다.

(설마 하니 그럴 리야 없겠지! 설마 일국의 왕자를 제아무리 잔혹무도한 세조일망정 삼촌인 지금의 상감이 화를 주지야 않겠지! 그러나 정배까지 보낸 후의 화라는 것은 너무나 뻔한 것이 아닌가! 세조의 친 동생인 금성대군도 사사했다는데. 조카쯤이야…)

자욱한 혼란이 그녀 머리를 휩싸 왔다.

(오냐! 내게는 수강궁에서 친가로 나오던 날, 아니 생이별을 고해야만 했던 날 지녔던 비상(비상)이 있다. 나는 목숨이 아깝지 않다. 만일 상감인 지아비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나도 같이 따라가서 저 세상에 가서나 영원히 지아비라고 부르면서 섬기자.)

그녀는 서릿발 같은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그 소식을 들은 날부터 도저히 목에 물 한 모금 넘길 수가 없었다. 이것을 보는 아버지 어머니의 근심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월선이도 대방마님의 어떤 명령을 받았는지 잠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중전마마, 오늘은 아니 주무십니까?”

“오냐, 너 먼저 자거라. 난 조금 있다가 자마.”

“아니올시다. 어서 침소에 드셔야 상감을 만나 뵈오려 떠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쇤네가 말씀 올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잠이 아니 오니 그 아니 딱하냐? 네 말이 옳긴 옳다마는…”

큰 한숨이 저도 모르게 뿜어 나왔다. 걱정하다 못해 꽉 차 있다가 몰려 나오는 호흡이다.

이미 각오는 서 있건만 설레이는 가슴을 달래기가 어려웠다.

“월선아, 어머님 자리에 드셨나 가서 보고 오너라.”

“예”

월선이가 안채로 사라졌다. 근래 어머니는 딸 걱정하느라 부쩍 백발이 늘었다.

“중전마마, 아니 듭시고 불이 켜진 채 기침소리만 들립니다.”

“오냐, 그럼 나 좀 안에 들었다 나오리라.”

대청에 올라선 그녀는 아직도 불이 켜 있는 어머니 안방을 열었다.

“어머님, 어째 아직껏 침소에 안 드시고 앉아 계십니까?”

“오, 중전이요? 왜 아니 자고 밤중에 나왔소. 하긴 사랑채 아버님도 주무시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머님, 불효자식 때문에 받으시는 아버님 어머님의 심려를 어떻게 하면 저의 힘으로 덜어드릴 수 있사옵니까?”

“우리들의 걱정은 중전의 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요. 중전은 숨기지 말고 속 마음을 이 어미한테 얘기할 수 없겠소?”

“예, 그러지 않아도 어머님께나 이 심회를 밝혀서 마음의 안정을 얻어 볼까 하옵니다.”

“오, 그렇게 하오. 어서 말해 보구료.”

“중전 몸이 아닌 이 몸이 요사이 그래도 위로를 받사옵는 것은 어머님의 인자하신 그 음성 속에서인가 합니다.”

“다행이요. 중전을 위해서도 난 좀 더 오래 살면서 세상 되어 가는 꼴을 봐야겠소.”

“어머님. 금성대군 참변이 그걸로만 그칠 것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다음 말은 하지 않아도 오래 조정과 국사를 보아온 어머니는 익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아유!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그저 신명이 도와 주시기나 빌고 지내야지. 아버님께서는 벌써 며칠 전부터 앉아 계신 대로 눕지도 않고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계시니 그저 딱하기만 하구료.”

“전 이미 각오를 가졌습니다. 아버님께도 어머님께서 여쭈어 주십시오. 저의 결심은 이미 되어 있다고 말씀입니다.”

어머니가 딸의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중전은 이상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니요. 언제나 부모 슬하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되오.”

그녀는 어머니의 혜안(혜안)이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그러하오나 어머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무얼 어쩐단 말이요! 목숨은 하늘이 점지하시는 것, 함부로 다루었다가는 그 화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되오.”

언제나 인자하면서도 추상 같은 말을 주는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님, 상감의 용체에 무슨 일이 있으시면…”

그녀도 어머니도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 말 잘했소. 상감마마께옵서 천수를 다 못하시고 무슨 일이 생기신다면 중전은 더욱이 세상에 남아서 상감의 억울하신 넋을 진혼(진혼)해 올릴 의무가 있지 않소?”

“어머님, 어찌 저 혼자만 남아서 천수 다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중전은 어찌 이 에미 말을 못 알아 듣소? 억울한 일은 언제나 백일하에 나타나는 법, 그것이 내 생전에 나타날지 어쩔지는 모르지만 중전만은 오래 살아서 그 억울함을 설욕해야 되지 않겠소?”

“예, 어머님 말씀 가슴에 명심하고 받들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일국의 국모될 자격이 있소.”

어머니는 진정으로 딸을 우러러보고 싶도록 갸륵하게 생각했다.

“어서 내려가 자도록 하오. 월선아! 게 있느냐?”

“예, 대방마님 여기 있사옵니다.”

“너 각별히 마마님 잘 모시고 받드시는 거 잊어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예, 대방마님, 조금도 염려 마시어요. 쇤네 몸이 없어질 때까지 중전마마를 모시고 받들겠사옵니다.”

노산군 부인은 월선이를 앞세우고 친정 어머니의 방을 물러나와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한편 멀리 영월 산골에도 금성대군의 참변소식은 날라왔다. 왕자의 기품을 잃지 않고 지내는 노산군의 태도는 누구나 경의를 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도 동헌에 앉아서 책 읽기에 여념이 없는 그의 심회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금성대군의 복위운동이 사전에 탄로되어 사사 받은 일과 영남 인사들이 피가 내를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은지 수일이 지났다. 이제 다가올 일은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 화가 오늘 올지 내일 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때 황급히 뛰어와서 알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뢰옵니다. 금부도사가 저기서 온다고 하옵니다.”

“오냐, 시끄럽게 하지 마라. 이미 각오하고 있는 몸! 걱정할 일이 못된다.”

나이 어린 왕자가 이토록 죽음에 이를 때 태연한 것은 이왕 죽을 몸이니 하루 빨리 죽는 길만이 이 무섭고 몸서리쳐지는 골육상쟁(골육상쟁)을 안 보는 첩경이라고 알고 지내 왔기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약을 받들고 동헌으로 들어온 도사는 감히 노산군 앞에 이것을 바칠 수가 없었다. 나장(나장)의 재촉에도 그는 왕년의 상감이었던 당년 열일곱의 왕자 앞에 약사발을 드리기에 하늘이 무서웠다. 이것을 보고 섰던 노산군을 모시던 한 서생이 말했다.

“제가 상감을…”

그는 몸에 지녔던 활 시위를 가지고 달려들어 노산군의 목을 졸랐다.

하늘도 땅도 울고 산골 두메의 초목도 같이 통곡하였다. 전하는 말은 상감 시체마저 강물에 띄어서 어복(어복)에 장사지냈다 한다.

 

 

 

잃어버린 세월

노산군 부인의 친가에서는 사랑채 송현수도 일체 두무불출을 하고 찾는 사람도 없는 방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앉아만 있었다.

마치 실신한 사람 같았다. 안채에 있는 송현수 부인도 보기에 너무나 애절하였다.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딸과 함께 자리 보존하고 누운지 며칠인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집안 어른들이 이러하니 아랫사람인 비복들도 기력이 없고 우울해졌다. 왕년의 중전이던 노산군 부인이 거처하는 후원 별당의 모습은 너무나 처량하였다.

그러나 자연은 어김이 없었다. 화사하기만 하던 함박꽃이 지고 흰 나리꽃이 별당에 거처 하는 노산군 부인의 마음은 아랑곳도 없이 그 은은한 향기를 자랑하고 있는 황혼 짙은 시간에 월선이만이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랐다. 오늘도 진종일 물 한 모금 안마시고 누웠다 앉았다 하는 노산군 부인이 너무나 딱해 보였다. 눈물이 말랐는지, 아니면 중전의 체모를 생각함에서인지 그녀는 아예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월선이는 도대체 이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백발이 성성한 대감 내외분을 보기가 송구스럽고 후원 자기 거처로 오면 중전마마의 침통과 세상을 외면한 듯한 모습을 차마 같은 여자로서 무심히 볼 수가 없었다.

아까 들여온 잣죽은 식어서 엉켜버린 채다. 몇 번이나 잡수시라고 종용은 했건만 노산군 부인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허공을 올려다본 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월선은 또 한 번 안채 부엌에 나가 다시 죽을 데워서 갖다 달라고 이르고 곧 들어왔다.

대방마님이 잠시라도 마마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내리기 때문이다. 잣죽이 다시 따끈하게 데워져 들어왔다.

“중전마마! 기력을 차리시고 한 수저라도 드셔야 안채 마님들도 진지를 잡숫지 않으시겠사옵니까? 쇤네는 너무나 답답해요. 안으로 들면 대방마님께서 자리 보존하신 채 식음을 전폐하시고 사랑에서는 대감마님께서 아예 출입도 안하시고 하루종일 앉아만 계신다 하오니…”

“오냐, 내가 참으로 불효자식이구나. 이 몸은 죽는 길도 맘대로 할 수 없는 몸, 어쩌면 좋단 말이냐.”

몰아 쉬는 한숨에 너무나 큰 한이 맺혀 있었다.

“중전마마, 쇤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사람에 지나지 않는 몸입니다마는 들은 풍월로는 양친님 앞에서는 그런 생각을 품는 것조차 불효가 된다고 들었사옵니다.”

“네 말이 옳다. 너에게 배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월선아, 너는 누구보다도 내게 힘이 된다. 네 은혜를 한시라도 잊지 못하겠구나.”

“마마께서는 늘 그런 말씀만 하시네요. 쇤네는 마마님이 웃으시면 따라 웃고 마마님께서 찡그리시면 저도 찡그리는 거울 같은, 그림자 같은 존재가 아니겠사와요?”

“넌 곧잘 문장 속에 있는 말을 다 할 줄 아는구나. 아무튼 기특도 하다.”

“중전마마, 어서 한 수저만이라도 드시어요. 그리고 기력을 차리시고 안방 대방마님께 납시어서 음식도 권하시고 위로도 하시어야 중전마마의 체모가 서지 않을까 소녀는 생각되옵니다.”

“그래 이리 가지고 오너라.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마시자. 네 말이 과연 옳다.”

중전은 반 사발이나 되게 마시고는 풀린 머리를 얹은 후 월선이를 앞장 세우고 나섰다.

몇날 잠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으므로 어지러웠다.

“어머님, 들어가도 좋습니까?”

“중전이요, 어서 오오!”

이제는 말할 기력도 없는 어머니는 딸을 반겼다.

“어머님, 소녀는 지금 잣죽도 먹고 이렇게 소세도 하고 머리도 빗고 정신차리고 나왔습니다.”

“오, 어디 보오. 암! 그래야 하오. 그래야 하구 말구요. 그래야 상감의 억울하신 영혼을 위로해 올리고 나라 꼴이 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게 아니오! 나도 오래오래 살아서 반역한 사람의 마지막을 보고 싶구료.”

“어머님, 부디 소저와 같이 오래 사셔서 어머님 말씀같이 세상 돼가는 것을 보셔야 하지 않아요?”

“중전의 말이 과연 옳소. 월선아, 게 있느냐? 가서 무어 먹을 것 좀 가지고 오너라. 마마께서 이렇게 기력을 차리시고 듭시었는데 난들 이렇게 있을 수야 있겠니?”

송부사 부인은 지금 이 시간이 진정으로 기뻤다. 효심이 극진한 딸이 어머니를 생각하여 그 사무치는 슬픔을 지탱하고 올라와서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더욱 그랬다.

“중전, 사랑 아버님께 가 뵈야겠소. 나도 한술뜨고 같이 나갑시다.”

송부사 부인은 언제 알아도 알게 될 노산군 참변을 딸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예, 그러세요. 저도 아버님 뵙고 싶습니다.”

아직은 노산군의 최후를 모르고 있는 부인은 어머니가 사랑으로 가자는 애기를 단순히 들었다. 비틀거리는 대방마님을 몸종이 붙들고 월선이는 노산군 부인 뒤를 따라 사랑으로 갔다.

“아버님, 아직 침소에 안 드셨어요?”

“웬일이요. 어서 들어오오.”

쉰 목소리는 가라앉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있는 그의 마음을 말하는 듯했다.

“부인도 같이. 무엇 드셨소? 중전도…”

“예, 대감께서는?”

“나야 먹었지. 암, 먹어야지! 안 먹으면 죽는 법.”

그것은 남에게보다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소리였다.

“중전도 정신을 처리오. 이보다 더 무서운 박해가 와도 정신을 차려야 사는 법이요. 그리고 오래 살아야 마지막을 보는 것, 알겠소?”

“예, 아버님, 저는 오래 살아서 상감의 진혼도 뫼시고 아버님 어머님에게 효도도 실컷 하고 싶사옵니다.”

“오, 과연 내 딸이로고!”

“아버님, 이미 각오하고 있사옵니다. 조금도 구애 마시고 제게 얘기해 주십시오.”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누가 말해 주어서 안 것이 아니라 궁중생활의 경험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지아비되는 노산군이 이 세상에 생존해 있다면 오히려 거짓이라고 규정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전의 입에서 먼저, 그 말이 나오기를 우리 두 늙은이는 기다린 셈이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주오.”

송부사는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한 미미한 서생놈에게 화살의 시위로 목을 졸리워 마지막을 고한 상감의 참변을 띠엄띠엄 얘기했다. 노산군 부인은 아무 표정도 없이 얘기를 들었다. 차돌같이 차고 굳은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새파랗게 맺힌 얼굴이었다.

말을 마친 늙은 아버지는 차마 딸의 얼굴을 정시하지 못했다. 어머니 역시 그러했고…

장지 밖에서 엿듣고 있던 월선이는 치마끈으로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자꾸만 자꾸만 닦았다. 노산군 부인은 이제는 아버지 처소를 일어서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가 발에다 못을 박아 놓은 것처럼 일어서지지를 않았고 입도 꿰매 놓은 것같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자기 넓적다리에 가져다가 꽉 꼬집어 보았다. 분명히 따끔하게 아픔이 왔다.

(정신을 차리자. 이래서는 안 되는 몸, 너무나 할 일이 많구나.)

중전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도사렸다.

“아버님, 물러가겠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심려가 안 되도록 굳건히 살면서 이 눈으로 똑똑히 세상 되어가는 형편을 보겠습니다.”

“갸륵도 하오. 중전이 그런 훌륭한 태도를 갖게 되니 우리 두 늙은이의 마음 한결 놓이는 것 같소.”

노산군 부인은 극한에 오른 슬픔과 억울함으로 마치 신경이 마비된 듯한 무감각의 상태로 세월을 보냈다. 옆에 직접 모시고 있는 월선이만이 가장 뻐저리도록 슬픈 심정을 느꼈다.

소복을 아무렇게나 걸친 노산군 부인의 자태는 청초를 지나 애절하게까지 보였다. 풀어 버린 머리는 더욱 윤기를 입어 머리카락까지 젖어 있는 듯 싶었다. 옆에 모시는 월선도 소복으로 어질던 상감을 추모했다.

상감의 참변을 아버지에게 들은 그 시간부터 노산군 부인은 얼음처럼 동작과 표정이 차게 바뀌었다. 분명 얼음이었다. 찬바람이 휙휙 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전에 없던 일, 즉 아침 저녁으로 양친에게 문안 드리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잣죽이나 깨죽을 물리친 노산군 부인은 새로 명하여 조미음을 쑤어 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자기는 조미음을 먹으면서 부모의 조석을 꼭 직접 참견하고 권하는 것이 일과였다.

상감의 시체를 뫼시지 못한 것은 노산군 부인이 품은 한 중의 한이었다. 그녀는 신위(신위)를 소박하게 자기 방 바로 옆에 붙은 마루방에 모셨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삼배를올렸다.

살림은 하루 하루 영락해 갔다. 많은 종들도 다 내보내고 밥짓는 사람 하나와 청지기 그리고 월선이 셋만 남았다. 조석 삭망에 올릴 음식을 따로 차리기도 힘겨웠다. 그리하여 점심도 없이 아침 저녁 들여오는 조미음을 정성껏 바치기로 그녀는 각오했다.

상감도 굽어 살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 저녁에도 조미음이 나무 쟁반에 올려지자 그녀는 손수 받아 곧 상청이 있는 마루방으로 갔다. 조용히 쟁반에서 미음 그릇을 꺼내 올리고 삼배를 하였다. 아무도 옆에는 없었다. 월선이 참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옆방에서 월선이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조용히 삼배를 하고 있었다.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정해 놓고 하는 일이다. 노산군 부인은 두 손을 합장하고 부처가 되신 상감을 조용히 눈 앞에 그려보며 명복을 빌었다.

“상감마마, 신첩 여기 사바세계에 살아 있사옵니다. 억울하신 영혼을 위로 드릴 수 있는 몸은 단지 이 몸밖에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첩이 상감을 따라가지 못하는 심중을 상감만은 헤아려 주실 줄로 믿사옵니다. 상감이 무서운 세상에서 어느 안식하는 처소로 옮기셨는지 이몸 알길이 없사오나 아직도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몸, 이 이상의 불효가 없도록 보살펴 주시옵기 비옵니다. 상감마마 오늘도 낙원에 계시면서 이 사바세계를 잊으시고 영원한 복락만이 깃드시기를 바라옵니다.”

늘 외우는 정해진 기원(기원)이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붙이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그 머리속에, 그 가슴 속에 상감을 그리지 않는 시간이 없었다. 조석으로 드리는 배례(배례)만이 그녀로 하여금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살아 있는 상감 앞에서 하던 그대로 뒷걸음을 세 걸음 걷고 조용히 물러나 옆에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월선이는 기도하는 동안 다 식어버린 조미음을 가져다가 주인 아씨에게 주었다. 그러면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부인은 그 조미음을 입에 갖다 대고 마서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안채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머니가 무엇을 잡수셨는지 안녕하신지 문안 드리고 아버지가 여전하신지 알고 싶어서였다. 잠시 안채하고 드나들다가는 다시 자기 처소로 들어오면 이제부터는 그녀 시간이었다. 중전은 뜰로 내려가 후원 큰 매화나무가 서 있는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영월 쪽인 동쪽을 바라보고 상감을 그리는 것이다. 상감의 생존시 꿈 속에서 보던 그 강물이 가까운 동헌으로 마음은 달렸다. 요즈음은 꿈도 없다. 아니 꿈에 뵈도 먼 먼 피안의 사람으로 보일 뿐 닿을락말락하게 상감은 보였다. 말 한마디로 건네지 못하고 곧 따라 뛰어 쫓아가면 그 자리에는 없고 또 저 멀리 가서 있다. 따라가면 또 그 모양이다. 중전은 기진맥진해서 식은 땀을 흘리고 잠을 깨고는 했다.

상감이 세상에 있을 때는 멀리 떨어진 영월땅이지만 밤마다 꿈 속에서 즐겁기만했다. 그러나 세상을 무참히 떠난 후에는 꿈 속에서라도 즐거울 수가 없었다.

(죽은 사람은 여기 세상 사람과는 인연이 먼것인가? 아직 따라가지 못한 이몸이 죄라면 죄겠지…)

그녀가 그 자리에서 서 있는 시각이 얼마인지는 월선이 이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중전마마, 안으로 듭시어요. 밤 바람이 아니 좋사옵니다.”

번번이 월선의 이 소리에 자기 정신으로 돌아가는 중전은

“그래, 들어가자. 네게 미안하기 이를데 없구나. 제발 너도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먼저 쉬고 하래두 말을 안 듣는구나!”

하고 거의 짜증 섞인 말투로 하였으나 그 소리도 월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마께서 안 듭시는데 제가 어떻게…”

“얘! 그리고 제발 너 그 중전마마 소리 좀 빼놓고 말할 수 없을까? 아씨라고 불러다오.

소원이다. 이 나라에 중전이 엄연히 계신데 외람되게끔…”

“쇤네에게는 하늘 밑 땅 위에서는 마마 한분만이 중전이십니다. 누가 뭐래도 제게는…”

그녀는 입을 채로 자리가 깔린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합장하고 입 속으로 기원하는 것이다.

“말을 못해 봐도 좋사옵고 옆에 뫼시지 않아도 좋사옵니다. 이 시간부터 상감이 계신 곳으로 더듬어 갈 수 있게하여 주십시오.”

천지신명과 부처님에게 드리는 소원이었다. 눈에는 안 보이는 어떤 힘에게 비는 마음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자리속으로 몸을 묻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마음가짐을 간직하고서. 지존한 사람을 생각하고 그리는 가슴은 한 오리의 흐름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채찍질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쉽사리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돌아 눕다가 보면 날이 밝는다. 아침 삭망을 마친 그녀는 안으로 어머니를 보로 올라간다.

세조의 왕조가 이 쇠락해 하는 송부사 집을 염두에도 두지 않는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한 일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눈 여겨 보지 않는 집. 뜻있는 사람이 있어도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그 집을 찾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다. 종친들이나 벼슬아치들이 마음을 써서 노산군 부인에게 문안도 드릴 겸 송부사를 위로할 생각으로 드나들었지만 그들에게 어느덧 화가 미쳐 귀양을 갔고 혹은 행방이 묘연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 같은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후원에 있는 여러 가지 수목과 꽃들이 피고 지는 속에서 계절을 느낄 따름이었다. 송씨는 치자꽃이 향기롭게 피어나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이렇게 외로운 때에 너그럽고 인자한 양친이 안 계셨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세심한 위로를 해주는 월선이의 존재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세상에 살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전마마, 사랑에 부원군 대감께서 오셨사옵니다.”

“오 그래, 언제나 변함없는 후의구나.”

“대방마님께서도 고마우신 양반이라고 오늘도 몇번 말씀하시던데요. 그리고 또 쌀도 보내오시고 필육도 보내셨다고 하시더군요.”

“그 신세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그리고 마마님 잡수시라고 녹용 든 보약도 가지고 오셨다 하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보약을 먹겠니? 아버님이나 어머님이나 달여 드려야지.”

“아니어요. 대방마님께서 마마님 옥체 걱정을 얼마나 하시는지 아셔요? 그래서 당장 내일부터라도 달여 올리라고 아까 말씀하시던걸요.”

“아니다. 내가 나가서 어머님께 여쭈어야 하겠구나. 나야 젊은 몸! 아무것을 먹으면 어떻겠느냐.”

그것은 조금도 숨김 없는 진심이었다. 잠시 후에 청지기다 들어와서 아뢰었다.

“부원군 대감께서 이리로 들어오신다고 하십니다.”

부원군 대감이라는 사람은 단종의 생질 해평 부원군(해평부원군) 정미수(정미수)를 말함이다. 그도 야인으로 지내고 있지만 조정의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덕으로 큰 화는 면하고 있었다. 가지 재산으로 그럭저럭 지내는 사람중의 한사람이었다. 그의 태도는 중전을 알현 하는 예의를 조금도 결한 데가 없었다.

“중전마마! 정미수 문안 아뢰러 왔사옵니다. 옥체균안하시온지…”

“그 동안도 별고 없으셨소? 댁내도 모두 안녕하시고요?”

“예, 덕분에… 중전마마 기체 여전 하시온걸 뵈오니 마음 든든하옵니다.”

“부디 오래 사셔서 서로 의지하고 나라 되는 꼴 구경도 하고… 그리고 항상 베풀어 주시는 후의를 무엇으로 사례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구료.”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어찌하여 심려를 하시오니까?”

“고맙소,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서 사례를 드리오.”

“황공하신 말씀 어찌 이 마음 다해서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전은 감격에 넘쳐 얼굴도 들지 못하고 말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중전마마, 보약을 좀 가지고 왔사오니 잡수시고 기력을 차리셔서 만수무강하셔야 되겠사옵니다.”

“너무나 고맙구료. 온 집안 살림을 보살펴 주시고 내 약까지 걱정을 해주시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아무 심려 마시고 꼭 잡수시어 이 다음에 와 뵈올 때는 좋으신 얼굴을 보게 해주십시오.”

“그 정성 잊지 않고 먹으리다.”

그들의 대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전과 신하의 알현이었으며 감정이 서로 통하는 인간과 인간의 대면이었다.

 

 

 

형극을 넘어서

왕년의 여양부원군(여양부원군) 송현수는 일찍이 아들이 없어 딸 하나를 예절과 절도를 다해 기를 보람이 있어 부원군이 되었으나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꿈에 지나지 않았다.

단종인 노산군을 영월 정배지에서 참살하고 난 세조는 얼마 안 되어 송현수를 귀양 보냈다. 괴로운 세파 속에서도 노산군 부인이 기력을 잃지 않고 살아나간 것은 너그러운 아버지를 가진 힘이었다. 그러나 어버지가 귀양을 가고 난 이제, 유일한 사랑은 어머니 하나 뿐이었다.

넓고 퇴락한 집 속에 식구라고는 안방에 어머니 하나와 밥짓는 종이 하나 있고 후원 별당에 두 여인이 침식을 같이 하고 있을 뿐이었다. 먹을 것과 땔감을 죽지 않을 만큼 보내주는 단종의 생질 정미수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들이 사는 까닭이나 힘은 오로지 한길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었다. 목숨이 아까와서 버티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가 견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딸을 견제하고 딸은 어머니를 견제하면서 그어가는 평행선의 생명이었다.

삶이라기보다 고문 같은 세월이었다. 노산군 부인은 아버지마저 없는 절간같이 고요한 별당에서 오늘도 과거를 추억해 보고 있었다.

그녀가 철이 들었을 때는 어머니 품을 떠나서 후원 별당에 옮겨와 있었다. 동갑짜리 월선이가

“아기씨! 대방마님께서 급히 올라 오시래요.”

로 시작하는 일과는 어머니가 가르치는 양반집 규수로서 필요한 모든 법도를 배우는 것이었다. 여덟살짜리에게는 지나친 요구가 허다했지만 바탕이 총명한 그녀는 하나를 배우면 둘을 아는 혜지(혜지)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선생을 놓고 배우는 글도 주위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진도가 빠르고 이해를 쉽게 해서 송부사의 기쁨을 부풀게 만들기도 했다.

바느질을 배우는 솜씨도 놀랍도록 날렵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했다.

어머니의 가르침과 어버지의 훈육은 각기 예절과 바느질, 글과 글씨 쓰는 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녀는 어느 일에나 성의를 갖지 않고 대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녀의 일과는 양친을 즐거움으로 이끌어 넣었다.

그러나 아무리 으젓하고 조숙한 그녀였지만 어른 눈에서 벗어나면 본연의 진정한 아기씨로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얘! 월선아. 아까 어머니께서 약과와 다식 이리 가지고 온!”

“예, 아기씨 우리 또 소꼽장난 해요?”

“그래, 어디서 할까? 그냥 방에서 놀까! 마당에 자리 펴고 할까?”

“아기씨! 얼마나 꽃이 예쁘고 새소리가 고운데요. 뭣 때문에 방구석에서 해요.”

이건 월선이의 제의였다. 아기씨도 재미있고 월선이는 다시 없이 즐거웠다. 월선이는 아기씨와 더불어 소꼽장난하는 시간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아기씨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규수로 하루 하루 자라났다.

그녀를 먼발치라도 보고 간 양반집 어른들 아니 부인들은 한 번씩 침을 안 흘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내 며느리 소리 내 손주며느리감으로 생각해 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열세살 되던 봄에는 궁중에서 간택설이 떠돌았다. 양반집 규수 중에서 동궁빈을 고르는 일이었다. 숱한 규수들의 열에 끼어 그녀가 간택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부터 그녀의 주변은 온통 세자빈마마 대접이었다. 양친을 비롯하여 드나드는 일가친척 종들까지 배풀던 그 융숭한 대접은 지금도 그녀가 잊을 수 없는 일의 하나였다. 모두들 이런 경사가 어디 있느냐고 기뻐했다. 그리고 아침 저녁 온갖 사람들의 출입으로 송부사 집의 대문이 메이다시피 했다.

정작 그녀는 멍멍한 속에서 이제부터는 궁중예법, 아니 앞으로 중전이 될 몸으로서의 법도를 배우는데 전심을 다해야 했다.

선생이 많이 있었다. 간택 받기 전에 양반집 아가씨로서 배운 예절과는 또다른 예법을많이 배워야 했다. 몸가짐, 옷입는 법, 언어 등 세밀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전같이 자유의 시간이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다 못해 식사를 하거나 걸음걸이의 예절까지 달리 배워야 했다. 그녀는 이렇게도 세자빈의 자리가 무섭고 어려운 것인가를 어린 가슴이나마 막연히 느끼면서 지냈다.

그래도 친가에서 있을 때는 자유로왔다.

어머니에게 의논도 드릴 수 있었고 얼마간 짜증 비슷한 말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거를 회상하며 가슴 속에 젖어오는 추억이 있다면 친가의 마지막 날인 궁으로 들어가던 날이었다.

그날도 꼭 지금같이 눈에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어머니께 들은 교훈을 마음 속으로 되씹고 있었다.

양반집 딸은 한 번 양반끼리 한 결혼에도 친가 출입을 못하는 법이어늘…

항차 궁으로 들어가 장차 중전이 될 그녀가 가는 길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길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집안은 잔치집인지 난가인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고 들떠 있어 그녀의 가슴은 진정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라도 더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조그마한 소원도 허락되지 않았다.

양친의 얼굴은 도시 볼 수가 없었다.

차려입고 앉아 있는 그녀를 수모가 양쪽에서 부축해서 일으켰다.

시간이 되었는가? 지금 이렇게 걸어서 앞마당으로 나가면 궁으로 들어가는 가마를 타야만 하는가?

착잡한 가슴이었다.

그대로 동궁빈은 친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는 것인가?

그녀는 끄느 대로 끌려서 신켜 주는 신을 신고 후원으로 나섰다.

수모들은 그녀를 사랑채 아버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면 그렇지! 아버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구나!)

지각없이 가슴이 젖어 들어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머리를 바로 잡았다. 며칠을 두고 하던 어머니 말이 귓속을 울리고 지나갔다.

“궁으로 들어가는 날, 궁 뿐이 아니라 누구든지 규수들이 시집을 가는 날 눈물을 흘리는 일을 기(기)하는 일중에서도 제일로 기하는 일이니라.”

아버지의 표정도 굳어 보였다.

어머니의 얼굴은 처절할 정도로 엄숙한 빛을 띠고 있었다.

수모가 시키는 대로 아버니와 어머니에게 절을 올렸다.

중후한 아버지 음성이 들렸다.

“지금은 나라의 세자비! 앞으로는 중전이 될 막중한 몸이다. 항상 네 몸은 송아무개의 훌륭한 집에서 태어난 여인이라는 걸 잊지 않으면 되느니라.”

간단한 한 마디의 말이었다.

궁중에서의 잔치도 그녀로서는 잊지 못할 일이었다. 당시 상감이던 시아버지 문종의 기쁨과 문종왕후의 즐거움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항상 병약하던 문종은 하루 빨리 양위를 하도록 서둘렀다. 얼마 후 침소에 눕게 된 선왕은 기어코 양위의 뜻을 밝히었다.

여러 날 있던 잔치, 동궁과의 초야를 치루던 일들, 그녀는 한 가지도 빠치지 않고 머리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또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면 온화한 가을로 접어든 어느날 베풀어졌던 상감의 즉위식이었다.

상감은 단종이라고 호명(호명)되고 그녀는 정순왕후(정순왕후)로 불리워졌다.

이제는 중전이 되었다. 열세살의 어린 왕후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국모의 자격을 지녔다.

옆에 뫼시는 시녀는 여전히 월선이었다.

“중전마마! 참으로 훌륭하시옵니다. 대방마님께 한 번 그 자태 뵈어드리고 싶사옵니다.”

이것은 월선이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근 한달을 부왕 승하로 상감이 슬퍼하는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 이제는 명실공히 상감으로서의 모든 정무를 손수 보게 되었다.

물론 옆에는 세종 때부터 충신인 김종서, 황보인, 정인지, 신숙주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평연월은 단종에게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삼감의 삼촌인 수양대군의 야망이 날로 깊고 두터워져 가는데 그 원인이 있었다.

왕비는 처음에 어린 단종을 도웁고 보필하는 체하는 수양대군이 참으로 호탕하고 훌륭한 종친이라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충성스럽게 상감을 받드는 종친이라고만 여기고 반기던 터였다.

수양대군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 동지규합에 주야를 가리지 않았다.

이들의 모의는 착착 진행되었다. 그들은 먼저 눈의 가시 같은 우의정 김종서를 죽이기로 의논이 되었다.

드디어 수양은 김종서 부자를 먼저 처치하고 단종에게 충성을 바치는 어진 신하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단종은 이제 왕위가 역겹기만 했다. 더 앉아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단종은 마침내 양위를 결심했다. 침통한 얼굴로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 주겠노라고 상감의 말은 충성 된 신하들을 슬프게 했다.

수양은 세조라 이름하고 왕위에 오르니 이조 제 칠대 임금이었다. 그녀의 상념은 끝이 없었다. 친가에 있던 생활은 빼고도 궁에 들어갔던 열세살부터 단종의 참사까지 육년이라는 세월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육년간의 역사였다.

자신은 한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몸이지만, 자신의 마음이지만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친가에서의 십삼년은 어머니의 표정대로, 어머니의 말씀대로 움직였다.

궁에 들어간 날부터는 상감의 용안의 움직임이 바로 자신이었다. 상감이 웃으면 따라 웃었다. 상감이 찌푸리면 같이 찌푸렸다. 임금이 울면 같이 소리 없이 울었다.

궁 속의 온갖 골육상쟁, 권모술수들을 직접 듣고 보지는 못했다. 단지 공기로 알았고 전해 듣는 얘기로 짐작했다. 여하간 지아비의 원수는 삼촌인 지금의 세조가 틀림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없는 원망은 지금의 상감에게 쏠렸다. 그렇게도 귀중한 아버지마저 멀리 산골로 귀양을 보냈다.

언제 또 무슨 나쁜 소식을 가져다 줄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슬픔에, 그리고 갖은 악랄한 조정의 생태에 숙련되어 버린 몸이었다.

이제는 어떤 소리, 어떤 사건도 그녀에게 놀라거나 감격 같은 것으로 안겨 오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어머니를 위로하는 길이 자신을 위로하는 길이라고 확신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이미 임종할 날만 기다리는 반송장 같은 모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지가 한 달이 넘었다.

아버지가 사사된 것이 귀양가던 바로 이듬해 봄이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런 소식은 어머니에게서 모든 감정을 빼앗아가 버렸다. 단지 딸을 위해서 딸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 나가는 삶이라고 보였다. 왕비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넘었다. 옆을 지키고 있는 월선이는 노처녀가 되어 있었다.

“중전마마, 아무래도 대방마님께서 미음도 잘 못 잡수시니 큰일났사옵니다.”

“그러지 않아도 걱정이 여간 되는 것이 아니구나.”

그녀의 얼굴은 이십세 젊은 여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소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얼굴빛은 창백하다 못해 누른빛이 베어나오는 것 같았다.

“오늘도 부원군 대감께서 들르실 거예요.”

“어찌 아니, 네가?”

“어제 돌아가시면서 아무래도 마님의 용태가 심상치 않으니 내일부터는 내가 하루에 한번씩은 들려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 분은 아무래도 우리들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신 분만 같구나!”

“정말 그렇사와요.”

“월선아! 난 무엇보다 네 걱정이 태산이다. 이십이 넘은 노처녀가 여지껏 나 때문에 시집도 못 가고… 나야 태어나길 양반집에 태어나고 뫼신 지아비가 상감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지만 네 일이 여간 걱정스럽지 않구나. 늙은 처녀가 돼서 제대로 시집 가기 어려우면 하다 못해 착한 홀아비 자리라도 가야 할 텐데.”

그녀의 진정한 근심거리는 월선이었다.

“마마께서는 입만 벌리시면 그 말씀이셔요. 저는 중전마마에게 시집 왔다고 생각하고 사는걸요! 쇤네에게는 이것이 제일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너 같은 충비를 가진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인인지도 모르겠구나.”

“마마, 쇤네 역시 마마님같이 훌륭한 분을 뫼셔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후는 둘이 다 말이 없다.

그들은 말이 없어도 가슴 가득히 각기 상대를 생각하고 근심하는 일이 차 있어 언어라는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주인인 그녀는 월선이가 처녀로 늙어가며 자기만을 섬기며 옆에 있는 일이 눈물 겨웁도록 고마왔다.

시녀인 월선이는 하루 하루가 질식할 것 같은 중전마마의 생활이 불쌍하고 딱하다 못해 자기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살이라도 깎고 뼈라도 갈아서 섬기고 싶었다.

“월선아, 안으로 들어가 보자. 어머니께서 정신 좀 차리셨는가…”

“예.”

그들은 대청으로 올라섰다. 밥도 짓고 어머니 옆에서 시중을 드는 여인이 재빨리 일어서서 그녀를 맞았다.

“중전마마, 어젯밤부터 이렇게 한 번도 눈을 안 뜨시고 주무시기만 하옵니다.”

“그래? 어젯밤에 내가 물러간 후부터 쭉 이런 용태시냐?”

“예, 눈을 뜨셔야 미음이라도 올릴 것이온데 걱정이옵니다.”

그녀도 걱정이 되었다. 이 경우를 걱정이라는 말로만 표현을 다할 수 있을까?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어머니 머리맡에 가서 앉았다.

조용한 호흡으로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성성한 백발과 깊은 얼굴의 주름들이 지난 날을 얘기해 주는 듯싶었다.

그녀는 가만히 어머니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어머니.”

조용하게 불러 보았다.

대꾸도 표정의 변화도 없다. 다시 불렀다.

“어머니!”

약간의 경련 같은 것이 이는 것 같았다.

다시 초조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 큰 소리로 불렀다.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

어머니는 놀라는 표정으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아버렸다.

그러더니 딸의 손을 찾는 듯이 야위고 흰 손을 저으며 무어라고 입을 벌리려 한다.

“저 여기 있습니다. 어머님 이것이 제 손이옵니다.”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는다. 눈을 감은 채다. 노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없이 흘렀다.

그녀는 일찍이 어머니의 눈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녀가 철이 들면서부터 오늘날까지 어머니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희노애락(희노애락)이 없었다. 항상 입언저리에 띠운 인자스런 미소로 딸을 사랑하고 대견히 여기는 마음을 읽었고 서릿발 같이 차고 굳은 표정에서 집안의 근심을 눈치 챌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그녀의 가슴이 뿌듯해졌다.

“어머님, 어디가 많이 편찮으시오니까? 말씀 좀 해보셔요.”

딸의 말을 알아 들었는지 어머니는 고개를 두어번 가로 젓는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다. 월선이 너 가서 부원군 대감께 곧 좀 듭시라고 여쭙고 오너라.”

“예 곧 다녀오겠습니다.”

월선이는 뛰어 나갔다.

“어머님, 돌아가시면 안 되어요. 이몸은 혼자서 어떻게 하라고…”

그녀의 꽁꽁 묶어 놓았던 마음의 방파제는 확 무너져 버렸다.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앞 뒤 경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은 몇 해 쌓였던 단장(단장)의 피눈물이었다.

소리는 낼 수가 없었다. 어깨만 물결쳤다. 참아야지, 이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참을 수가 없었다.

방바닥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누가 혹시 보면 어떻게 하나 걱정으로 울음을 그쳤다.

“아.. 가.. 야!”

어머니가 어렸을 때 부르던 대로 띠엄띠엄 불렀다.

“예, 소녀 여기 있사옵니다.”

그녀도 어느덧 소녀라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부엌 여인이 미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노부인은 부엌 여인이 주는 미음을 반 사발이나 거의 받아 넘겼다. 그녀는 조금 안심이 됐다.

대청마루에서 정미수의 소리가 들려왔다.

“중전마마, 제가 왔습니다.”

그녀는 반가왔다. 시누이의 아들이니 조카지만 마치 오라버니나 웃어른같이만 느껴졌다.

“어서 안으로 드시오. 어머니께서 위중하시어서…”

그는 곧 들어왔다. 여전히 그녀에게 큰절을 하는 예의를 잊지 않았다.

노부인은 임종에 가까웠는지 약간 호흡이 거칠었다.

정미수가 방에 들어온지 얼마 만에 노부인은 말 한마디도 못하고 운명을 했다.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밥짓는 여인가 월선이가 구슬프게 통곡하였다. 정미수도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홀홀 단신이 되었다.

정미수는 재빨리 모든 장사(장사)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를 서둘렀다.

장례가 끝나는 사흘낮 사흘밤을 눈 한 번 붙여보지 못하고 미음으로 연명하는 그녀를 월선이는 딱해서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대청에 어머니 상청을 모셨다.

그녀는 온 젊은 긴날을 상청에서 살려고 이승에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삼년을 하루같이 상감의 상청을 모셨다. 아버지 상청 나간지도 얼마 안 되었다.

이제 또 그 자리에 어머니 상청을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배례를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 시간이 가장 뜻있고 보람 있는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부엌 여인도 내보냈다. 후원 별당은 닫아두고 안채로 월선이와 둘이서 옮겼다.

“중전마마, 어제 저 행낭채 엄서방이 그러던데요.”

“뭐라고 하더냐?”

월선이는 두 무릎으로 가만히 다가와서 귀에다 입을 갖다댔다.

“글쎄, 지금 상감께서 온 몸에 부스럼이 나셔서 아무리 영 하다는 의원을 다 불러다가 갖은 선약을 다 쓰고 대국에까지 가서 약재를 구해다가 쓰셔도 효험이 없어서 궁이 발칵 뒤집히다시피 하고 있다고 그러던데요.”

그녀는 아무 말도 나오지를 않았다.

눈빛만 약간 불 같은 것이 지났을 뿐이다. 인간이 직접 못 갚아도 신명은 어떤 형태로든지 갚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봄을 보내고 겨울도 보냈다.

일년이면 나가는 마지막 제사도 끝냈다.

정미수는 이제 이 넓은 집에 있어 무얼 하겠느냐면서 월선이와 같이 자기집으로 거처를 옮겨서 지내자고 몇 번이나 권해 왔다.

그러나 쉽게 결심이 서지가 않았다. 지아비를 그리는 후원, 매화고목 앞을 떠날 수가 없어서 그랬고, 아버지의 불쌍한 혼을 생각해서도 그랬고, 어머니가 시종일관 양반집 부인답게 맞은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에서도 그랬다.

“월선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부원군 댁으로 옮기는 것 말이다.”

“예, 제가 뭘 알겠습니까마는 마마께서는 이 친가를 따나기 싫어하시는 게 아니옵니까?”

“그렇다. 나는 잠시도 이 집을 떠나기가 싫다.”

“그럼 나리께 분명히 그 뜻을 말씀하시고 좀 더 지내신 다음에 대감께 의지도 하실겸 가시는 것이 옳을 줄로 생각되옵니다.”

“오냐! 네 말대로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들은 서로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마음은 아랑곳없이 세월이 흘렀다. 수년을 정미수의 눈물겨운 비호 밑에서 그녀들은 목숨을 지탱해 나갔다.

그녀가 하는 일은 상감의 생신날과 돌아간 날을 소찬이나마 차려서 추모하는 일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억울함과 어머니의 갸륵한 생애를 애처롭게 여기며 제삿날을 잊지 않고 제사 지내는 일이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이 되었다. 동갑인 월선의 나이도 스물다섯, 그들은 고난의 세월을 조용히 견디어 나갔다.

이제는 주종이 진정 아니었다. 친구였다. 아니 혈연 같았다.

뜻있는 사람이며 주위의 사람들, 동리 사람들도 정순왕후를 얘기하려면 꼭 같이 월선이를 칭찬하고 찬미했다.

 

<조선편 3> 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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