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비사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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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편 終

 

  開國의 情話

 河伯의 딸 柳花

 

 고대 국가의 창업경위는 신비로운 전설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상례이지만 고구려의 건국 설화(說話)는 유달리 농후한 로맨스로 비롯되었다는 점이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대단히 흥미롭다.

 이상국집 동명왕편(李相國集東明王篇),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는 그 건국 설화가 이렇게 전해지고 있다.

 아득한 옛적 천제(天帝)는 태자 해모수(解募漱)를 부여의 고도에 보내어 나라를 세우게 했다.  이때 해모수는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그 종자 백여명은 백혹을 타고 오색 구름에 싸여 주악소리도 장엄하게 하강했다고 한다. 머리에는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찬 해모수는 아침에 그 곳을 내려와 백성들을 다스리고, 밤에는 다시 하늘로 도로 올라가므로 그 곳 사람들은 그를 천왕랑(天王郞)이라고 불렀다.

 그때 북쪽 청하(淸河=지금의 鴨綠江) 연변에 하백(河伯)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세딸이 있었는데 큰 딸은 유화(柳花), 둘째 딸은 훤화(萱花), 셋째 딸은 위화(葦花)라고 불렀다.  모두 다 신자염려(神姿艶麗)하여 보는 사람마다 침을 삼킬 만한 가인(佳人)이었다.

  어느날 해모수왕이 사냥을 나왔다가 웅심연(熊心淵)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세 처녀를 보자 첫눈에 몹시 마음이 끌렸다.  거 참 좋은 처녀들인걸. 만일 비로 삼는다면 훌륭한 왕자를 낳아 줄거야.

 좌우를 둘러보고 이렇게 말한 해모수왕은 서서히 말을 몰아 세 처녀에게로 다가갔다. 낯설은 남자가 다가오자 세 처녀들은 물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감추었다. 유유히 다가온 해모수 왕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처녀들이여 어찌하여 나를 피한단 말인고? 나는 바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 이 고장을 다스리는 임금이거늘 어찌하여 나를 피한단 말인고?

 해모수가 연못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니까 수중에서 세 처녀가 고개를 내밀더니 각각 한마디씩 했다.

  천제의 아드님이시며 이 고장을 다스리는 어른이시면 더욱 부끄럽고 황송하와요.

  우리는 몸에 가린 것도 없는 몸…

  어찌 그대로 뵈울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겠군. 그렇다면 내 당장 이 자리에 집을 지어 줄 것이니 그 속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도록 하라.

 이렇게 말하고는 말채찍을 들어 땅에 집 모양을 그리니 당장 그 자리에 장려한 구리집 한 채가 솟아났다. 그리고 그 구리집 속에는 세 사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고 큰 술통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처녀들이여. 어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라. 그래도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는다면 그 통의 술을 실컷 마셔라.

 해모수의 말을 듣고 세 처녀는 대단히 기뻐하며 그 집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은 다음 서로 권하며 술을 흠뻑 마셨다. 세 처녀가 대취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데 불쑥 해모수가 들어왔다. 해모수의 두 눈은 술에 취해서 더욱 요염해진 세 처녀를 쏘아보며 이글 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세 처녀는 취중에도 위험을 느꼈다. 일제히 일어나서 그 집을 빠져나가려고 애를 써서 훤화만와 위화는 빠져나가는데 성공했으나 유화만은 끝내 해모수왕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대는 나의 비가 되는 거야. 늠름하고 강한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해.

 해모수는 유화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정을 통하고 말았다. 유화가 해모수에게 붙잡혀서 욕을 당했다는 기별을 듣자 유화의 부친 하백은 크게 노했다. 즉시 사람을 보내어 자기대신 그 행패를 꾸짖게 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하백의 딸을 잡아 두는가?

 그랬더니 해모수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백의 딸과 혼인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당히 중매를 놓고 청혼할 것이지 어찌 함부로 남의 딸을 가두어 두는가? 예를 몰라도 분수가 있지 않은가?

 그 말에 해모수는 자기의 경솔한 행동을 뉘우쳤다.

  내 즉시 하백에게 가서 사과하리라.

 그는 하백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하백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문을 굳게 닫고 아무리 간청해도 열어 주지 않았다. 해모수는 하는 수 없이 유화를 가두어 둔 구리집으로 돌아갔다.

  그대의 부친이 그렇듯 노한 걸 보니 나와 그대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라. 즉시 부친 곁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해모수는 낙심하고 이렇게 권했다. 그러나 유화는 이미 해모수에게 깊이 기울어진 후였다.

  저는 이제 대왕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몸이에요. 비록 쫓아내신다 하더라도 가지 않겠어요.

 유화가 고집을 부리니 해모수는 더욱 난처해졌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그대 부친의 승낙이 없는 한 그대는 내 비가 될 수 없지 않으냐?

 유화는 잠시 궁리에 잠기더니 바싹 다가 앉으며

  대왕께선 용차(龍車)를 탁호 하늘을 마음대로 날으실 수 있지 않으시어요?

  그야 그렇지.

  그렇다면 용차를 타고 공중을 날아가시면 우리 집 문이 아무리 굳게 닫혀 있더라도 담을 넘어 들어가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음, 그래서?

  우리 아버님은 원래 힘과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소중히 여기는 분입니다. 대왕께서 하늘을 날으시는 걸 보시면 마음이 변하실 것이예요.

 해모수는 유화의 말을 옳게 여겼다. 즉시 하늘을 향해서 용차를 부르니 오색 구름에 싸여 오룡차가 내려왔다. 해모수는 오룡차에 유화를 태우고 다시 하백의 집으로 향했다. 찬란한 ]구름에 싸여 용차를 타고 마당에 내려서는 해모수를 보자 하백은  과연 천제(天帝)의 아들이시구나!

 감탄을 하고 융숭한 예를 갖추어 맞아 들였다. 그러나 따질 것은 잊지 않고 따졌다.

  혼인이란 원래 천하가 다 중히 여기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예를 갖추지 않고 우리 문중을 욕되게 하는 거요?

 해모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슬며시 딴청을 했다.

  내 하늘에서 자라나 지상의 예에 어두운 탓으로 그런 실례를 범했소이다.

  그렇다면 참을 수도 있는 일이오만 대왕이 과연 천제의 아드님이시라면 신기한 재주를 지니고 있을 것이외다. 어디 그 재주를 보여 줄 수 없으시오?

  어렵지 않은 일이오. 무슨 재주로나 당신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니 당신이 먼저 재주를 보여 주시오.

 해모수가 이렇게 도전하자 하백은 곧 한 마리 잉어가 되어 앞마당 연못 속에서 유유히 헤엄을 쳤다. 이것을 본 해모수, 즉시 물개로 몸을 변하여 잉어가 된 하백을 잡아 버렸다.

 하백은 다시 사슴이 되어 날래게 숲 속을 뛰어 다녔다. 그런 즉 해모수는 이리가 되어 사슴을 또 잡고 말았다. 하백이 이번엔 꿩이 되어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가니 해모수는 매가 되어 당장에 잡아 챘다. 그제서야 하백은 본래의 몸으로 돌아와서 해모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왕은 과연 천제의 아드님이시오. 미거하나마 내 딸을 길이 아껴 주시오.

 그리고는 성대하게 예를 갖추어 혼인을 치렀다. 그러나 하백은 어쩐지 마음이 안 놓였다.

  내 해모수왕의 상을 보니 한 여자를 길이 거느릴 분이 아니란 말야. 싫증이 나면 언제 내 딸을 버려 두고 하늘로 도망 칠는지 알 수 없으니 단단히 경계하도록 하라.

 좌우를 향해 이렇게 일러둔 다음 춤과 노래로 해모수를 즐겁게 해주는 한편 독한 술을 자꾸 권하여 대취하도록 만들었다. 그 술은 이레가지나야 깨는 술이었다.

 해모수가 술에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것을 보자 하백은 큰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해모수를 그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유화도 함께 들어가게 한 다음 가죽 주머니를 단단히 봉하고 용차에 태웠다.

  이렇게 해서 하늘에 올라가기만 하면 설마 내 딸을 쫓아 내리지는 않겠지.

 하백은 비로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해모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레가 되기 전에 독한 술에서 깨어난 그는 가죽 주머니 속에 갇혀 있는 것을 깨닫자 크게 노했다.

  남을 믿지 못하는 자는 마땅히 그 응보를 받아야 한다.

 그는 유화의 머리에 꽂혀 있던 황금 비녀를 뽑아 가죽 주머니에 구멍을 뚫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울부짖는 유화를 가죽 주머니째 멀리 던져버리고 용차를 몰아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하백은 펄펄 뛰며 야단이었다.

  그것 봐라. 이 못난x아! 네 마음대로 사내를 택하더니 이제 이렇게 버림을 받게 되고 집안 망신을 시켰으니 그냥 둘 수 없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시켜 유화의 입술을 꿰매고 길게 잡아 뽑게 하니 그 길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노비 두 사람을 달려 우발수(優渤水)가로 쫓아버렸다.

 이때 북부여의 왕은 금와왕(金蛙王)이었는데 하루는 금와왕에게 부추(扶鄒)라는 어부가 와서 이렇게 호소를 했다.

  요즈음 물에 잠거 둔 그물 속의 물고기를 훔쳐가는 도적이 있사온데 사람의 짓인지 짐승의 짓인지 도무지 알 수 없사옵니다. 하오니 대왕의 힘으로 밝혀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와 같은 호소를 받은 금와왕은 곧 사람들을 시켜 우발수에 그물을 치게 했다. 물고기를 없애는 기수(奇獸)를 잡아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얼마 후 그물을 건져 보니 무엇이 그렇게 했는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음…. 물짐승치고도 보통 물짐승이 아니로구나. 그렇다면 이번에는 쇠그물을 쳐보아라.

 이렇게 명해서 다시 쇠그물을 쳐보니 돌 위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이 걸려 나왔는데 그 여인은 바로 유화였다. 우발수가로 쫑겨간 유화 주종은 굶주림에 견디지 못해서 어부가 잡은 물고기를 훔쳐 먹다가 어부의 호소로 그물을 치니 유화만 금와왕에게 잡히고 만 것이다.

  너는 누구이며 어디서 온 여인인가?

 금와왕은 물어보았다. 그러나 입을 꿰매이고 석자나 잡아 늘린 유화가 어찌 대답을 하겠는가?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을 보자 왕은 그 입술을 세 번 잘라 겨우 말을 시켰다고 하는데 이번 역시 해모수에게 욕을 당한 일이 부끄러워 입을 떼지 못하다가 왕의 강요로 겨우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해모수 어른으 사랑을 받은 몸이라?

 금아왕은 한편 놀라웁고 한편 섭섭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금와왕은 유화으 꽃같은 용모를 보고 단번에 마음이 동했는데 해모수으 애인이었다는 말을 듣고는 저으기 실망했던 것이다.  금와왕은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解夫婁)가 늙어서 산천에 기도하여 얻은 수양아들이다. 그리고 왕위에 오르지 동부여로 천도하고 그 곳을 다스리고 있는 처지이니 유화는 말하자면 조모(祖母)뻘이 된다. 연정을 품기에는 너무나 난처한 처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두 사람의 연령으 차이인데 이상국집 동명왕편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무리 계산 해도 노파와 청년의 차이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해모수느 신인(神人)이므로 연령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간주하고 그가 유화와 관계를 맺은 것이 노년이라고 본다면 유화와 금와왕의 연령도 비슷하게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금와왕은 유화가 이미 몸을 더럽힌 여인이긴 하지만 담뿍 마음이 쏠렸다. 그래서 별실에 가두어 두고 밤낮으로 사랑을 속삭인 결과 유화는 마침내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 경위 역시 이상국집이나 삼국사기에서는 신비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유화를 별실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비쳐들었으며 유화가 그 햇빛을 피한 즉 햇빛은 마치 유화를 그리워하는 듯 따라다녔다. 그 결과 유화는 잉태하고 얼마 후에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들이 만했다고 전한다.

  사랑하는 여인이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 금와왕은 대단히 기뻐했다. 그러나 막상 해산한 것을 보니 사람이 아니라 괴상한 알이다. 왕의 실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끔찍한 건 당장 내다버려라.

 왕은 소리소리쳤다. 유화 역시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괴상한 물건을 낳은 것이 창피 하고 죄스러워 왕이 하는대로 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록 알이지만 아쉬운 정은금할 수가 없었다.

 왕의 명을 받은 사람은 먼저 그 알을 무엇이나 잘 먹는 돼지에게 갖다 주어 보았다. 그랬더니 돼지는 고개를 외로 꼬고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소와 말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에 내다 버려 보았다. 그 발에 밟혀서 깨어져 버릴 것을 바란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와 말들은 그 알을 보고 소중한 물건을 대하듯 멀리 피해서 돌아갔다. 나중에는 인가가 드문 들판에 내다 버렸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모여든 새들이 그 위를 날으며 노래를 부르로 날이 저물자 새들은 그 알을 깃으로 덮어 보온(保溫)해 주었다.

  어떻게 생긴 괴물이기에 그렇듯 이상한 일만 일으키느냐? 그것을 갈라 보아라.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나 속 시원히 보기라도 하자.

 왕은 마침내 이렇게 명했다. 그래서 힘을 자랑하는 장사가 도끼를 힘껏 내리쳐 보았으나 갈라지기는 고사하고 상처도 나지 않는다. 왕은 더 어쩌는 수가 없어 그알의 모친인 유화에게 돌려주며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했다. 유화는 역시 어머니였다. 그 알을 고운 비단으로 겹겹이 싼 다음 따뜻한 곳에 고이 놓아 두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알이 깨지더니 그 속에서 한 옥동자가 나타났는데 준수한 용모, 늠름한 몸집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을 약속하는 듯 했다.

  아기는 성장할수록 영특한 재질을 발휘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달만에 말을 했고, 아장장 걸어다니게 되자 모친이 만들어준 활로 파리를 쏘아 죽였으며 나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에는 나는 새라도 한 번 겨누면 백발백중(百發百中)이었다고 한다. 부여의 속어(俗語)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불렀는데 이 소년도 사람들로부터 주몽이라고 불리우게되었다.

  금와왕에게는 다른 여인의 몸에서 난 일곱 왕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주몽과 어울려 놀 때에는 무슨 놀이에나 주몽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모두 다 주몽을 시기한 나머지 맏아들 대소(帶素)는 부왕에게 이렇게 참소했다.

  주몽이 하는 짓을 가만히 살펴보니 후에 반드시 나라에 화를 끼칠 염려가 있습니다.

  어떤 점이 그렇단 말이냐?

 왕은 물어 보았다.

  첫째 주몽이 태어난 내력이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애가 즐기는 것은 말 타기와 활 쏘기 뿐이니 장차 우리 은혜를 배반하고 난을 일으킬까 염려됩니다.

  그러니 어쩌자는 거냐?

  일찌감치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이겠죠.

 금와왕은 유화를 극진히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 몸에서 난 주몽은 다른 왕자보다 한층 더 아꼈으며 장차는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 틀림없는 일이고 보면 대소의 위치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몽을 없애려고 온갖 술책을 쓰는 것이었다. 그것을 간파 못할 금와왕이 아니었다.

  내가 알아서 처치할 테니 너는 가만히 있거라.

 이렇게 일러 놓았다. 그러나 이대로 두었다간 왕자들의 미움을 받아 어떤 화를 당할는지 알 수 없으므로 그 예봉을 피하기 위해서 주몽을 목장으로 보내어 말을 먹이게 했다. 주몽은 왕의 참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 불평도 없이 말을 먹이고 있었으나 왕자들의 미움은 여전했다. 아무래도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어머니, 저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지만 이 곳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천한 마부 노릇을 하는 아들을 위로하러 찾아온 유화네게 주몽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던 참이다. 너먼한 재주를 가지면 어딜 간들 큰 일을 못하겠는냐?  그렇지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어머님 혼자 얼마나 외로우시겠어요.?

 주몽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유화는 오히려 아들의 손을 굳게 잡고 격려해 주었다.

  내 일은 그리 염려 마라. 너만 크게 된다면 외로운 것쯤 어찌참지 못하겠느냐. 그렇지만 멀리 떠나자면 무엇보다도 좋은 말이 있어야 할 텐데…

 이려게 말하다가 유화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주몽을 데리고 마굿간으로 갔다. 그리고는 주몽이 가지고 있던 채찍을 뺏어 들더니 마굿간 속으로 뛰어들어 말들의 등을 함부로 내리 쳤다.  말들은 모두 놀라 떼를 지어 도망했다. 그 모양을 이윽히 바라보고 있던 유화는 청황색(靑黃色) 터럭을 가진 말 한 필을 가리켰다.

  저것이다. 저 말이 바로 네가 타고 갈 말이다.

 다른 말들은 모두 열어 제낀 문으로 도망갔지만 그 청황색 말만은 두길 난간을 가볍게 뛰어 넘어 도망쳤던 것이다. 그러니 준마(駿馬)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자, 말들을 다시 모아 들여라.

 주몽은 말들을 불러 마굿간으로 모아 들였다. 그랬더니 유화는 말들 중에서 청황색 말을 찾아 입을 벌리고 그 혓바닥에 바늘 한 개를 꽂았다. 괴상한 거동이었다.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혓바닥을 상하면 먹이를 못 먹을게 아닙니까?

 주몽이 놀라 물어보니까.

  그래야 한다. 그래야 이 준마가 네 몫이 되는 거야.

 하며 유화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유화의 말대로 그 말은 혀가 아파서 먹지를 못하고 알로 여위어 갔다. 그러니 천리마도 한낱 둔마(鈍馬)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런지 얼마 후 금와왕이 마굿간을 찾아왔다.

  네가 그 동안 말을 먹이느라고 수고가 많았으니 그 상으로 말 한필을 주겠는데 어느 말을 갖겠느냐?

 금와왕이 이렇게 물어본 데에는 따로 속셈이 있었다. 만일 주몽이 준마를 택한다면 왕자들의 말대로 딴 뜻을 품은 것일 것이고 둔마를 택한다면 별로 염려 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주몽은 미리 혀에 바늘을 찔러서 먹지 못하고 야윈 말을 택했다.

  그 녀석 욕심도 없구나!

 금와왕은 흡족하게 웃으며 그 말을 선뜻 내주었다. 왕이 돌아가자 주몽은 즉시 말의 혓바닥에 꽂았던 바늘을 뽑고 좋은 먹이를 배불리 먹였다. 그러자 지쳤던 말은 당장 건강을 회복하고 어느 말도 따를 수 없는 날샌 말이 되었다. 주몽도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떠날 날만을 기다리며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어느 날 밤 모친 유화가 그의 거처로 몰래 찾아왔다.

  얘야 오늘밤으로 이 곳을 떠나야 하겠다.

 유화의 말을 들으니 대소를 비롯한 일곱 왕자와 여러 대신들이 마침내 주몽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이곳을 습격할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朱蒙과 禮氏夫人

 주몽은 곧 이 곳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모친 유씨와 작별하는 것도 슬픈 일이었지만 헤어지기 어려운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아내예씨(禮氏)였다. 주몽은 몇 달 전에 예라는 어여쁜 처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예씨는 이미 주몽의 아기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떠나시면 언제 또 만날 수 있겠어요?

 예씨는 주몽의 소매를 잡고 울기만 했다.

  사람이란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또 다시 만나는 법이요. 그대가 잉태한 아기나 잘 낳아 때를 기다리도록 하오.

 주몽은 이렇게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장차 제 몸에 무슨 변이 있어서 아기가 혼자 아버님을 찾아가는 날에는 어떻게 서로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겠어요?

  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나의 유물(遺物)을 일곱모가 난 돌 위 소나무 아래 감추어 두었으니 그 아기가 만일 사내아이거든 그것을 찾아가지고 나를 만나러 보내오.

 주몽은 수수께끼 같은 말 한마디를 남기고 마침내 예씨와 작별(作別)했다.

  주몽은 길을 떠날 때 전부터 친히 지내오던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부(陜父)등 세 젊은이와 준마를 거느리고 떠났다. 그들 일행이 한참을 가다가 엄호수(지금 압록강 동북쪽에 있었다고 한다.)에 당도했을 때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건너갈 다리가 없을 뿐아니라 배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주몽이 도망간 것을 안 왕자들의 군사가 추격해 오지 않는가. 이때 주몽이 위기를 모면하여 그 강을 건느게 된 경위 또한 신비스럽다.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부딪친 주몽은 하는 수 없이 하늘에 도움을 빌었다. 즉 채찍을 높이 들어 하늘을 향해

  천제의 후손이며 하백의 외손이 난을 피하여 여기까지 왔다가 목숨을 잃게 될 곤경에 빠졌나이다. 슬프고 외로운 이 몸을 천지신명(天地神明)은 굽어 살피소서.

  이렇게 애소한 다음 활을 들어 강물을 치니 난데 없는 물고기와 자라들이 무수히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었다. 주몽과 세 동지는 그것을 밟고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으나 뒤미처 추격해 온 왕자들의 군사가 건너려 하자 고기와 자라들은 모두 흩어져 버려 수중 고혼(孤魂)들이 되었다. 또 이런 전설도 있다. 그 후 한참 길을 가다가 양식이 떨어졌다. 마침 인가에서 먼 산중이라 먹을 것을 구할 길이 막연했다. 네 사람은 기진맥진(氣盡脈盡)해서 나무 그늘에 의지하고 있으려니까 어디선 지 한쌍의 비둘기가 날아와서 나무 가지에 앉았다.

 죄 없는 날짐승을 죽이기는 싫었지만 굶어 죽느니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하고 활을 쏘아 떨어뜨린 다음 배를 갈라 보니 뜻밖에도 그 속에 보리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제서야 그 비둘기를 자세히 보니 모친 유화가 항상 귀여워하던 비둘기들이었다.

  어머님이 내가 굶주릴 것을 염려하시고 이것을 보내신 모양이구나!

 주몽은 그 보리알을 모두 꺼내어 밥을 짓는 한편 비둘기의 배를 꿰매고 물을 뿌렸더니 비둘기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북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들 일행이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렀을 때 다시 동지 세 사람을 얻게 되었다. 한 사람은 베옷을 입고 한 사람은 누비옷을 입고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이며 성명은 무엇인가?

 주몽이 물으니 베옷을 입은 사람은 재사(再思)라 하고 누비옷을 입은 사람은 무골(武骨)이라 하고 수초옷을 입은 사람은 묵거(默居)라 했다. 그 이름이나 복장으로 미루어 재사는 농사 일에 농할 것 같았으며 무골은 전투에 능할 것 같았고 묵거는 낚시질과 고기잡이에 능할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재능에 따라 앞으로 할 일을 맡기는 한편 재사에게는 극씨(克氏)라는 성을 주고 무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을 주었다.

  이후부터 주몽의 덕(德)을 흠모(欽慕)하고 모여 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졸본촌(卒本川)에 이르렀을 때에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 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직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으므로 비류수(沸流水) 상류에 집을 짓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칭하고 자기성을 고씨(高氏)로 짓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바로 한효원제 건소(漢孝元帝建昭) 二년(西紀前三七)이었으며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위에 오른 지 二十一년 되던 해였다. 그리고 주몽은 이때 二十二세라는 젊은 나이였다. 그 후 주몽은 말갈족(靺鞨族)을 정벌하고 비류국(沸流國)을 합방해서 국위를 점점 떨치니 그가 다스리게 된 민가는 실로 二十一만五백八호나 되었다고 한다.

  주몽이 망명한 후 동부여에 남아 있던 예씨는 달이 차자 과연 옥동자를 낳았다. 예씨는 아들의 이름을 유리(類利)라 지어 주고 정성껏 키웠다. 주몽의 모친 유화는 금와왕의 애호를 받아 편안한 세월을 보냈으나 예씨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어 가난과 고생 속에 오직 유리의 성장만을 낙으로 삼고 살아왔다. 유리도 부친 주몽을 닮아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즐겨 했다.  날만 새면 산과 들을 달리며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을 사냥하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세월은 흘러 유리는 어느덧 세상 물정을 대강 짐작 할 수 있는 소년이 되었다. 그날도 유리는 거리에서 새를 쏘다가 화살이 빗나가서 물 긷는 여인의 물동이를 깨뜨렸다. 여인은 노발대발(怒發大發)했다.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더니 저 녀석도 애비 없이 자라서 저렇게 버릇없는 짓만 하는 모양 야.

 이렇게 욕설(辱說)을 퍼부었다.

 그 말을 듣자 유리는 부끄럽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즉시 집으로 달려가서 모친에게 따졌다.

  어머니 남들은 날더러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어째서 계시지 않아요? 돌아가셨으면 무덤이라도 있을 텐데 어째서 한 번도 그 곳을 찾아가지 않으세요?

 아들의 말을 듣고 예씨는 이제 모든 것을 밝힐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똑똑히 듣거라. 유리야. 너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신 게 아니라 휼륭히 살아 계신단다.

  그럼 어째서 우리하고 같이 사시지 않나요? 지금 어디 계세요?

 예씨는 주몽이 망명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한 다음

  지금 너의 아버지는 남쪽 땅에 고구려란 나라를 세우고 임금으로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계시단다. 그러니 이제 너도 아버지의 유물을 찾아가지고 가서 후사가 될 차비를 하여라.

 이렇게 말하니 유리는 입 속으로 몇 번이나

  일곱모 난 돌 위 소나무 아래 감추어 둔 유물….

 중얼거리며 산 속으로 달려갔다. 일곱모 난 돌 위에 서 있는 소나무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 다녀도 소나무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낙심(落心)을 하고 집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까 바로 자기 집 한 기둥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는 즉시 그 기둥 밑을 파 보았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끊어진 칼 한 토막이 나왔다.

  깜짝 놀란 유리는 그 주춧돌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분명히 일곱모가 난 주춧돌이었다.  그리고 기둥은 틀림없는 소나무로 깎은 것이었다.

  일곱모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둔 유물…. 그것이 바로 이 칼끝이로구나!

  유리와 예씨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는 즉시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등 평소부터 친히 지내오던 동지들과 함께 부친을 찾아 고구려(高句麗)로 향했다. 그때 유리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고구려(高句麗)로 찾아간 유리가 주몽을 뵙고 스스로 왕자라고 칭하자 주몽은 처음 대하는 늠름한 젊은이를 자세히 뜯어보더니

  네가 만일 내 아들이라면 내가 감추어둔 유물을 가지고 왔을 텐데 어디 내보아라.

 이렇게 말했다.

 유리는 즉시 품에 품고 온 칼끝을 바쳤다. 주몽이 즉시 그 칼끝을 자기가 가지고 있던 칼토막과 맞추어보니 꼭 들어 맞았다.

  반갑다. 유리야! 너는 과연 내 아들이다.

 크게 기뻐한 주몽은 곧 유리를 세워 태자를 삼았다.

  주몽은 나라를 세우자 예씨 이외에 월군녀(越郡女)라는 여인을 맞아 비를 삼고 두 아들 얻었다.  큰 아들은 비류(沸流)라 하고 작은 아들은 온조(溫祚)라 했다. 두 아들은 유리가 태자가 된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특히 큰 아들 비류는 이때까지 다음 왕위는 자기가 계승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유리를 태자로 세운데 대한 불만은 한층 더했다.  그래서 아우 온조와 함께 남쪽으로 망명해 버렸다.

  이렇게 돼서 명실공히 다음 왕위의 계승자가 된 유리는 곧 부왕에게 간청해서 다시 모친 예씨를 모셔와 근 二十년이나 헤어졌던 세 사람은 반가운 해후를 했으나 그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해 九월 주몽은 우연히 병을 얻어니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슬픔 속에 부왕을 용산(龍山)에 장사 지낸 유리는 부왕을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받들어부르고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곧 제二대 유리왕(瑠璃王)이며 때는 서기전 十九년이었다.

 

 

 

 

 黃鳥의 노래

  유리는 즉위할 때까지 비가 없었다. 그러므로 즉위한 이듬해 七월 다물후(多勿候)인 송양(松讓)의 딸을 비로 삼았다. 송양은 일찍기 비류국 왕이었으나 동명성왕과 무예를 다투어 패배하자 나라를 바쳐 합방하고 그의 고토인 다물후로 책봉된 것이다. 왕비 송씨는 비로 책봉된 이듬해 十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왕은 다시 두 여자를 계실(繼室)로 얻었는데 하나는 골촌( 川) 사람의 딸 화희(禾姬)이고 하나는 한(漢)나라 사람인 치희(稚姬)였다.

  두 여인은 다같이 남달리 투기가 심한 성질이었을 뿐 아니라 국적과 민족이 다른 처지였으므로 사사건건(事事件件) 반목(反目)하여 왕을 괴롭혔다. 그래서 왕은 하는 수 없이 양곡(凉谷)의 동서(東西) 두 곳에 각각 궁실을 짓고 두 총희를 따로따로 거처하게 했다.

  그러나 두 여인의 반목은 그치질 않았다. 한 번은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가게 되었다.  여러 날 걸릴 예정이었는데 그 동안 왕은 무엇보다도 화희와 치희 두 총희가 서로 다투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두 여인으 궁실을 찾아가서 단단히 당부해 두었다.

  내가 없는 동안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둘이 다투면 안되오.

 두 여인은 투기가 심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속이 좁기도 했다. 왕의 당부를 받고도 꽁하게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왕은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떨어지지 얻는 발길로 사냥터를 향했다.

  왕의 사냥은 제법 여러 날이 걸렸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화희와 치희는 묘한 암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왕이 돌아왔을 때 어느 궁실에 먼저 들르나 신경을 곤두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오랑캐년 궁실에 먼저 들르기만 해봐라! 내 가만 있지 않을 테니까.

 화희는 이렇게 종알거리며 독살을 피웠다. 그리고 치희는 치희대로  멀리 고국을 떠나 외로운 몸인데 나를 제쳐놓고 화희년만 먼저 찾아보신다면 정말 가만 있지 않을 테야.

  이렇게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시녀를 놓아 혹시 왕이 상대편 궁실에 몰래 돌아와 있지 않나 염탐하기까지 했다.

  왕이 사냥을 떠난 지 엿새가 지난날 저녁이었다. 치희가 외로운 방에서 왕을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루고 있으려니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또 화희년이 종을 보내어 염탐하는 모양이구나. 오늘은 내 가만히 두지 않겠다.

 늦게 돌아오는 왕을 기다리다 못해 짜증이 날대로 난 치희는 발소리를 죽이고 밖을 내다보았더니 과연 한 시녀가 방안을 엿보고 있었다.

  치희는 날쌔게 달려들어 그 시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이년! 너는 어떤 년인데 감히 내 침실을 엿보는 거냐?

 끌고 들어가서 불빛에 얼굴을 밝혀 보니 과연 화희의 시녀였다.

  치희는 분해서 치를 떨었다.

  여봐라! 이 도둑년을 흠뻑 때려서 쫓아보내도록 해라.

 치희는 시녀들에게 명했다. 주인이 반목하고 있었던 만치 시녀들도 대립되어 으르렁거리고 있었던 터였다.

  그년 잘 붙잡혔군. 초죽음을 만들어 줘야지.

  치희의 시녀들은 모두 달려들어 화희가 보낸 시녀를 때리고 차고 할퀴고 해서 피투성이를 만들어 돌려 보냈다. 총애하는 시녀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것을 보자 화희는 이를 갈고 발을 굴렀다.

  그 오랑캐년이 못할 짓이 없구나. 내 그년을 당장 쫓아버리겠다.

  화희는 시녀들을 거느리고 치희의 궁실로 달려 갔다.

  이년 ! 이 배우지 못한 오랑캐년아 !

  화희는 소리소리 질렀다.

  네 년이 남의 나라에 와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는 것만도 감지덕지(感之德之)할 텐데 감히 내가 부리는 아이를 매질하다니 더 그냥 둘 수 없다. 썩 돌아가라 ! 너희 나라로 썩 돌아가란 말야.

  그러나 치희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네 년이 누구라고 날더러 오라가라 하는 거냐? 네 년이나 나나 다 같은 처지가 아니냐 말야? 

  그러니까 화희는 싸늘한 비웃음을 띠우며 치희를 노려보더니

  입이 째졌다구 말이면 다 하는 것으로 아느냐? 어째서 네 년과 내가 같단 말이냐? 원래 사슴은 사슴과 어울리고 이리는 이리와 어울리는 법이야. 나와 대왕의 사이는 사슴과 사슴의 사이와 같지만 너와 대왕의 사이는 사슴과 이리의 사이와 흡사하지 않으냐? 사슴의 나라에서 어찌 악독한 이리가 행세한다는 말이냐?

  이 말에 치희는 더 항변할 힘이 없었다. 이에 앞서 오랜 동안 한(漢)나라에 정벌되어 압박을 받아 오던 이 땅의 백성들은 차츰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갖게 되자 한(漢)을 미워하고 반항하여 독립국가를 세우기 시작 할 시기였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세력이 고구려(高句麗)였다.  그러니 만치 화희의 말은 비록 질투에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고구려(高句麗)사람들의 민족 감정(民族 感情)의 일단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했다.

  치희는 한참 동안 말을 못하다가 겨우 한마디 반발하기를

  네가 아무리 그런 소리를 하지만 대왕께서는 다르단 말이야. 대왕께서는 나를 극진히 아껴 주신단 말이야.

  대왕께서 아껴 주신다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색다른 꽃이 신기해서 그러시는 거지 진심으로 아끼시는 건 아니란 말야. 너희 한(漢)나라 오랑캐들을 누구보다도 미워하고 기회만 있으면 이 땅에서 몰아내려고 하시는 게 대왕의 생각이라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치희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짐을 꾸려 가지고 그 밤으로 궁실을 떠났다.

  그 이튿날에야 유리왕은 사냥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치희가 궁실을 나가 버렸다는 말을 듣자 크게 놀랐다. 비록 이국의 여성이지만 왕은 누구보다도 치희를 사랑했던 것이다.

  왕은 궁중에 들어가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려 치희를 쫓아갔다. 치희의 집은 그 당시 한나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낙랑(樂浪)땅 (平安南道 및 黃海道 一部)에 있었다. 그러므로 왕은 그 곳을 향해 말을 달렸다.

  고구려의 강토와 낙랑 땅 접경을 이루고 있는 냇가에서 겨우 치희를 발견했다.

  치희 나요 ! 그만 돌아오오.

  왕은 소리쳤다. 그러나 치희는 한 번 왕을 돌아보더니 그대로 냇물을 건너고 말았다. 냇물을 건너면 곧 이국땅이다. 함부로 쫓아갈 수 없었다. 왕은 냇물 이편에서 애타게 치희를 부르다가 마침내 멀리 사라져 버리자 그대로 주저앉아 넋을 잃고 말았다.

  조용한 냇가 외로운 나무 밑이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흐르는 물소리와 나뭇가지에 모여 앉아 우는 새소리 뿐이었다. 왕은 힘없는 눈초리로 그 새들을 바라 보았다. 그 중에 누런 새 한 쌍이 이리저리 날으면서 다정히 지저귀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왕은 지난날 치희와 정답게 지나던 일이 회상(回想)되었다.

  왕은 그 자리에서 시 한수를 지어 자기 슬픔을 달래니 이것이 유명한 황조가(黃鳥歌)이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누런 새들은 훨훨

  암놈 숫놈 어울리는데

  나만 홀로 외로이 되었으니

  장차 뉘와 더불어 돌아갈까

 

 

 

 解明王子의 悲劇

  이성에게는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왕이었지만 유리는 새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는데 있어서는 신중하고 슬기로운 임금이었다. 그가 즉위한지 十四년 되는 정월이었다.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파견하여 질자(質子)를 교환하자고 청해왔다. 대소는 이에 앞서 그의 소망대로 부여국의 왕위를 계승했던 것이다.

  유리왕의 처지로 볼 때 대소는 선왕(=朱蒙)을 괴롭힌 숙적이다. 감정적으로는 질자 까지 보내어 수교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여는 아직도 고구려보다 훨씬 강대한 나라다. 감정적으로 맞서다가 노여움을 사면 지극히 불리했다. 총명한 왕은 이 점을 잘 판별(判別)할 줄 알았다.  그는 태자 도절(都切)을 불렀다.

  네가 질자로서 부여엘 가야겠다.

  도절은 겁이 많고 용렬한 인물이었다.

  제가 질자로 가요? 그러다가 두 나라 사이가 험악해지면 저는 맨 먼저 죽고 마는 게 아니에요?  싫습니다. 아버님 다른 사람을 보내 주세요.

  벌벌 떨며 거절하는 아들을 보고 왕은 탄식했다.

  어리석은 아들이 나라를 망치는 구나 !

  왕의 예견은 들어맞았다. 태자가 질자로 가지 않게 되자 부여왕 대소는 크게 노했다. 그 해 十一월 대소는 五만 대군으로 고구려 땅을 침공했다. 고구려의 군력으로서는 당해내지 못할 대군이었으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 수많은 장졸이 얼어 죽었으므로 부여국은 겨우 회군했다.  뜻하지 않게 고구려는 위기를 모면한 셈이었다.

  이후부터 왕은 더욱 이웃나라와 분쟁을 회피하고 오직 안으로 국력을 키우기에 부심(腐心)했다.  용렬한 도절이 그 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왕은 그 대신 해명왕자(解明王子)로 태자를 삼았다.

  해명은 도절과는 반대로 용감한 젊은이였다. 힘도 강하고 무술에도 능했다. 왕은 그것이 대단히 대견했으나 한편 격하기 쉬운 성격이 은근히 염려스러웠다.

  유리왕 二十二년, 왕은 국내(國內)에 위나암성(尉那巖成)을 축조(築造)하고 천도했다. 그러나 해명은 천도에 반대하고 고도(古都)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들의 태도가 달가울리는 없었지만 왕은 그 무용을 아끼어 과히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왕과 태자 사이가 결정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해명태자의 용명은 고구려 나라 안 뿐만 아니라 널리 이웃나라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고구려는 근처에 황룡국(黃龍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도 해명의 용명을 듣고 그 힘을 시험해 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황룡국 사람 중에 아무도 당기지 못하는 강한 활을 만들어 사신을 시켜 보내고 태자의 힘이 과연 강하다면 이 활을 듣자 해명은 껄걸 웃었다.

  나에게 어린애 장난감 같은 활을 쏘아 보란 말이요?

  그리고는 그 활시울을 한 번 힘껏 당기니 그렇듯 강한 활이 뚝 부러지고 말았다. 황룡국의 사자는 크게 놀랐다.

  태자는 과연 천하장사이옵니다.

  그러자 해명은 다시 껄걸 웃으며

  내 힘이 강한 것이 아니요. 활이 너무 약해서 꺾어졌으니 다시 내 힘을 시험할 의향이 있거든 훨씬 더 강한 활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라고 왕에게 전하오.

  사자가 돌아가서 그대로 전하니 황룡국 왕은 몹시 부끄러워했다.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구나!

  그리고는 고구려에 해명태자가 있는 한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하고 군비를 확장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 사실이 새 서울에 있는 유리왕의 귀에 들어가자 왕은 크게 노했다. 즉시 황룡국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해명은 비록 내 자식이지만 이웃나라에 무례한 짓이 많았으니 죽이도록 하시오.

 라고 부탁했다. 이것은 해명의 거만한 태도를 미워한 때문도 있었지만 그 보다도 해명이 힘을 과시한 때문에 황룡국에서 군비를 확장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해명을 없애버리면 황룡국에서도 고구려측에 딴 뜻이 없음을 깨닫고 경계를 풀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유리왕의 말은 황룡국 왕에게도 반가운 말이었다. 해명태자만 없앤다면 마음 놓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황룡국 왕은 사람을 보내어 태자와 만날 것을 청했다. 황룡국 왕이 만나자는 의도 어떠한 것인지 해명태자 자신도 그의 측근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태자의 측근자는 태자가 황룡국으로 가는 것을 극구 막았다.

  이웃나라에서 까닭 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반드시 음흉한 속셈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가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믿는 바가 있는 태자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염려들 마라.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어찌 황룡왕이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해명은 즉시 황룡국으로 향했다. 황룡국 왕은 해명이 오는 길로 죽일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해명이 당도한 것을 보자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그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할 뿐 아니라 그를 죽이는 날에는 유리왕은 비록 가만히 있을는지 모르지만 해명을 추종하는 부하들도 적지 않고 모두 다 굉장한 용사들이므로 어떠한 분란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예를 갖추어 후히 대접하고 그냥 돌려 보냈다.

  황룡국 왕이 해명을 무사히 돌려 보냈다는 말을 듣자 유리왕은 더욱 난처했다. 특히 해명의 세력을 두려워 한 나머지 돌려 보냈다는 점이 불쾌했다. 이대로 둔다면 밖으로는 이웃나라들이 모두 경계해서 고구려는 고립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안으로는 날로 강성해지는 해명의 세력이 부왕의 위치까지 위협할는지 알 수 없다.

  유리왕은 마침내 해명에게 사람을 보내어 꾸짖었다.

  내 도읍을 옮겨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자 했거늘 너는 내 뜻을 거역하고 그 곳에 그냥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조그만 힘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으니 아비에게는 자식 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한 셈이고 나라에는 전란을 불러 일으키는 죄를 진 셈이다.  마땅히 죽어야 하겠다.

  사자는 유리왕의 말을 전한 다음 왕이 자결하라고 보냈다는 칼을 내주었다. 칼을 받아 들자 해명은 눈물을 뿌리며 탄식했다.

  부왕께서는 그렇듯 나를 알아 주시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내 이 칼로 죽을 수밖에 없다.

  즉시 칼을 뽑아 들고 목을 찌르려 하자 곁에 있던 늙은 신하가 칼을 뺏어 들며 간했다.

  태자 잠시 참으시오. 대왕의 맏아드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태자께서 마땅히 그 뒤를 이으셔야 할 몸인데 지금 자결하신다면 나라 일이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대왕께서는 직접 분부하신 것도 아니고 사자가 전한 말이니 그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나 해명은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일찍이 황룡국 왕이 강한 활을 나에게 보냈을 때 내가 그것을 꺾어버린 까닭은 그가 우리나라를 가벼이 볼까 염려해서 힘을 과시했던 것이지만 부왕께서는 그 행동이 오히려 분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시니 부왕과 나 사이엔 메울 수 없는 생각의 틈이 있는 거야. 이대로 가다가는 그 틈이 점점 벌어지고 신하들도 강한 생각을 갖는 파와 유한생각을 갖는 파로 갈라질는지도 몰라.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서도 나는 없어져야 해.

  해명은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홀몸으로 여진 동원(礪津東原) 으로 달려가더니 땅에 창을 거꾸로 꽂아 놓았다. 그리고는 말을 달려 그 주위를 돌다가 스스로 몸을 날리어 그 창 끝에 꽂혀 죽었다.

  이 끔직한 자결의 방법만 보아도 그의 성격이 얼마나 강렬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유리왕 二十七년 三월, 이때 해명의 나이 한창 젊은 二十一세였다.

 

 

 

 無恤王子의 奇計

  제二 왕자 해명이 죽게 되니 제三왕자 무휼(無恤)이 왕위 계승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무휼왕자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녹녹지 않게 무용이 절륜했지만 슬기로운 그는 그것을 표면에 나타내지 않았다.

  해명왕자가 죽은 해 八월 부여왕 대소는 사자를 보내어 유리왕을 책망했다.

  나의 선왕께서 그대의 선친 동명왕을 극진히 보호했으나 그는 그 은혜를 배신하고 신하들을 꼬여 그 곳으로 도망가서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만으로도 죄송히 여기고 우리를 섬겨야 할 것이거늘 끝내 순종치 않았으니 그 죄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일은 잠시 덮어두고 오늘의 형편만이라도 생각해 보라. 예로부터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는 법인데 너희는 작은 나라로서 어찌 큰 나라를 섬기려 들지 않느냐? 지금이라도 그대가 예의를 갖추어 나를 섬기게 된다면 나라를 오래 보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 다면 사직을 보전하기 어려울 줄로 알아라.

  실로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분쟁을 싫어하는 왕은 그 모욕도 감수하려고 했다.

  우리는 나라를 세운지 아직 오래되지 않고 군사도 부여를 당해낼 만큼 못하니 한때 욕을 참고 굴복했다가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한 다음 부여에서 온 사신을 향해서

  과인이 외진 구석에 살며 예의를 알지 못한 탓으로 허물이 많소만 대왕의 가르치심을 듣고 비로소 취할 바를 깨달았소이다. 대왕의 명을 따라 삼가 섬길 것이니 그와 같이 아뢰도록 하오.

  이렇게 간곡히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부여사신은 의기양양해서 위세를 부렸지만 신하들 중에 뜻있는 자들과 특히 왕자 무휼은 지나치게 유약한 왕의 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무휼은 총명한 소년이었다. 부왕과 맞서서 미움을 사는 태도를 피하면서도 고구려의 국위를 과시하는 계교를 짜아냈다. 그는 부왕이 없는 틈을 타서 사신을 향해 말했다.

  우리 선조께서는 그대 나라를 배반했다고 했지만 첫째 그것이 틀린 말이요. 우리 선조께서는 원래 현명하고 다재하셨으므로 그대 임금이 질투한 나머지 부왕께 참소하고 죽이려 하기에 하는 수 없이 도망친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 임금은 자기 허물은 뉘우칠 생각도 없이 군사의 힘만 믿고 우리를 업수히 보니 어찌 그렇듯 무도한 일이 있겠소.? 내 사

신에게 일러 두겠는데 돌아가거든 그대 임금께 이렇게 전하시오.

  어린 소년답지 않게 사리를 따져 차근차근 말하는 것을 듣고 부여 사신은 어안이 벙벙했다.

  여기 달걀을 쌓아 놓았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을 헐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왕을 섬길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대왕을 섬기지 않겠소.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사신은 그 말뜻을 새기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서 대소 왕에게 보고했다.

  부여왕 대소는 무휼왕자의 말 뜻을 얼른 알아 차릴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시신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시신들 역시 그 뜻을 해석하지 못하므로 하는 수 없이 널리 나라안에서 슬기 있는 자들을 모아 들였다. 그랬더니 한 노파가 무휼왕자의 말을 풀이해 아뢰었다.

  달걀이란 원래 둥근 것 입죠. 그러므로 그것을 쌓아 올리기는 대단히 힘든 일일뿐더러 비록 쌓아 올렸다 하더라도 조금만 건드리면 곧 허물어질게 아닙니까? 이것은 무휼왕자가 우리 부여와 고구려의 사이를 비유한 말로 볼 수 있읍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서로 편안 할 수 있지만 잘못 건드리면 두 나라가 다 화를 입을것이라는 뜻입죠.

  노파의 설명을 듣자 대소는 입맛을 다셨다.

  거 어린놈이 제법 꾀가 많은걸. 그 말대로 잠시 건드리지 말고 기회를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렇게 되어서 고구려는 나라 위신을 깎이지 않고 부여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달걀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유리왕 三十二년 十一월, 엄동을 무릅쓰고 부여군은 고구려 변경을 침입했다. 달걀로 쌓은 평화를 깨뜨리고 만 것이다.

  아무리 국력이 약하더라도 쳐들어 오는 적은 막지 않으면 아니 된다. 평화주의자 유리왕도 마침내 무휼왕자에게 군사를 주어 적군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부여군에 비해서 너무나 열세였다. 정면으로 대전한다면 적군에게 여지없이 짓밟힐 것은 환한 일이었다.

  무휼왕자는 한 가지 기계(奇計)를 생각해냈다. 복병 전술을 쓰게 한 것이다. 즉 부여군이 통과할 산골 양편 언덕 바위틈에 고구려군을 숨겨 두었다가 부여군이 그 곳까지 진격해왔을 때 일제히 일어나서 협격하자는 것이었다.

  고구려군이 잠복한 산골 길은 좁고 험한 길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부여의 대군은 그 좁은 산골로 모여들었다. 때는 왔다. 무휼왕자는 높이 손을 들었다. 양편 언덕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일제히 함성을 올리고는 적군을 향해서 활을 쏘아대고 창을 던지고 암석을 굴려 떨어뜨렸다.

  뜻하지 않은 기습에 부여군은 당황실색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휘관의 명령은 서지 않고 병졸들은 제 목숨만 살려고 날뛰었다. 좁은 계곡에서 수많은 대군이 혼잡을 이루니 말은 사람을 밟아 죽이고 사람들은 서로 자기 편끼리 아귀다툼을 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휼은 다시 고구려군에게 명령을 했다. 고구려군은 일제히 계곡으로 달려 내려가서 혼란한 적군을 닥치는 대로 무찔렀다. 이렇게 해서 부여군은 거의 전멸을 당하고 어린왕자 무휼은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을 싫어하는 유리왕이었지만 승리는 역시 기쁜 것이다.

  三十三년, 정월 왕자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고 태자를 삼는 한편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겼다.  이후부터 유리왕도 태자 무휼의 진언을 받아 국세를 확장하기에 힘쓰게 되었다. 즉 그 해 八월에는 선왕 때부터의 공신 오이(烏伊), 마리(摩離)등에게 명하여 군사 二만을 거느리고 서쪽에 있던 양맥(梁 )을 습격하여 국위를 떨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三十七년 十월 왕이 두곡(豆谷)의 이궁에서 승하하자 유리명왕(瑜璃明王)이라 호하고 무휼태자가 그 뒤를 계승했다.

 

 

 

 一頭二身의 怪鳥

  유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三대 왕이 된 무휼태자가 바로 건국 기초를 완성한 대무신왕(大武神王)이다.

  대무신왕이 즉위했을 때(西紀十八年) 그의 나이 十一세였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왕자의 몸으로 부여군을 격파한 일까지 있으니 그것은 그릇 전해진 것이 아니면 왕이 비범한 인물임을 과장한 때문일 것이다.

  왕은 즉위하자 무엇보다도 숙적 부여를 멸망시켜 화근을 없애버리고자 마음먹었다. 그래서 군비를 확장하고 기회만 기다리고 있는데 三年 十月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파견하여 붉은 까마귀 한 마리를 보냈다. 머리는 하나인데 몸은 둘로 갈라진 괴조(怪鳥)였다.

  대소가 그 까마귀를 보낸 데엔 계략이 있었다. 어느 날 부여 백성이 그 이상한 까마귀를 잡아서 왕에게 바치자 왕은 좌우 시시들에게 그런 새가 나타난 것이 어떤 징조인가를 하문했다.  그랬더니 한 시신이 제법 아는 체하면서 아뢴다.

  까마귀란 것은 원래 검은 법이 온데 저렇게 붉은 빛을 하고 한 머리에 두 몸을 가졌으니 두 나라가 합칠 징조로 압니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시면 고구려는 우리으 것으로 될 줄 압니다.

  이 말을 듣자 대소는 대단히 기뻐했다. 대소는 그 신하에게 새가 나타난 징조를 글로 쓰게 했다.

  <부여왕 대소는 고구려 대무신왕에에 새 한 마리와 이 글을 보낸다. 새란 본래 그 빛이 검은 법인데 이 새는 전신이 피로 물들인 듯 붉다. 곧, 멀지 아니 해서 크게 피를 흘릴 징조다.  또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인 것으로 미루어 둘로 갈라졌던 나라가 하나로 다시 합친다는 뜻이니 곧 멀지 않아 부여는 고구려를 쳐서 합치게 될 것이라는 하늘의 뜻임이 분명하다.>

  새와 글을 받은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상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한 신하가 나서며

  대왕, 염려 마시오. 결코 흉조가 아닙니다. 원래 까마귀란 검은 것이며 검은 것은 북쪽 을 가리키는 색입니다만, 이제 우리 고구려가 있는 남쪽을 뜻하는 붉은 색으로 변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원래 붉은 새는 상서로운 것으로 일컬어 왔는데 부여의 대소는 그것을 기르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이것으로 이루어 두 나라의 흥망은 과히 판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신하의 말을 들은 임금은 대단히 기뻐했다. 이번에는 그와 같은 뜻을 글로 써서 부여로 보냈다.

  그 글을 받아 본 부여왕 대소는 자기의 경솔한 처사를 뉘우쳤지만 이미 어쩌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무신왕은 그 해 봄, 마침내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부여를 치기로 했다. 길조(吉鳥)를 얻어 백성들으 사기가 한창 높아졌으므로 가장 좋은 기회라 여긴 것이다. 왕이 거느린 군사가 이물림(利勿林)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날이 저물었다. 왕은 그 곳에 진을 치도록 분부했는데 그날 밤 문득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귀를 귀울여 보니,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 적군이 쳐들어 오는 것이나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왕은 소리 나는 곳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신등성이에 올라가 보니 쇳소리는 한층 요란스러워 왕은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런 즉 동편 골짜기에 푸른 달빛을 받고 무엇인지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다.  왕은 달려 내려가 보았다.

  그 산골짝 움푹한 동굴 안에 창이며 칼 같은 무기가 잔뜩 쌓여 있는데 그것들이 바람에 부딪혀 그런 소리를 냈던 것이다. 왕은 곧 부하들을 불러 무기를 거두게 했다. 부하들이 무기를 거두는 걸 살피고 있던 왕은 무엇인지 발에 채이는 것이 있기에 집어 보았다.

  그것은 금으로 만든 임금의 도장이었다. 하늘이 이렇게 무기와 금새(金璽)를 내려 주고 자기를 하늘이 보낸 임금으로 인정하신 모양이고 보니 이번 싸움에 크게 승리를 거두리라 여겨졌다.  왕과 장졸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 이튿날, 날이 새기를 기다려서 왕의 군대는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얼마를 갔을 때였다.  저편에서 괴상한 사나이가 다가왔다. 키는 九척이나 될 만큼 어마어마하게 크고, 얼굴은 백옥같이 희고 두 눈에서는 푸른 광채가 돌고 있었다. 왕의 말 앞까지 온 그 괴한은 공손히 절을 하더니

  반갑습니다. 대왕,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대왕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그토록 나를 기다렸다고 하는가?

  이 사람은 본시 북명(北溟)에 사는 괴유(怪由)라는 인간입니다. 들려오는 소문에 대왕께서 이번에 북부여를 치러 가신다기에 모시고 갈까 하옵니다.

  늠름하고 믿음직한 말이었다.

  좋아, 그러면 그대를 선봉장으로 삼을 테니 앞장 서 쳐들어 가 부여왕의 목을 베어라!

  괴유는 크게 기뻐하고 앞장을 섰다.

  고구려군은 드디어 부여의 남쪽 국경을 넘어섰다. 그리고는 가만히 지세를 살펴보니 그 자리는 땅이 낮고 수렁이 많아서 진을 치자면 대단히 불리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소 높은 다리를 택해서 진을 치고 수렁이 있는 쪽은 일부러 비어둔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 왔다는 기별을 받자 교만한 부여왕 대소는 크게 웃으며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군의 진을 향해 돌진했다. 고구려군이 진을 친 맞은편 언덕에 당도했을 때였다. 대소는 천천히 고구려군의 진을 살펴보더니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저 걸 보아라! 과연 소국이란 할 수 없다니까. 진하나 제대로 칠 줄 아는 장수가 없는 모양이군. 저기 저편을 내려다 보아라. 아무런 방비도 없이 텅 비어 있지 않은가!

  부여군은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그 방비가 부족한 쪽을 향해서 쳐들어 갔다. 그러나 잠시 후, 부여군은 큰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수많은 인마는 수렁으로 밀려 들어갔고 점점 허리까지 빠져 들어가 흙탕물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말들이 우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싸우기 전부터 이미 수라장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까닭이 없다.

  부여왕의 목을 벨 때는 바로 이때다. 누가 가서 속히 공을 세워라!

  왕의 말이 떨어지자 괴유가 칼을 빼어 들고 타고 있던 말을 치니 말은 두 발을 들고 한바 소리치고 적진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九척 괴한이 장검을 비껴들고 한 번 번득하면 그 앞엔 적의 목이 바람 아래 낙엽처럼 떨어졌다.

  이것을 보자 부여왕 대소는 크게 노했다. 몸소 나서서 괴유와 마주 싸웠다. 그러나 얼마 싸우지 아니하여 대소의 목은 괴유의 칼날을 받고 떨어져 버렸다.

  주몽을 비롯해서 고구려 왕실 三대의 숙적 대소는 이제 최후를 맞이했다. 대무신왕의 기쁨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괴유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는 한편 왕을 잃은 부여군사쯤은 단번에 섬멸될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왕을 잃은 부여군은 복수심에 불탔던지 오히려 사기백배하여 고구려군을 포위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하는 동안에 고구려군이 무엇보다도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군량의 결핍이었다. 적군의 포위망을 뚫을 길 없으니 군량을 구해올 방법은 없고 미리 준비했던 군량은 이미 다 떨어졌다.

  또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났다. 굶주린 군사들은 전투는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제는 적군에게 전멸당하느냐 아사하고 마느냐 두 가지 중 한가지 길밖에 남지 않은 듯 여겨졌다. 그런데 적에게 포위 된지 七일째 되는 날이었다.  갑자기 안개가 끼기 시작하더니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하늘이 돕는바 다.

  왕은 장수들을 불러 군사들로 하여금 풀을 베어 수많은 허수아비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허수아비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군기(軍器)를 잡히어 군영주위에 벌려 세워 의병(疑兵)을 삼아 적의 눈을 속인 다음 사잇길을 따라 몰래 포위망을 벗어났다.

  워낙 굶주린데다 적에게 추격을 당하지 않으려고 강행군을 했으므로 군사들 중에는 기운이 다하여 죽어 넘어가는 자가 허다했다.

  왕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국도로 개선하자 왕은 곧 잔치를 베풀어 굶주린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한편 전사한 자들을 후히 제사 지내고 상하고 병든 자들은 일일이 문병하며

  내가 부덕해서 너희들을 이렇게 고생시키니 실로 미안한 일이다.

  이렇게 사과했다. 그런 즉 백성들은 왕의 인자한 덕에 감격하여 상하가 다 심신을 바쳐 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서했다.

  부여왕 대소가 죽은 후 그 아우가 해두국(海頭國)으로 가서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대소의 종제는 부여백성 만여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항복해 왔다. 대무신왕 五년 七월이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숙망이던 부여를 합방하여 한층 더 강대한 국가가 되었다. 일두이신의 붉은 까마귀의 징조가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었다.

  고구려의 국세는 날로 강성해 갔다. 대무신왕 九년 十월에는 왕이 친히 개마국(蓋馬國)를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왕모(王母)를 사로잡고 백성을 거두어 그 국토를 고구려의 군현(郡縣)으로 삼았다.

  이렇게 되자 그 해 十二월에는 구다국왕(句茶國王)이 개마국이 멸망했다는 말을 듣고 미리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이렇게 고구려의 강토가 넓어지고 국세가 강해지는 것을 보자 불안을 느낀 것은 대륙의 한(漢)나라였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의 힘이 더 커지기 전에 눌러버릴 것을 생각하고 요동태수(遼東太守) 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케 했다.

  이 보고를 받은 대무신왕은 곧 대신들을 모아 놓고 전수(戰守)의 계책을 의논해 보았다.

그랬더니 병마를 총관하는 우보(右補)로 있는 송옥구(松屋句)가 전언하기를

  신이 듣기에 덕을 베푸는 자는 창성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합니다. 지금 중국은 나라가 어지러워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는데 그것을 진압하지도 않고 멀리 우리 나라로 명분없는 군사를 내어 쳐들어 오니 요동태수가 공을 세우고 욕심을 채우려고 일으킨 일로 압니다.  그러하오니 기병을 내어 적군을 쳐서 섬멸하면 중국 조정에서는 더 원병을 내거나하는 일이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智)는 그 의견을 반대했다.

  소적(小敵)이 아무리 강해도 대적(大敵)에게는 잡히고 마는 법입니다.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 군사를 비교해 보십시오. 어느 쪽이 많습니까? 그러하오니 계교를 써서 치면 모르오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줄로 아옵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왕은 을두지를 향해서

  한병을 치는 계교란 어떤 것이오?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 힘으로는 한창 사기가 충전한 한병의 예봉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오니 대왕께서는 마땅히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시다가 적의 군사들이 피로함을 기다려 물리치는 것이 상책인 줄로 아옵니다.

  왕은 을두지의 의견을 채택했다. 왕은 곧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들어가서 수십일 동안 농성을 해보았으나 적군은 포위를 풀지 않는다. 오히려 고구려 군사의 사기만 저하할 뿐이었다.  그래서 왕은 다시 을두지에게 대책을 물었다.

  과히 염려할 것은 못 될 줄로 압니다. 한인들은 우리가 있는 성이 암석으로 되어 있으므로 물이 나는 샘이 없을 것이라 믿고 저렇게 포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증에 못 이겨 항복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니 우리의 식수가 풍족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 단념하고 돌아갈 줄로 압니다.

  식수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거늘 어떻게 풍족한 체한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계교이옵니다. 마침 채 마르지 않은 연못에는 잉어 몇 마리가 있사오니 그것을 잡아 수초로 싸서 보내고 한편 주류를 곁들여 보내면 우리의 군량과 식수가 풍족한 것으로 믿지 않겠습니까?

  왕은 을두지의 의견을 따라 잉어와 술을 보내며 요동태수에게 글발을 띄웠다.

  과인이 우매하여 상국에 죄를 져서 장군의 백만 군사로 하여금 이 곳까지 이르러 수고를 끼치게 하였으나 그 후의에 보답할 길이 없으므로 변변치 못한 물건을 보내오니 여러 장졸들에게 먹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능청스러운 술책이었다. 그 술책에 요동태수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성중에 그렇듯 먹을 것이 풍족하다면 아무리 오래 포위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간다면 대국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고구려 왕에게 회답을 하고 군사를 거두어 회군했다.

  우리 황제께서 대왕의 뜻을 모르시고 군사를 내어 죄를 묻게 하시므로 이곳에 이르러 수십 일이 지났으나 대왕의 글을 대하니 유순한 말과 공손한 뜻이 조금도 대국을 가벼이 여기는 바가 없으므로 이대로 돌아가서 우리 황제께 고하도록 하겠소이다.

  역시 능청스러운 수작이었다.

 

 

 

 

  權力의 繼承者들

  樂浪宮中의 悲戀

 

  새 나라의 기틀이 잡혀 외환의 우려가 적어지면 안으로 그 권력을 계승하는 자들간에 암투가 벌어지는 것은 가장 흔히 보는 불상사이다. 고구려의 경우 역시 이 무렵부터 상서롭지 못한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대무신왕에게는 원비(元妃) 소생의 해우왕자(解憂王子)와 차비(次妃) 소생의 호동왕자(好童王子)가 있었다.

  원비 소생의 해우왕자는 아직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성격이 사납고 거칠었다. 그와 반대로 차비 소새의 호동은 용모가 수려하고 기상이 씩씩하고 마음이 착하므로 왕은 항상 호동을 사랑하고 그에게 기대를 걸어왔다.

  원비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혹시나 자기 소생의 해우를 제쳐놓고 호동을 태자로 삼을까 불안스러웠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적마다 호동을 학대했다. 원비의 학대를 받으니 호동은 궁중에 있기를 싫어했고 항상 외지로 여행하기를 일삼았다.

  이때 고구려의 이웃나라 중에서 가장 방해가 된 것은 낙랑(樂浪)이었다. 낙랑은 한사군의 하나로서 이때 호수(戶數)가 六만 一천四백九십二호였다고 하니 고구려보다는 비록 국세가 약한 편이었으나 도저히 그것을 정벌할 수가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랑군이 다른 나라게 정벌되지 않는 까닭은 적병이 국경에 쳐들어 오기만 하면 스스로 울리는 북이 있어서 이내 그 정보를 알게 되고 따라서 신속한 임전태세를 갖출 수 있는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전설을 그대로 믿는다면 오늘날 적기(敵機)의 침입을 알려 주는 레이다 같은 것이 발달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상식적으로 판단한다면 신속한 정보망이 발달되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 <스스로 우는 북>(自鳴 )에 얽히어 호동왕자와 낙랑태수 최리(崔理)의 딸과의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대무신왕 十五년 四월, 사방을 유랑하던 왕자 호동은 옥저(沃沮=城南地方)땅에 이르러 마침 그 곳에 사냥을 나온 낙랑태수 최리와 만났다. 최리는 남달리 준수한 호동의 용모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 같지 않은데 혹시 북국(北國=高句麗) 신왕(神王=大武神王)의 자제가 아니오?

  하고 물었다.

  호동은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최리는 고구려와 화친하는 뜻에서 후히 대접하고 싶으니 낙랑으로 가자고 권했다. 호동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낙랑의 비밀무기인 자명고의 정체를 알아낸다면 자기 나라에 크게 이로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호동의 그런 속셈도 모르는 최리는 낙랑 궁중으로 돌아가자 융숭히 대접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기 딸과 혼인까지 시켰다.

  최리의 딸과 혼인을 하고 나자 호동은 일단 혼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최리와 공주에게는 부왕의 허락 없이 혼인을 했으므로 먼저 돌아가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속셈은 자명고의 비밀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자기 나라에 돌아간 호동은 부왕에게 낙랑에는 자명고가 있다는 것과 그 자명고는 무고(武庫)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렇다면 그 자명고를 없애버릴 방도는 없느냐?

  왕은 호동의 보고를 받자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나 호동으로서는 별다른 묘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한참 만에 왕은 한 가지 계교를 말했다.

  네가 최리의 딸과 혼인을 했다니 최리의 딸은 비록 지난날엔 낙랑의 공주였지만 지금은 어엿한 고구려의 왕비이다. 마땅히 고구려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니 네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명고를 찢어버리도록 일러라.

  나라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왕으로선 당연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호동에게는 괴로운 명령이었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자기만 기다리고 있는 공주에게 자명고를 없애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죽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주가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그것은 낙랑으로서는 최고의 반역 행위이므로 아무리 공주라도 가혹한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호동이 망설이고 있으려니까 호동을 미워해 온 원비는 그것을 미끼 삼아 다시 왕에게 참소했다. 

  호동이 아무래도 딴 뜻을 품은 모양이에요. 그러기에 자명고를 없애는데 주저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렇게 되는 호동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마음 속으로 공주에게 사과하며 괴로운 붓을 들었다.

  <그대가 만약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충실한 아내로 알고 맞아올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편과 남편의 나라에 대한 정성이 없는 것으로 알고 남이 되겠다.>

  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사람을 시켜 낙랑으로 보냈다.

  호동의 편지를 받은 공주는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편의 뜻을 좇자니 부친을 배반하는 것이 되고 부친을 배반하지 않으려면 남편과 영 이별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공주의 애정은 부친보다도 남편에게 더 강했다.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서 비수를 품고 무고(武庫) 속에 숨어 들어간 공주는 마침내 자명고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연을 비밀히 고구려땅에 있는 호동에게 말했다.

  자명고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대무신왕은 곧 군사를 일으켜 낙랑을 습격했다.

  고구려군이 노도처럼 낙랑 땅에 쳐들어 갈 때까지 낙랑에서는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 대책도 없이 고구려군을 맞아 도성이 포위되자 겨우 이상히 여기어 무고를 조사해 보고 비로소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알았다.

  낙랑태수 최리는 그 범인을 추궁해 보니 뜻밖에도 자기 딸이 모든 것을 자백했다.

  예끼, 이 어리석은 것아!

  최리는 비통하게 부르짖고 한칼에 딸을 죽인 다음 고구려군에게 항복했다. 이렇게 되니 호동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지만 어쨌든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셈이었다. 왕은 그 공을 크게 칭찬하며 전보다도 한층 더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왕의 총애가 기울면 기울수록 원비는 호동을 두려워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호동을 태자로 삼고 자

기 소생인 해우는 불우한 처지가 될 것이 확실할 것 같다.

  원비는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한 가지 간교를 생각해 냈다.

  대왕,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어느 날 밤, 왕의 거처로 달려가서 눈물을 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오?

  왕이 의아해서 물어보니까?

  호동이 아무리 친자식이 아니라도 저를 어미로 대접하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겠어요?

  어떤 태도를 취했기에 그러는 거요?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어요. 대왕이 계시지 않을 때면 여러 가지 말로 유인하며 저를 범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뭐라구? 설마 호동이…

  왕은 비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비는 호동이 자기 소생이 아니라고 모함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반문해 보았다. 그러나 비는 거짓 울음을 울면서

  대왕께서 제 말을 믿지 않으신다면 몸소 그 징조를 살피시어요. 만약 제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무슨 죄라도 달게 받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왕의 마음에도 의혹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비밀히 사람을 놓아 호동이 하는 일을 일일이 감시하게 하였다.

  이것을 알자 호동은 슬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왕만은 자기를 믿어 주실 줄 알았는데 부왕까지 믿어 주리 않으니 살 맛이 없었다. 그리고 부왕에게 자기의 결백함을 밝히는 방법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되면 국모인 원비의 죄악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부왕에게 근심을 끼치고 형제 사이에 더욱 치열한 암투를 벌이게 될 염려가 있었다.

  나 하나만 없어지면 모든 일이 무사히 해결 되리라.

  호동은 이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칼을 물고 땅에 엎드려 자결했다. 대무신왕 十五년 十一월이었다.

 

 

 

  호랑이와 표범

  왕자 호동이 자결하자 대무신왕은 그 다음 달인 十二월에 해우를 세워태자로 삼았다.

원비의 강청을 물리치기 어려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우가 태자가 된지 十二년만인 대무신왕 二十七년에 왕이 승하했다. 그러니 응당 해우태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마땅할 것이지만 대신들은 그를 제쳐놓고 대무신왕의 아우인 해색주(解色朱)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려 앉혔다.  그가 곧 제 四대 민중왕(閔中王)이다.

  해우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데 대해서 사기(史記)에는 나이가 어린 때문이라고 되어 있지만 태자가 된 후 十二년만이니 적어도 거의 다 성장한 젊은이였을 것이다. 사실은 해우의 사람됨이 사납고 어질지 못한 때문에 그를 멀리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민중왕은 즉위한지 겨우 五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해우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니(西紀 四八) 제 五대 모본왕(慕本王)이다.

  五년 전에는 왕위 계승에 실패했던 해우가 거기 성공 한데에는 여러 가지 기반을 닦아 두기도 했을 것이며 또 왕위 계승의 경쟁자가 별로 없었던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모본왕은 왕위에 오르자 그 사납고 잔인한 성격을 여실히 드러냈다. 앉을 때는 비록 대신이라도 그 등을 깔고 앉았으며 누울 때는 허리를 베고 누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용서 없이 목을 베어 죽였고 신하들 중에 그 포악한 행동을 간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백성들은 모두 왕을 원망하고 군신들은 언제 왕의 손에 죽을는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두로(杜魯)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겁을 먹고 있었다. 두로는 항상 왕의 걸상 노릇을 하는 처지이므로 언제 몸을 움직였다가 화를 당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두로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자 그의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그래두 자네는 사내 대장부라고 자처하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 왕은 함부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니 곧 백성의 원수라. 자네가 아무래도 죽을 몸이라면 백성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하고 죽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 말을 듣고 두로는 분연히 결심했다. 그 이튿날, 두로는 품에 칼을 품고 입궐했다.

그러나 왕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소리쳤다.

  이놈아! 어서 거기 엎드려.

  두로는 왕의 앞에 엎드렸다. 임금은 그의 등에 걸터앉았다. 그 순간 두로는 칼을 뽑아 밑으로부터 왕을 찔러 죽였다. 모본왕이 즉위한진 六년째 되던 해 十一월이었다.

  모본왕에에는 익(翊)이라는 왕자가 있었으며 즉위하던 해 十월에 태자를 삼았다. 그러므로 모본왕이 세상을 떠나자 응당 익이 왕위를 계승할 처지였지만 부왕을 닮아서 성품이 용렬하고 사납기만 하므로 대신들은 다른 왕족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유리왕의 손자 즉 재사(再思)의 아들인 궁(宮)이라는 어린이를 맞아 태조왕(太祖王)을 삼았다. 궁은 아직 나이 七 세밖에 아니 되는 어린아이였지만 세상에 태어나는 즉시로 눈을 떠서 만물을 바라보았다고 전해지는 만큼 영리한 아이였으므로 잘 성장하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왕이 되리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왕은 과연 어진 임금이었다. 많은 치적을 남겨 백성들의 칭송을 샀으므로 사상 유래가 드물게 오래도록 왕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영주(英主)라도 너무 오래 집권하면 그것을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왕에게는 수성(遂成)이라는 아우가 있었다. 성품이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서 여러 번 크게 전공을 세웠으며 그를 따르는 심복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심복들은 연로한 왕을 몰아내고 수성을 세울 모의를 하고 있었다. 왕이 즉위한지 八十년 되던 해 七월, 수성이 왜산(倭山)에서 사냥을 하고 사람들과 술자리를 벌였을 때 심복 미유(彌儒)가 어지류(於支留),

양신(陽神) 등 왕의 친구들을 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전에 모본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태자가 불초하므로 여러 대신들이 왕자 재사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재사는 연로한 것을 빙자하고 그 아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 주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이 부형이 늙으면 자제에게 양위하는 것이 도리인데 지금 왕은 너무 연로했으면서도 양위할 의사가 없으니 왕제께선 마땅히 일을 도모하시는 게 좋을 줄로 아오.

  이 말은 수성에겐 무엇보다도 반가운 말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보니 몇몇 심복들을 제외하고는 그 말을 옳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때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능청스러운 수성은 이렇게 말하고 심복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왕이 계승은 반드시 적자로 하는 것이 천하의 상도요. 지금 왕은 비록 늙었다 하더라도 적자 막근(莫勤)이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왕위를 엿보겠소.

  그러나 수성의 마음은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나이 벌써 六十이 넘었으니 이러다가는 권력을 잡아보지도 못하고 늙어 죽을 판이다. 그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서 수성의 생활은 날로 거칠어져 갔다. 항상 궁궐을 비우고 사냥이나 하러 돌아다녔으며 한 번 사냥을 나가면 닷새고 이레고 돌아오지 않았다. 왕제의 몸으로서는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할 방종한 생활이었다.

  수성에게는 백고(伯固)라는 아우가 있었다. 수성과는 딴판으로 총명하고 인자한 인물이었다.  그는 야망을 누를 길 없어 거친 생활을 하는 형 수성이 몹시 민망하게 보였다.

  형님, 복과 환난은 따로 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인데 형님은 왕제(王弟)된 몸으로 지위가 백관의 으뜸이니 마땅히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 마음을 써야 한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지금 형님이 누리시는 부귀가 몸을 떠나지 않을 것이지 한 때 환락에 빠지면 어찌 화를 스스로 부르는 태도라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수성은 껄껄 웃으며

  네가 나를 훈계하는 거냐? 그러나 백고야 듣거라. 사람치고 부귀와 환락을 바라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느냐? 다만 그것을 누릴 복을 타고난 자가 만에 하나도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부귀와 환락을 누릴 처지에 놓여 있으니 그것을 마음대로 누리지 않고 늙어 죽는다면 오히려 억울할 뿐이 아니겠느냐?

  두 사람의 인생관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므로 말이 통할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후에 제 七대 차대왕(次大王)이 된 수성과 제 八대 신대왕(新大王)이 된 백고으 운명도 역시판이했다.

  九十년 九월 어느날 밤, 왕은 꿈을 꾸었다. 한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 뜯는 꿈이었다.  이상히 여긴 왕이 좌우에게 그 길흉을 물으니  호랑이는 백수(百獸)의 장(長)이며 표범은 그 동류이지만 호랑이보다는 작고 약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표범이 호랑이를 물었다면, 왕족 중에서 대왕의 뒤를 끊으려고 도모하는 자가 있는 징조로 압니다.

  왕제 수성이 딴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고한 것이다. 그러나 너그러운 왕은 아우를 의심하는 걸 즐기지 않았다.

  그래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에게 다시 해몽을 명해 보았다. 고복장은 원래 강직하면서도 원만한 중신이었다. 그러므로 해몽 역시 상식적이고 온건한 것이었다.

  옳지 못한 일을 하면 길한 것도 흉한 것으로 변하는 법이오며 옳은 일을 하면 재앙도 복이 되는 법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나라를 내집같이 염려하시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시는데 비록 이상한 징조가 있기로 어찌 염려하겠습니까?

  그러나 왕의 꿈은 결국 불길한 일의 징조였다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수성의 마음속에서는 왕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을 야망이 나날이 자라가고 그의 심복들도 그 일을 위해서 은밀히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이 흉몽을 꾼지 四년이 지난 九十四년 七월, 수성은 왜산(矮山) 밑에서 다시 사냥을 했는데 이때 숲속으로 심복들을 불러 놓고 자기 야망을 털어놓았다.

  지금 임금은 백살이나 나이를 먹고 九十여년 동안이나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죽지도 않고 왕위를 물려 줄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이제 내 나이 七十이 넘었으니 이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일을 꾸며 주겠는가?

  수성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심복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삼가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단 하나 꼬장꼬장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 왕제께서는 옳지 못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럴 때엔 좌우에서 바른 말로 간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모두들 그저 분부만 따르겠다고 하니 간사한 무리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제가 바른 말을 드릴까 합니다만, 허락하시겠는지요?

  이 말에 수성은 능청스럽게

  바른 말은 약석(藥石)과 같다고 하니 어찌 듣지 않겠는가?

  하니 그 사람은

  지금 대왕께선 현명하시어 모든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백성들까지도 그 덕을 칭솔하고 있는 터입니다. 그런데 왕제께선 임금의 아우되시는 몸으로서 간사한 무리를 거느리고 현명한 대왕을 폐하려고 꾀하시니 어찌 부당하다고 아니 하겠습니까?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러한 생각은 아니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왕제께서 그 마음을 고치시고 착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어 웃어른을 섬기신다면 대왕께서도 왕제의 뜻에 감동되시어 반드시 왕위를 물려 주실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신 대로 일을 저지르신다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으로 압니다.

  이 말에 수성의 안색은 불쾌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아참 잘하는 심복들은 그 눈치를 재 빠르게 알아차리고 이렇게 고해 바쳤다.

  왕제께서는 임금이 연로한 때문에 나라에 해로울 것을 염려하시고 뒷일을 꾀하시는 터인데 이렇게 우리와 뜻이 다른 자를 그냥 두었다간 우리의 계교가 누설되어 후환이 미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이 자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수성은 그말을 듣자 그 사람을 즉시 죽여버렸다.

  그해 十월, 비로소 우보 고복장(高福章)은 수성이 모반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당황했다. 임금을 뵙고 급히 아뢰었다.

  왕제 수성이 지금 모반하려고 무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먼저 그를 주살하시어 화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그러나 늙은 왕은 힘없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나는 이미 늙은 몸, 수성은 아직 힘이 왕성하니 그에게 왕위를 곱게 넘겨 줄까 하오.

  한다. 그 말에 고복장은 펄쩍 뛰었다.

  왕제 수성은 사람됨이 어질지 못하고 잔인해서 오늘 왕위를 이어 받으면 장차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가 그 후환이 죄없는 자손들에게 미쳐도 좋단 말씀입니까? 다시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왕은 역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리고 그해 十二월, 왕은 수성을 불러  내 이미 너무 늙어 모든 일을 게을리하게 된다. 너는 아직 창창한 몸인데다가 안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 군사를 이끌어 큰 공을 세웠으니 넉넉히 백성들을 복되게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좋은 후계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앞으로도 부디 백성을 사랑하고 잘 다스리도록 부탁한다.

  이렇게 말한 다음 왕위를 물려 주고 별궁(別宮)으로 물러갔다.

  수성은 마침내 그토록 갈망하던 왕위에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 七十六세, 바로 제 七대차대왕(次大王)이다.

  왕위에 오르자 성품이 잔인한 수성이 맨 먼저 착수한 일은 자기의 뜻을 반대하던 사람의 숙청이었다.

  일찍이 모반을 권고하던 심복 미유(彌儒)를 좌보(左輔)로 삼는 한편 그와 적대되는 세력의 거물 고복장을 잡아들여 목을 베려 했다. 그러자 고복장은 땅을 치며 탄식했다.

  아, 슬프고 억울하다. 내 선조(先朝)의 은혜를 받은 몸으로 모반을 꾀하는 사람을 어찌 그냥 둘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선군(先君)께 그대를 없애도록 아뢰었지만 듣지 않으신 탓으로 지금 이지경이 되었구나. 그대는 욕심대로 대위를 계승했으니, 마땅히 마음을 고치고 정교(政敎)를 새롭게 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옳은 말을 한 사람을 죽

이려 하니 무도하기 비길데 없다. 내 이러한 무도한 시대에 사느니보다 속히 죽는 편이 좋으니 어서 죽여 다오.

  고복장은 마침내 형을 받아 죽으니 사람들은 모두 격분해 마지 않았다. 수성은 신하들만 숙청한 것이 아니었다. 三년 四월에는 태조대왕의 원자 막근(莫勤)을 죽여버렸다. 태조대왕의 정당한 후계자를 죽임으로써 민심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자기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막근이 피살된 것을 보자 막근의 아우 막덕(莫德)은 화가 자기에게까지 미칠 것을 두려워하고 고민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기에 대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자 김부식은 논평하기를

  < 태조왕은 의(義)를 알지 못하고 대위를 경솔하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주었으므로 화가 한 충신과 두 아들에게 미쳤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으랴. >

  하면서 그 허물을 태조왕에게 돌렸는데 그 논평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충신과 아들들이 죽을 때 태조왕은 아직 살아 있었지만 이미 실권을 내놓은 그로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  아무 대책도 강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만일 좀더 현명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정권을 내놓지 않았던지 그것을 물려 주더라도 좀 더 사람을 가리어 물려 주었다면 이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수성은 잔인하고 사나운 독재자가였는지 모르지만 형에게서 정권을 빼앗을 생각을 한 만큼 웬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七十대에서 九十대라는 늙은 몸으로 끄떡없이 정권을 유지한 수완으로 보면 단순한 폭군으로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로는 과연 좋지 못했다. 二十년(西紀 一六五) 十월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가자 명림답부(明臨答夫) 등에게 왕은 드디어 피살되고 말았다.

 

 

 

 

  山中에 숨은 王子들

  차대왕에게는 추안(鄒安)이란 태자가 있었다. 차대왕이 죽었으니 왕위를 계승할 자는 바로 태자 추안이었지만 그는 부왕이 죽은 이상 자기의 신변이 안전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깊이 산중으로 도망해 버렸다. 그리고 태조왕과 차대왕의 아우 백고(百固)도 일찍이 차대왕의 절제 없는 생활을 충고 했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게 되었으므로 산중에 숨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차대왕이 피살되자 백고의 거처만은 자연히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혁명의 주동이 된 명림답부는 좌보 어지류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백고를 새 임금으로 삼을 것을 결정하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백고가 궁중에 돌아오자 어지류는 여러 대신을 대표해서 국새를 바치며 간곡히 말하기를  선군께서 나라를 버리고 또 비록 왕자가 있으나 종적을 감추어 나라 일을 맡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무릇 인심은 어진 분에게 돌아가는 것이므로 삼가 절하며 청하는 것이오니 대위를 계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백고는 엎드려 세 번 사양한 다음

  내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아우로서 원래 덕이 없고 형이 두 분이나 왕위에 있었으나 아우로서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신의 화를 두려워하고 멀리 숨어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위를 계승하기에는 부족한 자이외다. 그러나 백성들이 나를 추대하고 공들이 굳이 권하니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스스로 마음을 고치고 힘을 다하도록 하겠소.

  이렇게 말한 다음 마침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제 八대 신대왕(新大王)이며 그때 그의 나이가 七十七세 였다. 역시 연로한 임금이었다.

  신대왕은 즉위하는 즉시로 국내에 대사령을 내렸다. 그런즉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새 임금의 덕을 칭송했을 뿐만 아니라 산중으로 도망했던 차대왕의 태자 추안까지도 스스로 궁중에 나타났다.

  전에 나라에 재화가 있었을 때(차대왕이 피살되었을 때) 두려운 나머지 산속 깊이 숨어 있었습니다만 대왕께서 어진 정사를 베푸신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대왕께서 인자하신 덕으로 목숨만 살려 주시고 멀리 놓아 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겠습니다만 어찌 감히 그것을 바라겠습니까?

  말하자면 대사령을 듣고 자수했으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신대왕은 곧 그를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했다.

  왕은 누구보다도 명림답부에게 크게 보답했다. 즉 그를 국상(國相)으로 삼았으니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으로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다시 가작(加爵)하여 패자(沛者)로 삼고 내외병마(內外兵馬)을 맡아보게 하는 한편 양맥부락(梁貊部落)을 겸영(兼領)하게 했다. 명림답부는 혁명의 공신일 뿐 아니라 능력 있는 현신이기도 했다.

  신대왕 八년(西紀 一七二) 十一월, 한(漢)의 현토군 태수(玄 君太守) 경림(耿臨)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하리라는 정보가 들어 왔다. 그래서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국경으로 마주 나가서 싸울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농성을 하고 수비할 것이냐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다른 신하들의 의견은  한나라의 군사는 그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거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나가서 마주 싸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용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자주 쳐들어와 시끄럽게 굴 것입니다. 비록 나가서 싸운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세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므로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 적합하다니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명림답부만은 홀로 수리를 주장했다.

  적군은 그 수가 많은 데다가 지금 사기충전한 기세이므로 마주 싸운다면 그 예봉을 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자기 편이 우세하면 나아가 싸우고 열세하면 물러서서 지키는 것이 병가의 상사입니다.

  그렇지만 농성을 한다고 언제까지나 하겠소? 적군이 끝내 우리를 에워싸고 물러나지 않으면 나중에는 우리가 항복할 수밖에 없지 않소?

  한 신하가 이렇게 반문하자 명림답부는 거기에 대한 견해를 거침없이 밝혔다.

  그 점도 과히 염려할 것은 없을 줄로 아오. 지금 한병은 천릿길에 군량을 운반해야 되므로 오래도록 버티고 지키기만 하면 마침내 군량이 떨어져서 회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우리가 버틸 수 있는 방책은?

  높은 보루를 쌓고 깊은 구렁을 판 다음 양식과 백성들을 모두 다 보루 속으로 들여 놓는거요.  그렇게 되면 적군은 곡식 한알 구할길 없으니 어떻게 오래 우리를 포위하겠소?

  명림답부의 전략은 가장 사리에 맞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왕은 그 전략을 채택하고 농성을 단행했더니 적군은 명림답부가 예언한대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서 마침내 회군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자 명림답부는 날쌘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적의 퇴로를 맹렬히 공격하니 적군은 당황 실색해서 모조리 섬멸되고 필마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신대왕 五十년 (西紀 一七九)국상 명림답부가 세상을 떠났다. 왕에게는 오른 팔을 잃은거나 다름 없는 슬픔이었다. 왕은 스스로 그 영구를 얼싸안고 통곡했는데 그 슬픔이 원인이 되었던지 九十이 넘은 고령 때문이었던지 그 해 겨울 十二월 세상을 떠났다.

 

 

 

 

  妖花 于太后

  신대왕에게는 발기(拔奇), 남무(男武), 연우(延優)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왕은 생전부터 장자 발기보다도 그 아우 남무를 더 사랑했다. 그러므로 신대왕 十二년 三월에는 형을 제쳐두고 남무로서 태자를 삼았던 것이다.

  선왕의 뜻이 이러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이 보기에도 왕위 계승자로서 어느 모로 보나 남무가 훨씬 뛰어났다. 웅위한 자표(姿表), 큰 가마솥을 혼자 들을 만치 강한 완력, 어진 사람의 말은 잘 듣고 옳고 그름을 똑바로 판단하며 과감히 싸울 줄 아는 용맹, 남무는 왕으로서 더 바랄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즉위한 남무가 바로 제 九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이다. 왕은 즉위한 이듬해 二월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를 삼았는데 우씨는 제나부 우소(提那部于素)의 딸이다.

  왕은 왕후 우씨를 극진히 사랑했다. 그러므로 우씨의 연척들은 그것을 믿고 세도를 잡아 나라일을 심히 어지럽혔다. 특히 좌가려(左可廬) 등 몇몇 친척은 왕후의 권세를 믿고 사치한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자녀를 약탈하고 토지와 집을 빼앗으므로 백성들은 격분한 나머지 왕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우씨를 사랑한다지만 그 친척들의 횡포를 그대로 버려둘 왕은 아니었다. 크게 노한 왕은 즉시 좌가려 등을 잡아 처단하려 했다. 이 눈치를 알아 챈 좌가려 등은 이왕 죽을 바에야 한 번 싸워보고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十三년 四월 무리를 모아가지고 왕성을 침범했다.

  이에 왕은 노하여 기내(畿內)의 병마를 징집해거 좌가려 등을 모조리 토벌해 버렸다. 그리고 그 기회에 왕은 크게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모두 내가 어진 신하를 쓰지 않고 인재에 적합한 관직을 주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므로 널리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겠으니 사부(四部)에서는 마땅한 인물을 천거하도록 하라.

  이렇게 영을 내렸다. 그랬더니 사부에서는 다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했다. 그래서 왕은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 했으나 안류는 굳이 사양하며 이렇게 진언한다.

  보잘 것 없는 신은 성품이 용렬해서 국정을 맡기엔 너무나 적합치 않습니다. 서쪽 압록곡(鴨綠谷) 좌물촌(左物村)에 을파소)乙巴素)란 사람이 있사옵는데 그 사람이야 말로 이 나라를 바로 잡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을파소란 어떠한 인물이기에 그렇듯 칭찬하는 거요?

  을파소는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이온데 섬품이 강직하고 지려(智慮)가 심원하건만 세상에서 알아 주지 못하고 쓰지 않으므로 시골에 파묻혀 농사에 힘쓰고 있사오니 대왕께서 등용하심이 가한 줄로 압니다.

  왕은 곧 사람을 보내어 예를 두텁게 하고 을파소를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우대(于台)를 가작(加爵)하는 극진한 대우를 한 다음  내가 외람되어 선업(先業)을 계승해서 왕위에 올랐으나 덕이 박하고 재주가 부족해서 국정을 보살피는데 부족함이 많소. 그러므로 어진 인물을 심히 갈구해 왔는데 공이 이렇듯 기꺼이 와 주니 내 기쁨일 뿐 아니라 나라와 백성들의 복이라고 할 수 있소. 공의 가르침이라면 어떠한 일이든지 기쁘게 받겠으니 정성을 다해 주기 바라오.

  왕은 간곡히 부탁했다. 을파소도 이와 같은 왕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정을 과감히 쇄신하려면 그가 받는 벼슬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솔직히 말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슬쩍 이런 말로 자기 뜻을 비쳐보았다.

  신은 원래 불민하므로 그와 같이 큰 일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달리 어진 사람을 뽑아 높은 벼슬을 주고 대업을 이룩하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현명한 왕은 을파소의 뜻을 당장 알아차렸다. 즉시 그에게 최고관직인 국상(國相)을 제수하고 나라 일을 맡아보도록 했다. 이렇게 되니 역대 조신들과 왕족들은 불만이 대단했다.

시골에 파묻혀 있던 촌부가 하루 아침에 자기네들보다 웃자리에 앉게 된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왕에게 참소하여 을파소를 몰아내려고 했지만 왕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구신(舊臣)들에게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제 아무리 관직이 높은 자라도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당자를 즉시 처단 할 뿐 아니라 일가 친척까지 모조리 멸해 버리겠다.

  이 말로 미루어 왕이 을파소의 인물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이 이와 같이 강경한 태도를 보인 후부터는 을파소는 자기 능력껏 정치를 할 수 있데 되었다.

  정교(政敎)를 밝히고 상벌을 삼가고 백성들을 배부르고 편안케 하는데만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되니 나라 안이 태평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소문이 외국에까지 퍼지어 그때 마침 전란으로 시달리던 한인(漢人)들까지도 뒤를 이어 피난올 정도였다고 한다.

  十九년 五월, 현신 을파소의 보필을 받아 각방면으로 치적을 남긴 왕이 뜻밖에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왕이 세상을 떠난 것은 한밤중, 왕후 우씨와 동침하던 중이었다. 그러므로 왕이 죽었다는 사실은 우씨 이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죽은 것을 보자 우씨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급히 단장을 하더니 시체는 그냥 두고 몰래 침전을 빠져 나갔다.

  우씨가 간 곳은 왕의 형 발기(發岐)의 집이었다. 발기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 밤중에 왕후가 찾아온 것을 보고 그저 놀라며

  어쩐 일이시오? 이런 이슥한 밤중에 갑자기 찾아 주시니 무슨 큰 일이라도 생겼나요?

  책망하는 듯 말했다. 왕후는 한참 동안 발기의 얼굴을 건너다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대왕의 뒤를 이을 사람에 대해서 의논하려 왔소.

  대왕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니요?

  아시다시피 대왕께서는 후사(後嗣)가 없소. 내 생각으로는 그대가 대왕의 뒤를 잇는 것이 마땅할까 하오.

  한밤중에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니 웬만한 사람이면 왕의 신변에 이변이 생겼음을 짐작햇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자 우둔한 발기는 오히려 훈계하듯  하늘의 역수(曆數)는 스스로 그 이치를 따라 돌아가는 법이외다. 어찌 가벼이 의논할 일이겠소?

  이렇게 말문을 막아버린 다음

  오늘밤 왕후의 처사는 실로 아름답지 못하오. 여인 된 몸으로 한밤중에 남자를 찾아 다니며,  그런 일을 의논하다니 예의에 어긋나는 일로 아오.

  왕후가 임금의 죽음을 숨기고 한밤중에 찾아와서 왕위의 계승을 의논한 것은 새 임금이 될 자에게 그만한 성의를 베풀음로써 서로 정을 두텁게 하고 훗날 이(利)를 보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니 이렇게 정면으로 따지자면 떳떳한 일이 못되었다. 그런 만큼 발기의 책망을 받자 왕후는 부끄러웠다.

  왕후는 그 길로 발기의 아우 연우(延優)의 집을 찾아갔다. 연우의 성격은 고지식한 발기의 성격과는 딴판이었다. 사람들을 대하는데도 지극히 부드러워 많은 사람이 따랐다. 왕후가문을 두드리자 그는 급히 의관을 갖추고 문까지 뛰어 나와 맞아 주었다.

  귀하신 몸으로 이런 누추한델 찾아주시니… 자 어서 들어오십시오.

  연우는 왕후를 안으로 모셔 들이고, 한밤중인데도 있는 음식을 다 차려내어 후대했다.

  발기의 푸대접을 받다가 연우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니 고맙고 흐뭇한 마음에 왕후는 모든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대왕께서 세상을 떠나시다니요?

  연우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래서 발기 왕제를 찾아가지 않았겠소? 그랬더니 마치 내가 딴 마음이라도 품고 있는 듯이 말하고 그 대하는 폼이 무례하기 짝이 없구료. 그런 옹졸한 사람과 어떻게 왕위 계승의 큰 일을 의논하겠소.

  그래서 저를 찾아주신 거군요. 황송합니다.

  연우는 기뻤다. 왕후의 말투로 보아 왕위를 자기가 계승할 수 있도록 힘써 줄 것이 분명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리따운 왕후 우씨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게 기뻤다. 나라의 왕후이며 형수인 까닭으로 먼 발치에서 우러러 보기만 하던 꽃송이, 이제 그 꽃송이가 자기 손에 꺾이려 한다.

  그는 상을 차리는데도 하인을 시키지 않고 손수 차렸는데 고기 한 덩이를 들고 오더니 손수 칼을 들어 저몄다. 서투른 솜씨지만 그 모양을 왕후는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너무 신이 나서 그랬던지 손을 베었다. 연우의 손가락에서는 붉은 피가 번져 나왔다.

  왕후는 밥술을 던지고 연우에게로 다가와서 피나는 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기 옷자락을 찢어 동여매어 주었다.

  황송합니다.

  연우가 정중히 사례하는데 첫닭이 울었다. 왕후는 황급히 일어서며  궁으로 돌아가야겠는데,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는지 알 수 없으니 바래다 주오.

  요염한 눈초리로 연우를 건너다 보며 말했다.

  그저 분부를 따를 뿐입니다.

  연우는 기꺼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은 채 궁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왕후는 임금의 죽음을 밝혔다. 그리고 선왕의 유언이니 연우에게 왕위를 계승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왕의 유언이라고 하니 반대할 자가 있을 수 없다. 마침내 연우는 그 자리에서 왕위에 오르니 이가 十대 산상왕(山上王)이다. 연우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말을 듣자 발기는 노발대발했다. 곧 군사를 모앙 궁성을 포위했다. 그리고는 성 안을 향해 소리 소리 질렀다.

  연우놈아. 듣거라. 세상을 떠난 왕에게 아들이 없으면 다음 아우나 형이 마땅히 왕위를 계승해야 할 것인데 네놈은 무례하게 차례를 건너 왕위를 빼앗으니 그 죄가 이루 비길데 없이 크다. 당장 왕위를 내놓고 나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은 없을 줄로 알아라.

  그러나 연우는 성문을 굳게 닫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발기의 발악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연우를 지지하고 수하 장졸들도 하나, 둘 도망쳐 새 임금에게 투항했다.  발기는 하는 수 없이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 도망 가서 태수 공손탁(公孫度)을 만나 애걸했다.

  고구려왕 남무(男武)가 세상을 떠났소만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기화로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더불어 모반하여 나를 제쳐놓고 왕위를 빼앗았소. 이는 곧 천륜에 어긋나는 짓으로서 나는 그에 분격하여 상국(上國)에 달려온 것이외다. 태수께서 군사 三萬만 빌려 주시면 그 자를 쳐서 평정할까 하오.

  공손탁은 그전부터 고구려를 칠 야망이 있었다. 그래서 발기의 청을 들어 주는 체하고 군사를 냈다. 발기가 요동태수와 합세해서 쳐들어 온다는 보고를 받자 연우는 곧 아우 계수( 須)에게 군사를 주어 맞아 싸우도록 했다.

  계수는 날래고 슬기로운 장수였다. 몸소 선봉이 되어 한병(漢兵)을 공격하니 적으 三만 대군은 여지없이 대패했다.

  이때 한병과 함께 도망치던 발기는 그만 고구려군에게 사로 잡히고 말았다.

  아우 계수 앞에 끌려 오자 발기는 애걸복걸했다.

  이제 늙은 형이 싸우다 이롭지 못해 이렇게 사로잡혔지만 우리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동기가 아니냐. 그래도 너는 감히 나를 죽이려 드느냐?

  그 말을 듣자 계수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 아팠다. 군률로서는 마땅히 죽여야 하겠지만 형제의 의리로서는 차마 해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은 형님이 차례를 어기고 즉위한 것은 비록 의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큰 형님은 한때 분을 못 참고 외세(外勢)를 빌어 고국을 멸망시키려 하셨으니 이 무슨 처사시오? 이토록 나라를 배반하는 처서를 하였으니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인(先人)을 뵙겠소?

  이렇게 책망하니 발기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군률로서는 엄히 다스려야 하겠소만 동기의 정으로 차마 해칠 수는 없소. 형님 좋을 대로 아무데나 가시오.

  계수가 말 한 필을 내어 주니 발기는 말에 올라 정신 없이 달렸다.

  어느듯 배천(裵川)에 당도했다. 말도 지치고 임자도 지쳤다. 발기는 떨어지듯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한 때 아우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에는 구차한 목숨이라도 살아 보려고 애걸도 했지만 막상 이렇게 몸둘 곳도 없이 되고 보니 생에 대한 애착도 남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칼을 뽑아 목을 찌르고 자결하였다. 발기가 자결했다는 기별을 받자 계수는 그리고 급히 달려갔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형을 보자 한참 통곡을 한 다음 시체를 거두어 묻고 왕성(王城)으로 돌아갔다.

  계수의 개선(凱旋)을 맞아들인 연우는 처음에는 크게 잔치도 베풀고 후대했지만 그 심중은 결코 편치 않았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연우는 책망하는 듯한 말을 꺼냈다.

  나라를 배반하고 다른 나라에 군사를 청한 발기의 죄는 지극히 크다. 그대는 비록 그를 쳐서 이겼지만 죽이지 않고 목숨을 살려 준 것만도 과한데 그가 자살한 것을 슬퍼하고 그 시체를 묻어 주기까지 했으니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골육지정(骨肉之情)도 모르는 잔인한 인간으로 알 것이 아니냐?

  그러자 계수는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신은 이제 한마디만 아뢰고 죽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이냐?

  왕은 물었다.

  왕후께서 비록 선왕의 유명(遺命)으로 대왕을 세웠다고는 합니다만 그 때 대왕께서 마땅히  예로써 사양하시었어야 옳은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곧 형제 간에 우애가 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겝니다. 신이 시체를 거둔 것은 오직 대왕을 위하는 뜻에서였는데 이렇게 노여움을 살 줄이야 미처 몰랐습니다.

  나를 위해서 그런 처사를 했다구?

  그렇습니다. 신은 대왕의 아우이며 신은 분부를 받들어 발기를 치러 간 장수입니다. 신이 형의 시체를 거두고 묻어 주는 것을 볼 때 그 누가 계수 한 사람의 소행으로 보겠습니까? 곧 대왕의 분부로 알 것이니 신의 소행에서 우애를 느낀다면 대왕에게도 우애를 느낄게 아닙니까?

  말을 마치자 계수는 다시 엎드려 절한다.

  이제 아뢰고 싶은 말 다 아뢰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속이 후련합니다.

  그제서야 왕의 노기는 가시었다. 왕은 다가 앉아 아우의 손을 잡고

  내 어리석어 공연히 너를 의심했구나. 지금 네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내 허물을 알겠다.

  그리고는 왕과 신하로서가 아니라 다정한 형제로서의 하루를 지냈다. 자기 허물을 뉘우친 왕은 그해 九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발기의 영구를 영봉하고 왕례(王禮)로써 배령(裵嶺)에 장사지냈다.

  연우에게는 원래 처자가 있었지만 발기가 반군을 일으켰을 때 희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마땅히 새로 왕후를 세워야 했다. 왕족과 중신들은 많은 여인을 후보자로 천거했다.

그러나 왕은 어느 여인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오직 마음이 기우는 것은 우씨 뿐이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사모해 온 여인이었다. 오늘의 영광 된 자리를 마련해 준 여인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왕이 즉위하고 우씨를 비로 맞은지도 七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우씨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그 해 三월, 왕은 참다 못해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산천(山川)에 기도했다. 그랬더니 이달 보름날 왕은 한 꿈을 꾸었다.

  문득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내 너의 소후(小后)로 하여금 생남(生男)하게 할 것이니 과히 염려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들은 하늘의 말을 왕은 혼자 새기기 어려워 국상 을파소(乙巴素)에게  의논해 보았다.

  소후로 하여금 생남토록 한다고 하지만 내게는 소후가 없으니 어찌 그것을 바라겠소…

  하늘의 뜻은 인간으로서 헤아릴 수 없사오니 그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기다려 보십시요.

  이렇게 말했다. 그 해 八월, 국상 을파소는 병을 얻어 상하가 슬퍼하는 속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로부터 五년이 지난 후 그의 예견은 적중되었다.

  산상왕 十二년 十一월, 들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묶어 놓았던 멧돼지 한 마리가 줄을 끊고 도망쳤다. 그 일을 맡아보던 사람은 대단히 당황해서 그 뒤를 쫓아갔더니 멧돼지는 주통촌(酒桶村)이라는 마을로 도망쳐 들어갔으나 이리저리 피하며 도저히 잡히지 않았다.  이 때 마침 二十세 가량 되는 한 처녀가 지나가다가 방긋이 웃으며 손을 들어 막았다.

그랬더니 그때까지 그렇게 도망치던 멧돼지가 어쩐 까닭인지 잘 길이 든 개처럼 처녀의 발아래 넓죽이 엎드려 버렸다.

  그래서 그 멧돼지를 쫓던 사람은 다시 그것을 묶고 돌아가서 이 일을 왕에게 보고했다.

  네가 잡지 못하던 멧돼지를 그 처녀가 잡았다?

  왕은 그 처녀가 보통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야릇한 호기심을 느끼고 어느 날 기회를 보아 그 처녀의 집을 찾아갔다. 처녀와 가족들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왕을 맞이하자 크게 놀랐다. 그러나 그 사람들보다 더 놀란 것은 왕이었다.

  그저 신기한 처녀거니 생각하고 찾아갔는데 그 처녀의 용모가 너무나 아름답고 그 언동이 너무나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왕후 우씨 이외의 다른 여자는 거의 모르던 왕도 그 처녀를 보자 몹시 마음이 동했다.

  (저런 처녀에게서 아기를 낳는다면 얼마나 영특한 왕자가 될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왕은 시신을 시켜 그 처녀를 가까이 하겠다는 뜻을 그 부모에게 넌지시 전했다.

  처녀의 부모들은 대단히 기뻐했다. 일찍이 처녀의 모친이 처녀를 낳았을 때 한 무당이  얘는 반드시 왕후가 될 거요.

  라고 말하므로 이름을 후녀(后女)라 지었는데 그 예언이 이제 들어맞은 셈이었다.

  부모들은 즉시 왕과 처녀가 동침할 자리를 베풀었다. 그러나 후녀는 부모들처럼 덮어놓고 왕의 명을 따르지는 않았다.

  이 나라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죽이고자 하시면 죽일 수 있고 살리고자 하시면 살릴 수 있으신 대왕의 분부이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마는 한 가지 간청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떠한 청이냐? 네 청이라면 못 들어 줄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미 후녀에게 마음을 다 빼앗긴 왕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자 후녀는 정색을 하고

  만약 아기가 생기는 날에는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사 하는 것이 단 한 가지 청이옵니다.

  아기가 생기면 버리지 말라? 아기는 바로 내가 무엇보다도 바라는 바인데 어찌 아기의 어미를 버리겠느냐?

  왕이 단단히 약속하자 후녀는 비로소 몸을 허락했다. 그러나 왕은 그 집에서 밤을 새우지는 못했다. 우씨가 두려웠던 것이다.

  왕은 날이 밝기도 기다리지 않고 밤중에 그 집을 떠나 왕궁으로 돌아갔다. 총총히 돌아 가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후녀는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저렇듯 왕후의 눈초리를 살피는 왕의 사랑을 받는다고 과연 자기의 앞날이 평탄할까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후녀의 예감은 들어 맞았다. 그 이듬해 三월 왕후 우씨는 왕이 주통촌 후녀와 관계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남달리 성격이 강한 우씨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질투에 불탄 나머지 몰래 군사를 내어 후녀를 죽이려 했다. 이 소식이 후녀의 귀에 들어갔다. 후녀는 급히 남장(男裝)을 하고 자기 집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군사들의 추격을 받아 잡히고 말았다.

  그년을 잡거든 불문곡직하고 죽여버려라.

  군사들은 왕후로부터 이런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후녀를 잡자 당장 칼을 뽑아 목을 치려 했다. 그러나 영리한 후녀는 호락호락하게 그 칼을 받지는 않았다.

  너희들이 누구의 명령으로 나를 죽이려 하느냐?

  후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군사들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대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군사들은 잠깐 그 기세에 눌렸으나 왕후가 골라 보낸 심복들이었다. 언제까지나 망설이고만 있지는 않았다.

  누구의 명령이면 어떠냐? 우리는 웃어른의 명령을 받고 너를 죽이려 온 것이니 아무 소리 말고 이 칼을 받아라.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죽어도 좋지만 내 뱃속에 들은 아이까지 죽일 수는 없다. 이 아기는 바로 대왕의 아기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자마저 너희들은 죽이겠단 말이냐?

  이 말을 듣자 군사들은 그 이상 더 칼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되돌아 가 왕후에게 그대로 보고했더니 왕후는 더욱 노하며 후녀를 죽이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주통촌 후녀가 아기를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 왕이 급히 손을 쓴 것이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후녀의 신변을 보호하는 한편 기회를 타서 친히 그 집을 찾아갔다.

  네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누구의 아이냐?

  왕은 물었다.

  대왕, 어쩌면 그런 것을 다 물으시오.

  후녀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왕을 쏘아 보았다.

  저는 평소엔 남자 형제와도 한 자리에 않고 몸을 지켜왔어요. 그런데 어찌 다른 남자와 가까이 하겠어요. 하늘에 맹서하겠습니다만 지금 밴 아이는 바로 대왕의 아기입니다.

  후녀의 말을 듣자 왕은 대단히 기뻐했다. 좋은 말로 위로한 다음 후한 선물을 주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우왕후를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왕이었지만 十여년 동안이나 기다리던 아기를 낳게 된 이상 그 아기만은 고이 낳아 키워야 했다. 왕은 왕후에게 그 사실을 솔직히 말한다음

  만일 생남하면 내 뒤를 이을 왕자이니 왕후도 특히 애호하도록 하오.

  이렇게 못을 박았다. 그러니 아무리 사나운 우씨도 어쩌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해 九월, 후녀는 마침내 옥동자를 낳았다. 바라고 바라던 후사를 얻은 왕의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 나에게 후사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며 곧 왕자의 생모 후녀를 소후(小后)로 삼았고, 그 후 왕자가 나이 다섯 살이 되자 즉시 왕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 경사를 계기로 민심을 일신하는 뜻에서 왕도(王都)를 환도(丸都)로 옮겼다.

 

 

 

 

  太后의 最後

  주통촌 여인 소후의 몸에서 난 왕자가 태자로 책봉되자 왕후 우씨는 더욱 슬프고 외롭고 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아무리 왕후라는 귀한 자리에 있고 왕의 사랑 역시 아직도 극진하긴 하지만 열매 없는 꽃의 슬픔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것이었다.

  우씨는 그런 괴로움을 죄 없는 어린 태자를 들볶는 것으로 풀어보려고 했다. 어린 태자는 당나귀를 타는 것을 즐겨 했다. 티없는 웃음을 띠우며 당나귀를 모는 것을 보자 여러 궁녀들은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손뼉을 치며 환성을 올리곤 했다.

  그러나 그런 광경이 열매 없는 꽃에게는 무엇보다도 심한 아픔이었다. 어린 태자가 귀엽게 굴면 굴수록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스럽게 보면 볼수록 질투의 불길은 치열해질 뿐이었다.  태자가 한바탕 당나귀를 몰고 나서 잠깐 쉬고 있을 때, 우씨는 은밀히 사람을 시켜 그 당나귀의 갈기를 잘라 버리도록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 이유를 태자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 보다도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태자의 놀이를 방해하려는 충동에서 취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태자는 다시 나귀를 타려고 가까이 갔다. 그리고는 갈기가 없어진 것을 보자 이내 울상이 되었다.

  어유, 불쌍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하면서 나귀의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었다. 이 광경을 보자 구경하던 사람들은 태자의 고운 마음씨에 새삼 감탄했다. 말하자면 우씨의 심술은 태자의 주가(株價)를 올리는 결과만 초래하고 만 것이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태자를 모시는 궁녀가 태자에게 식사를 바칠 때 우씨는 일부러 국물을 태자의 옷에 엎지르도록 시켰다. 국물을 옷에 엎지르면 웬만한 사람은 펄펄 뛰며 노할 것이다. 태자도 역시 노한다면 그것을 빙자해서 태자의 옹졸한 성품을 비웃어 주리라,

그런 의도에서 시킨 일이었다. 그러나 태자의 태도는 예상 밖이었다.

  어머! 이 일을 어쩌나?

  국물을 엎지른 궁녀가 일부러 쩔쩔매는 척하면서 수선을 떠니까 어린 태자는 급히 자기 손으로 국물을 닦으며

  괜찮아. 사람이란 누구나 다 실수를 할 수 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어.

  오히려 이렇게 달래는 형편이었다.

  산상왕(山上王) 三十一년 五월, 왕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그 뒤를 이었으니 바로 제 十一대 동천왕(東川王)이다.

  왕은 일찍이 출생할 때부터 성장하기에 이르기까지 왕후 우씨의 학대를 심하게 받아 왔지만 조금도 우씨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위에 오르자 우씨를 높이어 태후(太后)로 삼고 극진히 받들었다. 그러니 우씨로서는 스스로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동천왕 八년 九월, 태후 우씨는 마침내 복잡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임종할 때엔 그렇듯 투기와 집념의 화신 같던 우씨의 마음도 딴 사람처럼 누구려져 있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좋은 행실을 못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국양(國讓=故國川王)을 뵙겠는가? 내 죄를 생각하면 길거리나 개울속에 던져 버려도 마땅하겠지만 대왕께서나 여러 신하들께서 그래도 나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산상왕릉 곁에 묻어 주기 바라오.

  이렇게 유언했다. 많이 누구러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랑하던 산상왕에 대한 집념만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디까지나 마음이 어진 동천왕이었다. 그 유언을 따라 우씨의 유해를 산상왕릉 곁에 장사 지냈다. 그러나 산상왕의 마음은 우씨와 같지 않았던지 한 무당이 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선왕께서 저에게 강림하시어 <우씨가 내 곁으로 온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와 더불어 싸웠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지겹기도 한 일이다. 너는 이 일을 조정에 알려서 나와 우씨 사이를 가로막아 주도록 해라.> 이렇게 분부하셨사옵니다.

  이에 소나무 일곱겹을 심어 막았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생전이나 사후나 남이 보는 바와는 딴판으로 우씨는 외로운 여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內憂와 外患

  亂中의 烈士

  그 당시 중국 땅위에서는위(魏)를 비롯하여 오(吳), 촉(蜀)이 정립(鼎立)되어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바로 소설 삼국지(三國志)에 묘사된 그 시대였다. 그리고 위는 우리의 강토에 설치된 군현(郡縣)을 지배하고 있던 공손씨(公孫氏)를 멸하고 그 군현을 장악하게 되자 그와 이웃한 고구려 땅을 엿보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가 동방의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강성 하므로 그 힘을 꺾어야만 동방을 지배하기 수월한 때문이기도 했다.

  한편 고구려 역시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요동(遼東), 현토(玄 ), 낙랑(樂浪) 삼국의 존재가 서쪽과 남쪽으로 뻗는 힘을 가로막는 장해물이었다. 이때 압록강 유역에 있는 여(麗),  위(魏) 두 나라의 경계는 압록강 하류의 한 지류(支流)인 안평하(安平河)방면이었는데 고구려로서는 이 경계를 뚫고 나가야 강토의 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천왕 十六년, 왕은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한 일이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동천왕 二十년 八월, 위나라에서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 丘儉)을 시켜 군사 만명으로 현토를 거쳐 고구려를 침공케 했는데 동천왕은 적군의 배가 되는 二만 대군을 거느리고 마주 싸워 비류수(沸流水)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적군 三천여명을 몰살시켰다. 이런 대승리에 동천왕은 지나친 자신을 가진 모양이었다. 여러 장수를 모아놓고

  위의 장졸이 강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우리 장졸 앞에는 감히 대적하지를 못하고 적장 관구검은 명장이란 말을 들었지만 그의 목숨이 이제 내 손아귀에 들어 있지 않은가?

  이렇게 큰 소리를 한 다음 철기 五천기를 거느리고 관구검을 멸하고자 돌진했다. 그러나 관구검은 철통 같은 방어진을 펴는 한편 교묘한 전술로 역습을 감행해서 전세는 역전되고 고구려군은 마침내 一만八천명이나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동천왕은 하는 수 없이 겨우 一천여기를 거느리고 압록원(鴨綠原)으로 도주했는데 그 해 十월,  관구검은 다시 환도성(丸都城)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장군 왕기를 보내어 동천왕을 추격케 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남옥저(南沃沮)를 향해서 도망하다가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이때 수하 장졸들은 거의 다 흩어지고 곁에는 겨우 동부 사람 밀우(密友)가 따를 뿐이었다.

  왕의 신변이 심히 위태롭게 되자 밀우는 왕을 향해서

  지금 적병의 추격이 매우 다급해서 이대로는 빠져나갈 것 같지 않습니다. 신이 결사대를 이끌고 잠시 적군을 막고 있겠사오니 그 동안에 대왕께서는 속히 피신하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 곧 결사대를 조직하고 적군을 가로막아 분투했다.

  밀우 등이 분투하는 틈을 타서 왕은 겨우 그 곳을 빠져나가 산골로 피신한 다음 여기저기 흩어진 장졸을 모아 겨우 신변을 호위하게 했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하고 나니 염려되는 것은 밀우의 운명이었다. 왕은 좌우에 모인 장졸들을 향해서

  그대들 중에 밀우를 구해 오는 사람이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누구, 나설 용사는 없느냐?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하부(下部) 사람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오며

  신이 가겠습니다.

  말하고는 즉시 달려가서 분투하다 쓰러진 밀우를 찾아 업고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밀우는 심한 상처와 피로로 말미암아 정신을 잃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 그대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왕은 밀우의 머리를 친히 자기 무릎에 눕히고 정성껏 간호하니 밀우는 겨우 소생할 수 있었다.  한때 위기를 모면했다고는 하지만 적군의 추걱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왕은 다시 적군의 손아귀를 벗아나기 어려운 곤경에 빠졌다. 그래서 장졸들을 향해 대책을 물으니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한 계책을 진언한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사옵니다.

  어떤 계책인가?

  신이 음식을 차린 다음 위군 진영을 찾아가서 질탕히 먹이며 기회를 엿보다가 적의 주장(主將)을 찔러 죽이겠사오니 신의 계책이 성공했다는 기별을 받으시거든 대왕께서는 적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기습하시기 바랍니다.

  유유의 계책은 자기 한몸을 던지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사적인 계책이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그 계책을 허락했다.

  위군 진중을 찾아간 유유는 거짓 항복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이렇게 바닷가로 도망해 왔습니다만 이제 힘은 다하고 계책은 궁해서 하는 수 없이 장군께 항복하고자 소신에게 먼저 변변치 못한 물건을 보냈사오니 여러 장졸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시오.

  그래? 고구려왕이 항복한다면 어찌 더 싸울 필아가 있겠는가?

  위장은 크게 기뻐하고 유유가 차려 가지고 온 음식을 여러 장졸에게 나누어 주며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유유는 적장에게 음식을 권하는 척하며 그릇을 받들고 다가가서 갑자기 그 그릇 속에 감추어 두었던 비수를 뽑아 적장의 가슴을 찌르고 자기도 자결해 버렸다.

  적장이 죽고 나니 유유가 예견했던바와 같이 적군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우왕좌왕 소란을 피우는 틈을 타서 동천왕은 휘하 장졸을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공격했다. 그런즉 위군은 미처 진영을 갖추지 못하고 낙랑 땅을 거쳐 도망해 버렸다.

  이 난을 겪고 나서 국권을 회복하자 왕은 밀우와 유유의 공로를 일등으로 삼았느데 밀우에게는 거곡(巨谷), 청목곡(靑木谷)을 식읍(食邑)으로 주고, 유유를 추종하여 구사자(九使者)란 벼슬을 주었으며 유유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국권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환도성은 적군에세 짓밝혀 다시 왕도로 삼을 여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도 환도성에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二十一년 二월,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 사직을 그리로 옮겼다.

  심한 전란으로 말미암아 심신이 소모될 대로 소모되었던지 동천왕은 평양성에 천도한 이듬해인 二十二년 九월, 세상을 떠났는데 상하가 모두 다 왕의 승하를 슬퍼해 마지 않았으며 군신들 중에는 왕의 무덤 앞에서 자살하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어 주었는데 그 때문에 그 곳 이름을 시원(柴原)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長髮의 佳人

  동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제 十二대 중천왕(中川王)이다. 왕은 이름을 연불(然弗)이라 했는데 동천왕의 아들이며 일찍이 동천왕 十七년에 태자가 되었다. 준수한 위표와 탁월한 지력으로 새 임금의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정권의 계승에따르는 분쟁을 모면할 수 없었다.

  왕이 즉위한 해 十一월 그의 아우 예물(豫物)과 사구(奢句) 등이 불평을 품고 모반했다.

왕은 원래 과단성 있는 임금이었다. 즉시 두 아우를 잡아 죽여버리고 새 정권을 공고히 했다.  왕의 이와 같은 과단성은 다른 면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유명한 관나부인(貫那夫人)의 이야기가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관나는 얼굴이 아름답고 특히 머리채가 九척이나 되는 장발의 미녀였다. 왕은 그 용모를 사랑하고 장차 소후로 삼으려 했다.

  왕의 마음이 관나에게로 기울게 되자 누구보다도 투기의 불길을 태운 것은 왕후 연씨(椽氏)였다.

  연씨는 일찍이 중천왕이 즉위하던 해 十월에 왕후가 된 몸이었다. 연씨는 여러 가지로 궁리 하던 끝에 왕과 관나를 갈라 놓을 한가지 계책을 세웠다.

  지난날 선왕께서는 중국을 잘 섬기지 않았으므로 병화(兵火)를 입고 거의 나라를 잃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지금 대왕께서 그들의 뜻을 맞추신다면 그들은 기뻐하고 다시는 침범하는 일은 없을 줄로 아옵니다.

  조용한 틈을 타서 연씨는 이렇게 진언했다. 그 말만 듣는다면 여성답지 않은 정치적인 진언이었다.  왕은 그 진의를 알 수 없어 물어보았다.

  중국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자면 어떠한 방도가 있겠소?

  그러니까 연씨는 무슨 대단한 계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싹 다가앉아 은근히 말했다.

  제가 듣기에 지금 위나라에서 긴 머리카락이라면 천금을 아끼지 않고 사들이는 풍습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라 안 여인들의 머리채를 모조리 베어서 위나라에 바치자는 거요?

  왕은 약간 비꼬는 투로 되물었다. 그러나 연씨는 절레절레 손을 저으며

  대왕 그게 어찌 될 일이옵니까? 만일 그런 일을 단행한다면 온 나라가 당장 어지러워질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어려운 방도가 아니라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사와요.

  그건 또 어떠한 방법이오?

  관나부인 말씀이예요.

  관나부인?

  관나부인으 머리채는 아홉자나 되니 중국에서도 아마 보기 드문 장발미인일 것이요. 죽은 머리만도 천금으로 사는 그 나라의 풍속이온데 장발미인을 산채로 보낸다면 그 나라 임금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이제 연씨의 의도는 완연히 드러난 셈이었다. 왕은 원래 부왕과 백성들이 위나라의 침공을 받고 심한 곤욕(困辱)을 받은 것을 분하게 생각해 온 터였다. 그러므로 위나라에 기회가 있으면 크게 복수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참인데 그 비위를 맞추느라고 사랑하는 여인까지 보내다니 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왕후의 말은 잘 알겠소. 내가 적절히 처리할 것이니 다시 그런 말, 입 밖에도 내지마오.

  이렇게 물리쳤다. 왕후 연씨가 관나부인을 멀리하려고 꾀한다는 소문은 관나의 귀에도 들어갔다.  관나는 연씨 못지 않게 잔재주를 잘 부리는 여인이었다.

  제가 나를 쫓아버리려구 한다구?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 그렇다면 내게두 생각이 있단말야.

  관나가 이렇게 벼르고 있는 중에 하루는 왕이 기구(箕丘)로 사냥을 떠나게 되었다.

  때는 왔다고 생각한 관나는 거것 눈물을 흘리며 왕의 소매를 잡았다.

  대왕, 대왕께서 멀리 떠나신다면 저는 어찌하옵니까?

  어찌하다니? 조용히 내가 돌아올 때만 기다리면 될 것이 아닌고?

  왕은 사랑하는 가인이 잠시의 이별이나마 애석히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이렇게 말했다.

  대왕, 그것은 모르시는 말씀이예요.

  모르는 말이라니?

  대왕이 잠시라도 궁궐을 비우시면 저의 목숨은 아마 당장 없어질 것이에요.

  목숨이 없어지다니? 누가 그대를 해친단 말인고?

  왕이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자 관나는 한층 더 흐느껴 울며,

  대왕, 저는 두렵사와요.

  두렵다니? 글세 누가 두렵단 말인가?

  왕후마마가 두렵사와요.

  왕후가?

  왕후마마께선 항상 저를 꾸짖으시며, 시골계집이 어찌 이곳에 있을 수 있느냐, 돌아가지 않는다면 크게 뉘우치게 될 거라고 하시지 않다면 제 몸이 어떻게 되겠사와요? 왕후마마의 손에 죽고 말 것은 환한 일이 아니예요?

  그 말을 듣자 왕은 관나에게 동정심이 가기보다도 오히려 지겨운 생각이 들었다. 지난 번에는 연씨가 관나를 물리치려 하고 이번에는 관나가 연씨를 참소하는 모양이다.

  (여자들이란 모두 이런 것일까?)

  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사냥길을 떠났다.

  며칠 후 왕이 사냥터에서 돌아오자 관나부인은 궁궐문까지 달려나오며 통곡을 한다.

  왜 이리 상스럽지 못하게 울기부터 하는고? 먼 길에서 돌아오는 사람을 반길 줄도 모르는고?

  왕이 꾸짖으니까 관나는 더욱 울음소리를 높이며

  대왕, 이런 일을 당하고 어떻게 울지 않겠사와요?

  무슨 일이냐?

  글세 왕후마마가 저를 바다에 던지려고 하시는군요. 대왕께서는 저를 아끼시는 뜻에서 저의 집으로 돌려보내 주시어요. 이곳에서 대왕을 모시다간 언제 어떻게 죽을는지 알 수없는 일이옵니다.

  아니 왕후가 아무리 그대를 싫어하기로 바다에 던질 만치 잔인하지는 않을 텐데…

  못 믿으시겠으면 이것을 보세요. 이 가죽주머니에 저를 넣어서 바닷속에 던지려고 하셨어요.

  왕은 아무래도 관나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궁인들을 불러 추궁해 보니 관나의 말은 전혀 거짓말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왕이 자기를 사랑하는 품으로 보아 눈물로써 호소한다면 자기 말에 속아 넘어가서 왕후를 멀리할 것이라는 얕은 생각에서 꾸민 연극이었다.

  관나의 미모를 극진히 사랑하던 왕이었지만 한 나라의 국모를 참소하고 기강을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을 버려둘 만치 깊이가 없지는 않았다.

  이 요사한 계집아!

  왕은 무섭게 꾸짖었다.

  네가 그렇듯 물고기의 밥이 되고 싶다면 네 소원대로 바다에 처넣어 주마.

  그리고는 자기 손은로 만들어 연극을 꾸민 가죽주머니 속에 관나를 처넣고 바다로 던져버리게 했다. 중천왕 四년 초여름의 일이었다.

  중천왕은 그 후 여색에 현혹됨이 없이 나라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왕후 연씨의 의견을 따라 위나라를 떠받드는 것 같은 허술한 외교정책을 취하지는 않았다.

  중천왕 二十년 위장 위지(魏將尉遲)가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는 일이 일어나자, 왕은 정병 五천을 뽑아 거느리고 양맥곡(梁貊谷)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고 적군 八천여명을 참살했다.

  이와 같이 안팎으로 나라 일에 힘을 쓰고 왕은 二十三년 十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幸運의 王孫

  중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는 제 十三대 서천왕(西川王)이다.

  서천왕은 이름을 약로(藥盧)라고 했는데 중천와의 둘째 아들로서 성품이 어질고 총명하므로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경애하여 마지 않았다. 그는 나라 안으로는 백성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밖으로는 숙신(肅愼) 등의 침입을 격퇴하여 고구려의 사직을 한층 더 공고히 하고 二十三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서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 제 十四대 봉상왕(烽上王)인데, 이 임금은 실로 고구려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포악하고 잔인한 임금중의 하나였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으며 겁이 많은 왕은 즉위하자 맨 먼저 한 일이 자기 숙부이자 나라의 큰 공신인 안국군 달매(安國君達買)를 죽인 일이었다.

  달매는 일찍이 서천왕 때 숙신이 침입하자 왕의 명을 받고 기병(騎兵)으로 적을 공격해서 그 추장을 죽이고 백성들을 귀속시킨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두 그를 흠모해 마지 않았는데 이것이 의심 많고 소견 좁은 봉상왕에게는 무엇보다도 못마땅했던 것이다.

  아무리 신하이지만 숙부가 되는데다가 인망 높은 공신이 가까이 있으니 사사건건(事事件件)이 자기를 압박하는 것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봉상왕이 죄 없는 안국군을 죽이자 백성들은 땅을 치고 통곡하며 나라의 앞일을 슬퍼했다.  백성들의 우려는 한해도 못 가서 사실로 나타났다. 봉상왕 二년 八월 연(燕)의 모용외(慕容 )가 침입했다.

  연은 오호선비국(五胡鮮卑國)의 일족으로 모용씨를 우두머리로하여 외( ) 때에 요하(遼河) 상류에서 일어나 西紀 一八五년에는 북부여를 침공하고, 요서(遼西)를 공략하고, 一九四년네는 지금의 금주(錦州) 부근에 도읍을 정했으니 고구려에 침입한 것은 바로 도읍을 정하기 전 해였다.

  포악하지만 겁이 많은 봉상와이었다. 신흥강국이 대군을 몰아 침입하니까 적을 맞아 격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한몸의 안전만을 꾀한 나머지 신성(新城)으로 피신하고자 곡림(鵠林)까지 도망했다.

  그러나 적군은 이것을 재빠르게 탐지하고 맹렬히 추격했다.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신성을 지키고 있던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五백기를 거느리고 마주 나와 적군을 격퇴시키고 왕을 구출해서 겨우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이렇듯 외적에게는 비겁한 왕이었지만 동족이나 혈친에게는 지극히 잔인했다. 모용외를 물리쳐서 겨우 신변이 안전해지자 이번에는 자기 주변이 불안스러워졌다. 즉 아우 돌고(固)가 딴 마음을 품고 자기를 몰아내혀 하지 않나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없는 죄를 만들어 돌고를 죽여 버렸다. 이때 돌고에겐 을불(乙弗)이란 아들이 있었다. 그는 자기 부친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보자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고 멀리 외진 시골로 도망쳐버렸다.

  이것은 안 봉상왕은 훗날 을불이 부친의 원수를 갚을까 염려되어 백방으로 사람을 놓아 찾아보았으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자기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는 혈친들까지 잔인하게 참살한 왕은 한편 향락을 위해서는 백성들의 고통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봉상왕이 즉위한지 아홉해 되던 해. 봄부터 가을이 되도록 도모지 비가 오지 않아서 논은 갈라지고 밭에 심은 채소까지 모조리 말라 죽었다.

  백성들은 굶주림에 견디지 못해 서로 잡아먹기라도 할 형편이었다. 이렇게 백성들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도 그 해 八월, 임금은 궁궐을 크게 고치려고 十五세 이상 되는 남녀는 모조리 징발해서 일을 시켰다. 이런 나라 형편을 크게 우려한 국상 창조리(創助利)는 임금을 뵙고 단단히 간했다.

  가물로 굶주린 백성에게 다시 고된 역사를 시키시다니, 어찌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처사라 하겠습니까? 듣자니 견디다 못해 이웃나라로 도망치는 백성도 많다고 합니다. 이 틈을 타서 이웃나라들이 쳐들어 오면 장차 어떻게 나라를 지키시려고 그러십니까?

  창조리의 말에 임금은 크게 노했다.

  무슨 소리냐?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 보도록 해야 하는 법아라 . 만약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이 초라하면 백성들이 임금을 가벼이 여길게 아닌가?

  창조리는 이 이상 더 간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봉상왕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울 생각으로 전부터 가깝게 지내오던 동부(東部)의 소우(蕭友)를 은밀히 불러 의논해 본 끝에

  그런데 어느 분을 새 임금으로 모시면 좋을까?

  창조리가 물으니까 소우는 당장에 대답하기를

  그야 전에 임금에게 쫓겨난 을불 어른이 제일 마땅하지요. 그 어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질고 인자하기로 왕족 중에 으뜸이니 반드시 백성이 바라는 좋은 임금이 되실 겝니다.

  이리하여 소우는 나라 안 각처로 을불을 찾아 다니게 되었다.

  한편 부친 돌고가 죽을 때 시골로 피난한 을불은 수실촌(水室村)이란 벽촌으로 흘러가서 음모(陰牟)란 사람의 집 머슴이 되었다.

  음모는 물론 을불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그를 심하게 부려 먹었다.

  유달리 무더운 여름 밤이었다. 성미가 지극히 각박한데다가 몹시 조급한 음모는 아까부터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담 너머 연못에서는 개구리들이 요란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 저놈의 개구리는 왜 저리 운담!… 얘, 을불아!

  하고 음모는 을불을 불렀다.

  너 가서 저 개구리가 울지 못하도록 해라!

  을불은 주인의 명령이니 어쩌는 수 없이 연못으로 갔다. 그는 돌을 하나 집어 연못에 던졌다.  개구리들은 울음은 뚝 그쳤다.

  얼마 후 개구리가 또 울기 시작하면 을불은 또 돌을 던졌다. 이렇게 하면서 밤새도록 돌을 던져 개구리 우는 소리를 막았다. 그 덕택으로 주인 음모는 편히 잘 잤겠지만 을불은 한잠도 잘 틈이 없었다.

  그 이튿날, 을불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인정이 없는 주인, 자기 혼자 편히 자려고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었든 마구 부려먹는 주인 밑에서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을불은 마침내 음모의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정처 없이 길을 가다가 재모(再牟)라는 사람을 만났다.

  어디 가는 길인가?

  갈 데가 없어서 그저 정처없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지.

  그럼 나하고 같이 장사나 시작해 보지 않겠나.

  무슨 장사를 한담?

  요즘 소금장사가 괜찮다더군.

  이렇게 해서 을불은 재모와 함께 소금장사를 시작했다.

  그날부터 여기저기 소금을 팔러 다니다가 하루는 날이 저물어 강동(江東)의 어느 시골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숙박료로 을불은 소금 한 말을 퍼 주었다. 그러나 그 노파는 굉장한 욕심장이였던 모양이다.

  겨우 한 말만 주우? 한 말만 더 주구려.

  사람 좋은 을불도 염치없는 노파의 욕심에 비위가 상했다.

  그거 너무 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까지 할수가 있어요?

  을불이 거절하니까 주인 노파는 앙심을 품었다.

  그날 밤이었다. 을불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노파는 몰래 을불의 소금섬에 무엇인가 처넣고 급히 몸을 피했다. 그 이튿날 아무것도 모르는 을불은 다시 소금짐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섰다. 큰길을 얼마쯤 갔을 때였다. 별안간 등 뒤에서

  도둑이야!

  하고 외치면서 어제 묵었던 집 노파가 쫓아오더니 을불의 소금섬을 움켜 잡았다.

  인제 잡았다. 이 도둑놈!

  하고 외쳤다.

  도둑놈요? 내가요?

  을불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 멀쩌하게 … 어 어젯밤에 내 신을 훔쳤지? 어서 내놔! 그 소금섬 좀 보자!

  을불은 전혀 애매한 소리라 선선히 소금섬을 열어 보였다. 그랬더니 소금섬 속에는 바로 노파의 신이 들어 있지 않은가? 앙심을 품은 노파는 어젯밤에 자기 손으로 신을 집어넣고 이렇게 야단을 떠는 것이었다.

  을불은 대단히 난처했다. 자기 소금섬에 틀림없이 신이 나왔으니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다.  이때였다. 둘러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틈에서 한 점잖은 사나이가 나섰다.

  여보 노파 그 젊은이 신수를 보니 도둑질을 하거나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구료. 뭐 잘못돼서 그런 모양이니 그만두슈.

  하면서 그 점잖은 사나이는 몰래 노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는 그 손에 금전 한푼을 쥐어 주었다. 원래 욕심 많은 노파라 곡절을 알수 없지만 공짜로 큰 돈이 생겼으니 이내 입이 딱 벌어졌다. 이때까지 붙잡고 야료하던 을불을 내버려 두고 덜레덜레 사라졌다.

겨우 창피한 꼴을 모면한 을불이 공손히 절을 하며 그 사나이에게 치하하니까 사나이는 나즈막한 소리로

  조용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같이 가십시다.

  했다. 그리고는 어느 조용한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땅에 엎드려 공손히 절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을불이 당황히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니까

  신하로서 임금 되실 분에게 절을 하는 것을 어찌 틀리다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바로 을불을 찾아 헤매던 소우였던 것이다.

  지금 나라 임금이 무도해서 국상 창조리가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왕을 폐하기로 의논 했습니다.  그러나 대통을 이을 분이 마땅치 않아 염려하던 차에 왕손께서 조행이 바르시고 성품이 인자하시므로 대통을 이의기에 가장 적합한 분이라는데 뜻이 합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렇게 모시러 왔으니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환궁해 주십시오.

  을불에겐 봉상왕은 부친의 원수다. 이제 원수를 갚게 될 뿐만 아니라 영예로운 그 자리에 대신 앉게 된다는 것은 더 바랄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소우의 말이 너무나 뜻밖이여 또 봉상왕이 보낸 자객이 감언이설(甘言利說)러 꼬이는 것이 아닌가 의심도 들었다.

  아니 날더러 왕손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나는 보시는 바와 같이 천한 소금장이 외다.

  딱 잡아떼어 보았다. 그러나 소우는 진정으로 을불을 찾아 헤맨 일을 낱낱이 이야기하므로 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마침내 그가 마련해 온 가마에 올랐다. 그러나 아직도 봉상왕이 권세를 쥐고 있는 세상이었다. 을불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면 당장에 화가 미칠 것이다. 창조리는 오맥남(烏陌南)이란 심복의 집에 을불을 감추고 거사할 기회만 가다렸다.

  그 해 九월 봉상왕은 후산(候山) 숲속에서 크게 사냥을 하게 되었다.

  기다리던 기회였다.

  사냥 좋아하는 왕은 짐승을 쫓아 홀로 숲 속 깊숙이 들어갔다. 이 틈을 타서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에게 외쳤다.

  지금 임금은 무도하기 이를데 없어 방방곡곡(坊坊曲曲) 백성들의 원성으로 가득하오. 나창조리는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서 무도한 임금을 몰아낼 생각이오.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분은 그 표적으로 다 나하는 대로 하시오.

  말을 마치자 창조리는 갈잎을 꺾어 머리에 꽃았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다 갈잎을 꺾어 머리에 꽃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들의 뜻이 다 같다는게 밝혀졌소. 자, 그럼 정의의 칼을 뽑읍시다.

  창조리가 칼을 뽑고 앞장을 서서 임금을 쫓으니 다른 사람들도 다 손에 칼을 뽑아들고 그 뒤를 따랐다.

  봉상왕은 창조리와 여러 신하들에게 사로잡혀 감금되었다. 왕은 그래도 여러 가지로 계교를 써서 도망치려고 애써 보았지만 누구 하나 자기편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누구나다 냉정한 눈초리를 보낼 뿐이었다.

  모든 것이 다 끝났구나!

  모질고 악독하던 왕도 두 줄기 눈물을 흘리고 허리에 매었던 띠를 풀어 목을 매어 죽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두 아들도 부친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창조리는 곧 죽은 왕의 시체를 봉산(烽山) 언덕에 고이 장사 지내고 마침내 을불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그가 곧 제 十五대 미천왕(美川王)이다. 상하의 신망을 한 몸에 지니고 왕위에 오른 미천왕은 과연 내치(內治), 외교(外交), 국방(國防)에 많은 치적을 남겼다.

  三년 九월에는 군사 三만명을 친히 거느리고 현토군을 쳐서 그 고장 사람 八천명을 사로 잡아 평양으로 데려왔으며 十二년 八월에는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공했으며 十四년 十월에는 낙랑군을 공략해서 남녀 二천여명을 귀순시켰다.

 이렇게 국력의 부강에 온갖 정력을 기울이던 미천왕이 즉위 三十二년 되던 해(西紀 三三一) 二월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사유(斯由)가 왕위를 이었다. 즉 제 十六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이다.

 

 

 

  小國의 君主

  고국원왕은 어느 의미로 보면 부왕이 지나치게 판도를 벌린 뒷수습을 하다가 희생된 비극의 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은 즉위하자 부왕이 지나치게 자극해 놓은 이웃나라들과 화친을 맺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므로 十년에는 세자를 연왕(燕王)에게 보내어 그 비위를 맞추려고 했지만 그 다음 다음 해인 十二년 十一월 연왕 모용황(慕容 )은 입위장군(立威將軍) 모용한(慕容翰)의 계책을 받아들여 스스로 정병 四만을 거느리고 남쪽으로부터 쳐들어왔다. 그리고 따로 장사 왕우(王寓) 등을 시켜 군사 一만 五천으로 북도(北道)로 침입하였으니 고구려는 남북으로 협공을 당한 셈이었다.

  이때 고국원왕은 아우 무(武)에게 정병 五만을 주어 북도를 막게 하고 왕 자신은 따로 군사를 거느리고 남도를 방비했다. 그러나 모용황, 모용한 등의 군세가 너무 강성해서 왕이 거느린 고구려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적군의 좌장사 한수(韓壽)는 고구려 장군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를 죽이고 승세를 타서 환도성에까지 침입했다.

  고국원왕은 하는 수 없이 단기로 피신하여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적군은 왕모주씨(王母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다.

  한편 남도를 지키던 왕군과는 반대로 북도를 지키던 왕제 무의 군대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모용황은 더 깊이 추격할 것을 단념하고 왕을 초청하였으나 왕은 단웅곡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북에 갔던 무의 군대가 내려오면 합세해서 적군을 섬멸할 기세였다.  그래서 모용황은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물러가려 하는데 좌장사 한수가 진언하기를

  모처럼 원정을 나왔다가 그대로 돌아가면 아무 소득이 없지 않습니까? 마침 왕모와 왕비가 우리에게 잡혔으니 그들을 볼모로 데리고 가는 한편 고구려왕의 아비의 시체를 파서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아무리 적이기로 그렇게 끔찍한 짓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모용황이 망설이니 한수는

  부질없이 잔악한 짓을 일삼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고구려왕은 생모와 비와 망부의 시체를 도로 찾기 위해서도 끝내 항거 할 것을 단념하고 우리에게 항복할 것이 아닙니까?

  모용황은 한수의 진언을 받아들여 미천왕묘에서 그 시체를 파서 싣고 부고(府庫)에 있던 가지가지 보물을 거둔 후 고구려 백성 五만명을 포로로 하고 궁실을 불태워 환도성을 헐어 놓은 다음에야 철군했다.

  실로 고구려의 건국 이후 가장 혹독한 참화였다. 한수의 계책은 그들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계책이었다.

  그 이듬해 고국원왕은 아우를 연으로 파견해서 조공을 하는 한편 지난 일을 깊이 사과했다.  그랬더니 연왕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체는 돌려 보냈으나 왕모만은 그대로 잡아 두고 볼모로 삼았다.

  그 후부터 고구려는 철저히 연나라의 눈치를 살피고 그 비위를 맞추기에 애썼다.

  十九년에는 전에 동이호군(東夷護軍)으로 있던 송황(宋晃)을 연으로 보내어 사과하게 하니 연왕은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活)이라 고치게 했다.

  二十五년 十二월에는 다시 사자를 연으로 보내어 조공하는 한편 왕모를 돌려보내 달라도 청했다.  그랬더니 연왕은 그것을 승낙하고 왕모주씨를 귀국시키는 한편 왕을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을 봉하니 고구려는 한때 연나라에 속국이 된 셈이었다.

  이로부터 十여년간은 평온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으며 이동안 고구려는 안으로 국력을 배양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대륙과의 관계가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틈을 타서 왕은 군사 二만을 거느리고 남으로 백제를 침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치양(稚壤=原州)땅 전투에서 패배의 쓴 잔을 마시고 말았다.

  이동안 대륙의 형세도 급변했다. 四十년 十월 고구려의 상전 노릇을 하던 연나라가 진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연나라의 태부(太父) 모용평(慕容評)은 고구려에 도망와 망명할 것을 청했으나 왕은 그를 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신흥세력 진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을 염려한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오래도록 시달림을 받은 연나라에 대한 일종의 복수이기도 했을 것이다.

  四十一년 十一월, 백제는 지난번 고구려가 침공한 복수전으로 군사 三만으로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했다. 이때 고국원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이달 二十三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즉위한 햇수는 비록 四十一년 동안이란 진 세월이었지만 그동안 끊임없는 외침(外侵)에 시달렸고 마침내 진중에서 횡사까지 한 것을 생각하면 고국원왕은 전형적인 소국의 슬픈 군주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시련을 겪기는 했으나 이후부터 고구려는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제 十七대 소수림왕(小獸林王)과 제 十八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을 거쳐 제 十九대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즉위하게 되자 고구려는 크게 약진하여 일대 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광개토왕은 西紀 三九二년에 즉위하여 四一四년에 승하할 때까지 재위 불과 二十二년이며 수를 누리기 겨우 三十九세였지만 국가와 부강을 위해서 세운 공적은 실로 위대했다고 할 수 있다. 나면서부터 사람됨이 영명하고 호협한 왕은 포부가 원대하고 군사를 부리는 힘이 신과 같았다고 한다.

  그가 즉위할 때엔 불과 十대 소년이었지만 동서남북으로 이웃을 정벌하여 싸우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었고 공격하면 반드시 전취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고구려 국토는 날로 광대해졌다.  즉위한 해 七월에는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十성을 빼앗았으며 九월에는 북으로 글안을 공격하여 남녀 五백구(口)를 포로로 하고 민가 一만구를 귀순케 했다.

  그 후에도 백제와 여러 번 싸워 완전히 기를 꺾어 버렸으며 서쪽으로는 한 번 멸망했던 오용씨가 다시 일으킨 후연(後燕)을 쳐서 오랫동안 다투어 오던 현토 요동 땅을 완전히 공취했다.  또 동으로는 동예(東濊)를 평정하여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나중에는 신라와 동맹을맺고 남쪽으로 멀리 임나(任那), 가라(加羅)에까지 군사를 보냈다.

  광개토왕이 재위 二十二년 동안에 이룩한 공업(功業)을 보면 공취한 성이 六十四성이며, 귀속시킨 부락이 一천 四백여촌이었고 한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었다.  그도 부친 못지 않은 영걸이었을 뿐 아니라 九十八세까지 장수했으므로 국력을 강성케 하는데 세운 업적이 또한 적지 않았다.

  그는 도읍을 기름진 대동강유역 평양으로 옮기어 민심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그 곳을 발판으로하여 남방경략에 힘을 기울였다.

  六十三년에는 백제 제 二十대 개로왕(蓋鹵王)을 모략으로 속여 잡아 죽임으로써 지난날의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는 한편 백제로 하여금 남쪽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게만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의 판도는 남으로 자꾸 뻗어 내려가서 그 경계가 아산만(牙山灣)에서 죽령(竹嶺)에까지 이르렀으며 서북으로는 요하(遼河)로부터 지금의 만주 대부분을 포함한 일대 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제 二十一대 문자왕(文咨王), 제 二十二대 안장왕(安藏王), 제 二十三대 안원왕(安原王)을 거쳐 제 二十四대 양원왕(陽原王)시대에 이르자 강대한 국가의 기틀은 완전히 잡히었고 모든 제도도 차츰 완비되어 갔다.

  그러나 고구려 민족다운 강건한 정신과 소박한 인정은 아직도 잃지 않고 있었으니 그것을 엿보게 하는 일화가 바로 온달(溫達)과 평강공주(平岡公主)의 사랑이다.

 

 

 

  公主의 사랑

  온달은 평원왕(平原王 또는 平岡王이라고도 한다)때의 사람으로 외모가 매우 어리석고 우둔하게 생겼으므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집안이 몹시 가난해서 떨어진 옷과 낡은 신을 끌고 거리를 다니며 구걸을 해서 홀어머니를 봉양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업수이 보았다.

  그러나 어리석은 외모 속에 감추어진 질박한 온정과 강건한 용기를 알아 주는 사람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이 때 평원왕에겐 한 공주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울부짖고 애를 태웠다. 말하자면 몹시 신경이 예민하고 성깔이 강한 소녀였던 모양이다.

  공주가 울부짖는 것을 달래기가 귀찮아지면 왕은 곧잘 이런 농담을 했다.

  너는 웬 아이가 그렇게 울기만 하느냐? 그러다가는 장차 자라서 점잖은 집으론 시집을 갈 수 없겠으니 저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겠다.

  왕으로서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어린 공주의 가슴에는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내겠다는 말이 깊이 새겨졌다.

  울기 잘하던 공주도 어느덧 성장해서 十六세의 처녀가 되었다. 그래서 왕은 공주를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했다. 공주 답게 문벌 좋은 집으로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이 그런 뜻을 전하자 공주는 펄쩍 뛰었다.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어요? 아버님께서는 항상 온달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하셨도,  저도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온달만이 남편으로 섬길 사람으로 생각해 왔는데 이제 어째 딴 말씀을 하시어요?

  공주의 말을 듣자 왕은 껄걸 웃었다.

  네가 어려서 하도 울기에 달래느라고 농담을 한 것이지 차마 한 나라의 공주를 구걸을 하고 다니는 바보에게 보낼 수야 있겠느냐?

  그러자 공주는 더욱 빡빡하게 대들었다.

  제가 배워오기는 한낱 필부도 식언을 죄로 안다고 합니다. 하물며 가장 존귀하신 어른의 말씀이 어찌 그걸 수 있겠습니까? 비록 아버님이시며 이 나라의 임금이신 분의 분부이긴 합니다만 그릇된 분부는 저는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어려서 농담으로 한 말을 끄집어 이렇게 거역한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빽빽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주의 편에 서서 생각한다면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라의 기틀이 잡혀가고 강성해짐에 따라 건국 초의 질박하고 강건한 기풍은 날로 퇴폐되어 가고 왕족이나 귀인들은 매사에 형식을 찾기 시작했을 것이며 실력보다도 문벌을 내걸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공주에게는 못마땅했는지 모른다. 혹은 성깔이 강하고 신경이 예민한 공주라 허식과 권모술수로 만사를 처리해 가는 궁중생활에 견딜 수 없는 반발을 느꼈을는지도 모른다.

  한편 어려서부터 마음에 새겨온 온달이라는 사나이, 세상 사람들이 바보라고 부르는 그 사나이의 동정을 살피고 사람됨을 알아본 결과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속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식견과 뛰어난 용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직 가난하고 문벌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지나치데 겸손하기 때문에 햇볕을 보지 못하고 파묻혀 버리는 옥과 같은 인물이라고 그렇게 해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문벌만 높고 아무런 실력도 없는 귀인에게 시집을 가느니보다 세상의 멸시를 받더라도 참된 사나이의 품으로 달려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공주가 하도 맞서니까 왕은 크게 노했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내 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내 딸이 아닌 이상 함께 살 수 없으니 너 가고 싶은 데로 마음대로 가거라.

  홧김에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면 공주가 어쩌나 그 태도를 보고 싶어서 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왕의 말이 떨어지자 공주는 즉시 금팔찌와 보석목걸이 수십개를 팔에다가 감고 궁궐을 나왔다. 온달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온달이 어디서 사는지 알 수가 없어서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 겨우 그 집을 찾아갔다.

  온달의 집에는 온달은 없고 늙고 눈이 어두운 그의 어머니가 혼자 앉아 있었다.

  공주는 늙은 어머니 앞에 꿇어 공손히 절을 했다. 그랬더니 앞 못 보는 늙은 어머니는 눈을 꿈벅꿈벅하며

  온 몸에서 풍기는 그윽한 향기 필기 지극히 귀한 분인 것 같구료. 무얼 하러 여길 찾아 왔소?

  묻는다.

  바로 댁의 아드님께 시집올 여자입니다.

  우리 아들에게 시집을 오다니?

  노모는 더듬더듬 공주의 손을 어루만졌다.

  솜과 같이 부드러운 손으로 이 움막집에서 가난한 살림을 할 수가 있을라구?

  그런 점도 미리 다 알고 찾아왔습니다.

  당치도 않은 말씀, 우리 아들은 며칠째 굶어서 견디다 못해 느릅나무 잎을 따러 산으로 갔다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저는 이 댁 며느리 노릇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공주는 온달을 찾아 산을 향해 올라갔다. 얼마쯤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려니까 저편에서 느릅나무 잎을 따가지고 내려오는 사나이가 있었다. 온달이었다. 공주는 그 앞으로 달려갔다.

  당신께서 시집 온 여자입니다.

  이 말을 듣자 온달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새파란 처녀의 몸으로 그게 무슨 소리요? 아마 그대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일 거요. 썩 물러가지 못할까!

  온달은 이렇게 꾸짖고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자기 집으로 향한다. 공주는 그 뒤를 따랐다.  공주가 온달의 집에 당도했을 때는 온달은 이미 문을 단단히 잠가버린 뒤였다. 두드려 보기도 하고 소리 껏 불러보기도 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이미 날이 저물었다.  그래도 공주는 그 집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 지성에 감동했던지 온달은 겨우 문을 열어 주며

  어디서 오신 분이며, 무슨 까닭으로 나를 이렇게 찾아오신 거요?

  공주는 그제서야 전후 사실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아도 괴상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공주가 거지에게 시집을 오다니.

  그렇지만 한 나라의 공주님으로 호강을 누리시던 분이 이런 구차한 살림을 정말 견디어 내시겠소?

  온달의 모친은 물어보았다.

  서로 마음만 맞으면 가난한 것쯤이야 어찌 가리겠습니까?

  공주의 얼굴에는 지극한 성의와 움직일 수 없는 결의가 서리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온달 모자는 겨우 마음을 허락하고 냉수를 떠다가 혼례식을 치루었다.

  혼인한 이튿날이었다. 공주는 온달에게

  날마다 구걸이나 하고 느릅나무 잎이나 뜯어 먹고 이런 살림을 하다가는 언제까지나 가난을 면치 못할 거예요.

  이렇게 말했다. 온달은 난처한 듯이 공주를 쳐다보며

  그렇지만 그것밖에 할 일이 있어야지.

  힘없이 말했다.

  왜 할 일이 없어요? 남들과 같이 논을 갈아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 밭을 갈아 채소를 얻고,  소와 돼지를 쳐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면 되지 않아요?

  공주의 말을 듣자 온달은 피식 웃었다.

  누가 그걸 모르나? 논과 밭과 소 돼지가 없으니까 그렇지.

  내 팔을 걷어 보세요.

  하고 공주는 자기 팔을 온달 앞에 쑥 내밀었다.

  온달은 영문도 모르고 공주의 팔을 걷어 보았다.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공주의 팔에는 궁궐을 나올 때 가지고 온 황금팔찌와 보석 목걸이가 팔꿈치에서 손목까지 가득 했다.

  이걸로 모든 걸 장만하세요.

  공주는 목걸이와 팔찌들을 모조리 빼어 놓았다. 온달은 놀라며 그것들을 팔아서 논과 밭과 소 돼지들을 넉넉히 장만했다. 그리고 논밭에 심을 씨앗도 사들였다.

  그렇게 해서 세월이 흘렀다. 거지꼴을 하고 다닐 때는 구차하고 우스워 보이던 온달도 좋은 옷에 잘 먹고 나니까 늠름한 대장부로 보였다. 이러한 어느날이었다. 공주는 온달에게 조용히 말했다.

  전에 금과 보석을 팔아 논 밭을 장만하고 남은 돈이 있지요?

  있구 말구. 아직두 많이 남았지.

  그 돈으로 말을 사오세요.

  말을 사다가 뭘하노?

  글세 사오세요. 그런데, 아무거나 살찐 거라고 사오시면 안 돼요. 말랐더라도 나라에서 내다 하는 국마(國馬)를 사오셔야 해요.

  온달은 공주의 말대로 장에 가서 국마 한필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몹시 야위기는 했지만 씨는 좋아 보이는 놈이었다.

  공주는 그 말을 정성껏 먹였다. 과연 얼마 아니 가서 살찌고 기름이 흐르는 날쌘 말이 되었다.  그러자

  남자가 논 밭에서 농사나 짓고 하면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이 말을 타고 산에 가서 사냥이나 해보세요.

  공주는 온달에게 말을 내주며 이렇게 말했다.

  온달은 하루도 쉬지않고 사냥에 골몰했다. 한해가 지나고 두해가 지났다. 꾸준하게 사냥을 하면서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익힌 온달은 어느덧 누구도 당치 못하는 날랜 장수가 되었다.  말달리기와 활쏘기에는 어느 무사에게도 지지 않게 된 온달을 보자 공주는 무한히 기뻐했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三월 초사흗날이 되면 그때 잡은 사슴이나 산돼지를 제물로 바쳐 산 신령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 해 三월 초사흗날에도 역시 큰 사냥을 하게 되었다.

왕은 여러 대신들과 장졸들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활을 쏘며 짐승을 쫓았다. 그런데 왕이 문득 보니 많은 장졸들 틈에 유달리 날쌘 사나이가 있었다.

  말을 달려 짐승을 쫓을 때는 늘 앞장을 섰고 활을 당겨 쏠 때에는 한 번도 빗나가는 법이 없이 짐승의 가슴패기를 꿰어 뚫었다.

  저 사슴보다도 날래고 산돼지보다도 힘찬 사나이가 누군가?

  왕은 좌우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나이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사냥이 끝났다. 그 사나이가 잡은 짐승은 사슴이며 산돼지 같은 값지고 큰 것들 뿐이었고 그 수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다.

  왕은 심히 가상히 여기어 그 사나이를 가까이 불렀다.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네 온달이올시다.

  왕은 크게 놀라는 한편 또 대단히 기뻐했다.

  그런지 얼마 후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대군을 거느리고 요동(遼東) 땅을 쳐들어 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고구려 나라 안은 발칵 뒤집혔다. 평원왕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적군을 맞아 싸우려고 예산(隸山)이라는 산기슭에 진을 쳤다. 마침내 적군이 당도하여 전투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때 고구려군의 한 장수가 성난 호랑이와도 같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혼자서 적군 수백명을 무찌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 호랑이보다 용맹스러운 장수가 누구냐?

  왕은 곁에 있는 장수들에게 물어보았다.

  바로 지난 삼월 초사흗날 사냥 때 가장 많은 짐승을 잡았던 바로 그 온달입니다.

  저게 바로 온달이라구? 과연 내 사위다!

  왕은 마침내 온달에게 대형(大兄)이라는 높은 벼슬을 주었다. 이제 온달은 한낱 거지의 몸으로 공주의 남편이 되었으며 또 높은 벼슬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몇 해가 지나 평원왕이 세상을 떠나고 영양왕( 陽王)이 뒤를 이었다.

  하루는 온달이 새 임금께 아뢰었다.

  신라가 일찍이 우리나라의 한북(漢北) 땅을 빼앗은 탓으로 그 곳 백성들은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있다고 들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고국을 잊지 못한다고 하오니 대왕께서는 저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십시오. 그러면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합니다만 잃어버린 땅을 찾아 대왕의 은혜에 보답하고 불쌍한 백성들을 구해 내겠습니다.

  그대가 그런한 결심이라면 내 어찌 말리겠는가.

  임금은 곧 온달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온달은 자기가 자청해서 나선 일이지만 이 일이 쉽지 않은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갑옷을 입고 말에 높이 올라 앉은 온달은 공주와 작별 인사를 할 때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 길엔 어쩐지 무사하지 않을 것 같소. 그러나 내 이미 마음먹은 계립현과 죽령 땅을 도로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오.

  온달의 말에 공주도 정색을 하고 격려한다.

  옳은 말씀입니다. 사내 대장부로 한 번 태어나서 나라 위해 큰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럽습니까? 부디 뒷일은 염려 마시고 마음껏 싸우세요.

  군사를 거느린 온달은 마침내 길을 떠나 신라 접경으로 향하였다. 그들이 아차성(阿且城=지금의 광나루 워커 힐 근처) 아래에 당도했을 때 드디어 신라의 대군과 마주쳤다. 전투는 벌여졌다. 양편에서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가고 날아왔다.

  온달은 여기서도 맨 앞장을 서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눈부시게 적군을 무찔렀다. 눈부신 온달의 활약에 적의 대군도 마침내 힘이 꺾이는 듯 싶었다.

  그때였따.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 하나가 그만 온달의 가슴을 꿰뚫었다. 잃어버린 조국의 땅을 찾으려고 멀리 쳐들어 온 온달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거둔 것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 고구려 군사들은 온달의 시체를 관에 넣고 장사를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힘센 장정들이 여럿이서 온달의 관을 움직이려 하는데도 꼼짝 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더 늘여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사들은 대단히 난처했다. 장군의 시체를 객지에 버려둘 수도 없고, 무슨 곡절인지 시체는 움직이지 않고, 하는 수 없이 고국에 있는 공주에게 이 사실을 기별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주는 당장에 달려왔다. 그리고는 관을 어루만지며 산 사람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한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일, 이제 모든 일이 끝났습니다. 편안히 돌아가십시오.

  이 말이 끝나자 비로소 온달의 관은 땅에서 떨어져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죽은 후에도 공주의 사랑을 요구하는 절박한 온달의 순정이었던 것이다.

 

 

 

  黃昏의 强者들

  名將 乙支文德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전성기를 한 고개 넘긴 셈이었다. 남으로는 신라가 국력을 길러 북상할 기세를 보였고 그에 따라 백제 역시 자주 침공하여 괴롭히고 있는데 한편 서쪽으로는 수(隋)라는 강대한 세력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중국 대륙은 삼국(三國), 위(魏), 진(晋) 이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 서로 뒤섞여 싸우는 가하면 남북조(南北朝)의 대립으로 분열과 혼란이 극심하더니 서기 五八九년 (高句麗 平原王 三十一年) 수에 의해서 완전히 통일되었다.

  이렇게 되니 고구려와 수나라는 서로 인접하게 되었고, 강대한 이웃나라와 접한 고구려는 항상 불안에 떨게 되었다. 그래서 만일의 경우를 염려한 고구려에서는 병마와 군량을 비축하고 적침에 대비하다가 온달의 처남 격인 영양왕이 즉위한지 아홉 해 되던 해 왕은 친히 말갈(靺鞨)의 군사 만 여명을 거느리고 요서 (遼西 = 滿洲錦州省地方) 지방을 침공했다.

그러나 영주총관 위충(營州總管 韋沖)의 역습을 받아 퇴군하고 말았는데 이것이 고구려 사상 큰 국난인 동시에 최후의 국위를 떨치기도 한 여(麗) 수(隨) 충돌의 발단이 된 것이다.

  고구려의 요서 침공으로 크게 노한 수문제(隨文帝)는 자기의 넷째 아들인 한왕양(漢王陽)에게 수륙 三十만 대군을 주어 고구려를 정복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한왕양은 임유관(臨關)으로 나와 진군하다가 홍수를 만나 군량을 운반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이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쓰러지게 되어 그 해 九월 군사를 거두어 퇴군하고 말았는데 이때 거의 전부의 군사가 죽었다고 한다.

  고구려로서는 뜻하지 않게 큰 화를 모면한 셈이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천재지변으로 요행을 만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나라의 비위를 그 이상 거슬렸다가 다시 침공을 받는 날에는 어떠한 참화를 겪을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 실력을 배양하는데 날까지는 수의 미움을 사지 않게 하자는 국책을 세우고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하는 글을 보냈는데 그 글 속에 [요동 기토 신모(遼東冀土臣某)]라는 말까지 넣을 정도로 자기를 낮추었다.

  수문제는 그 글을 보자 크게 만족하여 이로부터 얼마 동안 여수 양국의 관계는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문제의 아들 양제(陽帝) 때가 되자 다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영양왕 十八년, 양제는 계민(啓民)의 장막에 행차한 일이 있었다. 이때 마침 고구려의 사자가 계민의 처소에 와 있는 것을 보고 양제와 그의 종자들은 고구려의 충성심을 의심하게 되었다.

  특히 수의 황문시랑 배구(黃門侍郞裴矩)는 양제에게 말하기를

  고구려는 원래 한(漢) 진(晋)때부터 한낱 군현으로 우리 중국의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마는 근자에는 우리의 신하가 아니라 따로 독립된 이역으로 행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선제께서는 이를 정벌코자 하셨다가 천재지변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폐하께서 마땅히 공략하시어 귀속시키심이 옳을 줄로 압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고구려의 사자는 계민이 나라를 들어 우리를 받들게 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 모양입니다. 이때를 타서 대국의 위업을 보인다면 먹고 입조(入朝)할 줄로 압니다.

  양제는 그 말을 옳게 여겨 고구려의 사자를 불러 위협했다.

  짐은 계민이 충성을 다하므로 친히 그의 장막까지 왔거니와 그대도 귀국하거든 그대의 왕에게 입조(入朝)하여 의심을 사지 말도록 하라고 전해라. 만약 내조(來朝)치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그대의 국토를 침공하리라.

  그러나 고구려 측에서는 이때 이미 어느 정도 수나라와 맞설 자신이 생겼던지 또는 양제의 말을 한낱 위협으로만 보았던지 그 말을 흘려듣고 오히려 남으로 백제의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하고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공격하는 등 국토확장에 힘을 기울일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수양제는 영양왕 二十三년 정월, 고구려 정벌의 조서를 내리고 그 다음 달 인 二월 친히 백여만 대군을 거느리고 수륙 양면으로 침공하게 되었다. 이때 수양제의 군사는 요수(遼水)에 이르러 물가에 진을 쳤는데 고구려군이 요수를 막고 항전하므로 건너올수가 없었다.

  양제는 하는 수 없이 공부상서 우문술(工部尙書 宇文述)에게 명하여 부교를 내 갈래로 만들고 요수의 서쪽 강변으로 건너가게 놓으려고 했으나 그 부교를 강 건너까지 걸쳐놓아 보니 강변에서 장여(丈餘)나 모자랐다.

  그래서 그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데 이 틈을 타서 고구려 군이 싸움을 걸어왔다. 이것을 보자 수나라 군사 중에 효용을 자처하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물로 뛰어들어 접전했다. 그러나 고구려 군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유리한 지세로 대전하므로 수나라 군사는 강변에 오르지도 못하고 물 속에서 무수히 참살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양제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고 부교를 서쪽 강변으로 끌어올린 다음 다시 소부감 하조(小府監 河稠)에게 다리를 잇도록 명했다.

  하조는 이틀만에 부교를 완성하고 동쪽 강변까지 건너 놓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니 수나라 대군은 노도처럼 부교를 건너 요수 동쪽 강변으로 진격하고 고구려 군은 그만 대패하여 만 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적군은 승세를 타서 요동성으로 진격하고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석달이 지나도록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양제는 여러 장군을 모아놓고 마침내 짜증을 부리에 되었다.

  공등은 스스로 벼슬의 높음과 가세만 믿고 나를 업수히 여기는 것이냐? 내 공등에게 묻거니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죽기를 원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힘을 다해서 싸울 것이냐?

  그러나 아무리 수하 장졸들을 위협해도 전세는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한편 좌익위대장군 내호아(左翊衛大將軍 來護兒)는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패수(浿水)로 들어왔다. 그리고 평양에서 六十리 되는 지경에 이르자 고구려 군을 만나 이를 격파하고 그 승세를 타서 곧장 평양성으로 향하려 했다.

  이때 부총관 주법(副摠官 周法)은 다른 군대를 기다려 합세하여 진격할 것을 진언했지만 초전에 승전을 거두어 기고만장해진 내호아는 그 진언을 듣지 않고 정병 수만명을 뽑아 스스로 거느리고 평양성 밑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평양성을 수비하던 고구려 군은 나곽내(羅郭內)의 공사(空寺)에 군사를 숨겨두었다가 그들의 일부를 내어 거짓으로 패주시키니 내호아는 그들을 쫓아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우선 성중의 재물들을 약탈하느라고 대오를 갖출 겨를이 없었다.

  이것을 보자 고구려 군은 달리 숨겨두었던 군사들을 일제히 일으켜 적군을 격파하니 내호아는 대패하여 겨우 목숨만 건지고 주법 등이 지키고 있는 진영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수만 정병중에서 살아간 자가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구려 측은 용병(用兵)의 묘를 발휘하여 적군을 괴롭혔으나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않고서는 전란을 종식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자면 적군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양왕은 대신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불러 적진에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그 동태를 살펴 오라고 명했다. 을지문덕은 성품이 침착 대담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서 대신으로 군 국의 대사를 도맡고 있는 터라 그의 이름은 멀리 수나라에게까지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양제는 원정 초부터 휘하장군들에게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을 만나면 불문곡직하고 잡아 가둔 다음 보고하도록 하라.

  이렇게 엄명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을지문덕이 진중에 이르러 항복을 청한다는 말을 듣자 우중문(宇仲文)은 즉시 잡아 가둔려 했으나, 위무사 유사룡(慰撫使 劉士龍)이 그의 직책상

  이미 항복한 적장을 학대한다는 것은 대국의 도리가 아니오.

  하고 굳이 말이므로 우중문도 그 말에 귀가 솔깃해서 을지문덕을 그대로 방임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을지문덕은 적의 진중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적군의 형세는 을지문덕이 상상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허약했다. 군량은 부족하고 군졸들은 원로에 극도로 피로해 있었다.

  적의 형세가 이러하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한 을지문덕은 핑계를 대어 적진을 물러 나왔다. 을지문덕이 진영 바깥으로 나가자 적장 우중문은 그제서야 크게 뉘우쳤다. 그리고 양제의 엄명도 생각났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보내어 을지문덕의 뒤를 쫓게 하고

  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속히 돌아와 주기 바라오.

  이런 말을 전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그것이 적의 뒤늦은 술책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진영으로 귀환했다. 을지문덕을 돌려보내자 누구보다 더 불안에 쌓인 것은 적장 우문술(宇文述)이었다. 우문술은 이미 군량이 떨어지게 된데다가 군사들은 피로하고 또 그런 약점을 을지문덕이 남김없이 보고 갔으니 어떤 기습을 당할는지도 모를 일이므로 회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우중문은  우리 十만 대군을 가지고 조그만 적군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대할 수 있겠소?

  하고 강경히 반대했다. 을지문덕을 놓아 준 책임도 느껴서 그랬을 것이다. 우중문의 반대에 우문술도 더 회군을 주장할 근거가 없어서 그 말을 좇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적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군을 공격하게 되었다.

  적군이 굶주림과 피로에 시달리게 된 것을 잘 알게 된 을지문덕은 적군을 더욱 더 피로하게 하여 기진맥진했을 때 한번에 섬멸하려는 전술을 세웠다. 그래서 적군을 만나면 한참 싸우다가 일부러 패한 척 도망을 치기를 일곱 번이나 거듭했다. 이렇게 되니 한때 회군을 주장하던 우문술도 전승에 도취되어

  소국은 역시 별 수 없는 일이외다. 전력을 기울여 적군의 숨통을 끊어버립시다.

  이렇게 양언 하고는 마침내 살수(撒水=淸川江)를 건너 평양성 三十리되는 지경에 산을 의지해서 진을 쳤다. 이렇게 되자 을지문덕은 다시 한번 적을 농락하는 술책을 썼다. 즉 시 한수를 지어 적장 우중문에게 보냈다.

 

  神策克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之.

  (신과 같은 계책은 천문을 다하고,

  기묘한 헤아림은 지리에 통달했도다.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시니,

  바라건대 족함을 알고 그치시오.)

 

  을지문덕의 시를 받아든 우중문은 기고만장해서 너그러운 답서를 써서 고구려 진영으로 보냈다.

  그러자 을지문덕은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거짓으로 항복하는 체하며 이번에는 우문술에게 청했다.

  만일 이대로 회군하신다면 즉시 우리 왕과 함께 황제의 행재소(行在所)를 찾아가 뵙겠습니다.

  이러한 청을 받고 우문술이 피아의 군세를 돌아보니 자기 군졸들은 극도의 굶주림과 피로로 말미암아 이 이상 더 싸울 것 같지 않고 한편 고구려의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해서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므로 마침내 을지문덕이 항복을 청한 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군사를 돌려 퇴군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자 을지문덕은 태도를 돌변하여 미리 퇴로에 숨겨두었던 복병을 일으켜 사방으로 요격했다.

  우문술 등은 또다시 을지문덕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격분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로한 군졸을 이끌고 패주를 거듭하여 그해 七월에 겨우 살수에 이르렀다.

  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였다. 고구려 군은 최후의 맹격을 가한 결과 적의 우군위 장군 신세웅(辛世雄)을 전사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적군은 수습할 길 없이 혼란하여 더 싸울 기력도 없이 앞을 다투어 도망했는데 어찌나 급히 패주 했던지 하룻밤 동안에 四백 五십리를 달려 압록강에 이르렀으며 다시 압록강을 건너 요동 땅에 이르렀을 때에는 처음에 三十만 五천이나 되던 대군이 二천七백 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수나라로서는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그때 입은 손실로 말미암아 국세는 피폐하고 백성들은 동요하여 도적들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군웅은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그래도 양제는 고구려 침공을 단념 못하고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보았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정으로 국내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일어난 이세민(李世民)부자에게 천하를 빼앗기고 마침내 양제는 그의 부하에게 피살되었으니 수나라에 대한 고구려의 항쟁은 결국 수나라를 멸망시켜 중국 역사를 뒤엎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快傑 淵蓋蘇文

  고구려의 국세는 영양왕 때가 큰 고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양왕 二十九년 九월, 왕이 승하하자 그의 이복 아우인 건무(建武)가 즉위했는데 그가 곧 제 二十七대 영류왕이다. 고비에 다다른 고구려의 국운도 영류왕대에 이르자 비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중국대륙에 있어서 수를 멸망시킨 당(唐)은 호시탐탐(虎視耽耽) 고구려를 휘하에 넣으려고 노리고 있었으며 한편 남방의 큰 세력인 신라는 김유신(金庾信)의 국방정책으로 군세가 날로 강성해졌고 김춘추(金春秋)의 외교적 활동으로 나당(羅唐) 양국의 동맹이 바야흐로 맺어지려는 시기였다. 그리고 내부에 있어서는 여러 차례 수의 침공을 겪은 만큼 국정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다.

  이런한 위기를 극복하자면 위대한 지도자의 강력한 영도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터인데 영류왕은 그런 영도자의 자격을 구비하지 못했다.

  고작 한 일이라는 것이 신흥 당나라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꾀하는 정도였고 노자(老子)의 도교를 수입해서 강론케 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이 최고 지도자의 영도력이 약할 때엔 그 다음 가는 위치에 있는 자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수가 많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출현이 바로 그런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이름을 개금(蓋金)이라고도 부르는데 그의 출생연월은 정확치 않으나 고구려 동부(東部) 대인(大人)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모두 다 그 부족의 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 정부의 막리지(莫離支)를 지낸 인물이었다. 막리지란 중국의 병부상서와 중서령을 겸한 관직이었으니 다시말하면 행정과 군사의 수반이었다.

  개소문은 이러한 명문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성품이 호방하고 자질이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엉뚱한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출생부터 신비화하기 위해서  나는 사람의 배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물 속에서 난 사람이야.

  이런 소리를 하며 듣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개소문의 성을 연(淵)씨 또는 천(泉)씨라고 하는데 이것도 다 물 속에서 낳았다는 전설을 낳은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개소문이 十五세 되던 해, 그의 부친 태조(太祚)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부족의 장인 대인의 위를 응당 그가 계승할 일이었지만 부족의 간부들은 그것을 몹시 꺼렸다.

  그것은 개소문의 성격이 지나치게 사납고 잔인하고 격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소문은 남들이 생각하듯이 사납기만한 저돌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사납기는 하되 치밀한 계산과 끈덕진 인내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간부들이 자기를 경원하고 대인의 위를 계승하는데 반대하려는 눈치를 알아채자 그는 태도를 돌변했다. 지난날의 그 사납고 거만한 태도는 어디다 버렸는지 거의 비굴한 정도로 공손한 태도를 취하며 부락의 간부들을 찾아다녔다.

  제가 철이 없어서 한때 사납게 굴고 어른들의 눈밖에 났으니 비록 벼슬은 못하고 천인이 되더라도 원망할 것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대대로 이어온 가문의 영예가 저 하나의 허물로 더럽혀진다면 무슨 낯으로 선조들을 뵙겠습니까? 오늘의 개소문은 지난날의 개소문이 아니오니 부디 노여움을 풀으시고 한 번만 보살펴 주십시오.

  그렇듯 사납던 젊은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간청하니 부족 간부들의 마음도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은 모양일세.

  그렇다면 오죽이나 좋은가. 응당 물려받을 자리를 이을 분인데…

  이렇게 해서 개소문은 겨우 대인의 위를 계승했다. 이때를 계기로 국정에 참여하게 된 개소문은 영류왕 二十五년경에는 고구려 장성(高句麗長城)을 축조하는데 감독관이 되었다.

이 고구려 장성은 당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서 동북으로는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남으로 발해안(渤海岸)에 이르기까지 천여리나 되는 장성(長成)이었다.

  이런 큰 역사는 과단성 있고 통솔력이 강한 그에게는 적임이었다. 이 일을 성공리에 완성하자 그의 위치는 차츰 정계에서 두드려졌으며 마침내는 그의 위세가 여러 부족의 대인들 은 말할 것도 없고 영류왕까지도 능가할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왕과 대인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은밀히 의논한 끝에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사전에 탐지한 개소문은 크게 노했다.

  구더기같은 것들이 감히 누구를 해치려구?

  개소문은 각부의 장졸을 즉시 소집했다. 열병을 하겠으니 모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성남(城南)에 큰 술자리를 베풀고 여러 대인들과 중신들을 불러 열병에 참여케 했다. 개소문에게 어떠한 계책이 있는지 꿈에도 짐작 못한 대인들과 중신들은 모두다 열병장으로 모여들었다.

  열병이 시작되었다. 개소문의 명령일하, 대오정연히 행진하는 장졸들을 바라보며 대인들과 중신들이 새삼 개소문의 실권에 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개소문이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이때까지 일사불란하게 행진하던 장졸들이 일시에 함성을 올리더니 열병하고 있던 대인과 중신들에게 달려들었다. 미리 개소문의 밀명을 받고 있던 장졸들은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참살했으니 그 수가 실로 백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대인과 중신들을 참살한 개소문은 곧 궁중으로 달려갔다. 궁중에는 영류왕이 변변한 호위도 없이 남아 있었다.

  이 어리석은 임금아! 네가 감히 누구를 죽이려고 하느냐?

  개소문은 소리치며 뽑아든 칼로 왕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격정적인 그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왕의 몸을 토막토막 끊은 다음 구렁창에 내버리고 왕의 조카뻘이 되는 장(臧)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그가 곧 고구려 최후의 임금인 제 二十八대 보장왕(寶藏王)이다.

  제 마음대로 왕을 죽이고 새 임금을 세운 개소문은 이제 완전한 독재자로 등장했다. 스스로 관직을 높여 막리지가 되는 한편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홀로 전담했다.

  모도하게 정권을 장악한 자들은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부자연스러운 위세를 부리는 것이 상례이다. 그 점에 있어서도 개소문은 지나칠 만큼 심했다. 항상 몸에는 장검을 다섯 자루나 차고 주위를 위압 했으며 말을 타고 내릴 때에는 대신이나 장군을 땅에 엎드리게하여 발판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밖에 나갈 때에는 대오를 왕보다 더 거창하게 펴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가 지나가기에 앞서서 선도하는 자가 길게 외치면 백성들은 모두 굴 속이나 산골짝으로 몸을 피해야 하므로 그 괴로움이 이만저만하지 않았다고 한다.

  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독재자로소 국력을 전담한다는 정보는 고구려 침공의 명분을 찾고 있던 당태종(唐太宗)에겐 다시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보장왕 二년 윤六월, 당태종은 황족과 중신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개소문은 저희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전담하니 더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런즉 우리의 군력을 들어 정벌하기 어렵지 않으나 우리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것도 마땅치 않으니 내글안,  말갈을 시켜 침공케 할까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그러자 당태종의 장손(長孫) 무기(無忌)가 나서며

  개소문은 스스로 죄가 큰 것을 알고 있으므로 대국의 토벌을 드려워한 나머지 수비를 강화할 것이옵니다. 그러하온 즉 폐하께서는 좀 더 참으심이 마땅하온 줄 아옵니다.

  이렇게 간한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참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고?

  태종이 재차 묻자

  개소문의 성품은 원래 남달리 교만 방자하다고 들었습니다. 대국에서 토벌을 감행하지 않으면 저희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그릇 알고 그 교만 방자한 본성을 드러내어 방비를 소홀히 할 것인 즉 그때를 타서 토벌해도 과히 늦지 않을 줄로 압니다.

  무기가 이렇게 진언하니 태종은 그 말을 따랐다.

  한편 고구려가 당과 맞서고 있을 때 신라는 이면으로 당과 연락을 취하고 당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킬 공작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즉 신라는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군사를 합해서 대국으로 출입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내게 되었으니 대국의 구원을 바라오.

  이렇게 고해 바쳤다. 그래서 당태종은 사농승상 이현장(司農丞相 里玄裝)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정책을 꾸짖었으나 개소문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신라의 변경을 자주 침공했다.  이현장이 귀국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하자 당태종은 마침내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일으켰다.

  보장왕 四년, 당태종은 친히 수륙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 왔는데 수군은 요동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비사성(卑沙城=지금의 大連)을 공략하고 육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백암성(白岩城)을 차례로 함락시킨 다음 마침내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했다.

  이때 개소문은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 등을 파견해서 말갈군과 합세한 다음 안시성을 구원케 했는데, 당태종은 고연수 등의 원군을 고전 끝에 격파하고 총력을 기울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안시성은 원래 험한 산을 의지한 요새일 뿐 아니라 성내의 장졸들은 백전연마의 정병들이었으며 성주는 또한 지용이 겸비한 명 지휘관이었다.

  때로는 성을 넘어 당군을 기습하는가 하면 당군의 깃발이 나타나면 모두들 성 위에 올라서서 함성을 지르며 조롱하기도 했다. 이에 당태종은 크게 노하여 끝내 안성성을 공취 할 생각으로 성 동남쪽에 흙으로 뫼를 쌓아 성벽을 넘어보려는 궁한 계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중에서도 그것을 방관하지는 않았다. 적이 뫼를 한 자 높이면 성벽을 두 자 높이고 적이 열 자 높이면 스무 자를 높이어 대항하니 적군은 그 계책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운제(雲梯), 충거(衝車), 포석( 石)과 같은 성을 공격하는 무기를 써서 성벽을 파괴하려 하면 성중에서는 목책을 세워 굳게 방어했다.

  이렇게 시일을 끌다가 마침내 날씨가 추워지자 풀은 마르고 물은 얼어 인마가 그 이상 머물지러 있기 어럽게 되었고 아울러 식량도 거의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당태종은 하는 수 없이 철군을 단행하게 되었다.

  당군이 철군하기 시작하자 안시성주는 성위에 높이 올라 철군하는 적군을 전송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패전하고 돌아가는 적군을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당태종은 역시 배포가 큰 영웅이었다. 작은 성으로 대군의 공격을 六十여일이나 막아낸 그 용기와 슬기를 크게 찬양하며 비단 백필을 주어 그 뜻을 표시했다고 한다.

  당의 대군을 격퇴한 사실은 개소문은 자만심을 더욱 키웠다. 그는 대국 당도 이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남방에 있는 신라쯤은 어린애처럼 보았다. 치고 싶으면 언제나 치고 말고 싶으면 언제나 마는 태도였다. 이와 같은 방약 무인한 개소문의 태도에 당태종은 재차 원정을 일으키려 했으나 고구려를 정벌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뼈저리게 체험한 그

는 대군으로 일시에 공격하기보다 먼저 적은 군사를 보내어 신경전을 전개해서 고구려측을 피로케 한 다음 대대적으로 공멸할 방침을 세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군을 시켜 해상으로부터 자주 침입했지만 끝내 별 성과를 보지 못하고 당태종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西紀 六四九).

  이와 같이 대국 당의 침략을 좌절시킨 연개소문은 그의 당대엔 강력한 위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가 보장왕 二十五년,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다.

 

 

 

  强者의 아들들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자인 남생이 그의 뒤를 이어 막리지가 되었다.

  그는 일찍이 나이 아홉 살 때에 그 부친의 소임인 선인(先人)이 되었다가 중리소형(中裏小兄)이 되었다가 다시 중리대형(中裏大兄)으로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남생은 또 그 성품이 순후하고 사람을 대하면 말을 잘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새 권력자로서 국정을 살피려고 전국 각처를 돌아다녔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일반이 생각하는 것처럼 변변치 못한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가 나라를 망친 것은 의심이 많고 아우들을 포용하는 힘이 부족한 때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생은 국정을 살피러 떠날 때 그 아우 남건(男建)고 남산(男産)에게 국사를 맡겼다. 이럴 경우 흔히 간사한 무리들이 도당을 만들고 형제간을 이간시키는 수가 많다. 남생이 평양을 떠나자 남건과 남산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은 이런 말을 소근거렸다.

  조심들 하십시오. 막리지 어른은 당신들이 자가를 핍팍하려 한다고 몹시 두려워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 분이 장차 돌아오시면 당신들은 큰 화를 입을 것인 즉 하루 속히 보신책을 강구하도록 하십시오.

  물론 남건과 남산은 처음엔 그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한편 남생에게 아첨하는 무리들도 은밀히 그에게 소근거렸다.

  막리지 어른께서 두 아우님께 국사를 맡기신 건 큰 잘못으로 압니다.

  아니 형이 아우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어째서 잘못이란 말인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형제지간이라도 권력에 탐이 나면 서로 죽여 가면서가지 빼앗는 것이 예로부터 흔히 있는 일인데 장차 서울에 돌아가셔서 맡겼던 권력을 다시 찾으신다면 아우들이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리지 어른이 서울에 돌아가시는 걸 막으로 할 것입니다.

  남생은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의혹의 검은 구름이 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은밀히 심복을 평양에 보내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만 두 아우에게 탄로되고 말았다. 처음엔 아첨하는 무리의 속삭임으로 귀담아 듣지 않았던 두 아우도 형이 자기들을 의심하고 염탐꾼을 보내어 동정을 살피는 것을 알자 크게 분개했다.

  형이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살기 위해서 무슨 수를 써야 하지 않느냐?

  그렇구 말구요.

  두 아우는 의논한 끝에 남생이 보낸 염탐꾼을 잡아 가두는 한편 왕명이라 칭하고 남생을 평양으로 소환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우는 형을 해칠 생각까지는 없었다. 다만 형을 불러 흑백을 가려 보자는 생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의심 많은 남생은 아우들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평양에 가기만 하면 아우들에게 잡혀 죽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형이 끝까지 자기들을 의심하는 태도로 나오자 두 아우는 마침내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특히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남생을 토벌하러 길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듣자 남생은 국내성으로 들어가서 남건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는 한편 그 아들 헌성(獻誠)을 당에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아우와 싸우는데 외세를 빌리려 한 셈이었다.

  당고종은 즉시 남생의 아들 헌성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으로 삼고 계필하력( 苾何力)에게 군사를 주어 구원케 했으므로 남생은 겨우 목숨을 건지고 당에 항복했다. 그러지 않아도 고구려를 멸망시킬 생각이 간절하던 당고종은 그 실권자의 하나인 남생이 투항했으므로 대단히 기뻤다.

  즉시 남생을 평양도행군대총관겸 지절안무대사(平壤道行軍大總管兼 持節安撫大使)를 삼는 한편 당나라 서울에 저택까지 주는 후대를 베풀었다.

  고구려 실권자 형제의 내분과 그 하나인 남생의 투항은 당으로서는 고구려를 징벌할 절호의 명분과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당고종은 즉시 이세적(李世勣)을 주장으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이때 고구려의 내막은 남생 형제의 내분만 있었을뿐 아니라 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淵淨土)가 배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즉 연정토는 고구려가 멀지 않아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十二성 七백六十三호 三천五백四十三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분 속에서도 국권을 쥔 남건은 당군의 침공을 막아 보려고 있는 힘을 다 기울였으나 당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침공해 왔다. 이세적은 보장왕 二十六년 고구려의 서쪽 요새인 신성(新城=지금의 奉天東北)을 공취했고 二十七년에는 부여성(扶餘城)을 비롯해서 요동방면의 여러성을 함락시킨 후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때 이미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신라에서는 왕제 김인문(金仁問)을 시켜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가서 당군과 합류하게 했다.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포위된 평양성은 완전히 고립되어 위급하게 되자 보장왕은 남산등을 시켜 당진(唐陣)에 항복할 뜻을 전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남건은 끝내 굽히지 않고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기도했다.

  당군의 공격은 더욱 치열해졌다. 당병은 마침내 성 위에까지 기어 올라와 성문과 누각에 불을 지르니 불길은 삽시간에 퍼져 궁전과 역대의 보물들을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이 광경을 본 남건은 이제 더 아무런 소망도 없음을 깨닫고 자결하려 했으나 재빨리 침입한 당병에게 잡히어 왕과 왕족 그밖의 중신들과 함께 당나라 서울로 압송되었다. 보장왕 二十七년 (西紀 六六八) 九월이었다.

  이렇게 되어 고주몽이 건국한지 七백五년 二十八대의 왕을 거쳐 고구려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으니 그 멸망의 원인을 남생 형제들의 암투로 보는 측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신라를 중심으로 한 국토통일의 시대적 기운이 그러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후 남생은 조국을 배반했음에도 불고하고 당의 벼슬을 받아 四十六세로 죽을 때까지 무사히 지냈지만 그의 아들 헌성은 당인들의 모략을 받아 역모(逆謀)를 했다는 죄명을 뒤집어 쓰고 이국 땅에서 죽고 말았다.

  고구려편(高句麗篇)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