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비사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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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편 終

 

乙巳士禍

 

인종(仁宗=西紀 1,544-1,545)이 왕위에 오른 것은 삼십세 되던 해이다.

인종은 동궁으로 있을 때 맞이한 동궁빈(東宮嬪) 즉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딸을 그대로 왕비에 봉하였으나 여전히 슬하에는 일점 혈육이 없었다.

인종은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고, 신하의 올바른 말을 기꺼이 들으며 백성들의 고난을 임금의 고난으로 여기는 성군(聖君)이었다. 대간(臺諫)에서 도승지(都承旨) 윤원형을 내쫓으라고 하는데 대해서도 인종은 윤원형을 내쫓기는커녕 오히려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승격시켜 문정왕후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이제 시대는 윤임 일파 대윤(大尹)의 시대이되 결코 문정왕후의 오라비되는 윤원형 등 소윤(小尹)을 다치지 않았다.

이렇게 효성을 다해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그 계모(繼母)를 받드는데도 불구하고 문정왕후는 조금도 그 앙탈스러운 성질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하게 신왕(新王)을 대했다.

인종이 대비(大妃) 앞에 문안 드리러 가면 대비는 그가 낳은 경원대군을 앞에 앉히고 우리 모자가 전하의 손에 죽을 날이 머지 않았소. 언제쯤 죽이려 하오?

하는 엄청난 말을 하기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임금은 대비전 문밖에 엎디어 효성의 부족함을 뉘우치며 대죄(待罪)의 밤낮을 보냈다.

이런 노심초사가 쌓여서 그런지 혹은 부왕의 상(喪)을 당하여 장차 해나갈 정사(政事)를 걱정한 나머지인지 인종은 임금이 된지 얼마 안 가서 앓기 시작했다. 병이 점점 중하여 스스로 회복하지 못할 줄 알고, 임금은 중신들을 불러 앞에 앉히고

내 병이 이렇게 중한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경들은 나의 아우 경원대군을 세우고 국사를 잘 다스리오. 또 조광조(趙光祖)는 어진 선비였는데 저렇게 억울하게 죽었음이 늘 내 마음에 쓰라렸소. 내 마음 먹은 바를 이루지 못하고 가니 경들은 내 뜻을 받들어 조광조의 관직이나마 회복시켜 주기 바라오.

하고 유언을 했다.

그리고 좌우에 있는 신하를 시켜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해서 무엇을 쓰려고 하더니 붓을 놓고 탄식하며

나의 심중에 있는 말을 글로 써서 알리려 했더니 이제는 그것도 할 수가 없구나.

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 임금은 다시 깨어나지 못한 채 승하하고 말았다. 재위 팔개월 나이는 삼십일세였다.

당시 인종의 요서(夭逝)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문정왕후 즉 대비가 자기의 소생인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내세우기 위해 임금을 방양(方穰)했느니, 또는 밤마다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느니 하는 말이 떠돌았다.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제일 먼저 기뻐한 것은 대비와 윤원형 형제들이었다. 이들은 임금의 승하를 알리는 천아성(天鵝聲)소리 구슬픈 가운데서도 자기네의 세상이 돌아왔다고 기뻐 날뛰었다. 인종이 승하한 그날로 경원대군은 나이 십이세로 등극을 하였으니, 이가 곧 명종(明宗)이다.

명종(明宗=西紀 1,545-1,567)이 등극하지 문정대비는 신왕(新王)이 나이기 어림을 핑계삼아 스스로 발(簾)을 드리우고 섭정을 맡아했다.

대비는 우선 선왕 인종의 외숙(外叔)인 윤임 일파를 몰아내려고 생각했다.

이제 대비가 나라의 권력을 한손에 쥐긴 했으나 아직도 윤임 일파는 정원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좌의정 유과(柳灌), 이조판서 유인숙 등이 윤임과 더불어 매사에 대비를 견제하고 나섰다.

대비가 섭정하게 된 뒤 얼마 안 가서 윤원형의 형 원로를 해남으로 귀양 보내야만 했던 것도 윤임 일파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영의정 윤인경(尹仁鏡), 좌의정 유관을 비롯한 모든 대신들이 정원에서

윤원로는 과거에 선왕과 신왕을 이간시킨 자이니 내보내야 하오.

하고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대비도 하는 수 없이 자기의 친오라버니를 귀양 보냈다. 자기의 친형제를 귀양 보내고 나니 대비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때 윤원형에게 난정(蘭貞)이라는 첩이 있었다. 난정은 매우 영리한 여자로서 궁중과 윤원형 사이를 왕래하며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을 연락하곤 했다. 윤원형이 직접 대비를 궁중으로 찾으면 윤임 일파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윤원형은 형님 원로가 쫓겨남을 보고 즉시 자기의 심복들과 의논했다.

당시 윤원형의 심복으로서는 이기(李 ), 임백령(林百齡), 정순붕(정순붕), 허자(許磁) 등이 있었다. 윤원형은 이들과 의논한 결과 한 계책을 세우고 나서 다음날 난정으로 하여금 궁중으로 들어가서 대비에게

윤임이 자기의 조카되는 계림군(桂林君) 유(瑠)를 선왕의 양자로 세워, 장차 큰 일을 꾀하고자 하오.

하는 말을 밀고케 했다. 대비는 이 말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겠다. 윤임이 전부터 우리 모자를 잡아 먹겠다고 하더니 결국은 이런 수작을 하는구나.

대비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충순당(忠順堂)으로 나와 대신들을 불러들이고서

듣자니 윤임은 중종대왕 때부터 우리 모자를 해코자 하더니 이제 인종이 승하한 후 자기의 지위가 불안함을 느끼고서 딴 마음을 품고 무슨 모의를 한다는 말이 있소. 경들은 이러한 말을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대신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어린 임금은 그저 놀란 표정으로 몸을 떨고만 있을 뿐이다. 윤원형 일파는 이때가 바로 자기들의 반대파를 없앨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우선 이기, 정순붕 등이 어전에 나와

윤임은 좌상 유관과 이언적(李彦迪), 이림(李霖), 유인숙, 권발(權撥) 등과 함께 모의한 흔적이 있소. 엄중히 처단하여야 하오.

하고 일제히 일어섰다. 그러나 영부사(領府事) 홍언필과 신광한(申光漢), 백인걸(白仁傑) 등은 아무래도 사건이 확실치 않으므로 윤임이 종사를 모의한다고 하나 아직 그런 형적이 없으니 이는 공연히 만든 것이요.

하고 반대하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조정 안은 한동안 이 사건으로 서로 상소하고 논란하여 자못 시끄러웠다.

이러던 중 경기관찰사 김명윤(金明胤)이 전날에 윤원형의 첩 난정이 밀고한 바와 같은 내용을 가지고 윤임 일파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윤임이 자기의 조카 계림군을 추대하여 임금의 자리에다 앉힌다는 말이 있소.

한 번 이런 말이 나오자 윤임은 역적이란 누명을 쓰게 되어 사건은 매우 중대성을 띠우게 되었다.

대비는 곧 계림군 이하 모든 관련자를 잡아들이도록 명했다. 며칠 후 안변(安邊) 황룡사로 도망 갔던 계림군이 잡혀옴으로써 이 조작된 역모 사건의 친국은 벌어지게 되었다. 계림군은 중의 복색을 한 채로 사령에게 끌려서 국청 앞으로 나왔다. 이때의 추관(推官)은 임백령과 허자(許磁)였다.

너는 윤임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으니 그 죄를 아는가?

신은 역모한 일이 없습니다.

그럼 왜 도망을 했느냐. 죄 없는 자도 도망을 한단 말이냐?

윤임을 옭아 넣기 위해 애꿎은 계림군만 희생을 당할 판이었다.

어서 바로 대어라.

바로 대라고 하오나 무엇을 어떻게 바로 댈 것인지 신은 모릅니다.

그래도 바로 대지 못하겠느냐?

무서운 고문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주리를 틀때마다 계림군이 지르는 비명소리는 온 국청 안을 울렸다. 어린 임금은 이 처참한 광경에 그만 질려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대비도 보다 못해 임금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얼마 후 계림군은 서리가 가리쳐주는 대로

아저씨 윤임이 임금을 없애고, 나를 대신 임금으로 세운다 했습니다.

하고는 그 자리에 졸도했다. 이제 계림군은 고문을 면하게 되었으나 그 대신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며칠 뒤에는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어서 윤임(형조판서), 유관(좌의정), 유인숙(이조판서) 등을 반역 음모죄로 사사(賜死)하고 그 나머지 대윤을 싸고 돌던 이언적,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등 수많은 사류(士類)들도 귀양 보냈다.

이로써 조정은 완전히 소윤 일파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대비는 이번 사건의 공로자를 표창한다고 정순붕, 이기, 임백령, 허자 등에게 보익공신(保翼功臣)이란 칭호를 내렸다.

때는 명종 즉위초인 을사년이므로 사가(史家)들은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 한다.

 

 

 

夕陽에 배운 佛經

 

이제부터 조정은 거의 윤원형 일파로 바뀌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어린 임금도 차차 나이 들었으므로 대비는 체모상 발을 걷고 정권을 아들 임금에게 돌려 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나 대비가 정권을 임금에게 내놓았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표면상 형식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고 사실은 아직도 임금 뒤에 앉아서 여전히 권력을 휘둘렸다. 대비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정음(한글)으로 손수 써서 내시를 통해 임금에게 전달하고 그대로 시행할 것을 고집하였다.

명종(明宗)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런 대비의 명령 아닌 명령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명종은 이런 명령 가운데 크게 그릇된 일이 아니면 모후(母后)의 뜻을 받들어 힘써 시행하였지만 그러나 사리에 어긋난 일이면 아무래도 시행할 수가 없어서 난처하게 되는 수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대비는 정음 글씨로 윤원형의 첩 난정(蘭貞)을 정실부인으로 특명하고 정경부인에 봉하라는 전지(傳旨)를 임금에게 내렸다. 난정으로 말하자면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데 있어 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부터 대비의 비위를 잘 맞춰서 대비의 귀염을 받아 오는 터였다. 그래서 가끔 궁중에서 대비가 연회를 베풀고 공신들의 부인네들을 초청할 때면 비록 난정이 첩이란 신분에 있지만 그녀도 반드시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공신들의 부인들은 난정의 신분이 첩이라 해서 경원(敬遠)을 하니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는 난정이 이런 기색을 알아차리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날로 집에 돌아와 윤원형을 붙들고

여보, 날 언제까지 첩으로만 둘 작정이오? 그 아니꼬운 정경부인들 멸시 때문에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어요.

이래서 윤원형은 대비를 움직이게 되었고, 대비 또한 당신이 귀여워하는 난정의 일인지라 손수 글을 써서 이번 전지를 임금에게 내리게 된 것이었다.

임금은 대비의 전지를 받아 보고 전지를 받들고 온 중관에게

국법에 없는 일을 어찌 하겠소. 대비전께 가서 이번 전지는 거두시도록 부탁드리오.

하고 낯을 찡그리며 돌려보냈다. 중관은 대비전에 가서 그대로 왕명을 고했다.

뭐라고? 전지를 거두라고?

대비는 발끈 화를 내며 당장 임금을 들어오라고 했다. 잠시 후 임금은 대비전으로 나왔다. 어느새 들어와 있는지 대비 옆에는 윤원형이 앉아 있다가 임금을 보고 급히 일어나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대비는 윤원형을 보고

오늘은 가인의 예(家人之禮)로 대하는 것이니 그대로 앉아 있게.

하고 다시 임금을 향해서

너는 외숙에게 먼저 절하도록 하라.

했다. 임금은 어머니의 명령대로 윤원형에게 절했다. 그제서야 윤원형도 일어나 만수무강하옵소서…

하며 맞절을 했다. 이러한 광경을 옆에서 지켜 보던 대비는 동생에게

여보게, 오늘은 외숙으로서 생질을 대하듯 하라 했잖은가? 상감에게 대한 예를 떠나서 말하게.

예, 누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자네가 직접 생질에게 청을 해보게.

그래도 윤원형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멈칫거리자, 어린 임금은 벌써 알아차리고 어머니를 향해

외숙의 하고자 하는 말씀은 대강 짐작이 갑니다. 아무리 집안 어른의 청이라 해도 국법에 없는 일은 불가한 줄 아옵니다. 아까 어머니의 전지는 받자왔으나 소자의 생각…

하고 난색을 보이자 대비는 차츰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는 눈으로 아들을 노려보더니

무슨 소리냐. 네가 임금이 된 것은 나와 네 외숙의 힘인데 그것을 몰고 우리 형제의 말을 거역한단 말이냐?

하고 추상같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래도 어린 임금은

남의 이목이 있는데 어떻게 첩을 정경부인으로 봉할 수 있습니까?

하고 어머니의 생각을 돌리려고 부드럽게 말해 보았다. 그러나 대비는 여전히

내일 곧 왕명으로 정경부인에 봉하도록 하라.

할 뿐이었다. 어린 임금은 더 말해야 소용 없음을 알고 곧 대비전을 물러나왔다.

다음날 정원에서 임금은

좌의정 윤원형의 부인을 정경부인에 봉하노라.

하고 교지를 내렸다.

대비는 궁중에서 공신들의 부인네들을 초청하여 자주 연회를 베풀었다. 대비가 이렇게 자주 연회를 베푸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비인 것을 채워보고자 함에서였다.

전에는 정권만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생각해 오던 대비였다. 그러나 이제 소원대로 정권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고 보니 전날에 그렇게도 매력있던 것이 별로 신통해 보이지 않았다. 화창한 봄날이면 대비는 미망인으로서 전날의 남편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대비는 궁중 후원에 차일을 치고, 진수성찬을 벌여놓고, 한편으로는 풍악을 잡히며, 부인네들만의 청유(淸遊)를 즐기면서 모든 것을 잊으려했다.

그러나 이것도 한때 뿐이었다. 텅 비인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채워지지가 않았다. 대비는 다시 마음을 불교 행사로 돌렸다. 대비의 마음에는 어느덧 인생의 무상감이 점령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오늘은 진관사(津寬寺), 내일은 장의사(藏義寺) 이렇게 절간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드리고, 나중에는 전국 각지의 이름 있는 사찰마다 사람을 보내서 재를 올리게까지 했다. 전에 차일을 치고 연회를 베풀던 궁중 후원은 어느덧 무차대회(無遮大會)의 장소로 변하고 전날의 청아하 풍악소리는 불경소리와 목탁소리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듯 대비가 불사에만 열중하고 있음을 보고, 때에 강원감사 정만종(鄭萬鍾)은 보우(普雨)라는 희대의 요승(妖僧)을 대비에게 소개하였다. 보우는 원래 양양 신흥사(神興寺)의 중으로 간지(奸智)에 능한 인간이었다.

보우가 일단 궁중을 드나들며 대비 마음에 들기를 노력하자 대비는 당장 그에게 혹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어느새 대비는 보우의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듣게끔 되었다.

때마침 나라에는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 백성들이 많이 죽고 더욱이 명종 십년 여름에는 왜구(倭寇)가 영암(靈岩) 달량성(達梁城)에 쳐들어와 민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그러자 보우는 대비에게

지금 국사가 다난하고 민심이 흉흉하옴은 붕당만을 일삼는 유림 정치 때문에 그러한 것이옵니다. 대비마마께서는 나라를 생각하시와 국정을 쇄신하고, 승과(僧科)를 두어서 크게 불교를 융흥시키소서.

좋은 말이오. 불사는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모두 행하여 오던 일이니 이제 불사로써 나라에 새 기운을 불어 넣어야겠소.

대비의 생각은 보우보다도 더 적극적이었다. 당장에 대비는 언서를 임금에게 보내어 승과(僧科)를 새로 설정하여 중들에게도 과거를 보이도록 하라고 분부를 내렸다.

이때로부터 정능(靖陵) 옆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를 선종(禪宗)의 도회소(都會所)로, 또 광릉(光陵) 옆에 있는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의 도회소로 정하고, 여기서 다른 과거와 마찬가지로 승과회시(僧科會試)를 보일 때, 강경제술(講經製述)을 치르게 하면서 이에 합격한 자에게는 각각 중의 계급을 주었다. 이래서 각 지방의 사찰마다 이 승과에 응하려는 중들의 독경소리가 들려나오게 되었고, 또 선방에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중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경을 보고 유림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조정은 물론 성균관의 유생들까지 들고 일어났다. 요승 보우를 처단하라고 나섰다.

요승 보우는 국정에 간섭하여 나라일을 그릇 치고 있소. 즉시 그의 관직(都大禪師)을 삭탈하고 죄를 주도록 하오.

매일같이 이러한 상소문이 빗발치듯 임금 앞에 날아 들었다. 임금은 입장이 거북했다.

임금도 보우의 행동을 매우 괘심하게 여겨오던 터였다. 욕심 같아서는 당장 처단해 버리고 싶지만 그러나 그의 뒤에는 대비가 앉아 있으니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임금도 조신(朝臣)들과 함께 다만 보우를 처단할 기회만이 오기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던 중 대비가 중한 병으로 드러눕게 되었다. 보우를 몰아낼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임금은 대신들의 공론에 따라서 곧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낸 다음, 제주 목사(濟州牧使)에게 비밀히 전하여 그를 죽이도록 했다. 제주 목사 변협(邊協)은 매우 꾀가 많은 사람으로 그는 장사단(壯士團)이란 것을 만들어 가지고 보우와 함께 힘겨루기를 시켜서 보우를 매 맞치어 골병이 들게 했다. 보우는 시름 시름 앓다가 소문도 없이 죽었다. 얼마 후 대비가 병이 완쾌되어 다시 보우를 찾았지만 제주 목사로부터는 병사(病死)라는 보고가 올라 왔을 뿐이었다.

 

 

 

물결은 잠자고

 

윤원형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서 무수한 사람들을 치워버리고 그 후에도 여러 정적(政敵)들을 없애고 드디어 독세도(獨勢道)로 정사를 전횡해서 그 폐해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직 유충하던 명종도 차차 지각이 나자 국가 대세를 살피고, 외숙 윤원형의 전횡을 근심하다가 드디어 다른 세력을 세워 윤원형의 진횡을 억압하려고 종친이며 자기의 처족이 되는 이양(李樣)을 끌어들여 이조판서라는 요직에 앉혔다.

이양은 명종의 왕비 인순 심씨(仁順沈氏)의 외숙으로서 그러니까 왕비 심씨는 그의 생질의 따님이 되는 셈이다.

한 번 임금이 이양을 두둔해 준다는 소문이 나자 그의 밑으로 모여드는 자가 나날이 늘어서 미구에 윤원형을 대적할 만한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조정은 다시 윤원형 일파와 이양의 일파가 서로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이양은 그 인물이 교만방자해서 차츰 그 하는 행동이 원형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이양은 시험관을 매수해서 자기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에게 장원을 시키는가 하면, 또 돈을 주고 과거에 합격한 신사헌(愼思獻)을 두둔하여 자기의 심복을 만드는 등 그 방자하고 협잡스런 행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먼저 사림(士林)에서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자기들의 절개를 지키며 이양에게 반기를 들고 영합(迎合)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또 이양은 이양대로 사림들을 못마땅히 여겨 그들을 배척해서 장차 큰 사화를 일으킬 듯한 형세를 자아냈다.

이양은 자기의 심복인 윤백원(尹百源), 이감(李戡), 권신(權信), 신사헌, 이영(李翎) 등과 더불어 어떻게 하면 윤원형의 세력을 꺾고, 또 사림들마저 일망타진을 하나 의논하기에 영일(寧日)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임금도 협잡으로 말썽만 부리는 이양에게 실망을 느끼고 다시 중전의 오라버니 되는 심의겸(沈義謙)에게 새로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심의겸은 전부터 임금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 자기의 외종조(外從祖)되는 이양을 치워버리고 사람들과 깊이 사귀어 오던 터였다. 심의겸은 한 번 임금의 밀지(密旨)를 받게 되자 우선 자기와 인척관계가 되는 부제학(副提學) 기대항(奇大恒)을 찾아가 이양을 탄핵할 시기가 왔다고 알렸다. 다음날 기대항은 어전에 나아가

이조판서 이양은 돈만 알고, 군신의 의도 모르는 자입니다. 자기에게 아부 않는 사람을 해치고자 할 뿐 아니라 자기의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일망타진하려 합니다. 그대로 두면 훗일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하는 탄핵의 제일성을 발했다. 한 번 이런 탄핵의 소리가 떨어지자 윤원형의 일파들도 잇달아 일어나서 이양을 쳤다.

한 동안 세력이 당당하던 이양도 여기에는 배겨낼 수가 없어 강계(江界)로 이 세상을 떠났다. 이래서 또 조정은 어제까지 좋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쫓겨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마침내 문정대비가 오래 병석에 누워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윤원형이 몰락할 차례였다. 그전까지는 대비의 세력이 무서워 입을 봉하고 있던 사람들마저 한번 윤원형에게 공격의 화살이 떨어지자 여기 저기서 들고 일어나 마치 조정 안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떠들썩했다. 한결같이 극형에 처하라는 소리 뿐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윤원형은 무도한 죄인인 줄은 과인도 짐작하는 바이지만 그는 과인에게 외숙이 되는 사람이오. 외숙을 어찌 처단할 수 있소. 다만 윤원형의 관직을 삭탈하고 시골로 보내도록 하오.

하는 명령을 내렸다. 윤원형은 원한을 품고 사람들의 복수가 두려워 밤에 몰래 애첩 난정을 데리고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내려갔다.

이보다 조금 앞서 임금은 오직 하나밖에 없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를 잃었다. 이때 세자의 나이는 불과 십삼세, 임금은 기가 막혀서

나라에서 지난번 을사년(乙巳年)에 무죄한 사람들을 죽였으니 나라 꼴이 바로 되어갈 수 있겠는가?

이렇게 탄식하며 때로는 술을 마시고 울기도 했다. 어느 때는 조정의 일도 보지 않고 궁중 깊이 들어 앉아서 조신(朝臣)들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그러자 문정대비는 또 손자를 새로 얻어보겠다고 명종의 후궁을 많이 몰색하여 들였다.

문정대비가 돌아간 이년 뒤에 명종도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이 차츰 위독해지자 임금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영부사(領府事) 심통원(沈通源), 병조판서 원곤(元 ), 도승지 이양원(李陽元) 등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임금은 눈을 뜨고 뭐라고 말하고자 하나 말이 되지 않았다. 임금은 끝내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대로 승하였다. 재위 이십이년, 때에 임금의 춘추는 삼십사세란 장년이었다.

이제 궁중의 어른이라고는 인순왕후 심씨 뿐이었다. 인순왕후는 매우 덕스러운 분으로 문정대비와 달라서 정사에 관여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던 소생인 순회 세자를 잃은 뒤로는 가끔 명종과 후사에 대해 이야기가 있었던 듯 대신들이 왕위 계승할 사람을 상주할 때 인순왕후는 곧 전교를 내렸다.

전에 덕흥군의 제삼자 하성군(河城君)을 양자로 삼으라는 말씀이 계시었소.

이로써 도승지 이양원, 동부승지 박소립(朴素立), 주서 황대수 등이 사직동 덕흥군의 저택으로 하성군을 모시러 갔는데 이 하성군이 바로 이조 십사 대 왕 선조(宣祖)이다.

 

 

 

 

[ 榮華를 좇는 사람들 ]

致誠 三千里

 

선조(宣祖=西紀 1,567-1,608)는 나이 십육세로 등극하였다. 뜻밖에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된 선조는 처음 얼맛동안은 양모인 인순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받았다. 그러나 인순대비가 몇 달 안 가서 스스로 정사를 상감에게 돌려보낸 후부터는 영상(領相) 이준경의 도움을 받아 초정(初政)에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우선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죄 없이 쫓겨난 사람들을 전부 석방하고 죽은 사람들에게는 관작을 회복시켜 주도록 교지를 내렸다. 이래서 한때 억울하게 잡혀 있던 사람들이 대개 나와 임금의 정치를 도왔다. 이제 임금의 나이도 십팔세가 되자, 양모인 인순대비는 오라버니 되는 심의겸을 불러 왕비를 맞을 의논을 했다.

여보게, 상감도 이제 나이가 찾으니 왕비를 구해야겠는데 어디 좋은 자리가 없겠나?

글쎄요. 아무래도 외척을 잘 골라야 할 것입니다.

심의겸은 전에 윤원형 등 외척들의 전횡을 많이 보아온 터라 우선 이렇게 누님 대비에게 말했다.

빨리 서둘러야겠네. 정식 왕비도 책봉되기 전에 후궁들 몸에서 왕자가 먼저 태어서야쓰겠나?

대비는 후궁인 공빈 김씨(恭嬪金氏)가 임해군(臨海君)을 낳고 또 후궁 김귀인(金貴人)에게서도 멀지 않아 왕자가 태어나리라는 소식을 듣고 하는 말이었다.

누님, 그렇더라도 왕비 간택은 신중히 하셔야 됩니다. 제가 알아서 잘 할 터이니 좀 더 기다려 주십시오.

아무쪼록 잘 해보게.

인순대비는 왕비 선택을 심의겸에게 일임했다.

심의겸은 곧 대비 앞을 물러나와 자기 당파 사람들과 의논했다. 되도록 자기와 가까운 사람하고 국혼을 시킬 생각인데 좀체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친구 박응남(朴應男)이

우리 형님 딸이 어떻겠소? 우리 집안은 세력을 부릴 만한 사람이 없으니 좋지 않겠소?

하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 여기에 찬성했다. 심의겸도

그럼, 어디 그렇게 해봅시다.

하고 그 길로 누님 인순대비를 찾아가 박응남의 형 박응순(朴應純)의 딸을 천거했다. 이리하여 곧 박씨가 왕비에 책봉되고 심의겸의 지반도 더욱 공고해지게 되었다.

선조 오년(1,571년)에 영상 이준경이 세상을 떠났다. 이준경의 죽음은 나라를 위하여 불행한 일이었다. 이준경으로 말하면 전에 퇴계(退溪)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지금 신하 가운데 의지하시고 믿을 만한 사람은 영의정 이준경 뿐인 줄 아뢰오.

할 만치 그는 당대의 명상이었다. 이준경은 죽은 뒤 그의 아들 이덕열(李德悅)은 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적어 놓은 것이라하여 유차(遺箚) 한 장을 올렸다. 그 유차는 이러했다.

< 지금 조신들은 큰 소리만 하면서 서로 붕당을 일삼으니 이것이 나중에는 반드시 나라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

임금은 붕당이 생긴다는 말에 찔끔했다. 이것을 듣고 이이(李珥)는 글을 올려

< 대저 사람이 죽을 때에는 착한 말을 하는 법인데 이제 이준경이 죽을 적에는 악한 소리를 하였소. >

이런 격렬한 말로 이준경을 공박했다. 삼사(三司)에서도 이준경이 쓸데없는 소리를하여 천청(天聽)을 현혹시켰으니 죄 주는 것이 옳다고 대들었다.

그러나 수찬(修撰) 유성룡(柳成龍)만이 홀로 이 말에 참여하지 않고

대신이 죽을 때 올린 말이 옳지 못하다면 그 말을 물리치는 것은 모르지만 죄를 주기까지 하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은가.

하였고 좌의정 홍섬(洪暹)도

이준경이 생전에 공이 많은데 죄 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므로 이 의논은 그만 두게 되었는데 이런 일이 있은지 몇 해 뒤에 과연 이준경의 말대로 조정은 붕당의 싸움터로 변했다.

이 무렵 임금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후궁으로 김귀인이 있었다. 김귀인은 원래 상주(尙州) 시골 태생으로 인순대비의 궁에서 무수리 노릇을 하고 있다가 임금의 눈에 들어 사람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김귀인이 아들을 낳자 임금은 인빈(仁嬪)으로 승격시켰다.

왕비 박씨한테서는 아직 소식도 없는데 먼저 얻은 공빈(恭嬪) 김씨는 벌써 아들만 둘을 낳았고 이제 또 인빈 김씨가 아들을 낳았다. 인빈은 공빈이 자기보다 먼저 아들을 둘이나 낳은 것이 좀 불만이었지만 임금의 사랑을 한몸에 지니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인빈의 그 모란꽃같이 환하게 잘 생긴 얼굴은 언제나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임금은인빈이 아들을 낳은 뒤로 더욱 그 발길이 잦았다. 인빈이 옆에 있어야만 임금의 마음은 즐거웠다.

오늘도 임금은 지루한 정사를 마치고 인빈의처소로 발길을 옮겼다. 부액해 바치던 시위들이 물러나자 방안에는 임금과 인빈만이 남았다. 조용한 침실이었다. 임금은 젊은 여인의 가느다란 허리에 팔을 드리워 강하게 끌어당겼다.

상감, 누가 보옵니다.

보긴 누가 봐, 너와 나 단 둘 뿐인데…

임금의 포옹은 더 한층 강렬해지고 지극히 행복스런 유열 속에 두 남녀는 시간이 흐르는 줄을 몰랐다. 이날 밤, 만뢰가 고요한 한밤중 임금과 인빈의 침실 안에서는 도란도란 얘기소리가 새어나왔다.

상감, 어린 왕자를 위하여 불공을 드려볼까 하나이다.

좋을 대로 하지, 뭐 그런 것까지 다 내게 허락을 맡노?

아니옵니다. 불공을 드릴려면 초가 있어야 하오니 황랍(黃蠟) 오백근만 내려 주십시오.

오백근? 그렇게 많이 드나?

그러하옵니다.

사실인즉 인빈은 자기의 소생으로 왕위를 계승시킬 생각이 간절하여 부처님 앞에 자기 소생의 수명장수를 빌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이튿날 임금은 내수사별좌(內需司別座) 김공량(金公諒)을 시켜 황랍 오백근을 인빈의 처소로 들여보내라 일렀다. 김공량은 인빈 김씨의 오라버니다. 그는 소문이 나면 시끄러울 줄 알고 은밀히 황랍을 바리바리 실어 인빈에게로 보냈다. 황랍 오백근은 곧 초로 변하여 조선 팔도에 흩어져 있는 명산대찰로 흘러 들어가 불사를 하는데 쓰여졌다. 그리고 인빈 김씨는 서울 근처의 절에 나가 부처님 앞에 엎드려

이 어린 왕자에게 소원성취하옵도록 복을 내려 주옵소서.

하고 빌고, 한편 자수원(慈壽院)의 비구니들을 시켜서는 금강산에 들어가서 유점사, 장안사 등 큰 절에 불공을 드리라고 명했다.

이러한 불사는 물론 어디까지나 은밀한 가운데 진행되었지만 그래도 한입 건느고 두입 거너서 그 소문은 점점 퍼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이 소문은 선비와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인빈이 아들을 위하여 불공 드린다고 황랍을 가져다가 초를 만든다지.

인빈의 목통과 담이 여간 아니야.

황랍 오백근을 바리바리 실려서 금강산 일만 이천봉 봉우리마다 촛불을 켜놓고 천일 기도를 드린다나.

뭐 황랍 오백근태미나? 그래 대간(臺諫)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나?

이러한 소문이 물끓듯 조야를 뒤덮자 사간원에서 먼저 글을 들고 일어났다.

<전하, 황랍을 무엇에 쓰시려고 오백근태미나 들여가셨습니까? 항간에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쓰는 용도를 밝히어 사람들의 의혹을 풀도록 하십시오.>

이러한 간관들의 상소가 임금 앞에 올려졌다.

내수사 물건을 내 마음대로 쓰는데 간원에서 무슨 시비인가? 이것은 일반 사람이 알지 않아도 무방하다.

임금은 간단히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간관들은 또 다시 상소를 올렸다.

<지금 궁중에서는 많은 황랍이 필요 없는 줄아옵니다. 이곳에는 필시 좋지 못한 일과 구부러진 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이다. 어찌하여 그 쓰시는 길을 밝히지 아니하옵니까?>

이 말을 들은 젊은 임금은 언성을 높여 호령했다.

기막힌 일이다. 안에서 쓰는 물건에 대하여 신하들이 이렇게 참견을 하니 어쩌자는 건가?

옳은 길로 임금을 인도하려던 간관들은 이 열화와 같은 임금의 노여움에 모두들 움찔했다. 마침내 대사간(大司諫) 이이(李珥)는 사직서를 정원에 바치고 비장한 상소를 했다.

<근자 밖에서는 나라에서 불상(佛像)을 만드느니, 불사를 크게 이룩한다느니 하는 말이 떠돌고 있던 중 마침 황랍을 안으로 들이라는 말씀이 계시니 어찌 백성들이 의심하지 않으오리까. 앞서 신등이 여러 차례 간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해와 같이 정대한 전하의 입장을 밝혀서 백성들의 모든 의심을 끊어버리려한 것이온데, 전하는 간관들이 승순(承順)치 못하다 해서 크게 마음이 아프셨다 하오니 슬픈 일이옵니다. 아무쪼록 신의 무리 중 부족한 자를 쫓아내서 뒤사람을 징계하옵소서. >

이 말을 듣고 있던 임금은 더욱 노기를 띠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부처를 만든다는 소문을 누구에게 들었는가? 내가 친히 잡아서 국문(鞠問)코자 하노라.

임금은 대사간 이이의 사직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이때로부터 임금과 이이의 사이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사헌부의 대사헌의 명을 받든 헌부 서리들이 금강산으로 치성을 떠난 자수원 비구니들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는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가 들고 일어나

황랍 오백근을 대궐 안으로 들여간 것은 금강산에 비구니들을 보내서 치성하느라고 쓴 것이 분명하오. 헌부 서리들 손에 비구니들이 잡힌 것을 부면 증거가 확실하오.

이렇게 황랍 오백근을 쳐들어 말하니 성균관을 위시하여 팔도의 향교(鄕校) 선비들도 벌떼처럼 상소를 올려 들고 일어났다. 여기에는 임금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임금은 할 수 없이 내수사별좌 김공량을 불러 넌지시 일렀다.

아무도 모르게 황랍 오백근만 더 마련해 들여 보내라.

임금은 이렇게 영을 내린 뒤에 양사와 모든 선비들에게

비구들이 금강산으로 치성을 드리러 간 것은 내가 사실 모르는 일이니, 과히 나를 책망하지 말라. 그대들이 하도 의심하니 황랍 오백근은 도로 내수사로 내보내기로 한다.

임금 선조는 마침내 황랍 오백근을 내수사에 도로 내보내는 형식을 취하여 나라의 여론을 가라앉게 했다. 그러나 인빈 김씨는 양사(兩司)를 위시하여 모든 선비들에게 앙심을 먹었다.

 

 

 

비단 이불에서 싹튼 分黨

 

선조 팔년, 당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참변으로 죽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근공(金謹)의 문하생으로 김효원(金孝元)이란 명망 있는 수재가 있었다. 김효원은 심의겸보다 일곱 해 아래 되는 나이로 심의겸과 친분이 두터웠다.

심의겸이 아직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의 벼슬로 있을 때였다. 어느날 공사(公事)로 인해서 당시 영의정이던 윤원형(尹元衡)을 만나러 그 집으로 찾아갔는데 그때 윤원형은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청지기는 그를 작은 사랑으로 인도했다. 심의겸이 사랑에 들어가 보니 아랫목에는 매우 화려한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심의겸은 어떤 손님이 와서 묵는가 하고 청지기에게 물은 즉 청지기의 대답이

건천동 서방님의 침구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건청동 서방님이란 윤원형의 첩 정난정(鄭蘭貞)의 친정 당질녀서(堂姪女 ) 되는 김효원을 말함이었다.

이때 윤원형의 첩장인(妾丈人) 정윤겸(鄭允謙)의 종손녀서(宗孫女 )되는 김효원은 그 처당 고모 즉 윤원형의 첩 난정의 사랑을 받아서 늘 그 집을 드나들던 터였다.

청지기에게 이 말을 들은 심의겸은 김효원이 사림(士林)에게 쟁쟁한 이름을 가진 명망 있는 선비로서 세도 재상의 집 사랑에 쫓아다니며 아첨하기 위해서 금침까지 끌고가서 묵는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때부터 김효원을 마음 속으로 매우 비열한 인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김효원은 등과해서 재명(才明)이 날로 높아갔다. 때마침 이조전랑(吏曹銓郞) 오건(吳健)이 사직하게 되자 그 후임자를 추천하게 될 때에 김효원이 지목되었다. 이조전랑이란 벼슬은 비록 고위직(高位職)은 아닐지라도 그 직책이 내외 관직의 추천과 출석 등 중요한 직책을 맡은 일인 때문에 당시 명망 있는 인물이요, 똑똑한 자격을 가진 자가 아니면 쓰지 않았던 것이다.

오건은 김효원의 재질을 사랑해서 그를 후임자로 천거했더니 당시 이조참의(吏曹參議)이던 심의겸은 전날 김효원이 이부자리를 끌고 세도재상의 집 사랑을 쫓아다니던 일을 끄집어 내서 말하고 지개(志介)가 그와 같이 천박하고 야비한 인물이니 아직 그 자리에 서지 못할 사람이라고 반대했다. 이래서 김효원은 창피만 당하고 낙선되었다. 그러나 김효원을 동정하는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심의겸이 오래 전 일을 들추어서 후진의 앞길을 막는 것은 권세를 남용하는 것이다. 그는 국척(國戚)으로서 국정에 지나친 간섭을하여 인재등용을 방해한다. 라는 반박을 했다.

수년 후에 김효원은 결국 이조전랑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상당한 공적을 쌓은 후 그 자리를 떠나는데 후임자로 심충겸(沈忠謙)의 말이 나왔다. 심충겸은 의겸의 아우이다. 전부터 외척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하던 신진사류들은 불만을 품고 반대했다. 특히 김효원은 정면으로 반대했다. 김효원은 예전 심의겸이 자기를 반대하던 일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천거했다. 심의겸은 김효원의 태도에 매우 분개하여

옳든 그르든 나와 혐의하면 혐의했지 내 아우에게까지 혐의를 옮기는 것은 소인의 하는 짓이다. 외척이라도 원흉가(元兇家)의 문객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고 비꼬았다.

이때부터 당론은 갈라져서 김효원을 동인(東人)이라 하고 심의겸을 서인(西人)이라 하였다.

우의정 박순(朴淳) 같은 사람은 원로이면서도 심의겸의 편을 들었고 대사간 허엽(許曄)은 김효원보다 훨씬 선배이면서 김효원 편을 들어 조정은 완전히 두 파로 갈라졌다. 그중 김계휘(金繼煇), 정철(鄭撤), 윤두수(尹斗壽), 홍성민(洪聖民), 이해수(李海壽), 구사맹(具思孟), 신응시(申應時), 이산보(李山甫) 등은 서인 중의 쟁쟁한 인물들이고, 동인에는 김우옹(金宇 ), 허엽, 유성룡(柳成龍), 이산해(李山海), 이발(李潑), 우성전(禹性傳), 이성중(李誠中), 허봉(許 ) 등이 있었다. 이것을 을해분당(乙亥分黨)이라 부른다.

이때에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부제학으로 있으며 조정의 분당을 매우 근심하여 이를 제거한다고 심의겸을 개성유수(開城留守), 김효원을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내보냈다. 그래도 조정의 당파 싸움은 여전하여 이이는 하는 수 없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선조(宣祖)는 다시 이이를 불러들여 대사헌, 병조판서 등 중직을 맡겼다. 이이는 우선 동인 이발과 서인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서

두 분이 마음을 합해서 나라일에 힘 쓰시오.

하고 권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도리어 이이를 보고 공연히 어물어물하기만 한다고 불쾌히 여기고 듣지 않았다. 특히 동인 편에서는 율곡이 중립인물(中立人物)이 아니고 서인편인즉 그의 말을 좇다간 서인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들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조정에 있는 서인들은 대개 율곡의 문인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친구들이었던 까닭이다. 한편 서인쪽에서는 또 율곡의 중립적 태도를 평하여

천하에 어찌 두가지 일이 모두 옳고 두가지 일이 모두 그른 법이 있을 수 있느냐.

하고 은연중에 율곡이 서인편을 적극적으로 두둔하지 않는 것을 불만히 여겼다.

그러던 중 선조 십팔년에 이이가 세상을 떠났다. 이이가 조정에 있을 때는 그래도 그의 힘으로 서인들이 득세했었다.

그러나 일단 이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때까지 상주(尙州)에서 한가로이 지내던 동인의 거두 노수신(盧守愼)이 들어와 영의정이 되고 이산해는 이조판서, 유성룡은 예조판서가 됨으로써, 갑자기 동인의 세력이 조야에 팽창하고 서인이 밀려나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동인들의 세상이었다. 그들은 먼저 서인의 원흉(元兇)인 심의겸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청양군(靑陽君) 심의겸은 전날부터 박순, 정철, 신응시, 김계휘, 윤두수, 박응남(朴應男) 등과 붕당을 만들고 권세를 부려 조정을 혼란시켰소. 응당 관직을 삭탈하여 엄중한 죄를 주어야 하오.

하고 들고 일어났다. 임금은 심의겸을 죄 주고 싶지 않았으나 동인들에게 눌리어 어찌할 수 없었다. 이때는 이미 인순대비도 세상을 떠난 뒤라 심의겸은 안으로부터의 원조도 받을 수가 없었다. 붕당의 원흉은 마침내 파직을 당하고 그 후 얼마 안 가서 곧 세상을 떠났다.

심의겸이 쫓겨난 뒤로 동인들은 더욱 득세하여 서인들을 압박하고 규탄하였다. 이러다가 마침내 기축역옥(己丑逆獄)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기축역옥은 정여립(鄭汝立)이란 일개 선비의 반항으로 일어난 것이다.

정여립은 전주(全州) 사람으로서 총명하고 말을 잘하므로 일찍이 이이가 천거하여 그를 수찬(修撰)을 삼았다. 정여립은 이이를 항상 공자(孔子)에게 비교하여 높이 받들었다. 그러나 이이가 죽은 뒤로는

(이제 동인의 세상이 되겠구나!)

재빠르게 판단하고 동인의 거두 이발과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하지만 정여립은 동인들이 자기를 서인 이이의 제자라고 해서 배척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일찍이 스승으로, 은인으로 섬기어 오던 이이를 비방하기 시작하여, 경연(經筵)에서 터무니없는 말로 이이를 험뜯으니 임금도 놀라

정여립은 전에 이이를 스승으로 섬기더니 이제는 그 스승을 욕하는가?

하고 그를 나무랐다.

동인들도 비록 자기네들이 미워하는 이이라 하지만 남에게 아첨하느라고 스승을 욕하는 정여립을 보고 모두들 간흉 소인이라고 욕을 했다. 다만 이발만이 힘써 그를 두둔하고 천거했으나 임금도 그 후로는 정여립을 나쁘게 보아 종시 쓰지 않았다.

이에 정여립은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내려가 불평분자를 모아들여서 그들과 시국의 불평을 말하고 타매(唾罵)하다가 마침내 반역의 음모를 품게 되었다.

목자망(木子亡) 정읍흥(鄭邑興)이다.

장차 난리가 나서 사람의 수가 아주 적어진 후에야 진인(眞人)이 나온다.

정씨(鄭氏)는 진인이다. 무자년(戊子年)이나 기축년(己丑年)에 난리가 난다.

이러한 소문들이 그때 호서(湖西) 지방을 비롯하여 해서 지방에까지 파다하게 떠돌았다.

이것은 모두 정여립이 사람들을 시켜서 퍼뜨리게 한 것이다. 기축년 구월이 되면서 황해도 일대에서는 난리가 쉬 난다고 자못 소란하였다.

이때 송익필(宋翼弼)이란 사람이 정여립의 모반하려는 기색을 자세히 조사해 가지고 시골 시람들을 시켜 밀고케 했다. 고변하는 글을 황해도에서 먼저 올라왔다. 조정에서는 임금이즉시 편전에 나와 고변서를 앞에 놓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정여립이 역적질을 한다는 게 사실인가?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정여립과 동종(同宗)이므로 평소부터 사이가 좋았다. 그는 임금 앞에 엎드려

그건 당치고 않은 말들입니다. 정여립이 한낱 독서인에 불과한데 어찌 역적질을 꾸미겠습니까?

할 뿐이었다. 조정에서는 계속 이 고변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다가 결국 금부도사(禁府都事)와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정여립을 잡아오도록 했다.

한편 정여립은 밀고한 사실을 알고 진안(鎭安) 죽도로 도망했다. 그러나 팔도를 두루 찾아서라도 기어이 잡아 올리라는 어명이 내리자, 정여립은 더 숨을 길이 없어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고 말았다. 정여립의 시체는 곧 서울로 올려다가 반역죄로 다시 그 목을 베게 하고 그 아들 옥남(玉男)을 국문하기 시작했다. 옥남은 이때 나이 십칠세로 날 때부터 손에 임금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이 옥사를 맡은 위관(委官)은 우의정 정언신이었는데 그는 이 옥사를 맡아본지 한달이 지나도록 결말을 내지 못했다. 그러자 서인측에서는 이번 기회에 동인을 없애고자 들고 일어났다. 먼저 정철이

옥남의 죄를 국문하는 것이 너무 완만하고 지리하게 끌기만 한다. 그 까닭을 밝히라.

이렇게 논박하고 또 백유함(白惟咸)도

이발(李潑)의 무리들이 정여립과 서로 결탁한 때문에 정언신이 여립의 죄상을 덮어 주려는 것이다.

하고 신랄하게 대들었다.

이에 임금은 정언신을 물러나게 하고 새로 정철을 위관(委官)에 앉혔다. 정철이 새로 위관이 되어 옥사를 다스리게 되자 여기 저기서 상소문이 빗발같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여립은 동인들과 결탁하고 반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소. 이제 그의 친당을 보면 이발,이길(李 ), 백유양(白惟讓), 정언신, 정언지(鄭彦智), 홍종록(洪宗祿), 정창연(鄭昌衍) 등이요.

이것은 호남의 유생 양천회(梁千會), 양천경(梁千頃) 등이 올린 상소문이었다.

정철은 여립의 조카 정집(鄭緝)과 호남 사람 선홍복(宣弘福)이 밀고한 것을 가지고 임금께 아뢰었다.

정언신, 홍종록, 이발, 백유양, 정언지, 이길 등은 여립과 내통한 것이 뚜렷하므로 반역죄로 처참함이 마땅하나이다.

임금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이들을 곧 반역죄로 처단하고 다시 김우옹(金宇 )과 정인홍(鄭仁弘)도 정여립과 평소에 친했다는 것으로 해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사건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시 경인년 오월에는 정개청(鄭介淸)이라는 전라도 유생이

< 역적 정여립의 집터를 보아 주었다. >

는 죄목으로 잡혀 왔다. 곧 정개청을 문초하였으나 정개청이 집터를 보아 주었다는 것은 전혀 알 길이 없고 그 대신 다른 죄 두가지가 나타났다.

즉 그 하나는 소위 배절의론(排節義論)이다. [배절의론]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 절의(節義)란 여사여사한 것인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절의의 이름만 취하고 그 알맹이는 잃어버렸다. >

는 뜻의 내용으로, 후세의 소위 알맹이 없는 허명의 절의를 욕한 글이었다. 글의 제목은 원래 [배(排)]자는 없었고 그냥 [의절론]이라 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허명의 절의를 배척한 논이라고 죄를 만들자는 편에서는 [배절의론]이라 주장하였다.

훗일 그의 후손이며 후생들의 변무(辯誣) 상소에는

<어디 거기 배(排) 자가 있습니까? 없는 배자를 억지로 붙여서 죄목을 지었습니다.>

하여 그야말로 본의를 저버린 글자의 다툼이 되었다.

둘째 죄목은 정개청이 정여립에게

<도(道)의 고명(高明)을 본 이는 당대에 오로지 존형(尊兄) 뿐이외다.>

라고 칭송하여 편지한 것이 발각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 임금은 노하여 사관(詞官)에게 명 하여 [배절의론]을 조목조목 들어서 공박하는 글을 짓개하여 각 향교에 돌리고 자기 말로는 서로 알지도 못한다더니 두 번째에는 얼굴만 서로 안다 하고, 지금 또 이런 해괴한 편지가 나타나니 대체 도(道)는 무슨 도를 가리킴이냐?

하여 엄벌에 처하게 하였으나 정철이 여러 번 임금께 아뢰어서 귀양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개청은 귀양 간지 한달 뒤에 죽어버렸다. 이때 죽은 이 정개청의 서원(書院)은 그 후 삼백년간을 당쟁의 승부를 따라서 헐리었다가 다시 서고 섰다 다시 헐리곤 했다.

그 다음 문제 거리의 인물이 또 하나 생겨났다. 그는 비명(非命)에 죽었고 죽은 뒤에도 꽤 오래 들추어져서 당쟁에 이용을 당한 인물이었다.

일찍이 우계 성혼(牛溪成渾)의 집 근처에 한 중노인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성혼이 우연히 그 집에 들렸더니 인물 생김이 산림처사(山林處士) 같았다. 그래서 그 뒤 율곡 이이와함께 또 찾았다. 이리하여 당시의 두 거유(巨儒)에게 알려진 바 되어 상계(上啓)하여 육품직으로 지평(持平) 벼슬을 얻고 후에 경상도 진주(晋州)에 내려가 살았다. 그가 바로 최영경(崔永慶)이다.

그런데 역적 정여립의 아들 옥남(玉男)의 초사 가운데 대장에 길삼봉(吉三峯)이란 사람이 있었다. 하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길삼봉이란 실물은 없었다. 그런데 그 뒤 차차 어디서 난소문인지 길삼봉이 아니라 최삼봉(崔三峯)이라는 말이 돌았다. 한데 우연히도 최영경의 호가 삼봉(三峯)이라 이 때문에 최영경은 서울로 잡혀왔다.

원래 최영경은 정철과 사이가 좋지 않아 전부터 정철을 비방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최영경이 옥에 갇힌 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일부러 위관(委官) 정철을 조용히 만나서 그의 심경을 물었다. 그러자 정철은 변색을 하면서 평소에 영경이 나를 욕했다 하지만 사혐(私嫌)으로써 어찌 역옥(逆獄)을 다스리랴.

하고 애써 풀어 주어 최경영은 일단 백방이 되었다. 그런데 그 뒤 이상한 시(詩) 한 구절이 발견되어 최영경은 다시 문초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몸이 쇠약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이로써 일단 기축역옥(己丑逆獄)은 끝났다.

 

 

 

野望山脈

 

기축역옥(己丑逆獄)이 있은 뒤로 붕당의 세력은 바뀌었다. 이발(李潑)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호남 지방의 동인은 완전히 없어지고 오직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의 동인이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느 때부터인지 호남 지방의 동인들을 북인(北人)이라 하고 영남지방 동인을 남인(南人)이라고 불렀다.

선조(宣祖)는 기축년 옥사 때 정철의 힘으로 호남지방의 동인을 전부 몰아내고 이제 남은 세력 중 북인 이산해(李山海)를 영의정으로 삼고 서인 정철을 좌의정, 남인 유성룡을 우의정을 삼아서 붕당을 공평히 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기축역옥 후 조정의 명망은 서인 정철에게로만 모두 쏠렸다. 이산해는 영의정으로서 정철에게 장차 떨려날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때 후궁에서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 하고 있던 인빈 김씨의 세력은 왕비 박씨를 능가했다. 왕비 박씨는 아들을 하나도 낳지 못하는데 인빈은 황랍 오백근으로 크나 큰 말썽을 일으킨 후 계속 아들만 사형제를 낳았고 또 딸 다섯형제를 내리 낳았다. 왕비 박씨에게서는 아들이 하나도 없는데 왕자 사형제와 딸 다섯을 낳았으니, 인빈의 의기는 자못 양양했다.

후궁 속에는 인빈 김씨보다도 먼저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을 낳은 공빈(恭嬪)이 있으나,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났고 다음에는 순화군(順和君)을 낳은 순빈(順嬪)이 있고, 인성군(仁成君)과 인흥군(仁興君)을 낳은 정빈(貞嬪), 흥안군(興案君)과 경평군(慶平君)을 낳은 온빈(溫嬪)이 있으나, 임금 선조의 귀염은 인빈 김씨가 독차지를 했다. 임금 선조는 인빈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 들을 지경이었다.

인빈 김씨의 세도가 높아가니 내수사별좌 김공량(金公諒)의 세도도 누이의 세도를 따라서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동정을 자세히 살피게 된 영의정 이산해는 정철의 세력을 억제하는 길은 내수사별좌 김공량과 친해서 인빈 김씨를 가까이 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이산해는 김공량을 그의 집으로 자주 찾아왔다. 당대의 영의정이 일개 별좌의 집을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산해는 자기들의 일파가 세력을 잡기 위해서는 그런 것도 관계치 않았다.

어느 날 밤, 이날도 이산해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느라고 밤이 깊어서 선비 복색을 하고 상노 아이 하나만 데리고 김공량을 찾아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인정(人定)이 친 뒤인지라 어둠 속에서 순라(巡羅)꾼이 나타나서

누구냐?

하고 호통을 치며 덤벼드는 바람에 영의정 이산해는 몹시 당황했다. 이 꼴을 하고 영의정 아무개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아니 왜 대답을 못하는 거냐? 꿀먹은 벙어리냐?

순라꾼은 말을 마치자마자 달려들어 영의정의 멱살을 잡고 눈을 딱 부릅떴다. 이산해는 얼떨김에 다급해져서

나는 영의정일세.

하고 신분을 밝혔다.

순라꾼은 잠간 멈칫하다가 상노의 손에서 등불을 빼앗아 들고 얼굴로 가까이 가져다댔다.

환한 불빛에 눈이 부셔 영의정은 고개를 돌렸다. 복색은 비록 미복(微服)이지만 망건 편자에는 옥관자(玉貫子)가 붙어서 불빛에 찬란했다.

정말 대감이십니까?

순라꾼은 슬며시 뒤를 두며 물었다.

그러네. 틀림없는 영의정일세.

대감께서 이 밤중에 무슨 일로, 더구나 구종별배(驅從別輩)도 안 데리시고 평교자(平轎子)도 안타시고 이복 차림으로 다니십니까?

그저 그럴 일이 있어서 그러네.

이산해는 억지로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대감께서도 나라법은 지키셔야 합니다.

이런 순라꾼의 훈계를 듣고 이산해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이후 이 소문은 온 장안에 퍼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영의정이 인빈 김씨의 오라비 김공량을 찾아다니다가 순라꾼에게 잡혀서 큰 봉변을 당했다니.

나라가 망해도 분수가 있지. 영의정이 무엇이 부족해서 김공량이 한테 아첨하러 돌아 다니는 건가? 에이 더러워…

선비들은 이렇게 탄식했다.

한편 새로이 좌의정이 된 정철과 우의정이 된 유성룡은 포부가 많았다. 이들은 서로 만나서 일을 의논하다가 유성룡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정궁(正宮)에는 일점 혈육이 없으신데 상감께선 후궁들만 너무 가까이 하셔서 왕자가 열 세 분이나 되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오.

글쎄 나도 거기 대해 많이 생각해 보고 있소. 정궁(正宮)에 아들이 계시다면야 이 어른이 동궁(東宮)이라 아무런 걱정이 없겠지만…

좌의정 정철도 동감이라는 듯이 얼굴에 근심의 빛을 띠운다.

좌의정 대감, 우리가 이 기회에 동궁을 속히 모시도록 상감께 아룁시다. 우선 나이 많은 왕자로 동궁을 세워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함이 어떻겠소?

대단히 좋은 말씀이요. 원자(元子)가 안 계시니 동궁을 봉한다면 여러 왕자 중에서 순서대로 나이 많은 왕자로 동궁을 세워야 할 것이요.

정철의 찬동하는 말을 듣고 유성룡은 마음이 헝그러워졌다.

그럼 이 사람은 곧 영의정 대감을 만나 내일이라도 상감께 동궁 책봉을 건의하자고 말을 하겠소.

유성룡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글쎄 영의정이 찬동할까?

정철의 근심어린 대답이었다. 유성룡은 의아해 하는 눈치로 정철을 보며

어째서 영의정 대감이 안 듣겠소?

영의정은 지금 김공량이 하고 가깝소. 공량이는 인빈의 오라비 아니요? 인빈에게는 장성한 왕자가 여럿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첫째 왕자 임해군의 어머니 공빈은 불행히 돌아가서 없지 아니하오, 그러니…

안 될 말씀. 우리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대의 명분을 찾아 임해군을 동궁에 세우자는 것이요. 어찌 이런 일에 친하고 안 친하고가 있겠소?

유성룡은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물론이요. 그러나 세상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니 걱정이요.

그럼 우리 둘이서 영의정 대감을 찾아가 그의 의향을 물어봅시다.

좋소.

이리하여 좌의정 정철과 우의정 유성룡은 영의정 이산해를 찾아갔다. 영의정의 집은 으리으리하였다. 우선 큰 사랑에 들어가 보니 아랫목에는 비단 보료를 깔아놓고 뒤에는 비단 병풍을 둘러쳤다. 정철과 유성룡은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얼마 후 주인 이산해는 명주 옷으로 위 아래를 감고 들어서며

두 대감께서 어떻게 이렇게 찾아 오셨소?

좌의정 정철은 좋은 일이라면 시각을 지체지않고 기어코 성사를 해보려는 성격이 있었다.

영의정 대감!

하고 정철은 자기네들이 찾아온 목적을 대강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철의 얘기를 다 듣고난 영의정 이산해는

응당 동궁을 책립하자면 제일 왕자인 임해군이 동궁이 될 것이지만, 그러나 아직 중궁께서 젊으셨으므로 상감께서는 혹시나 하고 아들 낳기를 기다리고 계실는지도 모르오. 그러니 이제 우리가 공연히 이 말을 드리면 도리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하고 난색을 보였다. 그러나 성급한 정철은

아니, 상감께서 올해 춘추가 사십이신데 무엇을 더 기다려 본다는 말이요?

하고 우겨댔다. 옆에서 유성룡도

영의정 대감, 지금 정궁에는 원자가 없으시고 후궁에만 장성한 왕자들이 많은데 민망(民望)을 든든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속히 왕자 중에서 동궁을 세워야 하겠소. 내일이라도 우리 셋이서 조당(朝堂)에 모여 함께 들어가 아뢰기로 합시다.

내일? 내일은 좀 바빠…

이산해는 눈을 깜짝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모레로 하지요.

정철이 말했다.

그럽시다. 모레쯤 모이기로 하지.

이산해는 말을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서고 남은 두사람도 모레 조당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흩어졌다.

약속한 이틀 뒤였다. 정철과 유성룡은 벌써부터 모여서 이산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산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급한 볼 일이 생겨 못가니 상감 뵈오러 갈 것을 연기해 주기 바라오.

하는 글발만을 보내왔다. 성미 급한 정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흥, 국가 대사를 위해 예궐하는 마당에 영의정이 급한 일이 생겼다고 언약을 어기다니, 괘씸하고 고이한지고!

하고 이산해를 욕했다.

한편으로 영의정 이산해는 정철, 유성룡 등과 조당에 모여서 동궁 책립을 아뢰고자 약속한 뒤에 가만히 밤중에 김공량을 찾아가서

지금 정철은 임해군을 동궁에 세우고 신성군(信城君)의 모자와 그대를 죽이려 한다.

고 일러 주었다. 이러한 말에 김공량은 깜짝 놀라 곧 궁중으로 들어가 누이 인빈에게

누님 큰일 났소!

하고 이산해한테서 들은 얘기를 다 고해 바쳤다.

인빈은 또 그날 밤으로 임금을 붙들고 울면서

상감, 저는 어차피 죽을 바엔 대궐을 더럽히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서 죽겠나이다.

하고 애원했다. 임금은 깜짝 놀라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인빈의 대답은

지금 정승 가운데 임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우리 모자를 죽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임금은 단지 껄껄 웃었다. 동궁을 책봉하고 아니하는 것은 내게 달렸지, 정승에게 달렸겠느냐, 무슨 그런 헛소문을 듣고 근심하느냐 하고 위로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는 줄도 모르는 정철은 며칠 후 유성룡과 함께 영의정을 대신해서 동궁 책봉에 대한 계청을 올렸다.

< 상감, 지금 세상이 흉흉하오니 민망을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 하루라도 속히 동궁을 세우도록 하십시오. >

이 말에 임금은 문뜩 생각이 났다. 전에 인빈에게 듣고는 다만 웃고 말았지만 이제 정승의 이런 계청이 있는 것을 보니 사실 무슨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는 듯 싶어 임금의 노여움은 지극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직도 중궁이 젊었는데 후사가 나올지도 모르는 이때 누가 그런 생각을 하였소.

정철은 임금이 이렇게 진노할 것은 생각치 않았으므로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지금 내가 아직 살아 있는데 경은 장차 세자를 세워서 무슨 일을 하려는가?

임금의 노한 분부가 또다시 떨어졌다. 대사간 이해수(李海壽)와 부제학 이성중(李誠中)이 정철이 혼자서 불벼락을 맞는 것이 딱해서 어전에 엎드리며

상감, 동궁을 세우자는 것은 좌의정 혼자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하들이 다 함께 의논한 결과 아뢰는 것입니다.

임금은 대사간과 부제학의 이런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무엄한지고…

여전히 노기에 찬 호통이었다. 임금은 그대로 용상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철은 이날 대궐에서 물러나오는 길로 좌의정 직에서 물러난다는 사표를 써서 바쳤다. 이렇게 임금의 미움을 산 기회를 타자 동인측에서는 정철을 참소하기 시작했다.

임금도 인비의 참소를 들어서 정철을 미워하던 참이라 마침내 정철을 강계(江界)로 귀양을 보내라는 영을 내렸다. 이 바람에 대사간 이해수와 부제학 이성중의 벼슬도 외직(外職)으로 쫓겨나고 이밖에 정철과 친하게 지낸 윤두수(尹斗壽)와 이산보(李山甫) 등 많은 사람이 벼슬이 떨어지고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壬 辰 倭 亂

서울을 버리고

 

그 뒤 일년쯤 지나 왜구(倭寇)가 쳐들어 왔다. 선조(宣祖) 이십오년 사월 십삼일 부산을 지키고 있던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힘을 다하여 막았으나 반나절이 못되어 패하고 전사했다. 부동산성을 빼앗은 적병들은 다시 동래로 들이닥쳐 동래성을 포위하였다.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은 빈약한 군대와 녹슨 무기로 며칠을 대항하였으나, 일본군의 조총(鳥銃) 앞에 동래성도 미구에 함몰당하고 말았다.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자 일본군은 승승장구 경상도 여러 고을을 폭풍처럼 휩쓸고 북상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 급보를 접하자 크게 당황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급히 내려가게 하고 다시 뒤미처 대장 신립(申砬)으로 도순변사(都巡邊使)를 삼아서 순변사 이일의 뒤를 후원하게 하였다. 이일은 전에 북쪽에서 야인을 물리쳐 혁혁한 무훈을 세운 사람이고 대장 신립은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信城君)의 장인으로 임금 선조의 신임이 가장 두터울 뿐 아니라 이일과 함께 당대의 명장이라는 칭호를 짊어진 사람이었다.

이들은 모두 크게 장담하고 내려갔다. 이때 이일은 급한대로 군인을 모집할 사이도 없이 단기(單騎)로 내려갔는데 뒤에 군사라고 모집해서 내려보낸 것을 보면 그것은 군사가 아니고 시정에 있는 서리나 유생, 무뢰한들 뿐 그것도 삼백명에 불과했다. 이래서 이일은 지방의 군사들을 모을대로 모아 보았으나 그 세력 역시 보잘 곳이 없었다.

신립이 미처 경상도 땅을 밟기도 전에 이일이 참패한 소식이 들려왔다. 신립은 겁을 먹고 새재(鳥嶺)에 이르러 진을 친 채 감히 진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신립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이 자연의 요새인 새재(鳥嶺)를 버리고 충주(忠州)로 물러가 달래강(丹月江)을 등지고 배수(背水)의 진을 쳤다. 종사관 김여물(金如 )이 이것을 보고

지금 이일이 상주에서 패한 것은 문경 새재의 요새를 지키지 않고 도리어 지나치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상주에서 왜병을 막은 까닭입니다. 장군께서는 군사를 돌려 새재를 지키도록 하십시오. 새재 높은 곳에서 적을 막는다면 우리는 비록 팔천여명의 군사를 가졌다 하나 한 사람이 능히 열명의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간했다. 그러나 도순변사 신립은

아닐쎄. 적병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에서 좌우로 철기(鐵騎)를 달려서 싸워야 승리할 수 있네. 두고 보게.

그렇지만 자고로 험준한 곳을 지켜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왕 새재로 나가지 아니 하시려면 높은 언덕에 결전을 해서 쳐들어 오는 적병을 산 위에서 화살로 쏘아 막읍시다.

허, 글쎄 그런 게 아니래두.

신립은 끝내 김여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왜병은 어느새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로 몰려왔다. 마치 급한 풍우같이 무서운 형세로 닥쳐 왔다. 신립의 군대는 정돈할 사이도 없이 왜병과 마주 싸우게 되었다. 군사들은 뒤에 큰 강이 있어 달아날 수 없으므로 사력을 다 해 싸웠다. 신립은 말을 달려 적진 속으로 두번씩이나 돌격을 했다. 그러나 어느덧 길은 막혀서 적진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뒤에는 배수진 달래강이요, 앞에는 조총을 어지럽게 쏘면서 포위해 들어오는 왜병의 떼들이다.

신립은 죽을 것을 각오하고 말을 다시 달려 적진으로 쳐들어 가 수십명을 죽여버렸다.

그러나 힘은 다하고 형세는 글렀다. 군사들은 자꾸 조총 탄환에 밀려 달래강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강물은 붉게 물들고 시체는 강이 차도록 떠내려 가고 있었다.

신립은 이제는 더 싸울 기운조차 없었다. 옆에 있는 김여물을 돌아보고 종사관, 미안하이. 내가 자네 말을 안 들은 것을 후회하네. 나는 이제 죽을 몸이니 어서 자네나 피해 달아나게.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저도 이미 각오한 몸이올시다.

그럴 것 없네. 자네는 어서 달아나 훗일을 기약하게.

사나이가 세상에 났다가 나라일에 죽는 것처럼 쾌한 일인 없습니다. 저도 장군과 함께 같이 죽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끝까지 달래강 기슭에서 왜병과 백병전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말을 탄채 달래강 푸른 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 비록 적에게는 패했을 망정 깨끗이 죽어 적에게 항복하지 않으려는 때문이었다. 김여물은 바로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유명한 공신 김유(金 )의 아버지이다.

신립의 패보는 서울의 상하 인심을 극도록 흔들어 놓았다. 조정을 위시하여 서울 장안은 수선수선하고 불안과 공포 속에 휩싸여 떨기만 했다.

임금 선조는 유성룡에게 도체찰사(都體察使)라는 중임을 내렸다. 도체찰사란 임금의 몸을 받아 전체의 전쟁을 보살피는 높고도 소중한 자리로 모든 대장들은 도체찰사의 명령과 감독을 받아야만 했다. 임금은 다시 영을 내려 김인빈의 오라비 내수사별좌 김공량에게 활 잘쏘는 사람 이백명을 뽑아서 대궐 안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서울의 세력가들은 벌써부터 봇짐을 싸가지고 산으로 도망하는 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궁중 안에서도 김인빈을 비롯하여 여러 후궁 나인들이 임금에게 피란 갈 것을 졸랐다. 차츰 임금의 마음도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마음이 어수선하기 시작했다. 내수사별좌 김공량에게 은밀하게 영을 내려서, 여자들의 짚신과 남자의 미투리를 죽죽이 사들여서 대궐 안으로 들이라 했다. 김인빈을 비롯한 모든 후궁과 나인들이 여차직하면 서울을 버리고 멀리 피난 길을 떠날 채비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창덕궁 대궐 지밀에 가까운 협문 안에다 사복(司僕)과 말들을 대령해 세워 두게 했다.

이러한 일들은 지극히 은밀한 가운데 진행되었지만 이 소문은 어느덧 새어 나갔다. 영의정 이산해가 임금에게 아뢰인 뒤 임금의 마음이 흔들려서 피난갈 것을 결정했다는 소문이었다. 이산해는 당시 사복도제조(司僕都提調)를 겸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들고 일어났다.

영의정 이산해를 내쫓아야 합니다. 조종조 이래 역대로 지키던 서울을 내놓고 달아난다는 것은 오국(誤國)이옵니다.

그러자 장계군(長溪君) 황정욱(黃廷彧),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유홍(兪泓),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귀영(金貴榮) 등도 입을 모아 서울은 꼭 지켜야만 합니다. 서울을 버리자고 말을 꺼낸 자는 소인(小人)이옵니다.

하고 모두들 울면서 간했다. 임금도 마음이 몹시 구슬펐다.

종묘사직이 서울에 있는데 내가 서울을 버리고 어딜 간단 말이냐. 경들은 과히 염려 말라.

임금은 이렇게 모든 신하들의 마음을 달랬다. 이때 임금의 말을 듣고 우승지 신집(申 )은 다시 어전에 엎드리며

전하, 지금 소란한 민심을 진정시키려면 하루 바삐 세자를 세워 국본(國本)을 정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니이다.

전에 정철은 이 말로 쫓겨난 일이 있던 터이다. 문득 임금의 눈 앞에는 강제로 귀양 가 있는 정철의 얼굴이 떠올랐다. 달아나는 것보다 나라의 근본을 확실히 세우라는 신집의 말은 과연 정당한 의견이었다. 임금은 이 말을 더 노엽게 들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임금은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유성룡, 우의정 이양원(李陽元) 등을 돌아보며, 왕자 중에서 어진 자를 골라 세자로 세워보라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감히 누가 적당하다는 말은 못하고 임금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임금 선조는 엄숙하게 입을 연다.

광해군(光海君)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세자로 삼으려 하니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이 말에 모든 대신들은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필시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으로 세자를 봉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 뜻밖이었다. 대신들은 일어나 절하며

지당하옵신 분부이옵니다.

찬사를 올릴 뿐이었다. 이리하여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다음날 조정에서는 세자 책봉식을 조촐하게 거행하였다.

다시 하룻밤을 지난 사월 이십구일 저녁 무렵이었다. 충주에서 패한 신립의 군노 서너명이 말을 타고 남대문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한 곳도 성한 곳이 없는 부상병들이다. 삽시간에 이 소문은 장안에 퍼졌다. 신립의 패잔병이 벌써 서울에 당도했으니, 왜병이 서울에 쳐들어 오자면 하룻밤이면 넉넉하다. 거리는 공론이나 한 듯이 일제히 문을 닫고 보따리를 머리에 인 피난민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궁중 안에서도 비빈, 상궁, 나인, 무수리들이 수군수군 야단이었고 묘당에서는 급히 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사세가 급하오니 어서 평양으로 행차하십시오.

영의정 이산해가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은 묵묵히 대답이 없었다. 다시 도승지 이항복이 어전에 엎드려서 아뢰었다.

우선 서편으로 가시어 명(明)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는 것이 좋을 줄 생각하옵니다.

그러자 장령(掌令) 권협(權 )은 끝까지 서울 지켜야 한다고 우겨댔다. 이윽고 임금은 영을 내렸다.

임해군은 함경도로 떠나되, 영부사 김귀영과 칠계군 윤탁연(尹卓然)이 호위해 가고, 또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로 떠나되 장계군 황정욱, 호군 황혁(黃赫), 동지 이기(李 )가 호위해 가라.

그리고 우의정 이양원은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날은 임금도 신하들도 꼬박 밤을 새웠다. 마침내 임금은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대궐을 떠났는데 뒤에는 세자 광해군과 왕자 신성군, 정원군(定遠君)이 따랐다. 왕비는 인빈 김씨 이하 나인들에게 옹위되어 대궐문을 나섰다.

이때는 벌써 내시들도 다 달아나고 없었다. 병조판서 김응남(金應南)은 임금을 호위할 군사들을 모으려고 했으나 모두 어디로 도망갔는지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만에야 도승지 이항복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말과 가마를 구해와서 비로소 임금은 말을 타고 왕비와 김인빈을 비롯한 후궁들도 가마를 탔다.

때는 새벽이지만 아직 날은 완전히 밝지 않아 어둑어둑한데 하늘에서는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도승지 이항복이 맨 앞에 서서 길을 인도했다. 일행이 돈화문 대궐을 나와서 경복궁 대궐 앞을 지나니 길 양편에는 어느새 쏟아져 나온 백성들이 통곡을 했고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사현(沙峴) 마루턱까지 이르렀을 때야 날은 비로소 동이 트기 시작하는데, 힐끗 서울 편을 바라보니 우중에도 서울 장안이 불빛으로 환했다.

어디에 불이 났을까?

누가 불을 질렀을까?

벌써 왜병들이 쳐들어 왔나?

모두들 궁금해서 술렁거렸다.

난민들이 상감께서 행차하신 뒤 대궐에 몰려 들어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물건들을 집어간다고 하오.

옆에서 누가 아뢰었다.

무엇 대궐이 탄다고?

임금은 아무 말없이 동쪽 하늘만 바라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쏟아지는 빗물에 섞여서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하기가 어렵게 얼굴을 흘러 내렸다.

일행은 불바다가 된 서울을 등지고 또다시 서편을 바라보고 지향없는 길을 총총히 걸었다. 비는 여전히 쏟아졌다. 임금도 이제는 속속들이 젖었고 걸어가는 나인들의 옷은 젖어서 몸에 착 들어붙어 온 몸이 그냥 드러나 보였다. 그래도 궁녀들은 부끄러운 기색 하나없이 묵묵히 따를 뿐이었다.

홍제원(弘濟院)에 당도하여 교군들이 어깨를 쉬느라고 잠깐 가마를 땅에 내려놓고 있는 동안 경기감사 권징(權徵)이 뒤늦게 쫓아왔다. 그는 자기가 입고 온 우장을 벗어서 임금에 게 바쳤다.

어느덧 벽제관(碧蹄館)에 다다랐다. 점심 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점심 먹을 준비도 없다.

비는 쏟아지고 춥고 배가 고프자 여기서 슬그머니 하나씩 둘씩 떨어져서 도로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았다.

보행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다리가 아파서 더 갈 수가 없었다. 그 중 임금의 어의(御醫) 노릇하는 양예수(楊禮壽)란 노인은 평소에 각기병이어서 웬만한 양반이 왕진을 청하더라도 좀 체로 응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하도 급해서 당나귀 한 필 얻어타지 못하고 도보로 임금을 쫓아왔다. 평시에 아프다는 다리도 이런 때는 아무 일 없는지 곧잘 걸었다.

이 모양을 바라보던 도승지 이항복은 슬며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양동지! 양동지의 각기병은 난리탕이 제일이로구료!

하고 늙은 의원을 놀려준다. 모든 사람들은 창황 중이나 허리를 잡고 웃어댔다. 임금도 이 소리를 듣고 빙그시 웃고, 수심에 싸여서 울고 있던 궁녀들의 입가에도 소리 없는 웃음이 떠돌았다.

그것 안 되었군. 어의 양동지에게 말 한필 주어라.

이리하여 늙은 의원 양동지에게 겨우 말 한필이 차례갔다.

일행이 혜음령(惠陰嶺) 고개를 넘어가는데 비는 더욱 줄기차게 쏟아졌다. 별안간 억수장마가 진 것 같았다. 비를 무릅쓰고 파주(坡州)에 이르렀으나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여기서도 점심을 그대로 굶고 날이 저물어서야 겨우 임진강(臨津江) 가에 다다랐다.

강물은 온 종일 쏟아진 비로 인해서 도도한 탁류를 이루었는데 나룻배가 하나도 없으니 큰일이었다. 길은 어둡고, 강은 가로막히고 비는 쏟아지는데 적병들이 뒤에서 쫓아올 생각을 하니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항복이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호위하는 군사들을 시켜 그 근처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을 비롯하여 나루 사공의 집까지 불을 지르게 하였다. 어둡던 강가는 비로소 사람들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불빛 비치는 강변을 뛰어다니며 겨우 나룻배 다섯척을 구해서 밤이 깊어서야 임금은 중전과 김인빈과 함께 강을 건넜다.

이때까지 임금은 꼬박 꿇은 채로 있었다. 이항복이 보다 못하여 내시에게 임금께 드릴 술이나 차라도 준비했느냐고 물었으나 급해서 준비를 못했다는 대답이었다.

밤 삼경(三更) 때나 되어서 일행은 동파역(東坡驛)에 다다랐다. 파주목사 허진(坡州牧使許晋)과 장단부사 구효연(長湍府使具孝淵)이 장막을 치고 임금께 수라상을 올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어디서 몰려 왔는지 무수한 난민들과 또 호위하던 군관들이 함께 어울려서 음식을 빼앗아 먹기 시작했다.

파주목사와 장단부사가

이놈들아 상감께서 잡수실 수라다.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호통하고 쫓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난민들과 군사들은 삽시간에 밥을 주먹으로 움켜서 한 솥 밥을 다 입에 틀어넣었다. 무질서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는 다시 밥을 지을래야 쌀이 없었다. 파주목사와 장단부사는 당장 벌이 내릴 듯하여 도망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좌의정 유성룡이 어디로 돌아다니더니 겨우 쌀을 구해다가 임금에게 다시 수라를 지어 올렸다. 임금이 비로소 밥그릇을 대하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임금은 이때처럼 맛있는 수라를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다음날부터는 임금을 호위하고 왔던 군사들이 하나 둘씩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일행은 마부와 군사들이 별안간 없어져서 더 갈래야 갈 수가 없게 되었고 임금은 긴 한숨만 쉴 뿐이었다. 때마침 황해감사 조득인(趙得仁)이 군사 수백명과 말 육십필을 거느려 임금을 호위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려 모든 사람들은 저으기 힘을 얻었다.

일행은 다시 질서를 차려서 길을 떠났다. 널문이(板門店)에 이르러 조인득이 풍덕 군수에게 명하여 미리 차려놓게 한 음식을 먹었다. 백관들은 이틀 만에 얻어먹는 밥이었다.

초현(招賢) 역에서부터는 마중 나온 황해감사 조인득이 군사를 거느려 어가를 호위하게 되자 그날로 개성(開城)에 도달하였다. 일행은 평화스러운 개성 거리를 보고 우선 마음을 놓았다.

곧 쫓겨오는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려고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구경꾼들은 후줄근한 임금의 모습과 초라한 만조백관들의 얼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서로들 수군댔다.

나랏님이 수고하시네.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수고하긴 뭘 수고해. 임금이란 게 백성은 돌보지 않고 후궁만 생각하느라 저 꼴이 됐지.

이렇게 욕하는 자도 있었다.

많은 군중 속에서 갑자기 임금 앞으로 돌을 던져 호위하던 군사 하나가 맞아 소리를 질렀다.

어느 앞이라고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

그러나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는 너무도 수가 적고 힘이 약했다.

임금은 얼른 송도 유수(松都留守)가 있는 동헌으로 들어가 행궁(行宮)을 잡았다. 불안 공포에 싸인 하룻밤도 지나고 다음날 아침 어전엔 모든 신하들이 모였다. 어제 임금에게 백성이 돌까지 던진 사건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제 내가 남문 밖에서 당한 일은 한심한 일이다. 임금이 이꼴을 당했으니 누가 이 책임을 지겠는가? 누구 때문에 민심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었은가?

임금의 목소리는 격분에 떨렸다. 모든 재상들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三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또다시 싸움을 벌였다.

이산해와 김공량의 죄 크옵니다. 그들은 대궐 안에까지 손을 뻗쳐서 결탁하고 홍여순(洪汝諄)의 무리와 함께 나라일을 그릇쳤기 때문에 어제와 같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구나 이산해는 영의정이란 자리에 있으면서 달아날 궁리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편에서 말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산해가 아무리 김공량과 친하게 지냈다 해도 그것으로 나라를 그릇친 것이 무엇이란 말이요? 또 처음부터 달아나고자 한 것은 어찌 영의정 뿐이요. 좌의정 유성룡이나 최황(崔滉)도 일반이 아니요.

하고 맞서고 반박했다.

다음날은 삼사의 모든 간관과 헌관들이 일제히 임금 앞에 나아와

오늘날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가 이산해와 김공량이 안팎이 되어 일을 한 때문이요. 모든 백성들은 영의정과 김공량에게 원망과 분함을 품고 있소. 이들을 극형에 처하여야 하오.

하고 더 한층 맹렬히 들고 일어났다. 임금은 잠자코 언관들의 말을 듣고만 있다.

전임 좌의정 정철을 불러서 민심을 가라앉히십시오.

임금은 다시 더 어찌하는 도리가 없어서

이산해를 평해(平海)로 귀양 보내라. 그리고 최흥원(崔興源)으로 영의정을 삼고 윤두수(尹斗壽)로 좌의정을 삼고, 유홍(兪泓)으로 우의정을 시키라. 또 전암 좌의정 정철의 귀양을 풀어 다시 부르게 하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이로써 나중에 동인은 물러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내수사별좌 김공량은 이산해가 벼슬이 떨어져서 평해로 귀양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누님 김인빈과 눈물을 흘려 작별한 뒤에 강원도 산골로 가서 숨어버렸다.

바로 이날(오월 삼일) 왜병은 서울에 들어왔다. 임금의 일행은 다시 평양을 향해 떠났다. 평양에 머문지 달포도 안 되어 왜병은 임진강 가에 진을 친 한응인(韓應寅)의 마지막 저항선을 뚫고 유월에는 벌써 평양 근처에까지 육박하였다.

임금의 일행이 다시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달아나려 할 때 평양 사람들은 대신들을 보고 너희 놈들은 평생에 나라의 녹만 처먹고 당파 싸움만 일삼더니 나라가 이꼴이 되지 않았느냐. 이놈들아, 우리만 성을 지키라 하고 달아나면 너희만 살고 우리는 죽으라는 수작이지, 대신인지 승지인지 하는 것이 모두 개새끼만도 못하다.

하고 덤벼들었다. 대신들은 그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달아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의주 피난처에 도착하자, 곧 명나라로 구원을 청했다.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이 칠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온 것은 칠월. 그리고 뒤미처 이여송(李如松)이 제독(提督)에 임명되어 사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다음 해 계사년(癸巳年) 정월에 평양을 탈환하여 국면을 전환시키기 시작했다.

 

 

 

亂世에 흐르는 愛情

 

이때까지 육지에서는 연전연패라기보다 싸우지도 않고 도망만 가는 싸움이었다. 그런 중에 오직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 수로를 끼고 적의 서진(西進)을 잘 막아 내었으므로 그래도 대국(大局)은 아주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임금이 의주에 자리를 잡자, 할 일 없는 신하들은 또다시 지나간 일을 가지고 서로 논했다.

이홍로(李弘老), 홍여순, 유영길(柳永吉) 등은 이산해의 부하로서 뇌물과 아첨으로 나라 망친 자들이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피난살이를 하게 된 것이 누구의 소생이요.

이것은 서인들이 이산해나 유성룡의 부하들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것을 두려워해서 동인의 잔당을 몰아내고자 하는 소리였다. 그러면 동인측에서도 지지 않고 정철은 서인의 거두로서 나라 일을 돌보지 않고 술과 글로만 세월을 보냈소. 이런 자를 다시 소환하여 정승의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은 불가하고, 그리고 윤두수는 아무런 일도 못하면서 일찍이 평양을 고수한다고 하였소.

하고 공격했다. 피난길에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쫓고자 하는 심산이었다. 임금은 잠시 조용해졌던 붕당 싸움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심중에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하면서 친히 글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었는데, 그 글은 이러했다.

 

諸臣今日後 忍復名西東

( 여러 신하들이여, 이제부터는 동이니 서니 제발 다투지 말라. )

 

임금도 당파 싸움에는 이제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임금은 골치가 아프고 시끄러우면 으레 후궁에 있는 인빈 김씨를 찾았다. 이곳만이 고요하게 마음 놓고 온 종일 쉴 만한 아늑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인빈도 이제는 한창 무르녹아 익는 여인의 나이로 전보다 훨씬 피부에 기름이 올라, 흰 살결이 더욱 희고 밝은 창을 대하는 듯한 눈은 윤을 뿜었다.

임금은 영빈을 보고

아무리 싸움 중이라도 너만 있으면 적적한 것을 모르겠구나.

하고 은근히 기뻐했다. 그러자 인빈은 임금에게 조용히 물었다.

상감, 장차 적병이 쳐들어 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적병은 무슨 적병, 명 나라 원군이 들어온 이상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될 텐데.

정말이오니까?

내년 정월은 서울서 지내게 될걸.

아이구 좋아라.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빈은 어린애 모양으로 눈을 반짝이며 임금을 쳐다 보았다.

과연, 다음 해(癸巳年) 사월 왜병이 남해안으로 밀려난 가운데 화의(和議)가 진행되자 임금은 시월에 의주로부터 서울로 환도했다.

이동안 유성룡은 명장 이여송의 접반관(接伴官) 노릇을 잘 하였으므로 다시 임금의 신용을 회복하여 서울 환도 후에는 윤두수가 밀려 나고 그 뒤를 이어서 유성룡이 영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인들이 정권을 잡고 정철은 환도한 다음 해인 갑오년(甲午年)에 세상을 떠났다.

서인(西人)의 장로격인 정철이 없어지자 동인(東人)의 기세는 놀랍게 일어났다. 정철이 떠난지 수일 후에 벌써 남인과 북인의 책동은 시작되어 수년 전에 정여립(鄭汝立) 역옥(逆獄)에 빗걸려 들어 죽은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과 추증(追贈) 문제가 일어났다.

삼사에서는 연하여 상소를 올렸다.

< 정철은 간물(奸物)로서, 이전 최영경이 자기를 욕한 것에 원한을 품고 기축역옥(己丑逆獄) 사건에 자기가 위관(委官)이 된 것을 다행히 여기고 최영경을 잡아오게 꾸미고, 겉으로만 구하는 체하면서 뒤로 얽어넣어서 종내 영경을 죽여버렸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최영경의 원통함을 통촉하시고 정철을 추죄(追罪)하셔야 하실 것입니다. >

갑오년 오월에서 시작하여 그해 십일월까지 하루도 건느지 않고 조정에서는 두파로 나뉘어 임금께 말로써 혹은 글월로써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었다.

때는 바야흐로 난리는 조금 뜸해졌다 하지만 전후(戰後)의 수습이며 정돈은 아직 그냥이었고 또다시 언제 왜병이 쳐들어 올는지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시절이건만 모든 신하들은 그쪽은 둘째 문제로 삼고, 이미 죽은 정철의 관직 깎기에만 급급하였다. 임금도 너무 지긋지긋하여

지금은 군신이 다만 창을 메고 군사를 훈련하여 적을 칠 일을 생각할 때요. 그밖의 다른 일은 도외시해야 할 것이니, 이런 소요는 스스로 짐작하여 덮어둠이 옳지 않은가?

하면 사류(士類)들은 도리어

국시(國是)를 바로 잡는 일은 하루가 늦으면 하루가 늦을수록 그만큼 더 나라가 위태로와지는 일이오니 소요하다하여 어찌 가만 있으리까.

하여 죽은 정철의 관직 깎는 것을 고집하였다. 이 주장의 중심인물은 김우옹(金宇 ), 기자헌(奇自獻), 이기(李 ) 등이니 이때 김우옹은 대사헌이요, 이기는 대사간이오, 기자헌은 장령(掌令)이었다. 이리하여 드디어 십일월에 죽은 정철의 관직은 삭탈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서인(西人)은 몰락을 당했다. 정승에서부터 한낱 녹사에 이르기까지 벼슬자리는 모두 동인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인이 없어지고 동인의 독무대가 되자 다시 동인 자체내에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대립이 벌어졌다.

북인의 거두 이산해는 쫓겨나기는 했으나, 임금은 인빈 김씨와의 관계도 있고 해서 이산해를 종시 잊지 못했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정탁(鄭琢)은 기회를 엿보아 정철의 관직이 삭탈된 이때 억울하게 쫓겨난 이산해를 다시 부르시옵소서.

하고 임금에게 청했다. 이때 대사헌 김우옹이 정탁을 나무라고 파면시키니, 북인들은 이것을 보고

유성룡이 이산해가 다시 나오면 자기를 누를까 겁내서 김우옹을 시켜 정탁을 쫓아낸 것이다.

라고 비난했다.

이런 일로 해서 북인은 더욱 유성룡을 미워하던 차 마침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리 나라에 나와 있는 명장 양호(楊鎬)가 무고당한 것을 변명할 일이 생겼다.

이것은 양호의 중군(中軍) 팽우덕(彭友德)이 우리 나라 접반사 이덕형(李德馨)에게

여보 큰일이 생겼소. 본국에서 나온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이십여개 죄목으로 양호를 모함하는 보고서를 써 갔소. 그런데 그 중에는 귀국에 대한 것도 몇 가지 들어있다 하오.

하고 말한테서 알게 된 것이었다.

이때는 전진도 가라 앉은 무술을(戊戌年)이었다. 이덕형은 즉시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지금 명나라가 구원해 주는 이 마당에 명나라 황제의 의심을 살만한 일이 있게 되는 것은 불리한 노릇이므로 임금은 곧 유성룡을 보고 일이 중대하니 경이 명나라에 들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일일이 변명해 주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 유성룡은 병이 있다 하고 사양하므로 임금은 이것을 매우 괘씸하게 여겼다. 이것을 가지고 지평(持平) 이이첨(李爾瞻)과 대사헌 이헌국(李憲國)은 서로 공박했다.

먼저 이헌국이

국가 다난한 이때 영의정 자리를 비게 되는 것은 좋지 못하오.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오.

하면 이이첨은

중요한 때일수록 영의정이 직접 전말을 설명하는 것이 좋소.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명을 받고 가지 못하겠다는 말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오.

하고 대들었다. 임금은 마침내 이이첨의 말을 옳게 여기고 이헌국을 파면시켰다.

이에 남이공(南以恭)의 무리들은 임금이 유성룡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유성룡은 오랫동안 우성전(禹性傳), 이성중(李誠中) 등 심복의 사수를 받아 국정을 농단하고 사류를 해치었소. 그리고 또 성룡은 왜적과 화의를 주장해서 나라를 그릇친 자이니 물러나게 해야 하오.

하고 공박했다. 이때부터 남인 유성룡을 내쫓으라는 상소가 연일 잇달아 들어왔다. 임금도 이러한 상소질에는 더 견딜 수가 없었던지 끝내 유성룡을 내보내고 말았다.

유성룡을 몰아낸 후 북인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이산해와 홍여순을 중심으로 한 자들은 대북(大北), 남이공과 김신국(金藎國)을 중심으로 한 자들은 소북이라하여 서로 싸우다가 그해로 김신국과 남이공이 물러나고 이산해의 대북이 세력을 잡았다. 이러던 중 이원익(李元翼)이 상소로 유성룡의 청백한 것과 충성스러움을 말하고 홍여순, 임국로(任國老) 등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대사간 최철견(崔鐵堅)에게 쫓겨나 다시 이산해가 영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산해와 홍여순이 정권을 잡은 후 이들이 또다시 서로 싸우므로 이산해의 당을 육북(肉北)이라하고 홍여순의 당을 골북(骨北)이라 하였다.

이때 이산해 편에 가담한 이이첨이 상소로 홍여순을 논박하며 몰아내고자 하여 다시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임금은 이 두 사람을 다 내쫓고 다시 서인(西人)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서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귀(李貴)가 조정에 들어와 대북 정인홍 (鄭仁弘)의 행동을 비판하였다. 이에 정인홍은

신이 성혼(成渾), 정철과 사이가 좋지 못하고 또 유성룡과도 서로 가깝지 못하였더니 지금 와서 그 무리들이 신을 이렇게 미워합니다.

하고 전에 성혼이 정철과 함께 공연히 죄없는 최영경을 죽였다는 것을 트집잡아 서인 전체를 공박하였다.

대사헌 황신(黃愼)이 이 말을 듣고 이귀와 성혼을 위하여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자 임금은 도리어 황신의 벼슬을 바꾸고 간혼독철(奸渾毒澈)이란 전교까지 내려 조정에 있는 서인들을 다시 내쫓았다. 그후 소북 유영경(柳永慶)으로 이조판서를 삼고, 대북 정인홍(鄭仁弘)으로 대사헌을 삼았으므로 이제부터 또 이들이 서로 싸울 차례다.

 

 

 

촛불이 타는 밤

 

소북 유영경이 정권을 잡은 후 얼마 안 가서 왕비 박씨가 세상을 떠났다. 임금은 나이가 이미 오십이 넘었으나 다시 재혼할 생각을 가졌다. 이때 후궁에는 인빈, 순빈(順嬪), 정빈(靜嬪), 정빈(貞嬪), 온빈(溫嬪) 등 아이를 낳은 빈만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정실(正室)이 없으니 새로 왕비를 또 맞이하려는 것이었다.

의인왕비(懿仁王妃) 박씨의 장사를 치른 뒤 임금은 임인년(壬寅年=선조 삼십오년)에 이조좌랑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새 왕비로 맞이했다. 이때 임금의 나이는 오십하나요, 새 왕비(仁穆王妃)의 나이는 십구세였다.

첫날밤, 중전궁은 밤새도록 촛불이 휘황했다. 어린 왕비는 여러 시녀에게 둘러싸여 임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꽤 깊은 뒤 임금이 중전궁으로 들어섰다. 어린 왕비는 조용히 일어나 임금을 맞이하고 다른 시녀들은 모두 옆 방으로 물러났다.

때는 칠월이라 방안은 몹시 무더웠다. 임금은 친히 부채질을 하면서 좌정한 뒤 중전을 바라보았다. 중전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앉았는데 그 약간 홍조를 띤 두 볼은 바야흐로 피어나려는 한떨기 꽃봉오리 같았다. 임금은 슬며시 손을 잡아 끌며

자, 이리 가까이 오오.

하며 이리저리 처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중전은 아무 반항 없이 임금이 하는 대로 몸을 내 맡기고 있었다.

나이 보다는 꽤 숙성하곤 그래. 지금 궁중에는 아직도 정실 아들이 없으니 중궁이 아들을 하나 낳아야지.

임금은 처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중전은 부끄러운 듯 또다시 얼굴에 홍조가 물들었다. 임금은 팔에 힘을 주어 처녀의 가는 허리를 이끌어 당기자 처녀의 숨소리는 가쁘다 못해 가늘게 떨렸다.

누가 보옵니다.

중전은 무심결에 이렇게 말하며 임금의 용포 소매 속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허, 보긴 누가 보나. 너와 나 단 둘 뿐이 아닌가.

임금은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더욱 팔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지극히 행복스런 유열(愉悅) 속에 첫날밤은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게 흘러갔다.

얼마 후 왕비의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임금은 이번에야말로 정실에서 아들이 생긴다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어느날 임금은 오래간만에 인빈의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인빈은 언제나처럼 반가이 맞았다.

상감, 우러러뵈온지 퍽 오래옵니다. 신정 재미가 매우 좋으신 게지요?

그래 참으로 오래간만이다. 일각이 여삼추라더니 정말 시시때때로 네 생각이 나서 그리웠다.

희롱의 말씀입니다. 시시때때로 그리워졌다면 그토록 오래 아니 찾으셨겠습니까. 듣자온데 중궁께서 태중이라 하옵시니 반갑나이다.

글쎄 아들을 낳을지 몰라.

첫아들 낳으실 것이옵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야.

그날 밤 임금은 풍염하고 능란한 인빈의 처소에서 구정을 흡족이 누리었다. 다음 날 아침 인빈은 전부터 마음 먹고 있던 말을 임금에게 했다.

상감, 이번에 중궁께서 아들을 낳으시면 그 태자로 세자를 정하십시오.

세자는 벌써 광해군으로 세우지 않았나?

그러시지만 이번에 태어날 태자는 정실 소생이 아니옵니까? 벌써 세상에서도 그렇게 될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사실 임금도 새로 태어나는 정실 소생으로 세자를 삼고 싶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부터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긴 했으나 명나라에서는 큰 아들 임해군을 안 세우고, 둘째 아들을 세운다고 아직까지도 응하지 않고 있는 판이다.

임금의 마음은 저으기 흔들렸다. 더욱이 세상에서도 응당 그렇게 될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에 임금도 어느덧 새로 태어나는 원자(元子)로 세자를 삼으리라 마음 먹었다.

원자(元子)로 세자를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인빈 뿐만 아니라 유영경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영경은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휘옹주(貞徽翁主)의 부마 유정량(柳廷亮)의 조부로서 인빈과의 사이고 가깝고 미묘한 궁중 사정에도 환한 터였으므로 인빈이 전에 자기 소생으로 세자가 못된 것을 늘 불만히 여기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새로 태어나는 원자로 세자를 삼아야겠다는 것이 또한 유영경의 생각인 것이다.

이때부터 인빈은 대북의 이산해보다 소북의 유영경을 더 신임하여, 유영경이 칠년 동안 득세할 동안 대북 일파는 조정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젊은 궁궐의 안주인 인목왕후(仁穆王后)는 그 후 첫아기를 낳았다. 그러나 그 아기는 아들이 아니라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였다. 임금의 첫 번째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정실 소생의 원자는 아마 내 팔자에 없나 보다.

임금은 이렇게 자탄해 보기도 했다.

어느덧 일년은 또 지나갔다. 임금은 인빈 김씨의 처소를 찾은 뒤에는 반드시 인목왕비도 찾았다. 일년이 채 못가서 어린 왕비는 또다시 태기가 있었다. 임금은 또 한 번 희망을 걸었다. 임금은 어린 왕비를 극진히 대하고 약방에 명하여 날마다 지황과 녹용을 다려다 바치도록 했다. 한해 후에는 과연 기다리던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났다. 임금으로서는 정실(正室)에서 처음 낳은 아들이라고 기뻐하는 정도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영경은 이것을 보자 임금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때마침 임금이 재위 사십년이 되므로 성성께서 재위 사십년에 중전이 처음으로 원자를 낳으셨으니, 사십년 축하식과 아울러 크게 경축해야 하오.

하며 축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 축하식에서 유영경은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영창대군 만세까지 부르게 했다. 그 광경은 마치 세자가 영창대군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임금도 늙으막에 생긴 적자(嫡子)라 조신(朝臣)들이 세자를 제쳐 놓고 영창대군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별로 탓하지 않고 그저 만족한 미소로 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바라보는 광해군의 마음은 여간 쓰리고 아프지가 않았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임금의 몸에는 자주 병이 나기 시작하더니, 정미년(丁未年) 시월서부터는 그 증세가 매우 위태로와졌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매일 임금에게 문안하러 들어갔는데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어가서 임금의 용태를 살폈다. 광해군이 이렇게 정성으로 부왕의 문병을 하는 까닭은 그때 항간에 유영경 일파가 세자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새로 세자에 봉하려 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까닭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광해군의 형 임해군(臨海君)도 은근히 다음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말까지 들렸다. 임해군은 자기가 세자에 오르지 못한 것을 늘 불평으로 지내다가 최근에 와서는 부왕이 병중에 있는 틈을 타서 실력으로 정권을 잡아보려고 무사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으로서는 잠시도 마음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라에서는 매일 임금의 병을 낫게 한다고 산천에 기도를 했다. 그러나 임금의 병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임금은 하루바삐 전위(傳位)를 하고 죽을 생각만 했다.

그런데 지금 전위를 하자면 아무래도 광해군 밖에는 없을듯했다. 인빈과 유영경 등은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라고 하지만 영창대군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다. 역시 광해군에게 전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임금은 하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영의정 유영경,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 등을 불러 벌써 일년 가까이 누워 있어도 별로 차도가 없소. 이제는 며칠을 더 살것 같지도 않고 또 아무래도 벅찬 나라일을 감당키 어려우니, 세자 광해군에게 전위할까 하오. 세자도 이제 나이가 많아졌으니 그렇게 해보도록 하오.

임금은 진정으로 전위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세 정승들은

전하, 아직 전위하실 때가 아닙니다. 섭양만 잘 하시면 다시 일어나시게 됩니다.

하고 반대했다. 하지만 임금의 전위할 뜻은 굳었다. 대신들이 물러간 뒤 임금은 다시 전교를 내려 원로대신들과 의논해서 세자에게 전위하도록 하라고 독촉을 했다.

한데 유영경은 임금의 이런 전교를 받들고도 당분간 더 좀 두고 본다고 원로들에게 이것을 알리지도 않았다. 당시의 원로대신들은 이항복, 이원익, 이덕형, 이산해, 기자헌 등이었다. 후에 이 사실이 대북 일파에게 알려지자 이이첨과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李慶全) 등은 그때 영남에 내려가 있는 정인홍(鄭仁弘)에게 사람을 보내어 유영경이 세자를 위태하도록 꾀한다는 진상을 알리고 어서 상소하라고 권했다.

이때는 벌써 이산해, 이이첨 등 대북 일파가 세자 광해군에게 붙어 세자빈(世子嬪)의 오라버니 되는 유희분(柳希奮)과 밤낮으로 모여, 유영경을 몰아낼 의논을 하고 있을 때인 것이다. 정인홍은 원래가 경골한(硬骨漢)으로서 두려운 것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라, 남을 공격 할 때는 언제나 선봉 노릇을 잘 했다. 그는 시골서 상소를 올리기를

< 유영경이 임금의 명령을 비밀히 하고 여러 원로 대신들을 부르지도 않으니 무슨 무서운 흉계가 있기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나이다. 나라의 일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옵니다. 옛 부터 임금의 유고(有故)한 때는 세자가 그 대리를 하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유영경은 혼자서만 비밀히 처리하려 하니, 이는 세자를 위태롭게 하는 수작이옵니다. >

하고 정면으로 유영경을 공박했다.

그러나 임금은 아직도 유영경을 크게 신임하고 있어서 정인홍의 상소문을 보자 몹시 노하였다.

정인홍은 세자로 하여금 빨리 전위 받게 하려고 하니, 소위 신하된 자가 임금을 퇴위시키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다.

하고 꾸짖었다. 이후 대북과 소북은 서로 반박하며 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소북은 다시의 집권당이었다. 임금은 결국 유영경과 인빈의 주장대로 정인홍을 영해(領海)로, 이이첨은 갑산(甲山)으로, 이경전은 강계(江界)로 각각 귀양 보내라고 명했다. 그리고는 세자 광해군이 문안을 드릴려고 하면

네가 무슨 놈의 세자냐? 명나라에서 인준해 주지 않는 세자가 무슨 놈의 세자냐? 빨리 물러 가거라!

하고 호통을 쳤던 것이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목에서 피를 한 대야씩 토하고 밤과 낮으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 후 대북의 거두들이 귀양을 떠난 지 며칠 안 되어 선조는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등극하게 되었다. 때에 선조의 나이는 오십칠 세요, 재위(在位)는 사십일년만이었다.

 

 

 

暴 風 前 夜

쓰러진 어린 魂

 

광해군(光海君=西紀 1,608-1,623)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의 이이첨과 정인홍 등은 미처 배소(配所)에 당도하기도 전에 선조 승하하신 소식을 듣고 되돌아 올라와서 갑자기 공신(功臣)으로 돌변하였다.

어제까지의 죄인이 오늘은 제멋대로 정원 안을 활보하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광해군은 이산해로 하여금 원상(院相)을 삼고 선왕의 장례식 준비를 맡겼다.

이것을 보고 유영경은 곧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은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하면서 아주 너그러운 도량으로 오히려 유영경을 위로하며 만류하였다.

유영경은 할 수 없이 선왕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그냥 영의정 자리에 눌러앉아 있을 생각을 하는데, 임금의 만류가 있은지 불과 수일도 안 가서 대북 일파들이 유영경은 전에 전하께서 세자로 계실 때 전하를 물리치고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세우려고 꾀한 원흉이옵니다. 그런 대죄인을 그냥 조정 안에 머물러 두게 함은 불가하오니 즉시 추방하시기 바랍니다.

하는 글을 올렸다. 임금은

선왕이 승하한지 한 달도 못되어서 선왕의 신임하던 대신을 어떻게 그렇게 대접한단 말이요. 그것은 너무 지나친 말들이요.

하고 과거의 모든 혐의를 깨끗이 잊은 듯이 이렇게 유영경을 두둔했다. 그러나 대북 일파에서는 정권욕에 눈이 뒤집혀서 매일같이 유영경을 추방하라고 상소질을 했다.

마침내 임금도 이들의 등살에 못 견디어 유영경을 내쫓고 이원익(李元翼)으로 영의정을 삼았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양사(兩司)에 이이첨, 이경전, 정인홍 등을 등용했다.

이리하여 선조(宣祖) 승하한지 불과 육개월 후에는 완전히 대북 일파의 조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때 광해군의 나이는 서른 다섯이었다. 세자빈이던 유씨(柳氏)가 이제 왕비로 승격은 했으나 광해군의 사랑은 왕비보다도 김상궁(金尙宮)이란 후궁에 더 기울어져 있었다.

김상궁은 전에 선왕이 병중에 있었을 때 그 곁에서 시중을 들던 궁녀이다. 광해군이 세자로서 병 문안을 들어가면 으레 김상궁이 상냥하게 나와서 안내를 했다. 선조가 광해군의 문안을 달갑지 않게 여기며 호통을 쳐서 내쫓을 때 김상궁은 피를 토하며 통곡하는 세자를 극진히 간호하였다. 광해군은 그 젊고 영리하게 생긴 김상궁의 정성어린 간호를 여러번 받았다. 광해군은 이때부터 김상궁을 은근히 마음 속에 새겨 두었다가 후에 임금이 된 후 후궁으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왕비 유씨가 자기의 오라버니인 유희분과 권력잡기에만 골몰하고 있을 때 김상궁은 오직 임금의 마음만을 잡기에 힘썼다. 그러니 임금의 정이 자연 김상궁한테만 쏠리게 되었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동안 후궁에는 여섯명의 숙의(淑儀)와 열명의 소원(昭媛)이 생겨났지만 김상궁의 세력을 꺾을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김상궁은 또 왕비 유씨의 비위도 잘 맞추어서 왕비한테서도 미웁게 보이지 않아 가끔 왕비에게 불려가서 말동무 노릇도 하곤 했던 것이다.

한동안 세상은 잠잠했다. 임금도 나이가 지긋하므로 앞으로 정치가 곧잘 될 것으로 기대 되었다. 광해군은 당론(黨論)의 해가 큰 것을 알고 가끔 조신(朝臣)들에게 주의를 시키며 또 자기자신도 매양 거기서 초월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뿌리깊이 내려오는 당론은 평소에는 사라진 듯 보였다가도 무슨 일만 생기면 곧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대간(臺諫)에서 광해군의 형님인 임해군이 모반을 꾀했다고 탄핵을 하자, 이 문제를 가지고 조정 안은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이산해, 한응인 등 소위 원로들은 임해군의 사형을 반대하고 귀양만 보내자고 하는데 대해서 이이첨, 유희분, 정인홍 등은 원로들이 남인과 상통하여 호역(護逆)을 한다고 대들었다.

임금은 처음 임해군에게 죄를 줄 생각이 없었는데 강신(强臣)들의 권고가 하도 극성스러워지자 결국은 강화 교동(江華喬洞)으로 귀양을 보내어 위리안치(圍籬安置)케 했다. 위리안치란 담장을 쌓고 그 담장 안에서만 지내되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강화의 현감은 이현영(李顯英)이란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임해군의 신세를 가엾이 여기고 때때로 문 밖까지 내주어 얼마간이나마 자유를 주었다. 이러한 소식이 이이첨의 귀에 들어 가서 현감은 당장에 교체되고 새로 현감이 부임하였다. 새 현감은 바로 이이첨의 부하로서 그는 얼마 후에 사람을 시켜 임해군을 죽이고 말았다.

신해년(辛亥年=光海 三年)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왕비 유씨를 배경으로 한 유희분의 세력이 부쩍 늘어서 궁중의 중요한 자리는 모두 유씨들의 독단장같이 되어버렸다. 유희분은 자기네 집안 자제들로 하여금 과거에 합격시키고자 부정한 짓을 제멋대로 하였다. 때에 임숙영(任叔英)이란 사람 역시 과거에 응하였는데 그는 답안을 쓸 때 외척 유씨들의 부정이 하도 눈에 거슬려서 시대를 개탄하는 글을 써서 바쳤다. 시관들은 임숙영의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글로서는 매우 잘되었으나 그렇다고 그 글을 발표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임숙영은 전시(殿試)에서 누락(漏落)되었다.

권필(權 )이 이런 소문을 듣고 풍자하는 시(詩)를 지었다.

 

宮御靑靑花亂飛

( 대궐 버들은 청청하고 꽃은 바람에 어지러이 날이는데, )

滿城冠盖媚春輝

( 성 안에 가득찬 사람들은 봄빛에 아첨을 떠네. )

朝家共賀昇平樂

( 모든 백성들이 태평세월이라고 희희낙락 하건만, )

誰遣危言出布衣

( 위태로운 말을 누가 내어서 베옷 입은 사람을 내쫓았느냐. )

 

권필은 뒤에 이 글이 알려져서 혹독한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는 귀양 가던 도중 장독(杖毒)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광해 오년(癸丑年)의 일이었다. 동래(東萊)의 어떤 은상(銀商)이 적지 않은 은을 말에 실어 가지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새재(鳥嶺)에서 불한당 떼를 만나 재물과 목숨을 한꺼번에 빼앗긴 사건이 일어났다.

포청의 활동으로 그 불한당은 곧 잡혔다. 잡고 보니 그 불한당은 서인의 거두 박순(朴淳)의 서자(庶子)되는 박응서(朴應犀)였다. 뿐만 아니라 그 떼거리들이 모두 서(庶)줄이나마 명문의 자제들이었다.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은 의심이 덜컥 났다. 아무리 서줄이나마 명문집 자제들만이 모여서 결당(結黨)을 도모했다는데에 의심을 두지 않을수가 없었다. 더욱이 시절이 시절이니만치 그들의 배후에 무슨 줄이 없나 문초를 단단히 하였다. 박응서는

세상이 적서(嫡庶)의 차별을 너무 심하게 하여 서자를 천대하므로 나라를 뒤집으려고 우선 군자금을 구한 것이요.

라고 했다.

이 소문은 퍼져서 이이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이첨은 당시 부제학으로서 그 세도는 외척 유희분과 더불어 당대 제일이었다. 그는 속으로 무슨 큰일을 꾸밀 것을 생각하고 포도대장 한희길을 찾아가 밤새도록 수군댔다. 포도대장 한희길은 박응서를 은밀한 곳으로 불러내어 우선 먹을 것을 주며 은근히 달래었다.

네 죄는 죽어 마땅하되, 내 말대로만 하면 살아날 수도 있다.

이 말에 박응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박응서는 장차 자기가 죽을 것을 짐작하고 어떻게 하면 살아날까 궁리하던 참이다. 그는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짓은 못하겠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한희길은 박응서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박응서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며칠 후 의금부에서 문초할 때 박응서의 입에서 새어나온 토사는

역적 도모를 하였다.

지금 임금을 내쫓고 영창대군을 모셔다 임금으로 삼기를 꾀하였다.

영창대군 모후(母后)되는 인목대비(仁穆大妃)도 물론 아는 바이다.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되는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도 배후의 인물이다.

실로 놀라운 토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인목대비라 하면 지금 임금의 생모는 아니나 당당한 적모(嫡母)인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따져본다 할지라도 인목대비한테는 불평과 불만이 있을 것이었다. 인목대비는 전부터 후궁 태생의 현왕이 왕위를 계승한데 대해서 적지 않은 불만을 품고 있는 터였다. 환경과 입장이 그러하니 자식을 둔 어버이의 마음으로 혹은 어떤 다른 생각이 약간 있었을는지도 알 수 없다.

또 인목대비의 입장이 그러니까 대비의 친정 아버지되는 김제남에게도 그런 불만이 물론 있을 수 있다. 그 위에 김제남은 인목대비보다도 한층 더 불평을 품게 될 연유가 따로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임금은 북인들을 더 신임하기 때문에 서인인 김제남은 당파적으로도 또한 임금에게 불평을 품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 위에 박응서의 입에서 놀라운 토사가 나왔으니 역적 도모는 믿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더욱이 요로의 당직자인 이이첨, 정인홍 등이 모두 북인인지라 문제는 가장 나쁜 편으로 해결을 짓게 되었다.

광해군은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판의금(判義禁) 박승종(朴承宗) 등을 거느리고 친국을 벌인 후에 영창대군은 폐서인(廢庶人)을 시키고 김제남은 사사(賜死)하고 그 일족을 깡그리 목 베인 다음 인목대비의 어머니 부부인 노씨(府夫人盧氏)를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허나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이첨 일파들은 다시 영창대군을 폐서인만 시킬 게 아니라 죽여야 한다고 대들었다. 임금은 할 수 없이 또 명령을 내렸다.

서인 의(永昌大君)는 여덟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니 죽일 수는 없고, 강화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라.

이 명령이 떨어지자 어머니 되는 대비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내놓지 않았다. 어명을 받은 군노들은 대비의 품에서 영창대군을 빼앗아 가지고 궁문 밖으로 나갔다. 대비는 아들을 빼앗기고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져 통곡했다. 아무것도 모르며 끌려가는 영창도 어머니를 부르며 발버둥쳤다. 인목대비는

이놈들아, 차라리 날 잡아가거라. 어린 것이 무슨 역률(逆律)을 범했다고 잡아가는 것이냐.

소리소리 질렀으나 이런 말이 무지한 군노들에게 통할 리가 없다. 군노들은 억지로 울부짖는 아이를 끌어가고 말았다.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쫓겨난 후 울타리가 튼튼한 집안에 갇히우고 군사들이 매일같이 지키고 있었다. 어린 영창대군은 그 속에서 매일같이

어머니! 어머니!

하고 울며 지냈다. 마침내 대군은 울기에도 지쳐 그만 병이 들어버렸다.

강화부사 정항은 대군이 있는 방에다 불을 많이 때라고 명령하였다. 방은 펄펄 끓으며 달아 올랐다. 어린 영창은

아이 뜨거워 어머니!

소리를 몇 번 지르고 나중에는 문틈으로 기어 나오려다가 그대로 숨이 막혀서 쓰러진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쫓겨난 후 대비의 거처는 정동(貞洞)에 있는 경운궁(慶雲宮)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광해군이 대비와 함께 창덕궁(昌德宮)에 있기 싫어서 취한 조처였던 것이다. 이제는 내시도 많지 않고 시녀도 몇 명밖에 없었다. 넓고 넓은 경운궁 대궐 속에서 밤이면 무서운 줄도 모르고 친히 우물가로 가서 사발에 정화수를 떠 놓고 영창이 빨리 살아 돌아오기만 빌었다. 어린 영창은 벌써 세상을 떠났건만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같이 지성으로 빌고만 있었다.

가끔 그 옆에는 영창보다 두어살 위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역시 어머니 하는 대로 칠성님을 향해 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쓸쓸하고 괴로운 나날도 하루 하루 흘러서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돌연밖에 나갔던 궁녀 하나가 숨이 턱에 차서 뛰어 들어오더니 기절하도록 구슬픈 소식을 들고 왔다.

마마! 마마!

웬일이냐?

대비는 숨이 턱에 차서 뛰어드는 궁녀를 바라보고 물었다.

권필이란 시인이 신문고를 울려 대군께서 강화에서 돌아가신 것을 폭로시키다가 지금 사형에 처하라는 분부를 받고 의금부에서 끌려 나갑니다.

뭐? 대군이 죽었다고?

대비는 눈 앞이 캄캄했다.

네, 강화부사 정항이란 자가 이이첨의 지령을 받아 대군을 방에 가둔 후에 산더미 같은 장작불로 구들을 달궈서 숨이 막혀 죽게 했답니다.

대비는 맥이 탁 풀렸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기둥을 붙들 힘도 없었다. 그대로 쓰려져서 기절하고 말았다. 어린 정명공주는 기절하여 쓰러진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휘어잡고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만 했다.

 

 

 

西宮에 쌓이는 恨

 

이때 조정에서는 이이첨이 앞장을 서서 대비를 폐위(廢位)시키는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좌의정 정인홍은 원래부터 이이첨과 한패이면서도 이번 일에만은 겁을 집어먹었는지, 혹은 만대에 누명을 쓸 것이 두려웠음인지, 슬며시 발뺌을 하고 시골집에 내려가 누워버렸다.

또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은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고

이런 짓은 간사한 무리들의 짓이다. 나도 이 자리에 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알 수 없다.

하고서 영의정의 벼슬을 내놓고 강릉 고향으로 물러나 다시 오지 않았다.

이이첨은 심복인 우참찬 유간(右參贊柳澗)을 자기 집으로 불렀다.

지금 영상도 없고, 좌상은 시골 내려가 누워 있으니 일을 할 사람은 당신과 우의정 한효순(韓孝純)밖에 없소. 빨리 대사를 결정해서 조정의 여론을 실천하게 하오.

대비를 폐하는 지령을 내렸다.

유간은 부리나케 한효순을 찾아 이이첨의 말을 전했다.

우의정 한효순은 백대의 누명을 들을지언정 세도 이이첨의 말은 반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간의 손을 잡고

어떠한 방법을 취했으면 좋겠소. 유참찬 좀 가르쳐 주구료.

하고 물었다.

만조백관을 대궐 안에 모아놓고 대비의 죄악을 밝힌 후에 폐하는 게 가한가 부한가 가부를 쓰라고 하시오. 이렇게 하면 일은 쉽사리 처결될 것이 아니겠소? 대감이 이번 일에 공을 세운다면 영의정은 떼어논 당상입니다.

한효순은 공명에 눈이 어두웠다. 영의정이 된다는 말에 뻔히 옳지 못한 일인 줄 알면서도 당장 대궐로 들어가 정원 승지를 불렀다.

조정에 중대한 공론이 있으니 어서 만조백관을 초청케 하오.

승지들도 역시 이이첨의 심복들이었다. 한효순이 대궐로 들어오기 전에 벌써 이이첨한테서 연통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승지들은 곧 만조백관한테 초패를 놓았다. 삼공(三公)과 육조판서 이하 참판, 참의, 정랑, 좌랑까지 불렀다. 이이첨의 직계부하들이며 대북의 일당들은 오늘 돌연 부른 것이 무슨 일인지 대강 짐작들은 했으나 미관말직의 벼슬아치들은 까닭을 알지 못하고 모여들었다.

반나절이 넘어서야 모든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이때 전관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까지 합하여 구백삼십여명이나 되었고 그 중 종실(宗室)만도 일백칠십여명이나 되었다.

우의정 한효순은 가장 크나 큰 국사나 처리하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역적 김제남의 따님인 대비는 그의 아들인 영창대군으로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여 열 가지 큰 죄악을 범하였소. 그러니 이미 전하와 모자의 정은 끊어진지 오래오. 어머니 아닌 사람을 어머니로 모실 수는 없소. 만조백관들은 그를 폐위시키라 하오. 여론에 따라 가부를 묻는 것이니 여러분은 가부를 표시해 주기 바라오.

이렇게 말하자, 처음부터 이이첨의 주구가 되어 폐모론을 주장하던 대사간 윤인(尹 )이 앞으로 나와 큰 소리로 외친다.

옳소. 벌써 폐모를 했어야 할 터인데 오늘날까지 끌어 내려온 것은 전하께서 너무나 인정이 많은 탓이라 하겠소. 빨리 백관에게 가부를 물어 처단하오.

윤인은 팔을 걷어 붙이고 떠들어 댄다.

자아, 그러면 만조백관들은 두 줄로 갈라서서 가(可)하다는 사람은 좌편에 서서 이름을 쓰고 부(否)하다고 하는 사람은 우편으로 열을 지어 자기 이름과 붓자(否字)를 쓰시오.

한효순이 명령을 내린다. 어느새 정원 승지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사선상 두 개와 명단 책 두벌을 서리(胥吏)를 시켜 만조백관 앞에 양편으로 갈라 놓는다.

대사간 윤인이 가하다는 자를 쓰는 줄의 맨 앞을 섰다. 그 바로 뒤로는 대사헌 정조(鄭造)가 대섰다. 이 두 사람은 본래부터 폐모론을 주장하던 자들이다. 폐모론을 주장한 이후에 이이첨의 눈에 들어서 미관말직인 당하관으로 있던 두 사람은 일약 대사간과 대사헌이 되었다.

뒤를 이어 대북의 소위 명사들이 꼬리를 이어 폐모하는 것이 옳다는 줄에 대섰다. 여기 붙어서 눈치를 살피는 아전들, 서리들이 힐끔힐끔 남의 눈치를 살피면서 갓자(可字)쓰는 줄에 대어섰다.

이때 원임대신 이항복한테 수의(收議)를 하러 나갔던 칙사가 돌아왔다.

백사 정승의 수의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효순이 그 수의문을 받아 만조백관에게 피로하며 읽는다.

신은 벌써 반년 동안이나 중풍에 걸려 아직 병중에 있소.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런 일을 만들도록 하였는지 몰라도 자고로 어미가 악해서 비록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자식은 어미를 죄 줄 수 없소. 아버지가 자애스럽지 못해도 아들은 효도를 극진히 해야 하는 법이요.

도대체가 이러한 것은 논의하는 것부터가 불가하오.

반대하는 대답이 분명하였다. 국가의 동량이었던 이항복이 폐모론에 반대하는 것이 분명해지자 만당의 공기는 삽시간에 변하였다. 그때가지 힐끔힐끔 대북 일파의 눈치만 살피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 둘 반대론의 나오기 시작했다.

한효순도 원래는 줏대가 없고 주변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이이첨과 같이 악랄한 우인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북의 직속 당파도 아니었다. 그는 의외로 반대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겁이 슬며시 났다.

결국 이날의 공론은 찬반(贊反) 양론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폐모론을 주장하는 대북 일파들은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해 무서운 공격을 가해왔다. 우선 이항복에 대하여는 처참의 형을 가하라 하였고, 양사(兩司)에서도 그의 말이 발만(發慢)하니 삭탈관직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임금은 전조(前朝)의 대신을 죄 줄 수 없다 하여 여러 가지로 반대해 보았으나 조정은 벌써 대북 일파의 손에 들어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항복을 북청으로 귀양보내고 말았다.

이후부터는 거의 날마다 대비의 죄를 들고

지금 뿌리를 뽑지 않으면 훗일 해 되는 일이 많아질 것이요.

하고 대비를 없애라는 상소가 계속해 들어왔다. 임금은 하도 기가 막히고 귀찮아졌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이렇게까지 악착스럽게 폐모하라고 성화를 부리는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임금은 마침내

< 내 덕이 없어 임금이 된 후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 매우 유감스럽다. 전번에 친형 임해군을 죽이고 또 어린 영창대군을 죽였다. 이것은 생각만 하여도 형제의 정으로 잘못 된 것을 알고 있는데 지금은 또 종사를 위해 폐모를 시켜야 한다니 내 죄 더욱 큰 것을 느낀다. 내 무슨 죄가 많아 이런 변을 당해야 하는고! 경 등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아라. >

하고 글을 내려 다시는 그런 소리를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성군(仁城君) 이하 여러 종실들이 일어나 나라를 위해 대비를 폐하라고 떠들었다. 모두가 대북의 사주를 받아 일어난 괴뢰들이었다.

그 다음 해인 광해군 육년 이월 십일일 마침내 빈청회의(賓廳會議)에서는 임금의 한탄도 개의치 않고 좌의정 정인홍 이하 예조판서 이이첨 등이 모여서 폐모의 절목(節目)을 결정했다.

즉, 명나라에서 준 존호(尊號)와 본국에서 준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빼앗고 대비라는 명칭을 서궁(西宮)이라고만 하고, 국혼 때 내린 납폐(納幣) 등속을 비롯하여 왕비의 어보(御寶)나 표신(標信)을 회수하고, 출입할 때 연(輦)과 의장(儀仗)도 폐지해 버리고 일체 문안과 숙배를 폐하여 후궁과 같이 대우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또 그 절목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들어 있었다.

< 대비는 아비가 역적의 괴수가 되었고, 그의 몸이 역적 모의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자식이 역적의 추대한바 되었으니 이미 인연은 종묘와 사직에 끊어진바 되었다. 그가 죽은 후에 나라에서는 거애(擧哀)를 하지 아니하고 복(服)을 입지 아니하며 신주는 종묘에 들어갈 수 없다. 또 서궁의 담을 더 높이 쌓고 무장(武將)을 두어 지키게 하되 그 수직 군사의 행동은 병조에서 감독하고 내시는 두 명, 별감은 네 사람만 두게 한다. >

대강 이러한 것들이었다.

승지는 곧 이 결정을 받들고 대비에게로 갔다. 대비는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만 있었다. 몇 번인지 목을 매어 자진(自盡)을 하려고 한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궁녀들은 대비에게 자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머리도 그냥 흐트러뜨린 채 밥과 음식을 물리치고 누워 있는 대비 앞에 돌연 내시가 승지를 인도하여 들어왔다.

승지는 우선 열 가지 죄목을 읽고 폐모의 선언을 내렸다. 대비는 방 안에서 궁녀들에게 부축되어 오뚝이 앉아서 모든 선언을 다 들은 후에 이(齒)를 바드득 갈았다. 별안간 문을 벼락치듯 열어젖혔다. 오뚝이 앉아서 승지를 호령한다.

승지야, 듣거라, 만고에 자식이 어미를 폐한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자식이 어미를 어찌 폐하느냐? 나는 상감보다 나이 적은 젊은 계모다마는 상감의 아비가 친히 친영례(親迎禮)를 거행하여 맞이해들인 정정당당한 적모(嫡母)다. 알아 듣겠느냐? 제 아비가 정해놓은 어미를 어떻게 자식이 마음대로 쫓아낼 수 있느냐. 상감한테 내 말을 전해라. 폐모를 할것이 아니라 죽여버리면 만사가 다 해결될 것이 아니냐고. 공연히 세상이 시끄럽게 떠들썩할 것 없다. 나를 빨리 없애버려라. 왜 못하느냐? 맘대로 하는 것을! 나를 어서 죽여버리라 해라!

어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던 대비에게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아나는지 쨍쨍한 목소리로 승지를 꾸짖는다. 승지는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고만 섰다가 슬며시 피하여 나가버린다.

대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늙은 궁녀들에게 영을 내린다.

먹을 것을 좀 가져 오너라. 이제는 내가 살아 저놈들이 망하는 꼴을 좀 보아야겠다.

악에 받친 대비는 스스로 자청해서 먹을 것을 청했다.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그저 오래 오래 사시어서 눈으로 저 자들의 망하는 꼴을 보셔야지요.

늙은 궁녀는 대비를 위로한다.

조정에서는 폐모를 선포한 후에 서궁(西宮)의 담을 더 한층 높이 쌓아 올리고 군사를 풀어서 철통같이 포위해 버렸다. 그러나 이럴수록 대비는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고 마음 속으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다짐했다.

친정 아버지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어린 아들도 불을 질러 숨이 막혀서 죽게 했다. 금이야 옥이야 사랑해 주던 늙은 남편 선조대왕도 꿈같이 세상을 떠나 돌아갔다. 다만 남아 있는 혈육이라고는 생사를 모르는 친정 어머니 노씨와 열 살밖에 아니 된 정명공주 뿐이다.

늙은 어머니와 어린 딸, 핏줄이 엉킨 두 여자만이 남아 있을 뿐 자기의 몸은 이제 혈혈단신 홀몸뚱이다. 그러나 이제는 도리어 살아야겠다고 반발했다. 소금밥에 피죽을 끓여 먹고라도 오래오래 살아서 조정이 되어가는 꼴을 보리라 결심했다.

 

 

 

그믐밤의 탈춤

 

이때 조정에서는 명나라의 불 같은 독촉을 받아 참판 강홍립(姜弘立)을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정하고 평안병사 김경서(金景瑞)로 부원수를 삼은 후에 이만 명의 군사를 거느려심하(深河)에 출병케 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공을 갚자는 것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가담하고 있는 틈을 타서 갑자기 세력을 펴친 여진족(女眞族)은 그 후 점점 강성하여 건주호(建州胡)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광해군 팔년에 드디어 자립하여 후금국(後金國)을 세우고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정했다. 그런 후에는 더욱 막막강병이 되어 만주의 요동 벌판은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 서울 북경(北京)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명나라에서는 세 번 네 번 구원해 달라고 청이 들어왔다. 한번 이런 요청이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취급하여 묘당에서 토론하게 되었다. 전에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우리를 구원해 주었으니 이번에 그전 은혜를 갚는 뜻에서 구원병을 보내야 한다는 사람과, 의리상으로는 응당 구원해 주어야겠지만 강대한 이웃나라인 후금국을 건드리는 것은 자는 호랑이를 건드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과, 이렇게 의견이 두 갈래로 나뉘어서 좀처럼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한편 누루하치는 이 소식을 듣고

< 금번에 귀국이 명나라를 도와서 출병한다 하니 매우 섭섭한 일이다. 우리는 귀국과 아무런 혐의도 없다. 출병치 말고 국경을 지키며 형세만 보아라. 만약에 귀국이 명나라를 도와 원병을 보낸다면 조선 삼천리 강산을 무찔러 버리겠다. >

하는 위협을 보내왔다.

여진(女眞)이 비록 태조대왕과 세종대왕 때 조선에 굴복해서 조공(朝貢)을 바치고 종노릇 까지 했지만 이제는 강국이 되었다. 여진 누루하치를 업신여겨 볼 수 없게 되었다.

광해는 몇 달을 두고 골치를 앓았다. 광해는 마지못해서 심하(深河) 출병을 하면서도 원수 강홍립에게 비밀히 지령을 내렸다.

형편을 보아서 향배(向背)를 취하라. 그리고 오랑캐한테 먼저 칼을 빼어 들지 마라. 누루하치한테 활을 쏠 때는 반드시 활촉을 뽑아서 허청으로 화살을 쏘게 하라. 그리하여 뒷날 말썽이 나지 않도록 하라!

이같이 신신당부해 보냈던 것이다.

강홍립은 군사를 거느려 심하까지 갔으나 광해의 밀지(密旨)대로 살촉을 빼고 살을 쏘았다. 뿐만 아니었다. 대세가 명나라에 불리한 것을 알자 도원수 강홍립은 슬며시 누루하치한테 항복해 버렸다.

뒤미처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이 함락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조선을 의심했다. 그러나 오랑캐는 오랑캐대로 항복한 강홍립을 앞세워 조선을 치러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 돌았다. 서울 장안은 발끈 뒤집혔다.

큰일 났네, 오랑캐가 강홍립을 앞장 세워가지고 조선으로 쳐들어 온다네.

그뿐인가, 명나라가 또 쳐들어 온다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 주었는데, 조선은 오랑캐와 내통이 되어가지고 항복해 버렸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쳐들어 온다네. 큰일 났네.

사람들은 만나는 대로 수군거렸다. 조정에서는 갑자기 장수감을 뽑느라고 만 사람을 뽑는 만인무과(萬人武科)를 보였다.

과연 명나라에서는 문죄사를 내보내기로 작정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은 요동이 함락되자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로 넘어와서 철산(鐵山) 앞에 있는 단도(槨島)에 진을 치고 패잔병들을 불러들이지 시작하였다.

한편 오랑캐는 오랑캐대로 의주까지 쳐들어 와서 한인(漢人)을 만나는 대로 모조리 죽여 버리고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바치라고 공갈과 엄포가 대단했다.

광해는 양면 정책을 썼다. 비밀히 금은보화를 강홍립에게 보내어 오랑캐한테 바쳐서 조선이 딴 뜻이 없는 것을 밝히게 하고, 한편으로는 이정구(李廷龜)를 변무사(辯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오랑캐와 통한 일이 없다는 것을 변명하라했다.

원래 이정구는 글 잘하는 재상으로 이름이 명나라에 자자했으므로, 그가 전에 폐모(廢母)때 조정에 참예하지 아니했다고 귀양을 보냈던 것을 풀고 그의 명성을 이용하여 명나라 조정의 노한 것을 늦추자는 것이었다.

이같이 온 나라가 소란스러울 때 이이첨, 유희분의 집 기둥에는 화살에 십자로 붙잡아맨 협박장이 들어와 박혔다. 새로 영의정이 된 박승종(朴承宗)의 집에도 들어왔다. 협박장의 내용은 이러했다.

< 빨리 대비를 복위시키지 않으면 너희들은 명나라의 문죄사가 나올 때 나라에 공론이 일어나서 육시처참을 당하리라. 곧 서궁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다시 대비로 받들어 모시게 하라. >

하루는 유희분과 이이첨이 만나 이 협박장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먼저 유희분이 말을 했다.

살에 협박장을 붙들어 매서 대청 기둥이 아니면 문설주에 화살을 박아놓으니 범인을 잡을 도리가 없습니다. 필시 대비편 사람들의 하는 짓이 분명합니다.

이이첨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다.

장차 명나라 문죄사가 들어온다면 어찌하지요? 그리고 누루하치가 또 온다면?

말을 마친 유희분의 얼굴은 노랗게 질려 있었다.

서궁(西宮)이 복위되는 날에는?

이이첨의 가슴도 조마조마한 모양이다.

대감이나 나는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니다. 더구나 대감은 죄상이 더욱 크니까.

유희분의 말을 듣는 이이첨은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어찌해서 내 죄가 더 큽니까? 죄를 당하면 다같이 당해야지요.

이이첨의 목소리는 독이 들었다.

불을 질러 영창을 죽이고, 대비를 서궁으로 쫓아낸 일은 대감이 한 짓이니 나나 박승종보다 책임이 더 큽니다.

이이첨의 눈에는 별안간 핏줄이 빨갛게 섰다. 유희분은 이이첨의 살기 띤 독한 눈을 피했다. 이이첨의 살기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말을 부드럽게 붙여 본다.

나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은 내가 잘못 했소이다. 좌우간 속히 일을 피워볼 길을 생각하십시다.

이이첨도 조금 수그러졌다.

유대감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일이 피게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빨리 복위를 시킵시다. 그저 일은 무사한 것이 제일입니다.

유대감은 정신이 나가셨소? 도로 복위를 시키면 대비의 원망이 풀릴 줄 아시오?

그럼 이대감의 생각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이이첨은 대답 없이 필묵을 당겨서 왼편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 손바닥 안에는 글자가 두 자가 씌어졌다. 소리 없이 유희분 앞에 내민다.

[ 滅 口 ]

두 글자다. 유희분은 이이첨의 눈을 빤히 살펴보다 묻는다.

멸구란 죽이라는 뜻입니까? 어떻게 죽이란 말요? 어떤 방식으로?

한밤중에 자객(刺客)을 서궁으로 들여보내기는 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며 이이첨은 간드러지게 웃는다.

임술년(壬戌年) 십이월 그믐날 그 해의 마지막을 알리는 방포(放砲) 소리를 군호삼아 이이첨의 심복 백대형(白大珩)과 이위경(李偉卿) 등은 건달패 십여명을 거느리고 북과 장구를 치며 어지러이 서궁에 돌입하였다.

한편 그날 초저녁에 대비가 꿈을 꾸니 선조대왕이 생시와 조금도 다름없는 복색으로 나타나서 대비를 보고

도적의 무리가 곧 들어올 것이니 피하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요.

하고 조용히 말한 다음 사라졌다.

대비는 꿈을 깨어 흐느껴 울었다. 옆에 모시고 있던 궁녀가 그 까닭을 알자

선대왕의 혼령이 나타나셔서 이르시는 말이오니 반드시 까닭이 있겠습니다. 대비께서는 저와 옷을 바꾸어 입으시고 얼른 후원으로 몸을 감추십시오.

궁녀는 대비의 소복을 벗기고 자기 옷을 입힌 후에 머리에 얹은 첩지까지 바꾸었다. 그리고 대비의 소복을 자기가 입고 스스로 가짜 대비가 되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밤은 점점 깊었다. 섣달 그믐날 밤이라 거리는 웅성거렸다. 삼경(三更) 때쯤 되니 서궁 대문 앞으로 건달패들이 별안간 소고와 꽹과리를 두드리며 들이닥쳤다. 문 지키는 군사들이 물었다.

뭣하는 놈들이냐?

섣달 그믐에 잡귀를 쫓는 탈춤패들이요. 서궁에도 액막이를 하라고 위의 분부를 받들어 나왔소.

출입패(出入牌)를 보여라.

탈막을 쓰고 앞에 선 자가 출입패를 군사한테 보였다. 틀림없는 궁중 출입패다. 군사들은 문을 열고 탈춤패를 들여보냈다.

꽹과리와 소고 치는 소리가 요란한 속에 탈춤패들은 춤을 추면서 대비가 거처하고 있는 침실 앞까지 들어갔다.

대비와 옷을 바꾸어 입은 궁녀는 침착하고 대담했다.

누가 이렇게 소란을 떠느냐?

큰 소리로 꾸짖었다.

앞장을 선 건달패 두목은 대비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손을 번쩍 들어서 탈춤패들한테 말없는 군호를 보낸다. 탈춤패들은 우르르 대비의 침실로 몰려들어 왈칵 미닫이를 열어 젖혔다. 앞에 섰던 한 자가

오늘은 섣달 그믐이라 잡귀를 쫓아내라는 위의 분부를 받고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치자 소매 안에서 비수를 뽑아 거침없이 대비를 찔렀다. 순간 구슬픈 비명소리가 일어나며 가짜 대비는 푹 고꾸라졌다.

이때 마침 영의정 박승종이 대비를 해하려는 이이첨 등의 음모를 눈치 채고

(만약 대비를 해하는 일이 생긴다면 비록 자기가 손을 아니 댔다 해도 영의정의 책임으로 누명을 뒤집어 쓰고야 만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일은 훼방을 노아야겠다.)

결심하고는 친히 군복을 갖추고 군사를 지휘하여 서궁으로 뛰어들었다.

저놈들을 잡아라!

군사들은 일제히 허리에 찬 육모방망이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탈춤패들은 벌써 일을 저지른 뒤였다. 그들은 재빨리 어둠을 타고 담을 뛰어 넘어 도망을 치고 말았다.

탈춤패들이 도망 간 후에 박승종은 전상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어 보았다. 피비린내가 왈칵 코를 스쳤다. 박승종의 가슴은 탁 내려앉았다. 눈같이 흰 소복을 입은 여인의 몸에는 홍건히 피가 흘렀다. 틀림없는 대비였다.

조금만 일찍 왔다면 대비의 목숨을 구했을 것을! 이놈은 만대의 역적놈이 되겠구나.

박정승은 우두커니 시체 앞에 서서 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숙였다.

대비가 죽었다고 믿은 것은 박승종 뿐이 아니었다. 이이첨도 탈춤패들의 보고대로 대비가 죽었거니 하고 믿고만 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던 날 대비가 나타남을 보고 여태껏 살아 있었는가 하고 놀래었다고 한다.

 

 

 

새문안의 王氣

 

광해군은 근자에 와서 마음에 차차 번뇌를 느끼기 시작했다.

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이고, 대비를 폐위시켜서 서궁(西宮)에 감금하고, 이항복 이하 늙은 중신들을 다 보내고 나니, 아무리 이이첨, 유희분 등의 말만 듣고 행한 일이라 하나 깊은 밤중에 홀로 앉아 고요히 생각해 보면 어쩐지 마음이 괴로왔다. 광해군은 젊어서 좋아하지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김상궁의 거처를 찾는 광해군의 발길은 잦아졌다.

이때는 명나라에서도 입을 다물고, 누루하치도 중국을 통일하기에 바빠서 딴 생각을 아니하게 되어 차츰 세상이 태평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해마다 풍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풍부하니 광해군은 궁중 넓은 후원에서 김상궁을 위시한 여섯 사람의 숙의와 열 사람의 소원(昭媛)에 싸이어 행락으로 나날을 보냈다.

임금의 나이는 벌써 사십이 넘어섰고 김상궁도 이제는 나이 삼십이 넘어 한참 무르익어 가는 좋은 시기였다. 아침에 만조백관들을 모아놓고 국사를 논의해야 할 조회 시간이 되어도 광해군은 김상궁만 옆에 끼고 누워 있는 날이 많게 되었다.

김상궁은 이때부터 임금을 배경 삼아 본격적으로 권도(權道)를 부리기 시작했다. 김상궁의 총행(寵幸)이 비길데 없다는 말은 궁중과 조정에 파다하게 퍼졌다. 김상궁의 친정을 통해 벼슬자리를 얻으려는 자는 날이 갈수록 늘었다. 김상궁의 친정 어미는 과부가 된 후에 유몽옥(劉夢玉)에게 개가했다. 유몽옥은 과거를 못 본 백두(白頭)이건만 김상궁의 덕으로 횡성현감(橫城縣監) 까지 지냈다. 이밖에 김상궁의 조카사위가 되는 정몽필(鄭夢弼)은 무슨 일만있으면

아주머니!

하며 궁중을 드나들었다.

유가와 정가의 집으로는 조정의 벼슬하는 대관들이 뻔찔나게 드나들었다. 유몽옥과 정몽필의 문전은 날마다 사인교, 가마, 초헌, 남여로 시장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나라에서 내리는 벼슬의 지위가 김상궁에게 바치는 뇌물의 다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상궁은 이렇게 모아들인 제물을 기특하게도 그때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대궐 중수(重修)에 쓸어 넣었다.

창덕궁(昌德宮)의 중수(重修), 그밖에 다른 관청 등의 재건 역사를 벌였다. 늘 돈이 부족하여 건축 사업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될 때마다 김상궁이 내놓는 은전으로 역사를 계속해 나갔다. 광해군은

너의 충심을 무엇으로 갚을지 모르겠다.

하며 더욱 김상궁을 신임했다.

김상궁은 이렇게 임금의 마음만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다. 김상궁은 한편으로 왕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하고, 또 지관(地官)들이나 술수(術數)하는 자들을 불러들여 대왕전하와 중전, 동궁의 만수무강을 빌며 점을 치게 했다.

한 번은 성지(性智)라는 도승(道僧)을 청해서 여러 가지 점을 쳐보인 일이 있었다. 성지는 김상궁의 신수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운명은 국운과 같이 하는 대운이올시다. 이 재앙을 막는 길은 새로 일어나는 왕기(王氣)를 눌러 막아야 합니다.

새로 일어나는 왕기를 눌러 막아야 한다는 말에 김상궁은 귀는 번쩍 열려졌다.

새로 왕기가 어디서 일어납니까?

간단히 말씀을 할 일이 아닙니다. 함부로 말을 했다가는 소승의 목이 달아납니다. 어전이 아니고는 아뢸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어전에서 말씀을 아뢰도록 하지요.

김상궁은 곧 성지라는 중을 광해군에게 소개 했다. 광해군은 대뜸 물었다.

들으니 대사는 나라에 왕기가 일어난다고 했다 하니, 사실인가?

예, 그런 말을 상궁께 올린 일이 있습니다.

나라에 왕기가 일어난다 하니 어느 곳에 일어난단 말이냐?

바로 서울 인왕산(仁旺山) 밑에 왕기가 서려 있습니다.

광해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진다.

내 자리를 뺏을 사람이 나타났단 말이지?

새로 왕이 될 큰 인물이 인왕산 밑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을고?

광해군의 목소리는 떨리는 듯했다. 성지는 눈을 딱 감고 합장한 채 대답이 없다.

말씀을 해주십시오. 대사님.

김상궁도 옆에서 간곡하게 부탁한다. 성지는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새문안에는 왕기가 멈춰 있는 곳이니 그 곳에 크게 궁궐을 이룩하시어서 미리 다른 일이 없도록 눌러 놓셔야 하겠습니다.

성지의 말이 끝나자 김상궁이 아뢴다.

대사가 말씀한 새문안 대궐터는 바로 정원군(定遠君)의 집이옵니다.

뭐, 정원군의 집이야?

광해군은 깜짝 놀랐다.

정원군은 돌아간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소생으로 의주(義州) 피난길에서 죽은 신성군(信城君)의 아우요, 광해군의 이복 동생이다. 정원군은 나이 아직 사십미만이었으나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큰 아들은 능양군(綾陽君)이요, 둘째는 능원군(綾原君), 셋째는 능창군(綾昌君)이다. 광해군은 성지를 보낸 다음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이 괴상한데…

아무래도 으심스럽다는 듯 김상궁을 향해 혼자 말한다.

그야 하늘 일이란 모르는 것이올시다.

김상궁은 목소리를 나직이 하여 자기 의사를 표시한다.

정원군은 무능하고 못나기 한량없는 사람이야. 이 사람의 집에 왕기가 서려 있다니 괴상한 일이거든…

광해군은 또 한 번 뇌까린다.

정원군은 못났다 하지만 아들이 삼형제나 있습니다. 아들 삼형제 중에 혹시 인물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좌우간 전하께오서는 곧 정원군에게 집을 비우라고 분부를 내리십시오.

광해군은 김상궁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내시를 불렀다.

정원군한테 별감을 내보내서 사흘 안으로 집을 비고 옮기라고 이르라.

내시는 어명을 받들어 별감을 정원군의 집으로 내보냈다.

광해군이 즉위한지 십년이 넘었건만 형제인 정원군에게 무슨 분부를 내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정원군은 임해군의 일과 영창의 일이 있은 뒤에 영영 대문을 닫아 걸고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친구가 와도 만나지 아니했고 일가 친척도 서로 찾지 아니했다. 세상을 등지고 산송장이 되어 나머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전 별감이 나와서 어명을 전하러 왔다고 한다. 온 집안은 눈이 둥그래졌다. 부인 구씨도 깜짝 놀랐다.

부인 구씨는 당대 문장가(文章家)로 이름이 높은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웬일이지요?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정원군은 침착하게 대답하면서 조복으로 바꾸어 입고 칙사를 만날 준비를 했다. 대청문을 활짝 열어 놓고 대청바닥에 단정히 꿇어앉아 어명이 내려지기만 기다린다. 아내 구씨와 큰 아들 능양군도 뒤에 시립해 섰다.

경이 지금 들어 있는 집을 헐고 궁을 세우려 하니 경은 따로 집을 구해서 나가라는 어명이요.

청천벽력 같은 뜻밖의 소리다. 정원군은 자기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명이니 거역할 수는 없었다.

분부대로 집을 내놓겠습니다.

정원군은 어깨가 축 처졌다.

사흘 안으로 집을 내놓고 이사를 하되, 만약 영을 어기는 날에는 큰 벌을 받을 것이요.

칙사는 마지막 어명을 전하고 돌아갔다. 칙사를 보낸 다음 정원군의 집안 식구들은 서로 멍하니 바라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집을 왜 내놓으랍니까? 수다 식구에 간단한 살림도 아닌데, 어떻게 나갑니까? 우선 집을 구해야지 아니합니까?

구씨 부인은 마음을 잠깐 진정시킨 후에 이같이 물었다.

별 수 없지, 나가라면 나갔지 별 수가 있나? 동대문 밖 처갓깁으로라도 방 한간을 빌려서 이사를 가야지.

정원군은 길게 한숨을 짓는다. 이때 옆에서 아무 소리 아니하고 섰던 이십대의 젊은 능양군이 나직한 음성으로 부모께 아뢰었다.

사흘 안에 집을 옮기라 하니 지체 말고 옮기십시오. 공연히 지체를 하셨다가는 큰 의심을 사십니다.

정원군의 귀가 번쩍 띄었다.

의심이라니, 무슨 소리를 들었느냐?

이이첨의 집으로 드나드는 문객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이귀의 아들 이시백(李時白)이 저한테 귓속말을 해준 일이 있습니다.

이이첨의 문객들이? 그래 무어라고 하더란 말이냐?

기막힌 소리올시다. 새문안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는데 이 왕기가 일어나는 집이 바로 우리 집이라 합니다. 큰 일날 소리가 아닙니까?

뭐? 우리 집에 왕기가 일어났다고? 이것 큰일 났구나. 이런 까닭에 나는 문을 꽉 닫아 걸고 일체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고 지내는 터인데 이게 웬소리란 말이냐! 여보 마누라, 지금이라도 곧 당신 친정집으로 가서 사정 얘기를 하고 사랑채를 좀 빌려달라 하시오.

정원군은 기절초풍을 하고 서둘렀다. 이튿날로 정원군은 부랴부랴 처갓집으로 식구들을 옮겼다.

곧 새문안 정원군의 집은 헐리고 거기에 새로 짓는 대궐터를 닦기 시작했다. 나라에서는 도편수를 뽑고 팔도에 부역 명령을 내렸다. 미구에 새문안에는 푸른 하늘을 찌르고 굉장한 대궐이 이루어졌다. 광해군은 대궐 이름을 경덕궁(慶德宮)이라 했다.

이렇게 대궐을 지어 놓고도 광해군의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아니했다. 공연히 허전했다. 하루는 이이첨을 불러 물었다.

인왕산 밑에 왕기가 있다 하여 이것을 미리 막기 위해 경덕궁을 지었으나 나의 생각에는 왕기는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 정원군의 집안 식구에 혹시 영특한 아이들이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경의 뜻은 어떠한가? 만약에 그러한 애들이 있다면 아주 싹을 도려버리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되는데…

간특한 이이첨은 벌써 광해군의 뜻을 짐작했다. 그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이 기회에 자기와 세력을 겨루고 다투는 신경희(申景禧)를 꺾어버리자 생각했다.

신경희는 정원군의 부인 구씨의 외사촌이었다. 이이첨과 함께 폐모를 주장한 사람으로, 겉으로는 이이첨과 좋은 체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항상 이이첨의 세력을 시기해서 속으로 원수가 되어 있었다. 신경희는 유림(儒林)에게서 한몫 세력을 잡고 조정에서 이이첨의 세력과 곁고 틀고 있었다.

이이첨은 이 기회에 신경회를 죽여버리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 경은 무슨 의심스런 일을 짐작했는가?

광해군은 재차 묻는다. 이이첨은 잔기침을 두어번 하고 나서 아닌게 아니오라 소신도 이 점을 주의하와 항상 정원군의 집안 일에 유의한 바 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나?

들은 바에 의하면 신경희는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綾昌君)을 추대하려 하여 백방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경희는 소신을 만날 때마다 능창군의 자랑이 놀라왔습니다. 만약 능창군을 추대하여 왕을 삼는다면 능창군의 어머니와는 외사촌간이 되니 바로

조카가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큰 세력을 잡기 위해 이같은 불궤(不軌)한 뜻을 품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광해군은 노기가 충천했다.

괘씸한 것들! 곧 두 놈을 다 잡아다가 역적 모의한 것을 실토케 하라.

광해군은 승지를 불러 신경희와 능창군을 금부에 하옥시켜 엄하게 국문하라는 영을 내렸다. 금부도사는 즉시 신경희와 능창군을 잡아내서 꽁꽁 묶은 후에 금부로 끌고 갔다.

집을 빼앗기고 처갓집에 우거하고 있던 정원군은 별안간 셋째 아들 능창을 또 잡아가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정원군은 그만 심화병이 나서 자리에 눕는 몸이 되었다. 평화스러운 집안에 잠자다가 물벼락을 맞은바와 다름없이 된 정원군은 큰 아들 능양을 앞에 앉히고 눈물을 흘리며

안온한 집안에 된벼락도 분수가 있지. 네 생각에도 그 온후 침착한 네 아우놈이 그래 역적질을 한단 말이냐.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제는 별도리가 없다. 고관대작의 권문 앞에 무릎 꿇기는 차마 못할 일이지만 골육 하나 살리자면 그저 눈을 꽉 감고 무릎을 꿇어 볼밖에 없다. 유희분을 찾아 보아라. 지금 임금을 움직일 사람은 유희분하고 이이첨밖에 없다.

능양군은 평소에 부친이 아우 능창을 특히 사랑하시던 일을 생각할수록 아버지의 애타는 가슴을 미루어 생가하고 부지중 눈물이 흘렀다. 능양은

아버지, 너무 상심 마십시오. 백번인들 못가보겠습니까?

하고 그 길로 유희분을 찾아갔다.

광해군 십사년(壬戌年) 여름 어느날, 오늘도 유희분은 아침부터 친구들을 청해 놓고 술타령을 하고 있었다.

능양은 유희분의 집 대문을 들어섰다. 큰 사랑으로 들어가는 중문을 들어서면 거기엔 청지기 방이 있어서 먼저 거래를 하지 않고는 주인을 만나볼 수 없게 되어 있다. 능양군은 이 관문에 먼저 걸렸다.

어디서 오신 손님이시오니까?

청지기는 처음 보는 능양의 행색을 훑어보며 이렇게 물었다.

대감 계시거든 종실 능양이 뵈러 왔다고 일러라.

했다. 능양군으로 말하면 아무리 대가집 청지기인들 깍듯이 존대해 줄 처지가 되랴 하는 생각으로서 서슴지 않고 반말을 해붙인 것이지마는 청지기는 실쭉해서

거기 앉아 기다리시오.

하고 한동안 거드름을 피운 후에야 사랑으로 들어갔다.

능양은 우선 여기서 아니꼬운 정경을 보게 되었다. 그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서 하회를 기다렸다.

사랑방에는 다수의 손이 있는 듯 지껄이고 떠들고 웃고 하는 소리가 요란히 들려 나온다.

기생의 권주가와 시조 부르는 소리.

이윽고 기다리고 앉아 있는 능양군의 등뒤에서 청지기의 뿌루퉁한 음성이

이리 들어오십시오.

하였다. 넓은 사랑방 아랫간에 조그마한 방이 하나 달려 있다. 청지기는 이방으로 안내하며

여기 좀 계십시오.

하고 가벼렸다. 장지문 하나를 경계삼은 넓은 사랑방에는 주객이 삐익 둘러앉았고 곱게 차린 기생들이 손님 하나씩 걸러서 앉아 술을 권하며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이 마치 색동저고리를 보는 듯했다.

능양군은 자리에 조용히 앉아 눈을 감았다. 이렇게 앉아 있기를 한식경이나 했다. 그러는 동안에 손은 하나 둘씩 일어서 나갔다.

이리해서 손이 거의 퇴산하자 주인 유희분의 아우 희량(希亮)의 음성이

형님

하고 부르는 것이 들려나왔다.

아까부터 종실 능양군이 와 계신 모양인데 인사가 되었소? 이 방으로 모셔들여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말씀을 들어보는 게 좋지 않소?

능양군이? 뭘하러 날 찾아왔겠나, 아우 능창군 때문이겠지.

글쎄 하여간 만나보는 게 인사가 아니겠소?

술이 취했는걸. 취풍에 무슨 말이 나갈지 아나. 오늘만이 날이 아니지. 얘, 월선아, 너 파연곡(罷宴曲)으로 한 마디 더 불러라, 불러.

말이 떨어지자 월선이란 기생은 낭랑한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장지문 하나를 격하여 이 대화를 듣고 있는 능양군의 가슴에 불덩이가 치밀었다. 눈물이 나올 듯하였다.

능양군은 벌떡 일어섰다.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대문을 나서는 능양군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터져나왔다. 세상에 아무리 골육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 하기로서니 차마 이 굴욕이야 어이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가증스럽고 야비한 놈.

능양군은 속으로 이렇게 욕을 해붙이고 침을 탁 뱉았다.

그 후 능창은 강화(江華)로 이송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귀양살이로 속죄만 된다면 하고 일루의 희망을 둔 것이 필경엔 사형을 당해 죽고 말았다.

이것이 원인으로 아버지 정원군의 울화는 그칠 수 없는 병이 되어, 정원군 역시 그 후 얼마 안 가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능양군은 아버지의 상사를 당한 후에 비탄에 잠긴 수개삭을 보내는 동안, 모든 인간사를 청운으로 돌리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좀처럼 얼굴에 나타내지 않을 만큼 대오철저(大悟徹底)의 수양을 하였다.

그러나 일생에 한 번은 이 분풀이를 하고야 말리라는 결심만은 줄어들지 않았다. 물론 어떤 수단으로 분풀이를 하여야 한다는 일정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런 계획을 실행에 옮길 아무런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능양군은 그저 막연히 분풀이를 해야겠다고 생각만 지니고 있었다.

 

 

 

反正謀議

 

계해년(癸亥年=光海 十五年) 정월 초, 모악재 너머 서진관사(西津寬寺)에는 하루의 정초놀이로 절밥이나 사먹자고 모인 듯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진관사 구내에는 여남은 채의 집이 있었다. 명색은 여염집이었지마는 기실은 모두 진관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절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먹는 집들이다. 세 사람은 그 중에서 가장 조용하고 외딴집을 찾아서 들었다.

이 세 사람은 이괄(李适), 장유(張維), 최명길(崔鳴吉)이었다.

이괄은 그때 북병사(北兵使)의 인수를 받고도 병을 청탁하고, 부임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차일피일하고 부임하지 않고 있는 까닭은 당시 왕실의 부패가 극도에 달하여, 상처로 말하면 고름이 잔뜩 들어서 침 한대만 주면 고름이 주르르 쏟아질 듯한 형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불우한 지사(志士)와 강개비분하는 의사(義士)들과 사귀며 장차 큰일을 꾸밀 생각을 했다. 그가 이렇게 해서 교분을 맺게 된 것이 전판서 장운익의 아들 형제 장유와 장신(張紳)과 원두표(元斗杓)를 비롯하여 최명길, 이귀의 아들 이시백, 조익(趙翼) 등의 젊은 또는 장년(壯年)의 사람들이었다.

이날 이괄은 최명길, 장유와 무슨 비밀히 의논을 할 생각으로 일부러 조용한 곳을 찾아나선 것이다.

안주인이 술상을 차려놓고 나가자 세 사람은 우선 술 한잔씩을 따라 마시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괄이 먼저 이렇게 말을 끄집어 냈다.

무슨 일이건 시기와 모사(謀事)가 들어맞아야만 성사가 되는 법인데 인제 시기는 되었다고 볼 수 있고, 동지도 그만하면 어지간히 손이 맞을 만큼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누구를 위에 추대하느냐 하는 것하고 또 하나는 성(城) 안에서 내응해 주는 유력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 유력한 내응자란 병권을 잡은 사람이라야 더욱 좋겠네.

최명길이가 이렇게 말을 보탠다.

병권을 가진 사람의 내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내외 호응의 효과를 거두자는 것이지만 반드시 군병을 합류시켜 주지 않더라도 동병(動兵)만 맡아 주면 되는 거야. 중립만 해주면 된다는 거야.

이괄은 자신이 만만한 설명을 하였다.

병권을 가졌다면 누가 제일 유력하겠소?

장유의 질문이다.

그건 뻔한 일이 아닌가. 오늘 특히 장공을 청한 것두 그것 때문인데 제일 합당한 인물은 장공의 사돈 영감되는 이대장(李大將)이지.

이대장이란 포도대장 이흥립(李興立)을 말하는 것이다.

장유는 더 말없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우리 군사는?

최명길이 또 묻는 말이다.

우리에겐 장단(長端) 부사 이서(李曙)의 군사가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 될까?

무슨 소리, 지휘만 잘하면 쓰고도 남지. 지금 구굉(具宏)을 몰래 장단으로 보내 둔 것도 이서를 도와서 군사를 증모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장단부사 이서는 이괄 등과 벌써부터 기맥을 통해 가지고 천여명 군졸을 기르고 있었다.

이괄은 그보다도 이흥립 이대장을 설득시켜야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대장을 설득시키는 중임(重任)을 장유에게 간청을 했다. 장유의 아우 장신은 이대장의 사위다. 장유는

그건 염려들 마시우, 아우를 시켜서 십분 충분히 이대장의 배짱을 살핀 후에 우리의 뜻을 알리고, 자진해서 우리의 편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중립의 태도로서 동병을 맡도록 할수는 있다고 장담하겠소.

그리만 되어도 우리는 큰 성공이지.

이런 이괄의 말에 장유는 다시

그보다두 더 긴박한 문제가 추대 인물이 아니요?

하여튼 종실 가운데서 골라야지.

하는 최명길의 말에 이괄은 술을 한잔 따라 마시고는

고른단 말이 안 될 말이요. 종실 가운데에 제법 왕위에 올라앉을 만한 위인이 얼마나 된다구 고르고 가리고 할 여지가 있는가?

이괄은 심중에 이미 작정해 둔 인물이 있는 듯하였다.

그럼 영감 흉중에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 있소?

하는 최명길의 질문에

아무렴 있지.

누구요?

난 돌아간 정원군의 아드님 능양군밖에 없다고 생각하네.

능양…

하고 최와 장은 서로 눈을 맞추어 잠시 말이 없었다.

능양군이 어째서 우리가 추대할 만한 인물인가를 이야기해 줌세.

하고 이괄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반정거사(反正擧事)는 잘 되면 구국(救國)의 공을 세우는 것이지만 실패하면 역적으로 삼족이 멸망하는 화를 입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본즉 여느 종실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란 말일세. 적어도 왕가에 대하여 심각한 불평불만이 있고 이래도 못 살고 저래도 살 수 없는 어떤 비상한 사정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자진해서 응할 도리가 없는 것일세.

장유와 최명길은 이괄의 사리 밝은 설명에 승복하지 앉을 수 없었다. 듣고 보니 과연 절절이 그럴 법한 경위였다.

두 말할 것 없소. 영감의 말씀에 동감이요.

장유가 먼저 이렇게 의사를 발표하고는

그런데 능양군의 말씀이 났으니 말이지 요즘 내가 듣기에는 김유(金 )와 이귀(李貴) 같은 분들이 능양군과 가끔 왕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혹시 김유나 이귀 등 노패가 무슨 일을 꾸미지나 않소?

꾸며도 좋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지, 우리의 운동이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고 한들 해 될 바는 없지. 또 어느 기회에 합류해도 좋지 않은가.

하고 이괄은 만족한 안색을 하였다.

젊은이 일파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제일 중요한 장단부사와 이서의 양병 음모도 순조롭게 잘 돼나갔다. 젊은이 일파가 실질적인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김유, 이귀, 심기원(沈器遠), 신경진(申景 ) 등의 노패는 노패대로 어느 때는 이귀의 집 사랑에, 어느 때는 새문밖에 있는 어떤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밀회를 거듭하였다.

진관사에서 돌아와 각기 헤어진 세 사람은 서로 맡은바 소임을 수행하기에 바빴다.

장유는 이틀 후에 아우 장신을 시켜서 사돈 대감을 설복시키도록 했다. 장신이 그 장인을 찾은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장신은 큰 사랑에 와서 이흥립에게 읍하고 웃목에 앉았다.

이흥립은 아들이 없었다. 다만 무남독녀를 두어 장신을 아들같이 사랑했다.

저녁 먹었나?

예, 참 저녁 진지 안 잡수십니까?

아직 생각이 없다.

이흥립은 한동안 장신을 바라보더니

너 왜 과거는 안 보니?

지금 조정에는 벼슬할 마음이 없어요.

하고 장신은 대답했다. 이흥립은 이 소리를 듣고 한 번 크게 껄걸 웃으면서

너도 요새 그 흔한 절개 있는 지사(志士)가 되려는 게로구나.

그럼 장인께서는 이 시국에 대해서 불평이 없으시니까?

흥립은 이외의 질문에 약간 놀라는 빛을 보이며

왜 불평이야 없겠니, 그러나 한세상 지내는데 부귀나 누리면 그만 아니냐?

이렇게 대답하면서 이대장은 장신이 무슨 생각이 있구나 하는 것을 짐작했다.

그럼 만일 그런 태도를 가지고 계시다가 훗일 어떤 새 국면이 열릴 때 옥석혼효(玉石混淆)로 함께 몰리게 되면 무슨 말로 변명을 하시렵니까?

장신은 이야기를 차츰 목적하는 설복의 방향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런 조짐(兆朕)이 보인단 말이냐?

보이고 말고요. 보인다느니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위의 말에 이대장은 비스듬히 누워있던 몸을 가누어 바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심각한 안색을 했다.

옹서간이니 상관은 없다마는 너 경솔히 그런 말을 다른 데서 해서는 못 쓴다.

그런 조심을 아니할 리 있겠습니까?

그래 정녕 그 적실(的實)을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전 참판 김유와 전 평산부사 이귀, 그리고…

김유와 이귀가?

그렇습니다.

하고 묵묵히 무엇을 생각하더니

이귀가 중심이 되어 일을 꾸미고 있다면 일은 믿음직할 게다.

그밖에도 심기원, 신경전 등이 있습니다.

이귀는 그런 소문이 돌아서 수차 금부에 대죄(待罪)까지 허긴했다마는…

이귀 영감이 그런 혐의를 수차 받고도 태연히 대죄를 하는 소이는 김상궁이 궁중에 있어서 상감의 의심을 틀어막아버리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상궁은 수양딸처럼 궁중에 드나드는 이시백의 누이 예순(禮順)이란 여승(女僧)에게 반해서 그 예순이의 청으로 이귀에 대한 의혹을 풀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전에 들은 말이다마는 예순이라는 여승은 죽은 김자겸(金自謙)의 아내였다면서?

그렇습지요.

일은 꼭 되리라고 믿느냐?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오면 일은 지금 두갈래로 벌어져서 북병사 이괄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가 있어서 장단부사 이서의 손으로 군졸까지 기르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익어갈수록 놀라운 말 뿐이었다. 사위의 입에서 이괄의 이름이 나올 때 이흥립은 다시금 눈을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괄의 패기만만한 모습이 눈 앞에 떠올랐던 까닭이다.

그 젊은 패엔 어떠한 인물이 있느냐?

이대장은 눈을 감은 채 이렇게 묻는다.

장단부사 이서는 이귀, 김유와 맥을 통하기는 하였지마는 기실은 구굉이란 인물과 일심동체가 되어서 젊은 패에 속하고 있고, 최명길, 원두표 등등 일당 백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흥립은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눈을 뜨고

이런 일이란 형제간에도 알리기 어려운 일이며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할 일인데 너 무엇을 믿고 나에게 그런 비밀을 토설하는 것이냐. 만일에 내가 너의 소청을 들어 주지 않으면 어쩔 셈이냐.

이대장은 긴장한 안색으로 이렇게 질문하였다.

예, 지당한 말씀이올시다.

하고 장신은 허리춤에서 짤막한 비수를 꺼내 앞에다 놓고, 또 무엇인지 종이에 싼 조그마한 봉지를 내놓았다.

실상 이런 비밀을 말했다가 응낙을 받지 못하면 상대자를 살려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비수로 상대자의 심장을 찔러 그의 입을 봉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처지로 어찌 부모와 같은 장인의 몸에 칼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하고 종이 봉지를 펴보이며

비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먹고 저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대장의 눈은 그 두 가지 물건에서 잠시 떠나지 않았다.

음, 마땅히 그만한 결심이 있어야 하는 게지, 알았다. 집어 넣어라.

예.

장신은 조용히 그 두 가지를 다시 허리춤에 간직해 넣었다.

이귀를 만날 기회도 있긴 하다마는 내 입으로 말하긴 싫다. 너의 목숨을 걸고 대답해두려무나. 이흥립은 결코 동병을 하거나 방해를 하지는 않겠다구.

예.

허리를 굽실하며 이렇게 대답하는 장신의 얼굴에는 금시에 생기가 돌았다.

나머지의 일은 동지들의 굳은 단결과 비밀 유지 뿐이었다. 다만 요즘 와서 염려되는 바는 노패 이귀, 김유, 김자점 등의 행동이 차차밖에 누설되어 항간에는 불원 무슨 큰일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일이다. 비록 이귀의 딸 여승 예순이가 궁중에 자주 드나 들어서 김상궁을 어머니라 부르고 그의 힘으로써 이귀에 대한 의혹을 막아버리는 이면의 운동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한 번 두 번이지 너무나 사람의 입에 오르고 보면 필경 어떤 화변이 생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막아야 한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노패와 젊은 패의 합동을 꾀하고 일의 주동권을 잡아야 한다고 장신은 생각했다.

거사 후의 인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비록 노패들을 앞장 세운다 할지라도 실천에 있어서는 젊은 자기네들이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신은 형 장유를 통하여 이괄 일파에게 이흥립의 승낙 쾌보를 전했다.

반정모의(反正謀議)를 개시한지 수삭, 그 동안 동지들의 초조와 고심 그것은 이루 형언할수 없었다.

거사하는 일짜를 삼월 열사흗날로 작정한 이후의 이괄 이하 젊은이 일파는 그 전부가 각기 동서로 나뉘어서 맡은 소임대로의 부서에 매어 달렸다.

구굉, 원두표 등은 벌써 변장하고 장단부사 이서에게로 가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참모의 역할을 하고 있고 장신은 처가에 일참(日參)하여 장인 이흥립 장군의 행동을 감시할 겸 그의 중립적 행동을 취하겠다는 언약을 지키도록 직접간접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노인파 김유는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내객을 사절하고 틀어박혀 있고, 이귀 노인만이 평일과 다름없이 객도 만나보고 출입도 하였다.

반정모의의 노소파를 막론하고 열흘이 넘어서부터는 억제할 수 없는 불안 초조와 흥분에 노상 가슴 속이 떨림을 면할 수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가 앞으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하루가 천추의 길이 같았다. 죽으나 사나 정한 날짜가 얼른 오기나 했으면 한 것이 필경 오고야 말았다.

열이튿날!

이날 일반 백성의 눈에 뜨이지 않는 커다란 움직임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장단읍에서의 움직임이다.

이날 장단부사 이서는 돌연 군사를 다섯 대로 나눠가지고 서울 가는 길로 향하여 행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둘째의 움직임은 창덕궁 비원에서의 큰 잔치였다. 개나리꽃을 제외하고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지마는 일기도 따스하고 꽃봉오리 현저히 붉어진 비원에서 광해군은 육품 이상의 만조 벼슬아치를 모아놓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잔치는 이귀의 딸 예순이가 김상궁을 움직이고 김상궁은 다시 임금을 움직여서 특별히 봄놀이를 겸해서 베푼 것이었다.

비원 봄놀이는 한창 어우러져 어느덧 고관대작은 물론 구종들까지 술타령에 녹아 떨어져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대관들이 질탕으로 놀고 있는 자리에서도 이흥립 대장만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늘이 반정 거사의 날인 것을 알고 있는 그라, 술을 마시면서도 흥취가 나지 않았고, 몇몇 대관들의 낯을 바라볼 때 하잘 것 없는 것이 인간이로구나 하는 감개가 가슴에 떠오를 뿐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판국이 변해서 저 희희낙락하며 놀고 있는 위인들의 머리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눈 앞에 닥쳐오는 화변을 깨닫지 못하고 술을 마시며 즐겨 노는 꼴이 가련도 하고 어이 없는 생각도 들었다.

해가 훨씬 기울어졌을 때 선전관 하나가 이대장 앞에 와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돈의문 수문장이 와서 서문 밖 모화관 관지기 송가란 위인이 중대한 고변사유가 있다고 해서 데리고 왔다 합니다.

고변?

순간, 이흥립의 낯에 불안의 빛이 떠올랐다. 이흥립은 모화관 관지기란 위인을 놀이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불러들였다.

시립한 선전관이 이대장의 영을 받아서

아뢰어라.

하고 말하기를 독촉하였다. 송가는

역모 고변이올시다. 오늘 김유, 이귀, 이괄 등 서인(西人) 일파가 장단부사 이서와 합력하여 연서역에 군병을 모아가지고 오늘밤으로 성내로 쳐들어 올 계획이올시다.

너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고?

오늘 연서역으로 군사가 모여드는 것을 소인의 눈으로 보아서 알았삽거니와, 소인의 조카 놈이 장단 관가 장수로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틀림없는 일인가? 만일 사실에 없는 무고를 한 것이 드러나면 너의 목숨이 없어질 터인데 그래도 좋으냐?

틀림없습니다.

이흥립은 이 대답을 듣고 나서 송가를 잠시 물러가 있게 하되, 일체 그런 발설을 타인에게 했다가는 목을 벤다고 위협을 해놓고, 선전관더러

그 놈 정신이 뒤집힌 미친 놈이지마는 그냥 내보냈다가는 또 무슨 소리를 함부로 떠들어 서 인심을 소요케 할는지 모르니 자네는 포청에 기별해서, 그 놈을 내 말 있기까지 옥에 가두라고 하고, 돈의문 수문장에게도 그따위 낭설을 발설했다가는 당장에 군법으로 참하겠다고 일러 두게.

하는 영을 내렸다.

이리하여 고변해서 상급이나 타먹자는 타산으로 온 송가란 위인은 포청에 갇혀버리고, 이 내용은 아무한테도 알려지지 않았다.

 

 

 

밤은 밝아오고

 

이러한 위기일발의 아슬아슬한 사실이 비원 한 모퉁이에서 연출된 같은 시각에, 동대문 밖 능양군 외가집 사랑에서는 능양군과 이귀 두 사람만이 조그만 약봉지 하나를 앞에 놓고 수군대고 있었다.

능양군은 어제 오늘 양 이틀간 비상한 감동에 도리어 마음이 설레어 노상 가슴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느낌에 잠겼다. 이, 삼일 동안 죽었다가 깨어났으면 하는 어린애 같은 생각까지 일어났다.

용용한 희망과 불안, 초조 그리고 시각으로 쳐서 이십사시간 후에는 이 나라의 지존이요, 통치자인 지위에 오르느냐, 역적의 이름 아래 능지처참을 당하느냐의 판단이 나게 되는 지금 그는 자기의 부들거리는 가슴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능양군은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기에 노력하였다. 이귀는

동지의 한 사람이라고 할는지 평교의 심의로서 대하는 것도 지금 이 시각 뿐입니다. 천지신명의 가호가 있다고 믿으니 아무 불안을 가지지 마시되 세상 일이란 필경 알 수 없는 것이온즉 이 약을 달여서 놓으시고 만일 일이 그릇되어 내일 새벽까지 아무 기별이 없을 때에는 자처하셔서 깨끗한 최후를 맞아들이셔야 합니다.

긴장한 안색으로 이귀는 이렇게 말하기 어려운 것을 했다. 이것은 물론 이귀 개인의 뜻이 아니고 여러 동지의 뜻이었다.

지리한 봄날 하루도 어느덧 저물었다. 대자연의 하루는 사회의 모든 움직임을 한 아름 껴안고 어둠의 장막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이었다.

연서역의 밤은 시각이 늦어갈수록 달빛이 밝아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행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귀와 이서가 진중에 영을 내려서 사세 여하를 막론하고 일체 불빛을 엄금하였다.

화톳불 한 자리 피울 수 없었고 횃불은 더욱 안 되었다.

이귀, 구굉, 장신, 심기원, 원두표 등은 장단부사 이서가 가져온 장막을 치고 그 속에 모여서 시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있는 중에도 문제는 김유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 점이다. 경위로 말하면 이날의 총지휘는 김유가 맡아 하기로 되어 있은즉 적어도 이귀와 동행하여 군사를 지휘 단속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에게서는 아무 기별도 없다.

이귀의 가슴은 답답했다. 단순히 김유가 불참하고 있다는 그 문제 뿐이 아니라, 누가 고변을 하여 붙잡히지나 아니했나 그렇게 상상하며 별별 잡념까지 머리에 다 떠 오른다.

영감, 무슨 심려가 계셔서 안색이 좋지 못하슈?

이괄이 옆에서 묻는다.

대장된 사람이 지각을 하니 그것두 불안하거니와 무슨 사고가 생긴 것 같아서 더욱 아니 날 생각이 다 나누구료.

그런 염려는 마시우. 나두 소문을 들은바도 있고, 필유곡절(必有曲折)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소마는 뭐 근심하실 게 있으리까. 이제는 성중 군병이 모조리 쏟아져 나온다 해도 걱정 될게 없습니다. 당당히 싸워보는 것도 재미있지요. 김찬판은 영영 불참인가 싶소.

그럴 리는 없지마는…

하면서도 이귀 역시 굳세게 이 말을 부인하지 못했다.

염려 마시우. 허장성세가 아니라 이놈의 팔뚝이 있소.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장사 원두표가 이렇게 호언을 했다.

이서는 아까부터 수백명 군졸을 단속하기에 넓은 벌판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귀는 유심히 그 편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뜩 무엇을 생각하고

여보, 이병사 영감!

하고 이괄을 불렀다.

왜 그러시우.

지금 시간이 어찌 되었소?

자정이 멀지 않은 것 같소.

큰일났군.

하고 이귀는 초조한 낯으로 웅기중기 모여든 동지들의 낯을 한동안 둘러보더니

북병사 이괄 영감에게 대장 소임을 맡아보시도록 합시다.

는 발언을 하였다.

여럿은 이구동성으로

동병은 신속을 요하는 것이니 빨리 그렇게 합시다.

하고 찬동했다. 이괄은

그럼 불초가 여러분의 합의를 보았은즉 외람되나마 대장의 소임을 맡겠소.

하는 쾌락을 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여럿은 각기 맡은바 부서로 헤어지고 이귀와 이괄, 그리고 몇 동지들은 미리 만들어 놓은 단 앞으로 걸어갔다.

잠간 흐리었던 하늘이 말끔히 벗어지고 보름이 가까운 맑은 달빛이 넓은 벌판의 구석구석을 비추어 거기에 정연히 편대를 짜고 늘어선 군졸들 머리에 용용한 기분을 일으켜 주었다.

이괄은 단에 올랐다. 단에 올라서 막 군령을 내리려 할 즈음 저편 군사의 일부분이 별안간 와글거리는가 하더니 말에서 내려 이리로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김유였다. 오늘 대장의 소임을 맡았던 김유가 이제 도착한 것이다.

이귀 이하 여러 동지는 그의 내참을 반가와하기보다 차라리 난처한 지경에서 당황하였다.

이괄은 김유를 노려보며

대장이 이제서야 오니 일이 어찌 되겠소. 지금은 내가 대장이니 당신을 참해야 하겠소.

하고 장검을 빼어 들었다. 이괄이 빼어든 장검은 달빛에 비치어 서릿발처럼 번득였다. 이 때 이귀가 내다르며 이괄의 손을 잡고 빌었다.

북병사 영감, 좀 참으시오. 지금 김유의 목을 베이는 것은 군률로 보아서 당연한지 모르겠소마는 결과는 동지 하나 죽였다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 거룩한 거의(擧義)의 첫길에 동지를 죽이는 게 무엇이 시원하겠소. 만일 마음이 안 풀리시면 이놈의 목부터 베어 주시오.

하고 이괄을 말리었다. 이괄도 기실 죽이려고 하였던 것은 아니므로 손에 빼어든 장검을 자루에 꽂아 박으며

그러면 이제 대장이 왔으니 나는 대장을 사양하오.

하며 대장을 김유에게 내주었다.

김유가 늦게 온 이유는 이러하였다. 김유의 집 별배 만길이란 위인은 본래 금부 나졸출신으로 각 대가집 하배들간에 지면이 많고 소문을 염탐해 들이는데 능난했다.

이날 낮, 만길이는 이리저리 연줄을 얻어가지고 비원 봄놀이에 들어가서 궁노와 사령 틈에 끼어 구경도 하고 주식도 배부르게 얻어먹곤 하였다. 여기서 귀밝고 눈치 빠른 만길이는 심상치 않은 기밀을 엿들었다.

모화관 관지기가 고변하러 들어왔다는 중대한 기밀을 들었고, 그 고변을 선전관 하나가 우선 이흥립 대장께 전했다는 것, 이대장은 친히 그 고변자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고변 내용을 다 들은 후에 무슨 영인지를 선전관에게 내려서 그 고변자를 우선 포청에 가두어 놓게 했다는 것 — 이것을 듣게 된 만길이는 그 길로 비원에서 뛰어나와 한달음에 상전댁으로 돌아와 알렸다.

만길의 보고를 들은 김유는 완전히 불안과 공포에 어지러워졌던 것이다. 일은 이제 태반 글렀구나 하는 불안이다. 반정모의가 성공되면 모르거니와 만일에 실패한다면 주인이 역적으로 몰리는데 가족인들 그냥 내버려 둘 리 없다는 생각으로 우선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생각을 했다. 그러노라니 자연 연서역으로 나가지 못하고 중요한 가산을 정리하느라고 늦었던 것이다.

자시(子時)는 벌써 넘은지 오래고 축시(丑時)가 다 된 한밤중에 전 거의군(擧義軍)은 저마다 등에 의(義)자를 하나씩 크게 써 붙이고 숙연히 행군하기를 시작했다.

창의문(彰義門)에 당도하기에는 한 시간은 더 걸릴 것인즉, 창의문을 돌파하고 성내로 쳐들어 가는 것은 일러도 첫새벽이라고 생각되었다.

창의문에 당도하여 원두표, 이기축(李起築) 힘센 장사들이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도끼로 대문을 부서져라 하고 두드리며

문 빨리 열어라.

하고 외치자 이때 당번이 되어 지키고 있던 문지기 하나가 급히 문루에 올라서 내려다 본즉 희미한 새벽 달빛에 보이는 광경은 어머어마하였다.

검은 복색의 군병이 수천만인가도 싶었다. 이미 풍설에 들은바 있어 오늘이 있을 것을 알고 있던 문지기는 부들부들 떨며

문을 열테니 문 부수는 손을 멈추시오.

하고 외쳤다.

이때 쾅! 쾅! 문부수는 소리에 잠이 깨어서 내다른 수문장과 다른 병졸들이 뛰어나왔다.

수문장은

이놈아, 문을 열지 말아라!

하고 호통을 치는데, 그 호통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윙! 하는 활시위 소리와 함께 수문장의 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느새 벌써 성벽을 타고 넘은 군졸이 호통치는 수문장을 습격한 것이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거의(擧義) 군병은 물결치듯 문안으로 쏟아져 들었다. 앞에 선 원두표는 도끼를 들어 방금 일어선 수문장의 머리를 쳐서 죽였다. 모두가 수분에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연출되었다.

이괄은 여기서 무질서하게 쏟아져 들어온 군병을 다시 호령하여 정제하고 행진을 시작했다.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행군은 군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 뿐 숙연히 나아갔다.

이때 정원에는 이미 급변을 고한 자가 있어 이흥립 대장과 중군 이곽(李廓)은 영의정 박승종의 명령으로써 각기 요로를 지키게 되었다.

이흥립은 창덕궁 앞에 결진하였고 이곽은 파자교(把子橋) 일대에 진을 티고 있었다.

이흥립은 말에 높이 앉아 전 군사에게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일체 내가 말머리 돌리는 대로 행동하라. 만일 어기는 자 있으면 군법으로 처벌한다.

하는 영이다.

의거군은 선봉에 원두표, 이기축, 김자점, 최명길 등이 서서 행진을 하고 조금 떨어져서 이괄과 그의 부하 군졸 그리고 맨 뒤에 이귀와 김유가 있었다.

관상감재에 이르러서부터는 아우성을 치며 금호문(金虎門)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 고함소리를 들은 이흥립은 채찍을 높이 들고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리니 거기 결진하였던 군사는 일제히 파자교를 향해 내리몰렸다.

중군 이곽은 멀리 고함소리를 듣게 되자 이흥립의 군졸이 이리로 몰려 내려오는 것을 보고 말을 달려 이흥립 대장에게로 가니 이대장은

사세 불리하니 빨리 군사를 아래 도감으로 옮기게.

하는 영을 내렸다.

반정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금호문 앞에 다다르니 수문장 박효립(朴孝立)이 문을 열었다. 역시 수문장과도 내응이 있었던 까닭이다.

반군은 궐내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때 광해군은 작취가 미성하여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궁 밖 고함소리에 놀란 김상궁이 밖에 나갔다가 달려 들어오며

상감마마, 큰일 났습니다. 반군이 벌써 금호문에 쳐들어 왔습니다.

반군이?

하고 광해는 취중에도 정신이 번쩍 들어서

도감 군졸들은 뭘한다는 건가?

대장 이흥립이 도망을 했답니다.

뭐?

광해군은 깜짝 놀랐다.

그러는 중에도 고함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궁중 대소 관속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는 소요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궁중에 벌써 화광이 충천하였다.

김상궁은 이 위급한 중에도 자가의 친가로 보낼 보물 상자를 꾸리어 궁녀 하나에게 들려서 북문으로 달려보내고 자기는 급급히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상궁이 아니라 여느 나인 부스러기에 불과한 차림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번 반군의 중심 인물이 이귀라 하니 이귀의 생명은 수차에 걸쳐 자기의 입으로 살려 주었고 수양딸인 예순이가 있은즉 설마하니 나의 목숨까지야 죽이랴 하는 어리석은 추측을 하였다.

편전 앞 누마루에서

종묘에 불이 붙었나 보아라.

하고 외치는 광해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느냐 사느냐의 이 자리에서 종묘는 다 무엇이냐 하는 생각에 김상궁은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문으로 내다라 도망쳤다.

광해군은 생사가 위급한 지금에도 반정의 중심 인물이 왕자 종실이라면 종묘에 불을 지를 리는 없다고 추측한 때문에 종묘에 불이 붙느냐고 연방 부르짖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답이 귀에 들어오기 전에 황황히 어전으로 달려온 영의정 박승종은 혼백이 몸에 붙지 않은 듯 왕에게 국궁할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상감마마…

하고 부르짖었다.

광해군에게는 그 소리쯤으로도 반가왔다. 내시의 대부분이 도망하고 선전관 무감 등속이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때 영의정 박승종이 나타난 것은 고맙고 반가왔다.

나의 대에 와서 나라는 망했구료. 어이 하면 좋겠소.

상감 모든 것이 천운입니다. 빨리 옥체를 피하십시오.

경의 어이 할려오?

늙은 신이야 이제 죽사온들 한이 있사오리까.

하고 박승종은 눈물이 비오듯 내리는 것도 모르는 듯 서 있었다. 신하들은 하나도 광해군의 신변에 시립한 사람이 없었고, 단지 남아 있는 것은 변숙의(邊叔儀)와 내시 두엇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거의 허탈상태에 빠져 있는 광해군을 모시고 간신히 북문에 이르렀다.

화광은 궐내 이곳 저곳에서 충천해 있고, 금호문 내외에 고함소리 연하여 들려온다. 당초에 능양군은 궐내에 불을 놓지 말라고 영을 내리었지만 의거 군사의 대부분이 대궐에 불을 지름으로써 자기 가족들에게 의거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북문에 이른 광해군은 몸을 부들부들 떨렸다. 북문에 당도하기는 하였으나 문은 굳게 잠겨 있어서 나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광해군은 내시의 어깨에 올라 무등을 타고 간신히 성벽을 넘었다.

한편 능양은 궐내에 들어와서 인정전에 우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곧 중신들에게 예궐하라는 초패를 놓았다.

이때 이 초패를 받고 맨 먼저 예궐한 것이 병조판서 권진(權縉)이었고 그 뒤를 이어 대소판원이 황황히 궁중에 모여들었다.

반정 북새가 아직 끝나기 전이라 곁에 이귀, 김유, 이괄등이 시립하고 있고 모여든 전조(前朝) 신하들은 쳬례를 차릴 여우가 없어 인정전 대뜰 아래에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형편이었다.

이때 맨 먼저 예궐한 권판서가 때마침 대뜰 앞에 나선 능양군 앞에 나아가 국궁하고 넓죽이 절을 했다. 이 광경을 바로본 대소 관원은 거의 모두가 그 뒤를 따라서 절을 했다.

능양군은 이귀에게 분부하여 전조 대소 관원을 일단 정원과 집으로 물러가 있게 하고 의거에 참가한 군관 소임 이상을 불러들이게 했다.

할 일이 태산 같았다.

반정은 성공했지만 첫째 광해군을 잡아들여야 할 것이고,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仁穆大妃)께 문안 인사를 보내어 궁중으로 모셔들일 것, 전조의 관원을 전반적으로 해직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여야 할 것 등 등의 일이 어느 것 하나 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먼저 영을 내려 내시와 여관(女官) 등을 안정 시키고, 이흥립과 상의하여 의거 군졸을 각 영(營)에 임시 수용케 하였으며 일변 광해군의 행방을 상을 걸고 수색케 했다.

사방으로 사람을 내놓아 광해군의 행방을 수색케 한 결과 광해군이 내서 두엇과 그릭고 변숙의 등과 더불어 북문을 넘었다는 것만을 알게 되었을 뿐 북문을 넘은후의 행방이 모연하였다.

어느덧 날은 밝아 해가 높다랗게 떠올랐다.

능양군은 차츰 역정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 광해의 행방 하나 알아들이지 못한단 말이요?

참다 못해 터져나오는 능양군의 역정소리가 시립한 여럿을 황송케 하고 민망케 했다.

이때에 대전 별감 하나가 어떤 중노인을 데리고 들어와서

전 상감의 소식을 아뢰고자 전의(典醫) 정남수(鄭楠壽) 소명도 없이 들어와 뵙고자 하오.

이 말에 능양군은 반기며 놀라서

그래 그대가 전왕의 행방을 아는가?

하고 전각 앞에 엎드린 노인에게 물었다.

행방이 아니오라 지금 숨어 계신 집을 이 눈으로 보고 왔습니다.

어떻게 해서 보았더란 말이요?

그전 상감이 작취 미성으로 정신이 혼미하신데다가 오늘 이 대궐에서 몸을 피하시느라고 기절하시다시피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변숙의가 평소 소인의 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보해 왔기에 그 들어 계신 집에 소인이 가서 약을 지어올렸던 것입니다.

그대에 대한 상전(賞典)은 차차 내리겠거니와 지금 곧 무감을 데리고 그 집으로 인도하도록 하오.

하고는 능양군은 곁에 있는 이귀에게 고개를 돌려 눈짓을 했다.

이리하여 정남수란 전의에게 인도를 받아 들이닥친 무관과 병졸들에게 광해군은 붙잡혀서 창덕궁으로 압송되어 왔다.

능양군은 비로소 얼굴의 주름살을 폈다.

능양군은 이귀와 의논하고 광해군을 우선 궁중 일실에 감금하여 놓고 승지 홍봉서(洪鳳瑞)를 불러서 서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 뵙게 하였다.

인목대비는 서궁 하배들의 보고로서 반정 의거의 큰 소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듣고 몹시 궁금히 여기던 차다. 창덕궁에서 승지 홍봉서가 능양군의 사신으로 문안차 대령했다는 말을 듣고 곧 그를 불러들이었다.

홍봉서는 대청 끝에 굴복하고는 곧 능양군의 전갈을 주달하기 시작했다.

능양군이 이귀, 김유, 이괄 등 동지와 더불어 반정 의거를 감행하와 오늘 새벽에 창덕궁을 점령하옵고 간신들을 방금 숙청 중에 있사옵니다. 능양군은 마땅히 달려와서 대비마마께 문안을 드려야 할 것이오나 반정 벽두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잠시도 자리를 떠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우선 소신을 보내서 의거의 전말을 사뢰옵고 겸하여 창덕궁의 뒷수습이 대충 정리되는 대로 대비마마를 몸소 모시러 오겠다는 말씀이옵니다.

홍승지가 이렇게 말을 마치자 대비는

상감은 지금 어이 되었누?

궁중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대비의 얼굴에는 비로소 기쁨의 표정이 뗘올랐다.

그럼 옥새는?

옥새는 신왕께서 지니고 계십니다.

신왕이라니, 새임금이 뉘란 말이냐?

홍봉서는 무심히

능양군 말씀이옵니다.

하고 대답했다.

능양군이 누구의 허락으로 보위(寶位)에 올랐단 말이냐?

갑자기 대비의 노기 띠운 음성이 홍승지의 가슴을 찔렀다.

이제 보니 능양은 임금의 자리가 탐나서 반정을 일으킨 것이로구나. 벌써부터 이 늙은 것을 무시하는 꼴을 보니 장래가 무섭다. 냉큼 돌아가서 능양군더러 제멋대로 올라 앉은 자리 오래 잘 누리라고 전갈하라.

하고는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며 열어 놓았던 미닫이를 손수 불쾌스러이 닫아버렸다.

홍승지는 어안이 벙벙했다. 말 한마디 무심코 잘못했다가 대비의 큰 노염을 사게 된 것이다. 그는 곧 창덕궁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능양군에게 보고했다.

허허 그거 큰일 났군, 대비의 말씀이 지당하시지.

하고 이귀를 다시 서궁으로 보냈다.

대비는 시녀의

이귀 노인이 문안겸 급히 아뢸 말씀이 있다고 등대했습니다.

하는 전갈에 얼굴에 화기를 띠우며

들어오라고 그래라.

하였다. 이귀는 대청 끔에 올라 굴복하였다. 대비는 이귀가 문안의 말씀도 올리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반정 의거의 자세한 경과는 홍승지에게 들었거니와, 듣건대 능양군이 보위에 올라 임금이 되었다 하니 대체 뉘의 허락으로 대통을 이었다는 거요?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능양군이 보위에 오른 듯이 생각하온 것은 홍승지의 착각이옵고 반정 뒷수습에 능양군이 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임금으로서의 전교인 양 잘못 생각한 과실이옵니다. 능양군이 아무리 분망중이온들 그러한 법도를 무시할 분이오니까?

이귀는 진정의 표정을 얼굴에 띠우고 이렇게 변명하였다.

대비는 이귀의 말에 저으기 느끼는바 있는 듯 싶었다. 대비는 부드러운 어조로

늙은 그대야 설마 거짓말을 하겠소. 그대의 말과 같다면야 낸들 폭군을 내몰고 이 나라 사직을 바로 잡는 이 마당에 무슨 트집을 하겠소. 원체 체례로 말하면 광해를 잡아들이어 대행대왕의 영위 앞에 꿇리어 수죄하고 몰아낸 후에 내 손으로 옥새를 능양에게 전하는 것이 법도가 아니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생각하옵건대, 미구에 능양군께서 문후차로 등대하올 줄 아옵니다.

이귀는 이렇게 대답하며 또 한 번 굴복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있은 능양군과 대비의 대면은 극적이었다.

능양군은 대비께 뵈이고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수년 유폐의 고생을 하신 할마마마를 이제야 마음놓고 뵙게 되오니 기쁜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이 첫마디의 말이 대비의 가슴을 찔렀다.

능양군을 보면 좀 따져보리라 하던 감정이 스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이 몸이 너의 애쓴 덕으로 다시 기를 펴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모두가 천운이시지 무슨 이놈의 힘이오리까.

나는 이귀의 이야기로서 너의 사정은 알았다마는 일시 네가 보위에 올랐단 소문을 듣고 괘씸한 소행이라고 몹시 한심하게 생각했더니라.

천만 뜻밖의 일이옵니다. 대통을 이을 인물이야 할마마마께서 하시기에 있느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 어이 그런 방자한 생각을 먹사오리까.

“음

하고 대비는 머리를 크게 끄덕이었다.

그럼 이 나라에 한때도 임금이 없으서야 될 수 없으니 즉 조당에 즉위 거행의 준비를 하고, 옥새를 가지고 와서 내게 전하라.

예,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능양군은 곧 이귀를 시키어 옥새를 받들어 대비께 올리라 했다. 그러나 이귀는 옥새를안고 대비 앞에 나아와

이러한 판국에 대비마마께옵서 옥새를 드리라 하심은 전혀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대비도 그 뜻을 알아차리고 급히 대답했다.

내가 옥새를 가져 무엇하겠소. 나에게는 이미 친자식도 없소. 옥새를 드리라 함은 이 나라의 국체를 중하게 하고자 함이요.

그러시다면 정전(正殿)에 납시어 대신을 불러들이어 정식으로 거행함이 옳을까 하나이다.

이렇게 국보가 지름 길로 거쳐 드리어짐은 옳지 아니한가 하나이다.

하고 이귀는 대답하였다. 대비는 이 말을 듣고 곧 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대신들을 불러들이었다.

능양군은 김자점으로 하여금 모든 문을 지켜 다른 왕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박홍구(朴弘耉)를 시켜 공손히 옥새를 받들어 대비께 드리었다.

대비는 옥새를 받아 감격에 넘치는 음성으로

광해군은 이 세상에 용납지 못할 죄인이니 속히 처치할 것이요. 내 이미 십 년을 유폐되었다가 어제 저녁 꿈에 선왕을 다시 뵈왔더니 오늘의 이 경사로운 일이 있구나.

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부복하고 있는 능양군을 당(堂)으로 오르라 하여 친히 옥새를 능양군에게 전하며

위로 선왕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 일국이 화평하도록 하라.

하며 전교를 내렸다.                                                                                 

능양군은 머리를 굽혀 세 번 절하고 옥새를 공손히 받았다.

이조 십오대의 임금 인조(仁祖)가 바로 이 능양군이며 이때 그의 나이는 이십구세였다.

 

 

 

受難의 王朝

외로운 英雄

 

인조(仁祖=西紀 1,623-1,649)는 먼저 왕명으로서 광해군을 강화에 위리안치(圍籬安置) 하라는 처분을 내리고 호위의 법례를 갖추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창덕궁으로 모시라는 하교를 내리었다. 그리고 첫 공사로 새로운 조정을 조직하였다.

영의정에는 이원익(李元翼), 이조판서에는 신흠(申欽), 병조판서에는 김유(金 ), 예조판서에는 이정구(李廷龜), 형조판서에는 서성(徐 ), 공조판서에는 이흥립, 대사헌에는 오윤겸(吳允謙), 호위대장에는 이귀(李貴) 등으로 각각 발령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영창대군, 임해군, 능창군, 연흥부원군 김제남 등의 관작을 다시 주게 하고 인목대비의 어머니인 노씨(盧氏)는 제주도로부터 영환(迎還)하도록 영을 내리고, 그 동안 부부인 노씨를 학대한 제주목사 양호는 약사발을 안기어 사사(賜死)하였다.

한편 폐모의(廢母議)를 주장하던 이이첨, 정인홍, 윤인, 정조 등 십육명을 거리에서 차례차례 목을 베었다.

이때부터 반정 의사(反正義士)들이 모여 있는 빈청 내외에서는 논공행상의 발표를 앞두고 서로 의견들이 분부하였다. 누구는 일등이 마땅하고 누구는 이등에 합당하다는 등, 구체적인 토론이 아니고 막연히 각자의 공적만을 토의하여 하나의 여론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장 문제되는 인물은 김유와 이괄 두 사람이었다.

김유의 공적이 크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거사 당일 연서역에 늦게 도착한 그 실책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문제삼는 것은 이괄이었다. 이괄은 당일 김유의 모호한 행동은 그 동안의 그의 공적을 상쇄하고도 오히려 죄목이 남는다는 것이고 더구나 김유가 자기 집 권솔을 사방으로 헤쳐 숨어 있게 한 사실은 그의 심경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괄의 이러한 강경한 주장에 대하여 김유는 김유대로 이괄은 벌써 군문에 목을 베어 걸어야 할 것을 김유 자신이 반정거사란 대의에 비추어 참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괄은 연서역에 모이는 정각보다 훨씬 빠르게 이르러서 이귀를 농락하여 군졸에게 호령한 것은 그가 우정 김유보다 일찍이 가서 미리 대장의 지위를 가로채보자는 비열한 행동이었다고 공격하는 것이다.

세상에 정각보다 늦게 이르른 죄목은 있거니와 정각보다 빠르게 내참한 죄목도 있느냐고 이괄은 호통을 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누가 옳고 그르든간에 승리는 김유에게로 돌아갈 것인 뻔했다. 왜냐하면 임금은 김유를 무조건하고 믿고 대소사 일체를 그의 처단에 맡기고 있는 까닭이다.

이귀는 이괄의 행상(行賞)에 관해서 사전에 김유에게 주의를 하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번 거사에는 이괄의 힘이 큰 바 있고, 앞으로도 모든 일에 과감한 인물이니 깊이 생각하오.

하였다. 그러나 김유는

모든 일에 과감하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성급하고 교양 없는 인물을 큰 자리에 올렸다가는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소.

그럼 낙점(落點)은?

이등쯤 하려고 하오?

그게 말이 되오.

그럼 일등으로 하란 말이요?

그래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일등은 과합니다.

김유는 단연 이괄을 이등공신으로 내려 밀 결심을 보였다.

이런 논공행상이란 공평하게 해야지 만일에 지나치게 불공평하다면 큰 화근이 되는 법입니다.

화근이 무슨 화근이요. 공훈이 이등이라구 해서 상당한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게 아닌 즉 상관 없다고 생각하오.

김유는 어디까지나 대수롭지 않게 해석하고 자기의 심산대로 내뻗칠 눈치였다.

다음날 행상이 발표되었다.

일등 공신이 열사람, 이등 공신이 열여섯 사람, 삼등이 스물여섯 사람이다.

일 등에 든 사람의 이름은 이러했다.

김유, 이귀, 김자점, 심기원, 이서, 신경진, 최명길, 이흥립, 구굉, 심명길. 그리고 이 등에는 이괄을 필두로 원두표, 장유, 장신 등이며, 삼등에는 이기축, 승지 홍봉서 같은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장유, 장신 같은 사람, 그리고 이귀의 아들 이시백, 김유의 아들 김경증 등이 이등으로 올라 붙은 것은 오히려 후한 처분이라고 할 것이지마는 그들과 선을 같이 하여 이괄을 이등으로 몰아넣은 것은 확실히 불공평하고 가혹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 행장이 발표되자 이괄은 물론 동지들 사이에 불평이 비등하였다. 더욱 조정의 조직에 대해 그러하였다.

영의정 이원익은 누구나 반대 못할 원로이니 당연하려니와 김유 자신은 병조판서로 앉고, 이귀는 호위대장이란 자리로 돌렸다. 호위대장이니 상감 신변을 호위하는 측근 중신이라고 하겠지마는 뚜렷한 정권을 가진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참는다 하고, 그 이외의 각조 장관의 자리는 모두가 반정 동지가 아니었다. 말인즉 반정에 이면 협조를 하였다 하니마는 어찌하여 정면으로 활동한 사람을 제외하고 이면 협조자를 등용했는가.

김유의 농간이 너무나 심했다. 소위 이면 협조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김유를 지원하는 무리들로 김유는 타일의 비약을 꾀한 것이었다.

이괄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이라는 벼슬 한 자리를 얻었다. 북병사와 한성좌윤이 그 얼마나 승하가 있는 자리냐.

이로부터 이괄은 두문불출, 나날을 집에 틀어박혀서 술로 날이 새고 술로 날이 저무는 장야의 술타령을 했다.

이귀는 그동안 정무에 분주한 날을 보내는 중에도 아들 시백으로 하여금 이괄의 동정을살피게 하여 그 정보를 받고 한편으로는 김유에게 권하여 그를 좀 더 우대할 도리를 찾게 하였지만, 김유는 도무지 그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이귀는 생각했다. 김유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이괄의 감정이 심각하여 언제고 한 번 일을 일으키고야 만다 하면 능양군이 반정의 의로운 일을 완성한 보람없이 나라가 어지러워 질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지금 북쪽의 오랑캐가 그 세력이 날로 강성해져서 멀지 아니하여 명나라를 침범코자 그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이때가 아닌가.

그러므로 이귀는 먼저 이괄을 만나서 그의 심중을 헤아려 보고 겸하여 그의 노여움을 풀어 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귀는 일부러 밤을 타서 이괄을 찾았다. 만만한 불평에 싸여 있는 이괄도 이귀 노인에게만은 호의를 가지고 있는 터이다.

처음 두 사람 사이에는 시국 이야기가 오고 갔다. 시국 이야기가 얼마쯤 끝날 무렵해서 이괄이

그런데 영감.

…?

영감이 이 야심에 오신 것이 시국 이야기를 듣고자 오신 것이 아니고 나의 근황을 아시자고 오신 듯한데.

사실 그렇소.

하고 이귀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근황은 알아서 무얼 하시려오?

반정초에 형제 싸움이 우려돼서 그러오.

형제가 무슨 형제오니까. 나 하나의 존재가 뭐 꺼릴 게 됩니까?

바람 좀 쏘여보는 게 어떻소.

외방으로 나가라고요?

그렇지.

그것도 좋지요. 어차피 서울에 앉아 있어서는 갑갑도 하구, 기실 눈꼴이 틀려서 견디기 어렵소이다.

무엇이 그렇게 눈꼴이 틀리는 거요?

반정이 성공되면 썩은 물이 모두 흘러 내려가고 새물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지금 같아서는 임금 한분 갈아들이고 서인(西人) 일파가 대북(大北) 대신 다시 머리를 들었다 뿐 무엇 하나 청신한 정책이 없지 않소.

차차 있을 테지.

첫 출발이 틀렸소.

이괄은 언하에 이렇게 부정하였다. 이귀는 잠자코 돌아갔다.

이러던 중 북방 오랑케의 움직임이 수상해지자, 나라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하고 이괄을 부원수로 정하여 북쪽을 지키게 하였다. 이것은 이미 예기하고 있었던 일이라 이괄은 다만 고소를 지으며 받았을 뿐이다.

이괄은 발령이 내리자 그 이튿날로 수병 수십명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났다. 임금은 전례 없이 미행으로 모화관까지 행차하여 이괄을 전송하며 보검 한 자루를 내주었다.

 

 

 

運命의 꽹과리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세상은 일변하여 대북(大北)이 전멸하고 서인(西人)들이 오래간 만에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 남인(南人) 또한 이원익(李元翼)의 재등장으로 서인 다음으로 세력을 펴게 되었다.

그러나 반정공신의 논공행상이 불공평한 것으로 인하여 서인들 내부에 큰 모순이 드러나게 되어 세상은 또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하고 연달아서 역옥 사건이 일어났다.

사람 몇만 모이면 왕자를 추대한다고 떠들어댔다. 이러한 역옥 사건이 있을 때마다 늘 추대 인물로 지목되는 왕자는 인성군(仁城君)과 흥안군(興安君)이었다.

흥안군을 내세우려던 황현(黃玹)의 역옥 사건과 인성군을 추대한 윤인발(尹仁發) 등의 음모가 두드러진 예이다. 흉흉한 서울의 민심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왕손이 많이 있는데,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원군의 아들이 당한 말인가. 아들을 젖혀놓고 손자가 대통을 이었으니 나라가 바로 될 리 없지. 다시 뒤집어 엎어야 한다.

이런 소문이 떠돌았다. 반정공신들은 이런 소문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가 그 출처를 캐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이것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고자 하는 무리가 나타났다.

전에 윤인발하고 서로 맥을 통해서 일해 오던 문회(文晦), 이우(李佑) 등이

 < 기자헌(寄自獻), 현즙(玄揖), 이괄(李适) 등이 흥안군을 내세우려고 역모하고 있소. >

하는 글을 올렸다.

임금은 공신들을 불러 의논했다. 이귀와 최명길은

아무래도 이괄이 수상합니다. 그가 영변 병영(寧邊兵營)에 내려간 후로 군졸을 조련하고 병기를 보수(補修)하는 품이 심상치 않습니다. 필시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관련자를 잡아 문초하십시오.

하며 즉시 국청을 두라고 했다. 이로써 이괄의 아들 이전(李 )과 기자헌 등이 잡히고, 이괄에게는 체포령이 내렸다.

한편 이괄은 아들이 잡혔다는 기별을 듣고 내 자식이 아직 미거한데 어찌 역모를 꾀했으리요. 이는 필시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일파가 모함하여 그리된 것이다. 나도 대장부다. 어찌 죄없이 소인의 참소로 부자가 한 자리에서 국청에 무릎을 꿇리오.

이렇게 분개하다가도 다음에는 나의 양심에 죄지은 일 없고, 아무리 불공평한 조정인들 그래도 사람마다 김유 같은 자만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병력을 가진 나를 멀리 두고 내 아들을 먼저 잡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확실한 통고를 받지 않고 행동을 취하는 것은 이른바 소위 경고망동으로 오히려 김유 같은 자에게 구실을 주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였다. 그러던 것이 며칠이 안 가서 금부도사(禁府都事)와 선전관 일행이 경내에 들어섰다는 정보가 왔다.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과 기익헌(奇益獻) 등은

별 수 없습니다. 이쪽에서 먼저 도사의 목을 잘라 버립시다.

이괄도 그 말에 개죽음은 할 수 없다 하면서 금부도사와 선전관 일행을 포박하여, 서울 소식과 조정의 공론을 상세히 심문한 후에 그들을 한칼로 베어버렸다. 막하에 있는 군사들은 일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들 벌벌 떨고 있었다.

이괄은 피묻은 칼을 높이 치켜들고서

여러 장병들이여, 이제 싸움은 시작되었다. 조정에는 지금 간사한 무리들이 사람을 모해하고 충직한 신하를 죽이고 있다. 우리는 불의(不義)의 칼 아래 죽느니보다 나가서 먼저 그자들을 없애야 한다.

옳소.

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울려 퍼졌다.

다음날을 기해 서울로 진격할 때 그 부근에 있는 군사들도 모였다. 제일 먼저 구성부사(龜城府使) 한명련(韓明璉)이 가담했다. 반란군의 총수는 일만이천명이나 되고 그밖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해로가 막혀서 미처 돌아가지 못한 왜병 삼백명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총(鳥銃)을 갖고 있어 실로 일당 백의 강병들이었다.

도원수 장만은 이 급보를 서울로 기별하는 한편 병력을 거느리고 이괄을 막으려 하였으나 오랫동안 조련을 받은 이괄의 군대를 당할 도리는 없었다. 여러 고을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사나운 회오리바람처럼 여러 고을을 함락한 이괄의 군대는 중군대장 남이흥(南以興)과 부딪치는 것을 꺼려 뒷길로 돌아서 바로 서울로 향했다. 서울은 바로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조정에서는 벌써 패색이 농후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김유는 서울이 위태로와지자 이괄에게 붙을 만한 위험분자를 모조리 잡아서 죽였다. 이괄의 친척들은 물론이요 기자헌도 끌어내어 죽였다. 서울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마지막 방어선인 임진강에서 이귀와 박효립(朴孝立) 등이 패한 뒤부터는 서울은 더욱 혼란하여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이 되었다. 벌써부터 봇짐을 싸가지고 도망하는 관리들까지생겨났다.

갑자년(甲子年) 삼월 초여드렛날, 임금은 우선 신주를 먼저 보내고 대비를 가마에 태워 내보낸 후 한강을 건너 공주(公州)로 몽진하였다.

임금이 떠난지 이틀 뒤에는 이괄의 군대가 서울에 들어왔다.

이괄은 선조(宣祖)의 열째 아들 흥안군을 모시고 개선장군처럼 나타났다. 길가에는 출영 나 온 시민들로 가득 찼다. 누구의 입에선지

새 임금이 들어오신다.

한 마디 외치자 시민들도 모두 환성을 올렸다.

이괄은 그날로 흥안군을 세워 임금이라 칭하고, 명색 조정이란 것을 벌여 서인(西人)에게 내 쫓긴 대북(大北) 사람들까지 쓸 만한 사람이면 모조리 불러들여 각기 한 자리씩 맡겼다.

그리고 과거령(科擧令)까지 내려 선비들을 뽑는다 했다.

전에 이이첨의 부하였던 사람들은 이제야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살기 좋은 새 세상이 왔으니, 모두들 안심하고 일하오.

하고 사람들을 충동이며 돌아다녔다. 이제는 내 세상이노라고 임금이다, 대신이다, 하고 서둘던 이괄의 귀에 정충신(鄭忠信)이 관군을 거느리고 남하한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은 흥안군의 새 나라가 생긴지 불과 며칠이 안 되어서였다.

이괄은 몹시 당황하여

도원수 장만이야 대수롭지 않은 인물이지만 정충신은 만만한 적수가 아니다.

하고 황황히 군사를 모으고, 군기를 정비하는데 한 장교가 달려와 정충신의 군대가 이미 서대문 밖 안재(鞍峴)에 웅거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정충신은 전라도 광주 태생으로 임진왜란 때 열세살의 어린 나이로 광주목사 권율(權慄) 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육로 수천리 의주 행재소의 선조에게 갖다 바친 뒤 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선조의 명으로 이항복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선조가 서거하고 광해가 왕위에 오르자, 고결한 그의 성품이 간사한 신하들로 가득 찬 조정에 연합되지 않아 초야에 묻혀 있다가 인조반정 후 비로소 안주(安州) 방어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소식을 듣자 숙천부사(肅川府使) 정문익(鄭文翼)에게 그의 맡은 고을을 부탁하고 단신 장만의 진중으로 뛰어갔다. 장만은

이 난리 중에 어찌 맡은 고을을 함부로 떠났소.

하고 정충신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이괄과 정의(情義)가 형제간 같아서 그가 민란을 일으킨 오늘 안주에 그냥 있다가는 의심을 받기가 쉽습니다. 장군께서는 이 사람에게 군사를 맡겨 이괄을 치게 해주십시오.

이에 장만은 정충신에게 여러 모로 전략 방법을 묻고 그의 전략이 비범함에 감복하여 그 에게 부원수란 직책을 맡기고 군사 이천명을 주어 중군대장 남이흥과 함께 적을 무찌르게했던 것이다.

이괄은 정충신이 웅거한 안채를 바라보았다. 과연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나 그 수효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저편 군사는 얼마 되지 않으니, 일제히 공격하여 빼앗아버리자.

그의 명령 아래 이괄의 군사는 일제히 안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산 위에는 정충신의 관군이요, 산 아래는 이괄의 군대이다. 마침 동풍이 불어 이괄의 군은 크게 유리하여 총탄과 화살을 퍼부으며 산정을 향해 육박했다. 산 위에서도 지지않고 모든 병기를 동원하여 대항해 왔다. 싸움이 점차 치열해 가던 중 풍세는 서북풍으로 변했다. 이제는 위에서부터 공격하기가 좋았다. 화살과 돌과 모래가 내려와 이괄의 진을 뒤덮었다. 군사들은 눈을 뜨지 못해 크게 동요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정충신의 군은 돌격으로 옮겼다.

이괄의 군대는 그래도 얼맛동안은 잘 싸워 물러서지 않았는데 별안간 뒤에서 징(錚) 소리가 일어나더니 [후퇴하라!] 소리가 산천이 진동하도록 울려왔다. 이괄의 군대는 멋도 모르고 후퇴를 개시했다. 본래 군대는 북소리에 진군하고 징소리에 퇴각하는 것이었으므로 정충신은 계교를 써서 남이흥으로 하여금 적진 후방으로 가서 징을 치며, 퇴각을 하라고 외치게 한 것이었다. 이괄의 군은 여기서 산산히 패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장만(張晩)은 볼만이요, 이괄(李适)은 꽹과리 하고 비웃었다. 이것은 그때 장만은 파주(坡州)에 머물러서 보고 있기만 하였고 이괄은 꽹과리로 인해 크게 패하여 결국은 목숨까지 잃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정충신에게 산산히 분쇄된 이괄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여 성중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벌써 백성들의 태도는 표변해 있었다.

역적 이괄이 패했다. 저놈 쫓아라.

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들이지 않았다. 이괄은 하는 수 없이 초라한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광주쪽으로 향해서 달아났다.

정충신의 관군은 성 안으로 들어와 그동안 이괄에게 협력한 사람들을 잡아 들이었다. 서울은 다시 공포의 거리로 변했다.

이괄의 군사들은 광주로 달아나 광주목사 임회(林檜)를 죽이고 다시 이천(利川)에 이르렀는데 이때는 이미 이괄을 쫓던 군사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단 여섯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이괄은 한명련, 기익헌, 이수백 그리고 군졸 서넛과 다시 남으로 내려가 재기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야박한 것은 인심이다. 그렇게까지 이괄을 섬겨오던 기익헌과 이수백은 비밀히 의논하기를 서로 살 도리를 강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쑥덕거렸다.

그들은 밤에 이괄과 한명련이 잠든 틈을 타서 그들 두 사람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그 머리를 군복에 싸가지고 공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임금에게 바치었다.

이로써 한동안 매우 급하던 난리가 평정되었으므로 임금은 두 수급(首級)을 검증한 다음 팔도 각 고을로 돌리고 과장(科場)을 설치하여 충청도 선비들을 뽑은 다음 동가(動駕) 소리 높이 서울로 돌아왔다.

기익헌과 이수백은 얼마 후 죄를 용서 받고 놓여나왔다. 그러나 서흥(瑞興)에서 이괄과 싸우다 죽은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이문웅(李文雄)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백주에 서울에서 이수백을 죽였다. 의리를 배반하고 자기만 혼자 살고자 하던 역적의 잔당은 결국 좋은 최후를 보지 못하고 이렇게 죽어간 것이다.

이괄의 반란 사건이 평정되자 서인(西人)들은 조금만 의심스러운 자가 있어도, 이괄의 당이라고 하여 잡아 죽였다. 흥안군도 역시 잡히어 옥중에 있었는데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이 자고로 난신(亂臣) 역적은 죽어야 한다고 하며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렸다.

그러나 흥안군이 임금 노릇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괄의 강박에 못 이겨 하였던 것이었고 또 그는 평민과도 다른 왕족인 이상 응당 인조의 재가(裁可)를 얻어 처리를 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경진은 제멋대로 목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인조는 서울로 돌아와서 그러한 처사를 듣고 크게 노하여 신경진을 며칠 동안 금부에 가두기까지 하였다. 반정공신들의 방자한 행동은 날로 심해 갔다. 서인 아닌 사람들은 한시도 기를 펴고 살 수 없었다. 사실 역적이 아니더라도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서인에 의해 희생이 되었다.

이때부터 거리에는

< 폐주 광해군을 다시 모셔와야 한다. 이번의 반정이라는 것은 서인들이 자기네 당만 생각하고 일으킨 것이다. 더구나 나라에는 왕자가 얼마든지 있는데 광해가 잘못 했으면 다른 왕자를 내세울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고 한 대를 거너 손자를 세웠으니 될 말이냐. 이것은 반정이 아니고 순전히 서인들의 농간이다. >

이러한 격문이 나붙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서인 일파에서는

이는 인성군을 내세울려고 역모하는 자들의 소행이니 당장 인성군을 없애야 하오.

하고 들고 일어났다. 이원익을 중심으로 한 남인(南人)들은 인성군을 두둔하여 서인 일파에게 대항했다. 서인측에서 특히 공신들이 인성군을 죽여야 한다고 떠들어대면 남인측에서는 죽여선 안 된다고 나섰다.

공신들 중에서 가장 온건하다는 평을 듣던 이귀마저도

인성군은 전에 폐모를 적극 주장한 자로서 대비에 대한 죄과도 있고 또 그 후 역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으례 인성군을 추대한다는 말이 나오니 응당 처벌해야 하오.

하고 주장했다. 인조는 이러한 이귀의 주장에 대하여

경마저 그런 소리를 하면 내 마음이 어찌 되는가. 인성군을 죽이라는 말은 나의 덕을 더럽힐 생각에서 하는 말이 아닌가.

하고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잠잠하던 조정은 인성군 문제를 가지고 서인 남인으로 갈라져 또 다시 당파싸움으로 흔들렸다.

그 후 계속해서 효성 땅의 선비 이인거(李仁居)의 역모사건과 또 광해군의 왕비 유씨의 조카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이 추대하려는 인물이 또한 인성군이었다. 삼사에서는 합세하여 인성군을 참하라고 부쩍 떠들어댔다. 그러나 대사간 정온(鄭蘊)은

전에 영창대군은 역적들이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고 해서 죽였는데 이번 인성군의 경우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극형에 처하라고 하니 이 아니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아니오니까. 역옥은 거의 해마다 일어나고 있는데 오늘날 인성군을 제거하면 다음날에 또 다른 인성군이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오리까. 삼사에서는 종사(宗社)를 위해 인성군을 죄 주어야 한다지만 전하는 광해군 때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아야 하오.

임금은 정온의 말을 옳은 말이라 하며 칭찬까지 하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대비로부터도 인성군을 죽여야 한다는 정음(한글) 전교가 내려왔다. 대비는 물론 서인편을 두둔해서 인성군을 죽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서인 일파에게는 이것이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서인 일파와 대비, 이렇게 양측에서 들고 일어나는데는 임금도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임금은

아무리 종사를 위한 일이라 하나 골육간에 서로 살상하게 되니 나의 마음이 아프다.

하는 비통한 말로써 승낙하였다. 이리하여 죄없는 인성군은 반정공신들의 등살에 못 이겨, 결국 원통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丁卯胡亂

 

우리 나라에서 이렇게 내란과 시비로 무비(武備)를 등한히 하고 있을 때 북쪽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後金)은 점점 그 힘이 강해졌다.

그 태조(太祖)인 누루하치는 명나라가 쇠약해 감을 틈타서 중원(中原)으로 진출할 야망을 품고 우선 후방인 우리 나라의 동향을 타진해 왔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광해조 때같이 명나라 편을 들어 우리에게 도전하면 재미없다.

하는 식의 일종 위협이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도 오랑캐들의 힘이 강대하여 거역해 내지 못할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낼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사신을 보내려 하니, 누구 한 사람 내가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평안병사로 있는 정충신이 이 어려운 소임을 맡았다. 그는 오랑캐들의 만지(蠻地)로 들어가서 형제지국(兄弟之國)의 의를 맺고, 무사히 돌아왔다. 때마침 역적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은 이괄이 패주할 때,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도망하여 한동안 구성(龜城) 땅에 숨어있다가 아무래도 불안하여 만주로 달아나, 후금국에 의지코자 했다. 거기에는 광해조 때 명나라를 도우려고 출병했다가 잡혀서 아직까지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강홍립(姜弘立), 박난영(朴蘭英) 등이 있었다.

한윤은 자기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고 강홍립, 박난영 등을 충동하였다.

최근 몇 년 동안 본국과 연락이 끊겨서 매우 궁금하던 차요, 그래 본국의 사정은 어떻게 되었소?

강홍립이 궁금해 묻는 말에 한윤은

말 마십시오. 광해군을 내쫓은 뒤로는 전에 벼슬하던 사람들까지 다 내쫓고 있습니다. 민심은 새 임금을 싫어하여 이번에 이괄 장군이 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백성들은 크게 환영했습니다.

음, 그럼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소?

제가 듣기에는 장군의 가족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합니다.

사실에 있어서 공신들이 강홍립의 처자를 죽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강홍립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는 한윤의 말에 크게 노하여 은근히 복수할 생각을 가지고 누루하칭게 동병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누루하치는 정충신과의 언약도 있고 해서 출병을 하지 않았다.

인조 사년에 누루하치가 죽고 그의 넷째 아들 홍타시(弘他時=皇太極, 뒤에 淸太宗이 됨)가 그 뒤를 이었다.

홍타시는 한윤과 강홍립의 못된 말을 듣고 군사 삼만명을 보내 조선을 치게 했다. 홍타시의 군사는 회오리바람같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義州)를 엄습하여 부사 이완(李莞)을 죽이고 계속해서 곽산(郭山), 정주(定州)를 함몰시키고 청천강을 건넜다.

안주성(安州城)을 지키던 목사 김준(金浚)과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전사를 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적군은 평양을 무너뜨리고 평산(平山)에 이르렀다. 이때는 벌써 조정이 서울을 버리고, 묘사주(廟社主)와 대비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한 뒤이다.

홍타시는 자기 장졸들에게

출병의 목적이 조선에서 시위하는 정도로써 유리한 조건 아래 화의를 맺아 후고의 우려를 없이함에 있으니, 구태여 인명을 함부로 희생하여 조선과 원수가 될 것이 아니다. 또 시일을 천연하여 전쟁이 오래 계속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리한 노릇이니, 적당히 화의를 맺도록 하라.

이렇게 경고한 까닭으로 그들은 평산에서 더 진진하지 않고 사자(使者)로 유해(劉海)라는 항복 한인(降伏漢人)과 강홍립, 박난영 등을 강화로 보내어 화의를 교섭케 했다.

의주가 함락되었다는 정보가 처음 서울에 도달하였을 때, 조정에서는 홍타시가 조선에 출병하기까지의 그 원인과 곡절을 몰라 이에 대응할 방침을 세우지 못하고, 오직 갈팡질팡하기만 하고 있었다. 늙은 조관들은 도망갈 계책 뿐이요, 젊은 신진 대간들은 객기를 부려 명나라 원군에 일루의 희망을 걸고 무작정 항전론(抗戰論)만 주장했다.

이때 이귀는 김유와 불목 중에 있어서 어전에서 논쟁하다 과격한 언사로 김유를 꾸짖은 것이 죄안(罪案)이 되어 파직 근신 중에 있는 몸이었다. 사태가 매우 급하고 나라의 공론이통일을 얻지 못하니 인조는 특히 어찰(御札)을 내려서 이귀를 불렀다.

평소에는 경의 충간을 듣지 못하다가 급한 때를 당하여 부르는 것은 과인으로서 매우 면괴한 일이다. 경의 충성과 도량으로 응당 용서하리라 믿는다. 이제 적병이 침입하여 나라가 위태로운 이때 조정에 응전할 대책 세울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노라. 경은 속히 출사하여 과인의 좌우를 떠나지 말고 계책을 지도하여 종사를 보호할지로다.

이와 같은 간절한 소명을 받은 이귀 노인은 황공 제읍( 泣)하고, 일신을 희생하여 국난을 구제할 결심으로 다시 복직 입조하게 되었다.

이귀의 출사를 맞아 인조는 그를 탑전에 자리를 주어 앉히고 곧 시국 대책을 물었다. 이귀는 머리를 조아려 아뢰었다.

홍타시의 야심은 중원 침략에 있으므로 조선은 처음부터 안중에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갑자기 침입한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두가지 원인이 있는 듯 짐작되나이다. 첫째로는 홍타시가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여 그 뜻을 달성하려고 이제 대병을 일으켜 중원으로 향하기에 앞서서 후고의 근심을 끊으려고 일종의 시위 수단으로서, 먼저 조선을 굴복시켜 우리로 하여금 명나라를 돕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오며, 둘째로는 이괄의 잔당과 강홍립 등이 원심(怨心)을 품고 적에게 무소(誣訴)하여 출병을 종용한 것입니다. 적의 출병한 목적이 이상 두가지 예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오면, 적의 속셈은 우선 속전(速戰)과 속화(速和)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시일을 천연하여 중원에서 쓸 군사를 조선에 오래 묶어두는 것은 반드시 그들의 본의가 아닐 것인즉 결국 화의는 우리 측에서 제의하지 않더라도 적으로부터 응당 있을 것으로 압니다. 오직 우려되는 것은 우리에게 수비가 없으므로 여기서 적을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운 점입니다. 하지만 소수의 병력으로써 강적을 대항함에는 수비가 안전한 강화도로 피할 도리밖에 없사온즉 서울을 버리시고 잠시 강화도로 피하옵소서. 이렇게 되면 적이 비록 십만 강병이 왔다 할지라도 이른바 함정에 든 호랑이의 신세라 진퇴가 불능하여 굴복될 것이 분명하온즉, 소신의 계책은 먼저 지키고 다음에 싸우고 그리고 화(和)하는 것을 전하께 권하는 바입니다.

그때까지 갑론 을박으로 날을 보내던 조정에 비로소 수전화(守戰和)의 삼대 방침이 수립되어 이귀의 헌책대로 강화도 파천(播遷)이 실현된 것이다.

강화도로 옮겨 와서 우선 급한 고비를 넘기고 보니 조정의 대관들은 다시 그전 버릇대로 이귀의 헌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특히 청의파(淸議波)로서 강개 격앙하는 선비들은 오랑캐는 예의를 모르는 금수들이요. 이러한 금수에게 우리가 명나라를 대신하여 먼저 토벌치는 못할망정 그들과 화친하느니 하여, 요사스러운 말로써 전하로 하여금 절해 고도(孤島)에 몸을 의탁케 하시고, 또 장사들의 전투심마저 저하케 하니 이것은 나라를 욕 뵈이고 임금을 위태케 하며 의리를 저버리게 하는 소위로 그 죄는 천지간에 용납지 못할 바요.

하고 이귀를 공격하였다. 탄핵을 만난 이귀가 출사를 하지 못하게 되자 그의 헌책한 방침도 중구난방이 되어 버리고 강화도의 조정은 또다시 갑론 을박으로 영일이 없었다.

한편 후금의 홍타시는 조선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음을 보고 그 대책으로 의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수백리 연도 점령 지역에 군사로 하여금 농작을 짓게 하여 이른바 불퇴전(不退轉)의 결심을 보여, 은근히 주전파(主戰派)를 위협하고 서울 총공격을 개시 하였다.

서울 유도대장(留都大將) 김상용(金尙容)은 기겁을 해서 먼저 창고에 불을 지르고 강화로 도망쳐 왔다.

유해를 비롯한 강홍립, 박난영 등이 외교문서를 가지고 강화로 찾아온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다.

방어력과 전투심을 잃은 조정에서는 유해를 연미정(燕尾亭)에서 영접하도록 예조판서 이귀와 참판 최명길(崔鳴吉)을 내보냈다.

이귀와 최명길은 유해와 강홍립을 만나보고 비로소 홍타시의 출병동기가 한윤의 무소로서이루어진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다시 강홍립의 숙부 진흥군(晋興君) 강신(姜紳)으로 하여금 홍립의 자녀와 손자를 데리고 답례사(答禮使)로서 적진에 들어 가게 했다.

강신은 적진에 이르러 홍립을 만났다. 강홍립은 자기의 숙부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자기의 자식과 손자들이 혈색 좋고 충실한 것을 보고는 비로소 한윤에게 속은 줄을 깨닫고 후회하는 빛을 보였다.

강신은 강홍립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네 일국의 도원수로서 수만군을 거느리고 멀리 명나라를 위해 응원을 가서, 아무리 전왕(前王)으로부터 밀지(密旨)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체의 방침으로서 될 수 있으면 희생을 적게 하여 국력을 소모치 않았다가 다른날에 방비하자는 것이요, 그 취사선택은 여전히 너에게 일임하신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너의 처지에서는 왕명에 충실할진대 이제 무슨 면목으로서 이역에서 십년씩이나 묵고 있다가 못된 역적의 말에 속아서 배반자의 신분이 되어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느냐.

이 말에는 강홍립도 크게 느낀 바 있어 그 후 양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마다 일을 잘 주선해서 화의를 성립시켰다. 즉

 

一, 조선과 만주국은 앞으로 형제의 의를 맺고 영원히 서로 침범치 않는다.

二, 맹약의 성립과 함께 만주군은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고 이미 점거한 땅을 전부 반환한다.

三, 만주군이 획득한 인물과 재보는 맹약 이전의 것이므로 돌려보내지 않으나 조선으로부터 상당한 대가로써 찾아가려 할 때에는 언제든지 반환한다.

四, 금후 만주국과 남조(南朝=명나라를 기리킴) 사이에 전쟁이 있을 경우 조선은 절대로 남조를 원조하지 않는다.

五, 맹약을 맺은 후에 조선조정은 만주군에게 상당한 호군례( 軍禮)를 행하며, 국왕의 친형제와 자질 중에서 특사로 삼아 조정 대표로 대신 일명을 영솔케 하여 국왕의 친서를 받들어 심양(瀋陽)에 와서 사례를 진술한다.

六, 매년 춘추 이기에 조선으로부터 신사(信使)를 파송하여 교의를 돈독케 하며, 그 때마다 상당한 예물과 세폐(歲幣)를 보낸다.

 

이러한 절목을 정하고, 강화 성내에 단(壇)을 쌓고 백마(白馬)를 잡아 하늘에 제사하며 그 피를 찍어서 형제의 의를 맺었다. 이리하여 만주군이 철퇴할 때 한윤은 그냥 데리고 가서 오진 강홍립과 박난영만을 조선에 남아 있게 하였다. 그러나 적군이 미처 경내로부터 철퇴하기도 전에 조정에서는 또다시 척화론(斥和論)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丙子胡亂

 

인조 십년 임신년(壬申年)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승하하자 만주국에서는 특사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조정의 척화(斥和)하는 일파에서는 만주국의 특사를 거절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도 없어 받기는 하면서도 그 대접을 소홀히 하였다. 인조는 환후를 이유삼아 끝내 특사를 한 번도 접견하지 않았고 접반하는 관원도 이름 모를 미관에게 내맡겼다.

이런 일을 저쪽 사신이 알 까닭이 없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홍립과 한윤이 투항한 이후로 저들은 조선 사정을 세밀하게 알 뿐만 아니라 특사의 통역으로 따라온 고마아(古馬兒)란 자가 비록 만주의 성명을 갖고 그들의 의복까지 입고는 있으나 실상은 평안도 은산(殷山)의 관노(官奴)로 있다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적군에 사로잡혀 투항했던 자인 것이다. 그의 본명은 정명수(鄭命壽)라 했다.

이 정명수가 만주국의 장수 용골대(龍骨大)의 막하에 들게 된 후부터 용골대는 만주국 유일의 조선통이 되어 홍타시의 신임을 받아서 조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가 참견하지 않는것이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번 인목대비 승하 때에도 그가 조문사(吊問使)로 뽑혀서 나왔던 것이다.

용골대는 매우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삼년 후인 을해년(乙亥年)에 이르러 인렬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가 또 승하하였다. 이번에도 용골대가 마보대(馬保大)를 데리고 조문을 왔다.

이때는 벌써 만주국이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황제국으로서 승격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칭할 때이다.

용골대와 마보대는 청나라 군사 백여명과 몽고 군사 구십여명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황제국의 사신으로서 나타났다. 우선 조정에서는 예의상 접반사와 통사를 보내서 마중을 했다.

용골대는 홍타시의 친서(親書) 외에도 다른 두통의 봉서를 내놓았다. 접반사가 나중 내놓은 두통의 봉서를 보니 한 장은 만주국 팔기대신(八旗大臣)이라 쓰고, 또 한 장은 몽고제왕자(蒙古諸王子)라 쓰고 그 앞면에다가는 봉조선국왕(奉朝鮮國王)이라 쓴 것이었다.

이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접반사는 어찌해서 너희 나라 대신과 몽고 왕자가 무엄하게 우리 상감께 글을 바치느냐 탄하니 용골대는

그게 무슨 말이요. 우리 한(汗)의 성업이 혁혁하여 안으로 팔기대신과 밖으로 항복한 몽고 왕자들이 우리 한을 추대하여 황제위(皇帝位)에 나가시게 했소. 귀국은 우리와 형제의나라라 이 소식을 들으면 대단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 안 받겠다는 거요?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접반사는 하도 엄청난 이 말에

(허허, 이런 변괴가 있나. 되놈이 천자라니!)

혼자 입안의 소리로 중얼대며 국서(國書)와 편지도 받지 않은 채 용골대를 흘겨보고, 빨리 말을 몰아 조정에 이 사유를 복명했다.

접반사의 복명을 받은 조정에서는 물의가 분분했다. 대사간 정온(鄭蘊)은 여전히 반대하며, 몽고 왕자의 사신을 물리치라고 했다. 그리고 홍익한(洪翼漢) 등 척화신(斥和臣)들도 여기에 반대하여

오랑캐 사신을 붙들어 목을 베어서 당당히 법을 알리는 게 옳은 줄로 아뢰오.

하고 엄중하게 배척했다. 다만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만이

이번 금나라 사신의 서신은 응당 받아야 하고 그를 불러 보신다 하여도 무관한 줄 아뢰오. 다만 보고 안 보고 할 것은 몽고 왕자 뿐이외다. 몽고 왕자도 반드시 꼭 박대할 것은 없으며, 엄하게 물리칠 것은 그들의 패서(悖書) 뿐이옵니다.

하고 척화론에 반대 의견을 토했다. 이렇게 의론이 분분한 중에 날짜만 자꾸 끌던 중, 용골대 일행이 서울에 당도한지 사흘 만에야 조정에서느 다시 접반사를 보내 한(汗)의 조문만은 받는다는 기별을 했다.

어차피 한(汗)하고는 정묘년에 형제지국의 의를 맺었으니 조상마저 받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될터이니, 황제로 추대한다는 팔기대신과 몽고 왕자의 글은 받지 말고 조상만 받되, 이번 한(汗)의 사신이 전과 달라 백여명이요, 그 중에는 무기를 가진 자들도 있으니 절대로 전례대로 대궐 안에서 조상을 받지 말고 따로이 대궐 앞 금천교(禁川橋)에 군막을 치고 이것들의 조상을 받는 게 옳다고 조정의 의론이 낙착된 까닭이다.

용골대 일행이 금천교에 새로 마련한 혼전(魂殿)에 이르러 허위(虛位)에 대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릴 때, 용골대의 가슴 속에는 부쩍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동안 정탐군의 기별로는 조선 조정이 발끈 뒤집혀서 금나라 사신의 목을 잘라 버리자고 임금께 우긴다더니 이제는 이 다리 옆의 군막이다. 또 왕궁에서 알현(謁見)을 허락하기커녕 왕궁의 그림자조차도 구경시키지 않는다. 무슨 비밀한 계획이 있는 것 같이만 느껴졌다.

의심이 버쩍 난 용골대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사방을 둘러볼 때이다. 별안간 바람이 홱! 일어나더니 군막이 푸르르 날렸다. 군막 뒤에는 호위하는 조선 군사들이 무장을 하고 둘러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용골대는 순간, 앗! 소리를 치며 그대로 뛰기를 시작했다.

뒤미처 마보대도 몽고 왕자들도 뛰었다. 나머지 백여명이 영문도 모르고 눈이 뒤집혀서 헐레벌떡 용골대의 뒤를 따라서 뛰었다.

좌우 옆 길가에 빽빽이 늘어서서 구경하던 백성들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놈들이 모두 달아나니 나라에서 이들을 붙잡는 줄만 알았다.

오랑캐가 달아난다. 붙잡아라!

우뢰같이 일어나며 백성들은 앞을 다투어 용골대를 뒤쫓았다. 그럴수록 용골대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겨우 모화관 근처에 이르러 아무 집에나 뛰어 들어가서 마굿간에 있는 말을 집어타고 무악재 고개를 향해 치달아났다.

원래 조정에서는 용골대가 전례없이 일백 수십명이나 군사를 데리고 더구나 팔기대신과 몽고 왕자의 편지를 가지고 왔으니, 혹시 무슨 불우의 변란이 있을까 해서 금천교 다리 밑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군막 뒤와 옆에 파수를 세워놓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바람이 펄럭하고 군막을 젖히는 바람에 파수병이 용골대 눈에 띄어, 그는 영락없이 자기를 죽이려고 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일은 매우 공교롭게 되어버렸다.

어쨌든 용골대가 달아나자 조정에서는 통사 박난영(朴蘭英)을 벽제관까지 쫓아보내서 다시 돌아가자고 청하니 용골대가 이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 고개를 가로 흔들고 그냥 말을 몰아 달아나 버렸다.

평화의 사신이 달아났으니 싸움은 목전에 닥치게 되었다. 위에서는 곧 팔도에 통문을 돌려 군사를 모으게 했다.

병자년(丙子年) 겨울에 접어들자, 북방에서의 군사의 이동이 심해지며, 마보대가 의주까지 와서 부윤 임경업(林慶業)에게

너의 나라가 대신이나 왕자를 보내 강화를 맺지 않으면 치러 가겠다.

는 말까지 건네어 왔다. 그래도 완고한 척화론자들은 이번에 오랑캐 사신이 오면 목을 베이시오.

미리 평양가지 나가 싸움을 준비해야 하오.

이런 말로써 헛기운만 내고 있었다. 드디어 섣달 열이튿 날, 의주부윤 임경업의 급한 장계(狀啓)가 서울에 올라왔다.

이달 초아흐렛날 적병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옵니다.

그 이튿날, 즉 열사흗날 낮에는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가 올라왔다.

적병이 벌써 안주(安州)까지 왔습니다.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를 채 묘당에 돌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적병이 벌써 평양에 들어왔소.

하는 평양감사의 장계가 올라왔다.

평양은 서울서 불과 오백여리. 사흘 동안에 압록강에서 평양까지 왔으니 기막힌 노릇이다. 조정은 발칵 뒤접히고 온 장안이 슬렁거렸다. 재빠른 사람들은 벌써 보따리를 싸들고 남부여대하여 피난들을 가느라고 남대문 밖이 꽉 메워졌다.

조정에서도 우선 영의정 김유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으로 강화 도검찰사(都檢察使)를 시켜 강화를 지키게 하고, 윤방과 김상용(金尙容)으로 종묘사직의 신주와 빈궁(嬪宮), 원손(元孫) 이하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平大君)을 모시어 가게 했다.

섣달 날씨는 무섭게 추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떠나 강화도로 피난 가는 묘사주(廟社主)를 받든 일행이 김포(金浦), 양천(陽川)을 거쳐 양천강 언덕에 다다른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창졸 간에 일어난 일이라 배 준비가 넉넉할 수 없었다.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겨우 주워 모아 온 것이 여남은 척밖에 없었다. 검찰사 김경징은 자기 집 재물바리부터 먼저 건느게 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 어미, 제 아비의 첩, 제 아내부터 건느게 하니, 세자빈(世子嬪)과 원손을 모시고 섰던 나인들은

저런 무엄한 것이 있나. 빈궁마마와 원손 애기보다 제 어미 제 계집이 제일이람.

하고 발들을 굴러 분해했다.

이래서 묘사주를 모신 대신들과 세자빈, 왕자들은 여기서 이틀이나 묵어야 했다. 이러는 동안 적군은 벌써 경기 땅에 들어서서 송도를 두려 빼고, 장단부사 황직(黃稷)은 적병을 대항하러 나섰다가 그대로 항복하여 청나라 복색을 하고 길잡이가 되어 같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는 상감마저 몽진(蒙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임금은 남대문을 나서서 강화로 향하고자 했다. 세자(世子)가 뒤에 모시고 영의정 김유,이조판서 최명길,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 등이 그 뒤를 따르니, 성 안에 남았던 백성들은 통곡하며 <상감마마!>하고 부르짖었다.

막 남대문을 나서려 할 때

벌써 적의 선봉은 홍제원까지 이르렀고, 그 일부는 김포, 양천강 앞에서 강화도로 가는 통로를 끊었소.

하는 소식이 들러왔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남대문 문루에 올라가 따라온 신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일이 이렇게 급박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이때 철산부사(鐵山府使) 지여해(池如海)가 앞으로 나서며

신에게 포수(砲手) 오백명만 주시면 우선 급한 대로 사현(沙峴)에서 적의 선봉을 꺾겠습니다. 그 동안에 전하는 강화도로 피하십시오.

영의정 이하 여러 신하는 이것을 반대했다.

지여해의 말이 용감스럽긴 하지만 어떻게 오백명으로 십만 대군을 당한단 말입니까?

이번에는 최명길이 어전에 나와 엎드리며

종사의 멸망이 경각에 달렸으니 청하건대 신이 단기(單騎)로 적진에 나가 담판하려 하나이다. 그 사이에 전하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기회를 보아 강화로 들어가시도록 하옵소서.

했다. 임금은 이 말에 매우 마음 든든히 여기며

경은 진정 충신이요. 나라가 이꼴이 된 것은 과인이 척화신을 내쫓지 못한 탓이오.

하며 동중추(同中樞) 이경직(李景稷)을 부사로 삼고 수행원으로 군사 이십명을 주어 보냈다.

최명길이 이경직과 함께 적진을 향해 떠나자 임금은 대가를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수구문을 빠져 겨우 송파강(松坡江)에 다다르니 강물이 얼어서 엉겨붙었다. 강화 모양으로 배탈 걱정없이 얼음을 타고 건넜다.

일행이 남한산 밑에 당도하니 저물어 가는 해는 벌써 떨어져서 삽시간에 앞뒤를 분별하지 못할 캄캄한 밤이다. 앞에서 임금을 인도하는 사람은 한 두번 와서 길을 안다는데도 자꾸 험한 산을 끼고 맴만 돌 뿐이다.

이리저리 헤매는데 앞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사람들은 지옥길에서 천국을 만난 듯 반가와 했다.

내시가 창문을 두드리니 몸집이 큰 총각 하나가 나왔다.

이애, 산성 길을 가다가 잊었는데 어디로 가지?

우리집 뒤로 요리조리 올라가면 돼요.

총각은 한참 손짓을 하며 설명했다. 자기는 늘다녀서 잘 알지 모르지만 처음 가는 사람이 손짓만 가지고 알 리가 만무하다.

이봐, 그러지 말고 수고스럽지만 좀 앞에 서서 길을 가리켜 다구.

가르쳐 주기는 어렵지 않지만 간대야 산성은 못들어 갑니다. 벌써 밤이 깊었으니 문을 닫았을 거예요.

가르쳐만 다우. 들어가는 건 염려말고.

여러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애원하는 말에 총각은 마지 못해서 앞장을 서서 길을 걸었다. 산바람은 눈보라를 갈겨 쳐서 올라가는 일행을 눈코 뜰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모든 사람들은 온 종일 시달린 끝이라 촌보를 옮기기가 어려웠다. 그 중에서도 임금이 가장 딱해 보였다.

앞에서 훨훨 가던 떠꺼머리 총각이 뒤를 돌아다보고 하도 딱했던지 임금 앞으로 가서 등을 대고

이거 아주 못 걸으시는군요. 내 등에 업히시우.

어, 고맙네. 총각.

임금은 평생에 이렇게 고마운 일을 받아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총각 등어리는 반석같이 든든하기만 했다. 총각은 임금을 업고 평지를 걷듯 성큼성큼 올라간다. 임금은 등에 업힌 채 총각에게 물었다.

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갑돌이라 해요.

무엇으로 생업을 삼고 사니?

산에서 나무나 하고 그걸 팔아서 살지요.

부모는 다 계시냐?

칠십 먹은 어머니 하나 뿐이예요.

몇 살이냐?

서른살이예요.

음, 그런데 얘, 싸움이 났다는데 너는 왜 달아나지 않니?

내야 뭐 가진 게 없으니 도적이 들어와도 무서운 게 없지요.

이럴 때 나라님은 무서워할까?

나라님이야 죄가 있으니 무섭겠지요.

나라님에게 무슨 죄가 있다던?

그런 것은 말 못하겠어요.

왜 말을 못하니?

잘못 말하다가 잡혀가게요.

이렇게 얘기를 주고 받는데 어느덧 산성 문 앞까지 다 왔다.

산성수어사(山城守禦使) 이서(李曙)는 오랑캐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수어영(守禦營) 군사와 승군(僧軍)들을 풀어 밤을 도와 산성을 파수하고 네 군데 문을 닫아 대기하고 있던 차라 밤이 깊어 누가 성문을 두드린다는 말에 달려와 보니 어찌 놀라지 아니하랴. 임금의 행차가 문밖에 추위를 못 이겨 떨고들 섰다.

이서는 황공망극하여 손수 성문을 열고 임금을 맞아들였다.

뜬눈으로 산성에서 밤을 새운 임금은 첫닭이 홰를 쳐 울자 다시 강화도로 피난한다고 나섰다. 성문을 너서니 험한 산길에 빙판이 져서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말고삐를 잡은 어자(御者)가 채찍을 들어 갈기나 말은 전신에 땀만 흘릴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말을 버리고 도보로 걷기를 시작했다. 간밤의 노독이 아직 풀리지 못한 채 다시 미끄러운 새벽 산길을 걷자니 한 걸음마다 아프고 두 걸음마다 미끄러졌다.

임금의 기색은 좋지 못하였다.

얘, 도로 산성으로 돌아가자.

내관을 돌아보고 이렇게 분부를 내렸다. 이대로 걸어서 인천을 거쳐 강화로 가기는 마치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임금이 다시 산성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적병의 동정을 살피러 갔던 최명길이 돌아와 복명해 엎드렸다.

수고했소. 이조판서! 적군의 동정이 어떠하오?

임금은 최명길에게 물었다.

신이 용골대를 진중에서 만나 보고 무단히 형제지국을 범한 연유를 물으니 용골대는 노기를 띠며 형제지국의 의를 깨뜨린 것은 너희 나라가 먼저 아니냐 하면서, 전에 비변사(備邊司)에서 평안감사에게 보낸 오랑캐와 절화(絶和)하라는 유문(諭文)을 내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뒷일이 어찌 됐단 말이요.

임금은 뒷말을 재촉하였다.

용절대는 별안간 고함을 치며 신의 목을 베이고 남한산성을 무찔러 쳐라 하고 호령하였습니다. 신은 얼굴빛을 정색하고 조선은 의를 존중하는 나라라 무단히 사신인 나를 죽였다는 소리가 일어나면 팔도의 근왕병(勤王兵)이 구름 일 듯 일어날 것이니 내 목을 베이려거든 빨리 베어라. 마주 고함쳐 호통했습니다. 신의 기색을 살피던 용골대는 저희끼리 한참 수군 거리더니 세 가지 조건을 들어 화친하기를 청해왔습니다.

임금은 그 세 가지 조건을 물었다.

황송하오나 한 가지 조건은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신을 보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오랑캐 사신을 목베이자는 척화신(斥和臣)을 보내라는 것이옵니다.

이 말에 곁에 모시어 섰던 만조백관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오달제(吳達濟) 이하 젊은 척화신들은 오랑캐들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고 최명길은 화친하는 길 이외에 종묘사직을 지킬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또다시 평화론과 척화론이 대립되었다. 이러는 동안에 적병의 선봉은 벌써 풍우같이 마전(麻田)을 건너서 남한산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종실 능봉수(綾峯守) 칭( )을 왕제라 하고, 심즙(沈 )을 가짜 대신을 만들어서 적진으로 보냈다.

용골대와 마보대는 우선 가짜 왕제와 가짜 대신을 면대해 보고

당신이 정말 임금의 아우요?

하고 능봉수의 위 아래를 훑어보니 능봉수는 태연히

그거 무슨 소리요. 나는 진정한 왕의 아우요.

하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마보대는 다시 가짜 대신 심즙을 돌아보았다.

대감도 정말 대신이요?

하고 똑바로 심즙을 쳐다보니 심즙은 겁많고 어리석은 위인이라 얼른 능봉수처럼 똑똑히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마보대는 의심이 버썩 일어났다. 옆에 있는 박난영에게 물었다. 박난영도 역시 정말이라고 했다. 이때 용골대가 썩나서며 박난영의 멱살을 버쩍 추켜잡고

이놈, 내가 너를 여태껏 우대했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내가 다 알고 있다.

하고 환도를 빼어 박난영의 목을 갈기니 윽! 소리 한마디에 난영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이로써 제일차의 화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三田渡의 눈물

 

능봉수와 심즙이 적진에서 쫓겨온 뒤, 임금은 대신과 비국당상(備國堂上)을 인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라일이 여기까지 이르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요.

하고 통탄했다.

영의정 김유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이

일이 급하오니 화친하기를 청하는 것이 상책인 줄 아뢰오.

하고 화의를 주장했다. 임금은 한숨을 쉬고

그럼 이번에는 좌의정이 호판 김신국(戶曹判書 金藎國)을 데리고 가오. 만일 용골대가 기어이 왕자를 보내야 된다 하거든 대군들이 지금 강화에 있으니 화친이 되는 날이면 추후로 보내겠다 대답하오.

하고 분부를 내렸다. 다음날 홍서봉과 김신국이 산성을 나서서 섬전도로 용골대를 찾으니, 용골대는 당장 세자를 볼모로 보내지 아니하면 화친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임금 이하 백관들은 안색이 변하며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임금은 다시 대신들을 불러 세자를 적진에 보내는 가부를 결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누가 감히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음, 모두들 말이 없으니 그럼 세자를 보내란 뜻이구료. 모든 사람들의 뜻이 그러하다면보내지.

임금의 얼굴은 흙빛과 같이 참담하였다. 밖에서 이 소식을 듣고 섰던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어전에 급히 나와

안 됩니다. 동궁을 보내시려면 먼저 소신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으니 만좌는 모두 얼굴빛이 푸르러졌다. 신익성의 말이 떨어지자 다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이 들어와 영의정 김유를 보고

영의정이 동궁 전하를 적진으로 모시자 했다니 이런 변괴가 어디 있소. 다시는 대감과 하늘을 같이 일 수가 없구료.

하고 준절히 면박했다. 뒤미처 홍익한, 윤집(尹集), 오달제 등이

간신들이 나라를 위태롭게 했으니 분규를 일으킨 장본인을 목베어야 하오.

하고 연거푸 상소를 올렸다. 며칠이 지난 후부터는 적병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여 부분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원두표와 이시백이 나가 싸워서 원두표는 적장 양고리(楊古利)를, 이시백은 오상(吳祥)을 각각 죽임으로써 사기를 떨치었다.

이때부터 적은 사, 오일 동안 싸우던 군사를 내보내지 아니하고 진문을 굳게 닫고 포위만 했다. 이제 산성에서는 사람 먹을 군량미가 떨어졌다. 적병은 산성 안팎을 겹겹이 둘러싼 채 군사 하나 꼼짝 안하고 있다. 아무리 이쪽에서 싸움을 돋아봐도 적병은 그저 들은 척만 척 결진만 하고 있다.

산성에선 모든 사람이 갑갑증이 나고 초조해 배길 수가 없었다. 이때 이 외로운 산성에 일루의 희망이 잠간 비치기 시작했다. 원주영장(原州營將) 권정길과 충청감사 정세규가 응원병을 거느리고 산성 근처까지 왔다는 소식이 들어온 것이다. 산성 높은 곳에 올라가 보니 검단산(儉丹山)에서 호병과 싸우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 싸움은 며칠이 가지 않았다. 정세규와 권정길의 군사는 청나라 군사에게 전패하여 내빼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감히 근처에 응원해 오는 군사가 없었다.

청병들은 산성에 있는 조선군이 밖으로 연락을 할까봐 목책(木柵)을 성 밖으로 둘러치고 군데군데 쇠방울을 달아 사람이 목책을 넘기만 하면 방울소리가 요란히 나도록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남한산성은 완전히 두겹 세겹 적진 가운데 둘러싸인 외로운 성이 되고 말았다.

정축년 정월이 되면서부터는 청나라의 황제가 직접 나와서 항복하라고 독촉했다.

최명길 등이 임금의 분부를 받아 답서를 써보냈다. 그 내용인즉 그대로 아무 조건 없이 싸우지 말고 전과 같이 형제국으로 지내자는 것이었다.

호진(胡陣)에서는 이 국서(國書)를 받고도 한 동안 아무 기별이 없었다. 며칠 뒤 좌의정 홍서봉이 적진으로 가서 답서 재촉을 했다. 그러자 적장 용골대는 빙글빙글 웃으며 품안에서 간지 두 장을 꺼내 홍서봉에게 주었다.

대감 그것을 읽어 보오.

홍소봉이 그것을 받아 보니 바로 봉림대군이 상감에게 올리는 친필이다.

첫대목부터 호천망극 넉자를 쓰고 강화도가 함락되어 원손(元孫)은 행방을 모르고 빈궁과 봉림, 인평 두 대군은 적군에게 볼모로 붙들려 있고, 원임대신 김상용은 폭약으로 자진하고 원임 윤방만 살아서 역시 적군에 붙들렸다는 기막힌 소식이었다.

강화 검찰사 김경징과 부사 이민구(李敏求)는 하나는 영의정 김유의 독자요, 하나는 병조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아우로 모두가 권신의 자제들이다.

처음 강화도 피난이 묘당에서 논의될 때 김유는 즉석에서 자기 아들과 이민구 두 사람을 천거하였다. 임금은 이때

경징과 민구는 모두 백면 서생으로 큰 일에 대하여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경의 천거를 의심치는 않으나 직책이 중한 만큼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김유는

소신이 어찌 감히 자식의 재간 유무를 모르고 국가의 중임에 천거하오리까. 경징은 비록 미거하오나 일찍이 소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인(異人)을 만나 도술(道術)을 배웠다 하옵기로, 이제 국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전하께 만일의 도움이 될까 하와 추천하는 이외에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이리하여 김경징은 임금으로부터 상방보검(尙方寶劍)의 하나를 받으며

강도에 있는 문무백관과 수륙 제군으로 경의 명령에 복종치 않을 때는 선참후계(先斬後啓) 하여도 무방하니라.

하는 교서까지 배수하였다. 강화로 들어온 김경징은 앞에 큰 강이 있으니 안심된다고 하면서 대안(對岸)의 김포와 통진(通津)의 관곡(官穀)을 가져다가 먹어대며 매일 같이 연미정(燕尾亭) 근처에서 술만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군관도 장교들이 무슨 긴급한 정보를 보고하거나 처분을 물어 오면

그따위 쓸데없는 일은 그만 두고 술이나 한잔 마시라.

하고 사무는 도무지 살피지 아니했다.

이러던 중 청나라의 예친왕 다이곤(睿親王 多爾袞)의 대병은 강화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적군은 먼저 인천(仁川), 부평(富平), 통진, 김포 등을 함몰시킨 후 한강 상하에서 선척을 압수해 가지고 경기수영(京畿水營)을 깨쳐서 전선(戰船)을 노획했다. 그리고는 즉시 조수 밀리듯이 바다를 건느기 시작했다.

김경징은 장대 위에 높이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고 깔깔대면서

저놈의 군사가 몇 만이나 되는진 몰라도 나의 호령 한마디에 바닷속 고기밥이 될 것이니응전하지 말고 구경이나 해라.

이 말에 모든 장졸들은 대장의 하는 일이 매우 맹랑하고 추측키 어려웠지만 그래도 군률을 지켜 움직이지 않고 오직 대장의 거동만을 구경하게 되었다.

적병의 승선이 점점 육지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려 김경징은 술법을 쓴다고 칼을 빼어 공중을 가리키며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장(神將)은커녕 날씨는 쾌청한 채 적병을 실은 배는 평온한 바다를 미끄러지듯 자꾸만 육박해 왔다. 갑자기 김경징의 얼굴은 흙빛이 되는 동시에 허겁지겁 장대 아래로 내려와 바닷가에 매어 논 조그마한 어선을 잡아타고 어디로인지 도망쳐 버렸다.

강화도는 이렇게 해서 어이없이 함락이 되고 말았다. 강화에는 여자들의 피난민이 많아 적병들은 여자를 잡아 제멋대로 희롱했다. 김경징의 어머니와 처도 적병에게 잡혔으나 그 들은 비겁한 경징의 행동과는 반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여장부의 기개를 보였다. 이밖에 도 조관과 부녀의 순절하는 사람이 매일같이 속출했다.

강화도의 함락은 남한산성 안에 있는 임금으로 하여금 최후의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이 외로운 성 안에서 적을 대항하던 것도 묘사를 위하여 굴치 않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모두가 허사가 되었다. 내 이제 누구를 위하여 항전하며 우리의 군사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할 것이냐.

이런 비통한 하교와 함께 출성 통지의 사신을 적진에 내보냈다.

최후의 어전회의에서 국서(國書)의 초안을 잡은 최명길은 붓을 놓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옆에서 김상헌은 그 국서를 집어서 찢어버리며

사나이가 국가 패망하는 이 마당에 한 번 목을 찔러서라도 외롭게 죽지는 못할 망정 손가락으로 이 글을 짖고 있어. 아, 해괴한지고.

일변 꾸짖고 일변 땅에 엎디어 울며 일어나지 못했다.

동양위 신익성은 칼로 기둥을 찍으며 통곡했다. 최명길도 눈물을 흘리며

대감! 시생은 대감의 의기를 모르는 것이 아니올시다. 시생 역시 대감만한 의기와 기백은 가졌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 아니오니까.

찢어버린 종이 조각을 다시 수습하여 이어대기 시작했다.

정축년(丁丑年) 정월 삼십일, 임금은 오십명의 시위군사를 인솔하고 곤룡포(袞龍袍)대신 남포(藍袍)를 입고 서문으로 내려섰다.

성에 가득한 신하와 백성들은 통곡하며 임금의 행차를 받들어 보낸다.

청왕(淸王) 홍타시는 삼전도(三田渡)에 진을 치고 아홉층 단을 나룻가 남쪽에 모은 뒤에 황색 장막과 황색 일산을 꽂고 단위에 앉아서 기다렸다.

조선왕 인조는 진 앞 백보 밖에서 말을 내려 걸어 들어갔다. 세자궁도 말에서 내려 부왕 뒤를 따랐다.

진앞에 이르러 용골대는 조선왕을 인도하여 단아래 자리를 펴고 북면(北面)하여 절하기를 청한다. 인조는 잠간 주저하다가 호인의 풍습대로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다.

이것이 항복하는 식이다.

조금 있다가 용골대는 다시 임금에게 단에 오르기를 청한다. 거기에는 이번에 출정 나온 청나라 왕자와 몽고의 왕자들이 동서 양편으로 갈라서 앉아 있다. 임금은 동편에 서향을 하며 앉았다. 건너다보니 맞은쪽 서편 끝자리에 강화도에서 볼모로 잡혀 온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있다. 아, 얼마나 반가우랴. 두 대군은 눈으로 목례를 보내며 다만 소리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다.

다음에는 행주례(行酒禮)가 있었다. 군악소리 웅장하게 울리는 중에 임금은 청왕에게 술을 부어 올렸다. 수치스럽기 한량없는 광경이었다. 행주례가 끝나니 청왕 홍타시는 임금에게 수달피 웃옷 두 벌과 백마(白馬) 한 필을 하사했다.

다 저녁 때가 되어 청왕은 임금에게 당일로 서울 환궁할 것을 허락하고 왕세자와, 빈궁과,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눌러 진에 머물게 하니 장차 볼모로 심양(瀋陽)까지 데리고 갈 생각인 것이다.

임금의 일행이 강을 건너 서울로 향하니 청병의 일부대가 임금을 호위한다고 뒤따랐다.

일행은 밤이 깊어서야 겨우 창경궁에 다다랐다. 사십여일만에 다시 보는 대궐! 그러나 대궐들은 이미 차디찬 재가 되어 있었다.

 

 

 

멀고 먼 北녘 땅으로

 

정축년(丁丑年) 이월 초이튿날 청왕은 다이곤에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을 호위하여 천천히 뒤에 오라 이르고 자기는 군사를 거느려 급급히 회군했다.

이월 초여드렛날 세자와 봉림대군이 대궐로 들어와 부왕에게 작별인사를 올리니 임금은 남이웅(南以雄)과 정뇌경(鄭雷卿) 등을 수행원으로 배정하고 그밖에 무재(武宰)로 이기축(李起築)을 따르게 한 뒤에 기운찬 장사패 여덟명으로 세자와 봉림대군을 호위하여 청나라로 가게 했다.

원래 동궁 행차라 대신으로는 영의정 김유가 마땅히 앞잡이 서서 심양으로 가는 게 당연하나 김유는 백방으로 꾀를 피워 사양한 까닭에 남이웅으로 가함대신(假銜大臣)을 만들어보내게 된 것이다.

임금은 이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녹번이를 넘어 창릉(昌陵)까지 나가서 세자와 봉림대군을 전송했다. 세자는 통곡하며 울고, 봉림대군은 부왕의 상심되는 마음을 더욱 상하게 할까 하여 끊어오르는 슬픔 회포를 지그시 참고 있었다.

잘들 갔다 오너라. 무슨 일이든 경솔하게 하지 말고 참고 참아라.

임금 역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당부했다.

양화도(楊花渡) 나룻가에 진 치고 머물러 있던 다이곤의 대군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보대가 선진을 맡고 다이곤은 중군(中軍)을 이끌고, 세자와 봉림대군이 말고삐를 나란히 한 그 좌우 옆에는 팔장사(八壯士)들이 옹위하며 걸어가고 그 다음에 동궁빈 강씨(姜氏)와 봉림대군 부인 장씨(張氏)의 옥교가 따랐다.

뒤에는 용골대가 옹위해 나가고 그 다음에는 잡혀가는 조선사람 남녀노소 수만명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송도에 이르렀을 때, 송도유수는 말 이십여필에 쌀을 실어가지고 와서 동궁과 대군에게 바치었다. 동궁과 대군은 그 쌀 중에서 얼마를 진 뒤에 묶어서 따라오는 척화신(斥和臣) 오달제와 윤집에게 나눠 주었다. 이들은 홍익한(洪益漢)과 함께 척화(斥和)를 했다고 역시 심양으로 끌려가는 길이었다. 홍익한은 평양에서 직접 심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다시 해주(海州), 평양(平壤)을 지나 안주(安州)에 다다르니 슬픈 소식이 진중에 떠돌았다.

삼학사(三學士) 중의 한 사람인 홍익한이 호정(胡廷)에서 끝끝내 항거하다가 청태종(淸太宗)의 노염을 사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세자와 대군이 심양에 도착하여 관소(館所)를 정하고 체재하는 동안 윤집(尹集)과 오달제(吳達濟) 등도 끝끝내 반항하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동안 조선의 조정에서는 변동이 많았다. 영의정 김유는 삭탈관직을 당해서 쫓겨나고 그 대신으로 영의정에는 이홍주(李弘胄)가, 좌의정에는 최명길이, 우의정에는 장유(張維)가 들어 앉았다. 그리고 강화도를 잃어버린 김유의 아들 김경징은 강계로 귀양살이 갔다가 사사(賜死)를 받아 죽었다.

이 무렵 용골대는 인조(仁祖)에게 조선왕을 봉한다는 책봉사(冊封使)가 되어 조선으로 다시 나왔다. 그는 청태종의 책봉조칙을 인조에게 건넨 뒤에 여러 가지 난처한 조건을 요구했다.

 

첫째 한(汗)의 송덕비(頌德裨)를 삼전도에 세울 것, 둘째 대신들의 자제를 청국과 서로 바꾸어 혼인할 것, 셋째로 조선 여자로 한(汗)의 시녀를 뽑아 보낼 것 등이었다. 모두가 난처한 요구들이었다. 그러나 한(汗)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삼전도 나룻가에는 얼마 후 엄청나게 크고 넓은 대리석 빗돌이 세워졌다. 그리고 대관들의 본실 소생들은 부랴부랴 혼인을 올리고 종의 딸들을 수양녀로 삼거나 첩의 딸로 한 명씩 바쳐서 청나라 대관의 아들과 혼인하게 보내기로 하고, 한(汗)의 시녀로 만들 여자는 관비(官婢) 속에서 열 명을 뽑아 용골대에게 전해 주었다.

이렇게 온 나라가 힘에 눌려 청나라에 복종은 하고 있으나 속 마음으로는 아직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을 도와 준 명나라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청태종이 다시 명나라 장수 심세괴(沈世魁)가 웅거하고 있는 가도( 島)를 칠 테니 조선서도 군사를 보내라고 요구해 왔을 때 조정에서는 마지 못해 평안병사 유림(柳琳)과 의주분윤 임경업(林慶業)을 보내 바다에서 청군을 돕게 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은 몰래 사람을 심세괴에게 보내어 가도 백성들을 많이 피난케 하였다.

그 뒤에 또 금주(錦州)를 칠 때도 유림과 임경업은 형식적인 응원만 하고 돌아왔다. 명나라가 아주 쇠미(衰微)하여 강남(江南)에 근근히 그여맥을 지탱하고 있을 때에도 이와 같은 친명(親明)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영의정 최명길과 의주부윤 임경업은 명나라에 독보(獨步)라는 중을 보내어 수차 연락을 취했다. 명나라에서는 궁금하던 차에 조선의 책임 있는 재상의 글을 받고 두 나라가 힘이 부족한 것을 개탄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명나라 병부상서 홍승주(洪承疇)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바람에 전부 탄로되었다. 크게 노한 청태종은 조정에 통고하여 최명길과 임경업을 잡아 들이라 명했다.

이때 임경업은 전부터 호진(胡陣)에 참가하여 명나라를 칠 때마다 도리어 명나라 군사에 게 여러 가지 편의를 준 듯한 혐의가 있다 하여 청나라에서 조정에 항변하고 임경업을 삭탈 관직 시키게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임경업은 의주부윤과 평안병사의 직책을 내놓고 서울로 돌아와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판이다.

이런 중에 사건이 벌어져 최명길로부터 명나라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한 뒤 우리와 연락이 있었던 일을 자백해 버렸으니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편지가 왔다. 임경업은 이 편지를 받아보고 곧 몸을 숨기어 명나라로 건너갈 결심을 했다.

임경업이 몸을 숨겨 도망한 것을 크게 조선의 조야를 놀라게 했지만 청국의 분노는 더욱 더컸다. 용골대는 최명길이 잡혀서 심양으로 끌려 오자 곧 문초를 했다.

모든 일은 명나라 항복한 장수 홍승주에게 들어 알고 있으니 은휘 말고 대답하라.

은휘할 리가 있겠소. 무엇으든 물으시오.

독보란 중을 명나라에 보낸 것은 무슨 뜻으로 한 짓인가?

병자년 이래 조선의 형편으로 말하면 가뜩이나 군사가 없는 판에 서해 바다에는 더욱 방비가 없었소. 하루 아침에 명나라 군사가 조선을 향해 쳐들어 온다면 어떻게 대항하겠소?

그리고보니 미리 명나라에 간첩을 보내서 조선이 명나라에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리자는 생각이었소.

국왕이 이 일을 아는가?

처음부터 국왕은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좋아하시지 않으므로 나와 임경업 두 사람만이 상의해서 보낸 것이요.

임경업이 도망했다는데 이것은 조정에서 일부러 숨기는 일이 아닌가.

그건 당치도 않은 소리요. 조정에서 사람을 숨길려면 영의정 최명길을 숨길 것이지 어찌 일개 무장인 임경업을 숨기겠소?

최명길은 펄쩍 뛰며 그렇지 않다고 변명했다. 용골대도 다시 더 물을 게 없었다. 최명길의 답변을 일일이 한(汗)에게 보고하고 최명길을 심양옥에 가두었다. 이 옥에는 이때 김상헌(金尙憲)도 척화신으로 잡혀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 감개가 무량하였다.

한편 임경업은 일편엽주(一片葉舟)로 서해를 건너 등주(登州)로 갔다. 이때 등주의 주사대장(舟師大將)은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한 뒤에 황종예(黃宗裔)란 사람이 도독(都督)이 되어 있었다. 임경업은 황종예와 힘을 합하여 호국을 치기 위해 전선(戰船)을 만들고 군사를 교련시켰다. 부지런히 서두르는 동안에 배는 벌써 삼십척을 만들었고 군사들은 제법 노련하게 훈련되었다. 배만 다 완성되면 장차 큰 싸움을 시험해 보려 하는 판에 뜻 아니한 소식이 들려왔다.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가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의 핍박을 받아 북경을 빠져나가고 황제는 만세산(萬歲山)에서 목을 매어 죽고 신종(神宗)의 아들 복왕(福王)이 남으로 달아나서 남경(南京)에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임경업과 황종예의 낙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황종예는 임경업에게

장군은 중군(中軍) 마홍주(馬弘周)와 함께 등주를 지켜 주시오. 나는 근왕군(勤王軍)을 거느리고 남경으로 가야겠소.

하고 그대로 떠나 버렸다.

황종예가 떠난 뒤에 임경업은 중군 마홍주와 함께 등주에서 군사 일을 다스렸다. 그런데 다시 불리한 소식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이자성이 남으로 도망하고 호군이 북경을 점령했다는 소식이다.

이때 청국은 태종 홍타시가 죽고 그의 아우 다이곤(多爾袞)이 큰아들 숙친왕(肅親王)을 폐한 뒤에 겨우 여섯 살 된 셋째 아들 순치(順治)로 황제를 삼고 자기는 스스로 섭정(攝政)이되었다.

임경업은 마홍주가 벌써부터 청나라와 내통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모르고 그와 함께 남경으로 가려다가 그만 마홍주의 배신으로 호병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임경업이 북경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섭정왕 다이곤은 명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고 도읍을 북경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제는 조선이 겁날 것 없다 하여 그 동안 심양에 잡혀 있던 세자와 대군을 놓아주었다. 뒤이어서 김상헌과 최명길 등도 대사(大赦)로 놓여 나왔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벼슬을 버리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 나머지 여생을 보내고 영의정에 김자점(金自點)이 들어 앉았다.

한편 동궁은 구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기쁨이채 풀리기도 전에 별안간 세상을 떠나게 되어 궁중은 다음 세자 문제로 또 한 번 파란이 중첩하게 되었다.

당시 인조는 후궁인 조소용(趙昭容)의 품에 안겨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내고 있었다. 영의정 김자점은 조소용의 소생인 옹주의 부마 김세룡(金世龍)의 조부였다. 김자점은 조소용이 세자빈 강씨와 사이가 나쁜 것을 미리 짐작하고 세자의 아들인 원손(元孫)을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장하고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지닌 조소용도 임금에게 봉림대군으로 세자를 세울 것을 극력 주장했다.

좌의정 홍서봉과 이경여(李敬與) 등이 원손으로 세우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마침내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렇게 되고보니 원손은 한낱 왕손으로 떨어지고 강빈(姜嬪) 역시 홀로 쓸쓸한 과부 노릇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이러던 중 조소용은 은근히 강빈을 아주 없앨 생각을 먹고 여러 가지로 임금에게 무고를 했다. 조소용에게 눈이 어두워진 임금은 우선 강빈을 후원 별당에 유폐시켜 놓고 대신과 육경(六卿)을 불러

강빈은 심양에 있을 때부터 왕비 노릇을 하려고 했다 하오. 돌아온 후에는 수라상에 독(毒)을 넣지 않나, 북경서 사온 요물 같은 귀신을 가지고 밤마다 저주를 하지 않나 그 못된 행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어찌 경들은 가만히 있소? 어서 경들은 왕법을 엄하게 다스리오.

강빈을 죄 주라는 재촉을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왈가왈부 밤이 늦도록 떠들기만 하고 판결을 짓지 못했다. 임금은 몹시 답답증을 내고 그 중에서도 맹렬히 반대하고 나선 홍무적(洪茂績)과 이경석(李景奭)을 멀리 귀양을 보내게 하고

강빈을 폐서인(廢庶人)할 뿐 아니라 사사(賜死)를 내리도록 하라.

하는 엄한 말을 내리었다.

이로써 강빈은 남편을 잃은 뒤 얼마 안 가서 궁중을 쫓겨나 자기 집으로 돌아와 사약을 마시고 그 한많은 세상을 등졌다. 강빈의 소생 석철(石鐵)과 석린(石麟)도 그 후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거기서 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때를 전후하여 심기원(沈器遠)의 역적 모의가 또 탄로되어 조정은 물끓듯 어수선했다.

김자점은 영의정으로 심기원 옥사에 추관(推官)이 되어가지고, 신문할 때, 당시 조정 안에 자기와 한패가 아닌 사람은 이름을 불러가며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심기원이 극형을 받아 처참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회인군 덕인(懷仁君德仁)은 심기원에게 추대되었다는 바람에 피살되고, 임경업도 심기원과 함께 역적 모의를 할 양으로 명나라로 도망한 자이니 조선으로 내보내 달라고 청나라에 간청했다. 섭정왕 다이곤은 임경업을 옥에서 내놓으며 사신에게 칙유(勅諭)까지 들려 보냈다.

< 조선이 귀순한 뒤 임경업은 두 나라 사이를 이간시킬 양으로 명나라에 정탐을 보내는 등 좋지 못한 일을 많이 하다가 급기야 제 자신이 명나라로 들어가서 나라일을 어지럽게 하였다. 진작 임경업을 처결해 버릴 것이로되 개과천선하기를 바라고 옥 속에 가두었더니 지금 들으니 임경업이 조선 국왕을 폐하려 역적 모의를 했다 하니 놀라운 일이다. 이제 임경업을 보내니 조선은 처결한 후 하회를 알리기 바란다. >

이것이 병술년(丙戌年)의 일이었다.

임경업이 김자점의 독수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 조정은 김자점과 임금의 총희 조소용의 독단성이 되어버렸다. 이때 이들에게 대항해서 나선 사람은 같은 공신 계통인 원두표로서 김자점과 서로 파가 갈라져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 김자점편을 낙당(洛黨)이라 칭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파를 원당(原黨)이라 하였다.

조정은 이 두 파당의 싸움으로 한가로운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러던 중 최명길도 병들어 죽고, 또 인조도 기축년(己丑年) 오월에 승하하니 때는 병자호란이 일어난지 십삼년 두의 일로 인조의 나이 오십오세였다. 봉림대군이 곧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효종(孝宗)이다.

 

 

<조선편 5> 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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