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비사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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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편 終

 

運命의 女人 閔妃

 

少年王의 첫사랑

 

열두 살에 양자 임금으로 궁중에 들어온 고종은 생부 대원군과 사사로운 가인(家人)으로 만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궁중에 자주 들어오는 대원군은 대개 조대비와 중요한 정치문제만 수군대고 돌아갔다. 모친 민씨의 따뜻한 사랑을 받을 기회는 더욱 없었다. 처음에는 잠자다가도

어머니!

하고 잠꼬대를 하는 수가 많았다. 자기를 보고

개똥아, 이 자식!

하고 욕하며 놀던 평민 시절의 동무들이 그립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궁중에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가족도 없었다. 삼대(三代)의 과부들인 선대(先代)의 왕후들도 그를 따뜻한 애정으로 돌봐 주지는 않았다. 제일 어른인 조대비가 양모(養母) 관계이긴 해서 가장 소중히 여겨 주었지만 그것도 대원군과의 정치적 흥정과 같은 동기에서 시작한 것이어서 육친의 애정이 있을 수 없었다.

왕으로서의 권한도 모조리 대원군에게 있으므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 임금은 아직 정치권력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 대신 개인적 생활에는 완전한 자유라기 보다도 방임주의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지능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한창 발달할 시기의 소년왕에게는 지도하는 어른이 없었다. 몰론 글공부는 했지만 신하로서 어려워만 하는 선생에게 맡겨졌을 뿐이다. 외롭기만 한 소년은 따분한 글공부가 하기 싫었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아도 다가오는 사춘기(思春期)는 성에 눈을 뜨게 했다. 외롭던 소년의 마음을 끈 것은 후궁에 많은 예쁜 궁녀의 매력이었다. 글방보다 궁녀들 방에 놀러 가는데 재미를 붙인 소년은 드디어 궁녀 이씨의 미색(美色)에 반해버렸다.

궁녀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정실 왕비는 못 되더라도 귀인 또는 빈궁(嬪宮)으로서 첩 노릇을 할 수가 있고, 다행히 아들을 낳으면 세자(世子)로 삼아서 임금의 뒤를 이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상궁(李尙宮)은 자태가 아름다웠고, 머리가 영리하고, 나이 또한 고종보다 많은 처녀였다. 이 궁녀는 처음에는 시녀로서 고종을 섬겼으나, 점점 친해지자 누이같이 친절히 고종의 신변을 돌봐 주었다. 그러던 중에 서로 사랑의 싹이 트게 된 것이다.

상감마마

하고 손을 잡아 주며 옷을 입혀 줄 때에 탄력 있고 부드러운 처녀의 몸이 스치는데 쾌감을 느끼게 된 소년왕은 자기도 모르게 애욕이 동해서 궁녀의 가슴에 안기며 젖가슴을 더듬었다.

상감마마 왜 이러세요.

하고 소년왕의 손을 뿌리치고 얼굴을 붉혀 보이면 왕은 더욱 애달픈 피가 끓어 올랐다.

너 그러지 말고, 우리 장가 들고 시집 가는 흉내 좀 해보자.

어머나, 상감께서는 아직 아기신데 그런 소리까지 하세요? 그러다가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큰일 납니다.

나는 임금이다. 임금이 너를 좋아한다고 누가 막을 거냐?

궁녀에게만은 왕노릇을 해보겠다는 듯이 제법 조숙한 말까지 하면서 치마끈에 매달렸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은 뒤에, 소년왕은 밤중에 궁녀의 방으로 가서 놀다가 궁녀 이씨의 이불 속에서 임금의 어린 동정(童貞)을 깨뜨리고 말았다. 그 뒤로 고종은 낮에 글을 읽고 있어도 이상궁 생각만 나서 좀이 쑤셨다. 그러면 책을 덮어 놓고 이상궁의 방으로 가서 풋사랑의 쾌감에 취했다.

상감마마, 밤으로나 가끔 오시지 낮에 공부도 않고 놀러만 오시면 어떡하십니까? 제가 무슨 춘향이라고 이도령처럼 글공부도 않고 이러세요?

춘향이면 너보다 잘난 미인이랴. 나는 이도령 이상으로 네가 좋다. 책을 펴고 글을 읽으려면 글자가 모두 네 귀여운 눈웃음으로 보여서 견딜 수 없다. 이도령처럼 너를 끝까지 사랑하마.

어마. 저도 상감마마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여자를 가깝게 하시면 중하신 몸에도 좋지 못합니다.

왜?

기운이 파해서 병이 될 염려도 있습니다.

이상궁이 그런 주의를 시킬 정도로 어린 임금은 여자의 몸을 밝혔다.

너를 사랑하다가 병이 돼서 죽어도 좋다. 너는 내가 싫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냐?

상감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야요?

하고 이상궁은 시무룩해진 왕을 안아 주며 달랬다.

그러던 중에 고종이 열다섯 살의 봄을 맞게 되자, 왕후책립(王后冊立) 문제가 급속히 진행 되었다. 임금의 결혼은 왕실의 가장 큰 경사였다. 그러나 왕후 후보자를 둘러싸고 또 각파의 세력 암투가 벌어졌다. 자기 파에 유리한 규수를 왕후로 만들어야 세도를 부릴 지반을 톡톡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랑감인 십오 세의 고종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이상궁과 더 자유로운 애정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상감마마, 중전마마를 맞으시면 저는 본 척도 않고 버리시겠지요? 아주 버리시면 저는 죽고 말겠어요.

이상궁은 눈물을 흘림 속삭였다.

중전이 들어와도 나는 너만 사랑하겠다. 맹세한다. 너보다 귀엽고 예쁜 여자가 어디 있겠느냐?

정말이세요? 그야 저는 천한 궁녀니까 지금까지처럼 상감님을 독차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잊지만 말고 종종 제 방에 와 주시면 만족하겠습니다.

걱정 말아라. 중전이 들어와도 너는 내 첫정이 든 사람이니까, 실제는 본실이다. 나만 너를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

아이 좋아. 그럼 상감마마만 믿습니다. 변심 하시면 저는 죽어버리겠습니다.

그런 방정맞은 소리 하는 게 아니다. 네가 죽으면 나도 못 산다.

하고 고종은 이상궁을 끌어 앉았다. 이상궁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애인을 마치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듯이 헤친 가슴을 내맡겼다.

흐흐흐… 내가 임금이 돼서 제일 기쁜 것은 너하고 이렇게 지낼 수 있게 된 것 뿐이다.

그래도 저는 걱정입니다.

뭐가?

이번에 들어오실 중전이 강짜가 심한 규수가 아닐까 하고요.

내가 여편네 하나를 못 꺾을 남자같이 보이느냐?

그러나 누가 알아요? 상감마마 젖혀놓고 세도 부린 중전이 전에도 계셨다는데요.

궁녀들은 항상 역대의 왕비들을 화제에 올렸고 특히 궁녀들과 임금 사이의 치정관계에 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장차 맞을 자기의 비(妃)가 자기를 맞고 세도를 부릴영악한 여성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더구나 자기 생각대로 못할 것이 없는 대원군 조차도 자기의 세력 유지를 위해서 간택한 며느리인 왕비가 배은망덕하게 자기의 세력을 타도하고 덤빌 강적이 되리라고는 천만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선왕 삼년상도 지냈으니 곧 왕비를 책립(冊立)해야 한다.

고종 삼년 삼월부터 이 문제는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궁중에선 조대비가 서둘렀고 조정의 여러 대신들도 이 대혼(大婚) 문제를 둘러싸고 모두 자기들 파에 유리한 규수를 천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대원군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부인 민씨에게 상의했다. 당시의 권력으로 보나 며느리 간택의 시아버지 입장으로 보나 그에게 거의 결정권이 있었다. 문제는 어떤 집의 규수로 정하느냐에 있었다. 문벌도 봐야겠고, 규수의 인물도 봐야겠고, 자기 세력 유지에도 편의 한, 세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밤중 침실에서 부인 민씨에게 이 문제를 여러 번 상의했다.

부인, 왕비를 빨리 간택해야겠는데, 적당한 규수가 생각 안 나오?

글쎄요. 좋은 규수를 골라야겠는데요…

부인은 이렇게 대답하기도 했고

궁중과 대신들의 동정은 어떤지요? 남들이 천거하기 전에 대감이 먼저 마음에 든 규수를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재촉하기도 했다.

좋은 혼처가 생각 나지 않소. 그럴 듯한 규수는 역시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은데 좋은 규수를 둔 집이 없소?

며느리 보는 데는 역시 시어머니 의견이 큰 영향력을 갖는 법이다. 부인 민씨는 이 기회에 자기 친정편인 민씨 문중에서 왕비 될 규수를 추천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까운 친정엔 적당한 규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일가 집인 민치록(閔致錄)의 딸이 똑똑한 것을 어릴

때 본 기억이 떠 올랐다. 그러나 자기 친정 쪽에서 추천하는 것이 좀 거북하기도 했다. 그것은 대원군이 처갓집을 무시하는 형편인데다, 규수의 집안 문벌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대감께 좋은 규수가 생각 안 나시면 우리 친정 민씨집은 어떨까요?

당신같이 못나지 않고 규수만 잘 두었으면… 허지만 민망하지만 민가는…

대원군이 부인을 놀리는 말투로 얘기하므로 부인은 오히려 말하기가 쉬웠다.

민가 민가 하시지만… 내가 못났다 하시지만 상감 될 아들을 낳은 건 민씨집 딸의 내가 아닙니까?

허허허 그렇군. 어디 우리 왕자(王子) 같은 왕손(王孫)을 낳아 줄 규수가 민씨 집안에 또 있을까?

염려 마세요.

허지만 민씨도 왕비 된 뒤엔 모두 좋게 못했어. 태종(太宗)의 민비는 그 외척(外戚)이 세도 부리다가 장인과 처남이 역적으로 몰렸거든. 이번에도 민비를 세웠다가 내가 역적으로 몰리지 않을까? 허허허…

대감 그런 흉한 소린 마세요.

아냐. 숙종(肅宗)의 민비도 아들을 낳지 못했어. 암만 해도 민비는 왕실로선 궁합이 맞지 않는 모양이야.

대감도 그런 미신 같은 말씀을 하셔요? 태종의 민비는 그래도 좋은 아드님을 낳으시지 않았어요.

뭐 웃음의 소리로 한 거요. 허지만 우리가 이번에 민가를 추천하면 나를 못마땅해 하는 놈들이 그전 전례를 들고 나와서 반대할 거요.

그런 반대래도 규수만 좋으면 우리가 미는 며느리감을 누가 막겠어요.

하고 부인은 자신 있게 말했다.

실은 민치록의 딸이 똑똑했어요. 지금쯤 어엿한 규수가 돼 있을 겁니다.

치록이가 누구지?

대원군에게도 얼른 생각나지 않는 무명인사의 이름이었다.

벼슬은 군수밖에 못하고 죽은 지도 오래니까 대감은 잘 모르실 거야요.

아, 알겠소. 아비도 없는 딸이군.

어머니도 없는 외로운 소녀지만, 임금 처가의 세도를 제일 미워하신 대감이 그런 말씀하셔요?

음, 그래. 왕비의 친정이 무력한 건 도리어 좋소. 문제는 규수인데.

그 규수가 잘 생겼다니까요.

민비를 세우고 그 덕으로 민씨가 좀 세도를 써도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습니까?

음, 그럼 그 규수를 당신이 다시 선을 본 뒤에 생각해 봅시다.

부인 민씨는 자기가 시골에 있는 그 집에 가면 무슨 소문이 날까 두려워 하고, 몰래 가마를 여주(驪州) 땅까지 보내서 규수를 운현궁에 데려다가 하루를 묵혀서 보내고 비단 옷감도 선사했다. 그리고 다른 눈치는 보이지 않고 적당한데 혼처를 구해 주겠다고 외로운 소녀를 위로해 보냈다. 대원군도 그때 잠깐 규수의 선을 보았다. 규수를 보낸 뒤에 대원군은 먼저 부인에게 말했다.

음, 그만한 규수면 됐소. 역시 당신의 눈이 높군.

그것 보세요. 대감도 이젠 처갓집에 절해야 합니다.

허허허, 벌써부터 민비의 세도를 쓰는군.

세도가 아니라 기뻐서 그래요. 며느린 역시 우리 시부모가 골라야 해요.

하고 부인은 기뻐하면서 친정 자랑을 했다.

대원군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서 조대비에게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서 가장 적당하다고 추천했다. 조대비는 대원군의 말이면 무조건 듣는 처지였고, 더구나 며느리뻘의 간택이라 곧 찬성했다. 이 말을 들은 부인 민씨는 기뻐했다. 그러나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러나 그 딸만 남았던 집이니 딸을 궁중에 바친 뒤에 계모가 외롭겠어요. 이 기회에 적당한 양자를 넣어서 대를 이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부인에겐 다른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이었다.

그렇군. 그 집을 이어 줄 양자론 누가 좋겠소?

하고 대원군은 당연한 말이라고 찬성했다. 지금 까지는 보잘 것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양자도 두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낸 말이니, 그 집의 양자론 내 친정 동생 승호(升鎬)가 좋겠어요.

대원군은 자기 처남을 그 집의 양자로 넣어서 고종과도 처남 관계를 맺게 한다는 것이 매우 마음 든든한 묘안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원군 처남 민승호를 국척(國戚)의 당주(當主)인 양자로 밀어 넣었다.

국혼(國婚) 절차는 빨리 진행되었다. 궁중에서 삼간택(三揀擇=세번째 선 보는 마지막 절차)을 마친 대왕비 조대비는 교서(敎書)로 [고첨정(故僉正) 민치록의 딸과 대혼(大婚)이 결정 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죽은 국구(國舅) 민치록에게는 즉일로 영의정을 추직(追職)하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을 봉했다.

그 뒤에는 십오세의 신랑인 고종은 비로소 맞선 보는 친영례(親迎禮)를 올렸다. 그 예식을 끝낸 뒤에는 곧 신랑 신부인 고종과 민비가 사사로운 가인(家人)의 지위로 운현궁에 행차하여 친부모인 대원군 부부에게 절을 하고 새 며느리인 민비도 시부모에게 보였다. 그 다음 날인 고종 삼년 삼월 이십이 일에는 고종이 성인이 된 임금으로서 인정전(仁政殿)에서 백관(百官)의 하례(賀禮)를 받고 전국의 죄수에게도 대사령(大赦令)을 내려서 나라의 경사를 축하했다.

꿈결에 왕궁의 안 주인이 되고 이천만 백성의 국모(國母)가 된 민씨는 왕보다는 한 살 위인 십육 세의 시골 소녀였다. 그러나 여주 시골에서 가난한 편모 슬하에 고생만 하던 민비지만, 세상 물정도 모르고 궁녀와의 풋사랑에만 취해있는 남편 고종보다도 세상물정과 백성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성이 영리하고 영특해서 여걸(女傑)다운 천질까지 있었다. 비록 가난한 시골 집에서 편모 아래 자랐지만, 양반집 전통으로 글도 배워 여러 면에서 고종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이 신부 민비는 첫날밤부터 신랑 고종에게 냉랭한 소박을 맞았다. 궁중에선 중전(中殿)마마로 섬겨 바치고 국민들도 국모로 우러러 보았으나, 민비는 깊은 궁중에서 고독한 생과부의 한숨만 쉬면서 새로운 인생의 고민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이 신부 민비를 소박한 것은 물론 후궁의 요화(妖花) 이상궁의 매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 들어온 어린 왕비로서 궁녀에 대한 강짜도 하지 못하고 꾹 참고 겉으로는 정숙 온순한 왕실의 정부(貞婦) 노릇을 했다. 아직도 처녀인 민비는 남편의 애정에 굶주린 비애를 책 읽는 일로만 위로하면서 남편의 마음이 변해 주기만 기다렸다.

결국 민비는 그 후 삼 년 동안이나 공부하는 동안에 후일에 여걸 정치가로서의 실력을 기를 수가 있었다. 민비는 많은 독서를 하는 가운데서 자기가 나라 일과 백성을 지도할 뜻을 품고 특히 맹자(孟子)와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애독하고 연구했다. 민씨는 거기서 사회학(社會學)과 정치학(政治學)과 국가 흥망의 역사철학(歷史哲學)을 배웠던 것이다.

 

 

 

空房回春

 

고종왕비로 민비가 등장한 데 대해서는 천하가 깜짝 놀랐다. 부모도 없는 가난한 시골 처녀가 일약 중전마마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민비의 부친 민치록은 벼슬이라고는 군수밖에 지내지 못했으며, 살기가 어려워서 서울 안국동에서 살던 집까지 팔고 여주 땅에 사는 친척을 의지하고 낙향(樂鄕)해서 농사를 지어 연명했다.

그러므로 민비의 소녀 시절은 불행했다. 어려서 모친을 잃고 계모를 맞았으나 얼마 후 부친도 세상을 떠났다. 민비는 이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느라고 고생을 했다. 그러나 그런 고생 중에도 밤으로 글공부를 해서 재원(才媛)이란 칭찬을 받았고 여자로서 해야 할 모든 집안 일을 솜씨 있게 처리하여 근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저만 하면 재상 집 맏며느리 노릇도 잘할 처녀다. 아들로 태어났으면 큰 과거를 할 텐데 딸로 태어난 것이 아깝다.

하고 칭찬해 오던 시골 사람들은 그 처녀가 일약 국모(國母)가 되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중전까지 된 것은 역시 하늘이 낸 복이지만 대원군의 솜씨가 대단하다. 본인이 아무리 잘났기로 부모가 다 죽고 보잘것 없는 집의 혈혈 고아를 중전으로 간택한 것은 역시 대원군다운 영안이다.

대원군 부부는 상감의 생가족으로 중전의 처가족으로 완전히 궁중세력을 독점했으니 앞으로의 세도가 더욱 극성맞을 것이다.

하면서 은근히 대원군의 처사를 빈정대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로서 최고의 영위(榮位)에 오른 그 민비가 고종의 소박으로 독수공방(獨守空房) 생과부 노릇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수군거렸다.

이름만 중전마마면 뭘 해. 여자는 역시 남편의 사랑을 받고 생남생녀해서 일가 화목이 제일이지. 차라리 시골 농부의 아내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후회할 거야. 그러기에 분수에 넘친 일시의 호강은 도리어 화가 되는 거야. 민중전을 그렇게 소박하는 건 이상궁이 양귀비 같은 미인이라 그렇다지.

결국 여성인 민비를 동정하는 소리였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그렇게 좋아하던 대원군조차 민비가 왕손을 낳아 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궁내 정보에 정통한 그는 고종이 궁녀 이씨를 사랑하고 민비에게 냉담한 사실은 알았지만, 민비가 삼 년동안이나 처녀로서 독수공방할 정도로 고종이 멀리하고 있는 침실의 비밀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남자로서 열 계집 백 계집을 마다 할 리가 없다는 것은 자기의 오입 경험으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자의 얼굴을 보고 싶은 대원군은 부인 민씨에게까지 싫은 소리를 했다.

민중전은 암만해도 자복이 없나 보오. 무슨 병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젊은 몸으로 삼 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다니 역시 숙종의 민비처럼 아들을 못 두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요. 그래서 처음에 내가 민가는 어떨까 했더니 당신이 졸라대는 통에 그랬지만, 아마 큰 실책이었나 봐.

잘 된 건 영감 힘이요, 못 되면 민가 탓이군요. 그렇지만 두고 보세요. 상감이 아직 젊고, 삼 년쯤 태기가 없대서 걱정할 건 없습니다. 결혼 후 십 년 만에 초산하는 일도 흔하지 않습니까?

아니, 십 년 동안이나 손자를 못 보고 기다리란 말이요? 정 그렇다면 빈궁(嬪宮)이라도 맞아서 손자를 빨리 봐야지.

빈궁이 아니라도 이상궁이 있지 않습니까? 이상궁과는 중전보다 가까이 했어도 역시 태기가 없지 않아요? 그렇다고 상감에게 자복이 없다는 것도 아니니 좀 더 기다려 보세요.

대감보다 내가 더 걱정이라 불공도 드리고 명산 대천에 기도도 올리게 하고 있으니까 멀지 않아서 경사로운 영험이 있을 겁니다.

그런 미신을 어떻게 믿겠소.

대원군은 백성들의 미신은 금하고 있었으나 궁중에서 여전히 행해지는 뿌리 깊은 미신 행사는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이상궁의 몸에 태기가 있다는 소문이 궁중에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이상궁의 지위가 중전마마인 민비보다도 더 높아질 듯한 대우가 공공연히 엿보였다.

사태가 이쯤 되자 질투를 꾹 참고 자중해 오던 민비도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이상궁을 죽여 없앨 질투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대원군이 공공연히 이상궁에게 보약을 구해다 주는 것도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영리하고 치밀한 민비는 고종에게만은 조금도 그 문제로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오로지 애정을 자기에게 돌리려는 데만 전력을 기울였다. 첫째는 이상궁에 지지 않을 만한 여자의 매력으로 고종의 애정을 끌려고 했다.

궁녀 이가 년이 상감의 눈에 고운 꽃으로 보인다면 나도 고운 꽃으로 보이게 향기와 웃음으로 대해 보자.

여자로서 남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사랑을 받으려는 것은 귀천의 차이가 없는 본능적인 욕망이었다. 민비는 그전에 소홀히 여기던 화장과 의상에도 각별한 힘을 썼다. 그런 몸단장을 했는데 고종이 본 척을 않자 실망과 분함이 들끓었다. 실망한 얼굴을 거울에 비쳐 보고는 쓸쓸한 자기 얼굴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웃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질투보다도 자존심이 궁녀에게 지고 싶진 않았다. 쓸쓸한 웃음을 남자의 마음을 유혹할 수 있는 미소(媚笑)로 꾸며 보기도 했다.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부(妖婦)의 웃음이란 어떤 것일까 하고 거울 속의 얼굴로 기생 표정도 창작해 보면서, 소박맞은 젊은 생과부의 심정을 위로했다.

내 미모로 부족하면 내 지식으로, 아니 상감의 권력에 대한 야심을 불태워서라도 내 존재를 알리고, 상감의 마음을 끌어야겠다.

애정에 굶주린 민비는 차츰 정권에 대한 욕망이 생기고 있었다. 대원군이 언제까지나 고종을 무시하고 궁중의 사생활까지 뒤흔드는 것이 보기 싫었다. 대원군의 섭정을 빨리 고종의 친정(親政)으로 변경시키고, 자기 자신이 권력을 잡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고종을 자기의 애정과 정치적 식견으로 신임받아야 했다. 굶주린 애정도 충족시키는 동시에 오랫동안 책에서 배운 정치적 포부도 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십이 되도록 숫처녀로 정력을 써 보지 못한 민비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이미 폭발점에 달해 있었다. 민비는 대원군도 이상궁도 죽음도 두렵지 않은 굳은 결심을 했다.

만일 일개 궁녀인 이상궁이라는 애정의 적이 없이 처음부터 고종의 총애를 받고, 여성으로서의 행복만 가졌다면, 그리고 이상궁이 고종의 아들을 낳지 않고, 설사 낳았더라도 대원군이 조급하게 그 궁녀 소생의 아들을 세자(世子)로 봉하려고까지 안 했더라면 민비와 대원군과의 피투성이 권력 투쟁은 일어나지 않았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원군은 자기가 고른 며느리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비참한 몰락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원군까지 몰아낼 야망을 품게 된 민비는 이상궁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질투의 권화(權化)로 돌변한 민비는 노골적으로 이상궁 학대를 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이상궁을 불러 세워놓고 죄인 다루듯이 날카로운 문초를 했다.

이년, 요망스러운 미태로 상감님 총명을 흐리게 해서 공부도 못하시게 네 방에 끌어 모시고 추잡한 짓을 한다니, 그러고도 무엄한 줄 모르느냐? 도대체 너는 중전인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런 행동을 하느냐?

상감께서 가끔 제 처소에 행차 하십니다마는 제가 무슨…

이년 가끔이라니? 하루에 두 번 세 번 가셔도 가끔이냐?

상감께서 네 방에 왜 그렇게 자주 가시느냐? 네가 무슨 아양을 부려서 그런 것이지?

오시는 상감을 저로선 거역할 수도 없사옵고..

네 배에 애가 들었다는데 사실이냐?

민비의 말은 독이 올라서 떨렸다.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니, 네 뱃속의 일을 몰라.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배를 갈라서 보겠다.

아마 그런 듯도 합니다.

몇 달 됐느냐?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궁중에 소문이 파다할 제야 여러 달 된 게 아니냐?

민비는 상 사람의 욕과 다름없는 말을 했다. 이상궁도 바른대로 대지 않을 수 없었다.

댓 달 된 것 같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세자로 봉해 주신다는 어른들 말이 정말이냐?

그런 말씀은 듣지도 못하였으며, 소녀로서는 더욱 생각조차 못할 말씀입니다.

상감께선 무슨 말씀하시더냐?

상감껜 말씀도 못 올리고 있습니다.

이 간롱스러운년, 또 거짓말이냐? 왜 못 알려 드렸느냐?

부끄러워서…

부끄러운 년이 어린 임금을 유혹했어? 상감마마를 언제부터 농락했느냐?

농락이란 말에는 이상궁도 변명을 했다.

소녀가 어떻게 감히 상감마마를 농락하겠습니까?

그럼 마다는 네 몸을 상감께서 억지로 농락 하셨단 말이냐?

이상궁은 그렇다고 할 수는 더욱 없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흥, 어쩌다가 모르는 새에 애까지 뱃느냐? 대관절 언제부터 상감을 가까이 모셨느냐?

중전마마께서 들어오시기 전부터…

이상궁은 이 말에는 좀 기운이 났다. 민비보다 임금의 사랑에는 기정사실의 우선권이 있다는 대답이었다. 민비는 더 묻고 싶지가 않아졌다.

네 지난 죄는 더 묻지 않겠다. 그러나 오늘부턴 상감을 가깝게 해선 안 된다.

내 명이 못마땅하냐? 상감을 가깝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네, 그리 하오리다.

꼴 보기 싫다. 그만 물러 가거라.

이상궁은 겁도 나고 분하기도 해서 후궁의 자기 방에 가서 푹 엎딘 채 혼자 울고 있었다.

그때 고종이 소리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엎드린 이상궁의 등을 끌어 안았다.

내가 누구냐?

고종은 농을 걸었다.

모르겠습니다.

쌀쌀히 쏘아 붙이는 듯한 이상궁의 어깨가 떨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고종을 놀라게 했다.

너 우는구나. 왜 우느냐?

그러나 이상궁은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상감마마, 낮에 이렇게 제 방에 오시면 안 됩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어디 글을 읽고 있을 수 있어야지. 대관절 왜 우느냐?

하고 고종은 억세고 능란한 청년의 팔솜씨로 여자의 몸을 끌어 일으켜서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씻어 주었다. 이상궁은 금시에 마음이 풀렸다.

상감마마 이번이 마지막으로 소녀와 멀리해 주십시오.

하면서도 방긋 웃어 보였다. 그 원망스러워하는 태가 더욱 귀여워진 고종은 이상궁의 입을 자기 입으로 막고 비벼대면서

그런 말 못 나오도록 이렇게 막아 버리겠다. 내가 오는 것이 그렇게도 싫으냐?

싫을 리야 있겠습니까마는, 제 몸이 괴로워서 그럽니다.

왜?

제 몸이 점점 무거워져서요…

흐흐흐, 알겠다. 어디 내 옥동자가 얼마나 커졌나, 아버지 손으로 배 좀 만져 보자.

어마, 부끄러워. 그러시지 마세요.

하면서도 이상궁은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고종의 손을 막지는 않고 행복스러운 듯이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민비의 강짜로 혼났다는 말은 알리지 않았다. 고종은 이상궁의 배를 어루만지는 쾌감에 취해서

이런 경사에 울긴 왜 우는 거냐. 네가 옥동자를 낳으면 맏아들이니까 세자가 된다. 그러면 너도 지금보다 떳떳하게 된다. 그런데 왜 울었느냐?

하고 고종은 제법 어른처럼 이상궁을 위로했다.

너무 기뻐서 울었습니다. 그런 말씀하시면 중전마마께서 노하십니다.

하고 그제야 민비의 말을 했다.

아기가 커가기 때문에 몸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구나. 중전이 질투하고 너를 괴롭히지나 않더냐?

중전마마도 여자이신데, 왜 저를 미워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상감께서 저를 멀리 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중전이 뭐라고 해도 걱정 마라.

상감마마 아기만 무사히 낳아 드리면 저는 죽어도 원한은 없습니다.

이상궁은 민비와 충돌을 하는 것이 겁났다. 그래서 민비에게 혼난 사실을 고하지 않았다.

민비의 저주 가운데도 이상궁의 뱃속의 왕자는 자라고 세월은 흘러서 고종 오년 사월에 첫 아들을 낳았다. 민비의 초조한 고민은 극도에 달했다. 대원군은 왕손(王孫)을 본 기쁨을 참지 못하고 이상궁 소생에게 완화군(完和君)이라는 칭호를 봉하고 왕손 모자를 지극히 사랑했다.

내 몸에서 아들을 못 낳으면 저 궁녀 소생이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된다.

이렇게 될 장래를 생각한 민비는 이상궁 모자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 올랐다. 당장에 그 모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대원군이 원수 같았다. 그러나 민비는 그런 표정을 일체 나타내지 않고 고종과의 화합에만 전력을 다하면서 그럴 기회만 기다렸다.

하루는 고종이 내전(內殿)에 들렸다가 민비 방에는 전과 같이 들리려고도 않고 그 방 앞의 마루를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단장하고 있던 민비가 기민하게 방문을 열고 나가서 고종의 앞을 막고 요염한 웃음을 띠우며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있는 듯이

상감마마, 지금 왕실과 국가에 큰 불행한 일이 터질 것 같습니다. 잠간 제 방으로 들어 오십시오.

하며 손을 잡을 듯이 청했다. 이제는 자기의 지위가 어떻다는 것도 알고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막연히 나마 느끼게 된 고종은 깜짝 놀라서 민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큰일인데 나를 놀라게 하오.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있소?

지금 나라가 망하고, 상감께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를 위태한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상감께서 큰 용단을 내리지 않으시면…

어서 말을 하오. 무슨 역적음모라도 있는 것이요?

고종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실은…

민비가 말을 하려고 할 때에, 망을 세웠던 시녀가 당황히 뛰어와서 알렸다.

중전마마, 지금 대원군께서 내전으로 오십니다.

민비는 당황해 했으나 곧 침착하게

상감, 오늘 자정쯤 다시 오십시오.

하면 뒷문으로 고종의 등을 밀어서 내보냈다. 고종은 중대문제가 대원군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예감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그럴 리야…)

고종은 평소에 사이가 좋지 못한 민비와 대원군이라 그러는 줄만 알았다. 즉 대원군이 싫어하는 민비방에 고종이 낮에 와서 있는 것을 보면 민비의 입장이 거북해서 그러는 줄만 알았다. 자기로서도 민비 방에 와 있는 것을 대원군에게 알리고는 싶지 않았다.

그날 밤 자정 때쯤 고종은 보통 옷 차림으로 민비의 방을 찾아갔다. 민비는 이런 깊은 밤에 자기 방에서 고종을 맞게 된 것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종에게 국가의 중대한 기밀을 알리겠다고 약속한 민비는 화려한 밤 화장을 하고 금침까지 깔아 놓고 있었다. 준비시켰던 술상도 시녀들이 들여 오고 곧 물러나갔다.

고종은 지금까지 소박하기 만하던 민비의 다정스러운 여자 모습을 새로 발견하고 남편으로서 미안한 감조차 들었다. 민비는 술을 권하면서 웃기만 했다. 고종의 눈에는 오늘밤 따라 민비의 얼굴이 고와 보였다.

우선 술을 드십시오.

민비는 술잔을 권했다. 고종은 잔을 받아 마시면서도 중대한 말을 묻고 싶었으나 민비의 정성에 동정심이 앞섰다.

(역시 여자였구나. 중대한 얘기를 한다더니, 금침을 펴고 기다린 것은 남편의 정이 그리워서 나를 끌어오려는 수단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래도 좋다고 안심되었다. 아까 낮에 놀란 듯이 무슨 역적음모라도 있어서 그것을 알리려는 것이 아닌 것이면 얼마나 다행하랴 하는 안심이었다.

민비는 고종에게 술을 권한 뒤에 갑자기 수심을 짓는 듯한 엄숙한 태도로

상감마마

하고 고종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참 낮에 하려던 중대문제란 뭐요?

고종은 물었다.

상감께서는 인제 이십 세가 다 되신 어른 임금이십니다. 그런데도 대원군은 섭정(攝政)으로 국정을 농단해서 국내외로 원성이 높습니다. 특히 상감을 사사로운 어린 아들처럼 무시하고, 상감의 허명만 이용하고 왕실까지 업신여기니 신하로서 삼가는 태도가 일호도 없습니다. 더구나 무모한 쇄국 외교정책으로 서양의 강대국들은 물론이요, 옛날부터 친선 하던 청국까지 대원군의 외교정책에 놀라고 있습니다. 이런 국내외의 정세가 위급한 때에 빨리 대원군의 섭정을 중지시키고 상감께서 친정(親政)을 하셔서 왕권을 회복하시고 국가의 유지와 번영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고종은 지금까지 소박만 맞던 민비가 자기에게 임금 대접을 하면서 정치문제를 상의하는데 감격했다. 이것이 그에게는 처음으로 듣는 정치문제에 관한 말이었다. 그는 이제야 자기가 임금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듯했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나라를 대원군이 망쳐 놓아도 그 책임은 상감께 있고 왕실 열성(列聖)에 대한 죄도 상감이 져야 하게 됩니다. 빨리 친정을 하셔야 합니다.

민비는 현실의 정치문제를 비판하고, 이론적으로는 춘추좌전(春秋左傳)과 맹자(孟子)에서 배운 왕도(王道)와 정치철학을 도도히 강의했다.

음, 중전의 말이 옳소. 의당 그래야 할 것을 내 불찰로 국정을 섭정에게 일임하고 전연 관계하지 않았지만 금후론 빨리 친정을 회복해야겠소. 그러나 나는 아직 대신들과도 생소하고 지식과 경험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그럼 제가 내조에 힘쓰겠습니다. 대신들도 대원군의 세도에 마지못해서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사람이 태반이니, 그들과 비밀리에 상통해서, 우선 친정복귀(親政復歸)의 대의명분으로 힘을 규합하면 됩니다.

그렇게 대신들의 찬성을 얻을 수 있소?

예, 제가 비록 여자지만 상감과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있습니다.

고종은 민비의 말이 고마웠고, 여장부다운 권위까지 느꼈다. 민비는 고종이 자기 말에 찬성한 것이 기뻤다. 그와 동시에 정치문제에는 백지같이 단순하면서도, 역시 권력에 대한 욕망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내인 자기에게 애원하다시피 경의(敬意)까지 표하는 순진성에는 민망스럽기도 했다.

이 순간 민비는 일개 여성으로 돌변하더니 고종을 남편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의 지위로 내려가서 거의 노골적인 성적 매력을 고종에게 뿜었다.

상감, 오늘밤은 밤도 늦었으니 여기서 주무세요.

민비는 부끄러운 듯이 추파를 던졌다.

음, 글세…

고종은 지금까지 민비를 소박만 해온 것을 후회했다.

이상궁이 여자라면 저도 여자입니다. 하찮은 궁녀에게 질투를 하는 건 체통이 서지 않아서 참고만 있었지만, 제가 명색만의 중궁으로 얼마나 외로운 신세 한탄을 하면서 울었는지 모릅니다.

미안하오.

고종은 비로소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사과했다. 첫날밤에 옷도 벗겨 보지 않은 채 삼,사 년 동안이나 소박해 온 민비에 대해서 그는 처음으로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꼈다. 이미 이상궁에게서 남녀 관계에 능숙해진 고종은 노처녀인 민비의 옷을 벗기고 첫날밤의 화합을 했다.

민비는 비로소 여자로서의 행복을 느끼고 그날 밤을 행복하게 지냈다.

그 뒤로 민비는 육체적 애정으로도 고종을 완전히 매혹시키고 정치적으로는 지도하는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민비의 방에는 상감의 출입이 잦고 이상궁의 방에는 발길이 점점 적게 되었다. 이렇게 고종의 애정과 신임을 독점하게 되자 민비는 교묘하고 치밀한 방법으로 정치적인 비밀 운동의 그물을 정계에 펴기 시작했다.

목표는 대원군 축출을 위한 고종의 친정 회복(親政回復)이었고, 대원군 실정으로 위험하게 된 배외정책(排外政策)을 꼬집고 나섰던 것이다. 민비의 비상한 활동과 국내외의 사정이 대원군에게 불리한 것을 간파한 각 파의 정객들은 은연중에 민씨의 대원군 타도 운동에 호응해왔다.

 

 

 

深宮毒蔘

 

대원군의 방 안에서 호랑이 잡는 식의 무모한 배외정책을 직접적인 공격 목표로 삼고, 그의 독제 권력을 타도하려는 민비의 교묘한 비밀 정치 운동은 착착 효과를 거두어 갔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자기 권력에 도취한 대원군도, 그의 치밀한 정보망도 일개 심궁(深宮)의 여자인 민비가 그런 강적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 무렵에 민비는 애정 문제에 있어서도 완전히 이상궁에게 승리하고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민비는 대원군이 자기의 비밀정치 운동을 미리 알까 두려워 해서 일부러 이상궁에 대한 학대를 했다. 그렇게 하므로 밖으로는 개인적인 질투에 여념이 없는 여자라는 연막(烟幕)을 펴고, 안으로는 역시 꼴 보기 싫은 이상궁의 존재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계략이었다.

이상궁의 소생의 왕손(王孫)을 세자로 삼을 기미를 알자 자복 없는 민비가 미안한 줄도 모르고 질투가 심해진 모양이오.

대원군은 부인 민씨에게 며느리 흉을 보면서 경멸했다. 민비가 못마땅해진 대원군은 중전마마라는 존칭도 부르지 않고 민비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남편의 말에 대해선 부인 민씨는 아이도 못 낳는 여자를 며느리로 추천했다는 남편의 조롱이 두려워서 친정 출신의 민비를 두둔하기도 거북한 입장이었다.

민비가 아무리 질투를 해도 왕실의 대를 잇는 데는 맏 왕손의 완화군을 세자로 봉해야 하오. 대왕대비도 찬성이시고…

대원군은 그 전에도 해오던 말을 부인에게 또 다짐했다.

그러던 차에 이상궁 소생의 완화군은 건강하게 자라다가 삼대 과부 왕후들의 귀염 가운데 성대한 돌 잔치로 축복 받은 뒤에 원인도 모르게 갑자기 죽어 버렸다. 그리고 이어 이상궁도 자하문 근처의 작은 여염집에 감금되고 말았다. 이상궁이 궁중에서 축출된 것은 고종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만 뒤에는 민비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 이상궁이 밤중에 담을 넘어서 외간 남자와 밀통 했다는 음해가 고종을 노엽게 했기 때문이다.

그년이 상감께서 자기를 멀리하자, 무엄하게도 상감께 분풀이로 외간 놈과 밀통을 했습니다.

하고 민비는 고종을 충동했다. 고종도 반신반의했으나, 밤에 담을 넘어 다니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이 나서기도 했고 이미 총애하는 민비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도 궁중에서 말썽이 되는 이상궁을 아주 내보내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이상궁도 민비의 밀령을 받은 자객(刺客)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상궁을 죽인 것은 민비가 시킨 보복이다.

완화군을 죽인 것도 민비가 시킨 것이다.

이런 소문이 돌았으나 이때는 이미 민비가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정계에도 은연한 세력을 펴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 진상을 폭로할 사람은 없었다.

대원군도 일개 궁녀의 편을 들고서 며느리 민비를 공격하면 위신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모른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인(小人)과 여자는 역시 할 수 없다.

하고 민비에 대한 의심에는 쓴 입맛만 다셨다. 그뿐 아니라 포대기 속에서 원인 모르게 죽은 왕손 완화군을 세자로 세우려던 자기의 계획은 이미 청국의 압력으로까지 반대를 받아서 그로서는 더 언급하기도 거북했던 것이다.

완화군이 죽기 전에 민비는 완화군의 세자 책립(冊立) 운동이 일어나자, 청국의 힘으로 대원군의 계획을 꺾으려고 했다. 마침 이유원(李裕元)이 동지사(冬至使)로 청국에 가게 되자 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은 그에게 비밀 사명을 주어 보냈던 것이다.

민비는 청국의 총리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후한 예물을 보내고 대원군의 무모한 전횡(專橫)으로 조선 왕실이 위태롭다고 밀고했다. 천한 궁녀의 소생인 서자(庶子) 완화군으로 세자를 삼는 것은 왕통(王統)과 천륜에 어긋나는 처사이므로 중전 민비가 낳을 왕자로 정통을 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원군의 고집은 청국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소. 세계 정세도 모르고 외국과 충돌만 하는 그 로서 자기 어린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더니, 세자 문제도 좌지우지해서, 현숙한 왕비를 그토록 괴롭게 합니다.

청국에서는 민비의 청대로 조선 조정에 대한 공식 외교문서를 보내서 완화군 세자 책립을 반대하는 의향을 전했던 것이다.

이홍장의 권고 문서를 가지고 돌아온 이유원은 조정에 보고한 뒤에 대원군에게 자기가 민비의 청으로 그런 문서를 받아 온 것을 알까 두려워서

청국의 세계 각국에 대한 외교 정보가 신속하고 빠른데는 놀랐습니다. 이홍장은 벌써 우리 조정에서 백성에게도 비밀에 붙이고 있는 정책을 알고 있으며, 우리도 모를 지방 소식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완화군 문제만 하더라도 아직 정식으로 논의된 바도 없는데, 그런

권고 서한을 전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더니 당신도 완화군 세자책립에 찬성이냐고 하는 핀잔을 받았습니다.

이홍장은 그럴 자요. 그전에 청국 명령이라면 굽실굽실하던 우리나라가 요즘 좀 줏대가 잡히자 나 하는 일엔 모두 못마땅해 하니까요.

대원군은 민비의 수단에 농락된 줄도 모르고 도리어 자기의 위력을 자랑했다.

이 문제 뿐 아니라 민비는 대원군이 모르는 동안에 이미 대원군 반대 세력을 정계 각파에서 규합하는데 착착 성공하고 있었다. 민비는 대원군을 이용해서, 겉으로는 대원군 자신이 자기의 심복 부하를 조정 요직에 등용시키는 형식으로 민비와 미리 결탁한 인물들을 교묘하게 등용했다.

민비 친정의 오라버니 승호(升鎬)를 비롯한 규호(奎鎬), 겸호(謙鎬), 태호(台鎬)도 대원군이 인심을 쓰는 형식으로 등용되었지만 민비가 미리 사전연락을 했으며, 또 대원군보다는 민비에게 핏줄이 가까웠다. 그러나 대원군은 형식상 자기가 벼슬을 시켜 주었으니까 민비 보다는 자기편을 들리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조대비의 조카 조영하(趙寧夏), 조성하(趙成夏)도 대원군에 대한 불평이 있으므로 민비는 오라버니 민승호와 결탁하도록 했다. 그리고 전직에서 감등되어서 겨우 붙어있는 안동 김씨의 병기(炳冀), 병국(炳國)도 끌어 넣었고 실권도 없이 대원군에게 이용만 되고 있는 영의정 조두순(趙斗淳)까지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민비는 대담하게 대원군 친형과 맏아들까지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이용해서 대원군의 정치적 기밀을 훔쳐냈고 후일에 후대할 미끼로 잡아두었던 것이다. 대원군의 맏아들 이재면(李載冕)은 사람이 미련해서 자기 부친에게도 자식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이런 어리석은 점을 이용했고, 대원군의 형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도 아우에게 멸시당하는 불평을 이용해서 민씨는 접근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서원 철폐와 양반 계급 멸시에 불평인 유림들과 결탁을 하고 유림의 여론을 좌우할 거물 최익현(崔益鉉)과 대원군 타도 운동의 밀약을 하는데 성공했다. 이 모든 계획과 방법은 민비가 그들과 한번도 만나지 않고 깊은 궁중 규방(閨房)에서 지정되었다.

그러나 대원군도 강짜 심한 며느리가 완화군 문제로 이상궁 모자를 박해하고 고종의 총애에만 취해서 단꿈을 즐기는 요부(妖婦)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비와의 비밀 연락은 모두 대원군의 처남, 즉 대원군 부인의 친 동생인 민승호가 맡아서 민비의 수족같이 활동했다.

민승호는 호적상으로는 민비의 오라버니였지만 민비와는 먼 촌 일가에서 양자로 들어왔으므로 친누이인 대원군의 부인보다 혈통 관계로는 남이었다. 그러나 민비의 수단과 권력의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대원군 부부를 적으로 삼고 민비의 수족이 되어서 암약했던 것이다.

민비의 정치 세력이 암암리에 확장되어 갈 때 민비는 최대의 행복의 날을 맞았다. 고종 팔 년 동짓달에 민비 몸에서 첫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민중전께서 첫 아드님을 낳으셨다. 나라의 큰 경사다.

민씨는 이제는 당연한 세자감인 첫아들을 낳았으므로 기뻐했고 물론 고종도 기뻐했다.

민씨의 세력은 요지부동의 큰 기둥을 세운 셈이다. 그러나 민비의 행복감은 후산(後産)의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사흘 만에 악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태중에서부터 병을 지니고 출생한 아이는 첫 울음을 울었지만 대변 불통이라는 괴상한 병으로 거의 죽어가는 애처로운 생명이었다.

대원군은 어린 왕손(王孫)의 위독을 구하려고 인지 혹은 독살하려고 인지 산삼 한 뿌리를 구해다가 독삼탕을 끓여 먹이게 했다. 이때는 민비 자신도 그 구하기 힘든 산삼으로 죽어가는 평생소원이던 첫아들이 소생할 것을 빌면서 시아버지의 문병을 고마워했다.

그러나 그 산삼의 효력도 없었는지 혹은 그 산삼이 독이 되었는지 아이는 죽고 말았다.

그러자 궁중에서부터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완화군을 세자로 세우려다가 실패한 대원군은, 완화군을 민중전이 죽였다는 분풀이로 이번 민중전이 낳으신 아드님을 독살했다.

산삼이 무슨 독약일까?

하는 반문도 생겼다.

독삼탕은 어른에게도 조심해 쓸 정도로 위험한데 갓 낳은 아기에겐 만부당한 독약이 된다. 대원군은 그것을 알고서 구하는 척하고 죽인 것이다.

민비는 그런 말을 듣고 대원군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비는 총명하고 상당한 학문의 실력도 있었지만 여자의 약점인 의심증이 많았고 또 무식한 여자보다도 미신과 신령기도를 좋아했다.

갓난 아기에게 산삼이 독약이냐?

하고 궁중 전의(典醫)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들도 대원군이 가져온 산삼을 달여서 쓰는데 찬성한 책임상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못했다. 그러나 영리한 민비는 시중의 민간 의사에게까지 물어오라고 명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갓난 아기에겐 해롭기도 하지만 당시의 증세를 모르니까 단정하기는 어렵다 합니다.

어떤 의사도 이 이상의 대답은 하지 못했다. 아무리 민비를 동정하는 의사도 현재 세도를 부리고 있는 대원군이 자기 손자를 민비 소생이기 때문에 산삼이 독인 줄 알고 먹여서 죽였다고 할 용기가 없었다. 점을 쳐 보아도 신통한 분풀이를 할 점괘는 나오지 않았다.

허허허, 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손자를 독살 하다니. 소인과 여자는 할 수 없다.

그 이상은 언급하기도 싫어한 대원군은 더욱 민비가 미워졌다. 그러나 호기심이 많은 세상 사람들은 완화군을 민비가 죽였다는 소문과 그 보복으로 민비의 아들을 대원군이 죽였다는 소문을 연결시켜서 쉬쉬하는 화제로 입에 올렸다.

민비는 대원군을 더욱 미워했으나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아들 잃은 슬픔을 새로운 아들을 비는 미신으로 위로했다. 궁중에서는 사흘이 멀다고 기도를 올렸다. 무당과 판수와 중과 도인(道人)이 활개를 치고 궁중에 출입했고 명산대천(名山大川)에까지 세자 탄생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이 때문에 국고의 재정이 기울 정도였다. 대원군은 이제 민비의 세력을 꺾을 수 없을 정도로 대신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음을 알았다. 대원군은 때늦게 자기 세력의 만회에 초조해졌으며 민비는 하루라도 빨리 대원군의 세력을 꺾어 버리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恨을 안은 발길

 

민비에게는 마침내 대원군을 정계에서 몰아내는 공격을 노골적으로 표면화할 기회가 왔다. 고종 십 년 여름에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국력을 강화한 일본에서 소위 정한론(征韓論)이 머리를 들었다. 대원군의 배일정책(排日政策)은 일체 외국에 대한 완강한 쇄국정책(鎖國政策)의 하나였지만 대원군이 일본의 수교사절(修交使節)을 적대적(敵對的) 태도로 쫓아 보낸 데 대하여 일본은 강경한 정한론을 주장했다.

만일 일본과 정면 전쟁이 되면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상의 타격을 받으리라고 대원군 이외의 정객들은 두려워 했다. 민비는 이 기회에 대원군을 몰락 시키려고 우선 대원군의 위험한 쇄국정책에 대한 비난 여론을 조야(朝野)에 조성시켰다.

대원군의 대외정책은 세계 대세에 역행하는 위험천만한 망국 정책이다. 자기의 세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공연한 외국에게 국민의 불만을 전환시키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외국과도 화친을 논하는 자는 매국노(賣國奴)라는 그의 고집은 아직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 해 시월에 민비는 고종의 명의로 대원군이 꺼려하는 유림의 거물인 최익현(崔益鉉)을 부승지(副承旨)로 등용하는 동시에 그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을 과격 히 비판하고 고종의 실질적인 친정(親政)으로 국난을 구해야 한다는 수만어(數萬語)에 달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상감과 중전께서 대원군의 반발을 막아 줄 테니 철저하게 대원군을 탄핵해 주시오.

민비의 뜻을 전하는 민승호는 최익현을 격려했다. 최익현은 대원군에 대해서는 사원(私怨)과 공분(公憤)을 품고 있었다. 민비는 그의 신망과 이론과 문장력을 이용해서 대원군 배척의 불길을 조야에 던지게 했던 것이다.

그 과격한 상소문에는 대원군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대신인 육경(六卿) 간관(諫官)들도 그 의 위력이 두려워서 꿈쩍 못하고 비굴한 속론(俗論)만 일삼는다고 고관들의 무능까지 겸해서 공격했다. 이런 식으로 고관 전체를 공격했으므로 정계의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은 민비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므로 고종은 나라를 생각하는 충정(衷情)에서 나를 경계 하도록 하는 정론이매 극히 가상(嘉尙)하다.

하고 최익현을 칭찬했다.

대원군은 공격의 중심 대상이 자기였으므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체면상 침묵을 지키고 뒤에서 간접적으로 욕을 먹은 대신들을 충동시켜 우리들을 모욕하는 최익현의 상소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상감의 비답(批答)이 황송하므로 우리는 총사직하겠습니다.

하고 고종을 위협케 했다. 고종은 뜻하지 않은 고관 전체의 반발에 당황했다. 그러나 이런 파생적 잡음에 대해서 민비는 눈썹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상감 걱정 마십시오. 대신들의 감정을 자극시킨 좀 지나친 구절도 있었지만, 대신들의 대부분도 대원군을 탄핵한 데는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대원군에 대해서 감히 한 마디의 충고도 못한 그들은 당연히 그만한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말로만 발뺌을 하려고 그러지만 사직할 뼈다귀 있는 대신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것도 대원군의 충동에 자기들의 체면 유지로 흥분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좌의정 강로(姜老)와 우의정 한계원(韓啓源)이 최익현의 상소취지를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서도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는 정당하다. 그것은 대신들의 책임일 뿐 아니라 나 역시 반성하고 실천해야 할 충언(忠言)이다.

하고 최익현의 상소를 적극 비호했다.

대원군도 고종의 비답(批答)이 뜻밖에 강경한데 놀랐다. 다음에는 영돈녕(領敦寧) 홍순목(洪淳穆)도 최익현의 상소를 물리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고종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과 승정원(承政院)이 총동원해서 최익현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무능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가겠다고 고종을 위협했다. 그들은 대원군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체면 손상에 흥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경들이 무능함을 스스로 책임지고 물러나면 굳이 말리지 않노라.

하는 비답으로 그들을 전부 파면시켰다. 대원군은 고종에게 그런 용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물론 민비가 뒤에서 시키는 자기 배척운동이라고 이를 갈았다. 고종은 그 뒤에도 최익현의 상소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자들은 귀양을 보내고 유생(儒生)에게는

과거 볼 자격을 박탈해서 더욱 강경한 처단을 내렸다.

대원군이 물러나면 될 것을 공연히 다른 사람들만 희생을 당한다. 그래도 대원군이 직접 자기 이름을 지적해서 규탄하지 않았다고 모른 척하는 것은 철면피다. 인제 직접 그를 공격해야 한다.

하고 민비는 최익현으로 하여금 자기 상소에 대한 반박을 재반박하는 상소문을 또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서 최익현은 명확히 대원군이 정치에서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경한 주장을 했다.

오직 상감의 사친(私親) 관계에 있는 자는 그 지위를 존중히 해서 생활비로 국록을 후히 대접하되 국정에 관여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레 동안의 상소파동(上疎波動)은 이렇게 발전해서 대원군에게 불리한 대세(大勢)는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다.

일개 유림 출신의 부승지가 어찌 감히 그런 용기가 있으랴. 물론 민비의 대변이긴 하지만 아직도 칼자루를 잡고 있는 대원군에게 암살될 위험을 무릅쓰고 나온 것은 역시 나라에 대한 충성이다.

정계의 소식통들은 대원군을 규탄하는 최익현을 충성 된 영웅으로 칭찬했다.

최선생은 역시 대학자요, 충신이다.

유림들은 박수갈채를 했다.

그러나 고종은 대원군의 특정인물까지 지목한 최익현의 과격한 상소로 세상에 부자지간에 권력 암투가 있다는 이면이 폭로되어서 체면상 거북하게 되었다.

최익현은 용감한 충신입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돼서 좀 거북하게는 되었습니다.

그러나 올 것이 온데 지나지 않아서 통쾌합니다. 다만 대원군이 그를 암살할지 모르니 이 기회에 상소문이 과격하다는 핑계로 필시 귀양 형식을 취해서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신들의 그에 대한 감정도 무마하고 그의 생명도 보호해 주었다. 그가 제주도로 귀양 갈 적에 대원군의 독재에 지친 백성들은

최충신이 억울한 귀양을 가신다.

하고 공공연히 환송을 했다. 민승호는 미리 최익현에게 가서

선생의 신변이 위험하고, 대신들의 오해를 풀고, 상감과 중전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시 제주도에 가서 편히 계시다가 대원군이 아주 물러난 뒤에 모셔 오겠습니다.

하고 민비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충신 최익현을 귀양 보낸 연극은 대원군도 스스로 귀양 가라는 것인데 대원군도 바보야.

자기 세월이 다 갔는데도 왜 운이 다간 세도에 연연사고 있는 거야. 저러다가는 민비에게 시아버지 체면도 유지 못하고 정말로 창피를 당하려는 모양이다.

그런 백성의 여론이 대원군의 귀에도 들려 오게끔 대세는 기울고 말았다. 울분을 호소할 곳도 없게 된 대원군은 아직도 자기에게 동정하는 대신 박규수(朴畦壽)와 몰래 만나서 정확한 정세 판단을 물었고, 자기가 섭정에서 물러나야만 되느냐고 물었다.

대감의 심정에는 미안한 말이나 진퇴에는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대감은 십 년 동안 집정으로 국정에 많은 개혁을 하신 공이 큽니다. 그러나 정계는 물론 일반 민심도 십 년이면 변합니다. 이 때 정국을 안정시키는 대국적 견지에서, 담백한 태도로 대정(大政)을 봉환(奉還)하시고, 풍류와 산수로 그 동안의 심신 피로를 휴양하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박규수는 대원군의 실정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그가 자진해서 섭정에서 물러나라고 권했다. 대원군은 박규수까지 그런 말을 했으므로 섭정 사임을 결정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앙큼한 년, 지금은 내가 너한테 쫓겨 나지만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며느리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 그리고 그는 곧 섭정을 사임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삼계동 별장에 가서 홧술과 낮잠으로 세월을 보냈다. 대원군 시대가 오기 전까지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에게 그 별장을 바치게 하던 일세의 영웅도 이제는 그 별장에서 자신이 몰락 정객의 신세로 탄식하게 되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더니, 그 무서운 대원군의 호랑이 세도도 십 년으로 끝났다.

앞으로 민비세도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만 대원군을 거꾸러뜨린 것만은 통쾌하다. 좌우간 민비는 여걸이다.

대원군의 몰락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독재에 억압되었던 백성들의 해방감(解放感)이었다.

그의 탄압으로 삼만여 명이 학살당한 천주교도의 친척들이 제일 시원히 여겼으며, 앞으로 민비가 외국과 친교를 맺고 개명정책을 써서 다시 신앙의 자유가 오기를 바라며 기뻐했다.

대원군은 삼계동 별장이 장안에 있어 급속도로 자기의 과거 영향이 사라지는 것을 듣고 볼 수 있어 가슴이 아팠다.

내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아첨하고 은혜를 입은 놈도, 인젠 한 놈도 위로하러 오지 않는구나. 보기 싫고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서 시골 산속으로 숨어버리겠다.

하고 그는 양주군(楊洲郡) 직곡산(直谷山) 속에 지었던 산장(山莊)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곳의 자연은 전과 같이 조용하고 아름다웠지만, 그의 눈에는 적막강산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도 권력에 미련이 남아서 그전의 풍류객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람 속에서

 

대원군이 물러나자 그 해 십일월에 고종의 친정(親政)이 단행되어 대원군이 다시 정치에 참견하지 못하게 되었다. 민비는 야심대로 성공하였고 천하의 실권을 잡고 휘두르게 된 것이다. 고종도 처시하(妻侍下)인 민비의 치마바람은 삼천리 강산의 초목까지도 벌벌 떨게 했다.

정권을 한 손에 잡은 민비였지만 정계에 정면으로 나설 수는 없게 된 고로 궁중행사 이외에는 모두 오라버니 민승호(閔升鎬)와 일가 오라버니 뻘 되는 민규호(閔奎鎬)에게 맡겼으므로 또 다시 민씨에 의한 척족(戚族)의 세도정치가 재현되고 말았다.

민승호는 민비의 권력을 대행하는 제일인자가 되었고 민규호가 제이인자가 되었다. 그리고 영의정 이하 모두가 민비와 결탁하여 대원군 축출에 공로가 있던 인물로 개편되었다.

영의정으로 이유원(李裕元), 박규수(朴畦壽)로 우의정, 아우인 대원군을 배반한 이최응(李最應)으로 좌의정을 삼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역시 각파의 인심을 얻으려고 조대비 친척인 조씨문중의 중심인물인 조두순(趙斗淳)을 원훈(元勳)으로 예우(禮遇)하고, 조대비의 조카 조영하(趙寧夏)도 금위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그리고 대원군의 최대의 정적(政敵)이던 안동김씨의 김병국(金炳國)을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시켰다가 뒤에 우의정까지 시켰다.

한편 대원군의 후퇴에 결정적 동기를 만들었던 탄핵상소의 주인공 유림 최익현을 명목상의 귀양으로 제주도에 보호해 두었던 것을 석방 상경시켜서 충신 대우를 했다. 그와 동시에 유림에 대한 대원군의 탄압을 완화해서 그가 폐쇄시켰던 청주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을 비롯한 서원을 부활시켜서 삼남(三南) 지방에 세력이 굳은 유림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대원군의 독재를 종언시킨 것은 좋았지만, 그가 실시한 정책은 거의 모두 말살하고 그전

의 상태로 복귀시킨 것은 감정적 처사였으며 실질적으로는 대원군의 독재가 민비의 독재로 권력의 주인공만 바뀌어졌을 뿐이었다.

특히 대원군을 중심으로 모였던 남인계(南人系)의 인물을 무자비하게 정계에서 숙청한 것은 정계 이면의 파벌 암투를 심각케 했고, 밖으로 일본에 대한 반동적인 개방외교정책(開放外交政策)은 상당히 큰 영향을 그 후의 국운(國運)에 미치게 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양주 산 속에 숨어 있었으나 그는 권토중래(捲土重來)해서 민씨 일족에게 복수 하려고 벼르고 있었고, 민씨파에게 숙청당한 대원군파는 대원군의 복귀를 기다리면서 지하공작의 음모를 끈덕지게 했다. 이 때부터 시아버지와 며느리를 정점(頂點)으로 하는 양파는 표면의 경쟁을 떠나서 모략과 암살의 수단을 서슴지 않아서 장안은 암흑세계(暗黑世界)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원군의 산장에는 민비가 파견한 밀정이 주위에 잠복해 있었으므로 이름난 불평 정객들은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지기 등속의 천하장안(千河長安)을 비롯한 잡패들은 외부와의 연락을 하면서 정보를 제공했다.

민가 일족을 소탕해야만 우리 동지가 살고 나라도 제대로 바로 잡을 수 있다. 결정적인 때가 올 때까진 산발적으로 놈들을 죽여서 가슴을 서늘케 해주어야겠다.

천가, 하가, 장가, 안가를 비롯한 패거리들은 대원군의 뜻을 받고 하수인(下手人)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런 활동이 그들에게는 신이 났고 대담한 수완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암살에 필요한 무기도 입수하면서 민씨 요인의 암살을 모의했다.

대감, 자기황(自起黃)을 쓸 만큼 구했습니다.

속아 사지나 않았느냐. 한 개쯤 산 속에 가서 시험해 봐라.

진짜에 틀림없지만, 시험도 해보겠습니다.

그들은 자기황 한방으로 민비 이하의 정적을 몰살시킬 듯이 의기가 등등했다. 자기황이란 그 당시 청국에서 수입해 오는 일종의 폭탄으로서 유황(硫黃)을 비롯한 화약을 장치한 간단한 폭발물이었다.

대원군이 물러난 지 한달 만인 십이월 십일 밤중에 경복궁 안의 민비 침전(寢殿)에서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장한 폭음을 내고 자기황이 터져서 침전 일부를 폭파하는 동시에 자경전(慈慶殿)에 화재를 일으켰다. 이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서 자경전을 비롯해서 순희당(純熙堂)과 자미당(紫微堂) 등 사백여간의 전각(殿閣)을 태워버렸다. 이 사건으로 궁중과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어떤 역적의 흉한이 이런 대담무쌍한 투탄(投彈) 방화를 했을까?

대원군이 시킨 반란 음모다.

조야에는 이런 풍문이 돌았다.

고종과 민비는 우선 난을 피해서 창덕궁으로 옮기는 동시에 포도청의 전 기능을 동원해서 범인 체포를 엄명했다. 그러나 교묘하고 대담한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다. 민비로서도 증거를 잡지 못한 풍문과 추측만으로 대원군을 추궁할 수는 없었다. 범인을 잡지 못하게 되자 민비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궁중 화재는 실화(失火)였다고 발표하고 일체의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단속하라고 해서 결국 불문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선 경복궁 화재에 나를 관련시켜서 의심하는 풍문이 도는 모양인데,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지은 경복궁을 내가 태워 버리다니, 그런 모함이 어디 있느냐. 나도 산 속에서 홀로 근신하는 몸인데 귀신이 돼서 경복궁에 들어갔단 말이냐. 산중에 와서 조용히 있는 나까지 잡으려는 간악한 모략이다.

대원군은 일소에 붙이고 한 술 더 떠서

그런 추잡한 모략이 횡행하는 정치무대기 때문에, 내가 섭정을 스스로 그만두고 한가한 생활을 택한 것이 아니냐? 경복궁에 화재가 난 것은 하늘이 민씨 일족의 행패를 미워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경계의 천화(天火)였을 것이다.

하고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에 대한 비난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비상한 수완을 알고 있는 민비 측에서는 대원군의 동정을 더욱 엄중히 감시하고 그를 지지하는 잔당의 탄압을 더욱 철저히 했다.

대원군이 죽기 전엔 안심할 수 없다.

하고 민씨파에서는 역시 대원군의 음모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민비는 다음해 (고종 십일 년)에 기다리던 아들을 또 낳았다.

세자님 되실 생남 기도를 올린 덕택입니다.

하고 그동안 굿으로 한몫 보던 무당, 판수, 술객(術客), 도인(道人)과 불공을 올리던 중들이 자기들 공을 자랑하면서 축하를 올렸다. 민비는 미신을 좋아하는 여성이었으므로 아들을 낳기 위해서는 국고를 기울일 정도로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민비의 수족으로 활약한 오라버니 민승호도 불교를 믿었으므로 왕자를 비는 불공에는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런 신불기도로 세자 감의 아들을 낳았다고 믿게 된 민비는 그 후로 더욱 미신에 취했으므로 신임을 받는 무당과 중이 궁중에서 득실거리고 세도까지 부리게 되었다.

민비는 세자 탄생의 축하로 죄수의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유림에게 경과(慶科)의 과거를 보이게 했다.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 학식과 인물 좋은 신인(新人)을 등용한다는 과거제도(科擧制度)의 취지와는 달리 방(榜)에 발표된 급제자(及第者)의 명단은 모조리 민씨 일족의 자제거나 민씨 파에 속하는 고관들의 자제 뿐이었다. 이처럼 칫번 과거부터 세도정치로 부패했으므로 청운(靑雲)의 뜻을 품었던 유능한 선비들은 실망하고 민비 정권에 대한 반감을 가졌다.

저희들 자식만 급제시키는 게 무슨 과거냐? 무식한 병신이라도 민가 자식이면 급제시키고, 그 밖의 선비는 아무리 제갈량 같은 재주와 포부를 가졌더라도 낙방거사로 돌려보낸다.

그래도 대원군 시절엔 선비를 이렇게까지 모욕하진 않았고 인사행정이 이렇게까지 썩어 빠지진 않았다. 무당과 넋두리 춤만 추는 치마바람에 나라가 망해 버린다.

세자탄생을 축하하려던 과거도 결국 유림들의 저주만 늘리고 말았다.

그러나 궁중에서 민비가 벌이는 무당 춤 넋두리는 점점 번성하기만 했다.

중전마마, 낳으신 복보다도 잘 기르시는 복이 정말 큽니다.

요망스러운 무당과 중의 무리는 아들에 미친 민비를 유혹하고 위협했다. 옥동자도 크지 못하고 죽으면 도리어 불행하다는 말은 먼저 번 아들을 낳은 지 사흘 만에 잃었던 민비의 뼈아픈 슬픔을 공포심으로 이용하려는 간사한 무리들의 위협이었다.

민비는 아들의 명(命)을 위한 굿을 매일같이 올렸다. 궁중에는 괴상한 의상을 입은 요무(妖巫), 괴승(怪僧)의 무리가 활개를 치고, 무슨 굿, 무슨 기도 하고 법석대는 징소리 북소리와 함께 주문(呪文)과 경문(經文) 외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왕궁은 마치 화려하고 웅장한 무당집이나 불당(佛堂)과 같았다.

민비는 궁중에서 행하는 세자 명복(命福)으로도 부족해서 명산대천(名山大川)과 불각(佛閣) 음사(陰祠)에까지 기도행사를 확대하였다.

이에 대한 경비가 예상외로 막대하게 들자 궁중과 국가의 재정을 맡은 관리들은 비명을 올렸다. 처음에는 궁중예산을 집행하는 내수사(內需司)의 재정을 썼으나, 그것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국가의 일반 재정인 호조(戶曹)의 재정까지 함부로 갖다 탕진했다. 국가의 재정을 맡은 호조판서도 마침내 민비에게 간(諫)했다.

중전마마, 그만큼 하셨으니 인제 기도행사를 중지하여 주십시오.

호조, 나 하는 일에 왜 반대하오. 그것도 세자의 명복을 비는 일인데. 호조에게는 그런 충성보다 경비 드는 게 더 아깝소?

나라 일에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합니다. 본디 넉넉지 못한 예산에서 이처럼 예정 밖의 비용이 자꾸 들어서는 나라 일에 큰 지장이 생깁니다.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나라를 위해서 나라 전곡(錢穀)을 쓰는데 왜 반대하는 거요?

하고 민비는 호조를 마치 역적처럼 몰아붙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궁중의 모든 비용은 내수사 재정으로 쓰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일반재정인 선혜청(宣惠廳) 전곡까지 기도 비용으로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선혜청 재산이 세자 기도의 비용도 댈 수 없이 빈약하오?

예, 예산된 일반 국용에도 많이 부족한 형편이오라.

민비는 국가가 내 것이요, 내 아들이 왕자라는 사고방식(思考方式)만 있었지 국가의 재정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몰랐다. 결국 민비는 자기의 정치자금으로 또는 미신 비용으로 물 쓰듯이 했으므로 국고는 텅텅 비게 되었던 것이다.

아뢰기 황송하오나, 요 일년 동안에 든 재정이 대원군 십년 동안에 든 것보다 더 많았습니다.

민비는 대원군의 검소와 자기의 낭비를 비교한 호조의 말에 눈썹을 치올리고 화를 냈다.

나라의 재물을 나라에서 쓰는데 무슨 불평이요?

신도 얼마든지 바치고 싶으나 실정이 기도에 쓰실 비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호조는 우는 상을 했다.

그럼 좋소. 각 지방 재정에서 바치게 하오.

지방 재정이 곧 호조의 재정입니다.

지방 창고도 다 비었단 말이요?

예. 지방비도 태반 부족한 실정이오니, 빈 것이나 일반입니다.

그럼 백성들에게 바치게 하오.

백성의 재산도 자기 마음대로 빼앗아 들여다가 왕자 명복의 굿 비용으로 탕진하겠다는 민비의 무모한 독단이었다.

호조로서는 적당한 세금을 받는데도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무슨 명목으로 더 받겠습니까?

호조는 그 책임을 지지 않아도 좋소.

하고 민비는 성을 냈다. 이렇게까지 민비에게 바른 말을 한 호조는 궁중에서 물러 나와서 곧 영의정에게 사표를 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의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민비의 미신에 의한 국고 탕진에는 아무런 반성도 나타나지 않았다.

궁중에서 암탉이 울고 활개치는 바람에 춤추고 세도하는 것은 민가 떨거지와 무당년, 판수놈들 뿐이다.

일 년동안 벼르던 대원군은 마침내 민씨 일족 암살의 음모를 계획하고 심복 부하의 행동대에게 밀령을 내렸다.

우선 민비의 수족 민승호를 죽여라.

대감님 그 놈의 식구를 몰살시킬 묘안이 있습니다.

하고 부하는 장담했다.

그러나 꼬리를 잡히지 않게 조심해서 해야 한다.

예, 걱정 마십시오. 대감님 은혜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만일 불행히 잡히더라도 절대로 대감님 관계는 불지 않고 달게 죽겠습니다.

음, 잡혀서 죽다니 그러면 너희들 공을 갚지 못할 게 아니냐?

저희들이 대감님과 가까운 것은 세상이 다 알고 민승호며 그 집 청지기까지 얼굴을 아니까 시골 동지를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것이 좋다. 그리고 묘안이란?

네, 실은

하고 그들은 대원군과 함께 민승호 암살 계획을 밀의(密議)했다. 그리고 며칠 지난 십일월 이십팔일, 해가 져서 어둑어둑할 무렵에 시골티 나는 관가(官家)의 청지기 한 명이 민승호 집을 찾아왔다.

대감님 계십니까?

어디서, 무슨 일로 왔소?

실은 시골 어떤 원님의 봉물과 편지를 대감께 전해 올리러 왔소.

어느 원님 댁에서?

그건 밝히지 말고 봉물과 편지만 올리고 오라는 우리 원님 분부라…

하고 청지기는 싱긋 웃었다. 민승호 집의 청지기도 더 물을 필요는 없었다. 각 처에서 엽관운동(獵官運動)과 승진운동으로 이름을 숨기고 뇌물을 가져오는 사람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기 때문이다.

알았으니 두고 가시오. 수고했소.

민대감 집 청지기는 선물과 편지를 받았다.

그럼 부탁하오.

하고 어떤 원님의 청지기라는 이상한 사나이는 돌아갔다.

민승호는 마침 그날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돌아와서 마악 저녁상을 받고 있다가 청지기가 들여온 편지와 보배를 싼 작은 상자를 받았다. 우선 편지를 뜯어 본즉 다음과 같은 사연이었다.

< 상자 속에 것은 귀중한 진품(珍品)이오니 타인이 모르게 대감께서 친히 열어 보시고 소납(笑納)하시기 바랍니다. >

(무슨 보물일까? 혹은 무슨 기밀문서일까?)

궁금히 여긴 민승호는 그 상자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양모(養母)인 한창부 부인(韓昌府夫人)과 자기 아들애가 있었다. 이 양모가 바로 민비의 계모(繼母)이다.

시골 원이 보낸 선물인데 진귀한 물건이라기에 여기서 펴보려고 왔습니다.

민승호는 양모에게 웃어 보였다. 할머니와 손자는 자기들에게 물건을 보여주려고 안방까지 갖고 왔다 생각하며 호기심이 나서 앞으로 다가앉았다. 새로 만든 나무 상자는 잠겨져 있는데 뚜껑 밑에 구멍이 뚫어지고 열쇠가 끈에 달려 있었다.

뭘까?

어린 아들이 궁금해 했다.

알아 맞추면 너 주마.

아버지, 어서 여서요, 빨리 먹고 싶어요.

소년은 우선 맛있는 음식이 들어있으려니 하고 졸랐다.

오냐. 열쇠로 열어 보자.

민승호는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렸다. 순간

탕!

하고 터지는 폭탄 소리가 나고 방안의 벽이 달아났다. 양모와 아들은 직사하고 비명 한 마디내지 못했다. 중상을 입은 민승호의 피투성이가 된 몸이 피바다 같은 방바닥에 자빠져서 꿈틀거리면서 비명을 올렸다.

폭발 소동에 식구들과 남녀 비복(卑僕)과 청지기가 몰려 왔다. 이 때는 부서진 방안의 물건이 타기 시작했다. 놀란 사람들은 시체와 중상자보다도 불 끄기에 정신이 없었다. 불은 곧 껐으나 끔찍한 방안의 참경에 모두 벌벌 떨다가 곡성을 터뜨렸다.

나를 죽인 놈은… 음, 그 놈은 운현궁이다…

죽어가는 민승호는 최후의 저주를 했다. 운현궁이란 자기의 매부인 대원군이었다. 청지기는 곧 의원을 불러다가 응급치료를 하려 했으나 의원이 오기 전에 민승호도 죽어서 모자손(母子孫)의 세 초상이 눈깜짝할 사이에 났다. 그리고 그 며칠 후에는 대원군을 배반하고

민씨 파에 붙어서 영화를 누리던 대원군의 친형 이최응(李最應)의 집에도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연달아 일어나는 폭살(爆殺)사건, 방화사건은 민비 일파 거물들의 가슴을 서늘케 했다.

조정에서는 민승호 폭발사건의 범인 체포에 힘쓴 결과 폭탄을 전한 범인을 잡고 보니 뜻밖에도 진주병사(晋州兵使) 신철균(申哲均)의 청지기였다. 민비는 신철균과 그의 청지기 장(張)가를 대역죄(大逆罪)로 고문한 끝에 참형(斬刑)에 처했다. 그는 물론 대원군 지지파였으나 대원군의 직접 지령이라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원군이 뒤에서 이런 사건을 지휘하고 있다는 풍문은 세상에 돌아서 공공연한 비밀로 인정되었다. 민승호의 암살로 민비파가 전전긍긍하게 되자 대원군파에서는 폭탄세례로 선전 포고를 한 기세로, 이번에는 정치적 공세를 표면적으로 취하기까지 했다. 장령(掌令) 손영로(孫永老)로 하여금 대담하게도 대원군을 다시 조정에 모셔야지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친정(親政)을 비난하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 대원군이 섭정으로 다스린 십 년간의 공적으로 탐관오리가 숙청되고 상하에 검소한 생활이 실천되었더니, 친정 일년 동안에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을 비롯한 불충지신(不忠之臣)들이 권세를 마음대로 자행(恣行)해서 정계에 뇌물이 성행하고 국정을 부패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그런 세도의 병폐를 일소하고, 대원군에게 다시 정치를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민비는 펄펄 뛰었다.

이놈도 민대감을 암살한 신가놈과 결탁한 놈이다. 무엄하게도 상소라는 형식으로 상감을 협박하고 있다.

파랗게 성이 난 민비는 사헌부(司憲府)에 처벌하라고 명했다. 대원군을 지지하는 의사는 상소문으로도 표시하지 못하게 간관(諫官)들의 언론 자유마저 박탈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손영로는 금갑도(金甲島)로 귀양을 보냈다.

이에 대해서 간관과 옥당(玉堂)들이 상소하는 사람을 벌하면 국정 비판과 건의(建議)의 길이 막힌다는 상소를 했으나 모두 묵살되고 말았다. 그 후에 계속해서 상소한 유생(儒生)들은 모조리 귀양을 보내고 암살까지 했다. 그리고 암살된 민승호의 부자(父子) 뒤에 누구를 양자로 들여 앉히느냐 하는 문제로 민씨 문중에 또 암투가 벌여졌다가 마지막에 역시 민비의 환심을 더 산 민태호(閔台鎬)의 아들 민영익(閔泳翊)이 들어가서 세도하는 대를 이어 받았다.

 

 

 

外勢의 潮流

 

일본은 대외 강경책을 쓰던 대원군이 몰락하고 민비가 정권을 잡고 등장하자 조선과의 수교통상(修交通商)을 서둘렀다. 그러나 종전의 배일정책을 곧 개방하는 데는 김병학(金炳學)등이 아직 반대했다.

일본은 민비의 새 조정도 곧 대일화친정책을 쓰지 않는데 조급해서 군함 운양호(雲揚號)를 비롯한 일곱 척의 군함과 육천 명의 군대를 가지고 강화도로 몰려왔다. 그들은 강력한 무력 시위로 통상조약을 강요할 계획이었다. 그들은 강화도 해협의 수심(水深)을 측량하고 부근의 육지와 섬도 조사했다.

고종 십이 년 팔월 이십일 일에 일본 함대는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蘭芝島) 부근 바다에 머물고 운양호의 함장 이노우에(井上) 제독(提督)이 수십 명의 해군을 거느리고 연안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들이 초지진(草芝鎭)에 있는 우리 수비병진지의 포대(砲臺)에까지 접근하자, 도민들과 수비병은 깜짝 놀랐다.

불란서 군대인지, 미국 군대인지 또 외국 군대가 들어왔다.

그전에 불란서 군함과 미국 국함에게 놀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복으로 된 군복을 입고 서양식 무기로 장비된 일본군대는 먼눈으로 봐서는 서양군대 같았다. 포대의 수비병이 나가서 그들에게 항의했다.

너희들은 왜 우리나라에 무단으로 침범하느냐. 도대체 어느 나라 군대냐?

그러나 그들의 키가 작고, 조선 사람과 얼굴이 비슷한 황색인(黃色人)들이었다.

우리는 일본 사람이다.

하고 그들은 한문(漢文)으로 대답을 써 보였다.

일본 군대가 왜 우리 나라를 침범하느냐?

허허허, 우리는 조선과 이웃나라로서 화친할 생각은 있어도 침범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이번 상륙한 것은 청국으로 통신(通信)하려 가다가 물이 떨어져서 식수(食水)를 구하려고 왔다.

우리 병정은 곧 그 사실을 수비대 본부에 보고 했다. 포대에서는 그것이 거짓 핑계라고 단정하고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일본군대는 곧 단정(短艇)을 타고 철수했다.

우리 강화도 포대는 전부터 외국 군대를 쫓아 보낸 승리의 전통이 있다. 불란서 군함, 미국 군함도 보기 좋게 격퇴시킨 우리다. 네까짓 일본 군함쯤 문제냐?

하고 그들을 통쾌히 비웃었다. 그러나 그런 장담도 순간에 지나지 못했다. 일단 본함(本艦)으로 돌아간 그들은 우리 포(砲)보다 굉장한 성능이 강한 거탄(巨彈)을 퍼붓고 반격해 왔다. 이 일본 군함 운양호는 초지진 포대를 파괴하여 침몰시킨 후에 유유히 함수(艦首)를 돌려서 영종진(永宗鎭) 포대에 맹공격을 가했다.

영종진 포대에서는 응전했으나 당하지 못하고 침묵하자 일본군 육전대(陸戰隊)가 상륙, 공격을 감행해서 살육과 방화와 약탈을 감행했다. 영종진 진지에 있던 수비병 오백 명 중 사령관인 첨사(僉使) 이민덕(李敏德)이하고 풍지박산으로 도망치고, 삼십오 명의 전사자와 십육 명의 포로라는 큰 희생을 내었다. 그리고 대포 삼십육, 화승총(火繩銃) 백삼십 개를 약탈당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피해는 두 명의 경상자(輕傷者)밖에 없었다.

그들에 비해서 우리의 무기는 구식인데다, 규모가 작았으며, 수비병의 사기(士氣)도 대원군 시대보다는 여지없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이 운양호사건이야말로 근대국가로 개명한 일본이 우리나라에 무력침략을 감행한 시초였다.

그러나 당시의 조정으로선 일본의 불법 행동에 아무런 대책도 결정하지 못하고 이 사건을 쉬쉬해서 일반 국민에게 숨겨 두려는 태도로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도리어 우리에게 추궁했다.

항해 중의 선박이 담수(淡水)를 구하려고 섬에 들렸는데, 불법으로 포격한 것은 국제법상으로도, 인도상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공식 사과를 하는 동시에, 우호통상 관계를 맺고 친선을 하자.

이에 대해서 민비정권은 당황했다. 일본은 청국과의 교섭까지 통해서 조선에 압력을 가했다. 그 해 십이 월에는 전보다도 큰 규모의 외교, 군사를 겸한 거물급 사절단을 보내서 우리 조정을 위협했다.

화친이냐, 전쟁이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 그것도 오직 조선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무력을 배경으로 한 일대 외교공세였다. 이 무장된 외교사절단의 명단만 보아도 일본의 비상한 관심도(關心度)을 알 수 있었다. 즉 일본은 거물급 대사(大使)를 조선에 파견해서 과거 대원군의 배외정책으로 일본에게 행한 국서불수리(國書不受理)에 대하여 무례를 추궁하고 운양호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이것은 이를 계기로 국교 재개를 촉진시키기로 방침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청국주재공사 모리 유우레이(森有禮)로 하여금 청국의 태도를 확인하는 한편 일본주재 각국 공사에게도 양해를 구해서 사전 준비를 했다. 그 뒤에 특파 전권대사로는 육군 중장겸 개척장관 구로다 기요다까(黑田淸隆), 부사(副使)로는 이도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심복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였다. 그리고 실문진영으로는 육군소장 다네다 마시아끼(種田政明), 외무대승(外務大丞) 미아모도 고이찌(宮本小一) 육군중좌 가바야마 지끼(樺山資紀), 외무권대승(外務權大丞)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등 외교와 군사 전문가를 배치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처럼 조선에 대하여 국제적인 양해 밑에 거국적인 태세로 임했으나, 조선의 민비정권은 대외문제에 무식하고 무능해서 화전(和戰) 양단간의 뚜렷한 정책도 세우지 못하고 당황만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원군은 정권 만회의 기회만 노리고 울분에 차 있다가 대일수교반대(對日修交反對)라는 대의명분을 들고 민비정권에 불평을 품은 유림을 선동해서 민심을 자극시켰다. 그는 산 속에서 잠자던 호랑이처럼 정치 무대인 장안의 운현궁으로 돌아와서 민비정권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림들을 통하여 반대 여론을 일으키는 동시에 애국심을 자극하는 유언비어(流言蜚語)도 퍼뜨렸다.

대원군이 다스릴 때는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국방비를 저축해서 외군 침략을 통쾌하게 격퇴시켰다. 그런데 민빈정권은 미신의 굿 비용으로 국고를 탕진하고 국방을 돌보지 않았다.

무당, 판수가 호의호식하고 세도까지 부리는 반면 군대에겐 무기도 제공하지 않고 밥도 제대로 먹이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해서 싸울 충성도 기운도 없게 됐다. 그뿐 아니라 썩은 현 정권은 자기들 세력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해서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 먹으려고 비밀 외교를 하고 있다.

한편 민비정권에서는 실제로는 친일(親日)보다도 오히려 공일(恐日)병에 걸려서 고민했다.

이틈을 타서 대원군이 그것을 구실로 정권을 다시 노리려는 책동도 또한 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로 오래 논의했으나, 세계대세와 현재의 국력으로는 일본과 수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소위 대일완화책이 좌의정 이최응의 명의로 고종에게 건의되었다. 이최응은 대원군의 친형이었는데, 또다시 그와 정면충돌하는 상소문을 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일본의 전권대사 구로다(黑田) 일행이 현무호(玄武號)에 타고 야포(野砲) 팔문(八門)과 의장병(儀仗兵) 이백오십 명으로 위신을 세우고 따로 군함 석 척과 수송선 두 척에 오백오십 명의 병력을 싣고 부산항에 들어왔다. 신식 무기로 장비한 병력만도 팔백 명이나 되어 그들의 강경외교정책의 태도를 알 수 있었다.

이 정보에 접한 조정과 백성들은 큰 공포심에 떨었다.

우리 나라를 쳐들어 오는 일본의 선발대다. 지금의 일본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시대의 일본보다도 강한 서양식 군대로 개량되어 있다. 대원군 같으면 이기건 지건 한번 싸워 볼 용기라도 있겠지만 무당에 홀린 민비로선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항복할 것이다.

외교관계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일본의 대사가 군대의 호위로 왔다는 것 자체가 선전포고 차 온 것으로 알고 겁을 냈다. 이런 국민의 공포증을 대원군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민비정권을 타도하려고 했다.

부산에 있는 왜관장대리(倭館長代理) 야마노시로 유우쬡오(山之城祐長)는 일본전권대사를 정중히 대접하라는 위협적인 구술서(口述書)를 동래부사(東來府使)에게 전달했다.

< 일본전권대사 일행이 장차 강화도로 가서 귀국의 전권대신(全權大臣)과 회담을 청하려는 것이 귀국방문의 목적입니다. 만일 귀국의 전권대신이 국빈으로 정중히 마중하지 않으면 서울로 직접 들어가서 정부와 직접 담판을 할 것입니다. 일행의 승선이 강화부에 도착하는 시일은 마침 엄동기의 풍파가 심하기 때문에 아마 칠, 팔일 후가 될 듯하니 귀관은 이 소식을 빨리 귀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랍니다. >

그리고도 일본 함대는 부산에 머물러서 무슨 정보수집을 하는 모양이더니, 본국으로 이개대대(二個大隊)의 육군 병력을 증파(增派)해 달라고 급사(急使)를 본국 시모노세끼(下關)로 보냈다.

일본 사절단은 부산에서 정보를 수집한 결과 조선 조정에서는 아직도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이 확립되지 못한 것과 은퇴해 있던 대원군이 종전의 배일운동을 다시 일으키고 있는 정세를 알고, 만일의 경우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므로 그런 데에 예비책까지 준비했다.

이런 만반준비를 갖춘 그들은 고종 십삼 년 일월 삼 일에 강화도에 들어왔다. 먼저 군함 맹춘호(孟春號)가 초지진(草芝鎭) 앞바다에 들어와서 강화부판관(江華府判官) 박제근(朴齊近)과 함장(艦長) 가사마 히로다데(笠間廣盾)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귀국과 국교 문제로 친선관계를 맺으려고 일본전권대사가 왔으니, 이 뜻을 조정에 전해 주시오.

이런 간단한 요구에 대해서 강화부 판관은

곧 품달하겠으니 회답을 기다려 주시오.

하고 대답할 정도의 간단한 회견이었다. 이 정보를 그날로 받은 조정에서는 전직, 현직의 중신들을 비상소집하고 고종 어전에서 중대 회의를 열어 대책을 토의한 결과 그들을 정식외교사절로 대하고 회담을 하기로 결정했다. 외교문서도 접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퇴해 보내던 대원군 시대의 대일정책은 이것으로 완전히 쇄국(鎖國)의 문을 개방하였다. 그리고 접견대관(接見大官)으로는 어영대장(御營大將) 신헌(申櫶), 도총부 부총관(都摠附副摠管) 윤자승(尹滋承)을 접견부사(接見副使)로 임명해서 일본 사신과 교섭하게 했다. 그러나 이 강화도회담의 광경은 나라의 체면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들은 당당한 군함으로 호위된 강국의 규모와 사기(士氣)로 기세가 당당했지만 우리 대표단의 진용과 그 배경의 군사시설은 초라하고 사기도 없었다.

우선 그들은 여섯 척의 군함에서 거대한 대포로 예포(禮砲)를 쏘아서 우리 대표와 강화도 수비병과 백성을 놀라게 했다. 그런 공포 속에 그들 대표는 사백 명의 서양식 무장을 한 의장병(儀仗兵)을 거느리고 당당히 상륙했다.

친선 회담을 하려는데 왜 대포를 쏴서 민심을 놀라게 하오?

우리 대표가 말하자 그들은 도리어 의아스러운 표정과 경멸하는 태도로

당신들 오는 데에 경의를 표하고, 이번 친선 회담을 축하하는 예포(禮砲) 입니다. 소리는 나도 탄환은 없는 공포인데 놀랄 것이 무엇입니까?

신식 국제예법도 모르느냐는 조롱까지 받은 우리 대표단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예포에도 놀라는 무지무력(無知無力)을 첫순간부터 스스로 폭로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도 그들이 그때부터 이십사 년 전인 천팔백오십삼 년, 미국 사절단에게 강제로 일본의 문호개방(門戶開放)을 당하던 때에는 지금 조선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을 잊은 듯했다. 그때의 일본 모습이 오늘의 조선 같았고 오늘의 일본은 그때의 미국과 같았던 것이다.

천팔백오십삼 년에 미국 외교사절 페리 제독은 일본에게 통상수교(通商修交)를 하려고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도꾸가와(德川) 정부에게 강요했던 것인데, 폐리 제독은 미국의 태평양 방면 대 함대를 거느리고 동경만(東京灣) 우라가(浦賀)에 달려 들었다. 그 때 일본의 국민들은 그 쇠로 만들고 검게 빛나는 거대한 군함을 처음 보고 <구로부네(黑艦)>라고 벌벌 떨었다. 일본이 서양의 문명을 조선보다 먼저 발달시킨 것은 미국의 <검은 배> 였는데 그 위협 외교수단도 그대로 조선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검은 배가 아닌 일본의 이 검은 배는, 과연 미국이 일본에 가져다 준 것처럼 새 문명의 선물을 조선에 주려는 것일까? 또는 일본 모양으로 조선은 그 검은 배의 선물을 제 나라에 유익하도록 활용할 마음의 자세와 목적의식이 있는 것인가.

아무튼 일본의 위협적 분위기 속에 회의는 수차 거듭한 끝에 이월 이십칠 일에 십이 개에 달하는 소위 강화도 조약이라는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이 정식 조인되었다. 그러나 조선측의 태도가 마지 못해서 하는 것으로 보아 후일에 딴 소리를 할까 염려한 일본측은 조인과 동시에 국왕의 비준(批准)을 고집했다.

이에 대해서 비준에는 상당한 절차가 필요하니 후일로 미루자고 주저하자 일본측은 노해서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구로다 전권은 강화도를 떠나 버렸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남은 부전군 이노우에와 절충하고 고종의 비준까지 교환했다.

그런데 이 비준에 있어서 고종은 물론 민비까지도 아직 확고한 태도를 정하지 못해서 이상한 고충의 소극(笑劇)까지 남겼다. 고종은 비준문에 친서(親署)하는 대신에, 그러면 만일의 경우에 무슨 책임이나 체면을 면할 줄로 알았든지 < 조선국주지보(朝鮮國主之寶>라는 진짜 옥쇄가 아닌 소도장을 신주(新鑄)해서 찍었던 것이다.

이러한 곡절을 겪고 체결된 소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의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은 근대 조선이 외국에 대하여 최초로 체결한 조약으로 실로 역사적인 개국정책(開國政策)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조약 내용은 당시에 약국(弱國)이던 조선엔 불리하고 강국이던 일본에겐 유리한 조약으로서 국내외에 주의할 만한 몇 가지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국제정세와 외교술책에 어두운 당시 조정에서는 알면서도 꺾이고 몰라서도 속은 흔적이 남아 있다.

조약문의 첫머리에 있는

< 조선은 자주(自主)의 나라이므로 일본과 더불어 평등의 권리를 보유(保有)한다. >

이 문귀는 당연한 듯해서 조선 대표들이 기뻐했을지 모르나, 그것은 전통적으로 자주독립국(自主獨立國)의 취급을 하지 않은 청국에 대해서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조선에 관계된 이익과 발언권을 청국과 평등하게 보장하려는 일본의 속셈이었다. 다음에 부산항 이외의 항구, 곧 인천항과 원산항을 일본에게 개방하게 한 것은 청국과 아라사와의 장래 경쟁을 위해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필요한 일본의 포석(布石)이었다. 또 조선연해(朝鮮沿海)의 해도(海圖) 작성과 해안 측량을 허용케 했으며 일본 거류민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인정해서 그 재판권은 <조선에 있는 지정 된 강국>이라고 정해서 불평등한 권익을 승인시켰던 것이다.

이런 외교적 흉계는 서양의 강대국이 약소국을 기만한 마술로서 불란서가 이미 안남(安南)에 대해서 그러했고 또 일본 자신이 미국에게 당한 대우였다. 일본은 그런 술법을 조선에도 써서 성공했던 것이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되자 일본에서는 자기 나라의 개화된 문명과 부강한 국력을 자랑하려고 조선 조정의 친선 사절을 초청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 들여 예조참의(禮曹參議)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修信使)로 임명해서 보냈는데 이때의 사절단 파견에는 나라의 위신도 세우려고 상당한 규모를 차렸다.

사절단 일행은 칠십 명이나 되었으므로 일본의 화륜선(火輪船) 황룡환(黃龍丸)을 전세로 빌려 타고 고종 십삼 년 사월 사 일에 부산항을 떠났다. 그러나 김기수 이하의 사절단은 모두 비장한 각오로 공포에 떨고 있었다.

놈들이 우리를 청해다가 죽이거나 인질(人質)로 잡아 두지나 않을까?

사대부(士大夫)로서 만리 이역에 무슨 봉변을 하더라도 임금을 위해서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서 집을 잊자.

그들은 사당에 참배하고 살아서는 못 돌아올 각오까지 했던 것이다.

왜놈은 양놈들의 앞잡이니까, 놈들에게 속아서 기밀을 누설해선 안 된다.

하고 그들은 기선 안에서도 서로 다짐했다. 그러나 일행이 일본 땅에 상륙한 순간부터 뜻 밖에도 친절하고 융숭한 영접을 받았다. 일행은 예기하지도 않고 희망하지도 않았는데 아까사까(赤坂) 이궁(離宮)에서 명치천황과의 접견식까지 마련해 주었다.

이에 대해서 수신사 김기수는 비로소 당황했다. 조선 왕의 대리자격으로 일본 왕이 만나겠다는데 실상은 고종 황제의 친서(親書)도 갖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실은 국서도 받아 오지 않았으니 예의상으로도 사양하겠습니다.

김기수는 일본 외교관에게 솔직히 사양했다. 일본에 사절은 보내면서도 친서를 준비해 주지 않았던 것은 타의(他意)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한 외교 경험이 없는데서 온 실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사절단의 환심을 사려고, 그런 형식 문제에는 개의하지 않고 외교예의상 특별대우를 해서 명치천황의 접견식을 거행해 주었다. 그리고 총리대신, 외무대신이 베푼 두 번의 공식 연회와 사연(私宴) 여섯 번에다 은밀히 미기(美妓)들의 특별보상까지 곁들여 여수(旅愁)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체류기간 이십일 동안에 그들은 서양문물을 모방한 근대식 시설의 군사, 산업, 교육기관의 중요한 시찰로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모든 공식 생활에 양복을 착용했고 머리를 깎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칙사대접을 받는 조선사절단은 상투에 큰 갓을 쓴 한복 차림이어서 일반 일본인들이 기이하게 바라 보았다.

우리나라도 명치유신 전에는 모양은 다르지만 상투를 틀고 일본 복으로 사무를 보았으나 지금은 편리하고 능률적인 양복을 입고 머리를 깎게 되었습니다. 서양 것도 편리하고 좋은 것은 택하고 보시다시피 일본 것도 좋은 것은 그대로 보호 유지합니다.

하고 은근히 조선도 빨리 서양문명을 섭취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융숭한 대우를 받고 귀국한 사절단은 일본에 대한 인식이 아주 달라졌다. 종전에 외국 사절이라고는 청국을 대국(大國)으로 섬기는 소국(小國)으로서 상전을 문안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독립국가로서 외국에게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이 사절단으로서는 제일 기뻤다.

그리고 사절이 놀란 것은 청국의 문물제도는 그대로 대규모를 자랑하는 구문화에 지나지 않았으나, 근대 국가로 신흥한 일본의 문물제도는 서양식의 신문화가 백화만발 하려는 딴 세상이었다.

우리나라도 빨리 서양의 신문화를 섭취해서 적어도 일본에 뒤떨어져선 안 된다.

이것은 사절단이 일본의 실정을 보고 부러워하는 생각이었다. 그들의 대일 인식도 불과 이십 일 동안의 사찰로 천양지판의 전환을 했던 것이다. 일본 왕과 대신들이 보낸 진귀한 예물을 갖고 돌아와서 바치자 고종은 수신사 김기수를 자미당(紫薇堂)으로 불러서 복명(復命)을 받았는데, 고종은 민비와 함께 일본 실정에 대한 문답을 했다.

일본 왕의 인물이 어떻게 보였소?

고종은 명치천황의 인상을 물었다.

매우 정명(精明) 하였습니다. (頗爲精明)

국민들의 풍속과 범절은?

대개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 힘쓰고 있었습니다. (槪以富强爲務)

어떤 방법으로?

열심으로 부하고 강해질 기술을 숭상하며 실천하고 있습니다. (專尙富强之術)

일본인들의 생활태도와 정도는?

국민이 모두 각자의 직업을 갖고 근면히 일하며 놀고 먹는 백성이 없고, 길가에는 걸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질이 유순하고 친절하며 사나운 자가 없었습니다. (人皆柔順款曲 則無 强悍者矣)

기술이란 어떤 것인고?

서양식 기계로 물품을 만들기 때문에, 물건이 좋고 빨라서, 그런 기술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계를 다루는 솜씨에 익숙해 있습니다. (蓋欲學器械 無技不學矣 敎鍊之法 果 熟矣)

그럼 동양 고래의 경전(經傳) 같은 것은 다 버렸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기계 위주의 새 문명에 열중하면서도 도덕면에서는 고래의 경전을 숭상해서 지킵니다. (經傳尙傳)

이 모양으로 김기수는 일본의 문물과 풍속을 모두 찬양해 마지 않았다. 이리하여 조정의 대일정책에도 큰 영향은 끼쳤지만 국제적 흥정에는 세계정세에 어둡고 또 국력도 약한 조선이 항상 밑지기만 했다.

이러한 민비 정권의 대일정책에 대해서는 대원군을 선봉으로 하는 반대론이 점점 강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여기서 기이한 현상은 그 전에 배일정책의 주동자인 대원군의 섭정을 반대하고 극렬한 상소문 사건을 일으켜 대원군을 몰락시킨 최익현이가, 이번에는 강화도에서 대일수호조약이 진행되고 있는데 오란망(五亂亡)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역시 과격한 반대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

< 소문에 의하면 일본과 화친을 한다고 하여 만구(萬口)가 모두 분개하고 사경(四境)이 흉흉하니, 만일 그렇게 되면 상감의 처사는 큰 실책입니다. 화친문제로 그들이 애원할 정도로 우리가 강한 입장에 있어서 그들을 견제할 수 있다면 그 화친은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해서 화친을 구하면 목전의 고식지책에 지나지 못합니다. 금후의 그들의 흉악한 야욕을 무엇으로 충족시키겠습니까? 이것이 난망(亂亡)의 첫째 화근입니다.

그들의 물화(物貨)는 모두 사치하고 신기하며 우리의 물화는 겨우 백성의 명맥을 유지할 정도의 소박한 것이라 그들과 통상을 하면 수년을 못가서 지탱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반드시 망할 것이니 이것이 망란의 둘째 화근입니다. 그들은 일본의 탈을 썼으나 실을 양적(洋賊)이므로 그들과 화친하면 서양의 사학(邪學)을 전해서 나라를 휩쓸게 할 것이니 이것이 망란의 셋째 화근입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자유로 왕래해서 큰 집에서 호화스럽게 생활하면 부녀자들이 그들을 사모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망란의 넷째 화근입니다. 그들은 재욕(財欲)과 색욕(色欲)만 알고 인정과 의리가 없으니 무슨 해괴한 일이 생길지 모르며, 이것이 망란의 다섯째 화근입니다. 후세의 춘추(春秋=歷史)의 붓을 잡는 자 이 일을 쓴다면 모년모월(某年某月)에 양인(洋人)이 조선에 들어와서 모처에서 화친을 맹세하였다 할것이매 이것은 기성고강(箕聖故疆)이 일조에 멸망했다고 통탄할 것입니다. 오늘날 오는 왜인(倭人)은 양복을 입고 양포(洋砲)를 쓰고 양선(洋船)을 타고 있으니 이것은 왜양 일체(倭洋一體)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속으려고 하십니까… >

최익현의 반대 상소문은 일본자체의 침략성을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반대하는 동시에 그들의 중개로 서양문화가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오늘로 보면 일리(一理)에는 밝았으나 일리에는 어두운 주장이었다.

같은 날짜로 상소한 전사간(前司諫) 장호근(張皓根)은 최익현보다도 강경한 대일주전론(對日主戰論)을 강조했다.

< 추류(醜類)가 사백명이나 우리 땅에 하륙하였다 하오니 수백 년 굳게 닫혔던 문을 열고 도적을 맞아 들이는 것이 웬일입니까. 그들이 정한 십삼조라는 것은 더욱 해괴망측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군신 상하가 일치 단결해서 죽기를 맹세하고 그들을 배척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조정의 대신들이 그런 논의는 하지 않고 혹 그런 의견을 상소 하면 모조리 축출해서 충간(忠諫)의 길까지 막아 버리고 발본책(拔本策)은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목하의 급무는 국방 태세를 엄중히 하고 인재를 등용해서 요해(要海)를 굳게 방비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선(異船)을 소탕할 수 있습니다. >

이 밖에도 일본과 통상한 후에 신기한 일본 상품이 사치폐단만 조장시키는 무용지물이라는 비자해자졌다. 그리고 조약에 따라서 원산항을 개방하려 할 때 유림들이 반대하고 유통(儒通)이라는 역문을 돌렸기 때문에 그 대표자를 잡아서 귀양보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인천개항(仁川開港) 문제가 시끄러워졌을 때는 원로 이유원(李裕元)이 자기만 반대하는 척하고 사의(辭意)를 표명했다. 그러자 김병학(金炳學), 홍순목(洪淳穆), 한계원(韓啓源), 이최응(李最應)의 각료들도 일시에 단결해서, 자기들도 인천개항을 찬성한 바가 없다고 이유원을 반박했다.

이처럼 처음엔 민비 세력에 아부하기 위해서 개국론에 찬성하던 자들까지 그 후에 일본의 이권 강요가 계속되자, 책임을 회피하려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통상조약이 체결된 병자년(丙子年)에 큰 흉작이 들었는데다가, 민비의낭비로 국고가 탕진되었기 때문에 백성은 기아에 허덕이고, 정부관리와 군대에게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큰 경제위기에 봉착했다.

일본과 친해지면 잘 산다더니, 하늘도 미워해서 이런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은 이와 같은 불평을 터뜨렸다.

대원군은 이런 정치 분위기와 국민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유림을 모아 개화당(開化黨)이라는 이름을 내건 민비 정권에게 대하여 일대 반격을 착착 준비하고 있었다.

 

 

 

妓女亂心

 

경복궁 안에선 북소리 덩덩

무당년 중놈의 춤바람 분다.

진고개 사탕도 개화당 선물

장안의 남녀가 집팔아 댄다.

운현궁 호랑이 코만 골아도

자기황 소리가 탕탕 터진다.

세상에는 이런 풍자적(諷刺的)인 노래가 나돌았다. 민비의 사생활의 부패와 그의 정책인 개화 풍조에 불평을 품고 어서 대원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다시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진고개 사탕은 일본 상품이 일반국민 생활에 환영되고 있다는 상징(象徵)이었다. 기계로 짠 광목과 비단은 종래 부녀자들이 가정에서 만든 거친 무명과 명주를 무색케 하고 수공업을 위축시키는 동시에 사치 풍조를 조장했다. 침침한 들기름 등잔불보다 석유 남포불은 밤을 밝게 해주었다.

우두를 하면 무서운 마마병에 안 걸리고 곰보도 안 된다. 신기한 비방이다.

금계랍은 학질과 복통엔 그만이다.

우두(牛痘)는 종두(種痘)요, 금계랍은 키니네다. 종래의 한약과 무당 굿으로는 고치지 못하던 마마병과 학질에도 개화바람을 타고 신약(新藥)이 들어왔다. 그러나 불평객의 야당기질(野黨氣質)은 좋은 점을 묵살하고 나쁜 점만 과장해서 선동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는 정쟁방법(政爭方法)이다. 아무래도 민비의 개화당에게는 세월이 불리해졌다. 대원군이 언제까지나 산장과 운현궁에서 낮잠만 자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낮잠 자는 소리조차 혁명의 폭탄 소리처럼 민비와 개화당 일파에겐 들렸던 것이다.

세상이 이쯤 되자 대원군 주위에는 민비 정권에 불평을 품은 정객과 모사(謀士)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대원군이 사랑하던 기생 홍련(紅蓮)에게는 설화(雪華)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의 심복 정보원(情報員)이며 낭인시절부터의 부하인 장안의 건달 장순규(張淳奎)는 술친구 난이인 진주병사(晋州兵使) 신철균(申哲均)에게 설화를 기생첩으로 소개했다. 천하장안(千河張安)패거리 중의 하나인 그로서는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는 민비의 오라버니 민승호(閔升鎬)를 폭사시키도록 꼬였다. 그 사건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성공했으나, 신철균은 민비의 손에 잡혀서 참형을 당해 장가가 신철균에게 소개했던 설화는 과부가 되었다.

삼십이 넘은 설화는 또 기생으로 나서기도 거북하여 망설이는 차에 장가는 또다시 대원군의 일당으로서 전에 승지 벼슬을 지낸 안기영(安驥泳)에게 셋째 첩으로 소개했다.

설화는 장가의 끄나풀로서 대원군을 위하여 정보활동을 해 온 여투사(女鬪士)였는데 이번에는 안기영의 첩이 되었으므로 부첩(夫妾)의 뜻이 맞았고 애욕의 정도 각별했다.

어느 날 밤에 안기영의 집에는 친구인 진사 채동술(進士蔡東術)과 승지 권정호(權鼎鎬)가 모여서 밀의를 하고 있었다. 설화도 그들이 남편과 함께 대원군파 였으므로, 옆방에서 망을 보듯이 바깥도 경계하면서 그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대원군께서 민비를 죽여야 한다고 벼르기만 하고, 우리가 거사한다면 책상물림이라 안 된다는 심중한 태도만 취하시니 답답하오. 대원군 명령을 기다릴 것도 없소. 우리가 먼저 해치웁시다.

권정호가 성급하게 말을 했다.

그야 좋은 수만 있으면 대원군도 하라고 하실 것 아니요?

안기영이 궁금해서 물었다.

이번 팔월 (고종 십구 년)에 과거가 있어서 영남을 비롯한 전국의 선비가 모입니다. 그때 그들을 대원군의 명령이라고 선동해서 대궐을 점령하고 민비 앞잡이 개화당 놈들을 몰살하고, 별동대로 하여금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게 하여 왜놈을 모두 몰아내면 되지 않소. 아무래도 피를 보지 않고는…

선비들이야 입과 글로는 개화당을 잘 치지만 그런 실지행동에는 비겁해서 안 될 걸요.

대원군은 우리들까지 책상물림이라 일할 자격이 없다는데, 선비들이야 더구나 책상도령이 아니요.

거사를 하려면 역시 불평만만한 군대를 이용해야 하오.

대원군파의 모주(謀主)격인 채동술이 군대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옳소. 그럼 군대에 손을 뻗칩시다.

내가 무관(武官) 친구를 찾아가서 상의해 보겠소.

채동술은 광주산성 별감(廣州山城別監)  이풍래(李豊來)를 찾아 가서 모의해 협력해 달라고 권했다. 이풍래는 그 자리에서 친구의 면전이라 듣고만 있었고 찬부(贊否)간의 확답은 하지 않았다.

좌우간 잘 생각해 주시오. 믿는 사이라 상의한 것이니 절대 비밀로 하고.

그야 물론이지요.

채동술을 보낸 뒤에 이풍래는 잠시 동안 대원군측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채동술의 큰 소리와 달리 잠잠했다. 이풍래는 겁이 났다. 만일 음모가 발각되면 자기도 모의자의 일당으로 몰려서 목이 달아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친구고 뭐고 내가 살아야겠다.)

이풍래는 친구를 배반하고 이 기회에 자기의 공을 세워서 출세할 유혹을 느끼고, 그 음모 사실을 의금부(義禁府)에 고발했다. 이 고발을 들은 고종은 안색이 창백해졌고 민비의 안색은 불빛같이 노염이 피어 올랐다.

운현궁이 시킨 반란 음모에 틀림 없습니다. 이번엔 운현궁을 잡아다 직접 심문하고 대역죄로 처단해야 합니다.

민비는 고종의 양해를 구하려고 했다.

운현궁이 시켰는지, 심중히 미리 조사한 뒤에 사실이라면…

운현궁이란 물론 대원군이다. 지금까지도 민비는 시아버지를 숙청하려고 별렀으나 뚜렷한 증거로 명분을 세우지 못하기도 하고 또는 고종의 체면을 보아서 단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처치할 결심을 했던 것이다.

안기영, 채동술, 권정호는 즉시 잡혀서 엄중한 고문을 당했으나 대원군은 직접 지휘했다는 사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민비는 사건을 날조 확대시켜서 마땅치 못하게 생각하던 조중호(趙中鎬), 한성근(韓聖根), 윤웅열(尹雄烈), 유도석(柳道奭), 윤홍섭(尹弘燮) 등의 무관도 역적 죄로 몰아서 참형에 처해 버렸다.

그리고 대원군에게는 직접 손을 대지 못하게 되자 대원군의 서자(庶子) 이재선(李載先)을 그들이 추대했다는 사건을 꾸며서 독약을 먹여 없애 버렸다. 억울하게도 대원군 대신 희생 된 이재선은 미미한 군별직(軍別職)에 있었는데 고종에게는 이복형(異腹兄)이었다. 민비는 고종으로 하여금 핏줄이 통한 형까지 죽이게 하고서야 화를 풀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안기영의 첩 설화도 잡혀 가서 고문을 당했다. 설화는 중년여자였지만 아직도 미모였기 때문에 추관들의 음탕한 농감이 되었다.

이년, 너는 기생으로 곱게 늙지 못하고 대역적놈만 골라서 첩노릇을 하느냐, 역적 놈들의 그 맛이 그렇게도 좋으냐?

미인박명이라 서방만 잡아먹는 팔자로구나.

그년, 내가 하룻밤 데리고 자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고문과 경멸을 당한 설화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은 되었으나

너도 죽여버릴 수 있지만 계집의 얼굴이 아까워서 우선 살려는 보낸다. 그러나 금후로 역적놈들 잔당과 만나기만 해도 잡아 죽이겠다.

하는 위협을 받았다. 설화는 두 번째 남편도 잃어버린 기구한 팔자가 되었다.

이제는 기생노릇도 첩노릇도 지긋지긋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 신세한탄으로 지나던 어느 날 밤 자기를 잡아 가던 포교가 어슬렁어슬렁 찾아왔다.

나으리 웬일이시오?

설화는 깜짝 놀랐으나, 기생 솜씨로 아양까지 피우며 물었다. 포교에게 나으리라는 것도 큰 대접이므로 그의 동정을 사려는 본능적인 태도였다.

아씨에게 조용히 할말이 있어서 왔소.

조용히 할 말이라고 하므로 설화는 자기 방으로 불러 들였다.

나으리 또 잡으러 왔소?

음, 경우에 따라서는…

포교는 싱그레 웃어보였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내가 아씨에게 통사정을 하러 왔는데… 양반들만 상대하던 아씨가 나 같은 포교 따위야 어디…

눈치 빠른 설화는 이 포교가 자기에게 반해서 음침한 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잡으러 온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나으리는 왜 그런 말을 해요.

아씨, 나는 지체도 낮고 가난해서 이 나이에 기생오입 한번 못해 보고 상처를 일찍한 채 홀아비 신세로 있어요. 아씨를 본 후론 밤에도 잠이 와야죠. 살림은 같이 못하더라도 하룻 밤의 정이라도…

호호호, 나으리 그런 농엔 넘어갈 내가 아네요. 아무리 떠봐도 족쳐도 아무 죄 없어요.

설화는 슬쩍 딴 소리를 했다.

아씨, 내가 밀탐하러 온 건 아니고 정말로…

하고 포교는 설화의 손을 잡고 부르르 떨었다. 포교는 설화의 약점을 이용해서 야심을 품고 왔던 것이다.

호호호, 나으리도 포승 들지 않은 손으로 여자의 손을 잡을 줄 알아요? 그런 얘기라면 어서 돌아가요. 공연히 역적 집에 밤에 드나든다고 혼나지 말고요.

아, 아씨의 정만 한번 받아 보면 역적으로 능지처참해서 죽어도 한이 없겠소… 이건 변변치 않지만 내 정표로 받으시오.

포교는 가슴 속에 넣고 왔던 비단 옷감을 내놓았다. 그러나 설화는 그것도 밀쳐 놓고 냉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는 태가 포교에게는 더 도발적으로 보여 억센 두 팔로 설화의 가는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이럼 소리치겠어요.

하면서도 설화는 몸을 맡긴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찾아온 나비를 대하는 꽃과 같은 태도에 포교는

소리쳐도, 죽여도 좋소.

하고 늘어졌다.

나도 나으리 께 청이 있어요.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흥흥.

나를 다시 잡아가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겠어요?

설화는 일종의 흥정을 했다.

나 같은 일개 포리야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지만, 만일 그런 명령이 내릴 기미만 있으면 미리 알려서 숨게 하겠소. 아니 내가 숨기고 보호하지요.

정말 맹세하겠지요?

혈서라도…

혈서를 쓸 것까지 없지만, 만일 나를 또 잡아가면 당신이 나를 강간했다고 폭로해서 경 치울 테니 그리 알아요.

좋소. 그럼 강간을 허락하시오. 허허허

그리고 포교는 설화의 이불 속에서 하룻밤을 즐겁게 보냈다.

개화당 덕은 내가 제일 보는군.

포교는 설화의 몸을 한번 범한 뒤에는 아씨라는 존대를 치워 버렸다.

흥, 포도대장 세도도 못 부리면서.

아니지 개화당 반대파는 역적으로 모는 세월이니까 내가 천하일색의 설화와 이렇게 잘 수 있지.

흥, 민비가 고맙단 말이지?

민비는 지독한 중전이야. 죄도 없는 시형 이재선에게 독약 사발을 안기다니…

나도 여자지만 민비는 천하 독부로서 나라를 망쳐 버리고 있어요.

그렇지, 그런 극성을 부리다가 끝이 좋지 못할 거야.

포교도 어느새 설화와 동지가 된 것 같았다.

지금, 군대도 들먹거리는 정보가 있어요. 의금부와 포도청은 속으로 떨고 있으니까, 무

슨 난리라도 나고야 말 거야.

포교는 설화에게 그런 기밀까지 부지중에 누설했다. 설화는 다음날 그 정보를 대원군의 정보원 장가에게 보고했다.

이 정보처럼 군대는 불평불만으로 들먹거리고 있었다. 국고는 텅텅 빈데다가 흉년까지 들어서 세금을 받아 들이지 못한 조정에서는 군대의 봉급조차 오래 지급 치 못하고 있었다.

 

 

 

壬午軍亂

 

고과대작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취해 있으면서 졸병은 굶어 죽으란 말이냐? 굶주린 병정이 전쟁이나 충성을 할 수 있느냐?

국방비가 없다고 오영문(五營門)을 두 개로 줄이더니, 일본장교가 훈련시키는 별기군(別技軍)만 후대하고 우리는 밥도 안 먹이니 조정 창고라도 털어다 먹자.

개화당 정부를 뒤집어 엎어야 한다.

이런 불평이 폭발 점에 달하자, 임오년(壬午年=고종 19년, 1,882년) 6월에 겨우 한달 분의 쌀을 군대에게 지급한다는 조정의 포고가 내렸다. 6월 5일은 아침부터 선혜청 도봉소(宣惠廳都捧所) 앞에 마치 거지떼 같은 군졸들이 부대를 들고 모여 들었다.

일년 이상이나 밀린 봉급을 겨우 한달 치밖에 안 준다니 기가 막힌다. 이나마 얻어다가 처자에게 죽이라도 먹여야지 어떡하나.

이런 불평을 하는 군대들에게 이윽고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민겸호(閔謙鎬)의 부하 창리(倉吏)들이 창고 문을 열고 배급 쌀을 되어 주기 시작했다.

왜 침수로 썩은 쌀을 주느냐?

그나마 왕모래가 절반이나 섞여 있다.

이것도 사람이 먹으라는 쌀이냐? 다른 쌀로 내라.

군졸들은 썩고 왕모래 섞인 쌀을 바꾸어 내라고 아우성을 쳤다. 쌀을 되던 하인들이 몰매를 맞게 되자 악을 썼다.

당신들 보다시피 창고엔 이 쌀밖에 없소. 더 좋은 쌀이 있거든 들어와서 찾아내시오.

드디어 군대와 창고지기 사이에는 싸움이 벌어졌다.

너희들이 몰라? 네 상전 놈들과 짜고서 해먹은 농간이 아니냐?

군대면 그런 소리 해도 좋으냐? 누가 어떻게 해먹었단 말이냐?

당대의 세도가 민겸호를 상관으로 모신 하인들도 너절한 군대는 안중에 없었다.

그럼, 네 상전들도 너희들도 이런 쌀을 먹고 있느냐?

그 놈들부터 때려 죽여라!

격분한 군사들은 창고지기를 죽일 기세로 흥분했다.

창고를 부셔 버려라.

더러운 창고를 불질러 버려라.

폭동의 기세는 점점 높아갔다. 군대는 마침내 창고지기들에게 폭력을 가했다. 당황한 창고지기들은 이런 군대의 폭행을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고발했다. 폭행 주동자로 지목된 김춘영(金春永)과 유복만(柳卜萬) 등 수명의 병정은 민겸호의 연락으로 출동한 포교들에게 잡혀서 포도청에 갇혔다.

잡혀간 병정 오명 중 두 명은 폭동죄로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이삼 일 후에 이런 풍문이 서울에 돌았다. 무위군영(武衛軍營)과 장어군영(將禦軍營)의 장병들은 이 사건에 대하여 행동 통일을 논의하던 중 동료 두 명이 사형된다는 소문에 격분했다.

동료만 희생시켜선 안 된다.

그들을 구해 내지 못하면 앞으로 우리도 다 잡혀가 죽는다.

이럴 때 김춘영의 아버지와 유복만의 동생이 이웃 사람들과 함께 군영으로 들어와서 아들과 형을 구해 달라고 울며 호소했다.

6월 9일에 군졸의 대표는 무위대장(武衛大將) 이경하(李景夏)의 집을 찾아가서 동료의 석방을 진정했다. 이경하도 자기의 직속부하를 구하려고는 했으나 당대의 세도가 민겸호의 위세에는 맥을 추지 못했으므로 체포된 병졸들을 관대히 처분해 달라는 소개장을 군졸들에게 써주면서 직접 청원하라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였다.

군졸들이 이대장의 편지를 가지고 민재상 집을 찾아 갔으나 대감은 궁중에 가고 없다 하고 청지기들과 전날 창고에서 매맞은 창고지기들만 달려 나와서 군졸들에게 욕을 퍼붓고 대문을 닫으려고 했다.

요전에 도봉소(都捧所) 창고에서 우리를 친 놈들이 대감댁에까지 몰려 왔구나.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포도청 포교들을 부르겠다.

이놈들, 네놈들 때문에 우리 동료가 죽게 됐다. 대감을 못 만나게 하는 네놈들을 죽인 후 대문을 부시고 들어가서 대감과 담판하겠다.

격분한 군졸들은 청지기와 창고지기를 잡아 동댕이치고 대문을 부시고 안으로 습격해 들어가서 호화로운 저택과 가구를 닥치는 대로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오색찬란한 의복과 필육, 진귀한 패물과 골동품을 끌어 내다가 마당에 쌓아 놓고 불을 질러 버렸다.

백성의 고혈을 빨아서 군대를 굶기면서 도적질한 이 더러운 재산을 모조리 태워 버려라.

민가 놈들을 모조리 잡아다 저 불 속에 태워 죽이자.

흥분한 군졸의 집단은 복수의 쾌감으로 환성을 올리면서 화염이 오르는 민겸호 집을 나왔다. 그러나 나와서 생각하니 갈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가도 반란죄로 잡혀 죽을 중대사건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비로소 났다.

이 길로 포도청으로 가서 동료를 탈환하자.

영문으로 들어가서 복장을 하고 본격적인 혁명으로 민씨 일파의 개화당을 전부 없애 버리자.

그러자, 기왕 역적으로 몰리게 됐으니, 복장을 하고 전군대가 대궐로 쳐들어 가서 민씨부터 죽여 버리자.

자기들도 예기치 않은 폭동을 일으킨 군대들은, 갑자기 이 폭동을 혁명군으로 조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 의거(義擧)를 후원하고 지휘해 줄 지도자가 없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세우고 당당히 싸우려면 민씨와 맞설 인물을 추대할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 대원위(大院位) 대감께 우리 실정을 호소해 보고 최후의 태도를 결정하자.

옳소. 대원위 대감은 우리 편에 서 주실 것이다. 자아 운현궁으로 가서 그분을 추대하고 궁중으로 밀고 들어가자.

돌발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무장지졸(無將之卒)들은 대원군을 혁명군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대원군은 운현궁 문 밖까지 나서서 자기를 혁명군의 지도자로 추대하려고 호소하는 군졸들에게 미소를 띠우면서 간단한 훈시를 했다. 그는 침착하고 위엄 있는 태도로 얘기했다.

너희들 고충은 잘 알겠다. 그러나 이렇게 작당해서 남의 인명을 살상하거나 재물을 파괴하면 안 된다. 그러지 않아도 민심이 흉흉한 이때에 군대가 들고 일어서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대원군은 자기도 아직 태도를 결정할 수 없었다. 일부 군대의 돌발적인 폭동을 경솔하게 지휘하겠다고 곧 선언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에서 들어도 상관 없을 정도의 말을 하면서 은근히 너희들 군대가 정말로 총 결속해서 혁명을 일으키면 <나라가 위태로울> 정도로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고 암시적인 선동을 했다.

대감, 이대로 돌아 가면 민가 일파에게 역적으로 잡혀서 죽을 뿐입니다. 기왕 죽을 바에는 놈들의 세도정부를 둘러 엎겠으니 대감께서 다시 이 나라 정치를 맡아 주십시오.

그러나 대원군은 의미 있는 미소만 띠워 보였을 뿐이다.

너희들 신변을 무사하게 하고, 군미(軍米)를 좋은 쌀로 주도록 하겠으니 조용히 영문으로 돌아가거라.

그래도 군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흥분했던 군대가 삼삼오오 돌아가기 시작했다. 군대들의 굳은 결심을 본 대원군은 속으로 이미 이 기회를 이용하려고 결심했다.

(군대까지 나를 지지하는 이때, 내가 그들의 용기만 못해서야 되겠느냐.)

대원군은 심복 허욱(許煜)에게 눈짓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허욱은 이 군란의 주동자격인 김춘영의 부친 김장손(金長孫)과 유복만의 형 유춘만(柳春萬)의 옆구리를 꾹 찔러서 운현궁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대원군은 그들 세 명을 밀실로 데리고 가서 사건 경과와 군대의 동향을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대원군은 단호한 밀령을 내렸다.

허욱, 자네가 직접 군대를 혁명군으로 하여 조직적인 지휘를 하게. 우선 군영으로 돌아 간 뒤에 군대 전부를 동원해서 완전무장을 시킨 뒤에 민가 일파를 전격적으로 없애 버려.

군대의 신임을 얻고 사기를 돕기 위해서 내 입장은 자네가 적당히 말해도 좋아.

대원군은 곧 심복 부하들에게 비상 소집을 명령했으므로 청지기와 정보원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대원군과 만나고 궁문 밖으로 나온 유춘만이 기다리고 있는 군졸들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대원위 대감께서 우리들 소원대로 용감히 행동하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이분에게 지휘하도록 임명하셨으니 일치단결해서 이분의 명령대로 행동하자.

만세!

흥분한 군대는 일시에 환성을 올렸다.

세도 민가를 모조리 죽이자. 개화당을 때려 부셔라.

이런 아우성을 치자 허욱은 지휘자로서 제일 호의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일체의 개인 행동을 삼가라. 뭉치면 모두 살고 헤지면 모두 죽는다. 뭉쳐서 끝까지 싸우면 의거(義擧)로 성공하고 개별행동으로 분열하면 실패하여 역적의 누명을 쓰고 잡혀 죽는다. 우선 군영으로 행진하자.

왓!

하고 군줄들은 비로소 대열을 정돈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우선 군영으로 가서 남은 군대와 완전무장을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려라.

군대는 당당한 시위행진으로 동별영(東別營)으로 향했다.

군대가 대원군을 추대하고 민씨 일파와 개화당을 때려 부시게 됐다.

일반 백성들은 어느 사이에 몽둥이를 들고 군대에 합류했다. 군대가 동별영에 가는 동안에 몽둥이 든 군중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군대와 민중은 동별영으로 밀고 들어가서 무기창고를 부시고 무기를 꺼내다가 완전무장을 하고 다시 거리로 뛰어 나왔다.

당황한 민비는 곧 무위영대장 이경하에게 군란(軍亂)을 진압시키라는 급명을 내렸다. 이경하는 자기 통솔 부족의 책임을 느끼고 당황히 나서서 조용히 해산하고 군영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군대를 지휘하던 그전의 사령관 자격이 없었다. 지금의 지휘

관은 대원군이 임명한 민간인 허욱이었던 것이다.

이경하는 썩은 무관이다. 그전에 대원군께 중용된 은혜도 잊고서 민가들의 주구(走狗)노릇을 한다. 저놈부터 때려 죽여라.

격분한 군대와 군중이 아우성을 치자 이경하는 무장답지 못하게 창백한 얼굴로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우선 포도청을 때려 부수고, 감금된 동료를 구출하자.

군대는 종로를 휩쓸고 포도청으로 몰려가자 포도대장을 비롯한 포교는 삼십육계(三十六計)를 치고 말았다. 군대는 구치장을 부시고 김춘영, 유복만, 정의길(鄭義吉), 강명준(姜命俊) 등의 동료 병정을 석방했다. 석방된 그들은 일약 영웅의 모습으로 반란군의 선두에 나섰다.

포도청 앞에서 반란군민(反亂軍民)의 기세는 충천했고 인원은 점점 늘었다. 여기서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서 허욱과 유춘만과 김장손이 각대의 대장이 되어서 행동지휘를 분담했다.

일대는 경기감영(京畿監營)으로!

일대는 민태호(閔台鎬) 집으로!

일대는 별기군(別技軍) 훈련소로!

노도와 같은 군민 합동의 반란군중은 각각 공격목표로 몰렸다. 경기감영에서는 관찰사 김보현이 도망쳐 버렸으므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칼과 창을 약탈해서 민간 대원들이 나누어 들었다.

청수관(淸水館)으로 가자!

청수관은 일본 공사관이었다. 반란군중은 일본 공사관에 침입하려고 했으나 수비하던 일본 군대가 총을 쏘았으므로 일시 후퇴했다가 해가 진 뒤에 몰려 가서 불을 질렀다. 일본인들을 전부 죽이려고 했으나 공사 하나부사(花房)는 관원과 인천으로 도망해서 영국 기선 비어호(飛魚號)를 타고 본국으로 피신했다.

별기군 훈련소를 습격한 반란군은 일본인 교육 장교를 죽이고 별기군 군대로 합류시켜 버렸다. 반란군은 그날 밤이 깊도록 세도하던 대관들의 집과 민비가 단골로 불공 드리던 서울 주변의 절까지 파괴하고 방화했다. 그리고 일단 동별영으로 돌아와서 내일의 행동 계획

을 세운 뒤에 날이 새자 당시의 영의정으로 있던 대원군의 형 이최응(李最應)의 집을 습격했다. 당황한 이최응은 새벽 잠자리에서 잠옷 채로 빠져 나와 도망치려고 높은 뒷담을 넘다가 안으로 떨어져서 중한 낙상을 입고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집안 뒤지던 반란군은 그를 발견하고 쓰러져 있는 그의 몸을 창으로 찌르고 발로 밟아서 무참하게 죽였다.

놈들의 영의정을 죽였으니 이젠 나라를 망친 요부 민가년을 죽여 없애자!

그들은 이미 국모(國母)도 중전(中殿)도 민비도 아닌 요부(妖婦) 민가년으로 욕하며 이최응 처럼 피의 심판을 내리려고 창덕궁으로 돌격해 갔다. 반란군은 마침내 왕궁까지 쳐들어 갔다. 이제는 완전한 역적으로 화한 혁명집단이었다. 돈화문을 지키던 대궐의 수문장(守門將) 이하의 파수병도 막지 못하고 도망치자 반란군의 최후의 목표를 향해서 아우성을 치며 몰려 들어갔다. 이 때 대궐안으로 돌입한 성난 군민의 수는 수 천명에 달했다.

민비도 덜덜 떨면서 고종에게 애원했다.

우선 이 폭동을 진압시키는 데는 일시 운현궁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민비는 그 반란의 뒤에서는 대원군이 총 지휘를 하고 있는 줄 알았으므로 그와의 화해적 태도를 취해 우선 급한 화를 면해 보려는 마지막 술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요.

고종은 그런 생각이 있으면서도 민비가 찬성할지 몰라서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우선 목숨을 살고 보자는 왕과 왕후의 초라한 순간이었다.

곧 운현궁으로 가서 대원군을 궁중으로 모셔 오도록 하라.

고종은 중사(中使)를 급히 보내서 대원군을 청해 반란 무마의 뜻을 전했다. 그가 아니고는 아무도 반란군민 수천 명을 진압할 수는 없었다. 흥분한 군민들은 이최응을 무찌른 피묻은 창검으로 궁궐의 기둥을 치면서 아우성을 쳤다.

중전을 잡아라.

민비를 잡아 죽여라.

그년을 죽여야 나라가 바로 되고 백성이 살수 있다.

그런 아우성이 민비의 귀에까지 들렸다. 민비는 고종이 있는 궁전의 뒷방에 숨어서 벌벌 떨었다. 도망을 치려고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 모든 전각이 점령 포위되고 넓은 어원(御苑)의 숲 사이까지 반란군으로 꽉 차 있었다.

민비는 고종에게는 직접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고종이 있는 궁의 뒷방에 숨어 있으면서 빨리 원수의 대원군이 와서 성난 군민을 진정시켜 주기를 기다렸다.

대원군은 운현궁 아소당(我笑堂)에 앉아서 허욱으로부터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보내 오는 반란상황의 정보를 받으면서 통쾌한 미소를 띠우고, 중용한 문제에는 비밀 지령을 내리고 있었다.

(궁중을 점령했으면 인제 상감이 나한테 응원해 오겠지.)

하고 전세를 전망하고 있던 그에게 예기한바와 같이 고종이 보낸 중사가 와서 상감께서 대감을 빨리 궁중으로 모시고 오라는 분부이옵니다.

중전마마는 무사하신가?

어디 계시지?

상감과 함께 계시면서 대감 오시기를 기다리십니다.

대원군은 이때도 특히 민비의 행방을 물었다. 중사는 그의 뜻도 모르고 보통 안부려니 하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당신도 함께 갑시다.

대원군은 부인 민씨에게 말했다.

고종의 신변을 걱정하고 있던 부인은 얼른 궁중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급한 때 무슨 예복이오. 그대로 갑시다.

대원군은 부인을 재촉하고, 벌벌 떨고 달려와 있던 큰 아들 이재면(李載冕)을 데리고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대원군 대감 만세!

대원군이 돈화문을 들어서자 반란군민들이 일시에 환영 만세를 불렀다. 마치 구국 영웅(救國英雄)을 맞는 듯 감격의 환호성이 궁궐을 찌렁 찌렁 울렸다.

대원군 대감 행차시다. 길을 비켜라.

하면서 군중은 스스로 물결 갈라지듯이 길을 열었다.

뒤를 호위하라. 모시고 가자.

앞을 열었던 무장한 군중은 대원군 뒤에 다시 뭉쳐서 고종이 기다리는 궁으로 따라갔다.

고종은 중희당(重熙堂)에서 창백한 얼굴로 대원군을 맞았다. 고종을 호위하기보다는 자기들 살길을 구해서 도망쳐 와 있던 민겸호와 경기감사 김보현이 버선 바닥으로 뜰까지 내려와서 대원군에게 굽실거렸다.

저 비굴한 놈이 민겸호다.

저 놈은 김보현이다.

저 역적 놈들을 잡아 내려라!

격분한 군중이 보당까지 뛰어 올라서 민겸호와 김보현을 잡아서 질질 끌고 마당으로 내려 왔다.

대감 살려 주십시오.

하고 민겸호가 대원군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태도는 잔인할 정도로 빈정댔다.

허허.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천하세도가 민대감을 살리고 죽일 권한이 있소.

민겸호는 이제 죽었구나 하는 낙망으로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김보현은 끌려가면서도 최후의 허세를 부렸다.

어전에서 이게 무슨 무엄한 행패냐?

자기를 끌고 가는 군중에게 반항을 한 것이다.

이놈이 아직도 세도 버릇을 못 버렸구나. 지옥에 가서도 제 버릇 못 버릴 놈이다.

군중은 두 명을 중문 밖으로 나가서 무참하게 박살한 후 시체를 개천에 굴러 떨어뜨렸다.

두 명의 고관을 죽인 피에 흥분한 군중은

민비를 잡아 죽이자.

그년을 살려 두면 또 무슨 요사를 부릴지 모른다.

민비는 고종의 힘으로도 자기의 목숨을 보호하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민겸호에게 대한 대원군의 복수심이 곧 자기에게도 미칠 것을 안 것이다. 그러나 민비는 침착하게 도망할 계획을 세우고 허술한 궁녀로 변장하고 궁전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뒷문 밖에도 민비를 잡아 죽이라고 아우성 치는 군중으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대담 침착한 민비는 종시 궁녀 모양으로 그 군중에 섞여서 밀리면서 탈출할 구멍을 찾고 있었다. 겨우 대조전(大造殿) 앞까지 왔을 때,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가 허술한 궁녀 모습으로 변장한 민비를 보았다.

아, 너 여기 있었니? 너를 찾느라고 혼났다.

홍재희는 재빨리 기지(機智)를 써서 자기 누이 동생 취급을 했다. 그리고 옆에 넋을 잃고 있던 가마꾼에게 눈짓을 했다.

자네들 미안하지만, 내 누이 동생 좀 태워서 궁 밖으로 내다 주게. 천한 궁녀 노릇 시킨 것도 가엾은데 이 난리통에 밟혀 죽으면 어쩌나. 자아 술값을 받고…

하고 홍재희는 능청맞은 소리를 하면서 돈을 꺼내서 후하게 주었다. 가마꾼은 못이기는 척하고 궁녀 아닌 민중전을 태우고 군중의 혼잡을 피하며 나갔다. 가마 옆에는 홍재희가 호위하고 따라갔다. 그러나 도중에서 창 든 군졸들이 가마를 막고

누구를 태우고 가느냐?

제 누이 동생이요.

뭐, 어디 보자.

군졸들은 난폭하게 가마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나 그들은 궁녀로 변장한 민비의 얼굴을 알아 채지 못했다.

너는 누구냐?

궁녀 올시다.

궁녀는 이럴 때도 가마 행차냐?

너는 민중전 있는 곳을 알겠지?

모릅니다.

수상하니 나오너라. 중전 처소를 알리잖고 는 못 간다.

당황한 홍재희는 우는 상을 하면서 창 끝으로 위협하는 군졸에게 애원했다.

이 애는 내 누이 동생입니다. 오라비가 못나서 천한 궁녀 노릇을 시켰는데 마침 병중에 이런 혼란이라 집으로 데려 가는 중이요.

정말이냐?

정말입니다.

다짐해 대답한 홍재희는 가마 안에서 정체를 숨기려고 병인인 척 얼굴을 숙이고 있는 민비에게

얘, 어서 가마에서 내려라. 가마 탄 것이 오해를 받는 모양이다.

민비가 가마에서 내리자 홍재희는 얼른 등을 돌려대면서

자아, 업고 가자.

하고 천연스러운 연극을 했다. 민비는 홍재희의 충성이 고마웠고, 그의 임기응변의 기지에 감탄하면서 잠자코 그의 등에 업히고 병으로 고단하다는 듯이 얼굴을 그의 등에 파묻었다.

이래서 잡혀 죽을 뻔한 민비는 간신이 살벌한 궁중에서 탈출해 나왔다. 민비가 이런 요행으로 궁중에서 탈출하는 사이에 고종과 대원군 사이의 회견은 간단하게 끝났다. 고종은 곧 대신들에게

지금부터 모든 공무(公務)는 대원군 앞에서 품결(稟決)하라.

하고 대원군에게 국정의 실권을 일임할 것을 밝혔다. 그리고 국왕으로서 이번 군란사건에 대하여 자책(自責)하는 교서(敎書)를 발표했다.

오늘의 이런 전무(前無)한 변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나의 부덕(不德)한 탓으로서 하나도 내 잘못이요 둘도 내 잘못이다. 이런 말을 하게 될 내 심정이 어찌 한심스럽지 않으랴. 제신(諸臣)은 흥분한 군중을 잘 타일러서 조용히 물러가게 하라.

이런 고종의 분부가 내리자 반란군민들은 대원군에게 정권이 다시 돌아온 것을 만족히 여기고

대원위(大院位) 대감 만세!

를 궁중이 진동하도록 불렀다. 순식간에 정권을 쟁탈한 대원군은 군중을 향해서

군민들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소. 나에게 국사를 맡아 보라는 상감 분부가 내린 이상 여러분이 원하는 바에 따라서 모든 일을 선처하겠으니 안심하고 돌아가서 군무와 생업에 종사하기 바라오.

그러나 군중은 대원군의 해산명령에도 불복(不服)하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민중전을 이 기회에 처단해야 물러 나겠습니다. 민중전을 잡아서 처단하는 날까지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군중들은 궁중을 샅샅이 뒤지면서 소란을 계속했다. 대원군은 하는 수 없이 거짓말로 우선 군중을 무마하려고 했다.

중전께서는 동란 중에 승하하신 것이 확인 되었다. 다만 체백(體魄)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니, 그리 알고 해산해 돌아가라.

동시에 민비가 살해될 때 입었다는 옷을 관에 넣고, 정식으로 국장(國葬)을 발표하는 동시에 국장도감(國葬都監)까지 설치했다. 이로써 반신반의하는 반란군민은 해산해 돌아갔고 애매한 전국의 백성들은 각종 풍설 속에 백립(白笠)을 쓰고 국상을 입었다.

대원군은 일단 정권을 잡은 이상 빨리 자기 세력으로 정부를 개조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민비가 살아서 숨어 있다손 치더라도 장례식까지 공식으로 지내면 적어도 다시는 왕비로 되돌아 오지 못할 것이며 생매장이나 다름없다고 안심했다.

민비는 귀신같이 도망쳐서 살아 있으면서 대원군에게 복수할 음모를 하고 있다. 설영 죽었다 해도 귀신으로서 원수를 갚을 무서운 여자다.

세상에서는 이런 풍설이 돌았다. 대원군도 그 뒤에 민비를 정말로 죽여버리려고 사방으로 수색했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落照의 王家

 

山中女王

 

중전마마, 급한 경우오라 무엄한 언동을 하였나이다.

창덕궁 뒷문으로 민비를 업고 탈출하는데 성공한 홍재희는 민비를 등에서 내려놓으면서 사과했다.

홍별감, 그게 무슨 말이요. 자아 어서 안전한 곳으로…

민비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고마워하면서 빨리 피신할 곳으로 데려가도록 부탁했다. 마침 퍼붓는 비에 궁녀로 변장한 여름 옷이 몸에 착 들어 붙어서 민비의 젊고 풍만한 살빛이 그냥 드러나 있었다.

우선 윤태준(尹泰駿)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집은 안전할까?

네, 제가 믿는 터라.

홍재희는 민비를 화개동(花開洞)에 있는 윤태준 집으로 안내해 갔다. 거리에 범람하던 사람들도 비를 피해서 모두 집안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도망치는 민비에게는 다행이었다.

비에 쪼록 젖은 초라한 모습의 민비를 윤태준의 집에선 당황하고 송구스러워하며 곧 골방에 숨기고 옷을 갈아입게 했다. 민비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서, 홍재희에게 민응식(閔應植)과 민긍식(閔肯植)을 몰래 불러다가 우선 신변 안전의 방도를 상의케 했다.

거리가 아직 소란하지? 반란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상감께서는?

상감께서는 대원군에게 국정을 맡기셨으며, 대원군은 중전이 승하하셨다고 국상발표를 했습니다.

아, 그 소식은 알고 있소. 아무래도 서울을 빠져서 시골로 숨어야겠는데 노자와 그 밖의 비용을 마련할 수 있소?

네, 곧 마련하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쉽게 했으나 세도하던 민씨가 모두 도망하는 판이라 그들도 돈을 준비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주인 윤태준에게 부탁했고 윤태준은 조충희(趙忠熙)에게 돈 오백 냥을 빌려다 민비의 피란 비용으로 주었다.

노자가 마련되자 민비는 동대문 밖의 이근영(李根永) 집으로 가서 민응식, 민긍식, 민영기(閔泳驥)와 함께 피란민을 가장하고 여주(驪州)로 피란할 준비를 했다. 모든 준비가 된 민비 일행은 십사일 새벽에 광나루로 가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민비는 생명을 유지하려고 창덕궁을 탈출해서 한강을 넘으면서, 멀리 북악산을 돌아보고 비분강개했다.

(운현궁의 원수를 갚고, 한강을 다시 건너서 환궁할 날은 언젤까. 무슨 고생을 하더라도 내가 죽지만 않으면 꼭 원수를 갚겠다.)

민비는 굳은 결심으로 자기를 격려했다.

하인처럼 짐을 진 민응식, 민긍식이 뱃군에게 교섭했으나 장마로 불어난 이 큰 물엔 보통 때도 배를 못 내요. 더구나 지금은 대원군이 일체의 피난민을 건너선 안 된다는 엄명이 내렸소. 만일 들키면 잡혀 죽게요.

하고 배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허술한 차림의 후행(後行)으로 가장(假裝)한 민영기는 물이 불었지만 당신들 솜씨로 못 건너겠소. 신행(新行)길이라 꼭 건너야겠으니 특별히 부탁하오. 난리가 났다고 혼인까지 금하실 대원군도 아니실 거요. 선가는 후하게 주겠소.

혼행(婚行)도 딱하지만, 벌이 못하는 우리도 딱해요.

이때, 민간 신부로 가장하고 가마 안에 있던 민비가 큰 금가락지를 빼어서 민응식에게 주며 눈짓을 했다. 그는 그 묵직하고 빛나는 금가락지를 사공의 손에 쥐어 주면서 세상은 난리가 나도 혼인댁 경사는 지내야 할 거 아니요. 자아 누가 오기 전에 빨리 건너 갑시다.

사공들은 신부가 혼인 반지까지 빼어 주는데 동정한 듯이, 그러나 그 재물이 탐나서 못 이기는 척하고 배를 냈다.

생원님, 뱃값으론 큰 마음 쓰셨지만, 나중에라도 피난민 건너 주었다고 대원군이 우리 목을 잘라 버릴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나라일 잘하실 대원군께서 설마 그런 가혹한 벌을 내리시겠소?

민영기가 슬쩍 대원군을 추켜 올렸다.

말씀 맙쇼. 세도에 눈이 어두워서 중전마마까지 죽인 흉악한 시아버진데 우리 뱃사공 따위는 파리 목숨만치나 생각하겠어요?

민비는 대원군을 미워하고 자기를 동정하는 이름 없는 백성이 고마웠다. 그처럼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과도 같았다. 그러나 다른 동료 사공은 민비가 망해서 마땅하다는 말도 해서 아찔하게 했다.

대원군의 철통 같은 정보망과 경계망도 민비를 잡지 못하고 이처럼 한강너머로 탈출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미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이제 민비의 생사는 염두에도 없이 오래 굶주렸던 정권 야망을 채우는데 분망했다. 우선 민비 일파를 몰아내고 곧 자기 당파로 새 조정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의 정변(政變)은 군사의 국상문제로 조야의 물의가 분분하던 때라 극도로 불안한 정국(政局)에서 대원군과 운명을 같이 하려는 인물은 구하기 힘들었다.

신응조(申應朝)는 우의정을 시켰으나 처음부터 사퇴하고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또 조대비 외척(外戚)의 거물인 병조판서(兵曹判書) 조영하(趙寧夏)도 더 중용하려고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협력하지 않고 방관태도를 취했다. 병조판서도 그만두고 싶었으나 그렇게까지 하면 대원군에게 박해를 받을 것 같아서 그냥 정세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원군은 국민에게 신임 받을 만한 인물로 그의 새 조정을 확고하게 조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영의정 홍순목(洪淳穆)도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부자체제(父子體制)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의 아들 이재면(李載冕)에게 삼영(三營)의 대장(大將)을 겸임시키고, 호조판서와 선혜당상(宣惠堂上)까지 맡겨서 군권(軍權)과 국고(國庫)를 장악시켰다. 이처럼 대원군의 신정권은 불안한 약체성(弱體性)을 면하지 못했다.

민비가 살아서 반격준비를 하고 있다.

민비는 이미 청국으로 망명해서 청국이 전부터 미워하던 대원군을 끌어낼 공작을 하고 있다.

청국에 간 게 아니라 일본에 가서 청병해 가지고 와서, 일본 공사관을 불지른 대원군을 몰아낸다더라.

백성들 사이에는 그럴 듯하기도 하고, 또는 당치도 않은 유언비어(流言蜚語)가 횡행했다.

대원군은 벼락 같은 정권회복은 했으나 심복 일꾼이 적었고, 국제정세가 불리하게 되자 고독감과 불안감을 금하지 못했다. 대원군은 그럴수록 민비 일당에 대한 가혹한 숙청을 서둘렀다. 우선 자기의 아들인 고종을 단단히 단속할 생각을 하고 사사로운 가인(家人)으로서 고종을 대했다.

십이일 밤에 대원군은 궁중의 조용한 방으로 고종을 불러놓고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엄숙한 훈계를 했다.

너를 내가 임금을 시킨 것은 나라를 위하고 집안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간악한 계집이 하자는 대로 해 나라를 이 꼴로 망쳐 놓았으니, 임금으로서 그런 용렬이 어디 있으며, 또 이 아비에게 그런 불효가 어디 있을 수 있느냐?

특히 민비를 간악한 계집이라고 직접 욕을 했다.

아버님, 모든 것이 소자의 잘못입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신성해야 할 궁중이 굿터, 유흥장으로 타락해 버렸고, 국정은 민가 일파의 세도로 부패했고, 개화정책으로 일본세력을 끌어들였으니 이것이 매국망동이 아니고 무엇이냐.

소자의 힘으론 주위 사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국정은 고사하고 궁중의 유흥장도 못 막는 그런 임금, 그런 사내자식이 어디 있느냐?

대원군은 시아버지답지도 못하게 민비에 대한 원한을 풀려고 갖은 말을 했다.

모두 얕은 계집들의 소행이었습니다.

궁중에서 그런 잔당은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

다시는 그런 계집들에게 홀려서 안 된다.

고종이 민비를 계집들이라고 복수(複數)로 나무랐으므로, 대원군도 이미 죽었다고 발표한 민비를 꼬집어 말하지는 않고 다시는 그런 계집들에게 홀려선 안 된다는 못을 박고 아들 고종의 약속을 받았다. 대원군이 노골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만일 민비가 살아서 세력을 회복하고 재등장하더라도 너는 또 민비 농간에 홀리지 말고 아비 나에게만 효자 노릇을 해라.)

이런 의미였지만, 입에 올려서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를 가진 대원군의 호령에 고종은 벌벌 떨면서 맹세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이 나간 뒤에 고종은 혼자 오열했다. 앞으로 자기의 지위와 생명이 어찌될지 불안했다.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부정(父情)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직 무섭기만 했다. 따라서 민비에 대한 정이 그리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고종은 민비가 어디서 살아 있기만 빌었다. 민비가 살아서 대원군을 다시 몰아내고 전과 같은 왕실의 위세를 세워 보면 싶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민비와 도망해서 어떤 산 속에서 농사꾼 부부로 함께 살았으면 얼마나 행복스러웠을까 하며 임금의 거짓 자리(虛位)가 귀찮기만 했다.

그러나 민비 처시하의 시절보다도 무력해진 고종은 대원군에게 감시 당하는 궁중의 수인(囚人) 같은 신세였기 때문에 사랑하고 존경하던 민비의 생사 소식을 수소문해 볼 길조차 없었다. 대원군의 임기응변으로 국상까지 지낸 것은 반신반의였지만 민비가 살아서 서울을 탈출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서울을 탈출한 민비는 운이 좋아서 건재했다. 아침에 광나루에서 한강을 넘은 민비 일행은 망명(亡命)의 길을 강행군해서 그날밤에 여주로 가서 친정 민영소(閔泳韶)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 숨어서 며칠 지내면서 정세를 보고 있던 중 대원군이 민비를 잡으려고 전국에 밀정을 파견했다. 이 집 주위에도 수상한 놈이 기웃거리고 있다.

이런 소식을 들었으므로 밤중에 그 집을 떠나서 남한강(南漢江) 지류(支流)를 거슬러 올라가서 장호원(長湖院)으로 피했다. 장호원에는 서울서부터 민비를 호위해 온 심상훈(沈相薰)의 별장도 있었고, 민형식(閔炯植)의 시골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비는 장호원으로 몰래 들어가서 민형식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으나 세도하던 서울 민씨가 몰려 왔으므로 민비가 있다는 비밀을 곧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민형식의 세도로 학대를 받았던 지방민들이 그에 대한 보복을 할 좋은 시기라고 들고 일어났다. 장호원에 사는 장사(壯士) 정문오(鄭文五)가 주동이 되어서

우리를 못살게 하던 민형식의 집에 나라를 망친 민비가 와서 숨어 있다. 이 기회에 종전의 원수를 갚자.

하고 난동을 일으킨 군중이 민형식 집을 습격했다. 그러나 이때도 운이 좋은 민비는 민속하게 일행과 함께 다시 육십리나 산길로 도망해서 국망산(國望山) 밑의 한적한 산촌(山村)에 이르렀다. 산촌은 경치가 좋았고 행인에 대한 인심도 좋았다.

국망산이란 이름이 좋습니다. 여기가 나라 일을 다시 도모할 희망의 명당일까 합니다.

일행은 민비를 안심시키고 당분간 그 마을에서 숨어 살기로 했다.

집세를 후하게 주겠으니, 저 집을 빌려 주시오.

하고 심상훈이 마을 노인에게 부탁 하자, 마을 사람들은 일행이 행세하는 서울 사람들 같아서 의아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큰집의 주인은 먹을 것도 넉넉한 시골 선비였으므로 사랑에 글방도 차려 놓았다는 핑계로 수상한 서울 사람에게 집 빌려 주기를 거절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냥꾼의 집을 빌려서 살기로 했다.

민비는 물론 신분은 숨겼으나, 피란은 사람이라 하고 돈으로 마을 부녀자들에게 선심을 쓰면서 일류의 사교술로 산 속에서 여왕 노릇을 했다. 민비는 비록 망명 중이었지만 유흥과 미신의 기도로 적막한 피난살이의 심회를 위로했다. 그래서 국망산에 무엇을 비는 무당의 굿소리와 술집의 잡가 소리로 마을이 점점 번거로와지자 시골서 학자 행세를 하는 훈장은 민비 일행의 행동을 비난했다.

허허, 서울 난리가 우리 산촌의 미풍양속(美風良俗)까지 어지럽히게 됐다. 그래도 피난해 온 서울 양반들인 줄 알았더니 장사로 돈푼이나 번 잡된 중인들 같다.

민비 일행은 그런 공격이 도리어 망명정객으로 의심 받는 것보다 나아서 고마웠다. 민비가 국망산에 소원 성취를 기도하는 굿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마을 사람들은 몰랐다. 그리고 부녀자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법석대는 것도 단순히 피난중의 객고(客苦)를 위로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 태연스러운 유흥태도는 정치적인 망명가의 일행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한술책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행의 신하들도 민비에게 왕비에 대한 존경의 태도는 일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으로는 민비를 중심으로 조그만 망명정권의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고 치열한 음모가 거듭되었다.

인제 흉선군(兇鮮君)도 반란 성공에 취해 있고 민심도 좀 가라앉았으니, 우선 상감께 중전께서 무사히 생존해 계시다는 비밀 연락을 올려서 성심(聖心)을 위로해 드리는 시기인가 합니다.

그렇소. 그러나 내가 있다는 소식만으론 상감의 마음을 더 걱정시켜드릴 뿐이니 흉선군을 몰아낼 비책을 세워서 기뻐하시게 해드려야 하오.

민비의 일념은 대원군을 몰아내고 당당히 환궁(還宮)하려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흉선군(兇鮮君)이라는 악칭(惡稱)은 흥선군(興宣君) 즉 대원군을 저주한 그들의 호칭(呼稱)이었다.

<흉악한 조선의 폭군>이라는 뜻이다.

역시 청국의 이홍장(李鴻章)에게 밀사(密使)를 보내서 청병(請兵)해다가 흉선군을 죽이거나 잡아가게 하는 것이 상책으로 아오. 국내의 우리 힘으론 도저히 조속한 만회를 하기 어려우니까.

민비는 그전에 세자책립(世子冊立) 문제도 청국에 밀사를 보내서 이홍장의 일갈(一喝)로 대원군의 주장을 꺾어 버렸던 경험을 이때 되풀이 하려고 했다.

현명하신 방안입니다. 이홍장은 흉선군을 전부터 싫어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청국은 그 동안 일본에게 개국정책을 쓴 우리나라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참이니, 이 때 국내의 군란(軍亂) 수습을 청하면, 일본에 대한 경쟁으로 곧 응해 올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폭도들에게 공사관을 습격당한 일본은 그냥 있지 않겠고 그 책임은 우리가 복귀한 후에도 문제가 될 것이오. 이에 대한 대책으로도 청국의 발언권을 세워줄 필요가 있소.

민비는 시골 산 속에서 피난해 있으면서도 외국의 힘을 이용하고 외국을 이간시키면서 자기의 정권을 회복하려는 외교술책을 창안해 냈다. 이런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외교술책이 앞으로 나라와 함께 자신의 생명까지 멸망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런 망명정권을 자처하는 음모에 참가하고 연관을 가졌던 인물은 함께 피난 왔던 홍재희, 민응식, 민긍식, 민형식, 민영기, 윤태준, 심상훈 등이었다.

그럼 누구를 상감께 밀사로 보낼까?

하고 인선한 끝에, 역시 세상에서 제일 의심하지 않는 윤태준이 좋으리라고 결정했다.

궁중과 내외정세, 서울 민심을 살피고 상감께 나의 무사한 소식을 여쭈오. 그리고 대원군의 불법반란을 청국에 빨리 보고해서 흉선군을 몰아낼 것을 청원하시도록 아뢰오.

민비는 정식으로 임무를 부탁했다. 이런 임무를 맡은 윤태준은 서울로 잠입했다. 물론 자기가 직접 고종을 만날 길은 없었으므로 교묘한 방법으로 민비의 비밀연락을 고종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오오, 중전이 살아 있구나. 지금 형편으론 역시 청국에 응원을 구하는 것이 유일한 최선의 방법이다.

고종은 민비의 소식이 반가웠고 민비의 생각이 옳다고 여겼다. 이에 용기를 얻은 고종은 비밀리에 민태호(閔台鎬), 조영하(趙寧夏)에게 상의하고 밀사를 보내서 천진(天津)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 김윤식(金允植)과 어윤중(魚允中)으로 하여금 청국에 강력한 응원을 청하게 했다.

민비 일파의 이러한 내정간섭(內政干涉)의 자청은, 실제로 청국자체가 행동보다 시간적으로 늦었지만 청국에게는 조선땅으로부터 출병을 정식 청원 받았다는 명분으로 일본을 비롯한 각국에 대하여 방패가 되었다.

 

 

 

사라진 天下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서울주재 일본공사관이 방화되고 관원(館員) 십여명이 살해된 사실은 시모노세끼(下關)로 피난 귀국한 하나부사(花房) 공사의 전보로 일본 정부에 보고되었다. 일본의 국론은 격화돼서 정한론(征韓論)이 재연(再燃)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정변 성격을 알아보고 근본대책을 세우자는 신중론으로 기울어서 우선 다음과 같은 당면 외교정책이 채택되었다.

 

1. 조선에 대해서는 국제법 범위 안에서 최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할 것.

2. 전권위원(全權委員)으로 하나부사 공사를 보낼 것.

3. 전권위원은 육해군으로 호위할 것.

4. 이노우에(井上) 외무대신이 시모노세끼로 가서 직접 전권위원을 지휘할 것.

5. 반란의 원인과 성격을 세밀히 조사할 것.

6. 우선 부산과 원산의 일본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함을 파견할 것.

 

조선에 대한 이러한 일본의 당면방침이 정해지자, 일본주재 청국공사 여서창(黎庶昌)은 곧 본국에 보고하고 이 기회에 청국에서 빨리 군대를 파견해서 변란을 진정시키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조선에서 얻을 이권 획득을 방지해서 청국의 우선적 발언권을 확보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건의도 첨가했다. 이홍장은 이 건의에 즉시 찬성하고 북양대신서리(北洋大臣署理) 장수성(張樹聲)에게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조선 출동을 명령했다.

일본을 앞질러 빨리 서울로 가서 무력으로 동란을 진압하라. 그리고 국왕의 청원대로 대원군을 잡아오라.

이런 명령을 받은 마건충(馬建忠)과 정여창(丁汝昌)은 속국(屬國)의 내란을 평정하려는 당연한 종주국(宗主國)의 장군들처럼 군대를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청국의 함대가 조선에 닿기 전인 유월 이십일(고종 십구 년)에는 일본측과 회담했는데 이때 대원군은 정권을 잡기 전과는 딴판으로 일본의 항의에 사과하고 영구히 민비 시대에 체결된 수호조약을 준수해서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겠다고 머리를 숙이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강경한 척왜론(斥倭論)으로 민심을 선동하던 대원군도 그런 명분으로 일단 정권을 잡자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십여일 전까지 공약하고 장담하던 척왜론을 친일정책으로 돌변시킨 것이다. 그리고 유월 이십육일에는 일본군함 금강호(金剛號)가 인천에 입항해서 하나부사 공사가 군대와 함께 와서 조선 조정에 정식 항의를 하고 일련의 회담을 할 예정이라고 부평부사 김낙진(金洛鎭)에게 통고했다. 이때 비로소 하나부사 공사가 육해군을 거느리고 온다는 정보를 알게 된 조야에서는 깜짝 놀랐다. 그 군대는 하나부사의 신변을 보호하는 동시에 시위행동이었으나 당장 조선을 쳐들어 오는 전쟁으로 알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일본이 쳐들어 온다.

일본 공사관을 쳐 부실 때는 기세를 올리더니, 일본 군함이 쳐들어 오자 대원군도 벌써 항복하고 화친을 애원했다지. 민비고 대원군이고 저희들 세도에만 급급하지 나라의 흥망엔 관심도 없고 힘도 없다. 약한 백성만 언제나 세도가의 밥이다.

식자들 사이에는 일체의 정색에 대한 불신의 탄식이 떠돌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반이 두려워했던 일본군보다도 먼저 청국의 본격적인 파견군이 질풍같이 상륙해서 서울을 휩쓸고 청장 원세개(袁世凱)가 조선 조정을 호령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유월 이십칠 일에 청국의 북양함대 군함 세척이 하등의 예고도 없이 인천 월미도에 나타났다. 일본 출병의 기선(機先)을 제(制)하고 조선 내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이었다.

물론 그것은 계획 이후에 접수한 국왕 고종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轉嫁)하는 동시에 일본의 자극을 피하려고 일본과 조선과의 문제를 공정하게 조정한다는 구실을 통고했다. 그러나 청국이 조선에 대하여 갖고 있는 종주국(宗主國) 행세를 막으려는 일본이 속을 리가 없었다.

이리하여 인천항에는 이해를 달리하는 일본군함과 청국군함이 서로 야심을 경쟁하듯이 검은 연기를 토하고 있었다. 이런 정세를 본 미국에서 동양함대의 군함을 인천에 보내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민비와 대원군의 정권쟁탈의 내란은 마침내 외국들의 무력 간섭을 자초(自招)하고 말았던 것이다.

청국은 일본의 강경한 태도 특히 청국에 대한 자극을 완화시키려고 일본의 양해를 구하기에 급급했다. 청국 파견군 사령관 정여창과 마건충은 일본 군함 금강호를 예방(禮訪)하고 임오군란의 진상을 보고하는 한편 청국이 파병한 이유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그들은 임오 군란의 경과와 성격을 다음과 같이 일본측에 보고했다.

 

1. 이번 변란은 대원군이 조종한 것이며 지난 해 가을에 그의 아들 이재선(李載先)이 음모로 처형당한 행동의 연장이다.

2. 대원군이 조종한 반란군민은 왕비와 중신들을 살해한 뒤에 국왕을 감금하였고 외교관계의 인물도 거의 살해 되어서 형언할 수 없는 혼란과 무력으로 주권의 존 재가 불명하다.

3. 지금 만일 신속한 조처를 취해서 왕권 회복을 서두르지 않으면, 배외정책의 원흉인 대원군이 재류 일본인을 몰살할 것이다.

4. 그렇다고 지금 일본이 병력으로 보복하거나 간섭하면 동양의 큰 불행이요, 서양 각국도 간섭할 것이니, 이때는 역시 긴밀한 관계에 있는 청국이 조정해서 원만히 해결하는 것이 좋다. 일본에 대한 체면과 손해배상을 최대한으로 보장해 주겠다.

 

그러나 이러한 청국측과 제의에 대해서 일본측은

조정의 호의는 감사하다. 그러나 우리 문제는 당사국끼리 평화적 회담으로 해결하겠다.

일본은 결코 무력으로 조선 국내 문제에 간섭할 의사는 없다.

하고 청국측의 제의에 반대했다. 청국측은 일본의 본의를 정탐하려는 예방이었고, 그 동정에 따라서 최종 태도를 결정하려는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태도가 청국의 조정에 불찬성인 것을 알아챈 정여창은 군함 위원호(威遠號)로 급히 귀국했다. 정세보고를 하고 본국의 훈령을 받기 위해서였다. 청국에서는 정여창의 보고와 건의에 따라서 육군 육영(陸軍六營)까지 추가 동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여창이 군함 두 척을 인천항에 남겨두고, 한 척을 몰고 귀국한 그날(29일)에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육군소장과 해군소장이 거느리는 군함 네 척과 군대를 실은 수송선 세 척으로 당당히 인천항에 들어왔다. 그리고 시모노세끼에는 이노우에 외무대신이 출장해 있고, 오까야마(岡山)에는 혼성여단(混成旅團)의 대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청일 양국(淸日兩國)의 군사적 간섭과 시위에 대해서 대원군은 자기의 세력에 당장 철퇴를 내리려는 청국측의 제독(提督)을 더 환영하고 일본측의 공사(公使)를 더 푸대접했다. 그는 일본보다 청국이 더 자기 정권을 보호해 주리라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가 종래에 일본을 배척해 왔더라도 청국이 대원군을 숙청해 달라는 민비의 비밀 청에 찬성하고 온 줄 알았으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공사관 습격으로 격분해서 온 일본의 위력이 두려워서, 청국의 간섭으로 일본의 양해 내지는 격퇴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 태도는 그가 뜻밖에 온 청국 군함을 영접하는 정부대표로 병조판서(兵曹判書) 조영하(趙寧夏)와 공조대신(工曹大臣) 김홍집(金弘集)을 접견대관(接見大官)으로 내보내서 정중한 예를 표시한데 비해 일본공사에게는 아주 격이 떨어지는 반접관(伴接官) 윤성진(尹成鎭)을 보내서 냉대했던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원군은 청국 군함의 접견대관으로 보낸 조영하와 김홍집에게까지 이 미묘한 외교 공작에서 배반을 당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대원군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세계 무대에서 후퇴된 청국보다 신흥강국인 일본에게 더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청국의 마건충 장군과 회담한 뒤에 밤중에 하나부사 일본공사와 비밀 회견을 자청하고 일본군이 청국군보다 먼저 입경(入京)하라는 권고까지 했다. 그들의 생각은 보기 싫은 대원군의 세력을 일본의 힘으로라도 없애 버리려는 반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청국군 마건충의 본심은 모르고 배일을 주장하는 대원군을 도와서 일본의 세력을 억제 하려는 줄로 알았다. 즉 대원군이 청국에게 표시한 언사와 대원군에게 의무적으로 보내는 편지를 전해 받고 그런 착각을 했던 것이다. 좌우간 그들까지도 대원군의 실각을 바라고 하나부사에게

대원군이 정권을 전횡하여 국왕의 의사는 하나도 통하지 않소. 공사가 만일 입경한다면 일개 대대쯤 병력이래야 위엄이 설 것이요. 우리가 일본군의 입경을 비밀로 국왕에게 주상(奏上)할 테니 그때를 기다리시오.

이쯤 되면 완전한 이적밀정(利敵密偵)과 다를것이 없다. 민비가 청국군의 파견을 청한 것이나, 이들이 일본군의 입경을 청한 본심은 오직 대원군을 축출하려는 정권 사욕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는 똑 같다. 그러나 어윤중의 일기에는 그 후에도 조영하는 거의 매일같이 청국의 마건충과 만났다 하니 조영하는 청국에게도 일본에게도 다 같이 대원군 제거 공작으로 암약했다는 추측이 있을 만하다.

하나부사 공사는 조선 조정의 양해도 기다리지 않고 칠월 이 일에 일개 중대 병력을 먼저 양화진(楊花津)에 보내서 대기케 하고, 삼 일에는 호위병을 거느리고 밤에 입경해서 진고개의 전 금위대장(禁衛大將) 이종승(李鐘承)의 집을 숙소로 정하고 들었다.

대원군은 그때까지 서울 시내의 숙사가 미비하다는 핑계로 하나부사 공사의 입경을 차일 피일 연기해 왔으므로, 이에 노한 하나부사는 조정의 초청도 없이 그냥 들어왔던 것이다.

그렇게 된 뒤에야 당황한 대원군은 하는 수 없이 식료품을 선물로 보내서 환영의사를 표했으나 하나부사는 그것을 받지 않고 도로 보냈다. 그에게는 대원군이 안중에도 없었다.

형식적으로라도 국왕 고종과 직접 담판을 강요했던 것이다.

하나부사는 칠월 칠일 육해군 사령관을 대동하고 이개 중대의 호위로 창덕궁으로 들어가 중희당(重熙堂)에서 고종을 만나고 군란 처리에 대한 일본측의 일곱 개 요구조건을 냈다.

그리고 삼일 이내로 만족한 회답을 해달라고 한 뒤에, 대원군과는 비공식으로 잠깐 만나고 창덕궁을 물러나왔다. 그러나 대원군은 칠월 구일에야 산릉간심(山陵看審)을 핑계로 협상 연기를 통고했다. 이에 격분한 하나부사 공사는 곤노오(近藤) 사무관만 남기고 인천으로 떠나버렸다. 대 병력이 있는 인천으로 철수한 것은 분명한 위협 행동이었다.

대원군은 청국의 마건충에게 밀서(密書)를 보내서 일본측의 요구조건을 알리는 동시에 하루 속히 서울로 와서 조정해 달라고 애원했다. 이때 청국측은 오장경(吳長慶)에게 인솔되어 증파(增派)된 사천명의 병력이 군함 다섯 척에 실려서 남양만(南陽灣)에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보다 소수의 일본병은 인천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그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남양부(南陽府) 이명재(李命宰)와 회견하고 고종에게 정식으로 서한도 상정(上呈)했다.

대원군으로부터 빨리 입경하라는 초대를 받은 청국군은 십일 해질 무렵에 당당히 입성했으며, 대원군도 아들 훈련대장 이재면과 함께 청국군의 숙소로 제공한 남별궁(南別宮)으로 방문하고 정중한 위문을 했다.

서울과 인천 부근에는 일본군과 청국군이 경쟁적으로 대치되어 있었고, 인천바다에는 미국과 영국의 군함도 와서 조선의 격동하는 정세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태이자 <고금미문지사(古今未聞之事)>로 민심이 흉흉했다.

대원군은 종전의 쇄국정책은 흔적도 없이 그 자신도 청국군에게 일본의 압력을 조정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청국군은 이십일에 대군을 거느리고 입성했는데 일본군의 호위 부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압도적 부대였다.

십삼 일에 대원군을 예방하오리다.

청군측에서 찾아가겠다는 통고를 하자, 대원군은 마치 구세주라도 오는 듯이 국빈대우의 의식 준비와 호화로운 연회를 마련하고 기다렸다.

그날이 되자 오장경, 정여창, 마건충, 원세개 등은 청국 군대가 장안을 점령한 가운데 위풍도 당당한 기마(騎馬) 모습으로 운현궁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형식적으로는 경의를 표한다는 예방이었지만 대국(大國)의 지배자로서 속국(屬國)의 소관(小官)을 순찰하러 임하는 태도였다.

대원군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뒤에 그들 사이에는 의례적(儀禮的)인 필담(筆談)이 한문으로 교환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군무에 대하여 상의할 것이 있으니 오흠사(吳欽使) 장중(帳中)까지 왕림해 주시오.

라는 말을 남겼다.

오장경의 주둔군 진중으로 오라는 명령이었다.

네 고맙습니다.

대원군은 이런 명령조의 호출에 자존심이 상했으나 그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처지였으므로 혼연한 승낙을 했다.

이때 장안에는 이미 청국군이 쫙 깔려 있었다. 그들은 군란의 잔당을 경계하고 청국의 대관을 보호하며 장안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이었으나 도처에서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능욕하는 등 마치 적국의 서울을 전쟁으로 점령한 것 같은 행패를 부렸다.

겁냈던 일군은 오히려 온순한데, 믿었던 청군이 장안을 점령하고 이런 오랑캐 짓을 한다.

일군의 힘을 빌려서라도 저놈들을 몰아내 주었으면 좋겠다.

백성들은 당장의 피해만 생각하고 청군을 저주했다. 부녀자들은 쥐구멍을 찾아서 숨고, 슬금슬금 성 밖으로 피난하는 사람이 어느덧 몰려서 혼란한 광경을 이루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청군 졸개들의 이러한 행패에 항의할 생각은 꿈에도 없고 그들로 하여금 일본을 견제하려는 일념에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청탁을 하려고 남대문 밖의 남단(南壇)에 진치고 있던 오장경의 진중으로 찾아갔다.

오장경과 마건충은 대원군을 정중히 환영했으므로 대원군은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안심했다. 인사가 끝난 뒤에 소위 군무(軍務)를 상의하자던 필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선 무섭게 굴던 운현궁 호랑이가 외국군의 함정에 스스로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청국에서는 이미 국왕 고종의 이름으로 민비의 비밀 청원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불법 군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약탈한 그를 죽이든지 청국으로 납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부탁을 받은데다가 현지에 와서 보니 대원군에 대하여 정계나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 실정을 알았다. 그런데다가 청국군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일본의 태도가 강경하고 무력까지 개입시켜서 소위 <조정>하려는 청국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고 은연중에 위협을 하고 있는 데에 당황했다. 일본과는 충돌을 피하면서 조선에 대한 발언권을 일본과 적당히 분배해 갖는 것이 현명한 외교전략으로 삼고 따라서 청국군은 일본과 흥정하는 미끼로서도 대원군의 희생이 필요했다.

무모한 군란을 일으킨 원흉 대원군을 우리가 납치해 갈 테니, 그 뒤에 조선의 정국을 안정시키는 것은 동양평화와 우리 양국의 공동이익이 될 것 같다. 이 점을 일본서도 양해하라.

이런 비밀 제안이 청국측으로부터 일본측에게 있었다.

현재로선 대원군에게 책임을 추궁해야지, 그를 귀국으로 잡아 가면 누구를 상대로 담판을 하겠는가?

하며 일본측은 불신을 표시했다.

국왕과 직접 하면 된다.

국왕이 무슨 실권이 있느냐?

대원군만 추방하면 평화외교를 주장하던 여걸 왕후 민부인이 환궁해서 다시 섭정으로 들어 앉을 것이다.

민비가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 대원군을 잡아 가라고 우리에게 청한 것도 민비의 비밀 연락이다. 그것이 국왕의 명의로 되어 있고 또 국왕의 본의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대원군을 납치해 가는 것은 합법적이요, 국왕의 친정(親政)을 도와주는 우방(友邦)의 도의가 아닌가? 대원군을 지금 상대로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도 불리하고, 조선 국내의 혼란을 조장할 뿐이다.

음, 그럼 귀국의 책임으로 좋도록 하라. 우리와는 관계 없는 일이다. 후일에도 귀국의 이런 비공식 이야기는 피차 비밀로 하자.

드디어 일본도 대원군을 청국으로 잡아간다는 청국의 제안에 찬동했다. 일본으로서는 일본에 대한 당면의 적인 대원군에게 직접 항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기도 했으나 생존한 민비가 다시 집권을 하고 종전대로 일본과의 친선정책을 쓴다면 도리어 시끄럽지 않게 일본의 체면도 서고 실리도 거둘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문제로 당장 청국과의 관계를 악화 시키기도 싫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국내 음모와 일본과 청국의 국제 야합으로 자기를 외국으로 잡아 가려는 것도 모르고 오장경의 군문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런 대원군을 상대로 한 청국군 장군의 필담은 점점 죄인 심문과 같은 내용으로 발전해 갔다. 처음에는

귀국의 군제(軍制)가 약해 보이는데 귀국도 삼면이 바다이니 육군보다 해군을 증강하는 것이 어떻소?

당연한 말씀이나 국가 재정이 아직 외국과 같은 신식군함을 장만할 여유가 없소.

일년에 한 척씩만 마련해서 삼사 년 후에 삼사 척만 돼도 좋지 않겠소?

금후에 생각해 보겠소!

하고 마치 순수한 군비문제로 조선에 동정하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각하는 이번에 반란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이요?

하고 갑자기 중대한 심문을 시작했다. 대원군은 벼락을 맞은 듯이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했다. 그러나 그의 호통하는 버릇도 여기서는 통용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반란을 일으켰나요? 오직 소란한 정계와 민심의 뒷 수습을 했을 뿐이요.

폭력으로 정권을 잡고, 국정을 각하의 마음대로 할 목적이 아니었소?

아니요, 민비 일파의 세도에 반대한 군민이 혁명을 일으켜서 시국의 수습이 어려워지자, 국왕이 나로 하여금 국정의 중책을 위임한데 지나지 않소.

대원군은 자기가 반란과는 상관 없고, 국왕의 뜻으로 합법적인 정권을 위임 받았다는 구구한 변명을 했다.

허허, 각하가 그런 비겁한 소리를 할 줄은 몰랐소. 떳떳한 일이면 그런 변명은 하지 않으실 텐데. 역시 반란이 불법이었다는 가책이 있어서 그런 변명을 하는 것이요.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사대부(士大夫)답지 않소?

대원군은 개인적인 모욕까지 당했으나 이 외국 장군의 심판에 쩔쩔매기만 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추궁은 더욱 준열해지고 죄인 취급까지 했다.

귀국의 국왕전하는 우리 황제폐하께서 책봉(冊封)한 임금이요. 그런 국왕을 위협하고 왕비를 살해한 것은 이 나라에 대한 대역(大逆)일 뿐 아니라 우리 황상(皇上)께 대해서도 중대한 불경(不敬)이요. 마땅히 중죄를 받아야 하오.

대원군은 자기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듯한 청국 장군에게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참 후에야 반문했다.

장군은 나를 죽이겠단 말이요?

내야 어찌 각하를 죽이고 살릴 권한이 있소. 귀국의 국왕과 우리 황제께서 처분하실 문제지요. 다만 각하가 국왕과 부자지간이니까 용서할 수도 있지만, 우리 황상께 가서 사죄하고 또 각하의 서투른 외교에 대하여는 황상의 유지(諭旨)를 받을 필요가 있소.

대원군은 청국 장군이 자기를 청국으로 잡아 가려는 – 외국으로 귀양 보내려는 계획을 비로소 알았다. 대원군은 죽어도 고국에서 죽고 싶었다.

우리나라 일은 잘하건 못하건 우리가 할 권한이 있소.

허허. 그야 잘하면 그래도 좋지만 잘못해서 중대한 국제문제가 생긴 이상 종주국(宗主國)의 입장에서 좌시(坐視)할 수는 없소.

빨리 우리나라로 가서 황상께 사변 경과를 보고해 올리고 적절한 유지를 받고 돌아오시오.

내 권고에 불복이요?

오장경은 위압적으로 추궁했다.

후일 적당한 때에 그리하겠소.

우선 당장 끌려가는 것이라도 피하고 싶었다.

후일이라면 언제요?

우선 내외 중대문제를 수습한 뒤에

각하의 우리 황상을 가 뵙는 것이 중대문제 수습의 첫길이요.

지금 내가 없으면 국정을 어찌 하란 말이요.

나라엔 당신밖에 인물이 없소? 국왕이 친히 보실 것 아니요?

각하라고 부르던 청국 장군은 당신이라고까지 경멸하듯이 불렀다.

국왕께서 중대 문제를 친히 보실 수도 없고

당신도 참 말귀를 못 알아 듣는군요. 당신이 있기 때문에 현재 내외문제가 더 혼란에 빠지고 있소. 잠시 어려운 자리에서 피해 쉬시오. 신변보호는 책임지겠으니

그러나…

문답은 끝났소. 오늘 밤에 남양만으로 가서 우리 군함을 타고 천진으로 가시오.

오장경은 병정들을 불러서 대원군을 곧 남양만에 정박중인 청국 군함까지 호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청국 병정 십여명은 이미 대기시켰던 초라한 가마에 대원군을 잡아 태우고 삼엄한 호위로 영문을 나섰다. 뒤에는 정여창이 말을 타고 직접 감시역으로 따라갔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새 정권의 제 이인자인 대원군의 아들 이재면도 남별궁에 감금하는 전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대원군은 납치되고, 그 아들은 감금되었다. 대원군의 삼일천하(三日天下)도 제가 모셔들인 청국군의 손으로 끝났다. 인젠 숨어 있던 민비가 또 나타나겠지. 젠장 우리 백성들은 시아비, 며느리 싸움 등쌀에 이래 저래 죽어만 난다.

백성들은 대원군의 삼일천하도 별로 환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민비의 재등장도 탐탁하게는 여기지 않았다. 장안에서 멋대로 행패 부리는 것은 대원군 부하도 아니요, 민비의 부하도 아닌 청국 병정들이었다. 이때 청국 장군 정여창은 당당한 포고문을 발표했다.

조선과 일본의 국교를 조정하기 위해서 대원군은 청국 황제폐하의 유지를 받으러 천진으로 떠났다.

이처럼 청국군에게 납치된 대원군은 군함 위원호로 천진으로 압송되었다. 천진에서는 총리대신 이홍장과 외무대신 주복(周馥)에게 엄중한 문초를 받고 수일 후에는 황제의 명령이라고 해서 멀리 보정부(保定府)로 귀양을 갔다.

이역 만리에 귀양간 대원군은 언제 암살될지도 모르는 몸으로 망연한 귀국의 날을 기다리면서 한숨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이때 비로소 정권 야욕을 피동적이나마 단념하고 난초그림과 술로 풍류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난초그림은 중국에서도 이름을 떨치게 되어서 청국의 풍류문화인들과 사귀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배소(配所)에는 군대가 배치되어서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 민비가 그 곳까지 보낸 감시원들의 감시도 받아야 했다.

 

 

 

宮中亂舞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 가고 그의 아들 이재면까지 감금해 버린 청국군은 완전히 군정(軍政)을 실시하고 있었다. 장안의 성문 수비는 물론 궁궐에까지 호위 명목으로 청군이 주둔했다. 그리고 일본에게도 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생색을 냈다. 조선에는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 전권부관 김홍집(金弘集), 일본에서는 공사 하나부사가 인천항에 정박한 일본군함 비예호(比叡號)에서 정식 회담을 열었다. 회담은 삼 일간 진행되었는데 결국 일본측의 요구대로 결정되었다. 칠월 십칠 일에 조인된 소위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의 육개 조는 다음과 같다.

 

1. 오늘부터 이십일 안으로 조선국은 흉도를 체포하고 괴수를 엄중히 처벌할 것.

2. 일본국의 관리로서 살해당한 (십삼 명)자는 조선국이 예장(禮葬)할 것.

3. 조선국은 오만 원을 지불하여 피해자 유가족 및 부상자를 위자 할 것.

4. 흉도의 폭동으로 일본국이 받은 피해 및 공사를 호위하기 위해서 파견한 군사비 중의 오십만 원을 조선국이 오 개년 내에 완납할 것.

5. 일본 공사관에 호위 군대를 약간 명(사실은 일개대대)을 두어서 경비할 것.

6. 조선국은 대관(大官)을 특파하여 국서(國書)를 보내서 일본국에 사과할 것.

 

한편 청국군은 일본과 제물포조약이 조인된 그날인 칠월 십칠 일을 기해서 반란군을 소탕 한다고 행동을 개시해서 왕십리(往十里)와 이태원(梨泰院)의 조선군 부대를 습격하고 일백 칠십여 명의 조선군대를 습격하고 일백 칠십여 명의 조선군대를 체포하여 무차별 학살하고 반란군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관내의 집을 침입해서 살육과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다.

일본측에서는 조선 조정에서 약속한대로 일본인을 살해한 범인으로 손순길(孫順吉) 등 세 명을 일본관리 입회 아래 목을 베었다. 그리고 포도청에서는 반란 주모자로 김장손(金長孫) 등 여덟 명을 체포해서 대역죄(大逆罪)로 사형을 집행했다. 그리고 고종도 부덕(不德)을 자백하고 민심의 안정을 호소하는 교서(敎書)를 발표했다. 이때의 교서는 고종 스스로 범하였다고 팔대 죄목(八大罪目)을 들어서 국민에게 사과했는데, 이것은 전제(專制) 시대의 제왕으로는 이례적인 일로서 고종이 얼마나 선량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에 이런 선량한 임금에게 유능한 충신이 있었다면, 임오군란(壬午軍亂)은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민비가 다시 등장해서 정권을 휘둘렀으므로 군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질 수 없었던 것이다.

대원군이 청국으로 잡혀 갔으니, 빨리 민중전을 모셔 오자.

민씨 일파에서는 새 세상을 만났으므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민씨 일파에서는 이 희소식을 알리려고 힘세고 걸음이 빠른 장사(壯士) 이용익(李容翊)을 민비 피난처로 파견했다. 국망산(國望山) 신령에게 득세환궁(得勢還宮)을 빌면서 음모를 하고 있던 민비는 곧 일당과 함께 장호원으로 나와서 상경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대관들이 왕비봉영(王妃奉迎)차 급행해 갔고, 청장 오장경은 부하 군대 백 여명까지 호위로 파견했다. 그리하여 죽었다던 민비가 팔월 일일에 청국군 호위로 서울에 도착하게 되자 문무백관이 성 밖까지 나가서 영접하는 가운데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군란 때 궁녀의 변장으로 홍재희 등에 업혀서 새양쥐처럼 비에 젖어 탈출할 때와는 천양지판의 호화로운 환궁 광경이었다.

허허, 팔자에 없는 충성으로 억지 국상을 입었더니, 백립(白笠) 값만 손해 났구나.

오십여일 동안 백립을 쓰고 국상을 입었던 백성들은 민비 생환의 소식을 듣자, 우선 우롱당한 백립값이 아까왔던 것이다.

상감도 민비도 좀 삼가야 할 때가 아닐까?

이런 여론은 조정 일부에도 있었고, 백성들도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민비는 곧 다시 정권을 잡고, 그런 말을 한 고관을 징계하는 동시에 자기 일파로 새 조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민비 일당의 거물들이 군란으로 많이 희생당했으므로 희생을 면했던 민족(閔族)의 태호(台鎬), 응식(應植)과 피난시의 중신들을 중심으로 등용하고, 조영하(趙寧夏)을 청국황제에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파견했다. 그리고 대원군의 잔당에게 피비린내 나는 보복을 감행했는데 정현덕(鄭顯德)과 이경하(李景夏)도 이때 잡혀 죽었다.

그리고 일본에는 사죄사(謝罪使)를 보냈으므로 독립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일본 군대가 돌아가자 장기 주둔한 청국군은 조선의 주권을 무시하고 사실상의 종주국(宗主國) 군정(軍政)으로 민비 정권을 지휘했던 것이다.

워낙 무력한 고종은 민비를 총애하는 개인적 행복을 되찾았겠지만, 민비의 종전과 같은 독재에는 조금도 간섭할 용기도 수완도 없었다.

군란 후에 청군의 위력으로 전멸된 군사는 청장 원세개의 지휘하에 새로 천명의 군대를 모집해서 보충했는데 두 개의 군영(軍營)을 설치했다. 그리고 명칭은 <신건친군영(新建親軍營)>이라고 했다.

훈련은 청군 장교가 맡고 무기도 청군의 무기를 사용했다. 군란 전에 일본식 훈련을 받던 일부의 별기군(別技軍) 대신 이번에는 모든 조선군이 청국식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그 통솔권까지 청국의 원세개가 장악하고 있었다.

군사까지 이렇게 청국에 예속되었으므로 국정 전반이 그들의 감독 지도하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군까지 청국의 훈련 지휘하에 들게 되자, 일본측에서는 겉으로는 방관했지만 속으로는 불평만만했다. 이런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서 일본의 체면도 세워 주려는 형식적 연구까지 했다.

즉, 시월 초에는 창덕궁 안의 춘당대(春塘臺)에서 고종친람(高宗親覽)의 외국군 연병식(演兵式)까지 거행했다. 하루는 청국군의 연병식을 하루는 일본군의 연병식을 했으니 일국의 궁중에서 외국군의 시위경연(示威競演)을 시킬 만큼 민비 정권은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최대 추태를 폭로하고 말았던 것이다.

고종이 민비를 다시 맞기 전에 국민에게 사죄한 선정(善政)의 관심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조정과 지방 관청에는 민씨 일파와 민씨에게 아부하는 무지몽매한 무리만 등용했다.

그 일례로서 민비가 피난 때 공을 세운 자들의 특별 등용의 이야기는 항간의 웃음거리가 되기까지 했다. 윤태준(尹泰駿)과 이조연(李祖淵)을 고관으로 등용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과거에 급제한 적이 없으므로 남의 눈에 거북했다. 그래서 그들만을 위한 엉터리 과거를 보여서 많은 선비들을 골탕 먹였다.

이번엔 문벌과 지방차별 없이 실력 있는 인재를 뽑기 위해서 과거를 보인다.

과거의 취지는 그러했지만 거의 백지를 낸 윤태준과 이조연 두 명만을 급제시켜서 높은 관직에 등용했다.

아무리 여자 염치지만, 그런 야한 수작으로 만천하의 선비를 우롱할 수가 있는가?

대원군의 강적이던 유림은 이런 민비 처사에 대해서 전보다도 심한 경멸과 반발을 느꼈다. 그러나 민비는 윤태준과 이조연같이 문벌도 없고 자격도 없는 자들을 과거에 급제시켜서 피난 시절의 공을 표창했다. 그래서 이때의 사기과거(詐欺科擧)를 <민비의 이인과(二人科)>라고 빈정댔다.

이보다 걸작으로 <무당 봉군(巫堂封君)>이라는 피난 생활과 얽힌 민비의 미신일화(迷信逸話)도 있다.

피난했던 산속 마을에서도 민비는 무당의 굿을 좋아했는데 이 시절에 박씨라는 영리한 무당이 있어서 민비의 신임을 받았다. 무당 박씨는 민비가 비록 신분을 숨기고 있었으나, 인품으로나, 주위에 모시고 있는 가족들이 보통 서울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갖은 수단으로 민비의 환심을 사려고 간사스러운 무당의 수단을 부려서 민비의 마음을 족하게 했다.

무당은 시골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문을 듣고 장차 민비가 세도를 하게 되면 서울로 따라가서 한몫 보려는 꿈을 꾸었다. 민비일 줄은 그의 점괘로도 알아 맞추지 못했으나 남들의 소문으로 민씨 일문의 어떤 재상 집 부인쯤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호원 민형식 집에 있다가 거기서 민형식에게 학대 받던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쫓겨왔기 때문에 그만 신분 짐작은 무당이 아니라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무당은 피난 살림답지 않는 민비의 돈 씀새를 알아내고, 장차 서울까지 따라가서 대관집 신세를 지려고

마님 신관이 참 훌륭하십니다. 지금은 세상이 어수선해서 이런 산골에까지 오셔서 고생 하시지만, 멀지 않아서 서울로 돌아가셔서 귀하게 되실 것입니다.

귀하게 되다니, 공연히 남의 마음만 들뜨게 하는 게 아니요?

제 관상과 점은 영험합니다. 이래도 관운성제(關雲聖帝)님 신령의 딸입니다. 마님께서 장차 귀하게 되시면 제 점괘를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액운이 풀리도록 치성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무당 말대로 귀하게만 되면 신세를 갚고 말고. 그러나 나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과부인데, 앞으로 무슨 수가 있어서 귀하게 되겠소.

아닙니다. 이번 서울 난리에서 큰 화를 면하고 피난하신 것도 관운성제님의 신조(神助)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울에서 무슨 화를 면했다는 거요?

다른 민씨댁 대감들이 많이 참변을 당하셨지만, 마님은 영특하신 관운성제님 인도로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민비는 이 무당의 말이 맞는다고 반하기 시작했다.

관운장 신령이 나를 구해서 이곳으로 인도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제가 국망산에서 관운성제께 기도 올리다가 잠깐 눈을 감았더니, 당신의 딸로 태어난 저에게 현몽해서, 서울에서 귀하신 부인을 국망산 밑으로 인도했으니, 네가 가서 뵙고 인도해 드리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관운성제님 대신 마님을 위해서 기도 하겠습니다.

아, 고마워라. 그러나 피난 중이라 복채도 넉넉히 못 주는 것이 안타깝소.

하고 민비는 시골 부잣집에서도 받아 보지 못한 큰 돈을 주었다.

마님, 이렇게 후하신 복채를 주시면 황송합니다. 피난 중 용채로 쓰시고, 저에 대한 복채는 서울 가셔서 제 기도대로 후하게 되신 뒤에 주십시오.

아냐, 그땐 또 그때고, 이건 적지만 내 호의니까 받아 둬요.

그래도 무당 박씨는 사양하다가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았다. 민비는 복채에도 담백하면서 자기를 위해서 좋은 점을 쳐 주고 앞으로도 복을 빌어 준다는데 반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민비의 마음을 혹하게 한 무당 박씨는 다른 무당과 짜고, 자기가 관운성제님의 딸이며 자기들의 스승이라고 선전하게 해서 더욱 민비의 신임을 얻고, 그들과 함께 민비로부터 후한 복채를 받아서 나누어 먹으려고, 한 이레만큼 국망산에 기도굿을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 그 부인이 아마 죽었다는 중전마마가 피난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 소문을 들은 무당 박씨는 은근히 민비의 정체를 떠 보았다.

마님 제가 지난 밤에 또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무슨 길몽인가?

네, 마님을 위한 길몽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큰 꿈이라 마님께도 말씀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위한 큰 꿈이라면 삽시다.

돈으론 팔 수 없는 큰 꿈입니다.

열 냥쯤 주면 팔겠소?

만 냥 꿈이지만…

하고 무당은 웃어 보였다.

궁금하니 어서 들려 줘요.

민비는 조급하게 재촉했다.

실은 관운성제가 현몽해서 하시는 말씀이 국망산은 나라의 대운(大運)을 원망(願望)한다는 명당이다. 이 명당에 오셔서 정성으로 기도하시는 분은 나라를 위한 귀인이다. 팔월 달에는 그 분에게 대운이 형통하실 테니 너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서 잘 모셔라 하는 계시(啓示)를 내리셨습니다.

무당은 심중하게, 민비가 중전인가를 떠보려고, <나라를 위한 귀인>이라는 말을 하고 민비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나라를 위해서 귀인이라고? 그야 어떤 사람이 나라를 위하지 않을까?

하면서 웃는 민비에게

그런 보통 의미라면 관운성제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님께서 만일 규수였다면 꼭 중전마마로 간택되실 길몽입니다마는…

하고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는, 무릎을 바싹 당겨 앉으면서 물었다.

마님, 저는 보통 무당이 아닙니다. 저를 믿으시거든 마님 신분을 저에게만 알려 주십시오.

호호호, 내가 처녀였다면 중전마마가 될 뻔했군. 관운성제 딸의 꿈대로 내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서 중전마마가 되면 그때는 그 꿈의 은혜를 갚겠소. 그런데 팔월엔 서울로 돌아가서 귀하게 된단 말은 맞을까?

네 분명히 그런 말씀을 관운성제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길몽의 감사제를 올려 주시오.

하고 민비는 선뜻 굿비용을 내주면서 기뻐했다. 눈치 빠른 무당은 일부의 소문처럼 살아서 도망해 온 민비라고 믿었다. 그러나 더 추궁하지는 않고 큰 굿을 지낼 준비를 했다.

그리고 팔월이 되기 전 칠월 하순에 서울로부터 재상들과 청국군대까지 내려와서 생존해 있는 민비를 모시러 온 것이다. 민비 다음으로 신난 여자는 무당 박씨였다.

중전마마 축하하옵니다. 저는 벌써부터 중전마마이신 줄 알았으나, 신변이 위험하실까 봐 숨겨 왔습니다. 제 점괘와 그 동안의 기도대로 환궁(還宮)하게 되셔서 중전마마와 나라를 위해서 이런 경사가 없습니다.

모두 박소사(朴召使) 정성 덕분이었다. 나를 따라 서울로 가자.

하고 민비는 약속대로 무당을 가마에 태워서 서울로 데리고 왔다. 그 뒤로 무당 박소사는 민비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중에서 차차 세력을 얻었다.

중전마마, 대궐 뒤에 관운성제님 모실 사당을 지어 주십시오. 거기서 나라와 중전마마의 복을 빌겠습니다.

아, 그러자. 궁중의 시녀들도 박소사를 시기하는 모양이니, 관운장 사당의 신관(神官)으로 나가 있으면 격도 높은 신성한 지위니까 더욱 좋을 거야.

민비는 곧 아담한 북묘(北廟)를 지어서 신관 대우를 하고 그 북묘에서 때때로 성대한 굿을 지냈다. 박무당은 큰 굿이 있어서 민비가 고종을 동반하고 구경 올 때면 신나는 노래와 춤으로 관운성제 딸의 영험한 재주를 자랑하며 총애를 받았다.

과연 중전이 반할 만한 무당이요.

고종도 민비의 비위를 맞추듯이 무당을 칭찬했다.

나라를 위해서 충성이 있고 영험이 많은 무당이니, 봉군(封君)을 해서 특별대우를 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중전 생각이 그렇다면 좋도록 하시오.

고종의 승인을 받은 민비는 박소사라고 부르던 무당에게 진령군(眞靈君)을 봉해서 조칙했다.

북묘의 무당이 나라에 유공하고 영험해서 진령군으로 봉하게 됐다. 인물도 미인이고 점도 잘 쳐서 민비가 홀딱 반해서 그런 대우를 받고 세도가 등등하다.

이런 소문이 장안에 파다해지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북묘구경을 하러 모여들었다.

그런 백성들이

묘구경을 왔소.

하면 무당은 위엄 있는 태도로 호령을 했다.

묘구경이 뭐요? 관운성제께 참배 왔다고 하시오.

또 어떤 때는 무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하도 영한 무당이래서 점을 치러 왔소.

무당 무당 하지 마시오. 나는 진령군이 아니요?

하고 오만한 소리를 했다. 진령군의 세도가 직접 민비와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재상집 부녀자들은 그 줄을 타고 남편 재상들의 출세 운동을 하려고 뇌물을 싸가지고 찾아 다녔다.

진령군 누님

진령군 아주머니

하고 고관대작들도 이 무당에게 아첨했으며, 늙은 재상은 주책도 없이 수양딸로 정하고 갖은 아첨을 했다. 진령군의 힘으로 민비에게 추천되어서 감투를 쓴 자 중에는 조병식(趙秉式), 윤영신(尹榮信), 정태호(鄭泰好) 등의 위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무당이 젊었을 때 낳은 사생아(私生兒) 김창열 같은 자는, 그전에는 무당의 사생아로서 세상의 천대를 받았으므로, 무당의 자식 된 것을 숨기려고 어미 대우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비의 총애로 진령군의 세도를 부리게 되자 서울로 찾아와서

어머니, 어머니

하고 효자처럼 따랐다. 그래서 그도 무당 어미덕으로 벼슬을 하고 새 양반이 되었다.

이처럼 민비가 다시 집권한 뒤에 궁중의 미신 숭배는 부활되어서 무당까지 세도를 부리는 부패상을 폭로하게 되었다.

 

 

 

움트는 開化의 꿈

 

임오군란(壬午軍亂) 후에 있었던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의 의무를 이행하려고, 일본에게 사과의 국서(國書)를 전달하게 되었다. 사절단의 수교사(修交使)로는 정사(正使)에 박영효(朴泳孝) 부사(副使) 김만식(金晩植) 수원(隨員) 김옥균 등 십오 명이었다.

그러나 이 십오명을 일본까지 보내는 재정에도 궁색한 조정에서는 체면불고하고 오천원밖에 되지 않는 여비조차 일본의 보조를 받고 일본 공사가 귀국하는 일본기선 명치환(明治丸)의 신세를 지는 초라한 사절단이었다.

이 때에 수행한 김옥균은 대담한 성격의 모사(謀士)로서, 이 기회에 국제정세를 연구하는 동시에 일본의 유형무형의 후원으로 국내에서의 개화운동(開化運動)을 일으킬 준비를 하려는 정치적 포부가 있었다.

이들 사절단은 일본에 가서 독립국 사절단의 대우를 융숭히 받고, 제물포조약 이행 조건의 완화에도 성공한 후 차관획득까지 하고 돌아와서 조정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감명 깊게 각성한 점은 조선도 일본처럼 개화혁신(開化革新)해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박영효 일파에서는 귀국하자마자 그런 정책으로 소장세력을 규합해서 개화독립당(開化獨立黨)을 조직했다. 그전의 개국정책을 지지하는 일파도 속칭 개화당이라고도 했으나 정식으로 개화당의 명칭과 정책을 들고 나선 정당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개화당은 서양문명으로 혁신된 일본을 본받겠다는데서 일본색채가 농후했다. 그런데 이때의 민씨 정권은 척족(戚族) 민씨를 비롯해서 친정(親情) 사대주의로 일변도(一邊倒)되어서 관제(官制)와 군제(軍制)까지 청국식으로 개편한 수구파(守舊派)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또다시 신구 대립의 파쟁은 움트기 시작했다. 개화당파에서 민영익만이 외아 문협판(外衙門協辦)이라는 청국식 관명의 외무대신 격으로 임명되었으나, 이것은 민씨의 소장 영수자격으로였고, 박영효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시켜서 각료급에게 참여하지 못했다.

친정(親情) 수구파(守舊派)의 민비 정권은 사절단보다 더 오래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 온 개화당의 참모장격인 김옥균을 포경사(捕鯨使)의 명칭으로 해외로 파견, 경원하는 인사 발령을 하고 당수 박영효마저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해버렸다.

그와 동시에 박영효 일파가 개화정책의 출발을 만들어 관보를 겸한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을 만들어 발간했으나 창설한 개화당 인사에게는 실권을 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청국군의 행패를 비판하였다 해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민비는 정권 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신흥세력의 개화당을 탄압하는 동시에 대원군 세력의 잔재를 뿌리째 뽑으려고 귀양 보냈던 정현덕(鄭顯德), 조채하(趙采夏), 이재만(李載晩), 이원진(李遠進)을 비롯하여 조병창(趙秉昌), 조우윤(趙宇潤), 이회정(李會正), 임응준(任應準) 등 여덟 명을 군란과 관련시켜서 전부 사형에 처해 버렸다.

이래서 개화당과 대원군의 잔당은 정책이 다르면서도 민비정권 타도에는 감정적으로 동조(同調)하는 역효과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허욱(許煜) 등 일곱명이 군란 주동자로 능지처참당 한 것은 일이라도 일으키다가 실패 당한 결과이겠지만 위의 여덟 명 참변은 억울한 죽음이었다.

대원군의 잔당은 모조리 죽여버려라. 그 놈들이 이 나라 땅 위에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 해도 치가 떨린다.

민비는 민태호에게 직접 명령했다. 고종도 그 자리에서 찬성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민비의 감정적인 보복에 지나지 않았다.

조병창 부자가 함께 참살되었고 정현덕은 군란 당시에 귀양 가 있던 몸이라 군란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고 대원군이 재집권한 뒤에 불러다가 감투를 씨운 것이 대원군이 청국에 잡혀가기 닷새 전의 일이었다. 그런 정현덕까지 군란에 관련했다는 억지 죄명으로 죽였던 것이

다.

이 시절의 민비의 인간성과 정권의 보수주의에 대해서 외국 평론가 롱포드는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 국왕에 대한 왕비의 영향력은 전능의 그것이었다. 정적(政敵) 대원군이 중요한 존재였을 때는 그가 가진 보수적 편파성과 싸우기 위해서 개국정책도 썼다. 그러나 왕비가 반대한 것은 대원군의 정책이 아니었고 대원군의 개인과 그의 세력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임오군란때 피신했다가 요행히 권력을 잡자, 또다시 친정 민씨들로 조정의 모든 요직을 독점시켰는데, 민비와 민씨 일파의 보수주의는 이미 전통적인 고질이었다. >

이러한 민비 정권의 사대주의와 부수주의는 청국의 힘만 믿고 일본에게는 푸대접했고, 심지어 지일파(知日派)로서 자주혁신(自主革新)을 주장하는 박영효, 김옥균의 개화당을 탄압했으므로 일본은 은인자중하면서 국내외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대국(老大國) 청국의 허울 좋은 위세를 코웃음 치듯이, 신임 일본공사 다께조에(竹添)는 실리적(實利的)인 성과를 과학기술면에서 착착 거두고 있었다. 그 중요한 이권만으로도 부산과 나가사끼 간의 해저전신(海底電信)의 부설, 한일통상조약, 이정조약(里程條約), 택지차용권(宅地借用權), 각 항구의 관세업무(關稅業務)를 일본은행 지점이 취급할 것 등을 조선 정부와 교섭해서 조인에 성공했던 것이다.

청국과 민비의 사대보수당은 허울 좋은 권력에만 취해 있는 사이에, 일본은 과학과 경제의 힘으로 실리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처럼 신흥국가로 일해 보겠다는 개화당의 젊은 혁명적 정열은 보수당의 부패와 독재를 비상수단으로 타도하려는 음모를 계획했다.

민비 일당의 보수 세력을 몰아내야, 우리도 살고 나라도 구한다.

이런 개화당의 운동은 대원군 세력을 몰아 내고 세도를 부리던 민비정권에게 새로운 정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에 갔던 젊은 사절단이 개화당을 조직한 것은 일본의 새로운 문물제도를 본떠서 조선도 그와 같은 근대국가로 개화 발전시키려는 순수한 애국 정열에서였다. 그래서 정식 당명도 개화독립당(開化獨立黨)이었으나 보통은 개화당이라고 불렀다.

김옥균과 서광범(徐光範)이 늦게 돌아온 것은 국제정세 연구와 일본에서 개화당의 정치자금을 구하려는 일 때문이었다. 일본의 조야에서는 김옥균의 정치운동 취지에는 찬성하고 정신적 후원을 아끼지 않겠으나 민씨 정권에 반대하는 새로운 야당에게 정치자금을 대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거부했으므로 결국 실패하고 귀국했다.

김옥균이 귀국하자 먼저 귀국했던 사절단 – 개화당 동지들은 조정에서 거세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비와 고종은 김옥균의 외교수완을 인정했다. 사절단 일행의 최대 선물인 이십만 원 차관을 성공한 공이 주로 김옥균의 활동에 있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화당이라는 이유로 등용하지 않고 푸대접했으므로 불평이었다.

꾹 참고 대사(大事)를 위해 끝까지 단결해서 실력을 기르며 시기를 기다립시다.

하고 당수격인 박영효를 격려했다. 광주유수로 좌천된 박영효도 용기를 얻고

나도 한성판윤에서 쫓겨났지만, 도리어 잘됐소. 남한산성에서 혁명세력을 기르겠습니다.

직속군대 육백 명을 모집 육성할 자신이 생겼으니, 일단 거사 시엔 우리 개화당의 혁명군으로 쓸 수 있소.

그리고 당세 확충을 책략 하던 중 김옥균에게는 또 다시 일본으로 갈 기회가 왔다.

당시 재정 궁핍에 허덕이던 민비정권에서는 일본과 청국이 조선에 대한 이권경쟁을 하자 일본에서 덕을 볼 수 있으면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다.

마침 사절단이 이십만 원의 차관을 얻어 와서 갈증을 면한 조정에서는, 다시 삼백만 원의 대일차관을 하려고 서울주재 일본공사관과 교섭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조선주재 초대 미국공사 푸트가 부임하는 길에 그의 통역으로 따라 귀국한 윤치호(尹致昊)가 일본을 거쳐 올 때, 일본 외무대보(外務大輔)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가 김옥균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을 전해 왔다.

< 귀하가 국왕의 위임장만 갖고 정식 교섭을 오면 귀국에서 희망하는 삼백만 원 차관이 성공 될 가능성이 있소. >

민비도 삼백만 원이라는 돈이 당장 생긴다는 기쁨으로 김옥균에게 국왕의 위임장을 내주며, 꼭 성공하라는 부탁을 했다. 김옥균은 큰 희망을 품고 동경으로 갔으나, 외무대신 이노우에는 물론 편지까지 보낸 요시다 외무차관까지 태도가 냉정했다.

각하의 편지만 믿고 국왕의 위임장까지 갖고 왔는데 안 된다는 것이 무슨 말이요.

하고 김옥균은 요시다를 추궁했다.

나로서는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으나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이 일본의 재정상태가 그런 거액을 외국에 빌려 줄 사정이 못 된다 하니 어찌합니까? 미안하게 되었으니 이 기회에 당신의 포부인 신학문 연구라고 하고 돌아가시오. 학비 생활비는 염려 마시고…

요시다는 이런 핑계를 했다.

삼백만 원이 많으면 백만 원이라도 차관을 해줘야 나의 체면도 서지 않겠습니까?

글세 다시 물어는 보겠지만…

하고 요시다는 얼버무렸다. 그 후에 또 재촉해도 소용이 없었다. 김옥균은 액수를 자꾸 낮추어가며 애원하다시피 했으나 일본 정부의 태도는 단돈 만원도 차관에 응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김옥균이 그 후에 알아보니 차관을 거절한 이유에는 두 가지 문제가 개재해 있었다. 첫째가 김옥균 자신에 대한 인격모욕 문제였다. 그것도 일본인이 아닌 동포와 청국인의 모략중상에 의한 모욕과 방해공작이었다.

국내에서 외교문제로 일본공사와 공식 접촉을 하던 민영목(閔泳穆)은 그런 중대한 사명을 정적인 개화당 청년모사(靑年謀士)에게 맡긴 것에 질투를 느끼고 일본공사 다께조에에게 박영효와 김옥균은 경거망동하는 위험도배라고 중상했다. 그리고 청장 목인덕(淸將 穆麟德)도 민영목과 같은 중상을 했을 뿐 아니라 김옥균은 국왕의 위임장을 위조해 가지고 가서 개화당의 정치자금으로 횡령하려는 행동이라고까지 모략했다.

청국으로서는 일본이 막대한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것을 꺼렸으므로 무슨 짓이든지 대일차관을 방해해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다께조에 공사는 이런 정보를 일본 외무성에 보냈고 겸해서 김옥균 등의 개화당이 정계에서 무력하므로 무력한 야당의 간부를 조선의 대표로 상대하는 것은 장래가 위험하다는 의견도 상신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일본정부로서도 청국이 갖고 있는 조선에서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서 조만간 청국과의 실력 충돌을 각오하고 군비 확충을 암암리에 진행 중 이었으므로 그런 차관을 조선에 제공해서 청국을 자극시키는 것이 불리하다는 점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김옥균이 대일차관에 실패하고 실망해서 갑신년(甲申年) 삼월에 귀국하자 개화독립당 전체의 낙망이 더욱 커졌다. 그들의 낙망은 곧 수난(受難)이었다. 박영효도 광주유수에서까지 몰려났으므로 그가 혁명군으로 이용하려던 양병계획(養兵計劃)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개화당의 운명이 이처럼 약화되어 갈 때에 동지였던 민영익이 미국과 구라파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민비의 수단에 매수되어 동지들을 배반하고 역시 민씨 일족의 본색을 나타냈다.

개화당에서는 당내의 모든 정책과 비밀을 아는 민영익이 민비의 주구(走狗)로 돌변했기 때문에 타격이 큰데다가 민영익 자신이 정면에 나서서 박영효, 김옥균의 세력을 공격했다.

그리고 청장 목인덕은 김옥균이 청국의 간섭을 공격하고 일본의 힘으로 청국 세력을 꺾으려는 책사이며, 당오전(當五錢)의 화폐 문제로 직접 면박당한 것을 보복하려고 민비에게까지 그를 정계에서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김옥균은 굳은 각오를 하고 고종에게

< 지금의 국내실정은 정령(政令)이 하나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분당반목(分黨反目)만 심해지니, 어느 때 뜻하지 않은 사변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신은 잠시 시골로 물러가 있겠습니다. >

하는 상소를 올리고 동대문 밖의 별장에 은퇴하고 표면상의 정치활동을 멈추어 버렸다.

이때 청국에 대한 정책에 중대 변혁이 생겨서 질식상태에 빠졌던 개화당에게는 시운이 오는 듯했다. 조선에 파견 되 청국 군대의 군권남용이 조선 백성의 원만 대상이 되었고, 또 막대한 재정을 낭비했기 때문에 군란 수습과 대원군 납치로 위엄을 떨치던 마건충 장군을 탄핵하는 여론이 청국 조정에서 일어났다.

조선 백성의 원망을 사고, 군사비를 남용하고, 일본에 반감만 사는 주둔군을 곧 철수시켜라.

이런 청국 국내 여론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주둔군 장군끼리의 반목(反目)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것은 오장경(吳長慶)과 원세개(袁世凱)의 세력 투쟁에서 나온 여파이기도 했다.

그래서 갑신년(甲申年=西紀 1,884년) 사월에는 청국 주둔군은 반감되고, 원세개에게 밀린 오장경 등의 부대는 본국으로 철수해 가고 말았다. 이어서 청국에서는 안남 문제(安南問題)로 불란서와 정면 충돌이 났다고 들려오고 대원군을 석방 귀국시킨다는 풍문도 들려왔다.

민비를 중심으로 한 친정 보수당은 점점 그들의 정권유지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일본에서도 이 기회에 청국의 한국 지배를 배제하자는 적극론이 우세해졌다. 그 방법으로는 외교적으로 청국과 직접 담판하고,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영국, 미국, 불란서, 독일 등과 협력해서 조선의 독립권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 대해서는 정부내에 개화독립당의 세력을 강화하도록 적극 지원하자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본 개화독립당은 다음 정권을 노릴 운동을 다시 활발히 추진시켰다. 그러나 친정보수당은 개화당과 타협하고 인물을 등용하는 데는 여전히 인색했다.

국제정세의 변화로 개화당이 유리하게 되는 미묘한 동향을 본 민비정권에서는 큰 선심이나 쓰는 듯이 개화당 인물을 등용한 것이 겨우 신설 우정국(郵政局) 총판(總辦)으로 홍영식(洪英植), 부승지(副承旨)로 서광범(徐光範), 신설된 조련국(操鍊局)의 사관장(士官長)으로 서재필(徐載弼)을 임명했을 뿐이었다.

민비정권엔 우리와 타협해서 국난을 타개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 인제는 청년층의 동지를 규합해서 비상수단으로 썩은 보수당을 타도하는 수밖에 길이 없다.

김옥균의 단호한 계략으로 당론이 결정되자 자기들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 보냈던 사관생도(士官生徒)를 불러들이는 등 암암리에 혁명 준비를 진행시켰다.

청국이 불란서와 전쟁상태에 들어가자 일본공사 다께조에는 본국의 훈령을 받고 돌아와서 전과는 천양지판으로 국왕과 조정에 대하여 태도가 강경해졌다. 다께조에는 공사의 귀임을 인사차 방문한 외아문(外衙門)의 김홍집(金弘集)과 김윤식(金允植)에게 청국과 친청 조정에 대한 공격을 노골적으로 했다.

귀국 외교관 중에는 청국의 종 노릇하는 자가 수 명 있다고 하니 나는 그 따위 사람들과는 외교문제를 이야기하기도 싫소.

하고 김홍집을 위협했다. 그리고 김윤식에게도 직접 면박해서 개인적 모욕까지 했다.

당신은 학문에 능하고 청국과 내부(內付)할 의사가 있다 하니, 아주 청국에 가서 벼슬하지 않겠소?

친청 보수당의 외교관이 이런 위협과 창피를 당했다는 소문은 곧 정계를 긴장시켰다. 김옥균은 곧 일본공사를 단독 방문하고, 다께조에 에게 기고만장한 웅변을 토했다.

당신이 말한 그 청국 종들의 중상모략을 듣고 우리 개화당을 의심하고 과소 평가했기 때문에 우리의 구국대계는 실패했소. 한일 양국의 공영(共榮)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우리의 정책을 적극 후원해 주시오.

그리고는 다께조에 공사를 비난까지 했다.

과거에 실례된 일이 있었다면 사과하오. 그러나 어느 나라든지 외교정책은 때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앞으로는 일본도 적극적으로 당신들의 개혁운동에 협력하게 될 것이요.

다께조에는 과거를 사과하면서 앞으로의 개화독립당을 응원하겠다고 솔직한 약속을 했다.

이런 약속을 받은 김옥균은 곧 박영효에게 보고하고 그로 하여금 일본 공사를 방문케 해서 더 자세한 개혁운동의 방침을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하도록 급속한 활동을 전개했다.

구월 십오 일에 일본공사는 고종을 알현(謁見)하고 총 두 자루를 외무대신의 예물로 바치고 국왕을 통해서 개화독립당을 위한 거대한 정치 자금조의 선물까지 바쳤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손해배상금(損害賠償金) 잔액(殘額) 사십만 원을 귀국 정부에 환납(還納)하옵니다. 그러나 그 금액은 전부 내정개혁 자금으로만 전용(轉用)해 주십시오. 그리고 불란서가 완고한 보수주의(保守主義)인 청국과 전쟁 중이니, 앞으로 국제정세에 일대 변화가 예상됩니다. 이런 중대시국에 임해서 귀국에서도 상하가 단호한 결심으로 일치 단결해서 내정개혁을 실천하시기를 바라옵니다.

이 같은 중대 권고를 국왕에게 아뢴 것은 청국의 내정관섭을 공격하는 동시에 일본이 개화당운동을 적극 후원한다는 것을 선언한 셈이었다. 일본공사가 고종과 알현하고 나온 다음날은 마침 양력 십일월 삼십일일로 명치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이었다. 그는 신축한 일본공사관에서 축하연을 베풀고, 초대한 내외 빈객들 면전에서 청국공사 진수당(陳樹棠)에게 조롱 이상의 모욕을 했다.

진공사(陳公使)는 무골해삼(無骨海蔘)이요.

이것은 못난 병신이라는 욕이었다. 이 의미를 알아들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놀랐다. 그리고 나중에 전해 들은 정계에서는 의논이 분분했다.

일본공사가 청국공사를 각국 외교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모욕을 한 것은 일본이 불란서와 동맹하고 청국에 개전(開戰)할 징조다. 그렇지 않고서야 외교관끼리 그런 실례가 있겠는가?

민비당의 운도 다 갔군. 인제 개화당이 세월 만났다.

세도가 바뀌는 것은 좋지만 외국의 힘으로 엎치락 뒤치락하는 꼴이 한심스럽다.

세상은 바뀌고 또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이 벌어질까 걱정이다.

민심은 또다시 흉흉해졌다.

 

 

 

甲申政變

 

개화독립당의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은 실력으로 정권을 잡으려고 밤낮으로 모의했다. 그들은 일본의 힘을 빌리려고 일본공사관에 비밀 연락을 하고 그들의 후원 약속도 받았다. 행동대로는 당시의 건달인 소위 장사(壯士)라는 거리의 폭력배를 매수해다 모아놓고 김옥균은 습격 목표와 방화 및 암살의 방법 등을 지령했다.

마침 우정국(郵政局)의 낙성식 연회를 여는 날이 되었다. 이 날이 고종 이십일년인 갑신년(甲申年) 시월 십칠 일인데 양력으로는 십이월 오일이었다.

우정국장이 다행히 개화당 동지 홍영식이었으므로,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낙성식에 초대한 민씨 정권의 실력자들을 암살하고 장사단(壯士團)을 몰아 왕궁을 점령한 뒤에 고종과 민비를 위협해서 개화당 정부 조직을 왕명으로 발표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보수당의 반란이라고 왕을 속여서 호위 명목으로 일본군의 동원을 요청하여 청국군의 간섭을 막으려는 계책을 꾸몄다.

그리하여 혁명의 봉화(烽火)는 우정국에서 연회중인 시각에 폭력배 장사단으로 하여금 안동별궁(安洞別宮)에서 올리도록 했다. 이런 지령을 내리고 김옥균은 그 방화가 보수당파의 폭동이라고 속이고 혼란을 일으킨 뒤에 번개같이 정적(政敵)들을 숙청하고 왕궁을 점령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연회가 진행 중인 예정시각이 되어도 안동 별궁의 방화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행동파들의 계획이 여의치 못한 모양이었다. 초조해진 김옥균과 박영효는 긴급히 전술 변경을 상의했는데 이 때문에 의식적으로 지연시킨 연회가 열 시까지 끌었다. 각국의 공사들은 지루해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불야!

이때 우정국 옆의 민가에서 불이 났다. 안동 별궁에서 올리지 못한 혁명의 봉화를 개화당의 행동파는 애매한 민가에 방화했던 것이다. 불길은 충전해서 우정국을 포위할 듯했다.

당황한 내외빈객들은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개화당의 배신자로서 행동에 민첩한 민영익(閔泳翊)이 맨 먼저 피난해 나갔다. 이때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개화당 행동대원 윤경순(尹景純)과 이은종(李殷鍾)이 몽둥이와 칼로 습격했다.

사람살려라!

민영익은 직사를 면하고 피 흐르는 손을 흔들면서 우정국 안으로 되돌아 왔다. 내외 손님들은 깜짝 놀라서 벌벌 떨었다. 그러나 미국공사와 영국공사는 침착한 태도로

어떤 자가 대감을 습격했소?

하고 물었다. 김옥균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의 일파도 뒤를 따랐다. 눈치 빠른 민영익은

(저 개화당 놈들이 나를 암살하려 했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도 자기 개인 암살음모라고는 생각했지 그것이 반란 사건의 첫 번 유혈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곧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가서 행동개시를 알리고 일본군의 협력을 부탁 한 뒤에 궁궐 금호문(金虎門)으로 급행하자, 거기에는 미리 지령해 둔 대로 근처에 숨어 있던 장사들이 막 몰려왔다.

몽둥이와 망치를 든 사십 여명의 폭한들이 수문장을 때려 눕히고 궁중으로 침입했다. 그들은 궁중의 여러 개 중문(中門)을 쳐들어 가면서 막으려는 내시(內侍) 등을 물리치고 고종과 민비가 이미 잠든 침전(寢殿)의 안뜰까지 들어갔다.

고요한 침전에서는 그 영악한 민비도 이런 변란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단꿈만 꾸고 있었다. 개화당은 이미 낮에 김봉균(金鳳均)을 시켜서 인정전(仁政殿) 행랑채에 폭탄을 묻어 두었으므로 폭탄 심지에 불을 붙였다.

탕!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과 함께 인정전이 불길을 올리면서 타기 시작했다.

폭음소리에 놀라서 잠을 깬 고종과 민비는 정신이 아찔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중전, 저 폭음, 저 불이 웬일이요?

상감 진정하시오. 역적놈의 반란인 듯하오.

민비는 입술을 물고 당황하는 고종을 진정시키려 했다.

위험하니 어디로 피신해야지.

고종은 약한 여자인 민비를 보호하고 피신할 행동은 취하지 못하고 도리어 민비의 보호를 바라는 듯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상감, 나를 따라오시오.

민비는 시녀에게 등불을 들리고 침전에서 빠져 나오려고 일어섰다. 민비의 머리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궁녀로 변장하고 궁중에서 도망치던 때의 정경이 회상되었다.

(또 대원군의 잔당의 반란일까? 아니다. 개화당 놈들의 반란일 거다.)

이런 추측을 하자 김옥균과 박영효의 얼굴이 대원군 얼굴과 함께 명멸(明滅)했다. 임오군란 때는 낮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밤중이라 낮보다 피난이 어려울 듯도 하고 도리어 편리 할 것도 같았다. 또 다른 것은 그때는 고종을 두고 민비 자신만 도망쳤으나 지금은 고종을

데리고 가는 것이 달랐으며, 또 마음에 든든하기도 했다.

(개화당 반란이라면 상감을 시역(弑逆)하진 않겠지. 이번엔 상감을 모시고, 곁에서 떠나지 말아야겠다.)

고종을 방패로 자기 몸을 정적(政敵)의 박해에서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너, 그 등불을 꺼라.

먼저 등불을 들렸던 시비에게 명하고 고종의 팔을 잡으면서 어두운 침전 마당으로 내려섰다.

상감마마, 반란이 일어나서 모시러 왔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김옥균이 나서며 아뢰었다.

밤중에 무슨 소란이요, 어디서 누가 일으킨 반란이요?…

고종은 떨리는 음성으로 김옥균에게 물었다. 옆에 있던 민비는 침착한 태도로

이 반란은 청국군을 업고 하는 거요, 일본군을 업고 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개화당인 김옥균에게 개화당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없어서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김옥균이 청국군을 업은 보수당의 불평분자라고 거짓말을 하려는 순간에 또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김옥균은 천연스럽게

청국군대가 궁궐을 포위하고 궐내로 쳐들어 오는 중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국왕과 왕비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나 박영효가 앞으로 나와서 김옥균의 말을 이어서

사태가 긴박하고 괴상하니, 상감께서는 청국군을 막기 위해서 일본군 출동을 청하십시오.

상감마마, 일군 청병을 윤허(允許)하여 주십시오.

임금을 속여서 임금의 이름으로 일본군대의 출동을 청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리고

청국군에게 포위된 궁중은 위험하오니 옥좌(玉座)를 잠시 일본공사관으로 옮기십시오.

하며 일본공사관으로 납치하려는 계획대로 권했다. 고종이 주저하고 있자

상감, 체면문제도 있으니 다른 곳으로 피신 하십시오.

옆에 있던 민비가 수상스럽게 여기고 반대 의견을 말했다.

어디로 가면 안전하겠소?

고종은 우는 듯이 떨리는 음성으로 민비에게 물었다.

그럼 경우궁(景祐宮)으로 행차하시오.

박영효는 일본공사관으로 납치하려던 계획이 여의치 않자 경우궁에 감금시켜 놓고 자기 계획을 강요할 생각이었다. 고종은 일본공사관으로 가지 않는 것은 다행했으나 다리가 떨려서 걸음도 잘 걷지 못했다. 김옥균은 박영교(朴泳敎)에게 말했다.

상감을 업어 모시오.

임오군란 때는 민비가 홍재희 등에 업혀서 도망했으나, 이번에는 고종이 박영교 등에 업혀서 경우궁으로 납치되어 갔다. 그러나 걸어서 가는 민비는 매우 침착했다.

김옥균은 고종과 민비를 경우궁에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감금하고, 무장한 오십여명의 부하 장사단(壯士團)으로 경비시켰다. 트는 겨울날 새벽은 살벌하게 춥기만 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알게 된 민비정권의 고관들은 깜짝 놀랐다. 반란의 성격과 상황도 자세히 모른 채, 민태호(閔台鎬)와 조영하(趙寧夏)가 맨 먼저 궁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국왕과 왕후가 경우궁에 감금된 것을 알고 수상히 여겼다.

대감, 청국공사와 원세개 장군에게 빨리 연락합시다.

조영하가 민태호에게 말했다.

우선 상감을 뵙고 안위(安危)를 안 뒤에 합시다.

그들 두 명은 불안한 마음으로 경우궁 외문(外門) 앞까지 갔다. 이때 대문이 확 열리면서 무장한 장사들이 와 몰려 나왔다.

이 나라를 망친 역적놈들!

장사들은 두 명의 목을 칼로 베어 버렸다. 조금 후에 들어오던 윤경순(尹景淳)도 이조연(李祖淵)도 참살당했다. 경우궁 앞은 민비 보수당 요인들의 피로 물들었다. 피는 곧 붉은 얼음으로 변해 얼어 붙었다. 나중에 들어온 민영목(民泳穆)도 정전(正殿) 앞까지 오다가 학살되었다.

그런 공포 속에서도 내시(內侍) 유재현(柳在賢)은 왕과 왕비가 시역(弑逆)이라도 당할 것을 염려하고 박영효와 김옥균에게 항의했다.

상감과 중전을 이렇게 감금하는 불경(不敬)이 어디 있소. 당신들 마음대로 칙령(勅令)을 받으려다가 불응하시면 시역이라도 할 계획이 아니요?

유재현은 그들을 역적이라고 면박하자 김옥균은 살기등등해서 부하에게 명령했다.

저 내시놈을 죽여 버려라.

명령일하에 유재현은 당상에서 몰매로 타살되었다. 그는 민비의 심복으로서 항상 측근을 따라다녔는데, 이번에도 단신으로 경우궁까지 따라와서 김옥균 일파의 반란을 목격하고 참다 못해서 항의하다가 죽은 것이다.

내시 유재현은 박살하는 광경은 본 고종은 벌벌 떨었다. 민비도 이제는 이 반란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김옥균과 박영효가 미웠으나 역시 그들의 손에 생사가 달려 있음을 생각하고 참았다.

김옥균은 고종이 벌벌 떠는 기색을 보자, 단번에 정권이양의 왕명을 받으려고 강요했다.

상감마마, 빨리 개혁정부를 새로 조직하라는 어명(御命)을 내리시오.

박영효가 자기에게 대명(大命)을 내려 달라는 협박이었다.

미국공사와 영국공사가 왔습니다.

밖에서 경비하던 장사들이 김옥균에게 알렸다. 김옥균도 외국 사신들의 국왕 방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침착한 태도로 들어온 그들은

급변을 듣고 문안 차 예방하였습니다. 사태가 잘 안정될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감사하오.

인사를 마친 후 바로 물러났다. 고종은 그들의 소매에 매달려서 여기 있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으나 냉담한 인사 끝에 그들은 돌아가고 말았다. 다음에 방문 온 독일공사가 오히려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갔다. 그러나 일본공사는 수시로 드나들면서 김옥균과 밀의를 거듭했다. 민비는 모른 척하면서 날카로운 신경으로 무슨 음모 냄새를 맡으려고 애썼다.

그날도 저물어 해가 질 무렵 노환의 조대비(趙大妃)가 어젯밤 소란에 놀라서 병세가 위급하다고 알려 왔다. 고종과 민비는 이것을 핑계로 창덕궁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김옥균에게 말했다.

잠깐 기다리시오.

김옥균은 옆방으로 가서 일본공사와 상의한 뒤에 다시 돌아와서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이젠 사태도 좀 안정되어 가고, 대왕대비의 문병도 하셔야 하겠으니 창덕궁으로 옮겨 모시겠습니다.

하고 김옥균이 안내역으로 앞장섰다. 고종과 민비는 이미 출동한 일본군의 경비를 받으며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개화당의 <김옥균 내각>이 벌써 국왕을 협박해서 성립되고 있었다.

영의정은 흥영군(興寧君) 이창응(李昌應)을 업고 나왔으나 좌의정에는 이십사세의 개화당원 홍영식을 올려 앉히고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까지 겸임시켰다.

박영효는 친군영사(親軍營使)겸 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이 되고, 김옥균은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서광범, 변수(邊燧), 윤치호 서재필을 요직에 임명했다.

이런 새로운 인사 발령을 내렸는데 워낙 인물이 부족하고 정계와 국민에게 큰 세력을 갖지 못했던 개화당에서는, 각료 전원을 개화당 일색으로 일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난한

보수파와 중간파들의 관직은 유임시키는 동시에 거국일치 내각이라는 허울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인사 발표와 아울러 새 정부의 당면정책도 공포했다.

 

1. 대원군을 곧 귀국시킨다.

2. 문벌을 없애고 평등하게 유능한 인사를 관리에 등용한다.

3. 지세법(地稅法)을 없애고, 탐관오리를 숙청해서, 국민 부담을 감소하면서도 국가재정은 증대시킨다.

4. 내시부(內侍部)를 폐지한다.

5. 국정을 부패케 하고 사욕을 채운 자를 색출해서 엄벌한다.

6.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한다.

7. 순경을 모집 훈련해서 도적을 방지한다.

8. 혜상공국(惠商工局)을 폐지한다.

9. 정치범으로 귀양 간 사람을 방면 복권시킨다.

10. 전후좌우(前後左右) 사영(四營)을 폐지하고 근위군(近衛軍)을 둔다.

11. 국내 재정은 호조(戶曹)에서 관활하고, 기타의 재정기관은 일체 폐지한다.

12. 대신(大臣)과 참찬관(參贊官)의 회의는 의정소(議定所)에서 결정해서 임금께 품정(稟定) 한 후에 정령(政令)을 반포(頒布)한다.

13. 정부 육조(六曹) 이외의 관청은 전부 폐지한다.

 

이러한 혁신 정강을 나열한 포고문이 장안 거리에 나붙자, 백성들은 그 정책의 변혁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다른 데만 흥미를 느꼈다.

대원군이 귀국한다지?

개화당도 저희들 힘만으론 민비를 못 당하겠기로 대원군을 데려다 개화당 신주로 모실 생각인가보다.

개화당이고 뭐고, 두고 봐야 안다. 어떤 놈의 당파나 저희들의 세도를 위한 싸움이지 백성이 죽고 사는 거완 상관이 없다.

좌우간 개화당 등장으로 일본과 청국이 전쟁을 하게 되면, 우리 나라는 중간에서 쑥대밭이 된다. 정감록(鄭鑑錄)에도 그런 예언이 있다더라.

무식하면서도 건전한 상식이 있는 민중들은 이런 화제로 수군거렸다.

그러나 김옥균이 경솔한 혁명은 공중누각(空中樓閣)이라 길겐 못 갈걸.

장안에서 이런 풍설이 떠돌고 있을 때, 궁중을 폭력으로 점령하고 정권의 기초를 다지고 있던 김옥균의 개화독립당 일파도 후사(後事)가 불안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권이 공중누각의 꿈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본공사에게 군사적으로 적극 후원을 부탁했다.

십팔 일이 되자 일본공사는 청국측의 반발이 뜻밖에 큰 것을 보고 그들과 타협하려는 태도로 돌변했다.

일본군이 궁중에 오래 주둔하면 내정 간섭의 오해를 받겠으니 그만 철병하겠소. 당신들이 잘하시오. 우리는 이면에서 원조를 해줄 테니…

일본공사 다께조에는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말했다. 깜짝 놀란 김옥균은

당신의 약속만 믿고 한 일인데, 이 혼란 중에 갑자기 철병하면 배신 행동이 아니요? 앞으로 삼일 간만 더 궁중에 주둔해 주시오. 그 사이에 우리 당이 모든 자위태세(自衛態勢)를 갖추겠소.

철병해도 삼일 간은 사관 열명으로 근위대(近衛隊)의 훈련은 하겠소.

일본공사로부터 그만한 정도의 언질을 받은 김옥균은 새 정부가 개화정책을 단행하는데 필요한 오백만 원 차관을 애원했다. 다께조에 공사는 오백만 원은 어렵지만 삼백만 원 정도는 조속히 융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김옥균을 안심시켰다.

개화당의 간부들은 일본이 궁중에서 철병을 해도 군사고문 제공, 삼백만원 차관, 재정고문 제공을 허락 받았으므로 희불자승(喜不自勝) 하면서 금석같이 믿었다(信之若金石).

인제 청병 간섭의 방어책만 세우면 우리 정권은 요지부동이다.

김옥균은 개화당 간부들과 군사문제를 토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청국의 오조유(吳兆有) 장군이 보낸 사관 한 명이 국왕을 만나겠다고 신청했다.

오조유, 원세개 장군이 오면 모르되 일개 사관에게는 국왕 알현을 시킬 수 없다.

고 거절하자, 청군 사관은 오조유가 국왕께 바치는 사한을 전달했다. 그 내용은 < 서울 장안 안팎이 평시와 다름 없이 평정(平靜)하니 부디 안심하십시오. >하는 위안과 격려의 간단한 문면이었다.

김옥균 일파는 청국이 이처럼 개화당의 혁명을 냉소하는 듯한 태도에 불안을 느꼈다. 오조유의 서한을 전달한 청국 사관을 냉대해 보낸 뒤에, 곧 이어서 청국군의 통역관이 와서 원세개 장군이 군대 육백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국왕을 알현하러 오겠다는 일방적인 통고 를 전했다.

원장군의 입궐은 좋으나 군대의 입궐은 부당하다. 만일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불상사의 책임은 청국에 있다.

김옥균은 강경한 항의를 했다. 그리고 곧 다께조에 일본공사와 상의하고 각영(各營)의 군대를 단속해서 청군과의 일전(一戰)도 불사(不辭)하겠다는 결의를 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 두시반에 청국군의 대병력은 동서 양면에서 궁중으로 기습해 왔다. 요란한 총성에 김옥균 일파와 일본공사 다께조에는 당황했다.

청국군은 보수당의 긴밀한 연락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즉 민비는 고종의 명의로 반란 진압에 청군 출동을 요청했던 것이다. 천오백 명의 병력을 두 대로 나누어서, 일대는 오주유 지휘하에 선인문(宣人門)을 돌파 침입했고, 일대는 원세개의 지휘로 돈화문을 공격해 왔다.

이밖에 청국군이 훈련시켜 오던 조선군 좌우영(左右營)의 군대와 백성까지 합세한 부대도 수천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런 공격군은 맞을 궐내의 수비병은 주력부대가 되는 일본군이 일개 중대의 이백 명에 불과하고 박영효가 지휘할 수 있는 전후영(前後營)의 조선군은 팔백 명 정도에 지나지 못했다.

조청연합군(朝淸聯合軍)과 조일연합군은 왕궁을 전쟁터로 하여 공방전(攻防戰)을 벌였다.

그러나 병력도 청국측이 훨씬 우세한데다가, 이미 철병하려던 일본군은 다께조에 공사의 애매한 태도에 따라 본격적인 전투를 피하고 신변자위(身邊自衛) 정도로서 사기(士氣)가 전연 오르지 않았다.

김옥균 등이 당황해 하는 틈에 민비는 세자(世子) 부부를 데리고 궁전을 빠져서 북쪽 산으로 도망했고, 왕대비(王大妃), 대왕대비(大王大妃)도 따로 궁문을 빠져나와 피난했다.

중전이 세자를 모시고 종적을 감추셨다.

청국군의 총성에 놀라서 방어책에 정신이 없던 김옥균은 이 소식을 듣고 침전(寢殿)으로 달려갔다.

앗, 상감도 안 계시다!

김옥균은 고종의 행방을 찾아서 후문(後門)으로 뛰어나가 울창한 후원 산길을 올라갔다.

무감(武監)에게 인솔된 네 다섯의 병정의 호위를 받으며 북산(北山)으로 탈출하려는 고종을 발견했다.

상감, 그리 가시면 위험합니다.

김옥균은 고종의 도망을 위협적으로 중지시키는 고함을 치고, 서광범과 함께 달려갔다.

김옥균은 고종을 또다시 납치해다가 연경당(延慶堂)에 감금하고 청국군과 싸우는 일본군진지에 있던 다께조에 공사에게 급히 연락했다.

공사는 일본군의 일부를 거느리고 연경당으로 와서 고종의 주위를 경호(警護)했다. 개화 독립당의 간부들은 연경당에 모여서 일본공사와 함께 긴급한 대책을 토의했다. 김옥균이 먼저 다께조에에게 제의했다.

청국군의 무력이 궁중까지 침범한 이상, 상감께서 일시 인천으로 피난하셨다가, 사태를 수습한 후에 환궁하시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고종이 다께조에의 대답보다 먼저 반대했다. 고종은 이미 민비와 굳은 약속을 하고, 청국군의 힘을 빌어서 일본군과 개화당의 반란을 진압할 생각이었으므로 그들에게 포로가 되어 인천까지 호송되기는 싫었던 것이다.

고종이 인천까지 피난하라는 김옥균의 권고를 거부하자 개화독립당의 간부들은 고종의 뜻 밖의 강경한 태도에 어쩔 줄을 모르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모두 다께조에의 말을 기다렸으나 그는 신중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잠시 침울한 공기가 장내에 흘렀다. 움푹한 지대에 있는 연경당은 청국군의 공격을 막는 데는 매우 불리한 지점이었는데, 바로 왼편 쪽에서 공격군이 몰려들고 탄환이 날아왔다.

뒷산으로 이동해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고종을 모시고 언덕 위로 피해서 이리 저리 안전지대를 찾아서 방황하다가 점점 급해지자 동북문(東北門) 안까지 이르렀다. 이때는 이미 십구 일의 해도 저물었는데 공격군의 총성은 더욱 요란스러웠고, 청국군이 지른 궁궐의 화염(火炎)은 황혼의 저녁 하늘을 더욱 벌겋게 물들였다. 임금을 모신 개화독립당의 간부들은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해서 망연실색하고 있었다.

이때 민비와 세자, 그리고 대왕대비, 왕대비가 오시라는 기별이 왔다. 북묘는 진령군(眞靈君)을 봉한 무당 박소사(朴召使)가 민비의 복을 빌던 곳이라 민비에게는 신앙적으로 마음이 좀 놓이는 피난처였던 것이다. 고종은 민비를 비롯한 왕족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나도 북묘로 가겠다.

고종은 민비가 기다리면서 사람까지 보내서 부른 북묘로 가고 싶어했다.

그 곳은 위험하오니 단념하십시오.

하고 김옥균이 반대했다. 고종을 민비와 함께 모시기는 꺼림직했던 것이다.

무감, 빨리 북묘로 인도하라.

고종은 심복 무감(武監)에게 거듭 명령했다. 김옥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린 강경한 명령이었다. 무감은 재촉하는 고종을 호위하고 북묘로 향해서 출발했다. 그러자 박영효는 성을 내고 긴 칼을 쑥 뽑아 들고는 고종을 인도하고 가는 무감의 옆구리에 대고 위협했다.

고종은 다시 억류당하고 말았다. 박영효는 자기의 모의(毛衣)를 벗어서 소나무 밑에 깔고

상감, 편히 앉으셔서 잠시 쉬십시오.

하고 권했다. 그러나 고종에게는 편한 자리가 아니고 바늘방석같이 불안한 자리였다. 그러나 김옥균의 날카로운 감시의 눈과 박영효의 칼끝이 무서워서 북묘로 가겠다는 고집은 더 하지 못했다. 박영효와 김옥균은 이때도 함께 있던 다께조에 에게

상감을 모시고 인천으로 가야겠으니 군대로 호위해 주시오.

하고 또 고종을 인천까지 납치해 가기를 요청했다.

다께조에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때 마침 북산을 점령하고 있던 조선 별초군(別抄軍) 백여 명이 황혼 속으로 일본군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고종의 옆에 있던 시신(侍臣)이 탄환을 맞고 쓰러지자 고종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김옥균은 무감에게

저놈들에게 여기 상감이 계시니 사격을 중지하도록 하오.

하고 명했다. 자기들보다는 고종의 심복인 무감을 시키는 동시에 자기들이 고종을 납치하고 있는 것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무감은 큰 소리로 이곳에 상감이 계시니 사격을 중지하라고 외쳤다.

공격하던 조선군 부대의 사격이 중지되자 고종은 또 대왕대비의 안위가 걱정스러우니 북묘로 가야겠다고 주장했다. 실은 민비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다께조에가 이 문제에 대해서 비로소 입을 열었는데, 그 뜻밖의 말에 김옥균과 박영효가 벼락을 맞은 듯이 놀랐다.

일본공사가 국왕을 호위하는 것이 도리어 문제를 까다롭게 할지 모르니 일본 군대는 철수하고, 사태의 진전에 따라 선후책을 강구하겠소.

상감을 우리가 억지로 모신 것은 당신과 일본 군대를 믿고 한 일인데, 지금 철병하면 청국군과 민가 일족에게 정권이 다시 돌아갈 텐데, 그러면 우리는 어찌 되란 말이요?

김옥균이 성을 내고 항의했다.

사태는 심상치 않게 되었소. 처음엔 청국군뿐인 줄 알았더니, 지금 발포한 것은 조선군이 아니요? 조선군의 발포는 국왕을 우리 일본군대가 호위하고 있기 때문이오. 오해와 모험을 무릅쓰다가 만일 국왕께 불행한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하고는 김옥균의 말은 무시하고, 고종에게 일본군은 철수하겠으니 대국을 잘 통찰해서 사태를 수습해 달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안심하고 무감을 재촉해서 민비가 기다리는 북묘로 급행했다.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은 자기들의 혁명(甲申政變)이 단 삼일 동안의 명목상 집권- 문자 그대로 삼일천하로 몰락한 운명을 직감(直感)했다.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가야 옳소? 국왕을 따라가면 친정 보수당에 잡혀 죽을 테고…

이제는 정권의 욕망보다도 자기들의 생명을 구하기에 급급했다.

당신들 고충에 동정하오. 우선 나를 따라오시오.

대부분의 개화독립당 간부는 다께조에를 따라가서 우선 생명을 보전하기로 했다.

다만 홍영식은 이번 혁명에도 민영익을 보호해 주었고, 청장 원세개와도 친분이 있어서 민비 부수당의 보복을 면할 듯 싶었다. 또 그 자신도 국왕을 따라 가겠다 했으므로 김옥균등도 이에 찬성하면서 뒷일까지 당부했다.

자네는 인덕이 있으니까 박해는 면할 것이니 국내에서 시기를 기다리게. 우리는 국외로 망명했다가 후일에 권토중래(捲土重來)하겠네.

하고 비장한 다짐으로 동지들과 이별했다.

 

 

 

 

狂亂하는 季節

 

김옥균 일파의 중심인물들은 다께조에를 따라서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민씨 일파와도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므로 안심하고 고종을 모시고 갔다.

그러나 참형만 자초(自招) 했을 뿐 삼일천하의 개화독립당은 국내에선 완전히 멸망해 버렸다.

그날 밤, 남산에 있던 일본군의 병영도 습격을 받고 불에 타버렸다. 이십삼 일에는 아침부터 보수당에서 선동한 민중이 일본공사관을 포위하고 돌을 던지면서 침입하려다 문 앞의 파수병과 충돌했다.

김옥균, 박영효 등 역적을 내놓아라!

개화당을 조종하는 일본공사는 곧 물러가라!

일본공사도 사태가 위급해지자 미국공사와 영국공사에게 응원을 청하려고 했으나 청국군과 흥분한 군중 때문에 그들의 교통은 완전히 두절 당했다.

일본공사관이 완전한 고도(孤島)와 같이 외부와 일체의 연락이 끊어지자 당장의 곤란은 그날 먹을 식량조차 구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공사관에서는 직원의 고용원과 호위병이 칠십 명인데다가 피난해 온 일본인 거류민을 합한 삼백 명의 큰 식구를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이 떨어진 그들은 관내에서 아사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해서 인천으로 가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결심했다. 다께조에를 비롯한 관원은 죽  한 그릇씩으로 점심 요기를 하고 군대의 호위로 공사관을 나와서 인천으로 도망해 갔다.

이 일본 공사관 직원과 군대 한복판에는 개화독립당의 중심인물인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신응식(申應植), 정난교(鄭蘭敎), 유혁로(柳赫魯), 변수(邊燧) 등이 구경꾼의 시선을 피하면서 무거운 걸음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서울을 탈출하려다가 광화문 거리에서는 청국군과 조선군의 습격으로 한때 전투까지 하고는 패쇠 된 서대문을 부수고 마포로 나와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갔다. 그리고 인천에서 일본기선 천세호(千歲號)로 일본공사를 따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처럼 개화독립당이 일본 세력과 함께 도망친 뒤에 청국군은 전보다도 더 강한 보호자로서 국왕과 민비정권을 지배하게 되었다.

청장 오조유는 십구일 밤에 고종을 자기 군영에 모셔다 보호했다. 다음 이십일에는 원세개의 군영으로 모셔갔다. 그리고 거기서 원세개의 지휘 밑에 최초의 중신회의가 열려서 조정의 중요인사가 발령되었다. 그리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은 오적(五賊)으로 몰아 잡아서 극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외무협판(外務協辦) 목인덕(穆麟德)은 개인적으로도 원수 같던 김옥균 등을 체포하라는 왕명(王命)을 받자 군대를 거느리고 인천으로 급행했다. 그러나 때는 조금 늦어서 개화독립당원들은 이미 일본기선에 망명해 있었다.

그는 일본공사 다께조에를 만나서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역적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다께조에는 본래 성격이 약한 기회주의적인 외교관이었다. 그래서 국왕의 명령으로 김옥균 등을 체포하러 왔다고 위협하자, 다께조에는 김옥균 등에게 또 배신행동을 했다. 즉 하선하도록 요구한 뒤에 자유롭게 피신하라고 권했다.

공사는 또 배신하고 우리를 잡혀 죽게 할 작정이요?

사형선고와 같은 다께조에의 하선(下船) 요구에 김옥균, 박영효 등은 차라리 배 위에서 자결할 각오를 했다. 그래도 다께조에는 인정상으로라도 자기가 책임져야 할 망명객들에게 무자비하게 냉혹한 태도를 취했다. 대담한 책사(策士)인 김옥균도 이제는 살길이 막연했다.

그러나 이 위급한 때에 그들을 구원해 준 의협심이 많은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천세호의 선장 쓰지가쓰 사부로오(迂勝三郞)였다. 그는 단호한 태도로 일본공사의 태도를 물리치고 선장의 권한으로 말했다.

처음에 망명객을 태운 것은 다께조에 공사의 체면을 보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문제가 생겼다고 다시 하선하라는 공사는 비겁하다. 이젠 내 체면으로도 하선시킬 수 없다. 비록 공사의 명령이라도 이 배의 권한은 내게 있다. 나는 선장의 책임으로 인도상

(人道上) 곧 잡혀 죽을 망명객을 하선시킬 수 없다.

하고 망명객들을 배 밑의 비밀실에 숨겨 주었다. 그리고 재촉하는 목인덕에게는 시치미를 떼고

공사는 그 사람들이 이 배에 탄 줄 알고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나, 선장인 나로선 그런 사람을 태운 일이 없소.

목인덕은 우물쭈물하는 일본공사에겐 큰 소리를 했지만, 일본선장의 권한을 무시하고 외국기선을 수색할 수는 없었다. 공사의 정치적인 대접보다도 선장의 인도적 위협심이 김옥균 등의 많은 인명을 구해 준 것이다.

그리하여 개화독립당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삼일천하로 실패했다. 비록 그들이 일본의 후원으로 거사는 했지만 이 운동은 근대국가(近代國家)로서의 민주적 자주독립(民主的 自主獨立)을 시도한 최초의 정치운동(政治運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화당의 갑신정변은 민비 보수정권에게 세계각국과의 관계가 복잡미묘함을 알려 주었다.

청국군과 일본군과의 충돌 사건이 국제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공사관 습격과 일본인 사십 명 살해에 대한 배상과 앞으로의 보장을 위해서 한양조약(漢陽條約)을 체결시켰다. 그리고 청국에 대해서는 천진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시켜서 양국 군대의 철수와 함께 이권평등으로 조선에 대한 욕망을 채웠다. 이와 같이 조선에 대한 이권을 청국과 일본이 서로 싸우고 서로 타협하는 정세에 시기를 느낀 세계 각국 특히 노서아, 영국, 미국은 조선의 중립론을 들고 나와서 통상 등으로 이권을 노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은 마침내 극동의 화약고(火藥庫)가 되는 운명을 외부로부터 강요당하고 또 내부에서 자초(自招)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조정에서는 그들 각국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민비는 종래의 친정(親政)정책에 변덕을 부려 청국과 일본을 다 배척하고 다른 제 삼국의 외국세력과 결탁할 꾀를 부렸다.

청국도 인젠 믿을 수 없다. 신흥 일본의 세력에 밀려서 일본이 요구하는 천진조약으로 철병도 하고, 원수의 대원군까지 귀국시킬 모양이다.

민비는 일본과 청국간의 공동양해로 대원군을 귀국시킨다는 것이 싫었다. 이 문제만 보더라도 민비정권을 청국과 일본이 다같이 탐탁히 여기지 않고 대원군으로 하여금 민비의 정적을 삼아 후원하려는 비밀공작이 아닐까 하는 의심과 불안을 느꼈다.

비록 청국과 일본이 대원군의 집권을 후원하지 않더라도, 그가 자유로운 몸으로 귀국하면 또 정치음모를 할 것이다.

민비는 대원군을 송환한다는 소문이 외국군의 침입보다도 싫었다.

청국과 일본은 저희 나라끼리 우리 정부를 무시하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야합하면서 이용만 한다. 이 기회에 노서아와 손을 잡고 청국과 일본의 간섭을 막아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노서아 남하정책(南下政策) 때문에 반대하던 종전의 방로책(防露策)을 포기하고, 1,885년 사월 십사 일에 한로조약(韓露條約)을 체결하였다. 그와 동시에 민비는 밀사를 노서아 황제에게 보내, 조선에서 외국 간섭으로 중대사건이 생길 때는 조정의 보호를 요청한 비밀외교까지 했던 것이다.

노서아가 조선에 대한 남하정책을 노골화하고, 조선왕실과 노서아왕실 사이에 밀약설이 유포되자, 영국 함대는 노서아의 세력이 동양에서 팽창함을 견제하기 위해서 1,885년 사월 십오 일에 남해의 거문도(巨文島)를 무단 점령했다. 노서아에서는 이에 대해서 만일에 영국 해군의 이런 불법행동을 시인한다면 우리로서도 조선반도의 어느 일부를 점령할 것이다.

라고 엄중히 항의했다. 조선의 영토는 마치 외국이 분할 점령하는 대상물같이 자기들 마음대로 흥정했던 것이다. 민비정권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노서아의 압력으로 철수되기를 은근히 바랐다.

노서아의 이런 강경한 태도와 일본 및 청국의 항의에 부딪친 영국은 거문도를 오천 파운드의 돈으로 사겠다고 했으나, 전기 삼 개국의 반대로 민비정권은 거절했다. 청국 이홍장도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노서아가 조선의 일부분을 점령하는데 찬성한다는 뜻으로 영국에 대하자 영국도 하는 수 없이 1,887년 이월에 해군을 철수시켰다.

민비정권은 국토의 일부를 외국군사에게 불법 점령당하고도 자력으로는 격퇴할 실력이 없었다. 이것은 대원군이 각국의 군대를 격퇴한 자주성과는 판이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의타(依他)외교에 지나지 못했고 이러한 민비의 잔꾀는 마침내 조선을 외국의 충돌과 전쟁마당으로 만들고 끝내는 자신의 생명까지 외국의 흉인(兇刃)에게 빼앗기고, 조선왕실과 나라까지 멸망시키는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청국은 민비정권이 갑신정변 때에 왕실을 구해 준 은공도 잊고 천진조약을 계기로 일본과 함께 자기 나라를 경계하고 노서아와 친하려는 술책이 미웠다. 그래서 청국의 이홍장은 일본의 이노우에 외무대신과 상의한 끝에, 조선 조정의 민비세력을 견제하는 의미에서 대원군을 석방해서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청국도 일본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의 원흉으로 미워하고 청국으로 납치해다가 엄중히 감금했던 대원군이다. 그러나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의 국제 정세의 변화로, 민비가 친로정책(親露政策)을 꾀하게 되자 민비 최대의 정적인 대원군을 석방 귀국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대원군을 귀국시키는 청국과 이에 찬성한 일본은 장차 그에게 정권을 맡기기 위한 공작이다. 귀국하기 전에 외교간섭으로 중지시켜야 한다. 그 놈의 늙은이 병으로 죽지도 않고 또 돌아오면 두통거리다.

민비는 대원군의 귀국이 두려웠다. 그리고 그를 이용해서 자기의 세력을 꺾으려는 청국과 일본의 야합이 분했다. 민비는 노서아 공사에게 대원군 귀국 반대에 후원해 줄 것을 밀청(密請)하는 동시에 민씨 일파의 대표자격인 민영익(閔泳翊)을 천진으로 보내서 이홍장에게 직접 반대운동을 했다.

각하, 대원군이 귀국하면 또 임오군란 같은 폭동을 일으켜서 조정을 전복할 음모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국내 혼란을 구실로 각국의 군대가 조선에 출동할 것이요. 그러면 조선의 독립이 위태로울 뿐 아니라, 각국의 군대가 조선 땅에서 충돌할 것이니, 실로 위험합니다. 대원군은 국왕의 생부요, 왕비(민비)의 시아버지이며, 양(兩) 전하도 사사로운 정의로서는 귀국을 누구보다도 바라지만 국가를 위해서 귀국 보류를 원하시니 그 점을 잘 살펴 주시오. 귀국에 있는 동안에도 교묘한 수단으로 국내의 잔당(殘黨)과 밀통하면서 음모한 죄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거짓말로 이홍장을 졸라댔다.

우리 나라로선 귀국의 내정문제엔 간섭할 생각도 없소. 다만 국왕의 부친을 너무 오래 감금해 두는 것이 양국의 체면상, 또는 인도상 미안해서 돌려 보낼 생각 뿐이오. 효성이 지극한 국왕도 왕비도 환영할 우리 나라의 호의를 당신들이 공연히 그러는 것이 아니요?

하고는 이홍장은 능청맞게 이런 말로 민영익을 반박했다. 그리고 국왕과 왕비가 대원군의 귀국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불효가 아니냐고 빈정대는 태도까지 보였다. 민영익을 파견한 뒤에도 불안해진 민비는 김명규(金明圭)와 이응준(李應俊)을 또 파견해서 반대운동을 했으나 이홍장은 도리어 그들을 설복시키려고 했다.

대원군이 귀국하더라도 전과 같이 정치활동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이니 왕비를 비롯한 민씨 일문에서도 원만한 화해를 하도록 당신들이 힘써 주시오. 좌우간 우리는 국가간의 체면과 인도상의 염치로 이 이상 대원군을 억류시킬 생각은 없소.

이홍장의 기정방침은 민비가 파견한 반대운동자들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각하의 의견이 정 그러시다면 귀국 후에 서울에 있지 못하게 하고 국내의 어느 벽지에 한거(閑居)하도록 하는 조처에 귀국에서도 양해 해 주시오.

하고 국내에서 귀양 보내는데 묵인해 달라고 애원까지 하자 이홍장은 껄꺼 웃었다.

허허허, 그건 부친에 대한 국왕의 생각이요? 아니면 국왕을 보필하는 대신들의 생각이요?

아무리 국왕이라도 자기 부친을 귀양 보낼 수가 있느냐? 그러면 불효의 죄를 면하지 못 한다는 위협이었다. 이 말에 대해서는 청하던 사신들도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홍장은 민비가 파견한 사신들의 청원을 일축하고 보정부(保定府)에 귀양 보냈던 죄인 대원군을 국빈 대우로 천진에서 맞았다. 이홍장은 특별히 청국황제도 만나게 하고 귀국 감상과 조선의 정치문제에 대한 대원군의 진의(眞意)를 타진했다. 이에 대해서 대원군은 이홍장의 호의에 감사하면서, 칠십 가까운 노인답지 않게, 외국에 오랫동안 감금된 사람답지 않게, 자기 소신을 솔직히 피력했다.

왕비가 계속 정치를 휘두르면 귀국이 아무리 보호 원조하더라도 조선은 수년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귀국에서 왕비에게 일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엄중한 지시를 하고, 귀국의 대신 한 명을 파견해서 국정의 대소사를 감독케 하면 나라도 지탱되고 민심도 안정될 것입니다.

민비가 대원군을 미워하는 만큼 대원군도 민비를 미워했다. 그러나 그 분풀이를 역시 외세(外勢)에 의해서 하려는 사대주의에는 대원군도 민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청국의 대신이 조선 통감격으로 가서 내정을 감독해 달라는 대원군도 이제는 완전히 배외쇄국(排外鎖國)의 정책을 버렸던 것일까. 청국만은 양이(洋夷)가 아니라는 종주국(宗主國) 대우로서 그랬던가. 혹은 민비를 꺼려하는 자기를 석방 귀국시켜 주는 이홍장의 호의에 아부한 말이었던가.

아무튼 청국의 힘으로 조선 조정에서 민비의 세력을 꺾어버리려고 청국의 힘을 애원한 것은 사실이다. 대원군의 이런 솔직한 말은 이홍장에게 충분한 이용가치를 인식시켰다.

친로거청(親露拒淸)하려는 민비의 외교술책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려는 데는 대원군을 귀국 시켜서 은연중에 친청 세력을 유지 강화시키려는 것이 좋다는 자신을 갖게 해주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임오군란 후 청국에 잡혀간 지 만 삼 년 만에 청국군함으로 당당하게 귀국했다.

대원군이 삼 년 만에 외국 귀양에서 풀려 오자 청국, 일본의 공사들은 크게 환영을 했고, 민비 정권을 증오하던 국민들도 환영했다. 그러나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은 그와 정반대로 냉대했다. 대원군에 대하여 직접 박해는 가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서울에 와서 운현궁에 들어간 다음날부터 운현궁에는 관민을 막론하고 일체의 출입을 엄금했다.

청국 보정부의 귀양살이 이상으로 부자유했다. 그리고 임오군란 때 도망했다가 잡힌 김춘영(金春永), 이영식(李永植) 등을 능지처참해서 대원군을 위협하는 동시에 대원군의 옛날 종복(從僕)들도 다시 시중하지 못하도록 독살하고 옛날에 대원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하려고 엄중한 수배를 했다.

민비와 대원군 싸움에 나라가 망한다.

시아비는 청국편, 며느리는 아라사편이니, 이 집안 싸움이 언제 청아(淸雅) 전쟁으로 터질 지 모른다.

지금 앞장선 청국과 아라사보다 모른 척하고 구경하고 있는 일본이 더 무섭다. 청국도 아라사도 다 늙어서 허장성세만 하지만, 실속만 노리는 신흥강국 일본의 꾀에 두 나라가 농락만 당하고 있다. 중간에서 말리는 척하면서 대원군과 민비 – 청국과 아라사를 이간 시키는 것은 일본이다. 그러다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는 건 결국 일본일 거야.

세상에서는 친청 대원군과 친로 민비의 당파 싸움을 이렇게 욕하면서 경계했다. 그러나 민비와 대원군의 권력 투쟁의 암투는 악화해 가고만 있었다.

사실상 아직도 청국은 조선에 대해서 국제적인 발언권이 제일 강했으며 민비의 비밀 친로 경향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이 청국보다 더 강적인 노서아를 막기 위해서 당분간 청국에 대한 간섭에 동의했으므로, 이홍장은 임오군란 때 공을 세웠던 원세개를 대원군 호환사(護還使)로 다시 보내는 동시에 그대로 조선 주재 청국책임자로 삼아서 강력하고도 노골적인 내정간섭을 하게 했다.

이것은 대원군이 청국대신급으로 조선 국정을 감독하라고 한 요청이 제도화(制度化)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일종의 감국대신(監國大臣)으로서 후일 일본이 만든 조선통감(朝鮮統監)의 소형전례(小型前例)였던 것이다.

민비정권은 대원군을 옹호하는 원세개의 압력을 배제하려고 노서아와의 비밀외교에 더욱 정력을 기울였다. 민비는 척신(戚臣)들과 공모하고 웨베르 노서아 공사에게 조선왕국을 노서아 제국이 보호 육성해 주시오.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지원해 주되, 청국이 꺼려하거든 군함을 파견해서 견제해 주시오.

하는 내용의 국새(國 )와 총리대신의 도장까지 찍은 비밀문서를 보냈던 것이다.

민비의 이러한 친로 비밀교섭에 반대해 오던 민씨 일파의 거물은 우영사(右營使)로 있던 민영익(閔泳翊)이었다. 그는 대원군과 역시 정적이었으나 외교문제에 한해서는 반로친청(反露親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민비의 친로 비밀공작에 반대한 나머지 고종 병술년(丙戌年) 칠월에 왕실의 친로 비밀교섭을 청국 원세개에게 밀고했다. 오만불손한 원세개는 민비도 안중에 없었으므로 종전의 그런 풍문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만, 민영익의 밀고로 그것이 사실임을 비로소 알고 놀라는 동시에 분개했다. 원세개는 곧 본국의 이홍장(李鴻章)에게 비밀 전보를 보냈다.

< 국왕(高宗)이 노서아와 밀약하고 청국 세력을 몰아내려 하는 음모를 하고 있으니 국왕을 갈아치워야 하겠음. >

결국 일국의 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려는 음모가 진행되었는데, 고종을 몰아낸 뒤에는 고종의 조카(형의 아들)인 이준용(李埈鎔)을 세자로 들여세우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아서, 그에게 국정을 맡기겠다는 계획이었다.

원세개의 이런 음모는 물론 대원군에게 비밀로 연락되고 정권회복에 호시탐탐 하면서 민비 일당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그에게는 이를 데 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장군의 건의가 이홍장 대신을 비롯한 귀국 조정에서 승인될지 모르겠으나, 모든 것은 장군의 힘만 믿습니다. 만일 귀국에서 승인하지 않을 경우라도 장군만 후원하신다면 국내 사정만으로도 해치울 방도가 있습니다.

대원군은 조급하게 졸랐다. 그러나 원세개로서는 본국의 승인 없이는 어려웠으므로 이홍장의 찬성을 얻으려고 모든 정보를 비밀제공했다. 그리고 연극을 꾸몄다.

대원군의 운현궁을 습격 방화하고 그 폭동의 책임을 민비 일당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운다. 그리고 민비 일당의 만행을 규탄한다는 명목으로 폭도들로 하여금 이 기회에 민비정권을 전복시키려고 궁궐을 습격하는 난리를 일으킨다. 그 뒤에 원세개는 폭동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청국 군대를 거느리고 궁중을 점령한 뒤에 고종을 폐위시키고 대원군에게 다시 정권을 맡긴다는 음모였다.

그러나 원세개의 그런 음모 건의를 받은 이홍장은 심중한 태도를 취해서 노서아에 대한 외교 교섭을 하는 동시에 대원군 자신의 세력이 민비 일당의 세력을 제거할 시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으니 제반 준비를 갖추고 기회를 보라는 훈령을 원세개에게 내렸다.

대원군의 주체세력이 아직 약한 때에 준비 부족의 폭동을 일으켜서 내란이 일어나면, 청국 군대 뿐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각국, 특히 민비와 밀약한다는 노서아도 군대를 파견해서 복잡한 국제분쟁이 조선에서 재발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홍장은 고종폐위와 대원군 재집권에 대한 계획에는 찬성하고 곧 청국으로서의 준비 행동에 착수했다. 즉 조선 출병을 정여창(丁汝昌)에게 명령하는 동시에 성선까지 동원해서 군대 수송의 준비도 서둘렀다. 서울에 있는 원세개는 그런 정보를 받고 불원간 거사 할 계획에 자신을 갖고 조선 조정과 국왕 고종에게 노골적인 압력을 가했다.

원세개는 노서아의 밀서(密書) 사본(寫本)을 제공한 민영익의 비밀을 지켜 주려고 위조 전보로서 조선 조정을 위협했다. 그는 칠월 십오 일에 대신들과 각 군영의 대장들을 자기 공관으로 초대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잔치가 진행 된 자리에서 한 장의 위조 전보를 공개했다.

나는 이번에 본국 정부에 대해서 면목이 없게 되었소. 여러분과는 평소에 친한 사이로 믿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나를 속여서 놀라게 했소. 내가 채 보고도 하기 전에 본국에서 먼저 귀국과 노서아와의 밀약(密約) 사실을 알고 귀국에 문죄차(問罪次) 군대가 오늘 정오에 군함으로 출동했다는 전보가 왔소.

원세개는 위조 전보로 위협했다. 초청 받았던 대신들은 깜짝 놀라 황망히 돌아가서 고종과 민비에게 보고했다. 왕실과 정계는 물론 이 소문을 전해 들은 장안의 인심이 흉흉해졌다. 정부에서는 친군사영(親軍四營)에 비상 경비령을 내렸다.

원세개는 자기의 위조 전보 한 장으로 연극의 효과가 큰 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면서 이튿날에는 고종을 방문하고 직접 위협했다.

문죄의 대병이 오기 전에 전하는 빨리 우리 양국의 친선 관계를 파괴하는 간신의 무리를 숙청해서, 전하의 본심이 아니라는 성의를 보여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고종도 원세개의 이런 위협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원세개는 외교독판(外交督辦) 서상우(徐相雨)를 불러 놓고

귀국정부의 군신상하(君臣上下)가 우리나라와의 친선정통을 파괴하는 불법을 감행했으니, 그 책임을 느끼거든 즉각 사과하고 타국과의 밀약음모를 파기하시오.

하고 오만불손한 요구를 내놓았다. 그리고 미리 연락한 대원군은 국가 안위(安危)의 중대사건을 금시 초문이라는 놀란 표정을 짓고 궁중으로 찾아와서 조대비(趙大妃)  홍대비(洪大妃) 에게

무모한 친로 밀약으로 청국에 배신해서 지금 청국이 노하고 대군을 급파하였다니, 왕실의 운명이 목전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청국 대군이 입성하기 전에 조정에서 간신배를 몰아내고 국정을 바로 잡아서 우선 청국의 노여움을 풀고 안으로 민심 안정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고 대원군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기가 다시 정권을 잡아야만 이 중대 위국을 수습할 수 있다는 암시를 했다. 당황한 군신은 긴급 회의를 열고 선후책을 강구했으나, 우선 국왕과 대신들이 책임을 피하려 했다.

아라사와의 밀약문서는 국왕도 대신들도 모르는 일이요.

비밀서류의 사본에는 분명히 국새가 찍혀 있소. 증거품을 보여야 시인하겠소.

그건 모두 협잡배들의 장난입니다.

우선 그 협잡배가 어떤 자들인지 엄중 처단하시오. 그리고 아라사공사관에서 그 문서 일체를 회수해서 무효로 해버리시오.

원세개는 강경한 요구를 했다.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밀사(密使)의 역할을 한 자들을 억울하게도 협잡배로 몰아서 귀양을 보냈는데, 민비 정권에게 충성을 다한 조존두(趙存斗), 김가진(金嘉鎭), 김학우(金鶴羽), 김양묵(金良默) 등은 민비정권에 의해서 희생되었다. 그러나 노서아공사관에서는 비밀문서를 반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조선 조정의 처사에 대해서 항의했다.

청국의 내정간섭으로 외교문서를 반환하라는 것은 실례도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죄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귀양 보내는 법이 어디 있느냐?

민비의 외교정책은 청국에게 위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노서아로부터도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원세개의 국왕 폐립의 음모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는 칠월 이십일 일에 이홍장에게 전보로 밀청(密請)했다.

< 국왕은 비밀문서를 보낸 채현식(蔡賢植)을 암살해서 증거를 인멸시키려고, 아라사 군대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국내의 상하인심이 흉흉한 중이니, 만일 오백 명의 군대만 보내 주셔도 국왕을 폐한 후에 아라사와 야합하려는 무리를 천진(天津)으로 잡아다가 신문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

원세개는 수병 오백 명만 있으면 고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대원군에게 집권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니 일국의 왕위(王威)와 군력이 얼마나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이 미약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때 만일 대원군에게 정권을 담당할 세력이 있었으면 이홍장도 원세개의 음모에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대원군에게는 아직 그만한 정치세력이 없었고 일반 국민도 그를 그렇게까지 신임하고 있지 않았다.

그 밖에도 미묘한 국제정세가 있었으므로 이홍장은 고종 폐위를 단행하는데 심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리해서 결국에는 외교문서에까지 국왕의 거짓 옥새를 사용했다는 고종의 증언으로 국왕의 위신까지 떨어뜨렸다.

< 금후로는 외국인과의 일체의 공사(公私) 계약에는 외무 아문(外務衙門)의 관인 없으면 무효이다. >

그리고 이런 조회문까지 각국 공관에 보냈다. 그것은 노서아와의 밀약문서가 위조물이며 옥새까지도 위조물을 찍었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구육책(狗肉策)이었으며 약국의 굴욕외교(屈辱外交)로서 극치의 표본이 아닐 수 없었다.

민비의 고집과 간지(奸智)도 별 수 없구나. 구차한 변명으로 대원군에게 정권을 또 빼앗기지 않은 것만 운수가 좋았다.

이런 욕을 먹는 민비도 하는 수 없이 서상우와 이응준(李應俊)을 사신으로 청국에 보내서 양해를 구했으나 결국은 사과행각(謝過行脚)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소동 끝에 고종의 폐위는 모면되고 민비정권은 구차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원세개도 싱거운 놈이야!

이미 이가 빠지고 발톱이 무딘 늙은 호랑이 대원군도 청국의 힘으로 민비에 대한 원수를 갚고 다시 정권을 누려 보려던 야망이 수포화되자 공연히 마음만 들뜨게 했던 원세개를 싱거운 놈이라고 원망했다.

사건이 이렇게 일단락되자, 민영익은 원세개에 대해서도 거북했고 왕실에 대해서도 미안해서 향항[홍콩] (香港)으로 망명해 버렸다. 그가 망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친로 비밀 외교 반대의 자기 주장이 뜻밖에도 고종폐위와 대원군 재등장의 음모로 발전된 데 대한 불안과 불만에도 있었던 것이다.

 

 

 

亡國의 吊鍾

 

민비는 자기의 반청친로(反淸親露)의 비밀외교가 문제 되어 청나라의 노염을 사고 고종의 왕위 폐립 위기에까지 이르렀으므로 경풍을 하고 울화가 나서 몸 져 누워버렸다. 민비만 믿고 의지하던 고종은 국권의 위기에 못지 않은 불안을 느꼈다.

그뿐 아니라 인생에 대한 고독까지 느끼고 우울한 날을 보냈다. 민비의 미신숭배를 아는 측근에서는 병마를 쫓아내려는 무당굿을 자주했으나, 민비의 병세는 더해질 뿐, 배에 종기까지 나서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감국대신(監國大臣)으로 위세가 당당하던 원세개은 민비의 병이 중해지자 직접 왕실에 자주 들어와서 조정의 대신들을 직접 명령하면서 제 마음대로 부렸다.

고종은 표면상 국왕으로서 감국대신 원세개의 호령에 꿈쩍도 못했으나, 그와는 반대로 필요도 없는 실력자 민비는 심궁 안에서 그의 오만한 태도에 불평만했다. 이번에는 할 수 없이 청국에게 사과했지만 장차는 세계 강국인 노서아의 힘을 빌려서 원세개와 이홍장에게 보복하려고 별렀다.

원세개는 처음에는 속국 조선에 대한 정치적 명분을 세우고 위세를 부리는데 치중하고 경제적 이권에는 비교적 소홀했으므로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존중하는 척하고 정치간섭엔 관심이 없는 듯이 무역통상을 중심으로 경제적 실익만을 취했다.

그러나 원세개도 차차 경제적 이권을 확장해서 일본과 경쟁했으며 종주국적인 정치적 압력으로 경제적 이권도 일본보다 우선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일본과 청국관계는 점점 심각한 암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것은 청국과 노서아의 대립 이상으로 심각했다. 더구나 민비는 청국의 간섭을 노서아의 후원으로 억제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나 일본 세력의 침투는 청국 이상으로 꺼려 했다. 그러나 일본 신흥세력의 대륙진출 의욕은 조선과 청국의 반대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민비정권은 청국의 종주국적인 태도에 불만은 있었으나, 그 보호 밑에서 근근이 정권의 명백유지만 하고 내부에서는 부패가 거듭되고 있었다. 모든 정치적 공작은 반대파인 대원군의 세력 탄압과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 박영효 등 친일적 개화독립당의 음모를 분쇄하는데 만 경주했다.

그리하여 그들을 암살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자객(刺客)을 일본에 밀파하고 비용을 아끼지않았다. 일본에서는 재야(在野)의 낭인 정객(浪人政客)들로 김옥균, 박영효 등을 보호해 주었으나 정부로서는 귀양을 보내 김옥균의 신변보호를 해주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모사(謀事)가 여의치 못하자, 민비를 싫어하는 청국 이홍장의 후원을 받을 생각으로 청국 상해로 건너 갔으나, 동지로 가장하고 함께 따라간 민비측 자객 홍종우(洪鍾宇)의 칼을 맞고 여관에서 객사(客死)했다. 그리고 그의 시체가 서울로 이송되자 민비파에서는 죽은 시체에 역적의 패를 붙이고 다시 참형에 처하는 잔인한 보복까지 했다. 그러자 일본 언론계에서는 그 비인도적 처사를 비난했고 냉정하던 일본정부에서도 그것이 노골적인 반일 행동이라고 못마땅해 하는 동정을 표시했다.

이처럼 민비정권에 대한 일본의 반감과 일청관계가 악화일로에 있을 때 마침 전라도에서 동학당(東學黨)의 반란이 일어나서, 부패한 민비정권을 타도하려는 민중운동이 폭발했다.부패하고 무력한 관군(官軍)의 힘으로는 도저히 동학당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럴 때면 외세에만 의존하는 상투적 구명책으로 청국에 청병(淸兵)해서 국내 반란의 진압을 호소했다.

청국에서는 조선 파병의 구실을 기다리던 중이라, 오월 삼일(甲午年)에 천오백명의 군대로 아산만(牙山灣) 백석포(白石浦)에 들어왔다. 청국은 조선 출병에 앞서서 천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일본에게 그 사유를 통지했던 바 일본은 이에 대한 회답 대신 사흘 후인 오월 육일에 일만 명의 군대를 태운 군함으로 인천항에 입항했다.

앗, 일본과 청국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도 놀랐고 청국도 놀랐다. 민심도 흉흉했지만 많은 난리를 겪은 백성들은 급하면 피난할 생각으로 비교적 무관심했다.

왜놈과 되놈이 싸우면 어느 나라가 이길까?

하면서 제 나라 땅에서 싸우는 외국군대 싸움을 구경하려는 호기심으로 수군거렸다. 이런 예측은 적중에서 청국군은 아산에 상륙해서 서울로 향하고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해서 일부는 서울로 향하고 일부는 평택으로 향해서 북상하는 청국군을 막았다.

우리는 우리의 속국 조선의 청병으로 속국의 내란을 진압하려는 목적에서 왔지만 일본은 왜 군대를 남의 나라에 무단 출동하느냐?

청국측 항의에 대해서 일본은 저대로의 핑계를 했다.

조선에서 내란이 나고 청국 군대까지 출동하는 판국에 일본 거류민의 보호상 그냥 있을 수 없다. 또 청국 군대가 진압할 정도의 내란이라면 우리도 국제 도의상 청국과 함께 내란진압에 협력할 생각으로 왔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서 일본공사 오오도리(大鳥)에게 이미 동학당 내란도 진압되었으니, 귀국의 군대를 곧 철수 하시오.하고 요구했다. 그러나 오오도리는 완강히 거부했다.

청국군대가 먼저 왔으니 그들이 먼저 철병해야 우리도 철병하겠소.

그것은 청국군대가 철병하지 않으면 전쟁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청국과 조선 양국에 대한노골적인 태도였다.

민비정권은 내정의 부패로 농민폭동을 겸한 동학란을 유발(誘發)시켰고, 그 진압책으로 청국 군대를 불러들였으나, 청하지 않은 일본 군대까지 침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일본군을 격퇴시킬 힘이 없는 조정은 청국군이 일본군을 격퇴해 주기만 바랐다. 일본이 아무리 신흥국가지만 대국인 청국의 힘엔 당하지 못하리라는 상식적 신뢰감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공사 오오도리는 청국군과 일전(一戰)할 계획은 깊이 숨기고, 이때까지 나타내지 않고 있던 내정간섭을 노골적으로 시작했다. 오오도리 공사는 조선에서 민란(民亂)이 계속되는 원인이 부패된 정치에 있다는 것을 설교하고이 기회에 시급히 내정개혁을 단행하시오. 모든 국내반란과 국제문제 분규는 내정개혁에서만 이룰 수 있소.하고 소위 오강목(五綱目) 이십개조(二十個條)에 달하는 개혁안을 강요한 후 교정청(校正廳)을 신설하고 심의하라고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교정청의 임원을 대신급으로 구성하고 일본이 지시한 개혁안을 심의하기 시작했다.

< 일본의 개혁안은 비록 체면상 부끄럽게 되었지만, 그 취지와 원칙에는 찬성이다. 곧 민씨 일파의 부패한 전제정치(專制政治)를 폐지하고 초당파 거국내각으로 서정(庶政)을 일신하는 동시에 선진 문명국의 제도를 체택해야, 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취지의 상소문이 계속되었다. 이남규(李南珪) 등의 이런 상소는 자주적 입장에서 빨리 내정개혁을 하라고 주장했다. 민비의 대변자 노릇만 하던 고종은 이런 긴박한 내외 공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우물쭈물하며 시일만 지연시켰다.

청국의 원세개와 파견군 사령관이 본국과 연락해서 일군을 몰아내는 단호한 대책이 설 때까지 일본에 대한 회답을 지연시키도록 하시오.

민비는 고종에게 남의 힘으로 남의 힘을 꺾으려는 이런 외교적 잔꾀만 말하고 부패한 자기 일파의 내정개혁에는 일호의 반성도 없었다. 고종은 민비의 말을 따라서 청국 이홍장에게 직접 호소하는 비밀전보까지 보냈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급박하오. 그들이 요구한 소위 개혁안을 심의하는 척하고 있는 것은 귀국에서 신속히 시국 해결을 해주기 바라는 동안의 임시 작전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이홍장은 청국주재 각국 공사을 통해서 조선에서의 일본군 철병을 외교적으로 교섭할 뿐, 독자적인 적극 행동에는 심중한 태도를 취했으므로 민비정권은 총칼을 들이대고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일본 압력에 지쳐버렸다. 조선에 파병된 청국군 천오백 명의 힘으로는 일본군 만 명의 세력을 당할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이홍장이 일본을 압도할 대군을 증파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불안했다.

일본공사는 날마다 내정개혁의 심의에 결과를 재촉했으나 지연전술에 화가 나자 조선 대표 세 명을 불러서 최후 담판을 했다. 조정의 대표들은 일본 세력에 눌려서 내정개혁에 합의를 보게 되었으나 고종은 청국을 믿는 마음에서 결재를 내리지 않았다.

청국군을 철병시키고, 청국과의 통상조약을 폐기하시오. 이 회답을 유월 이십일까지 하시오. 이것이 최후의 회답입니다.

오오도리 공사는 명령적으로 최후 기한을 정하고 정식으로 청국에까지 노골적 태도를 표시했다. 대세는 이미 결정적으로 일본에 유리했다.

원세개도 겁쟁이 졸장부다. 조선 임금을 호령하던 놈이 일본공사가 무서워서 본국으로 도망쳐 버렸다. 아냐, 대군을 데리고 오려고 간 것이겠지, 설마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했을까?

원세개는 정세 보고 차 귀국한다는 명목이었으나 그의 대리로 당소의(唐紹儀)가 부임되자기대하던 조정에서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청국의 현지 세력은 일본에 비해서 시시각각으로 떨어져 가고만 있었다.

일본세력이 갑자기 유리하게 되자 친일적인 재야 정객들과 민비 정권에 불만을 품은 각파의 정객들은 암암리에 일본공사관에 출입했으며, 특히 일본 낭인(浪人)들과 야합해서 다음정권에 한몫 보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때 특히 벼르며 기다리던 일파는 대원군을 지지하는 숨은 세력이었다. 일본측에서는 우선 민비정권을 갈아치우는데 대원군을 이용할 계략을 세웠다. 그전에는 대원군을 배일정책의 주창자로 일본을 미워하는 완고한 노호(老虎)로 꺼렸지만 민비를 제일 미워하였으므로 이용하려고 생각했다.

일본공사가 통고한 최후 기한인 유월 이십일에도 조정에서는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았다.

일본측은 곧 실력행사에 착수했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한 일본측에서는 미리 치밀한 행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일본공사는 이십일일 새벽을 기해서 일본군 이개 대대를 직접 인솔하고 경복궁으로 공격 해 들어갔다. 영추문(迎秋門)을 지키던 호위군은 총 몇 방을 쓴 뒤에 도망쳐버렸다. 남은 병정의 무장을 해제시킨 뒤에 곧장 함화당(咸和堂)으로 달려든 일본공사 오오도리는 임금을 배알(拜謁)하고 겉으로는 공손히

놀라지 마십시오. 오늘은 내정개혁에 대한 말씀을 직접 들으러 왔습니다.

했으나 사실은 임금을 감금한 것이었다. 이때도 경복궁 안의 각처에서는 호위군과 일본군과 싸우는 총성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호위군의 완전 패배였고 무장해제로 조용해졌다.

아침 해가 높아지고 열 시쯤 되자 일본군에게 호위된 대원군이 갑자기 경복궁에 나타났다.

대원군이 궁중에 들어왔다.

궁녀의 복장으로 후궁에 숨어서 벌벌 떨던 민비는 궁녀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대원군이 일본군과 야합해서 일으킨 반란이라고 직감하고 치를 떨었다. 그러나 사실은 대원군이 주동적으로 취한 행동이 아니었고 일본공사가 그를 이용한 것이었다.

대원군도 민비정권을 타도하는데 통쾌했으나 일본군의 이용물로서 그들의 괴뢰정권의 수반이 되는 것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동기는 여하간에 자기가 다시 정권을 잡으면 자주적으로 부패한 정치를 일신해 보려는 야심과 포부는 아직도 왕성했다.

고종도 일본군의 총칼에는 하는 수 없이 일본공사가 요구한 내정개혁안에 무조건 찬성하고, 신하들에게 신속히 개혁안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늘부터 중요한 국사는 대원군이 결재하도록 하고 육해군의 통수권도 대원군께 맡기도록 하라.

고종은 오랜만에 만난 생부(生父)에게 무슨 효도나 하는 듯이 국정의 실권을 위임했다.

일본군의 총칼이 두려워서 마음에 없는 정권을 민비로부터 이양시켰던 것이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형식에만 그치지 않고 민씨 일파의 숙청이 단행되었다. 중요한 조정의 고관들은 귀양 보내고 내각은 개화당 일파로 편성되어서 일본이 요구한 정치개혁이 진행되었다.

국내의 정변이 일본의 무력 위협으로 대원군을 재등장시킨 뒤에는 국제적으로 일본과 청국의 군대가 충돌했다.

유월 이십삼 일에는 벌써 청국군 구백 명을 싣고 오던 군함이 일본 군함의 공격으로 침몰해 버렸다. 그리고 이십오 일에는 평택에서 육전(陸戰)이 벌어졌으나 역시 일본군의 대승리로 끝났다.

패잔병은 강원도로 돌아 평양으로 가서 새로 파견된 청국군과 합류한 후 일본군을 조선땅에서 막고 자기 나라 땅에는 침입하지 못하게 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청국은 이미 사실상의 전쟁을 인정하고 칠월 일 일에는 정식으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그 선전포고 첫머리에는 속국(屬國) 조선을 종주국(宗主國)의 권리와 의무에서 수호하기 위하여 침략자 일본군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을 강조했다. 이에 대하여 일본도 같은 날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일본도 조선을 원조하고 동양 평화를 위해서 청국의 침략행동을 격퇴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의 대군은 막대한 군수품을 북송(北宋)하면서 평양으로 공격해 갔다. 군수품을 운반하는 우마차와 지게부대는 밤낮으로 길을 메우고 일본군의 뒤를 따랐다. 동원 인부는 물론 조선의 농민들이었다. 마침 농한기였으므로 농민들은 자진해서 군수품 운반에 동원되었다. 큰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전의 청국군대는 공짜로 부역을 시키고 약탈까지 했는데 일본군은 전쟁터 일에도 비싼 품값을 꼭꼭 지불해 준다. 이 난리 통에 돈벌고 구경하게 됐으니 나쁘지 않다.

그들 인부의 대부분은 청국이나 일본의 어느 편이 지든 이기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돈버는 재미만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일부 친일파들은 의식적으로 일본군에 협력했고, 군수품 운반을 선전하고 격려했다. 승승장구하는 일본군은 평양의 청국군도 단번에 무찌르고 압록강을 넘어서 구월에는 만주 땅을 휩쓸고 여순(旅順) 군항(軍港)까지 함락시켜 버렸다.

작은 섬나라 일본이 몇 십 배나 큰 청국을 단번에 이겨 버리다니!

조선의 친청파들도 비로소 일본의 강대한 신흥세력에 놀랐다. 그리고 국내의 청국 세력은 싹 가시고 일본 세력이 판치게 되었다. 대원군 자신조차 일본의 힘으로 정권을 다시 잡았지만 그래도 전쟁에는 일본이 지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평양 전투 때까지는 기회주의(機

會主義)의 탈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평양감사에게는 밀사를 보내서 청군에게 협력하라는 지령까지 내려서 그만 골탕을 먹게 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이 시기에 일본의 괴뢰로서 정권을 잡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것은 남의 나라 지배를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정치를 해보려는 강한 개인적 성격에서였다. 또 하나의 고민은 아직도 고종과 그전 잔당을 조종하고 있는 <궁중의 요물>을 없애지 않고는 속이

시원치 못했다. <요물>은 며느리 민비였다.

대원군은 우선 친일파인 개화당과 국사를 같이 하기가 싫었다. 자기가 비록 섭정의 자리에 있으나 그전의 정적들이요, 지금은 일본의 내정간섭만 합리화하려는 그들이 못마땅했다.

일체의 국정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면 일본의 내정간섭을 봉쇄하는데 있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청국이 연전연패하는 판국에 자기 힘으로 국내에서의 일본 세력을 추방할 비밀계획까지 추진시켰다. 실로 대담한 배짱이었다. 그러나 군대가 없는 그는 결국 진압된 동학당의 잔세(殘勢)를 이용해서 내정의 부패와 외국의 내정간섭을 막자고 그들을 선동했다.

이런 밀행을 받은 동학당 간부들에게는 찬부양론이 격화했다. 결국 교주 최시영과 손병희, 이용구는 경천안민(敬天安民)의 종교적 평화론을 주장했으므로, 동학군의 총사령관 전봉준과 참모장 김원식만이 수만 명의 동학군을 재수습해 가지고 서울공격의 행군을 개시했다.

이것이 시월 이십일 일 새벽이었다. 그들은 북상도중에 공주를 습격하게 되자 일본군 천 명이 관군 응원 차 급파되었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동학군의 재래식 무기로는 일본군의 신식무기와 근대식 전술에는 싸움의 상대도 되지 못하고 풍지박산해서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동학군이 대원군의 충동으로 다시 행동을 개시했다는 풍문은 경향각지에 새로운 유언비어를 일으켰다.

대원군이 동학군을 선동해서 서울로 쳐 올라오고 있다. 이번엔 민비 잔당과 친일파를 조정에서 몰아낸다는데, 그러면 궁중에 또 피 흘리는 소동이 벌어진다.

이때 정부의 요직에는 친일적인 개화당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심지어는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까지 와서 큰 감투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배일태도를 고집하는 대원군과 가까이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던 민비와 같이 대원군을 싫어했다.

조선의 이권문제를 중심으로 일본과 청국이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민비와 대원군의 왕실 암투는 또다시 격화했다. 일본으로도 처음에는 대원군을 이용해서 집권까지 시켰으나, 일본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대원군을 꺼리게 되었다.

이 문제를 알게 된 민비는 어제까지 청국의 힘으로 일본 세력을 꺾으려고 책동했으나, 이제는 일본의 힘으로라도 대원군을 제거하고 싶어 했다. 이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권력싸움은 나라의 흥망 이상으로 그들의 이성을 흐리게 했던 모양이다.

대원군도 동학군 선동이 출발부터 일본군에게 참패하자 앞날이 불안해졌고, 그 비밀이 일본측과 민비에게 알려질까 봐 두려웠다. 그는 자기의 이번 집권이 멀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초조한 날을 보냈다. 민비를 빨리 제거하지 못하면 그 <궁중요물>에게 자기가 큰 화를 입지나 않을까 하고 그답지 않게도 신변 조심까지 했다. 그래서 형식상 맡겨진 집권자로서 세도에도 한 걸음 물러서서 엉거주춤하니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이러던 때 친일적 개화당의 득세 통에 벼락감투를 쓴 법부협판(法部協辦) 김학우가 시월(高宗 31년=甲申年)에 암살되었다. 경무청(警務廳)에서는 전동석(田東錫)을 범인이라고 체포해서 고문을 하고 강제로 사건을 꾸몄다. 그리고 정인덕(鄭寅德)을 비롯해서 속속 검거된 자들은 모두 대원군의 부하들이었다. 발표된 범죄 사실은 특별법원에서 조사한 것인데 조사 내용은 다음과 같이 무시무시했다. 즉 대원군의 종손 이준용을 임금으로 삼고 고종과 민비를 살해해 버릴 목적으로 동학군과 결탁해서 궁중을 습격하고 조정 요인들을 몰살한 뒤에 대원군 일파로 새로운 내각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재판에 의해서 전동석 등 네 명은 사형에 처하고 대원군의 종손 이준용 등 세 명은 귀양 보내고, 그 밖의 관련자들은 십 년, 십오 년의 징역에 처해서 대원군의 세력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그 요물의 계집이 나를 모해하려고 이런 흉악한 사건을 날조했다.

대원군은 분개했으나, 이제는 그를 두둔해 줄 아무도 없었다. 일본도 이미 그의 이용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중립파이던 각료의 김홍집, 김윤식 및 어윤중 등은 순전히 날조된 연극이니 마땅히 무죄라고 주장했으나 박영효와 서상범 등 대원군 반대파는 엄중한 처단을 주장했다.

그 뒤로 대원군은 다시 마포 별장으로 은퇴해서 두문불출하고 정권은 또다시 민비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일본으로서는 민비도 못마땅했으나 궁중 소동에 관계 않는 척하고 간섭하지 않았다. 대원군에게 요물의 이름으로 불리는 민비인 만큼, 일본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외교적 타협을 하여 시녀로 일본소녀까지 두고 총애했다.

그리고 생활도 개화풍(開化風)의 새로운 면모를 좋아했다. 즉 일본의 사탕과 서양식 커피를 즐겨 했고, 궁중에는 발전기를 놓아서 찬란한 전등을 켜고 밤이 늦도록 서양식 연회를 향락했다. 그러면서도 민비의 핏속에 배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당의 굿이요, 대원군에 대한 증오심이었다. 그러나 민비의 대오정책은 여전히 마음 속에서 일본을 꺼리고 노서아의 세력으로 일본의 세력을 꺾으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대원군을 밀어 주었다는 점에서 일본을 미워하는 마음이 격화된 민비였기 때문에 노서아와 결탁하기가 어려우면 차라리 청국 세력이 회복되기를 바랐다. 일본에서는 이런 민비의 대일태도가 불만이었다.

얘기는 다시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오오도리 일본공사가 왕궁에 군대를 몰고 침입해서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키고 대원군을 괴뢰로 등장시켰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일본은 오오도리 공사를 소환하고 그대신 거물급의 이노우에 가오루를 공사로 파견했다. 실지로는 조선 조정을 철저히 감독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노우에 공사는 대원군과 결탁해서 민비를 없애버리려고 왔다.

이런 풍문이 도는 가운데 이노우에는 그전 청국의 원세개 이상의 위엄을 갖고 부임했다.

대원군도 민비의 모함으로 부하들이 참형을 받고 쫓겨 나자, 이제는 일본세력을 빌려서라도 민비 일당을 없애버릴 생각이 들었다. 청일 전쟁 중에도 일본을 깔보고 엉거주춤하던 대원군도 지금은 일본의 실력을 알았을 뿐 아니라 우선 민비의 원수를 마지막으로 갚고 싶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일본의 낭인정객(浪人政客) 오까모도 류우노스께를 막하(幕下)의 동지로 삼고, 민비 제거와 정권회복의 책동을 했다.

이노우에 공사가 부임하자 오까모도는 민비의 음모로 죽을 뻔하다가 풀려 나온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데리고 가서 비밀면회를 시켰다. 이준용은 대원군의 대변으로 민비가 자기 조손(祖孫)을 모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유는 자기 조손이 일본과 화친하려는 것을 꺼려하는 탓이라고 민비를 중상했다. 그것은 주로 낭인 오까모도의 교사에 의한 것이었다.

좌우간 궁중에서 싸움이 잦고, 내정개혁이 지지부진하면 조선의 독립조차 위태로우니 군신상하가 인화(人和)를 도모해서 문명개화에 힘써야 하오.

이노우에는 일장훈시를 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궁중으로 들어가서 고종을 만나고서 역시 똑같은 설교를 했다.

일개 외국 공사에게 궁중의 추악한 암투까지 훈계를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은 실로 국가의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노우에는 궁중의 사치 생활을 비판하고 심지어는 정치의 방법론까지 강의했다. 통역에는 대원군파의 오까도모가 했는데 마치 왕비의 침실 풍경까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궁중통(宮中通)으로 자처하는 태도였다.

이노우에의 설교적이고 강요적인 말에 대해서 고종은 자신 없는 말로 우물쭈물했다. 옆방에서 엿듣던 민비는 남편 왕의 답변이 이노우에의 정연한 이론에 꿀리며 당황해 하는 것이 짜증날 정도로 안타까웠다. 이노우에도 무능한 국왕보다는 실력자인 민비와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날에는 민비와 국왕과의 공동 회견을 요청하고 그날은 물러나갔다. 다음 날 이노우에는 다시 와서 민비와 만나려고 거듭 청했다. 이 회견에서 민비는 병풍 뒤에서 얼굴은 보이지 않고 음성만의 문답을 했다. 이노우에가 내정개혁의 시급을 강조하자 민비는 또렷한 음성으로 이노우에에게 항의했다.

유월 정변 때 대원군을 내세운 것은 일본이 내정간섭을 한 무모한 장난이 아니고 무엇이었소?

이노우에는 민비의 날카로운 추궁에 잠시 얼굴빛을 붉힌 뒤에

그것은 공사가 관계한 일이라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궁중의 완고파가 일본과의 친선조약을 무시하고 청국의 속국으로 종 노릇 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경고였다고 보며 정권의 교체를 담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이었으니, 그것 역시 귀국의 사정이었습니다.

이노우에는 어색한 변명을 했다.

폐왕(廢王) 폐비(廢妃)까지 하려던 음모사건은 어떤 세력을 믿고 한 일이요?

그 문제는 대원군 일파에서 했다고 이미 처벌까지 한 일이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원군에게 물어볼 문제요, 일본으로서도 유감스런 궁중 알력으로 생각하오. 그 사건이 날조된 것이라는 풍문도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선 우리로선 흥미조차 없습니다.

하고 교활한 이노우에는 은근히 민비의 음모가 아니었느냐고 빈정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공사도 대원군의 집권을 바라고 있지 않소?

천만에요. 대원군은 일시적으로 혼란되었던 궁중을 감독했을 뿐, 이미 물러간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유월 음모사건에서 정상을 참착해서 방면중인 이준용을 앞으로도 왕으로 삼으려는 음모가 계속되고 있다는 징조를 어떻게 생각하오?

민비의 질문은 노골적이었다. 이노우에는 우물쭈물하는 고종과 천양지판인 민비의 대담한 발언에 놀랄 정도였다.

이준용은 그런 잡음을 없애기 위해서 당분간 일본에 가서 공부나 하도록 권할 생각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내정간섭을 삼가고 궁중의 친목을 바랄 뿐 그런 의미에서 대원군과 이준용도 앞으로는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권고할 생각입니다.

민비는 그래도 계속해서 대원군을 밀었던 일본의 내정간섭을 추궁했다. 이노우에는 이에 대해서 대원군은 일본의 호의도 배신하고 전쟁 중에 청국과 밀통한 비행도 있어서 인간적으로 믿을 수 없는 자라고 그들의 불만까지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 점에서 민비도 대원군에 대한 울분이 좀 풀렸다.

이때는 이미 국내의 동학란도 진압되었고 청일전쟁도 일본의 승리단계에 있었다. 민비정권은 이노우에가 요구한 내정개혁안이 기초로 된 십사조를 발표했는데, 객관적으로 보아도 이 개혁안은 분명히 현대적인 정치 방법으로서 국가의 새 출발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주적으로 성실하게 실천되지 못했기 때문에 도리어 일본에게 먹혀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렇게 조선을 청국의 속국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그들이 대우해 준 독립국을 상대로 해서 공수동맹(攻守同盟)까지 맺는데 성공했다.

이 공수동맹은 국제적 분쟁에 있어서 일본이 조선과 공동책임을 지고 어떤 나라와의 곤경에서도 한패가 되어 전쟁까지 한다는 최대의 의무 관계였다.

일본의 세력이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조선을 좌지우지하게 되자,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일본으로 망명했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의 개화당이 들어와서 대신들이 되었다.

그들은 상해에서 민비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된 옛날의 동지 김옥균을 회상하고 감회가 깊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종래 청국의 속국 지위에서 조선을 해방시키고 완전 독립국으로 세계에 선포하는 주동적 역할을 했다. 종전에는 청국왕을 황제폐하로 섬겼기 때문에 조선왕실에서는 왕전하(王殿下)로 밖에 존칭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의 독립국 선언으로 고종황제폐하로 승격되고, 민비는 황후폐하로 승격되었다.

이런 왕실의 독립적 칭호는 실로 고려(高慮), 조선(朝鮮)을 통해서 최초로 보는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국(自國)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일본의 정책적 후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 허명(虛名)에 그칠줄은 황후폐하 민비도 몰랐다. 더구나 민비 자신이 일본인 흉인(兇刃)의 희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므로…

을미년(乙未年=西紀 1,895)에 청국은 마침내 일본에게 항복하고 시모노세끼 조약에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했다. 그리고 청국은 대만(臺灣)과 요동반도(療東半島)와 팽호도(膨湖島)를 일본에 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노서아를 비롯한 독일과 불란서가 반대했다.

이른바 삼국 간섭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요동반도와 팽호도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본이라도 아라사의 위압엔 견디지 못하는구나.

민비는 일본의 실력이 노서아만 못하다는 것을 재확인하자 그전에 실패한 노서아와의 친선 정책을 다시 꾀하기 시작했다. 친일 개화정책으로 민씨 일파가 몰락한 것을 회복시킬 수단으로는 노서아의 힘을 빌어야 했기 때문이다. 박영효는 대원군 세력을 꺾는데 중요하게 이용했으나 서광범, 서재필, 이완용 등 친일 내각은 모두 갑신정변 때의 원수들이었다.

특히 박영효는 일본 세력의 대표격으로서 대원군 세력 제거에는 민비의 신임을 받았으나 그는 세력이 커지자 총리대신 김홍집도 무시하게 되어서 내각의 불화까지 일으켰다. 그는 마침내 김홍집을 밀어내고 내무대신의 자리에서 군무대신까지 겸해 민비의 실권까지 위협했다. 그에게는 강력한 일본 세력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비는 대원군 세력 제거에 공이 있던 박영효도 몰아낸 후, 노서아 세력을 배경으로 삼고 갑신정변 때 쫓겨났던 민영달(閔泳達), 민영환(閔泳煥), 민영소 등 살해를 면하고 생존했던 불우한 친정 쪽 정객들과 그 당시 심복이던 심상훈(沈相熏) 등을 특진관(特進官)으로 등용해서 개화당 구적(舊敵)의 세력을 회복시켰다. 이것은 삼국 간섭에 꺾인 일본을 깔보고 취한 친일파 숙청의 노골적인 준비 공작이었다.

민비가 또 옛날의 야심으로 농간질을 하는구나.

박영효 일파는 분개하고 반격 공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비는 노서아 공사와 밀약을 하고 그로 하여금 일본 공사에게 내정간섭을 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게 했다. 일본공사는 친로정책에 대한 문제를 박영효와 상의했다.

민비와 그 일당은 우리 개화당 출신을 몰아낼 뿐 아니라 친로정책으로 일본 세력까지 몰아낼 음모 중이니, 공사도 정신 차리시오.

민비가 대원군을 몰아칠 때는 나를 이용하더니, 인제는 구수파를 재등용해서 친로반일 음모를 하니, 역시 궁중 요물 때문에 조선의 개화는 방해될 뿐 아니라, 앞으로 또 궁중이 소란하겠으니 앞날이 걱정이요.

일본공사는 박영효에게 당신도 총리대신 김홍집을 몰아낸 것이 친일 내각을 분열시켜서 민비의 배신 행동을 촉진시켰다는 나무람도 했다. 박영효는 일본공사의 태도가 냉담한 듯이 느꼈고 오늘 밤에라도 민비가 보낸 자객의 칼에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박영효에게는 엉뚱한 방면에서 재난의 불똥이 튀어나왔다. 마침 대원군 파로 몰려서 관리에서 쫓겨난 한재익(韓在益)이라는 자가 일본 낭인과 민비정권을 서로 욕했다.

민비를 없애 버려야 나라가 잘 된다.

그러나 대원군도 못 죽인 민비를 누가 감히 죽일까?

박영효가 해치울 것이요.

하고 일본 낭인이 아는 척하고 말했다. 한재익은 그 뒤에 이런 역적음모를 밀고하면 상을 받고 벼락 감투를 얻어 쓰리라는 생각을 하고 박영효를 팔아먹으려고 밀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민비는 곧 박영효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리고 고발한 한재익은 경무관(警務官)을 시켜서 공로를 표창했다.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일본공사에게 박영효를 역적음모자로서 체포형이 내렸으니 양해 해 달라고 통고했다. 일본공사는 이 사실을 박영효에게 알리자 그는 일본공사관으로 도망해가서 신변보호를 청했다.

일본공사는 박영효를 보호했다. 그리고 조선의 강경한 요구를 받았으나 망명해 온 정치범은 국제법상 인도하지 못하겠다 라고, 일본 병정의 호위로 당당히 서울시내를 행진해서 한강에서 일본인이 운전하는 기동선을 태워 인천까지 보냈다. 박영효는 거기서 일본 기선

을 타고 또다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가 첫 망명에서 귀국하고 세도를 부릴 때는 옛날 개화당 동지들에게 구세주 같은 환대를 받았으나 이번 또 쫓겨 갈 때에는 신응희(申應熙)와 이규완(李圭完) 두명의 동지만이 그를 보호하고 따라갔을 뿐이다. 박영효는 세태와 인심의 무상(無常)을 느끼면서 또다시 일본땅으로 떠나갔다. 박영효가 또 일본으로 망명하자 대원군을 추대하려는 일본인 낭인 오까모도는 박영효의 잔당 이주회(李周會)와 함께 민비 제거의 음모를 진행시켰다. 같은 친일파이면서 박영효와의 세력 다툼으로 밀려났던 전 총리대신 김홍집의 세력을 박영효의 잔당과 합하고 대원군을 업은 후 거사(擧事)하려는 공작이었다.

김홍집도 이제는 실각한 박영효와의 사감을 씻고 근본의 정적 민비타도에 합력할 것이며 대원군도 전과는 달리 일본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충분하오.

오까모도는 미우라 일본공사를 충동이고 대원군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권고했다.

일본의 후원이 끝까지 신의를 지킨다면…

대원군도 민비타도로 정권을 다시 잡으려는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몸은 비록 늙었으나 정권야망의 불길이 식지 않은 대원군도 이번만은 중대한 결의를 표명했다.

그래서 을미년 시월 삼일 가을 밤에, 공덕리에 있는 대원군의 한가한 별장에서는 중대한 비밀회의가 열렸다. 책사 오까모도와 대원군, 대원군의 아들이며 고종의 형인 이재면, 그리고 손자 이준용 네 명이 모인 자리에서, 오까모도는 일본공사의 양해를 받았다는 전제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내놓았다.

지금 당장 민비를 없애고 싶으나 그것만은 일본공사가 시기상조라고 찬성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전제로서 대원군께서 국왕을 돕고 궁중을 감독하는 정도에 그치고 정치문제에는 직접 관여하지 마십시오.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세 사람을 중심으로 내정개혁을 추진시키면, 대원군이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민비의 독재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드님(이재면)은 국내대신으로 하고, 손자님(이준용)은 삼년 동안 일본 유학을 해서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 좋을까 합니다.

음, 그 계획대로 되면 나도 찬성이요.

대원군도 현재의 사정으로는 가장 좋은 안이라고 즉석에서 찬성했다.

이런 비밀을 눈치챈 민비는 곧 훈련대의 해산을 단행하려고 군무대신 안경수(安 壽)를 일본공사에게 보내서 사전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훈련대의 대장 우범선(禹範善)이 불만을 품고 일본공사에게

사태가 위급하오. 민비는 훈련대를 해산시킨 뒤에 곧 대원군 일파와 친일정객을 일망타진 할 음모를 하고 있소. 오늘밤으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당신까지 큰 봉변을 당할 것이요.

하고 충동였다.

그것이 사실이요?

사실이요.

그럼

미우라 공사는 오까모도의 미온적인 대책으로는 민비의 반격을 당할 줄 알고 긴급 대책을 세웠다.

그럼 훈련대와 일본 수비병과 일본 낭인들이 단결해서 내일 새벽에 거사(擧事)합시다.

민비는 내일(시월 팔일) 새벽에 대원군 일파와 일본군대가 경복궁을 쳐들어 와서 자기를 살해 하려는 줄도 모르고

이번에 대원군을 아주 없애버려야겠다.

하고 자기대로 벼르면서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 세시에 대원군은 이주회와 오까모도를 앞장 세우고 나서자 광화문에는 이미 우범선이 지휘하는 훈련대와 일본 수비대의 병력이 집결해서 대원군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원군 일행을 맞은 군대는 경복궁으로 쳐들어 갔다.

궁중을 지키던 시위대(侍衛隊)는 총을 쏘고 대항했으나 대장 홍계훈(洪啓薰)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군대는 도망쳐 버렸다. 건청궁(乾淸宮)을 지키고 있던 시위대도 싸우지 못하고 물러섰다. 대원군은 훈련대와 일본군의 호위로 경복궁으로 들어가면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 간신배들이 임금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조정을 부패 문란케 해서 유신대업(維新大業)을 그르치고 있다. 나는 나라가 위태로운 현상을 종친(宗親)으로서 좌시할 수 없어서 간신배 숙청에 착수했다. 임금을 모시고 사직을 튼튼히 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잘 살 정치를 단행 하겠으니 백성들은 동요치 말라. 만일 나의 의로운 일을 방해하는 자는 엄단할 것이다. >

이런 선언을 하고 대궐로 들어간 대원군은 일본의 병력을 배경으로 고종을 협박해서 곧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고 발표했다.

민중전이 왕실과 국사를 망치는 장본인이니 왕비를 폐하고 서인(庶人)으로 강하(降下)시키시오.

부인을 내쫓으라는 대원군의 요구에 고종은

그것만은 심하오. 금후로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못하게 하면 그만이지 왕실의 가정문제까지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 않소?

하고 최후의 언쟁을 벌였다. 내각 개편에는 두 말을 못한 고종이었지만 아무리 원수 같은 며느리라도 명색이 임금인 자기에게 이혼을 강요하는 데는 불만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도는 가정문제라 일본도 묵인하리라는 일루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이 대원군과 폐비(廢妃) 문제로 언쟁을 하고 있을 때 민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일본군과 일본 낭인을 비롯해서 훈련대인 조선군은 민비를 찾아서 궁궐을 샅샅이 뒤졌다.

침전에서 자다가 총성에 놀라서 깬 민비는 사태의 위급을 비로소 알고 궁녀의 옷으로 갈아 입고 침전에서 도망쳐 나갈 틈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침전 밖에는 자기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는 군대와 일본 낭인으로 꽉 차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침전으로 침입해서 벌벌 떨면서 우왕좌왕하는 수십 명의 궁녀들을 잡고

민비가 어디 있느냐? 숨은 곳을 대지 않으면 너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

하고 위협했다.

저희들은 모릅니다.

궁녀들은 모두 민비를 알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때 민비는 도망을 치지 못해서 궁녀의 옷차림으로 궁녀들 틈에 끼어서 이리 저리 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가와(小川)라는 시녀-

민비에게 총애를 받던 일본 여자는 궁녀 차림의 중년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말았다.

검도에 능숙한 일본 낭인은 민비를 단 칼로 찔러 죽였다.

너희들 이 시체를 끌어다 태워 버려라.

낭인은 일본군대에게 명령했다. 군대는 민비의 시체를 침실의 이불에 둘둘 말아서 녹원(鹿苑) 숲 속으로 운반한 후 곧 석유를 뿌리고 화장해 버렸다(그 장소는 지금 국립 미술관 동편 옆이다).

이때 민비의 나이는 사십오 세로서 아직도 여자의 젊은 태가 남았던 여걸의 왕비였다. 이 여걸은 불운한 고아로 자라서 왕비가 된 뒤에, 처음에는 남편 고종의 소박도 받았지만, 그 비상한 수완으로 고종의 총애를 회복했고 절륜의 정력과 지략(智略)으로 전후 삼십 년간 정권을 좌지우지 했다.

그러나 역시 영웅 정적(政敵)이던 시아버지 대원군과 처음부터 끝까지 피투성이의 암투 끝에 마침내는 외국 낭인의 칼로 비명(非命)의 살해를 당했다. 대원군도 며느리에 대한 정치적 보복엔 성공한 셈이지만 인륜상으로는 큰 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고종은 사랑하고 존경하던 왕비에 대해서 공식으로 슬픔도 표하지 못했다. 대원군의 요구대로 폐비 선언을 했으므로 물론 국장(國葬)의 대접도 못했다. 그리고 그 동안 모든 국정의 잘못을 민비에게 돌리고,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친서 형식으로 발표해서 백성에게 사과하기까지 했다.

이것으로 민비와 대원군의 궁중 암투는 끝났다. 그러나 민비의 살해사건은 이씨 왕조의 조종(吊鍾)과도 같이 그 후의 국운은 몰락일로를 걸었다. 민비를 잃은 고종도 주위의 사정에 끌려서 그 후에 친로 반일정책을 한때 썼고 그 때문에 노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서글픈 생활까지 했다.

그러나 역시 이런 조선 문제로 청일전쟁과 똑같은 노일전쟁까지 일어났고, 이 전쟁도 세계의 예상을 뒤집고 역시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 일본은 완전히 조선을 손아귀에 넣고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여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그 뒤에 바로 한일합방이라는 형식을 거쳐 결국 나라는 망하고 일본의 영토의 일부인 식민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만일에>라는 문제는 항상 따르는 중대한 수수께끼지만, <만일에> 조선말기의 남걸이던 대원군과 여걸이던 민비가 정권 투쟁만 하지 않고 합심해서 나라를 위해 협력했더라면, 복잡미묘한 국제정세를 잘 활용해서 근대화된 독립국가로 발전시켜 번영의

기초를 세웠을지도 모를 것이다. 실로 애석하고 통탄할 골육상잔의 당파싸움으로 일을 그르쳐 피눈물 나는 역사의 한 장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朝鮮篇 終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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