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이 다카시 박사
아들 마코토를 안고 있는 나가이 부부
병상의 나가이와 두 자녀
‘여기당’의 나가이, 오바 히데오 감독, 영화배우 와카하라 마사오, 쓰카오카 유메지 등과 함께 ‘나가시키의 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십자가 옆의 마리아상. 손상을 입은 채 우라카미 성당 폐허 가운데 서 있었다

 

1. 맏아들 고요

2. 개똥벌레, 눈 그리고 암사자

3. 쿠빌라이 칸, 쓰네 그리고 파스칼

4. 별을 볼 수 없는 쥐

5. 그건 고약한 바람이었지

6. 숨은 그리스도인

7. 나가사키의 종소리

8. 나팔꽃에 맺힌 이슬

9. 고요한 밤 그리고 귀중한 생명

10. 성모 마리아와 창녀

11. ‘위대한 목신은 죽었다’

12. 수위 선생 문하에서

13. 백호주의와 황색 위협

14. 태풍과 우아한 대나무

15. 염불식 기도와 어두운 밤

16. ‘교만한 헤이케는 무너진다’

17. 주인에게 등을 돌린 기계

18. ‘하지만 미도리가 내 곁을 지킬 것이다’

19. 태양도 빛을 잃어버린 날

20. 그리고 비는 독극물로 내렸다

21. 우주 최후의 블랙홀?

22. 말하는 뼈와 새 주문 呪文

23. 정오 그리고 일본은 울었다

24. ‘위로는 우연히 샘솟지 않는다’

25. 텅 빈 오두막의 교훈

26. 울지 않는 소녀

27. 도쿄 문둥이의 노래

28. 곰을 찾아온 파랑새

29. ‘세계의 중심’

30. 벚꽃은 셋째 날 진다

31.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를, 일어날 모든 일에 긍정을’

 

 

 

책머리에

 

이 책은 진지한 독자라면 누구나 쉽사리 손에서 내려놓기 어려운 책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일본의 한 무신론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유럽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하기 200년 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이야기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흔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가이 다카시는 일본 그리스도교 역사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혼신을 다한 헌신과 순교까지도 실천에 옮긴 놀라운 삶의 자취를 남겼다.

나가이는 일본의 고대 종교인 신도 神道가 번성할 무렵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932년 나가사키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이미 과학주의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자신의 신도 신앙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나가이에게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긴 여정의 시작이었으며, 이 여정은 독특하고도 다채로운 일본의 역사, 문화, 종료를 바탕으로 서서히 전개된다.  1930년대 나가이는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서 4년 반이라는 세월을 보낸 후 귀국, 그의 용감한 행적을 기리는 훈장을 받는다. 이때 그의 마음속에는 부상당한 군인이건 일본사람이건 중국 사람이건 또는 다른 나라 사람이건 흘리는 피는 똑같다는 확신이 자라고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하느님을 찾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군복무를 마친 나가이는 대학으로 돌아가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으며 마침내 나가사키 의과대학 방사선과 주임교수가 된다.

그러나 일찍이 엄격한 종교적 가정에서 자란 나가이는 자신의 영적 미래에 관한 한 확실한 목표의식을 가질 수 없었으며 따라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자마자 신부를 찾아간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모리야마 신부였는데, 모리야마 신부는 1870년대 일본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당시 희생당한 순교자의 조카였다.

나가이와 그는 서로 공통점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가이는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한 절차를 문의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온 ‘숨은 그리스도인’ 가문의 후손과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 사건을 다룬 장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접했던 피폭에 관한 어떤 기록보다도 생생하다. 이처럼 끔찍한 사건에 접하면 사람들은 차리리 눈을 감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을 모아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7만2천 명의 처참한 죽음, 동양의 나폴리라고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가던 행복한 시민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읽어 내려간다는 것이 몹시 힘들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가이는 원폭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으며, 자신도 방사능을 너무 많이 쏘인 탓에 치명적인 병에 걸린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에도 ‘핵 벌판’의 잿더미에 오두막을 짓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의 저서는 혼란스러운 전후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천황은 물론 거리의 부랑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이 거룩한 사람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의 짧은 생에 마지막 걸음은 강력하고도 흡인력 있는 것이었다.

 

이 책을 쓴 폴 글린은 21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으며 이 이야기를 쓸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는 나가이의 저서를 일본어로 읽었으며, 그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원폭 생존자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이 책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원폭 투하를 다룬 대부분 책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인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원자핵 분열과 함께 천지를 진동시킨 가공할 포효가 사라진 뒤에 고요한 노래가 들려온다. 이 노래는 복수심에 불타고 원한 맺힌, 성난 사람들을 위한 애도의 노래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행복, 곧 화해, 믿음, 수용, 평화의 노래다.

 

1988년 5월, 콜라로이에서

스탠 아닐

 

 

 

 

그녀의 가문이 250년 동안 박해를 견디면서 지켜온 십자가상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도 그녀의 뒤에서 똑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었는데, 바로 그때 그녀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는 감정의 동요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렇게 기도하면서 앉아 있었다. 아내의 수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목표만 추구해 왔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침착하게 말했다. “우린 결혼 전에, 그리고 당신이 두 번째로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말했지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삶도 죽음도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고요. 당신은 중요한 일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어요. 당신의 수고는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어요.”

 

 

 

 

 

1. 맏아들 고요

 

나가이 다카시는 때묻지 않은 옛 고을 시마네현에서 세상의 빛을 처음 보았다. 시마네현은 히로시마 북동쪽에 있으며 긴 해안선을 따라 동해의 물결이 출렁이는 곳이다. 겨울이면 서북쪽에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불러오는 매서운 바람이 눈보라를 몰고 와 산골짜기마다 눈으로 뒤덮인다. 지도를 펴보면 이 지역이 ‘젊은이여,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라’ 는 부름에 이끌려 이상을 품고 모험을 강행했던 고대 중국과 조선의 개척자들에게 어떻게 천혜의 기착지가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새로 온 이주자들은, 소수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을 뿐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 특히 화산작용에 의해 비옥해진 토양에서 마치 분수처럼 뿜어 나온 녹색의 자연과 마주치게 된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6천만 년 전 일본은 아시아 대륙에서 떨어져 나와 생명체로 태어날 수 없는 배아처럼 바다 밑에 놓여 있었다. 태평양과 동아시아 대륙 밑에 있던 접지판들이 서로를 향해 둔중하게 이동했을 때 해저가 맞물림과 동시에 일본  열도가 물을 뚝뚝 흘리며 솟아올랐던 것이다.

옛 지리책을 보면 일본을 거대한 ‘불고리’의 일부를 형성하는 땅을 묘사하고 있다. ‘불고리’란 남미의 서해안에서 시작하여 멕시코와 캘리포니아를 거쳐 하와이를 통해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인도네시아에서 뉴질랜드까지 뻗어 있는 지진/화산대를 일컫는 말이다. 일본이 바다에서 솟아오르자 도처에서 화산이 분출하여 용암이 쉴새 없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 용암이 식어서 현무암이 되었다. 빙하시대에 흘러온 빙하는 서서히 산기슭까지 이동하여 현무암을 부수고 파헤쳐 새 골짜리를 형성했다. 바람과 폭풍우, 특히 열대지방에서 발생한 저기압이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 땅을 기름지게 하고 골짜기를 풍요롭게 했다.

역사학자들은 일본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점을 신석기 시대로 보고 있다. 시저가 영국을 침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부모가 탄생할 무렵 일본에서 이루어진 문화적 도약은 몇 세기 후에 한 부족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 부족은 영향력 있는 권위를 확립하고 지금의 나라 현 남쪽에 수도를 정했다.

문자로 기록하기 훨씬 전부터 일본 사람들은 다채로운 신도 신화를 창조해 냈다. 시마네 현의 이즈모 다이샤 신사와 그 주변은 수많은 영웅과 여걸들의 성스러운 무대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어린이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 예를 들어 머리가 여덟 개 달린 무시무시한 괴물이 이 지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데, 결투 끝에 한 용감한 신이 그 괴물을 죽였다는 이야기 등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나가이에게 시마네는 성스러운 땅으로 경외심의 대상이었다. 그만큼 이곳은 일본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다.

 

나가이는 시마네현 이즈모시 남쪽, 그리고 미토야읍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걸리는 오지에서 태어났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외지에서 동떨어진 이 촌락에는 열두 채의 집이 있었는데 어떤 집들은 억새풀로 지붕을 이었다. 나가이의 부모와 조부모는 집 근처에 묻혔다. 신도 전통에 따라 세워진 그들의 묘비는 흔히 볼 수 있는 불교식의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강암이 아니라 자연석으로 되어 있다. 신도는 자연을 신성하게 여긴다. 따라서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자연 상태 그대로 유지한다. 지금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나란히 평화롭게 잠들어 있지만, 생전에는 두 분에 관한 에피소드가 얼마나 다채롭게 가족사의 한 장을 장식했던가! 할아버지 나가이 후미타카는 사무라이 후손이다. 그는 ‘다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일본과 중국에서 전해 내려온 약초원을 경영했다. 영리한 농부들은 할아버지가 약초를 이용하여 자연 처방으로 병을 치유하는 것을 보려고 찾아왔고, 그의 약초원은 날로 번창했다.

노보루는 할아버지 후미타카의 첫아들이었다. 이 이름은 ‘평온하다’는 뜻이지만 노보루는 ‘평온함’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할아버지는 학교를 여섯 번이나 옮겨가면서 아들을 바로 잡아 보려 했지만 아들은 제멋대로 행동했고, 결국 모든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절망 끝에 할아버지는 비싼 비용을 지불해 가면서 가정교사를 두었다. 이 아들은 무서운 교장 선생, 생활 지도관, 엄격한 규칙 등을 모두 다 갖춘 여섯 학교에서 교사들을 골탕먹이는 데 성공한 실력자였다. 그런 아들이 가정교사에게 맡겨졌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또 있었을까? 아들은 곧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가정교사를 곤경에 빠뜨렸다. 머지않아 가정교사는 상심했고 급기야 달아나 버렸다. 후미타카는 ‘우아하고 고상한 기품’을 뜻하는 이름에 걸맞게 동양적인 인내의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그는 평온함을 잃지 않고 조용히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그는 큰아들 노보루에게 걸었던 기대를 접고 농사일을 시켰으며, 모든 것이 잘되기만을 바랐다.

그토록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로 말썽만 피우던 반항아기 고분고분해진 것은 히말라야삼나무와 측백나무가 늘어선 산과 논을 오가면서, 그가 매일 해야 했던 일상의 괴롭고 단조로운 일 때문이었을까? 익숙하지 않은 정적 속에서 홀로 힘든 농사일을 하는 동안 노보루는 이른 아침과 저녁 하늘, 좋은 토양, 믿음직한 산의 가치 등을 깨닫게 되었다. 대로는 그를 흠뻑 적신 갑작스러운 폭우라든가 그 밖에 탁 트인 자연 공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삶의 현상을 경험하면서 그는 뜻하지 않은 만족을 느꼈다. 그의 냉소주의는 마치 이른 봄바람에 흩어지는 눈발같이 차츰 사라져 갔다. 드디어 그는 굳은 결심을 하고, 20세 되던 해 약간의 소지품을 챙겨 집을 떠났다. 성서에 나오는 탕자처럼 이 청년은 집을 떠나면서 아버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명예, 가문 그리고 자신의 장래 문제에 대한 책임을 느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수치심에 얼굴마저 달아오름을 느끼며 열심히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집을 떠난 노보루는 새로운 서양의술을 펼치는 의사를 만나 그의 조수가 되었다. 그는 환자를 진료하거나 수술하는 의사 옆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으며, 의사의 처방전에 따라 약을 조제하고 찾아오는 환자를 접수하고 잔심부름을 하는 등 하루 종일 의사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했다. 밤에는 그 친절한 의사가 빌려준 의학서적을 탐독했다. 그는 총명했고, 사시사철 들판에서 고된 농사일을 해왔기에 신체는 강인하고 튼튼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려는 듯 공부에 매달리던 그에게는 지금 강인한 체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진정한 사무라이는 지략이 풍부하고 평온하며, 산에서 자생하는 삼목처럼 꿋꿋하다’며 사무라이 정신을 일깨워 주던 아버지의 훈계도 도움이 되었다.

청년 노보루는 새벽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공부했으며, 서까래에 밧줄을 묶어 한쪽 끝을 올가미로 만들어 턱밑에 걸어두기까지 했다. 졸기라도 하면 그 즉시 밧줄에 걸려 눈을 번쩍 뜨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의사는, 탄탄한 농부의 손을 가진 이 조수가 기회 있을 때마다 의학을 공부하고 환자를 돌볼 수 있도록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거친 두 손은 서서히 부드러워졌고 의학서적에 나와 있는 도해를 베기는 일이나 환자의 복부를 진찰하든데도 숙련되어 갔다. 한때 그토록 공부를 싫어했던 소년이 이제는 공부에 걸신들린 청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는 장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질병과 죽음이라는 인류의 적과 싸우게 될 자신의 미래를 소중하게 그려보았다.

 

노보루는 25세 때 메이지 정부 보건성에서 관장하는 의사고시를 치렀고 마침내 시험에 무난히 합격했다. 1904년의 일이었다. 양피지로 된 의사면허증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권과도 같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사실 아들이 집을 떠난 뒤 아버지는 한번도 노보루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았고 아침마다 동이 터올 무렵 정원에 나가 동쪽을 향해 절을 했다. 그에게 복된 삶을 가져다 준 태양과 모든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 나서 노보루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되고 또 언젠가 집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날마다 기원했던 것이다.

이제 아버지에겐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아들이 그 지역 병원에서 의사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새로운 평판을 얻는 것을 3년 동안 자랑스럽게 지켜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노보루의 신부감을 고를 때가 왔다.

중매쟁이는 그의 신부감으로 쓰네라는 아가씨를 소개했다. 중매쟁이는 이 젊은이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쓰네 역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그녀의 담대한 기질 또한 의사 노보루에 못지않았다. 한 번은 집에 도둑이 들어 10대 아가씨 쓰네가 혼자 자고 있는 방에 침입한 적이 있다. 도둑은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흉기를 휘두르며 소리지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차분한 태도로 도둑을 안심시켰다. 도둑이 돈 있는 곳을 대라고 하지 그녀는 일어나 공손히 인사하고 나서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먼저 화장실이 급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나서 그 자리를 살며시 빠져 나갔다. 도둑은 이 예기치 못한 행동에 순간 당황했으나 흉기를 바짝 들이대고 위협하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쏜살같이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나무빗장을 걸어 잠갔다. 사태는 도둑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도둑을 돈궤가 있는 곳을 안내했다. 그리고 재빨리 돈을 꺼내 세더니 이것이 전부라며 건넸다. 바로 다음날 경찰은 도둑을 잡았다. 그녀의 기지로 쉽게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립스틱이 묻은 돈을 찾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그녀는 입술에 바른 립스틱을 손가락에 문질러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연로한 한의사 후미타카는 독실한 신도 신자로서 다이샤 신도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수많은 신들과 그 사제 앞에서 엄숙하게 거행된 신도식 혼례식에서 아들과 쓰네가 술잔을 교환했을 때 그는 참으로 기뻤다.

이듬해 쓰네가 극심한 산고에 시달리고 있을 때 젊은 의사 남편은 왕진을 가고 없었다. 쓰네의 고통은 점점 심해져 급기야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기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초조한 산모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마침내 쓰네를 구완하던 의사의 입에서 “아기의 머리를 압착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라는 끔찍한 말이 튀어나왔다. 극심한 고통과 불안으로 쓰네의 목소리는 바싹 마르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됩니다. 우리 아기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다. 그때는 얼굴이 온통 새빨갛고 울음소리도 우렁찬 사내아기가 그를 맞이했다. 이 젊은 의사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아기의 큰 머리였다. 하마터면 압착될 뻔했던 그 큰 머리는 훗날 모자가게에서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었다. 젊은 부모가 할아버지의 함자를 본떠서 아기 이름을 ‘고상한 기품’을 뜻하는 다카시라고 지었을 때 연로한 할아버지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아들 부부와 함께 신사에 참배한 할아버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할아버지는 자신의 존재를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선조들의 축적된 신뢰와 희망을 물려받은 후손으로 이해했다. 조상들의 용기와 희생이 밑거름이 되어 자신을 있게 했던, 선조들의 후예로 이해했다. 한때 맏아들 노보루가 조상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전통과 기대를 저버리는 듯한 행동을 했을 때 얼마나 상심했던가? 이제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얼마 후 할아버지는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매우 만족한 삶을 마쳤다. 그때가 1910년이었다.

 

 

 

2. 개똥벌레, 눈 그리고 암사자

 

1550년경부터 유럽 사람들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교역에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1600년대 초 도쿠가와 쇼군은 그 유명한 추방령을 선포했고, 유럽 사람들이 일본에 들어오는 것을 금했다. 서양에 간 일본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유럽 사람이 발각되기만 하면 처형될 운명에 놓여 있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인도, 필리핀, 멕시코 같은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문을 굳게 닫아버렸던 것이다.

1839-42년에 일어난 아편전쟁 때 일본 사람들은 무겁게 드리운 덧문 사이로 중국의 상황을 예의 주시했으며, 거대한 중국이 유럽의 현대식 병기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지난날 빗장을 굳게 걸어 잠갔던 중국으로 서양 사람들이 물밀듯 몰려들었으며 불평등한 교역상의 이권을 챙겼다. 1853년에는 미 해군 페리 제독이 무시무시한 함대를 앞세우고 일본 앞바다에 나타났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권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겁에 질린 막부의 한 장군이 요코하마라는 작은 마을에서 달갑지 않은 조약에 조인했다. 서구의 근대화에 대한 초기 저항이 주춤해지자 일본은 서구의 문명을 배우고 익히는 데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결단코 중국과 같은 굴욕을 당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과학시대로 진입하기 위해서 도시마다 속속 산업화되고, 기차와 증기선이 여행과 교역을 가속화시켰으며, 모든 국민을 위한 의무교육제도가 수립되고, 대학이 창설되었다. 사무라이 계층은 더 이상 칼을 차고 거리를 활보할 수 없게 되었지만, 때마침 징병제도에 의해 군대가 조직되었으므로 사무라이들은 새로 조직된 육군과 해군에서 장군과 제독이 되었다. 한편 사무라이 가운데는 유력한 정치가, 실업가 그리고 재계의 거물이 된 이들도 있었다.

페리 제독에게 항복한 지 41년이 지난 1894년, 일본은 식민지 약탈이라는 서양 놀이에 가담할 태세를 갖추었다. 일본은 조선을 집어삼킬 목적으로 중국과 싸워 이겼다.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영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동맹국 조약을 맺음으로써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러시아에 진입하여 러시아 황제의 해군을 격퇴시키고 평화협정을 맺도록 강요함으로써 서방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로써 일본 국민들은 승리에 도취되었으며 메이지 정부가 설정한 목표, 곧 선진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서구 수준으로 일본을 끌어올리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의사 나가이 노보루와 부인 쓰네는 보수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국가의 부름에 응했으며 미토야 주변 골짜기마다 찾아 다니면서 서양 의술을 펼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는 일본이 러시아를 침공한 지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맏아들 다카시가 태어난 뒤로 네 자녀가 태어났다. 시골에서 개업한 이 개척자는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소작농이 대부분인 농부들은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내고 나면 치료비 낼 돈이 없었는데 이 부부는 그들에게 독촉하는 법이 없었다.

시마네에 엄동설한이 닥치고 집집마다 눈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계절이 되면 의사 가족의 삶은 더욱더 힘들었다. 눈이라도 내리는 겨울 밤, 왕진 환자가 생기면 쓰네는 남편에게 두꺼운 옷을 입히고 현관 층계에 앉게 한 후 무릎까지 오는 오는 장화에 새끼줄을 친친 감아주었다. 다정한 인사로 남편을 배웅한 그녀는 남편이 진료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정신 없이 일에 몰두했다. 멀리서 ‘어이’ 하는 목소리가 겨울 밤공기를 가르기가 무섭게 그녀는 등불을 켜 들고 달려나가 남편을 맞으며 왕진가방을 받아 들었다. 집에 들어오는 즉시 남편의 옷에 묻은 눈을 털어주고 현관 층계에 앉힌 후 새끼줄을 풀고 장화를 벗겨주었다. 남편이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거운 목욕통에서 나오면 쓰네는 부엌으로 안내해 계란을 띄운 따끈한 사케 (일본청주)를 건넸다.

쓰네는 무엇이든 빨리 익혔으며 남편의 가장 유능한 조수가 되었다. 큰아들 다카시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아버지가 머리를 맞대고 딱딱하고 어려운 의학서적을 함께 읽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아버지는 독일 의학서적에 삽입된 그림을 보면서 어머니에게 해부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다카시는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행복하게 책을 보는 광경은 어린 다카시에게 ‘공부란 밥 먹는 일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즐거운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훗날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연구 논물을 쓰면서 그는 유년시절의 이 ‘초가지붕 대학교’에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성인이 된 다카시는 어머니가 억지로 공부를 시킨 기억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자연스럽게 싹트고 꽃피도록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어떤 때는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의 악의 없는 장난이나 우스꽝스러운 행동 같은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라도 손윗사람에게 무례하게 굴면 그때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한 번은 어린 다카시가 어머니에게 말대꾸를 했다가 한겨울에 쫓겨난 일이 있다.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홀랑 벗긴 채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고 잇는 아이를 베란다로 끌고 가서 문을 열고는 2미터나 쌓인 눈 위로 던져버렸다. 이 어미사자는 버릇없는 자식은 키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또 즐겨 하는 이야기 가운데 ‘사랑하는 자식은 멀리 여행을 떠나 보내라’는 말이 있다. 부모의 과잉보호는 미성숙한 아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부모는 다카시를 마쓰에시 명문 중학교에 보내 입학시험을 치르게 했다. 다카시는 시험에 합격했고, 아름다운 골자기 언덕 위 초가집에서 누렸던 소박한 행복과 일찌감치 작별을 했다. 1920년 그의 나이 12세 때였다.

다카시는 마쓰에시에 있는 친척집에서 살았다. 당시 근대화가 막 이루어지던 도시 중 하나였던 마쓰에시에서, 새 세상을 접하게 된 다카시는 모든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마쓰에 성벽 근처에는 최근까지 이곳에 살았던 한 유명한 서양인의 집이 있었다. 다카시는 이제껏 서양 사람을 본 적이 없었는데 마쓰에의 친척들 말로는 라프카디오 헌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다. 헌은 일본어를 완전히 터득했을 뿐 아니라 일본 고전문학을 읽었으며 그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으로 일본을 서양에 알리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시골 소년 다카시는, 일본 문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문화교류에 기여한 헌의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자기도 언젠가 이와 비슷한 일을 하고 싶었다. 물론 가끔 고향 생각도 났다. 그러나 그리움에 잠겨 멍청하게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 자기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도시 소년들을 따라잡으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평온함’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다카시의 아버지는 학교를 전전하는 동안 급우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카시가 체육시간만 되면 급우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의 커다란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뜀틀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지만 넘지 못하고 부딪치기 일쑤였고, 평행봉을 잡고 비장한 각오로 얼굴까지 찡그려 가면서 애를 써보지만,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것이다. 야구도 해보았지만 어느 포지션을 맡든지 참패를 당했다. 급우들은 다카시를 다이꽁이라고 불렀다. 다이꽁은 크기만 할 뿐 쓸모가 없는 일본 무다.

나가이 다카시는 당시 마쓰에 고등학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새로운 서구식 사고방식과 과학의 물결에 휩쓸렸다. 180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은 교사들 사이에 무신론이 팽배하던 시대였다. 서방세계에서 들어온 흥미진진한 과학적 사고에는 무신론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다윈이 자연의 존재법칙을 증명해 냈고 고집 센 무신론자요 사전에 ‘불가지론자’라는 단어를 수록한 장본인인 토머스 헉슬리가 모든 종교를 역사의 쓰레기더미에 버렸다고 나가이의 과학 선생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가이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어 있었다. 바위처럼 견고한 현실로 인도하는 유일한 과학만이 미래의 길이었다. 그는 장차 의과대학에 가서 대학의 가르침을 남김없이 흡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서 일할 꿈을 갖고 있었다. 부모와 함께 훌륭한 의사 가문의 본보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가이의 마음을 자극한 것은 과학만이 아니었다. 그는 프란츠 슈베르트 같은 독일 낭만파 음악가들의 풍요롭고 모호하며, 때로는 마음을 찢을 듯이 격렬한 음악에도 감동을 받았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였던 낭만주의자 나쓰메 소세키의 <진실한 마음>을 읽었다. 이 책에 묘사된 고결한 절망감으로 인해 그는 새로운 과학시대가 도래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모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부딪친 인간 소외 문제에 역점을 둔 이 책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주인공이 자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후 다른 소설가들의 작품에서 자살이 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가이는 이 책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몹시 혼란스러워했지만 불편한 심기를 잠시 접어두고 대학입학시험 준비에 전념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에 합격한 나가이는 유명한 도쿄 제국대학교나 교토 제국대학에 지원했더라도 무난히 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가이는 지명도가 훨씬 떨어지는 나가사키 대학교를 선택했다. 만일 그의 부모가 장차 나가사키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들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아들의 길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상신들에게 두 손 모아 절할 때, 그리고 의학공부를 위해서 아들을 따뜻한 남쪽지방으로 보낼 대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감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3. 쿠빌라이 칸, 쓰네 그리고 파스칼

 

대학생이 된 나가이는 금속제 단추가 달린 검정 교복을 입으면 기분이 좋았는데, 마치 자신이 독일 대학생 같았기 때문이다. 1870년대 들어 메이지 정부는 서구 여러 나라 제도 중에서 좋아 보이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도입했다. 해군의 발전을 위해서는 영국의 모델을 따왔으며, 교육제도는 프러시아 방식을 도입했다. 일본인들은 강인하고 조직적이며 질서를 존중하는 등 여러 면에서 독일인들과 비슷했다. 특히 일본인들은 정말하고도 철저한 독일 의료제도를 선호했으므로 젊은 나가이는 대학에서 독일어로 된 의학서적으로 공부하고 독일의 의료기술을 배우게 될 것이다.

나가사키 의과대학은 여러 동의 흰색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곤파라 산 기슭에 세워졌기 대문에 넓게 펼쳐진 북쪽 외곽지역의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서쪽으로는 햇빛에 반작이는 나가사키만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너머로 마치 곤피라 산과 대칭을 이루듯 이나사 산이 녹색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학교에서 500미터 떨어진 북쪽에는 5천 명의 신자가 한꺼번에 미사를 드릴 수 잇는 거대한 붉은 벽돌 성당이 우뚝 서 있었다. 성당의 위용과 하루에 세 번씩 골수까지 파고드는 듯한 삼종기도 종소리는 나가이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짜증스럽게도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일본 사람들이 불합리한 신도의 신들을 믿는 것도 한심한데, 그것도 부족하여 외국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화가 치밀었다. 훗날 우라카미 성당이 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 당시는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대학 병원은 대학에서 450여 미터 남쪽에 있었다. 그는 대학병원으로 가서 3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마쓰야마와 우라카미 교외 전경을 내려다보았을 때 놀랍게도 그의 눈앞에는 모두 똑같은, 차분한 잿빛 기와지붕이 끝없이 이어져 고요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4월 신학기를 맞아 나가이는 아열대 지방인 나가사키의 봄을 맞아 일제히 피어난 각양각색의 꽃들을 볼 수 있어 참으로 기뻤다. 대학에서 첫 강의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수업시간에, 교수는 학생들에게 시체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제군들, 이것이 우리의 연구 대상인 사람이다. 신체의 각 부분을 지닌 몸이야. 말하자면 자네들이 관찰하고 무게를 달고 검사하고 측량할 물체지. 그리고 이것이 사람의 전부다.” 나가이는 인간의 영적 속성을 부정하는 이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나가이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틀린 말이다. 그는 열렬한 과학 신봉자로서 과학이야말로 이제까지 인간의 발달을 저해했던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굳게 믿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아버지가 30년 전에 보여주었던 바로 그 혼신의 열정으로 공부에 임했다. 나가이는 또한 ‘인간성’을 믿었다. 긴 암흑시대의 안개를 모두 거두어 버린 과학 덕택에 드디어 인간이라는 종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삶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인간 종족의 엄청난 미래를 위해서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마침내 일본을 믿었다.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일본 고정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일본 역사와 문화의 깊이와 넓이에 대하여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것이다. 나가이는 갈수록 경외심을 느끼며 <만요슈(만엽집)>를 탐독했다. <만요슈>는 4,500여 수의 작품을 집대성해 놓은 시집으로 대부분 7세기 후반과 8세기 전반에 걸쳐 씌어진 것이다. 어떤 민족문학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만요슈>의 시작품은 신선하고 서정성이 뛰어나며 일본만이 갖고 있는 특성을 잘 드러낸다. 이 시집의 우수성과 독창성은 <만요슈> 저자 중 많은 이들이 낮은 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태생이 천한 민중, 교육 수준이 매우 낮은 변방 보초와 농부들, 떠돌이 음유시인들, 무명의 도시 거주자들이 천황, 황후, 귀족 그리고 궁중 사무라이들과 나란히 <만요슈> 시인의 대열에 끼여있는 것이다. 일본 민족을 대표하는 최초의 문학작품이 시라는 사실은 나가이로 하여금 일본적인 기질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젊은 대학생 나가이는 <만요슈>를 일종의 성스러운 글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만요슈>를 위시하여 여러 형식의 일본 전통시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그렇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자주 그의 글에 등장한다.

나가사키 의과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후 나가이는 의대 교수이자 저명한 시인인 사이토 모키치가 창립한 시 동아리에 들어갔다. 일본에서는 과학자, 정치가, 장군 또는 재봉사 같은 직업에 종사하면서 시인으로 성공한 예가 흔히 있다.

나가이가 나가사키 의과대학에 입학한 때는 1928년 4월이었다. 일본의 거대 은행들이 도산하여 그 충격이 온 나라로 확산되어 마침내 부모가 사는 시골의 평화스러운 골짜기까지 미치던 때였다. 1929년엔 전세계가 경제공황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 이전까지 일본의 산업은 날로 확장되었으나 위기에 빠진 몇 년 사이에 서양에서는 일본 수출품목에 50퍼센트까지 중과세를 부과했고 이로써 수출에 의존하던 일본 경제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특히 견직물 가격 추락은 농부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의료비를 내지 못해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의사인 나가이 노보루와 그 부인에게 간청하는 시골 환자들의 수효는 점점 늘어만 갔다. 나가이 노보루는 병원을 운영하는 틈틈이 집에서 괘 먼 곳에 있는 다른 병원에 가서 일을 함으로써 수지 균형을 맞추었다. 자연히 그의 식사시간과 취침시간은 불규칙하게 되었고, 결혼생활에서 처음으로 의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경제공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하지만 나가이 노보루 의사부부는 의과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매달 적정한 생활비를 아들에게 송금했으며,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오직 학업에만 전념할 것을 당부했고, 또한 아들이 시에 대하여 점점 흥미를 느끼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아들은 더욱 열심히 역사와 문화를 공부했으며, 동시에 민족에 대한 자긍심도 높아졌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역사를 특징짓는 핵심적인 요소는 열렬한 애국심이다. 또한 애국심은 그렇게도 많이 회자되는 일본의 동질성과 일본식 집단 역학을 가능하게 하는 구심점이기도 했다. 나가이 역시 일본 전통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갔다. 다음 사건은 그의 애국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하겠다.

언젠가 나가이는 방학을 이용하여 후쿠오카시에 위치한 하카타 항구를 탐방했다. 그는 책을 통해 하카타가 13세기 적군에게 포위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700년 된 유적을 집접 보고 또한 결사 항전으로, 호언장담하던 쿠빌리아 칸의 군대를 격퇴시킴으로써 성지가 된 땅을 밟아보고 싶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인 이 몽골 황제는 1264년 북경에 유안 왕조를 건립했다. 칭기즈 칸 시대 이래 몽골인들은 닥치는 대로 중앙 아시아, 러시아 남부 그리고 극동의 많은 지역을 휩쓸었다. 저 유명한 몽골 기병대는 헝가리와 아드리아해에 이르는 슐레지엔 (유럽 중동부지방으로 현재 폴란드와 체코령으로 나누어 있음 – 역주) 전 지역에서 앞을 가로막는 모든 병사의 목을 베었다.  칭기즈 칸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의 한 사람이었다만 손자 쿠빌라이도 그에 못지않은 강력한 정복자였다. 그의 명성만 듣고도 두려움에 떨 거라고 생각한 쿠빌라이 칸은 일본에 사절단을 보내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요청했다.

일본인들은 사절단으로 온 사람들을 지체 없이 처형해 버렸다. 이 모욕적인 행동에 분노한 쿠빌라이는 중국과 조선의 선박을 징발하여 무서운 침략군을 조직했다. 200킬로미터 동쪽에 있는 하카타만에 이르는 좁은 해협을 건너기 위해서였다. 몽골군은 곧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을 점령하고 하카타에 상륙했다. 그러나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면서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 몽골 장군은 아군 함대가 폭풍에 파손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조선으로 되돌아갔다가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려 재 침략하기로 결심했다. 몽골군은 일본군의 필사적인 임전태세에 대해 모르지 않았지만, 이제 하카타 항구와 그 주변 땅의 형세를 알게 되었으므로 다음 전투에서는 이 조그만 사무라이 군대를 전멸시킬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한편 일본은 또다시 맹공격해 올 것에 대비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가마쿠라 군지휘부, 교토 황궁, 신도 신자들 그리고 불교 사원이 총단결하여 한마음으로 국가의 운명을 놓고 기원했다. 하나의 메시지가 방방곡곡에 전해졌다. 일본은 성스럽게 보존되어야 하며, 미개한 유목민의 떼거리인 몽골과의 전투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망해 마지않을 일생일대의 영예로운 일이었다. 하카타만 주변에는 몽골 기병대를 저지할 목적으로 3미터 높이의 돌담을 쌓았다.

1271년 6월, 몽골은 당시로서는 역사상 가장 대규모 해전이었던 이 침략전쟁을 위해 15만 대군을 중국과 조선 선박에 태웠다. 6월 23일 몽골 함대가 출현하자마자 바다에 정박해 있던 일본 선박이 성난 벌떼처럼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몽골군은 재빨리 해안에서 떨어진 섬들을 점령하여 남자란 남자는 모조리 죽였다. 여자들은 닥치는대로 폭행하고, 손목에 구멍을 뚫은 다음 밧줄에 꿰어 산 채로 뱃머리에 매달았다. 하카타만 해안과 모래언덕에서 비장한 각오로 몽골군을 기다리고 있던 사무라이들. 그들의 아내와 딸들 앞에서 서서히 다가오던 불행한 운명을 이보다 더 분명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몽골군이 드디어 하카타만에 상륙했고 사무라이들은 그들을 막아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 거대한 무리를 향해 돌격했다. 6월 23일부터 8월 14일까지 일본군은 과연 몽골군을 잘 버텨내고 있었다. 16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돌담에 의지해 일본군은 무시무시한 몽골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몽골군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밀어닥쳤지만 일본군의 저지선을 뚫리지 않았다. 하지만 우수한 장비와 기술로 무장한 몽골군을 맨손과 불굴의 용기만으로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겠는가?

8월 14일 밤, 남서쪽 하늘에 마음을 설레게 하는 징조가 나타났다. 바로 다음날인 8월 15일 태풍이 하카타만을 강타했고, 육중한 몽골 함대가 태풍에 산산조각 난 채 어지럽게 북쪽 반도에 쌓였을 때 사무라이들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렀다. 8월 17일 아침이 되자 고요한 바다 위에 눈부신 태양이 빛났고 일본군 앞에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몽골 함대로 어둠에 짙게 드리웠던 하카타만은 활짝 개었다. 적의 함대는 바다에 가라앉거나 산산조각 나 수평선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일본 지도자들은 환호하는 국민들에게 이 태풍은 예사 바람이 아니라 ‘신풍’이라고 말했다. 일본 민중은 이 사건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은 결코 침공할 수 없는 나라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젊은 나가이는 경건한 마음으로 3미터 돌담의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그는 과학을 믿은 무신론자이긴 했지만 ‘일본 정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가이는 나라의 미래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안고 대학의 평화로운 강의실과 실험실로 돌아왔다. 그는 공부를 잘 했고 대학 농구팀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다. 마침내 그가 할 수 있는 운동경기를 찾아낸 것이다. 171센티미터에 71킬로그램인 그는 동급생들보다 큰 편이었다. 그의 포지션은 포워드였는데, 응원단은 그에게 담장이라는 기분 좋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가 속한 농구팀은 그 해에 일본 서부지역에서 우승하고 또한 전국 타이틀전에서 랭킹 3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나가이는 젊은 간호사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으며 그는 이것이 싫지 않았다. 그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군국주의자 가운데 누가 스타로 부상하든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선창가 술집에서는 제법 알려진 인물이었으며, 가끔 동급생들과 함께 사케를 엄청나게 마시곤 했기 때문에 그의 학과에서 술이 가장 세다는 평을 들었다.

대학병원 복도를 걸어가면서 나가이는 공기 중에 배어 있는 소독약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마치 항해하는 선장이 바다의 독특한 냄새에 익숙한 것처럼 말이다. 그랬다. 그는 자신이 마치 훈련중인 선장 같았다. 학업을 2년만 더하면 그는 의사가 되어 간호사들과 환자들의 존경을 받으며 청진기를 목에 걸고 병원 복도를 활보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의 두 손으로 사람의 생명을 다루고 자신의 판단과 전문지식과 기술로 환자의 생명을 구하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결핵에 관한 책을 반환하기 위해서 결행 병동으로 갔다. 급우들은 그가 책을 너무 많이 읽는다며 놀렸지만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집으로 오라’는 아버지의 전보였다. 나가이는 불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짐을 싸면서도 꼭 필요한 책 몇 권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북행 열차에 몸을 싣고 차창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줄곧 어머니에 대한 염려와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 즈음 휴일을 맞아 집에 갔을 때 어머니의 기력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일부러 말을 걸어가며 어머니의 원기를 북돋우려 애썼다. 어머니는 웃으면서 아들이 실습할 환자를 찾아 나선 모양이라고 농담을 했으나 이내 화제를 돌렸다. 자신의 삶에서 그러게도 중요했던 어머니와 관련된 어떤 것을 생각해도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아버지는 현관에서 그를 맞았다. 어머니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가이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머니는 의식은 있었지만 극도로 허약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맏아들을 알아보았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줄곧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나가이는 신발을 벗고 다가앉아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는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가신의 눈을 응시하는 아몬드 모양의 검은 눈에 비친 어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과 작별인사를 할 때까지 뇌출혈의 마지막 파괴력을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듯했다. 몇 분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훗날 그는 당신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어머니의 머리맡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숨을 쉬고 있었다. 잠시 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지금까지 고수해 오던 생각의 틀을 단번에 허물어뜨렸다. 나를 세상에 내보내고 키워주신 어머니, 나에 대한 사랑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은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에게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눈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네 어미는 이제 죽는다. 하지만 어미의 살아 있는 영이 언제나 사랑하는 다카시 곁에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영혼 따위는 없다고 굳게 믿고 있던 내게 어머니는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영혼은 육신이 죽은 후에도 산다는 것을 어머니의 눈이 말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직관, 확신을 가져다 주는 직관에 의해서 가능하다.”

고등학교 졸업반 이후 나가이에겐 자연과학만이 진리 추구를 위한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이제 그는 어머니의 영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 비과학적 ‘직관’으로 인해 당혹스러웠다. 이것이 선 禪의 세계에서 깨달음이라고 일컫는, 신뢰할 만하고 부인할 수 없는 경험, ‘존재의 문제를 단칼에 쪼개는 번득이는 칼’ 처럼 섬광처럼 찾아온다는 바로 그 경험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간절한 희망이 투사된 무의식 세계의 속임수였던 것일까?  그는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혜’를 중시해 온 현자들의 오랜 전통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매일 대하는 수많은 한자들 안에 인간의 감성이 지성을 능가한다는 옛 사람의 견해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지혜 智慧’ 라는 한자는 각각 ‘지성’과 ‘감성’을 뜻하는 두 개의 한자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에 ‘지식 知識’은 ‘지성’과 ‘베틀’의 합성문자이다.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지성보다 더 심오한 감성의 차원을 다루는 동안 영리한 사람들은 단지 신속한 재치로 지적 논의를 짜나간다는 뜻일까? 또 다른 예로 ‘듣다’는 뜻을 나타내는 문자에도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소리를 듣는다는 단어 ‘문 聞’으로 그 안에 ‘귀 耳’를 나타내는 글자가 포함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소리 이전의 소리를 듣는다는 단어 ‘청 聽’으로 ‘귀’와 ‘가슴’을 결합시킨 한자로 되어 있다. 나가이는 이제까지 ‘가슴 心’ 없이 귀로만 듣고 이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고등학교 문학수업 시간에 나가이는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한 문장에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17세기 프랑스인은 이렇게 썼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 이 말은 어딘지 모르게 깊은 공명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선문답(禪問答 필사주)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파스칼의 문체를 현대 프랑스 산문의 표본이라고 설명했고 시인이자 과학자였던 그를 매혹적인 인물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가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나가사키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또다시 파스칼을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세척기(주사기) 발명가로서였다. 파스칼은 기압계도 발명했으며, 백과사전을 통해 17세기를 주도한 인물인 동시에 일종의 ‘신비가’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팡세>를 주요 저서로 특별히 소개하고 있어 나가이는 즉시 한 권을 구입했다. 아버지의 전보를 받고 급히 집을 나설 때 챙겨 넣었던 몇 권의 책 가운데 <팡세>도 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시신을 땅에 묻고 나서 극도의 슬픔에 빠진 나가이는 나가사키를 행해 집을 나섰다. 어머니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배를 탄 것이다. 자연도 그의 상실감을 아는 듯, 잿빛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증기선 갑판에서 그는 <팡세>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의 새로운 인생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4. 별을 볼 수 없는 쥐

 

<팡세>는 과학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이 책은 형이상학적 실재를 추구하는 파스칼의 정신적 여정을 기록한 일종의 일기다. 이 책의 많은 부분, 예컨대 은총, 실낙원, 구원 같은 어휘는 나가이를 당황하게 했으며, 생소한 성서 인용문이라든지 서양식 은유와 역사적 암시 때문에 그는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가이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무엇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파스칼이 놀랍고도 중요한 비전의 소유자라는 암시를 받았다.

나가사키 대학교 교수들과 달리 파스칼은 인간 이성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 프랑스인은 이성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가차없이 경멸했다. 인간은 잠잘 때 꿈을 꾸고 환상의 세계를 창조한다.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이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성이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나가이도 알고 있었듯이 위대한 동양 사상가 가운데는 철학을 ‘꿈에 관한 꿈’이라고 여기고 ‘실재’란 단지 ‘망상’일 뿐이라고 설파한 이들도 있었다.

파스칼에 의하면 이성에 접근하는 두 가지 그릇된 태도가 있다. 그 하나는 이성을 과신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태도는 종종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회의론에 빠지게 한다. 다른 하나는 게으름이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스스로 어리석음에 빠지는 태도다. 이 두 함정을 피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진리 탐구를 회피한다면 우리는 ‘일종의 직무 유기자’가 되는 것이다. 파스칼은 계속한다. “인간 이성으로는 최상의 객관적인 실재에 도달할 수 없으며, 다만 저급한 과학적 진리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단순한 과학적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한, 더 높은 진리는 지혜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파악되기보다는 주어진다. 이성으로 파악되는 과학적 진리와는 달리 더 높은 진리는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나가이는 불교를 통해서 ‘마음의 눈’이라는 표현에 익숙해 있었다. 탱화나 불상을 보면 석가모니의 이마 한가운데 보석이 박혀 있는데, 이는 단순히 육안으로 보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성보다 더 높은 질서에 대한 파스칼의 견해는 불교의 지혜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음은 이성이 전혀 알지 못하는 근거를 갖고 있다’ 라고 파스칼은 덧붙인다.

나가이는 책을 덮고 갈매기들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불현듯 시장기를 느낀 그는 점심 도시락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팡세>에서 읽은 여러 구절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왜일까? 그것은 동양적 사고방식과 너무 동떨어진 사고였기 때문일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양 철학과 종교에 대해 낯설어한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여행하던 중 난생 처음 서양식 아침식사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것이 어색해 식사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아침식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박과 국이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무언가 빠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서양 음식에 익숙할 뿐 아니라 간단한 서양식 아침식사를 즐겨 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파스칼의 책과도 좀더 씨름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빈 도시락을 치우고 나서 갑판을 따라 거닐었다. 파스칼은 이성이 인간에게 부여된 최고의 능력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했다. 이건 순환논법이 아닌가? 파스칼은 인간이 이성만으로는 삶의 신비를 통찰할 수도, 신의 존재에 대해 알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신은 간구하는 정직한 신자에게는 꼭 필요한 진리를 계시한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믿음은 신의 선물이다. 믿음을 얻으려면 기도해야 한다’ 라고 결론 내렸다. 나가이는 갑판에 기댄 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 없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인가? 확실히 이 프랑스인의 논지는 여기서 설득력을 잃는다. 기도한다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을 멈추고 맹목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과 지적 책임감 모두를 포기하는 것이다.

나가이는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 인간에게 좀더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파스칼의 주장대로 신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면 말이다. 아니면 이렇게 추론하는 것은 유치한 생각일까? 파스칼은 ‘간절히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충분한 빛이, 그 반대의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주어진다’는 것과 ‘믿음이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역설했다. 나가이는 이 말을 자신의 최근 경험, 곧 ‘어머니의 육신은 죽었으나 영은 살아 있다’는 확신과 비교했다. 이것은 정말 체험이었을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그 압도적인 절망감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원시적인 보호본능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다시 <팡세> 를 펼쳤다. 파스칼은 인류 역사의 모순뿐 아니라 깊이 사고하는 사람들의 의식 안에 내재된 모순에도 주목했다. 우리는 위대함과 비참함을 모두 지니고 있다. ‘우리의 비참함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왕들의 비참함에 다름 아니다.’ 이 문장은 나가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파스칼이 친숙하게 묘사하고 있는, 영원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위대한 우주가 어디엔가 존재하리라는 가능성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나가이의 울적한 마음속에 ‘쥐는 별을 볼 수 없고 지렁이는 꽃을 볼 수 없다’는 옛 속담이 떠올랐다. 그는 파스칼의 꽃들과 별들을 믿고 싶었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팡세>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외로움에 지친, 탁월한 연민의 정을 지닌 한 인간의 아름다운 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무꾼과 선녀 식의 동화 같은 가공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새 그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던 선생님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제군들, 아편을 만드는 중국산 양귀비는 아름답다. 그처럼 세상의 종교에는 아름다운 요소가 많다. 그러나 종교는 아편처럼 여러분을 치명적 환각의 세계로 몰아갈 수도 있다. 신이나 석가가 여러분을 어려움에서 기적적으로 구할 것이라고 믿게 하면서 말이다. 문제는 이 믿음이 안이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타고난 능력과 책임감을 마비시킴으로써 진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든, 외국의 경우든 평범한 역사의 교훈을 생각해 보라. 사회를 지배했던 종교의 힘이 무너졌을 때만 과학이 발달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몽상가였다. 그러나 그가 말했던, 수도고 길쌈도 하지 않는 들판의 꽃이 바로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양귀비로 판명되었다. 종교에 어리석게 속아넘어가지 말고 견고한 과학적 사실을 여러분의 생각과 삶의 토대로 삼아라!’

나가이는 다시금 파스칼의 <팡세>로 되돌아왔다. ‘그리스도교는 어떠한 시련에도 언제나 존속해 왔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리스도는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의 성역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랬다. 도쿠가와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짓밟아 없애야 할 외국 종교로 간주되었다. 1600년대 박해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당했다. 도쿠가와 시대의 독재자들 그리고 최근의 군국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국가 체제를 전복하는 반역자라는 누명의 씌웠다.  나가이는 국가에 대하여 열렬한 헌신적 태도를 지니고 있던 터라 <팡세>에서 특히 단호한 문구를 접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 내용은 사랑하는 조국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이질적인 것으로 비쳤던 것이다.

나가사키로 돌아온 나가이는 의학공부에 전념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대단히 존경스럽고 권위적인 아버지보다는 인자한 어머니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가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영적인 문제를 함께 이야기할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펐다.

대학 친구들은 나가이의 변화를 눈치챘다. 태평스런 낙관주의, 과학이 구원을 담보한다는 신념에 대한 의심 없는 수용, 이제 막 눈앞에 전개될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 사라진 것을, 그는 또 교수들에 대해 전보다 더 비판적이 되었다. 어머니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떤 교수가 사고와 감정을 포함한 인간의 복잡한 정신 활동을 ‘두뇌를 통과하는 전류’ 현상으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나가이는 교수에게 구체적인 예가 있느냐고 따졌으나 교수는 이 이론이 아직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나가이는 과거에 읽었던 훌륭한 가설 가운데 개정판이 바뀌었거나 아예 없어진 예가 얼마나 많았던가를 새삼 떠올렸다. 그는 파스칼이 절대 진리라고 일컬은 것이 무엇인지 정말 알고 싶었다. 그런 것이 있을까, 아니면 단지 파스칼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태연한 척한 것일까?

의과대학에 입학한 처음 2년간은 강의와 실험실습, 동물 해부와 인체 해부 등으로 바빴다. 이제 3학년이 되자 교수들과 함께 병동을 돌면서 환자를 보살피는 업무가 시작되었다. 회진을 하면서 몇몇 의사들의 냉정한 태도가 환자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고, 심지어 사기마저 떨어뜨리는지 알게 되었으며,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신이 더욱더 민감해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농구를 즐겼고, 때때로 등산을 했으며, 이따금 친구들과 술자리를 함께하기도 했다. 이제 그는 17세기 바쇼 같은 시인이 한 말, 예컨대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서 먼 곳까지 여행할 필요가 없다. 아름다움은 바로 우리 주변에 있다’ 같은 표현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제 비로소 값싼 녹차 한 잔, 정원에 만발한 흔하디 흔한 꽃들, 인적이 끊어진 쓸쓸한 해변의 물떼새 울음소리 안에 깃든 소박한 아름다움, 선사 禪師 들이 말하는 만물의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평안이 없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뒤 그는 당시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자나깨나 시달렸다. 그래서 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읽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 문제는 더욱더 복잡하게 여겨졌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연구하고 있었으니까. 내 삶이 그들과 다른데도 말이다. 우리 각자의 삶은 서로 다른 것이며 그 의미도 유일한 것이 아닌가. 여러분은 공장에서 기성복을 대량 생산하기 전 여성들이 집에서 아름다운 레이스 제품을 손수 짜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이음새가 없는 길고 긴 실로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레이스를 짰다. 레이스의 다양한 패턴이라든지 짜는 방법이 내게는 매우 신비하게 여겨졌지만 솜씨 좋은 여성들에게는 이 모두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남에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또 혼란스러워 보인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도 레이스와 같지 않을까? 각자의 삶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그때부터 철학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삶의 의미에 관한 모든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내용이 너무 평범하고 단순하면 실망하는 속물근성을 지닌 대중을 위해서 글을 쓰는 철학자도 있다는 것을 당시는 알지 못했다. 정직한 구도자에게는 정직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이들의 말장난이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독자의 사기를 떨어뜨릴 정도로 난해하게 논리를 전개하고 나서 마침내 인생은 불가해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던 많은 현대 철학자들의 논지를 파악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태어남과 삶과 죽음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고, 또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5. 그건 고약한 바람이었지

 

193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 뒤 나가이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학업에 전념했다. 한편 아버지는 아들이 잇는 곳에서 동북쪽으로 몇 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서 도저히 평온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때마침 북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저주와도 같이 으르렁거렸다. 시베리아 동토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은 칼날처럼 매서웠고 늑대처럼 잔인했다. 나가이 노보루 의사는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보라를 헤치고 천천히 집 뒤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극심한 노여움과 상처와 분노가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눈을 소복이 뒤집어쓴 아내의 묘비 앞에 서서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했다.

전날 저녁 나가사키에서 낯선 손님 두 사람이 불쑥 찾아왔다. 그 중 한 명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나가사키 의과대학 이비인후과 교수라고 했다. 다른 한 명은 최고급 외투에 수입 모피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함께 온 교수는 나가사키 상공회의소 소장이며 이 도시의 거물급 사업가라고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분에게는 아름다운 따님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선생님의 아드님 나가이군을 운젠산 기슭에 있는 이 댁 별장으로 이틀 간 초대한 적이 있지요. 이 댁 가족은 물론 그 젊은 아가씨가 아드님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건 으레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 두 젊은이는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 같습니다. 제 친구인 이 사람은 아드님에게 반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이 젊은이들이 결혼만 하면 아드님을 유럽에 보내 본인이 원하는 분야가 무엇이든 그 분야에서 전문의 수업을 받도록 해주겠다고 합니다. 또한 선생님을 나가사키로 모셔서 아드님 곁에서 여생을 보내시도록 주선하고 싶답니다. 또 멋진 낚시터 옆에 위치한 가장 좋은 빌라 한 채를 드리고 싶다는군 요.  앞으로 이 결혼이 가져다 줄 행복에 대한 조그만 감사의 표시로 말입니다.”

 

나가이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나는 ‘즉시 집으로 오라’는 아버지의 전보를 받았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18시간 걸리는 기차 여행길에 올랐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으며 나를 보자 무뚝뚝하게 기다리라고 했다. 낯선 간호사가 녹차 한 잔과 팥 빵을 가지고 왔다. 그녀는 공손히 인사를 했고 나도 예의 바르게 대하긴 했지만 속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 분위기가 참으로 냉랭하고 사무적으로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환자들이 돌아가고 아버지가 들어왔다. 몇 번이나 망설이던 아버지가 마침내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어떻게 네 자신을 그렇게 팔아 넘길 수 있느냐?” 갑작스런 공격에 젊은 아들은 너무도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변명하지 마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네가 괘나 잘난 의대생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 아비가 동의할 줄 알았더냐? 삼척동자라도 자기 자신을 돈다발과 바꾸지는 않을 게다.” 아들은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아버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자세히 말해 달라고?” 아버지는 버럭 화를 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돈이 탐나 결혼하고 게다가 데릴사위가 되겠다니!”

“네? 제가 데릴사위가 된다고요?”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는 마치 심술궂은 표정으로 카드 놀이 하는 사람처럼 명함 두 장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러면 이건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보아라!”, “이분들이 다녀가셨습니까?”, “그래. 네가 부잣집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다는 멋진 소식을 전하러 왔더구나. 네가 할 일은 오직 데릴사위가 되는 것뿐이고 유럽 유학 준비도 모두 끝났다고 하더라. 인생을 다 산 늙은이로 보였는지 나를 나가사키에서 낚시나 하며 여생을 보내게 해주겠다더구나.”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나가이는 그 교수의 초대에 응한 것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언젠가 나가이에게 친구의 집에 함께 가자고 했던 것이다. 바로 만주사변 기념일인 9월 18일이었다. 나가이는 자기가 왜 그 빌라에 초대를 받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했지만 그것이 젊은 남녀가 처음 만나는 맞선 자리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가이는 그 집 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노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

아들이 어떻게 했느냐고 묻자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나가이 노보루는 부자는 못될지언정 낚시용 빌라 때문에 아들을 팔 만큼 저속하지는 않습니다.”

순간 아들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가 훗날 회고했듯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맥박을 짚었지만 뇌물은 한번도 받지 않았던 그 손’을 잡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손을 잡고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나가사키로 돌아온 나가이는 3학년을 마친 뒤 4학년 말에 있을 마지막 시험을 위해 학업에 전념했다. 이번 시험은 의사자격 시험과도 같은 것이었으므로 그는 시험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여타 활동은 대부분 중단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온 인생의 목적과 신의 존재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31년 봄이 되자 그는 낡은 <팡세>와 점심 도시락을 챙겨 언덕에 오르는 것으로 신학기를 시작했다. 그는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냇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예 결판을 낼 심산으로 <팡세>를 펴 들었다.

나가이는 파스칼의 문체와 깊이에 매료되었지만 이 프랑스인의 독선에는 종종 짜증이 났다. 가톨릭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파스칼의 입장은 탐구적 풍토, 갈릴레오의 발견, 남미 인디언 대학살 등 현실적인 사건 앞에서 빛을 잃었던 것이다. 나가이는 <팡세> 마지막 행을 일고 화가 치밀었다. ‘오직 그리스도교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한다. 인간적인 규범은 행복도 사랑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파스칼은 부모가 도저히 줄 수 없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파스칼은 인간의 감성적, 영적 체험에 의한 확신이 감각이나 지적인 확신보다 더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얄팍한 지성으로 파악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영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이 프랑스인은 강력한 충고로 결론을 내린다. ‘만일 여러분이 내가 한 말 가운데 매력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어떤 점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말들은 평생을 기도로 살아온 사람한테서 나온 것임을 잊지 말라. 여러분이 아직 믿을 수 없다고 해도 기도나 미사를 무시하지 말라.’

 

나가이는 점심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그리고 배낭을 메고 냇가를 따라 길게 뻗은 비포장 시골길을 걸었다. 화창한 4월의 봄날 작은 산골짜기는 나가이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새, 일본의 나이팅게일이라고도 불리는 우구이스(휘파람새)의 아름다운 노래로 메아리 쳤다. 바고 그때 그를 둘러싼 이 모든 아름다운 광경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혹시 파스칼의 창조주 하느님이 합리적인 가설이 아니었을까? 나가이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언제나 어떤 가설이든 실험실에서 테스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파스칼이 그렇게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 기도도 한번 그렇게 해보자. 단지 실험으로 끝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기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신부를 찾아가서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광신자에게 잘못 걸려들어 끈질기게 개종을 강요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많은 대학생들이 나가사키의 일반 가정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자기의 하숙생을 기꺼이 받아줄 가톨릭 가정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되면 신자가 되지 않고도 그리스도교의 기도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몇 군데 수소문한 끝에 대학에서 1킬로미터 이내 성당 근처에 있는 2층집을 구했다. 그 집은 녹나무와 백 년은 더 되었음직한 커다란 목련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모리야마 사다키치 라는 문패가 걸려있었다. 목축업자로 성공한 모리야마는 부인고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교사인 외동딸 미도리가 집을 떠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6. 숨은 그리스도인

 

모리야마 사다키치의 신앙의 뿌리는 나가사키가 일본의 최초이자 유일한 그리스도교 도시였던 30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549년 8월 15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일본인들은 그리스도교 복음을 처음 전해 들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아직 내륙까지 진입하지 못했고 일본에는 일본어-유럽어 사전도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하비에르는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으며, ‘대일 大日’ 이라는 말로 전교 활동을 시작했다. 하비에르는 이 단어가 성서의 전능하신 하느님을 뜻하는 일본어가 아니라 석가모니의 현시를 나타내는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그러나 믿음이란 배워서 알게 되기보다는 은총(사로잡힘)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어쨌든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이 역동적인 바스크 귀족 출신 신부에게 너무도 깊이 감동받은 나머지 세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주의 시대에 이루어진 가톨릭 전교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는 마음 편히 읽을 수 없는 내용이 많다. 그러나 일본의 예수회 포교 이야기는 다르다. 하비에르 추종자들은 그들의 인품과 헌신, 그리고 병자와 노숙자와 고아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통해 귀족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많은 개종자를 매료시켰다.  예컨대 일본 관리들은 일본에서 외과를 개척한 예수회 회원 알메이다를 기리는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예수회에 입회했을 당시 알메이다 의사는 이미 극동지역의 부유한 투자자가 되어 있었다. 예수회에서 서원을 하지 전 그는 배당금 전액을 예수회 병원과 고아원에 보낸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재산을 수익성이 높은 마카오-일본 실크 교역에 투자했다. 배당금이라고 해봐야 실크 무역에서 얻은 보잘것없는 금액에 지나지 않았지만 예수회 신부들이 금과 실크 무역에 관여한다는 헛소문으로 확대되었다. 이 소문은 베스트셀러가 된 <쇼군>에서도 언급된다.

1579년 예수회 신부 알렉산드로 발리냐노가 예수회 전교단 단장으로 부임했는데 그 역시 하비에르만큼이나 유능한 인물이었다.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거인이었던 그가 27세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할 때 그는 이미 세속적인 르네상스 교육을 받았고 변호사 경력도 갖고 있었다. 성 이냐시오의 영성수련[영신수련, 필사주]에 몰입하는 동안 기도와 묵상의 대가가 되었고 영적 지도신부로 임명되었다. 그가 지도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훗날 중국에서 명성을 떨친 마테오 리치였다. 예수회 총장은 하비에르가 동양에서 시작한 전교 활동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급기야 35세의 발리냐노 를 이 전교단의 총책임자로 파견했던 것이다.

발리냐노는 시대를 몇 세기 앞서간 선교사였다. 그는 식민주의 시대의 전교 활동에 뒤따르는 위험을 재빨리 파악했고 회원들에게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그들을 존경하도록 당부했다. 또한 서구문화의 짐을 아시아인들의 어깨에 짊어 지우는 것을 철저히 금했다. 예수회 회원들이 동양에 온 것은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문화를 전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서양의 천문학, 의학, 자연과학 지식을 동양인들에게 전수해야 하지만 16세기 유럽 문화가 복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 나라 사람을 훈련해 지도자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유럽인들이 우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복음 말씀을 조금 먼저 알고 있다는 점에서만 그렇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다른 모든 것은 일본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발리냐노는 깊은 통찰력과 애정으로 일본인들을 대했으며, 일본 예절과 풍습에 관한 지침서를 만들어 예수회 회원들에게 그대로 따르도록 했다. 일본의 지도급 인사들이 다도를 중시한다는 것을 알고 그는 모든 예수회 건물에 다실(다도를 위한 방)을 꾸미도록 명령했다. 발리냐노와 마테오 리치가 택한 선교의 토착화와 현지 문화 수용 정책으로 일본과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다수의 일본 다이묘, 곧 봉건 영주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이 새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일본의 토머스 모어라고 불리던 다카야마 우콘이었다. 한때 영국 재상을 지낸 모어처럼 다카야마도 당대의 걸출한 정치, 문화 지도자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집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성과 토지를 몰수당했다. 헨리 8세가 재상 토머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독재자 히데요시는 탁월한 군사 전략가이며 서예가이자 다도의 대가인 그를 회유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다카야마는 마침내 그리스도교를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추방당했다.

상당수의 사무라이와 미천한 농민과 도시인이 대거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수효가 급증하고, 특히 다카야마 같은 거물급 인사들이 목숨을 다해 충성을 바칠 주군으로 그리스도를 섬기게 되자 독재자 히데요시는 점점 불안해졌다. 이렇게 되면 사무라이 제도 자체가 붕괴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이 독재자도 처음에는 예수회 신부들의 헌신과 서양 학문에 매료되어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악명 높은 변덕이 발동하여 그리스도교를 금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믿는 종교를 버려야 했으며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을 떠나야 했다. 이 명령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도 교토에서 26명의 그리스도인을 체포하여 엄동설한에 맨발로 나가사키까지 행군을 시켰다. 30일간의 혹독한 행군이 끝나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할 운명이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나가사키를 선택했다. 나가사키는 1571년, 중국 – 마카오를 경유하여 – 일본 사이에 활발하게 이루어진 새로운 무역, 곧 유럽 선박이 드나드는 주요 항구가 되기까지 이름없는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이 항구는 그리스도인이었던 제후 오무라의 영지에 속해 있었다. 지난날 봉건 제후는 승려들에게 땅을 희사하여 사원과 교육기관 등을 설립하는 일을 도왔다. 오무라는 나가사키 입항세를 예수회에 기부하여 학교와 교회, 극빈자들을 위한 거처를 짓고 운영하는 일을 돕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나가사키가 학교와 예수회 주교 공관을 갖춘 그리스도교 마을이 되었다. 또한 이곳에 신학교를 설립했으며, 대대적인 가톨릭 박해가 있기 전 15명의 일본인 사제가 수품을 받았다.

긴 여정에 지친 26명의 희생자들이 얼어 터진 맨발로 절뚝거리며 나가사키에 도착했을 때, 이 도시에 살고 있던 모리야마 가족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다. 독재자 히데요시는 공개처형으로 희생자들의 처참한 광경을 보게 되면 나가사키의 그리스도인들이 쉽사리 신앙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목적을 위해 천천히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그들이 드디어 나가사키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그리스도인이 모여들어 격려의 함성을 외쳤다. 그들은 지금의 나가사키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니시자카 언덕으로 끌려갔다. 잘 다듬어진 26개의 십자가는 어디서든 잘 볼 수 있게 언덕에서 항구까지 늘어서 있었다. 희생자들을 쇠고리와 새끼줄로 십자가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각각의 십자가 밑에는 죽창을 든 사무라이가 두 명씩 배치되어 언제라도 그들의 옆구리를 찌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처형 준비가 끝났지만, 희생자들과 구경꾼들의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최후의 일격은 지연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줄지어 늘어선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라, 주의 백성들이여’라는 성가가 터져 나왔고, 언덕을 가득 메운 군중들은 웅성거림을 멈추고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편 성가가 끝난 후 이번에는 한 사람이 라틴어 미사에서 부르는 ‘거룩하시다’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가락이 나가사키만을 가로질러 허공으로 흩어지자 또 다른 십자가에 매달린 프란치스코회 소속 사제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예수, 마리아, 요셉, 마리아, 요셉…’ 군중 가운데 섞여 있던 4천여 명의 그리스도인이 따라 했다. 처형 책임을 맡고 있던 데라자와 하자부로라는 관리는 독재자 히데요시에게 이 상황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점점 불안해졌다. 지금 눈앞에서는 히데요시의 명령대로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광경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인의 강한 힘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놀라운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는 예수회 회원 미키 바오로였는데, 당시 33세인 미키는 제후 다카야마 휘하에 있는 장군의 아들로서 훌륭한 교리교사요 설교자였다. 미키는 군중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우렁찬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일본인이며 예수회 신부입니다. 지금까지 지를 지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쳤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나는 그 때문에 죽을 수 있어서 행복하며 이 죽음을 주님의 위대한 선물로 여깁니다.” 미키는 십자가에 달린 26명의 얼굴에서 공포심을 찾아볼 수 있느냐고 군중에게 물었다. 그리고 천국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 따위는 느낄 필요가 없다고 그들을 확신시켰다. 죽음의 순간에 그에게는 단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을 갖는 것이었다. 그는 히데요시와 이 처형을 책임진 사람들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침착한 목소리로 고별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던 시편 31편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시의 손에 맡기나이다’ 였다.

데라자와는 신호를 보냈고 그 순간 사무라이들이 쇠고챙이가 달린 죽창을 들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고막을 찢는 듯한 고함에 이어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잠시 흘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성난 군중 사이에서 질풍노도와 같은 분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데라자와는 서둘러 일을 끝내고 상부에 보고할 채비를 했다. 히데요시가 예상했던 굴욕적인 구경거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리스도인의 신망이 더할 나위 없이 고조되었으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마침내 독재자 히데요시가 죽고, 봉건 제후들 사이에 엄청난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여 히데요시보다 더 절대적 권한을 가진 독재자가 되었으며 쇼군이라는 옛 칭호를 획득했다. 도쿠가와 쇼군은 그리스도교, 그 중에서도 특히 가톨릭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지구 곳곳의 식민지에서 정복자 행세를 하는 선교사들을 보았으며 다카야마 제후 같은 중상류 계급 사람들과 하찮은 농부들이 이 불법적인 외국 종교를 옹호하기 위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자 히데요시에게 불복했다는 사실로 인해 몹시 언짢았다. 1614년 도쿠가와 쇼군은 자신의 통치에 저항하는 마지막 남은 자들을 모두 쓸어버린 후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더욱 강화시켰다. 사제와 교리교사를 체포하는 데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후한 보상을 약속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버리는 대신 죽음을 택하자 그들을 꺾기 위해서 더 세련된 고문방식을 도입했다. 나가사키와 인근 지역은 정부 끄나풀과 군인들로 득실거렸다. 처형당한 전임자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비밀리에 일본에 들어온 사제들은 파란 눈과 서툰 억양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다. 나가사키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나 우라카미와 같은 오지로 피신했고, 사제 없이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고 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나가사키 북부, 조그만 우라카미강이 나가사키만으로 흘러드는 험한 골짜기로 피신한 사람들 가운데 모리야마 사다키치의 선조들도 끼여 있었다. 그들은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지하교회를 조직했다. ‘물 당번’을 정해 세례를 관장하게 했고, ‘달력 당번’에게는 대림절, 성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등 교회 절기를 지키도록 했으며, ‘초카타(우두머리)’를 정하여 모든 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모리야마 사다키치의 조상들은 초대 초카타를 지냈는데 가장이 죽으면 장남이 대를 이어 그 일을 맡아했다. 도쿠가와 쇼군은 경찰국을 설립하여 2세기 반 동안 권좌를 유지했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1856년에는 7대손 초카타였던 모리야마 기치조가 경찰 체포망에 걸렸다. 그는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으나 신앙만은 끝까지 지켰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그의 아들이 훗날 모리야마 사다키치의 아버지가 된다.

1858년 일본은 경비용 소형 군함을 이끌고 일본 연안에 나타난 페리 제독의 문호 개방 압력에 굴복하여 미국과 무역협정을 맺었다. 유럽 사람들도 곧 뒤따라 들어와 요코하마와 나가사키 같은 도시에 정착했다. 그들이 교회를 건립하기 시작했을 때 쇼군은 유럽 사람들에게만 교회 출입을 허용했다. 그리스도교는 일본 사람에게는 금기사항이었던 것이다. 1864년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프티장 신부가 나가사키의 남부 외곽지역인 오우라, 말하자면 오페라 ‘나비 부인’으로 명성을 얻게 된 지금의 글로버 저택 바로 아래에 교회를 건립했다.

이 교회는 우라카미 그리스도인의 비밀 공동체에서 나가사키만 쪽으로 6킬로미터 아래쪽에 있었다. 우라카미 공동체의 임시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초카타가 6년 전 감옥에서 잔혹하게 죽는 것을 지켜본 터라 섣부른 행동을 삼갔다. 게다가 새로 세워진 교회는 자신들이 조상대대로 지켜온 교회와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소박한 원칙 몇 가지를 꾸준히 지켜왔는데, 예를 들면 조상들이 섬기던 교회는 언제나 일본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며 사제가 독신을 지키고, 마리아상이 있으며, 로마의 교화에게 순종한다는 세 가지 특성에 의해 그 교회는 다른 교회와 구분된다는 것이다.

언젠가 장날에 우라카미의 몇몇 그리스도인이 새로 지은 오우라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살그머니 교회 안으로 들어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을 보았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에게 검은 수도복을 입은 키 큰 프랑스인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어본 결과 그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교회 밖에 세워 놓은 위협적인 정부 게시판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읽었다. ‘이 교회는 외국인을 위한 것이며 교회 안에서 발각되는 일본 사람은 누구든지 반 反 그리스도교 법령에 의해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초카타 모리야마의 아들은 아직 어려서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고 연장자들은 오우라 교회에 대해 좀더 확실하게 알 때가지 기다리자고 했다. 하지만 부인들은 소심하게 꾸물대는 남편들을 나무라면서 이제 증거는 그만 하면 충분하니 빨리 그 프랑스 신부를 만나자고 했다. 바로 다음날인 1865년 3월 17일, 비가 금방이라고 쏟아질 듯이 잔뜩 흐린 날씨에도 부인들은 짚으로 만든 우비를 걸치고 몇 척의 어선을 나누어 타고 나가사키만 동쪽으로 5킬로미터나 나가 데지마 너머에서 내렸다. 그들은 생필품을 구하러 도시에 나온 어부들인 척 행동하면서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근처에 경찰이나 정부 관리가 없음을 확인한 후 걸음을 재촉하여 돌계단을 따라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 안에서는 낙담한 프티장 신부가 그날의 성무일도를 바치고 있었다. 파리에서 신학생 시절 그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베푼 첫 세계 이후 60년 동안 일본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개한 책을 읽고 매료되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26명 의 순교자, 영주 다카야마 우콘, 호소카와 다마 부인,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는 대신 죽음을 택한 계층을 망라한 수많은 일본인들의 삶에 대한 기록을 읽었다. 그래서 일본이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자마자 살아남은 그리스도인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큰 희망을 품고 나가사키에 온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개심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홀로 꿇어앉아 성무일도를 바치는 그의 기분을 아는 듯 오늘따라 날씨마저 잔뜩 흐려있었다.

 

남루한 행색의 일본 여인들이 다다미를 지나 다가오자 그는 경계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성모 마리아상이 어디 있습니까?” 유리(백합)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물었다. 신부는 너무 놀라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데루(광채)라는 이름의 여인이 그를 안심시켰다. “우리 마음과 신부님 마음은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도 같은 질문을 했다. “성모 마리아상이 어디 있나요?” 신부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네.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는 동쪽 벽 앞 작은 제단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아! 이분이 성모님이시군요! 이분이 성모님이시군요!” 데루의 음성에는 몇 세기 동안 가슴 졸이며 기다려 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네, 이분이 성모님이 틀림없어요.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있잖아요.” 몇 세기를 내려오는 동안 그들의 발음은 다소 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성모 마리아를 찾았을 때 신부는 그들이 이미 진실을 말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마음과 그의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프티장 신부는 우라카미 그리스도인이 모리야마씨의 널찍한 축사에서 비밀리에 집회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물 당번’과 ‘달력 당번’ 그리고 연장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들은 신부에게 시청 관리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각별히 주의할 것을 당부했고 따라서 신부는 농부로 가장하여 어두운 밤에 그들을 찾아왔다. 그는 가축의 배설물을 밟지 않도록 발밑에 볏짚을 간 채 외양간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그들은 신부와 함께 드리는 첫 미사가 외양간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두운 세상에 찾아온 예수 탄생 이야기,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방을 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헤로데 병사들에게 쫓기기까지 했던 그 소박한 성가정의 성탄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박해가 이루어지던 지난 250년 동안 그들이 가장 즐겨 듣던 이야기였다. 그들은 12월 25일이 되면 가축들에게 건초를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주곤 했다.

나가사키 관리들은 이들 그리스도인과 프랑스 사제의 낌새를 눈치채고는 중앙 정부의 지시를 기다렸다. 도쿠가와 쇼군이 여전히 나라를 지배하긴 했지만 그들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했다. 군국주의 제후들이 몇 세기 동안 도쿠가와에 의해 교토의 황금우리에 감금되어 있던 천황을 해방시키고 서양인들의 압박에 대비하여 일본의 국력을 강화시킨다는 ‘영광스러운 명분’을 앞세워 사무라이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1600년대 일본 그리스도교를 전멸시키다시피 했던 도쿠가와 정부는 집권 마지막 해인 이때, 나가사키시 관리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마지막 남은 불씨를 완전히 짓밟아 버리도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1867년 7월 15일 새벽 3시, 사무라이들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들이닥쳤으며 68명의 지도급 신자들을 포위했다. 그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마침내 힘없는 노인에서 울부짖는 아기에 이르기까지 3,414명의 우라키미 그리스도인이 모조리 체포되어 특별히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나가 곳곳에 19곳의 임시수용소를 만들어 그곳으로 보냈다. 정부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단단한 결속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용소로 보냈으며, 계속 믿음을 고집할 경우에는 고문과 사형에 처할 계획이었다.

그 후 1년이 못 도어 도쿠가와 독재시대는 끝이 났으며 메이지 천황이 즉위함으로써 천황의 지위가 복권되었다. 적대적인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아시아 진출에 직면하여 새 메이지 정부는 민족적 단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일본 사람의 단결을 붕괴시키는 것으로 비쳤으며, 천황 숭배와 국가의 신성한 운명에 대하여 가르쳤던 ‘신도’만이 국가의 결속을 다질 수 있는 종교로 간주되었다. 정부에서는 수용소에 수감된 그리스도인을 신도 신자로 돌려놓기 위해 온갖 잔인한 방법을 동원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당시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유럽 사람들이 이 사실을 서구의 언론기관에 알림으로써 외국 정부의 공식적인 항의가 빗발치자, 메이지 정부는 이 정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수용소에 수감된 지 5년 만에 우라카미 그리스도인들은 다리를 절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전체 숫자의 20퍼센트를 약간 밑도는 664명이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대부분의 생존자들도 몹시 쇠약해져 있었다. 정부가 그들을 반역자로 몰았기 때문에 가재도구도 무사하지 못했다. 농기구며 가구, 배, 낚시용구, 그리고 조금이라도 값나가는 물건은 모조리 없어졌다. 한때 잘 정돈되었던 논밭은 황무지로 변해 버렸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7. 나가사키의 종소리

 

프랑스 사제들이 일본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초카타와 물 당번 그리고 달력 당번이라는 전통적인 역할을 사라졌다. 마지막 초카타는 1856년에 옥사했다. 고달픈 바빌론 포로시절(우라카미 그리스도인이 수용소에서 지냈던 시절을 유다인의 바빌론 포로생활에 빗대어 한 말 – 역주)에 성장한 그의 어린 아들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우라카미로 돌아왔으며 가업인 목축업을 다시 일으켰다. 어느덧 그는 결혼을 했고 1907년에는 장남 사다키치가 소를 사러 우쿠지마에 갔다. 나가사키에서 320미터 동쪽에 있는 이 섬은 고도 제도의 최북단에 위치했다. 17세기 초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도의 여러 섬으로 피신해 비밀리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1907년까지 존속했다. 그러나 우쿠지마는 도쿠가와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쿠지마 주민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위험인물로 간주했다. 사다키치가 섬처녀 아카기 쓰모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섬에서 온통 난리가 났다. 농부 아카기는 딸 쓰모가 나가사키 그리스도인과 결혼하는 것을 결사반대 했다.

그 아가씨는 소를 실은 배를 타고 나가사키로 도망갔으나 아버지는 다른 배로 뒤따라와서 딸을 데리고 갔다. 그녀가 또다시 도망치자 아버지는 그녀를 딸로 인정하기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를 다시 보게 되어 기뻤던 사람은 오직 사다키치뿐이었다. 그의 부모는 부모대로 장님이 비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한편 우라카미 처녀들은 유능한 목축업자를 사이에 두고 그녀를 경쟁자로 생각했으며 까마귀라고 불렀다. 그것은 눈부신 태양과 짭짤한 바닷바람에 그을린 그녀의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탐스러운 새카만 머리채 때문이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은 마침내 결혼했다. 1908년 나가이 다카시가 태어났던 바로 그 해 그들에게는 외동딸 미도리가 태어났다. 사다키치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들은 선조의 가옥과 목축업을 물려받았다.

 

이제 다시 1931년으로 돌아가서, 나가이는 그들의 집 문밖에 서 있었다. 나가이로서는 이 2층집이 2세기 반 동안 그리스도인의 비밀 본부였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그에게는 단지 이 집이 하숙집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는 큰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실례합니다. 계십니까?” 잠시 후 쓰모 가 문을 열고 나왔는데 한때 윤기 흐르던 새카맣던 머리는 어느덧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 있었다. 나가이는 모리야마 씨 댁에 빈방이 있는지 내심 궁금해하면서 근처 의과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 하숙집을 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쇠 단추가 달린 단정한 교복 차림에 잘 닦아서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편안한 웃음까지 지어가면서 자기를 소개했다. 쓰모는 남편과 의논한 뒤 결정할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친절하게 말했다. 마침 남편이 외양간에 나와 있었고, 그들은 하숙생을 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곧 돌아와 그의 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한번 거절당했다고 의기소침해 할 나가이가 아니었다. 이틀 후 그는 다시 찾아가서 전보다 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더욱 온화한 웃음을 띠면서 자신의 간청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쓰모는 그의 친절하면서도 집요한 요구에 웃으면서 남편과 상의하기 위해 거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막 돌아온 후였다. 사다키치가 말했다. “오늘 설교 말씀처럼 혹시 주님께서 저 학생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게 아닐까? 무턱대고 거절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소. 여보, 저 학생을 우리  집에 들이면 어떻겠소?” 그녀는 어느새 이 학생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금방 동의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나가이는 규슈 지방의 흥겨운 민요가락을 흥얼거리면서 2층의 널찍한 다다미방에 이삿짐을 풀었다. 그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리스도교 마을인 우라카미에 머물게 된 것이 나가이에게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 셈인데, 훗날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상세하게 적었다. 그는 매일 아침 5시 30분만 되면 어김없이 성당에서 들려오는 두 개의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뒤이어 아래층에서는 모리야마 가족이 마치 주문과도 같은 기도를 나가사키의 민요가락에 맞추어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오와 오후 6시에 성당의 종이 다시 울리면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삼종기도를 바치곤 했다. 때때로 나가이는 모리야마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사다키치 씨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곤 했다. 가끔씩 따끈한 사케 기운까지 빌려가며 그리스도교를 전하려 하는 사다키치의 열정이 나가이에게는 다소 귀찮게 느껴졌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신자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나가이가 모리야마 댁에서 하숙을 한 지 3개월 정도 지났을 때 한 교수가 강의 시간에 우연히 지나가는 말로 나가사키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건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니시지카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26명을 위시하여 나가사키 시 안팎에서 죽음을 당한 많은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나가사키에 관한 책과 안내책자, 그리고 관광안내책자 등에 이미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교수는 순교자들을 ‘광신자’로 매도했다. 하지만 우라카미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광신자가 아니었다. 나가이가 보기에 그들은 ‘개화기 開花期’를 맞은 여러 분야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일요일을 온 가족이 함께 휴식을 취하는 휴일로 지켰다. 근로자가 1주일에 한 번 휴일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녀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은 6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일본에서 으뜸가는 교육시설 가운데 하나였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과 학교는 미국의 경우만큼이나 훌륭해 보였다. 그가 우라카미 주변에서 보았던 사제들과 신앙의 형제 자매들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청빈하고 정결하며 헌신적인 그들의 삶은, 지난날 불교가 삶의 중심을 이루었던 시절, 승려의 삶과도 같았다. 뛰어난 건축미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고전 연구의 중추기관이었던 사찰이 마을 곳곳에 세워졌던 그 시절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불교 세력이 팽창했을 때 불교는 정치까지 간섭하게 되었고 결국 억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가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갈릴레오 사건, 노예매매 제도는 물론 남미, 아프리카 및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자행된 식민정책을 묵인하고 복을 빌어준 행위 등은 유럽의 그리스도교도 불교와 유사한 결함을 안고 있는 듯했다. 종교는 항상 광신적 행위로 끝났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고 단정했던 그 교수의 판단이 어쩌면 옳은지도 몰랐다. 그 대가가 겨우 상식적인 수준에 그쳤고 또 광신적 행위로 끝났을 뿐이라면 단지 종교라는 이름으로 너무 큰 희생을 치른 것이 아닌가!

나가이는 성당의 종지기가 300년 된 그리스도교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천식기가 있는 그 노인은 나가이를 17세기의 십자가, 묵주, 성화, 마리아 관음 등이 보관도어 있는 커다란 방으로 안내했다. 나가이는 특히 마리아 관음에 흥미를 느꼈다. 불교의 대자대비를 상징하는 관음보살의 불상은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콴린, 인도에서는 아볼로키타 이쉬바라, 티베트에서는 첸레식스로 불린다. 불교에서 여성은 극락세계에 들어갈 수도 부처가 될 수도 없으며, 구원에 이르는 중간 단계에서 남성으로 거듭나야 한다. 따라서 관음은 남성이지만 부드러움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비심을 강조하기 위해 얼굴은 언제나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박해가 한창이던 무렵 정부 관리들이 나가사키의 그리스도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 위해 집집마다 뒤지고 다녔을 때, 신자들은 도자기로 관음과 유사한 마리아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작은 십자가를 만들어 마리아상의 안쪽이나 뒤쪽에 붙였으며 종종 아기를 안은 마리아 관음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만든 조각상 앞에 꿇어앉아 있는 그리스도인을 보았을 때 관리들은 불상에 절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체포하지 않았다.

 

나가이는 종지기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성당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성당은 길이가 70미터에 이르는, 극동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성당 내부는 5000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었고, 두 개의 종탑은 높이가 30미터나 되었다. 종지기 노인은 나가이에게 이 성당을 짓기 위해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말해주었다. 종지기 노인도 그 엄청난 역사에 동참한 사람이었다.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용소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나서 고향 우라카미로 돌아온 1872년 당시 그는 어린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몇 년 동안의 생활은 원시생활 그대로였다. 농기구란 농기구는 모조리 도난 당했으므로 깨진 기와조각과 사금파리로 잡초가 우거진 논밭을 일구어야 했다. 한편 그들은 우라카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웅장한 저택, 한대 그들의 지도자를 심문하고 그들을 수용소로 보낸 정부 관리의 소유였던 바로 그 집에 눈독을 들였다. 돈을 모으기 위해 노예처럼 뼈빠지게 일한 그들은 이 저택을 사들인 다음 그 자리에 목조 성당을 세웠다.

계속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한 끝에 1895년 목조 건물을 철거하고 아마추어 건축가 신부의 감독 아래 돌과 벽돌을 사용하여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신자와 그 가족들이 성당 건축에 참여했다. 남자들은 성당의 기초를 놓는 데 사용할 거대한 돌들을 구마모토에서 배로 운반하여 언덕 꼭대기까지 옮기는 데 동원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목재를 구하러 산으로 갔으며 여자들과 아이들은 교대로 붉은 벽돌을 만들어야 했다. 그들의 목자인 프랑스 신부는 시멘트를 섞는 법과 석고상 만드는 법을 가르쳤고, 예술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화강암으로 성상과 건물 장식품을 조각했다. 이 모두가 극빈자 수준을 겨우 벗어난 사람들의 손으로 이루어졌기에 수시로 건축비나 자재가 부족했으며, 그때마다 공사를 중단해야 했다. 마침내 거대한 초석을 언덕 꼭대기로 끌어올린 지 22년이 지난 1917년, 성당이 완공되었다. 당시 나라의 경제 사정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고 별로 큰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독일과 대항하던 연합군 동맹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나가이는 샤르트르와 콜로뉴처럼 유명한 고딕 성당들도 전문 건축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어떤 때는 온갖 종류의 부조화를 드러내는 성당을 짓는 데도 한 세기가 걸렸다. 서로 마주 서있는 벽들, 짝을 이루는 창문과 지붕이 삐뚤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건물들이 6세기 동안 또는 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정신이 이루어 낸 위업을 기리며 늠름하게 서 있었다. 나가이가 처음 나가사키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불쾌감을 느낀 건물이 우라카미 성당이었다. 시끄러운 종소리에,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건물구조와 색깔, 이 모든 것이 일본적인 것을 중시했던 그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 성당이 외국 자본이 아니라 가난한 일본 농부와 어부들의 힘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비판적인 태도가 누그러졌다. 오히려 그는 농사일과 고기잡이밖에 모르던 일본의 농부와 어부들이 이와 같은 위업을 이루어 낸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나가이는 자기 민족의 뛰어난 미적 감각이 어머니를 통해서 전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집안이 부유하건 가난하건 소녀시절부터 여성의 세련미와 우아함을 함양하는 교육을 받아왔다. 이 전통을 배우고 지키는 것은 결혼 준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모은 도시와 농촌 마을에서 꽃꽂이와 다도 강습이 번창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생각은 어느새 어머니에게 옮겨갔다. 식사 때마다 흔하디 흔한 녹차를 내는 일에서 환자의 손님을 맞고 배웅하는 일까지 어머니는 매사에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나가이는 자기 민족의 삶에서 중심인물은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모성적이고 여성적인 특정이 표출되는 강력한 호소력은 불교의 관음보살(관음)에 대한 인기에서 잘 드러난다. 심지어 숨어 사는 그리스도인조차 마리아 관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우라카미 성당에서도 그는 우뚝 솟아 있는 마리아상을 보았다. 성당 문 밖 십자가 옆에 있는 마리아상과 성당 안의 좀더 부드러운 표정의 마리아상이 그것이다. 또한 마리아상은 모리야마씨 댁의 도코노마 에도 있었다. 도코노마란 일본식 가옥에서 안방의 한 곳을 차지하는, 기품이 있으면서도 소박한 장식 코너라 할 수 있는데 보통 가보와 같은 귀중품을 진열한다.

한 시간 후 나가이는 모리야마씨네 2층 다다미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창을 열고 창틀에 기대어 거대한 붉은 벽돌 성당을 바라보았다. 낡은 기모노를 입은 여자 아이가 창문 바로 밑에서 천천히 왔다갔다했다. 여자 아이는 열 살 가량 되어 보였고 아기를 업고 있었다. 마침 소녀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 가락을 읊조리고 있었는데 나가이는 그 독특한 노랫가락에 사로잡혔다. 그 노래가 이따금 마음속에 맴돌곤 하던 규슈 민요였을까? 아, 그 노래는 바로 ‘키리에 엘레이손, 크리스테 엘레이손’이었다. (라틴 미사곡으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 – 역주) 그는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베토벤과 바흐의 미사곡에 나오는 그 가사를 기억했다.

땡…. 땡….. 땡! 그때 성당에서 6시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이가 있는 곳과 성당 사이의 들판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이 무릎을 꿇더니 긴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온 기도를 마리아에게 바치고 있었다. 아기를 업은 소녀도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나가이는 종소리가 우라카미를 영국의 촌락으로 바꿔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으며, 눈앞에서는 그가 좋아하는 밀레의 그림과도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서글퍼졌다 .우라카미의 그리스도인과 밀레의 농부들은 모두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은 오직 의문만 갖고 있는, 의식구조가 복잡한 학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헛간에서 송아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저녁 고도 섬에서 이 집으로 오자마자 달아나려고 하는 바람에 모리야마씨가 축사에 묶어놓았더니 밤새 울부짖었다. 송아지는 계속 달아나려고 했다. 나가이는 마치 자신이 속박을 끊고 집으로 달아나고 싶지만 집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송아지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책상 앞으로 가서 내일 수업 준비를 위해 독일어로 된 교재를 읽기 시작했다. ‘여기가 내 집이다. 여기가 내가 설 견고한 땅이다. 과학과 증명할 수 있는 의학적 사실이야말로 나의 집이다!’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8. 나팔꽃에 맺힌 이슬

인생과 집은 나팔꽃에 맺힌 이슬과 같은 것. 어느 것이 먼저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 기모노 초메이, <방장기>

 

1932년 나가사키 시민들은 찹쌀떡으로 새해의 시작을 축하했다. 가족들은 평상시의 작업복 대신 기모노를 멋지게 차려 입고 신도의 신들에게 지난해의 무사함을 감사하고 새해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신사를 방문했다. 거리마다 아이들은 기모노를 예쁘게 차려 입고 제기차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얼굴엔 자랑스러운 웃음이 넘쳐났다. 만주에서 곧 전쟁이 일어나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제 우중충한 군복과 모양이라곤 없는 여성용 몸빼가 화려한 기모노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나가사키 거리에서 즐겁게 세시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 가운데 많은 소년들이 중국의 산중이나 말레이 정글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문제를 간섭하는 부당한 외국 세력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가장 최근의 침략 세력인 일본군에 대한 보복행위로 상업의 주축을 이루는 상해항에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서양의 높은 관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본 수출업은 상해 봉쇄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1월 28일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곧 관동군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상해를 공격했다. 중국측은 영웅적인 저항으로 버텨냈고, 양쪽 모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3월 3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붓글씨 몇 자로 체결된 평화조약은 분화작용이 시작된 화산 꼭대기를 덮어놓은 종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곧 시뻘건 용암이 주변을 새까맣게 태우며 나가사키까지 단숨에 흘러내릴 기세였다.

그러나 젊은 나가이는 세계 정세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코앞에 다가온 마지막 시험이었다. 말하자면 18년 공부라는 지루한 마라톤이 거의 끝나가고 이제 가파른 언덕만 남이 있는 셈이었다. 당시 일본 학생들은 6세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6년 과정을 마치고 상급학교에 진학할 경우 중학교에서 5년을 공부했다. 그 다음에 고등학교에 진학해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면 20세가 되었으며, 이때 비로소 대학 진학을 할 수 있었다. 스물네 번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나가이는 의사 면허 취득을 위한 국가고시에 대비하여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가이와 학우들은 1932년 신년 연휴에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1월 초부터 3월 중순까지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 정신과, 안과, 산부인과, 피부과, 비뇨기과 그리고 소아과에 이르는 9과목에 걸친 엄격한 시험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필기시험이 끝나면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치른다. 학생들은 진료를 하는 동안 교수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진료과정을 지켜보면서 점수를 기록한다. 4년 동안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나가이는 모든 과목을 뛰어난 성적으로 통과했고, 대학에서 수여하는 메달을 차지했으며, 졸업식 날 졸업생 대표로 송별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이 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를 썼으며 졸업과 동시에 귀향하여 아버지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당시 아버지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또 아내의 빈자리를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꼈음에도 아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네 어머니는 누구보다 네가 훌륭한 의사가 되기를 바랐고 또 열심히 일하고 희생했다. 대학 당국에서 의과대학에 남아 달라는 제의를 받은 것으로 아는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라. 어쨌든 내 밑에서 일하겠다는 뜻은 고맙구나.’

젊은 나가이는 파스칼로 인해 혼란스러운 의문과 모든 것을 잠시 잊고 송별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송별사는 지적인 깊이가 있고 과학적이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글이어야 했다. 또한 새로운 일본 정신을 반영하여, 현대 감각을 지니면서도 고대 만요슈와 같은 따뜻한 정서를 담아야 했다. 의학적으로 일본이 아직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당시만 해도 결핵과 같은 질병이 만연한 실정이었다. 그는 자기 나라 의사들이 서양 의사들과 당당하게 실력을 겨룰 수 있을 때까지 전심전력할 것을 촉구하는 말로 송별사를 마치리라 생각했다. 송별사 내용이 결정되자 나가이는 자리에 앉아 붓으로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골치 아픈 독일어 의학서적에서 해방되어 모국어가 시인들에 의해 창제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면서, 송별사를 빠르게 써내려 갔다.

그러나 나가이는 송별사를 하지 못했다.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나가사키에서 제일가는 중국식당 통천각 通天閣에서 기분 좋게 졸업 자축 파티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학생들은 지난 두 달간 큰 시험을 치르느라 몹시 지쳐있었다. 휘황찬란한 음식점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하룻밤 신나게 놀 생각에 들떠 있었다.  젊은 기생들이 마치 그림 속의 흰 기러기처럼 꾸미고 나타났다. (흰 기러기는 몸 전체가 하얗고 날개 끝만 검은, 북극지방에 사는 기러기의 일종임 – 역주) 새하얗게 분칠을 한 얼굴로 처음에는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꼿꼿이 앉아 있더니 알코올 기운이 퍼지자 서서히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나가이는 그날 밤 파티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진탕 퍼 마셨던 맥주, 배갈, 사케, 값비싼 유럽산 와인 등 온갖 술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했다. 기생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 시작했고 깔깔거리면서 술이 엎질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를 자리에서 끌어냈다.

나가이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때처럼 자신만만했던 적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그의 손안에 든 공이었다. 이 공은 파티 내내 집요하게 그의 관심을 끌려고 교태를 부리면서 춤을 추던 사세보 출신의 저 예쁜 기생처럼 빙글빙글 잘도 돌아갈 것이다. 그 맹랑한 여자는 그를 취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가 그녀의 술잔을 받는 족족 단숨에 비우고 권하자 그녀는 숨을 할딱거리며 잔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장기인 ‘미꾸라지잡이춤’을 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나가이는 취기가 오른 것을 느꼈다. 건배는 계속되었고 그는 그 뒤에도 더 많은 술을 마셨다.

음식점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문을 닫았다. 학생들은 큰 소리로 서로를 축하하며 거리를 나섰고, 지나가는 어린 기생들과 잡담을 주고받으며 학창시절 노래에 기분이 고조되어 서로서로 집으로 보내주었다. ‘집, 집이 어디야? 하! 하! 하! 나가사키가 온통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네. 내가 바로 어항 속의 미꾸라지였나? 나는 가만히 있는데 어항이 돌아가는 것인가? 아, 그렇지. 어항을 전차에 태우면 되지. 어항은 못 가도 전차는 똑바로 가니까. 어어! 여기가 전차 정거장인데. 뭐, 전차가 끊겼다고? 시장은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전차를 그렇게 일찍 자러 가게 하다니. 그래도 괜찮아. 시장은 멍청해도 택시 기사는 똑똑하니까. 그들은 잠도 안 자거든. 아니, 이럴 수가!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이지, 한 푼도 없네! 그 놈의 바보 같은 회계녀석! 그 친구가 돈을 모자라게 갖고 나왔으니 어쩌겠나, 우리가 보태는 수밖에. 아무려나, 무슨 상관이람. 내가 졸업생 대표로 송별사를 한다 이거야, 메달도 받고. 그 세세보 출신 여자기 날 가장 좋아했다니까. 사무라이 시인은 비를 맞으며 걷는 걸 좋아한다고. 만세!’

봄을 재촉하는 비가 소리 없이 내렸다. 나가이가 모리야미씨 댁에 도착해 사다키치와 쓰모가 깨지 않도록 조심할 때쯤 그는 뼛속까지 젖어 있었다. 하지만 좀 젖으면 어떠랴. 젖지 않고서 어떻게 어항 속 미꾸라지가 될 수 있겠는가? 그는 반쯤 기고, 반쯤 헤엄치듯 하면서 계단을 올라가 다다미방에 깔아놓은 얄팍한 후통(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모두 미꾸라지가 되어 잠시 호수 밑바닥에 누워 보는 거야.”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 때문이었다. 해는 어느새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햇빛 때문에 그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귀가 몹시 쑤셨고 사지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계단 밑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닙니다” 그는 수니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으니 그냥 조용히 혼자 있게 해 달라고, 오늘은 꼼짝 않고 집에 있겠다고 했다. 다시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홀로 있게 되자 그는 숙취가 심한 탓이려니 생각하면서 두통약을 먹고, 젖은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자리에 누웠다. 고맙게도 다시 밤이 되어 어둠이 찾아왔지만 그는 밤새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다음날 해가 곤피라산 위로 떠오르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그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가까스로 옷을 걸치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누군가가 망치로 쿵쿵 내리치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으며 그 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다른 소리라니? 사실 그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도 모리야마씨 부부가 외양간에 있어서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병원까지 가서는 온몸을 떨며 의자에 쓰러졌다. 마침 오랜 친구인 간호부장이 그를 보자마자 재빨리 침대에 옮기고 당직의사를 불렀다.

그의 병은 급성 중이염이었는데, 뇌막염일 수도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를 진단한 의사가 간호부장에게 말했다. 나가이의 병이 뇌막염으로 판명될 경우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해의 가장 뛰어난 졸업생 나가이는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를 특실로 옮긴 그녀는 가장 실력 있는 귀 전문의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즉시 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공교롭게도 나가이를 백만장자의 딸에게 결혼시키려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가이는 너무도 기진맥진하여 농담 한마디 건넬 힘이 없었다.

그의 척추에서 척수액을 뽑은 교수는 뇌막염이 분명한 여러 증상을 보자 침울해졌다. 건장하고 언제나 적극적이며 그의 학년에서 수석을 차지한, 모든 사람들의 총아 나가이! 이제 이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이미 몸 속에서 용혈현상이 일어나 적혈구가 파괴되고 있었으므로 위험한 수술을 감행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수술이 잘되어 환자가 고비를 넘긴다 해도 뇌 손상이 심해 평생 백치 상태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일의 경우 이런 최악의 상태까지도 각오해야 했다.

수술을 받음으로써 위기는 가까스로 모면했지만 나가이는 곧 중태에 빠졌고 간간이 정신착란 증세까지 모였다. 나가사키에 친척이 없는 나가이를 위해 모리야마 가족이 나이 든 간병인을 구해주었다.

우라카미 출신 간병인은 나가이가 밀레 그림에서 경탄해 마지 않았던 브리타니 농촌의 아낙네와도 같았다. 그녀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청년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을 보자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나가사키 민요가락에 맞춰 약간 큰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가이가 모리야마씨 댁에서 종종 들었던 이 소리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금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음을 알았으며 이 나이 든 여인의 기도를 통해서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나가이는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그는 오른쪽 청력을 잃었다. 이미 송별사는 다른 학생이 했으며, 난생 처음 몸과 마음이 모두 소진된 느낌이었다. 그가 즐겨 읽던 고전문학은 덧없는 영광과 인생에 대한 글귀로 가득했다. 나가이는 문득 가모노 초메이의 <방장기 方丈記>에서 읽은 첫 구절을 떠올렸다. ‘강물은 쉬임 없이 흘러가고… 소용돌이치는 물거품은 모였다 흩어진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은가.’ 한때 아름다웠던 이 시구가 현실로 다가왔다. 벚꽃이 앞다투어 피어나면 그 고혹적인 아름다움에 수많은 사람들이 꽃구경을 나온다. 하지만 사흘이 안 되어 그 보드랍고 섬세한 꽃잎은 흩날려 사람들의 발에 짓밟힌다. 그가 준비했던 송별사도 그가 없는 가운데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고 졸업의 기쁨을 만끽했던 변덕스러운 군중의 발에 짓밟혔다.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 삶이 그렇게도 무자비하고 부당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구역질은 자기 자신의 얄팍함과 자만심 때문이었을까? <방장기>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고요하게 빛나던 보름달

산 너머로 사라지면

내 마음 서글퍼지네.

아미타의 영원한 빛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아미타 석가모니는 영원한 빛 가운데 살았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그랬을까? 그의 어머니는, 아니면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일까? 삶이란 우지 강물 위를 떠도는 거품처럼 비영속적이고 무의미한 것일까? 가모노의 시는 다만 망망대해의 파도처럼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지고 이내 사라져 버리는 뜬구름 같은 세상의 가련한 인생을 위로하기 위한 고상한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9. 고요한 밤 그리고 귀중한 생명

 

1932년 무렵, 나가사키 의과대학교의 초라한 연구실에는 스에쓰구 이쓰마 교수가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지난해 방사선과를 신설할 목적으로 이 학교에 부임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직 유럽에서도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이 새로운 의학 분야를 공부하는 동안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함부르크의 성 게오르크 병원이 공부와 임상 실습을 하기에 탁월한 곳이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독일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스에쓰구는 몹시 힘들었다.

학교에 부임할 당시 교수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했을 뿐 예측 불가능한 인간관계 같은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강의 시간에 열변을 토하는 것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데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나가사키 대학교의 적지 않은 교수들 마음 한구석에는 오래된 악마, 곧 동료 교수에 대한 시기심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거기에는 두려움, 곧 스에쓰구 교수의 엑스선 기계가 도입되면 청진기 기술이 쓸모 없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과 엑스선을 대하는 동료 의사들의 싸늘한 태도에 몸서리를 쳤다. 그가 독일에서 귀국할 때만 해도 학교측에서는 방사선과의 독자적인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체공해 줄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와 장비는 쓸모 없이 비워둔 방 몇 개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에는 화장실조차 없었다. 화장실은 옆 과에 있는 것을 사용하라는 비공식적인 언급이 있었을 뿐이다. 교무회의에서는 방사선과의 명패를 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의과대학생들은 곧 다른 교수들의 동태를 파악했다. 학기말 고사를 앞둔 학생들에게는 해야 할 공부가 넘쳐났기 때문에 스에쓰구 박사가 내준 과제에는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방사선학은 시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리 크지 않았던 탓이다. 이는 스에쓰구에 대한 또 다른 냉대이기도 했지만 그는 채점을 통해서 단단히 복수를 했다. 많은 학생들에게, 그들과 학교 당국이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 F 학점을 주었던 것이다. 나가이도 F 학점을 받은 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늦은 봄 나가이의 건강은 많이 좋아졌다. 대학 본부 직원이 즉각적인 답을 요하는 문제를 가지고 찾아왔을 때 그는 아직 병원에 있었다. 나가이는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방문객은 그의 왼쪽에 앉았다. 그리고 나가이에게 다가가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으니 앞으로 청진기 사용은 불가능하다며 방사선과 스에쓰구 박사의 조교가 될 것을 제의해 온 것이다. 대학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던 방사선과, 그에 대한 스에쓰구의 불만에 마침내 학교 당국이 귀를 기울었다. 그가 초지일관 밀어붙였던 F 학점 사건이 결국 대학 당국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하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나가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만일 그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학교측은 대학에 남아서 일을 해 달라던 당초의 초빙의사를 철회할 것이다. 그는 스에쓰구 교수가 조금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네’라고 대답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로부터 몇 주 뒤 스에쓰구 교수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가이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엑스선은 미래의 파장일세. 방사선학 분야에서 우리가 유럽보다 40여 년 뒤처져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네. 나가이군, 자네에게 솔직하게 말하겠네. 이미 엑스선은 의학계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고 앞으로는 더욱더 그러할 걸세. 하지만…” 여기까지 말하던 교수는 갑자기 침울한 얼굴로 젊은 조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직 우리는 광선을 완전히 조절할 수 없다네. 이 사진을 보게. 비엔나의 홀츠크네흐트 박사일세. 외국에서 공부할 때 가르침을 받은 분이지. 이분은 방사선학계의 위대한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방사선학을 위해 목숨을 걸었네. 방사선에 과다하게 노출되어 손가락 하나를 잃었고 그 뒤에 또 하나를 잃었다네. 마침내 오른팔을 절단해야 했네.이걸 보게. 의사들과 엑스선 기술자들은 방사선에서 보호하는, 더 나은 방법에 대하여 박사님이 적어 놓은 자료일세.”

나가이는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박사의 독일어 필체를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오, 그렇다네.” 교수는 덧붙였다. “이 글은 읽기가 힘들다네. 오른팔을 절단한 후 박사님이 왼손으로 썼기 때문이지. 나는 일찍이 함부르크 대학교 정원에 세워진 석조 기념비를 본 적이 있네. 거기에는 적어도 10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지. 방사성 물질을 연구하던 중 방사선에 과다하게 노출되어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름일세. 거기에는 교수, 의사, 간호사, 기술자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심지어 수녀 과학자도 있었네. 그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과학적 진리의 순교자들이라네. 훗날 엑스선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될 사상의 모든 환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인 셈이지. 그 기념비에는 폴란드, 독일,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영국 과 같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의 이름이 있었지만 일본 사람의 이름은 없었네. 나가이군, 모두 큰 병원에 안전한 엑스선 병동이 세워질 때까지 우리에게는 이 위험한 과학적 진리 추구에 동참할 의무가 있네. 학교에서 내준 이 초라한 방들을 보게. 이 대학의 교수들은 방사선학이 앞으로 얼마나 중요하게 대두될지 알지 못한다네. 그러므로 이를 악물고 그 멍청한 친구들이 납득할 때까지 노력해야 하네. 피에르와 마리 퀴리에 대해서는 자네도 들었을 걸세. 라듐을 추출해 낸 공로로 노벨상을 받기 전에 생활이 너무도 곤궁한 나머지 마리는 생계 수단으로 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다네.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가 여학생들에게 방정식을 가르쳐야 했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게. 나가이군, 우리 앞에는 오직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네. 이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은 이해하지도 못할 테고!” 그는 이 젊은이에게 투철한 목표 의식을 지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게다가 나가이군, 건강을 해칠 수도 있어! 하지만 자네는 이 중요한 의학 분야에서 개척자가 될 걸세.”

스에쓰구 교수는 활기에 넘쳐서 계속했다. “우리는 영원히 존속하게 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걸세. 영원히 남게 될 진리 말일세! 그것이 무엇이든 진리는 영원한 것이니까. 자네가 만일 정치가가 된다면 자네는 종종 거짓으로 드러날 지극히 일시적인 것을 위해 일하겠지.” 1932년 여름 일본 정치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군국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우울하게 덧붙였다. “칭기즈 칸의 몽골군을 보게. 그들은 아시아 전역과 유럽의 일부를 점령했지만 오늘날 그들의 것이라 할 만한 땅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네.” 나가이가 좋아하는 17세기 시인 바쇼가 한때 거대한 두 군대가 충돌했던 들판에서 지은 하이쿠를 보면 그곳엔 자랑스런 깃발도, 빛나는 사령관의 투구도 남아 있지 않으며 살해당한 군사와 말들의 뼈조차 사라져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평화로운 초원뿐이다. ‘아, 군인들의 꿈은 사라지고 풀만 돋아났구나!’ 나가이는 곧 스에쓰구 교수의 열렬한 제자가 되었다.

첫 환자가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주임교수 옆에 서 있었다. 환자는 나가사키에서는 아직 흔하지 않은 퍼머 머리에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스에쓰구는 나가이에게 독일어로 말했는데, 그녀에게 통증을 일으킨 원인이 기생충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바륨 용액의 흔적을 따라가며 설명했다. 나가이는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지 궁금했다. 만일 그 남자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녀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환자는 교사였는데 그는 결핵을 앓고 있었다. 그는 부양해야 할 처자가 있으며 자신의 병이 알려지면 해고당할지도 모르니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고 간청했다. 당시는 공황으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터라 직업을 잃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스에쓰구 교수는 점심식사 후 잠깐 쉬는 틈을 타서 재정상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미국에서는 대기업과 정부가 모두 연구를 위한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네. 그런데 우리는 도움은커녕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엑스선을 한 번 촬영하는 데 7엔이 들지. 자네의 나흘 치 봉급과 맞먹는 비용이네. 나가이군,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연구비를 따내는 것과 엑스선 촬영 비용을 줄일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네. 자네는 미국 과학자들이 몰두하고 있는 연구가 무엇인지 아는가? 원자에 관한 연구일세. 물론 이 연구는 우리 분야에서 자연히 다룰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가공할 원자력이 그 괴력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될 때를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어니스트 로렌스는 원자의 핵변환을 위한 가속장치의 일종인 사이클로트론을 보유하고 있다네 그 크기로 말하자면 우리 대학의 모든 건물을 합친 것의 4배가 되는 거대한 기계라네.” 앞으로 나가이가 지대한 흥미를 갖고 몰입하게 될 원자와 방사선 그리고 원자력 연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32년 12월 중순은 유난히 추웠다. 당시 나가이는 일과가 끝난 후에도 난방조차 잘 되지 않는 연구실에 남아 방사선 연구에 몰두했다. 스에쓰구 박사 덕분에 접하게 된 이 새로운 분야에 자신이 한때 그렇게도 무관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는 오늘 밤에는 일찍 귀가할 예정이었다. 오늘은 12월 24일이며, 특히 모리야마씨가 크리스마스 이브를 축하하는 특별 정찬에 그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공휴일이 아니었다. 군국주의자들은 크리스마스가 ‘일본 명절이 아닌 외국 것’이라는 이유로 일본 사람들이 이날을 기념하지 못하게 했다. 나가이는 지금까지 한번도 크리스마스를 지낸 적이 없지만 오늘 밤만큼은 주인댁에 대한 우정과 존경의 표시로 크리스마스를 지키기로 한 것이다.

이 특별한 저녁에는 모리야마씨의 외동딸 미도리도 겨울방학을 맞아 함께했다. 미도리라는 이름은 ‘푸릇푸릇한’ 이라는 뜻이다. 유난히 나가이의 시선을 끈 것은 그녀의 어머니 ‘쓰모(까마귀)’에서 물려받은, 유난히 탐스럽고 윤기 흐르는 새카만 그녀의 머리채였다.  미도리의 검은 피부와 탄탄하면서도 유연한 팔다리는 살아온 모계에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미도리는 그날 밤 식탁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웃는 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평소 딸을 자랑스럽게 여긴 쓰모는 미도리가 단거리 경주에서 우승했을 때와 배구 선수권 대회에서 팀의 미들가드로 활약하던 시절에 찍었던 사진을 나가이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우아한 몸놀림에서 운동을 잘했던 소녀시절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미도리의 아버지는 따끈한 사케 기운에 상기된 채 대화를 이끌었으며, 그의 선조들이 그리스도교 박해시대에 어떻게 신앙을 지켜냈는지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자신들이 ‘나타라 natara’라고 불렀던 크리스마스 밤이 되면 그들은 모리야마 씨 댁의 가축우리에서 모임을 갖곤 했다. 나타라는 박해시대 때 숨어 살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통용되던, 일본어 사전에는 있지도 않은 기이한 단어 가운데 하나다. 그 단어들은 대체로 라틴어나 푸르투갈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3세기에 걸쳐 구전되는 동안 발음이 변화되었다. 그들은 기도를 ‘오라쇼 orassho’라고 했는데 이 단어는 라틴어 ‘오라티오 oratio’에서 유래되었다.  모리야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모임을 위해 그들은 가축우리와 헛간을 말끔히 청소하고, 음식을 장만했으며, 석탄난로 위에는 언제든 뜨거운 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또한 몇 사람은 망을 보게 했고 유사시에는 신호를 보내도록 했다. 살벌했던 도쿠가와 독재시절에 흔히 그랬듯이, 경찰이 들이닥칠 경우 그들은 초상이 나서 불교 전통에 따라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모인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그날 밤의 하이라이트는 연장자 중 한 사람이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분이었다. 마리아와 요셉이 거처할 방도 구하지 못하고 겨울밤의 어두운 거리를 헤매다가 마침내 어느 집 마구간에서 지친 몸을 쉬게 되는 이야기를 해마다 되풀이하면서 그들은 크리스마스의 감동을 다시금 되살렸으며, 이로써 또다시 한 해를 굳건하게 견뎌낼 용기를 얻곤 했다. 모리야마씨가 말했다. “지금도 경찰과 문제가 있지만, 오늘 밤 성당에서 공공연히 자정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거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어려움과는 비교도 안 되지요.”

목축업자 모리야마는 취기가 돌아 불그레한 얼굴을 의사의 얼굴에 바짝 들이대며 말했다. “의사 선생, 오늘 밤 자정미사에 같이 가세.” 언젠가 고집불통 의대생이 찾아와 하숙을 하겠다고 재차 간청했던 그 일요일 이후, 모리야마는 부인과 미도리에게 나가이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기도할 것을 권했다. 또한 “하느님께서 바로 그 때문에 나가이를 우리에게 보내셨는지도 모른다”고 모리야마는 덧붙였다. 미도리는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겼고 지금 그녀는 자정미사 초대를 받은 나가이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나가이가 말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네.” 모리야마가 나가이의 말을 받았다. “마구간에 찾아왔던 목자들과 동방박사들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네. 그러나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그들은 믿을 수 있었네. 교회에도 가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네.” 바로 그때 ‘무릎을 꿇어라. 미사에 참례하라’는 파스칼의 말이 나가이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가이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 “네, 오늘 밤 선생님의 가족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날 밤 눈이 내리는 가운데 5천여 명의 신자들이 성당을 가득 메웠다. 농부들과 노동자들은 성장을 했고, 여인들과 소녀들은 다채로운 기모노를 차려 입어 성당 안은 수를 놓은 듯 아름다웠다. 나가이는 그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성가의 웅장한 소리와 성가를 멈추었을 때의 고요함에 압도당했다. 나가이는 이 첫 미사에서 예기치 않았던 직관적 체험, 곧 ‘우라카미 성당 안에 어떤 존재가 현존하고 있다는 느낌’에 대해서 저서 <영원한 것을>에서 상세하게 적고 있다. 나가이는 저 유명한 불교 용어이자 개념인 ‘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이 단어는 ‘사람이 꾸러미를 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영어로는 비어 있음, 공허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불교에서는 우리 각 사람의 실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공 空, 무 無라고 규정한다. 우리가소유한 모든 것이 타인한테서 받았기 때문이다.  내 몸, 내 얼굴, 내가 사용하는 말, 심지어 나의 억양조차도 조상, 부모, 가족, 선생님들에게 선물 받은 것이다. 내가 먹는 음식,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타인한테서 왔다. 고요하고 엄숙하게 진행되는 미사 시간 내내 나가이는 이 오래된 사상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생각은 언제나 흥미를 느꼈던 또 다른 불교적 개념으로 이어졌다. 곧 자연은 우리가 매일 목욕할 때마다 잘 볼 수 있게 배꼽을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배꼽은 우리 몸과 모든 신체 부위가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이자 상징이다. 우리는 아홉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에게 붙어 살았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양분과 돌봄을 받기만 했을 뿐, 이러한 것들을 받을 만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진실로 무이며, 아무것도 아니며 공이다. 그런데 무에는 또 다른 종류가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nothing’이 아니라 ‘물질이 아니다 No Thing’라는 의미에서 무이다. 이것은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물질 thins’을 완전히 초월하는 그 이상의 개념이다. 나가이는 파스칼의 ‘절대적이고 무한한 하느님’이 ‘물질을 초월하는 공’이라는 불교적 개념과 동일한 것인지 의아스러웠다. 그는 <팡세>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성서에서는 은유적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글을 읽었다. 또 다음과 같은 구절도 읽었다. ‘빛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게 비쳐도 우리는 장님이 되고, 소음이 지나치거나 너무 적어도 우리는 귀머거리가 되는데, 이러한 우리의 감각기관처럼 우리 마음의 능력도 극히 제한되어 있다.’ 파스칼은 13세기 대승불교의 위대한 승려 도겐의 사상과 일치하는 말로 결론지었다. ‘우리가 비곡 제한된 이성으로 진리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진리를 체험할 수는 있다.’ 나가이는 혼란스러웠다. 인간에게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은 바로 이성을 통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파스칼과 도겐은 이성만으로는 진정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맹점인가? 나가이가 읽었던 모든 종교의 주장이 타당성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전쟁과 광신주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이성의 거부라는 파멸을 자초하는 생각 때문일까? 그러나 파스칼과 도겐은 단순히 ‘합리적인’ 사람들한테서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무언가를 갖고 있었다.

 

나이 많은 사제가 제단 위로 올라가면서 나가이는 끝없는 상념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사제가 단아한 음성으로 가난한 목수와 그의 동정 아내를 선택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양했을 때 5천 여 신자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러한 겸양지덕이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동경해 마지않는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계획이었기에 성가정조차 그 밤의 어두움과 고통을 수용하였다면,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신부의 강론은 마치 선사가 졸고 있는 제자를 큰소리로 꾸짖듯이 나가이에게 충격으로 다가와 그로 하여금 이기심, 물질주의적 사고, 마음속의 거짓됨 같은 자신의 모든 것을 돌아보게 했다.

사제가 강론을 마치자 신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도신경을 암송했다. 5천여 명의 우라카미 신자들이 합송하는 사도신경은 나가이에게는 도전적인 함성이나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그는 왜 혼란스러운 것일까? ‘광신주의’에 대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일까? 특히 그 광신적 신앙이 너무도 비일본적 방식으로 표출되었기에 더욱더 불안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비탄에 잠기 채 자신을 되돌아 보았다. 보통 사람들은 단순하게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데 그는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즐기고 윤리 기준마저 제멋대로인 이른바 지식인층으로서 보통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은 아닐까?

성가가 그치고 분향 연기가 촛불을 밝힌 제단 주변을 감돌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가이는 봄철 산등성이에 피어 오르는 푸른 안개, 언제나 부드러운 그 무엇을 암시하는 아지랑이를 떠올렸다. 은빛 종소리가 아지랑이 사이를 지나가자 또다시 신자들은 무릎을 꿇었다. 정적 속에서 홀로 깜박이는 제단의 촛불, 그 촛불을 바라보노라니 어느덧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방학을 이용하여 친구들과 함께 떠났던 산행의 기억이었다. 밤마다 그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앉아 있었다. 나가이는 으레 그가 좋아하는 별자리를 찾아 마치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인 양 별들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때 그 별자리와 지금 눈앞에서 깜박이는 촛불은 신비스러운 초월적인 세계를 암시하고 있었다.

미사가 끝나고 나가이는 모리야마씨 댁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거의 24시간을 눈코 뜰 새 없이 보낸 하루였는데도 말이다. 그의 마음은 일제히 하늘로 솟아오르는가 하면 연줄을 끊으려고 뒤쫓아오는 다른 연을 피해 이리저리 날아오르던, 크기도 모양도 다른 알록달록한 연으로 가득 찬, 연날리기 축제가 한창인 나가사키의 하늘만큼이나 어수선했다. 상반되는 생각과 감정이 좌충우돌하는 동안 잠은 점점 더 멀리 달아났다. 그날 밤 성당에서 보았던 경건하고도 화려한 중세풍의 미사는 그의 타고난 과학자적 습성과 충돌을 일으켰다. 대부분 노동자 계층인 5천여 명의 신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때로는 깊고 깊은 침묵으로, 때로는 우렁찬 목소리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광경을 보면서 나가이는 그런 행동을 가능하게 한 그들의 신앙심에 몹시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사로서의 상식에 따르면, 혹독한 수련과 흑백논리로 무장한 종교야말로 가장 호전적이고 파괴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미사에서 직관적으로 느꼈던, 사랑이 충만한 어떤 존재에 대한 기억은 지난날 자기 암시, 히스테리, 심리적 조종 등이 가져오는 병리적 현상에 대하여 경각심을 고취시키던 교수들의 음성으로 인해 멈칫거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파스칼은 이렇나 것들의 위험성을 알고 있는데도 우라카미 성당에 임재 하는 사랑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했다. 파스칼이 우라카미에? 아니다. 그건 아니다. 그곳은 함부르크의 성 게오르크 성당이었다. 그는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기 전 잠이 쏟아져 생각과 감정은 흐릿해지고 마침내 가물거리던 의식의 빛은 꺼졌다.

 

다음날 나가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방사선과에서 일했다. 그리고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해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푹신푹신한 이불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기가 무섭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정 무렵 아래층에서 복통을 일으킨 미도리가 부모를 깨우는 소동이 일어났지만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즉시 기생충을 의심했다. 1930년 당시에는 위생시설이 미비했고 야채를 통해 기생충에 감염되는 사례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미도리의 어머니는 항상 구충약을 준비해 두었으므로 즉시 미도리에게 약을 먹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미도리는 극심한 고통으로 온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밖에는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고 게다가 그 시각에 의사를 부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미도리의 아버지는 2층으로 올라가 젊은 나가이를 깨웠다. 연신 사과를 하면서 이 위기에 대해 설명했다. 나가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진찰한 결과 급성 맹장염이었다. 미도리는 즉시 수술을 받아야 했다. 미도리의 침대에서 돌아섰을 때 그는 사다키치씨가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촛불을 켜는 것을 보았다. 가련한 사다키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모두가 하느님의 뜻인 게야. 이로 인해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 말은 나가이에겐 너무도 이상하게 들렸다.

미도리를 대학병원에 데려갈 채비를 하라고 부모에게 이르는 한편 나가이는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야마자토 소학교로 달려갔다. 그의 노크 소리에 야간 경비원이 나와 나가이에게 전화를 빌려주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3200번 부탁합니다. 매우 급합니다. 서둘러 주세요. 아, 여보세요, 저는 나가이인데요. 오늘 밤 응급실 당직이 누굽니까? 잘됐군요, 잘됐군요. 당직의사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저는 엑스선과의 나가이라고 전해주십시오.” 동료 의사가 수화기를 받아 들었을 때 나가이는 그에게 즉시 맹장수술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동료 의사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 나가이는 다시 눈 속을 달려 모리야마 씨네 문 앞에 당도했다. 미도리는 담요에 둘둘 싸인 채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밤엔 택시 부르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지체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몇 달째 건강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쓸 물건과 딸을 간호할 때 필요한 물건을 챙기느라 뒷방에서 꾸물대고 있었다. “오토상!” 나가이는 사다키치를 불렀다. 이 말은 아버지라는 뜻이며, 매우 소박하게 들리지만 존경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등불을 들고 앞장서십시오. 제가 미도리상을 업고 병원까지 가겠습니다.” 미도리는 이 밀에 너무나 놀라 아픈 것도 잠시 잊었다. ‘남자의 등에 업혀 간다고? 하지만 이 새벽에 누가 보겠는가?’ 그녀는 예의범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업혀 가기로 했다.

그들은 함박눈이 쏟아지는 거리로 나섰다. 기름 먹인 종이초롱에서 새어 나오는 부드러운 불빛,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쳐가는 불빛이 길을 밝혀주었다. 그들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도시가 눈에 파묻혀 평화로워 보였다. 그때 어디선가 개가 달려 나와 짖었다. 놀란 일행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고, 나가이가 고함을 쳤다. 개가 슬금슬금 달아날 때 그는 미도리의 빠른 심장박동과 목덜미에 닿은 뜨거운 입김을 느낄 수 있었다. 나가이는 그녀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등불을 들고 앞서갔다. 드디어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불 꺼진 복도 저편에서 괴기스럽게 울려왔다. 나가이가 모퉁이를 돌자 수술실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수술실의 배기관을 빠져 나온 수증기는 유리창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불빛을 뚫고 연회색의 나선형을 이루며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전깃불은 환하게 켜지고, 나방은 돌아가고, 수술대는 준비되었고, 수술기구는 가지런히 놓여 있다. 소중한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든 준비가 완료된 이 정경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그는 생각했다.

미도리를 수술대 위에 누이고 7분 뒤 모든 것이 끝났다. 맹장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간호사가 맹장을 포르말린 병에 담아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사다키치에게 건넸다. 그녀의 어머니도 어느새 침대 시트, 이불, 화장지 등을 짊어지고 와 있었다. 그녀는 다채로운 색깔의 보자기를 나가이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별 것 아니지만 수술을 맡아주신 의사 선생님께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나가이는 보자기를 외과의사의 방으로 가져갔고 그 의사가 보자기를 풀었을 때 포도주와 햄, 집에서 만든 소시지 등이 나왔다. 외과의사는 잔에 포도주를 따라 높이 들면서 말했다. “자네 연인의 빠른 회복을 위하여!” 나가이는 얼굴을 붉히며 연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왜 그러시나, 친구.”  젊은 외과의사가 웃었다. “그녀가 좋아하지도 않는 자네 등에 업혀 우라카미 거리로 나왔단 말인가? 게다가 자네는 또 얼마나 조심스럽게 그녀를 업고 왔나! 이게 어디 그렇게 당황할 문제인가? 자네의 현명한 선택을 축하하네. 자, 그녀를 위해 건배!”

 

 

 

10. 성모 마리아와 창녀

 

1933년 1월 나가이는 사무적인 엽서 한 장을 받고 몹시 혼란스러웠다. 히로시마 제11연대에서 소환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도쿄 정치가들과 사전 협의도 없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장군들은, 큰 대가를 치르지 않고 곧 승리할 것이라고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빗나갔다. 중국인들은 굴욕을 겪을 만큼 겪었던 것이다. 중국의 저항세력이 일으킨 충격은 바다 건너 나가사키 의과대학교 방사선 교실에까지 미쳤다. 의료계에 종사하는 나가이는 중국 전선에서 날아드는 끔찍한 사상자 수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소환명령이 사형선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걷잡을 수 없이 우울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엑스선이 토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마무리도 못하고 도중에 포기할지도 모른다. 도한 그의 삶도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싸늘한 예감이 들었다.

1월 21일 나가사키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대학 농구팀의 옛 친구들이 나가이를 위한 환송식을 열어주었다. 환송식은 기분 좋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식당 주인의 딸이 사케를 따르면서 우는 바람에 분위기는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녀는 나가이와 같은 젊은이들이 환송식을 하고 송별주를 나누고 만세를 부르며 머지않아 승전하리라는 확신을 안고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몇 달 뒤에 들려오는 것은 전사 소식뿐이었던 것이다. 김이 빠져버린 환송식은 의외로 일찍 끝났다.

모리야마씨 댁으로 걸어가는 동안 또다시 눈발이 흩날렸다. 바로 이 길을 몇 주 전 미도리를 업고 갔다. 그의 어깨로 전해지던 그녀의 심장박동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동료 의사의 말처럼 정말 미도리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일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녀도, 그의 삶에 약속된 그 밖의 모든 것도 남겨둔 채 떠나야만 하는데! 그것들은 만주 벌판의 이름없는 무덤 속에 영원히 묻혀버릴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았다. 모리야마씨 댁 현관문을 열고 터덕터덕 방으로 올라가면서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젊음의 마지막 순간과 이루지 못한 꿈을 간직한 채 밤새 이렇게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술에 취하여 고통을 잊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로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미닫이문을 열자 그녀가 고상한 차림으로 복도에 꿇어앉아 있었다. 나가이를 보자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바닥에 대고 깍듯이 절을 하는 바람에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채가 손등을 덮었다. “작별이사 하러 왔어요. 그리고 제 생명을 구해주신 데 대하여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공손한 태도에 그도 꿇어앉아 답례를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두툼한 털스웨터를 내밀었다. 그가 만주로 떠난다는 걸 알고 감사의 표시로 퇴원 후 틈틈이 스웨터를 짰다고 했다. 그녀의 마음속엔 하루 종일 드린 기도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하느님, 이 젊은이가 총탄에 쓰러지지 않게 보살펴 주십시오. 꼭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는 말없이 미도리를 응시했다. 그녀가 길가에 핀 한 송이 꽃처럼 느껴졌다. 곁에 머물 수 없는 그저 스쳐 지나가야만 하는 꽃 말이다. 가디건 스웨터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여성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그녀를 응시하는 동안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힘들어 그의 전존재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스웨터를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그녀의 따뜻한 손이 스쳤다. 갑자기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면서 그녀의 손을  와락 잡아당겼다. 그가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하는 동안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잠시 후 그녀의 반응을 살피듯 쳐다보았을 때 두 눈에 눈물이 반짝였다. 그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절을 했을 때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마룻바닥에 흘러내렸다. “꼭 무사히 돌아오세요. 선생님을 위해 매일 기도하겠어요.” 그녀는 속삭이듯 말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순간 자신이 한없이 외롭고 약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죄의식이 몰려왔다. 그가 아무리 지나친 행동을 했더라도 미도리는 다 받아주었을까? 혹시 모리야마 가족이 보여준 신뢰를 저버린 것은 아닐까?

다음날 나가사키 기차역에는 대학 동창들이 나가이를 배웅하기 위해 모여 있었는데 그는 그들의 요청에 ‘미꾸라지잡이춤’을 추었다. 승차를 알리는 안내방송은 사람들의 환호에 묻혀버렸고, 역무원은 상아탑 출신의 이 멍청한 친구들을 향해 곱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나가이를 제외한 다른 청년들은 신병 입대 중이었다. 역에는 부녀회 회원들이 나와 국기를 흔들며 국가를 부르면서 입대자들을 격려하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어주었다.

기차가 동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나가이는 뼛속까지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요란한 장면을 보았다. 그러나 국기가 중국군의 탄환을 막아주는 요술 지팡이는 아니었다. 그는 또한 사상자들로 가득한 병동에서 진료한 경험도 있었다. 사실 군인들은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군인들이 죽어 나가면 위생병은 더럽혀진 시트를 걷어내고 신속히 새 시트를 깔아 다음 부상병을 맞이할 채비를 했다. 침대에 새 이름을 써 붙이고 나면 곧바로 그 부상병은 잊혀져 버린다.

 아직 회복기에 있던 미도리는 그날 아침 베란다의 유리문 앞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두툼한 털장갑을 짜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가 호흡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신앙심이 깊은 여인이었다. 능숙하게 뜨개질을 하면서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그가 만주에서 죽지 않게 곡 지켜주세요.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지켜주세요. 사랑하는 하느님, 그는 아직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지만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그가 남다른 관용을 베풀고 환자를 헌신적으로 진료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모 마리아님, 지난밤 그가 혼자 있을 때 너무도 슬퍼 보였습니다. 그가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계시지요? 그에게 어머니가 되어주세요. 그를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대신 제가 격려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을 잘 해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히로시마는 나가이의 고향 시마네현의 유서 깊은 고장처럼 오래된 도시는 아니었다. 일본의 근대라고 할 수 있는 1594년, 한 지방의 봉건제후인 모리가 자신의 성을 건축하기 위해 만을 굽어보고 있는 이 전락적 요충지를 선택했다. 히로시마는 넓은 섬이란 뜻이다. 북족 산지에서 발원하는 오타강은 바다 근처 벌판에 이르러 여섯 지류로 갈라지면서 히로시마 삼각주를 형성한다. 몇 세기가 흐르는 동안 삼각주 지역에 여섯 개의 작은 섬이 형성되었고 현재 이 도시는 이들 섬에 걸터앉은 형국이다. 19세기 말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현대식 항만 시설물이 들어서는 한편 히로시마는 오사카와 시모노세키를 왕래하는 신설 철도의 주요 정거장으로 떠올랐다. 1894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히로시마성은 황국군 사령부가 되었으며, 1945년까지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나가이를 태우고 동쪽으로 달리던 기차가 빠른 속도로 이 도시의 서부 산지를 통과할 무렵,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이 기차는 히로시마에 잠깐 정차하겠습니다. 저희 기차를 이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가이가 무심코 차창을 바라보는데 오타강의 지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로부터 13년 뒤 미국의 폴 티베츠 대령은 바로 이 지류를 찾아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 ‘꼬마’를 완벽하게 투하했고 이 도시에 영원한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나가이는 히로시마 보병 제11연대 소속 경기관총 부대 제1중대로 곧장 가서 내무반으로 들어섰다. 군인들은 난롯가에 둘러앉아 큰소리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가이 다카시, 신고합니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호통을 쳤다. “모자는 어디 있다고 생각하나?”, “아! 죄송합니다.” 나가이는 모자를 황급히 벗어 오른손에 들고 말했다. “모자를 어느 손에 드는 건지도 모르나?” 다른 군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 네. 왼손입니다.” 조금 당황한 나가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큰소리로 말해, 임마. 여기가 여학교인 줄 알아?”, “잘못했습니다. 모자는 왼손에 들어야 했습니다!” 나가이가 외쳤다. 이번에는 무언가를 읽고 있던 상병이 고함을 쳤다. “나가이, 자네는 도대체 뭐 하는 자인가? 그렇게 큰소리치는 것을 보니 장군인가?” 군인들은 싫증이 날 때가지 그를 괴롭혔다. 나가이는 의사이며 방사선과 개척자의 조교인 자신의 지위가 이곳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의사도 아무것도 아니며, 다만 나가이라는 보잘것없는 한 개인일 뿐이었다.

메이지 유신 때 창설된 육군과 해군 장교는 대부분 사무라이 가문 출신이었다. 반면 일반 사병들은, 특히 육군의 경우 엄청난 인구를 차지하는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도쿠가와 쇼군이 지배하던 265년 동안 농민들은 철저히 종속적인 계층으로 격하되었고 농부들의 인권이라든지 개인의 가치는 사실 거부당했다. 1868년부터 메이지 천황시대의 새로운 독재자들은 짓밟힌 농부들을 향해 그들도 영광스러운 불굴의 무사 계급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군에 입대하기만 하면 그들은 사무라이가 되어 한대 금지되었던 그 고고한 선민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원병은 대부분 피폐한 농촌을 떠나 군사훈련학교에 들어간 청년들 (그들 가운데는 14세 소녀도 있었다)이었는데, 그들은 새로운 무사도에 관해 철저하게 세뇌교육을 받았다. 현대판 사무라이인 군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국화꽃 모양의 왕좌에 앉아 있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 어쩌다 천황이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시선을 내리깔지 않는 서민들은 가차 없이 군대의 처벌을 받았다. 문제는 군대가 천황 자신보다도 그의 뜻을 더 잘 안다는 데 있었다. 1931년 그들은 천황의 의향은 물어보지도 않고 만주에서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의 구실로 삼았다. (관동군이 1931년 9월 18일 밤, 펑텐 奉天 교외 류탸오거우  에서 만주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이 저지른 것으로 몰아붙여 군사행동을 일으킨 사건 – 역주) 이 소식을 들은 천황이 노발대발하는 동안 그들은 ‘가장 순수한’ 천황의 신하들로 자부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공공연히 자축했다.  사실 국화꽃 왕좌는 한겨울 매서운 바람에 흩날리는 국화 꽃잎만큼이나 무력했다.

사무라이는 강인해야 했다. 입대한 농촌 출신 청년들은 강인함이 주무기인 이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을 능가함으로써 가난한 배경과 별 볼일 없는 교유게 대해 보상받았다. 신참병들은 고참병들과 상사의 주먹세례를 받기 일쑤였다.  때대로 신참병들이 처음 받는 교육은 잔인하리만큼 단순했다. 군복을 입고 일렬로 늘어선 신참병들이 차례차례 건장한 상사의 주먹세례를 받고 땅바닥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일 군인칙유 軍人勅諭를 암송했는데 그 수칙에는 ‘진정한 사무라이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일본 군인들은 항복하는 연합군 병사들을 존경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군사학교 교육을 받은 그들로서는 영예로운 항복이라는 서구의 오랜 전통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경기관총 부대 제1중대에 배치된 신병들은 머지않아 훈련 담당 사사들이 그들을 얼마나 풋내기 얼간이로 생각하는지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다. 행군이 없을 때도 그들은 밤낮으로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작은 실수까지도 모두 처벌 대상이었다. 첫 휴가 때 나가이를 포함한 신병들은 해방감을 느끼며 작은 음식점으로 향했다. 첫 번째 식당에서 그들은 뱀장어 요리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한 블록 떨어진 식당에서는 튀김을 아주 삼아 또다시 맥주를 마셨다. 3차로 간 곳은 몇 백 미터 떨어진 초라한 오뎅집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도 맥주를 마셨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비틀거렸지만, 가고자 하는 목적지만큼은 틀림없이 찾아갔다. 매춘굴에 당도한 것이다.

나가이는 어둠침침한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여자는 히로시마와 시코쿠 사이의 담수호 가운데 있는 섬 출신이며 열아홉 살이라는 걸 알았다. 한낮의 더위로 화장은 흉하게 지워져 있었고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입술에 난 발진은 헤르페스 때문이었을까? 음식을 꾸역꾸역 쑤셔 넣는 여자를 보는 순간 매춘부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다. 그는 여자의 손에 화대를 쥐어주고 밖으로 나가려고 미닫이 문을 열었다. 순간 깜짝 놀란 여자가 씩씩거리며 “왜 내가 맘에 안 들어? 이 개 자식아” 하면서 그를 향해 음식을 집어 던졌다. 훗날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바로 그 순간, 한 젊은 여인이 나가사키 성당의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나가이는 며칠 뒤 모리야마 미도리의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11. ‘위대한 목신은 죽었다’

 

매춘굴에 다녀온 며칠 뒤 나가이는 중대장실로 불려가 부관 앞에 섰다. 경례를 하자마자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미도리가 누군가? 이 여자와는 어떤 사이인가?”, “아무 특별한 사이도 아닙니다. 그냥 아는 사입니다.”, “그냥 아는 사이라…? 그런데 왜 얼굴이 빨개졌나? 그 여자가 보낸 장갑은 가져가도 좋다. 그러나 이 가톨릭 교리서는 안 돼. 특무반 검열을 거쳐야 한다. 만을 불온한 내용이 발각되면 그땐 영창해이다.”

미도리의 편지는 짧아서 금방 읽었다. 그런데 소포 꾸러미를 풀었을 때 진하지는 않지만 향기가 났다. 그는 장갑을 얼굴에 갖다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그녀에게 키스했던 그날 밤 이후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바로 그 향기였다!

3일 후 그는 다시 중대장실에 불려가 문제의 가톨릭 교리서를 받았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복잡한 사상이 가득 들어있을 뿐, 불온한 사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따위 서양 신들에 관한 쓸모 없는 책을 잃을 시간이 있으면 군인칙유나 철두철미하게 익혀두는 편이 낫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 앉아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된, 단도직입적인 교리서를 펼쳤다. 책에는 나가이를 혼란에 빠뜨렸던 바로 그 문제가 낯설긴 하지만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인생에서 가중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까? 죽음 이후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까?’ 무신론에서 불가지론으로 옮겨가면서 나가이는 9세기의 고보와 13세기의 도겐과 같은 탁월한 종교 지도자에 관하여 생각했다. 그들은 중국의 영적 지도자를 찾아 위험한 항해를 무릅썼던 사람들이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신분을 버리고 금욕생활을 택하여 끊임없이 가르치고 글을 쓰고 지혜를 얻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며 여생을 보냈다. 그들의 삶은 교리서에 순진하리만큼 소박하게 제시된 문제의 해답을 구하기 위한, 타협을 모르는 구도의 연속이었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해답을 알아냈을까? 아니, 해답이 있기나 했을까?

 

그는 십계명 내용에 이르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말한다. “갑자기 나 자신이 더럽게 느껴졌다. 만일 신이 존재하고 악마가 존재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악마의 십계명을 지키며 살아왔다. 교만, 정욕, 탐심, 분노… 나는 교리서에서 나쁘다고 한 모든 짓을 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지난 휴가 때 그는 사케를 여섯 병이나 거뜬히 비우고 나서 행인들로 붐비는 센다마치의 대로에 용감하게 주저앉음으로써 동료들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 갑자기 지난날의 모든 행동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의 미래는? 젊은 나이에 만주 땅에서 죽는다면? 한줄기 빛이 어둠 속에서 비쳐왔다. 그를 위해 매일 기도하겠다고 약속한 나가사키의 신심 깊은 여인이 바로 그 빛이었다. 비록 자신은 하느님도 부처도 믿지 않았지만 그녀의 약속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다.

코다이트 폭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만주 전선의 이야기를 적은 나가이의 일기는 계속된다. 자신만만했던 일본 군대가 ‘만주 사건’은 머지않아 끝이 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겁에 질린 와카쓰키 수상을 설득하여 중국군을 공격한 지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무시무시한 ‘중국 늪’으로 변했고 나가이는 밤낮없이 피로 물든 야전 수술대 위에서 부상병을 치료했다.

팔다리를 절단 당한 부상병들은 점점 늘어갔고, 나가이는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에 대하여 적고 있다. 포탄에 눈이 멀고 귀가 먹은 병사에게 대한 이야기도 있다. 한참 후에 의식을 되찾은 그 병사는 중국군의 포로가 된 줄 알고 죽여 달라고 거듭거듭 간청했다는 것이다. 포병대의 탄막 포화가 멈추기를 기다려 이동하던 중에, 처참하게 죽어 나동그라진 중국인 시체더미를 지나칠 때 그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 시체들 가운데는 노인과 아이들이 많았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부모의 시체를 끌어안고 흐느껴 울거나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그가 한대 그렇게 아름답다고 여기던 창공은 끝없이 펼쳐진 텅 빈 공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전에는 과학과 인간 진보에 대한 꿈을 가졌고 그것이 그의 힘과 낙관주의의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과학의 발달이 빚어 낸 전쟁 희생자들을 밤낮없이 수술하는 동안, 그 꿈이 한낱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 세월을 찬란하게 이어져온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믿음과 자긍심도 무너져 내렸다. 히로시마의 부대 집결지에 있을 때만 해도 그는 일본 군대가 선전하는 내용을 그대로 믿었다. ‘우리는 진공상태에 있는 만주벌판을 차지하고 그로써 비인도적인 볼셰비즘의 확산을 막을 신성한 책임이 있다. 우리는 또한 서양 식민주의자들의 횡포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고 아시아 공동 번영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러나 군대의 잔혹성은 그를 깊은 고뇌에 빠뜨렸다.

나가이는 강풍용 램프를 켰다. 그리고 지친 몸으로 <팡세>를 집어 들고 고대 그리스 작가 플루타르크 서글픈 말이 인용된 부분을 펼쳤다. ‘위대한 목신은 죽었다.’ 그리고 모든 신들에 대한 믿음은 ‘무지한 미신 또는 철저한 무신론으로 타락했다’. 그는 수많은 일본의 신도 신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메이지 유신체제에서 그 신들은 한때 국민의 흩어진 힘을 재규합하는 참으로 강력한 상징이었으며, 군국주의자들의 규범을 제공하는 원천이었다. 모든 일본 군인들은 전쟁터로 행군하기 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신사에 가서 신들에게 절을 했다. 하지만 바로 그 군인들이 야전병원의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 파스칼이 절대 순수의 순간이라고 말한 바로 그때 신도의 신들에게 위로를 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 앞에 나아가 순명하는 것’임을 파스칼은 거듭 강조했다. 우라카미 성당 건립을 도왔던 미도리와 그녀의 부모,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 든 종지기는 모두 하느님께 순명했다. 미도리가 보내준 교리서에는 숨을 쉬기 위해 공기가 필요하듯 기도는 인간 영혼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가이는 이 말을 믿고 싶었다. 우주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었고, 낯선 이국땅에서 죽어가는 젊은 군인들에게도 그리고 어머니와 중국 어머니들과 어린이들과 군인들의 죽음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었다. 만일 삶에 궁극적 의미가 없다면, 포로로 잡힌 줄 알고 죽여달라고 눈멀고 귀먹은 그 병사처럼 인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동료 의사 중에는 전쟁의 참혹한 고통을 아편의 힘으로 완화시키려는 친구가 있었다. 나가이도 그 고뇌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의 행위를 용납할 수는 없었다. 파스칼, 모리야마 가족 그리고 도겐과 고보 같은 영적 위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매력은 평온함이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신앙과 기도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겁쟁이가 무조건 항복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신앙이 아편보다 좀더 미묘한 형태의 자아포기이긴 하지만 어쨌든 포기라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 아닐까?

 

 

 

12. 수위 선생 문하에서

 

리하르트 바그너는 오페라 ‘탄호이저’ 에서 중세의 상징을 통해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기사 탄호이저는 삶의 불확실성과 비탄에 잠긴 나머지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사랑의 여신 비너스에게 바친다. 그러나 그는 비너스에게 싫증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벗어나려 하지만 질투가 심한 그녀에게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절망한다. 한편 이 무기력한 기사를 한결같이 사랑하는 신실한 처녀 엘리자베트는 성모 마리아께 그녀와 탄호이저 사이를 중재해 줄 것을 탄원한다. 마침내 탄호이저는 질식할 것 같은 비너스의 사랑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 나가이는 만주 전선에서 귀환할 무렵 자신의 처지를 탄호이저에 비유했다. 배의 건널판을 내려서는 순간 세상에 대한 환멸과 절망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는 부두에 내려서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나가사키’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외과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밤의 장소, 곧 여자와 사케와 환락이 가득한 육욕의 나가사키였고 또 다른 도시는 마리아의 나가사키였다. 이곳 역시 사랑의 장소지만, 이 사랑은 기도와 희생과 봉사가 따르는 사랑이다. 후자의 나가사키는 우라카미 성당, 26인 순교자의 언덕, 순례자의 집 오우라 성당, 그리고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세원 수도원에서 찾을 수 있다.

나가이는 부두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 성당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번화가로 가서 낯익은 비너스의 장소에서 위안을 구할 것인가? 탄호이저가 마음의 평정을 찾은 것이 엘리자베트 덕분이었다면, 지금 나가이는 미도리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편안함을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가서 그 마지막 날 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리라 마음 먹었다. 오래 전부터 그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의 정결함을 잃은 적이 없는 신실한 신자였다. 지금까지 욕망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순결을 지키지 못했던 그는 절망적인 혼란에 휩싸였다. 그는 결혼 하건 안 하건 그녀에게 가야 한다. 가서 충동적으로 와락 끌어안았던 행동에 대해 사과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 다음 성당으로 올라가서 마음속 어둠을 몰아낼 한줄기 빛을 간절히 구하리라고 생각했다. 미도리는 방문을 열다가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있었다. 나가이는 순간 할말을 잃었다.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내면의 혼란을 감추려는 듯 그는 군용 외투를 벗더니 어느새 꿇어 앉아 있는 미도리 앞에 스웨터를 벗어놓았다. 그러고는 다다미에서 두 계단 아래에 서서 말했다. “덕분에 독감 한번 걸리지 않고 잘 지냈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미도리는 공손한 태도로 따스한 체온이 남아 있는 낡은 스웨터를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황량한 겨울날씨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러나 더 고약한 것은 그가 아직도 적당한 사과의 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와 똑같이 할말을 잃은 미도리에게도 침묵은 견디기 어려웠다. 갑자기 미도리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그가 불쑥 물었다. “이제는 이 스웨터가 필요 없으신 것 같군요.” 그녀가 말했다. 잠시 후 그녀는 뒷방으로 사라져 갔고 타닥타닥 들려오는 발소리만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사과할 기회조차 망쳐버린 자신에 대해 실망하며 외투를 입었다. 미도리의 반응을 보면 결혼에 대한 희망은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인생의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이 가련한 남자를 단순히 동정했던 것이다. 이제 그가 전선에서 돌아왔으니 그녀의 의무는 끝난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무거운 그는 모리야마씨네 대문을 나와 언덕을 올라갔다. 그리고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우라카미 성당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사제관 현관에 당도하여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를 맞이한 신부는 언젠가 나가이가 참석했던 크리스마스 자정미사를 집전한 바로 그 신부였다. 모리야마 신부는 마치 오랫동안 잃었던 형제가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군인의 손을 덥석 잡더니 서재로 안내했다. 벽을 따라 책들이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조금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신부는 명함을 내밀었고 나가이는 신부의 함자인 모리야마가 미도리의 성과 발음은 같지만, 야마(‘산’이라는 뜻)만 같고 나머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가이는 모리야마 신부에게 혹시 모리야마 사다키치시네 근처에 살고 있는 모리야마 진자부로씨와 친척이냐고 예의 바르게 물었다.  “네, 그분이 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혹시 선생을 붙들고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하지나 않았는지요?” 신부도 나가이도 모두 웃었다. 하지만 나가이의 웃음에는 어딘가 편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전쟁이 낙천주의와 넘치는 활기를 앗아갔던 것이다. 이제 그는 이 낯선 사람에게 자신이 도덕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 말해야 한다. 어쩌면 모리야마 신부는 화를 내며 뒷걸음질칠지도 모른다.

“신부님, 지금 제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신부님의 귀한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저는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어쩌면 평화를 얻을 권리를 상실했는지도 모릅니다. 가톨릭 교리서에서 나쁘다고 하는 잘못은 모두 범했습니다. 어쩌면 교리서에서 말하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까지 범했는지도 모릅니다.” 나가이는 긴장한 나머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부의 마음은 전선에서 막 돌아온 지친 군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수 있는 오차(연한 녹차) 주전자를 난로에서 가져와 찻잔에 따랐다. 나가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차를 마셨고 평정을 되찾았으며, 신부의 따뜻한 눈길에 힘을 얻어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지난날의 독단적인 무신론,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회의, 파스칼을 이해하기 위한 몸부림, 취하도록 마시는 술버릇, 그리고 매춘굴에 드나들었던 것까지 모두 말했다. “가끔은 저도 하느님과 내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나가이는 계속했다. “확실하게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어떻게 이런 것들을 확신할 수 있었으며 사제가 되셨는지요?”

 

모리야마 신부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1864년 반 反 그리스도인 칙령이 재차 공포되었을 때 증조부모와 가족은 체포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나가사키의 사쿠라 마치 감옥에서 돌아가신 지 얼마 후 증조 할아버지도 쓰와노에 있는 감옥에서 돌아가셨지요. 당시 22세였던 장남 진자부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인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쓰와노는 신도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안 지역으로 감옥 관리들은 그리스도교 농부들을 머지않아 신도로 복귀시키겠노라고 도쿄의 중앙정부를 향해 호언장담했습니다. 하지만 장황한 설득이 실패로 끝나자 세련된 고문 방식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들은 혹한의 겨울에 진자부로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장대 끝에 달린 갈고리에 걸어 호수의 얼음 속에 처박았다가 죽기 직전에 꺼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글거리는 화덕 가까이 난폭하게 떠밀었습니다. 고문아 반복되는 동안 희생자들은 늘어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문에 못 이겨 신도를 받아들였으며 맛난 음식과 함께 안락한 숙소로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바위처럼 단단하고 웅변술이 뛰어난 진자부로는 경찰이 반드시 꺾어야 할 핵심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고문 총책임자는 사무라이 출신의 모리오카 였는데 그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빠른 시일 안에 신도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큰소리친 장본인이었습니다. 진자부로의 저항으로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더욱더 악랄한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가족들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을, 14세 도니 막내동생 유지로를 진자부로가 얼마나 아끼는지 모리오카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지로는 발가벗긴 채 매를 맞고 진자부로의 감방에서 가까운 곳에 감금되었습니다. 소년은 고통으로 신음했지만 꿋꿋이 견뎠습니다. 소년은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묶였고, 죽창에 찔렸으며, 외국 미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조롱을 당했습니다. 또한 무릎을 파고드는 대나무살에 꽁꽁 묶였으며 새파랗게 질릴 때까지 얼음물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어린 소년은 아사를 면할 정도의 식량으로 연명하면서 혹독한 고문을 14일 동안 견뎌냈습니다. 마침내 소년은 의식을 잃었습니다. 모리오카는 유지로의 의지를 꺾을 심산이었지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죽어갔습니다. ‘내가 사무라이인가? 젖비린내 나는 어린 소년을 고문하여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내가 사내대장부인가?’ 그는 의식을 잃은 소년을 여자 감방에 수감된 누나 마쓰에 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체온으로 동생을 살려내려고 온갖 애를 쓰면서 소년을 극진히 보살폈습니다. 눈을 떴을 때 누나가 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소년은 매를 맞을 때 겁쟁이처럼 큰소리로 울었던 것을 용서해 달라고 누나에게 말했습니다.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유지로는 죽었는데, 죽기 전 가족들이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을 누나에게 남겼습니다. 그들은 유지로가 환청을 듣고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니라 ‘장래의 일을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의 격려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누나에게 살아서 우라카미로 돌아갈 것이며 어린아이들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후 우라카미로 돌아온 그녀는 그리스도교 박해로 인해 고아가 된 어린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최초의 가톨릭 수녀의 한 사람으로 일생을 어린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소년은 형 진자부로도 무사히 풀려날 것이며 훗날 형의 아들이 신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소년의 말대로 진자부로는 박해를 견디고 살아남았으며, 우라카미에 돌아와 결혼했습니다. 장남이 태어나자 그는 아기를 안고 프랑스 신부의 사제관으로 달려가 ‘신부님, 아들입니다. 이 아기가 자라서 신부가 될 수 있게 기도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날 선교사의 강복을 받은, 새빨간 얼굴을 하고 울어대던 조그만 핏덩이가 바로 접니다.” 모리야마 신부가 계속했다. “저의 신앙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가 되고 나서 저는 무신론에서 신앙으로 옮겨간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파스칼을 존경한다고 하셨지요. 파스칼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도 선승 도겐에 대하여 말했습니다만, 13세기 지성인들은 철학적인 담론을 나누고자 교토를 떠나 에이헤이지 산속에 자리잡은 그의 사찰을 찾아갔지요. 하지만 그는 장황한 담론을 거부했습니다. 그 대신 ‘그냥 명상하십시오!’라고 말했지요. 신학생 시절 저를 많이 도와주셨던 프랑스 신부님은 초기 그리스도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그리스도교의 도겐이라고 할 수 있는 오리겐의 말을 즐겨 인용했습니다. 오리겐은 요한복음서야말로 성서의 요체인데 이 복음은 ‘예수의 가슴에 기대야만’, 다시 말해 기도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신비스런 계시에 관한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방사선학처럼 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기도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기도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더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했다고 염려하셨지요.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죄는 성령을 고의적으로 철저히 거부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 나오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 예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도리는 교실에서나 그 밖의 장소에서 별로 당황하는 법이 없는 침착하고도 강인한 성품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나가이라는 한 남자로 인해 그녀는 여지없이 흔들렸다. 그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났을 때 그녀는 벅차 오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스웨터를 모리야마 집안의 가보인 십자가 밑에 놓았다. 그녀의 집안이 7대에 걸친 그리스도교 박해를 피해 소중하게 지켜온 바로 그 십자가였다. 기도하는 동안 눈물이 두 뺨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예수님, 이것이 그의 스웨터입니다! 주님은 그를 돌아오게 해 달라는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도 아십니다. 하지만 저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고 훌륭한 분이 그의 아내가 되어야겠지요. 제가 그와의 결혼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주님은 웃으실 겁니다. 이제 그가 전선에서 무사히 귀환했으니 저는 부모님과 중매쟁이가 소개해 주는 남자들 중에서 좋은 사람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 그로 인한 고통을 그를 위한 기도로 바칩니다. 그에게 믿음을 선물로 허락해 주십시오.’

그녀는 맥이 탁 풀렸다. 일에 몰두하려 했지만 집중할 수가 없어 집을 빠져 나와 400미터 남짓한 거리를 걸어 성당으로 갔다. 성당 입구에는 십자가 처형 장면을 새겨 넣은 석상이 서 있었다. 그녀는 비탄에 잠긴 성모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가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성모 마리아님,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제게 일어난 모든 일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하느님께선 우리 삶을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드시나요? 지금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저에게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녀는 어스름한 성당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묵주를 꺼냈다. 그날은 마침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는 금요일이었다. 자신의 고통과 잘 어울리는 듯 했다. 20분쯤 지났을 때 일어나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가 앞쪽에서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미도리, 너의 할 일은 이제 끝났다. 이제 그가 집으로 돌아와 나와 함께 있으니 너는 그를 잊어야 한다.” 그때처럼 수명하기 힘들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를 잊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가 주일미사에 참례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그녀의 눈에 띄었다. 이제 그녀는 결혼 적령기인 25세가 되었다. 나가이가 만주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녀는 부모에게 이런 사정을 말씀드릴 수는 없었지만 구혼 제의를 여러 번 거절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라는 부모의 청을 받아들여 지역 가톨릭 계통의 준신(순결한 마음) 여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봄이 되자 숲은 휘파람새의 노래로 넘쳐났고 벚나무 가지마다 꽃망울을 터뜨렸다. 하지만 미도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가이는 병원 엑스선과에 복귀했지만 여가 시간에는 성서와 교리를 공부하고 모리야마 신부와 함께 지냈다. 가톨릭의 관습, 전례, 기도 등에 관하여는 별도의 교육을 받았다. 나가이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우라카미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마을 주민이었다. 그는 철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나가이는 곧 그가 겸손하고 지혜롭고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수위였다.

 

 

 

13. 백호주의와 황색 위협

 

1934년 6월, 햇빛이 쏟아지는 산과 들에는 제비들이 분주히 날아다녔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사회주의자들은 민중의 기분에 휩싸여 울적해 보였다. 이른바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 – 말하자면 1932년 미국 선거에서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지지했던 사람들 – 이 이제는 극우파로 전향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1920년대 후반 경제공황의 타격을 심하게 받았다. 서방 국가가 일본 상품에 엄청난 과세를 부과했을 때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취약함과 소외감, 그리고 서방 국가의 노골적인 차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가운데 유일하게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국가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서구인들이 그들을 열등한 ‘유색 인종’으로 깔보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다른 승전국들과 나란히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참석했을 때 일본은 최종 보고서에 인종차별을 비난하는 문구를 집어넣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빌리 휴스는 이를 무효화하기 위해 반대 세력을 규합했다. 그는 ‘백호주의’ 노선을 변경하는 것은 사소한 일 같지만 장차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 사람들은 백호주의란 말도 혐오했지만,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또 다른 인종차별적 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황색 위협’이라는 표현이었다. 이것은 독일의 빌헬름 2세가 1895년 어느 날, 동양인들이 유럽 도시를 초토화하는 꿈을 꾸고 난 후 지어낸 말이다. 그는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이 ‘예언적’ 경고를 퍼뜨렸다. 그렇게도 많은 유럽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고 또 이를 너무도 쉽사리 받아들이는 서구인들에 대해 일본인들은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일본에 황색 위협이라는 불미스런 이름이 붙어버렸고, 일본 언론은 서방세계에서 이 말이 얼마나 빈번하게 사용되는지 낱낱이 보도했다. 날이 갈수록 일본 사람들은 서방세계가 일본을 ‘유색 인종’ 가운데 유일하게 강력한 국가로 인정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일본 여론을 형성하는 계층, 곧 작가, 언론인, 교수, 교사, 공무원 등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를 거치는 동안 서구 민주주의에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초기에 일어난 여러 사건으로 그들의 열정은 식어버렸다. 민주주의라고는 하나 인종차별적이었고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에 처했으며 그 틈바구니에서 도덕적 무질서가 판을 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혼과 청소년 범죄가 급증하고 시카고 불량배를 흉내 낸 깡패들이 경찰을 조롱하고 다녔다. 그 밖에도 서구에서 유입된 저속한 음악과 춤, 도발적 옷차림 등은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퇴폐적인 현상으로 비쳤다.

극우파 지지자들과 군국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현상을 이용하여 그들의 단순한 생각, 곧 일본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서방 국가만큼 강력해질 때만 나라가 안전하다는 논리를 적극 강화해 나갔다. 서구 민주주의자들이 일본을 중국이나 인도 같은 삼류 국가로 전락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서방세계는 일본의 적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와 그리스도교와 같은 서구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일본 사람은 일본의 반역자로 간주되었다.

국수주의와 신도가 거세게 되살아나고 있었고 그 조짐은 머지않아 그리스도교 마을인 우라카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모리야마 신부와 성당은 극우파인 경찰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나가이는 자기가 성당에 다니기 때문에 공립학교인 의과대학에서 승직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풍문으로 나가이가 그리스도교에 귀의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즉시 집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며칠을 두고 아버지는 자신의 능력뿐 아니라 한집안을 이끌어 가는 어른의 권위를 총동원하여 아들의 신념을 되돌리기 위해 애썼다. 장남인 나가이에게는 다른 가족에 대한 특별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살아 있건 죽었건 상관없이 말이다.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가문에 대한 충성심과 전통 종교를 버린 장남만큼 조상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없다.” 아들은 조상들도 진리를 찾아서 다이샤 신도에 귀의했으니, 자기가 그리스도교의 복음서 안에서 진리를 찾아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도 그 때문에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조상들도 신도를 택하기 위해 이전 종교를 버렸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한 것은 실수였다. 아버지는 분노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고함을 질렀다. “신도는 맨 처음부터 있었다.”

나가이는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해 준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어쩌면 이 광경을 비켜보는 조상들이 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오래 전 바로 아버지가 새로운 서양의술을 펼치는 의사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낯선 여행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린 ‘평온한 의사’는 아들의 세례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나가사키에 돌아온 나가이는 너무나 혼란스러워 곧장 수위 선생을 찾아갔다. 수위 선생은 유년시절에 겪었던 바빌론 유수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난 유다인들의 바빌론 포로 생활을 뜻함. 여기서는 일본의 그리스도교 박해에 대한 은유로 사용됨 – 역주)의 잔인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최근 일본 사회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한 반 反 그리스도교 정서는 지난 상처를 건드렸고, 비신자들을 향한 원한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가이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나를 따를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가이는 충격을 받았고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다음날 나가이는 좋은 상담자로 평판이 나 있던 모리야마 진자부로 노인을 찾아갔다. 모리야마 노인은 나가이의 이야기를 이따금 머리를 끄덕이며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와 우라카미 그리스도인들이 쓰와노의 감옥에서 석방된 지 여러 해 지난 어느 날, ‘모리오카 수사’라는 사람의 편지를 받았네. 그 사람은 자기 아버지와 쓰와노에서 그리스도인을 심문한 책임자였으며 내 동생 유지로를 포함하여 36명의 그리스도인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고 했네. 모리오카의 아들인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수도회에 입회했다며 대단히 수고스럽겠지만 쓰와노에 와서 만나줄 것을 간곡히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여비를 보내왔네. 쓰와노 기차역에서 나는 그 사람을 만났네. 우리는 말없이 도시의 외곽지역 감옥이 있던 곳을 갔네. 나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지난날이 떠올랐네. 감옥 건물은 없어졌지만 연못은 그대로 있었네. 그리고 나지막한 돌담도 그대로였네. 그곳에서 사랑하는 친구 야스타로가 앉을 수도 설 수도 누울 수도 없는 작은 상자에 감금된 채 26세의 나이로 죽어갔지. 그는 사장에 갇혀 못질 당한 채 한겨울 혹한 속에서 방치되었고, 20일이 지난 후 본향인 하느님께 돌아가는 자비로운 죽음을 맞았네.

내가 무릎을 꿇자 어느새 모리오카 수사도 꿇어앉아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엎드려 흐느껴 울었네. 난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지.  ‘선친께서는 관리로서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일본에 해로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막내를 누이동생에게 데려다 줄 때 그분 나름대로 자신의 실수를 고백했습니다. 이제 말씀 드립니다만 그 후 저는 줄곧 수사님의 아버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천국에 있는 유지로도 그분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수사님이 신앙을 위해 헌신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수사님도 알고 계시다시피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진리가 승리한 또 하나의 예가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언제나 주도권을 갖고 계시며, 우리가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어떠한 난관도 암흑도 고통도 새로운 은총의 기회가 되지요.'” 진자부로 노인은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차를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화제를 바꾸었다.

 

나가이는 곤피라 산 아래 나 있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갔다. 그가 세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고 또한 어머니의 품에서 몸에 밴 효도의 정신을 위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예컨대 독일의 성서 비평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확신하기 전에 더 치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아버지가 그리스도교 사상을 받아들일 때가지 세례를 미루는 것이 신중한 게 아닐까? 게다가 그에게는 아직 개척 분야인 방사선학을 발전시킬 의무가 있었다. 공립대학교에서 정교수의 조수 노릇이나 하는 지금의 조교수 신분에서 승진할 때까지 세례를 미루는 것이 낫지 않을까? 승진한 뒤에 세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교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다미방 탁자 옆에 앉았다. 그리고 <팡세>를 펼쳐 읽다가 한 문장에서 눈을 떨 수가 없었다. ‘간절히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빛이, 그 반대의 사람들에게는 어둠이 주어진다.’ 해답은 분명해졌다. 지금 세례를 미룬다면 그것은 어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다.

결심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만주 전선으로 떠날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면서 모리야마 신부를 찾아갔다. “신부님, 제 부족함을 나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만 세례를 받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제게도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신부는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랜 시간 충분히 검토해 보았느냐고 물었다. 세례를 서둘러 받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부님, 확신이 섰습니다. 아버지는 제 생각이 틀렸다고 확신하지만 말입니다. 아버지와 이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제가 세례 받는 것을 미루면 미룰수록 아버지와 사이만 더 나빠질 것입니다. 제 신앙상태를 시험해 보시고 세례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판단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신부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시작했다. 나가이의 그리스도교 이해와 헌신적 자세에 관한 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신부는 몇 주 안에 새벽 미사 전 나가이에게 세례를 베풀기로 했다.

1934년 6월, 장마가 시작되었다. 한 달간 계속되는 비는 5월에 모내기를 끝낸 벼의 생장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다. 나가이는 어둠 속에서 일어나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희부옇게 눈앞에 나타난 서양식 건축물은 가문과 문화를 저버리고 있다는 아버지의 질책만을 거듭 상기시켰다. 신부, 교리를 가르쳐 준 수위 선생,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성당 제의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세 번째 사람, 곧 혈색 좋고 투박해 보이는 농부는 나가이가 처음 성탄 자정미사에 참석했을 때 중세풍의 성가대 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어색하여 웃음짓게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모리야마 신부가 나가이의 대부 代父로 선택한 이 사람은 미도리의 사촌으로, 머지않아 나가이에게 중요한 인물이 된다.

네 사람은 조명이 잘 안 되어 어두컴컴한 장소로 갔다. 신부가 성수반을 준비하는 동안 느닷없이 엄습했던 공포에 대해 나가이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그 순간 사탄과 사탄의 모든 일과 허세를 물리쳐야 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신성한 약속의 결과가 비인간적으로 생각되었다. 성년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던 생활, 곧 동시대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의 일부로 여기는 것들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이렇게 반쪽짜리 남자, 반쪽짜리 일본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할 수 있을까? 신부가 소금을 그의 혓바닥에 올려놓자 나가이는 오랜 욕망에서 자유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서서히 평화가 찾아왔다. 라틴어가 더 이상 낯설게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다른 인종과 문화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 가족을 위한 모국어였다. 그것은 베토벤, 바흐 그리고 하이든의 위대한 미사곡을 전해주는 장엄한 언어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한 자아는 ‘소아 小我’ 였다. 고대 현자들은 소아를 대아 大我와 대비시켜 이야기했는데, 이들은 대아가 우주의 심장을 뛰게 하고 우리 개개인의 ‘소아’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다.

 

나가이는 1597년 나가사키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26명 가운데 한 사람인 예수회 순교자, 미키 바오로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택했다. 나가이는 미키 바오로의 역동적 영성과 다카야마 우콘성의 장군이었던 선친에게 물려받아 일본적인 것에 대한 그의 애정에 탄복했던 것이다.

나가이가 만주 전선에 있는 동안 미도리는 종종 모리야마 신부에게 그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는데, 모리야마 신부는 서로에 대한 두 사람의 감정을 눈치채고 이 사실을 나가이의 대부에게 말했다. 이 농부는 체격이 건장하고 동작이 느린 사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누구보다도 발 빠른 중매쟁이가 되었다.  두 젊은이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정식으로 만남을 주선했다. 그 다음엔 두 사람을 따로 만나 그들의 마음을 떠보았다. 문제는 나가이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엑스선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엑스선은 미래의 의학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분야입니다만 아직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사선을 연구하던 많은 과학자들이 암에 걸려 죽었습니다. 저도 젊은 나이에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미도리는 결혼을 승낙하기 전에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룻기에는 미도리가 좋아하는, 그래서 준신여학교 학생들에게 이따금 읽어주던 구절이 있다. 그녀에게 이 말씀은 결혼생활을 요약해 놓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님이 눈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고 어머니 곁에 같이 묻히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됩니다. 죽음밖에는 아무도 저를 어머님에게서 떼어내지 못합니다.” 나가이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녀의 하느님을 선택했다.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의 삶에 뒤따르는 위험을 함께 나누는 일은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녀의 생명을 구했다. 그녀는 공손히 절을 한 후 중매쟁이에게 말했다. “우리가 인생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어디를 가든지 또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기든지 그와 함께하는 삶은 제 특권이 될 것입니다.”

미도리의 결혼 승낙을 받고 나서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후루세 선생 부부를 찾아갔다.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인 모리야마 미도리와 결혼하려 하는데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다, 아버지를 존경함에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행동을 하게 되어 지금 너무나 고통스럽다, 하지만 자신이 이와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양심에 따른 것이며 이제는 진실한 길을 알았으므로 그 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면서 후루세 선생 부부에게 아버지에게 잘 말해 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미도리를 자랑스러운 며느리로 여길 것이며 자기와 미도리는 나가이 가문에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입은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나가이의 결단에 후루세 부부는 미도리를 집으로 초대했으며 그녀에 대해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다. 후루세 부부는 친구의 아들을 위해 미토야까지 찾아갔고, 연로한 의사 나가이 노보루는 마지못해 아들의 결혼을 승낙했다. 그리고 나가이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혼배성사에 참석했다. 그 혼배성사가 하루아침에 새로운 종교에 대한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말이다. 미도리는 서서히 그들을 변화시켰다. 처음부터 그녀는 나가이 집안과 평화를 이루려고 했다. 나가이 부부는 가능한 한 자주 시마네 현에 있는 고향집을 방문했다. 첫아기가 할아버지 품에 안길 때쯤 나가이 노보루의 적대감은 사라졌고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14. 태풍과 우아한 대나무

 

1934년, 나가이 다카시는 다른 과에 소속되어 있는 방사선과 주임교수의 조수로 40엔의 월급을 받았다. 그런데 미도리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목축업도 정리한 상태였으므로, 날로 악화되어 가는 일본 경제 상황에서 어머니까지 모시고 풍족하게 살아가기는 매우 어려웠다. 1930년에서 36년 사이에 무역 수입은 29퍼센트 증가하는 한편 수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다. 지난 6년 동안 엔화 가치는 두 번이나 하락했으며 1936년엔 1930년의 반으로 떨어졌다. 수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미도리는 목초지를 채마밭으로 가꾸었다. 어머니 쓰모는 웃었지만, 미도리는 신선한 야채라도 자급자족하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다가 작물 가꾸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녀에게는 온종일 채마밭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었다. 글쎄, 그것보다 더 좋아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바느질이었을 텐데 그녀의 바느질 솜씨는 나가이를 언제나 기쁘게 했다. 결혼한 뒤로 그는 옷을 사 입은 적이 없었다. 그가 레이온과 같은 화학섬유로 만든 것은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결혼한 뒤 나가이는 장갑과 양말에서 속옷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순면이나 모직 또는 실크 제품으로만, 게다가 모두 미도리가 손수 만든 것만 착용했다. 또한 그녀는 당시 우라카미 양복 전시회의 단골 품목인 트위드(스코치) 코트까지 만들어 입혔다. 미도리는 잠언 31장에 기록된 이상적인 아내와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나가이는 매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상적인 일본 여성은 대나무처럼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민감하면서도 강하다. 대나무의 섬세하고 연약한 잎은 미세한 바람에도 흔들리지만, 가을철 태풍도 그 뿌리를 뽑을 수 없다.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뒹 거대한 삼목과 실편백나무는 뿌리가뽑혀 나뒹굴지만 대나무는 고요히 서 있는 법이다.

이상적인 여성을 그리고 있는 많은 문학작품 외에도 노든 도시와 마을에서는 다도나 꽃꽂이, 수예 교실을 운영했는데 언제나 여성들로 붐볐다. 이 강습은 매우 중요한 여성의 일과로, 말하자면 결혼을 하고 어머니가 되기 위해 곡 거쳐야 할 신부수업이었다. 나가이는 아내가 꽃꽂이와 수예 강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기뻤다. 결혼 후 그녀는 그들의 넓은 집에 야학을 열고 꽃꽂이와 수예를 가르쳤다.

미도리의 식품저장실에는 신선한 야채가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감자, 배추, 양배추, 양파, 고구마, 겨자잎, 무 그리고 보리농사를 지었는데 소출이 나면 이웃에 고루 나누어주었다. 나가이는 괴물 같은 녹색 덩굴손이 불쑥 나타나 집을 포위하고 삼켜버리면 어쩌나 하고 미도리를 놀렸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그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미도리는 몸뻬 차림으로 채마밭에서 일하곤 했다. 몸뻬란 전시에 정부의 내핍생활 장려와 더불어 일상적인 작업복이 되어버린, 품이 넉넉하고 자루같이 생긴 바지를 말한다. 그녀가 교사로 있던 준신여학교의 부잣집 아가씨들이 이따금 화려한 기모노 차림으로 지나가다가 미도리와 마주치면 그들은 어김없이 걸음을 멈추고 큰 소리로 선생님을 부르면서 깍듯이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러면 미도리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호미질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유쾌한 농담을 던지면서 정중하게 인사를 받았다. 헤어지기 전 그들은 다시 한번 예의 바르게 ‘작별인사’를 주고받았다.  다도를 하든지 호미질을 하든지 무엇이든 능숙하게 해내는 강하고도 섬세한 손을 가진 이 여성을 나가이는 사랑했다.

대학에서는 방사선과를 독립시키기 위한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일은 엄청나게 늘어났고,  때마침 신장결석에 관한 나가이의 논문이 의학잡지에 실렸다. 미도리는 그가 교수가 되어간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새로운 연구에 몰입할 때 그는 며칠씩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은 그 자리에 벗어놓기 일쑤였고, 책상에는 환자들의 명함, 각종 잡지, 책들이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겸연쩍은 듯이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보, 당신 지금 바빠요? 교토 대학교에서 보낸 리포트가 없는데 좀 찾아주겠소?” 그가 연구에 몰입하는 동안 다른 일을 등한시해도 그녀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어머니에게 그의 방사선학과 관련된 일이 다름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예산 세우기, 물건 구입, 은행 심부름, 여학교에 관련된 업무, 그녀가 운영하는 야간학교, 그리고 채마밭 가구기 등 집안일에 관한 한 아내의 몫이었다.

주일과 축일 미사 때 나가이는 모리야마 신부가 나자렛의 소박한 가정생활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론하는 것을 종종 들었다. 그 소박한 아름다움은 보편적 가정생활의 크나큰 가치,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도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가이는 어머니한테 밥 한 공기에도 우주를 발견하는 법을 배웠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이 밥을 잘 보렴. 한 톨의 쌀을 얻기 위해 수많은 농부들이 몇 세대를 거쳐 황무지를 개간하고 가뭄과 홍수와 가난과 전쟁과 질병의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논을 일구어 냈단다. 도 이 소박하고도 예쁘게 생긴 밥공기와 젓가락을 보면서 이것들을 만든 수많은 장인과 이것들을 우리 손에 오게 한 모든 상인의 노고를 생각해 보렴. 그뿐만이 아니다. 열심히 일해서 쌀을 사고 밥을 지어준 부모의 은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머니는 두 손을 모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절을 한 후 이 모든 것과 우주에 대하여도 감사하는 기도로 끝맺곤 했다. “아미타 부처님, 이 모두가 부처님의 은공입니다.”

방사선과 스에쓰구 주임교수는 많은 일을 시작했으며 엑스선 관련 강의에 갈채를 보내는 의사들이 점점 늘어갔다. 나가이는 스에쓰구를 돕는 한편 일반인을 대상으로 연속 강좌를 개설했다. 청중들이 늘어나면서 주임교수의 신임도 더 돈독해졌다. 나가이는 대학교재 집필에도 참여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대학에서는 그의 열정적인 능력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마침내 그를 대학병원 의국장으로 임명했다. 우라카미 그리스도인의 지도급 인사였던 다가와는 나가이에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회 가입을 권유했다. 나가이는 무슨 일이든지 철저한 사전 검토 없이는 시작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이 단체에 관한 책을 도서관에서 여러 권 빌렸다. 1833년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프랑스인 프레데리크 오자낭에 의해 창설된 단체였다. 소르본 대학교 교수인 오자낭은 나가이와 마찬가지로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힘든 시간을 보냈으며, 평생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에 대해 연민을 갖고 있었다. 나가이는 그에 관해 흥미를 느끼며 책을 읽어 나갔다.

소르본 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 오자낭은 파리의 슬럼가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울적한 마음으로 파리 교구의 우중충한 성 스테파노 교회 안으로 들어간 그는 앙드레 앙페르가 꿇어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앙페르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기도를 마친 그에게 오자낭이 물었다. “교수님, 교수님은 기도를 믿으시나 봅니다.” 그러자 앙페르가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기도해야 한다네.” 나가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 자신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음에도 다른 이들의 신앙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나가이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회에 가입했다. 첫 번째 진료봉사를 나갔을 때 그는 가미노시마 마을 주민이 결막염에 걸린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대학병원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설득하여 무의촌 진료봉사단을 만들어 주일마다 무료진료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그는 임질에 감염되어 다섯 살 짜리 아들을 데리고 산중에 숨어사는 여자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녀는 시각장애인이 되어 아들과 함께 바위에 기대어 지은 오두막에서 그들의 유일한 벗이자 생계수단인 암탉을 키우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나가이가 처음 찾아갔을 때 그녀는 적대감을 보였고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주 그는 옷과 음식을 가지고 갔고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그가 떠나기 전 그녀가 말했다. “의사 선생님, 어디선가 매화꽃 향기가 풍겨와요. 매화꽃이 참 예쁘게 피었지요?” 그가 산기슭으로 기어올라가서 꽃을 꺾어 내밀자 그녀는 은은한 꽃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1935년 2월의 어느 추운 겨울 밤 그는 난방도 안 된 실험실에서 늦게까지 일을 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목이 아프고 열이 났다. 아내가 누워서 쉬라고 했지만 그날따라 복잡한 수술에 입회하기로 되어 있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느낌이 좋지 않아 이비인후과 전문의에게 부탁하여 주사를 한 대 맞았다. 잠시 후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채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면서 복통이 일어났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순간 증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양해를 구한 뒤 병실 밖으로 나와 검붉은 피를 토했다. 그러고는 심한 호흡장애를 일으켰다. 스에쓰구 교수가 그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고 강심제를 놓았다. 진단 결과 나가이의 병은 특정 주사약에 대한 과민 반응인 아나팔락시스로 판명되었는데, 이는 내출혈, 부종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심할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나가이는 온몸에 열이 나고 눈은 거의 뜨지 못했으며 얼굴이 축구공처럼 부어올랐다. 잠시 후 신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가이는 마지막 순간이 가까웠다고 느끼면서 신부의 기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호흡장애로 인한 끽끽거림을 멈추고자 안간힘을 썼다. “하느님의 자녀여, 일생 동안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죄는 오직 사랑이신 하느님께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구속하기 위해 고통을 받고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지금 이 육신의 아픔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이 고통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함께 바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합시다.” 나가이는 신부에게 죄를 고백했으며 신부는 사죄경을 바친 후 그에게 성유를 발라주었다. 성유의 향기는 편안했고 초자연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정신이 점점 흐려지면서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은 평온했다.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여자인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울고 있었다. 아, 미도리! 갑자기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긴장된 음성이 들려왔다. “맥박 130, 호흡 36.” 다시 주사를 맞았다. 정말 죽을 것이라면 미도리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렇게 죽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 순간 소년시절에 배웠던 공자의 말씀 한 구절이 뇌리에 스쳤다. ‘아침에 진리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는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번 경험은 그를 철저히 바꾸어 놓았다. 그때까지는, 심지어 만주 벌판에서 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도 죽음을 그렇게 가깝게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의 차디찬 눈을 똑똑히 보았다. 주사 한 대 잘못 맞고 인생무상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몇 백 년 동안 풍상에 마모된 묘비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옛 교토 지방의 화장터인 ‘아다시노의 이슬처럼, 도리베야마의 연기처럼’ 인생은 덧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가이는 난생 처음으로 자기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임을 뼛속 깊이 체험했다. 그리고 성서를 읽거나 성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더 많아졌다.

그 후 그는 천식환자가 되었다. 찬 공기, 실험용 토끼, 호탕한 웃음, 사케와 과식, 담배연기 자욱한 방, 또는 갑작스런 운동 등이 그에게는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어느 눈 내리는 밤이었다. 그날도 천식기가 도져 미도리는 그에게 일찍 쉬라고 했다. 그가 막 잠자리에 누었을 때 누군가가 찾아왔다. 나가이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회 봉사 때 찾아간 적이 있는, 연로한 농부가 천식으로 숨을 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미도리의 만류에도 그는 환자에게 가겠다고 말했다. 아무리 만류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미도리는 하는 수 없이 그가 옷 입는 것을 거들어 누빈 기모노, 또 그 위에 코트를 입게 했다. 그가 싫다는 것을 억지로 우겨 양말을 두 켤레 신게 하고 장갑을 챙겨주고 찬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면 마스크를 씌워주었다. 그녀는 이제라도 그가 마음을 바꿔 가지 않기를 바랐지만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웰링턴 장화 (웰링턴 공작이 고안한, 무릎 위까지 오는 가죽 장화 -역주) 신는 것을 거들었다. 한 손에는 왕진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나서는 자신이 영락없이 에스키모처럼 보였으리라고 그는 훗날 술회했다.

농부는 2킬로미터 덜어진 언덕에 살고 있어 나가이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천천히 걸었다. 나가이가 도착했을 때 노인은 앉아 있었다. 연신 색색거리면서 숨을 들이쉬기 위해 고투를 벌일 적마다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는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눈빛으로 도움을 간청하고 있었다. “이제 곧 괜찮아질 겁니다.” 나가이는 노인의 여윈 팔에 아드레날린 0.3과 쓰디쓴 장뇌 1.0을 주사하면서 말했다. 30초 만에 경직되었던 얼굴 근육이 풀렸고 호흡이 순조로워졌다. 나가이는 5일치 약봉지를 건넨 뒤 작별인사를 했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의사에게 깊은 감사를 보내는 노인의 눈가에는 빛나는 다이아몬드 같은 눈물방울이 맺혔다.

나가이는 다시 어두운 밤거리로 나섰다.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렸고 불빛은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난 괜찮을 거야, 내리막이니까.’ 그러나 그는 어리석게도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나다를까, 몇 발짝 내딛기도 전에 천식기가 도진 것이다. 길 바로 옆 둔덕에 감자를 저장하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비틀거리면서 구덩이로 들어가는데 눈이 쏟아졌다. 그는 덜덜 떨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아드레날린 주사를 맞고 싶었지만 불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떨리는 손으로 주사를 놓을 수가 없었다. 공포가 엄습했고 점점 더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날이 밝으려면 예닐곱 시간은 있어야 하는데다 또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밤 이곳을 지나갈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제 의사가 아니라 겁에 질린 환자였다.

얼마 후 구덩이 밖에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등불과 묵직한 지팡이가 보였고, 그 다음엔 그의 짧고 거친 숨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당신이죠? 그렇죠?”, “그렇소.” 그는 헐떡이며 말했다. “어서요, 여보, 불 좀 비춰요.”

 그녀는 왕진가방을 열고, 주사기에 약을 넣고 바늘을 깊숙이 찔렀다.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아내의 가슴에 기댄 채 잠시 주사약이 퍼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죽은 영혼이 연옥을 빠져 나올 때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미도리는 남편을 업고 가겠다고 자청했다. 그녀가 몸뻬를 입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있는 동안 그는 지친 몸을 그녀의 등에 실었다. 앞으로 한번 숙였다가 몸을 일으킨 후 그들은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적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불빛에 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그는 미도리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던 때를 떠올렸다. 70킬로그램이나 되는 나가이의 체중에 비해 그녀는 가벼웠지만, 우아한 대나무는 꺾이지 않았다!

 

 

 

15. 염불식 기도와 어두운 밤

 

나가이가 결혼한 처음 몇 년 동안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는 강의하랴, 논문 집필하랴, 엑스선 연구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에 정치 같은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1935년 4월 4일 장남이 태어났으며 아기의 이름은 정직을 뜻하는 마코토 라고 지었다.

1930년대 중반, 도쿄에는 세 가지 권력 기반이 있었다. 첫 번째는 히로히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권력으로 이는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그의 조부 메이지 천황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지만 심약한 다이쇼 천황은 국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다이쇼의 아들인 히로히토는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교육을 통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황제로 성장했다. 두 번째 권력 기반은 정치가, 재계 인사, 기업가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국민의 절반 이하만 투표권을 가졌던, 이제 막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던 일본 사회에서 비교적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던 그룹이었다. 세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권력 기반이 바로 군국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조국을 군사, 경제대국으로 만들어야 할 신성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정치가와 사업가들이 군국주의자들의 만주 합병과 어마어마한 군사비용에 결사반대를 했으나 그 보복은 참으로 끔찍했다. 반대한 일곱 사람이 모두 암살당한 것이다. 히로히토 천황은 두 번씩이나 이 유혈참사에 대해 강도 높게 항변했지만 그때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가 믿고 의지하던 사이온지 왕자의 신랄한 비난뿐이었다. 그 자신도 군국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사이온지 왕자는 천황에게 군림하되 통치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의무를 상기시켜 주었다. 반대자들의 암살사건 이후 누구도 감히 대놓고 반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은 군부 독재시대로 접어들었다. 언론은 철저한 검열을 받았으며 경찰은 군부의 시녀가 되었다. 헌병대가 언제 어디서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공포심을 자아냈다. 모리야마 신부의 이름은 요주의 인물 명부에 올라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외국 사상인지라 여기서 스파이가 나올 수도 있다’는 몰이해 때문이었다.

 

1937년 딸 이쿠토가 태어났다. 7월 7일 밤, 나가이는 딸을 보기 위해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 거리는 남녀노소가 즐기는 민족 축제 다나바타를 경축하는 다채로운 장식으로 가득했다. 나가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린아이들이 밝은 면 기모노을 입고 다나바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그가 좋아했던 구슬픈 이 민요의 핵심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동경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슬펐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별 축제날의 초월적 세계 그 너머에 대해 알지 못했고 베들레헴을 비췄던 순수한 별빛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전쟁 신, 화성의 가혹한 붉은 빛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 라디오에서 불길한 소식이 흘러나왔다. 북경에서 25킬로미터도 안 되는 마르코 폴로 다리 근처에서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면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나가이는 하필이면 7월 7일에 자국 문화의 모체인 중국을 공격했다는 아이러니에 충격을 받은 채 우울한 마음으로 대학까지 걸어갔다. 다른 많은 문화와 마찬가지로 다나바타 역시 고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었다. 나가이와는 대조적으로 장교들은 이제 전면전이 개시되었으니 곧 승리하리라는 확신에 차서 환호했다.

군대는 즉시 참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동원 명령을 내렸다. 며칠 후 우편함에서 정부 발행 우편엽서를 보았을 때 미도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7월이 다 가기도 전에 나가이는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제5사단 위생대 의무장으로 중국행 배를 탔다. 그 후 30개월 동안 중국전선에서 지내면서 군국주의자들의 야만성을 목격하는 동시에 그들인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던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또한 나가이는 두 번 참전하는 동안 집으로 보내는 편지와 일기를 통해 많은 기록을 남겼으며, 중국전선에서 누볐던 제5사단의 활약상을 자세히 전했다.

중국에 도착한 직후인 1937년 8월, 나가이 군대는 만리장성 근처 북쪽 계곡을 따라 행군하다가 기습공격을 받았다. 한바탕 포화가 끝난 후 전열을 가다듬었을 때는 일본군 사상자가 400여 명에 달했으며 모든 통신 장지가 파괴되었고 무기와 의료품, 식품도 대량 파손되었다. 도한 그들은 보급기지에서 완전히 차단된 채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 나가이가 급조해 만든 야전병원은 신음하는 병사들로 넘쳐났다. 그들 모두 긴급한 도움이 필요로 했으나 의료품은 턱없이 모자랐다. 나가이는 지휘관에게 달려가 의료 상황이 절망적임을 알렸다. 지휘관은 지원부대가 오지 않는다면 48시간 안에 모두 전멸할 것이라며 덧붙였다. “우리는 사령부와 연락이 끊긴 상태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오늘 밤 안으로 중국 전선을 뚫고 가서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 말에 나가이는 “저를 보내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나가이는 유능하고 여러모로 쓸모 있는 군인이었기에 쉽게 허락을 받았다.

그날 밤 나가이는 어둠을 틈타 행동을 개시했다. 일본군 사령부는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문제는 중국군이 지키고 있는 최초의 6킬로미터를 어떻게 빠져 나가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가이는 산기슭으로 살금살금 기어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강물을 이용하여 시체처럼 둥둥 떠내려갔다. 마침내 사령부에 도착하여 절망적인 상황을 보고했다. 사령관은 그날 밤 안으로 지원부대를 파견할 테니 함께 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가이는 자기는 의무장이므로 즉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가이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자신감에 날아갈 듯 기뻤다. 그때 그의 눈앞에는 경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운 중국의 자연이 펼쳐졌다. 오른쪽으로는 만리장성이 산등성이를 따라 뻗어나가다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고, 왼쪽으로는 조와 수수를 심은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바로 앞 조밭의 한 나무에 빨간 과일이 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사과였다! 마침 배고 고프고 비상식량도 바닥난 터라 사과나무를 흔들었다. 사과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는 쉬지 않고 달려왔던 터라 몸이 후끈거렸는데 바로 그때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왔다. 온몸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아마도 숨어 있던 농부가 총을 쏜 모양이다. 나가이는 겁에 질린 토끼처럼 은신처를 찾아 달아났다.

일본군 지원부대가 왔고 중국군은 퇴각했다. 부상병들을 모두 옮기고 나자 나가이에게는 비로소 여유가 생겼다. 그는 고국에 있는 집 생각을 잊고 일에만 몰두하려고 애썼지만 그건 불가능했다고 적고 있다. 중국 어린이들은 자기 아이들 같았고, 중국 여인들을 볼 대마다 아내가 생각났으며, 나이 든 사람들은 아버지를 상기시켰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는 선량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적군의 가족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고 우리는 교육받아 왔다. 이 전쟁이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정당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의와 평화는 어디 있는가? 그것을 찾아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몇 주 뒤 야전 텐트 안에서 수술을 하던 나가이가 한 병사와 실랑이를 했다. “그렇지만 반드시 절단해야 한다. 자, 너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가? 네 목숨인가, 오른팔인가?” 문제의 병사는 흐느끼며 대답했다. “오른팔입니다. 저는 바이올린 연주자입니다.” 그때 총알에 양쪽 턱을 관통한 병사가 실려왔다. “이 환자에게 유동식을 주도록 해” 하고 나가이는 위생병에게 지시했다. 전투는 점점 치열해졌고 식량은 바닥이 났다. 젊은 위생병은 산새 알을 구하러 나섰지만 계절이 가을이어서 허탕을 치고 말았다. 몇 시간 뒤 그는 자루에 꿀이 가득 담긴 자루를 갖고 돌아오긴 했으나 얼굴과 양손이 벌에 쏘여 말이 아니었다. 나가이는 노트에 적었다. ‘전쟁은 인간의 최악만이 아니라 최선의 모습도 이끌어 낸다.’

인종적인 면에서나 종교적인 면에서 관용을 찾아볼 수 없었던 그 시대에 나가이는 타민족과 타종교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주었다. 어느 날의 일기에 그는 포켓용 신약성서 말씀에서 힘과 평화를 얻은 일에 대하여 기록하는 한편 그날 새벽 숨진 비신자 전우를 위해 시 한 수 도 적어 놓았다. ‘아름다운 새벽빛 밝아올 때, 전우 평화로이 천국에 오르다.’ 그는 덧붙였다.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한 가난한 농촌이나 도시 빈민 출신 병사들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다. 예수께서 마태오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이는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나가이는 1933년과 1934년에 만주 전선에서 경험했던 내적 혼란을 떠올렸다. 지금 전투는 그때보다 더 치열한데도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렸다. 그는 확실히 변했던 것이다. 어느 날의 일기에는 그날 낮에 체험했던 일, 말하자면 한 중국군 포로를 수술하기에 앞서 괴저에 걸린 그의 발을 씻으면서 마음속에 일어난 희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중국인 부상병에 대해서도 똑같은 연민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중국에 온 것은 누군가를 패배시키기 위해서도,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나는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하러 온 것이다.’

치열한 교전이 있을 때마다 중국 민간인들이 종종 붙잡혔다. 또한 점령된 도시나 마을에는 으레 팔다리가 잘려나간 채 무참하게 버려진 어른들과 아이들이 있었다. 나가이는 의료반을 편성해 부상당한 민간인들과 어린이들을 위해 가능한 모든 치료를 했다. 나가이는 이 자원봉사자들의 사진을 나가사키에 보냈다. 우라키미 성당 소속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회원들은 이 소식을 입에서 입으로 알렸고, 그 덕분에 식품과 의류, 어린이 장난감이 속속 도착했다. 나가이는 중국에도 상당수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지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일본에서 보내온 물품은 중국회원들을 통해서 분배되었다. 그가 중국인들을 위한 간이 응급처치실을 설치했을 때 처음에는 양쪽 모두 서로를 의심했다. 양손을 소맷자락 깊숙이 집어넣고 오는 저 중국 노인이 수류탄을 숨기고 오는 것은 아닐까, 노인 역시 일본 군의관을 보면서 불안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불신을 사라졌고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으러 왔다.

 

전쟁은 질질 끌고 있었고 일본군 부상자 수는 늘어만 갔다. 중국군 장군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일본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으므로 큰 전투를 피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략은 더욱더 넓은 지역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군대를 분산시키는 한편,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기습하고 지원부대가 오기 전에 도주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방어선 또한 가늘게 뻗어 있던 터라 필요한 물자공급에 어려움이 많았다. 혹한의 겨울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으며 병사들은 추위에 동사하기 시작했다. 많은 병사들에게는 사케가 유일한 낙이었지만 나가이의 경우는 달랐다. 미도리와 결혼한 후 그전처럼 과음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는 글을 씀으로써 위로를 받았다. 시를 쓰는 데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이쿠나 단가는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바가 많은데 비해 내 시는 무디고 산문적이다.’ 그의 하이쿠를 보자. ‘저 풀밭에 나뒹구는 공산군 소년병의 시체, 그리고 갓 피어난 초롱꽃!’

때때로 그의 일기는 분노와 신랄함으로 넘친다. 한 병사의 눈을 감기고 난 후 슬픔에 잠긴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민족적 이기주의, 그리고 장군과 정치가들의 공허한 선전에 대하여 언급했다. 그러나 나가이는 일반 보병들과 하위 계급 장교들에게서 끊임없이 발견하는 인간의 고귀한 품성과 같은 긍정적인 면에 대해 썼다. 또한 중국의 빼어난 산하와 중국 문화의 장엄함에 대해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가이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나날이 깊어갔지만 그 방식은 더욱더 일본적이었다. 그는 종종 간소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다이샤 신도의 여러 종교 의식에 참가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무수히 많은 불교식 장례식과 죽은 자를 위한 추도법회 등에 참석했고, 그럴 때면 불교에서 가장 보편적 기도라고 할 수 있는 염불을 했다. ‘아미타 부처님, 제 존재는 부처님께 달려 있습니다.’라는 뜻의 나무아미타불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염불은 단순함 그 자체다. 나가이는 일종의 그리스도교 식 염불을 시작했다. 그는 시편이나 포켓용 신약성서에서 짤막한 구절을 택하여 되풀이했다. 그의 일기를 보면 부상병들이 수술용 텐트로 옮겨져 땅바닥에 앉아 차례를 기다릴 때가 많았는데, 나가이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부상병들을 치료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은혜로 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기도를 끊임없이 되풀이한 덕분에 정신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염불은 바오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구절이다.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

염불 念佛의 ‘念’자는 ‘마음 心’과 ‘지금 今’을 뜻하는 두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염불은 우리의 마음이 과거나 미래의 집착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수단이다. 또한 시끄럽고 부산한 생각을 벗어나 각자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평화로운 현재’인 절대자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나가이에게 염불은, 당신 자신을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신 그분 안에서 안식하는 것을 뜻한다. 이 오래된 기도 방식으로 나가이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깊은 평화를 맛볼 수 있었으며 ‘성서를 연구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그대로 기도하라’는 파스칼의 말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나가이는 말했다. “나는 성서 말씀이 전쟁통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보다도 더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과 병사들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김으로써 평화를 체험했다. 이것이 바로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이 백합꽃을 보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단순한 삶의 방식이다.”

나가이는 묵주기도가 기도생활에 크나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것을 ‘주머니 교회’라고 불렀으며, 강행군을 할 때나 소강상태가 찾아올 때도 묵주기도를 바쳤다. 특히 마음이 괴롭고 심란해서 ‘생각’도 할 수 없을 때 묵주기도가 도움이 되었다. 다음은 묵주기도에 얽힌 이야기다.

1939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중국군이 기습 공격을 개시하여 300여 명의 일본군이 쓰러지고, 남은 240명도 완전히 포위당했다. 지휘관은 나가이에게 지시했다. “중국군이 오늘 밤 다시 공격해 오면 끝장이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부상병들을 일장기 둘레에 모아놓고 그들의 침구에 휘발유를 부어라. 중국군이 공격해 오면 즉시 휘발유에 불을 붙여 포로로 잡혀가거나 일장기가 점거 당하지 않게 하라. 나도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이 죽기보다 싫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휘관은 며칠 씩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잘 수 없었던 탓에 쇠약해졌고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나가이는 딜레마에 빠졌다. 일본 군인이라면 누구나 패전했을 때 포로로 잡혀가기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할 의무가 있다. 나가이는 당번병에게 지시했다. “부상병들에게 곧 이동할 준비를 하라고 이르고 나 혼자 있게 해주게. 기도해야겠네. 비상사태가 아니면 나를 부리지 말게.” 나가이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했다. 그 순간만큼은 명령 불복종의 무서운 결과도, 죽음도, 아내와 두 아이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다 묵주알에 이끌려 하느님을 향한 단순한 여행을 시작한 그는 너무도 깊이 몰입한 나머지 몇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달려온 것도 알지 못했다. 연락병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그에게 공손히 인사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중위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사령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규모 지원 병력이 적군을 격퇴했다고 합니다. 위기는 모면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우편물이 도착했는데 미도리가 보낸 편지가 들어 있었다 아내의 편지는 언제나 그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딸 이쿠코와 시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피로 물든 늪지와 얼어붙은 산지를 오가며 숨가쁘게 보낸 끔찍한 전쟁의 세월이 갑자기 그를 강타했다. 그는 심신이 지친 나머지 동물처럼 굴속에 들어가 긴긴 잠을 자다가 그대로 죽고 싶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16. ‘교만한 헤이케는 무너진다’

 

중국에 있을 때 중국 족자, 동양화, 도자기 등에서 일본 예술가들이 즐겨 사용한 상징과 테마를 발견한 것은 나가이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가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인내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와 소나무를 예로 들 수 있다. 아무리 겨울이 춥고 여름이 타는 듯이 뜨거워도 소나무와 대나무는 푸르고 꿋꿋하다. 그러나 나가이는 이른 봄의 전령사인 매화꽃을 가장 좋아했다. 해마다 1월 말이 되면 잔설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매화나무 가지에 기적과도 같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난다. 1940년 1월, 산매화가 일제히 피어나 중국군과 일본군 병사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을 때 그의 마음 한구석에 쌓여 있던 눈 더미가 단숨에 녹아 내리도록 엽서가 날아들었다.  본국 송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귀환하기 위해 그는 즉시 광동으로 가야 했다. 1주일 후에는 일본으로 가는 수송선 갑판에 서 있었다. 저 멀리 단노우라 해안선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자신이 고대 일본 역사상 가장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던 바다 위를 지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12세기 역사 이야기는 언제나 그를 흥분시켰다. 당시 헤이케 가문이 일본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너무도 교만하고 잔인했기 때문에 겐지 가문이 들고일어나 그들을 교토에서 쫓아내고 남은 잔당을 1185년 단노우라 해안 근처 바다에서 소탕해 버린 것이다. 그때 ‘교만한 헤이케는 무너진다’는 격언이 생겨났다. 나가이는 헤이케를 군국주의자들과 비교해 보았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가 그의 마음을 스쳐지나 갔다. 그는 중국에서 잔혹한 전쟁을 경험했다. 그런데 군대는 여전히 전선을 확장하면서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수송선에 오르기 전 그는 한 상급 장교로부터, 일본에 도착하면 전쟁의 실상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다. ‘국민의 사기를 지속적으로 고양시켜야 한다!’ 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그 말이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모노세키 선창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고 배가 선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선창가에 마중 나온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즉시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내가 다가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가 중국에 있는 동안 그녀는 시아버지와 딸의 죽음을 차례로 겪어야 했다. 전쟁으로 민간인들도 배급에 의지해서 살아야 했다. 식품, 연료, 의약품, 심지어 의사들이 부족해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그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그렇게도 큰 기쁨이었던 어린 딸 이쿠코가 죽은 것도 그 때문이다. 미도리는 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가 전쟁터에 있는 동안 아이를 제대로 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두를 향해 건널판을 내려오면서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나가사키의 보금자리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군대는 그와 같은 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몇 마디밖에 주고받지 못했다. 만나자마자 그는 또다시 아내와 헤어져야 했다. 히로시마로 가는 기차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한 장교가 중국에서 있었던 전투 경험에 대해 침묵하도록 군인들에게 거듭 주지시키고 있을 때, 나가이는 울적한 마음으로 히로시마의 병영에 앉아 있었다. 나가이의 눈앞에는 수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일본군과 중국군 병사들의 짓이겨진 얼굴들, 미도리 같은 중국 여인들, 이쿠코 같은 어린아이들, 그리고 노인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도망치던 겁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 갔다.  그런 한편으로 지나치게 치장한 장군, 기업을 경영하던 기름기 번지르르한 민간인도 떠올랐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들은 현대판 헤이케였던 것이다. 일본의 장래를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군악대의 요란한 팡파르에 맞춰 용맹을 떨친 군인들에게 훈장이 수여되었다. 나가이도 영예로운 무공훈장을 받았다.

제대 후 나가이는 틈을 내어 고향 미토야로 가서 부모님의 묘소를 찾았다. 그리고 그분들의 삶을 회상하며 울었다.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는 낙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농부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부모님의 오두막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그는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말을 특히 좋아했다. 그가 중국의 진흙땅을 누비고 있을 때 그를 위해 기도해준 부모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다. 또한 나가사키에서 맡게 될 새로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굽어살펴 달라고 간청했다.

나가이는 나가사키로 가는 첫 기차를 탔는데 지친 나머지 아무 계획도 세울 수가 없었다. 책조차 읽을 수 없었다. 중국 전선에서 본 얼굴들이 또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그 중에는 그의 당번병이었던 가와하라도 있었고, 포탄에 눈이 멀어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중국 소녀도 있었다. 나가이는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들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왼쪽 차창으로 운젠산이 보였다. 아, 고향의 푸른 산이었다. 곧 그는 아사하야역에서 내렸다. 아들 마코토를 와락 끌어안았지만 소년은 아버지의 포옹이 어색한지 무뚝뚝하게 서 있었다. 나가이는 전쟁이 한 가족에게 입힌 상처를 실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날 밤늦게 홀로 있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감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계속되는 전쟁의 비참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하도 많이 읽어 책의 모서리가 너덜너덜한 <팡세>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이라는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 파스칼은 계속해서 이 모순의 해결책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가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아들은 은총 가운데 나를 무사히 나가사키로 돌려보내 주셨다.’

나가이는 방사선학 강의를 다시 시작했고 곧바로 교수가 되었다. 그는 나라가 엄청난 위기로 치닫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때가 되면 잘 훈련 받은 의사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는 강의 시간에 매우 엄격했고 학생들에게 많은 과제를 내주었지만, 그이 강의는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매우 좋았다. 1940년대의 일본은 선진국 가운데서 결핵환자 보유율이 가장 높았다. 나가이는 나가사키에서 결핵을 조기 발견할 수 있는 엑스선 투시 대중화를 시작했다. 엑스선 투시가 가장 효과적인 결핵 퇴치 방법임을 판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 분야에 흥미를 보인 몇몇 동료와 함께 방사선 연구에 투신했다. ‘현미경은 한때 최후의 미개척 분야로 여겨졌던 방대한 미시 세계를 뚫고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원자의 세계는 이보다 훨씬 작다. 사과 한 개와 원자의 크기를 비교하자만, 사과를 지구라고 할 때 원자는 사과 한 개에 해당한다. 엑스선을 통해서 과연 이 극소한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희열을 느꼈다. 실제로 우리의 실험실은 우주와 그 우주의 모든 진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신장을 연구하느라고 소변 결정체의 구조를 들여다보았을 때 너무 놀라워 그는 ‘무릎을 꿇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이때 그는 실험실도 승려의 암자 못지않음을 분명히 알았다. 전쟁으로 대학 캠퍼스를 오래 떠나 있었던 만큼 그는 만사를 제쳐놓고 연구에 몰두했다. 전쟁으로 인한 상실과 호전적인 거짓 선전을 생각하면 할수록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깊어만 갔다. 그는 다시금 과학 전문지에 게재할 논문을 연달아 쓰기 시작했다.

미도리는 책으로 출판된 그이 논문을 즐겨 읽었다. 나가이는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의학용어가 가득한 그이 논문, 말하자면 마치 황제의 칙령과도 같은 글들을 미도리가 읽어내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가 수수한 옷차림으로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다다미방에 꼿꼿이 앉아 있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곤 했다. 그녀는 결혼식 같은 행사에 친구들을 위해서 화려한 옷을 만들어 주었지만, 검소하게 생활하고 전선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에게 더 많은 물자를 보내자고 호소하는 정부 방침을 철저히 따랐다. 게다가 채마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의 손은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그러나 나가이를 첫눈에 반하게 만들었던 여성다움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논문 때문에 바쁜 척하면서도 사실은 어려운 글을 읽느라고 고투하는 그녀를 훔쳐보곤 했다. 이 글을 쓴 남편이 너무도 자랑스러운 나머지 그녀의 눈에는 이따금 눈물이 맺히곤 했다. 그 역시 그녀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이 부드럽고 감수성 예민한 여성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고 단호하기도 했다. 도쿄에서 일본의 모든 도시, 마을, 촌락에 국가 위기를 타개할 일환으로 부녀봉사회를 결성하도록 지시했을 때 미도리는 그녀가 사는 지역의 지회장인 동시에 인근 18개 지회를 대표하는 연합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두 번째 참전 이후 나가이는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무솔리니에 대해, 특히 히틀러의 불길한 전조에 대해 글을 썼다. 일본의 외무성 장관인 다혈질의 마스오카가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조약을 맺었을 때 그는 몹시 불안했다. 또한 내각이 차례로 무너지고 도조 히데키 장군이 1941년 10월 18일 수상이 되었을 때는 몹시도 염려스러웠다. ‘면도칼’ 이라는 그의 별명이 이유 없이 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 8일 월요일, 나가이와 그의 아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오전 6시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울의 어둠을 뚫고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나가이는 미도리에게 그이 걱정거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일본의 노무라와 미국의 국무장관 헐 사이에 진행된 워싱턴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미사 도중 그는 ‘부상병들에게 휘발유를 부으라는 명령을 받았던 그날 밤처럼 간절한 심정으로’ 미국과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미국이 석유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일본을 궁지로 몰았을 때 나가이는 몹시 불쾌했다. 온건파인 야마모토 제독은 이것을 한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가장 유감스럽고도 호전적인 작태로 간주했는데 나가이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조가 전쟁을 해결책으로 들고 나올 경우 미국은 일본에 기름을 퍼부어 온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나가이는 미국의 자원과 군사적 잠재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사가 끝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가이 부부는 집에서 1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미쓰비시 군수품 공장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보았다. 나가사키에는 대규모 조선소를 포함하여 미쓰비시 공장이 일곱 군데나 있었다. 중국군의 공습을 떠올리며 그는 생각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나가사키는 적군의 공격대상이 될 것이다.

그는 미도리가 준비한 아침 식사를 서둘러 먹었다. 특히 도미구이는 미도리가 언제나 소중히 지켜온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기념 특별 메뉴였다. 그는 후식으로 연한 녹차를 마신 후 학교를 향해 집을 나섰다. 5분쯤 지났을까, 거리의 확성기에서 “오늘 새벽 우리 황국 군대가 영미 연합군과 교전상태에 들어갔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근처에 있던 한 젊은이가 “만세! 드디어 해냈다, 해냈어!”를 외치며 환호했다. 나가이는 그 순간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건물이 파괴되리라는 예감이 들면서 무시무시한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원폭의 폭심지에서 200미터 지점에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17. 주인에게 등을 돌린 기계

 

그날 아침 첫 강의는 3학년 과목인 엑스선 진단학이었다. 그는 암담한 심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닥쳐올 어려운 시기에 대하여 경고했다. 그들은 모두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더러는 전선에, 더러는 군의관으로 폭격이 예상되는 지역에 배치될 것이다. “잘 들어라. 이 전쟁은 미국이라는 초당개국과 강력한 영국과의 싸움이다. 사상자 가운데는 우리의 가까운 친척들도 끼여 있게 될 것이다. 제군들은 중국과의 전쟁이 어떠했는지 그 실상을 모른다. 미국, 영국을 상대로 하는 이 전쟁은 그보다 10배는 더 불리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의학연구의 국제 흐름에서 단절될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비장한 한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금 여기 있는 우리 중 죽거나 불구가 괴든 사람도 생길 것이다.” 이 말을 하는 동안 그의 뇌리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바로 황해 근처 가난쇼 병원의 소아병동이었다. 나가이는 나가사키의 성 빈첸시오 회에서 보내준 장난감과 과자를 가지고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팔다리가 없거나 손발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과자를 주어도 아이들은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전쟁이 아이들에게서 앗아간 것은 팔다리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현실로 되돌아 왔을 때 학생들은 충격적인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학생들뿐 아니라 자신의 기분을 돋우기 위해서도 그는 ‘아침에 진리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그리고 분위기를 바꾸며 말했다. “자, 엑스선 진단으로 들어가자.”

군정부 문서에는 나가이가 두 번씩이나 중국 적선의 포화 속에서 용맹을 떨치며 복무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즉시 우라카미 교회 지역 방공 구호반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가 처음 조직한 구호반 가운데는 18개 지역 부녀봉사회 여성들도 끼여 있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거짓 선전으로 자국민을 안심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실상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언제 폭탄세례를 받을지 모릅니다. 지혈법과 부상자를 응급처치소까지 운반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이웃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위대한 사랑 말입니다.”

나가이는 이제 엑스선 촬영실을 갖춘 지하 수술실을 만드는데 매달렸다. 그는 중국 전선에 있을 때 며칠씩 포화가 퍼붓는 가운데서도 임시로 만든 지하 수술실에서 광부처럼 횃불을 머리에 동여매고 수술을 감행한 일이 있었다. 나가사키에서도 그와 같이 할 수 있다고 대학 당국을 설득했을 때 몇몇 교수는 그의 열성에 감복하여 빙긋 웃기까지 했다.

이 모든 불행은 딸의 출생으로 다소 완화되었다. 아기의 이름은 ‘억새를 닮았다’는 뜻의 ‘가야노’라고 지었다. 억새는 키가 크고 갈대의 일종으로, 특히 시골집 지붕을 엮는 데 사용되었다. 딸의 이름에는 미도리도 잘 알고 있는 나가이의 각별한 향수가 숨어 있다. 그는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서민적인 삶에 깊은 애정을 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해마다 여름철이면 산기슭을 따라 완만한 경사를 이룬 푸르른 논이 보여주는 그 아름다움이다. 도 높은 산에서 안개가 내려와 신비한 광경을 자아내는 가을이면, 삼목과 은행나무가 녹색과 금빛으로 물결치는 가운데 바다에 떠도는 배처럼 솟아 있는 주홍 신사의 지붕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특히 기억 창고에는 언제나 억새풀의 초가지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초가지붕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봄날 보는 각도에 따라 산허리를 배경으로 하든, 가을날 불타오르는 풍광을 등지고 있든, 눈 덮인 논을 뒤로하고 어두운 그림자로 얼어붙어 있든 언제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전쟁 초기, 일본군의 승리로 나가이의 비장한 경고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 웃음거리로 치부되는 듯했다. 그러나 미 해군이 일본의 군사비밀 코드를 해독한다는 사실을 나가이의 학생들이 알았더라면 승리의 웃음은 얼어붙어 버렸을 것이다. 미드웨이 (태평양 중부 하와이 북서쪽에 있는 미국령의 작은 섬으로 공군 및 잠수함 기지가 있음 – 역주)를 공략하려던 일본의 계획을 미국은 사전에 알아냈고, 그 결과 1942년 6월에 거대한 일본 기동대는 니미츠 제독이 설치해 놓은 강철 덫의 음산한 입구로 서서히 들어갔다. 여기서 대형 수송기 4대와 성능이 뛰어난 해군 항공대를 잃은 일본은 해군 주도권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철저한 언론 봉쇄로 미드웨이에서 패배한 사실은 보도되지 않았다. 그 해 8월에는 미국 해병대가 과달카날에 상륙함으로써 일본의 남방 진로는 원천 봉쇄되었다.

우월한 공군력을 보유한 영미 연합군은 1943년 초까지 라에 (오스트레일리아 신탁 통치령 뉴기니아 지구 동남부의 항구도시.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주요 보급기지로 사용되었음 – 역주)와 라바울 (오스트레일리아 신탁 통치령 비스마르크 제도와 주도인 뉴브리튼 섬 동북부에 있는 항구도시 – 역주)처럼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군사 기지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화물의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1943년은 일이 잘 안 풀린 한 해였지만 더 무서운 일이 닥쳐오고 있었다. 일본 본토를 공습하는 항공기가 근해의 항공모함에서 또는 멀리 중국의 활주로에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1943년 11월에 카이로에서 열린 영국과 미국의 참모총장회의에서는 길버트 제도, 마샬 제도, 캐럴라인 제도, 마리아나 제도와 같은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미크로네시아 군도를 점령하기로 결의했다. 일본군은 사력을 다해 방어했으나 타라와 비아크 공군기지, 사이판, 티니언, 괌과 같은 섬들이 미국의 강철 태풍 앞에 무너져 내렸다. 사이판은 1944년 7월 함락되었는데 이때 3만 명의 일본군과 2만2천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미 해병대의 경우 거대한 공군력과 해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만4천 명 이상을 잃었다. 항공모함을 이용한 일본군의 공격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던 때에 미국이 이 섬들을 점령함으로써 B-29가 언제라도 일본을 강타할 수 있게 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티니언이라는 조그만 섬에 대해 알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공부를 할 때 나가이는 전쟁에 대해 가톨릭은 어떻게 가르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모리야마 신부는 4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립한 견해를 들려주었는데, ‘정당한 전쟁’을 위해서는 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줄곧 나가이는 일본이 과연 정당한 전쟁을 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 그렇다고 연합군을 정의의 투사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는 군인,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를 돌보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부도덕한 행위가 아니라고 결론에 도달했고, 다라서 방공훈련에 혼신이 힘을 쏟았다. 그리고 병원이 폭격 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지하 수술실에 비상 의료품 보급소를 설치했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나가사키만은 수목이 울창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서쪽으로는 동지나해에 접해 있기 때문에 천혜의 보호를 받았다. 적군이 육지로 행군해 오거나 배로 올 경우 나가사키는 비교적 안전했다. 그러나 바다 위로 항공기가 날아올 경우 문제는 달랐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미군 항공기들은 도시 위로 저공비행을 했으며, 거대한 B-29 폭격기들이 은박지처럼 반짝이며 비행했다. 1944년 8월부터 거의 매일 공습이 이루어졌다. 1945년 4월 26일 일기에서 나가이는 특히 피해가 컸던 공습에 대해 적었다. 공습이 끝나자 부상자들을 가득 실은 트럭 한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학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는 부상자들의 으깨진 뇌를 씻어냈고, 골절상을 입은 환자들은 엑스선 촬영실로 보냈다. 그 다음 시체실로 내려가 시신을 씻기고 환부를 꿰맸다. 가족들에게 끔찍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방사선과 직원들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며 이런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돕는 사람이 없어도 그는 언제나 시신을 씻기고 환부를 꿰매러 지하로 내려갔기 때문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뒤 따라갔다.

전쟁의 한가운데로 끌려나가 목숨을 잃은 대학생들의 이름이 빈번하게 뉴스에 보도되었다. 나가이는 중국에 있을 때 불쾌한 일을 경험한 장소를 싫어했는데 마찬가지로 루존, 레이테, 이오 섬 같은 이름을 미워하게 되었다. 전시의 식량 사정은 점점 더 바빠졌고 결핵도 증가했다. 결핵이 의심되는 사람들은 모두 엑스선 촬영실로 보내졌고, 그 많은 사람들을 나가이 혼자 감당했다. 병원에서 환자의 엑스선 사진을 찍고 또한 학생들에게 방사선학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그는 방사선을 과다하게 쐬었다. 홀츠크네흐트 교수와 같은 많은 과학자들이 엑스선 기계에서 방출되는 감마선 때문에 암으로 사망한 이후 방사선학계에서는 하루에 0.2 뢴트겐 이상의 엑스선에 노출되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내렸다. 나가이는 이미 그 안전선을 훨씬 넘었지만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학생들을 훈련시킬 책임이 있고 궁극적으로는 결핵을 발견할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 모든 국민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제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저도 위험을 피할 수 없지요.” 중국 전선에 있을 때 위험지역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결코 부상을 입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은 안전할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갖고 있는 듯했다. 세심한 주의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더 큰 희망을 갖고 그는 감마선과의 위험한 놀이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불길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몸이 극도로 피곤했으며, 가끔씩 계단을 오를 때 떨린다는 것을 알았다. 도한 야간 공습에 대비하여 불침번을 서는 날은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다. 때때로 기력이 소진한 듯한 느낌이 들 때는 연구실 문을 잠그고 책상 위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앞에 앉아 있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다시금 평온을 되찾았던 것이다. 간호사들은 그가 아무데서나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정신을 차리고는 졸았던 만큼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마침내 동료가 그에게 사진을 찍을 것을 권유했고, 그는 엑스선 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점을 자세히 적어놓았다.

그는 기계의 촉감이 얼마나 차가운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두려운지를 동시에 의식하면서 엑스선 기계를 붙잡고 서 있었다. 미도리만 옆에 있어 준다면! 이 방에서 그는 무수히 많은 환자들을 검진했을 뿐만 아니라 의학상으로 특수한 사례가 발견될 경우 그 결과를 보려고 얼마나 열심이었던가. 그때 환자의 심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임상 결과에만 몰두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상태가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닌지 몹시 겁이 났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지금의 자신처럼 불안해했겠지만, 그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기번호를 부르고는 냉정한 태도로 스위치를 올렸다. 이제 그 얼음 같은 냉정함이 자신의 심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입은 바짝바짝 타 들어갔고 가슴은 사막같이 느껴졌다.

방사선과 담당의사와 함께 엑스선 촬영 사진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가이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위장 우측에 흉측한 그림자가 있었고 비장은 심각한 수준으로 비대해져 있었다. 간장의 우측 상단은 부어 있었고 창자와 위는 아래로 쳐져 있었다. 게다가 아래에서 위로 치미는 힘 때문에 심장은 약간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담당의사는 할말을 잃었다. “자네 조수를 불러 진단을 하라고 하게나. 여기 좋은 연구 자료가 넉넉히 있지 않나.” 조수가 들어왔다. 그러나 주임교수의 엑스선 사진을 보자마자 그도 놀라서 할말을 잃었다. 그때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 한 젊은 간호사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들어왔다. “나가이 교수님, 4학년 수업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다른 두 의사가 얼굴을 돌리자 그녀는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가이가 웃는 얼굴로 “수고했어요, 오냐나지 간호사, 곧 갈 겁니다” 하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강의를 끝낸 후 나가이는 검사 결과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백혈구 수치가 정상보다 천 퍼센트나 높았고 적혈구는 40퍼센트 낮았다. 그는 사료를 들고 자신의 증상을 큰소리로 읽었다. “환자 나가이는 불치의 백혈병에 걸렸음. 예상 수명은 앞으로 2,3년.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게 됨.” 그는 심란한 동료들을 향해 웃었다. “의사 선생들, 우린 현실을 직시해야 하네. 언젠가 우리 모두 환자가 될 걸세. 가망 없는 환자 말이야.” 그는 그들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았다. 그들이 모두 방에서 나가고 혼자 남게 되자 나가이는 그제야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도를 했다. ‘하느님, 당신은 제가 얼마나 나약한지 아십니다. 이 상황을 견뎌낼 자신이 없습니다! 오, 주님. 왜 이렇게 빨리 인생을 끝내야 합니까? 아내와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는 게쎄마니 동산의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주님, 우리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너무 지쳤고 이 십자가는 제게 너무 무겁습니다.’

퇴근하기 전 그는 자신의 피에 죽음의 씨앗을 심어놓은 엑스선 기계를 응시했다. 그리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이 기계는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이 기계와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을 비춰주었다. 만일 이 기계에 영혼이 있다면, 기계는 그이 동료인 나가이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고 그의 짐을 나누어 지고 싶어할 것이라고 나가이는 생각했다. 이제는 기계도 스에쓰구 교수가 이 방에 들여놓을 때처럼 반짝반짝 한 새 물건이 아니었다. 그 자신처럼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낡아 버렸다. 인류를 위해 봉사하다가 닳아 없어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생의 마지막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나가이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고 오늘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에 감사하기까지 했다.

누군가가 조용히 연구실을 노크했다. 총장이 위로 차 방문한 것이었다. 나가이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나서 자신의 부주의함에 사과했다. “아닐세, 나가이 선생. 선생은 부주의했던 것이 아닐세. 선생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느라 병이 난 것일세. 선생 말고는 아무도 엑스선 촬영을 해줄 수 없었으니까.”

 

 

 

18. ‘하지만 미도리가 내 곁을 지킬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 남아 있었다. 미도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6월의 눈부신 태양이 나가사키를 비추어 만물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또다시 우울한 기분에 잠겨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그와 결혼한 후 미도리는 언제나 힘들게 살아왔다. 대학에서 받는 박봉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교수들은 개업을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근무 시간 외의 자유 시간을 그가 하고 싶은 연구에 쏟아 부었다. 그 때문에 밤늦게 귀가했고 때로는 새벽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미도리는 언제나 잠자리에 들지 않고 그를 기다려 주었으며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외출한 적도 별로 없었는데 최근에야 그녀가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형편이 좋아지면 우리가 좋아하는 식당에도 가고 극장에도 갈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제 자기의 부주의로 미도리의 앞날에는 젊은 과부의 험난한 길만이 남게 된 것이다.

미도리는 현관문 소리를 듣자마자 맨발로 다다미를 타닥타닥 걸어 나왔다. 그녀는 반색을 하며 “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일찍 오시다니요.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데요!” 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가 구두와 양복을 벗고 기모노로 갈아입는 것을 거들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저녁시사로는 신선한 연어회와 조개를 준비해야겠다며 즐겁게 재잘거렸다. 미도리가 낌새를 알아챈 것일까? 그래서 그 나쁜 소식을 몰아내려고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의아했다. 왜 자기는 신들린 사람처럼 방사선학에 그토록 투신했던 것일까? 정기 간행물에 게재할 논문을 쓸 때마다 까다롭게 굴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녀에게 소리내지 말라거나, 녹차를 부탁하고는 마시는 것조차 잊곤 했다. 한 번은 거리에서 마주 오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 적도 있었다. 훗날 그녀는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가만히 웃었다. 그랬다. 마치 자기가 위대한 학자라도 되는 양 무슨 일을 시작하면 주변은 다 잊고 철저히 그 일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그는 테이블 너머로 그녀의 눈가에 생긴 주름과 힘든 일로 거칠어진 양손을 보았다. 그의 침묵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그녀는 그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아름답고 정직하고 세심한 배려가 가득 담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마침내 그가 사실을 털어놓았고 미도리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듣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조용히 식탁에서 일어나 가족 제단에 촛불을 켰다. 그러고 나서 그 앞에 꿇어앉아 그녀의 가문이 250년 동안 박해를 견디면서 지켜온 십자가상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도 그녀의 뒤에서 똑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었는데, 바로 그때 그녀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는 감정의 동요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렇게 기도하면서 앉아 있었다. 아내의 수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목표만 추구해 왔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침착하게 말했다. “우린 결혼 전에, 그리고 당신이 두 번째로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말했지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삶도 죽음도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고요. 당신은 중요한 일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어요. 당신의 수고는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어요.” 나가이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 여인은 지금 이 순간까지 그를 실망시킨 적이 한번도 없다. 그는 눈물을 참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눈물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이었다. 그녀의 행동에서 알 수 없는 거룩함이 풍겨 나왔다. 그녀는 순교한 우라카미 그리스도인의 화신 같았다. 250년이라는 긴 박해 속에서도 여전히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은 그리스도인 말이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절망적인 마음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그는 ‘새사람이 되어’ 엑스선과로 돌아왔다고 일기에 썼다. ‘아내가 비극적인 사실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어떤 말도 못하게 막음으로써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지난 몇 달간 심신의 피로가 다 사라지는 듯했다. 이번에도 아내는 그의 심장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돌을 들어올려 주었던 것이다. 방사선과 씨름했던 13년의 세월, 전선에서 보낸 시간, 지난 몇 년의 내핍생활과 공습을 견디며 살아온 그 모든 시간이 가치 있고 아름답게 여겨졌다. 아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아버지의 엑스선 작업과 연구를 계속하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고 그녀는 전날 밤에 말했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그녀의 발 아래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원망도 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크나큰 평화를 느끼는 한편으로 무슨 일이든지 넉넉히 해낼 것 같은 힘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면서 엑스선 기계를 껴안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것이 파스칼이 말한, 내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에서 비롯되는 기쁨일까?”

오키나와가 함락되었고 미군의 다음 착륙지는 규슈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가사키는 규슈에서 매우 중요한 항구였고 더 많은 헌병대가 이 도시에 내려왔다. 성당에서 ‘평화를 위한 기도’를 바쳤다고 우라카미 교구 신부가 경찰서에 잡혀가서 심문을 받았다. “당신들은 일본이 패망하라고 기도합니까?” 경찰관이 물었다. “아니오.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전쟁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당신고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하고 말하자 경찰관은 “그렇소” 라고 답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일본이 승리할 테니 전쟁은 곧 끝날 거요! 당신들의 전능하신 하느님 자리에 천황을 놓는다는 조건으로 성당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겠소.” 다른 동료 신부들처럼 투옥되어 미사를 드릴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신부는 신중하게 답해야 했다. “하지만 선생, 천황이 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의 위대하신 메이지 천황께서 이미 밝히셨습니다. 군인칙유에서 ‘짐은 하늘의 은총에 순응하여’ 라고 했습니다. 천황조차 순종하는 그 하늘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전능하신 하느님입니다.” 화가 난 경찰관은 신부에게 돌아가라고 말했다.

일본 군부는 미군이 곧 규슈와 도쿄만을 침공하고 그들이 보유한 무서운 공군력으로 확실한 거점을 마련하리라 추측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키나와를 침공했을 때 미군은 그 작은 섬을 완전히 포위했고 밤낮으로 폭격을 퍼부었지만 그 섬을 점령하는 데 3개월이 걸렸으며 12,500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냈다. 일본이 전함으로 포위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일본은 90퍼센트 이상이 산지였다. 미군은 해안의 평지를 이용해 착륙을 시도하겠지만 황국 군대와 어린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 중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산지에 겹겹이 전선을 구축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미군측은 해를 거듭하며 싸우는 과정에서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을 것이다. 아니면 불경하게도 천황을 제거하고 ‘무조건 항복’ 하라는 요구를 철회해야 할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무조건 항복하느니 차라리 몇 천 번이라고 죽는 쪽을 택할 것이다. 아예 민족이 깡그리 말살 당한다 해도 죽은 편이 항복이라는 불명예보다 나을 것이다.

1945년 7월 중순, 나가사키의 가톨릭 평신도 지도자들은 주변의 사태를 낱낱이 보고하라는 군부의 명령을 받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은 국내에서 반역을 꾀하며 파괴행위를 할 가능성이 농후한 무리로 찍혔으며, 무시무시한 협박과 함께 미군이 착륙하는 즉시 나가사키 경찰 본부에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가이 박사도 그들 가운데 끼여 있었으며, 그들은 이제 자신과 가족의 죽음까지도 각오한,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가이는 1597년 십자가에 처형된 26명의 그리스도인이 밟았던 길을 따라 먼 길을 돌아서 집으로 갔다. 특히 자신의 주보성인으로 택했던 성 미키 바오로에게 자기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했다.

다음날 병원으로 돌아온 그는 암환자들에게 서서히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미도리가 내 곁에 지킬 것이다. 나를 위해 기도하며 십자고상을 내 이마에 놓아줄 것이다. 나는 아내의 팔에 안겨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내 눈을 감겨주고 나를 무덤에 데려가겠지. 헌신적은 미도리! 당신은 내 죽음의 순간마저 아름답게 승화시켜 줄 것이오. 여보, 고맙소!’

미군들이 일본에 삐라를 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삐라에 쓰인 일본어가 서툴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1945년이 되자 삐라의 문구도 세련되었다. 경찰 당국의 금지 명령에도 많은 사람들은 몰래 삐라를 읽었다. 최근에 뿌린 삐라에는 소름 끼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4월에는 나가사키가 꽃으로 뒤덮이지만 8월이 되면 불의 소나기가 쏟아질 것이다.’

드디어 문제의 8월이 되었다. 8월 6일 저녁에 나가이는 히로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신형 폭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와 미도리는 세 살짜리 가야노와 열 살짜리 마코토를 외할머니와 함께 안전한 시골로 피신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 하지만 히로시마의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다음날 미도리는 친정어머니와 함께 아이들의 옷가지를 배낭에 챙겨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서 북동쪽에 있는 고바의 시골집을 향해 6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떠났다. 그 집은 평화로운 산골짜기를 굽어보는 언덕에 있었고 때마침 시원스런 매미소리와 졸졸졸 흐르는 산개울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미도리는 다음 날인 8일 아침에 일찍 집에 돌아왔고 공습경보가 울렸을 때는 남편과 함께 방공호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비장이 부은데다 다리도 기운이 없는 터라 미도리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들은 마치 소풍 나온 연인들처럼 방공호에 앉아 있었다고 그는 일기에 적었다. 잠시나마 그들은 전쟁을 잊고 나가사키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큰 절기이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일본에 도착한 날인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도리는 이날을 위해 전통 음식인 당고를 만들어야겠다고 말했으며, 나가이는 지난해 성모 승천 대축일에 아들 마코토가 당고를 많이 먹었던 일이 생각나서 웃었다. 나가이는 대축일을 맞이하기 위해서 고해성사를 언제쯤 보면 좋겠는가라고 물었고  미도리는 다음날 아침에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날 오후가 더 좋겠다고 말했다.

공습경보가 해제되자 그들은 집을 돌아갔다. 그는 미도리의 기분이 ‘눈에 띄게 명랑해서’ 놀랍고도 고마웠다. 그녀는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줄곧 시골에 두고 온 장난꾸러기 아이들과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손주들을 돌보느라 쩔쩔매고 있을 외할머니 이야기를 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미도리가 학교까지 부축하려 했지만 괜찮은 것 같아 그는 거절했다. 그녀는 그가 하얀 구두를 신는 것을 거들었다. 그리고 다다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안녕히 다녀오세요” 라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인사를 했다. 그도 “잘 다녀오리다” 라고 다정하게 인사말을 건네고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집을 나섰다. 아내가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잘 버티며 명랑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집에서 30미터도 못 갔을 때 점심 도시락을 두고 왔다는 것을 알고 그는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현관에 이르렀을 때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미도리가 다다미에 엎드려 어린아이처럼 몸을 떨며 흐느껴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8월 8일 밤 방공 당번이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으니 당번 명단에서 제외시켜 주겠다는 병원측의 제의를 거절했다. “보시오, 학생들조차 얼마나 당번을 잘 서는지, 그들 가운에 몇몇은 당번을 서다가 죽기도 했소. 그들이 특별대우를 요구하지 않듯 나도 그렇게 하지 않겠소.” 이 방사선과 주임교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젊은 의료진의 귀감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8월 9일은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정찰기 한 대만이 공중을 날았고 오전 10시가 되자 공습경보는 해제되었다. “저 비행기가 공중에서 무엇을 했건 나가사키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잘못 알고 있었다. 그 비행기는 그때 나가사키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고 ‘박스 카’라고 명명된 B-29에 무선통신으로 정보를 보내고 있었는데, B-29는 티니언 섬을 출발하여 일본을 향해 북쪽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공습경보가 해제되자 미도리는 여전히 긴장한 채 친척 다쓰에와 우라타 할머니와 함께 방공호에서 나와 집 베란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들이 엄마를 많이 보고 싶을 텐데.” 우라타 할머니가 말했다. 미도리는 당고를 만들 때 사용할 팥을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럴 거예요, 할머니.” 그녀가 말했다. “가야노는 그렇겠지요. 개구쟁이 마코토는 개울에서 개구리처럼 헤엄치고 노느라 행복할 텐데, 어디 엄마 생각할 틈이 있겠어요. 손에 물갈퀴가 자라는지 아직은 노는 데 정신이 없어요.” 할머니는 웃었다.그러나 잠시 후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훌륭한 의사 선생은 좀 어때?”

“상태가 좋지 않아요. 그렇게 아프면서도 그이처럼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더 나빠질 것도 없고요. 그런데 그이는 어젯밤에도 방공 당번을 섰거든요. 그래서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어요. 정말 걱정돼요. 그이를 위해 계속 기도해 주세요.” 할머니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조금만 젊었더라도 여인들을 따라 나가사키 동쪽 교외에 자리잡은 수도원 뒤쪽 루르드 동굴까지 7킬로미터 순례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미도리가 이따금 했듯이 말이다. 이 동굴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1931년 5월 일본에 왔을 때 지은 것이다. (루르드는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로 1858년 성모 마리아가 이 마을의 가난한 소녀 벨라뎃다에게 18회나 나타났는데, 그 결과 질병 치료의 효험이 있는 기적의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기적의 샘물이 있는 동굴 위에 신 고딕풍의 아름다운 성당이 세워졌고 해마다 세계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나가사키의 동굴은 이 이름을 딴 것임 – 역주)

바로 그때 미도리의 사촌 기쿠에가 마당으로 뛰어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밝게 인사를 하고 나서 말했다. “돕포수이 방앗간에 가실 분 안 계세요? 하늘은 파랗고 아름다운 시골길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저하고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다쓰에는 이 젊은 친척의 호라기 찬 태도에 “그래, 내가 같이 갈게” 라며 웃었다. 그러자 기쿠에가 손뼉을 치면서 미도리에게 말했다. “자, 우라카미의 부녀회 회장님, 지난번 회의 때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잊지 않으셨죠?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신체 활동을 즐기고 도한 미적 감각을 발달시키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함께 팔다리를 힘껏 흔들면서 돕포수이에 다녀와야 해요. 드넓게 펼쳐진 시골 정취를 맘껏 맛보면서 말이에요.” 미도리는 사촌의 애교 섞인 농담이 즐거웠다. 그리고 자기도 밀을 빻아야 하지만 아이들에게 갈 때 방앗간에 들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 병원에 갖다 주어야 했던 것이다. 훗날 <나가사키의 우리>에서 우라타 다쓰에는 그날의 뼈아픈 이별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이렇게 우리는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살아남게 될 사람들과 목숨을 잃게 될 사람들로.’

 

 

 

19. 태양도 빛을 잃어버린 날

 

‘척 스위니 소령’은 그날 새벽이 되기도 전에 ‘뚱보 사나이’라고 불리는 4.5톤짜리 원자폭탄을 싣고 극도로 위험한 이륙을 시도했다. 비행기는 이제 첫 번째 목표지점인 고쿠라 위를 날고 있었다. 구름이 잔뜩 기어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어서 도시의 상공을 세 바퀴나 선회하던 바로 그때 척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보조 가솔린 파이프가 막혀버린 것이다. 원자폭탄을 곧 투하하지 않으면 그들 모두 공중에서 산화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는 즉시 제2의 목표지점인 ‘나가사키 도심 지역’을 향해 기수를 남서쪽으로 돌렸다.

척의 B-29는 오전 11시 직전에 시마바라 상공을 날고 있었다. 한 라디오 아나운서가 비행기를 발견하고 긴급 대피 방송을 했고 이 방송을 들은 나가사키 시민들은 방공호를 향해 달려갔다. 다음 순간 척과 그의 폭격조는 구름이 살짝 갈라진 틈새로 우라카미강과 마쓰야마 운동장을 알아보았고 거의 동시에 나가사키가 바로 발 밑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들은 원폭 예상 낙하지점에서 3킬로미터 북서쪽에 있었지만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폭격수 커밋이 폭탄을 떨어뜨렸다. ‘뚱보 사나이’가 인구 20만 명의 도시를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던 시간은 정각 11시였으며, 전체 인구 중 7만 명 이상이 죽었고 많은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라카미 성당 안에서는 니시다 신부와 다마야 신부가 공습경보 해제 후 고해성사를 하고 있었다. 성당은 ‘뚱보 사나이’가 폭발한 지점에서 겨우 5백 미터 떨어져 있었으므로 일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성당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성당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치모토상이 가와비라산에 일구어 놓은 논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굉음을 들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며, B-29 한 대가 구름을 뚫고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B-29 한 대가 거대한 검은 폭탄을 토해내는 순간 그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1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무시무시한 빛이 번쩍이더니 온 천지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위로 올라갈수록 넓게 퍼지면서 하늘로 치솟는 거대한 연기 기둥을 보자 그는 너무 놀라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무서운 속도로 바람이 불어왔다. 집이며 건물이며 나무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불도저에 밀리듯 그의 눈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그는 마치 성냥곽처럼 날려 돌담 옆에 나가떨어졌다. 소나무, 밤나무, 녹나무가 뿌리째 뽑히거나 굵은 줄기가 뚝뚝 부러지는 광경을 보면서 그는 뼛속까지 떨렸고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인근에는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다.

미도리의 열아홉 살 난 사촌 모리야마 사다코는 원폭 투하 직전에 어린 남동생 둘이 야마자토 소학교 운동장에서 잠자리를 잡으면서 노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찾는다며 동생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려던 바로 그 순간 폭격기 소리를 들은 그녀는 동생들을 데리고 학교 방공호로 내달렸다.  방공호에 막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거센 바람에 휘말려 방공호 벽 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주위는 온통 암흑 천지였다. 동생들을 더듬거리며 찾는데 아이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주위가 왜 이렇게 칠흑 같이 어두운지 알 턱이 없었다. 잠시 후 어둠 속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왔을 때 그녀는 공포로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방공호 입구에 소름 끼치는 괴물 둘이 나타나서 끽끽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기어들어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어둠이 조금 더 가시자 그녀는 그들이 피폭 당시 밖에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폭심지에서 750미터 거리에 있던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살가죽이 벗겨지고, 몸뚱이는 바람에 날려 방공호 옆에 내동댕이쳐졌던 것이다.

그녀는 방공호 밖으로 나가 보았다. 아직 새벽 미명인 듯 주위는 온통 희끄무레했다. 그녀는 갑자기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모래상자 옆에서 옷도 피부도 다 벗겨져 나간 어린아이 넷을 본 것이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선채 아이들이 참혹한 몰골을 바라 볼 뿐이었다. 아이들의 손목에서 찢겨져 나간 피부가 손톱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그 마치 속과 겉이 뒤집힌 장갑 같았다.

그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다시 방공호로 들어갔다. 아직도 방공호 입구에서 구물거리며 신음하고 있는 두 희생자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들의 몸뚱이가 마치 썩은 감자처럼 느껴졌고 동물의 소리처럼 소름 끼치는 목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녀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 물’ 그들의 애처로운 울부짖음은 오랜 세월 동안 나가사키 생존자들의 악몽 속에서 마치 깨진 레코드 소리처럼 되풀이되었다.

 

열 살짜리 오기노 미치코는 여름방학이 되어 집에서 놀고 있었다. 오전 11시가 되자마자 거대한 섬광이 번뜩이더니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끔찍한 돌풍이 불어왔다. 미치코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붕 밑이나 벽 틈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꽂혀버렸다. 원자폭탄이 폭발하면서 폭심지에서 초속 2킬로미터의 초고속 강풍이 일어나 집이란 집은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같은 속도의 광풍이 이미 진공상태가 되어버린 폭심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미치코는 무너진 지붕 밑에 절망적으로 꽂혀 있었지만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에게 구출되었다. 밖으로 나온 미치코는 사악한 형상을 한 거대한 구름이 몸체를 비틀며 올라가면서 주변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며 놀랍고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도대체 어떤 번개가 이렇게 엄청난 재해를 가져왔단 말인가! 그러자 어디선가 점점 발작적으로 변해가는 실날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대들보 밑에 깔려 옴짝달싹 못하는 두 살짜리 여동생의 울음소리였다. 미치코는 도움을 구하려고 주변을 살폈다. 그때였다. 몸뚱이는 번질번질하고 가지색과 같은 자줏빛을 띤, 머리털은 붉은 갈색으로 지져진, 벌거벗은 여자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은 엄마였다! 말을 잃은 미치코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들보 밑에 깔린 동생을 가리키는 것뿐이었다. 타오르는 불길에 제정신이 아닌 듯한 엄마는 파편더미에 뛰어들어 어깨를 대들보 아래로 들이민 다음 위로 들어올렸다. 두 살짜리 아기는 무사히 구출되었지만 엄마는 아기를 가슴에 끌어안더니 땅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조금 전 대들보 아래로 밀어 넣은, 살가죽이 벗겨진 엄마의 어깨는 피투성이의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심한 화상을 입은 미치코의 아빠가 나타났는데 신음하면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엄마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엄마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제 나가사키는 불타고 있었고, 가와사키 사쿠에는 제 눈을 의심하며 아부라기 방공호 안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방공호 밖에서 벌거벗은 채 호박처럼 부푼 몸을 비틀거리며 힘겹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때 애처롭게도 물,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동물 울음 같은 소리가 들여왔다. 하지만 물을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침 방공호 입구 바깥쪽에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한 희생자가 거기까지 기어가서 입을 대고 꿀꺽꿀꺽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물을 마신 그 사람은 방공호까지 기어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도중에 쓰러졌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희생자들도 차례차례 웅덩이 물을 마시고는 기진맥진하여 죽어갔다. 갈증이 얼마나 극심하기에 인간을 미친 레밍(북극산 쥐와 비슷한 작은 동물 – 역주)  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일까?

나가사키에 떨어진 플루토늄 239 원자폭탄은 재래식 폭약 2만 2천 톤과 맞먹는 파괴력을 지니지만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인간을 죽음에서 이르게 하는 방사선의 파괴력은 잠시 접어두고라도 원자폭탄이 폭발할 때는 섭씨 몇 백도에 이르는 강한 열이 방출된다. 거대한 폭탄을 구성하고 있는 핵분열물질의 이온화 현상이 일어나고 이때 발생하는 불덩어리로 인해 주변 공기가 빛을 발하는 한편 이 불덩어리가 자외선과 유사한 광선과 적외선을 방출하며 폭심지에서 1킬로미터 안에 있는 모든 건물 지붕을 녹여버린다. 도한 4킬로미터 안에 있는 사람들의 피부는 즉시 심한 화상을 입게 되고 3,4킬로미터 안에 있는 전신주, 나무, 집들은 새카만 숯으로 변해버린다. 이때 폭심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속도는 초속 2킬로미터로 열대성 저기압이 일으키는 토네이도 속도의 60배에 달한다. 이것은 폭심지를 진공상태로 만들면서 또 다른 역풍을 모아오는 원인이 되고, 이때 먼지, 흙, 파편, 연기 같은 것이 날아드는데 이 때문에 비틀리면서 하늘로 솟구치는 버섯구름이 검은색을 띠게 된다.

젊은 가토는 폭심지에서 8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오야마 교외 언덕으로 소를 몰고 갔다. 그때 번쩍이는 섬광에 놀란 그는 그 자리에 곰작 안고 서서 거대한 하얀 구름이 마치 불가사의한 마술에 의해 저절로 살이 찌는 기괴한 생명체처럼 점점 커지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겉에서는 하얗게 보였지만 안에서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로 빨갛게 타올랐다. 그러고 나서 붉은빛, 노란빛, 자줏빛 섬광이 번갈아 번득였으며 구름은 서서히 버섯 모양을 이루더니 그 줄기에서 검은 점이 하나 생겨났다. 마침내 구름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더니 마치 위장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버린 흉측한 벌레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주변의 산꼭대기에는 여전히 태양이 비치고 있었지만 구름 아래 지역은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이어서 성난 바람이 세차게 불어 닥치는 두 번째 충격이 찾아왔다. 가토는 그 근처에서 도 다른 폭탄이 터진 줄 알았다.

 

 

 

20. 그리고 비는 독극물로 내렸다

 

8월 9일 아침 10시, 공습경보 해제 사이렌이 울렸을 때 나가이 박사는 경원 방공호에서 막 나온 뒤였다. 그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햇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강철 헬멧과 무거운 당번복을 벗어 던졌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정원에 피어있는 핏빛 같은 유도화와 칸나, 그리고 발 아래 늘어서 있는 진 자줏빛 기와지붕을 피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저 멀리 이나사산의 울창한 숲에 둘러싸였을 뿐 아니라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도는 솜처럼 하얀 구름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나가사키만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전쟁으로 짖긴 우리 세상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중국 시인 도호의 글귀가 떠올랐다. ‘나라는 파괴되어도 산천을 남는다.’ 하지만 그에겐 할 일이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 하지도 못한 채 아쉽게 병원을 발길을 돌렸다. 한 시간 후 그는 연구실에 앉아 강의 준비를 했다.

“오전 11시가 막 지났을 무렵 눈을 뜰 수차 없는 무서운 섬광이 번득였다. ‘폭탄이 현관에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에 바닥에 납작 엎드리려고 했으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폭음과 함께 유리 파편이 방안으로 쏟아졌다. 그 순간 거대한 손이 몸을 낚아채어 공중으로 3미터나 날려버리는 것 같았다. 깨어진 유리조각은 마치 회오리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제서야 눈을 뜨고 창 밖을 내다보니 널빤지와 나무토막, 옷가지가 바람에 날려 미친 듯 괴이한 춤을 추고 있었다. 연구실의 모든 물건이 바람에 흩날렸고, 드디어 끝이 왔다고 생각했다. 오른쪽 어디선가 유리에 베어 따뜻한 피가 볼과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주먹은 더욱 광포해져서 연구실의 모든 것을 부쉈다. 산들이 서로 부딪치며 우르릉거리는 듯한 굉음을 듣고 있는 동안 온갖 것들이 내 몸 위로 쏟아졌다. 그러고는 마치 철근 콘크리트 병원이 특급열차가 되어 이제 막 터널로 돌진하기라도 한 듯 캄캄해졌다. 아직 환부의 통증은 느끼지 못했지만 탁탁 타 들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매운 냄새가 풍겨왔을 때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 공포가 밀려왔다. 그 순간 내가 지은 죄, 특히 그날 오후에 고해성사를 통해 고백하려고 했던 세 가지 죄가 생겨났고,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우리의 심판자이신 하느님께 죄를 아뢰고 그분의 용서를 구했다.”

나가이는 “여보, 이게 마지막이오. 난 지금 죽어가고 있소” 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사이 열차 바퀴를 단 병원은 다시금 터널을 빠져 나왔고 그는 적어도 왼쪽 눈으로는 사물을 볼 수 있었다. 날아다니던 유리조각에 오른쪽 관자놀이 동맥이 절단되어 피가 사방으로 솟구쳤고 오른쪽 눈가에도 고였다. 나가이는 몸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무너져 내린 파편더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으며 이대로 생매장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싸늘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 무슨 괴상한 죽음이란 말인가! 다시 한번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유리더미에 파묻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리조각이 얼굴 바로 밑에도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누운 채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한편 간호사 하시모토는 바로 옆방의 엑스선실에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벽에 기대어 붙박이 책꽂이 뒤로 몸을 피한 채 방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모든 움직임이 멈춘 후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랐다. 병원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던 수많은 집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가사키만 너머로 바라다보이는 이나사산의 울창한 녹음도 사라져 버렸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벌거숭이 산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곳 어디에도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지 않았다. 온 세상이 벌거벗은 것만 같았다. 병원 정문 쪽을 내려다 보았을 때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황폐해진 땅바닥에 나체가 된 몸뚱이들과 바람에 날려온 온갖 잡다한 파편이 한데 뒤엉켜 있었던 것이다.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온 세계가 죽어버린 것일까? 그녀는 이 무시무시한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건 지옥이다, 지옥이야!” 잠시 뒤 다시 눈을 떠보았으나 여전히 단테의 지옥과 같았다. 모든 희망을 묻어버리듯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열일곱 살의 간호사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발작적으로 몸을 떨며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렇게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소리는 주임교수 나가이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그의 연구실로 가려 했지만 부서진 장비들로 길이 꽉 막혀 있었다. 캄캄한 복도를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부드러운 물체에 부딪쳤다 허리를 굽혀 만지는 순간 손에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었다. 그것은 잘려나간 팔이었고 아직도 맥박이 느껴졌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짤막한 기도를 드리면서 계속 걸어갔다. 갑자기 시뻘건 불꽃이 어둠을 뚫고 지나갔다. 탁, 탁, 무엇인가가 타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재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자폭탄은 폭심지에서 7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철근 콘크리트 병원을 완전히 날려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환자와 직원의 80퍼센트가 목숨을 잃었다. 방사선과는 건물의 남동쪽 끝에 위치해 있어 최대한 보호를 받은 셈이다. 간호사 하시모토는 방사선과 직원 다섯 명이 생존한 것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데리고 나가이를 구하러 갔다. 그들은 인간 사슬을 만들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 나가이박사를 구했다. 중국 참전 경험 덕분에 그는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두들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방사선과 직원이 더 살아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는데, 많은 동료들이 농익은 복숭아 껍질처럼 피부가 벗겨진 채 부풀어오른 몸으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몇몇 사람들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애처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물, 물, 타 죽을 것 같아요. 물 좀 주세요. 내 몸에 물 좀 퍼부어 주세요. 물, 물!”

병원의 또 다른 곳에서는 나가이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나뒹굴었다. 바로 위에서 지붕이 무너져 내려 1학년 학생들은 마치 표본상자의 나비들처럼 날카로운 못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학년 대표인 후지모토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돌덩이를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몇몇 학생들은 이상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길이 덮쳐오자 그 대화도 끝이 났다. 한 학생이 큰소리로 ‘안녕’을 외치고 나서 옛 군가를 부르며 죽어가는 모습은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후지모토는 마지막 힘을 다해 다시 한번 빠져 나오려고 했다. 드디어 마룻바닥의 널빤지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밑으로 미끄러져 갔다. 그는 1학년 학생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다.

방사선과에는 입원환자가 없었으므로 주임교수 나가이는 몇 안 되는 직원들에게 일렀다. “서두르시오. 불이 옮겨 붙기 전에 의료장비가 온전하지 살펴보고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는지 알아보시오.” 직원들의 보고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계획을 세우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번 주 안으로 미군이 진격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민간인이 다칠 텐데 지금 꾸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직원들이 돌아왔다. 엑스선 장비는 있으나마나였다. 밸브란 밸브는 다 망가지고, 전선은 갈가리 찢기고, 변압기는 산더미 같은 쓰레기에 파묻혔다. 나가이는 할말을 잃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직원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아니다, 우리까지 공포에 질려 있어선 안 된다. 이대로 있다간 모두 타 죽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웃음에 모두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일부러 웃은 것은 아니었지만 긴장이 조금 풀렸다.

병원 밖으로 나간 일행은 다시 맥이 빠졌다. 돌담과 울타리에는 머리나 사지가 잘려나간 사람들의 몸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한 어머니는 머리가 잘려나간 아이를 끌어안고 혼비백산하여 달려가고 있었고, 두 어린이는 죽은 아빠의 시체를 질질 끌며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길 건너편의 불타고 있는 건물 옥상에서는 한 남자가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노부부는 침착하게 손을 잡고 활활 타오르는 불바다를 빠져 나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가이와 직원들은 속수무책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 불이 병원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더 많은 방사선과 직원들이 나가이와 합류했고 그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의료장비를 밖으로 끌어낼까요?” 나가이가 말했다. “장비는 잊어버리시오 병동에는 아직도 환자들이 있소. 지금 구출하지 않으면 산채로 타버릴지 모르니 그곳으로 먼저 가시오. 어서요!” 그러고는 자신은 지하 응급처치실로 달려갔다. 수도관이 터져 물이 사방에 넘쳐났다. 의료기구, 의약품, 들것 등 모든 것이 망가지고 부서져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때 나는 다리가 모조리 뽑혀버린 한 마리 모기처럼 느껴졌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 남은 것은 자신들의 전문지식과 사랑 그리고 맨손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서 불안한 마음으로 괴이한 버섯구름을 보았다. 그 구름은 험악한 시선으로 나가사키를 잔뜩 노려보았다. 한편 간호사들은 젖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연기로 뒤덮인 병동으로 뛰어가 환자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오후가 되자 젊은 의사 오쿠라가 나가이에게 달려왔다. “저 병동에 관절염 환자가 한 명 있습니다. 들것이 없으면 방에서 나올 수 없다고 우기는데 들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가이는 때마침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10미터 높이로 치솟는 화염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병원의 동쪽, 곤피라 산 기슭으로 피신해 있었다. 오쿠라가 다시 병동으로 돌아간다면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 환자를 내버려두시오. 책임은 내가 지겠소.” 나가이가 말했다 그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었지만 훗날 나가이와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우리가 화상을 입더라도 그 사람을 구했더라면…’

나가이가 관자놀이 동맥을 벤 순간, 피가 ‘빨간 잉크를 담은 물총을 발사할 때처럼’ 세차게 뿜어 나왔다. 직원들이 상처 부위에 건포를 대고 그 위에 붕대를 감았다. 그러나 피가 계속 흘러나왔기 때문에 그는 마치 빨간 터번을 두른 것 같았다. 불길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환자들이 누워 있는 곳까지 점점 뻗어왔다. 나가이가 소리쳤다. “서두르시오. 환자들을 더 높은 곳으로 옮기시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두 사람을 안전지대로 옮겼다. 그러나 곧 다리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히사마쓰 간호부장이 맥을 짚었는데 그는 과다출혈과 백혈병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직원들은 그를 강제로 앉힌 다음 나머지 환자들을 옮겼다.

호흡이 회복되자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 도시의 크고 작은 모든 조직이 유명무실하게 해체되는 것을 목격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종합병원까지만 가면 안심할 수 있다는 듯 도시의 아래쪽에서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실제와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병원 의료진조차 환자들을 돌볼 엄두를 내지 못할 뿐더러 그들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도 나가사키에 살고 있는 히사마쓰 간호부장은 전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겁을 내기 시작했어요.” 바로 그때 나가이가 “빨리 국기를 찾아보시오” 라며 젊은 의사 오쿠라에게 지시했지만, 오쿠라는 시큰둥했다. 국기를 찾아오라니! 그는 지금 국기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불타지 않은 몇 곳을 건성으로 둘러보며 찾은 척하더니 이내 돌아와서 보고했다. “한 장도 찾을 수 없습니다.” 나가이는 바람에 실려 자기 앞으로 날아오는 하연 천을 낚아채 정방형으로 만든 다름 머리에서 피에 젖은 붕대를 풀었다. 그러고 나서 붕대에서 짠 핏물로 흰 천 한가운데 빨간 원을 그렸다. 히사마쓰 간호부장과 몇몇 사람들도 그들의 상처에서 나온 피를 보탰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국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전선에서 나가이는 충격과 공포에 떠는 사람들에게 대담한 행동이나 강력한 상징이 구심점이 되는 것을 목격했다. 1945년 일본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상징은 국기였다. 지난 15년간 군국주의자들은 모든 군부대와 관공서, 그리고 중요 행사 때 반드시 국기를 게양하도록 지시했다. 나가이는 오쿠라에게 굵은 장대를 구해 방금 만든 국기를 매달아 약간 위쪽에 있는 풀밭에 꽂아놓으라고 했다.  히사마쓰 간호부장은 42년이 지난 후에도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갑자기 우리 행동의 구심점인 ‘본부’가 생겼습니다. 우리 일을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중심축이 생긴 셈이지요.” 훗날 사제가 되었고 특히 (의미심장하게도) 십자가의 성 요한 전문가가 된 오쿠라 박사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것은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심리적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나가이는 힘든 일을 겪을 때 언제나 대지의 어머니인 자연의 품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지금 그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려웠다. 원자폭탄이 자연마저 모조리 휩쓸어 버린 것이다.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검고 사악한 얼룩을 남기는 단조로운 빗방울이었다. 공기도 더러워졌다.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간 불이 주변의 산소 酸素를 모조리 집어삼킨 후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했기 때문에 나가이와 동료들은 숨쉬기가 몹시 힘들었다.  오후 4시, 처참한 재앙을 초래한 폭발이 있은 후 다섯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불은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어떤 환자들은 통증 때문에 또 어떤 이들은 공포 때문에 여기저기서 신음하고 있었지만 의료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몸에 막힌 유리조각이나 나뭇조각 그리고 시멘트 조각 따위를 거친 의료기구로 빼내고 상처 부위에 소독약을 바르거나 붕대로 감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우물이나 근처 산 개울에서 쉴새 없이 물을 길어왔다. 물을 달라고 절규하는 환자들이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하연 옷이 검은 비에 흉하게 얼룩진 채 들판에 나뒹굴고 있는 이 대학 총장을 발견했을 때 나가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기진맥진한 총장에게 다가가 그간의 상황을 간단히 보고한 후 제자리로 돌아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엑스선 기사 우메즈가 비에 흠뻑 젖은 채 땅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것을 본 나가이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우라카미 교외 전 지역이 불타는 것을 알게 된 정오쯤부터 나가이는 집으로 달려가 아내를 찾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하지만 그건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 병원에서 살아남아 활동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중진의 한 사람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인근 교외에서 비틀거리며 병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물밀 듯 몰려오는 사람들 틈에 아내가 끼여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기도하면서 그는 흘긋거렸다. 어느새 4시가 되었는데 아내한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순간 무서운 절망감이 엄습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우라카미 교외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라고는 무너져 내린 우라카미 성당 벽의 잔해와 관공서의 시커먼 콘크리트 골조뿐이었다. 집이 있던 마을을 온통 재의 벌판으로 변했고 불탄 사리엔 아직도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아내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이 몸과 마음은 이미 정상적인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갑자기 두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그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가 신음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한 동료의 귀에 들려왔다. “살아 있다면 지금까지 오지 않을 리가 없어. 아내는 죽은 거야. 죽은 게 틀림없어, 여보!” 그는 무의식적으로 흙을 한 움큼 쥐었다. 그리고 기절했다. 과다출혈이 원인이었다.

나가이가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후세 교수가 간호사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실, 핀셋, 거즈, 거즈, 여기를 꾹 눌러요. 동맥 끝이 뼈 밑으로 빠져들어갔다니까!”  나가이는 또다시 의식을 잃었지만 출혈은 멎어 있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헐벗은 이나사산 위로 떠오른 은빛 달이 온 누리를 비추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근처 밭에서 주워 온 호박을 방공용 헬멧에 넣어 호박죽을 끓이고 있었고 남자들은 환자와 부상자들을 위한 임시거처를 만들고 있었다. 지칠 줄 모르고 동분서주하는 작은 몸집의 두 젊은 간호사를 나가이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사선과 소속인 그들에게 애칭으로 ‘작은 콩’ 과 ‘작은 통’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작은 낙지’ 까지 합해서 삼총사였지만 그녀는 죽었다. 죽은 하마자키도 이들 못지 않게 뛰어난 간호사였으며 죽는 순간까지 그와 함께했다. 나가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주머니에 간직했다. 그녀의 가족이 찾아오면 가족 제단 위 조그만 유골단지에 안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죽은 자를 기억할만한 아무런 위안거리조차 없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될 유가족들을 생각하자 나가이는 우울해졌다.

나가이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까지 구조에 동참했던 동료 직원, 간호사, 의사들, 그리고 엑스선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떤 불가사의한 운명에 의해 하나로 묶인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서로서로 손을 잡고 또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21. 우주 최후의 블랙홀?

 

해가 지고 한참이나 지났지만,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생존자를 찾느라고 들판을 헤매는 동안에도 병원 저 아래 인가에서는 여전히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마을에서 병원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오던 많은 부상자들이 기진하여 도중에 주저앉는 바람에 의료진은 어둠 속에서 부상자들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구조대원들도 유리조각에 찔리거나, 부상자들을 부축해 걷다가 배수구 같은 데 곤두박질치기 일쑤였다.  못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널빤지가 사방에 나뒹굴었기 때문에 못에 찔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자정이 다 되어가자 아래쪽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차츰 잦아들었다. 바로 그때 히사마쓰 간호부장이 놀라 소리쳤다. “선생님, 성당이 화염에 휩싸였어요.” 성당은 언덕에 우뚝 솟아 있었기 때문에 처음 폭발 때 크게 훼손당하기는 했지만 우라카미의 목조건물이 다 탈 때도 성당까지는 불이 옮겨 붙지 않았다. 하지만 불씨가 무너진 목재건물에 옮겨 붙어 거대한 화염이 죽음의 춤을 추듯 성당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장승처럼 그 자리에 서서 목재와 벽돌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은 나가이의 기억 속에 영원한 불길로 남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이 바야흐로 대격변의 결말을 향해 치닫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육중한 B-29에 의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장치로 된 신 이라는 뜻- 역주) 가 무대 한복판에 등장한 것이다. 이 새로운 신은 이성적 과학시대가 만들어 낸 가공할 폭탄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가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요한묵시록에 묘사된 마지막 때의 무시무시한 장면과 온 천하를 다스리실 그리스도의 장엄한 모습이었다. 파괴된 성당이 마치 살해당한 어린양처럼 누워 있었다. 과학자 나가이는 눈을 치켜 뜨고 활활 타오르는 불에서 에너지를 끌어내는 듯한 괴상한 구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 구름은 무엇이며 악마의 마법처럼 폭발했던 저 새로운 폭탄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가이와 구조팀은 밤새 잠을 설치다 새벽에 눈을 떴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재와 벌판 뿐이었다. 그들은 할말을 잃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다. 요란하던 매미소리도 그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의료기구나 의약품을 조금이라도 건질 수 있기를 희망하며 내부가 다 타버린 병원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 안에는 해골과 새카맣게 타버린 시체가 사방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어제 아침 11시 2분에 동료들이 있던 장소로 가 보았다. 교수, 학생, 의사, 간호사, 기사, 환자들이 모두 새카맣게 타버린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줄지어  웅크리고 있었고, 또 어던 이들은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누워 있었다. 나가이는 고개를 숙이고 짤막하게 기도를 드렸다.

히사마쓰 간호부장이 미 군용기에서 방금 떨어뜨린 삐라 한 장을 들고 나가이에게 달려왔다. 삐라에는 너무 늦기 전에 속히 이 도시를 떠나라는 경고가 적혀있었다. 어떤 성급한 미국인이 경고도 하기 전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실책을 저질렀거나 아니면 진주만의 악몽을 떠올리고는 은밀하게 사전계획을 실행에 옮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가이는 잠시 사방을 훑어보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원자폭탄이다. 원자폭탄이 틀림없다!” 과학자들이 원자핵 분열 연쇄반응으로 발생하리라고 추측했던 모든 구체적인 가능성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폭탄의 파괴력을 통해 그대로 실증된 셈이다. ‘그 순간 나는 고학의 승리와 조국의 패배, 다시 말해서 물리학의 승리와 일본의 비극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죽창이 그의 발끝에 채였다. 열세 살부터 예순 살까지의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전투 훈련을 의무화했던 전 국민 동원령이 통과된 1944년 8월 14일 이래, 여성들에게 전투 훈련을 시킬 때 사용했던 무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죽창이다. 그 옛날 적의 손아귀에서 성 城을 지키기 위해 사무라이들의 부인, 딸, 어머니들이 죽창으로 맞서 싸웠던 것처럼 그들도 미국인들과 싸우도록 훈련 받았던 것이다.  원자폭탄에 죽창이라니! 나가이는 분노와 절망에 휩싸여 그 초라하기 짝이 없는 무기를 발로 차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이제 이 해안에 꼼짝도 못하고 서서 저항 한번 못해 보고 사라져 버릴 것인가?’

그는 문제의 삐라를 고명한 과학자 세이키 교수에게 가져갔다. 그 교수는 임시변통으로 만든 방공호의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 세이키는 삐라를 읽고 신음하듯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텅 빈 하늘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다음 특유의 능란한 말솜씨로 물리학자들과 담론을 시작했다. “이상스럽게 들리겠지만…” 나가이는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잊고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 사실 일본 과학자들도 일찍이 우라늄 235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 군대가 연구를 중지시켰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누가 돌파구를 마련했을까? 그들은 아인슈타인, 보어, 페르미, 채드윅, 졸리오 퀴리 부처, 마이트너 부인, 한과 같은 제2차 세계대전 전의 핵물리학계 선두주자들을 거론했다. 그러고 나서 세이키 교수는 원자핵 분열에 의해 발생하는 방사선에 관한 문제를 화두로 삼았다.

나가이는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남달리 강했다. 맑은 날 큰곰자리나 북극성 같은 낯익은 별자리를 보면서 그는 우주의 신비에 압도되곤 했다. 그 별들에 대한 친밀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지금 그는 대학자인 세이키 교수 옆에 웅크리고 앉아 아무 관련도 없다는 듯 ‘귀중한 과학적 대화에 동참한다’는 생각으로 눈을 빛내며 방사선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 그와 동료들에게 이 언덕배기는, 오랫동안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원자핵 분열이 실제로 사람과 곤충 그리고 초목에 어떤 결과를 미치는지 알게 해준 실험대인 셈이다. 어제만 해도 그들은 자기 민족에게 닥친 엄청난 재앙으로 슬픔에 짓눌렸고 분노로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새로운 활력이 용솟음치고 있었고, 진리를 추구하는 열의를 느꼈다. 참혹하게 파괴된 핵폭발의 폐허에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위한 묘목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나가이는 희생자들을 돌보기 위해 흥미진진한 대화의 장소를 잠시 떠났다. 한낮이 되자 원자핵이 분열할 때 발생한 강풍의 흔적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마치 거인이 휘두른 단칼에 베인 듯 사람들의 잘린 머리가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핵분열과 함께 방출된 적외선이 가져다 준 혹독한 열기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감마선에 노출된 환자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가스 냄새가 난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과음했을 때와 같은 심한 숙취나 심한 배멀미 상태를 호소하기도 했다 상처를 입지 않고 빠져 나온 사람들도 가장 가까운 피신처까지 가서는 맥없이 쓰러졌다. 나가이 자신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꼈다. 그는 이중으로 감마선에 노출되었고 이 때문에 몹시 괴로웠지만, 그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원자폭탄으로 인한 방사선 영향을 과학적으로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체험했던 것이다.

8월 10일 미 군용기들이 쉴새 없이 머리 위를 날아다녔고 나가이와 동료들을 두렵게 했다. 그것은 미 군용기에 더 많은 원자폭탄이 잇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죽은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생존자를 찾아 다녔지만 비행기 소리만 나면 혼비백산하여 엎드리곤 했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졌거나 커다란 숯덩어리로 변해버린 사람들이 끔찍한 광경을 볼 때마다 신경증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비행기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들은 마치 신경세포가 전기 자극에 노출된 것처럼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또한 사지가 점점 무거워지고 하고 있는 일이 절망적으로 여겨질 때마다 심리적인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다. 8월 10일도 저물어 가자 그들은 방공호의 흙바닥에 쓰러졌다. 방공호라고는 하지만 온전히 피신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우주 최후의 블랙홀은 아니었을까? 방공호 바닥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신음하는 육체들로 가득 찼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저 세상 사람들이 되었지만 누구도 시신을 치울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자정 무렵 누군가가 악몽을 꾸면서 나가이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 사람은 날카로운 소리로 전날 죽은 간호사 오야나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22. 말하는 뼈와 새 주문 呪文

 

8월 11일 아침이 밝아오자 의료진은 방공호에서 나와 환자들을 군의관과 위생병들이 거처하는 임시 처소로 옮기기 시작했다. 한여름이라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했으므로 그들은 나무토막을 아무렇게나 쌓아 올렸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신원이 밝혀지면 얇은 널빤지에 그 사람의 이름을 적고, 불을 붙이기 전에 시체를 나무토막 사이로 밀어 넣었다. 사람들이 가족을 찾아 다니고 있었는데 집단적인 신경쇠약에 걸려 예의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부상자들의 얼굴을 무례하게 들춰본 후 “없군, 이 무더기에도 없어”라고 말했다.

군의관과 위생병들이 도착했고 그들에게 환자들을 인계한 후에야 나가이는 마침내 가족을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아이들과 장모는 6킬로미터 떨어진 산속에 있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한때 우라카미였던 황폐한 재의 사막을 행해 비틀거리며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그는 연구실의 파편더미에서 구출되자마자 아내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는 후회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이웃 동네까지 왔다. 이곳은 방사선 양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유골을 가족묘지의 십자가 밑에 안치함으로써 장례만은 반듯하게 치러주고자 단단히 결심했던 것이다.

깨어진 기왓장과 재밖에 없는 곳에서 그들이 살았던 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쪽에 있는 저 검은 덩어리는 무엇일까? 바로 아내였다. 검게 타버린 아내의 두개골과 엉덩이뼈, 척추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는 아내가 그리도 좋아하던 부엌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흐느끼면서 우그러진 양동이를 집어 들고 아내의 유골 옆에 꿇어앉았다. 아내의 오른손 뼈마디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저것은 무엇일까? 비록 구슬은 모두 녹아버렸지만 줄과 십자가는 흔적이 남아 있어 그것이 아내가 자주 손가락으로 굴리며 기도하던 묵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흐느끼며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게 가장 소중하신 하느님, 아내가 기도하면서 죽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통의 어머니시여, 죽은 순간까지 신실한 아내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내의 유골을  양동이에 담으면서 중얼거렸다. “아, 우리의 구세주, 은총이 가득하신 예수님! 당신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으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무거운 짐을 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고통과 죽음의 신비에, 아내와 제 고통에 평화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묘지를 향해 걸어갔다.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올라 걸음을 멈추고 양동이 안에 있는 뼈들을 내려다보았다. “여보, 당신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를 위해 홍고치 수도원까지 다녀오곤 했지. 이제 그 순례여행도 모두 끝났소. 나를 위한 당신의 끊임없는 기도와 내게 베푼 무한하고 한량없는 친절에 모두 감사하오. 나를 용서하오! 당신의 모든 희생과 수고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나를 용서해 주오. 내가 연구에 몰두하고 승진하는 동안 당신은 묵묵히 집을 지켜주었소. 당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 곧장 당신에게 오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주오. 부디 나를 요서하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여기저기 널려 있는 파편 부스러기에 걸려 넘어졌고 그때마다 양동이에서 뼈들이 덜거덕거렸다. 놀랍게도 그 소리는 마치 미도리가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에요. 저를 용서하세요. 용서를 구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제예요.” 물론 이것은 그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밴 너그러움과 매사를 언제나 철저하게 꾸려나가던 성향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정말 그녀가 그렇게 말을 했다고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이 이야기는 그가 쓴 <영원한 것을> 에 계속된다. 그는 미도리의 유골을 아카기보치(붉은 나무 옆 묘지) 가족묘지에 묻었다. 기도를 마친 그는 심란한 마음으로 집이 있던 폐허로 돌아와서 여기저기를 지팡이로 쑤셔보았다. 저 금속 덩어리는 무엇일까? 그건 메달이었다. 아내는 그가 대학과 군대에서 받은 메달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한 훈장을 귀하게 여겼으며 이것들을 반짝반짝 하게 닦아 향나무 상자에 가지런히 넣어 두었다.  이제 메달은 형체도 없는 검은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태양 문양 위에 정교하게 덧입힌 아름다운 칠보 장식도 다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이것이 한때 태양의 땅이었던 이 나라에 앞으로 닥치게 될 일들의 상징이었던 것일까? 과학책, 노트, 사례 연구집, 엑스선 연구 결과물은 병원 건물이 화염에 휩싸이면서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 불꽃이 그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고전문학책들을 삼켜버렸다. 불타버린 책더미를 서글프게 바라보고 있자니 첫 장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글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것은 학창시절부터 애송하던 ‘시성 詩聖’ 가키노모토의 시였다. 그는 7세기에 궁정 관리를 지냈는데 이 시는 그가 멀리 시마네현으로 귀향갔을 때 고향, 특히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대나무숲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온 산을 휘젓는데… 나는 오직 어린 누이만을 그리워하노라.’ 어린 누이란 남편이 가끔 아내를 부를 때 사용하는 애정 어린 표현이다. 나가이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소중했던 책과 연구자료집, 집과 그가 사랑했던 성당, 절친했던 친구들, 이 모두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또다시 무섭게 엄습했다. 게다가 이 모든 것 위에 너무도 사랑스럽고 또 그기 그렇게도 온전히 의지했던 그의 어린 누이, 미도리를 잃은 것이다. 며칠 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주체할 수 없는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는 또한 백혈병, 과다출혈, 방사선 노출 그리고 적당한 섭생과 수면 부족으로 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 나간, 완전히 쇠진한 상태였다. 그는 잿더미가 된 집터에 벌렁 나자빠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의식을 잃은 채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그는 다음날 새벽, 동트기 전 나가사키 만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뜨자 빛이 들어왔다. ‘저것이 뭘까? 가로등 불빛인가?’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시선을 고정했다. 샛별, 금성이었다. “샛별이여,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샛별은 그가 좋아하는 기도 가운데 하나인 ‘로레토의 연도’에서 마리아를 일컫는 호칭이다. 그 순간 성모님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힘들게 무릎을 꿇고 앉아 묵주기도를 천천히 암송했다. 기도를 마쳤을 대 그는 기운을 회복했고, 영원한 나라에서 아내를 다시 만날 때까지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계획하신 것이 무엇이든 다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그가 장모와 아이들이 있는 고바를 향해 출발했을 때는 평온한 아침 햇살이 우라카미 골짜기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곧 파괴된 도시를 뒤로하고 거울 같은 맑은 시냇물을 따라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먼저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로 얼굴과 손을 씻고 목을 축인 다음 아이들과 장모에게 이 비보를 어떻게 전할까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산이 이토록 아름답고 믿음직스러웠던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나라는 사라져도 산천은 남는다고 한 중국 시인의 말이 옳았다. 인간은 원자폭탄을 만들고 투하했지만 하느님의 햇빛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순간 과학자 나가이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태양의 연료는 이미 절반쯤 사용되었다. 따라서 언제가 태양빛도 사라지고 푸른 산들도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다. 아내가 죽고 그 많은 책과 메달이 한줌 재로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그의 신약성서조차 재로 변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걸어가는 동안 성서 말씀이 그를 다시 사로잡았다. “하늘과 땅이 모두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 산과 햇빛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진리, 8월 9일의 공포와 슬픔에 대한 해답이 거기에 있었다! 중국에서 힘든 행군을 할 때마다 성구로 기도했듯이 그는 걸음걸이에 박자를 맞춰가면서 그 구절을 수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자 새로운 기운이 몸과 마음과 영혼에 넘쳐났고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확신이 솟구쳤다. 아내는 다만 할 일을 일찍 마쳤기에 하느님이 계신 본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장래는? 전쟁은 곧 끝날 것이다. 그러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고, 그는 아이들과 장모를 위해 집을 마련하고, 대학과 성당을 재건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게 되겠지. 그러고 나서 2,3년 후에는 백혈병으로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자신의 죽음을 남자답게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과 아내가 있는 본향으로 가는 길, 말하자면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산길만큼이나 단순하고 확실한 길이었다.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서 말할 수 없는 감사의 기쁨이 넘쳐흘렀다.

 

 

 

23. 정오 그리고 일본은 울었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그 다음날, 모리야마 할머니는 단장의 아픔을 삼키며 우라키미까지 가서 딸 미도리의 유골 몇 조각을 조그마한 금속통에 담아 돌아왔다. 할머니는 마코토에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안 된다고 다짐을 했지만 할머니가 울면서 그 통을 너무도 경건하게 다루는 것을 보자 마코토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잠시 밖에 있는 틈을 타서 마코토는 살금살금 기어가 떨리는 손으로 통을 열었다. 마코토는 그것이 어머니의 유골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소년과 할머니가 초라한 식탁 앞에 우울하게 앉아 있을 때 기척도 없이 미닫이문이 덜거덕 열렸다. 피가 그대로 말라붙은 붕대를 머리에 감고 때묻고 찢어진 옷을 잎은 채 그들 앞에 서 있는, 면도도 하지 않고 야윌 대로 야윈 한 남자를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어린 가야노를 안으려고 했을 때 아이는 겁을 먹고 소리를 지르며 할머니 뒤에 숨어버렸다. 슬픈 귀향이었다.

수많은 원폭 희생자들이 들것이나 마차 같은 데 실려서 또는 비틀거리면서, 맑은 물이 흐르고 화상치료에 효험이 있다는 광천수를 찾아 이 시원한 산골짜기까지 왔다는 것을 나가이는 곧 알게 되었다. 마을 농부들은 가련한 부상자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맞이했다. 선한 이웃인 다카미는 백여 명의 환자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많은 환자들은 온몸이 괴상망측하게 부어 오르면서 죽어갔지만, 유리, 콘크리트, 나뭇조각이 박힌 환자들은 이웃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방사선과의 몇 안 되는 생존자들로 구성된 구조팀은 바로 다음날 나가이와 한 약속을 지켜 의약품과 의료기구가 턱없이 부족했지만 이곳 고바에 이동 진료반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유리조각을 빼낸다거나 상처를 치료하는 등 골짜기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며 사람들을 치료했다. 그들은 곧 광천수가 화상치료에 효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방사선 장애로 고통 받는 많은 희생자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게다가 어디를 가나 환자들로 넘쳐났기 때문에 진료반원들은 밤마다 녹초가 되었다.

하지만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가이는 한여름 풀숲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계곡물로 찌들고 지친 몸을 씻곤 했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는 파괴되지 않은 시골길을 걸으며 새로운 기도의 영감을 도처에서 느꼈다. 거센 바람과 안개와 비에도 굳건하게 있는 산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인간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 같았다. 밤이 찾아오면 그는 넋을 잃고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 중에서도 처녀자리인 비르고 를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고대 그리스 전설에 따르면, 비르고 는 남자들의 사악한 행동으로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에 이 땅을 버리고 하늘의 정결한 곳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호전적인 남자들의 사악한 행동 때문에 죽은 하마자키와 방사선과에서 일했던 모든 간호사들이 비르고 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젊은 여인들이 남편의 포옹도 아이들의 웃음도 보지 못한 채 죽었으니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8월이 되기 전에 이미 해군과 공군은 기세가 꺾여 있었고, 아시아 대륙과 일본 본토에 주둔해 있던 황국 군대는 전의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미 군용기는 공장이든 항구든 닥치는 대로 폭파했고 지각 있는 지도자들은 나라가 패했다는 것을 알고 평화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즈키 수상은 도고 외무상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러시아와 일본과 서방세계 사이의 평화협상자로 이끌어 낼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일본이 약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일단의 유력한 미국인 인사들이 ‘무조건 항복’은 일본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라는 것을 백악관측에 설득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조건은 일본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룹의 리더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까지 도쿄 주재 매국대사로 근무했던 조지프 그루였다. 역사가 톨랜드는 그루야말로 ‘일본과 일본적인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사랑 했던 사람이었다고’ 고 적고 있다. 그루는 일본에 살았던 10년의 경험과 전쟁 발발 무렵의 일본의 속사정을 언급하면서 천황은 전범이 아니라 전쟁을 막으려 했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계속했다.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천황을 전범으로 재판정에 세울게 될지도 모르는 무조건 항복은 거부할 것이며 또한 주둔군에 절대로 협조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루는 두먼, 밸런타인, 블레익슬리 교수, 맥클로이 육군차관과 같은 미국무성의 극동문제 전문가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거부당했고 연합군은 1945년 7월 27일,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7월 27일 스즈키 수상은 연합군에 ‘거부’한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 국민은 이 결정을 수용했다. 그리고 미군이 일본에 착륙했을 때는 힘겨운 전투에 대비하여 이를 악물었다. 일본 언론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8월 9일 아침 11시, 전시최고회의가 소집되었다. 히로시마 원폭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입각하여 포츠담 선언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천황은 전통에 따라 수동적 방관자로서 회의에 참석했다. 여섯 명 위원 가운데 스즈키 수상, 도고 외무상, 해군장관 요나이 제독은 무조건 항복에 찬성했다. 그러나 육군장관 아나미 장군,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장군,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제독은 이에 완강히 반대했다. 쌍방간 한치의 양보고 없이 팽팽한 교착상태에서 회의는 무산되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천황은 나가사키에 제2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참으로 침통했다. 그가 계속 소극적으로 통치하는 사이에 백성들이 모조리 파멸한다면 그 죄책감은 누구의 몫인가? 그는 즉시 전시최고회의 위원들과 내각의 장관들, 고급 행정 관리들에게 그날 밤 자정에 자신의 방공 벙커에 모이도록 했다. 그들이 벙커에 모였을 때 그는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용할 것이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2000년 된 석학 石鶴이 갑자기 말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흐느꼈고 큰소리로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천황은 몸소 대국민 방송을 통해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겠다고 함으로써 다시 한번 모든 전례를 깼다.

나가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 중대 발표가 있으리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그들은 조상들이 13세기에 몽골군을 격퇴했던 것처럼 미군을 물리쳐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기라고 짐작했다. 막상 그날이 되어 “참을 수 없는 일을 참아야 하고 견뎌낼 수 없는 일을 견뎌내야만 한다”는 천황의 격앙된 음성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것은 무조건 항복을 뜻했기 때문이다. 전역에서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많은 사람들은 천황이 있는 쪽을 향해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무릎을 꿇었다. 나가이에게도 ‘무조건 항복’은 큰 충격이었다. ‘구름 위로 우뚝 솟아 있는 후지산, 태양이 동쪽 하늘에 떠오를 때 아침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후지산으로 상징되는 일본, 일본은 죽었다! 우리 민족은 끝없는 심연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혼혈아를 낳아 순수 혈통의 맥을 끊으려고 미국 사람들이 일본 남자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라는 괴이한 소문이 나돌았다. 나가이와 그의 진료반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무조건 항복이라는 것이 혹시 일본의 정체성 박탈과 일본 문화 말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그렇게 되면 일본도 인도나 한국처럼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료를 계속할 기분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었으며 저녁때가 되어도 뭘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아침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설거지할 생각도 잊은 채 말 하마디 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찾아왔다. 병든 친구를 위해 의사 선생님을 모시로 왔다는 것이다. 나가이는 그에게 버럭 화를 냈다. “나라가 망하는데 환자 한 명 고친다고 나아질 게 뭐요.” 의외의 반응에 놀란 그 사람은 낙심한 채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들판을 가로질러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나가이는 생각을 바꾸었고 ‘작은 콩’ 간호사에게 재빨리 뒤따라가라고 했다. 진료반은 하는 수 없이 나가이의 뒤를 따랐고 이렇게 해서 순회 진료를 재개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력은 눈에 띄게 떨어져 있었고 고열, 백혈구 수치 감수, 탈모, 잇몸 출혈, 만성 피고 등 각종 방사선 장애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8일, 나가이에게는 원자폭탄증으로 인한 심각한 여러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체온이 섭씨 40도까지 올라가 1주일 동안 떨어지지 않았으며, 전신이 부풀어올랐고, 얼굴은 축구공만큼 부었다. 관자놀이에 난 상처 부위가 썩기 시작하더니 상처가 터져 출혈이 시작되었다. 도미타 박사와 모리타 간호사가 번갈아 가며 밤낮없이 나가이의 관자놀이 동맥을 눌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세 시간 안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피를 많이 흘렸고 맥박과 심장박동은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주사를 놓았다. 나가이는 통증으로 미루어 ‘아, 코라민(각성제의 일종 – 역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가와 신부가 들어오자 나가이는 고해성사를 받고 싶다고 했다. 뒤이어 성체성사도 받았다. 그러자 그는 ‘큰 평화가 넘치는 것을 느꼈으며 그와 동시에 죽을 준비가 되었다’. 그는 고별시를 쓰기 위해 붓과 먹물을 달라고 했다.

나가이는 시를 쓰고 나서 곧 의식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호흡장애가 더 악화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 몇 시간 후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관자놀이 동맥을 누르고 있는 도미타 박사를 바라보면서 “체인스토크스 호흡” (깊은 호흡과 얕은 호흡이 번갈아 나타나는 이상호흡. 요독증, 심장병, 뇌압 항지 때 흔히 나타남 – 역주)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도미타가 “알았네” 하로 대답했다. 나가이의 허파는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쏠리는 텅 빈 자동차처럼’ 느껴졌다.  시 施 박사가 나가사키로 갔다.  혹시 대학 동료 가운데 나가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처방이나 약품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그는 시라베 박사, 가게우라 박사, 고야노 박사 등 의과대학 교수 3명과 연락이 닿았고 나가이의 증세를 설명하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나가이는 죽어가고 있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나가이는 잠깐씩 정신이 들었다가 혼수상태에 빠지기를 되풀이했고, 아젠 머리도 움직일 수 없고 눈도 뜰 수 없었다. 그래서 곧 경련이 일어나겠구나 생각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의 기도소리와 아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순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그에게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여인의 음성도 들렸다. “이 물은 홍고치 수도원의 동굴에서 가져온 것이네.” 장모님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듣자 루르드 동굴의 선명한 이미지와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자신을 격려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가이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그때 들었다.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나는 그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 음성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에게 기도를 청하라’고 말했다. 나는 콜베 신부님에게 기도를 청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주님! 저를 주님의 거룩하신 손에 맡깁니다.'”

관자놀이 동맥을 누르고 있던 모리타 간호사가 갑자기 도미타 박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출혈인 멎었습니다.” 어던 약도 듣지 않던 커다란 상처가 의료적 도움 없이 치유되었던 것이다. 훗날 나가이는 책에서 그때의 경험에 대하여 상세히 적고 있다. 기적 치유에 관한 한 언제든지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나가이 자신은 물론 현장에 있던 의사들도 그의 회복을 기적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또한 루르드는 믿음이 약하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도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예시하면서, 기적적인 치유가 반드시 거룩함의 표지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나가이는 자신의 기적적인 회복을 콜베 신부의 덕으로 돌렸다. 프란치스코회 소속인 콜베 신부가 일본에 들어온 것은 1930년이었다. 그는 나가사키에 수도원을 창설하고 그 뒤쪽에 루르드의 동굴을 지었는데 그 동굴은 범국민적 순례지가 되었다. 또한 그가 창간한 <마리안>은 일본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구독하는 잡지다. 나가이는 콜베 신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결핵검사를 하기 위해 엑스선을 투시한 적도 있다. 1936년 콜베 신부는 큰 수도원 원장이 되어 조국 폴란드로 돌아갔다. 그가 부임하면서 수도원에서는 가톨릭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했는데 매주 몇 백만 부가 팔렸다. 그의 탁월한 영향력은 곧 나치 침략군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41년 5월 체포되어 수인번호 16670을 달고 아우슈비츠에 감금되었다. 7월에 죄수 한 명이 탈옥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수용소장 프리츠는 모든 죄수를 한 줄로 세워 그 가운데서 열 명을 뽑더니 률립 구근처럼 말라 죽을 때가지 먹을 것도 마실 물로 주지 말고 지하 벙커에 처넣으라고 명령했다. 죽을 운명에 처한 열 명 가운데 프란치스 가조브니체크라는 중사가 기여 있었는데 그는 ‘불쌍한 아내와 아이들’이 걱정이라고 중얼거렸다. 이때 콜베 신부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자기는 가족이 없으니 중사 대신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콜베 신부와 다른 아홉 명은 7월 31일에 격리 수감되었으며 8월 14일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콜베 한 사람뿐이었다. 한 당번병이 석탄산 주사를 가지고 왔다. 그마저 죽이기 위해서였다.

뉴스가 철저히 통제되던 시절이라 나가이 가족은 콜베 신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미도리는 콜베 신부가 세운 루르드의 동굴로 순례를 갈 때마다 그를 기억하곤 했다. 장모는 그 동굴에서 가져온 물로 죽어가는 나가이의 입술을 축여주었지만 콜베 신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방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가이는 자신이 기적적으로 회복된 것은 콜베 신부의 기도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24. ‘위로는 우연히 샘솟지 않는다’

– 로마 가톨릭 성무일도 성가

 

나가이가 기적적으로 회복되던 10월 5일을 전후해 정부에서 의료팀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가이의 진료반은 비로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가이는 애도 기간을 정해 아내와 대학병원 사망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보냈다. 그는 머리도 수염도 깎지 않았고, 되도록 깊이 참회하면서 지냈다. 도한 우라카미로 돌아가 잔류 방사선 문제와 씨름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도도 없었지만 개미와 지렁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대 그는 가을비에 대부분의 낙진이 씻겨 내려갔음을 확신했다. 원폭 피해를 입은 곳에서는 향후 70년간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이라던 소문은 허황된 오류였음이 드러났다. 개미처럼 일터로 돌아가자!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타버린 집터 축대에 가맣게 그을린 통나무를 기대어 세운 후, 우그러진 양철조각으로 지붕을 얹어 움막을 지었다.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살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아이들과 외할머니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8천 명의 가톨릭 신자가 우라카미에서 죽었다. 다른 사람들은 폭탄이 떨어졌을 당시 교외로 빠져 나갔거나 해외에 파병되었거나 그도 아니면 해외의 일본 식민지에 거주했다. 우라카미를 재건하자는 나가이의 제안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여 그의 움막 주변에 움막을 지었다. 살아남은 대학 직원들은 새로운 대학을 세우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으며 나가이도 적극적으로 이 일에 동참했다.

 

나가이는 미도리와 8천 명의 가톨릭 신자가 희생된 바로 그 도시로 돌아왔다. ‘그 엄청난 사건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기 위해’서 였다. 어떤 이들은 원자폭탄이 하늘에서 내린 벌이라고 수군거렸다. 주교는 고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옥외 위령미사’ 계획을 발표했고, 나가이에게 조사 弔詞를 부탁했다. 나가이는 원자폭탄 투하라는 엄청난 비극의 의미를 찾고자 노심초사하던 중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놀라운 통찰에 이르게 되었다. 고사사 간호사와 방사선과 직원들은 폭탄이 떨어지던 날 자정 무렵에 여인들의 라틴어 성가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온몸이 녹초가 된 터라 그 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곳을 지나갈 때 그들은 조세이 수녀원 수녀들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원자폭탄 투하로 수녀원은 초토화되었고, 수녀 몇 명은 즉사했으며, 다른 수녀들은 끔찍한 화상을 입은 채 겨우 목숨만 건졌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근처 샘가에서 부둥켜안은 채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성가를 부르며 죽어갔던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미도리가 교사로 있던, 나가이도 잘 아는 수녀들이 운영하던 준신여학교 학생들에 관한 것이다. 공습이 점점 심해지자 에즈미 교장 수녀는 전교생에게 매일 성가를 부르게 했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님! 저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당신에게 바칩니다’로 시작하는 성가였다. 1945년 암담했던 며칠 동안 학생들은 이 성가를 너무도 절절하게 불렀다.

8월 9일 아침 준신여학교 학생들은 도키쓰와 미치노에 있는 공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몇 명은 즉사했고, 또 다른 학생들은 유리조각, 쇳조각에 다쳤으며, 적외선에 심한 화상을 입었으며, 원폭 희생자의 특징인 끔찍한 갈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 후 몇 달 몇 주일에 걸쳐 나가이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들판에 모여 있거나, 임시 조제소를 찾거나, 강가에 나온 준신여학교 학생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상이 심해 며칠 못 가서 죽게 될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소녀들은 ‘성모 마리아님, 저를 당신에게 바칩니다’를 부르며 서로를 격려했던 것이다.

나가이는 파괴된 성당 안 파편더미에 앉아 ‘위령 미사’ 때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희미한 빛 때문이지 십자 모양의 검게 탄 목재들이 매화나무의 검은 가지를 연상시켰다. 아니, 8월 9일의 비와 태양처럼 그리고 요한묵시록에 묘사된 태양처럼 검었다. 그는 파괴된 제단을 응시했다. 살해당한 어린양이 거기 있었다! 묵시록에서 어린양은 어디를 가나 ‘하얀 옷을 입고 성가를 부르는 처녀들’이 뒤따른다고 묘사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 조세이 수녀원의 27명 수녀들과 준신여학교 소녀들은 어린양에게서 배운 ‘새 노래’를 부르며 죽어갔던 것이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일깨우는 노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나가사키의 대학살에 의미와 아름다움을 부여했던 것이다. 나가이는 연필을 꺼내 단가를 한 편 썼다.

 

 

번제물의 희생제물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 사라져 간

백합 같은 처녀들

그들은 하느님을 찬미했네.

 

 

1945년 11월 23일, 나가이는 합동위령마사를 드리기 위해 처참하게 부서진 성당 옆에 모여든 사람들, 다시 말해 붕대를 감고 다리를 절고 화상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사기가 떨어진 가톨릭 신자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차례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의 몸이 약간 흔들렸다. 수척한 얼굴에 머리와 수염이 길게 자라 마치 ‘산신령’ 같았다.

그는 먼저 사제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다음 말문을 열었다. “8월 9일 아침, 도쿄의 대본영에서는 전시 최고회의가 열렸습니다. 일본이 항복할 것인지 항전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순간 전세계는 갈림길에 놓였습니다. 평화인가, 아니면 더욱더 잔인한 피의 전란과 대량 살육인가를 놓고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정확히 오전 11시 2분, 우라카미 교외에 한 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일시에 8천 명의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몇 시간 안에 화마는 이 거룩한 성지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날 밤 자정, 우리 성당은 갑작스런 화염에 휩싸여 찬란한 불꽃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정확히 바로 그 시각에 황궁에서는 천황이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8월 15일 드디어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천황의 칙서가 발표되었고 이로써 전세계는 평화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8월 15일은 또한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우라카미 성당이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전과 마리아 대축일, 이 두 가지 사건이 같은 날 발생한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인지…

제가 듣기로는 원자폭탄은 다른 도시에 투하될 예정이었습니다. 짙은 구름에 가려 목표지점 조준이 불가능함에 따라 미군 조종사는 두 번째 목표인 나가사키를 향해  기수를 돌렸습니다. 그때 기체에서 결함이 발견되었고 다급해진 상황에서 폭탄은 계획된 지점보다 훨씬 북쪽에 투하되었으며 성당 바로 위에서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미군 조종사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라카미가 선택된 것은, 그리고 우리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진 것은 모두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나가사키의 궤멸과 종전 사이에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가사키는 제2차 세계대전과 연루된 모든 민족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쳐진, 하느님의 선택된 희생제물, 곧 ‘흠 없는 어린양’이 아니었을까요?

슬픔에 잠겨 있던 사람들이 번제물이라는 말에 분노했다. 그들의 성난 반응은 유명한 영화감독 기노시타 케이스케가 만든, 나가이의 일대기 ‘나가사키의 아이들’에 잘 드러나 있다. 어떤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세게 항의했다. 유가족들에게 영원한 상처로 남게 될 이 끔찍한 참상에 대해 단어 하나에도 신중하게, 경건하게  표현하라는 것이었다. 나가이는 분노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처한 암흑의 골짜기를 몸소 지나온 사람으로서 오히려 그들의 성난 반응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위엄 있게 말을 이어갔으며 사람들은 곧 잠잠해졌다.

“우리 인류는 아담의 죄와 카인의 죄를 물려받았습니다. 카인은 동생을 죽였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고 살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으며 사랑을 잊었습니다. 서로를 미워하면서, 서로를 죽이면서, 신나게 서로를 죽이면서 말입니다. 마침내 사악하고 무시무시한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희생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도시가 모조리 날아갔습니다만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나가사키의 번제물만이 충분한 희생제물이 될 수 있었고, 그때서야 하느님은 천황을 움직이시어 전쟁을 종식시킬 거룩한 선포를 하게 하셨습니다. 나가사키의 ‘그리스도의 양떼’는 3세기의 긴 박해를 견뎌내면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이 전쟁 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진정한 평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몇 백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의 제단에 번제물로 바쳐져야 했던 ‘흠 없는 어린양’이었습니다.

나가이는 매년 동트기 전 어둠 속에서 커다란 부활초를 켜놓고 거행하는 부활절 성야미사의 부활찬송을 상기했다. “어둠을 몰아내고 평화의 및 밝히며 성당의 불꽃 하늘로 치솟던 그날, 8월 9일 자정의 번제! 그 얼마나 고귀하며 그 얼마나 경이로웠던가요. 비통함이 극에 달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러러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순수하며 장엄한 그 무엇을!”

마지막으로 나가이는 산상설교와 예루살렘 성 밖 해골산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슬퍼하는 자는 행복합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패전국민으로서 배상을 해야 합니다. 비웃음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우리가 저지른 죄악에 대한 벌을 받으며, 땀 흘리고 피투성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셨고, 주님께서 거두어 가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나가사키를 희생제물로 선택해 주신 것에 감사합시다! 이 희생제물을 통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고 우리에게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것을 감사드립시다!”

나가이가 자리에 앉자 깊은 침묵이 흘렀다. 8월 9일의 참상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졌음을 간파한 나가이의 연설은, 위령미사에 참석한 청중들뿐만 아니라 훗날 그의 저서를 통해 비신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나가이는 비와 바람은커녕 겨울에 눈조차 막아주지 못하는 움막에 정착했다. 의학적 견해에 의하면 그는 앞으로 2,3년밖에 살지 못한다. 그의 가장 큰 염려는 아이들, 네 살 된 딸과 열 살 된 아들이었다. 그는 되도록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면서 ‘자립정신’을 가르치고 싶었다. 참혹한 전쟁에서 경제가 엉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오직 투철한 자립정신의 소유자만이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시적은 움막은 아이들에게 배움의 장소가 될 것이다. 그는 장모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고, 아직도 크나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장모는 그의 생각을 순순히 따랐다. 처음에는 바깥에서 밥을 해야 했고, 그릇이라고는 손잡이도 없는 철제 냄비와 목이 부러진 토기 항아리가 전부였다.

오갈 데 없는 친척 두 사람이 그들과 함께 살았다. 밤마다 여섯 식구가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는, 처음 사람이 머리를 북쪽을 향해 누우면 다른 사람은 남쪽을 향하는 식으로 서로 머리를 반대쪽으로 두고 누워야 했다. 어쨌든 침구라고는 한 명당 담요 한 장뿐이었고 이런 식으로 온기를 유지했다. 피폭과 함께 대부분의 옷가지와 침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겨울이 되자 눈과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 아무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나가이는 이것이 우라카미의 방사능으로 인한 예기치 않은 혜택이라고 생각했다. 방사능에 노출된 밀이 어디서나 빨리 싹을 틔우는 것을 이미 보았던 것이다. 옥수수에서도 싹이 나긴 했지만 낟알은 맺히지 않았다. 나팔꽃은 피폭 후 즉시 새 덩굴손을 뻗었으나 꽃의 크기가 작았고 잎사귀는 정상적인 모양이 아니었다. 고구마도 그 즉시 싹이 났으나 열매를 맺지 못한 반면 녹색 채소만은 무성하게 자랐다.

지금은 명문 교토 대학교의 엑스선과로 옮겨간 스에쓰구 교수가 옛 동료를 보러 왔다. 나가이는 옹색한 움막에서 그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교양 있는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님을 도코노마가 있는 방에서 맞이한다. 도코노마란 방 한쪽을 방바닥보다 한층 높게 만들어 틀 전체를 노송나무로 짜는데 자연스러운 나뭇결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칠은 하지 않는다. 도코노마안에는 짤막한 한시나 족자를 거는 것이 관례다. 나가이의 단칸 움막에는 도코노마는커녕 마루도 없었지만 스에쓰구는 붓을 들고 고전 한시를 써내려갔다. ‘지금 이곳엔 아무것도 없지만 무궁무진한 보물창고로다!’ 나가이는 기뻤다. 바로 자신이 아이들에게 해주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를 벽에 걸었다. 이것은 옛집에 있던 아름다운 도코노마나 고전문학 족자보다도 훨씬 갑신 것이었다.

한 노인이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피폭 때 온갖 파편조각이 우물 밑바닥을 메워 노인은 물 한 방울을 얻기 위해 두레박을 바닥에서 힘들게 퍼 올렸다. “저 노인을 보아라, 얘야.” 나가이는 아들 마코토에게 말했다. “우리네 삶이 지금 저렇다. 우린 지금 바닥을 박박 긁고 있는 거란다. 우리는 무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어둠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하지만 얘야, 우린 인내심과 믿음을 갖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며칠 후 한 젊은이가 원자핵으로 황무지가 된 재의 벌판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가이도 아는 청년이었는데, 몇 년 전 해군에 징집될 당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가장 나이 어린 회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남태평양 정글에서 싸우다가 종전을 맞았다. 식량과 의약품이 오래 전에 떨어져 초근목피로 근근이 살아남은 패잔병이었던 것이다. 말라리아에 걸렸을 대는 정글의 진흙 속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고열로 인해 영원한 무의식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총동원해서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 와중에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힘이 났다. 그런데 고향 우라카미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은 8월 9일에 모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서 말이다. 그는 사라져버린 집터 옆 검게 타버린 바위에 앉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고 그는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나가이가 다가가서 말없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잠시 후 들썩이던 어깨가 가라앉고 이 수척한 참전용사는 말했다. “저는 정글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만 부모님을 생각하며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분들이 돌아가셨으니 제가 참고 견딘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아주 멀리 떠나서 우라카미를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가이가 말했다. “그렇다네. 그 기분은 나도 잘 아네. 그러나 자네가 멀리 떠나서 그분들을 영영 잊게 되면 그분들의 죽음도 자네가 고통스럽게 견뎌온 모든 것도 의미를 상실하는 것일세. 우리처럼 우라카미에 남아 움막을 짓고 살면 그분들의 이름도 헛되지 않고 또한 자네가 겪은 고통도 큰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일세.” 참전용사는 옛 집터에 움막을 지었다. 그리고 1년 후 신부감을 데리고 와서 공손히 절을 했다.

나가이는 펜과 잉크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첫 번째 책을 연필로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100쪽짜리 의학 보고서로 8월 9일 이후 원폭 희생자들을 한 달 동안 치료하면서 얻게 된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그가 글을 쓴 목적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희생자들의 치료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길은 실제로 방사능에 이중으로 노출되어 고통을 겪고 있는 방사선학 전공자가 쓴 글인 만큼 설득력이 있었으며 따라서 의학 발달에 기여했다.

친구들이 찾아와 나가이에게 그와 아이들을 돌봐줄 좋은 여자를 찾아줄 테니 새 장가를 들라고 권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어린아이에게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은 아버지를 잃는 것보다 훨씬 더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나의 두 아이들은 어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새어머니가 생긴다면 혼란만 가져올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아이들은 아내를 많이 닮았고, 특히 딸은 더 그랬다. 가야노가 옆에 있는 한 그는 아내를 결코 잊을 수 없을 뿐더러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그는 나가사키 원폭 실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1945년 성탄절 전야에 친구 야마다 이치타로의 도움으로 책의 메시지와 제목을 정하게 되었다. 8월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 우라카미 성당에는 두 개의 종탑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각 종탑의 높이는 50미터에 달했으며, 맨 위에 커다란 종루가 있었다. 북쪽 (또는 왼쪽)의 종루는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몇 십 미터 밖으로 날아갔다. 종루는 성당 옆에 흐르는 조그만 수로 둔덕에 처박혔고 종은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박살이 났다. 남쪽 종루는 종과 함께 종탑 밑으로 떨어졌으며 벽돌조각, 돌조각, 타버린 들보와 잿더미에 파묻혀 버렸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당시 야마다는 인근 섬에 주둔하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재빨리 우라카미로 달려왔지만 폭탄이 이미 아내와 다섯 아이들, 그리고 부모까지 모두 증발시켜 버린 뒤였다. 절망에 빠진 그는 친구 나가이를 찾아왔다. 끓어오르는 분노의 절규를 받아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가이는 야마다의 절규를 들어주었고, 잠시 후에는 야마다가 나가이의 고통에 귀를 기울였다. 미도리의 죽음으로 나가이 역시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가이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의 유일한 선택은 이 원폭 사건을 “언제나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물었다. 야마다라는 이름은 ‘산의 들판’이라는 뜻이다. 나가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함께 지복 至福 의 산으로 올라갑시다.” 상처투성이 야마다는 그날로 나가이의 제자가 되었다. 12월이 되자 두 사람은 ‘원폭 잔해에 파묻힌 종을 파내는 것이야말로 보람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곧 야마다와 젊은 남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잔해를 하나하나 걷어내기 시작했고, 12월 24일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종의 윗부분이 드러났다. 그들은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나가이의 인도로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러고는 한마음이 되어 다시 일을 시작했고, 종의 양쪽 옆구리 부분을 파냈다. 종은 금간 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야마다가 활차를 설치한 후 종을 들어올렸고 종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들은 노송나무로 만든 삼각대에 조심스럽게 종을 달아맸을 때는 오후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을 울리기로 했다.

나가이와 야마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준 사람들은 종소리가 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우라카미 신자들에게 그들의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그 무렵 우라카미 신자들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자신들의 움막에 앉아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는 하나 성 프란치스코 병원의 타버린 빈방에서 자정미사를 드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처지였다. 바로 그때 기적 같은 일이 겨울 밤의 어둠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 향수에 젖게 하는 삼종기도 종소리!  일대에는 높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종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맑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성당이 잿더미 속에서 불쑥 솟아난 것 같았다. 그들은 베들레헴의 어두운 밤하늘에서 천사의 노랫소리를 들었던 목동들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날 밤 나가이는 책제목을 <나가사키의 종>으로 정했다. 이 책은 원자폭탄조차도 하느님의 종소리를 막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종이도 귀했고 글을 쓸 만한 장소는 더더욱 없었지만 책은 서서히 윤곽을 잡아갔다. 책을 집필하는 동안 그는 나가사키에서 죽은 72,000 명의 희생자와 그들이 남기고 간 고아, 과부, 홀아비들의 대변자로 자처했다. 원자폭탄 피해에 대해 객관적으로 기술한 책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어로 쓰였다. 이 책에는 소박하지만 가슴 뭉클하게 하는 일화가 많다. ‘밤이 되었다. 나는 네 살짜리 가야노를 품에 안고 움막 안 침대에 누웠다. 가야노는 몹시 졸린 듯했다.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본능적으로 가슴을 파고들더니 젖 꽂지를 만지고는 화들짝 놀란다. 엄마의 가슴이 아니라는 것과 엄마가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린것은 잠에서 깨어나 흐느껴 울고 있다.’

그는 도 다른 책에서 원자력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 좀더 깊이 다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원자력은 하느님께서 우주의 내부에 숨겨두신 비밀이다. 과학자들은 이 비밀의 자물쇠를 열었다. 그 결과 인류의 문명은 엄청난 발전을 이룰 것인가, 아니면 이 지구가 파괴될 것인가? 원자력은 생존의 열쇠인가, 아니면 총체적 멸망의 열쇠인가? 진정한 종교만이 이 열쇠를 올바로 사용하도록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진정한 종교란? 어떻게 진정한 종교를 찾을 것인가? 나가이는 자신과 이 작은 공동체가 핵 벌판에서 발견한 종교적 희망에 대해 언급한다. 성당에서 흘러나오는 성가가 재의 골짜기마다 넘쳐나고 그의 아이들과 함께 삼종기도를 바치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절대 빈곤과 뼈아픈 상실에도 하느님은 사랑 이시라는 것. 그리고 고통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려는 노력 또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전이 없는 국민은 망한다’는 말처럼 나가이는 비전을 가져다 주는 것이 기도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25. 텅 빈 오두막의 교훈

 

나가이는 폐허로 돌아온 우라카미의 옛 친구들에게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 판잣집의 최저 생활을 견디면서 성 프란치스코 병원과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 및 학교를 재건하고, 옛 성당터 옆에 새 목조 교회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니시다 신부 후임으로온 나카타 신부가 총회를 소집, 산을 소유하고 있는 한 독지가가 새 교회를 짓는 데 필요한 나무를 아낌없이 희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나가이가 말했다. “여러분, 하느님을 믿는 우라카미의 시민답게 교회를 가장 먼저 건설함으로써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보여줍시다. 목조 성당은 멋진 성당을 다시 지을 때까지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어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활동이 가능한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일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산에서 벌목한 나무를 운반해 오기도 하고, 나무를 자르고 고르고 다듬어서 우라카미 가톨릭 목공조합장인 야마다의 지시에 따라 교회를 지었다. 이 성당은 우라카미 교외에 최초로 세워진 공공건물이었다.

나가사키 대학은 인접한 세 도시의 건물을 빌려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가이는 방사선학을 가르쳤다. 준신여학교도 인접한 도시 오무라의 옛 군사시설인 병영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가이는 이 여학교에서 1945년 크리스마스 연극 대본을 써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대배경에 쓸 그림도 그려주었다. 1946년 3월, 준신여학교의 에즈미 교장 수녀가 나가이에게 졸업식 축사를 부탁했다. 어느 면으로 보나 눈물바다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축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장내에는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8월 9일 이전에는 졸업반 학생수는 131명이었지만 지금은 31명만 남았다. 남아 있는 학생들은 친구들을 잃었고 부모를 잃은 학생들도 많았다. 교자 수녀는 아직도 무릎이 온전하지 못하여 떨고 있고, 많은 수녀 교사들도 침대에 누워 지내거나 아니면 아카키 묘지의 소나무 아래 영원히 잠들어 있다. 나가이는 이런 상황에서 평범한 말로 용기와 믿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우리 모드는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와 일본이 다시금 일어설 때까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는 이번에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는데, 바로 이런 점이 그의 매력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처절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것도 비관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 이것이 바로 그를 존경하고 그의 삶에 감탄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이유다. 그가 축사를 시작했을 때 눈시울을 붉히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고개를 떨군 채 울적하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축사가 끝났을 때는 장내에 유쾌한 웃음이 넘치고 있었다.

그는 미도리의 사망 1주기인 1946년 8월 9일까지 <나가사키의 종>을 끝냈다. 이 책은 3년 후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화로 만들어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1946년 당시 이 책에 관심을 갖는 출판업자는 없었다. 일본의 주요 도시가 모두 폭격을 당했는데 도대체 누가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을 것이며 게다가 원자폭탄 희생자들의 괴이한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겠는가? 나가이는 출판업자들의 이 같은 반응에 마음이 상했다. 그러나 그는 두 권의 책을 더 쓰기 시작했다. 한 권은 브루스 마샬의 고전 <세상, 육체 그리고 스미스 신부>를 번역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 권은 자전적 소설 <영원한 것을>인데 나가이는 여기서 이름을 류우키치로 바꾸고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으로 기술한다.

 

1946년 7월, 나가이는 나가사키 기차역에서 졸도했다. 그의 백혈구 수치는 180,000 이었고 적혈구 수치는 2,290,000 이나 되어 건강상태가 매우 악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대학병원으로 옮겨졌고 그를 검진한 동료들은 병상에 누워 있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의 건강상태는 나날이 악화되어 갔으며 그 해 11월부터 죽은 순간까지 나가이는 병상에서 지냈다. 준신여학교의 1946년 졸업식에어 그는 학생들에게 “우리 원폭 희생자들은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아니 환자들도 무엇인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꼼짝없이 병상에 눕게 되자 집필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비장이 심하게 부어 그는 엎드릴 수가 없었다. 따라서 누워서 글을 쓸 수 있도록 머리 위쪽에 나무로 된 책받침을 고정시켜 놓았으며 글은 연필로만 썼다. 잉크는 흘러내려서 불편했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 오래 누워 지냈기 때문에 자연히 욕창이 생겼으며, 팔 힘이 점점 약해져 연필심을 점점 더 무른 것으로 바꾸어야 했다.

유명한 여성 월간지에 그가 번역한 브루스 마샬의 소설이 연재되면서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또한 이것을 계기로 다른 잡지사에서 원고 청탁이 쇄도했다. 경영난에 허덕이던 한 출판업자는 그의 원고를 받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호소했다. 무너진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 된다고 믿은 그는 어려운 출판사를 돕기 위해 원고료를 받지 않고 글을 써주기도 했다.

1947년 미도리의 친척 한 사람이 우라카미로 돌아왔고 목수인 그는 나가이 가족을 위해 조금 나은 판잣집을 지어주었다. 새집은 그전 움막에 비하면 공간도 넓고 여러 면에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단칸방이었다. 그곳에서 몸져누운 나가이와 장모, 그리고 두 아이들이 먹고 생활하고 잠을 잤다. 판잣집은 다다미 여섯 장 크기로 대충 12평방미터에 해당한다. 이 무렵에는 원고료가 넉넉히 들어오던 때라 궁색하게 사는 것이 돈 때문이 아니었다. 장모가 말했듯이 우라카미 사람들 모두가 가난하게 사는데 혼자만 잘산다면 시민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에 제대로 된 집을 거절한 것이다. 그는 생활에 꼭 필요한 액수만 제하고 나머지 돈은 병원을 재건하는 등 공익사업에 희사했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비생산적인 일도 벌였다. 한 예로 나가이가 1948년 규슈 타임스가 주최하는 ‘올해의 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상금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우라카미의 모든 사람들이 헐벗고 있을 때 거액을 들여 벚나무 묘목을 1,000그루 사서 폐허가 된 성당 주변, 학교 운동장, 도로변에 심었다. 우라카미 사람들도 시인과 같은 넉넉한 마음을 지녔던 것 같다. 누군가가 반대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으니 말이다.

1947년 12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회의 회원들이 나카타 신부를 찾아갔다. “나가이 박사님이 방해 받지 않고 조용히 집필할 수 있는 집을 지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신부도 찬성했으므로 그들은 나가이를 찾아와 이렇게 결정되었다고 통보했다. 그가 할 일은 자신과 가족을 위한 이상적인 집의 세부 구조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나가이에게는 하지메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는 군대에 징집되기 전에 결혼했고 만주의 한 대학에서 근무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러시아군은 만주를 침략했는데, 이때 하지메는 포로가 되어 악명 높은 시베리아 수용소로 끌려갔다. 1948년 본국으로 송환된 그는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전 재산을 배낭 하나에 짊어지고 일본으로 돌아와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는데, 가족이 함께 살 집을 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무일푼이라는 사실이었다. 나가이는 자기가 이사를 나가고, 다다미 여섯 장 넓이의 판잣집을 조금만 넓히면 옹색한 대로 동생 가족과 장모와 아이들이 함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그는 빈첸시오 회원들의 제의를 수락했고 자기에게 이상적인 집의 초안을 잡았다. 그것은 약 4평방미터, 그러니까 한 평 남짓한 방 한 칸짜리 집이었다. 이 오두만은 그이 남은 생애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6세기 그리스도인이었던 호족, 다카야마 영주는 다실을 지어 개인 예배처로 삼고, 기도의 준비단계로 다도를 행했다. 다도를 통해 마음의 평정을 회복함으로써 번거로운 국사를 잊고 복음서를 명상하는 동안 ‘어린아이와 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가이는 다카야마 영주의 이러한 자세에 크게 탄복했고 자신도 그처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일본 문화에 접목시켰다. 그는 우라카미 목수들에게 은자의 다실 같은 작은 집을 한 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마루는 다다미 두 장 널이면 된다고 했다. 다다미 한 장의 크기는 보통 가로 여섯 자 세로 세 자로서 한 사람이 눕기에 알맞은 치수다. 다다미 한 장은 자신을 위한 것이고, 나머지 한 장은 아이들이 아빠 곁에서 잘 때를 대비한 것이다. 아이들은 평상시에는 외할머니와 작은아버지 가족과 함께 살면 된다. 목공들은 방문객이 찾아올 경우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집 왼쪽 벽에 의자 대용으로 좁은 널빤지를 한 장 붙였다. 가구라고는 갓을 씌우지 않은 알전구 한 해, 그리고 성서와 책들과 필기도구, 십자고상과 마리아상을 올려놓을 수 있는 책장이 전부였다.

순례자들의 오두막에는 이름이 있는 법이다. 나가이는 자신의 집을 ‘여기당 如己堂’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은 오두막 이름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이 담겨 있음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는 집을 지어준 목공들을 기리는 뜻에서 이 이름을 정했다고 했다. 그들이야말로 복음서에서 가르치는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집은 안락한 삶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나가사키의 타는 듯한 더위는 견디기 힘들었지만 집에는 선풍기 한 대 없었다. 여름에는 모기떼가 극성을 부리고 겨울에는 시베리아 벌판의 칼바람이 미닫이문 틈으로 거침없이 들어온다. 하지만 그는 저서에서 이러한 악조건에 대해 불평 한마디 없이 이렇게 근사한 집을 갖게 된 행운과 좋은 점만을 강조했다. “가타오카 교수가 직접 설계한 정원까지 있다네. 저 장미꽃을 보게!” 특히 장미꽃을 좋아하는 그는 새 품종을 발견하고 또 그것에 대해서 연구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1948년 봄,  그는 여기당으로 이사했다. 몸은 야윌 대로 야위었으나 부풀어오른 비장으로 허리둘레는 96센티미터나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간디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일본신문은 아내와 가족과 집을 떠나 뉴델리의 조그만 집으로 옮겨 은둔생활로 접어든 간디,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며 허름한 옷 한 벌만 걸치고 살았던 이 가난한 성자, 간디에 대해 자주 보도했다. 1948년 1월 간디가 암살당하자 일본 사람들은 나가이를 ‘여기당이 간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를 간디라고 부른 것은 신문, 잡지 특유의 수식어가 아니라 그에게 적절한 호칭이었다. 은둔자의 오두막이라든가 다도를 위한 다실, 그리고 나가이의 여기당,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유이마 수트라’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성스러운 불교경전에서는 텅 빈 오두막의 교훈에 대하여 다름과 같이 전한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오두막처럼 마음을 온전히 비울 때 그대는 초월적인 존재를 만날 수 있다.’

 

 

 

26. 울지 않는 소녀

 

나가이의 어린 딸 가야노는 활달한 소녀였다. 엄마가 없어서 느끼는 불안과 공허감을 무의식적으로 잘 참아내려고 애쓰는 듯했다. 가야노는 아빠에 대한 사랑을 거침없이 표현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한 번은 나가이의 주치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보게, 꼬마 아가씨가 달려와서 자네 품에 뛰어들기만 해도 자네 비장은 파열할 것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그렇게 되면 자네는 죽을 거란 말이네. 그러니 가야노에게 너무 힘차게 아빠 품에 안기지 않도록 주의를 주게!” 나가이는 슬펐지만 하는 수 없이 여기당의 침대 주위에 나지막하게 테두리를 설치했다. 하루는 나가이가 잠들어 있을 때였다. 가야노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와서는 아빠의 볼에 제 볼을 살짝 갖다 대는 것이었다. 인기척에 나가이는 잠을 깼지만 짐짓 자는 척 하면서 딸아이가 속삭이는 말을 엿들었다. “아! 사랑하는 우리 아빠 냄새.” 나가이는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사람들은 혹시 백혈병에 걸린 환자는 냉혈동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딸아이의 그 뼈아픈 한마디를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내가 죽은 후 천애고아가 되어 장례식에서 돌아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우리 아빠 냄새’를 맡기 위해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울 어린 가야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방문객이 늘어남에 따라 나가이는 점점 더 바빠졌다. 그가 쓴 글이나 그에 관한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안고 이 거룩한 사람의 충고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도쿄나 그보다 더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도 많았다. 점점 더 바쁜 나날을 보냈음에도 그는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잠을 깼다. 아이들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그에게 2,3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제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그는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글로 남기고자 했다. 훗날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그의 글이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쓴 두 권의 책은 훗날 불티나게 팔렸으며 지금까지도 서점의 서가에 진열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봄으로써 마흔 살의 나가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너희들은 아직 어린아이인데 벌써 어머니를 잃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엄청난 상실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를 잃은 아픔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고아가 되어 이 넓은 세상에서 상처 받으며 외롭게 살아가겠지. 너희들은 울기도 많이 할 것이다. 그래, 너무 슬퍼서 목놓아 울 때도 있을 것이다. 괜찮다. 우는 것도 때로는 유익할 것이다.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운다면 말이다. 하느님께서 너희들을 위로해 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도 그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나도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울고 싶을 때는 하느님 앞에서 실컷 울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언제나 그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이것은 산상설교에 나오는 말씀인데 산상설교를 통해서 모든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산을 오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때로는 안개와 비와 눈을 맞기도 하겠지. 그러나 안개와 구름이 걷히면 얼마나 놀라운 아름다움과 평화와 사랑의 전망이 펼쳐질까? 그렇다. 우리 삶에 의미를 주고 우리 고통에 가치를 부여하는, 영원히 지속될 가치의 전망이 펼쳐질 것이다. 지금 너희들에게 남겨줄 재산이라고는 이 ‘여기당’이 전부다. 아!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적인 소유보다는 영원한 자아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다! 우리의 삶이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는 지구를 생장하게 하는 저 아름답고 눈부신 태양보다 너희들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느냐?  너희들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이며, 모든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어라. 그러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기 위해 애썼으며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아이들아! 너희들에게 솔직하게 말해야겠구나. 너희들은 고아로서 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학급 친구들에 대한 원한을 품고 싶은 유혹, 그리고 인생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 운명론이라고 어둡고 암울한 불신의 늪에 빠져버리고 싶은 묘한 유혹과 고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맹목적인 운명에 맡긴 채 부정적으로 살지 말고 사랑하면서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너희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구체적인 섭리를 체험하기 바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세 사람에게 쓴 잔을 마시도록 요청하셨다. 이로써 우리는 평화에 이르고, 하느님의 우대하고도 크신 계획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들의 백합꽃과 참새 한 마리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미 그 계획을 알고 계셨다. 나는 의사로서 이따금 환자들에게 쓴 약을 주어야 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불쌍한 것, 그렇게 고통을 받다니! 이 환자에게 달콤한 주스를 줍시다.’ 너희들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게다. 그렇지 않니? 우리는 위대하신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값싼 시럽 대신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우리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생명의 물을 주신다. 때때로 하느님의 선물이 쓰디쓰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입맛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내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 다음 천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분과 더불어 나누게 될 영원한 삶에 적합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너희들은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행복의 파랑새를 기억할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참으로 슬프게도 너희들의 파랑새는 날아가 버렸다. 너희들의 파랑새는 오직 천국에서만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후에 쓴 <묵주알>에서 나가이는 폐허가 된 우라카미에 달빛마저 황량한 저녁이 찾아오면 어떻게 이 시간을 보냈는지에 관해 적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오두막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임시변통의 아궁이에선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하루 중 이때처럼 아내가 간절하게 생각나는 때도 없을 것이다. 그는 너무도 비참하게 느껴지는 나머지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하지만 어린 딸 가야노는 결코 울지 않았다. 그는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할 때면, 가야노가 황량한 핵 벌판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보곤 했다. 한 번은 동생의 어린 딸이 막 낮잠에서 깨어나 가야노 곁으로 갔다. “엄마, 어디 갔어?”, “천국에.” 가야노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바로 그때 동생 댁이 들어왔고 어리둥절한 꼬마는 큰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앞치마를 두른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나가이는 순간 가야노의 얼굴이 시무룩해지는 것을 보았다. 가야노는 슬그머니 일어나 미닫이문 쪽으로 가더니 손가락으로 문틀을 문지르는 것이었다. 가야노의 이 행동이 나가이에게는 너무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들의 오두막 주변은 온통 깨진 기왓장과 원폭 잔해가 어지럽게 흩어진 황무지였다. 나가이는 가야노가 몇 번 넘어져 무릎을 다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가야노는 손가락으로 상처 부위를 천천히 문질러 피를 닦아낼 뿐 결코 울지 않았다. 한 번은 놀이가 지나쳤는지 개가 가야노를 쫓아왔고 아이는 겁에 질려 그의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러나 아이는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눈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가이는 이 울지 않는 딸 가야노가 몹시 걱정스러웠다. 그는 이 울지 않는 딸을 염려하면서 가야노가 좀더 자라서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도 다른 책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어린 시절이 행복한 것은 우리가 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울면 어머니가 달려와 달래줄 것을 우리는 안다. 가야노야,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눈이 붓도록 울고 싶을 때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어른은 그렇게 행동할 수 없고, 오직 어머니가 있는 어린이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고아원에서 봉사한 경험이 있는 나가이는 그곳에서는 다른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에 아이들은 눈물을 감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모든 것의 해답을 아시는 유일한 분께서는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울 수 있다. 하느님은 너희들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나가이의 책에는 그가 좋아하는 과학자들이 여럿 등장한다. 파스칼, 코페르니쿠스, 멘델, 파스퇴르, 앙페르, 마르코니… 그는 말한다. “이들 과학자들은 모두 겸허하게 지성의 눈으로 피조물의 세계를 바라본 자유인이었다.” 과학과 신앙은 서로 적대적이라는 글을 접할 때마다 나가이는 화가 치밀었다. 그는 이렇게 항변하다. “위대한 과학자들의 글을 읽어보면 이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과학과 신앙이 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험은 해본 적도 없고 펜대만 굴리는 사회 비평가, 문학 평론가들이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깊은 존경심과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연구해야 한다. 진정한 과학자는 수도자와 마찬가지로 실험에 모든 것을 바친다.”

과학 특히 방사선학과, 원자 및 방사능 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순수한 것이었다. 그가 아무런 미련이나 원망 없이 교수직과 실험실 그리고 학생들의 인기를 누리던 강의실을 홀가분하게 떠났다는 것이 그 좋은 증거다. 그는 또한 미군이나 하느님에 대한 원망 없이 미도리를 떠나 보냈다. 참으로 슬펐고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지만 원망은 없었다. 그의 저서를 읽거나 그를 가까이에서 알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들은 나가이를 일컬어 ‘남을 끝없이 배려할 뿐 부질없는 염려는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나가이는 종종 별과 별자리에 대해서도 썼다. 그는 별의 아름다움에 싫증을 느낀 적이 한번도 없었다. 별은 한결같이 우주의 질서에 따라 제자리를 지킴으로써 육지와 바다를 건너 먼 여행을 떠났던 고대 여행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벗이었다. 그런 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산 역시 그의 평생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폭염이 내리쬐고 태풍이 휘몰아치고 눈이 온 천지를 뒤덮어도, 산은 삼나무와 측백나무의 울창한 숲을 지키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산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산은 그의 조상들이 위대한 영적 사상을 발견한 전통적인 장소였다. 후지산, 야쿠모산, 히에이산, 고야산 등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점진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산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이루어진 산이다. 또 다른 책에서 그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산다고 해서 돈이 많이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런 삶은 돈보다 훨씬 더 귀중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아이들이 독자들에게 선물 공세를 받을 때면 그는 언제나 이 말을 했으며 선물을 이웃의 가난한 아이들과 나누어 갖도록 했다.

그는 언젠가 여섯 살 짜리 가야노에게서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가야노가 집에서 100미터밖에 안 되는 야마자토 소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가야노가 학교가 끝나고 30분이 다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재잘거리는 꼬마들의 소리가 들여오자 나가이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드디어 딸아이가 나타났는데, 마치 불꽃이 꺼지기라도 하듯이 두 손에 법을 받쳐들고 있었다. 가야노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다다미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선반에 올려놓을 때까지 컵에서 시선을 떼지 않더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하자 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이 파인애플주스를 나누어주셨어요. 맛있는 주를 아빠에게 갖다 드리고 싶었어요. 학교가 끝나고 나오는데 어떤 아이와 부딪쳐 주스를 조금 흘렸어요. 집으오 올 때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어요.” 가야노는 주스 컵을 조심스럽게 가져왔을 때 그이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피폭 직후 오두막의 생활은 몹시 비참했다. 비만 오면 지붕이 새기 일쑤였고, 부엌이 따로 없어 바깥에서 불을 피우고 식사 준비를 하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겨울에는 매서운 북풍에 눈보라가 몰아쳐 방안까지 눈이 들어오는 것은 예사였다. 또한 식량이 늘 부족했기 때문에 간이식탁은 언제나 배고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오곤 했다. 어느 날 밤 쥐를 한 마리 잡은 나가이는 단백질 섭취를 위해 깨끗이 손질해 먹은 적도 있다. 그때 그는 시장이 반찬이라는 속담을 실감했다. 그러나 차츰 형편이 나아졌는데 특히 목공들이 그에게 새 집, 여기당을 지어주었을 무렵에는 많이 좋아졌다.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일본 점령군을 지휘했는데 이 군대는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주둔군으로 기록될 것이다. 맥아더 장군과 천황 사이의 친분관계가 작용한 덕분이다. 맥아더의 개혁정책은 군국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파탄 지경에 있는 경제를 회복시킴으로써 일본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언론기관만큼은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출판업자가 <나가사키의 종>을 출판하기 위해 주둔군 당국의 허락을 요청했을 때 검열반에서는 이를 거부했다. 그 무렵 미국인들은 원자폭탄 결과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나치스와 일본 전범들이 잔혹한 행위로 인해 처형되어야 한다면, 원자폭탄과 같은 연합군측의 잔혹행위 또한 처벌받아야 한다는 문제가 세계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1949년 초 <나가사키의 종>을 출판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다만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한 미국 군사재판소의 기록을 이 책과 동일한 분량으로 출판할 것을 전제로 한다는 조건부 승인이었다. 나가이는 이 조건을 수락했고 두 권의 책은 1949년 4월 1일 나란히 출판되었다.

<나가사키의 종>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1년 후에는 유수한 영화사인 쇼치쿠에서 영화화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영화는 향후 전역에 걸쳐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일본 사람들은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나가가 열정마더 간직하고 있는 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가이의 고통을 자신들의 고통과 동일시 했다.

1937년 중국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1945년 8월 15일에 끝났고 2,470,000명의 일본인이 목숨을 잃었다. 1,672,000명은 전투 중 사망했고, 289,000명의 민간인이 만주, 한국, 오키나와 등지에서 죽었으며, 본토에서 공습으로 죽은 사람은 509,000명이나 되었다. 부상자와 파괴된 가옥, 생활용품, 그리고 무너진 생계수단 등은 그만두더라도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이 가족과 친척, 친구를 잃어야 했다. 미래는 암울하고 불투명했으며 사기는 저하될 대로 저하되었다. 그런데 거의 모든 것을 다 잃고도 삶에 대하여 여전히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사람, 나가이가 있었던 것이다.

쇼치쿠 영화사에서는 제작자인 오바 히데오와 주연배우 두 사람, 와카하라 마사오와 스키오카 유메지를 여기당의 병상에 누워 있는 나가이에게 보냈다. 그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함으로써 그와 죽은 아내의 투철한 정신을 영화에 담기 위해서였다. 영화 제목 역시 ‘나가사키의 종’이었다. 도한 사토 하치로는 동일한 제목의 영화 주제가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10년간 가장 인기 있는 히트곡이 되었으며, 많은 인기 가요집에 수록되었다.

전쟁이 종식된 1945년부터 1951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가이는 20권의 책을 썼으며 많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여기당 수상록>도 베스트셀러였는데 이 책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비애감이라든가 평화에 대한 열망, 핵 위협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과 여기에 참전한 유엔군에 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물론 1950년 이전에도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글을 많이 썼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나가이는 핵무기에 관한 열띤 논쟁을 또다시 불러일으켰던 수소폭탄이 사용되기 18개월 전에 고인이 되었다. 생전에 그는 핵전쟁의 가공할 파괴력은 물론 원자력의 엄청난 잠재력에 대해 지적한 바 있는데, 잠시 그의 생각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원자력 발견을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치명적인 실수처럼 부정적인 것으로는 결코 보지 않았다. 그는 우주 전체를 좋은 곳으로 보았으며 원자력을 우주의 장엄한 역동성의 한 국면으로 파악했다. 예컨대 태양의 빛과 볕을 지구에 가져다 주는 것은 바로 원자력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부싯돌과 나뭇가지를 사용하여 불을 만드는 비밀을 터득했다. 원자력은 전세계 기름 매장량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대체 에너지원이 될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원자력의 에너지화를 위해서는 물론 인간의 책임이 수반된다. 그것은 불, 석유, 전기,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할 때와 같다. 원자력의 경우 그 위험성이 엄청나며, 그 위험성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삶의 고통이 극대화될 수 있음은 사실이나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위험은 언제나 있어 왔다. 어쩌면 고통과 위험은 우리가 참다운 인간, 곧 깊이가 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필요 불가결한 요소인지도 모른다.

나가이는 특히 전반적인 기름 부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미국과 전쟁을 일으킨 이유였다. 그는 원자력을 만성적 에너지 문제를 해결해 줄 대안으로 보았다. 그는 원자력을 현실화하는 것이 요원하던 시대에 죽었지만 오늘날 원자력을 이용한 핵발전소가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21세기 초가 되면 총 에너지 사용량의 절반 이상을 핵발전소가 담당할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너지원을 수입 석유에 의존하던 1941년도의 상황보다는 이편이 덜 위험하다고 믿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만 해도 나가이는 원자폭탄의 위력이 강대국 사이에 전쟁억제 요인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 같은 소박한 꿈을 여지없이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너무도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는 건강상태가 매우 나빴음에도 책을  더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 무렵 그는 고열에 시달렸고, 부풀어오른 비장에 밀려 심장 위치에 이상이 생겼으며, 참기 힘든 뼈의 통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백혈병이 많이 악화되었다는 증거였다.

나가이는 한국전쟁의 불씨가 되었던 서방세계와 공산국가 양 진영의 대결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면서 또다시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나가이는 그럴듯한 공산주의 이론에 현혹된 사람들을 향해 최근의 세계사를 면밀히 살펴보고 ‘그 열매를 보고 나무를 심판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반전을 주장하는 나가이의 글에서는 ‘평화주의자들’이 그렇게도 줄기차게 부르짖었던 반미라든가 반서양적 요소를 결코 찾아볼 수 없다.

나가이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10여 년 전부터 파시스트 슬로건에 조종당한 어리석은 일본 군중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슬러건 따위나 큰소리로 외쳐대는 군중을 혐오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반대시위를 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큰소리나 치는 경박한 사람들임을 나가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보통 사람들이 열망하는 평화를 ‘이용하는’ 정치가들과 종교인들도 통렬하게 비난했다. 세계평화란 가장 힘든 과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가장 고상한 가치라고 믿은 그로서는, 너무도 쉽게 값싼 해결책을 약속하는 정치인들과 특정 이데올로기 주창자들이 무책임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화운동을 하는 ‘성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평화운동 그 자체의 필요성은 그 역시 인정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마음이 평화로운 소유자들에게 의해 이루어질 때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는 실질적인 사회정의, 사랑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힘든 일에 헌신하지 않으면서 오직 정치적인 목적이나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평화운동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에는 평화를 외치는 성난 함성 뒤에는, 종종 평화와는 별 상관없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그는 지적하기도 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사실 주목할 만한 것은 못 된다. 하지만 그가 (그리고 간디도) 산상설교를 세계평화를 위한 구체적 실천요목으로 삼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계속 써내려 갔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공산주의자와 평화를 이루기 전에 그 손에서 낫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낫에 찔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자에게 나아가 그를 포옹할 것이다. 비현실적인가? 당신이 기도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럴 것이라고 나가이는 말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도하는 것이 단순히 ‘미신’이거나 ‘복권 한 장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도란 ‘홀로 산으로 올라가서 금욕주의자가 된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런 것이 아니다. 우주 안에 충만한 모든 힘의 원천이신 사랑의 인격자와 더불어 대화하는 것, 그것이 기도다. 나가이는 또한 우리 모두가 ‘명상을 하도록’ 부름받았으며 그 명상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에 어린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이와 같이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복음서를 인용하여 말한다. “아버지, 이러한 것들을 지혜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시는 감사합니다.” 그는 도 덧붙인다. “어린아이들이 쉽게 즐거운 명상의 샘을 발견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복음서는 모든 사람들을 명상으로 초대합니다.”

14세기 영국의 신비가가 쓴 <무지의 구름>은 그리스도교 명상에 관한 고전으로 모세가 계시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구름으로 뒤덮인 시나이산의 어둠 속으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한다. 나가이가 명상의 묘미를 터득한 곳도 바로 버섯구름으로 캄캄해진 핵 벌판이었다. 그는 말한다. “우라카미의 핵 황무지를 하느님과 함께 걷는 동안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버섯구름은 단지 절망의 표지이며 죽음의 전조일 뿐이다.

그러나 나가이의 신앙은 그 구름을, 지배자인 과학의 노예상태에서 사람들을 구출해 내는 또 다른 출애굽의 구름으로 변형시켰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에야 그들은 시온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핵 황무지를 바라보면서 나가이는 이사야와 같은 심정으로 말한다. “하느님께서 폐허를 낙원으로, 황무지를 야훼의 동산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일본 선불교를 연구하는 윌리엄 존스턴은 불교 문화권인 일본과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서구의 대화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핵심 분야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기도 경험인데 그는 나가이가 이 두 분야에 독특한 기여를 했다고 믿는다. 존스턴은 <나가사키의 종>을 영어로 옮겼으며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과학자 나가이, 애국자 나가이, 인도주의자 나가이가 신비가 나가이가 되었다. 그는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의 신비가이다. 원폭에 관한 많은 책 가운데 그의 책은 단연 독보적이다. 그는 처절한 고통과 힘든 회심을 통해서 신학을 몸소 체득하고자 한다. 자신만의 사랑의 메시지로 마하트마 간디, 마르틴 루터 킹, 도로시 데이, 토머스 머턴과 같은 위대한 예언자들과 나란히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신성모독의 가공할 버섯구름은 그가 사랑했던 한 여인을 한줌의 뼈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를 믿은 그의 신앙은 핵분열의 사악한 불꽃을 신비스런 엘리야의 불수레로 변화시켰다. 그가 여기당에 누워 지내면서 그린 두 점의 묵화를 보면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두 점의 묵화는 여기당 바로 옆에 세워진 나가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마리아 그림이다. 이것은 무릴료 (스페인 화가 – 역주)의 그림 –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성모 마리아 – 을 본 따서 그린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 그림 역시 이와 비슷하지만, 구름 위에 서 있는 여인은 미도리다. 그녀는 마리아처럼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았고, 그 대신 전시에 주로 입었던 몸뻬와 원자폭탄이 우라카미 상공에서 폭발할 때 입고 있었던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또한 미도리는 버섯구름 위에 서 있었다!

 

나가이가 그린 성모마리아와 아내의 모습

 

 

27. 도쿄 문둥이의 노래

 

1948년 연말이 가까워 올 무렵 일본 전역에는 나가이의 책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듬해인 1949년 5월 25일, 일본 후생성에서는 <나가사키의 아이들>을 추천도서로 선정했다. <나가사키의 종>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문부성에서는 각급 학교에 우수영화로 추천했을 뿐만 아니라 나가이를 교과서에 수록하기까지 했다. 그는 또한 해외에까지 알려졌다. 수필집 <나가사키의 우리>는 피폭 생존자가 쓴 최초의 영문본이 되었고 북남미 대륙에서는 독자들이 선물을 보내왔다. 죽어가면서 잠시도 일과 집필을 쉬지 않는 이 과학자에 관한 기사를 연재하는 정기 간행물이 증가했으며 네 권의 책이 연달아 출판되었다.

1949년 9월, 국회 하원에 좀 특이한 의안이 상정되었다. 사기가 떨어진 국민들을 격려하고 재규합하는 데 공로가 큰 두 사람, 곧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와 나가사키의 과학자이며 성자인 나가이 다카시에 관한 안건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과 좌경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의원들이 이 안건에 반대했다. 그들은 유카와의 추천서류는 통과시켰으나 ‘종교적 감상주의자’ 나가이를 추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반대했다. 반대 운동이 급기야 나가이에 대한 중상모략으로 변질되었다. 나가이는 원폭 희생자도 아닐 뿐더러 핵 방사능으로 인한 질병을 앓는 것도 거짓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책과 논문도 그가 쓴 것이 아니며 사람들의 동정을 사서 돈을 벌 목적으로 유령작가를 고용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나가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정치인들은 나가이가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지 못하도록 언론사를 이용했다.

예를 들면 시미즈 박사는 신문기사를 통해 나가이를 공격했다. 나가이의 건강상태에 대한 보고가 사실이라면, 그와 같은 몸으로는 어느 누구도 나가이처럼 많은 저서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나가이의 친구이자 역사가 가타오카 같은 이들은 분노했고 나가이에게 이 근거 없는 비난에 대해 반박하도록 종용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면서 거절했다. 그의 마음이 크게 상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내버려두게. 내가 그 책들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근원적으로 보자면 그 사람들이 말에도 일리가 있네. 내 책의 모든 사상은 성서나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 나온 것이거든. 게다가 나는 작가로서 재능도 별로 없는 사람일세. 하느님의 은총만이 내 글의 모든 영감이니까.” 그러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바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 외교관으로 이름을 떨쳤던 요시다 시게루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나가이를 공격한 것은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국회에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나가이를 대상에서 제외시킨 이유를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나가사키에 가서 시청 직원, 대학교수, 의사, 출판업자들을 인터뷰했다. 그는 심지어 나가이가 힘들게 연필로 쓴 친필 원고까지 조사했다. 잡지사 편집자들이 나가이가 무상으로 써준 원고를 들고 달려왔다.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조교수 아사나가는 나가이의 백혈병에 관하여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하며 낱낱이 설명해 주었다. 방사선 연구자인 나가이는 1932년부터 12개월 동안 방사선을 차단할 아무런 장치도 없이 엑스선 병동의 개척자로 근무해다. 1934년에서 1937년까지, 안전한 방사능 인체투과 양이 어느 정도인지 의사들도 확실히 모르던 시대에 나가이는 하루에 8시간 이상 엑스선 투시를 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대학병원의 결핵검진 병동을 신설, 운영했는데 때마침 전쟁으로 방사선과 직원들이 나날이 줄었기 때문에 매일 엄청난 사람들에게 엑스선을 투시해야 했다. 이는 병원 환자들의 정규 검진과 의과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엑스선 실습만으로도 버거운 그에게 추가로 부과된 일이었다. 아사나가는 나가이가 방사능으로 인해 암에 걸린 것이 확실하다고 결론내리면서 피폭 이후의 만성 백혈병 증세에 관한 상세한 진단서를 덧붙였다.

일반 사람들도 나가이 그들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내주었다고 증언하면서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들과 주고받은 편지뭉치는 여기당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85년 필자는 도쿄 서부지역에 사는 한 병자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우연히 나가이와 ‘펜팔’을 주고받은 사람을 만났다. 그 병자는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위한 기관에 있었는데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고세키 간호부장이 들어오더니 도쿄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내가 나가이 박사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 중이라고 하자 그녀는 즉각 ‘나가이 박사요? 정말이신가요? 아,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고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의아해하는 나를 남겨둔 채 밖으로 쏜살같이 나가더니 편지 한 장을 흔들며 나타났다. “자, 보세요. 이것이 나가이 박사께서 저에게 보내주신 답장입니다.” 이어서 그녀는 편지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1949년 그녀는 국립나환자촌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당시 나환자들은 시력을 잃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환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 간호사들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때 나가이가 쓴 책이 그녀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환자들에게 그 책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저자에게 ‘시력을 상실한 환자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광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녀가 가지고 온 편지가 바로 나가이가 보낸 답장이었다. 답장에는 만일 나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냈다면 받는 이가 불쾌하게 여겼을 수도 있는 시도 한 편 들어 있었다. ‘나병이 그들을 가르쳤네, 인간의 무한히 값진 재산은 정신임을.’

나의 시각장애인 친구, 하하라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맞습니다, 맞아요. 제가 나병에 걸리기 전에는 아름다운 아내와 딸을 둔, 생각 없는 젊은이였습니다. 사회에서 낙인 찍힌 저는 아내와 딸한테서 격리되어 굴에 둘러싸인 나환자촌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저는 절망했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나가이 선생님은 모든 것을 잃고, 죽어가면서도 자신과 이 세상과 더불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간호부장님은 우리에게 나가이 선생님의 책을 계속 읽어주었고 그분은 우리에게 편지까지 보내주었습니다. 그분이 저를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인도해 주었고, 이제 저는 믿음을 통해 삶의 모든 것이 선물이고 은총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병에 걸린 지 올해로 50년이 됩니다만 저는 ‘나병으로 인해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음에 감사하며, 나가이 선생님이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1949년 12월 23일, 특별조사위원회가 나가이에 대한 최종 보고를 했고 국회에서는 투표를 통해 나가이를 국민 영웅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시상식을 위하여 내무차관이 직접 여기당까지 왔으며, 이 자리에는 나가사키현의 지사와 나가사키 시장이 배석했다. 천황은 은으로 만든 사케 잔 한 세트를 하사했는데, 천황이 기념품을 하사하기는 생애를 통틀어 이것이 두 번째였다.

1949년 12월, 나가이는 나가사키 최초의 명예시민으로 선정되었고 그는 또 한번 모든 영예를 하느님께 돌렸다. 친구 가타오카 교수가 이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밤하늘을 밝혀주는 달빛은 태양빛을 반사하는 차디찬 물체의 덩어리일 뿐이네! 이 명예시민증은 하느님께 받은 빛을 반사한 결과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나 자신에 관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네. 하느님 없이는 나 도한 복음서에 언급된 그 쓸모 없는 종과 다를 바 없네.”

나가이의 오두막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야마자토 소학교는 전체 학생 1,100명 가운데 900명이 원자폭탄으로 목숨을 잃었다. 학교가 복구 되었을 때 많은 학생들이 죽어간 학교 운동장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화강암 표면에는 불꽃에 휩싸인 이 소녀가 평온한 얼굴로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이 청동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추모비문 청탁을 받은 나가이는 한 편의 시를 통해 어머니들의 애끓는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직도 벽엔 아이들의 낙서

연필로 서툴게 쓴 그 이름.

한 번이라도 부를 수 있다면

대답을 들을 수만 있다면!

아! 그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운동회를 기억하는가!

우렁찬 확성기 소리에 발걸음도 씩씩하게 교실을 나와

저마다 테이프 끊겠다며 헐레벌떡 달려가던 아이들

운동복 입은 아이들의 모습 얼마나 귀여웠던가!

아! 그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다시는 그 모습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해거름 교문 앞을 서성거린다

보이는 건 진홍 자줏빛 맨드라미뿐!

아! 그 아이들

여기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이 시는 잊혀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선율로 작곡, 해마다 8월 9일이 되면 전교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그날의 비극을 추모한다. 나가이의 시에 곡을 붙인 이름난 작곡가 가운데 야마다 고사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곡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져 사랑을 받았으며 ‘고추잠자리’는 특히 감동적이었다.

 

 

 

28. 곰을 찾아온 파랑새

 

생애 마지막 4년 동안 나가이는 하루 평균 다섯 통의 답장을 썼다. 오사카, 도쿄 및 일본 적역에서 그를 보기 위해 여기당으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1946년 병상에 누워 지내던 초기에는 우라카미의 외로운 노인들이 “(의사) 선생님, 선생님이 외로우실 것 같아서 동무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라는 구실로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몇 시간씩 이어졌다. 그의 친구들에 의하면 그는 한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책과 논문을 쓰다 말고 그렇게 몇 시간씩 방해를 받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관해 한 책에 고백한 적이 있다. 하지만 방문객은 늘어만 갔기 때문에 급기야 손님 접대를 중요한 일과로 정해 놓아야 했다. 당시 남행 고속열차가 나가사키역 도착시각인 오전 7시 20분이 되면, 역 구내 고성님 스피커에서는 ‘나가사키의 종’이  흘러나와 기차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환영했다. 이 노래가 어느새 이 도시의 비공식 주제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7시 20분 고속열차 편으로 온 사람들은 7시 40분이 되면 여기당에 도착했다. 이 사각만 되면 어김없이 방문객이 찾아왔으므로 나가이는 매일 아침 7시 40분까지는 식사와 세면을 끝내야 했다. 다만 목요일은 예외였다. 그날은 그의 오랜 친구 야마다가 종을 딸랑딸랑 우리며 앞장서고 그 뒤를 따라 신부가 봉성체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방문객들이 너무 많아서 낮 시간을 온통 그들에게 할애하느라 책을 쓸 틈이 없는 날도 허다했고 그럴 때는 다른 시간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자주 눈에 띈다. ‘새벽 1시에 잠에서 깼음. 커피 한 잔 마시고 7시까지 집필함.’ 도 이런 구절도 있다. ‘새벽 4시경 너무 지쳐서 글쓰기를 멈추고 아침식사 시간까지 다시 잠을 청함.’ 언제나 낙천적이고 또 모든 기회를 이용했던 나가이는 통증이 점점 심해지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갔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시간까지도, 밀린 집필을 하도록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여기당은 나날이 번잡해지는 거리 옆에 있었다. 이곳에서 버스 정거장까지는 몇 미터밖에 되지 않아 쉴새 없이 오가는 행인들의 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리는 듯했다.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미닫이문을 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가이는 미닫이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좋아했는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이 빛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의 조용한 악장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미닫이문도 소음을 막는 데는 효과가 없었다. 밤이 되거나 날씨가 춥거나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유리나 나무로 된 덧문을 달기도 했다. 한 번은 많은 학생들이 단체로 여기당을 견학하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의 상황을 친구 가타오카는 다음과 같디 전한다. 인솔 교사는 바로 그곳에서, 여기 살고 있는 놀라운 인물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미닫이문으로 인솔 교사의 우렁찬 음성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그의 목소리는 마치 여기당 안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가이가 말했다. “맙소사! 내가 영락없이 동물원의 곰이 되었군. 누가 저 선생의 예의 좀 가르쳐야겠어. 아, 아니지. 내가 틀렸어. 아이들이 기뻐한다면 곰이 재주를 부린들 어떤가.”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는 법이다. 1948년 10월 18일은 전형적인 가을날이었다. 성당 뒤쪽 산기슭은 중국 갈대 스스키로 수를 놓은 듯 아름다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분홍, 하양, 자주색 코스모스는 한껏 자태를 뽐내고, 저 멀리 나가사키만은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계절은 이토록 아름다웠지만 나가이는 우수에 잠긴 채 옆으로 누어 아픈 위장을 두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그가 열린 미닫이문을 통해 무심코 밖을 내다보는데 두 사람이 여기당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시선은 68세의 연로한 여성에게 가서 멎었고 그는 그녀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녀는 비서인 폴리 톰슨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 가야노가 말했듯이 ‘마치 미용체조 레슨을 받은 사람처럼’ 다리를 번쩍번쩍 들면서 열심히 나가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아닌, 나가이가 최근에 신문에서 보았던 헬렌 켈러였던 것이다.

여기당의 조그만 정원에는 큰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 나가이는 주의를 주려고 “발 밑을 조심하세요”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헬렌 켈러는 어느 사이 여기당 문 앞에 와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가이는 그녀의 손을 잡기 위해 매트리스에서 굴러 등으로 다다미를 타고 그녀가 서 있는 곳까지 미끄러져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오른손은 마주잡지 못한 채 공중을 휘젓고 있었고, 그는 풍뎅이처럼 안간힘을 썼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파랑새가 나를 만나러 여기당까지 날아왔지만, 나는 퍼덕거리는 날개를 잡을 수가 없었다.” 폴리 톰슨이 부드럽게 헬렌 켈러의 손을 이끌어 나가이의 손을 잡게 해주었다. 나가이는 계속해서 그날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그분의 따스한 마음이 손을 타고 병든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헬렌 켈러는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무서운 병에 걸렸으며 그로 인해 눈이 멀었고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신실한 앤 설리번 선생의 도움으로 피나는 노력 끝에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앤 설리번도 매우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이었다.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부모마저 사망한 후, 어린 나이에 보스턴 뒷골목에서 어렵게 생활해야 했기 때문이다. 앤 설리번은 헬렌 켈러의 손바닥에 글자를 직접 써가며 알파벳을 가르쳤다.  강의 내용을 일일이 손으로 옮겨가며 공부한 끝에 헬렌은 마침내 래드클리프 대학 4년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그때 24세였던 그녀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콜리어 백과사전에는 그녀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여성의 한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전쟁으로 찢기고 사기가 떨어진 일본 사람들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끼고 있던 헬렌은 1948년 2개월 동안 일본 여행길에 올랐다. 그녀는 일본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방문을 통해 오래오래 기억될 아름다운 열매까지 맺게 되었다. 그녀는 나가사키 방문을 끝으로 다음날 아침 일찍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날 오후 나가사키에서 특별 강연을 마친 후 그녀는 꼭 하고 싶은 일이 두 가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원자폭탄 폭심지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당의 나가이 박사를 만나보는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나가이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의 두 손이 마치 예수님의 신비로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비서 톰슨이 통역해 주자 헬렌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제 마음도 감격스럽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아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기당을 떠나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오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영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가이가 응답했다. “오늘 선생님을 만나면서 얻게 된 귀한 선물을, 우리가 다시 천국에서 만날 그날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나가이의 표현을 빌리면 그때 헬렌의 얼굴은 말로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할머니와 마코토와 차례차례 손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어린 가야노의 작은 손을 잡았을 때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가이를 찾아온 또 한 사람은 고토 연주가 미야기 미치오였는데 그도 시각장애인이었다. 동양의 앉은 하프라고 할 수 있는 ‘고토’는 일본의 유서 깊은 전통 악기다. 2미터 정도의 몸통에 13현 현악기인 고토를 연주할 때는 다다미에 앉는다. 1200년도 더 지난 옛날에 6현 고토가 중국의 궁궐에서 연주되었을 정도로 이 악기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현대의 가장 뛰어난 고토 연주가이자 작곡가인 미야기 미치오는 시력을 완전히 상실함으로써 오히려 음악적 감각을 발달시켰고 청중의 반응에 대한 감각도 매우 예민해졌다. 그는 젊은 나이에 기차에서 발을 헛디뎌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지만 고토 협주곡 가운데 가장 우수한 곡을 남겼다. 미야기가 여기당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역경을 헤치고 나온 두 사람 사이에는 각별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유머를 교환함으로써 보는 이들을 감동시켰다. 나가이는 한때 ‘전능하신 사랑의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고통과 악으로 가득할까’ 라는 해묵은 의문으로 번민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신앙으로 이 문제에 대한 만족스런 해답을 찾았고, 도한 헬렌 켈러와 미야기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고통은 기쁘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며, 암흑을 통과한 경험은 우리의 영적 비전을 선명하게 해준다. 헬렌 켈러와 미야기를 만난 후 나가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몸소 고통을 겪고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연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없다. 울어보지 않고는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는 방황하는 사람이 길을 찾는 데 도와줄 수 없다. 시시각각 엄습해 오는 죽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 뜨거운 입김을 느껴보지 않고는 다른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도록 도와줄 수 없다.’

여기당 옆 조그만 박물관에는 헬렌 켈러가 보낸 세 통의 편지가 진열되어 있다. 두 통은 나가이 박사에게, 한 통은 어린 가야노에게 보낸 것인데 모두 비서 톰슨이 타이핑을 했고, 끝에는 눈물겨울 정도로 큼지막한 켈러의 서명이 적혀 있다. ‘나가사키에서 우리가 손을 잡았던 그날의 따스한 추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앙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선한 일을 행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믿는 박사님의 신앙에 대해,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여건에서도 과학 연구를 위해 그 비극적인 경험을 매 순간 빠짐없이 기록하는 용기와 열정에 대해 들었습니다. 지금 여기 제 옆에 박사님의 책들이, 육신의 고통을 정신적 승리로 승화시킨 그 증거물들이 있습니다. 박사님의 그 거룩한 정신을 존경하며 감탄해 마지않습니다.’

폭심지에 조성된 마쓰야마 평화공원에서 10분쯤 걸리는 곳에 ‘나가사키 포토’ 라는 카메라 상점이 있다. 이 상점 주인은 67세의 다카하라 이타루인데, 그는 나가사키 토박이로 피폭 당시 방사능을 과다하게 쏘인 탓에 방사능병을 앓고 있다. 나가이 박사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그는 한때 신문기자로 일했고, 1949년 5월 나가사키를 방문한 천황을 특별 취재하기도 했다. 그때 천황이 나가이를 만나고 싶어했기 때문에 생명이 꺼져가던 나가이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천황의 일정에 맞춰 대학병원까지 옮겨가야 했다. 천황이 백성의 삶을 살피기 위해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왕궁 밖으로 나왔을 때, 다카하라는 여러 차례 탈 脫 전통적 여정을 취재했다.  천황이 이 순방을 계획한 것은 국민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서였으며, 이로써 천황은 일본의 민주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는 몸집이 왜소하고 어깨가 둥글며 근시인데다 낯선 이들 앞에서는 몹시 수줍음을 타고 어색해했다. 공개석상에서는 종종 모자를 손에 곽 움켜잡곤 했는데, 사람들은 천황이 인간적 약점을 드러낸 채 다가온 것에 대해 찬탄해 마지 않았다. 나가이는 일본이 군국주의에서 민주국가로 바뀌는 데 천황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천황이 나가이를 만나러 왔을 때 다카하라는 그의 병상에 있었다. 다카하라는 천황의 태도에서 다른 어떤 여행에서보다 편안해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따뜻한 웃음을 머금은 채 나가이의 저서에 관해 이야기했고, 관심을 갖고 그의 병세에 대해 물었으며, 가기우라 박사에게 나가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치료를 아끼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고 나서 겁에 질인 아이들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숙제하는 것 잊지 말고, 이 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아이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하자 천황은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다키하라는 천황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에 깊은 감동을 받은 나가이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나가이는 일본 국민들에게 천황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확인했고 일기에 적고 있다 “천황이 나가사키로 순례를 왔다. 그는 죽은 자들을 애도하고 부상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왔으며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가사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고 그 점에 대해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평화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나가이는 천황의 이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천황이 입고 있던 의복이 수행원들의 옷보다 더 검소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용기와 연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949년 8월 15일은 그리스도교 선교사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들어온 지 4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각종 축하행사가 열렸으며 오스트레일리아의 길로이 추기경이 교황 비오 12세의 특사로 왔다. 추기경은 나가사키의 야마구치 대주교에게 원폭 희생자를 한 사람 만나 ‘형과 아우처럼 대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주교는 나가이를 추천했고 이로써 지구의 정반대쪽에서 태어난 추기경이 고개를 숙이고 조그만 여기당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이는 특히 두 아이를 염두에 두고 쓴 <사랑하는 아이야>에서 무려 12쪽에 걸쳐 이때의 이야기를 전한다. “내 어린 자녀들아, 추기경은 아주 특별한 신분이란다. 추기경은 교황을 뽑기도 하고 또 교황이 될 수도 있단다. 그런데 대주교님이 미리 귀띔한 것처럼 그 추기경님이 ‘인간 대 인간으로, 형과 아우로써’ 말씀을 나누러 여기에 오셨단다. 그건 내가 그분을 그렇게 친근하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야. 그분은 눈곱만큼의 허세도 우쭐거림도 남을 업신여기는 오만함도 없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처럼 행동하셨단다. 그분은 우리의 풍습을 아시고 갓 잡은 살진 뱀장어와 잘 익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비파나무 가지를 선물로 갖고 오셨단다. 그분은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내 오른손을 그렇게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잡아주시더구나! 또한 옥스퍼드 출신인 그분의 영어 발음은 알아듣기도 쉬었다.

그분은 지금 지금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선과 악의 투쟁에 대해, 그리고 점점 신자들과 유물론자들의 양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있는 현상 등에 대해 말씀하셨다. 또한 기도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며, 병자들이 자신이 고통과 질병을 믿음으로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은 즉시 ‘희생제물’과 ‘기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받은 감동을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구나.

내 어린 자녀들아! 글은 말과 달라서 냉정하고 또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아, 내가 그분께 느꼈던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없음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그날 나는 현명한 맏형에게 마음 놓고 애기하는 동생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겠다. 3월이 되어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때의 그 기분을 알겠니? 매서운 겨울이 이제 다 지났다고 호가신하게 하는 따뜻한 바람 말이다. 내 기분이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게다. 나는 그때 밖으로 달려나가 전국의 모든 병자들에게, 이곳에 와서 질병과 고통의 의미에 대하여 그렇게도 확신에 차서 말씀하시는 이 맏형을 만나보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어 그분에게 축복을 부탁했다. 아, 그 변화를 뭐라고 말할까! 나는 그때 비로소 진정한 위엄이 갖는 힘을 보았다. 그분이 십자성호를 긋고 나와 내 어린것들을 위해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실 로마 추기경의 거룩한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언젠가 너희들에게 류트 연주가 료세이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시각장애인이나 다름없으며 다리를 저는데다 근육 위축으로 보기 흉한 외모를 하고 이집 저집 다니며 류트를 연주해 주는 대가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야마구치에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강론을 듣게 되었다. 이후 그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리교사를 지냈을 뿐 아니라 예수회 소속 로렌조 신부가 되었다. 그는 25장으로 된 최초의 일본어 그리스도교 서적 <도키리나>를 썼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다이묘(大名, 당시 일본을 다스리던 군부 통치자 – 역주)를 만나 그리스도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히데요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시작하기 전에 이곳 나가사키에서 돌아가셨다. 하비에르 신부님이 일본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료세이에게 축복하셨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하니? 길로이 추기경이 나에게 축복하셨을 때 마치 내가 하비에르 신부님의 축복을 받았던 료세이 로렌조 신부라도 된 것 같더구나.”

1949년 10월 21일, 여기당을 방문하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에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드르 모길레브스키가 왔다. 그는 연주여행차 일본에 왔는데, 정치적 망명이 허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기당을 방문하여 나가이를 위해 연주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나가이는 기뻤지만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근처의 야마자토 소학교의 피폭 어린이들과 나가사키 맹아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을 연주회에 초대해도 되겠습니까?” 바리올리니스트는 기꺼이 찬성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나가이는 여기당에 누워 있었고, 초라한 행색의 어린아이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조율을 시작했고 깨질 듯 약해 보이는 악기가 힘찬 소리를 내자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폐허가 된 우라카미에서 바이올린은 사치스런 물건이었으며 많은 아이들은 그날 난생 처음으로 이 악기를 보았다.

조율을 끝낸 바이올리니스트는 나가이에게 먼저 공손하게 인사한 다음 아이들에게 인사했다. 아이들은 어느새 똑바로 앉아 공손히 답례했다. 갑자기 슈베르트의 신비스런 아베 마리아 선율이 야외 음악당에 흘러 넘쳤고 아이들은 넋을 잃은 듯 귀를 기울였다. 음악소리가 그들을 아름다움과 선과 평화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동안 아이들은 잠시나마 자시들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과 끔찍한 켈로이드(화상 따위의 상처가 아문 후에 생기는 종양 – 역주) 상처 등을 잊었다. 비록 어린아이들이지만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연주가 끝났을 때 모길레브스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가이는 자신을 옥죄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말할 수 없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천장을 응시한 채 누워있었다. 잠시 후 그는 내키지는 않았으나 침묵을 깨뜨렸다. “모길레브스키 선생님, 대단히 고맙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통역을 통해서 말했다. “지금까지 웅장한 연주회장에서 많은 연주를 했습니다만 오늘처럼 청중에게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29. ‘세계의 중심’

 

나가이는 도쿄에 있는 나환우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제 몸도 나날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거의 다 끝나갑니다. 그러나 육신의 고통은 천국에 보물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몇 년만 더 우리의 무거운 짐 – 사실 인생의 짐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습니까 -을 성실하게 열심히 지고 갑시다. 그 다음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 영원히 때묻지 않는 기쁨에 동참할 수 있을 테니까요.’ 또 다른 편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여러분께서 저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교환하고 또 글을 통해 서로 도울 수 있도록 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나가이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나환우들을 위해 여러 편의 시를 썼다. ‘그대의 뼈에서 살이 울고 있네. 그러나 그대의 정신은 밝고 강하고 영원하다네! 인간의 위대함이 여기 있네.’ 또 이런 시도 있다. ‘바람이 휩쓸고 간 황량한 몰로카이 섬. 그 섬에서 다미안 신부 마지막 남은 생애 다하고 묻혔네. 그는 영원한 빛 가운데 살아 있네.’ 도 다른 편지에서는 이렇게 썼다. ‘비록 우리의 육신은 허물어져 가지만, 우리의 마음이 부패되는 것에 비하면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나가이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 유머까지 곁들여 가면서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그가 여기당 옆에 아동도서실을 지어 개방했는데 아이들이 떠들며 돌아다닐 때면 쉽게 마음이 상하고 했다. 피폭 직후 우라카미 오두막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책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인세로 아이들에게 작은 도서실을 지어 주었다. 도서실이 완공되자 실내 정숙을 유지하기 위한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다. 규칙을 위반하는 아이들은 여기당에서 들려오는 “조용히 하지 않으려면 집에 가!” 하는 불호령에 화들짝 놀라곤 했다. 그는 가끔씩 지나칠 정도로 아이들을 나무랐는데 그때마다 곧 후회했다. 사소한 일에 너무 심각하게 반응한 것이다.

나가이와 1934년부터 알고 지내온 가타오카 교수는 가족과 집을 다 잃어버린 ‘그날’ 의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나가이를 도와 그리스도인의 마을 우라카미를 재건하는 일에 힘썼다. 가타오카는 나가이의 책일 출판될 때마다 서문을 썼으며 1962년에는 366쪽에 달하는 나가이의 일대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10 쇄본을 소장하고 있는데 가타오카는 이 책에서 나가이를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과 강철같은 강인한 의지를 겸비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나가이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몸에서 스며 나오는 사랑에 감동을 받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 문화와 문명을 물려준 조상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꾸어 온 것을 물려주어야 할 후손에 대해서도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의무감은 인류에 대한 사랑과 충절에서 나오는 것이다.’

 

누구나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 지내다 보면 자기 중심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성가시게 하기가 쉽다. 환자 나가이 곁에서 6년을 지켜보았던 가타오카는 나가이한테서는 그와 같은 약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술회한다. 오히려 병상에 누워 있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의 글은 더욱더 타인 중심적이고 외향적으로 되어 갔으며 감사의 정으로 넘쳐났다. 예컨대 나환우들은 그의 편지가 모두 ‘행복한’ 글이었기 때문에 편지를 학수고대했다고 한다. 죽기 한 달 전에 끝마친 책에서 나가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끔씩 한 페이지만 더 쓴다면 기진맥진해서 완전히 뻗어 벌릴지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 페이지를 다 쓰고 나면 또다시 쓸 수 있는 힘이 솟곤 한다! 실제로 요즈음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몇 년 전보다 훨씬 더 빨리 쓸 수 있다. 그때의 의무감에서 썼다. 그래서 마치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마라톤 선수를 응원하는 사람처럼 나 자신을 격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은 뭐랄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소년처럼 글을 쓰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소년은 아침에 일어나 날씨가 좋으면 ‘야, 야구하기 좋은 날이다’ 라고 외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비가 오면 ‘야, 뱀장어 잡기 좋은 날이다’라고 말한다. 비록 병상에서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몸이지만, 소년의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음악과도 가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어서 하자’는 노래가 들려온다.

어떤 사람들은 생계수단으로 하이쿠를 짓는다. 그런데 내 생각은 어떤지 아는가? 우리 삶이 한 편의 하이쿠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가 덜거덕거리는 공장에서 땀 흘려 일한다거나, 고기잡이배에서 하루 종일 흔들린다거나, 생계를 위해 우중충한 상점에서 싸우듯 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메마르고 시적이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영감이 넘치는 하이쿠를 쓴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하루 24시간을 모두 한 편의 시로 만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사물을 바라보고 그 속에 감춰진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하며, 우리들 둘러싸고 있는 영광스러운 것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매일매일이 한 편의 하이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일은 완성하지만 자유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반면에 어린아이들은 놀이를 즐김으로써 자유와 기쁨을 얻을 줄 안다.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닌가?”

나가이는 책에서 산상설교가 매우 ‘실용적’이며 우리의 모든 삶에 적용 가능한 진리임을 역설했다. 나가이는 환자의 생명이 의사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으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의사로서 깨달은 진리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한다. “의사들은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는 산상설교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정한 의사는 모든 환자와 고통을 함께 나눈다. 환자가 죽음을 두려워하면 의사도 두려워한다. 오랜 투병 끝에 회복된 환자가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때 의사도 똑같이 ‘고맙습니다’ 라고 응답한다. 환자가 노인이면 친아버지처럼, 환자가 어린아이면 친자식같이 대한다. 모든 환자가 형제, 자매, 어머니이므로 최선을 다해 보살펴야 한다. 각종 검사 결과와 엑스선 사진을 거듭거듭 확인하고, 아무리 작은 결석 結石도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진료 기록을 세밀히 검토한다. 젊은 시절 의사로서 행위를 단순히 의료기술 문제로만 생각했다니,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마치 의사를 신체 수선공 정도로 여긴 것이 아닌가? 그럴 수는 없다. 의사란 환자가 몸과 마음으로 겪는 모든 고통을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함께 겪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의사를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소명,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환자를 검진하고 엑스선 투시를 하고 주사를 놓는 이 모든 의료 행위가 하느님나라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환자들을 치료할 때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

그가 깊이 사랑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나가이도 학식이 많건 적건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한결같이 편안하게 대했으며 그들 또한 그랬다. 학자, 농부, 신자,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여기당의 이 가난한 사람과 이야기 하기 위해 찾아왔다. 가난한 사람들을 업고 권좌에 올랐던 아르헨티나 독재자 부인이자 영화배우 출신인 에바 페론도 나가이를 존경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수호성인인 루한의 성모마리아 조각상을 한 일본 선장 편으로 나가이에게 보내기로 했다. 이에 감동을 받은 브라질의 일본 사람들은 나가사키 주민에게 마리아상을 하나 더 전해줄 것을 선장에게 부탁했다. 그 배는 고베까지만 갔기 때문에 와타나베 선장은 마리아상을 기차로 나가사키까지 운반했다. 나가사키현과 시 관리들이 기차역에서 간단한 환영식을 거행했다. 환영식장에서는 두 나라 국기가 때마침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였다. 두 마리아상은 꽃으로 뒤덮인 오픈카에 실려 행렬에 따라 나가이의 오두막까지 왔다. 많은 사람들은 촛불을 켜 들고 30명의 준신여학교 수녀들의 인도에 따라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며 행렬을 맞이했다. 와타나베 선장은 에바 페론이 보낸 마리아상을 안고 여기당 안으로 들어가 나가이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나가이는 마리아의 발에 입맞춤할 수 있도록 마리아상을 가까이 가져오도록 선장에게 부탁했다. 잠시 후 그들은 여기당을 나와 횃불 행렬을 지어 성당으로 향했다. 나가이와 그의 신앙이 이제는 나가사키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불교 신자이며 신도 신자인 시 관리들도 이 공공연한 가톨릭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가이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필립 네리, 돈 보스코와 같은 성인들처럼 삶의 기쁨을 추구하는 기질이 있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그의 묵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우라카미 소년들의 교리 문답 시간을 묘사한 그림이 그 좋은 예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들은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한 온갖 표정을 짓고 있다. 풍선껌을 부는 아이, 친구의 손에 레몬즙을 슬쩍 떨어뜨리는 아이 아예 천장을 쳐다보는 아이 등 흔히 볼 수 있는 소년들의 교리 공부 광경이다. 그림 옆에는 유머러스한 지방 방언, 말하자면 나가사키 소년들 사이에 통용되는 일종의 토박어 은어로 된 시가 한 편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머리를 박박 긁을 만큼 어렵다. 정말 피 터지게 긁어댈 만큼. 그런데 그건 알았다. 삼위이지만 하느님은 하나라는걸.’ 그는 파스칼의 경우처럼 자신의 사고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참으로 오랜 고투 끝에 얻어낸 중요한 메시지를 이렇듯 유쾌하게 전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신비는 수학과 과학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가이는 또 이렇게 썼다. ‘성당 밖에서 미사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비신자는, 문명을 등지고 산속에서 살았던 내가 아는 어떤 사람과 같다. 영화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는 현대의 젊은이들이 영화 관람을 위해 돈을 허비한다며 분노했다. 삶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미사도 설명보다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미사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사를 통해서 골고타를 체험했고 이를 영적 깨달음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꼼짝없이 여기당에 누어 지내는 동안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이다. 이따금 나는 감실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성당에 들르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는다.’

 

언젠가 고리가 동그랗게 말린 돼지를 그린 적이 있는데, 그 그림은 고향 시마네 현에서 대대로 가업을 잇고 있는 어느 과자점의 로고로 사용되고 있다. 나가이는 원폭 희생자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엽서에 이 돼지그림을 그려 보냈다. 그 사람은 병상에 누어 지내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다. 나가이는 동그랗게 꼬리가 말린 돼지그림 밑에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비록 우리 두 사람 모두 방사능병으로 건강을 잃었지만, 삶을 포기하지는 맙시다. 마치 돼지꼬리처럼 모든 것에 뒤처져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돼지꼬리조차도 제 몫의 역할이 있는 법이니까요!’ 얼마 후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요즈음은 짐수레를 끄는 개 두마리의 도움으로 조금씩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돼지꼬리 역할이나마 제대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모두 저에게 용기를 주신 선생님의 편지 덕분입니다.’

특별한 날에는 아들과 딸이 여기당의 아빠 옆에서 잘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날도 그런 날 중의 하나였다. 새벽녘에 잠에서 깬 그는 아이들의 숨소리를 듣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삶의 기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즉시 연필을 꺼냈다. ‘우린 살아 있다. 살아 있어! 온전한 새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삶의 조수가 썰물처럼 서서히
빠져 나가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그는 두 아이를 위해 쓰고 또 썼다. 그는 마코토가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전장에 나간 아빠를 대신하여 의젓하게 서 있었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슬픔으로 가득한 장례행렬이 언덕을 오르는 동안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코토는 그때 겨우 네 살이었다. 당시 아내가 보낸 편지에서, 이 꼬마가 눈에 눈이 들어가지 않도록 얼마나 자주 눈을 깜박거렸는지, 또 어른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그 조그만 발을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였는지 상세히 적어 보냈다. ‘마코토, 눈을 맞으며 그 언덕을 오른 것이 패전한 나라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상징이 되었구나.’

마코토가 열네 살, 가야노가 여덟 살 때 나가이는 특별히 이 아이들을 위해 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들은 곧 고아가 될 테고 따라서 가파르고 거칠고 외로운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너희들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고통을 잠재우는 약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너희들이 걸어야 할 외로운 길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너희들을 위해 택하신 것이다! 그 길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도록 하여라.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그 길을 걸어갈 것인지 자주 하느님께 기도로 물어보아라. 기도란 불행을 떨쳐버리기 위한 심리 전술도, 현명한 방법도 아니다. 기도는 오직 삶의 신비를 드러내는 진실한 자세다. 너희들이 행복하면 그것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행복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기도하여라.

질병과 고난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있다거나 그분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의 위대한 성인들, 예컨대 리지외의 예수 아기 데레사와 루르드의 벨라뎃다 같은 분들의 삶을 보아라.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총애하는 사람들을 복권에 당첨시켜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무시하는 그런 편협하고 시시한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너무 관대하셔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렇지만 진실한 기도에는 언제나 응답하실 것이다. 너희들은 진실한 기도의 응답을 받아 건강을 회복해 가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병이 기적적으로 낫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이들이 기도를 통해서 그분의 평화와 은총 가운데 머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내가 백혈병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좋겠지. 그러나 내 병이 낫지 못해도 여전히 좋은 것이고 또 그것 때문에 실망하지 않는다. 나를 향한 그분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 오직 그것만이 나의 관심사이며,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뿐이다. 하루에 한 번씩 기도로 지탱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국가와 인류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만일 그래야 한다면 이 세상의 병자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예를 들어 남의 도움이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나를 보아라. 병상에 누워 지내는 환자들을 이 세상에 ‘쓸모 있다’ 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쓸모가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가 처한 상황을 선하신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위대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병자라고 해도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면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죽고 싶다는 어리석은 소망 가은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섭리가 ‘불공평’ 하다고 생각한다. 왜 어떤 사람들은 낮은 지능지수, 신체장애, 허약한 몸, 가난 등으로 고통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하느님의 뜻이, 특히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알 때가  틀림없이 오리라는 것이다.  각 사람의 재능과 신체 장애는 엄청나게 다르겠지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 땅에서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고, 그리고 사후에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평등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내 어린 자녀들아, 너희들은 천재가 아닐 뿐더러 결코 순탄하지 않을 미래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정말 그렇다. 하지만 겸손하게 그리고 사랑하며 살기로 굳게 결심한다면 너희들은 풍성한 결실을 맺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은 후에 하느님 앞에서 인생을 결산하게 될 것이다. 그때 하느님은 우리의 이름이 무엇이고 무슨 일을 하다가 왔는지는 관심이 없으실 것이다. 그렇다. 오직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하는 데만 관심을 보이실 것이다. 오직 그것만으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회사의 사장이라고 웨이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으며, 어부의 아내와 백만장자의 아내가 동등하게 취급될 것이다. 또한 선장과 관리들이 그 배의 요리사보다 우선권을 갖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재능을 잘 사용했는가? ‘ 라는 똑같은 잣대에 의해 심판 받게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재능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그들에게 주어진 재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받은 몫으로 최선을 다했다면 너희들이 각료든 가구 제조업자든, 선장이든 선실에서 일하는 급사든 더 유리할 것도 더 불리할 것도 없을 것이다.”

히로시마에 사는 젊은이들이 연꽃을 선물로 보내왔다. 연꽃은 히로시마를 상징하는 꽃으로 불교 신자들의 마음속에 자랑스럽게 자리해 왔다. 더러운 늪에서 자라고 피어나는 꽃이기에 부패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선한 것을 이끌어 내는 자비로운 부처의 상징이었다. 나가이는 히로시마의 선물을 기쁘게 받고 그 답례로 여기당 정원에서 피어난,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백장미를 보냈다.

장미는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상징하는 꽃으로 특히 성모님한테서 그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난다. 나가이가 즐겨 사용하는 마리아의 옛 명칭 가운데 ‘신비스런 장미’라는 것이 있는데 그는 로사리오(Rosary: 묵주)가 장미 꽃밭을 뜻하는 라틴어, 로자리움 rosarium 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모님에게 바치는 기도는 나가사키의 숨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에 매우 중요했는데 그 점은 나가이도 마찬가지였다. 황폐한 우라카미에 최초로 지은 그의 오두막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신약성서, 십자고상, 그리고 성모상만으로도 충분한’  느낌이었다. 또한 이 성물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곁에 두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가 죽기 얼마 전 복음주의자인 개신교 신자가 여기당을 방문했다. 마리아상이 거슬렸던 그는 ‘이교도적인 우상 숭배’라면서 나가이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잠깐!” 나가이의 입가에는 웃음이 사라졌다. 나가이는 상대방의 급소를 찌를 말을 찾느라 잠시 침묵했다. “제 생각에 선생님은 편협한 시각 때문에 이미지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마음 속에 있는 이미지를 숭배합니다. 이 이미지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더욱 미묘한 특성이 있지요.”

그는 이어서 자신의 경험과 그리스도교 전통을 토대로 하여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로 우리가 복음의 핵심에 이르게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된다는 것을 역설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마리아에게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체험할 수 있다.

숨은 그리스도인들은 언젠가 가톨릭 교회가 ‘거룩하신 성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배를 타고 마리아가 새겨진 돛을 펄럭이면서’ 일본으로 돌아오리라는 내용의 민요를, 호시탐탐 그들의 말을 엿듣는 정부 관리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암호로 바꾸어 부르곤 했다. 1949년 5월 14일, 교황 대사인 푸르스텐부르크 주교가 교황 비오 12세의 메시지와 묵주를 가지고 여기당에 왔다. 이로써 그들의 노래는 실현되었던 것이다. 나가이가 묵주를 받아 드는 순간 감격의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로부터 2년 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묵주는 그의 병상을 지켰다.

 

 

 

30. 벚꽃은 셋째 날 진다

 

1950년 2월, 나가이의 백혈구 수치는 390,000 이나 되었고 주치의는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렸다. 동생 하지메는 가족을 불러 모았다. 그런데 그들이 너무도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가이는 기분이 언짢아졌고, 그래서 그들의 기분을 전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대시절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의 전기를 쓴 가타오카는 나가이의 이러한 태도, 곧 고통에 짓눌리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는 그의 능력이야말로 친구들을 반하게 하는 그만의 뛰어난 자질이었다고 언급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불교의 전통을 갖고 있는 일보의 넨부쓰의 오랜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넨부쓰란 염주를 하나하나 굴리면서 ‘아미타 부처님, 제 모든 존재를 부처님에게 맡깁니다’ 라는 뜻의 ‘나무 아니타 부쓰(나무아미타불)’를 반복해 읊조리는 기도를 말한다. 17세기 그리스도교 박해 당시, 사형언도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꺾기 위해 고문이 자행되었을 때 넨부쓰식 기도가 신자들 사이에 널리 전파되었다고 전한다. 어떤 이들은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화형기둥에 묶였고, 어떤 이들은 센다이의 얼음물 속에서 장대에 묶인 채 채찍에 맞았고, 또 어떤 이들은 운젠의 뜨거운 온천수 속에서 화상을 입고 서서히 죽어갔다. 그들은 마치 염불을 외우듯, 단순한 명상 기도로 ‘예수, 마리아, 요셉, 예수, 마리아, 요셉’을 끝없이 반복했다. 1860년과 70년대의 박해 때도 이와 같은 일이 되풀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땅에서 보낸 마지막 1년, 그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나가이가 끊임없이 중얼거렸던 기도도 바로 이런 기도였다. 어떤 때는 39도까지 오른 열이 열 시간씩 지속도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코토나 다른 가족이 발끝으로 살살 걸어와서 그에게 필요한 것이 없나 살피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가이는 제단을 향하여 돌아누운 채 들릴 듯 말듯 소리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곤 했다. 윌리엄 존스턴은 나가이가 깊은 명상 기도의 경지까지 들어갔다고 믿는다.

이제 나가이는 백혈병으로 인해 뼈가 부어 오르는 증상과 함께 또 다른 통증을 겪어야 했는데 치료약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서도 <여기당 수상록>을 꾸준히 집필함으로써 주치의를 놀라게 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걸작품으로 평가했다. 그는 매일 새벽 3시나 4시면 어김없이 눈을 떴고,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곧바로 집필에 들어갔다. 날이 갈수록 그의 마음은 나가사키의 순교자들, 그 오랜 신앙의 벗들에게 머물렀다. 그는 전에도 순교자들에 대해 쓴 적이 있으나 좀더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의 몇몇 장 章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문체는 점점 극적으로 바뀌어 갔다. 이 책은 나가이라는 한 개인이 걸어간 십자가의 길과도 같다. 그는 잔인하고 난폭한 죽음의 순간들, 섬뜩할 정도로 침묵하시는 하느님, 도 외견상 하느님의 실패로 보일 수도 있는 이 엄청난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26명의 참혹한 죽음이 의미심장하고도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키면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몸과 두 어린것들의 운명에 생각이 미치면 스스로도 이렇게 다짐하며 위안을 삼았다.

 

나가이는 나가사키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미키 바오로의 마지막 순간을 공감하면서 긴 글을 남겼다. 사무라이의 ‘무사도’ 정신에서 가장 큰 덕목은 오직 주군을 위해 살고 죽는, 목숨까지도 바치는 충성심이다. 사무라이들은 벚꽃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겼다. 벚꽃은 만개한 지 사흘 만에 꽃잎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는 명예를 위해서라면 젊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나가이는 이 같은 가치에 담겨 있는 위험을 모르지 않았지만, 위대한 측면도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그의 후임자 발리냐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지 않았던가. 미키는 죽기 전에 ‘고별 노래를 불렀다. 이제 사무라이의 후손인 나가이도 고별 노래를 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영감의 원천은 벚꽃이 아니라 하얀 장미였다. 나가이의 시를 소개한다. ‘잘 있거라, 나의 육체여. 장미 향기가 사라지듯, 나 이제 머나먼 곳으로 떠나야 한다.’

1951년 초, 나가이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창작에 불을 지핌으로써 생애 마지막 책을 쓰도록 만든 뉴스가 날아들었다. 뉴스란 에수회에서 쓰와노의 오토메 도게에 순례자들을 위한 성당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그곳은 나가이에게 세례를 준 신부의 부친 모리야마 진자부로가 얼음고문과 불고문으로 고통받고, 그의 열네 살 된 남동생 유지로와 35명의 신자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곳이다. 나가이는 연로한 진자부로와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이 바빌론 유수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는 오랫동안 이 사건을 책으로 쓰고 싶어 했고 자료도 수집해 놓았는데, 갑자기 지금 쓰지 않으면 영원히 못 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이 책을 1951년 4월 1일에 쓰기 시작하여 오른팔이 마비되기 3일 전인 4월 22일에 끝마쳤다. 그리고 1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나가이가 마지막에 쓴 <순결한 길>은 그리스도인이 투옥되고 고문당한 쓰와노 교회의 산길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영적, 문학적 호소력이 있는 81쪽 분량의 이 책은 쓰와노를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그리스도교 순례지로 만드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나가이 사망 후 사체를 부검한 의사들은 신체와 신경조직이 파열될 때까지 책을 썼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다. 가까운 친구들은 그가 평생 애정을 가졌던 한자를 틀리게 쓰기 시작할 때부터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나가이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찾아온 육신의 고통을 순교자들에 대하여 글을 쓰고 있는 자신에게 적절한 것으로 여겼다. 이 책은 3세기 테르툴리아누스를 인용한 문구로 끝맺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에서 싹튼다.’ 이것이 나가이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모교인 나가사키 의과대학병원에 죽기 전에 자신을 병원으로 옮겨 젊은 의대생들이 백혈병의 최종 단계를 관찰할 의료자료로 삼도록 당부해 놓은 터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기당을 떠나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가톨릭 의사회로부터 백색 카라라(이탈리아의 카라라 부근에서 나는 대리석, 세계의 조각가들이 해마다 이곳으로 모여듦 – 역주) 대리석으로 조각한 평화의 성모 마리아상을 보냈다는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 조각상은 배에 실리기 전, 1950년 12월 로마에 보내져 교황 비오 12세의 축복까지 받았다. 그들은 나가이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이 성모상이 나가사키 성당 앞에 세워짐으로써 사람들이 언제든지 평화를 위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원했다. 나가이는 매우 기뻤다. 편지를 받은 즉시 성당 관계자들과 의논하여 성모상을 성당 남서쪽 입구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또 석공들에게 돌받침대를 만들도록 부탁했다. 배는 3월에 고베에 정박했다. 그러나 성모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한편 여기당에서 평화의 성모상을 기다리는 동안 나가이는 가족과 친구들과 방문객들에게 전쟁, 특히 핵전쟁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기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은 사회정의구현과 사랑의 삶을 살기로 헌신한 사람들이 주도하는 평화운동이, 과거 어느 때보다 시급합니다. 이 운동은 우리 모두의 희생과 마음의 변화를 통해 진정한 헌신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기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기심이야말로 평화의 적 敵 입니다.”

나가이는 이제 잠시도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는 언젠가 위령미사 때 우라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폭 피해자들을 하느님께 바친 번제물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지금 그는 일종의 산 제물이었으나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번제물이라고 여긴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의 마음은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을 향했다. 지난날 그는 자신이 비신자였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을 뿐더러 그들에 대한 연민을 떨쳐버린 적이 없었다. 그는 “우리는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슬픈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인간이 아메바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라고 말하는 과학자들은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가엾은 일입니까!” 이제 그의 오른팔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고통이 심하다는 것을 주치의는 알았다. 그러나 나가이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평온한 얼굴로 기도에 몰두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4월 29일 밤, 그는 또다시 과다출혈을 했다. 이번에는 오른쪽 대퇴부에서 출혈이 있었는데 그 부위가 심하게 불어올랐다. 그는 극심한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가족들은 깜짝 놀랐고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그의 곁으로 가서 기도했다. 가족들은 그이 누이를 병원에서 데려왔고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오빠에게 의지하고 있느니 심지를 굳게 하세요”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너무 고통스럽구나.” 그는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이젠 예수께서 빨리 오셨으면… 나를 위해 기도해 다오. 부탁이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다오.” 의사가 모르핀 주사를 한 대 놓았고 그는 약 기운에 잠이 들었다.

우타코 간호사가 밤새 그의 병상을 지켰다. 그는 새벽 1시경 타는 듯한 갈증으로 잠에서 깼다. “마실 것 좀 가져오겠습니다” 라는 간호사의 말에 그는 “아니오. 오늘 성체를 영하고 싶으니 그 후에 마실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선생님, 환자는 금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  “나고 알고 있소.” 그는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마시지 않을 거요.” 그러고는 수시로 간호사에게 시간을 물었다. 새벽 5시가 되었다는 간호사의 말에 그가 말했다. “빨리 마코토를 성당으로 보내주시오. 신부님이 지금쯤 깨어나셨을 겁니다. 내가 병자성사를 받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시오.”

곧바로 신부가 달려왔다. 나가이는 힘들게 신부에게 인사를 하고, 기도문을 한마디 한마디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힘들게 인사한 후 성체를 받아 모셨다. 그러고 나서 감사기도를 마치기까지 15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간호사가 으깬 딸기와 우유와 물을 섞어 만든 주스를 가져와 그가 마시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그러자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회원들이 그를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손수 만든 목재 들것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나가이를 들것에 옮겼다. 나가이의 제자 마쓰오는 경미한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나가이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나가이는 자는 척하고 눈을 감았지만 집 밖으로 나오자 감사와 슬픔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여기당을 바라보았다. 마치 임종을 앞둔 성 프란치스코가 사람들이 실내로 옮기기 전, 마지막으로 아시시와 도시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거대한 산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처럼 말이다.

작은 행렬은 슬픔에 잠긴 채 700미터까지 나간 후, 성당이 있는 언덕 아래 사라져 버린 성모상의 받침대 옆에서 멈춰 섰다. 나가이가 평화의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가이는 성모상을 기다리고 있는 받침대를 고통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쓰시마 해협 저편의 한국전쟁이 하루빨리 끝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자고 말했다.

나가이는 성당을 향해 인사를 하고 나서 신호를 보냈다. 네 명의 친구가 들것을 들고 다시 출발했다. 강한 햇빛 탓이었을까, 아니면 약한 신경조직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서였을까? 마쓰오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들것을 운반하는 사람들에게 멈추라고 하고는 나가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장님이 된 모양이네. 아무것도 볼 수가 없네.” 그는 말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더니 위스키 한 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그가 구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가이는 웃음을 짓더니 위스키를 조금 마셨다. 시력이 회복되었고 그들은 다시 출발했다. 그들이 소독약 냄새가 밴 병원으로 들어갔을 때 나가이는 코를 킁킁거리며 농담을 건넸다. “악취를 풍기는 걸 보니 병원이 틀림없군.” 친구들과 마쓰오는 안도감에서 들것을 내려놓고 큰소리로 웃었다.

나가이의 오랜 지기인 히사마쓰 간호부장이 그들을 병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에다 간호부장이 들어와 유쾌하게 말했지만 그가 너무도 많이 상한 것을 보자 감정이 북받쳐 목이 메었다. 당황한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난처한 모습을 가리려 했다. 나가이는 웃으며 말했다. “네, 이분이 우리 마에다 간호부장이에요. 여전히 황후처럼 우아하지요!” 간호사들은 억지로 웃었다. “물수건으로 닦아드릴까요?” 히사마쓰가 물었다. “그래요. 온몸을 닦아주겠소?” 그들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 온몸을 닦아 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후 교수들과 의사들이 들어왔고 가족들이 도착했다. 가족들은 그가 전보다 더 생기있고 기운차게 보여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밤이 되자 그들은 병사에 둘러서서 저녁기도를 드렸다. 의사들이 오늘, 내일 안으로 운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안심한 가족들은 그에게 쉬라는 인사를 하고 병실을 떠났다. 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쳤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들 마코토와 우타코 간호사가 병실을 지키기로 했다. 밤 9시 40분이 되자 갑작스런 어지럼증을 일으켰고, 다른 가족들은 다 어디 갔느냐며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엔 이미 초점이 없었다. 잇달아 경련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온몸을 떨며 거칠게 속삭였다. “빨리 신부님을 불러주시오.” 우타코는 마코토에게 빨리 나가서 아무에게나 부탁하여 성당에 전화하라고 이르고는, 나가이에게 루르드의 물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재빨리 물을 마셨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의식을 잃었고 그때 막 방에 들어온 의사가 각성제를 놓았다. 나가이는 눈을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예수, 마리아, 요셉”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하기 시작했으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당신의 손에 제 영혼을 맡깁니다”라는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깜짝 놀란 우타코가 커다란 십자고상을 마코토 쪽으로 들이밀면서 얼른 아버지에게 갖다 드리라는 손짓을 했고 어린 소년은 흐느끼면서 십자고상을 아버지의 병상 곁으로 가져갔다. 나가이의 오른손은 죽어가는 새의 부러진 날개처럼 보였다. 그가 간신히 묵주를 들고 있던 왼손을 갑자기 위로 뻗치더니 아들의 손에서 십자고상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기도해 주시오. 제발 기도해 주시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히사마쓰 간호부장은 지금까지 한번도 이처럼 격렬하고 극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순식간에 이루어진 평화로운 죽음을 본 적이 없었다.

신부가 황급히 달려왔지만 나가이가 마지막 종교의식을 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죄의식마저 느꼈다. 그러나 의사들이 그를 위로했다. “저희들도 어안이 벙벙합니다. 이렇게 빨리 돌아가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요.” 히사마쓰 간호부장이 덧붙였다. “제 생각에 나가이 선생님은 한 가지를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백혈병 환자들이 죽을 때는 보통 온몸에서 출혈을 하거든요. 혹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선생님께서 그렇게도 빨리 평화롭게 떠나신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신부는 이 말을 위안 삼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오늘은 성모 성월이 시작되는 5월 초하루입니다. 선생께서 오늘 돌아가신 것이 우연한 일 같지 않군요. 제 생각에는 성모 마리아께서 직접 오셔서 주님이 계신 본향으로 데려가신 것 같습니다.”

 

 

 

31.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를, 일어날 모든 일에 긍정을’

 

5월 2일 오후 1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의사와 교수들, 대학병원 각 과의 주임교수 및 원자폭탄상해협회 의료 담당 관리들이 모여 철저한 부검을 실시했다. 그 결과 나가이는 백혈병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 밝혀졌다. 정상인의 비장이 약 94그램인데 비해 그의 비장은 3.41 킬로그램이나 되었다. 간장은 정상인의 4.5배로 부어 있었다. 그가 이런 몸으로 그렇게 오래 생명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두 권의 책까지 쓸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놀랄 뿐이었다.

친구들은 니스칠을 하지 않은 소나무관에 입관한 다음 여기당으로 옮겨왔다. 이 오두막을 중심으로 반원을 이루고 서 있던 사람들 중에는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버지가 가르친 대로 강하고 독립적인 아이답게 침착하게 서 있던 마코토가 갑자기 열린 관 위로 쓰러지면서 오열했다. “보세요! 아빠, 보세요. 우리 모두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세요!” 나가이의 동생 하지메는 마코토와 가야노와 함께 관 옆에 서있었는데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것은 나가이를 대신하여 아이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겠다는 엄숙한 서약이었다. 동생 부부는 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

장례식은 5월 3일, 20,000여 명의 조문객이 성당 안팎을 가득 메운 가운데 우라카미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아침 9시가 되자 장례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야마구치 대주교가 행렬을 지어 입당했다. 나가이의 그리스도교 여정은 1932년 우라카미 성당의 성탄 전야 미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제 그 여정을 미사로 마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대주교의 사죄경이 끝나자 나가사키 시장이 앞으로 나가 관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시장은 허리를 펴더니 이번에는 대주교와 운집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경건한 어조로 300여 통의 조사를 대독했는데, 요시다 수상의 조문을 시작으로 마지막 조문까지 읽는데 무려 90분이나 걸렸다. 대주교는 이제는 고인이 된 옛 친구의 관 위에 성수를 뿌렸고, 가족과 시장에게도 이와 같이 하도록 권했다. 시장이 성수를 뿌리고 제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시계가 정오를 가리켰다. 바로 그때 삼종기도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종을 친 사람은 1945년 크리스마스 전날 나가이와 함께 바로 이 종을 잿더미에서 파냈던 친구 야마다였다. 그날 밤에는 쓸쓸하게 종이 울렸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가사키의 모든 교회의 첨탑과 절에서 일제히 종이 울려, 화답하듯 천상의 교향악을 연주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장에서는 사이렌이 울렸고, 나가사키만에 정박해 있던 배들은 일제히 고동을 울렸다. 이렇게 온 나가사키가 이 도시의 으뜸가는 시민, 여기당의 빈자를 기리기 위해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날’ 아이들과 교사들이 물을 달라고 절규하며 죽어갔던, 근처의 야마자토 소학교도 이 순간 잠시 침묵했다. 삼종기도 종소리가 사라져 갈 때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교사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위대한 한 친구가 그들 곁을 떠나간 것이다.

나가이의 관은 ‘인 파라디숨 In Paradisum 낙원으로’ 이라는 라틴 성가에 맞추어 성당을 떠났다. “천사들이 그대를 천상 낙원으로 인도하고, 순교자들이 그대를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영접해 드리기를, 천사의 합창대가 한때 가난했던 라자로와 더불어 그대를 영원한 평화로 인도하기를.” 장례행렬 선두에 선 이들이 성당에서 1.5 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묘지를 행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들은 상주들과 조문객이 묘지를 향해 출발하기도 전에 그곳에 도착했다. 대주교는 애통한 심정으로 검은 기모노의 물결을 굽어보았다. 여성 신자들의 하얀 미사보가 검은 색을 약간씩 희석시킬 뿐 검은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한 조문객은 하늘이 열리고 나가이의 영웅이던 베토벤이 나와서 ‘에로이카’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 – 역주)를 직접 지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가이 박사의 유해는 나가사키시 공원 묘역의 미도리 곁에 묻혔다. 우라카미 기차역 앞 전차 정거장에서 도보로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 이 묘역은 외국인 묘역의 서쪽 입구 바로 앞에 있다. 미도리의 묘비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응답했던 바로 이 말씀이 새겨져 있다. 나가이의 묘비에는 루가복음 17장 10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함께 두 사람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이 남자는 나가이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기꺼이 그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나가이를 만난 적이 없는데도 나가이를 존경하는 스승으로 섬겼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미군 주둔 이후 저는 성난 젊은이로 변했습니다. 신들의 땅인 일본은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던 학교 선생님들과 모든 지도자들에게 속고 배반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너무도 암담하게 여겨졌으며 제 장래도 그랬습니다. 그때 우연히 공공 도서관에서 나가이 박사의 책을 읽게 되었고 그분에 대해 흥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대부분의 우리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 역경에 처해 있었는데도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후 그분의 다른 책들도 읽었고, 결국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삶과 인간의 노력과 개인의 가치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인가, 아니면 당장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가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우주적인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에 부딪친 것입니다. 나가이의 책에선 어떤 힘이 느껴졌고 저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저도 그가 믿는 신앙을 갖게 되었고, 세례를 받게 되었지요.” 당시 고등학교 과학교사였든 그는 종종 나가사키를 순례하고, 여기당을 방문하고, 또 나가이 다카시와 미도리의 묘소를 찾는다고 했다.

강렬한 나가사키의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 들어와 발등에 섬세한 무늬를 수놓았다. 때마침 항구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마치 카드리유 (네 사람이 사갹형을 이루어 추는 프랑스 춤 – 역주)를 추는 파트너인 양 한데 어울려 춤추는 빛과 그림자의 무늬를 시시각각 바꾸어 놓았다. 자연에서 햇빛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다. 햇빛은 그 자체는 색이 아니지만 모든 색깔을 담고 있으며, 또 무색이지만 우리가 색깔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며칠 전 핵전쟁의 위험성에 관한 세미나에서 한 연사가 식물은 햇빛이 일으키는 광합성으로 생명을 유지하며, 우리 인간도 그렇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이어서 “햇빛을 생산하는 것과 똑같은 과정에 의해 수소폭탄이 폭발한다”는 나로서는 신기한 내용을 덧붙였다. 나는 과학교사인 그 친구에게 이 말이 단순한 가설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물어보았다.

“그건 과학적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태양의 중심부는 고도로 농축된 온도가 섭씨 1,500만도의 거대한 수소가스 덩어리로 되어 있다. 이 열과 압력을 받은 수소원자는 서로 충돌을 일으키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다닌다. 이 수소 원자의 충돌로 새로운 헬륨 원자가 만들어지는데 이때 태양빛의 형태로 방대한 에너지가 방출되며 이와 함께 전자파, 초단파, 적외선, 자외선, 감마선, 엑스선 등도 방출된다. 이와 같은 태양의 활동을 위해서는 하루에 10억 톤의 수소가 필요하지만 아직 몇 백만 년 동안 활동할 수 잇는 수소는 충분하다. 지구와 태양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지구의 대기권과 오존층이 없었더라면 태양은 우리를 파괴했을지도 모른다. 태양의 수소 원자들이 서로 융합하여 헬륨 원자로 변하기 때문에 이 과정은 원자 융합 또는 핵융합 반응이라 불린다. 수소폭탄의 경우, 핵융합에 필요한 압력과 열은 우라늄이나 풀루토늄 원자의 1단계 분리에 의해 발생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폭탄은 핵 분리 시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한 것으로 이는 원자 융합 반응을 이용한 수소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에 비하면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나는 과학 분야에서는 문외한이지만 다름과 같이 덧붙였다. “나가이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많이 했고 또 글도 썼습니다. 제가 언젠가 아시시를 방문했을 때 일입니다. 그때 그곳에 거주하던 한 프란치스코회 회원이 그 성인에 대해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나가이 박사에게도 적용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일찍이 ‘태양의 찬가’를 지은 적이 있지요. 그는 거기서 태양과 바람을 형제들이라고 하고, 달과 물을 자매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 그는 장님이 되었고 교황은 로마의 가장 뛰어난 의사들에게 그를 고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관자놀이 가까이에 뜨거운 철판을 가져다 치료하는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그 후 그는 ‘태양의 찬가’에 불에 관한 구절을 첨가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여, 나의 형체인 불을 만드시고 불로써 밤을 비추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그(불)는 아름답고 유쾌하고 단단하고 강합니다.’ 기분좋은 햇빛 아래서나 부드럽게 대지를 적시는 빗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는 쉽지요. 그런데 프란치스코와 나가이는 한여름의 무더위, 가을철 태풍, 혹한의 눈보라, 암흑과 고통 등 우주의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분은 태양 속의 핵융합 형제를 찬양하는 구절을 하나 덧붙였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습니다.” 일본인 친구가 말했다. “아마 그랬을 겁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나가이는 자연 속에서 초자연적 차원을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현대 시인들이 자연계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주제로 하는 시와 노래를 짓는 데 애를 먹지요. 성 프란치스코의 비전이 우주적인 데 반해 그들의 시각은 오로지 이 세상 것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나가이는 고대 일본의 만요슈 시들을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그 시들 가운데는 낭만적 사랑을 노래한 걸작품들도 상당수 들어 있지요. 그러나 낭만적 사랑도 초자연적 사랑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쉽사리 좌절과 파국을 맞는 것 아닙니까? 나가이는 만요슈 시에 초자연석 사랑의 차원이 결여되었음을 알았던 것이지요. 나가이는 성 프란치스코가 글라라 성녀에게 느꼈던 사랑, 곧 순수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새카맣게 타버린 미도리의 유골을 발견하고도 그가 절망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는 계속했다. “그것이 바로 나가이가 말한 암탉의 비유 핵심입니다. 어느 날 들판에서 알을 발견한 암탉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알을 품고 부화에 필요한 에너지와 온기를 주었습니다. 마침내 껍질을 개고 생명이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병아리는 곧장 연못으로 가더니 무리에 섞여 헤엄쳐 가는 것이었습니다. 삶, 건강, 사랑하는 사람들, 재능과 지식, 책임져야 할 일 등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나가이는 유리처럼 투명하게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타인을 이용해서는 안 되지요. 언제든지 남에게 봉사할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하며, 도 봉사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나가이도 자연과 삶을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그 상실 또한 평화롭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것들을 초월하여,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마친 과학교사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나가이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할 것 같은 그의 열정에 용기를 얻은 나는 침묵을 깨뜨렸다. “선생님, 지금 우리는 그분의 무덤가에 서 있습니다. 결례가 안 된다면 ‘나가사키의 종’을 한번 불러 주실 수 있겠는지요?” 나가이의 첫 영화를 위해 시인 사토하치로가 가사를 쓰고 고세키 유지가 목을 붙인 이 노래는 일본인들 사이에 꾸준히 불릴 뿐만 아니라 그 분위기와 호소력이 아일랜드 민요 ‘아, 목동아’와 비교될 정도다. 과학교사는 “기꺼이 하지요” 하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우렁찬 음성이 대기를 가르자 참새들과 비둘기들이 날아가 버렸다.

 

 

하늘은 찬란하게 빛나고

내 가슴 슬픔으로 찢어지네

우리네 인생 파도같이 무상하고

들에 핀 야생화처럼 유한하다오

 

나보다 먼저 하늘의 부르심 받은 아내,

그녀는 홀로 죽어갔다네

아내가 남기고 간 묵주만이

지금 내 눈물로 반짝인다오

 

구슬픈 바람이 성가를 대신하고

하늘도 울었던 그날의 장례 미사

그녀 무덤의 십자가 움켜쥔 그 슬픔에

빛나던 바다도 잿빛이 되었다오

 

그제야 밝혔다네, 내 영혼의 죄

밤이 왔지만 그 어둠 약해졌네

환하게 빛나던 달빛과 내 초라한 오두막 들보 위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의 찬란한 빛으로

 

아, 그래도 여전히 종은 울리네

위로와 격려를 실어오는

나가사키의 종소리 (후렴)

 

 

 

윌리엄 존스턴은 나가이를 마하트마 간디, 도로시 데이, 토머스 머털과 견줄만한 인물이라고 했다. 또한 1961년에 사망한 국제연합의 제2대 사무총장 다그 하마슐드와도 비교되었다.  두 사람 다 평화를 갈망하는 영향력 있는 글을 많이 남겼으며 간결하면서도 소박하고 호소력 있는 하이쿠 시를 사랑했다. 하마슐드가 그 피폭 현장을 보았다면 그도 성가를 부르며 의연히 죽음을 맞이했던 나가사키 처녀들을 기리는 시를 썼을 것이다. 또한 하마슐드 사후 <흔적>으로 출간된 그의 일기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를, 일어날 모든 일에 긍정을’ 이라는 글을 그 밖에도 불신앙과 불가지론에서 출발하여 성서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앙으로 옮겨간 고통스런 여정에서도 두 사람은 비슷한 점이 많다.

두 사람은 현대로 진입하는 격동기에 태어나 살고 죽었다. 그들은 삶을 사랑했고 교육, 과학, 문화, 정부, 평화운동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글을 썼다. 그러나 그들은 이와 같은 것들을 초자연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그 능력은 개인의 기도생활에서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의 삶에서 기도는 인간 경험의 어수선하고 다양한 색깔을 선명하고도 단순한 대낮의 빛으로 바꾸어 주는, 말하자면 반대로 작동하는 프리즘이었던 셈이다.

나가이가 처음 기도를 배운 것은 파스칼을 통해서였다. 이제 <팡세>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이 이야기를 끝맺으려 한다. 이보다 더 적절한 끝맺음은 없다는 생각에서다. 나가이는 처음 이 구절로 인해 몹시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이 구절을 ‘꼭 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철학자나 학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확실함, 확실함, 느낌으로 앎,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당신의 하느님.

세상은 잊혀지고 하느님 외에 모든 것은 사라짐.

인간 영혼의 위대함.

오, 의로우신 아버지시여, 세상은 당신을 몰랐지만

나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1654년 은총의 해

23일 월요일 밤 10 반경부터 12시 반까지

 

원폭 기념일에 딸 가야노와 준신여학교 수녀가 미도리의 묘소를 참배하는 모습을 스케치했다

 

 

책 끝에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추모 미사에서 조사를 했을 때, 나가이는 비탄에 잠긴 가족들에게 고인들을 하느님께 바친 ‘번제물’로 여기자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으며 극심한 분노를 나타내기까지 했다. 나가이는 죽기 얼마 전에 쓴 책에서 이 말을 한 것이 양심에 걸리는 일은 아니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다고 적었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옳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증거는? 그의 마음에 찾아온 평화가 증거였다. 나가이는 중요한 사건을 성서 말씀에 따라 분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원폭 피해자들을 번제물로 보는 견해가 성서적으로도 권위를 갖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로써 ‘성령의 열매들이’ 그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22절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예레미야 6장 1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갈림길에 서서 살펴보고 옛길을 물어보아라. 좋은 길이 어디냐고 물어 그 길을 걷고 너의 영혼이 쉴 곳을 찾아라.” 나가이는 번제물 영성으로 크나큰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음을 죽음의 교차로서 다시금 단언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자. “히로시마는 신랄하고 소란스럽고 매우 정치적이고 좌파적이고 반미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그러나 나가사키는 슬프지만 고요하고 명상적이며 비정치적이고 기도로 충만하다. 전자가 분노로 꽉 움켜진 주먹이라면 후자는 마주잡고 기도하는 손이다.”

이데이 시게루는 와세다 대학을 위시하여 도쿄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한 경험이 있는 수학자다. 그는 신도 정신에 입각한 평화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떠났다. 이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군국주의자들이 통치하던 시절에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몇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그의 선친에 의해 시작되었다. 선친의 뒤를 이어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아들이 최근에 시드니에 왔다. 평화의 돌을 세우는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끄는 단체에는 다른 종교와 긴밀한 협력 아래 일본, 유럽 그리고 미국의 여러 곳에 평화의 돌을 세웠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차이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과 같은 대중적 표현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함치는 히로시마, 기도하는 나가사키.'” 히로시마가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적으로 더 잘 알려졌다는 것 자체가 대중매체와 인간 속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정치적 시위 현장에서 고함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히로시마 주민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난 히로시마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깊은 명상으로 조용히 보내야 할 날을 ‘용’하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 온 외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나가사키의 원폭 기념식이 이렇듯 영적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데는 누구보다 나가이의 영향이 크다. 그가 번제물이라고 한 말은 처음에는 뺨을 얻어맞는 것과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히스테릭 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충격적 경험이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다. 바위처럼 견고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극한 처방이 필요한 것은 원폭 희생자 가족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원폭 이후 세대 사람들이 현실에 등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말하자면 반항의 세대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핵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다. 이와 같은 영혼의 절망이야말로 나가이의 육체를 파괴한 방사능보다 훨씬 더 해로운 방사능 낙진임에 틀림없다.

 

원폭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 나는 절망에 빠진 한 여성을 만났다. 이제 막 중년에 접어든 그녀는 오사카의 한 대학 심리학 강사이며 여성들과 어머니들을 위한 상담자요 저자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녀의 세계는 악성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는 날 와르르 무너졌다. 잠을 이루지 못하던 신경증 환자들을 도와주던 그녀가 이제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수술 받기 이틀 전 그녀는 울적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했다. 마침 원폭 기념일이 머지않았기 때문에 그날 신부는 나가이 박사에 대해 짤막하게 설교했다. “우리 작자는 고통과 비극을 겪어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죽음이라는 비극을 맞게 될 것이고, 그것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격렬한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가이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는다면, 어떤 비극적 사건도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전에도 이와 같은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날은 그 말씀이 갑자기 자신을 강타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영적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자아를 되찾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회복기에는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책도 한 권 썼다.그녀는 책에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해묵은 문제이자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목격한 많은 환자들의 신경쇠약의 원인이 되었던 문제, 다시 말해 고통을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문제를 다루었다. 나가이가 번제물이라고 깨달은 것이 이 책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원폭투하 계획을 실행에 옮겼던 장본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말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두려움 그 자체다.” 핵 벌판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 나가이는 자신이 모든 것을 소유했음을 발견했다. 현대의 사막 한가운데서도 그는 ‘하느님과 동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에덴 동산으로 돌아간 것 같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조상들이 염불한 것처럼 그도 유일한 현실은 ‘지금’, ‘지금 그리고 여기’ 임을 발견했다. 우리가 ‘지금, 여기’라는 현실을 실재하는 유일한 것으로 바라보고 또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동행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음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이처럼 에덴으로 복귀하는 것이야말로 영원히 지속될 낙원, 지복직관 (至福直觀: 천사, 성인이 천국에서 하느님을 뵙는 일 – 역주)의 시작인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오로지 통증만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해결 방법이다. 우리 조상들은 우리처럼 각종 진통제, 냉난방 장치, 비행기, 유급 휴가 등을 누리지 못했지만,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이 더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분열되고 소외되고 평화도 실종되고 또 불평불만이 가득한 우리 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그들은 삶에 뒤따르는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현실을 직시하고 더 심오한 인간의 문제, 곧 나가이가 말한 형이상학적 또는 ‘물리적인 세계를 초월하는’ 문제까지 직면하지 않았을까?

 

암은 새롭게 떠오른 문제가 아니다. 중년의 위기 또한 그렇다. 이것들은 오사카의 한 대학 강사에게 새롭게 부각되었을 뿐이다. 그녀의 즐겁고 성공적이던 삶이 하룻밤 사시에 이상스러울 정도로 무의미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병리학자의 진단 결과로 그녀는 발가벗긴 채 두려움에 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가이의 강한 영성으로 자신이 처한 원초적인 발가벗김과 속수무책의 현실을 직시하고 수용했을 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현실이 그렇게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이 그 안에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 해묵은, 그러나 새로운 발견으로 그녀는 평화를 누리며 고요한 마음으로 단순하게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각자는 중년이나 노년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고, 의사나 심장 전문가한테서 심각한 말을 들을 수도 있다. 또한 알코올 중독, 마약 문제, 교통사고, 정신쇠약, 결혼 파국으로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나가이의 삶이 진정한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그가 그토록 엄청난 현대의 질곡을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그 아픔을 굳건하게 딛고 신앙을 증거한 데 있다. 나가이는 최초의 추모 미사에서 원자폭탄, 부서진 성당, 그리고 8월 15일에 있었던 천황의 항복 등 우라카미를 중심으로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나가이의 탁월한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 그로 하여금 20세기 최악의 아픔을 겪어낸 후 마침내 다른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느님께서 크신 섭리 가운데 줄곧 인도하셨던 것이다. 나가이가 죽어가면서 남긴 마지막 한마디에 이 땅의 순례자들을 위한 그의 충고가 담겨 있다. ‘기도하시오. 제발 기도하시오.’

 

 

 

역자 후기

 

나는 언제부터인가 ‘한 사람의 생애’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 모두 한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으로 살다가 가기 때문일 게다. 나는 또 학생들에게 우리는 모두 1대 1이라고 말한다. 세계 인구가 60억이든 70억이든 우리는 60억분의 1이나 70억분의 1이 아니라 1분의 1이라고.

이 책을 번역하면서 사람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을 가져온 원자폭탄이 투하된 장소가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대부분 히로시마라고 답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우라카미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의 마을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 하필이면 그곳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까? 하느님은 왜 세상 사람들이 ‘저주’나 ‘처벌’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 끔찍한 재앙을 250년의 박해를 견뎌가며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켜온 자랑스런 신앙선조들의 후예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리셨을까?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며 누구보다 바르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심오한 고통의 신비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환희의 송가’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지극한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살았던 신앙인의 생생한 고백이자 하느님께서 함께하진 기록이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와 같은 초인적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참 많이 울었다. 인간 이성의 승리라는 과학 발달로 가능해진 전쟁 무기의 처참한 파괴력 때문에, 인간의 증오 때문에, 나가이 박사와 어린 자녀들의 가련한 처지 때문에,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개신교 신자인 내가 번역을 맡게 되어서 내심 불안하셨을 바오로딸 수녀님들께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는 여러 차이점이 있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에게서 좋은 점을 배울 수 있다면 한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 세상을 바꾸는 분들은 바로 나가이 다카시 박사와 같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운명을 완성한 ‘한 사람’들이다. 이 책을 통해서 많은 ‘한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삶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일본어 번역에 도움을 주신 아버님, 일본어 발음을 감수해 주신 강원대학교 백동선 교수, 가톨릭 용어표기를 도와준 유봉여자고등학교 송경애 선생, 그리고 좋은 책을 번역할 기회를 허락하신 바오로딸 모든 가족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04년 6월

백령동산에서 역자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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