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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 편 (李 朝 篇)

 

 

  五百年의 曙光

  風雲의 하늘 밑

  고려 말에 함경도의 무장으로 왕조 470년 사직(社稷)을 전복시키고 이조(李朝) 오백 년의 왕업(王業)을 대성한 이성계는 우리 동국에선 얻어 보기 어려운 개세(蓋世)의 영웅이었다.

  이 자랑함직한 영웅의 가문과 탄생에 대하여 다음에 간단히 써보고자 한다.

  태조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사년 을해(乙亥=西紀 1,335) 십월 십일일에 함경남도 영흥군 흑석리(黑石里) 사저(私邸)에서 탄생하였다. 이름은 단(旦), 자(子)는 군진(君晋), 최초의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中潔), 호(號)는 송헌(松軒)이라 불렀다.

  아버지 환조(桓祖)의 이름은 자춘(子春)이고, 어머니의 성은 최씨였다.

  이문(李門)의 시조(始祖)는 신라시대에 사공(司空=토목과 건설을 맡은 관직)이란 벼슬살이를 하던 한(翰)이란 사람이었는데 태조는 이의 이십이대 손(孫)이다.

  그런데 시조 이하 십칠대(代)까지에는 영명(令名)을 날리는 자가 없었으므로 한 개의 평범한 집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십팔대 손 목조(穆祖) 곧 안사(安社)대에 이르러 전주에서 함경남도로 이사해 살다가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게 되어 의주(宜州=오늘의 덕원)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때는 바로 고려 고종 말년이었다.

  중국의 원(元)나라(몽고족)는 오늘의 영흥 지방에 쌍성총관부(雙城摠官府)를 두고 그 이북의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때에 목조 안사는 원나라에 투신하여 멀리 북쪽 알동(斡東=간도지방)으로 또 이사하여 남경(南京=국자가)에서 오천호(五千戶)란 직명(職名)을 가진 지방관리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인 익조(翼祖) 행리(行里), 익조의 아들인 도조(度祖) 춘(椿), 도조의 아들인 환조(桓祖=태조의 아버지) 등은 모두다 대대로 습직하여 원나라의 천호(千戶)란 지방관이 되어 지냈다.

  그러나 익조는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거소(居所)를 도로 남으로 옮겨 덕원에서 와 살았다.

  그러나 환조는 다시금 영흥지방(쌍성)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영흥서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환조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사,오 두해에 고려조정으로 들어와 공민왕의 지우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환조는 공민왕 오 년에 고려의 장수 유인우(柳仁雨)를 도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격하파고 함주(함흥)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이 때문에 환조는 고려 삭방도(朔方道=함경도)의 만호겸병마사(萬戶兼兵馬使=외직으로 무관 벼슬)로 등용케 되었다.

  이씨의 흥륭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환조의 천수가 길지 못하여 사십육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는데 그의 슬하에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을 원계(元桂), 차남을 성계(成桂=곧 태조), 삼남을 화(和)라 불렀다. 그러나 장남과 삼남은 정실의 소생이 아니었으므로 이남인 성계가 망부의 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성계는 일대(一代)의 영웅이었으므로 그 기개, 용력, 그 배포가 십인, 백인에 뛰어났다. 특히 소년시대부터 궁술(弓術)의 묘를 터득하기 시작하여 만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또한 외모가 당당한데다 신채(神彩)가 몸에 감돌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자못 컸다.  소장시대의 태조는 엄격하고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평거(平居)에 있어서는 항상 눈을 감고 지냈기 때문에 그에게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 사람을 접하게 되면 어느 때나 화기융융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무서운 존재로만 보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도 보았다. 성계는 육척 장신의 소유자인데 귀가 남달리 크고 또 기묘하게 생겼던 모양이다. 명(明)나라 사신(使臣) 왕태(汪泰)는 성계의 귀가 남달리 크고 기묘함을 보고 그의 일행에게 대하여

  참 묘한 귀다! 그런 귀는 생후 처음 본다.

하고 놀랐고 또 상명사(相命師) 혜등(惠등)은 어느 때 그의 친지에게

  내가 사람의 상을 봐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성계처럼 앞날이 환하게 티인 사람은 처음 보았다.

하고 느낀 바를 말하자 친지의 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뭣? 어째? 제아무리 잘 된다 할지라도 총재( 宰=오늘의 내무부장관)밖에 더 되겠나?

대답했다.  그러나 혜등은

  총재밖에 더 안 돼? 모르는 소리 말아! 내가 본 것은 그게 아닐세.

  어떻게?

  군장(君長)이 될 상을 지니고 있어. 좀 기다려 보게! 이성계가 왕씨를 대신하여 꼭 임금이 될 터이니….

하고 쾌히 대답하였다.

  승(僧) 무학(無學)이 안변 설악산 토굴 속에 기거하고 있을 때에 성계는 그리로 찾아가 다음의 꿈을 해몽케 하였다. 그 꿈의 하나는 자기가 어느 파옥(破屋) 속에 들어갔다가 세 개의 <서까래>를 가로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꾼 것이었다. 성계는 이 꿈의 해몽을 청하였다.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은 먼저 치하하고 해몽하기를, 등에 삼연(三椽)을 짊어진 것은 <임금왕(王)>자(子)를 형용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을 들은 성계는 또 다른 하나의 꿈을 내놓고 이것의 해몽을 청하였다. 그것은 꿈에 꽃이 지고 거울이 떨어지는 것을 본 것이었다. 이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은 또 해몽하기를 꽃이 졌으니 열매가 생겨질 것이고 거울이 떨어졌으니 반드시 무슨 소리가 났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성계는 이 말을 듣고 기쁨에 넘쳐 그날부터 절을 창건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창건케 하여 절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지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태조 친필의 <석왕사> 석자는 없어지고 다만 각판(刻板) 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 한다.

  성계가 정승 지위에 있을 때는 꿈에 하늘의 신인이 금척(金尺)을 내주면서 말하기를

  경시중 부흥(慶侍中復興=시중은 고려시대의 정승 벼슬)은 남달리 청렴하기만 한데다 이미 늙었고 또 최도통사(崔都統使=도통사는 고려시대의 외직으로 국방군을 거느리는 무장 영(瑩)은 남달리 직(直)하기만 해서 나라를 바로 잡음에 있어 적재가 못된다. 그래서 이 금척을 그대에게 주노니 이것을 지니고서 나라를 바로 잡음에 힘쓰라.

하고 사라졌다.

  위에 말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전설과 꿈 이야기가 전해 오지마는 그것들은 거의 다 신화(神話) 같은 이야기들이다.

  다음으로 이성계가 사술(射術)의 기재(奇才)였 음에 대하여 써보고자 한다. 성계는 유년(幼年)시대부터 활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 활을 대로 만들지 않고 싸리나무로 간(幹)을 삼고 여기에 깃을 붙임에 학령(鶴翎)을 사용했고 또 초(哨) 만드는 데는 미각( 角)을 사용했다.그래서 크기가 배(梨) 만했으며 촉(鏃)이 무겁고 간(幹)이 길어서 보통 궁시(弓矢)보다 배나 무거웠다.

  성계는 청년시대에 아버지 환조를 따라 사냥을 하게 되었다. 이때 환조는 태조가 갖고 있는 살을 빼앗아 보면서

  이 살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한 후 이것을 땅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태조는 이것을 내버리기 싫어 땅에 떨어진 살을 줏어서 살통에 꽂고 앞에 서서 갔다.

  이때 노루 한 마리가 산록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성계는 노루가 나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일시(一矢)를 가하였다. 노루는 맞기가 무섭게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런데 또 한 마리가 나타났다. 성계는 이 노루에게도 일시를 가하여 죽게 하였다. 이와같이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일곱 마리를 잡아 아버지 환조는 이를 보고 한편으로는 놀라면서 한편으로 기쁨에 넘쳐 크게 웃어댔다.

  이 노루사냥이 있은 지 며칠 안 되어 이번에는 홍원군(洪原郡) 소포산(昭浦山)으로 가서 노루 사냥을 하였다. 때 마침 노루 세 마리가 떼를 지어 나와 있었다. 이를 본 성계가 우선 노루 한 마리에게 일시를 가하여 죽게 하자 나머지 두 마리는 나란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성계는 이 두 마리를 일시로 잡을 작정을 하고 또 한 살을 쏘았다. 성계가 작정한 대로 화살은 두 마리의 동부(胴部)를 관통하고 나아가서 여력으로 나무를 뚫었다. 성계의 종자(從者) 이원경(李原景)은 나무에 박혀 있는 살을 뽑아 가지고 성계에게로 갔다. 이때 성계는 원경에게

  이제야 돌아오니 뭣 때문에 그리 늦어졌노?

하고 입을 열었다. 원경은 이 물음에

  살촉이 나무에 깊이 박혀서 뽑아내기에 시간이 가서 늦었습니다.

대답을 하자 성계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근사한 말이다. 그랬을 것이다. 나의 시력(矢力)은 노루 세 마리를 한 살로 동관(胴貫)하였을지라도 그만한 힘이 남게 될 것이다.

  호언장담을 하였다.

  또 성계가 어느 때 임강현 화장산(臨江縣華藏山)에서 사냥을 하게 되었다. 산 속에서 사슴이 나타나서 성계가 이를 쫓아가다 보니 높이가 수십척이나 되는 절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절벽의 지세는 사람이 오르락내리락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계는 이를 불문에 붙이고 말을 올라 채찍을 가하면서 절벽 밑으로 내려 갔다. 말이 마침내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계는 어느 사이에 사슴에게 일시를 가하여 죽게 하였다. 이런 것들을 보면 성계의 용맹과 담력이 어떠하였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번은 여조(麗祖) 삼십일대왕 신우(辛禑)를 따라 해주에서 사냥을 하게 되었다.

이때 왕은 따라온 여러 신하에게

  오늘의 사냥은 짐승을 잡는데 반드시 등어리를 쏘아서 잡아야 한다. 이에 위반한 것은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하고 주의를 시켰다.

  성계는 평소에 사냥을 할 때에도 기러기의 바른편 시골(翅骨)을 목표로하여 사냥을 해왔기 때문에 목표지정의 사냥이 그리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날 사십여마리나 되는 사슴을 쏘아 잡음에 있어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등어리만을 쏘아 잡아 일등상을 탔던 것이다.

  또한 황상(黃裳)이란 사람은 일찍부터 원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쏘기로 이름을 천하에 날렸다. 그리하여 그는 고려 공민왕조로 들어가 찬성사(贊成事=고려시대의 정이품 벼슬, 평장사와 같음)를 지냈는데 성계는 일찍이 그와 회동하여 사술시합(射術試合)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백오십보밖에 과녁을 만들어 놓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였다. 성계는 일찍부터 시합 장소로가 쏘기 시작했다.

  그는 백발백중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는데 낮쯤 되어서 황상이 나와서 쏘기 시작했다.

그는 수백 발중 오십발만은 연발 연중하고 그 후부터는 혹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했다.

그러나 성계는 수백발을 쏨에 있어 단 한 발도 실패한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이, 황 양인의 사술시합 결과를 듣고

  이성계는 사술의 귀재(鬼才)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칭송하기를 마지 않았다.

 

 

 

 

  戰塵 속의 二十年

  이성계는 십대 시절에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밀직사는 고려시대 출납, 궁중경호, 군기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마을. 밀직사부사란 마을에서 둘째 우두머리의 벼슬)인 안변 한경민(韓景敏)의 딸에게로 장가를 갔다. 이때부터 사랑을 속삭이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 환조에게로 나아가 사술을 실지로 배우고 동시에 남다른 연구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사술을 청소년시대부터 완전히 터득하게 되었다.

  아버지 환조는 천수(天壽)가 길지 못하여 사십육세(공민왕 구년)를 일기로 황천개이 되고 말았는데 이때 성계의 나이는 이십육세였다. 그는 곧 아버지 환조의 벼슬인 함경도만호겸병마사(咸鏡道萬戶兼兵馬使)의 직을 이어 받아 가지고 공민왕을 섬기다가 동북면만호(東北面萬戶)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동북면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여 국경을 개착하고 혹은 개경(開京=오늘의 개성)에 주둔하여 침략하는 홍두적을 맹공하는 등 선등(先登)의 공훈을 세웠다.  또한 운봉, 해주에 자리잡고 있는 왜구(倭寇)를 맹격하여 크게 무훈(武勳)을 세웠다. 다음은 이성계의 무훈을 개별적으로 들은 것이다.

  때는 공민왕(恭愍王) 십년 신축(辛丑=西紀 1,361)이었다. 이때 북원(北元=몽고)의 홍두적(紅頭賊=머리를 홍건으로 매었기 때문에)은 왕경(송도)으로 쳐들어와 고려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왕은 남쪽으로 몽진(蒙塵)을 하고 이성계를 주장(主將)으로 내세워 반격하도록 했다. 만만치 않은 홍두적이었지만 이성계의 용병에는 저항할 길이 없어 참패의 고배를 마시고 철군(撤軍)하고 말았다.

  동왕(同王) 십일년 임인(壬寅=西紀 1,362)이었다. 이때 원(元)나라 승상 나하추가 쳐들어 왔다. 왕은 이를 반격하기 위하여 태조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았다. 반격의 총대장으로 나선 이성계는 부하로 있게 된 여러 장수를 모아 놓은 후

  우리 군이 여러 번 패한 모양인데 그 까닭을 말해 보라.

고 묻자, 여러 장수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전투가 한창 벌어질 때면 적장 한 사람이 철갑(鐵甲)을 몸에 떨치고 붉은 쇠털로 장식한 후 창을 휘두르면서 달려 듭니다. 그의 위풍에 용기가 저상되어 전패하곤 하였습니다.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그 사람을 십분 물색한 후 단독으로 물리칠 작정을 했다. 그리고 거짓 패한 듯이 북방으로 도망하는 태도를 취하자 그자는 이를 정말로 믿고 창을 사정없이 휘두르면서 쫓아왔다.

  성계는 이때 몸을 번득여 말 배에 들러 붙었다. 적장은 창을 쓸 중심을 잃자 창과 더불어 넘어져 버렸다. 성계는 이를 보기가 무섭게 말 등에 도로 올라 앉아 그 자를 쏘아 죽였다.  그리고 큰 소리로

  적장이란 자는 죽었다. 이제는 전진하라.

부르짖었다.  적장이 이렇게 쓰러져 죽고 말자 적병은 무장지졸이 되어 좌왕우왕하다가 나하추를 따라 북주(北走)하였다. 이때 나하추의 아내는

  여보시오! 영감, 영감의 천하 공벌(攻伐)이 한두해가 아닌데 이렇게 패주(敗走)하는 일이 있게 되니 고려의 장수가 여간이 아닌가 보오. 공연히 헛수고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는게 좋을 성싶소.

하며 나하추에게 진언하였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성계가 함관령을 넘어가자 나하추는 십여기(十餘騎)를 거느리고 진 앞에 서 있었다.

  이를 본 이성계도 십여기를 거느리고 진 앞으로 나아가 대치(對峙)하였다. 이때 나하추는 말하기를

  우리의 군세(軍勢)가 지극히 약하다. 원컨대 전투를 중지하자. 그리해 주면 우리는 유명시종(唯命是從)하겠다…

  이 말이 거짓임을 안 이성계는 싸움을 중지하지 않고 일격을 가하자 양군 사이에는 격전이 벌이지고 말았다.

  이성계는 썩 나서서 도망하는 나하추의 뒤를 쫓았다. 이때 나하추는 이성계의 급추(急追)에 견딜 수 없어

  여보시오. 이장군, 우리 두 장수가 이리할 필요가 뭐요? 좀 생각해 보시오!

어름 더름하면서 슬그머니 도망하려 했다.

  이 눈치를 챈 이성계는 두말하지 않고 나하추가 타고 있는 말에 일시(一矢)를 가하여 쓰러뜨렸다. 이를 본 적장 하나가 말에서 내려 그 말을 나하추에게 주어 타고 도망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나하추는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하추가 이렇게 도망하자 적병들도 따라서 도망을 하니 이때부터는 동북면이 평정무사하게 되었다.

  개선 도중 이성계는 고향인 영흥군 흑석리에 들렀다. 이때 고향의 사민(士民)들은 [이성게 만세]하며 그를 환영하였고 또 아동주졸(兒童走卒)들은 이성계의 늠름한 풍채를 보고 머리를 숙였다.

  후년에 이르러 고려 제삼십일대 신우왕(辛禑王)은 개성 부윤 황숙경(黃淑卿)을 북원(北元)에 보낸 일이 있었다. 이때 원 승상 나하추는

  연소한 이장군이 나에게 덤벼들어 혼이 났소이다. 지금 이장군의 건강은 어떠합니까? 연소한 무인으로서 그렇게 용병을 잘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소. 확실히 용병의 천재요. 고려가 지금까지 안전 히 지탱되어 가는 것은 이장군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오.

라고 말하면서 이성계를 극구 찬양하였다.

 공민왕 십팔년 기유(己酉=西紀 1,369)에 있었던 외환(外患)에서 왕은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평양에 있었던 북원의 한 마을)를 공격하게 했다. 이때부터 북원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다.

  성계는 동녕부를 격파함에 있어 기병 오천, 보병 일만을 거느리고 동북면에서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육백여리를 걸어서 설한령(雪寒嶺)에 이르렀다가 다시 칠백여리를 걸어서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동녕부의 동지(同知=동지중추부사의 준말-일무관) 이올로(李兀魯=이 사람은 북원에 귀화하였다)는 항전(抗戰)하러 내달아 왔다. 그러나 이올로는 이성계 장군이 온 것을 알고 갑옷 투구를 벗어 던지고 몇 번이나 머리를 굽히면서

  나의 조상은 원래 고려 사람이고 나의 이름은 이원경(李原景)이라 부르나이다. 내 마땅히 이장군의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

하면 삼백여호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그의 추장(酋長)인 고안위(高安慰)란 자만을 공격하여 내쫓았다.

  그리하여 동으로는 황성(皇城=옛날의 여진성)에 이르고 북으로는 동녕부에 이르렀으며 서는 바다, 남은 압록강이었다. 그래서 이 여러 지역은 고려 영토가 되었다.

  이것은 공민왕 십구년 경술(庚戌=西紀 1,370)에 있었던 외우였다. 원나라 평장(平章=평장사의 준말) 기새인(奇賽因)은 김백현(金伯顯)이란 자와 더불어 동녕부에 자리를 잡고 고려의 북면을 침범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이성계와 지용수(池龍壽) 두 장수로 하여금 반격, 몰아 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새인은 마침내 도망하고야 말았다.

  기새인은 원래 고려 사람이다. 그러나 원나라로 가 평장사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원나라가 멸망하자 원나라에 남아 있는 무리를 모두 모아 동녕부를 점령하고 있다가 고려의 북변을 침략하려 했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 새인의 아들 처명(處明)은 지극히 용맹스런 사람이었는데 이를 안 이성계는 이원경에게

  처명이 하나쯤 죽이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를 안 죽이려 하는 것은 그를 살려 수용(收用)하려 함이니 이를 잘 전하여 빨리 항복케 하라.

하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처명은 원경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원경은

  그대는 우리 이장군이 천하의 용장임을 모르는가? 항복하지 않으면 그대는 그의 일시(一矢)에 죽고 말 것이다.

고 타일렀다. 그러나 처명은 항복하기를 싫어했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시험을 겸하여 그의 투구를 목표로 살을 쏘아 투구를 벗겼다.

  이 일이 있은 후 원경은 또 다시 항복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이번에는 그의 다리를 목표로 일시를 쏘았다. 살은 다리를 뚫고 나갔다. 이것을 목도한 원경은

  그대가 이래도 듣지 않으면 이젠 그대의 얼굴을 쏘아 죽이고 말 것이다.

하며 또 항복하기를 권하였다. 만만치 않은 처명이었지만 이상 버틸 용기가 나지 않아 마침내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말았다.

  처명은 훗일에 이르러 이성계가 자기를 죽이지 않고 기용(起用)해 준데 대하여 감사히 생각하고 일생 동안 이성계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동정북벌에 참가하여 수훈(殊勳)을 세웠다. 특히 운봉(雲峰)에서 있던 왜구 토벌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사람들을 놀래기도 했다.

  또 신우왕 삼년 정사(丁巳=西紀 1,377)이었다. 이때 왜구(倭寇)가 경상도로 쳐들어 와 그 횡 폐가 막심했으나 여기를 지키는 장수들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성계가 대장이 되어 나아가 지리산(智異山)에서 싸워 왜군을 대파하였다.

  이성계가 왜구를 상대하여 지리산 밑에서 싸우려 할 때 앞으로 이백보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점에 한 왜구가 돌아서서 자기 궁둥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태도는 우리 군을 모욕하는 것같이 보였다. 이성계는 이를 일소(一笑)에 붙일 수만 없어 살 한 대를 뽑아 그 자에게 쏘았다. 그 자는 맞기가 무섭게 쓰러졌다. 이런 일이 생기자 왜구들은 좌왕우왕 헤매기 시작했다.

  성계는 이 기회를 포착하고 왜구에게 맹격을 가하여 왜구들로 하여금 참패 도주케 하였다.  이 패잔 한 장병들은 험한 산으로 올라가서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서는 칼과 창을 휘두르면서 우리군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계 휘하의 여러 장수는 대항할 용기를 내지못하였다.  이때 성계는 여러 장수에게

  내가 먼저 적의 진지로 올라가겠으니 그대들은 나의 말이 올라서거든 따라오라.

  타이른 후 자기 말에 채찍을 사정없이 가하고 한편 손에는 장검을 빼 들고 이를 햇빛에 번쩍이면서 한 손으로는 말로 절벽 위에 있는 적의 진지로 뛰어오르게 하였다.

  성계가 적의 진지로 오르게 뒤자 휘하 장병들은 사력(死力)을 다하여 뒤쫓아 올라갔다.

  그리하여 거기서 격전이 벌어졌다. 드디어 왜적의 태반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우리군은 완전히 대첩을 하였다.

  그리고 또 신우왕 시절에 왜구를 만재한 배 백오십 척이 함주(咸州=오늘의 함흥) 및 북청(北靑)등지로 들어와 저희들 멋대로 살생을 하고 약탈을 하였다.

  그리하여 원수 심덕부(沈德符)가 홍원 대문령(洪原大門嶺)에서 왜구를 상대하여 싸웠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성계가 자청하여 항전하기로 하였다. 함주에 이르러 소나무가 칠십보 밖에 있음을 발견하고

  내가 저 소나무의 몇째 가지 몇째 솔방울을 쏘라는 대로 쏠 테니 어떤가?

휘하에게 말을 걸었다.

  성계는 이와 같이 말한 후 유엽전(柳葉箭)으로 쏘기 시작했다. 그는 휘하의 지시대로 칠발을 쏘아 칠중(七中)하였다. 이를 목도한 휘하 장병들은

  우리 이 장군은 정말 신장(神將)이시다.

하고 환호(歡呼)하였다.

  성계는 환호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에 왜구가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왜구들은 멀리서부터 소라 소리가 요란히 들리기 시작하자 모두들 놀라고

  이 소리는 이장군이 출동하는 소라 소리인 것 같다.

하며 떠들어댔다.

  성계는 왜말을 아는 자를 불로 놓고

  오늘의 주장(主將)은 이만호(李萬戶)이다. 너희들은 빨리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해주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왜장들 사이에는 항복에 대하여 불찬성하는 자가 있어서 결정적인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성계는

  알았다. 어디 보자.

하고 몸소 왜적 이십여 인을 목표로 활을 쏘자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응현(應弦)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성계는 단기(單騎)로 나서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무도 덤비지를 못했다.  성계의 무서운 살은 중갑(重甲)도 뚫고야 말았다. 이를 목격하게 된 왜구들은 사면팔방으로 궤주(潰走)하고 따라서 죽은 군사가 들에는 물론이요, 강물 속에도 쌓였다.

  왜적의 형편이 여간하지 않은 모양이다. 죽이진 말고 생포하는 게 좋겠다.

  성계는 휘하에게 분부하였다.

  또 왜구는 서해도(西海道)에도 들어왔다. 그러나 모든 장수들이 승리를 얻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또 성계가 물리쳐 버릴 것을 장담하고 나섰다. 성계는 항전에 즈음하여 투구를 백수십보나 떨어져 있는 곳에 놓고 살 세발을 쏘았다. 이 세발은 모두 다 투구를 뚫었다. 이에 자신을 갖고 해주의 동정자(東亭子)에서 왜구를 상대로 싸웠다.

  싸움이 한창이었을 때에 한 길이 넘는 이렁이 앞에 가로 놓여 있었다. 성계의 말은 한번 뛰어 이 수렁을 넘었으나 뒤따라 온 장병들은 하나도 넘지를 못하였다. 태조는 이를 불문에 붙이고 대우전(大羽箭)으로 왜적을 쏘아 십칠명을 죽였다. 이 때문에 나머지 적은 사방으로 궤주하여 해주는 다시 평화를 찾게 되었다.

  신우왕 오년 기미(己未=西紀 1,379)였다. 이번엔 왜구가 배 오백척에다 군사를 싣고 삼도로 들어와 운봉 인월역(雲峰引月驛)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도의 물정이 자못 소란하고 인심이 흉흉했다.

  신우왕은 이성계로서 양광(楊廣道=경기도), 전라, 경상 삼도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삼아 그로 하여금 반격하도록 하고 동시에 주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여 없애게 하였다. 아지란 말은 어린아이를 가르켜 말하는 것이고 발도란 말을 몽고 말로 용감무쌍하다는 뜻이다.

  이 왜구들은 바다에 연(沿)해 있는 주군(州郡)을 깡그리 방화하여 죽은 시체가 산야를 덮었고 또 미곡을 배에 싣기 위하여 쌀섬 등을 굴리기 때문에 지상에 흘려진 쌀이 척여(尺餘)에 달하여 땅이 두꺼워졌으며 또 이, 삼세 되는 계집애를 약탈하여 머리를 깎고 나아가서는 배를 갈라서 정결히 씻은 후 여기에 쌀과 술을 곁들여 하늘에 제를 올리기도 했다.

  이런 참혹한 일은 왜구에게서만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배극렴 등 구원수가 분기하였으나 모두 다 전패하였다. 그 중의 두 원수는 항전 중 전사해서 팔도의 인심은 한층 더 흉흉해졌다.

  이성계는 천리지간에 죽은 군사가 쌓여 있음을 발견하고 측은한 생각을 억제할 수 없어 침식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운봉을 넘어서서 우편에 있는 험준한 지름길을 보고  왜적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 우리를 습격할 것이다. 나는 이 길로 들어가 보고 싶다.

하고 그리로 나섰다. 성계가 그 험로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왜적은 덤벼들었다. 그는 태연한 태도로 백우전(白羽箭) 이십대를 꺼내서 적에게 쏜 후 뒤이어 유엽전(柳葉箭) 오십여대를 뽑아서 계속해 쏘았다. 이 화살들은 모조리 적의 얼굴을 쏘았기 때문에 적은 응하려 하지도 못하고 쓰러져 죽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여전히 산지를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토벌하기가 어려웠다. 이성계는 소라를 요란히 불어 취군 케 하고 결사적으로 기어오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성계가 탄 말이 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곧 딴 말을 바꾸어 탔으나 유시(流矢)에 왼편 무릎을 맞았다.  이것도 즉시로 빼어 버리기는 했으나 몇 겹으로 포위도어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왜적 팔 명을 쏘아 죽였다. 만만치 않은 적이었지만 그의 담용에 놀라 앞으로 달려들지를 못했다.이성계는 휘하 장병에게

  죽을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모두 다 물러가라. 나는 적과 더불어 죽고 말겠다.

는 자기의 결의를 말했다. 휘하장병들은 이성계와 한가지 죽기로 결심하고 역전분투(力戰奮鬪)하였다.  그러나 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장 중에는 나이 십오, 육세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년이 끼어 있었다. 나이는 불과 십오, 육세였지만 그 용기와 담력은 백전노장(百戰老將)을 능가할만했다. 이자는 백마 위에서 창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군사들은

  저게 아지발도란 자다. 아지발도다.

하면서 피하려 했다. 성계는 이 소년의 용기와 기백을 장하게 생각하고 이두란(본성명은 퉁두란)에게 사로잡으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받고서 이두란은

  산 채 잡아서는 안 됩니다. 잘못하면 우리에게 해가 올 것입니다.

하고 반대를 했다. 사실 아지발도는 전신에 갑주를 떨친데다 얼굴까지 투구를 쓰고 있었으므로 화살을 댈 데가 없었다. 그러나 성계는 이를 불문에 붙이고  이두란 장군은 보라. 내가 지금 아지발도의 투구 정자(頂子)를 쏘아 벗겨놀 테니 그대는 잘 보라.

하고 나는 듯이 달려들어 쏘고 또 쏘니 투구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를 본 두란도 즉시 활을 쏘아 소년은 결국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왜적의 사기(士氣)는 마침내 땅에 떨어져 버렸고 따라서 우리 군의 사기는 충천해져 승승대파(乘勝大破)하이 적의 시체가 산과 들에는 물론이요, 강 중에도 쌓이게 되었다.

  당초 왜적의 수는 우리 군에 비해 십배나 많았는데 무사히 도망한 자의 수는 칠십명에 불과했다.  이것을 보면 이성계의 용병지술(用兵之術)이 얼마나 신묘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이성계가 운봉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오자 당시의 판삼사(判三司=고려 때의 삼사의 우두머리.  종일품 벼슬)였던 최영(崔瑩)은 백관을 거느리고 천수사(天水寺) 앞까지 나와서 환영하였다.  이때 최영은 친히 태조 이성계의 손을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공, 삼한(三韓)의 재조(再造)가 공에게 달렸소. 이 나라에 믿을 사람은 공밖에 없소.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 왜구의 침범은 이 나라와 백성을 몰살시킬 외우(外憂) 중의 외우였으므로 이것을 도륙하였다는 것은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살린 일이므로 백성들은 모두다 이성계를 신명과 같이 우러러보게 되었다.

  신우왕 팔년 임술(壬戌=西紀 1,382)이었다. 이때 여진인(女眞人) 호발도(胡拔都)는 대군을 거느리고 단주(端州=오늘의 단천)로 쳐들어왔다. 이성계는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가 되어 영격대파(迎擊大破)하였다. 그리하여 발도는 간신히 홀몸으로 도망하였다.

  이 싸움이 있기 전에 이두란은 모상(母喪)으로 청주(靑州=오늘의 북경)에 있었다. 성계는 사람을 보냈다.

  나라 일이 급하다. 그대 집에 머물러 거상할 때가 아니다.

이 말을 듣자 두란은 상복을 벗어 던지고 선봉이 되어 호발도군을 길주에서 맞아 싸웠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성계는 곧 자기가 나섰다.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을 입고 검은 말에 올라 횡진(橫陣)을 베풀고서 대기하고 있었다. 호발도는 성계가 나타남을 보고 군사를 머물러 있게 하고 단기로 칼을 빼 휘두르면서 달려 들어왔다.

  성계도 역시 단기로 칼을 빼들고 대들었다. 그리하여 양자 사이의 싸움은 격검이나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성계는 재빨리 탄 말을 돌린 후 호발도의 등을 맹렬히 쏘았다. 그러나 갑옷이 두꺼웠기 때문에 살촉이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자가 탄 말을 쏘아 땅에 떨어지게 하였다. 호발도는 죽지는 않았으나 싸움은 크게 패하고 돌아가버렸다.

  끝으로 이성계의 위인에 대하여 잠깐 보고자 한다. 이성계는 일개 무인(武人) 뿐만이 아니고, 천성이 어질고 후한 사람으로 일가 친척에 대해서는 특별히 화목했다. 그에게는 원계(元桂)라 부르는 서형(庶兄)과 화(和)라 부르는 서제가 있었는데 동복 이상으로 친히 지내고 거처를 어느 때나 같이 했다. 훗날 호의 생모 정빈(定嬪) 김씨가 서울에 와서 살 때에는 김씨를 자기의 생모 이상으로 효성스럽게 섬겼으며 또 김씨를 나와 볼 때는 언제나 계하(階下)에 꿇어앉아서 보았다.

  원계가 일찍이 고려의 장수 노릇을 할 때 일을 잘못 처리하여 사람을 죽게 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원계는 죽게 되었다. 이 소식을 안 이성계는 구명운동(救命運動)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구명운동이 수포로 돌아가자 남달리 슬퍼하면서 원계의 미망인과 유자녀 또 원계의 손 아래 누이 강우(康佑)의 아내를 위하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움에 있어 게을리 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씨 왕업이 성취되자 원계의 아들들을 중용하여 큰 벼슬을 주었다.

  성계는 유학(儒學)을 소중히 아는 사람이었다. 일찍부터 동정북벌에 분주히 지냈지만 여가만 있으면 진중으로 유명한 선비를 청해다가 경사(經史) 강의를 듣곤 했다. 그의 집안은 본시 선비의 집안이 아니었으므로 아들 방원에게는 일찍이 유학(儒學)을 공부하게 하였다.

  방원이 신우왕 때 과거에 참가하여 급제함에 이르자 성계는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고 또 후에 제학(提學) 벼슬을 하게 되자 기쁨에 넘쳐 매일과 같이 이름 높은 선비들을 청해 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성계는 매일의 연회에서 흥이 도도해지면 아들 방원을 보고

  네 덕에 이런 낙이 우리 집에 있게 되었다.

하며 기뻐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이성계가 얼마나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를 알 수 있다.

 

 

 

  美女 發福

  이성계는 아버지 환조(桓祖)가 공민왕 구년(西紀 1,360)에 세상을 뜨자 그의 뒤를 이어 군문으로 들어가 공민왕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어 둥북면의 여진족을 토벌하여 영토를 길주(吉州), 갑산(甲山)에까지 이르게 하고 혹은 개성에 쳐들어 온 몽고의 홍두적(紅頭賊)을 반격하여 궤주케 하였으며 혹은 운봉(雲峰), 해주 등지로 들어와 멋대로 행악을 하던 왜구를 도륙하여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성계의 명성은 전국에 떨치고 아동주졸까지도 이성계를 이장군이라 부르면서 존중하였다. 전공이 귀신을 울릴 정도였으므로 벼슬이 여러번 승진되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고려의 벼슬로 최고의 정승 벼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성계의 존재가 이러했으므로 일반 사람들은 그를 한 번 보려고도 했고 또 딸을 가진 부모들은 그런 사위를 두려고도 했다. 그가 동정북벌(東征北伐)하는 사이에 세월은 흐르고 흘러 그의 청춘은 흘러가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렸다.

  이때 황해도 해주에 강윤성(康允成)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당시 양반급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서민(庶民) 중에 있어서는 학행이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에게는 남달리 미(美)와 덕(德)을 겸한 과년한 딸이 하나 있어 천하 제일의 사윗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기회에 친구를 통해 이성계의 문객(門客) 홍(洪)이란 사람을 알게 되었다. 강은 홍과 가까이 하는 사이에 이성계의 생활 사정도 알게 되고 또는 경처(京妻)로서 미처녀(美處女)를 널리 구한다는 말도 듣게 되었다.

  강윤성은 어느 날 밤에 그의 부인과 자리를 같이 하고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다가 딸 시집 보낼 문제를 내놓고 부인과 의견을 교환하였다.

  강윤성은 새삼스럽게 부인을 자기 앞으로 가까이 불러서

  방실(芳實=딸)이의 나이가 지금 열아홉살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년이면 스무살이 될 테니까 지금은 열아홉이죠.

  그러면 시집가는 것이 몹시 늦어진 모양인데… 부인도 사윗감을 좀 구해 보았소?

  구해 보기는 좀 했지만 방실이의 짝이 됨직한 총각은 안 보입디다. 이대로 가다간 방실이를 늙히겠는데… 영감도 좀 구해 보셨소?

  나도 구해 보기는 했으나 모두 다 신통치 않군 그래.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

마누라의 이 말에 윤성은 고개를 숙이고 뭣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내가 개성으로 가서 홍진사를 한 번 찾아 볼까?

마누라는 이 말에

  왜요?

하고 가볍게 반문했다.

  내가 말 좀 들어 보오. 이성계 장군 같은 양반에게 왜 부인이 없겠소마는… 근년에 들어서부터 는 서울에서 몸을 자주 뺄 수가 없게 되었다 합디다. 그래서 서울에도 아내를 두고자 작년부터 미(美)와 덕(德)을 겸한 규수를 구하고 있다고 개성의 홍진사가 말한 일이 있었소.  그래서 개성으로 가려는 것이요.

  잘 알겠어요. 시골에는 정실부인(正室夫人)이 있겠죠?

  있지.

  그러면 우리 방실이를 첩으로 주잔 말이죠?

부인은 고개를 숙였다.

  윤성은 부인의 기색을 보고

  나도 방실이의 신랑감을 구하다 못해 이런 생각을 한 것이요. 이를 양해하고 말을 해야 하오.

하며 달랬다.

  그런데 지금까지 구하지 못했을까요? 그런 양반이 구한다면 문이 메어졌을 텐데.

  글세.

  그 양반의 나이가 지금 얼마나 되었나요?

  글세, 한 사십은 됐을 걸!

  한 사십요? 그러면 방실이 아버지 뻘이 되는구먼… 우리 방실이가 좋아할까요?

  그건 한 번 부인이 방실이에게 물어보구료.

윤성은 한 마디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이튿날 윤성은 개성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리고 홍진사를 개성에서 만나기가 무섭게 이성계의 경처가 결정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결정되지 않았음을 알고 비로소 안심하고 홍진사를 상대로 자기 딸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홍진사님, 미안합니다. 갑자기 폐를 끼치게 되어서…

  강윤성은 다시금 이렇게 인사를 올렸다. 이 말에 홍진사는

  그런 인사는 그만두고 돌연히 찾아준 곡절이나 말해 보시구료.

하며 자기 앞으로 가까이 앉혔다.

  제 딸년 혼인 문제 때문에 별안간 오게 된 것이올시다.

  누구와 혼인하게 되었나요?

  누구와가 뭣입니까? 저 이장군(이성계)에게 제 딸이 어떨까 해서요.

  홍진사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정말이요?

  그럼 정말이죠.

  지금 딸의 나이가 몇 살이나 됐소?

  열아홉이올시다.

  열아홉? 꼭 좋은 나이구먼! 나도 한 번 딸을 본 일이 있지만 그 동안에 더 예뻐지고 더 맵시가 있어졌겠군!

  그 애가 이젠 다 자라서 만개한 모란꽃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위인도 어질고 고와서 이 애를 한 번 본 사람들은 입의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합니다.

  어떻게 그런 딸을 두게 되었소? 그런 딸을 두게 된 것도 큰 복이요. 내가 이장군에게 이런 말을 하고 권할 것 같으면 장군도 싫어하지 않을 것이요.

  강은 이 말에 희망을 걸었다.

  저는 다 결정된 것으로 믿고 그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장군이 오랫동안 수많은 처녀를 물색해 왔지만 아직도 교양 있는  미처녀가 발견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강형의 딸은 남달리 현숙해 보이고 꽃 같으니 성공할 것 같소.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의 집안은 양반이 아니올시다. 몇대를 두고 농사를 하며 장사를 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학행만은 양반 집안 못지 않도록 힘썼습니다. 이 점을 참고로 말씀해 주십시오.

  잘 알겠소. 내가 중매를 잘하면 무슨 수가 나게 될까?

  홍진사는 웃음을 섞어 이렇게 말하였다. 강윤성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잘해 주시면 큰 복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하며 몇 번이나 머리를 숙였다.

  윤성은 홍진사 집에서 술대접까지 받고 그날로 개성을 떠나서 해주로 돌아갔다.

  고향 해주로 돌아온 강윤성은 돌아온 날 밤에 자기의 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딸까지도 불러놓고 개성으로 가서 홍진사에게 단단히 부탁한 것을 이야기하고 부인과 딸의 의견을 묻기로 했다.

  나는 홍진사 집에서 술대접, 밥대접까지 받으면서 저 애의 혼인문제를 내놓고 부탁하였소.  그 동안 여러 집에서 말이 있던 모양인데 아직도 결정은 되지 않은 모양입디다. 그래서 열심히 부탁했더니 홍진사도 저애의 편이 되어 힘쓰겠다고 확언했소. 홍진사가 힘만 쓰면 우리 애가 경처로 될 것은 틀림없을 것으로 믿어지오. 며칠 동안 기다리고 있으면 기별이 올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떤지 있으면 말해 보오.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이어

  오늘의 이장군은 장군 지위에 있지만 그 명성은 천하를 울리니 반드시 고려를 대신하여 임금이 될 것이라고 홍진사는 장담을 합디다. 이 나라 백성의 마음이 모두 다 이장군에게로 돌고 있으니까… 그래서 청하는 자가 많아지는 것 같소.

  이 말에 대하여 부인은

  그리 된다면 방실이가 왕비가 되어 크게 호강을 하겠군요!

하며 방실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방실이는 아무 기색도 보이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윤성은 부인에게 대하여

  부인도 처음에 탐탁히 여기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은 어떠하오?

하고 물었다.

  이젠 이장군과의 결혼이 이루어지기만 바랄 뿐이고 아무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아요.

  윤성은 부인이 대답하는 것을 들은 후 다시 말을 이어

  애 방실아! 너는 이장군에게로 시집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니? 이장군은 가까운 장래에 이 나라의 임금이 될 분이다. 그의 신(身), 언(言), 서(書), 판(判)이 남자다와 보인다고 홍진사는 극구 칭송 하던데. 좀 말해 보아라.

고 딸의 말을 듣고자 하였다. 방실이는 이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제가 외람되게 무슨 말을 드리겠습니까? 아버님께서 옳게 생각하신 일이면 저도 옳게

생각하고 그대로 복종하겠습니다.

대답하였다.  윤성은 시선을 방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너를 남의 부실(副室)로 주는 것을 나도 좀 섭섭히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일개 노리개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여라.

  윤성의 말이 끝나자 윤성의 부인은 그 뒤를 이어서

  방실아! 불만을 품을 것 없다. 여자의 팔자는 남자에게 달렸다. 일생의 고(苦)와 낙(樂)이 남자의 성공, 불성공에 달렸기 때문이다. 네가 크게 호강을 하게 되면 우리도 좀 호강을 하게 된다. 너는 딸의 덕에 부원군(府院君)이 된다는 말을 못 들었니?

하고 웃음 섞어 말을 하자 방안의 분위기는 자못 부드러워졌다.

  윤성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홍진사의 기별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윤성이 해주로 돌아온지 한 열흘 남짓해서 홍진사가 친히 해주로 와 윤성을 찾았다. 홍진사는 윤성을 보기가 무섭게

  이장군을 모시고 왔는데 이찌하겠소?

하고 물었다. 윤성은 이 말을 듣고

  지금 어디 계신가요?

황망히 반문하였다.

  지금 읍내 어느 객사에 계시다오.

  그러면 어찌해야 좋을까요?

  글세, 오늘은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까 나는 되돌아가 하룻밤을 객사에서 새우고 내일 정오까지 이리로 모시고 오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강형은 어찌 생각하오?

  글세, 올시다. 그러나 촐촐히 돌아가시게 될 것이 걱정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읍내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곧 돌아가야 하겠소.

내일 한잔 톡톡히 하기로 하고 나는 그만 돌아가겠소.

  홍진사는 이렇게 말을 하고 윤성의 전송을 받으면서 객사로 돌아갔다. 윤성은 홍진사를 돌려 보내고 집으로 들아 와

  홍진사가 이장군과 함께 해주로 왔는데 진사만이 홀로 찾아왔다가 돌아갔소.

하고 부인과 딸에게 알렸다.

  윤성의 부인은 이 말을 듣고

  그런데 왜 문전에서 보내셨수?

물었다.

  실은 홍진사가 이장군을 모시고 왔는데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읍내 객사에 머물러 계시게 하고 나를 찾아온 것이요. 내일 정오쯤 해서 이장군을 모시고 오겠다 하고 돌아갔소.

  그러면 어찌하면 좋소?

  뭣을 어찌하면 좋아? 첫째 집안을 깨끗이 소제하고 둘째 우리 집안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상비돼 있지 않으니까 있는 대로 정결히 만들고 셋째 무명옷이나마 깨끗이 입고 대하면 좋겠지. 알겠소?

  윤성은 이와 같이 말하고 특별히 당부를 하였다.

  내일 자리를 건넌방으로 할 테니까 특별히 잘 소제해 주오. 그리고 내가 부인이나 방실이를 들어오라 하거든 조용히 대답하고 들어와 이장군이며 홍진사에게 정중하고 겸손히 절을 하오.  그리고 묻는 말이 있거든 조용히 대답하고 함부로 웃음을 터뜨려서는 안 되오.

라고 주의 시켰다.

  날은 밝아 정오가 되었다. 이성계는 홍진사를 따라 윤성의 집으로 왔다.

  윤성은 이성계이며 홍진사에게 절을 하고는 건넌방으로 인도하여 상좌에 앉게 한 후 다시 절을 하고  천민(賤民)의 집에 오시게하여 죄송만만이올시다. 그러니 이놈의 집에 대해선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인사를 한 후 이번엔 홍진사에게

  크게 수고를 끼쳐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진사님 덕분에 이장군 어른까지 만나 뵙게 되어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 은혜는 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고 치하였다. 그러한 후 윤성은 한편에 자리 잡고 응구첩대 하다가 그의 부인과 딸을 불러 이성계며 홍진사에게 인사를 하게 하였다.

  이성계 장군은 방실이의 절을 받은 후 홍진사에게  이 처녀가 본인이요?

물었다.

  그 처녀가 바로 본인이올시다.

  홍진사가 이렇게 대답하자 이성계는 다시금 방실이를 주의해 보면서

  홍진사의 말이 헛말이 아니었구만… 잘못했더라면 시골에서 세상을 보내고 말 뻔했는데.

하고 방실이의 부모를 돌아보고

  참 따님 잘 두셨습니다. 왜 지금까지 시집을 안 보냈습니까?

  이장군님께 보내려고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윤성은 웃음의 말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윤성의 부인과 방실이는 윤성의 명령에 따라 점심상을 차려다 놓고 안방으로 물러갔다.

  이때 이성계는 윤성에게 술을 권하면서

  댁은 음식범절이 보통이 아닌 집안인가 봅니다. 저 같은 놈이 이런 집안의 규수와 혼사를 갖는다는 것은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에게 따님을 주신다면 감사히 받아 드리겠소이다.

라고 입을 열었다.

  윤성은 이성계가 권하는 술을 마시고 나서

  그 말씀이 정말이신가요?

  정말입니다. 저는 술을 먹어도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시다면 저의 집 산소에 꽃이 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겸사의 말씀은 마십시오. 저는 이날 이좌석에서 홍진사를 증인으로 장인 되실 어른, 장모 되실 어른 앞에서 댁 따님을 경처(京妻)로 맞아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비용은 홍진사에게 맡겨 전하게 할 것이고 또 준비가 다되면 길일(吉日)을 택하여 적당한 장소에서 정식으로 식을 올리겠습니다.

  이성계는 자기의 심경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나라에 매인 몸이므로 내일은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객사에서 하룻밤만 더 묵고 돌아 가겠으므로 결혼 후 아니면 만나 뵈올 틈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성계는 홍진사와 함께 윤성의 집을 하직하고 떠났다.

 

 

 

  사랑의 비탈길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성계에게는 초취(初娶)부인으로 한씨가 있었다. 이 한씨는 이성계의 조강지처(糟糠之妻)였으므로 피차 나이도 비등하여 이성계가 오십고개에 이르렀을 때는 한씨도 오십고개에 이르러 있었다.

  한씨 역시 청춘시절에는 남만큼 고와 남에게 밉다 소리를 듣지 않고 지냈고 또 한씨에 대한 이성계의 사랑도 두터웠다. 그리하여 그들의 슬하에는 육남 외에 이녀까지 두게 되었다.

  그러나 한씨는 나이가 많아 여자로서의 미(美), 여자로서의 색향(色香)이 떨어지고 늙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병 저병도 생기게 되자 한씨에 대한 사랑이 좀 식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아름다운 강처녀(康處女)를 맞아 경처(京妻)를 삼은 것이다.

  강처녀가 경처로 들어와 이성계를 섬긴 것도 어느덧 십년이 가깝게 되어 슬하에는 이남 일녀가 있었다.

  대감! 함흥에 계신 어른이 요즘 병환으로 고생하신다 던데 알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함흥 어른이란 물론 한씨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알고는 있지. 그대는 어떻게 알았소?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 사람의 병은 지병(持病)이니깐 그러다 죽고 말 것 같애. 하여간 걱정이 되는군!

  강씨는 이 말을 듣고

  그러면 한 번 내려가 문병하시지요.

  글세? 요즈음 국사가 너무 다난해서 몸을 뺄 수가 없는걸.

  그러면 어찌하실 작정이시오? 첩도 대감을 따라가 문병하고 싶은데요…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뭣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말을 이어

  그대와 동반하여 갈 것은 없어. 가면 나 혼자 가는 게 좋을 성싶어.

  이성계는 동반해 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왜요?

  왜요가 뭐요.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일이지.

  그건 첩도 알아 차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병을 안할 수야 있습니까? 첩은 저 대로의 도리는 차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말만은 옳아! 꼭 문병을 하려거든 혼자 가보시오. 나는 그대와 동반해 가기가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강씨는 이성계가 말한 것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강씨는 결국 자기가 천생의 요염(妖艶)을 지니고 이성계의 경처로 들어와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지내는데다 나이가 젊어 장래가 자기 것이 될 것이므로 한씨가 자기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다가 같이 가게 되면 한씨의 마음이 한층 더 산란해지겠으므로 이성계가 동반해 문병하는 것을 기피한 것으로 생각했다.

  정실부인 한씨는 원래 현숙한 부인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늙어 이성계의 사랑이 식어지자 질투의 싹이 트기 되었고 따라서 강씨를 사랑의 도둑, 권세의 도둑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강씨는 요염만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부덕(婦德)도 남만 못지 않게 지닌 사람이었으므로 정실 한씨를 형이나 어머니같이 생각하고 틈 없이 지내기를 바랐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강씨는 이성계와 동반해 문병할 것을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강씨는 문병문제를 가지고 이성계를 괴롭히기 싫어서

  대감, 대감께서 첩과 동반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뜻은 대강 짐작해 알겠습니다. 첩은 동반문병하는 것을 단념하고 기후를 보아 혼자서 문병하겠습니다. 그러나 대감만은 빨리 내려가셔서 문병하시는 게 좋을 성싶습니다.

라고 말을 했다.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이젠 나의 심중을 안 모양이구먼! 그럼 틈을 보아서 내려가 문병하기로 하지. 지금 형편으로는 틈을 낼 수가 없어!

  대답하자 강씨는

  되도록 틈을 내셔서 내려가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부인께서 첩에게 미쳐서 조강지처를 돌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를 깊이 생각하시고 빨리 내려가 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하며 안타까이 굴었다.

  알겠어. 속히 내려가기로 하지. 우선 급한 일만 처리하고 사, 오일 후에 내려가겠소. 이제부터 그 이야기는 치웁시다.

  그런데 대감, 끝으로 한 말씀 여쭈어 둘 것이 있사온데 좀 들어주세요. 한씨 부인께서는 저를 사랑이 도둑, 권세의 도둑으로 보시는 것같이 느껴지는데 첩의 나이 젊은 탓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첩은 사랑의 도둑이나 권세의 도둑이 되려고 대감을 모신 것은 아니옵니다. 첩의 이 심중을 살피셔서 모든 사람의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 주시면 한이 없겠습니다.

  강씨는 이와 같이 말을 하고야 이성계를 자리에 들어 쉬게 하였다.

  한씨 부인 문병문제가 있은 지 한 엿새쯤 돼서 이성계는 함흥으로 내려갔다. 그는 함흥에 도착하여 종자(從者)를 앞세우고 고향집으로 들어섰다. 고향집 사람들은

  아버지 오셨네!

  대감 오셨네!

하며 반가이 맞이하였으나 부인만은 병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이성계는 행장을 풀어 놓은 후 부인의 병석으로 나아가 병세를 물었다.

  부인은 사람의 부축으로 간신히 일어나

  대감! 어떻게 내려오셨습니까? 국사에 몸을 빼실 수 없을 텐데… 정말 고마워요. 이젠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였다. 이성계는 부인의 손을 잡고는

  벌써 내려오려고 하였지만 요즘의 국정이 하도 문란해서 이제야 간신히 틈을 얻어 내려오게 된 것이요. 이를 양해하고 용서해 주오. 그런데 병세는 어떻게 돼가오? 몹시 수척해졌구료!

위로했다.

  한씨 부인의 병은 악성 위장병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미음이나 마시고 오늘까지 목숨을 이어 온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이르러서는 병이 더욱 악화되어 미음도 먹을 수가 없어서 사경(死境)에 빠져 있었다.

  위장에 무서운 병이 생긴지가 오래 되었어요. 그래도 밥을 먹고 지냈는데 요즘에 이르러서는 밥은커녕 미음도 먹을 수가 없으니 어찌합니까? 명의(名醫)란 명의는 모두 청하여 진료에 힘써 보았으나 그들도 그저 난치의 병으로 돌리고 말더군요. 그래서 이꼴이 되어 버렸어요.

  그것 참 큰일났구료. 미음도 먹지를 못한다니…

  먹을 것을 많이 두고서도 굶어 죽게 되니 그게 원통하군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대감의 앞날을 못보고 죽게 될 테니까 그것이 한이 됩니다. 아마 복이 그만인가 보아요. 지금 형편 같아서는 더 살지 못할 것같이 생각되는데 어떨는지…

  너무 낙담할 것은 없소. 금방 죽을 병도 거뜬히 낫는 일이 있으니까… 내 서울로 돌아가면 널리 명의를 구해 보내겠으니 좀 마음을 굳게 가지시오.

  한씨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머금었다.

  대감 고맙습니다. 그런데 첩은 대감께 청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정(新情)도 좋지만 구정(舊情)을 잊지 마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첩의 오직 하나의 원이올시다.

  한씨는 이렇게 말하고 더 앉아 있을 수 없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성계는 한씨의 병세가 자못 위독했으므로 며칠을 두고 한씨의 병석 곁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성계의 몸은 한가한 몸이 아니었으므로 처음 생각으로는 하루나 이틀쯤 사저(私邸)에 묵으면서 간병도 하고 위로도 하려고 작정을 했으나 막상 와본즉 인정상 이틀쯤 있다가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칠일이나 묵으면서 한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씨는 뼈만 남은 몸에 정신이 좀 돌면 이성계를 찾으면서

  이렇게 오래 계실 수 있으세요? 첩은 얼마든지 계셔 주시면 좋지만 대감의 처지가 그렇지 못하니 하루바삐 돌아가세요. 나라와 백성이 대감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이성계도 국사가 몹시 궁금하여 간병하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나도 너희들과 한가지로 병석에서 떠나지 않고 싶으나 이 나라의 정사(政事)가 그러하지 못하니 내일 아침엔 서울(당시의 서울은 개성)로 돌아가야 하겠다. 여전히 간병(看病)에 힘써 다오.

  한씨를 부탁한 후

  부인, 항상 마음을 편안히 갖도록 하오. 천우(天佑)와 신조가 있어 부인을 살게 하리라.

하고 부인을 위로하였다.

  다음날 아침 이성계는 섭섭해 하는 부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종자와 함께 말을 타고 함흥을 등졌다.

  서울로 돌아온 이성계는 강씨의 마중을 받았다. 그날 밤 강씨는 이성계에게 한씨 부인의 병세여하(病勢如何)를 물었다.

  대감! 부인의 병은 대체 무슨 병인가요?

  위장병인데 악성인 모양이야.

  요즘의 증세는 어떠세요?

  요즘의 증세는 미음도 먹을 수 없는 형편이더군.

  그러면 큰일났습니다. 그려

  먹는 병은 살 수 있지만 못 먹는 병은 죽게 되는데 참 큰일났소. 피골이 상접해 있던데.

말은 천하의 명약, 명의를 구해 보내겠다고 했지만…

  이때 강씨는 정색을 하고

  대감, 잘못하면 대감께서 홀아비가 되실테니 살릴 방법을 연구해 보십시오.

  내가 홀아비가 돼? 왜? 그대가 엄연히 내 곁에 있는데 그건 농이겠지. 하여간 살려야 하겠는데, 걱정이야.

  강씨는 이 말을 듣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이젠 첩도 한 번 내려가 문병하여야 하겠는데 어찌 생각하시나요?

  문병하는 게 도의상 옳긴 옳지! 그런데 혼자서 갈 수 있겠어?

  왜 못 가요?

  그러면 함흥길에 익숙한 가마잡이와 비복(婢僕)을 데리고 가도록 해보오. 언제쯤 갈 작정이요?

  아직 내려갈 날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잘 됐소. 내가 오늘부터 열흘 안으로 명약을 구해 볼 테니까 그것을 가지고 가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강씨는 이와같이 대답하고 이성계가 약을 구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온지 열흘이 채 안 돼서 한씨 부인 사망의 기별이 왔다.

  이성계는 서울집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씨 부인은 오랫동안 숙환(宿患)으로 고생하다가 공양왕(恭讓王) 삼년 신미(辛未=西紀1,391) 구월 이십삼일에 오십오세를 일기로 사저에서 서거하였다.

고 알려 준 후 분상(奔喪)할 준비를 분부했다.

  분상 준비가 대강 끝나자 이성계는 시각을 다투어 강씨와 같이 종자를 데리고 함흥으로 내려가서 장례(葬禮)를 치르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강씨는 이성계의 부실(副室)로 만족하러 들지 않았다. 어느날 강씨는 이성계의 기색을 유심히 살피면서

  이젠 또 장가를 가셔야 하겠죠? 사대부집 규수에게…

  뭐, 나는 장가만 가나? 그대가 있지 않소?

  저 같은게 어떻게 정실이 될 수 있어요? 다시 장가를 가셔야 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요. 무슨 생각으로…

  생각은 무슨 별 생각일라구요. 순서가 그래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나는 여생을 그대와 살다 죽을 테니까 더 말할 것 없소. 그만하면 내 속을 알겠지?

  강씨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한 말이었으므로 성계의 말이 이렇게 나오자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이때부터는 강씨는 정말 정실부인으로, 이성계의 본부인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落華지는 王朝

  고려 말년에 편조(遍照)란 승(僧)이 있었는데 이는 원래 옥천사(玉川寺) 여종의 아들이었다.  그 어미가 천예(賤隸)에 속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멸시 하였다.

  그런데 공민왕이 어느 날 밤에 어떤 사람이 칼을 빼 들고 자기를 찌르려 할 때 승 하나가 나타나 자기를 구해준 꿈을 꾸었다. 왕이 이 꿈을 명심하고 지낼 때 김원명(金元命)이란 사람의 소개로 승 하나를 만났는데 생김생김이 꿈에 보던 승과 다름 없었으므로 이를 이상히 생각하고 말을 교환해 보았더니 그 말이 무슨 득도(得道)나 한 듯이 들렸다. 그리하여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자를 궁중으로 자주 불러들였다. 이 중이 자주 궁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이승경(李承慶)이란 사람은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 자는 반드시 이놈일 것이다.

하며 탄식했고 또 정지운(鄭之雲)은

  그 놈은 요물(妖物)일 것이다.

고 죽여 없애려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몰래 명령을 내려 편조로 하여금 몸을 피하게 하였다. 위에 말한 두 사람이 죽어 궁중에 없게 되자 편조는 머리를 길게 길러 두타(頭陀=행각승)로 행세함과 동시에 이름을 신돈(辛旽)이라 고치고 또 궁중으로 들어와 왕에게 배알하였다.

  왕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이자를 사부(師傅)로 섬기면서 국정 고문으로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간신배는 거의 다 이자에게 붙어 지내고 또 사대부의 아내나 첩은 이자를 신승(神僧)으로 앙시하여 구복(求福)하러 몰려 들었다. 따라서 사대부의 처첩치고서 이자의 콧김을 쏘이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신돈에 대한 왕의 신임은 날이 갈수록 더욱 두터워지기만 했다. 왕은 이따금 신돈에게 대하여

  어찌하면 국리민복(國利民福)의 도를 열 수 있는가?

물으면 신돈은

  왕께선 참소하는 말을 잘 들으시고 잘 믿는다 하는데 이 참간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면 세상이 반드시 복리를 받게 될 것이올시다.

  그럴 듯하게 대답하였다. 왕은 손수 맹서(盟書)를 써 놓고서 천지신명에게 맹세하였다.

  신돈이 궁중에 들어와 있은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궁중의 노신들은 모두 내쫓기고 말았다. 그러나 왕은 이를 불문에 붙이고 신돈에게 수정론도 보세공신(守正論道, 保世功臣)호를 내림과 동시에 영도첨의(領都僉議)란 벼슬을 주었고 또 나아가서는 신돈을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이란 작호까지 내렸다.

  다음에 신돈의 탐음성(貪淫性)을 하나하나 들어서 써보고자 한다.

 [가] 신돈의 탐은 행위는 날이 거듭될수록 더욱 심해졌다. 집에 있어선 으레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며 또 풍악도 계집도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고 지내다가 왕의 눈에 걸릴 듯하면 이 행위를 은폐하고 청담(淸談)으로 바꾸어 대하며 채과(菜果)를 내놓아 알랑거렸다. 어느 날 고려 중신의 한 사람인 이달충(李達衷)이 연회석에 참석하였다가 신돈을 보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公)은 지나치게 술과 계집을 좋아한다고 별의 별 말을 다하는 모양인데 공은 이 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우.

  말을 걸었다. 신돈은 이 말을 듣고 얼굴에 노기를 띠우며 연석을 등지고 어디론지 가고 말았다.

  [나] 역시 중신의 한 사람인 경부흥(慶復興) 등은 신돈 배격회의를 하고 있다가 도선기(道詵記)를 본 이야기를 하였다.

  도선기의 소위 <비승비속 난정망국(非僧費俗, 亂政亡國)>이란 문구는 딴 말이 아니라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자가 국정을 어지럽게 하여 나라를 멸망케 한다는 말인데 이 자가 바로 신돈으로 생각된다. 하루 바삐 이자의 탐음 무도한 행위를 왕께 아뢰어 처단케 하여야 하겠다는 의논을 했다.

  [다] 신돈은 개도 싫어하고 사냥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나 집안에 오계(烏鷄)의 고기, 백마(白馬)의 고기만은 충분히 준비해 두고 지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고 이 두가지 고기는 양기(陽氣)를 도웁기 때문이었다.

  [라] 그리고 우정언(右正言=이것은 사간원의 한 벼슬) 이존오(李存吾)는 말하기를

  신돈은 요물이라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 반드시 쫓아내야 한다.

하고 신돈의 존재를 배격하였다. 존오는 이와 같이 배격함과 동시에 왕에게 상소하였다. 글 상소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신돈은 어느 때나 말을 타고 궁중을 드나들고 또 전하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집에 있을 때에 재상이 뜰 아래서 절을 하면 그대로 앉아서 대할 따름이옵니다. 저, 최항(崔沆), 김인준(金仁俊)도 그런 태도는 취하지 못하였나이다. >

  그러나 왕은 이를 옳게 보지 않고 시신으로 하여금 상소문을 태워 버리게 함과 동시에 존오를 불러 면책하였다. 이때 신돈은 왕과 더불어 대좌(對坐)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존오는 소리를 높여서

  노승은 대체 무엇인데 그리 무례한가?

  꾸짖었다. 신돈은 이 말을 듣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어 상하로 자를 잡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벌어지자 왕은 더욱 얼굴에 노기를 띠고 순군옥(巡軍獄)에 하옥시켜 국문케 한 후 장사감무(長沙監務)로 내쫓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왕이 신돈에게 얼마나 홀렸던가를 알 수 있다.

  [마] 공민왕 이십년 신해(辛亥= 1,371)였다. 신돈은 이 때에 들어 마침내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  신돈이 처음 행각승으로 왕의 신임을 받게 되자 벌써부터 금난(金蘭)이란 여인과 또 첩으로 많은 여자를 곁에 두기 시작했다. 왕의 덕에 자기의 위복(威福)이 커지자 기현(奇顯)이며 최사원(崔思遠)을 자기의 심복으로 삼았다. 따라 신돈의 도당이 조정에 수두룩해지자 왕도 불안히 생각하여 무슨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신돈도 이를 눈치 채고 왕은 내쫓으려는 음모를 계획하였다.

  신돈의 문객 시랑(侍郞=고려 때의 문관 벼슬로 우두머리 벼슬) 이인(李 )은 이 흉모를 자세히 알자 자기의 성명을 감추고 한갓 한림거사(閒林居士)라 자칭하였다. 그리고는 글을 만들어 어느 날 밤에 이를 재상 김속명(金續命) 집에 투입한 후 미복(微服)을 몸에 떨치고 어디론지 도망하였다. 김속명이 이 글을 왕에게 올리자 왕은 신돈의 도당 현(顯)과 사원(思遠)등을 체포하여 국문하하고 분부를 내렸다.

  이들을 체포하여 국문한 결과 역모를 계획한 것이 사실임이 판명되어 이 두 사람은 즉석에서 참살되고 신돈은 수원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대간(臺諫=사간원, 사헌부의 벼슬의 총칭)들이 교대적으로 상소하여 신돈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이 상소에 의하여 임박(林樸)을 수원으로 보내 신돈을 죽여 없애게 하고 또 신돈의 이세까지 죽이게 하였다.

  공민왕 이십삼년 갑인(甲寅=西紀 1,374)이었다. 이 해에 홍윤(洪倫)과 최만생(崔萬生)이란 자가 침전(寢殿)으로 들어가 왕을 시해(弑害)했다.

  당초에 왕은 자제위(子弟衛)란 것을 설치하고 연소미모(年少美貌)의 소년을 선발하여 여기에 두게 한 후 대언(代言=왕명을 받아 전하던 벼슬) 김경흥(金慶興)으로 하여금 이를 거니르게 했다. 그리하여 홍윤, 한안(韓安), 권진(權瑨), 홍관(洪寬), 노선(盧瑄) 등의 소년들이 왕의 귀염을 받게 되었다. 이들 소년은 어느 때나 왕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왕은 워낙 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죽은 후로 맞아들인 여러 비(妃)들을 별궁에 두고 밤낮으로 죽은 노국공주만 생각하고 찾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느 때나 여자처럼 몸치장을 하고 김경흥이며 홍윤 등을 끌어다 놓고 마음대로 음란한 짓을 하였다.  왕은 자기의 뒤를 이을 후사(後嗣)가 없음을 걱정하고 윤(倫)과 한안 등으로 하여금 여러 비(妃)을 강간하여 아들을 낳도록 했다.

  그러나 여러 비중 정비(定妃) 안씨(安氏), 혜비(惠妃) 이씨(李氏), 신비(愼妃) 염씨(廉氏)는 죽기로 작정하고 강간에 불응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왕은 익비(益妃) 왕씨의 궁으로 가서 윤 등으로 하여금 간통케 하려 했다. 그러나 익비도 죽을 결심을 하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 왕은 대노하여 칼을 빼들고 익비를 찌르려 하자 익비는 죽을 것이 두려워서 윤 소년에게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당초에 왕은 윤 등으로 하여금 궁중의 여인을 간통케 한 것은 아들이 있기를 바라서였는데 때마침 익비 왕씨가 잉태를 했다. 내시(內侍) 최만생은 왕이 변소로 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 아뢰었다.

  신이 익비의 내전으로 갔사옵는데 비께서 홀몸이 아닌지가 벌써 다섯 달이나 됐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기쁨에 넘쳐 물었다.

  이젠 걱정이 없구나. 그런데 비가 누구와 정을 통해 그리 된 것인지 너는 아느냐?

  만생은

  비의 말씀에 의하면 홍윤인 것 같사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중얼댔다.

  과인은 내일 창릉(昌陵)을 참배하고 주연을 베푸는 체하고 윤을 없애련다. 그런데 네가 이 계획을 알게 되니 너까지도 죽일 테다. 그리 알고 있어라.

  그러자 만생은 이 말에 겁이 나서 윤과 함께 그 대책을 생각한 끝에 이날 밤에 왕의 침전으로 침입하였다. 때마침 왕은 대취하여 잠들어 있었다. 만생은 이 기회를 타서 단검으로 왕을 찔러 죽이고 또 윤은 김경흥 등을 난격한 후

  악도가 바깥에서 들어왔다.

  소리질렀다. 그러나 위사(衛士)들은 못 들은 체하고 있었고 내시 이강달(李剛達)만이 먼저 침전에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선혈이 방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강달은 왕이 병중에 계시다고 거짓 알리고 침대에 쇠를 채웠다. 새벽쯤 돼서 태후(太后)도 왕의 침전으로 와서 이를 보았으나 비밀에 붙이고 발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부흥, 이인임(李仁任) 등에게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인임은 만생의 옷에 피 흔적이 있음을 보고 곧 순위부(巡衛府)에 잡아넣어 국문케 하였다. 국문한 결과 이 자의 범행이 확인되었다. 또 홍윤도 국문을 받았는데 그의 대답도 만생과 다름 없었다. 그리하여 조정의 백관은 시중(市中)으로 몰려들어 만생과 윤 등을 찢어 죽이게 하였다.

  공민왕이 돌아간지 삼일 되는 날에 우(禑)는 중신들과 함께 발상을 하였다. 다음날 태후와 경부흥은 종친으로, 이인임은 우로 공민왕의 뒤를 잇게 하려고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었다.

  이때에 판삼사(判三司) 이수산(李壽山)은

  오늘의 의논은 마땅히 종실로 돌아가야 한다. 영녕군(永寧君) 유(瑜)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고 말하였다.

  이 말에 밀직(密直) 왕안덕(王安德)은 소리를 높여

  그건 안 될 말씀이요. 돌아가신 왕께서는 대군을 세우기로 하셨는데 내놓고 딴 데서 구하려는 것은 부당한 일로 생각하오.

하며 대들었다. 인임은 마침내 백관을 거느리고 우를 세워 공민왕의 뒤를 잇게 하였다.

  공민왕은 후사가 없음을 근심하고 지내던 어느날 미행으로 신돈의 집으로 간 일이 있었다.  이때 신돈은 자기 앞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면서

  상감마마, 이 애를 좀 보시옵소서. 이 애를 양자로 삼으시었다가 상감마마의 뒤를 잇게 하시면 어떨까요?

하고 진언했다. 이 때 왕은 이 말을 듣고 그저 웃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의 속마음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신돈은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자기 도당으로 하여금 무니노(牟尼奴=우의 처음 이름)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였다.

  그런데 왕은 신돈을 수원으로 귀양을 보내고 근신들에게

  과인이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갔다가 반야(般若)란 계집을 가까이 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다. 제신은 놀라지 말고 이 무니노를 잘 두호(斗護) 해 주길 바란다.

고 부탁했다. 왕은 신돈을 죽여 없앤 후 무니노를 불러서 이를 태후전에 맡겨 한씨 소생으로 하고 나아가서는 이인임에게

  이제는 원자(元子)가 생겨 후사 걱정은 없게 되었다. 신돈의 집에 한 미녀가 있어 그녀를 상관했더니 아들이 있게 되었다. 바로 반야의 소생이다.

고 말했다. 그리고는 왕은 또 시신 이미충(李美沖)에게 물었다.

  너는 <아기> 일을 잘 알고 있겠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미충이 대답했다.

  임박은 이상히 여겨 바깥으로 나와 미충에게 은근히 물었다.

  미충은 이 물음에

  왕께서는 일찍이 금으로 뭣인가 만들어 나로 하여금 신돈의 집으로 가서 아기에게 전하라 하신 일이 있었소. 신돈은 나에게 왕께서 자주 우리 집으로 오신 것은 나(신돈)를 위해 오신 것은 아니라고 말합디다. 그래서 나도 들은 대로 왕께 고했더니 오늘날 그런 말씀을 하시게 된 것 같소.

  대답하였다.

  신돈이 죽은 후 박은 당시의 사관(史官) 이지(李至)를 보고

  신돈을 죽여 없앤 것도 나라의 큰 경사였지만 이외에 또 큰 경사가 있음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그것은 왕께서 자주 신돈의 종녀를 가까이 하셔서 아드님을 얻게 된 것이다. 지금 나이가 일곱 살이나 된다 하는데 신돈은 이 애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기른 모양이다.  사관된 그대는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반야는 어느 날 밤에 몰래 태후궁(太后宮)으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오늘의 상감을 낳은 계집이 바로 저인데 한씨란 무슨 말이오니까?

하고 대들었다. 태후는 이 말을 듣자 두말도 하지 않고 순위부(巡衛府)로 하여금 엄격히 다스리게 하였다. 이때 삼사(三司)의 우사(右使) 김속명이 이를 보고  천하에 아들로서 생부(生父)를 분명히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혹간 있었지만 생모(生母)를 분간하지 못한 자는 내 들은 일이 없다.

고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반야는 결국 이인임 등에 의하여 임진강(臨津江) 중의 원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때는 신우왕(辛禑王)시절이었다. 이 시절에 최영은 이성계와 더불어 당시의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에게 참형(斬刑)을 가하였다.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정당(正當)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최영은 임, 염이 기용한 사람을 깡그리 내쫓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이성계는 최영에게

  임, 염이 권신으로 오래 있었으니 궁중(宮中) 부중(府中)의 사람이 거의 다 그들의 사람이었을 것이요. 그러니 그 사람들의 재덕(才德) 여하를 조사하여 여전히 두 사람은 두는 게 좋지 않겠소?

하는 뜻을 비쳤다. 그러나 영은 이 말에 응하지 않았다.

  말년의 고려는 염흥방, 임견미, 지대연(池大淵), 이인임 등에 의하여 국정이 좌우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전권을 갖고 용사(用事)하기 때문에 그 해독이 백성을 못 살게 하고 나아가서는 나라를 좀먹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그들을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와 같이 간주하고 미워하였다.

  최영은 이를 좌시할 수 없어 혁폐도감(革弊都監)을 설치하고 죽일 자는 죽여 없애고 내쫓을 자는 내쫓았다. 그리하여 한 집에서 주출(註黜)을 당한 자가 천여인에 이르기도 했다.

  최영이 이성계와 더불어 혁폐를 했기 때문에 상하는 통쾌히 생각하고 조야(朝野)는 경사로이 지내게 되었으나 그 대신 왕실이 점차로 고적해지고 우익(羽翼)이 없어져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못되었다.

  이때에 있어서 목은(牧隱), 포은(圃隱)과 더불어 일한 사람은 이숭인(李崇仁), 김진양(金震陽) 이외에 약간명 초야(草野)의 백면서생(白面書生) 뿐이었다. 국사가 제대로 진전되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

  이성계와 최영은 의좋게 그날 그날을 지냈다. 이성계의 위엄과 덕망이 나날이 높아져 가자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은 항상 신우왕에게 무고하고 물리치려 하였다. 이런 일이 있게 되면 최영은 얼굴에 노기를 띠고

  이성계는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이 나라가 망하게 될 큰 변이 생기면 이를 뉘에게 맡기겠는가? 깊이 생각하고 경솔히 굴지 말라.

고 경고(警告)하였다.

  신우왕 십사년 무진(戊辰=西紀 1,388년 명나라 홍무(洪武) 21년)이었다. 이때 왕은 이성계와 조민수(曺敏修)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토벌케 하였다. 당초 명나라 홍무 기유(己酉=西紀 1,368년)에 명태조는 부부랑(符寶郞) 설사( 斯)를 고려에 보내 새서(璽書)를 주게 하고 동시에 공민왕을 봉하여 고려 국왕으로 삼고 금인(金印)까지 만들어 보냈다.

그리하여 왕은 그때까지 쓰던 전원(前元) 연호를 정지함과 동시에 사은사(謝恩使) 강서찬(姜師贊)으로 하여금 전원에서 주었던 금인을 반납(返納)케 하고 의관문물을 모두 화제(華制)에 의하여 시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민왕이 시해(弑害)를 받자 김의(金義)란 자가 명나라에 진상할 마필(馬匹)을 팔아 치운 후 명나라 사신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게 되면서부터 마음이 변해서 중도에 부사(副使)인 채빈((蔡斌)을 살해하고 몰래 북원(北元)으로 도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신우왕 3년 정사(丁巳=西紀 1,377년)에는 북원으로 사신을 보내 2월부터 북원 연호 선광(宣光)을 사용할 것을 알리게 했다. 그런데 다음 해 무오(武午)에 이르러서는 선광 연호를 내던지고 9월부터 다시 홍무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다. 명태조는 철령(鐵嶺) 이북이 원래 전원에 속한 것이라 하여 요동으로 돌리게 하고 또 철령위(鐵嶺衛)란 것을 세워 요동에 백호(百戶)를 주게 하였다. 왕 신우가 이를 알고 4월에 들어서부터는 다시 홍무 연호를 중지하고 조민수로 하여금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를 삼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을 정벌케 하였다.

  고려는 원종(元宗)시대부터 원(元)나라를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겨왔다. 그 햇수가 한 백 년 정도가 아니었다. 따라서 충선왕(忠宣王) 이하가 모두 원나라의 외손(外孫)이었다. 그런데 명(明)나라가 흥하기 시작한 후부터 공민왕이 명나라를 의주(義主)로 섬겨 한때 말썽이 많았다.  다시 말하면 전원의 뒤를 이어 생긴 북원과 강경히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말썽이었다.

정도전(鄭道傳), 박상충(朴尙衷) 등 여러 사람은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삼자고 주장하고 이인임, 지대연 등 여러 사람은 북원을 종주국으로 삼자고 주장하여 피차간 대립이 되었는데 여기에만 그치지 않고, 이 때문에 죄를 입은 사람까지도 있게 되었다.

  최영이 집권하고 있을 때 명나라는 마침 철령에다 철령위를 세우고자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여러 사람들은 모두다 북원을 섬길 것을 주장하고 요동을 치기를 결의하였다. 최영은 이성계의 명망이 날로 높아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성계가 임금이 되리라는 말까지 떠돌았으므로 이 말을 낭설로만 믿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성계의 일거일동을 감시하다 못해 요동토벌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무슨 잘못이 있게 되면 이것을 증거로 명나라에 득죄(得罪)케하여 처치하려는 흉계를 품은 것이다.

  최영이 요동토벌할 것을 신우왕에게 권할 때에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은 영의 집으로 가서

  요동토벌은 무익한 일이다. 도리어 나라에 해가 될 일이다. 그만두는 것이 득책(得策)일것이다.

고 만유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이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그에게 임, 염의 도당이라는 이름을 붙여 하옥시키고 장형(長刑)을 가하여 멀리 정배를 보냈다가 죽이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자 신우왕은 최영만 상대하여 요동토벌을 결의한 후 봉주(鳳州)에 이르러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놓고

  과인이 요동을 토벌함에 있어 경들은 최대의 힘을 아까지 말라.

  부탁하자 이성계는

  오늘의 형편으로는 출사(出師)하는 게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첫째 약소한 자가 강대한 자를 치려 하니 불리할 것이요.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내놓으려 하니 불리하고, 셋째 나라의 전군을 내놓아 원정(遠征)을 하면 왜구가 이 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니 크게 불리할 것이며,  넷째 벌써부터 더위와 비가 심해 궁노(弓弩)는 풀리고 군사는 악역(惡疫)에 걸릴 테니 역시 불리할 것이옵니다.

고 아뢰었다. 신우왕은 이 말에 굴하지 않고

  글세? 그러나 이미 출사를 했는데 어찌 중단한단 말이요?

고집을 부렸다. 이성계는 여러번 출사중지를 권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경도 이자송의 뒤를 밟고 싶은가?

힐책하는 듯 반문하였다.

  이성계는

  이자송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이름은 천추에 전해질 것이 아니오니까?

  그래도 왕은 여전히 듣지 않자 이성계는 물러나와 울면서

  생민의 불안이 이제부터 시작케 되었다.

크게 탄식하였다.

  신우왕은 평양으로 와 영에게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의 직을 맡기고 조민수에게는 좌도도통사(左道都統使)의 직을 맡겨 심덕부(沈德符) 등으로 하여금 그의 절제를 받게 하고 또 이성계에게는 우도 도통사(右道都統使)의 직을 맡겨 이두란(李豆蘭) 등으로 하여금 그의 절제를 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좌우군의 총 수가 38,600에 달했는데 이것을 10만이라 가칭하고 진군케 하였다. 이때에 신우왕과 최영은 대원수격이 되어 평양에 머물러 있으면서 좌우군을 절제하고 있었다.

  때는 바로 5월이었다. 이때에 좌우군은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이성계는 의분을 참을 수 없어 회군(回軍)하기로 결심했다.

  좌우군 도통사는 신우왕에게 아뢰기를

  신등이 압록강을 지낸즉 앞에 큰 내가 있었사옵니다. 이것이 빗물로 창일 되어 있어 개울에 벌써 수백명이 빠져 죽었삽는데 개울은 더욱 깊어져 한층 더 위험을 느끼게 합니다. 이대로 강중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양곡만 허비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옵니다. 적은 놈이 큰놈을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데 경대법일 것이올시다. <철령위>를 세운다는 말을 들의셨으면 박의중(朴宜中)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글을 올려 품하는 게 좋을 것 같사온데 지금 별안간 대국을 정벌한다는 것은 나라와 생민을 위하는 일이 못될 것으로 생각되나이다.  바라컨대 전하! 회군하도록 분부를 내리소서.

  그들은 이런 내용의 글을 올렸으나 왕은 역시 본체 만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휘하 제장에게

  우리가 지금 명나라 국경을 침범하면 당장에 나라와 생민에 위해가 닥쳐올 것이다.

경고하였다.  성계는 또 말을 이어

  그런데도 상감은 묵연히 계시고 또 최영도 이미 늙어서 그런지 모른 체만 하고 있으니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여러 장수와 더불어 왕을 뵈옵고 몸소 왕의 측근에 있는 악도를 삼제(芟除)하고 싶으나 왕께 그런 아량이 없으니 어찌한단 말이요? 이 생민의 화(禍)를 누가 물리쳐 준단 말이요?

하고 탄식하매 여러 장수는 이구동성(異口同聲)이로

  우리나라 사직의 안위(安危)는 이장군 일신에 달려 있습니다. 저희는 이장군의 분부라면 무슨 분부든지 받들겠소이다.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으로 회군하자 이성계는 백마에 올라 붉은 활에 백우전(白羽箭)을 곁들어 가지고 강변에 서 있었는데 군중의 여러 장수는 그를 바라보고

  백세내세(百世來世)에도 저런 장수가 또 있을까?

  칭송했다.

  그러나 위화도에서 회군하기 전 이성계의 고향 동리에는 다음과 같은 동요(童謠)가 떠돌고 있었다.

  서경(西京) 밖에는 불빛이 충천해지고

  안주성(安州城) 밖에는 불연기 자욱하네

  이 새를 오가는 이원수님은 보시는가? 살벌장을

  팔도의 생령 원수님을 신명처럼 바라고 있네

  이와같은 동요가 있은지 얼마 안 돼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하기 시작햐여 국내 인심을 안정케 하였다.

  성계의 둘째 아들은 그의 형 방우(芳雨) 및 이두란의 아들 화상(和尙) 등과 함께 신우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와 군전(軍前)으로 왔다. 이때 신우왕이 말을 달려 서울에 돌아오자 여러 군사는 근교(近郊)로 몰려와 글로써 최영의 죄를 열거하여 문죄하였다.

  그러나 신우왕은 본척 만척 그 요구에 응하지 않고 설장수( 長壽)를 보내 여러 장수를 개유하고 파병케 하였다. 그러나 여러 군사는 도성 문 밖으로 나아가 주둔할 따름이었다.

  신우왕은 최영과 함께 병사를 소집하여 4대문을 지키게 하고 동시에 조민수 등 여러 장수의 직함을 삭탈하고 항전하려 하였다.

  좌군은 선의문(宣義門)으로 이성계는 숭인문(崇仁門)을 거쳐 침입하였다. 좌우군이 이렇게 다투어 가면서 들어서자 성을 지키는 군사들도 별 대책이 없어 침입하는 것을 방관만 했고 또 성내의 사녀(士女)들은 주육을 가지고 달려와 군사들의 수고에 사례하였으며 늙은이와 아이들은 성상(城上)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면서 환호용약(歡呼勇躍)하였다.

  이때 민수는 검은빛 대기(大旗)를 내세우고 영의교(永義橋)에 이르렀으나 최영의 군사 때문에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자 뒤를 이어 이성계가 황룡을 그린 대기를 내들고 선죽교(善竹橋)를 거쳐 남산(男山)으로 올랐다. 이때 홍진은 일어나 하늘을 가리고 북소리는 울려 성중이 떠나갈 것 같았다. 최영의 휘하들도 씩씩했지만 모두다 이성계의 군기만 보고도 궤주(潰走)하였다.

  최영은 항전할 도리가 없어 화원(花園=신우왕의 소재지)으로 돌아오려고 창으로 수문자(守門者)를 찔러 물리친 후 원내로 들어섰다. 이때 이성계는 암방사(岩房寺) 북령으로 올라가 휘하 군사로 하여금 대라(大螺)를 한 번 불게 함과 동시에 화원을 수백겹으로 포위케 하였다.  이와 같이 만들어 놓고 소리를 높여 최영 내놓기를 청했다. 이때 신우왕은 영비(寧妃=최영의 딸)와 최영을 데리고 팔각전(八角殿)에 있었으나 나오기를 싫어하였다. 그래서 여러 군사는 화원을 훼철(毁撤)하고 난입하여 곽충보(郭忠補)가 앞장서서 최영을 수색하였다.

  신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자 최영은 왕에게 재배한 후 충보를 따라 나섰다.  이때 이성계는 최영을 보고

  이와 같은 사변이 나의 본심에서 생긴 것은 아니요. 그러나 요동을 토벌한다는 것은 대의에 벗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나라를 불안케 하는 일이므로 부득이 이런 수단을 취한 것이니 이를 양찰하고 잘 가 계시오.

하며 서로 울고 최영은 고봉현(高峰顯=오늘의 고양)으로 추방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도통사와 36원수는 대궐로 들어가 사례하고 제각각 군으로 돌아갔다.

  최영은 조인옥(趙仁沃) 등이 솔선하여 죄를 들어 참(斬)할 것을 청하자 마침내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그러나 그는 형에 으르러도 사색(辭色)이 변해지지 않았으며 또 도성 안의 모든 사람은 문들을 닫아 걸고 그를 조상하였다. 그리고 원근에 사는 남녀 노소며 아동주졸 등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그의 최후를 조상했다.

  이인임이 일찍이

  이판삼사(李判三司=이성계)는 이 나라의 주인이 되고 말 것이다.

고 한 적이 있었다. 최영은 이 말을 듣고 처음엔 크게 노하였으나 나중엔

  인임의 말이 틀림없을 것 같다.

하며 탄식하였다.

  그 해 6월에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은 모두 돌아왔다. 신우왕을 폐하여 강화로 추방하고 신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위에 오르게 함과 동시에 동월 초 3일부터 홍무 연호(洪武年號)를 다시 쓰기로 했다.

  신우왕은 쫓겨나가는 날 밤에 내시 등 80여명과 더불어 갑옷을 입고 이성계 및 조민수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모두 군문외(軍門外)에 주둔해 있고 집에는 없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폐왕 창 1년 기사(己巳=西紀 1,389년)에 창(昌)을 폐하여 강화로 추방하고 정창군요(定昌君瑤)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가 바로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이다.

  김저(金佇)란 사람은 최영의 생질이었다. 그는 정득후(鄭得厚)란 사람과 더불어 몰래 여흥(麗興)으로 가 폐왕 우(禑)를 찾았다. 우는 그들을 보고 울면서

  아무리 추방된 몸이지만 울화증이 나서 못 견디겠소. 이젠 꼼짝도 못하고 죽게 됐소! 내가 지금 장사(力士) 한 사람만 얻게 되면 이시중(李侍中=이성계)을 없앨 수 있겠는데. 이시중을 그대로 두고 죽는다는 것이 크게 한이 되오.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겠소.

  칼 하나를 정득후에게 전하게 하고 이것으로 거사할 것을 당부하였다. 득후는 정말 그리할 것같이 대답하고 그 길로 이성계에게로 가 이 음모가 있음을 바른 대로 고했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김저를 순군옥에 가두어 국문케 하고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과 더불어 의논하였다.

  우(禑)와 창(昌)은 당초부터 왕씨(王氏)가 아니다. 종사를 받들 자격이 없다. 폐가입진(廢假立眞)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비(定妃)의 교지에 의하여 우를 강릉으로, 창을 강화로 옮긴 다음날 이성계는 여러 중신과 의논한 후 정창군을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이다.

  이때 윤회종(尹繪宗)은 글을 올려 우와 창을 죽여 없앨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우는 강릉에서 창은 강화에서 참형을 받고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때 우의 비(妃)였던 영비는 소리를 내어 통곡하면서

  내가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최영)의 잘못으로 생겨진 것이다.

부르짖었다.

  그리고 간관(諫官)등은 이색(李穡)의 입창영우(立昌迎禑)한 죄를 논하고 이색에게 극형을 가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이색을 장단에서 국문하였는데 색의 말은 이러했다.

  지난 해 명나라의 예부상서(禮部尙書=우리의 외무부장관에 해당) 이원명(李原明)이 말하

기를 <너희 나라는 아비를 쫓아내고 아들을 세우니 천하에 이런 법도 있는가? 또 왕과 최

영이 모두 붙잡혀 옥에 있다니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 하고 힐문한 일이 있었다. 내가 환국한 후 이시중에게 한 말이 있다. 원명의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었지만 입으론 말할 수 없다. 여흥은 머니 가까운 데에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하면 임금을 추방했다는 소리가 잠잠해질 것이라고…

  이 말이 있은 후 색을 함창으로 옮기고 색의 아들 종학(種學) 등은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하여 종학 등은 결국 이씨 혁명이 있을 때 죽고 말았다.

 

 

 

  善竹橋에 흘린 피

  공양왕의 세자 석(奭)이 명나라에 가 있다가 돌아오자 이성계는 황해도 황주에까지 나아가 마중을 한 후 해주에서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노루가 있어 이를 쏘아 잡게 되었는데 채 말고삐를 잡지 못하여 마상에서 떨어져 몸을 몹시 상해 견여(肩輿)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

  시중(侍中=정승 벼슬) 정몽주(鄭夢周)는 이성계의 위덕(威德)이 날로 성해 가는 것을 걱정스럽게 생각하여 자기 파와 동모하고 성계를 제거하려는 결의를 품고 있었다. 성계가 때마침 말에서 떨어져 고생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당시의 대간(臺諫)에게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대단히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먼저 그의 우익(羽翼)으로 있는 조준(趙浚) 등을 도륙하고 나중에 성계를 처치하는 게 좋겠다.

  제언하였다.

  그리하여 대간은 이를 삼사(三司)에 고하였다. 삼사는 조준,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도전, 밀직사(密直使) 남은(南誾), 예조판서(禮曺判書) 윤소종(尹紹宗), 청주목사(淸州牧使), 조박(趙璞) 등의 죄를 들어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이를 도당(都堂)에게 내주어 처리하게 했다. 이때 몽주는 도당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조에 부채질을 하여 여섯 사람이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하였다. 또 나아가서는 자기 당파의 사람인 순군천호(巡軍千戶) 김구련(金龜聯)과 형조정랑(刑曺正郞) 이번(李幡) 등으로 하여금 구금해 놓은 장소로 나아가 국문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때 방원은 제릉(齊陵=태종 모후 한씨의 묘소) 곁에서 여막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말에서 떨어져 돌아왔다는 소문과 또 몽주는 아버지가 입경하는 날에 난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왔다. 방원은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부친에게

  정몽주가 저의 집을 구렁에 넣을 음모를 하고 있습니다. 속히 돌아가셔야 합니다. 여기에 유숙하시다간 큰 봉변을 당하시게 됩니다.

  진언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이 말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도 방원은 재삼 재사 간하여 마지 않았다.  성계는 부득불 응하지 않을 수 없어 억지로 고통을 참아가면서 밤새도록 걸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몽주는 대간을 시켜 교대적으로 글을 올리게 하여 조준, 정도전 등을 죽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방원은 몰래 성계에게로 나아가

  아버님, 정몽주를 죽여야 합니다. 몽주를 죽이는 것은 저희 집을 살리는 것이올시다. 속히 처치하소서.

  간청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이 말을 듣고

  그게 다 무슨 말이냐? 사생(死生)은 유명(有命)한 것이다. 나는 그리하고 싶지 않다.

  대답할 따름이었다. 방원은 그래도

  몽주를 죽여야 합니다.

고 고집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여전히 불을하면서

  다 듣기 싫다. 그만 말하고 빨리 돌아가 너하는 일이나 완수하라.

  아들을 돌려보냈다.

  방원(芳遠=성계의 다섯째 아들 후에 태종)은 숭교리 구저(崇敎里舊邸)에 있으면서 성계의 응낙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방안만 지키고 있을 때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방원은 나는 듯이 나가 보았다. 대문을 두드린 사람은 광흥창(廣興倉) 사자(使者) 정탁(鄭擢)이란 사람이었다. 정탁은 방원을 보기가 무섭게

  오늘 생민은 이장군님을 신명과 같이 보고 있소이다. 바로 신명으로 나서실 때올시다. 왕후장상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충고 하였다.

  그리하여 방원은 방과(芳果=성계의 둘째 아들) 및 제(濟=성계의 사위)와 더불어 의논한 후  몽주를 볼가불 없애야 하겠소. 내가 천인(天人)이 공노(共怒)할 죄를 지게 될지라도…

  그리고는 이두란으로 하여금 정몽주를 격살할 것을 부탁했다. 이때 두란은

  글세? 이성계공(公)이 모르시는 일을 내가 어찌 감행한단 말이오?

  달게 응낙하지 않으매 방원은 조영규(趙英珪) 등을 불러

  우리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다해 온 것은 이 나라 백성이 다 아는 바이다. 그런데 정몽주의 모함으로 이제 악명을 듣게 되었다.나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에 필요한 사람인가?  이씨를 위하여 나서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단 말인가?

  부르짖었다.

  이때 조영규는

  제가 이씨를 위하여 최대의 힘을 바치고자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방원은 조영규, 조영무(趙英茂), 고려(高呂), 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들어가 몽주를 없애게 하였다.

  그런데 별안간

  예라 물러있거라.

  예라 물러있거라.

하는 벽제성( 除聲)이 들려왔다. 그래서 나가보니 정몽주가 문전에 당도해 있었다.

  성계의 서형(庶兄) 원계(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은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을 몽주에게 알렸다.

  몽주는 이말을 듣고도

  무엇? 그러면 한 번 봐야 하겠다. 문병을 온체하고..

  이어 문을 두드렸다.

  이때 이성계는 몽주를 여전히 친절히 대하였다. 성계의 서제(庶弟) 화(和)도 있었는데 그는 방원에게

  몽주를 처치할 때는 바로 이때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진노하실까 걱정된다.

말했다.

  그러나 기회란 뒤를 이어 오는 것은 아니올시다. 이 기회를 잃으면 다시는 얻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방원은 이와같이 대답하고 조영규로 하여금 칼을 차고 몽주가 지나는 길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때마침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사망하였다.

  몽주는 유원의 집으로 가 조상을 하고 거기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영규등은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몽주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몽주가 나타났다.

  영규는 나는 듯이 달려가 몽주에게 일격을 가하였으나 빗나가서 헛수고로 돌아갔다. 몽주는 말을 빨리 달리게 하면서 피신하기 시작했다. 영규는 또 달려들어 말목에 일격을 가했다. 말이 쓰러지자 몽주는 말에서 떨어져서 다시 도망하기 시작했다.

  이때 영규의 일당인 고려(高呂) 등이 달려들어 몽주를 격살하고 말았다.

  몽주를 격살한 후 방원은 아버지 성계에게로 와 몽주를 격살한 것을 보고하였다.

  이성계는 이 말을 듣기가 무섭게 대경실색하면서

  무엇? 어째? 우리 집은 대대로 충효(忠孝)로 유명한 집인데 너희들이 맘대로 일국의 대신을 죽였단 말이냐? 국인이 나를 무엇으로 보겠느냐?

고 소리를 내 꾸짖었다.

  그러나 방원은 엄연한 태도로 말했다.

  아버님, 몽주와 몽주의 일당은 우리 집을 멸망의 구렁으로 쓸어 넣으려 노리고 있은 지 오래였습니다.  이러한 몽주를 어찌 그대로 내버려 둔단 말씀이오니까?

  그러나 성계의 노기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 강씨 부인은 성계의 기색을 두루 살피고는  대감께서는 평소에 대장군으로 자임하시고 모든 일을 잘 처단하시더니 지금 와서는 왜 그리 비겁해지셨습니까? 용기와 담력을 내서 행하십시오.  격려했다.

  그리하여 성계는 다음 날에 사람을 보내 이와 같이 아뢰게 했다.

  몽주는 남몰래 대간(臺諫)과 손을 잡고 충량한 사람을 모함했기 때문에 마침내 죽고 말았사옵니다. 바라건대 준(조준) 등을 조치하시와 대간과 더불어 이를 변명케 하소서.

  그리하여 왕은 부득이 대간인 사람들을 순군옥(巡軍獄)에 구금시키고 배극렴, 김사형(金士衡)으로 하여금 그들을 국문하도록 했다. 이때 좌상시(左常侍) 김진양은  몽주 및 이색 또는 우현보(禹賢寶)가 이숭인과 이종학, 조호(趙瑚) 등을 보내 신 등으로 하여금 탄핵하도록 시켰나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하여 숭인 등 세 사람을 순군옥에 구금하였다가 얼마 안 돼서 김진양, 이확(李擴), 이뢰(李 ), 이돈(李敦), 권홍(權弘), 정희(鄭熙), 김묘(金畝), 서진(徐甄), 이작(李作), 이신(李申) 및숭인, 종학 등을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당시의 유사(有司)인 사람은 말하기를  진양 등의 죄는 참형을 받아야 한다.

고 주장했지먈 성계는  그러나 김진양이란 탄핵한 것은 몽주의 사주(使嗾)에서 생긴 일이다. 어찌 극형을 진양에게 가한단 말이냐?

하며 진양을 용서하였고 이색은 한주(韓州=韓山)로 추방하였다.

  정몽주와 이성계는 당초부터 나라의 중신으로 유명하였다. 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한 후부터는 성계도 몽주와 같이 정승의 열(列)에 들어가 함께 나라에 몸을 바치고 지냈다.

  그런데 이성계의 공훈이 날로 높아져 민심이 성계에게 쏠렸다. 이러했기 때문에 정몽주는 이성계가 고려조에 대신하여 왕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남모르게 성계를 없애려는 꿈을 꾸었다.

  방원은 일찍이 아버지 성계에게  정몽주는 어째서 저희 집을 멸망의 구렁으로 쓸어 넣으려 하는 것인가요? 물었다.  성계는 그렇다고 해서 몽주에게 무슨 앙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

  몽주의 음모가 청천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하자 방원은 어느 때 집에다 잔치를 베풀고 몽주를 청하였다. 이 좌석에서 방원은 시조로 몽주를 종용(慫慂)하였다. 그 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방원이 이와 같이 먼저 부르자 몽주는 이에 화답하는 노래를 불러 자기의 심경을 피력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 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몽주가 이와 같이 화답하자 방원은 몽주가 변심하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 마침내 부하로 하여금 격살 케 한 것이다.

  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남은(南誾)은 조인옥(趙仁沃)과 더불어 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할 것을 남몰래 의논하고 이를 방원에게 알렸다.

  비밀히 방원은 이 말을 듣고  알겠소. 그러나 이 일은 대사이므로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되오.

  대답하였다. 당시의 민심은 모두 성계에게로 돌아 조인광좌(稠人廣坐) 중에서도  천명과 인심이 벌써부터 이시중에게 돌아갔는데 왜 급히 서두르지 않는고? 하고 떠들어대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리하여 공양왕 임신 유월(壬申六月)에 이르러 방원은 남은과 더불어 추대 계획을 세우고 비밀히 조인옥, 조준, 정도전, 조박 등 52인과 협력하여 추대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이에 불응하고 노발대발할까 봐 방원도 보고할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부득이 강씨부인에게로 나아가 추대 계획의 전부를 알림과 동시에 이를 성계에게 알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강씨 부인은 기회를 엿보고 지내다가 어느 날 밤에 이를 이성계에게 알렸다. 강씨에 대한 성계의 태도는 방원에 대한 태도보다 지극히 부드러웠다.

  그리하여 7월 12일에 시중 배극렴 등은 정비(定妃=공민왕비)에게로 나아가  오늘의 상감은 명철하시지 못하여 임금으로서의 위망(威望)을 잃어 민심이 벌써부터 이반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상감으로서는 이 사직과 이 백성을 부지하지 못하실 것으로 믿사오니 바라컨대 오늘의 임금을 폐하소서.

하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정비는 왕을 원주(原州)로 내쫓고, 13일에 이성계로 하여금 국사를 맡게 하였다.

그리고 15일에 이르러서는 배극렴 등이 국보(國寶)를 성계에게 전하고자 성계의 잠저(潛邸)를 향하여 나섰다.

  그런데 이때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만이 불찬성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남은만은 민개를 죽이려 하였다. 이때 방원은  도의상 그리할 수는 없다. 멈추라!

  재삼 만류하였다. 그리하여 민개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성계는 대문을 굳게 닫고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혼자 앉아 있었다. 이를 안 배극렴은 대문 짝을 떼 던지고 들어가 옥새를 청상에 놓고 대배(大排)를 하며 동시에 북을 울리면서 <천세(千歲) 천세>하고 성계를 찬송하였다.

  그러나 성계는 이를 굳이 사양하면서  옛날부터 임금이 되려면 천명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천명도 못 받은데다 덕이 부족해서 임금 노릇을 못하겠다.

  여전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소신료(大小臣僚)는 말할 것도 없으며 여항의 장로(長老)들도 그냥은 물러서려하지 않았다.

  다음 날 임신 7월 16일 병신(丙申) 즉 西紀 1,392년 음력 7월 16일이었다. 이날 백관은 반(班)을 지어 수창궁(壽昌宮) 서편에서 성계를 맞이하였다. 이 환영의 의식이 끝나자 이성계는말에서 내린 후 걸어서 정전(正殿)으로 들어가 즉위한 후 옥좌에서 물러나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고 육조판서 이상의 관직을 가진 사람을 전각 위로 모이게 하고  과인이 이 나라의 우두머리 정승이 된 것만해도 분수에 넘치는 일인데 오늘 또 이런 일이 있게 되니 참 의외가 아닐 수 없소. 병중에 있지 않고 몸이 건강했더라면 필마로 이 불의의 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요. 그런데 병에 걸려 수족을 맘대로 쓰게 되지 못하여 이런 일을 받게 되었소. 경등은 여전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과인을 도웁고 나아가서는 전조의 중의대소료로 하여금 여전히 국사에 힘쓰게 하오.

  간곡히 부탁했다.

  임신 7월 16일! 이날은 이성계가 여조 5백년 사직을 전복시키고 조선국 태조로 출발한 첫날이었다.  그때 나이 58세였다.

  그런데 나라를 들어 이성계에게 공손히 바치고 만 고려 32대 임금 공양왕은 어떠한 임금이었던가를 다음에 잠깐 써 보고자 한다.

  공양왕은 한갓 유하고 잔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랬던지 울기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런데다 국정에는 마음이 없고 불도(佛道)에 만 쏠려서 국사가 어려워지기만 했다.

그리하여 고려의 우국대신(憂國代臣) 정몽주는 어느 날 경연(經筵)이 벌어졌을 때 왕에게  선비의 도는 일상 유용한 일을 함에 있고 요순堯舜)의 도도 또한 이에 있사옵니다. 기거동작에 있어 그 옳은 바를 얻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요순의 도가 되는 것이올시다. 그런데 저 불가(佛家)의 도는 이와 정반대가 아니오니까? 친척을 멀리하고 남녀와의 관계를 끊고 홀로 암굴 속에 앉아서 초의(草衣)를 몸에 떨치고 목식(木食)을 하니 이는 관공적멸(觀空寂滅)을 본 받는 생활이 아니고 뭣이겠습니까?

  사불(事佛)의 폐를 말해 올렸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들은 척 만 척할 뿐이었다. 정몽주는 온갖 방법으로 고려를 구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그런 정도였으므로 몽주의 우국열성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고려는 마침내 이성계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고려의 멸망과 함께 죽고 만 정몽주는 어떠한 사람이었던가? 그의 약전(略傳)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정몽주의 자(子)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圃隱)인데 지주사(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예다.  그의 어머니 이씨는 그를 잉태할 때 난초분을 안고 있는 꿈을 꾸었으므로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지었다. 천생 사람됨이 수려하고 또 어깨에 사마귀가 일곱이나 있는데 그 벌려져 있는 모양이 북두(北斗)와 같았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그의 어머니가 낮에 흑룡(黑龍)이 후원 배나무에 올라가는 꿈을 꾸고 깨어 보니 그것은 바로 몽난이었다. 그래서 이름을고쳐 몽룡(夢龍)이라 지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있다가 태조(이성계)를 따라 삼선삼개(三善三介)를 물리쳤다.

  그는 부모상(父母喪)에 반드시 묘측에 여막을 세우고 여기서 종상(終喪)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효자문(孝子門)을 세워 그를 표창하였다. 그리고 주자학(朱子學)에도 밝아서 모든 선비들은 스승처럼 앙시했다. 이색은 일찍이 말하기를  몽주의 논리가 횡성수설같이 들리지만 어느 하나라도 이론에 안 맞는 것이 없다고 칭찬했다. 이 때문에 후인들은 그를 이학의 조(祖)로 추대하였다.

  몽주는 인격적으로 보아 첫째 기백(氣魄)의 인(人)이었다. 그가 일찍이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서장관(書將官)이 되어 명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해중에서 사나운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 일행이 다 죽게 되었을 때에 일개 암도(岩島)에 표착하여 13일 동안을 천명만 기다리고 초조히 굴지 않았다 한다. 이런 것을 보면 그의 기백을 알 수 있고 또 하나는 명나라가 원나라를 전복시키고 일어났을 때 그는 당시의 조정에 대하여 명나라와 가까이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권신(權臣) 이인임은 또다시 원나라를 섬기고자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몽주는 한사코 문신 10여인과 더불어 왕에게 그 불가함을 역설하여 사명(事明)할 것을 글로 아뢰었다. 이 때문에 권신 이인임은 몽주를 미워하여 언양(彦陽)으로 귀양 보냈다.

  이런 점은 몽주가 수정불굴(守正不屈)의 대장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몽주는 대담한 변설(辯舌)의 인(人)이었다. 어느 때 왜구(倭寇)가 해주로 쳐들어와 전군이 텅 비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일본으로 가 문책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이인임은 정몽주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몽주를 일본에 보내고자 왕에게 청하였다. 몽주는 이인임의 심사를 알면서도 가기로 하였다.

  수월치 않은 일본이었지마는 일본은 몽주의 청산유수와 같은 변론을 듣고 칙사와 같이 대접했다. 그리고 그의 시문을 구하는 자가 떼를 지어 모여 들었기 때문에 몽주는 단 하루를 한가히 보내지 못했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국내에 말썽이 생겨 고려에 군사를 보낼 결심을 하고 있었다.

  고려는 적당히 사절을 보내 성절(聖節)을 치하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의 사람들은 무슨 호령이나 받을까 봐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이때 권신 임견미가 신우왕에게 몽주를 추천했다. 그리하여 몽주는 사명을 완수할 것을 장담하고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성절일(聖節日)에 하표(賀表)를 내 놓았다. 명나라 황제는 하표를 보고  너희 나라는 무슨 핑계를 하고 오지 않으려다 할 수 없으니까 박두해서 온 것이지?

  힐책하듯이 묻는 것이었다. 몽주는 지난날에 있었던 해상에서의 조난사실을 들어 여전히 현하(縣河) 변(辯)으로 대답하였다.

  명제(明帝)도 이 말에 감동하여 몽주를 특대하였다. 그리고 신우왕 12년에도 몽주가 명나라로 가 관복(冠服)을 청하고 또 세공(歲貢)의 면제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5년간 미납(未納)한 공물이 면제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우왕으로 부터 두터운 상사(賞賜)를 받았다.

  몽주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인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내(內)에 있어서도 외(外)에 있어서와 같이 큰 일이며 큰 문제를 처리함에 놀랄 정도로 시원하고 통쾌하였다.

  그리하여 이성계가 공양을 임금으로 세움에 있어서도 도움이 커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됨과 동시에 순충론도 좌명공신(純忠論道 佐命功臣)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또 이조는그 에게 영의정(領議政)이란 벼슬을 증(贈)하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문묘(文廟)에 모시게 하였다.

  그가 조영규 도배에게 격살을 당한 때의 향년은 5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