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언니의 부음을 받았다. 언니가 미국으로  쫓겨간 지 두 달도 채 안돼서였다.  나는 당장 상가로 달려가야 할 것처럼 영안실이 어디냐고 황황히  물었다. 그건 웃기는 질문이었나보다. 질부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언니가 여기 어디가 아닌, 미국땅에서 죽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그렇지, 웃음이 나오다니. 전화기를 통해  들어서 그런지 질부의 웃음소리는 상제답지 않게 들떠 있었다.“어딘 줄 알면 가시게요?” “못 갈 것도 없지, 하나밖에  없는 언닌데.”그 소리를 하면서 울음이 복받쳤다. 오남매 중 나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게 막막하고 무서웠다. “이모님도 참, 미국이 저기 어디 부산이나 대구쯤으로 아시나 봐.”“시방 너 있는 데는 어디냐?”“어딘 어디예요, 반포죠. 즈이가  어디 사는지도 잊으셨나봐.”“그럼 맏며느리도 미국이 멀어서 여적지 못 가고 있단  말이지?”“아범이 방금 떠났어요. 비수기니까 그나마 비행기표를 구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모르겠어요. 미국은 뭘 찾아먹으러 그렇게들 드나드는지.”“그럼 넌 비행기표가 없어서 못 갔단 소리냐?”“이모님, 막내가 고3이에요. 고3 엄마가 어딜 가겠어요?”

  질부의 목소리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팽팽했다. 순간 나는  넉살 좋게 빌붙다가 떠다밀린 것처럼 움찔했다. 고2짜리뿐 아니라 고3을 모시고만 있어도 웬만한 법도쯤 무시하고 살아도 아무도 뭐랄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질부는 여기저기  알릴 테가 더 있으니 그만 전화를 끊자고 했다. “에미야, 그럼  난 어떡하라구? 난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구?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야아.”난  끊긴 전화통에다 대고 이렇게  징징거렸다.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자 울음보다는 노여움이 치뻗쳤다. 마지막 다녀간 걸 그렇게 보내다니.  나도 언니가 서울에 와 있는 동안 살뜰하게 해주지 못했지만 질부가 처음 모신 시어머니한테 한 짓은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언니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게 60년대였으니 30년이 넘는 셈인데 그동안 언니는 단 한번도 고국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거기서 대학 나오고 결혼까지 한 맏아들이 고국에 일자리를 구해 영구 귀국할 때도 언니는 따라오지 않았고, 그후에도  어떻게 사나 보러 올법도 한데 미국물을 떠나면 죽는 줄 아는지 꼼짝을 안했다. 하긴 그 동안에 거기 눌러앉은 다른 아들딸들이 다 뿌리내리고 살 만해진 건 언니의 공이 컸고, 맏아들도 뻔질나게 미국을 드나들었으니까 아들 보고 싶은 걸 참고 살았달 수만은 없었다. 언니네가 이민갈 때 고등학생이었던 맏이는 영어와 모국어를 거의 똑같이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했고, 그로 인해 발탁된 일자리니만치 1년이면 서너 달은 외국에서 보냈다. 나처럼 자식들이 외국물과는 인연이 먼 사람에게는 질부가 제 남편이 비행기 때문에 골병들고, 비행기 음식 때문에 위장 버렸다고 안달을 하는 소리도 은근한 자랑으로 들렸다. 우리집에선 내가 그래도 언니 덕에 외국바람을 가장 많이 쐐 본 사람이었다.  언니하고 사는 거리와는 상관없이 정이  날로 애틋해져 전화도 자주 걸게 되고, 언니가 불쑥  비행기를 보내주면 즉시 날아가서 한두  달씩 머물다 오기도 했다. 물론 언니네가 그쪽에서도 잘사는 축에 들고 나서였으니까  최근 10년 사이의 일이었다.

  언니의 30여년 만의 귀향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었다. 지금 고3짜리하고는 10년이나 터울이 지는 그 집 맏아들은 언니가 미국에서 받은 첫손주이자  장남이었다. 올 봄 그애가 결혼할 때 다녀간 게 언니의 마지막이자 첫 고국 나들이었다.  언니가 도착하던 날 나도 공항에 마중을 나갔는데 울긋불긋한 잠바조각하며,  곱슬곱슬한 머리 위로 올려붙인  선글라스하며, 샌들을 신은 맨발에 시뻘건 매니큐어하며 칠십대 노인의 차림치고는 촌스럽다기보다는 상스러웠다. 부조화스럽기는 언니가 밀고 나오는 짐도 마찬가지였다. 얼룩지고 낡은데다가  솔기에 테이프까지 더덕더덕 붙인 구럭 같은  이민가방하고 상표도 안 뗀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루이뷔똥 새 여행가방은 암만해도 잘 안 어울렸다. 그러나 곧  그 금빛 장식도 은은한 가방은 언니의 생뚱스러운 차림에 대한 우리 모두의 민망한 마음을 씻고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장손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오는 30년 만의 귀향이 아닌가. 언니가 조르지  않았어도 미국에서 잘사는 삼촌과 고모들이 결혼식에 오지는 못하나마 선물이 없을 수 없었다. 그 가방은 추레한 이민가방과의 도드라지는 차별성 때문에라도 선물가방이라고 써붙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에다 가방을 실을 때의 언니의 표정만 봐도 거기  값지고 좋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큰아들네서 짐을 푼 언니는 그러나 이민가방만  풀고 그 고급스러운 새 가방에  대해서는 누가 물어볼 엄두도 안 나게 이상하게 굴었다. 신주단지라도 든 것처럼 아이들 발길에다 차여도 언짢아하다가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미리 발뺌을 하면서 구석빼기로다만 밀어붙이려드는 게, 영락없이 장물아비 장물 끼고 돌듯 떳떳지 못해 보였다. 언니가 여봐란듯이 풀어놓은 이민가방에서 쏟아져나온 선물들은 더군다나 그 새 가방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다.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봉다리에 든  인스턴트 커피가 스무 개도  넘었고 대만제 싸구려 립스틱은 그보다 더 여러 개였다. 흔해빠진 랑콤 콤팩트가 그래도 그중 값나가는 물건 축에 들겠는데 그건 몇 되지도 않았다. 그밖엔 언니 옷들인데, 왜 그렇게 울긋불긋  너절한 것들뿐인지 내가 괜히 민망했다. 눈치도 없이 그까짓 봉다리 커피를 가지고 나눠줘야 할 사람들을 기억력도 좋게 사돈의 팔촌까지 엮어대면서  몫을 짓는 언니 곁에서 나는  질부와 눈을 맞추면서 “우리 언니 몰라도 뭘 너무 모른다 잉.” 일부러 잘할 줄도 모르는 사투리 억양까지 써가면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했다.  언니가 이민갈 때만 해도  미제라면 그저 커피 한 봉지라도 감지덕지할 때였다. 요새 웬만한 집에서는  다들 원두커피지 인스턴트 커피는 잘 마시지도 않는다는 것을 언니는 아마 모를 것이다. 내내 시큰둥한 눈으로 바라보던 질부의 표정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번졌다. 암말 말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내가 눈치로 질부를 다독거리고자 한 것은 아직도 그 새 가방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언니는 그 깊고 깊은 이민가방 속을 충분히 다 뒤지고 나서, 뒤져낸 선물의  수효와 자신의 기억력과 맞춰보느라 손가락 까지 다 동원했다. 뿌르르 부엌으로 나간 질부가 식사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팬  돌아가는 소리와 굴비 굽는 냄새가 끼쳐왔다. 5만원 짜리 굴비를 굽고 있을까. 언니가  없어도 나에겐 1년에 한두 번씩은 조카네 들를 일이 생겼는데, 그럴 때마다 이 시이모에 대한 질부의 대접은 깍듯하고도 융숭했다. 귀한 음식도 아낌없이 내놓았다. 커다란 굴비를 통째로  구워준 적도 있는데 한 마리에 5만원도 넘는 진짜 영광굴비라고 했다.

  식탁은 푸짐했다 김치만 해도 몇가지나 됐고 갈비찜이며, 잡채며 전유어며 잔칫상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언니가 미국서도 실컷 먹던 거라는 걸 난 알기 때문에 얼른  굴비를 언니 앞으로 밀어놓았다. “언니, 이 굴비 좀 잡숴봐요. 한 마리에 오십 달라도 넘는 진짜 영광굴비라우. “아이구머니 하늘 무섭다. 이까짓 조기 한  마리에 뭐 얼마라구? 미국선… 언니는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되물으며 굴비접시를 멀찌거니 밀어놓았다.  “언니, 미국서  잡히는 건 조기 아냐, 그건 부서지. 영광굴비에다 그까짓 부서를 어떻게 갖다대우”  그러나 언니는 미국 조기가 더 진짜지 한국 조기는 중국서 건너 온 거라고 우기고 나서, 마치 살림재미에 돈독이 잔뜩 오른 여편네 처럼  그쪽 물가가 얼마나 싸다는 걸, 무  배추에서 마늘 파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예를 들어가며 기억해냈다. 외국살이하다 온 사람들한테서 흔히 듣던 소리건만 질부의 과장되고 냉랭한 무관심 때문에  마치 고부간이 맹렬히 싸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싸움을 말릴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명감으로 나는 숨이 가빠왔다. 내가 주책을 부려서라도 화제를 딴데로 돌려야 할 것 같았다. “언니 , 왜 그  루이뷔똥 가방은 공개 안하우? 나 가고 나면 식구 끼리만 열어보려구? 언니  그럼 못써. 보나마나 손주며느리한테 줄 예물일 텐데, 그치? 삼촌이나 고모들도 뭐 한가지씩 해보냈을 테구. 그런 건 자랑하는 거야. 그래야 장만해준 아들딸들도 낯이 서지. 그거 못 보면 나 오늘 집에 안 갈 테니 그런 줄 아슈” “이모님두, 안 그러면  오늘 가시려고요? 장우 결혼식이  며칠 남았다구요? 그때까지 여기 계셔요. 두 분 회포도 실컷 푸시고 함 보낼 때 격식에 어긋나지 않게 이것저것 참견도 해주셔야죠.” 질부의 표정이 단박에 배시시 풀어졌다  질부는 이렇게 다루기에 따라서는 싹싹하고 뒤끝도 없었다. 며느리까지 보게 됐으니 같이 늙어가는  처지건만 제법 늙은이 위할 줄도 알았다. 질부나 나나 그 가방이  궁금한 것은 호기심하고도 다른, 얼른 짚고  넘어가서 개운해지고 싶은 께름칙한 그 무엇이었다. 언니가 아이 참, 하면서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식사중에 보자는 소리는 아니었다고 말할 틈도 없었다. 그러나  언니가 휭하니 식당으로 가져온 것은 두툼한 봉투였다.  “그러잖아도 다들 있는 데서  내놓을 참이었다 느이 시동생하고 시누이들이 제법 큰 부주 했다. 뭘 하나씩 맡아서  해주고 싶다고 의논들을 하길래 신랑 쪽이니까 그럴 것 없이 돈으로 하라고 내가  옆에서 훈수를 뒀다. 안 그러냐? 돈이 젤이지. 얼마를 해야 할지 감을 못 잡길래 액수도 내가 정해뒀다. 백주에 강도 같았을 거야, 천 달라씩 내놓으라고 공갈을 쳤으니까 걔네들은 이제 양키 다 됐어.  웬만한 양키는 지 아들이 혼인해도 천 달라 안 내놓을걸, 얼마 나들 짠데.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근본이 있는  아이들이니까 두말 안하고 내놓더라.”

  언니에겐 그 쪽에 삼남매가 더 있으니까 그 돈은 3천불은 될  것 이다. 물건으로 뭘 해보낸다고 해도 그 이상 가는 걸 해보낼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쪽 조카들 집도 다 한번씩 가보아서 알지만 다들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것 같아도 다 빛덩어리라고 했다. 은행 빛이라고는 하지만 하다 못해 학비까지 빛이라니 속 빈 강정처럼 사는 건 거기 사정이나 여기  사정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 싶었다. 그런 자식들한테 말이 조카지 왕래가 있고 정이 든 것도 아닌 순전히 관념적인 조카를 위해  천불씩이나 짜낸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언니가 의기양양해할 만했다.

  질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과용들을 해서 어떡 하나? 하면서도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그 가방은 뭔가? 돈봉투 때문에 잠시  흐려졌던 관심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언니가 그 가방을  구석빼기로 처박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존재는 정체 모를 손님처럼 이 식탁에 끼여앉아 우리의 신경을 지속적으로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느낌은 질색이었다. 질부도 같은 생각이라는 게 이심전심으로 느껴질수록 질부에게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다.

  축의금 봉투가 출현하고부터 다들 입맛을 잃었는지 숟가락을 놓았다. 언니만이 누구 약을 올리고 싶은 건지 오래도록 못마땅한 듯 반찬접시를 께적거리면서 식사를 계속했다 맨 나중까지 수저를 붙들고 있는 언니 때문에 나는 자꾸 식구들  눈치가 보였다. 내가 왜 미안해해야 하는지 이치가 닿지 않는 미안감에 떠다밀리듯이 불쑥 또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언니, 그만 먹어. 이제 그만 먹고, 남은 짐이나 풀릅시다. 궁금 해 죽겠네.” “다 풀렀잖냐? 가방 맨 구석빼기 속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온 돈 봉투까지  꺼내다 광고를 쳤으면 고만이지 뭐가  또 궁금한 게 남아 있냐?” 언니는 일부러 굼뜨게 수저를 놓으며 나를 나무랐다  “새 가방을 아직 안 풀렀잖우?” “그 안엔 아무것도  없어, 뱌아.”  “그럼 빈 가방이란 말유?”  “아니, 그건 아니고 미제는 이제 아무것도 안 남았다구… 언니는 다시 장물아비처럼 떳떳지 못하게 우물거렸다.  “언니두, 우리가 뭐 미제에 걸신이 들린 줄 알우? 미제면 어떻구 중국제면 어떠우. 언니가 신주단지 위하듯 하는 게 뭔지 그냥 보자 는 거지.”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자꾸나.”

  언니가 식탁에서 일어서 자기 방으로 정해진 곳으로 향했다. 나는 뒤따르면서 나도모르게 고약한 일에 말려든 것처럼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럴 작정은 아니었다  장난스러운 호기심 정도였는데 왜 이렇게 심각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 집 분위기 탓이라고, 몇십년 만에 노모를 맞는 태도치고는 은근하거나 따뜻한 배려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조카네들 하는 짓에 휘말렸을 뿐이 라고, 누가 묻지도 않는 변명을 궁리했다.

  허섭스레기를 넣어두던 곳을 대강 치운 빈방이라 제물장 속도  어수선했다. 어느 틈에 거기 넣어두었는지 루이뷔똥 가방은 그 안에 비스듬히 처박혀 있었다. 언니가 손수 그걸 꺼냈다. 뒤따라온 식구들이 둥글게 에워싼 한가운데서 언니는 답답하도록 느리고 서툴게 가방을 열었다. 마치 가방 밑에 용수철이라도 장착된 것처럼 안의 것들이 둥실 부풀어올랐다.  대나무숲을 스친 미풍 같은 상쾌 한 소요와  함께 그것들이 코끝까지 부풀어오를 것 같은 환각 때문에 우리는 다들 비명을 억누르며  뒤로 한걸음씩 물러났다 누런  베옷들이었다. 우리가 그 느닷없는 이물감을 미처 어째볼 새도 없이 언니는 그 안의 것들을 한가지씩 끄집어내면서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원삼,당의,천금,지요,멱목,악수‥‥그것들  은수의였던 것이다.

  “어머니, 그만 하세요, 그만요.” 조카가 먼저 격앙된  목소리로 어머니를 만류했고, 질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방을 뛰쳐나갔다. 딴 식군들도  우르르 질부를 따라나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일이 왜 조카며느이가 울고불고 위로받아야 할 일로 둔갑을 했는지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언니가 꺼내놓은 것들을 가방에 도로 쑤셔넣 기에 바빴다 졸지에 분란을 일으킨 것들을 우선 안 보이게  하는 게 수라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갖은수의로 해달라고 했지.”

  언니가 이를 악문 듯이 야무지게 말했다. 언니답지 않게 도전적인 표정이었가. 갖은수의란 예로부터 내려오는 격식을 한가지도 생략함이 없이 고루 갖춘  수의를 말한다.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더군다나 장손의 경사를 앞둔 집에 수의가 아랑곳인가. 그러나 언니는 자신이 일으킨 파문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안 쓰는 것처럼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일찍 자고싶다고 했다 나는 잠간 바깥동정에 귀을 기울이고 나서, 질부가 처음 모셔보는 시어머니를 위해 새로 꾸며놓은 폭신하고 가뿐한 이부자리를 깔아주었다. 언니는 자신이 졸지에 구박데기로 전락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매사가 귀찮은  듯이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푸석하고  미련스러워 뵈는 언니를 내려다보다가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질부는 전화로 누군가와 다투고 있었다. 입에 거품을 문 것처럼 격정적인 언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둘러싼 식구들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면? 아니면? 그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 잘난 딸들은 생판 모르는 일이라고  앙큼을 떨더니 자네는 또 그게 아니라구? 오해라구? 칠십 노인한테 수의를 안동해서 보낸게 여기서 돌아가란 소리가 아니면 무슨 소리냐구? 여직껏 이 집 저 집 조리를 돌려 가며 식모처럼 알뜰하게 부려먹다가 이제 자식들 다 길렀겠다 아쉬을 거  없을 때, 노인네 근력 떨어지니 마침 잘됐다 이거지? 그럼 난 뭔가? 말이  좋아 맏며느리지 누굴 등신인 줄 아나? 맏며느리는 배알도 없는 줄 아나본데 잘 들어둬. 자네나 나나  땡전 한푼 없는 이민자 가족한테로 시집와서 자수성가하긴 마찬가지야. 그래도 자넨 노인네 노동력이라도 이용했지만 난 일찌거니 시집 그늘 벗어 나서 덕 본 거 하나도 없어. 그만큼 떳떳하다구. 노인네가 귀찮아 질 무렵에 마침 고국 나들이 할 기회가 생겼으니 그걸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겠지. 그 기분 나도 알아, 이제사 말인데 나도 시집 식구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영어 잘하는  남편한테 기회도 많고 여자들 살기 좋은 그 좋은 땅  버리고 한국에서 새롭게 기반을 닦았으니까. 왜 이래. 나도 그런 여자라구 자네가 나한테 미리 자네  속셈을 넌지시 귀띔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막 나가진 않았을 거야. 자네가 본데없이 자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맹랑한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네그려. 설사 웬수지간이라도 남의 개혼에  어떻게 그 흥측한 수의를 얹어 보낼 생각을 하냔 말야. 난 그게 분하단 말야 어머님이야 여적지 부려먹은 사람들한테로 가시라고 비행기 태워드리면 그만이지만, 자넨 무슨 억하심정으로  남의 귀한 아들 혼사에 수의 보따리를 안동을 해서 보냈냐구? 말해봐. 그게 아니면, 미국서 오래 살면 남의 경조사에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되는게 있다는 것도 몰라도 되는 줄 아나? 덮어놓고 다 아니라니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몰라도 나는 자네 꿍수에 넘어갈 사람은 아닐세.“

  내가 듣고 있다는게 민망했던지 조카가 느닷없이 눈을 부라리며 제 댁한테서 수화기를 낚아채 소리나게 내려놓으면서 고함을 쳤다.  “그만 닥치지 못해. 당신이야말로 자식들 앞에서 할 수리가 있고, 해서 안되는 소리가 있다는 것도 몰라?” “느이 어머니 잠드셨다. 시차 때문에 고단하신가보더라 하룻밤 모시고 자면서 회포를 풀려고 했더니 안되겠다, 가봐야지.“

  나는 총총히 그 자리를 피했다. 아무도 나를 붙들지 않았다. 나도 알토란 같은 내  손주새끼들과 효자일 것도 불효자일 것도 없는 아들 며느리가 있고, 기회만 있으면 나를 데려가지 못해 안달하는 딸자식도 있는 몸이었다. 제까짓 것들이 붙들지  않는다고 아쉬을 거 없었지만 앞으로 뭔 일을 당할지 첩첩태산인 언니 생각을 하면 뒤꼭지가 당기는 듯하여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식구들 몰대 내 방에서 미국으로 전화를 했다. 요금을 그쪽 부담으로 하려면 암만해도 조카보다는 조카딸들이 만만했으므로 LA교외 라구나 비치에  사는 큰조카딸한테 전화를 걸었다. 질부도 맨 먼저 거기다 전화를 한 듯, 조카딸은 여기서 일어난  일을 대강 알고 있었지만 왜 그렇게들 야단법석인지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큰올케는 다짜고짜 나한테 엄마 짐에 수의가 들어 있는 것도 몰랐냐고 시비를 거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엄마는 샌프란시스코 작은오빠네서  떠나신걸. 난 엄마한테 축의금만 보냈지 배웅도 안했어. 알았어도 그렇지. 엄마가 갖고 가고 싶으면 갖고 가는거 지 그걸  우리가 왜 말려야 돼. 수의는 죽어서 입자고 하는 옷이잖 아. 엄마는 만약 한국 나갔다 돌아가시는 일이 생기면 그걸 입고 싶었나보지 뭐. 그게 거기 사는 아들 며느리 짐을 덜어주는 일도 되구. 살아 생전에 수의를 장만하는 마음이 바로 그런 거 아니겠수. 꼭 돌아가실 날 받아놓은 것처럼 윤달 낀 해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자식들한테 보채다시피 해서 장만한거거든 그거 얼싸나 비싼 건데. 처음엔 여기 올케한테 구걸하기 싫어서 나혼자 했었어. 소문보다 싸더라구. 여기 노인들도 윤달 든 해엔 수의 장만하는 게 유행이라 값도 빤해. 교포사회가 좀 살 만해졌거든. 그래서 남 하는 대로 했는데 엄마가 중국베라고  시뜻해하시면서 당신은 꼭 한국산 안동포로 하고 싶다는 거야. 엄마가 우리한테 어떤 엄만데  그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수. 그래서 내가 해드린 건 좀 못사는 노인에게 선물하기로 하구 다시 추렴을 해서 그 안동포라나 뭐라나 하는 최고로 비싼 베로 새로 해드린 거야. 엄마가 애착을 가질 만하지 뭐. 근데 왜 난리들이야. 이모도 알다시피 LA가  얼마나 더운 데유. 그래도 겨을 한철  좀 서늘할 때면 밍크 입고 나오는 노인들 더 러 있다우. 나도  밍크 있다 이거지. 애교스럽지 않아. 엄마의 수의도 그렇게 애교로 좀 봐주면 안되냐구?”

  조카딸 얘기를 듣고 보니 언니의 수의에 그닥 큰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질부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넘겨짚은 건 수의가 주는 이미지의,  경사와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그 생급스러움, 사위스러움의 충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밍크코트하고 수의하고 비교가 가능한 조카딸한테 사위스럽다는 우리 마음속의 해묵은 그늘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나는 암만해도 느이 엄마 여기 오래 계실 것 같지 않다는 소리만 하고 조카딸하고의 통화를 끝냈다.

 그러나 언니의 수의 소동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언니가 온 지 며칠 안돼 신부집에서 예단이 왔다고 보러 오라는 전갈이 왔다. 신랑집의 집안네가 다 외국에 있으니까 접어두고, 직계만 하라고 했다는데도 나한테까지 예단이 왔다는 것이었다  언니하고 나 하고는 같은 천의 아름다운 비단이었는데 언니는 두루마깃감까지 있고, 나는 치마저고릿감만  있었다. 알맞은 차별이어서 호감이 갔 다. 언니는 연분홍빛이고 나는 황금빛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옷감을 풀어서 언니의 어깨에 걸쳐 보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잘어 울리는 색깔을 골랐을까,라고 사돈댁의 안목을 치하해 마지않았다. 언니도 오래간만에 기죽을 펴고 활짝 웃더니 벌떡 일어서서 큰 거을 앞에 섰다. 그리고 한복 어깨로부터  발끝까지 치렁치렁 그 고운 비단을 걸쳐 보였다. 고급비단 특유의 우아한 주름과 속삭임 같은 살랑임에 우리는 그동안 어긋났던 마음이 편안히 녹아드는 걸 느꼈다. 그러나 거을 속의 자신의 모습에 황홀한 눈길을 보내고 있던 언니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정말 너무 엉뚱했다.  “이런 옷감으로 수의 했으면 참 좋겠다. 그치?” 언니는 희고 아득하게 웃으며  가물가물한 소리로 우리의 동의를 구했다 나도 섬뜩했으니 질부가 노발대발한 건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예단이  만들어준 모처럼의 화해의 틈서리에 끼여들어 오늘밤이야말로 언니하고 함께 자리를 나란히 회포를 풀어보려던 생각을 단념하고 쫓기듯이 조카네를 떠나야 했다. 내 몫의  예단에다가 바느질삯이 든 봉투를 얹어주는 질부를, 암만해도 노망기 같으니 네가 참아야지 어쩌겠느냐고 다독거렸다.

  “나도 따로 알아봤는데 느이 시누이나 시동생은 노인네를 여기 떠맡길 생각 추호도 없더라. 거기 애들이 특별히 효자라서가 아니라 노인네 앞으로 나오는 돈이 충분하고 병이 들어도 병원비 걱정도 없는데 뭣하러 그런 혜택을 안 받겠냐고  하더라. 나도 미국에 대해선 좀 아는데 거긴 나라가 효자야. 여기서 여생을 보내려고 오신 거 아니란 거 하나는 확실하니까 괜히 지레 겁먹지 말고, 계실동안 잘 해드려. 결혼식만 끝나면 오래 계시지 않도록 나도  거들 테니까.”

  이 정도로 질부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질부는 수의라면 얼마나 지긋지긋했던지 결혼식날도 시어머니한테 그 예단으로 옷을 지어드리지 않았다. 언니는 옥색 옷을 입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도 언니는 한 달 가량이나 별탈 없이 아들네서 잘  지냈다. 내가 미국 가서 언니한테 받은 대접을 생각하면 마땅히 나도 언니를 우리집에 청해 단 며칠이라도 같이 지내고, 운전 잘하는 딸한테 부탁해서 시골바람도 좀 쐬게 해드리는 게 도리인 줄은 알겠는데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기 며느리 눈밖에  난 언니가 내 며느리 눈밖에는 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동안 딴사람처럼 표정이 어둡고 거칠어진 질부만 봐도 언니가 얼마나 달값지 않은 짐이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후  내가 앞장서서 언니를 마치 고약한 짐 부치듯이 황황히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사건이 또 한번 생겼는데, 수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수의보다 훨씬 해괴한 사건이었다.  빨리 좀 와달라는 질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언니는 난만한 낙화 한가운데 사뿐히 앉아 있었다. 하필 사돈집에서  보내온 예단을 밤새도록 싹둑거렸을 것으로 보이는 분홍 꽃이 파리들은  찍어낸 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일정해서  언니의 요망스러운 짓거리에 괴기감을 더했다. 언니는 그 옷감이 피륙일 때 몸에 걸쳐 보일 때처럼 하얗게 바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언니, 정말 왜 이래? 겁에 질린 소리로 부르짖으며 언니를 부둥켜안았다. 또 무슨 광기가 분출할지 모르는  언니의 몸은 그러나 재만 남은 뜬숯처럼 사뿐했다. 한줌의 바람을 안은 것 같은 허망감에 소스라치며 나는 언니를 밀어냈다.

  이래도 나만 나쁜 며느리냐고 질부가 나를 쏘아보며 대들었다.  나는 그런 질부가 정떨어졌지만 질부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질부편을 든다는 것은  질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도 언니를 미국으로 보낼 수 있도록 주선하는 거였다. 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조카  보다는 조카딸이 만만해서 전화로, 너희 어머니가 가시고 싶어해서 어느날 몇시 비행기 태워드린다고만 말했고 조카딸은 알았어, 이모 하고는 바쁜 듯이  전화를 끊었다. 그뿐이었다. 내가 했으니까 그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이 됐지 질부가 했으면 아마 이러쿵저러쿵 훨씬 더 곱잖은 소리가 오갔을 것이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공항에서 마지막 만난 언니는 입국할 때와는 딴사람처럼 고상하고 품위있어 보였다. 결혼식 때 입었던 옥색 한복에다 흰 버선에 고무신까지 갖추어 신고, 그동안 자란 머리를 깔끔하게 얹어 빗은 게, 언니의 작달막한 키와 나부죽한 어께선에 잘 어울렸다. 짐도 루이뷔똥 가방만 그대로고, 구럭 같은 이민가방 대신 제대로 된 새 여행가방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큰 가방을 두개나  더 장만한 걸로 보아 그쪽에사는  시동생 시누이들한테 줄 선물도 충분해 해보내는 것 같았다. 우애는 별로라도 그 정도의 허영심은 있는 질부였다.

  “미국물이 좋다지만 늙은이한테는 한국물이 좋은가보다. 몇달안되는 동안 느이 시어머니 어쩌면 저렇게 귀타가 잘잘 흐르냐?” 나는 질부에게 이렇게 아부 겸 치하의 말을 했다. 어찌됐건 그동안 별난 시어머니를 그만큼 잘 참아낸 끝에 호사까지 시켜서 무사히 떠나보내는 질부가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출국장 앞에서는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이 서양식으로 알싸한고 볼도 비비며 작별을 아쉬워하는 게 어색하지 않고 보기 좋았다. 나도 남들이 하는 대로 언니를 포옹했다. 언니에게도 전송 나온 식구들은 남부럽지  않게 여럿 됐지만 끌어안고 서로의 존재를 느낌으로 간직하고 싶어하는 동기는 나밖에 없구나 싶은 게 뭉클하니 내 눈시울을 자극했다. 언니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질부는 시어머니가 싹둑거려놓은 한 바구니나 되는 꽃잎을 다  압수한 줄 았았는데, 어젯밤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면서 보니, 루이뷔똥 가방 속  안동포 수의 갈피갈피에 흩뿌려놓은 것처럼 아직도 많은 꽂잎이 숨겨져 있더더라고 했다.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질부가 내 귓전에 대고 속삭인 마지막 시어머니 흉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떠했니?” 나는 숨가뿌게  물었다.“어떡허긴 어떡해요. 그냥 못 본 척했지요.”“그래 잘했다.”나는 가슴을 쓸어내고 싶게 안도하면서 태워다주마는 조카를 뿌리치고 버스정거장으로 향했다. 언니의 이상한 행동을  고자질할때마다 악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불길하고 영물스러워 보이는 질부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두 달도 안돼 언니의 부음을 들을 줄이랴. 그래도 그렇지 두 달이 어디 짧은 동안인가. 그렇게 보내놓고 어쩌면 그동안  한번도 언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았을까. 궁금해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제나저제나 그쪽에서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을 뿐 먼저 전화나 편지를 쓸 엄두가 안 났다. 나쁜 소식을 듣는다 해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닐 것 같은 일종의 무력감, 무소식은 희소식으로 덮어두고 싶은 소심증 때문에 아예 알고 싶지도 않았는지 모르겠다.

  공항으로 언니를 마중 나오기로 한 게 큰조카딸이었으니까 아마 언니를 끝까지 모신 것도 그애였을 것이다. 내가 언니 보러 미국 갔을 때마다 제일  잘 해주고 유복하고 그래서 마음 편하게 묵을 수 있는 곳도 그애네 집이었다. 미국서도 제일 부자동네라고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산동네 같은 지형에 기화요초로 정원을 가꾼 집들이 드문드문 흩어진 그림 같은 동네였다. 조카딸네는 맨 아래 마당이 바로 바닷가로 면한 집이었는데 천평은 됨직한 마당 끝에 서면 절벽 아래로 바다가 몰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이 마치 갈기를 세운 맹수의 공격처럼 사납고 무시무시해 보였다. 언니한테 안 무서우냐고 물어보았더니 태평양인데 뭐가 무서우냐고 했다. 태평양이면 왜 안 무서울까? 그것까지는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한번은 언니하고 온종일 그 동네를 한바퀴 돈  적이 있다. 세상에, 세상에, 꽃도,  꽃도 어찌나 많고, 모든 꽃들이 바로 지금이 제철인 양 어찌나 진하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지 식물원이 따로 없었다. 버려진 공터나 낭떠러지에 물결치고 있는 노란 야생화는 멀리서  보면 한창 철 만난 유채꽃 같은데 야생 겨자꽃이라고 했다. 그  동네엔 유명한 영화배우도 살고, 돈 맣은  변호사도, 은퇴한 고관들도 산다고 언니는 일일이 그런 집들을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알은척을 했다. 세상에, 경애 신랑은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길래, 한국  사람이 이런 동네서 살 수가 있을까. 내가 이렇게 감탄을 하면 언니는 속도없이 이 동네  사는 한국 사람은 그렇지도 않다면서 저기 저 대문이 네 개에다 풀장이 두 개나 되는 집은 한국에서 부도내고 도망온  누구누구네, 저기 지금 한창 수리중인 성 같은 집은 몇년  전 신문을 떠들썩하게 한 빠찡꼬계의 주먹대장 누구누네 집 하는 식으로 알은척을 계속했다. 잘사는 동네답게 동네를 휘감아도는 길도 구렁이 잔등처럼 능글능글 기름쳐 보였지만 차의 통행은 어쪄다가 볼 수 있었다. 그날 언니는 유난히 즐겁고 의양양해 보였지만 밤에는 둘이서 똑같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낼 정도로 그건 고단한 순례였다.

  그렇게 온동일 다리품을 파는 동안 어쩌면 동네사람이건 행인이건 걷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못 만난 것일까. 언니는  손가락질하며 알은척한 집에 정말 그런  사람이 살고 있었을까? 그런 사람이건 저런 사람이건 그  동네가 사람 사는 동네라는 게  맞기나 할까. 언니의 부음을 듣고 나서 왜 줄창 그런 의심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큰조카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지 싶어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힐 무렵 먼저 조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질부를 거치지 않고 조카가 직접 전화하기는 드문 일이었다.  회산데, 장례 치르고 와서 첫 출근이라  자연히 이모님 생각이 난다면서 차 보낼  테니 나오시면 점심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점심이 급한 게 아니라 할 얘기가 급한 것 같은 눈치에 사양하지 않았다. 여자형체끼리는 늙을수록 닮아가는 법이고, 그게 그 자식한테는 곧잘 상실감을 달랠 수 있는 구실이 된다는 걸 나도 경험해봐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급스러운 일식집은 그의 단골집인 듯 친절하고 공속하게 안내된 정갈한 방엔 조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양손으로 따뜻이 보듬으며 반겼다. 질부 앞에서라면 감히 꿈도 못꿀 침밀감의 표현이었다. 전골냄비의 야채와 어우러진 고기맛은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그러나 좀처럼 식욕은 일지 않았다. 조카도 전골국물보다는 따끈하게 데운 정종잔을 더 자주 훌쩍이면서,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더라구요. 정신 놓은  노인들을 위한. 그런 노인들이 더 오래 산다는데 어머니가 그런 데서 돌아가신 걸 갖고 한번 뗑깡을 부렸더니, 장례 치르고 나서 경애년이 글쎄 이런 얘기를 해주지 뭐예요. 경애가 알고 있는 일을 왜 저는 몰랐을까요? 하긴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겠지만  말예요. 제가 어머니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란  생각이 왜 이렇게 슬플까요. 이모님. 평소 과묵한 그답지 않게 이야기는 주절주절 계속됐다. 나는 어느 틈에 조카하고 마주않은 게 아니라 언니하고 마주않아 옛날 예기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미국 처음 갔을 때만도 60년대니까 한국이 지지라도  못살때였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 형님이 미군하고 국제결혼한 처제 연줄로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이민간 지 몇년만에 살 만해졌다고 했고, 시어머니 생신 때는 100불씩 부쳐오곤 했다. 그때는 100불이 어찌나 큰 돈이었는지 그걸로 잔치를 떡벌어지게 치를 수가 있었다. 시어머니는 마치 아들이 미국 가서 갑부나 된 것처럼 날로 도도해지셨고, 남편도 여기서  월급쟁이 노릇 하는 걸 불만스러워했다. 그건 불만이 아니라 열패감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에서의 경쟁은 이미  결판이 나버린 나이였으니까, 출세할 사람은 이미  다 했고, 못한 사람은 영영 감앙이  없어진 사십대 중반이었다. 출세한 친구가 유난히  많은 명문대학 출신이라는 것도  남편이 시시한 직장을 성에 안 차 하는  까닭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까짓  직장 당장 때려치울까보다는 소리를 누가 붙드는 것도 아닌데 줄창 입에 달고 다녔다.  여기서 사는 걸 뜨내기처럼 말하는 데는 미국서 자리잡은 형님한테서 들은 풍월의 영향도 컸다. 남편은 자기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주류에서 밀려나 변두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형이 떠벌리는 원리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노력한 만큼 잘살 수  있는 나라야말로 자기 같은 사람이 놀 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귀가 여린 사람은 아니어다. 그때는 다를 그랬다. 사회 도처에 불평불만이 팽배해 있을 때라 미국 이민은 누그나 한번쯤은 꿈꿔볼 만한 돌파구였다. 공항을 통해 이  나라를 뜬다는 것만으로도 당장 신분이 수직으로 상승한 것처럼 보일 때였다.

  남편의 꾸준한 노력 끝에 우리는 드디어 이민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 무렵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낯선 나라에서 과연 적응이 잘 될까 하는  부담감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다. 단출한 우리 식구만도 여섯이나 되었다. 대식구였다. LA에서 잘산다는 형네는  이혼한 처제와 함께 식당을 하고 있었다. 순전히 한국인 상대의 식당은 한국의 변두리 식당보다 김치 젓갈  따위 고타분한 냄새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그 냄새가  그리워 찾는 손님이 많다고 하는데 이국적인걸 동경한 우리는 오만정이 떨어졌다. 남편은 더했다. 형은 처제가 독립하고 싶어하니 아우를 그 자리에 앉히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민수속과 함께 영어회화 공부를 제법 착실하게 해가지고 온 남편은 온종일 영어 한마디 할 필요가 없는 일터는 천만금을 준대도 싫다는 거였다. 남편은 어떻게든 백인들 사회에 끼여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가져온 돈을 조금씩 까먹었다. 형과 사이가 나빠지자 나도 그 식당에서 일을 거들 수 없게 됐고, 앞으로 아이들 공부시킬 일이 난감했다. 형네는 아이들이 좋은 학교 다닌다는 게 큰 자랑거리였고 희망이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고 자부했다. 남편은 그 잘난 학벌 때문에 오히려 애들을 개처럼 기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편이 잘 벌어도  부부가 같이 벌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든 사회라는게 우리 형편을 딱해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충고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주선으로 시간제 식모 같은 일자리도 더러 얻어걸렸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나는 남편과는 달리 식민지시대에 여고에서 배운 영어가 단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이 안 통하는 가정에 들어가 종노롯을 하기가 죽기보다는 싫었다. 그러잖아도 유색인종에게 백인은 알아서  기어야 할 상전처럼 어렵기만  한데, 그게 일대일의 관계가 되면,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정식으로 출퇴근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얻은게 냉동회사였다. 내가 맡은 일은 냉동한 새우를 크기에 따라 몇단계로 분류해서  포장하는 일이었다. 보수는 작업량에 따라 주급으로 지급되는데, 내가 받은 주급은 동료들 중에서 늘 꼴찌였다. 내가 가장  일이 더디니까 당연했다. 나는 내 직장에 만족했다.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건 또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몰랐다. 동료들은 대부분 뚱뚱한 멕시코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유쾌했고  무엇보다도 그들앞에선 한결 주눅이 덜 들 수 있었서 좋았다.  백인들이 하는 영어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멕시칸의 영어는 곧잘 귀에 들어오는 것도 신기했다.

  어느날, 별안간 나에게 사무직이 주어졌다. 들어오고 나가는 물량만 기록하면 되는 간단한 사무직이었지만 보수도 오르고 손이 온통 짓무르는  막노동을 안해도 되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그러나 신참인데다가 직업능률도 가장 떨어지는 나에게 그런 출세길이 어떻게 열렸는지를 알고 나자 괜히 동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경위는 이러했다. 그 회사에서 슈퍼마켓으로 넘긴 새우가 대량으로 반품이 들어왔는데, 표시된  규격과 다르게 크고 작은 게 함부로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반품을 받아보니 사실이었으므로, 누가 그렇게  불성실하게 일했나를 알아보기 위해 포장하는 봉지에다가 누가 잔업한 건지를 알아볼 수 있는 특별한 표시를 했는데 정직하게 일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는  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진급할 만해서 한 거였는데도 제일 신참이 먼저 진급한 게 미안해서 나는 늘 아이 앰 쏘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사장한테도, 감독한테도, 동료들한테도 만나기만 하면 아이 앰  쏘리였다. 행여나 누가 날 시기할까봐 미리 겸손을 떨었고, 마음으로부터 미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차차 그런 과장된 내 겸손은 비웃음거리가 되는가 싶더니, 누가 뭘 어떻게 고해버쳤는지 나는 생선을 뼈째 가는 무시무시한 기계가 있는 곳으로 쫓겨났다. 그  기계를 청소하는 일은 아주 힘든 막노동이었다. 엄청 큰 기계였는데, 청소를 하다가 잘못 조작을 해 팔뚝이 잘린 일이  있는 기계라고 했다. 겁이 많은 나는  그 직장을 그만두었다. 함부로 굽실대며 미안해할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착실하게 배운 성싶었다. 또 하나, 같이 일하던 멕시칸들로부터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믿을 만한 직업소개소가 어디  있다는 걸 알아놓은 것도 냉동회사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일본말엔 자신이 있었고, 통하는 말로 통사정을 할 수 있으면  반드시 살 길이 열릴 것 같았다.

  그런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소장은 나이 지긋한 여자였다. 일본말 특유의 상냥한  말투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겠는데, 고맙게도 그 여자는 어떡하든  내 소질이 뭔가를 알아내려고 내게 말을 많이 시켰다. 나는 말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곧 제동을 걸  수 없도록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웃으면서 적당히 반문도 하고 맞장구도 쳤는데, 상대가 어떤 일에 적합한지 알아내려는 의미있는 질문이어서, 나는 저절로 기술 한 두가지 정도는 익혀가지고 오는 건데, 하고 깨우칠 정도였다. 그 여자와 이야기하는 동안 비록 익혀 온 기술은  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내 안에서 진지하게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건 덮어놓고 아무 일이나 하게 해달라고 덤빌 때하고는  딴판의 행복감이었다. 나는 대학도 안 나오고, 이민오기 전에 취직해본 적도 없고, 출신학교도 현모양처를 양성하기로만  소문난 여고라는 걸 그 여자에게 몹시 미안해하며 털어놓았다. 여학교 때 얘기를 하다가 좋아하는 과목얘기도 나오고, 양재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다는 걸 아련한 그리움으로 생각해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여자들은 거의 여고가 최종학력이 되었으므로,  상급반에서는 실생활에 필요한 요리나 바느질, 예의범절을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양재도 그 중의  하나였는데, 선생님이 그 시절엔 희귀한 양장미인이어서 양재과목은 인기학과였다. 재봉실  시설도 훌륭해서 우리는 좋은 선생님 밑에서 재봉틀 실습은 물론 치수를 재는 법에서부터 기본형 옷본을 떠서 자유자재로 변형시키는 법까지 철저한 기본교육을  받았다. 결혼할 때도 양재노트만은 챙겨갈 정도로 그때 받은 교육은 오래도록 쓸모가  있었다. 내가 딸애들의 원피스는 사 입히지 않고 거의 내 손으로 해 입힌 것도 생각해보니 그 양재노트 덕분이었다.

  그 여자하고 그런 옛날 얘기까지 하게 된 것은 이미  구직을 위한 상담의 한계를 벗어난, 막혔던 대화의 욕구였다. 동년배인데다 섬세한  감정 표현까지 가능한 공통의  언어를 갖고 있다는 걸로 나는 그 여자에게 첫날부터 우정 같은 걸  느꼈다. 취직과는 상관없이 가끔 놀러 오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전엔 누구에게도 그렇게 넉살 좋게 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내 이야기를 섬세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들었던 듯하다.  얼마 안돼 나는 그 여자의 소개로 양장점에 취직을 할 수가 이었다. 특수한 고객만을 상대로 하는 맞춤옷집인데 주인은 불란서 여자라고 했다. 임금도 냉동회사와는  댈 것도 아니게 후했다. 그 여자가  나를 과대평가해서 잘못 소개한 게 분명했으므로  뒷일이 걱정돼 사양하려고 했지만.  하필 그날 그 여자는 정신없이 바빴고,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떠다밀리 듯이 새로운 일터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불란서 양장점은 일본인들 거주지역하고 가까운 깨끗하고  고요한 뒷골목에 있었다. 일본여자 소개로 불란서 양장점에 왔다는 느낌 때문인지 결벽증에 가까운 청결함과 하찮은 것도 멋있어 보이는 분위기가 나에게는 일본과 불란서의 의좋은 공존처럼 신기하게 여겨졌다. 양장점이라고 해도 밖으로 면한 쇼윈도는 없었고, 그림에서 본 유럽의 성당 문처럼 생긴 문을 밀고 들어가면 비로소 큰 유리창이 보이고 그 안에는 창백하고 도도하고 어딘지 슬퍼 보이는 마네킹들이 공단이나, 사텐, 시폰 같은 고급 천으로 만든 주름이 풍부한 드레스를 치렁치렁하게 입고 읍한 자세로 고즈넉이 서 있었다. 불란서 여자의 작업실은 이 응접실풍의 작은 홀을 거쳐서 들어가게 돼 있고 그 안은 밝고 능률적으로  정돈돼 있었다. 그 여자는 주름은 없었지만 깡마르고 강파른 얼굴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고, 오렌지 빛 루주를 진하게 바른 입술이 한련 꽃을 문 것처럼 생생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불란서 여자와 재봉사들이 말하는 걸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여자는 나에게  쉬운 영어로 간단한 지시를 했고 가끔 일본 말도 했다. 어떤  말도 아주 조용히 속삭이듯이 말했기  때문에 눈치로 알아듣는 게 더 편했다. 거의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미국 땅에서 여러 번 던져졌던 침묵 중에서 이 곳의 침묵은 아주 편안했다. 단절이 아니라 용해 같은 거였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일은 불란서 여자가 떠주는 본대로 천을 재단하는 일이었다. 나는 양재 선생한테 배운대로 몸체의 앞뒤나 좌우를 뜰 때,  암홀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게 놓고 재단했다.  무늬가 없는 옷감인 경우 그렇게 해서 옷감을 덜 들게 하는 건 재단의 기본이었는데도 불란서 여자는 그걸 매우 신기하게 여겼고 나를 칭찬해주었다. 얼마 안돼  나는 그 여자가 나를 신임하고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편은 아직도 방황 중이었지만, 나는 순전히 내 힘으로 잡은 좋은 일자리로 인하여 비로소 이민생활이  일단 위기를 벗어났다는 안정감을 맛볼  수가 있었다.

  일감은 연달아 있었지만 나는 옷을 맞추러 오는 고객을 거의 보지 못했다. 고객인가 싶은 이도 맞춤 옷의 진짜 주인은 아니었고, 심부름꾼이었다. 미국사회에도 전화를 걸거나 하인을 시켜서 치수를 대주고 옷을 맞추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귀족사회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소녀 적에  읽은 괴기소설로다 그런 상류사회를 유추해보곤 했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에 권세와 부를  한 몸에 지닌 성주가 선택된 귀족들을 외부세계와 철저히 차단된  성 안에 모아놓고, 흑사병과 맞선다.  흑사병은 커녕 바늘 끝이나 심지어는 시간이 흘러 들 틈도 없는 완벽한 방어 속에서도 그들은 흑사병의 공포에서 못 벗어난다. 그래서 허구한 날 질탕 같은 무도회로 그 공포를 잊으려  하지만, 어느 날 낯익은 멤버 외에 낯선 손님이 섞여 있음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불청객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불청객이 바로 흑사병이었고, 춤추던 귀족들은 차례차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다, 는 이야기였다. 그 폐쇄된 성 안의 교만하고 이기적인 귀족들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옷이었다.

  나는 불란서 여자가 재단한 이런 치렁치렁하고 유현한 옷보다는 그 여자가 모조진주로 손수 수놓는 비단 실내화나, 불란서 망사의 정교함이 돋보이는 베일, 그리고 자투리 헝겊을 날이 긴 반짝거리는 가위로 날렵하게 싹독거려서 한 송이 요염한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코사지 등을 더 좋아했다. 불란서  여자가 몰입과도 도취와도 같은 표정으로  그 일에 열중하는 걸 나는 숨죽이고 지켜보곤 했다. 검은색이나 은색 보라색 등 가라앉은 색상의 드레스에 한쪽 가슴을 장식하는 코사지는 거의 비슷한 계통의 색상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현실적인 옷에다가 놀랍도록 생생한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옷을 뚫고 걸어 나올 것 같은 생기는 생뚱스럽게도 간드러진 요염함이었다. 그  여자는 어쩌면 자기가 만든  엄숙한 옷에다가 장난을 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 여자가 다 된 옷에다가  장난을 치기위해 코사지를 만들 때의 무아지경을 볼 때마다 아침에 거울  앞에서 오렌지색 루주를 안 칠한 그 여자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 양장점 종업원 중에서는 내가 가장 가벼운 일을 하고 있는 것같은 미안감 때문에 나는 될 수 있는 대 로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마무리  청소까지 끝마치고 퇴근하려 들었다. 어디서나 그놈의 미안감이 문제였다. 그러다보니 가게를 열고 닫는 열쇠까지 내 차지가  되었다. 커다란 거울이 걸린 잘 정돈된 불란서  여자의 작업실에서 나는 금지된 장난에의  유혹으로 가슴을 울렁거리며 아직 찾아가기 전의 맞춤옷을 이것저것 걸쳐보곤 했다. 계집앳적 엄마의 외출복을 몰래 입어볼 때 처럼 서양 여자들의 체격에 맞춘 옷들은 나에게 터무니없이 컸지만 고급천의 감촉은 황홀했고, 가슴에서 피어나는 코사지는 내  안에 남은 화냥기처럼 요요했다. 나는 내 하루 중 그 시간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감미롭고도, 마치 열병의 예감처럼 불안하고 달뜬 열정의 웅성거림을 내 안에서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양장점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유명한 양장점인  것 같았다. 어느 날 어마어마한 장비와 함께 그 지역 TV방송국 촬영팀이 들이닥쳤다. 미리 약속된 것인 듯 나만 놀라고 아무도 안 놀라며 그들을 맞이했다.  휘황한 조명등이 설치되고 여기저기다  플러그를 꽂고 마이크랑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그들은 서로 거침없이 떠들었다. 물론 영어였고, 나는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그런 소요가 마치 여지껏 내가 편안하게 안주해왔던 침묵이 흘러 나가는 소리만 같아서 불안했다. 장비를 설치하는 기술자중에 동양인이 한 사람 있었다. 동양  사람 중에도 한국 사람이 아닌가 싶게 친근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말로 이야기를 시켜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두 팔을 크게 벌려 못  알아듣겠다는 몸짓을 해 보이고는 이내 무관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그를 관찰했고, 마침내 조작하는  기계가 말을 잘 안 듣자 일본말로 욕을 하는 걸 들었다. 우리말만은 못해도 일본말만 해도 어딘지 몰랐다. 그가 맡은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짜고짜 일본말로 말을 시켰다.  이번에는 그도 반가워했다. 내가 일하는 양장점이 TV에 나올 만큼 유명한가를 그에게 물은 게 잘못이었다. 그들은 특이한 직업을 취재 중이었고, 불란서 여자는 부자들의 수의를 비싼  값으로 잘 만들기로 소문난 여자라고  했다. 내가 가게에 혼자 남아  걸쳐본 야회복은 수의였던 것이다. 나는 그 날로 그 양장점을 그만두었다. 다시는 그렇게 편안한 직업을 못 가지게  되리라는 걸 알고도 더는 그 일을 계속하기가 싫었다. 정말로  그 후로는 그렇게 편안한 직업을 못 가져보았고, 남편이 안정된 직업을 갖기까지 안해본 고생이 없었지만 그 직장을 그만두지 말걸 하는 후회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좀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까 해서 그 일본인 직업소개소를 다시 기웃거려보는 짓 따위도 하지 않았다.

  마치 홀딱 반해 얼싸안고 정을 나누던  사내의 정체가 실은 해골이었더라는 괴기담  속의 처녀처럼 날로 수척해질지언정 지난날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직접  송장을 다루는 것도 아니겠다, 그만큼 편안한 일터를 놓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송장에  대한 금기가 워낙 격렬하고 유구한 내 나라의 문화를 극복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작가세계 199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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