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비사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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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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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편 1

조선편 2

조선편 3

조선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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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편 6

조선편 終

 

榮華의 지름길

 이성계는 왕씨 천하의 고려를 완전히 차지하긴 했지만 그래도 민심의 격동을 피하기 위하여 나라 이름을 여전히 고려 그대로 두고 송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 태조의 묘(廟)를 경기도 마전(麻田)에 건설함과 동시에 왕씨 후예를 우대할 것을 천명(闡明)하였다.
그래서 국내는 전일과 같이 안온해졌다.
그러나 등극한지 2년 되는 해 곧 태조 2년 계유(癸酉=西紀 1,393년) 2월에 이르러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개칭하고 서울을 공주 계룡산(公州鷄龍山)으로 정하려다 하윤(河崙)의말을 듣고 동년 3월에 한양(漢陽=오늘의 서울)으로 결정하고 여기에 묘사(廟社)와 궁궐(宮闕=경북궁과 청덕궁)을 건조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씨 신 왕조의 기업이 완전히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개국공신의 한 사람이 된 정도전(鄭道傳)은 어느날 대낮에 역시 공신의 한 사람인 남은(南誾)의 첩의 집으로 갔다. 남은은 정도전에게 있어서 없지 못할 동지였다. 남은은 대낮부터 술상을 차리게 하고 피차 세상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삼봉(三奉=정도전의 호)! 오늘은 퍽 심심하시었던 모양이시군요!
왜요?
이렇게 대낮에 찾아주시니…
그런 것이 아니요. 한참 동안 의성군(宜城君) 대감을 보지 못해서…
잘 오셨소. 나도 낮잠이나 잘까 하고 있었는데 의관도 다 벗고 술이나 마시면서 얘기나 합시다.
두 사람은 남은의 사랑으로 들어가 멋대로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하고 있는 사이에 술상이 나왔다.
삼봉, 어젯밤엔 안 주무셨소? 웬 잠을 눕기가 무섭게 주무시오? 일어나시오. 술상이 나왔소
남은이 이렇게 말하자 정도전은 몹시 곤한 듯이 기지개를 키면서 사실 어젯밤은 잠도 잘 자지 못한데다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어서 잠이 온 것 같소.
도전은 새삼스레 양치를 하고 술상 앞으로 다가 앉았다.
오늘 안주는 골고루 잘 차렸는데 안어사(남의 첩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 음식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어!
오늘은 웬 칭찬을 이리 하시오! 그만하고 술이나 먹읍시다.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니고천일주(千日酒)란 술이요. 삼봉을 위하여 벌써부터 준비해 두었던 것이요.
남은이 대답했다. 도전은
그러면 오늘은 술도 좋고 안주도 좋으니 양껏 먹겠소. 대단히 고맙소. 대단히 고마워…
하면서 자기가 먼저 한잔을 비웠다.
술 맛이 어떻소? 내 말이 틀림없지 않소?
참 좋은데… 그런데 대감! 안어사께서도 술 자실 줄 알지?
좀 먹는 체하지만…
그러면 안어사도 참석케 합시다. 생각이 어떠하시우?
상관없소. 참석케 하리라.
그리하여 남은의 제2부인도 술자리에 참석하였다. 이때 정도전은 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가지고 남은의 첩에게
내 술 한잔 들어보십시오.
권했다. 그러나 남은의 애첩은
제가 이 좌석에 참가한 것은 술을 먹으려는 것이 아니옵고, 정정승 대감께 약주를 쳐올리고자 함입니다. 이를 살피시고 술은 권하지 마십시오.
술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도전은 이말 저 말로 대꾸를 하면서 권하였기 때문에 첫 잔 한잔만 마시었다. 그러나 물러나지 않고 술을 치면서 권했다.
그런데 안어사, 상감(이성계)의 정실부인이었던 한씨 부인을 생전에 본 일이 있었소?
정도전은 이와 같은 말로 입을 열었다.
저 같은 것이 어떻게 그런 어른을 뵙는단 말씀입니까? 그 어른을 뵈온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정도전은 잔 둘에다 각각 술을 가득히 부어 가지고 한잔은 남은에게 다른 한잔은 남은의 애첩 박씨에게 권하였다. 박씨는 여전히 거절하려 하였지만 도전의 강권에 못 견디어 또 한잔을 비웠다. 도전은 이와 같이 술을 권한 후 다시 말을 이어
그러면 한씨 부인이 어떠한 부인이란 말도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까?
항간에 도는 말은 들었고 또 우리 대감으로부터도 들은 일이 있었지요.
그래 어떠한 여인이라고 말들을 합디까?
아주 현숙하시고 씩씩한 부인이었다고 말들을 하더군요.
그리고 한시 부인이 상감이 왕업을 성취하기 전 55세를 일기로 조사(早死)하신 것도 알고 있소?
그 어른이 별세하신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어른이 몇 살에 돌아가신 것은 모릅니다.
도전과 박씨 사이에 이와 같은 문답이 있게 되자 남은은 술만 마시고 있다가 이젠 돌아간 한씨 부인에 대해선 그만 말하고 삼봉을 친정 오라버니처럼 믿고 있는 오늘의 왕비(王妃)마마에 대하여 한 번 물어 보시우?
말문을 열었다.
그리하여 도전은 더 이상 묻지를 않고 남은과 함께 박씨가 쳐주는 술을 받아 먹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안어사께서는, 왕비마마에 대해서도 들은 일이 있나요?
들은 일은 있어요.
오늘의 왕비께서 상감의 후취였다고 알고 있나요?
아마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러면요?
부실(副室)로 들어오셨던 어른이 아닌가요?
그런 모양이요. 그런데 그 어른의 성씨(姓氏)를 아오?
성씨는 강씨(康氏)라 하더군요.
집안은 어떠한 집안이랍디까?
해주 사람으로 서민(庶民)의 딸이었다고 말하던데요.
그리고 사람은?
아주 꽃같이 예쁘고 달같이 시원한데다가 여자로서의 숙덕(淑德)을 겸전한 여인이라고 전합디다.
그리고 왕비마마께서 상감을 몇 살 때에 만나게 된 것도 아오?
그건 분명히 모릅니다. 그러나 20전후였던 모양이어요.
또 상감의 나이는 몇 살 때였던가요?
글쎄요? 나이 40에 귀가 달렸던 때인 것 같아요.
그때의 상감은 어떠한 지위에 있었던가요?
대신 지위에 계시면서 대장군에 계셨죠.
도전은 박씨를 상대로 이렇게 문답을 하고 남은을 상대로 술을 계속해서 먹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안어사, 돌아간 한씨 부인의 소생이 몇분이나 되는 줄 아오?
그것도 들어서 알지요. 아드님이 여섯 분이고 따님이 두 분이죠.
잘 대답했소이다. 그리고 오늘의 왕비 강씨의 소생은?
강씨의 소생은 아드님이 두 분 따님이 한 분이지요.
참 잘도 아십니다.
….
그런데 한씨 부인이 살아 계시었더라면 누가 왕비가 되었을까요?
그러야 한씨 부인이 되셨겠지요.
그러면 오늘의 왕비는 무엇이 되었을까요?
오늘의 강씨를 운수가 티인 유복한 분으로 보시오?
그렇구 말구요. 아무리 천하일색으로 태어났을지라도 일개 서민의 딸로서 왕비까지 되시었으니 대복지인(大福之人)으로 볼 수 있지요. 강씨는 도무지 한이 없을 것입니다.
박씨가 이와 같이 대답하자 도전은 박씨의 총명에 감동하여 술 한잔을 다시 들어 그녀에게 권하였다. 박씨는 역시 강권에 못 이겨 그 술 한잔도 마시고 말았다.
삼봉! 이젠 취하셨소?
좀 취한 것 같애.
그러면 우리 얘기는 집어 치우고 한 잠 자기로 할까?
무슨 술을 많이 먹었다고 자고 말고 한단 말요? 또 얘기나 계속시켜 봅시다. 이번엔 대감이 얘기를 해보시오. 응수할 테니…
도전이 이렇게 말하자 남은은
그런데 삼봉! 강씨에 대한 상감의 태도를 어떻다 보시오.
매우 좋다고 보오.
상감은 왕비를 정말 미(美)의 여왕, 색향(色香)의 여왕으로 보는 것 같습디다.
그러면 상감이 강씨를 천하에 없는 미인중의 미인으로 보고 강씨의 미(美)와 색향에 반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게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봉은 왕비 강씨에게서 무슨 기색을 못 보셨소?
내 눈에는 아무것도 뜨이지 않습디다.
세자책봉(世子冊封)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한 눈치를 보이지 않던가 말이요.
그러면 왕비가 세자책봉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이군.
글쎄, 그런 것도 같애.
왕비가 자기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세워 보려는 야심을 갖고 있는 모양인가?
글쎄, 왕비의 맘대로 자기 소생의 왕자가 세워질 수 있을는지?
세워질 수도 있을 것이요. 상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강씨의 청치고 안 들어 준 게 없다니깐…
그러나 자기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봉해 달라는 청만은 들어 주지 않을 것같이 생각되는데 어떻소?
그러나 나는 들어 줄 것으로 생각되오.
어디 두고 봅시다.
두고 볼 것도 없어. 강씨의 소원이 성취될 테니깐… 오늘의 상감이 누구를 믿고 사는 줄 모르오?

강씨 하나야. 강씨가 세상을 떠나면 상감도 아마 세상을 떠나려 하리다.
남은은 도전의 말을 듣고 새삼스러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나는 지금까지도 태조가 강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런 정도에까지 이른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려…
대답하였다.
그러나 대감! 보시오 내 말이 틀림없이 들어맞을 테니까.
나도 그렇게 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요. 한씨 부인의 소생이 엄연히 있는데다 제5왕자 방원(芳遠)이 노리고 있으니까 말이요.
그러나 자기 아버지의 하는 일을 어찌하겠소?
아무리 무서운 아버지일지라도 방원 왕자의 협조한 공이 켰음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어디 두고 봅시다. 상감이 왕비 강씨의 미와 색향에만 사로잡히지 않으면 세자책봉이 올바르게 낙찰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왕비의 소원이 성취될 것 같소. 남자란 아무리 잘난 체해도 여자의 미와 교태에는 투구를 벗는 것 같습디다. 대감, 형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좀 말해 보시오
나 역시 남자니깐 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삼봉은 방원 왕자를 얼마만한 남자로 보시오.
자기 아버지를 닮아서 수월치 않은 남자로 보고 있지요.
나는 어느 점으로 보아서는 부친 이상의 결단력을 가진 의지(意志)의 인(人)으로 보고 있소이다.
도전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가
글쎄? 그런 경향도 있어?
삼봉, 잘 들어보시우. 상감도 왕업을 이룩하려는 꿈을 단단히 품고 있었지만 방원 왕자는 꿈만 꾸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힘으로 또는 행동으로 이것의 실현을 위하여 달려들었소. 삼봉도 이를 아실 게요. 오늘의 방원 왕자는 자기가 바로 부친의 뒤를 이을 왕자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요. 그런데 강씨의 소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다면 맘 편히 방관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나도 대감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상감도 이젠 늙어서 마음도 좀 약해지고 마음이 강씨에게로만 더욱 쏠리는데다 또 막내 왕자가 더욱 귀여워 보일 것이요.
따라서 상감의 마음이 정실 소생의 왕자나 또는 방원 왕자에게로는 잘 가지 않을 것이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세자 책봉이 강씨의 소원대로 성취될 것 같소. 조정의 모든 사람은 대감이나 나를 왕비 강씨편으로 보고 있으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왕비를 도와야 하겠소. 그렇게 하는 수 밖엔 별 도리가 없으니까 말이요…
어느덧 바깥은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 이때 도전은
형이 고단하시겠소. 이 얘기 저 얘기가 하도 길어저서… 이젠 그만 돌아가겠소.
일어서려 하였다.
가시는 게 뭐요. 아직도 해가 좀 남은 것 같은데… 우리 세잔갱작(洗盞更酌)을 해봅시다.
남은이 이와같은 말로 도전을 만류하였다. 그리하여 도전은 또다시 주저앉아서 지금까지 해오던 세자책봉 문제를 놓고 얘기를 계속시켰다.
대감! 왕비 강씨를 어떠한 여인으로 보시오?
매우 총명하고 입이 무거운 분으로 봅니다.
나도 동감이요.
또 무슨…?
그리고 눈치도 빠르고 경하지도 않은 분이니까 세자책봉 문제도 자기가 먼저 내놓지는 않으리다.
글쎄 그럴 것 같애. 그래야만 안 될 일도 될 수 있지!
이런 문제를 자기가 먼저 내놓고 달려들면 도리어 동정을 잃을 테니까… 나도 그만치 현명한 분임을 알고 있소.
그러니까 우리가 협조자로 되기에도 좋지 않겠소?
물론이지요. 하여간 왕비 강씨는 아름답고 유덕하고 현명한 품이 왕업을 성취한 임금의 아내 됨직한 분이야. 두 분이 잘 만난 셈이지!.
남은은 이와 같이 말하고 또 박씨를 불러 술을 권하게 하였다. 도전은 박씨가 주는 잔을 받아 들고
이젠 서산에 걸렸던 해도 떨어진 것 같소. 그만 먹고 그만 지껄이고 돌아가야 하겠소.
너무 오랫동안 폐를 끼쳐서 할 말이 없소이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감,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먹고 마음껏 놀다 돌아가오. 일간 우리 집에서 한잔 나누기로 합시다. 그러나 우리 집엔 천일주가 없어서 걱정되는데… 하여간 일간 만납시다.
도전은 이와 같은 말을 남겨 놓고 남은의 집을 등졌다.
남은은 도전을 보낸 후 새삼스럽게 술기가 돌아 자기 사랑에서 쓰러져 자고 말았다. 한밤중쯤 되어서 잠을 깬 그는 냉수를 찾으면서 내실로 들어왔다.
제2부인 박씨는 벌써부터 준비해 놓은 냉수를 내놓으면서
어서 들어오세요. 여기 냉수가 있어요.
하며 반겼다.
남은은 냉수를 두어 대접 들이킨 후 정신을 차리고 아랫목으로 자리를 잡고 또 누웠다.
박씨는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 앉으며
저녁진지는…
하고 물었다.
저녁 생각이 없소.
그러면 굶고 주무시겠어요?
글세 있다가 봐서…
그런데 대감! 아까 정대감께서 한씨 부인, 강씨부인에 대하여 알알 샅샅이 물으시니 웬 까닭이예요?
웬 까닭은 뭣이 웬 까닭이야. 우리 남자의 생각과 여자의 생각이 어떠한가 해서 물어본 것이지.
무슨 딴 의미가 있어서 물은 것이 아니란 말씀이죠?
그럼.
첩은 너무도 이것 저것 별 것을 다 물으시기 때문에 겁이 났어요.
박씨는 이렇게 말한 후 다시 말을 이어 대감, 피곤하신데 미안합니다만 첩하고도 얘기를 좀 해보세요.
무슨 얘기를?
낮에 정대감과 주고 받고 하시던 얘기 말씀예요.
응? 세자책봉 얘기?
그래요. 그 얘기 말예요.
그건 뭣에 소용되어서?
그저 알고 싶어서요.
남은은 이 말을 듣고 또 냉수 한 대접을 들이킨 후 그러면 물어 가면서 얘기를 할 테니 잘 들어 보오.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세자(世子)란 뭣을 말하는 것인줄 아오?
세자란 임금의 아들로서 부왕의 뒤를 이을 왕자가 아네요?
그래 맞았소. 그러나 왕자라고 다 아버지 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정실 부인 소생의 아들로서 여럿이 있게 되면 그 중에서 장자를 세자로 결정하는 법이야. 그런데 본궁(본비)에게는 아드님이 없고 후궁에게 아드님이 있으면 그 중에서 역시장자를 세자로 세우는 거야. 알겠어?
그런데 우리 상감께서는 아드님이 없나요?
웬걸. 돌아간 본부인 한씨가 낳으신 아드님으로 지금 살아계신 분이 넷이나 있고 또 왕비이신 강씨의 소생도 두 분이나 있는데…
그런데 왜 세자책봉 문제를 내놓고 이말 저 말들을 하세요?
남은은 이 질문을 받고 잠깐 뭣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그대는 한씨 강씨 두 부인의 소생 중 어느 부인의 아드님이 세자로 결정되는 게 좋을 것으로 생각하오?
남은의 물음에 대하여 박씨는 잠깐 대답을 멈추고 있다가
한씨 부인이 정실 부인이었죠?
그래 한씨가 정실 부인이었어!
그러면 한씨 소생의 아드님 중에서 세자가 결정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상감은 왕비 강씨와 강씨의 소생인 왕자만을 귀엽게 보고 마음이 이리 저리 흔들리는 모양이야.
그러면 말썽이 날 것 같은데요. 오늘의 상감은 이 나라에선 다시 얻어보기 어려운 대영길이시라고 말들을 하는데, 그런 어른이 일을 어찌 그렇게 처리하시려 할까요?
글쎄, 여자의 요염과 교태에는 왕후장상(王侯將相)도 별 수 없는 모양이지.
글쎄요? 천하를 정벌하시던 상감께서 일개 여자에게 정벌을 받고 투구를 벗으려 하시니 딱한 일이올시다. 이젠 두 분이 주고 받고 하시던 얘기 내용을 잘 알겠어요. 저녁 진지나 잡수세요.
박씨는 이와 같이 말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남은은 저녁밥을 밤중에야 먹은 후 다시 박씨를 자기 앞으로 불러 앉히고 좀 더 얘기할 말이 있는데 들어 보겠소?
말을 걸었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아까 얘기에 계속되는 것이야.
그러면 또 들어 보겠어요.
잘 들어봐. 아까도 얘기한 바와 같이 세자를 책봉하는 데는 첫째 적자(嫡子)중에서 발탁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적자가 아닐지라도 발탁할 수가 있단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들어 봐!

이제 말한 것은 평상시의 경우를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야. 난시(亂時)에 있어서는 달라!
어떻게 달라요?
난시에 있어서는 평시에 있어서와 같이 적서(嫡庶)를 가리지 않고 공(功)이 있는 왕자를 택하여 그로 하여금 세자가 되게 한단 말야.
그러면 우리 왕자님 중 난시에 공을 세운 분이 계신가요?
계시고 말고!
어느 왕자세요?
한씨 부인의 소생 중 제5왕자로 계신 방원(芳遠)왕자란 말야.
박씨는 이 말을 듣고 저으기 놀라서 제5왕자이신 분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공을 세웠던가요?
이때 남은은 새삼스레 박씨를 주시하면서 상감이 왕업을 성취한 것이 모두 다 제5왕자이신 방원왕자의 공이야. 이 왕자가 선두에서서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상감은 오늘의 성공이 있을 수가 없었을 거야. 알겠어?
그러면 상감은 제5왕자 덕에 소원이 성취된 셈이군요.
그럼, 그러니깐 제5왕자는 당당한 적자인데다 건국(建國)에 공을 많이 세웠으므로 상감도제5왕자의 존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 아냐? 그런데 상감의 태도가 선명치 못해서 모든 사람은 세자책봉에 대하여 이말 저 말을 해가면서 의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애! 이런 점에서 생각하면 왕비 강씨 소생의 왕자는 세자로 책봉 받을 권리가 없을 게 아냐? 그런데 그대의 생각은?
글쎄요. 제 생각 같아서는 강씨의 소생을 상감이 세자로 봉하려 하실지라도 강씨가 받아들이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한씨 부인 소생의 여러 적자들도 왕비강씨를 성스런 어른으로 우러러 볼 것이고 또 나라도 안온해질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박씨는 이와 같이 대답한 후 잠자리를 펴기 시작하였다. 밤은 이미 깊어져 삼경(三更)에 이르렀다.
 
 
 
 
때를 기다리며

태조는 왕비 강씨에 못지 않게 어느 때나 강씨 소생 두 왕자 중 제8왕자인 방석을 몹시 사랑했다. 어느 날 태조는 강씨의 내전으로 왔다가 이날 밤을 거기서 보내게 되었다. 태조는 이때
나의 뜻을 받아 내 뒤를 이음직한 왕자가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방석 밖엔 없는 것 같다.
하고 천장을 바로 보고 있었다.
왕비 강씨는 이 말을 듣고
(왕위의 계승자가 방석으로 낙착될 것도 같다는 말씀을 저렇게 하시니.)
은근히 혼자서 기뻐하였다.
때는 마침 강씨 소생 경순공주(慶順公主)가 개국공신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로 시집가려 하는 때였다. 이때 태조는 대신 배극렴(裵克廉) 및 조준(趙浚) 등을 내전으로 불러놓고
오늘은 두 대신을 보고도 싶고 또 의논도 하고 싶어서 청한 것이요. 허물 하지 마오.
배, 조 양대신을 둘러 보았다.
황공하고 또 황공할 따름이옵나이다.
배정승, 의논하고 싶다는 것은 딴 것이 아니요. 이제는 과인의 뒤를 이을 세자를 책봉하여야 하겠는데 좀 아는 바를 들려주오.
태조가 이와 같은 말로 대답을 구하자 배극렴은
때가 태평 무사하면 적자를 세워 세자를 삼고 때가 어지러우면 유공한 왕자를 먼저 세워 세자를 삼는 게 현명한 처사인 줄 아옵나이다.
하고 쾌히 아뢰었다. 이때 한데 붙어 있는 전각에 혼자 있었던 강씨는 배극렴의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오는 것을 듣고 실망한 나머지 부지중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 울음소리는 바깥 내전안 할 것 없이 들렸다.
이때 배, 조 양대신은 말할 것도 없고 태조까지도 그 울음소리를 강씨의 울음소리로 인정했다. 내전을 물러나려던 두 대신을 좀 더 머무르게 하고 태조는
배정승의 세자책봉에 대한 의견을 잘 기억하고 있소. 며칠 후 또 청해서 물을 테니…
하며 배, 조 양대신을 돌려보냈다.
배극렴과 조준이 가자 왕비 강씨는 다시 내전으로 돌아왔다. 태조는 강씨가 돌아와 자리를 잡자 강씨의 얼굴을 유난히 두루 살피면서
곤전(坤殿), 배정승과 조정승을 상대로 얘기하는 동안 어디 있었소?
물었다.
상감마마 황공하오. 이웃 전각에 있었나이다.
그런데 눈이 분 것 같으니 웬일이요?
눈이 왜 부어요?
글쎄요. 왜 그랬을까요?
곤전이 모르는 것을 과인이 어찌 알겠소? 바른대로 말을 해보오.

곤전! 울었지?
뭣 때문에 울겠어요?
분명히 운 것을 과인도 아오.
무엇으로 운 것을 아시었나요?
곤전의 목소리를 듣고서 알았소. 울게 된 이유를 감춤 없이 말해 보오.
태조가 이와 같이 줄기차게 묻자 강씨도 더 이상 감출 길이 없어
상감마마께서 세자책봉에 대하여 방석왕자를 들어 말씀하신 것을 들은 법 하온데 배정승이 평시에는 적자를, 난시에는 유공한 왕자를 세우는 법이라고 아뢰는 것을 듣고 그만 실망 한 끝에 울음이 터진 것입니다. 상감마마 이를 굽어 살피시와 용서하여 주심을 바라고 또 비옵나이다.
태조는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한참 동안 침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과인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겠다는 말을 곤전에게 말한 일은 없지 않소?
그렇습니다. 신첩에게 직접 언명하신 일은 없었나이다.
그런데 어떻게..
상감마마께서 내전으로 듭시와 <나의 뒤를 이을 자는 방석밖엔 없을 것이다.> 하시고 말씀한 일이 있어서인가 합니다.
하고 대답해 아뢰었다.
태조는 이때부터 강씨가 자기 소생의 왕자에게 세자로서의 자리가 돌려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강씨의 소원이라면 일각 지체 없이 시행해 온 태조는 세자책봉에 있어서도 강씨의 소원을 무시할 수 없어 배극렴, 조준을 더 한 번 불러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틀쯤 지나서 태조는 또 배극렴, 조준의 참내(參內)를 명하였다. 배, 조 두 대신은 태조의 소명(召命)이 세자책봉 문제 때문에 환반된 것으로 믿고 조준은 먼저 배극렴의 집으로 갔다.
대감, 태조의 소명이 세자책봉 문제 때문에 내려진 것이 아닐까요?
조준이 이와 같은 말로 묻자
그런 것 같소. 그런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걱정이 되오.
글쎄올시다. 우리가 제 일차로 아뢰고 돌아오려 할 때에 무슨 소리를 듣게 되지 않았소?
그 소리가 왕비 강씨의 울음소리였음을 아시겠소?
알고 있소. 왜 소리를 내어 울었을까?
그것은 자기 소생의 왕자는 세자책봉에 참가도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섭섭한 생각이 나서 운 것 같소이다.
나도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참내해선 또 무엇이라고 아뢰어야 할까요?
별 말 있겠습니까? 제 일차에 아뢰었던 것을 더 한 번 아뢸 수 밖엔…
그러나 그 말이 통해질 것 같이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그와 같이 말하면 왕비 강씨는 이번엔 대성통곡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글쎄 그럴 것도 같애! 어찌하면 좋을까?
강씨가 비록 자기 소생 왕자의 책봉문제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실상은 상감의 마음을 사고자 은근히 전심을 기울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상감의 심중, 강씨의 심중을 잘 살펴가면서 어느 정도 타협으로 나가야 할 것 같소이다.
타협적으로 나가자고? 어떻게 타협적으로 나가오?
실상은 타협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강씨에게로 기울어지는 것을 말함이요.
이 말에 배극렴은 한참 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가
어떻게 강씨에게로 기울어진단 말씀이요?
하고 반문하였다.
대감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강씨 소생 두 아드님 중에 큰 아드님 방번(芳番)님은 난폭하고 다음 아드님 방석(芳碩)님은 태조를 닮아서 영특한 데가 있소이다. 배대감, 이 방석 왕자를 추천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내 하여 상감의 뜻을 받들기로 합시다. 그리하는 수 밖엔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조준이 이렇게 말하자 배극렴도 이에 동감하고 조준과 함께 참내하여 왕비마마의 소생 왕자 중 방석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시는 게 좋을 줄로 아뢰오.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는 이를 반가이 받아들였다. 강씨의 마음이 흐뭇해졌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강씨는 기쁨에 넘쳐 새삼스레 태조 앞으로 나아가 큰 절을 하면서
상감마마! 황감하오이다. 신첩은 상감마마의 하해 같으신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소원이 성취되었나이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이 감격은 죽는 순간까지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머금었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모든 것이 다 곤전의 분복에서 생겨진 것이요. 과인에게 그렇게 감사할 것은 없소. 과인도 방석이 세자로 추천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하며 한동안 왕비 강씨를 주시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
요즘 곤전의 얼굴은 좀 여위어진 것같이 보이니 웬 까닭이요? 세자책봉 문제로 걱정이 되어 그렇소? 이젠 문제가 낙착되었으니 마음을 편안히 갖고 계시오.
강씨는 이 말에 더욱 감격해서
상감마마의 거룩하신 뜻을 받들어 마음을 편안히 갖겠나이다. 일개 서민의 딸로서 장상(將相)의 총희(寵姬)가 되었다가 이제 와서는 임금의 왕비가 되고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세자의 모비(母妃)가 되게 되었삽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마음이 불편하겠나이까? 이젠 기뻐
서 매일 춤이라도 추고 싶나이다.
정말 춤을 출 듯한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이 소문은 한씨 부인 소생의 네 왕자(여섯 왕자 중 두 왕자가 일찍 돌아갔음.)의 귀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네 왕자의 마음엔 불평이 자리를 잡게 되어 태조에 대한 태도, 왕비 강씨에 대한 태도가 순평하지 못하였다. 특히 한씨 소생의 제5왕자 방원의 심사는 말할 수 없이 뒤틀렸다.
태조 2년 8월이었다. 강씨 소생의 왕자인 제 8왕자 방석의 세자 책봉식(世子冊封式)이 거행 되었다.
이 세자 책봉식은 고 정실부인(故 正室夫人) 한씨 소생의 네 왕자도 참가하였는데 그들을 들어 말하면 영안대군(永安大君) 방과(芳果),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 정안대군(靖安大君) 방원(芳遠) 등 넷이었다.
이 네 왕자는 의식이 끝난 후 모두 다 정안대군 저(邸)에 모여 한방에 자리를 잡았다. 네 왕자 중 정안대군 방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됨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지 않소. 그러나 부왕(父王)께서 그리하신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대로 인종(忍從)하고 만 것이올시다. 그런데 여러 형님들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네 왕자 중 가장 나이 많은 영안대군은 정안대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렇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됨에 대해선 불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고 나서는 것은 부왕께 대하여 순종하지 않는 불효자가 될 것이므로 나도 역시 순종하고 만 것이다.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을 아시면 우리들을 의심하실 것이다. 이를 생각하고 말 한 마디라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겠다.
대꾸를 했다. 익안대군 방의가 입을 열었다.
부왕은 무슨 일이나 엄정하게 처리하시는 어른이신데 어째서 이런 엄정치 못한 처사가 있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알고 싶은데…
익안대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안대군은 다시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부왕께서 우리의 존재를 무시하신 처사를 하시게 된 것은 강씨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글쎄다. 그러나 부왕께서 그렇게 현명치 못하신 어른이 아니신데… 우리의 사람됨이 방석 왕자만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겨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영안대군은 이와 같이 대꾸를 하면서 정안대군에게 자중과 자애를 권하였다.
점잖은 말씀이올시다. 자중하고 자애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왕께서 강씨의 요염과 교태에 이성을 상실 하심에서 오늘의 일이 생겨진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어찌 입밖에 낸단 말이냐? 우리가 차라리 못난 사람 되는 게 옳지 않을까. 잘못하면 부왕의 위신을 땅에 떨어지게 한다. 그래서 자중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알겠니?
영안대군의 말은 역시 점잖았다. 괄괄한 정안대군이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잠시 후 안으로부터 술상이 나왔다. 네 왕자는 모두 술상 앞에 마주 앉았다. 주인인 정안대군은 맨 먼저 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가지고
큰 형님 먼저 한잔…
권하였다. 이와 같이 술잔이 차례차례로 한번 두번 세번이나 돈 후 제각기 자작도 하고 권하기도 하면서 마실 만큼 마셨다. 비로소 실내는 술바람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어질고도 착해 보인던 영안대군의 말씨도 힘차게 들렸고 또 패기(覇氣)와 담력(膽力)이 사람을 억누르던 정안대군의 힘도 좀 더 굳세게 보였다. 시간이 흘러 갈수록 실내는 영안대군과 정안대군의 천지가 되고 말았다.
영안대군은 정안대군을 자기 앞에 앉힌 후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가지고 이를 권하면서 말했다.
우리 전주 이씨가 왕업을 성취케 된 것은 원래 부왕(父王)의 위덕(威德)에서 생겨진 일이지만 부왕을 도와 이를 대성한 사람은 정안대군으로 생각한다. 정안대군의 절대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왕업이 성취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씨조선의 정말 건국공신은 정안대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데 대해서는 나도 불만을 품고 있다. 그러나 방석도 역시 부왕의 아드님인데 어찌하나? 정안대군이 부왕을 도와 왕업을 대성케 함과 같이 오늘의 방석을 도와 나라를 빛나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정안대군은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형님의 말씀은 정말 현인 군자의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이 방원은 형님과는 다릅니다.
저는 기회가 오면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야만 국법이 바로 잡혀질 것입니다.
힘차게 대답하였다. 이 말에 익안대군도 회안대군도 찬동하는 뜻을 표하였다. 정안대군은 이와 같이 대답한 후 다시
형님(영안대군), 또 좀 들어 주십시오. 형님께서는 정도전, 남은 도배를 어떠한 인물로 보십니까?
글쎄?
글쎄가 뭣이오니까? 정도전과 남은은 왕비의 사람이며 동시에 방석의 사람입니다. 왕비는 이자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자들은 매일과 같이 참내하여 첩자(諜者)노릇도 하고 또는 고문 노릇도 합니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됨에 있어 정도전 도배와 왕비 사이에 알쏭달쏭한 얘기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이 자들도 감시하겠습니다. 형님, 이런 것은 부왕의 존재를 무시 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 저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알겠다. 그러나 자중해야 한다.
영안대군은 이렇게 대답하고 대취하여 눕고 말았다. 그러나 술에 강한 왕자들은 여전히 정안대군을 상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안대군의 부인 민씨는 친정 오라버니들이 왔으므로 사람을 시켜 정안대군의 입래(入來)를 청하였다. 정안대군은 입래하라는 말을 듣고
세분 대군이 계신 동안은 들어가지 못하겟다. 두 장군에게 크게 바쁜 일이 없거든 좀 기다리게 하여라.
하고 돌려 보냈다.
영안대군이 취면(醉眠)에서 일어나자 두 왕자도 정신을 차리고 귀저준비(歸邸準備)를 하였다. 그리하여 정안대군은 세 형님 대군을 문 밖까지 나가 공손히 전송한 후 그 길로 내실에 들어갔다. 내실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부인의 오라버니인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형제였다. 다시 말하면 정안대군의 처남들이었다.
어떻게 이렇게들 왔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이!
저희 때문에 세 분 대군이 속히 돌아 가시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것이 아니야. 돌아가실 때도 됐어.
그러면 안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모이셨던가요?
무슨 일은 무슨 일이야!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어서 그 일로 한 번 모였지.
무슨 좋은 대책이 세워졌습니까?
대책은 무슨 대책이야. 그저 앞날을 정관하기로 했지.
알겠습니다. 그리하는 수 밖엔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민무구 형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안대군은 다시 말을 이었다.
두 처남은 방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오?
글쎄요, 태조께서 그리 결정하신 것을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끼리 말하는 것일세. 무슨 상관있나? 어디 말해 보게!
이 말에 장군 민무구는 방석 왕자를 세자로 봉한 것은 정도에서 벗어난 일로 생각합니다.
쾌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 게 좋을까?
그저 되어 가는 것을 정관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겨질 것도 같습디다. 부왕의 감정을 격화시켜서는 안됩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찌하란 말이요?
그저 때를 기다리고 계시란 말씀이지요.
알겠소. 그러면 때만 기다리고 있지.
곁에서 설왕설래하는 것을 듣고 있던 정안대군의 부인 민씨는
저하(低下)께서 혼자만이 나서시다간 크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아무리 오늘날 부왕 어른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좀 가만히 계시는 것이 득책일 것입니다.
정안대군의 심사를 가라앉히고자 애를 썼다. 정안대군은 부인의 말을 듣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그런데 두 장군은 오늘의 왕비를 어떻게 보오?
또 물었다.
두 장군 중 민무구 장군은
그 분은 미인 왕비, 유덕한 왕비, 현숙한 왕비라고 칭송을 받고 지냈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장군도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겠군!
글쎄요? 왕비 그 어른에게서 무슨 특별한 단점(短點)을 발견하지 못한 이상 무던하신 어른으로 볼 수밖엔 없지요.
알겠소. 그런데 이번의 세자책봉은 누구의 잘못에서 생겨진 것으로 생각하오? 부왕(父王)의 잘못에서 생겨진 일로 보오? 그렇지 않으면 왕비의 간청에서 생겨진 일로 보오?
무구 장군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 잘못이 부왕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대의 영걸이신 태조를 위하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러면 전 책임을 부왕께 돌리는 말이구료.
그렇게 생각하셔도 할 수 없지요. 남정북벌 싸움에서 그토록 영명하시던 태조께서 그렇게 마음이 약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 어른의 유약하신 마음이 오늘의 일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태조와 같은 천하의 대영걸도 여자의 요염, 여자의 색향, 여자의 교태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글쎄? 이젠 부왕과 왕비에 대한 얘기는 그만 두기로 합시다. 그러나 나는 때가 오면 방관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은즉 이를 살피고 좀 도와주기를 바라오.
정안대군이 이와 같이 말하자 민무구, 민무질은 정안대군과 그의 부인 민씨에게 작별을고하고 돌아갔다.
 
 
 
 
病든 牧丹

왕비 강씨 소생 방석 왕자가 세자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정실 부인 소생의 네 왕자가 강씨를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온순하였고 동시에 방석 왕자에 대한 태도도 매우 우애적(友愛的)이었다. 그러나 방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 후부터 네 왕자가 강씨 및 방석 왕자에게 대하는 태도가 일변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는 네 왕자가 강씨를 친어머니(나이는 젊었지만)처럼 공경하였고 또 방번(芳番), 방석 두 왕자를 동복의 친동생처럼 사랑하였다. 그런데 방석이 책봉된 후부턴 왕비 강씨 및 세자 방석을 불공대천의 원수와 같이 저주하고 지냈다.
이때부터 강씨는 불안과 공포(恐怖)를 느끼기 시작했고 따라서 소화불량증, 불면증, 공포증 등의 병들이 연달아 생겨 하루 사는 것이 고역이었다. 이러한 증세들은 강씨의 살을 갉아내는 듯했고 마음을 초조하게 하였다. 이 증세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심해질 뿐 조금도 차가 없었다.
그리하여 강씨는 방안에서 그날 그날을 보내고 밤낮을 자리에 누워서 지냈다. 강씨의 소화 불량은 식음을 전폐하게 만들고 불면증은 하루에 단 한 시간도 편안히 못 자게 하였으며 또 공포증은 강씨로 하여금 벌벌 떨게 하였다.
왕비의 신변을 심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던 태조는 어느 날 대낮에 왕비를 내전으로 찾아왔다.
그 곱던 얼굴이 뼈만 남아 가니 대체 웬 까닭이요? 못 먹어서 그렇소? 그렇지 않으면 무슨 딴 병 때문에 그리 되었소? 병은 감추면 안 되오.
태조는 왕비의 등과 손을 어루만졌다.
소화불량으로 그런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보아도 먹고 싶지 않으며 설사 먹는다 하여도 전일에 비하여 10분지 1도 먹혀지지 않으니 뼈만 남을 수밖에 없겠지요. 또 그리고 밤이면 잠을 못 자고 뜬 눈으로 새우니 어찌 살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 병만이 아니올시다. 정 충증( 沖症)까지 생겨서 정말 죽고 말 것 같아요.
강씨는 간신히 태조에게 말했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곰곰이 무엇을 생각하다가 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증세가 생기기 시작했소?
한 서너 달 전부터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 올리면 방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 후부터인 것 같아요.
그러면 알겠소. 심화로 생겨진 병 같소. 정신만 가다듬고 마음만 굳세게 가지면 세 가지 병이 차츰 사라질 것이요. 우선 과인의 말대로 오늘부터라도 실행해 보오. 과인은 과인대로 내의원(內醫院)의 모든 의원(醫員)들을 총 동원시켜 곤전 치료에 힘쓰게 할 테니…
태조는 왕비를 안심시켰다. 사실 방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된 것은 왕비 강씨의 강요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태조 자신이 발설해 가지고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왕비 강씨는 한씨 부인 소생의 네 왕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중에는 건국에 유공한 왕자도 끼어 있었으므로 정관하는 태도만 취하려 했다. 그런데 태조가 방석을 지명하면서 방석을 세자로 삼고자 하는 눈치를 보였기 때문에 강씨는 그야말로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란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강씨가 당초부터 이 세자의 자리를 네 왕자에게로 돌렸더라면 네 왕자들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비 강씨의 생각이 여기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강씨가 마침내 국법을 어지럽게 만든 여인으로 전락됨과 동시에 아들 방석도 미움의 제 1인자가 되고 만 것은 이에 연유하는 것이다.
강씨는 세자책봉 문제로 인하여 네 왕자로부터는 말할 것도 없고 궁중, 부중의 사람들로부터도 미움과 저주를 받고 지내게 되었고, 마침내는 우수사려(憂愁思慮)에 잠겨 불면증과 공포증에 걸려 밤낮으로 앍게 된 것이다. 결국 왕비 강씨는 철저하게 악에 강할 수 있는 여인이 못 되었다.
어느 날 오후였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은 의성군(宜城君) 남은과 함께 왕비 강씨의 내전으로 들어갔다.
왕비 강씨는 시녀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일어나 앉아 정, 남 양 중신의 인사를 받고 나서 한참 동안 못 만났소. 나는 두 대신에게도 버림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몹시 슬퍼햐였소.
하고 정, 남을 앞으로 앉게 했다.
그런데 중전마마의 병환이 언제부터 더 위중해지셨습니까?
정도전이 물었다. 강씨는
정, 남 두 대신을 나는 친 오라버니같이 보고 이 몸을 의탁해 왔는데 요즘에 이르러서 보니까 나를 기피하는 것 같습디다. 역시 남임이 분명하더군요. 두 대신이 나를 보고 돌아간 지가 한 20일 되는데 그 이후부터 병세가 더욱 나빠져서 이렇게 누워 있기만 하오.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남은이 말을 듣기가 무섭게
황송한 말씀을 듣잡게 되어 아뢰올 말씀 없소이다. 저희들의 중전마마께 대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20일 전에 만나 뵈올 때는 중전마마의 병환이 그리 심하시지 않은 줄 알았사옵고 또 별안간 고향에 갈 일이 생겨서 그만 부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널리 살펴주시고 용서하옵소서.
재삼 재사 머리를 숙였다.
잘 알겠소. 더 말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중전마마의 병환은 역시 그 병환이시죠? 그 병환이 오늘에 와서 어떻게 위중해지셨는지…
이젠 아주 절곡을 하게 되고, 밤은 아주 뜬 눈으로 새우기가 일쑤고… 이제는 벌벌 떨고만 살게 되었소. 오늘 같은 이 모양으로 나는 며칠 못 살고 죽을 것 같소.
정도전은 이 말을 듣고
중전마마, 지금부터라도 마음만 굳세게 가지시면 세 가지 증세가 일소(一掃)될 것이 올시다. 세자책봉이란 임금의 맘대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자 왕자만이 세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 올시다. 중전마마가 너무 양심적이시기 때문에 불면증도 생기게 되고 공포증도 생긴 것으로 생각됩니다. 네 왕자가 무서울 것 없습니다. 궁주, 부중의 공론도 두려울 것 없습니다. 중전마마의 오늘의 병환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므로 천하 명의도 소용없고 천하명약도 소용없을 것이오니 신(臣)의 말대로 마음만 굳세게 가지십시오. 그리하시면 다시 건강
한 몸으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왕비 강씨는 도전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대신의 말은 잊지 않고 그대로 실행하겠소이다. 그런데 네 왕자는 나보다도 세자 방석 왕자를 노리고 있는 것 같소. 오늘의 상태로서는 세자 방석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내가 내일이라도 죽어 없어지면 세자 방석도 살아 남지 못할 것 같군요. 세자 방석을 친 조카와 같이 아시고 끝까지 도와주시면 나는 지하에서라도 그 은혜를 갚아 드리겠소이다.
강씨는 애원하여 마지 않았다.
도전과 남은은 이 부탁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걱정은 마시옵소서. 신 등은 세자 방석 왕자를 위하여 최후의 날까지 몸을 바치겠사오니… 신 등은 중전마마께서 마음을 굳세게 가지시기만 기원하고 있나이다.
거듭 다짐을 하고 왕비의 내전을 물러나왔다. 양 대신이 물러간 후 이번엔 방석 왕자가 강씨의 내전으로 들어왔다.
어마마마, 오늘의 병환이 어떠하시오니까, 저는 어마마마의 병환으로하여 밤이 돼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나이다.
이제부턴 쾌복되겠지, 나 때문에 잠을 못 자면 안 돼!
그런데 사람들은 어마마마의 마음이 남달리 약해서 그런 병에 걸리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마마마, 마음을 굳세게 가지십시오.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쾌복되기 시작할 것으로 믿습니다.
잘 알겠다. 이제부터 마음을 굳세게 가지마. 내 몸도 내 몸이려니와 세자를 위하여 마음을 굳세게 가지려 한다.
어마마마, 제 걱정은 그만 두세요. 어마마마의 병환이 위중해진 것은 제 걱정 때문인 것 같사옵니다. 어마마마, 제 배후에는 부왕(父王) 태조가 엄연히 계시지 않습니까? 제 걱정은 이제 그만 하시고 마음을 안정하십시오. 그리 하시기만 하면 불면증도 공포증도 다 물러나고 말 것이오니…
방석 세자가 모비(母妃) 강씨를 상대로 이와 같이 진언(進言)하고 있을 때에 태조가 내전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다 곤전을 중심으로 살고 있소. 세자 방석도 곤전을 중심으로 살고 있고 과인도 곤전을 의지하여 살고 있는 것임을 모르시오? 무엇 때문에 그리 잡념이 많아져 불면증에 걸리게 되고 뭐가 두려워서 공포증에 걸려 초조히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소? 과인이 죽지 않고 엄연히 있는 이상 두려울 게 뭣이요? 곤전의 생병으로 보지 않을 수 없소. 곤전의 배후에 과인이 있음을 생각하고 마음을 강하게 가지시오!
태조는 이와 같이 말하고 강씨의 얼굴을 주시하며
곤전, 거울을 가져다 얼굴을 좀 보오. 만개한 모란꽃 같던 얼굴이 어떻게 됐는지를. 시녀에게 거울을 가져오게 하였다. 강씨는 거울 속에 비추어진 자기의 얼굴을 보았다.
태조는 다시 말을 이었다.
보고 난 감상이 어떠하오?
아주 뼈만 남았군요. 상감마마, 제 얼굴을 쳐다보지 마세요.
강씨는 울 듯이 고개를 숙였다.
곤전! 이제부턴 마음을 굳세게 갖고 보(補)할 음식이며 보할 약을 자시기로 하오. 곤전의 병은 마음 병이니까 마음만 굳세게 가지면 그만이요. 곤전! 과인의 말을 바람소리같이 들어서는 안 되오. 곤전의 병이 어디서 생겨진 것임을 알게 돼서 하는 말이요.
잘 알았습니다. 상감마마의 분부대로 실행하겠사오니 안심하옵소서.
강씨는 이와 같이 대답하고 수척한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누웠다.
왕비 강씨의 병은 태조 3년 이래 긴 병이 되고 말았다. 마음을 굳세게 갖고서 모든 병을 물리치려 노력했지만 병세는 어느 때나 일진일퇴(一進一退)를 할 뿐이고 근치될 희망은 좀 처럼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강씨의 병이 태조 4년에 이르러서부터 는 더욱 악화되었고 또 5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몸이 철골이 되어 기동을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씨의 이어소(移御所)는 간병하는 사람, 문병하는 사람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강씨의 병을 내 병같이 알고 슬퍼하는 사람은 태조와 세자 방석 그리고 왕자 방번 정도였다. 그 중에서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역시 부군(夫君)인 태조였다.
부군 태조는 곁에 사람이 있건 없건 전후에 문병객이 있건 없건 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강씨의 병석에 가까이 앉아서
곤전! 무슨 회춘(回春)할 도리가 있을 것 같거든 뭣이든 말해 보오. 하늘에 올라가 별이라도 따오라면 따오리라. 약 못 써서 죽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니… 그런데 곤전, 죽는 줄로만 알아서는 안 되오. 곤전! 이 노부(老夫)를 두고서는 못 갈 것이요. 곤전! 빨리 회춘해
주오. 그래야 이 노부가 좀 더 살게 되리라. 곤전이 정말 이 세상을 등지려거든 이 노부를 먼저 죽여 주오. 그러지 않고서는 못 가리다.
하며 강씨의 병석을 떠나지 않고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강씨의 병 증세는 날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하고 좀처럼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태조는 폐조(廢朝)를 해가면서까지 강씨 간병에 전심과 전력을 기울였다. 태조의 불 같은 사랑도 강씨의 병엔 소용이 없었다. 천하의 명의도 강씨의 병을 고치지 못했고 천하의 명약도 강씨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때는 태조 5년 8월이었다. 그 달에 들어서부터 는 강씨의 병이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강씨는 자기가 회생하지 못할 것을 짐작했던지 자기 소생의 두 왕자와 정도전, 남은 등을 병석으로 불러 놓았다.
첫째 방번, 방석은 들어 보아라. 나의 병은 이제는 골수의 골수에까지 들어가 명의도 소용 없게 되고 명약도 소용없게 됐다. 이젠 죽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죽는 일이 당장에 있을는지 오늘 밤에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죽은 후라도 형제가 의좋게 살아 주기를 바란다. 방석 세자의 장래를 생각하면 내가 죽지 말아야겠지만 천명을 어찌하니? 부왕 태조가 계시니까 크게 걱정되진 않지만 그래도 부왕의 말씀을 잘 듣고 신변을 조심하여야 한다. 너 때문에 병든 나는 죽은 후에도 눈이 감겨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강씨는 두 왕자에게 이렇게 말한 후 대령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을 불러 들였다.
두 대감에게 소명(召命)을 내려 미안스럽소이다. 나는 오늘밤을 넘길 것 같지 않소. 그래서 두 대감을 청한 것이요.
강씨가 이런 말로 입을 열자 정도전, 남은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군(夫君) 태조와 두 왕자를 어찌하시고..
이제는 아무리 기운을 차리고 마음을 굳세게 가지려 해도 별수 없을 것이요.. 나의 천수 길지 못하여 오늘의 병에 걸린 것 같소. 정대감, 남대감, 나의 평소의 부탁을 잊지 않고 계신지 듣고 싶소이다.
잘 명심하고 있나이다. 세자 방석왕자에 대한 일은 저희가 담당할 것을 다시 한 번 맹세합니다.
이때 강씨는 뼈만 남은 얼굴을 들어 정, 남을 주시하면서
고맙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나는 이제 죽어 눈을 감겠소.
눈물을 흘렸다. 이런 말이 있은 후 정도전, 남은은 강씨의 병석에서 물러났다.
정, 남이 돌아간 후 태조는 넋 잃은 사람처럼 부축을 받으면서 간신히 강씨의 병실에 발을 들여 놓았다.
태조는 강씨의 병실에 발을 들여 놓기가 무섭게 병석으로 바짝 대들면서
왜 죽으려 하오? 아직도 앞날이 호호양양(浩浩洋洋)한데…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는 거요? 나를 내 버려두고는 못 가리다. 곤전! 내가 왔소. 정신 차리시오!
하고 목이 메었다. 그제서야 태조가 듭신 것을 알고 강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태조의 가슴 속에 파묻고
신첩의 명(命)이 그만인 것 같습니다. 신첩이 일개 서민의 딸로 태어나 왕비가 되고 또 세자의 모비까지 되었으니 이런 영화(榮華), 이런 호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건 모두 상감마마의 뜨거운 사랑에서 생겨진 것으로 믿고 감사 감격하나이다. 신첩에게는 이생에서 사는 동안 아무 부족도 없었고 아무 불만도 없었습니다. 그저 고맙기만 하였습니다. 신첩의 복이 그만이어서 이제 죽으려 하는 것이올시다. 신첩의 가는 곳이 이생보다 더 좋은 곳이라면 상감마마를 모시고 가겠지마는.
가느다란 파동을 지으며 강씨는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고개는 여전히 태조의 가슴에 파묻혀 있었다.
곤전! 저 세자 방석을 어이 두고 가려하오. 세자 방석이 내 뒤를 이을 때까지 살다 가는게 좋지 않겠소? 기운을 내보오. 기운을 내보오!
태조가 이렇게 애원하자 강씨는 고개를 들고
상감마마, 세자 방석을 부탁합니다. 신첩은 세자 방석이 상감마마의 뒤를 잇게 되면 지하에서 눈을 감겠나이다.
태조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강씨는 말을 마치자 태조의 무릎에서 내려와 조용히 자리에 들어가 누웠다.
 
 
 
 
王子의 亂

때는 태조 5년 병자(丙子=西紀 1,396년) 음 8월 13일이었다. 강씨는 자리에 누워서 한동안 눈을 크게 뜨고 내실를 두루 살펴 보다 허망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강씨의 임종을 지켜보다가 강씨의 시체 앞으로 나아가 목을 놓고운 사람은 부군(夫君)인 태조 뿐이었다.
태조는 슬픔을 사민(士民)과 더불어 나누고자 10일간 정무를 중지시킴과 동시에 일반 서민에 대해서는 철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전국 8도의 사민은 애도(哀悼) 속에 잠겨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능지(陵地)를 택하기 위하여 15일이란 시일을 소비하였다. 그 결과 능지로 택해진 곳이 안암동(安岩洞), 행주(幸州), 서부 황화방(皇華坊)이었다.
이 서부 황화방이란 오늘날의 정동(貞洞)을 말함이다. 당시 물망에 오른 땅은 위에 말한 세 개소인데 그 중의 안암동 땅은 습해서 버림을 받았고 또 행주 땅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버려졌다. 그래서 황화방이 능지로 결정되었는데 이 땅이 쉽사리 결정된 것은 대궐 측근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강씨의 능지가 대궐 측근으로 확정되자 태조는 그해 9월 9일부터 친히 정능(貞陵) 축조에 정성을 기울였고 또 그 해 10월 10일에는 좌정승 조준(左政丞趙浚)과 판중추원사 이근(判中樞院事李懃) 등을 시켜 강씨의 시책(諡冊)을 받들어 신덕왕후(神德王后)란 묘호(廟號)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정월 초사흘에는 황화방 북원(皇華坊北原)에다 안장하고 능호를 정능(貞陵)이라 했다. 정능동(貞陵洞)이란 동명이 여기에서 생겼고 이를 약하여 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사대부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도성 안에 능묘(陵墓)를 두는 것은 옛 법을 무시함에서 생겨진 일이다.
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태조는 강씨의 백골이나마 자기 측근에 두고자 해서 한 일이므로 아무도 이를 탄하지는 못하고 지냈다. 그리고 또 태조는 죽은 강씨의 혼령을 오래도록 위안해 주려고 정능 안 동쪽 지대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원당(願堂)을 지어 주었다.
이 흥천사는 태조 6년 3월 19일에 착공하여 태조가 몸소 공사를 독려하였는데 이것이 준공되기는 그해 10월 28일이었다. 원당이 준공되자 태조는 이 흥천사에다 밭 천결(千結=結은 조세를 계산하기 위한 토지면적의 단위)을 하사하여 절의 유지재산으로 쓰게 하였고 대선사(大禪師) 상총(尙聰)을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당시 이 흥천사는 조계종(曹溪宗)의 본산이 되어 있었다.
제3대 태종(太宗) 8년 5월 24일 태조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태종은 태조가 돌아간 지 아홉 달쯤 되어 당시의 정능을 동소문(東小門)밖에 있는 사을한리(沙乙閑里)에다 옮겼는데 이사을한리란 곳은 오늘의 정능동을 말한다.
정동의 정능을 사을한리로 옮긴 것은 능묘를 도성 안에 두지 않으려고 한 처사일 것이다.
그런데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0년쯤부터는 흥천사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황폐해졌다. 다만 남아 있는 것은 황폐한 건물 사리각(舍利閣)뿐이었다. 그리고 제11대 임금 중종(中宗) 5년 3월 26일에 이르러서는 유생(儒生)들이 작당하여 방화하였기 때문에 황폐된 건물은 말
할 것도 없고 사리각 오층탑까지고 재로 변하고 말았다.
부군(夫君)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능은 돌보는 사람없는 쓸쓸한 능묘로 황폐를 면치 못했고 강씨의 원당이며 태조의 원당으로 지어졌던 흥천사도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만 것이다.
때는 태조 7년 무인(戊寅=西紀 1,398년) 가을이었다. 어느 날 정도전은 남은과 만나 네 왕자와 세자 방석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감! 이제는 세자 방석이 고단한 몸이 되었구료…
글쎄 말이요. 부왕이 계시기는 하지만 곤전이 계실 때보다는 신변이 고단하실 밖에…
그런데 우리는 고 강비(故康妃)의 긴탁을 받고 있으니 세자 방석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소?
그럼 최선을 다해야지.
무슨 좋은 생각 좀 해 보셨소?
내 두뇌는 삼봉의 두뇌처럼 융통성(融通性) 있는 게 못돼서 특별히 좋은 생각이 나질 않소. 어디 삼봉의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낸들 별 수 있겠소? 그저 당하는 대로 당해 보는 것이지. 그런데 요즘 태조께서 몸이 불편하시와 자주 누워 계신 모양인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무슨 장난을 하고 싶소.
무슨 장난을?
그 장난은 대감의 힘을 꼭 빌려야 할 것이요. 그리고 태조의 병세가 좀 더 악화해야만 할 수 있는 장난이니깐 좀 기다려 보아야 하겠소.
지금 당장에 방법을 말할 수 없소?
방법만은 말할 수 있죠.
어디 들어 봅시다.
지금 태조가 누워 계신 모양인데 좀 더 악화되면 나는 대감과 참내하여 피접(避接)요양의 필요를 역설하면서 모든 왕자를 불러들이게 하려오.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네 왕자를 도륙할 생각을 갖고 있소. 대감은 나의 이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오?
글쎄요. 될 것도 같군요. 그러나 이 소문이 사전에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우리만 죽고 말 것 같으니 이 일을 절대 비밀에 붙이고 추진 시켜야겠소이다. 그런데 우리 편 사람도 이 일을 알고 있습니까?
몇 사람은 알고 있소.
이 음모가 있은지 단 열흘도 안 돼서 태조의 병세는 심히 위중해져서 정말 피접해서 요양 할 정도에 이르렀다. 정도전과 남은은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몇 번이나 참내하여 문병하고 피접의 필요를 진언 하였다. 태조도 이 말에 귀가 솔깃해서 도전의 진언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도전과 남은은 힘을 얻게 되어 태조 측근의 중관(내시)에게
태조의 병환은 피접요양(避接療養)을 해야만 쾌복될 것으로 믿어지니 여러 왕자가 참내하여 이어(移御)하시는 것을 보는 게 도리일 것인즉 중관들은 곧 모든 왕자로 하여금 참내케하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전 참찬(前參贊) 이무(李茂)란 사람도 역시 정도전의 한파였으나 이무는 정도전의 음모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정안대군 방원에게 전부 고자질해 버렸다. 방원은 어느 때고 형님왕자들과 함께 근정문(勤政門) 밖에서 밤을 세우곤 했다. 그의 부인 민씨(후일의 원경황후)는 자기의 오라버니 민무질(閔無疾)과 의논하고 하인 김소근(金小斤)으로 하여금
마님께서 별안간 흉통(胸痛), 북통으로 안절부절을 못하십니다.
알리게 하였다.
방원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자저(自邸)로 돌아왔다. 방원은 돌아와 보고서야 자기를 부른 이유가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방원은 부인 민씨와 민무질을 상대로 한참 동안 밀담(密談)을 주고 받다가 벌떡 일어섰다. 민씨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디를 가시려 하십니까? 지금 대궐로 가시는 것은 죽으러 가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다. 방원은 정색을 하고
놓으시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오. 어서 놓으시오. 더구나 형님들이
이미 대궐 안에 계신데 내가 어찌 안 가겠소? 첫째 정도전의 흉계를 형님들게 빨리 알려야 하겠소.
하며 옷자락을 뿌리치고 나왔다. 그러나 민씨는 대문 밖에까지 쫓아나와
신변을 조심하세요! 신변을 제발 조심하세요.
하고 신신 부탁하였다.
아내의 부탁을 뒤로 하고 집을 나온 정안대군 방원은 나는 듯이 말을 달려 대궐로 들어섰다. 소관(小官) 하나가 궁중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상감마마의 병환이 몹시 위중 하시와 지금 피접을 하시려 하오. 여러 왕자께서는 모두 입시하시라는 분부입니다.
그런데 전날까지도 궁문에 등불을 매어 달아 앞을 밝혔는데 이날 밤에는 궁문에 등불이 없어 어둡기 칠흑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게 웬일일까?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때 정안대군은 변소로 가려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익안대군 방의, 회안대군 방간, 싱당군(上黨君) 이백경(李伯卿)은 정안대군의 뒤를 쫓아오면서
정안대군! 정안대군! 어찌할 작정이야!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를 말아요. 이런 경우에 별 묘책이 없어서 크게 걱정이요.
대답할 뿐이었다.
정안대군은 방의, 방간, 백경과 함께 영추문(迎秋門)으로 나왔다.
우리 형제들은 말을 광화문(光化門)밖에 세워놓고 천명(天命)을 기다립시다. 그러는 편이 득책일 것 같소이다.
정원대군이 이같이 말하고 곧 사람을 시켜 정승 조준, 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을 불러오게 하였다. 공교롭게도 마침 조준은 점장이를 상대하여 길흉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정안대군의 성화 같은 독촉에 하는 수 없이 조준은 갑옷 차림의 병졸들을 이끌고 정안대군 앞으로 나왔다. 이때 정안대군은 예빈사(禮賓寺) 앞 돌다리를 막게 하고 다만 두어 사람만 거느리고 오도록 명령한 후 조준에게 호령했다.
공(公)들은 이씨 왕국의 사직을 이대로 버려두고 있을 참이요?
추상같은 목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신(趙臣)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서 조준, 김사형 등은 정당으로 들어가 자기를 잡으려 했다. 이것을 본 정안대군은
(만약 궁중에서 군사를 내놓았을 때 우리 군사가 좀 후퇴하면 저 군사들이 궁중으로 들어오리라.)
생각하고 다시
우리 형제들도 말을 타고 노상에 서 있는데 대감들은 어찌 정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려 하시오?
하며 앞을 가로막아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운종가(雲從街)에 주저 앉았다.
그들을 운종가에 앉힌 후 정안은 백관을 불러들이게 하자, 찬성(贊成) 유만수(柳曼殊)가 그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 정안대군은 유만수에게 갑옷을 내주어 입게 하고 자기 뒤에 서 있게 하였다. 이를 본 이무는
안 됩니다. 만수는 방석의 일당입니다.
귀띔을 했다. 눈치를 챈 만수는 말에서 내려 정안대군의 말굴레를 잡고
정안대군 저하! 신이 솔직히 아뢰겠사오니 들어주옵소서.
애걸복걸했으나 정안대군이 못들은 체 해 버리자 김소근은 칼을 번쩍 들어 만수와 그의 아들을 찔러 죽여 버렸다.
정안대군은 친히 무사를 거느리고 정도전 등의 동정을 염탐한 결과 도전은 이직(李 )과 함께 남은의 작은집에서 불을 밝히고 모의에 열중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의 부하는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정안대군이 이숙번(李叔蕃)을 시켜서 불화살 한발을 쏘아 그 집 지붕 위에 떨어뜨리게 하자 불길은 삽시간에 확 피어올랐다. 이를 본 도전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급히 뛰어나와 이웃에 있는 판봉상(判奉常) 민부(閔富)의 집으로 들어가 은신하려 하였다. 그러나 민부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우리 집에 배불띠기 하나가 들어와 숨었소.
이 말에 대군의 부하들은 떼를 지어 민부의 집으로 들어가 도전을 끌어 내었다. 도전은 피할 도리가 없어 칼을 옆에 끼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군사들은 기어 나온 도전을 끌어다 대군 앞에 꿇어 앉혔다. 도전은 고개를 들어 대군을 바라보면서
정안대군 저하! 죽을 죄를 범하였소이다. 저하께서 저를 살려 주신면 전심과 전력을 다하여 저하를 도웁겠습니다.
살려 주기를 애걸하였다. 이 말에 대군은 목소리를 높여 호령했다.
네놈은 이미 왕(王)씨를 배반한 놈인데 이젠 또 이씨를 배반하여 하느냐?
흥분한 정안은 당장에 칼을 빼어 도전을 죽이고 또 나아가서는 그의 아들 유영(遊泳)까지도 참형(斬刑)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남은은 몰래 미륵원(彌勒院) 포막(圃幕)으로 피해 은신하려 했으나 추병(追兵)에게 결국 붙잡혀 죽었고 이직이란 자는 아무 내용도 모르고
도전에게 끌려 왔다가 의외의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고 애걸을 했기 때문에 참형은 받지 않고 살아 남았다.
그런데 불은 남은의 집에만 그치지 않고 이웃집에까지 퍼져서 남은의 집 일대가 불바다가 되어 화광이 충천하였다. 궁중에서는 이를 바라보고 소란히 굴면서 활을 쏘았다. 방석 세자의 파당은 이때를 기회로 군사를 내놓으려고 군사로 하여금 세자를 받들고 성상으로 올라
가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그 결과 광화문에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철기(鐵騎)가 자기를 잡고 있어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안대군은 휘하 군사에게 보다 이상의 피를 흘리게 하지 않고 세자 방석을 배경으로 하고 일어났던 정도전 난을 평정하였다.
그런데 태조의 병세는 날로 위중해지기만 해서 결국 청량전(淸凉殿)으로 피접하고 말았다.
태조가 청량전으로 이어(移御)한지 며칠이 못돼서 좌정승 조준은 여러 중신과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태조 앞으로 나와 정도전, 남은 등이 범한 죄를 상세히 보고함과 동시에 세자를 딴 왕자로 개봉(改封)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때 세자 방석은 태조의 곁에 있었다. 태조는 조준의 간청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경등은 방석을 세자로 봉한데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지 않소? 오늘날 왕자 사이가 불화 해진 것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함에서 생긴 것같이 사람들은 말하는 모양인데 경들도 그리 생각하오? 어디 대답 좀 해보오?
그러나 이 하문에 대하여 아무도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왜들 대답을 하지 않소? 내가 신덕왕후(강씨)를 위해 후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아니요. 방석이 막내인데다 사람됨이 될 성 부르고 또 늙은 내 눈에는 방석이가 귀여워 보이기만 해서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요. 부왕(父王)으로서 아무나 됨직하고 맘에 드는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게 뭣이 잘못이요?
태조는 이와 같이 말한 후 곁에 있던 세자 방석을 불러 말했다.
너는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싶으냐?
아바마마의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알았다. 그러면 너 좋을 대로 해라.
저는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싶습니다.
그래서 맘이 편해질 것 같으면 그리하는 것이 득책일 것이다.
태조가 이렇게 말하자 방석은
저는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히 해드리고 또는 제 마음을 편안케 하기 위하여 깨끗이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말겠습니다.
하고 태조의 곁을 물러났다.
방석은 형 방번과 함께 대궐의 서문으로 나와 어디론지 가려 했다. 이때 방원은 방번에게 말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두 말 할 것 없다. 가고 싶은 데가 있거든 빨리 가거라.
방번이 어디론지 가자 도당(都堂=홍문관의 교리 이하 벼슬아치의 총칭)은 그들의 뒤를 쫓아가 중도에서 살해했다. 태조는 방번, 방석이 이렇게 죽은 것을 알고
이게 누구의 잘못에서 생겨진 것이냐? 이게 아비의 잘못에서 생겨진 것이라면 나도 죽여 달라고 하겠다. 이 원통한 일을 어찌 참고 산단 말이냐? 저 두 애가 불쌍해 어찌 하나? 하늘도 무심하구나!
하고 목을 놓고 통곡하였다.
그 후 태조는 틈만 있으면 흥천사(興天寺=강씨의 원당)로 거동하여 부처님께 참회를 하고 두 아들의 명복(冥福)을 빌고 지냈다. 그리고 경순공주(慶順公主)는 방번, 방석과 한 가지로 신덕왕후(강씨의 묘호)가 낳은 오직 하나의 따님이었는데 정도전 난에 부군(夫君)인 흥안군(興安君)이 피살되어 소년과부가 되고 말았다. 어느 날 태조는 경순공주를 찾아가 대성통곡 하면서
방원이란 놈을 살려 둔단 말이냐? 그 놈은 포악한 놈이다. 네 어머니는 그 놈 때문에 병들어 죽었고 너의 두 오라비는 그 놈에게 참살을 당했다. 그리고 네 신랑마저 그 놈 때문에 죽어 네가 소년과부가 되었구나! 이런 절통한 일이 또 어디 있겠니? 너는 이젠 중(僧)이나 되어 네 몸이나 지키면서 네 남편, 어머니, 두 오라비의 명복이나 빌어다오.
가위를 들어 공주의 머리를 사정없이 베어 버렸다. 일세의 대영웅도 인생의 무상함을 크게 느꼈던 모양이다.
정안대군 방원이 정도전 난을 평정하자 중외(中外)의 사민은 모두 태조께 정안대군을 세자로 봉해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러나 대군은 한사코 세자 자리를 둘째 형 영안대군에게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영안대군은 응하지 않았다.
당초부터 개국(開國)을 건의한 사람도 방원이고 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난리를 평정한 사람도 방원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나는 세자 됨에 족한 공이 없다.
그래도 방원이 듣지 않고 여전히 고집을 부리자 영안대군은 정안대군에게 다음과 같이 언질을 준 후에 세자의 자리에 임했다.
그러면 내가 어느 시기까지 세자의 자리를 맡아 가지고 있기로 하자. 시기가 오면 너에게 전하겠다.
동년 9월, 태조는 임금의 자리를 세자 영안대군에게 전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정종(定宗)이었다.
 
 
 

咸興差使

정종(定宗)이 임금의 자리에 나아가자 방원은 동궁으로 책립되었다.
정종의 비(妃) 김씨는 왕자의 난을 생각해서 항상 정종에게 간청했다.
상감마마, 동궁의 눈을 조심해 보시옵소서. 입궐할 때마다 그 기색이 무엇을 구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루 바삐 임금의 자리를 내 주시와 그 마음을 편케 하소서.
그리하여 정종은 마침내 임금의 자리를 방원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방원의 야심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방원은 결국 경북궁에서 왕위(王位)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이조 제 3대 임금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임금으로 있었음이 2년에 불과한 정종을 추존(追尊)하여 상왕(上王)으로 태조를 추존하여 태상왕(太上王)으로 모시었다. 그러나 태조는 태종의 소행을 생각하고 내주어야 할 대보(大寶=옥새)를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하들은 모두 다 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태조는 사실 두 왕자를 잃은 후부터 마음에 상처가 생겨 태종을 사갈(蛇蝎)과 같이 미워하였다. 이와 같이 미워한 나머지 태상왕의 자리를 헌신짝같이 내버리고 함흥으로 가 버렸다. 태종은 부왕 태조가 함흥으로 물러간 후부터 이것, 저것이 걱정되어 자주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안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문안사를 보기만 하면 태종이 더욱 미워졌다. 따라서 문안사를 화살의 세례만 받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말았다. 태종의 문안사는 가기만 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나가서 안 돌아오는 사람이 있게 되면 함흥차사(咸興差使)가 됐나보다 하고 농담을 하였는데 오늘에도 이 말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사람으로 성석린(成石璘)은 태조의 옛날 친구였다. 그는 태종에게 나아가
신이 태조의 행재소(行在所)로 가 인륜의 도를 역설하여 태조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겠나이다.
하고 가기를 자청하였다. 그리하여 석린은 나그네처럼 몸차림을 한 후 백마를 타고 나섰다. 그는 거의 목적지에 도달하자 말에서 내린 후 불을 피우면서 밥짓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태조는 이를 바로 보고 중관(中官=내시)으로 하여금 가보게 하였다.
중관이 석린을 찾아보고 말을 걸었다.
뭣을 하시는 것이요?
나는 무슨 볼일이 생겨 여행을 하는 도중인데 날이 저물어 말에게 먹이를 주고 여기서 하룻밤을 세우려 하는 것이요.
석린의 대답을 듣자 중관은 더 이상 묻지를 않고 돌아와 그대로 태조께 고하였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만면에 희색을 띠우고
알겠도다. 그 사람을 불러오라.
또 중관을 보냈다.
그리하여 석린은 중관의 인도를 받고 태조를 만나게 되었다. 태조를 만나게 된 석린은 인륜의 도를 들어가며 태조께 간하였다. 태조는 이 말을 듣기 무섭게 얼굴빛을 고치고 고함을 쳤다.
그대는 누구를 위해서 하는 말인가? 그대의 임금을 위해 하는 말은 듣기도 싫다. 물러가라!
석린이 여전히 말을 이어
신이 참말로 지금의 주상(主上)을 위해서만 하는 말일 것 같으면 신의 자손이 꼭 실명하여 장님이 될 것이올시다.
맹세까지 하였지만 태조는 결국 석린의 말도 듣지 않았다.
태조가 서울을 떠나 울화를 소산(消散)시키고 있던 곳은 태조의 구저(舊邸)로 여기서 몇 해를 보내자 태종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신하들도 황송한 생각을 억제할 수 없었다.
상감마마! 무학상인(無學上人)은 부왕 태조와 친교가 있던 사람입니다. 태조께서는 일찍이 무학상인을 스승으로 모신 일도 있었으니 이 무학상인을 문안사로 보내셔서 선처케 하시면 태조께서도 응하실 것 같습니다.
한 신하가 간곡히 태종에게 간하자 태종은 특사(特使)를 보내 무학상인을 불렀다. 무학은태종 앞으로 나와 태조에 대한 얘기를 들은 다음 태종에게 말했다.
상감마마, 부자 사이에 어디 이런 일이 또 있겠습니까? 저 같은 몸이 무슨 능력이 있어 태조로 하여금 회가(回駕)하시게 한단 말입니까? 그런 말씀은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태도가 더욱 친절하고 더욱 공손해지자 수월치 않은 무학이었지만 불응으로만 고집할 수 없어 마침내 태종의 청을 받아가지고 함흥으로 갔다. 함흥에 도착한 무학은 태조에게로 나아가 내함(來咸)의 인사를 올렸다. 무학의 인사를 받은 후
무학상인이 여기까지 찾아왔느니 웬일일까? 상인도 누구를 위해 온 것이 아닐까?
태조가 이렇게 묻자 상인은 파안일소(破顔一笑)하면서 그럴 듯이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소승이 상감마마와 친교를 맺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소승이 지금 온 것은 옛날을 회상하고 하루만이라도 더 마마의 얘기 벗이 되고 싶어서 온 것이올시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야 안심을 하고 자기 방에서 자도록 하였다. 무학은 태조 방에서 유숙하는 동안 한 번도 태조의 잘못을 들어 말한 일이 없이 태연스럽게 수십 일을 지냈다. 태조는 무학과 태종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없다고 생각하자 무학을 더욱 신뢰하고 지냈다.
그러자 무학은 어느 날 밤중에 기회를 타서 태조에게 간곡히 진언 하였다.
마마께서는 왜 여기에 와서 계십니까? 태종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종도 마마의 귀여운 아드님이 아닙니까? 매우 어려운 말씀이오나 보위(寶位)를 맡길 만한 아드님이 이 아드님 밖엔 없지 않습니까? 만약 이 아드님을 그렇게 대접하신다면 마마의 일평생 고심해 이룬 대업을 누구에게 맡기려 하십니까? 딴 사람에 이를 맡기시는 것보다 마마의 혈육에게 맡기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늘날 천하가 좀 안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안에 있어서는 건국의 중신이 없어지고 밖에 있어서는 실의(失意)한 자들이 칼을 갈고 있지 않습니까? 마마! 십분 생각하시어 행하십시오.
그제서야 태조는 이 말을 그럴듯하게 듣고 대답했다.
말인즉 옳소! 옳아. 어디 생각 좀 더해보고.
그러시면 심사숙려 하시고 하루 바삐 환궁하시기로 하십시오.
무학은 때를 놓치지 않고 권고를 거듭했다. 태조가 함흥에서 환궁하기로 되자 태종은 성밖으로 나아가 맞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궁중은 장악을 준비하기에 바빴다. 이때 하륜(河崙) 등 여러 사람은 태종께 간곡히 권고했다.
태상왕의 노여움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을 처리하는데는 어느 때나 원려(遠慮)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차일(遮日)의 고주(高住)는 꼭 아름드리 대목을 쓰셔야 합니다.
태종도 이 말을 듣고 열 아름이나 되는 대목을 써서 고주를 세웠다.
태조는 차일이 쳐진 곳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숨어있던 분노가 얼굴에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지니고 있던 강궁 백우전(强弓白羽箭)을 꺼내어 태종을 목표로 한 대를 쏘았다. 이때 태종은 당황하여 얼떨결에 고주 뒤로 은신하자 화살은 고주에 박혀버렸다. 이를 본 태조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할 수 없다. 하늘이 이렇게 만드는 것 같다.
태조는 가지고 있던 국보(國寶=옥새)를 태종에게 던져 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냐? 당장 이것을 가지고 가거라.
태종은 눈물을 머금고 나와 옥새를 받은 후 뒤를 이어 대연(大宴)을 베풀었다. 잔치 도중 태종이 태조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비는 뜻에서 잔을 올리려 할 때 하륜은 역시 태종에게로 나아가 진언했다.
상감마마! 상감께서는 술통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잔에 술만 따뤄 놓으시고 이를 중관에게 주어서 올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그의 말대로 중관으로 하여금 술잔을 들어 태조에게 권하게 하였다.
태조는 그 술을 받아서 다 마신 후 웃음을 띠우고 소매 속에서 철여의(鐵如意)를 꺼내 놓고
할 수 없다. 하늘이 시키는 모양이다.
탄식만 연발하고 말았다.
그런데 무엇이 일대의 영걸 태조로 하여금 서복(庶腹)의 말자(末子)를 세자로 책봉케 했으며 또 유공한 왕자였던 태종을 백우전으로 또는 철여의로 죽여 없애려 하였던가? 이는 다름이 아니었다. 애처(후일의 신덕왕후)에 대한 편애(偏愛), 말자 방석에 대한 편애가 태조로 하여금 현명치 못한 행위를 감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태종에게 개죽음을 하고만 정도전과 남은의 약전(略傳)을 간단히 써서 그 인물됨을 알아보기로 하자.
 

鄭道傳의 略傳

정도전은 봉화(奉化)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목은(牧隱)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신우왕(辛禑王) 때에 설화(舌禍)에 걸려 회령(會寧)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특사를 받고 돌아와 삼각산 밑에 집을 짓도 살며 이때
호를 삼봉(三峰)이라 자칭했다.
임신(壬申)에 이르러 이조 개국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봉화백(奉化伯)이란 작호를 받았고 동시에 한양(서울)으로 자택을 옮겼다.
태조는 어느 때 도전에게
과인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경(卿)의 공이요.
하며 도전을 찬하였다. 그러다가 방석, 방번의 난이 있을 때에 도전은 선두에서 일했으므로 정안대군 방원에게 붙잡혀 자기는 물론 아들 유영(遊泳)도 참살을 당하였다.
도전의 저서(著書)로 삼봉집(三峰集)이란 책이 전해지는데 이것은 심(心), 리(理), 기(氣)에 대하여 연구한 것 3편이었다. 이외에 경제문감(經濟文鑑), 경국전(經國典) 등이 세상에 전해졌다.
그의 슬하에는 네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진(津)은 판사(判事)로 있었고 그의 아들 문형(文炯)은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주 시절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중종(中宗)이 반정하자 벼슬이 영부사(領府事)가 되었는데 시호(諡號)를 양경(良敬)이라 불렀다.
 
 
南誾의 略傳
남은(南誾)은 영의정(領議政) 남재(南在)의 아우로 사람됨이 호매(豪邁)하고 기계(奇計)를 좋아하였다. 신우왕 때에 왜구가 삼척(三陟)을 쳐들어오자 남은은 자진하여 삼척으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왜적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태조를 따라 위화도(威化島)로 갔다가 회군책(回軍策)을 올렸다.
이 공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고려때의 밀직부사란 마을의 두 번째 어른)가 되었으며 태조가 개국함에 이르러 일등공신으로 뽑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한때 태조는 여러 신하에게 대하여
과인에게 남은과 조인옥(趙仁沃)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없이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고 말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무인년(戊寅年) 곧 태조 7년에 도전과 함께 세자 방석을 도우려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방원에게 참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후에 세종이
남은에게 죄가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큰 공이 있는 사람이다.
하여 그에게 강무(剛武)란 시호를 내리고 또 태조묘(太祖廟)에 배식(配食)케 하였다.
태조는 고려조에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후부터는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그 걱정이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후예가 무슨 일을 일으켜 다시 고려를 세우려 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즉위한지 3년쯤 되어서 고려 태조의 후예로 거물급(巨物級)에 속하는 사람들
을 아무 죄 없이 무인도로 추방하려 했다.
이때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은 그 거물급 왕씨 왕강(王康), 왕승보(王承寶), 왕승귀(王承貴), 왕융(王 )들을 섬으로 추방하는 것에 대하여
주상전하(主上殿下)! 상감께서 이 사람들을 지나치게 사랑하시고 지나치게 후히 대접하시지만 저들은 상감의 애호와 후대를 은혜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그 중의 강은 지모(智謀)가 백 사람 천 사람에 뛰어나는 인물이옵고, 또 그 중에 승보, 승귀는
용기와 담력이 만인에 뛰어나는 인물입니다. 이들이 서울에 있게 되면 반드시 무슨 일을 저질러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하고 진언하였다.
오늘날 왕조의 여족(餘族)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반드시 후환이 있게 될 것이다. 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 죽여 없애는 것이 득책일 것이다.
이런 결과로 나라에서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없으므로 헤엄에도 익숙하고 또 배도 잘 다루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들에게 왕씨들을 꼬여내게 하였다. 그래서 이자들은 여러 왕씨에게
상감마마께서 왕성(王姓)을 가진 어른을 모두 섬으로 옮겨가 사시게 하기 위하여 저희들을 출동시켰습니다. 별 생각 마시고 배를 타 주시면 적당한 섬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런 권고에 왕씨들은 살 곳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기쁨에 넘쳐 앞을 다투어서 배를 탔다. 그러나 배가 중양(中洋)에도 채 못 이르러 선주에 있던 선인(船人)들은 배 밑을 뚫어 놓은 후 슬그머니 해저(海底)로 들어갔다. 그러자 해수가 배 안으로 들어와 당장 바닷속으로 침몰하게 되었다. 이때 왕씨와 사귐이 있던 어느 승(僧)이 해안(海岸)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큰 소리를 내어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여러 왕씨 어른들! 배가 당장 바닷속으로 침몰하게 되었소. 당장 어복(漁服)에 장시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씨들은 당초부터 헤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저 죽는 시간만 기다리면서 승의 부르짖음에 답하여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一聲柔櫓滄波外
어느덧 놋소리 나더니 배 창파 밖으로 왔네
縱有山僧奈爾阿
산승이 있은들 어찌하리!
 
승은 그들이 불쌍해 통곡을 하며 돌아 갔다.
그런데 왕씨가 바다에 침몰되었을 때 태조는 꿈을 꾸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칠장지복(七章之服=王侯의 禮服)을 입고 나타나
네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는데 그 공은 이 백성들에게 있다. 네가 만약 나의 자손을 도륙할 것 같으면 오래지 않아서 그 앙화를 받고야 말 것이니 너는 이를 명심해 두어라.
노호(怒號)하였다. 태조는 이 말에 놀라 왕씨 처치의 생각을 고쳐 갖기로 하였다. 그리고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서도 왕건의 후예로 민간에 숨어 있는 자가 있었다. 이때 이조의 대간(臺諫=사헌부, 사간원)은 태종께 이자를 죽여 없애야 합니다.
하고 극간하였지만 태종은 다음과 같은 교지(敎旨)를 내렸다.
제왕으로 나서게 되는 것은 오로지 천명에 의한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도륙한다는 것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 이 뜻을 받들어 왕씨의 후예로 생존해 있는 자를 안심하고 생업에 힘쓰게 하라.
고려의 종실(宗室)인 왕휴(王 )의 서자(庶子)는 민간에 살고 있었다. 이를 듣게 된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는 사실을 밝히려고 문초하였는데 항간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父王) 태조께서 개국하실 때에 왕씨가 살게 되지 못할 것이란 말은 태조께서 말씀한 것이 아니다. 실상은 한두 대신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옛날부터 역성수명(易姓受命)한 제 왕중에는 전조의 후예를 봉하여 작호를 주기도 하고 혹은 고관을 주어 그의 어진 점을 길이 전하게 하였다. 다시 말하면 역성수명자로서 전조의 후예를 전부 도륙한 일이란 일찍이 없었다. 대간이 죽여 없애라는데 대해서 과인은 다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옛날부터 제왕이 일성(一姓)으로 천지와 더불어 종시한 일은 없다. 오늘의 이씨(李氏)가 인정(仁政)으로서
백성에 임하면 백 왕씨(百王氏)가 있을지라도 걱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악정으로서 임하면 왕씨가 아닐지라도 따로이 수명자가 생겨 나라가 위태해질 것이 아니냐?
하고 다음과 같은 하교(下敎)를 내렸다.
금후 왕씨의 후예로서 자수를 하거나 또는 사람의 고발에 의해서 알려진 자가 있으면 그들의 말을 듣고 살기 편한 데에 거주케 하며 동시에 생업에 전념케 하라.
그리고 태종은 또 다시 말을 이어
자고로 처음 왕업을 이룩한 자는 전조의 후예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걱정하고 여러 가지로 의심을 품고 전조의 후예를 모두다 전제(剪除)하려 하였다. 그러나 과인은 그런 생각은 갖지 않고 있다. 천명에 의하여 한 나라의 임금이 된 과인은 이 강토 안에 있는 자를 모두 다 과인의 적자(適子)로 보며 동시에 일시동인(一視同仁)하여 천의에 보답하려 한다. 이미 공양왕(恭讓王)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편안한 데서 살게 하여 처자와 비복(婢僕)이 여전히 한군데에 모여 단란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다만 그 족속이 섬으로 들어가 고
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이를 불문에 붙일 수 없다. 저 거제도(巨濟島)에 있는 자들을 육지로 나오게하여 각군 각주에서 살게 하고 또 재간이 있는 자는 잘 선발하여 이를 나라에 알리라.
그리하여 왕씨로서 거제도에 있던 자는 완산(完山)으로 상주(尙州)로 또는 영주(寧州)로 가 살게 되었고 또 왕강, 왕승보가 불려 오게 되었다. 이런 것으로 생각하면 태조의 왕업이 정안대군 방원, 즉 태종에 의하여 대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忠臣列傳

杜門洞 사람들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이성계가 왕위에 나아가 천하가 이성계에게로 돌아가고 말자 우국지정(憂國之情)에 잠겨 지내던 고려 유신(高麗 遺臣)들은 이성계의 신하가 되는 것을 욕스러이 생각하고 산중으로 벽강궁촌으로 두문동(杜門洞)으로 혹은 섬으로 들어가 고절(孤節)을 지키다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여조말의 수절한 충신임을 말하여 둔다.
 

1. 李 穡 (號는 牧隱)

이색(李穡)의 자(字)는 영숙(潁叔)으로 한산(韓山)사람이다. 찬성사(贊成事) 곡(穀)의 아들로 사람됨이 총명한데다 범인과 다른 점이 있어 글만 읽으면 그대로 낭송(朗誦)하였다. 원(元)나라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으로 다섯 해나 보내다가 어머니의 노환으로 벼슬을버리고 돌아왔다.
고려 공민왕 계사(癸巳)년에 대과(大科)에 등제하여 벼슬이 삼중대광 시중한산백(三重大匡侍中韓山伯)에 이르렀다. 공민왕 기사(己巳)에 장단으로 가 귀양살이를 했고 경오(庚午)년 5월에는 청주옥(淸州獄)으로 들어갔으며 임신(壬申)년에는 금양(衿陽)으로 끌려갔다가 여흥(驪興)으로 옮겨졌고 또 이조 개국 후에는 장흥벽사(長興碧沙)로 끌려갔다가 그해 겨울에 나왔다. 이와 같이 귀양살이와 옥중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풀린지 얼마 못되어 병자(丙子)에 이르러 청심루(淸心樓) 아래의 연자탄(燕子灘)에서 서거하고 말았다.
색이 불귀의 객이 되자 이조에서도 그에게 한산군이란 작호와 문정공(文靖公)이란 시호를내렸다.
 
어느 때 길재(吉再)는 색에게
어떻게 거취(去就)를 취하는 게 좋겠느냐?
고 물은 일이 있었다. 이때 색은
그것은 제각기 자기들의 뜻대로 할 것이다. 우리들은 대신의 지위에 있으니 나라와 한 가지로 흥하든 망하든 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뜻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대의 자유에 맡긴다.
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공양왕 때에 색은 소명(召命)에 의하여 적소(適所)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환경(還京)한 그 가 이성계를 잠저(潛邸=임금 되기 전에 살던 집)에서 만나자 성계는 기쁨에 넘쳐 상좌에 그 를 앉히고 꿇어앉아 권주(勸酒)를 하였다.
색은 한잔도 사양하지 않고 양껏 마시고 돌아갔다. 색은 가끔 성계와 만나고 성계는 언제나 중문까지 배웅하곤 했다. 그는 종학(種學)이란 아들과 종덕이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다 문과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나라가 성계에게로 돌아가자 그들은 여전히 한 마음을 갖고 버티다가 마침내 장독(杖毒)으로 죽고 말았다.
색은 한때는 여주 농막으로 내려가 한운(閑雲)과 야학(野鶴)을 벗삼고 지냈다. 어느 날 문생(門生)이 찾아오자 그는 문생을 데리고 심산궁곡으로 끌고 들어갔다. 곡절을 모르는 문생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색은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이르자 문생이 곁에 있는 것을 문제삼지 않고 온 종일 계속하여 방성통곡(放聲痛哭)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실컷 울고 나더니
인제야 막혔던 가슴 속이 뚫어진 것 같구나. 좀 살 것 같다.
하고 문생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색이 이렇게 방성통곡하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고 두 아들이 이조에 항복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은 후 곧 임신(壬申)년부터 을해년에 이르기까지 색은 한산(韓山)으로 여주(驪州)로, 오대산(五臺山)으로 드나들면서 여생을 보냈다. 태조는 그를 옛날 친구로 또는 옛날의 스승으로 대접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하였다. 병자년(丙子年) 5월 색은 여주로 내려가 피서(避暑)할 것을 간청하고 배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돌연 폭사(暴死)하고 말았다. 나중에 태조가 이 소식을 듣자 놀래고 의심한 끝에 당시의 안찰사(按察使)를 죽여 없애고 분을 풀었다.
 
<<附記=고려 말년의 수절 제신 가운데 제일인자로 손꼽는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는 이미 기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2. 吉 再 (號는 冶隱)

길재(吉再)의 자(字)는 재부(再父), 해평 사람이다. 아버지 원진(元進)이 지금주사(知錦州事)로 있다가 보성대판(寶城大判)이 되자 어머니 김씨가 따라가게 되었는데 수입이 적은 탓으로 길재를 데리고 가지 못했다. 그때 나이는 8세,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느 때나 울고 지내던 중 남계(南溪)란 곳에서 놀게 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석별(石鱉)을 발견하고 자라야! 자라야! 너는 어머니와 헤어졌니. 나도 역시 어머니와 헤어졌단다. 내 너를 삶아 먹고 싶지만 네 신세가 나와 다름 없어 너를 놓아 준다.
노래를 지어 부르며 자라를 도로 물 속에 놓어 주었다. 이 노래가 이웃에 전해지자 이웃 사람들은 그를 안고 눈물을 머금었다 한다.
계해년(癸亥年)에 이르러 사마(司馬=진사)가 되고 병인년(丙寅年)에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였으며 기사년(己巳年)에 문하주서(門下注書=의정부 주서로 정7품 벼슬)가 되었다가 공양왕이 임금이 되자 벼슬을 내놓고 선주(善州=선산)로 돌아와 그 어머니 봉양에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출천의 효자로 칭송하였다.
이조 태종이 잠저(潛邸)에 기거하면서 서당에 들어와 독서할 때에 길재는 서당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서로 상종하게 되어 그 교의가 남달리 두터웠다. 방원이 세자로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을 상대로 이름이 드러나 있지 않은 선비들을 들어 말하게 되자 세자는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길재와 동학하였는데 못 본지가 오래다.
하고 말했다. 길재와 동관인(同寬人) 정자(正字=정9품벼슬) 전가식(田可植)은 길재의 효행에 대하여 상세하게 얘기하니 방원은 가식의 말을 듣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
어느땐가 그의 아버지 원진이 서울로 가 벼슬살이를 할 때 노(盧)란 성을 가진 여인 하나를 얻어 제2부인을 삼고 지냈다. 이를 알게 된 길재의 생모(生母)는 어느 때나 원진을 보기만 하면 그 일에 대해 큰 소리를 내므로 집안이 불안했다. 길재는 이를 방관만 할 수 없어
어머님! 아내로서 남편에 대한 도의, 아들로서 어버이에 대한 도의에 설사 불의한 일이 있을 지라도 불의한 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륜의 변은 성인이라는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오니 이를 살피시고 어머님은 어머님으로서의 도의만 지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이 말을 듣고 감동하여 다시 입을 연 일이 없었다. 그리고 또 어느때 자기 어머니에게
어머님! 아버님을 좀 가 뵈야 하겠습니다. 아버님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안가 뵈옵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하고 서울(당시의 서울은 개성)로 올라갔다. 그는 서울 서모(庶母) 집에 있을 동안 무슨 거친 말을 듣게 되면 어느 때나 더욱 공손히 더욱 아들다웁게 대하였다. 노씨 부인은 친어머니가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씨에 감동하여 그를 친아들같이 사랑하였다.
길재가 선산으로 돌아와 있는 동안에도 세월은 여전히 흐르고 흘러 그의 어머니 나이 육십에 귀가 달리게 되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것을 궐한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이부자리를 친히 펴고 걷고 하며 지냈다. 아내나 혹은 딸 자식이 자기 어머니의 이부자리에 손을 대려 하면 만류하면서
너희들은 손댈 것 없다. 어머님이 이젠 아주 늙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하겠다.
하고 타일렀다.
그가 이와 같은 효자였으므로 그의 아내 신씨(申氏)도 그를 배워 늙은 시어머니를 알뜰하게 공경했다. 방원이 그의 효행에 감동하여 정종께 이를 알려 봉상박사(奉常博士)를 제수케 하였다. 길재는 대궐로 나아가지 않고 사은(謝恩)한 후 다시 방원에게 다음과 같은 요령의글을 올려 징소(徵召)엔 불응하였다.
 
<일찌기 저하(邸下)를 모시고 반궁(伴宮=성균관 혹은 문묘)에서 두 번이나 글을 읽은 일이 있사온바 이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날 부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감사하고 황공하오이다.
그러하오나 등과 후 두 번이나 신조(辛朝)로 나아가 벼슬살이를 하다가 왕씨가 복위(復位)하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옛날을 생각하시고 불러 주시니 감사함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올라가 배알(拜謁)은 하겠지만 벼슬살이만은 신의 원하는바 아니 오니 이를 살펴주옵소서.>
 
이 글에 대하여 방원은
<그대의 말은 강상불역지도(綱常不易之道)로 생각하오. 따라서 그대의 뜻을 뺏을 수는 없지만 그대를 부른 사람은 나이고 그대에게 벼슬을 내릴 사람은 상감마마인즉 상감마마께 이 를 아뢰는 것이 좋은 것 같소.>
하는 내용의 대답을 보냈다.
이 대답에 접한 길재는 정종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上疏)를 하였다.
<신은 본래 한미(寒微)한 가문의 소생으로 신조(辛朝)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문하주서(門下注書)로 있었습니다. 신은 듣건대 계집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합니다. 그리하여 신은 향리로 돌아와 늙은 어미나 잘 봉양하면서 여년(餘年)을 보내려 하는 것이올시다. 상감마마께서는 이를 굽어 살피시고 신으로 하여금 여생을 향리에서 보내게 하소서.>
정종은 이 말을 듣고 그의 절의에 감동하여 특별히 우대를 하고 그 가문의 명예를 보전케 하였다.
그 후 태종임금이 자리를 세종(世宗)에게 내주고 자신은 상왕(上王)이 되었을 때 세종에게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의사이다. 듣건대 길재에게 아들이 있다 하니 마땅히 불러서 적당한 직에 있게 하고 동시에 그 집에 충신문(忠臣門)을 세워 주게 하라.
는 하교(下敎)를 내렸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사순(師舜)이 불려 들어가 종묘부승(宗廟副丞)이 되었다. 또 길재가 육십칠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미두(米豆)와 장군(葬軍)을 내렸고 나아가서는 그에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란 명예직을 주었다. 그리고 구정 남재(龜亭南在)는 다음과 같은 시를 바쳐서 그의 절의를 찬하였다.
 
高麗五百獨先生
(고려 오백년에 사람은 선생 뿐이니,)
一代功名豈足榮
(일대의 공명도 그에겐 영화롭지 못하다.)
凜凜淸風吹六合
(맑은 바람은 늠름히 상하사방에 불고,)
朝鮮億載永嘉聲
(그의 높은 이름은 억만년에 이르도록 전해지리.)
 
 
3. 徐 甄 (號는 未詳)

서진(徐甄)은 이천(利川) 사람으로 초명(初名)은 분이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경인(庚寅)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으나 김진양(金震陽)당에 연좌되어 금천(衿川)으로 물러와 살았다. 그는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자기의 심경을 피력하였다.
 
千載神都隔渺茫
(천년이나 되는 성스런 도읍지 바랄볼 수도 없네.)
忠良濟濟佐明王
(이름 높은 충량들이 임금을 보좌했건만)
統三爲一功安在
(삼국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든 그 공이 어디 있노)
却恨前朝業不長
(오히려, 한만 되네, 전조의 왕업 길지 못해서…)
 
이런 내용의 시가 항간에 떠돌게 되자 당시의 대신이며 대간은 태종께 나아가서 진을 국문하고 치죄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태종은 이 말을 듣고 새삼스레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게 다 무슨 말이요? 고려의 신하였던 사람이 그 임금을 잊지 않고 시를 읊어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인정인 것이요. 우리 이씨의 운이 천지와 더불어 무궁할 것을 누가 장담하겠소? 그것쯤은 불문에 붙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요. 이젠 이 문제를 입밖에 내지 마시오.
그러나 대신과 대간은 또다시 입을 열어 간청하였다. 허나 태종은 여전히 불응하면서
진이 고려의 신하이므로 북면(北面)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임금을 그렇게 추모(追慕)하니 진은 정말 이제(夷齊)에 비할 사람이다. 상을 주면 주지 벌은 못 주겠다.
대신이며 대간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 선조는 허균(許筠)의 보고를 듣고는 진의 무덤에 제를 지내게 하고 동시에 대사간(大司諫)이란 직을 내렸고 또 윤근수(尹根壽)의 말에 의하여 그의 묘를 충신묘(忠臣墓)라 봉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진을 금천 충현서원(衿川忠賢書院)에 합사(合祀)케 하였다.
 
 
4. 元 天 錫 (號는 耘谷)

원천석(元天錫)은 원주 사람으로 자(字)를 자정(子正)이라 불렀다. 문장이 섬부(贍富)하고 식견이 해박했다. 고려 말년에 이르러 나라꼴이 말 못할 정도에 놓여지자 이를 차마 볼 수 없어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친히 농사에 종사하고 어버이 봉양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는 도중 어느 유서에서 과거에 참가해야 할 기록을 발견하고 부득이 참가하게 되었는데 일거에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벼슬은 하기 싫어 도로 향리로 돌아와 이색과 가까이 하면서 시주(詩酒)로 세상을 보내기로 하였다.
태종은 미시(微時)에 그의 문하에서 학을 구하였던 관계로 천석의 위인을 잘 알아 몇 번이나 그를 불렀으나 한 번도 태종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어느 때 태종이 강원 지방을 순유(巡遊)하게 되자 천석의 기거하는 집을 찾아갔으나 천석은 피신하고서 태종을 맞이하러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종은 부득이 계석상(溪石上)으로 내려와 옛날의 종을 불러 먹을 것을 주고 돌아 올 때 천석의 아들 동(洞)에게 기천 감무(基川監務)란 직을 내렸다. 그리하여 후인들은 그 계석을 이름 지어 태종대(太宗臺)라 불렀는데 이대는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근방에 있다.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 천석을 부르자 그는 보통 출입하는 옷을 입고 배알하러 들어갔다. 그가 궁중으로 들어가자 태종은 여러 왕자 왕손을 불러냈다. 이때 태종은
이 애가 나의 손자인데 어떠하오?
하고 하문하였다. 천석은 바로 세조를 가리키면서
그러나 형제간에 우애가 있도록 잘 지도하셔야겠나이다.
천석은 일찍이 야사(野史)를 저술하여 나무상자 속에 넣고 이에 자물쇠까지 채워서 깊이 감추어 두었는데 죽을 암시하여 집안 사람들을 불러 놓고 타일렀다.
저 책상자를 가묘(家廟) 안에 꼭 비장(秘藏)하되 어느 때나 잘 지켜야 한다.
이 상자 표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귀가 쓰여져 있었다.
 
我子孫, 不如我則, 不可開見
<내 자손이 나만 못하면 열어보지 말아야 한다.>
 
그 후 그의 증손댕 이르러 시제(時祭)가 있을 때 종족이 일당에 모이게 되었다. 이때 모인 종족들은
아무리 선조의 유언이 있을지라도 세월이 가고 또 가서 이젠 오래 되었으니 열어보아도 무방한 것 같다.
하고 결국 책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속에 있는 야사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거의 모두가 은휘하지 않고 사실대로 쓰여진 고려 말년의 사실이다. 따라서 내용이 국사와는 다른 점이 많을 것이다.>
 
이를 보게 된 종족들은
이것은 우리를 원씨 종족을 멸족함에 알맞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볼 것은 다 보았으니 이제 불에 태워버리자.
불 속에 넣고 말았다.
천석은 고려 말년에 있어서 곧은말 하기로 가장 유명했고, 또는 우국(憂國)하는 사람으로도 가장 유명했다. 그의 분묘는 오늘의 원주 치동서 십리가 떨어진 석경촌(石鏡村)에 있어 행인 과객으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게 한다.
 
 
5. 李 崇 仁 (號는 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자(字)는 자안(子安)으로 경산부(京山府)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다. 일찍이 정도전이 숭인과 함께 이색에게로 나아가 학문을 배웠는데 재주는 비등하였으나 그 인격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이성계가 왕업을 성취함에 있어 도전은 성계의 중신이 되었다. 이때 도전은 자기의 사람인 황거정(黃居正)을 숭인이 귀양가 있는 적소로 보내 숭인을 곤장으로 때려 죽이게 하였다.
숭인은 당초부터 정몽주 당의 한 사람이었는데 무슨 일로 영남으로 추방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거정은 도전의 명령을 받고 영남으로 가서는 하룻동안에 숭인에게 곤장을 수백 대나 가하고도 그를 결박하여 말에 태우고 수백 리나 떨어져 있는 곳으로 달
리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마침내 처참히 죽고 말았다.
 
 
6. 金 震 陽 (號는 草屋子)

김진양(金震陽)의 자(字)는 자정(子靜)이다. 공민왕조에 이르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時)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당시의 간관(諫官)과 더불어 조준 및 정도전을 규탄한 일이 있었다. 포은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는 곤장을 백도나 얻어 맞고 먼 곳으로 귀양가 있다가 적소
에서 죽고 말았다.
 
 
7. 趙 (號는 松山)

조견(趙 )은 평양 사람으로 자(字)는 종견(從犬)이다. 조준(趙浚)의 아우로 고려시대에 지신 안렴사(知申按廉使)로 있었다. 그는 형 준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말을 듣고 형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형님,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임을 모르십니까? 우리 집안은 마땅히 나라와 존망을 함께 할 집안이올시다.
이 말을 들은 준은 견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견을 영남으로 파견하여 안찰에 종사케 하였다.
그러나 견이 돌아오기도 전에 고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 소문을 듣고 견은 돌아올 생각이 나지 않아 소리를 높여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때 상감은견에게 호조전서(戶曺典書)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다.
그러나 견은
나는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먹고 살지언정 성인(聖人)의 백성은 되고 싶지 않소.
대답한 후 뒤이어 이름을 견( =본래의 이름은 윤(胤))이라 고치고 자를 종견(從犬)이라 개 칭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죽지 않았기 때문에 개에 비해 이렇게 지은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을 고친 후 견은 두류산에서 청계산(淸溪山)으로 들어갔다. 매일같이 최고봉으로 올라가 고려 서울을 내려다보면서 통곡하곤 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그 산의 최고봉을 망경(望京)이라 불렀다. 당시의 임금 이태조는 절의에 감동하여 그를 만나보기를 원하였다.
태조의 원이 간절했으므로 조견은 나와 태조를 만났으나 태조에게 고개만 숙이고 대배(大拜)는 하지 않았으며 또 말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했다. 태조는 그의 언동을 문제삼지 않고 용서하였다. 왕은 이와 같은 일이 있은 후 어디서나 살기 좋은 곳을 택하여 거주할 것을 특별히 허락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집도 지어 줄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나라에서 지어준 집에는 들어가 살지 않고 양주 송산(楊州松山)으로 들어가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그가 아호(雅號)를 송산(松山)이라 지은 것은 송산에서 살게 된 때부터였다.
견이 청계산으로 들어가 은신하고 있을 때 당시 형 준은 태조의 좌명공신이 되어 있었으므로 자기 아우에게 무슨 재앙이 미칠까 걱정하고 개국공신권(開國功臣券)에 아우의 성명을 기입하고 이것을 가지고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견은 한사코 이를 받지 않고 이름을 고치고
만 것이다. 그리고 태조가 어느때 친히 청계산으로 거동하여 그에게 큰 벼슬을 준 일이 있었으나 굳이 사퇴하고 말았다. 그는 죽을 임시에 아들과 손자를 불러
나는 이제 죽을 것이다. 나의 묘표(墓表)에는 고려시대의 관직만 쓰고 이조의 것은 절대로 쓰지 말라. 그리고 너희들은 신조(新朝)인 이조로 나아가 벼슬을 하지 말아라.
이르고 절명하였다.
 
 
8. 金 濟 兄弟

김제(金濟)의 호는 백암(白巖)으로 선산 사람이다. 고려 말년에 김제는 평해(平海) 군수로 있었는데 고려가 망하자 배를 타고 외로운 섬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조 정종(定宗) 때에 해상에 단을 만들어 놓고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는데 그의 아우 주(做)와 함께 일원(一院)에
다 수용(收容)하고 제를 올렸으며 나라에서는 고죽(孤竹)이라 쓴 액(額)을 하사하였다.
그의 아우 주(做)의 자는 택부(澤夫)이고 호는 농암(籠巖)이었다.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양왕 사년에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복(朝服)이며 쌍화(雙靴)를 벗어서 종에게 주어 자기 아내에게 전하게 하고 동시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보냈다.
 
<총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라오. 내가 귀국할지라도 몸 둘 곳이 없겠으므로 이것들만 대신 보내는 것이요.>
 
 
9. 禹 玄 寶 (號는 養浩堂)

우현보(禹玄寶)의 자(字)는 원공(原功)으로 단양(丹陽)사람이다. 공민왕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신우왕 십이년에는 조민수(曺敏修), 장바온(張子溫), 하윤(河崙)과 함께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창(昌) 이년에 김행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신우왕을 여흥에서 맞고 비밀히 정몽주와 더불어 음모를 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이 현보를 체포하여 형에 붙일 것을 청하였으나 창(昌)이 듣지 않아 면관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란 벼슬을 하였다. 그런데 공양왕조에 이르러서 또 무슨 일에 관련되어 붙잡히게 되었다. 그랬다가 특사로 석방되자 당시의 대간들은
그건 안 됩니다.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고 왕에게 글을 올렸다. 그러나 왕은 현보의 손자 성범(成範)이 부마(駙馬)였으므로 철원으로 추방하고만 말았고 또 그의 아들 홍수(洪壽)와 홍부(洪富)는 멀리 귀양을 보냈다. 그래도 얼마 후 쉽사리 용서를 받고 다시 복관(復官)되었다.
정몽주가 죽음을 당할 즈음에 그는 또 계림(鷄林)으로 귀양을 갔고 다음 해에 고려 왕조는 끝나고 말았다. 정몽주가 살해를 당하자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다 겁을 집어먹고 그의 피살 장소에 가지를 못하였다. 이때 현보만이 천마산(天摩山)중 하나와 같이 수의와 관곽을 만들어 가지고 가서 길지(吉地)를 택하여 안장케 하였다.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현보를 <장한 사람> 이라고 칭송하였다.
그가 죽자 이조에서는 그에게 단양백(丹陽伯)이란 작호 이외에 의정부 영의정이란 벼슬과 충정공이란 시호를 내림과 동시에 숭양서원(崇陽書院=정몽주를 모신 곳)에 배향케 하였다.
 
 
10. 曺 信 忠 (號는 未詳)

조신충(曺信忠)은 창녕(昌寧) 사람이다. 신우왕 구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하윤, 이숭인, 이색과 더불어 의좋게 지냈다. 우(禑)와 창(昌)이 서로 전후하여 폐립케 되자 그는 모든 것을 내버리고 영천군(永川郡) 창수면(滄水面)으로 가 살기 시작했다. 고려가 멸망한 후 하윤이 영의정으로 있게 되자 하윤은 신충을 장재(將才)가 있는 사람으라고 나라에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즉위 후 오년되는 해에 그에게 강계도 병마사겸판희천군사(江界道兵馬使兼判熙川郡事)란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한 번 서울에 왔다가 얼마 안 되어 시골로 물러가 버렸다. 이것은 이색과 더불어 거취를 함께 하기 위함이었다. 신충의 아들 상치(尙
治)는 재사였다. 그가 정시(庭試)에 장원급제를 하자 이를 안 태종은 상치를 보고
네가 왕씨의 충신 조신충의 아들이지?
하고는 당석에서 상치에게 정언(正言=사간원의 한 벼슬)이란 벼슬을 내렸다.
 
 
11. 李 皐 (號는 忘川)

이고(李皐)는 여흥 사람이다. 공민왕 갑인(甲寅)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가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승진되었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그는 수원 광교남탑산(水原光敎南塔山)으로 물러가 호를 망천(忘川)이라 자호하였다. 이는 세상의 근심을 잊어버리겠다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었다.
어느 때 공양왕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무엇에 재미를 붙이고 지내는가?
고 묻게 하였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산수(山水)에 맘을 붙이고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곳에서 그날 그날을 보냅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활달한 성격의 소요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러한 사람이었으므로 태조는 즉위와 동시에 그를 경기도 안렴사(京畿道按廉使)로 기용하려고 몇 번 소명(召命)을 내렸으나 한 번도 소명에 응한 일이 없었다.
 
 
12. 李 集 (號는 遁村)

이집(李集)의 자(字)는 호연(浩然)으로 광주(廣州)사람이다. 고려 충숙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고려시대의 벼슬이름)에 이르렀다. 그는 학문 뿐만 아니라 지절(志節)도 남에 뛰어나 포은, 목은, 도은 등 세선배는 그를 특별히 사랑하고 높이 보았다.
신돈(辛旽) 문객에게 미움을 받아서 불의의 화(禍)를 입게 되자 그는 아버지를 업고 남방으로 도망해 와 영천 최사간원도(永川崔司諫元道) 집에 은신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신돈이 피살되어 조정에서 없어지자 그는 다시 여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주로 돌아온 후부터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말았다. 그가 죽자 광주 구암서원(廣州龜岩書院)에 배향하였다.
 
 
13. 南 乙 珍 (號는 未詳)

남을진(南乙珍)은 의령 사람이다. 공민왕 시절에 벼슬이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까지 이르렀다. 성질이 강직하고 정몽주, 길재와 친교를 맺고 지냈다. 고려 말년에 이르러 정치가 문란해짐을 보고 사천(沙川)이란 곳으로 물러가 은신하고 말았다.
태조는 등극하게 되자 남을진을 잠저(潛邸) 시대부터의 고인이었다 하면서 친히 편지를 써서는 을진의 친조카인 재(在)를 시켜서 전하게 하였다.
재는 태조의 편지를 가지고 을진에게로 가 전하고 출려(出廬)하기를 권하였다. 이때 을진은
나는 이미 늙었다. 나는 암혈(岩穴) 속에서 죽을 작정이다.
할 뿐 한사코 출려를 응하지 않았다. 을진에게서 이런 대답이 나오자 재는 울면서 부탁했다.
아저씨! 좀 더 생각해 보시고 마음을 돌리십시오.
그러나 여전히 을진은
두 말할 것 없다. 나는 백이(伯夷)를 본받아 서산에서 고사리를 씹으면서 죽고자 한다.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재는 더 권할 용기가 나지 않아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였다.
이때 영의정 조준은
남을진은 지절이 높은 사람이올시다. 굴하고 들어오지 않을 것이오니 이를 살피시고 제 뜻대로 살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아뢰오.
태조에게 진언하였다. 이 말에 태조는 한숨을 짓고는
나는 그런 높은 선비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려 보고 싶었는데 출려하기를 싫어하니 별 도리가 없구나!
하고 을진이 거주하는 땅 이름 사천을 따라 사천백(沙川伯)이란 작호를 내렸다. 이런 일이 있게 되자 을진은 탄식했다.
내가 좀 더 깊이 들어갔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텐데 잘못했다. 참 잘못했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 산발을 하고는 감악산(紺岳山)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죽자 산 중에 사는 사람들은 그가 숨어 살던 굴을 남선굴(南仙窟)이라 명명(命名)한 후 굴 속에다 돌을 세워 전면에 을진의 소상(小像)을 조각하고 전면 상에
入山而效伯夷之節, 披髮而慕箕子之狂
<산으로 들어와선 백이의 높은 절개를 본 받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기자의 광태를 흠모하였다.>
이라 글을 새겼다.
이때부터 그는 사천서원(沙川書院)에서 제사를 받게 되었다.
 
 
14. 許 棹 (號는 擎庵)

허도(許棹)는 고려 시절에 진사(進士)로 있던 사람이다. 고려가 망하자 환로(宦路)에서 물러나 여조 진사로 늙어 죽고 말았다.
 
 
15. 宋 愉 (號는 雙淸堂)

송유(宋愉)의 자(字)는 이숙(怡叔)인데 은진 사람이다. 사복정(司僕正)으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회덕으로 물러가 은거 하였다.
 
 
16. 許 錦 (號는 堂)

허금(許錦)의 자는 재중(在中)으로 양천(陽川) 사람이다. 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 문경공(文敬公) 공(珙)의 현손이고 평장사(平章事) 백(伯)의 손자며 지신사(知申事) 강(綱)의 아들이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리판사(典理判事)에 이르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체약하여 병 속에서 살게 되자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고려가 멸망하자 그는 시골로 돌아가 일생을 보냈다.
 
 
17. 許 徵 (號는 未詳)

허징은 양천 사람이다. 현령(縣令)으로 있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길주로 들어가 야인이 되어 여생을 보냈다.
 
 
18. 許 麒 (號는 湖隱)

허기(許麒)는 김해 사람으로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까지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고 말자 자취를 감추고 두문동(杜門洞) 현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 李 養 中 (號는 石灘)

이양중의 자(字)는 자정(子精)으로 광주廣州)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부(刑部=오늘의 사법부) 좌참의(左參議)로 있었다. 나라가 이성계에게로 돌아가자 지조를 굳게 지키고 소명에 응하지 않기 때문에 귀양살이도 하였다.
그와 태종은 고우(故友)였으므로 특별히 그에게 한성판윤(漢城判尹=오늘의 서울시장)이란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이를 굳이 사퇴하고 받지 않았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그를 광주 구암서원에 합사케 하였다.
 
 
20. 李 養 蒙 (號는 岩灘)

이양몽(李養蒙)은 석탄(石灘) 이양중의 아우이다. 고려조에 벼슬이 대광판도판서(大匡版圖判書)에 이르렀다. 이성계의 즉위 후부터 그의 형 석탄과 더불어 광주 취리(廣州鷲里)로 물러갔다.
태종은 광주로 가 옛날의 도우(道友)를 찾아보려 했지만 양몽은 원적산(元積山)이란 곳으 로 도피하고 말았다. 그는 이에만 그치지 않고 자손을 보기만 하면
너희들은 과거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과거에 참가하는 것은 나의 지절을 짓밟는 행위가 될 것이니 이를 명심하고 과거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고 준절히 타일렀다.
이조 세조(世祖)조에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서연(書筵)을 베풀었을 때 절의(節義) 문제를 내걸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때 세조가 물었다.
이양몽에게 아들, 손자가 있느냐?
재신중의 한 사람이
이양몽의 현손(玄孫)되는 명인(明仁)이 신의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
대답하였다. 세조는 이 말을 듣고 당석에서 명인으로 하여금 정릉참봉(貞陵參奉)의 직을 갖게 하였다. 이 소식이 명인에게 전달되자 명인은
조상의 유교(遺敎)를 지키기 위해서는 하명(下命)에 응할 수 없다.
하고 일가 권속을 거느리고 두역(斗驛)이란 곳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21. 朴 愈 (號는 未詳)

박유(朴愈)는 울산 사람이다. 고려조의 한림(翰林)으로 남평감무(南平監務)로 봉직하였다. 고려가 멸망되자 벼슬을 내 버리고 임존(任存=오늘의 대흥)에 은신하고 말았는데 그의 자손은 이대에 이르도록 이조에 들어와 벼슬을 하지 않았다.
 
 
22. 尹 忠 輔 (號는 自號)

윤충보(尹忠輔)는 무송(茂松) 사람이다. 그가 안성군수로 있을 때에 나라가 망하자 가지고 있던 군수의 직을 던져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하고 말았다. 나라에서는 그를 몇 번이고 불렀으나 한사코 이에 응하지 않고 고려처사로 자호 하였다. 날마다 높은 고개 위로 올
라가 송경(松京)을 내려다보면서 분향(焚香)하고 절을 하였는데 이렇게 함을 단 하루도 궐한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그 고개를 가르켜 왕망현(王望峴)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가 여기에서 은신하려 할 때에 백학 한 떼가 그를 에워싸고 있었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은 한곡선생( 谷先生)이라 불렀다. 그는 죽음이 가까워지자 가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부탁했다.
나 죽은 후 비갈(碑碣)을 세워 주지 말고 또 무덤은 만들되 꼭 고려식으로 하라.
 
 
23. 李 倚 (號는 未詳)

이의(李倚)는 부평 사람이다. 그는 고려의 세신(世臣)으로 유명하던 집안의 후예이다. 고려가 망하자마자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이조는 그를 역신(逆臣)으로 간주하고 부평군 자연도(紫烟島)란 섬에 추방하고 동시에 재산까지 몰수했다.
 
 
24. 崔 文 漢 (號는 忠齊)

최문한(崔文漢)은 강릉 사람이다. 고려 충숙왕의 부마(駙馬)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강릉으로 돌아가 세상을 보냈다.
 
 
25. 曺 義 生 (號는 未詳)

조의생(曺義生)의 자는 경숙(敬叔)으로 가흥(嘉興) 사람이다. 그는 개성윤(開城尹) 인(仁)의 아들로 글 읽기를 좋아했고 또는 기절(寄節)로, 언론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리하여 약관시대(弱冠時代)부터 정몽주, 길재의 문하에서 놀게 되었는데 그들은 어느 때나 조의생을 우리의 외우(畏友)라 부르면서 사랑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말자 그는 임선미(林先味)와 더불어 산중으로 들어가 죽고 말았다. 후에 임선미와 함께 표절사(表節祠)에 합사되었다.
 
 
26. 金 士 廉 (號는 未詳)

김사렴(金士廉)은 안동 사람이다. 평장사(平章事) 방경(方慶)의 후예였다. 소년시대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사(文詞)가 남달리 섬부했다. 공민왕 초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오늘의 감찰원장)에 이르렀고 정몽주, 이색과 가까이 지냈다. 그는 직간자(直諫者)
로도 이름을 떨쳤는데 일찍이 신돈(辛旽)이 용사하기 시작하자 상소를 올렸다.
신돈은 옳은 사람이 아니올시다. 반드시 후일에 국사가 어지러워지고 고려의 사직이 위태해질 것이올시다.
그런데 여조가 망하고 이성계가 왕위에 나아가자 사렴은 청주로 가서 은신하고 말았다.
그는 은둔생활을 하는 동안 한 번도 대궐을 향해 앉은 일이 없었다. 어느 때나
<열녀는 불경이부요,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낭송(朗誦)하면서 그날 그날을 지냈다.
태조는 사렴으로 하여금 좌사간(左司諫)의 직에 있게 하기 위해 몇 번이나 그를 불렀다.
그러나 이에 불응하고 도산(陶山)으로 들어가 두문함에만 그치지 않고 빈객의 내방도 거절하고 지냈다. 그는 임종에 자식들에게 간곡한 유언을 남겼다.
나는 고려의 구신(舊臣)이다. 그러나 나라가 있을 때엔 임금을 옳게 보필하지 못했고 또는 나라가 망함에 이르러는 몸을 바치지 못했으니 천하의 죄인이다. 무슨 면목으로 지하로 돌아가서 왕이며 선인(先人)들을 뵙는단 말이냐? 내가 죽거든 심산궁곡속에 묻되 봉토(封
土)도 하지 말고 비갈도 세우지 말 것이며 또 내 자손 중에 이미 이조에 들어가 벼슬을 하는 자가 있으면 계속하지 못하도록 하라.
향리의 사부(士夫)들은 그의 지절에 감동하여 송천(松泉)이란 곳에 사당을 짓고 그에게 춘추로 제향(祭享)을 하였다.
 
 
27. 林 先 味 (號는 休庵)

임선미(林先味)는 평택 사람으로 태학생(太學生)이었다. 영조조 신미(英祖朝辛未)에 서필로 비를 세워 줌과 동시에 제사를 올렸다.
또 정조(正祖)조에 이르러서는 사당을 짓고 사액(賜額)을 해 그의 고절을 표창하였다. 그는 두문동 절신(杜門洞節臣)의 한 사람이다.
 
 
28. 曺 希 直 (號는 未詳)

조희직(曺希直)은 가흥(嘉興) 사람으로 벼슬은 사간원의 정언(正言)이었다.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 배척상소를 하다가 도리어 미움을 받아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고려가 망함에 가흥 몰가에다 압구정(押鷗亭)을 짓고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29. 高 天 祐 (號는 未詳)

고천우(高天祐)는 개성 사람으로 벼슬이 총제(總制)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부조현(不朝峴)에다 관(冠)을 벗어 던지고 물러나 두문동 절신(杜門洞節臣)이 되었다.
 
 
30. 田 祿 生 三兄弟

전녹생(田祿生)은 담양 사람으로 자는 맹경(孟耕) 호는 야은(野隱)이다. 신우왕 을묘(乙卯)에 각관 이첨(李詹)과 함께 간신 이인임(李仁任)을 죽여 없애고자 나라에 소청(疏請)하였다.
이때 정몽주도 이 소청에 참가하였다. 그러다가 박상충이 주모자로 지명되어 전녹생은 함께 장류(杖流)로 치죄되어 귀양을 가다가 중도에서 죽고 말았다. 고려는 그를 찬화보리공신(贊化輔理功臣)으로 봉함과 동시에 그에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란 벼슬과 문명(文明)이란 작호까지 내렸다.
전귀생((田貴生)은 녹생의 첫째 아우이다. 자는 중경(仲耕), 호는 뇌은( 隱), 벼슬이 삼사좌윤(三司左尹)에 이르렀다. 저서로 언지록(言志錄)이 있다.
고려가 망하자 조천관(朝天冠)을 벗어던지고 평양립(平陽笠)으로 바꾸어 쓰고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면 농번이를 뉘 알아주리!
하고 섬으로 도망해 버렸다. 그의 생사를 아는 이란 하늘 뿐이었다.
전조생(田祖生)은 녹생의 둘째 아우이다. 자는 계경(季耕), 호는 경은(耕隱)이로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원(문元)이라 불렀으며 문장과 도덕이 정몽주에 못지 않았다.
 
 
31. 高 天 祥 (號는 未詳)

고천상(高天祥)도 개성 사람인데 고천우와 형제간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조천관을 부조현에 벗어던지고 말했다.
나는 고려의 신하였다. 나는 누가 뭐라거나 상관없이 신하로 있던 절의만 지키겠다.
 
 
32. 李 行 (號는 騎牛子)

이행(李行)은 여주 사람으로 자는 도주(道周), 태사(太師) 인덕(仁德)의 후예요, 목사(牧使) 천백(天白)의 아들이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大提學)에까지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절(文節)이라 불리웠다. 고려가 망하고 말자 그는 은둔하여 이태조의 내방(來訪)도 거절하였다.
 
 
33. 李 嶠 (號는 桃村)

이교(李嶠)는 철성(鐵城) 사람으로 자는 모지(慕之), 철성군 우(瑀)의 아들이요, 철성 부원군암( )의 아우이다. 고려 충숙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고려시대의 벼슬이름. 이조의 이조판서에 해당하는 것)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당시의 권신(權臣)을 탄핵했기 때문에 화가 신상에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병고를 청탁하고 시골로 돌아갔다.
태조가 친히 찾아와 그를 보려 하였으나 태조와 만나지 않고 깊은 산속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그 후 그가 죽자 고성 갈천서원(固城葛川書院)에 배향케 하였다.
 
 
34. 李 釋 之 (號는 南谷)

이석지(李釋之)는 영천(永川) 사람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 흡(洽)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오직 산수에다 마음을 붙이고 살다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는데 나라에서는 그를 광주대치서원(光州大峙書院)에 모시게 하였다.
 
 
35. 金 子 進 (號는 首山亭)

김자진(金子進)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문숙공(文肅公) 주정(周鼎)의 후예이다. 고려 말년에 벼슬이 금위사정(禁衛司正)이었고 이성계가 임금이 되자 나주로 물러가 살았다.
태조는 의정부 우의정으로 임명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불렀으나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정산(牛井山) 아래에다 정자를 짓고 정자 이름을 수산정(首山亭)이라 명명(命名)한 후 정자이름으로서 호를 삼고 천일(天日)을 보지 않으며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36. 李 致 (號는 未詳)

이치(李致)는 합천(陜川) 사람으로 자를 가일(可一)이라 불렀다. 제학(提學) 원경(元慶)의 손자로 처음 이름은 감(敢)이었는데 고려가 망하자 치(致)로 고쳤다. 이는 고려의 멸망을 치명사(致命事)로 보고 고친 것이다.
신우왕조에 문과 급제하여 간관(諫官)으로 있게 되었으며 사람됨이 지극히 강직하여 감언지사(敢言之士)로 유명하였다. 이러했기 때문에 현무(縣務)로 좌천이 된 일도 있지만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란 벼슬을 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만수산 두문동(萬壽山杜門洞)으로 들어가 버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詩)를 지어 자기의 심중을 피력하였다.
 
生爲王氏臣
(살아선 왕씨의 신하이고,)
死爲王氏鬼
(죽어선 왕씨의 귀신되겠다.)
 
태조가 몇 번이나 그를 불러 찬성사(贊成事)란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한사코 이를 받지 않고 합천군 이상곡(陜川郡二上谷)의 향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곳의 산을 송여현(松如峴), 그 동리를 두암동(杜 洞)이라 이름 짓고 낚시에 낙을 붙이고 살다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는데 옛집에는 충신문(忠臣門)이 세워져 있다.
 
 
37. 車 原 부 (號는 雲巖居士) <<한자가 없다니..부(兆+頁)>>

차원부(車原부)는 연안 사람이다. 일찍이 나라에서 요동(遼東)을 정벌하려 하자 원부는 그 불가능함을 역설하였다. 태조가 이 때문에 거의회군(擧義回軍)하였고 따라서 나라에서는 그를 공신으로 봉하였다. 그 후 태조가 등극함에 이르러 조준 등은 원부를 참공권(參功券)에 기입하려 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또 태조가 등극한 후 몇 번이나 불렀으나 이에도 역시 불응하고 송원(松原)이란 곳으로 돌아가다가 정도전, 하윤 등의 철퇴를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 원부가 죽자 그의 내외 친족 팔십여인도 연좌되어 살해되고 말았다.
또 인부는 원부의 족제(族弟)인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불출하고 지냈으나 원부가 죽게 되자 그도 역시 연좌되어 선산으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생사를 알 수 없었다.
 
 
38. 金 自 粹 (號는 桑村)

김자수(金自粹)의 자는 순중(純仲)으로 경주 사람이다. 고려시대에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있었고 또 그의 마을에는 효자비(孝子碑)까지 세워져 있었다. 태조가 등극한지 얼마 안 되어 태조는 옛날 친구인 그를 등용하고자 맨 처음에 불렀다. 그러나 그는 두문하고 응하지 않았다. 후에 태종은 쓸만한 인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형조판서(刑曺判書)의 직을 주며 불렀다.
그는 이 소명을 받자 즉시로 가묘(家廟)에 고별한 후 아들에게 수의며 관곽을 준비해 가지고 따라오게 하고는 그날로 출발하여 광주(廣州) 추령(秋嶺)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들에게 일렀다.
이 땅은 곧 나의 죽을 땅이다. 여자도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데 하물며 남의 신하가 되어서 이성(二姓)의 임금을 섬긴단 말이냐. 나는 벌써부터 두 임금을 안 섬기기로 결심했다. 너는 마땅히 나를 이 추령 곁에 묻되 비석 같은 것은 세우지 말아라. 나는 그저 초목과 함께 썩어 없어지련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겨 놓고 정포은(몽주)의 의대(衣帶)를 감추어 둔 추령에서 음독자결을 하고 말았다.
 
平生忠孝意
(평생에 충효를 다하려던 마음)
今日有誰知
(오늘에 와서 아는 이 그 누구리)
39. 李 元 桂 (號는 未詳)
 
이원계(李元桂)는 태조 이성계의 서형(庶兄)인데 자도 역시 원계였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고 또 명나라에 가서 문과에 참가하여 역시 급제하였다.
공민왕조에 이르러 국사는 나날이 그릇되어 갔다. 정도전, 조준 등은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하자 원계는 온갖 말로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마침내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되었는데 때는 태조 이성계 즉위 전 이십일이었다. 원계의 유언에 의하여 고려시대의 관직 — 곧 고려시중휘원계자원계(高麗侍中諱元桂字元桂)라 써서 비를 세웠고 이조로부터의 증직(贈職)은 써 넣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훗일에 이르러 완산백(完山伯)이란 작호를 내렸다.
 
40. 元 庠 (號는 未詳)

원상(元庠)은 원주 사람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 송수(松壽)의 아들이었다. 공민왕조에 이색과 함께 무서운 국문(鞫問)을 받게 되었지만 그는 혹형(酷刑)에도 굴하지 않았다. 정몽주의 소구(疏救)에 의하여 극형만은 면하고 귀양살이를 갔다가 임신(壬申)에 대사(大赦)가 있자 풀려 장단으로 돌아와 대덕산 밑에서 그날 그날을 보냈다.
태조는 일찍부터 그의 덕망에 감동하여 몇 번이나 소명(召命)을 내렸으나 몸에 병이 있음을 빙자하고 소명에 응하지 않고 지내다가 천수가 길지 못하여 죽고 말았다. 태조는 그의 지조에 감동하여 그가 죽자 희정(僖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41. 都 膺 (號는 魯隱)

도응(都膺)은 성주(星州) 사람으로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까지 이르렀다. 기사(己巳)에 화변이 있는 이후 산간에 은신하고 당시의 세상과는 절연을 하고 지냈다. 태조는 옛 친구였던 그를 다섯 번이나 불렀으나 한번도 응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태조는 그의 절의를 대단히 보고 청송당(靑松堂)이라 쓴 액(額)을 하사하였고 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내렸다.
 
愛看靑松節
(청송의 절개 사랑스러이 보아)
貞幹手以摩
(곧은 줄기를 손으로 어루만지다)
寒岡千 上
(천길이나 되는 추운 뫼 위에 있건만)
霜雪不會磨
(눈 서리에 상함이 없도다)
 
42. 韓 哲 (號는 夢溪)

한철충(韓哲 )은 청주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전법판서(典法判書)에까지 이르렀다. 고려가 멸망하게 되자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상주 수염산(尙州首厭山)으로 들어가 은둔하고 말았다. 학문이 섬부하고 식견이 고매하였으므로 일찍부터 이초은(李樵隱)과 가까이하고 지냈다. 그는 산 속으로 들어간 후 다음 과같은 시를 지어 자기의 심중을 피력하였다.
 
落日淸溪上
(해저문 청계상에)
閑臥夢前朝
(한가이 누워 지난날의 고려만을 꿈꾸고 있네)
 
 
43. 朴 剛 生 (號는 蘿山耕隱)

박강생(朴剛生)은 밀양 사람으로 자를 일컬어 유지(柔之)라 했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찬정부사(參贊政府事), 또는 집현전 제학에 이르렀다. 그는 문장으로도 저명하였고 또는 배불론자(背佛論者)로도 유명하였다.
태조는 재주를 아껴 그에게 호조전서(戶曺典書)란 벼슬을 내림과 동시에 그의 공훈을 기록하게 했다. 그러나 모두 다 받지 않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44. 許 邕 (號는 迂軒)

허옹(許邕)은 고려 충숙왕조에 등과하여 벼슬이 전리판서(典理判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던 사람인데 강직(剛直)으로 이름났다. 그는 정국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간파하고 벼슬을 내놓고 단성(丹城)으로 돌아가 낚시에 마음을 붙이고 지냈다.
그러던 중 태조가 임금이 되자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고 두문하고 지내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45. 金 若 時 (號는 未詳)

김약시(金若時)는 광주(光州) 사람이다. 그는 태조와 동년생으로 문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진현관 직제학(進賢館直提學)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약시는 그의 부인과 함께 도보로 광주(廣州) 산 속으로 들어가 움막 같은 집을 지어 놓고 여기서 기거하였다. 촌사람이며 야로(野老)들은 의관과 거동이 이상해 보여 가끔 그 집으로 가 이것 저것 물었으나 그는 듣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때로 촌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그를 대접하려 하였지만 이 대접도 받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의 행동이 이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태조는 사람을 시켜 그의 거처를 찾게 하였다. 소재가 알려지자 태조는 그에게 특별히 성명방(誠明坊) 집을 하사하고 또는 송헌(松軒)이란 호를 친히 보냈다. 뿐만 아니라 태조는 그를 원관(原官)으로 기용하기 위하여 또 부르자 눈이 어두어졌다 빙자하고 그것도 받지 않았다. 어느날 가인에게
나는 망국대부(亡國大夫)이다. 죽어야 할 사람인데 죽지 못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상의 분묘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여기에 묻되 봉토(封土)도 할 것 없고 비도세울 것 없다.
고 당부했다. 그가 죽자 유언에 의하여 안장을 하였으나 이조 순조 십구년에 이르러 광주 유생 유의주(兪 柱) 등의 발기로 증직사시(贈職賜諡) 운동이 전개되어 마침내 이조판서란 중직과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46. 李 芳 雨 (號는 未詳)

이방우(李芳雨)는 태조 이성계의 제 일남이다. 태조가 신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는데 이때 방우는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에 이르러 태조가 고려조에 군림하려는 뜻을 단단히 품고 있음을 알고 서울(開城)로 돌아오지 않고 해주로 들어가 여기서 일생을 보내고 말았다.
태조는 그를 진안대군(鎭安大君)으로 추봉(追封)하며 진안은 우리 집의 백이(伯夷)요, 숙제(叔齊)다.
라고 칭찬하였다. 후에 나라에서는 청성사(淸聖祠)를 건조하여 매년 춘추에 제사를 올리게 했다.
 
 
47. 李 午 (號는 茅隱)

이오(李午)는 재령 사람으로 진사(進士) 급제를 하였다. 고려가 망하려던 어느날 밤에 판서 성용(成庸), 평리사 변윤(卞贇), 박사 정몽주, 전서(典書) 김성목(金成牧), 대사성 이색 등을 우연히 만났다. 이중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은(殷)나라에 세 어진 사람이 있었는데 첫째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어디론가 없어지고 기자(箕子)는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우리의 거취는 우리 마음대로 결정 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은
그 말이 옳다. 자결하기로 하자.
하고 찬동하였다. 이오는 고향으로 가고 이 말을 전해 들은 단구(丹邱) 김후(金厚)는 상산(商山)으로 전서 조열(趙悅)은 함안함안(咸安)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가 소리없이 세상을 떠났다.
 
 
48. 李 陽 昭 (號는 琴隱)

이양소(李陽昭)는 순천(順天) 사람으로 대언(代言) 사고(師古)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그는 태조의 옛날 친구며 또 동방(同榜=똑같이 과거에 합격하였다는 말)의 친구였다. 고려가 망하자 은둔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태조는 사람을 시켜 백방으로 찾아 그가 사는 집을 알게 되자 친히 그를 찾아가 부탁했다.
나하고 손잡고 일 좀 해보지 않겠소?
그러나 굳이 사양하므로 태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고우(故友)였으므로 그에게 살고 있는 산을 하사함과 동시에 산명을 청화(淸華)라 지어 주었다. 훗일에 그가 죽자 이 산명을 따라 청화공(淸華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49. 權 定 (號는 思復 )

권정(權定)의 자는 안지(安之)이며 안동 사람이다. 태사(太師) 행(幸)의 후예로 고려 말년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있다가 구국의 도리가 없어 보이므로 안동 옥산(玉山)으로 돌아가 지명(地名)을 기사리(棄仕里)라 개칭하고 거기서 여생을 보냈다.
태조가 등극한 후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불응하였다. 그는 학식이 남달리 뛰어났으므로 사우(師友)로 존경을 받았고 또 그의 청풍고절(淸風孤節)은 야은(冶隱)에 못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죽자 영천(榮川=영주) 구호서원(鷗湖書院)에 합사케 하였다.
 
 
50. 崔 安 雨 (號는 竹溪)

최안우(崔安雨)는 낭주(朗州)사람으로 민휴공지몽(敏休公知夢)의 후예이다. 고려 말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소감(少監)에 이르렀으나 신돈이 국정에 참가하여 흔들기 시작하자 벼슬을 내던지고 돌아가 있다가 신돈이 주륙을 당하고 없어지자 다시 벼슬을 하였다.
이성계가 임금이 된 후 그를 직제학(直提學)으로 등용하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최후까지 이에 응하지 않고 영평도 성산(永平道成山)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51. 金 七 陽 (號는 康隱)

김칠양(金七陽)은 안동 사람으로 충숙공 승용(忠肅公承用)의 손자요, 가정(稼亭)의 문인이다. 고려 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참(吏參=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고려 멸망 후엔 금릉산중(金陵山中)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이조로 들어와서도 이조의 벼슬은 하지 않았다.
 
 
52. 李 思 敬 (號는 送月堂)

이사경(李思敬)은 성주(星州) 사람으로 고려 말년에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로 있었다.
그런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아들 다섯을 데리고 개령(開寧)으로 들어가 은둔하자 목은 이색이 작당기(作黨記)를 지어 써 붙여 주었다.
 
 
53. 李 邕 (號는 釣隱)

이옹(李邕)은 아산 사람으로 아산백(牙山伯) 주좌(周佐)의 후예이다. 고려 시절에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이조에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 등용하기 위하여 불렀으나 최후까지 응하지 않고 여생을 아산에서 보내면서 낚시에 낙을 붙이고 외로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54. 朴 門 壽 (號는 未詳)

박문수(朴門壽)는 고려 시절에 벼슬이 정승에까지 이르렀던 사람이다.
고려가 망하자 처음엔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남원으로 들어가 여생을 끝 마쳤다.
 
 
55. 具 鴻 (號는 松隱)

구홍(具鴻)은 능성 사람으로 벼슬이 좌시중(左侍中)이었는데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불의의 부와 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다름없을 것이다.
하고 부조현(不朝峴)에 올라가
백이가 별 사람이냐? 나도 그만한 사람은 되겠다.
하며 관을 벗어던지고 폐양자(蔽陽子)로 바꾸어 쓴 후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태조는 그를 좌의정(左議政)으로 등용하고자 몇 번이나 청했으나 그는 최후까지 응하지 않았다. 그는 임종에
나는 이제 죽는다. 내가 죽은 후 관직으로 신조(이조)의 관직은 쓰지 말라. 이것이 나의 부탁이다.
가인에게 일렀다. 그가 숨을 거두고 말자 그의 유족은 신조의 명령에 불복할 수 없어 명정에다 신조의 관직을 기입하였는데 별안간 바람이 불어 정백(旌帛)이 세조각으로 찢어졌다.
그래서 다시 정백을 준비해 놓고 여기에다 고려좌시중(高麗左侍中)이라 개서하니 정백에 바람이 불어 들지 않았다 한다. 후에 태종조에 이르러 그에게 좌정승(左政丞)이란 중직(重職)을 내리고 또 문절공(文節公)이란 시호를 내림과 동시에 장지(葬地)까지 하였다.
 
 
56. 金 漢 (號는 樹隱)

김충한(金 漢)은 경주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벼슬이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백이(伯夷)를 쫓아 서산의 고사리를 씹고 싶다.
하고 자기의 심정을 피력하였다. 처음엔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영남으로 가 숨어서 여생을 보냈다.
 
 
57. 閔 普 文 (號는 未詳)

민보문(閔普文)은 고려 시절에 군사(郡事)로 있었다.
고려가 망하자 처음엔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후에 적성(積城)으로 도피하여 거기서 일생을 보냈다.
 
 
58. 蔡 貴 河 (號는 未詳)

채귀하(蔡貴河)의 벼슬은 전서(典書)였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그의 심중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東瞻開城
(동으로 개성을 바라보니)
非復我土
(다시는 우리땅이 못될 것이고)
西望首陽
(서으로 수양산을 바라보매)
忍忘一心
(이 한마음 잊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와같이 심중을 피력하고 처음에는 두문동으로 갔다가 평산으로 피하여 여생을 보냈다.
 
 
59. 朴 湛 (號는 未詳)

박담(朴湛)의 벼슬은 전서(典書)였다.
처음엔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해주로 도피하여 여생을 보내다 죽고 말았다.
 
 
60. 李 孟 藝 (號는 未詳)

이맹예(李孟藝)의 벼슬도 진서였다.
고려가 망하자 담과 마찬가지로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엔 두문동에서 나와 해주로 도피하여 거기서 일생을 보냈다.
 
 
61. 閔 安 富 (號는 未詳)

민안부(閔安富)의 벼슬은 예의판서(禮儀判書)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호남(湖南)으로 도피하였다.

 

62. 金 先 致 (號는 未詳)

김선치(金先致)는 상산(商山) 사람으로 공민왕조에 호부랑(戶部郞) 벼슬을 했는데 홍두적(紅頭賊)을 토벌한 공으로 녹일등공 봉상산군(錄一等功封商山君)이 되었다가 낙성군(洛城君)으로 개칭되었다. 형 상낙군(上洛君) 득배(得培), 상산군(商山君) 득제(得齊) 등이 함께 원수가 되어 왜구를 도륙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삼원수(三元帥)라 불렀다.
왕조가 멸망되자 상산의 산양현(山陽縣)으로 물러나 채미(採薇)와 조어(釣魚)에 마음을 붙이고 여생을 보냈다. 그의 청풍고절(淸風高節)은 길야은(吉冶隱)에 비할 만하다.
 
 
63. 尹 璜 (號는 後松)

윤황(尹璜)은 남원 사람으로 벽성거사(碧城居士) 위(威)의 5세손인데 벼슬은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불출하고서 세월을 보냈다.
 
 
64. 趙 承 肅 (號는 德谷)

조승숙(趙承肅)의 자는 경부(敬夫)로 함안 사람이다.
고려시절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감무(監務)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함에 이르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 덕곡(咸安德谷)으로 돌아가 후진(後進)을 훈도하는 것을 그의 의무로 삼고 지냈다. 이 때문에 명유(名儒) 석사(碩士)가 많이 배출 되었다.
 
 
65. 趙 仁 壁 (號는 未詳)

조인벽(趙仁壁)은 한양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여러번 전공(戰功)을 세운데다 등주(登州)의 여러 성을 극복하고 또 사방의 봉강(封彊)을 회수하였기 때문에 한산백(漢山伯)이란 영작(榮爵)까지 받게 되었다.
그는 국명(國命)에 의하여 귀국하였다가 양양으로 들어가 고려 신하로서의 절개를 굳이 지키고 늙으려 했는데 환조(桓祖=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의 사위가 되었다.
 
 
66. 朴 暹 (號는 未詳)

박섬(朴暹)은 울산 사람이다. 고려 시절에 한림(翰林)으로 있다가 여조가 망하자 두문동 72인과 거취를 같이 했다.
그러나 나중에 임성(任城)으로 물러나와 여기서 일생을 소리없이 살았다.
 
 
67. 申 德 隣 (號는 醇隱)

신덕린(申德隣)의 자는 불고(不孤)로 고령 사람이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포은 정몽주 등 여러 석학들과 지기로 지냈는데 특히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고려가 망하자 피신하여 광주(光州)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아들 포시(包翅)의 호는 호촌(壺村)으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이조 태종과 동방진사(同榜進士)였으나 남원으로 돌아와 이조와 인연을 끓고 말았다. 그 역시 아버지와 같이 명필로 유명하였다.
 
 
68. 申 祐 (號는 退 )

신우(申祐)는 출천의 효자였다. 그의 아버지 판서(判書) 윤유(允濡)가 세상을 떠나자 무덤 곁에 여묘를 짓고 3년간 하루도 궐하지 않고 시묘하였다. 그의 효성에 천지신명도 감명했던지 무덤 앞에 한쌍의 청죽(靑竹)이 나 있어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효감(孝感)에서 생겨진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고려가 망한 후 태조는 그와 옛날 친구였으므로 고려조의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였던 그를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등용하기 위하여 몇 번이나 불렀으나 고사불응(固辭不應)하고 말았다.
 
 
69. 洪 魯 (號는 敬齊)

홍노(洪魯)는 부계(缶溪) 사람으로 죽계(竹溪) 민구(敏求)의 아들이다. 고려 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전조 고려를 위하여 지조를 굽히지 않고 일생을 보내고 말았는데 그의 저작으로 문집(文集)이 있어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70. 徐 光 俊 (號는 箕隱)

서광준(徐光俊)은 이천(利川) 사람으로 상서(尙書) 인(麟)의 손자다. 고려가 망한 후 기산(箕山)에 숨어서 이제(夷齊)의 절개를 흠모하고 여기서 일생을 보냈다.
이조에서 감정(監正)을 제수하고자 불렀으나 고사불응하였다.
 
 
71. 徐 仲 輔 (號는 積岩)

서중보(徐仲輔)는 장성 사람으로 소년시대부터 글을 좋아하였고 또 지조도 남달리 높았다.
고려의 국운이 완전히 기울어지자 그는 신조와 인연을 완전히 끊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나오자 않았다.
이조에서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우대 하고서 불렀으나 이에 불응하면서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없어졌는데 나의 갈곳이 어디란 말이냐?
몸에 불을 질러 죽고 말았다. 두문동 72인의 제 1인자다.
 
 
72. 白 莊 (號는 靜愼 )

백장(白莊)의 자는 명윤(明允)으로 수원 사람이다. 일찍이 포은 문하에서 수업을 했으며 나이 16세에 진사급제를 했고 20에 원(元)조 과거에 등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으며 고려 공민왕조에 이르러 벼슬이 광정대부 이부전서 보문각 대제학(匡靖大夫吏部典書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다.
때마침 국정이 여지없이 문란해지자 처자를 데리고 치악산 속으로 들어가 폐문불출(閉門不出)하고 말았다.
태조가 이를 알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해미(海美)로 추방하여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태종조에 이르러 특사가 있자 또 그를 이조판서로 등용하고자 불렀으나 역시 불응하였다. 태종은 그에게 충숙공(忠肅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73. 崔 七 夕 (號는 未詳)

최칠석(崔七夕)은 전주 사람이다. 칠석일(七夕日)에 일본 대마도전(對馬島戰)에 전공을 세웠으므로 나라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름을 칠석이라 부르게 하였고 또 나아가서는 대장군이란 직명을 갖게 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말자 종손(從孫) 양(瀁)과 함께 상향(桑鄕)이란 곳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태조가 거동하게 되었을 때 칠석과 양에게 소명(召命)이 내렸으나 칠석은 이미 죽어 없었던 때였으므로 태조는 그에게 부원군(府院君)이란 작호와 위정공(威靖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의 종손 양의 호는 만육당(晩六堂)으로 고려 시절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전주 대승동(大勝洞)으로 물러가 여기서 여생을 보내는 중 태종이 몇 번이나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또 하사한 전록(田祿) 등도 받은 일이 없었다.
 
 
74. 金 振 門 (號는 未詳)

김진문(金振門)의 자는 여집(汝執)이다. 김해 사람으로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인 감무익경(監務益卿)의 손자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 예의판서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목은 이색, 박학사 자검(自儉)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나 여생을 두문하고 보냈다.
 
 
75. 吳 憲 (號는 松庵)

오헌(吳憲)은 함평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벼슬이 낭장(郎將)에 이르렀으나 나라가 망하자 고려 신하로서의 절의를 끝까지 지키다가 죽고 말았다.
 
 
76. 李 元 發 (號는 隱峰)

이원발(李元發)은 연안 사람으로 상호군(上護軍) 정공(靖恭)의 아들이며 고려 시절에 벼슬이 전공판서(典工判書)에 이르렀다.
이조는 그에게 정승 벼슬을 주고자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77. 林 貴 緣 (號는 未詳)

임귀연은 여주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벼슬이 소윤(少尹)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이조로 나가지 않고 끝까지 수절하다가 죽고 말았다.
 
 
78. 蘆 俊 恭 (號는 未詳)

노준공(蘆俊恭)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절행(節行)이 남달리 특이하여 일찍부터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었다.
고려 말년에 예의가 땅에 떨어져 부모상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는데 이 중에서 3년상을 지킨 사람은 오직 노준공 뿐이었다.
그는 이성계가 임금이 된 후부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조에서 몇 번이나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태조는 감탄하며
노준공은 시속 사람이 아니다. 대경대법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참 포상함직한 사람이다.
하고 특별히 절효공(節孝公)이란 시호를 내려 표창함과 동시에 효자문을 세우게 했다.
 
 
79. 邊 肅 (號는 未詳)

변숙(邊肅)은 고려 시절에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던 사람이다.
고려가 망하고 말자 두문으로 들어가 여생을 외로이 보냈다.
 
 
80. 全 五 倫 (號는 採薇軒)

전오륜(全五倫)은 정선 사람으로 고려시절에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렀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또는 조송산(趙松山)과 더불어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되어 지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 부조현(不朝峴)으로 들어가 수양산 채미(採薇)를 본받아 채미헌이라 자호하였으며, 나중에 정선군 서운산(瑞雲山)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81. 全 信 (號는 栢軒)

전신(全信)의 자는 이립(而立)으로 성산 사람이다. 일찍부터 국제 권부(菊齊權溥)의 문하에서 학을 구하다가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진현관(進賢館) 대제학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굳은 절의를 지키면서 두문동으로 들어가 백헌(栢軒)이라 자호하였다. 태종이 친히 그의 사는 동리로 찾아갔으므로 동리의 이름을 왕방리(王訪里)라 개칭했다. 태종은 이 동리의 산을 하사함과 동시에 산 이름을 국사봉(國賜峰)이라 명명했으며 또 그가 죽자 문효공(文孝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82. 全 淑 (號는 未詳)

전숙(全淑)은 옥천(沃川)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그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져감을 보고 옥천으로 도피하여 여기서 여생을 보내고 말았는데 그가 살던 고을을 가리켜 기사천(棄仕川)이라 불렀다.
 
 
83. 孟 裕 (號는 未詳)

맹유(孟裕)는 신창 사람으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두문하여 여생을 보냈다.
 
 
84. 程 廣 (號는 巾川)

정광(程廣)은 고려 시절에 벼슬이 전중판시사(殿中判寺事)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여생을 숨어서 보냈다.
 
 
85. 裵 尙 志 (號는 栢竹堂)

배상지(裵尙志)는 평리 흥해군(評理興海君) 전(詮)의 아들이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이르렀으며 고려가 망함에 이르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촌(安東金鷄村)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86. 宣 允 祉 (號는 退休堂)

선윤지(宣允祉)는 선성(宣城) 사람이다. 명(明)조의 학사로 명나라 홍무(洪武) 년간에 고려로 와 공민왕조에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그 벼슬은 안렴사(按廉使)에까지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보성으로 가 살기 시작했으며 태종이 몇 번이나 그를 불렀으나 최후까지 불응하고 말았는데 그가 죽자 태종은 이조판서란 중직을 내렸다.
 
 
87. 范 世 衷 (號는 休厓)

범세충(范世衷)의 자는 여명(汝明)으로 금성(錦城) 사람이다. 고려조에 벼슬이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이르렀다.
성리학 연구에 전심을 기울였고 또 풍교(風敎)를 부식함에 전력을 다했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만수산 아래로 물러가 백이(白夷)를 본받아 지조를 지키다가 여생을 마쳤다.
 
 
88. 陶 東 明 (號는 雙栢堂)

도동명(陶東明)은 고려 시절에 남대장령(南臺掌令)으로 있었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신조(新朝)와 인연을 끊고 여생을 보냈다.
 
 
89. 鞠播와 鞠 (號는 )

국파(鞠播)는 담양 사람으로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있다가 고려가 멸망되자 여생을 두문하고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또 국유(鞠 )는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과 인연을 끊고 의로이 세상을 보냈다.
 
 
90. 金 仁 奇 (號는 梅隱)

김인기(金仁奇)는 파평 사람으로 고려 말년에 벼슬이 보승중낭장(保勝中郎將)에 이르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91. 沈 元 符 (號는 岳隱)

심원부(沈元符)는 청송 사람으로 고려 시절에 벼슬이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버렸고 또 부조현(不朝峴)에 이르러서는
나는 왕촉(王 )을 사모한다. 나는 고려의 왕촉이 되어야 하겠다.
자기의 심중을 피력하였다.
 
92. 宋 柱 (號는 未詳)

송주(宋柱)는 홍주(洪州) 사람으로 고려조에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태조가 등극하자 두 임금을 안 섬기겠다는 곧은 지조를 지키면서 홍양(洪陽=오늘의 홍주)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93. 姜 淮 仲 (號는 通溪)

강회중(姜淮仲)은 진주 사람으로 자를 중부(仲父)라 불렀다. 명나라 홍무(洪武) 십오년 임술(壬戌)에 전농시승(典農寺丞)으로 있다가 유량방(柳亮榜)에 합격되어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이 되었다.
태조가 등극하자 처음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둘째 번에는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그 다음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넷째 번 세종 신축(辛丑)에는 총제(摠制)로 불렀다. 그러나 모두 다 사퇴 불응하고 어버이를 업고서 두문동으로 들어가 일생을 보냈다. 그가 죽자 상주 경덕사(尙州景德祠)에다 안치했다.
이 외에도 태학생(太學生) 육십구인이 두문동에서 집단적으로 굶어 죽었으며 또 무신 사십팔인도 보봉산(寶鳳山) 속으로 들어가 수절을 하다가 모두 다 죽고 말았다. 오늘에 남아있는 세시정(洗身井)이란 것도, 회맹대(會盟臺)란 것도 그 당시에 있었던 것인데 이것들이 모두 두문동 안에 있었다. 그리고 두문동과 한 오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 궁녀동(宮女洞)이란 것이 있었는데 여기는 궁녀가 모여들어 순국한 곳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판시사(判寺事)로 있던 사람 여덟이 고려가 망하자 함께 성거산(聖居山)으로 들어가 먼저 처자를 자결케 하고 나중에 적시(積柴)에 불을 질러 놓고 그 속으로 들어가 죽고 말았다.
그런데 위에 말한 사람들의 꽃다운 이름이 하나도 알려지지 않고 있어 여기에 쓰지 못함은 가석한 일이다.
 
 
 

지나친 虛慾

정종(定宗)은 전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태조의 둘째 아들이다. 휘(諱)는 경( )이고 자(字)는 광원(光遠)이며 초휘(初諱)는 방과(芳果)였다.
고려 공민왕 육년(西紀 1,357년) 칠월 삭일(朔日)에 함흥군 귀주동(咸興君歸州洞)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시절에 벼슬이 장상(將相)에까지 이르렀고 태조 즉위와 동시에 영안군(永安君)으로 봉해졌다. 태조 칠년 무인(戊寅=西紀 1,398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동년 구월 오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태조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았다. 정종 이년 경진(庚辰=西紀1,400년) 십일월 십삼일에는 왕위를 태종에게 전했고 세종 원년 기해(己亥=西紀 1,419년) 구월 이십육일에 육십삼세를 일기로 인덕궁(仁德宮)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위(在位) 이년이었고 재상왕위(在上王位) 십구년이었다. 슬하에는 십오남, 팔녀가 있었다.
때는 이조 제이대 임금 정종(定宗) 이년 경진(庚辰)이었다. 방원의 넷째 형 되는 방간은 평소에 이런 생각을 일쑤 했다.
(정종에게는 적사(嫡嗣)가 없다. 익안군 방의가 왕세자로 됨직하지마는 용하기만 해서 물망에 오를 것 같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왕세자 자리가 나에게 올 것 같다. 그러나 좀 배움이 적어서 걱정이다. 저 방원이는 사람됨이 영특해서 사람이 모두 방원에게로 모여든다. 그러나 어디 보자.)
방간은 이와 같은 생각을 처질(妻姪) 이래(李來)에게 들려 주었다. 이래란 사람은 우현보의 문하생이었으므로 들은 대로 곧 우현보에게 얘기 했다.
선생님! 방간이 이달 그믐에는 방원을 상대로 크게 거사하겠다 합니다. 이것을 내버려두는 게 좋을까요?
우현보는 이 말을 듣기가 무섭게 아들 홍부(洪富)로 하여금 방원에게 알리게 하였다.
방원은 이 말을 듣자 하윤 이무 등과 함께 대비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때 방간은 자기 휘하의 오용권(吳用權)을 시켜서 정안군(靖安君=芳遠)이 나에게 해를 가하려 하기 때문에 부득이 군사를 내놓아 응전하려합니다.
정종에게 고하게 하였다. 정종은 이 말을 듣자 노발대발하면서 무엇 어째? 그게 무슨 망녕 된 말이냐?
하고 지신사(知申事) 이문화(李文和)에게 다음과 같은 명을 가지고 방간저로 가게 하였다.
<당장 군사를 해산시키고 대궐로 들어오지 않으면 너에게 큰 해가 미칠 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채 도달하기 전에 인척인 민원공(閔原功) 등의 망동으로 방간의 아들 맹종(孟宗)이며 그의 휘하 수백명이 갑옷 투구를 하고 내 덤비기 시작하였다. 문화는 정종의 교지를 전하였으나 방간은 이에 불응하였다.
그리하여 방원도 별 도리가 없어 이숙번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항전하였다. 항전의 결과 방원군의 승리로 끝나 방간까지도 포로가 되었다. 방원은 이숙번으로 하여금 방간이 난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묻게 하였다. 이에 방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박포(朴苞)가 나에게 <공에 대한 정안군의 태도가 이상야릇하니 반드시 무슨 변란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까 공이 변란을 당하기 전에 먼저 변란을 가하는 것이 득책일 것이다.> 하고 말했기 때문에 내가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이요.
무인정사(戊寅定社)가 있은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는데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포는 남보다 공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남의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항상 불평과 불만을 품고 사람을 헐며 저주하는 언동을 삼가지 않고 지냈다.
그리하여 방원은 정종에게 이를 알려 죽주(竹州)로 귀양을 보냈으나 특사를 입어 죽주에서 돌아 온 후에도 여전히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무슨 변을 일으켜보려고 방간저에 드나들었다. 박포는 어느 날 방간을 상대로 세상 얘기를 하다가 끝으로 방간에게 물었다.
공에게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기지 않는 한 정안군을 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안군의 군사는 남달리 강한데다가 사람이 많이 따르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못당하고 말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방법을 써서 정안군을 일격(一擊)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은 이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십니까?
방간은 이 말에 귀가 솔깃해서 어느 날 방원을 격살하기로 하고 사람을 보내 방원을 자기 집으로 청하였다. 정안군 방원은 청한 날에 방간의 집으로 가려하였으나 별안간 병이 생겨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래(李來)는 방간에게 따져 물었다.
공은 소인(小人)의 말만 듣고서 골육(骨肉)에게 해를 가하려 하시우? 좀 더 생각해 보시오. 정안군은 이 나라에 있는 오직 하나의 대공신이요. 오늘에 있어 개국(開國)하고 정사(定社)한 사람이 누군줄 모르시우?
그러나 방간은 이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도리어 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 때 내시 강인부는 몰래 정안군저를 찾아갔다.
비옵건대 저하(低下)께서는 오시지 마십시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하! 회안군(방간)은 사리를 모르시는 분이 올시다. 그러나 방임해서는 안 될 것이오니 마땅히 대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방간이 정말 거병(擧兵)함에 이르자 의안군(義安君) 화(和)와 완산군(完山君) 천우(天祐) 등은 방원의 집으로 가서 권하였다.
방간이 결국 거병하였소. 바라건대 이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소?
이때 방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 무슨 면목으로 외인을 본단 말이요?
하고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의안군 화는
방간의 태도가 흉험하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내버려 둡니까? 소절(小節)을 지키다간 종사(宗社)의 대계를 그르치게 될 것이오니 이를 살피십시오.
하며 외청으로 나와 주기를 굳이 청하였다. 그리하여 천우는 방원을 붙들고 나왔고 또 화는 갑옷을 입혀서 마상에 오르게 하였다.
그런데 신하들 중에는 박포와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이 있어 방간을 도왔을 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방원을 도웁고자 나섰다. 이중에서 승선(承宣) 이숙번이 맨 먼저 뛰어 나가 역전분투하였다. 방간 측에도 백발백중 활의 명수인 방간의 아들 맹종(孟宗)이 있었지만 병으로 인하여 살 한 발도 쏘지 못하였다. 모든 항전 조건이 방간군에게는 불리했으므로 방간은 결국 참패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이 때 방원은 싸움에서 방간이 살해를 당할 것 같아 친히 나서서 소리 질렀다.
방간 왕자는 나의 형님이시다. 그 왕자께는 손도 대지 말라.
이 소리가 방간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방간은 타고 있던 말을 달려서 성균관 뒷골목으로 가 활과 살을 다 내버리고 누워 있었다. 추병(追兵)이 그를 생포하자 방간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나를 이렇게 꾀인 자는 박포이다.
태조는 이 때 상왕으로 송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방간이 거병하였다는 말을 듣고 탄식했다.
그 소 같은 인간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이 싸움이 끝나자 박포에게는 참형(斬刑)이 내려졌고 재산은 적몰당했으며 자손은 금고(禁錮)의 형을 당하고 말았다. 또 방간에게는 유형(流刑)이 내려 토산(兎山)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태종이 등극하자 여러 신하는 다투어 가면서 간청했다.
방간에게 참형을 가하라.
그러나 방원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방간은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맹종은 세종조에 이르러 사헌부 및 사간원의 진언에 의하여 약을 마시고 죽데 되었던 것이다.
정종의 비(妃)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천서(天瑞)의 딸로 고려 공민왕 사년 을미(乙未=西紀 1,355년) 정월 구일에 탄생하였다. 태조 칠년 무인(戊寅)에 덕빈(德嬪)으로 책봉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덕비(德妃)로 다시 책봉되었다. 태종 십이년 임인(壬寅) 육월 이십오일 무인(戊寅)에 인덕궁(仁德宮)에서 별세하였는데 당시의 춘추는 오십팔세였다. 슬하에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후궁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아들이 열다섯 옹주가 여덟으로 도합 스물세남매에 이르렀다.
 
제 一남 의평군(義平君)
제 二남 순평군(順平君
제 三남 금평군(錦平君)
제 四남 선성군(宣城君)
제 五남 종의군(從義君)
제 六남 진남군(鎭南君)
제 七남 수도군(守道君)
제 八남 임언군(林堰君)
제 九남 석보군(石保君)
제 十남 덕천군(德泉君)
제 十一남 임성군(任城君)
제 十二남 도평군(桃平君)
제 十三남 장천군(長川君)
제 十四남 정석군(貞石君)
제 十五남 무림군(茂林君)
제 一녀 함양옹주(咸陽翁主)
제 二녀 숙신옹주(淑愼翁主)
제 三녀 덕천옹주(德川翁主)
제 四녀 고성옹주(高城翁主)
제 五녀 상원옹주(祥原翁主)
제 六녀 전산옹주(全山翁主)
제 七녀 인천옹주(仁川翁主)
제 八녀 함안옹주(咸安翁主)
 
그러나 이십삼인의 아들 딸들은 후궁 한 사람에 의하여 출생된 것은 아니다. 정종조에 있어서 후궁으로 뚜렷한 존재가 되었던 궁녀는 다음과 같다.
 
一, 숙의 지씨(淑儀池氏)
二, 숙의 기씨(淑儀奇氏)
三, 숙의 문씨(淑儀文氏)
四, 숙의 이씨(淑儀李氏)
五, 숙의 윤씨(淑儀尹氏)
 
그런데 내명부(궁녀)로서 숙의(淑儀)가 되면 옛날에는 정이품(正二品)의 품계를 받았다. 이는 임금으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지 않고서는 일어지지 않았다.
위에 말한 다섯 숙의 중 제일 정종의 사랑을 받고 지내던 숙의는 지씨였고 다음으로는 기씨, 또는 윤씨였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특별한 품(品)을 갖지 않은 궁녀라도 임금과 가까이 할 수는 있었다. 이것이 증거로 위에 말한 덕천옹주, 고성옹주, 상원옹주, 함안옹주 등의 생모(生母)가 명시(明示)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옛날 암흑시대 곧 전제군주 시대에는 대궐 안에 수많은 궁녀를 두었다. 정말 삼천이나 되는 궁녀를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궁녀를 많이 두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궁녀를 두었을까? 군주의 위안을 위하여 두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여간 정종의 경우를 보면 이것이 다행한 점도 없지 않다. 왕비 김씨는 오십팔 재세(在歲)중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딸 하나도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다행히 대궐 안에 궁녀들이 있었기 때문에 후궁의 소생이었지만 열다섯의 아들과 여덟의 딸을 슬하에 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종 시절에 여난이 없었다는 것은 특기하여 둘 만한 일이다.
 

 

 

굳어지는 터전

태종은 태조의 전비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으로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휘는 방원(芳遠)이라 불렀다. 고려 공민왕 십육년 정미(丁未=西紀 1,367년) 오월 십육일에 함흥 귀주동(咸興歸州洞) 사저에서 탄생하였다.
임술(壬戌)에는 고려의 진사(進士)로 발탁되었다가 계해(癸亥)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密直司) 대언(代言)에 이르렀고 태조가 즉위하자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졌으며 정종 일년 경진(庚辰)에는 왕세세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동년 십이월 십삼일에는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양(禪讓)을 받았고 무술 팔월 팔일에는 세종에게 왕위를 전해 주고는 세종 사년 임인(壬寅) 오월 십일에는 천달방(泉達坊) 신궁에서 오십육세를 일기로 승하(昇遐)하였다.
태종은 이씨조선의 제 삼대 임금이다. 아버지인 태조가 의주에서 돌아오신 뒤 부터는 태조를 도와 이씨 와조를 세움에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태종은 개국공신 중의 공신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은 창업에 있어서만 공로자가 아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잘 수성(守成)하는데 있서서도 큰 공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태종은 세아들 중 장자 차자를 젖혀놓고 셋째 아들 세종을 임금으로 세워 나라를 다시리게 하였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태종이 얼마나 수성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해 말하면 태종은 이씨 조선을 창업함에 있어서나 수성함에 있어서 여러 임금 중 가장 훌륭한 임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주 태종을 위하여 가석한 임금이 되기 전에 신덕왕후 소생의 두 왕자 방번, 방석을 처참히 죽인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임금이 된 후에도 가끔 옥사(獄事)를 일으켜 사람을 많이 죽게 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태종으로 하여금 그런 끔찍한 일을 하게 하였을까?
태종의 비(妃) 원경왕후(元敬王后) 민(閔)씨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제(霽)의 딸이다. 고려 공민왕 십사년 을사(乙巳=西紀 1,365년) 칠월 십일일에 송경(松京) 철동(鐵洞)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태조 원년 임신(壬申=西紀 1,392년)에 정녕옹주(靖寧翁主)라 봉했고, 정종 이년 경진(庚辰)에 정빈(貞嬪)이라 책봉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정비(靜妃)로 봉했다. 세종 이년 경자(庚子) 칠월 십사일에 수강궁 별전(壽康宮別殿)에서 오십육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슬하에는 사남사녀가 있다.

 
閔妃所生의 王子와 公主
一남 양녕대군(讓寧大君)
二남 효녕대군(孝寧大君)
三남 충녕대군(忠寧大君)
四남 성녕대군(誠寧大君)
一녀 정순공주(貞順公主)
二녀 경정공주(慶貞公主)
三녀 경안공주(慶安公主)
四녀 정선공주(貞善公主)
後宮所生의 王子와 翁主
一남 경녕군(敬寧君)
二남 성녕군(誠寧君)
三남 온녕군(溫寧君)
四남 근녕군(謹寧君)
五남 혜녕군(惠寧君)
六남 희녕군(熙寧君)
七남 후녕군(厚寧君)
八남 익녕군(益寧君)
一녀 정혜옹주(貞惠翁主)
二녀 정신옹주(貞信翁主)
三녀 정정옹주(貞靜翁主)
四녀 숙정옹주(淑貞翁主)
五녀 소선옹주(昭善翁主)
六녀 숙혜옹주(淑惠翁主)
七녀 숙녕옹주(淑寧翁主)
八녀 소숙옹주(昭淑翁主)
九녀 숙경옹주(淑慶翁主)
十녀 경신옹주(敬愼翁主)
十一녀 숙안옹주(淑安翁主)
十二녀 숙근옹주(淑謹翁主)
十三녀 숙순옹주(淑順翁主)
 
모두 이십구명에 달한다. 이중에서 민비의 소생 팔남매를 제하면 후궁에서만 출생한 아들 딸들이 이십일명에 달하는 셈이다. 이 후궁 중에서 소생이 가장 많은 사람이 신빈(信嬪) 신씨(辛氏)였고 그 다음으로는 안씨(安氏) 및 효빈(孝嬪) 김씨 그리고 숙빈(淑嬪) 최씨였다.
그리고 태종의 후궁으로 어느 때나 대령하고 있던 미인들은
 
一, 신빈(信嬪) 신씨(辛氏)
二, 숙빈(淑嬪) 최씨(崔氏)
三, 효빈(孝嬪) 김씨(金氏)
四, 의빈(懿嬪) 권씨(權氏)
五, 소빈(昭嬪) 노씨(盧氏)
 
그리고 이외에 안씨(安氏)와 이씨(李氏)가 있어 태종의 총애를 받고 지냈다. 그런데 빈(嬪)이란 것도 내명부의 품계를 말하는 것인데 빈(嬪)이 되면 정일품(正一品) 대우를 받게 된다.
이것은 무슨 특별한 공로가 있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文化의 黃金時代

세종은 이조 제 삼대 임금 태종의 셋째 아들로 휘를 도( ), 자를 원정(元正)이라 불렀다.

태조 육년 정축(丁丑=西紀 1,397년) 사월 십일에 한양(漢陽) 잠저에서 출생하였다. 태종 팔년 무자(戊子)에 처음으로 충녕군(忠寧君)으로 봉했고 임신(壬辰)에 대군(大君)으로 봉했으며 무술(戊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동년 팔월 팔일에 경북궁 근정전에서 선양(禪讓)을 받았다. 그리고 경오(庚午) 이월 십칠일에 별궁에서 오십사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는 십팔남 사녀가 있었다.

세종은 이씨조선의 성군(聖君)이며 동시에 문화의 대은인이었다. 세종이 삼십이년에 결쳐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에 문화의 꽃이 만발했으므로 세종시절을 가르쳐 이조문화의 황금시대(黃金時代)라 한다.

그 시대의 문화는 모두가 세종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또는 발명되었는데 이러한 임금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틀어 놓고 보더라도 얻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은 분명히 창조자였고 발명가였다.

세종 치세중(治世中)의 업적을 들어보면 첫째 과학, 둘째 예술, 셋째 어학이다. 그 당시에 있어 강우량(降雨量)을 측량할 수 있는 측우기(測雨器)는 동서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그런데 세종은 이를 만들었다. 과학을 자랑하는 서양 사람보다도 이백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리고 예술 면에 있어서는 음악에 유의하여 아악(雅樂)의 소리를 바로잡아 예로부터 전해 오던 동양의 고전음악(古典音樂)을 다시 일으켰다.

또 특기할 것은 세종이 우리 나라 문자가 없음을 개탄하고 한글 이십팔자를 만들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우리 글을 발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다시 말하면 세종 이십팔년부터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자를 가진 민족이 된 것이다. 세종은 사람으로서 <생각이 없는 사람>을 싫어하였고 <능력없는 사람>을 싫어하였다. 세종은 <능력있는 분>이었고 <생각이 있는 분>이었다. 그리하여 두만강 가에 육진이 개척되었고 또 동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대마도(對馬島)와 서쪽으로는 파저강(婆猪江)가 만주인의 출몰을 막아 내게 되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세종은 일대(一代)의 영주(英主)였고 성군(聖君)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의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딸로 태조 사년 을해(乙亥=西紀 1,395년) 구월 이십팔일에 양주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태종 팔년 무자(戊子)에 가례(嘉禮)를 거행하고 경숙옹주(敬淑翁主)로, 정유(丁酉)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무술(戊戌)에는 경빈(敬嬪)으로 책봉했다가 다시 공비(恭妃)로 임자(壬子)에는 다시 고쳐 왕비로 봉했다. 그후 세종 이십팔년 병인(丙寅) 삼월 이십사일에 별궁에서 오십이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왕비의 소생으로 슬하에 팔남 이녀가 있었다.

 

王妃所生의 王子와 公主

一남, 문종대왕(文宗大王)

二남, 세조대왕(世祖大王)

三남, 안평대군(安平大君)

四남, 임영대군(臨瀛大君)

五남, 광평대군(廣平大君)

六남, 금성대군(錦城大君)

七남, 평원대군(平原大君)

八남, 영응대군(永膺大君)

一녀, 정소공주(貞昭公主)

二녀, 정의공주(貞懿公主)

后宮所生의 王子와 翁主

一남, 화의군(和義君)

二남, 계양군(桂陽君)

三남, 의창군(義昌君)

四남, 한남군(漢南君)

五남, 밀성군(密城君)

六남, 수춘군(壽春君)

七남, 익현군(翼峴君)

八남, 영풍군(永豊君)

九남, 영해군(寧海君)

十남, 담양군(潭陽君)

一녀, 정현옹주(貞顯翁主)

二녀, 정안옹주(貞安翁主)

 

성군(聖君) 세종에게도 일정한 후궁이 다섯 사람 있었다. 첫째 정일품(正一品) 대우를 받는 영빈(令嬪) 강씨(姜氏), 신빈(愼嬪) 김씨,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있었고 다음으론 정삼품(正三品) 대우를 받는 숙원(淑媛) 이씨(李氏)와 정육품(正六品) 대우를 받는 상침(尙寢) 송씨(宋氏)가 있었다.

위에 기록한 십 왕자 이옹주는 다섯 후궁이 낳았다. 그 중에서 신빈 김씨가 여섯 아들을 낳았고 혜빈 양씨가 세 아들을 낳았다. 이런 점에서 생각하면 세종의 정력도 남만 못지 않았던 모양이다.

 

 

集賢殿 學士들

문종은 이조 제 사대 임금 세종의 맏아들로 휘는 향(珦)이요, 자는 휘지(輝之), 태종 십사년 갑오(甲午=西紀 1,414)년 십월 삼일에 한양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세종 삼년 신축(辛丑)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을축(乙丑)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대리했고 경오(庚午) 이월 이십이일에 별궁에서 즉위했으며 임신(壬申) 오월 십사일에 경북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삼십구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재위 이년에 불과하였다. 슬하에는 일남 일녀가 있었다.

문종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때나 몸에서 병이 떠나지 않았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역시 몸이 시원치 않아서 늘 누워 지냈다. 그러나 문종은 자기의 몸보다도 아들 걱정에 신경을 쓰게 되어 몸이 더 나빠지게 되었다.

세자는 불쌍하게 자랐다. 이제 나이가 열살이 넘어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만 내가 이 꼴이니… 내가 병이 없어지지 않는 한 세자에 대한 걱정은 더욱 심해질 것 같구나. 나를 살리는 것은 결국 세자를 힘차게 또는 영광스러이 살리는 일이 될 텐데…

문종은 어느 날 침전(寢殿)에 누워서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내리는 것을 보자 문종은 중관을 시켜 집현전(集賢殿)에 나와 있는 여러 학사(學士)들을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용촉(龍燭)으로 상하 사방을 밝히게 한 후 술상을 준비하도록 이르고 슬하에 있는 세자 단종(端宗)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간곡히 학사들에게 부

탁했다.

과인은 세자를 경 등에게 맡기고 싶소. 이 애는 낳은지 아흐레만에 모비(母妃)를 잃은 불쌍한 애요. 이 애가 오늘날 왕세자가 되었지만 과인이 죽어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 자리를 잘 지니게 될는지가 의심되오. 내몸이 튼튼해져 좀 더 살게 되면 이 애도 더 장성해서 안심되겠지만…

문종은 침상에서 내려와 여러 학사들과 똑같이 평좌(平座)를 한 후 친히 잔을 들어 여러 학사들에게 술을 권하였다. 이때의 술자리는 임금과 학사와의 좌석 같이 보이지 않았다. 평등무차 별함이 지기(知己)와 지기(知己)와의 술좌석 같은 화기애애하였다.

사람은 나를 알아 주며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의기(意氣)에 감동하는 동물이다. 공명(功名)고 부귀도 의기 앞에서는 위세(威勢)를 못 부리는 것이다. 이날 술좌석에 모여진 집현전의 학사는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 여러 학사였는데 그들은 문종의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감읍(感泣)하면서 신 등이 일개 심장적구(尋章摘句)하는 학구(學究)에 불과하오나 신 등을 알아 주옵시는 수우(殊遇)에 보답하옵고자 왕세자 저하(低下)의 현재 및 장래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감히 맹세하나이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뢰었다. 문종은 이 말을 듣고서 웃으며

이젠 과인은 좀 안심하겠소. 세자를 어린 동생이나 조카로 다르고 수호해 주오. 과인은 세자로 하여금 여러 학사를 나이 많은 형이나 아저씨로 섬기게 하겠으니…

하고 부탁했다.

그럭저럭 밤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문종의 몸은 오랫동안 앉아서 말을 주고 받고 할 만 한 건강의 소유자가 못되었으나 강잉히 괴로움을 참아가면서

오늘의 세자가 열살이 넘도록 튼튼히 자란 것은 혜빈 양씨(세종의 후궁)의 공덕이요. 혜빈 양씨로 말하면 과인의 어마마마뻘이 되는 분인데 혜빈의 말씀에 의하면 재덕을 겸비한 튼튼한 애다 합디다. 과인이 틈만 있으면 시험해 보았는데 혜빈의 말이 옳은 것 같소. 여러 학사들이 잘 지도하고 보호만 해 주면 임금으로서 한 몫 일을 할 것이요.

하고 재삼 부탁했다. 그러나 학사들은 문종이 괴로워하는 것을 살피고 어전을 떠났다.

문종 시대의 의정부 三정승은 다음 세 사람이었다.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

좌의정(左議政) 남 지 (南 智)

우의정(右議政) 김종서(金宗瑞)

이중에서 영의정보다도 뚜렷한 존재가 되어 있는 사람은 우의정 김종서였다. 그는 세종의 유위주의(有爲主義)에 찬동함과 동시에 이를 받들고 육진(六鎭)을 개척하였기 때문이고 또 용력과 담력이 열 사람 백 사람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들 삼정승도 어느날 문종의 소명을 받고 함께 참내하였다. 문종은 이날도 침전에 누워있었다.

공들을 청함에 있어서도 누워 청하게 되니 미안함을 금할 수 없소이다. 사십평생을 병고에서 떠나지 못하니 이런 불행한 사람도 더러 있을까?

문종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세 정승의 인사를 받았다. 문종은 다시 말을 이어

과인이 공들을 청한 것은 나를 보라고 청한 것이 아니요. 짐의 병이 심상치 않아가니 세자 걱정이 더욱 심해 가는 까닭에 그 걱정을 좀 나누어 볼까 해서 청한 것이요.

그리고는 왕세자를 불러 오게 하였다. 이때 세자의 나이 십이 세에 불과하였지만 매우 숙성해 보였다. 그러나 워낙 나이가 어렸으므로 얼굴에 치기(稚氣)가 가득해 보였다. 이때 영의정 황보인은 세자에게로 가까이 가서

저하의 나이 지금 몇이십니까?

입을 열었다.

열두살이오.

제가 무엇하는 누구인 줄 아십니까?

영의정 황보인이요.

황보인은 다시 좌의정 남지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누구인 줄 아십니까?

그 사람은 좌의정 남지요.

황보인은 세자의 총명에 놀라면서 또 우의정 김종서를 가리키고 이 사람도 아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우의정 김종서요.

황보인등 세 사람은 세자의 마음 가짐이 범인에 지나는 것에 감동하여 이번엔 좌의정 남지가 문제를 만들어 물었다.

육조란 것은 무엇을 일컬어 말하는 것일까요?

육조? 육조란 것은 이조(吏曹), 예조(禮曹), 형조(刑曹), 병조(兵曹), 공조(工曹), 호조(戶曹)를 말하는 것이요.

그리고 각 조의 우두머리 자리에 있는 사람을 무엇이라 부르나요?

판서(判書)라 부르오.

삼공 육경이란 무엇을 일컬어 말하나요?

삼공 육경이요? 삼공이란 의정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자리에 있는 사람 셋을 말하는 것이고, 육경이란 육조의 판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여섯을 말하는 것이요.

세자가 대답하는 것을 듣고만 있던 우의정 김종서는

참 세자 저하는 좀 더 장성하면 훌륭한 임금이 되시겠소. 참 총명도 하십니다.

세자를 칭송하였다. 세자와 삼공 사이의 문답으로 인하여 한때 중단 되었던 문종과 삼공과의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었다.

그런데 세자 저하의 건강은 어떠한가요?

건강도 좋은 편이요.

글도 많이 읽고 계신가요?

나이로 보아서는 많이 읽고 있는 것 같소.

오늘의 문답으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총명도 남만 못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한번 본 것, 한번 들은 것을 잊지 않으니 총명하다 할 수 있소. 그런데다 사람됨이 단아(端雅)해서 과인의 마음엔 꼭 드는구료.

부왕(父王)을 닮아서 그러신 것 같소이다. 그런즉 마음씨도 어지실 것이올시다.

문종은 이 말을 들은 후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좀 들어보오. 세자에게는 삼촌이 너무 많아서 걱정되오. 과인이 병신(病身)일지라도 왕위에 있으니까 궁내가 안온한 것같이 보이지만 과인이 죽어 없어진다면 궁중이 편안해질 것같지 않소. 과인이 지금 죽으면 세자가 곧 내 뒤를 계승하여 임금이 될 것이요. 이 어린애가 아무리 총명해도 궁중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일어나는 폭풍우를 어찌 제지 하겠소?

하고 가장 중대한 걱정거리를 내놓았다. 문종이 이러한 말로 입을 열자 삼공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인 양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문종은 또 입을 열었다.

과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며칠 못 가서 저 어린것에게 왕위를 내주어야 할 것 같소. 과인은 저 어린 것이 장성하여 어른이 될 때까지 살고 싶지만 천수(天壽)가 이만인데 어찌하겠소? 과인이 오늘 죽을는지 내일 죽을는지 알수 없지만 하여간 세자가 어린 임금으로 즉위하면 저 집현전의 여러 학사와 손을 잡고 보좌해 주고 수호해 주오. 그리해 주면 과인은 지하에서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겠소이다. 삼공의 생각은 어떠하오?

문종의 이 말에 세사람은

신 등은 전하의 심경을 잘 살피고 있습니다. 신 등은 전하의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세자를 보필하고 또 수호하겠사오니 신 등을 믿어주소서.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문종은 여윈 얼굴에 일말의 광명을 띠우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감사하오. 오늘부터 세자를 삼공의 아들로 맡기겠소. 이제 해도 저물었으니 어떻게 그대로 돌아가겠소. 술상이 준비되어 있으니…

술상을 내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세 정승은 황송히 받아 마시고 어전을 물러나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문종의 비(妃)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증영의정(贈領義政)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딸로 태종 십팔년 무술(戊戌=西紀 1,418년) 삼월 이십일 홍주 합덕현(洪州合德縣) 사제에서 출생하였다.

세종 십삼년 신해(辛亥)에 동궁(東宮嬪)으로 뽑혀 들어와 처음엔 승휘(承徽)로 책봉되고 좀 지나서 양원(良媛)으로 진봉(進封)되었으며 정사(丁巳)에 이르러서는 순빈(純嬪) 봉씨(奉氏)가 폐립(廢立)되자 이어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었다.

문종이 왕위에 나아가자 종전까지 빈으로 있던 권씨는 왕후(王后)로 책봉되었다가 신유(辛酉)을 하직하였는데 당시의 춘추는 이십사세였다.

슬하에는 일남 일녀가 있었다.

王妃所生의 王子와 公主

一남, 단종대왕(端宗大王)

一녀, 경혜공주(敬惠公主)

后宮所生의 翁主

一녀, 경숙옹주(敬淑翁主)

이 옹주는 사칙(司則)이란 직함을 가진 양씨(楊氏)의 소생이다.

문종은 천생 약질이었으므로 삼십구년간 궁중 꽃밭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애정생활은 쓸쓸할 만큼 별 일이 없었다.

 

 

 

<조선편 2> 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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