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문학 안팎의 내 삶

 

나에 관한 헛소문 사태

소문이란 그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교우 관계가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니라서-정확하게 말하면 좁다-소문에 말려드는 일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전혀 모르는 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요즘에는 고맙게도 그리 나쁜 소문은 들리지 않는다. “무라카미가 BMW를 산 것 같아”라든가(살 리가 없다), “무라카미는 매일 두부를 세 모나 부쳐 먹는대”라든가(한 모밖에 안 먹는다), 그 정도의 것들이다.

이해가 잘 안 가서 “어째서 내가 하루에 두부를 세 모씩 부쳐 먹어야만 한답니까?” 하고 상대방에게 물어 보면, “아니, 잡지 인터뷰에서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묻는다. 잘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렇게 대답을 한 기억이 있다. 몇 번이고 인터뷰를 하다 보면 질문이 거의 비슷해서 따분해지기 때문에 때때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대답해 버리게 된다. “좋아하는 거요? 두부부침이에요, 하루에 세 모는 먹는 것 같네요” 하는 식이다.

BMW도 어딘가에서 농담으로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깔보며 살다가는 언젠가 안 좋은 꼴을 당하지 싶다. 하여튼 내 인터뷰 기사는 너무 믿지 말고 적당히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때때로 내가 다시 읽어 봐도 아연 실색하는 일이 있을 정도니까. 하기야 “연 수입은?” 따위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건 그렇다손 치고, 해독이 없는 소문이란 즐겁다. 문단에도 여러 가지 소문이 있어서, 가끔 편집자를 만나 “사실은요, 무라카미 씨. 요전에 말이죠” 하고 하나 둘 문단의 소문을 들으면 “그런가, 그런 일도 있었나?” 하고 어느 정도 사회에 참여를 하는 듯한 기분이 된다. 그렇지만 그런 건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으로, 신주쿠 골든 가에 어떤 얼음 기둥이 치솟았는지를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펭귄 북스 에서 나온 <루머>라는 책이 있다. 미국에 퍼져 있는 다양한 소문이 진짜인지 헛소문인지를 가려낸 퍽 재미있는 책인데, 이것을 읽고 있으면 세상에는 실로 갖가지 소문이 있구나 하고 정말 감탄하게 된다.

예를 들면 “존 딜린저의 페니스는 너무 커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라는 것은 헛소문이고, “아인슈타인의 뇌는 위치타의 의사가 병에 담아 보존하고 있다”라는 건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은 사후에 자신의 뇌를 연구용으로 써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게 돌고 돌아 위치타 까지 흘러 들어가 병에 담긴 채 사이다 상자 속에 처박혀 있다는 것이다.

“1943년에 주조된 1센트짜리 동전을 포드 사에 가져 가면 새 차를 한 대 준다”라는 소문도 있는데, 이것은 유언비어다. 그러나 1943년의 1센트짜리 동전은 희귀해서 실제로 새 차 한 대 정도의 값으로 흥정을 한다고 하니까 새빨간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국 판 <플레이보이>지 표지 타이틀의 P자에 별이 몇 개 붙어 있는가가(1978년 이전의 <플레이보이>지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체크해 보십시오), 바로 편집장인 휴 헤프너가 그의 파트너와 그 달에 몇 번 섹스를 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유감스럽지만 헛소문이다. <플레이보이>지는 지역별,용도별로 달리 편집되고 있었고, 별의 개수는 그 표시였던 것이다.

문학에 관계된 것으로는 “토머스 핀천은 J.D.샐린저의 필명”이라는 굉장한 소문이 있다. 이것은 진짜 완벽한 헛소문이다. 샐린저가 자택에 틀어박혀 있었고, 핀천이 사진을 발표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은 탓에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됐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남들이 모르는 필명을 두 개 정도 갖고 있지만 말이다.

“프랑스에서 제리 루이스는 채플린과 쌍벽을 이룰 만큼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다”라는 소문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필시 프랑스 인들이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시기 때문일 거라고 저자는 쓰고 있다.

그리고 구리코 모리나가 사건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식품 관련 회사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예를 들면 맥도날드 햄버거에 들어 있다고 소문이 났던 것만 해도, 고양이 고기, 캥거루 고기, 거미 알, 지렁이…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맥도날드 사는 광고를 할 때 항상 ‘100퍼센트 쇠고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담배 회사인 체스터필드 회사는 한때 “공장에서 문둥병 환자가 발견됐다”라는 소문에 휩쓸려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다. 회사는 탐정 몇 명을 고용해서 그 소문의 발생지에 가장 가까운 스물 다섯 명 중 범인을 밝혀 내는 데 1,000달러를 걸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1,000달러를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엉킨 실타래를 풀 듯이 어느 정도 소문의 전파 경로를 거슬러 올라갔지만, 좀처럼 발생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남에게 해가 되는 거짓말이란 대단히 무서운 것이다.

며칠 전 어떤 여성 편집자에게서 “무라카미 씨도 꽤 짓궂더군요. 너무해요” 하는 소리를 들어서 그 소문의 발생지를 캐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안자이 미즈마루 씨였다. 곤란하다고요, 그런 짓은.

 

그러나 자유업은 즐겁다

대도시에서 자유업을 공연히 화려한 직종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성인 남자가 대낮부터 빈둥빈둥 놀고 있어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나처럼 대도시를 벗어나-도심지의 집세가 너무 비싼 데 질려서-교외의 중소 도시를 전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나름대로 고충이 많은 직업이 자유업이다.

우선 첫째로 다른 사람들이 ‘자유업’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싫은 것은 보너스 시즌의 은행이다. 정말 싫다 싫다 해도 이것처럼 싫은 건 없을 것이다. 창구의 업무가 끝나기를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은행 직원이 다가와선 “보너스를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셨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런 걸 결정할 턱이 없으니까 “정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대답하면, “그러시면 우선 이 정기 예금을 드시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저, 보너스가 없는데요”라고 하면 상대방은 하나같이 ‘네에?’ 하는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마치 비로 인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폐가를 바라보는 눈초리다.

그 선에서 “그럼, 실례했습니다”하고 물러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그것으로 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반 정도는 물러나지 않는다. 대개 내가 은행에 가는 것은 아침 아홉 시나 열 시쯤으로 손님이 많지 않은 시간이라서 상대방 역시 한가한 것이다.

대체로 “저,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말을 걸어 온다.내가 “자유업입니다”하고 말하면 은행 직원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목수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야 뭐 조깅 팬츠에 고무 샌들, 선글라스 차림으로 은행에 가는 나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업->목수라는 극단적인 발상을 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애당초 목수가 자유업이란 말인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음, 문필업 인데요” 하면, “아아, 그렇습니까. 토지를 분필하는 일을 하시는군요” 하는 사람까지 있다. 이것도 잘 이해가 안 간다. 확실히 은행원다운 발상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문필업’이란 직종 자체가 세상에 있기는 한 걸까? 직종별 전화 번호부를 찾아봤지만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문필업’도 없고, ‘문궤업(역주:분필업과 함께 일본어의 음은 ‘분피스교’로 같다)’도 없다. ‘분피스교’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문필업’이다.

그리고 귀찮아서 “저술업입니다”라고 고쳐 말하면, 그제야 상대방도 대충 알아듣는다. “나오키 상이라도 타시게 되면 우리 은행에 몽땅 예금해 주십시오, 하하하” 하고 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일까? 아마 친절하게 격려를 하려는 뜻이겠지만, 이쪽으로선 누가 예금 따윌 한대? 하는 기분이 된다.

그렇지만 이 정도도 아직은 나은 편이다. 심한 경우에는 “저술업입니다”라고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아아, 그러십니까? 저술업이십니까?”라고 하기에 겨우 뜻이 통했구나 하고 생각하면, “그럼 졸업한 다음에 보너스를 타시면 그때는 꼭 저희 은행에…”라고 말해서 사람을 이만저만 실망시키는 게 아니다. 서른여섯 살이나 먹은 남자를 붙잡아 놓고 졸업이니 뭐니 할말이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하지만, 뭐 은행에는 은행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있고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이 있나 보다. 난 잘 모르겠다. 어쨌건 보너스 시즌에는 되도록 은행 근처에 가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기분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같은 은행에 2~3년이나 다니다 보면 얼굴이 익혀서 보너스 시즌이 되어도 ‘저 작자는 별볼일 없으니까’ 하고 아무도 접근해 오지 않게 된다.

참고 견디면 복이 온다더니, 반복이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작년까지 3년 동안 다녔던 교와 은행 기타 나라시노 지점 사람이 내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사내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은행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하기야 나는 이사광이기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하는데, 그때마다 각지의 은행에서 “저, 실례지만 직업은?” 하는 질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들어야 한다. 정말이지 피곤한 노릇이다.

교외의 전원 도시란 사실 샐러리맨의 소굴 같은 곳이다. 아침 아홉 시가 지나면 성인 남자라고는 집배원 아저씨나 채소 가게 아저씨 말고는 전혀 볼 수가 없다. 이곳에는 아줌마들과 어린아이들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교외의 전원 도시 같은) 곳을 어슬렁  어슬렁 산책하다 오락실에 들어가거나 냄비를 들고 두부를 사러 가거나 하니, 이웃에서도 별로 곱지 않은 눈으로 본다.

슈퍼에 가서 물건을 사다 보면 바겐 세일을 하는 생리 용품을 대형 상자로 잔뜩 사고 카운터에 서 있는 아줌마들 틈에 끼여, ‘이건 또 뭐야, 싫다 싫어. 대낮부터 왜 이런 데 남자가 있는 거야’ 하는 느낌의 눈흘김을 당하기가 일쑤다.

자유업이란 것도 여러 가지로 괴로운 점이 많은 직업이다. 그래도 꼭 자유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쿄의 미나토구 근처에서 살면, 아무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내 멋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 즐겁기 그지없다.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은 연필

얼마 전에 볼일이 좀 있어서 어떤 잡지사의 편집자를 만난 뒤에 술을 마시면서 둘이서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화제가 학용품에 대한 걸로 흐르고 말았다. 학용품 얘기는 나도 무척 좋아하므로, 볼펜은 이런 게 좋다는 둥, 지우개는 이런 것만 쓴다는 둥, 하고 술자리에서 두서 없이 얘기를 이어 갔는데, 그러던 중 상대방이 “그런데 무라카미 씨는 어느 정도로 딱딱한 연필을 쓰시나요?” 하고 물었다. 나는 늘 F 심 연필을 쓰고 있으므로 “저, F 연필인데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십니까? 그런데 F 연필은, 전 늘 그런 생각을 하는데요,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때는 술자리였으므로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세상에는 다양한 감수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는 정도로 웃어넘겨 버리고 곧 다른 화제로 옮겨 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얘기가 점점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 F 연필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인지 한번 의아해 하기 시작하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뭐가 뭔지 영문도 모른 채 정말로 F 연필이 단정하게 세일러복을 차려 입은 여학생으로 보이게 됐다. 이렇게 되면 여간 난처한 게 아니다. 요즘에는 F 연필을 손에 쥘 때마다 세일러복 차림의 여학생이 떠오른다. 물건에 일단 어떤 이미지가 정착되어 버리면, 그 다음에는 거꾸로 그 이미자가 물건을 규정하게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이 그대로 진행되면 연필을 손에 쥘 때마다 성욕이 자극을 받는다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데 되면 직업상 연필을 써야 하는 일이 많은 나로서는 이만저만 곤란해지는 게 아니다.

차라리 F 연필을 그만 쓰고 HB 연필로 바꿔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딱하게도 이번에는 “만약 F 연필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이라면 HB 연필을 학생복을 입은 남자 고등 학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건 그것대로 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나는 원래 세일러복이니 학생복이니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세일러복 같은 건 멀리에서 보면 꽤 괜찮아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무척 지저분하고, 별로 볼품도 없다. 학생복의 더러움에 대해서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H 연필은 어떨까 했지만, 이건 또 어째 ‘폴리스(역주:록 밴드의 이름)’의 스팅하고 느낌이 비슷하다. 스팅에 대해서는 별달리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진 않지만, 감정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연필이 스팅과 비슷하다는 건 어쩐지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귓가에서 밤낮으로 ‘폴리스’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2H 연필처럼 딱딱한 연필이나 B 연필처럼 무른 연필은 일하기에 적당치 않으므로, 나로서는 결국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과 ‘학생복을 입은 남학생’과 ‘폴리스의 스팅’이라는 세 가지 가능성이랄까 선택의 여지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어쩌다가 고작 연필 따위에 관한 일로 이렇게까지 골치 아픈 상황에 빠져 들게 되었는지를 나로선 잘 알 수 없지만, 애초에 “F 연필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 라고 쓸데없는 말을 꺼낸 편집자의 잘못이다. 그 뒤로 이미자가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부풀어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원고를 수정하는 데 연필이 아닌 볼펜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볼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다. 볼펜은 그저 볼펜일 뿐이다.

그런데, 연필이란 꽤 사랑스런 필기 도구다. 요즘에는 샤프 펜슬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탓에 학용품 업계에서 연필이 차지하는 지위가 다소 저하된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필에는 사람의-적어도 나의-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다. 단순하다면 참으로 단순한 제품이지만, 연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으면 거기에는 무수한 수수께끼와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맨 처음 연필을 만든 사람은 꽤나 여러 가지로 힘들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치즈를 넣은 치쿠와(역주:으깬 생선살을 길쭉하게 빚어 대꼬챙이에 꽂아 구운 음식)을 발명한 사람에 대해서 대단한 외경심을 품고 있는데, 치즈를 넣은 치쿠와보다는 연필 만들기 쪽이 발상으로서도 기술로서도 훨씬 복잡할 것 같다.

나는 원고의 자잘한 ‘수정’에는 대개 연필을 사용한다. 샤프 펜슬도 편리해서 가끔 사용하지만, 감촉과 쓰는 맛으로 따지자면 극히 평범한 연필 쪽이 일하기에는 딱 좋다. 아침에 한 다스 정도의 연필을 깎아서 온더록용 유리잔에 꽂아 두고, 그것을 차례대로 써가는 것이다. 그러니까-얘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만-연필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의 모습으로 보이거나 하면 매우 곤혹스럽다.

‘다음에는 너를 써볼까?’

‘꺄악, 싫어요, 저리 가요!’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일은 조금도 진척되지 않고, 정말 나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신초샤의 스즈키 지카라 씨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르게 됐는데, 정작 본인은 술에 취해서 자기가 무슨 소릴 했는지조차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네?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어째서 F 연필이 여학생과 닮았죠?”라고 오히려 묻는다. 그런 걸 나한테 물어 보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영화 중독증

장편 소설을 쓰는 일이 겨우 마무리되고 필름 교정도 끝나, 출판되기만을 기다릴 때가 나에게는 가장 마음 편하고 평온한 시기다. 쓰고 싶은 건 다 썼고, 일단 해야 할 일도 없으니까-그렇긴 해도 때로는 생활을 위해 이런 원고도 쓰곤 하지만-매일 멍하니 툇마루에 앉아서 고양이랑 봄볕을 쬔다.

나는 내가 쓴 글이 활자화되어 세상에 나올 때까지는 도무지 다음 소설에 착수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몇 개월쯤은 좋건 싫건 빈둥빈둥 놀면서 보내게 된다.

이렇게 하강 기류를 탄 것처럼 마음 편한 시기에는 대체로 영화를 왕창 본다. 최근에는 비디오 테이프도 많아졌고 나도 자주 대여점 신세를 지고 있지만, 역시 이런 한가한 시기에는 영화관까지 전철을 타고 진출해서 어둠 속에서 스크린을 노려보다가 맥주 집에서 한잔 걸치고 돌아오는 게 제일이다. 영화관에서 보고 있는 한, 마누라가 “저것 좀 봐요, 다이안 키튼이 입고 있는 저 스커트 괜찮지 않아요?”라며 쿡쿡 찌르는 일도 없고, “잠깐 되돌려 봐요. 저 플로어 스탠드 비쌀 것 같네”하는 일도 없다. 플로어 스탠드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이번 봄에도 그런 이유로 해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보았다. <듄,모래의 혹성>을 보고, <2010년>을 보고, <터미네이터>와 <리틀 드러머 걸>을 보고, <네버 엔딩 스토리>를 보고(어째서 타이틀을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은 걸까?), <아마데우스>를 두 번 보고, <사랑에 빠져서>와 <슛 더 문>을 보고, <베스트 키드>를 보고, 바빠서 놓쳤던 <보디 더블>과 <젊은 사자들>(이 영화는 <에스콰이어>지 선정 1984년도 좋지 않은 영화다)을 재개봉관까지 쫓아가서 보고, 오래간만에 방화도 보고…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봤다. 이 정도로 연달아서 영화관에 드나들면 과연 영화를 보았구나 하는 보람 같은 게 느껴진다.

영화라는 것은 의자에 털썩 앉아서 머리를 텅 비워 놓고 있으면 저쪽에서 알아서 필름을 돌려 진행시켜 주므로 정말 편하다. 연극이나 콘서트 같으면 “오늘은 흥이 덜 나는 게 아닌가”라든지, “어딘가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건 아닌가” 내지는, “박수는 이 정도만 치면 될까” 하는 등 나름대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어 좀처럼 머리를 비워 놓을 수가 없다.그러니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 죄 없는 할리우드 영화를 멍하니 보는 게 상책이다. 뭔가 계몽을 시키려 들면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고 만다.

이번에 본 일련의 영화들은 모두 비교적 재미있고, 심하게 계몽시키려는 부분도 없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트루먼 카포티는 그의 소설 속에서 영화를 종교적 의식에 비유했는데, 확실히 그런 말을 들으면 또 그런 것 같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혼자 스크린과 마주하고 있으면 왠지 내 혼이 잠정적인 장소로 밀려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영화관을 드나드는 사이에, 그런 기분이 내 인생에 있어서는 계속 이어져야 할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 중독이다.

일찍이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영화관을 찾았다. 마침 학원 분쟁이 일어났던 무렵이어서 수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파트와 아르바이트와 영화관이라는 트라이앵글을 뱅글뱅글 돌았었다. 물론 매일매일 볼 수 있을 만큼 영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같은 필름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보거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B급,C급 영화를 뼈다귀라도 쪽쪽 빠는 듯한 기분으로 보았다. 그러나 보니 꿈속에서 MGM의 사자가 포효를 하기도 하고, 도에이의 파도가 부서지고, 20세기 폭스의 라이트가 광고와 함께 돌아가기도 했다. 여기까지 이르면 이건 이미 완벽한 병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른바 ‘명작’보다는 볼 만한 영화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되풀이해서 봤던 필름이나 별내용도 없는 작품 쪽이 생생하게 기억나니 이상한 일이다. 별내용도 없는 B급,C급 작품은 이른바 ‘명작’과는 달리 내 스스로가 어떻게 해서든 괜찮은 부분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단순한 시간 낭비가 되고 만다. 그런 긴장감을 그대로 마음에 확실하게 새겨 두었기 때문에 훗날까지 기억에 남는 건 아닐까? 한마디로 영화라 해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 본 영화 중에서 그런 B급,C급 작품 감상의 묘미를 맛보게 해준 건 뭐니뭐니 해도 존 밀리어스의 <젊은 사자들>이었다. 다들 이 영화를 호전적이며 황당 무계 한 영화라고 말하고 분명히 그렇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여긴 것은 미국이 소련과 쿠바 연합군에게 점령당한 데 대해 미국의 소년들이 게릴라전으로 저항한다는 상황 설정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입장과 위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물론 상황 설정 자체에 상당한 무리가 있고 작품 자체가 뒤죽박죽이었지만, 뒤죽박죽인 만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끈질기고도 강인한 반전 영화로 완성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타입의 영화를 퍽 좋아한다.

그 후 <젊은 사자들>의 비디오 테이프를 사서 다시 보았는데 역시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록키 4>나 <람보 2> 같은 훨씬 노골적인 반공 영화가 나온 지금으로선, 고상하게 비쳐지는 장면도 있다. 밀리어스가 너무 일찍 시도했던 건 아니었을까.

 

나의 양복 변천사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밴 재킷에 회색 헤링본(역주:삼목잎 모양의 줄무늬를 짜넣은 무늬) 슈트였다. 셔츠는 흰색 버튼다운이었고, 넥타이는 검은색 니트. 아이비 전성 시절의 얘기다.

나는 헤링본이라는 무늬를 굉장히 좋아해서 맨 처음 양복을 산다면 이거여야만 된다고 늘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헤링본 양복이란 건 열여덟 살 난 남자에게는 별로 어울리는 게 아니었다. 헤링본을 입으려면 역시 나름대로 연륜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로 구입한 양복은 결혼할 때 산, 은은한 올리브그린의 영국식 스타일 스리피스로, 이것은-본인이 말하긴 좀 뭣하지만-퍽 잘 어울렸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머리가 길고 지금보다 한결 말랐으며, 얼굴에서는 나름대로 굳은 결의 같은 걸 엿볼 수 있었다. 스물두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취직이란 걸 한 적이 없으므로 세 번째로 양복을 산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스물아홉 때 우연히 응모한 <군조>라는 문예지의 신인상에 당선(이라고 하나?)되어, 시상식에 나가기 위해 일부러 여름 양복을 산 게 세 번째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양복에 대한 동경,집착 같은 게 이미 말끔히 사라졌으므로 되도록이면 값싸고 적당히 질 좋은 것을 사려고 마음먹었었다. 그 당시에는 나도 꽤 잘난 척을 했던 터라, 문예지 신인상 시상식 같은 데 나가기 위해 촐싹대며 비싼 양복 따위를 살까 보냐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건방졌던 것 같다. 하긴 지금도 여전히 건방지긴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한테는 당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양복을 살까 하고 산책 겸 아오야마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자니, 옛날 밴 빌딩에서 도산 바겐세일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아니, 밴도 망해 버렸나,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옛날에 유행하던 스리 버튼의 면 양복을 팔고 있었다. 올리브그린으로 값은 1만 5,000엔, 굉장히 쌌다. 그걸 사가지고 돌아와서 세탁기에다 빨아 구깃구깃하게 만들어 낡은 테니스화를 신고 시상식에 나갔다.

지금 나의 양복장-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에는 한 벌의 양복밖에 없다. ‘폴 스튜어트’에서 산 검은 양복뿐이다. 이것은 순전히 관혼상제용으로, 아직 한 번밖에 입지 않았다. 앞으로도 양복을 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귀찮은 옷은 입지 않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값은 비싸지, 활동하긴 불편하지, 금방 스타일이 바뀌고, 드라이 클리닝 비도 든다. 간혹 양복을 입고 나가고 싶기도 하지만 두 시간 정도 걷다 보면, 아아 싫다, 이런 걸 입고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고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양복은 너무도 부자연스런 옷이다.

넥타이를 맬 필요가 있을 때는 전부 블레이저 코트로 한다. 나는 브룩스 브라더스의 블레이저 코트를 좋아해서 이래저래 여섯 벌이나 사고 말았다.

넥타이를 매는 건 두 달에 한 번 정도니 좀 너무 많이 산 감도 들지만, 옷값이란 게 거의 들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이 정도의 사치는 괜찮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더블 블레이저 코트를 입고 호텔 로비에 멍청히 서 있으면 플로어 매니저로 오해받는 일이 있다. 오사카의 로열 호텔에서는 세 번이나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정말이지 넌덜머리가 났다. “어이, …실 준비는 다된 거야?”라는 말 따위. 그런 걸 알턱이 없잖은가?

양복 얘기와는 관계없지만, 나는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다. 한번은 이케부쿠로의 도부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데, 아르바이트 종업원으로 착각을 했는지 높은 분인듯한 아저씨가 “이봐, 넌 왜 명찰을 안 달고 있는 거야!” 하고 야단을 쳤다. 하도 기가 막혀서 나도 얼떨결에 “옛!” 하고 있는 사이에 상대방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도부 백화점에 특별히 원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일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경험이다.

여담은 그만하고 양복 얘기로 돌아가자.

나 자신은 거의 양복을 입지 않지만 양복을 멋지게 차려 입은 사람을 보는 건 또 그 나름대로 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역시 연륜이 쌓여야 하고, 철학도 필요할 것이다. 나는 둘 다 없으니까 좀처럼 양복을 멋지게 차려 입을 수가 없다.

미국 화장품 업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던 고 찰스 렙슨 회장은 일생 동안 다크블루 슈트만 입었다고 한다. 그는 빌 피올라반티라는 디자이너에게 약 200벌의 다크블루 슈트를 만들게 해서 그것을 차례대로 입었다고 하니까, 여기까지 이르면 이미 철학의 경지를 뛰어 넘었다고 볼 수 있다. <에스콰이어>지에 따르면 다크블루라는 색깔은 일종의 권위와 힘을 두드러지게 해서,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 열심히 뛰고 있다!’라는 인상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과연 당대에 렙슨 제국을 쌓아 올린 인물답게 색깔 감각이 뛰어났다.

그 얘기를 읽고부터는 거리에 나서면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다크블루 슈트를 말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는 별로 없다. 확실히 다크블루 슈트를 세련되게 입기란 까다로운 일인가 보다.

 

나는 이발소가 좋다

최근의 젊은 남성들은 대부분 유니섹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깎는 것 같지만, 나는 전부터 이발소 쪽을 좋아했다. 개성 없는 헤어스타일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용실에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여자들 옆에서 여자 미용사가 머리를 깎고 감겨 주는 것이 아무래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머리를 잔뜩 말고 있거나, 얼굴 면도를 하거나, 머리에 건조기를 뒤집어쓰고 얼빠진 얼굴로 주간지를 읽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점이 오래 전부터 꽤나 신경에 거슬려서 한번은 여자 몇 사람을 붙잡고 “미용실 옆자리에 남자가 있으면 싫지 않아요?” 하고 물어 봤더니, 그녀들 역시 한결같이 “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줄곧 남녀 공학을 다녔으므로 여자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지만, 머리카락을 자를 때에 한해서는 역시 남녀가 따로따로인 쪽이 편하다. 그래서 꽈배기 과자 같은 기둥이 서 있는 동네 이발소를 죽 다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미의 문제지, “모름지기 남자란 모두 이발소에 가야 한다”라고 확고하게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발소가 붐벼서 곤란해질 것이다. 미용실에 가는 사람은 계속 미용실을 이용해 주었으면 한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나의 단골 이발소는 센다가야에 있다. 나는 지금 후지사와에 살고 있으므로 두 달에 세 번 꼴로 오다큐센의 로맨스 카를 타고 센다가야까지 머리를 깎으러 간다. 이래저래 가는 데만도 한 시간 반은 걸리니까 한가하다면 한가한 거고, 유별나다면 유별난 것이다.

후지사와에 살기 전에는 나라시노에서 살았는데, 그때도 역시 한 시간 반씩 걸려 지금의 이발소에 다녔다. 소부센 쾌속보다는 오다큐 로맨스 카 쪽이 운치도 있고, 값도 싸고, 애플 티도 마실 수 있으므로 나로서는 이쪽이 훨씬 편하다. 나라시노 전에는 센다가야의 이발소 근처에서 살았다. 그러니까 그럭저럭 8년째 단골인 셈이다.

어째서 그렇게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면서도 이발소만큼은 끈질기게 바꾸지 않는가 하면, 새로운 이발소에 가는 게 너무나 귀찮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발소에 가면 여러 가지 사항들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해야만 한다. 우선 나는 회사원이 아니니까 그다지 단정한 머리형을 할 필요가 없고, 3주에 한 번은 머리를 깎으니까 그렇게 짧게 깎을 필요도 없다는 기본 방침을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고는 세부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 귀 위는 어느 정도 길이로 하고, 가르마는 어디쯤에 있으며, 수염은 깎지 말고, 매일 머리를 감으니까 샴푸는 대충 한 번이면 되고, 헤어 리퀴드는 필요 없다

고 설명을 하다 보면 그것만으로도 지쳐서 축 늘어지게 된다. 게다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설명한 대로 깎아 준다는 보장도 없다. 아니, 그렇게 깎아 주지 않는다. 특히 지방 소도시의 경우에는 더욱 심해서 대개는 군인 아저씨처럼 바싹 잘라 놓는데, 그러면 4~5일은 뿌루퉁해서 집에 틀어박히게 된다. 이런 일은 몹시 난처하다.

그런 점에서 단골 이발소는 문을 밀고 들어가 “안녕하세요” 하고 의자에 털썩 앉기만 하면 잠에 빠져 있어도 언제나처럼 알아서 말끔하게 다듬어 준다. 이렇게 편할 데가 있나.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이발소의 첫째, 이발사가 자주 바뀌지 않아야 한다. 종종 갈 때마다 이발사의 얼굴이 바뀌는 가게가 있는데 이래서는 이쪽도 마음이 놓이지 않고, 그때마다 다시 설명을 새로 해야 하므로 단골 이발소에 다니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사람이 들락날락하지 않는 이발소는 나름대로 분위기란 게 있고 솜씨도 안정돼 있다. 이것은 초밥집 주방장도 마찬가지다.

둘째로는 쓸데없이 자꾸 말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 전혀 얘기를 안 하는 것도 따분하지만, 나는 이발소에서는 멍청하게 있는 것을 퍽 좋아하므로 너무 말을 시키면 피곤해진다. “이젠 봄이군요”, “따뜻해졌죠”라든가 “꽃구경은 하셨습니까?”, “아뇨, 바빠서요”정도가 이상적이다. 내가 가는 이발소의 아저씨 중에는 조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가끔 경주 이야기를 짤막하게 하곤 한다.

셋째는 품위 없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틀어 놓지 말아야 한다. 요즘에는 오후 시간대에 주부들을 상대로 한 야한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서, 그걸 듣고 있으면 정말이지 피곤하다. “우리 남편은요, 내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항상 뒤에서 치마 속으로 손을 넣는 거예요. 그렇지만 저도 그게 싫진 않아서…” 하고 떠들어대면 머리 속이 어지러워진다. 요즘 주부들은 모두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

사실은 NHK FM의 <한낮의 클래식>같은 프로그램이 백 뮤직으로 흐르는 게 이상적이지만, 뭐 이발소에서 브람스를 듣는 것도 약간은 속물 같으니까,

NHK 제1방송쯤이 바람직하겠다. NHK 라디오 프로그램은 이발소 정도에서밖에 들을 수 없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꽤 재미도 있다. 듣다 보면 적어도 ‘세상은 넓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퍼시 페이시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푸른 산맥>은 아오야마 미용실에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오전 열한 시 반쯤에 하는 소설 낭독도 이발소 의자에 앉아 듣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지금은 더욱 멀어져서 가는 데만도 두 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여전히 같은 이발소에 다니고 있다. 퍼시 페이시스의 <푸른 산맥>은 중간에 썩 훌륭한 포 버스의 응수가 있기도 하여, 상당한 열연이다.

 

내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가끔 어떤 설문 조사에서 취미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난감해 하는 일이 있다. 제대로 답하면 독서와 음악이지만, 요즘에는 책도 읽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건 취미라고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귀찮아서 그럴 때는 대개 겸손하게-그렇지도 않나?-

‘무취미’라고 대답하기로 했다.

소설을 쓰게 된 뒤로는 독서가 일의 일환이 되어 버렸으므로 이건 이미 현실적으로 취미라고 부를 수 없다. 그래서 가까스로 음악만이 취미 영역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음악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취미로 남겨 본업이 되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고 있으면서 특정 분야를 피해 지나가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집에서 나 말고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중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느 누구의 지도나 조언도 받을 수 없었다. 요즘과는 달리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책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튼 용돈을 모아 무턱대고 레코드를 사서 이해가 갈 때까지 그저 듣는 수밖에 없었다.그 무렵에 산 레코드를 지금 뒤적거려 보면 꽤나 두서 없이 사 모았구나 하고 스스로도 질릴 정도지만, 당시에는 그런 건 알지 못했으니까 싸게 파는 레코드를 여기저기서 사 모아선 음반 면이 닳아 빠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었다. 젊은 시절에 들었던 연주라는 건 평생 귀에 달라붙는 것인 데다 몇 장 되지 않은 레코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들었으므로, 그 무렵에 산 레코드는 지금의 나에게는 일종의 표준 연주가 되어 버렸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글렌 굴드가 연주한 것을 내내 들었으므로, ‘3번’ 하면 굴드의 연주가 머리 속에 탁 떠오르고, ‘4번’ 하면 박하우스의 연주가 떠오른다. 훨씬 나중에야 박하우스가 연주하는 3번과 굴드가 연주하는 4번을 들었는데, 그걸 듣고 있자니-연주는 물론 나쁘지 않았지만-아무래도 안정감이 없었다. ‘3번은 공격적으로, 4번은 정통적으로’라는 연주 기준이 머리 속에 콱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 15번과 17번만 해도 그렇다. 이 경우에 15번은 줄리어드 현악 4중주단이고, 17번은 빈 콘체르토 하우스 현악 4중주단이라는 경이적인 결합이다. 들으면 아시겠지만, 이 두 연주 단체는 모든 면에서 극과 극을 이룬다. 줄리어드는 엄격하며 딱딱한 느낌이고, 빈 콘체르토 하우스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런 연유로 나는 ’15번은 엄격하고 딱딱한 곡이고, 17번은 부드럽고 따뜻한 곳이다. 모차르트란 사람은 역시 굉장한 다면성을 지닌 인물이었구나’ 하고 오랫동안 믿었었다.

스물두 살이 지나 다른 레코드로 15번을 듣고는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는데, 지금도 15번을 듣고 싶을 때는 나도 모르게 줄리어드의 레코드(물론 새로 산 것) 쪽으로 손이 가게 된다. 이상한 일이다.

이런 예를 일일이 들자면 한이 없다. 오로지 바겐 세일용 레코드를 닥치는 대로 사 모아 온 결과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런 계통 없는 불균형성이 음악을 듣는 재미를 오히려 두드러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묘하게 한 쪽으로만 취향이 치우치지 않았던 것은 옆에서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대개 이런 식으로 우회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억척스레 밀고 나가는 성격이라, 무엇인가에 다다르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리고 실패도 수없이 한다. 그렇지만 한번 그것을 몸에 익히고 나면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다. 이걸 딱히 자랑스레 떠드는 건 아니다. 이런 성격은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신이 그런 스타일을 고치려고 애써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권해도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진지하게 권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왔으니 이제 와서 새삼 어쩔 도리가 없다.그건 그렇다 치고, 일반적으로 음악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은 스무 살을 고비로 해서 점점 약해지는 것 같다. 물론 이해력이나 해석 능력은 훈련하기에 따라 높아질 수 있지만, 10대 시절에 느꼈던 뼛속까지 스미는 듯한 감동은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유행가도 시끄럽게 들리게 되고 옛날 노래가 좋았는데,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내 주변의, 왕년에는 록광이었던 청년들이 차츰 “요즘의 록같이 시시한 건 들을 맛이 안 나요”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 기분은 이해하지만, 이러쿵저러쿵 그런 말만 늘어놓아 봤자 어쩔 수 없으므로, 나는 꽤 솔직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전미 히트 차트 같은 것에도 귀를 기울여서 귀가 노화되는 걸 방지하려 애쓰고 있다. 컬처 클럽이라든가 듀란듀란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요즘에 웸의 저 은근함은 비교적 마음에 든다.

 

자동차 유감

나는 운전이란 걸 하지도 않고, 또 자동차라는 물건 자체에도 별 흥미가 없다. 내 주위를 둘러봐도 어쩐 일인지 운전을 하는 사람의 수가 굉장히 적다. 대충 아는 사람 중의 30퍼센트 정도만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일본 총인구의 60퍼센트 가까이가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한심할 정도로 적은 숫자다.

어째서 이렇게 내 주변 사람들이 운전하지 않는가 하면, 이유는 참으로 간단하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면 불필요한 신경을 써야 하고, 쓸데없는 돈이 들며, 술도 마실 수 없고, 세차니 차량 검사니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아서 지하철이나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그야 홋카이도 들판 한가운데 사는 사람이라면 차 없이는 생활할 수 없을 테지만, 도쿄 근교에서 살아가는 데는 차가 특별히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을 예로 들자면, 차를 갖고 있지 않아서 불편하게 느낀 적은 1년에 한두 번 정도 뿐으로, 그 한두 번을 어떻게든 넘기고 나면-물론 넘긴다-나머지는 전철과 택시를 타는 것과 걷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야 뭐 사람에 따라 사정이 다르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게 모두들 앞 다투어 차를 갖고 싶어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불과 3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 없이도 충분히 평화롭게 살았으니까 말이다.

이런 얘기를 자동차를 가진 사람에게 하면, 대개 “맞아요, 그게 제일이에요, 차를 탈 필요가 없으면 차를 안 타는 게 좋죠”라는 대답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하철로 한두 구간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굳이 차를 몰고 간다. 운전을 안 하니까 이런 소릴 하는 거라고 한다면야 할말이 없지만, 운전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난 잘 모르겠다. 부지런히 주차 공간을 찾아 돌아다녀야 하고, 시간도 얼마 차이 나지 않는데 그새를 못 참아 차선을 바꿔 달리는 일 같은 건 나로선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차가 없으니 자동차 대금이라든가 주차 요금, 세금이라든가 기름 값, 수리비 같은 게 들 리 없기 때문에, 그 대신으로 택시나 국철의 그린 차(역주:특등 차)를 종종 탄다. 이게 또 이상한 일인데,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택시나 그린 차의 요금이 턱없이 비싸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내가 종종 택시나 그린 차를 탄다고 하면, “너, 그거 사치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도쿄와 후지사와 간의 그린 차 요금이라고 해봐야 두 시간 반 정도 주차시키는 요금과 엇비슷하다. 한 시간 동안 느긋이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싼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딱히 국철을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그러나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조금만 더 젊었으면 역시 고급 승용차를 굴리며 드라이브하자고 여자를 꼬시며 돌아다녔을지도 모르니 큰소리칠 순 없다. 이런 일은 운과도 같은 것이라 조금만 달리 살았더라면 완전히 정반대의 주장을 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널린 주장의 대부분은 결과적으론 좋은 게 좋다는 정신 위에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서 자동차 무용지물론을 전개하려는 게 아니라, 차가 없어도 별로 부자유스럽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게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견을 타당성 있게 설명하려 했던 것뿐이다. 그러니, 화를 내며 반론을 제기하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후지사와 거리도 여름이 가까워짐에 따라 차량이 점점 늘고 있다. 주말이 되면 후지사와 교에서 에노시마까지 길이란 길은 차량 행렬로 넘쳐 나고, 좁은 길에도 꾸역꾸역 차가 밀려든다. 밤중에는 오토바이가 내는 소음이 시끄럽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온 뒤에도 조깅을 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 차에 치여 돌아가셨고, 오토바이 소음으로 잠을 잘 수 없다고 항의 자살을 한 사람도 있다. 정말 안된 일이다.

내가 자동차에 대해 너무 신경질적인 탓인지도 모르지만, 차량이 늘어남에 따라 일본 내 어디엘 가더라도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일이 극히 드물게 되었다. 때때로 생각이 나서 에노덴을 타고 가마쿠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이젠 거리마다 온통 자동차라서 머리가 아파져 빨리 돌아와 버리고 만다. 교토 같은 곳은 옛날에는 그렇게 거칠고 시끄러운 곳이 아니었다.

세상에 자동차가 한 대도 달리지 않는 곳이 한 군데 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 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와이어트 업이 덧지 시티에서 사람들로부터 권총을 압수했듯이, 담당자가 입구에서 차를 맡아 두는 것이다. 어딘가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꼭 거기에서 살아 보고 싶다. 간혹 ‘보행자 천국’이란 곳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를 천국이라고 부르다니 말도 안 된다. 차를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인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사정이 있어서 이 글을 쓴 후에 면허증을 땄다. 기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국철은 그 후 JR로 이름을 바꾸었다. 에노덴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양이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며칠 전 우리 집 고양이가 죽고 말았다. 이 고양이는 무라카미 류 씨에게서 얻어 온 아비시니언 종으로 이름은 ‘기린’이었다. 류 씨 집에서 왔기 때문에 ‘기린’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맥주(역주:일본의 유명 맥주 상표에 ‘기린’이 있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이는 네 살로, 사람으로 따지자면 아직 20대 후반이나 서른 정도니까 요절인 셈이다. 이 고양이는 방광에 결석이 쌓이기 쉬운 체질이고 전에도 수술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항상 다이어트 캣 푸드(라는 게 이 넓은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이다)를 줬는데 결국 방광이 악화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애완 동물 전문 업자에게 화장을 의뢰해서 그 뼈를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가미다나(역주:집 안에 부적을 모시는 선반)에 올려 놓았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일본식 집이므로 가미다나가 딸려 있어 이럴 때는 매우 편리하다. 새로 지은 방 두 개짜리 맨션 같으면 고양이 뼈를 둘 장소를 찾아내는 게 큰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냉장고 위에다 아무렇게나 올려 놓을 수도 없는 것이고.

우리 집에는 이 ‘기린’ 외에도 또 한 마리 열한 살짜리 암컷 샴 고양이가 있는데, 이름은 ‘뮤즈’다. 이 이름은 순정 만화 <유리의 성>의 등장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전에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콤비의 이름을 딴 ‘부치’와 ‘선댄스’라는 두 마리의 수고양이가 있었다. 고양이를 기르다 보면 일일이 이름을 붙이는 것도 귀찮은 일이라, 대개는 지극히 쉽게 이름을 짓고 만다. 한때는 ‘줄무늬’라는 이름의 줄무늬 고양이를 길렀었고, ‘얼룩이’란 이름의 삼색 고양이가 있었던 적도 있다. 스코티쉬 폴드라는 종류의 고양이를 길렀을 때는 ‘스코티’란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파생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검둥이’란 이름의 검은 고양이를 길렀던 적도 있다.

근 15년 동안 우리 집을 오갔던 고양이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각각의 운명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A:죽은 고양이-기린,부치,선댄스,줄무늬,스코티

B:다른 사람에게 준 고양이-얼룩이,피터

C:자연스레 없어진 고양이-검둥이,통통이

D:현재 남아 있는 고양이-뮤즈

 

생각해 보면 집 안에 고양이가 한 마리도 없었던 기간은 15년 동안 고작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고양이도 성격이 다양해서 한 마리 한 마리가 저마다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고, 행동 양식도 다르다. 지금 기르고 있는 샴 고양이는 내가 손을 잡아 주지 않으면 출산을 하지 못하는 참으로 별난 성격의 고양이다. 이 고양이는 진통이 시작되면 곧장 내 무릎으로 달려와서 ‘영차’ 하는 느낌으로 앉은뱅이 의자에라도 기대는 듯한 자세로 주저앉는다. 내가 양손을 꼭 잡아 주면 이윽고 한 마리 또 한 마리하고 새끼 고양이를 낳는다. 고양이의 출산은 보고 있으면 매우 재미있다.

‘기린’은 건강하고 탄탄하고 살이 찐 데다 식욕이 왕성한 수고양이로-이 묘사는 무라카미 류 씨의 개성과는 관계없다-성격도 개방적이어서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꽤 인기가 좋았다. 방광의 상태가 나빠져서 약간 기운이 떨어지긴 했지만, 죽기 전 날까지도 도저히 그대로 죽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동네 수의사 선생님께 데려가 고였던 오줌을 빼고 결석을 녹이는 약도 먹였는데, 하룻밤 지나고 보니 부엌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번쩍 뜬 상태 그대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고양이는 언제나 참으로 깨끗하게 죽는다. 죽은 얼굴이 하도 깨끗해서 양지바른 곳에 놓아두면 해동되어 되살아 나지나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오후에 애완 동물 전문 매장 업자가 라이트 밴을 타고 고양이를 가지러 왔다. 영화 <장례식>에 나오는 반듯한 상복 차림을 한 사람이었다. 일단 애도의 말을 했는데, 이건 인간들끼리 나누는 애도의 표시를 적당히 간략화 한 것으로 상상하면 된다. 그러고 나서 요금 얘기를 꺼냈다. 화장->납골 코스는 항아리 값이 포함되므로 2만 3,000엔이다. 라이트 밴 후미의 짐칸에서는 플라스틱 의상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독일 셰퍼드의 모습도 보였다. 아마 ‘기린’은 저 셰퍼드와 함께 태워지겠지.

‘기린’이 라이트 밴에 실려 가고 나자 온 집안이 썰렁하게 느껴져서 나도 집사람도 남은 고양이도 안절부절못하고 말았다. 가족이라는 건-설사 그것이 고양이라 해도-저마다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는 것으로, 그 한 귀퉁이가 무너지면 한동안은 기묘하게 균형이 뒤틀려 버리는 것이다. 집에 있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아서 요코하마에라도 갈까 하고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뚫고 역까지 걸어갔지만, 그것도 왠지 귀찮아져서 도중에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지금은 ‘뮤즈’와 ‘고로케’라는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마이클’이나 ‘고테쓰’란 이름의 고양이는 전국적으로 산더미같이 많을 것이다.

 

첫째가 건강, 둘째는 재능

‘첫째가 건강, 둘째는 재능’이란 게 나의 좌우명이다. 조만간 안자이 미즈마루 화백에게 족자에 그렇게 써달라고 해서 거실에 걸어 두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글씨 밑에 철제 아령 그림 같은 게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어째서 ‘첫째가 건강’이고 ‘둘째는 재능’이냐 하면, 단순하게 생각해서 건강이 재능을 불러들이는 일은 있어도, 재능이 건강을 불러들일 가능성은 일단 없기 때문이다. 물론 건강하다고 해서 재능이 부쩍부쩍 늘어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노력과 집중력을 유지하려면 아무래도 체력이 필요하고, 노력과 집중력을 유지하면서 재능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첫째가 건강, 둘째는 재능’인 것이다.

하기야 이런 사고 방식은 천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천재란 아무리 허약하더라도, 그리고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훌륭한 작품을 창출해 내는 존재다. 의식적인 자기 훈련이란 천재에게는 인연 없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는 천재가 아니고, 나름대로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건강이 소중하다. 대단한 재능도 없는 주제에 병을 달고 다니는 거야말로 작가로서는 가장 불행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좌우명을 족자로 만들 것까지도 없이, 나는 상당히 건강한 인간이라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고, 10년 동안 의사를 찾아갔던 적도 없다. 약도 먹지 않고, 몸 어딘가에 신경 쓰이는 증상이 나타난 적도 없다. 어깨 결림, 두통, 숙취로 애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불면증은 20대 초반쯤에 몇 번인가 경험했었던 같은데, 지금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두통이나 숙취, 어깨 결림이 실제로 어느 정도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짐작이 가지 않으니 동정심도 별로 일지 않는다. 때때로 집사람이 “오늘은 머리가 아파요”라고 말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어도 “어어, 그래?” 하고 대답하는 게 고작이다. 그런 건 반어인이 “오늘은 아가미와 비늘이 스쳐서 아파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됐다고는 생각하지만, 내가 경험한 적이 없는 육체적 아픔,고통이란 건 정확하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에게 “넌 동정심이 부족해”라고 비난받는데, 그건 당치도 않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동정심이 부족한’ 게 아니라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 증거로 치통이나 뱃멀미로 고생하는 사람이나, 의자에 정강이를 세게 부딪힌 사람에 대해서 나는 항상 진지하게 동정하고 있다.

숙취라는 것도 이해가 잘 안 가는 고통 중의 하나다. 나는 그렇게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매일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이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술에 만취되는 일도 있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숙취라는 건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아무리 형편없이 취했어도 아침 햇살이 비치면 말짱하게 깨어나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 가서 친구에게 가끔 “숙취란 게 어떤 건데?” 하고 물어 보지만, 누구 한 사람 정확하게 묘사하고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다. “아무튼 머리가 무겁고, 띵하고, 좌우지간 아무것도 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 거야”라는 정도의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소릴 해도 ‘머리가 무겁다’라는 게 어떤 상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포기하고 만다. 그 이상 자세한 설명을 요구해 봤자 “그것 참 귀찮구먼, 숙취를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 숙취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턱이나 있겠어?”라는 푸념만을 듣기 일쑤다. 사람들은 모두들 숙취 얘기만 나오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일전에 어느 곳에서 맥주를 몇 병인가 마신 뒤에 다른 곳으로 옮겨 와인을 집중적으로 마시고, 상당히 만취하여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져 잠을 잔 적이 있다. 이튿날 아침 일곱 시경에 눈을 뜨자 엷은 안개가 낀 듯 머리가 멍했다. 그래서 문득 ‘이것이 가벼운 숙취란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밥을 먹고 나서 12킬로미터쯤 달리고 돌아오니 그런 흐리멍덩한 증상이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이 얘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이 친구야, 그런 건 숙취도 아냐. 숙취일 때는 식욕 같은 건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을 뿐더러 애당초 달리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거라구”라고 했다. 그러니 숙취라는 건 나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변비, 치질, 꽃가루 알레르기, 신경통, 생리통(물론 당연하지만), 현기증, 식욕 부진 같은 종류도 나는 잘 이해할 수 없다. 구역질, 설사, 치통, 피로감, 감기, 고소 공포증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끼리 아픈 데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는 건, 당사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적어도 건강한 사람들끼리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다. 그건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닌 공감대의 질이 높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재미있는 것은 치질이나 변비 이야기로, 본인은 굉장히 힘겨워하는 듯싶지만 목숨과 직접 상관이 있는 병이 아닌 만큼, 이야기가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비통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비통하긴 하지만 우습고, 우습긴 하지만 비통하다는 느낌은 건강한 몸으로선 경험하기 어려운 감흥이다.

 

기묘한 인생 강요당하는 유명인

때때로 바의 스탠드 같은 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으면 옆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서 하는 얘기를 듣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런 얘기를 안 듣는 척하면서 듣는 것도 퍽 재미있다. 소문의 대상은 내가 아는 유명인인 경우도 있고, 상사나 동료, 친구인 경우도 있는데 두 경우 다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가장 재미없는 것은 누군가를 칭찬하는 얘기로, “저기, 아무개 말야, 그 사람 참 대단해. 재능이 있어” 따위의 이야기가 나오면 이쪽도 따분해져서 ‘빨리 험담이나 하지’ 하고 바라게 된다. “그 자식 바보라니까, 진짜 멍청하다구. 완전히 구제 불능이야” 하고 나오게 되면, 어차피 남의 일이니까 이쪽은 유쾌하기 짝이 없다.

몇 년 전에, 요코하마에 있는 ‘스톡’이란 재즈 클럽의 스탠드에서 한잔 마시고 있자니 옆자리에 앉은 샐러리맨은 듯한 젊은 두 사내가 줄곧 신교지 기미에(역주:여배우) 얘기를 하길래, 또 여느 때처럼 귀를 기울이고 있었더니, 느닷없이 “저기 말야, 무라카미 하루키 란 작가 있잖아? 그 사람 말야” 하는 얘기로 바뀌어 그 다음은 듣지도 않고 허둥지둥 나와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신교지 기미에 얘기에서 아무런 맥락도 없이 내 얘기로 옮겨 갈 수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그럴 때는 정말 난감하다. “그러면, 신교지 기미에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다른 것에 대해 얘기해 보세”, “뭐가 좋을까?”, “소설 얘기나 하지”, “젊은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 뭐 읽은 거 있나?”, “그러고 보니까”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나도 일단 경계 태세를 취할 수 있어 괜찮지만, 목구멍 밑에서 바로 위가 시작되는 식으로 화제를 바꾸니, 그만 온더록 잔 가장자리에다 코를 부딪히는 일이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아주 드물긴 하지만 안면이 없는 사람이 말을 걸어 오기도 한다. 나는 텔레비전에 출연을 하지 않으니 극히 드문 정도에 그치지만, 늘상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참 고역일 것이다. 잡지에 사진 정도가 실리는 거라면 실물을 만나도 의외로 알아보지 못하지만, 텔레비전이라는 것은 무척 생생하게 비추기 때문에 힘들 것 같다. 그런 이유로 해서 나는 절대 텔레비전에는 출연하지 않는다. 가끔 텔레비전 출연 의뢰가 들어오지만, “인형 옷을 입고 출연해도 괜찮으시다면 나가겠습니다”라고 농담을 하면, “그래도 좋으니까 나와 주세요” 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하기야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나와 친분이 있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도 한번 텔레비전에 나갔다가 그 뒤로 여러모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이튿날 쉴새 없이 전화가 걸려 오고,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서 “텔레비전에 나오셨지요” 하는 인사치레를 들었다고 한다. 텔레비전이라는 건 굉장히 무섭다. 뭐니 뭐니 해도 문예지가 제일이다. 문예지에 소설을 쓴다고 해서 전화가 걸려 오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언젠가 한번은 진구 구장 외야석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며 야쿠르트 대 주니치 전을 보고 있는데, 한 여자가 다가와 “무라카미 씨, 사인 좀 해주세요” 했다. 나는 진구 구장 외야 우익석에 오는 여자에게는 대체로 호감을 품고 있으므로 “좋아요” 하자, 그 여자는 “저기, 힘내라 야쿠르트 스왈로즈라고 써주시겠어요?”라고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을 비교적 좋아한다.

소부센 전철 안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말을 걸어 온 적도 딱 한 번 있다. 그럴 때는 나는 그저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타입이라 말도 잘 나오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대단히 미안할 따름이다. 게다가 전철 안에서 말을 걸어 오면 주위 사람들도 힐끔힐끔 쳐다보므로 무지하게 부끄럽다. 야쿠르트 대 주니치 전 때처럼 텅텅 비어 있으면 나도 마음이 편하겠지만.

아카사카에 있는 베르비라는 패션 빌딩의 대기실 의자에 부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을 때에(아내의 쇼핑 시간이 너무나 길어져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 온 적도 있다. 이때는 젊은 남자로, “무라카미 씨, 앞으로도 열심히 해주십시오”라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이쯤 되면 <프로 야구 뉴스>의 인터뷰 같다.

내친김에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면, 롯폰기에서 젊은 커플이 말을 걸어 온 적도 있다. 오차노미즈의 메이지 대학 앞과 신주쿠에 있는 이세탄 백화점 2층, 후지사와의 세이부 백화점과 오타루의 길모퉁이에서도 한 번씩. 오타루에서 만난 사람의 말에 따르면, 홋카이도에서는 내 책이 비교적 많이 읽히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타루 역 앞의 상점가에서 나 같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정말 감탄하고 말았다.

그런 연유로 해서 하나 둘 꼽아 보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6년 동안 거리에서 안면 없는 사람들이 말을 걸오 온 것은 전부 여덟 번이다. 대개 1년에 한 번 남짓한 비율인데, 이 ‘말을 걸어 온 빈도’가 나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많은 수치인지 적은 수치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옛날에 모 가수가 살고 있는 맨션 옆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이 차에서 현관까지의 10여 미터 거리를 전력 질주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필시 팬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심야 한 시가 지난 주위에 사람 그림자라곤 하나도 없을 때조차도 그렇게 하는 거였다. 유명인이란 상당히 기묘한 인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탈모와 스트레스

며칠 전 어떤 주간지로부터 <나의 20대>라는 난에 싣고 싶으니 20대 시절에 찍은 사진을 한 장 빌려 달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지금도 그렇지만) 20대에 찍은 사진이라고는 거의 없는데, 그래도 여기저기 뒤적이다 보니 대여섯 장 정도가 나왔다.

그런데 불과 10년밖에 안 된 사진을 보고 발견한 사실인데, 20대 시절보다도 지금이 확실히 머리 숱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헤어스타일이 달라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아도 지금이 더 머리 숱이 많다. 부푼 데다가 밀도도 높다. 이발소에 다니는 횟수도 전보다 잦아졌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머리 숱이 많아졌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다.친구들은 “옛날에 비해 머리를 쓰지 않게 돼서,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으니까 그런 거 아냐?” 하고 쉽게 말해 버리지만, 아무리 별볼일 없는 소설이라고는 해도, 소설을 쓰기 위해선 역시 그 나름대로 머리를 써야 하고, 머리를 쓰면 스트레스도 쌓이게 된다. 문단이라든가 업계라든가, 세금이라든가 대부금도 있으니, 작가라고 해서 느긋하게 마당에 내려앉은 참새나 바라보며 “벌써 봄인가”라는 말이나 하고 있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머리를 쓰지 않는다는 식으로 간단히 결론을 내려 버리고 싶지는 않다. 나라고 해서 이런 저런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어려움이 외모에 반영되지 않을 뿐이다.

그렇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확실히 내 머리 숱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전업 작가가 되고 나서부터다. 그렇다면 전업 작가가 된 게 내 생활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내 머리 숱이 많아진 비밀도 저절로 풀릴 것이다. 몇 가지 변화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도쿄를 떠나 교외에서 살게 되었다.

(2) 다른 사람과 만나는 일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3) 밤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4)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스스로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5) 매일 운동을 하게 되었다.

(6) 접대로 마시는 술자리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물론 머리 숱이 적어지는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어 한마디로 결론을 내릴 순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경우에는 이러한 생활의 변화가 머리카락의 상태에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뒤집어 말하면, 등골 빠지게 소설을 쓰고 있지 않다는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한때-5년쯤 전의 일이지만-나 역시 머리 숱이 상당히 준 적이 있었다. 그 무렵에는 사업상 이런 저런 말썽이 많아(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몹시 피곤하다), 그 때문에 머리카락이 계속해서 조금씩 빠졌었다. 욕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으면 욕실 바닥의 배수구엔 언제나 기가 찰 정도로 많은 머리카락이 엉켜 있었다.

나는 워낙 머리 숱이 많은 편이라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이윽고 목욕을 하고 거울 앞에 서면 머리카락 사이로 두피가 약간 보일 지경에 이르렀고, 그러는 사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머리 숱이 좀 준 거 아니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자 나도 꽤 머리를 의식하게 되어 헤어스타일을 바꾸기도 하고, 헤어 토닉으로 정성껏 두피를 마사지하기도 했다. 탈모라든가 발기부전이라든가 하는 것은(후자는 아직 까

지는 관계없지만) 비만이나 금연과 달리 스스로 암만 노력해도 어떻게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당사자는 몹시 울적하다.

그러나 사람들이란 참으로 잔인해서, 본인이 신경을 쓰면 쓸수록 “괜찮아, 괜찮아. 요즘엔 가발도 잘 나온다구”라든가, “하루키 씨는 머리가 벗겨지면 벗겨진 대로 꽤 귀여울 거예요”라는 둥 정말 집요하다. 어느 한 쪽 귀가 잘라져 나갔다거나 하는 얘기라면, 모두들 안됐다고 동정하지 앞에서 놀리거나 하지는 않을 테지만, 탈모라는 건 구체적인 아픔을 동반하는 게 아니니까 진지하게 동정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특히 젊은 여자들은 자신도 머리가 벗겨질 수 있다는 공포심을 갖고 있지 않은 만큼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천진난만하다. “어머, 세상에. 정말 벗겨지잖아. 어디 좀 보여 줘요. 어머 두피가 보여. 와 싫다, 싫어”라는 식으로, 이런 때는 정말 화가 난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귀찮고 불쾌한 상황이 개선됨에 따라 빠지는 머리카락의 양도 서서히 줄어들어 두세 달이 지날 무렵에는 머리카락이 완전히 예전 상태로 회복되었다. 그 이후로 머리카락에 대해서 걱정을 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젠가 또다시 어떤 연유로 해서 거대한 트러블에 말려들어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자질구레한 일에 안달복달하지 않고,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지도 않고, 느긋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

 

‘공부 기피증’과 ‘공부 중독증’

세상에는 크게 나누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잘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양쪽 다 잘하는 사람도 있고, 양쪽 다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충 처음에 말한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뉠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배우기를 좋아하는’ 타입으로,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데는 전연 소질이 없다. 그러니까 강연 의뢰라든가 문화 교실의 ‘소설 작법 강좌’를 맡아 달라는 의뢰 같은 게 들어와도 언제나 사양하고 있다. 세상에서 뭐가 불행하니 어쩌니 해도 가르치는 게 서툰 사람이 남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할 때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나한테 소설 작법을 배운 사람이 훗날 도대체 어떤 소설을 쓸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가르치는 쪽도 불행이지만, 배우는 쪽 역시 대단히 불행한 것이다.

미국의 대학에는 ‘문학 창작과(크리에이티브 코스)’라는 게 있어서, 작가가 학생들에게 소설 쓰는 법을 가르친다. 나도 실제로 본 건 아니므로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지만, 대략 열 명 내외의 학생들이 1주일에 한 번 모여서 자신이 쓴 단편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고, 거기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교수인 작가가 학생들의 작품을 체크하고, 고쳐 쓰기 위한 충고를 해준다고 한다.

이 시스템의 장점은 학생들이 전업 작가와 접촉하여 실전적인 충고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작가의 수입이 안정된다는 데 있다. 교수로서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 작가는 여가 시간을 자신의 창작 활동에 쏟을 수도 있다.

이런 시스템이 교육 수단으로써 어느 정도 효과적인지를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일본 대학에도 어느 정도 이런 코스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에게는 퍽 무리한 얘기지만, 가르치기를 잘하는 작가와 배우기를 잘하는 학생들이 하나가 되면 그 나름대로 효과는 나타날 것이다. “대학의 강의실 같은 데서 어떻게 소설 쓰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느냐”라는 의견은 너무 편협한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특히 젊은 사람들은-다양한 곳에서 무언가를 배워 가는 법이고, 그 장소가 대학의 강의실이라 해서 부적당한 건 아니다.

하긴 나 자신은 학교란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을 뿐더러 상당히 반항심이 강한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는 선생님에게 매를 맞았던 기억밖에 없고, 고등 학교 3년은 마작을 하거나 여자들과 놀러 다니는 사이에 지나갔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원 분쟁으로, 그것이 일단락 지어질 무렵에는 학생 신분에 결혼을 해서, 그 후로는 생활에 쫓기느라, 지금 생각해 보면 꼼짝 않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를 했던 적이 전혀 없다. 특히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7년 동안이나 다녔지만-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무엇 하나 배운 게 없다. 와세다 대학에서 얻은 것이라곤 아내뿐인데, 배우자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 점이 교육 기관으로서의 와세다 대학의 우위성을 입증하는 건 아니다.

내가 매사에 배우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대학을 나와 이른바 ‘사회인’이 되고 나서부터다. 어쩌면 그것은 학창 시절에 정신 없이 놀기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원래 성격상 학교란 제도가 맞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며, 아니면 원래 나라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타입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일하는 틈틈이 짬이 나면 내가 좋아하는 영어 소설을 열심히 번역하거나, 친구에게 불어를 배우거나 하면서 지냈다.

그뿐만 아니라 일하면서도 의식적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거나 이런 저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자 노력했다.남의 얘기를 듣는 건 꽤 재미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여러 가지 사고 방식이 있다. 개중에는 ‘과연 그렇군’ 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생각도 있고, 전혀 무의미하고 바보 같은 생각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무의미하고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해도 잘 들어 보면 그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 위에 확고하게 성립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먼저 한걸음 물러나 이야기를 들으려는 태도를 보이면, 대개의 사람들은 비교적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얘기해 준다. 당시에는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지만, 훗날 소설을 쓰는 데 이런 학습 경험은 무척 도움이 되었다. 이런 건 대학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젊을 대 지나치게 공부를 하면 어른이 되어 ‘공부 기피증’에 걸리게 되거나 반대로 ‘공부 중독증’에 걸리게 되지 않을까?’공부 기피증’이란 학창 시절에는 무턱대고 그저 공부만 하다가 사회에 나온 다음부터는 뒹굴며 텔레비전만 보는 증상이고, ‘공부 중독증’이란 좌우지간 뭔가를 공부하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는 증상이다. 뭐 그런 건 어차피 남들이 사는 방식이니까 아무래도 좋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린 시절에 실컷 놀았던 사람 쪽이 훨씬 좋다.

 

오디오 스파게티

간혹 신문이나 잡지를 읽다 보면 이런 저런 것이 발견되거나 발명됐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개중에는 ‘와아’ 하고 감탄하게 되는 것도 있고, 대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도쿄 대학 이학부의 XX 박사는 일본 원숭이의 뇌하수체를 전기적 처리에 의해 계층화하는 데 성공했다”라는 소리를 들어도-이것은 물론 엉터리로 지어 낸 얘기지만-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설령 ‘와아’ 하고 감탄하게 되는 유의 일이라도 그게 어떤 원리에 입각하여 어떠한 단계를 거쳐 성립되었는가에 이르면, 나로선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옛날부터 화학이나 물리에는 굉장히 약했던 것이다.

이런 발명 및 발견은,

 

(1) 어떠한 필요에 의해서

(2)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이론적 고찰 및 시행 착오가 있은 후에

(3) 발명 및 발견에 이른다.라는 과정을 거치지만,

 

(1)과 (3)은 대충 이해할 수 있어도 (2)의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어려워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1)이러저러한 필요가 있어서 (2)얼렁뚱땅 (3) 이러한 것이 생겨났다. 라는 정도의 인식으로 모든 게 끝나 버린다. 요컨대 비디오를 예로 들면,

 

(1) 영상을 테이프에 간단히 녹화할 수 있으면 편리하다

(2) 얼렁뚱땅

(3) 비디오가 생겨났다.

 

라는 식이다.

 

비디오가 어떤 원리로 성립되어 있는지 나로선 전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나는 비디오를 별다른 지장 없이 사용하고 있고, 제법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 와트의 증기 기관이나 마르코니의 전신 장치라든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정도라면 나도 어떻게든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데, 얘기가 그 이후의 테크놀러지에 이르면 내게 있어서는 거의가 어둠 속 저편에 묻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건-결코 안이하게 동료 의식을 구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나 한 사람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가령 모두들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2,000~3,000엔만 내면 손쉽게 살 수 있는 포켓형 계산기만 해도, 어떻게 그렇게 작은 물건이 루트13 곱하기 루트272를 계산할 수 있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분명히 나처럼 “이건 원래 이런 거니까” 하고, 계산기를 사용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테크놀러지에 관한 한 이른바 절대 군주제 같은 체제하에 놓여져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칙명’ 같은 새로운 발명 내지는 새로운 발견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모두들 “이게 무슨 일일까?”라든가 “잘 모르겠는데” 하며 와글와글 떠들다가, 그래도 어쨌거나 “임금님 어명이시니까 틀림없을 거야”라는 말에 길들여져 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기술에 관해서는 민주주의라는 것도 완전히 무너지고 마는 것 같다.

나는 현재 집에 두 대의 레코드 플레이어와 세 대의 카세트 테이프 리코더, 한 대의 FM 튜너와 두 대의 VTR, 한 대의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를 두고 사용하고 있는데, 마치 지옥과 같은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우선 세 대의 카세트 테이프 리코더를 테이프 셀렉터에 연결하고, VTR과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를 비디오 셀렉터에 연결한다. 그리고 비디오 셀렉터에 FM 튜너의 출력 선을 꼽아 하이파이 녹음을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오디오 테이프에 더빙할 수 있도록 비디오 셀렉터의 출력 선을 테이프 셀렉터에 꼽는다. 그러고 나서 FM 튜너의 전원을 오디오 타이머에 꼽아서… 하고 생각하다 보면 도중에 뭐가 뭔지 모르게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예를 들어 “레코드를 들으면서 FM 방송을 비디오 데크에 녹음하고, 그것을 동시에 카세트에 더빙하는 게 가능한가?” 따위의 질문을 받으면 잠시 생각하지 않고는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뿐더러, 내려진 결론도 대개는 틀리기 일쑤다. 배선을 메모한 종이를 뚫어져라 들여다 봤자 머리만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집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노력은 아예 포기한 터라 오디오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가장 곤란한 건 이사를 할 때다. 기계를 늘어놓고 배선을 다시 하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린다. “어어, 그러니까 이 출력 선이 이쪽 입력 선으로 가고…”라며 낑낑거리다 보면, 점점 ‘어째서 내가 이런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하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고교 시절에 처음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었을 무렵에는 세계가 훨씬 단순했다. 플레이어와 스피커를 통합 앰프(그런 게 있었다)에 연결하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고, 그 다음은 느긋하게 음악을 듣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스파게티 5인분을 바닥에 퍼 질러 놓은 것 같은 코드 더미에 쭈그리고 앉아 악전고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민주주의의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대체 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앗, 미안, 실수였어!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게 된 이후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사람은 반드시 실수를 한다’라는 것이다. 하긴 글을 쓰기 이전부터 일상적으로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질렀으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렇게 통감할 필요도 없지만, 글을 쓰기 전에는 대부분의 잘못은 “앗, 미안해, 실수였어” 하고 넘어갔다. 상대방도 “정말 어쩔 수 없군” 하는 정도로 넘어가 주었다.그러나 글을 쓰면 실수란 것이 확실하게 흔적을 남기게 될 뿐 아니라 그것이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실수를 깨달았더라도 “앗, 미안해요. 실수였어요” 하고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과를 하며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암만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는 해도 이건 너무 골치 아프다. 그 대신에-라고 할 것도 없지만-나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실패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 아닌가 한다. 다른 사람이 실수했다고 해서 그걸 트집잡으며 “어이, 너 그때 그런 말을 했었지. 맞지, 그랬었잖아” 하며 빈정대는 일은 일단 없다. 덕분에 14년 동안 그런대로 평온한 결혼 생활을 해왔다.

문장상의 실수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번역이다. 여하튼 원본이 있으므로 나보다 어학력이 뛰어난 사람이 치밀하게 원본과 번역문을 맞춰 보면 자잘한 실수 같은 건 얼마든지 나오게 된다.

얼마 전 가쓰시카 구에 사는 모리시타 씨라는 사람이 엽서를 보냈는데, “당신의 번역 중에는 2주(a couple of weeks)가 ‘이틀’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2주’를 잘못 옮긴 게 아닙니까?”라고 지적해 주었다. 이것은 정말 누가 뭐라 해도 나의 잘못이다.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 후에도 부끄럽지만 ‘twenty one’을 ’31’로 옮긴 적도 있고, bald’와 ‘bold’를 혼동해서 번역한 일도 있다. 어째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학창 시절, 답안 용지에 “사소한 실수가 많으니까 다시 잘 보도록” 하고 몇 번이나 씌어져 있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성향은 나이를 먹어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것 같다.

다만-이런 말을 쓰면 변명을 늘어놓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지만-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를 정확하게 옮기기 위해서 하루 종일 끙끙대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그리고 그런 조마조마한 부분을 어찌어찌 통과해서 비교적 평탄한 부분으로 들어갔을 때 후유 하고 한시름 놓다가 사소한 실수를 하게 되는 게 대부분이다. 물론 나중에 원본과 번역문을 몇 번이고 다시 맞춰 보긴 하지만, ‘이런 데서 실수를 했을 리가 없어’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박혀 있어서 몇 번이나 체크를 해도 실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난처한 일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식은땀이 흐른다.

다른 사람에게 지적을 받을 것까지도 없이, 나 자신이 오역을 나중에 퍼뜩 깨닫는 경우가 있다. 밤중에 이부자리에 들어가 불을 끄고 멍청히 누워 있을 때에 “앗, 틀렸어. 그건 실수야!” 하고 벌떡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주의하지 않아 저지른 실수라기보다는 좀더 중대한 의미를 가진 잘못일 때가 많다. 따라서 전자보다 식은땀의 양도 훨씬 많다.그러나,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부주의해서 저지른 무수한 실수들을 잔뜩 모아 그것을 병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꽤 재미있는 연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장뿐만 아니라 나는 일상 생활의 온갖 측면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실수를 저지르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소변을 봐야지’ 하고 화장실에 갈 생각이었으나 잘못해서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그대로 방에 돌아와선, “앗, 이상한데 아직 소변이 마렵잖아. 몸 상태가 안 좋은 걸까?” 하고 의아해 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 거에 비하면 ‘twenty one’을 ’31’로 번역하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전철 시간표나 전화 번호부를 만드는 편집자가 되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번역만이 아니라 이렇게 내 글을 쓰고 있을 때도 때때로 심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러나 나는 데이터를 구사하여 이론을 전개해 나가는 타입의 글쟁이도 아니고, 모델 소설이나 논픽션도 쓰지 않아 그 일로 특별히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도 없으므로 대개의 실수나 사실 오인은 웃음으로 넘겨 버리고 만다.

며칠 전 아키시마 시의 오카무라 씨라는 사람으로부터, 하루키 씨의 소설 중에 ‘폴크스바겐의 라디에이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상하지 않느냐는 투서가 모 잡지에 게재된 걸 알고 계십니까, 하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한테 물어 보니 분명히 폴크스바겐에는 라디에이터가 없는 듯하다. 영락없는 나의 실수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하느냐 하면, 그러기는커녕 웃으며 넘겨 버린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세계에서는 화성인이 하늘을 날아다녀도, 코끼리를 축소하여 손바닥에 올려 놓아도, 폴크스바겐에 라디에이터가 붙어 있어도, 베토벤이 교향곡 11번을 작곡했다 해도, 그건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앗, 그렇구나. 이건 폴크스바겐에 라디에이터가 붙어 있는 세계의 얘기구나!’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어 주면 나는 굉장히 기쁠 것 같다.

그래도 역시 실수는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성실한 분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나올 영문판 <핀볼, 1973>에서는 그 부분을 제대로 고쳐 놓았으니까 그 쪽을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보니 책 소개까지 하게 되었다.

 

나의 독서 이력서

요즘에는 옛날에 비하면 서점을 찾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 같다.왜 서점에 가지 않게 되었는가 하면, 그 이유는 스스로 글을 쓰게 된 데 있다. 서점에 내 책이 나열돼 있는 게 왠지 모르게 쑥스럽기도 하고-나열돼 있지 않으면 이것 역시 곤란한 일이긴 하지만-해서 서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뜸해지고 말았다.

집 안에 책이 너무 많이 쌓여 있는 탓도 있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몇백 권이나 되는데, 그 위에다 쌓고 또 쌓는 것이 어쩐지 어리석게 느껴진다. 지금 쌓여 있는 책 더미를 완전히 정리하고 나면 서점에 가서 보고 싶은 책을 사 모아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웬일인지 이게 전혀 줄지를 않고 오히려 점점 늘어만 가고 있는 형편이다.

<블레이드 러너>는 아니지만, 정말이지 나도 ‘독서용 복제 인간’ 같은 게 갖고 싶다. 복제 인간이 부지런히 책을 읽고 “주인님, 이건 좋습니다. 읽으셔야만 합니다”라든가, “이건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요약해서 가르쳐 주면 나도 무척 편하겠다. 딱히 복제 인간이 아니더라도 활력이 넘치고 한가한 데다 책에 대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지만, 좀처럼 그렇게도 되지 않는다.

서점에 별로 가지 않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외국 소설을 번역한 신간이 눈에 띄게 줄어든 데도 있다. SF라든가 추리물이라든가 모험 소설 같은 건 꽤 많이 번역되지만, 이런 번역물들은 읽을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섞여 있어서 어지간한 나도(한 때는 무턱대고 읽어댔었지만) 요즘에는 별로 읽지 않게 되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순수 문학을 번역하여 발행한 수는 극히 적다. “순수 문학은 전혀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팔리지 않습니다”라고 출판사 사람들은 구실을 갖다 대지만, 어쨌거나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독서 시간이 대폭 짧아진 데도 원인이 있다. 최근 출판사 사람들과 만나면 한결같이 입을 모아 “요즘 젊은이들은 느긋이 앉아서 책을 읽을 줄 몰라요”라며 투덜거리고, 나 역시 맞장구를 치며 “그래요, 참 큰일이군요” 하고 말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 자신도 별로 책을 읽지 않게 된 것이다.

10대 시절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장 크리스토프>,<전쟁과 평화>와 <고요한 돈강>을 세 번씩이나 읽은 것을 돌이켜 보면 아주 먼 옛날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당시에는 좌우지간 책이란 건 양만 많으면 그저 기뻤고, <죄와 벌> 같은 건 페이지가 적어서 불만이었을 정도다. 그 당시에 비하면-한 권의 책을 꼼꼼하게 읽게 되기는 했어도-독서량은 5분의 1정도로 줄어든 것 같다.

왜 이렇게 책을 읽지 않게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오로지 독서에 할애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독서 이외의 활동에 많은 시간을 빼앗겨, 그 악영향으로 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고 만 것이다. 가령 조깅에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음악을 듣는 데 두 시간, 비디오를 보는 데 두 시간, 산책을 한 시간…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가만히 엉덩이를 붙이고 책을 읽을 시간 따위는 거의 없는 것이다. 이건 진짜다. 뭐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어야 할 때는 한 달에 몇 권이나 눈을 부릅뜨고 읽지만,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라면 솔직히 말해서 요즘에는 도무지 읽지 않는 형편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하기야 이런 상황 내지는 경향에 빠져 버린 사람이 결코 나 하나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다지 책을 읽지 않게 된 것도 역시 독서 이외의 다양한 활동에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대폭 할애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라고 말하니 갑자기 너무 아저씨 같은 느낌이 들지만-전체적으로 꽤 시간이 남아돌아, ‘할 수 없군, 책이나 읽을까’ 하는 기분이 지금보다는 비교적 쉽게 들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비디오도 없었고, 레코드도 상대적으로 비싸서 그렇게 많이 살수 없었으며, 스포츠도 오늘날만큼 유행하지 않았다. 당시의 분위기도 매우 이론적이어서 어떤 유의 책을 일정량 이상 읽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풍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뭔데요? 그런 거 읽지 않았어요. 난 몰라요”라며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그 외에 할 일도 잔뜩 있는 데다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장소와 방법, 매체도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 결국 독서라는 것이 두드러진 신화적 매체였던 시대는 급속하게 종식되고 만 것이다. 오늘날 독서란 수많은 각종 매체 중의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것은 대부분의 사회 현상이 그렇듯,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교양주의적,권위주의적 풍조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걸-정말로 사라져 가고 있는 거겠죠?-기쁘게 생각하지만, 한 사람의 글쟁이로서는 책이 별로 읽히지 않게 된 것을 섭섭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섭섭한 한편, 우리(출판업에 관여하는 다양한 사람들)가 그 의식과 체질을 전환하여, 새로운 지평에서 새로운 종류의 우수한 독자들을 발굴해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한숨만 쉰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술을 혼자 마시는 습관

나는 혼자서 술을 마시는 일이 많다. 집에서도 음악을 듣거나 비디오를 보면서 맥주나 위스키, 와인을 혼자서 홀짝홀짝 마시고, 혼자 밖에 나가서도 훌쩍 바 같은 데 들어가 두세 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나는 자폐증은 아니니까-일전에 3년 만에 업계의 파티에 참석했더니 모 여성 작가가 “어머나, 무라카미 씨도 파티에 다 나오시네요. 자폐증이 아니셨네” 하며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다른 사람과 함께 즐기며 술을 마시는 일도 있다. 그러나 횟수로 따져 보면 혼자서 마시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원래 친구가 그다지 않지 않은 데다 지방의 소도시에 살고 있는 탓도 있다.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절대로 자폐증 같은 건 아니다. 내가 자폐증이라면 무라카미 류 씨는 자개증이다.

하긴 바에서 혼자 술을 마셔도 결코 필립 멀로우라든가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처럼 딱 작정하고 조용히 앉아 분위기를 잡으며 마시는 건 아니고, 그저 멍청히 술을 마신다. 조용히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과 멍청하게 혼자서 술을 마시는 건 한눈에 척 보기에도 상당히 다르다. 한신 타이거스를 놓고 얘기하자면 마유미와 오카다 선수 정도로 다르다. 같잖은 말도 하지 않고, 트렌치 코트 깃도 세우지 않고, 물끄러미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멍청하게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저쪽에서 쓸쓸한 눈으로 마티니를 마시고 계신 분께 내가 한잔 내겠어요”라는 얘기를 해주는 여성도 나타나지 않는다(나타날 턱이 없지).어째서 이런 식으로 멍하니 있는가 하면, 우선 내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의 시력 차가 몹시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상시 바깥 세계에 있을 때는 나는 양쪽 눈의 근육을 긴장시켜서 양쪽의 상을 인위적으로(물론 극히 자연스럽긴 하지만) 일치시킨다. 그러나 술집에 들어가 혼자서 술을 마시거나 할 때는 그 근육을 이완시켜서, 말하자면 ‘오카다 현상’이 생겨 얼굴 전체가 멍청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집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집사람한테 “당신은 왜 나만 보면 항상 그렇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고 야단을 맞는다. 그러나 나라고 해서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긴장을 하고 있으란 법은 없잖은가.두 번째 이유는 내가 전부터 꽤 오랫동안 술집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바텐더를 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스탠드에서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으면 일하는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신경 쓰이게 마련이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많다. 상대방은 손님이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아무래도 좋은 거겠지만, 그래도 역시 그런 하드보일드 풍의 사람이 눈 앞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침착할 수가 없다. 종종 유리컵을 깨거나 칵테일의 배합을 잘못하거나 한다. 그러니까 나는 손님으로서 조용히 있는 것보다는 멍청하게 있는 쪽을 택한 것이다. 멍청히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손님이란 바텐더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고객이다. 어찌 됐건 그런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혼자서 술을 마시는 버릇이 들어 버리면 여자가 옆에 앉아 얘기를 하는 바 같은 데 들어가는 게 무척 난감하다. 일단 눈도 긴장시켜야 할 뿐더러 화제를 계속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대체로 처음 대면한 사람과는 거의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성격인 것이다.

며칠 전 호텔에 투숙해 일을 하고 있는데, 밤 열한 시 무렵에 맥주가 마시고 싶어져서 훌쩍 거리로 나섰다. 호텔의 바에서 마시는 것도 괜찮지만, 어쩐지 거리의 등불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득 눈에 뜨인 스낵 바 같은 곳에 들어가 맥주를 주문하자 까만 양복을 입은 남자가 정중하게 맥주를 날라 왔다. ‘엇, 이거 잘못 들어왔나?’ 하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아니나다를까 이어서 짤막한 드레스를 입은 스무 살 정도의 아가씨가 와 내 옆에 앉더니 “안녕하세요, 혼자세요?” 하고 물었다.

이럴 땐 정말 눈앞이 아찔하다. 나로서는 일의 긴장을 풀기 위해 혼자서 멍하니 맥주를 두세 병 마시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런 때 옆에 이 방면의 달인이자 대가인 안자이 미즈마루 씨가 있었다면 레슬링을 할 때처럼 재빨리 교대를 하고 빠져 나갈 수 있을 텐데, 혼자서는 도무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술집에서 여자와 얘기를 하면서 가장 난처한 경우는 직업이 뭐냐고 물어 올 때다. 상대편 역시 처음 만나는 사람과 할말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날씨 얘기 다음에는 직업을 화제에 올리게 된다. 그렇지만 이제 겨우 일을 끝내고 느긋하게 쉬려고 오는데, 나로서는 술을 마시면서 일 얘기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음, 그러니까 뭐랄까 자유업 같은 건데…” 하고 얼버무리다 보면 화제가 금방 동이 나고 만다. 야구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술자리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즈 얘기를 해 봤자 분위기만 침울해질 뿐이다.

그럭저럭 별로 대단한 얘기를 한 것도 없이 맥주를 세 병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나도 피곤했지만, 상대방 여자도 무척 피곤했을 것이다. 참 안됐다 싶다.

문득 생각이 났는데, ‘뜨개질 바’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여자들은 묵묵히 뜨개질을 하고 있고, 그 옆에 손님이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는 형식의 바 말이다.

“뭘 뜨고 있지”

“응… 장갑.”

이런 느낌이라면 나도 차분히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맥주가 좋다

옛날에,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아직 얼마 안 됐을 무렵에, 당시 잡지 <태양>의 편집장이었던 아라시야마 고자부로 씨에게서 “아, 무라카미 군. 자네는 늘 맥주만 마시는 것 같은데, 그건 아직 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맥주에서 다른 술로 기호가 바뀔 거라구”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네에, 그렇습니까?” 하고 그때는 반신반의하며 대답했지만, 확실히 그로부터 6년 남짓 지난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체적인 주량 중에서 맥주가 차지하는 비율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맥주를 마시는 양 자체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거기에 더해 위스키나 와인을 더 많이 마시게 된 것이다. 나는 젊었을 적에는 별로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니었지만, 워낙 위가 튼튼했기 때문에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평균적이거나 평균을 훨씬 넘을 정도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일 하나가 끝나고 술잔을 기울일 때의 기분이란 분명 인생에 있어서의 작은 행복이다. 외국 속담에 “인생에 있어서 행복은 세 가지밖에 없다. 식전의 술 한 잔과 식후의 담배 한 대다”라는 게 있는데, 이것도 꽤 설득력이 있다.

하긴 내 주변을 둘러보아도 나이를 먹고 주량이 늘었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와 같은 연배인 사람들 대부분은 속에 무슨 탈이 나서 “아니, 난 그렇게 많이 마실 수 없어서”라며 두세 잔으로 그만둔다. 젊었을 때 주량이 셌던 사람에게 이런 경우가 많다. 정열적인 투수가 어깨를 못쓰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젊었을 때 너무 마셔대서 내장이 피폐해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30대 후반에 접어든 샐러리맨의 대개는 관리직의 지위에 올라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처자식에 대한 책임도 있으므로 비교적 건강에 신경을 쓰게 된다. 인생이란 마시고 싶은 만큼 실컷 마실 수 있는 때가 황금기다.

시부야 역 앞 같은 데서 단숨에 술을 마신 뒤 왁자지껄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이 사람들 중 반쯤은 앞으로 1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주머니에 위장약을 숨겨 놓고 술을 마시겠지 하고 상상한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그들의 환호성 속에서도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게 느껴져 제법 정취가 있다.

하긴 나에게도 학창 시절에 하루가 멀다 하고 술집에서 술을 퍼 마셨던 시절이 있었다. 대개는 싸구려 정종으로, 그것을 벌컥벌컥 마셔대니 당연히 뒤끝이 안 좋았다. 누군가가 형편없이 취해 나동그라지면 대학 구내에서 ‘미제 타도’라고 씌어진 플래카드를 들고 와, 그것을 들것 삼아 하숙집까지 옮긴다. 한번은 옮기는 도중에 플래카드가 찢어져 친잔소 옆 계단에다 신나게 등을 부딪힌 일이 있지만 서도.그러나 그런 얼빠진 소동도 한 넉 달쯤 가다가 끝이 나고, 그 이후로는 모두들 와글와글 소란을 피우며 술을 마시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 덕분에 나는 나의 그 튼튼한 위를 한층 광을 내가면서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거나 먹어도 맛있고, 술을 마셔도 뒤끝이 안 좋은 일도 없고, 명치 언저리가 쓰린 일도 없다. 실제로 볼 수가 없어서 유감이지만, 내 위는 제법 괜찮은 색깔에 돌고래처럼 매끌매끌하고 생기가 있을 것 같다. 바다에 풀어 주면 어딘가로 헤엄쳐 가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술 얘기로 돌아가서, 나는 지금은 정종이란 걸 거의 마시지 않는데, 이것은 학창 시절 내내 정종으로 줄곧 고생을 하던 후유증 때문이다. 그 책임은 100퍼센트 내 쪽에 있지 정종 탓이 아니다. 만약 정종을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된다면, 나는 일절 자기 변호를 하지 않고 그 죄 값을 치를 생각이다.

그와 반대로 맥주 나라에 가면 나는 필시 VIP급 국빈으로서 대우받을 것이다. 개인적인 소모량만 해도 굉장하고, 소설 속에서도 꽤나 맥주를 지지하고 선전해 왔다. 내 소설을 다 읽고 나자마자 곧장 가게로 달려가 맥주를 사왔다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 소설의 질이야 어찌 됐든 적어도 어떤 종류의 효용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와인은 최근에 꽤 마시게 되었고, 지금도 부동액 소동에 아랑곳없이 열심히 마시고 있다. 원래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몇 번인가 꼬임에 빠져 야마나시에 있는 양조장을 들락거리다 보니 폭 빠지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곤 해도 내가 마시는 와인은 그리 고상한 건 아니고, 가장 싼 캘리포니아 산 와인을 사와서 페리에를 섞고, 거기에 레몬즙을 짜 넣어 주스 대신으로 꿀꺽꿀꺽 마시는, 퍽 엉망진창인 와인이다. 그러나 이게 또 꽤 맛있다. 리처드 브로티건을 알코올 중독자로 만든 것으로 유명한 가로의 푸어보이 보틀(손잡이가 달린 대형 술병) 같은 건, 겉보기에도 와일드해서 그런 목적에는 딱 어울린다. 느긋하게 음미하며 마시기엔 로트실트의 붉은 와인이 최고지만, 이건 한 병에 2만 엔 이상이나 가니 그렇게 자주 마실 수는 없다. 위스키는 비교적 값비싼 것을 좋아해서, 외국에 갈 때마다 시바스 리갈하고 와일드 터키를 면세점에서 사와서 주로 온더록으로 마신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빈 병, 빈 캔을 한 달엔 한 번밖에 수거하지 않는다. 그때 한 달에 걸쳐 마신 와인이나 위스키 병, 맥주 캔을 지정된 장소까지 들고 가는데, 이게 또 상당한 양이라서 양손에 봉지를 들고 두 번 정도 왕복해야만 한다. 그러니 그때마다 제대로 쓰레기를 버리는지 안 버리는지 체크하는 이웃 아줌마가 “무라카미 씨도 굉장한 술꾼이군요” 하며 질린 표정을 짓는다. 매달 그런 소릴 듣는 것도 몹시 고통스럽다.

최근에는 어찌 된 일인지 정종이 굉장히 좋아져서 대낮부터 국숫집에 앉아 조금씩 마시는 횟수가 늘었다. 미즈마루 씨의 말에 의하면 그건 인간적으로 성장했다는 뜻이라는데, 정말일까?

 

나와는 무관한 정치의 계절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선거 때 투표란 걸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왜냐고 물어도 한마디로 제대로 대답할 수 없어서 “글쎄, 어째서일까요” 하고 어물어물 넘기고 마는데, 좌우지간 투표는 안 한다. “그건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는 거 아니야?” 하는 소리를 들으면,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투표는 안 한다. 정치적 관심이나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투표는 안 한다.

얘기에 따르면 그리스 같은 나라에서는 선거 때 투표하는 것을 국민의 의무로서 법률로 정해 놓았고, 명백한 이유도 없이 기권을 하면 모든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한다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없으니까 투표를 하지 않아도 일단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 어느 쪽이 제도로서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일본의 방식이 좋다고 생각한다. 투표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까. 내 주변에도 선거 때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다.

어째서 선거 때 투표를 하지 않는가에 대한 그들(나를 포함해서)의 이유는 대체로 비슷하다. 첫째로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 둘째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선거의 내용 자체가 매우 수상쩍은 데다 신뢰감을 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세대에는 ‘가두 시위’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많고, 시종일관 “선거 따윈 기만이다”라는 선동을 믿어 왔으므로, 나이를 먹고 제법 안정이 되었어도 고분고분하게 투표소에 가질 않는 것이다. 정당의 선거 운동과는 무관하게 한결같은 신념으로 지내 왔다는 생각도 든다. 넌 그때 뭘 했는데 하고 물으면, 무얼 했는지를 거의 기억할 수 없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선거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건 아니므로, 뭔가 명확한 쟁점이 있고, 현재의 정당들이 하고 있는 선거 운동의 도식 같은 게 없어진다면 우리는 투표를 하러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경우는 없었다. 기권이 많은 것은 민주주의의 쇠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나는 그런 경우를 제공할 수 없었던 사회 시스템 그 자체 속에 민주주의 쇠퇴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원칙론을 앞세워 기권자에게만 책임을 지우려 하는 건 잘못일 것이다. 마이너스 4와 마이너스 3 중 한 쪽을 선택하기 위해 투표소까지 가라고 해 봤자, 난 안 간다, 그런 데는.

지바에서 살았을 때 지방 선거가 있었다. 내가 마당에서 고양이와 놀고 있는데 동네 반장 격인 아줌마가 밭에서 갓 뽑은 시금치를 들고 와서는, “저기 말이죠, 이 근처 사람들은 모두들 아무개 씨한테 투표를 하기로 결정했어요”라고 했다.

내가 잘 이해를 못하고 “네에, 그렇습니까?” 하자 그 아줌마는 “아무개 씨한테 표를 던지면 도로 정비라든가 하수구 청소 같은 문제를 해결해 준대요”라고 말하며 시금치를 두고 돌아갔다. 내가 그것이 투표 의뢰라는 걸 안 것은 얼마 지나서였다. 그때는 허 참, 과연 지바로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나는 여러 지방에서 살아 봤지만 시금치로 투표 의뢰를 받은 곳은 지바 말고는 없었다. 물론 시금치는 맛있게 먹고, 투표를 하러 가지는 않았다. 나야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으니까 하수구 청소 같은 건 해주는 게 당연하다. 경험상으로도 아무개 씨에게 투표를 하기보다는 매일 시청에 전화를 걸어 불편을 호소하는 게 빠르고, 올바른 절차다. 이런 일이 있으면 투표를 하러 가기가 더더욱 싫어진다. 지바에서 사는 것 자체는 무척 즐거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대로 투표를 한 번도 하지 않고 일생을 마치고 말 것이냐 하면, 절대 그런 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나의 직감에 지나지 않지만, 금세기 중에 반드시 다시 한 번 중대한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싫어도 스스로 입장을 정해야만 할 것이다. 다양한 가치관들이 철저하게 전환되어, ‘무엇이든 적당히’로는 끝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 역시 영화 <빅 웬즈데이>의 라스트 신처럼 투표 용지를 손에 들고 투표소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

뭐 이건 단순한 예측일 뿐이고, 내가 하는 예측의 대부분은 빗나가니까 대수롭지 않은 얘기지만, 하여튼 그런 상황이 머지않아 닥쳐올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든다. 이것은 1920년대의 미국과 그에 뒤따른 대공황에 관한 역사서를 읽어 보면 오싹할 만큼 피부로 느껴지는 일이다. 미증유의 번영과, 화려하고 호화로운 문화를 구가하던 1920년대의 미국은 하루아침에 와해되고, 그 후로는 어둡고 무거운 나날과 전쟁이 찾아온다.

물론 서로 다른 두 시대와 사회를 포개어 놓고 보려는 생각에는 근본적으로 무리가 있지만, 경제적 번영의 밑바탕이 얄팍한 점이나 흥청망청 대는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세계적인 부의 편중 상황을 보고 있으면 1920년대의 미국과 현시대 사이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수많은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저 대공황에 필적하는 크래시(붕괴)가 닥친다면, 당시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방만한 문화 주변에 기생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사들 대부분은-어쩌면 나도 그 중 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날려 가버릴 것이 눈에 훤하다. 내가 이런 말을 해 봤자 별 설득력이 없겠지만, 우리는 이제 슬슬 그러한 크래시=가치 붕괴에 대비하여 스스로를 재확인해야만 할 시기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고소 공포증

나는 높은 곳이라면 딱 질색이다. ‘여기에서 떨어지면 아마 죽을 거야’라는 생각이 드는 장소에 가면 허리께가 찡한 게 더 이상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런 나에 비하면 아내는 높은 곳을 밥보다 좋아해서 함께 여행을 가기라도 하면 반드시 높은 곳에 올라가 깡총깡총 뛰기도 하고 한 발로 서 있기도 하면서 즐거워한다. 그런 행동을 나로선 이해할 수 없다. 단순히 남이 싫어하는 짓을 굳이 하려 드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높은 곳이라고 해서 어디든 다 무서워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같은 높이라도 산이라든가 절벽같이 자연적으로 생긴 높은 곳은 빌딩이라든가 탑 따위의 위에 비하면 그다지-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무섭지 않다. 제일 무서운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그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높은 곳이다.

내 책의 표지 그림을 자주 그려 주시는 사사키 마키 씨의 집도 고층 아파트의 9층인가 10층인데, 나는 그 곳에 가는 게 굉장히 겁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뻥 뚫린 바깥 계단을 한 층 내려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안쪽 벽에 찰싹 달라붙어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가고 있으며 매번 담당 여성 편집자가 “무라카미 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라며 눈을 흘긴다. 옆에서 보면 분명 ‘도대체 지금 뭘 하는 거야?’겠지만, 어쨌거나 공포를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 공포의 질을 설명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하긴 나 역시 공포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일부러 그런 유의 비디오를 보여 주면서 “어이, 저것 봐. 전기 톱에 손목이 날아갔어” 하고 놀려대니까 남의 말을 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가장 겁났던 곳은 빈에 있는 성 슈테판 사원 위였다. 그때도 나는 전혀 그런 곳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아내가 “어때요, 무섭지 않아요. 올라가 보자구요. 사람이라면 한걸음 한걸음 진보해야 돼요” 하며 끈질기게 설득하길래, ‘그럼 어디 한번’ 하는 생각으로 그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말았다. 퀼른 대성당에 올라갔을 때는 계단이었기 때문에 도중에 겁이 나서 도로 내려왔지만, 엘리베이터는 그럴 수도 없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그 곳은 바람이 휑휑 부는 깎아지른 듯한 지붕 위였다. 더욱이 한번 아래로 내려간 엘리베이터는 다음 손님이 올 때까지는 올라오지 않았다. 물론 지붕을 따라 철조망으로 된 울타리가 쳐져 있기는 했어도, 나로서는 그런 울타리 따위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고, 얼어붙을 듯한 겨울바람이 쌩쌩 불어와서 도무지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무서움을 느껴야 하는 거라면 인간은 진보 같은 거 안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공포도 하나의 재산이다.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훌륭하고, 느끼면 바보라고 단편적으로 판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유럽의 오래된 건축물에는 꽤 무서운 곳이 많다. 특히 퀼른 대성당은 하늘에 닿을 듯이 뾰족하게 치솟아 있으므로 실제로 꼭대기에 올라가 보면 어중간한 고층 빌딩의 옥상 같은 데보다 훨씬 스릴이 있을 뿐더러 공포의 질도 높다. 비교 문화론을 펴려는 건 아니지만, 성 슈테판 사원 지붕 꼭대기에서 느끼는 고소 공포는 일본이나 미국에서 느끼는 고소 공포와는 상당한 질적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도 고소 공포증이 없는 사람에게는 필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럴 시간만 있다면 전세계의 이런 저런 높은 곳을 둘러보고 <고소 공포의 시점에서 본 고소 문화론>같은 걸 써보고 싶을 정도다. 이런 글은 단연코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따금 어째서 세상에는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 도무지 잘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아기에 높은 곳에 올라가 무서워했던 기억이 없고, 그렇다고 고소 공포증이 혈통적으로 유전된 것 같지도 않다. 또 ‘억압된 심적 트러블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딱히 짚이는 데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어떤 경위로 고소 공포증이라는 병에 말려들게 되었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이제 ‘공포의 선택이란 무작위적인 것이다’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즉 인간은 한두 가지 정도는 이른바 정신의 보호막으로서 공포가 필요하고, 결국 그 대상은 무엇이든 괜찮다는 얘기다. 나의 경우는 그것이 우연찮게 고소 공포증이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폐소 공포를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첨단 공포를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암흑 공포를 선택한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레이더스>에 나오는 저 유명한 인디애나 존스도 뱀한테는 꼼짝 을 못하지 않았나? 요컨대 공포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요인이고, 그것이 불합리하면 불합리할수록 그 유효성은 커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주의 암흑 속에 두둥실 떠 있는 바위 덩어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불안정한 생을 보내고 있는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못한다는 상황 쪽이 나로서는 더 없는 공포다.피사의 사탑도 3층까지밖에 올라가지 못했다. 그건 공포였다.

 

독서용 비행기

요즘 별로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는 글을 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무래도 좀 쑥스럽지만, 요 한 달 동안 꽤 많은 책을 읽었다. 일상적인 얘기를 글로 쓰면 이런 식의 일이 종종 일어난다. “담배를 끊은 지 2년, 몸 상태가 무척 좋다”고 쓰자마자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하거나, “넥타이를 매는 건 1년에 두세 번밖에 되지 않는다”고 쓴 직후에 연달아 세 번이나 넥타이를 맬 처지에 놓이거나 하는 식이다. 무책임하다고 하면 무책임한 일이겠지만, 뭐 세상이란 원래 다 그런 거다.

어째서 갑자기 책을 읽기 시작했는가 하면, 요 한 달 동안 전철이나 비행기를 탈 기회가 꽤 많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이동이 많으면 책을 많이 읽게 되는 것이다.

우선 남반구 항로의 비행기로 도쿄-아테네 사이를 왕복했으므로(편도 약 스무 시간) 그 동안 책을 세 권 읽었다. 존 어빙의 <워터메서드 맨(Water-method Man)>과 닥터로의 <다니엘 서>와 존 고어즈의 <해미트>다.

남반구 항로의 유럽행 비행기는 몸도 마음도 위장도 죄다 기진맥진하게 되지만, 적어도 책만큼은 잘 읽힌다.

<워터메서드 맨>은 3년인가 4년 전에 읽었을 때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 보니 맨 처음 읽었을 때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가프의 세계>만큼 완성도가 높지는 않지만 풍속 소설을 토막 낸 듯한, 독특하고 와일드한 재미가 있어서 푹 빠져 들게 되었다. 나의 개인적인 기준으로 따지자면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더 재미있는 책이 좋은 소설이다. 하기야 두 번이나 읽고 싶어지는 소설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지도 모르겠다.

닥터로의 <다이엘 서>도 <워터메서드 맨>처럼 시간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포인트를 잡기가 어렵지만, 한번 포인트를 포착하면 내 몸이 소설의 시간에 자연스레 감응하여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읽을 만한 소설이다.

고어즈의 <해미트>는 그런 풍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어 재미는 있었지만, 실재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놓은 만큼 다소 짜임새가 빤히 들여다 보이는 경향이 있는 듯했다.

비행기 안에서 독서벽이 붙어 버렸는지 귀국한 뒤에도 일하는 짬짬이 시간만 나면 핀천의 <경매 넘버 49의 외침>을 읽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영어로 읽어 보려고 시도하다 좌절했던 소설인 만큼, 번역본이 나온 것은 나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물론 핀천의 소설이니까, 술술 읽힐 뿐더러 재미도 있다고 할 수 없지만, 이만큼 우스꽝스러운 소설도 흔치 않을 테니 흥미가 있는 분은 꼭 읽어 보길 바란다.

그 다음에는 존 어빙의 신작(여전히 무턱대고 긴 소설) <더 사이더하우스 룰스(THE CIDERHOUSE RULES)>의 후반부를 다 읽었는데,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은 도저히 한마디로 말할 수 없으므로 통과해야겠다.

그러고 나서 스파게티 소설을 세 권, 크럼리의 <댄싱 베어>와 리처드 콘든의 <여자와 남자의 명예>(제목의 뜻은 불명)와 마이클 Z.류인의 <침묵의 세일즈맨>이다. 스파게티 소설이란 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로, 스파게티를 삶으면서 읽기에 적당한 소설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들 작품을 깔보는 게 니다. 스파게티를 삶으면서도 자꾸만 손에 들게 되는 소설이라고 해석해 주기 바란다. 세 권 중에서는 <여자와 남자의 명예>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는 누가 읽어 보라고 권하길래 류탄지 유 전집을 세 권쯤 읽었다. 나는 일본 소설을 그다지 읽지 않으므로 류탄지 유라는 사람이 문학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고, 몇몇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모리타 요시미쓰의 <그로부터>를 본 뒤로는 전전 일본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마쓰다 유사쿠처럼 느껴지고 만다. 책을 읽고 있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마쓰다 유사쿠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영화는 무척 재미있었지만.또 한 권, 저자인 스즈무라 가즈나리 씨가 보내 주신 <아직/이미, 무라카미 하루키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책도 읽었지만 이것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에 대한 평론서이므로 감상은 쓰지 않겠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씌어진 글을 읽는다는 건 어쩐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한 기분이 드는 일이다. 아마도 나와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거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세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끔 독자들과 만나 얘기를 할 때마다 항상 누군가를 대신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한편 아내는 그 동안 세 권의 책을 읽었다. 앨리스 워커의 <컬러 퍼플>과 헨리에트 폰 쉴러흐슈미트(이름 한번 길다)의 <히틀러를 둘러싼 여인들>과 키티 하트의 <아우슈비츠의 소녀>다. 그녀가 도대체 어떤 취미와 목적으로 책을 선택하는지 지금까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한마디로 부부라 해도 그 사이에 가로놓은 골짜기는 어둡고 깊은 모양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읽는 책의 영역과 집사람이 읽는 책의 영역은 거의 겹치는 일이 없으므로(고작해야 랩 크래프트 정도가 두 영역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서로가 제멋대로 좋아하는 책을 사 모아 우리 집의 책은 늘어 가기만 한다. 어떻게 좀 했으면 좋겠지만, 아마 어떻게도 안 되리라.

 

나의 주부 생활

결혼하고 2년째 쯤 되었을 때의 일인데, 나는 반년 정도 ‘주부(하우스 허즈번드)’ 노릇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이렇다 할 일도 없이 극히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반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한 페이지였던 것 같다.하긴 그 당시에는 특별한 ‘주부’ 노릇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우연찮게 사소한 인연으로 아내가 일하러 나가고 나는 집에 남게 된 것이다. 이럭저럭 벌써 12-13년 전 얘기로, 존 레논 이 ‘주부’가 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 전이다.

‘주부’의 일상은 ‘주부(하우스 와이프)’의 일상과 마찬가지로 평온하다. 우선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짓고, 아내를 출근시킨 뒤 뒷정리를 한다. 싱크대 속에 있는 그릇들은 곧바로 닦아야 하는 것이 가사의 철칙 중의 하나다.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들 같으면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하겠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당시 우리는 무형 문화재처럼 가난해서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살 수 없었고, 신문을 구독할 돈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돈이 없으면 생활이란 놀랄 만큼 심플해진다. 세상에는 ‘심플 라이프’란 브랜드도 있는데 ‘심플 라이프’에 관해서라면 내 쪽이 훨씬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침 설거지가 끝나면 빨래를 한다. 빨래를 한다 해도 세탁기가 없으니까 목욕탕에서 발로 꾹꾹 밟아 빠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시간은 걸려도 꽤 좋은 운동이 된다. 그리고 빨래를 넌다.

빨래가 끝나면 시장을 보러 간다. 시장을 본다고는 해도 냉장고가 없으니까(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가난하구나)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살 수는 없다. 그날 쓸 것만을 여분이 생기지 않도록 사는 것이다. 그러니 그날 저녁 반찬이 무된장국과 무조림과 잔멸치를 섞은 무즙이 되는 상황도 심심찮은 빈도로 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활을 ‘심플 라이프’라 부르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이라 불러야 좋겠는가?

시장을 보는 김에 ‘고쿠분지 서점’에 들러 책을 사거나 값싼 헌책을 사기도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다림질을 하고는 대충 청소를 하고(나는 청소하는 걸 싫어해서 그다지 꼼꼼하게는 하지 않는다) 저녁때까지 툇마루에 앉아 고양이와 놀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서 느긋하게 지낸다. 무엇보다 한가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에만도 <소년 소녀 세계 명작 전집>을 독파했고, <싸락눈> 같은 소설은 세 번이나 읽었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면 슬슬 저녁 준비를 한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된장국을 끓이고, 조림을 만들고, 생선 구울 준비를 한 뒤 아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린다. 아내는 대략 일곱 시 전에 돌아 오지만 이따금 야근을 하느라 늦어지는 날도 있다. 그러나-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 집에는 전화가 없으므로-연락을 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생선을 석쇠 위에 올려 놓은 채로 마누라를, “…” 하는 식으로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다.

“…” 이란 건 일상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잘 이해가 안 가겠지만, 매우 미묘한 종류의 감흥이다.

‘오늘은 늦어질 모양이니까 먼저 밥을 먹어 버릴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뭐 모처럼인데 좀더 기다려 볼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렇지만 배가 고픈걸’ 하는 식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집약되어, “…” 이라는 침묵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 미안해요. 저녁 먹고 왔어요” 하는 소리를 들으면 역시 화가 난다.

그리고 이건 기묘하다면 기묘하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다지 기묘한 얘기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자기가 만든 요리를 식탁에 늘어놓다 보면 아무래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모양이 뭉그러진 걸 내 접시에 얹게 된다. 생선이라면 머리 쪽은 상대방 접시에 올리고, 나는 꽁지 쪽을 먹는다. 이런 행동은 딱히 내가 자신을 주부로서 비하시켜서가 아니라, 그저 단순하게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요리사의 습성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나는 해석한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주부적’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속성 중에서 대다수는 결코 ‘여성적’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즉 여자가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주부적인 속성을 익혀 나가는 게 아니라, 그것은 단지 ‘주부’라는 역할에서 생겨나는 경향,성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남자가 주부의 역할을 이어받으면 그 사람은 당연히 많든 적든 간에 ‘주부적’으로 되어 갈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말하자면, 세상의 남자들은 일생 중 적어도 반년이나 1년 정도는 ‘주부’ 역할을 해보아야만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단기간이나마 주부적인 성향을 몸에 익히고, 주부적인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아야만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현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통념의 대부분이 얼마나 불확실한 기반 위에 성립되어 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유유히 마음껏 주부 생활을 누려 보고 싶은데, 마누라가 도무지 일을 하러 나가 주지 않으니 그러지도 못하고 난감할 뿐이다.

 

13일의 금요일

한때 점치는 데 열중했던 적이 있다. 물론 열중했다고는 해도 재미 삼아 하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면 가벼운 무아 지경 상태에 빠지고, 그럴 때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이런 저런 것들을 잘 알아맞혔다. 한 예로, 어떤 여자의 점을 치자 그녀의 연인이 몇 살이며 어디 출신이고 형제는 몇 명인지가 비교적 막힘 없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한번 이런 일을 하고 나면 치쳐서 기진맥진하게 될 뿐더러, 친구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니만큼 복채를 받을 수도 없어서 어느 사이엔가 그만두게 되었다.이런 것을 바로 초자연 능력이라고 봐야 할지는 의견이 분분하겠으나, 지금의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일종의 ‘감’ 같은 게 아닐까 한다. 특별히 점을 치지 않아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다른 사람과 접하다 보면 상대방의 몸짓이나 말투, 미묘한 분위기 같은 것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추측할 수 있게 되고, 무아 지경 상태에 몰입하다 보면 그런 ‘감’이 좀더 연마되어 그 영역이 더욱 확대되어 가는 것이다.

‘무아 지경 상태’라고 하기에는 좀 주제넘을지도 모르지만, 장편 소설을 쓰고 있다 보면 때때로 머리 속이 텅 비어 그런 비슷한 상태가 되는 적이 있다. 이름하여 ‘라이팅 하이’라는 건데, 이것도 딱히 초자연 현상이 아니라 단지 단순한 ‘감’의 확대일 뿐이다. 그런 상태에 빠졌을 때 재떨이나 지우개가 방안을 날아 다니는 일이 일어난다면 내 소설도 한층 무시무시해지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점이란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운수라든가 징크스 같은 것에도 흥미가 없다.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원칙적으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 자동차의 관계랑 비슷하다. 그 유효성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점이나 운수라는 건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면 늘 연연해 하게 마련이고, 무엇이든 한번 연연해 하기 시작하면 그 영역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 법이다. 나는 성격상 그런 부담이 증폭되어 가는 걸 참지 못하므로, 다소 재수가 없더라도 하려고 마음먹은 일은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 한다. 이것은 성격이 강하냐 약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 방식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결혼할 때 점쟁이에게서 “허 참, 이거 형편없는 궁합이군요”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결혼했다. 결혼해 보니 정말 형편없는 궁합이라는 게 판명되었지만, “뭐 어때” 하며 체념하고 15년 가까이를 함께 살고 있다. 정말로 형편없는 궁합이란 의외로 좋게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자주 이사를 하는데, 그때마다 점을 신봉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그 집은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 그 쪽은 무라카미 씨한테는 최악의 방향이라구요”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 사람 말에 따르면 나는 노상 최악의 시기에, 최악의 방향에서 이사할 집을 발견하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듯싶다.

그 사람은 또 “지금 그 곳으로 이사하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예요. 아픈 사람이 생길 거고, 일은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구요. 부모상을 당할 거고, 화재가 날 겁니다. 나카소네 수상이 삼선을 할 겁니다(이건 거짓말). 앞으로 두 달만 기다려요. 두 달만 지나면 모든 게 잘 풀릴 테니까”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두 달은 커녕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이사해 버린다. 한번 그렇게 양보를 하면 앞으로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나 두 달이 반년이 되고, 1년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말에 한번 지면 결국 언제까지고 계속 지게 된다. 그러니까 ‘아, 괜찮아. 될 대로 되라지 뭐’ 하는 배짱으로 당당하게 뚫고 나간다. 이런 진취적인 자세를 취하는 한 운세 따위에 질 리 없다. 그러는 사이에 그 사람도 포기했는지 우리 이사에는 일절 참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성격은 옛날부터 죽 그랬던 것으로, 고등 학교 때는 어머니가 대학 입시를 위해 신사(역주:일본에서 황실의 조상이나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에서 사온(사온 건지 받아 온 건지) 잡귀를 쫓는다는 화살을 둘로 뚝 부러뜨려 내다 버린 일이 있다.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화살 하나쯤 부러뜨렸다고 해서 대학에 떨어진다면, 대학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뭐랄까, 자포자기 비슷한 실험 정신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국립 대학은 떨어지고 두 군데의 사립 대학에 합격했다. 그냥 ‘TKO승’ 같은 거다. 부모님은 “사립 대학은 돈이 많이 든다는데” 하고 중얼중얼 불평을 늘어놓으셨고,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국립 대학에 가지 않아서 그 후에 어떤 불이익을 당했던 기억은 없다. 어쩌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점괘를 믿거나 안 믿거나, 미신을 신봉하거나 신봉하지 않거나 그것은 각자 알아서 좋을 대로 할 일이고, 다른 사람이 이러쿵저러쿵할 문제도 아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굳이 흉일에 결혼식을 올리려는 타입의 사람들이 좋다. 흉일이 됐든 뭐가 됐든 우리는 잘해 나갈 거라는 신념이 있으면 무엇이든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책임은 지지 못하겠지만.

 

잡지를 즐기는 법

출판 관련 업계의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하다 보면, “무라카미 씨는 현재 어떤 잡지를 가장 재미있게 보고 계십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 일이 많다. 요즘은 잡지 전쟁이 워낙 치열하므로 그만큼 만드는 쪽도 상당히 진지하게 상황을 분석해 나가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해 봤자 나는 잡지를 열렬히 읽는 독자가 아니고, 가끔 마음이 내키면 손에 들고 페이지를 훌훌 넘기는 정도기 때문에 어떤 잡지가 현재 가장 재미있고, 어떤 잡지가 제일 급진적인지 따위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을 것 같다. 첫째로 이렇게 엄청난 양의 비슷비슷한 잡지들이 서점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지금, 나로서는 선택 그 자체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것 같다. 대체 누가 오후 4시 30분의 어슴푸레함과 오후 4시 35분의 어둑어둑함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어쩌면 그런 것을 차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약간 막연한 규칙하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런 식의 선별 작업에는 별로 흥미가 없다.

요컨대 잡지의 수가 너무나도 많아서 어느 게 어떤 잡지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친구 하나가 “좋은 잡지란 폐간된 잡지다”라고 했는데, 그 기분이 이해가 간다. 구태여 이름은 거론하지 않겠지만, ‘그것도 몇 년쯤 전에 폐간되었으면 아쉬웠을 텐데’ 하는 잡지도 몇 개쯤 머리에 떠오른다. 폐간돼 버린 잡지는 오히려 두 번 다시 손에 넣을 수 없으므로-당연하다-‘꼬박꼬박 발간될 때 소중히 여길걸’ 하고 금방 후회하게 된다.

지금은 없어진 <해피 엔드 통신> 같은 잡지는 내가 좋아 나서서 일을 했지만 폐간되어 섭섭하다. 그런 얘기를 당시 <해피 엔드 통신>의 편집을 맡았던 가가 야마히로 씨에게 했더니, 그는 시니컬하게 입을 삐쭉거리면서 “다들 그렇게 말해 주지만 폐간되고 난 뒤에 동정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구요”란다. 뭐, 만드는 쪽에서 본다면 지당한 말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가가 야마히로 씨에게 하면 이것 역시 ‘때늦은 동정론’의 한 변형이 될지 모르지만, 내가 비교적 글을 쓰기 쉬웠던 잡지는 잘 폐간되어 버린다. 이 <해피 엔드 통신>도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던 데 비해선 일을 열심히 했고, 주오코론샤에서 나오던 <우미>에서도 갓 등단한 신출내기치고는 피츠 제럴드나 카버의 작품을 많이 번역했다. 그리고 문화출판국에서 발간했던 <투데이>라는 잡지에서도 여러 가지로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나 같은 사람이 유유히 기분 좋게 일을 할 수 있었던 잡지는 어쩌면 자연 소멸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초샤의 <대 컬럼> 같은 건 두 번 다시 나오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대충 읽는 잡지 중에서도 비교적 열심히 보는 걸 꼽으라면, 우선 <플레이 가이드 저널>이라는 간사이 지방의 정보지를 들 수 있다.이 잡지에는 간사이 지방 일대의 영화나 콘서트 그 밖의 갖가지 정보밖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도쿄에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당연하지만 도쿄의 일반 서점에서는 팔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럼 종류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점’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 자질구레한 정보를 세밀히 체크해 보면 도쿄와 간사이 지방 사람들의 다양한 사건에 대한 의견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퍽 재미있다.

예를 들어 간사이 지방에 있는 한 텔레비전 방송국의 프로그램 시간표를 보니 <혹성 탈출> 시리즈를 다섯 편, <쇼와 잔협전>을 세 편이나 한꺼번에 연속해서 방영한다고 되어 있었다. 아무리 설날이라고 해도 도쿄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절대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다음날이 설날 아침이니까 한밤중까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이야, 저 원숭이 가면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정말” 하면서 <혹성 탈출> 다섯 편을 연속적으로 보며, 술을 마시거나 설날 음식을 먹는 간사이 지방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찔어찔하다. 그리고 그 외에도 나카지마 같은 사람의 칼럼을 읽을 수 있어 즐겁다.

<플레이 가이드 저널>말고는 <광고 비평>이라는 잡지의 텔레비전 CF 소개 기사를 뽑아서 읽는다. 어째서 그런 걸 읽느냐 하면, 나는 텔레비전에도 CF에도 전혀 흥미가 없고, 대부분의 CF는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적 없는 CF를 카피와 스틸 사진만으로 감상하는 것은 매우 기괴하고 쓸데없는 일이다.

마침 여기 ‘맛김’의 광고 필름을 소개하는 게 있으니 잠깐 발췌해 보겠다.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이토 시로와 부하인 미네 노보루.이토:야마시타 군, 자네는 며칠 전에 아직 맛김을 먹어 보지 못했다고, 분명히 그렇게 얘기했지?

부하:아, 네. 견문이 부족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하 생략)이런 식인데, 카피만 읽으면 이게 어떻게 연간 제2위의 CF가 되었는지, 그 재미의 질을 잘 파악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실제로 본 사람들은 재미있다고들 하니까 뭐… 심각하게 ‘맛김’ CF의 영상을 상상해 보는 요즈음이다.

누군가 <텔레비전 CF 걸작편>이라는 비디오 같은 걸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의외로 잘 팔리지 않을까? <메이킹 오브 맛김> 같은 것을 말이다.가가 야마히로는 그 후에도 잡지사 몇 군데를 망하게 했다.

 

어정쩡한 내 고향

나는 교토에서 태어났지만 바로 효고 현 니시노미야 시 슈쿠가와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가, 다시 같은 효고 현의 아시야 시로 옮겼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 출신인가는 명확하지 않지만 10대를 아시야에서 보내고, 부모님의 집도 그 곳에 있으니까 일단은 아시야 출신이라고 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좀더 막연하게 ‘한신칸 출신’이라고 해야 내 마음도 편하겠지만, 이 ‘한신칸’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간사이 지방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해하기 힘들다.

하긴 아시야라고 해도 내가 자란 곳은 지금 한창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공주병 붐이 일어난 아시야가 아니라,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인 아시야니까 아무래도 솔직히 “아시야 출신입니다”하고 말하기가 좀 그렇다. 괜히 쑥스럽다. 우리 집 주위는 납치당할 것 같은 순간에 큰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우르르까지는 아니더라도 네댓 명 정도는 좋이 튀어나올 듯한, 극히 평범한 주택가다.

예전에 덴엔초후 시 출신의 남자와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도 “그렇다니까. 정말 그래”라며 동감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만 해도 말이지, 덴엔초후에서도 가난한 쪽에 속하는데, 태어나고 자란 곳이 덴엔초후라고만 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굉장하다고 놀란다니까. 정말 답답해서 원.” 그런 얘기였는데 진짜 답답할 것 같다. 나만 해도 10대 시절을 아시야에서 보내면서 ‘공주님’ 같은 여자 아이와는 단 한 번도 말을 해본 기억이 없다. 아시야에 대해 지금도 가장 잘 기억나는 것이라면, 한밤중에 종종 집을 빠져 나가 해안가(지금은 이미 없어지고 말았지만)에 가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정도인데, 그런 건 딱히 아시야가 아니더라도 바다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줄곧 “고향이 어디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고베 쪽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고베요, 좋은 곳이죠”라는 소리를 듣는 일이 많아 이것도 또 찜찜하여, 요즘에는 “효고현 남부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효고 현 남부’라는 말은 왠지 모르게 일기 예보처럼 시원시원해서 퍽 마음에 든다. 그러나 출신지를 밝히는 일 하나로 심각하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해야 한다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나 자신은 친구들이 많이 있는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므로 돌아가서 살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지만, 도쿄의 대학을 나와 도쿄의 회사에 다니는 코스를 밟아 결혼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한신칸 출신의 친구들이 요즘 들어 탁탁 신변을 정리하고 간사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득 둘러보니 나와 고등 학교 동창이면서, 지금도 도쿄에 있어서 연락이 닿는 친구는 딱 한 명 밖에 없다. 그들이 귀향하는 이유를 대충 요약하자면, 아이들도 제법 컸고, 도쿄보다도 한신칸 쪽이 훨씬 주거 환경도 좋으니까 이제는 슬슬 속속들이 잘 아는 곳에서 느긋하게 지내고 싶다고 하는 정도가 된다. 대개의 회사는 간사이에 지사(혹은 본사)가 있어서 도쿄를 떠난다 해도 별달리 생활에 곤란을 겪는 일은 없다. 때때로 이렇게 믿는 구석이 있어서 한신칸 출신들은 도쿄에 와서도 맹렬하고 활달하게 활동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개중에는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이것은 나의 친구들과 내가 아는 사람

들에게 한정된 얘기인지도 모르겠지만 모두들 비교적 느긋하게 지내지,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다거나 다른 사람의 등을 치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뭐 그러면 좀 어때” 하는 정도에서 대개 일이 수습돼 버린다.

로렌스 캐스던 감독의 영화 중에 <다시 만날 때>란 게 있다. 1960년대 아이들이 십몇 년인가 만에 재회를 했지만 애증이 뒤범벅이 된 동창회가 되고 만다는 얘기로, 만약에 똑같은 설정 하에서 한신칸 출신들을 주인공으로 기용했다면, 그 영화는 그다지 애증이 엇갈리지 않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오랜만이야. 요즘 뭐 하고 지내?”

“소설 쓰고 있어”

“소설 쓰는 것도 힘든 일이겠지?”

“그저 그렇지 뭐”

“그래, 잘해 봐. 건강하고.”

이런 정도로 별다른 얘기 없이 영화가 끝나 버릴 것 같다. 오모리 가즈키가 <다시 만날 때>를 다시 제작한다면 어쩌면 이런 노선에 근접할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아시야로 돌아간 친구와 오래간만에 도쿄에서 만나 한신칸에 대한 갖가지 새로운 정보를 들었다.

“일전에 우리 어머니가 신문에 가정부 모집 광고를 냈더니 스물대여섯 명이나 신청을 했지 뭐야. 그래서 아시야 시민 회관을 빌려서 면접을 했더랬어”라고 그는 말했다. 가정부 면접을 하는데 시민 회관을 빌렸다니 스케일이 크다고 해야 할까, 기개가 웅대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굉장하다.

“그래서 어머니가 혼자서 하기는 힘들다고 해서 나도 따라갔었거든.

여하튼 스물 몇 명이니까 물어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할 것 아냐.”

그의 얘기에 따르면 그 스물 몇 명 중에는 ‘어째서 이런 사람이’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아름답고 이지적인 사람도 있어서, 한 사람을 고르는 데도 굉장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나도 한 번 아시야 시민 회관에서 가정부 면접을 보고 싶다.

 

하루키 구함

며칠 전 어떤 편집자를 만나서 얘기를 나눴는데, 그는 나가노 구에서 본 기묘한 벽보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 벽보에는 “하루키 구함”이라는 문구와 전화 번호만 달랑 씌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게 뭐예요?”

“글쎄 뭘까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하여튼 하루키를 구하니 전화해 달라는 얘긴데… 잘 모르겠네요.”

“개를 찾는 게 아닐까요?”

“글쎄요. 개라면 종류라든가 특징 같은 걸 써놓았겠죠. 역시 인간 하루키일 거예요.”

“특별히 어떤 한 사람의 하루키를 말하는 걸까요, 아니면 하루키이기만 하면 아무나 상관없다는 걸까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요. 뭐, 하여튼 이번에 다시 보면 전화 번호를 메모해 둘 테니까 직접 전화해 보는 게 어때요? 뭔가 좋은 일일지도 모르잖아요.”

“좋은 일라뇨, 가령 어떤?”

“아니, 뭐라고 꼬집어 얘기할 순 없지만” 하는 데서 얘기가 끝나 버린 채 그 사람과는 다시 만나지 못했고 전화 번호도 아직 모른다. 따라서 도대체 나가노 구의 누가 어떤 목적으로 ‘하루키’를 구하고 있는지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하루키’라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몸이 사르르 녹아 버리는 성욕 과다증 미인이 나가노 구에 살고 있어서 밤이면 밤마다 ‘하루키’를 찾는 건가, 라고 가장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이름과 성욕이 정말 그렇게 강력히 맺어질 수 있는 건지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확신이 안 선다.

또 다른 희망적인 추측은 엄청난 부자인 노부인이 전쟁에서 잃은 자식과 이름이 같은 남자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려 한다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세계를 제외하고는 부자인 노부인이 그런 엉뚱한 짓을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커트 보네거트의 ‘익살극’ 식으로 누군가가 ‘하루키’ 확대 가족을 찾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전국의 하루키가 모여서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빙고 게임을 하며 친분을 돈독히 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임이 과연 얼마나 즐거울지를 난 잘 모르겠다. 더할 나위 없이 즐겁든지, 엄청나게 따분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하고 상상력이 점점 부풀어 가기만 하는데-이건 중대한 범죄와 연관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가노 구에 살고 있는 범죄자가 코난 도일의 <빨간 머리 동맹>을 읽고 하루키 동맹이란 걸 생각해 냈는지도 모른다.

나가노 구의 하루키를 한곳에 모아 놓고 백과 사전을 베끼게 하고는 그 사이에 터널을 파서 은행을 털 작정인 것이다. 범죄는 어찌 되었든 간에 빌딩의 한 방에 나가노 구의 ‘하루키’가 몇십 명 모여 부지런히 백과 사전을 베끼고 있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고 그다지 나쁘지 않다. 그런 곳에 앞에서 말한 성욕 과다증 미인이 들어온다면 얘기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점점 나가노 구란 곳이 무정부적인 장소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건 그렇고, “하루키 구함”의 진상에 대해서 아시는 분이 계시면 <주간 아사히> 앞으로 제보해 주십시오. 좋은 일이 있으면-그리고 만약 그게 나눌 수 있는 것이라면-조금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약간 이상한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얼마 전의 발렌타인 데이 이튿날 아침에 센다가야의 하토모리 신사 부근의 노상에 하트 모양의 대형 초콜릿 몇 개가 엉망으로 짓밟혀 있었다. 상당히 기분 나쁜 광경이었다.

“이런 짓을 남자가 했을까요? 아니면 여자가 했을까요?” 하고 아내가 물었지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남자의 짓이라면 애처롭고, 여자의 짓라면 무섭다. 이건 나의 편견일까?

물론,

(1) 여자로부터 초콜릿을 잔뜩 받은 모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내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전부 짓밟아 버렸을 가능성도 있다.그리고,

(2) 불단 위에 놓은 공양 떡을 둘로 가르듯, 하나의 의식으로 초콜릿 가르기가 정착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보내고, 그래서 사랑이 이루어지면 그날 밤 안으로 신사 근처에서 두 사람이 초콜릿을 짓뭉개는 것이다. 그리고 ‘발렌타인 2탄’으로서 8월 14일에 남자가 여자에게 수박을 선물한다던가 말이다. 그런 여러 가지 부속 행사가 있으면 재미있을것 같다.

혹은,

(3) 초콜릿을 연인에게 전하려고 길을 가던 여자가 뒤쪽에서 사자와 표범의 습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4) 초콜릿이라고 생각해서 한 입 깨물어 봤더니 하트 모양의 고형 카레였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하루키 구함”의 진상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42킬로미터 뛰고 난 뒤에 마시는 맥주

봄이 가까워 오면 왠지 모르게 장거리 경주에 참가하고 싶어져서, 며칠 전 ‘아스카 히나마쓰리 고대 마라톤’에 출전했다. 스타트 지점은 아스카의 이시부타이 앞으로, 오니노마나이타와 아스카 절, 타카마쓰 고분 같은 곳을 바라보며 42킬로미터를 주파하는 꽤 즐거운 코스였다. 날씨도 좋았고, 따뜻해서 이시부타이 옆에 벌렁 누워 필립 로스의 <해부학 강의>를 읽으며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몸과 마음이 노곤하게 풀려 왔다. 이제 봄이다.

풀 마라톤에 출전하는 것은 이것으로 세 번째지만, 지난 대회가 1983년의 호놀룰루였으므로 대략 2년 만에 42킬로미터를 뛰는 셈이다. 호놀룰루 전해에는 아테네에서 역시 완주했고 10킬로미터, 20킬로미터의 경주에도 별일이 없으면 이따금 참가했지만, 호놀룰루 대회가 끝난 뒤에는 좀 생각한 바가 있어서 얼마 동안 레이스에 출전하는 건 삼가고 혼자서 느긋하게 뛰자고 결심했던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완주를 했어도 세 시간 반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한 ‘극히 평범한’ 아마추어 주자이므로 그렇게 잘난 척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래도 굳이 개인적인 감상을 묻는다면, 이름 있는 시민 마라톤 대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거대해 지고 있고, 어떤 종류의 대회는 좀 지나치다 싶게 소란스럽다.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이 마구 설쳐대는(실제로 이런 표현이 딱 어울린다) 호놀룰루 대회는 제쳐 두고라도, 좀 이름 있는 대회다 싶으면 참가자를 끌어 모으기 위한 상품이 있거나, 기념 티셔츠를 선물로 주기도 하고, ‘달리기 동호회’에서 똑같이 맞춘 옷을 입고 노보리(역주:좁고 긴 천의 한 끝을 장대에 매달아 세운 것)까지 치켜 들고 우르르 몰려들거나, 그럴싸한 ‘완주증’을 발급하기도 하고, 길기만 할 뿐이지 별 의미도 없는 개회식,폐회식을 거행하는 등, 아무래도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아진 듯하다. 물론 그저 놀이에 불과하다면야 어찌할 수 없지만, 나로서는 그런 점들이 퍽 성가셔서-그런데 그런 세세한 모습들이 문학상 파티랑 어쩌면 이다지도 비슷한 걸까-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당분간 삼가기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회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국 워싱턴 D.C.에서 달렸던 이름도 없는 10킬로미터 대회다. 이 대회는 주말 아침에 포트맥 강가의 출발 지점에 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참가할 수 있는 지극히 부담 없는 대회로, 물론 권위도 없다. 참가자들은 50~60명 정도로, 나이도 천차만별, 모두들 자기 멋대로 입고 나와 삼삼오오 모여 있다. 안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참가비 2달러(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도)를 내면 “네, 저쪽에 있는 오렌지 주스는 마음껏 드십시오. 이쪽에 있는 롤빵도 마음대로 드시고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참가비를 냈다는 증거로 손에 스탬프를 찍고는 노트에 주소와 성명을 적는다. 출전 번호니 표장이니 하는 건 일절 없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할까요.

자, 준비… 땅” 하고 10킬로미터를 달릴 뿐이다. 달리기가 끝나면 “수고하셨습니다. 몇 분 몇 초입니다”라고 가르쳐 준다. 그리고 우리는 꿀꺽꿀꺽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롤빵을 먹으면서 마지막까지 앞뒤를 다투었던 아저씨와 악수를 하고 헤어진다.

물론 호놀룰루나 오메가 틀렸다는 건 아니다. 호놀룰루는 나름대로 즐거웠고, 오메는 가능하면 한 번쯤 달려 보고 싶다. 그래도 나는 워싱턴 D.C. 대회처럼 심플하고 꾸밈없는 대회에서 뛰는 것이 아마추어 주자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원점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일본 각지에서 미니 호놀룰루 마라톤을 출현시켜야 할 필요성 따위는 전혀 없는 것이다. 제대로 된 코스와 정확한 시계, 물의 적당한 공급과 주최자의 따뜻한 배려만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대회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스카 마라톤’은 실제로 달려 보니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어려운 코스였다. 아스카를 걸어서 돌아다녀 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근방은 꽤 굴곡이 심해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바로 다음 고개가 시작되어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의 차이가 약 100미터 정도나 된다. 그러니까 평지에서 달릴 때의 감각으로 뛰다 보면, 후반에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게 된다. 나는 원래 언덕길에 그렇게 약한 편은 아니지만, 요사이 진구 가이엔이나 쇼난의 자전거 도로 같이 평탄한 코스만 달려서 35킬로미터를 넘었을 무렵부터는 언덕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결국 오르막길에서는 걸어 올라가고 말았다.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지금부터 다시 착실하게 크로스 컨트리로 단련해서 가능하다면 다시 한 번 이 코스에 도전해 보고 싶다.

기록이야 어찌 되었든, 42킬로미터를 다 뛰고 난 뒤에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마시는 맥주 맛이란 그야말로 최고다. 이 맛을 능가할 만큼 맛있는 것을 나는 달리 떠올릴 수가 없다. 그러니까 대개 마지막 5킬로미터 정도는 “맥주, 맥주” 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달리게 된다. 이렇게 가슴속까지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 42킬로미터라는 아득한 거리를 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어떨 때는 너무나 잔인한 조건인 듯싶게도 느껴지고, 어떨 때는 지극히 정당한 거래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요즘 필립 로스의 소설이 갑자기 재미있어졌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 하나뿐일까? 그렇게 재미있다는 평판도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제 2 장 나날의 여백 위에 쓴 단상

 

생일이 재미없어졌다

앞서 어떤 글에서 나이를 먹고 나니 발렌타인 데이가 전혀 재미있지 않다는 얘기를 썼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서 재미없어진 것은 발렌타인 데이뿐만이 아니다. 생일날도 무척 재미가 없다. 자랑할 일도 못 되지만, 최근의 내 생일만 하더라도 무엇 하나 재미있는 일이 없다.

물론 선물을 받지 못한 건 아니다. 우리 집사람은 꽤 선심 쓰기를 좋아하는 편이라 “선물은 뭐가 좋아요? 뭐든지 사줄게요”라고 말하고, 또 대개는 실제로 선물을 사준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집사람이 돈을 내든 내가 돈을 내든 나오는 구멍은 한 구멍인 것이다. 10만 엔짜리 카세트 테이프 리코더를 선물 받고 그 당시에는 와아 하고 좋아라 해도, 월말이 되면 “저기 말이죠, 이번 달 생활비가 모자라요” 하는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생일 선물로 무얼 받든 전혀 기쁘지 않다. 우울하다.

그래서 올해의 생일은 슬그머니 넘어가 버리려고 했다. 긴자에서 레코드 한 장을 산 뒤(내가 직접 샀다), 니혼바시에 있는 다카시마야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 것으로 끝내기로 했다. 그 정도라면 분수에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니혼바시까지 걸어갔는데 다카시마야는 정기 휴일이었다. 이럴 수가. 나는 다카시마야에 가면 나름대로 은밀하게 생일 축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니혼바시까지 걸어왔던 것이다. 결국 그날은 버럭버럭 화를 내며 맥주를 마시고 배가 터지도록 회를 먹어 돈을 잔뜩 쓰고 말았다.

그 이튿날, 나는 출판 담당 여자 편집자와 만나 식사를 했다. 그녀는 나보다 세 살 연하로, 나와 혈액형도 같고 생일도 같다.

“생일이라 해 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어요”라고 그녀도 말했다. 나이를 먹으면 이런 식으로 생일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너나할것없이 좋은 일이라곤 없군요” 하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실컷 먹고 마시는 게 생일을 보내는 가장 타당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걸핏하면 잃어버리는 전철표

나는 걸핏하면 전철표를 잃어버리는 타입의 인간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 모양이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막 개찰구를 빠져 나가려고 하면 전철표가 보이지 않는다.

코트 주머니, 바지 주머니, 셔츠 주머니를 홀랑 뒤집어 보지만, 전철표는 아무데도 없다.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전철 안에서 딱히 유별난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니 자리에 앉아 문고판 책을 읽을 뿐이다. 전철표를 넣어 둔 주머니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째서 전철표가 사라져 버리는 걸까? 수수께끼다.

더구나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어났다. 이래서는 전철표만 전문적으로 빨아들이는 블랙 홀이 내 주위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여하튼, 다 큰 남자가 개찰구 옆에서 옷 주머니를 뒤집고 있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창피하다. 특히 선반 위에다 주머니에 있던 것을 전부 꺼내어 놓고 “이건 지갑이고… 수첩이고… 화장지고…” 하고 늘어놓으면서 점검해야 할 때는 비참하기 짝이 없다.

나는 역의 개찰구를 지날 때마다 나처럼 주머니를 몽땅 뒤집어 전철표를 찾고 있는 사람이 없나 둘러보지만, 그런 모습은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보통 사람들은 전철표 같은 걸 잃어버리지 않는 걸까?

무엇보다 여자랑 데이트를 할 때 전철표를 잃어버리면 참 난감하다.

“아, 잠깐, 잠깐만 기다려”하고 하며 기다리게 해놓고 개찰구 옆에서 뒤적이다 보면, 동행한 여자의 얼굴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 가는 걸 느끼게 된다. 정말 서글픈 일이다.

 

나와 여자와

요즘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여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매우 힘든 일인 것 같다. 나는 지금 서른네 살이고, 뭐 보통 사람만큼은 여자와 사귀어 본 경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여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한다.

미리 말해 두지만, 그저 단순하게 여자에게 친절을 베풀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집까지 바래다 준다든가 짐을 들어 준다든가, 마음에 드는 선물을 한다든가 옷차림을 기억해 준다든가 하는 일은 고등 학생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일을 하면서도 상대방에게 “하루키 씨는 참 친절하시네요”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끔 하는 테크닉이다. 왜 여자에게 “친절하시네요”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이런 느낌은 웬만큼 나이를 먹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나 잘났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도 예전에는 여자에게 친절 하려고 애쓰다 실패만 잔뜩 한 사람이다.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열일곱 살 때 일로, 그 무렵에 나는 매일 한큐센을 타고 고베에 있는 학교까지 다녔는데, 어느 날 아침 한큐 아시야가와 역에서 종이 봉투가 전철 문에 끼여 당황해 하고 있는, 굉장히 귀엽게 생긴 여학생을 발견했다. 그래서 곧장 달려가 “잡아당겨 드릴까요?”라고 했더니, “어머, 고마워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내가 힘껏 잡아당기자 종이 봉투가 둘로 짝 찢어지면서 내용물이 선로 위에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면 무척 난감해지게 마련이다. 더 이상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 음, 미안합니다” 하고 뒤처리는 역무원에게 맡기고 도망쳐 버렸다.

벌써 17년이나 지난 얘기지만, 그때의 고난 여자 고등 학교의 여학생, 정말로 미안해요. 악의는 없었어요.

 

내 학창 시절의 아르바이트는

내 학창 시절이라면 이미 10년도 더 된 이야긴데, 시간당 평균적인 아르바이트 수당은 대충 다방의 평균적인 커피 값과 같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60년대 말을 기준으로 150엔 정도였다. 아마 하이라이트 담배가 80엔, 소년들이 보는 잡지가 100엔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레코드를 잔뜩 샀기 때문에, 하루 반만 일하면 LP 한 장을 살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일했다.

지금은 커피가 300엔인 데 비해서 아르바이트 수당은 시간당 500엔쯤 되니까 상황은 조금 달라진 듯싶다. LP라면 하루만 일하면 두 장 정도는 살 수 있다. 숫자만 보면 최근 10년 동안 우리의 생활은 편안해진 듯싶다. 그러나 생활 감각에서 본다면 그렇게 편안해진 것도 아니다. 옛날에는 가정 주부가 부업 전선에 나서는 일도 별로 없었고, 샐러리맨을 상대로 한 고리 대금업도 없었다.

숫자라는 것은 참으로 복잡하다. 그러니까 총무처 통계국 같은 곳은 도저히 신용할 수가 없다. GNP도 솔직히 말해서 의심스럽다.

그야 GNP라는 게 신주쿠의 니시구치 광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 만지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만질 수 있다면 나도 신용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체가 없는 것 따윈 절대로 믿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다케무라 겐이치라든가 다나카 가쿠에 같은 사람들은 실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숫자의 그런 미심쩍은 점을 제대로 간파한 뒤에, 적절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숫자라면 대충 수첩 한 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학창 시절에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산 레코드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으며,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듣고 있다. 무엇이든 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수라든가 양이 아니라 질이다.

 

연달아 만나는 이혼한 친구

요즈음 어찐 된 일인지 이혼한 친구들만 연달아 만났다.

그러면 참 난처하다. 오래간만에 만난 상대라면 얘깃거리가 별로 없어서 “하는 일은 좀 어때?”라든지 “지금 어디 살고 있어?”라는 말로 시작해서, “부인은 잘 지내?” 하는 말에 이르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건 딱히 친구 부인의 동향을 알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라-남의 부인이 어떻게 지내든 알 바 아니다-그저 세상살이 얘기나 날씨 인사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어어, 그저 그렇지 뭐” 하는 대답을 기대한다.

그럴 때에 “사실은 이혼했어” 같은 소릴 들으면, 나는 완전히 할말을 잊게 되어 곤란해진다. 물론 말한 친구도 난감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혼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혼의 곤란함은 이쪽이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도통 모르겠다는 점이다. 결혼이나 출산이라면 무엇이 어찌 되었건 “그것 참 잘됐군” 하면 되고, 장례식이라면 “힘들었겠군” 하면 된다.

그러나 이혼에 관해서라면, 해줄 적당한 말이 없다. 헤어져서 다행일지도 모르고, 도무지 그런 건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속 시원하겠어”라는 것도 왠지 모르게 무책임하고, “아아, 부럽구먼” 하는 건 너무 경박하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그것 참…” 하는 것도 분위기가 완전히 침체되어 버리므로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뭐라고, 정말? 으음…’ 하는 느낌이 되어 버린다. 상대편도 똑같이 ‘그렇다니까. 으음…’ 하는 느낌이다. 그런 일이 요즘 서너 번이나 계속되다 보니 완전히 지쳤다.

이렇게 이혼하는 사람이 늘고 있으니 <관혼상제 예절> 같은 책에 이혼 항목이 첨가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쓰는가’와 ‘어떻게 사는가’

이따금 앞으로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는 젊은이들에게서 “문장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는 질문을 받는다. 나 같은 사람한테 그런 걸 물어 봐야 아무 소용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하여튼 그런 일이 있다.

문장이라는 것은 ‘자, 써야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제대로 써지는 게 아니다. 먼저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내용이 필요하고,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게 걸맞은 내용과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천재가 아닌 한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기성 작품의 내용이나 스타일을 빌어와 적당히 넘기게 된다.

기성 작품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해되기 쉽기 때문에, 재주 많은 사람이라면 “와, 잘 쓰는데” 하는 소리를 곧잘 듣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본인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게 된다. 좀더 칭찬을 들을 수 있게 하려고 한다-이런 식으로 해서 망가진 사람을 나는 몇 사람이나 보았다.

문장이란 양적으로 많이 쓰면 확실히 좋아진다. 그러나 자신 속에 곧은 방향 감각이 없는 한, 그 능숙함은 ‘재주’로 끝나고 만다.그러면 그 방향 감각은 어떻게 하면 갖춰지는 것인가? 요는 문장 운운하는 건 제쳐 두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은 의미다. 어떤 식으로 여자를 꼬실 것인가, 어떤 식으로 싸울 것인가, 초밥집에 가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 뭐 그런 거다.

대충 그런 짓을 해보고, ‘뭐야, 이런 거라면 딱히 문장 같은 걸 일부러 쓸 필요도 없잖아’ 하는 생각이 들면 더없이 행복할 테고, ‘그래도 아직 쓰고 싶은걸’ 하는 생각이 들면-잘 쓰고 못 쓰고는 별도로 하고-자기만의 독특한 문장을 쓸 수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의 일’

당연한 얘기지만, 앞날은 예측할 수 없다. 절대로 예측할 수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일인데, 하루는 라디오를 듣고 있자니 아나운서가 “저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록 음악이 너무너무 싫습니다. 그런 건 빨리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습니다”라는 투서를 읽어 주었다.

당시는 1950년대 후반으로 엘비스의 전성기였다. 아나운서가 거기에 “그렇군요. 이런 시끄러운 록 음악은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군요”라고 동의했다.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런가? 이런 록 음악은 곧 사라져 버리는 걸까?’ 하고 아무 의심 없이 믿었다. 그러나 엘비스는 살아 남았고, 롤링 스톤즈는 훨씬 더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해 몇 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리고 이것도 그 무렵의 일인데, 어느 잡지에 “장래에 전자 두뇌는 일반적으로 보급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게재된 적이 있다. 대답은 노(No)였다. 이유는 “인간의 두뇌에 필적할 만한 전자 두뇌를 만들려면 빌딩 정도만한 크기가 될 테고(옛날 얘기), 그런 것이 일반에게 보급될 리가 없으니까”였다.

나는 그때도 순진했기 때문에 머리 속에 빌딩 정도만한 크기의 전자 두뇌를 떠올리고, 이래서야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서류 가방에 사무용 컴퓨터가 들어가는 시대다.

그것과 엇비슷한 일들은 여태까지 수없이 있었다. 나는 꽤나 집요한 성격이라 그런 일들을 하나하나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웬만한 일들은 믿지 않는다.

제일 위험한 건 전문가의 말, 그 다음으로 위험한 것은 그럴듯한 구호다. 이 두 가지는 일단 믿지 않는 게 좋다. 나도 그런 것에 굉장히 속으면서 살아왔다.

소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소설이란 무엇인가 따위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좋은 소설을 써야 한다. 그것이 전부다.

 

사기 힘들어 사지 않는 체중계

그다지 비싼 물건도 아닌데 도무지 사기 힘들어서 사지 않고 마냥 있게 되는 물건이 있다. 내 경우에는 체중계가 그렇다. 항상 사야지 사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실제로 백화점 같은 데 가보면 디자인이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거나, 가지고 돌아오는 게 귀찮아서 결국은 ‘에이, 다음에 사지 뭐’ 하게 되고 만다.

게다가 내 경우에는 60이나 61킬로그램 정도로 체중이 안정적이고, 특별히 몸에 이상도 없어서 체중계가 꼭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있으면 편리한 정도다.

그러던 중 지난 가을에 어딘가에서 체중계를 받았다. 그럴 때는 굉장히 기쁘다. 지금까지 사지 않고 버틴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체중계란 건 두 개씩 있어 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물건인 것이다.

그래서 재빨리 그 체중계로 몸무게를 재어 보았다. 고양이 A가 3.5킬로그램, 고양이 B가 4.5킬로그램, 내가 61킬로그램이었다.

체중계란 꽤 재미난 물건이다. 한번 재고 나면 습관이 되어 나 같은 사람은 하루에도 열 번쯤 체중계 위에 올라간다.

세밀히 관찰하면 알 일이지만, 인간의 체중은 하루에 1킬로그램에서 1.5킬로그램까지 오르락내리락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밥을 먹으면 늘고, 배설하면 줄어든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와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1킬로그램 가까이 체중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여름철에 1분당 200미터 정도의 속도로 5킬로미터를 달리면 500그램이 줄고, 마찬가지로 10킬로미터를 달리면 1킬로그램 가까이 줄어든다. 하기사 이런 현상은 대부분 발한 작용에 의한 것이라, 수분을 공급하면 금방 원래의 체중으로 되돌아간다.

또 하나, 시내에 나가 업무상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거나 하면 1킬로그램이 빠진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올 가을 나의 최고 체중은 64킬로그램, 현재는 58킬로그램이다. 기초적인 다이어트와 가벼운 조깅을 한 달쯤 하면 5킬로그램은 금방 빠지는 모양이니 살이 쪄서 고민인 사람은 노력해 보길 바란다.

 

훌륭한 동물 개미

개미란 훌륭한 동물이다. 허튼소리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옛날부터 개미 들여다보기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관찰을 했다.

어제도 집 근처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발 밑에서 개미 떼가 와글와글 열심히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길래 15분 정도 들여다보았다.

아시다시피 개미란 동물은 땅속에 굴을 파서 집을 만들지만, 땅을 팔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파낸 흙을 어떻게 해서 지상으로 실어 나르느냐 하는 점이다. 영화 <대탈주>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것은 참으로 귀찮은 문제다. 지극히 단순한 얘기지만, 모든 개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한 알갱이씩 앞 발로 끌어안고 지상으로 옮긴다. 상당히 고된 노동일 거라 생각되지만 개미란 동물은 일을 하는 게 천직이니까, 그냥 그렇다고 치자.

내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모래 알을 떨궈 놓는 방식이다. 무슨 소리냐 하면, 지상까지 모래 알을 날라 온 개미는 결코 그 모래 알을 가까운 아무데다 함부로 툭 내던지고 돌아서는 법이 없다. 그런 짓을 하면 보금자리의 입구 주변에 모래 산이 생기고 말아 여러 가지로 곤란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사실을 개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미는 구멍에서 나와 30센티미터나 50센티미터쯤 기어가 적당한 곳을 가늠하여 모래 알을 떨구고는 다시 구멍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 ‘가늠한다’는 느낌이 개미의 뒷모습에 어려 있어 옆에서 보고 있으면 호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개미가 다 그런 건 아니다. 개중에는 입구 옆에 슬쩍 모래 알을 떨구고 가는 파렴치한 놈도 있다. 개미의 세계에도 각양각색의 개미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찌 생각하면 누구나가 모래 알을 멀리까지 운반해 가야만 한다는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구석구석까지 모래를 흩어 놓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입구 근처에 슬쩍 내다 버리는 놈이 있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 개미 한 마리 한 마리가 줄곧 그런 상황 판단을 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면, 역시 개미는 대단한 존재다.

 

대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어디가 그렇게 좋단 말인가!

내 주위에는 어찌 된 일인지 잘생긴 남자를 밝히는 여자들이 많다. 나이 서른이 지나 남편도 있으면서 뭘 그리 잘생긴 얼굴을 밝히느냐고 나는 생각하지만, 마음이 약해서 그런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한다.

단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나는 그런 여자들에게 훌리오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 출판사에서 내 글을 담당하고 있는 여자도 훌리오 증후군에 걸린 환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훌리오 전에는 이브 몽땅의 팬이었다.

몽땅이 일본에 왔을 때는 아파서 누워 있는 남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현금 카드로 은행에서 몰래 2만 엔을 인출해서는, 티켓을 사서 혼자 콘서트에 가 ‘이제 남편 따윈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냐’라고 생각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아마도 훌리오 증후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 사람이 최근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팬이 됐다.

“있잖아요, 하루키 씨. 훌리오의 연간 수입은 몇백 억에, 자가용 비행기도 갖고 있고, 별장 같은 건 한 다스쯤 갖고 있으며, 전세계에 애인이 몇 십 명이나 되는 데다 훌륭한 인텔리라구요. 어때요, 부럽죠?” 하고 그녀는 말한다.

너무도 환경이 달라서 그런 말을 들어도 부럽지 않을 뿐더러 아무렇지도 않다. 전세계에 애인이 몇 십 명이나 있다면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플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마누라 하나밖에 없는데도 잠꼬대를 하면서 옛날 애인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할 정도인데, 훌리오는 참 잘도 해내고 있구나 싶다. 꼼꼼한 성격인가 보다, 틀림없이.

그녀 역시 만약 훌리오에게 구애를 받는다면 마음이 솔깃해질 것 같다

고 한다. 그래서 훌리오의 몇 십 명이나 되는 애인 중의 하나가 되어 매년 5,000만 엔 정도의 수당을 받겠다고, 그렇지만 한 해에 5,000만 엔을 다 쓸 순 없을 테니까 그 중 1,000만 엔쯤은 지금의 남편에게 송금해 주겠다고 한다. 이런 여자를 정숙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 세상의 일반적인 주부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는 내 상상력 밖의 일이다.

 

신문이 끼여들 틈이 없다

외국에 나가서 가장 마음이 편한 것은 신문을 읽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도 거의 신문을 읽지 않는 편이므로 장소와는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일본에 있으면 싫든 좋든 큰 사건 등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된다. 가령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게 격추된 사건쯤 되면 일단은 신문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 같은 데 있으면 현지의 신문은 읽을 수가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비싼 돈을 내고 영자 신문인 <헤럴드 트리뷴>을 사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라, 정보와는 전혀 무관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지내면 정말 편하다. 솔직히 신문 같은 것은 없어져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리스에 있을 때는 불편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난다->밥 먹는다->수영한다->밥 먹는다->낮잠 잔다->산책한다->술 마신다->밥 먹는다->잔다. 이런 패턴이 노상 반복되어 도무지 신문이 끼여들 수가 없었다. 그리스는 정말 훌륭한 나라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전에 독일에서 한 달 간 체류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신문이란 걸 읽지 않았다. 딱 한 번 베를린행 팬암기에서 서비스로 준 트리뷴을 읽었는데, 별다른 사건도 없어서 ‘그런가, 미국이 그레나다를 침공했나’라든가 ‘론과 야스가 손을 잡았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보다는 독일의 젊은이들이 모두 반핵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거나, 퍼싱 2 반대 캠페인 실(seal)을 차에 다닥다닥 붙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세계의 흐름 같은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진짜 정보란 바로 그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코 신문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단지 세상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정보가 흘러 넘치도록 무진장 많은 건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다.

 

음식의 좋고 싫고가 인생의 갈림길

나는 꽤 음식을 가리는 사람이다. 생선과 야채와 술에 관한 한은 거의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좋고 싫은 게 없지만, 육류는 쇠고기만 먹고, 조개류는 굴을 빼고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 요리는 아예 못 먹는다. 그러니까 대개 생선과 야채를 중심으로 담백한 음식을 먹으면서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곤약이라든가 녹미채, 두부 따위. 그러고 보니 완전히 노인식이군요, 이것은.때때로 나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무엇은 좋고 무엇은 싫다는 판단 기준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째서 굴은 먹을 수 있는데 대합은 못 먹는단 말인가? 굴과 대합이 본질적으로 도대체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그런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서, 결국 ‘운명’이라는 한마디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나는 어느 날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이유도 없이 굴을 사랑하게 되고 만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결과가 전부다.

어떤 경위를 거쳐 중국 요리를 못 먹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나에게는 커다란 수수께끼 중의 하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중국이나 중국인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대단히 흥미를 갖고 있는 쪽이라고 생각한다. 아는 중국인이 몇 명인가 있고, 내 소설 속에도 중국인이 제법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위가 중국 요리란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유아적 체험이라든가 뭐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센다가야에 살던 시절, 우리 집 근처의 키라 거리에는 맛있기로 소문난 라면집이 두 집 나란히 있었다. 그 앞을 지날 때면 싫어하는 라면 냄새가 풍겨서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항상 고역이었다. 내 친구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라면을 먹고 싶다는 격렬한 욕망을 억누르느라 고역이었단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라면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의 차이로도 인생의 양상이 상당히 달라지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오해가 불러일으킨 소동

며칠 전 영자 신문을 읽다가 광고란에 개가 목을 매달고 있는 사진이 실린 걸 보았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싶어서 읽어 보니, 이것은 애견가 협회의 메시지로 “한국에서는 개를 잡아먹는 관습이 있는데 이것은 야만스러운 일이므로 저지하자”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한 달쯤 뒤에 호놀룰루에서 신문을 읽다 보니 “중국인은 들개 사냥을 하는 데다 그 일부를 먹기까지 하는데, 이건 너무나도 야만스러운 행위다. 이제부터 중국 제품을 보이콧하자”는 내용의 투서가 실려 있었다. 북경에서 대규모의 개 사냥이 행해져 6주일 동안 약 20만 마리의 개가 처분된 사건이 있었는데(굉장하죠!), 그것은 거기에 대한 한 호놀룰루 시민의 반응이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조선과 영국간의 개 소동은 100년쯤 전에도 한 번 있었다. 그때 빅토리아 여왕(그랬다고 생각한다)이 조선 황제에게 우호의 선물로 개를 보냈는데, 조선 궁중 측에서는 완전히 잘못 받아들여 고맙게 개를 요리해서 먹었던 것이다. 그 소동은 당시에 상당한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재미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재미있네요.이렇게 개를 먹고 안 먹는 관습의 문제를 편식과 같은 선상에서 논하는 데는 좀 무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엇을 먹고 무엇을 안 먹는다는 선택이 근본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차원이다.

야만은 인간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다. 내가 굴은 먹을 수 있고 대합은 못 먹는 것에 대해 “왜 그런데?” 하고 캐물어도 나로서는 무척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성향을 설명하는 건 가능하지만 개념을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얘기가 심하게 비약되지만, “왜 그런 마누라와 같이 살게 됐는데?”라는 질문도 같은 선상에 있는 어려운 문제다. 나는 이런 종류의 현실을 잠정적으로 ‘동시 존재적 정당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왠지 이번에는 얘기가 복잡해졌다.

 

돌 쌓기 고문과 드릴 고문

영화에는 고문 장면이 곧잘 나온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시대극에는 종종 돌 쌓기 고문이 등장했었다. 누가 생각해 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꽤 그럴듯한 고문이다.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잠깐 설명을 하자면, 우선 주판처럼 울퉁불퉁 튀어나온 판 위에 죄인을 꿇어앉히고 그 무릎 위에 평평한 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는 것이다.

<쇼텐>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무릎 밑에 방석을 포개 가는 것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 반대인 셈이다. 올려 놓은 돌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무릎이 으드득거리고, 결국은 바스러지고 만다. 내가 실제로 당해 본 일은 아니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굉장히 아플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돌 쌓기 고문을 당하고 있다면, 불쌍한 반면 퍽 섹시하기도 하다. 옆에 탐관오리가 떡 버티고 서서(역시 사토 게이가 그 역으로 적격이겠지) “이봐, 낭자, 아프지? 아버지가 있는 곳을 어서 대”라고 호통을 치고 있고, 꽤 그럴싸 하다.

일본의 고문 중에는 돌 쌓기 외에도 목마 고문, 주리 틀기 같은 것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다른 범주 안에 속해 있으므로 이번에는 생략하겠다.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신 분은 닛카츠 영화의 <단키로쿠> 시리즈를 보면 된다.

영화의 고문 장면에서 탐관오리와 나란히 일반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나치스 친위대의 장교다. 이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고문 장면이 좀처럼 마무리되지 않는다. 요즘 나치스물로 잘 만들어진 영화는 역시 <마라톤 맨>이라고 생각한다.

<마라톤 맨>은 나치스의 잔당이 유태인 청년을 잡아 고문하는 얘기다.

이 나치스 아저씨는 원래 치과 의사로, 청년의 충치를 드릴로 들쑤셔 치아의 신경을 노출시키고 나서는 그것을 다시 끈질기게 쑤시는 것이다.

평소에도 치과 의사의 치료를 받는 게 무서웠는데, 이런 걸 보고 나니 미칠 것만 같다. 돌 쌓기도 끔찍하지만 드릴은 더 끔찍하다.

 

지금은 잊혀져 가는 베트남 전쟁이지만

얼마 전에 영화를 보는데, “베트남에 얼마나 있었어?” 하는 질문에 어떤 파일럿이 “2년 반”이라고 답하는 대목이 나왔다. 자막은 “두 번 왕복하고 반”으로 처리되었다. 직업상 나도 다른 사람의 번역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건 역시 ‘2년 반’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내 기억으로는 마이클 파가 쓴 <파병>이라는 베트남 전쟁 리포트에 이 ‘턴(turn)’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확실히 원 턴이 1년이었다. 베트남에서 1년을 근무했다면 이미 베테랑 군인으로,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이 이상해지고 만다. 그런 것을 2년 반이나 근무했으니 이 파일럿은 상당히 거친 사내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두 번 왕복하고 반’이라면 도무지 뭐가 뭔지 전혀 이해가 안 간다. 미국 본토와 베트남을 두 번 왕복하고 반이라면, 지금쯤은 베트남 한복판에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베트남 전쟁에 관한 영화나 소설이나 다큐멘터리가 꽤 많은데, 그런 것들을 보다가 새삼스레 깨닫는 것은 은어와 속어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나도 처음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소설을 읽었을 때는 뜻도 모를 단어투성이라 뭐가 뭔지 도통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하기야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평범한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설에 따라서는 책 뒤에 베트남 전쟁에서 쓰였던 전문 용어와 속어에 대한 ‘빠른 이해를 위한 사전’ 같은 편리한 것이 붙어 있는 것도 있다.

나는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 좋아서 극장에 가서 네 번 정도 봤는데, 그 영화에 나오는 속어도 소설만큼은 아니더라도 역시 상당하다. 특히 동양인에 대한 차별적인 말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자막으로 처리할 수도 없다. 말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베트남에서의 전쟁은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추잡한 전쟁이었던 것 같다.

 

 

 

제 3 장 문학은 무거워도 사는 건 가볍게

 

이발소에서 어깨 결림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몰랐었지만, 다른 사람한테 들은 바에 따르면 ‘도코야(이발소의 옛 호칭)’라는 말은 방송 금지 용어인 모양이다. 라디오라든가 텔레비전에서는 ‘리하쓰텐(이발소)’이라고 해야만 하는 것 같다. 단, ‘도코야상(이발소 아저씨)’은 X와 Z의 중간인 Y로, 그 정도라면 뭐 그런대로 봐줄 수 있다고 한다. 이왕 내친 김이니까 더 얘기하자면, ‘야오야(채소 가게)’는 X고, ‘야오야상(채소 가게 아저씨)’는 Y란다. 허 참, 세상이란 한없이 복잡하다. 도코야라는 말이 대체 어디가 어때서 차별적인 용어라고 하는 걸까? 가령 ‘재능 없는 작가’라는 비평은 차별적인 용어가 아닐까? ‘재능에 부자연스러운 작가’라든가 ‘재능에 핸디캡이 있는 작가’라든가 좀더 완곡하게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어째서 ‘도코야’는 안 되고 ‘재능이 없다’는 허용되는 걸까? ‘오카마(역주:남색을 가리키는 비어)’는 어째서 차별 용어가 아닌지, 이런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면 한이 없기 때문에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도코야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

사실 나는 옛날부터 이발소에서 마사지를 받는 것이 고역이었다. <하이 패션>의 독자 중에는 필시 이발소에 가본 적이 없는 분들이 무수히 많을 거라 생각되어 일단 설명을 해두자면, 이발소의 마사지 과정은 머리를 감은 뒤에 행해진다. 머리가 마르기까지 머리와 관계된 일 이외의 일이 ‘막간을 이용해서’라는 식으로 삽입되는 것이다.

어깨나 목이나 팔을 중심으로 1~2분 간 꼭꼭 주물러 주는데, 그것이 나한테는 참으로 고역이다. 어째서 고역이냐면, 어깨가 전혀 결리지 않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어깨 결림이라는 걸 한 번도 의식하지도, 경험한 적도 없다(잘난 체를 하자면 숙취, 두통, 변비를 경험한 적도 없다. 불면증을 경험한 적도 거의 없다. 자기 혐오증은 1년에 약 두 번 정도).

그러니까 미안한 얘기긴 하지만, 모처럼 이발소에서 마사지를 받아도 그저 간지러울 뿐이다. 모두들 어깨 결림은 고통스러운 거라고 말하지만, 결리지 않는 어깨를 누군가가 쓸데없이 주물러 줘도 나름대로 꽤 괴롭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프로페셔널하게 열심히 주물러 주는데 트집을 잡듯이 “간지러우니까 마사지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는 좀처럼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몇 십 년 동안이나 이건 일종의 인간 수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입술을 깨물고 내내 참아 왔다. 나는 이발소에 간다는 별것도 아닌 한 가지 일을 통해서도 인생을 결코 장밋빛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하긴 요즘에는 반갑게도 이 마사지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어쩌면 나이를 먹음에 따라 내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정도까지는 안 되어도 조금은 어깨 결림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사지를 받고 ‘아아, 참 기분 좋구나’라고까지는 생각을 안 해도, 옛날에 비해 훨씬 덜 간지럽다고 느낀다. 덕분에 이발소에 가는 것이 옛날보다 훨씬 덜 고통스럽다. 사람이란 이렇게 사소한 일들을 쌓아 가면서 나이를 먹어 가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발소 아저씨한테 “무라카미 씨는 어깨가 결리지 않으신가 봐요. 이 정도로 근육이 부드러운 사람은 많지 않죠”라는 얘기를 듣는다. 어째서일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부모님도 어깨가 결리는 체질이고, 아내도 그렇다. 나만 전혀 결리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의 어깨를 주물러 보았는데, 어깨가 가장 심하게 결리는 사람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바둑을 두시는 분들이죠. 그렇게 어깨가 결리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딱딱한 것이 아예 돌덩이 같아요”라고 이발소 아저씨는 말한다. 내가 다니는 이발소 바로 근처에 기원이 있어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자주 오는 것이다.

분명히 머리를 쓰는 탓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딱한 일이다. 하지만 ‘아니, 아니, 잠깐. 그러고 보면 나도 일단 소설가고 이래저래 머리를 쓰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실제로는 그렇게 많이 머리를 쓰고 있지 않은 건가? 그냥 머리를 쓰고 있다는 기분만 들 뿐인가? 소설을 쓰는 것은 바둑을 두는 것보다는 머리를 덜 쓰는 작업인가? 이발소 아저씨에게 나 이외의 다른 소설가가 머리를 깎으러 온다면 그런 비교도 가능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소설가 손님은 나밖에 없는 듯해서 비교할 방법이 없다. 어쩌면 이발소 아저씨가 “이런 저런 사람들의 어깨를 주물러 봤지만, 소설가처럼 어깨가 결리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라는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솔직히 다른 사람의 어깨를 주무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썼듯이 부모님도 아내도 어깨가 결리는 체질이므로 옛날부터 자주 어깨를 주물러 봤지만, 싫은 건 싫은 거니까 어쩔 수 없다. 나 자신이 어깨가 결려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깨 결림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풀 수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 모르는 일을 하자니 당연히 재미도 없다.

그래도 부모님의 경우에는 내가 어깨를 10분쯤 주무르면 용돈을 주시기도 했으니까 어렸을 때는 돈이 탐나서 참고 주물렀지만, 아내는 물론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다. “음음, 거기가 아파요. 왜 그렇게 못해요?”라든가 “좀더 힘을 줘서 주물러요” 하고 혼을 내기 일쑤다. 내가 불평을 하면 “당신은 어깨가 결리는 고통도 모르고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 정도 봉사하는 건 당연하잖아요?”라고 반론을 편다. “그럼, 좋아요.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구요” 하는 얘기를 들으면, 그런 억지를 부릴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만 포기하고 열심히 어깨를 주무르게 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어깨를 주무르는 게 특기인 남자가 있다. 어깨가 결린다는 사람이 있으면(상대방은 여자인 경우가 많다. 어째서일까?) 그럼 잠깐 주물러 주지, 하고는 몸을 만지고 결리는 부분을 찾아서 시원하게 잘 풀어 준다. 나 같은 사람과는 달리 손 놀림이 간결하고 요령이 좋으며 보기에도 효과적이다. 이 사람은 인기가 높아져서 마침내 마사지의 프로가 되었는데, 나도 그 기분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나 역시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를 꾹 한 번 누르면 안개가 걷히듯이 그 사람의 어깨 결림이 가셔, “아아, 편안해졌어. 거짓말 같다. 정말 고마워” 하는 인사를 듣거나 한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분야가 어떻든,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순수한 기쁨을 준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도 내가 쓴 책을 읽고 “아아, 재미있었어” 하고 기뻐해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소설을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격려도 되고, 더욱 재미있는 걸 써야지 하고 다짐도 하게 된다. 딱히 칭찬을 받으려고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만약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았다면 아무리 내가 뻔뻔스럽다고 해도 기가 꺾여 도중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면 그대로 프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재능의 경향이라 불러도 괜찮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의 경향이 생기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점점 짙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결과적으로 프로가 된다. 그런 경향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런 경향은 원래부터 사람에게 입력되어 있나 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몸을 슬쩍슬쩍 만지기만 해도, 여기가 이런 식으로 뭉쳐 있으니까 여기를 이렇게 누르면 되는 거라고 알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전연 몰라서(요는 그런 재능이 입력되어 있지 않아서) 멀쩡한 관절을 함부로 꾹꾹 누르다가 아내의 비난을 사기도 한다. 세상은 이렇게 무척이나 불공평한 것이다.

나는 어째서 마사지의 프로가 되지 못하고(혹은 될 수 없고), 이렇게 프로 작가가 되어 있는 것일까, 하고 가끔 진지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고,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다는 근소한 차이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 다르게 지압사가 되고, 바둑 기사가 되고, 작가가 되는 것이다. 인생이란 참으로 순수하고, 참으로 불가사의하다.이런 걸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이에 이윽고 이발이 끝났다. 이발소에서 나는 온갖 일들을 생각한다.

 

하얀 아가씨와 까만 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얼마 전에 별안간 깨달은 건데, 요즘에는 하얀 아가씨와 까만 아가씨가 나오는 화장품 만화 광고를 전혀 볼 수 없다. 미시족풍의 30대와 20대의 아가씨가 번갈아 까맣게 되기도 하고 하얗게 되기도 하면서 “어머, 어떻게 된 거야. 하얀 아가씨, 요즘 아주 뽀얗게 됐네?”, “사실은요, …를 썼거든요”라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광고 말이다. 시종일관 똑같은 패턴의 광고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광고를 무척 좋아해 만약에 진짜로 없어진 거라면 섭섭할 것 같다. 등장 인물들이 차례로 하얗게 됐다가 까맣게 됐다가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부단히 입장을 바꾸다 보면 때때로 착각해서 양쪽 모두 까매지거나 양쪽 모두 하얘지거나 하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단 한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어느 한 쪽이 희면, 다른 한 쪽은 까맸다. 어느 한 쪽이 검으면, 다른 한 쪽은 하얗다.그 광고가 없어졌다면 언제쯤 없어졌을까?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봤지만 아무도 몰랐다. 어느 사이엔가 ‘그러고 보니’ 하는 식으로 없어졌나 보다. “글쎄요, 그러고 보니 요즘 잘 안 보이네요”라는 식으로 말이다.

요즘에는 백색 미인도 별로 인기가 없는 듯하니까 광고를 하는 쪽도 틀림없이 심드렁해졌을 것이다. 하얀 아가씨는 O이고, 까만 아가씨는 X라는 단순한 양극 구조적인 도식이 통용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광고 기반 자체가 소멸되고 만다. 까만 아가씨와 하얀 아가씨가 “이거 산모리츠에서 스키 타면서 태운 거야”, “어머, 부럽다. 얼마 동안이나 가 있었는데?” 하는 얘기를 하게 된다면, 더 이상 광고로서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갈색 미인’이라는 캐릭터까지 나온다면 대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된다. 옛날에는 단순해서 좋았는데 말이다.

하긴 하얀 아가씨,까만 아가씨 하면 어쩐지 요즘에는 스트립 쇼를 하는 술집의 간판 같은 느낌도 있다. ‘흑백 절정 대결. 졸라매는 까만 아가씨,몸부림치는 하얀 아가씨’라는 식으로 말이다. 가능하면 이런 대결은 다이애나 로스와 올리비아 허시의 콤비로 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다.

광고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이 하얀 아가씨와 까만 아가씨 시리즈도 좋았지만, 옛날의 양명주 광고도 좋았다. 이 광고는 대략 여덟 컷 정도의 만화로, 주인공은 이름이 이치로인가 하는, 이름부터도 확실히 순수 그 자체인 초등 학생이다. 이치로 군의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늘 자리에 누워 있다. 그래서 이치로 군은 학교엘 가도 왠지 생기 발랄하지 않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동급생인 스스무 군(이름부터가 친절할 것만 같다)이 “우리 엄마도 몸이 약했는데 양명주를 드시더니 요즘에는 완전히 건강해지셨어”라고 이치로 군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치로 군은 집으로 돌아가 그 얘기를 어머니에게 전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럼, 나도 시험 삼아 한번 양명주를 마셔 볼까”라며 관심을 갖는다. 마시면 당연히 기운이 난다(하여튼 광고니까 기운이 나지 않을 리가 없다). 마지막 장면은 이치로 군의 가족이 오쿠타마 부근에서 등산을 하는 장면으로, 이치로 군의 어머니는 몰라볼 정도로 건강해졌다. 얼굴도 젊어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도 흐뭇해 하는 것 같다. 다 양명주 덕분이다. 잘 됐다.

이 광고의 맥락은 ‘하얀 아가씨,까만 아가씨’의 경우와 거의 비슷하다. 즉 어떤 특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구제된 인간 A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괴로워하고 있는 인간 B에게 지식을 나눠 주고 자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려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A가 B에게 구해 줬다고 생색을 내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상의 호의며 구제인 것이다. A는 어디까지나 B가 있어야 할 상황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리고 A는 B가 자신처럼 좋아진 것을 순수하게 잘됐다고 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그런 광고가 역시 훌륭한 광고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하얀 아가씨도 사람이니까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까만 아가씨를 ‘흥, 참 내, 뭘 모른다니까’ 하며 깔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하얀 아가씨는 심술 같은 건 부리지 않고 까만 아가씨에게 효과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그래서 까만 아가씨는 구제받게 되고 하얀 아가씨는 자신이 한 순간 안 좋은 생각을 했던 것을 남몰래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그런 건 사실적이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사실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지난날 전후 민주주의의 이상 세계다. 요컨대 거기에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상태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노력만 하면 인간은 거기에 분명히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세계라 해도 인간이 모두 평등하지는 않다. 하얀 아가씨는 까만 아가씨보다, 스스무 군은 이치로 군보다 한 발 앞서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평등한 세계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하얀 아가씨도 스스무 군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쳐진 사람에게 손을 빌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옛날이 좋았고 지금은 좋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확실히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 만한 곳에는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그때도 없었던 곳에는 없었다. 그래도 있는 곳에는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얀 아가씨는 늘 까만 아가씨를 구제했고, 스스무 군은 늘 이치로 군을 구제했으며, 그것이 제법 오랫동안 한 패턴의 시리즈 광고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정신적인 여유 같은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혹은 ‘놀이’라고 할까, 정신의 예비 공간 같은 것이 거기에는 있었던 것이다.

유토피아는 존재한다고 하는 생각이 공통 환상으로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세계에서는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사람들은 다들 건강했고, 여자들은 모두들 얼굴이 하얗고, 오쿠타마는 날씨가 좋았다.

물론 이제는 그런 환상은 사라져 버렸다. 사회의 변화 속도가 그것을 깨끗이 날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환상 자체가 상품화되고 말았다. 바야흐로 환상은 자본 투자의 새로운 개척지인 것이다. 더 이상 환상은 아무 대가 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배급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화되고 세련화되어 아름답게 포장된 상품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에서의 하얀 아가씨는 더 이상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스스무 군은 쓸데없는 일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는지도 모른다.하얀 아가씨와 까만 아가씨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것이 이 글의 테마다.아마 어디로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제목 만들기의 어제와 오늘

요즘 영화 제목은 이렇다 할 만하게 좋은 것이 없는 것 같다. 히트한 영화를 보면 <스타 워즈>라든가 <E.T>라든가 <레이더스> 같은 오리지널 제목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왠지 흔하다. 도대체가 <레이더스>나 <블레이드 러너>란 제목을 언뜻 들어서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너무 불친절한 것 같다. 하기야 <레이더스>처럼 ‘잃어버린 성궤’ 따위의 제목이 붙어 있어서 오히려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 예도 있긴 했지만. 최근에 이해가 잘 안 갔던 것은 진 와일더와 리처드 프라이어가 나온 <스타 크레이지>라는 영화였다. 원제는 ‘Star Crazy’가 아니라 ‘Stir-crazy’였다. ‘Stir-crazy’란 게 어떤 뜻인지 이해가 갑니까? 나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 사전을 펼쳐 보았더니(작은 사전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형무소에 있어서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뜻이었다. 물론 속어다. 일반적인 일본인들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내도 이해 못할 듯한 까다로운 말을, 그래도 영화 제목으로 공개하는 일을 삼가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게다가 발음 탓으로 <스타 크레이지>라는 제목을 들으면 누구든지 ‘Star Crazy’로 생각하고 말 테니까, 이건 배급 회사의 불친절 내지는 직무 태만이다. 바로 이럴 때에 수완을 발휘해 강렬한 제목을 붙여서 왕창 돈을 벌어야 당연한 게 아닐까?

옛날 사람이라면 <얼빠진 형무소 소동> 같은 제목을 붙였겠지만, 이래서는 아무래도 구닥다리 같으니까 <형무소 파라다이스>라든가 <웃기는 탈옥>쯤으로 해두면(물론 예를 들자면 말이다), 이건 코미디고 게다가 형무소 얘기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걸 <스타 크레이지>라고 해버리면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옛날 사람들은 정말 성실하게 제목을 번역해 붙였다. 너무 지나칠 정도로 성실해서 원제와 번역한 제목이 잘 연결되지 않아 문제였지만, 제법 그 나름대로의 느낌이 있었다.

예를 들면 <잇 해픈드 인 브루클린>이 <뒷골목 천국>으로, <레크리스>는 <무궤도 행진곡>으로, <로열 웨딩>이 <연애 준결승전>으로 재미있게 번역되었다. <연애 준결승전>이 도대체 뭘 말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극장에 한 번 가볼까 하는 기분이 든다. 이 영화는 뜨뜻미지근하지 않고 아주 밝은 연애 영화랍니다, 라는 메시지가 제목에서 바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현재 그런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성인 영화 전문 업자로, 가령 최근작으로는 <리퀴드 애세츠>가 <슈퍼오나도르 한코>로, <사운드 오브 러브>는 <돌비 아크메 고인>이라는 황당한 제목을 내걸고 개봉되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 ‘한코’라는 말을 생각해 낸 것일까?

내 생각에는 영화 배급 회사에서 ‘성’이라든가 ‘음’이라든가 ‘범’이라든가 ‘강’이라든가 ‘유’라든가 ‘발’이라든가 ‘액’ 같은 글자들을 써놓은 카드를 책상 위에 잔뜩 늘어놓고, 사원이 그 중에서 대충 몇 장 뽑아서 조합하는 조어 작업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성유’라든가 ‘발범’이라든가 말이다. ‘범음 준결승전’ 같은 것도 웃긴다. 매일 이런 것만 생각하면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을까. 머리가 이상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성에 굶주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글쎄, 얘기가 좀 뒤죽박죽이 되었지만, 말하자면 그럴싸하게 제목을 붙인 영화는 매우 재미있고 인상적이라는 것이다.

팝 뮤직 세계에서도 옛날에는 <외로운 소년병>이라든가 <어린 애가 아니에요>라든가 <딸기의 짝사랑>같이 가벼운 제목을 붙였었는데, 비틀스가 출현한 이후로 그런 식의 제목이 눈에 띄게 사라져 섭섭하다. 어째서 <딸기의 짝사랑>이냐 하면, 낸시 시나트라가 바로 그전에 부른 노래가 <레몬의 키스>였기 때문이다. ‘레몬’이 히트를 치자 “그럼, 이번에는 ‘딸기’로 가자”라는 식이었던 것 같다. 그런 건 나도 굉장히 좋아한다.

‘포도의 고백’이라든가 ‘사과의 웨딩’이라든가 ‘드릴게요, 오렌지’라든가 ‘도둑 참외’라든가 그런 거 말이다.

요즘 비교적 마음에 드는 것은 레이 파커 주니어의 <아이 스틸 캔트 겟 오버 러빙 유>라는 노래로, 번역된 제목은 <아이 스틸 사랑하고 있어>였다. 이런 식의 제목 붙이기는 진짜 멍청하고 품위 없는 짓이긴 해도, 외우기 쉬우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목의 대략적인 뜻과도 잘 맞았다. 제목의 번역이라면 이런 식으로 그냥 적당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홀 앤 오츠의 <세이 잇 이즌트 소>라는 제목을 들어 봐야 ‘뭐, 그런 게 있나 보지’ 하는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그보다는 “다음에 띄워 드릴 곡은 홀 앤 오츠의 <포도의 고백>입니다”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원리적으로 완전한 번역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고,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될지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팝 뮤직이니까 말이다.

재즈 스탠더드 넘버에 이르면 상황은 더욱 어이없어진다. 롯폰기의 재즈 클럽 같은 데 가면, 여자 가수가 혀를 마구 굴리면서 “다음 곡은 <아이 게스 아이 윌 해브 투 행 마이 티어즈 아웃 투 드라이>입니다”라든가, “<스프링 윌 비 어 리틀 레이트 디스 이어>를 부르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런 건 <눈물에 잠겨서>라든가 <늦은 봄>이라든가로 적당히 바꿔 놓으면 서로 얘기가 빨리 통하지 않을까 싶지만, 좀처럼 그렇게 되지도 않는 모양이다. 게다가 솰라솰라 영어로 떠드는 쪽이 어쩐지 더 재즈답다는 풍조도 있으니, 참 난감하다. 같은 곡을 팝 가수가 부르면 <내 마음에 드는 것>인데, 재즈 컬렉션이 연주를 하면 <마이 패이버릿 싱>이 되고 만다. 완전한 차별이다. 옛날 사람들은 외국 노래라도 <어떻게 전할까요>라든가 <달빛의 값은 천금>이라는 좋은 제목을 붙였다. 그러니 요즘이라고 해서 그게 불가능할 리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재즈 팬이고 영어 소설을 번역하고 있는 인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 게스 아이 윌 해브 투 행 마이 티어즈 아웃 투 드라이’ 같은 말을 절대로 단숨에 줄줄이 말할 수는 없다.

 

짐 모리슨을 위한 ‘소울 키친’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전반에 걸친 이른바 ‘혁명의 시대’에 배출된 무수한 록 밴드 중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밴드는 대체 몇 개 정도나 될까? 영화 <우드스톡>을 지금 다시 상영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흥분할 수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이 지나가 버렸다. 그 시절에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몸을 꿰뚫는 것만 같던 수많은 것들을 10년도 넘게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되돌아보니, 그것들은 단지 겉치레만 번지르르한 약속 따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요구했고, 그리고 주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결과 주어진 대부분의 것들은 유형을 따르게 되었다. 유형으로서의 문화를 공격해야만 할 반 문화가 유형화되었다. 반 반 문화가 일어나고, 반 반 반 문화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고는 당연히 ‘혁명’은 끝이 났다.

만약 1969년이나 1970년에 세계 어딘가의 대도시(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 아니면 도쿄든)가 폼페이처럼 화산재에 묻혀 버렸다면 그 유적지는 상당한 구경거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인 광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화산 폭발이 일어나지 않은 채 모든 것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반 문화라는 발상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유형화를 거부하려는 인간이란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시도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두들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아빠진 사회에서는 유형 속에 이미 반유형이 포함되어 있고, 반유형 속에 이미 유형이 포함되어 있다.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남겨진 유일한 길은 갑작스런 역전을 인정하고 반어적으로 ‘유형의 왕’이 되는 것뿐이다.

그런 번잡한 사회 속에서 짐 모리슨은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소울 키친(soul kitchen) 속으로 돌아가 버렸다. 짐 모리슨은 1971년 7월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도 이른 그의 죽음을 시대의 죽음과 겹쳐 생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리슨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는 여러 사람이 죽었다. 지미 헨드릭스가 죽었고, 제니스 조플린이 죽었고, 존 콜트레인이 죽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 각기 다른 크기의 유적을 남겼다.

죽은 자를 칭송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젊어서 죽은 사람은 더 더욱 그렇다. 죽은 자는 배반하지 않고 반격도 하지 않는다. 나이도 먹지 않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지지도 않으며, 배로 안 나온다. 그들은 그저 조용히 완전하게 죽은 상태로 있을 뿐이다. 설령 당신이 그들의 죽음에 대해 신물을 내며 잊고 말았다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다. 단지 그대로 잊어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끝이다. 잊혀졌다고 해서 그들이 당신네 집 대문 앞에 문을 두드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암흑 속에서 단지 고요히 있을 뿐이다. 그렇다. 죽은 자를 칭송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온갖 생각을 뛰어넘어, 죽은 자를 칭송하며 그들의 흔적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꺼림칙함을 뛰어넘어, 짐 모리슨의 음악은 지금까지도 나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 그가 남긴 레코드 중 정말 좋았던 서너 장의 음반은 그 이후에 나온 어떤 록 뮤직 레코드보다도 훌륭하고, 독창적이며, 충격적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한테는 최고의 LP인 <더 도어즈>보다 전율적인 음반이 없고, <스트레인지 데이즈>보다 아름답고 심플한 음반이 없으며, <L.A.우먼>보다 황량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음반은 없다.

내가 처음 들었던 짐 모리슨과 더 도어즈의 레코드는 물론 <라이트 마이 파이어>였다. 1967년의 일이다. 1967년에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그때는 고등 학교를 나와 대학에도 입시 학원에도 다니지 않고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록큰롤을 듣던 때다.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그 해에도 수많은 히트송이 나왔고, 그리고 사라졌다. 그러나 <라이트 마이 파이어>라는 곡만은 변함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거칠기 짝이 없고 폭력적인 보컬과 전주의 주술적인 오르간 음색은 언제까지나 내 뇌리 속에 박혀 있었다. <마음에 불을 붙여라>라는 일본어 제목은 너무 부드럽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라이트 마이 파이어’였지 그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Come on baby light my fire

Come on baby light my fire

Try to set the night on fire

 

자 그대, 나에게 불을 붙여 줘

자 그대, 나에게 불을 붙여 줘

이 밤을 확 불살라 버리지 않겠어?

 

나는 이 곡의 가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아하게 ‘내 마음에 불을 붙여서’라든가 ‘온밤 내내 타오른다’가 아니라 그것은 좀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이다. 그는 밤 자체에, 혹은 육체 자체에 불을 붙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묘하고 직설적인 감각이 바로 짐 모리슨이라고 하는 록 싱어의 생리다.

이 곡의 작사와 작곡은 대부분 기타를 맡은 로비 크리거가 했는데도 불구하고, 짐 모리슨의 생리는 압도적이고 카리스마적으로 이 노래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건 짐 모리슨 이외의 가수가 노래하는 <라이트 마이 파이어>의 버전을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호세 펠리치아노라든가 스티비 원더. 그들의 노래는 해맑고 아름답다. 잘하면 누군가의 마음에 불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짐 모리슨 말고 대체 누가, 육체 그 자체에 직접 불을 붙일 수 있을 것인가? 믹 재거라 해도 그건 무리다.나에게 있어서 <라이트 마이 파이어>는 나에게 있어서의 1967년과 너무나도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낡은 커튼처럼 잡아뜯어서 1967년의 밤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면 나는 꼭 그렇게 했을 것이다. 1967년은 그런 해였다.

짐 모리슨은 본질적으로 선동자였다. 그보다 더 평범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될 만큼 평범하고 우직한 군인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제임스(짐) 더글라스 모리슨은 록 싱어가 됨에 따라 부친을 상징적으로 살해하고, 모친을 상징적으로 범했으며, 자신의 과거를 불태워 버렸다. 데뷔 당시 그는 성장 배경을 묻는 말에 단지 ‘고아’라고만 대답했다. 그는 스스로를 선동해서 짐 모리슨이라는 이름의 신생아에게 신성한 혼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한 선동 없이는 짐 모리슨은 짐 모리슨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때문에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선동의 대가는 날마다 커져만 갔다. 마침내 더 이상 대가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그 시절에 우리는 짐 모리슨이었다. 짐 모리슨이 LSD(역주:강력한 환각제)와 코카인으로 자신의 머리를 선동하고, 버본 위스키와 진으로 내장 기관을 선동하고, 바지 지퍼를 열고 페니스를 꺼내 관중을 선동할 때, 우리는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공유할 수 있었다.그리고 짐 모리슨이 죽었을 때, 우리 속의 짐 모리슨도 함께 죽었다. 존 레논도, 믹 재거도, 보브 딜런도 짐 모리슨이 남긴 빈자리를 이어받을 수는 없었다. 20년이라는 세월도 그 공백을 메우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1971년에는 1983년 같은 해가 정말로 나에게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1983년은 실제로 아무런 감동도 없이 내 위로 내려왔고, 나는 지금도 짐 모리슨과 더 도어즈의 레코드를 듣고 있다. 나는 이제 서른세 살이고, 여전히 밤에 불을 붙일 수 없다.

 

자 이제 문닫을 시간이야

가야만 해

밤새도록 여기에 있고 싶어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가로등은 공허한 불빛을 흔들고 있지

게다가 내 머리 속은

완전히 미쳐 버린 모양이야

이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뻔하잖아

너의 소울 키친에서 하룻밤 자게 해줘

그 촉촉이 젖은 스토브로 나를 따뜻하게 해줘

 

짐 모리슨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소울 키친’으로 사라지고 나서 12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의 노래는 지금까지도 스테레오 세트 주위에 살이 나는 냄새를 감돌게 한다. 그가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와서 문을 두드릴 것만 같다. 어이, 난 전설 따위가 아니야, 라고.

그래, 짐 모리슨은 결코 전설 따위가 아니다. 전설로도 짐 모리슨의 빈자리를 메울 순 없는 것이다.

 

카레라이스에 나물무침 같은 회의

가끔 텔레비전 야구 중계 같은 걸 보다 보면, 경기 후의 인터뷰에서 투수에게 “오늘의 투구가 100점 만점에서 몇 점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 아나운서를 보게 되는데, 대체 그런 질문을 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 대개 그런 질문을 하는 아나운서는 투수가 “글쎄요, 90점 정도일까요”라고 하면, “아아, 그렇습니까? 90점입니까?” 하는 식으로 얘기를 끝내 버리고 만다. 얘기는 거기서 끝나고, 90점이라는 자기 평가가 과연 어떤 기반과 체계 위에서 성립된 것인가 하는 분석까지는 가지 않는다. 이래서는 답안지를 받고 어디가 틀렸는가를 반성하지도 않고 “와아, 90점이야, 90점” 하고 떠들어대는 초등 학생과 하나 다를 바가 없잖은가.

도대체 무엇이 100점 만점인가 하는 설정부터가 애매한데도, “글쎄요, 90점 정도일까요”라는 소리를 듣고, “아아, 그렇습니까?”하고 이해를 하는 쪽이 더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봐야 스포츠에 불과하니까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는 게 촌스럽다면 뭐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하기야 인터뷰 시간도 짧고, 본인이 90점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됐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프로 야구 투수 중에도 자기 평가에 엄격한 사람과 느슨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개중에는 “이기면 100점, 지면 0점!”이라고 하는 단순한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90점입니다”, “그렇습니까?”라는 대화 속에서 뭘 얻는 건 상당히 무리일 테고, 아나운서 역시 그것이 무리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알면서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100점 만점이라면 몇 점일까요?”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이미 안일함이나 단순함이 아니다. 그저 무의미한 소모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점수 평가 방식의 질문은 질문자에게는 상당히 편리한 모양인 듯, “100점 만점이라면 당신의 남편은 몇 점일까요?” 하는 종류의 질문이 항간의 잡지-특히 여성지-에 자주 등장한다. 대답하는 쪽도 “글쎄요…난처하군요. 65점쯤일까요”하고 난감해 하면서도 우직스럽게 답변한다.

그런 기사를 읽으면 나는 항상 어리둥절해지는데, 과연 65점 남편이란 어떤 남편일까? A씨네 남편은 ‘집안일은 잘 도와 주지만, 섹스가 별로 여서 65점’일지도 모르고, B씨네 남편은 ‘섹스는 무턱대고 짐승처럼 세게 하지만 집안일을 도와 주지 않아서 65점’일지도 모른다. C씨네 남편은 ‘얼굴은 못생겼지만 마음이 착하니까 65점’일지 모르고, D씨네 남편은 ‘너무 사랑한 나머지 왠지 두려워서 65점’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A씨와 B씨와 C씨와 D씨네 남편은 모두 65점이지만 그 방향성도 질도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65점이라는 숫자로 바꿔 버리면, A씨네 남편도, B씨네 남편도, C씨네 남편도, D씨네 남편도 그저 ’65점’이라는 따옴표 안에 한데 묶이고 만다. 그러니 그런 질문이나 대답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설문 조사 중에는 왠지 찝찝하고 무의미한 것이 많다. 나도 한번 “당신의 행복도는 10점 만점 중 몇 점입니까?”라는 끔찍한 질문을 받고 난감했던 적이 있다. 그런 걸 갑작스레 물으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것은 마치 “10점이 만점이라면 남극 대륙의 존재는 당신에게 몇 점입니까?” 하는 질문과 똑같다.

남극 대륙은 좋든 싫든 존재하는 것이고, 좋아하니까 이렇고 좋아하지 않으니까 저렇다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펭귄이 있으니까 8점’이라든가 ‘추운 건 싫으니까 2점’이라는 식으로 평가를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쯤 되면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현재 상황이라는 것도 그렇다. 당연히 여기 있어야 했기에 여기에 있는 거니까, 이런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하므로 여기에 있다’라고 평가할 도리밖에 없다. 펭귄이나 추위라는 건 개별적인 측면의 속성일 뿐, 총체로서의 상황과는 별 관계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모르겠다’라든가 ‘뭐라 말할 수 없다’라든가 ‘대답하고 싶지 않다’라고 답하기로 했다. 물론 여태까지 여기에 쓴 얘기를 꺼내며 ‘모르겠다’라는 답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세세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얘기가 너무 길어질 염려가 있고, 무엇보다 질문자는 그런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6점’이라든가 ‘8.5점’같은 단순한 수치다. 그래서 나는 설문 조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신문의 여론 조사 결과 따위를 보면, ‘모르겠다’라든가 ‘대답하고 싶지 않다’라고 답한 사람들이 대략 5퍼센트 정도씩 있는데, 나는 그런 사람들의 기분을 잘 이해한다.가령, 당신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다음 중에서 골라 주십시오.

 

(1) 신뢰할 수 있다

(2)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

(3) 그다지 신뢰할 수 없다

(4) 신뢰할 수 없다

(5) 모르겠다

 

라는 설문 조사를 받으면 (5)를 고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미국이든 일본이든 니카라과든, 신뢰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신뢰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나는 이런 질문에 대해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신뢰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설문 조사나 여론 조사에 대해 죄다 ‘그런 건 모르겠다’라든가 ‘뭐라 말할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다. 여론 조사의 원 그래프에 ‘모르겠다’는 대답이 85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다소 불안한 느낌이 들 테고, 그런 회의적인 사회에 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아마 회의라는 것은 카레라이스에 나물무침을 곁들인 정도의 비율로 존재해야 건전할 것이다.

 

‘토끼정’ 주인

나는 나의 단골집을 소개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짓을 하면 왠지 모르게 ‘잘난 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섣불리 소개를 해서 가게가 붐비게 되어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토끼정’의 장소와 전화 번호를 여기에 쓰지 않기로 하겠다.

‘토끼정’은 우리 집 근처에 있고, 나는 종종 이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손님이 열 명만 들어가면 꽉 차 버릴, 카운터만 달랑 있는 작은 집인데 꽉 차는 일이 거의 없다. 인테리어도 극히 평범하고, 바깥에는 간판도 달려 있지 않다. 입구 옆에 ‘서양 정식,토끼정’이라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무척 조용히 영업을 하고 있는 집이다.

‘토끼정’에는 두 종류의 요리밖에 없다. 하나는 매일 바뀌는 정식이고, 또 하나는 고로케 정식이다. 두 음식에 바지락 된장국과 큰 그릇에 한 가득 담긴 양배추 샐러드가 딸려 나오는데, 이게 참 무지하게 맛있다.

그리고 신선한 야채절임도 듬뿍 곁들여진다. 갓 볶은 참깨를 뿌린 데친 시금치라든가, 스파게티와 버섯 초무침 같은 게 작은 그릇에 소복이 담겨 나온다. 쫄깃쫄깃한 스파게티와 씹는 맛이 상큼한 버섯 초무침은 여느 정식집에서 나오는 반찬과는 격이 다르다.

그리고 밥은 보리밥이다. 이 보리밥이 투박한 느낌의 큼지막한 밥 공기에 담겨 나오면 은은한 보리 냄새가 온 가게 안에 물씬 풍긴다. 나는 이 순간이 미치도록 좋다. 차 역시 은은한 엽차(여름에는 시원한 보리차)가 나온다. 젓가락은 약간 짙은 색의 날씬한 삼나무 젓가락이고, 젓가락을 싸는 종이는 고동색이 섞인 연둣빛의 무늬 없는 일본 종이다.

날마다 바뀌는 정식의 반찬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쓰자면 한이 없으니 여기에서 화제를 고로케 정식으로 한정하겠다.

‘토끼정’의 고로케가 얼마나 맛있는지를 글로 표현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꽤 큰 고로케 두 개가 접시에 담겨 나오는데, 무수한 빵가루가 바깥을 향해 톡톡 튀듯이 알알이 서 있고, 기름이 쉭쉭 하는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스며드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건 거의 예술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을 삼나무 젓가락으로 꾹 누르듯이 잘라서 입에 넣으면, 튀김옷이 바삭 하는 소리를 낸다. 속에 든 감자와 쇠고기는 녹아들 것처럼 뜨겁다. 감자와 쇠고기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대지에 뺨을 비비고 싶을 정도로 잘 자란 감자-이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와, 주인이 엄선해서 구입한 쇠고기를 커다란 부엌칼로 잘게 썰어 섞은 것이다. 양념은 재료의 뛰어남을 살리기 위해 아주 조금만 하고, 맛이 좀 싱겁다 싶으면 ‘토끼정’ 특제 소스를 친다. 소스는 커다란 항아리에 들어 있어서 스푼으로 그것을 퍼서 치는데, 뭐라고 형용해야 좋을지 모를 불가사의한 맛이 난다. 결코 뒷맛도 남지 않고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두 개의 고로케 중 하나는 소스 없이 먹고, 다른 하나는 소스를 쳐서 먹는다. 소스를 쳐서 먹는 것도 맛있고, 소스를 치지 않고 먹는 것도 맛있다는 미묘한 심정에서다.

‘토끼정’의 주인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로 몸은 다부지다. 인상은 나쁘지 않으나 말이 없고, 고집이 세 보이긴 하지만 친절을 강요할 것 같지는 않은 퍽 바람직한 성격의 인물이다. 목덜미에 5센티미터쯤 되는 칼자국 같은 상처가 있는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나로서도 음식만 맛있으면 가게 주인의 경력이야 어찌 됐든 알 바는 아니다.

‘토끼정’의 주인에게는 호리호리한 미인 부인과 중학생쯤 돼 보이는 딸이 있다. 나는 딱 두 번 집 부근의 길에서 그들을 보았다. 구태여 말을 걸진 않았지만, 딸은 값비싸 보이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다. ‘토끼정’ 주인과 ‘토끼정’ 부인과 ‘토끼정’ 딸은 셋이서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늘 주인 혼자 ‘토끼정’에서 일을 하고 있다. 혼자서 재료를 사서 요리를 만들고 차를 끓인다. 그의 움직임은 참 보기가 좋다. 일을 척척 빠르게 처리하는데도 어수선한 느낌이 없다.

다른 사람한테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토끼정’의 주인은 원래는 야쿠자였단다. 서른 일곱, 여덟이 되었을 때 그 바닥에서 손을 싹 씻고 식당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 옛날 패거리들과 연락이 닿지 않도록 일부러 한적한 주택가를 골라 가게를 내고, 간판도 걸지 않고 선전도 하지 않고, 잡지사의 취재도 거절하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평판만으로 조용히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본인에게 확인해 본 건 아니니까 그 얘기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얘기가 일맥 상통하는 듯하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맛있는 점심만 먹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고, 그가 전에 야쿠자였든 뭐였든 전혀 상관없다. 이런 맛있는 고로케 정식을 1,000엔에 먹을 수 있는 가게는 도쿄의 어디에서도 절대로 찾을 수 없다.

언젠가 한번 내가 오후 한 시 반에 ‘토끼정’에 갔더니 재료가 다 떨어지고 없었던 적이 있다. 내가 “그럼 다음에 오죠” 하고 가게를 나서려고 했더니, 주인이 나를 불러 세우며 “반찬은 남았는데 드시고 가시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먹으려고 만든 꼬치와 삶은 고비와 보리밥과 된장국과 나물무침을 내왔는데, 이게 또 도저히 다른 데서는 맛볼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된장국은 냄비 속에 조개를 듬뿍 넣어 국물을 우려내고, 조개에 맛이 완전히 배어들 정도로만 끓이는 거다. 맛이라기보다는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산뜻했다.

“맛있군요” 하고 내가 말하자, 주인은 “남은 반찬이라…”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래서 나는 ‘토끼정’과 수수께끼 같은 ‘토끼정’ 주인이 무척 마음에 든다.

 

빌리 홀리데이에게 바친다

지금은 새벽 한 시 반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바깥은 어둡다. 그것도 어정쩡하게 어두운 도시의 밤이 아니라, 창 밖으로 손을 내밀면 손가락이 검게 물들어 버릴 것만 같은 진짜 어둠이 깔린 밤이다. 우리 집 뒤쪽은 바로 산이라 밤의 어둠이 정말로 깊고 조용하다. 달이나 별이 총총한 밤에는 주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데, 오늘 밤에는 그들도 어둠 속에 푹 묻혀 버리고 말았다.

두 마리의 고양이도 완전히 잠들었다. 곤하게 자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나는 항상 마음이 놓인다. 적어도 고양이가 안심하고 잘 수 있는 동안은 특별히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내가 어들 좀 갔기 때문에 집 안에서 나 혼자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책상 앞에 앉아서 이 원고를 쓰고 있다.

새벽 한 시 반에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원고를 쓰고 있다니, 참 오래간만이다. 적어도 요 1년 동안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내가 어째서 이런 시간에 깨어 있는가 하면, 너무 빨리 잠자리에 들어서 밤 열두 시 반(즉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에 퍼뜩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역시 오후 일곱 시 사십 분에 잠자리에 든 것은 너무 일렀다.

그러고 보니 왠지 시차 병에 걸린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일이 있어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다. 이렇게 한밤중에-고양이도 잠들어 버린 한밤중에-외톨이가 되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다.

부엌에 가서 보조레의 코르크 마개를 따고, 잔과 함께 가져 와 책상 위에 놓는다. 그리고 벌써 반년이나 듣지 못했던 빌리 홀리데이의 레코드를 턴테이블에 얹고, 바늘을 그 위에 올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요즘 빌리 홀리데이의 레코드를 그다지 듣지 않게 된 건 밤늦게까지 깨어 있던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기야 오후 두 시 반에 케이크를 먹으면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하다.

오래된 레코드라서 빠지직 빠지직 잡음이 들어가 있다. 아니, 잡음이 들어가 있다기보다는 잡음투성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레코드를 대학생 때 샀으니까, 7~8년은 족히 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최초로 산 빌리 홀리데이의 레코드다. 지금도 나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버브(폴리돌)의 <빌리 홀리데이의 혼>이라는 편집 레코드로, A면은 1946년에 있었던 JATP의 라이브, B면은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앤솔러지(야마토 아키라 씨의 추천곡)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은 A면인데, 우선 <보디 앤드 소울>과 <스트레인지 프루트>라는 압도적인 중량급 가창력을 느낄 수 있는 노래로 시작하여, <트래블링 라이트>,<히즈 퍼니 댓 웨이>로 약간 밝아지고, 이어서 <더 맨 아이 러브>,<더 베이비 에인트 아이 굿 투 유>로 느릿느릿 나가다가, <올 오브 미>로 거침없이 치닫고, 그 유명한 <빌리즈 블루스>로 단숨에 마무리되는 구성이다. <보디 앤드 소울>로 시작되는 구성이 약간 불만스럽지만(맨 첫 곳으로 듣기에는 너무 압도적이다), 이 레코드의 연주에는 지긋이 귀를 기울이면 빌리 홀리데이라는 사람이 정말로 굉장한 사람이었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된다.

빌리 홀리데이는 한때 지나치게 신격화되었던 적이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은 약간 짜증이 나 멀리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좋을 그런 주변적인 일들에서 완전히 벗어나 허심탄회하게 음악 그 자체에 귀를 기울여 보면 역시 진지하게 노래를 듣게 만드는 멋진 가수임을 알 수 있다. 옛날에도 멋지다고 생각했었지만 나이를 먹어 새삼스레 다시 들어보니 그 훌륭함이 훨씬 분명하게 이해되었다.

그녀의 노래에는 몸 속 깊은 곳에서 자연히 배어 나오는 원액 같은 것-그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청중들을 압도하고, 감싸 안고,도취시키고, 완전히 뻗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음악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갑자기 나 자신이 어디인지 잘 알 수 없는 곳에 파묻혀 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때때로 이건 대체 어찌 된 일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노래는 그저 노래일 뿐이다. 골똘히 생각하다 해서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와 흔하디 흔한 다른 재즈 가수의 노래가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층성일 것이다. 요컨대 그녀의 노래에 포함된 어떤 요소는 듣는 쪽이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랍 속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미개봉 된 편지처럼, 예정된 그날이 와야지 겉으로 드러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해독할 수 있는 날이 되면 그냥 자연히 해독되는 것이다.

그런 음악이 있다는 것은 역시 멋진 일이다. 젊은 시절에 숨이 막힐 듯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들어도 무엇 하나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던 부분이, 지금 이렇게 포도주 잔을 기울이면서 멍하니 듣고 있을 뿐인데도 실타래가 풀리듯이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가 된다. 그러고 보니 나이를 먹는 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버브 판 빌리 홀리데이도 좋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베스트 레코드는 미국 컬럼비아에서 나온 <더 골든 이어즈 VOL.1>이라는 세 장짜리 앨범이다. 이 석 장의 레코드는 진짜 많이 들었다. 그 정도로 듣고 또 들었던 재즈 보컬의 레코드는 또 없을 것이다. 버브나 컬럼비아나 데카의 빌리 홀리데이가 각각 나름대로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초일류급 스윙 밴드를 배경으로 불러 젖히던 1930년대, 1940년대의 이 컬럼비아 판 빌리 홀리데이는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산뜻하고, 그리고 완벽하다. 아슬아슬하고, 꼼짝도 할 수가 없고,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행복하며, 그리고 참을 수 없이 슬프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방비 상태며, 그러면서도 손을 대기가 어렵다.

특히 레스터 영이 함께 한 트랙은-<웬 유 아 스마일링 아이 캔트 겟 스타티드>-주옥같이 아름답다. 만약 앞으로 빌리 홀리데이를 들어 보고 싶은 젊은이가 있다면 나는 역시 이 레코드부터 들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유명한 <스트레인지 프루트>를 불렀을 무렵의 빌리 홀리데이는-이상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가장 먼저 듣기에는 좀 너무 위태로운 것같이 내게는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버브 판은 한밤중에 혼자서 듣기에는 너무 슬프다.

이따금 밤에 재즈를 들을 수 있는 바에 가면 버브 시절의 빌리 홀리데이 노래가 흘러 나올 때가 있다. 그녀의 그런 노래-가령 <올 오아 낫싱 앳 올>-를 들으면서 위스키를 마시다 보면, 왠지 나 혼자만이 중력이 다른 해저나 그 어딘가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무척 깊은 곳이어서 위로는 올라갈 수 없고, 제대로 걸음을 옮기기조차 힘겹다. 그래서 그저 위스키 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빌리 홀리데이에게 바친다

-그녀의 노래에는 몸 속 깊은 곳에서 자연히 배어 나오는 원액 같은 것이 들어 있어서, 청중들을 압도하고 감싸 안고 도취시키고 완전히 뻗어 나가게 한다 지금은 새벽 한 시 반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바깥은 어둡다. 그것도 어정쩡하게 어두운 도시의 밤이 아니라, 창 밖으로 손을 내밀면 손가락이 검게 물들어 버릴 것 같은 진짜 어둠이 깔린 밤이다. 우리 집 뒤쪽은 바로 산이라서 밤의 어둠이 정말로 깊고 조용하다. 달이나 별이 총총한 밤에는 주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데, 오늘 밤에는 그들도 어둠 속에 푹 묻혀 버리고 말았다.

두 마리의 고양이도 완전히 잠들었다. 곤하게 자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나는 항상 마음이 놓인다. 적어도 고양이가 안심하고 잘 수 있는 동안은 특별히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내가 어딜 좀 갔기 때문에 집 안에는 나 혼자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책상 앞에 앉아서 이 원고를 쓰고 있다.

새벽 한 시 반에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원고를 쓰고 있다니, 참 오래간만이다.

적어도 요 1년 동안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내가 어째서 이런 시간에 깨어 있는가 하면, 너무 빨리 잠자리에 들어서 밤 열 두 시 반(즉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에 퍼뜩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역시 오후 일곱 시 사심 분에 잠자리에 든 것은 너무 일렀다.

그러고 보니 왠지 시차 병에 걸린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일이 있어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다. 이런 한밤중에-고양이도 잠들어 버린 한밤중에-외톨이가 되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다.

부엌에 가서 보조레의 코르크 마개를 따고, 잔과 함께 가져 와 책상 위에 놓는다. 그리고 벌써 반년이나 듣지 못했던 빌리 홀리데이의 레코드를 턴테이블에 얹고, 바늘을 그 위에 올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요즘 빌리 홀리데이의 레코드를 그다지 듣지 않게 된 건 밤늦게까지 깨어있던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기야 오후 두 시 반에 케이크를 먹으면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하다.

오래된 레코드라서 빠지직 빠지직 잡음이 들어가 있다. 아니, 잡음이 들어가 있다기보다는 잡음투성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레코드를 대학생 때 샀으니까, 7-8년은 족히 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최초로 산 빌리 홀리데이의 레코드다. 지금도 나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버브(폴리돌)의 《빌리 홀리데이의 혼》이라는 편집 레코드로, A면은 1946년에 하던 JATP의 라이브, B면은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앤솔러지(야마토 아키라 씨의 추천곡)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은 A면인데, 우선<보디 앤드 소울>과 <스트레인지 프루트>라는 압도적인 중량급 가창력을 느낄 수 있는 노래로 시작하여, <트래블링 라이트>·<히즈 퍼니 댓 웨이>로 약간 밝아지고, 이어서 <더 맨 아이 러브>·<더 베이비 에인트 아이 굿 투 유>로 느릿느릿 나가다가, <올 오브 미>로 거침없이 치닫고, 그 유명한 <빌리즈 블루스>로 단숨에 마무리 되는 구성이다. <보디 앤드 소울>로 시작되는 구성이 약간 불만스럽지만(맨 첫 곡으로 듣기에는 너무 압도적이다), 이 레코드의 연주에 지긋이 귀를 기울이면 빌리 홀리데이라는 사람이 정말 굉장한 사람이었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된다.

빌리 홀리데이는 한때 지나치게 신격화되었던 적이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은 약간 짜증이 나 멀리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좋을 그런 주변적인 일들이 완전히 벗어나 허심 탄회 하게 음악 그 자체에 귀를 기울여 보면 역시 진지하게 노래를 듣게 만드는 멋진 가수임을 알 수 있다. 옛날에도 멋지다고 생각했었지만 나이를 먹어 새삼스레 다시 들어 보니 그 훌륭함이 훨씬 분명하게 이해되다.그녀의 노래에는 몸 속 깊은 곳에서 자연히 배어 나오는 원액 같은 것-그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청중들을 압도하고, 감싸 안고, 도취시키고, 완전히 뻗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음악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갑자기 나 자신이 어디인지 잘 알 수 없는 곳에 파묻혀 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때때로 이건 대체 어찌 된 일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노래는 그저 노래일 뿐이다. 골똘히 생각한다 해서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와 흔하디 흔한 다른 재즈 가수의 노래가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중층성(重層性)일 것이다. 요컨대 그녀의 노래에 포함된 어떤 요소는 듣는 쪽이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랍 속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미 개봉된 편지처럼, 예정 된 그날이 와야지 겉으로 드러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해독할 수 있는 날이 되면 그냥 자연히 해독되는 것이다.

그런 음악이 있다는 것은 역시 멋진 일이다. 젊은 시절에 숨이 막힐 듯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들어도 무엇 하나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던 부분이, 지금 이렇게 포도주 잔을 기울이면서 멍하니 듣고 있을 뿐인데도 실타래가 풀리듯이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가 된다. 그러고 보니 나이를 먹는 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버브 판 빌리 홀리데이도 좋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베스트 레코드는 미국 컬럼비아에서 나온 《더 골든 이어즈 VOL.1》이라는 세 장짜리 앨범이다.

이 석 장의 레코드는 진자 많이 들었다. 그 정도로 듣고 또 들었던 재즈 보컬의 레코드는 또 없을 것이다. 버브나 컬럼비아나 데카의 빌리 홀리데이가 각각 나름대로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초일류 급 스윙밴드를 배경으로 불러 젖히던 1930년데, 1940년대의 이 컬럼비아 판 빌리 홀리데이는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산뜻하고, 그리고 완벽하다. 아슬아슬하고, 꼼짝도 할 수가 없고,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행복하며, 그리고 참을 수 없이 슬프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방비 상태며, 그러면서도 손을 대기가 어렵다.

특히 레스터 영어 함께 한 트랙은-《웬 유 아 스마일링 아이캔트 겟 스타티드》-주옥같이 아름답다. 만약 앞으로 빌리 홀리데이를 들어 보고 싶은 젊은이가 있다면 나는 역시 이 레코드부터 들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유명한 <스트레인지 프루트>를 불렀을 무렵의 빌리 홀리데이는-이상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가장 먼저 듣기에는 좀 너무 위태로운 것같이 내개는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버브 판은 한밤중에 혼자서 듣기에는 너무 슬프다.

이따금 밤에 재즈를 들을 수 있는 바에 가면 버브 시절의 빌리 홀리데이 노래가 흘러 나올 때가 있다. 그녀의 그런 노래-가령 <올 오아 낫싱 앳 올>-를 들으면서 위스키를 마시다 보면, 왠지 나 혼자만이 중력이 다른 해저나 그 어딘가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무척 ㄱ은 곳이어서 위로는 올라갈 수 없고, 제대로 걸음을 옮기기조차 힘겹다. 그래서 그저 위스키 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찰스턴 의 유령

-기왕 나올 바에는 유령도 고풍 찬연하고 고요하며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완고하게 옛모습을 간직한 곳에 나타나고 싶을 텐데… …

찰스턴에서 유령이 나오지 않는 오래된 집을 발견하기란 지극히 힘든 일이다, 라고 어떤 책에 씌어져 있었다. 뭐 다소 문장상의 과장은 있었다 해도, 확실히 해질 무렵에 찰스턴의 고요한 코블스톤 거리를 걷다 보면 정교하게 세공 된 검은 철문 너머로, 혹은 어렴풋한 등불이 뿌옇게 비치는 현관 한 구석에서 뭔가 이상한 그림자를 본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한밤의 정원은 어쩐지 울적하고, 거대한 떡갈나무 가지에 몰(역주: 인도 모골 지방이 원산지인 돋을무늬의 모직물)처럼 축 늘어진 착생 식물이 강바람에 흔들거리며, 땅거미 속에 백일홍이 아련하게 떠 있다. 찰스턴이란 곳은 그런 도시다. 모든 것이 오래되고 고요하며, 그리고 우아하다. 기왕 나올 바에는 유령도 뉴욕 시티보다는 이런 도시에 출몰하는 쪽이 훨씬 기분이 좋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찰스턴은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는데, 고풍 찬연한 남부의 옛모습을 좀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완고하게 간직한 항구 도시다. 애슐리 강과 쿠퍼강이 합류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 하구에 꼭 맨해튼 섬과 비슷한 모양으로 위치하고 있는 천연의 항구로, 식민지 시대에는 ‘작은 런던’이라 불리며 번창했었고, 군사적 중요성에서 남북전쟁의 발화점이 되기도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팬들에게는 버틀러 선장이 봉쇄망을 뚫고 용감한 이름을 날렸던 도시라고 말하면 얘기가 통할지 모르겠다.

나는 딱히 레트 버틀러의 열렬한 팬은 아니지만, 앨라배마 주의 모빌 호텔에서 미국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찰스턴이라는 곳에 꼭 가보고 싶어져서 비행기를 타고 곧장 대서양 해안으로 날아갔다. 어째서 찰스턴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나의 여행이라는 것은 대개 늘 그런 식이다. 지도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마음에 들 만한 곳이 있으면’음, 이거야!’ 하고 결심하고는 그 곳으로 간다. 그런 기대에 제대로 부응되는 때도 있고, 전혀 영 아니다 싶을 때도 있다.

찰스턴은 기대에 부응했던 도시다. 그 사실은 애슐리 강의 다리 위에서 도시를 한눈에 둘러보았을 때부터 이미 알았다. 물가에 무성한 푸른 풀들은 마치 논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쓰다듬어 주기라도 하는 듯 부드럽게 몸을 흔들고 있고, 줄줄이 늘어선 요트의 돛대는 여기저기에서 펄럭펄럭 소리를 내고 있으며, 그 위를 갈매기나 황새(!)가 천천히 춤추듯 날고 있다. 시가지는 오랜 기품을 간직하고 있고, 고층빌딩 같은 건 하나도 없다. 거리를 걸어가고 있으면 몇 사람이나 “하우 아 유 두잉 투데이?”하고 말을 걸어 온다. 찰스턴이라는 것은 아이 앰 저스트 파인. 생큐,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만약 당신이 유령이라 해도 사우스 브롱스보다는 역시 이런 곳에 나타나고 싶겠죠?

내가 묵은 여관에도 자주 유령이 출몰한다고 한다. 나는 나중에야 그 사실을 《찰스턴의 유령》이라는 책에서 보고 알았다. 이 책에 따르면 “유령은 밤이 되면 복도를 걷다가 2층에 있는 남쪽 침실로 들어가 그 곳에서 사라진다”고 한다. 유령의 정체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타르반데라는 부인일 거라고 얘기되고 있다. 타르반데는 18세기 후반에 이 건물에서 여자 기숙학교를 운영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그녀가 200년도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굳이 한밤중에 복도를 걷고 있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는 유감스럽게도 불투명하다.

하기야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유령이 나오는 여관의 본관에 묵지는 못했다. 객실이 네 개밖에 없는 본관이 전부 찼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여관의 젊은 주인인 월터 버튼 씨는(소개가 늦어졌는데, 이 여관의 이름은’스워드 게이트 인’이다) 나를 별채에 묵게 해주었다. 별채는 이웃집 정원을 지나 안쪽에 있는데, 전용 풀이 딸려 있는 호화로운 큰 건물이었다.

월터씨는 나를 안내하면서 “이웃집이지만 지나 다니는 걸 염려하시지 않아도 돼요’라고 말했다.

“잠깐만요”하고 내가 끼여 들었다.

“웨스트 모어랜드라면 ……베트남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지낸 웨스트 모어랜드 말입니까?”

“맞아요”하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장군의 집 정원에는 동남 아시아에서 가지고 돌아온 듯한 장식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타르반데 유령보다는 인도차이나 땅에서 쓰러져 간 몇 십만, 몇 백만의 사람들의 피가 훨씬 리얼했지만, 이 우아한 찰스턴에서 그런 말을 해봤자 풍류 없단 소리나 들을 것이다. 게다가 여관의 젊은 주인은 무척 친절한 사람이었다. 이번 주말에 친구들과 대형 요트를 타고 가까운 섬에 가서 수영도 하고 바비큐 파티도 할 예정인데 같이 가지 않겠냐며 나를 초대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일정 관계로 그들과 동행할 순 없었지만, 딱히 섬까지 가지 않고 이 거리에서 느긋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마도 이 고장 사람들은-이 기품 있는 조용하고 깔끔한 고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인도차이나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결국 그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밤 열 시 반에 달빛이 비치는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 일가의 정원 끝의 풀에서 헤엄을 치면서 말이다.

찰스턴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엄청나게 많은 레스토랑이 있는 데다가 맛의 수준도 미국 치고는 월등히 높아서 실망시키는 일이 별로 없다.

나는 퀸 거리에 있는 ‘푸건즈 포치’라는 남부풍 시프드 레스토랑이 마음에 들어 그곳에서 몇 번이나 저녁밥을 먹었다. 황당무계한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가게 안은 냉방이 잘 되지 않았다. 천장에 달린 선풍기가 빙글빙글 돌아 가며 공기를 휘젓고, 그 아래에서 우리는 디프 프라이드 캣피시(메기 말이다)를 먹었다. 메기는 제법 맛있는 물고기다. 보리멸의 맛과도 비슷하지만, 보리멸보다는 약간 진한 느낌이 든다. 암게를 사용해서 만든 수프와 도넛 버터 파이는 이 가게의 자랑거리고 이 두 가지는 확실히 일품이다. 이 세 가지 외에 머시룸 서테와 슈림프 크레올과 샐러드와 커피가 딸려 나오면서 20불 남짓이니, 이 정도면 꽤 싼 거다.

이곳에서 ‘돌핀 사바나 풍(風)’이라는 요리도 먹었다. 가다랭이와 게르치를 뒤섞어 고급스럽게 만든 듯한 맛이 났다. 약간 오도독거려 꽤 맛이 괜찮았지만, 이것은 진짜 돌고래는 아니고 아마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만새기였을 것이다. 아무리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고 해도 미국에서 돌고래를 먹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푸건즈 포치’의 넘쳐흐를 정도로 양이 많은 정식을 배에 꾹꾹 눌러 담고 나는 애슐리 강을 향해 처치 거리를 걸었다.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모양의 달이 은세공품처럼 부드러운 여름 밤 하늘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강가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포도주의 취기를 씻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각별히 이렇다 할 만한 이유도 없이 백일홍 옆에 앉아 있다. 마치 예약 등록을 끝마친 말없는 유령처럼.

 

그리운 비프스테이크

-스테이크는 꾸밈 없이 아양도 떨지 않고 잘난 척하지도 않는 ‘남자다운’요리여야 한다.

이따금 괜스레 비프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나는 원래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평소에는 거의 생선과 야채만 먹지만,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문득 스테이크의 이미지가 머리 속에 떠올라서는 그냥 그대로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한 번 스테이크 생각이 나면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이건 아마도 몸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고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일 테지만, 그렇다면 스키야키 든 포크 커틀릿이든 햄버거든 비프 커틀릿이든 불고기든 좌우지간 고기면 될 텐데,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스테이크여야만 하는 것이다.

필시 스테이크라는 것이 내 머리 속에 ‘육적(肉的) 기호’로서 입력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기호라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어쨌든 일종의 단순 개념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내 속에 육적 영양분이 부족해지면 “고기가 부족합니다, 삑삑’ 하고 자동적으로 신호가 발신되어 그 기호인지, 개념인지 하는 것이 백경(白鯨)처럼 의식의 해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때때로 몸이 근질근질해질 정도로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극히 심플한 스테이크다. 육질이 좋은, 맛있는 고기를 쓱싹 솜씨 있게 구워 내어 육즙이 흐르지 않게 위에다 슬쩍 소스를 끼얹었을 뿐인 심플하기 그지없는 스테이크 말이다. 가볍게 소금과 후추 정도로만 간을 하면 된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런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가게는 유감스럽게도 이 드넓은 도쿄 거리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여러 사람에게 소개를 받기도 했고 나 스스로도 찾아다녀 봤지만, 정상적인 가격으로 내가 좋아하는 막의 스테이크를 마음 편이 먹을 수 있는 가게란 여간 해서 없는 것이다.

나는 고베 태생인데, 고베라는 곳은 아시다시피 스테이크 가게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오늘은 외식이나 할까?”라고 할 때는 자주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다. 물론 그런 외식은 진수성찬이라면 진수성찬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잠깐 집 근처에’ 들른다는 일종의 편안한 느낌을 주었고, 또 그 스테이크 맛도 ‘짐 근처’ 식의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맛이었다. 옛날 예기인 데다 어린아이가 뭘 알았겠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왠지 그 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고, 스테이크란 그런 맛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고베에 돌아가면 스테이크가 어떤 맛이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스테이크 하우스에 들른다. 늘 느끼는 거지만, 고베의 스테이크 맛은 도쿄의 그것과는 전혀 틀리다. 고베 편을 드는 건 아니지만, 도쿄보다는 고베의 스테이크가 내 입맛에 맞는다. 요리의 질이 단순하고 스피드가 있다. 아니면 단순하기 때문에 스피드가 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정말 그립다. 스테이크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꾸밈 없이 아양도 떨지 않고 잘난 척하지도 않는 ‘남자다운’ 요리여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에서 반년 정도 살았을 때는 퍽 자주 스테이크를 먹었다. 무엇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쇠고기 값이 쌌기 때문이다. 가장 최상급 안심 1킬로 그램에 1000엔 정도니, 정말로 싼 거다. 두꺼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그리스 파를 볶은 뒤, 고기를 중간쯤 익혀 가볍게 간장에 찍어 먹는다. 이 그리스 파라는 게 또 꽤 맛이 있어서, 스테이크에 썩 잘 어울린다.

1킬로그램 정도의 고기면 두 사람이 세 끼를 먹을 수 있다. 자투리로 남은 고기로는 필라프를 만들고, 그 나머지로 맛있는 수프도 끓일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1000엔이다. 이 정도로 싸면 정말 대범하게 요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제법 대담한 맛이 난다. 일본에서 안심을 사오라고 하면 순간 긴장하게 된다. 나는 스테이크란 원칙적으로 집에서 만들어 먹기보다는 레스토랑에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집에서 만든 그리스 풍 스테이크만큼은 지금도 무척 그립다.

또 하나 기억이 생생한 것은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먹었던 스테이크로, 이것 역시 굉장히 샀다. 저녁에 거리를 걷다가 문득 맥주가 마시고 싶어져서 근처에 있는 작은 바에 들어갔다가 내친김에 식사까지 주문했다. 메뉴를 보니 ‘서프 앤드 터프’라는 것이 있었다. 직역하자면 ‘파도와 잔디’다. 뭔지 잘 몰랐지만 뭐 어때 하고 주문해 봤더니, 버터에 엄청나게 큰 새우를 볶은 것과 두께 5센티미터는 족히 될 듯한 스테이크와 필라프가 듬뿍, 게다가 샐러드까지 수북이 나왔다, 과연, 이래서 ‘파도와 잔디’인가 하고 납득을 했는데, 그 양이 또 터무니없이 많았다. 직접 보여줄 수 없는 게 유감인데,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그러면서 값은 1,500엔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맛은 비교적 심플했고, 고기도 부드러워 그만하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잘 만든 스테이크를 특별히 볼 거리도 없는 동네의 작은 바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미국의 저력이란 거구나, 하고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모두들 미국의 스테이크는 크기만 했지 맛은 없다고 하는데, 내가 남부에서 먹은 스테이크는 대부분 맛이 있었다. 곁들여진 프라이드 포테이토는 바삭바삭하고, 조금 싱거운 고기에 나이크를 넣으면 주르륵 육즙이 흘러 나와 옆에 있는 필라프로 스며들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점점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참 난감하다.

미국 소설에는 종종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가장 맛있을 것 같았던 스테이크는 허들리 체이스의 《미스 브랜디쉬의 난초》의 첫 장면에 나오는 것이다. 소설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첫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확실히, 그야말로 조건 반사적으로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지금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아 안타깝게도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지만, 대략 설명하자면 시골의 먼지투성이 도로변에 있는 ,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 레스토랑에 한 남자가 들어서는 데서부터 소설을 시작된다. 남자는 배가 굉장히 고픈 모양인지 서둘러 웨이트리스에게 스테이크를 주문한다. 굽는 정도랑 곁들이는 양파 같은 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를 한다. 주방장이 철판에다 스테이크를 굽고, 양파를 볶는다. 양파를 볶는 강한 냄새가 남자의 식욕을 거칠게 자극한다. 남자는 군침을 삼키면서 요리가 나오기를 꼼짝 않고 기다린다. 바깥 도로에서는 트럭이 뭉개 뭉개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고, 건조하고 뜨거운 햇빛은 대지에 쨍쨍 내리쬔다.

체이스의 간결하고 폭력적인 문체와, 남자의 식욕과,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는 냄새가 훌륭하게 잘 어우러져 있어서 나는 그만 소설의 세계에 푹 빨려 들고 말았다. 만약 이것이 포크 커틀릿이었다면 얘기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스테이크를 먹으러 가야겠다.

 

오페라의 밤

-우리는 마음 속으로 ‘비일상 으로의 매몰’이라는 감성의 낭비를 갈구한다. 오페라는 그걸 만족시켜 준다

‘오페라’라는 말에는 이상하게도 매력적인 울림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결코 오페라광이나 마니아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페라라는 말은 묘하게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지금부터 오페라를 보러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뿐만 아니라 막이 오르기 전의 객석의 그 웅성거리는 독특한 술렁임이며,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박스에 들어와 드디어 서곡이 시작될 때의 그 분위기도 너무 좋다.

굳이 오페라 하우스에 가지 않더라도 집 안에서 고양이를 무릎에 올려 놓고 싸구려 포도주를 홀짝거리면서, 마당의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레코드로 오페라를 한가로이 듣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다. 게다가 요즘에는 비디오로도 오페라를 볼 수 있게 되어 참 고맙다. 한 손에 리모콘을 들고 우리 집 소파에 누워 뒹굴면서 마젤이 지휘하는 <돈 지오반니>나 아바도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들을 수 있다는 건 역시 더 없는 행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페라란 참 이상하다, 그처럼 완벽하게 18세기, 19세기적이고 장황하며 전통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비일상적인 것이, 어떻게 이처럼 극히 단기간 동안 다양한 스타일이 반짝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바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것일까? 물론 18세기, 19세기적이면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은 또 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도, 가부키(역주:에도 시대에 발달한 일본의 전통적 미중 연극의 하나)도 지금까지 여전히 공연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가령 가부키를 예로 들어 보아도, 유럽의 오페라처럼 일본 어느 지방 자그마한 도시엘 가도 반드시 가부키 좌가 있어서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며 가부키를 즐기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말하자면 이미 가부키는 일종의 서민적인 전통 예술이 아니다. 셰익스피어 극도 엇비슷하다. 그렇지만 오페라라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오페라는 여전히 현존하는 정열적인 엔터테인먼트인 것이다. 오페라 하우스의 값싼 좌석은 젊은이들로 넘치고 있고, 인기 있는 공연이라면 관람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매진돼 버린다. 이상한 일이다. 대체 오페라라는 음악의 형태 속에 무엇이 그다지도 현대인들을 매료시키는 것일까?

나는 음악 평론가도 풍속 현상 평론가도 아니므로 그런 의문에 일일이 대답해야 할 책임도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고맙게도). 남의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없이,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잖아? 그냥 그런 거라구. 하이호!’ 하고 그냥 맘 편하게 생각하며 오페라를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인데, 우리가 오페라에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은 ‘낭비’가 아닌가 한다. 시간의 낭비, 노력의 낭비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시대 착오를 가능케 하는 ‘비일상성으로의 매몰’이라는 감성의 낭비. 우리는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그런 것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최초로 오페라라는 형태의 음악을 접한 것은 아마 중학생 때쯤으로, 텔레비전에서 마리오 델 모나코가 열창하는 전설적인 <어릿광대>를 보았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굉장한 <어릿광대>였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해도 좋을 정도로 박력이 넘치는 공연이었다. 비치보이스의 팬이었던 열두세 살의 소년이 어떻게 텔레비전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공연을 볼 마음이 생겼는지는, 여하튼 오래 전 일이라 불명확하다(아아, 나이를 먹으면 어찌하여 이다지도 많은 일의 동기가 불명확이라는 희미한 빛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걸까?) 드르륵드르륵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호기심이라는 위대한 촉매에 의해 그렇게 맺어졌는지도 모른다. 둘 중 하나겠지. 좌우지간 그게 처음이었다. 마리오 델 모나코의 <어릿광대>. 최초로 극장에 가서 본 오페라는 <오르페우스>였다. 아마 고등학생 때였을 거다. 밀라노 실내 가극단의 공연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장소는 오사카 페스티벌 홀. 다만 그게 누가 작곡한 <오르페우스>였는지가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누구였던가 하고 계속 생각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훌륭한 공연이었다. 세세한 것은 잊어버렸지만 굉장히 좋았던 것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좋았느냐고 물어 본다면 거기에 대해 대답하기는 곤란하다. 여하튼 좋았던 것이다(하이호!). 그 후 몹시 감동하여 기분이 들떠서는 전철을 타고 고베의 집으로 돌아 왔던 게 기억난다.

그 뒤로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으로 조금씩 오페라를 계속 들었다. 그래도 나는 오페라 마니아는 되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오페라의 존재 이유는 그 낭비성 속에 있고, 나에게는 그 같은 낭비성에 익숙해져 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0여 년 동안 오페라와는 실질적으로 인연이 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학생 때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일을 시작했을 무렵에도 오페라를 보러 다니거나 석 장짜리 오페라 레코드를 살 여유는 도저히 는 아니더라도, 하여튼 없었다. 나는 학생 때 결혼을 했기 때문에 대학을 나와서도 우선 생활에 쫓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무지하게 바빴고, 무지하게 가난했다. 소중하게 간직했던 몇 장인가의 오페라 레코드도 돈에 쪼들려 중고 가게에 팔아 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빚을 갚을 수 없어 쩔쩔맬 때는 어지간해선 그럼 어디 오페라를 들어 볼까 하는 기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기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절망적이던 우리의 경제 상태도 몇 년 후엔 회복이 되어 생활이 차츰 안정되어 갔다. 그렇긴 해도 우리는 갓 서른이 넘을 때까지 여전히 일과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쫓겨야만 했다. 바빴던 것이다. 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주위에는 항상 뭔가 해열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어렵사리 짬을 내서 콘서트에 갈 수는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페라는 아직 아득한 저 멀리에 있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아직 사치였던 것이다. 저 제이 캐츠비가 바라보던 해협 너머의 녹색 등불처럼, 그것은 늘 멀리 있었다.

겨우 오페라와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때까지의 일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어,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간간이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고 나서부터였다. 우선 독일에서 <방랑하는 네덜란드 인>과 <마적>을 보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나는 또다시 오페라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후에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틈만 나면 오페라를 보러 다녔다. 다양한 도시에서 다양한 오페라를 보았다. 베르디, 로시니, 푸치니, 모차르트….. 휴식시간에는 싸구려 샴페인을 조금씩 마셨다. 달랑 한 벌뿐인 정장차림으로 로비에 서서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또다시 오페라의 밤다운 감정의 전율을 되찾았던 것이다.

 

 

제4장 꿈이 서린 계절의 회상을 위하여

《scrap(그리운 1980년대)》

 

문학과 취미와 삶의 주변, 그리고 이성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 어린 탐구. 아주 짤막짤막한 글 속에 그의 큰 문학의 편린이 스며 있어 즐겁다.

그렇게, 지난날은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나날이었다.

 

독신 남성이란

-핸섬하고 어딘지 쓸쓸해 보이고 스릴 있어 보이는 남성이 바로 독신 남성 여성 잡지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하고 소리치고 싶어지는 일이 종종 있다. 그래서 그런 유의 잡지에는 손을 대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밖에 아무것도 읽을 것이 없을 때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페이지를 들춰 보게 된다.

얼마 전에도 그런 식으로, 《하퍼스 바자》지 12월호를 거의 다 읽어 버렸다. 읽었다고는 해도, 이런 잡지는 실질적으로는 읽을 거리가 별로 없다. <겨울에 살을 뺀다>라든가, <스키장에서의 화장법>이라든가, <은색 옷을 입는 법>이라든가, 그러한 기사를 읽어 보았자, 나에게는 전혀 무익하니까 말이다. 내가 그 가운데서 유일하게 시선을 멈추고 읽은 것은, <지금 가장 맛있어 보이는 미국의 독신 남성 열 명>이라는 특집 기사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열 명의 명단은 잡지사가 선정한 것이 아니라, 산드라 반하트 라고 하는 여배우(킹 오브 코미디)가 독단적으로 편견에 치우쳐 선정한 것으로, 사진 밑에 그녀의 코멘트가 일일이 덧붙여져 있다. 그 열명을 일단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로버트 라우셴버그

(2) 톰 크루즈

(3) 버트 레이놀스

(4) 리처드 체임벌린

(5) 데이비드 보위

(6) 존 트라볼타

(7) 톰 셀렉

(8) 워렌 비티

(9) 에디 머피

(10) 리처드 기어 (순서는 관계없음)

 

나는 아무래도 세상사에 어두워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게 미안하지만, (1)은 화가고, (7)은 탤런트인 것 같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일본에는 사교계라는 것이 없으니까 그다지 실감이 나지를 않지만, 미국 같은 곳에서는 ‘독식 남성’이라고 하는 말은 어느 정도 특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애스컷 타이(역주:폭이 넓은 스카프 풍의 넥타이)를 매고, 애스톤 마틴 같은 차를 몰고 칵테일 파티에 나타나는 플레이보이라는 이미지다. 핸섬하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고, 스릴 있어 보이고…… 이러한 독신 남성이 한 사람쯤 있으면, 파티도 몰라보게 활기를 띠게 되는 법이다. 그러한 사람이 ‘맛있어 보이는 독신 남성’인 것이다. 그냥 단순히 결혼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 점은 부디 오해가 없기를.

 

올림픽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올림픽 일기

-올림픽은 20년쯤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제 맛이 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헬싱키나 멜버른 올림픽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7월 20일 (월)

여름의 아침식사로는 누가 뭐래도 샐러드가 최고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미역과 토마토와 양상추를 마구 섞은 뒤, 거기에 특제 생강 드레싱을 쳐서 맛있게 먹는다. 더운 여름엔 샐러드 말고는 아침에 먹고 싶은 것이 없다.

일본에서는 여름에 미역이 금메달이다. 은메달은 찬 모밀국수, 동메달은 빙수다.외국에서 여름 내내 머물다 보면 가장 곤란한 것이 미역이 없다는 점이다. 어째서 서양 사람들은 미역을 먹지 않는 걸까? 언젠가 시애틀에서 페리 보트를 탔을 때, 바다 밑바닥에서 거대한 미역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먹고 싶어서 군침을 흘린 적이 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어제부터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나의 개인적인 감상을 말한다면, 올림픽이라는 것은 20년쯤 세월이 지나야 아무래도 제 맛이 나는 것 같다. 최근 들어 개최된 올림픽은 왠지 좋아지지 않는다. 지금 같아서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로마 올림픽도 괜찮을 것 같다. 헬싱키나 멜버른 올림픽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네댓 명이 모여 술을 마시면서 헬싱키 올림픽의 기록 영화를 보거나 한다면, 굉장히 행복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이유로 이번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낄 수가 없다. 신주쿠로 나가서 《아사히 신문》의 센다 씨를 만나, 원고를 건네 주었다. 센다 씨는 어저께 올림픽의 개회식을 보았다고 한다. “개회식은 일단 많이들 보는 모양입니다. 그 뒤의 게임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지만, 그것만은 보게 됩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어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서 개회식을 보았냐고 물어 보았더니, “뭐, 그거 못 봤나? 재밌다니까, 개회식은. 여러 나라가 잔뜩 나온다구”하고 대답했다. 과연 그렇다.

 

7월 31일 (화)

오늘은 대학 때 친구인 마치코의 권유로 나와 집사람과 세 명이 뉴오타니 호텔의 풀에 갔었다. 그 호텔의 풀에서는 덱 체어(역주: 접는 의자)를 1000엔에 빌려 주었다. 마치코 씨가 요전에 갔던 모 호텔의 풀에서는 덱 체어를 무료로 빌려 주고, 로커 사용료는 1000엔을 받았다고 한다. 덧붙여 말한다면, 뉴오타니의 로커는 무료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시스템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것은 아사부 프린스 호텔의 풀로, 지금은 이미 없어졌지만, 정말로 느낌이 좋은 곳이었다. 우리 집에는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에어컨이 없어서, 여름이 절정에 다다르면 아사부 프린스 호텔에 체류하면서 노상 풀에서 수영을 했다. 아사부 프린스 호텔의 풀에서는 분명히 로커도 덱 체어도 무료로 사용했던 것 같다. 방문을 열면 바로 그 곳이 뜰이고, 뜰을 가로질러 가면 풀이 있었다. 작은 풀이지만, 비교적 사람이 없고 수심도 깊어서 수영하기가 쉬웠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가족 동반으로 오는 외국인이 많았다.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아사부 프린스 안에 있던 튀김집은 맛이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아사부 프린스 호텔이 없어진 까닭에 그 튀김을 먹지 못하게 되어서 굉장히 아쉽다고 했다. 사람은 정말 가지각색이다. 이 세상에서 모든 튀김집이 소멸해 버리는 것과 모든 풀이 소멸해 버리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아쉬울까를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튀김도 먹고 싶고, 풀에서 수영도 하고 싶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오늘은 신문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올림픽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8월 1일 (수)

아침부터 계속 소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라는 장편 소설이다)을 썼는데, 세 시가 지나서 갑자기 모든 것이 따분해져, 시내로 나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영화를 보는 거였다. 무엇을 볼까 한참 동안 망설였는데, 결국 시부야에서 <핫카리의 계절>이라는 터키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일본에서는 터키 영화를 거의 상영하지 않기 때문에, 이 기회에 보아 두지 않으면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찌 된 셈인지, 터키라는 나라를 꽤나 좋아한다. 터키에 잠깐 들른 적이 있는데, 까슬까슬한 느낌을 주는 이상한 나라였다. 꼭 다시 한 번 시간적으로 여유를 갖고 천천히 돌아다녀 보고 싶은 곳이다. 베를린에 가면 터키 인 거리가 있는데, 거리에서는 케밥(역주:채소와 고기를 꼬치에 꿴 산적의 일종) 냄새가 진동을 한다. 케밥 집에 들어가면 마늘 소금 같은 특수한 향신료가 식탁에 놓여 있다. 일반 독일인은 딱 질색을 하지만, 그 곳도 상당히 괜찮은 거리다.

핫카리는 이란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터키의 마을인데, 고지대의 산속이라 문명과는 격리되어 있다. 전기도 가스도 수도도 아무것도 없다. 영화는 그러한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세미 다큐멘터리 풍으로 그렸는데, 그들의 세부적인 생활상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스토리가 지나치게 진지해서, 이따금 혼혹스러웠지만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스토리와 관계없는 것을 즐길 수 있어 그다지 지루하지는 않았다.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라든가,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면 터키가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는 어떤 곳일까? 그래서 오늘도 올림픽과는 관계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말았다. 저녁때 미역 샐러드 하고 모밀 국수를 먹고, 친지가 새로 개업한 가스미초의 바에 들러 보드카 토닉 두 잔과 하퍼 온더록을 마셨다.

실비아 심즈와 사라 본의 레코드가 걸려 있었다. 작업실로 돌아와서 목욕을 하고 잤다.

 

8월 2일 (목)

《소설 신초》지의 마츠이에(경칭 생략)의 말을 빌리면, 가스미초의 바에서는 세 잔씩이나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는 그저 술을 두 잔만 마시고, 일어나서 나오는 것이 요령이라고 한다. 어려운 이야기다. 지바에서 3년씩이나 살다 보면, 그런 것에 완전히 어두워지게 된다.

그러고 보면, 보드카 토닉을 두 잔 마신 뒤에 하퍼 온더록을 마신 것도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술 마시는 태도에 품위가 없었다.

최근에 와서 특히 술 마시는 순서가 엉망진창으로 뒤바뀐 것 같다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생맥주를 두 잔 마시고 나서, 위스키를 마시고, 마지막에 와인에 페리에를 섞어 마시거나 한다. 정말로 엉망진창이다. 마음 가는 대로 제멋대로 마시고 있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가스미초 주변에 대해 밝은 마츠이에의 설에 따르면, 그 근처에서 마시는 사람들은 대개 업계 사람들인데, 광고 관계 업자, 방송 관계 없자, 인기 있는 편집자 등이라고 한다. 인기 있는 편집자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 자체를 처음 들었기 때문에 정말로 깜짝 놀랐다. 내가 모르는 동안에 여러 가지로 국민 계층의 재편성이 진행되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지바는 참으로 평화로운 곳이다. 농민과 샐러리맨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편집자들 중에는 그다지 인기 있는 편집자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모처럼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일단 스타성이 있는 편집자를 여기에 세 사람만 열거하고 개인적으로 표창을 하고 싶다.

금메달 →스즈키 지카라(《신초》)·아사카와 준의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와 너무나 닮았으니까.

은메달 →야스와라 아카리(《마리 클레르》)·언제나 엉뚱하고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넥타이를 매고 있으니까.

동메달 →니시야마 요시키(《넘버》)·어딘가에 갈 때마다 부지런히 선물을 사다 주니까.

 

8월 3일 (금)

나리타 공항에서 “별송품이 도착했으니까 찾아가십시오”라는 전화가 걸려 와 전철을 타고 나리타까지 갔다 왔다. 굉장히 무더운 날이어서, 좌석에 앉아 있기만 해도 셔츠에 땀이 흥건히 배었다. 게세 전철에서 냉방 칸을 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매트 데니스의 노래 가사를 빌린다면, 정직한 중고차 중개인을 만나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런데 그 별송품이라는 것이 보스턴에서 산 세면대와 수도쪽지였다. 그게 300달러나 했다. 그래서 집사람에게 잔소리를 했더니, “어쩔 수 없잖아요, 아오야마에서 사면 세 배는 더 줘야 할 걸요”하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한마디로 반론을 제기할 수가 벗어서 괴롭다. 나도 중고 레코드 같은 것을 “디스트 유니온에서 사면 세 배는 더 비싸다구”하면서 열심히 사들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무더위 속을 뚫고 나리타 공항까지 갔다가 왔다. 별송품을 찾는 일은 익숙하지 않으면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다. 우선 플라잉 타이거스 사무실까지 가는 게 어렵다. 도중에서 세 차례 정도 검문을 받는다. 사무실에서 서류를 받아 거기에다가 여러 가지를 기입한 뒤에 그것을 가지고 세관 사무실까지 가야 하는데, 바쁠 때는 항공회사 측이 제대로 서식 같은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업자에 비해서 개인은 차별당한다. 그러고는 세관 사무실에서 탕탕 도장을 받고, 다음으로 항공 회사의 창고에 가서 짐을 검사소까지 직접 운반한다. 못뽑이 등을 사용하여 상자를 열고 체크를 받고 나서 다시 상자에 집어 넣고, 그것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약 한 시간 반이 걸린다.

세관 사람과 함께 상자를 열고 있으려니까, 다른 세관 사람이 뛰어와서, “구시켄이 금메달을 땄어요!”하고 외쳤다. 오늘은 권투 경기가 없는데 어떻게 지금 구시켄이 금메달을 딴 걸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더니, 그 사람은 체조 선수란다. 권투 선수 구시켄과는 관계가 없는 모양이다.

 

8월 4일 (토)

나이를 먹으면 평일의 낮 동안 함께 놀아 줄 친구(특히 젊은 아가씨)가 없어져 버려서 크게 곤란을 겪는다. 당연한 일이다. 모두들 평일의 낮 동안에는 열심히 일을 하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하고는 잘 놀아 주지를 않는다.

예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전화를 걸어 보면 두세 명에 한 명쯤은 낮 동안의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서른 살이 넘으니까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나는 아는 아가씨와 점심 전에 만나서 점심 식사로 튀김이나 장어를 먹고, 두 시부터 시작하는 영화를 보고는, 영화관을 나와 천천히 산책을 하다가, 저녁때 바에서 술을 마시고 헤어지는 방식을 전부터 좋아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탓도 있고 해서, 밤늦게 하는 데이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홉 시경이 되면 나도 모르게 꾸뻑꾸뻑 좋거나 한다.

물론 데이트 상대는 아내라도 괜찮지만, 그녀는 장어도 튀김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영화에 대한 취미도 나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언제나 “그런 건 다른 사람하고 가요”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해도 대낮부터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따금 혼자 하루 종일 풀에 있을 때가 있지만, 그것도 말짱 헛일이다. 카세트 테이프도 두세 시간 듣다 보면 지겹고, 그렇게 오래 수영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주위에는 쌍쌍들뿐이어서 굉장히 따분하다.

얼마 전에 예전의 여자 친구로부터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나서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길래 반가워서 “식사라도 하러 가자”라고 말했더니, 그녀는 “농담하지 말아요. 지금 셋째 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구요” 하고 가볍게 거절했다. 자유업이라는 것도 그 나름대로 상당히 어렵다. 올림픽하고는 별로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8월 5일 (일)

나는 일단은 자유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니까, 평일이든 주말이든 전혀 상관이 없다. 그래서인지 요일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미적미적하면서 매일 똑같은 날을 보내게 된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누가 물으면, 갑자기 떠올릴 수가 없다.

일단 화·목·토가 쓰레기수거일, 월요일은 이발소가 쉬는 날이라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어서, 이것이 요일 망각증의 최후의 브레이크인 셈이다.

그런데 난처하게도 ‘자아, 오늘은 이발소에라도 가볼까?’하고 마음을 먹는 날은 언제나 월요일인 것이다. 그런 일은 상당히 불쾌한 일이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손해만 보는 성격인 것 같다.

나는 가는 데만 한 시간 반, 전철 요금으로 쳐서 630엔이 드는 센다가야에 있는 이발소에 가기 때문에, 만일 도착했을 때 이발소가 쉬면 굉장한 쇼크를 받는다. 그래서 어쨌든 월요일만큼은 이중으로 동그라미를 쳐놓고 조심을 하고 있다.

만일 이발소가 연중 무휴였다면, 나는 요일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왜 요일에 관해서만 쓰고 있느냐 하면,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풀로 수영을 하러 갔었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 기간 중 일요일에 풀에서 수용하는 것은 야마노테센의 만원 전철에서 수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덱 체어를 빌리기 위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계속 덱 체어를 빌리는 값에 구애 받는 것 같지만, 이곳(다카와 프린스)은 500엔이다.

밤에는 ‘온 선데이즈’에서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봤다. 오늘도 올림픽과의 접점은 없었다. 그래서-비단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하퍼에다 소다수를 섞어 네 잔을 마시고 맥주를 세 병 마셨다.

 

8월 6일 (월)

오늘은 호텔에서 잤기 때문에 처음으로 텔레비전의 올림픽 중계를 보았다. 《넘버》지의 편집자 니시야마 요시키의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화면에 비치지 않을까 하고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으나, 역시 보이지 않았다. 남의 일이지만, 그가 빽빽한 스케줄을 무릅쓰고 영화 <고스트버스터>를 볼 수 있었을지 걱정이 되었다. <고스트버스터>는 정말 재미있어서, 나는 두 번씩이나 봤다.

그런데, 내가 오늘 아침에 본 것은 여자 마라톤이었다. 지난 밤에 일찍 잔 탓으로, 8시 45분부터의 녹화 방송을 보았다. NHK의 아나운서가 존 베이노트와 그레테 와이츠를 섞어서 ‘존 와이츠’라고 외치는 것이 우스웠다. 이따금 텔레비전을 보면, 여러 가지 우스운 일이 있다. 가케후와 카니가 나오는 CF도 우스웠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아나운서는 “그린벨트에는 코럴 트리가 심어져 있습니다. 산호나무입니다”하고 설명했는데, 산호나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해가 가도록 설명한 게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말이다.

아내는 나에게, “저기 선두에 선 여자의 어깻죽지에 삐져 나와있는 게 브래지어 끈이죠? 아까부터 마음에 걸렸는데”하고 질문했다.

그런 것을 나에게 물어 보면 곤란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여자 선수의 어깻죽지에서 끈이 보인다면, 브래지어나 뭐 그런 유사한 것의 끈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로스앤젤레스라고 해도 22구경 홀스터(역주:권총을 넣는 가죽 케이스)를 차고 마라톤에 출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일일이 그런 질문은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니까, 아내는 “뭔가 특수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거든요”하고 말했다.

여자 마라톤 주자가 브래지어 외에 뭔가 특수한 것을 유방에 감고 뛴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나는 대답해 주었다.브래지어 끈의 레이스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상 없다.

 

8월 7일 (화)

오늘은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처박혀서 소설을 썼다. 제대로 된 소설을 쓰는 것은 8개월 만이고, 장편을 쓰는 것은 2년 반 만이다. 즐겁다.

밤 아홉 시쯤 피곤해서 위스키를 마시려고 작업실 근처에서 바 같은 것을 찾아보았으나, 제대로 된 집은 한 집도 없었다. 어느 술집이나 문을 열면, 가라오케 세트가 눈에 들어와서 황급히 문을 닫곤 했다.

나는 싫으니 싫으니 해도, 가라오케처럼 싫은 게 없다. 가라오케로 노래하는 것도 싫고, 가라오케로 노래하는 인간을 보는 것도 싫다. 가라오케라는 명칭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I♡하라주쿠’라는 배지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근처의 술집에서 위스키와 얼음을 사가지고 와서 혼자 홀짝홀짝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I♡하라주쿠’ 와 좋아해요, 홋카이도’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불쾌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둘 다 똑같이 불쾌했다.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나는 본래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재주를 부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으로, 그때 부른 노래는 <강아지 순경>이었다. 생각하기만 해도 불쾌한데 나에게 <강아지 순경>을 부르게 한 사람은, ‘생활 향상 위원회’라고 하는 재즈 그룹에 있던 하라다 라는 술 버릇이 고약한 피아니스트였다. 하라다가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며 나에게 강제로 <강아지 순경>을 부르게 한 것이다. 재즈 연주가와 상종해서 그다지 재미를 본 적이 없다.

내가 노래한 <강아지 순경>에는 멋진 율동이 있기 때문에 그걸 부르면 굉장한 인기를 끈다. 그러나 너무 인기가 높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 쓰긴 했는데 전혀 올림픽과는 관계가 없다. 정말로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8월 10일 (금)

로버트 B.파커의 소설을 다 읽고 나서(참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읽어 버렸다), T.E.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가지 기둥》을 읽고 있다.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지만, 엄청나게 난해하고 해독이 불가능한 문장이 차례차례로 등장하기 때문에 비명을 지르게 된다. 가령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아무튼 부하들이 그 의지의 자동성의 위축을 일으키지 않고, 언제든지 곧장 직속 상관의 직무를 물려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어서, 완전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약한 가설과는 무관하게, 또한 위대한 계급 조직 속을 원활하게 옮겨 다니다 마침내는 두 명의 잔존 병사가 상관에게 인계되는 지휘의 효과 등과는 무관하게, 우발적인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이런 식의 문장은 내가 머리가 나쁜 탓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두세 번 읽어도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하긴 열 번쯤 되풀이해서 읽으면 대강 그 의미는 알 수 있겠지만.

나는 공포영화 팬이라서, <더 키프>를 보러 갔다. <13일의 금요일>의 최종편과 동시 상영되고 있었다. <13일의 금요일>시리즈는 언제나 머리가 나빠 보이는 여자가 잔뜩 나와서 마구 옷을 벗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살해당해 버린다고 하는 똑같은 패턴이기 때문에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으나,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일단 끝까지 보았다. 여전히 형편 없었지만, 이번만은 쌍둥이 자매가 나오는 섹스 장면이 있어서 용서를 해주었다. 나는 쌍둥이가 나오면 두엇이든지 얼른 용서해 버린다. 그러나 꽥꽥 악을 쓰고 도망 다니는 머리 나쁜 아가씨들을 부지런히 살해해 나가는 제이슨 씨를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마지막에는 동정심조차 느끼게 된다. 꼭 한 번 하라주쿠 근처로 초대하고 싶다.

<더 키프> 쪽은 의도는 나쁜지 않았으나, 트릭이 밝혀진 심리극 풍의 과장된 대사와, 20년 전의 도호 영화와 같은, 하나도 무섭지 않은 어설픈 괴물이 흥을 깼다. 그리고 괴물을 봉쇄하는 정령같은 아저씨(<라이트 스터프>에서의 세퍼드 중령을 맡았던 사람)가 인간인 아가씨를 보고 “한 번 해보고 싶어서”라고 하면서, 의미도 없이 강간한 것은 좋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8월 11일 (토)

나는 언제나 호쿠토샤라는 곳에서 만든 원고지에다 글을 썼는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문화 출판국용 원고지에다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마 때때로 기분을 바꿔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사의 200자 원고지라면, 나는 가쿠가와 출판사의 《더 텔레비전》잡지의 것을 좋아한다. 선의 색깔이 펠리컨의 로얄 블루 잉크와 잘 어울리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교적 그렇게 자질구레한 것에 신경을 쓰는 성격인 것 같다. 문화출판국의 것은 선이 녹색이라서, 그런 의미에서는 약간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그 가쿠가와 출판사의 《더 텔레비전》집지를 들춰 보니까, 올림픽의 남자 마라톤 중계를 13일 아홉 시부터 한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 마라톤 중계는 오다큐센 게이도에 살고 있는 여자친구(그렇긴 해도 대학 때 친구니까 벌써 서른여섯이다)의 집에 가서 보곤 했는데, 이번에는 아침 일찍 중계를 하니까 통근 시간에 전철을 타고 지바에서 게이도까지 일부러 가기가 어렵다.

그런 연유로 근처의 전파사까지 찾아가서, 빌려 주는 텔레비전은 없느냐고 물어 보았다. “물론 있구말구요”하고 대답하길래 신바람이 나서 돌아왔다. 이것으로 준비는 완벽하다. 남은 것은 세코 선수가 분발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180도로 달라지는데, 월터 힐의 <스트리트 오브 파이어>의 포스터는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판의 꺼끌꺼끌한 목판과 풍의 포스터는 굉장히 좋았는데, 일본판은 고상하지 않은 뒷골목의 로큰롤 영화 같았다. 그 영화는 만화 같긴 했지만, 꽤나 재미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니시야마에게서 <고스트버스터>를 못 봤다고 하는 엽서가 왔다. 진지하게 취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8월 12일 (일)

오늘은 한꺼번에 편지를 다섯 통이나 썼다. 나는 정말로 편지를 쓰기 싫어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편지가 아직 열다섯 통 정도나 남아 있다. 죄송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일이 일인지라 담배 한 대 피우고 편지라도 써볼까 하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 것이다. 편지 쓰는 것보다 게임 센터에 가는 쪽이 더 즐겁고, 기분 전환도 된다. 그런 까닭으로 써야만 하는 편지가 자꾸만 쌓이게 된다.

예전의 유명했던 작가들은 대개 서간집을 내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마 교양과 여유가 있었고, 게임 센터가 없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요소가 전부 거꾸로 된 것이 내 경우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며칠 내로 다시 한꺼번에 편지를 써야겠다.

답장을 아직 못 받으신 여러분, 정말로 죄송합니다. 무더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제비우스 게임 20만 점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 오락게임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오카 미도리 씨, 냉모밀 국수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기노시타 요오코 씨, 갓난아기는 건강합니까?

그런데, 드디어 올림픽이 하루밖에 안 남았다. 올림픽에 관해서 거의 언급하지 못한 채, 이 올림픽 일기가 끝나 가려고 한다. 그러나 내일은 대망의 남자 마라톤 대회가 있다. 올림픽에서 다른 종목은 전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남자 마라톤은 중요하다. 텔레비전은 제대로 나오도록 세트 되어 있으며, 차가워진 캔 맥주도 냉장고에 가득하고, 조깅화도 베갯머리에 갖다 놓았고(이것은 거짓말), 이것으로 준비는 오케이다. 말할 수 없이 기대가 크다. 내일 기다릴 수가 없어서, 저녁때 근처 운동장을 15킬로미터 정도 뛰었다. 내가 뛰는 게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말이다.

 

텔레비전과 먹는 것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먹으며 하나의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광경이 왠지 모르게 기묘하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텔레비전이 없으니까 당연히 비디오도 없다.

내 친구의 집에는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있어서 이따금 한꺼번에 몰아서 보러 간다. 지난번에는 가서 하루 종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와 <피터팬>과 <라일락의 문>, 이렇게 세 편의 비디오를 보고 왔다. 그때 사람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정말로 잘 먹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평소에 거의 간식을 하지 않는 인간이다. 담배를 끊고 얼마 안되었을 때에는 입이 심심해서 여러 가지 것을 열심히 먹어댔지만, 이러다가는 살이 한없이 찌게 될 것 같아 어느 날 단단히 결심을 하고 쓸데없는 것은 일체 입에 넣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은 간식을 하지 않는다. 간식을 먹고 안 먹고는 습관적인 문제라서,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나까지도,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이것저것 꽤나 여러 가지 것을 집어먹게 된다. 더군다나 내 친구는 대단히 친절해서, 쿠키라든가 전병이라든가 초콜릿이라든가 애플파이라든가 그러한 것을 주위에 쭉 늘어놓아 주기 때문에, 나는 극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계속적으로 먹어 치우게 된다. 과자를 잔뜩 먹으면 목이 마르니까, 그 다음에는 차나 커피, 주스나 맥주 같은 것을 꿀꺽꿀꺽 마시게 된다. 그 덕분에 오줌만 계속 나오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일곱 시간이나 여덟 시간 가량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여러 가지 것을 먹고 마시고 한 다음에 집으로 돌아온다. 나의 경우 그러한 일은 2개월에 한 번 정도밖에 없어서 아주 신기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매일 그 짓을 했다가는 영락없이 뚱보가 될 것이다.

지난번에 공항 대합실에서 스탠드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으려니까, 정면에 놓인 커다란 텔레비전에서 <웃어도 좋고말고!>라는 프로그램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 곳에는 300명 가량의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광경이 왠지 모르게 굉장히 기묘하게 느껴졌다. 점심때였기 때문에 모두들 주스를 마시거나, 도시락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하면서, 이따금 일제히 웃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러한 광경을 쳐다본다는 의식도 없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3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위장이 꿈틀거리는 소리가 텔레비전 화면에 오버랩되어서, 점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그런 것이 좋다든가 나쁘다든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라고 하는 기계가 갖는 기능의 기묘함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 섹스는 재미없게 되어 버렸을까?

-헤르페스는 한창 일할 나이의 엘리트가 걸리기 쉬운 신종 성병. 이 병을 예방하려면 여러 사람과 자지 말고,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

 

(롤링 스톤)지 3월 4일호에 실린 섹스 특집 기사를 소개하고 싶다. 물론《롤링 스톤》지의 섹스 기사니까 상당히 노골적이다. 읽고 있으려니까 피곤해진다.

우선 헤르페스(Herpes) 이야기가 나온다. 헤르페스를 질 모르는 사람을위해서 설명한다면, 이것은 신종 성병이다. 헤르페스라는 것은 그리스 어로, ‘근질근질하다’라는 의미다. 헤르페스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타입 1은’구강 헤르페스’고, 타입 2는 ‘성기 헤르페스’다. 타입 1은 오럴 섹스에 의해서, 타입 2는 성교에 의해서 감염된다(이런 얘길 쓰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하다). 이것은 줄곧 이성에 의해서 감염된다고 애기되어 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샌프란시스코의 동성 연대자 사이에서도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증상으로는 쑤시고 가렵고 발진이 있고, 뒤이어 임파선이 붓고 근육통, 발열에 이른다. 이와 같은 증상은 몇 주일이면 가라앉는데, 가라앉았을 때에는 이미 바이러스가 신경절에 침입해,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정기적으로 피로를 느끼게 되거나 생리불순이 된다. 좀더 끔찍한 일이 있다. 성기 헤르페스에 걸린 여성의 자궁 경관부의 발암률은 보통 사람의 여덟 배나 된다. 더구나 이러한 증상들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겨우 해명된 것이어서, 그 전체 상황은 지금까지도 분명치가 않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좀 더 무서운 수치가 있다. 놀랍게도 2,000만 명의 미국인이 이 헤르페스에 감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 10퍼센트는 구강 헤르페스와 성기 헤르페스 양쪽 다 감염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치료법은 없다.

이 병의 재미있는 점은(재미가 없다고 해야 할까), 인텔리·중산층 환자가 참으로 많다는 것이다. 10대 보다는 20대 후반이나 30대에 많다. 게다가 놀랍게도 대학 졸업자와 대학원 졸업자가 5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고등 학교 졸업 이하의 환자(취학 기간 12년 이하)는 겨운 21퍼센트다. 즉 한창 일할 나이의 엘리트가 걸리기 쉬운 병이다. 경구 피임약과 오럴 섹스, 프리 섹스, 스와핑(역주: 파트너를 교환해서 하는 섹스 파티)의 탓이다.그러니까 이 병을 예방하려면 난잡하게 여러 명의 상대와 자지 말고,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시대는 조금씩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롤링 스톤》지의 다음 페이지는 <베드 컨트롤 블루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인텔리 여성들 사이에서 경구 피임약의 사용률이 뚝 떨어져서(80퍼센트→50퍼센트), 그것이 부부간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다 주고 있다는 리포트다.

이 기사도 굉장히 재미가 있지만, 소개할 지면이 없어서 보류하기로 한다.

성욕을 감퇴시키고 싶은 사람은, 《롤링 스톤》지의 3월 4일 호 기사를 꼼꼼히 읽어 보기 바란다. 특집의 제목은 <왜 섹스는 재미 없게 되어 버렸을까?>다.

 

(뉴요커)지의 소설

-뛰어난 단편은 쉽게 읽을 수 있고, 마음에 무엇인가를 남긴다

외국 잡지를 읽는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광고만 읽는 사람도 있고, 서평만 읽는 사람도 있으며, 레이아웃만 보는 사람도 있다. 최신 정보 칼럼을 골라서 읽는 사람도 있고, 핀업(역주:벽에 붙이는 육감적인 미인의 사진)만 전문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나는 한때 미국판《플레이보이》지의 <인생 상담>코너만 읽었다. 나라가 넓어서 그런지 참으로 여러 가지 고민이나 질문이 실려 있어서 재미가 있었다. 비슷한 고민이라도 동양인과는 약간 보는 관점이 달랐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잡지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뛰어난 단편 소설과 만나는 일이다. 신간의 목차에서 마음에 드는 작가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면 기쁘다. 뿐만 아니라 들어 본 적도 없는 작가의 소설을 읽어 보았는데, 정말로 재미 있었던 경우도 있다. 분명히 미국에서도 최근의 소설 특히 단편은 흉작이어서, 예전처럼 《에스콰이어》지나 《플레이 보이》지의 새로운 호를 손에 넣을 때마다 가슴을 설레는 일은 완전히 없어졌지만, 그래도(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뭣하지만) 일본의 잠지를 읽을 때보다는 재미 있는 소설이 많이 걸려든다.

최근에는 《뉴요커》지에 실린 레이먼드 카버의 <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와 도널드 바세르미의 <벼락>이란 두 작품을 권하고 싶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언제나 그런 것처럼, 홀딱 반할 만한 좋은 단편이다.

<벼락>은 《포크스》라고 하는 잡지(물론《피플》지의 패러디)를 위해서 ‘벼락을 맞고서도 살아 남은 사람’의 인터뷰를 모으는 자유기고가의 이야기로서, 특별한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착상과 문장만으로 독자들을 끌고 나간다. 최후의 마무리도 자못 바세르미답게 감칠맛이 있다. 이러한 작품은 단편집 속의 한 편으로 읽는 것보다는 잡지에서 독립된 작품으로 읽는 편이 더 좋은 것 같다. 나는 앨러리 퀸 식으로, ‘독자에 대한 도전’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처음부터 밑천을 모두 드러내 보이고 어디까지 독자를 끌고 갈 수 있는가 하는 테크닉을 보여 주는 쇼 케이스다.

<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는 그것과는 달리, 과장이 없는 담담한 문제의 소설이다. 그러나 카버의 문장은 한 순간이라도 멈춰 서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돌진해 나간다. 알코올 중독으로 요양소에 들어가 있는 주인공이 같은 이유로 요양소에 들어온 청년과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이야기지만, 어두운 소재치고는 비극적으로 흐르지 않아서 좋다. 쉽게 읽을 수 있고, 더구나 읽고 난 뒤에 마음에 무엇인가가 남는다. 뛰어난 단편이란 그런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무리 버텨 보아도 노쇠는 자기 몫을 확실히 빼앗아 간다. 체념하고 자기 나이를 기분 좋게 받아들여야 편안히 늙어 갈 수 있다

최근에 ‘스니커 미들’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다. 요컨대, ‘단괴세대(역주:1948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사람이 많아서 연령별 인구 구성상 두드러지게 팽배한 세대>’가 나이를 먹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숨막히게 답답한 세대인데(나도 그 일원이지만), 그들이 모두 중년이 되어 버렸으니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무겁다. 아랫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정말 큰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동정한다.

그런데, 사람은 모두 나이를 먹는다. 그런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정말로’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나이를 먹어 보기 전에는 좀처럼 알 수가 없다. 머리가 벗겨지는 것은 어떠한 느낌일까, 성욕은 어느 정도 남을까, 노안은 어느 정도나 불편할까, 그런 일들 말이다. 노쇠는 생리적인 현상인데, 동시에 ‘그런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라는 의식이 미묘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재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20세의 건강한 청년이 ‘어차피 나이를 먹게 되면 배가 나오고 머리도 벗겨지고 간이 나빠져서 죽을 테니까’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에스콰이어》지 5월호는 ‘남성의 노화’라는 문제에 정면으로,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도전하고 있다. 제목은 <한 사람의 남자가 어떻게 나이를 먹어 가는가?>이다. 이 제목부터가 생경하고, 읽어 보면 한없이 우울해진다. 남성 잡지에서 잘도 이런 우울한 특집을 낼 수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넘버》·《브루터스》·《플레이보이》같으면, 이런 특집은 낼 수 없을 것이다.

내용은 너무나도 자세하다. 상당히 본격적인 데이터와 일러스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리얼하다. 가령 새벽에 서는 회수 같은 것도 실려 있다. 한 달에 20세가 6회, 30세가 7회, 50세가 5회,70세가 2회 선다고 한다. 사정 횟수는 20세가 1년에 140회(그 가운데 마스터베이션이 49회)고, 30세가 121회(10회)고, 40세가 52회(2회)고, 70세가 22회(8회)라고 한다. 이것은 미국인의 통계니까, 다소 차이가 나더라도 별로 고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비교적 편안히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에스콰이어》지는 체념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체념하고 자기 나이를 기분 좋게 받아들여 나간 것이다. 아무리 버텨 보아도, 노쇠는 자기 몫을 확실히 빼앗아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어두운 사실이 싫은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높은 수입을 얻고, 매일 조깅을 하면 좋다고 한다. 한때의 위안 정도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부부간의 불화

-꽤나 눈물 나게 하는 대사다. 미국에서 ‘성공의 기준은 대충 연수입 100만 달러 이상이니까, 나 같은 사람은 아직도 멀었다

 

(롤링 스톤)지의 8월 5일 호를 읽다 보니 존 어빙의 대 걸작이며 동시에 베스트 셀러인 (가프의 세계)의 영화 광고가 눈에 띄었다. 주연은 로빈 윌리엄스고, 감독은 <슬리터하우스 5>를 찍은 최루성 영화의 대천재 조지 로이 힐로, 7월 23일 미국전역에서 일제히 개봉되었는데, 워너 브라더스 작품이라고 한다. 이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봐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피플지 7월 12일호의 가십난(잡지 전부가 가십 난 같긴 하지만)을 일고 있었는데, 우연히 존 어빙의 별거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존의 갑작스런 성공은 우리의 결혼 생활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어요”하고 부인인 샤일러(39세)는 이야기하고 있다. 존은 40세이고, 결혼한 지 18년이 되었으며, 매우 사이가 좋은 부부로 알려져 있었다. 샤일러는 프로 사진 작가다. “별거하는 데는 그다지 문제가 없었어요”하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지금 버몬트 집에 틀어박혀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 ‘붕괴와 분열의 이야기’라고 한다(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자기 선전을 하는 사람은 그다지 좋은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 같다). 그녀는 “존과 함께 살았다면 틀림없이 소설 같은 것을 쓸 생각은 못했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존 어빙 씨는 버몬트의 집에서 나와 햄프턴 해안의 집과 맨해튼의 아파트를 왔다갔다하고 있다. “그는 집필하고 있으니까, 행복하지 않겠어요?”하고 샤일러는 태연스럽게 말하기도 한다.

“존의 갑작스런 성공은 우리의 결혼 생활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어요”

꽤나 눈물 나게 하는 대사다. 미국에서 ‘성공’의 기준은 대충 연수입 100만 달러 이상이니까, 나 같은 사람은 아직도 멀었다.

같은 호에 실린 유명인 이혼담을 계속 보면, 카펜터즈의 카렌 카펜터(32세)가 남편인 톰 뷰리스(41세)와 헤어졌다고 한다. “그는 내가 계속 찾아 헤매던 타입의 남성이에요. 다정하고도 강하죠”라고 카렌은 결혼할 때(1980년) 얘기했었다.

기사의 제목은 <그들은 지금 막 시작했다>였다.

그리고 비치보이스의 핸섬 보이, 데니스 윌슨이 헤어진 아내로부터 월 1만 달러의 생활비를 요구 받고 악전고투하고 있다. 그는 그전의 아내에게도 매달 2,600달러씩 계속 지불하고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빚이 53만 달러나 된다. 저런 저런!

 

미국의 마라톤 사정

-뉴욕 시티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려면 전날 밤부터 우체국 앞에 줄을 서야 한다. 마라톤에 출전하기도 전에 지쳐 버릴 것 같은 이야기다

 

혼자 매일 꾸준히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마라톤 경기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누구나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조깅이 붐을 이루는 나라기 떼문에 꽤 많은 시합이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파이브 마일러(8킬로미터 정도)’나 ‘텐 케이(10킬로미터 정도)’다. 그렇게 때문에 다리에 자신이 있어 열성적으로 조깅하는 사람 정도라면, “우리는 이걸로는 만족할 수 가 없다” 라고 말하게 된다. 26마일, 즉 42킬로미터의 풀 마라톤이야 말로 그들이 원하는 일단의 도달점이다. 그에 앞서 트라이 애슬론(역주:철인3종 경기)이라든가 울트라 마라톤 같은 것도 있는데, 제정신이 박힌 사람으로서는 이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에스콰이어지에 이러한 달리기 중독자를 위한 마라톤 안내 기사가 실려 있다.

그것에 따르면, 풀 마라톤에 출전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연습량은 1주일에 80킬로미터를, 2개월 간 계속해서 뛰는 것이라고 한다. 하루에 12킬로미터 가량을 달리는 셈이 된다. 그것을 감당해 내지 못하면, 마라톤에 나갈 자격이 없다는 애기다.

미국에서는 1년 동안 약 400회의 풀 마라톤 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경기에 참가하는 인원이 많고 국토가 넓어서지만, 참으로 부럽기 짝이 없다. 그 가운데에서 빅 스리를 꼽자면 보스턴 뉴욕시티 호놀룰루 대회다. 가장 권위가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전통이 있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인데, 여기에 정식으로 출전하려면 자격 심사를 받아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40세 이하의 선수라면 2시간 50분, 40 -49세라면 3시간 10분의 마라톤 타임이 요구된다. 그 이하의 사람은 스타트 라인 훨씬 뒤쪽에서 출발해야 한다. 뒤쪽에서 출발을 하면, 스타트 라인까지 5분 정도가 걸린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의 비결은 처음에 지나치게 빨리 달리지 않는 것이다. 너무 빨리 달리면, 약 29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비탄의 언덕’에서 완전히 지쳐 버리게 된다.

그리고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뉴욕 시티 마라톤 대회다(1981년에는 4만 명이 참가 신청을 했고, 1만 6,00명이 접수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가하고 싶은 사람은, 신청하기 전날 밤부터 맨해튼 우체국 앞에서 줄을 서야 한다. 아니면, 1,000달러의 회비를 내고, ‘뉴욕 로드 러너즈 클럽’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 마라톤에 출전하기도 전에 지쳐 버릴 것 같은 이야기다.

 

스트레스에 따라 발병률이 증가하는 신종 성병

-낙관적 기대에 반해서 하룻밤 사랑의 대가로 재수 없게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데

 

앞서 <왜 섹스는 재미없게 되어 버렸을까?>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헤르페스라는 신종 성병에 대해서 썼었다. 그때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라는 전화가 편집부로 걸려 왔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이번과 다음 번의 두 차례에 걸쳐서 자세히 헤르페스에 대해 쓸 예정이니까, 과거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앞으로 걸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사람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 주기 바란다.

헤르페스 바이러스라고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유성에서 온 물체 X’와 비슷하다. 즉, 그것은 인간의 세포에 달라붙어서 기능하고, 증식되어 나간다. 그리고 성행위를 매개로 해서 전염된다. 성행위라고 하는 것은 성교와 오럴 섹스를 말한다. 에스콰이어지에 기사를 쓰고 있는 잭 매클린독 씨의 경우는 이혼한 뒤 최초로 관계를 가진 여성으로부터 헤르페스에 감염되었다. 아침에 굉장히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는데, 그 여자가 “사실은 나, 헤르페스예요”하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녀는 만나는 남성 모두에게 자기가 헤르페스에 걸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분명히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헤르페스에는 비활동기가 있다. 성기나 입술과 같은 부드러운 부분을 통해 체내로 들어온 헤르페스 바이러스 중 어떤 것은 피부 밑에서 증식하여 살을 짓무르게 하거나 물집을 만든다. 또 어떤 것은 축색 돌기로 올라가 신경 세포 속으로 기어들어 간다. 이윽고 이와 같은 증상이 일단락 지어지면, 전자 쪽의 바이러스는 뺨에 있는 신경 세포로 후퇴하고, 후자 쪽의 바이러스는 척추로 후퇴하여 그곳에 기지를 만든다. 그러고 나서 꼼짝 않고 출연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말하는 ‘비활동기’며, 분명히 바이러스는 안쪽에 틀어박혀 있어서 감염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언제 ‘출현’하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가령 세금을 신고하는 기간에만 헤르페스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하는, 굉장히 불쌍한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에게는 ‘출현’도 잦다.

그런데 이 매클린독 씨는그 녀의 낙관적 기대에 반해서 하룻밤 사랑의 대가로 재수 없게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데, 그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하기로 하겠다.

 

 

상당히 흥미로운 병, 헤르페스

-이 세상에는 현실적으로 2,000만명의 헤르페스 환자가 득실거린다. 다음 번에는 정말로 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된 매클린독 씨는 어떠한 증상을 경험했을까? 우선 목구멍에 염증이 생겼다. 어느 정도로 아프냐 하면 물을 마실 수 없을 정도다. 그 얼마 뒤에 페니스가 빨갛게 짓물렀다. 이것이 헤르페스의 전형적인 초기 증상이다.

그래서 맥클린독 씨는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아가서 목구멍을 치료받았다. “아무래도 헤르페스인 것 같군요. 참 안됐습니다. 지금 현재로서는 치료법이 없습니다”하고 의사는 말했다.

헤르페스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병이다. 감염되었지만 발병하지 않는 사람도 수없이 많다. 혈액 내 항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다. 숫자로 말하면, 미국 전역에는 약 1,000만 명에서 2,000만 명의 성기 헤르페스 환자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수는 매년 25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안심할 수 가 없는 것이다.

헤르페스는 염증과 통증뿐만이 아니다. 특히 무서운 것은, 여성 헤르페스 환자가 보통 사람보다 여덟 배나 자궁 경관부의 암에 걸리기 쉽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헤르페스 활동기의 임산부에게서 태어난 갓난애의 절반은 염증으로 사망하여, 나머지 절반도 눈에 보이지 않거나, 뇌에 손상을 입거나 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왕절개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헤르페스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치료법은 없다. 100종에 이르는 백신이나 약, 레이저 요법이 발표되고 있으나, 실제로 효과가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ET에게 고쳐 달라고 하는 것이다.

매클린독 씨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낙담을 하게 되었다. 자신감을 상실하고, 일에 대한의욕을 잃고, 성욕도 감퇴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너무나도 인생이 암울했기 때문에, 그는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고 비뇨기과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헤르페스가 아닙니다. 일종의 노이로제로, 당신 혼자 그렇게 믿어 버린 겁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요, 목구멍은 인후염이고, 페니스는 과다한 성생활로 염증이 생긴 것뿐입니다.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이렇게 해서 매클린독 씨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현실적으로 2,000만 명의 헤르페스 환자가 득실거리니까, 다음 번에는 정말로 헤르페스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보로의 세계로 오세요

-나는 얼마 전에 담배를 끊었으나, 꿈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담배에 불을 붙여 가지고 입에 물고 있다

 

나는 얼마 전에 담배를 끊었으나, 지금도 이따금 담배를 피우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담배에 불을 붙여 가지고 입에 물고 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은 하지만, 피워 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으냐며 그대로 피우고 만다. 끊고 나서 5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꼴인 걸 보면, 담배라는 것은 상당히 끈질긴 물건이다.

외국 잡지에 실리는 담배 광고는 상당히 자극적이다. 일본과는 달리 담배를 나라에서 판매하지 않기 때문에 광고가 각기 독특하다. 그래서인지 보고 있기만 해도 무의식적으로 담배에 손이 가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말보로 담배 광고인데, 광고 모델은 전원이 카우보이고, 카피는 언제나 단 한 줄, “말보로의 세계로 오세요”다. 피터 예이츠의 영화 <영 제너레이션>에는 이 말보로 광고에 미쳐 버린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젊은이가 나오는데, 상당히 재미있었다. 말보로의 광고를 볼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고, 담배(물론 말보로)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윈스턴이 있다. 이 담배 광고의 모델은 대개가 육체 노동자다. 카피는 “아메리카 베스트”인데, 분위기는 <디어 헌터>의 세계에 가깝다.

타르가 어떻고 니코틴이 어떻고 하는 것은 남자답지 않다는 느낌이다.

카멜도 마찬가지다. 모델은 탐험가고, 카피는 “사나이가 있어야 할 곳”이다. 완전한 헤비 듀터의 세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세 개의 광고에 대해서 심하게 반발을 느끼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이 세 개의 광고를 보고 있으면 그 반발과는 정반대로 굉장히 담배가 피우고 싶어지는 것이다. 니코틴 냄새가 발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혀끝으로 이빨 안쪽을 핥고 만다.

그것에 비해서 “울트라 로우 타르지만 맛이 좋아요(켄트 3)”라든가, “모두 함께 깨끗한 셀럼 스피릿(셀럼)”이라든가, 재즈맨을 모델로 한 쿨의 “연주하는 데는 이것밖에 없다”시리즈처럼 따분한 광고는, 보고 있어도 특별히 담배를 피워 보고 싶다는 마음을 일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담배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남성다운 것이 아닐까?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일 때문에 선사에 갔는데 수행승 중에 골초들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부러 산에 틀어박혀서 수행을 하고 있으니 담배 따위는 끊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마음대로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담배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골치 아픈 물건이다.

 

두 손으로 피아노 치는 아빠의 모습

-손가락 하나하나가 차례로 마비되어 가는 잔혹한 병에 도전. 10년 투병 끝에 재기한 감동에 찬 이야기

내가 처음으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집을 산 것은 열여섯 살 때로, 피아니스트는 박하우스도, 캠프도, 제르킨도 아닌, 레온 프라이셔라고 하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젊은 피아니스트였다. 지휘는 조지 셀이었다. 프라이셔를 선택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값이 쌌기 때문이다. 네 장이 한 세트로 바겐세일해서 단돈 3,000엔이었다. 가난한 고등 학생으로서는 반할 만한 가격이었다. 연주로서는 품격이라든가 예리함은 결여되어 있었어도, 그 나름대로 느낌이 좋은 레코드였다.

그런데, 며칠 전에 라이프 지를 읽다 보니 이 레온 프라이셔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최근에 프라이셔에 관해 듣지 못한 것 같아서 읽어 보니, 프라이셔는 오른손의 건소염으로 계속 연주가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건소염이라는 것은 피아니스트에게 있어서는 직업병과 같은 것이어서, 옛날에 로베르트 슈만도 이 병에 걸려서, 피아노를 단념하고 작곡가로 전업했던 것이다. 우선 새끼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게 되고, 다음에는 약지가 말을 듣지 않게 되며, 결국에는 손 자체가 마비되어 버린다. 여기까지 오면, 거의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 잔혹한 병이다.

레온 프라이셔는 그래도 버텨 내면서,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유일한 레퍼토리로 피아니스트 활동을 계속해 나갔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곡만을 치면서 살아 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근육 치료 전문인 아래서 피나는 투병 생활을 했다. 그는 10년 넘게 훈련을 한 끝에 가까스로 정상적인 피아니스트로 재기한 것이다. 이러한 기사를 읽고 있노라면, 정말로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라이셔는 첫 번째 재기 콘서트에서 프랑크의 <교향 협주곡>을 연주했다.

리허설에는 프라이셔의 아이들도 참석했다. 그들은 두 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아빠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프라이셔는 심각해지지 않고, 갑자기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쳐서 모든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리게 만들었다. 유태인의 유머는 일본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터프 함을 지니고 있다.

이 원고를 쓰면서 프라이셔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듣고 있는데, 그리움이 밀려온다.

 

 

<소피의 선택>과 브루클린 다리

-시대 고증을 머리 속에 넣고 영화를 보면, 굉장히 재미있을 것이다.

윌리엄 스타일로느이 원작을 영화화한 <소피의 선택>은 매우 뛰어나고 참으로 볼 만한 영화였다. 나는 <입맞춤>과 <콜 걸>이래의 앨런 J.파큘러의 가장 괜찮은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영화를 지나치게 기교적으로 만들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당히 심각한 소재를 가지고 두 시간 반 동안이나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특히 유태인 청년 네이선 랜드 역이 케빈 크라인이라는 배우의 연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탁월하다. 이러한 영화에는 좀처럼 관객이 들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관심이 있는 분은 꼭 한 번 보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중에 네이선이 주인공인 작가 지망생 청년의 새 출발을 축하하면서, 브루클린 다리 위에서 샴페인 병을 터뜨리는 대목이 있다. 이 영화의 무대는19940년대 후반의 브루클린이기 때문에, 브루클린 다리는 이 장면 이외에서도 몇 번씩이나 나온다. 과연 한 세대 전의 뉴욕의 분위기를 풍기는 다리다.

네이선의 대사에도, “옛날에 하트 크레인이 이 다리를 건넜어”라는 것이 있는데, 크레인은 그 다리를 건넜을 뿐만 아니라, <브루클린 다리에 바친다>라는 시까지 썼다. 할렘 태생의 작가 아서 밀러는 수천 번이나 이 다리를 건넜고, 그리고 브루클린 다리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서 다리로부터의 조망 을 썼다.

브루클린 다리가 놓여진 것이 1883년이니까 금년으로 꼭 100년째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기념해서 아서 밀러가 라이프 지에 브루클린 다리에 얽힌 추억담을 쓰고 있다. 1950년대 초에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성공한 아서 밀러는, 그 돈으로 녹색의 스튜드베이커를 샀었는데, 어느 날 밤, 브루클린 다리 위에서 교통 사고를 내서 그 차를 박살내고 말았다. 앞쪽에 정차해 있던 차를 피하려다가 미끄러져서 한 바퀴 돌아 뒤에 따라오던 차와 정면으로 충돌을 해버린 것이다. 밀러의 얘기에 의하면, 당시의 브루클린 다리의 차도는 폭이 차 한 대하고 반 정도가 지나갈 정도로 좁았고, 더구나 목제 블록을 깔아 놓아서 안개 같은 것이 끼면 노면이 마치 버터처럼 미끄러웠다고 한다.

그러한 시대 고증을 머리 속에 넣고 영화를 보면, 굉장히 재미있을 것이다.

 

에게 해 2 대 1

-“그들은 호텔과 카페의 손님들 앞에서 보란 듯이 드러내 놓고 섹스를 했습니다”

서른 살이 넘으면 여름이 섹스의 계절이라는 말 따위와는 별로 관계 없이 혼자 무료하게 맥주를 계속 마셔댈 뿐이지만, 어쨌든 여름은 성적으로 고양되는 계절인 모양이다. 특히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여름의 에게 해 같은 곳은 그야말로 성의 도가니 같아서, 아베크 족이 대낮부터 길 한가운데에서 위장까지 닿으라는 듯이 진한 키스를 펼쳐 보인다. 아무래도 좋지만, 그러한 것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육식을 하는 짐승’이라는 느낌이 든다. 특히 개트워트 공항에서 단체로 밀려나오는 영국 펑크족 소년 소녀들의 기세는 그야말로 엄청나서, 벌써 성기가 백팩킹 하고 로큰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리스는 관광국이라서 여행자들의 볼썽사나운 대부분의 품행은 눈감아 주리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물론 한계가 있어서 그것을 넘어 서면 역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게 된다.

7월 23일자의 아테네 뉴스 지에 의하면, 시로스라는 에게 해의 섬에서 두 명의 영국인 여행자와 그리스계 프랑스 여자 한 명이 여러 사람 앞에서 성교한 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두 명의 남자는 모두 스물두 살로, 벨파스트에서 온 기계공과 실업자였다. 여자는 스물여섯 살로 파리에서 비서 일을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부둣가의 혼잡한 오픈 카페 옆에서 성교를 끝낸 후에, 격앙된 섬 주민에 의해 붙잡혔다고 한다.

“그들은 호텔과 카페의 손님들 앞에서 보란 듯이 드러내놓고 섹스를 했습니다”하고 호텔 주인인 이야니스 쿠즈피스 씨가 증언했다.

세 사람은 “산토리니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술을 너무 마셔서 그만 “하고 변명했지만, 법정은 상고권은 일체 인정하지 않고 형을 선고했다.

그리스라고 하는 나라는 종교가 상당히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라라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에 대한 벌이 다소 엄하다.

또 그리스의 교도소는 소문에 의하면,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고, 어쨌든 형편없는 곳인 모양이다. 그 진위의 정도는 확실치 않지만, 현지에 살고 있는 일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식사 같은 것은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사입이 없는 죄수는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될 수 있는 한 교도소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그게 정말이라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간 그리스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섹스를 하고 싶으면 적당한 장소에 가서 하는 것이 일단은 이 세상의 상식이다.

 

그리스의 여름 밤과 야외 영화관

-야외에서 연극을 보고 나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그리스에서 영화를 구영하는 것은 간단할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어렵다. 왜 어려운가 하면, 그리스의 영화관은 대개 여름이면 밤 아홉 시쯤 되어야 개장을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렇게 늦은 시간에만 상영을 하느냐 하면,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한 것으로, 영화관에 지붕이 없기 때문이다. 지붕이 없게 때문에 주위가 완전히 깜깜해지지 않고서는 여화를 상영할 수 없다. 굉장하지 않은가? 그 느낌은, 옛날에 흔히 학교의 교정 같은 데서 상영하던 야외 영화회를 떠올리면 거의 비슷하다. 테니스 연습을 하는 판을 새하얗게 칠한 것 같은 스크린에, 파이프 의자를 흙 바닥에 늘어놓았을 뿐이다. 엉터리라고 하면 엉터리지만, 요금도 200엔 정도니까 턱없이 싼 거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 그리스의 여름 밤은 굉장히 시원하고 상쾌하며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아서, 지붕을 씌우거나 에어컨을 설치하거나 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고, 그래서 자연히 지붕 없이 상영을 하기로 정해진 것이다. 그리스라는 나라는 아무튼 지붕 없는 시설이 많은 곳이어서, 극장도 콘서트 장도 레스토랑도 모두 지붕이 없다. 덕분에 영화관 주변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은 매일 밤 공짜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일본 같으면 소음 공해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겠지만, 그리스 인은 그러한 것에는 대단히 무신경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아기 테오도리라고 하는 해수욕장의 영화관에서, 앨런 J. 파큘러 감독의 <컴즈 어 호스먼>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2부작이어서 전편과 후편 사이에 예고편이 상영되었다. 코린토스의 영화관에서는 놀랍게도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버스의 창으로 흘끗 포스터를 보기만 했기 때문에 잘은 모르는데, 도대체 그리스 어로 제목이 어떻게 붙여져 있는지가 궁금했다.

리카비토스 산꼭대기의 원형 극장에는 사가와 유키오가 연출하고, 히라 미키지로가 주연한 연극 <메디아>를 보았다. 이 연극은 참으로 재미있었고, 사실 아테네에서는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럴 것을 보면, 역시 그리스의 연극은 야외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정말로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으니 말이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헤로데스 아티코스 음악당은 아테네 국립 교향악단의 파업 소동으로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유감이었다.

 

내가 세 번이나 본 <스타 워즈>

-한가하다면 한가하다고 할 수 있고, 유별나다면 유별나다고 할 수 있는 매료의 경지

나는 <스타워즈>를 세 번이나 보았다. 한가하다면 한가하다고 할 수 있고, 유별나다면 유별나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나의 아내도 함께 영화관에 갔었는데, 그때까지 이 사람은 <스타 워즈>시리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세 번째 작품을 보고 아니나다를까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그 뒤로 아내는 <스타 워즈 1>과 <스타 워즈 2>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보고 싶다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지금 상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애당초 무리한 이야기였다. 사정이 그러니까 당신이 단념하라고 설득하는 사이에 나도 점점 첫 작품이 너무나 보고 싶어져서, 마침내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와 27인치 모니터 텔레비전과 <스타 워즈>의 디스크를 사버렸다. 70밀리미터 극장 화면에는 물론 미치지 못했지만, JBL(역주:스피커 상표 이름)의 백로드혼(역주:스피커 시스템의 하나로 저음역이 강화된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보는 27인치는 꽤나 다이내믹 했다.

자주 생각하는 건데, 큰 원숭이 츄바카라고 하는 캐릭터는 정말로 귀엽다. 어디가 귀여우냐 하면, 츄바카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무오고’라든가, ‘아구’라든가 하는 정도로 대개의 용건을 해결해 버린다. 나도 그 정도의 단어로 볼일을 끝내고, 그 나머지 시간은 제국군과 이따금 공중전을 벌이면서 인생을 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한다.

츄바카의 얼굴 모습이 1편과 3편에서 상당히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편에서는 헤어스타일이 납작한 헬스 엔젤스 풍의 올백이었는데, 3편에서는 조금 더 덥수룩해지고, 모습이 약간은 어른스러워졌다. 나로서는 새로운 호인풍의 츄바카보다는, 무슨 일만 있으면 바로 완력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흉폭한 옛날의 츄바카쪽이 더 마음에 든다. 이 3부작이 완결되어 더 이상 츄바카의 모습을 볼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굉장히 슬펐다.

자막을 보고 있으면 잘 알 수가 없지만, 1편에서 츄바카는 레이아 공주로부터 “이 워킹 카펫(Walking Carpet, 역주:몸에 털이 많은 것을 빗댄 말임)을 어디 다른 곳으로 보내 줄 수 없어요?”라는 말을 듣고 쫓겨난다. 아무리 그래도 워킹 카펫은 너무했다. 1편과 비교하면, 3편에서는 레이아 공주도 어느 정도는 말씨가 부드러워졌다. <스타워즈>의 세계에서도 등장 인물 모두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어 가는 것이다.

 

언제나 비슷한 옷을 입는 나

-새로 사 온 와이셔츠의 포장을 풀 때 희미하게 풍기는 옥스퍼드 면의 냄새가 좋고, 빨아서 빳빳하게 마른 와이셔츠를 다림질해 나갈 때의 감촉이 좋다

며칠 전에 낡은 와이셔츠를 세 장 가량 처분했기 때문에, 그대신 입을 것을 하라주쿠의 ‘폴 스튜어드’로 사러 갔다. 나는 특별히 옷에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어서, 언제나 비슷한 것만 입는 편인데, 와이셔츠를 사는 것만은 비교적 좋아한다. 남성복 전문점의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와이셔츠를 보고 있기만 해도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바지라든가 블레이저 코트라든가 스웨터에 대해서는 특별히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와이셔츠 뿐이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이유로 와이셔츠를 좋아한다. 새로 사온 와이셔츠 포장을 풀 때 희미하게 풍기는 옥스퍼드 면 냄새를 좋아하고, 빨아서 빳빳하게 마른 와이셔츠를 다림질해 나갈 때의 그 감촉도 좋아한다.

고교시절과 대학 시절에는 VAN 재킷의 버튼다운 칼라 사이즈 37만 입는다고 하며 상당히 편집광적으로 지냈는데, 최근에는 여러 가지 셔츠를 즐겨 입게 되었다.

미국의 남성 잡지에는 와이셔츠 메이커의 광고가 많은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애로우일 것이다. 1920년에 피콧 피츠제럴드가 닥원의 이쪽 으로 데뷔했을 때, 그의 잘생긴 얼굴은 “애로우 와이셔츠의 광고 모델 같다”라고 형용되었을 정도니까, 그 역사가 길다. 뉴요커 지에 실린 애로우 사의 광고를 보니까, 이미 문을 닫은 레스토랑에서 몸을 밀착시키고 있는 남녀의 사진이 있고, “아메리카가 숨쉬고 있는 셔츠”라는 카피가 붙어 있었다. 남자는 리처드 기어와 트라볼타를 합쳐서 두 개로 쪼개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마 지금은 이러한 타입의 핸섬 보이가 유행하는 것이리라. 옷은 세련되었으나, 플레이보이라기 보다는 비지니스맨에 가깝다. 역시 세련된 옷차림을 한 여자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그의 흰 와이셔츠 소매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있다. 좋은 그림이었다.

그런데, ‘폴 스튜어트’에서 와이셔츠를 샀더니 앙케트 용지가 딸려왔다. 그래서 그 직업란에 기입을 하려고 보니까, 자영업이 (1)지적 서비스업, (2)물적 서비스업, (3)기술 서비스업 세 가지로 분류되어 있었다. (1)로 할까, (3)으로 할까 굉장히 망설였다. 와이셔츠 한 장 샀을 뿐인데, 그런 어려운 질문은 제발 하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

 

번쩍이는 유방에 대한 고찰

-브룩 쉴즈와 돌리 패튼의 유방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인공 확대된 마리엘의 유방

보브 포시의 신작 영화, <스타 80>은 문제의 마리엘 헤밍위에의 유방 확대 수술 쪽으로 화제가 집중되어 버려서, 작품의 질이 어떻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그다지 들려 오지 않는다. 화제를 만드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이렇게 되니 진퇴양난이어서, 마리엘 양도 어쩔 ㅅ 없는 모양이다.

“이것은 내 유방이 어떻다는 내용의 영화가 아니라구요. 내가 하고 싶어서 유방 확대 수술을 한 것이지, 영화의 배역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하고 그녀는 변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말과는 정반대로, 포시 감독은 이 배역은 거대한 유방 없이는 성립될 수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주인공은 플레이보이 지의 핀업 걸이라서 확실히 납작한 가슴의 아가씨로서는 해낼 수가 없다. 그런 연유로 마리엘이 “이 영화는 보브 포시의 작품이라구요. B급 섹스 영화 같은 것이 아니라니까요”하고 아무리 강조해도, 모두의 눈은 결국 인공적으로 보가오딘 번쩍이는 유방 쪽으로 쏠리게 된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한 이야기다.

“딸 아이는 수술 전에 나에게 알려 주었지만, 나는 그것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군요. 그 아이는 배역 때문에 수술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마리엘은 이전에 가슴이 작다고 고민한 것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하고 어머니 바이러 헤밍웨이는 이야기하고 있다. 수술의 결과에 대해서는, “너무 극단적으로 커지지 않아서 안심했어요”하고 한다.

그녀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나, “딸의 누드 장면을 보는 것은 어머니로서 다소 괴로운 일이고, 유방 확대 수술 때문에 모두가 법석을 떠는 것도 싫어요”하고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어머니라는 입장도 결코 편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딸들이 한층 더 괴롭다. 유방에 삽입한 실리콘이 서서히 굳어 갈 때줌의 고통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성형 외과 의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고통이 심하기 때문에 상당한 퍼센티지의 여성이 그것을 견디다 못해서 일단 주입한 실리콘을 제거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라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엄청나게 아픈 모양이다.

그래도 마리엘은 그럭저럭 그 고통을 극복하고, 꽤나 큰 유방을 가지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유방과 상세한 사이즈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피플 지에 의하면, 그것은 “브룩 쉴즈의 유방과 돌리 패튼의 유방 사에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다.

 

달리면서 듣는 음악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달리다 보면 지평선 너머 저 멀리까지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 집 근처에는 육상 트랙이 있어서 그 곳을 자주 달리는데, 트랙을 서른 번 정도 혼자 돌다 보면 역시 지루해진다. 처음 얼마 동안은 재미 삼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거나 혼잣말을 하는데, 그러는 사이에 생각할 것도 바닥나 그냥 묵묵히 발을 앞으로 내딛는 일만 되풀이하게 된다.

그래서 얼마 전에 스포츠 용품점에 가서 서포터(역주:운동 선수 등이 몸을 보호하기 위해 대거나 차는 보호대)를 사가지고 와서, 거기에 워크맨의 베이스를 고정시켜 음악을 들으면서 달릴 수 있도록 머리를 썼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며칠 동안 계속하는 사이에 매우 쾌적하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 1킬로미터를 5분 내에 달리 때는 적당하지가 않지만, 느긋하게 달리 때는 최고다.

사실 테이프에 집어 넣는 음악이 문제인데, 그 선택이 상당히 까다롭다. 너무 짧은 곳은 리듬이 쉴 새 없이 변하기 때문에 달리기가 어렵고, 디스코 풍의 롱 버전은 신시사이저 드럼 소리 같은 것이 너무 시끄러워서 귀에 가해지는 자극이 강하기 때문에 달리면서 듣게 되면 쉽게 피로해진다. 클래식 음악은 아무래도 리듬이 맞지 않고, 포 비트(역주:재즈의 주법. 4분의 4박자로, 한 소절에 네 개의 음이 들어감) 재즈도 달리는 리듬이 아니다.

내 경험으로 말한다면, 달리면서 듣기에 가장 적합한 음악은 <스타즈 온> 풍의 메들리 송이다. 그것은 리듬이 안정적이고, 본바탕이 단순해서 편하게 달릴 수 있다. 그리고 <스태프>라든가, <크루세이더즈>와 같은 심플한 타입의 퓨전 음악도 나쁘지 않다. 극히 평범한 아메리칸 록 음악도 달리기 용이다.

내가 최근에 마음에 들어 하는 달리기용 음악은 존 쿠거 맬렌캠프와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신보와, 예의 <풋루스>의 LP, 보비 우맥의 <포이트 2>다.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달리다 보면 지평선 너머 저 멀리까지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글을 쓰면, 야마가와 겐이치에게 또 조롱을 당할 것 같지만, 휴이 루이스 & 더뉴스도 최고로 아메리카 적이고 신바람 나는 밴드니까.

 

마지막으로, 원래 애기하고는 그다지 관계없는 얘기를 두 가지 하겠다.

(1)워크맨(Walkman)의 복수형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답은 Walkmen이다.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틀림없이 그렇다. ‘워크맨을 듣고 있는 소년들’은 ‘The boys who are listening to Walkmen’이 된다. 대학 입학 시험과는 별로 관계가 없지만 말이다.

(2)외국의 달리기 대회에 참가하면 유방이 꽤 커다란 여자들이 달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의 달리기 대회에서는 그런 여자들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떻든 그다지 상관은 없지만, 왜 그럴까?

 

장편 끝내고 2주 동안 영화만 봤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슈왈츠네거의 전 나체 장면이 나오는데 언제나처럼 국부가 조금 지워져 있다. 그런 장면은 보고 싶기도 한 것 같고 보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장편 소설이 겨우 일단락 되었기 때문에 2주일 동안 영화만 봤다. 금년 봄에는 <듄> <2010년> <리틀 드리머 걸> <터미네이터> <네버 엔딩 스토리> 등 상당한 역작이 구색별로 갖춰져 있어서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다만 나는 <네버 엔딩 스토리>와 같은 부자지간이 즐길 수 있는 작품에는 역시 ,끝이 없는 이야기>처름 제대로 된 일본어 제목을 붙여 주는 것이 친절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길다란 영어 제목은 어린애들이 기억하기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나는 <코난>의 팬이기도 해서,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주연하는 <터미네이터>를 상당히 좋아한다. <블레이드 러너>와 <에일리언>과 <크리스틴>을 함께 섞어 놓은 것 같은, 스릴 넘치는 이 영화는 미국에서 6주간 연속 관객 동원수 제1위를 기록하여,업계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 독일 사투리가 심한 거구의 사나이가 주연한 영화가 대히트 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슈왈츠네거는 1947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고등 학교를 나온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1975년까지 ‘미스터 유니버스’의 타이틀을 4회, ‘미스터 월드’를 1회, ‘미스터 올림피아’를 6회나 획득했다. 경이적인 기록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리고 보디 빌딩에 대한 세 권의 책을 써서 베스트 셀러로 만들었고, 현재는 부동산 업자로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부동산 회사 외에도 프로덕션 회사를 가지고 있으며 CBS와 ABC의 스포츠 해설도 맡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대부호인 셈이다.그래서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취미라고 한다. 굉장한 사람이다.

롤링 스톤 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 영화가 성공하게 된 원인은 자신이 악역을 맡았기 때문일 거라고 했다. 감독인 짐 카메론은 <코난>에서의 그의 주인공 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영화 속에서 슈왈츠네거에게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게 하는데, 이 악의 분출이 영화의 중심이 되고 있어서, 보고 있으면 저절로 탄식이 나온다. 이 악에 비하면 착한 사람 쪽의 존재가 훨씬 희미하다. ‘스니크 프리뷰’의 경우에도 관객들 대부분은 악역인 슈왈츠네거 쪽에 감정이 이입되어서, “그래, 아놀드. 죽여 버려라!”하고 외댔다고 한다. 어쨌든 이상하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슈왈츠네거의 전나체 장면이 나오는데, 언제나처럼 국부가 조금씩 지워져 있다. 그런 장면은 보고 싶기도 한 것 같고 보고 싶지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

 

에릭 시걸과 러브 스토리

-돈과 명예와 경의를 동시에 손에 넣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그 가운데에서 두 가지를 손에 넣었다면 이미 만만세가 아닐까?

러브 스토리의 작가인 에릭 시걸이 얼마 전에 더 클래스 라는 제목의 장편 소설을 출판했다. 시걸의 대부분의 책에 대한 서평이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다지 작가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좋은 평판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라고 그는 낙담한 모습으로 신문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르고, 텔레비전의 프로듀서들이 그 영화와 판권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비평에서 두들겨 맞은 것에 대해서 “유감입니다(I’m sorry)”라고 말하고 있다. 동업자로서는 안됐다(I’m sorry)고는 생각하지만, 동시에 후회하지 않는 것(Never say I’m sorry)도 작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아내는 이 책이 마음에 든다며 ‘만일이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좋은 평을 받을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정의 같은 것은 없어. 만일 내가 운이 좋다면, 이 책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거야’라고 말했죠. 사실 그렇게 되었으니, 나는 돈과 명예를 가지고 도망쳐 버리겠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그가 원하고 있는 것은 돈도 인기도 아니다. 시걸이 원하고 있는 것은 경의(경의)다.

“[나는 자신을 대 작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핀트에서 벗어난 비평은 듣기가 거북합니다. 적어도 그는 유능한 작가이기는 하니까 그것만큼은 제대로 인정해 주길 바라는 거예요”라고 그는 말한다.

요컨대, 그는 대학 교수로서 받고 있는 경의를 소설가라고 하는 분야에서도 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돈과 명예와 경의를 동시에 손에 넣는 것은-누가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처럼-상당히 힘들다. 그 가운데에서 두 가지를 손에 넣었다면, 그것으로 이미 만만세가 아니냐고 나 같은 사람은 생각하지만, 에릭 시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항상 존경 받는 데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는, 경의를 표하지 않는 데 대해서 신경질을 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것과는 별도로 러브 스토리 가 출판되었을 때의 소동을 에릭 시걸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투데이 쇼>의 인터뷰에 출연하자 바바라 월터스는 흥분한 것 같았어요.

그녀는 인터뷰는 하지 않고, 카메라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 젊은이가 굉장한 소설을 썼습니다. 열분, 지금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서 사보세요’하고 말이죠. 그날 열두 시까지 러브 스토리는 미국 전역에서 한 권도 남김없이 다 팔려 버렸어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다.

 

서핑을 하는 데 따른 마음의 짐

-서핑을 순수한 의미에서의 정직함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며, 그것에 의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응시하게 된다

“지금은 상당히 상황이 호전되었지만, 내가 대학을 나온 1960년대에는 서퍼 같은 친구들은 모두 무뢰한이라고 여겨졌었다”라고 얘기한 사람은, 하와이 대학에서 해양학을 연구하고 있는 리처드 그리그 박사다. 그리그 박사는 한때 와이미어 베이의 톱 서퍼였고, 마흔 여덟인 지금도 가장 우수한 서퍼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무렵은 정말 형편없었다. 어쨌든 내가 서핑을 하고 잇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도 나의 연구를 인정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남보다 두 배의 노력을 해서 무엇인가를 발견해도, 저 녀석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말만 들었다. 제대로 대접을 받게 될 때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공화당 의원인 프레드 헤밍스 쥬니어는 서핑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상당한 핸디캡을 짊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서핑을 하는 국회 의원을 신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들도 자식에게 서핑을 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서퍼는 야구나 미식 축구와는 달라서 추천 받아 대학에 입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스포츠로서의 서핑은 1960년대에 비하면 지위가 굉장히 향상된 편이다. 1960년대에 비하면 서퍼도 드롭아웃(역주:사회체제로부터의 탈출, 타락)적인 색채는 희미해지고, 마약이나 여자에 얽혀 난장판을 벌이지도 않는다. 서핑도 겨우 ‘2급 시민적’이기는 하지만, 스포츠로서의 시민권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서핑의 뛰어난 점은 그것이 개인적인 스포츠라는 것이다. 서핑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정직함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며, 그것에 의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응시하게 된다. 파도 앞에 나서면 인간은 갖가지 공포와 직면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정신 치료라고 할 수 있다”하고 어느 서핑 잡지의 편집자가 말했다.

자기 정신적 치료라고 하는 게 약간의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금년 가을 태풍이 오기 전날의 고코누마 해안의 파도는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재미있는 도쿄 디즈니랜드-도쿄 디즈니랜드에 갈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가자. 그런 사람은 덕을 볼 것이다. 무지는최고의 사치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 학교 학생 때, 텔레비전에서 매주 <디즈니랜드>라고 하는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을 방영했었는데, 나는 그걸 자주 보았다. 미국의 디즈니랜드가 1955년에 생겼으니까 그 얼마 뒤의 일로, 말하자면 동시대적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디즈니랜드의 존재를 우리 일본의 어린이들에게도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려 주었다고 해서 곧장 달려갈 수도 없었고, 그로부터 약 4반 세기의 세월이 흘러 나는 서른 넷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1983년 4월, 지바 현 우라야스의 매립지에 버젓이 도쿄 디즈니랜드가 완성된 것이다.

기쁘냐고 물어 보면, 일단은 기쁘다. 나는 지금 지바 현에 살고 있으니까, 근처에 유락 시설이 들어선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너무 늦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1950년대적, 월트 디즈니적, 로봇 아톰적 휴머니즘을 새삼스럽게 지금 들고 나오다니, 이쪽으로서는 약간 난처하다. 그러나 역시 가보고 싶고, 가서 구경해 보고 싶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조금 복잡하다.

이것은 역시 재미있다!

그러나 3월 18일의 이 ‘도쿄 디즈니랜드 프리뷰’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서, 이런 식으로 꽤 까다롭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은 나 정도였다. 함께 돌아다닌 안자이 미즈마루 씨라든가 마쓰야마 다케시 씨라든가, 넘버 편집주의 N씨 같은 사람은 모두 미국에서 이미 디즈니랜드에 가본 적이 있는 탓인지, 모든 면에서 정말로 익숙했다. 미즈마루 씨는 로스앤젤레스 쪽도 플로리다 쪽도 몇 번씩 구경을 갔었다고 한다.

“정말로 재미가 있을까요?”하고 내가 의심스러운 듯이 입구에서 물어 보자, 미즈마루 씨는 “괜찮습니다, 재미있어요”하고 장담했다.

그런데 다섯 시간에 걸쳐서 실제로 돌아다녀 본 결과부터 말하면 역시 재미있었다. 아직 디즈니랜드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정말로 디즈니랜드라는 곳이 그렇게 재미있습니까?”하고 미심쩍어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나도 미즈마루 씨처럼 “괜찮습니다, 재미있어요”하고 대답하게 될 것 같다.

디즈니랜드 안에 어떤 장치가 있고, 어떤 것이 준비되어 있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구태여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한 것들은 다른 잡지나 텔레비전에서 충분히 소개할 것으로 믿으며, 게다가 나는 여러분들의 그와 같은 예비 지식 없이 나처럼 완전한 백지 상태에서 가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틀림없이 덕을 볼 것이다. 무지라는 것은 현대에 있어서 최고의 사치인 것이다.

 

감탄한 세 가지 포인트

아주 일반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도쿄 디즈니랜드는 장점을 세 가지 갖고 있다. 우선 넓고 청결하며, 둘째로 순수하게 꾸며져 있고, 셋째로 지겨울 정도로 많은 구경거리가 있다. 이 세 가지는 지금까지 일본의 유원지에는 없었던 특징이다.

넓이는 참으로 대단해서 대충 한 번 둘러보는 데도 하루가 걸린다. 청결함에 대해서도 광적일 정도로 철저해서 디즈니랜드 구석구석에 청소부가 배치되어 있는데, 어떤 쓰레기라도 15분 이내에 회수되어 버린다. 내가 떨어뜨린 팝콘도 10초 내에 회수되어 버렸다. 아무튼 굉장하다.

그리고 구경거리가 많은 것에 대해서, 처음 오는 사람은 틀림없이 놀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일본 유원지의 놀이 기구의 감각으로 가면, 이제 이쯤에서 끝이겠지, 하는 대목에서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은 ‘제기랄, 벌써 끝이야?’하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미국의 레스토랑에서 먹는 바닐라 퍼지(역주:설탕 버터 초콜릿 등으로 만든 말랑말랑한 캔디)정도의 볼륨이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내가 가장 감탄한 것은, 이래도 감탄하지 않을래? 자아, 어떠냐 하는 식의 속 들여다보이는 얄팍함이 없이, 참으로 순수하게 전체가 꾸며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손님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그만큼 돈이 들어간 것이다. 요금도 입장료와 놀이 기구를 타는 비용 등을 포함해서 대개 한 사람당 4,000엔 정도가 든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비싸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 정도는 들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돈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기분 좋게 화끈하게 노는 것이 이익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만큼 돈이 드는, 천진난만한 낙천성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제5장 신나게 살고 싶은 욕망의 여울

 

코끼리 공장의 해피 엔드

짧은 글 속에 숨어 있는 하루키의 작품의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

오래 마음속에 간직했던 욕심 많은 꿈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나는 쌍둥이 자매와 데이트해 보는 게 오랜 꿈이었다.”

난생처음 스테레오를 선물 받던 날

-1960년 12월, 우리는 무척이나 심플하고 무척이나 행복하고 무척이나 중산 계급적이었다. 그리고 빙 크로스비는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노래했다

난생처음으로 부모님이 스테레오를 사주셨을 때, 그것과 함께 빙 크로스비의 크리스마스 레코드가 따라왔다. 그렇다면, 그때는 크리스마스 계절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름에 스테레오를 샀는데, 빙 크로스비의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를 끼워줬을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레코드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징글 벨>과 <아베 마리아>와 <고요한 밤>4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아무튼 벌써 20여 년 전의 이야기니까,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것도 네 곡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것도 빙 크로스비의 노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1960년 12월, 우리는 무척이나 심플하고 무척이나 행복하고 무척이나 중산 계급적이었다. 그리고 빙 크로스비는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노래했다.

 

커피가 있는 풍경

-내 앞에는 사춘기 특유의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이 있었고, 거기에는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이 똑똑히 비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등뒤에는 사각형으로 도려내어진 조그만 풍경이 있었다

그날 오후에는 윈톤 켈리의 피아노가 흐르고 있었다. 위에트리스가 흰색 커피 잔을 내 앞에 갖다 놓았다. 두텁고 무거운 잔이어서 테이블에 놓을 때 둔탁한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마치 풀의 물 밑 바닥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의 소리처럼 오랫 동안 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그때 열여섯 살이었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곳은 항구 도시였고 언제나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바다 냄새가 났다. 하루에 몇 번씩인가 유람선이 항구를 돌고, 나는 몇 번씩이나 그것을 타고 대형 여객선이나 독(역주:선박을 건조 수리하기 위해 항만에 시설한 설비)의 풍경을 물리지도 않고 바라보곤 했다. 비 오는 날에도 우리는 흠뻑 젖어 갑판 위에 서 있었다. 항구 근처에는 스탠드바의 좌석 외에는 테이블이 한 개밖에 없는 조그만 커피숍이었는데, 그 곳의 천장에 달려 있는 스피커로부터는 재즈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캄캄한 방에 갇힌 조그만 어린애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커피 잔의 친밀한 온기가 있었고, 소녀들의 상냥한 향기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커피의 맛 그 자체 보단 커피가 있는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앞에는 사춘기 그 특유한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이 있었고, 거기에는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이 똑똑히 비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등뒤에는 사각형으로 도려내어진 조그만 풍경이 있었다.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의 울림처럼 따스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모두 마셔버렸을 때, 풍경이 나를 축복했다.

그것은 또한 작은 거리에서 소년이 어른이 되어가기 위한 은밀한 기념 사진이기도 했다. 자아, 커피 잔을 가볍게 오른손에 들고, 턱을 당기고,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좋습니다, 찰칵.

때로는 인생은 한 잔의 커피가 가져다 주는 따스함의 문제라고 리처드 브로디건이 어딘가에 썼었다. 커피에 대해 쓴 문장 가운데서 나는 이 글이 제일 마음에 든다.

 

 

존 업더이크 책을 한 권 들고 상경하던 날

-그는 하버드로 출발하기 이틀 전에, 그녀의 처녀성을 빼앗았다. 그녀는 울었다. 그도 왠지 기운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자기가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자신도 동정을 잃었던 것이다

봄이 오면 존 업다이크가 생각난다. 존 업다이크를 읽으면 1968년의 봄이 생각난다. 우리의 머리 속에는 몇 가지인가 그러한 연쇄가 존재한다. 아주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나 세계관은 그러한 ‘아주 사소한 일’로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도쿄로 올라온 것은 1968년 봄이었다. 커다란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이 싫어서 필요한 것은 먼저 보내고, 코트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와 존 업다이크의 뮤직 스쿨 만을 쑤셔 넣고 집을 나섰다. 밴텀 출판사인가 델 출판사인가의 페이퍼 백으로, 표지는 고풍스럽고 세련되어 좋았다.여자 친구와 식사를 하고 헤어진 뒤에 신칸센에 올라탔다.

업다이크 책 한 권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도쿄에 올라온다고 하는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같잖은 일이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괜찮았다.해가 지기 전에 토쿄에 도착해서 메지로에 있는 새 집에 가보니까, 도착해 있어야 할 짐이 어찌 된 일인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도 없었으며 세면 도구도 재떨이도 이불도, 그리고 커피 잔도 주전자도 없었다. 이렇게 되면 비참하다. 뭔가 하려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사고가 난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서랍이 한 개밖에 없는 엄청나게 심플한 책상과 엄청나게 심플한 철제 침대가 있을 뿐이었다. 침대 위에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우울해질 것 같은 매트리스가 얹혀 있었다. 앉아 보니까 1주일 전에 산 프랑스 빵처럼 딱딱했다.

잔뜩 흐려 있는 조용한 봄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창문을 여니까, 멀리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이나 가다 다 비다>가 걸려 있었다. 14년이나 전의 일인데도, 자질구레한 것들만 또렷이 기억난다.

당장은 할 일이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근처의 가게에서 코라콜라(물론 병이다. 병을 상상해 주기 바란다)와 비스킷을 사가지고 와서 딱딱한 매트리스 위에서 뒹굴며 존 업다이크의 소설을 계속 읽었다.

조금씩 해가 기울어 방안이 어두워 졌기 때문에 나는 형광등을 켰다. 형광등 중 하나는 타각 타각 하는 소리를 냈다.

8시 30분에 업다이크를 다 읽었을 때, 코카콜라 병 밑바닥에는 5센티미터 가량 담배꽁초가 쌓여 있었다. 나는 책을 베갯머리에 내려 놓고 한 시간 씩이나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 거대한 도시에 이불도 없고 면도기도 없고 전화를 걸 만한 상대도 없고 외출할 만한 곳도 없이 혼자서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만일 책을 읽는 데 가장 적합한 장소는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1968년 4월의 그 휑뎅그렁 한 방의 딱딱한 매트리스 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한 줄 한 줄이 마음에 차분히 스며드는 곳-그 곳이 곧 나에게 있어서는 ‘서재’다. 임즈의 라운지 체어나, 모빌리아의 라이트나, AR의 스피커에서 조용히 흘러 나오는 텔레만(역주:독일의 작곡가)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다. 존 업다이크를 읽기위해서는 존 업다이크를 일기 위한, 치버를 읽기 위해서는 치버를 읽기 위한 최고의 장소가 반드시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하버드로 출발하기 이틀 전에, 그녀의 처녀성을 빼앗았다. 그녀는 울었다. 그도 왠지 기운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자기가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자신도 안정을 잃었던 것이다. 오슨은 제정신이었다. 제정신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일정한 한도 내의 일이라면, 기꺼이 배우겠다고 생각했다. 하버드 대학은 이러한 청년을 수천 명씩 가공 처리하여, 눈에 보이는 손상은 거의 입히지 않고 세상으로 다시 내보내고 있다.

 

-존 업다이크, ,같은 방의 그리스도교 신자들, 뮤직스쿨

우리는 신나게 즐길 수 있다

 

1964년의 선더버드 아가씨는 대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도서관에 간다고 아버지한테 말하고

차를 빌려 타고 그대로 안녕

그녀는 그럴 생각으로

햅버거 가게 앞을 마구 달린다

라디오의 볼륨을 올리고

전속력으로 질주

마음껏 즐긴다

아버지한테 선더버드(역주:미국의 승용차 종)를 압수당할 때까지는

 

이것은 비치보이스의 1964년도 히트송, <펀 펀 펀>의 기사다. 나는 비치보이스의 수많은 히트송 가운데서도 이 곡을 제일 좋아한다. 리듬도 멜로디도 듣고 있으면 행복해지고, 또 가사가 기가 막히게 좋다. 가사를 듣고 있기만 해도 눈앞에 그 모습이 떠오른다. 1964년형 빨간색 유선형의 선더버드에 탄 포니테일(역주:뒤로 땋아 늘어뜨린 머리형)의 아가씨. 도서관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아버지의 차를 빌려 가지고, 득의 만면해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러 나간다. 여자 아이들은 모두 망연히 그녀를 바라본다. 남자아이들은 바로 차에 올라타고 카 체이스(역주:자동차끼리의 추격전)를 시작한다. 하지만 모두들 선더버드를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아버지에게 들켜서 차를 압수당한다. 그래서 그녀는 크게 낙담한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쪽이 행복하다. 그러니까,

 

이제 즐거움은 끝났다고

너는 생각하고 있지만

나와 함께 가자

선더버드가 없어도

우리는 틀림없이 신나게 즐길 수 있을 테니까

 

라는 것이다. 1964년의 선더버드 아가씨는 지금은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섰을 것이다. 그녀는 대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제인 폰다가 경영하는 워크아웃 헬스 센터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E T>에 나오는 것 같은 신흥 주택지에 살면서 베리 매닐로우의 노래라도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이따금 그녀와 그 빨간색 선더버드를 생각한다.

 

 

꿈처럼 몸에 익숙한 만년필

-꿈처럼 몸에 익숙한 만년필이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걸로 꿈같은 문장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만년필 가게는 대로에서 두 골목쯤 떨어진 옛날의 상점가 한가운데쯤 있었다. 가게의 넓이는 유리문 두 개 정도로, 간판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문패 옆에 ‘만년필 가게’라고 조그맣게 씌어져 있을 뿐이었다. 형편없이 엉성하게 만든 유리문은 열리고 나서 제대로 닫히기까지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은 변변치 못한 것이었다.

물론 소개장이 없으면 안 된다. 시간도 걸리고 돈도 많이 든다. 하지만 말이야, 꿈처럼 마음에 쏙 드는 만년필을 만들어 주거든, 하고 친구는 말했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찾아 왔다.

주인은 예순 살쯤 되어 보였는데, 숲 속에 사는 거대한 새 같은 풍모였다.

“손을 내놓아 보게”하고 그 새가 말했다.

그는 나의 손가락 하나하나의 길이와 굵기를 재고, 피부의 기름기를 확인하고, 바늘 끝으로 손톱이 딱딱함 정도를 조사했다. 그러고 나서 내 손에 남아 있는 여러 가지 상처 자국을 노트에 메모했다. 그렇게 살펴보면, 손에는 갖가지 상처 자국이 나있는 법이고.

“옷을 벗게나”하고 그는 간략하게 말했다.

나는 무엇 때문인지 잘 알지도 못한 채 셔츠를 벗었다. 바지를 벗으려고 하니까, 주인이 황급히 제지하며 위만 벗으면 된다고 했다. 그는 나의 등 쪽으로 돌아가 등골 위에서부터 차례로 손가락으로 눌러 내려갔다.

“인간은 말일세, 등골 하나하나로 사물을 생각하고 글자를 쓰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의 등골에 맞춰 만년필을 만든다네”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의 나이를 묻고, 생일을 묻고, 월 수입을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만년필로 도대체 무엇을 쓸 생각이냐고 물었다.

3개월 후, 만년필은 완성되었다. 꿈처럼 몸이 익숙한 만년필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것으로 꿈같은 문장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꿈처럼 몸에 익숙한 문장을 파는 가게에서 바지를 벗어 보았자 내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스파게티 공장의 비밀

-스파게티 공장이라는 말에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더운물의 온도를 조절하거나, 소금을 뿌리거나, 타이머를 세트 하는 정도의 의미다

그들은 나의 서재를 스파게티 공장이라고 부른다. ‘그들’이란 양 사나이와 쌍둥이 아가씨를 말한다. 스파게티 공장이라는 말에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더운물의 온도를 조절하거나, 소금을 뿌리거나, 타이머를 세트 하는 정도의 의미다.

내가 원고를 쓰고 있으면, 양 사나이가 귀를 펄럭펄럭 거리면서 찾아 온다.

“저어, 나는 아무래도 그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걸.”

“그래?”하고 나는 말한다.

“왠지 모르게 건방지고, 공감이 안 가.”

“그래”하고 나는 말한다. 나도 상당히 고생하고 쓴 것이다.

“소금이 조금 많이 들어갔어요”하고 쌍둥이 아가씨 중 208쪽이 말한다.

“다시 만들어요”하고 209쪽이 말한다.

“나도 도와 줄게”하고 양 사나이가 말한다.

아니, 괜찮다. 양 사나이가 도와 주면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너느 맥주를 좀 가져다 줘”하고 나는 208에게 말한다.

그리고 209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연필을 세 자루 깎도록 하고.”

209가 과일 칼로 연필을 싹싹 깎는 동안에 나는 맥주를 마신다. 양 사나이는 말린 잠두콩을 씹고 있다.

뾰족한 연필이 세 자루 준비된 뒤에, 나는 딱 하고 손뼉을 쳐서 그들 세 명을 모두 서재에서 쫓아낸다. 일을 해야지, 일을.

내가 원고를 쓰고 있는 동안 그들은 뜰에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 이런 노래다.

 

우리의 고향은 아르덴테(역주:잘 삶아진 스파게티 국수)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고

그 이름도 듀럼 세몰리나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 밀

봄 햇살이 그들 위로 쏟아지고 있다. 뭐라고 할까, 참으로 멋진 풍경이다.

마이 네임 이스 아처

 

-내가 난생처음 사들인 영어의 페이퍼백 가운데 한 권이 로스 맥도널드의 마이 네임 이스 아처 라고 하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로스 맥도널드가 죽었다.

로스 맥도널드가 죽어 버림으로써 하나의 흐름이 끝났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지면서 죽어 간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 하나의 훈장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만년의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은 일본에서는 그다지 높이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지중해의 사나이로 가장 크게 인정을 받았지만, 그 이후의 몇 권인가에 대해서는 “이런, 모두가 비슷비슷하잖아”하는 의견이 분분했다. 배경은 언제나 끈끈하고 화려함이 없으며, 대개는 오디프스 콤플렉스와 관계가 있는 이야기로, 류 아처 탐정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영감 스러워지고 화려한 액션도 없고 유머의 질도 챈들러 같은 사람에 비해서 빈약한 느낌이 든다. 그런 이유로 독자들은 로스 맥도널드 보다 좀 더 젊고 싱싱한 네오 하드보일드 쪽으로 눈을 돌렸다.그리고 레이몬드 챈들러라고 하는 선배 작가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로스 맥도널드의 류 아처 시리즈는 전부 다 좋아한다. 로스 맥도널스 소설의 아름다운 점은 그 부끄러움을 타는 듯한 수줍음과 진지함 속에 있다. 물론 결점도 그 속에있다. 화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통틀어서 나는 로스 맥도널드읫설을 좋아한다.

내가 난생 처음 사들인 영어의 페이퍼백 가운데 한 권이 로스 맥도널드의 마이 네임 이스 아처 하고 하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 내 나이 열일곱 쯤으로, 그 무렵에는 호레이스 실버의 레코드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호레이스 실버의 레코드를 들으며, 열심히 마이 네임 이스 아처를 읽었다.

잭 스마이트가 감독한 불후의 명작, <움직이는 표적>이 공개된 것도 이 무렵으로, 나는 이 영화를 당시 세 번인가 네 번 보았다. 영화 속에는 폴 뉴먼이 류 아처 역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선 류 하퍼라는 이름을 썼다. 왜 아처가 아니고 하퍼인간 하면, <허슬러> <해드>에서 이름을 날린 폴 뉴먼이 이왕이면 ‘H’ 시리즈로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워너 브라더스 영화의 제목은 <하퍼>가 되었다. 엉터리라면 엉터리 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은 그렇다 치고, 이 무렵 폴 뉴먼은 정말로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

이 <움직이는 표적>의 원작도 초기의 로스 맥도널드의 특징이 느껴지는 훌륭한 작품이지만, 나는 중기의 줄무늬의 경구차라든가, 칼튼 사건 같은 것을 더 좋아한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 보아도, 인간이 살아 가는 데서 빚어지는 안쓰러움을 억제된 필치로 잘 그려 낸 걸 엿볼 수 있다. 등장 인물은 모두 검은 모자를 쓴 것 같은 느낌이고, 각자가 불행으로의 길을 계속 걷고 있다. 아무도 행복하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걸어가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고스 맥도널드는 계속 외쳐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들 캘리포니아에는 사계적의 변화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부주의한 인간만이 그 변화를 깨닫지 못할 뿐이다”라고 어떤 소설 속에서 그는 쓰고 있다.

나는 로스 맥도널드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다.

 

쌍둥이 마을의 쌍둥이 페스티벌

-쌍둥이 아가씨와 데이트를 해보고 싶은 게 나의 오랫동안의 꿈이었다. 양 옆에 똑같은 얼굴을 한 아가씨가 한 사람씩 있으면, 여러 가지 일이 엄청나게 편해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을까?

나는 옛날부터 쌍둥이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한 번이라고 좋으니까, 쌍둥이 아가씨와 데이트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 나의 오랫동안의 꿈이었다. 양 옆에 똑같은 얼굴을 한 아가씨가 한 사람씩 있으면, 여러 가지 일이 엄청나게 편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지 않을까?

미국의 클리브랜드 시의 교외에 쌍둥이 마을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기초는 1812년 모제스 윌콕스와 아론 윌콕스 형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마을의 역사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엄청나게 똑같은 쌍둥이였는데, 자식을 낳고 줄곧 같은 곳에 살았으며, 죽을 때도 같은 병에 걸려 몇 시간 차이로 죽었다고 한다.

그 두 사람을 기념하여 마을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쌍둥이 마을에서는 매년 쌍둥이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금년에도 스물여섯 개 주에서 수백 명의 쌍둥이가 이 마을로 모여들었다. 페스티벌의 정식 목적은 “쌍둥이들끼리 만남으로써 쌍둥이에게만 있는 특유한 문제나 감정을 서로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모여서 떠들어대며 게임 같은 것을 즐긴다. 탤런트 콘테스트 등도 열리는데, 그 대부분이 듀엣 코러스 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까지도 없다.

이 페스티벌에는 수많은 ‘더블스’도 참가한다. ‘더블스’라고 하는 것은 쌍둥이와 쌍둥이가 결혼한 쌍을 말한다. 그리고 ‘더블스’가 되길 원하는 쌍둥이들도 찾아온다. 그러니까 쌍둥이가 쌍둥이를 헌팅 하는 셈인데, 이것은 꽤나 재미있을 것 같다.

“넌 저쪽을 맡아라. 나는 이쪽을 맡을 테니까”하는 식으로 미리 의논을 하고 나서 “헤이, 걸스!”하고 말을 걸겠지만, 누가 어느 쪽을 맡을 지는 도대체가 어떤 근거하에서 정하는 것일까? 나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를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이야 말로 명실상부한 더블 데이트라는 느낌이 든다.

페스티벌이 열린 지난 이틀 동안 조그만 쌍둥이 마을은 무자 그대로 쌍둥이로 가득 찼었다. 그런 연유로 페스티벌에 끼여 들게 된 ‘비쌍둥이’는 자신이 쌍둥이가 아닌 것에 대해서 굉장히 혼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 같아. “정말이지 나의 반쪽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다”고 하는 것이 그들 ‘비쌍둥이’의 감상이다.

며칠 전에 신문을 읽다 보니 다케노코족(역주:괴상한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소년 소녀)에게서 돈을 뜯어내던 쌍둥이 폭력배에 관한 기사가 눈에 띄었는데, 쌍둥이 폭력배라니 어째 으스스할 것 같다.

 

마이 스니커 스토리

-나는 스니커를 대단히 좋아한다. 1년 중 350일은 스니커를 신고 생활하고 있다. 스니커를 신고 거리를 걷다 보면 나이를 먹는 것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스니커’라는 명칭은 정확하지 않다. 스니커(SNEAKER)는 ‘비열한 사람’을 말한다. 사실은 스니커즈(SNEAKERS)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괜찮다.

스니크(SNEAK)는 ‘살금살금 걷는다’는 뜻이다. 분명 스니커를 신으면 살금살금 걸을 수가 있다. 틀림없이 처음으로 스니커를 발명한 사람은 친구나 가족에게 수없이 싫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뭐, 뭐야, 자넨가? 뒤에서 살금살금 걸어오니까 깜짝 놀랐잖아”라든지, “당신, 앞으로 그 새 신발 좀 신고 다니지 마세요. 깜짝 놀라서 접시를 세 개나 깨 먹었다구요”라고 말이다.

하지만, 스니커를 발명한 이는 여간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러 가지고 장난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광경을 상상해 보면 상당히 재미있다.

자세히 조사해 보니까, 스니커는 1872년 에 보스턴에 사는 제임스 P.브래들리라고 하는 마구상 주인에 의해서 발명되었다고 한다. 브래들리 씨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는 것 같다. 부인이 접시를 깨뜨리거나 친구에게 핀잔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도 없다. 에디슨이나 라이트 형제에 대한 전기는 상세하게 남아 있는데, 스니커를 발명한 사람이 이렇게 낮게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브래들리 씨는 상당히 특이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처음에 고무 말발굽을 발명해서 시 당국에 13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고무 말발굽을 붙인 말이 살금살금 거리를 지나가다가, 앞서나는 노 부인의 목덕미를 낼름 핥았기 때문이다. 노부인은 졸도하고, 브래들리 씨는 경찰에 연행되어 가서 벌금형을 받고, 고무 말발굽은 폐기되었다.

그러나 브래들리 씨는 단념하지 않고 고무 말발굽의 연구를 계속 했고, 그것은 드디어 실험적으로 인디언 토벌군에게 채용되게 되었다. 1868년의 일이다. 소리를 내지 않고 기병대가 인디언의 배후로 잠입해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 성과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보스턴의 노 부인과 수족(역주: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한 종족)의 전사는 역시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그리고 1872년에 브래들리 씨는 “말발굽에 고무 밑창을 댓 수 있다면, 인가의 신발 밑바닥에 고무를 갖다 대도 괜찮지 않겠는가?”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오카모토 다로적 전환을 이룩했다. 그리고 거기에 ‘브래들리 식 고무 밑창 신발’이 탄생한 것이다.

‘브래들리 식 고무 밑창 신발’은 어느 사이엔가 스니커즈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악의에 찬 이름이 붙여진 것을 보면, 보수적이고 온건한 보스턴의 시민들은 브래들리 씨와 그 발명품에 대해서 상당히 짜증스러워 했던 모양이다.그런데 세월은 흘러 1982년이 되었다.

나는 스니커를 대단히 좋아한다. 1년 중 350일은 스니커를 신고 생활하고 있다. 덱 슈즈(역주:배의 갑판 위에서 신는 신발), 로컷, 바스켓볼 모델이나 빨간색, 파란색, 흰색 스니커나, 콤파스, 케즈 등 여러 가지 스니커를 가지고 있다. 스니커를 신고 거리를 걷다 보면, 나이를 먹는 것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스니커를 발명했을까 하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를 생각한 끝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거짓말을 생각해 냈다. 전부 거짓말이다. 정말 미안하다.

 

거울 속의 저녁놀

-우리는 걸어 온 길을 묵묵히 되돌아갔다. 바다와 같은 양치 식물의 잎이 밤바람에 흔들려서  내음이 하얀 달빛 속에 떠돌았다. 시냇물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어지고,밤에 우는 새가 금속을 서로 비벼대는 것 같은 소리로 울어댔다

우리는(우리라는 것은 물론 나와 개를 말한다) 아이들이 잠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오두막을 나섰다. 내가 베갯머리에 앉아서 1963년도 판 조선 연감을 소리 내어 일고 있는 사이에(오두막 안에는 책이 그것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총 배수량 23,652톤, 전체 높이 37.63미터”하는 식의 문장을 읽어 주면, 코끼리의 무리라도 잠들어 버릴 것이다.

“저어, 주인님, 산책이라도 나가요. 오늘 밤은 달이 너무 아름답네요.”하고 개가 말했다.

“좋고말고”하고 나는 말했다.

이렇게 나는 말을 할 줄 아는 개와 살고 있다. 물론 말을 할 줄 아는 개는 참으로 드물다. 나는 말을 할 줄 아는 개와 함께 살기 전에는 아내와 함께 살았다.

작년 봄에 시내의 광장에서 바자회가 열렸는데, 그 곳에서 나는 아내와 말을 할 줄 아는 개를 교환했던 것이다. 나하고 거래 상대하고 어느 쪽이 더 득을 보았는지,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아내를 사랑했지만, 말을 할 줄 아는 개는 다른 무엇보다도 신기한 존재기 때문이다.

나와 개는 강을 따라 완만한 언덕을 올라가서, 그대로 숲 속으로 들어갔다. 때는 7월이어서, 매미나 개구리의 울음 소리가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무의 작은 가지에서 흘러 떨어지는 달빛이 오솔길에 얼룩진 무늬를 그려 내고 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주인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하고 개가 물었다.

“지난 일들이란다. 젊었을 때의 일들 말야”하고 나는 대답했다.

“잊어버리세요. 지난 일 같은 거 생각해 보았자 비참해질 뿐이에요. 나는 아무래도 잘 모르겠어요. 비참한 인간들이 더욱 비참해지려고 한다니까요. 아시겠어요?”하고 시원한 목소리로 개가 말했다.

“이제 그만 됐어”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고는 잠자코 걸음을 계속 옮겼다. 개는 길러 주는 주인을 향해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개를 너무 버릇없이 키운 것 같다. 이대로 간다면 내년 봄의 바자회에서는 또 다른 어떤 것과 교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내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하프를 연주할 수 있는 영양 정도는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는 그러한 나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럴 생각으로 말한 것은 아니에요. 당신은 굉장히 좋은 분이세요”하고 개가 변명을 했다.

“조금 더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로 하자. 밤의 숲 속은 무서우니까 말이야”

하고 개가 변명을 했다.

“분명히 그래요. 밤의 숲 속은 무서워요. 밤의 숲 속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거든요. 가령 거울 속의 저녁놀이라든가”하고 개는 말하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울 속의 저녁놀이라니?”하고 나는 놀라서 그렇게 되물었다.

“그런 게 있다고요. 옛날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인데요. 엄마 개가 강아지들을 겁줄 때 자주 쓰곤 하지요.”

“흐음”하고 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어때요? 여기서 잠시 쉬어 가지 않을래요?”

“좋고말고.”

나는 나무 뿌리에 걸 터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거울 속의 저녁놀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들려주지 않겠니?”

“내년 봄의 바자회에 나를 들고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그렇게 하지요. 나도 이 나이에 또다시 서커스 같은 데 나가기는 싫으니까요.”

“약속할게”하고 나는 말했다.

개는 고개를 끄덕이고, 앞발에 달라붙은 진흙을 나무 줄기에 비벼 떨어뜨리고 나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근처의 개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예요. 이 넓은 숲 속 어딘가에 수정으로 만들어진 조그맣고 둥근 연못이 있어요. 그 표면은 마치 거울처럼 매끈매끈했죠. 그리고 그 곳에는 언제나 저녁놀이 비쳤어요. 아침이든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저녁놀이 비쳤던 거예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글쎄요. 수정이라는 것은 틀림없이 기묘한 시간의 호흡법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오묘한 깊은 바닷속 물고기처럼요”하고 말하는 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하단 말이지?”

“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어진대요. 아무튼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저녁놀이니까요. 그리고 그 곳에 들어가 버린 사람들은 그 저녁놀의 세계 속에서 방황을 계속하고 있대요.”

“별로 나쁠 것도 없잖아.”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러나 실제로 해보면, 대개의 일은 생각처럼 즐거운 게 아니에요. 특히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경우에는 말이죠”하고 개는 말하고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난 저녁놀을 좋아하거든.”

“나도 저녁놀을 좋아해요.”

나는 한참 동안 잠자코 담배만 피웠다.

“그런데. 너는 실제로 그 거울 속의 저녁놀이라는 걸 본 적 있니?”

“아뇨”하고 말하고 개는 고개를 흔들었다.

“본 적 없어요. 부모님 한테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에요, 부모님은 또 그들의 부모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구요.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고요.”

“그것을 본 개도 없는 거야?”

“그것을 본 개는 모두 그 저녁놀 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다고요.”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드는구나.”

“사람들도 개들도 생각하는 건 거의 똑같다고요. 자아, 이제 그만 돌아가요.”하고 개는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을 묵묵히 되돌아갔다. 바다와 같은 양치식물의 이이 밤바람에 흔들려서 꽃 내음이 하얀 달빛 속에 떠돌았다. 시냇물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가는 멀어지고, 밤에 우는 새가 금속을 서로 비벼대는 것 같은 소리로 울어댔다.

“피곤하게요?”하고 개가 물었다.

“아니, 천만에. 굉장히 기분이 좋아”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하고 개가 말했다.

“그런데, 조금 전의 이야기는 전부 거짓말이지?”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러지 마세요. 무엇 때문에 내가?”

“괜찮으니까, 사실대로 털어놓아 보라고”하고 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알아차렸군요, 역시.”

“당연하지.”

개는 계면쩍은 듯이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였죠?”

“글쎄다”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잊으면 안 돼요. 봄의 바자회 건 말이에요. 주인님이 확실히 약속했으니까요.”

“알았어.”

“서커스에만은 나가고 싶지 않다고요”하고 개는 말했다.

우리는 그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두막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어쨌든 지독하게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제6장 작지만 확고한 행복을 나는 원한다

랑게르한스섬의 오후

여기서는 한잔 마시면서 쓴 글이 많다고 한다.

오랫동안 콤비를 이루었던 화가의 그림을 곁들여 매월 잡지에 연재했던 꽤나 멋도 부였던 글들의 향연!

 

8월의 크리스마스

-내가 여름에 뿌려 둔 씨앗이 훌륭히 성장해서, 슬슬 거리에는 크리스마스가 찾아오려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집의 레코드 선반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패티 페이지와 체트애트킨즈가 출연할 차례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행위 그 자체는 그다지 곤란한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하기가 곤란한 종류의 일이 이 세상에는 몇 가지 존재한다. 가령 한여름에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를 사들이는 것도 그런 일 중 하나다.

레코드를 한 장 사는 것은 그다지 중대한 결심을 필요로 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그 레코드가 크리스마스 캐럴이고, 계절이 8월이라는 것만으로, 내 마음은 언제나 ‘망설임의 바다(그것이 달 표면에 있으면 좋겠는데)’의 깊고 어두운 해저를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금년 크리스마스에 나는 정말로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가 듣고 싶어질까? 그리고 크리스마스 같은 것이 그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8월의 한가운데에서 크리스마스와 크리스마스의 주변적 사물에 대하여 가치 판단을 강요당하는 것은 나름대로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수의 진귀한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를 사지 못하고 놓쳤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오래된 크리스마스 레코드도 남에게 빼앗겼고, 케니 바렐의 것도 사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한여름에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아주 의귀한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와 만나는 괴로운 처지에 놓이곤 한다. 그리고 언제나 12월이 되어서야, ‘그때 사두었으면 좋았을걸’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금년 겨울에 한해서는 나는 절대로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난 6월에 ‘금년 여름에야말로 바겐 세일일 때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를 듬뿍 사모아야지’하고 결심했고, 그것을 대담하게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것도 실로 8월의 호놀룰루에서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를 열 장이나 산 것이다. 어떤 가게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여름에 뿌려 둔 씨앗이 훌륭히 성장해서, 슬슬 거리에는 크리스마스가 찾아오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집의 레코드 선반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패티 페이지와 체트 애트킨즈가 출연할 차례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셰이빙 크림병을 들고 거리를 누빌 때

-나는 외국에 나가면 반드시 셰이빙 크림을 산다. 그리고 그것을 호텔의 세면대 선반에 면도칼이나 칫솔 등과 나란히 놓는다. 그러면 ‘아아 외국에 왔구나’하는 실감이 비로소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막상 요금을 내려고 하면 지갑 속에는 1만엔짜리 지폐밖에 없고, 마침 운전사도 거스름 돈이 없는 경우가 가끔 있다. 옛날에는 이런 때 “담배 가게 앞에서 세워 주세요”하고, 담배를 사서 큰 돈을 바꾸곤 했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담배를 끊고 나서 부터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러한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는 대개 화장품 가게 앞에 차를 세어 달라고 한 뒤에 병에 든 셰이빙 크림을 사고 거스름 돈을 받는다. 왜 하필 셰이빙 크림이냐고, 왜 같은 화장품이라도 샴푸나 탤컴 파우더나 애프너 셰이빙 로션이나 오데코롱이면 안 되느냐고 물어도, 확실히 대합할 수는 없다.

나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셰이빙 크림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게 때문에 반사적으로 셰이빙 크림을 사버리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택시 요금을 지불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지만, 그 위 하루 온종일 셰이빙 크림병을 안고 거리를 우왕좌왕하는 곤경에 빠지게 되고 만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한 개의 셰이빙 크림병을 손에 들고 거리를 걷고 있으면, 거리가 여느 때하고는 약간 다르게 보인다. 권총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거리를 걷고 있으면 거리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읽은 적이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셰이빙 크림병 역시 조금은 다르다. 술집에 들어가 스탠드 위에 셰이빙 크림병을 올려 놓고 위스키를 마시거나 해도 꽤 기분이 괜찮다. 특별히 그것이 무엇인가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외국에 나가면 반드시 그 곳의 슈퍼마켓에 뛰어들어가 셰이빙 크림을 산다. 그리고 그것을 호텔의 세면대 선반에 면도칼이나 칫솔 같은 것과 나란히 놓는다. 그러면 ‘아아, 외국에 왔구나’하는 실감이 비로소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질레트의 ‘트로피컬 코코넛’이라는 셰이빙 크림인데, 이것을 쓰고 있으면 한 걸음 밖은 와이키키 해변인 듯한 느낌이 든다.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새로 사귄 애인 사진

-나처럼 회사에 다니지도 않고 자식도 없는 사람은 자기 나이에 대한 정상적인 감각을 점점 상실하게 된다. 어떤 부분에서는 형편없이 어린애 같아지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묘하게 노인처럼 되거나 한다

얼마 전에 오래간만에 옛 친구와 만나서 잡담을 하며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지갑에서 젊은 여자 사진을 꺼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사진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새로 사귄 애인 사진이라고 했다. 꽤 귀여운 얼굴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그는 나와 나이가 같지만 독신이다.

“어때, 어리지?”하고 그가 말했다.

“그래, 어리군”하고 내가 대답했다.

“후후후, 열여덟 살이란 말이야, 열여덟”하고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강조했다.

상당히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기뻤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갑 속에 자기 나이의 절반쯤 되는 어린 애인 사진을 넣어 가지고 다닌다니 정말로 대단하다. 어쨌든 꽤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이런 친구는 정말로 특수한 예고-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이쪽 머리까지 이상해질 것 같다-나만한 연배가 되면 대개의 사람들은 지갑 속에 어린아이의 사진을 넣어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만나면 나에게 보여 준다. 벌써 큰아이는 초등 학교 3학년이거나 한다.

“이 녀석이 벌써 아홉 살이라니까”하고 말하는 그도 즐거워 보인다.

상당히 타입이 다른 이 두 가지 예를 함께 종합해 보면, 나도 이제 꽤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실감을 문득 하게 된다. 독신자는 독신자 나름대로, 가정을 꾸린 사람은 가정을 꾸린 사람 나름대로 나이를 먹고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것이다.

나처럼 회사에 다니지도 않고 자식도 없는 사람은 자신의 나이에 대한 정상적인 감각을 점점 상실하게 된다. 어떤 부분에서는 형편없이 어린애 같아지고,또 어떤 부분에서는 묘하게 노인처럼 되거나 한다. 그래서 이따금 옛날 친구들과 만나거나 하면, 여러 가지 감정이 새삼스럽게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 지갑 속에는 어느 누구의 사진도 들어있지 않다. 자식은 없고, 젊은 여자의 사진을 넣어두거나 하면 여러 가지고 골치 아픈 문제로 발전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의 사진을 넣고 다니는 것도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이 내 아내인데, 서른 몇 살이야”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하긴 그렇게 난처한 일이라고 할 정도도 아니지만.

 

낡은 혼의 흔들림 같은 여름의 어둠

-틈만 있으면 슬리핑 백을 둘러메고 혼자 여행을 하며 돌아다니던 무렵, 여행지에서 그 고장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오랜 옛날에 내가 아직 학생이고, 틈만 있으면 슬리핑 백을 둘러메고 혼자 여행을 하며 돌아다니던 무렵, 여행지에서 그 고장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즐거운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기묘한 이야기를 말이다.

어느 것이나 다 그 고장의 역사와 지형이나 기후와 밀접하게 결부된 이야기였다. 자신의 다리로 마을이나 부락을 일일이 돌아다니다 보면, 하나하나의 장소에 사람들의 추억이 미세한 비늘처럼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다. 이러한 것은 비행기나 신칸센이나 자동차를 이용하는 바쁜 여행자의 눈에는 거의 띄지 않는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에 흠뻑 젖어서 바보처럼 며칠씩이고 뚜벅 뚜벅 걷고 있노라면 조금씩 보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산속에서 한 노인이 ‘죽은 이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죽은 이의 길’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혼이 명도9역주:불교에서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영혼이 세계)로 향하는 길을 말하는데, 그것은 모든 물이 강 줄기를 따라서 바다로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성한 길이어서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그 길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죽은 이의 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까?”하고 나는 노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칫 잘못해서 그런 곳에서 노숙이라고 하게 되면 큰일이 날 테니까 말이다.

“추우니까 금세 알 수가 있지. 한여름이라도 등줄기가 얼어붙을 것처럼 춥거든. 혼이 길을 걷고 있을 때는 말이야”하고 노인은 말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여름 밤은 무더운 것이 좋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름은 무더운 것이 당연하며, 그것이 가장 평화로운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데, 도시 한가운데서 숨을 거둔 사람들은 어떠한 코스를 더듬어서 죽은 이의 나라로 향하는 것일까? 그들은 빌딩 그늘을 살며시 더듬어서 지하철 궤도의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가거나, 혹은 빗물과 함께 하수도로 기어들어가서 소리도 없이 도시를 가로질러 가는 것일까?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요즘도 그 노인의 말을 떠올리면서, 지하철 차량의 맨 앞에 서서 뒤로 밀려가고 있는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볼 때가 있다.

 

낡은 혼이

흔들리는 것 같은

여름의 어둠

 

 

지각한 여고생이 담 넘어가는 광경 보면 하루 종일 즐겁다

-나는 호텔의 4층 창문에서 지각한 여고생이 담 넘어가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박수를 보내고는, 하루 종일 즐거운 기분으로 보낸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시간에는 철두철미한 편이어서,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약속 시간에 늦지를 않는다. 그러나 아주 오래 저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학생 때는 상습적으로 지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밥 먹듯이 사람을 기다리게 했다. 학교를 나와 직접 장사를 시작하고, 타인을 향해서 절대로 지각하지 말라고 말하는 입장이 되고 나서부터 나 자신의 지각하는 버릇도 완전히 고쳐진 것이다. 지각하지 말라고 주의를 조는 당사자가 지각을 하면, 아무도 그 사람의 말은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학생 때는 아무런 지각을 해도 별로 상관이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학교에 가는 시간이 다소 늦어졌다고 해서 시시한 수업의 첫 부분을 조금 듣지 못하고 해서 그렇게 손해 볼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필요에 따라서 갖가지 버릇과 습관을 고쳐 나가는 것은 사회에 나오고 나서 해도 충분하다.

내가 이따금 머무는 시내의 호텔 창문에서는 여자 고등학교의 정문이 바로 내려다 보인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샤워를 하고 아침식사를 끝내고 담배를 한 대 피우면, 대개 이 학교의 등교 시간이 된다. 세일러복을 입은 소녀들이 한결같이 검은 가방을 들고 차례차례로 걸어와서 교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바삐 뛰어오는 여학생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고 나서 운명의 벨이 울리고, 정문이 끼익 하고 닫힌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심술 사나워 보이는 선생님이 교문 옆에 서서, 지각한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의를 주면서 이름을 적어 나간다.

그러나 개중에는 반드시 ‘호락호락 지각생 명단에 오를 수야 없지’하는 생각을 하는 짓궂은 여학생이 있다. 그런 학생은 정문 근처에 있는 전신주 뒤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다가, 트레이닝 복을 입은 선생님이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한 순간을 포착하여, 재빨리 길을 가로질러서 옆집 담으로 다가가서 슬슬 그것을 타고 넘어 그대로 학교의 담 안으로 뛰어내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스커트 자락을 툭툭 털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교실로 들어간다. 용기와 판단력과 체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재주다. 나는 호네르이 4층 창문에서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박수를 보내고는, 하루 종일 즐거운 기분으로 보낸다.

그런 일로 인해서, 나는 그 여자 고등학교가 내려다보이는 호텔이 꽤 마음에 든다.

 

내가 좋아하는 지도 그리기

-나는 비교적 편견에 찬 사고방식의 소유자라서, 그다지 일반적인 감각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지도를 잘 그리는 아가씨가 만일 근처에 있다면 나도 모르게 사랑을 해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지도 그리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댁으로 찾아 뵙고 싶은데, 약도 같은 것은 한 장 “하고 말을 하면, 공연히 즐거워져서 쓱쓱 그려 주게 된다.

음, 버스에서 내리면, 거기에 커다란 해바라기가 피어있고요, 그 옆에 이런 모양을 한 문이 달린 집이 있는데, 그 곳을 똑바로 지나쳐서, ‘모리가나 호모 우유’라는 간판을 왼쪽으로 돌아서, 하는 식으로 지나치게 꼼꼼히 그리게 된다. 원고 청탁이라면, “지금은 좀 바빠서 미안합니다”하고 거절할 때라도, 이런 것만은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하니까, 바쁘다는 것도 모두 거짓말이다.

글씨를 잘 쓰고 못 쓰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지도도 역시 잘 그리고 못 그리는 사람이 있다. 제대로 못 그리는 사람이 그리는 지도는 재앙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못 그린 지도의 세 가지 요소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균형이 잡혀 있지 않다. 즉, 도로의 폭이라든가 거리 같은 것의 상대적인 비율이 엉터리다.

(2)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음, 두 번째 오른쪽이었던가, 세 번째였던가 하는 식이다.

(3) 포인트가 결여되어 있다. 가장 눈에 띄기 쉬운 표식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이런 지도를 손에 들고 미지의 고장을 찾아 헤매는 날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 혼자 걷고 있으니까 그나마 괜찮지만, 콜럼버스였다면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거다.

매번 이런 생각이 드는데, 세상에는 펜습자 교실이나 서예 학원 같은 겉들이 넘쳐흐르고 있으니까, 개중에는 지도 그리기 교실 같은 게 하나 정도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러한 곳에서 제대로 지도 그리는 법을 배운 아가씨가 회사에 들어가서 무엇인가 그런 지도를 그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 지도를 그리는 일이라면 총무과의 아무개 씨에게 부탁하면 되네. 그녀는 지도 그리는 것만큼은 굉장히 잘하니까”하는 식으로 칭찬받는 장면을 상상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훈훈해진다. 나는 비교적 편견에 찬 사고방식의 소유자라서, 그다지 일반적인 감각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지도를 잘 그리는 아가씨가 만일 근처에 있다면 나도 모르게 사랑을 해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언젠가 가공의 도시의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소설을 쓴 일이 있는데, 굉장히 즐거웠던 걸로 기억한다.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나

-나는 옛날에, 소설가가 되기 전에 술집 비슷한 것을 경영했었는데, 그때는 단순하게 예전에 기르던 고양이의 이름을 붙였었다

나는 물건에 이름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새로 개점하는 가게라든가, 새로 발간하는 잡지라든가, 그러한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친구들 사이에서, “야, 어때? 괜찮지?” 라든가, “그런 이름을 어떻게 붙이냐? 촌스럽게!”하면서 떠들어대는 게 좋다는 거지, 아주 진지하게 “무라카미 씨, 우리 가게의 이름을 좀 붙여 주십시오”하는 부탁을 받게 된다면, 그건 사양하고 싶다.

나는 옛날에, 소설가가 되기 전에 술집 비슷한 것을 경영했었는데, 그때는 단순하게 예전에 기르던 고양이의 이름을 붙였었다. 이런 것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주위를 빙 둘러보고 난 뒤에 우연히 눈에 띄는 것을 얼른 붙여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 이름을 붙이면, 손님 쪽에서 아무래도 답답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다음에 술집을 차리게 되면 ‘캥거루 구경’이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생각했었으나, 가게를 할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단편집의 제목으로 유용하게 사용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기는 하다. 술집 이름을 책 제목으로 써먹었으니까 말이다.

워싱턴 D.C에 ‘원 스텝 다운’이라는 이름의 재즈 클럽이 있다. 나는 처음 이 가게 이름을 보았을 때부터 이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하고 굉장히 마음에 걸렸었는데, 어느 날 밤, 마크 머피라고 하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공연이 있어서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주인이 있으면 붙잡고 이 가게 이름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이냐고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문자 그래도 가게에 한 발을 들여놓으면 그 유래가 확실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문을 열고 발을 한걸음 내디디면, 그 곳이 한 계단 낮아지는 것이다. 덕택에 나는 보기 좋게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 것은 가게 이름으로 하기 보다는 문에다가 팻말을 붙여서 주의하게 하는 편이 손님들에게는 훨씬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 ‘원 스텝 다움’은 좁고 지저분해도 친근감을 느낄 수 있고, 편안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재즈 클럽이었다. 자못 까다로워 보이는 주인 아저씨가 굉장히 재미없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스탠드 안에서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다. 마크 머피의 파이브 콘서트를 실컷 듣고, 맥주를 두 병 마셨는데도 12달러밖에 안 나온 것도 신바람 나는 일이었다.

 

욕실 속의 악몽

-자주 ‘방심’상태에서 빠져 덤벙대는 내가 소설을 쓰는 건 하나의 구원이다

나는 학생 때 동급생한테서 “너는 언제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나는 교실 안에서 생각에 감긴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니까, 그 무렵부터 나의 ‘방심(방심)’ 상태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아니 전보다 한층 더-나는 자주 ‘방심’ 상태에 빠진다. 타인과 함께 있으면 긴장하고 있으니까 그러한 일이 거의 없지만, 혼자 있게 되면 몇 분 간이가 의식이 전혀 없는 공백 상태에 빠지게 된다. 특히 욕실에서 심한데, 무엇인가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헤어 브러시에 치약을 얹어서 이빨을 닦고 있기가 일쑤고 칫솔에 샴푸를 짜서 묻힌 적도 있다.

세 번에 한 번은 린스로 머리를 감은 뒤에 샴푸를 사용하고, 셰이빙 크림을 얼굴에 칠하기는 했으나 수염을 깎지 않고 말끔히 씻어 낸 뒤에 그대로 외출한 적도 있다. 소변을 보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착각해서 목욕을 할 생각으로 옷을 전부 벗어버린 일도 있다. 그것도 한참 시간이 경과할 때까지,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가 없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뚫어질 듯이 응시하는 일도 있다.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아니, 왜 내가 이런 것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을까?’ 하고 이상스럽게 생각하지만, 보고 있을 ㄸ는 전혀 그런 의식이 없다. 이전에 지하철에서 쉐이프 팬츠 따위의 포스터를 뚫어질 듯이 몇 분씩이나 들여다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로 창피했다.

이런 것은 정말이지 난처한 일이다. “하루키 씨는 덤벙거려서 귀여워요!”하고 젊은 아가씨에게 말을 정도라면 괜찮지만-그런 말을 들은 일은 없다-나이를 먹고서도 이런 짓을 한다면 완전히 치매에 걸린 노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나는 일단 소설을 써서 생계를 꾸려 가고 있으니까, 이러한 일종의 비사회적 행위도 예술 활동의 부산물이라고 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그나마 하나의 구원이다. 노상 전철을 잘 못 타거나, 전철 표와 디스코 테크 우대권을 착각하고 역무원에게 건네주었다가 혼나거나 하는 외과 의사에게, 맹장 수술을 부탁해야겠다고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가진 열여섯 개의 시계

-이따금 기분이 날 때면, 열여섯 개나 되는 시계의 시간을 일일이 맞추며 돌아다닌다. 저쪽으로 가서 바늘을 앞으로 돌리고 이쪽으로 와서 바늘을 뒤로 돌리다 보면, 인생이라는 건 정말 이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란 시계의 증가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성찰은-성찰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지만-특별히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내 인생의 개인적 측면에서 생긴 개인적인 의견이다. 일반적인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쯤 전, 결혼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의 이야기인데, 우리 집에는 시계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물론 가난했던 탓도 있었지만 시계라는 것이 별로 갖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밤이 지나면 고양이가 배가 고파서 문자 그대로 우리를 두들겨 깨웠으며, 잠이 오면 적당히 잠을 잤다.

거리에 나가면 가는 곳마다 전광 시계가 있어 불편할 것이 없었다. 집에는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전화도 없어서, 시간을 확인하려면 500미터쯤 떨어진 담배 가게에 가서 담배를 사고, 간 김에 안방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를 잠깐 들여다보는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시계가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그다지 없었다.

지금은 손목시계니 자명종 시계니 오디오 타이머 같은 것을 합치면 전부 열여섯 개의 시계가 집에 있다. 열여섯 개의 시계가 우리 집 안에서 제각기 시간을 새기고 있는 것이다. 15년 전의 일을 생각하면 정말로 거짓말처럼 믿을 수 없는 생활이다.;

열여섯 개 가운데 절반 가량은 어디선가 선물 받은 것이다. 무슨 상을 받았을 때의 기념품이라든가, 짧은 원고에 대한 사례비 대신이라든가, 개인적인 선물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한 것이 필립 K.디크의 소설에 나오는 어떤 종류의 엔트로피가 증대하는 것처럼, 차례차례 쌓여 버린 것이다. 그 덕택에 온 집안이 시계의 소굴처럼 되고 말았다.

이따금 기분이 날 때면, 그 열여섯 개의 시계의 시간을 일일이 맞추며 돌아다닌다. 저쪽으로 가서 바늘을 앞으로 돌리고 이쪽으로 와서 바늘을 뒤로 돌리다 보면, 인생이라는 건 정말 이상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계 같은 것이 없어도 별로 불편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트레이닝 셔츠에 얽힌 이 생각 저 생각

-나는 와세다 대학 출신이지만, 그렇다고 ‘와세다’라는 로고가 들어간 트레이닝 셔츠를 입느냐 하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1960년대의 미국 영화를 보고 있으면, 컷 오프 트레이닝 셔츠가 자주 나온다.

긴 소매 트레이닝 셔츠를 가위로 싹둑 잘라서 7부 소매 정도로 만든 것이다. ‘거칠다, 입는 옷 같은 것에는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느낌이 잘 드러나 있어서, 나는 비교적 그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웨스트코스트와 같은, 계절에 의한 기온 차가 그다지 심하지 않은 곳에서나 적당한 것이지, 일본에서는 그다지 적합하지가 않다. 여름에 티셔츠 대신으로 입기에는 옷감이 너무 두껍고, 겨울에는 소매가 없어서 너무 춥다. 나는 언젠가 흉내를 내서 트레이닝 셔츠의 소매를 싹둑 잘랐다가 크게 후회한 것이 있다. 일본에서는 컷 오프 트레이닝 셔츠를 입기에 알맞은 기간이 상당히 짧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 원고를 쓰면서 입고 있는 옷은 니혼 대학의 매점에서 구입한 것으로, 가슴에 ‘뷰티풀 캠퍼스 니혼 유니버시티’하고 씌어져 있다. 어째서 니혼 대학의 트레이닝 셔츠를 입고 있느냐 하면, 단지 이전에 니혼 대학 이공학부 근처에 살 때 구내 매점에 가서 자주 쇼핑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와세다 대학 출신이지만, 그렇다고 ‘와세다’라는 로고가 들어간 트레이닝 셔츠를 입느냐 하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자기가 졸업한 대학에는 여러 가지로 애증이 엇갈리게 때문에, 아무래도 너무 자극이 강하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대학의 셔츠를 신경 쓰지 않고 입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이 ‘뷰티풀 캠퍼스’라고 하는 캐치 플레이즈는 조금 잘못된 것이 아닐까? 캠퍼스가 아름다운 니혼 대학이라는 것은 마치 리조트 호텔의 광고 같은 느낌이다. 대학에는 캐치 프레이즈가 필요 없다. 나는 프린스턴과 하버드 대학의 구내 매점에도 가보았지만, 트레이닝 셔츠에는 단지 대학 이름밖에 써 있지 않았다. 그런 것이다. 하긴, 남의 대학 일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밖에도 트레이닝 셔츠에는 여러 가지 영어 문구가 씌어져 있다. 개중에는 상당히 엉망진창인 것이 있어서, 거리에 나가서 바라보고 있으면 굉장히 재미있다. 누가 그런 문구들을 생각해 내는 건지 나는 늘 궁금했다. 언젠가는 ‘나이스 박스 1384’라는 문구가 씌어진 트레이닝 셔츠를 입고 있는 아가씨를 보았는데, 박스라고 하는 것은 사서함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일까? 그러나 나이스 박스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성능이 좋은 여자의 성기를 의미한다. 이런 것은 왠지 좀 서늘하다.

 

남자는 돈을 지불하고 운반만 하는 ‘캐스&캐리’인가

-남자는 쇼핑하는 아내나 애인을 따라다니며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운반하는 일개미 같은 인간이 아니다. 남자도 살아 숨쉬는 인간이다

대다수의 남자들이 아마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애인과 데이트를 하거나, 아내와 거리를 걷거나 하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옷 사는 데 따라가는 일일 것이다. 그것도 한 집이나 두 집이라면 또 모를까, 여섯 집이나 일곱 집씩 따라다닌 끝에, “안 되겠어요. 제일 처음에 갔던 집에 다시 가봐야겠어요”하는 식의 말을 듣게 되면, 온몸에서 힘이 쑥 빠져 버린다. 여자는 남자가 레코드 가게나 장난감 가게 같은 곳에서 열중하고 있을 때 동행해 주었으니까, 하는 생각도 있을 테지만, 그녀들이 옷을 고르는 데 쏟는 집념에는 남자의 온갖 취미의 영역을 하나로 합쳐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의 파워와 위협이 있어서, 그 에너지가 이따금 우리 남자들은 압도라고 놀라게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나는 어제 다이칸야마에서 시부야,아오야마 3번가를 여유해서 하라주쿠까지 쉴 새 없이 따라다녀야만 했다. 나는 미리 신중하게 생각한 뒤 조깅화를 신고 가서 약간 득을 보았지만, 하이힐을 신고 그런 장거리를 걷는 에너지를 집념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항간의 뷰티크라는 곳은 남자에게 있어서 참으로 어색한 장소다. 시간을 보낼 만한 곳이 없고, 어쩐지 모든 것이 거북스럽기만 하다. 손님이 붐빌 때에는 멍청하니 서 있으면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고, 그렇다고 해서 원피스나 핸드백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일이 상품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울 수도 없다. 그것은 정말 난처한 일이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면 이상하게 그런 일이 없고, 아내의 뷰티크 군례에 동행을 해도 그렇게 지루하고 따분했던 기억이 없다. 이것은 상점 쪽이 함께 들어오는 남성에 대해서 그 나름대로 신경을 써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샌프란시스코의 ‘로라 아슐레이’에서는 아내가 옷을 고르고 있는 동안, 그 집의 예쁜 아가씨가 나를 상대해 주면서 “도쿄에서 오셨나요? 좋은 곳인가요? 가보고 싶어요. 저는 뉴올리언스 태생이에요. 뉴올리언스에 가보셨어요?”하고 말을 걸어 주었으며, 호놀룰루의 교외에 있는 뷰티크에서는 소파에 앉게 해주고, 콜라와 프리첼까지 대접해 주었다. 이러한 뷰티크라면 남자 쪽도 다시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도쿄의 뷰티크도 남자의 입장이라는 것을 조금은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남자는 단지 캐시&캐리(역주: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운반하는 인간)가 아닌 것이다. 남자도 살아 숨쉬는 인간이다.

 

UFO를 못 본 하루키는 바보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UFO를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몇 명인가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허어, 그래?” 하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스필버그의 <미지(미지)와의 조우>라는 영화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영화가 잘못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다만 내가 UFO라는 것에 대해서 흥미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서는 비교적 재미있게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흥미가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중국 만두를 싫어하니까, 만일 중국 만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가 있다면 그 작푸멩 대한 점수는 상당히 인색할 것 같다. 제멋대로라고 할 지 모르지만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UFO의 경우는 중국 만두와 달라서 유달리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다만 흥미가 없을 뿐이다. UFO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이 있다고 말하면 ‘있을까?’하고 생각하고, 없다고 하면 ‘없을까?’하고 생각한다. 자연체라고 할까, 아무튼 어느 쪽이라도 좋은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UFO를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몇 명인가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허어, 그래?’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대개의 경우 상대방은 “자네는 믿지 않는군!”하고 화를 낸다. 나는 UFO의 존재를 특별히 믿지 않는 것은 아니고, 다만 흥미 없는 일에 대해서 양자 택일을 강요 당하는 게 싫을 뿐이지만, 그러나 나의 심정을 설명해도 좀처럼 이해를 해주지 않는 일이다. 골치 아픈 일이다.

지난번에는 어떤 아가씨에게, “하루키 씨는 UFO도 보지 못했으니까 틀렸다구요!’라는 의미가 담긴 말을 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 보니까,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소설가로서 일을 해 나가려면, UFO 한 개쯤은 보아 두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UFO나 유령 같은 것을 한 번 보아두면, 예술가로서 관록이 붙을 것 같다. 술집에서 화젯거리로 꺼낼 수 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했었는데, 편의적으로 UFO나 유령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예술가’ 라고 정의하고, 경험이 없는 소설가는 ‘예술 방면 활동가’라고 정의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누군가가 UFO에 대한 화제를 들고 나왔을 때, “아, 나는 소설을 쓰고 있지만 ‘예술가’가 아니고 ‘예술 방면 활동가’니까, UFO 이야기는 못합니다”하고 분명히 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도 ‘그런가. 이 사람은 ‘예술방면 활동가’니까 이런 이야기를 해도 헛일이겠군’ 하고 생각해 줄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어 나는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수수께끼에 휩싸인 고양이

-고양이에게도 고양이 나름대로의 유아 체험이 있고, 청춘기의 뜨거운 상념이 있고, 좌절이 있고, 갈등이 있는 것일까?

인간도 여려 부류가 있겠지만, 고양이의 부류도 참으로 다양하다. 나는 대체로 한가한 생활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들 고양이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데, 아무리 오래 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는 일이 없다. 열 마리의 고양이가 있으면, 거기에는 열 가지 다른 개성이 있고, 열 가지 다른 버릇이 있으며, 열 가지 다른 생활 방식이 있다. 그런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니까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뿐이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여러 갖 불가사의한 일이 많다. 그것 참 이상도 한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하루 해가 저물어 버리곤 한다.

우리 집에는 열한 살 된 암컷 샴과 네 살 먹은 수컷 아비시니언이 있는데, 성격이 복잡한 점에서, 나이를 먹은 샴 쪽이 역시 앞선다. 우선 첫째로, 그 고양이는 밥을 주어도 얼른 입에 대지 않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흥, 밥이구나!’ 하는 표정을 짓고 다른 곳으로 가서, 한참 동안 꼬리를 핥고 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주위가 조용해진 다음에 다가와서, ‘어디 먹어 볼까?’하는 식으로 밥을 먹는다.어째서 그런 짓을 일일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추운 계절에 이불 속으로 들어올 때, 반드시 먼저 세 번 이불 속을 들락날락하는 버릇이 있다. 우선 이불 속으로 들어와 드러누워서 잠깐 동안 생각하고 나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하는 느낌으로 쓰윽 밖으로 빠져 나간다. 이것이 세 차례 계속되고, 네 번째야 겨우 자리를 잡고 깊이 잠이 드는 것이다. 그 의식에 대충 10분에서 15분의 시간이 소요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완전한 시간 낭비다. 고양이 쪽도 번거로울 테고, 나도 간신히 잠이 들려고 하면 고양이가 들락날락 거리니까 상당히 신경이 곤두선다. 세상에는 “삼고(삼고)의 예(역주:중국 촉한의 임금 유비가 제갈 양의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 간청하여 드디어 제갈양을 군사(군사)로 맞아들였다는 고사)”라는 것이 있지만, 고양이가 한밤중에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따금 어째서, 어떤 이유로, 어떠한 경로를 통해 그런 버릇이 고양이의 머리 속에 각인된 것일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있다. 고양이에게도 고양이 나름대로의 유아 체험이 있고, 청춘기의 뜨거운 상념이 있고, 좌절이 있고, 갈등이 있는 걸일까? 그리고 그러한 경로를 거쳐 거기에 한 마리의 고양이로서의 아이텐티티가 생겨나서, 겨울 밤에 정확히 세 차례 이불 속을 들락날락하는 것을까?

고양이는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다.

 

공부를 하기 싫어했던 나는

-나는 고교 시절에 “어느 면도사에게나 철학은 있다”는 서머셋 몸의 글을 읽고 감동했었다. 어른이 되어 술집을 경영하면서도, 어떤 온더록에도 철학은 있다, 하고 생각하면서 8년 간 매일 온더록을 만들었다

나는 학생 때부터 공부를 하기 싫어해서 성적이 그다지 신통치 않았던 편이지만, 그래도 ‘영문 일역’ 참고서를 읽는 것만은 예의적으로 좋아했다.

‘영문 일역’ 참고서의 어던 점이 그렇게 재미있느냐 하면, 거기에는 예문이 잔뜩 실려있기 때문이다. 이 예문을 하나씩 하나씩 읽거나 외우거나 하기만 해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고, 그런 일을 계속하다 보니 어느 틈엔가 극히 자연스럽게 영어 원서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의 영어교육의 문제점이 있다고 트집을 잡는 것은 아니지만, 전치사라든가 동사변화 같은 것을 아무리 정확히 암기한다 해도 원서는 읽을 수가 없다.

나는 그 무렵에 외운 예문을 지금도 몇 가지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서머셋 몸의 ‘어느 면도사에게나 철학은 있다”고 하는 말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 앞 뒤 문장이 상당히 긴데, 그건 잊어버렸다. 요컨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매일 계속하다 보면 , 거기에서 자연히 철학이 생겨난다고 하는 취지의 문장이다. 여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어떤 립스틱에도 철학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고교시절에 서머셋 몸의 이 문장을 읽고, ‘으음, 인생이란 그런 거로구나’하고 상당히 순진하게 감동했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술집을 경영하면서도, ‘어떤 온더록에도 철학은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8년 간 매일 온더록을 만들었다.

그런데 온더록에 정말로 철학이 있느냐 하면, 대답은 틀림없이 ‘있다’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맛있는 온더록과 맛 없는온더록이 있겠지만, 맛있는 쪽의 온더록에는 확실히 철학이 있다. 온더록이란 얼음 위에 위스키를 따르는 것 뿐이잖으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얼음을 쪼개는 방법 하나로도 온더록의 품위와 맛이 확 달라지는 것이다.

얼음도 커다란 얼음과 작은 얼음의 녹는 방식이 다르다. 커다란 어름만 사용하면 투박해서 모양이 보기 싫고, 그렇다고 해서 작은 얼음이 많으면 금세 물이 많아진다. 그래서 크고 작은 얼음을 잘 배합한 뒤에 거기에 위스키를 따라야 한다. 그러면 위스키가 잔 속에서 호박색의 조그만 소용돌이를 그리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런 식으로 몸에 익힌 조그만 철학은 나름대로 나중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백화점의 사계절

-백화점은 미묘한 계절감을 엿볼 수 있는 식물원과 비슷하다

여자들은 대개 백화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나도 백화점을 끔 직이 좋아한다. 그처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는 동물원을 빼놓고는 달리 찾아볼 수 가 없고, 더군다나 입장료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거리에는 놀랍게도 백화점이 다섯 군데나 있다. 물론 교외 도시라서 도심의 백화점처럼 규모가 크거나 물건을 많이 갖추어 좋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10분쯤 걸어간 곳에 백화점이 다섯 군데나 있다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만 있으면(대개 매일 시간이 있지만), 역 앞까지 걸어가 백화점 안을 돌아다닌다.

백화점을 돌아다니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대는 뭐니뭐니해도 평일의 오전 중이다. 붐비지 않고, 공기도 깨끗하고, 모든 것이 손을 대지 않은 느낌으로 빽빽이 늘어서 있다. 개점 직후에 가면 종업원이 비교적 공손히 인사를 하기도 한다. 붐비지 않는 백화점은 왠지 모르게 식물원과 비슷하다. 어슬렁어슬렁 거리면서 물건을 구영하다 보면, ‘아, 이제 슬슬 수국이 꽃봉오리를 맺기 시작했겠구나’라든가, ‘목련꽃도 다 떨어졌겠군’ 하는 것과 같은 미묘한 계절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여름이 가까워 오면 백화점 안의 장식에서도 시원한 느낌을 받게 되고, 여름용 드레스나 수영복이나 서프보드(역주:파도 타기에 쓰이는 널빤지)나 어깨 끈이 없는 브래지어(그런 것을 너무 오래 보면 곤란하지만)가 눈에 띄게 되고, ‘벌써 여름이 왔구나!’ 하고 실감을 하게 된다. 에어컨의 서늘한 바람을 여름 들어 최초로 접하는 곳도 대개는 백화점 안이다. 가을의 낙엽 빛깔로 물든 백화점도 스웨터 냄새가 나서 풍취가 있고, 크리스마스 전의 그 들뜬 분위기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백화점 옥상이라는 데도 상당히 즐거운 곳이다. 맑게 개인 날에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과 함께 핫도그나 오징어 튀김을 먹거나, 제빙스 게임을 하며 놀거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며, 비가 내리는 날에 우산을 쓰고 옥상을 산책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최근에는 그럴 기회가 없어서 그다지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옛날에는 비가 내리면 여자와 둘이서 자주 백화점 옥상에 올라가곤 했었다. 옥외 테이블이나 목마 같은 것이 비에 젖어 있고, 주위의 풍경도 희미하게 흐려져 있었다. 당연한 거지만, 사람들도 거의 없다. 애완 동물 매장의 열대어가 언제나 변함 없이 수족관 안을 헤엄쳐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백화점에는 아직도 발굴해야 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나는 느낀다.

 

회사 사무실이 왜 바쁘게 돌아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사무실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세상은 굉장히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절실히 실감하게 된다. 세상이 우동 가게와 야채 가게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의 인생은 훨씬 단순해질 텐데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회사’라고 이름이 붙은 곳에서 근무한 일이 없다.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회사에 다니는 걸 거부하면서 살아왔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럭저럭 일이 돌아가는 형편상 그렇게 되어 버린 것뿐이다. 나는 이따금 생각하는데, 만일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하나하나를 컬러 마커 같은 것으로 색칠해 나간다고 하면, 내 경우에는 ‘형편상’을 칠하기 위한 색깔의 마커가 상당히 많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제쳐 두고 회사에서 근무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의 인식 영역에는 회사라든가 그것에 부수되는 갖가지 주변적 사물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가령 넥타이를 매고 회사에 간다는 것은 어떠한 일인가? 상사와 부하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정신적 위치관계에 있는가? 오피스 러브란 어떠한 것인가? 창가족(역주:집무에 방해가 되지 않는 창가에 책상이 있는 중간 관리자로, 그들에게는 일다운 일이 주어지지 않는다)은 매일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은 모두 내 상상력의 범위 밖에 있다.

회사가 바쁘다고 하는 것도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우동 집이 바쁘다”라든가, “야채 가게가 바쁘다” 고 말한다면, 나도 체험해 본 바가 있으므로 이해할 수 가 있다. 그러나 “회사가 바쁘다”라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가 없다.

나의 고등 학교 시절의 친구가 광고 대리점 비슷한 것을 경영하고 있어서, 이따금 그 사무실에 들르는데, 보면 스무 명 가량의 사원들이 모두 바쁜 듯이 일을 하고 있다. 전화를 받고 있는 사람도 있고, 표에 무엇인가를 써넣고 있는 사람도 있고, 종이 봉지를 들고 밖으로 달려나가는 사람도 있다. 보고 있노라면 힘이 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떤 식으로 바쁜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동정심이라고 할 정도의 마음은 생기지를 않는다.

사무실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세상은 굉장히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구나,하고 절실히 실감하게 된다. 세상에 우동 가게와 야채 가게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의 인생이 훨씬 더 단순해질 것이 틀림없다.

“아주머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이쪽 분의 토마토를 싸드리고 나서 해드릴게요”라든가, “미안합니다. 지금 가게가 조금 붐벼서요. 배달은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하고 말하면, 그것으로 이야기는 모두 통할 테니까 말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 “꽤 바쁜 것 같구나” 하고 말하면, 그 친구는 “당연하지. 보고 있으면 알 수 있을 거야”하고 대답한다. 하지만, 무엇이 어떤 식으로 바쁜가 하는 것까지 그 친구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런 걸 설명해 줄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쁜 것이다.

 

뉴스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을 때

-특별히 내용 때문에 철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나운서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에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멍하니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다 보면, 이따금 정말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있다. 특별히 내용 때문에 철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나운서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에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속 도로 1호선의 어느 인터체인지 부근 하행 차선에서 트럭의 ‘니쿠즈레(살이 까짐)’가 있어서 3킬로미터나 정체”라는 식으로 말하면, 한 순간 ‘어째서 트럭의 살이 까질까?’하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분명히 이것은 ‘니 구즈레(짐이 무너져 내림)’다. 트럭이 껍질이 까지거나, 오토바이가 무좀에 걸리거나 한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어제 일본과 소련의 ‘지간큐(시간급)’ 협의가 행해져서 “라는 뉴스도 있었다.’어째서 일본과 소련이 시간당 급여에 대해서 협의를 하게 된 것일까?’ 하고 싶이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자세히 설명을 들어 보니까 ‘지칸큐(차관급)’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는 동음 이의어가 많아 잘못 알아듣는 일이 많다.

왠지 우스워서 택시 뒷좌석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었더니, ” 손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보죠?”하고 운전사가 물었다. “네? 아닙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이러한 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우스꽝스러움이라는 것은 사람을 꽤나 즐겁게 만들어 주는 법이다.

상당히 오래 된 일인데, 시보를 두 차례나 잘못한 아나운서가 있었다.

“일곱 시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여덟 시입니다. 아니 실례했습니다. 아홉 시입니다. 아홉 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는 식이어서, 나는 그 방송을 듣고 한참 동안 혼자 큰 소리로 웃은 적이 있다. 그 아나운서는 나중에 틀림없이 상사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다. ‘일곱 시, 여덟 시, 아홉 시의 아무개’라고 별명을 동료들이 붙여 주고, 그로부터 몇 년 동안은 놀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좀 불쌍하다. 불쌍하기는 하지만 우습다. 이른 유의 사건이 하루에 한 번 꼴로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상당히 인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말이다.

 

작지만 확고한 행복

-서랍 속에 반듯하게 개켜진 깨끗한 팬츠가 쌓여 있다는 건 인생에 있어서 ‘작지만 확고한 행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그건 어쩌면 나만의 특수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바지를 미국식으로 ‘팬츠’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이따금 그 안에 받쳐 입는 종래의 팬츠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를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영어라면 ‘언더 팬츠’가 되겠지만, 그러한 명칭이 뚜렷이 정착되어 있지 않은 일본에서는 그 바깥 팬츠와 안 팬츠의 혼란 상황이 혼미의 도(도)를 더욱더 깊게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언더팬츠’ 모으기를 (물론 남성용이지만) 꽤 좋아한다. 때때로 직접 백화점에 가서 , ‘이것으로 할까, 저것으로 할까?’ 하고 망설이면서 대여섯 개를 한꺼번에 사기도 한다. 덕택에 옷장 서랍에는 상당히 많은 팬츠가 쌓여 있다.

서랍 속에 반듯하게 개켜진 깨끗한 팬츠가 쌓여 있다는 건 인생에 있어서 ‘작지만 확고한 행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그건 어쩌면 나 혼자만의 특수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혼자 살고 있는 독신자를 빼놓고는, 자신의 팬츠를 자기 손으로 직접 고르는 남자는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그다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속옷인 러닝 셔츠도 상당히 좋아한다. 산뜻한 면 냄새가 나는 흰 러닝 셔츠를 머리로부터 뒤집어 쓸 때의 그 기분도 역시 ‘작지만 확고한 행복’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은 팬츠의 경우와는 달리 언제나 같은 메이커의 같은 제품을 한꺼번에 사들이기 때문에 골라서 사는 즐거움이 없다.

그러고 보면, 남성의 경우 속옷이라는 장르는 여기서 딱 끝나버린다. 여자의 속옷이 커버하고 있는 광대한 범위와 비교한다면, 마치 집 장사 주택의 앞들처럼 좁고 간결하다. 팬츠와 러닝 셔츠 뿐이니까 말이다.

이따금 속옷에 대한 생각을 하면, 내가 남자로 태어나기를 잘했구나 하고 안도하게 된다. 만일 내가 지금과 같은 성격인 채고 여자로 태어났다면, 속옷을 수납하기 위한 한구 개의 서랍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워크맨을 위한 진혼곡

-하나의 기계가 겨우 4년 만에 이렇게까지 진보할 수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니, ‘감개 무량’까지는 아니더라도 감탄할 만한 일임은 분명한 듯 싶다

4년 간 혹사를 당해 온 워크맨이 최근에 그 성능이 나빠졌기 때문에 신형을 구입하기로 결심했다. 한마디로 4년 간이라고 해도, 내 경우에는 매일 아침 조깅을 할 때 서포터로 워크맨을 팔에다 묶고 달렸으니까,소모 정도가 보통 사람의 경우보다 훨씬 더 심할 것이다. 그래서 정확히 표현한다면, ‘워크맨’이라기 보다는 ‘런맨’이 되는 셈이긴 한데, 하여간 4년 동안 불평 없이 땀투성이가 되고, 비를 맞고, 뒤흔들리고, 어떤 때는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면서 탈없이 잘도 버텨 주었다고 생각한다. 기계를 전문적으로 받아 주는 절이라도 있으면 워크맨 공양이라도 올려 주고 싶을 정도다. ‘무라카미 주행 음악 동자’라는 법명이라도 붙여서 말이다.

오디오 가게에서 사온 두 번째 신형 워크맨은 첫 번째 워크맨에 비하면 훨씬 작고, 무게도 절반에 가깝고 게다가 오토리버스 기능까지 되고, 충전도 할 수 있다. 가격도 지난번 워크맨보다 싸다. 하나의 기계가 겨우 4년 만에 이렇게까지 진보할 수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니, ‘감개 무량’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감탄할 만한 일임은 분명한 듯싶다. 적어도 인간의 (가령 나의) 진보의 스피드와 비교하면, 기계의 진보의 스피드는 괄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에 감탄함과 동시에, ‘워크맨’이 과연 이렇게까지 진보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야 물론 하나의 기계가 값싸고 작고 편리해지는 것 자체에는 전혀 반론의 여지가 없지만, 은퇴한 워크맨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까, ‘진보 안하고 이대로였어요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이 세상의 진보의 95퍼센트까지는 불필요한 것처럼 생각된다.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긴 하다.

어쨌든 간에 소니 워크맨 WM 여, 평안히 잠들라.

 

긴자센에서의 원숭이의 저주

-나는 비교적 자구 그런 착각을 한다. 판단력에 결함이 있는 데다가, 상상력이 저 혼자서만 앞질러 가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모녀라고 믿어 버리면, 사실 여하와는 관계 없이.

얼마 전에 지하철을 탔더니, 맞은편 좌석에 모녀간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잇는 두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백화점의 쇼핑 백을 무릎에 얹고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꼭 쌍둥이처럼 닮았었다.

무료하던 차에 나는 ‘모녀간이라서 그런지 정말로 꼭 닮았구나. 틀림없이 저 아가씨도 나이를 먹으면 저런 아주머니가 될 거야’ 하고 감탄하면서 힐끔힐끔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전철이 아카사카이쓰케 역에 정차하자, 나이 많은 쪽의 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재빨리 내려 버렸다. 요컨대, 그 두 사람은 모녀간이 아니라 그냥 우연히 옆에 앉았던 생판 모르는 타인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교적 자주 그런 착각을 한다. 판단력에 결함이 있는 데다가, 상상력이 저 혼자서만 앞질러 가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모녀라도 믿어 버리면, 사실 여하와는 관계없이 그 믿음이 혼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까지도 그 두 사람이 ‘사실’은 진짜 모녀가 아니었을까 하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어떠한 사정이 있어서, 그 두 사람은 자기네들이 진짜로는 모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예를 들어 그 젊은 딸은 갓난애 때-가령 도쿄 올림픽이 있던 해에-숲 속에서 원숭이에게 납치되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딸기를 따 가지고 돌아왔을 때 갓난애의 모습은 이미 거기에 없었고, 털실로 짠 조그만 모자와 원숭이의 털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22년이 흘렀다. 딸은 여덟 살 때까지 원숭이의 손에서 자랐는데, 그 뒤로는 마을로 나와 촌장의 집에서 지내면서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다. 오늘은 긴자의 마쓰야 백화점에 스테인리스 후추 용기를 사러 온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지하철에서 옆에 나란히 앉아도 그녀가 자기 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원숭이의 저주는 아직도 그녀들 위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