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제1장 청강생

제2장 신학생

제3장 병신 도착

제4장 프랑스에서의 첫 방학

제5장 프랑스에서의 첫 학기

제6장 미니 아가씨가 맺어준 인연

제7장 코드 다쥬르의 이방인

제8장 주님! 어떠자고 나는

제9장 나는 거부한다

제10장 쟌느의 구원

제11장 주여, 한 말씀만 하소서!

제12장 이 한 몸을 바치며

제13장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제14장 프랑스를 떠나면서

 

 

 

제1장

청강생

 

내가 혜화동 신학대학에 입학한 것은 1956년 4월 10일 경이었다.

노(盧) 주교님의 특별한 호의로 청강생 가격으로나마 신학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개학 초에 있는 피정신공(일주일 간의 묵상기도)도 끝나고 학기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별과 1학년에 편입되었다. ‘별과’라 함은 소신학교인 성신고등학교를 거치지 않고 외부에서 직접 대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1년 간 라틴어를 공부하는 특수한 과정을 의미한다. 라틴어는 천주교의 공용어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통 철학인 스콜라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나 신학원서를 일기 위해서도 필수 불가결한 언어였다.

내가 별과에 편입되던 날, 한공렬 학장 신부님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훈시를 하셨다.

“태오 학생, 노주교님의 각별하신 배려로 학생을 신학교에 입학시켰으나 학생은 별과 1년 동안 신학생이 될 자격이 있나 없나를 시험 받아야만 하오. 그러니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할 거요. 나는 학생에게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겠소.

첫째, 학기 말 시험에 합격할 것. 신부는 남을 가르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갖고 있으니 만큼 이제 필요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지능을 지녀야 하오.

둘째로 학교 규칙을 엄격히 지킬 것. 지금 학생은 신부가 되기 위한 학습과 일종의 훈련을 받아야만 하오. 훈련에는 규칙이 따르는 법이며, 이 규칙은 학생을 신부가 되는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거요.

셋째, 외출과 방학 기간을 막론하고 옛 군인 친구들을 일체 만나지 말 것. 이 세 번째 조건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학생 자신이 더 잘 알 거요.”

 

나는 이 상의 세 가지 조건을 전제한 청강생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날 밤 나는 30여명의 별과 신입생들이 함께 자는 커다란 침실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뜬 눈으로 꼬박 밤을 새웠다.

비록 조건부 청강생 자격으로서였지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 나는 기쁨과 감격을 숨길 수 없었다. 신부가 되자고 결심한지 만 4년 만에 실현된, 꿈이 아닌 이 현실을 실감하며 나는 무감각한 상태에서 그저 잠만 청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나도 과연 남들처럼 공부를 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나를 잠 못 이루게 했다. 어떻게 해서든 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내 가슴 깊숙이 에서 번져 나오는 사제직에 대한 이 열렬한 갈망! 나는 이 불타는 갈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갈망도 학장 신부님께서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었다. 둘째와 셋째 조건은 내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지만 첫째 조건은 내 천부적 지능에 좌우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다만 정상적인 학교 공부를 못했다 뿐이지 결코 바보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그날 밤을 뜬 눈으로 밝혔다. 그리고 사제직에 대한 나의 열망이 주님의 확고한 부르심의 증거라면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신념을 더욱 굳혔다.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것도 이미 사어(死語)가 되어 버린 복잡하기 짝이 없는 라틴어 공부! 공부를 잘 해낼 수 있기 위해서는 지능과 취미와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능에 관한 한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학교 생활은 바둑판처럼 짜여진 규칙화된 공동생활이다. 일정한 시간 내에 똑같이 공부하고 기도하고 쉬고 일하는 생활 속에 남보다 더 노력할 수 있는 시간적 영유가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나 대학교 출신 학생들보다 몇 배나 더 노력을 기울여야만 그들을 따라갈 수 있었으나 그럴 만한 시간이 나에게는 없었다. 특히 이론적으로 따져 나가는 것이 아닌 이 언어공부에 미련하리 만치의 무조건의 노력을 요구하는 이 라틴어 공부에 나는 차츰차츰 자신을 일어가기 시작했다. 외우면 잊어먹고, 도 외우면 잊어먹고 하는 이 라틴어 공부를 시작한지 1주일이 지났으나 앞날에 대한 자신보다는 오히려 불안감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라틴어를 생각했고, 쉬는 시간에도 동사변화를 남몰래 외워 보기도 했으며, 잠자리에서도 마음 속으로 라틴어를 공부했다. 내 딴에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으나 매주 월요일에 있는 첫 주간 시험에 결국 나는 낙제를 하고 말았다.

 

 그날 저녁 만과(밤 기도)를 올리며 용기와 지능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 드리고 있을 때 불현듯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즉 남들이 잠자고 있는 시간에 일어나 <도둑 공부>를 해 보자는 것이었다. 신학교 생활은 단체생활이어서 밤 10시에 무조건 취침해야 한다. 따라서 밤 10시 이후에 교수 신부님들의 서재 이외에 불이 켜져 있는 곳이라곤 공동변소 뿐이었다. 바로 그 변소에서 이 도둑 공부를 결행하기로 결심했다.

밤 10시 15분 전, 취침 종이 울리면 난들은 용변을 보고 잠자리로 갔으나 나는 오히려 냉수를 실컷 마시고 자러 들어갔다. 규칙생활은 군대건 신학교건 으레 고단한 법이다. 잠자리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즉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물을 많이 마신 탓으로 나는 밤 12시가 아니면 1시쯤에 으레 눈을 떴다. 그러면 잠자리에 몰래 숨겨 두었던 라틴어 교과서를 잠옷 속에 감추고 변소로 갔다. 거기서 나는 복습을 시작했다. 매일 밤 나는 이런 식으로 한밤중에 두 시간씩 공부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공부를 열중한 나머지 그곳이 변소라는 것도 깜빡 잊고 라틴어를 소리 내어 읽다가 그 중얼거리는 소리에 놀라 변소에 들어서려던 어떤 학생 하나가 기절할 듯이 되돌아서 달아난 일도 있었다. 또 한때는 설사를 만난 어떤 학생이 참다 못해 빨리 자리를 비켜 달라고 고함친 일도 있었다. 그때 그 학생의 잠옷 언저리에는 이미 누런 물리가 번져 내리고 있었다. 하여튼 나는 체면 북구하고 열심히 변소에서 공부했다. 한 보름 동안 이런 식으로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빈 속에 찬물을 많이 마신 탓인지, 혹은 변소 안에서 잠옷만 입고 있어서 사늘한 밤 공기에 몸이 얼어 버린 탓인지 설사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간 시험 성적은 훨씬 나아졌다. 나는 주님께 감사 드렸다.

이러한 도둑 공부가 학교 규칙에 위반되며, 특히 학장 신부님이 내게 제시한 두 번째 조건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도둑 공부를 결심하던 날 밤, 나는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첫째, 학교 규칙을 위반하게 됨으로써 괴로웠고, 둘째로 주님에 대한 내 신심(信心)의 결핍을 느낌으로써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그날 밤 나는 기구 중에 다음과 같은 자문자답했다.

“주님, 내가 신학생이 될 수 있기 위한 첫째 조건은 만족시키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규칙에 위반되는 줄을 잘 알면서도 나는 매일 밤 변소에서 두 시간씩 공부하려 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태오야, 사제직에 대한 네 열망이 내 부름의 결과라고 보느냐? 혹은 네 스스로의 망상이라고 생각하느냐?”

“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불러 주셨기에 제가 이 곳에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하찮은 망상을 위해 이 피 끓는 청춘과 하나 밖에 없는 이 귀중한 생명까지 바치려 하겠습니까? 나는 모든 걸 버렸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애인마저 당신께 제물처럼 바지고 당신의 부름에 따른 것이 아닙니까?”

“그럼 무엇 때문에 그렇게 걱정이 많으냐? 내가 너를 필요로 해서 불렀다면 너를 이 신학교에서 쫓겨 나도록 버려 둘 줄 아느냐?”

“그렇게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주님, 하지만 나에게는 학기 말 시험에  합격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시험의 합격을 보장하는 지능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내게는 부족합니다.”

“태오야,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라. 공부는 네가 하지만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내 복음을 위해 몸을 바치려는 네가 이 다음 제아무리 큰 일을 한다 하더라도 나에 대한 신앙과 겸손과 순종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래서 나는 너에게 거듭 말한다.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고 나에 대한 신심 안에 항상 복종하라고… 태오야, 학장 신부님이 너에게 부과한 지침들을 철저히 지키도록 노력하여라. 그것만이 너로 하여금 신부가 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길잡이가 될 것이다.”

“주님, 인간들로부터 수없이 배반을 당하시고 결국은 매맞아 죽으신 당신이기에 한 말씀 드리렵니다. 믿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어려우며 고통스러운 석인가를 주님께서는 잘 아기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낭떠러지로 몸을 던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믿고 당신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산을 좋아하는 우리 인간들은 망설이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그날 그날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신 당신의 말씀을 쫓아 아브라함은 고향과 부모 형제들을 떠났으나 그 과정에서 그는 얼마나 많은 배신과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힘으로 완성할 길이 없는 이 신앙의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방황하다가 결국은 당신에게 반항하고 돌아서 버렸습니까? 그저 믿기만 하라는 당신의 말씀이 나에게는 다소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 너도 그들처럼 내 앞에서 교만하게 반항하고 반항하고 이윽고 는 나를 떠나고 싶다고 말하려 하느냐?”

“아닙니다. 주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세우신 교회의 역사를 통해 나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당신의 뜻을 그릇되게 판단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으로 헛되이 희생되었습니까? <실수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그르칠 수 있는 인간인 학장 신부님의 판단 아래 나 또한 희생될까 두려워 도둑 공부를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사제직이라는 내 최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규칙을 위반하겠다는 것입니다.”

“태오야, 너는 앞으로 내가 가르친 진리와 사랑과 정의를 설교할 사제가 되 사람이다. 그러나 정의라는 것은 목적의 달성을 위해 불법적인 방법을 정당화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전제하고 있지 않으냐? 그 목적이 아무리 선하고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너도 잘 알다시피 이 세상에는 목적을 위해 부당한 방법을 합리화시킴으로써 결국은 인류에게 크나큰 해를 끼친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주님, 도둑 공부는 목적 달성을 위한 부당한 방법이 되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야박스럽게 이것을 금지시키려 하십니까?”

“태오야, 너는 네가 하고자 하는 불법적인 도둑 공부에 나를 강제로 개입시키려 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너에게 분명히 말해둔다. 목적을 위해 옳지 않은 방법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인류 구원이라는 최선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크나큰 고통과 희생을 십자가에서 맞이했다. 나의 뜻이 아닌 성부(聖父)의 뜻에 나는 순종했었다.”

“주님, 나는 당신이 아닙니다. 성신(聖神)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께서 낳으심을 받은 당신이 나는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마저 사양하지 않으신 당신과 같은 용기와 믿음이 내게는 없습니다. 내가 제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당신처럼 될 수 없는 영약하고 불완전한 한 인간입니다. 당신처럼 완전해질 수 없는 인간들에게 당신처럼 되라 하시니 때로는 당신이 원망스럽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능력의 한계 내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섬기고, 당신의 복음을 전파하려 합니다. 물론 당신의 은혜와 도움으로 이 불완전한 인간 조건을 초월하려고 하겠지만요.”

“태오야, <성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네게 친히 가르쳐 준 기문을 너는 벌써 잊고 있느냐? 성부의 듯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지금 너는 이 순종에 등을 돌리려 하고 있으며 학장 신부님의 뜻이 아닌 네 뜻을 실천하려 하고 있지 않으냐?”

“주님 당신의 책망에 대답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세상 일은 빈번이 성부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부르심을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 이후의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당신 의 뜻과는 상반되는 일들을 했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해 그르쳐진 당신의 뜻을 당신은 또한 현명하게 다른 방법으로 완성시키지 않으셨습니까? 이처럼 당신은 당신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방법을 사용한 자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구속사업을 계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예를 들면 아브라함 같은 사람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가질 것이라고 당신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보다 빨리 실현시킬 욕심으로 사라에게서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의 종인 아가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부당한 방법을 사용한 아브라함을 약속대로 축복해 주셨듯이, 비록 그것이 부당한 일이지만 사제직을 위해 도둑 공부나마 열심히 하려는 나를 축복해 주십사 는 겁니다.”

“태오야, 이런 말은 차마 너에게 하지 않으려 했다. 도둑 공부를 하겠다는 테 의도에는 오직 사제직이라는 목적 완성을 위한 것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네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지만, 그 속에는 청강생이라는 현재의 너의 불안한 위치에서 생긴 일종의 열등의식과 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정식으로 다녀 보지 못했다는 너의 열등감을 무마해 보려는 야심이 있다. 또한 정상적인 학교 과정을 거친 동료들보다 더 공부를 잘해 보겠노라는 일종의 교만함마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주님, 당신께서 방금 말씀하신 그 야심과 교만, 그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내 처지에서 그만한 야심과 교만마저 없다면 나는 이 신학교에 들어올 용기조차 갖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또한 이 어려운 라틴어 공부에 대한 의욕과 열망마저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 방금 책망하신 이 야심과 교만조차도 사제직을 향한 험난한 과정의 한 단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것이 신부들이 갖추어야 할 완덕(完德)을 위해 우리 신학생이 체험해야 할 시련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당신이 아시다시피 나는 아직 덕(德)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고통스러운 신앙의 길로 막 들어선 초년병이라는 겁니다. 주님, 한 번만 저의 뜻을 허락해 주시고 축복해 주십시오. 한 번만, 단 한번만입니다 주님!”

“이 미련한 고집불통 같으니….”

 

나는 이렇게 수없이 자문자답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결국은 도둑 공부를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지도 신부와도 의논하지 않았다. 다만 학기 말 시험을 성공리에 치르고 난 다음 고백성사 볼 것을 마음 속으로 다짐하기만 했다.

그러나 도둑 공부 이외의 학교 규칙은 철저히 지켜 나갔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리하여 주간시험에 차차 좋은 성적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설사도 계속되었고 체중도 훨씬 줄어들었다.

신학교 생활을 시작할 무렵 나에게 제일 어려웠던 일은 아침 미사 전에 있는 30분 간의 묵상신공 시간이었다. 30분 간을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기도 드리는 일이란 군대에서의 지독한 기합 만큼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무릎에 군살이 생기기 시작했고   목욕 후면 으레 그 군살을 칼로 깎아내야 할 정도였다.

심야의 도둑 공부 탓이었겠으나 묵상 시간에 나는 자연스럽게 졸았다. 그런데 다른 신학생들은 열심히 무릎을 꿇고 거룩하게 묵상 신공을 바치고 있는 게 아닌가! 내 바로 앞 줄에 있는 한 상급생은 묵상 시간에 가끔 자기의 허벅다리를 꼬집어 뜯기도 하고 주먹으로 턱을 치기도 했다. 어느 날 휴식 시간에 나는 그 상급생과 산책을 하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도미네, (이 말은 도미누스 라는 라틴어의 호칭이며 <주여>라는 뜻이지만 영어의 <미스터>나 불어의 <무슈>에 해당하는 말로서 신학생 서로가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왜 당신은 묵상시간에 허벅다리를 꼬집기도 하고 턱을 때리기도 하지요?”

그는 다소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것은 묵상 신공을 올바르게 바치기 위해섭니다.”

“묵상 신공을 잘 드리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해야만 되나요?”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은 물론 없으나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요. 예를 들면, 주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에 관한 신비를 조용히 묵상할 때 이 묵상을 방해하는 분심이나 잡념이 생기지 않아요? 그래서 정신을 통일하고 잡념을 몰아내기 위해 다만 방법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태오 도미네는 묵상 중에 잡념이나 분심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글쎄요… 분심이나 잡념보다는 졸려서 그냥 졸 때가 많지요. 그리고 눈만 감으면 군대 생활이 회상되어 술 생각이나 놀러 다니던 옛날 일들이 생각 키워서 차라리 졸리면 그냥 잠들게 내버려 두지요. 그렇지 않으면 마음 속으로 라틴어 단어를 외우든지요.”

그 도미네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말을 계속했다.

“태오 도미네, 그건 신학생으로 안될 말입니다. 우리는 이 수련 기간에 기도하는 습관을 잘 길러 놓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지식 습득을 위한 공부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기도생활 역시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공부가 지적 양식이 된다면 우리의 기도는 영적 양식이 되고 있으니까요. 영신생활의 내적 충만 없이는 우리는 신학생으로서나 신부로서 올바르고 참되게 살아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태오 도미네, 기도하는 습관을 키워나가세요. 기도생활은 신학생에게 있어서 마치 벌집을 가득 채우는 꿀과 같은 것이니까요.”

 

그 다음 날 아침, 나도 그 도미네 학생처럼 묵상 신공을 정성껏 바쳐 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졸리면 내 허벅다리를 꼬집었고 잡념이 들면 턱을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졸음과 분심과 잡념의 삼면 공격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졸음을 참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졸음의 원인은 바로 심야의 도둑 공부에 있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기도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그 상급생의 말을 회상할 때마다 묵상 신공을 소홀히 해온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그날 밤부터 당장 한 달 동안 계속되던 도둑 공부를 중단했다. 잠도 충분히 잘 수 있었고 묵상 시간에도 줄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규칙에 대한 순종이 바로 영적 생명에 연결되며 이 규칙은 사제직의 완성을 향한 절대적인 질서임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한달 전 내 기도 속에서 주님과의 자문자답은 또한 얼마나 교만한 행위였던가 하는 것을 잘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시 신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시내 외출이 허용되었다. 이 외출은 의무적이었으며 매주 수요일 오후에 실시되었다. 이 외출을 통해서 신학생들은 공부에 시달린 몸을 쉬기도 하며 사회와의 접촉을 갖기도 하였으나 학교 규칙상 이 외출은 3인 이상의 엄격한 단체 외출이었다.

그러나 어느 수요일 오후, 나는 서울 주교관에 계시는 유신부님을 만사 뵈기 위해 단독 외출 허가를 받았다. 용무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명동 거리를 지날 때였다. 별안간 번호판도 붙이지 않은 지이프가 내 앞에 멈추더니 어떤 쇠갈고리 손이 내 양복 상의 주머니를 잡아 당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검은 색안경을 쓴 신사복 차림의 한 사나이가 입가에 웃음을 띠며 “야, 이 새끼야! 너 태오 아냐?” 하고 고함을 쳤다.

그는 바로 내 해병대 전우였다. 김일성 고지 전투에서 발 앞에 굴러 떨어진 적의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는 순간 그것이 손 안에서 폭발해 버리는 바람에 오른손목이 잘려 나간 ‘훈’ 하사관이었다. 그는 재대 후 몇몇 상이군인 동료들과 함께 명동 뒷골목을 드나들며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사업으로 상당한 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반가운 친구였다.

“야, 이거 훈형이 아니오? 반갑소.”

나는 반가와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쇠갈고리 손을 내밀며 내뱉듯이 말했다.

“태오, 너 이 새끼, 훈형이 다 뭐야? 그런 점잖은 말, 내 평생 들어본 역사가 없다. 너 이 새끼 언제부터 그렇게 귀족적으로 되었냐?”

 “이봐 훈형! 우리도 이제 30을 넘어서려는 늙어가는 몸 아니오? 이 새끼라는 말이 이젠 어쩐지 비린내가 나는 것 같소. 하여튼 훈형, 정말 반갑소. 그런데 훈형은 무슨 사업인가 해서 성공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래 요즘은 어떻소?”

“야, 태오야! 나는 그런 양반식의 말투를 들으면 구역질이 나. 너나 나나 해병대 하사관이란 명찰을 붙인 영원한 쌍놈이 아닌가 말야! 너와 나 사이는 영원히 <이 새끼> 관례란 말이야. 우리는 바로 이 새끼라는 우정 속에서 조국인가 지랄인가를 위해 생사 고락을 같이하며 피를 흘려온 동지가 아닌가? 그러니 훈형이니 빌어먹을 형이니 다 집어치우고 이 전처럼 <야, 훈아 너 이 새끼 아직 죽지 않고 살아  남아 그 쇠갈고리 손으로 명동 거리를 휩쓸고 있구나. 빌어먹을 새끼 같으니…>하고 나를 한 번 불러 봐. 나는 이런 쌍놈의 말을 더 좋아해. 특히 전선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우리 해병대 전우를 사이에서는 말이야.”

그는 왼손을 내 어깨에 얹고 무언가 어떤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신학생이었고, 훈이 나에게 아무리 반갑고 허물 없는 친구라 해도 몇 년 간 쓰지 않은 <이 새끼>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훈형! 내가 형을 이 새끼라고 부르든 혹은 훈형이라고 부르든 훈형에 대한 내 우정은 변함없소. 호칭이 그렇게 중요하오? 말 속에 들어있는 우정이란 진실이 더 중요한 게 아니겠소? 훈형.”

“야 이 새끼, 옛날처럼 또 공자님 같은 말을 하는군…. 태오야, 너도 알다시피 이 손목이 잘린 채 제대한 후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이 뒷골목에서 좀 떳떳하지 못한 사업을 있으나 그래도 너만은 잊지 않았다. 가끔 술자리에서까지 십자성혼가 뭔가를 그으며 파리 쫓는 시늉으로 지랄하기 때문에 술맛을 좀 잃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너를 나는 요즘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 서양 중이 되려고 신학굔가 뭔가 하는 <고자학교>에 들어갔다면서? 태오야, 그게 정말이냐?”

그는 검은 색안경을 벗어 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길 가던 사람들이 구경하듯 돌아 보다가 지나갔다. 훈은 예나 지금이나 솔직했고 소박했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훈형, 상이군인이 신사에게 행패부리는 줄 알겠소. 길가에서 이렇게 서 있을 게 아니라 어디 다방이라도 들어가서 차나 마시며 이야기합시다.”

나는 그 순간 신학생에게 다방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훈이 나를 자기 지이프에 태웠을 때 비로소 나는 그 학교 규칙을 생각해 내었다. 그러나 이미 띠는 늦었다. 얼마 후 우리는 어느 술집 앞에 도착했고 훈은 그 갈고리 손으로 주저하는 나를 끌어당겨 안으로 끌도 들어갔다. 참으로 뜻 밖이고 곤란한 일이었다. 그 술집에서 훈은 왕자처럼 군림했다. 술집 마담과 여자들도 훈 앞에서 온갖 애교를 부렸다.

“오늘은 장차 거룩하고 훌륭하게 될 친구 한 사람을 보시고 왔으니 술상 조심해서 차리고 미스 김과 미스 조를 데려 와.”

훈이 마담에게 말하자마자 젊고 예쁘장한 두 아가씨가 우리 방에 들어와 큰절을 했다. 그때 훈은

“태오야 어때? 이만하면 술 맛 날 것 같냐?” 하며 나의 거동을 살피고 있었다. 난처했다. 이러한 술집에서, 그리고 술집 아가씨들 앞에서 신학생이라는 내 처지와 학교 규칙을 설명하기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었다. 그것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훈이 내 말을 들어 줄 리도 없었다. 내가 오늘 그와 술을 마신다면 학교 당국은 그 동기 여하를 막론하고 나를 무조건 퇴학시킬 것이다. 그때 내 상상 속에서 봇짐을 싸 들고 신학교를 쫓겨 나오는 내 처량한 모습이 떠올랐다. 훈은 미스 김이라는 술집 여인을 향해,

“이봐, 미스 김! 왜 장작개비처럼 뻣뻣하게 앉아만 있어? 이분은 내가 가장 존경하면서도 감히 쌍말을 할 수 있는 분이야. 이 다음에 아주 거룩하게 될 분이다. 이분의 다리를 좀 주물러 드려. 그리고 미스 조는 내 다리를 주물러 주고…” 하고 말하며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나는 내 다리를 주무르려는 미스 김을 손으로 제지했다. 다만 내 마음 속엔 어떻게 하면 이 술집을 빠져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봇짐을 들고 신학교 교문을 나서는 내 환상이 끊임 없이 떠올랐다. 마음 속으로 열심히 기구했다. 평소에도 말을 잘 흘리는 나였으나 그날은 마음 속에 끓어 오르는 갈등과 고통 때문에 온 몸에 땀이 축축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현기증까지 느꼈다. 미스 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선생님, 어디 몸이 불편하세요? 덥지도 않은데 너무 땀을 흘리시는군요.”

참으로 나에게는 고마운 말이었다. 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잠잠히 살피더니 말했다.

“태오야, 갑자기 웬 일이냐? 때 아닌 땀을 그렇게 흘리고 있으니… 어디 몸이 불편하니?”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잠시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훈형, 사실은 말야 요즘 그렇게 몸이 좋지 않아. 오늘도 성모병원에서 진찰받고 오는 길이었어. 내 몸 마른 것을 봐. 훈형보다 몸집이 크던 내가 이젠 예전의 내 몸이 아니지 않소? 뭔가 대단히 고장이 났대요. 의사 선생이 계속 약을 먹으라고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수술까지 받을지도 모른다고 합디다. 훈형, 대단히 실례가 되는 줄 알지만 지금 현기증이 나고 이렇게 식은 땀이 흐르는데 빨리 기숙사로 돌아갔으면 좋겠소. 훈형, 용서하구려. 술은 이 다음 기회에 합시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정말 환자처럼 짐짓 엄살을 부리며 말했다. 훈은 아래 위로 한참이나 나를 훑어 보더니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그는 술집 아가씨들에게 가방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주고는 술집을 나섰다.

훈은 혜화동 성당 앞까지 나를 태워다 주었다. 나는 차 안에서 그가 말한 <고자학교>가 어떤 곳이며 내가 무엇을 공부하고 도 신부가 뭐 하는 사람인지 하는 것을 그리고 또 어떠한 생활을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때 그는 나를 조금도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말투가 아닌 지극히 엄숙하고 감탄하는 음성으로 나에게 말했다.

“태오. 자네는 훌륭해. 나는 종교라는 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도 못하고 또 신부에 대해서도 별 아는 게 없네. 그러나 자네는 이상과 딴 사람들을 위해 청춘과 생명마저 바치겠다는 정말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네. 나는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는 사람과 남들이 흔히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하고자 하는 용감한 사람들을 존경하네. 그러한 용기 있는 행동이 바로 전쟁 중에 우리가 하던 일이 아니었던가? 죽음을 각오하고 적탄 속에 몸을 던지던 우리들의 그 용감했던 행동 말이야. 자네는 그러한 용감하고 희생적인 생활을 평생 계속하겠다는 말이군. 그래. 우리는 자네를 향해 빈번히 <황소 같은 놈이 예수를 믿는다>고 그 십자성호를 그을 때마다 <파리 쫓는 놈>이라고 놀리기도 했네만 자네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있었군 그래. 태오, 이제 나는 그 용감한 사람의 대열에서 탈퇴했네. 이 순목을 잘린 후부터 나는 자네의 그 맑은 눈에 비굴하게 보이리 만치 비겁하게 되었고, 오직 살아야만 한다는 이 한 가지 집념 앞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네. 이 다음 신부가 되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겠지…. 그리고 나와 같은 놈은 만나 주지도 않겠지….”

훈의 얼굴은 엄숙했다. 소박한 그의 인간미, 단순한 그의 성격, 직설적인 그의 말투, 살기 위해서라는 솔직한 고백, 그러면서도 죄인으로 자인(自認)하는 그의 정직함, 이 모든 것이 실은 훌륭한 종교적 태도였다. 나는 훈의 차디찬 쇠갈고리 손을, 두 손으로 움켜 잡고 기도 드리듯 말했다.

“아니야, 훈형! 내가 신부가 되고자 하는 것은 훈형과의 이 우정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야.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단죄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아. 내가 신부가 되고자 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 인간 사회에서 나 또한 죄인으로 살아가며 그들과 함께 보다 밝고 명랑하고 보다 보람 있게 살 수 있도록 서로 협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야. 지금이나 혹은 나중에 신부가 되더라도 나 또한 훈형 처럼 영원한 죄인이야.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이 동지의식 속에서 서로 동정하며 또 서로 격려하며 사는 거야.”

“그래 태오야, 꼭 신부가 되어 다오. 어쩌다 술병 들고 찾아가서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도록 너는 꼭 신부가 돼 다오. 태오야, 오늘 너를 만나 참으로 기쁘다.”
그때 나는 차디 찬 그의 쇠갈고리 손을 오래 오래 잡고 있었다.

 

훈을 만난 지 몇 주일 후였다. 오후 복습 시간에 나는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 학교 소사가 찾아와 학장 신부님이 찾는다는 전갈을 했다. 학장 신부님이 나를 부르신다는 것은 나에게는 두려운 일이었다. 도둑 공부, 술집에서의 훈과의 만남 등으로 인해 나는 언제나 양심의 가책을 받고 학장 신부님을 피해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의 근엄한 표정에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창가로 데리고 갔고 창문 앞 신학교 앞마당에 몇 사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놀랐다. 거기에는 바로 훈의 번호판 없는 지이프와 한 대의 택시, 그리고 훈을 비롯한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몇 명의 해병대 전우들이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상이군인을 무서워했다. 이렇다 할 생활 보장이 없던 그 시절에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때로는 시민들을 괴롭히기도 했고 또 때로는 교회나 성당을 돌아다니며 구호를 강요하기도 했다. 학장 신부님은 책망하는 음성으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태오 학생, 저 사람들이 지금 학생을 찾고 있는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저런 사람들이 학생을 찾아오게 했는가?”

“글쎄요, 학장 신부님, 저 사람들은 옛 해병대 전우들이며 조국을 위해 몸의 일부분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은 저들을 배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들은 이 사회가 멸시하고 외면하는 병신이지만 결코 우리에게 해를 끼치러 오진 않았을 겁니다. 아마 저를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겠지요.”

“주(週) 중에는 학교 규칙상 면회가  허용되진 않는다고 아무리 타일러도 학생을 꼭 만나겠다니, 학생의 의견은 어떤가?”

“학장 신부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내려가서 저들을 조용히 돌려 보내겠습니다.”

“저 사람들이 막걸리와 빈대떡을 갖고 온 모양인데 학생은 술 마시면 안 되네. 그리고 저 상이군인들을 학교에서 술 마시지 못하도록 하게.”

학장 신부님의 말씀대로 거기에는 막걸리가 담긴 항아리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빈대떡이 있었다. 훈이 반가워하며 그 유명한 쇠갈고리 손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반갑게 그 손을 잡았다. 훈은 그 특유의 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태오야, 자네 이야기를 이 친구들에게 했더니 술 한 잔 꼭 나누어야 한다고 해서 데리고 왔네. 그런데 뭐 변변한 선물이 생각이 나야지. 자네처럼 특수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며 또 어떤 선물이 적당한지 알 수가 있나. 그래서 말야, 자네 마음대로 양복이나 한 벌 맞춰 입으라고 적은 돈이지만 우리 병신들끼리 좀 모아왔네. 사양치 말고 받아 주게나.”

그 순간 내 눈 언저리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군대에서 어쩌다 만난 친구들이지만 한 번 맺은 그 우정을 그렇게도 잊지 않고 찾아와 주었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시켰다. 살기가 어려워 부모 형제들마저 사람들을 외면하고 지내는 각박함 속에서도 이렇게 나를 잊지 않고 찾아 준 그들의 우정이 진정 고마웠다. 물론 공부에 쫓기기도 하였으나 신학교에 들어온 이래로 나는 이들에게서 맛보는 이 따스한 정을 신학생에게서는 맛보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정성껏 모아온 그 돈을 받기로 했다.

“훈형, 그리고 여러 형들, 정말 고맙소. 내가 형들을 도와 주어야 할 텐데 오히려 도움을 받는구려. 여러분의 우정은 아마 신부가 되려는 나에게 큰 힘이 될 거요. 열심히 공부해서 정말 훌륭한 신부가 되겠소. 그때 형들을 찾아 뵙겠소. 그날 우리 다 함께 이 막걸리와 빈대떡을 먹으며 인생의 고달픔을 달래 봅시다. 여러 형들, 오늘 정말 고맙소.”

“태오야, 그럼 우리는 지금 여기서 너와 함께 막걸리를 마실 수 없단 말이냐?”

훈이 실망한 표정으로 나에게 항의 아닌 항의를 해 왔다.

“훈형,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오. 이 학교 규칙상 우리 신학생들은 학교 안이나 밖을 막론하고 술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소.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 여기서 이 술을 마시면 나는 학교를 쫓겨나야 하오. 그러니 내 입장을 이해해 주오. 술은 이 다음 내가 신부가 된 후에 허리띠를 끌러 놓고 실컷 마시도록 합시다.”

“제기랄, 세상에는 별난 학교도 다 있구나. 신부가 되려는 네 뜻이 아무리 좋아도 이런 학교 규칙은 너무 해. 나는 자네가 일평생 홀로 고독하게 살아갈 것을 생각만 해도 울화통이 터질 지경인데, 그래, 술마저 못 마시게 한단 말이냐?”

훈은 화난 사람처럼 얼굴에 열을 올리며 나에게 대들 듯이 말했다.

“훈형, 이 신학교는 말이야, 신부를 만드는 일종의 신병 훈련소야. 우리가 신병 훈련소에서 어디 술 한 방울 마셔 보았소? 자, 그러니 훈형, 그리고 여러 형들, 여러분은 내 벗이 아니오, 내 입장을 한 번 이해해 주구려.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 이 술을 같이들 마셔 줬으면 정말이지 고맙겠소.”

“나 원 참, 별난 학교 다 있구나…. 태오야, 지난 번 네 말을 들으며 감탄하고 존경했다마는 그래 너 미쳤냐? 계집 없고 술도 없는 인생을 뭐 좋다고 살아가겠다는 거냐? 남을 위해 희생하고 몸을 바친다 해도 글쎄 가끔 계집도 옆에 있어야 하고 술도 마셔야 될 거 아냐? 넌 인물이 부족하니, 우리들처럼 병신이기라도 하니, 뭣 때문에 계집도 술도 없는 이런 곳에서 미친 놈처럼 살려는 거야?”

“훈형, 흥분하지 마시오. 나는 정말이지 저 십자가에 매달린 저분을 위해 미치고 싶어요. 내가 정말 미쳐야만이 여러 형들을 위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요. 내가 좋아서 스스로 선택한 이 생활에 정말이지 나는 이 생활에 행복을 느껴요.”

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였다. 담배 한 대를 거의 다 피우고 난 훈은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래 태오야, 너는 훌륭해. 저 십자가에서 병신처럼 매맞아 죽었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모르지만 저분을 위해 미치고 싶다는 너를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어. 그리고 청춘과 생명마저 아낌 없이 바칠 수 있는 세계가 너에게 있다니, 정말이지 너는 행복한 놈이야. 남을 위해 일생을 바치며 살 수 있는 네 가 진정 부럽구나. 그래 태오야 우리는 네 뜻을 존중해 주겠다. 그 대신 이 술항아리에 네 순을 한 번 담가 주지 않겠니?”

“그런 왜?”

나는 그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말이야, 좀 바보스런 일이지만…. 네가 이 술항아리에 손을 넣어 휘저어 주면 네 손 때가 남아 있을 게 아냐? 그러면 우리는 너와 함께 술을 마시지 못할 망정 네 냄새 나는 술이라도 마실 수 있지 않니?”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따스한 정감이 밀려왔다.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여러 번 술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들은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되돌아갔다. 훈이 탄 지이프와 택시가 교문 밖으로 사라지자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신학교를 박차고 뛰어 나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받았다. 인간의 사회라는 것이 어떠한 것일까? 인간의 사회, 그것은 훈의 우정과 같은 그러한 따스한 인정이 감도는 세계가 아닐까? 내 손때가 묻어 내 냄새가 나는 술을 마시겠다는 훈의 소박한 우정! 그 술을 오늘 밤 어디에선가 나누어 마실 그들! 아직 예수님을 믿고 있지는 않아도 저들이야말로 천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당 혹은 주님이 설교하신 하늘 나라! 그곳은 바로 훈과 같이 순진하고 다감한 인정이 감도는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나는 훈을 비롯한 그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러한 벗들이 내게 있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했다. 그들이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내 두 눈에서는 뜨거운 물리가 맴돌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술기가 묻어 있는 냄새 나는 손을 씻지도 않은 채 학장 신부님을 찾아갔다.

“학장 신부님, 저런 순진한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곡 신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사회는 저들을 암적 존재처럼 단죄하고 외면하려 합니다마는 나는 저들한테서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사회는 저들을 기생충처럼 취급하고 있으나 저들에게는 의리와 우정이라는 인간의 숭고한 정신이 있습니다. 학장 신부님, 저들과 함께 살기 위해, 그리고 저들을 쓰레기 취급하는 이 사회를 교화시키기 위해서도 저는 꼭 신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에 대한 저들의 순진한 우정과 의리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학장 신부님은 입을 다물고 계셨다. 신부님이 떠다 주는 대야 물에 손을 씻고 나는 그 방을 나왔다. 성당에 꿇어앉아 그들을 위해 기구할 때 웬일인지 나도 모를 몇 방울의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렸다.

 

학기 말 시험이 다가왔다. 그것은 바로 내 운명을 결정짓고야 말 중대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자신을 갖고 이 시험을 치렀다. 당시 신학교에서는 시험 성적표를 신학생 각자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리고 그 성적표를 본당신부에게 보내는 습관이 있었다.

성적표를 나누어 주는 날 밤, 신학생 전원이 강당에 모였다. 학장 신부님은 최상급생인 부제반으로부터 시작해 우리 별과생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호명하시며 성적표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내 이름은 끝내 부르지 않았다. 주위의 시선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거의 나는 절망할 지경이었다. 결국 시험에 떨어졌구나 하고 생각하니 그저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까지 고생하며 노력했는데도, 아! 주님은 무심도 하시지…> 나는 이번에 퇴학 처분을 받게 되면 이것으로 내 인생이 끝장이 나는 것이라 믿었다. 내가 이 이상 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때 학교 소사 소년이 와서 학장 신부님이 나를 찾고 계시다고 전했다. <아, 이것으로 끝이구나. 이젠 퇴학 명령만 남아 있겠지…> 나는 마치 사형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형수와 같은 심정이었다. 학장 신부님 방으로 걸어가는데 내 등 뒤에는 동료들의 동정 어린 시선들이 어른거렸다. 목이 바짝 타 올랐다. 부엌으로 들어가 찬 물을 한 사발 들이키고 용기를 내어 학장 신부님 방을 노크했다. 이마 나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장 신부님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반갑게 나를 맞아 주시는 게 아닌가? 나는 그 미소, 그리고 그 표정이 잔인하리 만치 냉혹하고 비굴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분이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서재 한 구석에서 포도주 한 병을 꺼내더니 나에게 한 잔을 권하셨다. 나는 이 술잔을 퇴학 처분의 사형선고로 받아들였다. ‘아, 이것이 나에게 주는 저분의 마지막 위로의 잔이라니…’ 나는 자포자기된 심정으로 그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왕 신학교와 끝장이 나는 바에야 주는 술이나 실컷 마시자고 마음 먹었다. 술을 더 달라고 이번에는 내가 스스로 술잔을 내밀었다. 그분은 여전히 웃으시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두 번째 술잔도 단숨에 마셔 버렸다. 나는 또 잔을 내밀었다. 나는 쉬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결국 포도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나서야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때 학장 신부님께서

“태오 학생, 그 동안 수고가 많았소. 그런데 그 술 마시는 솜씨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개병대 솜씬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게 건넸다.

“학장 신부님,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괴롭습니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리고 원망하는 듯한 눈길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그치듯이 말했다.

“태오 학생, 지금 자네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네. 나는 자네를 축하해 주기 위해 불렀네. 입학 초에 내가 자네에게 말했듯이 자네는 청강생이 아닌가? 말하자면 아직 문교부에 정식 보고되지 않은 신분이란 말일세. 그래서 자네의 성적표도 따로 작성한 걸세. 태오 학생, 축하하네, 자네는 2등이야!”

“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 성적표에는 2등이라는 숫자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성적표를 보고 또 보았다. 그러나 틀림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내 상상을 뒤바꿔 놓은 결과에 대한 기쁨만의 눈물이 아니었다. 나는 흐느껴 울었다. 그때 왜 나는 기쁨보다 슬픔을 느꼈을까? 학장 신부님은 흐느껴 우는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태오 학생, 하여튼 장한 일이오. 지금 자네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날 테니까 학습실로 가지 말고 성당에 잠깐 들러 성체조배하고 일찍 자도록 하게. 그리고 오늘 자네가 흘린 이 눈물을 잊지 말고 주님께 항상 감사하여 계속 노력하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분의 방을 나왔다. 성당에 들러 잠시 성체조배 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뭐라고 기도 드렸는지 모르나 아마 말 없이 앉아 그저 성체불만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침실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모든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꼭 꿈만 같았다. 그리고 허탈했다. 마치 6.25 전쟁 중 피 어린 육박전 끝에 적의 진지를 완전히 점령했을 때 느꼈던 그 허탈감 같은 것이었다. 점령이라는 최후의 목적을 달성한 다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나는 언제나 기쁨보다는 허탈감을 느꼈었다. 술 기운 탓인지 혹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온 몸에 맥이 빠져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서 천장 한 구석만을 멍청히, 오래 오래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2장

신학생

 

나는 일학기 말 시험 합격과 동시에 청강생으로서의 위치를 보장받았다. 그리고 내년에는 정식 신학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2학기 동안에는 라틴어 공부와 함께 일반적인 지식을 넓히기 위해 주로 독서를 많이 했다. 학년 말 시험에는 별과에서 중간 이내에 들어서는 성적을 받았다. 이것이 정상적인 내 능력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라 믿었고 그런대로 만족할 수 있었다.

 

새 학기 시작과 함께 나는 정식 신학생으로 철학과 1학년에 편입되었다. 철학이라고 하면 나에게는 고작 소크라테스니,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옛날 선비들만 회상되었다. 라틴어로 된 철학 교과서를 받아 들고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로 나는 가슴 벅찬 감격과 흥분을 맛 보았다.

이 철학 공부는 라틴어만큼 어렵거나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많은 재미를 느꼈다. 어떤 교수님의 강의는 지루한 적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나는 강의보다는 독서에 더 치중했었던 것 같다. 독서를 통해 나는 더욱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아마 내가 정상적인 교육을 받아 보지 못한 탓으로 강의라는 것에 덜 익숙했었던 때문인 것 같았다.

철학 공부와 함께 나는 즐겁게 사색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도한 진리에 대한 아직 못할 향수는 나로 하여금 신학교 생활을 더욱 보람되고 행복하게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나는 공부에 참으로 열중할 수 있었다.

 

이제는 가끔 동료 신학생들과 철학과 인생 문제를 토론한 기회와 여유도 생겼다. 또한 우리는 서로 자신의 내적 고민도 서로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어느 산책 날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동급생들은 가끔 이런 질문을 자주 하곤 했다.

“태오 도미네, 도미네의 눈에는 저 여자들이 예쁘게 보이지 않아요?”

“왜 그런 질문을 하지?”

나는 반문했다.

“글쎄, 요즘 내 눈에는 이 세상 여자들이 한결같이 예쁘게만 보여요. 저 생동하는 아름다움을 보고 내 본능을 억제하려 하니 때로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 아름다움 앞에 나는 고독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해요.”

“도미네, 나도 마찬가지야. 물론 질과 양으로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고독이 우리가 건강한 남자라는 증거며, 또한 사제직의 필수 조건인 동정생활을 우리가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시험하는 한 과정의 괴로움이겠지.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퍽 정상적인 것 같아. 그래서 우리 신학생들은 이 괴롭고 고독한 훈련을 통해 동정생활에 대한 능력을 배양할 수 있겠지.”

“하지만 도미네, 내가 저 아름다운 여자들을 영원히 포기할 것이라 생각하면 할수록 저들이 더 예쁘고 사랑스럽게만 보이는군요.”

“우리 인간은 똑같이 귀중한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할 때 흔히 포기해 버린 쪽에 더 미련을 갖게 되는 모양이야. 저 여자들이 <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갖고 바라본다면 아마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저 여자들이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우리는 저 여자들을 포기하고 따라서 저들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미련이 더 커지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일 거야.”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에게 질투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렇고 말고, 그것도 방금 내가 말한 것과 비슷한 이치일거야. 나도 한 때 경험한 일이지만,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여인을 볼 때, <저 여자가 내 사람이 아니구나>하고 생각하니 괜히 그 여자가 미워지고 질투까지 느끼게 되더군. 이것도 말하자면 나는 소유할 수 없다고 하는 욕구불만 같은 것에서 생기는 심리 상태겠지. 사람에게는 흔히 남의 것을 더 좋게 보고 탐내는 일종의 본능 같은 게 있잖아.”

“태오 도미네도 역시 세상 여자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고민해 본 일이 있어요?”

“물론이지, 나도 도미네와 같은 한 남자이니까… 그리고 남자에게는 다 그런 때가 있는 법이야. 언젠가 전쟁 중에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긴 일선에서 몇 개월 동안 여자 얼굴 한 번 구경 못하고 목소리 한 번 듣지도 못하다가 후방으로 휴가 온 일이 있었어. 그때 늙은 여자, 젊은 여자를 막론하고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보이고 사랑스러운지,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어. 이 세상 여자들이 하나 같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게만 보였었어.”

“그런데 어떻게 그 격한 감정을 처리했어요?”

“참았지!”

“그런 격렬한 본능을 도미네는 참을 수 있었어요? 더구나 그 당시에 도미네는 신학생도 아닌 군인이었는데도…”

“무척 힘들 일이었어. 그러나 참을 수가 있었어. 그때 내 고독한 눈에 미칠 정도로 아름답게만 보이던 그 길거리의 여인들보다도 더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내게는 있었거든. 그것을 위해 나는 애써 내 눈길을 돌려 버렸어.”

“그게 뭔데요?”

“사랑이었어! 내가 생명보다 더 아끼고 소중히 여겨 온 사랑이었어. 내게는 결혼하기로 이미 약속한 애인이 있었어. 그래서 이 여자에게 충실하기 위해 그 어지럽던 남성적 본능을 억제할 수 있었어. 사랑은 성실과 정절(貞節)을 요구한다고 믿었지. 또한 그것을 통해 사랑은 완성된다고 생각했어.”

“결국 말하자면 어느 쪽을 더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군요?”

“바로 그 점이야. 천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 교회를 더 사랑하니까 우리는 저 거리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떠나 이 신학교에 들어온 게 아니겠어?”

“물론 나도 천주님과 교회를 더 사랑합니다. 지금 내 가슴에 한 없이 밀려오는 이 고독 속에 비친 저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위해 천주님과 교회에 대한 내 사랑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도 한 인간인데 더구나 젊음의 피가 끓고 있는 한 남자인데, 이 희생이 요구하는 대가는 나에게 너무 지나친 고통을 주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이지, 그 희생의 대가는 크고 말고. 천주님과 교회를 위해 우리가 바쳐야 할 희생의 대가는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무자비할 정도로 냉혹하고 고통스러운 짐이야. 그러나 우리는 <벗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신 그분을 위해 희생이라는 십자가를 자유로이 선택하지 않았어?”

“사실이죠. 하지만 여자들의 아름다움에 쏠리는 내 눈길은 어쩔 수 없군요.”

“도미네, 난 이렇게 생각해. 여자들이 우리에게 하나도 아름답지 않고 오히려 성가시고 짐스러운 존재라면 우리가 택한 이 동정생활은 아무런 뜻도 없고 가치도 없을 거야. 아직 동정생활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모르고 있지만 말야….. 여자들은 아름다워, 우리는 자유로이 이 여인들을 아내로 맞을 수 있었으나 보다 더 사랑하는 분이 있음으로 해서 그들을 제물처럼 바쳤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이란 희생이라는 고통을 안고 있다는 것이군요?”

“그러나 우리가 바치는 희생이 의무적인 책임감 때문이거나 강요된 희생이라면 그것은 고통 뿐이겠지. 왜냐하면 그러한 희생에는 자유가 없고 사랑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어. <내 십자가는 달고 가볍다>고. 다시 말하면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십자가라는 희생이 내포한 그 감미로움을 알고 또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겠지.”

“신부가 되려고 나도 최선의 노력을 하겠지만 어떤 때는 젊음이 끓고 있고 아름다움에 눈길이 쏠리는 이 몸이 불쌍하게만 느껴지고 울고 싶기만 해요.”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나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바치는 행위야. 나에게 있으나 없으나 상관 없는 것을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는 것은 사랑의 행위라 볼 수 없어. 마침 아담이 자기 심장을 보호하고 있는 갈빗대를 뽑아 하와에게 줌으로써 하와가 하나의 인간으로 생명화된 것처럼 사랑은 자기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줌으로 해서 사랑하는 이를 살리는 행위야. 그리고 또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들을 가지리라>는 천주님의 약속을 실현시켜야 할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행위처럼 말이야….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로 아까운 우리의 이 젊은, 아름다움 앞에서 뼈저리게 느끼는 이 고독, 그리고 내 아내가 될 수도 있는 저 여인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천주님과 교회를 위해 고스란히 바쳤어.”

“그런데 말이에요, 태오 도미네. 예수님께서도 성격에 명확하게 말씀하시지도 않은 신부의 독신제도를 교회가 제정한 것은 좀 독선적인 일처럼 느껴져요. 물론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훌륭한 신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 어려운 독신 생활 때문에 신학교를 그만 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또한 사제 생활을 하다가도 성직을 떠난 신부들도 상당히 있을 거예요. 그들에게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 성실하고 용감하게 그들의 청춘과 몸을 아낌 없이 바쳤던 한 때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독신 생활이란 십자가 앞에 연약한 인간성을 느끼고 떠난 것이 아니겠어요?”

“나도 도미네처럼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어. 그러나 바로 이 시간에 성직을 지키고 또 열심히 공부에 열중하는 신부, 신학생들도 어느 한 대는 우리처럼 고민도 하고 회의를 품기도 했었을 거야. 그러나 그들이 신부로서 성실히 살아온 일면에는 독신생활에 대한 우리의 인간적 해석과 이론을 초월하는 그 어떤 신비가 있을 거야. 우리는 이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아마 그 신비를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신비라는 것은 이론을 초월하여 각자의 신앙의 정도에 따라 체험할 수 잇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우리는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을지어다> 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자유로이 자신을 바칠 수 있을 거야.”

 

청강생으로부터 시작한 이 신학교 생활도 벌써 만 2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매일 매일 새로운 지식에 접하게 되는 이 신학교 생활이 나에게는 매양 즐겁고 행복하게만 느껴졌다. 이제는 아침 묵상 신공 시간에도 졸지 않았다. 이 사간은 주님과 조용한 내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즐겁고도 기다려지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신학생들은 군인들처럼 솔직하거나 순박하거나 혹은 박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친절하고 신심생활에 열심이었다. 무섭게만 보이던 학장 신부님도 실은 가끔 농담도 해 주시는 인자하신 분이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0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날이 그날 같은 규칙생활이었으나 8년 간 군대생활에 단련된 나에게는 오히려 더 어울리는 생활이었다.

 

신학교에 입학한 이래 나는 여름 방학이든 겨울 방학이든 한 번도 방학다운 방학을 가져보지 못했다. 나에게는 방학이라고 해서 찾아갈 집도 없었고 또 내가 소속해 있는 본당도 물론 없었다. 학장 신부님은 방학 기간 중 학교에 남아 학교 일을 도우라고 명령하셨다. 갈 곳 없는 나에게는 고마운 일이기도 했으나 한 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했다. 이러한 내 신세를 동정하는 동료 신학생들의 위로가 나에게는 오히려 모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좋아라 하고 가방을 들고 신학교를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질투를 느꼈고 욕을 하기도 했다. 신학교에 그대로 남아 있게 한 학장 신부님의 의도를 나는 모르는 바는 아니다. 아마 그분은 방학 도중 혹 내가 또다시 상이군인이 된 옛 해병대 동료들과 어울러 술 마시러 다니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하셨을 것이다. 물론 신부가 되려는 나를 아껴 주시는 그분의 고마운 배려였으리라….

방학 때마다 나는 학장 신부님의 말씀처럼 학교에 남아 <머슴>처럼 열심히 일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여러 교수 신부님들의 미사 준비와 복사를 해 드렸고 아침 식사 후에는 그분들의 방과 성당을 청소했다. 그리고 나면 오전 시간이 다 지나갔다. 오후에는 필요에 따라 이 신부님, 저 신부님의 잔심부름을 해 드렸다. 저녁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식사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학생 식당의 식탁에서 혼자 했다. 식사 시간이 5분을 초과할 때가 없었다. 교수 신부님 식당에서는 매일 이다시피 불고기, 스끼야끼, 갈비찜 같은 것들의 냄새가 요란하게 났으나 그런 것은 사실 나에게는 그림의 떡 같은 것이었다.

방학 중 나에게 가장 힘들고 외로웠던 일은 말 동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입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하고 지낸 날들이 허다했다. 말을 나눌 수 없는 인간, 대화를 나눌 벗을 갖지 못한 인간, 그것은 감옥 속의 죄수나 다를 바 없었다. 지나가는 거지라도 동냥을 하려고 나를 찾아 주었어도 나는 무한정 감격했으리라… 사람이 이처럼 그리운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물론 학장 신부님을 비롯해서 여러 교수 신부님들, 식당에서 일하시는 수녀와 아주머니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나와는 항상 거리가 있었고, 나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금지된 구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많은 사람들과 한 지붕 밑에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또 창 너머 저 길거리에 저렇게도 사람들이 많았건만 나는 언제나 외톨이었다.

어느 날 참을 수 없이 심심하고 고독하여 거울을 끄집어내었다. 그리고는 거울 속에 반사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거기에는 내 모습이었지만 나와 함께 움직이는 하나의 생명체가 있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나와 함께 중얼거려 보기도 했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나는 꼭 미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이처럼 거울 속에 비친 내 고독한 모습을 벗삼아 나는 그 기나긴 방학을 신학교 3층 위생실 골방에서 지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신부가 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견뎌내야 하리라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갈 곳이 없고 밥 먹을 곳이 없는 나에게 이러한 편의나마 제공해 주는 신학교에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기도 속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 자신을 신부로 만들어 놓기 위해 나를 단련시키는 주님의 뜻에 나는 순종하자고….

 

철학과 1학년 겨울방학이었던 것 같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무언지 모르지만 나는 눈을 유별나게 좋아했다. 그날도 창문가에 턱을 두 손으로 괴고 앉아 소리 없이 쌓이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고독감이 내 전신을 휘감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내 안에 이상한 충동이 일어났다. 마치 나를 부글부글 끊어 오르게 하여 결국은 나를 미치게 하려는 것처럼 나는 답답했다. 방학 때마다 정답게 살아온 이 위생실 골방이 마치 형부소의 독방인 양 참을 수 없이 좁고 냉혹하게만 여겨졌다.

 나는 이 방을 때려 부수고 싶었다. 나는 의식할 겨를도 없이 의자를 하나 집어 들어 복도 쪽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의자를 발로 밟아 부숴 버렸다. 내 잎에서는 “빌어 먹을 것, 내 가 뭣 때문에 이 치사스러운 곳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단 말이야”하는 상말이 거침 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이전처럼 홀로 책만 읽으며 이 방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었다. 나는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유를 느꼈다. 나는 외투를 걸치고 언젠가 숙이 기념으로 짜 준 털모자를 뒤집어 쓰고 무작정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눈 내리는 거리를 정처 없이 쏘다녔다.

서울의 거리는 휘황했다. 성탄절이 바로 며칠 전에 지나고 새해 정월 초하루를 하루 앞둔 서울의 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쇼우윈도우 안에 진열된 저 많은 상품들! 선물 꾸러머를 한 아름씩 안고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오가는 저 행인들! 그들은 누군가를 위해서 저 선물꾸러미를 샀을 것이며 또 누군가를 찾아가고 있으리라!

자신을 위해 줄 사람이 있고 찾아갈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평범하나마 본질적인 행복이 아닐까? 그리고 그곳은 바로 가정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기다리고 있는 곳,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 받는 곳, 그리고 우리가 피로에 지친 몸을 이끌고 찾아가 쉴 수 있는 곳, 그것은 바로 가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행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정을 행복의 보금자리라고 말하지 않는가?

 

여전히 눈 내리는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찾아갈 사람이 있고 찾아 갈 집이 있으며 나를 반갑게 맞아 줄 사람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때 나는 상이군인 훈을 생각해 내었다. 그렇다! 사람 많은 서울 장안에 내가 마음 놓고 찾아갈 수 있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반겨 줄 사람은 훈 혼자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이 서울 시내에도 가족처럼 지내는 가정이 한두 군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을지로 강남치과 할아버지 댁도 있었고 이영민 같은 친한 친구의 집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들은 내가 점잖은 신학생으로 있을 때만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사흘째 세수도 안 했고 면도도 물론 하지 않았다. 이러한 험상궂은 모습을 그들에게는 차마 보일 수 없었다. 그보다는 술 마시고 상말도 하고 좀 미쳐도 보고 싶은 지금의 내 심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 줄 사람은 이 세상엔 훈 혼자 뿐이었다.

“그래, 훈을 찾자. 그리고 그 자식하고 술이나 실컷 마시고 속 시원하게 욕지거리나 해 보자. 그 자식의 쇠갈고리 손으로 불고기라도 찍어 먹으며 옛 전투 이야기도 하자. 훈이 자식만은 그래도 나를 반겨 줄 거야. 오늘은 신학생이란 이 체면도 벗어 던져 버리고 또 교양이니 인격이니 하는 인간의 허위스럽고 치사스러운 허울도 벗어 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돌아가 훈이 새끼하고 술이나 마시며 이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나는 곧 미쳐 버릴 것 같아…”

이렇게 자신에게 중얼거리며 그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나는 그이 주소를 몰랐다. 그래서 혹시 이전처럼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명동거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명동거리를 몇 번이나 훑고 다녔으나 거기에는 훈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전해졌다. 그리고 내 걸음도 이미 맥이 빠져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내 등 뒤에서 “태오씨!” 하고 부르는 어느 젊은 여인의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갑자기 정신차림 사람처럼 뒤를 돌아다 보았다. 거기에는 뜻 밖에도 지난 해 정월 결혼한 숙이 자기 남편 근과 함께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숙은 자기 남편과 같이 크고 작은 선물 꾸러미들을 들고 있었다. 숙은 양장을 하든 한복을 입든 옷이 몸에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화려한 연분홍색에 까만 털깃이 달린 외투를 입고 모자까지 쓰고 있는 숙은 마치 서양 배우처럼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숙은 반가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도망치고만 싶었다. 나는 얼른 내 초라한 모습을 떠올렸다. 이러한 모습으로, 그리고 이런 심정으로 그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못 본 척 그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반갑습니다” 하고 말하며 나도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우리 셋은 예기친 않은 곳에서의 이 뜻 밖의 해후에 서로들 어색함을 느꼈다. 우리들은 숙의 제의로 다방으로 들어갔다. 숙의 남편 극과 나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도 역시 숙과 나의 지난 날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내가 전쟁 중 숙을 위해 써온 일기를 다 읽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숙이를 사랑했고 또 어떠한 과정을 통해 신부가 되려고 결심했었나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충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를 존경하고 나를 사랑한 숙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까지 한 일이 있었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데도 여러 번 함께 식사까지 했다.

 내 앞에 서서 남편과 함께 다정히 걸어가는 숙의 뒷모습에서 나는 처음으로 질투를 느꼈다. 그리고 숙이 얄밉게 보였다. 지난 해 정월, 숙은 자기의 혼배미사에 나를 초청했었다. 나는 그 미사에 참석하여 그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자기 남편과 나란히 제대 앞에 앉아 있는 숙을 보면서도 나는 전혀 질투를 느끼지 않았었다. 나는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원할 수 있었다. 그날은 숙의 행복을 비는 기도로써 충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자기 남편 옆에 앉아 찬찬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숙을 처음으로 미워했다. 숙은 나에게 가혹하리 만치 냉정해 보였고 나는 그들과 함께 다방에 들어온 것을 몹시 후회했다.

우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서로가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잇는 것 같았다. 그때 근이 숙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했고 숙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지며 반가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리고 근은 군인으로 있을 때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일도 있었고 본래 점잖은 그의 성격과 풍채는 서구식 신사풍이 몸에 배인 은은한 멋을 풍겼다. 나는 그에게 남자로서 상당한 호감을 가졌었다. 숙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시작했다.

“태오씨, 반가워요.”

숙은 진정으로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반가움보다는 내 초라한 모습 때문에 그녀를 피하고 싶은 심정 뿐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숙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이미 한 아내로서, 그리고 애기 엄마로서 성숙한 아름다움이 품위 있게 잘 조화되어 있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그는 다소 기분이 상한 것 같았으나 여전히 부드럽게 말을 계속했다.

“그 털모자 마음에 드세요?”

나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숙이 짜서 보내 준 그 털모자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숙은 입가에 조용히 웃음을 띠고 그 털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에 만족해 하는 것 같았다.

“아, 참 감사해요. 덕분에 잘 쓰고 있습니다.”

나는 멋 적게 웃으며 겨우 몇 마디 대답했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한 이후 지난 여름방학 때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경칭을 썼다. 이번에도 그녀에게 경칭을 사용했다.

“그런데 태오씨의 몸이 많이 수척해 보여요. 혹시 학교 식사가 좋지 않아요? 아니면 공부가 지나치게 힘이 드신다 든지…”

내 건강을 진심으로 염려해 주는 숙의 이 다정스러운 음성과 마음씨, 그러나 사흘째 세수도 안 한 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숙의 다정한 관심과 우려가 오히려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왜 내가 병자처럼 보입니까?”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해 주려는 추호의 의도도 없었으나 어쩐지 내 감정과 이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었다. 숙은 현명하게도 나의 이 부끄러움을 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동정 어린 눈에는 이미 물기가 촉촉히 서리기 시작했다. 숙은 착한 여자였다. 부끄럼 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여전히 부드럽게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감은 나를 책망하고 있는 듯했다.

“태오씨, 지금 태오씨는 태오씨 답지 않게 남의 관심과 호의를 무시하고 있군요. 정말 섭섭한데요….”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그만….”

숙과 함께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무슨 핑계를 주워 대든지 하여간 빨리 그 앞에서 사라지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숙은 다소 화가 난 듯했으나 애써 그걸 참는 것 같았다. 뭔가를 말하려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그저 웃기만 했다. 나는 그 웃음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를 알고 싶은 심정도 갖지 않았다. 숙이 말을 계속했다.

“태오씨, 오늘은 태오씨와 대화를 나누기가 여간 힘들지 않군요. 그런데 신학교 생활은 재미있으신가요?”

“우리 신학생들은 재미를 위해 살지 않아요. 우리는 사명을 위해 공부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 없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 참 그렇지요. 하지만 사명이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긴장감 같은 걸 느끼게 되네요. 그러한 긴장 속에서도 그것을 부드럽게 해 주는 그 어떤 재미라 할까 취미 같은 것들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런 뜻이라면 그런 재미 같은 것들이 우리들에게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신학생 서로 간에 느끼는 동지의식이랄까, 도는 새로운 지식을 대할 때 맛보는 기쁨이라든가 혹은 기도 안에서 체험하는 주님의 위안 같은 것들이 우리들 신학생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재미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나의 말 속에는 이전과 같은 신념의 힘이 없었다. 그때의 솔직한 내 심정은 “뭐 재미가 있느냐구요? 지금 숙씨는 나를 놀리고 있습니까? 산다는 그런 재미가 나에게 어디 있어요.” 하고 대꾸해 주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우선 내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 숙에게 필요 이상의 걱정 거리를 던져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숙은 이미 내 심정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태오씨는 참으로 훌륭하세요.”

숙이 말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솔직하지 못한 나를 책망하는 다소, 나를 비꼬아 주는 듯한 어감이 숨어있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태오씨, 태오씨는 지금 무엇인가를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시는 것 같아요. 이런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태오씨는 지금 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으며 또 뭔가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요…”

“고민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살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가 다 제 나름대로의 고민을 갖게 마련이죠.”

나는 마치 이유 없이 대들고 있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나의 자존심이 허락 치 않았으나 고민이 없다고까지 숙에게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태오씨, 오늘은 그런 까다로운 얘기를 나누지 말아요…. 아, 참 우연히 만난 이 기회를 축하하는 뜻에서 무슨 기념될 만한 일이라도 했으면 하는데요. 태오씨 생각은 어떠세요?

나는 숙에게 그날의 내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도 역시 나의 불안하고 반항하는 듯한 이야기를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그러한 대화를 나눌 처지가 이미 아니었다. 나는 숙이 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저 잠잠히 있었다. 숙은 말을 계속했다.

“태오씨가 신부가 될 때까지는 우연히 만나는 기회를 제외하고는 서로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고 또 만나지도 않기로 한 우리 서로의 약속 때문에 성탄 카드도, 아무런 선물도 보내지 않았어요. 하지만 얼마나 반가운 일이에요.  이 기회를 뜻 있게 축하하는 의미에서 우리와 함께 저녁 식사라고 같이 해 주실 수 없겠지요?”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오늘 저녁, 여기 명동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날의 기분으로서는 숙의 제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태오씨, 태오씨는 우리 서로의 처지가 이렇게 되었는데도 저를 피하시고 싶으세요?”

숙의 밝던 표정은 금세 나를 원망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숙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숙은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두려웠던지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느냐고 다그치지는 않았다. 외출할 때마다 몸가짐에 남달리 신경을 써 오던 내 깔끔한 성미를 이미 잘 알고 있는 숙은 아마 그날의 내 허술한 모습에서 지금 내가 속이고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짐작했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태오씨, 오늘은 태오씨 답지 않아요. 우리 서로가 모든 걸 이해하는 처지에서 왜 나를 피하시려고 하세요? 태오씨가 가지셨던 이전의 그 용기와 신념을 잊으셨어요? 나를 피하고 싶어하는 태오씨의 자존심, 나는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태오씨, 그러한 자존심과 체면을 고집하셔야만 되겠어요? 그건 태오씨 답지 않은 행동이에요. 태오씨의 아픈 마음을 자꾸 건드려서 죄스럽지만요. 나는 태오씨의 지금 그 모습을 더 존경해요. 고뇌가 그려져 있는 태오씨의 이마, 의지적인 태오씨의 코, 끝 없이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태오씨의 그 두 눈, 어쩌면 오늘 세수조차 하지 않았을, 좀 게을러지고 수수해진 태오씨의 모습, 털털한 태오씨의 옷차림, 이러한 태오씨의 달라진 모습에서 나는 소박한 일반 대중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는 한 훌륭한 신부님의 모습을 보고 있어요. 태오씨, 오늘 저녁 어머니 모시고 우리 함께 식사해요. 네? 저분이(숙은 남편 보고 저 분이라고 했다) 지금 오빠 집에 계시는 어머니 사정을 알아 보러 나가셨어요. 어머니께서 아마 굉장히 반가워하실 거예요.”

“아, 참 어머님 안녕하세요?”

“네, 잘 계세요. 어머니께선 늘 태오씨를 보고 싶어하시지만 제가 말리고 있어요. 어제만 해도 정초에 태오씨를 집으로 초대해서 태오씨가 좋아하시는 만둣국이나 같이 들었으면 하셨으나 제가 안 된다고 했어요. 우리 서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오늘은 다르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와 함께 식사해 주세요. 모두들 기뻐하실 거예요.”

숙은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나는 숙 앞에서 빨리 사라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감사합니다만 모처럼의 그 초대를 받을 수 없어 죄송해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이 명동에서 친구를 만나야만 합니다.”

“나는 끝까지 거짓말을 계속했다. 그때 근이 오버의 눈을 털며 안으로 들어왔다. 근은 우리 둘의 굳어진 표정을 잠시 살피더니 숙 옆에 앉았다. 숙이 남편의 오버 깃에 아직도 남아있는 눈을 털어 주며 물었다.

“어머니 안녕하시대요?”

“응, 잘 계시대. 저녁 식사에 어머니를 식당으로 모시겠다니 좋아하시더군. 그래 태오 형, 숙이 이미 말씀 드렸겠지만 오랜만인데 어머니 모시고 저녁 식사나 같이 합시다 시간은 있겠지요?”

“태오씨는 오늘 저녁 이름도 없는 누군가를 이 명동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대요. 그래서 우리 초대를 받으실 수 없대요. 그런데 당신, 어머니 보고 태오씨 만나셨다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숙이 화난 듯한 음성으로 말을 가로 챘다. 그는 다소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태오형, 사정도 모르고 어머니께 그런 말씀을 드릴 수 있어야지. 그래서 그저 물건 좀 사러 명동에 나왔다가 어머니 모시고 식사나 할까 하고 전화 드렸다고 말씀 드렸지. 태오형 어떻소? 웬만하면 우리 같이 식사나 합시다. 연말이고 하니 함께 술이라도 나누면 좋지 않겠소? 아마 어머니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제일 좋은 선물이 될 거요. 어머니는 그처럼 태오형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고마우신 초대지만 근형, 나는 선약이 있어 먼저 실례해야겠소. 죄송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들에게 말했다. 숙도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남편을 쳐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우리도 가요. 태오씨는 한 번 안 된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으로 끝장이에요. 더 이상 권할 필요 없어요. 예나 지금이나 고집은 여전하시군요.”

숙은 나를 돌아다보며 다소 비꼬는 투로 말했다.

“이거 참 섭섭하구려. 오랜 만인데…. 대접도 해 드리지 못하고. 요즘 때가 때인 만큼 태오형 생각이 간절했었는데….”

 

근은 정말 섭섭해 하는 것 같았다. 숙은 “여보, 빨리 오빠 집에나 갑시다.” 하며 자기 남편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안녕히 계세요.”하는 싸늘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러나 근이 찻값을 지불하는 동안 내게로 돌아와서 다소 누그러진 듯한 음성으로 차분히 말을 건넸다.

“태오씨, 용서하세요. 태오씨의 심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태오씨께 마음 아픈 말씀을 드려 죄송해요. 그리고 태오씨를 위한 기도, 잊지 않고 바치고 있어요. 주님의 뜻이 항상 태오씨와 함께 하길 빌어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숙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말 마디 마디 마다 에서 진실의 냄새가 스며 나오고 있음을 나는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전등불에 비친 그녀의 두 눈에서는 물기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숙과 근이 선물 꾸러미를 들고 다방문을 나서자 나는 그 자리에 도로 앉아 차 한 잔을 다시 주문했다. 숙에게 좀 지나친 고집을 부린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차를 마시면서 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일시에 사그라져 버린 것처럼 훈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생기지 않았다. 훈과 함께 술이나 실컷 마셔 보자던 내 생각도 우스꽝스러운 일처럼 여겨졌다. 신학교 그 구석진 내 골방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다방에서 나와 혜화동 신학교 쪽으로 택시를 달리면서 그래도 나는 감사했다. 나는 그때 내 아픈 가슴을 안고 되돌아 갈 집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나를 맞이해 줄 사람 없는 신학교 골방이지만 그래도 내 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그런대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내 방에 돌아오니 난로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방안은 냉장고 속처럼 냉기가 감돌았다. 난로 불을 다시 피우고 싶은 기분도, 의욕도 내키지 않았다. 시간이 늦어 저녁밥을 얻어 먹기도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해서 시내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더더구나 없었다. 모든 게 그저 귀찮기만 했다.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러나 뜬 눈으로 밤을 새운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나긴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드디어 심한 독감에 걸려 있었다.

그 후부터 나는 신학교 생활에 차츰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교수 신부님들의 미사 시중 들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분들의 방을 청소할 때마다 나는 일종의 모욕감까지 느꼈다. 그 넓고 추운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할 때는 밥 사발을 집어 팽개치고 싶은 이상한 욕구불만 같은 것을 가지기도 했다. 불고기 냄새가 나는 교수 신부님들 식당 앞을 지날 때마다 치사스러워 침을 탁 뱉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대로 내 고독의 벗이 되어 주던 거울마저 깨뜨려 없앴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중얼거리는 일이 이제는 궁상맞아 견딜 수가 없었다. 교수 신부님들은 하나같이 심술 맞고 독재자처럼 보였고 비겁해 보이기도 했다. 저런 분들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교회를 비난한다고, 나는 엉뚱한 트집을 잡기도 했다. 신학생들의 행동이나 태도를 하나 하나 뜯어 보니 그들은 한결같이 쩨쩨하고 위선적이고 교만하고 비겁하고 치사해 보였다. 저건 것들이 세상에 나가 신부랍시고 대우와 존경을 받으며 사랑과 진리와 정의와 겸손을 강론할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쓴 웃음만 나왔다. 나는 모든 것에 반발했다.

나는 이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신학교를 비난하고 교수 신부님들을 모욕하고 동료 신학생들을 무시했다. 그러나 신학교를 박차고 나올 용기는 없었고, 나는 그저 머슴처럼 묵묵히 일했다.

 

어느 날 성당을 청소하고 있었다. 제대 위의 먼지를 털다가 나는 계단을 헛짚어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발목을 삐었다. 그 순간 “쌍, 빌어 먹을 것” 하는 상말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때 어디에선가 “태오야” 하고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다만 제대 위에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또 지극히 익숙해진 자문자답을 시작했다.

“태오야, 아프냐?”

십자가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발목을 삐어 일어날 수가 없을 지경인데, 그럼 아프지 안 아프겠어요?”

나는 주님께 항의했다.

“물론 아플 게다. 그런데 네 입에서 방금 무슨 말이 나왔느냐?”

“그건 나 자신마저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상말이었습니다. 용서하십쇼, 주님!”

“평소에 네가 불만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런 점잖지 못한 상말이 튀어나오는 거다. 네가 깨닫지도 못하는 새에 말이다. 사람의 말은 말하는 사람의 정신 상태를 말해 주는 것이다. 태오야, 너 요즘 어떤 불만이 있느냐?”

“주님, 생각해 보십쇼. 2년 동안이나 이 신학교에서 방학 때마다 머습처럼 일하고 있는데, 그래 내게 불만이 없겠습니까? 나도 인간입니다. 나도 인간 취급을 받고 싶습니다. 동료 신학생들은 집에 가서 편히 쉬고 공부하고 놀며 인간답게 살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추운 신학교에 남아 머슴살이를 해야만 합니까? 내 이 꼴과 내 이 신세가 뭐냐 말입니까.”

 “그건 네가 나를 아직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당신에 대한 사랑과 이 머슴살이와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관계가 있고 말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네가 훌륭한 신학생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방학 때마다 너에게 이 일을 시키고 있는 거다.”

“주님, 그건 정말이지 너무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킨다구요? …. 주님은 정말 무정한 분입니다. 주님께서 진정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를 좀 쉬게 하십시오. 그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일 겁니다.”

“전쟁 중에 이미 너는 경험했을 것이다. 야간 기습이나 정찰전에 출동할 때마다 너는 네가 제일 신임하고 아끼는 대원들을 척후조로 선택하지 않았느냐?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너의 눈이 되어야 했고 상황 판단의 길잡이가 되어야만 했었기 때문이 아니냐?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너를 더 아끼고 사랑하니까 신부생활에 절대로 필요한 순명의 덕과, 고독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로 덕과, 궂은 일을 즐겨 할 수 있는 겸손과 덕과, 무엇을 하든 나를 위해 한다는 사랑의 덕을 훈련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너에게 시키고 있다. 네가 이런 훈련도 습득하지 않고 신부가 되어 세상에 나가 보아라. 그때에 자신이 직면할 고독과 불만과 고통 앞에 너는 무엇으로 대처할 수 있겠느냐? 해병대가 전쟁 중에 전투를 제일 잘 해낼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심한 훈련과 전쟁 상황에 적절한 훈련을 받은 덕택이 아니겠느냐? 신부 생활이란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신부에게는 지식에 앞서 덕행이 있어야 한다. 내가 거듭 강조한다마는 방금 말한 그런 여러가지 덕을 잘 훈련하고 습득하지 않으면 아무도 신부생활을 참되게 해 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주님, 생각 좀 해 보세요. 주님의 말씀은 지당합니다만 이건 좀 너무 하지 않아요? 입에서 구린내가 날 정도로 말할 사람이라고는 그림자조차 없는 이 사막 같은 곳에서 도무지 살 맛이 나야지요.”

“그건 거듭 말하지만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다. 태오야, 너 야곱의 이야기를 모르고 있느냐? 야곱은 자기 외삼촌 집에서 라켈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그 대가로 7년을 종살이 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7년 간의 머슴살이가 야곱에게는 마치 며칠간의 일처럼 느껴졌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느냐? 왜냐하면 야곱이 라켈을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도 나를 사랑한다면…”

“주님, 야곱은 장가라도 가려고 그런 일을 했지만 나는 도대체 뭡니까?”

나는 자신도 미처 의식하기 전에 주님께 불쑥 대들었다.

“태오야, 그럼 너는 결혼하고 싶단 말이냐? 너를 6년 간이나 사랑하던 애인을 내게 제물처럼 바치고 신학교에 들어온 네가, 그래, 지금에 와서 결혼하고 싶어하느냐?”

“주님, 그게 아닙니다. 생각 없이 나온 말입니다. 내가 어찌 결혼을 생각하겠습니까? 주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 머슴살이에 이제는 미칠 것만 같습니다.”

“태오야, 너는 벌써 네 자신의 말을 잊었느냐? 몇 달 전에 어린 동료 신학생과 <보다 더 큰 사랑>에 관해 그렇게도 훌륭히 말을 잘 하고서도…. 태오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런데 너도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네, 주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럼 너는 결혼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 주님, 숙을 축복해 주시고 당신을 위해 그녀를 떠난 나도 축복해 주십시오. 나는 주님을 결혼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럼 빨리 일어나 하던 일을 계속해라.”

나는 마룻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삔 발목이 뻐근하기는 했으나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얼마 동안 절룩거리며 하던 청소를 끝냈다. 그리고 제대 앞에 꿇어 앉아 차분히 기도 들릴 수 있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남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하신 당신 말씀을 실천하고 배우기 위해 우리 신학생들은 이곳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훈련 중에 있습니다. 주님, 이 괴로운 훈련 과정에서 저로 하여금 낙오되지 않게 인도해 주십시오. 넘어지면 일으켜 주시고 이 외롭고 메마른 내 가슴 속에 당신의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십시오. 당신의 진리에 회의를 품고 저항하려 하는 이 오만함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당신의 섭리와 사랑을 항상 옳게 이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며, 그리하여 당신이 가르쳐 주신 <보다 더 큰 사랑>을 위해 당신처럼 십자가에 못박힐 수 있도록 해 주소서. 주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3장

병신 도착

 

철학과 2학년이 되었다.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방학이 또 다가오자 동료 신학생들은 마냥 즐거워했으나 내 마음은 또 다시 무겁고 어둡기만 했다.

어느 날, 당시 철학과 과장 교수로 계시던 황신부님이 병역을 필 한 몇 명의 노장 신학생들을 당신 방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우리를 보고 7월 말에 있을 문교부 유학시험에 임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프랑스 낭씨 신학대학교의 유학생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당시의 문교부 유학 방침은 병역을 필한 학생으로서 일반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만 유학시험을 허용하였다. 6.25 전쟁에 참전한 많은 학도병 출신들이 문교부의 이러한 방침에 항의하여 이승만 대통령께 진정서를 제출했다. 즉 고등학교 이상으로서 군 복무를 마친 학도병 출신에게도 유학의 길을 열어 달라는 진정이었다. 이대통령은 이 진정서를 받아들였고 문교부는 학도병 출신으로서 외국 대학의 장학금이 보장된 사람에게만 유학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세 번 주게 되었다. 이번 7월 말 시험이 그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이었다.

 

처음에 나는 황신부님의 유학 제안을 사양했다. 국어로 공부하기에도 힘이 든 이 철학과 신학을 불어로 공부할 것을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이래 단 한 번도 유학을 꿈꿔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내가 유학 간다고 나선다면 아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비웃을 일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정상적인 학교 공부라고는 왜정시대 때 소학교를 마친 정도이고, 이제 신학교에서 겨우 철학이란 것을 힘들게 배우기 시작한 내가 프랑스 땅에서 공부를 해낸다면 그것은 홍길동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기도를 드리며 나는 또 주님을 찾았다.

“주님, 황신부님이 절더러 프랑스 유학을 가라고 하시니, 그분이 망령이 드셨지요?”

“태오야, 너는 유학 가는 사람이 특별히 정해져 있는 줄 아느냐?”

“그럼 그렇고 말고요, 아무나 다 유학 갈 수 있나요?”

“너는 그러면, 어떤 사람들만이 유학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우선 머리가 뛰어나게 좋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하겠지요. 그리고 어학에 소질이 있고, 또 유학 가려는 나라의 말도 잘 알고 있어야 하고요. 그런데 나는 이런 조건들을 하나도 갖춘 게 없는데요.”

“태오야, 넌 네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그리 바보가 아니다. 그렇다고 네가 천재라는 이야기는 아냐. 하지만 어느 나라에 가서도 넉넉히 공부해낼 수 있는 능력은 있다. 특히 너는 노력형이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말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인간의 노력에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음악에 하나도 소질이 없는 사람이 노력만 한다고 뛰어난 음악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억지의 예다. 지금 나는 너와 너의 유학 문제를 놓고 대화하는 중이다.”

“그럼 주님께서는 제가 프랑스에 가서도 지금 하나도 알지도 못하는 프랑스 말로 이 어려운 공부를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벌써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너는 네가 그렇게 존경하는 김대건 신부를 잊고 있느냐? 김대건 신부는 너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라틴어도 프랑스어도 한 마디 모르면서 얼마나 훌륭하게 공부를 해냈느냐? 너는 그래도 라틴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군요, 그럼 내가 유학 가는 것을 주님께서도 진정 원하십니까?”

“너 자신을 위해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그리고 말이다. 네가 여기서 계속 공부한다면, 신부가 되는 날까지 신학교에 남아 방학 때마다 일을 계속해야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또 책상을 몇 개쯤 때려 부술 것이고, 나에게 또 상말을 할 테고, 제의방(祭衣房)의 포도주가 몇 병 도둑맞을 것이다. 너는 이렇게 나에게 반항할 것이고, 도 나를 많이 괴롭힐 것이다. 이제 나는 너 스스로 즐겨 말하는 머슴살이에 동정이 간다. 그래서 네가 이곳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가버렸으면 한다. 그 먼 속에서 너는 홀로 좋은 경험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아, 그렇군요. 사실 방학 때마다 학교에 남아 머슴살이하는 일이 이제는 지겨워요. 그럼 주님께서는 이 머슴살이를 피하기 위해 유학 가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썩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태오야, 또 고집이냐? 사실 그 고집이 너에게는 큰 장점이 되기도 한다마는…. 나도 한 때는 헤롯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간 일까지 있지 않느냐?”

“그러나 주님, 사실 자신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 할 수 없다. 학교에 남아 그 지긋지긋한 머슴살이나 하면서 의자나 집어 던지고 거울을 때려 부수고, 욕지거리나 하고 있으려무나. 자신이 없는 자는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

“주님, 그건 너무 가혹한 말씀입니다. 나는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데, 나를 위로해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책망만 하십니까?”

“태오야, 나는 너에게 분명히 말해 둔다. 나는 너를 필요로 해서 너를 이곳으로 불렀고 너는 또 용기 있게 이 부름에 대답했었다. 그러므로 내가 항상 너와 함께 공부하고 노력하고 있음을 너는 잊지 않아야 한다. 나는 너에게 아우구스틴 성인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같은 대학자가 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너는 비록 미련하고 무식하고 고집 센 사람이지만 순박한 네 성격과 때로는 바보스러우리만치 순진한 네 모습과 불붙는 듯한 그 반항심의 열정을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너와 함께 신앙의 모험을 시도해 보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주님, 그런데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또 무슨 문제냐? 넌 참으로 까다로운 녀석이다. 사사건건 까다롭게 이유를 붙이고 있구나.”

“주님, 생각해 보십시오. 유학시험에는 외국어와 역사가 필수과목인데 어떡하지요? 외국어 시험은 불어로 볼 것이고, 역사라면 옛날 고향집 사랑방에서 동네 할아버지들이 들려 준 야담 정도의 지식 밖에 없는데요. 불어는 문자 그대로 캄캄하고, 역사는 야담 정도의 지식 밖에 없고 더구나 시험 준비할 시간도 넉넉지 못한데 어찌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나 대신 시험을 쳐 주신다면 모르지만요…”

“참, 딱한 녀석이구나. 걱정 말아라, 태오야. 나는 너에게 결코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벌써 학교 당국에서는 외국어 시험을 라틴어로 치를 수 있도록 선처해 놓았고, 역사는 지금부터 공부하면 되지 않느냐? 너에게는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있으니 이번에도 아마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고 밤 새우며 공부하리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너의 이러한 미련한 성격을 기특하게 여기고 있어.”

 

방학과 함께 유학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드디어 7월 말경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유학시험을 치렀다. 라틴어는 어느 목사님이 출제했으나 어렵지 않았고, 역사도 그런대로 자신이 섰다. 선택과목으로 택한 철학도 그렇게 실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두려움 속에서 준비해 오던 유학시험에 결국은 합격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었고 또한 프랑스에서의 신학공부도 내 성실한 노력의 대가로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길 성심으로 기도 드렸다.

 

복잡한 유학 수속도 여러분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냈다. 해군 헌병감으로 계시던 허대령님, 인사국의 김대령님, 그리고 상이군인 훈이와 그 외 몇몇 친구들, 그 외 여러 사람의 힘으로 유학에 필요한 일체의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소화 데레사 성녀(聖女)의 조국인 프랑스에서 그분의 축일인 10월 1일 도착할 예정으로 9월 27일 서울에서 출발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동경과 홍콩, 그리고 방콕에서 각각 하루씩 쉴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우선 황신부님께, 당시 파리에서 공부를 하시며 유학생들의 지도 신부님으로 계시던 이 바오로 신부님께 나의 도착을 알리는 전문(電文)을 부탁 드렸다. 왜냐하면 누군가 비행장으로 나를 마중 나오지 않으면 도착 즉시부터 치러내야 하는 엄청난 난관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황신부님은 짤막한 불어 전문을 써 주셨다.

<ARRIVEE INVALIDES 21 HEURES 30 LE PREMIER OCTOBRE>

 

당시 한국에는 불-한 사전이란 고등학생들의 영어 단어장 같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사전을 보고 전문의 뜻을 더듬거리며 해득해 내리고 나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문의 뜻은 <10월 1일 21시 30분 병신 도착> 이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불어도 하나 모르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니 그건 병신이나 다름 없었고, 그래서 병신 하나가 공부하러 가니 잘 봐 주라는 뜻으로 나는 해석했었다.

황신부님은 프랑스에서 12년 간이나 공부하신 분이고 학생들과도 가끔 농담도 잘 하시는 분이었다. 그러나 농담도 정도 문제지, 불어 한 마디 모르는 나를 유학 보내면서 병신이 도착한다는 전보는 사실 너무 지나친 농담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일종의 모욕감까지 느꼈다. 그러나 그 전보는 그냥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내가 프랑스에서 병신 노릇 면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1958년 9월 27일 오전 10시, 서울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전날 밤, 나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침실 창 너머로 부슬 거리는 비를 바라보며 2년 6개월 동안이나 살아온 이 신학교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 동안의 기쁘고 즐겁고 괴롭고 죄스러웠던 여러 가지 일들이 회상이 되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날은 새고 있었으나 비는 여전히 구슬프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비가 오는 게 더 다행스러웠다고 생각했다. 병신의 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 나는 죄 지은 사람처럼 그저 사람들을 피하고만 싶었다. 이런 부끄러운 심정을 하늘은 구름으로 덮어 주었고 길 가는 행인들은 빗줄기 속에서 나로 외면하며 지나갔다.

나를 태운 택시는 서울역을 지나 용산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택시 창 밖으로 아직도 6.25 전쟁의 상흔이 군데 군데 남아 있는 거리를 내다 보았다. 거미줄처럼 엉킨 전선 줄 아래로 성냥 곽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나지막한 집들,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상점들, 필경 술내기 장기를 두고 있을 철문상 앞에 쭈그리고 앉은 몇 명의 남정네들, 택시를 앞질러 지나가며 흟탕물을 뿜고 있는 군용 트럭, 길 가는 아가씨들을 희롱하고 있는 군인들, 이 모든 정다운 풍경들이 이제 한 시간 삼십 분 후면 내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고 또 오랫동안 눈 여겨 볼 수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나는 마치 목마른 사람처럼 차창에 매달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조국의 이 가난한 풍경들을 훑고 도 훑었다.

삶의 한 순간에 느닷없이 느끼는 그 어떤 예감 속에서 예언적인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무엇인지는 모르나 나는 별안간 내 조국을, 이 서울을, 택시 창 너머로 보이는 저 풍경과 저 사람들을, 영원히 떠나는 듯한 예감을 강력히 느꼈다. 이 조국 땅에서 저 가난한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살며 주님의 뜻에 따라 저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몸을 바치리라 다짐하곤 하던 나였었는데, 그런데 왜 나는 이 조국과 그들을 영원히 떠나는 듯한 예감을 가졌을까?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멀리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 흔히 갖는 연민과 슬픔, 그런 것이었을까?

여의도 국제공항, 국제공항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바라크식 건물들만 늘어서 있는 여의도는 마치 가난한 한국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난하게 자라온 나였었기 때문에 또 가난한 내 조국이었기 때문에, 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국제공항 건물에도 나는 마음 깊이 동정과 애착을 느꼈다.

물론 이 공항 안에서 나를 배웅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에게도 내 출발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 이것은 물론 내 괴팍한 성격 탓이었다. 사람들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또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하는 별난 취미를 나는 갖고 있다. 공항 한 구석에는 수십 명의 남녀들이 모여 찬송가를 부르며 기도 드리고 있었다. 또 어느 목사님이 유학 가는 모양이다. 어디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소리 내어 찬송하고 기도하는 저네 들이 좀 별나게 보이기는 했지만, 신앙 표현에 대한 그들의 열성만은 장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주교님이 어디를 떠나신다 해도 천주교 신자들은 저렇게 요란하게 찬송하며 기도 드리지는 않으리라. 내가 이 생각, 저 생각하며 공항 안을 거닐고 있을 때 누군가 “태오씨!” 하고 나를 불렀다. 아, 거기에는 숙과 숙의 어머니가 서 계신 게 아닌가?

“웬일이십니까? 어머니.”

“태오 신학생님, 야속해요 야속해…. 이렇게 떠나면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르는 내 나인데 그래 인사도 없이 떠나가긴가요?”

어머니께서는 눈물을 글썽거리시며 내 손을 잡았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신학교에 들어온 이후에는 몇 범의 편지에서도 경칭을 쓰셨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신부가 되어 돌아올 거예요. 그때 어머니를 제일 먼저 찾아 뵙게요. 어머니께서도 부디 몸 조심하시고, 우리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해요.”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기쁘겠소. 그러나 나도 이젠 60을 넘은 몸이 아니오. 나는 우리 태오 신학생이 신부님이 되시고, 태오 신부님한테서 종부성사 받고 주님 품으로 돌아가는 게 제일 소원이라오. 내 작은 기도와 정성이지만 태오 신학생을 위해 바치겠소. 부디 몸 조심하시고 훌륭한 신부님이 되셔서 돌아오구려. 그때 이 늙은이가 춤추며 주님께 찬미 드리리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저도 어머님을 위해 기도 드리겠어요.”

나는 말을 마치자 우리 뒤에 서 있던 숙을 돌아다 보았다. 숙은 두 살 난 큰 아들을 데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애기를 내 품에 안았다. 그 녀석은 처음에는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이내 조용히 내 품 속에 안겨 있었다. 나는 숙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되는가를 몰라 애기를 안았던 것이다.

“너 이놈 몇 살이냐?”

“아저씨, 두 살.”

그 녀석은 나를 아저씨라 부르며 조그맣고 귀여운 손가락 둘을 세워 보이며 제 나이를 말했다.

“그럼 네 이름은?”

“본명이 마태오에요. 재작년 9월에 이 애를 낳았어요. 그래서 애기 아빠가 9월의 성인 중에서 제일 훌륭한 마태오 사도를 본받아 마태오라 이름 짓자 해서 그렇게 했어요.”

숙이 대신 대답했다. 아기 본명이 마태오라니, 참 이상한 인연이었다. 놀라는 내 표정을 보고 어린 마태오도

“아저씨, 내 이름 마태오야.” 하며 강조했다.

숙이 말을 계속했다.

“아기 아빠가 마태오 성인을 참 좋아해요. 저도 그 성인을 존경하구요. 그런데 참 섭섭했어요. 요즘 어머니가 꿈 속에서 자꾸 태오씨가 보이신다고 하시면서 안절부절 하시길래 이제 아기 아빠가 태오씨 안부를 물으려 학교에 다녀오셨어요. 태오씨는 계시지 않았고, 대신 오늘 아침 유학 떠나신다는 전갈만 받고 오셨어요. 너무 하셨어요. 애기 아빠가 처음으로 화를 내시며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 하시면 밤새 분해 하시더군요. 아빠는 회사 일로 못 나오시고 이 편지만 좀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아마 그 편지 속에 태오씨를 나무라는 말들이 있을 거예요. 언짢아 마세요.”

숙은 원망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대답할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말이 갑자기 궁색해지자 나는 어린 마태오의 얼굴을 쳐다보며 숙에게 농담을 건넸다.

“어디 보자, 마태오야 너 누구를 더 닮았니? 넓은 이마와 오똑한 코는 이지적인 아빠 닮고, 반짝이는 두 눈과 냉정함이 감도는 입매는 쌀쌀한 엄마 닮고, 선한 표정은 할머니 닮았구나. 너 이 녀석, 아빠 엄마 할머니의 좋은 점만 뺏어 태어났으니 이 다음 복깨나 받겠다.”

내 말에 어머니도 숙도 웃었다.

“우리 마태오의 고집은 태오씨 닮았어요. 태오씨처럼 아 주 고집이 대단해요. 우리 집안의 왕이랍니다.”

숙이 말을 이었다.

“마태오야, 엄마 말대로 너 내 고집 닮았느냐? 그건 좋은 일이야. 그 고집 잘 키워라. 그러면 이 다음 큰 사람 될 거야.”

모두가 같이 웃었다. 어린 마태오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내 목을 두 손으로 끌어안고 방실거리며 웃었다. 어린 마태오의 보드라운 살결이 내 목에 닿자 나는 마태오를 힘껏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자 나에게도 이런 귀여운 아기가 하나 있었으면 하는 알 수 없는 부성애 같은 것이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마태오를 할머니에게 건네 주고 숙과 나는 공항 안을 거닐었다.

“숙, 고마워.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이 땅을 떠나려 했었는데…. 그러나 막상 공항에 나와 보니 홀로 조국을 떠나는 심정이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어. 뭔지 모르게 착잡하고 울적하고 했었는데, 듯 박에 숙이 이렇게 나를 환송해 주니…. 고마워.”

나는 숙과 서로 다정했던 그 옛날로 돌아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부자연스러운 경칭을 쓰지 않고 이전에 흔히 하던 대로 반말을 했다.

“왜 태오씨는 필요 이상으로 고독하게 지내시려 하세요. 떠난다는 것, 그것도 수만 리 떨어진 외국으로 떠난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쓸쓸한 일이에요. 태오씨는 남을 위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시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정말이지 냉정한 사람이에요.”

“숙, 나도 그런 나 자신을 얼마쯤은 후회해. 나 스스로 고독을 찾아 나서고, 그러면서도 그 고독을 거부하고 그 고독에 반항하려 하는 유별난 성격이 내게 있다는 것을 요즘 나는 새롭게 발견했어.”

“지난 해 연말에도 그러셨어요. 그때 나는 정말이지 태오씨를 미워했어요. 물론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요. 그리고는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태오씨를 미워하던 그만큼 기도도 더욱 열심히 드렸어요.”

“숙, 이제는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아. 그날 나는 미치고 싶을 정도로 신학교 생활에 진저리를 느꼈었어. 그날 숙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바로 구원이었어. 만일 그날 숙을 만나지 않고 명동 거리에서 막연히 찾아 헤매던 친구를 만났더라면 아마 지금 나는 이 공항에 이렇게 유학 떠나는 몸으로 서 있지도 못했을 거야. 숙은 이렇게 언제나 나에게 마치 등불처럼 구원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어. 숙, 정말 고마워.”

“나도 그때 태오씨 신변에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구나 하고 짐작은 했었지만…. 태오씨는 정말 훌륭해요. 나는 자랑스러워요.”

“감사해. 우리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 구원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배구에 됐어. 우리의 구원은 물론 천주님의 은혜이지만 이 은혜는 우리 서로가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며 또 협조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결실이라고 생각해. 그런 면에서 숙은 나를 돕고 또 나도 숙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빛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 가고 싶어.”

“옳으신 말씀이에요. 우리 서로는 주님의 은혜 안에 서로 도우며 살아 가야 해요. 나는 주님 안에 태오씨를 무한히 보람스럽게 여겨요. 태오씨께서 신부님이 되실 날을 기다리겠어요.”

“그런데 숙, 이전보다 몸이 많이 여윈 것 같아. 이제 숙은 아내자 어머니야. 몸 조심해야지….”

나는 화제를 돌렸다.

“지난 7월에 딸을 낳았어요. 산후 조리가 좋지 않아 몸이 불편하고 몇 주일 전에는 입원까지 했어요.”

“그래? 근형이 걱정이 많았겠군. 그래 참 요새 근형은 잘 계셔?”

“네, 여전하세요. 이번에 과장으로 승진했어요.”

“근형은 참 훌륭한 사람이야. 남자인 나까지 부러워할 정도로 착하고 이해심이 많아.”

“태오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이도 태오씨에 대해 똑같은 말씀을 해요. 그이는 정말이지 좋은 분이에요. 때로는 내가 미안스러울 만치 내게 잘해 주세요.”

“숙은?”

나는 웃으며 숙의 옆 얼굴을 쳐다 보았다. 숙도 나를 바라보며 다소 얼굴을 붉히고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죠.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잘해 줘요. 태오씨께서 내가 결혼하기 며칠 전에 보내 주신 편지 있었지요? 그때 태오씨께서 하신 말씀 명심하고 있어요. <결혼생활은 마치 이인삼각(二人三脚) 경기>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때로는 서로 고집을 부리다가도 똑같이 그 말을 회상하고 양보하고 화해하곤 하지요.”

 “물론 그렇게 협조하고 호흡을 맞춰가며 살아야지, 만일 근형이 숙에게 잘못해 주면 내가 달려가서 근형을 혼내 줘야지.”

우리는 서로 웃었다. 그러나 비행기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어머니께로 되돌아갔다. 어머니께서는 비행기 떠나는 것을 보시고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셨으나 나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시길 권했다. 숙은 내 기분을 이해했다. 어머니는 나를 안으시고 꼭 성인 신부님이 되어 돌아와 달라고 말씀하시며 또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숙의 손을 잡고 있는 어린 마태오를 안고 택시 있는 쪽으로 걸었다.

“숙, 몸조심 해요.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요.”

숙은 아무 말 없이 마태오를 받아 안고 뺨을 비비며 택시 창문 밖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숙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돌아섰다. 택시는 엔진 소리를 거칠게 내며 공항 모퉁이를 돌아 저 멀리로 사라졌다.

 

 

어느새 비는 멎었고 하늘이 맑아 왔다. 비행기를 향해 걸으며 나는 갑자기 가슴이 텅 비어옴을 느꼈다. 걷잡을 수 없는 고독감과 무엇인가의 동반을 바라는 마음이 나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영원히 조국을 떠나 있게 될지도 모르는 나와 함께 항상 같이 있어 줄 수 있는 <조국의 것>을 갖고 싶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옷들도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여러가지 물건들도 시간과 함께 낡아 없어질 것이다. 나는 무언가 영원히 변하지도 않고 닳아 없어지지도 않을 <조국의 것>을 원했다. 나는 오직 그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며 비행기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기도 드리듯 <조국의 것>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내 발부리에 무엇인가 부딪혀 걸리는 것이 있었고, 그것은 어린 아이의 주먹만한 한 개의 돌이었다. “옳지, 그렇다. 너는 조국의 돌이다. 너느니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의 발부리에 채이며 이리 몰리고 저리 쫓기며 살아온 한 개의 천한 돌이지만 나에게는 너는 한 알의 귀중한 조국의 돌이다. 나도 너처럼 못나고 천한 몸, 자 이제부터 우리는 동지다. 조국의 돌아! 나와 함께 프랑스로 가자. 그리고 내 책상 머리에서 항상 조국을 생각할 수 있도록 나를 지켜 다오. 그리고 변치 않는 너의 본질을 통해 주님을 향한 내 사랑과 사제직에 대한 내 의지를 변호해 다오.” 나는 이렇게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 돌을 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했다.

비행기는 요란한 폭음 소리를 내며 활주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눈 아래 환히 내려다 보이는 저 서울 시가들, 숙을 태운 택시가 달리고 있을 저 거리들, 2년 반을 내 집처럼 살아온 저 신학교, 오늘도 쇠갈고리 손을 흔들며 명동 뒷골목을 누비고 있을 훈이와 그의 상이군인 전우들, 저 멀리 저 산 너머로 보이는 내 고향 개성 땅, 형님들, 누님들, 조카들, 저 한스러운 휴전선! 그리고 그 주위의 사천강 전투에서 죽어간 내 많은 벗들, 특히 진섭이와 오진이, 그리고 강원도의 저 험악한 산악들, 거기에 묻혀 있을 수많은 내 전우들, 특히 우 수병과 13고지의 인민군 장교, 저 헐벗은 산들, 메말라 보이는 조국의 땅, 버섯처럼 정답게 모여 있는 초가집들, 행복보다는 불행을, 기쁨보다는 슬픔을 회상시켜 주는 내 조국의 산천들….

얼마 후 비행기는 동해의 푸른 물 위에 떠 있었고, 조국의 돌을 움켜 쥔 내 오른손 안에는 땀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예정대로 10월 1일 파리 어얼리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전보의 도착 시간보다는 30분이 빠른 오후 9시였다. 늦은 것보다는 차라리 일직 도착한 것이 더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혼자 생각하며 나는 짐을 찾고 세관을 통과하고 그리고 공항 대기실에서 이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신>이 도착한다고 했으니 틀림없이 마중 자오실 것을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파리 공항에 도착하자 정말이지 나는 병신이나 다름 없었다. 말 한 마디 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물론 없었다. 그러나 9시 30분이 다 되어도 이 신부님처럼 보이는 한국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초조해졌다. 10시쯤 되자 검은 수단을 입은 한 동양 신부님이 나타났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분 앞으로 뛰어가며 “이 신부님!” 하고 반갑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분은 나를 한 번 흘깃 쳐다보더니 그냥 지나갔다. 나는 그분 앞으로 다가서며 다시 한 번 “이 신부님!” 하고 소리쳤다. 그분은 여전히 묵묵히 걷고 있었다. 나는 라틴어로 “에쓰 네 사체르도쓰 코레아누쓰?” 즉, 당신은 한국 신부님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분은 웃으며 “에고 숨 씨넨씨우쓰” 라고 대답했다. 그는 중국 신부였다. 나는 속이 탔다. <병신>이라고까지 전보에 명확하게 명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마중을 나오지 않으셨다니… 나는 이 신부님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흔히 신부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인자해도 동료 신부들 간에는 이상할 정도로 인정이 없고 냉정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병신>이 도착했는데도 돌보아 주지 않는 것은 정도를 지나치는 것이라고 나는 홀로 분개하고 있었다.

밤 10시 30분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신부님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마침 내 옆을 지나가는 한 조종사를 붙들고 서투른 영어로 시내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는 저 쪽을 가리키며 거기서 ‘앙발리드’ 라는 행선지 표지를 붙인 버스를 타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과연 거기에는 내가 <병신>으로 번역한 INVALIDES라는 표지판이 붙은 버스가 서 있었다. 도무지 나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버스를 탔다. 약 30분쯤 후에 도착한 곳은 INVALIDES란 커다란 형광등 간판이 붙어 있는 곳이었으며 이곳이 바로 에어 프랑스의 터미널이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21시 30분 병신 도착>이라는 전보의 뜻을 이해하고는 피식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렇게 멍청히 웃고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거기에도 이 신부님은 안 계셨다. 행여나 하던 마지막 기대도 무너지자 나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호텔에 가고 싶어도 나는 택시 운전수에게 내 의사를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생각난 것이 파리의 그 유명한 노트르담 성당이었다. 그곳에 가면 적어도 라틴어로라도 의사를 소통할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나는 택시 운전수에게 다가갔다. 손짓 발짓 다해가며 “에크레시아 노트르 담”이라고 수 없이 되풀이 했으나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주위에 차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택시 운전수는 마치 내가 난동이라도 부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던지 이윽고 는 나를 밀쳐대고 있었다. 그러면서 화난 듯 큰 소리로 뭔가를 지껄여대며 그는 딴 손님들을 태우고는 떠나 버렸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그때 저쪽에서 자그마한 키에 몸집이 통통한 한 동양인 신부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경상도 사투리로

“저 혹시 한국에서 온 태오 신학생 아닙니꺼?” 하고 물었다.

나는 반가움보다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그분에게 다가서며 고함쳤다.

“당신 한국 신부욧?”

“와 그라십니꺼? 나 이신붑니더.”

그분은 놀란 표정으로 두서너 걸음 뒤로 물러 서며 더듬거리듯 말했다. 나는 여전히 목청을 높였다.

“아니 그래, <병신>이 도착한다고 까지 전보를 보냈는데도 지금까지 어디 있었습니까?”

“병신이라고요? 누가 병신입니꺼?”

그는 어리둥절해 있었다.

“병신이 바로 여기 있지 않습니까? 내가 바로 그 전보의 주인공, 병신입니다.”

“아니 당신은 프랑스로 유학 온 태오 신학생이 아닙니꺼?”

“그렇습니다. 전보에 병신이라고 보낸 바로 태오 신학생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웃었고 그분은 내가 미치지나 않았나 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이 하도 우스워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사건의 전모를 설명했다. 그랬더니 이 신부님은 한바탕 소리 내어 웃으시며 ‘앙발리드’ 라는 지명이 있게 된 연유를 설명하셨다. 즉 나폴레옹 황제의 무덤과 육군병원이 있는 곳이라서 ‘불구자’라는 뜻인 앙발리드 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단다. 그분은 그분대로 화가 나 계셨다. 두 시간이나 나를 헛되이 기다리고 계셨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아니 그래, 프랑스에 유학 오면서도 그 정도의 상식조차 없이, 더군다나 말 한 마디 배우지도 않고 왔단 말인가? 하여튼 용감하네. 그런데 자네는 나이가 퍽 들어 보이는데 신학교 몇 학년인가?”

“지금 29세 입니다. 그리고 철학과 2학년이었습니다.”

“그럼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 자네는 사회에서 무엇을 했었나?”

“해병대에 8년 간 있었습니다.”

“어쩐지 자네한테서는 <개병대> 냄새가 좀 나는군 그래. 하여튼 용감하네. 앞으로 공부하는데 무던히 고생이 될 테지만, 해병대 출신이니까 자네는 능히 해나갈 걸세.”

그날 밤 나는 이 신부님의 소개로 ‘후라때르니테 사체르또딸’ 이라는 성직자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목욕을 하고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저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태오야, 이 불쌍한 태오야, 너는 정말이지 병신이다. 오늘 같은 병신 노릇을 수없이 되풀이해 가며 살아야 할 테니, 너는 정말 가련한 녀석이구나…”

나는 주님을 찾았다.

“주님, 앞으로 어떻게 하죠?”

“오늘처럼 그렇게 하면 되지 않느냐? 오늘 너는 아주 재미있고 용감하게 일을 잘 처리해 나가더라.”

“아니, 주님, 내 병신 노릇을 주님께서는 재미있어 하십니까? 그건 너무 하십니다. 오늘 일로 인해 아마 내 몸 무게는 한 3 킬로 그램쯤 빠졌을 겝니다.”

“태오야, 너는 모험을 즐기는 녀석이야. 너도 벌써 오늘 일을 재미있게 회상하고 있지 않느냐? 네 삶 안에 어려운 일이 없거나 복잡한 사건들이 없으면 너는 아마 살 맛을 잃을 게다. 항상 뭔가와 투쟁하며 고달프게 살아가는 바로 거기에 너는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리고 너는 이러한 투쟁과 난관을 아주 재미있게 처리해 나가는 별난 취미와 재주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신부가 되려는 너에게 큰 장점이 되고 있어. 물론 이러한 장점 때문에 신부로서 고생도 어지간히 하겠으나 그래도 그 속에서 너는 네 나름대로 행복을 찾을 거다. 아마 네 스스로 말하는 병신 노릇을 앞으로도 수없이 되풀이하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통해 좋은 추억을 갖게 될 게다.”

“하여튼 주님께서는 만사 태평이시군요. 하지만 한 번 부딪혀 보겠습니다. 다만 주님, 나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십시오.”

 

다음 날 파리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유 바리시오 부제님의 호의로 대충이나마 파리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서글픈 광경만을 목격할 수 있었을 뿐이다. 꿈 속에서만 그려 보곤 하던 자유와 예술과 낭만과 유행과 향수(香水)의 도시, 그러나 알제리아 사태로 인해 지하철 역마다, 길거리 골목마다,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관만이 삼엄한 경계의 눈초리를 굴리고 있었다. 잔뜩 흐린 하늘 밑에 놓여 있는 파리는 긴장과 공포로 인해 더욱 음산하기만 했다.

 

파리에서 사흘을 묵고 나는 유학 목적지인 낭씨 신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역까지 나를 배웅 나오신 이 신부님은 말 한 마디 못하는 병신 같은 나를 동정하는 표정으로 한참 나를 바라보시더니 입을 열었다.

“태오 신학생, 너무 걱정 말게. 남들이 다 해내는 공부 아닌가. 그 해병대의 돌격 정신으로 무엇을 못해내겠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건강에 조심하게. 외국에서 병이라도 나봐, 그것보다 고독한 일은 없다네. 그리고 외국어 공부는 시간이 걸리고 시간이 해결해 주는 걸세. 물론 노력이야 해야 되겠지만, 덤비고 설친다고 어학 공부가 되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자네처럼 나이 든 사람이 불어를 배우며 공부를 해 나가야 될 테니 오죽하겠나 마는… 하지만 실망 말게. 그리고 프랑스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차가 연착하는 법이 없네. 그러니까 오후 2시 45분에 기차가 정거하면 무조건 거기서 내리게. 그곳이 낭씨일 테니까, 내가 신학대학교 학장님께 자네의 도착을 전화로 알렸네. 그러니 누군가가 틀림없이 역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걸세. 그럼 몸 조심하고…”

 

생각하면 모두 꿈만 같은 일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서울에 있던 내가 프랑스에까지 와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기차 속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빨간 기와 지붕을 올린 저 아름다운 집들, 끝없이 펼쳐진 평야, 여기 저기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는 젖소들, 그리고 뭉게구름처럼 모여 있는 양떼들,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하는 고운 야산들, 그리고 그 한쪽에 규모 있게 정돈되어 있는 포도밭들, 지난 날 봉건영주들의 집이었을 저 아름다운 샤또(城)들,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자동차의 행렬, 부락이 있는 곳마다 보이는 성당들, 그리고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아 있는 두 젊은 연인들의 다정한 속삭임과 쉴 새 없는 키스, 또한 도무지 무관심하고 표정 없는 목석처럼 앉아 있는 내 주위의 사람들… 마치 외국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신부님의 말씀대로 오후 2시 45분 정각에 기차는 낭씨 역에 도착했다. “병신아, 여기가 낭씨다” 라고 나에게 외치고 있는 듯한 NANCY 라는 큰 간판이 눈 앞에 보였다. 병신처럼 어슬렁어슬렁 역으로 걸어 나올 때 한 서양 신부가 내 앞으로 다가오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분에게 나는 “에고 숨 쎄미나리 우쓰 코레아누쓰, 셋드 네시오 로쿠이 링괌 칼리캄”, 나는 한국인 신학생이지만 불어를 말할 줄 모릅니다 라고 라틴어로 말했을 때 그분은 여간 실망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분은 라틴어로 자기가 신학교 학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분은 몸은 말랐으나 날씬한 몸집이었으며 두 눈이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분의 성미가 급하고 좀 까다롭게 보이는 표정에서 다소 불안한 기분을 느꼈으나 그의 행동은 지극히 자상했다. 손수 내 가방을 들어다 자기 차에 실었고, 내가 편히 차에 탈 수 있도록 차 문까지 열어 주었다. 그리고 몇 마디 간단한 불어 단어를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쎄 마 봐뒤르> (이것은 내 차입니다)와 <러 셔망>(길)과 <러 쌔미내르>(신학교)라는 단어였다. 그분은 이 세 단어를 무심히 가르쳐 주셨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단어들에 깊은 뜻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였다.

즉 그분의 <자동차>는 그분의 지도와 사랑이었고 <길>은 신학교의 규칙과 내가 신학생으로 걸어가야 할 엄격한 생활을, 그리고 <신학교>는 내 사제직의 완성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다. 그날 밤 나는 일기장에 이 세 단어를 정성껏 기록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나는 더 병신이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학장 신부님께서는 다섯 명의 신학생을 내 불어 선생으로 지정해 주셨다. 그들은 하루 두 시간씩 당번제로 나에게 불어를 가르쳤다. 일정한 불어 교과서도 없이 그들은 제멋대로 떠들어대기만 했다. 내가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소 귀에 경 읽는 격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말끝마다 나는 하나도 알아 드지 못했다는 뜻으로 항상 ‘농'(영어의 NO)이라고만 대답했다. 어느새 나는 <무슈 라빼 농>(농 신학생)이 되어 있었다. 내가 “농”이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항상 자기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온갖 손짓 몸짓을 다했으나 나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나는 답답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정성이 미안스럽기도 했고, 또 알아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무의미했다. 나는 피곤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누가 묻기만 하면 그저 <우이>(영어의 YES>라고 만 대답하기로 했다. “너 병신이지?” 라고 물어도 나는 “우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신학생들이 나를 <무슈 라빼 우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얼마를 지내다 이제는 <농>도 귀찮아졌고 <우위>도 성가셔져서 누가 뭐라고 묻기만 하면 그야말로 병신처럼 히히 웃어 주기만 했다. 이번에는 신학생들이 <무슈 라빼 쑤리엉>(싱글벙글 신학생)이라고 불러 주었다. 이렇게 한 달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점점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불어 공부에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내 자신은 완전히 공부에 대한 걱정으로 압도당하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이윽고 나는 불면증에 걸렸다. 밤만 되면 정신이 이상하게 맑아 오면서 두통이 심해지고 현기증이 나서 공부할 수 없었고 낮에는 낮대로 잠에서 깨어 있는 것인지 졸고 있는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살 감기마저 심하게 들었다. 매일같이 흐리지 않으면 비가 오는 습기 찬 이곳 기후 때문에 나는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해야만 했다. 전쟁 중에 받은 상처가 이런 날씨만 되면 으레 쑤시고 아팠다. 나는 밥도 못 먹고 이틀 간이나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학장 신부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를 찾아 주셨고 의사도 여러 번 다녀갔다. 약을 먹어도 효과는 조금도 없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이 프랑스 땅에 유학 온 것을 죽으라고 후회했으나 이젠 별 수 없었다. 내 조국이 아닌 남의 땅에서 죽게 되는 내 운명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조국의 돌>이 내 신세처럼 불쌍하게 보였다. “나의 벗, 조국의 돌아. 내가 죽으면 너는 영영 고아가 되겠구나….. 그리고 너는 저 창 너머로 버려져 영원히 이 몹쓸 프랑스 돌 틈에 끼어 외롭게 살게 되겠구나. 나의 벗, 조국의 돌아, 너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나를 용서해 다오. 네가 원한다면 너를 내 관 속에 함께 묻어 달라고 유언할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허리끈에 구멍을 두 개나 더 뚫어야 할 정도로 몸도 말랐다. 밥맛은 여전히 없었다. 몸살도 몸살이지만 좁디 좁은 신학교 골방이 신경질 날 정도로 갑갑했다. 침대는 허리가 배겨 더 이상 누워 있을 수조차 없었다. 사흘째 굶었더니 배도 고팠다. 그러나 서양 음식이 도무지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군대에서 또 신학교에서 먹던 나이롱 콩나물국, 된장국, 소금에 절여진 쓰디 쓴 김치, 고추장, 보리밥, 이런 것들을 회상하니 입안에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그때 학장 신부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시내에 중국 음식점이 하나 있는데 원한다면 같이 동반해 주겠노라고 친절히 말씀하셨다. 너무 감사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나는 허락만 해 주신다면 학교 위생실에서 내가 손수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다고 말씀 드렸다. 당시 낭씨 국립대학교에는 한국 학생 두 사람이 있었고 어느 날 나는 초대를 받아 그들이 손수 준비한 한국 음식을 먹은 일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한국 식사에 필요한 재료의 확보 방법까지도 알아 두었었다. 학장 신부님은 나의 라틴어 설명을 들으시더니 그것을 허락해 주셨다.

학장 신부님은 학교 식당에서 일하는 한 수녀님을 소개해 주셨고 나는 그분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시내로 나갔다. 내가 손짓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사 주셨다. 나는 몸에는 기운이 다 빠져나가 버렸었고 현기증이 심하여 허리를 굽혔다 펴기만 해도 하늘에 수만 개의 별이 보일 정도로 쇠약해 있었다. 그러나 한국 음식을 먹게 된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절로 났다. 우선 김치를 만들었다. 양배추를 썰어 소금에 절였다. 그리고 마늘을 다지고 파와 양파도 썰어 넣었다. 사과도 얇게 썰어 넣고 설탕과 고추가루를 적당히 섞어 양념도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소금에 절여 풀 죽은 양배추를 씻어 양념에 식초를 함께 버무려 병에 담았다. 병에 비친 김치 색깔은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게 보였다. 밥 짓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의 불고기 솜씨도 일품이었다. 쌈도 먹고 싶어 상추도 두어 포기 사다 두었다. 고추장은 토마토케찹에 설탕과 고추가루와 쇠고기를 다져 기름에 볶아 만들었다. 빛깔은 틀림없는 한국 고추장이었다. 시금치에 조개를 넣어 된장국도 끓였다. 또한 무우를 넣고 생선찌게도 만들었다. 문자 그대로 일품 요리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성싶을 정도로 모든 준비는 거의 완벽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생겼다. 불고기 냄새를 주방에서 맡고 위생실에 올라 오신 수녀님 두 분이 “싸 썽봉” (냄새가 좋습니다)을 연발하며 자기들이 음식 맛을 보겠다는 것이다. 한국 음식을 맛 보겠다는 그 극성스러운 수녀님들을 쫓아 버릴 수도 없었고 또 그들 앞에서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쌈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들을 자발적으로 물러나게 할 수 있는 묘안을 생각해 내었다. 그분들 앞에다 조개국을 한 종기씩 떠 놓고 거기다가 그 매운 월남 고추가루를 한 숟가락씩 집어 넣었다. 나는 조금 후에 벌어질 그 기막힌 코미디를 상상하고는 혼자서 숨 죽여 웃었다. 그들은 무엇이 또 그렇게 좋은지 포도주까지 한 병 들고 와서는 서로 건배하며 나눠 마셨다. 우리는 엄숙하게 식전 기도를 드리고 즐겁게 국을 한 숟가락씩 들여 마셨다. 이윽고 두 수녀님은 으악 소리를 지르며 입을 크게 벌리고 눈물을 흘리며 연거푸 재채기를 했다. 나는 능청스럽게 “수녀님들 많이 드세요”라고 말하며 태연히 국을 먹었다. 두 수녀님은 드디어 “메르씨 보오꾸 메 에스큐세 누” (감사해요, 그런데 용서하세요)라고 겨우 입을 떼어 놓으시며 자리를 떴다. 나는 만면에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허리끈을 풀었다. 약 한 시간 반 동안 나는 정신 없이 먹어대었다. 테이블 위에는 생선 뼈 몇 개와 고추장 한 숟갈과 냄비에 몇 알씩 붙어 있는 누룽지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치 전투가 끝난 들판 같았다. 그리고 나는 위생실 침대에 옷도 입은 채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이었을 게다. 누군가가 내 방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깨어 보니 오후 2시 반이었었다. 어젯밤 고추가루에 혼이 난 두 수녀들로부터 말씀을 전해 들은 학장 신부님이 혹 내가 죽어 있지나 않나 하고 달려 오셨던 것이다. 그분은 걱정이 되어 의사를 부르시겠다고 하셨으나 나는 말렸다. 그 후 나는 불면증도 몸살도 거짓말처럼 말끔히 나았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열의가 샘처럼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 고추가루 사건 이후 그 수녀님들은 나를 <무슈 라빼 매셩>(악질 신학생)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동료 신학생들이 불어를 가르쳐 주는 시간 이외에 나는 주로 독학을 했다. 동경에서 사 가지고 온 불어 교과서와 문법책과 사전을 놓고 나는 머리를 싸맸다. 하루 평균 6시간 이상은 자지 않고 미련할 정도로 공부했다. 처음 신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울 때 기억이 났다. 미련스러울 정도의 노력 이외에는 결코 다른 방법이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성탄절을 보내고서는 매일 불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문장의 유창함이 내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 달이 지나면 한 달치의 일기를 교정해 가며 다른 공책에 옮겨 쓰곤 했다. 한 달 전의 불어 문장이 유치해 보일 정도로 나는 조금씩 진보가 있었고, 또 그를 통하여 어느 정도 자신을 갖게 되었다. 내 자신이 교정한 일기를 동료 신학생에게 보이고 또 다시 교정을 받았다. 이렇게 학년 말까지 계속했다. 그러자 남들도 놀랄 정도로 문장이 다듬어졌고 또한 불어 공부도 재미 있기만 했다. 그리고 이제는 프랑스 어디를 가더라도 병신 노릇을 면할 자신이 있다고 은근히 자부하게 되었다.

 

 

 

 

 

제4장

프랑스에서의 첫 방학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지루하기만 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던 한국에서의 방학! 그러나 처음 맞는 이 곳에서의 여름방학은 무척 기다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가정생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재산이 많건 적건, 사회적 지위가 높건 낮건,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든, 무식한 사람이든, 사람은 제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지혜로운 노력의 결과라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인간적 행복은 가정의 화평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일생을 물론 가정 없이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 신부가 된 나였지만 나는 이번 방학을 이용해 프랑스 사람들의 가정생활을 알아 보고 싶은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왜냐하면 삶을 하나의 예술로 생각하고 생활의 멋과 낭만을 창조해 가며 산다는 프랑스 사람들의 가정생활에 관하여 나는 너무도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낭씨 신학대학의 선배이며 당시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손요한 신부님이 이번 7월 방학을 자기와 보내지 않겠느냐고 연락을 보내왔다. 그는 프랑스 서부 낭트 시에 살고 있는 의사 로마이에 가족을 잘 알고 있었다. 손 신부님은 기 가족과 함께 여름마다 그분의 별장에 가서 방학의 일부를 보내고 있었다. 로마이에 씨는 프랑스 서부 해안에서 가장 유명한 ‘라볼’ 이라는 피서지에 ‘레샤죵’ 이라는 꽃 이름의 아담한 별장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 별장에서 나도 7월 한 달을 지내게 되었다. 8월은, 닥터 로미이에가 이미 편지로 나에게 소개해 준, 역시 낭트 사람이며 의사인 쿠에상 가족과 함께 브레타뉴 지방에서 피서지로 유명한 ‘쌍 삐에르 드 키부롱’ 에서 보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쿠에상씨는 그 곳에 엄청난 큰 별장을 갖고 있었으며 친절하고 독실한 신자이기도 했다.

 

7월 초, 손요한 신부님을 따라 낭트를 거쳐 라볼에 있는 로마이에씨 별장에 도착했다. 닥터 로마이에씨는 낭트에서 일하고 있었고 다만 주말에만 별장에 와서 우리와 함게 지냈다. 그러나 마담 로마이에는 방학 중에는 애들과 함께 내내 별장에서만 지낸다고 했다. 그 부부는 50대에 가까워 오는 사람들이었다. 로마이에 아주머니는 불문학을 전공했으며 한때 골레져 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분의 말은 항상 재미있었고 문학적이었으며 틈이 나는 대로 나에게 불어를 가르쳐 주시기도 했다. 우아한 성품에 감정이 풍부하고 친절했으며 가정 일에 온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평범한 주부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큰 아들과 딸은 영국을 여행 중이었고 14세 난 막내 아들 이브만 우리와 함께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프랑스 가정에서 장기간 지내게 될 때는 손님이라는 입장에서 ‘아웃 사이더’처럼 잠자코 있으면 안 되네. 그것은 자네를 초대해 준 사람들을 오히려 피곤하게 만들어 주는 결과가 될 테니까… 그래서 가족의 한 사람처럼 그들과 같이 늘 어울려야 하고 그들의 하는 일을 같이 도우며 지내야 하네. 아첨을 할 정도는 곤란하지만 아주머니의 비위를 맞춰 줄 수 있도록 하여간 애써야 하네. 주인 아주머니의 환심을 사지 못하면 다시는 초대받지 못할 걸세.”

손신부님의 이러한 충고도 있었지만 나는 본래 남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다. 로마이에씨의 낭트 집에는 가정부가 있었으나 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무엇이나 로마이에 아주머니가 다 했다. 나도 가족처럼 식사 준비도 도왔고 설거지도 같이 했으며 별장 청소도 했다. 로마이에 부인을 따라 시장도 같이 다녔다. 그러면서 나는 열심히 불어 회화를 익혔다. 가족이 단출하고 또 손신부님이 계셔서 그런지 나는 조금도 불편하거나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정말이지 즐거운 방학이었다.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주로 해수욕장에서 지내고 밤에는 손신부님과 해안가를 산책하였다. 물론 나는 나를 이렇게 프랑스에 오게 하신 주님에게 감사 드리는 것을 잠시도 잊지는 않았다.

 

별장생활이긴 했지만 프랑스인들의 가정생활을 넉넉히 관찰할 수 있었다. 로마이에 씨 가정은 프랑스의 중류 정도 수준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의 생활은 사치스럽다고 듣던 것과는 딴판으로 그들은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물론 낭비도 없었다. 철저한 절약과 생활비의 계획이 빈틈 없었다. 먹고 마시는 데에는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 당해낼 수 없을 정도로 풍부했으나 절대로 음식이 남아 버리게 될 정도는 아니었다. 집안에는 불필요하게 켜져 있는 전등은 없었다. 식당이나 응접실의 전등도 필요에 따라 세고 약함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마담 로마이에는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옷차림도 아주 검소했다. 그러나 머리 손질과 몸가짐은 항상 깨끗하고 단정했으며 수수하고 간결한 화장이 더 잘 어울려 보였다. 프랑스 가정 부인의 멋은 수수하고 단정한 몸가짐에 있다는 누군가의 말을 새삼 기억했다. 그는 집안 일도 놀랄 정도로 부지런히 했다. 특히 정원 손질은 정원사 이상이었다. 손 신부님과 함께 대화할 때도 그분은 늘 뜨개질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잠시도 손이 쉴 새 없을 정도로 무엇인가를 했다. 그 외에는 감탄스러운 일은 로마이에 아주머니의 독서열이었다. 문학 작품은 물론, 자기 취미에 맞지는 않지만 자기 남편을 위해 전문적인 의학 잡지도 읽고 있었다. 그래서 주말마다 오는 남편에게 의학상의 상당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다.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있으면 그것을 스크랩했다가 남편에게 보이기도 했다. 그는 주말에 오는 자기 남편을 마치 젊은 애인들처럼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틀에 한 번씩은 꼭 전화로 다정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금요일 오후에는 미장원에 가서 머리 손질을 꼭 했다. 옷도 평소보다는 좋은 옷으로 갈아 입고 몸에는 향수도 뿌렸다. 이렇게 일주일 만에 두 사람이 만나는 광경은 마치 두 젊은 애인의 생사를 초월한 극적인 해후처럼 열렬했고 다정스러웠다.

프랑스에는 <부부는 영원한 애인이다. 따라서 부부 간에 애인다운 감정이 없으면 그것은 위태롭다> 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로마이에 부부는 영원한 애인의 감정을 지니고 항상 생활을 새롭게 하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부인은 남편의 사랑스런 아내이자 비서였다. 그런가 하면 남편의 직업상의 좋은 협조자요, 친구이기도 했다. 아울러 자녀들에게는 애정 깊은 어머니요, 동시에 그들의 엄한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8월 초에 나는 쌍 삐에르 드 키부롱으로 닥터 쿠에상의 별장을 찾아 갔다. 역에 내렸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 살짜리 어린애로부터 십 칠팔 세쯤 되어 보이는 학생까지 아이들만 무려 12명이 나를 마중 나와 있었고 어른들도 여러 명 보였다. 그 중에서 점잖게 머리가 벗겨진 한 신사가 내 앞으로 나서며 나에게 엉부라쓰(프랑스식 포옹)한 다음 자기 소개를 했다. 그가 바로 무슈 쿠에상이었다. 그리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소개했다. 인사를 서로 나누고 엉부라쓰를 하는데 무려 30여 분이나 걸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친한 사이거나 혹은 친절과 존경을 표시할 때 양쪽 뺨에 세 번 키스를 한다. 아직 엉부라쓰에 익숙지 못한 나에게 이 30분 간의 키스는 땀나는 일이었다. ‘러 아모’ (작은 촌이라는 뜻)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 있는, 말하자면 대문 격인 큰 문으로 들어서며 나는 또 한번 놀랐다. 별장이 크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으나 이렇게 클 줄은 미처 몰랐다. 별장의 정원이 학교의 큰 운동장만 했다. 장미 밭과, 사과나무와 배나무가 심어져 있는 조그만 과수원, 야채 밭, 어린이 놀이터, 그리고 백 년은 족히 살았음직한 웅장하고 위엄 있는 소나무와 또 큼직한 두 채의 집이 있었다. 한 채는 봉건 영주의 성처럼 생긴 고전풍의 집이었고 또 한 채는 현대식 문화주택이었다. 침실만 무려 10여 개나 되었고 무도회를 열 만한 크기의 살롱도 각각 있었다. 별장 담 너머로는 태양에 비쳐 은백색으로  빛나는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고 대서양의 물결이 햇빛에 부서지고 있었다.

 

 러 아모 라는 이 별장은 운수업으로 한 때 부자가 되었던 마담 쿠에상의 부모님이 자기들의 두 자녀를 위해 세운 집이라 했다. 쿠에상 아주머니의 오빠인 에그랑 장군이 영주의 샤또(城) 같은 별장을 차지했고 문화주택 같은 별장은 마담 쿠에상의 소유였다. 이 별장에서는 여름만 되면 몇 가정들이 함께 모여 바캉스를 즐긴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마침 에그랑 장군이 알제리아에서 휴가 차 와 있었고 에그랑 부인의 남동생인 보오에 가족이 그 집에 와 있었다. 닥터 쿠에상 댁에도 친구인 러샤르뽕띠에르 가족이 바캉스를 보내려 와 있었다. 닥터 로마이에 별장에서는 조용한 가족적 생활이었으나 이곳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부산했다. 식사도 평일에는 네 가정이 따로 했으나 주일에는 이십 명의 대가족이 함께 모여 마치 잔칫집 같은 분위기였다.

 

매일 점심 식사 후 어른들은 백 년이 넘은 그 소나무 아래서 카페를 마시며 환담하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다양한 화제가 오고 갔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부인들이 갖고 있는 그 넓은 상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문제로부터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분야에까지 그들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독특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의견의 일치가 힘들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남을 무시하고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법도 없었다. 의견의 충돌로 인하여 기분을 상하는 일은 물론 있을 수가 없었다. 부러울 정도로 그들은 자기 의견과 상반되는 견해도 존중해 줄 줄 알았다.

 

나는 한국인들을 생각해 보았다. 흔히 한국인들은 남을 헐뜯기 좋아하고 남의 잘못을 꼬집어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들을 한다. 거기에는 물론 여러 이유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만큼 독서를 많이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반적인 지식과 교양이 부족한 탓으로 자연히 화제가 궁색해지기 때문에 할 말이 없어진다. 그래서 떠도는 소문이나, 주워 들은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그때 생각해 보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말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의 끝은 항상 깨끗하고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의 행동도 어른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들은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자유시간이었다. 나는 그들이 노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아주 어린 꼬마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보통 같이 어울려 놓았다. 점심식사 후 그들은 장미 밭에 모여 오후에 놀 계획을 세운다.  그들도 나이는 어리지만 개성이 강하여 각자의 계획과 주장을 고집한다. 한참 동안 왁자지껄하다가 한 방향으로 의견이 모이면 두 말 없이 그것에 따른다.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공동놀이에서 탈퇴하는 아이를 나는 보지 못했다.

 

회의를 하다가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흔히 퇴장하는 것을 남자의 긍지로 여기고 있는 한국 사람들의 그러한 태도와는 아주 달랐다. 지난 십오 년 동안 해외에서 교포들을 위하고 또 교회를 세우면 일하면서 가장 슬프고 어려웠던 일들 중의 하나가 바로 회의 도중 남의 의견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그러한 태도였다. “신부님, 이번 회의에 내 제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난 퇴장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사표를 써 들고 오는 간부를 달래 가며 일해 나가야 할 내 마음은 고통스럽고 슬프기도 했다.

<프랑스 인구는 4천6백만이 아니고 4천6백만의 개인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개인주의가 발달한 나라가 프랑스다. 이들은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지, 너가 아니다>라는 철저한 개성을 갖고 살고 있다. 이러한 유별난 프랑스 사람들의 아이들까지도 남의 의견을 존중해 줄줄 알았다. 그들은 또한 남의 인격을 침해하지도 않으며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었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그만큼 프랑스 사람들은 자유를 좋아한다. 자유를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들을 풍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소련에서는 법으로 허가된 것까지도 금지되어 있으나, 프랑스에는 법으로 금지된 것마저도 허용되어 있다.>  이만큼 프랑스인은 자유를 좋아하며 제멋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자유가 남의 일을 절대로 해치지 않고 방해하지도 않은 점에 그들다운 자유의 멋이 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며 자기 존중에서 오는 긍지인 동시에 차원 높은 교양이었다.

대화나 토론이나 생활을 통해 본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은 얼핏 보기에는 무정부적인 개인주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너와 나라는 사회성에서 오는 의무에 대한 존엄심과 질서가 있었고 또 분별이라는 상식과 혼란을 피하는 합리주의적인 높은 인격적 교양이 있었다.

 

아이들 중에 죤비에브 라는 열두 살 난 소녀가 있었다. 사람들은 죤비에브 를 그저 비에브 라고 만 불렀다. 길게 자란 금발 머리에 파아란 눈빛과 곧게 뻗은 긴 다리를 가지고 있는 비에브는 인형처럼 깜찍하고 귀여웠다. 어린애답지 않게 머리 손질과 옷차림에 유달리 신경을 쓰며 몸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애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고 햇빛에 살이 타는 것을 아주 겁냈다. 주로 어른들 곁에서 강아지와 함께 놀지 않으면 해수욕장 비치 파라솔 아래서 책을 읽었다. 다른 아이들은 검둥이처럼 온 몸이 햇빛에 그을려 있었으나 비에브만은 병원에서 막 퇴원한 아이처럼 유달리 살결이 희게 보였다.

 

내가 닥터 쿠에상 댁에 도착한 날부터 비에브는 나를 잘 따랐다. 처음 며칠 동안은 큰 애들이 나에게 자주 놀러 왔으나 그렇게 썩 말이 잘 통하지 않자 그들은 나를 멀리하는 것 같았다. 비에브는 외따로 떨어져 있기만 하는 나를 발견하자 반가운 모양이었다. 어쩌면 서로 동지 의식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비에브와 나는 곧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나대로 어른들의 그칠 줄 모르는 대화와 토론에 지쳐 있었고 애들은 또 나를 상대해 주지 않던 참이라 비에브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애들이 해수욕하며 놀고 있는 오후에 우리 둘은 우산 밑에서 책을 읽든지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에브는 참을성 있게 서투른 내 불어를 들어주었다. 그 무렵 나는 비에브를 <귀여운 불어 선생님> 혹은 <아름다운 꼬마 공주님> 하고 불렀다. 그녀는 나의 이러한 표현을 아주 좋아했다. 비에브는 내 곁을 항상 떠나지 않았고 늘 무엇인가 나에게 가르쳐 주려고 선생답게 처신했다. 어느 날 비에브는 나에게 이런 말을 들려 주었다.

“태오, 애들이 요즘 나를 놀려대기 시작했어. 그 애들이 뭐라고 나를 놀리는지 넌 알 수 있니?”

그녀는 부모 형제 또는 친한 사이에서 쓰는 낮춤말로 나에게 질문했다.

“몰라, 그런데 왜 그 애들이 내 귀여운 공주님을 놀려주지…”

나는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태오 그건 너 때문이야!”

“그것이 왜 나 때문이지?”

나는 웃으며 여전히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태오, 나 좀 봐!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도 무신경이야! 넌 참으로 답답하다. 아무리 신부가 될 사람이지만 이렇게 관심이 없고 느낌이 더디니…”

“글쎄 난 모르겠는 걸. 그 애들이 왜 너를 놀리고 있을까?”

“태오, 넌 어떤 때는 나에게 아주 잘해 주지만 어떤 대는 머리가 통 돌지 않는 목석 같아. 글쎄 우리 둘이 이렇게 친하고 다정하니까 그 애들이 샘이 나나 봐.어제 저녁 때 삐에르, 루이, 밋셀, 키뚜, 안느, 글로딩 이 나보고 내가 네 애인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둘 이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놀리지 않겠니…..”

비에브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놀랐다. 열두 살 짜리 철 없는 소녀가 벌써 사랑이 어떻고 하는 말을 하다니.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그건 장난하는 말이겠지…”

“아냐, 그것이 농담이라면 나를 모욕하는 행위야! 나는 그 애들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싫어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나는 너를 좋아하고 사실상 우리 둘은 친하니까 말야. 그래서 우리 둘 이는 아주 아주 사랑하고 있다고 자랑했지. 그런데 넌 정말 나를 사랑하니?”

“내가 너를 사랑하냐고?”

나는 웃으며 비에브에게 반문했다.

“나는 정말로 너를 좋아하고 사랑해. 그런데 너는?”

비에브의 말이 깜찍하게 귀엽기도 했고 한편 우습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애의 심각한 표정 때문에 웃을 수가 없었다. 어리고 순진한 비에브의 진실한 표정이 그의 꾸밈 없는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고 나는 그러한 그 애의 마음을 상하게 해 줄 수 없었다. 한국 아이들한테서는 들어 볼 수도 없는 말을 비에브는 거침 없이 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어에는 사랑한다는 말고 좋아한다는 말이 따로 없다. 에메(Aimer)라는 동사로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다만 대상과 환경에 따라 구별될 뿐이다.

“비에브, 나도 널 아주 좋아해. 너는 아름답고 멋있는 애야. 그래서 나는 너를 내 아름다운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않니?”

이렇게 말하며 나는 비에브의 뺨에 키스를 했다. 비에브는 내 목에 매달려 내 뺨에 자기도 키스하며 말을 이었다.

“태오, 네가 이렇게 말하며 엉부라쓰를 해줄 때 난 참 행복해! 너 나를 정말로 사랑하지?”

비에브는 그 사랑을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다그치듯이 물었다.

“비에브, 우리 한국에서는 말야, 사랑이라는 말을 잘 안 써. 그 말은 특수한 남녀 사이에서만 사용하는 말이야.”

“그런 특수한 남녀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응, 그 사람들은 말이야, 말하자면 결혼을 약속한 애인들이나 또는 부부가 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거지.”

“그럼 너희 나라에서는 부모에게도 사랑이라는 말을 안 쓰나”

비에브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 거리며 물었다.

“부모들에게는 흔히 공경이라는 말과 존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나는 그런 말을 제일 싫어해. 왜냐하면 그런 말들은 너무 차게 느껴져. 그리고 거기에는 따스한 정이 없고 간격이 느껴져, 서로 좋아하면 아무 하고도 사랑이라는 말을 쓸 수 있지 않겠어?”

“그것은 프랑스 사람들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 풍습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데서 생기는 감정의 차이일 뿐이야. 우리는 그 말을 사용하면서도 너희들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도 우리 부모님을 사랑하고 있어.”

“그럼 너희 나라 생활 감정으로 나를 대한다면 너는 나에게도 사랑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니?”

“물론 할 수 있고 말고!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듯 말야.”

“그러나 넌 내 부모가 아냐. 우리는 친구야. 친구라는 입장에서 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니?”

비에브의 집념은 강했다. 이 순진한 소녀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비에브, 너는 어떤 뜻에서는 내 친구지만 우리나라 풍습대로 말하면 넌 내 친구가 아냐. 다만 내 귀여운 공주님이지.”

“섭섭한데, 할 수 없지. 너희 나라 풍습이 그렇다니… 그럼 너희 나라 풍습대로 한다면 넌 나를 어떤 표현으로 부를 수 있니? 예를 들면 나에게 편지할 때 뭐라고 부르겠어?”

“글쎄…. 물론 <사랑하는 내 귀여운 공주님>하고 부르겠지. 왜냐하면 불어로 너한테 편지 할 테니까.”

“망설이는 네 말과 표정을 보니 너희 나라에서는 다정하게 서로 부르는 말이 별로 없는가 보구나. 하지만 상관없어. 너는 지금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살고 있고, 한국말이 아닌 불어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생활 감정대로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야 돼, 알겠지 태오?”

나는 말끝마다 사랑, 사랑 하는 비에브가 도대체 사랑의 의미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하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비에브, 그런데 너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니?”

“태오, 그건 너무하다. 나를 모욕하는 말이야. 그래, 내가 사랑의 뜻도 모르면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 줄 아니? 태오, 지금 너는 나를 모욕하고 있어.”

비에브는 정말 화난 표정을 하며 돌아앉았다. 내가 좀 지나친 말을 했구나 하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내 공주님! 이 미련한 종이 공주님을 무시하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공주님이 갖고 있는 고상한 사랑의 뜻을 알고 싶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공주님의 그 착하고 너그러우신 마음 이 상하신다면은 이 미련한 종을 용서하소서.”

나는 연극 대사를 읊조리듯 배우처럼 허리를 굽혔다. 그랬더니 비에브는 금세 명랑해지고 행복해 하며 내 목에 매달려 뺨에다 키를 했다. 얼른 그 애의 두 눈에 몇 방울의 눈물이 보였다. 진주보다도 더 맑은 비에브의 눈물이었다. 나는 그 눈물을 곱게 닦아 줬다. 비에브는 웃으며 말했다.

“태오, 사랑은 말이야,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뜻은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친절을 베푸는 거야. 그리고 서로 도와주며 서로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는 노력이야. 이런 관심과 친절과 기쁨을 위한 노력 속에 우리 둘처럼 다정하게 지내는 것이 사랑이야. 이젠 알겠니?”

사랑이라는 말과 사랑의 표현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는 프랑스 사람들은 사랑이 곧 생활이며 생활의 곧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생활 환경 속에서 살아온 비에브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을 사랑의 뜻을 아주 훌륭하게 설명했던 것이다. 그는 아마 자기 부모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사랑을 체험하고 제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에브는 말을 계속했다.

“태오, 어제 저녁 네가 클로딩하고 해안가를 산보하는 것을 보고 나는 분해서 막 울었어. 이젠 너도 나를 사랑하니까 나하고만 놀아 주고 산보해양 돼. 약속하지?”

어린 소녀의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질투와 독점욕이 숨어 있었다.

“비에브, 어떻게 너하고만 매일 놀 수 있니? 매일 나하고만 있어도 넌 지루하지 않니?”

“그렇지 않아.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행위라고 내가 말했잖아. 난 너하고 이렇게 있으면 마음이 즐거워. 조금도 지루하지 않아.”

“그럼 너하고만 놀고 산보할게. 그런데 내 이 서투른 불어가 듣기에 짜증스럽지 않니?”

“사실은 말이야, 너의 엉터리 불어를 듣고 있으면 어떤 대는 조금 신경질이 나기도 해. 그러나 너의 불어 공부를 위해 참아 왔어. 그리고 참는 것이 너의 불어 공부를 돕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내 마음은 즐거워져. 정말이지 지금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불어 공부 아니니? 그래서 말야, 어젯밤 어떻게 하면 너의 불어 공부를 도우며 너하고만 있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봤지.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즉 너는 내일부터 매일 나에게 너희 나라 동화 하나씩 들려 줘. 그러면 너는 불어 표현력이 늘 거고 나는 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있을 수 있고… 물론 네가 말하는 불어가 엉터리거나 발음이 나쁘면 내가 그것을 고쳐 줄 수 있을 거야. 한국 동화를 많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면 아무 이야기라도 좋아. 하여튼 너는 매일 45분 씩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 줘야 돼.”

비에브는 정말이지 깜직하고 귀여웠다. 나이는 어리지만 남을 기쁘게 해 주는 거이 무엇이며 참아 준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미 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의 힘을 빌어 실천하려 했다. 나는 그 제안을 쾌히 수락했다. 대부분 내 상상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었지만 그 다음 날부터 나는 동화 한 편씩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비에브는 마치 엄격한 선생처럼 나의 틀린 불어를 정성껏 고쳐 주었다. 사실 그것이 나에게 많은 공부가 되었다.

 

이러는 동안 어느새 8월 한 달이 다 지나갔다. 그 동안 나는 러 아모에서 사실 많은 것을 배웠다. 프랑스인들의 생활감정과 그 환경, 그들의 개인주의, 그러면서도 남을 배척하지 않고 존경해 줄줄 아는 아량, 극단의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나타나는 의무에 대한 종엄심, 식사를 예술이라고 말하는 생활에 대한 그들의 멋, 부부 서로간에 생활화 되어있는 애인다운 애정, 여자들의 개성미와 그녀들의 교양의 멋, 그리고 비에브의 순진한 사랑과 불어 공부 등… 러 아모를 떠나는 것이 진정 섭섭했다. 귀여운 비에브의 두 눈에 서린 눈물이 내 마음을 아프게도 했지만 나는 예정대로 8월 말 러 아모를 떠났다. 그리고 룩셈부르크 공국(공국)의 클레르보에 있는 성 보누아 수도원으로 향해야만 했다.

 

9월 초, 나는 성 보누아 수도원에 도착했다. 학장 신부님이 이곳을 소개해 주셨던 것이다. 방학 중에 여행도 하고 쉬는 것도 좋지만 나의 처지로는 그렇게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적어도 한 달 동안은 다음 학기를 위한 준비를 서두르기로 작정했다. 지도 신부님께서 선정해 주신 영신생활에 관한 책 한 권과 기초 신학, 그리고 성서학 입문, 이렇게 세 권의 책만 손에 들고 수도원을 찾아왔다.

이 클레르보 성 보누아 수도원은 중세기에 이미 세워졌으며 많은 학자 신부를 배출한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수도원이었다. 이 수도원에는 80여 명의 수도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수도원 기숙사에는 나 같은 여러 명의 신학생과 개인 피정을 하로 오신 몇 명의 신부님들, 그리고 10여 명의 평신자 대학생들이 와서 영적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천주교 수도원을 보았다. 물론 한국에서도 몇 군데 들른 적이 있었으나 마치 한국의 절처럼 인적이 드문 관상 수도원을 본 적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성 보누아 수도원은 소나무가 우거진 야산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국의 절을 연상시켜 주었다.

이 수도원으로 온 것은 물론 공부가 주 목적이긴 했지만 나는 수도원에서의 생활을 알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수도원 규칙이 허가하는 범위 내에서 수도자들과 함께 살고 싶었다. 나는 원장 신부님의 특별한 호의로 내 방도 기숙사에서 수사님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수사님들과 같이 기구생활과 노동도 함께 했다. 나는 목장을 담당하고 계시던 앙드레 수사 신부님과 두 명의 수사님을 도와 목장에서 풀도 베고 외양간 청소도 하고 돼지 먹이도 날랐다. 그리고 젖소들을 모아 자동화되어 있는 기계로 젖을 짜기도 했고 짜낸 우유를 운반하기도 했다. 오후에는 내 방에서 혼자 공부를 계속했다.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만은 일반 수사님들과 함께 하는 것을 나에게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를 나는 이내 알아내었다. 우리 손님들과 수도자들이 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했으나 수도자들의 식사는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반면에 우리들의 식사는 그야말로 일품요리였다. 그분들 앞에서 먹기가 죄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수도원의 관습이니 순종하기로 했다. 어느 수도원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이 성 보누아 수도원은 보누아 성인의 말씀을 좇아 여기에 찾아온 손님을 방문 호신 예수님처럼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식사 전에는 원장 신부님이 손수 물병을 들고 손님의 손을 씻겨 주는 관례도 있었다. 대부분의 수도자들의 몸이 대체로 마른 편이지만 아주 건강해 보였고 명랑했다. 그들의 기도 드리는 모습에서 풍기는 신비로움과 엄격함에 비해 말과 행동은 그지없이 순진했다.

 

이 성 보누아 수도원에서는 미사와 기도를 불문하고 일체를 노래로 하는 것이 특색이었다. 남자들의 노래 소리가 어쩜 그렇게도 고울 줄이야! 기도 중에 그분들의 노래 소리에 반해 정신을 잃고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이 지상을 초월해 있는 초자연의 신비를 속삭여 주듯 감각을 초월한 주님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려는 듯, 하느님 앞에서 바치는 천사들의 찬미가를 연상시켜 주듯 잔잔하고 조용하며 그러나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악한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나는 문득 우리 천주교회를 생각했다. 우리 천주교회가 주님의 은혜 안에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번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도자들의 순결과, 숨은 기도와, 정결한 희생의 대가라고 나는 확신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이상이나 드리는 공동 기구, 이 기구를 통해 주님께 바쳐지는 주님에 대한 찬미, 이 찬미 속에 깃들어 있는 순결과 희생, 이러한 수도자들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표양대로 은밀한 곳에서 주님께 기도 드리며 인류 구원을 위해 문자 그대로 이 한 몸을 바치는 제물들이었다. 인류의 속죄를 대신한 이 제물의 향기, 그것은 바로 이분들의 순결이요, 성덕(聖德)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수도자들을 향해 오직 자기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 수도원에 들어간다고들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무지하고 주님을 모독하는 언사랴!

 

교회는 20대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소화 데레사를 전교 신부의 주보 성인으로 모시게 하지 않았는가! 소화 데레사 성녀는 그 짧은 수도생활 중에 어느 전교 신부 못지않게 전교의 공이 컸었다고 교회는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데레사 성녀의 전교의 공, 그것은 다름 아닌 그분의 순결과 그분께서 숨어서 바친 희생과 기구의 결과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런 수도자들의 순결과 청빈과 노동과 기구 생활이야말로 이 세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부들에게 부이지 않는 신심적(信心的) 힘이 되고 있으며, 또한 이 세상의 죄를 속죄하는 제물 그 자체라고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주님의 복음 사업을 위해서는 말만의 전교보다도 행동상의 증인이 되어야 하며, 이 증인은 바로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순명과 순결과 겸손과 청빈의 덕을 실천하고 있는 이 수도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자정기도인 ‘레마딘’ 에 참례하고 나서 그 복받치는 감동을 나는 즉흥적으로 읊어 보았다.

 

 

한밤 중에

 

한밤 중에

주변은 정물(靜物)처럼 고요한데

다만

달빛만이 창가에 내려 앉아

소리 없이 비추고 있다.

 

한 쌍의 롯씨뇰(Rossignols)이

이 적막의 자연을 잠 재우듯

은은하게

하아프의 낮은 줄을

퉁기며 조용히 노래한다.

 

달빛에 곱게 비친 구름은

저 산마루 푸른 하늘에

홀로

싸늘하게 타오르다

소리 없이 꺼져가고 있다.

 

인류의 조인인 양

검은 수의(囚衣)를 입은 수사(修士)들이

한밤 중에

십자가의 주님 찾아

줄지어 성당으로 가고 있다.

 

할렐루야, 찬미 받으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내 탓이요!

죄 없이 죽어 가신 당신처럼

구원의 십자가를 따르게 하소서.

 

주님, 나로 하여금

제대 위에 노오랗게 타오르는

저 촛불처럼

찬미와 희생으로 이 한 몸 바쳐

영원의 길잡이가 되게 하소서.

 

한밤 중에

세상의 죄악을 대속(代贖)하는

이 진실

신앙의 러비브러(Revivre)의 기쁨 안고

아베 마리아 찬송한다.

 

* 롯씨뇰(Rossignols): 밤에만 우는 이곳의 새 이름

 

 

앙드레 수사 신부님은 동심(동심)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50세 전후의 연세였으며 근엄하고 고독한 표정이 엿보이기도 했지만 항상 평화롭고 인자한 그분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 내 마음도 평화로워짐을 느꼈다. 그분은 평범한 농부처럼 순진하고 소박했다. 나는 그분을 그저 수수한 수사 신부로만 알고 있었다.

 

어느 주일 날 앙드레 신부님이 강론을 하셨다. 그날 나는 그 신부님을 다시 한 번 쳐다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날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11시 미사에 어디서 왔는지 모를 많은 일반 신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분의 열띤 강론 내용을 당시의 내 불어 실력으로는 다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청중들의 진지한 태도를 통해서 나는 그분이 보통 설교자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알고 보니 그분은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며 한 때 루뱅대학교에서 젊은 철학 교수로 이름 있던 분이기도 했다. 그러한 분이 나와 같은 풋나기 신학생과 즐겁게 농담도 하고 목장에서 풀도 깎고 외양간을 청소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거의 믿을 수 없었다. 늘 겸손한 그분의 말과 행동, 나는 그분의 이러한 겸손의 덕을 부러워했다.

 

어느 날 점심 식사 후 앙드레 신부님은 나와 함께 산보를 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태오 신학생, 천주님의 뜻을 나로 하여금 겸손되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구해 주세요. 어쩌면 나는 9월 말경에 로마로 가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대학 교수로 발령받을 것만 같군요. 그러나 다소 내 마음은 섭섭해요. 7년 간 정들은 이 목장과 이 젖소들과 돼지들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런 기분이 드는군요. 하여튼 사람은 무엇에든지 정이 들면 헤어지는 게 슬픈 모양이에요. 그런데 천주님은 우리가 사물이나 사람에 너무 애착하면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으시거든요. 물론 우리의 영적 선과 유익을 위해서지요. 나는 대학교 강단보다는 이 목장이 더 좋아요. 대학교 교단에서 교만해지기보다는 이 목장에서 평범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 노동하고 기구하며 이 몸을 희생하고 싶어요. 하지만 우리는 순명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순명은 우리 수도생활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사실 우리에게 이 순명의 덕이 없다면 애덕(愛德)도, 겸손의 덕도 그리고 그 어떠한 것도 실천할 수 없겠지요. 이 다음 태오 형제도 신부가 되시면 순명이 요구하는 십자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만, 하지만 순명 하세요. 이 순명의 덕만이 당신을 올바른 사제의 길로 이끌어 주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끝까지 순명 하셨으니까요.”

 

9월도 다 지나가던 어느 날, 나는 낭씨 신학대학으로 되돌아 왔고, 같은 날 앙드레 신부님은 순명을 위해 7년 간 몸 바쳐온 정든 목장과 젖소들을 두고 로마로 떠나셨다. <태오 형제, 우리는 이 순명의 길을 통해서 이 다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주님 곁에서 다시 만납시다.> 하신 앙드레 신부님의 말씀이 기차의 요란스러운 기적소리 속에서 더욱 맑고 또렷하게 울려 오는 것 같았다.

 

 

 

 

 

제5장

프랑스에서의 첫 학기

 

수업이 시작되었다. 첫 강의 시간에 교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무려 20권이나 되는 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교수 신부님의 강의는 책 소개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시된 책들은 자기 강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다음 그분은 책을 한 권 한 권 들어 보이며 그 책의 성격과 내용을 일일이 설명해 주셨다. 그분의 독서의 범위와 해박한 지식에 나는 놀라기도 했었지만 한 편으로는 어떻게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큰 문제 거리였다. 학생들은 책 소개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흥미로운 책과 저자의 이름들을 적고 있었지만 나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교수 신부님이 열심히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고 학생들은 열심히 노트하고 있었다. 내 딴에는 그래도 얼마쯤은 강의를 알아 들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지나친 망상이었음을 나는 이내 알아차렸다. 나는 노트에 글 한 줄 기록하지 못했다. 다만 몇 마디 아는 단어만 내 머리 속에서 허무하게 오락가락하고 있었을 뿐 도대체 교수님이 무엇에 대해 저렇게 열띠게 강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노트를 덮고 턱을 고이고 앉아서 그저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동료 학생들이 강의 내용을 이해했느냐고 질문했을 때 나는 그저 얼굴만 붉혔을 뿐이다.

 

다음 강의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교수 신부님들은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수십 권의 책을 진열해 놓고 그것을 설명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 강의 시간에도, 또 그 다음 강의 시간에도 그것은 역시 되풀이 되었다. 나는 전신의 힘이 솔도 없이 빠져 나가고 있음을 확실히 느꼈다. 앞날에 대한 걱정과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나는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

 

강의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단편적으로 이해되는 것도 이제는 한두 가지 있었다. 그러나 애써 그것을 몇 줄 적고 나면 교수는 벌써 딴 곳에 가 있었다. 나를 동정하는 동료 신학생 몇몇이 자기들의 노트를 나에게 빌려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갈려 쓴 글씨를 읽어내는 일은 교수의 강의를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힘들었다.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더 큰 실망만 안겨 주었다. 즐거웠던 방학의 추억도 이제는 남의 이야기처럼 실감 없게 느껴졌다. 나는 또 다시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한국 신학교에서는 교과서 중심의 강의였다. 교수의 강의가 없어도 우리는 교과서만으로도 능히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 대학에서는 교과서라는 것이 일체 없었다. 학생들의 중요한 공부 재료는 교수의 강의와 그분들이 소개한 그 방대한 양의 책들이었다. 물론 학생들이 이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과목별로 적어도 다섯 권은 읽어야 된다고 했다. 말하자면 교수들은 마치 지도 위의 일정한 목적지에 점을 찍어 놓은 다음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만을 제시할 뿐이었다. 학생들은 그 목적지를 향해 제 나름대로 걸어가며 주변을 탐색하기도 하고, 또 거기서 얻은 것을 스스로 정리해야만 했다. 스스로 쥐어짜는 노력 없이는, 그리고 홀로 사색하며 길을 모색해내지 못한다면 낙오는 불을 보듯 빤한 노릇이었다. 그것은 사실 고독한 투쟁 같은 것이었다.

 

 

한 달이 지났다. 혁대 고리의 마지막 구멍조차 헐거울 정도로, 방학 동안 불었던 몸도 빠져 나갔다. 하루 평균 여섯 시간 이상을 자 본 일이 없었다. 내 귀여운 공주님, 비에브의 정성 어린 격려 편지도 여러 번 왔으나 나의 공부는 여전히 발전이 없었다. 월말시험을 치렀다. 겨우 십여 줄의 문장을 답안지에 쓰긴 했으나 그것이 결코 시험 답안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예상한 대로 며칠 후 점수도 없는 내 답안지가 되돌아 왔다.

 

그날 밤 나는 주님을 찾았다.

“주님, 어떡하죠? 점수도 없는 이 시험 답안지를 좀 보세요. 창피해서 얼굴도 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그리고 무엇이 창피하다는 거냐?”

주님의 쌀쌀하고 엄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주님, 오늘따라 왜 그렇게 쌀쌀하십니까? 점수도 없는 이 시험 답안을 받아 든 이 불쌍한 나를 주님은 이해도 못하십니까?”

“태오야, 네 나이가 이제 몇 살이냐?”

“왜 갑자기 주님께서는 나이 타령까지 하십니까?”

“나이 서른이 다 된 녀석이 그까짓 일에 실망하고 때 아닌 위로를 구하고 있어?”

“주님, 나는 정말이지 당신의 정겨운 위로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코피를 벌써 몇 번이나 쏟으며 열심히 공부했어도 결과는 이 정도이니 슬퍼지기만 합니다. 좀 도와 주십시오….”

“못난 녀석 같으니…. 너는 그 많은 고생과 전투도 헛된 놈이다. 조금 어려운 일만 생겨도 ‘주님 어떻게 하면 좋죠?’ 하고 엄살만 부리고, 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주님, 주님’ 하며 응석만 부리려 하고…”

“아, 주님 당신은 정말이지 무정하고 잔인하신 분이십니다. 차라리 죽으라고 말씀하시는 게 더 났겠습니다.”

“그래도 너만큼은 무정하고 잔인하지는 않다.”

“내가 언제 무정하고 잔인했었단 말입니까? 주님.”

“언젠가 전쟁 중에 너는 한 대원을 살리기 위하여 오히려 그의 목에 날이 시퍼런 대검을 갖다 대고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한 일이 있지 않느냐? 그래도 나는 네 목에 아직 칼을 대지는 않았다.”

“언제 내가 그런 잔인한 일을 했단 말입니까?”

“벌써 잊었느냐? 정확하게 말하면 너희 해병대가 월산령 고지에 있을 때였다. 아마 1952년 1월 경이었을 게다. 인민군 전초 진지를 야간 기습하러 갈 때의 일이다. 그때 대원 중의 한 명이 눈 얼음으로 동그랗게 얼어 붙은  외나무다리를 조심스럽게 가랭이를 타고 건너다가 물에 빠진 일이 있지 않았느냐? 그러자 너는 그 대원에게 달려가 그의 목에 칼을 갖다 대고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지 않았느냐? 사실은 그 대원을 죽일 의사가 전혀 없었으면서도 몸이 무섭게 얼어 들어오는 그 대원의 약해지는 정신을 긴장시켜 주기 위해서 아마 너는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너의 그 지혜로운 행동을 정말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만약 네가 그 대원을 죽이겠노라고 협박하지 않았다면 그날 밤 그는 아마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퍼런 너의 칼날 아패 그는 순간적으로 추위를 잊었을 거고, 오직 살아야겠다는 단 한 가지 마음으로 얼어오는 몸에 정신적인 온기를 불어넣을 수가 있었을 게다. 그날 밤 네가 그 대원을 조금이라도 동정했었다면 그 대원은 마음이 약해져 그 자리에서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동정은 때에 따라서는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며 반대로 냉정한 태도는 오히려 남을 살려 내는 지혜로운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그래서 어쨌단 말씀입니까? 주님.”

“그래서 너를 기특히 여기고 나도 너를 한 번 본받아 조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날 밤 너의 차가운 모습과 너의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대검을 뽑아 들어 멱살을 틀어 잡은 그의 목에다 갖다 대고 ‘이 자식 잔말 말고 우리를 따라왓! 아니면 이 현장에서 죽여 버리겠다. 알겠나?’ 하며 호통치던 너를 지금도 나는 자랑스럽게 여기며 또한 그 지혜를 기특히 생각한다. 이렇게 모든 일은 정신력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한다마는 나는 아직도 네 목에 칼을 갖다 대지는 않았다. 알겠나, 태오야?”

“주님은 별난 것도 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그 사건과 지금 주님의 심정과는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때 아닌 전쟁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시고…”

“말하자면 너를 위해, 차마 너처럼 그런 잔인한 방법을 쓸 수는 없으나, 냉정하지만 지혜로운 방법을 한 번 써보겠다는 것이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 그건 억지의 말씀입니다.”

“아니다. 너에게는 훌륭한 약이 될 수 있어.”

“그럼 차라리 오늘 밤 주님께서 칼로 내 목을 쳐 죽여 버리세요. 그게 이 고생과 이 창피보다 훨씬 달가울 것입니다.”

“태오야, 너 누구 앞에서 그런 상식에 벗어난 신학생답지 않은 말을 함부로 하느냐!”

“주님 앞이니까 함부로 말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믿은 내 솔직한 고백입니다. 유학 왔다는 놈이 시험 답안에 점수가 없다니 창피해 죽을 지경입니다.”

“태오야, 내 말을 잘 듣거라. 네가 그 점수 없는 시험 답안을 받고 창피스럽게 여기는 것은 네가 아직도 교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너의 교만을 단죄하지는 않겠다. 사실이지 그러한 교만이 너에게 없다면 너는 이 세상 살 맛을 잊을 녀석이니까… 태오야, 네가 부끄럽게 여기는 그 시험 답안은 내가 보기엔 당연한 결과였다. 너로서는 아주 잘 치른 시험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너의 현 저지에서 최선을 다한 훌륭한 시험 답안이었다. 나는 너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원죄가 인간 사회에 점수라는 까다로운 숫자와 등급을 가져왔지만 나는 그 점수에 나타난 숫자를 보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태오야, 걱정 말아라. 그리고 창피하게 여길 것이 하나도 없다. 시험 점수의 좋고 나쁨에 나의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가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였느냐에 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오늘은 더 이상 너에게 말하지 않겠다. 내 말을 잘 명심하거라, 태오야.”

“주님, 한 말씀만 더해 주세요. 제발 내 말 한 마디만 더 들어 주세요, 주님!”

“……………………..”

주님은 침묵을 지키셨다.

 

 

어느 날 학장 신부님이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금년도 학기는 강의를 연습하는 정도로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말하자면 금년 1년을 청강생 자격으로 지내고 내년에 신학교 1학년을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그래서 학년 말 시험에 낙제하는 일이 있더라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학장 신부님은 건강에 유의하라는 충고와 함께 그것을 허락해 주셨다.

 

이윽고 동료 학생 중에서 수재급으로 꼽히는 몇몇 학생이 내 공부를 도우러 나섰다. 그들은 고맙게도 자기들의 노트한 강의 내용을 타자로 찍어서 나에게 주었다. 중요한 대목에는 빨간 줄로 표시까지 곁들이며, 자기들이 혼자 독서한 내용까지 타자로 정리해 줬다. 말하자면 일종의 가정교사 역할을 그들은 담당했던 것이다. 그들의 그 고마운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월말 시험을 또 치렀다. 물론 교수 신부님들의 동정과 격려도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나는 낙제를 면할 수 있었다. 월말 시험이 거듭되면서 내 성적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낮 강의 시간에 나는 주로 졸았다. 나는 항상 잠이 부족했다. 그 타자로 찍은 노트를 다 공부해 내자면 새벽 두세 시까지 해도 부족했던 것이다. 교수 신부님들도 졸고 있는 나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마냥 졸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옆에 앉은 학생에게 만약 내가 졸면 꼬집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어느 날 오후 첫 강의 시간이었다. 초겨울의 따스한 햇살과 점심 후 휴식 시간의 운동으로 피곤해진 학생들은 하나 둘 씩 졸기 시작했다. 나는 졸고 앉은 것이 아니라 아예 꿈까지 꾸며 자고 있었다. 나는 꿈 속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고, 인민군 항공 부대가 우리 해병대를 공습하고 있었다. 급습을 받은 우리는 당황하며 적과 대전하고 있었다. 갑자기 적기 한 대가 우리 폭탄에 맞아 불을 뿜으며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누가 나를 힘껏 꼬집었고 그 순간에 그 적기는 내 머리 위에서 폭파했다. 나는 “앗!” 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다행히 그것은 꿈이었지만, 교수 신부님과 학생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고, 졸던 학생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났다.

 

 

그 동안 세상은 많이 변하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도 비오 12세 께서 서거하셨고 <봉 빠쁘> (마음 착하신 교황님)라고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요한 23세 께서 등극 하신지도 1년 반이나 되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 공고와 함께 천주교회는 물론 전세계 그리스도 교회는 희망과 기쁨과 두려움과 회의와 무관심이 엇갈린 심정으로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들의 독신 제도에 대한 찬-반 양론이 신문지상에 심심찮게 나돌고 있었다. 또한 공의회가 취급할 의제에 대한 의견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교회 뿐만 아니라 프랑스 안에서도 많은 것이 변해 가고 있었다. 1954년 인도지나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패망한 프랑스는 또 다시 알제리아 전쟁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프랑스는 이름만의 대국이요, 문화 면을 제외한 정치, 군사, 경제 모든 면에서 빈약한 나라로 전락하고 있었다. 1년에도 내각이 몇 번이나 자리바꿈을 하였고,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혼란 속에 프랑스는 안정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국민들의 부름을 받고, 자신을 제2의 쟌다크 라고 부르는 콧대 높은 드골 장군이 엘리제궁의 주인으로 들어선지도 벌써 2년이나 되었다. 드골 장군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이윽고 제5공화국을 선포했다. 드골 장군은 <알제리아는 알제리아 사람에게>라는 식민지 해방 정책을 취했다. 이것은 급기야는 쌀랑 장군에 의한 알제리아에서의 반란을 야기 시켰고 프랑스는 순식간에 혁명 전야처럼 어수선해졌다.

 

어느 날 학교에서는 모든 강의를 일체 중단하고 교수와 학생 전원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았다. 미셀 더부레 수상이 무엇인가 비장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쌀랑 장군의 휘하에 있는 그 무서운 외인부대가 나폴레옹 황제의 고향인 코르시카섬을 이미 점령했고 곧 이어 낙하산 부대를 이끌고 파리로 공격해 온다는 것이었다. 드골 장군의 제5공화국도 그 몰락이 눈 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친애하는 파리의 숙녀 신사 여러분,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우리의 자랑스런 형제, 외인부대를 환영합시다. 그들은 결코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조국을 영화롭게 한 가장 용감한 시민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들입니다. 친애하는 파리 시민 여러분! 여러분의 술 창고에 보관 된 가장 귀중한 술을 들고 그들을 환영합시다. 고기를 굽고 샴페인을 터뜨리며 우리의 형제를 충심으로 환영합시다. 우리는 한 사람 빠짐 없이 거리에 나와 하늘에서 내려오는 우리의 자랑스럽고 용감한 형제, 외인부대를 포옹하며 조국에 바친 그들이 공로를 치하합시다. 친애하는 파리의 숙녀 신사 여러분! 우리는 진정 춤추며 외인부대를 환영하고 후손들에게 우리의 지혜로운 용기를 물려 줍시다.>

더부레 수상의 이러한 용감하고 애국적인 연설에 쌀랑 장군의 반란도 싱겁게 끝났다. 그리고 1백 년의 찬란한 역사를 갖고 무수한 일화를 남기 채 드골 장군의 명령 하나로 외인부대도 해산되고 말았다.

 

내 조국 한국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부정선거에 잇따른 학생들의 봉기, 이기붕씨 일가의 참혹한 자살, 프랑스 신문에도 며칠 동안 계속 일면 톱기사로 보도되던 4.19 학생혁명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경무대를 나서는 이대통령의 처량한 모습과 그 늙은 독재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시민들의 아량, 이곳 신문을 통해 본 조국의 소식과 모습이었다. 좋은 소식보다는 언짢은 소문만 전해주던 이곳 프랑스 신문들도 4.19 혁명을 통하여 한국 학생들의 용감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의 장래에 대한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평론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 크나큰 위안을 주기도 했다.

<조국의 돌>을 바라보며 나는 십자성호를 긋고 멀리서 조국을 위해 그저 기도 드릴 뿐이었다.

 

 

조국과 교회와 프랑스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지만 나는 오로지 공부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신부가 되는 길만이 나로서 조국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교수 신부님들의 폭 넓은 이해와 동료 신학생들의 우정 어린 협조 아래 내 공부도 많은 진전을 보게 되었다.

고달픈 나날이었으나 세월은 흘러 어느덧 학년 말 시험이 다가왔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시험 답안지에 열심히 쏟아 놓았다. 일주일 간 계속된 시험에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시험이 끝난 금요일 저녁 시간에는 수저를 들기 힘이 들 정도였다. 입맛도 없었다. 입안이 깔깔해 딱딱한 고깃덩어리와 감자 쪽도 넘길 수 없었다.

 

몸이 피곤할 때 나는 한국 음식 생각이 난다. 평소에 나는 프랑스 음식을 좋아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난 그날 저녁 왜 그렇게도 한국 음식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따끈한 된장찌개 백반에 한 잔의 소주, 혹은 시원한 냉면과 김치와 생선찌개 백반, 나는 군침을 삼켰다. 역시 나는 한국 사람인 것이다. 내 노란 피부생기 변치 않는 이상 내 부모님이 물려주신 된장과 김치에 대한 내 향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객지에서 외롭거나 몸이 불편할 때 고향 생각이 나듯, 몸이 피곤할 때 한국 음식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무슨 신앙처럼 나를 집착하게 했다.

그날 밤 몸은 극도로 피곤했으나 왜 그런지 마음이 허전해지며 외롭고 쓸쓸한 기분 속에 잠을 이루기가 힘이 들었다.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이 피곤한 몸으로 어머니에게 매달려 응석을 한바탕 부리고도 싶었다. 그리고 한 여인의 사랑에 충만한 위안의 한 마디 말조차 그리워졌다.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메신 예수님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더 처량하게 보였고, 저 꼴이 내가 신부로서 져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며 무언가 두려운 기분이 들어 이불로 얼굴을 나도 모르게 가리고 있었다.

 

 

시험기 끝난 주(週)의 주일 아침이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평일보다 30분 늦게 일어났다. 왜냐하면 아침 미사가 없고 주일 미사를 오전 11시에 지내기 때문이다. 아침 기상 벨이 울리자 무슨 소동이 일어났는지 학생들이 왁자지껄하며 야단들이었다. 학교 규칙상 저녁 만과기도 시간부터 아침 식사 후까지는 <대 침묵 시간>이었으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말을 해서도 안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직은 대 침묵 시간인데도 학생들이 게시판 앞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시험 결과가 발표되어 있었다. 개개인의 성적표는 아니었으나 과목별로 필기시험에 합격한 사람과 불합격한 사람이 구분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 만족한 점수를 받은 학생은 구두시험을 면제받게 하는 학교 관례가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우등생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내 이름도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틀림 없는 내 이름이 똑똑히 타자로 적혀 있었다.

 

낭씨 신학대학교에는 ‘오바쌍’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은 구두시험을 면제받는 학생들을 들어다가 학교 안 마당에 있는 예수성심상의 연못에 집어 던져 일종의 물세례를 주는 관습이었다. 남들은 구두시험을 보거나 아니면 낙제하여 방학 후에 재시험을 보아야만 하는데 너희들은 편히 지낼 수 있는 대신에 물세례나 받으라는 일종의 장난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저 게시판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몇몇의 학생들에게 들리어서  연못 속에 집어 던져졌다. 나는 온통 물벼락을 맞았다. 그러나 ‘오바쌍’의 풍습을 전해 듣자 나는 오히려 통쾌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윤리신학과 교회법과 교회 역사학과 창세기 구약성경에서 교수 신부님들의 동정으로 좋은 성적을 받았으나 다른 과목에서는 그저 수수한 점수였다. 사실 나도 구두시험을 보아야 할 과목이 몇 과목 있었으나 교수 신부님들의 각별한 호의로 그것을 면제받았던 것이다

 

하여튼 기분은 좋았다. 구두시험을 보게 될 염려도, 도 낙제되어 방학 후 재시험을 보게 될 걱정도 없었다. 남들이 구두시험을 보느라고 고전하고 있는 동안 나는 즐거운 방학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잊지 않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 드렸다. 그날 밤 나는 만과 시간에 주님께 말씀 드렸다.

“주님, 감사합니다.”

“물론 교수 신부들의 동정 점수지만 하여튼 용하다.”

“그저 주님께 고마울 따름입니다.”

“태오야, 네 감정과 기분을 조정하라!”

“무슨 감정과 기분 말입니까? 주님.”

“너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금세 ‘주님, 어떻게 하죠?’ 하며 나에게 성화고, 즐거운 일이 생기면 어린애처럼 헤헤 웃으며 감사니 뭐니 말하며 어리광부리는 그러한 너의 기분과 감정 말이다.”

“주님, 나는 아직도 수련 중에 있는 부족한 한 인간인데, 그러한 감정 표시도 할 수 없단 말입니까?”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경솔을 피하고 교만해질까 조심하라는 뜻이다.”

“주님,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는데…. 때로는 교만도 삶의 멋이 될 수도 있고 또 사람들은 제 잘난 멋에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사람에게는 경우에 따라 방금 네가 말한 <교만성>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 그러나 너는 이 <인간적 교만성>을 초월해야만 되는 수도자임을 명심해라. 그리고 교만은 교만성과 다르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주님! 그러나 주님, 이번 방학도 지난 해처럼 즐겁고 보람되게 지낼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

“태오야, 나 항상 너와 함께 있으리라!”

 

 

 

 

 

제6장

미니 아가씨가 맺어준 인연

 

외롭고 고달픈 유학 시절, 나에게 가장 즐겁고 기다려지는 것은 방학이었다. 그 해 7월 나는 라옹에다쁘 에 살고 있는 무슈 그렁꼴라 가족과 함께 방학을 보내며 여행을 함께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이 가족은 참으로 우연히 알게 된 가족이었다.

지난 부활절 방학 때 파리로 올라가는 기차 안이었다. 당시 프랑스 기차는 곤빠아트멍 이라고 부르는 칸막이 방으로 되어 있었다. 이 곤빠아트멍 은 각각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두 줄의 의자가 있었고, 사람들은 서로 마주 모고 앉았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 신학생들과 신부들은 예외 없이 검은 수단을 입고 다닐 때였다.

부활절을 막 지낸 직후라서 그런지 차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리 저리 찾아 헤매다가 좌석 두 개가 비어 있는 곤빠아트멍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가방을 선반 위에 얹어 놓고 자리에 앉았다. 주변 승객을 훑어 보니 남자는 나 하나 뿐이고 모두30대에서 50줄을 바라보는 부인들 뿐이었다. 기차가 막 떠나려는 순간에 스무 살 가량의 한 여학생이 뛰어 들어와 바로 내 앞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자기 뒤를 따라와 자리가 없어 통로에 서 있는 한 청년을 바라보며 웃음으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이 여학생이 내 앞에 앉자 부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여학생의 치마는 두 뼘을 넘지 못할 정도의 초미니 였었고, 바로 내 무릎 앞에는 그녀의 벌거벗다시피 한 두 무릎이 아무런 부끄럼 없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인 나는 긴 치마 같은 수단을 입고 있는데 여자는 오히려 남자들의 반바지 보다 짧은 치마를 입고 두 다리를 통째로 내놓고 있었으니 아마 좋은 구경거리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나는 내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였다. 사방에 여자들 뿐이었고, 차가 흔들릴 때마다 내 무릎을 스치는 여자의 벌거벗은 두 다리를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눈을 감고 있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날 따라 나는 신문도 책도 들고 있지 않았다. 이리 저리 시선을 굴리다가 어떻게 그 여학생과 눈이 마주치면 나는 얼굴을 붉혔고, 그녀는 열심히 그 짧은 치마를 잡아당겼다. 그럴 때마다 차 속의 부인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내 표정을 살피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있었고 심지어는 성(性)의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이러한 젊은이들은 성의 모랄을 설교하는 신부를 극단으로 기피하고 싫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부들을 만나면 ‘꽉꽉’ 하며 까마귀 우는 소리를 내든지 자기들끼리의 노골적인 키스나 애정 표현으로 신부들을 놀려 대기도 하였다. 그래서 프랑스 사전에는 ‘꾸악케’ 라는 까마귀 우는 소리를 성직자들을 모욕하는 일종의 상말이라고까지 기록하고 있다. 신부들은 까만 옷을 입고 다니고 있으며, 까마귀처럼 성가신 설교로 젊은이들을 간섭하는 것을 풍자한 언어 표현이었다.

 

지난 성탄절 방학, 파리에 살고 있는 에그랑 장군 댁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 도중이었다. 마침 퇴근시간이라 차 안은 만원이었다. 비좁은 차 안, 몸과 몸이 밀착될 정도로 혼잡한 차 속에는 바로 내 얼굴에서 한 뼘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에 애인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은 내 수단을 보자 본격적으로 키스를 시작했다. 물론 프랑스 사람들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키스를 하나, 이 두 젊은이의 키스는 분명 나를 놀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나도 질세라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이 두 애인의 입과 입이 마주 붙어 있는 곳을 향해 내 따뜻한 입김을 후 하고 불어 주었다. 그랬더니 이들은 나를 보고 웃고는 키스를 멈추었다. 나는 차 천장만 바라보며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내 앞에서 허벅다리까지 허옇게 내놓고 천연스럽게 앉아 있는 이 여학생도 나를 당황하게 만들어 자리를 하나 양보 받으려는 심산임에 들림 없었다. 나는 그때 요한 23세의 사과 에피소드를 회상해 내며 이 여학생을 오히려 좀 곯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요한 23세가 아직 롱깔리 추기경으로 파리에서 교황청 대사로 있을 때였다. 어느 외교관 파티에서 롱깔리 추기경 옆자리에는 가슴과 등이 환하게 파진 야회복을 입은 부인이 앉아 있었다 한다. 그때 교황대사는 태연하게 붉은 사과 하나를 집어 그 부인에게 줬다는 일화다. 에피소드는 이렇게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사실은 구약성경의 말처럼, 알몸이 부끄러운 줄 모르던 인류의 첫 여인 하와가 금단의 열매인 사과를 따 먹자 부끄러움을 알고 자기의 발가벗은 몸을 나뭇잎으로 가렸다는 이야기처럼 그 부인도 수치심을 가지라는 뜻이었다. 신학교 주방 수녀님이 꾸려 준 점심 꾸러미에서 붉은 사과를 하나 꺼내 나도 롱깔리 추기경을 본받아 그것을 앞에 앉은 여학생에게 줘 보기로 했다.

“마드모아젤, 이 사과 한 알 드시겠습니까?”

나는 다소 얼굴을 붉히며 그 여학생에게 대담하게 말했다.

“농, 메르씨, 무슈”

그 여학생의 짤막하고 냉정한 거부의 음성이 도리어 나를 당화하게 했다.

나는 엉겁결에 내가 오히려 그 사과를 한 입 깨물었다. 차 안의 부인들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속 웃음을 웃고 있었다. 나는 점점 무안해졌다.

프랑스 사람들은 참으로 별난 사람들이다. 그렇게 말하기를 좋아하면서도 기차 안의 손님들과는 여간 해서 대화하지 않는다. 그 부인들이 자기들끼리 말이라도 하며 떠들어댔다면 내 입장이 덜 난처했을 텐데…. 그들은 오히려 진기한 구경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켜 두고 있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후회할 수는 없었다. 이왕에 이렇게 창피를 당한 바에야 끝까지 가보자는 배짱이 생겼다.

나는 태연스럽게 그 사과를 다 먹고는 그 여학생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마드모아젤, 당신의 다리는 참 아름답습니다. 특히 그 동그란 무릎이 아주 예쁩니다.”

이렇게 말하며 나는 그 여학생의 두 다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의 두 다리는 미끈하게 길고 멋이 있었다. 그때 부인들은 웃음을 참지 못해 기침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담배를 새로 붙이는가 하면 어떤 이는 담배를 비벼 끄기도 했다. 그 여학생은 치마를 당겨 앞을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마드모아젤, 천주님께서 주신 아름다움을 손으로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남이 감상할 때만 그 생명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당신 치마는 고무 치마도 아닌데 자꾸 잡아당기니 찢어지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차라리 긴 치마를 입었으면 잡아당길 필요도 없고 또 손으로 무릎을 가리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요.”

곤빠아트멍 안에는 부인들의 기침소리와 웃음소리로 요란해졌고 그 여학생은 더욱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성직자가, 그것도 동양인이 여자들 틈에 끼어 앉아 이러한 농 아닌 농을 하리라고는 부인들도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또 말을 계속했다.

“마드모아젤, 실례지만 저기 통로에 서 있는 청년과는 동행입니까?”

“네, 파리까지 가는 친구에요.”

“그래요? 그럼 내가 저분에게 30분 간 내 자리를 양보해 드리지요. 두 분이 같이 있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30분 후에 다시 나에게 이 자리를 돌려 주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부 세드 비앙 봉 몽 빼르. 부 세드 부레몽 에빠텅.” (신부님 당신은 정말 친절하시군요. 당신은 정말이지 멋있어요.)

이렇게 말라며 그 여학생은 기쁨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감사를 표했다. 나는 토로로 나왔다. 그리고 그 둘은 손을 마주 잡고 종알종알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통로에서 서서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어떤 부인이 “신부님!” 하고 불렀다. 그는 곤빠아트멍 한 구석에서 나를 줄곧 쳐다보며 무슨 재미있는 구경이나 하듯 눈웃음을 보내고 있던 어느 인상 좋은 부인이었다. 옷차림은 단정했고 40대 후반을 넘어선 부인처럼 보였다.

“마담, 나는 아직 신학생입니다.” 하고 나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상관 없어요. 당신은 지금 수단을 입고 있는 성직자가 아니세요.”

그 부인은 여전히 눈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뭐,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지금 점심 시간인데 레스토랑 와공(식당차)에 가서 저와 함께 식사나 하실 수 있을까요? 당신과 갑자기 이야기하고 싶어졌어요.”

통로에 서 있는 것이 피곤하기도 했고 호기심도 없지 않아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갸르송이 아뻬리티프 두 잔을 가져오자 그 부인은 말을 시작했다.

“내 이름은 그렁꼴라인데 당신은 뭐라고 부르면 되지요?”

“태오 신학생이라고 부르세요. 내 이름이 태오 입니다.”

“태오 신학생님, 내가 초면인 당신을 이 식당 차로 초대한 것이 좀 당돌한 행동이 될지 모르겠으나…. 오늘 나는 내 일생 가장 반가운 말을 당신한테서, 한 성직자의 입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날을 축하하기 위해 축배를 들고 싶어요.”

마담 그렁꼴라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우리는 <아 보트러 썽테>를 교환하며 술잔을 부딪치고 아빼리티프를 한 모금 마셨다.

“태오 신학생은 프랑스에 오신지 오래 됐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내가 좀 경솔하죠?”

“아닙니다, 마담. 2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불어에 서툽니다.”

“아니에요, 그런대로 잘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마담.”

우리는 서로 예의적인 인사말을 나누었다. 아배리티프를 홀짝홀짝 마시던 마담 그렁꼴라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여전히 웃음기 있는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 내가 태오 신학생님께 한 가지 질문해 보고 싶은 것은… 내가 뭐든지 당신에게 질문할 수 있을까요?”

“나는 아직 배움의 길에 있는 신학생의 몸에 불과합니다. 교리상의 문제든가 또는 깊은 신앙상의 질문이라면 나는 좀 자신이 없는데요.”

나는 그 부인이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를 끄집어 낼까 봐 사실은 다소 두려웠다.

“아닙니다. 그러한 신학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어떤 문제에 대한 태오 신학생의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질문하기가 더 어렵군요.”

“내가 느끼는 감정의 문제라면 질문하셔도 좋습니다. 마담께서 설마 나를 골탕먹이지는 않으시겠죠?”

나는 웃으며 농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도대체 이 부인이 무엇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나는 궁금해졌다.

“그럼 용서하세요. 내 질문을 경솔한 것으로 받아들일지 몰라도…. 당신은 여자들을 볼 때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낍니까?”

과연 내가 상상도 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나는 이 부인의 질문을 듣고 속으로 긴장되기 시작했다. 마담 그렁꼴라의 인상은 정숙해 보였고, 약간 은빛이 감도는 머리결과 곱고 선한 눈매가 고상하고 교양 높은 풍미를 엿보이게 했다. 50대를 바라보는 부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숙한 우아함과 세련된 아름다움이 마담 그렁꼴라에게서도 풍기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갖고 있는 것이 프랑스 부인들의 특징이다. 이러한 교양 있는 풍채를 지닌 부인이, 더구나 신학생에게 여자들의 아름다움에 관해 질문 하리라고는 나는 미처 짐작도 하지 못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 부인의 눈이 나를 유혹하는 것만 같아 나는 애써 그 시선을 피하면서 아빼리티프만 마시고 있었다. 내 가 잠자코 있자 마담 그렁꼴라는 좀 무안해 하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내 질문이 좀 당돌한 것이었죠, 태오 신학생님?”

“아닙니다. 내가 미처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질문이라, 대답할 시간적 여유를 갖고 있을 뿐입니다.”

“아까 태오 신학생님께서 앞에 앉아 있던 여학생에게, 아름답고 멋이 있다 라는 말씀을 하시는 걸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고 또 이런 질문도 드렸습니다만 내 질문이 좀 지나쳤다고 생각하시면 대답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현재 신학생이지만 나도 남들과 같은 감정을 갖고 있는 남자인데 아름다운 여자가 어찌 밉게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아름다운 여자는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사람에 따라 미(美)를 보는 관점이 얼마쯤은 다를 수 있겠지만요. 예를 들면 마담 그렁꼴라라는 아름다운 부인이십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 감사합니다. 태오 신학생님, 그러나 그 말씀이 혹시 나를 나무라시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왜 내가 마담을 나무라겠습니까? 이 좋은 술과 음식을 대접해 주는 당신을.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을 어찌 나쁘다고 말하겠습니까?”

나는 웃으며 말했으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를 칭찬해 주어서가 아니라 태오 신학생은 확실히 멋있는 남자이기도 합니다. 신부가 되실 분이시지만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보고 계시는군요.”

“미(美) 자체이신 천주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으며, 또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에게도 내 나름대로의 취미와 개성과 사물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각별히 아름답게 보이고 느껴지는 여자들이 없지 않아 있지요.”

“아까 당신께서 사용하신 ‘벨'(아름답다는 형용사)과 ‘죨리'(이쁘다, 멋지다는 형용사)에 나는 관심을 가졌어요. 물론 당신의 그 말 속에는 너무 노출하고 다니는 요즘의 젊은이들을 좀 나무라는 뜻도 있겠으나…. 그러나 말하는 당신의 표정은 아주 진실해 보여요.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멋있는 태도가 엿보였어요.”

“감사합니다, 마담. 칭찬을 해 주셔서…. 그러 뜻에서 나는 이 술잔을 들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술잔을 맞부딪치고 보르도의 짙고 붉은 포도주를 한 모금씩 마셨다. 그리고 큰 뜻도 없는 화제를 앞에 놓고 심심치 않은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의 일반적인 화법(話法)을 좋아한다. 한국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종교나 정치 이야기 등 심각한 화제를 꺼내기를 좋아한다. 사랑이든가 아름다움이라는 삶의 부드러운 면을 이야기할 때가 거의 없었다. 심각한 문제를 토론하다가 끝내는 서로 피로를 느끼고 기분을 상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히 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과의 대화는 늘 부드러웠고 내 기분과 감정을 즐겁게 해 주는 이야기가 흔히 오갔다. 그때도 나는 달리는 기차 식당에서 마담 그렁꼴라와 평범한 화제를 앞에 두고 시간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마담 그렁꼴라는 쎄르비에뜨(식사할 때 사용하는 수건)로 입을 닦고는 무엇인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평소의 웃는 얼굴로 나에게 또 질문을 던졌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왕에 시작한 우리의 대화니 한 가지마 더 물어 보겠어요. 괜찮으시겠어요?”

“마담은 교양 있고 상식이 있으신 분이니까 나를 애먹이는 질문은 안 하시겠지요? 나는 마담을 신뢰합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경우에 따라서 대답을 피하시고자 하는 연막탄을 쳐놓고 계시는군요. 내 질문에 태오 신학생께서 꼭 대답하실 의무는 없다는 것을 나도 미리 말씀 드립니다. 그런데 당신은 신부가 되실, 현재 신학생의 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볼 때 질투 비슷한 감정은 안 느끼십니까?”

“질투 감정이라고요?”

마담의 이 질문도 내 예상에서 역시 또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나름대로 솔직히 대답하기로 했다.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마담께서 물으신 그 질투의 감정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한 여인을 두 남자가 사랑할 때 느끼는 경쟁의식과 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는 일종의 열등의식과 혹은 자기가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불만의 감정 등이 질투가 아닐까요? 그러한 의미에서 내가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아름답고 멋진 여자를 볼 때마다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즉 소유할 수 없다는 불만에서 일종의 질투를 느꼈습니다마는 이제는 그러한 감정이 없습니다. 소유라는 이 가능성마저 나는 완전히 포기했고, 그것을 또 철저히 단념하는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리고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신 보다 큰 사랑을 위하여 내 <아내>가 될 수 있었던 한 아름다운 여인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질투의 감정을 초월하신 당신은 훌륭한 신부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보면서도 보다 큰 사랑과 사명을 위해 그것을 희생시킬 수 있었던 당신이 존경스럽습니다.”

“마담, 나는 당신의 그러한 찬사를 들을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아직도 사제생활이 어떠한 것인지도 잘 모르는 풋나기 신학생에 불과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충분히 존경 받을 만 합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신부들에게는 사물을 보는 눈과 그것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야 할 당신에게 어쩌면 가장 어려운 문제의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성(異性)문제를 당신은 옳게 보고 있으며 또 이성을 대하는 자세가 확립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마담의 호의와 칭찬을 받아들여야 좋을지 솔직히 말해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마담께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나에게 질문하시죠?”

처음엔 마담 그렁꼴라와 대화하는 것이 재미있어 말을 계속했으나 그 내용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아 나는 일단 말을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진의(眞意)를 알고 싶었다.

 “태오 신학생님은 지금 나를 경계하고 계신 것 같군요. 스스로 말하기는 쑥스러우나 나는 결코 나쁜 여자는 아니에요. 얼마 전부터 나는 신부님을 볼 때마다 그분들을 동정하게 되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 드려 주는 습관을 갖게 됐어요. 사제직에 충실하던 어떤 날 갑자기, 그분들도 사명감의 무게 속에 고독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얼마 전에 내 오빠 신부가 사제직을 떠나 결혼했고, 현재는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오빠는 나보다 다섯 살이 위였고 내가 제일 무서워한 사람이었으며 그만큼 내가 제일 싫어한 분이기도 하지요. 오빠는 신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여자들의 옷차림이라든가 몸가짐에 대해 어하고 간섭이 심했지요. 좀 신경질적으로 오빠는 여자들을 대했어요. 오빠의 말인즉, 여자들의 아름다움이란 흔히 남자들의 유혹의 대상이 되고 도 죄의 원인이 되다는 거예요. 사실 죄의 원인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게 아니겠어요. 물론 그 어떤 대상이 악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그 대상을 악하게 보는 생각이 인간의 마음 안에 실지로 있을 때 악이 형성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는 여자에 대한 당신의 태도와 오빠의 자세를 비교해 보며 당신께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말하자면 오빠가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미워하고 비난한 것은 그만큼 그가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신부라는 자기 처지에서 오는 일종의 질투였지요. 그런데 태오 신학생님의 태도는 그 질투 감정을 초월한 너그럽고 여유 있는 것이었어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빠는 신부 될 사람이 애초에 아니었고 자기 불만 속에 그 질투 감정을 초월하지 못해 결국은 여자에게 진 셈이지요. 요즈음 공의회 선포와 함께 신부들의 독신제도 폐지론이 나돌고 있으나 하여튼 오빠의 결혼은 인간의 자기 발견이라는 일종의 인간적 승리를 가져다 준 셈도 되지요. 하지만 오빠는 20여 년 간 몸 바쳐온 사제로서는 불쌍한 패배자가 되었죠. 그러나 나는 오빠를 이해하고 있어요.”

 

 

우리는 여러 문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담 그렁꼴라는 자기집 소개도 했다. 그는 파리 출생이며 소르본느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는 보죠 지방의 라옹에다쁘 에서 살고 있었다. 자기 남편은 보죠 출신이며 대학에서 사귄 친구였었다. 그는 보죠 지방에서 제지(製紙) 공장을 경영하고 있으며 학생들이 사용하는 공책 종류와 봉투 등도 만들어낸다고 했다. 그리고 제라르메르 호숫가에 별장을 갖고 있으며, 여름이면 온 가족이 별장에서 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는 마담 그렁꼴라를 알게 되었고, 이번 여름방학 중 7월 한 달은 그분의 별장에서 지내며 가족과 함께 여행하기로 초대를 받았다. 며칠 전에 나는 온 가족이 환영한다는 무슈 그렁꼴라 부부의 싸인이 든 편지까지 받았다.

 

낭씨에서 라옹에다쁘까지는 약 1백 킬로 밖에  안 되는 거리였으나 지방선(地方線)이라 기차가 느렸고, 또 여러 역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방학이 시작된 토요일 오후 나는 여러가지 기대와 상상 속에 라옹에다쁘에 도착했다. 역에는 꼭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 처럼 훤하게 잘 생긴 풍채에다 선한 인상을 주는 한 신사와 마담 그렁꼴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담으로부터 자기 남편의 소개를 받으며 우리는 악수를 했고 마담은 나를 엉부라쓰하며 다정하게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집에 들러 샴페인을 터뜨리며 축배를 나누었다. 다른 가족은 벌써 별장에 가 있었다.

 

우리가 제라르메르 호숫가 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경이었다. 별장은 상당히 컸다. 거기에는 무슈 그렁꼴라의 80세가 가까운 늙으신 부모님이 가정부 한 사람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퇴역한 육군 대령이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직접 경험하기도 한 노장이었다. 큰 아들 베르나르는 파리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어도 배울 겸 미국을 여행 중이었고 스트라스부르크 대학교 사회학과 2학년을 막 마친 큰딸 쟌느는 3일 전에 호숫가에서 뛰어 놀다가 조개껍질에 발바닥을 크게 다쳐 걷지도 못하고 자리에 누워있었다. 그 밑으로 14세의 막내아들 보누가가 있었다.

 

쟌느는 자기 어머니처럼 아름다웠다. 얼핏 보면 자기 어머니와 쌍둥이로 오해 받을 정도였다. 무슈 그렁꼴라는 쟌느를 퍽이나 사랑했고 쟌느도 자기 아버지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무슈 그렁꼴라는 발을 다친 쟌느를 식사 때마다 식당까지 안아 날랐다. 그리고 곡 자기 옆에 앉혀 두고 온갖 시중을 다 들어 주었다.

가정 분위기는 퍽 부드러웠고 부러울 정도로 안온했다. 특히 가정에서의 종교적 생활은 무척 감명 깊었다. 식사 전후에는 빠짐 없이 감사 기도를 드렸고 밤에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간단한 기도를 바치고 잠자리로 들어갔다. 열심하다는 프랑스 어느 가정에서도, 심지어는 신학생의 가정에서조차 나는 온 가족이 모여 밤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마담 그렁꼴라는 생활면에서는 좀 사치스러운   면이 엿보였으나 자녀들에게는 다정하고도 엄한 어머니요, 남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착실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였다. 특히 아이들의 종교교육에 남달리 신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스스로도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인 가정 분위기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옛 모습을 얼마쯤은 회상시켜 주기도 했었다.

무슈 그렁꼴라는 주일 날 저녁식사 후에 회사 일 관계로 혼자 라옹에다쁘의 집으로 돌아갔고, 보름 간 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프랑스 남쪽 지방을 여행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우리는 밤마다 코냑을 마시며 할아버지 대령의 전쟁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나대로 한국 전쟁에서의 내 경험을 들려 주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 군인이라는 의식 아래 존경하며 곧 친해질 수 있었다. 쟌느는 할아버지의 똑같은 전쟁 이야기를 열 번 이상이나 듣는다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고 재미있게 들었다.

 

무슈 그렁꼴라가 라옹에다쁘의 집으로 돌아가자 식사 때마다 쟌느를 이층에서 식당까지 안아 나르는 일을 내가 맡게 되었다. 쟌느는 성격도 자기 어머니를 닮아 명랑했고 솔직했으며 그만큼 순진하기도 했다. 쟌느는 첫날부터 내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정도로 나를 자기의 오래된 친구처럼 허물없이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후에는 이런 말까지 하며 가족들을 웃긴 일도 있었다.

“엄마, 태오가 내 옆에 있으면 내 마음이 편해져. 왜 그럴까? 그리고 식사 때마다 태오가 나를 안아다 날라 주는 것이 나는 참으로 행복해. 태오가 한 달 동안만 나에게 이렇게 봉사할 수 있도록 다친 발이 다시 곪았으면 좋겠어.”

 

나는 6.25 전쟁 중에 부상병으로서의 심한 고독을 체험한 바 있어 환자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방안에 갇혀 있을 수 밖에 없는 쟌느를 동정했다. 그래서 나는 쟌느의 침대머리에 앉아 한국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 주기도 했다. 그리고 갑갑해 하는 그를 보트에 태우고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쟌느는 자기 어머니처럼 대화를 좋아했고 호기심이 많은 여자였다. 그러나 예의는 발랐다. 때로는 짓궂기도 했으나 쟌느의 모든 행동이 나에게는 귀엽기만 했다. 우리는 가끔 마담 그렁꼴라와 보누아와 함께 자동차로 보죠의 산속 길을 드라이브하기도 했다. 쟌느는 오토바이 타는 것을 참으로 좋아했다. 자기가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전하는 뒤에 앉아서 촌길을 달리는 것을 여간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쟌느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샹송이 흘러 나왔고, 기쁨의 환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나대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가족처럼 지내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고통스러울 만큼 힘들었던 학교 공부의 숨막히던 피로도 이제는 완전히 풀리고 몸에는 또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쟌느의 다친 발도 완치되었다. 그녀는 마음 놓고 수영까지 할 수 있었다. 마담 그렁꼴라와 쟌느의 수영 실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호숫가를 산책하며 쟌느와 함께 여러 문제에 관해 토론도 자주 했다. 서로가 배우는 몸이라 우리는 또 할 말도 많았다.

나는 이처럼 훌륭한 가정을 나에게 소개하신 주님께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 부활절 방학 때 파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마담 그렁꼴라와 이런 인연을 맺게 해 준 그 미니 아가씨를 그지없이 고맙게 여겼다.

 

 

 

 

제7장

코드 다쥬르 의 이방인

 

예정대로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일행은 그렁꼴라 부부와 쟌느, 보누아,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었다. 할아버지 그렁꼴라 부부는 니쓰에서 우리와 합류하기로 했다.

나는 여행에 대한 즐거운 기대 속에 파묻혀 떠났다. 이제는 불어도 제법 하게 되었고 공부에 대한 조바심도 얼마쯤 없어진 대신에 자신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내 생활 주변에 대한 관심과 프랑스라는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을 좀 더 깊이 알고 싶은 호기심을 갖고 있을 때였다.

프랑스의 ‘캐딜럭’으로 불리는 거북이형 ‘씨트로엔’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편하게 파묻고 우리는 즐거운 여행을 떠났다. 쟌느는 본래 자기 동료 여학생들과 7월 말에 영국 여행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포기하고 우리와 동행하기로 했다.

우리는 디죵에 도착했다. 중세 봉건 시대에, 내가 공부하고 있는 낭씨가 로오렌 공국(公國)의 수도였던 것처럼, 디죵은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였다.

이 도시에는 아름다운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으며 그 유명한 부르고뉴 포도주가 생산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디죵은 전통적인 프랑스 요리로서도 유명한 도시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프랑스 요리의 명물인 에쓰가르고(달팽이)로부터 시작하여 갖가지의 음식과 술을 감상하며 저녁을 즐겼다. 무슈 그렁꼴라 부부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미식가여서 집에서나 식당에서나 음식은 언제나 최고로만 먹었다.

 

그 다음 날 우리는 리옹에서 1박 하고 태고의 영원한 구름과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알프스 산맥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영봉(靈峯)을 바라보며 그러노불에 도착했다. 알프스 산맥의 한 모퉁이를 드라이브하며 그곳 산장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음 날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크고 작은 많은 도시를 통과하고 아비뇽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하루를 쉬면 님므를 구경하고 다음에는 말세이유였다. 이상한 일은 여행을 계속하며 역사적 유적과 아름다운 풍광(風光) 속에 파묻히면 파묻힐수록 내 마음은 고독해지기만 하는 것이었다.

 

부르고뉴 지방에 높고 낮은 야산을 중심으로 언덕길을 위태롭게 달리며 맛보는 쾌감, 그리고 거기에 널려 있는 끝없는 포도밭, 쥬라 산맥의 그 맑은 공기와 깨끗한 경치, 프로방스로 들어오는 라론느강(江) 주변의 그 비옥한 농토, 그리고 물결치듯 바람에 출렁거리는 밀밭, 도로 주변의 아름다운 농가들, 그리고 그들의 아담한 성당,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목장들과 평화로운 젖소들의 풍경… 프랑스인들의 독특한 개성미처럼 지방도 지방마다 새로운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으며 조금도 단조로움이 없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쓸쓸해졌고 무엇인가 내 삶 속의 지극히 귀한 것을 잃는 듯한 감상에 젖어 서글프고 외롭기만 했다.

 

나는 이 지방을 여행하며 내 조국과 내 고향을 생각했다. 조국의 메마른 땅, 벌거벗은 산들, 여름에는 물이 말라 숨이 끊어질 듯 가냘프게 흐르는 개천과 강들, 쓰러져 가는 듯한 초라한 농촌의 초가집들, 먼지 나는 도로들, 거기에 노예처럼 무거운 짐을 싣고 고역스럽게 끌려가는 달구지들, 지게에 짐을 얹고 황소놈을 앞세우고 힘없이 걸어가는 농부들의 원시적인 모습들, 한 모퉁이가 무너져 내린 다리… 뭐 하나 풍족하고 아름답게 회상되는 것이 없었다. 내가 살아온 조국의 풍경은 기름진 프랑스의 이 고장과는 너무도 심각한 차이가 있었다. 내 조국은 그저 가난만을 회상시켜 주었으나 이 고장의 풍경은 아름답고 평화롭고 그러면서도 뭔가 살아 있는 생동감(生動感)과 행복과 낭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그렁꼴라 부인은 우리가 지나가는 지방마다 그 엉킨 전설과 그 지방이 낳은 유명한 문학가와 예술가들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곤 했다.

“태오, 여기가 바로 1904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스드랄의 고향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오도루우드(하이웨이)를 미스드랄은 마차를 타고 달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유명한 글과 소설을 구상했을 것이며,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저 아름다운 풍경이 그의 창의력을 길러 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아비뇽, 프랑스 민요의 고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곳이지요. 저 아름다운 다리를 오가며 이 고장 사람들은 삶을 즐겼고 사랑을 노래했지요. 태오, 저 다리를 보세요. 거기에서 옛날에 어떤 소설가가 이름도 모르는 한 소녀를 3년 간이나 기다렸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치고 지나간 한 아름다운 소녀를 사랑하며 그녀를 만나려고 3년이나 이 다리를 지키고 있었대요. 그런데 가엾게도 그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바로 저 큰 샤토(城)가 프랑스의 바티칸이라고 불리는 집이지요. 14세기 초에 약 70년 간 교황들이 살던 곳이지요. 그리고 이곳은 당신이 좋아하는 알퐁스 도오테의 고향, 님므입니다. 다시 말하면 ‘레 레트러 드 몽 물랑’ 이라는 유명한 작품을 낳게 한 곳입니다. 보세요! 이 주변 경치와 이 라론느 강변의 풍치를 저 푸른 하늘의 태양과 이 맑은 공기와 이 상쾌한 바람을. 이 모든 것이 알퐁스 도오테 의 문학의 세계였지요. 그리고 이 지방이 낳은 고호나 세잔느의 그림을 상상해 보세요. 바로 우리 주변의 이 아름다운 풍경이 그들에게는 무한정의 미의 세계를 열어 준 문이었지요. 저 산에 있는 푸른 목장을 보세요. 오늘 밤에도 어쩌면 도오테의 ‘레 세트왈'(별들) 속에 나오는 마드모아젤과 목동 간의 그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저 목장에서 별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계속되지도 모르죠. 이처럼 미스드랄이나 도오테, 그리고 고호나 세잔느 등은 문학과 예술을 통해 자기들이 살아온 고향을 시대성을 초월하여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게 해 주고 있으며, 우리 마음에 아름다움을 심어 주고 있지요.”

 

마담 그렁꼴라의 설명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분의 문학과 미술과 역사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 마음은 우울해지기만 했다. 즐거움 속에 큰 기대를 갖고 출발한 여행이 계속될수록, 나는 쓸쓸함과 슬픔과 고독과 우울 감만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물론 우리가 지나온 지방의 경치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내 조국에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닐 텐데…. 그러나 나는 왜 그 지방들의 아름다움을 전설화시키고 거기에 생명이라는 존재성을 남겨 놓은 그러한 한국의 위대한 문학가나 예술가들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을까?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아름답고 신비롭고 멋있는 이름을 갖고 있는 한국에도 아름다운 고장들이 많이 있겠지요?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반영한 훌륭한 문학과 예술도 많을 거예요.”

마담 그렁꼴라의 이 말에 나는 그저 힘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 착한 부인을 속이는 것만 같아 죄스럽기만 했다.

 

그날 밤 우리는 마르세이유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여행에 피곤한 마담과 보누아는 호텔에서 쉬게 하고, 무슈 그렁꼴라와 쟌느와 나는 항구 구경을 나섰다. 거기에서 우리는 중국 음식점을 발견했고 국적도 알 수 없는 험상궂은 선원들 틈에 끼어 식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술집에 들러 술을 마셨다. 쟌느가 놀라서 쳐다보는 가운데 나는 포도주 잔을 거듭 들었고, 무슈 그렁꼴라는 재미있다는 듯이 술을 자꾸 권했다. 그날 밤 나는 술에 취하고 싶었다. 나를 걱정해 주는 쟌느의 다정함이 없었던들 나는 그날 밤 분명히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지 않으면 나의 이 우울증을 풀지 못할 것만 같았다.

 

 

다음 날 뚤론을 지나 나체주의자들의 왕국인 쌍 드로빼와 칸느를 거쳐 우리는  니쓰에 도착했다. 아, 이 지중해의 해안선, 코드 다쥬르의 아름다움이란! 부르고뉴 지방과 프로방스 지방의 풍경이 단순하고 순결하고 맑고 깨끗한 시골 처녀의 청순한 아름다움이라면 이 코드 다쥬르의 경치는 멋있게 세련되고 요염하고 매혹적인 숙녀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지중해 해안선은 참으로 유혹적이었고 아름다웠다.

모래알 하나 하나를 세어 볼 수 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바닷물! 끝없이 뻗어 있는 황금색의 해수욕장! 야자수의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는 해안 도로 주변에 자리 잡은 화려하고 로맨틱한 별장들! 그리고 수없이 피어 있는 저 아름다운 꽃들!

해안선의 곡선을 돌고 산길을 오르내릴 때마다 마주치는 풍광(風光)은 마치 신선들의 고향처럼 황홀하게 느껴졌다. 지중해의 햇빛은 따가웠으나 맑은 대기 속에 봄바람 같은 미풍(微風)은 한결 유혹적이었다. 그리고 온통 미인 경연 대회장 같은 인상을 주는 비키니 차림의 늘씬하고 멋진 몸매의 여인들은 이 풍경 속에 더 잘 어울려 보였다. 수영복 차림으로 오토바이와 스포츠카를 몰고 달리는 저 젊은 연인들도 이런 곳에 있어야만 될 것 같은 이곳의 풍경의 한 부분이었다. 사랑과 행복이 태양처럼 빛나고 공기처럼 충만 된 이곳은 어느 한 군데 누가 한 사람 나무랄 데 없는 기쁨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담 그렁꼴라와 쟌느의 감탄사는 쉴 새 없이 계속되었으나 넋을 잃고 이 주변의 선경(仙境)을 감상하고 있는 내 가슴 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고독감만이 파고 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고독감은 나에게 분노에 가까운 질투심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해수욕장을 앞마당처럼 끼고 있는 호텔에 짐을 풀고 며칠 간 니쓰에서 쉬기로 했다. 할아버지 그렁꼴라 부부는 벌써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즉시 우리는 그 맑고 시원한 지중해의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담 그렁꼴라와 쟌느와 보누아는 물고기처럼 물을 좋아했지만 무슈 그렁꼴라는 수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우리는 바다 속에서 물장난도 쳤다. 쟌느와 함께 나는 모래밭을 달리기도 했다. 엔진이 달려 있는 가족용 큰 요트를 빌려 온 가족이 타고 무슈 그렁꼴라가 운전하며 우리는 지중해의 파도를 헤치며 뱃놀이도 즐겼다. 일광욕도 하고 저녁도 들고 술도 마셨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웬일인지 더욱 더 심한 고독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내 온 몸을 어루만지는 이 부드러운 바닷바람의 은근한 유혹! 저 멀리 내 온 시야(視野)에 밀려와 닿는 해안선의 아름다운 풍경!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 그렁꼴라 부부에 대한 부러움! 바닷바람이 차다고 내 가슴에 기대어 서 있는 쟌느의 사랑스러움과 귀여움, 그리고 바람에 날려 내 뺨을 간지럽히고 있는 쟌느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의 촉감과 은은한 향수 냄새! 나는 행복했으나 이방인 같은 고독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인간존재에 곡 있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 빠져 버린 듯한 공허감이 시간을 흐를수록 나를 괴로움 속을 밀어 넣었다.

 

나는 확실히 이 코드 다쥬르의 이방인이었다. 이 아름다운 자연과 이 행복한 분위기 속에 나 자신을 조화시킬 수 없는 나는 분명히 이방인이었다.

이 코드 다쥬르의 세계는 내가 자라온 환경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뿐만 아니라 신부로서 살아가야 할 나에게는 이곳이 마치 금단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코드 다쥬르의 아름다운 자연을 질투했다. 그리고 무슈 그렁꼴라 부부의 행복도 질투했다. 쟌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질투했다. 질투한다는 것, 그리고 미워한다는 것,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일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이삼 일이 지났다. 날이 갈수록 이방인이라는 뿌리칠 수 없는 감정은 더욱 굳어만 갔다. 그리고 어디로부턴가 유혹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지금까지 지켜온 내 종교적 신념과 사랑과 행복관(幸福觀)을 비웃고 있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그러한 사랑과 행복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하나의 순수한 망상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피가 끓고 있는 인간의 몸으로, 또 보고 듣고 느끼고 감탄하는 황홀한 감각의 현실로 되돌아 오라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태오야, 너는 바보다. 너는 정말 바보다. 신학생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 인간이라는 현실로 되돌아 와라. 그러면 네가 마음 깊이에서 갈구하고 있는 피 끓는 사랑과 행복을 당장 차지할 수 있다. 그리고 너는 이 아름다운 자연의 주인이 될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나를 둘러싼 이 모든 환경, 심지어는 내가 숨쉬고 있는 이 공기마저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며 유혹의 손길을 펴 왔다. 아, 이 아름다움 앞에 내 두 눈을 가리고 이 사랑스러운 속삭임에 내 두 귀를 막고, 가슴 속 깊이 파고 드는 이 사랑과 행복에 나는 마음의 문을 닫고, 홀로 이 자리에 막연히 서 있는 나는 확실히 확실히 이방인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 오후 늦게 우리는 모나코에 들러 그레이스 켈리가 살고 있는 궁전을 돌아 보고 몬테 카를로의 국제 도박장인 카지노도 구경했다. 그리고 황홀한 장식이 화려하게 빛나는 어느 호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렁꼴라 부부와 쟌느는 춤을 즐겼고 나는 내내 고독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어디를 가나 나와는 거리가 먼 세상이었고, 어느 한군데 내 마음을 편안히 둘 곳이 없었다.

밤늦게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내 손을 잡고 내 가슴에 기댄 채 피곤한 몸을 쉬고 있는 쟌느의 귀여운 모습이 왜 그렇게도 사랑스럽고 고맙게 느껴졌을까? 나는 생각했다.

“나라는 인간 존재에 곡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쟌느와 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인일 것이다. 즉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한 여인의 존재만이 죽음 같은 이 무서운 고독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이며, 나로 하여금 이 자연의 주인으로서 이 풍경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게 해 줄 것이다. 이러한 한 여인의 존재 없이 살아가는 한 나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쩌자고…. 나는 왜, 무엇 때문에….”

 

그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주님께 기도 드릴 용기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중얼거렸다.

“주님, 세상은 이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운데 내 가슴은 왜 이렇게도 외롭고 쓸쓸하고 고통스럽기만 합니까?…. 지금 내 심정을 주님은 무엇으로 위로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만일 아씨시의 후랑소와 성인이었다면 이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당신을 찬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씨시의 성인이 아닙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그저 외로움만을 느끼는 한 가련한 영혼입니다. 그리고 내 옆에 한 여인이 있어 주기를 바라는 고독한 인간입니다. 주님,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날이 밝아왔다. 밤새도록 잠 한 숨 자지 못했다. 나는 신학교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신학교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며, 또한 나를 기다려 주는 곳이었다. 기다림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내가 신학교의 주인이라는 뜻이었다. 신학교로 되돌아갈 것을 결심했으나, 그 이유를 그렁꼴라 부부에게 솔직히 말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가지로 궁리해 보았으나 좋은 구실을 찾아내지 못했다. 사실 신학교로 되돌아가는 것도 벌써 하나의 문젯거리가 되었다.

나는 수영복 차림에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해수욕장으로 나왔다. 시원한 물에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새벽의 은빛 나는 햇살이 잔물결 치는 지중해 위로 번져 오고 있었다. 이른 새벽인데도 벌써 몇 쌍의 젊은이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물 속에 몸을 던지고 앞을 향해 정신 없이 헤엄쳐 나갔다. 누군가 내 뒤를 따르고 있었으나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방향을 돌려 뒤를 돌아다 보니 해안선이 저 멀리 까마득하게 보였다. 나는 겁이 났다. 더 이상 헤엄칠 힘이 내게는 이미 없었다. 갑자기 슬픈 감정이 엄습하자 “그까짓 것, 죽은들 어때, 나는 어차피 일생을 이방인처럼 살아가야 할 걸…”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내 마음 속을 지나갔다. 바로 그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태오, 너 미쳤니?  헤엄도 잘 못하면서 이렇게 멀리 나오고…”

쟌느였다.

“쟌느, 봉 쥬르”

나는 숨이 차 헐떡이며 겨우 아침 인사를 했다.

“가만히 이렇게 누워 있어. 내가 너를 도와 줄게.”

쟌느는 자기 왼손을 내 머리 밑으로 돌려 내 턱을 잡고 천천히 헤엄쳐 나갔다. 나는 겨우 발 끝으로 물을 내차며 쟌느의 헤엄을 도와 주었다. 우리 둘이는 기진맥진하여 모래 사장으로 기어 나왔고 그리고는 쓰러졌다. 얼마 후 쟌느가 기운을 차리고 내게 말했다.

“태오, 너 미쳤니?”

쟌느의 다정한 얼굴이 바로 내 얼굴 위에 있었다.

“쟌느, 차라리 내가 미쳤으면 얼마나 좋겠어. 미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

“태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말 해서 나를 겁내게 하지 마. 너는 요즘 이상해졌어. 요즘의 네 표정은 평상시의 그 평화스러운 모습이 아니야. 그런데 어쩌자고 사람도 별로 없는 이 이른 새벽에 그 멀리까지 헤엄쳐 갔지? 무슨 일이 네게 생겼구나.”

“쟌느, 나는 이방인이야! 그래서 이곳을 탈출해 도망치고 싶었어.”

나는 쟌느가 내 말을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하지 않고 내 심정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뭐, 네가 이방인이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쟌느는 몸을 일으켜 모래밭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내 존재를 배척하고 신학생이라는 내 세계를 비웃고, 나를 고독하게만 만들고 있어.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이라는 감정 이외에 다른 감정을 가질 수가 없어.”

“태오, 누가 너를 배척하고 조롱하고 있단 말이냐? 혹시 우리 가족이 너를 잘못 대접했단 말이야?”

“쟌느, 너의 가족은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야.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그럼, 어젯밤 모나코에서 내가 너에게 스트립 쇼를 구경시켜 준 것이 신학생이란 너의 명예를 손상시켜 줬단 말이냐?”

쟌느는 나에게 다그쳐 물으며 내 몸을 흔들어 댔다.

 

어젯밤, 그렁꼴라 부부가 카지노에서 장난 삼아 도박을 하고 있을 때, 쟌느는 나와 함께 산보를 나왔었다. 혼잡한 밤거리를 걸으면서 쟌느는 내게 말했다.

“태오, 내가 이상한 질문 하나 할까?”

“뭔데?”

“저 말이야…. 너 화 안 내겠지? 스트립 쇼 구경해 본 일 있어?”

“왜 쟌느는 그런 호기심을 갖고 있지?”

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쟌느는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해서 나를 자주 당황하게 만들었다. 쟌느는 또 짓궂은 표정으로 내게 다그쳤다.

“대답을 피하는 것을 보니 그런데 가 본 일이 있구나…. 태오, 넌 그런데 정말 가 보지 않았어?”

“우리 한국에는 그런 곳이 없어. 그런 것은 고귀한 인간성을 오락용으로 타락시키는 퇴폐적인 짓이야. 내가 군인이었을 때 우연한 기회에 일본에 가 본 일이 있어. 그때 동료 군인들하고 그런 곳에 한 번 가 본 일은 있지만…”

“그런데 말이야. 남자들은 이상하지…. 왜 그런데 가서 술 마시기를 좋아할까?”

“쟌느, 제발 그런 호기심을 버리도록 해요. 나도 모르겠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왜 남자들이 그런 곳을 좋아하는지를…”

“너는 벌써 신부 냄새가 나는구나. 모든 일에 윤리성을 붙이고…. 그런데 태오, 너는 신학생이지?”

“왜? 그래, 나는 신학생이야.”

“그럼 남을 위해 희생하는 법을 훈련 중이구나?”

“희생이란 사랑의 생명 같은 것이 아니겠어? 그래, 신학생에게 희생 정신이 없으면 어떻게 해!”

나는 좀 바보스러울 만치 순진하게 대답했다. 그때 쟌느는 반가워하며,

“태오, 그럼 오늘밤 그 사랑의 생명인 희생을 한번 훈련하는 셈치고 나를 위해 스트립 쇼 구경하러 같이 갈 수 있겠어?”

나는 내가 한 말에 스스로 말려 들고 있음을 느꼈지만 쟌느의 그 청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싫어! 쟌느, 너는 참 귀여운 마드모아젤 이지만 어떤 때는 나에게 가혹하리 만치 장난이 심하고, 그래서 밉기도 해. 나는 너에게 그런 희생을 할 수 없어. 그건 희생이 아니야. 호기심이라는 일종의 죄의 사슬에 얽매이기를 나는 거부해.”

“태오, 너는 그것을 왜 악으로만 보고 있어? 악의 객관성이 사물에 있기도 하지만, 선과 악의 기준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달려 있는 거야! 마치 비 오는 날, 그 비가 누구에게는 선이 되고 또 누구에게는 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도 다 그런 것이 아니겠어?”

“쟌느, 지금 너는 ‘귀여운 사탄’ 같은 말을 하고 있구나. 너의 호기심을 합리화시키려는 구실을 멋지게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야!”

“뭐, 내가 사탄이라고?”

쟌느는 놀라는 표정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팔을 잡아 당겼다.

“그래 쟌느, 지금 너는 사탄의 가면을 쓰려고 하고 있어. 사실 인간은 누구나 천사와 사탄의 이중 가면을 항상 몸에 지기고 있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선을 원하면서도 때로는 자기가 원한 바의 악을 합리화시키려는 구실을 발견해 내는 지능을 갖고 있으니까 말야. 바로 그러한 꾀라는 지능이 사탄이야.”

“좋아, 너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나를 사탄시하는 너의 심정은 너무 가혹해. 너의 견해대로 설사 스트립 쇼 하는 술집이 일종의 악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말이야. 너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친구니까 사회학을 공부하는 학도의 입장에서 그 악을 한 번 구경하고 싶어하는 나에게 호수천신처럼 나를 동반해 달라고 했을 뿐인데, 그래 내가 사탄이란 말이야?”

쟌느의 음성이 높아진 것을 보고 나는 그녀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쟌느를 그토록 화나게 만들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었다.

“쟌느, 내가 너를 화나게 했으면, 내 말을 용서해 줘.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가 보아야 뻔한 것이 아니겠어?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여인이 휘황한 불빛 아래 춤추고 있는 것, 그런 게 아니겠느냐 말이야.”

태오, 네 생각과 내 생각은 근본적으로 달라. 너는 스트립 쇼를 생각할 때 벌거벗고 춤추는 여자를 그리고 있지만, 난 그런데 관심이 없어. 사회학을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그곳에서 술 마시고 있는 남자들의 표정과 심리상태와 분위기 등에 관심이 있을 뿐이야. 그런 곳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한 부분이 아니겠어? 이 사회에는 성당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 그래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들의 여러 모습들을 보고 관찰하고 싶었어. 단지 내 공부를 좀 도와 달라는 뜻에서 네 협조를 바랐을 뿐이야.”

나는 결국 쟌느에게 이끌려 스트립 쇼를 구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내내 굳은 표정으로 술을 마셨고 쟌느는 무엇인가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한참 후 쟌느는 굳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내게 물었다.

“태오, 기분 상했어?”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지만 좋은 편도 절대로 아니야.”

“그럼 우리 나가! 나는 나와 함께 공감하고 나와 함께 이해하고 나와 함께 생각하고 나와 함께 잠시의 시간이나마 즐길 수 없는 사람하고는 잠시도 같이 있을 수 없는 사람이야.”

그리고 쟌느는 술값을 지불하라는 뜻으로 돈을 내 앞에 밀어놓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술값을 지불하고 쟌느를 뒤따라 나왔다.

“쟌느, 화났어?”

“이젠 그런 것 묻지 마. 신경질만 나.”

“쟌느는 상당히 이기주의자야. 그래 내가 너의 공부에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생각해 봐. 나도 한 남자야. 사실 보아서는 안 될 것이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겠지만 신학생이라는 내 입장에서 그런 것을 봐서 도움될 게 뭐가 있겠느냐 말이야. 쟌느는 나의 입장도 이해해 주고 존중해 주어야 될 게 아니겠어?”

“태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안해. 그러나 사과는 안 해. 그래 너는 남자야, 이 길거리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는 남자야. 그러나 나는 널 그렇게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어. 너는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너는 흔한 남자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어. 그래서 여자의 벗은 몸만 생각하고, 그것이 너에게 악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난 달라. 나는 거기서 하나의 예술과 봉사와 인생의 휴식과 일종의 사회악을 미연에 방지하는 예방주사를 놓아 주는 병원 같은 인상을 받았어.”

“뭐? 거기서 예술과 봉사와 휴식과 예방주사를 보았다고? 너 돌았니, 쟌느?”

나는 엉겁결에 미처 생가지도 않고 미쳤냐고 말해 버렸다.

“돌기는 왜 내가 돌아! 어쩌면 설익은 너의 종교관에 대한 아비 속에 네가 돌고 있는지도 몰라. 네가 정말로 신부가 되려면 말이야. 이 사회의 모든 발전 속에서, 심지어는 섹스면의 발전 속에서도 악의 보다는 선의의 눈으로,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태도로, 비관보다는 낙관적인 자세로, 이 사회의 모든 발전을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될 거야. 그런데 너희들 신부들은 이 사회의 발전을 선하게 보다는 악하게, 긍정보다는 부정적으로, 낙천보다는 비관적으로 보려는 경향을 갖고 있어. 그리고 너희들에게는 너희들만이 선과 진리와 사랑과 봉사를 행할 수 있다는 고집과 오만이 있어. 바로 이러한 점이 교회와 오늘의 젊은이들 사이를 격리시키고 있는 원인이 되고 있는지도 몰라.”

 

쟌느는 거침 없이, 나를 얼마쯤은 무시하는 태도로, 자기 의견을 주장했다.

“너의 충고는 고맙기는 하지만, 너의 의견대로 스트립 소가 하나의 예술이요, 봉사요, 휴식이요, 또 이 사회에 꼭 있어야 할 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렇다고 그것에 대한 너의 의견을 반대하는 것은 아냐.”

“태오, 한 번 생각해 봐. 지금 네가 신학생이라는 입장을 떠나, 말하자면 스트립 쇼가 악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내 말을 한 번 들어 봐 줘? 나는 정말이지 그 여자의 몸에서 하나의 훌륭한 미술품을 보고 있었어. 같은 여자이면서도 나는 그 여자의 아름다운 몸매를 어느 정도는 질투했었으니까… 그리고 그 몸의 율동미, 거기에 비친 조명의 조화, 이 모든 것은 나에게 예술 감정을 일으켜 주었어. 그것은 멋진 하나의 예술이었어. 그리고 땀을 온 몸에 흘리며 열심히 춤추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거룩할 정도였어. 사람들은 흔히 돈 때문에, 또는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스트립 걸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보고 온 그 여자는 그런 것 같지가 않았어. 물질적인 보수를 초월한 봉사라는 차원 높은 감정이 그녀에게는 있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처럼 정성껏, 아니 진실에 가까운 열성을 갖고 춤을 출 수가 있었겠어? 그 여자는 훌륭한 봉사자야. 그리고 나는 도 그녀의 땀 흘리는 봉사의 그늘 아래서 인생의 고달픈 한 순간을 즐기며 휴식하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을 거기서 보았어.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즐거워 보였으며 바로 또 그 순간에 그들은 외로운 인생을 잠시나마 위로 받을 수 있을 거야. 네가 나의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내가 보고 느낀 점을 지금 말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스트립 쇼 하는 이런 술집도 인간 사회에 있어야 할 한 요소라고 생각해. 만일 이러한 곳이 없다고 생각해 봐! 거기서 파생될 수 잇는 악의 가능성을 말야. 이 시대에 가장 큰 악의 하나, 그것은 할일 없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 사회학자도 있어. 나도 그분의 의견에 동감이야. 이러한 뜻에서 나는 영화 배우들이나 운동선수들이나 심지어는 우리가 보고 온 그 스트립 걸도 이 사회를 위한 훌륭한 봉사자들이라고 확신해. 이 시대의 인간들에게 휴식과 즐거움을 주고 있는 봉사자. 안 그래, 태오?”

“사회학 박사님, 감사합니다. 그 훌륭한 사회학 강의에….”

나는 빈정대는 투로 쟌느에게 말했다.

“아, 그래요? 기분이 상하셨군요, 거룩하신 신학생님…”

쟌느도 지지 않고 나를 빈정댔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렁꼴라 부부가 놀고 있는 카지노에 돌아왔다. 이런 일을 회상하며 쟌느는 신학생이라는 나의 자존심을 자기가 손상 시켰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런 것도 아니야.”

나는 어젯밤 일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왜 그래 태오? 말해 봐. 우리 둘 이는 터놓고 지내는 좋은 친구가 아니니?”

쟌느는 두 손을 턱을 고이고 내 얼굴을 내려다 보며 다정스럽게 물었다.

“사실은 말이야. 너희들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나는 우울하기만 했어. 그리고 요즘 이 코드 다쥬르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갑자기 심한 고독감을 느꼈고, 이 자연을 질투하기도 했어. 너희들의 행복한 모습도 부러웠고, 네가 아니라 여자들이 얄밉기도 했어.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과 행복 속에서 나는 홀로라는 소외감과 고독만을 느꼈을 뿐이야. 나는 확실히 이곳의 이방인이야. 그래서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어.”

“오, 가엾은 태오!”

쟌느는 내 이마에 키스를 하며 입을 열었다.

“태오, 그것은 신학생이라는 너의 현실적 강박관념에서 오는 당연한 심리적 부담이야. 너는 일생 홀로라는 신부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어? 너는 언제나 어디서나 인간적으로 홀로일 거야. 물론 너에게는 영신적인 가족과 형제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엄밀히 다지고 보면 현재 너의 입장에서 너는 아무 것도 질투할 것이 없고 누구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어. 문제의 해결은 너 스스로에 있는 거야. 지금 너는 그 이방인의 감정의 세계에서 너 스스로를 해방시키거나 또는 그것을 초월하는 의지를 확고히 가져야 할 거야. 안 그래, 태오?”

나는 쟌느와 이 문제에 대해서 대화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화제를 돌려 어떻게 쟌느가 새벽에 나를 따라왔는가를 물었다.

“쟌느, 네 말대로 내 문제는 나 스스로 해결할게… 그런데 넌 어떻게 새벽에 일어나 나를 구해냈지? 네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아마 물 속에서 죽어 있을는지도 몰라.”

“너는 이것도 천주의 섭리라고 말하겠지만…. 하여튼 새벽에 잠에서 깼어. 그리고 네가 갑자기 보고 싶었지. 사실 어젯밤 내 입장만 생각하고 너를 좀 지나치게 대해 준 것 같아 후회가 됐어. 그래서 나는 너를 위로해 주고 싶었어. 상한 네 마음을 위안해 주는 뜻으로 이 이른 새벽에 너하고만 모나코에 가서 쁘띠테져네(아침식사)를 하고 싶었어. 옷을 입고 네 방으로 가서 방문을 노크하려는데 문은 열려 있고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어. 이상하다 생각하고 들어가 보니 침대에는 네가 잔 흔적이 안 보이고… 겁먹은 마음으로 발코니에 나가 보니 네가 처량한 모습으로 물로 걸어가고 있지 않겠어? 네 뒷모습을 보고 네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생각하고 나도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너를 뒤따라 간 거야. 그런데 어쩌자고 그 먼 데까지 헤엄쳐 나갔지 …. 이방인의 감정에서 탈출하는 것도 정도 문제가 아니겠어?”

쟌느는 사뭇 나를 염려하는 표정으로 말을 마쳤다. 동정하는 여인의 모습, 그것은 어머니를 회상시켜 주는 고맙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그 무엇이었다.

“쟌느, 고마워. 아까 이야기로 되돌아가지만…. 어젯밤 나는 참 고독했어. 그래서 오늘 신학교로 되돌아 가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 부모님께 그 이유를 말씀 드려야 할 텐데 적당한 말이 떠올라야지. 잘못하다가는 너와 나 사이에 오해만 받을 것 같고… 사실 요즘 네 어머니가 우리를 좀 감시하고 있는 것 같더라…. 밤을 새우며 생각하다가 정신이나 차리자고 수영하러 갔던 거야. 그저 정신 없이 헤엄치다 보니 그렇게 됐어.”

“태오, 그럼 너 정말 오늘 우리를 떠날래?”

쟌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전히 내 얼굴 가까이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물었다.

“떠나고 싶어. 여기서는 아무래도 나는 이방인이야. 그래서 내 고향 같은 신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그건 도피야, 태오! 네가 신부가 되면 이곳도, 그리고 네가 질투하는 이 자연도, 네가 일해야 할 주님의 포도밭이야. 그 포도밭에서 땀 흘려 일하기 위해 너는 지금 훈련 중 아냐? 그리고 또 말이야, 네가 부러워하는 우리 가정의 행복도, 또 나까지 포함하여 네가 얄밉게 보고 있는 여자들도, 너로부터 축복을 받고 주님께로 걸어가야 할 것들이 아니겠어? 이 자연을 질투 없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영유와 아량을 너는 훈련시켜야 돼. 그리고 너의 감정을 얼마쯤은 괴롭히고 있을 여자들의 생동하는 아름다움도 너그럽게 축복해 주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확립시켜야만 돼. 그래서 나는 너의 친구 입장에서 간절히 말해. 즉 이방인의 감정이라는 그 고립감을 피하려는 너의 자세는 일종의 비겁이라고….”

쟌느는 그 순진한 모습으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애원하듯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쟌느, 고마워, 너의 우정 어린 충고와 격려, 하지만 전쟁에서는 후퇴라는 일종의 전략상의 전법(戰法)도 있어. 무리한 대면(對面) 전투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니까….. 나는 잠시 후퇴하고 싶어.”

“태오, 넌 그렇게도 신부가 되고 싶니?”

“그래, 아직까지는 변함이 없어.”

“그럼 앞으로는?”

“내일의 우리 운명을 모르는 인간이지만….. 그저 변함 없기를 바라고 싶은 마음 뿐이야.”

“자신이 없구나…. 신념이 없는 행위는 자기 기만이야!”

“바로 그 점이 어젯밤 밤새 나를 괴롭혔어. 내 소외감도 하나의 문제였지만, 이렇게 자신 없는 상태에서 내가 신부가 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일 거라고…..”

“너는 아까 내 말을 의식적으로 피했지만, 지금 너는 내가 말한 대로 스스로 해방이든가 아니면 그것을 초월하는 의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시기에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 문제를 피할 것이 아니라 이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쳐 너 자신을 보다 옳고 보다 깊이 통찰하여 너 자신의 능력과 의지를 정확하게 저울질해 봐야 되리라고 나는 확신해!”

“지금의 내 심정으로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자신 없어. 그리고 나는 이 문제와의 정면 대결을 솔직히 피하고 싶어. 나는 요즘, 특히 어젯밤, 처음으로 나의 약함을 발견했어.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 무엇에나 자신이 없어. 내가 노력하고 원하기만 하면 나는 나만의 힘으로 얼마든지 신부가 될 수 있다고 믿어 왔어. 그런데 바로 그러한 나의 태도가 나의 크나큰 약점이었어. 인간의 노력은 절대적이 아니란 것을 나는 절실히 느끼고 있어. 그래서 말이야, 신학교로 돌아가 조용히 며칠간 기도하며 주님의 힘과 은총을 받고 싶어. 교만이 자리잡고 있던 내 가슴을 주님의 은총으로 채우고 싶어. 정말이지 주님의 도움 없이는 나는 신부가 못 될 것 같아.”

“오, 가엾은 태오? 쉰 살이 넘은 외삼촌 신부님이 한 분 계셨는데 오죽했으면 그분이 다 결혼했겠니? …. 그도 한 때는 너처럼 생각하고 은총이라는 주님의 힘을 믿었을 거야. 나는 주님과 교회와 성경을 믿지만 주님의 은총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납득이 안 갈 때가 많아. 사실 따지고 보면 은총이라는 것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습성의 결과가 아닐까? 이것이 주님의 섭리다. 이것이 주님의 은총이다 라고 사람들이 상상하고 그것을 믿으면 사실처럼 느껴지니까 말이야.”

나는 쟌느의 말을 담담히 듣고 있었다. 그 순간 무엇인가 섬광처럼 번쩍이며 나의 뇌리에 들어와 박히는 게 있었다. 사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대부분의 경우, 생각하기에 따라 고독해질 수도 있고, 즐거워질 수도 있다는 간단한 진리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 코드 다쥬르의 넘칠 듯한 아름다움 속에서 그것을 시기하고 또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고독하게만 느껴 왔으므로 나는 점점 고독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자신 있게 받아들이며 그것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 데 대하여 감사함을 느낀다면 나는 오히려 커다란 즐거움을 실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벽촌의 한국인에게 이러한 기회를 베풀어 준 그렁꼴라 부부의 호의에도 또 쟌느의 다정스러운 우정에도 나는 진정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이러한 감사로써 내 비어있던 가슴을 채우기로 하니까 나는 이미 외롭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내 심경의 변화가 일종의 주님의 은총이며, 이것을 또한 은총이라 믿는 것이 내 신앙의 행위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나는 일어서며 쟌느의 볼에 키스를 해 주며 말했다.

“쟌느, 고마워! 지금 나는 네 말 속에서 너 자신이 의심하는 주님의 은총을 깨달았어. 그것은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직관(直觀) 같은 것이라고 할까…. 너는 이러한 직관을 하나의 순수한 환상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주님께서 지금 나를 지켜 주시고 내 신앙적인 지성과 의지를 밝혀 주시고 계신다는 신념을 갖기 시작했어. 쟌느, 이제 나는 고독하지 않아. 이 자연에 대한 질투와 너희들에 대한 부러움도 이제는 다 사라졌어. 나는 정말 즐거워.”

“하여튼 너희 동양 사람들에게는 우리 프랑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면이 있어. 별안간 무엇을 깨달았다고 즐거워하는 너의 그러한 태도 말이야. 이론적인 논리의 전개 없이는 우리는 무엇 하나 이해할 수도 없는데, 너희에게는 그러한 것을 초월하는 직관의 눈이 있나 봐. 그건 그렇고… 그럼 태오, 그래도 너는 지금 우리를 떠나 신학교로 돌아갈래?”

“아니 예정된 여행을 너희들하고 끝까지 할 거야.”

“태오, 나도 기뻐. 네가 방금 무엇을 깨달았든 간에 네가 신학교에 안 돌아간다는 이 사실이 나에게는 제일 중요하고 고마운 일이야. 나는 네가 우리를 떠나겠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었어. 나는 너를 좋아해. 그럼 태오, 너의 은총의 깨달음을 기념하는 뜻에서 부모님 몰래 우리 둘만 빠져나가 모나코에서 쁘띠데져네를 하고 오자!”

쟌느는 내 목에 매달리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이제는 쟌느의 이러한 순진한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우리 둘은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 입었다. 나는 모나코에 가서 쟌느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온다는 쪽지를 그렁꼴라 부부 방문 틈에 꽂아 놓았다. 그리고 어제 호텔 가르송(보이)을 통해 빌려 놓은 오토바이를 타고 모나코를 향해 달렸다. 아침 햇살은 이미 전속력을 달리는 오드 로우드 위에 넘치고 있었다. 몸에 쏜살같이 와 스치는 아침 바다 바람은 상쾌하기만 했다. 쟌느는 내 뒤에 앉아 얼굴을 내 등에 대고 신나게 샹송을 부르다가 내 귀에 대고 소리쳤다.

“태오, 난 지금 멋진 한 가지 환상을 생각해 봤어.”

“뭔데?”

나는 해안선의 굽이치는 위험한 길을 달리며 쟌느에게 소리쳤다.

“이렇게 네 등에 매달려 너의 나라 서울까지 달려 봤으면 얼마나 멋질까, 방금 생각해 봤어.”

“그럼 우리 모나코를 서울로 생각하기로 해. 우리가 생각하기에 따라 모나코에서 서울에 온 기분을 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 그럼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데 말이야, 태오 내가 너를 조금 놀려 줘도 괜찮아?”

“상관 없어 쟌느, 나는 오늘 즐겁기만 해.”

“내가 너를 애인으로 생각해도 좋으니?”

“애인?”

“그래 애인으로 너를 생각해도 상관 없느냐 말이야. 물론 실지로는 말고… 다만 모나코로 달려 가는 이 오토바이, 네 등 뒤에 매달려 있는 동안만 말이야….”

“그건 좀 곤란한데….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현실화될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생각 가운데도 경우에 따라서는 한계가 있어야겠구나. 하지만 지금만은 나를 애인으로 생각해도 상관 없어.”

“태오, 넌 틀림없이 신부가 되겠지?”

“너의 그 착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기도해 주고 사랑이라는 희생을 바쳐 주면 나는 꼭 신부가 될 거야. 난 신부가 되고 싶어!”

“네가 원하는 대로, 그런데 네가 신부가 되면 나는 조금 섭섭해질 것 같다.”

“왜?”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그렇지 뭐야!”

“좋아한다는 감정의 본질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존종해 주고 이해해 주는 행위야, 쟌느.”

“태오, 넌 나를 좋아하니?”

“좋아한다는 표현보다는 너를 귀여워 해. 너는 정말이지 귀여운 아가씨야.”

“너는 정말이지 깍쟁이다. 너는 네가 방금 말한 말의 뜻을 슬쩍 피하는구나. 네가 만약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나도 내가 좋아하는 내 뜻을 존중해 달라고 말하려고 했었지. 그런데 느는 깍쟁이야.”

쟌느는 내 등을 간지럽히며 말했다.

“쟌느, 나를 간지럽히지 마. 그러다가 운전을 실수해 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럼 얼마나 멋지겠니?…. 한 번 그 밑으로 떨어져 봐, 태오.”

쟌느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철 없이 큰 소리로 떠들며 내 등을 두들겨 대고 있었다.

“쟌느, 죽음은 결코 우리가 두 번 경험할 수 없는 거야. 죽음은 그것으로 하나의 완전한 끝이야.”

“넌 죽음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 같구나. 난 죽음 같은 것 아무렇지도 않아. 죽음이란 네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완전한 끝인 동시에 비로소 시작되는 또 하나의 다른 생의 형태거든. 그래서 나는 네 등 뒤에 이렇게 매달려 그 새로운 삶으로 옮겨 갔으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해. 태오, 한 번 저 밑으로 함께 떨어져 봐.”

“정말?”

“정말! 그러나 나 혼자 죽기는 싫어, 너하고 함께라면 난 죽음 같은 것 무섭지 않아.”

“쟌느, 우리 죽음 이야기 같은 것 더 하지 말자. 기분이 정말 이상해지는 것 같다.”

“모나코에 도착할 때까지 너는 내 애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니? 그래서 그냥 감정이 시키는 대로 막 말해 보는 거야. 그것도 재미있지 않니?”

“쟌느, 우리 둘은 친구야. 우정도 애인들의 애정만큼 성실하고 진실한 거야. 내가 신부가 되어야만 우리 둘의 우정이 계속될 거야, 알겠니?”

“모나코에 이제 우리는 다 왔구나…. 그래서 너는 이 이상 더 애인 역할을 하지 않으려는 구나. 좋아, 그리 우리는 친구야.”

우리 둘은 농담도 진담도 아닌 말을 지껄여대며 모나코로 들어서고 있었다.

“쟌느, 여기는 서울이다. 네가 내 등 뒤에 매달려 그렇게 가 보고 싶어하던 내 조국 서울이야. 여기서 우리는 서울에 온 기분을 내자. 이제 나는 이 이상 더 이방인이 아냐.”

“물론 너는, 하지만 이 서울 한복판에서 이제 나는 이방인이 되겠지?”

“아냐 쟌느! 같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벗이 있는 곳에선 이방인이 될 수 없어. 우리 둘은 그런 친구야, 안 그러니, 쟌느?”

“그래, 우리 둘은 친구야! 너와의 공감 속에, 너와의 이해 속에, 너와의 신뢰 속에 나는 이 서울의 주인이야, 물론 너와 함께. 태오, 나는 너의 우정 속에 이방인이 될 수 없어.”

어느 새 우리는 모나코 시내 한복판을 엔진 소리 요란하게 달리고 있었다.

 

 

 

** 이세상의 이방인 (하)편으로 계속됩니다. (하)편은 이곳에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