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추위는 유별나다. 눈도 많이 왔다. 스키 캠프 간 손자들한테서 걸려온 전화 목소리가 낭랑하다. 눈다운 눈이 안 올 때는 제설기로 만든 눈으로 스키를 탄다는 걸 알고부터는 아이들을 스키장에 보내는 걸 마뜩찮아했는데 올해는 하늘이 내리는 눈으로 스키도 타고 썰매도 날 생각을 하니 나도 기분이 좋다. 집 앞에 숲이 있어 바라보는 눈 경치도 기막히다. 그래도 나는 눈이 무섭다. 친정 어머니가 금년처럼 폭설이 내린 해에 눈에 미끄러져서 엉치뼈가 망가진 후 노인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수술을 여러 번 거쳤지만 결국 보행의 자유는 회복하지 못하고 십 년 동안이나 집 안에 갇혀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지금 내 나이가 그 지경을 당하실 때의 어머니 나이와 같다. 노후에 보행의 자유를 잃는다는 게 어떤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눈만 오면 미리 집 안에 갇혀 지내기로 작정을 하고 있다. 죽는 날까지 잃고 싶지 않은 가장 소중한 걸 대라면 서슴지 않고 보행의 자유를 대겠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에도 눈이 많이 왔다. 어머니는 한겨울에 돌아가셨다. 영구차가 공원묘지 오르막길을 오르기가 여간 아슬아슬하지 않았다. 노인들일 춥도 덥도 않을 때 죽기를 소망하는 것도 봄 가을이라고 죽기가 덜 서럽거나 덜 힘들어서 그러겠는가. 다 자식들을 생각해서지. 그러나 노인들의 소망과는 달리 혹한이나 혹서가 계속될 때 노인들의 돌연사가 가장 많다고 한다. 지난 여름은 해마다 기온이 상승한다는 지구 온난화 현상을 감안하더라도 예년에 없는 찜통 더위가 입추 처서 지나고 나서까지 수그러들 줄 몰랐다. 작년의 그 유난스러운 더위가 이 엄동설한에도 문득문득 생각나며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에게는 옥탑방에 사는 사촌동생이 하나 있다. 둘 다 환갑 진갑 다 지나 늙어가는 처지지만 동생은 나보다 여덟 살이나 아래다. 볼이 늘 발그레하고 주름살이라곤 없는데 살피듬까지 좋아서 오십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인다. 그러나 겨울나기는 많이 힘들어한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무거운 것도 못 들고, 걷는 것도 느릿느릿 절룩거린다. 동생 말에 의하면 날씨만 추워지면 온몸의 마디가 안 쑤시는 데가 없다고 한다. 동생은 자기의 이런 병을 ‘웬수 관절이 또 도졌다’ 또는 ‘이놈의 관절만 없다면’ 이라고 마치 관절을 몹쓸 병 이름처럼 표현한다. 하긴 집에 온 손님들이 시국 얘기를 하면서 아이엠에프를 졸업했나 말았나, 설왕설래 하는 소리를 듣더니 부엌에서 나한테 귓속말로 아암프가 어디 대학이름이냐고 물었으니까.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와본 사람은 다들 동생을 얹혀사는 군식구인 줄 안다. 그러나 동생은 남한테 붙박이 식모 취급 당하는 건 싫어서 사촌동생이라는 걸 분명히 해두었기 때문에 어느 틈에 이모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생이 매일 오는 건 아니다. 보통 파출부처럼 일주일에 두 번 요일을 정해놓고 청소와 빨래, 밑반찬 등을 해주고 가지만 손님을 청할 일이 있을 때나 명절 제사 같은 때는 수시로 부를 수가 있다. 요새 젊은이들은 제 자식 백일이나 돌잔치까지 호텔이나 이름난 요릿집에서 하지만 나는 그 꼴 못 봐준다. 밖에서 점심이라도 한끼 사야 할 일이 있을 때뿐 아니라 누가 나에게 점심을 사고 싶다고 할 때까지도 나가기도 귀찮으니 집으로 오라고 부르곤 하는 것도 아마 그 꼴 못 봐준다는 강한 의사 표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집에서 밥 한끼 먹이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믿는 구석이 없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동생은 음식 솜씨가 좋다. 구메구메 해놓고 가는 밑반찬은 누가 맛있다고 칭찬만 해주면 아낌없이 덜어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기도 하다. 그러나 손님들은 그게 다 내 솜씨인 줄 안다. 자식들이 잔손 갈 나이를 벗어날 무렵부터 시작해서 근 삼십 년 가까이 이어져오는 동창계 친구들조차도 내가 탈 차례가 되면 네 손맛 좀 보게 너희 집에서 하는 주제에. 우리 동창 또래들은 사는 형편들은 제각각이지만 시대를 잘 탔는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런지 호텔 뷔페라면 최고의 식사인 줄 알고 웬 떡이냐 마구 식탐을 부리던 때가 언젯적이냐 싶게 다들 입맛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죽을 날이 가까울수록 고향 쪽으로 머리라도 두고 싶어하듯이 맛의 시간여행을 하고 싶은 거였다. 그런 골동품 혀들이 우리 집 음식맛을 최고로 쳐준다. 하다못해 슴슴하고 물렁한 무나물 같은 하찮은 것까지 저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맛을 못 낸다는 거였다. 내가 개성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내 손맛을 그렇게 신비화시키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런 칭찬이 싫지 않았다.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전통의 맥, 가문의 품격가지 얹어서 평가받고 있다고 여기고 싶었다. 순전히 칭찬을 듣는 맛에 툭하면 집에서 밥을 먹이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 천격스러운 것이란 획일적인 것의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집만의 음식맛은 김치를 비롯해서 고추장 된장까지 하나같이 동생의 손맛이지 내 손맛은 아니었다. 나는 뜨끔도 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동생의 손맛을 표절하고 있었다.

동생과 나는 사촌간이지만 같은 집에서 태어났고 한 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나는 공부 잘하는 아이로 낙인찍힘으로써 집안일은 조금도 안 거들고 공부만 하다가 시집을 가게 되었다. 시집가서는 살림살이에 집착이 많은 시어미님과의 평화 공존을 위해 살림살이에서 겉돌다가 남편의 수입이 들면서 나 대신 시골서 상경한 소녀를 시어미니 조수로 붙여줌으로써 살림이라는 걸 배울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다. 내가 시집살이할 50년대는 다들 살기가 지금과는 댈 것 아니게 곤궁했고 도농간의 격차도 더 심해 집에서 한 입이라도 덜려고 도시로 식모살이 오는 소녀들이 넘쳐날 때였다. 공부에 별 취미가 없던 동생은 중학교도 낙방을 해 초등학교 졸업에 그쳤다. 숙부에겐 맏딸인 동생은 몸 약한 숙모를 거들어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대학까지 간 두 동생 뒷바라지도 잘해서 딸년 대학 공부까지 시켜서 남 좋은 일만 한 우리 어머니의 우월감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동생은 바지런하고 솜씨가 좋을 뿐 아니라 얼굴도 예뻤다.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어른들이 인물값할까봐 전정긍긍할 정도로 예뻤으니까 시쳇말로 하면 섹시했었지 싶다. 아니나 다를까, 열두 살이나 더 먹은 유부남하고 열렬한 연애를 해서 숙부 내외를 기절초풍하게 놀래키다가 결국은 그 남자를 이혼시키고 정식 부부가 되었다. 각각 딴 집안으로 출가외인이 돼버린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도 만날까 말까 한 사이가 되어 제각기 자식과 살림을 늘리며 살다가 그 자식들이 혼기가 되면서 다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시집살이에 부담이 없어진 대신 부모나 자식의 경조사에 동원할 인력이 필요한 나이가 되면 평소 격조하게 지내던 친척이나 동창이 아쉬워지게 마련이다. 고등학교 때 단짝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긴 통화를 하거나 더 발전하여 친목계를 만들기도 하고 무리 지어 관광길에 나서보기도 하는 게 바로 이런 중년의 끄트머리 나이이다. 나하고 동생하고도 그런 나이가 되어 서로 찾을 것도 없이 저절로 가까워진 건 동생의 남편이 빚보증을 잘못 서서 살던 집에서 나앉고 나서부터였다. 넉넉지 못하다는 건 전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노후에 집까지 없어질 줄은 몰랐다. 동생은 남매를 낳을 때까지 시부모와 큰 동서 밑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하다가 큰형이 혼자서 물려받은 시골 땅이 오르는 바람에 겨우 작은 집을 하나 얻어가지고 세간을 날 수가 있었다. 동생의 남편은 착하기만 하고 경제적으로는 무능했기 때문에 동생은 그 집을 유일한 남편의 덕으로 알고 여간 대견해한 게 아니었다. 집이 생기고부터 친정 나들이도 잦아졌고 별로 큰 집도 아닌데도 방방이 세만 줘도 먹고 사는 건 문제없다고 친정 부모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집을 날린 건 다행히 남매를 다 결혼시킨 후였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잘해 보내지도 못한 사회 초년생들이라 모셔갈 만한 여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효성들은 지극해서 힘을 모아 마련한 모갯돈으로 얻어준 전세방이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전철로 두 정거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단독주택 단지 옥탑방이었다.  나는 이사 갈 때 딱 한 번 가봤는데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집이라 옥상으로 통하는 야외 계단만 좀 위태로워 보일 뿐, 널찍하고 깨끗한 주방과 수세식 화장실이 딸여 있을 뿐 아니라 옥상을 온통 마당처럼 쓸 수 있어서 셋방이라는 구차스러운 느낌이 안 들었다. 동생이 그 동네를 택한 건 바로 이웃에 큰아들 내외가 살고 있어서였다. 그들은 구멍가게보다 조금 나은 미니슈퍼를 경영하면서 가게에 딸린 어둡고 작은 방에서 살림을 하는데 며느리는 임신 중이었다. 장차 이이도 봐주고 아들이 배달 나가면 가게도 봐주고 싶어 아들 곁으로 온 거였다. 그러나 친구한테 속아 집까지 들어먹은 충격으로 제부가 몸져눕게 되고 그 약값이 만만치 않자 동생은 나한테 어디로 파출부라도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구차한 소리를 해왔다. 마친 나도 딸애가 뒤늦게 학위를 한답시고 겨우 젖 떨어진 어린 것을 이 할미한테 전적으로 갖다 맡겼을 때라 어디 소개해주고 말 것 없이 내 사정이 급했다. 그 후 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은 호강을 한 지가 어언 십여 년에 이른다. 시어미니가 돌아가시고 식모라는 직업도 사라진 후 나는 파출부 따라 식성까지 바뀌는 생활을 해왔다. 나는 내가 살림을 할 줄도 모르고 취미도 없기 때문에 누굴 가르칠 줄도 모른다. 정 음식을 맛없게 하면 저 사람은 음식은 못해도 청호 하나는 잘하지, 도는 다림질 하나는 끝내주지 하는 식으로 좋은 면만 보려고 애썼다. 다 못해야만 차라리 내가 하는 게 속 편할 것 같아 그만 두게 하고 부지런을 떨어봤댔자 한 달이 못 가 또 딴 파출부를 구해 들이곤 했다.

동생 덕으로 내 딸이 무사히 학위를 하고 나자 내 남편이 병들어 입-퇴원을 되풀이하게 됐다. 동생은 한약도 잘 달이고 죽도 잘 쒔다. 남편이 병석에 있는 동안 동생은 나에게 내 자식들보다 더 의지가 되었다. 환자의 몸과 마음에 보비위보다 더 좋은 효자는 없다. 동생은 그걸 완벽하게 해주었다. 내 남편이 투병 중인 동안 나는 동생의 남편도 병석에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이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오게 하고 밤늦도록 붙잡아두려고 했다. 설사 제부 생각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해도 수고비를 넉넉히 쳐주니까 동생도 바라는 바이지 나를 심하게 여길 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과부가 된 지 삼 녀 후에 동생도 과부가 되었다. 그 삼 년 동안 나는 동생이 내 남편한테 해준 생각을 해서라도 제부에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우선 동생을 매일 쓸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매일 오도록 했다. 시혜보다는 정당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게 동생을 돕는 길이었다. 문병도 가보려고 했지만 동생이 한사코 싫다고 했다. 동생의 말투로 미루어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환자보다도 사는 형편인 듯했다. 이사 갈 때만 해도 겉은 반드르르해 보였지만 워낙 날림집인데다 세줘먹으로고 나중에 올린 옥탑방은 더 엉터리여서 여기저기 뒤틀리고 금 가서 겨울에는 수도와 화장실이 얼어붙어 못 쓰고 여름에는 비까지 새서 비닐 조각으로 임시변통을 해야 한다고 했다. 환자까지 있는 집 꼬락서니가 그러하니 다년간 누적된 누추가 어떠하리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았다. 보이고 싶지 않아하는 동생 마음에 따르는 게 수였다. 얼어붙는 상하수도 때문에 겨울이면 물통이나 요강까지 들고 옥외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동생의 관절염은 해마다 조금씩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동생은 약을 입에 달고 살았다. 관절이 부드러워지는 봄 여름에도 약국만 바라봐도 삭신이 쑤셔서 약을 안 먹고는 모소 배긴다고 했다. 나는 문병을 못 갔지만 내 딴엔 남보다 후한 월급 외에도 도움을 주려고 은근히 제부에게 많이 배려를 하는 편이었다. 남편의 유품 중 따뜻하고 편한 옷을 죄다 보냈고, 집에서 별식을 할 때뿐 아니라 자식들이 나한테 보내는 고깃근이나 영양제도 늘 넉넉하게 나누었다. 약식이나 인절미 같은 것도 잘 먹고 소화도 잘 시킨다고 하기에 출입만 못할 뿐 제부는 마냥 살 줄 알았다. 물론 그걸 동생의 복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착하고 솜씨 좋은 동생이 어쩌면 복은 그렇게 지지리도 없을까 생각할 때마다 그게 제부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

명절을 앞두고 있어서 동생하고 준비할 게 이것저것 적지 않을 때 동생한테서 못 오겠다는 전화가 왔다. 매일 온다고는 하나 지 볼일을 못 볼 정도로 매여 있는 것 아니어서 시집 대소사나 친구끼리의 계모임에도 거의 안 빠지는 동생이었다. 그렇지만 사전 양해 없이 긴요할 때 빠지겠다고 한 건 처음이었다. 나는 벌컥 화가 났지만 환자가 아침에도 먹을 걸 안 찾는 게 암만해도 이상해서 집을 비우기가 싫다고 했다. 지척에 사는 아들 며느리는 뒀다 뭐하려느냐고 역정을 내려다 말았는데 참길 잘했다. 제부는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옥외 계단으로 시신을 내가게 될까 봐 늘 걱정하던 동생은 119를 불러 혼수 상태의 병자를 병원으로 옮기고 그러고 나서 곧 임종을 맞았다고 했다. 만약 내가 성질을 부려서 동생이 남편 임종도 못 보게 했더라면 어쩔 번했나, 생각날 때마다 모골이 송연 해지곤 한다. 나중에 들어서 안 얘기지만 제부는 죽기 전날 밤 느닷없이 동생이 손목을 잡고 사랑한다고 말하더란다. 기분이 이상해서 누구 보고 싶은 사람 없냐, 아이들을 부를까 물어봤더니 아니 아무도 안 보고 싶다고 당신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사랑한다고 강조하더란다. 그 다음날 아침 안 깨어나길래 죽을 줄 알고 모든 조치를 침착하게 취할 수 있었노라고 했다. 그 후에도 동생은 아무한테나 사랑한다는 제 남편의 마지막 말을 되뇌며 해해거렸다. 남편으로부터 그런 임종의 말을 들은 여편네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는 투였다. 아무리 작은 것에 행복해하는 동생이라지만 저리도 속이 없을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동생에게 남겨진 건 더 이상 퇴락할 여지도 없을 정도로 누추한 전세방이 다였다. 그나마 전셋돈을 올려달라지 않는 것만 다행이었다. 빼 봤댔자 천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전세방이 서울 시내에 어디 있겠느냐.  주인은 곧 재개발이 되어 헐릴 집이라는 핑계로 고쳐주지도 않는 대신 돈도 더 달래지 않았다. 동생의 두 자식들도 저마다 옹색한 단칸방에서 제 자식을 둘씩 낳아 기르면서 반듯한 독채 전셋집을 얻을 만한 돈을 마련하는 걸 목표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동생은 자식들이 저 살 궁리만 한다고 섭섭해하는 소리를 한 번도 안 했다. 오히려 부모 덕 없는 걸 원망하지 않고 씩씩하게 사는 걸 고마워했다.

관절 때문에 겨울나기를 유난히 힘들어하던 동생이 지난 여름에는 더위를 못 참아하면서 그 좋던 얼굴도 점점 못 쓰게 돼가는 게 눈에 띄었다. 남편의 상중에도 화색을 잃지 않고 무슨 잔칫날처럼 조문객을 챙겨 먹이려고 잠시도 엉덩이를 붙이지 않던 동생이었다. 어디 아픈 게 아니냐고 물어도 괜찮다는 대답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혈색 없는 얼굴에 푸석한 부기까지 나타났다. 안 되겠다 싶어 심각하게 따져 물었더니 옥탑방의 더위는 밤에도 화덕 속 같다는 것이었다. 선풍기를 두 대나 틀어 놓고 자는데도 환장하게 더워서 러니셔츠를 물에 담갔다가 대강 짜서 입고 자면 그게 마르는 동안은 좀 견딜 만해서 잠을 청할 수가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무겁고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젖은 옷을 입고 잔다는 소리를 충격적이었다. 나는 삼복더위가 가실 때까지만이라도 우리 집에 같이 있자는 소리가 입 밖에까지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우리 집은 단열과 통풍이 잘돼 있어 열대야 현상을 거의 못 느끼고 여름을 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끝없는 수다를 참아낼 생각을 하면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평소에도 동생은 우리 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의 한 시간은 수다를 떨어야 일을 시작했다. 나하고 관계되는 사람 얘기라면 들을 만도 하겠는데, 거의가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집의 친척들 얘기 아니면 친목계원들 얘기였다. 동생은 시집 쪽이 번족한데 이젠 대가 갈려 젊은이들 세상이 되니까 서럽게 된 노인도 많고 재산 관리를 잘못해 억울하게 된 노인이나 병든 노인도 여럿 생겨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늙은이들 모인 데서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그저 그런 구질구질하고 시시콜콜한 얘기였다. 아마도 우리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친척간의 왕래가 정상적으로 회복됐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나 동생이 그런 얘기를 할 때 그렇게도 신이 나서 한 얘기를 하고 또 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것은, 제 잇속만 챙기고 제 마누라 말만 받들어 모실 줄 아는 요새 젊은 것들 중에서는 그래도 내 새끼들이 그 중 효자더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동생의 큰 아들은 소원대로 방이 세 개 잇는 독채 전세로 이사를 한 지 얼마 안 되었다. 나는 그때 으례 동생이 그 끔찍한 옥탑방을 면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말이 방 세 개지, 하나는 창고로 쓰기도 하고, 중학교 갈 날이 머지않은 손자들 두 놈은 한 놈만 들어서도 집 안이 곽 찰 만큼 숙성했다. 동생은 거기 같이 들어가 살 생각은 꿈에도 안 해본 것 같았지만 젖은 옷을 입고 잔다는 소리를 듣고부터는 여름 동안만이라도 와 있으라는 소리를 안 하는 아들 내외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집에 와 있으라는 소리를 꼴깍 삼키고 만 것은 수다 때문이라기보다는 누가 더 동생에게 가까울까 하는 책임감의 문제였다.

와 있으라고는 못했지만 며칠 바캉스를 다녀오겠다는 말에는 반색을 하며 그러라고 했다. 바캉스란 말이 동생 입에서 나오니까 그렇게 신선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남해의 작은 섬에서 민박집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섬은 주위가 청정해역일 뿐 아니라 여름에 서늘하고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없다면서 한번 꼭 놀로 오란다는 것이었다. 넉넉잡아 일주일 정도 있다 올 줄 안 동생은 열흘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민박집이 동생을 부른 것은 서늘한 여름을 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동생을 부려먹고 싶어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자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게 좋은 섬이라면 올 여름 같은 혹서에 오죽 피서객이 많이 몰려들겠는가. 민박집이 호황을 맞아 일손이 달릴게 뻔했다. 그러잖아도 공밥을 얻어먹을 동생이 아니었다. 오죽 바지런을 떨며 구석구석 쓸고 닦고, 엽엽하게 투숙객들 시중을 들 것인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그 속없는 것이 본업을 까맣게 잊고 팁 몇 푼 얻어 쓰는 재미에 팔려 배알이라도 빼줄 듯이 해해거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치밀었다. 파출부란 제도가 있기 전 옛날, 요새 너도나도, 아무리 가난뱅이라도 밥만 안 굶으면 다 자가용 부리듯이 도시에선 집집마다 식모를 두고 살던 때가 있었다. 공단이 생기면서 그 흔한 식모가 귀해지기 시작하자 남의 집 식모를 빼돌리다가 탄로가 나서 친하던 이웃끼리 쌈박질이 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일을 당했을 때처럼 그 민박집한테 맹렬한 적의를 느꼈다. 동생의 아들네고 전화를 걸어 섬의 민박집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동생의 이름을 대고 바꿔달랬더니 심부름을 나갔다고 했다. 그 집에서 부려먹고 있다는 내 추측은 틀림이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환갑 노인에게 심부름이라니, 설사 심부름을 나갔다 해도 잠깐 출타를 했다고 하면 듣기 좋을 것을, 하고 나는 민박집의 본데없음을 마음껏 경멸했다. 그날 저녁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밝고 들뜬 목소리로 그 섬이 얼마나 공기 좋고 서늘한지 자랑만 늘어놓고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불편했나 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괘씸했지만 젖은 옷을 입고 더위를 참아낼 때 모른 척한 게 아직도 양심에 걸려 있어서 참고 들어주었다. 그 섬이 그렇게 쾌적하다면 추석까지라도 기다려야지 별수 있는가. 금년엔 추석이 일찍 들어 선들바람도 나기 전에 명절 준비를 해야 할 생각을 하면서 나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마냥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동생이 지상낙원처음 말하는 섬이 어디서 어떻게 가는 곳이며 이름은 뭐냐고 물어보았다.삼천포에서 여객선으로 두 시간가량 걸리는 섬으로 이름은 사량도라고 했다. 나는 사랑도? 이름 한번 요상하다고 했더니 동생은 알이 아니라 량이라고 고쳐주었다. 그러나 나는 외우기 쉽게 사랑도로 생각하기로 하고, 아무리 거기가 좋아도 너무 추석 임박해서 오지 말고 넉넉하게 남겨놓고 오도록 하라고만 당부하고 정화를 끊으려고 했다. 동생은 제 남편 제사나 차례를 분수에 넘치게 지내는 편이었다. 우리 집은 차례뿐 아니라 손님도 치러야 한다. 장보기까지 동생의 손길이 두 집에 고루 미치려면 적어도 닷새 전에는 와야 한다. 동생은 마지못한 듯 시들한 목소리로 추석 전에는 가야지 하면서도 석연치 않은 말을 덧붙였다. 언니, 힘들어서 어떡해. 나만 믿지 말고 사람을 구해봐. 사람을 구하라니 딴 파출부를 쓰란 얘기고, 지가 여태껏 고작 파출부 노릇이나 했단 소리가 아닌가. 내가 절 어떻게 대접했는데. 나는 치사하게도 그 동안 내가 동생에게 베푼 갖가지 혜택을 일일이 떠올리면서 그 배은망덕에 이라고 갈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부가 죽은 후 하루 걸러 오도록 하면서도 수입이 줄지 않도록 일당을 올리고, 김장이나 명절 손님 초대 등 가외로 부를 때는 후하게 웃돈을 얹어줬으며, 비싼 옷도 조금만 싫증이 나면 저한테 아낌없이 물려줬으며, 집에 고기나 갈비가 남아돈다 싶으면 즉각 저한테 넘겨줬으며,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어린이날엔 내 손자가 안 챙겨도 넷이나 되는 제 손자들은 꼬박꼬박 챙겨서 설빔이나 선물을 장만했으며, 외국 여행 갔다가도 제가 행여 며느리한테 얕 보일까 봐 며느리 주라고 비싼 영양 크림 사오는 걸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것 등등 열거하자면 한정이 없었다. 그게 어떻게 보통 파출부에게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러나 그런 걸 잊지 않고 꼽고 있는 자신이 문득 남처럼 역겨워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과연 추석 미처도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추석을 일주일이나 앞두고 동생은 돌아왔고 돌아오던마다 우리 집 먼저 들이닥쳤다. 동생은 얼굴에서 푸석한 부기가 말끔히 가시고 보기 좋게 탄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동생의 건강뿐 아니라 내 생활의 질서까지 원상으로 돌아온 안도감에 나는 함박웃음을 띠고 동생을 맞아들였다. 그러면 그렇지. 반가운 김에 아유 못된 것, 난 네가 사랑도에서 사랑에 빠진 줄 알았지 뭐냐고 농담까지 한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동생은 화들짝 놀라며 언니, 내가 사랑에 빠진 걸 어떻게 알았어? 하며 신기해하는 게 아닌가. 농담을 진담으로 받을 때의 당혹감이라니. 동생이 혼자 됐을 때만 해도 비록 꼴깍 넘어가기 직전이었지만 쉰자가 들어가는 나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환갑 진갑 다 받아먹은 뒤가 아닌가. 그 나이에 더군다나 섬에서 누구와 사랑에 빠질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랑도인지 사량도인지가 갑자기 근해의 파도 속에서 비너스가 요상하고 변덕스러운 화냥기를 바람에 실어보내고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섬으로 변했다.

 

언니, 난 처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섬에 간 건 아니야. 그렇지만 가보니까 민박집은 계획적이었더라구. 날 그냥 놔두면 안 되겠다 싶었나봐. 내가 언니한테도 못할 소리도 그 여편네한테는 다 털어놓았으니까. 올 여름이 좀 더웠수. 대식이 애비가 전셋집이나마 처음으로 구색을 갖춘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니까 기쁘고 대견하면서도 인사성으로라도 같이 살잔 소리가 한마디쯤 있을 줄 알았는데 며칠이 지나도 암말이 없더라구.  게다가 처갓집에서 떡하니 새 집에다 에어컨을 들여놔줘서 내가 갈 때마다 시원하게 켜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옥탑방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펄쩍펄쩍 뛰게 덥고, 게다가 서럽기까지 한 거야. 그때마다 젖은 옷을 입고 더위를 견디기가 너무 비참해 전화통 붙들고 민박집에다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하곤 했더랬어. 그 동안 옷이 다 말라 다시 한번 적셔다가 입고는 통화를 계속한 적도 있는걸. 물론 내가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다는 중계방송도 빠뜨리지 않았지. 내가 누구유. 그 친구가 그러다 병 나겠다고 섬에 와서 여름을 나고 가라고 하길래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떠났던 거야. 오라는 데가 있는 게 그렇게 좋더라구. 폐가 될 걱정 같은 건 안 했어. 어디 가든 내 몸 하나만 안 아끼면 밥값 할 자신은 있었으니까. 죽으면 썩을 놈의 손 뭣하러 아끼겠어. 언니, 언니, 언니도 여윳돈 있으면 그 섬에 별장 하나 사. 삼천포에서 배루다 두 시간도 채 안 걸려. 얼마나 좋다구. 난 사람들이 다 좋다는 제주도도 그닥 좋은 줄 몰랐는데 사량도는 첫박에 마음에 쏙 들더라구. 여기가 바로 선경이다 싶었으니까. 순 서울 사람인 민박집이 하필 거기다가 노후 설계를 하게 됐는지 이해가 되더라구. 얼마나 시원한지 서울의 찜통 더위가 딴 나라 일 같더라구. 거긴 복더위도 없지만 엄동설한도 없대. 겨울에도 얼음이 어는 법이 없다니까. 들이 사철 푸르대. 그래도 가을 되면 나무들이 단풍은 든다나봐. 노오란 은행잎이 파아란 잔디 위에 떨어질 생각을 해봐. 내가 뭣에 홀렸다구? 아마도. 민박집이 얼마나 잘해주는지 도와주고 싶어도 할 일도 없더라구. 심부름하는 아녀석도 하나 있구 민박 손님들은 잠만 자지 밥은 안 해달라니까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언니, 난 아무리 할 일이 없어도 퍼질러서 낮잠이나 자고 그러지는 못하는 거 언니도 알잖아. 한시 반시 안 놀리던 팔다리 너무 편하게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아침 저녁 섬을 한 바퀴씩 돌면서 선창가 구경도 하고 들일하는 사람들과 만수받이도 하니까 서울서 더위 먹은 부기도 빠지고 밥맛도 좋아지더라구. 근데 이상한 게 내가 바람 쐬러 나갈 때마다 민박집은 곡 딸 미팅 내보내는 여대생 엄마처럼 나한테 잔소리를 하는 거야. 화장하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라구. 그러잖아도 섬 여자들보다 얼굴이 하얗고 팽팽한 게 미안해 죽겠는데. 언니 섬 여편네들 말도 말아. 내 나이면 새까만 얼굴에 굵은 주름이 밭고랑 같다니까. 서울서도 아무도 나를 육십대로 안 봤잖아. 다들 열 살은 젊게 봤는데 거기선 꺾어진 육십으로 보는 사람까지 있더라구.  눈들이 빈 게 아니라 즈네들하고 비교해서 그렇게 본 거지. 그렇게 지내길 일주일도 안 돼서 청혼이 들어온 거야. 삼천포까지 배 타고 나가서 다방에서 만났는데 낯익은 얼굴이더라구. 작은 섬이니까 반하잖아. 내가 도 오죽 빨빨거리며 쏘다녔수. 홀아비인 줄은 몰았지만 점잖기가 꼭  교장선생님 같아서 길을 비켜드리며 인사를 하곤 했던 분이었어. 그게 다냐구? 물론 나를 맞선을 보이려고 삼천포까지 끌고 나가기 전에 민박집이 오주구 나를 꼬셨겠어. 언니도 감언이설은 무슨, 그게 아니라 한 동네서 겪어본 그 노인네 마음 씀씀이랑, 집안 사정이랑, 재산 정도랑 겪어본 대로의 그 노인 속내를 일러주면서 나한테는 과분한 혼처라는 거지. 교장선생님은 아니었지만 그 노인이 제일 되고 싶었던 게 교장선생님이었대. 상처한 지는 일 년도 안 돼. 금년 이월이었다니까. 금슬 좋기로 동네서 소문난 부부였다나.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언니, 난 그 소리가 젤로 마음에 들더라. 우리도 소문난 잉꼬부부였으니까. 그래야 서로 꿀릴 게 없잖우. 다 된 밥인데 새삼스럽게 맞선은 뭣하러 봤냐구? 그래 맞아. 우리끼리는 민박집이 바란 것보다 더 쉽게 눈이 맞아버린 거야. 그러니까 삼천포까지 나간 건 맞선이 아니라 상견례였어. 영감님은 오남매를 두었는데 아들 셋을 다 대학까지 가르치고 딸 둘은 고등학교까지만 가르친 대신 다 대학 나온 사위를 맞았는데 그이들이 삼천포에서도 살고 부산 마산에서도 사는데 그이들한테 먼저 나를 소개시키고 승낙을 받은 절차를 밟고 싶다는 거야. 자식들이 마다할 리는 없지만 그래야 앞으로도 내 입장이 떳떳하다는 거지. 오남매가 하나도 안 빠지고 동부인해 나왔으니 그 식구만 해도 열 명이 아니우. 게다가 육지에 사는 아우 누이들까지 나왔으니 얼마나 근검해. 교장선생님보다 더 잘나 보이더라구. 대학 졸업생들이 다들 절절매는데 총장님이라면 누가 뭐랄 거야. 영감님이 섬에서도 존ㄴ경받고 있다는ㄴ 게 느껴져는데 처신을 저잖게 하는 것도 있지만 그 섬에서 자식들을 모조리 그만큼 공부시킨 집은 그 집 하나밖에 없다니까 그럴 만도 하지 뭐. 다방에서 음식점으로 옮겨 앉아 회식을 하면서 영감님은 부득부득 나를 자기 옆에 앉히고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눈을 못 데지. 건장한 아들 사위들이 차례로 잔을 올리며 어머니 어머니 붙임성 있게 굴지. 그래노니 시쳇말로 내가 뿅 가지 않았겠수. 언니, 언니는 왜 또 도끼눈을 뜨고 그래. 그 집 식구만 젤이구 우리 족 식구들은 뭘로 아냐구. 그건 아니지 영감님이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 아냐. 부득부득 나하고 같이 상경해서 우리 식구한테 자기를 선보이겠다는 거야. 내가 안 그래도 된다고, 나 혼자 가서 승낙을 받고 오마구 했어. 솔직히 반대할 사람도 없지만 반길 사람도 없잖아. 내 자식들은 데면데면하고 친정붙이들은 다들 언니처럼 쌀쌀맞고, 시집은 대가 갈려 조카들만 남았는데 뿔뿔이 흩어져 제 살기 바쁜 그 애들을 불러모아 숙모 시집간다고 광고를 치면 아마 날 미쳐도 더럽게 미친 년 취급할 테고. 내 살던 데 보여주기도 싫고… 사람 마음이 어쩌면 그렇게 간사스러운지 아무리 집 가지 않은 집이라도 온종일 뼈빠지게 일하다가 밤에 기어들어가 다리 벋고 누우면 세상 편한 게 내 집구석이다 싶더니만 이제 다시는 거기서 못 살 것 같아. 그럼 어젯밤 대식이네서 잤지. 아들 며느리 보는 앞에서 경환이 경숙이한테도 전화 걸어서 자초지종을 다 말해버렸어. 승낙은 제까짓 것들이 무슨 권리로 승낙을 하고 말고 해. 통고한 거지. 그래도 이언 일에는 여자 형제가 낫더라구. 경환이는 누나가 오죽해서 그런 결정을 하게 됐겠느냐면서 잘 살기를 바란다고 하는데 정이 조금도 안 느껴졌어.  그래도 경숙이는 놀라서 울먹이면ㄴ서 자기 집에 와서 자면서 자세한 얘기 하자고 하더군. 오늘 내일은 경숙이네서 잘 거야. 아냐 그 다음날도 언니네는 못 오지. 모레 내려가야 하니까. 모레 새벽에 떠나야 해안에 섬에 닿을 수가 있거던. 추석? 추석이야 물론 섬에서 쇠야지. 대식 애비가 즈이 애비 차례 어련히 지낼려구. 거기 영감님이 당신 마누라 차례를 내 손으로 차려주길 원해. 마나님 차례는 올해가 처음이지만 영감님이 모셔야 할 조상이 네 분이나 더 있는데 자식들이 미리 오지 않고 얕얕이 시간 맞춰 오는 바람에 죽은 마나님이 명절이나 제삿날은 육지 바라보느라 고개가 한 뼘은 늘어났대. 태풍이라도 와서 뱃길이 끊기면 못 오기 일쑤고. 자기는 죽은 마나님처럼 자식바라기만 하고 살지 않을 거래. 둘이서 오순도순 차리재. 나도 그 노인이 나를 안 놓치려고 그렇게 급하게 군다는 거 알아. 모레 곡 삼천포에서 만나자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 나를 육지로 보내준 거야. 삼천포까지 영감님이 자기 배를 가지고 마중 나오기로 했어. 명색이 혼행길인데 어떻게 어중이떠중이 다 타는 여객선을 타게 하냐고. 만일 그날 내가 섬천포에 안 나타나면 내가 가족들의 승낙을 못 받은 걸로 알겠다고 했어. 그럼 영감님이 얼마나 풀이 죽겠어. 생각만 해도 불상해서 가슴이 저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삼십여 년을 해로한 제 영감 차례를 내팽개치고 어느 개뼉다귀인지 모를 늙은 뱃놈의 죽은 마누라 차례를 지내러 가겠다는 게 어디 제정신인가. 너 환장을 했구나. 나는 차갑게 내뱉고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동생이 열두 살이나 더 먹은 기혼자와 연애해서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을 때 생각이 났다. 식구들의 그러건 말건 동생은 그 연애를 완성시켰고, 그 남편이 죽으면서 남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지금도 남들에게 풍기면서 자랑하기를 잘한다. 옥탑방의 지옥불을 견디게 한 힘의 방 이상이 아마도 그 말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런 동생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그 남자는 칠십이지만 건장하고 점잖아서 앞에서 보면 교장선생님 같고, 뒤에서 보면 청년 같다나. 자기 소유의 어선을 가지고 있고, 바다 하나만 믿고 자식을 다섯 다 고등교육 시킬 정도로 근면할 뿐 아니라 지금도 그가 놓은 통발에서만 유난히 많은 고기가 잡힐 정도로 바다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능숙한 어부란다. 동생은 일어서 나가면서까지 영감님 자랑을 하고 갔다.

다음날 차편이 생긴 김에 추석 장을 보러 나갔다. 나는 일손 생각은 깜박 잊고 예년에 하던 대로 구색 맞춰 제수거리를 넉넉히 장만했다. 다용도실에 그걸 쏟아놓으니 엄청난 부피였다. 냉장실 냉동실로 나누어 넣는 것조차 생전 안 해보던 일처럼 난감하게 느껴졌다. 저걸 다 어쩌란 말인가. 사다만 내던지면 다듬고 지지고 볶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면서 제상과 손님상이 저절로 차려지던 때는 가버린 것이다. 친구들은 생전 진일을 모르는 나를 인복이 좋다고 부러워했었다. 인복을 놓친 나는 지금 얼마나 불쌍한가. 엉엉 소리를 내서 울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제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가. 나는 그 동안 내가 저한테 베푼 온갖 혜택을 떠올리면서 제가 나한테 미리 아쉰 소리만 했더라면 뭘 못해줬을까. 집도 사줬을 것처럼 내 후한 마음을 마냥 부풀렸다. 그러나 사다가 내던지기만 하면 진수성찬이 저절로 차려지던 지상낙원은 잃어버린 뒤였다.  그 좋은 솜씨로, 예전 같으면 궁중숙수를 해도 손색이 없을 솜씨로 섬의 거칠고 단순한 뱃놈의 밥상을 차려주러 간 것이다.  이건 돼지에게 진주 정도가  아니다.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나는 질투로 분기탱천하여 동생의 친동기들한테 전화통을 돌렸다. 먼저 경환이한테 이게 얼마나 우세스러운 일이라는 걸 강조했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이냐? 나는 구태여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열녀나 정경부인가지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육이오 때 우리 집안 내에서 떼로 생겨난 과부들을 생각해냈다. 어쩌면 그 많은 떼과부들이 하나도 개가를 안 하고 수절을 했을까. 말을 하면서도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겠죠. 떼과부는 떼죽음 때문에 생겨난 건데 어디로 개가를 하겠수. 경환이가 느물댔다. 그리고 자기도 충격을 받았지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누님의 행복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어쩌겠다는 소린지 감이 잘 안 잡혔지만 회사로 건 전화를 더 붙들고 늘어질 수가 없었다. 다음은 경숙이네였다. 전화를 받은 경숙이는 지금 언니는 이것저것 섬에서 부족한 걸 사러 나갔다고 했다. 마침 잘됐다. 너하고 의논하려고 걸었단다. 느이 언니 말이다. 이렇게 서두를 꺼내자 경숙이는 즉각 나도 심란해 죽겠어, 그 동안 난 사는 데 골몰해서 언니한테 제대로 신경을 못 서준 게 이렇게 마음에 걸릴 수가 없네, 하고 울먹이기까지 하는 게 말이 될 것 같았다. 여자끼리 통하려면 가문보다는 정서적인 호소가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일을 우리가 다 같이 적극적으로 막아야 하는 첫째가는 이유를 정에 무르고 타산적이지  못한 그녀의 다정다감한 성격을 꼽았다. 너도 알지 느이 언니하고 느이 형부하고 우리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결혼한 거. 그건 안 되는 결혼이라고 그렇게 말렸건만 기어코 그리고 시집을 가더니만 뭐 좋은 거 있더냐. 느이 형부 생전 마누라 지지리 고생만 시키더니 말년에는 병수발까지 얼마나 오래 시켰냐. 그래도 싫은 내색 한 번 안 하고 해해거리고 살았지만 아마 속으론 그때 어른들 말을 들을 걸, 후회막심이었을 거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경숙이가 발끈하는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우. 마치 우리 언니가 평생 불행하게 산 것처럼 말하는데 우리 언니가 언니보다 좀 어렵게 살았다고 그렇게 깔보나 본데 우리 언니 남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살았어요. 이렇게 나오는데야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아아 내 꼴이 이게 뭐란 말인가. 처량하다 못해 참담했다.

동생하고 전화로만 작별 인사를 하고 외출 중 택시 속에서 방송을 들으니 남해에 파랑주의보가 내려졌다 한다. 태풍이 북상 중인 모양이다. 순간 하늘이 이 늙은 철부지들의 만남을 훼방 놓았으면 하는 불티 같은 희망이 가슴을 짜릿하게 했다. 그 후에도 동생한테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화가 걸려왔다. 워낙 수다떨기 좋아하는 동생이었다. 주로 제 자랑 그리고 내 걱정이었다. 사람 구했어, 아직도 못 구했다구? 이 세상에 웬 떡이 어딨수. 몇 번 갈아 들이다 보면 웬만한 사람 만날 거야. 언니도 그 성질 좀 죽어야 해. 나도 언니한테 얼마나 스트레스 받은 줄 알아. 그래 지금도 스트레스 안 받아서 좋겠구나. 나도 동생이 한나는 대로 성질 죽이고 유하게 대답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 먼 곳에서 택배로 뭘 부쳐오기도 했다. 아이스박스로 바다메기라나 물메기라나 하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징그러운 생선을 부쳐오기도 하고, 간 마늘을 부쳐오기도 했다. 그 섬 마늘은 단단하고 맛좋기로 전국적으로 소문난 마늘이라 혼자 먹기 아까워서 부치는데 일하기 싫어하는 언니 생각을 해서 까서 씻어서 깨끗이 행주질해서 보내니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 것들을 받고 나서도 내 쪽에서 섬으로 전화 거는 일은 없었다. 고맙지 않아서도 전화값이 아까워서도 아니고, 그 영감이 받을까 봐서였다. 전화상으로라도 그 늙은 뱃놈하고 수인사를 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내 주위 사람에게 동생이 재가했다는 걸 알리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생겼을 때는 그녀가 남해의 그림 같은 섬의 선주한테로 시집갔다고 말해주곤 했다. 내 체면을 위해선지 모르지만 대단한 격상이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동생한테서 제 남편 제사를 지내러 상경한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알기론 그 영감이 전남편 제사를 지내라고 새 마누라를 육지로 내보낼 남자가 아니었다. 동생은 그 천진하고도 날렵한 말솜씨로 거짓을 꾸며대 그 영감을 감쪽같이 속였을 것이다.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이건 동생이 그 섬을 탈출하겠다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오겠다는 날보다 이틀이나 더 일찍 서울에 왔다. 영감을 속이고 온 것도 영감 곁을 도망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들네로 도착하자마자 걸려온 전화 목소리는 영감이 제수거리와 서울 가서 옷 사 입으라고 찔러 준 돈 봉투 자랑으로 들떠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명랑하게 조잘대는 시냇물 위로 점점이 떠내려오는 복사꽃잎을 떠올렸다. 다음날 물메기 말린 걸 한 보따리 들고 내 앞에 나타난 동생을 보자 그저 반갑기만 해서 허둥대며 맞아들였다. 석 달 만에 만난 동생은 어찌나 생기가 넘치는지, 첫 근친온 딸자식이라 해도 그만하면 시집 잘 갔구나 마음을 놓고 말 것 같았다. 나는 아끼던 포도주를 따서 건배하고 물메기 말린 것을 짝짝 찢어 안주 삼아 둘이서 한 병을 다 비웠다. 아직도 제삿날까지는 사흘이나 더 남아 있었다. 나는 해롱해롱해진 김에 생전 안 하던 짓을 해버렸다. 동생더러 나하고 같이 자자고 붙든 것이다. 그날 밤 자리 나란히 갈고 같이 자면서 동생의 수다를 끝까지 다 들어줬는지 끝나기 전에 스르르 잠들어버렸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생에 대해 궁금한 건 다 알아버린 건 확실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도 일말의 불안감도 가셔버렸으니 말이다.

 

언니, 그건 언니가 이상한 거야. 영감님이 날 그이 제사에 보내준 게 뭐가 그렇게 이상하다는 거야. 보내주긴, 내가 갔다 온다고 했어. 나도 즈이 마누라 첫 차례 지내려고 풍랑을 무릅쓰고 갔는데 그 정도의 주장도 못해. 추석밑에 영감님하고 삼천포에서 만나 섬에 들어갈 때 나 죽을 뻔했다. 정말이야. 그때 파랑주의보가 내려서 여객선도 못 뜰 때였어. 영감님은 그전에 섬에서 나와 삼천포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지. 내가 터미널에 내리니까 어찌나 기뻐하는지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 같더라구. 내가 언약을 지키리라고 백 퍼센트 믿은 건 아니었나봐. 안 나타나면 서울까지 쫓아가봐야지 혼자 섬으로 돌아갈 순 없다고 생각해다니까.  서울서도 못 찾으면 어쩔 뻔했냐고 물어봤더니 바다에 빠져 죽었을 거래. 사내들 허풍은 늙어도 못 말린다니까.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선뜻 배에 날 태우려 들지를 않는 거야. 삼천포에 큰딸이 사는데 거기서 하룻밤 자고 갔으면 하지 뭐야. 풍랑이 심상치 않다는 거지. 아주 못 갈 정도냐고 물었더니 그렇지는 않다길래 짐도 있고 피곤해서 이왕이면 내 집에 짐 풀고 푹 쉬고 싶다고 했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더라구. 그럼 그러자고 배를 태우더군. 나중에 그러는데 내가 벌써 자기 집을 내 집처럼 말하는 걸 듣고 이젠 됐다 싶었다나. 배가 어찌나 출렁이는지, 우리 배를 타본 건 그때가 처음이거든. 그래도 난 여객선보다 작아서 그런 줄 알고 하나도 안 무서웠어. 내가 바다에 대해서 뭘 알우. 영감님이 운전하는 배에 영감님하고 같이 탔다는 생각만 하면 겁나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구. 배가 기우뚱하면서 파도가 덮칠 때마다 꺄악 소리를 지르며 재미나 하니까 영감님이 화를 내면서 꼼짝 말고 엎드려 있으라고 하더군.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지만 마음은 편안했어. 영감님하고 둘이서면 죽어도 그만이다 싶은데 뭐가 무섭겠어. 한 시간 사십 분 걸린다던 배가 두 시간 반 만에 섬에 도착했는데도 나는 늦는다는 생각도 없었어. 영감님이 나를 얼싸안으면서 인제 살았다고 등을 토닥거릴 때도 그 뱃길이 그렇게 위험한 건지는 몰랐지. 우리가 도착했단 소리를 듣고 이웃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다들 영감님을 막 야단치는 거야. 민박집은 다짜고짜 영감님 등짝을 철썩철썩 때리면서 이런 풍랑에 배를 띄우는 사람이 어딨냐고 만약 두 사람이 어떻게 됐으면 중신을 선 자기가 어떻게 저 집 식구들을 대할 뻔했느냐고 말 소리를 지르는 거야. 영감님이 싹싹 빌면서 잘못했다고 하더군. 그 사람들 하는 양을 보니까 비로소 우리가 죽을 고비를 뚫고 왔다는 걸 실감하겠더라구. 언니 그 얘기가 그렇게 재밌수?  그럼 재미있는 얘기 또 하나 해줄까. 며칠 전이었어. 한 동안 사는 큰 아재라는 친척하고 면사무소가 있는 이웃 섬으로 볼일을 보러 간다고 전날부터 벼르더니 나도 같이 가야 한다고 아침부터 서둘르는 거야. 단둘이서라면 모르지만 평소 어렵게 대하던 큰아재하고 같이 간다길래 내키지 않아했더니 곡 같이 가야 된다고 두둑한 서류봉투까지 내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어주면서 졸르는 거야. 그래서 선창가까지 따라갔는데, 우리 배에서 큰 배로 영감님이 껑충 옮겨타고 나서 손을 내밀길래 나도 그렇게 가볍게 건너뛸 수 있을 줄 알았지. 근데 배와 배 사이가 너무 넓었나봐. 바닷물에 빠질 뻔하면서 어찌어찌 뱃전을 잡긴 했는데 아랫도리는 온통 물에 잠겨 버둥거렸지 뭐야. 영감님이 내 팔을 잡고 끌어올리려고 안간 힘을 썼지만 역부족인 거 있지. 영감님이 사람 살리라고 막 악을 쓰더군. 마침 같이 가기로 한 큰아재가 왔기 망정이지 하마트면바다에 바져 죽는 줄 알았다니까. 큰아재의 도움으로 나를 건져 올려서 흠빡 젖은 아랫도리를 자기 잠바랑 큰아재 잠바로 꼭꼭 싸주면서 영감님이 엉엉 우는 거야. 나는 남자가 그렇게 눈물을 철철 흘리며 우는 거 처음 봤다우. 그러면서 죽은 마누라가 도와줬다나. 내 손목을 붙들고 마누라한테 도와달라고 이 사람마저 잃으면 못 산다고 빌었대. 언니도, 그게 뭐가 기분 나빠. 난 하나도 기분 안 나쁘더구만. 영감님이 워낙 정이 많아서 그래. 언니는 그 사람이 마누라 잃은 지 일 년도 안 돼 새 장가 들었다고 욕하지만 외로움을 이기는 못하는 게 왜ㅗ 나빠. 그날 나를 데리고 면사무소에 갈려고 한 목적이 집문서를 내 이름으로 해주려는 것였더라구. 내 안주머니에 넣어준 게 집문서였던 거야. 다행히 그건 안 젖어서 그날로 계획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나를 기쁘게 해주려고 그때까지 암말 않고 있던 거지. 사실 민박집도 내가 내 낭탁을 너무 할 줄 모른다고 걱정하고 경환이나 경숙이도 혼인 신고는 할 거냐, 영감 죽은 후를 위한 대책은 뭐냐, 알고 싶어했지만 나는 무대책으로 그냥 간거였어. 호적을 옮기면 그쪽 오남매가 내가 재산이나 탐내서 시집온 줄 알 거 아냐. 그런 일로 서로 눈치보고 사이 나빠지는 것도 싫고, 내 아들하고 같은 호적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도 싫고. 그래서 호적에 오르는 것 사양하겠다고 했더니 영감님도 동의하더라구. 남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게 영감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하나도 안 중요하더라구. 그래도 영감님은 자기가 먼저 죽으면 나는 어찌 사나 내 걱정을 무지 해. 우리 집이 우리 동네서 민박집 다음으로 커. 짓기도 단단하게 지었고 아파트마냥 갖출 거 다 갖췄어. 그 섬에서 땅값 젤로 비산 선창가에 있고. 그래도 팔아봐야 이삼천밖에 안 나간대. 영감님 재산 중에는 배값이 되레 알토란 같다나봐. 그건 자식들 몫이겠지. 난 영감님이 나는 하나도 걱정 안 하는 자기 죽은 후의 내 살 걱정까지 해주는 게 신기하고 고마울 뿐 더 바라는 건 없어. 오늘 먹을 양식과 잠자리 걱정 안 하고 사는 게 얼마나 좋은지 난 그걸로 족해.  이게 꿈인가 생신가 자다가도 꼬집어볼 적이 있다니까. 영감님 참 좋은 사람이야. 집문서 옮겨주고도 언만 원짜리 통장도 내 이름으로 해줬어. 그 밖에 적금도 하나 들어줬구. 그 나이에도 우리 섬에서 가장 고기 잘 잡는 어부야. 물메기는 무진장 잡아. 때가 되면 도미도 많이 잡는데. 시커먼 도미 말고 금붕어 같은 도미 말야. 도미 잡으면 내가 택배로 부쳐줄게. 언닌 맛있는 것만 좋아하잖아. 그 사람 그런 거 안 아껴. 올해 물메기가 많이 잡히니까 집집마다 돌린걸. 섬이니까 과부들이 많아. 영감님이 상처하니까 다들 나 안 데려가나 끼룩끼룩 영감님을 넘봤다나 봐. 그런데 도시에서 꽃같이 예쁜 색시를 얻어왔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고 샘이 나겠느냐면서 홀어머니들한테 인심 쓰라고 물메기도 돌리고 문어도 돌리고 그런다우. 그이 그런 사람이야. 서울서 마누라를 얻어들인 게 좋은가 봐. 나더러 당신은 어쩌면 노름도 못하고 술도 못하고 담배도 못하느냐고 무슨 보배 덩어리 보듯이 본다우. 섬엔 세 가지 다 하는 여자들 천지래. 섬 남자들도 거기 사투리가 그런건지, 친한 척하려고 일부러 그러는지, 한두 번만 만나 얼굴을 익혔다 하면 단박 반말지거리야.  왔나, 갔나, 묵었나, 보라 이런 식으로. 영감님은 처음부터 석달을 같이 산 지금까지 깍듯이 보소, 드소, 갔다 오소, 하는 식으로 존댓말을 쓴다우. 그게 얼마나 듣기 좋다구. 우리 둘이 말을 많이 해. 할 얘기가 왜 없어. 지가 즈이 마누라 얘기하면 난 우리 남편 얘기도 하고, 한 얘기 하고 또 해도 싫증이 안 나. 우린 서로 얼마나 열심히 들어준다고, 듣고 또 들어도 재미나니까. 그러다가 누가 먼저 잠 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지.

 

나도 동생 얘기를 거기까지 듣다가 잠들었던가. 아니면 동생이 먼저 잠들었을까. 하여튼 아침에 깨어나 건진 게 거기까지였다. 그 후 나는 동생을 더는 부릴 수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몰랐다. 나는 동생에게 항상 베푸는 입장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상전의식이지 동기간의 우애는 아니다. 상전의식이란 충복을 갈망하게 돼 있다. 예전부터 상전들의 심보란 종에게 아무리 최고의 인간 대접을 한다고 해도 일단 자신의 거룩한 혈통이 위태로워졌을 때면 종이 기꺼이 제 새끼하고 바꿔치기해주길 바라는 잔인무도한 것이 아니던가. 나는 상전의식을 포기한 대신 자매애를 찾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도 춥지 않은 남해의 섬, 노란 은행잎이 푸른 잔디 위로 지는 곳, 칠십에도 섹시한 어부가 방금 청정해역에서 낚아 올린 분홍빛 도미를 자랑스럽게 들고 요리 잘하는 어여쁜 아래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이 있는 섬, 그런 섬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그리움이 샘물처럼 고인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 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릴 것 없이 살았으므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내년 여름엔 이모님이 시집간 섬으로 피서를 가자고 지금부터 벼르지만 난 안 가고 싶다. 나의 그리움을 위해. 그 대신 택배로 동생이 분홍빛 도미를 부쳐올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작품해설

삶의 빛나는 물색을 그려내 보인 작가의 역량

임규찬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그리움을 위하여>는 박완서의 근년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보기 드물게 늙음에 맞대면하여 오히려 삶의 빛나는 물색을 그려내 보인 작가적 역량이 <그리움을 위하여>에도 한껏 스며들어 있다.

최근의 한 산문에서 작가는 “느낌이 실제보다 더 확실해지는 아니, 때로는 망령하고 노닐 수도 있을 것처럼 육신은 아무것도 아니게 가벼워지면서 자유의 경지 같은 게 예감처럼 다가오는 나이가 바로 70대가 아닐까”라고 한 바 있는데, 그러한 경지를 이 작품에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아니 작품 자체가 그런 경지처럼 비쳐진다.

물론 그렇다고 이 소설이 세속적 삶을 훌쩍 뛰어넘는 어떤 이상향을 대가풍으로 노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지극히 세속적인 삶을 지극히 세속적인 산문식 흐름으로 끌고 간 작품이다.

그 점에서 한마디로 ‘수다’ 과에 속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두 노인네가 있다. 화자인 ‘나’는 상대가 되는 사촌여동생보다 나이가 여덟 살 위인데, 제법 풍족한 노년살이를 하고 있다. 반면 사촌동생은 ‘나’의 집에 파출부식으로 일하며 돈을 얻어 먹고 사는 빈핍한 노년살이다. 그러므로 ‘나’의 입장에서 그녀는 여러모로 ‘아랫것’이다. 소설은 그런 두 사람 사이의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지루할 정도의 수다가 오히려 재미와 함께 술술 읽힌다. 이것 역시 작가의 노련한 필력에 힘입은 바 크겠지만, 더불어 묻어나는 작중 화자의 미묘한 심리와 의식에 대한 예리한 해부야말로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이다. ‘아랫것’을 향한 ‘나’의 태도는 결코 악인형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한정의 온정으로 치닫는 선인형 善人型으로 유형화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데 이 작품의 첫째 묘미가 있다.

온정적이긴 하지만 상대적 부유함 속에 녹아든 인간의 이기적 속성, 그에 따른 여러 일상적 행동 양태 등에 대한 얄미울 정도로 날카로운 서술이나 묘사는 가히 ‘박완서표’라 할 정도로 이미 하나의 경지라 할 만하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가 그런 세속적 실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사이 또 한번의 비상을 감행하여 말없이 조용하게 침묵하고만 있던 인간적 숨은 본질을 대자연풍으로 활짝 열어젖힌다. ‘아랫것’으로 온정적인 보호 대상으로만 역할을 하던 사촌 여동생이 대반격을 가한 것이다. 어느 날 훌쩍 아는 민박집이 있는 남쪽 섬으로 가서 임자를 만나 연해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점잖은 늙은 뱃사람과 사촌 여동생의 만남,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청정해역처럼 아름다운데, 그 이야기가 작중 화자의 표현대로 우리에게 “칠십에도 섹시한 어부가 방금 청정 해역에서 낚아 올린 분홍빛 도미를 자랑스럽게 들고 요리 잘하는 어여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이 있는 섬”, 바로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본원적 그리움을 일으켜 세운다.

말하자면 아무런 그리움도 없이 살 수밖에 없는 삭막한 세상살이에 사실은 우리들 마음마저 이미 메말라 있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작품을 다 일고 나면 작품 자체의 구성이나 서술방식 역시 절묘하게 이런 내용의 반전 혹은 비상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초반부의 지루할 정도의 세세한 서술이나 수다나 집요한 심리의 표출이 곧 오늘날의 세상살이가 담고 있는 내용이자 형식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필자는 언젠가 박완서에 대해 “일상성의 곧 여래장 如來藏 임을 절묘하게 연출할 수 있는 작가를 갖고 있다는 것도 삶의 한 행복이 아닐까”하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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