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앙의 여정.. 조금은 거창한 제목일까? 신앙이란 말도 그렇고 여정이란 말도 그렇다. 조금은 둘 다 무겁게 느껴진다. 이런 제목은 또한 나이가 어느 정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리라. 나의 신앙은 어떠한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고 현재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조금 심각하게 생각하고 정리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최소한 오늘까지.

과연 나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이 첫째의 조건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필요조건이지 절대로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불행하게 신앙적인 가정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토속적인 신령님은 서로 얘기하며 자랐어도 심각하게 하느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는 절대로 아니었다.

나의 어머님은 원산에 있는 루씨여고, 그러니까 미국 선교사들이 만든 미션스쿨을 졸업하셨고, 이화여전에서 공부를 하셨다. 둘 다 기독교의 정신으로 세워진 학당들 이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그런 쪽으로 깊이 영향을 받으신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6.25때 아버님이 납북이 되신 후 곧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든 이후는 거의 기복신앙에 빠지셔서 모든 운명을 그곳에 의지하시곤 하셨다. 친척 하나 없이 남겨진 서울에서 믿을 곳은 먼 장래의 천국이 아니고 바로 오늘, 내일의 우리가족 안전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먼 훗날의 천당 같은 것은 어머님에게는 사치로 까지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좋은 경험적인 예가 있었다. 납북되신 아버지에게는 여동생 둘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우리 남매에게는 고모님들이시다. 그분들 중에 큰 고모가 우리 어머님에게는 아주 지독한 시누이 노릇을 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결혼부터 반대했고 나중에는 헤어지라고까지 했다고 들었다. 그 고모님의 남편이신 고모부께서 그 당시에는 많지 않았던 설암(舌癌, 혀의 암)에 걸리셔서 돌아가셨다. 우리도 어렸을 때 한번 철도병원으로 찾아간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그 고모님도 우리처럼 3남매를 둔 홀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그런데 그 고모님께서 택하신 길은 우리 어머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장 하루하루 생활이 걱정이 되는 때는 매일 근처의 교회에 가서 거의 그곳에서 사셨다. 서울근교 수색에 사셨는데 나도 그 교회당을 가본 적이 있다.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가시는지 참 기적이었다. 한마디로 교회당에 완전히 ‘미치신’ 것이었다.

어머님은 그런 고모님의 무책임한 생활방식이 참 이해가 안 되시는 눈치였다. 그리고 “서울여자”들의 “생활력 부족”을 비난하셨다. 나중에 그 고모님은 완전히 ‘박 장로’ 교회에 빠져서 그 당시 시작된 서울근교의 신앙촌으로 모든 재산을 헌납하시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 우리도 그런 것을 보고 자라면서 “신앙의 함정'”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심하게 말하면 신앙이란 것이 조금은 ‘마약적’인 요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것이다. (실제로 공산주의에서 종교는 아편, 이라고 하긴 했다)

그런 환경이라 보니 나에게 눈에도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존재는 사실 허무맹랑한 말에 불과했고, 앞으로 나는 절대로 그런 것을 믿지 못할 것 같았다. 특정된 조직적 종교 중에서 물론 불교를 먼저 알긴 했지만 그것은 역사적인 것이라 생각되어서 별로 특별하게 느낀 것은 없고 사실 먼저 조금이라도 가깝게 느낀 것은 역시 동네마다 있는 “예배당”, 그러니까 개신교였다. 크리스마스와 연관이 되곤 했던 교회당은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조금은 푸근해지는 인상을 주곤 했다. 성탄절마다 과자를 나누어 주던 추억이 어찌 가슴에 아련하지 않을 수 가 있을까? 내가 어릴 때 살던 원서동, 특히 승철이네 집에 살 때, 몇 집 건너에서 가끔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가를 부르곤 했다. 그 집 아저씨는 상이군인, 그러니까 불구자였을 것인데 얼마 못 가서 돌아가셨다. 그때 예수교와 사람이 죽는 것과 조금 연결이 되어서 추억에 남았다. 물론 어릴 적의 어린 생각이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누나는 다니던 학교가 Christian mission계열이었고, Y-teen이라는 Christian club에 가입을 하였는데, 어느 날 성경을 들고 왔다. 조그맣고 두꺼운 책으로 그때 나이로 읽기에는 너무나 ‘어른스러운’ 책이었다. 하지만 구약의 첫 장 창세기는 읽었던 기억이고 그저 재미있는 옛날 얘기로 이해를 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유한한 인간수명과 그에 따른 인간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3이 되면서 입시준비로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개신교 선교사들이 세운 연세대학교에 입학을 하였는데,물론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운 학교였지만 신앙의 자유는 많았다. 예외적인 것은 전통적으로 해오던 채플시간, 필수과목인 신학, 성서개론 정도였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것들이었고 아쉽게도 신앙적인 방향은 잡아주지를 못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기에 그때 배웠던 것들, 들었던 것들이 다 지금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면, 정기적으로 채플시간에 들었던 주옥 같은 강론들, 성서개론에서 배워서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성 바오로(Saint Paul)의 서간문들.. 다 기억에 남는다. 대학 재학시절 나는 가끔 도서관에서 천문학에 관한 책을 빌려보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우주의 기원과 상대성원리에 의한 우주의 유한성 같은 것에 아주 매료되곤 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무한’이라는 비수학적인 개념에 소름이 돋곤 했던 경험을 하였다. 그런 생각이 다시 나면 나는 반 의도적으로 피하곤 했다. 무한한 공간, 영원한 시간이란 개념에 나는 소름이 끼쳤고, 나를 너무나 당황시킨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사회생활이란 도피처로 자연스럽게 피난을 가서 무한, 하느님 같은 ‘무서운 개념’을 피하며 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종교란 것에 많은 회의가 있었다.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면 그런 것 공부해가며 믿지 않아도 될 것이란 생각이었다. 한때는 대학시절 죽마고우 친구 유지호를 따라서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 란 김준곤 목사가 이끄는 대학생 선교회에 가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자를 만나려고 나간 것 뿐이었다. 의외로 그곳에는 여대생들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종로5가 성결교회도 유지호를 따라서 잠깐 갔었는데 그것 부끄럽지만 역시 동기는 위와 같았다.

대학교에 다닐 때,연세대 앞에서 버스를 탔는데, 어떤 30~40대 정도의 젊잖고 멋있게 보이는 여자가 나의 옆에 앉았다. 갑자기 나에게 예수를 믿느냐고 물어왔다. 조금은 당황했지만, 그저 어느 교회의 전도사가 아닐까 하며 말을 받아 주었다. 안 믿는다고 솔직히 대답을 한 것이 화근이었는지, 계속 물어왔다.도대체 왜 못 믿느냐는 것이 골자였다. 이런 언쟁에 익숙지 않은 나는 궁지에 몰렸지만 끝까지 솔직히 대답을 하였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안 믿는다고. 지금 생각하니 참 모자란 대답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참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 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이 어리냐는 듯한 눈치였다. 그렇다. 나는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그렇게 어렸다.

나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과학과 종교를 혼동하곤 했다. 과학적으로 종교를 해석하려 하고 종교적으로 과학을 보려 하는 그런 “짧은” 생각이 나를 오래 오래 사로 잡았다. 그러니까 이곳의 표현을 빌리면,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현재 내가 아는 어떤 “배운” 사람조차 이 함정에 빠져서 “다차원공간”적인 신학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조금은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공부하는 것은 자연과학을 근거로 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공학 쪽이고 보니 자연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인간의 정신에 입각한 인문학이나, 인간의 사회적인 활동인 경제, 상업적인 것, 자연을 인간에 이롭게 이용하려는 자연, 응용과학, 공학 같은 것은 그런대로 쉽게 이해가 되었지만, “보이지 않는” 신을 연구하는 신학 같은 것은 한마디로 “무용지물”이라고 까지 매도를 하곤 했다.

한때 나는 영국의 수학, 철학자 Bertrand Russell의 사상에 매료되기도 했고, 작문시간에는 그의 저서를 주제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때의 그의 종교에 대한 생각과 나의 것은 거의 일치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 없는 것’을 찾으려 방황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라는 그런 것들.. 어찌 그런 말을 믿지 않겠는가? 언젠가는 죽마고우자 중앙고 1년 후배, 연세대를 같이 다닌 박창희가 갑자기 교회에 빠졌다. 그렇게 우리와 어울리며 잘 놀던 친구가 갑자기 거의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나는 그런 것들이 정말 싫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과정이나 이유는 차후의 문제였고, 당장 친구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에 교회나 종교가 더 싫어지곤 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라는 것은 사실은 일반적인 의미의 교회, 성당과 그에 속하나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한 나의 생각에 조금 생각을 하게한 일이 있었다. 1980년 초쯤 이었을까. 나는 그때 서울에서 결혼을 하고 Ohio State에 나만 먼저 돌아와서 학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살던 곳이 Ohio State main campus옆 High Street에 즐비한 rooming house중의 하나였다. 그 중에 Frambes Avenue란 곳에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그런대로 살고 있었는데 내가 사는 집 옆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 갓 온 유학생들 중에는 나이가 나보다 위인 장석민씨라는 분도 있었다. 교육학 전공이었는데 전공이 비슷한 사람들이 그룹으로 유학을 왔다. 아마도 한국에서 같은 직장에 있던 분들 같았다. 장석민씨는 참 달변인 사람이었다. 특히 신앙, 종교에 대한 얘기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 당시,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얘기를 한 기회가 종종 있었다. 종교에 대한 얘기는 대부분 교회의 부패상 같은 자극적인 화제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냉정하고 신중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그날 나는 조금 지나친 말을 했는데, 간단히 말해서 ‘신학의 허구성’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심한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이 나의 소박한 생각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신을 연구할 것이며,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학문적으로 ‘연구’를 할 것이냐..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요지였다.

나의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무언가 언급을 했지만 장석민씨는 딱 한마디를 하였다.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이 결국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냐?” 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신학이란 다른 말로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말이었다. 더 이상 거기에 설명이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조금 머리를 세게 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조금은 신학과 신앙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게 되었고, 나의 마음에 여유를 두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곳의 표현으로 “Not So Fast, Never Say Never”같은 것이었다.

1년도 못 가서 나는 그렇게 암호같이 느껴지던 성경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생활은 고국보다는 훨씬 외로운 시간들이 많은데 그 당시 나는 학교의 생활이 거의 지옥같이 느껴지고 거의 burn-out상태가 되었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bible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내 앞에 있던 그bible은 그 당시 약학과에서 공부를 하던 김미영씨가 준 것이었는데 받은 지 조금 오래된 것이었고, 그 동안은 읽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읽으면 마음속에 조금은 여유가 생기곤 했고, 곧 바로 같은 과의 유근호형의 안내로 콜럼버스 한인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외로움과 불안함을 달래는 것이 주 목적이었지만 그런대로 자연스럽게 절대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기나긴 여정의 시작이 되었다. 천주교 교리가 다 믿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정을 할 근거도 없었고, 그것이 하느님을 믿는데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 이후 천주교신자로써 일요일 미사는 꼭 간다는 정도의 미지근한 신앙인이 되었고 별 문제가 없는 한 사는 곳에 있는 일요일 미사에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저 습관적으로 나가는 것에 불과했다. 마음속 깊이 진정 절대자가 있을까, 성경이 전부 사실일까 하는 자질구레한 의문들에 나는 사실 자신이 없었다. 우리 가정 생활에 위기가 오면 조금 더 하느님에 의지하려는 이기적인 신앙생활이었다. 또한 성당에 큰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핑계로 공동체를 오랫동안 떠나기도 했다. 역시 근본적인 문제는 나의 신앙심이었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나도 확실하지를 않았다. 그저 습관화된 신앙생활이었다.

현재 살고 있는 아틀란타의 한인성당에도 1990년 초 커다란 문제가 생겨서 결국 우리는 한인성당을 완전히 떠나서 집 근처에 있는 미국성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이 지금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그나마 나는 10년 전부터 가끔씩 나가기 시작하다가 근래에는 정기적으로 나가게 되었다. 문화적인 차이로 미국공동체는 사실 한인공동체와 많이 다르다. 하지만 최소한 성당공동체를 완전히 떠나지 않게 하는 역할은 잘 해주었고 우리 아이들의 교리공부나 중요한 성사를 받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문제는 우리부부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근본적인 영적인 외로움이었다. 나는 그런대로 크게 문제시 하지 않지만 연숙은 그것이 문제가 되는 모양이었고 결국은 조금씩 아틀란타 한인성당의 조그만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현재는 레지오 마리애나 CLC 같은 모임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현재의 미국성당 생활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도 몇 년 전부터는 한인공동체의 구역활동에는 우리부부가 다 참여를 하고 있다. 그것은 월례 구역모임과, 가끔 있는 구역미사가 있어서 나는 사실 그것이 현재 유일한 한인공동체와의 연결의 다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어디까지만 외형적인 변화나 모습에 불과하다. 나 자신의 저 속에 있는 ‘신앙심’은 어떠한가? 두 개의 크고 작은 변화를 기억한다. 첫 번째는 어머님의 타계, 두 번째는 묵주기도의 시작, 바로 그것들이었다. 누구나 어머님의 존재와 그 의미는 상당할 것이다. 물론 그 정도는 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돌아가실 때까지 실감을 못한 듯 하다. 심하게 말하면 우리 어머님은 무한히 사실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두 번의 충격을 받은 것이다. 돌아가셨다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모습, 그것이었다. 예수님의 첫째 계명인 사랑으로 철저히 자식들을 기르신 어머님을 통해서 나는 ‘조건 없는’ 사랑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이렇게 늦게.. 비록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살아왔지만 나는 역시 마음은 항상 어머님과 옆에서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고, 영원히 떠나셨다는 것을 알았을 그때의 허전함은 사실 7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다. 나쁘게 말하면 나는 절대로 성장한, 독립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에 딸린 식구가 생긴 가장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나는 무한한, 절대적인, 인간을 사랑하는 그런 하느님의 존재를 마음 속 깊이 믿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믿어진다기 보다는 믿고 싶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그것과 더불어 나이가 쉰을 훨씬 넘으면서 인간의 수명을 실제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60년을 살면 그런대로 많이 살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환갑이라는 것과 별개로 그저 60년이면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서서히 인생을 돌아볼 만한 나이가 아닐까. 생명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완전한 끝인가, 아니면? 영세를 받으면 교리도 배웠지만 이런 사후의 문제는 거의 100% 추상적인 ‘이론’으로 밖에 받아들이곤 하였다. 그것이 이제 실제로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다. 나도 안다. 내가 너무나 이기적이라는 것을.. 죽을 때가 서서히 다가오니까 그런 것들을 믿겠다는 것, 내가 생각해도 조금 이기적이다.

묵주기도의 시작은 비록 타이밍은 비록 우연일 수도 있지만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성모신심에 큰 관심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유별나게 피할 그런 생각도 없었다. 솔직히 성모신심이나 묵주기도가 확실하게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지금 생각하니 아주 옛날에 알던 어떤 남자분이 그것을 혼자서 하는 것을 본적이 있긴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상상에 할머니들이 염주 같은 것을 굴리며 웅얼거리는 그런 모습도 있었다. 2007년 초의 일이었다. 그 전해에 한국에서 조카 수경이네가 왔다 갔을 때 연숙이 레지오 협조단원을 부탁한 모양이었고 나한테도 부탁을 하였다. 그것이 이상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사실 관심도 없이 대답조차 안 했을 터인데 그때는 그저 생각해 본다고 대답을 한 것이었다.

그것이 조그만 시작이었다. 얼마 후부터 묵주기도를 시작 하게 된 것이다. 사실 그때 조그만 사건이 있었다. 내가 내 자신과 내기를 한 것이다. 또한 성모님과의 내기였다. 그 당시 이승구씨의 business의 computer system을 봐 주고 돈 $100을 받았는데 그만 그 돈을 집에 오면서 잃어 버렸다. 바지 호주머니에서 없어진 것이다. 아마도 그때 시작한 동네걷기를 하다가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동네 한 바퀴를 이 잡듯이 뒤졌는데 허탕이었다. 그때 불현듯 높은 곳의 도움이 필요한 것을 느끼고 성모님께 약속을 하기를 만약 이 돈을 찾게 된다면 묵주기도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집에 주차했던 차 바로 옆에서 돈을 찾게 되었다. 차에서 내리면서 떨어진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제는 나도 비록 아무도 모르게 성모님과 약속을 한 것이지만, 체면상으로라도 이 약속을 어길 수가 없었고 정기적인 묵주기도를 매일 밤 하게 되었는데.. 참 내가 생각해도 재미가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장난이 아닌 듯 싶었다. 생각보다 덜 고통스럽고 지루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우선 기도라는 것에 호감이 갔다. 개인기도가 아니지만 기도는 기도가 아닌가. 지루할 수도 있는 그 알려진 기도를 하면서 참 재미있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문득문득 무언가 느끼게도 되었다. 그것이 진정한 하느님과의 대화가 아닐까..생각하면 불교의 불경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것의 이상한 묘미를 천주교에서 성모님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지루한 기도문의 반복을 어떻게 견디나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생각보다 그렇게 지루하지 않고 사실 그 시간 동안 문득 문득 생각나는 각가지들, 다른 때는 생각도 못하던 것들.. 그 모든 것들이 머리를 스친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것들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승화를 하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게 내가 그렇게 못하던 하느님과의 기도, 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묵주기도를 시작하면서 나는 또 하나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아직까지 묵주기도를 하게 되고 믿게 된 원동력이 된 것이다. 언제부터 시작된 지도 기억이 잘 안 나는 고질적 습관들.. 그런 것들에 나는 묵주기도의 힘을 빌린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런 것들을 끊거나 멀리하는 것이 예상외로 쉬웠다는 것이다. 아니면 진심으로 마음 속 깊이 그런 것을 나는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나의 의지력이 없었거나, 아니면 다른 각도로 보면 ‘내속의 악마’가 나를 잡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직까지 나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이건 이건 나도 참 믿기 힘든 것이다. 이것을 나는 성모님의 ‘도움’으로 생각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성모신심을 조금이나마 가지게 되었고 교황님, 특히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 께서 묵주기도를 그렇게 권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대강 나이와 시대에 따른 나의 신앙관과 신앙적인 경험을 적었다. 하지만 어찌 이것을 나의 극히 제한된 글 솜씨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노력은 해 보았다. 절대로 노력이 없이는 하느님을 알 수가 없다는 “진리”도 때 늦게 깨닫게 되어서 얼마나 많은 “공부” 가 필요한 지도 알게 되었다. 또한 내가 제일 부족하게 느끼는 “공동체와의 더 많은 친교”를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나가느냐 하는 커다란 과제를 놓고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도 절감을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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