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에 관한 추억 – 원재길

기형도 산문집

 

1976.2. 신림중 졸업식에서

나는 지금 인사동 카페에 앉아있다. 창 밖으로 인사동 네 거리가 내려다 보인다. 해는 이미 기울었고 땅거미가 내리고 있다. 창가에는 촛불이 켜 있다. 생에의 마지막 날 형도는 인사동에 있었다. 일찌감치 회사를 나와서 해질 이맘 무렵 종로쪽에서 인사동 길로 홀로 걸어 들어왔다. 목격한 이에 따르면 그는 우울한 낯빛이었다고 한다. 그날 밤 그의 행적은 어느 분식집과 영화관으로 끝난다. 중간에 어딘가를 더 들렀을지도 모른다. 들렀다면 아마 이런 카페였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서 촛불 너머로 해거름의 거리를, 행인들과 짐수레와 자동차가 얽히고 설켜 분주한, 거리라기보다는 조금 넓은 골목이라는 표현이 보다 합당할 풍경을 내려다 보았을런지도 모른다. 일년 전 그때는 지금보다는 겨울이 조금 더 멀리로 물러난 삼월 초순이었다. 그런데 기온은 지금보다 더 쌀쌀했다. 그날의 기운으로 살이 아프다. 아파서 나는 가볍게 진저리를 친다.

 

 

1978년 중앙고2년 남성4중창단 ‘목동’에서 바리톤을 맡았다

우리는 스무 살 푸르른 나이에 삶으로 만났다. 만나서, 서른 살 여전히 푸르른 나이에 죽음으로 헤어졌다. 그와 처음 만난 즈음 역시도 삼월 초순이었다. 그는 즐겨 가디건이라고 부르는 앞 단추가 내리 달린 실로 짠 윗옷을 입고 다녔다. 보랏빛이 약간 도는 옅은 회색 옷이었다. 밑에는 면바지를 입었다. 고수머리에다 죽기 직전에 비해서는 적어도 십 킬로는 가벼운 적당하게 마른 체구였다. 콧등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짙은 눈썹과 얇은 쌍꺼풀, 기다리면서 눈동자를 찌를 것처럼 안으로 둥글게 말려 나오는 속눈썹, 자주 면도를 해야 하는 각진 턱을 가지고 있어서, 희랍 소년을 떠올리는 풍모였다. 눈빛은 맑고 티가 없이 깨끗했으며, 때로는 쓸쓸해 보였다. 무언가 여간 쑥스럽고 난처하다는 느낌을 또는 그 눈은 담고 있었다.

1988.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시절

 

어떤 때 노래를 부르고 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했다. 그는 노래를 썩 잘했다. 송창식이 십팔 번이었다. <철 지난 바닷가> <딩동댕 지난 여름> 같은 노래가 한 시절을 장식했다. 송창식이 지나가고 나서 조용필의 <한오백년>이 왔다. <제비>와 <내 생애 단 한번만>의 조영남도, 그리고 양희은도 잠시 다녀갔다. 노래뿐만이 아니라 그는 작곡에도 능했다. 우리는 그의 선창으로 신대철의 시 <處刑 3>에 곡을 붙인 노래를 한 소절 한 소절씩 따라 배웠다.

‘저 산 노을이 비치고 온 몸에 금이 가요. 사방에서 노을이 떠요. 살고 싶어요. 아~ 사람이 죽으면 노을에 묻히나요.’

1982. 윤동주 문학상 수상후

우리가 만나 대학 4년을 내내 기거하다시피 한 한 평 반 넓이의 서클룸이 생각난다. 전쟁 때에 포로를 가두어둔 곳이라는 설이 나도는 창문에 촘촘한 창살이 달리 골방이었다. 벽은 온통 낙서투성이였다. 역시 대학 시절 내내 아지트로 삼았던 김지미의 좋은 인상만을 닮은 아줌마가 주인인, 다방 ‘캠퍼스’도 생각난다. 강의가 빈 시간이면 만나서 병아리처럼 햇빛을 쪼이며 뒹굴던 학관 앞 잔디도,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배수관 속으로 기어들어가 군불을 지피던 청송대 숲도, 잡탕을 전문으로 하는 십여 개 술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신촌 시장도, 선하게 생각난다.

그때 우리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만나면 시 얘기만 했다. 시를 끄적거린 노트나 종이쪽을 늘 품고 다녔다.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금요일 저녁에는 서클룸에서 시 합평회를 가졌다. 거기에서 그가 쓴 시를 처음으로 대했다. 그는 이미지즘에 다가가 있었다. 이미지스트로 불리는 걸 그는 싫어 했다.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의 이미지는 종종 동화나 전설에서 왔다. 한 어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물에 빠져 죽었다. 죽어서 물고기가 되었다. – 무의미 시는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에게서 이미지와 의미는 충돌이나 힘 겨루기가 아니라 서로 삼키고 섞이는 삼투 현상을 일으켰다. 차츰 그의 이미지는 정 靜에서 동 動으로, 무념 無念에서 정념 情念으로 넘어갔다. 그 정념의 복판에서 그는, 안으로 겉으로 어둡게 어둡게 변해 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리들의 곁에서 사라졌다. 군대로 갔다. 군대를 마치기까지 단 한 차례도 그는 캠퍼스에 나타나지 않았다. 완벽한 유폐였다. 입대 직전에 캠퍼스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는 플라스틱 차양이 달린 모자를 쓴 모습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차양에서 붉은 색이 안면으로 내렸다. 무더운 여름이 오고 있었다.

1987. 유럽여행 중 파리 개선문 앞에서

어떤 추억은 이미지 또는 인상의 골로 존재한다. 이를 글의 꼴로 바꾸는 작업 또는 언어화는, 추억을 가장 오래 보존하는 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그러나 어떤 추억은 손대지 않고 그냥 추억의 원래 모양대로 놔두는 편이 좋으리라는 생각이다. 흔한 말로 언어는 왜곡에 능하다. 언어가 닿으면 이미지는 덴다. 이미지가 수비형이라면 언어는 공격형이다. 불에 데듯이 언어에 데고 나면 원래 모습으로의 환원이 불가능하다. 물론 개중에는 이미지 또는 인상이 아니라 논리나 말의 꼴로 존재하는 추억도 있다. 이것들은 자체로 이미 언어화가 이루어져 있다. 종이를 갖다 대면 물 위에 뜬 그림물감처럼 고스란히 언어 기화가 찍혀 나온다. 폴 끌레의 그림 같다.

기형도 는 내게 있어서 하나의 인상이다. 나는 인상을 일별로 훑어 본다. 보인다. 그가, 늘 같은 모양인 어깨걸이 검은 가방을 메고 외투 깃을 휙휙 날리면서 지나간다. 그는 밥을 빨리 먹는 습관이 있다. 그가 근무하던 신문사 근처 식당에서 종종 우리는 라면을 툭, 두 토막을 내서 넣어 먹는 김치찌개로 점심을 나누고 했다. 김치찌개는 이제서야 막 끓기 시작하는 참인데 이미 밥그릇을 반 너머 비워나갔다. 밥을 숨가쁘게 떠 넣으면서, 그는 소나기처럼 말을 쏟아낸다. 밥이 들어가는 길과 말이 나오는 길이 한 입에 동시에 열려 있다. 이 얘기 하다가는 어느새 저 얘기, 저 얘기 하다가는 어느새 이 얘기로 유장하게 그러나 정신이 하나도 없게 말머리를 몰고 다닌다. 서두름과 조급함은 천성에 가깝다. 그와 나란히 앉아서 같은 잡지나 책을 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조용한 다방을 하나 찾을라치면 앞장 서서 탐색에 분주를 떠는 데, 건물 속으로 서둘러 들어갔다가는 어느새 도로 빠져 나오고, 다시 다른 건물로 사라졌다가는 이내 나타난다. 마치 건물들이 그를 삼켰다가 토하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드물게 그는 말없이 앉아 있기도 한다. 아주 드물다. 그럴 때 그의 우울은 노골적이다. 부산하게 움직일 때, 떠들 대, 노래할 때, 이런 저런 모임에서 뛰어난 재치와 유머로 사회를 볼 때, 나는 동시에 그의 지독한 우울을 읽어낸다. 무엇이 그를 저토록 허둥지둥 대게 만드는가. 왜 그는 늘 허둥지둥 대는 것일까. 그는 이른 봄에 갔고, 늦은 겨울에 나는 그와 함께 다른 친구네 집에서 외박을 했다. 잠결에 나는 몇 번인가 설핏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때마다 그는 내처 묘하게도 팔 하나를 세워서 허공에 한쪽 턱을 받힌 자세로 잠을 자고 있었다. 스르르 팔이 앞으로 기울다가 한계에 이르면 한번 머리 전체로 흔들 해 보이고는 다시 원상 복귀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잠이었다. 나는 그가 남긴 인상 전체를, 불안의 인상이라고 부르고 싶다.

‘짧은 여행의 기록’에 나오는 망월동

죽기 사흘 전에 그와 이승에서의 마지막 통화를 그것도 우연히 했다. 그 우연은 그가 만들었다. 전화가 걸려와서 받으니 냉랭하고 예의 빠른 목소리로 ‘나한테 전화 했었니?’ 하고 물어왔다. 송신인이 불분명한 전화 메모가 돼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그래? 알았어’ 하고는 그대로 끊을 기세였다. 나는 다급하게 ‘야, 뭐냐? 이런 식으로 끊는 게 어딨어!’ 하고 소리쳤다. 일순, 저쪽에서 동작이 주춤했다. 통화가 끊어지려는 찰나에 가까스로 전화선 양쪽을 움켜잡은 느낌이었다. 그는 물었다. 한가지를 확인하고 넘어갈 참이었다.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잖아, 그렇지?’ 휴우 – 이 아스아슬함이라니. 그게 그였다. 내게 있어서, 얘기가 되면서도 안 될 것 같은 얘기, 선뜻 표현하기 어려운 답변, 목젖을 간지르지 않으면 나가기 머쓱한 답변을 독 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식의 단호한 추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그였다. 나는 그런 면에서 이따금 그한테 부담을 탔다. 어던 객관적인 거리 같은 걸 허용치 않으려 들 때, 나는 상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러는 나의 눈빛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게 그이 애정에 혼란을 주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쳤고,나는 순간적으로 최근의 몇 달 동안 먼저 전화를 건 것도 그였고 불쑥 상대를 방문한 것도 모두가 그쪽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개인적인 이유에서의 은둔이었는데 두문불출한 나의 태도가 어쩌면 그를 포함한 어떤 가상 집단에의 전면적인 보이코트 로 오도 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목젖을 간지럽히는 쪽을 나는 택했다. 그러나, 그는 싱거울 정도로 가볍게 기운이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런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는 자책으로 자신도 모르게 맥이 빠져 모기 소리로 그저 ‘그렇지 않아. 그럴 까닭이 있나. 늘 네 생각을 해’ 그러고는 말문을 돌린 셈으로 최근에 그가 발표한 시에 대한 얘기를 연이어 꺼냈을 뿐인데,그는 처음의 냉랭함에서 너무도 간단하게 부드럽고 생기가 도는 목소리로 변해 갔다. 그게 그였다. 조금만 섭섭하면 많이 섭섭해 하고 조금만 유쾌하면 많이 유쾌해 했다.

나는 그가 그의 시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극도의 절망만을 살다가 갔다고는 보지 않는다. 멀리로는 마흔 살 때 시작할 모종의 작업 계획을 나한테 털어놓은 적이 있었거니와 사후에 어머니한테서 흘러나온 얘기지만 ‘어머니 아무 걱정 마세요. 저는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겁니다.’ 같은 순진한 표현으로 자신의 희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벗도 많았고 가까운 선후배,그를 아끼는 스승, 윗어른도 많았다. 나는 그가 죽고 나서, 나 자신 그가 생전에 가졌던 많은 벗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생전의 호의에 뒤늦게 감사했다. 그 호의를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를 나는 놓쳤다. 그렇게 빨리 우리들에게도 죽음이 다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간과했다. 그가 떠남으로써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 버린 걸 본다. 이 세계는 그가 살아 있을 때의 세계가 아니다. 한 사람의 죽음쯤으로 세계가 가닥이나 하겠느냐는 말은 그러므로 거짓말이다. 그가 이제 이 지상에 없다니. 끔찍한 일이다. 너무도 목소리가 귓전에 생생한데, 너무도 가까이서 지금도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그가 없다니, 무서운 일이다. 며칠 전에 꿈에서 그를 보았다. 싱글싱글 웃으며 그가 다가왔다. 다가와서 말했다. ‘가자.’ 그가 앞장을 섰다. 나는 얼마쯤 그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그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는지를 문득 깨달았다. 공포로 떨면서 얼마간 따라가다가, 그를 뿌리쳤다. 달아나듯이 나는 꿈에서 지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한참 동안 온 몸이 후들거렸다. 무슨 꿈을 꾸었냐고 옆에서 물어왔다. 나는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옆 사람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따라 가면 안돼요. 그가 당신을 데려가려고 해요, 했다. 그렇다, 그는 갔다. 그는 간 사람이다. 갔지만, 그러나 만약 지상에서 비슷한 추구를 한 사람끼리 저승에서도 무리를 짓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와 만나기 위해서는, 그와 나란히 해왔던 일을 계속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길 뿐이다. 그가 어디선가 짓고 있을 웃음을,나는 눈부신 광휘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