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란 손수건 (2011. 6. 19. 삼위일체 대축일)

[탈출 34,4ㄱㄷ-6,8-9; 2코린토 19,11-13; 요한 3,16-18]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사랑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그것은 그 진리를 이해할 만큼 우리가 큰 사랑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그 사랑을 배우려는 것입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대륙간 고속버스가 미국 북동부에서 동남부로 가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에 승객들은 바에서 식사를 같이 하며 친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났지만 계속 우울하게 있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승객들은 그를 자신들의 식탁에 초대하여 그 이유를 들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빙고였습니다. 그는 막 교도소에서 출소하여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자주 사고를 쳐서 여러 번 교도소에 갔는데, 이번 출소 전, 그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아직 사고를 치는 이런 생활을 바꾸지 못했고, 너는 아직도 젊으니, 이제 나를 떠나서 좋은 사람 만나 좋은 인연을 맺어라. 하지만 아직도 나를 받아줄 수 있다면, 마을 어귀에 있는 느티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아놓으면 버스에서 내리고, 없으면 그냥 떠나겠다고.” 그 말을 들은 승객들은 버스가 그 마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긴장하며 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버스운전사가 문제 없다는 듯이 기뻐하며 크락숀을 빵빵거렸습니다.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에는 수천 장의 노란 손수건이 찬란하게 걸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사랑하는 당신을 받아들인다는 표시로.

노란 손수건 이야기는 사랑의 감정이 없어지면 헤어지는 변덕스러운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두 남녀 사이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교의 아가페 사랑도 의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이루고 실현하 는 사랑은 마치 가을의 단풍처럼 찬란하고 아름답습니다. 이 노란 손수건 이야기에서 보이듯이, 삼위 하느님께서는 혼자 사랑하고, 혼자 독백(monologue)하는 고독한 분이 아니시라, 서로 나누고 대화(dialogue)하며 기쁨을 나누시는 분들입니다. 동방의 삼위일체 이콘을 보면, 이 세 분은 자신을 보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면서, 놀랍게도 성부께서 세우시고, 성자께서 실행하시고, 성령께서는 실현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인간적 사랑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먼저 삼위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을 배워서 실현하고 나누도록 합시다.

 

 

2.   콩 심은 데 콩, 팥 심은 데 팥 (2011. 6. 22. 수)

[창세 15,1-12.17-18; 마태오 7,15-20]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납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이, 행복한 것을 심으면 행복한 결실이 맺어집니다. 불행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심으면 그만큼 불행한 결실을 맺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 인과법칙입니다. 지금의 결과에는 그 원인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 원인이 외부적인 요인과 남 탓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의 해결이 어렵고 복잡해집니다. 외부 환경과 남 탓에 시간을 다 보내면 진작 내가 해야 할 일을 놓치게 됩니다. 그런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나의 길을 가고 올바른 선택을 통해 나의 삶을 점차 개선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삶은 모름지기 그래야 합니다. 탓하고 불평하는데 시간을 허비하기 보다 조금씩 개선해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나의 삶이 철저하게 외부적 조건과 인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현재의 삶은 운명이고 이것을 바꿀 수 없다고 여긴다면, 불행하게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외부적인 조건과 인물에 큰 영향을 받음에도, 또 환경이 썩 유리하지 않음에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영혼을 스스로 바꾸기를 선택하는 이들로, 영혼을 비옥한 밭으로 경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3.   인내와 수양과 희망 (2011. 7. 3. 성 김대건 대축일)

[역대 하 24,8-22; 로마 5,1-5; 마태오 10,17-22]

로마서는 인내와 수양과 희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소 순교자들 혹은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평소의 이런 수행이 순교로 드러납니다.

환난은 인내를 형성합니다. 인내의 희랍어 휘포모네(hypomone)는 단순한 인내 이상의 것으로 피동적인 참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세상의 온갖 시험들과 시련을 이기고 정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굴복하여 휘둘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사물을 정면으로 대항하여 이기는 정신입니다. 인내는 수양을 자아내고, 수양은 희망을 만듭니다. 수양은 희랍어로 도키메 (dokime)라 하는데, 불을 통해 모든 불순물이 타서 제거된 금속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환난이 인내를 만나면서 사람은 더 강해지고 순수해집니다. 수양은 희망을 자아내며, 수양을 통해 웬만한 시련을 능히 견디고 진정한 것을 바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당신 홀로 세상을 구원하시지 않고, 반드시 당신이 ‘사용할 손’(도구)을 찾으십니다. 사탄도 인간 타락을 위해 자신들이 이용할 손을 찾습니다.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하느님께서 찾으신 최상의 손 중에 한 분이 준비된 영혼 김대건 사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4.   스파이더 맨. 큰 힘 (2011. 7. 10. 일)

[이사야 55,10-11; 로마 8,18-23; 마태오 13,1-23]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앗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은총이요, 밭은 우리 영혼 입니다. 성경은 우리 영혼에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하게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우리 영혼의 밭을 비옥하게 경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화에서 스파이더 맨은 약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돕고 악한 자들을 물리치는 영웅입니다. 주인공인 피터는 뿔테 안경을 썼고, 여자친구 MJ를 좋아하지만, 그것을 고백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학생입니다. 어느 날 대학 실험실에 견학을 갔다가, 유전자로 조작된 슈퍼거미에게 물린 후 그는 초능력자가 됩니다. 강한 몸을 갖게 되고, 손목에서 거미줄이 나오고, 높은 벽을 타오르고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게 된 것입니다.

피터는 자신에게 드러난 그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합니다. MJ의 환심을 사기 위해 레슬링 쇼에 참가하여 돈을 버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피터는 그 힘을 잃어갑니다. 벽에 오르지도 못하고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피터가 가지게 된 ‘큰 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옳고 선한 공동선을 위해 주어진 은총이었습니다. 그 힘으로 많은 좋은 일에 봉사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할 때 사용자는 의미를 얻고 행복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에 삼손은 혼자서 천 명의 적을 물리친 이스라엘의 영웅입니다. 그런데 그는 데릴라를 알고부터 그 힘을 사적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그 결과 눈이 뽑히고 노예처럼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주어진 힘을 사적으로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똑같은 이슬을 두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벌이 마시면 꿀이 되듯이, 누가 그 ‘큰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사뭇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도 큰 힘을 갖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그 힘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자신을 비우는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큰 힘으로 자신은 끝도 없는 불행으로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은총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총을 보존하고 사용하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준비된 자에게 큰 힘을 주실 것이고, 그 힘을 바르게 사용한다면, 그 영혼 안에서 은총의 씨앗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5.   인간의 마음 (2011. 7. 17. 일)

[지혜 12,13.16-19; 로마 8,26-27; 마태오 13,24-43]

오늘 독서에 “성령께서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란 구절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탄식하신다?  탄식하시는 하느님의 속사정을 알기 위해 인간의 마음을 살펴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하느님과 가장 긴밀하고 가까운 부분이 있다면 아마도 마음일 것입니다. 마음은 인격 전체를 가리킵니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하듯이). 마음은 진실하면 편안하지만, 거짓말하면 불안합니다. 또 변덕이 심하고, 쉽게 다칠 정도로 유약하고, 일단 상처를 받으면 쉽게 아물지 않고 방황하는 특성을 가집니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강제나 통제 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마음에 없는 공부나 일, 약속이나 인간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도 지켜지지도 못합니다. 원치 않는 것을 행하게 되면 억하심정 (恨)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을 얻기 위해 상대에게 강제하거나 무력을 사용함은 오히려 그 마음을 닫게 합니다. 마음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수고할 때 그 의미를 찾고 기뻐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 께서 우리를 기계로 만들지 않고 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정 사랑을 하려면 상대에게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그 허락된 자유로 인해 자신이 거부당할 아픔도 예상해야 합니다. 사랑과 아픔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기쁨을 얻으 려면 아픔을 감수해야 하고, 아픔이 죽고 싶을 정도로 싫다면 그냥 사랑하지 않으면 됩니다. 비록 산모가 진통으로 고생하지만, 아이를 얻으면 그 기쁨으로 겪은 산고를 다 잊게 됩니다.

마음은 신앙에서 최종단계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요구한 것이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께서 애간장이 타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도우시지만, 결코 인간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간섭하면 실격입니다. – 마라톤 완주는 선수(인간)가 하는 것이고, 선수가 넘어질 때 코치(하느님)는 일으켜 주면 실격입니다. –

그래서 하느님의 고민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최상의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점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었습니다.

 

 

6.   헤롯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 (2011. 7. 30. 토)

[레위 25,1.8-17; 마태오 14,1-12]

요한은 신적 계시의 2천 년 프로젝트의 마지막 주자입니다. 첫 주자가 아브라함이고, 중간 정도 에 다윗이 등장하고, 마지막 주자가 예수님 공생활 직전에 등장하여 사람들과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이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구약에 그 누구도 뵙지 못한 하느님을 만나 그분에게 세례를 주었을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위대한 인물이 자기 임무를 끝내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그 정도 일을 했으면 자기 지분이나 몫을 요구했을 법도 한데, 요한은 일체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역할이 거기까지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슬처럼 조용히 사라진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이 이 세상에서 임무를 마치고 사라지는 방식이 너무 인상적입니다. 헤롯 왕이 자기 생일에 춤을 추었던 조카의 요구를 들어주는데, 형수가 조카에게 자신들의 부정을 고발하고 귀찮게 구는 요한의 목을 요구하라고 하자, 그 청을 들어줍니다. 헤롯 왕은 의심이 많은 사람 이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의 아내와 장모와 심지어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래서 백성 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죽을 무렵에 그 도시에 유명한 사람들을 잡아 죽여 통곡소리를 나도록 조치했는데, 이는 마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만든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세례자 요한과 사뭇 대조되지 않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삶에는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주어진 것을 다 소모하고, 다 덜어놓은 채 이 세상을 하직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남기지 않고 다 써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충만합니다. 우리도 채우지 말고 비우도록 합시다.

 

 

7.   이냐시오 축일 (2011. 7. 31. 일)

[이사야 55,1-3; 로마 8,35.37-39; 마태오 14,13-21]

오병이어 사건은, 물고기 한 마리가 수 백이 되고 몇 개의 빵이 수천 개로 증가한 것인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이, 준비한 물과 빵을 가지고도 모두가 굶지도 않고 충분히 먹고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음식을 준비한 사람, 준비하지 못한 사람, 적게 가져온 사람, 많이 가져온 사람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음식도 나누고, 삶도 나누는, 보기 드문 친교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자들 눈에는 분명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서로 나누었던 것처럼, 돈도 없고,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모두가 자신들의 것들을 꺼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기적과 기이한 현상은 다릅니다. 성경의 기적(세메이온)이란, 일상의 사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을 배려하는 눈이 뜨이고, 회심하여 믿음으로 이어지는 사건을 말합니다. 우리 경험에서,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 개과천선을 하여 변화가 이루어질 때 기적이라 합니다. 반면 기이한 현상은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현상일 뿐 하느님을 만나 자신을 개방하거나 회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왜곡시킵니다 (해외토픽).

이냐시오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단지 기사였고, 성격이 급하고, 이기적이고, 쉽게 결투할 정도로 무절제하고 여왕의 경호대장이 되는 꿈을 가졌던 분이었습니다. 그의 형과 형수도 그가 순례자가 된다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세속의 부귀영화를 쫓던 이냐시오가 하느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회심 전에는 비교적 무엇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남에게 줄 수 없었지만, 순례자가 된 후에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그는 이웃의 영혼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나르는 훌륭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이냐시오는 오병이어 기적처럼,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을 많은 이들에게 나누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나누어 먹었습니다. 우리 본당에도 자주 오병이어의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교우 여러분들은 알고 있나요? 그들은 결코 생색을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을.

 

 

8.   엘리야.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2011. 8. 7. 일)

[열왕 상 19,9ㄱ.11-13ㄱ; 로마 9,1-5; 마태오 14,22-23]

가르멜 산에서 엘리야는 누가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지, 누구의 말이 옳고, 누가 진짜 신을 섬기는지를 가리기 위해 바알 예언자 450명과 대결을 펼칩니다.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 450명을 이긴 후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정점을 만끽합니다. 그 시간에 자신의 수하들을 죽였다는 보고를 들은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나의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내일 이 맘 때까지 너를 반드시 죽이겠다.” 고 엘리야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이 말에 그는 한 순간에 어린 아이처럼 무너져서 즉시 떠나 밤낮 쉬지 않고 40일을 걸어 호렙산 동굴에 숨었 습니다. 위풍당당했던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못난 자신의 모습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삶은 이미 실패했다고 여겼습니다. 천둥이나 불길, 지진이 일어났지만 (위협), 결국 고요하고도 부드러운 소리를 들은 후 비로소 동굴에서 나옵니다.

인생 최고의 정점에 있을 때 (성공과 성취),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성공하고 출세할 때 인간은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 자신을 세우고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그 위풍당당하고 자만했던 자아가 깨지고, 자신의 무능함을 깨달아야 비로소 인간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엘리야의 마음을 움직인 것(개방)은 지진과 돌풍(소리)이 아니라 고요하고도 부드러운 하느님의 목소리였습니다. 데자뷰는 처음 보고 듣는데도 낯익은 환경이나 경우를 말합니다. 그처럼 우리도 본능적으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차립니다. 그 예로, 나무에서 내려왔던 자캐오나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 그리고 시로페키니아 여인이나,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낫는다고 했던 백부장 등이 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은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10,5).

우리가 자만하면 하느님의 목소리도 옆 사람의 말도 잘 들리지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은총 으로 오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합니다. 반면, 사람이 깨지고 처참하게 되는 바닥으로 내려가면, 하느님을 찾게 되고 그분의 소리가 들립니다.

 

 

9.   마태오 18. 1-14 (2011. 8. 9. 화)

[신명 31,1-8; 마태오 18,1-5.10.12-14]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곤경에 빠졌을 때, 자신이 스스로 그것을 해결할 힘이 없다고 판단하면 즉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자신의 못난 점과 못하는 점과 자존심 때문에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합니다.

이런 예를 군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지휘관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무리하지 않고 상급부대에 도움을 청하는 반면, 나쁜 지휘관은 자신이 하기에 벅차면서도 치적을 위해 도움 없이 무리하게 하려다가 결국 부하들을 다 희생시키고 자신도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합니다.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모든 덕과 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아흔 아홉 마리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찾을 수 있지만,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이는 한 마리는 커녕 아흔아홉 마리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큽니다.

 

 

10.    성모님의 계속되는 리모델링 (2011. 9. 3. 토)

[콜로새 1,21-23; 루카 6,1-5]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야,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신앙의 세계는 매우 역설적입니다. 살기 위해 죽어야 하고, 밀알이 싹을 내기 위해 먼저 썩어야 하고, 큰 문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늘 손해를 보고, 이문을 남기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화되듯이, 한 단계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예전의 것을 리모델링(탈바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은 것으로 성모님의 미션이 끝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낳고 키우고 그분의 주위에 머물면서 성모님은 언제나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을 직면하셨고, 훗날을 기약하며 그것을 마음 속에 담아두어야 했습니다. 계속 진행되는 하느님의 계시를 다 알아들을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이 마리아의 영혼에 실현된 것은 아마도 파스카 사건 이후였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계속 리모델링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다 이해될 수 없는 주님의 생애를 따르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그분은 파스카 사건을 통해 부활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비천한 이를 돌보신다는 마니피캇의 의미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11.    완고한 사람 (2011. 9. 4. 일)

[에제키엘 33,7-9; 로마 13,8-10; 마태오 18,15-20]

배 한 척이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항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빛이 나타났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 불빛과 충돌하게 됨으로, 선장은 무선을 통해 상대 선박에게 항로를 동쪽으로 10도 틀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상대 선박에서 응답이 왔습니다. “불가하다.” 선장은 다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여기는 군함이고, 나는 함장이다. 명령대로 틀어라.” 그러나 상대로부터 또 “불가하다”는 메시지만 들려왔습니다. 함장은 최후의 통첩을 보냈습니다. “틀어라. 틀지 않으면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 결국 상대로부터 이런 메시지가 안타깝게 들려져 왔습니다. “여기가 등대인 줄 모르세요?” 결국 세 번 경고를 했음에도 그 순간 군함은 등대 앞의 바위를 들이받아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완고한 사람은 등대와 일반 배의 불빛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상대로부터 주어지는 긴급한 메시지를 읽지 못할 수 있어서 숱한 경고에도 항로를 변경하거나 양보조차 하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고집이 자신마저 침몰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누군가 반복적으로 잘못을 하면, 공동체 평화와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잘못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듣지 않으면 두 사람을 데려가 말하고, 이것마저 통하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로 취급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집단 이지메처럼 들리지만, 한 영혼의 구원과 공동체 평화를 위해 할 바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형성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수도생활에서 형제들과 부딪히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괜찮다고 여긴 것이 남에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을 막고 있는 장애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공동체 평화를 심각하게 깨트리는 사람의 악습을 알려주는 형제적 고침은 애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서로를 위하는 배려나 경우도 없이 그냥 비난하고 지적해서는 안 되고, 먼저 서로를 위한 기도하는 도반(道伴)이 되어야 합니다.

 

 

12.    성령의 특성 (2011. 9. 4)

“너희들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풀고 맺는 것은 용서와 화해와 관련하는 행위입니다. 용서 못하면 매이는 것이고, 용서하면 악연이 풀어지고 영혼은 자유롭고 기쁘게 살게 됩니다. 용서하는 힘은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성령의 특성에 대해 몇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주도하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성자 예수님을 발견하고 우리 영혼에 실현하게 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돕고 그분과 일치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영혼 안에 성자의 형상이 완전히 형성될 때까지 모든 진통과정을 담당하십니다(로마 8,22-24; 갈라4,19).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수행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주(내재)하시도록 하는 일입니다. 은총은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보호자 성령(파라클레이토스): 우리가 위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언제나 우리의 요청을 들을 수 있는 지근거리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즉, 발생되는 모든 상황에서 발휘되는 실제적인 능력과 충족입니다.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는 마치 만화영화에 나오는 뽀빠이와 올리브의 관계와 같습니다. 올리브가 위기에 처하고 필요한 것이 생기면 뽀빠이를 부릅니다. 마치 911처럼 뽀빠이는 지체 없이 시금치를 먹고 달려와 올리브를 도와줍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총 을 받지 못한 것은 성령께 도움을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감찰하는 능력: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고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 롭다.”(히브4,12) 성령은 탐지기처럼, 비정상적이고 건강치 못한 영혼 속에 깊이 숨어있는 죄로 오염된 자아를 찾아냅니다. 대전차는 지뢰가 묻혀있는 지뢰밭을 그냥 지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영혼들의 모습이 이럴 것입니다. 언제 지뢰를 밟아 터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로 오염된 자아를 찾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고, 성령만이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뚫고 들어가 위장된 자아의 위치를 파악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CT촬영에서 찾아내지 못하는 것을 MRI 촬영을 통해 발견할 수가 있다.)

모든 이들에게 같은 성령이 주어지지만, 사람마다 결실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분을 대하는 방법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더 유익하게 사용하고 투자하고, 그분과 대화하며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되고, 그분께서 나의 기업을 운영하시도록 기꺼이 맡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이들이 결실을 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은 것과 성령에 충만한 삶은 다릅니다. 에제키엘서에 나타나는 이미지 처럼, 어둔 골짜기에 널려져 있는 생명이 없는 마른 뼈들은 바로 성령이 없는 영혼들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닿는 곳이면 어김없이 온갖 생명체가 살고 성장합니다. 이 물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바오로의 말처럼, 성령을 입어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은 나의 삶을 하나의 주님의 선물로써 흔쾌히 받아들이게 하는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분을 주님이라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늘 당신이 우리를 위해 결정적으로 무엇을 하시면서도 결코 우리에게 생색을 내는 법이 없으십니다.

 

 

13.    열두 제자 부르심 (2011. 9. 6. 화)

[콜로새 2,6-15; 루카 6,12-19]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은 당신이 가르치려는 구원의 진리를 세상에 전파할 도구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아버지의 말씀을 다 전하실 수는 없습니다. 전할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 진리의 본질을 제대로 공부해야 합니다. 당신과 3년을 같이 살 12제자를 부르셨고, 매일 같이 살고 또 같이 다니면서 그들을 특별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매일 교리교육을 받았던 셈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함께 살면서 인격적으로 배워야 했습니다. 파스카 사건은 이론적으로 알아듣고 타인에게 학문적으로 전달하는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달해야 했습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듯이, 가톨릭 신자들은 사도로부터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삼습니다. 곧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사도들에게 전달되었고, 사도들은 예수님 가르침을 교회에 전달하였고, 지금 현재의 우리는 사도들이 교회에 전달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아버지 하느님을 믿습니다. 어떤 천사가 나타나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해도 그것이 사도로부터 전해진 말씀이 아니면 절대로 신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과 현재 우리에게 이어지는 합법적인 계승이란 차원에서 사도들의 자리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14.    족보 조작 (2011. 9. 15. 목)

[히브리 5,7-9; 요한 19,25-27]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곧 믿음의 전통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이름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불림을 받았고,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그것에 응답하지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족보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뜯어고치는 행위가 만연했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신적인 기원을 가졌으며, 영웅과 고고한 학문을 지닌 피의 혈통의 자손임을 은연중에 알리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삶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족보를 뜯어고치듯이 자신의 역사를 뜯어고치고 지나치게 의미화 시키거나 치장을 합니다. 사실과 조작이 혼재되어 있으므로 한 사람의 삶의 역사에서 사실 관계를 다시 확인해야 할 정도입니다.

주어진 나의 삶은 나를 이끌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로써 그만한 까닭이 있다고 여겨야 합니다. 자신을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꾸미고 과장하는 만큼 나다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15.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마라톤 선수 리마 (2011. 9. 18. 일)

[지혜 3,1-9; 로마 8,31ㄴ-39; 루카 9,23-26]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탄 마라톤 선수 리마의 이야기입니다. 올림픽의 마지막 피날레 마라톤에서 브라질 선수 리마가 1등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따라오는 2등 선수가 약간 지쳤지만, 리마는 아직도 쌩쌩했습니다. 도착할 메인 스타디움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갑자기 어떤 사람이 리마를 덮쳐 쓰러뜨렸고, 그 사이에 2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추월하여 1등으로 골인하게 되었습니다. 스타디움의 관중들은 이런 말이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방치한 올림픽 경기 운영 위원들을 질타했습니다. 4년에 한번 열리는 올림픽 마라톤에서 월계관을 받는 일은 마라톤 선수들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시상대에서 은메달을 받은 리마는 속으로는 무척 속상했겠지만 내색하지 않고 금메달 선수에게 가서 축하한다고 악수를 청했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아 항암치료를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어느 암환자는 중계를 통해 리마의 선함을 보고 다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그 이후로 10년을 더 살고 있었습 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당신의 포도밭에 참여하여 당신과 함께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한 탈란트로도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고 또 그렇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국 순교자들은 하늘 나라가 주는 한 탈란트의 의미를 깨달았고, 그것을 세상과 바꿀 수가 없어 죽음을 선택한 분들입니다. 순교자들은 맹목적인 신앙으로 혹은 강제로 혹은 집단광기로 바보처럼 죽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포도밭 주인께서는 예외 없이 그 기쁨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마태복음 13,44).

 

16.    예수님을 찾아온 성모님 (2011. 9. 20. 화. 마태오 8,19-21)

[에즈라 6,7-8.12ㄴ.14-20; 루카 8,19-21]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내 어머니요 형제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정면으로 공박하셨고, 예루살렘의 성전파들 (사두가이파,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등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룹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어 그분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들은 이런 현상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소요사태로 발전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성전파들은 로마총독의 허락 하에 그 지역에서 소위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로마 총독은 언제나 팔레스티나 안에서 폭동과 소요사태가 없기를 바랐습니다. 소동이 일어나면 곧바로 로마군대가 개입하여 통치하기 때문에 성전파들은 그 기득권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지방의 회당장이나 유지들에게 압력을 행사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했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 성모님은 마지못해 동원되어 예수께 왔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께 왔다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어머니를 이렇게 만나는 것도 결코 편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오랜 만에 만나셨을 것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묘한 갈등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저녁에 몰래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어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가셔서 오랜 만에 회포를 풀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17.    헤롯의 의식. 영적 실망 (2011. 9.22. 목)

[하까이 1,1-8; 루카 9,7-9]

헤롯은 불안한 사람입니다. 이미 저질러 놓은 잘못을 두고 어찌할 줄 모릅니다. 그는 거기서 벗어나기보다 오히려 그 안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만, 자유롭지 않는 상태에서의 싸움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카지노에서 돈을 많이 잃은 사람의 흥분되고 좌절하는 상태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무엇을 하든 그 상태에서는 만회할 수 있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자유롭지 않고, 지속적인 불안상태에서는 옳은 것이 보이지도 않고 옳은 결정을 할 수도 없습니다. 무조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영적 실망을 이렇게 언급합니다(영신수련 317번). ‘영혼이 어둡고, 혼란스럽고, 현세적이고, 비속한 것으로 기울며, 여러 심적 동요와 유혹에서 오는 불안감 등으로 불신으로 기울고, 희망도, 사랑도 없어지고, 게으르고 냉담하고 슬픔에 빠져서 마치 창조주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이다.’ 경험적으로,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선택하거나 행했을 때 내면에서 올라오는 매우 좋지 않는 느낌들입니다. 원수가 이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더 강하게 하는 영적 실망 상태에 영혼을 맡기지 않고(주도권을 주면 휘둘림), 저항하면서 서둘러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원수는 항상 자신들이 선호하는 그런 상태로 우리를 코너에 몰아서 우리와 싸우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빛이 있는 양지로 나와야 합니다. 원수가 싫어하는 반격의 원칙이 있습니다. 즉 그것을 ‘거슬러서 행하기’(Agere contra. Act against)라고 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영적인 실망 중에서도 우리가 반격할 수 있는 은총의 힘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자기 연민, 화, 실망, 버려진 감정을 가지고 지난 일을 기억해서 되풀이 말하는 영적 실망에 우리 영혼을 내 맡겨서는 안 됩니다.   

 

 

18.    오체투지 (2011. 9. 25. 일. 연중 제26주일)

[에제키엘 18,35-28; 필리피 2,1-11; 마태오 21,28-32]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첫째는 포도밭에서 일하겠다고 해놓고 결국 하지 않았고, 둘째는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결국 하였습니다. 포도밭은 생명이 있는 곳, 우리가 의미를 찾고 기뻐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티벳인들의 소원은 일생에 한 번 라싸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의 성지순례는 비행기나 차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체투지로 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절입니다. 즉 두 손을 펼치고 머리와 가슴이 땅에 닿은 상태에서 다시 일어나는 절입니다. 다섯 사람이 라싸의 포탈라 궁까지 2,100 km의 긴 여정을 늦가을에 출발해서 그 이듬해 늦은 봄이 되어 서야 떠난 지 185일 만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포탈라 궁 안의 본당 앞에서 또 10만 배를 올립 니다. 성지순례에서 오체투지 수행이 끝이 났을 때 그들의 영혼에는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 넘칩니다. 자아를 통제하면 그 자리에 하느님의 기운이 들어오게 됩니다.

어떤 종교가 진정한 종교라면, 자신이 해야 할 수행을 면제받거나 혹은 남에게 떠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수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보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셨는데, 곧 전자의 그룹들은 의식적으로 자신들은 의롭고 괜찮다고 간주하고 변화를 추구하지 않지만, 후자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들이 스스로 변하려는 의식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군인이나 기능의 장인이 되려면, 지속적인 훈련을 해야 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그에 걸 맞는 수행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졸병이 아니라 왕직에로 부르심을 받았고, 더 가치 있게 쓰이고 봉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우리를 잘 준비시켜야 합니다.

 

 

19.    불살라 버릴까요 (2011. 9. 27. 화. 마태오 9,51-56)

[즈카르야 8,20-23; 루카 9,51-56]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지나갔는데, 사마리아인 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저들을 불살라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사람을 바라 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와는 사뭇 다르셨습니다.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했던 메시아는 적과 죄인들을 심판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연히 심판하는 주체는 결코 죽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메시아는 내가 살아서 남을 처단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두를 살리기 위해 당신을 기꺼이 희생시키는 방식입니다. 곧 구원의 주체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살고 남들을 살리기 위해서 메시아(내)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메시아의 모습 안에서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살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입을 다물라고 지시하신 것(마태 9,30)은 기존의 메시아 사상과 혼동 내지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됩니다.

 

 

20.    오우아이 (2011. 9. 30. 금)

[바룩 1,15ㄴ; 루카 10,13-16]

오우아이(Ouai)는 슬픔과 연민, 분노가 함께하는 희랍어 단어입니다. 이는 모욕을 당하고 자존심이 다쳤을 때 드러나는 분함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의 비극을 막지 못했을 때 드러나는 탄식과 슬픔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구해다 주지만 거절당했을 때의 심정입니다.

이번 주간에 계속되는 복음 구절에서 나타나는 포도밭 주인의 심정입니다. 포도밭은 주님께서 계시는 곳, 우리가 생명을 얻는 곳, 잃어가는 우리를 찾는 곳입니다. 주인은 포도밭에서 일할 사람들을 구하고, 혹은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초대하지만, 거절 당합니다. 오히려 주인의 하인들을 해치고, 심지어 포도밭 주인의 외아들마저 죽였습니다. 그들에게 선의를 베풀고도 외아들을 잃었을 때 포도밭 주인이 느끼는 심정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시며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분께서 자비를 거두신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중에 스스로 잘한다고 자랑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화가 미치지 않고, 온전히 살아있는 것은 죄인을 돌보시려는 그분의 자비하심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21.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2011. 10. 2. 일. 소화 데레사)

[이사야 5,1-7; 필리피 4,6-9; 마태오 21,33-49]

“제 때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에게 포도밭을 내 줄 것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농부들은 이스라엘 종교지도자, 배척 받은 사람들은 예언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백성은 처음에는 선민의식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랐고, 열린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고, 이웃도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세월이 경과하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안녕이 하느님의 덕이 아니라, 자신들이 잘났기 때문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점차 은총에 의존하지 않다 보니 성전 출입은 뜸해지게 되고, 기도는 멀어지게 되고, 점차 마음이 닫히게 되고, 이웃은 안 보이게 되고, 개인과 나라 전체가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면서, 결국 하느님의 뜻에 불순명하게 됩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하고 귀양을 가고 시련을 겪고 고통을 받게 되면 그때서야 다시 주님을 찾게 됩니다. 이런 사이클이 계속 반복되는데, 우리 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는 둔해서 그분을 느끼지 못합니다. 태평 세월이 인간을 그렇게 만듭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았 습니다.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갖춘 분별력으로 절대적인 것을 절대화하고, 상대적인 것을 상대화하면서, 자신에게 불필요한 것들을 서슴없이 덜어내었습니다. 24세에 성녀가 임종할 때, 그와 같이 살았던 동료 자매가 성녀를 두고 하는 말이 “자매는 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 습니다. 함께 살았던 수녀마저 성녀 안에서 일어난 엄청난 영적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성녀의 덕행 실천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이었습니다.

성녀의 덕행실천에서 몇 가지를 들자면, 기도시간에 졸지 않고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기, 빨래터 에서 주위의 빨래방망이에서 날아오는 구정물 피하지 않기, 의자 등에 기대지 않기, 제일 못생긴 꽃병을 자기가 사용하기, 아주 작은 것에서 장상에게 순명 하기 등이 있습니다. 교회는 데레사 성녀에게 교회 학자라 칭했습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작은 방법을 통해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 성녀에게는 어떤 대단한 금욕적 행위나 신비주의자들의 기도가 없었습니다. 다만 어린아이가 엄마를 신뢰하여 자신을 위탁하듯이, 자신은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고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자매는 한 것이 별로 없어서,” 성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 하찮고 작은 것들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우리도 작은 것에서 덕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제 때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에게 포도밭을 내 줄 것입니다.”

 

 

22.    요나 (2011. 10. 5. 수)

  [요나 4,1-11; 루카 11,1-4]

요나는 니네베 회개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니네베는 아시리아제국(고대중동에서 아주 잔인했던 제국)의 수도입니다. 하느님께서 요나를 부르셨지만, 그는 고래 속으로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기까지 오셔서 요나에게 네가 진짜 살고 싶으면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요나는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사악한 니네베가 처벌받는 것을 목격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니네베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니 왕과 도시전체가 회개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회개를 보시고 전격적으로 니네베를 용서하십니다. 이에 요나는 악인들을 용서하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열을 받았고 화가 났습니다.

요나가 화를 낸 것은 처벌받아야 할 악인들이 용서 받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그의 소명은 니네베의 회개보다 그 이전에 요나 자신의 회개와 원수까지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초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면, 그 원수에게 매어있는 그 사람도 그만큼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제자들은 대체적으로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휘둘릴 수 있고 분하고 억울한 심정을 드러내고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다치고 깨어진 마음 으로는 사람을 용서하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통회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은 당신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에게 복음의 핵심인 용서와 화해를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용서와 화해는 깨어진 우정이나 애정 관계를 복원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로써의 자유선언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는 일차적인 소명은 복음 선포보다는 통회와 회개일 것입니다. 그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23.    무질서한 충동 (2011. 10. 6. 목)

[말라키 3,13-20ㄱ; 루카 11,5-13]

“두드려라, 청하여라. 열리고 줄 것이다.” (마태 11,5-13)

인간의 영혼 안에는 ‘무질서한 충동’이 있습니다. 이는 거듭되는 죄의 결과로써 영혼 안에 상처로, 그늘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방해하는 악으로 기울어져 있는 경향입니다. 이 충동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교두보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통제가 불가능함으로,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인간은 쉽게 죄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바오로는 무질서한 충동에 대해 로마서 7장 15-17절에서 말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이는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교회의 모든 성인 성녀들이 경험하는 실체입니다. 불교에서는 욕망, 욕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므로, 도움을 청하기 위해 문을 두드려야 하고, 빵을 얻어야 합니다. 여기는 자존심을 내세울 것이 아닙니다.

 

 

 

24.    영과 육의 대비 (2011. 10. 21. 금)

[로마 7,18-25ㄱ; 루카 12,54-59]

인간은 옳은 것을 행하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실패하는 이유는 생각과 몸이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 자신을 분열된 존재로 여겼고, 자신이 두 방향으로 이끌어지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는 육과 영의 문제를 대비합니다. 육에 따르는 삶이란, 사물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선택하는 것으로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가 말하는 육은 단순히 인간의 육신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성의 모든 약점과 무능, 죄로 유약한 인간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교두보가 됩니다. 따라서 육에 따른 삶은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상태, 곧 무질서한 인간의 본성에 지배되는 삶을 말합니다.

영(ruah)은 항상 인간적인 것 이상의 무엇이며, 인간에게서 유래되지 않는, 인간 권한 내에 속하지 않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면 우리에게 그 영이 주어 집니다. 인간의 본성에 지배되는 자기 중심인 육에 따르는 삶을 버리고, 하느님의 영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영은 신약에서 그 거룩한 정체가 드러나는데 곧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육에 따르는 삶은 최악의 조건에서 싸우는 사람과 같습니다. 두 손을 묶고 권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 최적의 상태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25.    탈리온 법칙 (2011. 10. 23. 일)

[이사야 2,1-5; 로마 10,9-18; 마태오 28,16-20]

오늘 신구약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과부와 고아를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너희를 죽이겠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 하느님 사랑은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구약의 탈리온 법칙. 눈은 눈, 이는 이. 당시 가나안 점령을 위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과 거의 수백 년을 싸웠습니다. 계속된 싸움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으면서 많은 과부와 고아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약자였습니다. 권력자들과 힘 있는 사람들은 약자들을 함부로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약자들도 당한 만큼 합법적으로 갚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탈리온 법칙이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의 평등법칙으로 사람들은 약자들에게 함부로 대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본래 취지가 좋았던 이 탈리온 법칙이 세월이 경과하면서, 본래의 정신은 상실되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예로, 철수 아버지가 순자 엄마에게 살해되었다면, 철수는 순자 엄마를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순자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철수를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탈리온 법칙이 상생과 화해가 아니라 오히려 합법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준 셈입니다. 서로 복수를 하는 악순환이 개인과 가족을 넘어 확산됩니다. 두 집안의 싸움으로 젊은 두 남녀가 죽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이 좋은 예입니다.

복수의 연쇄 고리, 그 돌아가는 바퀴를 끊는 것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고, 한 벌 달라면, 두 벌 주고, 오른 뺨을 대라면 왼뺨까지 대주듯이, 한쪽에서 손해를 본다면 상대방도 어느 듯 측은지심으로 ‘됐다’ 하면서 그만 두게 됩니다. 내가 당한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 결국 둘 다 죽는 공멸이 됩니다. 상생하도록 매이지 않고 새롭게 시작하도록 초대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 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큰 이익을 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의 이익도 고려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26.    광복절 특사 (2011. 10. 25. 화)

[로마 8,18-25; 루카 13,18-21]

우리가 기도할 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오로는 우리가 성령을 통해 기도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미래를 내다볼 수 없고,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따라서 무언인가를 바르게 청할 수 없다. 인간은 한 시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몰라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보다 해로운 것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교도소에 있는 아들이 석방되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도 졸라대니 어쩔 수 없이 하느님께서 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광복절 특사로 풀려 나오자마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하느님께 원망을 합니다. 왜 자신의 불쌍한 아들을 그렇게 죽게 만들었나, 차라리 감옥소에서 나오게 하지나 말지. 이 에피소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미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의 욕심이 나를 망치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나에게 유익한지 몰라서 성령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우리는 무식해서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주도하는 기도를 금지 시켰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생각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하느님의 계획을 알 수 없으므로 성령 께서 주관하시도록 맡기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완전한 기도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했던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27.    장벽이 있었던 세계. 프로사고규스 (2011. 10. 28. 금)

[에페소 2,19-22; 루카 6,12-19]

고대는 장벽으로 가득 찬 세계였습니다. 희랍인들에게 모든 인류는 두 계급, 희랍인과 야만인 으로 나누어집니다. 희랍어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 야만인입니다. 야만인들은 짐승의 성질을 가진다고 멸시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타 종족에 속한 사람들 모두 다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합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을 준수해야 인간은 선해지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외는 그들에게 구원이 없었습니다. 서로 간에 이런 장벽들이 존재했던 세계에서 인간 모두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바오로는 중요한 단어 하나를 사용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느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간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프로사고게(prosagoge)인데, 그것은 어떤 사람을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하느님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사용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바사의 궁전에서, 프로사고규스(prosagogeus)라는 관원이 있었는데, 그는 임금과 알현을 원하는 사람을 임금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훌륭 하고 현명하며 지혜로운 왕에게 가까이 가서 나의 근심을, 나의 이야기를 말하는 시간과 공간을 가진다는 것은 더 없는 귀중한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누구나 ‘하느님을 뵐 수 있는 그 권리’를 주셨습니다.

 

 

28.    하느님의 자비 (2011. 11. 6. 일)

[지혜 6,12-16; 1테살로니카 4,13-18; 마태오 25,1-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유대인들에게 결혼식은 큰 축제였습니다. 일생에 한번만 할 수 있는 것으로 큰 대접을 받았 습니다.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 기간만큼은 율법 연구까지 면죄될 수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면 신랑 집에서 일주일 동안 잔치가 벌어졌으므로 신랑이 언제 신부 집에 도착할지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갑자기 신랑이 도착하여 혼인잔치가 마련된 집으로 들어가면 문이 닫히고,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비유는 직접 유대인에게 해당되던 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준비했음에도 막상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9부 능선에서 선택된 하느님의 민족, 이스라엘이 탈락하여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그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이럴 때 주로 예수님께서 드러내셨던 감정이 희랍어로 Ouai입니다. 이는 슬픔과 연민, 분노가 함께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모욕당하고 자존심이 상했을 때 드러나는 분함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의 비극을 막지 못했을 때 드러내는 탄식입니다.

2-3주 동안 계속 복음에 등장했던 포도밭 주인의 심정도 이와 같습니다. 포도밭은 하느님께서 계시고, 생명이 있고, 잃어버린 우리를 되찾는 곳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포도밭 에서 일하도록 선의를 베풀었지만, 소작인들은 오히려 주인의 하인들을 해치고, 심지어 그의 외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들에게 아낌없이 선의를 베풀고도, 그들에 의해서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은 것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시며,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분께서 자비를 거두신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중에 스스로 잘하고 있고 잘 살고 있다고 자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우리에게 화가 미치지 않는 것은 우리를 돌보시려는 그분의 자비하심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29.    카나의 혼인잔치. 성모님의 비움 (2011. 11. 8. 화)

[지혜 2,23-29; 루카 17,7-10]

복음사가 요한은 이 구절을 통해 적어도 두 가지를 의식한 것 같습니다. 하나는 성모님의 본질적 특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악마에게 속하는 사람들과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전자는 채우 려고 하고, 후자는 비우려고 합니다.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여지를 허락하느냐 허락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체험한 이들이 자신들을 비우려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그 일용할 양식이 얼마나 유익하고 좋은지를 알기 때문이고, 그 양식을 얻으려면 내가 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사 체험자는 자기 중심적으로 자신을 가득히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욕심으로 잘못 변질되어 갑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그의 생각과 행동이 오로지 자신을 드러내고 욕심을 채우는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기 비움에 가장 훌륭한 모범이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성모님은 그런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바가 드러나고 실현되도록 하십니다. 그분의 자기 비우심은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듯이, 예수님을 만나면 질적으로 변화된다는 사실 입니다. 곧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하느님께서 본래 허락하신, 자신 안에 이미 존재했던 최고의 것을 발견하고 질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문처럼, 세상은 성자를 통해 창조되었고, 성자를 통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성자의 씨앗(speramtokos)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우리 영혼 안에 가능태(可能態)로 남았던 그 씨앗이 현실이 되는, 즉 발아되고 싹을 틔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30.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2011. 11. 20. 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에제키엘 34,11-12.15.17; 1코린토 15,20-26.28; 마태오 25,31-46]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12살 트레버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알코올 중독의 어머니와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로 인해 그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시모네 선생도 상처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기 분을 못 참아서 아들에게 석유를 붓고 불을 지르는 바람에 죽다 살아났는데, 그때 입은 화상이 시모네 선생의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시모네 선생님은 학기 첫 수업에서 이런 모순투성이의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숙제를 내어 줍니다. 우리가 도망을 칠 수 없는 이 현실에서 살아야 한다면, 이 현실을 바꾸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한 끝에 트레버가 찾은 방법은 도움이 필요한 세 사람을 선정하여 그들에게 조건 없이 선행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도움을 받는 이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것이고, 또 그렇게 하다보면, 점차 세상이 변화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트레버가 선택한 세 사람은 마약하는 부랑자, 왕따 당하는 학급 친구, 그리고 시모네 선생님 이었습니다. 첫째는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새 옷을 입혀주고, 친구와는 함께하면서 기가 죽지 않도록 용기를 주고, 시모네 선생님에게는 그냥 그의 말을 경청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서히 변해갑니다. 트레버의 실천은 돌려 받겠다는 생각 없이 하는 것이고 (은혜를 자신에게 갚지 않고, 다른 필요한 사람에게 주도록), 그저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처럼, 구원에서 심판 기준은 사람이 이 지상에서 이룬 능력과 재산과 권력이 아니고, 얼마나 이타적으로 살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왼쪽에 있는 이들이 예수님께, 언제 주님께서 감옥에 가셨고, 굶주리셨고, 헐벗으셨고 목마르셨냐고 질문을 합니다. 주님이었다면 당연히 도왔겠지만 자기 성공에 도움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시했다는 말입니다. 영화 속의 트레버는 조건 없이 선행하면서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성서학자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여 유대인들에게 하셨듯이 예언자를 보냈거나, 혹은 성모님께 하셨듯이 천사를 보냈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면, 이것은 그저 감사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나 천사는 피조물이지만, 외아들은 태초부터 존재하셨던 하느님이며, 외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곧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일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31.    기다림 (2011. 11. 27. 일. 대림 1주)

[이사야 63,16ㄹ-17.19ㄷ.64,2ㄴ-7; 1코린토 1,3-9; 마르코 13,23-37]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과거에 이미 한번으로 이루어진 구세주 아기탄생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나의 구세주 잉태’입니다.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느님으로서, 말씀의 씨앗이 인간 영혼 안에 수용되고 착상되어 실현되도록 하십니다. 

식물의 성장은 점진적입니다. 잎사귀가 나온 후 이삭이 나오고, 그 이삭에서 옥수수가 자랍니다. 봄에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오고 잎과 꽃이 피고, 그 후 알곡이 열립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토지를 비옥하게 만드는데 봄비만큼이나 겨울서리가 필요하듯이, 우리 자아가 부서지고 비워져야 비로소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서서히 스며들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 안에 구세주 잉태를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흔히 범하는 잘못은, 우리의 준비 없이 주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엇을 결정하고 실행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예로써,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이 자기 후손과 관련됨을 알았을 때,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라의 조언을 받아 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이 뜻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섭리 하에서 기다림 끝에 낳은 아이가 이삭입니다. 그러기까지 하느님께서도 기다리신 것입니다.

군대에서 지휘관의 명령이 있고 필요한 장비를 다 갖추어야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을 통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이 성령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세주의 탄생이 우리 밖에 있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바로 내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성탄을 지낼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각자는 구세주를 임신하고 있고, 그 구세주가 내 안에서 탄생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32.  와시카시 체험 (2011. 11. 29. 화)

[이사야 11,1-10; 루카 10,21-24]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드러내신다.”

어느 예수회 동료가 미국에 온 첫 해에 8일 피정을 하게 되었는데, 며칠 동안 그가 기도했던 내용을 면담 지도신부에게 알리니, 지도신부는 기도를 어떻게, 몇 번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이 핏줄이 서도록 허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료는 기도의 열매를 얻을 때까지 계속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지도신부는 동료가 계속 이렇게 머리로만 기도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다음 날은 기도는 하지 말고 어렸을 때 했던 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지내도록 권했습니다. 그래서 동료는 마대를 만들어서 하루종일 마대치기를 하면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매사 머리로 따지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공부하고, 취직하고, 진급하고,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 우리는 머리를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마실까 생각하고 걱정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리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내가 아닌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므로 머리 사용을 중단하고 내가 주도하기를 멈추고, 즉 자신을 비워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시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동료는 마대치기를 하면서 지난 날 즐거웠던 시절(동심)로 돌아가 그냥 자신을 잊고(걱정을 중단하고) 놀이에 몰입하면서, 걱정하는 자신을 잊은 것(몰아)입니다. 곧 머리를 쓰지 않고 (자신이 주관) 비우면서 (성령께서 주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33.    안드레아 사도 축일 (2011. 11. 30. 수)

[로마 10,9-18; 마태오 4,18-22]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안드레아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셋은 중요한 일을 할 때 예수님께서 늘 곁에 두셨던 이들입니다. 그럼에도 안드레아는 무엇을 특별히 요구하거나 나서기보다 보이지 않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만난 뒤 일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안드레아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는 2천 년 계획에서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올림픽에서 마지막 성화 주자가 제일 중요한 인물이듯이, 세례자 요한은 구약에서 모세나 엘리야 못지않게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인물 중에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의 중요성만큼 무엇을 청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 한 후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이런 점에서, 안드레아는 그의 스승 세례자 요한을 많이 닮았습니다. 요한과 안드레아가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이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그분을 이미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실재이고, 세상은 그림자라 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이미 실재이신 그분을 찾았고, 그분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정하시고 안 하시고는 어디까지나 이차적인 악세사리로 여겼습니다. 

 

 

34.    악덕들 (2011. 12. 4. 일. 대림 제2주일)

[이사야 40,1-5.9-11; 2베드로 3,8-14; 마르코 1,1-18]

우리는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잘 준비하고, 잘못된 허물과 습관을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판공성사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바오로가 말하는 죄인의 악덕들을 나누겠습니다.

바오로가 말하는 죄인의 악덕들 (로마서 1장, 에페소 4.17):

죄인이 하는 짓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바라보기보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허무한 생각에 자신을 몰아넣고, 하느님의 뜻 대신에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생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불의는 능동적으로 상대에게 해를 끼치려는 욕구.

추악함은 상대를 자기와 같이 악하도록 자기 수준까지 끌어내리려는 마음.

시기는 훌륭한 것을 동경하기보다 원망하는 마음.

악독은 타인을 항상 나쁘게 생각하고 그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마음.

비방은 남이 잘되는 것을 비판하는데서 희열을 느끼는 마음.

탐욕은 자기 이익을 위해 이웃을 희생시키고,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정신.

 

거짓말은 많은 경우 고의라기보다는 진실에 대한 무관심에서 생긴 결과이며, 진실을 전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도 거짓말이 됩니다. 교회 지체들의 의사소통은 서로 진실해야 합니다. 거짓정보가 전달된다면, 사람이 크게 다치고 죽을 수가 있습니다. 불타는 석탄을 만질 수가 있다고 말하면, 상대의 생명을 잃게 할 수 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아름다움과 미덕과 거리가 먼 것을 가지고 자기가 만든 것 혹은 자기가 한 것 이라고 자랑하는 사람.

체하는 자는 자신과 무관한 유력한 인사와의 관계를 자랑하는 사람.

우매한 자는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

무정한 자는 어린 생명들을 천하게 취급하는 사람. 그 당시 로마제국 시대에 하루 밤에 30명의 유아가 광장에 버려졌는데, 특히 약하고 장애가 있는 여자 아이가 대상이었습니다.

무자비한 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기분에 따라 노예들을 죽이는 사람.

방탕 하는 자는 희랍어로는 운동경기에서 우승한 이들이 서로 축하하며 노래 부르며 오는 한 무리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 후 이 단어는 밤중에 도시의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시끄러운 술주정꾼들을 가리켰습니다.

부도덕, 파렴치한 자는 부끄러움을 상실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되는지 상관않고 육욕에 사로잡혀 공공연히 잘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로써, 마약상습자는 처음에는 마약을 몰래 복용하지만, 나중에는 마약을 구하기 위해 수치도 모르고 공공연히 애원하고, 아첨까지 하고, 울며 매달리게 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자만은 실제보다 부유한 체, 용기 있는 체하고,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자신을 뽐내고 권력을 자랑하고 사방을 향해 큰소리로 외칩니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 보이게 하고, 타인을 멸시하는 마음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자만과 다른 점은, 교만은 사람 마음 속에 있습니다. 겸손하고 얌전하고 악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의 은밀한 곳에서 사람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마음입니다.

증오를 달래기 힘든 것은 인간이 매우 혹독하고 잔인하고 융화할 수 없어 미워한 나머지 자기와 언쟁했던 상대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가혹함과 냉정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 곧 망은이란 잘 의식되지 않는 죄이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도 가장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중상하는 자. 악마는 모든 중상의 두목입니다. 중상이란 근거 없는 말로 남을 헐뜯고 지위와 명예를 손상시키는 행위를 말하는데, 중상은 모든 죄악 중에 가장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재산은 잃어버리더라도 다시 장만할 수 있지만, 그 명성은 한번 빼앗기면 쉽게 회복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죄들은 결국 인간의 마음을 둔하게 합니다.

마음이 굳어졌다는 포로시스(porosis)는 원래 대리석보다 더 단단한 돌을 말하는 포로스(poros) 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즉 모든 감각능력이 굳어지고 경화되면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상실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처음 죄를 범할 때는 두렵고 무섭고 뉘우치고, 그리고 후회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감각을 잃어버리면서 가장 부끄러운 일도 아무 느낌이 없이 해치우게 됩니다.

이런 죄악들은 마치 우유가 상해서 못쓰게 되는 것처럼 행할수록 사람을 망가트리고, 우리의 그릇을 작게 만듭니다. 작은 그릇은 많은 물을 담을 수 없듯이, 이런 작은 그릇으로는 큰 사랑을 할 수 없게 합니다. 결국 기쁘게 살 수 없게 됩니다.

 

 

35.    잃어버린 한 마리 양 (2011. 12. 6. 화)

[이사야 40,1-11; 마태오 18,12-14]

착한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미국은 미국 시민권을 가진 자국민을 철저하게 보호합니다. 미군의 경우,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거나 실종한 병사들은 반드시 구출하려고 하고, 사망한 병사의 시신이나 유골은 반드시 수습하여 조국으로 데려갑니다. 조국을 위해 희생을 당한 영혼들은 결코 적군들에게 유린 당해서는 안 되며, 명예롭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6.25 때 사단 깃발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아직도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사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국가인 미국의 이런 정신은 아마도 착한 목자 정신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 됩니다. 그런데 미군은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뚜렷하지만, 예수님께는 그런 구분이 없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지(死地)에서 고통 당하고 도움을 절실히 청하는 그 어떤 영혼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양들을 안전지대에 옮긴 후, 곧바로 지팡이를 들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떠나시는 예수님의 신속함과 긴장감을 상상해 보십시오. 늦을수록 어린 양이 짐승들에게 당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한시라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찾으러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께서 왜 우리를 찾으러 오시는지 의아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잃어버린 한 마리가 아니고,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 양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지상에 계실 때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 중 하나라고 생각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36.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 (2011. 12. 8. 목)

[창세 3,9-15; 에페소 1,3-6.11-12; 루카 1,26-38]

죄의 역사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뜻대로 진행한 역사를 말합니다. 그 역사는 나를 나로부터, 이웃으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켜 버렸습니다. 죄의 역사는 사람을 망가뜨려, 하느님의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반면 은총의 역사는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비우고 하느님의 섭리에 동참하여 이루어지는 믿음의 전통에 속하는 역사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너무 어려서, 뭘 모르는 무지상태에서 구세주 어머니의 직분을 수락했다거나 또는 거부하면 처벌의 두려움으로 수락을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을 선택했을 때 구세주의 어미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 수반되는지 알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미션의 목적도 내용도 모르는 무지 또는 무의식의 상태에서 강요로 이루어진 선택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부르심의 내용을 알고 “예”라고 동의했기 때문에, 그 영혼 안에 하느님의 말씀, 성령의 기운이 착상되고, 발아되어 잉태되고, 성장되면서, 구세주의 탄생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예”라고 하지 않는 영혼에서 예수님의 잉태는 가능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말은, 죄의 환경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자유롭게 “예”라고 응답할 수 있는, 성령의 은총 속에서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과 신앙 안에서 사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게 아니라 의지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도움으로 신앙 안에서 주님을 잉태해야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원죄 없이 태어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담도 원죄없이 태어난, 아니 창조된 인물이 아니었던가요? 그래도 죄를 선택한 인물이었습니다. 신앙은 지금 현재에서 의지적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37.    5분 간의 기적 (2011. 12.11. 대림 제3주일)

[이사야 61,1-2ㄱ.10-11; 1테살로니카 5,16-24; 요한 1,6-8.19-28]

“나는 빛이 아니다, 다만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이름을 들었던 모세 못지않게 주님을 만나 세례를 베풀었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마태 11,2-11).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묻게 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행적을 듣고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당황한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 기존의 메시아와 판이하게 다르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요한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죄인을 쉽게 용서하기보다 먼저 그 죄를 묻고 처벌하는 분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새로운 구세주를 발견합니다. 처벌과 교정이 아닌 인간의 죄에 지극히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발견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빛이 아니라 다만 빛을 증언하러 왔을 뿐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한 사람이 아니다.”

 

제주도 조천 성당의 5분 간의 기적을 소개합니다. 김델리야와 그의 남편 미카엘 이야기입니다.

부부는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많은 돈을 번 후 제주도로 돌아왔습니다. 부인의 소원은 남편이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착하고 똑똑한 남편이지만 냉담자였습니다. 남편은 늘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하면 돈이 나와 빵이 나와? 착하게 살면 되지 무슨 신앙이 필요하냐”고. 그런데 제주도에 정착한 그들은 사업이 잘못되어 돈을 다 날려먹었습니다. 믿을 것은 하느님밖에 없어서 근방에 있는 조천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성당에 가는 아내를 차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런 남편이 고마워서, 자매가 핸드폰을 통해 신앙과 관련되는 좋은 음악이나 글귀를 보내면, 남편은 “장난치지 마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 성당에 새 사제가 부임했는데, 전 신자들에게 제안하기를, 신자들이 9시 55분에 5분 간 가정을 위해 기도하면, 10시에 사제가 강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지금 기도하는 모든 이와 가정에게 강복하시고,

이들을 주님의 사랑 안에 일치를 이루게 하시고,

모든 유혹과 위험에서 지켜주시고,

주님의 이름을 영예롭게 한다면 이들의 원의를 들어주소서.

이 제안을 들은 자매는 남편에게 우리도 우리 가정을 위해 그 시간에 5분 동안 기도하자고 했고, 남편은 거절하지 못할 처지라 마지못해 따라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여보, 우리가 진짜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자매는 전기에 감전된듯 했고, 두 사람은 한참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자매는 5분 간의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9시 55분에 5분간 가정을 위해 기도하면, 본당 신부인 제가 10시에 강복을 드리겠습니다. 부디 가족을 위해 하나 하나가 힘든 가운데 잘 되기를 기도합시다.

 

 

38.    선더링 허드 (2011. 12. 18. 대림 제4주일)

[사무엘 하 7,1-5.8ㄷ-12.14ㄱ.16; 로마 16,25-27; 루카 1,26-38]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전쟁, 대참사, 재난 같은 일반적인 인간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그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장애를 말합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는 것처럼, 과거사건과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면 피하거나 격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을 트라우마의 트리거(촉발인자. trigger)라 합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한 좋은 예를 소개합니다. 

1970년에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헌팅턴에 있는 마셜대학의 미식축구팀 선더링 허드는 미식 축구에서 최고의 대학팀이었습니다. 이 대학이 있는 헌팅턴 시민들에게 선더링 허드는 큰 자랑 이었습니다. 그런 자랑스러운 팀이 하루 아침에 비행기사고로 미식축구 팀원 대부분이 죽게 되고, 죽은 선수들의 가족과 대학교와 헌팅턴 시민이 충격과 함께 침묵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 후 그 도시에서는 미식축구와 관련되는 어떤 대화도 금기시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의 축제 수퍼볼은 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유발하는 트리거가 되었습니다.

그 대학의 이사장의 아들도 그 사고로 죽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슬픔에 휩싸여 삶의 의욕과 활기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신입생도 줄어들게 되면서 대학총장은 언제까지 이렇게 피하면서 살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이사장에게 선더링 허드를 재건하자는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정면으로 부딪혀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팀 재건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비행기를 타지 않아 살아 남은 선수들은 충격으로 이미 운동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샌더링 허드의 부활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게 했지만,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서는 바로 아픈 그 기억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다시 시작한 샌더링 허드는 비록 그 해에 단 두 경기밖에 승리하지 못했지만, 팀 재건은 참으로 잘 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좌절에 빠진 이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상처 받은 도시는 점차 치유가 되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도 치유를 위해서 헌팅턴 시민들의 선택처럼, 은총의 도움으로 용기를 가지고 우리가 겪은 그 아픔에서 시작하도록 합시다.

 

 

39.    넷째 왕의 전설 (2011. 12. 24. 성탄 밤 미사)

[이사야 62,1-5; 사도행전 13,16-17.22-25; 마태오 1,1-25]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넷째 왕의 전설은 일 년에 딱 한 번, 오늘 같은 날에 어울리는 이야기입니다.

구세주를 경배하러 온 이들은 셋이 아니라 넷이었습니다. 가스펠, 발타살, 멜키올과 넷째가 페르시아 출신 알타반입니다. 이들은 별을 연구하던 천문학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일정한 항로를 따라 움직이는 별이 궤도에서 벗어나 특이한 현상을 드러내면, 그것은 신의 계시라고 여겼습니다. 네 사람은 별들의 움직임을 통해 구세주 탄생을 예견하고,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만나기로 했습니다. 세 사람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알타반은 세 개의 보석을 준비하였습니다.

알타반이 약속장소로 가는 도중에 상처를 입은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에게 아이의 가족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찾지 못했으므로, 그는 한 여인에게 첫 번째 보석 하나를 주고 아이를 돌보아달라고 청했습니다. 그가 약속장소에 도착했지만 삼왕들은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알타반이 어느 마을을 지나갈 때 비탄에 빠진 어느 여자와 아이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많은 빚을 남긴 채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곧 노예로 팔려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있었으므로 알타반은 그 여자에게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두 번째 보석을 주었습니다.

알타반이 베틀레헴에 도착했을 때 구세주는 이미 태어나 어디론가 떠나셨고, 삼왕들도 고향으로 떠난 후였습니다. 갑자기 베틀레헴에 군사들이 몰려와 어린아이들을 죽이며 아수라장 이 되었습니다. 어느 집 안으로 피했는데, 가족 모두를 죽이려는 군인에게 세 번째 보석을 쥐어주고 그들을 살려주기를 청했습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알타반은 아직도 반짝이는 별을 보고, 그 별을 따라 이집트로 가게 됩니다.

 

그는 이집트 항구에서 가족과 이별하는 노예를 보고 노예 상인에게 자신이 노예를 사겠다고 했지만 이미 보석들을 다 써버린 것을 뒤늦게 알고 실망합니다. 한평생 구세주를 기다려왔지만, 이제 구세주를 현실적으로 만나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 노예대신 자신이 노예선을 타기로 합니다. 30년 세월이 흘러서 알타반은 늙고 병들어 예루살렘 근처 어느 항구에 버려집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갔는데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언덕 위로 오르고 있음을 보았다. 그 언덕을 따라갔던 그는 그곳에서 그가 만나고 싶었던 바로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계셨습니다.  

아기 탄생이 아니라 이 지상 마지막 순간에 죽어가는 그분을 만나는 얘기지만, 알타반은 고난을 당하는 구세주를 뵙고 한없이 위로를 받았습니다. 구세주가 태어나기 전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고, 구세주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구세주의 처음과 마지막의 모습이었습니다. 알타반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진정으로 구세주 하느님을 경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0장 7-8절에 보면, 감옥에서 요셉은 함께 갇혀 있던 파라오의 두 대신에게 묻습니다. “어째서 오늘 언짢은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그들은 “우리가 꿈을 꾸었은데 풀이해줄 사람이 없다네.”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무수한 꿈을 꾸고 또 그 꿈들이 실현되기를 기대하지만, 상처와 실망을 느끼고, 꿈이 없었다고 좌절합니다. 요셉은 말합니다. “꿈풀이는 하느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다” 우리가 꾸는 꿈들이 실현되기 위해서 구세주는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40.    요한 복음사가 축일 (2011. 12. 27. 화)

[1요한 1,1-4; 요한 20,2-8]

요한 복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도 요한이 희랍문화에 영향을 받은 이들을 위해 쓴 것입니다. 희랍인들은 세상을 엄밀히 두 개의 세계로 나누었습니다. 실재와 그림자, 진품과 유사품(짝퉁). 이 세상의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이데아 세계는 모든 것이 충분하고 고통도 슬픔도 죽음도 없는 곳이기 때문에 진짜 세상인 이데아로 가기 위해서는 가짜 세상에 마음을 두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림자와 짝퉁의 세계에 마음을 두면, 지금은 모든 것이 괜찮게 보이지만, 서서히 사람을 실망시키고 이내 좌절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림자의 세계에는 우리를 만족시키는 진정한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짝퉁의 세계에 마음을 두고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어야 하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곧 실재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안내하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요한은 가르칩니다.

짝퉁과 유사품이 이토록 매혹적이고 아름답다면, 진품은 얼마나 더 아름답겠습니까? 고통은, 우리가 진정한 어떤 것도 주지 못하는 짝퉁의 세계에 마음을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41.    베를린 천사의 시. 육신에 대해서 (2011. 12. 31)

[1요한 2,18-21; 요한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두 천사가 어떤 임무를 받고 베를린 시에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베를린 시를 돌면서 여러 인간들의 실존을 바라봅니다. 저녁에는 둘이 만나서 보고 듣던 것을 나누지만, 인간들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 하나가 서커스 공연에서 어떤 여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천사는 그녀를 만지려고 하지만, 만져지지가 않습니다. 천사는 영혼만 있을 뿐,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는 추운 겨울 이동 커피점에서 어떤 사람이 커피 마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천사를 보고 “너도 마시고 싶냐”는 말에 천사는 놀랍니다. 그가 말합니다. “놀라지 마라. 나도 예전에 천사였다. 보라! 나는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추위를 느껴 이렇게 두 손을 비비고 있다. 이것이 사람이 사는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영체만 있는 천사는 육신을 지닌 인간의 실존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천사는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 육신이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라는 항구한 수명대신 한시적 수명을 가진 인간이 되기를 선택합니다. 천사가 인간이 된 것입니다. 천사가 인간이 되는 순간 영화는 흑백에서 총천연색으로 바뀝니다. 천사는 육신을 가지게 되면서 비로소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희랍인들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혼은 보이지 않고 변치 않는 인간의 본질로써 여겼고, 육신은 보이는 부분으로 변하고 사멸하여 항구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멸시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신이 인간이 된다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육신을 취하는 것은 곧 타락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다르게, 그리스도교에서 육신은 창조 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본질적인 것(바오로가 말하는 죄로 오염된 육신과 다름)입니다. 육신을 제외하고는 결코 인간을 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은 다 육신적입니다. 정도 사랑도, 미움도 희망도 다 육신을 기초로 빚어집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다 오관을 거쳐서 확신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육신적입니다. 육신은 인간에게 유일한 의사소통의 도구이며, 구원의 진리 또한 육신을 통해 전달되고 확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거치지 않으면 추상적이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것도 다 육신이라는 전달체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런 라틴어 표현이 있습니다. Quod non est assumptum, non est sanatum.(취하지 않은 부분은 구원되지 않는다.)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충분치 않으며, 그것이 육신으로 표현되어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에서, 하느님께서 인간과 소통하고 구원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전달되어야 우리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가 추상적으로 애매하게 전달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우리의 눈높이에 맞게 알리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2011년 한 해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미 지난 것은 가도록 내버려두고,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이는 송구영신. 올해 우리에게 좋고 나쁜 것,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주님께 그대로 봉헌하도록 합시다. 그분께 맡기는 것은 사실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는 천 년이 하루와 같고 지나간 어제와 같다고 했습니다. 지나가는 세월에 시선을 두지 말고 언제나 늘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께 시선을 두도록 합시다.

 

42.    한나 (2012. 1. 10. 화. 연중 제1주간)

[사무엘 상 1,9-20; 마르코 1,21ㄴ-28]

사무엘 예언자의 어머니 한나는 엘카나의 두 아내 중 한 사람이었고, 늦도록 아이를 낳지 못해서 다른 아내 프닌나에게 놀림과 구박을 받았습니다. 한나는 그 신세가 너무 서러워 실로의 성소에서 하느님께 아이 하나를 점지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엘리 사제가 볼 때, 한나의 기도가 술주정뱅이처럼 보였을 정도로 그는 흐느끼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말씀드리면서, 자신에게 아이를 허락하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 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에게 아이를 허락하셨고, 한나는 아이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 약속한 대로 성전에 가서 사무엘을 하느님에게 봉헌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사무엘)은 자기 품에 안고 자신의 영광과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무엘은 한나 자신이 서러운 처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큰 은총이었기 때문에, 약속대로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사무엘을 봉헌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더 큰 은총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받은 은총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에게 봉헌할 때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43.    자식 농사에 실패한 엘리 사제 (2012. 1. 11. 수)

[사무엘 상 3,1-10; 마르코 1,29-39]

“엘리는 매우 늙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갖 짓을 저지르고.”(2.22) 사제가문으로써 말이 아니었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을 불러 주님께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나쁜 짓을 한 대가로, 하느님께서 엘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기운과 네 조상 집안의 기운을 꺾으리니, 네 집안에는 오래 사는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슬퍼지게 하겠다. 네 가족이 사람들의 칼에 맞아 다 죽을 것이다.” “나는 믿음직한 사제 하나를 일으키리니, 그가 내 마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엘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이의를 달지 않고 그대로 받아 들입니다.

엘리는 그 동안 사제가문으로 봉사했으니, 건질 것은 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무엇인가 자기 권리를 주장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는 사제직이 자기 자식들에게 넘어가서는 안 되고, 그 상황에서 자기 집안이 망하는 것이 이스라엘에 사제직을 바로 세우는 길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자신에게서 떠나, 어린 사무엘을 부르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의 권력이 자신으로부터 어린 아이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역할이 뒤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엘리는 담담하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엘리의 아들들에게는 미래가 안 보였지만, 엘리의 태도에서는 미래가 보인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자기 뜻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서는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지만, 내려 놓아보십시오. 어쩌면 우리의 미래는 포기하겠다는 그 결심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릅니다.

 

 

44.    왕을 요구하다 (2012. 1. 13. 금)

[사무엘 상 8,4-7.10-22ㄱ; 마르코 2,1-12]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다.”

가나안 땅 정복 후 이스라엘에 판관 시대가 계속되었습니다. 판관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로써 하느님의 뜻이 백성들에게 전달되고, 백성의 청이 하느님에게 전달되도록 중재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나라의 위기 때마다 하느님께서 백성 중 한 사람을 뽑아 판관으로 세우시고, 그는 임무를 완수하면 다시 자신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판관은 임시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스라엘이 자신들도 이웃 나라들처럼 강력한 왕을 달라고 졸랐던 것은, 나라의 통치를 하느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계획대로 다스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반듯한 부모의 인도를 받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성장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왕정이 들어설 때의 문제점들을 열거하시고 설득해 보지만 백성들은 계속 고집을 피웠으므로, 결국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기로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축복으로 연결되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원의 자체가 처음부터 하느님의 섭리와 거리가 있는 무리였고, 그런 경우에는 문제점들이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500년 동안 왕들의 실정으로 선민 이스라엘은 바빌론으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밝히고 거기에 동참하는 것이지, 떼를 써서 나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45.    엘리, 안드레아, 세례자 요한 (2012. 1. 15. 일)

[사무엘 상 3,3ㄴ-10.19; 1코린토 6,13ㄷ-15ㄱ.17-20;요한 1,35-42]

오늘 독서와 복음에 세 사람, 엘리와 안드레아와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엘리는 백성에게 존경받는 사제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이 사제의 자녀답지 않게 백성 에게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2.22), 하느님께서 그 대가로 엘리의 가문에 저주를 내리시고, 엘리 대신에 사제 한 사람을 세우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엘리는 주님의 말씀에 결코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엘리는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지만, 말년에 이르러서 자식농사가 잘못되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자고 있는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엘리는 하느님의 영이 자신에게서 떠나 사무엘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엘리가 하느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은 자신의 집안이 망하는 것이 곧 사제 가문을 바로 세우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따른 첫 번째 제자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한 후 자신의 몇 제자를 예수님께 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안드레아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순간에는 주로 세 사람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현성용, 겟세마니). 안드레아는 제자 그룹에서 주변 인물로 남았지만, 인정을 받기 위해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는 것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알 수 있듯이, 안드레아를 보면 그의 스승 세례자 요한을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요한은 구약에서 모세나 엘리야 못지않게 주님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인물 중에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요한이 마치 종이 주인에게 할 바를 다 하고 물러가는 것처럼, 할 바를 다 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요한은 자기 역할이 (메시아 행세가 아닌) 물로 세례를 베푸는 거기까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을 예수님께 소개했던 일등공신이었지만 조연에 머물렀고,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가 물로 세례를 베푸는 거기까지라는 것을 알았고, 집안이 망하는 것을 곧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곧 그들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식대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세상의 그림자에 머물지 않고, 실재를 향해 걸어가는 이들이었습니다.

 

 

46.    요나 (2012. 1. 22. 일. 연중 제3주일)

[요나 3,1-5.10; 1코린 7,29-31; 마르코 1,14-20]

요나가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요나를 예언자로 만들어 니네베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악상을 알리게 하십니다. 부르심에 응답의 결과가 바로 죽음이라는 점에서, 요나는 예언직을 거절하고 도망가 고래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니네베는 당시 중동의 나찌라 불릴 정도로 잔인했던 대제국 아시 리아의 수도였는데, 그런 도시의 한복판에서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행위 자체가 죽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거기까지 오셔서 요나에게 네가 진짜 살고 싶으면 가야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요나는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사악한 니네베가 처벌받는 것을 목격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니네베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니 왕과 도시 전체가 회개하였고, 하느님은 그들의 회개를 보고 전격적으로 니네베를 용서하십니다.

 

이에 요나는 악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열을 받았고 화가 났습니다. 의인에게는 보상을, 죄인에게 처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들로 인해 고통 받은 사람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 진작 이럴 줄 알았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 습니다”(요나4,1-3). 이렇게 화를 내며 기도하는 요나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하느님의 자비에 열을 받았고, 악인이 처벌을 면하게 된 것에 약이 올랐습니다. 거기 다가 회개까지 하다니 더 기가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아주까리 나무 밑으로 가서 열을 식히려고 하니, 하느님께서는 그 나무의 잎을 치워버리십니다. 곧 네가 죄인의 고통을 즐기려고 예언직을 맡은 것이냐고 역정을 내십니다.

요나가 화를 낸 것은 처벌받아야 할 악인들이 용서받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그의 소명은 니네베의 회개보다 그 이전에 자신의 회개와 원수까지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초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면, 그 원수에게 매어있는 그 사람도 그만큼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47.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 포레스트 검프 (2012. 1. 29. 일)

[신명 18,15-20; 1코린토 7,32-35; 마르코 1,21ㄴ-28]

검프는 다리 불구에 머리가 많이 모자라서 늘 놀림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또 놀림을 받는데, 여자 친구가 보다 못해 “넌 할 수 있어, 뛰어!”라고 외치니, 걷지도 못하는 그가 뛰기 시작했습 니다. 이렇게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던 검프는 어느 덧 바람처럼 빨리 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검프는 친구들에게 왕따 당하고, 그의 어머니는 일찍 돌아 가셨고, 월남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들도 대부분이 죽고, 또 여자 친구마저 떠났지만, 결코 누굴 탓하거나 거기에 매여서 살지 않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언제나 긍정적 이고 따뜻합니다. 

어느 날 검프는 옛 소대장을 만납니다(다리 중상 소대장 구함). 그는 부하들은 다 죽었는데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두 다리를 잃어 불구가 되었다는 좌절감에 술과 마약에 빠져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검프에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자신을 살렸다고 악을 씁니다. 검프는 그를 먼 바다 새우잡이에 초대합니다. 먼 바다에 왔을 때,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은 폭풍우가 몰려옵니다. 소대장은 두려워하기는커녕 하늘을 향해 자신을 데려가라고 발악합니다. 그런데 그날 그들은 엄청난 양의 새우를 잡았고, 소대장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합니다. 그는 의족도 달고, 예쁜 아가씨와 결혼도 합니다. 소대장이 세상에서 다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검프의 영향이 컸습니다.

 

검프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수님의 시선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는 현실이 불운하더라도 ‘~때문’이라고 하지 않고, ‘~덕분’이라 하고, ‘~였더라면’이라 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합니다.

검프는 비록 자신의 삶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덧 그는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할 길을 갑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보장을 바라지 않고 그냥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확신과 보장과 다릅니다. 이 지상에서만큼은 예수님께서도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48.    정결예식 (2012. 2. 7. 화)

[열왕 상 8,22-23.27-30; 마르코 7,1-13]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코이노스(koinos)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이라는 뜻인데, 거룩하지 않은 세상의 평범한 사물을 의미합니다. 코이노스한 상태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예배를 드리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정결의식이 필요했습니다.

부정한 손으로 먹는 사람은 십타(shibta)라는 악령이 침범하는 대상이 됩니다. 예로써, 아기를 낳은 여자도 부정하고, 나환자도 부정하고, 시체를 만진 사람도 부정합니다. (예수님도 부정 하게 됨.) 이방인도 부정하고, 그들이 손을 댄 그릇도 부정합니다. 이런 부정한 사람과 사물들에 손을 댄 사람들도 부정합니다. 따라서 엄격한 유대인은 그런 종류의 무수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 그가 묻혀온 더러움을 없애버리기 위해 큰 돌 항아리(카나 혼인잔치 참고) 안에 있는 물로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로마인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감옥에서 주는 물을 마시지 않고 정결례로 사용해서 목이 말라 죽게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각에서는 지나치게 율법의 형식 준수에 목을 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치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적인 변화(하느님 공경, 이웃 사랑과 배려. 이 부분은 반드시 행해야 함)를 소홀히 하고 외형적인 거룩함과 순결(악세사리)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위선자가 될 공산이 매우 높습니다.

 

 

49.    스파이더 맨 (2012. 2. 8. 수)

[열왕 상 10,1-10; 마르코 7,14-23]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허락하신 지혜는 솔로몬 왕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과 공동선에 기여하고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 역사 안에 등장하는 큰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 힘이 독자적인 노력을 통해 성취되었거나, 혼자 혹은 그의 가족들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남을 위해 사용하면 의미를 얻게 되지만, 자신을 위해 사용하면 의미를 상실하는 황폐를 겪게 됩니다. 

스파이더 맨의 주인공(피터)은 어느 날 실험실에 견학 갔다가, 유전자로 조작된 슈퍼거미에게 물린 후 초능력자가 되었습니다. 손목에서 거미줄이 나오고, 높은 건물사이를 날아다니게 됩니다. 피터는 그 초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합니다. 곧 여자 친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과 스포츠카가 있어야했기 때문에 레슬링 쇼에 참가합니다. 그 때부터 피터는 그 힘을 잃어가면서 벽에 오르지도 못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경에 삼손이 등장합니다. 그는 당나귀 턱뼈로 천 명의 적군을 쳐부순 영웅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자신을 위해(데릴라) 사용한 결과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큰 힘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사용자를 치는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큰 힘’을 가지기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힘을 공동선을 위해 이타적으로 바르게 사용하도록 자신을 준비(훈련)해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똑같은 이슬을 마시는데,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벌이 먹으면 꿀이 되듯이, ‘큰 힘’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그 결과가 달라질 것입니다.

 

 

50.    콰시모도 콤플렉스(2012. 2. 12. 일)

[레위 13,1-2.44-46; 1코린토 10,31-11,1; 마르코 1,40-45]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시고, 사제에게 가서 나병이 나았다는 것을 확인받은 후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벌로 주어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추방되어 혼자 살았고, 길에서 정상인들을 만나면 반드시 여기 저주 받은 자가 지나 간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치유된 후 정상인으로 사회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확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자신이 나환자였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릴 필요는 없지만, 정상적 사회복귀를 위해 사제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자신이 나환자였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콰시모도 콤플렉스: 콰시모도는 흉측한 자기 얼굴 때문에 자신을 감추고, 종 밑에서 살아가는 노트르담 꼽추의 이름입니다. 흉측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범죄율이 높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서 자주 조롱을 받아서 성격이 삐뚤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콰시모도 콤플렉스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조종사들은 독일 공군으로부터 런던 상공을 방어하는데 영웅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휘발유통이 기체 앞에 있는 비행기 결함으로 총에 맞아 불이나면 조종사들 대부분이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고, 여러 번 성형수술로 그들의 얼굴은 더 흉측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되고, 자연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게 되며 점차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간절한 소원은 영웅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나환자들도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빳빳하든 꾸겨져 있든 간에 100불짜리 돈 이듯이,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우리 인간도, 나환자든 정상인이든 동일하게 소중한 존재들 입니다. 그래서 흉측한 자신이라고 해서 숨거나 움츠려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나은 상태로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51.    아페케인 (2012. 2. 22. 수. 재의 수요일)

[요엘 2,12-18; 2코린토 5,20-6,2; 마태오 6,1-6.16-18]

카니발 축제는 바로 사순절 직전에 있습니다. 어원은 carne vale! 곧 ‘육체여 안녕’이란 말 입니다. 사순절 동안 금육과 단식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기간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에서 세 가지 중요한 신심행위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가지 신심행위를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신심들을 나쁜 동기에서 행하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자선을 하면서 아량을 과시하고, 기도하면서 자기 경건함을 인정받기를 원하고, 단식하면서 자기 훌륭함을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예수님께서 쓰신 표현이 아페케인입니다. 이는 전문적 상업용어로, 곧 약속한대로 보수 전액을 다 받는다는 뜻입니다. 만일 너의 목적이 세상의 보수를 받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원한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인데, 그것이 네가 받을 상의 전부이며 그 이상의 하느님 나라의 보상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은 허락하지만,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인생은 참으로 허망할 것입니다.

 

 

52.    구약의 계약. 곰이 된 아이 (2012. 2. 26. 일)

[창세 9,8-15; 1베드로 3,18-32; 마르코 1,12-15]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계약이 세 번 나옵니다. 첫째는 노아의 계약입니다.  인류가 죄로 크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40일간의 대홍수를 통해서 인류를 정리하고자 했지만 이내 후회하시고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그 표시로 무지개를 보여주시고 노아와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두번 째는 아브라함과의 계약(창세 15장)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에게 “네 자손은 하늘의 별 수만큼 번성할 것이며,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시면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세번 째는 시나이 계약(탈출 36장)입니다. 히브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10계명을 주시며 율법을 지키면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은 곧 시나이계약을 말합니다.

백곰 부부가 있었습니다. 늑대들의 공격으로 피하다가 임신 중인 암컷 곰이 새끼를 사산하게 됩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암컷 곰을 위해 수컷 곰은 인간 아이를 빼앗아 암컷에게 줍니다. 암컷은 그 인간 아이를 자기 새끼처럼 키웠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러 다닌 인간 아버지는 결국 암컷 곰을 죽이고 아이를 구출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돌아온 아이는 자기 부모 앞에서 곰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엄마 곰을 찾습니다. 부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인간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간 세계에서 도망쳐서 진짜 곰이 되기 위한 통과 의례를 거칩니다. 높은 폭포와 깊은 계곡 사이를 지나고, 무서운 폭풍과 고독을 견디어 냅니다. 인간 아버지가 다시 그 아이를 찾으러 나섰지만, 이미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아이는 이미 곰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곰이 되려는 것은 인간에게 사랑을 받기 전에 이미 곰에게 사랑을 받았고, 아이도 자기 마음을 곰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으로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정당하게 누구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대신하여 그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비록 자신을 불행하게 하더라도 쫓아가게 됩니다. 아이가 인간 부모를 놓쳐서 곰이 되려 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잘못된 사랑을 만나 불행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위한 아가페 사랑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순절 동안, 그 사랑을 묵상하고 배워야 합니다.

 

 

53.    양용은. 공포. 사탄의 무기 (2012. 3. 4. 일)

[창세 22,1-2.9ㄱ.10-13.15-18; 로마 8,31ㄴ-34; 마르코 9,2-10]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 셋을 데리고 타볼 산에 오르셨고,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인식에서, 두 예언자는 구약의 두 기둥들입니다.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오는 예언자로, 모세는 메시아와 함께 오는 예언자입니다. 두 위대한 인물들이 예수님께 경배하고 있는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장면을 보이신 것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리는 것뿐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수난을 대비해서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과 대화하는 동안 예수님의 옷이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그것을 본 베드로는 너무나 좋아서 그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목격했음에도 제자들은 고난이나 십자가는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두렵고 무섭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양용은 선수가 PGA 골프에서 타이거 우즈를 꺾고 우승한 적이 있습니다. 타이거 우즈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최고의 골프선수였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 같은 조에서 호랑이 줄무늬가 있는 붉은 티셔츠를 입은 그와 함께 공을 친다는 것은 공포에 가까웠습니다. 그 공포를 시카고 트리뷴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차가운 수술대에 누울 때, 인간은 극한의 공포를 체험한다. 챔피언 조에서 타이거 우즈와 마지막 라운드를 하는 게 꼭 그런 거다. 마치 마취주사를 맞지 않고 외과수술을 받는 것과 같다.” 양용은 선수는 그 공포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만의 경기를 하기 위해서 계속 성경구절을 되풀이 읊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공포에 질리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공포로 포기하거나,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사용하는 최고의 무기가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파스카사건을 체험하고, 또 그것을 기억하도록 하셔야 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 당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사순 2주를 맞이하면서,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를 가지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도록 합시다. 

 

 

54.    부자와 나자로 (2012. 3. 8. 목)

[예레미야17,5-10; 루카 16,19-31]

부자는 이 지상에서 호화롭고 즐겁게 살았고, 반면에 나자로는 개들이 자신의 종기를 핥는 것을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존재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워야 할 정도로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나이프나 포크가 없었으므로, 대신 빵 안의 부드러운 부분을 떼어서 더러워진 손을 닦아서 식탁 아래로 버렸다고 합니다. 아마 나자로는 그런 빵 부스러기를 먹은 듯합니다.

둘이 모두 죽은 후에 세상에서 살았던 대로 부자는 지옥으로 갔고, 나자로는 아브라함의 품(하늘나라)에 안겼습니다. 세상과 전혀 다른 현실을 직면하면서, 부자는 이전에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하나의 실재를 확인합니다. 죽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찌 살아야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부자는 그 대가로, 뜨거운 구덩이 속에서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처지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물을 청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형제들이 이런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나자로를 보내줄 수 없느냐고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에게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하자, 부자는 손사래를 치면서 절박하게,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져 있습니다. 부자가 원했던 것처럼,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하늘나라의 실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어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을 것인가 아닌가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55.    요셉 이야기 (2012. 3. 9. 금)

[창세 37,3-4.12-13ㄷ.17ㄹ-28; 마태오 21,33-43.45-46]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게 된 큰 이유는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늦게 얻은 아들인데다가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귀공자 처럼 특별히 장신구가 달린 옷을 입혔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어 결국 노예로 팔려 이집트로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살의에 찬 미움으로 구덩이에 던져졌고,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으며, 주인의 부인을 겁탈한다는 누명을 받아 무기수가 되어 꽤 긴 시간을 감옥소에서 보냈습니다. 훗날 이집트 총리가 되었지만, 요셉은 그런 지울 수 없는 상처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냈을 것이고, 세상을 삐뚤게 보고 복수의 칼날을 갈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 억울함을 당하면 시작부터 불행했다고 자신을 규정하고, 한탄만 하면서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돌보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이해 하였습니다. 관점으로 보는 것과 과정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과정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시각으로, 전체를 바라보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련을 통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집회 2,5). 황금은 처음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56.    그리스도교 덕목들 (2012. 3. 11. 일. 사순 제3주일)

[탈출 20,1-17; 1코린토 1,22-25; 요한 2,13-25]

지난 대림 때, 판공성사를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악덕들에 대해 언급했고, 이번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 다섯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덕입니다. 예수님 당시 고대인들에게 최고의 미덕은 겸손이 아니라 용감함이었습니다(용사와 노예비교). 겸손은 굽실거리고 당당하지 못한, 생존을 위해 몸을 사리는 비굴함으로 이해되었지만, 그리스도교가 시작되면서 겸손은 모든 덕을 담는 그릇으로써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 되었습니다. 겸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식하는 자세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수락하기 때문에 자신을 과장 하거나 덧칠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롭습니다. 낮추어져 있어 남의 말 또한 들을 수 있습니다.

온유함(프라우스praus). 온유한 사람은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고, 그래서는 아니될 때 분노하지 않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를 보면 분노하지만, 자신에게 오는 부당한 대우와 모욕에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온유함은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께서 잡혀서 돌아가실 때까지 유지하셨던 덕목입니다.

오래 참는 것.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참는, 모욕과 손해를 감수하는 정신입니다. 어떤 불행에도 좌절하거나 고난에도 꺾이거나 단념하지 않습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복수할 기회를 가졌음 에도 복수하지 않는 정신입니다. 복수로써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잔인한 인물이 되기도 합니다. 평생을 헛수고하는 셈이 됩니다.

아가페 사랑. 사랑의 세 가지 개념 – 스토르게(storge)는 가족애, 필리아(philia)는 우정. 에로스(eros)는 남녀 간의 열정 – 외에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사랑을 위해 새로운 용어가 필요 했습니다. 성서 저자들은 이를 아가페라 불렀습니다. 아가페는 상대방이 무슨 짓을 하든지 그 사람의 최고의 것만을 보려는 의지입니다. 비록 상대방이 자신을 비난하고 해치더라도 그 사람을 위한 선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가페는 의지적이며, 결코 쉽게 정복되지 않는 자비심입니다. 본능적 사랑은 오래 가지 않고 쉽게 포기되고 그래서 쉽게 정복되는 사랑입니다.

충실성이란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약속한 것(그리스도께 한 서약)을 포기하지 않는 정신 입니다. 만사가 다 잘 되어갈 때 훌륭한 군인으로 남는 것은 쉽지만, 몸이 지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군인으로서 자기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충실성은 주인을 기쁘게 하는 덕목입니다. 사무엘 하권 15장 13-23절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의 아버지를 배반하였고, 백성도 압살롬을 따랐기 때문에, 다윗은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경호원 이타이는 이방인 용병이었습니다. 다윗은 살고 싶으면 자신에게서 떠나라고 했지만, 이타이는 “죽을 곳이든 살 곳이든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서 계시는 곳이면 이디나 이종도 거기에 있겠습니다.”하고 자신의 입장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충실성입니다.

이런 덕목들을 갖추지 않으면, 그만큼 우리 안에서 신앙을 유지시켜주는 항체가 약화되고, 과녁을 향해 쏜 화살들이 표적에서 벗어나듯이 우리가 가야할 종착지에서 벗어나면서 죄를 짓게 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소중한 사람이 망가질 때 하느님을 탄식하게 만드는 죄입니다. 적들은 성곽의 약한 부분들을 찾아서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약한 곳을 튼튼하게 구축하지 않으면, 적들에게 쉽게 함락 당할 것입니다. 덕목을 쌓는 이들은 평소 성곽의 약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6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투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루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이런 덕목들을 갖추면 시련들을 넘기게 되고 유혹에서 무난히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사순절 시기에 그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57.    벙어리 마귀 (2012. 3. 15. 목)

[예레미야 7,23-28; 루카 11,14-23]

오늘 복음은 벙어리 마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영신수련 식별규칙 부분을 보면(326, 열셋째 규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원수(사탄)는 자신의 비밀이 발각되기를 원치 않으며, 자신의 흉계와 거짓 약속들이 비밀에 부쳐지기를 원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점을 발설하지 말고 입을 다물고 봉하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지배 하에서 영혼을 망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신의 계획이 영적인 사람에게 발각되면 무척 원통해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탄은 한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점과 아픔을 드러내기를 두려워 하게 만듭니다. 즉 억압상태 그대로 있기를 바라면서, 한 영혼이 어디가 아픈지,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원천적으로 봉쇄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야 그 영혼을 망가트려 하느님을 원망하게 하고 멀리하게 만들게 됩니다.

입이 벙어리라면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표현하기도 도움을 청하기도 어렵습니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억압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자신을 드러내기를 극히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곪은 것은 터트려야 제 살이 돋습니다. 드러내고 표현하는 성찰에서 해방은 시작될 것입니다.

 

58.    굿 윌 헌팅 (2012. 3. 18. 일. 사순 제4주일)

[역대 상 36,14-16.19-23; 에페소 2,4-10; 요한 3,14-21]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 구원 받기 위함이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MIT공대 수학교수가 학생들에게 학기 끝날 때까지 수학문제 하나를 숙제로 내주었습니다. 그것을 그 대학에서 청소부 청년이 풀었습니다. 그가 1세기에 한 번 나올 정도의 수학 천재로 21살인 윌 헌팅입니다. 윌은 어렸을 때 받은 상처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입양-파양 3번 거절 당한 경험). 그리고 양아버지로부터 학대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네 건달들과 어울리고, 상습적인 도박과 폭력으로 감방에 갔다 온 전과기록도 있습니다. 세상을 불신하고 자신을 도우려는 사람마저 믿지 못합니다.

윌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는 영국 여학생을 알게 되었고, 그 학생은 윌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자기 곁을 떠날 것이 두려워 자신이 먼저 그 여자에게서 떠나버립니다. 이런 결정들은 언제나 윌을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윌은 숀 맥과이어라는 상담심리학 교수와 상담하게 됩니다. 월은 질문을 받으면 다른 대답을 하거나, 상담자의 약점을 지적하거나 시비를 걸곤 합니다. 월이 자기 과거에게 도망을 가자, 숀 교수는 자신도 어린 시절 양아버지에게서 학대받았고, 너와 똑같은 고통을 겪었다고 고백 합니다. 양부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렌치와 혁대 중에 무엇을 택하겠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도 알다시피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대부분 상처받은 피해자들은 마음 깊이에서 자기 잘못이라고 믿고 있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가해자나 주변의 방관자들이 어린 피해자에게 ‘네가 잘못하니까 벌을 받는 거’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좀 더 잘 했으면 이런 일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숀 교수는 윌로 하여금 이런 세뇌 당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믿음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네 탓이 아니라는 말에, 윌은 닫혀 있던 자신을 개방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탓을 묻고 단죄하는 심판자로 서 계시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우리를 단죄할 마음이 전혀 없음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네 탓이 아니야.”  

 

 

59.    40일의 의미 (2012. 3. 22. 목)

[탈출 32,7-14; 요한 5,31-47]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에서 헤맨 세월이 40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께서 공생활 직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고, 사순절 기간도(재의 수요일-부활대축일까지) 40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40일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40일은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을 더 신뢰하게 만드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계약을 맺은 뒤, 모세는 다시 하느님의 산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점차 불안해져서 아론에게 신을 만들어 달라고 청합니다. 금붙이들을 녹여서 만든 우상이 금송아지였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후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로 광야에 왔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아직도 신앙 에서는 초보자들이어서 하느님께서는 한 단계 더 높은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모세를 지도자로 내세우고 그의 인도를 받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아론에게 요구 합니다. 뭔가 시각적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보여야 그것을 소유할 수 있고 (히브리 노예들의 특성), 그렇다면 결국 자기 원의대로 하려는, 그 욕심을 채워 줄 신이 바로 금송아지였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모세가 아닌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요구해서 (모세로는 안 되니까, 타협이 가능한 아론에게), 10계명 실천이 아닌 금송아지를 섬기려고 했습니다. 우상숭배의 특징 중 하나는 시각적 부재는 곧 하느님 부재라고 여기고, 그 부재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그런 상태를 극복할 가르침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급한 신앙의 선택지는 언제나 불안하고 위험합니다.

 

 

60.    성지주일 (2012. 3. 25. 일)

[예레미야 31,31-34; 히브리서 5,7-9; 요한 12,20-3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영지주의 사상을 간략하게 설명겠습니다. ‘신적인 것(영적, 빛, 부드럽고)이 유출되어 끝을 모르고 흘러 내려가는데 가장 마지막 부분은 물질(사악한, 딱딱함, 어두움)이다. 전자는 구원, 후자는 타락이며, 인간은 이 유출되는 긴 무수한 계단의 어느 중간에 위치해 있다. 구원되려면, 위로 신적인 방향으로 올라가야 하고, 거쳐야 하는 무수한 단계들마다 설치되어 있는 잠금장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데, 예수의 가르침은 너무 단순 소박해서 그것을 풀 수 없다.’ 그것을 푸는 보다 정교하고 비밀스러운 지식(gnosis 그노시스)은 오직 소수인 영지주의자들 만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구원의 길은 수수께끼처럼 난해하고 복잡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밀스럽거나 난해하지 않고 누구나 실천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고 명백합니다. 구원은 지식이 아닌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뉴욕 맨하탄의 겨울 바다에 비행기가 불시착하였습니다. 어떤 승객 한 사람이 자신도 구출되어야 할 처지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노인들과 아이들을 먼저 살리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자신에게 구명줄을 내려준 헬리 콥터에 몸을 맡기기보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구명줄을 양보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이 살신성인(殺身成仁)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실천의 문제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실천보다 머리를 쓰려는 것은 자신들이 지성적이어서가 아니라 고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구원의 길을 자신들에게 맞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에 이르지 못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곧 자연의 질서이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순리입니다. 밀알이 죽지 않고 한 알 그대로 남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겨울이 오는데도 잎이 녹색 그대로거나 노란 잎이 나뭇가지 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이상한 일입니다.

 

경주박물관의 신라시대 때의 토기항아리 안에 탈색된 시커먼 씨앗들이 있습니다. 천오백 년 전, 다른 씨앗들은 이미 땅에 떨어져 죽어서 싹이 발아하고 많은 결실을 맺었지만, 항아리 안의 씨앗은 수천 년 동안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결실을 내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입니다.

 

 

61.    하느님의 행사는 언제나 비범해야 (2012. 3. 27. 화)

[민수 21,4-9; 요한 8,21-30]

랍비의 격언에 의하면, 예고 없이 닥쳐오는 세 가지가 전갈, 하느님의 은총, 메시아라 합니다. 메시아는 돌연히 등장하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위대하고, 동시에 신비스러운 기원을 갖는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가족이나 고향의 뒤 배경에는 ‘아무런 신비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메시아는 숨어 대기하고 있다가 결정적일 때에 세상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그 기원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행위와 드러남은 정상적인 일상의 평범한 사건들 안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비범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의 표준에 맞지 않았습니다.

민수기는 불뱀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불뱀에 물린 이들이 기둥에 달린 구리뱀을 보면 낫게 됩니다. 사실 뱀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하느님의 은총이 살렸던 것입니다.  그처럼 그런 처지의 백성을 살릴 수 있는 분, 오랜 세월 이스라엘이 기다려왔던 바로 그분께서 오셨고, 너희들이 구원되려면, “내가 바로 나임”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불뱀에 물려 고통을 당하는 우리의 현실과 처지에서 믿을 것이라곤 주님밖에 없습니다.

 

 

62.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2012. 3. 29. 목)

[창세 17,3-9; 요한 8,51-59]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하느님에 의해 이름이 바뀐 첫 번째 사람입니다. 곧 아람족의 아버지라는 뜻인 아브람에서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인 아브라함 으로 바뀌는데, 아람이라는 일개 유목민의 족장에서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창세 16장 16절에서 사라의 종,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줄 때 아브람의 나이는 88세였고, 창세 21장 5절에서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아들이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됩니다. 아브람은 13년 동안 이스마엘에게 푹 빠졌을 때의 이름이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허락하시면서 하느님의 섭리대로 살라고 주신 이름이었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받는 것은 어떤 신분의 변화를 뜻합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되면서 추가된 단어가 ‘헤이’인데, 이는 보통 하느님을 가리키는 약자로 곧 하느님께서 ‘그의 존재의 가장 깊이’로 들어가셨음을 뜻합니다. 우리의 세례명도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3.    예레미아의 고난 (2012. 3. 30. 금)

[예레미야 20,10-13; 요한 10,31-42]

예레미야는 유다백성들에게 예루살렘 함락(587년)을 알렸지만, 백성들은 예레미아의 경고를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에게서 선택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결코 망하거나 재앙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아는 예언자 로써 할 바를 다했지만, 그러나 그에게 오는 것은 비난과 고통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나라의 모든 사람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몸을 저주합니다”(15,10). 그를 민족의 반역자로 여겼고, 고향사람들까지 그를 죽이려고 했고(11,21), 친구들마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11,19-20). 예레미아는 천성이 부드럽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같은 동포로부터 조롱거리가 되면서, 호전적이며 참을성 없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처참한 심정에서 예레미아는 하느님께 자기를 못살게 구는 이들에게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느님이 저들에게 복수하는 것을 보게 해 달라고 청했는데(15,15), 하느님의 응답은 이러 했습니다. “그런 시시한 말은 그만두고, 말 같은 말을 하여라”(15,9).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는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64.    유다 마카베오. 고진감래 (2012. 4. 1. 일. 예루살렘 입성)

[이사야 50,4-7; 필리피 2,6-11; 마르코 14,1-15.4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기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3년 동안 당신과 당신의 가르침의 내용을 분명히 알리셨기 때문에, 이제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유대의 풍습에서, 나귀는 고상한 동물로써 평화로울 때 왕이 탔던 동물(전쟁터에서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으로 오르시는 것입니다. 

기원전 167년 팔레스티나를 통치했던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왕은 유대종교를 없애고 대신 희랍 문화를 심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정책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그때 유다 마카베오가 등장하여 안티오쿠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백성들은 자기 겉옷을 길에 깔고, 종료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마카베오를 환영했다고 합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에게도 마카베오와 같은 정복자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대와 너무나 다른 것을 확인하고 실망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을 예견한 예수님께서는 입성하실 때 몹시 심란하셨을 것입니다. 

누군가 한국사회를 고진감래(苦盡甘來) 이데올로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고통과 희생도 감내한다는 것인데, 학생들은 입시를 위해 젊음을 희생하고 그리고 취업을 위해, 승진을 위해 참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현재를 사는 게 아니라, 언젠가 좋은 날이 오리라는 기대로 현재를 희생시키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정상에 오르는 모든 과정이 다 괴로운 일이 됩니다. 

부활은 과정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과정으로 이해 하셨습니다. 다만 그것을 고통스러운 희생으로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라는 보물을 사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 놓으셨습니다. 보물을 발견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는 행위는 괴로운 일이라기보다 오히려 즐거운 일이 될 수는 없을까요?

 

 

65.    온유함 (2012. 4. 6. 성 금요일)

[이사야 52,13-53,12; 히브리 4,14-16.5,7-9; 요한 18,1-19.42]

예수님께서는 유대지도자들의 질문들에 대답을 하시지만, 상황이 반전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그들의 판단에 맡기실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꼬투리를 잡으려 할 뿐,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당신이 메시아인가 하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다니엘서의 표현대로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 쪽에 앉아 있으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했을 때, 대사제는 가슴의 옷을 찢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치려고 달려듭니다. 그들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욕을 하며 예수님을 치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변명하거나 대들지 않으시고, 그들의 폭행과 폭언을 말없이 수용하십니다. 이것을 온유함이라 합니다. 내 멍에를 메어라 (마태11,28-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당하면서 말도 못하면 그 억울함으로 속병을 앓고 밤에 잠도 자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혼자 애를 쓸 때 드러나는 영혼의 현상입니다. 그러나 기도 안에서 시비를 가리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분함과 주어지는 수모를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면, 그리고 피하지 않고 그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우리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40,31).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도신경에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후 곧바로 저승에 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학자 한스 폰 우르 발타살에 의하면,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시신이 되어 하느님이 철저히 부재하는 곳, 지옥까지 내려가셨다고 합니다. 지옥의 영혼들은 자신들이 왜 고통을 당하는지 모르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들에 대한 뉘우침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으로 내려오는 주님의 시신을 보고 비로소 저 ‘나자렛 예수가 바로 그 하느님’임을 알아보고 뉘우치며 절치통곡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해서 계속 내려오시고, 우리는 뉘우치면서 계속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에 복음사가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 으로서 지니신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우리도 그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66.    부활 성야 미사 (2012. 4. 7. 토)

[창세 1,1-2,2; 창세 22,1-18; 탈출 14,15-15,1ㄱ; 이사 54,5-14; 이사야 55,1-11

바룩 3,9-15.32-44; 에제키엘36,16-17ㄱ.18-28; 로마 6,3-11; 마르코 1-7]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기다려왔던 바로 그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 3년 동안 하느님과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스승과 함께 했던 지난 3년의 삶을 부활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되면서, 이것을 기초로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에서 당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살았던 곳입니다. 우리 각자는 다 갈릴래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하느님께서 부재하셨던 세계라고 간주했지만, 사실은 하느님과 함께 했던 자리였음을 확인합니다. 우리가 활동사진들을 거꾸로 돌리듯이 우리의 과거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자신들의 삶 곳곳에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고, 평생을 반추해도 다 소모되지 않을 정도로 그분의 현존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나와 이웃을 바라보게 합니다. 예전의 시각으로 그리고 증오의 시각으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처럼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고린 전 13,11). 라틴어로 ‘Ubi amore ibi oculos’란 말이 있습니다. 곧 사랑이 있는 곳에 눈도 있다는 것입니다. 증오하고 미워하는 시각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지만,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67.    부활의 흔적, 가락테르 (2012. 4. 20. 금)

[사도행전 5,34-42; 요한 6,1-15]

산헤드린은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했지만, 사도들은 그 명령을 무시 합니다. 사도들에게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특성들이 보입니다.

사도들은 매질을 당한 다음 (40절)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지만, 풀려 나자마자 곧장 성전에 가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무모한 일).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뚜렷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자신들의 안전을 뒤로 두는 담대함을 보여줍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자신들의 부활 체험)을 보고 들은 것만을 전할 뿐 어떠한 것도 보태거나 덜하지 않습니다. 전달받은 자가 받은 것만을 전하기 위해 지녀야 할 태도가 비움과 투명성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메시지가 투명하지 못한 사람들을 거칠 때마다 충분히 조작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남는 흔적(카락테르. 케릭터)이 있습니다. 희랍어로 카락테르는 곧 도장이 밀초 위에 남기는 자국을 말합니다.

 

왕들은 자신이 보내는 사람과 서신을 인증하기 위해 손가락의 반지도장으로 밀초 위를 꾹 눌러서 자신의 서신임을 확인하는 흔적을 남깁니다. 자국은 도장의 모양을 정확하게 재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본질을 드러내며 흔적을 남기시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본질을 드러내며 흔적을 남깁니다. 부활의 흔적 중 하나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욕 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가말리엘 선생이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은연중에 이들을 움직이는 이가 곧 하느님 이실지도 모른다는 의식을 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68.    40일 발현 (2012. 4. 22. 일. 부활 제3주일)

[사도행전 3,13-15.17-19; 1요한 2,1-5ㄱ; 루카 24,35-4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주 발현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이제 본래 하느님의 위치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분을 만나려면, 예전 지상에서 보았던 그 모습으로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여러 번 발현하신 것은,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방식’에 익숙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예수님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만나는 훈련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났을 때 그녀는 한참 후에 자신을 “마리아”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엠마오의 제자들은 그분이 빵을 쪼개는 모습을 통해 스승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엠마오까지 함께 가는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을 느꼈다면 필시 그분의 얼굴을 봤을 법한데, 그분이심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방식에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익숙한 제스처, 빵의 쪼갬). 예수님의 발현 중에 마지막에 속하는 티베리아 호숫가에서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평화스럽습니다. 제자들은 곧 예수님을 쉽게 알아보았는데, 이제 기도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서툴지 않고 익숙해졌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기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지상에 계셨을 때 성령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셨고, 부활사건 이후 사도들도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려면 기도라는 형식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려면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자주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것은 성령을 통해서 당신을 만나는데 익숙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69.    바오로와 바르나바 갈등 (2012. 4. 25. 수)  

[1베드로 5,5ㄴ-14; 마르코 16,15-20]

제1차 선교여행 때 마르코의 철부지 행동으로, 바오로가 마르코에게 반감을 갖게 됩니다. 갑자기 선교여행 중간에 마르코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바오로는 그런 어린 마르코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2차 선교여행 때 바르나바가 자신의 친척 마르코를 합류시키려고 했을 때, 바오로와 심하게 다투게 됩니다. 서로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데려가자 말자 하고 부딪혔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헤어지게 됩니다.

그 후 사도행전에서는 바르나바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연착륙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인물입니다. 그는 성격이 원만하고 좋은 특무상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오로가 개종했다는 사실과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두고 그리스도인 들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위장잠입한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골로사이 4.10, 티모테오 후 4.12, 필레몬 1,24에서, 마르코가 바오로의 협력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화해를 했고, 그 표시로 마르코를 자신의 협력자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복음에서처럼, 사도들이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싸우고 부딪히는 현상은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사도들의 선교활동은 늘 ‘거룩하고 누가 봐도 훌륭하게’ 진행되지만은 않습니다. 어쩌면 선교사들은 최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군인들과 같이 치열하고 서로 함께하기 어려운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서로간에 어떤 다툼이나, 이견, 그리고 갈등 없이 선교생활을 하는 팀은 나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70.    필리포스와 에티오피아 내시 (2012. 4. 26. 목)

[사도행전 8,26-40; 요한 6,44-51]

같은 성경글귀를 가지고 부활체험을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성경을 읽는 시각에 있습니다. 시각에 따라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이사야 성경 구절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활체험을 한 필리포스는 그 성경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부활체험자는 성령께 자신을 여는 훈련에 익숙한, 곧 기도를 하는 이들입니다.

이처럼 필립보가 부활의 시각에서 성경구절을 해석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지난날의 삶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인간적인 정서에 기초된, 버려진 감정과 부서진 마음에 담아놓았던 기억들을 하느님의 시각 으로 새롭게 조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지난 사건들을 왜곡 조작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지켜보면, 이제껏 내가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discovery)하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당했고, 느꼈고, 살았는지에 그 중점을 두지 말고, 은총의 빛 가운데 하느님이 나를 어떻게 이끄셨는지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71.    사울의 회심(2012. 4. 27. 금)

[사도행전 9,1-20; 요한 6,52-59]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스테파노의 순교에 개입되었던 사울이 스테파노가 비명횡사하지 않고 평화롭게 죽었다는 사실에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게 됩니다.

사울에게 유대종교는 아브라함이 있었고, 모세가 있었고, 숱한 예언자들이 함께하였던 위대한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잔당들을 뿌리 뽑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2천년 동안 이어온 찬란한 유대종교가 나자렛 예수를 위한 하나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큰 충격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충격으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으니 걸음을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바오로는 유대종교의 역할은 하느님의 거대한 구원의 계획에서 결코 주연이 아닌 수많은 조연일 뿐이며, 이스라엘만이 아닌 모든 인류의 구원에 초점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사울은 길을 잃어버렸고, 어디로 가야할 지 모릅니다. 그때 등장했던 하나니아스를 통해 방금 그가 체험한 실재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울이 다시 눈을 뜨게 되고, 바오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실재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72.    아마추어 사진 작가 (2012. 4. 29. 일)

[사도행전 4,8-12; 1요한 3,1-2; 요한 10,11-18]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는다.”

팔레스티나에서, 양들에 대한 목자들의 책임의식은 철두철미했다고 합니다. 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목자의 과실인지 아니면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는지를 밝혀야 했습니다. 양이 실종되었다면 찾아야 하고, 짐승들에게 당했다면 짐승들을 찾아 죽여서 양의 흔적을 찾아서 증거품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탈출기 22.13 손해배상법). 그 과정에서 목자들은 많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다.”

어느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자신의 슈퍼 앞,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오랫동안 사진을 찍었습니다. 물건 사러 온 젊은이는 1년 전 슈퍼 앞에서 갱들의 총격전에 죽은 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합니다.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모습으로 바쁘게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아들이 아버지 를 멀리했던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집을 나갔고, 잔소리가 많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기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통해 생전에 본적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없었으니 찰나처럼 지나가는 그런 모습들이 보였을 리가 없습니다. 

앨범의 사진처럼, 우리 주위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주로 어둔 기억위주로). 그들 중에 적지 않은 착한 목자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지나가며 나를 도왔을 것입니다.

궁지에 몰린 나를 발견하고, 치료해 주고,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주고, 또 사람들에게 완쾌를 부탁하고 명함도 남기지 않고 떠났을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사실들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처럼, 우리의 삶에서 평생을 반추해도 다 할 수 없을 만큼 하느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의 삶에서 힘들었던 것을 기억하기보다 먼저 그분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슬픔과 분노가 자신의 삶을 지배하도록 놔두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전자를 어리석다고 하고, 후자를 지혜롭다고 합니다.

 

 

73.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 (2012. 5. 10. 목)

[사도행전 15,7-21; 요한 15,9-11]

당시 첫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오랜 세월 형성된 문화적 습관은 태어난 남자아이에게 할례하고, 율법을 준수하고, 안식일에는 시나고가에서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유대종교 입교식 처럼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준수를 요구했습니다. 해가 뜨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예수님이 오면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한 율법은 이제 물러나야 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러합니다.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은총으로 이루어 진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율법준수는 인간에게 감당할 수 없는 멍에다. 613가지 규칙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장사하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만나서도 안 되고,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과 식사를 하더라도 금지된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장사를 하지 않으면 몰라도 장사하는 유대인들에게 그것들은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적으로 율법준수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패배의식을 갖게 되었고, 오늘도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는 죄인의식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억압적 영성을 가지 고는 하느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인격적인 만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비인격적인 율법준수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마저 이방-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준수하도록 강요 했다면, 그리스도교 유대종교의 한 지파가 되었을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74.    바오로를 죽이려는 유대인 결사대 (2012. 5. 24. 목)

[사도행전 22,30.23,6-11; 요한 17,20-26]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든 유대교를 배반하고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는 바오로를 죽이고 싶었 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오로가 율법을 파괴하고, 선민을 모독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방인도 사랑하신다는 바오로의 주장에 그들은 괴성을 지르고, 겉옷을 벗어던지고, 공중으로 먼지를 올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오로는 로마 군인들이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3장 12-15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바오로를 제거하려고 로마총독에게 부탁하여 바오로를 예루살렘 최고의회로 호송하도록 하여(로마군인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함) 중간에 매복한 이들을 통해 바오로를 살해하려고 했습니다. 40명의 결사대가 하느님을 두고 바오로를 죽이기 전에는 결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바오로의 친척이 이 사실을 알리면서, 로마로 가는 카이사리아 항구까지 자그마치 로마 군인이 470명이 바오로를 호송 하게 됩니다.(군사 이백 명, 기병 칠십 명, 경무장 병 이백 명)

복음이 세상으로 전파되고, 바오로가 유대인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로마 군인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과 결국 바오로가 상소하여 로마로 가게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로 보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점입니다. 바오로는 팔레스티나를 떠나 로마제국의 수도로 옮겨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75.    아버지와 누나 에피소드 (2012. 5. 27. 일. 성령강림 대축일)

[사도행전 2,1-11; 1코린토 12,3ㄷ-7.12-13; 요한 20,19-23]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게 된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형성하시고 2천 년 동안 이끌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번으로써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복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준비시켜야 했습니다.

구약의 전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성령에 의한 준비과정이었다면, 신약은 성령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 예수님에 의해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올림픽이 지구촌의 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 긴 시간 준비하듯이,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그만큼 그들이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데 최대의 난적은 바오로에 의하면, 바로 내 뜻대로 하고 싶은 나의 자아이며,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와 누나는 관계가 어려웠습니다. 아버지는 누나에게 당분간 아버지를 만나러 오지 말라고 자격정지(suspesio)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번은 어버이날에 누나와 매형이 선물을 사들고 갔지만, 아버지는 만나주지 않고 그들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완고하셨고, 누나에게 무정하게 대했습니다. 1년이 지난 2005년도 어느 날 매형이 백혈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에게 알리려고 했지만, 아버지도 후두암에 걸리셨기 때문에, 병의 악화를 막기 위해 매형의 죽음을 알리지 않기로 했는데, 결국 몇 년이 지나도록 말해야 할 시기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1년 정도 암투병을 하셨고, 형에게서 연락이 와서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라는 느낌에 원하지 않는 누나를 모시고 아버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아버지는 암에 걸렸음에도 당신을 찾지 않은 누나에게 종이와 연필을 건네주고 방문한 이유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나의 글을 읽는 아버지는 놀라워 하시고 “백 서방이 먼저 갔구나… 너무 상심하지 마라. 세상 모든 것이 다 헛되다. 다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누나 손을 잡으시고 모처럼 함박웃음을 지으셨습니다. 조카들은 할아버지가 웃었다고 좋아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10여 일 후 아버지는 주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그 후 누나는 가끔 아버지 꿈을 꾸는데, 이제는 무서운 얼굴로 야단을 치는 모습이 아니라 웃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누나와 가족은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76.    표준전승 (2012. 6. 8. 금)

[1티모테오 3,10-17; 마르코 12,35-37]

“그대는 내가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과 리스트라에서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따라서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은 것’을 지키십시오.“ 

사도들에 의해 전승된 것들 사이에는 표준전승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는 복음내용이 변조 (變造)되고, 조작되는 위험을 막을 뿐 아니라, 다른 전승들의 표준이었습니다. 이 표준 전승은 오로지 ‘전해지는 것만을 받고, 전달 받은 것만 전달할 수’ 있을 뿐, 더 보태거나 덜어내거나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전달 방법은 랍비 전달 방식에서 빌려 온 것인데, 예수님 돌아가신 후 20년 동안(30-50년대) 사도들이 사용한 전승 방법이었습니다. 랍비 전승 방법은 중요한 내용을 그대로 기억하는 방법으로 전달내용을 마치 쇠사슬처럼 연결시켜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Chain-linking).

사도들은 주님께 받은 것만을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전달했고, 그 제자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동일하게 전달했습니다. 전승된 내용 중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사건 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예수님에게서 배웠고, 사도들의 제자들은 사도들에게서 배웠다. 바오로 역시 그 부활체험을 성령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것을 디모테오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전달하는 이들은 전달받은 구원의 내용에 더 보태거나 덜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투명하게 받은 그대로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전달자 자신을 비워야 했는데, 대체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고난을 통해서 자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77.    빌리 엘리엇트 (2012. 6. 10. 일. 성체 성혈 대축일)  

[탈출 24,3-8; 히브리 9,11-15; 마르코 14,12-16.22-26]

사람들은 보통 많은 돈을 벌고, 좋은 집을 사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그리고 자신의 영역에서 크게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여깁니다. 자신이 자신답게 살아가면서 행복한 삶을 실현한 이야기,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소개합니다.

영화의 배경은 1984년 대처 수상이 영국경제의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탄광노조가 총 파업을 했던 시기입니다. 빌리의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치매환자입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아버지는 빌리를 강한 남자로 키우기 위해 권투도장에 보냅니다. 광산 파업으로 인한 긴축재정으로, 발레수업이 권투도장의 한 구석에서 열리게 됩니다. 빌리는 권투보다 발레에 관심을 갖고 발레수업을 받게 되는데, 춤을 추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발레 선생은 빌리의 가능성을 보고 왕립발레단 입학을 위한 오디션을 보기 위해 빌리를 연습시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발레를 못하게 합니다. 어머니 피아노를 부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파업으로 우울한 성탄절 저녁에 아버지는 추운 체육관에서 혼자 연습을 하는 빌리를 보면서 결국 발레를 허락하게 됩니다.  

오디션 장에서 빌리가 표현한 발레는 정통발레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썰렁한 분위기에서 심사위원들 중 한 부인이 “빌리, 네가 춤을 출 때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니 빌리는 이렇게 대답 합니다. “춤을 추면 모든 것이 잊혀지고, 몸 전체가 변하고, 몸에서 불꽃이 일어나 새처럼 날아가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기분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은 행복한 일 입니다. 그 후 빌리는 훌륭한 발레리노가 됩니다.

누군가 원해야 할 것을 원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으로써 살지 않고, 남이 되려고 한다면 불행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내 몸에 맞는 않는 옷을 입고,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고, 또 원하지 않는 직장에 다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내 발에 맞는 구두가 아니라, 구두에 내 발을 맞추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이는 행복하다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처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다는 점을 강조 합니다.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는 그분께서는 우리가 각자 자기 모습대로 자기답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78.    성 알로이시오 공자가 축일 (2012. 6. 21. 목)

[집회 48,1-4; 마태오 6,7-15]

알로이시오 공자가 성인(1568-1591)은 현 이탈리아 북부지방 만토바에서 후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으로 보냈지만, 그는 그 가문의 폭력과 암살, 욕망이 득실거리는 그 생활에 지쳐버렸습니다. 1578년 그는 성모영보성당에서 절대로 죄를 지어 하느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드러냅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마드리드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예수회 고해사제를 만나, 예수회 신부가 되고 싶다는 원의를 드러냅니다. 고해사제는 공자가가 장남이었으므로, 아버지로부터 승낙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알로이시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썼지만 무의로 돌아가자 결국 아들의 수도회 입회를 허락합니다. 그는 1585년 11월에 만 17세로 예수회에 입회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굽은 철 조각이다. 이것을 똑바로 펴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는 2년 후 1587년에 첫 서원을 했습니다.

 

1588년에 이탈리아 전역에 전염병(흑사병)이 나돌았고, 신학생들은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 았습니다. 3년 후 1591년에 알로이시오는 전염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었고 병은 호전되지 않았 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불렀던 말이 ‘예수’였습니다. 그는 사제가 되기 전 23세 신학생 때 죽었으므로 신학생의 주보성인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예수회 수련자로 살다가 죽은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는 수련자의 주보성인입니다.

귀족생활에서 염증을 느끼고, 내적 삶으로 전환했던 것은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마치 불 마차에 실려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를 본 것처럼 그의 영혼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79.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 (2012. 6. 24. 일. 세례자 요한 축일)

[이사야 49,1-6; 사도행전 13,22ㄴ-26; 루카 1,57-66.80]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의 생일에 조카가 춘 춤의 대가로 참수되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위대한 인간이 너무나 어이없이 죽은 것입니다. 이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일은 구분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마치 미리 만들어 놓은 규칙이나 메뉴얼처럼 우리가 신앙의 경험들을 토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복음 정신의 범주에서 선행하고, 남을 칭찬하고 도와주며, 기도하고 성당을 다니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때론 칭찬하지 않는 것이, 때론 남을 돕지 않는 것이, 때론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의 일처럼, 율법의 규정처럼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소풍이 비바람으로 취소되거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주변의 환경이 달라지거나, 천재지변이나 그때의 상황에 따라 하느님의 뜻이 달라지는 것은 변덕이 아니라,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돌보심입니다. 성경에서 두 가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6-7절을 보면, 2차 선교여행 초기에 바르나바와 헤어진 바오로는 디모테오와 만나 그와 함께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께서 그들을 막으셨고, 그들이 갈라티아와 비티니아 지방으로 가려고 했지만, 역시 하느님의 영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마케도니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셨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마리아와 몰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마태오 1장). 파혼이 마리아를 위한 곧 하느님의 일이라고 믿었지만, 하느님의 뜻은 마리아와 파혼이 아니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과 관련하지 않는 순전히 요셉 개인이 판단한 하느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의 추측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기도 안에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본당 공동체에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면 쉽게 일치와 조화를 이루지만, 각자의 생각과 추측에 의존하면 비록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일치와 중지를 모우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의 뜻은 시련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를 위한 돌보심과 이끄심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80.    말과 에고 길들여야 하는 것 (2012. 6. 26. 화)

[열왕기 하 19,9ㄴ-11.14-21.31-35ㄱ.36; 마태오 7,6.12-14]

옛날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말은 전투하고 이동하는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수단 이었습니다. 미쳐 날뛰는 야생말을 타면 사람이 다칠 큰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길들여야 했습니다. 가고 달리고 서고, 천천히 혹은 빠르게, 아주 빠르게, 특히 전투에 나갈 때 사람이 마음대로 조종이 가능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인디언들에게 말은 꼭 필요하지만, 반드시 길들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인디언과 말의 관계처럼, 나와 나의 에고가 이런 관계입니다. 인간의 에고는 철저히 자기 본성 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이기적인 어린 아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에고는 완전히 제거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길들여져야 합니다. 에고를 없애버리면 나라는 존재도 따라서 죽어 없어지고 맙니다. ‘나’가 없으면 이웃에게 봉사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주체 또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은 에고를 길들일 수 있는 힘이 없고, 통제할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에고를 길들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에둘러 다르게 표현하자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넓은 문은 덜 수고하고 쉽게 취득하려는 인간의 꼼수(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81.    하혈증에 걸린 여자 (2012. 7. 1. 일. 루카 8.43-48)

[지혜 1,13-15.2,23-24; 2코린토 8,7.9.13-15; 마르코 5,21-43]

여자는 12년 동안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치유를 위해 온갖 민간요법을 다 사용했고, 자신의 재산을 다 낭비할 정도로 의사에게 매달렸지만 결국 병을 고치지 못했 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런 병을 가진 여자의 손에 닿는 것은 다 부정해짐으로, 여자는 성전과 회당 출입은 물론 각종 종교예식에도 제외되고, 가족에게도 쫓겨날 수 있는 절망의 끝에 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레위 15,25-27). 어느 날 여자는 예수님에 관해 들었고 이분이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도움을 청하기보다 군중 속에 몰래 접근하여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을 건드리면 그분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화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여자는 자기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에게 탓을 두거나 전가하기를 멈추고, 그분의 옷만 건드려도 낫는다는 믿음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소문대로 그분이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을 것이고, 그저 그분의 옷에 손만 대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옷을 건드리는데 성공했고, 여자의 병은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당신을 밀쳐대는 것과 당신께 믿음을 두고 접촉하는 것과 구별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신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자의 믿음이 그의 몸과 마음을 변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나머지는 이차적인 형식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딸’ 이라고 부르셨는데, 이런 호칭은 복음에서 여기 딱 한번 나옵니다. 그만큼 이 여자의 믿음이 예수님께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입니다.

 

82.    마태오를 부르심 (2012. 7. 6. 금)

[아모스 8,4-6.9-12; 마태오 9,9-13]

서강대학교 건물마다 다산관, 이냐시오관, 리치관, 벨라르미노 기숙사 등 성인들의 이름들이 붙어 있습니다. 경영관은 마태오관이라 부릅니다. 마태오는 세관원이었습니다. 당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세관직과 경영학과와 많이 관련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명명되었습니다. 즉 경영학과는 조직이나 사람들을 잘 다루어서 이익창출의 극대화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마태오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수가 얼마인지, 돈을 잘 거두어들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써야 하고 (칼잡이나 폭력배 동원), 거두어들인 것 중 얼마를 상납해야 하는지 등,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평소 율법을 지키지 않는 마태오는 그래서 죄인이었고,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유대종교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그 자체로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마태오는 한 마디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같이 있지 않을 때 홀로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태오는 자신이 스스로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뭔가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마태오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다 놓아둔 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거두어들인 돈만 꼼꼼하게 기록하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성서 저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의미를 찾지 못했거나 행복하지 않았다면 결코 가능할 수 없는 일입니다.

 

 

83.    교회의 지체들. 은사 (2012. 7. 7. 토)

[아모스 9,11-15; 마태오 9,14-17]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고린토 12,3-8)

바오로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간주했습니다. 몸의 지체가 서로를 인정해야 존립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의 지체들도 서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고,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을 발휘합니다. 모든 생물체 안에 하느님의 기운(생명의 활력)이 감돌고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했습니다.(군대도 보병, 포병, 공병, 의무병, 보급병, 특전사 등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 전쟁을 치릅니다.)

바오로는 인간의 모든 재능은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을 은사 혹은 카리스마라 하는데, 이는 인간이 노력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은 받은 은사를 극대화시킬 뿐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독특한 은사를 받습니다. 은사에는 크게 예언의 은사(하느님의 것, 올바른 사실을 알리는), 가르치는 은사(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이치적으로 설명), 구제하는 은사(가난 봉사), 권고하는 은사(격려, 상담원), 다스리는 은사(조직의 리더)가 있습니다.

 

누구는 조직을 잘 만들어 운영하고, 누구는 설교와 가르침을 잘하고, 누구는 집을 잘 짓고, 누구는 남을 즐겁게 하는 등 각자가 서로 다른 은사를 받습니다. 이 은사들은 훈련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살아간다면 개인은 신나고 의미 있는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은사는 자신의 이익과 명예가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84.    이태리 어부의 지혜 (2012. 7. 22. 일)

[예레미야 23,1-6; 에페소 2,13-18; 마르코 6,30-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수 건너편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호수를 돌아서 따라왔으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휴식을 반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일을 한 후에는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이태리에 아주 열심히 살아가는 어느 수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문제는 짜증을 잘 낸다는 것입니다.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그분을 만나면, 모두가 마치 폭탄을 만나듯이 그분을 피해버렸습니다. 그분의 짜증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짜증의 원인은, 수사님은 수도자는 휴가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수도생활하는 동안 단 한번도 휴가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열심한 수도자였지만 자신이 인간이란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는 70년대 말 광고가 있었습니다. 당시 일만하고 지쳐있던 직장 인들에게 이제 당신들은 쉴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휴식은 미래의 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다시 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최적의 상태를 만들어줍니다. 자기 몸의 소리를 듣지도, 돌보지도 않는다면, 결국 자신은 물론 다른 영혼도 돌보기가 어려워집니다. 몸에 짜증이 나면 기도하기도, 기쁘게 살기도 어렵다는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휴식을 가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냥 지치도록 일만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태리인들의 여유로운 삶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태리 바닷가에 어부가 자기 배에서 낮잠 자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여행객이 어부를 깨워서 물었습니다. “하루에 몇 번 나가시오?” “한 번 나갑니다.” “왜 두 번 이상 안 나가시오? 그러면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을 텐데.” 어부가 묻습니다. “그 다음은요?” “몇 년 후면 더 나은 배를 살 수 있겠지요?” 어부가 계속 묻습니다. “그 다음은요?”  “더 나은 배를 가지면 더 많은 고기를 잡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겠지요.” “그 다음은요?” “돈을 많이 벌면, 저 멋진 바다를 감상하며, 여생을 편안히 지내지 않겠어요?” 어부가 빙긋히 웃습니다. “보다시피, 지금 내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요?”

게으른 이태리 어부에 관한 이야기지만, 우리 한국인들이 쉴 때에는 이 어부처럼 게으르게 쉴 필요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애틀랜타 주교님도 휴가를 떠난 7월에, 보다 알찬 8월을 위해 영육으로 잘 쉬기를 바랍니다.

 

85.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2012. 7. 27. 금. 루카 8.4-15)

[예레미야 3,14-17; 마태오 13,18-23]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에는 씨 뿌리는 방법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농부가 직접 씨를 뿌리는 것과 구멍을 낸 씨앗자루를 노새 등에 얹어서 노새가 돌아다니는대로 씨앗을 뿌리는 방법인데, 이 두 번째에서 씨앗이 밭 안팎으로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길은 밭 안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굳은 땅으로, 거기에 떨어진 씨앗은 부드러운 흙속에 묻히 지도, 씨앗이 땅에 뿌리를 박지도 못합니다. 즉 길에 떨어지 씨앗이란 마음이 닫힌 상태를 말하고, 그 상태에서는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돌밭은 팔레스티나의 대부분에서 보는 토양이 깊지 않은 땅입니다. 땅 밑이 석회암 층으로 되어 있고, 석회암 층 위에 흙이 10센티 밖에 덮여 있지 않기 때문에 태양열을 받으면 씨앗이 빨리 발아하지만 그만큼 빨리 뿌리가 말라 죽습니다. 즉 돌밭에 떨어진 씨앗이란 쉽게 감격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쉽게 포기해 버리는 깊지 않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가시덤불과 잡초가 많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결국 시들어 죽게 됩니다. 그 땅은 갈아엎어서 가시덤불과 잡초을 제거해야 합니다. 곧 인생살이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분주하고, 그래서 지쳐있기 때문에 정말 해야 할 중요한 것을 놓치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좋은 땅은 토양이 깊고, 돌도 없고, 잡초가 제거된 제대로 경작된 부드러운 땅입니다. 즉 덕행의 실천으로 비옥하게 된 영혼에서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뿌려지는 씨앗 즉 은총이 문제가 아니라, 은총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밭의 상태 즉 각자의 영혼의 상태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과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인지 성찰해 보십시오.    

 

 

86.    오병이어 보리빵과 물고기 (2012. 7. 29. 일)

[열왕 4,42-44; 에페소 4,1-6; 요한 6,1-15]

지난 주 강론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휴식을 위해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지만, 군중들이 그들을 따라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음식을 먹지 못한 것을 아시고, 보리빵과 물고기를 축복하시고,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보리빵은 빵 중에서도 가장 싸고 천한 것이었습니다. 예로 간음한 여자가 속죄제물을 바칠 때 쓴 재료가 보릿가루였는데, 보리가 주로 동물들의 사료였고, 여자는 보리를 먹는 동물과 같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보리빵은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습니다. 물고기는 갈릴리 호숫에서 잡힌 것으로, 소금에 절인 정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 들이 잘 먹지 않았던 음식에 강복하시고 나누어 먹게 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들이, 자신들이 준비한 물과 빵을 모두 내놓아 함께 나누어 먹었다(배려와 애덕).’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왔던 그들 중에는 음식을 준비하기도 하고 하지 못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많이 혹은 적게 가져온 수많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서로 마음을 열고 음식을 나누고 삶도 나누는, 보기 드문 친교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야외미사 때처럼). 오병이어 사건은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자신의 것을 챙기려고 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사태였습니다.

자기 것을 나누는 것이 빵 다섯 덩어리와 정어리 두 마리를 가진 한 어린아이에게서 시작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소박하지만 적은 것으로도 이웃과 함께 먹고 나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드레아가 말했습니다.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있지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하찮은 것들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반문하니, 예수님께서 그것을 축복하시고 친교의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가운데 나누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것들을 나누어 먹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을 그분께서는 가능하게 하신다는 말인데, 우리가 이웃에게 우리의 것들을 나눈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게 됩니다.

 

 

87.    골라내는 작업. 애국교회 지하교회 (2012. 8. 2. 목)

[예레미야 18,1-6; 마태오 13,47-53]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 방식은(예인망) 그 특성상 좋은 것만을 골라서 잡는 것이 아닙니다. 물은 빠지고 그 안에 각종 혼합물이 끌려 올라옵니다. 그리고 어부들은 그것을 물가에서 골라냅니다. 이 비유를 지상의 교회에 적용시키면,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혼재되어 존재하는데 (선하고 덜 선하고, 이타적이고 덜 이타적인),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선인에게서 악인들을 골라낼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언제나 배타적이거나 포괄적인 두 견해가 존재합니다. 전자에 의하면, 교회는 선하고 거룩한 사람들의 공동체여야 하기 때문에, 죄인들에게는 매우 엄격하여 그들에게 쉽게 관용을 베풀지 못합니다. 후자에 의하면,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이고, 그 누구에게도 개방되어 있어야 하며 죄인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에는 바티칸에 충성하는 지하교회와 중국공산당에 의해 인정되는 애국교회가 있습니다. 지하교회의 사제들과 신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뿌리를 두고 타협 없이 충실하게 살아가지만, 애국교회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느 덧 애국교회 안에서도 로마 가톨릭에 깊이 간여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에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애국교회와 지하교회를 이렇게 단순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거기에는 참으로 다양한 이유와 조건들로 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골라내는 작업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실 것입니다.(천사들이 골라낼 것입니다.)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의 몫은 의인이 되려는 노력이지, 골라내고 판단하는 일이 아닙니다. 결국 선하고 악한 사람이 분리되는 때가 올 것이고, 그들에게 응분의 보상과 처벌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참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88.    레인맨 (2012. 8. 5. 일)

[탈출 16,2-4.12-15; 에페소 4,17.20-24; 요한 6,24-35]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휴식을 취하러 배를 타고 호숫가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그들은 달려서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찰리(차 판매상)는 아버지 부고를 듣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16세 때 몰래 아버지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어 구속되고 보석금 사건으로 가출한 찰리는 아버지가 남겼을 유산(3백만 달러)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산이 그가 어릴 적에 헤어져 요양소에서 지내는 자폐증 환자인 형 레이몬드에게 상속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찰리는 유산 욕심으로 형을 집으로 데리고 가는데, 비행기공포증으로 자동차로 여행합니다. 찰리는 아버지에게 거부 당해 소외감이 깊었고, 오래 가족과 격리되어 혼자 살아 외로움이 컸으며, 겉으론 명랑하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의식으로 의기소침합니다. 그래서 그는 보란 듯이 돈을 벌어 하고 원하는 것을 다 누리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차로 여행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게 됩니다. 어렸을 때 찰리가 뜨거운 물에 데인 사건으로 형이 요양소로 가게 되었고, 어린 찰리가 레이몬드를 잘못 발음하여 레인맨이라 불렀다는 것, 잘 때 늘 자기 곁에서 자장가를 불러주던 그 레인맨이 바로 형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자신은 진짜 많은 사랑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찰리는 자신을 사랑했던 그 레인맨이 지금 자기 곁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동안 사랑 받지 못해 스스로 닫아버렸던 과거로부터 풀려나오는 해방감을 느끼면서, 깊은 자존 감을 회복하게 되고 유산을 가지려는 생각을 포기합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 찰리는 늘 배가 고팠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형 레인맨을 만나면서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했던 형을 만난 것으로 충분했고, 이것이 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찰리처럼 우리도 배가 고픈 존재입니다. 우리도 레인맨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레인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89.    가장 위대한 악마의 업적 (2012. 8. 9. 목)

[예레미야 31,31-34; 마태오 16,13-23]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난하셨던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방해하는, 수난을 기피하려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유혹 중에 제일 큰 유혹이 바로 양심을 둔하게 하고 죄의식을 상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큰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죄를 지으 면서도 뉘우침이 없는 것입니다. 신흥종교 뉴에이지가 문제가 바로 죄 자체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라즈니쉬 류).

사탄이 지옥회의를 소집해서 악마들에게 연간 보고를 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가 악마들에게 일렀습니다. “너희 공적을 알고 싶다. 공이 가장 큰 악마에게 상을 내리겠다.”

악마 1호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욕정에 빠지게 해서 타락하게 만들었 습니다.” 악마 2호가 말했습니다. “저는 수많은 사람들을 오만에 빠지게 하여 겸손을 상실케 하였습니다.” 악마 3호가 말했습니다. “저는 수많은 사람들을 탐욕에 빠트려, 가난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악마 4호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사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참 잘 했다. 인간들에게 죄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90.    성모 승천 대축일 (2012. 8. 15. 수)

[묵시록 11,19ㄱ.12,1-6ㄱㄷ.10ㄱㄴㄷ; 1코린토 15,20-27ㄱ; 루카 1,39-56]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미카엘과 용이 싸운 것입니다.”(묵시록 12.7)

원래 사탄이란 반대자란 뜻을 가집니다. 발람이 하느님의 뜻을 반대하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선 천사가 사탄이었습니다(민수 22.22). 구약에서 사탄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심판받을 때 사람을 기소하고 사람에게 불리한 모든 말을 하는 천사였고, 반면 미카엘은 사람들을 변호하는 입장에 선 천사였습니다. 구약에서 사탄은 하느님의 통치 하에 있었지만, 신약에서는 완전히 사탄(diabolos)으로 변합니다. 사탄은 단순한 고소인이 아닌 인간을 유혹하고 타락시키는, 하느님의 목적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존재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을 보좌하면서도 그분처럼 되려는 탐욕으로 하늘에서 쫓겨난 존재입니다. 교만이 그들을 천사에서 사탄으로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났지만 땅의 권세를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와 죽음이 있는 곳에는 메시아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탄은 모든 사악한 것들을 총집결시켜 메시아를 막으려고 합니다. 메시아의 등장은 모든 악의 세력과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하느님께서는 사탄의 최후의 발악을 허용하는 셈입니다 (한꺼번에 끌어 모아 태움. 추수 때의 가라지). 사탄은 메시아를 해치기 위해 임신한 여인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여인은 독수리의 날개에 태워져 하늘로 올라갑니다. 용은 여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만, 그곳에서 대천사 미카엘을 만나 쫓겨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모님의 존재를 이해합니다. 묵시록에 나오는 용의 의도를 보아서, 여인은 이 지상에서 한 시인들 편안히 사시지는 못했을 것이고, 메시아를 안전하게 지켜야 하는 동시에 메시아의 수난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달픈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음).

유대종교에 의하면, 의인들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시신을 3일 이상 어둠 속에 방치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성모 승천이란 곧 성모의 영혼과 육신이 보통 사람들이 겪게 되는, 죽고 부패되는 과정이 면제되어 온전히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어머니는 그런 부패과정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91.    모세율법이 인정하는 이혼 (2012. 8. 17. 금. 마르코 10,1-12)

[에제키엘 16,1-15.60.63; 마태오 19,3-12]

신명기 24장 1절에 나타난 모세율법에 의하면, 결혼한 후 남자가 자신의 여자에게서 수치 스러운 것을 발견하면, 여자의 동의 없이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여자 쪽에서 남자의 추한 점을 발견하고 이혼을 하려는 경우에는, 여자는 남자의 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여자의 사회적인 지위가 남자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혼 사유가 되었던 수치스러운 짓의 범위를 두고 학파들마다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강간이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사악하더라도 강간만 하지 않는다면 이혼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힐렐학파는 여자들의 다양한 스캔들, 예로써 오늘날의 맥락에서 표현하자면, 시부모를 자주 험담하고, 매일 외출해서 저녁식사를 차리지 않고 배달을 해서 먹는다든지 하면 이혼 사유에 해당된다고 했고, 지나친 것은 남자가 사귀는 여자가 부인보다 더 예쁠 때 이혼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불평등한 부부사이에서 서로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판단하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 남자의 의지에 따라 쉽게 이혼을 할 수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 부정적인 물꼬를 바른 방향으로 틀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혼이 불가피한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이혼불가를 고수하는 이유는 쉽게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는,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인간적인 삶의 양식으로는 예수님께서 목표로 하시는 아가페 사랑의 실천은 너무나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92.    부(富)의 잘못된 독립심 조장 (2012. 8. 21. 화)

[에제키엘 28,1-10; 마태오 19,23-30]

이스라엘에서 성곽으로 두른 도시에는 크고 작은 두개의 문이 존재했습니다. 큰 문은 말이나 낙타의 짐수레 등 교통수단으로 사용했고, 그 옆의 작은 문은 큰 문이 닫힌 뒤 주로 밤에 사용했던 문이었습니다. 작은 문은 사람이 서서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 낮아서 ‘바늘 귀 문’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한 밤중에 갑작스러운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팔레스티나에서 제일 큰 동물이었던 낙타는 당연히 작은 문으로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갈 수 없듯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부(재물)는 잘못된 독립성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부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습성을 가집니다. 돈만 있으면 배달도 가능하고, 대형마트에 가면 무엇이든 구매가 가능하니까 살아가는데 무엇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웃도 찾지 않게 되고, 하느님도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돈을 버는 경제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있다고 했듯이, 부(富)에 맛을 들이면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하거나 적어도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재물은 언제나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보조 수단에 머물러야 합니다.

 

93.    운명의 변화 (2012. 8. 23. 목)

[에제키엘 36,23-28; 마태오 22,1-14]

혼인잔치에 손님들을 초대했지만 거절하였으므로, 주인은 저작거리에서 아무나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쫓아냈습니다.

잔치에 초대를 받은 이들의 응답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잔치초대를 거절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초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밭으로 일하러 가거나 장사하러 떠났다고 했듯이 그들 삶은 잘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사 오케이 입니다. 만족하기 때문에 굳이 변화가 필요하지 않으니 메시아에 대한 절실함이 없습니다. 이대로가 좋다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유형의 사람들은 이대로는 안 되기 때문에 변화를 요구하고,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그 혼인잔치에 참여하면서 예복을 차려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변화가 필요하지만, 그 변화는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나도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불행이 전적으로 외부적인 조건들에 의존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외부적인 불합리한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행복해 진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유형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부에서부터 변화를 모색하는 이들입니다. 외부적인 조건들이 어떻든지 간에 스스로 나를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정신입니다. 외부적인 변화에 의존하는 이들은 불행의 원인을 외부의 탓에 두지만, 나를 변화시키는 이들은 외부에 원인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가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내 탓이라고 하는 것은 내 삶이 전적으로 내 탓 때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운명은 내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고, 일구어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94.    무엇이 아닌 누구를 찾아야 (2012. 8. 26. 일)

[여호수아 24,1-2ㄱ.15-17.18se; 에페소 5,21-32; 요한 6,60-69]

빵의 기적을 베푸신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고 참된 음료인 당신을 먹고 마시라는 말씀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곁을 떠났 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먹고 마시라는 그분의 말씀에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고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언제는 왕으로 모시려던 사람들이 이제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었다가, 오병이어사건을 정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기 시작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예수님 곁에는 성모님과 몇 사람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요한복음은 ‘찾아서’라는 표현이 거의 각장마다 27번이나 나옵니다. 1장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이스라엘의 독립과 메시아 왕국을 찾아서, 3장에서는 니고데모가 영생을 찾아서, 4장에서는 왕실관리가 중태에 빠진 아들의 치유를 위해서, 6장에서는 오병이어 기적을 목격한 군중이 먹을거리를 찾아 예수님께 왔습니다.

도(道)를 추구하는 어떤 분에 의하면, 구도자들에게 드물지 않게 드러나는 현상이 신통력이라고 합니다. 큰 도에 이르는 과정과 단계에 이를 때마다 그런 힘이 주어지는데, 구도자가 얻은 신통력을 두고 사람에게 장난을 치면 나타나는 현상이 빙의라고 합니다. 마치 머리 위로 보자기를 뒤집어 쓴 것처럼 구도자는 도 대신에 신통력으로 장난을 친 대가로 더 이상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낙마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단계마다 주어지는 신통력이란 구도자의 품성을 시험하는 신적장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중도에서 탈락하는 것은 도를 추구하기보다 신통력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실제인지 아니면 상징적 표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구신지 신원을 밝히셨을 때 실질적인 무엇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하고 떠났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아니라, 누구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6,27). 신앙은 무엇을 찾는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95.    도나투스 이단 (2012. 8. 28. 화. 아우구스티누스 축일)

[1테살로니카 2,1-3ㄱ.14-17; 마태오 23,23-26]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은총박사라 불립니다. 잘못 살아온 자신이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되었 음을 깊이 인식한 사람입니다. 은총을 받을 만한 착한 일도, 공덕도 없음에도 너무나 큰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5세기)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판명된 도나투스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 스도와 교회 신앙에 절대충성을 한 엄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박해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배교했는데, 이들이 박해시대가 끝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고 했을 때 도나투스 파들은 그들을 용납하지 않고 단죄했습니다. 그리고 도나투스파들은 성직자들에게 절대적인 도덕성을 요구했습니다. 성사를 거행하는 사제들에게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그 만큼 신자들에게 오는 은총을 막는 것으로 간주하여 사제들에게 더 큰 엄격성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허락하시는 은총은 인간의 윤리 도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제들의 도덕적 결함에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을 통해 주시는 은총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타락한 사제가 거행하는 성사는 그 자체로 유효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그 사제의 도덕성을 통해 은총을 허락하시는게 아니라, 당신께서 약속하셨고 원하시기 때문에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구원을 위한 은총이 사제의 도덕성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그 자체로 은총 입니다. 교회의 멤버들이 타락했더라도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약하고 늘 잘못할 수 있기 때문에, 은총과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자비가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했으니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나투스들은 은총보다 인간의 윤리도덕에 더 비중을 두면서 스스로의 엄격함으로 교회의 죄인들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유대율법주의자들과 많이 닮아있는 도나투스파의 주장은 가톨릭 교회의 정통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96.    십자가를 통한 해결 방안 (2012. 8. 30. 목)

[1코린토 1,1-9; 마태오 24,42-51]

그 당시 고린토는 고대세계의 무역과 사업의 중심지였고, 지중해 세계의 피카데리 광장이었 습니다(현대 런던의 중심지에 있는 광장). 그곳에서 올림픽 경기에 버금가는 큰 경기가 주기적으로 개최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동시에 고린토는 악덕과 부도덕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코린티아제스타이, 코린토인처럼 생활한다.’는 말은 곧 타락과 방탕한 가운데 살아간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곳에 신전이 있었고, 1천 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밤마다 도시로 내려가 매춘생활을 했습니다. 코린토는 곧 타락과 동의어였습니다. 코린토는 기원전 146년에 로마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고, 그 후 기원전 46년에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 다시 도시가 재건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에페소를 제외하고, 코린토에서 제일 오래 머물렀습니다.

오늘 독서를 들으면, 바오로는 코린토 1서 1장 1-9절까지, 그리스도 단어를 10번 사용합니다. 바오로는 이런 코린토 교회의 현실을 해결하는데, 거듭 머리에 떠올린 단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의 경우 어려움과 난관에 부딪히면 세상의 기준대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건의 중심으로 모시고 와서,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 해결방안을 강구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하는 신앙의 정수입니다.

 

 

97.    코이노스. 정결례. 일본 선불교 고양이 (2012. 9. 2. 일)

[신명 4,1-2.6-8; 야고보 1,17-18.21ㄴ-22.27; 마르코 7,1-8.14-15.21-23]

희랍어에 코이노스란 표현이 있습니다. ‘평범하고 보통’이란 의미로 곧 거룩하지 않은, 세속적인 사물을 쓰일 때 사용했는데, 곧 이러한 사물들은 하느님께 예배드리기에 적합하지 않는 사물로 간주했습니다. 특히 시장에서 그런 사물을 건드리면 부정한 손이 되었습니다. 부정한 손으로 먹는 음식은 거의 배설물 수준으로 취급했으므로, 유대인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손을 씻는 데는 일정한 방식이 있습니다. 모래를 털고, 물을 양손에 떨어뜨려 비벼서 씻고, 손가락 아래로 물을 부어 깨끗이 하면, 손 씻는 예식은 마무리됩니다. 이 정결예식은 위생보다는 의식적인 정결을 더 강조했습니다. 씻는 물은 큰 돌 항아리에 넣어 두었고, 다른 목적에 사용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랍비가 감옥에 갇혔을 때 주는 물을, 먹는 대신 손을 씻는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정결예식의 본질은 더러워진 마음을 씻어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소홀히하면서,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정결예식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면 하느 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 에게 죄인이 되셨습니다.

일본 선불교에 이런 고사가 있습니다.

어느 선방에 위대한 고승이 있었고, 그에게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고승은 고양이를 좋아해서 참선시간에 늘 함께 했습니다. 고승이 세상을 떠나니, 그 제자들은 스승을 기리는 뜻에서, 그 고양이를 선방에 들이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고양이와 함께 참선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후 그 고양이도 죽었습니다. 고양이와 함께 참선하는 것에 익숙해진 스님들은 다른 고양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고양이와 참선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수좌들은 점차 높은 선지식을 얻는 비결이 고양이와 관련하고, 고양이는 집중력을 길러주고, 속된 기운을 물리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외부에서 어느 고승이 그 절의 책임자(방장)가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고승은 동물 털 알레르기가 있었기 때문에, 고양이를 그 선방에서 치워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수좌들은 반발했지만, 그 고승의 선지식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결국 고양이를 선방에서 치워버렸습니다. 고양이 없이도 선수행이 가능할까 염려했지만, 그런 우려와는 다르게, 수좌 들의 선지식은 날로 진보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고양이의 도움 없이도 높은 선지식을 이룰 수 있다는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세월이 경과하면서, 그 절의 참선수행에서 이제 고양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본래 고양이와 참선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셈입니다.

정자로 올라갈 때 난간을 잡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본질이 아닌 이차적인 것에 집착하면, 마치 난간에 자기 몸을 묶어버려서 결국 정자에 오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종교의 정결예식을 율법의 본래정신이 빠진 형식주의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과 신앙생활에서 혹시 본래 취지와 다른, 또는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난 관습이나 사고방식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98.    가나안 여자. 유대인의 선민의식과 아침기도 (2012. 9. 9. 일)

[이사야 35,4-7ㄴ; 야고보 2,1-5; 마르코 7,31-37]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팔레스티나 밖에 머무신 적이 거의 없습니다. 많은 일을 하셨기 때문에 쉬셔야 하고, 또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해서 조용한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이스라엘의 길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셨고,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시니(메시아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에게 먼저 혜택이 가야한다는 것), 여자는 강아지 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응답합니다(당신이 진정으로 메시아라면 혜택이 유대인뿐 아니라 세상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겠냐는 의미).

딱딱한 말도 미소가 있으면 부드럽게 들리듯이, 여자는 예수님의 말에서 어떤 모욕감을 느끼기 보다 오히려 그런 대화의 초대를 반기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쿠나리아 (kunaris. 강아지)는 길거리에 배회하면서 쓰레기를 뒤적이는 개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를 말합니다.

유대인에게 개는 아주 나쁜 표현입니다. 자신들을 두고 애완용 개로 표현하는 것도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유머로 받아넘깁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마귀가 들린 딸 때문에 슬퍼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거절 당해도 물러설 줄 모르는 신앙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공생활 중에 예수님께서 아주 기분이 좋으셨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선민의식을 가졌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약속과 축복은 오직 유대인을 위한 것이며, 이방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야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시지만 (시편103), 오로지 이스라엘에게만 그러하시고, 그분은 회개하면 누구나 받아주시지만, 이 또한 이스라엘 에게만 해당되며 이방인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유대인들의 아침기도문은 이러합니다. “하느님이여! 당신이 저를 노예나, 여자나,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지으신 백성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하신다는 생각은 분명 하느님의 계획과는 한참 먼 생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특별한 임무와 책임을 위해 선택되는 민족은 있을 수는 있지만, 특별한 권리를 받게 되는 민족은 없습니다.

 

 

99.    교우들의 이방법정에서 고소 (2012. 9. 11. 화)

[1코린토 6,1-11; 루카 6,12-19]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이 유대인을 이방인 법정에 고소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명백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다만 율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와 다르게 희랍인들은 성격상 소송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양쪽 다 중재인을 의뢰하고, 양쪽 합의 하에 공정한 재판관으로서 세 번째 중재인 즉 배심원들을 선정했습니다. 이처럼 소송을 일상처럼 즐겼던 희랍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그 습성을 교회에 가져 왔고, 문제만 생기면, 이방인 법정에 교우들을 고소하고 법정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방 법정에서 재판 받는다는 것은 곧 문제를 세속적인 가치기준, 재단으로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서로 화해와 용서라는 복음정신을 무시하고, 또 화해를 위한 지혜들을 구하는 일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소송을 제기하는 것(형제자매를 고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이 아니라 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법정고소는 피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법정에 가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를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 때까지 간 자리에는 그 만큼 어떠한 자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100.    우상에 받쳐진 고기 (2012. 9. 13. 목)

[1코린토 8,1ㄷ-7.11-13; 루카 6,27-38]

고대인들에게는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습니다. 제사에 바쳐진 고기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처리되었습니다. 고기의 일부는 제단에서 태워졌고, 그 반은 제사를 지낸 사제가 가져가고, 그 나머지는 제물을 바친 본인이 가져갔습니다.

제사에 바친 고기들은 공무원에게 주어지기도 하고 혹은 푸줏간에도 팔려나갔습니다. 그런 고기들이 잔칫상에 올라왔는데,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면한 문제는 잔칫상에 올라온, 우상에게 받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먹을 수 없다고 엄격하게 금하면, 그리 스도인들은 모든 사적인 모임과 만남을 끊어야만 했습니다. 이 질문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당면했던 문제였습니다.

코린토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신들에게 바치지 않는 고기를 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바오로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로부터, 이방 그리 스도인들은 율법을 준수할 의무가 없지만 우상에게 받쳐진 고기는 먹지 않도록 권고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코린토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 하나는,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이방신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신들에게 받친 고기를 먹는다 해도 하등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이방인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우상에게 그런 마음으로 바친 고기라면 안 먹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규칙이 어떤 이들의 양심을 힘들게 하고, 신앙을 어렵게 하고,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 한다면, 그 사람들에게까지 그 규칙에 맞추라고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에서 바오로는 지식이 아닌 사랑의 기준(애덕 caritas)에서 식별하도록 요구합니다.

 

 

101.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해서 (2012. 9. 16. 일)

[이사야 50,5-9ㄴ; 야고보 2,14-18; 마르코 8,27-35]

베드로가 말하기를,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messiah)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바로 그 메시아 시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나자렛 예수가 유대인들이 기다려 온 메시아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신에게 부름을 받은 자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즉 임무(Mission)를 주고, 이에 합당한 지위와 권한을 부여할 때 그 지명된 사람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구약에서는 판관이나 예언자들도 도유예식을 거쳤음에도, 메시아 칭호는 오로지 왕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왕은 하느님의 지상의 대표자로써, 국가경영에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몇몇 왕을 제외하고 대부분 이스라엘 왕들이 하느님께 불충실하고 정치를 잘못한 결과 제국들에게 정복당하면서, 더 이상 인간 왕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메시아는 더 이상 지상적이고 한시적인 인물이어서는 안 되고 초인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다니엘서, 구름타고 오는 인자).

이스라엘이 고대했던 메시아는 단연 정치적 독립을 이루고, 이스라엘을 강한 민족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인물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메시아는 누가보아도 위대하고 폼나는 인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어쩌면 과격하고, 민족주의적이고, 파괴적이고,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피와 정복의 과정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하느님의 완전한 지배를 이루는 영광의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입을 다물라고 말씀하신 것은 파스카 사건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메시아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존의 메시아 사상에는 남을 위한 사랑, 즉 십자가라는 희생개념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 입니다.

 

 

102.    불가의 해바라기 씨 (2012. 9. 16. 일)

[이사야 50,5-9ㄴ; 야고보 2,14-18; 마르코 8,27-35]

불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어느 여인이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부처님께 와서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알려달라고 청했습니다. 부처님은 해바라기 씨앗을 가져오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단 해바라기 씨앗은 반드시 삶에서 고통을 겪지 않은 집안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해바라기 씨앗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 여자는 홀연히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 누구도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예외 없이 모두가 고통을 안고 산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 여자는 그 슬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고, 자신과 타인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인생 전체가 고(苦)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거부하고 피한다고 해결되는 무엇이 아니라, 수락하면서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표현으로 바꾸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여기에 우리의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고통을 수락하면 초월된다는 역설).

 

 

103.    스토아의 무감동 (2012. 9. 18. 화)

[1코린토 12,12-14.27-31ㄱ; 루카 7,11-17]

과부가 외아들을 잃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제일 고상했던 스토아철학이 말하는 현자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외부 조건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평정과 무심의 상태, 무감동(아타락시아)을 실현한 사람입니다. 화와 격정을 드러내면 무엇인가 결핍되고 충만하지 않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스토아철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기대하는 신도 그러했습니다.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만하기 때문에, 외부 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밖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지도 않으며, 외부 일에 일체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감정적인 측면에서 지배당하는, 그 부분이 부족하고 약하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도 현자도 결코 외부 조건에 지배 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신과 현자의 첫 번째 속성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무감동(무관심, 무심)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에서 계시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모습은 외부의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는, 곧 인간의 불쌍하고 가엾은 실존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아픔을 함께하는, 그렇기 때문에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신과 현자의 이상적인 모습과 계시의 하느님은 사뭇 다른 것입니다.

 

 

104.    마태오의 부르심 (2012. 9. 21. 금)

[에페소 4,1-7.11-13; 마태오 9,9-13]

당시 로마제국의 총독에게 세금을 거두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자금이 있어야 제국을 운영하고 전쟁을 치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을 세관들이 했고, 어느 정도 거두면 일부를 떼어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성과금). 그래서 그들은 악착같이 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거두고, 거둔 돈을 지키기 위해 무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관들은 동포로부터 원성을 들었고,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죄인으로 단죄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욕을 얻어먹는 죄인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마태오가 길거리에서 돈 통을 들고 다닐 때나 혹은 세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의기소침). 예수님께서 행복하지 않은 마태오를 부르시고 기쁘게 하기 위해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마태오는 기쁜 나머지 자기 친구 세리들도 불러 주님과 함께 식사 하였습니다. 주님과 식사를 하면서 기뻐하는 세리 친구들과 자신을 보고, 그는 미련 없이 예수 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의사이십니다.

강남스타일로 뜨고 있는 싸이가 한번은 아주 겸손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자신을 미국에 소개했던 CNN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자기가 이런 시간과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자기를 여러 번 용서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두 번이나 갔다 온 인물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가 계속 가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용서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용서가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알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싸이는 아는 것 같습니다. 그가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마태오가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자신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105.    고통의 신비 (2012. 10. 5. 금)

[욥 38,1.12-21.40,3-5; 루카 10,13-16]

오늘 우리는 복음과 독서에서 사람을 향해 사자후를 토해내는 두 가지 하느님의 감정을 보게 됩니다.

“불행하여라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벳사이다야!” 즉 오우아이(ouai)는 슬픔과 분노가 함께 하는 감정입니다. 곧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뉘우침 없이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을 손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을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욥기의 상황은 복음과 약간 다릅니다. 욥은 자신이 삶을 열심히 살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겼음 에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불행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은 옳지 못하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당시 구약의 신앙에 의하면, 의인은 축복을 받지만, 한 사람의 불행과 고통은 그 사람이 지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고 살았다고 여긴 욥은 하느님께 “도대체 제가 뭐 그리 잘못했습니까?” 하고 반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이 돌아서게 된 것은, 그가 진노에 가까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하나의 신비라는 것, 그리고 믿음 안에서 고통은 마냥 피해야 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처럼 받아들이고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알아서 다 나머지를 처리하실 것입니다. 

 

 

106.    이미 이름이 있었던 세계 (2012. 10. 7. 일)

[창세 2,18-28; 히브리 2,9-11; 마르코 10,2-16]

오늘 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로 하여금 다른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게 하셨습니다.

로마 유학 시 머물렀던 공동체에 아프리카에 속하는 마다가스카르 섬 출신 예수회원이 있었 는데, 이름이 ‘라솔루프알리말랄라’였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이 너무 길다보니까 서구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긴 이름 대신 존으로 불렀던 것을 무척 불만스러워하였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데려온 피조물들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그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곧 작명가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이와 다르게 서구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창세기처럼 이름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이미 이름이 있었던 세계였습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역사가 있고, 그 안에는 작명자의 꿈(기대)도 있습니다. 아시아나 한국은 이미 무수한 이름으로 가득 찬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이름을 짓는 작명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이름을 풀이하고 해석하는 일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고, 이름 안에 숨어있는 의미를 찾는다면 나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자녀의 모습으로 만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사업을 혼자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협력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작명하라는 것은 자신의 삶을, 특히 찌그러지고 못나고 깨어진 삶의 부분을 그냥 방치하지 말고 성찰하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바꾸어가는, 곧 우리 각자가 삶의 주인이 되는, 나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바꾸어나갈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107.    위령의 날 (2012. 11. 2. 금)

[지혜 3,1-9; 로마 5,17-21; 마태오 11,25-30]

식사 후 기도의 내용을 보면, 마지막에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매끼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위령미사를 바치면서, 세상을 떠난 부모님, 가족, 친척들 또 친구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도록 기도합시다.

가톨릭 전통에 의하면, 죽은 사람은 세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천국으로 직행하는 사람들, 연옥에 가는 사람들, 그리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연옥은 정화개념이고, 지옥은 처벌 개념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에는 아직도 불순한 영혼이기 때문에 정화가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가끔 꿈에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나타나 기도의 도움을 청하는데, 그것은 연옥에서 고통과 시련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하거나 미사를 봉헌하면, 그 다음 꿈에 나타나 감사의 인사를 하고 평안히 떠나는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이 전통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연옥 영혼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과 살아있는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을 선택할 시간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진복팔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 핵심은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에서 ‘행복하여라.’ 즉 마카리오스(makarios)는 행복한 섬이라는 뜻인데, 그 섬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풍요롭기 때문에 행복을 위해 바다 건너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행복한 섬 마카리오스는 장소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내가 행복한 것은 아름다운 훌륭한 곳에서 풍족하게 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그분과 함께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영혼들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기도합시다. 

 

 

108.    마지막 잎새 (2012. 11. 4. 일)

[신명 6,2-6; 히브리 7,23-28; 마르코 12,28ㄱㄷ-34]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윌리엄 시드니 포터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은행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돈을 횡령하고 온두라스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의 마지막을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자진 귀국하여 체포되어 5년을 형무소에 살았습니다. 아내는 죽고 자신은 감옥에 있으니, 홀로 남겨진 딸의 생계비 마련을 위해 소설을 쓰게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탄생한 불후의 명작이 마지막 잎새입니다.

주인공 존시는 뉴욕의 어느 아파트에 사는 젊은 화가입니다. 그는 심한 폐렴에 걸렸고, 병세가 점차 깊어지니 삶에 대한 희망을 잃습니다. 그는 자기 병을 돌보는 수우에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덩굴 잎이 다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끝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수우는 아래층에 사는 화가 베어먼 노인에게 찾아가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그 노인은 밤새 비를 맞으면서 담벼락에 잎새를 그림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밤새 작업의 후유증 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다음 날 아침 존시는 밤새 비바람에 낙엽이 다 떨어졌으리라 생각하고 커튼을 젖히니 아직도 담벼락에 잎새 하나가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다음 날에도 여전히 붙어 있었습니다. 수우는 존시에게 저것은 어떤 사람이 네가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담벼락에 그린 그림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그렇게 했다는 말을 들은 존시는 다시 살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존시는 ‘나는 살 수 없다, 할 수 없다’는 절망이란 병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어느 율법학자가 모든 계명 중 첫째 계명이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만들어진 613가지 조항들을 다 지킬 수가 없으니, 그들 사이에 율법조항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토론하고, 적은 수의 율법조항들로 축소 요약을 시도했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한 구절에 집중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기 6.4).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절을 첨가하십니다. 여기서 ‘네 이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해당합니다. 곧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자비를 기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자비라는 것입니다.

노인은 절망에 빠진 존시에게 다시 살도록 희망을 주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가 곧 사랑입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에게서 슬기롭다고 칭찬받았습니다. 그 율법학자는 사람이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109.    바오로의 경력 (2012. 11. 8. 목)

[필리피 3,3-8ㄱ; 루카 15,1-10]

유대인들의 관심은 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유지를 위해 율법준수에 열성을 다 한 바오로는 자신이 예전에 얼마나 괜찮은 유대인이었는지 밝힙니다.

첫째, 태어나서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태중 유대교인이라는 말입니다. 할례는 이스 라엘과 하느님이 특별한 계약을 맺은 것을 몸에 표시한 것입니다(창세기 17,9-10). 둘째, 바오로는 벤자민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그 지파는 이스라엘 민족 중에 최고 귀족이며 엘리트 입니다.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 사울이 벤자민 지파였고,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했을 때 나라 재건은 벤자민과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셋째, 히브리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사용했고, 히브리말은 사어(死語)였습니다. 곧 히브리말을 한다는 것은 유대인들 중 6천 명 정도의 율법을 연구하는, 훈련받은 정통 바리사이파였기 때문 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는 말합니다. 자신은 열성적으로 그리스도 인들을 박해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즉 지도자들로부터 인정받는 공적이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이런 것들이 그분을 드러내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것을 스쿠발라(skubala)보다 더 못한 것으로 여겼다.” 이는 개에게 던져주는, 쓰레기, 배설물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동안 가졌던 신앙은 잃어버린 혹은 잃어버리고 있는 한 마리 양을(곧 유대인에게 죄인)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이기적인 자기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가 말한 것들이 우리가 목을 매달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닌지 살펴봅시다.

 

 

110.    자신의 본분 (2012. 11. 13. 금)

[티토 2,1-8.11-14; 루카 17,7-10]

“너희들은 분부 받은 대로 다 하고나서, 저희들은 쓸모없는 종일 뿐이라고 말하여라.”

당시 로마시대는 노예들이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정확한 통계를 내기는 어렵지만, 주석가들에 의하면 로마제국 하에 약 6천만의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복된 민족들 대부분이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사고파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위해를 가한다고 간섭할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주인이 노예(종)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살지 못했을 노예들의 삶은 아주 비참하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과 노예의 사회적 지위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비록 노예가 하루 종일 많은 일로 지쳐다 하더라도, 주인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해야 하고 주인이 식사하는 동안, 군소리 없이 식탁 봉사를 해야 했습니다. 비록 종은 자기 처지가 어렵더라도, 그 이상의 것을 주인에게 기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분부 받은 대로 다 하고나서, 저희들은 쓸모없는 종일 뿐입니다.”라고 말하여라. 복음에 나오는 백부장처럼, 자기 종에게 선의를 베푸는 주인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특별한 소수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주인은 찾기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희생시키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당신이 희생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분이십니다. 

 

 

111.    자캐오 (2012. 11. 20. 화)

[묵시록 3,1-6.14-22; 루카 19,1-10]

예리고는 큰 종려나무 숲이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삼향나무 숲이 있고, 장미정원으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그리고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며 그래서 가장 큰 과세지의 중심 이었고, 세리들이 설쳐대던 곳이었습니다. 

자캐오는 키가 아주 작고(핸디캡), 유대종교의 시각에서 사회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고 미운털이 박혔지만(자격지심),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곧 자신이 은폐 하고 싶었던 자신의 핸디캡과 자격지심을 스스로 드러낸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눈에 보였고, 그분이 자캐오의 이름을 부르셨고,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리고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런 원의가 그로 하여금 그런 것에서 벗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자캐오는 변화된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의식적으로 남에게서 (눈에 보이게) 강탈한 경우는 4배로 보상해야 하고(출애급 22,1), 평범한 도둑질이면 2배로, 자수해서 보상하겠다면 본래 물건이나 액수에 1/5를 더 보태어 갚으면 됩니다. 자캐오가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상하기로 한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 그 이상 더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12.    심판의 두 가지 이미지 (2012. 11. 27. 화)

[묵시록 14,14-19; 루카 21,5-11]

오늘 독서와 복음에 하느님의 심판에서 두 가지 이미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로 추수 때에 사람의 아들(인자)과 천사들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구원받을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이고, 천사들은 (큰 낫을 사용하여) 심판 받을 사람들을 추려내어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잘 가려서, 알곡은 거두어들이고, 쭉정이는 태워버립니다. 한 해 농사에 수고했던 농부가 쭉정이로부터 알곡을 가려낼 때의 즐거움을 상상해 보십시오. 알곡 한 알도 놓치지 않으려고 가려냅니다.

두 번째 포도주 틀의 이미지입니다. 팔레스티나는 포도주 틀이 위아래 두 개로 되어 있고, 포도 알들을 틀에 집어넣어 사람이 들어가서 밟습니다. 포도즙이 튀어서 포도를 밟는 사람들의 옷에 묻게 됩니다. 마치 피가 튀는 이미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악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분노를 드러내시며 짓밟아버려서, 그 피가 튀고 흘러 팔레스티나 남북의 길이에 해당되는 넓이에까지 퍼진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대면대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잘못 살았다면 그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되고, 어둠의 세력과 사악한 자들이 어떻게 응징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날이 오면 우리 각자가 어떻게 될 지 한 번 성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113.    안드레아 사도 축일 (2012. 11. 30. 금)

[로마 10,9-18; 마태오 4,18-22]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안드레아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습다. 그 후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이 세 사람들을 언제나 당신 곁에 두실 정도로 중요한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예수님을 소개시킨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생색을 내거나, 자신이 한 것을 알아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스승, 세례자 요한을 많이 닮았습니다.

안드레아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부러 조연에 머무는 겸손한 사람으로 남기를 원했다 기보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하는 삶 자체가 그를 의미있게 하고 자유롭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기쁘다 자유롭다는 것은 누가 알아주거나 자신이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가 잘 압니다. 안드레아처럼 가장 좋은 몫을 택했을 때는 주연과 조연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안드레아는 이미 예수님의 뛰어난 제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114.    독대(獨對) (2012. 12. 7. 금)

[이사야 29,17-24; 마태오 9,27-31]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흔하게 생기는 질병이 눈이 머는(안 보이는) 병입니다. 태양빛이 무방비 상태로 눈에 비치는 것도 있고 또 당시의 불결한 위생(파리 떼 전염)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시력을 잃었다고 합니다. 두 소경이 예수께 와서 도와주기를 청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첫 요구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위사람들이 소리 지르니까 덩달아 소리를 지르는 것인지, 아니면 절실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절실하지 않은 영혼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안에서 간절함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외부는 단지 자극과 충고일 뿐).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의 개입 없이 그들이 당신을 홀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의 원칙입니다. 그리고 질문하십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은 군중의 생각이 아니라 바로 청하는 이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큰 집회나 모임에서 감정에 휩쓸린 상태에서 믿는다고 결심하지만, 그러나 이젠 군중과 단체를 뒤로하고 홀로 단독자로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115.    그리스도의 종, 심장병, 할루시스 (2012. 12. 9. 일)

[바룩 5,1-9; 필리피 1,4-6.8-11; 루카 3,1-6]

필리비서는 바오로가 로마 감옥에서 필리비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는 필리비서 1장 4-11절의 앞뒤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doulos)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고, 그분께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곧 왕이 되는 것이고 노예처럼 비굴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매우 영예스러운 칭호였습니다. 주로 교황님이 이 칭호를 사용합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1장 12절에 “나에게 닥친 일이 오히려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바오로는 3년 반 감옥소에서 자기 오른손이 간수의 왼손에 묶인 채(할루시스) 살았습니다. 바오로와 할루시스했던 간수들은 로마 황제의 친위대였고, 그들은 전 로마제국의 병사들에서 차출된 1만 명의 정예 병사였습니다. 바오로의 투옥으로 로마군의 정예 병사들에게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마련된 셈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동포로부터 변절자라고 갖은 비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선교하러 가는 곳마다 그를 모욕하고 박해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분하고 억울해서 홧병이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자유로웠습니다.

요즘 심장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심장에 감정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와 아픈 기억들이 심장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어느 스님의 말에 따르면, 심장에 대못이 박힌 것입니다. 나와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그냥 지나갈 뿐이므로, 감정에 머물거나 잡지 말고 그냥 지켜볼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을 자연 스럽게 내려놓게 됩니다. 문제는 내가 그 감정을 붙들고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왜 왜 그것을 붙들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합니다. 

바오로는 감옥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유로웠습니다. 바오로와 할루시스했던 병사들은 감옥에 갇혀 있는 바오로의 모습을 보고 걱정하거나 한탄하지 않고 어찌 이렇게 자유스럽고 평안할 수 있는지 놀라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바오로에게 많은 질문과 함께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속하면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116.    기쁜 소식 (2012. 12. 16. 일)

[스바니야 3,14-18ㄱ; 필리피 4,4-7; 루카 3,10-18]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온 이들에게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루카 3.7) 그들이 마치 광야의 덤불에 불을 지르면 튀어나와 도망치는 독사와 뱀 같다고 비난했습니다. 그저 심판날이 온다니까 심판을 면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알곡은 곳간으로 가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지듯이, 잘못 산 사람들은 모아서 태워지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요한의 말은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종교의 기본생각처럼, 의인은 보상을 받고 악인은 처벌받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따라서 정해진 대로 살아야 하고, 그것을 어길 때에는 용납될 수 없으며,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바오로는 필리비서에서 “기뻐하라,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사람들이 알게 하라”고 합니다. 에피에이케이아(관용)는 인간이 세운 공정함에서 더 나아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로 판단하기 보다 그 외의 것을 보려는 배려입니다. 예로써, 불합격한 학생이 있다고 합시다. 좋은 가정 환경과 재정적 뒷받침이 없고,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나쁜 환경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수가 있기 때문에, 드러난 점수만으로 그 학생을 최종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현상에서 나타나는 그 이상의 것을 보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입니다.

 

간음한 여자의 경우, 그 당시 관습으로 볼 때 그가 잘못했고, 현행범으로 잡혔고, 율법에 따라 여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옳고 정의로운 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고 그를 살려 내십니다. 사람이 죽을 죄를 지었어도 뉘우칠 기회가 주어지고, 살도록 개선의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쁜 소식입니다.

다행스럽게 예수님의 덕으로 여자는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 에게 관대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남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못하게 됩니다. 먼저 자신에게 관대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117.    마리아, 엘리사벳, 소경 가수 (2012. 12. 23. 일. 연중 제4주일)

[마카베오 5,1-4ㄱ; 히브리 10,5-10; 루카 1,39-45]

스콰이어스 부인은 존과 1959년에 재혼하였습니다. 부인의 첫 남편은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전사하였고,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클로디어가 있었는데, 재혼하기 전에 그 딸을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세월이 지나, 부인은 존에게 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존은 소개인을 통해 클로디어를 찾기로 합니다. 고아원 기록에 의하면, 클로디어는 성악 레슨을 받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좋은 양부모를 만나 잘 성장했으며, 현재는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소개인은 클로디어가 성악가나 대중가수가 되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금발머리 나이 20세 초 중반의 가수를 찾은 결과, 로스앤젤레스의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클로디어 블레어를 찾게 됩니다.

소개인이 만난 클로디어는 금발머리의 아름다운 아가씨였고 장님이었습니다. 소개인은 그녀 에게 친어머니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그런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합니다. 소개인은 양부모를 통해 클로디어가 친어머니를 만나도록 설득합니다. 클로디어는 “내가 엄마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날 버렸다. 재혼하기 위해 장님이 된 거추장스러운 나를 버렸다.” 그는 한참 말없이 흐느껴 울고 난 뒤에,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만나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약속 장소에서 클로디어는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소경이니 당연히 친엄마가 자신에게 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친엄마가 천천히 걸어와서 딸의 얼굴을 만지면서 말했습니다. “아주 많이 컸구나.” 딸은 그때서야 미워했던 친엄마가 자신처럼 소경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엄마는 소경에다가 남편을 잃은 미망인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딸을 키울 수 없었으므로, 고통스럽지만 딸을 고아원에 맡기기로 한 것입니이다. 클로디어는 친엄마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찾아온 것에 감사했습니다.

스콰이어스 부인이 딸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했던 것처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와 엘리사벳 역시 하느님의 섭리를 위해 자신들의 소박한 꿈을 포기한 분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동변상련) 마리아는 자신의 꿈을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는 아쉬움을 엘리사벳과 함께 나누며 서로를 위로했으리라 여겨집니다.

 

118.    코러스 (2012. 12. 24. 성탄전야 미사)

[이사야 62,1-5; 사도행전 13,16-17.22-25; 마태오 1,1-25]

영화 ‘코러스’는 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를 배경으로 합니다.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으므로 부모들 모두가 일을 해야 했고, 많은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살게 됩니다. 보육원의 환경은 열악했습니다. 신경질적이고 독선적인 원장은 아이들을 선도하기보다 처벌의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며칠 동안 독방으로 보낼 정도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에서 아이들은 반항적, 냉소적으로 변해 갔고, 문제는 마치 새장에 갇힌 것처럼 아이들에게 전혀 희망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햇빛이 보육원 뜰에 한가득 내리 쬐지만 얼어붙은 아이들의 마음은 닫혀있었고, 씨앗들이 날아 왔지만 굳어버린 땅은 씨앗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런 곳에 음악선생으로 마티유가 부임합니다. 또 하나의 씨앗이 햇빛과 바람을 타고 날아 온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마티유 선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수업시간에 장래희망을 쓰라고 했는데, 아무도 선생이 되려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다들 선생들로부터 학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티유 선생은 어느 날 기숙사에서 아이들의 노래를 듣습니다. “야, 이 대머리야, 넌 이미 끝났어. 아무도 너를 따르지 않을꺼야!” 그는 자기를 놀리는 노랫소리에서 그들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마치 오병이어에서,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가진 아이를 통해서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처럼. 마티유 선생에게는 아이들이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사에 곡을 쓰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주목하십니다. 비록 하찮고 작아 보이지만, 하느님 께서는 하려는 의지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하시는 것입니다. 마티유 선생은 코러스를 만들었고, 결국 하나의 마음으로 아이들은 멋진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은, 아이들의 노랫소리에서 희망의 불씨를 발견한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희망의 불씨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119.    하갈에 대해서 (2012. 12. 31. 월)

[1요한 2,18-21; 요한 1,1-18]

우리는 보통 영웅과 테마의 주연을 위주로 성경을 읽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위주로 읽다 보면, 당연히 하갈은 하느님의 섭리에 벗어난 존재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하느님의 섭리에 포함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처럼 모든 것이 로고스에서 생겨나 로고스로 돌아 가듯이, 그 섭리에서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지만 사라는 자신에게 태기가 없자,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의 잠자리에 보내 아이를 낳게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자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허용되었지만,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하갈이 임신하면서 사라를 업신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의 허락 하에 하갈을 구박 하였습니다. 이 구박이란 표현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4백 년 동안 당했을 때 썼던 그 표현과 동일합니다.

사라의 구박에 못 이겨 하갈은 이집트로 도망갑니다. 도망가는 길목에서 주님의 천사는 하갈을 막아서며 묻습니다. “사라의 몸종 하갈아,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천사는 사라의 몸종이라 하면서 하갈이 처한 현실을 알립니다. 피하지 말고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갈이 “여주인 사라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 중입니다.” 하자, 천사는 해결책을 제시 합니다. “네 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여라.” 복종하라는 것은 학대받을 것을 각오하고, 주인을 멸시했던 그 대가를 치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갈의 후손도 번성하게 해 주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합니다.

큰 틀에서 보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안에는 하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하갈이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하갈이 복을 받으려면 사라에게 돌아가서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 입니다. 곧 하느님의 섭리라는 시스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갈은 천사의 말대로 돌아와 사라 밑에서 죽은 듯이 살았습니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사라가 이삭을 가지면서 다시 둘의 관계가 악화됩니다. 사라는 이삭의 권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기로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하느님께 알렸고, 하느님은 사라의 말을 들어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섭리에는 이삭은 물론 이스마엘 후손도 큰 민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1장에 하갈과 이스마엘은 신변보장을 받을 수 없는 광야로 쫓겨납니다.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아이를 덤불 밑으로 던져버리고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저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아이를 네 손으로 꼭 붙들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그때 하갈은 우물을 보았고, 물을 마셨습니다.

사라의 몸종인 하갈의 삶 곳곳에서 주님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조연이 아니고 주연입니다. 자신이 누구의 여종이나 혹은 첩으로 남느냐 아니면 큰 민족의 어머니가 되느냐는 오로지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니까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섭리 안에서는 하느님의 자녀 였습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그분의 섭리의 세계에서는 누구나가 동일한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그분의 축복을 받으려면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종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의 의지적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120.    헤롯 (2013. 1. 6. 일. 주님 공현 대축일)

[이사야 60,1-6; 에페소 3,2.3ㄴ.5-6; 마태오 2,1-12]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구세주를 만나야 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기록들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가까운 동굴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석회암 산 경사면에 동굴들이 많았고, 그것이 가축들이 사는 거처로 사용됨) 4세기에는 그 위에 성탄교회가 세워졌고, 들어가는 입구가 낮아서 무릎을 꿇어서 들어가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헤롯은 반은 유대인, 반은 에돔 사람입니다. 로마제국을 위한 공로로 기원전 47년에 총독이 되었고, 그 후 왕이 되었습니다. 팔레스티나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온 유일한 통치자였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을 세운 훌륭한 건축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을 의심하는 결점이 있었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즉각 죽였다고 합니다. 처와 장모, 그리고 자기 장남과 장남의 두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말하길,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죽음에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을 알고, 예루살렘 시민들 중 유명한 자들을 체포해서 자신이 죽을 때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에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될 운명을 지닌 아이의 탄생 소식을 들으면 어떤 행동을 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헤롯에게는 ‘그 아이’가 자신의 권위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죽이려고 했습니다. 구세주가 필요하지 않는 영혼에 당연히 평화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삼왕은 구세주를 찾아 먼 곳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져 왔습니다. 황금은 세상의 왕에 어울리는 물건이고, 유향은 사제들이 희생제사와 예배 때 필요한 물건이고, 몰약은 시신이 빨리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미래에 일어날 구세주의 시신을 위해 사용될 물건이었습니다. 구세주는 하느님과 세상의 화해를 위해 죽으시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 광야에서 금욕하며 살았던 요한의 기본 생각은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관습적인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요르단강 세례에서 성령을 체험하면서, 구세주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짊어지는 분으로 오셨음을 깨닫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두고 “저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지나가신다.” 말한 것입니다.

헤롯은 구세주를 없애려고 했고, 삼왕은 그분을 경배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겨울 바람처럼 춥고 모질고 완고하지 않은가요? 내가 용서를 통해서 죄책감에서 벗어나면, 시나브로 나를 용서하고 타인을 용서하게 되면서, 나는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죄가 서로를 매이게 함. 은총으로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한다면 내가 그를 놓아주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억은 하되 나에게 아무런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게 됩니다.)

삼왕은 구세주를 만나면서 자유와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긴 여행하면서 그 동안 그분을 찾았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도 삼왕처럼 그분을 만나 기뻐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121.    비움으로 오는 내적 자유 (2013. 1. 10. 화)

[1요한 4,19-5,4; 루카 4,14-22ㄱ]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찾고, 성전에 머물려고 하는 소년 예수님의 첫 번째 종교적 체험에 대해 서술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서 언젠가 자신들 곁을 떠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것입니다. 아들에 대한 애착을 비우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나는 엘카나의 두 부인 중 한 사람으로, 늦도록 아이를 낳지 못해서 다른 아내 프닌나에게 놀림과 구박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신세가 서러워, 실로의 성소에서 하느님께 아이를 하나 점지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허락하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하느님께서 한나에게 아이를 허락하셨는데, 그 아이가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 약속한 대로 사무엘을 하느님에게 봉헌합니다. 사무엘은 곧 한나 자신을 서러운 처지에서 벗어나게 했던 축복이었으므로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주어지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께 봉헌 하는 영혼 안에서 은총은 더 역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사무엘은 실로성전의 사제인 엘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사제 엘리는 이제 늙었고, 아들들은 사람들에게 아주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사제 가문으로써 말이 아니었습니다. 엘리는 그들에게 충고했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대가로 하느님께서 엘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안에는 오래 사는 자가 없을 것이다. 너의 가족의 눈은 어두워지고, 마음은 슬퍼지며, 모두 칼에 맞아 죽을 것이다. 대신 나는 믿음직한 사제 하나를 세울 것이고, 그가 내 마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자식 농사에 실패한 엘리는 부끄러웠지만 주님의 말씀에 이의를 달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오랫동안 사제가문으로 봉사했으니, 한번 봐 달라고 청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는 사제직이 자기 자식들에게 넘어가기보다 자기 집안이 망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제직을 바로 세우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자신에게서 떠나, 어린 사무엘을 부르 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엘리는 하나의 권력이 자신에게서 아이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자기 자식들에게는 미래가 안 보이지만, 자기 처지를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엘리의 태도에서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려는 한나와 엘리처럼, 마리아와 요셉에게서도 하느님의 뜻을 수용하는 내적 자유를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가 언젠가는 자신들에게서 떠나게 되는데, 자신들을 비우고 그분을 하느님께 봉헌하시는 것입니다.

 

 

122.    그리스도의 속성들 (2013. 1. 27. 일)

[느헤미야 8,2-4ㄱ.5-6.8-10; 1코린토 12,12-30; 루카 1,1-4.4,14-21]

오늘 복음에 복음사가 루카는 이제 막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셨다.” 바오로는 루카와 함께, 예수님과 함께 살거나 직접 뵌 적이 없고 다만 신앙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뿐입니다. 바오로가 파악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루카보다 더 분명하고 세련되어 있기 때문에, 바오로가 만났던 그리스도의 속성들을 알아 보겠습니다.

프로사고규스:(에페소 2장) 왕궁에서 임금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임금에게 안내하는 사람입니다. 방문 목적을 확인하고, 보안 절차가 까다로운 왕궁에서 절차를 생략하고 우리가 원할 때마다 언제나 어디서든 직접 훌륭하고 현명한 임금을 만나 우리의 근심과 어려움을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아르케고스(히브리 2,5-9)는 위기 때 남들을 위해 처음 길을 열어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로써, 배가 좌초되어 떠내려가면, 누군가 배를 고정시켜야 하고, 배를 밧줄로 부둣가에 붙들어 매어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곧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좌초되지 않도록 무사히 항구까지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폰티펙스(히브리 3장)는 대사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의 약한 실존을 잘 아시는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마치 한 쪽은 위험지역이고, 다른 쪽은 안전지대인 두 절벽 사이에 세워진 안전한 교량으로, 위험지대에서 벗어나 무사히 안전지대로 가도록 당신의 희생제사를 통해 도우십니다.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 구약에 의하면, 죄인이 죄를 탕감 받으려면 일년에 한 번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동물을 사서 사제에게 바치고, 사제가 그것을 번제물로 바치면 죄가 사해진다고 여겼습니다. 동물들이 인간을 대신해서 번제물로 바쳐진다고 사람의 죄가 사해지고,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번제물에서 나는 냄새가 지겹다. 마음으로 회개하여라.” 인간의 죄를 위해서 어떤 짐승이나 인간이 아닌 하느님께서 직접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알고는 너무나 놀라워하였습니다.

판토 크라토르(전능한 존재. 다니 7.1-4)는 요한의 표현으로,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권력을 네 마리 짐승으로 묘사했습니다.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바빌론), 흉악한 곰(페르시아), 날개가 돋은 표범(희랍), 그리고 끔찍한 쇠 잇빨로 모든 것을 씹고 짓밟는 야수(로마)입니다. 아무도 이들과 맞설 수 없었고, 이들에게서 나라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희생되셨지만, 세상을 심판하는 판토 크라토르로써 다시 오십니다. 곧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넣어 지배하고, 명령하는 존재입니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의 판토 크라토르 안에 있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은 네 마리 괴물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 순명해야 합니다.

세상의 빛:(요한 8.12)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초막절 때 하신 말씀입니다. 초막은 광야 40년 히브리인들의 안식처였던 천막을 말합니다. 초막절은 이집트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심을 기억하는 축제인데, 초막절 첫날 저녁에 ‘성전의 조명’이란 의식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불이 켜지기 시작하여 예루살렘 전체가 빛으로 밝혀지는데, 밤의 어두움을 몰아내던 그때에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 불빛은 다음날 아침이면 꺼지지만, 그분의 빛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예수님은 하느님의 아이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 곧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투명하게 당신을 비우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를 알리시는데 특히 강조하신 부분이 ‘돌아온 아들의 비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잘못을 두고 벌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선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많지만, 그 중 하나만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안에 있는 크고 선한 힘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힘은 상한 마음을 고치고, 불행한 환경을 극복하게 하고, 낙심한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 힘은 어떠한 압력이나, 상처나 실패에도 결코 망가지지 않습니다 (반석처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이런 힘이 있음을 알려 주셨고, 우리는 이 힘을 풀어내고 배양을 시켜야 합니다.

 

123.    아가페, 세 가지 희랍사상 (2013. 2. 3. 일)

[예레미야 1,4-5.17-19; 1코린토 12,31-13,13; 루카 4,21-30]

우리는 코린토 1서 13장의 아가페 사랑에 관한 바오로의 유명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이 말씀이 나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코린토는 고대세계, 지중해의 무역의 중심지였고, 피카데리 광장이었습니다 (마치 런던의 중심지처럼). 그곳에서 큰 스포츠경기들이 주기적으로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동시에 코린토는 악덕과 부도덕한 생활로 악명 높았다. ‘코린토인처럼 생활한다.’란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된 몇 가지 원인은 이러합니다. 

첫째, 희랍신의 특징은 초월적이며, 무감동하는 존재다. 신은 자체로 충만하기 때문에, 기쁨도 실망도 분노도 드러내지 않는다. 감정들을 드러내는 것은 무언가 충만하지 않는 결핍을 뜻한다. 따라서 신은 인간사에 초월해서 일체 간섭하지 않으며, 인간은 그런 이기적이고 무정한 신을 모방하게 된다.    

둘째, 희랍인들은 물질과 육체를 멸시했다. 영혼은 불변하고 훌륭한 가치를 띠지만, 육체는 변화하고 사멸하는 것으로 저급하다고 간주했다. 영혼스럽게(덕행) 살면 구원이고, 육체스럽게 살면 타락이다. 그래서 영혼은 품위 있게 다루지만 육체는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되며 쾌락에 맡긴다고 해서 나쁠 것이 없다. 영혼 존중, 육체 멸시가 일견 구원을 위한 행위로 보이지만, 사실은 타락을 조장하는 셈이다.

셋째, 철학자 데모크리투스에 의하면, 세상의 근원이 원자고, 세상의 모든 사물은 다양한 원자들의 구성과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이 죽으면 다시 본래의 원자로 돌아가기 때문에, 나의 탄생 전에 고유한 내가 없었고, 죽음 후에도 나는 해체되어 없어지게 된다. 나는 우연히 구성된 허무한 존재이므로, 그저 자기 본능과 쾌락에 따라 살아도 된다. 여기서 도덕이 무너지면서, 쾌락주의가 등장한다.

이런 주장들에 영향을 받았을 코린토 신자들에게, 바오로는 무엇이 항구불변한 가치를 가지는지 알립니다. 그것은 비인격적인 사물이나 이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에서의 사랑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사물이나 이념이나 신도 천사도 인간도 사랑을 담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이내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항구한 가치를 띠는 것은 오로지 아가페 사랑임을 알립니다.

아가페 사랑. 당시 희랍인들은 사랑과 관련하는 세 가지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스토르게(storge)는 가족애, 필리아(philia)는 친구간의 우정. 에로스(eros)는 남녀 간의 애정 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사랑은 이 셋과 분명 구분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용어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을 아가페라 불렀습니다. 아가페는 상대방이 무슨 짓을 하든, 그 사람의 최고의 것만을 보려는 의지입니다. 비록 상대방이 자신을 비난하고 위해를 가하더라도 그 사람을 위한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본능적 사랑은 쉽게 정복되지만, 아가페는 결코 정복되지 않는 자비심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지만 아가페는 끝까지 남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런 말로 희망을 줍니다. 지금은 비록 그분이 희미하게 보이고, 그 사랑이 희미하게 느껴질지라도, 그때 우리가 그분을 만날 때는 모든 것이 분명해 질 것입니다.

 

124.    노인 요양원의 청년(2013. 2. 15. 금)

[이사야 58,1-9ㄴ; 마태오 9,14-15]

어떤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매주 노인요양원에 봉사하러 갑니다. 그곳에 계시는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자주 폭력을 당해서 아버지에게 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부자의 정을 찾아야 할 것 같아서 그곳에 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과 말벗이 되어주는 청년이 자기 아들인지 모릅니다.

어느 날, 젊은이가 일어서는 아버지를 부축하는데, 아버지는 아프니 팔을 세게 잡지 말라고 하면서,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맞아서 팔이 부러졌다고 말합니다. 자주 폭행을 당했다고 하는데, 할아버지에게 당했던 폭력을 아버지는 그대로 아들에게 대물림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 젊은이가 아들인지도 모르고, 또 자신이 과거에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버지를 거부할 것인가(도피) 수용할 것인가(직면) 둘 중 하나입니다. 치매로 잘못을 인식하지도 용서를 청하지도 못하는 그런 아버지의 현실을 바라보던 청년은 결국 그런 아버지라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아버지라는 무겁고 묶인 짐에서 풀려나는 해방을 경험합니다.

비록 우리가 풀어야 할 상대가 치매로 정상적인 소통을 할 수 없고,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 쪽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를 마다 하지 않으십니다. 곧 시도한 사람의 간절함이 하늘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125.    사탄의 유혹 (2013. 2. 17. 일)

[신명 26,4-10; 로마 10,8-13; 루카 4,1-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십니다. 이 장면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당신께서 메시아직을 부여받으심을 확인하고,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광야로 가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로부터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십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이 되게 하라고 했고(이는 신통력을 행사해 보라는 것), 두 번째는 사탄이 예수님께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경배하면 그것을 예수님께 다 주겠다고 하였고 (피조물이 창조주께 경배를 요구), 세 번째는 높은 성전 꼭대기에 데려가서, 당신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당신의 천사들이 당신을 다치지 않게 받쳐 줄 것이니 몸을 던져보라고 유혹합니다(신적 지위를 행사하도록).

돌을 빵이 되게 하라는 첫 번째 유혹은 신통력을 발휘하라는 말입니다. 빵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베풀 수는 있지만, 구원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쉽게 주어지면, 사람들은 노력과 수고보다는 요행과 운을 바라게 됩니다. 인간이 신통력과 기이한 행위에 자주 노출되고 현혹되면, 신앙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기적의 빵을 먹으면 계속 구걸하는 거지로 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부귀와 권세를 주겠다는 두 번째 유혹에서, 부귀와 권세는 사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중립적이지만, 문제는 그것들이 사람의 욕망에 부채질한다는 점입니다. 세상의 논리에 의하면, 돈을 가지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돈으로 명예와 권력을 사는 셈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지면 명예는 박탈당하고 권력을 상실하게 되며 사람들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부귀와 명예와 권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렇게 메시아직을 수행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처럼 대단히 위험한 행위입니다(마태7,24-27).

세 번째 유혹은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면 당신의 천사들이 보호해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느님 아들의 권능을 가지고 메시아직을 행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참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메시아 사명에 차질이 발생되게 됩니다. 

원수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직을 수행하시지 못하도록 방해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메시아직을 신적 권능으로 수행하도록 유혹합니다. 구원의 길이 인간에게 알려지지 못하도록 하거나, 아니면 신적 권능이 남용되어 구원의 진정성이 상실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유혹에 실패한 사탄은 다음 기회를 노리며 떠나갔습니다(루카 4.1-13).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택하신 것은, 매일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성령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루카복음 저자는 예수님에게서 이 광야 이야기를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제자들에게 교육상 여러 차례 언급했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이것이 성서에 기록될 정도로, 예수님의 약점이 여지없이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힘으로 부귀와 명예와 권력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음을 깨닫고, 오로지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126.    두 번의 계약과 가상의 저주 (2013. 2. 24. 일. 사순 제2주일)

[창세 15,5-12.17-18; 필리피 3,17-4,1; 루카 9,28ㄴ-36]

제1독서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Berit)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계약은 언제나 쌍방적입니다. 인간의 의지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는 부분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첫 번째 계약은 노아와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죄를 보시고 크게 실망하신 나머지, 40일 동안 대홍수로 세상을 다 휩쓸어버리셨고, 다시는 이렇게 심판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하늘에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두 번째 계약은 아브라함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70세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겠고(12,1), 모든 종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하느님의 말을 믿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과 부인이 아이를 가지기에 너무 나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습니다 (15장). 3년 된 암송아지,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반으로 쪼개어 놓고, 마치 저주하듯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짐승들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이 계약이 뜻하는 바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렇게 짐승들이 새까맣게 태워지듯이 하느님도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가상의 저주)

이 계약에 깔려있는 하느님의 의도는 인간을 반드시 구원하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약속(계약)대로 인간이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고 협력하지 않을 경우 하느님께서 감당하셔야 하는 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이 희생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손에 돌아가실 수 없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시기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 독서에 하느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비와 눈이 본래 할 일을 다 하고 하늘로 돌아오듯이, 내 입에서 나오는 말도 반드시 뜻하는 바의 사명을 성취하고서야 나에게서 돌아올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을 위하고 그들을 구원 하겠다는 그 말씀 그 자체로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그분의 전능이 현실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는 사탄이나 세상의 유혹이라기보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127.    의식성찰 (2013. 3. 10. 일. 사순 제4주일)

[여호수아 5,9ㄱㄴ.10-12; 2코린토 5,17-21; 루카 15,1-3.11ㄴ-32]

오늘 복음에서는 돌아온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모두가 아버지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의 상황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분이시며, 자신이 얼마나 잘못 살았는지 깨달았다는 점입니다(신앙의 깨달음).

이처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한계를 절감하고 은총을 구하는 자기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 강론은 이것과 관련하여 고해성사(판공)를 돕기 위해 수도자들이 하는 의식 성찰을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합니다.

의식성찰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내용들을 의식화하는 작업입니다. 어렸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들이 처리되지 않은 채 무의식 속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이 무의식 속의 어두운 기억(상처)들은 세월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현재 나의 삶을 지배(조종)하면서, 나를 불쾌하게 하고, 화나게 하며, 지치게 하고, 또 죄를 짓게 하면서 후회하게 만듭니다.

의식성찰에는 은총의 빛이 필요합니다. 은총이 필요한 것은 평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부분들이 치유되지 않으면 잘못된 자판기로 오타(誤打) 치듯이, 잘못된 행위를 반복하게 됩니다. 우리 영혼 안에 어두운 기억들이 치유가 되지 않고 남아 있으면, 아무리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해도 계속 동일한 죄를 반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죄가 다양한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의식하는데, 그것들은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하나의 뿌리에서 오고, 다양한 인물과 사건과 계기를 통해 드러납니다. 이 죄의 뿌리를 찾아 절단하기 위해 의식성찰을 하는 것입니다. 성찰한 것을 고해성사 때 사제에게 간결하게 전하면 됩니다.

 

교회가 고해성사를 제정한 것은 회개와 성찰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성찰이 생략된 고해성사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저 기억에 의존해서 잘못들을 뒤지는 것은 형식적일 뿐 회개와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고해성사에서 지은 죄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며 죄를 사해달라는 것도 신자 로서 의무를 소홀이 하는 것입니다. 몸의 건강에는 큰 관심을 가지면서 영혼구령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면 죄를 덜기보다 쌓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내가 그분의 사랑에 얼마나 부합하지 못하고 살았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128.    에제키엘 예언, 성전의 물 (2013. 3. 12. 화)

[에제키엘 47,1-9.12; 요한 5,1-16]

에제키엘 예언자의 임무는 유다의 멸망과 관련됩니다. 그는 이국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크바르 강가에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유다가 멸망하는 환시를 보았습니다. 날마다 동포들이 도륙을 당하는 고통스러운 광경이 그의 눈앞에서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던 바로 그 날에 그의 아내가 죽기도 하였습니다. 외국에서 유배 생활하는 사람에게 이런 환시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하느님 께서는 이스라엘이 회복한다는 다른 환시를 보여주십니다.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발목에 차는 실개천 정도의 적은 양이었지만, 점점 무릎까지 차고 허리까지 차다가, 나중에는 사람이 헤엄을 쳐야 할 정도로 풍부한 수량의 강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넓은 광야와 사막으로 흘러갑니다. 물이 흘러가 닿는 곳마다 모든 생물들이 살아나면서 푸르고 아름다운 곳으로 변하였습니다.  

이 환시에서 보는 성전의 물이 바로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생명이 살지 않는 장소로 흘러가면서 모든 생명을 살려냅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은, 기도생활에 충실하지 않아 메마른 영혼들이 기도하고 성령을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129.    성지 주일 (2013. 3. 24. 일)

[이사야 50,4-7; 필리피 2,6-11; 루카 22,14-23.56]

성지주일의 핵심은 축성된 나뭇가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고대하던, 죽음을 물리치신 구세주라는 신앙입니다. 성지가지로 행진하는 것은 곧 개선행진을 뜻하고, 그분의 죽음은 부활로 극복된다는 희망과 믿음이 성지주일의 주제입니다.

본인이 군대생활을 했던 전방 가까이 신산리라는 곳에 영국군 참전용사 기념비가 있습니다. 1951년 4월 22일~25일까지 3일 동안 임진강 전투에서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 대대가 중공군 3개 사단을 맞이하여 싸우다가 거의 전멸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이 가장 큰 대가를 치룬 전투라고 합니다.

당시 상황에서 영국군들은 후퇴할 수 있었지만, 아군의 더 큰 피해를 막고, 후방에 있는 한국군, 미군, 벨기에군들이 전투준비를 위한 시간을 벌도록 하기 위해, 영국군 지휘관들은 그 고지를 방어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처음 그들은 그렇게 많은 중공군이 쳐들어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영국군들은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를 방어하다가 거의 전사하였고, 중상에서 살아 남은 샘 서머는 그 당시 부대원 그 누구도 그렇게 결정한 자신들의 지휘관을 탓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유교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천명, 곧 하늘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후퇴하면 살아서 영국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고, 끝까지 방어하고 싸우겠다면 죽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들은 이국땅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바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제대로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의식이며, 메시아로써 대의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예수님께서 처하셨던 상황이었습니다.

2010년에 천안함이 침몰되었을 때, UDT 대원들이 바다 밑에 가라앉은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바닷물에 들어가 구출작업을 하였습니다. 서해가 탁해서 잘 보이지 않는데다가 조류가 거센 상황에서 UDT 젊은 대원들이 거의 다 탈진한 무렵에, 나이가 제일 많았던 한주호 준위가 자청을 해서 참여하다가 3월 30일 오후 3시 20분에 순직하였습니다.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처럼 제대로 죽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 죽은 이들이 주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130.    어린 양의 피 (2013. 3. 28. 목. 성 목요일)

[탈출 12,1-8.11-14; 1코린토 11,23-26; 요한 13,1-15]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명으로 그들의 집 문설주에 발랐던 어린 짐승의 피 덕분이었습니다. 죽음의 천사들은 짐승의 피를 바른 히브리인들의 집은 통과 하고, 그것을 바르지 않은 이집트인들의 집에 멈추어 그들의 맏아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집트인 들이 비통해하며 경황이 없는 때를 틈 타 히브리인들은 억압의 땅, 이집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즉 히브리인들의 해방에 결정적인 매개가 바로 어린 짐승의 희생이었습니다(상징적으로 양으로 표현). 이제 무대는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구세주시며 동시에 우리를 위해 희생되는 어린 양이십니다. 히브리인들이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억압에서 해방 으로 넘어가는 이 과정을 파스카라 부르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파스카 사건이라 합니다. 수난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유다와 베드로는 서로 너무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유다는 혁명 당원, 곧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세상의 힘과 무력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에게 수치를 안긴 로마제국은 용서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행위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큰 죄임을 알고 절망하여 자살합니다. 의인에게는 축복을, 죄인에게는 처벌이라는 율법종교의 기본 인식 하에서 자신의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았더라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사랑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지막 파스카 가르침을 보지도 못하고,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반면 세 번씩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뉘우치고 그분께 돌아가면 그분께서는 자신을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마지막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가 분하고 억울하고 화날 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대하라는 메시지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 숙여 우리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발을 씻으면 하느님 뿐 아니라 사람도 용서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31.    부활성야 미사 (2013. 3. 30. 토)

[창세 1,1-2; 창세 22,1-18; 탈출 14,15-15,1ㄱ; 이사야 55,1-11

바룩 3,9-15; 에제키엘 36,16-17ㄱ.18-28; 로마 6,3-11; 루카 24,1-12]

오늘 독서들은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맥을 짚고 있습니다. 뚜렷한 공식이 있습니다.

1독서: 창세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제품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완성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데, 곧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고 순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순명의 결과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내 뜻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나를 주관하시게 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운명은 달라집니다. 그러나 첫 인간들은 하느님께 불순명하고, 그 결과 낙원에서 쫓겨나고, 동생을 죽이고, 욕망의 탑을 세워 자신을 드러내는 죄의 역사(불행)를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그분께 순명하지 않았으므로 이 시점에서 실낙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2독서: 아브라함. 하느님께서는 분명한 구원의 길과 모범이 될 인간이 필요하다고 생각 하셨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이 하느님께 순명하여 변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조건 없는 믿음(순명)을 요구하셨습니다. 즉 인간이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30년 동안 자기 뜻을 내려놓고 그분께 순명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인정하시게 된 사건이 바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였습니다. 첫 단추를 잘 끼운 셈입니다. 순명으로 변화되는 한 사람의 영혼을 통해, 계시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3독서: 탈출기.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히브리인들을 해방을 시키셨을 때, 처음으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야훼)을 알려주셨습니다. 야훼는 비천하고 억압 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해방시키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히브리인들 가슴에 깊이 각인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누구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5독서: 이사야. “주님을 찾아라. 죄인은 자기 길과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내 생각과 너희 생각, 내 길과 너희 길은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너희 뜻과 생각을 접고, 주님께 순명하라는 말입니다.

6독서: 바룩서를 보면, “이스라엘아! 어찌하여, 네가 원수들의 땅에서 살며, 남의 나라에서 늙어 가느냐? 네가 어찌하여 죽은 자들과 함께 더럽혀지고, 저승으로 가는 자들과 함께 하려는 것이냐? 그렇게 된 것은, 네가 지혜의 샘을 저버린 탓이다. 네가 하느님의 길을 걸었더라면, 너는 영원히 평화롭게 살았을 것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헛된 나의 생각과 뜻대로 사는 것은 큰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7독서: 에제키엘. “우상들을 제거하면,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성령을 넣어주겠다.” 고 말합니다. 우상은 곧 하느님의 뜻을 찾아 순명하는 마음이 아니라, 내 뜻을 세우고 하느님이 내 뜻에 따라야 한다는 욕망이 밖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로마서: 바오로 사도는 죄의 지배를 받는, 자기 뜻대로 행동하여 하느님께 불순명했던 옛 인간 (아담)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 우리는 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과 일치하고 부활하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의 방식과 다르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당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위해 자신을 비우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영혼 안에, 성령이 충만하게 깃들이고 부활하는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는데, 하느님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처지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32.    레드 테이프 (2013. 4. 3. 수)

[사도행전 3,1-10; 루카 24,13-35]

오늘 1독서에서 어떤 불구자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자선을 청했을 때, 사도들은 은과 금이 아니라 가진 것을 주겠다고 하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자 그 불구자는 걷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행위와 불구자가 걸었다는 부분보다 사도들이 가진 것, 곧 성령의 은총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온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하느님께 순명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는 듣는 것입니다.

레드 테이프(Red tape)란 표현이 있습니다. 곧 중요한 일들이 제 때 처리되지 못하고 지연되어 곤란해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1800년도 초 스코틀랜드 역사가 토마스 카라일이 처음 사용한 어휘로, 정부가 (빨강색 끈으로 묶여있었던) 공식문서들을 처리하는데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것을 항의하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참전용사들이 정부로부터 보훈혜택을 받아야 했지만, 정부에서 주는 혜택과정이 (관료주의 때문에) 너무 느리고 지지부진했을 때 레드 테이프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말하자면 아쉽고 필요할 때, 바라는 바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고 지연될 때 사용되는 어휘가 레드 테이프입니다.

베드로나 요한은 그들이 인간인 한 레드 테이프가 있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레드 테이프 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분에게 청하면 그분께서는 들으신 것을 행하시 는데 결코 지체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선물인 성령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133.    뮤직박스 (2013. 4. 7. 일)

[사도행전 5,12-16; 묵시록 1,9-11ㄴ.12-13.17-19; 요한 20,19-3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오른 손을 얹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나는 영원토록 살아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영원히 사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영화 ‘뮤직박스’에는 라즐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2차 대전이 끝나고 헝가리에서 미국 으로 건너왔고, 미국에서 40년 동안 열심히 살면서 딸(유명한 변호사)과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 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어느 날 유대인 단체에서 라즐로를 전쟁범죄자인 미쉬카라고 고소하였습니다. 미쉬카는 2차 대전 때 헝가리 비밀경찰로써 나치를 도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인물이었습니다. 라즐로는 자신이 미쉬카가 아니라고 가족에게 알리고, 자기 딸(애니)에게 누명을 벗기기 위해 자신을 변호할 것을 부탁합니다. 법정심리에서 검사는 라즐로가 헝가리 비밀경찰 미쉬카라고 하였지만, 그 제시한 증거들이 결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라즐로는 무죄로 판명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애니가 헝가리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교통사고로 죽음)의 여동생 집을 방문 합니다. 그 여동생은 애니에게 전당표를 주면서(미국에서 사망한 오빠의 유품) 미국에 돌아가면 오빠가 맡겨놓은 물건을 찾아 보내줄 것을 부탁합니다. 애니가 전당포에서 찾은 물건이 뮤직박스였고, 그 안에서 아버지(라즐로, 미쉬카)가 무고한 사람들을 총살하는 사진들을 발견하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애니는 아버지를 찾아가 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진실을 요구했지만, 자신은 미쉬카가 아니라고 잘라 말합니다. 애니는 이제 나의 아버지는 죽었다고 절망하고는, 뮤직박스에서 나온 사진들을 검사에게 보내고, 아버지는 유죄를 받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아마도 대부분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떨쳐버릴 수는 없겠지만, 그냥 덮어버릴 것입니다. 그런 선택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니가 절망한 것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의 토양에서는 사랑이 싹을 틔우거나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진실을 그냥 덮어버린다고 해서 예전의 온전한 관계로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진실하지도 뉘우침도 없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뉘우치고 사망하는 것과 뉘우침이 없이 사망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망 후에는 영혼구령을 위한 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권이 박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뽑고,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잘라버리는 것이 영혼구령에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애니는 아버지의 영혼구령을 위해 옳은 것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보면, 애니가 아버지를 유죄로 만들 수 있는 결정적인 사진자료들을 검사에게 보냈던 것은 아버지가 미워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그냥 덮어버렸다면, 그런 선택에는 어떤 의의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부활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나는 영원토록 살아있다.” 우리가 부활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하도록 지혜를 청합시다.

 

 

134.  빅터 프랭클,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 (2013. 4. 14. 일)

[사도행전 5,27ㄴ-32.40ㄴ-41; 묵시록 5,11-14; 요한 21,1-19]

제1독서의 5장 27절에,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사도들은 이를 무시하고 복음을 전했으므로, 다시 체포되어 수모를 당합니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그 수모와 박해가 예수님 때문이라고 기뻐합니다.

사도들이 체포된 것은 그들이 했던 두 가지 설교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 메시아이시며,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분은 바로 유대인들의 하느님 야훼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유대교 지도자들이 무죄한 분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를 거스린 죄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두가이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금지령을 무시했습니다. 사도들은 풀려 나자마자 조심스럽게 행동하거나 자신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곧장 성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스승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가 박해와 죽음의 위협에도 복음을 전하는 그런 용기를 어디서 갖게 되었을까요? 3년 전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 많은 양의 고기를 잡았을 때, 그는 두려워하며 가급적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 후에 베드로는 가급적이면 그분께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로고테라피 창시자 빅터 프랭클은 2차 대전의 나찌 포로수용소에서 생존한 인물로, 그곳에서 수많은 동료들이 가스실로 보내어져 죽어가는 참혹한 상황에서, 일치감치 삶을 포기한 이들은 대부분 죽었지만 반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의미를 추구했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생존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참한 상황에서도 동료들을 위해 빵을 나누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갑자기 쓰러진 동료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으면, 고통스럽더라도 의미 있게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수도회 입회해서 자주 들었던 말이, 예수회원은 남을 위한 봉사에 불림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입니다(Man for other). 내 것도 제대로 못 챙기는데 남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깨달은 것은 남을 위한 삶에서 내 삶이 성장하고 의미를 찾고 기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기뻐하였다고 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135.    빠삐용. 스테파노 순교 (2013. 4. 17. 수)

[사도행전 8,1ㄴ-8; 요한 6,35-40]

영화 ‘빠삐용’. 먼 바닷가에 외롭게 떠 있는 섬, 절대고도의 수용소에 갇힌 주인공. 섬은 배가 들어오는 선착장 외에는 높은 절벽으로 형성되어 빠져나갈 수 없고, 더욱이 엄청난 파도가 그 섬을 수시로 때리고 있어서 탈출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탈출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섬을 수시로 때리는 엄청난 파도의 역류 덕분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섬의 절벽을 치고 순식간에 1킬로미터를 빠져나가는 큰 파도의 역류를 이용해서 절대고도를 탈출하는데 성공 합니다. 보기에도 끔찍한 역류가 가능하지 않는 탈출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즉 위기가 우리에게 (탈출과 해방을 위한) 은총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말입니다. 

스테파노 사건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큰 박해를 받았고,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대부분 예루 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좁은 팔레스티나를 떠나 세상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사건에서, 그를 돌로 죽이던 사람들의 옷을 맡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사울이었는데, 그가 회심하여 사도 바오로가 됩니다. 바오로가 스테파노 순교에서 놀란 것은 그가 비명횡사가 아닌 평화롭게 죽었다는 사실에서 혼동스러웠고, 급기야 다마스쿠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이 믿은 유대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한 하나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역류를 통해 절대고도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스테파노 순교사건을 통해 사울이 바오로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시련이라는 핀치에 몰렸을 때 예수님께 의지한다면 거기서 우리는 한 단계 더 크게 성장하는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136.    바오로의 불치병 가시 (2013. 4. 21. 일. 성소주일)

[사도행전 13,14.43-52; 묵시록 7,9.14ㄴ-17; 요한 10,27-30]

오늘 1독서(사도 13,14)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의 안티오 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고 기록합니다. 페르게는(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밤필리아 지방에 속하고,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는(터키 중부) 해발 1,100미터 고원지대에 있는 갈라디아 지방에 속합니다. 남부 페르게와 중부 산악지대로 이어지는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사이에는 깊은 계곡들이 있고, 강도와 산적이 많아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가기 편하고 덜 위험한 해안지역, 페르게에 머물지 않고,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로 간 이유가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갈라 4,13).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육신의 병이 계기가 되어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내 육신의 상태가 여러분에게 하나의 시련이었지만, 여러분은 나를 업신여기지 않고, 역겨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오로는 병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곳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코린토 2서 12장 7-8절에 바오로는 육신의 병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게 가시를 주셨다. 그것은 줄곧 나를 찔러대었다. 주님께 그것을 없애달라고 세 번 청했지만, 그 고통은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성서학자들은 이 가시를 불치의 두통으로 해석합니다. 곧 바오로는 소아시아의 낮은 해안지방에 창궐한 지독한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 두통은 불에 달은 쇠막대로 머리를 찌르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바오로가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로 간 것은 투통을 떼어내기 위해서 고원지대로 올라간 것입니다.

1독서 13장 43절에,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바오로는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힙니다. 시나고그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곳 유대지도자에게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당시 고대종교들은 성적으로 문란했고, 가정생활이 파괴되는 가운데 제일 큰 피해자가 부녀자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대종교는 높은 도덕적 수준과 윤리적 순결성을 요구했기 때문에, 많은 부녀자들이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들의 남편들이 높은 관직에 있었으므로, 유대지도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이용해 바오로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바오로는 투통을 겪고 박해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내고, 희망은 우리를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장 3-5절). 여기서 인내의 희랍어 휘포모네는 단순한 인내 이상의 것으로, 능동적으로 이 세상의 시험과 시련을 이기고 정복하는 것, 다시 말해서 굴복해서 휘둘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사물을 정면으로 대항하여 이기는 정신입니다. 곧 우리가 신앙 안에서 환난을 만나게 되면,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인내하며 더 강해지고, 더 순수해지고, 시련을 능히 견디는 하느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1950-70년까지, 스페인 예수회의 11개 관구에서 매년 700-800명이 입회하여, 수련을 받고 그 중 반이 선교사로 남미로 떠났습니다. 당시 스페인 젊은이들은 선교생활이 신앙 안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가치를 띤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성소주간을 맞이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바오로가 가졌던 이 휘포모네 정신을 간직하고 배양하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137.    처음 복음을 전한 희랍계 사람들 (2013. 4. 23. 화)

[사도행전 11,19-26; 요한 10,22-30]

사도행전 11장 19-21절을 보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글이 나옵니다. 키프로스와 키레네에서 온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였다는 구절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때부터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 5절에 스테파노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박해가 시작되어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다와 사마리아로 갔고 필립보가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베드로가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를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 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교회가 먼저 복음을 전했다기보다 코르넬리우스가 먼저 찾아온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평소 기도와 자선을 베풀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미 하느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전했던 그들이 누군지 명확하게 모르고 단지 아는 것은 그들이 키프로스와 키레네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뿐입니다. 안티오키아 공동체가 형성된 후 예루살렘 교회는 그 사실을 알고, 바르나바를 보내게 됩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가기 전에 먼저 안티오키아에 가서 희랍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던 그들의 이름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생명의 책에는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을 뿐 굳이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점에서, 이미 예수님께 가까이 간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138.    바오로와 마르코 (2013. 4. 24. 수)

[사도행전 12,24-13,5ㄱ; 요한 12,44-50]

1차 선교여행 때 여행 도중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마르코의 철없는 행동으로, 바오로가 그에게 반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2차 선교여행이 시작될 무렵 바르나바가 친척 마르코를 다시 합류시키려고 했을 때, 바오로의 반대로 심하게 다투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헤어집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연착륙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선하고 원만한 사람입니다. 이 사건 후 사도행전에서는 바르나바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골로사이서 4장 10절; 티모테오 2서 4장 12절; 필레몬서 1장 24절에서, 마르코가 바오로의 협력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화해를 한 것으로 보이고, 그 표시로 마르코를 자신의 협력자로 둔 것으로 추정됩니다. 복음에서처럼 사도들이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고 갈등을 겪는 현상은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최고의 선교 팀에서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Magis란 라틴어 형용사 표현이 있습니다(영어로 Better). 더 나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모인 동료들이지만 그렇다고 선교사로 투신한 삶이 마냥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공동체를 운영하는 방식이 다르고,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과 해결하는 방식 또한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함께 살아가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복음 선교지역은 사람들을 쉬게 하는 관광지 괌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갈등하고 싸우게 됩니다. 

그래도 사도들이 훌륭한 것은, 시간이 더디 걸리더라도 관계를 회복시킨다는 것과 하느님과 이웃에게 크게 봉사하기 위해 이전보다 관계를 더 훌륭하게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그러합니다.

 

139.    예수님 일상에서 하느님 찾음 (2013. 5. 1. 수)

[사도행전 15,1-6; 요한 15,1-8]

창세기의 말처럼, 노동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인간에게 죄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의미와 하느님을 찾기 위한,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게 하기 위한 초대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세주로 태어나 성장하시고 살았음에도 어떻게 30년 동안 그분과 함께 살았던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구세주이기 때문에 성장하시는데 뭔가 유별나고 특별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구세주는 아침에 아침 먹고, 점심에 점심 먹고, 저녁에 저녁 먹고, 배고프면 더 먹고, 배부르면 덜 먹고, 가족을 위해서 좀 더 일감이 많았으면 하는 기대에서 그렇게 되면 좋아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타까워하는, 우리와 똑같은 그런 평범한 삶을 사셨던 것 같습니다. 또 예수님 께서는 특별한 어떤 만나를 거저 얻어먹으면서 사신 것이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노동을 하셔야 했습니다. 특별하지 않게 우리와 똑같은 조건하에서 사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특별난 인물, 구세주이심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구세주는 우리의 일상과 다르게 유별난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일상 안에서, 나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결코 신앙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일상과 구분하여 유별나게 특별한 방법으로 찾고 만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일상과 구분되어서는 안 됩니다.

 

 

140.    부활하신 예수님의 다양한 발현. 야고보 (2013. 5. 3. 금)

[사도행전 15,1-8; 요한 14,6-1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케파에게, 열두 사도에게, 오백 명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다음에 야고보에게, 다른 모든 사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자신 바오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를 먼저 언급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신했습니다. 그런 경우, 웬만한 사람들은 미움과 증오로 대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시고, 그가 다시 일어서서 하느님의 일을 하기를 바라 셨습니다. 그런 용서와 위로가 없었다면 베드로는 파행적으로 괴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여기서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이며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친척, 야고보를 말합니다. 마르코 3장, 요한 7장에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미친 사람으로 오해하고 비난하고 적대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일조한 자신을 두고 크게 후회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고뇌하던 영혼에게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시기 위해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첫 번째 교황으로 로마에서 순교했고, 두 번째 교황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이가 바로 예수님의 친척 야고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원의대로 살지 못하므로 그분의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에게 하시듯이, 우리에게도 위로를 주시고, 용서하시고 자유롭게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141.    지복직관 (2013. 5. 5. 일)

[사도행전 15,1-2.22-29; 묵시록 21,10-14.22-23; 요한 14,23-29]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구원을 받을 때 그곳에는 오로지 하느님과 어린 양만이 있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은총이 인간을 혼동시킨다’는 교부들의 말이 있습니다. 곧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상태를 갖추지 못한 영혼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겪게 되는 시련과 고통을 말합니다. 영혼이 리모델링되는 과정, 곧 새로운 것을 구성하고 새우기 위해 기존의 틀과 구조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때의 고통은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그래서 모든 시련 안에는 구원의 희망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시련이 너무 커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할 수도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 맥락에서, 묵시록과 요한복음 저자는 그럼에도 계속 믿음으로 인내하기를 독려합니다. 시련으로 믿음이 흔들릴 때, 원수들은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고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죽음과 공포를 이기셨 습니다. 산모가 해산의 고통이 크지만, 아이를 낳는 기쁨으로 모든 고통은 잊게 됩니다. 묵시록은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이 마지막에 받을 큰 영광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에둘러 설명합니다. 예로, 다니엘 3장에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유대청년들은 불가마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영광의 상속).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가 완전히 형성할 때까지의 모든 진통의 과정을 담당하십니다. 시련을 통해 정화되면 그때서야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하느님을 보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그분의 현존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중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전과 같은 어떤 중재 없이도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지복직관(Beatific vision)이라 합니다.

묵시록은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기보다 그 사건이 지향하는 하느님의 숨겨진 의도에 중점을 둡니다. 역사적 사건 안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은 멸망과 파국이지만, 그것을 또 하나의 출발점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역사를 구원의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142.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준수 면제 (2013. 5. 5. 일)

[사도행전 15,1-2.22-29; 묵시록 21,10-14.22-23; 요한 14,23-29]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교회로 들어오면서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함께 했던 안티오키아 교회에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개종 전에 율법을 철저히 준수헀던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그리스도인 들도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개종했음에도 아직도 예전처럼 율법을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이방인들과 만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게 되면서, 어느 정도까지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친교를 이루어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율법준수의 의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공동체에서 분란이 일자,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의 결정을 듣기로 합니다(1차 예루살렘 공의회).

13절에서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의 최고 책임자(2대 교황)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친척으로 원래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했던 사람이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던 인물입니다 (2코린토15.7). 야고보의 판결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으며,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대신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켜야 할 몇 가지 사항들 곧 우상에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고, 불륜을 멀리하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음식과 그것을 먹는 사람의 마음은 부정하고, 유대인에게 피는 곧 생명이고, 생명은 하느님께서 관장하시므로, 피를 뺀 고기를 먹도록 권장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교회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은 형제자매라는 원칙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이런 결론을 편지로 써서, 반대 주장을 잠재우기 위해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아니라 유다와 실라를 통해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직접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143.    성자와 성령. 제도와 카리스마 (2013. 5. 8. 수)

[사도행전 17,15.22-18,1; 요한 16,12-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곧 나의 것이고,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5)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이러합니다.

교회는 제도와 카리스마라는 두 요소로 구별됩니다. 제도는 그리스도의 범주에 들고, 카리스마는 성령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제도라는 안정적인 요소들, 곧 성자에 의해 이루어진 성경과 성사들은 카리스마 곧 성령에 의해 실현됩니다. 제도적인 직무들은 본질적 으로 카리스마와 불가분의 관련을 갖는데, 그것은 교회봉사를 위해 성령의 선물, 카리스마를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3년 공생활 동안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의 진리가 자동적으로 인간을 구원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각자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열매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 실현되기까지의 모든 진통을 담당하시는 분께서 바로 성령 이십니다. 그래서 성자 제도는 늦고 보수적이고, 카리스마는 빠르고 진보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제도와 카리스마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이 있습니다. 바오로는 카리스마(성령)가 넘치는 교회 공동체들은 제도적인 차원(그리스도)에서 잡아주고 정리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1코린토 12,3). 제도와 카리스마는 상호보완적입니다. 제도가 없는 카리스마는 무분별해지고, 카리스마 없는 제도는 사람들을 교회를 떠나게 만듭니다. 제도는 건물로 비유하자면 구조물 뼈대에 해당하고, 카리스마는 사람이 살기 위한 그 나머지 모든 인테리어에 해당될 것입니다.   

카리스마는 언제나 제도를 넘어섭니다. 성령은 단순히 그리스도 사건을 모방하지 않고, 그 말씀(성자)의 실현을 위해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제도를 넘어 목적하는 바를 이룹니다. 카리스마는 제도에 묶여 있지만, 그러나 같은 방법 안에서 제도를 넘어서며, 제도와 카리스마는 종말 때까지 그 창조적인 긴장을 잃지 않습니다. 

 

 

144.    일신숭배사상 (2013. 5. 26. 일. 삼위일체 대축일)

[잠언 8,22-31; 로마서 5,1-5; 요한 16,12-15]

“내가 너희에게 아직도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고대 중동은 도시와 나라마다 서로의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일신숭배사상). 그래서 도시를 떠날 때는 자기 신에게 무탈하게 귀환하도록 기도하고, 다른 도시에 가면 그 도시의 신에게 무탈하게 지내도록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고향 우르에서 다른 신을 믿고 있었 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그런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 후 하느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고, 모세를 통해 10계명을 주시면서, 이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며, 지금까지 신으로 불렸던 다른 신들은 인간에게 생명도 구원도 줄 수 없는, 돌과 나무로 만든 피조물이며, 야훼 외에 다른 신들을 믿으면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유일신을 믿었던 유일한 민족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이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님께서 이렇게 증언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며, 아버지를 보는 것이 곧 나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을 언급하시면서, “내가 떠나면 나를 이끄셨던 성령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분명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성령은 당신과 다른 존재로 이해 하셨습니다.

이를 두고, 유일신 사상에 영향을 받은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어쨌든 하느님은 한 분이어야 하니까, 한 분이신 하느님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이후는 성령으로 역할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런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한 분의 하느님께서 영원히 홀로 독백하면서 사시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일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 다른 독립적인 존재라 말하면서, 삼위 하느님에게 페르소나(Persona. 위격) 개념을 사용합니다. 삼위는 수직적 위계질서가 아니라, 수평적 평등관계란 것입니다. 위격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두 타자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비우고, 개방하고, 나누면서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해서 무한하신 하느님과 그 사랑의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조금씩 점진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처음에는 도시와 마을의 신들을 통해 다양하게 하느님을 추구하도록 허용하셨고, 그 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일신 사상을 통해 세상을 창조한 유일한 창조주 하느님을 알도록 이끄셨고, 그 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의 하느님이 계시되면서, 인간이 어떻게 인격적으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을 점진적으로 드러내신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교사가 유치원학생에게 인내를 다하여 가르치듯이, 우리의 인식의 정도에 맞게, 우리 눈높이에 맞추어 당신에게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일신숭배사상-유일신사상-삼위일체사상은 하느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의 인식에 맞게, 우리의 눈높이에서 가르쳤던 방식이며, 여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구원의 도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야 하는지 하나의 화두를 던져줍니다. 나를 닫지 않고 비우고 개방하며 나눌 수 있다면,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얻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아직도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모래로 만든 구멍 안으로 바닷가 물을 다 담으려는 아이를 보면서, 삼위일체를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고 오로지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도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하느님이 아니시게 될 것입니다.

 

 

145.    세 번 죽음 예언. 예수님의 고독 (2013. 5. 29. 수)

[집회 36,1-2.5-6.13-22; 마르코 10,32-45]

방금 들은 복음 구절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독하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북쪽 가이사리아 지방에 몸을 감추고 계시다가 남쪽으로 내려오시면서 갈릴리를 거쳐, 유다를 지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걷고 계셨는데, 예수님께서 혼자서 앞서 가고 계셨고, 제자들은 뒤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가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 같이 보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게 되신다고 세 번 예언하셨다고 전합니다. 첫 번째는 단순한 발표였고(마르코 8,31), “사람의 아들은 예루살렘에서 원로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다(사흘 만에 부활).” 두 번째는 배신의 암시가 있었고(9,31),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의 손에 죽을 것이다.” 세 번째는 사람의 아들은 크게 능욕을 받고 채찍질 당하고 죽으시는 일이 일어난다(10.33)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제자들에게 위로를 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혼자서 결정하고 실행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고독하고 힘들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께서 당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46.    오병이어. 북예맨 (2013. 6. 2. 일. 성체성혈 대축일)

[창세 14,18-20; 1코린토 11,23-26; 루카 9,11ㄴ-17]

예수님의 기적 중에서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오병이어 기적뿐입니다. 루카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막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과 함께 조용히 지내시려고 벳사이다 근처로 가셨는데, 사람들이 뒤따라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쉬고 싶었지만, 따라 온 그들을 모른 체 하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있던 장소가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배고파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다녔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과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보통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자신들의 음식을 잘 나누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굶주리고 지친 상태라면 좀처럼 자기 음식을 남에게 내어놓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다 함께 나누어 먹는다면 모두가 먹고도 남았겠지만, 나누지 않는다면 음식을 먹지 못해 배고파하는 사람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음식들을 내놓았고, 그것을 본 어린 아이들도 따라하였고,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것들을 내놓았을 것입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서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변화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변화의 주체가 됨을 봅니다. 하느님의 구원방식은 그 분께서 은총을 주시고, 우리는 그냥 은총을 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면서 실제로 변화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기뻐하면서 삶이 충만하게 됩니다.  

미사를 거행할 때 사제가 빵을 쪼개는 것은 함께 나누어 먹기 위해서입니다. 감사기도를 드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음식을 쪼개는데, 하늘의 별 수처럼, 바다의 물방울 수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은총을 얻는 것입니다. 사제의 축복으로 빵이 성체로 변화되는 것은 은총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성체를 모신다면 우리는 질적으로 변화된다는 신앙입니다. 

성체를 모신 곳을 감실이라 하고 거기에 성체불이 켜져 있는데, 이것이 성당이 예배당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성체조배를 통해 참으로 많은 은총을 받게 됩니다. 2천 년 수도생활의 깊은 영성은 미사성제와 감실과 성체조배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개신교에서 수도생활의 전통이 이어지지 않고 잘 안 되는 이유는 사제에 의한 미사도, 감실도, 성체조배도 없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북예멘 대통령이 마더 테레사 수녀님에게 자기 나라의 나환자를 돌보도록 수녀님들을 청했 습니다. 지난 800년간 이슬람 국가가 그리스도교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한 적은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대통령에게 사제 한 사람이 갈 수 있도록 허락한다면 기꺼이 수녀들을 보내겠다고 답했다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도 그리스도를 줄 수 없습니다. 성체를 모시면 그리스도를 모시게 됩니다. 

떼제 공동체의 로제 수사님은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매년 유럽의 수십 만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젊은이들이 그곳에 모여 기도합니다. 떼제 공동체의 하루의 중심에는 미사가 있습니다. 한 번은 로제 수사님이 로마에 가서 교황님을 알현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했을 때, 교황님은 그에게 교회 일치를 위해 개종하지 말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로제 수사님은 이미 매일 미사의 영성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사를 드리면 마음이 편안하고, 드리지 못하면 무언가 의무를 다 하지 못했다는 불편한 느낌을 받습니다. 미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여행 이나 한국방문), 근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시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가톨릭 신앙 입니다. 그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합시다.

 

 

147.    사두가이파 부활거부 (2013. 6. 5. 수)

[토빗 3,1-11ㄱ.16-17ㄱ; 마르코 12,18-27]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언급을 하시니, 사두가이파들은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결혼한 첫째 아들이 죽어 둘째가 형수와 살아야 했는데, 유대율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일곱 아들 모두가 이 여자와 살게 되었다면 부활하여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질문하였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이 이렇게 불합리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웃기는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독서에서는 토빗과 사라가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은 열심히 살지만 불합리한 것에 고통스 러워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한탄합니다. 그래도 이 한탄이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죽었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거나, 이 삶의 연장이거나 수명을 초과하여 오래 사는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곧 변모이며 초월입니다. 변모와 초월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부활은 변모이지 변질이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하느님을 믿는 것, 선하신 하느님께서 결국 승리하시고, 선한 이들을 거두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말이 안 되는 불합리함에서 오는 고통과 시련에서도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고, 토빗과 사라처럼 믿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 다다르게 됩니다.

 

 

148.    예수성심 대축일 (2013. 6. 7. 금)

[에제키엘 34,11-16; 로마 5,5ㄴ11; 루카 15,3-7]

“착한 목자는 99마리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

1993년 소말리아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UN 평화유지군이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활동 하고 있었습니다. 소말리아 민병대가 난민을 위한 구호물자를 자주 탈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군헬기가 모가디슈 상공에서 소말리아 민병대가 쏜 로켓에 맞아 도시 중간 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미군은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보내는데, 소말리아 민병대 수천 명과 치열하게 싸우게 됩니다. 미군의 구출부대가 포위되어서, 또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미군이 파견됩니다. 결국 단 몇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미군의 사상자가 20여 명이 죽게 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소말리아 민병대는 천 명 이상이 죽습니다.

미군의 경우, 전투에서 실종한 병사들은 반드시 구출하고, 사망한 병사들의 시신과 유골들은 반드시 수습하여 조국으로 데려간다고 합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의 시신은 결코 적지에 방치되어서도, 적군에게 유린되어서도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예수님의 착한목자 정신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6.25 때 사단 깃발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아직도 한국에 그 미군사단의 일부가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미군의 정책과는 다르게 예수님에게는 적군과 아군의 구분이 없습니다. 사지에서 고통 당하고, 도움이 필요한 영혼에게는 언제나 구원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적십자의 박애정신은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149.    개종한 바오로의 의미있는 행적 (2013. 6. 9. 일)

[열왕 하 17,17-24; 갈라디아 1,11-19; 루카 7,11-17]

2독서 1장 17-19절을 보면, 아라비아,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시리아-길리기아 지방의 타르수스. 도시와 장소들은 개종 후 바오로의 의미 있는 행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느님에게서 선택받았고, 이방인들을 구원에로 이끄는 빛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면 먼저 기존의 신들을 경멸하고 그들의 나라와 인연을 끊고 부모와 자녀와 친구들까지 멀리하도록 했습니다. 

바오로가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한 후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홀로 아라비아에 있으면서 사람들 보다 먼저 하느님을 만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 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갔다가, 지금은 그들이 믿는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갔습 니다. 그곳은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갔던 장소였습니다. 다마스쿠스 사람들은 바오로가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장소는 바오로가 방문하기에 아주 불편한 장소였습니다.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종교지도자들과 바오로의 스승과 친구들이 활동하는 곳입니다. 그들은 유대교를 배교한 바오로를 비난하고 해치려고 했습니다. 동시에 예루살렘 에는 바오로에게 피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바오로가 자신들의 뿌리를 뽑기 위해 거짓으로 개종한, 위장한 사람일지 모른다고 의심했습니다. 바오로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굉장히 동요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디도 동행)(갈라디아 1.23-2.10). 그리고 바오로는 시리아-길리기아 지방(타르수스)에 갔습니다. 타르수스는 바오로가 자란 곳이고, 소년과 청년시절에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던, 어쩌면 가장 행복하고 열정적으로 공부하면서 미래를 꿈꾸던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바뀌어서, 친구들은 배교한 그를 경멸했을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것을 알고 그곳으로 갔고, 그는 이미 예수님 때문에 비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이 여정을 통해, 자신이 일생동안 믿었던 유대종교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대교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한 한낱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음을 안 것입니다. 그러면서 1독서에 나오는,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처럼, 자신의 종교신앙의 근본이 무너지는 재앙을 겪으면서 깊은 혼란과 좌절을 겪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언제나 이스라엘 중심(자기-중심)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들, 곧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위해 잠시 등장하다 사라지는, 없어도 되는, 별 가치 없는 이차적인 존재들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모두가 소중한 존재들이지, 무가치하고 이차적인 존재란 없습니다. 그러 니까 하느님의 섭리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메시아가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해 탄생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유대인들과 바오로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부르시고, 과거에 성장했던 장소로 이끄시고, 그곳에서 하느님 의 섭리(구원계획)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초대하십니다. 회심은 예전의 동일한 사건과 인물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동일한 사건을 내가 보지 못했던, 보고 싶지 않았던 다른 면들을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과 사물과 사건을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또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다면 처한 많은 어려움(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50.    바르나바가 바오로를 협력자로 부르다 (2013. 6. 11. 화)

[사도행전 11,21ㄴ-26.13,1-3; 마태오 10,7-13]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바르나바를 파견합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 많은 이방인들이 들어왔는데, 이단을 방지하고, 교회 분열을 막고, 또 유대종교와 희랍문화 사이에서 교통 정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바르나바가 찾은 이가 바로 바오로였습니다.

바오로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바르나바는 바오로를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연착륙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배신한 바오로를 해치려고 했으므로, 그는 밤에 바구니를 타고 피신해서 고향 타르수스로 갔습니다. 바르나바는 9년 동안 고향에서 지내고 있었던 바오로를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위해 불러들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티오키아 교회의 안정과 일치를 위해 인품이 훌륭한 바르나바를 선택하고, 안티오키아 교회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자신보다 더 적합한 인물, 바오로를 선택하였습니다. 곧 바오로가 훌륭한 이방인 선교사가 되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바르나바였습니다. 자신도 훌륭하고, 또 교회봉사를 위해 훌륭한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언뜻 보면, 바르나바가 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 했던 주연이었습니다. 성령의 뜻을 찾고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주연입니다.

 

 

151.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2013. 6. 13. 목)

[1코린토 3,15-4,1.3-6; 마태오 5,20ㄴ-26]

“자기 형제에게 성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면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진다.”

 

희랍어, 오르게(orge)는 뿌리차원에 정착되어 있는 분노를 말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잊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고, 화해를 거절하고, 기회만 되면 복수하려고 하는 분노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상하게 하는 분노를 품지 말고 뽑아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보에 해당하는 희랍어, 라가(raca)는 상대를 멸시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몰지각하고 늘 실수를 저지르고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에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오만한 자가 상대를 무시할 때 쓰는 말입니다. 멍청이에 해당하는 희랍어, 모로스(moros)는 정신적인 바보가 아니라 도덕적인 바보를 말합니다. 한 사람을 비도덕적인 바보로 낙인찍고 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오랫동안 뿌리 깊게 품고 있는 분노는 영혼에 무척 나쁘고 해를 끼칩니다. 남을 멸시하는 언사는 더 나쁘고, 이웃의 명예와 신용을 파괴하는 악의적인 말은 살인에 해당할 정도로 더욱 나쁘다는 말입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 관대하지 않다면, 세 가지 다 해당될지도 모릅니다.

 

 

152.    카프와 Kapwa (2013. 6. 15. 토)

[1코린토 5,14-21; 마태오 5,33-37]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 행복의 인류학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의 일부입니다.

“홍콩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필리핀 여성들(14만 명 중 절반은 대학 졸업, 기혼자)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낯선 나라 홍콩까지 왔다. 그들은 비좁은 홍콩아파트 욕실이나 부엌, 심지어 다락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사소한 실수로 주인에게 심한 말을 듣고 얻어맞기도 하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한다. 홍콩에 가면 큰 건물과 건물사이에 출퇴근과 걸어 다닐 수 있는, 한 시간 산책도 가능한 고가다리들이 길게 연결되어 있다. 그 거리에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모여 담소와 정보를 나눈다. 그냥 누워 자는 사람들도 있다. 찡그린 얼굴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 행복이 세계 최고의 수준 입니다. 어느 필리핀 가정부는 말합니다. “나는 월급 400달러를 받지만 행복합니다. 그러나 연봉 1백만 달러가 넘는 내 주인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코노미스트지는 필리핀 토속어(타갈로어)로 카프와라고 하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풀이하자면, ‘더불어 살고, 남을 위해 살기’ 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삶의 환경은 열악하지만,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나누는 카프와를 통해 행복을 느끼고 유지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많은 것들이 우리가 만들기도 하지만, 그냥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은 내가 선택한 것들이 아니지만, 주어진 것을 거부할 것이냐, 수용할 것이냐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어지는 것들을 수용하겠고, 그것을 나 혼자가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누고 주님과도 함께 하겠다는 것이 카프와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53.    경계해야 할 사항 (2013. 6. 20. 목)

[2코린토 11,1-11; 마태오 6,7-15]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결코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예수님과 다른 성령과 다른 복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니까 별로 유쾌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는 코린토 교회를 미혹하는 자들과 비교하면서, 자기 권위를 확인시켜야 했고, 자기 스스로를 추천하고 자랑해야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한 것일까요? 복음의 내용을 왜곡하고 변조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이단적 가르침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순수한 전통과 왜곡된 전통. 당시 수사학과 웅변술에 뛰어난, 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교회공동체의 교사들로 활동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달하기보다 자신들의 능력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고, 사도들이 전달하는 내용과 다른 것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왜곡 전통은 전달하는 자가 자신을 비우지 않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선호도에 따라 취사선택 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신앙생활을 쉽게 하려고, 불편하고 힘든 부분들을 완화시키거나 혹은 아예 빼버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154.    관점 (2013. 6. 28. 금)

[창세 17,1.9-10.15-22; 마태오 8,1-4]

이레네오 교부가 활동했던 2세기 당시 참으로 다양한 문화와 학문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유대와 희랍과 다양한 이방문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같지 않고 달랐는데, 이것이 교회 안에 다툼과 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교부들은 사도로부터 전승된 정통 가르침 그대로를 보존하고, 그것을 동시대에 정확하게 가르치고, 다음 세대에 오류 없이 계승하는데 온 힘을 다 바쳤습니다. 이 일로 많은 교부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학문적 교류와 대화를 통해 보다 통합적인 인식을 얻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소중한 가르침을 어느 특정한 개인의 세속적인 가치와 이해 관계에 따라 내용을 바꾸거나 왜곡시킨다는 점입니다. 사도와 교회로부터 전승되는 신앙에 순명하기보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교부들은 사도들의 신앙 그대로를 보존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가르치고, 그것을 오류 없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처럼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자신을 비우는 가난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155.    사마리아인들 (2013. 6. 30. 일)

[열왕 상 19,16ㄴ.19-21; 갈라디아 5,1.13-18; 루카 9,51-62]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고 있을 때 자신들을 환대하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의 불손한 태도에, 제자들이 저들을 불질러버릴까요?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는 수백 년 동안 서로 원수였습니다. 

에즈라서 4장 3절에 보면, 우리도 당신들과 함께 성전을 짓게 해 달라는 청에, “당신들은 우리와 함께 성전을 지을 수는 없다. 성전을 짓는 것은 우리만의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갑이 쯔루빠벨과 여수아, 을이 사마리아인).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정복 되었고, 포로로 잡혀간 약 2만 명 외에 남아있었던 사람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생긴 혼혈들이 사마리아인들입니다. 

기원전 538년에 귀양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들이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바로 무너진 성전을 재건축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이 귀환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찾아와 우리도 다윗의 자손이며, 성전 재건축에 자신들도 참여하게 해 달라고 청했지만 그들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신명기에 의하면(7장 3절) 이스라엘은 이방인 과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결혼을 통해 배우자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환자들은 잡혼을 금하게 하고, 이미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여자들마저 내쫓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을 제외시켜서라도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도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지만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을 이방인 취급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박해시대 때 많은 이들이 배교했습니다. 박해가 끝난 후 배교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 했을 때, 그것을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곧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므로 온갖 불이익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박해 때는 배교를 하고,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된 후 교회로 돌아오려는 사람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중국의 애국교회와 지하교회. 애국교회 사제들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만들어진 주교에 의해서 사제가 되었기 때문에, 엄밀히 법적으로 말하면 로마 교황청 소속의 천주교 사제가 아닙니다. 반면 공산당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는 지하교회의 사제들은 교황청 소속의 사제들입니다. 애국교회 사제들은 공산당에 충성 서약을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유롭게 교회 일을 하지만, 지하교회 사제들은 숨어서 지내야 합니다.

애국교회의 사제들이 로마 바티칸에 충성을 하고, 중국 땅에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려고 한다는 말도 들립니다. 그런데 지하교회는 애국교회를 인정하지도 대화조차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떤 입장이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한, 예수님 에게서 그 답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동시에 잘못을 뉘우치는 이들에게 관용(관대함)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질러버릴까요’ 하던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죄인이 비록 큰 잘못을 저질렀 더라도 뉘우치면 조건 없이 받아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이 6월 예수성심성월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홀대를 받았던 사마리아인들과 초세기에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고 했던 배교자들, 이 시대의 중국대륙에 애매하게 존재하는 애국교회의 사제들과 신자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156.    한나와 성모님 (2013. 7. 2. 화)

[창세 19,15-29; 마태오 8,23-27]

성모님은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곧 성모님은 예수님 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해 주신다고 믿으십니다.

사무엘 상 1장에 보면, 한나가 등장합니다. 그의 남편 엘카나에게는 한나와 프닌나, 두 부인이 있었습니다. 프닌나는 아이가 있었지만, 한나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프닌나가 한나를 몹시 괴롭혔고, 그럴 때마다 한나는 분하고 슬퍼 아무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성전에 가서 주님께 아이 하나만 허락해 달라고 청하고, 아이를 주신다면 그 아이를 평생토록 당신께 바치도록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성전 사제 엘리가 한나에게 야훼께서 들어주실 것이니 안심하고 돌아가라고 하니, 한나는 그 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습니다. 이런 태도는 자신이 청한 것을 보장받아서가 아니라, 주님이 무엇인가를 해 주실 것이라는 신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기도에 대한 불만과 결과에 대한 초조함이 없습니다. 

성모님의 태도도 그러합니다.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 그 다음에 어떤 불만 스럽고 조급한 반응이 없습니다. 술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리고, 아들이 무엇인가를 해 주시리 라고 신뢰하면서, 그냥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을 술로 만드는 기적을 바랐던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157.    마니 풀리테 (2013. 7. 7. 일)

[역대 하 24,18-22; 로마 5,1-5; 마태오 10,17-22]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축일입니다. 우리가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기리는 것은, 그분이 마카오까지 가서 어렵게 공부하고 조선의 첫 사제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부활신앙을 사람들에게 알렸기 때문입니다. 순교란 죽음으로써 하느님을 증언하는 행위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에 순교가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지 한 예를 제시 합니다.

9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 국영방송에서 ‘삐오브라’라는 마피아와 관련된 전 국민이 보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1992년에 마피아 담당 판사, 죠반니 팔코네가 마피아에 의해 살해된 사건에서 기인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마피아에 대항하는 이들 대부분이 다치거나 죽습니다. 1982년에 경찰청장이었던 델라 키에사가 암살당했고, 1987년에는 부체스타, 1992년에는 판사였던 죠반니 팔코네, 같은 해에 그의 후임자인 파올로 보르셀리노가 암살당했습니다.

마피아의 본고장인 시실리 섬은 지리적으로 계속된 외세의 침입과 지배, 착취에 시달렸는데, 그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가족, 친지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마피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와 재계와 결탁하여 크게 성장하였고, 지금은 마약과 매춘, 무기판매, 그리고 금융 조작 에까지 관련하는, 이탈리아에서는 통제가 불가능한 암적인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마피아는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보복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에 마피아에 대항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Manipulite 운동(깨끗한 손. 정치 정화운동)을 이끈 피에트로 검사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마피아에 대항하는 그들의 희생에서 이탈리아인들은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시실리 섬에서 청소년들 중심으로 마피아 반대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악에게 굴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순교는 희망을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신앙을 증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했던 행위의 결과로 지금 우리가 존재합니다. 성인들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김대건 신부님 역시 일신상의 이유로 배교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지만, 생명의 원천이며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하느님을 거부할 수 없었 습니다. 순교는 자유로운 선택에서 이루어집니다.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이미 가려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금 현재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158.    환난과 승리 (2013. 7. 25. 목)

[2코린토 4,7-15; 마태오 20,20-28]

인간은 그 자체 교만하지 못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고통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변화와 우연의 지배를 받는 환경에 의존된 존재일 뿐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라는 보물이 약하고 가치 없는 질그릇에 담겨 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승리의 개선장군이 지나갈 때, 군중들은 찬양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뒤를 돌아보아라, 너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개선장군 앞에서 포로와 노획물이 먼저 지나가고, 그 다음에 개선장군과 군인들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코린토 2서 4장 16-18절에 바오로는 “세상에서 겪는 어떠한 환난도 다음 세상에서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그 영광은 인간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은 잠시 뿐이며 곧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 즉 하늘의 것은 영원하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늘에 것에 대해 지금은 희미하고 확신이 들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는 ‘어렴풋이(glimpse)’ 지나가는 그 영광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정신을 짓밟고 마음을 유린하는 그런 일들이(박해와 시련) 바오로에게 일어났습니다. 모두에게 좌절이었지만, 그는 그런 것을 보지 않고 마음과 정신을 오로지 주님께 두었습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제베데오의 두 아들처럼 현실적인 대가를 청하지는 않게 됩니다.

 

159.    모세의 너울 (2013. 7. 30. 화)

[탈출 33,7-11.34,5ㄴ-9.28; 마태오 13,36-43]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서 내려왔을 때, 백성들은 그 사이에 금으로 만든 수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모세는 십계명판을 백성들 위로 던져버렸고, 십계명판은 깨져버렸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다시 받기 위해 산에 올라가 하느님과 함께 밤낮으로 40일을 지냈습니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너울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율법을 건네 받는 40일 동안 하느님과 함께 지냈던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피조물이 창조주로부터 받은 빛이어서 항구한 것이 아니라 곧 사라지는 빛이었습니다. 모세는 매일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점차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슬퍼서 모세는 얼굴에 너울을 가렸습니다(탈출 34. 28-35).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실체가 아닌 그림자입니다. 얼굴 빛은, 말하자면 우리가 실체와 함께할 때 주어지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얼굴에서 빛이 사라진다고 해서 슬퍼하고 얼굴을 너울로 가리기보다 실체이신 하느님과 함께 그분 안에 늘 머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160.    소유에 대한 가르침 (2013. 8. 4. 일)

[코헬 1,2.2,21-23; 콜로새 3,1-5.9-11; 루카 12,13-21]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금전에 관한 한 여하한의 논쟁에도 끼어들기를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청에 따라 제자들에게 물질에 대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은 자기 일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에는 ‘저에게, 나의, 나의 것’이란 어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품사를 소유대명사가 아니라 침략 대명사라고 지칭합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물건에 집착하는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기보다 그것을 확실히 자기 안에 둠으로써 행복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자기 목숨(영생)을 재산과 맞바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인들의 격언에, 돈은 바닷물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마실수록 갈증은 더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의 욕심처럼 재화는 가질수록 더 많이 갖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젊고 야망에 찬 한 젊은 이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젊은 이가 “저는 세상 경영이란 큰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노인은 “그러고 나서는?”  “큰 재산을 이루겠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리고 나면, 은퇴해서 번 돈으로 여생을 편히 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글쎄요. 언젠가 죽게 되겠지요.” 죽고 난 다음에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젊은 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합니다.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는 끔찍한 충격 속에서 가장 무서운 사실에 부딪히게 됩니다.

 

1독서는 말합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세상에서는 언제나 모든 것이 새롭지만, 그분께서 부재하시는 세상에서는 아무리 소유한 것들이 차고 넘치더라도 무익하고 무의미하다는 말입니다. 현실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자기 목숨(구원의 가치)과 바꿀 수 있을 정도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161.    야훼 하느님 (2013. 8. 9. 금)

[신명 4,32-40; 마태오 16,24-28]

신명기 4장 34-35절에 보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쓰신 신이 있느냐?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주신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히브리 백성을 해방시키신 후, 제일 먼저 하신 것은 히브리인들을 해방시켰던 신의 이름은 야훼시며,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신 유일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곧 이집트에서 자신들을 구출한 신이 바알이나 다른 어떤 신이 아니라, 야훼라는 이름을 가진 하느님이시라는 것, 세상에는 여러 신들이 있는게 아니라 오로지 한 분이신 참 하느님, 당신 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신들이라 불리는 다른 신들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당신께서 창조 하신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피조물일 뿐입니다.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시고 진정으로 존재하시는 유일한 하느님의 신비를(우리를 위해 죽고 수난하는 고통의 신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면, 우리는 기꺼이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논리적으로 분자와 같은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 고통을 당하고 죽으시기까지 하신다는 신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는 가능합니다.

 

 

162.    아브라함의 전설, 안탈라니아 (2013. 8. 11. 일)

[지혜 18,6-9; 히브리 11,1-2.8-9; 루카 12,32-48]

오늘 2독서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그 믿음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런 전승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전설 첫째: 아브라함이 눈부신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태양을 하느님 으로 여기고 절을 하였다. 그런데 태양은 저녁에 서쪽으로 졌고, 밤이 되어 달과 별이 동쪽에서 솟아올랐다. 아브라함은 그 달과 별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고 절을 하였다. 그런데 아침이 왔을 때, 달과 별은 지고 다시 태양이 떠올랐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것들은 하느님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지배하시는 분을 찾기 시작하였다.

 

아브라함에 대한 전설 둘째: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숭배했고 직접 우상들을 만들어 팔았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아버지 대신 점포에서 일하는데, 50-60세 손님들이 우상을 사러 왔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하루 만에 만들어진 것을 섬기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하였다. 70대 노인이 우상을 사러 왔을 때, 아브라함은 당신보다 더 젊은 신을 섬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 했다. 또 어떤 여자가 그 가게의 우상들에게 바치기 위해 음식을 가져왔을 때 아브라함은 어떤 우상의 손에 몽둥이를 들려주고는 그 가게의 우상들을 다 부수어버렸다. 돌아온 아버지가 왜 그랬냐고 물으니, 그는 이 신이 혼자 음식을 독차지하려고 다른 신들을 부순 것이라고 하니, 아버지는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럴 수 없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때서야 아브라함은 “맞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출발하였고, 천막에서 살면서 이국인처럼 옮겨 다니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11장 13절에 희랍어 크세노이는 이국인을 뜻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이국인은 늘 어려운 입장에 서 있는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가난해도 자기 나라에서 사는 것이 외국에서 사는 것보다 나았습니다. 

11장 9절에 파로이케인 즉 외국인 체류자는 사회적으로 노예취급을 받았던, 바빌론이나 이집트에 살던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외인세를 지불했고, 장소의 허가를 받아 거주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선조들은 일생 동안 자기 부족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인간 사회로부터 눈 밖에 난 존재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결코 그분에 대한 그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훌륭한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처음 그들 부부가 아이를 낳는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땅에 엎드려 웃었고 (창세 17,17), 사라도 마음속으로 웃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들은 인간 최초의 반응은, 너무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른 하느님은 실현 불가능한 약속을 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인간이 바라면서도 불가능하다고 해서 포기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대체적으로 우리가 꾸는 꿈은 삶에서 실현하기 어렵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이삭을 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믿음을 두기 시작합니다.

희랍어 안탈라니아라는 표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말합니다. 그 누구도 인간인 한, 자신의 목숨과 바꿀 세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평소에 크게 손해를 보아도, ‘아이구 살았다.’ 하면서 다행이라고 안도의 숨을 쉽니다. 살았으니 다행이라는 말입니다. 왜?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으니까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아들, 이삭의 목숨을 당신을 위해 바치라고 하십니다. 기득권들을 다 버리고 이국인처럼 살았고, 그 가운데 아들을 주시어 겨우 뗄 수 없는 정을 나누게 해놓고, 이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안탈라니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목숨을 주신 이가 자신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분이셨기 때문입니다.

 

163.    신의 아그네스 (2013. 8. 15. 성모 몽소 승천)

[묵시 11,19ㄱ.12,1-6ㄱㄷ.10ㄱㄴㄷ; 1코린토 15,20-27; 루카 1,39-56]

영화 ‘신의 아그네스’에서 관상수도회의 수련 수녀가 아이를 낳아 그 아이를 탯줄에 묶어 죽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수녀원에 상담심리학자가 파견됩니다. 심리학자는 당연히 수녀가 남자로 인해 아이를 낳았다고 여겼지만, 아그네스 수녀는 계속 비둘기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성장기에 수녀가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판단한 박사는 마지막으로 원장 수녀의 허락을 받고 아그네스 수녀에게 최면술을 걸기로 합니다. 그 과정에서 수녀의 몸에서 오상이 나타납니다. 오상은 교회 역사에서 아시시 프란시스코 성인이나 비오 사제 등 몇몇 성인에게만 나타난 예수님께서 수난 때 받으신 다섯 부분의 상처로, 하느님의 사람으로 인정되는 표시로 이해 됩니다.

심리학자는 그 오상에 크게 놀라면서도 묻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아이를 임신했다고 치자, 그러면 아이는 왜 죽인 것인가 물으니, 수녀는 답하기를 “나 같은 영혼에게 구세주를 주신 것은 명백히 하느님의 실수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아이를 하느님께 돌려드리기 위해서 아이를 죽였습니다.” 수녀가 아이를 키울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구세주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인간 욕정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성장은 각자의 영혼 안에 성령을 통해 예수님이 형성되는 것인데,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선택이 적지 않게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영혼 안에 예수님의 씨앗이 착상되거나, 잉태되거나 탄생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유산되고 그 결과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을 낳지 못하는 신앙의 불임상태가 될 것입니다.

아그네스 수녀와 다르게 성모님은 아드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까지,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선택하면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영혼에는 예수님의 형상이 뚜렷이 형성되었고,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성령의 도움으로 나의 예수님을 잉태해야 합니다.

 

 

164.    정화와 평화 (2013. 8. 18. 목)

[예레미야 38,4-6.8-10; 히브리 12,1-4; 루카 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진짜가 아닌 가짜를 말하고, 불을 지른다는 말은 그 가짜를 태우고 불순물을 걸러내기 위한 정화의 의미로 이해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불을 지르시는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상태에 놓여있을 때 그 잘못된 상태를 놔두기보다 오히려 갈등과 고통으로 몰아가신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인생과 선택의 결과는 불행이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시는 바가 아니므로, 더 큰 불행을 당하기 전에 문제의 현실을 확실하게 정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인생에 축복과 평화를 허락하시기보다 불을 질러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잭 캘리라는 신문기자의 칼럼 내용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한 소년이 가까스로 구한 빵을 자기대신 동생에게 주었다. 그는 굶어 죽기 직전이고 주위에 독수리가 그 소년이 죽기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 아름답고도 슬픈 장면을 두고 그 기자는 우리가 어디에다 평화를 주고 어디에다 불을 질러야 할까하고 묻습니다. 소년을 굶어 죽게 만드는 이 세상에게는 불을 질러야 하고,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동생을 살리려는 그 소년에게는 평화(위로)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복음적인 것에 불을 질러야 하고, 복음적인 것에는 평화를 허락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불을 지르는 행위는 곧 옳지 않은 것과 맞서 싸우는 것이고, 그런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165.    땅의 백성들 (2013. 9. 15. 일)

[탈출 32,7-11.13-14; 1티모테오 1,12-17; 루카 15,1-32]

루카복음 15장은 신약성서에서 잘 알려진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리 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자들과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죄인이라 규정하고 일괄적으로 땅의 백성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땅의 백성에게 돈을 맡기거나, 그들 에게서 필요한 증언을 받거나, 여행할 때 동반하거나, 그들을 손님으로 받거나, 사업상의 거래를 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과 상종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마도 40-50년 전에 바로 이곳 조지아 주에서 일어났던 백인과 흑인들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장벽과 같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인 땅의 백성들과 식사를 같이 하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땅의 백성들이 벌을 받아야 하늘이 기뻐한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지금까지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는 그런 하느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죄인이 참회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와 용서를 구하면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수 있지만, 그러나 먼저 죄인을 찾으러 다니시는 하느님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팔레스티나 땅은 목초지가 많지 않고, 특히 가파른 벼랑과 삭막한 황무지에서 양들을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공동체 전체가 공동으로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양을 잃어버리면 몇몇 목자들은 양을 찾으러 가고, 나머지는 마을 어귀에서 그들을 기다렸다가 목자들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데리고 오면 모두가 함께 기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잃어버린 양과 은전을 찾고 기뻐하듯이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166.    공자의 논어, 천명 (2013. 9. 18. 수)

[1티모테오 3,14-16; 루카 7,31-35]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으로 비길 수 있는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다. 세례자 요한이 금욕과 단식을 하면 왜 하느냐고 하고, 사람의 아들이 먹고 마시면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훌륭한 오케스트라처럼 연주할 곳과 멈추어야 할 곳을 구분해야 하듯이, 와야 할 분이 누구인지 또 왜 그분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장단을 맞추지 못하고 엇박자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버스가 지나간 후에 손을 흔드는, 때를 놓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엇박자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공자의 논어에 이런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 살에 자립하고, 마흔에 사물의 이치에 의혹을 갖지 않게 되고, 쉰에 천명(天命)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예순에 모든 사리에 잘 통하게 되고, 일흔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규범을 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이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육십에 그 하늘의 뜻에 자신을 맞추게 되는데, 오십 이전까지의 모든 수행은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함이고, 칠십에 하늘의 뜻을 실현하여 군자(君子)를 이루는데, 군자란 도를 추구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천명에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늘의 섭리를 알고 그 뜻에 동참하고 조율할 수가 있다면, 모든 사리에 통하게 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규범을 넘지 않게 되듯이, 우리의 삶 역시 하늘의 뜻에 따라 꽃을 피우고 큰 열매를 맺게 됩니다.

 

 

167.    부자의 죄 (2013. 9. 28. 일)

[즈카르야 2,5-9.14-15ㄷ; 루카 9,43ㄴ-45]

부자를 라틴어로 디베스(Dives)라 합니다. 그냥 부자가 아니라 아주 비싼 자주색 고운 베옷을 입고, 값비싼 요리를 먹고, 매일 같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잔치를 여는 큰 부자를 말합니다. 아모스가 표현하듯이, 디베스는 비스듬히 누워 흥청망청 마시며 요셉의 집안이 망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수저나 포크, 냅킨이 없어서 음식을 손으로 먹었습니다. 부자들은 두꺼운 빵의 두꺼운 속으로 손을 닦아 식탁 아래에 버렸습니다. 나자로가 먹은 것이 그저 부스러기가 아니고 손을 닦았던 빵이었습니다. 거지 나자로는 전신에 종기가 나 있었고, 몹시 쇠약해서 자기 몸을 핥으러 오는 개들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고 비참했습니다. 둘 다 죽었고, 나자로는 아브라함 곁에, 부자는 고통 중에 있습니다. 

부자는 나자로에게 떨어진 빵을 못 먹게 하거나, 자기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고의로 몹쓸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단지 나자로라는 불쌍한 현상을 그저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았을 뿐입니다. 사치스럽게 사는 동안 나자로의 굶주림을 너무나 당연시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자의 죄는 어떤 나쁜 짓을 했다기보다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즉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제 4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4계명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서 단지 노동 금지만이 아니라, 자선 등 해야 할 도리를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탈출20.8).

아브라함은 부자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위로해야 할 슬픔이 있고, 채워주어야 할 궁핍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할 고통이 있음에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죽은 사람이 돌아오더라도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살아있을 때 보지 못했던 하나의 현실을 본 것입니다. 결국 파국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 그는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연말결산하듯이 불가피하게 우리가 살아왔던 대로 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 나오는 약은 청지기는 부당거래로 쫓겨나게 되자, 자신이 몰린 파국을 즉시 알아차리고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의 빚들을 탕감해 주고 자신이 살 궁리를 모색하였습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일어난 것들을 빨리 알아차리고, 구원의 현실에 맞게 자신을 수정하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끔 이런 꿈을 꿉니다. 시험문제를 반도 풀지 못했는데 시험지를 거두고 있거나, 도착하기 전에 타야 할 기차가 떠나는 그런 참담한 꿈 말입니다. 한 마디로, 한 눈 팔고 딴 짓 하다가 식겁하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정신을 뻔쩍 차리게 됩니다. 

 

 

168.    역설 (2013. 10. 2. 수)

[이사야 66,10-14ㄷ; 1코린토 7,25-35; 마태오 18,1-5]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여쭈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제일 비참하고 슬픈 것 중 하나가 불쌍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전쟁이 많았던 시기 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더 고통을 받았습니다. 여자 아이를 낳으면 쉽게 버려 지고, 포주에게 팔려가고, 노예와 같은 물건으로 취급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부르셨을 때 가리키는 지시대명사가 중성이었습니다. 주석가들은 여자 아이를 가리키는 것 같다고 보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쓰던 것을 그대로 변경 없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 아이를 불러 세우시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강하고 빠르고 목소리 크고 많이 벌어 성공하고, 사나운 사람들이 앞서가는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고 취약하고 작고 수줍어하며 아직은 자아가 불안정하지만 그럼 에도 선하고 옳은 것을 신뢰하고 듣고 사랑을 받고 하면서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런 여자 아이를 받아들이고 배우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일찍 과부가 되신 성모님도 어린 여자아이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169.    요나와 니네베 (2013. 10. 9. 수)

[요나 4,1-11; 루카 11,1-4]

하느님께서 요나를 불러서 가라고 하셨던 도시 니네베는 아시리아 대제국의 수도입니다 (고대 중동에서 아주 사악했던 제국). 하느님께서 요나를 부르셨지만, 요나는 피해서 고래 속으로 숨었습니다. 아마도 니네베나 아시리아 사람들이 요나에게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원수였기 때문에 도망을 갔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따라오시어 요나에게 네가 진짜 살고 싶으면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요나는 부르심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회개할 리 없는 니네베가 철저히 심판받는 것을 보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니네베 중심에서 회개하라고 하니 왕과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회개하였고, 그것에 하느님께서 전격적으로 니네베를 용서하십니다. 이에 요나는 악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정의롭지 않다는 것).

요나가 화를 낸 이유는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보면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이 점에서, 요나의 부르심은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서였지만, 사실은 요나 자신의 회개를 위해서, 그러니까 용서할 수 없는 원수(아시리아 사람들)를 용서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용서할 수 없다면, 그 만큼 내가 원수에게 매어있는 것이어서 나 자신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율법교사의 질문처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기쁘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서”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170.    밤늦게 빵을 청함 (2013. 10. 10. 목)

[말라키 3,13-20ㄴ; 루카 11,5-13]

밤늦게 친구에게 빵을 청하는 사람들.

팔레스티나에서는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주로 저녁 늦게 여행을 떠났고, 그래서 거의 한 밤중에야 자기 친구의 집에 당도했습니다. 손님 접대는 언제나 그들에게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빵은 집에서 하루에 필요한 양만큼 구웠기 때문에, 밤늦게 도착한 손님에게 제공할 빵이 종종 부족했을 것입니다. 동방에서는 낮에는 집 문을 항상 열어두지만, 저녁에는 불가피한 용무가 아니면 이미 닫힌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사상은 이스라엘이 노예생활에서 구출되었던 출애굽 사건까지 거슬러 갑니다 (탈출기 11.11).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내 백성을 보내라!”하고 이집트 왕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때부터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하느님께 호소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절체절명의 위기 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도움을 호소하고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71.    일 포스티노. 나아만, 열명의 나환자 (2013. 10. 13. 일)

[열왕 하 5,14-17; 2티모테오 2,8-18; 루카 17,1-19]

오늘 1독서를 보면, 시리아의 군사령관 나아만이 나병의 치유를 위해 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사 를 만났습니다. 엘리사가 그에게 요르단 강물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치유가 된다고 하니, 나아만은 너무 단순한 치료법이라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결국 부하의 요청으로 강물에 몸을 씻어 자신의 더러운 피부병이 낫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이에 그는 감격하여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를 찬양하겠습니다.”

복음에는, 열 명의 나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들의 나병을 고쳐달라고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치유해 주시고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나환자가 사회로 복귀할 때에는 사제로부터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확인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사마리아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땅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두 얘기에 등장하는 두 이방인 모두가 탄성을 지르는 경험을 합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기쁨의 탄성을 지르게 하고, 땅에 엎드리면서까지 감사하게 만들었을까요? 복음의 19절에,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일어나다’ 동사는 부활과 관련되는 동사입니다. 루카복음 15장 24절의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첫째 아들과의 대화에서 집으로 돌아온 둘째아들을 두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동사와 같은 동사 입니다. 그러니까 ‘일어나다’, ‘살아나다’는 것은 곧 구원되는 부활 체험을 의미합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 우체부)’에서, 칠레의 사회주의자며 유명한 시인이고 정치인 이었던 파블로 네루다는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았을 때 칠레를 떠나 이탈리아 남쪽에 있는 작은 섬 칼라 디소토에 머물게 됩니다. 그 섬에는 마리오라는 순박한 청년이 네루다의 편지들을 전하는 임시 우체부가 됩니다. 마리오는 네루다의 시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여자를 꼬시는 그의 시를 이용해 사랑하는 베아트리체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오는 거의 매일 네루다를 만나면서 점차 시의 세계에 빠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네루다 시를 흉내 내다가 어느 덧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표현하게 됩니다. 외부에서 부과되는 무엇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본 세상을 표현하는 자유를 구가하면서 스스로 탄성을 자아냅니다.

에페소 2장 10절에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품의 희랍어가 ‘포이에마’ 곧 영어 ‘포임(poem. 시)’의 어원입니다. 우리가 시라면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시인이 되십니다. 우리는 냉정하고 위엄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시인이신 하느님을 만나면 놀라운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그냥 떠나버린 9명의 나환자는 나병이 나았다는 감사와 탄성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자신들의 치유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그냥 인격적이라기보다 거래관계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하는 것을 취득하면 그 뿐이고, 나머지는 어찌되었든 상관없이 돌아보지 않고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과 나아만의 탄성은 단순히 나병이 나은 것을 넘어서 마치 시가 시인을 만나듯이 하느님을 인격적인 만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탄성은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72.    성경 기록의 영감 (2013. 10. 20. 일)

[이사야 2,1-5; 로마 10,9-18; 마태오 28,16-20]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복음과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디서 들을 수 있는가 질문합니다. 영감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디모테오 2서 3장 16절에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 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신약성경은 세 단계를 거치며 기록되었습니다. 첫째 단계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직접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기억 속에 담고 있었습니다. 둘째 단계는 예수님 승천 후 제자들이 그것을 구전으로 전달하고 부분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부활사건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 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깊이 인식하였고, 그 시각으로 3년의 공생활을 재해석 하면서 복음을 부분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셋째 단계는 구전과 글로 기록된 것들을 한 곳에 수집 정리하면서 복음서가 편집되었던 시기입니다. 복음서는 듣는 사람과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달리 편집되었습니다. 즉 팔레스티나 안과 밖에서 살았던 유대인들과 희랍문화에 영향받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복음이 다양하게 편집 되었습니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욕구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고 기록되었음에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같은 복음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성사 저자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영감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영감은 구체적이며 실재(實在)하는 것으로써 진리를 기록할 때 인간 저자의 의지와 마음에 직접 영향을 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는 성령의 움직임 입니다. 곧 성경 저자의 영혼을 비추고, 인격적으로 감동시키며, 정신적 활동에 하나의 변화를 일으키고, 기록하는 행위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저술에서 하느님께서는 원리적 원인(principal cause)이시고 인간은 도구적 원인 (instrumental cause)이 됩니다. 곧 하느님께서 인간 저자의 의지와 재능에 영향을 주시는 첫 저자이시고, 인간은 둘째 저자입니다. 이것은 구두로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하에 저자가 복음 내용의 본질을 상실하지 않은 채 저자의 지식과 믿음의 정도에 따라 글로 기록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셨던 것, 그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이 그것을 전하고 기록했던 것, 성서 저자들이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들을 수집하고 편집 하면서 복음서를 저술한 것,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복음의 본래 의미와 깊이를 알아듣는 것은 바로 성령의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셨던 하늘나라의 복음내용 그대로를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기도 안에서 성경을 대할 때,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을 느끼게 하고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분이 바로 성경 저자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를 독특하고 특별하게 이끄시고, 예수님의 제자들 못지 않게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4세기의 성서학자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 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데 유익하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173.    준비 (2013. 10. 22. 화)  

[로마 5,12.15ㄴ.17-19.20ㄴ-21; 루카 12,35-38]

복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설명하자면, 중동 아랍인들은 긴 옷이 활동에 방해가 되어 일할 때는 옷자락을 허리띠로 허리에 묶었습니다. 당시 전기 시설이 없었으니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항상 기름을 준비해야 하고, 등잔의 심지는 불에 잘 붙도록 손질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언제 영원한 존재가 우리를 부르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잘 준비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않은, 준비가 덜 된 경우라면 결코 칭찬 받지 못할 것입니다. 성인들이 위대한 것은 해야 할 것을 뒤로 미루는 법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부산 금정산에는 2백여 개의 사찰들이 있습니다. 산 하나에 그렇게 많은 절이 있는 것은 바로 예측할 수 없는 기후로 바다에서 수많은 어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이다. 그래서 이미 죽은 어부들을 위한 진혼제와 먼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이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들과 비교해서 암선고를 받은 암환자는 오히려 형편이 나은 것은 아닐까요?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보다 언제 죽을지 안다면 그래도 죽음을 준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운명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 소환될지 모르니 준비해야 합니다.

 

 

174.    아날루시스 (2013. 10. 27. 일)

[집회 35,15ㄴ-17.20-22ㄴ; 2티모테오 4,6-8.16-18; 루카 18,9-14]

디모테오 1,2서는 바오로가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디모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사목서간). 바오로는 어떤 지역의 신앙공동체의 책임자를 타모테오로 내세우고,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당부합니다. 서간의 특징적 표현은 “내가 전해 준 것(위탁물)만을 보존하고 가르치고 전승해야 한다.” 곧 복음의 정통성은 절대로 바꾸거나, 가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애의 마지막 시기의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4.6). 당시 관습에 따르면, 식사 중에 포도주 잔을 채우고 신을 향해 헌신과 희생을 맹세했습니다. 곧 처형될 바오로는 자신을 주님께 맡기고자 합니다. 바오로는 죽겠지만, 그러나 자기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4.6). 아날루시스. 이 말은 달구지나 쟁기에서 동물의 멍에를 벗긴다는 뜻입니다. 배를 정박시키는 로프를 푼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바오로는 바다 중에 가장 깊은 바다인 죽음을 통과하여 하늘 나라로 가기위해 출항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배를 묶은 로프를 푸는 시기가 왔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에게 죽음이란 이 삶에서 짊어졌던 족쇄를 풀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안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4,7). 싸움(아곤)은 곧 경기장 에서 쓰는 말입니다. 운동선수가 최선을 다하고 자기가 가진 마지막 힘까지 다 쏟았을 때 그 경기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갖게 되는 깊은 만족감을 뜻합니다.

 “달릴 길을 다 달렸다.” 무엇이든 시작은 쉽지만 마무리가 어렵습니다. 목적하는 바가 진정 가치가 있다면 그 만큼 방해와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옆으로 빠지지 말고 끝까지 달리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당시 희랍에서 올림픽에 참여한 선수들은 신에게 두 가지 맹세를 했습니다, 즉 최고의 경기력을 위해 10개월 이상 훈련받겠다는 것과 승리를 위해 비열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도 처음 약속했듯이 죽음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4.14). 바오로는 생애 마지막에 많은 제자들이 그의 곁을 떠나는 배신을 느꼈습니다. 법정 심리과정에서 바오로를 변호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시편 22장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고, 나를 도울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수난 때의 예수님께서 겪으셨듯이 바오로에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로마 법정에 선 바오로에게 내려질 재판의 결과는 죽음뿐이었습니다. 세상의 판결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하느님의 판결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사람들은 그를 버렸지만, 하느님께서는 바오로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노병이다. 제대 특명을 받았으니 이제 싸움은 젊은 사람들에게 맡겨야겠다.”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위대한 전사 바오로는 이제 자기 무기를 내려놓고, 디모테오로 하여금 자기 대신에 무기를 들고 전력을 다해 싸우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곧 죽게 될 노병의 삶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없고 대신 무척 평화스럽습니다. 신앙을 잃지 않고 끝까지 완주한 영혼들에게 보이는 모습입니다(병자성사에서 자주 목격하고, 위로를 받음). 우리도 이렇게 마감되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175.    종들에 대한 왕의 신뢰 (2013. 11. 20. 수)

[마카베오 하 7,1.20-31; 루카 19,11ㄴ-28]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기 위해 먼 고장으로 떠나기 전에 종들에게 미나를 나누어주고 돌아올 때까지 잘 관리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합니다. 기원전 4년에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가 다스린 왕국은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필립보와 아켈레오에게 분할됩니다. 아켈레오가 왕위를 받으러 로마에 갔을 때 유대인 50명의 사절단이 로마에 가서 그가 왕위를 받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고, 결국 그는 왕이 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무엇을 의도하신 것일까요? 종들에 대한 주인의 신임입니다. 종들에게 돈을 주고 떠나면서 돈을 자유롭게 쓰도록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훌륭하신 것은 간섭도 감시하지도 않우시고, 하고 싶은 대로 그들의 재량에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나누어준 것은 그들이 작은 일에 충실한지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재화 활용을 통해, 주인은 종들이 자신과 자신이 목적하는 바에 충실히 기여하는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작은 일에 충실하지 않으면 왕이 되어 돌아온 후 더 큰 일을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충실한 종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그냥 먹고 즐기도록 재화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보다 의미있고 중대한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고의 찬사는 모두를 위해 가치 있고 의의가 있으며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중책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이라는 말을 들을 때입니다. 주어진 어려운 미션을 성공했을 때의 보람과 기쁨은 큽니다. 작은 일에 충실하지 않거나 준비되지 않으면, 그 영혼에게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중요한 미션을 맡길 수 없습니다.

 

 

176.    아들의 소문 (2013. 11. 21. 목)

[즈카르야 2,14-17; 마태오 12,46-50]

어떤 맥락에서 성모님이 미쳤다고 소문난 예수님을 찾으러 오셨는가?

가족의 결혼식과 장례식, 그리고 명절을 제외하고 성장한 자녀들이 모이는 경우는 드뭅니다. 자기 인생이 있고, 학교와 직장에 따라, 또 배우자에 따라 집을 떠날 수밖에 없고, 플로리다, 밴쿠버, 보스턴 등으로 흩어져서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서는 가족 간의 유대가 친밀하고 물리적으로 가까워서 서로 많은 것을 공유했고, 자녀들이 부모와 가까이 살고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불명예와 추문은 그가 속한 가족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습니다. 율법은 가족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일상에서 늘 행했던 예식이 안식일 준수와 정결 예식과 음식 규정이었습니다(유대인들의 정체성 상징).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전통 예식들을 비판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위는 가족의 유대와 안정을 손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걱정되어 아들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집으로 가자고 했을까요? 아무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많은 행동과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해 불안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집으로 데려가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도 아셨을 것입니다. 그냥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입니다.

 

 

177.    안티오쿠스 왕, 밀레니언 베이비 (2013. 11. 23. 토)

[마카베오 상6,1-13; 루카 20,27-40]

페르시아의 안티오쿠스 왕은 평생을 무력으로 남의 땅을 점령하고 남의 것을 빼앗았습니다. 그런 그의 강력한 군대가 패하면서 실망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자기 벗들을 불러 놓고 후회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에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버렸다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단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쓸모 있고, 사랑 받는 사람이었는데…  나에게 불행이 닥쳤고, 나는 큰 실망을 안고서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왕은 자신을 돌보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무력으로 점령하고 소유하고 무고한 이들을 죽였 으므로 그래서 그의 말년은 비참하게 끝난 것입니다.

매기는 여자 복싱선수입니다. 자신의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미 한물 간 코치를 스승 으로 삼아 복싱을 시작합니다. 짧은 시간에 매기는 복싱기술을 배우고 성장합니다. 그리고 첫 시합에서 상대를 KO로 눕혀버립니다. 그것을 기화로 그는 자주 시합을 나가 이겨서 돈을 벌기를 욕심 내게 됩니다. 매기가 시합에 나갈 몸이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았음에도 시합에 나가려는 무리한 행동을 보고 코치는 매기에게 먼저 자신을 돌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매기는 승리해서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시합을 해야 한다는 고집을 꺽지 않습니다. 승승 장구를 하던 어느 날 매기는 어느 시합에서 불의의 일격을 맞아서 몸 전체가 마비가 되어 불구가 됩니다. 드러누운 매기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만 이미 늦은 것이었습니다.

매기는 순리대로 살지 않고 무리를 했고, 말하자면 자신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결국 돌아온 것은 파국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제대로 돌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78.    영지주의 (2013. 11. 24. 일)

[사무엘 하 5,1-3; 콜로새 1,12-20; 루카 23,35ㄴ-43]

2독서의 배경이 되는 영지주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신적인 것(영적, 빛, 부드럽고)이 아주 높은 위에서 유출되어 까마득히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굳어지고 물질화되고 어두워지는데 이것이 타락입니다. 반면 위로 올라 갈수록 부드럽고 밝은 구원인데, 인간은 유출의 중간 어디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구원되려면 아래가 아닌 신적인 방향인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위에서 아래 사이에 무수한 단계들이 존재합니다. 단계들마다 잠금장치가 있고 그것을 풀어야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지주의에 의하면 예수의 가르침은 너무 단순 소박해서 그 잠금장치를 열 수 없기 때문에 보다 더 정교하고 비밀스러운 지식이 필요하고, 그 지식(그노시스)은 오직 소수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수수께끼처럼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단계마다 풀 수 있는 열쇠는 특정한 지식의 소유자들에게만 주어 졌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은 결코 타락한 물질(인간의 육체)을 입을 수 없다. 신이 육신을 입고 물질화된 것 자체가 타락임으로 구세주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는 타락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영지주의자들과 다르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이라 부르는 것은 당신 영광을 위해 우리를 희생시키는 우리 위에 군림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위해 조건 없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당신을 희생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이분이야 말로 세상의 왕이시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왕이 아닐까요?

우리는 왕직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왕이란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들의 구원과 안전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인물을 말합니다. 졸병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달아납니다. 우리는 왕직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왕직을 예수님을 통해 배웁니다.

 

179.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 (2013. 12. 1. 일)

[이사야 2,1-5; 로마 13,11-14ㄱ; 마태오 24,37-44]

오늘 1독서를 보면, 이사야는 미래에 이루어질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에 대해 언급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로부터 기원전 721년에, 남 유다는 바빌론으로부터 587년에 멸망 하였습니다. 멸망하게 된 이유를 살핀다면 대림절 기간에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세 가지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아시리아가 바빌로니아, 시리아 등 주위의 약소국가들을 정복하면서 유다의 장래가 불투명 해졌습니다. 반아시리아 운동에 유다가 참여하길 거절하자 동맹국들은 유다를 공격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기에 이릅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유다의 왕 아하즈가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하려고 했을 때 예언자 이사야가 등장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진정하고 겁내지 마라. 아시리아는 연기 나는 두 횃불의 끄트머리에 불과하다. 아시리아는 곧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아하즈는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하고, 아시리아 신의 제단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웁니다. 아하즈는 유다의 생존을 위해 신앙쯤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하즈 사망 후 왕이 된 히즈키야는 아시리아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마침 이집트와 주위 동맹국들이 아시리아를 공격하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이에 이사야는 지금은 아시리아에서 벗어날 때가 아니며 이집트와의 동맹은 오히려 큰 재난이 된다고 경고합니다. 히즈키야는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였고, 이집트 동맹군은 아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유다는 온전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아시리아의 왕 사라곤이 죽자 히즈키야는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바빌론과 동맹하려 했습니다. 이에 이사야는 그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아시리아는 곧 멸망하게 된다고 예언 합니다. 그러나 히즈키야는 바빌론 동맹군과 함께 아시리아에 대항합니다. 그러나 크게 패하면서 예루살렘마저 함락 당할 처지에 놓입니다. 이때 아시리아는 예루살렘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지만 히즈키아는 아시리아가 결코 예루살렘을 함락하지 못한다는 이사야의 말을 듣고 성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던 아시리아 진영에서 역병이 돌아 떼죽음을 당합니다. 아시리아 왕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고, 자기 아들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섭리)에 지극히 무감각한 왕들에게 크게 실망합니다. 유다를 위한 올바른 정책은 아시리아에 속하거나 반아시리아 동맹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망하고 백성들이 귀양살이하게 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홍수의 난리를 겪듯이 불행한 일을 겪기 전에, 그러니까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가 미리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성장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있습니다. 내 생각과 원하는 바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계획대로 하는데 있습니다. 내 뜻에 하느님께서 따라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운명적으로 실패하는 사업에 내 전 재산을 투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구세주 탄생을 보게 됩니다. 무딘 신앙으로는 마구간에서 탄생하는 구세주를 볼 수 없습니다. 이 무감각을 일깨우는 일이 바로 대림절 기간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180.    집의 비유 (2013. 12. 5. 목)

[이사야 26,1-6; 마태오 7,21.24-27]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 그래서 나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잠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폭풍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토대 위에 서 있다.” (잠언 10,25)

예수님께서 실제 집을 지으셨던 경험자로써 집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세도나처럼 모래가 많고 물이 금방 스며들기 때문에 물이 많이 흐르고 거센 격류가 흐릅니다. 팔레스티나는 지형과 계절에 맞게 다가올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확실한 토대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난관 중 하나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듣지도 않으니,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는 실천해야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라는 말씀에 순명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명을 얻는데 유일하고 확고한 기반입니다.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듣지도 실천하지도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실 것입니다. “강물과 바람이 휘몰아치자 그 집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181.    마리아, 아담과 하와 (2013. 12. 10. 화)

[이사야 40,1-11; 마태오 18,12-14]

원죄 없이 탄생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마리아가 우리와 아주 다르게 매우 특별한 은총을 받았고, 신앙의 모범이 된 것도 마리아가 특혜를 받았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 말고도 원죄 없이 잉태된 인물들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들입니다. 원죄 없이 창조된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특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선택하는 자유 의지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자유 의지란 곧 축복을 선택할 수 있지만 동시에 어리석게도 죄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것은 마리아가 자유 의지를 갖는 인간인 한,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지어 구세주를 키울 수 없을 만큼 타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 쪽에서 들어놓은 일종의 보험으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마리아가 하느님의 계획을 계속 진행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마리아의 역할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인류 구원을 위한 계획을 전적으로 인간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것은 구세주 탄생을 위한 것이지, 마리아 자신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계획대로 구세주의 어머니 역할을 너무나 잘 모범적으로 수행하셨습니다.

 

182.    바오로 사도와 로마서 (2013. 12. 22. 일)

[이사야 7,10-14; 로마 1,1-7; 마태오 1,18-24]

오늘 2독서는 로마서의 시작입니다. 바오로는 로마서를 기록하기 전에 가 본적이 없는 로마 공동체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기원 후 58년, 코린토에서). 왜 로마서를 쓴 것인가요?

바오로 사도는 스페인에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저명인사와 지성인들 중에 스페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시인 루칸, 콜루멜라, 위대한 웅변가 퀸틸리안, 철학자 세네카 등이 있었습니다. 동방에서 이방인 선교사로 복음을 전한 바오로는 이제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 지방을 지나 스페인 등 서방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스페인을 세상 끝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로마를 스페인 선교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곳으로 서신을 보내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글을 읽게 하고, 주위의 공동체에서 돌려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훗날 자신이 로마에 가게 되면 이들의 도움으로 스페인 선교를 준비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쓰게 된 이유입니다.

바오로가 로마서를 기록할 때의 상황을 말하자면, 당시 박해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 살렘을 떠났고, 예루살렘 공동체가 재정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여러 공동체에서 후원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했습니다. 바오로가 그 일을 담당했고, 직접 돈을 예루살렘 공동체에 전달했어야 했는데, 예루살렘에는 바오로를 해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3장, 바오로를 살해하기 전에는 결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던 40명의 결사대. 로마로 가는 카이사리아 항구까지 호송하는 로마 군사만도 470명에 달함. 보병 200명, 기병 70명, 경무장 병 200명)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갔고, 그곳에서 체포되어 로마총독에게 넘겨집니다. 그 후 다시는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하고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결국 바오로는 스페인에 가지 못했습니다.

바오로가 쓴 로마서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의(義)라는 개념인데, 이것을 달리 표현 하자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말하고, 유대인에게 첫째가는 관심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상실하면 축복도 평화도 얻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율법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각을 달리합니다. 

곧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아는 것(발견)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아들은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종으로 농장에서 일하는 것).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신나고 기뻐 하십니다. 그것으로 끝이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이미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가 중국인에게 성 모자상과 십자고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성모자상은 좋아했지만 십자고상을 두고는 매우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성모자상의 배경에는 십자고상(피에타상)이 있습니다. 피에타상은 우리가 잘못되기를 바라거나 잘못했어도 그 잘못을 뉘우치면 하느님께서는 이유불문하고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인류 구원을 위해서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면, 이제 나를 위해서 그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시고, 나에게 어떻게 접근하시고, 나에게 어떤 놀라운 사랑을 베푸시는 지를 발견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83.    성탄전야 미사 (2013. 12. 24)

[이사야 62,1-5; 사도행전 13,16-17; 마태오 1,1-25]

마태오 복음서의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얘기는 좀 지루하지만, 오늘 강론은 이와 관련 하여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족보는 기억하고 전하기 쉽게 인물들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세 그룹으로 나누어서 한 그룹에 14명씩 묶어서 마흔 두 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족보는 유대 역사의 세 단계를 나타냅니다. 첫째 단계는 다윗까지의 역사입니다(이스라엘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한 가장 위대한 왕). 둘째 단계는 이스라엘의 수치와 비극과 멸망과 관련하고, 바빌론 귀양살이까지의 역사를 다룹니다. 셋째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꿈은 창조된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자유의지로 자기욕심을 채웠으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죄의 역사 안에서 계속 망가지고 비극으로 끝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노아와 아브라함과의 계약에서 하느님의 의지를 엿봄). 하느님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사건을 마련하십니다.

메시아 탄생에 직접 기여한 인물들의 이름에는 여자도 있고 이방인도 있으며, 심지어 예리고성의 창녀였던 라합도 등장하고 문제 있던 여자들까지도 등장합니다. 여자는 유대 사회에서 비천하고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아침 기도문에서 이방인이나 종이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한 것을 감사하게 여겼을 정도였으므로, 당연히 그들의 족보에 여자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을 죽이지 말고 이집트로 가는 대상에 팔자고 제안한 형제인 유다의 며느리 타마르는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아이 둘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하지 않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바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위대한 왕 다윗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고, 솔로몬은 또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감된 족보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의인과 죄인 사이에 차별과 구분이라는 장벽이 다 무너지고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끝나는 족보의 역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합니까?

창세기 40장 8절에 보면, 요셉이 모함을 받아서 파라오의 술 시종장과 같이 감옥소에 있었 습니다. 시종장이 자주 꿈을 꾸지만 자기 꿈을 해석해 줄 사람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결국 요셉이 꿈을 해석해주지만 사실 꿈을 해석한 이는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꿈을 해석하고 실현하실 수 있습니다.

 

동일한 역사를 두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사가 전개됩니다. 죄의 역사로도 볼 수 있고, 은총의 역사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역사로 볼 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역사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희망을 엿볼 수도 있고 절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고통스러운 현실을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삶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나의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러나 보는 시각은 달리할 수 있습니다. 회심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없던 것이 아니라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을 은총의 빛으로 보게 되면서 닫힌 마음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곧 부활의 시각으로 우리는 마음을 고쳐먹으면서 화해하는 길을 찾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시각으로 역사의 본질을 보고, 주어지는 꿈을 해석하고,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구세주 탄생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184.    앙드레 마티유와 요셉의 꿈 (2013. 12. 29. 일)

[집회 3,2-6.12-14; 콜로새 3,12-21; 마태오 2,13-15.19-23]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콜로3,15)

앙드레 마티유(1929-1968)라는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다섯 살 때 이미 자신이 작곡한 곡으로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던 천재 음악가였습니다. 비평가들은 이렇게 평했습니다. “앙드레가 모차르트를 능가할지는 알 수 없지만, 모짜르트가 앙드레 나이에 이처럼 위풍당당하고 멋진 연주를 남긴 적이 없었다.” 위대한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는 “앙드레만이 나의 계승자며, 위대한 작곡가가 될 수 있다.”라고 할 정도로 앙드레는 천재 음악가였습니다.

그런 앙드레가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죽음이 비극적이었던 것은 부모의 지나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연주회 시작 전에 부모는 아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밤 우리의 미래가 달렸어, 알았지?” 이에 앙드레는 부모님은 늘 자신에게 “팔아 넘길 꿈만 심어줬다”고 탄식하였습니다. 팔아 넘길 꿈이란 돈과 영예로 환산되어야 의미를 갖는 꿈을 말할 것입니다. 결국 팔아 넘길 꿈을 위해 연주를 하다 보니 음악은 무겁고 지겨워지고,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실망과 좌절이 오면서 앙드레는 일찍 요절하게 됩니다.

유대 율법에 의하면, 자녀들은 아버지의 강한 지배 하에 있고 (Patria Potestas), 그래서 자녀 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노예로 팔수도 있고 죽일 수 있는 법적인 권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문화적 환경에서 살았던 요셉은 아기 예수를 두고 얼마든지 그런 욕심을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가장으로서 언제까지 목수로만 살 수는 없었으므로 아들의 힘을 이용하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자기 꿈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면 자기 식으로 자녀를 간섭하고 통제하게 되는데, 심한 경우에 자녀는 크게 실망하여 부모를 잃게 됩니다. 유명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주의 기도에서 “우리 아버지”라는 부분을 언급할 때마다 어려웠다고 고백합니다. 아버지는 루터에게 늘 엄격하였고, 그 상처로 늘 하느님을 두렵고 무서운 분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요셉은 아기 예수를 어떻게 키웠을까요? 복음에는 꿈 이야기가 두 번 나옵니다. 이집트로 피난을 갈 때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성가정을 이룬 후부터는 자기 생각보다 꿈에서 천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콜로새서 3장 15절에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이 ‘다스리게 하다’라는 동사는 운동 경기 중에 승패를 좌우하는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정확하게 판결하는 심판과 관련하여 쓰는 용어입니다. 즉 예수님을 우리의 심판자로 지명하고 그분에게 결정을 맡긴다면 우리는 결코 잘못될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아버지로써 아기 예수를 두고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거나, 자기 욕심을 위해 아들 예수에게 팔아넘길 꿈을 심어주거나 하지 않고, 늘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평화로 마음을 다스리면서 아기 예수를 돌보고 성장을 시켰을 것입니다.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듯이 예수님을 보면, 요셉 성인께서 얼마나 자신을 비우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185.    명분 없는 전쟁. 람보 (2013. 12. 31. 화)

[1요한 2,18-21; 요한 1,1-18] 

요한1서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글을 쓰는 이유는 여러분이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기 때문이고,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영화 ‘람보’는 전쟁의 참혹성을 고발하는 반전영화입니다. 월남에서 돌아온 후 람보가 로키 산맥의 시골에 사는 옛 전우를 찾아 옵니다. 친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마을을 지나 는데, 보안관이 람보를 수상하게 여기고 마을을 떠나라고 합니다. 떠나기를 거부하자 보안관은 람보를 체포합니다.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범죄자처럼 난폭하게 다룰 때 그는 베트남 포로 수용소에서 잔인했던 고문들이 기억되면서 경찰서를 탈출하여 산으로 달아납니다. 보안관들이 추격하며 총을 쏘는 가운데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람보는 공격 본능이 살아나면서 보안관을 죽이게 됩니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모든 도로가 차단되고, 많은 경찰들이 동원되고, 기자들이 몰려옵니다.

경찰들은 람보를 살인자로 규정하고 사살명령을 내리지만, 인간병기로 훈련된 람보는 오히려 경찰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TV를 통해 이 사건을 접한 람보의 옛 상관이 그를 찾아옵니다. 람보가 그에게 전쟁터에서의 죽음의 두려움이 되살아나고 옛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가서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는 외로움과 허무함을 말하며 어린애처럼 하염없이 웁니다. 옛 상관은 “작전이 끝났다.”고 하니, 람보는 “나에게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쟁에서 돌아 왔지만, 아무도 나를 환영하지도 보호해 주지도 않는다. 나에게 내 얘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없다.”고 말합니다. 숨김도 과장할 것도 없이 그저 그대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필요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스승이기도 하시지만 우리의 벗으로 우리의 얘기를 들어주십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군들에게 정신적인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열대성 기후, 무더운 정글, 군인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는 적들의 공격, 그리고 명분 없는 전쟁이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명분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요한은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글을 쓰는 이유는 여러분이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한 세력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86.    자연계시와 전 인류의 구원 (2014. 1. 5. 일)

[이사야 60,1-6; 에페소 3,2.3ㄴ.5-6; 마태오 2,1-12]

“이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령을 통해서 드러났으며, 다른 민족들도 공동의 상속자, 공동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에페서 3장)

자연 계시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과 구원의 진리를 계시하셨다는 뜻입니다. 창조물은 창조주를 반영합니다. 복음사가 요한에 의하면 모든 것이 말씀(성자)을 통하여 생겨났습니다(요한 1장 3절). 이 말씀이 대자연 안에서는 자연법으로,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율법으로, 인간 안에서는 양심으로 드러납니다. 이 셋의 뿌리는 하느님의 말씀, 곧 예수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통해서 인류가 당신을 찾고 구원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연 계시를 통해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방식은 부분적이고 불충분하고 불분명하고 더디며, 포괄적 인식에 이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지침이 없이 인류가 창조물을 통해서 창조주를 알아가는 과정을 밟기 때문입니다.

예로 고려청자 만드는 방법을 배운다고 합시다. 전문가의 가르침 없이 혼자 만들려고 하면 오랜 세월이 걸리지만, 전문가에게서 가르침과 노하우를 전수받으면 짧은 시간에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연 계시는 인류가 신비로 남아있는 하느님을 창조물을 통해 찾아가지만, 초자연 계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직접 구원의 진리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인격적으로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 바오로가 초자연 계시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예외 없이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모두를 구원의 길로 이끄신다는 진리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하느님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여긴 이방인들을 경멸 했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희랍인을 통해서만 이해되고 전달된다고 여긴 희랍인들은 진리를 깨달을 능력이 없다는 야만인들을 경멸했습니다. 한 마디로 2000년 전에는 어느 나라도 감히 신의 은총과 자비의 특전이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관심과 축복은 특별한 민족과 사람에게만 한정되었고, 그 외에는 저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발견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당신 사랑과 구원에로 부르셨다는 진리 였습니다.

이 맥락에서 이방인들이었던 동방박사들이 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며 경배하기 위해 그 먼 길을 마다하고 왔습니다. 이제 누구를 섬기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진 것입니다.

 

187.    오병이어와 폭풍우 사건 (2014. 1. 8. 수)

[1요한 4,11-18; 마르코 6,45-52]

오병이어 기적은 사 복음서 모두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기적인 것을 보면, 제자들은 이 기적에서 아주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 기적에서 인간의 욕구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때는 저물고, 군중은 피곤하고 굶주려있을 때, 제자들은 그들을 해산시켜 누군가의 도움을 받도록 하자고 제안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염려해야 할 일이라는 입장이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려면 2백 데나리온으로 부족합니다. 예수님 께서 물으십니다. 너희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많은 양과 많은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가진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보리빵은 가장 싸고 거칠게 만든 서민들이 먹었던 빵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보리빵으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것은 나를 드러내려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쓰시도록(축복하시도록) 하면 됩니다.

오병이어 사건 후 예수님께서 제자를 떠나보내고, 군중을 해산시키셨습니다. 기적을 본 군중 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결정적으로 거부하신 것이 부귀와 권력의 길이었습니다. 제자 들은 이런 유혹에 감염되기 쉬웠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주로 하류층이 살았던, 그래서 혁명의 온상지로 군중들은 쉽게 휩쓸리고 선동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유대종교 지도자에게 감시를 받고 계셨기 때문에, 섣불리 경고망동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서둘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보내시고, 군중들을 해산시키셨습니다. 

폭풍이 일고 있는 호수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니 폭풍은 그치고, 혼란은 잦아지고, 평화가 주어지고, 공포 속에서 아우성쳤던 제자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련과 폭풍을 이기는 길은 은총이 없는 자연인으로 뭘 해볼려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188.    유대교 회당 (2014. 1. 9. 목)

[1요한 4,19-5,4; 루카 4,14-22ㄱ]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회당에서 시작하셨습니다(마르코 1.21). 팔레스티나에서 성전은 오로지 예루살렘 하나뿐이었고, 회당은 전국 곳곳에 마을마다 있었습니다. 성전은 제사 지내는 곳이고, 회당은 기도하고 예배하고 가르치기 위해 마련된 곳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밖에서 사는 유대인들은 평소에 기도나 예배를 하러 회당에 갔지, 예루살렘 성전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평신도이고, 목수에 불과한 예수님께서 어떻게 회당에서 가르칠 수 있었는가?

예배는 3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도와 히브리어 모세오경을 봉독하는 것과 읽은 성경구절에 대해 해석하고 설교하는 부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사용했고, 히브리어는 이미 죽은 언어였기 때문에 율법을 공부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읽었을 뿐 그 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번역과 해설이 필요 했습니다. 가난한 시골 회당에는 성경을 가르칠 전문가를 따로 둘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회당장은 언제나 성경에 대해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마을에 오면 그를 환대하고 초대하였을 것입니다. 회당은 비교적 개방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신 것을 보면, 회당에서 예수님의 설교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에 대한 유대지도자들의 반감이 없는 상태에서 그분의 말씀이 마치 갈릴리의 부드러운 봄바람처럼, 영적으로 목말라하는 이들의 마음을 건드렸던 것 같습니다. 

 

 

189.    나환자의 치유 (2014. 1. 10. 금)

[1요한 5,5-13; 루카 5,12-16]

예수님께서 나환자에게 사제를 찾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나병은 온몸이 병균투성이인 강력한 전염병이었다는 점에서, 유대종교의 정결 예식은 율법 학자들이 만들어 낸 훌륭한 규칙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몸을 씻는 것이 일상화되지 않아 불결했고, 언제나 어디서나 쉽게 감염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정결예식은 그들에게 좋은 위생 습관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나환자가 어느 날 마을 한복판에 나타난 떠돌이 설교사가 자신의 나병을 고쳐주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나환자의 말을 쉽게 믿거나, 그래서 그 나환자를 자신들의 마을에서 정상인들과 살도록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치유를 인정하는 증명서가 필요했고, 그 직무를 사제가 맡았습니다.

나환자들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일체의 접촉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정상적으로 사는 우리가 시력과 청력을 잃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사회생활 안에서 모든 접촉에서 배제되어, 백화점 물건도, 음식 코너의 시식도, 버스 지하철도 탈 수 없다면 지나가며 부딪혔던 예전의 불쾌함도 오히려 그리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치유 이상을 기대하십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온몸이 질병투성이인 나환자를 만지는 행위는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짓이지만, 나환자에게는 병이 낫는 영혼이 정화되는 것으로써 그보다 더 감사한 것은 없습니다. 소외되고 고독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190.    예수님과 베드로의 장모 (2014. 1. 15. 수)

[사무엘 상 3,1-10.19-20; 마르코 1,29-39]

예수님께서 병든 이들과 마귀에 들린 이들, 그리고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 병은 우리를 일상과 일터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합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드러누운 것은 사위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에게서 떠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위가 떠나면 자신과 딸이 먹고 살기가 막막해질 것입니다. 사위가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출세간은 참으로 막기가 힘들었습니다. 떠나지 않으면 베드로에게 의미 추구가 막히게 되고 무의미한 생활의 반복은 결코 그를 기쁘게 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일에서 그는 엄청난 고기를 잡는 경험을 이미 해 버렸기 때문에, 결코 뻔하고 무의미한 갈리리 호수가의 삶에 안주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모는 열을 받고 실망하여 드러누었습니다. 자신이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떠나면 자신들이 어렵고, 남아있게 되면 베드로 본인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예수님 께서 누워있는 장모를 만났을 때, 그가 일어나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장모와 예수님의 만나는 장면에 머물러서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장모가 어찌해서 열병에 걸렸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장모는 또 예수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서로를 경청했을 때 장모가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는 것은 무언가 이해하고 수긍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그분께 말씀 드릴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수긍하고 낫게 될 것이고, 그래서 주님을 위해 기쁘게 시중을 들게 될 것입니다.

 

 

191.    계약의 궤 (2014. 1. 16. 목)

[사무엘 상 4,1ㄴ-11; 마르코 1,40-45]

필리스티아인들은 가나안 땅 서쪽 바닷가 비옥한 땅에서 살았고, 경제나 군사력에서 이스라엘 보다 강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 두 번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첫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 4천명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무척 당황하며,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실로에서 계약의 궤를 가져왔습니다.

계약의 궤는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서 야훼와 계약을 맺으며 그분의 명령대로 만든 것이고, 이 안에는 모세 지팡이, 10계명 돌판,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였던 만나가 들어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현존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계약의 궤와 함께 한다면, 과거에 승승장구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승리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가 3만 명이 죽고, 계약의 궤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시기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웠을 때 자신들이 승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을 수가 있었다는 사실은 간과하였습니다. 자신들이 늘 이기고 잘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무조건 승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나에게, 우리에게 승리만이 좋고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엔 패배가 하느님의 계획에 훨씬 부합하는, 각성이 필요한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192.    왕을 세워주십시오 (2014. 1. 17. 금)

[사무엘 상 8,4-7.10-22ㄱ; 마르코 2,2-12]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강력히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야훼 하느님 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사무엘이 아닌 바로 나를 배척하는 것이고, 더 이상 당신을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사무엘 상 8,7).

구약성경의 일관된 주장은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오직 야훼 하느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적절한 판관을 선택하여 주셨고, 그 판관은 자기 에게 주어진 임무가 끝나면 다시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판관시스템은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주도하시고, 판관들은 그분의 뜻에 따라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들의 주도권을 확장시키려는 의도로 여겨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의 요구가 당신의 계획과 부합되지 않고, 그 결과 또한 결코 좋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이미 결심한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왕정정치로 많은 후유증이 드러 납니다. 다윗과 솔로몬과 몇몇 왕을 제외한 대부분의 왕들은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대제국의 속국이 되었거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고 좋은 은총의 열매를 맺은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었기 때문일 수 있지만, 적지 않게 하느님 쪽에서 우리의 욕심을 허락하신 경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고집과 완고함이 하느님의 계획을 어긋나게 혹은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그분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맞추어 실천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193.    하느님의 어린양의 의미 (2014. 1. 19. 일)

[이사야 49,3.5-6; 1코린토 1,1-3; 요한 1,29-34]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 하였습니다. 이때 유월절이 얼마 남지 않았고, 유월절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수많은 양떼들이 방방곡곡에서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는 백성들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조석으로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것을 본 요한은 예수님을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탈출기 12장을 보면,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탈출하던 날 밤에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히브리인들의 집은 그냥 지나치고 이집트의 장자들만을 살해했을 때, 그 혼란을 틈타서 히브리인들은 누룩이 없는 빵을 움켜잡고 서둘러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희생)가 히브리인들을 파멸에서 구해준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양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가 있습니다. 마카베오 시대에 뿔이 달린 양은 위대한 정복자, 하느님의 전사를 상징했습니다. 이 양은 연약하지 않고 승리하고 정복하는 힘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싸워 죄를 정복하는 하느님의 전사이시며,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죽음을 영원히 폐기시킨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말한 하느님의 어린 양이란 말에는 희생과 수난과 함께 승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각이 성전에서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오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 양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어린 양의 피로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 시키셨듯이, 예수님의 피로 세상의 죄에서 해방시키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셨다는 말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훨씬 더 광범위한 창조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모든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출 작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죄가 죽음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고통과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구원의 길로 들어가기를 마다(포기)합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고 죽음 앞에선 선한 것, 옳은 것, 사랑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방해하는 죽음의 힘을 무력화시키셨고, 세상의 권세를 쳐부수셨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두려움으로 구원의 길로 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어린 양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지난 주에 성서대학의 강의를 위해 방문한 송봉모 신부님이 미사 강론에서 라푼첼에 대해 말했습니다. 마녀가 라푼첼을 어렸을 때부터 거울이 없는 탑 안에 가두어놓고, 너는 세상에서 제일 못 생겼다고 했고, 라푼첼은 탑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지나가던 왕자의 눈망울을 통해 라푼첼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확인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이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4.    공동선 (2014. 1. 26. 일)

[이사야 8,23ㄷ-9,3; 1코린토 1,10-13.17; 마태오 4,12-2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코린토 교회가 분열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 습니다. 바오로가 사용한 용어, 스키스마타는 옷에 헤진 곳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코린토 교회는 헤진 옷과 같이 보기 흉하게 분열될 위험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여기에 바오로파, 베드로파, 아폴로파, 그리스도파가 등장하는데, 사실 이들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분열과 하등 상관이 없었습니다. 다만 신자들이 자신들의 분파를 위해서 이들의 이름을 마음대로 이용한 것입니다. 등장인물 중 세 사람은 잘 알려졌지만, 아폴로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 아폴로가 등장했고,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아퀼라와 프리스퀼라 부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로마에서 살다가 로마 황제 클라디우스가 끊임없는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두 사람은 로마를 떠나 코린토로 갔고, 그곳에서 천막제조업을 하며 살다가 바오로를 만나 함께 일하게 됩니다. 바오로는 그들에게 신앙교육을 철저하게 시켰고, 그들은 바오로의 훌륭한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이들은 바오로의 3차 선교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에페소로 갔는데, 그곳에서 아폴로를 만났습니다. 아폴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학문이 뛰어났고 웅변가였으며 구약 성서에 능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는 아폴로의 설교를 듣고 그 설교에서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곧 아폴로는 예수님을 알았지만, 예수님의 파스카 사건과 성령이 주어진 오순절 사건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입니다. 부부는 아폴로를 집으로 초대해서, 그에게 파스카 사건과 성령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아폴로는 거기서 성령을 체험합니다. 이제 아폴로는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성령의 감도로 복음을 전달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에 정통하고 학문과 언변이 뛰어나며 성령까지 체험한 아폴로의 설교는 에페소 공동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코린토 교회에 알려지게 됩니다.

코린토에는 여러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한 장소에 모이면 외부에 주목받게 되고, 설교와 나눔이 어려워짐으로 여러 공동체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공동체가 아폴로를 초대하여 설교를 들었는데(마치 대림절 특강처럼), 그의 설교가 너무 훌륭했으므로 추종자가 생기고, 코린토 공동체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평소 서로 생각과 의견을 달리했던 신자들이 각자의 사도를 추종하게 되는 가운데, 아폴로의 설교를 들은 신자들은 자신들이 아폴로 편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런 분열상을 접하고 바오로가 코린토 1,2서를 쓴 것입니다.

코린토 2서 10장에 바오로는 “자신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말이 보잘것 없습니다.” 코린토 1서 2장에 “나는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그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 전할 뿐입니다.” 그만큼 바오로는 용모와 말에서 아폴로를 의식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민망한 일이 있은 후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아폴로를 만나, 그에게 코린토 신자들이 원하니 그곳에 가도록 권했고, 이에 아폴로는 지금은 가지 않겠지만 기회가 되면 가겠다고 화답합니다. 아폴로의 자제력과 슬기로움에 감사하면서, 바오로는 코린토 1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며, 그것을 자라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 합니다.”

공동체 신자들 사이에 분란이 있었고, 그것이 사도들에게까지 확산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바오로와 아폴로는 슬기롭게 그 분열상을 잘 대처하였습니다. 공동체가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사도들과 신자들은 자신들의 입지보다 그리스도가 먼저이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란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선택과 판단은 개인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올해도 본당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이해 관계가 드러나겠지만, 개인보다도 공동선을 선택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이 우선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195.    예수님의 눈 높이 (2014. 2. 2. 일)

[사무엘 하 12,1-7ㄷ.10-17; 마르코 4,35-41]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두 천사가 베를린 시에 내려왔습니다. 하루 종일 베를린을 돌아 보았지만, 그들은 인간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천사가 서커스 팀에서 연기하던 한 여자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그 여자를 알고 싶지만, 천사 쪽에서는 그 여자를 만질 수도, 그 여자 쪽에서는 천사를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천사는 육신이 없어서 자신을 드러낼 소통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여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사랑하려면) 육신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천사는 장구한 수명의 삶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인간이 된 천사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추위를 느끼면서 손을 비비고(촉각), 다양한 색깔들을 보고(시각), 소리를 듣고(청각), 커피 향기를 맡고(후각), 커피의 맛을 보는(미각)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여자를 만나게 되고, 서로 바라보면서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육신은 인간이 하느님을,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고 소통하는 유일한 장소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면 자동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선택해야 가능한데, 선택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께서는 우리가 제대로 선택하도록 우리의 눈높이에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인간이 되셔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영원성을 내려놓으시고, 시공간 안에서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는 인간의 나약함을 취하시면서, 고통과 죽음의 공포와 유혹을 당하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전능과 신적 능력을 내려놓으시고 우리의 정도와 눈높이에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전에 봉헌되는 아기 예수를 보고 시메온이 감격했던 것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그분이 얼마나 내려 오셔야 했는지를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196.    간절함 (2014. 2. 4. 화)

[사무엘 하 18,9-10.14ㄱㄴ.24-25ㄱㄴ.30-19,3; 마르코 5,21-43]

복음에서 회당장의 딸과 병이 든 여자의 경우, 유대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시신을 만진 경우라든지 하혈하는 여자는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살아나고 치유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했기 때문에, 회당장의 입장에서는 유대교 신자들과 친구들과 식구들의 눈치를 봐야 했을 것입니다. 또 율법을 거스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딸을 살리기 위해서 회당장이란 위신을 버리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혈하는 여자도 공적으로 자신의 병을 밝힐 수 없으니, 군중 속에서 예고 없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이들이 치유된 것은 딸을 살려야겠고, 자신이 살아야겠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은총을 청할 수 있고 얻을 수 있습니다. 은총이 원천적으로 봉쇄된게 아님에도, 우리가 은총의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은총에 문제가 있거나 운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봐야 합니다. 무엇이 은총을 막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197.    아가토스와 칼로스 (2014. 2. 9. 일)

[이사야 58,7-10; 1코린토 2,1-5; 마태오 5,14-16]

“너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희랍말로 착하다는 개념과 관련하는 두 단어(아가토스agathos, 칼로스kalos)가 있습니다. 아가토스는 단순히 착하다는 의미고, 칼로스는 거기에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칼로스는 보이기 위한 선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에게 집중하게 만듭니다.

영화 ‘슈렉’에서 탑에 갇혀 있는 피오나 공주는 자신이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백마를 탄 기사가 와서 키스만 해주면 예쁜 여자가 된다는 환상에 빠져 있고, 슈렉은 몸이 비대하고 흉측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두고 삽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치장하는 자존감이 낮은 인물들입니다. 영화 중간에 이런 구절의 노래가 나옵니다. “주님을 기쁘게 한 다윗의 노래를 소개할게. 다윗은 목욕하는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겼어. 그녀는 다윗을 묶어버렸고, 그의 왕좌를 부수어버렸고, 그의 입에서 할렐 루야를 빼앗아 갔어. 그러나 다윗은 더 이상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래하지 않아. 그의 노래는 상처받은 할렐루야이기 때문이야.” 상처받은 할렐루야란 비참하고 발가벗겨진 자신의 부끄러움을 수용하여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이 쓴 시편 32장에 “제가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했더니 (죄 감춤), 나날이 신음 속에 저의 뼈들이 말라버렸고 제 기운은 여름날 더위에 빠져버렸지만, 주님께 제 허물을 고백했을 때 주님은 저를 진정으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자기 경험을 쓴 것입니다 (사무 후 11장). 다윗이 바쎄바를 탐하고 그 사실을 숨겼고, 나단 예언자를 통해 그 죄상이 드러났을 때 즉시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뻐하며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기쁨을 되찾았던 시점이 바로 그가 숨겼던 죄를 고백했을 때입니다.

다윗의 시편 51장에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신다”(19절). 이 꺾인 마음이 바로 상처받은 할렐루야인데, 이것을 감추지 않고 하느님께 드러냈을 때 용서하시고 마음의 평화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다윗처럼, 그리고 슈렉과 피오나 공주처럼 자신들의 허물과 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바로 선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을 발산하는 칼로스(kalos)입니다. 죄와 허물을 감추지 말고 주님 앞에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도록 합시다.

 

198.    영화 ‘미션’을 통해서 바라본 통회 (2014. 2. 16. 일)

[집회 15,15-20; 1코린토 2,6-10; 마태오 5,17-37]

“제물을 제단 옆에 두고 먼저 형제와 화해를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원칙 하나를 환기시켜 주십니다. 희생제물의 본래적 의미에 관한 것으로써, 유대교 관습에 의하면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느님과 관계가 깨지는데 이는 사제를 통한 희생제물을 바치면서 회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희생 제물은, 의도하지 않았거나 무의식중에 범했거나 순간 자제력을 잃고 격정에 휘말린 경우에는 효과가 있지만, 고의로 지은 죄의 경우에는 효과가 없습니다. 즉 자신의 선택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고의적인 범죄에는 예물을 바쳐도 용서받지 못함으로,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문제의 당사자와 화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 개인이 저지른 죄는 본인 외에는 그 누가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구원 역사에서 하나의 규칙입니다. 

영화 ‘미션’에서 주인공 멘도사는 가브리엘 신부로부터 평생 감옥소에서 살든지 그가 피해를 입힌 과라니인들에게 봉사하든지 결정하라고 요구를 받습니다. 후자를 선택하면 보속으로 자신이 지닌 모든 무기와 갑옷의 무거운 짐들을 과라니 마을까지 끌고 가야 했습니다. 끌고 가는 과정에서 어느 수사가 보속이 충분하다고 멘도사의 짐을 끊어버리지만, 멘도사는 그것을 다시 묶어서 끝까지 끌고 갑니다. 아직도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을 입구에서 과라니인들이 그의 등에 묶인 짐을 끊어주었을 때(용서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누구도 본인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를, 보속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화해는 제 3자가(하느님 포함) 정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통회(회개)와 피해 당사자의 용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통회는 자신의 죄가 타인에게 고통을 주었음을 인식하고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통회한 후 바치는 제물은 진정한 것이 됩니다. 이처럼 고해성사 역시 통회가 선행 되어야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 통회 없이 성사를 보고 죄가 사해지면, 고해성사는 죄를 조장하는 성사가 될 것입니다.

제물을 바친다 해서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지고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통회로써 묶이고 매인 것이 풀어지면서 영혼이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통회가 있은 후 바치는 희생 제물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마무리가 됩니다.

 

 

199.    바리사이들과 헤롯의 누룩 (2014. 2. 18. 화)

[야고보 1,12-18; 마르코 8,14-21]

오병이어 사건(하늘에 별 수, 바다의 물방울과 같이, 하느님의 은총이 그토록 무한하고 풍성하다는 것, 나누어 먹어도 7광주리가 남음.) 이후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사건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그들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바리사이 누룩이란 메시아를 기적적인 사건과 민족적인 승리와 연계하여 이해하는 것이고, 헤로데 누룩은 부귀와 권력과 같은 세상의 힘을 추구하려는 경향과 관련합니다. 이 둘 다 세상적인 힘과 위대함을 찾는 행위입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만들었거나 만진 것을 먹지 않았고, 그것을 먹으면 불결하게 된다고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호수 건너편 이방인들이 사는 지방에서 떡을 구한다는 것은 그들 에게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제자들은 빵을 가져 오는 것을 잊고 이방인이 만든 불결한 빵을 먹게 된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핀잔을 주신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속 시원하게 이해하기를 바라셨지만, 여전히 보고 들리는 대로 판단하는 그들을 보고 무척 답답하게 느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보이는 세상 그 이상의 것을 보는 눈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0.    산을 향해 눈을 드네 (2014. 3. 2. 일. 시편 121)

[이사야 49,14-15; 1코린토 4,1-5; 마태오 6,24-34]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재물은 히브리어로 매몬이고, 곧 사람이 자신의 귀중한 재물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은행이나 금고 등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세월이 경과하면 그것이 단순히 맡겨진 재물이 아니라 사람이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 신과 같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의 관계를 좀 더 부연하기 위해 시편 121장을 소개합니다.

“산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드네.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 내 도움은 주님에게서 오리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다.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 신다. 나거나 들거나 주님께서는 모든 악에서 너를 지키시고, 네 생명을 지키신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산과 주님을 대조하면서 내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 묻습니다. 이 산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루살렘에 실완이라는 장소가 있습니다. 다윗 초기시대에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간 통치한 후 이곳으로 옮겨와 수도로 정한 여부스 성읍입니다(열왕 상 2.11, 다윗은 이스라엘을 40년 다스 림.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

여부스 성읍은 수도로써 최적의 조건을 갖춘 장소였습니다. 성읍 근처에 샘이 있어 식수 문제가 해결되었고, 길이 남북과 동서로 연결되어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해발 8백 미터의 높은 고지대에 위치해 외부침략을 막을 수 있는 천연적인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정학적 으로 볼 때,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적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이스라엘 생존과 안보에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출애굽에서 다윗에 이르기까지 늘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수도다운 수도를 가진 경험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순한 종교의 대상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없었다면 그들의 생존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면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불기둥 구름기둥을 통해 그분의 보호하심을, 사막에서 유랑하면서 그들은 유일한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이스라엘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하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안전한 장소, 여부스 성읍이 자신들을 지켜주었지만, 오히려 이런 외적 환경의 이점이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떠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마음속에 하느님보다 산들을 더 신뢰하는 무엇이 자리 잡게 되면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영적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들을 가리키며 이스라엘에게 도대체 우리를 위한 도움은 어디서 오는지 자문해 보라고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 그런 산과 같은 요새는 없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면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언제나 이스라엘을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도움은 그런 외적인 안전한 조건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하느님보다 산들을 더 신뢰한 까닭에 비참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보조용이지 마치 신을 섬기듯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01.    야뽁강의 야곱 (2014. 3. 9. 일. 사순 제1주일)

[창세 2,7-9.3,1-7; 로마 5,12-19; 마태오 4,1-11]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간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이 메시아 직을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지 성찰하기 위함입니다. 즉 메시아 직 수행을 부귀와 명예와 권력처럼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기 때문에 세상의 힘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려 40일 동안 세상의 힘을 이용하려는 혹은 가지려는 자신과 사투를 벌이셔야 했습니다. 창세기 32장23-33절을 보면, 야곱이 야뽁강에서 밤새 하느님과 씨름했던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의 전후 맥락은 이러합니다. 동생 야곱은 쌍둥이 형제인 형 에사우가 받아야 할 장자권을 속임수로 가로챘습니다. 눈 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에게 가야할 장자권을 가로챈 것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사우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야곱을 죽이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레베카는 형제간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급히 야곱을 그의 오빠 라반의 집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았고, 라반의 두 딸과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하느님 의 지시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야뽁강에 도착한 그는 가족들을 먼저 건너보내고, 강가에 홀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어두움 속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과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합니다. 그 사람은 그만하자고 했지만, 야곱은 축복을 주지 않으면 그만 둘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하느님).

야곱이 야뽁강을 건너기를 주저한 것은 형에게서 받을 보복과 가족들의 비난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강을 건너는 것은 곧 자신이 도망쳤던 그 장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야곱은 밤새도록 동이 틀 때까지 뼈가 다칠 정도로 하느님과 씨름했고, 두려움을 극복할 은총을 받기 전에는 씨름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기를 포기하려는 자신과 싸웠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기도하면서 새벽까지 하느님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강을 건너지 못했을 것이고, 싸움을 피한 것이고, 평생 형으로부터 도망 다니면서 살았을 것이며, 결국은 자신이 이스라엘이 되는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야뽁강을 건너 형 에사우를 만나는 것은 야곱의 삶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돌파해야 했던 십자가였습니다.

이처럼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힘을 구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주어지는 모든 십자가 (하느님의 뜻)를 짊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삶이 정상화되도록 광야에 서고 강을 건널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02.    요나 이야기 (2014. 3. 12. 수)

[요나 3,1-10; 루카 11,29-32]

오늘 독서의 주제는 요나의 회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니네베는 대제국 아시리아의 수도이고, 아시리아는 주위 나라를 정복하고 많은 악행을 자행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요나가 가지는 문제의 뿌리는 아시리아가 아니라 요나 자신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요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네베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도망가서 고래의 배 속, 어두움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거기까지 오시어 네가 진짜 살고 싶다면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부르실 때, 소명을 받는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목적이기도 합니다.

결국 요나는 하느님께서 따라오시며 귀찮게 구시니 마지못해 니네베로 갑니다. 그는 하느님 께서 왜 자신을 부르셨는지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이 니네베를 회개시켜야 한다고 착각 했습니다. 도시 복판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니, 순식간에 니네베 왕과 백성들과 짐승들까지 모두 회개에 참여했습니다. 이를 본 요나는 화를 내고 불만을 터트립니다. 심판되어야 할 사람들이 회개하고, 더욱이 하느님께서 그들의 회개를 보시고, 용서하신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화가 난 것은 악인들이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보다, 악인들이 뉘우치고 그것을 보고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보면서, 그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용서하다면 용서하는 이의 삶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평온). 사순절 동안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203.    율법과 하느님 (2014. 3. 14. 금)

[에제키엘 18,21-28; 마태오 5,20ㄴ-26]

유대인에게 있어 율법은 신적이고 거룩합니다. 랍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율법은 비록 하느님에게서 왔지만, 어떤 구절은 예외고 어떤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모세가 말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영혼은 불경건하고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회당 예배의 첫 순서는 율법의 두루마리를 보관해 두었던 상자에서 율법을 꺼내서 회중의 주위를 빙 돌면서 회중들이 율법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들이 늘 사용하던 관용어가 “하느님 야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십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전달하는 중재자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써 중개 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그 말씀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곧 하느님과 동등한 권리 주장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근본적인 결함을 지적하고 수정하는 권한 혹은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권위를 희랍어로 엑수시아라 하는데, 마음대로 가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204.    변모사건 (2014. 3. 16. 일)

[ 창세 12,1-4ㄱ; 2티모테오 1,8ㄴ-10; 마태오 17,1-9]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제자들 앞에서 변모하셨고, 그분의 곁에는 모세와 엘리야 가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기 직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신이 그곳에서 죽게 되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임을 제자들에게 인식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메시아가 죽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제자 셋을 타볼산으로 데려 가신 것은 곧 당신에게 일어날 수난의 비극을 대비하기 위함인데,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 부활의 목격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타볼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모세는 율법과 관련해서 그리고 엘리야는 예언자로써 유대종교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로 쌍벽을 이룹니다(신약의 바오로와 베드로처럼). 유대인 들의 일관된 신앙은, 엘리야는 메시아에 앞서서 오고, 모세는 메시아와 함께 동반자로서 온다는 것입니다. 곧 두 사람의 출현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 일어나는 일이 하느님의 뜻이며,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변모사건을 보면, 같은 복음의 27장에 나타나는 십자가 사건과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27,33-54).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모습이고, 골고타에서는 수치를 받으셨습니다. 타볼산에서 변모된 예수님의 옷이 눈부시게 빛났지만, 골고타에서는 그분의 옷이 벗겨지고 찢겨져 나누어졌습니다. 타볼산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지만, 골고타 십자가에서는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타볼산에서는 밝은 구름이, 골고타에서는 어두움이 그 현장을 드리웠습니다. 타볼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 머물고 싶어했지만, 골고타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피해버렸습니다. 타볼산에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두고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고, 골고타에서는 병사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한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는 것도, 메시아가 죽는다는 것도, 그리고 죽은 메시아가 부활한다는 것도 인식시키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믿고 끝까지 따라와 줄 것을 당부하십니다. 부활을 목격해야 모든 것이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관망만 하지 말고 동참하도록 합시다.

 

205.    사마리아 우물 (2014. 3. 23. 일. 사순 제3주일)

[탈출 17,3-7; 로마 5,1-2.5-8; 요한 4,5-42]

오늘 복음 4장 27절에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놀란 것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홀로 만나시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만나거나 더욱이 사마리아 여자하고 대화를 하는 것은 금지된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열게 하고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던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방인의 피가 섞여 유대 순수혈통을 상실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가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나라로 데려가고, 그곳에 다른 민족들을 이주시켰는데, 그들과 남았던 유대인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 사마리아인들입니다.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성전건립을 할 때 돕고 싶다고 하는 사마리아인들의 요청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로 그들은 유대인 성전건립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만의 성전을 그리짐산에 세우면서 더 갈등이 깊어지게 되고, 유대인들이 그 성전을 파괴했을 때 그들은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낮에 물을 뜨기 위해 나온 여자가 근심이 많은 여자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셨 습니다. 한낮에 그것도 먼 곳의 우물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마을들은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언덕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마을에서 2킬로 떨어져 있습니다. 여자의 하루 일과는 물을 나르는 것인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자기 어려움 에서 벗어나려면 매일 길어 마시는 물이 아니라 생수 곧 마셔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생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받아들이면, 그 영혼 안에서 생수가 펑펑 솟아오르는 것처럼 성령의 은총을 받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청할 수 있고 마실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사람들이 세 가지 방법으로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채소들이 심겨진 밭에 물을 주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한참 떨어진 강에서 물을 날라다 주는 방법 이고, 둘째는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주는 방법이며, 세 번째는 우물물을 두레박 으로 푸는 수고가 필요 없이 우물에 솟아올라오는 생수를 퍼서 주는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영혼 안에 성령을 모실 때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셔도 갈증을 느끼는 매일 길어 마시는 그런 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생수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206.    악령을 바라본 사람들의 두 가지 해석 (2014. 3. 27. 목)

[예레미야 7,23-28; 루카 11,14-23]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악령들과 귀신들은 예수님께 복종하였습니다. 이런 장면을 본 사람들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능력으로 무장한 사람으로 간주하든지, 아니면 사탄의 두목과 거래하여 악한 권세와 어울리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든지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반대 세력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세력과 결탁하고 계시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십니다.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사탄은 결코 자기들끼리 싸우거나 자기 편을 공격하거나 쫓아내지 않습니다. 공동의 적을 두고 사탄끼리 편이 되지(철저하게 단합공조) 적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듯이 누군가에 의존하거나, 주문을 외우거나, 또는 거룩한 사람의 이름을 통하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쫓아내십니다. 말하자면, 사탄의 집에 들어가 두목을 잡아 포박하고 모든 졸개들을 무장해제시켜 당신께 복종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는 권한과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이제 예수님의 이름은 사탄의 세계에 이미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207.    초막절과 세상의 빛 (2014. 3. 30. 일. 사순 제4주일)

[사무엘 상 16,1ㄱㄹㅁㅂ.6-7.10-13ㄴ; 에페소 5,8-14; 요한 9,1-41]

에페소서에서 바오로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권고하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부터의 소경의 눈을 고쳐주셨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규칙을 어겼다고 예수님을 비난 하였습니다. 소경은 빛을 보았지만, 바리사이들은 그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주장은 초막절 때 하신 말씀입니다. 초막이란 광야 40년 동안 히브리인들의 안식처가 되어 준 소박한 거처 (천막)를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셨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물과 만나를 마련해 주시면서 돌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히브리인 들을 인도하셨던 빛이었습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한 이집트에서 겪었던 어둠은 없었습니다. 초막절은 광야에서 빛이셨던 하느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초막절 축제 첫날 저녁에 성전의 조명이란 의식에서, 성전 뜰 한쪽에서 촛불의 빛이 시작하여 성전과 예루살렘 전체가 빛으로 밝혀지고, 새벽까지 춤추며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성전에서 시작한 불빛이 밤의 어두움을 몰아내던 바로 그때에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불빛은 결국 다음날 아침이면 끝나겠지만 그분의 빛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복음에(마르 12,28-34)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그 많은 율법 조항들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율법학자는 큰 깨달음을 얻고 기뻐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제일 중요한 계명이지만, 그 실현을 위해 실제적으로 뭔가가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실재를 두고 표현된 두 가지인 것입니다 (동전의 앞뒤).

예수님께서 보태신 둘째 계명은 나 대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존중하고 돌보듯이 이웃을 그렇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제대로 돌보거나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도 그처럼 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나부터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소경은 빛을 얻었고, 율법학자는 율법의 본 정신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208.    비행기의 블랙박스 (2014. 4. 2. 수)

[이사야 49,8-15; 요한 5,17-30]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사순절 때 대부분 구약의 독서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돌보고 이끄셨는지를 알려줍니다.(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49,15)

비행기에는 보통 항공 자료 기록기, ‘블랙박스’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비행기의 성능과 상태를 기록하고, 다른 하나는 승무원과 지상의 관제탑과의 대화를 기록합니다. 이 블랙박스는 극한의 온도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단열되어 있고, 물 속에서 수면으로 소리를 내보내는 위치 표시장치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블랙박스를 통해 추락의 원인을 밝히게 됩니다. 항공기 안전관계자들은 다시는 똑같은 재난이 발생하지 않도록 블랙박스의 기록을 분석하여 문제의 원인과 개선점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막연하게 은총을 기대하는 것은 재난방지가 아니라 재난을 키우는 것입니다.

재난의 원인에는 자연 때문에 일어나는 천재(天災)가 있고,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인재(人災)가 있습니다. 천재인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 우리가 어찌할 수 없지만, 인재인 경우에는 재난의 원인을 밝혀 재발되지 않도록 대비할 수가 있습니다. 천재와 인재가 혼합된 경우가 있습니다. 즉 천재 때에도 올바른 결정과 조치를 내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보는데, 일어난 재난을 천재로 판단하고 나의 실수나 잘못된 선택을 살피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형 사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더 큰 사고가 나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은 블랙박스의 기록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돌보심에도 인간의 잘못과 실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불행과 재난을 또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막연하게 은총을 기다리지 말고, 자신의 블랙박스를 열어 살펴야 할 것입니다.

 

 

209.    노인의 바이올린 연주 (2014. 4. 11. 금)

[예레미야 20,10-13; 요한 10,31-42]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나에게 돌을 던지려 하느냐고 하니, 유대인들은 좋은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했기 때문에 처벌로 돌을 던지려 한다고 말합니다. 왜 돌을 던지려고 했을까요?

어떤 위대한 작곡가가 죽은 후 그가 남긴 악보 한 장이 발견되었는데, 시 바이올린 협회에 헌정된 곡이었습니다. 회원들은 그 곡을 연주해 보았지만, 곡이 너무 어렵고 특별해서 아무도 연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저녁, 그 도시 광장에서 어느 노인이 그 곡을 연주했는데, 사람들은 야성적이고 이채롭고 아름다운 연주에 감동하여 아낌없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시 바이올린협회 회원들은 “그 곡은 우리에게 헌정된 우리 곡이며, 당신은 그 곡을 연주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런 행위에 그 노인은 자신이 작곡자의 아들이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 곡을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니, 협회 회원들은 그를 도시에서 쫓아냈고, 다시는 그 광장에서 그 연주를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작곡가가 자신의 곡을 바이올린협회 회원들에게 헌정한 것은 그 아름다운 곡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자 화를 냈던 것은 그 자신들이 해내지 못한 훌륭한 연주를 그 노인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노인에게 화를 냈던 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연습하지도 연주하지도 않는).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역시 주어진 율법의 정신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율법정신을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화를 내고, 비난하며 돌로 쳐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210.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세 가지 이유 (2014. 4. 16. 수)

[이사야 50,4-9ㄴ; 마태오 26,14-25]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두고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유다는 젤로데 당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단검을 품고 다니면서 요인들을 암살하는 사람들 이어서 시카리라 불렸습니다. 유다의 생각에, 예수님은 지적 능력을 가진 하느님께서 보내신 지도자고, 조국 해방을 위한 투쟁을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폭력 운동을 지향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더 이상 스승을 따르지 않겠다는 표시로 그분을 유대지도자들에게 팔아넘긴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일찌감치 메시아로 인식한 유다는 스승이 계속해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해침을 당하려는 것을 보고,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면 즉시 메시아임을 알아볼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유대 지도자 를 빨리 만나도록 손을 썼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유다의 탐욕 때문입니다. 요한 12장 6절에 보면, 유다는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위해 비싼 돈을 주고 기름을 준비한 것을 두고 불만을 드러냅니다. 유다와 같은 제자였으며 요한복음 저자였던 요한은 돈주머니를 맡았던 유다가 자주 돈을 가로챘던 도둑이라고 증언합니다. 금전 문제로 예수님을 팔아넘겼다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가 교회의 입장입니다. 이 세 가지 설 모두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 식으로 주도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가라지 농사로 마감되어 버렸습니다.

 

 

211.    하느님이 약속 (2014. 4. 29. 화)

[사도행전 4,32-37; 요한 3,7ㄱ.8-15]

광야에서 히브리 백성들은 차라리 이집트에서 살게 하지 이렇게 생고생을 시키고 있다고 계속해서 불평했습니다 (민수기 21장). 그러자 주님께서 불뱀을 보내시어 그들을 물려 죽게 했습니다. 그들이 살려달라고 하니, 구리 뱀을 보는 사람들을 낫게 하였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이 그 가족을 보살피기로 했습니다. 전쟁의 고된 삶이 끝나고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 거두어들인 사람이 요나단의 아들 므피보셋이었는데, 그가 다윗왕가의 일원이 된 것은 다윗이 요나단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 15년 세월이 흘러 다윗의 맏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거슬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급하게 부하 몇 사람과 같이 도망쳤을 때 대부분의 신하와 다윗에게서 큰 호의를 받은 므피보셋이 다윗을 배반합니다. 시간이 경과한 후 압살롬이 죽고 사태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므피보셋은 자신이 왜 다윗을 거부했는지 그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다윗은 므피보셋을 다시 왕궁에서 살게 하였는데, 그것 또한 요나단에게 한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께 거스르는 백성들을 은총으로 살리시는 것은 백성이 잘나서나 은총을 받을 만큼의 선행과 공덕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하느님의 약속과 그분의 선의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새로 태어나도록 성령을 주시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해서, 그리고 잘나서가 결코 아닙니다.

 

 

212.    거룩한 술주정뱅이의 전설 (2014. 4. 30. 수)

[사도행전 5,17-26; 요한 3,16-21]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성경은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고,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거룩한 술주정뱅이의 전설’의 이야기입니다. 다리 밑 계단으로 내려가던 어느 노인이 그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는 어느 노숙자에게 부탁했습니다. 돈을 줄테니 어느 성당에 가서 거기에 있는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돈이 필요했던 노숙자는 쾌히 승낙하고 돈을 받고 그 성당에 가는 도중에 술집에 들려 포도주 한 잔을 하는 바람에 성당에 가지도 기도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알코올중독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노숙자는 또 다시 노인을 만납니다. 노숙자가 미안해 하며 기도하지 못했다고 하니, 노인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그에게 또 다시 돈을 줄테니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감사하며 돈을 받은 노숙자는 성당에 가는 도중에 또 술 한 잔을 하느라 성당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다리 밑에서 계단을 통해 올라오던 노숙자는 그 계단으로 내려오던 노인을 만납니다. 노숙자가 성당에 가지 못한 것을 눈치 챈 노인은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또 돈을 주며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노숙자는 한 발 물러서면서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마치 은총이 계단을 통해 올라오는 노숙자에게 비록 조건을 걸지만 거의 무상으로 베풀어 지는데, 왜 은총이 거절되었을까? 노숙자는 왜 그 제안을 거절하였을까? 요청을 들어주지 못한 자기 불성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불편함으로 주어지는 은총을 거절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은총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았을 때 오히려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보지 않는 영혼들에게 일어나는 거부 현상입니다.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13.    주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나를 말리지 말라 (2014. 5. 4. 일)

[사도행전 2,14.22ㄴ-23; 1베드로 1,17-21; 루카 24,13-35]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에게 구약 성경에서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자신들과 함께 머물러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두 제자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관련하는 하나만 언급할까 합니다.

탈출기 32장 10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말리지 마라’는 말은 내가 하려는 일에 간섭하지 말고 나를 가만히 놔 두라는 뜻입니다. 정말 화가 나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작심했을 때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이 됩니다 (20장). 그리고 모세가 10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 산에서 40일 머무는 동안,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자신 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신이라고 금송아지를 숭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약속한 지 40일도 되지 않아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어겼으므로, 하느님 께서 이스라엘과의 계약관계를 없애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 아니라, “너(모세)의 백성”이라 하셨습니다. 하느님 대신 금송아지를 섬기는, 염치없는 이 백성과의 계약을 파기하려고 하셨을 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곧 이 말씀은 모세에게 계약을 파기하려는 당신을 말릴 수 있다고 힌트를 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이스라엘은 당신께서 선택하시어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백성이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시면 이집트인과 타 민족들이 당신을 무능하고 무자비한 신으로 받아들일 것이므로, 부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 하였습니다.

이 요청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재앙도 거두셨습니다. 이것을 경험한 모세는 말합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신 분이시다”(34.6-7). 나를 말리지 말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 하고, 우리를 선으로 이끄시려는 하느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두 제자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인간의 불성실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듣고, 너무 좋은 나머지 자신들과 함께 머무시도록 청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214.    간다케 (2014. 5. 8. 목)

[사도행전 8,26-40; 요한 6,44-51]

이디오피아 여왕의 재정 담당인 내시 간다케가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유대종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유대종교의 구약성경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왕궁 신하여서 가능?), 성경을 읽으면서 점차 야훼 신을 예배하고 싶어서, 예루살렘까지 가서 예배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때 간다케가 읽고 있었던 구약성경 구절이 이사야 53장이었는데, “양처럼 도살장에 끌려 가고, 굴욕 속에서 모든 권리를 박탈 당했지만, 자기 입을 열지 않았던”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예언자의 말대로, 오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 인물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간다케는 이런 인물이라면 자기 평생을 바칠 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필립보에게 세례를 청했습니다. 세상의 왕과 여왕을 모시고 있지만, 이런 분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215.    김영철 전 (2014. 5. 11. 일)

[사도행전 2,14ㄱ.36-41; 1베드로 2,2ㄴ-25; 요한 10,1-10]

“나는 착한 목자이고,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오면 구원을 받는다.”

18세기에 홍세태(1653-1725)의 ‘김영철 전’이란 고전소설의 내용은 어쩌면 우리의 삶을 대변해 주는 것이어서 소개합니다. 

김영철은 평안도 영유현 사람으로, 무과에 급제한 사람입니다. 무오년(1618)에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군사를 요청하니 조선은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에 2만의 군사를 보내는데, 여기에 19세의 미혼인 김영철이 참여합니다. 출전하기 전에 영철의 할아버지는 “영철아, 니가 죽으면 집안에 대가 끊기니, 살아서 돌아오너라.”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명-조선 연합군은 후금에 패하고, 영철이 포로가 됩니다. 처형 직전에 후금의 장수 아라나가 영철이 죽은 자기 동생과 닮았다는 이유로 살려서 자기 집에 데려가서 영철이를 죽은 동생의 아내와 혼인시킵니다. 영철은 여기서 두 아들을 둡니다.

영철은 함께 포로가 된 명나라 병사 전유년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여, 등주에 있는 그의 집에 기거하게 됩니다. 거기서 영철은 전유년의 누이와 혼인하여, 두 자녀를 낳았습니다. 세월이 지나 조선 사신의 배가 등주에 왔을 때, 영철은 그 배를 타고 드디어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영철은 가족에게 돌아왔지만, 가난하여 부모를 모실 수 없어 슬퍼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자 이군수는 대를 잇기 위해 살아서 돌아온 영철을 효자로 여겨 자기 딸과 혼인하게 합니다.

6년이 지난 후 병자호란이 있었고(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여 승리), 그로부터 4년 후 후금이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조선에 군사를 요청합니다. 이 전쟁에 명나라와 후금의 언어에 능통 하다는 이유로 김영철이 징집됩니다. 여기서 영철은 자신을 살려서 자기 제수씨와 결혼하게 했던 후금 장수 아라나를 만나게 됩니다. 아라나는 배신한 영철을 잡아서 죽이려 했지만, 통역이 필요했던 영철의 상관의 제안에 입담배 200근을 아라나에게 주는 조건으로 영철은 풀려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조선의 조정은 영철에게 입담배 200근의 값을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을 갚느라고 전 재산을 잃고 알거지가 된 영철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 나라에 있는 처자식들을 버려, 그들을 평생 슬픔과 한탄 속에 살게 했으므로, 지금 내가 천벌을 받는 것이다.” 그는 변방의 성을 지키는 포졸로 살다가 84세 나이로 죽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내가 사랑스럽고 중요하며 쓸모 있고 나와 함께하는 것을 그가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면, 나를 용서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도 용서하게 된다.” 삶이 우울하고,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온통 실망으로 가득 차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사라졌을 때 바로 그때 하느님의 은총이 다가올 것입니다. 마치 빛이 어둠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듯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알려줍니다. “너는 받아들여졌다” (길 잃은 양이 자신을 찾은 목자를 발견했을 때처럼).

목자들은 밤에 양들을 지키기 위해 양 우리의 문 앞에서 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오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신 이 초대는 곧 너는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하느님께서 400년 전 한반도에 존재했던 길을 잃어버린 어린 양인 김영철을 바라보셨을 때, 그에게 어떻게 접근하시고, 어떻게 대하셨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결코 무관심 하고 모른 척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216.    목자의 목소리 (2014. 5. 13. 화)

[사도행전 11,19-26; 요한 10,22-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27절)

주님의 현존과 돌보심 체험은 믿음의 성숙과 비례합니다. 갓난 아기는 엄마의 얼굴을 보아야 안심합니다. 엄마가 보여야 자기와 함께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엄마의 얼굴이 안 보이면 아기는 불안해합니다. 엄마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엄마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갓난 아기가 자라면서 자연 엄마와 함께하는 영역에 대한 인식이 넓어집니다. 엄마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소리로 집 어딘가에 엄마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식사준비나 집안청소) 아기는 안심합니다.

심리학에 따르면 이것을 대상 영속성이라 합니다. 갓난아기가 대상 영속성을 습득하지 않으면 눈 앞에 엄마가 안 보일 때 불안해한다는 것입니다. 대상 영속성이란 어떤 대상이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대상이 저 편에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만큼 대상 영속성을 습득했을까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도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는 갓난아기 수준이라면 주님의 즉각적인 돌보심 만을 계속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당장 허기를 채워주고, 달래주고,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할 것이고, 그 요구가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님의 현존과 돌보심이 없다고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이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돌보신다고 믿습니다.

 

217.    제러마이아 덴턴(2014. 5. 14. 수)

[사도행전 1,15-17.20-26; 요한 15,9-17]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님의 이 말씀 에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제러마이아 덴턴은 미국 상원의원을 지냈고 소장으로 퇴역한 해군 제독입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포로로 7년 반 동안 살았습니다(절반은 독방). 훌륭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용소 소장이 부하를 시켜 자신을 고문해서 고분고분하게 만들라고 했는데, 고문을 받는 동안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머리에서 번뜩 아름다운 화살기도가 떠 올랐다. ‘예수성심께 제 생명을 드립니다.’라는 기도였다. 그래서 화살기도를 되풀이 바쳤다. 진짜로 주님께서 나의 생명을 받아주시는 것처럼 느꼈고, 평화가 포근한 담요처럼 덮어 고문의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다. 고문하던 베트남 병사는 나의 얼굴을 보고 수용소 소장에게 더 이상 고문을 못하겠다고 하고 감방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는 지금도 이 기도를 꾸준히 바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신장암으로 투병하는 본당 신부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신부님, 마음을 다해 예수성심께 기도를 바치면, 고통을 적게 겪느냐 많이 겪느냐, 오래 사느냐 얼마 못사느냐 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부님의 마음이 평화로워질 테니까요.” 우리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괴로울 때 묵주 신공처럼 ‘예수성심께 제 생명을 드립니다.’라는 화살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218.    마떼치기를 통해서 만난 하느님 (2014. 5. 18. 일)

[사도행전 6,1-7; 1베드로 2,4-9; 요한 14,1-12]

복음에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내가 먼저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예수회 동료가 미국에서 8박9일 피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도신부는 그 형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은 핏기가 없을 정도로 하얗고,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물으니, 동료는 기도가 잘 안 되어 6-7번을 했다고 했습니다. 지도신부는 이러다 사람 잡겠다고 생각하고, 어릴 때 무엇하고 놀았는가 물으니 그는 마떼치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내일은 기도하지 말고 그냥 놀면서 하루를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동료는 기도의 의무가 없으니,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을 먹고 놀기 시작했습니다. 피정 집 주변에는 큰 호수가 있고, 아주 큰 아름드리 나무들로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떼를 만들어서 놀기 시작했는데, 이 놀이를 하는 동안 그는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 자신과 함께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이 느낌을 지도신부에게 말하니, 지도신부는 그렇게 하루를 더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도 마떼치기를 하면서 놀았는데, 그렇게 행복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동료는 그때까지 늘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머리 차원에서 기도하고 하느님을 이해했을 뿐, 가슴으로 하느님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동료는 마떼치기를 하며 걱정하는 자신을 잊으면서 비로소 인격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신약성서의 귀중한 사상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분 뒤를 안전하게 따를 수 있도록 미리 앞서 가신다는 사상입니다. 곧 프로드로-모스(prodromos) 입니다. 곧 군대에서 주력부대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신속하게 이동하도록 앞서 가는 정찰대 를 말하거나, 큰 배가 접근하기 어려운 항구에 안전하게 입항하여 정박하도록 앞장서 돕는 작은 배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앞서 가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잘 만나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에 걸맞는 무엇을 갖추어야 합니다. 곧 뉘우침과 통회입니다. 반면 증오와 복수하려는 무정한 마음으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219.    파라클레토스 정의 (2014. 5. 25. 일)

[사도행전 8,5-8.14-17; 1베드로 3,15-18; 요한 14,15-21]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할 것이다.”

북미 한인 사제모임에서 있었던 정진철 주교님의 강론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꿰매는 수녀님’의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종족과 부족들 사이에서 오랜 전쟁과 갈등으로 그들의 언어에서 ‘감사하다’는 표현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느 날 심한 전투 후에 군인들이 어느 한국 수녀에게 와서 두개골이 깨진 사람을 살려내라고 총으로 협박하였고, 바느질을 잘 했던 한국 수녀가 어떻게 꿰맸는데 그 병사가 살아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전투가 벌어지는 날이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김없이 그 수녀에게 와서 갈라지고 터진 부분을 꿰매라고 협박했다는 것입니다. 그 수녀는 두 종족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면서 거의 80여명을 꿰맸다고 합니다.

사제 총회에서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1.5세대 한국인 사제(거의 70명)들의 북미주 한인 사제협의회의 정회원 자격에 대한 문제였다. 정관에 따르면, 정회원은 한인들 대상으로 본당사목과 특수사목을 담당하는 한국인, 비한국인 사제들입니다. 정회원은 총회에서 투표권이 있고, 임원선출 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집니다. 준회원은 미국 성당이나 신학교에서 일하는 1.5세대 한인사제들로, 임원선출 시 선거권, 피선거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북미주 한인 천주교의 발전을 위해 1.5세대 사제들에게 정회원 자격을 허락하자는 주장과 그들에게 임원 선출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는 것은 무리라는 두 입장이 맞서면서 갈등을 빚어졌습니다.

북미 한인 천주교회들 안에도 많은 갈등을 있습니다. 서로의 입장과 살아가는 이유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사도행전이 해답을 줍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사도들이 선택한 것은 인간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곧 성령을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할 것이다.” 이 보호자는 희랍어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곧 고소를 받은 피고인이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법정에서 그 사람을 변호하도록 요청받아 온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어려운 상황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돕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파라클레토스는 인간 변호사와 달리 불의한 행위와 주장을 하는 사람의 편에는 결코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다양성을 분열과 갈라짐이 아닌 일치와 화합에로 인도하십니다.

 

220.    감옥조차도 옥죌 수 없는 평화 (2014. 5. 27. 화)

[사도행전 16,22-34; 요한 16,5-11]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와 실라스가 필리비에서 여자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었는데, 사람들이 귀신들린 그 여자를 통해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들을 고발하여 감옥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깊고 열악한 방에서 차꼬까지 채워 육체 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사도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 습니다.

지진으로 감옥소의 문이 열려 간수는 죄수들이 탈출한 것으로 착각하여 자결하려고 했지만, 사도들이 감방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을 확인하고, 이 사건을 경험한 간수는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귀신들린 여자, 그 여자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 그리고 간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감옥소 밖에서 사는 사람들이지만 실제로 자유롭지가 않았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열악한 감방에 갇혀 차꼬에 채워졌던 사도들은 하느님을 찬미할 만큼 자유로웠습니다. 곧 사도들의 영혼이 감옥의 깊이만큼 깊은 평화를 누렸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현존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221.    하느님의 뜻. 예루살렘 지킴 아님 포기 (2014. 6. 1. 일)

[사도행전 1,1-11; 에페소 1,17-23; 마태오 28,16-20]

“너희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요한 17장 6절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신다.

예루살렘은 과거나 지금이나 세상 어느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수도입니다. 3천 년 전에 다윗이 수도로 삼았던 이래, 예루살렘은 천 년 동안 유대종교의 중심이었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 후 마호멧이 예루살렘 바위 돔에서 승천했고, 같은 장소에서 재림한다는 믿음으로 이슬람교도들의 성지가 됩니다. 그래서 이 도시를 차지하려고 오랜 세월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소개합니다. 14세기 당시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었고, 어진 그리스도교 왕 덕분에 모슬렘과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순례를 오는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도 모두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었 습니다. 그런데 십자군 안에 유대교, 이슬람교와 평화로운 공존을 원치 않고 그들을 예루살렘 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강경파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도로 십자군은 결국 살라딘 군대와 싸우게 되는데, 그 전투에서 십자군이 크게 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기사들은 예루살렘을 떠났고, 예루살렘에는 주인공 발리안과 소수의 기사들과 그곳 백성과 노예들이 남습니다.

항복 아니면 도주를 선택하자는 원로들의 요구에 발리안은 그 당시 싸울 권리가 없었던 노예들에게 무기가 있거나 싸울 수 있는 사람들 모두 무릎을 꿇으라고 하고, 그들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살라딘의 군대에 맞서 죽기까지 싸웁니다.

발리안과 그들의 용맹스러움에 감탄한 살라딘은 이러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다 죽겠다 싶어 발리안에게 제안합니다. “알라의 이름으로 안전을 보장하겠으니 백성을 위해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떠나라.” 장고 끝에 그 제안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발리안과 기사들은 예루살렘 에서 철수합니다. 

예루살렘을 지켜야 하는 십자군 기사 발리안은 예루살렘을 지키는 것보다 백성과 예루살렘 평화를 위해 예루살렘을 포기하는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를 떠나, 살라딘과 발리안에게서 백성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읽는 믿음을 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동시에 하느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했던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우리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부터 예수성심성월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자비심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그 자비심을 배워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합시다.

 

 

222.    성령을 입음과 무아경 차이 (2014. 6. 8. 일. 성령강림대축일)

[사도행전 2,1-11; 1코린토 12,3ㄷ-7.12-13; 요한 20,19-23]  

오순절에 성령이 기도하는 사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성령은 오순절 때 비로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느님이셨습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성령은 초대교회 안에서 지배적 실재로써 모든 지도력과 이끄심과 모든 지혜와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도들과 신자들은 어떠한 결정도 예외 없이 성령을 거쳐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행위, 활동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령강림과 그 활동은 한시적이지 않고 앞으로 영원히 계속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할 수 없다.” 성령에 힘입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희랍에 디오니소스 축제가 있습니다. 숭배자들은 몸에 새끼 양 가죽을 두르고, 담쟁이덩굴 화관을 쓰고, 산 속에서 축제를 벌였습니다. 피리 불고, 북과 꽹과리를 치고,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면서 사람들은 도취와 무아경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광신적 축제는 인간 정신을 유약하고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무아경(ecstasy)은 문자 그대로 혼이 육체를 떠난 혼수상태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무아경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보통의 상태에서 잡을 수 없는 더 높은 진리를 얻고, 높은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정상적 의식에서는 이런 것들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아경은 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이탈하는 상태지만, 신접(神接)은 신령한 힘이 인간 몸 속에 들어와 무엇을 행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정리하자면, 무아경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주체성을 박탈 당합니다. 즉 기억을 할 수 없는 무의식 상태에서 무엇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경험을 말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런 상태에서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지도, 전달받지도 못합니다.

초대교회에 방언이라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방언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 했던 은사였습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 신적인 것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어려운 방언현상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무아경과는 달리 성령을 입은 영혼들은 결코 의식을 잃지 않습니다. 인격을 가진 자유로운 한 사람이 자유로운 다른 인격의 사람을 만나서 분명한 의식으로 소통합니다. 무의식이나 강요된 상태가 아니라, 전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의사소통을 나누고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성령 안에서 인간의 의지와 판단력은 정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나거나 자신의 진실을 대할 때는 무의식이나 환각이나 취한 상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여야 자유롭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힘을 입을 때 받게 되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우리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평소와 일상에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분께 전적으로 의지하지도 도움을 청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223.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2014. 6. 15. 일. 삼위일체 대축일)

[탈출 34,4ㄱㄷ-6.8-9; 1코린토 13,11-13; 요한 3,16-18]

세상이 아들을 통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당신은 그분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가지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빠’라 부른 것은 유대종교에서 하느님께 가장 친밀하게 부를 수 있었던 칭호였기 때문입니다. 철두철미한 가부장적 유대사회에서 하느님을 엄마라 부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신 것은 진짜 혈연적 사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가까이하고 만날 수 있는 사랑스러운 분임을 알리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중학교 1학년 트레버는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랐습 니다. 알코올 중독의 어머니, 고부간 갈등, 게다가 폭력적인 아버지와 살았기 때문에 그는 마음에 큰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시모네 선생님도 큰 상처가 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자기 분을 못 참아 아들에게 석유를 붓고 불을 지르는 바람에 죽다 살아났는데, 그때 입은 화상이 얼굴에 남아 있었습니다.

시모네 선생은 학기 첫 수업에서 모순투성이의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주제로 숙제를 냅니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라는 것입니다. 트레버가 찾은 방법은 도움이 필요한 세 사람을 선정해서 그들에게 조건 없이 선행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도움을 받으면 타인에게 도움을 줄 것이고, 또 그렇게 확산되면 세상이 점차 변화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세 사람을 선택하는데, 마약을 하는 부랑자와 왕따 친구, 그리고 숙제를 내 준 시모네 선생님입니다. 첫째는 집으로 데려와서 씻기고 새 옷을 입혀주었고, 왕따 친구와는 함께하면서 기 죽지 않게 용기를 주고, 시모네 선생에게는 그냥 그의 말을 경청합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트레버의 선행은 돌려 받겠다는 생각 없이 하는 것이고, 그저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축일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께서는 우주 어디에서 홀로 독백하는 외로운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인격적인 만남과 대화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인격의 성장은 자신을 다른 인격에게 개방할 때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실 때도 ‘한 인격’으로써 당신을 ‘다른 인격’에게 개방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도 자신을 하느님께 ‘인격으로’ 개방하게 됩니다. 그 원동력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224.    멍에 (2014. 6. 27. 금. 예수성심 대축일)

[신명 7,5-6-11; 1요한 4,7-16; 마태오 11,25-30]

“내 멍에는 편하다.” 편하다는 희랍어는 ‘몸에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멍에가 잘 맞지 않으면 짐승 목의 가죽이 벗겨지고 아프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목수로써 멍에를 많이 만드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당신에게가 아닌 우리에게 맞고 필요한 것입니다. 맞춤복처럼 내 몸에 잘 맞는 것입니다.

“내 짐은 가볍다.” 그 짐은 운반하기에 가볍고 쉽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부과된 것이어서 무겁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질투나 미움으로 부과된 것이라면 지치게 만듭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가치 있는 일은 실제 부담스럽고 무겁지만, 그러나 사랑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대학생인 지체장애자를 4년 동안 늘 업고 수업에 출석했던 어머니는 그들을 쳐다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아요, 제 아들이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 짐은 언제나 무겁지 않습니다.

다른 것에 의지하면 지치지만, 예수님께 의지하면 쉴 수 있게 됩니다.

 

 

225.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 (2014. 6. 29. 일)

[사도행전 12,1-11; 2티모테오 4,6-8.17-18; 마태오 16,13-19]

베드로는 3년을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을 했던 제자였고,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인물입니다. 교회의 두 기둥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오로는 유대종교의 바리사이로써 모세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구원은 율법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율법 준수와 예수님을 믿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에는 윤리도덕적인 차원에서 선악과 옳고 그름의 구별이 있고, 선하고 옳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도덕적이길 요구합니다. 의인은 축복과 보상을 받고, 죄인은 응징이 되고 처벌을 되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신심행위에는 후유증이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지 않는 엄격한 도덕 선생으로 간주되고, 가까이 갈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조건 없이 용서받는 경험을 하지 못하므로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억압적 신앙을 갖게 됩니다. 율법에서는 죄와 죄인을 구분하지 않고 죄인을 죄처럼 증오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죄와 죄인을 구분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스테파노를 용서하지 못해 현장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시며, 그분의 행적과 가르침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이란 계명과 의무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을 한 인격으로 만나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병폐는 용서받지 않았거나, 용서하지 않은 부서진 관계에서 옵니다. 이전에 바오로는 그냥 율법을 준수하면 되었지 용서가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다가 예수님을 통해 죄인을 용서하는 하느님을 발견하면서, 유대종교가 한낱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대종교의 시각에서,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이미 선을 넘은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자살했고, 베드로는 주님께 돌아와 탕감을 받았습니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죄인을 용서하는 하느님을 발견한 것이고, 유다는 그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용서를 받은 베드로를 교회 수장으로 세우신 것은 교회 통치를 율법이 아니라 용서받은 체험으로 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두 사도의 공통점은 바로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란 구원의 진리를 발견했고 그것을 믿음으로 사셨다는 점입니다.

 

 

226.    위험한 안주 (2014. 7. 1. 화)

[아모스 3,1-8.4,11-12; 마태오 8,23-27]

다윗이 여부스 성(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하기 전, 집도 성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전쟁을 했을 때에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철옹성 여부스 성으로 들어온 후 위험이 줄어들고 안전 하고 편안했으므로 점차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보니, 성전을 찾지 않게 되고, 종교의 진정성이 사라지면서 겉치레와 형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치기 아모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우찌아 왕은 남쪽 유다를, 여로보암 왕은 북쪽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때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안정과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물질적인 풍요가 하느님을 찾지 않는 정신의 빈곤을 가져왔고, 윤리와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 지고, 지도자들은 향락에 빠졌으며, 종교 역시 겉치레와 형식에 치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삶이 원하는대로 잘 되어 나갈 때에 오히려 위험한 것은 그만큼 안주하게 되고, 그만큼 하느님을 찾지 않게 되고, 찾더라도 예전보다 덜하기 때문입니다. 

 

 

227.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2014. 7. 11. 금)

[호세아 14,2-10; 마태오 10,16-23]

베네딕도 성인이 살았을 5세기에는 여러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즉 세상에서 벗어나 (탈세관) 독신으로 살면서 오로지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 습니다. 어떤 정해진 규칙도 없이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개인주의적 수도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면서 수도하는 방랑 수도자, 그리고 사막이나 광야에서 홀로 살아 가는 은수자가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홀로 살아가는 형태였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하는 사람들을 한 곳에 정주하게 하여, 공동체 규칙대로 살아가면서 한 장상에게 순명하는 수도회 시스템을 만들 었습니다. 아빠스를 중심으로 주위에 12개의 수도원을 만들고, 한 수도원에 12명의 수도자 들이 함께 공동생활, 공동전례를 하면서 기도하고 일하도록 했습니다.

불교의 총림의 예를 보면, 불교에도 크고 작은 많은 절들이 있습니다.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 등 총림에서는 많은 고승들이 배출됩니다. 총림(叢林)은 선승과 학승과 율승들을 양성하는 곳입니다. 이 세 부류는 추구하는 것과 삶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접근과 운영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부딪히고 언제나 난리법석입니다. 그 난장판을 피하지 않고 상생을 위한, 도의 추구를 위한 지혜를 찾고 터득해 나갑니다. 마치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작은 절에서는 갈등과 부딪히는 것들이 적어서 그만큼 살기가 편하지만, 그러나 절실하지도 지혜를 구하지도 않아서 훌륭한 고승들이 그만큼 적게 나옵니다.

혼자 살면 쉽지만, 독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더불어 살면 어렵지만, 영적으로 크고 빠르게 성장합니다. 이런 수도회 조직 안에서 많은 영적인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교회를 쇄신시켰습니다 (불교의 총림. 고승과 성인들).  공동 생활에서 함께 살면 많이 부딪치게 되는데, 그 갈등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고,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공동체 삶에서의 문제는 갈등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그 갈등을 피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함께 살면서 우리 각자의 마음을 경작하여 많은 신앙의 열매를 맺도록 그 지혜를 주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228.    팔레스티나의 씨 뿌리는 두 가지 방법 (2014. 7. 13. 일)

[이사야 55,10-12; 로마 8,18-23; 마태오 13,1-23]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에는 두 가지의 씨 뿌리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농부가 직접 밭을 오르내리면서 씨를 뿌리는 것이고, 다른 방법은 흔히 사용하는 편리한 방법으로 씨앗이 담긴 자루를 노새 등에 얹고 자루 한 쪽에 구멍을 내어 씨앗이 떨어지게 하는 방법인데, 노새의 움직임에 씨앗이 밭 안과 밖으로 떨어졌습니다. 복음에는 씨앗이 네 가지 종류의 땅, 즉 길과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과 좋은 땅에 각각 떨어졌습니다.

길은 밭이랑 사이에 사람들이 다니는 곳으로, 마치 길처럼 굳어버린 곳에 떨어진 씨앗은 부드러운 흙속에 묻힐 기회가 없습니다. 이는 씨앗이 뿌리박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닫힌 상태를 말합니다. 곧 쉽게 이루고 편히 살려고 하면 나태해지고, 그렇게 살다보면 자신을 비난하고 단죄할 하느님이 없기를 바라게 됩니다 (시편53,1).

돌밭이란 팔레스티나에 흔히 보는 땅 밑에 석회암 층이 있는데, 그 위에 흙이 10센티 정도 얇게 덮여 있는 땅을 말합니다. 토양이 깊지 않아서 태양열을 받으면, 씨앗이 빨리 발아하지만, 뜨거운 열기로 수분과 자양분이 부족하게 되어 뿌리가 말라 죽습니다. 돌밭에 씨앗이 떨어졌다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곧 말라버리는 깊지 않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곧 어려운 일이 생기면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시덤불은 잡초가 많은 땅을 제대로 갈아엎지 않으면, 잡초는 더 왕성하고 강하게 자라게 되고, 씨앗은 그런 곳에서 제대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여 결국 영양실조로 시들어 죽습니다. 즉 경작되지 않은 영혼의 상태를 말합니다. 신앙이 성장할 수 없는 영혼을 가리킵니다.

좋은 땅은 토양이 깊고, 돌도 없고, 잡초가 제거된 제대로 경작된 땅입니다. 여기서 씨앗은 방해 받지 않고 자라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229.    안식일 법 설명 (2014. 7. 18. 금)

[이사야 38,1-6.21-22.7-8; 마태오 12,1-8]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단죄했습니다. 곧 안식일은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기 위해서 오로지 그분께 봉헌된 날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해서 안 되는 노동을 규정했습니다. 수확하고, 키질하고, 타작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것, 그리고 짐을 운반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마른 무화과 열매 두 개만한 무게 정도를 짐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밭에서 이삭을 뜯어먹은 것을 두고, 이삭을 자른 것은 추수이고, 손으로 비빈 것은 타작이며, 쭉정이를 가리는 행위를 키질이라 하고, 그래서 전 과정을 볼 때 마치 안식일에 음식을 장만한 죄를 범한 것이라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3장 25-26절에 보면, “너희가 이웃의 포도밭에 들어갈 경우, 원하는 만큼 배불리 포도를 먹을 수는 있지만 그릇에 담아서는 안 된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곧 배고픈 경우, 남의 소출의 극히 적은 일부를 취할 수 있지만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농부가 모든 소출을 다 거두어들이지 않고 일부분을 남겨두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동물들을 위해서 그러합니다.

자비와 나눔이 곧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 정신을 아는 사람들이면 제자들의 행위는 단죄할 수 없습니다.

 

 

230.    밀과 가라지 농사. 진정한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 (2014. 7. 20. 일)

[지혜 12,13.16-19; 로마 8,26-27; 마태오 13,24-42]

밀밭에 씨앗을 뿌렸는데, 가라지가 생겼습니다. 종들이 어떻게 할까 물었지만, 주인은 밀과 가라지의 구분이 어렵고 또 가라지는 밀과 얽혀 있어서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면 밀도 다치거나 죽게 되기 때문에, 다 자란 추수 시기에 가라지를 가려내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를 보면, 세상에는 두 세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씨앗)을 자라도록 돕는 선한 세력과 그 씨앗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악한 세력입니다. 문제는 이 둘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선하게 보이는데 악한 결과가 나타나고, 악하게 보이는데 선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성급하게 심판하지 말고 심판은 마지막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는 뜻은 좋지만 밀이 다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큰 잘못을 범한 사람도 신용을 회복하고 남은 인생을 속죄하며 훌륭히 살 수 있고, 반면에 훌륭히 살았더라도 욕심 때문에 최악이 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든 변화될 수도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되며, 심판은 마지막에 하느님께서 공정하게 하시도록 맡기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밀밭의 가라지를 뽑지 말라는 것은, 밀을 다치지 않게 하고 밀농사를 망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밀농사를 하시는 분이시고, 반면 원수는 가라지 농사를 합니다. 즉 잘못된 점과 문제점을 의식하게 하고, 죄책감을 갖게 하고, 연민에 빠지게 해서 결국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고 마지막에 풍성한 밀을 수확하는 일입니다. 밀밭은 사람의 영혼입니다. 밀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은 원수가 유혹하고 인간이 선택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살려야 하고 가라지는 제거해야 하는 하느님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 종들이 우리가 밀을 뿌렸는데 가라지가 생겼다고 하니, 주인은 원수가 그렇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원수에 대해 타협이 없는 분명한 예수님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냉전시대에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곧 바로 항복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섣부른 유화정책이 전쟁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공산당 서기장, 후루시초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은 냉전을 이기지 못하고 언젠가 항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이다.’ 후루시초프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가 우선이라는 우리의 나약한 자세 때문입니다. 죽는 것보다 무릎을 꿇고 사는 것이 낫고, 죽는 것보다 공산주의자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굴복 하면서 평화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역사가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평화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적에게 단호하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너희들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절대 이 선을 넘지 마라.’  타협이나 항복이 아니라 철저히 그들을 무력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를 망가뜨리는 죄와 그 죄를 조장하는 원수들에게 이런 단호히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231.    분도영성에서 이냐시오 영성에로 변화 (2014. 7. 26. 토)

[예레미야 7,1-11; 마태오 13,24-30]  

“보화라는 것은 대단히 소중한 것으로,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취해야 할 그것이다.”

1491년 이냐시오 성인이 태어난 그 해에 스페인의 페르디난도 5세는 그라나다 전투에서 승리 하면서, 오랜 기간 스페인 남부를 통치하던 무어인들을 쫓아내고 스페인을 통합하였습니다.

1년 뒤 1492년에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냐시오 탄생 25년 후 1517년에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신대륙의 발견으로 유럽의 나라들은 식민지 개척을 위해 아프리카와 남미로 떠났고, 선교사들은 그들의 뒤를 따랐는데, 신대륙 발견과 종교개혁이 이냐시오와 동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즉 복음의 본질을 알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가고, 비 그리스도교 타 문화 안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보다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기존의 영성(정주 형태의 수도원에 맞는)은 적합치 않다고 판단하고, 신앙의 본질은 상실하지 않으면서 그 문화에 적합한 형식들을 자유롭게 취하도록 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알면 복음을 듣는 이들의 문화에 맞는 형식들을 찾고 취하는 융통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유럽이 취한 방법론과 형식들 그대로 고수하지 않고, 타문화에 맞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사성제를 중심으로, 회원 개개인은 양심 성찰 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공동식별을 통해 자신들의 사도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것을 다 팔아 반드시 취해야 하는 보화가 무엇인지 식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인의 선호와 이해관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자기 약함과 욕심의 결과물이 하느님의 뜻으로 둔갑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섭리에 나를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232.    예레미아의 분노 (2014. 7. 30. 수)

[예레미야 15,10.16-21; 마태오 13,44-46]

예레미야는 20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키야 때까지 약 40년 동안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이 기간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왕들의 실정과 폭정으로 말미암아 혼란한 시대가 계속되었고, 종교는 부패하고 백성들은 점차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에서 왕들과 위정자들을 비판했습니다. 그의 활동은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고, 심성이 착했던 그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다 보니 점차 화를 잘 내고 거칠어 졌으며 누구에 대한 미움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의 친구들과 가족들마저 예레미야를 헤치려고 했을 때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는 한탄을 하게 됩니다.

그는 두 가지에 흔들립니다. 동포에게 수모와 박해를 받아 가지게 된 섭섭함과 미움, 그리고 동시에 풍지박살 나고 시련을 겪게 될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측은지심이 그것입니다. 자신을 헤치려는 그 사람들을 살려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음에도 예레미야가 예언직을 계속하고, 자신의 불행에서도 부르심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다른 것을 상대화시키는 보화, 하느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33.    신앙의 정신 (2014. 8. 5. 화)

[예레미야 30,1-2.12-15.18-22; 마태오 15,1-2.10-14]

예수님께서 정결례를 두고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 규칙을 이행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외적 행위보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어떤 것이 정결하고, 어떤 음식을 삼가고, 손은 언제 어떻게 씻고 하는 외적인 규칙보다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 처리가 상대적으로 더 어렵습니다. 열심히 성당에 나오고, 교회에 후하게 헌금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들은 신앙의 외적 수단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이웃에게 확장).

그렇다고 외적 규칙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신앙의 정신이 상실된 채 외적 규칙 준수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적 신앙이 충실하면, 그 만큼 그것이 외적 행위로 훌륭 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부모 양가의 수용과 이해를 이루면 그만큼 결혼예식이 더 빛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식은 장례식이 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외적 규칙 준수를 강조하다 보면 점차 영혼은 다소곳이 있지 않게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잘하고 있다고 인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누룩처럼 번지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은총에 의존하지 않을 때 생가는 현상입니다.

 

 

234.    넬슨 만델라 (2014. 8. 10. 일)

[열왕 상 19,9ㄱ.11-13ㄱ; 로마 9,1-5; 마태오 14,22-33]

오늘 복음을 보면 물에 빠진 베드로가 죽음의 위기를 느끼고 구해달라고 소리를 질렀을 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주셨습니다.

2013년에 타계한 위대한 인물,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차별 정책 (아파르트 헤이트)에 맞서다 27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고, 그 나라에서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인물 입니다. 만델라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인 상황을 짧게 소개합니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건설했고, 19세기에는 영국이 그곳을 지배하게 됩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 주민들(아프리카너)은 혼혈은 어떤 형태건 신의 뜻에 벗어난 범죄로 인식하는 인종주의적인 성향이 강했고, 그 나라를 백인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은 국민을 네 등급으로 분류합니다(1등급 백인, 2등급 백인 피 섞인 혼혈인, 3등급 아시아인, 4등급 흑인). 이들 사이에 결혼은 물론 성관계도 법으로 금지 시켰습니다. 특히 흑인에게는 거주 제한, 강제 이주 및 직업 활동이 제한되었습니다. 공공시설과 공동장소 사용에서 흑백이 분리되었습니다. 이 법을 어길 시 재판없이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델라는 흑인 인권을 위해 활동하다가 1960년의 ‘샤프빌 학살’의 계기로 적극 적으로 무장 투쟁의 길로 들어섰고,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27년을 복역합니다. 1990년도 까지 백인 정권 하에서 흑인이 약 3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흑인들의 저항은 거세지고 국제사회가 경제적 압박을 가했으므로, 백인 정권은 체제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감옥소의 만델라를 찾아서 협상하게 됩니다. 흑인 강경파들은 그 협상을 변절이라고 반대했지만, 만델라는 폭력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 받아들여, 협상 끝에 만델라와 모든 정치범들이 석방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50년의 인종분리 정책이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1994년에 흑인에게 참정권이 주어졌고,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복수와 보복의 유혹을 물리치고, 일치를 위해 용서와 화해를 주장합니다. 국민 통합과 화해 증진법을 만들고, 과거의 범죄 행위는 밝히되 죄를 인정하면 처벌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준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만이 상처가 치유되고, 어둠에서 해방되어 빛을 봅니다. 사람들은 출소한 만델라의 평온한 미소를 보고 놀랐습니다.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신념으로 가해자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 만델라의 위대한 점입니다.

만델라는 자신을 학대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때, 또 주위에서 그것을 부추기면서 복수하자고 유혹했을 때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했고, 인종차별주의자들 못지않게 폭력적 으로 변해버린 동료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그가 간절히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는 지체 없이 그를 붙잡아주셨습니다.

“그가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베드로가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처럼 만델라 역시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235.    부(富)의 세 가지 문제점 (2014. 8. 19. 화)

[에제키엘 28,1-10; 마태오 19,23-30] 

낙타는 유대인이 알고 있는 가장 큰 동물입니다. 성곽을 두른 도시에는 두 개의 문이 있는데, 낮 동안 사람과 동물이 다니는 큰문과 저녁에는 사람들이 몸을 굽혀 들어올 정도로 좁고 작은 문입니다. 작은 문을 ‘바늘 귀 문’이라 불렀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낙타가 사람도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부(富) 그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치 같은 이슬을 마시는데도 벌이 마시면 꿀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듯이. 그래서 부에 대해 세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 부는 잘못된 독립심을 조장합니다. 돈의 혜택을 받으면 돈으로 다 해결된다고 믿습니다. 묵시록 3장 17절에 “나는 부자이며 부족함이 없으므로,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에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돈을 가지고도 자신을 구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둘째, 부는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듭니다. 즉 아무리 많이 가져도 더 갖고 싶은 욕심입니다. 넉넉하다는 것은 언제나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을 말합니다. ‘가진 것보다 더’를 요구하고, 채워져도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셋째, 부는 세상에 집착하게 합니다. 마르코 6장 21절에는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했습니다. 부로 인해 이 세상의 즐거움에 마음을 두면, 정작 우리에게 필요하고 좋은 것을 잊게 됩니다.

여기서 부자라는 표현은 영원한 실재인 하느님이 아니라, 지나가는 세상에 대한 애착을 의미 합니다. 인생에서 부(富)가 첫 번째 목적이 되면 낙타가 작은 문을 통과할 수 없듯이 결코 구원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36.    일곱 가지 거짓말 유형 (2014. 8. 24. 일)

[이사야 22,19-23; 로마 11,33-36; 마태오 16,13-20] 

예수님께서 곧 예루살렘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게 된다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마치 자살하는 사람을 붙잡듯이 예수님을 붙들면서 안 된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를 두고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유혹을 이전에 광야에서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다. 사탄의 가장 큰 유혹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거짓말의 아비라고 하셨습 니다(요한 8.44).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거짓말을 일곱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교회 가르침에 반하는 거짓말 (거짓 교사, 이단, 사이비).

둘째, 모두에게 해가 되고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거짓말.

셋째, 한 사람에게만 이익이 되고, 다른 모두에게 해가 되는 거짓말.

넷째, 거리낌 없이 즐거움으로 행하는 거짓말.

다섯째, 매끄러운 화술로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한 거짓말.

여섯째,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만 이익이 되는 거짓말.

일곱째,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고,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첫 번째 거짓말이 가장 나쁜 것이라 하였습니다. 복음의 본질이 파스카인데 십자가를 빼면 부활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고, 우리가 당신을 따르도록 감언이설로 거짓말하지 않으 셨습니다. 당신이 제시하는 구원의 길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따른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몸소 보여주심). 그래서 복음의 진리를 가르칠 때, 십자가를 언급하지 않거나 그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사탄이 하는 짓과 똑같은 것이 됩니다. 십자가는 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간주됩니다. 여기서 거짓말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피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237.    희랍의 운동 경기와 영적 훈련 (2014. 9. 12. 금)

[1코린토 9,16-19.22ㄴ-27; 루카 6,39-42]

바오로는 안이한 길을 걸으려는 코린토 교우들에게 엄격한 자기 훈련을 하도록 권장합니다. 당시 희랍은 올림픽 경기가 열렸던 곳이고, 지역마다 크고 작은 운동 경기가 열렸으며, 많은 사람들이 우승을 위해 열심히 훈련을 했습니다. 운동 경기가 자주 열렸던 것은 그것이 전쟁을 위한 신체 단련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선수들은 곧 시들어버리는 월계관을 타고자 열심히 훈련합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메달을 따기 위해 악바리처럼 훈련합니다. 훈련에 게으른 선수들은 선수촌 에서 퇴출 당합니다.

이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것 못지 않은 훈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약한 군인은 전투에 이길 수 없고, 연습에 게으른 선수는 경기에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체와 정신은 물론, 영적 훈련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마침 신랑이 올 때 운이 좋아서 깨어 있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영적 훈련으로 자신들을 철저히 준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영적 훈련을 게을리 한 이들은 자신에게 은총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합니다. 은총이 아니라 훈련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란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238.    사도라고 변명해야 하는 바오로 (2014. 9. 18. 목)

[1코린토 15,1-11; 루카 7,36-50]

사도 바오로가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웠던 것은 과거에 그리스도 교인들을 박해했던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의심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모두 잡아 넣기 위해 위장잠입한 사람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사람들이 그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도라고 여기지 않았고, 또 그에게 그런 권한이 없다고 여겼다는 점입니다. 사도는 적어도 지상의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경험과 파스카 사건을 목격한 부활의 증인들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이 점에 대해 늘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던 다마스쿠스 회심과 이방인의 사도로 불림을 받았음을 설명해야 했고, 자신이 3천국까지 끌어 올려진 체험까지 언급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구차한 일이었습니다. 마치 그는 영이 서지 않는 지휘관과 같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선교사가 된 바오로 사도는 자기 동포에게서 유대종교의 변절자로써 박해를 받았 습니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늘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오로는 예수 그리 스도를 발견한 것을 제일 큰 행운이요 위안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예수 그리스도를 산 것입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올인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 것을 다 팔아서 예수님을 산 여자를 볼 수 있습니다.

 

 

239.    선조들의 순교 (2014. 9. 21. 일)

[지혜 3,1-9; 로마 8,31ㄴ-39; 루카 9,23-26]

한국의 선조들이 중국에서 가져온 서학(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 공부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된 점도 놀랍지만, 당시 교리 지식이 열악했던 조건에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에 몇 가지 힌트를 드리고자 합니다.

마카오 시절에 김대건 신학생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네로 황제가 로마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집에서 사자를 키우던 어느 그리스도인도 잡혀가 경기장에서 자신이 키우던 사자와 마주쳤습니다.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던 사자는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그 사자는 자신을 키웠던 주인을 보고 조용해진 것입니다. 이처럼 사자도 주인을 알건만 왜 사람들은 천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김대건 신부님은 천주 하느님을 ‘임자’라고 불렀는데, 즉 살아있는 하느님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개종 전에 희랍 철학자였던 초대 교부, 유스티누스(100-165년)는 희랍 철학의 로고스 개념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리고자 했습니다. 로고스는 생명의 원천, 곧 존재의 근거입니다 (요한은 로고스를 말씀으로 변역). 예수님께서 로고스이시며, 세상은 로고스를 통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된 모든 것은 다 로고스 씨앗을 가집니다. 로고스는 창조물 안에서는 자연법으로, 인격체 안에서는 양심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는 율법으로 드러납니다. 이들은 하나의 동일한 로고스 곧 예수님에게서 기원되기 때문에 서로 대치되거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서로 역할과 표현이 다르지만, 인간이 구원되고 하느님을 향하는 하나의 목적을 갖습니다. 

그래서 로고스 씨앗을 가진 우리가 그리스도교 복음을 들을 때 우리의 본래 주인이신 하느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곧 우리 모두는 우리 본래의 주인이신 임자 천주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면, 마치 땅에 묻힌 보화를 발견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듯이 하게 됩니다. 자신 안에서 최고의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잃지 않고 반드시 지키려고 할 것이고, 상대적인 것은 포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김대건 신부님과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240.    혼인잔치의 초대, 몰훼와 스케마 (2014. 9. 28. 일)

[에제키엘 18,25-28; 필리피 2,1-11; 마태오 21,28-32] 

어떤 한 사람이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자기 두 아들에게 일하라고 하니, 첫째 아들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어 일하였고, 둘째는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일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첫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유대종교의 율법을 준수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가리킵니다. 삶 전체가 하느님을 섬기고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종교의 핵심그룹이었던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게하였습니다. 의인들로 자처한 이들은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죄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사실 둘 다 하느님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동의했지만 실천하지 않았고, 동의하지 않았지만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뜻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모님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혼인잔치의 비유(마태오 22,1)에서, 혼인잔치에 미리 초대를 하고, 잔치가 다 준비되면 그때 초대한 손님들에게 시간을 알립니다. 그런데 주인은 거절 당했고, 초대를 거절한 이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여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갖춘 의인들로 자처했지만, 정작 구세주가 이 세상에 왔을 때(잔치가 다 준비되었을 때) 그들은 그 초대에 응하기는커녕 혼인잔치의 신랑마저 죽였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저작거리에 가서 죄인들과 이방인들까지 불러들입니다 (루카 14,15-24).

필리비서 2장 1-11절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바오로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본체라고 하였습니다. 본체를 표현하는 두 희랍어가 있습니다. 몰훼와 스케마. 몰훼는 어떤 사물의 변하지 않는 형상을 뜻합니다. 즉 어떤 변화나 환경에 있어서도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지만 본래적으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신성을 지닌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스케마는 시간의 경과와 환경에 따라 변하는 외적의 형상을 뜻합니다. 예로써, 인간에게 몰훼는 결코 변치않는 인성이고, 스케마는 계속 변화하는 것으로, 갓난아기, 소년, 청년, 중년, 장년, 노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신성을 지닌 하느님께서 외적으로 변화하는 스케마로 들어오셨다는 말입니다(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할파그모스는 ‘취하다. 강탈하다. 움켜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몰훼를 강탈 하거나 움켜쥘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부터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몰훼를 비우고 스케마를 강탈했음에도 그분의 본래의 모습은 그대로 가지십니다. 그것을 붙잡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비우시고 스케마를 취하셨습니다. 억지가 아닌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두 아들과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예’하시고 그대로 실행하셨습니다.

 

 

241.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2014. 10. 5. 일)

[이사야 5,1-7; 필리피 4,6-9; 마태오 21,33-43]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 포도원은 (하느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이고, 소작인들은 유대의 왕과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종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구약의 예언자들이고, 마지막에 보낸 아들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실정(失政)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알아보지도, 그분의 가르침을 듣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 습니다. 이것을 이사야서는 포도밭에 좋은 포도대신 들포도를 맺게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몇 가지로 정리하자면, 우선 첫째,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를 보여 줍니다. 포도원(이스라엘)을 소작인들에게 맡긴 것은 그들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인내를 보여줍니다. 소작인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였지만, 주인은 즉시 보복하지 않고 아들을 보낸 것은 그들에게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인간의 계획적인 죄를 지적합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차지할 목적으로 아들과 종들을 죽이는 주인에게 반역과 불순종을 드러냈습니다. 넷째, 주인이 어떻게 심판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불성실한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맡깁니다. 하느님에게서 버려지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면서 자신이 살 수 있는 포도밭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 바로 심판 입니다 (가슴을 치고 이를 갈게 된다.).

여기서 소작인들이(백성의 지도자들이) 주인이 보낸 이들을 (우연이 아닌) 어떻게 계획적으로 죽였는지, 열왕기 상 21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예언자로 있던 시기에, 나봇이란 사람이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포도원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별궁 근처에 있었습니다. 아합 왕은 더 큰 정원을 만들기를 원해서 포도원을 팔라고 했고, 나봇은 선조의 유산이라 팔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이에 왕은 몹시 마음이 상해서 밥도 먹지 않고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이세벨 왕비가 그 사실을 알고, 아합의 이름으로 밀서를 나봇이 살고 있는 성의 원로들에게 보내어, 백성들 앞에서 나봇이 하느님과 왕을 욕보였다고 고발하고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봇은 돌에 맞아 죽었고, 그의 포도밭은 왕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유부단한 왕과 사악한 이세벨, 그리고 부화뇌동한 마을의 원로들이 합세해서 무죄한 나봇의 생명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이들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도 언제 어디서든 궁지에 몰리거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 소작인 들처럼 하느님의 사람과 구세주를 죽이게 됩니다. 여기서 바오로는 덕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필리비 4.8-9)

평소 우리가 죄를 안 짓는 소극적인 것보다 덕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소극적인 신심은 마치 이등병이 탱크를 모는 것처럼 위태위태합니다. 성모님처럼 덕행의 실천으로 많은 영적인 이로움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242.    바오로의 회심 후 영적 여정 (2014. 10. 7. 화)

[갈라티아 1,13-24; 루카 10,38-42]

바오로가 회심하고 난 뒤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는 회심 후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홀로 있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살피기 위해, 또 사람들을 만나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다시 만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한때 자신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언해야 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지도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배신자로 박해를 받을 수 있는 그곳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시리아와 킬리키아로 갔습니다. 그 지방에는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공부했고 청년시절을 보냈던 고향, 다르소가 있습니다. 가족과 고향 사람들과 친구들은 그에게 미쳤다고 비난과 경멸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현재의 자신을 알려야 했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오로지 예수님께 의지할 뿐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이미 온갖 비난과 수모를 다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243.    선교사들의 네 가지 책무 (2014. 10. 18. 토)

[1티모테오 4,10-17ㄴ; 루카 10,1-9]

이 구절을 보면, 12제자의 활동보다 더 넓은 선교 활동을 볼 수 있습니다. 72인으로 되어 있지만, 일부 기록에는 70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70은 유대인에게 하나의 상징적인 숫자입 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하고 모세를 돕기 위해 선택된 장로 수가 70이었고 (민수기 11장), 유대 최고의회의 산헤드린 의석수가 70이고, 세상의 모든 나라의 수가 70이라 생각 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상의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그날이 오리라 고 믿었습니다. 본문은 선교 사명을 받은 이들이 가져야 책무를 알려줍니다.

첫째, 제자들의 마음이 재물에 어지럽혀져서는 안 되고, 여장은 가벼워야 한다.

둘째,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전념해야 한다. 도중에 길에서 누구를 만나고 인사하느라고 늑장을 부려서는 안 된다. 즉, 하느님의 일을 맡은 사람은 사소한 것에 한 눈 팔지 말라는 말입니다.

셋째, 제자들은 수입을 바라는 목적으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 초기에 식객 접대 습관이 있었는데, 보다 낫고 편안한 숙소를 구하려고 이집 저집으로 돌아다니지 말 것이고, 일하지 않고 한 집에서 3일 이상 지내거나, 성령을 빙자하여 금품과 음식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입니다. 

넷째, 하느님의 소명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누구는 수고하고 또 누구는 수고하지도 않고 열매 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수고와 열매를 함께하고 나누어야 한다.

여기서 들어온지 한참된 레지오 마리애 회원들은 늘 병사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이 지나면 하사관도 되고 장교가 되어 지휘관이 될 수 있어야 단장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늦게 들어오는 병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244.    노인 요양원 (2014. 10. 19. 일)

[이사야 2,1-5; 로마 10,9-18; 마태오 28,16-20]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십 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고, 모든 민족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고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가르침이 무엇을 말하는지 요한 20장 2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떤 젊은 이가 있었는데, 그는 매주 노인요양원에 봉사하러 갑니다. 그곳에 계시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자주 폭력을 당해 아버지에 대한 정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부자의 정을 찾아야 할 것 같아 그곳에 가는 것이 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과 말 벗이 되어주는 젊은이가 자기 아들인지 모릅니다.

어느 날, 젊은 이가 일어나는 아버지를 부축하는데 아버지는 아프니 팔을 세게 잡지 말라고 하면서,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자주 폭행을 당해서 팔이 부러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당했던 폭력을 아들에게 대물림을 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젊은 이가 아들인지도 모르고, 또 과거 자신이 아들에게 자주 폭행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삶의 무게와 짐을 십자 가를 받아들이듯이 받아들였을 때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묶이고 매인 것을 풀게 되면서, 그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라는 선물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 행위 전에 먼저 성령을 받으라고 한 것은, 용서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폴 마이어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바람을 멈출 수 있는가? 멈출 수 없다. 하지만 풍차를 만들 수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멈출 수 없다. 하지만 배의 돛을 조종할 수 있다.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전교주일을 맞아, 우리가 은총의 힘을 입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전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245.    감추어진 죄 (2014. 10. 23. 목)

[에페소 3,14-21; 루카 12,49-53]

잔디가 잘 자라지 않아서 원인을 알고 보니, 두더지가 닥치는 대로 벌레를 잡아 먹기 위해 잔디밭 밑을 다녀서 엉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보이지 않는 원인이 있었습니다(여호수아 7장). 여호수아가 적군보다 훨씬 많은 3천 군사를 데리고 적군의 수가 훨씬 적은 아이 성을 공격했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피해를 입고 성을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들이 많은 군사에도 왜 승리하지 못했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숨겨진 원인을 알려주셨습니다. 여호수아 병사인 아칸이 계명을 어기고, 여리고 의 바쳐야 할 물건을 훔쳐 자신의 것으로 챙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고 순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숨겨진 죄를 발견하여 해결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추어진 죄는 언제나 큰 피해를 줍니다. 스스로 해결을 보지 않을 때, 하느님은 정상화를 위해서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허락하십니다.

 

246.    사랑에 대한 설명 코린토 1서 13장(2014. 10. 26. 일)

[탈출 22,20-26; 1테살로니카 1,5ㄴ-10; 마태오 22,34-40]

바오로는 데살로니카에서 3번의 안식일 때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바오로가 예수를 왕으로 여기고, 황제의 법령을 어기고 있다고 선동하면서 불량배를 동원하여 바오로를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로이아를 거쳐 아테네로 피신 했습니다. 단지 3주의 선교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뿌리내렸는지 걱정했던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통해 테살로니카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체류 3주 동안 바오로는 복음의 정수를 전했을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감사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코린토 1서 13장에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가장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다면서 믿음, 희망, 사랑을 언급합니다. 사랑에 대해 중요한 부분만 언급하겠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린다.’ 이는 사람에게 대한 인내를 말합니다. 부당한 취급을 받을 때 보복하지 않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이는 약자의 표시가 아니라 승자의 결단으로, 우리가 잘못된 선택으로 처지가 악화되고 그 반복으로 삶의 경영에 실패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옳은 것을 선택하리라고 믿고 기다리십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친절하다.’ 사랑은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곧 무엇을 얻기 위해 행하는, 의미 없는 도덕적 의무사항이 아닙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질투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타인의 소유를 부러워하는 것과 자신 에게 없는 것을 타인이 가지고 있음 자체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인간적 감정이지만, 후자는 물건 자체에 대한 욕심보다는 타인이 그것을 갖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극복하는 힘이 아가페사랑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위대한 선교사, 캐리는 신구약 성경을 34가지 인도 방언으로 번역한 언어학자였습니다. 그의 인생은 구두 수선공 이었습니다. 그가 인도에 도착하여 어느 만찬회에서 소개될 때, 예전에 구두를 만든 분이었다고 하자, 캐리 는 정정하기를 “구두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고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는다.’ 여기에 쓰인 동사는 어떤 사항을 잊지 않기 위해 장부에 기록 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삶에서 가장 훌륭한 기술 하나는 잊어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기술 입니다.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은 과거의 증오를 기억케 하는 물건을 지붕에 매달아 놓았다고 합니다. 잊지 않고 불씨처럼 살려서 그 원한을 갚기 위해서입니다. 화와 앙심을 품고 사는 것은 사탄에게는 최적의 환경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욕을 얻어먹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이 바로 쾌감입니다. 보통 타인이 행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보다 불행에 대한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 합니다. 누구를 칭찬하는 이야기는 부담스럽고, 비판하는 것을 듣기 좋아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기보다 더 쉽습니다. 인간의 고약한 특성입니다.

‘진실을 두고 기뻐한다.’ 진실이 이기기를 바라지 않거나 진실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곧 진실이 우리를 두렵고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의 문을 닫으면 이내 우리는 내적 자유를 상실합니다. 두려움을 이길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준다.’ 어떠한 모욕과 실망과 배반에도 상대의 결점과 잘못과 실수들이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는다.’ 여의치 않지만 모든 것을 선으로,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마지막에 구원된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믿거나 바라지 않으면 구원의 싹은 성장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여기에 사용한 동사는 휘포모네입니다. 그냥 참는 소극적인 무엇이 아니라, 견디어 나가면서 오히려 정복하여 변화시키는 정신입니다.

 

 

247.    위령의 날 (2014. 11. 2. 일)

[욥 19,1.23-27ㄴ; 로마 5,5-11; 마태오 5,1-12ㄴ]

11월의 위령미사는 특히 돌아가신 모든 연옥 영혼들이 하루 속히 하느님의 나라에 가도록 기도 하는 날입니다. 매일미사 책의 나눔(50쪽)의 두 가지 기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당신의 제자들을 만나신 것을 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여기서 마지막이 아니라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긴 이들에게 죽음은 축복이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죽음이 저주가 될 것입니다.

의인들은 축복을 받고 악인들은 처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없고, 주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자기 욕심을 차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담의 후손 처럼 죄를 짓고 죽어야 할 우리의 인생을 보고 예수님께서 슬피 우셨고,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도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은 주님의 자비하심입니다.

어떤 분이 병자성사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진작 알았더라면 이렇게 바보처럼 살지는 않았을 텐데,” 그분은 주님께서 우리를 탓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에게 얼마나 자비로우신지를 몰랐다가 늦게 깨닫고 감사하며 자신의 삶을 잘 정리하고 이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행복할 수 있는 조건들이 나옵니다. 마지막에 한 가지 더 첨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뉘우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이미 앞서 이 세상을 떠난 분들이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위로와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합시다. 

 

 

248.    혼인잔치의 초대장 (2014. 11. 4. 화)

[필리피 2,5-11; 루카 14,15-24]

당시 유대 풍습에 혼인잔치는 미리 초대하고, 나중에 잔치가 다 준비되면 종들을 보내어 시간을 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미 초대장을 받은 이들이 바로 그날 혼인잔치에 안 가겠다고 거절하는 것은 중대하고도 심각한 모욕에 해당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인들로 자처했던 유대인들이 그런 짓을 했다고 보셨습니다. 이와 다르게 죄인들 이라는 세리와 이방인들은 잔치에 참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로, 구매한 밭을 보러 갔다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한 자신의 사업에 마음을 빼앗긴 경우를 말합니다. 겨릿소 다섯 쌍을 부려보기 위해서라는 것은 곧 새로운 것과 신기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가전제품이나 컴퓨터나 자동차 등 신상품이 나왔으니 가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가를 간다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아내를 취하면 군대를 보내거나 어떤 직무를 맡아서는 안 되고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다 이차적인 것 때문에 본질을 상실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사는데, 이 세 가지가 중요하다 해도 혼인잔치 초대를 거절한 것은 비극입니다. 늘 남는 것과 지나가는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49.    필리피 교회의 두 그룹 (2014. 11. 7. 금)

[필리피 3,17-4,1; 루카 16,1-18]

필리피서18절에, 필리비 교회의 어떤 이들은 부도덕하고,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리 스도교를 이용하는, 복음의 가르침에서 크게 어긋난 행동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략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은총으로 구원되기 때문에 신자들은 율법 준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율법이 폐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제 자신들의 원의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로 이해한 것입니다. 곧 율법 준수로 억눌렸던 본성이 원하는 대로의 자유를 말합니다. 율법 준수에 학을 뗀 사람들의 반동심리였던 셈입니다. 

다른 그룹은,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어서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잘못된 은총의 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고 모든 허물을 덮어준다.’ 우리는 늘 죄를 짓는 존재이므로, 죄를 안 지으려고 노심초사하거나 죄 짓기를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계신데 무엇이 걱정이냐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하느님의 자비가 죄인들의 구린데를 처리해주는, 죄를 조장하기 위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50.    신앙을 지키는 지혜 (2014. 11. 11. 화)

[티토 2,1-8.11-14; 루카 17,7-10] 

티도 2장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품성과 행동거지에 대해 말합니다.

나이가 많은 남자는 절제해야 합니다. 그들은 삶의 경험으로 옳고 그름을 알기 때문에 방종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경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때임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이 많은 여자의 동정심과 이해심은 가족과 신앙공동체에서 큰 역할을 합니다. 반대로 노인에게 가장 큰 위험은 자기 습관과 방법을 고집하고 새로운 것과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쉽게 남의 흠을 잡고 비판하고 험담에 빠지기 쉽습니다.  

젊은 이들은 유혹을 쉽게 받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권합니다. 인생 경험이 부족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서 자유로워서 충분히 고민하거나 고려하지 않고 선택하고, 그래서 그릇된 길로 가서 실패하게 되고, 그래서 쉽게 실망하기 때문에, 신중한 선택과 행동이 필요 합니다. 인생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바오로는 이런 것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는 지혜라고 보았습니다.

 

 

251.    노예 오네시모 (2014. 11. 13. 목)

[필레몬 7-20; 루카 17,20-25]

오네시모는 절도를 하고 도망간 노예이고, 그의 주인은 그리스도인 필레몬입니다. 오네시모는 로마로 도망을 쳐서 그곳에서 바오로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감옥소에 갇힌 바오로를 돕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로마에 온 어떤 그리스도인을 통해 오네시모가 골로사이의 필레몬의 노예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유롭지 못한 바오로에게 오네시모는 정말 필요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곁에 두고 자신을 돕도록 하고 싶었지만,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필레몬이 되돌아오는 오네시모를 도망자라는 낙인을 찍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노예들의 신분은 사람이라기보다 주인이 사고팔고 원하면 합법적으로 죽일 수도 있는 하나의 사물로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편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필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같은 한 형제,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노예로서 도망갔다가 주인에게 돌아가지만, 오네시모나 필레몬에게 진정한 주인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절도하여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한 형제로 받아들일 것인가, 처벌할 것인가는 필레몬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252.    엔도 슈자쿠의 ‘침묵’ (2014. 11. 30. 일. 대림 제1주일)

[이사야 63,16ㄹ-17.19ㄷㄹ.64,2ㄴ-7; 1코린토 1,3-9; 마르코 13,33-37]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16세기 일본에 천주교가 들어와 박해를 받았을 때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소설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일본에서 33년 선교하던 페레이라 주교가 배교했다는 사실이 로마 교황청에 전해지고, 그 진상 을 알기 위해 로드리고 신부를 포함해 세 신부가 일본에 파견됩니다. 그들은 일본 청년 기치지로의 도움을 받아서 도모기라는 어촌에 잠입합니다.

기치지로는 8년 전에 한번 배교를 하고, 타국에 피신해 있다가 다시 신부들을 만나 밀항을 도와 주게 됩니다. 급기야 포졸들에게 신부들의 존재가 알려지고, 신부들은 피신할 수 있었지만, 기치지로는 포졸들에게 잡히고 맙니다.

포졸들은 기치지로에게 성화를 밟도록 하고, 사제들 체포에 불응하면 죽인다고 협박하니 그는 두려움에 또 포졸들의 앞잡이가 됩니다. 결국 도망을 다니던 신부들은 기치지로의 신고로 포졸들에게 잡히게 됩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고문을 받는 신자들을 보고 괴로워합니다. 예수님의 성화를 밟지 않으면 순교이고, 밟으면 배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고 죽어 가는 가운데, 주위 사람들은 일상처럼 웃고, 하느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십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구원의 약속이나 위로도 없이 그저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배교하게 됩니다.

이 소설에 두 번 배교한 기치지로가 나옵니다. 그는 두 번째 배교 때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내가 성화판을 밟지만 마음으로는 하느님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지만,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감옥에서 로드리고 신부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기치지로를 보면, 살기 위해 신앙을 버리고 두려워서 예수님의 성화판을 밟고,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고 그리고 용서를 청하고, 또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 살기위해 배교합니다. 이렇게 잘못된 선택과 죄책감을 반복하다보면, 마음은 자연히 이중 삼중으로 닫히게 되고, 결국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얼어붙은 동토의 땅이 됩니다. 이제는 닫혀진 자신에게서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 출구를 찾기 힘들게 됩니다. 기치지로 청년을 보면 마치 우리 자신들의 어떤 부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소설의 제목처럼,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해 무능해서, 혹은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무정해서도 아니고, 또 참혹한 장면을 보고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어서가 아니라, 심판이 아닌 우리를 야단스럽지 않게 조용히 용서하시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베드로 2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성탄의 은총을 받기 위해 잘 준비하도록 합시다. 

 

 

253.    나비부인 (2014. 12. 7. 일)

[이사야 40,1-5.9-11; 2베드로 3,8-14; 마르코 1,1-8]

오페라 나비부인의 줄거리를 소개합니다.

2차 대전 때 히로시마와 함께 원자폭탄이 떨어진 항구도시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서양의 문물을 제일 빨리 받아들인 곳입니다. 서양인들이 들어오자 일본기생, 게이샤들은 이들을 상대로 영업하게 되고, 적지 않은 이들이 국제결혼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전쟁으로 집안이 몰락한 열다섯 어린 나이의 초초상입니다 (‘나비’의 게이샤 예명. ‘버터플라이’는 서양고객을 위한 이름). 초초상은 미해군 장교 핑커턴과 결혼하기로 합니다. 문제는 이 결혼이 초초상에게는 진심이었지만, 핑커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나가사키 주재 미국 영사 샤플레스는 그런 결혼을 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결국 그들은 결혼하였고, 나비부인은 아이를 가집니다. 

핑커턴이 미국으로 떠난 지 3년 동안 내내 초초상은 그를 기다립니다. 주위에서는 “본국으로 돌아간 외국 남편이 돌아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며 포기하라고 하지만, 초초상은 남편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이때 초초상이 부른 노래가 ‘어떤 갠 날’). 어느 날 샤플레스 영사가 핑커턴이 미국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초초상을 찾아왔지만 말하지 못했고, 초초상은 그에게 핑커턴의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가사키 항구를 바라보던 초초상은 핑커턴이 탄 군함의 깃발을 확인하고 밤새 남편을 기다리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 다음날 핑커턴의 아내 케이트가 초초상에게 와서, 자신은 핑거턴 부인이며 허락한다면 당신의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가서 친자식처럼 키우겠다고 아이를 달라고 합니다. 이에 나비부인은 크게 절망하고, 남편이 직접 온다면 아이를 주겠다고 하고, 아이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큰 전쟁을 경험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초초상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불합리하게 보입니다. 전쟁으로 집안이 몰락했고, 아버지는 자살했으며, 먹고 살기 위해 게이샤가 되었고, 한 외국인을 사랑해서 결혼하여 아이를 갖게 되었지만, 그러나 기다리던 남편은 미국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그 부인이 와서 하는 말이 남편의 자식을 달라고 합니다. 초초상에게는 이런 불합리와 절망에서 벗어나게 할 어떤 힘이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희망을 포기한 점이 아쉽기만 합니다.

지난 금요일 복음에 두 소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지나가는 예수님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청을 외면하신 채, 어느 집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들어줄 마음이 없기 때문에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따라붙었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유대인들은 그들이 겪은 고통과 시련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아가 다윗의 혈통에서 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기도 안에서 메시아가 오셔서 자신들을 구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다졌습니다. 그들은 나라 없이 세상에 흩어져 살면서 온갖 시련 속에서도 메시아는 반드시 온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시련과 고통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가졌다는 점이 부럽습니다.  

하느님께는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그분 에게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254.    과달루페의 성모님 (2014. 12. 11. 목)

[이사야 41,13-20; 마태오 11,11-15]

1531년 12월 9일에 성모님이 멕시코의 원주민 후안 디에고에게 예수님을 잉태되신 모습으로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후안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과 보호를 드러내도록 이곳에 성당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곳 지역 주교님은 후안에게 성모님을 봤다는 증거를 어떻게든 제시하라 했고, 그는 성모님이 말씀하신 대로 장미를 따서 자기 망토에 넣어 주교에게 갖다 보여주었는데, 그 망토에 지금의 과달루페 성모님의 이미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신심으로, 8년 동안 8백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세례를 받았고, 20년 후에는 그때까지 아즈텍 문화에서 매년 2만 명의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산 제물로 신들에게 바쳤던 그 야만스러운 풍습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과달루페는 도시나 마을 지명이 아니고, 아즈텍 말로 성모님께서 멕시코의 전통 신, 돌뱀의 우상을 쳐부수다라는 뜻입니다. 즉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 마리아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신 채 발현하셨습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임신한 여자가 불러 나온 배를 보이면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띠를 매도록 했습니다. 어쩌면 가장 행복할 때의 성모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55.    아버지와 누나 (2014. 12. 21. 일)

[사무엘 하 7,1-5.8ㄷ-12.14ㄱ.16; 로마 16,25-27; 루카 1,26-38]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아버지와 누나의 관계가 어려웠습니다. 30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홀로 사시는 아버지에게 서운한 일이 자주 벌어졌고, 아버지가 누나에게 또 누나가 아버지에게 화해를 시도할 때마다 더 꼬여갔고, 결국 두 분의 왕래가 끊겨져 버렸습니다. 세월이 흘러 2005년도에 매형이 백혈병 진단을 받자 한 달이 되지 않아 돌아가셨고, 그 사실을 아버지께 알리려 했지만 그때 아버지도 후두암에 걸리셔서 병의 악화를 막기 위해 매형의 죽음을 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말씀드릴 시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1년을 암 투병을 하셨는데, 형의 연락을 받고 마지막인 듯하여 누나를 설득해서 함께 아버지께 갔습니다. 

아버지께서 갑작스러운 누나의 방문에 많이 놀라셨습니다. 누나에게 종이와 연필을 주고 여기 온 이유가 뭐냐고 글로 쓰라고 하셨습니다 (후두암 말 못하심). 누나의 글을 읽는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굉장히 놀라 떠시면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백 서방이 먼저 갔구나. 너무 상심하지 마라. 세상 모든 게 다 부질없고 헛된 것이다.” 누나 손을 만져 주시며 웃으셨고, 조카들은 할아버지를 따라 함께 웃고 좋아했습니다.

10일 후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누나는 가끔 아버지에 대한 꿈을 꾸는데, 예전 에는 무서운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늘 웃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 사건 이후로, 누나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아버지와 누나의 화해로 집안 전체에 수십 년 만에 평화가 강물처럼 찾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완고한 마음과 누나의 닫혀버린 마음, 이 두 상처받은 마음이 풀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던 일이 기적처럼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와 누나가 겉으로는 만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기도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256.    성탄전야 (2014. 12. 24)

[이사야 62,1-5; 사도행전 13,16-17.22-25; 마태오 1,1-25]

이사야서에서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성모 마리아처럼, “너는 소박 맞고, 버림 받은 여인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요, 혼인한 여인이라 불릴 것이다.” 

실제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팔로미나(아일랜드인)는 50년 전에 헤어진 아들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는 미혼모로써 수녀원 에서 운영하는 미혼모시설에 있는 동안 낳을 아이에 대한 일체 면접권과 양육권을 포기한다는 계약서를 썼기 때문에 낳은 아이 앤소니는 입양되어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전직 BBC 방송 기자였던 마틴이 입양된 아들을 찾으려는 팔로미나를 돕게 됩니다.  

그들은 미혼모시설이 있었던 그 수녀원을 통해 앤소니가 미국으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아 냅니다. 미국으로 간 두 사람이 알아낸 것은 아들의 이름이 마이클 헤스이고, 미국 행정부의 법무보좌관으로 재직했으며, 8년 전, 1995년 8월에 사망했다는 사실입니다. 팔로미나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런데 찾은 사진 한 장에서 팔로메나를 돕고 있던 마틴을 발견 합니다. 그는 BBC 기자시절, 백악관에서 앤소니를 만난 사실을 기억하면서 아들이 똑똑하고, 친절하고, 악수할 때 손 힘이 셌다고 말해줍니다. 팔로미나는 혹시 아들이 자신을 찾으려고 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와 앤소니와 함께 같은 양부모에게 입양된 메리를 통해서 알아낸 사실들은 이러했습니다. 앤소니는 게이였고, 평소 앤소니가 아일랜드나 친모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으며, 지금 그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팔로메나는 친모에 대한 관심도 없고 성공한 미국인으로 살아간 죽은 아들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틴은 사진에 나타난 앤소니 신사복 옷깃에서 아일랜드 하프 배지를 발견하고, 그가 아일랜드를 잊지 않은 것 같다고 여기고 마지막으로 앤소니의 애인이었던 피터를 만나보자고 설득합니다.

그들은 피터를 만났고, 피터는 그들에게 앤소니가 입양되어 죽을 때까지의 동영상을 보여 줍니다. 앤소니가 일찍 사망한 것은 에이즈 때문이고, 그가 8년 전 아일랜드 그 수녀원을 방문 했고, 죽어서 그 수녀원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피터는 앤소니가 늘 어머니를 찾았고, 아일랜드에서 묻히기를 원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아들을 찾으러 그 아일랜드 수녀원으로 가서 아들 무덤을 발견합니다. 묘비명에 “두 나라의 아들로 살다가 여기 잠들다. 마이클 헤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팔레미나는 언젠가는 자기가 아들을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여기에 묻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랜 세월의 짐과 아픔을 내려놓게 됩니다 (시메온의 감격처럼). 그는 마틴 기자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느 덧 수다쟁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버림 받고 소박 맞은 여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혼인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이끄심을 봅니다. 50년 만에 아들을 찾겠다는 것도 은총이었고, 마틴을 만나고, 미국에서 앤소니의 지인들을 만나고, 아들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큰 은총이었습니다. 이것이 팔로미나에게 성탄이 아니었을까요? 팔로미나가 자유롭게 된 것은, 그 과정에서 하느님의 계시처럼 하나씩 드러난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달라진 것은 팔로미나 뿐이었습니다.

 

257.    아녹케와 마크로투미아 (2014. 12. 31. 수)

[1요한 2,18-21; 요한 1,1-18]

세상을 만드신 주인이 세상에 왔지만, 알아보지도, 환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습니다.

복음사가 요한은 세상을 실재와 그림자로 나눕니다. 변하지 않는 실재, 하느님께서 계시고, 나머지는 그 실재의 모사품,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실재를 만나는가? 요한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희랍인들이 꿈꾸었던 그 실재로 인도하시는 분 이라고 강조합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이 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인가? 그 답은 구약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백성은 처음에는 선택된 백성으로 열심히 하느님을 따랐고, 열린 마음으로 기도하니 이웃이 보였고, 공동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경과하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무탈함이 하느님의 덕이 아니라, 자신들이 잘했고 잘났기 때문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점차 은총에 의존하지 않다보니 성전 출입은 뜸해지게 되고, 기도는 하지 않게 되고, 점차 마음은 닫히게 되고, 이웃은 안 보이게 되고, 개인과 나라 전체가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어 결국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불순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하고 귀양을 가고, 시련의 기간 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그때서야 다시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백성을 용서하시고, 거두셨던 축복을 다시 내려주십니다. 그러다가 다시 잘못하는 전철을 밟는 사이클을 반복합니다. 곧 축복이 자만하게 만들기도 하고, 시련이 겸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하느님을 표현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로마 2.4). 용납하심(아녹케)은 원수와 적대적 관계를 일시 중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단은 한시적이고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오래 참음(마크로투미아)은 자신을 해치고 욕하는 자에게 복수할 권리와 힘이 있지만, 즉각 응징하지 않고 인내하는 자비를 말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자마자 곧바로 형벌이 따르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무능하기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회개를 위해 인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로써 당신 뜻을 관철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실 때가 있습니다. 자만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로 들어서도록 인간에게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만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자만은 스스로 만족해서 필요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지 않는 상태고, 교만은 한술 더 떠서 아예 하느님께 자기 뜻을 따르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실재이시며 세상의 주인을 세상은 알아보지도, 환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묵시2,13).

2010년 칠레에서 69일 동안 700미터 지하 갱도에 갇혔던 33명이 구출된 사건이 있습니다. 갱도가 무너지고 17일 지난 후에 이들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NASA의 최첨단 기계까지 동원하게 됩니다. 17일이 지나 생존의 희망이 사라지고 있을 무렵 갱도에 갇힌 이들로부터 기적적으로 연락이 옵니다. 정확하게 그들의 위치를 알게 된 구조팀이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하 갱도에 있는 광부들에게 알렸을 때, 자포자기에 빠진 그들은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고, 결국 모두가 구출되는 기적을 이룹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을 겪을 때, 이 세상의 그림자가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구세주께 희망을 둔다면 우리는 결국 구출될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외아드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258.    주님 공현 대축일 (2015. 1. 4. 일)

[이사야 60,1-6; 에페소 3,2.3ㄴ.5-6; 마태오 2,1-12]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 없이 기뻐하였다.”

주님 공현 축일은 또 하나의 성탄 축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구세주 한계를 넘어서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공적으로 알리는 축일입니다. 1독서는 말합니다. “어둠과 암흑이 깔린 세계 위에 주님의 빛이 떠오르고 비추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우리 가족에게는 은총이 필요했고, 가족 모두가 가족의 평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1985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시신을 화장하겠다고 하시어 (1985년 당시 천주교에 화장이 드물었던 시절), 이에 가족 대부분과 본당 신자들이 화장을 문제 삼았고, 급기야 본당 신부님은 교회법 학자를 통해 화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어머니 시신을 화장하기로 했습니다. 화장이 끝난 후 여자분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아버지와 매형과 형, 그리고 나와 동생만 어머니 재를 모시고 동백섬으로 갔습니다.  

겨울 동백섬은 추운데다 바위가 매끄러워서 조심해서 내려가야 했습니다. 매형이 미끄러지면서 바닷물에 빠지게 되었는데, 진지하다 못해 우울했던 우리는 한 번 터진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이 웃음을 터트리면 또 다른 사람이 돌아가면서 터트렸고, 결국 어머니 유해를 가슴에 앉았던 아버지까지 동참하면서 아예 대놓고 한참 동안 웃고 말았습니다. 걱정했지만, 그런데 그것으로 오랜 세월 마음에 담아두었던 우울했던 짐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간 웃음이 드물었던 가족이 같은 자리에서 정신없이 웃었던 신기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집안을 더 어둡게 하기보다 오히려 가족에게 웃음과 평화를 주고 가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달라진 우리의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가족의 평화를 위한 기도가 놀라운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느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삼왕은 별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삼왕은 별을 발견하고, 별이 인도하는 곳에서 구세주 아기 예수를 발견하고 경배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인도하는 별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별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주위와 내면을 들여다 보십시오. 우리 삶 곳곳에서 하늘의 별 수와 바다의 물방울 수처럼 그분에게 인도하는 별들과 나를 위한 그분의 인도하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259.    예수님의 세례 (2015. 1. 11. 일)

[이사야 42,1-4.6-7; 사도행전 10,34-38; 마르코 1,7-11]

복음에 요한은 메시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하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베푸시기보다 오히려 세례를 받으십니다. 

어떻게 적지 않은 이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을까?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기 전까지 거의 300년 동안 예언자들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꿀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전혀 새롭지 않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영혼 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그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샌들을 벗기는 것은 노예들의 일이었지만, 자신은 예수님의 샌들 끈을 풀어드릴 자격마저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요한에게서 사람들은 옛 예언자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의 말을 들으려고 왔고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세례는 죄인에게 필요한 회개의 표시인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은, 구원의 대상인 인간과 동일시하고 연대하여 인간을 하느님께 복귀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흑인 인권을 위해 밖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참여했던 만델라처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셨고, 성령을 통해서 당신이 메시아의 임무를 받았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메시아 직을 수행해야 할지 알기 위해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지내셨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였고, 그 뜻의 실현을 위해 취한 삶의 양식이 다른 어떤 인간적인 능력과 힘에 의존하기보다 오로지 매일 기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이 흥남부두에서 배를 탈 때 여동생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의 아버지는 여동생을 찾으러 가기 전에 주인공에게 말합니다. “이제 아버지 대신 네가 가장이고 네가 식구들을 보살펴야 한다.” 그는 아버지와 한 약속대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갖 희생을 다 합니다. 고집이 세고 욕 잘하는 아버지의 모습인데, 그것은 우선적으로 가족을 지키려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도 6남매의 장남이셨습니다. 아버지에게도 그런 모습 이 있었습니다.

때론 하느님(실재)을 경험한 이들은 그 실재를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 이차적으로 취하는 삶의 양식이 현실적으로 덜 떨어지거나 모양새가 빠지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도록 합시다. 

 

 

260.    진리는 무엇이 아닌 누구를 찾는 것. 파스칼 (2015. 1. 18. 일)

[사무엘 상 3,3ㄴ-10.19; 1코린토 6,13ㄷ-15ㄱ.17-20; 요한 1,35-42]

불란서 수학자이자 사상가 파스칼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옷 안쪽 꿰맨 자리에서 종이 쪽지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에 자신이 하느님을 체험했을 때의 감격이 적혀 있었습니다.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밤, 10시 30분-12시 30분까지 나는 하느님을 만났다. 그분은 철학자나 유식한 이들이 머리로 생각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었다(선조들이 실제 삶의 현장에서 만났던). 확실함, 확실함, 감격스러움, 감격스러움, 환희, 평화.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에 대해 들었지만, 실제 그분을 살아있는 하느님으로 만난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당신을 따라오던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요한 복음에는 ‘찾다’는 동사가 거의 모든 장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찾아서 예수님께 옵니다. 1장에는 두 제자가 이스라엘의 독립과 메시아 왕국을 찾기 위해서, 3장에는 니고데모가 영생을 찾아서, 4장에는 왕실 관리가 병든 아들의 치유를 위해서, 6장에는 오병이어 기적을 목격한 군중들이 먹을거리를 찾아서 예수께 옵니다. 요한복음은 무엇인가를 찾는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합니다.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에는 무엇 때문에 나를 찾고 나의 제자가 되려는지 말해보라는 것으로, 이는 예수님께서 단지 우리가 무엇을 얻는데 도움을 주시는 분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께 갔다가 무엇을 찾는 것보다 누구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시는 주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 천국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을 말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부재가 바로 지옥입니다. 인간 경험으로 볼 때, 주위가 낯설고 불행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가 없다면 궁전이든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곳이든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 없이 혼자 산다면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구원의 진리는 무엇을 찾는게 아니라 누구를 찾는 것입니다. 요한 6장 27절에, 너희들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무엇을 얻는 것),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누구를 찾는 것) 얻으려고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찾아서,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모실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61.    메시아 (2015. 1. 22. 목)

[히브리 7,25-8,6; 마르코 3,7-12]

악령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집트 왕이나 로마 제국의 황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고, 유대인들은 천사들과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과 의인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과 가깝고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악령들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예수님께서 기대하시는 메시아 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자신들을 로마인에게서 해방시키고 로마인을 쳐부수는 현세 권력으로 인도하는 정복자로서의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메시아는 봉사와 희생과 십자가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고 메시아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 피할 수 없는 모반과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갈릴리 지역에서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아주 컸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말씀과 치유 능력, 그리고 사탄까지 제어하는 힘을 지닌 예수님을 그들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위한 현세의 메시아가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고통 받는 메시아여야 했습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습니다.

 

262.    인간복제, 영생이란 의미 내용 (2015. 1. 25. 일)

[요나 3,1-5.10; 1코린토 7,29-31; 마르코 1,14-20

오늘 복음에, 밤새 허탕을 친 베드로가 아침에 빈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탁으로 그물을 쳤는데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많은 수고에도 열매가 없고 의미 없는 정체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천재적 재능이 나에게 주어지면 좋겠다고 하고, 이순신 장군과 같은 분이 많으면 나라가 크게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1997년에 복제양이 성공하면서 인간 복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 복제는 우선 일차적으로 우수하고 뛰어난 인간들에게 해당되고, 나아가 그들의 유전자를 조작하면 더 강력하고 재능이 있으며 미래 사회에 합당한 맞춤형 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 복제에서 중요한 논의 중 하나가 인간의 수명 연장에 있습니다. 인간은 수명 연장으로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곳이지 오랫동안 머무는 장소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맺고 낙엽이 떨어지고, 그 이듬해에 종자가 번식하여 새로운 꽃잎이 돋게 되는 사계절의 순환처럼 태어나면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의학의 발달로 수명을 더 연장시킬 수 있게 되었더라도, 그 연장된 삶이 새로움이 없이 무의미한 삶의 반복이라면, 수명 연장 자체가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희랍어 아이오-니오스(aionios)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즉 단순히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는 그것이 끊임없이 생명일 수 있도록, 생명 연장 이상의 어떤 속성이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사시는 그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 영원히 사는 것이라면, 이는 이미 천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써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영혼 안에 지속적인 의미와 행복을 제공하는 최고의 프로그램을 깔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 세상의 모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을 은총으로, 공짜로).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깔려면 한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나의 기존의 것을 지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기존의 나의 것을 지워버릴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263.    스키아와 아이콘 (2015. 1. 27. 화)

[히브리 10,1-10; 마르코 3,31-35]

히브리서 10장 1절에 그림자와 실체라는 두 용어가 나옵니다. 스키아는 희랍어로 희미한 그림자를 말합니다. 이것으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아이콘은 세밀한 부분까지 완전하게 재현하는 초상(실체)을 의미하고, 아이콘을 통해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이 아이콘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 저자는 유대종교의 제사 의식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일 년에 한 번씩 예루살렘에 가서 인간을 대신하여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린다고 해서, 부정한 죄가 사해지고 영혼이 정결하게 되며 죄의식과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종교의 제사와 다르게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이분이 한 말씀만 하시면 우리 영혼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면, 죄는 사해지고 영혼은 정결하게 되고, 죄의식과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죄 사함을 받는 것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지금은 언제든지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나의 탓이지 그분 탓이 아닙니다.

막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진짜(미사성제)를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264.    주님의 도구 역할 (2015. 1. 29. 목)

[히브리 10,19-25; 마르코 4,21-25]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것은 형평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삶의 진리입니다.

유대인 격언에, ‘학자들은 어린 암소처럼 취급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 암소에게 매일 조금씩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해서 더 무거운 것을 옮길 수 있게 했습니다.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이해하고, 실행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것들을 해결할 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배움의 세계가 그러합니다. 수학에서도 방정식과 공식을 알수록 더 어렵고 난해한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음악에서도 다양한 기술을 배워야 더 깊고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할 수가 있습니다. 아주 잘 훈련된 병사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수가 있습니다(수중에서 다양한 소리를 구분하고, 적 잠수함의 위치를 찾아냄).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어렵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아마추어에게 맞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써 하느님 나라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덕행의 실천입니다. 위기나 시련 때에 쉽게 포기하고, 쉽게 피하고, 쉽게 상처받는 영혼이어서는 은총을 나르는 주님의 도구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265.    한니발 군대의 안락함에 발목이 잡히고 (2015. 1. 29. 목)

[히브리 10,19-25; 마르코 4,21-25]

이 편지의 수신자는 전에 박해를 경험한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핍박을 받고 재산을 몰수 당하고 배척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견디고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앙에서 멀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이란 역경에 처해 있을 때보다 순조로운 환경에 있을 때 더 넘어지기 쉽습니다. 안락함이 고난보다도 많은 사람들을 타락시킵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로마 제국의 군대를 쳐부순 유일한 장군이었습니다. 겨울이 와서 추위로 더 이상 군사 행동을 할 수 없었을 때, 한니발은 그가 정복한 카푸아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그 당시 카푸아는 사치스러운 도시였습니다.

로마 군대에도 굴하지 않았던 한니발 군대가 한 겨울에 그곳에서 호사스럽고 편안하게 보내 면서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고난이 인간을 단련시키고, 지속적인 안락함이 인간을 망가뜨립니다.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자신에게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점차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갈 수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 저자는 우리에게 힘들었던 지난 날을 기억하고 그때처럼 최선을 다해서 싸우라고 말합니다.

 

 

266.    포레스트 검프  (2015. 2. 1. 일)

[신명기 18,15-20; 1코린토 7,32-35; 마르코 1,21ㄴ-28]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권위 있게 가르치셨습니다. 갈릴레아의 가난한 회당에는 율법교사가 상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훌륭한 분들을 초대하는 것이 회당장의 몫이었 습니다.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은 사탄에 제압되어 있고, 사람들은 그것에 어찌할 수 없이 무능력하고,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그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검프는 다리 불구에 머리가 많이 모자라서 늘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또 놀림을 받는데, 그의 여자 친구가 보다 못해 “넌 할 수 있어, 뛰어!”라고 외치니, 걷지도 못하던 그가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던 검프는 어느 덧 바람처럼 빨리 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왕따 당하고,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월남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들은 대부분이 죽고 또 여자 친구마저 떠났지만, 검프는 결코 누굴 탓하거나 거기에 매여서 살지 않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언제나 긍정적이고 따뜻합니다. 

어느 날 검프는 옛 소대장을 만납니다(다리 중상, 소대장 구함). 그는 부하들은 다 죽었는데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두 다리를 잃어 불구가 되었다는 좌절감에 술과 마약에 빠져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검프에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자신을 살렸다고 악을 씁니다. 검프는 그를 먼 바다 새우잡이에 초대합니다. 먼 바다에 왔을 때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은 폭풍우가 몰려옵니다. 소대장은 두려워하기는커녕 하늘을 향해 자신을 데려가라고 발악합니다. 그런데 그날 그들은 엄청난 양의 새우를 잡았고, 소대장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합니다. 그는 의족도 달고, 예쁜 아가씨와 결혼도 합니다. 

소대장이 세상에서 다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검프의 영향이 컸습니다. 검프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수님의 시선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는 현실이 불운하더라도 ‘~때문’이라고 하지 않고 ‘~덕분’이라 하고, ‘~였더라면’이라 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합니다.

검프는 비록 자신의 삶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할 길을 갑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보장을 바라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확신과 믿음은 다름). 이 지상에서만큼은 예수님께서도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선택할 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더러운 영은 유혹해서 우리가 망가지기를 기대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초대하여 우리를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입 다물고, 나가!(shut up, get out)” 라고 하니 더러운 영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두고 사람들이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한 마디의 말씀이 사람들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영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267.    욥에 대해서 (2015. 2. 8. 일)

[욥 7,1-4.6-7; 1코린토 19,16-19.22-23; 마르코 1,29-39] 

오늘 1독서(욥기)에 “나는 고통스러워 새벽까지 뒤척거리고, 이제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영적으로 시련과 어두움을 겪고 있는 상태). 

욥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도 의인으로 인정하셨던 욥에 대해, 사탄은 욥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며, 당신께서 주시는 축복을 거두시면 어쩔 수 없이 그도 하느님을 비난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허락 하에 사탄은 욥의 재산과 가족을 쳐서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나중에는 욥을 쳐서 잿더미에 앉아 고름을 짜는 불행한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이에 욥의 부인이 하느님을 저주하라고 하니, 욥은 그분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으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2장까지 그러지 않았던 욥이 3장부터 하느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생일을 저주하고,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이 죽음보다 못하니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가 한탄하는 욥에게 그의 친구들은 고통은 바로 지은 죄 때문이라고 하니, 욥은 그렇다면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37장까지 친구와 시비 계속).

이에 38-41장에서 하느님께서 폭풍우 속에서 욥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너는 새벽을 깨우고, 아침에게 명령을 한 적이 있느냐? 바다의 심연까지 내려가서 걸어보았느냐? 빛이 머무는 곳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 사자와 까마귀에게 먹을 것은 주는 자가 누군지 아느냐?” 도저히 인간이 알 수 없는,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상식에 속하는 자연의 이치와 질서에 대해 질문하니, 욥은 전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욥기의 주제는 의인의 고통에 대한 것입니다. 의롭게 살던 욥이 왜 이런 끔찍한 불행을 겪는지 질문하지만, 하느님에게서 구체적인 대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 절, 42장 5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욥은 “당신에 대해서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이 이제는 제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고통을 받기 이전까지 하느님에 대해서 듣기만 했지만, 이제 그 하느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고통을 통해서입니다. 말하자면 고통이 하느님을 만나게 한 통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욥은 왜 고통을? 고통을 없애달라고 청했지만, 더 큰 것을 주심.)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의 장모가 등장합니다.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습니다. 베드로가 떠난다면 자신도 딸도 살기 어려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방문하신 후에 누워있던 베드로의 장모는 털고 일어나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장모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 합니다.

우리가 각자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분을 만나면, 우리가 삶에서 겪는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것들도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의 만남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없애달라고 청하지 말고, 오히려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찾도록 합시다. 

 

 

268.    이방인 여자의 쿠나리아 (2015. 2. 12. 목)

[창세 2,18-25; 마르코 7,24-30]

예수님께서 티로 지방에서 딸을 살려달라는 ‘이방인’ 여자를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유대인)이 배불리 먹어야 하고,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이방인)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시자, 그 여자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응답합니다. 당신께서 메시아시라면 모두에게 해당되어야 한다는 표현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식탁에서 떨어진 빵이라고 했을 때 그냥 빵부스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수저가 없었고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으므로 빵 안의 기름진 부분을 뜯어서 식사로 지저분해진 손을 닦았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양이면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에서 보듯이 거지들이 집어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여인을 두고 사용하신 쿠나리아 (kunaris)는 길거리에 쓰레기를 뒤져 먹는(유대인들이 경멸할 때 쓰는) 개가 아니라, 애완용 개를 말합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감정적으로나 불리하게 해석하지 않고, 본래 의도하는 바를 그대로 알아듣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도 유머를 드러냅니다. 이방인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자신을 낮추어 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슬픔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 신앙입니다. 공생활에서 예수님께서 기억하시고 싶은 즐거운 만남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269.    루빈 카더 (2015. 2. 15. 일)

[레위 13,1-2.44-46; 1코린토 10,30-11,1; 마르코 1,40-45]

“주인이 돌아왔을 때, 곧바로 문을 열어주는 하인은 행복하다.” 주인은 그들에게 식탁 시중을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식탁 시중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지금 소개하려는 사람이 그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루빈 카터는 1960년대에 활동했던 흑인 권투선수입니다. 그는 흑인으로 인종차별 속에서 누명 을 쓰고, 거의 30년을 교도소에서 살다가 결국 무죄선고를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루빈은 어렸을 때 친구를 성추행하려는 백인을 칼로 찔러 소년원 생활을 합니다. 그곳에서 7년 살다 탈출하여 군에 입대를 했고, 권투선수로써 웰터급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제대 후 고향에서 잡혀 두 번째 교도소생활을 합니다. 1961년 출소했지만 또 다시 인종차별에 의한 살인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습니다. 그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은 델라페스카라는 형사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로써 검찰과 짜고 사건을 조작하여 평생 루빈을 범죄자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교도소에서 증오와 억울함으로 망가지는 루빈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무도 나를 파괴할 수 없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때 할렘의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소년으로 캐나다에서 환경단체 회원들과 함께 사는 흑인 소년 레즈라를 통해 하느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레즈라가 처음으로 산 책이 루빈 카터의 자서전이었고 그 책에서 큰 공감과 위로를 받아 루빈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면서 루빈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날, 레즈라는 루빈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긴 세월 무죄를 위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지금 난 지쳐버렸다. 이제 편지와 면회를 받지 않겠다.”  자포자기하는 루빈을 돕기 위해 그들은 주거지를 캐나다에서 교도소가 보이는 아파트로 옮기고 루빈에게 전화합니다. “우린 당신이 석방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 한 통의 전화로 루빈은 다시 마음을 잡습니다. 레즈라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루빈 카터는 1985년 11월 8일에 무죄 선고를 받고 30년 교도소생활을 마치고, 50세 나이에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루빈이 레즈라를 만난 자리에게 그들의 이름을 두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레즈라는 성경에 나자로 곧 ‘죽음에서 부활한 자’란 뜻이고, 루빈(르우벤)은 창세기 29장 32절에 나오는 레아의 아들로써 ‘아들을 보라’라는 뜻인데 (야곱은 라헬을 좋아했지만,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먼저 레아와 원치 않은 결혼을 함. 레아가 아들을 낳지 못하니 하느님이 불쌍히 여겨 그녀에게 아들을 주심.), 이 둘을 합치면, 죽음에서 부활한 아들을 보라는 뜻입니다. 곧 불굴의 의지로 무죄를 받고 자유의 몸이 된 루빈 카터를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루빈 카터에게서 불의함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을 이겨나가는 하나의 코드를 찾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나를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었으면 억울함과 증오로 인해 스스로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릴 때 곧바로 문을 열어주는 하인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시련에도 하느님의 믿음 속에서 잘 견디어 냈기 때문입니다. 루빈 카터와 레즈라,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에게서 식탁 시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 이라고 생각합니다.

 

270.    재의 수요일 (2015. 2. 18)

[요엘 2,12-18; 1 코린토 5,20-6,2; 마태오 6,1-6.16-18]

재의 수요일에 대한 설명이 매일미사 109쪽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오늘 재의 수요일부터 성주간의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 전까지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자기 죄를 성찰하고 고쳐가면서 부활축제를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곧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40일 동안의 정화 기간인 것입니다.

사순시기 동안은 연중 때보다 더 금육과 단식을 실천합니다. 금요일마다 금육과 단식을 지키는데, 일을 해야 하는 형제 자매들은 단식보다는 절식하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면 좋겠고, 가까운 성당에서 14처를 바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사순절을 잘 준비하는 것이 됩니다.

덧붙혀 몇 가지 성찰할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에게 익숙했던 것들에 대한 성찰입니다. 나는 괜찮지만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고, 남들에게는 불편하게 하는 그것입니다(관습과 고정관념). 개인이 사용하는 구두는 길이 들어 그 사람의 발에는 편하고 익숙하지만, 남의 발에는 신기 편하지 않고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싫고 불편한 것을 감수하는 정신입니다. 불편하고 싫은 것을 피하려고 죄를 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훈련 삼아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좋고 편하게만 살려는 것은 세상의 싸움에서 차포를 띠고 경기하는 것과 같아서, 자신이 성장하는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싫고 불편한 것을 감수하는 훈련을 할 때 우리는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우리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이 좋고 선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을 만든 주인 대신에 이 세상을 더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을 성찰하는 것은 곧 세상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기쁘게 해 주시지만, 어른은 수고와 노력으로 그 열매를 얻게 됩니다. 사순기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잘 실천하여 부활절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합시다.

 

 

271.    구상 시인의 ‘얼굴’ (2015. 2. 22. 일)

[창세 9,8-15; 1베드로 3,18-22; 마르코 1,12-15]

죄인이란 하느님의 뜻과 이웃의 원의를 듣지 않고, 오직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생의 기준으로 삼는 이들입니다.

악의는 매사 자신을 중심에 두기 때문에, 타인을 나쁘게 여기고 해치려는 마음.

질투와 시기는 타인이 잘 되는 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하려는 것으로, 인간의 감정 중에 가장 비뚤어져 있는 마음.

분쟁은 명예나 지위나 직책에 대해 질투하는 마음.

비방, 수군수군. 비방은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고, 수군수군은 어느 특정한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 남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비판하는 마음.

중상은 근거 없는 말로 남을 헐뜯고 지위와 명예를 손상시키는 마음.

탐욕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권리와 인간성을 무시하고, 남의 것을 취하기 위해서 그를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마음.

사기는 쥐덫의 미끼를 뜻하고, 속임수를 의미하는 교활하고 약삭빠른 마음.

거짓말은 진리(진실)와 담을 쌓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불타는 석탄을 맛있는 사과라고 속이고 남의 손에 쥐어주면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생명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보를 아예 감추거나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취사선택하여 사실을 왜곡시킵니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 수 있으므로 가장 불안한 마음입니다.

어리석음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하는 마음 (목적상실, 소탐대실). 지성과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도덕적인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부도덕과 파렴치는 부끄러움을 상실한 채 공공연히 잘못을 행하는 마음. 마약상습자는 처음 에는 마약을 몰래 얻어서 복용하지만, 나중에는 마약을 구하기 위해 수치도 모르고 공공연히 애원하고 울며 매달리게 됩니다.

자만은 실제보다 아는 체하고, 가진 체하고, 자신을 뽐내고, 그것을 사방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는 두려움을 상실한 마음. 

교만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고 자신을 높이 드러내는 마음. 자만은 밖으로 드러나지만, 교만은 숨겨져 있어서 겉으론 얌전하고 악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사람을 경멸하고 멸시합니다. 하느님과 맞서려고 하는 모든 악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겸손은 모든 덕을 담는 그릇).

증오 달래기 힘든 것. 인간이 잔인하고 융화할 수 없어 미워한 나머지 자기와 언쟁했던 상대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마음. 여기에는 가혹함과 냉정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신의가 없음. 믿고 나누거나 맡길 수 없는 사람의 마음. 불신을 받으면 좋은 친구와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없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 곧 망은이란 잘 의식되지 않는 죄로써 죄 가운데서도 가장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불효는 유대인과 로마인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높은 덕으로 여겼습니다(십계명). 가족 관계가 해이해지면 대규모의 도덕적인 손실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죄들이 인간의 마음을 둔하고 굳게 만듭니다. 모든 감각 능력이 굳어지고 경화되면서, 바른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처음 죄를 범할 때 두려운 마음에 후회하지만, 계속 죄를 지으면서 도덕적 영적인 감각을 잃고 가장 부끄러운 일도 서슴없이 해치우게 됩니다. 이런 죄들은 사람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마음의 평화를 잃게 합니다. 은총이 오더라도 은총이 아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이 하느님을 잃어버린 실낙원입니다. 복락원은 하느님께서 찾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는 것입니다.

 

구상 시인의 얼굴

온화하지 않더라도 험상궂어도 좋으니

그저 숫된 얼굴이 그립다.

저런 천성의 얼굴을 보면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요즘 만나고 스치는 얼굴마다, 이건 영악하지 않으면 초조하고

유들유들하고, 반들반들하고, 새침하고, 매정하고, 얄궂다.

얼굴은 사람 마음의 거울이라는데,

너나없이 저렇듯 얼굴이 뒤틀린 것은

마음이 세상살이와 그 이해에만 쏠려서

탐욕으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얼굴을 바로 잡으려면 모두가 그야말로 훌훌 비워서

때마다 하늘과 구름도 멀거니 쳐다보고

산과 들, 강과 바다도 멍철히 쳐다보고 삶과 죽음도 곰곰이 생각해 보고,

더불어 사는 남의 구실도 헤아려 보며

삶의 참된 보람과 기쁨을 찾아서 몸부림치며 뉘우치고 울기도 하고,

허망에도 빠지고, 영원도 그려보아야 본연의 얼굴을 지니게 될 것이다.

 

 

272.    우리 욕심으로 청하지 말자 (2015. 2. 26. 목)

[에스테르 4,17(12).17(14)-17(16).17(23)-17(25); 마태오 7,7-12]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주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주겠느냐?” 아버지는 결코 먹을 수도 먹어서도 안 되는 것들을 아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운동권 학생이 교도소에 갔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당장 광복절 특사로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응답으로 아들은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만에 아들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교도소에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아들이 이렇게 빨리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기도는 은총이 아닌 그야말로 저주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그러니까 욕심대로 하느님께서 응답하셔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올 수 있는 나쁜 것(돌과 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불행하게 될 수 있는 요구들을 결코 허락하실 수도 주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더 나은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73.    다윗과 법궤 (2015. 3. 1. 일)

[창세 22,1-2.9ㄱ.10-13.15-18; 로마 8,31ㄴ-34; 마르코 9,2-10]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사건을 앞둔 2천 년 계시의 마지막 순간에 계시고, 제1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하느님에게 부르심을 받은 2천 년 계시의 첫 인물입니다. 이 두 분 사이를 이어주는 긴 다리의 교각과 같은 인물이 다윗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대한 인물이었던 다윗에 대해서 언급할까 합니다.

시편 132장을 보면, 성전으로 올라가는 솔로몬의 노래가 나옵니다. 첫 구절은 이러합니다. “주님,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노고를 기억하소서.” 다윗 인생의 전반부는 사울로부터 도피 생활이었고, 후반부는 오로지 성전 건축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으므로, 하느님께서 그의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계획했고, 그것을 완성한 이가 아들 솔로몬이었습니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계획한 것은 법궤를 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중심이 예루살렘 이고, 예루살렘 중심은 성전이며, 성전의 중심에 법궤가 모셔져 있어야 했습니다. 법궤는 마치 성당의 감실처럼 하느님의 현존이고, 이스라엘의 일치와 은총이 흘러내리는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성전을 완성한 뒤 법궤를 성전에 안치하면서 아버지 다윗을 회고한 것입니다.

법궤가 다윗에게까지 오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시나이산에서 주님의 명으로 법궤가 만들어진 후 40년 광야생활을 거쳐서 실로라는 장소에 안치됩니다. 그 후 가나안땅 정복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필리스티아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게 됩니다 (아스돗-가드-에글론).  

법궤가 머물렀던 도시마다 재앙이 발생했으므로 필리스티아인들은 법궤를 이스라엘의 벳세메스로 보냅니다. 그곳에서 법궤를 보았다고 해서 70명의 주민이 사망하면서그 법궤는 다시 키르얏 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법궤는 다시 오벳에돔이란 사람의 집으로 옮겨졌다가, 드디어 예루살렘의 다윗 성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다윗은 좋아라 춤을 춤). 긴 세월 동안 이리저리 유랑했던 법궤가 이제 예루살렘에 정착합니다. 법궤가 뺏기고 방치되면서 이스라엘의 기억에서 야훼 하느님은 서서히 잊혀졌습니다.  

다윗은 숫한 전쟁터를 누빈 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필리스티아, 사울, 이스라엘 통합 왕이 될 때까지 싸움). 그런 그가 왕으로써 최우선의 과제로 삼은 것이 법궤를 성전에 모시는 것 이었습니다. 전쟁터를 누비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윗은 하느님 없이는 살 수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편 150수를 보면, 그가 하느님과 얼마나 하나가 되어서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밤낮으로 기도했으며, 결국 아들 솔로몬에 의해 그 꿈이 이루어집니다. 법궤가 성전에 안치되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혼 안에 하느님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아마도 다윗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조각조각 흩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라는 성전 안에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방해하는 세력과 최선을 다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 세력은 바로 나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바로 내 맘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274.    악을 선으로 (2015. 3. 6. 금)

[창세 37,3-4.12-13ㄷ.17ㄹ-28; 마태오 21,33-43.45-46]

오늘 독서의 줄거리는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아 다른 형제들이 그를 살해하려고 했고, 결국 목숨을 부지한 채 노예로 팔려 이집트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경우 요셉의 쪽에서 볼 때 그가 식구들과 상종하지 않거나, 그들에게 복수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선택은, 이복형제들에게 살해당할 뻔 했고, 외국으로 노예로 팔려가는 불확실 했던 그 운명에 휘둘리거나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의 돌보심과 이끄심을 믿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것으로 선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믿고 맡긴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가르치는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이해 했다는 점이 훌륭합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과 아버지의 사랑으로 요셉이 그런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전적으로 요셉 본인의 선택에 있지 외부적 환경에 의존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마련되어 있다고 저절로 훌륭하게 되거나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영혼이 어떤 마음과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외부의 조건들이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75.    그리스도교 덕에 대해서 (2015. 3. 8. 일)

[탈출 20,1-17; 1코린토 1,22-25; 요한 2,13-25]

사순절은 금욕과 단식을 하고 죄를 짓지 않는 시기지만, 동시에 덕행을 실천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리스도교적인 덕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사랑(아가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아가페 사랑은, 어떤 경우든 상대의 최고의 것을 보고 지켜주는 마음입니다. 곧 밉고 싫지만, 남이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정적이지 않고 매우 의지적인 것으로, 정복하기 어려운 덕입니다.

시기하지 않는 것. 유형이든 무형이든 내가 갖지 않은 것을 타인이 가졌다는 자체를 원망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앙심을 품지 않는 것. 어떤 사항을 잊지 않도록 장부에 기록한다는 뜻입니다. 잊지 않고 불씨 처럼 살려서 그 원한을 갚으려는 마음입니다. 뿌리에 닿아 정착되어버리면 언어를 통해 수시로 등장하게 됩니다.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는 것. 누군가가 욕을 먹거나 불행하다고 할 때 느끼는 쾌감입니다. 남이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부담스럽고, 남이 못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위로가 됩니다. 함께 슬퍼할 수 있지만, 함께 기뻐하기 어렵습니다. 아가페는 이런 것들과 거슬러 싸워야 합니다.

겸손은 본래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보고 인정하는 덕입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거나 혹은 낮추거나, 숨기거나 과장하거나 채색할 필요가 없어서 늘 자유롭습니다. 바오로가 말했듯이, 인간은 약하고 가치 없는 질그릇에 담겨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얻어지는 덕입니다.

오래 참는 것(인내). 어떤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부당한 취급을 받더라도 보복하지 않고, 끝까지 모욕과 손해를 감수하는 정신. 이것은 인내 이상의 것으로,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면서 세상의 시련을 이기고 정복하는 정신입니다. 

충성이란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으로, 주인을 기쁘게하는 정신입니다. 만사가 잘 풀릴 때는 그 약속을 지키기 쉽지만, 몸이 막대기처럼 지치고 절망적인 상황에 쳐했을 때 약속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윗의 용병경호원 이타이의 충실성 (충성)입니다(순교자들의 정신과 일맥상통).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재를 현실화하는 능력입니다. 부모를 믿어야 성장하고, 선생을 믿어야 배움이 있고, 교관을 믿어야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믿음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현실화됩니다.

희망은 진짜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언젠가 그날이 오면 반드시 온다고 믿는 정신입니다. 바오로는 세상에서 겪는 어떤 환난도 다음 세상에서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의 미래에 그 영광이 주어지기를 희망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고, 다만 그 상황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 믿음과 희망에서 구원의 싹이 시작됩니다.

에페소서에서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악령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하게 무장해야 한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허리에는 진리의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악한 자들의 불화살을 막기 위해 믿음의 방패를 잡고, 손에는 성령의 칼을 쥐어야 한다.”

우리가 평소 덕행을 실천하지 않으면 신앙을 유지시키는 항체(면역체계)가 점차 약화되고, 유혹에 쉽게 꺾이게 되고, 가야할 목적지에서 벗어나게 되고 결국 목적지에서 이탈하는 사단이 벌어집니다. 덕을 쌓아 영혼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쉽게 병에 걸리거나 시련이 오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게 됩니다. 

덜 욕하고, 덜 비판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덜 먹고, 덜 자고, 하고 싶은 것을 덜 하는 등, 자제 하고 절제하는 행위를 통해 덕을 쌓게 됩니다. 덕은 머리로가 아니라 실천으로 얻는 것입니다.

 

 

276.    상처를 통한 성찰 (2015. 3. 15. 일. 사순 제4주일)

[역대 하 36,14-16.19-23; 에페소 2,4-10; 요한 3,14-21]

오늘 강론은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동물농장이란 한국 TV 프로그램에서 크게 알려졌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마미라는 승마장의 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미는 사납게 굴면서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물과 교감을 나누고 소통하는 미국인 하이디가 등장하여 마미와 소통하게 됩니다. 하이디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마미가 사람들을 태우지 않는 이유는, 1년 전에 마미가 새끼를 베었는데 그 사실을 몰랐던 주인이 마미 등에 사람들을 태웠고, 사람 들의 구둣발이 임신한 배를 건드렸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새끼를 잃게 된 것 (상실체험)과 밤에 새끼를 유산했을 때 주인이 자기 곁에 없었던 것에 대한 서운함이었습니다.

이사실을 전해들은 주인은 말이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사실에 크게 놀라면서 마미에게 미안 하다는 마음을 전합니다. 마미는 비로소 자기 등에 사람을 태우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성찰할 것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상처를 받으면 마음에 빙점이 생기고, 마음을 닫고 타인과 단절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마미가 새끼를 잃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주인이 아니었지만, 주인이 자기 관리 소홀로 새끼를 잃게 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을 때 마미의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불행을 들어주고 진심으로 유감을 표시했을 때 묶인 것이 풀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 역대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고, 70년 귀양살이 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건축합니다. 귀양살이는 잘못에 대한 심판이었지만, 이스라엘이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왜 시련을 겪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똑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구원을 위해서 “구리뱀이 광야에서 들어 올려진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올려져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비정상적인 삶을 정상화시키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무엇이 우리의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성찰하도록 합시다.

 

 

277.    블랙박스 (2015. 3. 24. 화)

[민수 21,4-9; 요한 8,21-30]  

사순절 구약의 독서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돌보시고 이끄셨는지를 알려 줍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49,15).

비행기에는 보통 ‘블랙박스’(항공 자료 기록기)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비행기의 성능과 상태를 기록하고, 다른 하나는 기장과 지상 관제탑과의 대화를 기록합니다. 이 블랙박스는 극한의 온도에서도 견딜 수 있고, 물 속에서 수면으로 소리를 내보내는 위치 표시 장치가 장착 되어 있습니다. 이 블랙박스를 통해 다시는 똑같은 재난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 원인을 살피고, 개선점을 찾습니다.

재난이 천재(天災)인 경우에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인재(人災)인 경우에는 재난을 미리 대비할 수가 있습니다. 잦은 재난사고가 일어나도 그 원인을 살피고 개선하지 않으면 재난을 키우는 꼴이 됩니다.

구약의 말씀은 블랙박스의 기록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돌보심에도 인간의 계속되는 잘못과 실수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찰하는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는 큽니다 (다윗). 우리가 또 불행과 재난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막연하게 은총을 기다리지 말고, 자신의 블랙박스를 살펴야 합니다.

 

278.    원수를 갚아달라는 예레미아 (2015. 3. 27. 금)

[예레미야 20,10-13; 요한 10,31-42]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함락(587년)을 알렸지만, 백성들은 선택 받은 민족은 결코 망할 수 없다고 여기고, 예레미아의 경고를 듣지 않고 그를 조롱하였습니다. 이에 예레미아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이 몸을 저주하고, 시비를 걸어옵니다.” 예레미아는 자신을 민족의 반역자로 여기고 고향 사람들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하며 친구들까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천성이 부드럽고 착했던 사람이 호전적이며 참을성 없고 성 잘 내는 사람이 된 예레미아는 하느님께 자기를 못살게 구는 이들에게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느님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15,15). 이에 하느님의 응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런 시시한 말은 그만두고 말 같지 않은 말을 하지 말아라”(15,9). 

예수님께서는 피해자에게 복수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279.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2015. 3. 29. 일. 성지 주일)

[이사야 50,4-7; 필리피 2,6-11; 마르코 14,1-15.47]

성지주일의 핵심은 성지가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기다렸던 죽음을 물리치신 메시아 이시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고난을 받고 죽지만 그렇기 때문에 부활한다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5사단이 있는 신산리에는 영국군 참전용사 기념비가 있습니다. 1951년 4월 22-25일까지 3일 동안 그곳에서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 대대가 중공군 3개 사단을 맞이하여 싸우다가 모두가 전멸하였습니다. 영국군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대가를 치룬 전투였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에서 영국군들은 후퇴할 수 있었지만, 아군의 더 큰 피해를 막고, 후방에 있는 한국군, 미군, 벨기에군이 전투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영국군 지휘관들은 그 고지를 방어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영국군은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그 대대가 모두 전멸하고 말았지만, 이로 인해서 후방부대가 전투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상에서 살아남은 샘 서머는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중공군이 쳐들어 올 줄은 몰랐지만, 그럼에도 부대원 그 누구도 싸우기로 결정한 지휘관들을 탓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교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천명, 곧 하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후퇴하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고, 방어하려고 한다면 죽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테, 그들은 남의 나라 땅에서 군인으로써, 자신들이 해야 할 선택을 하고 산화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제대로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님께서 처하셨던 상황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굶주림이란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장발장 처럼 남의 빵을 훔칠 수가 있다고 교회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죽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콜베 사제처럼).

세상의 가치와 복음의 가치가 충돌할 때 우리는 갈등을 갖습니다. 자기 꿈이 있고, 그 꿈을 무력화시키는 하느님의 뜻이 있을 때 갖게 되는 갈등입니다. 선발 투수가 잘해도 마무리 투수가 못하면 경기에 지듯이, 우리도 마지막에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제대로 죽지 않으면 삶에서 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280.    그리스도의 속성 (2015. 3. 29. 일)

[이사야 50,4-7; 필리피 2,6-11; 마르코 14,1-15.47]

그리스도가 어떤 속성을 갖는지 바오로를(용어) 통해 알아봅니다.

프로사고규스:(에페소서 2장) 제약과 제한들이 있음에도 임금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임금에게 안내하는 사람입니다. 훌륭하고 현명한 임금께 우리의 근심과 어려움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 누구든지 그분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소외되었고, 그래서 하소연도 위로도 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지었지만 억울하고 불쌍합니다. 이런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실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임금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알케고스(히브 2,5-9): 남들도 따르고 할 수 있도록 처음으로 길을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막연하고 두려워서 아무도 가지 않던 부활의 길을 처음으로 열어준 사람입니다(선구자, 개척자). 예수님의 부활사건으로 아가페사랑이 시련을 주지만, 결국 구원에 있어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예수님은 하느님의 아이콘) 예수님을 보면 곧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은 바로 당신을 투명하게 비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움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과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셨습니다. 특히 그분이 하느님을 알리는데 강조한 부분이 돌아온 아들의 비유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에도 자비를 베푸는 선한 아버지와 같은 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폰티펙스(히브리 3장): 대사제를 의미합니다. 두 절벽 사이에 세워진 안전한 교량을 말합니다. 한 쪽은 위험지역이고, 다른 쪽은 안전지대입니다. 위험지대에서 벗어나 안전지대로 가는 것을 도와주는 교량입니다. 즉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교량을 세우는 사람으로써, 하느님도 잘 알고, 인간도 잘 아는 예수님께서 대사제로써 우리를 안전하게 하느님께로 인도하십니다.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 구약에 의하면, 죄인이 죄를 탕감 받으려면 먼 성전까지 가서 번제물로 바칠 짐승을 사서 그것을 사제들이 번제물로 바치면 죄가 사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수많은 양과 염소들이 인간을 대신하여 번제물로 죽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마음이 결정적 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짐승 혹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 죄를 대신하여 당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에서 놀라운 하느님을 인식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안에 있는 선한 힘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 힘은 상한 마음을 고치고 불행한 환경을 극복하게 하고 낙심한 이들에게 용기를 주게 합니다. 이 힘은 어떠한 어려움과 실패에도 망가지지 않습니다(반석처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이런 힘이 있음을 알려 주셨고, 우리는 이 힘을 풀어내고 배양을 시켜야 합니다.

 

 

281.    구약의 어린양의 피 (2015. 4. 2. 성 목요일)

[탈출 12,1-8.11-14; 1코린토 11,23-26; 요한 13,1-15]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집 문설주에 발랐던 어린 양의 피 덕분에 이집트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천사들이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이집트인들의 맏아들을 죽였는데, 그 경황이 없는 틈을 타서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양의 희생이 탈출에서 결정적인 매개가 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된다는 점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 부릅니다.

제1독서 탈출기 12장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묻혀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멸망시키겠다, 또는 치겠다, 벌하겠다고 말합니다. 즉 죽고 사는 생사 문제가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너서 이집트라는 억압의 땅에서 벗어난 것을 파스카라 부르고, 하느님의 계획대로 수난 과정을 거쳐 부활로 넘어간 예수님의 사건 또한 파스카라 부릅니다. 홍해를 건너든 수난을 거치든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했는데, 이 넘어가는 파스카 과정에서 유다와 베드로가 서로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실족하여 생을 마감했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께 돌아와 교회를 이끄는 수장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달랐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유다 때문에 잡혀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유다의 배반은 예수님의 수난사 에서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셨지만 유다의 불행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유다는 어떤 설득에도 들을 귀가 없는, 파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게 될 정도로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구약의 신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의인에게 축복을 주시고, 죄인은 처벌하신다는 맥락에서, 자신의 죄는 결코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죄를 지은 상황에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한시킨 것입니다. 함께 3년을 살았 지만, 스승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유다 못지않게 예수님께 큰 실망을 안겨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을 목격하고,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워서 그분이 누군지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점은, 지은 죄에 머물러서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즉시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돌아왔다는 점입니다.

 

둘째 아들의 비유처럼, 하느님께서는 언제든 뉘우치고 돌아오는 아들을 조건 없이 안아 주신다는 것과 세족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머리를 숙여 남의 발을 씻으면, 하느님뿐 아니라 사람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 하느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믿었고, 유다는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의 차이는 하느님의 존재의 유무, 즉 있고 없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그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였습니다.

 

 

282.    시네마 천국 (2015. 4. 4. 토. 부활 성야미사)

[창세 1,1-2,2; 창세 22,1-8; 탈출 14,15-15,17; 이사야 54,5-14; 이사야 55,1-11;

바룩 3,9-15.32-44; 에제키엘 36,16-17ㄱ.18-28; 로마 6,3-11; 마르코 16,1-7]

예수님 부활에 대해서 두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고통스럽지만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런 선택이 주는 의미와 부활의 진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케고스 라고 했습니다. 즉 고통과 두려움으로 확신이 없어 가지 않았던 부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처음 으로 우리에게 알려준 선구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래아에서 당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곳 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과 자신들이 3년동안 갈릴래아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난 3년의 삶을 새롭게 해석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록들을 토대로 복음서가 기록).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 토토는(어른 살바토레) 어린 시절의 멘토였던 알프레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떠난지 30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시실리, 잔칼도)으로 돌아옵니다. 떠났을 때의 그곳과 다시 돌아왔을 때의 그곳은 달랐습니다. 떠날 때의 그곳은 가난하고 엄마는 과부로 늘 슬픔 속에서 살았고, 아버지가 없어서 영화기사 알프레도를 인생의 멘토로 삼고 살았으며, 첫사랑이 있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아 크게 실망하여 떠났던 장소였습니다.

영화를 보면, 당시 토토의 현실을 말해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는데, 그 공주를 사랑한 어느 병사가 공주에게 ‘당신 없이는 나의 삶은 의미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공주는 병사에게 100일 밤낮을 발코니 밑에서 기다려준다면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병사는 밤낮으로 그 자리에서 기다렸고, 90일이 지나자 탈진이 되어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99일째 마지막 날에 병사는 백일을 채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왜 하루를 더 견디지 못하고 떠났을까요? 공주를 사랑하는 것과 결혼하는 것은 별개로 두더라도 병사가 기대하는 삶이 그가 처한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는 현실이 토토가 처한 현실이고, 그래서 어렸을 때의 잔칼도는 곧 토토에게 갈릴래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토토는 가족과 고향사람들을 어린 토토가 아닌 어른 살바토레의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사람들과 장소는 그대로인데, 어렸을 때는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있습니다.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었던 것들을 이제야 발견하고, 그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있습니다. 변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토토입니다. 예전에는 피하고 떠났지만, 지금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예전에는 원하는 것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세상이 이루어지는대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부재가 아니라, 하느님 현존의 시각에서 우리 자신들을 바라본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의 이야기+ 하느님의 부활 이야기=새로운 나의 이야기.

제자들에게 갈릴래아에서 당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과거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느님이 현존했던 세계에서 먹고 마시며 살았음을 확인하라는 초대였습니다. 우리의 역사와 삶이 그분의 계획 속에서 그분과 함께 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신앙입니다.

 

 

283.    알리와 자라 (2015. 4. 12. 일)

[사도행전 4,32-35; 1요한 5,1-6; 요한 20,19-31]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번째 교서 ‘복음의 기쁨’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느님을 향해 갈 수 있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바로 그분께서 아버지와 함께 하셨을 때 누렸던 그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기쁨은 자아완성을 통해서 가 아니라 남을 기쁘게 했을 때 누리는 기쁨입니다. 사람들은 천국이 어디 있느냐, 그곳은 어떤 곳이냐고 묻습니다.

영화 ‘천국의 아이들’의 주인공은 알리와 자라입니다. 집은 아주 가난하고, 월세가 밀려서 부모님들은 매일 빚독촉에 시달리고, 어머니는 큰 병이 있지만 병원에 가지도 못합니다. 어느 날 자라가 신발을 잃어버렸습니다. 착한 오누이는 한 가지 해결 방법을 찾습니다. 여동생은 같은 학교 오전반에, 알리는 오후반을 다니므로 알리 신발을 교대로 신는 것입니다. 자라가 수업이 끝나서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오면 알리는 즉시 신발을 바꿔 신고 학교로 달려갑니다. 알리는 늘 늦게 왔다고 교장선생님께 야단을 맞습니다.

그러던 중 알리는 기쁜 소식을 접합니다.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데, 3등 상품이 운동화입니다. 알리는 자라를 위해 3등을 하리라 마음을 먹습니다. 드디어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고 알리는 옆눈치를 보며 달립니다. 그런데 골인 지점에서 한꺼번에 6명이 몰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1등으로 들어오고 맙니다. 교장 선생님과 학생들은 좋아서 난리였지만, 알리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여동생에게 운동화를 선물하지 못하게 된 지금 알리에게 1등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알리 아버지가 그날 번 돈으로 두 오누이의 새 운동화와 새 구두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둘이 신발 하나를 가지고 신고 다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새 신발을 본 알리와 자라는 너무나 기뻐합니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아버지도 병든 어머니도 시름을 잊고 기뻐합니다.

알리가 훌륭한 것은, 자신보다 동생을 먼저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알리뿐 아니라 이 가족 모두가 그렇습니다. 천국은 남을 배려하고 남을 위하는 이들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기쁨은 남을 위해 살아갈 때 주어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고,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도 그 축복을 향유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284.    부활 신앙의 카락테르 (2015. 4. 17. 금)

[사도행전 5,34-42; 요한 6,1-15]

산헤드린은 사도들에게 매질한 다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이 스승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뚜렷히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풀려나자마자 곧장 성전에 가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사도들에게 눈여겨봐야 할 어떤 특성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남는 흔적(카락테르. 케릭터)이 있습니다. 밀초 위에 남기는 자국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왕과 같은 통치자들이 자신들이 보내는 문서의 신빙성을 인증하기 위해 자신들의 반지 도장을 붉은 밀초 위에 꾹 찍어서 보냈습니다. 자국은 도장 모양을 정확하게 재현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그분의 아버지의 본질이 남겨졌고, 사도들 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본질이 남겨졌습니다. 사도들에게 보여지는 흔적 중 하나가 자신들의 안전을 뒤로 둔 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욕을 받는 것을 기뻐하였다는 점입니다. 

가말리엘 선생은 이러한 사도들의 모습을 보고, 이들을 움직이는 이가 곧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285.    안락사 (2015. 4. 19. 일)

[사도행전 3,13-15.17-19; 1요한 2,1-5ㄱ; 루카 24,35-48]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였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구세주를 죽인 것은 우리의 ‘무지 탓’입니다. 인간의 결정이 구세주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합니다. 병원을 방문하면서 교우들에게 안락사에 대해 기본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이번 기회에 정리해 봅니다.

 

안락사란 편안한 죽음을 말합니다. 즉 죽기를 원하지만 죽을 능력이 없어 의사의 도움으로 고통 없이 죽으려는 일종의 자살과 같은 것입니다. 안락사는 의사의 주도하에 환자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든가, 영양 공급 장치의 전원을 끄든가, 환자에게 독극물을 투입을 통해 환자의 죽음을 돕는 것입니다.

환자의 입장에서 안락사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자발적 안락사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고 주위 사람들과 식구들도 그것을 분명히 인지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환자의 요청이 심한 우울증이나 경제 문제, 또는 외부 압력에 의해 이루어지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비자발적 안락사는 환자가 혼수상태에 있거나 교통사고로 식물 인간이 되어 정상적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의사와 가족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데, 유언장도 없고 대리인도 지명하지 않았다면 안락사가 나쁜 의도에서 악용될 소지가 큽니다. 그리고 과거에 유언장을 남기고 대리인을 지명했더라도 현재 그것을 환자의 동의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불치병이 의료 기술의 발달로 치료가 가능하게 되었다면 환자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락사 법제화를 찬성하는 이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객관적인 진단 결과 더 이상 생존 가치가 없고, 환자의 극심한 고통과 회복 불가능한 혼수 상태, 심각한 치매와 기능 퇴화로 이미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환자가 본인이 원한다면, 편안한 죽음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단, 환자 본인이 원하고, 그 원의를 주위 사람들도 인지한 경우에 가능합니다.

안락사 법제화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생명을 스스로 마감하는 자살을 죄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보고 뉘우치는 시간을 원천적으로 갖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안락사는 곧 이 과정을 기피하는 행위로 간주됩니다.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행위는 생명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것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안락사가 법제화가 되면 악용될 소지가 많다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더 이상 치료행위를 하지 않도록 요청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떠날 준비를 하셨으므로, 의학적으로 연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신 듯합니다. 이것은 안락사라 볼 수 없습니다.

안락사 법제화에 찬성하는 주장에서 한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치료 불가능한 말기환자로써 인간적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안락사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곧 스스로 먹고 입거나 마실 수 없고, 일도 못하고, 의사표시가 불가능하고, 철저히 남에게 의존해야만 생존하는 식물 인간을 인간적인 가치가 없는 존재로 판정내릴 수 있는가?  보기에는 아무런 의식도 생각도 느낌도 없는 존재가 기계에 의존하여 그저 숨만 쉬고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의식이 없고 육신은 무기력해졌지만, 생명의 숨이 붙어있는 한 하느님은 죽어가는 이들과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1독서에서 우리가 무지해서 구세주를 죽였지만 하느님께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말처럼, 모든 것을 합하여 선으로 이끄시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우리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맡겨드려야 합니다. 환자가 아주 고통스럽다 해서 죽음을 허락하는 것은 복음 정신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안락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환자가 평화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과 공감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현명한 판단을 하여 환자가 삶의 마지막을 잘 준비하고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286.    스테파노의 순교 이유 (2015. 4. 21. 화)

[사도행전 7,51-8,1ㄱ; 요한 6,30-35]

스테파노는 두 가지 주장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하나는, 유대 조상들이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 21장)처럼,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매질하고 죽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자렛 예수는 유대인이 오랜 세월 기다렸던 바로 그 메시아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광야에서 유랑할 때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준 이가 모세가 아니라 생명의 빵이신 하느님이셨고, 예수님 당신이 바로 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며, 나에게 오는 이는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로 스테파노는 순교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흔적이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박해을 받고, 모욕을 받는 것을 기뻐한다는 점입니다. 스테파노에게 이 흔적을 발견한 사울은 다마스커스 에서 회심할 때까지 갈등하게 됩니다. 스테파노의 순교에서 사울의 회심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87.    착한 목자. 아들의 방 (2015. 4. 26. 일)

[사도행전 4,8-12; 1요한 3,1-2; 요한 10,11-18] 

팔레스티나에서는 양들에 대한 목자들의 책임의식이 철두철미했습니다. 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목자의 과실인지 아니면 불가항력적이었는지를 밝혀야 했습니다. 양이 실종 되었으면 찾아야 하고, 짐승들에게 당했다면 희생된 양의 흔적을 찾아 증거품으로 제시해야 했습니다. 양을 살리려는 목자들과 자신만 살려는 나쁜 목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 놓는 착한 목자다.”  

영화 ‘아들의 방’ 이야기입니다. 이태리 북서쪽 어느 항구도시에 조반니라는 정신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조반니는 일요일 아침에 아들과 운동하기로 약속했는데, 그날 환자로부터의 급한 요청으로, 아들은 대신 친구들과 바다로 스킨스쿠버를 하러 갔다가 사고로 죽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단란했던 가족은 풍지박살이 납니다. 아내는 아들 방에서 울고, 오빠를 잃은 딸은 농구시합에서 상대선수와 싸우고, 조반니는 그날 아들의 사고는 자신이 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자책합니다. 가족 모두가 슬퍼할 뿐입니다.  

이때 죽은 아들의 옛 여자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같이 집을 찾아옵니다. 가족들은 뜻밖의 방문에 당황했지만, 아들의 죽음을 알리고 함께 저녁식사를 합니다. 조반니는 그들이 히치 하이킹으로 프랑스에 간다는 말을 듣고 국경까지 태워주기로 합니다. 그들은 저녁 늦게 출발 하여 새벽에 동이 틀 때까지 국경을 향해 밤새 함께합니다. 갑자기 이루어진 여행이었지만, 그들은 함께하면서 서서히 가족의 친밀감을 회복합니다. 바닷가 옆 국경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처럼 서로 바라보고 웃습니다. 그들이 웃을 수 있게 된 것은, 어떤 방식이든 그 상실의 아픔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이시고, 길을 잃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지 잘 아신다.”

 

착한 목자가 길을 잃은 조반니 가족을 위해 무슨 일을 하신 것인가? 이들에게 아들의 옛 여자 친구와 그 친구들을 보내셨고, 가족은 그들을 받아들여 저녁식사를 함께 했으며, 프랑스 국경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들 각자가 혼자 슬퍼하고 자책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어떤 방식이든 아픔을 함께하도록 이끄셨고, 유쾌한 웃음으로 마무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통해 선으로 이끄시는 성령께서 길을 잃어버린 조반니 가족을 구출하신 방식은 그들로 하여금 서로 상실의 아픔을 혼자가 아닌 함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288.    곰이 되고 싶은 아이. 포도나무 (2015. 5. 3. 일)

[사도행전 9,26-31; 1요한 3,18-24; 요한 15,1-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백곰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신 중인 암컷 곰이 홀로 산속에서 늑대들의 공격으로 새끼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컷 곰은 슬퍼서 아무것도 먹지 않는 암컷 곰을 위해 인간이 사는 마을에서 인간 아이를 빼앗아 암컷 곰에게 줍니다. 암컷 곰은 기뻐하며 그 인간 아이를 자기 새끼처럼 키웠습니다. 곰이 자기 아이를 데려갔다는 말을 들은 인간 아빠는 아들을 찾으러 나섰는데, 그는 결국 암컷 곰을 죽이고, 아이를 마을로 데려 옵니다. 

인간 세계로 돌아온 아이는 인간 부모 앞에서 곰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자기를 키운 암컷 곰만을 그리워하면서 찾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곰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부모가 온갖 정성을 다했음에도, 인간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는 결국 곰의 세계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폭포와 깊은 계곡을 지나 무서운 폭풍과 고독을 견디는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아이는 인간이 아닌 진짜 곰이 되어 버립니다. 인간 아빠는 다시 자기 아이를 찾아 나섰지만, 그러나 이미 곰이 되어버렸고, 더 이상 인간아이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이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 얘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진짜 아이를 제대로 사랑했는지 따지려는 게 아닙니다. 아이가 곰이 된 것은 아이가 자신을 사랑한 곰에게 자기 마음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사랑하고 받아야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것을 대체할 다른 사랑을 찾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이가 인간 부모의 사랑을 놓치고, 곰이 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놓치면, 그분의 사랑과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다른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죄를 짓고 하느님께 붙어있지 않았으므로,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시고, 당신께 붙어 있으면 구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다고 강조하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야생 포도나무가 아님).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바오로가 된 것(회심)은 예수님께서 구세주시고 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 인생에서 많은 결실을 내는 참 포도나무라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그분의 사랑’을 배우게 되지만, 그 사랑을 알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야생 포도나무처럼 잘못된 사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289.    말과 에고 (2015. 5. 13. 수)

[사도행전 17,15.22-18,1; 요한 16,12-15]

옛날에 말은 인디언들에게 전투하고 이동하는데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훈련이 안 된 야생말을 사용하면 사람이 크게 다치므로, 안전한 이동과 신속한 전투를 위해 반드시 길들여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은 인디언들에게 필요하지만 반드시 길들여야 했다는 말입니다.  

나와 나의 에고가 바로 이런 관계입니다. 인간의 에고는 철저히 자기 본성대로 행동하는 이기적인 어린 아이와 같은 존재지만, 에고를 없애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나라는 주체도 없어지기 때문에, 에고는 있어야 하되 반드시 길들여야 합니다. 결국 길들어진 에고가 진정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이기적인 본성을 지닌 에고를 훈련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에고를 무척 거슬리게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우리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실존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성령께 도움을 청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진리에로 안내하면서, 그 진리에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모든 방해와 어려움을 넘어서도록 도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290.    마지막 미사 (2015. 5. 31. 일)

[신명 4,32-34.39-40; 로마 8,14-17; 마태오 28,16-20]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는 홀로 고독한 삶을 살아가면서 혼자 독백하시는 분이 아니라,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나누는 분이시라는 진리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오늘 미사는 4년간 이곳 본당 신부로서 공식적인 마지막 미사가 됩니다. 본당 사목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은총으로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 드리고, 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본당 교우분들께 감사드리는 감사미사로써 이 미사를 봉헌하겠습니다.

4년 동안 강론을 하면서 기억나는 강론이 하나 있습니다. 작년 가을에 했던 강론인데, 여러분 에게 다시 한번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매주 노인요양원에 봉사하러 갑니다. 그곳에 계시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자주 폭력을 당해서 아버지에 대한 정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부자의 정을 찾기 위해서 그곳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과 말벗이 되어주는 젊은이가 자기 아들인지 모릅니다. 어느 날 젊은이가 일어나는 아버지의 오른팔을 부축하는데, 아버지는 아프다고 젊은이를 밀치게 되었습니다. 미안해서 하는 말이, 어렸을 때 당신 아버지에게 자주 폭행을 당해서 팔이 부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당했던 폭력을 그대로 아들에게 대물림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젊은이가 아들인지도 모르고, 또 과거 자신이 아들에게 자주 폭행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아픔과 상처 그대로 남아서 자신을 억압하겠지만, 받아들이면 그 묶임에서 풀어져 자유와 해방이라는 선물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수용할 수 없는 그런 아픈 현실을 자주 경험합니다.

지난 주가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 행위 전에 먼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용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거룩한 행위이지 우리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삼는 이들을 용서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미 인간을 용서하셨음을 모든 민족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셨듯이, 우리도 그분의 힘으로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제 상태는 이전에는 수심 50미터에 있었지만, 그러다 30미터, 10미터, 3미터로 올라 왔다가 지금은 막 물 위로 올라온 것처럼 아주 편안합니다. 수심 50미터에 내려간 것은 반드시 해야 했던 작업 때문입니다. 그 작업을 끝내고 올라왔기 때문에 지금 편안한 것입니다. 고통과 수고가 없으면 얻는 것이 없듯이(No pain no gain)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으면 보람도 기쁨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4년 전에 피트니스 센터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첫 날 그곳 탈의실 옷장의 키를 제 옷에 핀으로 달아놓고는, 키를 잃어버렸다고 온 전체를 찾아다녔습니다. 탈의실에서 어느 흑인이, 키를 주머니에 넣으면 운동할 때 잊어버릴 수 있으니 핀으로 옷에 달면 안전하다고 해서 달은 것을 그만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일하던 백인 여자와 함께 그 넓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다가 몸에 달려있는 키를 발견하고 크게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몰라서 허둥지둥했고 흑인과 백인은 나를 도왔으며 결국 키를 찾고 웃음으로 끝난 것처럼, 이 본당 생활도 그와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본당에 초짜인 제가 그렇게 허둥지둥 살았고, 여러분들은 십시일반으로 저와 함께하면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무탈하게 웃음으로 마무리가 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모든 게 주님의 은총과 여러분 들의 덕이라 생각합니다.

대단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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