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대하여

 

몽포르 출판사는 독자들에게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자이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마리아의 사도들 중 한 사람인 프랭크 더프를 알릴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쁘다. 그 자신도 아일랜드인인 로버트 브래드쇼 신부님이 프랭크 더프의 만년에 25년 동안 생활과 사도직 활동에서의 친밀한 교류를 토대로 전형적인 아일랜드 기질의 프랭크 더프를 기술하였다. 매장마다 한 시대의 영웅과 그 문화와 시대에 대한 저자의 찬탄을 드러내 보이는 개인적이고 따뜻한 접근은, 장차 이 영적 거인의 천재성과 성성이 세상에 드러나고 교회 내에서 더욱 잘 알려지게 될 때에 나올 많은 전기들을 위해 큰 기여를 할 것이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의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을 깨닫고 프랭크 더프는 이미 청년 시절에 그의 전 영성과 사도직을 “마리아를 통한 예수께 봉헌” 이라는 그 성인의 모토에 바쳤다. 브래드쇼 신부님의 <프랭크 더프의 생애>가 많은 영혼들을, 몽포르의 길인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더욱 깊은 직접적인 위임으로 이끌기를 바란다.

 

 

 

추천의 글

성 골롬바노회 이든 맥그래드

 

나는 로버트 브래드쇼 신부가 쓴,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자 <프랭크 더프의 생애>를 큰 기대를 가지고 읽었는데, 이 책을 레지오 단원뿐만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읽도록 권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내가 가장 찬탄해 마지않던 분들 중의 한 사람이다. 프랭크 더프는 항상 조용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프랭크 더프의 장례 미사에서 아르마의 오파이아이취 추기경은 “교회가 그를 ’20세기 아일랜드인’으로 선언할 날이 올 것” 이라고 강론했다.

아니, 그는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그의 명성은 전세계 가톨릭 교회에 널리 퍼졌다. 그의 업적과 그가 창설한 레지오 마리애의 사업은 다섯 분의 교황 성화와 전세계의 수많은 추기경들과 주교들과 사제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가 평신도 입회인으로 참석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힌넨 추기경이 그를 소개하자 2,500명의 고위 성직자들이 오랫동안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불림을 받아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는 신비체 의 지체들이라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50년 가량 앞질러 생각한 사람에게 인사를 보냈던 것이다.

프랭크 더프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생활했고 널리 전파했다. 성모님의 보호 아래 그것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그는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했다. 그러나 “평신도 사도직”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고 따라서 처음에는 오해와 비판과 심지어 적대감에 부딪쳤다. 그러나 그는 참아냈다.

성모님께 대한 그의 깊은 신심과 신뢰는 내가 1946년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인상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공산당이 정권을 잡기 전에 중국 주재 교황공사인 리베리 대주교의 요청으로 본인이 중국 전역에 레지오를 확장시키고 있을 때 프랭크는 나와 항상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충고를 해주었다. 더욱이 그 후에 레지오 사업 관계로 영국, 미국, 캐나다, 일본, 한국,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와 필리핀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때도 항상 격려하고 의욕을 불어넣어 주고 동조하는 그의 편지가 끊이지 않았으며 편지를 통해 현세의 것이 아닌 지혜로 충고를 해주었다.

프랭크의 편지들은 감동적이었으며 그와의 대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와 나누었던 많은 개인적 대화는 생각과 활동과 생활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봅 브래드쇼 신부가 19년간에 걸친 프랭크와의 대화를 우리 모두에게 제공한 것이 얼마나 유익한 일인지를 실감한다. 이 책은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들에서 추려서 기록한 것이다.

봅 신부는 그의 작업에서 레지오 마리애 사도직에서의 그의 오랜 경험과 이해라는 또 다른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런던에서 힌넨 추기경의 지도 아래 그가 많은 쁘레시디움을 성공적으로 세운 것을 나는 직접 보았다. 후에 투롤스 신학교에서 영적 지도자로 있을 때 그는 꼰칠리움 회의에 참석하고 프랭크와 꼰칠리움 간부들에게 협력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여러 해 동안 여름마다 브래드쇼 신부는 레지오 팀들을 이끌고 러시아를 방문했고 그 곳 젊은이들과 성공적인 접촉을 해왔으며 수년 동안 아이슬란드에 머물면서 그 곳에 그리스도교를 재건하려는 레지오의 활동에 종사해 왔다. 덧붙여 그의 쉬운 이야기 식 문체는 누구든 쉽게 읽을 수 있게 한다. 이 책을 읽어 보면 내가 왜 이토록 강력하게 추천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처음으로 프랭크 더프에 대한 책을 읽은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나는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소개를 할 수 없다. 레지오 마리애와 그 영웅적 창설자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하는 레지오 단원들과 평신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영감과 기쁨을 발견하리라 확신한다.

 

 

 

 

서문

 

1955년 여름 내 고향 티퍼리리에서 열린 레지오 마리애 대회에서 프랭크 더프를 처음으로 만났다. 나는 당시 사제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대회 미사를 집전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미사 후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러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식사 때 그의 옆에 앉았다. 대화를 시작했을 때 난 그가 레지오 문제가 아니라 그의 가족과 그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를 굉장히 사랑했기 때문에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아주 슬퍼요.”

난 그 사람의 인간미에 상당히 매혹되었다.

내가 프랭크 더프의 대화를 처음으로 녹음한 것은 그로부터 6년 후였다. 그건 거의 우연한 일이었다. 난 우연히 몇 가지 레지오 사업으로 더블린에 있는 레지오 본부를 방문했다. 내가 들어갔을 때 프랭크가 내게 말했다. “신부님, 알피 램의 레지오 선서 녹음을 들으려는 순간에 마침 잘 오셨군요. 오늘 남미로부터 그 테이프를 받았어요.” 마침 문밖에 세워둔 내 차 안에 녹음기가 있어서 그것을 녹음할 수 있느냐고 프랭크 더프 에게 물었다. 그리고 몇 분 내에 나는 녹음기를 준비했다. 우리 둘은 침묵 속에 알피의 목소리가 크고 분명하게 울리는 것을 들었고 나는 그것을 녹음했다.

그리고 나서 순간적인 착상에서 프랭크 더프에게 레지오 초창기에 대한 회고를 기록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전혀 이의가 없었고 그 때부터 녹음을 시작해서 그 뒤 20년 동안 계속했다.

겉으로 보기에 프랭크 더프는 당당한 풍채가 아니다. 그는 중간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이며 겸손하고 젠체하거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말을 할 때는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조용했다. 그는 매력적인 더블린 식 억양을 썼다. 그의 눈은 생기가 넘치며 친절이 가득했다. 그리고 말을 할 때는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상대방을 사로잡아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위대한 인물임을 깨닫게 했다.

프랭크의 얼굴은 화기가 차 있고 사랑스런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나는 종종 그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아름답고 심지어 황홀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그의 표정은 온화함 그 자체였다. 어떤 때는 그 표정에서 조용히 드러나는 괴로움을 보았다. 또 어느 때는 그 표정이 어떤 위대한 내적 힘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나는 프랭크에게 있어서 신비체의 교리가 얼마나 진실되고 친근하게 실현되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고, 그가 얼마나 열렬하게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사랑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언젠가 그는 얘기 중에 이렇게 말했다. “성모님이 예수님께 대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쏟으실 때,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께 대한 성모님의 사랑을 도로 받으십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프랭크 자신은 이를테면 예수님과 성모님 사이의 사랑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 뒤로도 여전히 그의 얼굴 표정에 때때로 감탄은 하지만 놀라지는 않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성직과 사목 활동으로 프랭크와 상당히 가깝게 만났다. 그 외에도 많은 레지오 휴가를 그와 함께 마운트 멜러리 수도원과 근처 시골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콘네마라를 지나갔다. 내가 더블린에 있는 천상의 모후 기숙사 소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마다 상당히 자주 프랭크는 참례했고 그 뒤 나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나와 그와의 관계는 교제와 그의 특별한 신임을 만족스럽게 여기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일찍이 우리가 나눈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그가 내게 말한 중요하지는 않지만 흥미 있는 많은 화제들을 모두 적어 두는 습관을 길렀다. 특별한 대화가 아직 생생하게 머리에 남아 있을 때 사실 보통 그날 저녁에 그것을 기록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렇게 한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져서 덜 정확한 얘기가 되었을 것이다.

프랭크에 대한 이 기록들과 많은 녹음 테이프들이 이 전기의 주요 “자료 원”이다. 더 나아가서 나는 다행히도 대략 프랭크와 비슷한 나이이며 레지오 초창기에 그와 접촉을 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녹음할 수 있었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꼰칠리움 간부들과 프랭크와 가까이서 일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갑진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나는 동료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프랭크 더프의 종교적 견해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들의 삶이 풍부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그의 비범한 신앙, 교회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에 대해 어떤 통찰을 하게 되고, 그가 꿈꾼 대로 레지오 마리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에게 맡겨진 영혼들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둘째로, 나는 이 책이 전세계의 레지오 단원들에게 성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 레지오가 제공하는 놀라운 도움과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레지오가 제공하는 많은 기회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해 주리라 믿는다.

내 원고를 교정해 주고 많은 도움을 준 노라 버클리 양에게 감사한다. 또한 내 테이프를 조사한 도널 힐리에게 감사한다. 헌신적이며 인내심을 갖고 타이프를 해준 질다 셀리니와 안젤라 칸톨프 양에게 감사한다.

무엇보다 레지오 마리애에 감사한다. 레지오 마리애는 그 기발한 체제와 놀라운 정신으로 나에게 참된 영감을 주었고 내 성무 수행에 진정한 기쁨이 되도록 도와 주었다.

 

 

 

 

1 그의 가계(家系)

 

 

프랭크 더프의 외할아버지는 마이클 프란시스 프레힐로 미드 주에서 은퇴한 교장 선생님이었다. 마이클 프레힐은 어려운 시기를 살아왔다. 그는 아일랜드가 빈곤과 압박 속에 있던 19세기 초에 태어났다. 그것은 악명 높은 페널 로우(형법)로 인해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이 호된 시련을 겪던 어려운 시기였다. 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아일랜드 청년 운동이 지지를 얻고 있었고 젊은이들에게 외국의 지배를 벗어 던지기 위해 다시 한 번 일어서도록 촉구하던 불안과 소요의 시기였다.

그러나 또한 해방 자 다니엘 오코넬 의 시대였고 새로운 희망과 신선한 열망과 일치된 목적이 있던 시기였다. 1829년 초 오코넬은 구교도 해방 령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에게 적어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후에 “가톨릭 위원회”는 가톨릭 신자들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오코넬의 운동을 준비하고 자금을 조달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매월 일 페니 를 내기로 했다. 이것이 “가톨릭 세금”으로 알려졌고 마이클 프레힐  그가 이 역사적 모금 운동의 수금 자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1847년 아일랜드에서는 감자 농사가 실패했고 대기근이 전국을 휩쓸었다. 적어도 백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또 백만 명 정도는 잉글랜드와 아메리카와 오스트랠리아로 피난했다. 마이클 의 동생인 톰 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마침내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

1849년 쯤에는 식량 위기가 좀 나아졌다. 기근과 함께 만연했던 열병도 한풀 꺾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해에는 상황이 여전히 아주 나빠서 정부가 운영하는 “구빈 원”이 부양한 사람들의 숫자는 무려 93만 2천 명에 달했다.

같은 해에 미드 주 트림 시에 있는 모델 학교가 문을 열었고 마이클 프레힐이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50년 전 페널 로우가 제정된 이래로 공립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된 최초의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자신의 임명에 얼마나 중대한 의미가 있는지 알았다.

그 자신은 “노천학교” 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었다. 임시 변통인 이 형편없는 학교는 초보적인 교육을 제공했고 역시 더블린에 있는 식민성에 의해 존폐 위협을 받고 있던 아일랜드어와 아일랜드 문화와 전통을 지켜 나갔다.

교장으로서 그의 새로운 지위는 도전적인 것이었고 책임이 무거운 자리였으며 학생들의 성격 형성과 식견을 넓히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그는 영감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역사 교과서를 넘길 때 그들은 아일랜드 민족에게 그 특성인 도덕성을 심어준 용기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이들은 야만족의 침략 이래로 유럽 전체에 꺼진 불을 다시 붙인 6,7 세기의 위대한 아일랜드 선교사들로부터 가까이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토굴 감옥과 방화와 약탈”을 견뎌 온 18세기 그리스도의 추종자들까지를 말한다.

마이클 프레힐의 많은 제자들은 “그의 품을” 떠난 후 평신도나 사제로서 국내외에서 훌륭히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의 책 권두에 마이클 은 이렇게 썼다. “연대기에 따르면 프레힐 가는 성 꼼칠(St. Colmiclle)의 외아들에서 이어져 내려온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물론 연대기의 사실 여부를 증명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전통은 그의 흥미를 끌었다.

한편으로 마이클 의 동생인 콤 은 미국에서 큰 성공을 했다. 그는 뛰어난 창의와 상재(商才) 로 커다란 부를 쌓았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막대한 부동산을 소유했다. 그가 죽었을 때 아일랜드에 있는 그의 형제들은 그 당시로선 엄청난 금액인 10만 파운드의 유산을 받았다. 그의 몫으로 마이클 은 카반 주에 광대한 토지를 샀으며 역시 철도 주식에 상당한 돈을 투자했다. 그는 이제 최대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을 세우고 역시 최첨단 과학 장비를 들여놓았다. 그는 과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가난이 아일랜드를 휩쓴 그 당시에 그는 많은 교장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날카로운 지성과 일류 도서관을 갖추고 그는 새로운 세대의 교육에 열중했다. 그는 미래를 낙관했다.

마이클 은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상냥하고 다정다감한 딸 수잔은 아버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숙제를 하고 어머니를 도와 장보기와 요리를 하는 것 외에도 그녀는 피아노를 배웠다. 그 애가 그 자신처럼 과학에 특별한 소질을 나타내는 것은 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기쁨이었고 18세 때 그 애가 런던의 교육 성으로부터 과학 부문에서 여왕상을 받았을 때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 뒤 그는 딸에게 영국 공무원에 지원하도록 격려했다. 그 당시 영국 행정부는 영국과 함께 아일랜드를 통치했다. 채용시험에서 수잔은 2등을 차지했다. 영국 전역과 아일랜드의 최고 학교에서 온 경쟁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상당한 실력이었다.

곧 런던에서 근무하러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급히 짐을 싸고 작별 인사를 하고 작별의 눈물을 흘리며 부모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수잔, 몸을 돌보아라. 틈나는 대로 소식 전해라.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널 지켜 주실 것이다.”

수잔은 런던에서 2년을 보냈다. 큰 도시에서의 흥분된 생활과 만만찮은 업무로 그녀는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 외에도 오빠들 중 한 명이 런던에 살고 있었고 그를 찾아갈 수 있어서 멋진 생활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깊은 내부에서는 정든 고향 트림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을 느꼈다. 더블린 에 있는 행전부가 여성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면 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제일 먼저 지원을 했을 것이다.

트림으로 돌아가 보자. 마이클 프레힐은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학교를 떠나야 하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전환기였다. 그는 용감하게 결정을 내렸고 더블린으로 이주해서 집을 하나 지었다. 거기에서 그는 가족들과 더 가까이 있게 될 것이다. 이들 중 둘은 이미 그곳에서 살고 있었고, 수잔은 때때로 휴일에 아일랜드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드럼콘드라 는 더블린 시의 정북쪽에 있는 큰 농경지대였다. 마이클 프레힐이 집을 짓기로 선택한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사실 그의 집은 드럼콘드라에 세워질 첫 번째 집이었다. 그 지역이 개발되었을 때 그의 집은 드럼콘드라 성 패트릭 가 55번지로 지정되었다.

더블린에 있는 행정부가 마침내 여성들에게 문호를 개방했고 더블린으로 옮기려는 자신의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딸의 편지를 어는 날 받았을 때, 마이클 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이클 은 자신만을 생각해서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특히 딸을 생각해서 기뻐했다. 그는 딸이 아일랜드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알았다. 그 외에도 수잔은 이제 숙녀가 되었고 앞으로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 애의 배우자가 아일랜드인이기를 그는 바랐다.

수잔은 런던에서보다는 생활이 훨씬 여유 있게 될 더블린의 환경에 재빨리 적응을 했다. 더욱이 트림은 이제 쉽게 찾아갈 수 있어서 예전의 친구들과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드럼콘드라에 있는 새 집에 걸려 있는 트림의 두 가지 풍경화는 “좋았던 옛날”을 생각나게 하는 정다운 그림이었다.

 더블린은 현대적인 대도시의 장관을 갖추기에는 너무 오래 된 도시지만 방문객은 물론 그 곳 주민들도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곧 수잔은 여러 면에서 “아름다운 더블린 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파아란 풀이 돋아 있는 둑과 우아한 백조가 조화를 이루는 대 운하, 멀리 푸른 산과 피츠윌리암 거리의 조지 왕가의 파토라마 같은 경치, 오리들이 꽥꽥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운 스테판 그린의 숲과 연못, 극장들, 사람들로 붐비는 교회들, 각양각색의 과일 상가가 늘어서 있는 무어 거리, 마차들, 거리의 악사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상쾌한 정신과 번뜩이는 재치를 소유한 “더블린의 엘리트들”의 우정과 스스럼없음, 그것은 제임스 조이스 에 의해 불후의 명성을 얻는 가스등의 도시였다.

그렇다. 수잔은 더블린에서의 생활을 정말 좋아했다. 그 외에도 그녀가 장차 남편이 될 존 더프를 만난 곳도 더블린이었다. 그들의 만남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단순했다. 그들을 소개해 준 사람은 바로 수잔의 아버지였다.

존 더프도 역시 마이클 프레힐의 제자였다. 틴 세니 경의 집사장의 아들인 그는 미드 주에 있는 주인의 저택에서 살았다. 그는 성적이 뛰어나게 우수했고 트림의 모델 학교의 자랑거리였다. 그리고 지금은 더블린 시 행정부에서 좋은 직책에 있었다. 존이 그의 옛날 스승인 마이클 프레힐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존, 우리 집에 한 번 오지. 지난 몇 해 동안 자네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궁금하다네. 또 내 딸 수잔을 만나야 하네. 자네도 그 애를 알지?”

사실 존은 수잔의 얼굴만 알았다. 그들 둘 모두가 트림에서 같은 학교에 다녔음에도 서로가 한 번도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존은 교장 선생님의 10대인 수줍음 많은 딸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프레힐 씨. 기꺼이 찾아 뵙겠습니다.”

존은 주저하지 않고 그 초대에 응했다.

며칠 후 그는 프레힐 가에서 차를 대접받고 있었다. 수잔의 수줍은 홍조와 그 아버지의 사려 깊은 배려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이래로 몇 년이 지난 사이에 수잔은 아주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해 있었다.

일년 뒤 존 더프는 수잔 프레힐과 결혼을 했다. 그는 스물 여섯이었고 수잔은 두 살 아래였다. 그들의 첫 아이는 1889년 6월 7일에 태어났다. 그 애를 프란시스 마이클 더프라고 이름 지었다.

 

 

 

 

2 유년 시절

 

프랭크 더프의 유년 시절의 몇 가지 기억들은 외할아버지인 마이클 프레힐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권위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특별한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며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는 노인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 많음을 알았다. 사실 그는 어려운 세월을 보아 왔지만 더 나은 시대를 위한 큰 변화로 보았고 새롭고 더 나은 아일랜드를 건설할 많은 아일랜드 청년들의 품성을 기르는 일에 자신을 임명한 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게 여기었다. 이제 자신이 일하던 때는 지나가고 기력도 해가 갈수록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노년의 그에게 온갖 주의를 기울이는 사랑하는 딸 수잔은 큰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보기 드문 진주였고 사위인 존 더프는 신사 중의 신사였다.

어린 프랭크는 모두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잴 수도 없을 만큼 작은 손가락들, 갓난아기의 순진한 무력함, 부드러운 뺨 위에 반짝이는 눈물 방울들, 그리고 달이 가고 해가 감에 따라 작은 발로 종종거리며 반기는 모습, 높은 곳을 기어오르려는 기발한 노력, 작은 소년의 재잘거림과 끝없는 질문들, 그리고 이제 곧 학교에 들어갈 때가 될 것이다. 마이클 프레힐 은 손자를 굉장히 사랑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가 곧 그에게 닥쳐서 그는 프랭크가 겨우 다섯 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께서는 존 더프와 수잔 부부에게 일곱 명의 자녀를 주셨다. 프랭크 다음으로 아사벨, 래티티아, 이브, 존, 사라 제랄딘 과 아이리스를 두었다. 래티티아는 아기 때 죽었다.

존 더프는 헌신적인 남편이며 아버지였다. 그는 이웃들이 “훌륭한 가정적인 남자”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었다. 그가 자녀들의 장래 직업에 대해 약간의 야망을 가졌다면 그것은 그들의 지능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남인 프랭크라 특히 뛰어난 것을 알았고 그 애를 대학에 진학시켜 영국 식민 성 행정부에 관리로 근무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행정부의 고위관리였기 때문에 그 뒷받침을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그의 아내도 역시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 받았고 가족들은 부유하게 살았다.

존은 대단히 활동적인 사람이었고 많은 여가 시간을 자전거 타기와 수영으로 보냈다. 그는 프랭크가 야외 생활에서 건강한 기쁨을 맛보도록 했다. 어린 소년을 짐받이에 태우고 더블린 근교의 고속도로와 간선도로를 달리는 부자(父子)를 보는 것은 즐거운 광경이었다. 그들은 또한 함께 수영을 했고, 나중에 프랭크는 그의 아버지가 언젠가 물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구해냈는지를 자랑 삼아 얘기했다.

더프 가는 화목한 가정이었고 아이들은 보통의 건강한 아일랜드 가정의 높은 정신으로 넘쳤다. 물론 때로 사소한 언쟁과 보통의 유치한 말다툼과 시끄러운 재잘거림이 있었다. 더프 부인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작은 둥지 안에 있는 새들은 사이가 좋단다. 한 집에서 아이들이 다투고 싸운다면 슬픈 일이잖니?”

보통은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점심은 대개 양고기, 감자와 야채로 했다. 또한 토끼 요리가 정기적으로 식단에 올랐다. 특별한 때에만 닭고기를 먹었다. 금요일에는 예외 없이 금육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금요일 저녁 시사는 일 주일 중 가장 인기가 있었다. 자상한 어머니인 더프 부인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리인 감자로 만든 케이크와  팬케익과  특별 후식을 마련했다.

더프 부인은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요 가수였고 때로 저녁에 가족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프랭크는 어머니로부터 많은 사랑스러운 노래들을 배웠다. 그리고 더 자주 아이들은 난로 가에 둥글게 모여 앉아 어머니가 읽어 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큰 석유램프가 천장에 걸려있고 아이들이 홀린 듯이 얘기를 듣고 있을 때 난로에서는 불꽃들이 춤을 추었으며,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소녀들의 모습은 마음이 푸근해지는 정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오락 시간에 어머니는 또한 말보다는 본보기로써 어린 자녀들에게 미덕을 가르치고 있었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상냥하고 헌신적인 태도에서 잘 드러났다. 자녀들이 그녀 주위에 둥글게 모였을 때, 그녀는 사탕 봉지를 하나 꺼내어 각자에게 똑같이 나누어주고 자신의 몫도 꺼내 놓는다. 순번제도에 따라 각자는 표에 기재된 날짜에 첫 번째로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차례가 되면 결코 첫 번째로 집지 않고 항상 마지막에 집었다. 밤에 방문객이 찾아올 때마다 분별력 있고 삼가는 태도로 방문객을 위해 자신의 난로가 자리를 비워 주는 더프 부인은 관찰력이 예리한 어린 프랭크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언젠가 한 번 프랭크는 작은 수술을 받기 위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린 아들을 애처롭게 쳐다보며 말했다. “프랭크야, 네가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이 수술을 받고 싶구나.” 그 말과 그 말에 담긴 의미에 대한 기억은 프랭크의 남은 생애에서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더프 부인의 가장 뛰어난 미덕은 무엇보다 겸손이었다. 그녀는 실제로 매우 겸손하고 단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소 재산이 있다 해도 결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재주가 많고 총명했지만 그것을 과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예로 그녀가 학교 다닐 때 과학 부문 여왕상을 받은 것을 프랭크가 발견한 것은 그녀가 죽은 후였다. 그녀는 생전에 자녀들에게 그에 대해 단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프 부부가 예외적으로 거룩한 사람이었다거나 그들의 가정이 대단히 경건한 가정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프랭크는 어머니를 “평범한 선의의 가톨릭 신자” 였다고 기술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쳤고 덕을 쌓도록 단련시켰으며 주일 미사에 반드시 나가도록 했다. 더프 가는 단지 “진짜 가톨릭 신자” 였다.

가톨릭 교회는 매우 다양한 아름다운 꽃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정원과 같다. 각 민족은 그 곳에서 자라고 있는 꽃이며 각자는 독특한 방식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면서 무한히 다양한 교회에 이바지한다. 초기 아일랜드의 수도원 제도는 “아일랜드 식” 가톨릭 신앙의 분위기를 결정했다. 아일랜드인들의 느슨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성격에 어느 정도 금욕주의를 결합시켰다. 또한 그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에 다소 초자연적 사고방식을 가르쳤다. 프랭크 쉬드에 말에 따르면,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강경하고 완고한 특징은 그들의 전적이고 근본적인 경건성, 실제적이고 분명한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일종의 본능적인 자각, 영적 세계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는 것” 이라고 했다. 그리고 물론 신앙은 아일랜드 식으로 7세기에 걸친 시련기 동안 시험되고 강화되었다. 사실 실제로 아일랜드인들에게 신앙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하느님의 섭리가 그들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병들거나 슬프거나 혹은 어려움이 있을 때 그들의 외침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였다.

더프 가는 이 전통을 이어 받았다. 그것이 그들이 모든 생활 방식에 스며들고 영향을 준 한편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주목을 받지 못했음에도 그들의 신앙과 종교에 가장 호감이 가는 특징이었다.

가정에서 저녁에 책을 읽어 주는 습관은 프랭크에게 있어 문학에 대한 취미를 길러 주었다. 요즘 말로 그는 책벌레가 되었다. 그의 용돈은 모두 책을 사는 데 써버렸다. 프랭크의 외할아버지가 세운 훌륭한 도서관은 아버지가 더욱 확장시켰다. 그가 열 살이 될 무렵까지 프랭크는 월터 스코트와 찰스 디킨스의 고전적 소설 대부분을 포함한 매우 많은 양서들을 읽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또한 와이즈만 추기경의 ‘과학과 계시 종교에 대한 강의(Lectures on Science and Revealed Religion)’ 와 ‘성체 성사에 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Eucharist)’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딱딱한 책을 읽었다. 그 나이에 그러한 책을 읽는 것은 비범하고 뛰어난 지성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했다. 프랭크가 후에 그의 지적 발달에 풍부한 영향을 준 뉴만 추기경의 저서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곳도 바로 외할아버지가 세운 도서관이었을 것이다. 1

프랭크가 아직 어릴 때 가정에는 심한 타격이 몰아쳤다. 그와 아버지가 장티푸스로 쓰러졌다. 그들은 집안 격리된 방에서 간호를 받았다. 처음에 프랭크는 매우 심하게 앓아서 가족들은 모두 그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완쾌되었다. 그의 아버지도 역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열이 계속 내리지 않아서 몸을 약하게 만들었다.

프랭크가 아홉 살이 조금 지나서 가족들은 던 로가레 클라린다 파크 이스트 17번지로 이사했다. 이것은 더블린 주에 있는 큰 맨션이었다. 가족들이 늘어나고 부모의 재산이 늘어나고 더프 가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이사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넓은 생활 공간은 더프 부인에게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을 것이다. 고급 가구들이 방을 우아하게 장식했다. 두 명의 하녀가 고용되었다. 그들은 “선택된” 이웃이었다. 대체로 말하면 더프 가의 생활은 좋은 편이었다.

 

 

 

 

3 학창 시절

 

프랭크 더프는 국립학교에는 다니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년들을 위한 지방 사립학교에 들어갔다. 그 당시는 보통 그런 사립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일이 년 동안 벨버디어 대학에 다녔다. 1899년 그의 가족이 던 로가레 로 옮겼을 때 그는 블랙록 대학 주간 부 학생이었다. 그 대학은 세계적인 선교로 명성이 높은 성신 수도회에서 담당했다. 여기서 입학 수 얼마 안 되어서 그는 첫 영성체 준비를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는 매우 민감하고 정확한 도덕관념을 지켰다. 그러나 그것은 죄에 대해 세심한 태도를 가진 것이 아니고 이완된 태도도 아니었다. 오히려 결과에 개의치 않고 진실한 것을 주장하는 특별히 정직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첫 고백성사는 이것을 잘 설명해 주었다. 여러 해 뒤 투를스 의 성 패트릭 신학교의 부제에게 얘기하는 중에 그는 그 사건을 얘기했다.

“첫 영성체 전에 제가 매일 한 공동고백에서는 고백해야 할 잘못들을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전 제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고백성사를 할까 봐 매우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출석 점호가 있을 때 나는 고백성사를 다시 하라고 할까 봐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그들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제대로 모른다고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아마 그가 지나치게 민감했을 것이다. 어쨌든 첫 고백성사 사건은 어린 나이에도 예리하고 정확한 지성과 문제에 대면할 도덕적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고백성사에 대한 걱정이 첫 영성체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할 만큼의 그를 혼란케 하지는 않았다. 그는 집에서 기본적인 종교적 수양을 쌓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그와 학급 친구들은 교리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영성체 전 일 주일 동안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사건을 위해 집중적인 준비를 받았다. 그 외에도 각 소년은 자신의 특별한 청원이나 결심을 종이에 써서 봉투에 넣어 제단에 놓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한 태도는 소년들에게 첫 영성체의 엄숙함을 더욱 깊이 명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준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보통 그토록 어린 소년들에게서 성숙한 인식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프랭크 더프가 어른이 되었을 때 한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프랭크 씨, 당신은 첫 영성체 때 그 의미를 깨달았소?”

프랭크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예, 그 때도 난 첫 영성체의 특별한 의미를 깨달았지요.”

그리고 실제로 성체는 그의 전 생애에 추진력이 되었다.

 

프랭크 더프는 분명히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주일 저녁이 되면 월요일 아침에 학교 갈 생각에 마음이 괴롭 곤 했으며 마침내 학교 공부를 마쳤을 때 그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해방된 기분을 만끽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그는 학생으로서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수학을 매우 싫어했고 그 과목에 재능이 없다고 믿었다. 역사와 언어, 특히 고전어를 매우 좋아했다. 입학 후 그는 곧 학교에서 가장 총명한 학생 중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

블랙록 대학은 운동 경기로 명성이 높았으며 그 외에는 별 볼일 없었다. 몸이 단단하고 튼튼한 프랭크는 매우 기뻤다. 그는 뛰어난 달리기 선수요 사이클 선수였다. 또한 테니스와 크리켓을 매우 좋아했다. 그가 열 두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그는 크리켓 경기장의 쪽문에 서 있었다. 그때 크리켓 볼이 날아와 그의 귀 뒷부분을 때려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모두들 깜짝 놀았으나 프랭크는 양호실에서 곧 의식을 되찾고 집으로 돌아갔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때 귀를 다쳤고 영원히 청각 장애를 겪었다. 이것은 후에 그에게 심각한 장애를 가져왔다.

그는 럭비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어는 날 아침, 더블린의 유력한 일간지인 <프리맨스 저널>에 블랙록 대학과 다른 대학교간에 럭비 경기가 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블랙록 교수진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 경기에 이긴 후 대학에서 즐거운 축하 잔치가 벌어졌다고 되어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학 선수들의 배치에 있어서 “불가능한” 배역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훌륭한 만화의 한 장면 같았다. 교수진들은 흥분했다. 책임 있는 언론지인 <프리맨스 저널>이 그런 허구의 기사를 쓴 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저널의 편집자를 만났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저널은 단지 블랙록 대학에서 보내온 기사를 실은 것뿐이라고 하지 않는가! 투고기사라고? 대학 교수진들 중 몇 명이 즉시 <프리맨스 저널> 사무실을 방문해서 그 “자료”를 넘겨 받았다.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가사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즉시 그것이 열두 살 된 학생, 이름하여 프랭크 더프가 쓴 글임을 알아보았다!

아마 그 후에 벌을 주겠다든지 혹은 제적을 시키겠다는 위협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블랙록 대학이 총명한 학생을 놓치기 꺼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침묵 속에 “냉대”를 참아야 했으리라. 학교 당국은 그 범인을 못 찾은 척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사건에 대해서 프랭크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랭크의 성적표가 학기말에 부모에게 보내졌을 때 결국에는 장수말벌의 동화에서 나오는 독침처럼 되었다. 여러 과목에서 그의 성적은 10점 만점에 10점 혹은 9점이었는데 품행 점수에서는 10점 만점에 2점이었다! 지금까지 품행에서 그의 가장 낮은 점수는 10점 만점에서 9점이었는데!

그 일이 있은 뒤 2년 동안 가족들에게 불행이 닥쳤다. 아버지는 장티푸스를 앓고 난 후 좀처럼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상태가 나빠졌다. 힘과 기력은 쇠퇴해 갔다. 그토록 튼튼하고 활동적이었던 사람이 그것은 어렵고 비참한 타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을 제대로 직시해야 했다. 그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행정부 관리직에서 물러났다. 그 때의 나이가 겨우 42세였기 때문에 그는 연금을 전액 다 받을 수는 없었다. 그가 받은 연금은 봉급의 삼분의 일이었다. 또한 불행하게도 그 부인의 수입도 줄어들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부친이 투자한 철도회사의 주식이 점점 하락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후퇴는 더 이상 던 로가레 에 있는 큰 집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여전히 더프 부인의 소유인 드럼콘드라의 옛집으로 다시 옮겼다.

프랭크는 벨버디어 대학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드럼콘드라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나 성신 수도회는 그를 블랙록 대학에 계속 다니게 하라고 부모에게 호소했다. 심지어는 그를 무료 기숙생으로 돌보겠다고 제의했다. 마침내 부모는 양보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블랙록에서 기숙생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가족과 함께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프랭크의 계획표는 이러했다. 오전 7시 15분에 아침을 먹었다. 7시 30분에 드럼콘드라에서 훼스트랜드 로우 정류장까지 2마일 걸었다. 그 때는 아직 그에게 자전거가 없었다. 그리고 기차를 탔다가 나머지 3/4마일을 걸어갔다.

저녁에는 집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12세 혹은 13세 때부터 프랭크는 5개 국어, 즉 아일랜드어, 영어,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블랙록 대학의 수업 시간표는 대체로 기숙생들에게 맞춰 짜여져 있었다. 따라서 어떤 수업은 프랭크에게는 적당치 않은 시간에 있었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어 수업은 저녁 늦게 있었다. 대학 당국은 프랭크에게 편의를 주기 위해 개인교수를 배정해 주었다. 일 주일에 두 번씩 그는 캐브라에 있는 개인교수의 집으로 아일랜드어 수업을 받으러 갔다. 개인교수인 데니스 린치 씨는 난로 가에 앉고 그는 다른 쪽에 앉았다. 프랭크는 비범한 기억력과 함께 캐묻기를 좋아했고 그의 실력은 크게 나아졌다. 그는 “순수한 강의식” 방법보다는 “학생이 참여하는 수업”이 더 좋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느 날 개인교수가 말했다. “프랭크, 시험에서 넌 아일랜드 전체 수석은 문제없을 거야.” 일등에는 특별 메달이 수여되었다. 프랭크는 스스로도 말했듯이 아일랜드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낙관했다. 그러나 메달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다른 학생이 반점 차이로 프랭크보다 앞섰던 것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놀라운 유머감각을 타고났다고 해도 블랙록에서의 학창 시절 동안 프랭크는 매우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었다. 언젠가 그는 셰익스피어의 연극 <주현 절 전야(Twelfth Night)>에서 주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연습 초기에 그는 무대 공포증을 느껴 그 배역에서 빼 달라고 부탁했다. 블랙록 대학의 넓은 운동장에서 운동을 잘했지만 운동회 날에는 결코 시합을 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수줍은 성격은 계속 남아서 그의 가장 사랑스러운 특징 중의 하나인 우아하고 온순한 성격이 되었다.

18세 때 그는 학교를 마쳤고 최종 학년 때 현대문학에서 일등상을 차지하여 학교 생활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4 새로운 세계의 발견

 

대체로 말해서 총명한 더프 가 사람들은 몸이 허약했다. 이브의 쌍둥이 자매인 래티티아는 갓난아기 때 죽었다. 이브 자신도 결코 튼튼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 검은 곱슬머리와 약간 창백한 안색을 한 13세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는 명랑하고 쾌활하며 아주 재치가 있었다. 학교에서도 총명했기 때문에 시험 때마다 일등을 했고, 프랭크의 말에 따르면 더프 가의 진짜 천재였다고 한다. 학교는 에꼴레스 거리에 있는 도미니꼬 수도원이었고 거기서 그녀는 수녀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질이 우수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것은 그녀의 성덕, 즉 그녀의 맑고 깨끗한 영혼의 아름다움이었다.

모드 브린 은 이브의 학교 동료이자 친구였다. 어느 겨울날 두 소녀는 하늘에서 춤추며 내려와 운동장 위에 흰 비단 양탄자를 깐 것처럼 쌓이는 예쁜 눈송이를 창 밖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그들은 점심시간에 밖에 나가서 마음껏 뛰어 놀았다. 흥분에 들떠서 그들은 찬 기온을 느끼지 못했다. 수녀들이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꾸짖었고 당연히 이브는 감기에 걸렸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학교 생활이 되었다. 그녀는 심하게 아파서 병원으로 보내졌다. 의사는 결핵이라고 진단했다.

죽기 전 7개월에 걸친 투병 생활 동안 그녀는 놀라운 성성을 보여 주었다. 본당 신부인 맥그래드 신부가 그녀를 찾아와 성체를 영해 주곤 했다. 그는 그녀의 거룩함에 매우 감동되어 클론리퍼 대학의 히케이 박사에게 그녀를 보여주었다.

말년에도 프랭크는 그의 집 층계 창 곁을 지나가던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의 앞에는 이브가 실내복을 입고 창백한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저 애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그 뒤 곧 죽었다.

 

프랭크가 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의 첫 번째 관심사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인해 일찍 은퇴했고 가족들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하기는 불가능했다. 그 대신 그는 공무원으로 들어가(시험에서 일등으로) 재무성에 근무했다. 다소 갑작스럽게 그는 가족을 부양할 위치에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수학을 싫어했기 때문에 재무성에 임명된 데 대해 상당히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깨닫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 “책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급수학과 과학을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세운 거대한 도서관은 그가 공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노력해 볼 만한 목표가 있었고 그는 그것을 성취했다. 매일매일 그는 부지런히 공부를 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 과학의 흥미로운 세계, 순수한 정신적 노력, 이 모든 것은 그의 지성을 열광시켰고 이전에 이런 과목들에 대해 품었던 혐오감은 사라졌다. 이제는 그가 맡은 분야에 대해 단순한 열중이 아니라 순수한 열광이었다.

그의 정확하고 빈틈없는 지성과 문제에 대한 뛰어난 실제적 접근으로 그는 그 부서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겨우 21세가 되었을 때 그는 그 부서의 장관의 관심을 끄는 계산 방법을 발명했다. 그 결과 그는 그의 방법을 런던 재무성 관리들에게 시범을 보이도록 런던으로 초청을 받았다. 그 부서는 후에 그의 새로운 방법을 채택했다. 그는 자신의 성취에서 자부심을 맛보았고 역시 봉급이 올라 기뻤다.

과중한 업무와 임무 수행이 공무원의 틀에 박힌 생활이었지만, 그가 일하는 사무실에서는 우애와 유쾌함이 흘러 넘쳤다. 한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생기가 넘치는 곳에는 반드시 더프 씨의 웃음과 익살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바쁜 업무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부 활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학교에서 “해방된” 다음 그는 즉시 드럼콘드라에 있는 테니스 클럽에 들었다. 테니스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 중의 하나이며 그 운동을 아주 잘했다. 그리고 그가 가입한 테니스 클럽은 하드코트를 갖추고 있어서 일년 내내 이용할 수 있었다.

도전적인 성격이 없었다면 그가 걸어 다닌다는 것은 기분 전화거리가 되지 않았을 거이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그는 아버지가 기차를 놓쳐서 트림 시까지 꼬박 걸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들도 할 수 있다” 고 프랭크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더블린에서 출발해서 트림까지 83킬로미터의 거리를 하루가 채 안되어서 걸어갔다가 되돌아 왔다. 날씨가 더워 길가 물이 나오는 곳을 지날 때마다 머리에 물을 적셨다. 또 머리를 시원하게 하기 위해 모자 속에 잔디를 넣었는데 그것을 잊고 도중에 소성당에 들어가서 모자를 벗었을 때 매우 당황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 7마일 동안 그의 오른팔이 심하게 물집이 생겼지만 자신이 한 번 하기로 마음먹은 것을 완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후에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느냐고 묻자 그는 “지기 싫어서” 라고 대답했다.

그런 완고한 결심은 그의 두드러진 성격으로 드러났다. 일단 한 번 마음을 정하면 바꾸기가 불가능했다.

그가 즐긴 모든 야외 활동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자전거를 타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 직장을 구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프랭크야, 난 이제 더 이상 자전거를 잘 탈 수가 없구나. 너에게 주마. 네가 필요할 것이다.”

프랭크는 그 자전거를 약간 손을 본 다음 그의 자전거를 항상 여행의 동반자로 삼았다. 그는 사무실에 자전거로 출근했고 전할 것이 있어도 자전거를 타고 갔으며 소풍도 자전거를 타고 갔다. 주일 아침 미사 뒤 그의 일행들은 해안도로를 따라 하우드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리고 오후에 다시 브레이나 혹은 다른 경치 좋은 곳으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

대체로 청년 더프는 매우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많은 그의 친구들은 ‘상류사회’에 속해 있었고, 그는 많은 상류층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섰다. 재무성에서 밝은 장래가 이 젊은 수학자에게 보장되어 있었다.

그때 그의 전 생애를 엄청나게 다르게 바꾸어 놓은 사건이 생겼다. 프랭크가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것은 1913년 10월이었고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이전에 프랭크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들어가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그 후 그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며 그가 매우 존경하는 잭 캘러한으로 부터 다시 권유를 받았다.  그는 “싫다” 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갈멜 산의 성모 마리아의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가입했고 모임을 참관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세 번째 모임에 참석했을 때 그 회(會)의 서기로 임명되었다.

당시 더블린에서의 가난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실업 상태였고 일가족들이 슬럼가의 방 하나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굶주림, 불결과 술에 만취한 생활이 만연했다. 종교적 냉담은 더욱 심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목표는 가장 비참한 상태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라도 구제하고 동시에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영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프랭크는 때때로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해야 하는 절박한 사정 때문에 영적 목표가 무시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빈첸시오회 가 복음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 40). 그 말씀의 실체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에게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이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 모두 안에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존재하신다. 더러운 손, 때묻은 얼굴, 피로에 지친 다리는 동정과 도움을 절규하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신비체의 일부였다. 그들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기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 도와야 할 불쌍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은 참으로 이 땅에 계신 그리스도의 지체였다.

프랭크는 이제 지금까지 그의 신앙이 평범한 것, 즉 비교적 따분하고 지루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현존이라는 이 교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는 신앙이 줄 수 있고 또 주어야 하는 감격적인 모험을 깨달을 수 없었다.

몇몇 병원에서 그 당시 상황은 원시적이고 비위생적이었다. 프랭크가 방문하고 있는 사람이 진실로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상기함으로써만이 그 불쾌감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후에 슬럼가를 방문했을 때, 그 끔찍한 상태를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위에서와 같은 숭고한 진리를 떠올림으로써만이 가능했다.

소년 시절 프랭크는 결코 가난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 그의 집에는 풍부함과 청결함과 정성 들여 꾸민 환경이 있었다. 그는 물론 멀리서 가난을 보았고 허름함 옷을 입은 아이들을 보았으며 길에서 술에 만취된 사람을 보았고 두려움에 뒷걸음질 쳤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사회의 “버려진 이들” 과 “어깨를 스친” 적이 없었고 극빈자들이 사는 상태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활동은 이제 그로 하여금 소름 끼치는 현실에 직면하게 했다. 아마 그의 정화된 풍성은 그가 경험한 것들에 의해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전혀 새로운 세상, 그리스도의 불쌍한 백성들을 발견했다. 그는 그들을 열정과 온화함을 가지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그들을 돌보았고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시중을 들었다. 그들은 그의 새로 발견된 친구들이었고 일생 동안 그의 친구가 되었다.

 

 

 

5 조셉 가베트와 사귀다

 

“하느님은 올바른 생각을 지닌 모든 가톨릭 신자들의 가슴에 성인(성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심어 주셨습니다.” 프랭크 더프는 1916년에 이렇게 썼다. 2

우리는 프랭크가 그의 신앙을 좀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영원한 삶으로 이끈 좁은 문”을 그의 삶의 목표로 정하게 만든 다양한 요인들을 모두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특히 영적 독서와 봉쇄피정이 처음부터 그에게 풍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들어가기 전부터 영성 서적을 많이 읽었다. 아마도 그는 그것을 아버지의 도서관에서 구했을 것이다. 그가 빈첸시오회에 들어갔을 때 그는 하느님과 성인들에 대한 서적을 탐욕스럽게 읽어 나갔다. 조셉 글린, 랄프 캘러한, 톰 팔론, 매트 랠로, 빈센트 켈리, 프랭크 스위니 등등 빈첸시오 회의 많은 회원들은 열렬히 영적 도서를 권장하였다.

프랭크는 특히 성인들의 전기를 흥미 있게 읽었다. 그가 그들의 내핍 생활을 모방할 엄두도 못 낼 만큼 민감하다 해도 하느님과 영혼들을 위한 그들의 열정은 그에게 성성에 대한 야망을 새겨 주었다. “성성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임을 일단 우리가 받아들이면 그것을 위해 애쓰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3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많은 심오한 신학 서적들을 읽었다. 그 외에도 그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위대한 신비 가들의 주요 저서들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빈첸시오회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그는 첫 봉쇄피정에 들어갔다. 그것은 예수회의 스캔론 신부가 지도했다. 주말피정은 정기적으로 라트파른햄과 밀타운 파크의 예수회에서 열렸다. 그 곳에서의 외부와 격리된 산책과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은 개인이 자신의 영원한 구원과 위대한 종교의 진리에 대해 묵상할 수 있는 적절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스캔론 신부의 강론은 프랭크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감동을 주었다. 그는 피정의 가치를 무한히 소중하게 인식했고 스스로 매년 두 번씩 피정을 하기로 계획했다.

 

빈첸시오회는 돈과 양식을 많은 빈곤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빈곤은 매우 심각했고 그래서 기금을 모으기 위해 온갖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 토요일마다 프랭크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나가 전당포를 찾아가서 그들로부터 7펜스씩 모금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과의 거래로 돈을 벌기 때문에 기부를 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적절했다. 그리고 그들도 기꺼이 응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는 길에 프랭크는 항상 그들을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도우려고 했다. 그는 가난한 집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그들의 신앙 생활을 실천하는 데 무력한 것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미사와 성사를 무시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도움을 줘야 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랭크는 그들에게서 사도직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밤마다 그는 혼자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걸어서 더블린 뒷골목을 다니면서 집집마다 방문했다. 그리하여 이제 친숙한 얼굴이 되었다. 사실상 그가 방문한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게 되었다. 심지어 가장 냉담한 신자들까지도 그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그가 교회의 준 성사를 사용했을 때 그의 노력에는 큰 축복이 뒤따랐다. 사람들은 “기적의 패”와 갈색 성의, 그리고 성수를 받는 것을 매우 좋아했고 많은 이들이 그의 온화하고 설득력 있는 호소에 다시 신앙 생활을 실천하기로 했다.

 

그 당시 더블린의 엄청난 빈곤 대문에 개종이 만연했다. 개신교의 개종 본부는 화이트 프라이어에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개신교 예배에 참석하는 조건으로 무료로 아침 식사를 제공받았다. 약 150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비참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참여했다.

1914년 초 교회의 큰 일꾼인 톰 맥케이브가 빈첸시오회 회의에 이 달갑잖은 음모를 지적하고 그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편지를 빈첸시오회에 보냈다. 따라서 빈첸시오 회장인 레논씨는 그 상황을 조사할 지원자를 찾았다.

프랭크는 기꺼이 지원했고, 다음 주일 아침 8시에 레논 씨와 함께 화이트 프라이어 거리로 가서 개종 본부 회관 맞은 편 길에 서서 그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때 한 숙녀가 다가와서 물었다.

“저 곳에 관심이 있으세요?”

“예, 아주 많이요.”

“당신이 저 쪽에서 하는 일(개신교로 개종시키는 일)에 반대해서 어떤 일을 할 예정이라면 가베트 씨와 힘을 합치세요. 그는 이미 이 일에 착수 했어요.”

조셉 가베트는 매우 키가 크고 힘있게 생긴 사람으로 꿰뚫는듯한 눈과 인상적인 검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군인처럼 보였는데 실제로 여러 해 동안 영국 군대에서 근무했었다.

프랭크는 그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가베트는 이미 다음주일부터 개신교의 조반 센터에 대항해서 “반 조반 센터”를 열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개종회관을 드나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퍼뜨리고 있었다.

이제 따로 빈첸시오회의 조반 센터를 세울 필요가 없었으므로 다음 주일 아침에 프랭크는 이 새로운 사업에서 조셉 가베트를 돕기로 했다.

그 용도로 가베트가 빌린 장소는 치터스 랜에 있는 큰 마구간이었다. 일층은 말과 마차를 두는 곳이고 이층은 방이 세 개가 있었는데 조반을 준비하고 나누어 주는데 사용될 수 있었다. 그 일을 도울 몇 명의 남녀를 가베트가 데려왔다. 그 계획을 이해 필요한 돈을 위해 소녀들은 그들이 일하고 있는 근처 야곱 비스켓 공장에서 일인당 1페니 씩 주말마다 모금을 하기 시작했다. 가베트는 그의 작은 조직에 이름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무염시태 회”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제일 큰 방에 적절하게 장식한 매력적인 제대를 배치했다. 그 제대의 중앙에는 무염시태 의 아름다운 성모상이 있었다. 모금된 돈의 일부는 그 성모상을 사는 데 쓰여졌다. 후에 레지오의 최초의 제대에 놓여진 것도 바로 이 성모상이었다.

개업식 날 개종회관을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이 가베트의 조반센터로 왔다. 그리고 그 숫자는 매주 늘어갔다.

프랭크는 가베트의 “오른팔”이 되었고 매주 토요일 저녁에 주일 조반 준비를 돕기 위해 갔다. 그는 가베트의 차를 만드는 솜씨에 매료되었다. 그는 큰 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많은 양의 강한 차를 넣었다. 그리고는 불 위에 올려 놓고 밤새 끓게 내버려 두었다. “위스키라니, 가베트의 차만으로도 취할 수 있어요!” 라고 프랭크는 종종 말했다.

프랭크는 청소나 설거지를 했다. 또 빵을 자르고 버터를 발랐고 그것을 “산처럼” 쌓아 두었다. 그리고 나서 가베트의 “차”를 끓였다.

사람들이 일요일 아침 음식을 먹는 동안에 가베트는 그들에게 신앙에 대해 설교했다. 그의 말투는 거칠고 세련되지 않았지만 단순했고 그들은 그이 말을 잘 알아들었다. 그가 참석할 수 없을 때마다 프랭크가 대신 그 일을 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가베트는 그의 활동 장소를 넓혔다. 그는 포르토벨로 병영의 군종신부인 오루글린 신부의 평신도 보조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물론 가베트는 프랭크를 함께 데려갔다. 병영에는 2천 명의 군인이 있었다. 가베트와 프랭크는 그들 속을 돌아다니면서 신앙을 충실히 지키도록 격려했다. 냉담한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그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의 수는 엄청났다. 그들은 오루글린 신부가 매월 첫 금요일 전야에 병영을 방문해서 고백성사를 주도록 마련했다. 오루글린 신부는 또 그 다음날 아침에, 즉 매월 첫 금요일에 성체성사를 베풀기 위해 왔다. 그것은 사제와 평신도 보조자와 평신도 보조자를 보조하는 프랭크 사이의 놀라운 팀워크이었다!

어떤 때는 가베트가 가톨릭 신자인 병사들을 큰 막사에 모아놓고 그들을 위해 기도 모임을 가졌다. 성모상 주위에 모여 성가를 부르곤 했다. 그리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고 가베트가 그들의 영원한 구원과 성사의 중요성에 대해 설교를 했다. 그는 갈색 성의와 “기적의 패”를 착용하도록 권하곤 했다. 그리고 그와 프랭크는 메달을 나누어주곤 했다. 모두들 모든 것에 대해 상당히 호응을 했고 때로 그들은 놀라운 결과를 거두었다. 즉, 70명의 병사들이 모였고 가베트와 프랭크는 그들을 네 줄로 세워서 군대식으로 시내를 지나 밀톤 파크에 있는 예수회 건물까지 행진했다. 그 곳에는 많은 사제들이 그 “침입자들”을 처리하고 70명의 고백성사를 듣기 위해 동원되었다.

프랭크는 가베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는 군대에 있던 군인으로서 이제 그리스도의 전사가 된 사람을 이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었다. 성 바오로처럼 강력한 이 사람은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과 희망의 투구”를 썼다. 그는 하느님과 복되신 어머니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베트는 고급 제화 공이었는데 늦은 시간까지 일을 했다. 대부분 저녁 프랭크는 자신의 사도직 활동을 끝마친 후 그의 신 만드는 작업장으로 들어가 부츠와 구두들 사이에 앉았다. 그것은 종교적 대화를 위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가죽을 꿰매고 두들길 때도 가베트는 계속 하느님과 성모님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프랭크는 스승의 발치에 앉아 그 모든 것을 전부 흥미 있게 받아들이는 제자였다.

그는 가베트가 개척자 회 배지를 착용한 것을 보았다 그래서 프랭크는 배지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려는 생각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종교적 상징물도 착용할 수 없었다.

절대 금주 개척자협회는 1898년 예수회의 제임스 쿨렌 신부가 더블린에 세운 것이었다. 이 협회의 일차적 목표는 기도와 자기 희생을 통해 절대 금주를 장려함으로써 예수 성심을 흠숭 하는 것이었다. 금주뿐만 아니라 회원들은 매일 특별한 기도를 바쳐야 하며 예수 성심을 나타내는 개척자 회 배지를 착용해야 한다.

프랭크는 예수성심을 매우 공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징물을 공공연하게 착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여기 위대한 영웅 가베트가 이 배지를 착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그로 하여금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연히 발견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명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마태오 10, 32-33). 그렇다면 “그에 대해 두 번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심판 날에 수줍음이나 도덕적 비겁함 때문에 단죄를 받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개척자협회에 가입을 하러 갔다.

거기서 그는 2년 동안 수련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그가 15개월 동안 수련 자 배지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그가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것”이 9개월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개해서 일어나 나와 버렸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기로 작정했고 이 실망이 주님을 따르는 또 다른 작은 십자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 주일 뒤에 그는 수련 자로 가입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개척자회의 열성적인 장려 자였고 그 협회의 목표와 이상을 높이 평가했다.

그가 이따금 사이다나 저장 맥주를 즐겨 마셨다 해도 음주를 포기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배지로 말하자면 그것을 공개적으로 착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착용했다.

이 작고 가벼운 배지가 프랭크에게는 무거운 십자가였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착용함으로써 그의 마음속에 있는 체면을 깨뜨리고, 그리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그리스도의 샘물이 아닌 다른 것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얻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근위병으로서, 성심을 나타내는 작은 상징물을 공개적으로 착용하는 것을 명예와 특권으로 여기게 되었다. 1914년에 그가 특별히 도금된 개척자 회 배지를 마련한 것은 그런 의미가 있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그것을 자랑스럽게 착용했다.

 

치터스 랜에 있는 가베트의 조반 센터에서 눈에 띄는 곳에 걸린 것은 대형 예수 성심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프랭크에게는 특별히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75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그는 그 그림을 자랑스럽게 응시했을 것이다.4 그의 예수 성심께 대한 그의 신심은 강렬했고, 특히 1675년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주님이 발현하신 이야기에 깊이 감동했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가 성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영안 으로 그녀는 가시관에 둘러싸이고 그 위에 십자가가 있는 예수 성심을 보았다. 그녀는 그 일을 직접 기록하였다. “내 주님께서 당신의 놀라우신 부드러움과 성심의 비밀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내 가슴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 불타 올라 더 이상 그 사랑의 불길을 억제할 수 없다. 내가 담고 있는 보물로 인간들을 부요롭게 만들기 위해 인간에게 직접 알려야 한다.'” 또 다른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녀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의 성심을 보여 주시며 말씀하셨다. “인간을 그토록 사랑했지만 인간들로부터 별로 사랑을 받지 못한 이 가슴을 보라.”

이 메시지는 프랭크에게는 잊혀지지 않았으며 매일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감실 안에 계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 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아마도 그는 20년 동안은 자신의 기본적 의무를 훌륭하게 다했지만, 다소간에 종교를 이럭저럭 “갖추어야” 하는 일상적인 일로 보면서 주님의 제사에 무관심했던 것을 슬퍼했을지도 모른다. 1916년에 그는 어떻게 느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기도문을 썼다.

“하느님, 지나간 일들이 저의 마음을 덮쳐 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저를 당신께 완전히 바칠 것입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충실히 섬기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허송세월 한 지난 날들을 저에게 다시 주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 완전하게 보상하여 당신께 돌려 드리겠습니다. 오 예수여, 저도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은 제가 위대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큰 사랑을 받으시게 됨을 의미합니다.”5

그는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공부하고 기도했다. 특히 그는 성인들의 전기를 읽음으로써 자극을 받았고 헌신과 열정에 대한 훌륭한 본보기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성인들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진 성덕에 대한 산 가르침이고 실천입니다. 우리가 자주 성인들에 대한 책을 읽게 되면 곧 그분들의 자질을 본받게 될 것입니다.”6라고 썼다.

예수 성심에 대한 프랭크의 사랑이 강렬해진 것처럼, 이 신심을 장려하는 그의 열정도 커졌다. 그의 첫 소책자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볼 수 있는 보물을 다른 사람들도 맛보게 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먼저 주님을 마음속에 생생하게 모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신적인 모범을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의 엄하면서도 사랑이 넘치는 얼굴, 모습, 말, 행동을 하나하나 우리 머리 속에 떠올리면 애정을 가지고 그분에 대해 가장 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부드러움, 지혜, 순수함, 인내, 온화함, 그리고 온갖 변덕스러움과 불충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베푸시는 진실한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러러보고 공경하십시오. 또 자애로운 숨결이 우리 자신을 감싸도록 하십시오. … 그분 안에 있는 완덕의 보물은 보석함이나 박물관 안에 있는 세상의 보물들과는 다르며,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빛나고 있는 각각의 완덕은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분은 그것들을 진심으로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존중하고 갖기를 갈망하면 그것들은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 우리 주님과 그분의 품격은 거룩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성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지 좋은 의도를 가지고 그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고 우리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응시합시다. 이 관상에서 그분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새로 태어난 갓난아기 예수님의 얼굴을 처음 본 그날 밤부터 관상은 성모님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7

프랭크는 주님께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하신 참으로 놀라운 약속이 마음에 들었다. 아홉 번째 약속이 특히 그의 흥미를 끌었다. “내 성심을 나타내는 그림이나 성상을 모시고 있거나 공경하는 모든 가정을 축복하리라.” 그는 가정에서 성심을 공경하도록 열심히 권장했다. 냉담한 가정에 대한 사도직과 관련하여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집을 예수 성심께 봉헌하도록 만든다면 승리의 날은 이미 받아 놓은 것입니다.” 8 후에 그가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했을 때 그는 단원들에게 심지어 “희망이 없는” 경우에 처했을 때라도 그들이 가진 강력한 무기는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심 봉헌을 위한 가정 방문은 가장 풍부한 열매를 맺는 길잡이이다. 마리아의 사명은 예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므로 성심 봉헌을 전파하는 활동은 레지오 마리애에 특별히 알맞은 활동임에 틀림없다. 9

프랭크는 예수님의 열 번째 약속을 호소하였다. “나는 지극히 완강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은총을 사제들에게 주겠다.” “사제를 대신해서 방문하는 단원들에게도 얼마만큼은 이 말씀이 해당된다.” 10 더욱이 더블린의 많은 “제 멋대로인” 가정에 대한 자신의 사도직의 놀라운 결실은 그의 주장을 확실하게 입증했다. 프랭크 더프는 경험에서 말하고 있었다.

프랭크 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예수 성심께 대한 봉헌이 많은 영혼들을 위한 활동에 실제로 보다 큰 효과를 보장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한편,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효과적인 수단이 봉헌이라고 보았다. 성심께 대한 그의 사랑은 순수하고 사심이 없었다. “우리 마음은 가장 크고 순수한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건전한 사랑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사랑이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상이나 벌에 동기를 둔 사랑이라면 그 그릇은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그 그릇을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착한 목자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이기심을 초월하여 갖도록 합시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지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들을 바라서가 아니라 오직 그분을 이해 사랑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시는 그분의 크신 사랑에 순수하게 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수한 사랑이 우리 가슴속에 강해졌을 때, 그 사랑은 독수리처럼 높이높이 올라가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동경하는 바를 소화 데레사와 함께 다음과 같이 간절히 원하며 외칠 것입니다.

“예수여.. 예수여!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당신께서 결코 받지 못한 그러한 열렬한 사랑을 드리고 싶습니다.”11

 

 

 

6 1916년 부활절의 반란과 아일랜드의 시련기

 

1916년 4월 24일 월요일에 프랭크의 아버지는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왔다. 그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구나.” 하고 말했다. 실제로 부활절 반란이 그날 아침에 일어났다.

프랭크는 애국심이 깊은 가문 출신이었다. 가문의 전통에 따르면 그들은 1641년 반란에서 아일랜드를 위해 싸우다가 교수형에 처해진 휴 마기레 경의 직계 자손이었다. 프랭크가 어릴 때 어머니는 이따금 오빠를 찾아갔다. 그때 프랭크도 데리고 가곤 했다. 대화는 자주 프랭크의 외할아버지가 일한 구교도 해방 령을 주도한 위대한 다니엘 오코넬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그 해방 자는 그 가문에서 영웅으로 존경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정치적 자유는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이 무렵까지 어떤 이들은 무관심했고 외국의 지배 아래 살기로 체념했다. 또 다른 이들은 분개하고 끝까지 “적”을 물리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회원인 헤가티 씨는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였다. 자주 그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모임이 끝난 뒤 프랭크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갔고 그에게 신페인 운동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가담하도록 권했다. 프랭크는 거절했다. 첫째로 그는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매우 여러 가지 신심활동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그는 그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폭력에 관계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활절 전 얼마 동안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소문을 믿었다.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은 수적으로 완전히 열세였고 성공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부활주일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에 반란은 실제로 일어났다. 프랭크는 유혈 사태를 생각하고 매우 슬펐다. 그날 저녁 늦게 발포 소식을 들었다. 그의 마음은 번민과 고통으로 가득 찼다. 모든 면에서 우세한 영국군이 단시간에 그것을 진압할 수 있었고 그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반란 주도 자들의  운명을 걱정했고 친구 헤가티 씨를 염려했다. 그는 체포되어 런던 감옥에 갇혀 있었다.

다음 수요일에 프랭크가 빈첸시오회 회의에 나가는 도중이었다. 그가 댐거리에 이르렀을 때 신문팔이 소년들이 거기를 뛰어다니며 반란 주동자들이 처형되었다는 신문 머리 기사를 외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전율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소름 끼치는 사악한 격정이 그이 가슴속에서 격하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헤가티 씨가 처형되지 않고 곧 풀려났다는 사실에 다소 위안을 얻었다.

15명의 반란 주도 자들에 대한 즉결 처형은 아일랜드 민족을 자극하여 애국심이 불타는 민족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아일랜드에 있는 영국정부를 무너뜨리기로 작정했다. 독립전쟁은 1917년부터 1921년까지 계속되었다.

대담무쌍함과 작전으로 유명한 마이클 콜린스가 신페인 군대의 최고 정보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유능한 전략가였고 우세한 영국군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미국과 영국의 여론은 휴전을 요구했다.

영국 정부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아일랜드인들에게 독립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신페인 지도자들은 협상 대표를 런던으로 보내라는 영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프랭크 더프는 그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관리자로서 대표단을 이끌고 가서 위험을 내포한 여행에서 가능한 대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도록 선출되었다. 그것은 그가 신페인 지도부로부터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실례이다. 또한 그는 대표단의 보고서 작성을 도왔다. 그는 일급 공무원의 능숙한 솜씨로 이것을 처리했다.

며칠 후 프랭크는 동반한 아일랜드 대표단은 보트로 런던을 향해 출발했다. 위험이 내포되었기 때문에 각자는 연발 권총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프랭크는 거절했다.

런던 호텔의 접수계원은 숙박부에 F.S. Mitchell(미첼)이라고 서명한 젊은이가 사실은 프랭크 더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없었으리라. 안전을 위해서 대표단의 진짜 이름을 감추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물론 프랭크 자신은 협정의 정치적 측면이나 실무협상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빈틈이 없는 그는 대표단의 안전에 대해 요행수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표단 모두에게 호텔 숙박부에 서명할 때 가명을 쓰도록 했다. 그가 선택한 가명은 F. S. Mitchell(미첼)이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간의 협정은 1921년 12월 6일에 조인되었다.

새 정부 아래에서는 이전의 공무원들이 관대한 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조기 퇴직을 선택할 수 있었다. 프랭크는 그의 직책을 계속 수행하기를 원했고 이것은 장관의 호감을 크게 샀다. 국가공무원으로서의 그의 관록은 어려운 시기에 매우 필요했던 것이다.

프랭크는 또한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될 도 다른 임무를 받았다. 그의 상관들이 그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더프 씨, 마이클 콜린스 씨는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국군의 최고 지휘관입니다. 당신을 그분의 개인비서로 임명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조만간 포르토벨로 병영으로 가서 그분을 돕기를 바랍니다.”

이 두 사람 간의 만남은 대조적이었을 것이다. 강력하고 유능한 마이클 콜린스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약간 작은 체격에 온화하고 또 다른 면에서 유능한 프랭크의 모습은 대조를 이루었을 것이다. 마이클 콜린스는 프랭크가 그의 공무를 보좌하자 그처럼 유능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을 얻은 것을 매우 기뻐했다.

1922년 8월 22일 아침에 프랭크 더프는 늘 하던 대로 콜린스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프랭크, 난 오늘 코크로 여행을 갈 예정일세. 약삭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좀 도와주게.” 프랭크는 그렇게 했고 그를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것이 살아 있는 콜린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아일랜드 군의 위대한 최고 지휘관은 바로 그날 코크로 가는 도중에 사살되었다.

드럼콘드라에 있는 프랭크의 집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1916년 반란을 주동한 죄로 영국군에 처형된 제임스 코널리의 미망인인 코널리 부인이 그를 찾아왔다. 그녀는 이상한 얘기를 하면서 그의 충고를 들으려 했다.

별로 철저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인 머피라는 사람이 그의 세 어린 아들을 개신교 기관에 넘겨 주었다. 그 후에 그는 마음을 돌렸지만 개신교 기관은 그들에게 들어온 어린이들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후에 중풍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머피 씨는 그의 아들들을 가톨릭 기관으로 옮기기 위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말 속에 그는 코널리 부인과 퍼스 부인을 그의 세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정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코널리 부인은 가톨릭교로 개종을 했고 매우 독실한 신자였다. 그녀는 그 세 소년을 소위 말하는 “새 둥지”로부터 구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프랭크는 머피 씨가 그녀에게 준 서명된 문서가 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새 둥지”로부터 데려올 합법적인 권리를 그녀가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러나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기는 매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 것이라고 그녀에게 충고해 줬다.

“코널리 부인, 그 문제를 제가 처리하도록 해주시겠습니까?” 하고 그가 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더프 씨.”

택시 한 대가 병원 정문에서 좀 떨어진 고에 멈추었다. 프랭크 더프는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서 때를 기다렸다. 운전기사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세 어린 소년들이 가까이 와서 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들이 자신이 들은 인상 착의와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코널리 부인이 프랭크를 처음 방문한 후 그는 입원한 머피 씨를 찾아가서 그와 아주 친해졌다. 그는 머피 씨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 주고 “새 둥지” 의 관리자에게 가까운 시일 안에 아이들을 보고 싶다고 편지를 쓰도록 했다. 머피 씨는 그의 자녀들이 모일 모시에 그를 방문할 것이라는 회답을 받았다.

세 아이들이 아버지를 방문한 뒤 병원을 나오자, 프랭크는 그들을 붙잡아 택시에 태웠다. 택시 기사는 곧바로 아텐으로 차를 몰았고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형제 수사 회 수사들이 그들을 돌보았고 마침내 글라스네번에 있는 “가톨릭 계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그 곳에 정착했고 매우 행복해 했다. 그들 셋은 모두 훌륭한 가톨릭 신자로 성장했다.

 

 

세월이 흘렀다. 다시 한 번 프랭크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번에는 여러 해 전에 프랭크에 의해 “납치 되었던” 세 소년들 중의 한 명인 머피 2세였다.

“더프 씨, 당신이 저희에게 해주신 일에 대해 감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저를 기억하시겠지요?”

“물론 기억하고 말고. 그리고 우리가 자네들을 데리고 도망갈 때 자네들이 택시 뒤쪽으로 머리를 내밀면서 소리를 질러댔던 것도 기억하지” 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 동안 그들 둘 모두가 유쾌하게 옛날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 중요한 날의 모험을 되새겼다.

코널리 부인으로 말하자면, 그녀의 훌륭한 역할은 분명히 상을 받을 만했고 실제로 주님은 그녀에게 풍부한 상을 내리셨다! 그 후에 프랭크는 그녀를 유명한 더그 순례에 두 번이나 데려갔다.

 

 

 

7 하느님과 순수한 친교

 

그가 24세일 무렵, 프랭크 더프는 그의 존재의 밑바닥까지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믿음을 잃었다. “토요일 오후에 그는 화이트 프라이어 거리에 있는 가르멜 성당에 고백성사를 보러 갔다. 고백성사를 마친 후 그는 즉시 보속을 바치기 위해 높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때 사건이 생겼다. 갑자기 그의 신앙이 없어졌다! 단순히 의심을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믿음은 간단히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하느님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이제 삶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프랭크는 이 무서운 경험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자신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이러한 상태는 세상에 있는 지옥과 같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불신”의 상태가 직속되었는지를 계산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단 몇 분밖에 안 되었겠지만 그에게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사라진 만큼이나 재빨리 다시 돌아왔다. 하느님께서 그로 하여금 완전한 불신의 어둠을 경험하시도록 하신 것 같았다. 후에 그는 그러한 경험으로 신앙은 본래 하느님의 선물이며 그 누구도 인간의 이성으로만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전보다 더욱 깊이 깨닫게 됐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아마도 이 경험은 또한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해야 하며 결코 자신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앞으로의 시련에 대비해 그를 강하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리라.

프랭크가 생활 속에서 참으로 비범한 신앙을 발전시켰다면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열심히 노력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공부, 시련, 용감한 행동과 기도 등이었다. 특히 충실하고 참된 기도가 이 모든 것들의 핵심이었다.

대 성인이며 매우 경험이 풍부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한 영혼의 인도를 위해 계발된 유능한 영적 지도자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더욱이 그런 사제를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랭크 더프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운이 좋았다. 그는 정식 영적 지도자를 갖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았다. 그는 성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크나큰 도움을 주게 될 사람을 발견했다.

더블린의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 교회의 예수회 신부인 마이클 브라운 신부는 성덕으로 유명했다. 프랭크가 그에게 고백성사를 보고 영적 지도를 받으러 간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1915년 초부터 1922년 까지 프랭크는 다른 신부에게는 가지 않았다. 그는 때로는 고백성사가 아니라 충고를 듣기 위해 영적 신부를 찾아가곤 했다.

프랭크 자신의 말에 따르면, “브라운 신부님의 삶에 대한 생각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지 않으면서 일과 기도와 고행을 하며 방법상에 있어 기계적인 태도를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때로 나는 그분의 결정에 동의하기 어려운 점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분을 영적 지도자로 모시는 동안 항상 충실히 복종했고 결코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그 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그 때에 그분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브라운 신부와 만난 사람은 누구든지 즉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그분의 깊은 신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방향으로 길을 찾고 있던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프랭크 더프의 영적 발전에서 브라운 신부의 가장 큰 공헌은 의심할 여지 없이 기도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특히 “탁월한 기도인 성무일도 에 대한 이해”를 넓혀 준 것이었다.

1915년에 프랭크는 매일 성무일도를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가르멜 제3회에 입회했고 매일 복되신 마리아의 소성무일도 를 바쳤다. 1917년까지는 그 성무일도를 계속 바쳤다. 그 후 일반적으로 성무일도로 알려진 전 성무일도를 바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브라운 신부는 그것을 바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시편들과 성서 낭독은 프랭크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었고 기도의 필수적인 요소는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하찮음과 무가치성을 깨닫고 하느님의 무한하신 아름다움과 좋으심을 찬미하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야훼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다만 당신의 이름으로 영광되게 하소서”(시편 115).

프랭크는 그것을 “난 성무일도를 하느님과의 순수한 친교로 보았다” 고 요약했다.

1917년 성 니꼴라오 축일에 처음으로 전체 성무일도를 시작했다. 그것을 바치는 데는 세 시간이 걸렸다. 그는 그것이 매우 힘든 것임을 알고 포기했다. 그러나 며칠 뒤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참아냈고 평생 동안 매일 충실하게 바쳤다. 그가 성무일도서와 친해지자 곧 서두르지 않고도 1시간 30분 안에 충실하게 바칠 수 있었다.

프랭크는 여행할 때도 항상 일과기도서를 가지고 다녔다. 언젠가 레지오 단원들과 등산을 갔을 때도 그의 기도서가 주머니 속에 물론 들어 있었다. 그는 위험한 순간에 기도서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만일 사고로 다쳐서 병원으로 옮겨진다 해도 기도서를 가지고 간다면 안심이 될 것이라고 느꼈다. 얼마나 단호한 결심인가!

만년에 프랭크는 “1917년에 성무일도를 처음 바치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줄도 빠뜨린 적이 없다” 고 말할 수 있었다.

1914년(그때 그는 막 25세가 되었다.) 프랭크는 사순절 기간 동안 매일 아침 미사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것이 내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고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매일 미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프랭크는 종교를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공무원으로서 그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많은 사도직 활동에 참가했고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기도와 특히 감실 앞에서 드리는 기도에 바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마음을 모두 주님께 바쳤다. 그가 1914년부터 1922년까지 기도에 바친 시간은 정말 놀랍다. 하루에 거의 네 시간 이상을 기도에 바쳤다. 그리고 적어도 그 중 세 시간은 여러 교회에서 바쳤다.

그의 일상적인 “기도 시간표”는 이러했다. 매일 아침에 7시에 길모퉁이에 있는 레뎀토리스트회 수도원(그 당시 그는 드럼콘드라, 성 패트릭가 55번지에 살았다)의 미사에 나가거나 7시 15분에 역시 가까운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 교회로 미사를 보러 갔다. 이 마사 뒤에 그는 다음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그대로 남아 있곤 했다. 그는 교회에서 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점심시간에 사무실에서 재빨리 점심을 먹고 성체 흠숭 수녀 회인 마리아 레파라트리스 수녀원(Marie Reparatrice Convent)에서 “성시간”을 보내러 갔다.

그 다음 사무실에서 하루 일을 마친 후 또 다른 한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곤 했다. 그것은 보통 화이트 프라이어 거리나 클라렌던 거리에서 있었다. 이 모든 것에 덧붙여 적어도 집에서 한 시간을 기도로 보냈다.

프랭크의 친구가 어느 날 그에게 효과적인 사도직은 기도와 영성 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하는데, 그토록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그의 사도직의 핵심이냐고 물었다. 프랭크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의 기도생활은 모든 일들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미 대단히 많은 영성 서적, 특히 “성인들의 전기”를 읽었다. 성인들의 생애에서 기도에 대한 필요성은 완전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효과적인 사도직을 위한 기도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기도의 본질적인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의 경우에서 기도와 관련해서 일은 단지 “충전물”이었다고 말했다. 모든 시간을 기도에 바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도직 활동을 함으로써 2시간을 채웠다.

 

1916년 부활절의 반란은 조셉 가베트에게는 특이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반란에 대해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치터스랜 조반 센터를 문닫고 영국군에 다시 들어갔다. 조반 센터에서 음식을 얻어먹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제 다시 화이트 프라이어 거리에 있는 개신교 기관으로 몰려갔다.

프랭크는 당황했지만 포르토벨로 병영에서 군인들 사이에서 훌륭한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거기서 주일 기도 모임을 가베트 대신 주도했고 매주 정기적으로 강론했다. 부대 지휘관으로 가톨릭 신자가 된 박스터 특무상사가 이를 허락해 주었고 격려했으며 언제든 “설교를 하러” 병영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1918년 초 병영 내 병원에 있는 군인들이 코크 주 스파이크 섬의 군부대로 옮겨졌다. 바로 전 주에 프랭크는 특히 열심히 활동했다. 그리하여 이동하기 전 주일 미사에서 병원 내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했다.

이제 그들은 갔고 프랭크는 또 다른 “충전물”을 찾아야만 했다.

 

 

 

8 아침 식사비

 

가르멜 회 교회에서 여성 신심단체의 모임이 막 끝났다. 교회 문밖에서 사제는 부인들과 아가씨들이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사제는 외로운 모습을 한 사람이 거리를 내려오는 것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우리 구역의 미친 사람입니다.” 하고 사제가 말했다. 그 외로운 모습의 주인공은 프랭크 더프였다. 로사리오를 손에 들고 그는 화이트 프라이어 6거리에 있는 개신교의 개종 권유 센터를 감시하고 있었다.

신심단체 회원 중 한 명인 엠마 콜간은 그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녀는 “신부님, 그게 아니에요. 그 사람은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있는 거예요. 그는 저 곳을 반드시 문닫게 만들고 말 거예요” 하고 변호했다. 그 후에 엠마 콜간은 레지오 마리애에 최초로 가입한 단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프랭크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그의 충전물”을 발견했다. 개종권유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자 다시 감시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방법은 로사리오를 손에 들고 그 센터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다다가 들어가지 말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빵과 개신교 예배를 위해 자신의 종교를 배반하는 행위에 대해 짧은 설교를 했다.

이 일을 하는 데는 특별한 도덕적 용기가 필요했다. 그 당시는 “훌륭하고 실천적인 가톨릭 신자”란 단지 자신의 영혼만을 돌보고 다른 사람의 구원에는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했다. 또 주일마다 미사에 참석했고 대죄를 피했으며 대체로 말해서 뜨겁지도 차지도 않았다.

50년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분명하게 규정했다. “그리스도 신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도직에 부르심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2). “평신도는 사도직 수행의 권리와 의무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 받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3). “세계의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구원의 천상 복음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도록, 활동해야 할 영광스러운 임무가 모든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부과되어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3).

그러나 1918년에는 보통 가톨릭 평신도는 “형제들의 파수꾼” 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프랭크 더프는 뚜렷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고용인”이었다. 오늘날에야 그는 “그의 시대보다 앞서 태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이트 프라이어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냉담하게 또는 적대감을 가지고 그를 보았다. 그러나 프랭크는 그 센터에서 가난한 “고객들”에게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의 말을 듣고 거기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신앙심이 약하고 육체적으로 굶주린 이들은 단념시키기가 더욱 어려웠다.

 

프랭크는 옛날에 경험한 것을 생생하게 얘기해 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감시를 하고 있을 때는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내 일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개종 권유 센터로 들어갔지만 나는 편히 마음을 먹고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종종 “반발하는”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술에 만취한 군인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매우 취해 있어서 똑바로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난 그에게 말했지요. ‘당신이 가톨릭 신자라면 저 곳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개신교 예배에 참석하게 됩니다.’ 다음 순간에 난 그의 손에 칼이 들려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나를 찌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난 너무 놀라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매우 취해 있어서 목표를 잃었고 난 다행히 다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몸의 균형을 회복했지요. 그 작자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먹인 강타로 그는 벌렁 자빠졌습니다. 칼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고 난 그것을 집어서 그가 일어나길 기다렸습니다. 그가 일어나면 심하게 때려 주려고 했습니다. 다음에 심한 격투가 벌어졌습니다. 난 한쪽으로 밀쳐졌지만 반대편 객실 창에서 사건을 전부 보고 있던 한 여인이 그 자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녀는 그를 차고 때리고 머리를 잡아당기고 얼굴을 할퀴었습니다. 난 그토록 파괴적인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그것이 첫 번째 경험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도직에 따르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랭크는 참아냈다. 그러나 곧 그들이 완전히 굶주린 것을 알았을 때 차마 “그 곳에 들어가지 마시오”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부 보조나 연금이 없었다. 그러나 미드 거리를 올라가면 알퐁소 리안 신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아침 급식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계획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모두 3펜스씩을 내야 했다. 그래서 프랭크는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고객들”에게 조반 값의 남용을 막기 위해 티켓으로 주었고 그들을 리안 신부에게 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 고객들이 너무 많아서 그의 넉넉한 지갑으로도 못 당하게 되었다. 그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특별회의를 소집해서 그의 계획을 설명하고 조반 센터의 운영 비용을 도와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기꺼이 그런 가치 있는 계획에 자금을 조달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가톨릭 센터로 몰렸다.

개종 센터에 대한 감시는 6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 그 무렵 그곳을 이용하는 숫자는 17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래서 문을 닫았다. 남아 있는 17명은 메트로폴리탄 홀이라 불리는 또 다른 개종 센터로 갔다. 그 곳에서 임무가 매우 실망적으로 수행되고 있었지만 1,200명이 거기에 드나들고 있었다.

프랭크가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빈첸시오 아 바오로 임시 회의를 소집했을 때 그가 요청한 것은 주로 재정적 도움이었다. 그러나 모임이 끝났을 때 회원 중 한 사람인 톰 팔론이 그에게 다가와 감시하는 일을 함께 하겠다고 제안했다. 톰 판론은 교회의 큰 일꾼이며 조직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제안은 12개월 동안 혼자서 감시를 해 온 프랭크에게는 큰 힘을 주었다.

점차로 다른 사람들도 이 일을 돕기 위해 지원했고 프랭크는 메트로폴리탄 홀에 대한 감시 대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17년간 감시가 계속되었고 마침내 메트로폴리탄 홀 개종 센터는 “이용자의 부족”으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9 어머니

 

한편, 드럼콘드라에 있는 더프 가로 돌아가 보자. 아버지의 건강으로 인한 조기 은퇴로 프랭크는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다. 여동생 이사벨은 건강이 안 좋아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존은 학교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고 대학에 진학했다. 존은 곧 공무원이 되었고 법무성 서기 직에 올랐다. 존이 종교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프랭크의 걱정거리였다.

사라와 아이리스는 이제 10대의 소녀들이 되었고 프랭크는 그들도 대학에 진학시킬 여유가 있었다. 형제 중 막내인 아이리스는 프랭크가 가장 귀여워한 동생이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프랭크가 제일 먼지 안았고 또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걸음마를 가르쳐 준 사람도 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겨우 15세였다. 그래서 프랭크는 다정한 오빠 겸 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사라와 아이리스는 더블린 종합대학에서 우수한 학생이었고 둘다 의사가 되었다.

가족 상호간에는 놀라운 유대감이 있었다. 그러한 유대의 토대는 물론 신주하고 조용하며 다정다감한 더프 부인이 세웠다. 참으로 그녀는 훌륭한 아내이자 훌륭한 어머니였다.

이브가 죽은 후 더프 부인은 가족 중 아픈 사람이 생길까 봐 무척 염려를 하게 되었다. 또한 프랭크가 아홉 살 되던 해 유행성 열병으로 잃을 뻔했던 것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제 어머니는 남편의 악화되는 건강에 대해 더욱 많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남편을 간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려워하고 있던 날이 왔다. 여자로서의 직감이 남편이 평소보다 심하게 아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존, 정말 의사에게 가야겠어요.”

처음에 아버지는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마침내 부드러운 설득에 굴복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프랭크는 부엌에 있었고 의사가 진단한 것을 얘기하려고 아버지를 다른 방으로 부축한 것은 어머니였다.

“프랭크, 너의 아버지가 암에 걸렸단다”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확실한가요?”

“그렇다. 의사 선생님이 더 자세한 검사를 하러 두 명의 고문의사를 불렀다. 너무 확실해서 무섭단다. 사셀 네 아버지는 6개월밖에 못 사신다는구나.”

그 소식은 프랭크에게는 날벼락 같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훌륭한 가정, 건강하고 건전한 가정 교육, 스포츠와 야외 생활에 대한 취미, 문학과 예술을 배웠다. 그러나 지금 프랭크에게는 추억에 잠길 시간적 여유가 정말 없었다. 단지 인간의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리를 채웠다. 프랭크의 아버지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지나치게 종교적” 이라 불린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의사들은 “사형선고를 내렸다!”
아버지는 의사의 의견을 조용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고통을 겪었지만 용감하게 견디었다. 어느 날 프랭크와 단둘이만 있게 되었다. 프랭크가 10대 초였을 때도 아들의 성숙함과 지혜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도 자주 그의 의견을 듣곤 했다. 이제 다시 아버지는 그의 의견을 물었다.

“프랭크야, 어느 신부님께 갔으면 좋겠느냐?” 이 말은 프랭크의 무거운 마음을 다소 덜어 주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아버지는 신부님에게 갔고 마지막 날을 위해 훌륭한 준비를 했다. 그의 죽음은 거룩했다. 그는 1918년 12월 23일에 선종했고 3일 후에 매장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2년 뒤 프랭크는 다트마우스 스퀘어에 있는 집을 샀다. 그것은 51번지에 있었다. 공간이 넓고 아름답게 위치한 집이었다. 프랭크는 특히 어머니를 위해 기뻐했다. 어머니가 그것을 좋아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사벨을 위해서도 다행이었다. 그녀는 건강이 상당히 나빴고 프랭크는 진심으로 그녀를 동정했다.

물론 프랭크 자신에게도 이상적이었다. 그는 이제 근무처에 상당히 가까이 있었고 다방면에 걸친 사도직과 영적 활동 구역에 가까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프랭크가 그의 모든 신앙심을 어디서 찾아냈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와 프랭크 간의 유대는 참으로 특별했다. 어머니는 그를 위해 무엇이든 했을 것이고 또 그도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했을 것이다.

때때로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그가 “항상 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오래 된 신빙성” 이라고 부르곤 했다.  “우리 어머니는 당신의 말이 얼마나 내 마음속 깊이 새겨졌고 내 사고에 영향을 주었는지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난 그런 칭찬을 소중하게 여겼고 그 칭찬대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하고 후에 그는 시인했다.

그가 생전에 한 후회 중의 하나는 어머니를 그토록 자주 혼자 있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활동은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갈 수 없게 했다. 또한 밤이 아무리 늦어도 어머니는 항상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21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상당한 봉급을 받았고 휴일에 어머니를 파리에 모시고 갔다. 실제로 매년 그는 어머니를 런던에 모시고 갔다. 그 곳에서 아주 상냥한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호텔을 발견했다. 그 곳은 아주 안락하고 공원에 가까이 있었다. 그들은 함께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고 극장에 가고 쇼를 보러 가곤 했다. 어머니는 그냥 가게들을 둘러보기를 좋아했다. 그는 휴일마다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물론 당시 더블린에는 다섯 개의 극장이 있었고 훌륭한 배우들이 하는 좋은 연극을 볼 수 있었다. 토요일 밤마다 프랭크는 어머니와 함께 극장에 갔다. 후에 그의 청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영화관으로 바꾸었다.

프랭크는 만년에 어머니에 대해 회상하기를 좋아했고, 기회가 닿는 대로 어머니를 모시고 다는 것은 의무감에서 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아니, 그것은 그에게는 순수한 기쁨이었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그의 가장 가깝고 좋은 친구였다. 그리고 생애에서 그의 훌륭한 위안 거리 중의 하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어머니가 그의 옆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어머니께 의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 역시 항상 그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서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이 놀라운 관계를 통해 프랭크가 진정한 모성애의 의미와 아름다움에 대한 놀랍고 풍부한 통찰을 얻은 것이 확실하다.

 

 

 

10 참된 신심

 

청년 시절 프랭크는 평범하고 약간 무심한 신자였다. 그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켰고 규칙적으로 주일 미사에 참여했다. 또 성모님께 대해 감상적 신심이라 불릴 수 있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성모님께 대한 신심의 기초에 대한 적절한 이해도 못 했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진정한 인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후에 크랭크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큰 은총이라고 여긴 일은 이미 1918년에 일어났다 그는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가 쓴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이란 소책자를 손에 넣게 되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모임이 끝난 어느 날 저녁 프랭크는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른 회원들은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서성거리면서 열심히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 한 가운데에는 몽포르가 쓴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의 사본을 손에 든 빈센트 켈리가 서서 그 책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었다 프랭크는 정리를 마치고 그 속에 끼어들었다. 토론은 이럭저럭 끝났다. 그러나 그는 빈센트 켈리가 그 책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며칠 뒤 프랭크는 그 책의 사본이 리페이 강변 헌 책방에 나와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4펜스를 주고 그 책을 샀다.

그 책을 읽고 그는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했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께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치웠다.

하느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는 이제 이 사람이 어떻게 훌륭한 선교를 위해 준비되고 있었는지 보게 될 것이다.

성모님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시고 그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누군가 필요하다면 훌륭한 약속을 한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의 신앙은 이미 시험되었고 부족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의 생활은 하나의 기도였고 불굴의 용기와 신념을 가진, 아마도 지금까지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 무렵 화이트 프라이어 6거리의 개종 권유 센터를 감시하는 일에 함께하던 톰 팔론이 어느 날 물었다.

“프랭크 씨,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이라는 몽포르의 책을 읽어 보았습니까?”

“예, 읽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름다운 글이지만 너무 과장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제대로 읽지 못했을 뿐이에요. 돌아가시거든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반드시 그 책의 근본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프랭크에게 그 책을 반복해서 읽어 보라고 했다. 프랭크 자신의 말로, 결과는 훌륭했다.

“난 마지막으로 억지로 읽고 있었다. 그때 하느님의 돌보심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 일어났다. 일종의 빛처럼 그 책이 진실이라는 느낌이 갑자기 왔고, 비현실적이라고 여겼던 것이 충분히 증명되었다는 신념이 생겼다. 이 책에서 내가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내 자신 속의 부족한 점인 지식과 이해의 넓은 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이 내 마음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물론 프랭크는 이미 성모님께 대해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는 규칙적으로 성모님께 기도 드렸다. 1964년 7월에 그는 교황 바오로 6세 께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털어 놓았다. “저는 1914년 이래로 매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로사리오 기도 5단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1918년에는 그의 지식 가운데 이러한 틈들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신앙은 강했지만 이제 성모님에 대한 신학을 공부함으로써 그것을 뒷받침해야 할 의무를 깨달았다. 성모님께 대한 그의 신심이 실제로 그분께 부여된 자격에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그의 마음속에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필요로 하는 배경 지식인 신학을 어디서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든 어디서든 그는 몽포르가 그리고 있던 그 지식을 습득해야 할 것이 틀림없었다.

멜러리 산 수도원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자들이 그를 구하게 될 것이다.

 

 

멜러리 산 수도원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시토회 수도원이다. 그것은 티퍼러리와 워터포드 사이의 노크밀다운 산의 경치 좋은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 수도원의 광활한 농장과 숲은 원래 그 산의 일부였고 리챠드 킨 경이 1832년 2월에 그 곳에 온 최초의 수도자들에게 기증했다.

새로운 토대는 점차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수도자들은 메마르고 이끼 낀 땅을 개간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서서히 수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멜러리 주변 농가들은 매우 가난했고 많은 농부들이 가족을 부양할 양식을 구걸하러 수도원을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자들은 기꺼이 그들이 가진 것을 없는 이들과 나누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가난한 사람이 모습을 바꾼 그리스도였다.

수도자들의 일상생활은 기도와 일과 고행의 생활이었다. 그들의 사명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좋으심과 사랑을 찬양하고 영광을 드리는 것이었다. 수도원의 규칙은 정신의 산만을 줄이고 기도하기에 좋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매일 많은 침묵의 사간을 규정한다.

1919년 10월의 서늘한 저녁에 프랭크 더프와 조셉 가베트 두 사람이 이 곳으로 들어갔다.

가베트는 막 영국군에서 제대했다. 프랭크는 그를 찾아갔다가, 그가 개척자회 약속을 깨뜨리고 술에 만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그를 돕기 위해 이 문제를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두 친구 스위니 씨와 랠로 씨에게 의논했다. 그들은 “프랭크 씨, 그를 멜러리 산으로 데려가세요” 라고 말했다. 그 수도자들이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그들의 “약점”을 극복하도록 도왔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프랭크는 이미 시토회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시토회의 창설자인 베르나르도 성인을 깊이 공경했다. 그는 수도자들의 생활에 대한 것은 무엇이든 읽었고 그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수도자들은 인간적인 면이 조금도 없을 거라고 간주했다. 그 산기슭에 있는 그들의 수도원에서 실제로 며칠을 보낸다는 생각은 그에게는 정글을 탐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모험적이었다.

그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더블린을 출발해서 마지막에는 구식의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했다. 그 당시에는 그러한 모습을 아일랜드의 시골 생활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저녁이었다.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수도원의 뾰족한 첨탑과 건물의 윤곽을 불 수 있었다. 후에 언제나 프랭크는 그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회상했다.

그들은 접대 수사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수도원 스타일”의 간단한 수프를 대접받았다. 프랭크는 극히 “편안하게” 느꼈다.

다음날 그는 일찍 일어나서 소성당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수도자들은 그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정말로 이 세상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들이 한 줄로 소성당에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약간 여유 있게 서두르지 않고 걸었다. 수도자들은 체격이나 모습, 혹은 표정에서 달랐지만 모두가 고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프랭크는 그들이 모두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거룩하고 기도에 매우 열중하고 있고 하느님께 가까이 간 것처럼 보였다. 그는 확실히 그들과 그들의 관상생활을 부러워했지만 자신은 결코 함께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깊이 인식했다.  이전에도 그는 결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소명이 성직이나 수도 생활에 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의 소명은 다른 방식의 선교였다. 그는 그 선교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선교가 자신의 소명이라고 확신했다.

아침 식사 후 몇몇 수도자들이 가베트를 잘 보살펴 주었다. 그는 그들의 지시를 잘 따랐고 놀라운 진척을 보여 주었다.

한편 프랭크는 연못가에 있는 길, 숲, 정원들, 언덕들 등 수도원 구내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연 그대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것 같았고 거의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 영혼이 성덕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신성한 정원 같았다.

브렌단 신부는 훌륭한 접대 수사였다. 그는 프랭크와 함께 정원을 거닐었고 영적인 것에 대해 얘기했다. 브렌단 신부가 물었다. “더프 씨, 책 한 권 드릴까요?” 수도원의 도서관에는 영성서적들을 잘 구비하고 있었다. 프랭크가 대답했다. “예, 성모님에 관한 책을 갖고 싶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너무 심오하지 않고 성모님의 위치를 잘 설명하는 신학 서적이면 좋겠습니다.”

그 신부는 드 콘실리오 신부가 쓴 <마리아의 이해(The Knowledge of Mary)>라는 책을 가지고 왔다. 그 책은 신비체 안에서 성모님께 탁월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러한 것에 굶주리고 있던 프랭크는 즉시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난 즉시 그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가 찾던 것임을 알고 굉장히 흥분했다. 그것은 몽포르의 책에서 놓친 ‘토대’였다. 그것은 몽포르의 책이 당연하게 여긴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학이 여기 있었다.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들어간 이래로 신비체에 대한 그의 인식은 크게 발전했지만 그 교리가 여전히 상당히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새로 발견된 책을 읽으면서 그는 그 실체가 압도시킬 만한 것이며 믿을 수 없게도 성모님이 그 열쇠라는 것을 보았다. 물론 예수님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구원의 중재자 내지는 구원을 완성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계획 속에 성모님을 당신의 협력자로 포함시켰다. 그분은 태초부터 세말까지 당신의 구속 사명에 성모님을 개입시키셨다.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 그분은 당신의 전체 계획이 성모님의 특별한 사랑과 충성에 맡겨지도록 정하셨다. 하느님의 그 설계에 우리 자신이 복종하는 정도에 따라 우리의 공적은 평가될 것이다.

멜러리에서 돌아온 그날부터 프랭크는 영어로 되어 있건 프랑스어로 되어있건 간에 성모님에 관한 책을 모두 읽었다. 그는 그러한 책들 속에 있는 모든 사상을 흡수하고 소화했다. 그는 그 책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남은 생을 성모님께 대한 적절한 이해를 전파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성모님을 공경함으로써 그들의 감사를 표하도록 가르치는 데 바쳤다.

 

 

 

 

11 매틀 탈보트와 다른 사람들

 

기쁨과 흥분이 있었고 축하 연설이 있었다. 청년 찰리 앤드류스는 방금 결혼했고 결혼식 피로연은 프랭크 더프의 집에서 했다.

더프 부인은 프랭크의 여러 친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데 익숙해 있었고, 이 친구들 가운데는 찰리와 그의 신부처럼 가난한 사람 중의 가난한 사람도 있었다.

매우 많은 결혼 피로연이 더프 가에서 열렸다. 그리고 더프 부인의 음식 솜씨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찰리 앤드류스는 프랭크가 그를 위해 한 일에 깊이 감사했고 그를 존경했다. 어느 날 프랭크와 얘기하는 중에 “더프 씨, 우리 아저씨인 탈보트 씨를 아세요?” 하고 물었다.

프랭크는 모른다고 했다.

“그분은 매트 탈보트 씨인데 성덕으로 명성을 얻고 있으며 환시를 본답니다” 하고 찰리가 말했다. 프랭크는 그 말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날 우연히 그래프톤 거리에서 친구 랄프 오캘러한을 만났다. 찰리의 삼촌인 매트 탈보트가 화제에 올랐고 랄프가 매트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요. 매트하고 친구지요. 사실 우린 서로 자주 왕래를 하지요. 우리 아주머니 댁에 묵고 있는 매트를 당신도 알 겁니다” 하고 랄프가 말했다.

그리하여 그래프톤 거리에서 프랭크는 매트 탈보트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매트 탈보트는 1856년 5월 2일에 더블린의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 12세가 되었을 때 그는 술집에서 일했다. 불행하게도 그곳에 오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공짜로 술을 주었고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후에 그는 막노동자로 일했고 임금의 대부분을 술을 마시는 데 써버렸다.

그럼에도 매트는 항상 순수했고 버릇 없거나 음탕한 말을 쓰지 않았다. 그는 항상 아침 기도를 바쳤고 주일 미사에 참례했고 성모님을 공경했다. 그러나 그는 차츰 종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성사를 그만두었다. 술을 마시면서 싸우기를 좋아했고 저주를 퍼붓고 욕설을 하곤 했다.

그 후 그는 회개를 했다. 어느 날 그는 3개월 수련기간용 개척자회 배지를 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미사에 나가서 영성체를 했다.

질질 끄는 어려운 투쟁이었지만 그는 매일 미사와 로사리오 기도와 고행으로 참아냈다.

그때 운 좋게도 여주인의 조카인 랄프 오캘러한을 만났다. 빈첸시오회의 모범적 회원인 랄프는 매트에게 큰 관심을 가졌다. 아주머니로부터 매트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매트가 잠자는 판자 침대를 보여 주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자신도 매일 밤 그런 판자 침대에서 자기로 했다.

매트는 때때로 랄프의 집에 영적 토론을 하러 왔다. 랄프가 그에게 빌려준 영성 서적들 가운데는 몽포르의 저서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도 있었다. 이 책은 매트에게 풍부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성모님께 대한 그의 사랑을 강렬하게 했다. 또 성모님과의 일치를 심화시켰다. 그는 그 책에서 이런 글귀를 읽었다. “자신을 성모님 안에서 예수님의 노예로 바친 사람이 그들의 사랑의 굴레의 표시로 특별한 축복이 내린 작은 사슬들을 몸에 지니는 것은 영예롭고 높이 찬미할 만하다”(2부 3장).

매트는 실제로 그러한 사슬을 몸에 둘렀다. 그 사슬들은 그가 복되신 성모님의 사랑의 노예가 되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후에 그는 친구인 존 구닝에게 사슬에 몸을 감는 것은 “그를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들어올리는 것이다”고 했다.

이 놀라운 사람에게 대한 랄프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매료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매트의 성성도 발전했다. 그의 기도 생활, 고행, 영웅적 덕행, 하느님과의 일치의 정도는 참으로 놀랄 만했다.

그의 건강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나빠졌다. 충실한 친구인 랄프는 병원으로 그를 방문했고 후에 다시 초라한 거처로 돌아왔을 때 그 곳으로 찾아왔다.

매트 탈보트는 1925년 6월 7일에 미사에 나가다가 세상을 떠났다.

매트의 죽음에 대해 들었을 때 프랭크는 영웅적인 덕을 쌓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그대로 잊혀지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랄프 오캘러한을 요셉 글린 경에게 데려가서 소개했다. 요셉 경은 랄프의 말에 매우 감동되어 매트의 생애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전기를 쓰기로 동의했다.

그 다음 프랭크는 요셉 경을 매트 탈보트의 누이인 앤드류스 부인에게 데려갔었고 그녀는 기꺼이 상세한 자료를 제공했다. 그의 오빠인 매트의 덕행에 대한 정당한 자랑은 별문제로 하고라도 프랭크가 그녀의 아들 찰리에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그녀는 매우 기뻐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요셉 글린 경은 1928년에 <매트 탈보트의 생애>를 출판했고 이 거룩한 사람의 놀라운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다.

 

더프 여사는 더블린에 살고 있는 오빠가 신앙을 버린 데 대한 걱정을 했다. 이제 그는 병이 들었다. 그녀는 올케에게 말했다.

“오빠가 무척 걱정스러워요. 오빠는 성사를 받지 않았어요.”

“사실, 나도 수잔의 근심을 잘 알아요. 오빠가 쇠약해진다면 싫어하든 좋아하든 간에 그를 신부님께로 ‘모셔 갈’ 테니 안심하세요.”

“정말 고마워요. 그렇다면 내 마음이 편안해질 거예요.”

물론 프랭크도 삼촌에 대해 매우 걱정을 했다. 그는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지만 가까운 친척에게 영원한 구원에 대해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때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졌다. 아저씨는 약간 회복되었다가 다시 악화되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는 매우 아파서 “24시간 내내”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아, 주님께서 나를 그분께로 인도하셨구나” 하고 프랭크는 확신했다. 그는 모든 사실을 절친한 친구인 로빈슨 신부에게 말했고 그의 아저씨를 방문해 달라고 청했다.

“신부님, 아마 성공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일단 시도라고 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신부님을 청했다고 저희 아저씨께 말해도 됩니다.”

로빈슨 신부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다음날 로빈슨 신부는 프랭크에게 전화를 했다. 프랭크는 밤새 열심히 기도를 드렸지만 그 신부님이 어떻게 일을 추진하고 있었는지를 감히 묻지 못했다.

“프랭크 씨, 아주 좋은 소식이 있어요. 당신 삼촌께 성사를 주었어요.”

오! 그 안도와 기쁨이란! 그 후에 프랭크는 이렇게 말했다.

“내 생애에서 기뻤던 순간들 가운데서 이번이 가장 기뻤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그는 병원으로 아저씨를 방문했다. 삼촌은 그를 보자 매우 기뻐했다.

“프랭크, 네 친구인 로빈슨 신부님이 나하고 같이 있었단다. 그분은 아주 친절하더구나. 그분이 나에게 성사를 주었단다. 이제 내 마음속에 있던 아주 큰 짐이 없어졌단다.”

그 순간까지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은 데 대한 삼촌 스스로 얼마나 오랫동안 걱정을 했는지를 미쳐 깨닫지 못했다.

삼촌은 대략 일 주일 후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 동안에 그는 매일 영성체를 했다. 그리고 저녁마다 그를 담당하고 있는 세 간호원들과 같이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다.

 

더프 부인은 런던에 또 다른 오빠가 있었는데, 프랭크와 함께 런던에 갈 때마다 그 곳에서 며칠씩 머무르곤 했다. 그들은 그 삼촌 역시 종교 생활을 완전히 포기한 것을 알아차리고 가슴 아파했다.

그러던 중에 그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이 왔다. 프랭크는 어렵지만 그 삼촌이 성사를 받도록 다시 한번 노력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더블린에 있는 그의 삼촌이 한 말, 즉 “내 마음속에 있던 큰 짐이 없어졌다”한 말이 프랭크의 머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프랭크는 아저씨께 편지를 썼다. 진지하지만 부드러운 어조로 그는 종교 문제에 간섭한다고 마음 상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썼다. “어머니와 저는 삼촌께서 성사를 받지 않고 돌아가신다면 매우 슬플 것입니다” 하고 간절하게 적었다. 그리고 즉시 그 편지를 부쳤다. 그 날은 성 금요일이었다.

회답이 없는 채 한 달이 지나갔다. 그 문제의 심각성과 우려 때문에 그 동안 프랭크는 매우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프랭크의 염려에 감사하며 불쾌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답장이 도착했다.

그 편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진지한 문제에 대한 너의 편지에 왜 내가 마음이 상할까 봐 걱정하겠니? 더욱이 난 네가 걱정을 해주고 나의 건강에 관심을 가져 주어서 기쁘단다. 그러나 나도 바울로 사도처럼 신앙 생활을 해왔으니 안심하여라.”

그러나 프랭크는 안심하지 못했다. 아저씨의 편지에는 성사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었다.

모든 것, 특히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철저한 프랭크는 영국에 있는 리폴리 신부께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리폴리 신부는 삼촌의 집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수 고난회 사제의 도움을 받아 병자 방문에 성공했고 그에게 성사를 주었다. 성체를 통해 보다 확고한 신자가 되어 삼촌은 그 뒤 곧 영원한 삶으로 들어갔다.

 

 

 

12 레지오가 탄생하다

 

엘리자벳 커윈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점신 시간에 마리아 레파라트리스 수녀원의 소성당을 찾는 것이 그녀의 일상 습관이었다. 그 곳에는 성체에 대한 끊임없는 경배가 있었다. 그 수도원은 그녀가 일하는 곳의 모퉁이에 있었다. 그녀는 이 작은 소성당에 들어갈 때 자신의 작업용 앞치마를 결코 벗지 않았다. 그녀는 주님께서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었다.

지금 그녀는 마음속에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알고 있지만 정말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몰랐다. 그녀는 “인생의 올바른 길”로부터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를 충분히 깨달았다. 그녀는 틀림없이 “하느님의 방식은 얼마나 오묘하신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엘리자벳 오루글린은 뉴질랜드 더네딘에서 가톨릭 가정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륙가였다. 그녀가 아홉 살 때 가족들은 오스트랠리아 멜버른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몇 년 후 런던으로 와서 간호원 교육을 받았다. 런던에서 그녀는 자신의 종교에 대해 냉담해졌고 곧 종교에 대한 흥미를 모두 잃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 속에 그녀를 위해 특별한 자리를 준비하셨다. 그녀는 더블린으로 와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존 커윈과 결혼했다.존 커윈은 직업이 가로등 점등부(點燈夫)였다.

그 당시 더블린 시가지에는 가스등이 있었다. 가스등의 등대는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었으며 시 중심가는 특히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낮이 끝나고 밤의 그늘이 도시 위에 펼치는 저녁 무렵이면 그 점등부가 오른손에 길고 가벼운 장대를 든 채 자전거를 타고 신비스러운 유령처럼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각 램프마다 멈춰 서서 오른팔을 올려 막대로 가스등을 켠다. 그는 어둠을 가로질러 가면서 그가 지나간 자리에 백열등의 사슬을 남긴다. 그리고 나서 별들이 깜박이는 새벽의 어스름한 빛 속에서 충실한 점등부의 모습을 윤관만으로 다시 볼 수 있다. 그는 잠든 도시의 거리를 조용히 다니면서, 하느님께 그 도시를 새벽의 찬란한 햇빛으로 축복해 주실 때 램프들을 차례차례 끈다. 오늘날 나이든 시민들은 가스등이 켜지는 거리와 늙은 점등부들이 있던 낭만적인 때를 향수에 젖어 회상하곤 한다.

그러나 프랭크 더프는 후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존 커윈이 매일 점화시킨 불 중에서 제일 중요한 불빛은 아내의 꺼져 가는 영혼에 다시 붙인 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아내에게 아직 남아 있는 신앙의 불씨에 불이 타도록 숨을 불어 넣는데 성공했다.

존 커윈이 죽었을 때 아내 엘리자벳은 약간 궁핍한 처지였기 때문에 집에서 가깝고 수도원 소성당에서도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는 사무실의 청소부로 취직했다. 그녀는 그 일에 만족했다.

이 특별한 날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에 그녀의 “문제”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해결책은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가까이서 무릎을 꿇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세련되고 잘 차려 입은 젊은이를 다시 한 번 힐끗 보았다. 그가 매일 이 소성당에서 점심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또한 그의 이름이 더프이며 공무원으로 책임 있는 자리에 있고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일원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성당을 나왔다. 그리고 입구에서 그를 기다렸다. 더프 씨가 나오자 그녀는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또한 자신의 “사정”을 얘기했다.

“더프 씨, 도움과 지도가 필요한 사람을 몇 명 알고 있지만 전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제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제 대신 그 일을 맡아 주시겠어요?”

프랭크는 꽤 놀랐다.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았는지에 놀랐지만, 곧 자신과 조셉 가베트와 그토록 친하게 지냈던 포르토벨로 병영의 군목인 오루글린 신부의 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커윈 부인이 그에게 다가온 것에 기뻤다. 그녀는 75세 정도 되어 보였다. 그녀는 겸손했지만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꺼이 부탁 받은 문제를 처리하기로 동의했고 며칠 뒤 그녀의 작은 집으로 찾아가서 그 문제를 성공적으로 처리했다고 알려 주었다.

 

1917년 무렵 미라의 성 니꼴라오의 빈첸시오 협의회에 가입한 회원들의 수는 매우 많아서 두 개의 협의회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새로 세워진 것은 성 패트릭스 협의회라 불렀고 프랭크 더프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바로 그 해 빈첸시오회는 “마이러하우스”로 옮겨 갔다. 그 곳은 키오프 부인이라는 자비심 많은 부인이 프랭크 스위니에게 선물로 기증한 곳이었다. 이 널찍한 빌딩은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다양한 사업을 하기에 충분한 공간을 제공했다. 프랭크 더프의 협의회인 성 패트릭스 협의회는 다양한 요구를 받아들여 곧 많은 새로운 사업을 도입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방치된 어린이들에게 종교를 가르치기 위해 교리 수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절대금주 개척자 회관을 열었고 그 회원들을 모집했다. 또한 매일 미사 참례를 권장했다. 그들은 가정에서 성심 공경을 하도록 권장했고 갈색 성의를 착용하도록 권했다. 프랭크가 이러한 창의 뒤에서 영감을 제공하는 추진력이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믿기 어려운 것은 평신도들에 의해 광범위한 분야에서 다양한 영적 사도직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들 중 몇 가지는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위해 설정되었고 일의 특성상 여성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여성들이 빈첸시오회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프랭크는 모든 모험적인 사업에서 그의 영감과 조직력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는 불빛이었다. 지원자들 중에는 이미 치터스랜 조반 센터 사도직에서 조셉 가베트와 프랭크를 도왔던 소녀들도 다수 있었다.

다양한 활동을 조정하고 감독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 관리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프랭크는 월례 회의를 주재하고 운영할 능력잇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커윈 부인을 생각했으며 곧 그녀를 방문했다.

“커윈 부인, 우리는 마이러하우스에서 교리 수업, 청년 활동 등과 같은 다수의 사도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오셔서 우리를 도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도움이 된다면 저도 기쁠 거예요. 더프 씨.”

 

 

그 후 4년 동안 이 월례 모임은 마이러하우스에서 열렸다. 지역 보좌 신부인 토허 신부가 참석했다. 여기서는 성모송 대신에 로사리오 기도를 바친 것 외에는 빈첸시오회의 협의회 모임 때의 기도와 같았다.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에 관한 몽포르의 책이 이야기되었을 것은 필연적이리라. 프랭크는 이 책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책에 관심을 가졌고 많은 질문을 했다. 마침내 이 책과 몸포르의 가르침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특별한 모임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월례 모임에서 나왔다. 그리고 날짜를 정했다. 프랭크는 그 주제에 대해 얘기했고 토론했다.

후에 프랭크는 이렇게 썼다. “‘참된 신심’ 모임과 다음 월례 모임에서부터 레지오의 임시 회의간의 연결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너무나 많은 초자연적인 설계가 있었고 인간의 계획은 너무나 적었다. ‘참된 신심’ 모임이 열릴 때까지 거의 4년이 자나갔다. 그리스도교적 조직 안에서 성모님의 진짜 크기를 사람들 속에 세원 그 순간 모든 것이 레지오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참된 신심’ 모임 후 17일 이내에 레지오 마리애가 탄생했다. 매트 머레이가 관리기관 모임에서 평상적인 보고를 할 때 그는 자신이 방문한 더블린 유니온 병원에 대해 매우 인상적인 보고를 했다. 그 당시 병원에 대한 사도직은 남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매트의 보고는 모든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모임이 끝난 뒤 몇몇 부인들이 전통적인 “다과”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두 명의 부인이 토허 신부와 프랭크에게 와서 물었다. “여자들도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예, 물론입니다” 하고 프랭크가 대답했다. “이 일에 더 많은 여성들이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두 부인은 참석한 다른 부인에게 “의견을 들으러” 돌아다녔다. 몇 분 뒤 그들은 “이미 일곱 명을 확보했어요” 라고 결과를 밝혔다.

첫 모임은 다음 수요일 저녁 8시에 열기로 합의했다. 그날 저녁이 성모님의 탄생 축일 전야라는 사실은 아무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후에 누군가 그 사실을 지적했다.

그래서 1921년 9월 7일 저녁 8시에 15명이 모였다. 그들은 토허 신부와 프랭크 더프와 13명의 여성들이었다. 여성들의 대부분은 상당히 젊었다. 그것이 레지오 마리애 최초의 모임이었다.

프랭크 더프가 방에 들어섰을 때 그는 탁자 위에 무염시태의 성모상이 있고 그 주위에 꽃과 촛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기뻤다. 오늘날 어느 레지오 모임에서나 그와 꼭 같은 광경을 볼 수 있다. 물론 벡실리움은 후에 고안되어 첨가되었다. 놀랍게도 레지오 제대와 성상의 설계는 미리 의논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먼저 온 알리스 키오프가 스스로 꾸며 놓은 것이었다.

더욱이 첫 레지오 제대에 있는 성상은 조셉 가베트가 사서 치터스랜 조반 센터에 세워 주었던 바로 그 성모상이었다.

그날 저녁 레지오 제대에 있는 그 성모님의 모습은 프랭크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남은 생애 동안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했다. 번개처럼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즉, 새로운 단원들이 함께 모인 후 성모님을 그들과 함께 하도록 초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이 그들보다 먼저 그 곳에 계셨고 그들을 받아들여서 당신께서 그들에게 봉사하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 그들은 단지 한 단체를 만들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봉사하기 위해 가고 있었다. 그 성모상은 항상 그들에게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으리라.

처음에 이 새 단체는 “자비의 모후회”라 불렀다. 그리고 후에 레지오 마리애로 바뀌었다.

출발 때부터 단원들은 평신도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사목적 사도직에 착수했다. 그 당시에는 그에 대한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몽포르의 참된 심심에서 배운 것을 생활 속에서 결합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말로써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성모님께 봉사하는 실천적 봉사가 강조되었다. 그들이 만나는 모든 이들 안에 계신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 봉사함으로써 성모님께 봉사하려고 했다. 그들은 병원에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환자들에게서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보았고 혼자 사는 사람들 속에서 외로우신 그리스도를 위로하려고 했으며 그들이 만나는 모든 청소년들에게서 소년 예수를 만나려고 했고 모든 죄인들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했다.

더욱이 그들은 레지오 제대에 있는 성상을 볼 때마다 특별한 사명을 위해 그들을 파견시키시는 예수님의 어머니 시라는 것을 기억하려고 했다. 그들은 성모님께 의지하려고 했으며 성모님과 거룩한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진군 나팔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성모님의 봉사에 함께” 라고 불릴 수 있다.

최초의 단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그 모임에서 가장 가난하며 나이가 많은 엘리자벳 커윈이었다.

 

 

 

 

13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다

 

레지오 단원들이 처음으로 착수한 사도직 사업은 성 케빈 병원으로 알려졌고 자비의 수녀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더블린 남부 구빈원의 병자들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초기부터 온갖 종류의 사도직 사업에 착수하리라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안건 중에서 더블린 시의 매춘부들의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당시 더블린 시에는 상당히 대규모의 매춘이 행해지고 있었다. 지독한 가난, 섬뜩하게 하는 빈민굴과 더블린이 항구 도시라는 점이 그것을 촉진시켰다. 모든 항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 곳에도 달갑잖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놀랍게도 매춘의 문제는 더블린이나 다른 곳에서도 그 이전에 결코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이 없었다. 매춘 문제는 구제하기 어려운 사회 문제로 간주되었다.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어떤 노력이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은 매춘을 특별한 지역에 제한하는 것에 그쳤다. 그 주제가 거론된 때마다 산을 옳길 수 있는 그러한 신앙이 없다는 것이 이상했고, 성직자들까지도 실제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온갖 구실을 생각해 냈다. “그런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 문제는 인류가 존재하기 시작한 때부터 있어 온 것으로 지금까지 해결된 적이 없는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슬픈 일이지만 그 여자는 가난 때문에 매춘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단지 사회적 물질적 상황이 개선되어야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홍등가를 폐쇄한다 해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흩어져서 시 전역에 퍼질 것입니다” 등등.

프랭크 더프가 보기에는 그 문제의 실체는 우리가 흔히 이렇게 말하면서 포기해 버리는 데 있었다. “지금은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접근할 적당한 시기가 아니야.” 혹은 “상황이 아직 적당하지 않아.” 때로는 그들에게 얘기할 준비가 안 된 사람이 바로 우리이며 우리 자신이 그 어려운 일에 직면할 용기가 없거나 아마도 우리의 신념이 부족할 것이다.

프랭크 더프는 그것이 시도로 끝나더라도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그 문제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경솔하고” “무모하고” “무분별한” 사람으로 불린지도 모른다. 단 한 명의 영혼을 건진다 해도 가치 있는 희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겪을 어려움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을 불가피한 비난을 생각하며 그 문제를 저울질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한 저울질을 한 뒤 시작한다면 실패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모든 외적인 불가능한 상황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지고 겁이 날 것이다. 프랭크에게는 오직 한 가지 정직한 접근만이 있었다. 즉 “하느님께서 이 사업을 하기를 원하실까?” 만일 그렇다면 이 일을 해야만 한다. “일단 이 점은 분명하다. 즉,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하나 그 문제에 어떻게 착수할지를 고려하고 가능한 한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프랭크가 매춘부들을 돕기로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레지오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레지오의 두 번째 지단이 세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 지단은 “성모 신심” 쁘레시디움으로 불려졌다. 후에 그 명칭은 “성 마리아”로 바뀌었다.

31명의 매춘부들이 로우 거리에 있는 오명(汚名)의 집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들 모두는 어렸다. 그들을 위해 봉쇄피정을 준비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은 터무니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회 사제인 더반 신부는 그 아이디어에 열성을 보였고 프랭크도 마찬가지였다. 매춘부들을 위한 피정에 이용할 수녀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한 제의를 몇몇 수녀들은 신경질적으로 진저리를 쳤다. 그 외에도 아주 극소수의 수녀원만이 그러한 피정을 위해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마침내 발도일에 있는 애덕의 수녀회의 수녀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수녀원 원장인 마티 안젤라 월쉬는 “제가 제 정신이 아닐지는 몰라도 당신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군요.” 라고 대답했다. 그녀로서는 그것은 신앙과 애덕의 영웅적 행위였다.

프랭크와 다섯 명의 여성 레지오 단원들이 오명(汚名)의 집으로 갔다. 그들이 들어간 첫 번째 방에는 여섯 명의 어린 매춘부들이 있었다. 반 시간 동안 레지오 단원들이 설명을 하고 달래고 간청을 한 결과 여섯 명 모두가 피정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방에는 또 네 명의 매춘부들이 있었다. 거기서도 역시 더 많은 설명과 호소를 했다. 그때 첫 번째 방에 있는 여섯 명이 “겁을 먹었고” 마음을 바꾸었다. 레지오 단원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해야만 했다. 그러나 다섯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애쓴 끝에 마침내 그 집에 있는 모든 여자들로부터 약속을 받아냈다. 하루 뒤 발도일 수녀원에서 실제로 피정이 시작되기 전 여전히 많은 걱정스러운 순간들이 있었다. 프랭크 더프의 저서인 <술집에서의 기적들(Miracles on Tap)>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산도 옮길 수 있는 신앙이 승리했다. 피정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피정을 지도했던 프란치스코회 사제 필립 신부는 정말 대단했다. 그 여자들은 그의 말을 열중하여 들었다. 물론 때때로 눈에 띄는 긴장과 반신반의와 침착치 못한 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었다. 은총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그 여자들은 고백성사를 보았다. 그들은 피정 동안 그들의 죄보다 더 큰 것이 하느님의 자비라는 것을 발견했다. 사탄은 지배력을 잃었다. 비참했던 세월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참신하고 아름다운 은총이 그들의 영혼을 채웠고 긴장된 분위기는 고요하고 평화롭게 바뀌었다.

주일 저녁이 다가왔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 일을 돕던 레지오 단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 여자들은 –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매춘부가 아니었다 – 수녀원의 침실로 갔다. 침대와 매트리스는 그들을 위해 급히 구입해서 수녀원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발도일 수녀원으로 온 프랭크 더프는 극도로 바빴다. 밤중 무렵에는 기진맥진했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필립 신부가 잠잘 방에 그를 위해 간이 침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파란 많은 전날의 흥분으로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필립 신부와 프랭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한없이 수녀원 정원을 거닐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여자들을 위한 앞으로의 계획도 의논해야 했다.

바로 그날 아침 일찍 프랭크는 더블린 시의 시장인 코스그레이브 씨의 집무실에서 그 여자들이 발도일의 피정을 끝낸 뒤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기 위해 대대적인 조치가 있으리라는 보장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피정을 마친 후 적절한 장소를 마련해야 하는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 곳은 “산타 마리아”로 불릴 것이다.

산보와 잡담 후 필립 신부와 프랭크는 바깥 문 옆에 있는 소성당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대략 새벽 세시쯤이었다. 그들은 기도를 바치고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침실로 갔다.

아침이 되었다. 수녀원의 종이 기상 시간을 알렸다. 수녀들과 그 여자들은 미사를 드리러 소성당으로 내려왔다. 두 명의 개신교도를 제외한 모든 여자들이 영성체를 했다. 프랭크는 그 영광스러운 월요일 아침에 제단 난간 쪽에서 그들 중 두 여자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후에 이것은 지금까지 참석한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미사였고 영성체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기쁨의 순간” 이었다고 말했다. 신앙의 눈으로 그는 이 회개하는 여인들에게 놀라운 은총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았고 당신의 모든 사업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 앞에 자신이 얼마나 작고 비참한지를 느꼈다.

 

 

 

14 신앙의 표징

 

새 조직인 레지오 마리애는 서서히 확장해 나갔다. 새 쁘레시디움들이 세워졌다. 초기 쁘레시디움에는 부인들과 소녀들만 있었다. 남자들의 모집을 늦춘 것은 현명한 조치였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경쟁 단체로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회원 자격이 남자들에게도 개방되리라는 것이 분명히 예정되어 있었다. 그 동안에 프랭크 자신은 한편으로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일종의 연결을 유지하고 또한 레지오가 여성만을 위한 단체로 방관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쁘레시디움의 단원으로 남아 있었다.

1927년 5월에 프랭크 더프는 워터포드에 있는 우르술라 수녀회의 한 수녀로부터 그 레지오 마리애라는 새 단체에 관심을 표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곳 사람들은 레지오의 지단을 세우고 싶어 했다. 그는 지체 없이 워터포드로 가서 그곳에 쁘레시디움을 세웠다. 같은 해 11월에 블라니 밀스의 돈 마호니 여사가 샛별 기숙사의 사업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프랭크를 코크로 초청했다. 이 일은 같은 해 11월 21일에 코크에 첫 쁘레시디움을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벨파스트에도 곧 쁘레시디움이 생겼다. 프랭크는 이제 집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다녀야 했다.

1928년 3월 말이었다. 부두에는 번스랜 증기선이 당당한 모습으로 승객들이 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트랩을 올라가고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까지의 여행은 17시간 30분이 걸린다. 이런 여행에 익숙해진 승객들은 체념한 듯이 보였다. 처음으로 가는 사람들은 흥분하고 들떠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러 글래스고우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쓸쓸해 보였다.

마침내 오후 6시 30분에 배는 부두를 떠났고 승객들은 길고 지루한 여행에서 가능한 한 편안하게 가려고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몇몇은 그들 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는 옷을 잘 입은 젊은이를 한 번쯤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이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옷을 잘 입은 젊은이는 바로 프랭크 더프였다. 그는 레지오를 해외에 확장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그의 마음은 이미 글래스고우에 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징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신안은 단지 예수님의 가르치신 것과 또한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이다! 그들의 신앙이 그들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인식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프랭크에게 있어서는 달랐다. 그는 기도와 공부와 경험을 통해 신앙의 길이 어려운 길임을 알았다. 그는 “신앙의 표징” 이라고 부르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즉,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나 혹은 겉으로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것에서조차 하느님의 손길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화”, 즉 사도가 되도록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비겁해지는 우리는 본성 때문에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거나 혹은 그 순간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거나 그러한 행동 방식은 건방진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백만 가지의 변명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약간의 개입을 하여야 한다. 그분은 이상한 “일치”를 조성하여야 한다. 말하자면 하느님과 협력하도록 초청하여 영적 유익을 가져오도록 하는 기회가 여기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채도록 자극한 일종의 표징에 호소해야 한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생기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한 영혼을 예수님과 마리아께 데리고 갈 목적으로 성령께서 배려하신 일이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번 프랭크는 “처음에 어떻게 그 표징들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간단히 “사건들” 속에서라고 대답했다. 예를 들어 그가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형제로부터 들은 후 곧 헌 책방에서 <참된 신심>이라는 책을 보는 데에서 “일치” 가 있었다. 프랭크가 개종 권유 운동을 방해하기로 계획하고 있던 바로 그때 “우연히” 조셉 가베트를 만났다. 성모탄생축일을 위한 첫 저녁 기도 때 레지오의 최초 모임이 열린 “일치”가 있었다.

프랭크가 개척자회 지원자를 모집하러 노스 윌리암 가를 내려가고 있을 때 레지오에 관심이 매우 많은 조세핀 수녀와 마주쳤다.

“수녀님, 전 지금 글래스고우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후 곧 조세핀 수녀는 자신이 글래스고우 월턴 크레센트에 있는 애덕회 수녀원에서 피정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소식을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수녀는 그 곳에 레지오를 설립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프랭크에게 있어 그것은 표징이었다. 그는 표징을 필요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레지오가 지구상 어느 조직과도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레지오 안에서 놀라운 신앙과 열정과 노력과 가장 어려운 일에도 하느님과 영혼들을 위해 기꺼이 달려들려는 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또한 신입단원을 모집하고 대담하고 새로운 사업을 착수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은 문제와 죄악과 무관심으로 가득 찬 세상에 맞섰다.

그렇다. 프랭크는 레지오 안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하느님께서 불어넣으시고 계획하신 것임을 확신했다.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나는 내가 이끌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조금도 바꿀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표징들은 프랭크에게 귀중한 확신을 주었다 해도 단지 지침일 뿐이다.

조세핀 수녀는 피정을 했고 그 뒤에 월턴 그레센트의 수녀원장인 브렌단 수녀에게 글래스고우에 레지오를 세우고 싶어하는 프랭크의 희망을 얘기했다.

그 뒤 곧 브렌단 수녀는 서신으로 프랭크에게 그 주교 관구의 총대리께서 프랭크와 글래스고우 대주교간의 면담을 주선하도록 동의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프랭크는 일 주일 간의 휴가를 신청하여 지금 재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성모님을 통해 전해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나오는 구원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레지오의 영웅적 사절들이 프랭크의 여행을 땅 끝까지 뒤따르게 될 것이다.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프랭크는 다음날 정오에 그리녹에 상륙했다. 그리고 글래스고우 행 첫 열차를 탔다. 도착한 뒤 그는 곧 바로 총대리를 만나서 성 안드레아 대성당으로 갔다. 그 때는 저녁 9시였다. 그는 그날 하루 종일 식사를 못했다. 할 시간도 없었고 기회도 없었다. 그는 허기지고 지쳤지만 목적지에 도착해서 기뻤다.

그러나 실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대리는 대단히 좋은 분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대주교님을 만나려는 용건이 건축관계 때문이 아니던가요?” 하고 물었을 때 프랭크의 충격이 어떠했는지 상상해 보라. 프랭크는 재빨리 자신이 품고 있는 것을 정확히, 그런 종류의 건축은 아니라고 대답한 뒤 레지오 마리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총대리는 감동하지 않았다. “오, 그건 잊어 버리세요.” 하고 총대리께서 말씀하셨다. “대주교님은 그에 관해서는 당신을 만나려고도 않으실 겁니다. 이 교구에는 신심단체들이 너무 많거든요. 필요한 것은 있는 것을 정리하는 것이지 추가로 단체를 설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서 일종의 사후조치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나 자신도 대주교님과 같은 생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오! 그 번민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프랭크는 절망적인 생각에 괴로움을 당했다. 그는 일 주일 간의 휴가기간을 전부 이 계획에 쓰려고 남겨 두었다. 주님은 그를 어디로 이끌고 계신가? 그는 당황했고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포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총대리께 계속 얘기했다. 그리고 총대리께서 점점 수긍하는 것을 발견했다. 밤 1시가 되어서야 총대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내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을 해냈습니다. 나를 감동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나서 “글래스고우에 며칠간 머물 겁니까?” 하고 물으셨다.

“일 주일 간입니다.”

“그렇다면 금요일까지 여기 머무는 동안 총대리 사무실에서 대주교님과 면담을 주선하겠습니다.”

“주교관에서 만날 수는 없습니까?”

“안 됩니다. 불가능해요! 대주교님은 그분의 집에서 만날 수 없습니다. 바로 일전에 그분을 만나러 온 X 신부도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프랭크는 총대리의 사무실에서 면담을 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대주교를 만나러 줄을 지어 기다릴 것이다. 시간도 매우 제한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프랭크는 작은 호의에도 감사해야 했다.

금요일까지는 아직 며칠 남았고 그래서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그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회원을 만났는데, 그는 크게 반기면서 오는 주일에 열리는 그들의 모임에서 연설을 하도록 주선했다. 또한 그는 토요일 저녁에 가톨릭 증거회 (Catholic Evidence Guild)에서 연설하도록 초청을 받았다.

금요일이 되었다. 프랭크는 대주교를 만나러 총대리 사무실에 갔다. 총대리께서 그 곳에 계셨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대주교님은 오늘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프랭크는 다신 한 번 놀라고 실망해서 물었다.

“언제 다시 한 번 글래스고우로 오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프랭크는 이날 금요일 저녁 배로 아일랜드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주일에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모임에서 연설하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한편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이 한 가지 남아 있었고 그것을 해야 했다. 그는 수녀원으로 돌아가서 대주교께 편지를 썼다. 쓸 수 있는 유일한 편지지는 매울 질이 나빠서 잉크가 편지지에 번졌다. 봉투도 역시 나빴다. 더욱이 그는 봉투에 모자라는 우표를 붙이는 실수까지 했고 나중에야 스코틀랜드의 우편 요금이 아일랜드보다 비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대주교께서 요금을 치를 것을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그 편지를 쓰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매우 긴 편지였고 총대리께서 제기한, 그 교구에 신심 단체가 지나치게 많다는 바로 그 문제를 다루었다. 그 편지는 문제의 요점을 찔렀고 계속하여 교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밝혔다. 그 편지는 역시 레지오 마리애가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도 실제로 더블린에서 이미 긴급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는 미사에 나가는 길에 그 편지를 부쳤다.

프랭크는 사실상 자신이 그 편지의 결과에 대해 거의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난 이 곳으로 인도되어 왔다. 여기에 대해선 아무런 의심도 없다. 천사가 나를 이끈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나를 인도한 곳은 글래스고우가 아니라 에딘버러일지도 몰라!” 그는 크래이글로하르트에 성심교육대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전 더블린에서 그 수녀원에서 온 한 수녀님을 만났었다. “에딘버러로 가서 그 수녀님을 만나야겠다” 고 그는 결심했다.

바로 그날 오후 그는 에딘버러로 가는 기차를 탔다. 클래이글로하르트 교육대학을 찾아가서 그 수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원장수녀는 응접실로 프랭크 더프에게 인사하러 나왔다.

“잘 오셨습니다, 더프 씨” 하고 원장수녀가 인사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수녀는 피정 중이라 만날 수 없습니다.” 라고 그녀는 말 했다. 서슴지 않고 프랭크는 가장 예의 바른 태도로 레지오 마리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 좋아요. 그 수녀는 잠시 동안 나오도록 하지요.” 하고 원장수녀가 말했다.

잠시 후 그 수녀는 응접실로 와서 프랭크와 원장수녀와 자리를 함께 했다. 프랭크는 그들 둘 다를 감동시키는 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에딘버러의 대주교님만 허락하도록 설득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 우리가 그것을 주선할 수 있어요. 우리가 당신 대신에 허락을 얻을께요. 대주교님께서는 얼마 동안 몸이 편찮으시지만 보좌주교님인 그레이 그레함  주교님께서 허락해 줄 겁니다.” 이것은 놀라운 소식이었다. 원장수녀는 그레함 주교에게 전화를 걸려고 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프랭크는 그녀의 얼굴에서 생기가 없어진 것을 알아챘다.

“그분은 아일랜드에 계신 다는군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나타난 실망의 표정을 보면서 덧붙였다. “그렇지만 그분이 돌아오시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어요.”

그 수녀들은 프랭크에게 훌륭한 점심 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 나서 글래스고우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급히 서둘렀다. 그는 그날 저녁 가톨릭 증거협회에서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매우 지치고 기운이 없어서 그는 기차에서 잠이 들었다. 글래스고우역에서 그는 친절한 짐꾼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가톨릭 증거협회에 연설하러 갔다.

주일 아침이 되었다. 프랭크는 미사에 참석한 후 아침을 먹을러 윌턴 크레센트에 있는 수녀원으로 갔다. 원장수녀인 브렌단 수녀는 친절하고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때 수녀는 방문객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녀는 식탁에 앉아 프랭크가 식사하는 동안 얘기를 해주었다.

방에서 전화 벨 소리가 났다. 브렌단 수녀는 전화를 받으러 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놀란 감정을 드러냈다. 그녀는 손을 수화기에 대고 프랭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프 씨, 대주교님이세요. 그분이 당신과 통화하시고 싶답니다.”

프랭크가 전화를 받았다. “예, 대주교님, 제가 더프입니다.”

그는 내부에서 일어난 흥분을 억제하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더프 씨, 언제 나를 만나러 주교관으로 올 수 있겠습니까?”

“택시를 잡는 대로 곧 가겠습니다, 대주교님.”

“당신이 온다면 나도 기쁘게 만나겠습니다.”

그 말은 꿈나라에서 들리는 것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 무서운 도날드 맥킨토쉬 대주교님의 말씀이다! 갑자기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거의 즉시 전화가 다시 울렸다.

“더프 씨, 당신 전화예요. 에딘버러에서 레이디 마리아 카 입니다.”

다시 한 번 프랭크는 전화를 받았다.

“오 더프 씨, 이 곳 수녀원 원장 어머님께서 당신에 관해 말씀해 주셨어요. 오늘 밤이나 월요일 에딘버러에 오실 수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저희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랭크는 레이디 마리아 카 의 말을 들었을 때 어안이 벙벙했다. 카 가문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가톨릭 가문의 하나였다. 레이디 마리아 카 의 남편은 한때 아일랜드 주재 영국군의 사령관이었다. 그들의 아들인 로티안 카 자작은 전쟁 동안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였다. 그들의 두 딸인 레이디 세실리 카 와 마가렛 카 는 모두 훌륭한 처녀였다.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고 프랭크는 전화기에 대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월요일에 기차로 가겠습니다.”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한 빨리 서둘러 마쳤다. 그리고 글래스고우에 있는 대주교 댁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도날드 맥킨토쉬 대주교는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가톨릭 가문 출신이었고 6피트가 넘는 키와 위풍당당한 모습과 젤릭 사투리를 썼다. 그 앞에 선 프랭크는 약간 홀쭉한 체격에 얼굴에 항상 미소를 띠고 있는 아주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대주교는 매우 친절하였다. 호의적이었다. 그는 이미 프랭크의 긴 편지를 읽었고 그에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프랭크는 더 이상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얼마 전 교황청으로부터 가톨릭 운동에 대해 제안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그때 당신의 편지와 아이디어를 내가 몰랐던 게 유감이오. 무언가 귀중한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대주교께서 말씀하셨다.

그 면담은 두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대주교는 그 교구에 레지오 마리애를  세우도록 완전히 허락해 주었다. 더욱이 그는 대주교의 권한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장려하기로 약속했고 실제로 프랭크가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이 추천한 본당 네 곳의 사제들 명단을 주었다. 그리고 프랭크를 주교관 내 소성당으로 데려가서 함께 레지오의 성공을 위해 기도했다.

대주교는 프랭크를 배웅하러 현관 문을 열었을 때 현관 밖에 서 있는 사람은 프랭크의 주머니 속에 든 명단에 기록된 네 명 중 한 명인 캐논 맥닐리 신부가 아닌가!

그날 프랭크가 대주교관을 나올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가를 누구나 추측할 수 있으리라. 그날 저녁에 그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참석했다. 잊지 못할 일요일이었다.

월요일 아침에 다시 한 번 에딘버러로 갔고 카 가문 사람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그들은 필요한 허가를 받고 레지오를 시작하기로 약속했다.

월요일 밤에 피곤했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더블린행 번스랜 증기선에 승선했다.

일일 마무리짓기 위해 그는 4월 23일에 글래스고우로 다시 갔고 3일 후에 그 곳에 첫 쁘레시디움을 세웠다. 보좌신부인 콘론 신부가 신입단원 가입을 권유했다. 20명의 훌륭한 소녀들이 모여서 즉석에서 미니 맥그레이의 사회 아래 첫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루르드 성모 마리아 쁘레시디움” 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것은 패트릭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서였다. 그 본당 사제는 물론 대주교의 현관에서 프랭크와 인사를 나눈 캐논 맥닐리였다.

그 쁘레시디움은 설립된 순간부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레지오 마리애는 글래스고우에 급속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한편, 에딘버러에서는 카 가문 사람들이 그들의 약속을 잘 이행했다. 그들은 그레함 주교의 허가를 받아냈고 그들 스스로 레지오의 쁘레시디움을 세웠다. 프랭크가 다음 번에 에딘버러를 방문할 무렵에는 그 곳에서 레지오가 번창하고 있었다.

이제 레지오는 스코틀랜드에 자리를 잡았고 프랭크는 더블린으로 돌아가기 전, 영국에 레지오를 세우기 위해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그 외에도 그는 친한 친구인 랠로 씨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랠로 씨는 그를 만나러 런던에 오고 있었다.

 

 

 

15 랠로 씨와 사귀다

 

매튜 랠로는 아일랜드 더못에서 태어났으며 그 곳에 상점을 가지고 있는 삼촌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린 나이에 그는 더블린으로 왔고 큰 상류 백화점의 수습생이 되었다. 후에 담배 사업으로 바꾸면서 그는 곧 고급 시가와 담배만을 판매하는 자신의 담배 가게를 열었고 몇 년 내에 아주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깊은 신앙을 가진 그는 블랙록에 있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들어갔고 머지않아 더블린의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이사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그의 돈을 거의 대부분 자선사업에 기부했고 특히 선교 사제들의 양성을 후원했다.

프랭크 더프를 블랙록에 있는 랠로 씨의 집에 처음 데려간 사람은 톰 팔론 이었다. 랠로 씨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약간 고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아주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잘 다듬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독특한 인상을 주었다. 그 당시 그는 60세가 넘었지만 마음이 젊고 모험심이 강했으며 적극적이었다. 프랭크는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그를 항상 랠로 씨로 불렀으며 그에게서 적잖은 감명을 받았다. 또한 나이차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실제로 그 뒤 20년 동안 프랭크는 매주일 마다 블랙록에 있는 랠로씨 댁으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가곤 했다.

프랭크는 그의 긴 생애 대부분 동안 엄청난 과로를 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그의 사도직 활동 중 많은 부분이 아주 까다로운 성격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가 “시대에 앞서 태어난” 사람이어서 많은 오해와 심지어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는 적어도 몇몇 성직자들이 레지오가 문 닫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그런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일요일 오후 블랙록에서의 시간은 그에게는 큰 원기를 돋우어 주었다. 샛별 기숙사 모임 후 즉시 그는 자전거를 타고 랠로 씨의 집으로 갔다. 레지오의 모든 문제, 레지오의 모든 위기가 그 곳에서 논의되었다. 그는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 놓을 수 있었고 그의 좌절감을 쏟아 놓았다. 프랭크보다 나이가 많을뿐더러 조용한 성격이었던 랠로 씨는 항상 동정을 하면서 들어 주었고 나이와 지혜와 영성이 깊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었다.

랠로 씨 댁에서의 주일 점심 식사는 마음이 푸근해지는 행사였다. 종종 프랭크 말고도 다른 손님들도 식사를 함께 했다. 톰 팔론 은 고정적인 방문자였고, 또한 랠로 씨가 자기 집에 머물게 한 중년의 사업가인 오핸론 씨도 마찬가지였다. 오핸론 씨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을 행운아라고 여겼다. 편리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렇게 현명하고 고상한 사람과 가깝게 지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특권이었다. 레지오의 영적 지도자인 토허 신부와 크리돈 신부도 이따금 들렀고 물론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회장인 프랭크 스위니 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아일랜드 평신도들을 위한 책임 있는 거의 모든 주요한 계획들이 랠로 씨 댁에서 의논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확실히 성령은 그런 주일에 블랙록에 있는 랠로 씨 댁에 거처하셨다. 그 지붕 아래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업으로 바쁜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점심 식사 후 그들은 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난로가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유쾌하고 명랑했다. 커피를 마신 후 랠로 씨와 프랭크는 산보를 했다. 둘은 굉장한 독서가들이었고 특히 영성 서적을 많이 읽었으며 대화는 거의 대부분 종교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프랭크는 랠로 씨 역시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가 설교한 것처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심심을 실천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교훈을 얻었고 용기를 얻었다.

영육을 상쾌하게 만드는 산보 후 그 두 사람은 차를 마시러 집으로 갔다. 그리고 나서 곧 프랭크는 자전거를 타고 샛별 기숙사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많은 문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열정과 정력을 가지고 그 문제들에 달려들 수 있다고 느꼈다. 그의 “영적 배터리”는 말하자면 재충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글래스고우에서 프랭크는 남행 기차를 탔다. 그는 영국 북쪽의 뉴캐슬온타인에 내렸다. 그 곳에서 그는 젊은 교사은 넬리가간을 만났다. 그녀는 언젠가 한 번 더블린으로 그를 방문했었다. 얼마 후에 그녀는 그 곳에 레지오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브른(Bourne) 추기경과의 면담을 위해 런던으로 갔다. 그 면담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추기경은 열성적이었고 그 교구에 레지오를 소개하는 일을 허락했다. 영국의 첫 쁘레시디움은 실제로 일 년 뒤인 1929년에 해머스미스에 있는 성심 수녀원의 마티우드락의 협력으로 시작되었다.

브른 추기경과의 면담 후 프랭크는 런던에서 한 가지 약속이 더 있었다. 그것은 이제 70이 넘은 랠로 씨와의 약속이었다. 프랭크의 눈에 그는 존경할 만하고 성인과 같은 사람이었다. 이제 그는 프랭크를 만나러 런던에 오고 있었다. 그들은 둘 다 기뻐서 몸이 떨리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랠로 씨는 런던에서 그의 담배 사업과 관계된 약속이 있었고 프랭크는 그의 일정에 따라 그와 함께 다녔다.

사업상 볼일을 마친 후 두 사람은 이제 그들의 계획을 실천에 옳길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계획은 3일 동안 파크민스터의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에서 봉쇄피정을 하는 것이었다.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는 프랭크에게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였다. 그 수도원에서 그들 둘만이 외부인이었다. 그들은 식사 때 서로 맞은편에 앉았지만 삼 일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접대 수사인 파샬 조프리스 신부가 프랭크에게 물었다.

“더프 씨, 피정 기간 동안 어떤 특별한 주제에 대해 강론을 듣고 싶으십니까?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프랭크는 “신부님, 성모님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파샬 신부가 너무 이해심이 많아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그 대신에 프랭크는 또 다른 주제, 즉 그가 특히 관심이 있는 전례에 대해 언급했다.

“신부님, 거룩한 전례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파샬 신부는 약간 당황했다.

“아닙니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성모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모님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의 이해와 정신의 기초입니다. 그분이 빠진다면 당신은 파산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파샬 신부가 말했다.

그는 그러한 피정 지도자를 만나게 된 것이 믿기 어려운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했다.

피정 동안 12개의 강론 모두가 전적으로 복되신 성모 마리아에 관한 것이었다. 강론들은 순전히 신학적인 것이었다. 파샬 신부는 우리가 왜 성모 마리아를 진심으로 공경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강론들은 프랭크에게는 하나의 영감이었다. 강론은 그의 지식 가운데 있는 틈을 채워 주었고 영혼의 성화에 있어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더 큰 이해를 심어 주었다. 그는 이제 “가장 높고 신비스러운 완덕의 길에 들어가고 다른 이들은 그 곳으로 이끌도록 하느님께서 그분께만 사랑의 열쇠와 능력을 주신”12 비천한 동정녀에 대해 더욱 더 많이 알아내고 싶은 불타는 욕구를 가졌다.

그 3일 동안 날씨는 매우 좋았다. 그러므로 몇 가지 강론은 아름다운 수도원 정원에서 이루어졌고 몇 개는 온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해가 하늘 높이 떠 있고 기온이 가장 뜨거울 때는 그늘진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 뒤 항상 프랭크는 그 피정에 대한 행복하고 거룩한 기억을 간직했다. 그는 그것을 그의 인생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그것은 역사가 이루어진 기억할 만한 일 주일로 놀라운 마무리였다. 역시 “하느님 사랑의 저장소”가 성모님에 의해 열리고 은총이 그분의 헌신적인 종에게 쏟아진 기간이었다. 그러한 모든 은총은 앞에 놓인 길고 험난한 길을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16 샛별

 

스코틀랜드에서 기획한 일을 하는 동안 프랭크는 결코 그가 가고 있는 방향이나 그의 사업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걱정과 어려움에서 벗어나리라는 확신은 결코 없었다. 사실 언제나 그의 사업에는 장애물과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 일을 계속하게 했을까? 그를 지탱해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그의 생애 동안 그러한 비범한 사업을 할 수 있었는가?

프랭크 자신은 그의 많은 “업적들”이 마음속에 어떤 단순한 원칙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던 덕분이라고 했다. 근본적인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결코 당신이 만날 모든 어려움이나 마주치게 될 반대를 고려하면서 사업에 착수하지 말라. 만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어느 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어려움과 반대에 맞서야 하겠지만 그러한 것들은 출발점이 아니다. 그 대신 고상한 사업이 떠오르면 그것을 잘 연구하고 그에 대해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하느님께서 이것을 원하실까?” 하고 물어 보라.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면 그것을 따르고, 그에 관련된 사람이 당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의 사업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당신을 중단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 도구가 오직 당신이라 하더라도 그 분께 유용한 어떤 도구든 사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그러한 사고방식은 프랭크에게는 신앙의 중추적 요소였다.

프랭크는 하느님께서 더블린에 “영락(靈落)” 한 사람들을 위한 기숙사가 세워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했고 자신이 미약하지만 “이 그리스도의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는 거대한 일을 착수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업의 방대함과 그 사업에 따를 불가피한 어려움 때문에 감히 그러한 모험을 하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이제 프랭크의 첫 번째 원칙의 필요성을 보라!)

그러나 프랭크에게는 그에 관해 의심할 것이 없었다. 더블린 시에는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곳에는 이미 기숙사들이 세워져 있었지만 집 없는 사람들에게 머물도록 허용하는 최대한 기간이 2주일이었다. 만성적이고 영구적으로 집이 없는 “영락한 이들을 위해 무슨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다.

그가 또 다른 고려를 깊이 해야 하는 것은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개종 권유 기관이 가난한 사람들의 가엾은 처지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이 개신교 예배에 참석하면 무료로 양식을 뇌물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가운데 프랭크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 많은 “영락한 사람들”이 누구의 책임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고정된 거처가 없었고 영적으로도 방치되었다.

프랭크는 기숙사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모임에서 제안했다. 그러한 계획은 즉각적으로 관심을 모았다. 그들은 그것을 의노하기 위해 소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때 어려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그 아이디어가 순전한 환상이며 불가능한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아이디어에 열광했다. 마침내 그 계획의 초안은 정식 허가를 받기 위해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제출되었다. 그것은 예상되는 어려움까지도 언급한 정직한 보고서였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더 많은 논의를 위해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그 회의 전에 말보로우 거리의 부주교좌 성당(Pro-Cathedral)에 봉헌된 성령께 미사를 드리도록 마련되었다. 프랭크는 그 결과에 대해 낙관했다.

결정의 날이 되었다. 그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랠로 씨가 프랭크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네 주었다. 그는 편지를 뜯었고,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것은 제출된 계획을 거부하는 총대리의 몬시뇰 윌 로부터 온 것이었다. 빈첸시오회는 그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난 거의 죽을 지경이었어요” 하고 프랭크는 후에 그 때의 심정을 친구에게 토로했다.

그렇지만 프랭크는 자신의 원칙을 마음속에 명시했다. 하느님께서는 기숙사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 비용이 얼마가 들던 간에 그 문제를 중지해서는 안 된다. 몬시뇰께 대해 불복하면서 그 문제를 더 추진하도록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를 설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자신이 소위원회를 만드는 것을 반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것을 했고 매주 이 소위원회는 제안된 “샛별 기숙사”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만났다.

더블린 시의 서기관인 맥카론 씨가더블린의 집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영국 정부가 주재하던 시절 뛰어난 능력을 보인 고급 공무원이었고 새 나라의 출범과 그 초창기에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에 훌륭한 봉사를 한 프랭크 더프는 또한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으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다. 그는 그 위원회의 고문으로 추대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서면으로 그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제출하도록 요청 받았다. 그의 아이디어는 매우 감동적이 것이어서 그는 위원회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세부 사상에 대한 더 많은 질문이 있은 후에 의장인 오코너 씨가 그들이 더 많은 심의를 하는 동안 방에서 잠시 나가 달라고 프랭크에게 요청했다. 그는 나와서 다시 부르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서기와 얘기를 했다. 나중에 다시 불려 들어갔을 때 집 없는 이들을 위해 그가 작성한 그 보고서는 건전했고 장관께 제출하는 건의서들 속에 넣기로 만장일치로 동의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뒤에 더블린 시의 간부가 더프 씨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더프 씨, 전 몬시뇰 윌 이 집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숙사를 열고자 하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호감을 가지지 않았던 사정을 이해합니다. 그분은 그 계획이 줄 무거운 재정적 부담을 두려워한 것일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그 문제를 빈첸시오회 밖에서 해결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난 그들이 기꺼이 당신을 도와 주고 빈첸시오회의 기금을 사용하는데 대한 몬시뇰의 염려를 없앤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와 함께 일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예,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 계획 아래에서도 당신에게 똑같은 관심을 기대해도 됩니까?”

“예.”

“당신 친구들의 후원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예.”

맥카론 씨는 매우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기까지 했다. 정부는 집 없는 이들의 문제의 중대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부지를 제공하고 직원을 두기 위해서는 수백만 파운드의 비용이 들 것이다. 돈은 많지 않았다. 그 밖에도 정부가, “노하우”를 가졌거나 어려운 부류의 수용자들을 다룰 능력 있는 직원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그렇다 맥카론 씨는 기뻤다. 여기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일찍이 조직력이 있다고 증명된 사람이다. 매춘부들을 구제하여 사회에 복귀시킨 더프 씨의 특별한 능력은 정부로부터도 인정을 받았고 호평을 받았다.

“더프 씨, 이제 정부는 이 문제에 관한 당신의 계획과 아이디어를 완전히 승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 도시와 나라에 바치고 있는 당신의 봉사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당신은 이 순간부터 당신의 기숙사를 위해 더블린 북구 구빈원 빌딩을 당신의 보호에 맡겼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프랭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아마도 역시 하느님께 침묵 가운데 감사기도를 바쳤을 것이다.

“물론, 그 건물의 내부를 약간 개조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개조에 드는 비용은 정부가 조달할 것이라고 알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또한 때때로 필요한 수리를 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무료로 임대할 것입니다.”

프랭크 더프와 랠로 씨는 정부로부터 그 기숙사의 피신탁인으로 임명되었다.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더블린의 대주교인 바이른 박사가 반대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분이 지금까지 더프 씨의 몇 가지 “최신식” 아이디어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랠로 씨가 대주교를 만나기 위해 급파되었다. 랠로 씨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아일랜드 이사회 회장이었다. 프랭크는 걱정스럽게 기다렸다. 그런데 랠로 씨가 의기양양해서 돌아왔다.

“대주교님께서 기뻐하셨고 실제로 이 모험이 성공하도록 미사를 드려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안다면 기쁘겠지요. 그분은 우리의 일이 진척되는 상황을 계속해서 알려 주길 바란다고 하셨어요” 하고 프랭크에게 말했다.

프랭크는 그의 동료 협력자들과 만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건물을 조사하려 갔다. 흥분한 그들은 방과 복도를 돌아다녔다. 곧 개조 계획을 세웠다. 샛별 기숙사는 1927년 3월 25일에 문을 열기로 예정되었다.

 

 

 

17 뜻밖의 손님

 

3월 22일은 샛별 거리에서 많은 사람이 오고 간 몹시 분주한 하루였다. 프랭크는 다트마우스 스퀘어에 있는 집을 팔았고 가족들은 샛별 기숙사, 정식으로는 더블린 북부 구빈원에서 몇 집 건너에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큰 집에 거처를 정했다.

이제 63세가 된 프랭크의 어머니는 여전히 정정하고 건강했다. 그녀에게는 다시 한 번 정든 집을 떠나게 된 것이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모든 것을 “쉽게 극복하는” 조용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거만한 사람이었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다트마우스 스퀘어의 다소 “호화로운” 구역을 떠나는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샛별 기숙사의 영락한 이들인 그녀의 새 이웃들은 그녀가 익숙해 있던 말씨와는 상당히 다른 말을 사용할 것이다. 정말로 그 이사를 좋아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실제적이고 사무적인 사람이었다. 이 무렵 그녀는 자신의 생활 양식을 프랭크와 프랭크가 하는 사업에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프랭크가 이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체념하며 그의 계획에 동의했다.

찬장, 책상, 의자, 침대 등등이 그 곳으로 운반되었고 물론 여러 상자의 책도 옮겨졌다.

1927년 3월 23일 그날 밤은 프랭크의 남은 생애 동안 생생하게 기억되는 밤이었다. 그는 매우 피곤했다. 가구를 들어 올리고 그것을 배치하는 힘든 일로 인한 신체적 피로뿐만 아니라 그의 계획에 대한 반대와 기숙사를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데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한 싫증과 긴장이 있었다.

어쨌든 그날 밤에는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가족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자정이 지났지만 프랭크는 아직 그의 성무일도를 바쳐야 했고 그 기도는 보통 1시간 30분이 걸렸는데 이번 경우는 그가 매우 피로했기 대문에 훨씬 더 오래 걸릴 것이다. 그는 기진맥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과기도서를 펴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무엇인가를 들었다! 무섭게 개가 짖고 있었다. 그의 약한 청력에도 불구하고 확실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개 짖는 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이상하게 무시무시한 요소가 있었다. 프랭크는 너무 지쳐서 그것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창문을 통해 내다본다면 그 자신이 참을 수 없을 거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가 내려왔을 때 큰 개가 정문 바깥 현관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개는 털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를 놀라게 해서 그가 선택한 진로를 버리도록 하기 위해 악마가 개의 시체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그 생각은 끔찍한 것이었다. 그 해석이 맞는다면 또한 그 기숙사가 악마가 울부짖게 하는 어떤 일을 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그 기숙사를 통해 큰 은총이 내린다는 표시가 아닐까? 어쨌든 프랭크는 그의 계획을 곧바로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틀 뒤인 3월 25일 성모 영보 대축일에 집 없는 이들을 위한 기숙사가 문을 열었다. 기숙사는 남자 위원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그들 중 다수가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회원들이었다. 그 위원회는 정기적으로 만나 모임을 열고 그 기숙사를 다소간에 레지오 마리애 노선을 따라 운영했다. 사실 단시간 내에 그들은  그 기숙사를 맡을 레지오 쁘레시디움을 세웠다. 이것이 더블린에 세워진 최초의 남성 레지오 쁘레시디움이었다.

기숙사에 “손님”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영락한 이들”, 알코올 중독자들, 부랑자들과 의지할 데가 없는 이들 등 많은 사람이 따뜻한 환대와 영원한 가정을 발견했다. 거주자들에게 적어도 하루에 8펜스씩 아주 작은 요금을 지불케 했고 이것은 엄격한 규칙이었다. 물론 문제는 많았다. 많은 경우에 거주자들은 아마도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명백히 가난하고 궁핍한 책임 있는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은 또한 욕설하고 싸우고 훔치고 때로는 술에 만취된 다루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다루어야 했다. 기숙사는 200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거의 항상 가득 찼다.

때때로 그들이 싸움을 할 때는 겁나기도 했지만 레지오 단원들이 공격을 받기도 했다. 경찰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는 것도 보통은 불가능하거나 실행할 수 없었다. 특히 기숙사의 초창기에는 프랭크는 종종 저녁에 기숙사로 가고 있을 때 낮일을 마치고 걸어나올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매일 그는 다리가 부러지는 위험을 무릅썼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운동신경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매우 건강했고 홀쭉한 체격에 비해 힘이 셌다. 곧 그 사람들은 그의 건강에 대해 존경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와의 싸움에서 글자 그대로 녹아웃 되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기숙사에 있는 동안 그와 싸움을 해본 사람들은 대부분 몇 개의 갈빗대가 부러졌다.

그러나 그의 힘을 지탱시켜 준 것은 다른 그 무엇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맡겼고 하느님께서는 확실히 그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셨다. 더욱이 프랭크는 그 당시 하느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힘을 주셨다고 확신했다. 그 기숙사를 운영하는데 절대적으로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프랭크가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들어갔을 때 그를 제일 매혹시켰던 것은 복음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강조한 말씀이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프랭크 더프는 보통 평범한 가톨릭 신자에게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도의 한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은 그 가르침의 완전한 진리가 현실화 된 것이다. 그의 기도 생활과 신앙은 놀랍게 자라서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 있어 특별한 경지에 이르렀다. 프랭크 앞에서 모든 궁핍한 사람은 모습을 바꾸신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프랭크는 이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프랭크는 이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이 그와 다른 레지오 단원들에게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특별한 특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 때문에 프랭크는 그 기숙사의 수용자들을 “영락한 이들”로 간주하기를 거부했다. “내려온 것은” 맞지만 “쫓겨난 것은”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불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로서 독특한 존엄성를 가지고 있었고 그 존엄성은 가난이나 궁핍이 없앨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소위 “영락한 이들”은 그 기숙사의 “거주자”들로 불리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종종 시끄럽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거주자들에게 있어 프랭크는 단지 철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비범한 온화함과 친절과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부드러운 호소, 자애로운 미소, 겸손한 태도와 변치 않는 유머 감감이 거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거친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가 타락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사람들의 숫자는 셀 수가 없다. 그가 죄악의 수렁에서 구해낸 사람들의 수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그리고 오늘 원내 레지오 형제들이 공동으로 성무일도를 바칠 대 기숙사 소성당에서 시편의 사랑의 시가 하느님께 제일 큰 목소리의 기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배경은 시토회 수도원이 아니었지만 확실히 천사들도 하느님께 감사 드리는 대찬가에 함께 했을 것이다. 또 우리의 천상 어머니이신 샛별께는 얼마나 큰 기쁨이겠는가!

 

 

이제 더프의 집안은 모양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더프 여사는 그 집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이사벨은 여전히 건강이 나빴지만 집 주위에서 어머니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었다. 다른 두 여동생 사라 제랄딘과 아이리스는 이제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존은 종종 그의 직업상 볼일과 사회 활동 때문에 집을 떠나 있었다.

더프 여사는 꽃을 사랑했고 짧은 시간 내에 집 뒤에 있는 정원을 조화 있고 아름답게 꾸몄다. 그 곳에서 어머니는 쁘레시디움 회합 때 레지오 제대를 꾸밀 꽃을 공급했다. 어머니는 뒤에 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결코 실제로 쁘레시디움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프랭크의 모든 사업에 큰 지원을 해주었다. 어머니의 생활과 관심은 프랭크의 것과 하나가 됐다. 사제들과 다른 간부들의 권고로 프랭크가 레지오 교본을 쓰고 있을 때 매장마다 어머니께 가지고 가서 교정을 받았다. 내용에 완전히 맞지 않는 단어나 구절이 있으면 어머니는 그에게 말해 주었다. 어머니의 지성은 그 총명함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에게는 방문객이나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항상 가족과 함게 식사하도록 초대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랭크에게는 놀라운 축복이었다. 그는 그것이 어머니에게 추가적인 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머니도 역시 그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어머니는 그가 이 일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일에서도 당신에게 완전히 의지하기를 기대했다.

어느 날 밤 프랭크는 약간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 때는 아주 늦은 밤 1시였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프랭크는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었다. 그는 아래층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추운 날씨 속에 12세 정도의 한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그 소년은 그 밤을 묵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 소년은 지저분하고 텁수룩한 머리와 헝클어진 모습을 한 어린 개구쟁이였다.  프랭크는 그 소년을 데리고 들어와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아침에 그가 일어났을 때 놀랍게도 그 소년이 이미 가버린 것을 알았다. 하녀가 프랭크에게 말했다.

“오, 더프 씨, 제가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 오늘 아침 내려와서 나가 버렸어요.”

프랭크도 가족들도 그 소년을 다시 보지는 못했다.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다. 그러나 여러 해 뒤에 프랭크가 한 친구에게 얘기 했을 때 그 친구가 물었다.

“더프 씨, 그건 약간 이상한 일이 아닌가요. 어떻게 생각해요?”

그가 대답했다. “나는 물론 그 아름다운 소년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 길이 없어요. 그러나 종종 ‘소년 예수가 우리 집에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기도 해요. 복음에 소년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며칠 동안 없어졌다는 대목이 있잖아요. 예수님이 그 밤들을 어디서 보냈는지 아직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잖아요. 그분이 우리 집에 오셔서 하룻밤을 보내 주실 수가 있을까요? 시간은 하느님께서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천 년도 그분께서는 하루와 같잖아요. 어쨌든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은 그 소년이 사람의 모습을 한 소년 예수였든 혹은 아니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중요한 것은 내 집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들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계시고 도움과 동정을 호소하신다는 것을 내가 명심하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그것을 계획하셨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날마다 해마다 프랭크는 샛별 기숙사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식탁으로 초대하고 그들을 위해 빵을 자르고, 진하고 뜨거운 차를 부어 주고, 잠자리를 준비해 주고, 그들의 불행한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 주는 비천한 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운영한 세 기숙사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산타 마리아는 이미 강대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곧 여성들을 수용하기 위한 기숙사인 “천상의 모후” 를 열기로 했다. 덧붙여, 그는 개인적으로도 영혼들에게 다방면에 걸친 사도직을 수행했다.

 

 

여러 해 뒤 12월의 차가운 아침에 프랭크 더프는 샛별 거리를 친구 신부와 함께 걷고 있었다. 근처에 튼튼하고 건장한 체격을 한 기숙사 거주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더프 씨” 하고 그 사람이 인사했다.

“자네도 안녕한가?”

프랭크와 그 신부가 그 사람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갔을 때 프랭크는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을 얘기해 주었다. 프랭크가 걷고 있을 때 한 사람 – 그를 존 X라고 부르자 – 이 그에게 다가와 갑자기 장난 삼아 프랭크의 손을 꽉 누르고 그의 손을 “희생자” 의 주머니에 넣었다. “더프 씨, 난 당신을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갈 수도 있고 원한다면 훔칠 수도 있어요. 내가 당신을 꼼짝 못하게 했어요” 하고 존 X가 말했다. 사실 프랭크는 한때 영국군에서 특공대원이었던 이 힘센 사람에 의해 팔을 붙잡힌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프랭크는 물론 존 X가 그에게서 돈을 훔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그 사람은 프랭크를 매우 존경했다. 그러나 프랭크는 약간 충격을 받았고 또 상당히 화가 났다. 왜냐하면 그는 주머니에 중요한 것을 넣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는 그에게는 특별히 진짜 십자가 유물(True Cross)과 로사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존X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고 사태는 곧 역전되었다. 존 X는 프랭크의 악한 같은 손아귀에 잡혔고 자신이 땅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 프랭크는 손을 풀어주고 존 X가 가게 내버려 두었다.

자기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한테 – 그때 프랭크는 86세였다 – 진 데 대해 당황하고 창피해서 존 X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당신이 이겼습니다, 더프 씨. 이제 공평하게 해봅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오른손을 도전적으로 뻗쳤다.

“좋아, 좋아, 한 수 배우겠다면 가르쳐 주지” 하고 프랭크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오른손을 내밀어 존 X의 손을 잡았다. 서로 상대방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꽉 쥐었다. 그러자 존 X는 자신이 서서히 뒤쪽으로 구부리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의 강력한 힘은 다시 한 번 사라졌다. 더프 씨가 더 힘 센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한 수 배웠다. 프랭크는 그의 손을 풀어 주었고 일어나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리고 나서 부드럽지만 질책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존, 자네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않나.”

프랭크가 사제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자 그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

“더프 씨, 언젠가 샛별 기숙사 초창기에 그 호스텔을 운영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에 당신에게 ‘위로부터’ 특별한 도움이 있었다고 말했지요?

“맞아요, 신부님.”

“이제 당신과 존 X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말해 주는 것은 다시 한 번 그 힘을 받았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제가 하려는 말은 그 힘이 내게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8 첫 로마 방문

 

존 헤이스 신부는 아일랜드 남부 캐쉘과 에믈리 대교구의 보좌 신부였다. 그는 사제이며 드물게 보는 자질을 가진 설교가 였다. 그의 설득력 있는 설교는 냉담한 사람에게까지도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불을 지폈고 보다 운이 없는 사람에 대한 그의 동정은 소문이 났다. 그는 아일랜드 역사에 “Muinntrna Tire”의 창시자로 기록되었다. 그 단체는 형제적 애덕과 협력과 진취적 정신을 통해 특히 농촌 공동체에서 공동체를 촉진시키기 위해 세워졌다.

1930년에 팔로티니회는 헤이스 신부를 로마의 산 실베스뜨로인 까삐떼에서 대립시기 강론을 하도록 초청했다. 강론에서 그는 레지오 마리애가 더블린에서 하고 있는 사업을 생생하고 극적인 말로 설명했다. 로마의 대목인 마르체띠 셀바기아니 추기경이 그에게 와서 레지오 사업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헤이스 신부에게 그 단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려 줄 더프 씨를 로마로 초청하겠다고 제안했다.

그 소식은 지체 없이 전해졌다. 더프에게 있어 그것은 기쁨 그 이상의 것, 즉 표징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로마에 나를 소개하는 기회가 될 것이고 마르체띠 추기경 같은 분을 만나는 것은 아주 유리한 일이 될 것이다.” 그 다음 그는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생각을 되새길수록 정말 교황을 알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교황 비오 11세 께서는 평신도들에게 가톨릭 운동에 참가하도록 호소하고 있었다. 레지오 마리애가 그분의 관심을 끌 것이 틀림없다고 프랭크는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소개장이 필요한 것이다. 프랭크는 소개장을 얻기 위해 자신이 직접 더블린의 대주교에게 갈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레지오 마리애는 더블린 교구에서 아직 공식적으로 재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대주교는 그 주교 관내에서의 모든 레지오 활동에 대해 알고 있고 공식 승인을 고려하기로 약속했지만 아직 재가를 해주지는 않았다.

사실 그 당시 프랭크의 큰 십자가 중의 하나는 성직자들이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이 조직에 관해 불쾌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프랭크 더프가 교권에 반대하는 사람이며 그가 사제의 임무를 대신하고 있으며 레지오 단원들은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이라는 단언을 하고 있었다. 물론 머지않아 그들은 레지오가 사제의 일을 도와주고 교회 당국에 완전한 충성과 복종을 하며, 실제로 사제들이 레지오를 통해 더 많은 영혼들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특별한 무기, 특별한 손발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제들은 머지않아 레지오 조직 체계가 보통 평범한 사람들에게 종교의 큰 진리를 확고하게 이해할 수 잇게 하고 놀라운 사도가 될 수 있게 하며 크고 영웅적인 성화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프랭크는 십자가의 길에 희망의 가장 좋은 표징이 놓여 있고 모든 방해물이 극복될 수 있는 충분한 신앙이 있음을 깨닫는 충분한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프랭크는 현실과 부딪쳐야 했다. 대주교의 소개서 한 장도 없이 교황님을 개인적으로 알현하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프랭크에게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 그는 신앙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서 하느님의 손에 “더 맡길” 것이다.(그것은 레지오 교본에서 “상징적 행동”으로 불린다.)

프랭크가 할 수 있고 했던 조치는 한 가지였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며 1922년에 지금은 성 마리아 기숙사가 된 건물을 레지오에 양도하도록 인가한 윌리암 코스그레이브 씨가 아일랜드 자유국의 수상이 되었다. 코스그레이브 씨는 레지오의 전체 역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매우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다. 1925년에 교황은 그에게 그리스도 최고 훈장(Order of the Grand Cross)을 수여했다. 프랭크는 그에게 가서 필요한 것을 설명했고 코스그레이브 씨는 미묘한 상황을 고려하여 교황께 그를 소개하는 사신을 써 주었다. 이 편지는 프랭크에게 바티칸의 문을 열어 주었다.

리버풀의 몬시뇰 오브리엔이 함께 로마에 갔다. 프랭크는 매우 흥분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로마 역사에 대한 그의 풍부한 지식은 많은 성지를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오랜 전에 순교자들의 피로 흠뻑 젖었던 콜로세움, 카타콤, 대성당, 오랜 된 교회들, 교황청, 이 모든 것이 그를 흥분시켰다. 그러나 그의 흥분은 교황을 알현한다는 두려운 기대로 다소 가라앉았다. 그는 물론 교황이 이 무렵 레지오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프랭크는 이미 로마 교황청의 몇몇 추기경들과 다른 직원들에게 상세하게 그의 “사례”를 제출했었다. 그들의 임무는 그 단체에 대한 평가와 요약한 보고서를 교황께 제출하고 추천하는 것이었다. 곧 프랭크와 몬시뇰 오브리엔은 교황 비오 11세 앞으로 안내되었다. 알현은 20분간 이루어졌다. 교황과 창설자의 만남은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가톨릭 운동의 교황으로 알려졌고 교회의 선교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호소해 왔다. 전세계의 주교들은 교황의 희망을 이행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그들은 교황께 항상 이렇게 질문했다.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교황께서는 큰 관심을 가지고 프랭크의 말을 경청했다. 프랭크는 교황께서 상당히 진지하게 미소도 짓지 않는 것을 알아챘다. 그분은 프랭크에게 레지오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셨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기를 바랍니까?” 하고 교황께서 물으셨다. 이 말은 프랭크가 듣기를 고대하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교황 성하께서 레지오 마리애가 전세계로 확장되길 개인적으로 바라신다고 저희가 말할 수 있다면 레지오를 보급하는 데 있어서 큰 ‘선전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 문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신중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 교황께서 말씀하셨다.

“성심을 다해 그 희망을 표하겠소.”

프랭크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그 순간부터 레지오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세계 정복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지체 없이 더블린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때는 1931년이었다.

 

 

레지오는 안전했다. 그렇다. 그러나 단지 어느 정도까지이지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프랭크가 교황으로부터 받은 격려가 그이 교구인 더블린에서 레지오에 대한 공식 재가를 촉진시키리라 생각했다면 아주 큰 착각을 한 것이었다. 레지오에 대한 편견은 너무도 깊어서 쉽게 풀릴 수가 없었다. 레지오가 전개하는 평신도 사도직의 아이디어가 그 당시에는 너무 지나친 것처럼 보였다. 다수의 고참 성직자들은 정말로 놀랐다. “저런, 이 사람들을 다루기는 불가능할 거야.”, “사제의 일에 간섭하다니”, “그들은 머지않아 본당을 운영하려고 들 거야.”, “왜 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지?” 이런 두려움이 몇 몇 사제들의 마음속에 있었고 몇몇 고참 사제들은 대주교에게 레지오를 억압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었다.

신비체 교리에 대한 프랭크의 열띤 연구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기도와 신앙 생활을 통해 도움을 받고 영감을 얻었으며 교회 안에서 모든 세례 받은 신자들의 역할에 대한 분명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문제는 예외도 있었지만 그 당시 성직자들이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마이클 오캐롤 박사의 말을 인용한다면, “기존 성직 사회가 평신도에게서 나오는 발의에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13 고 한다.

그러므로 여러 해 동안 프랭크가 더블린의 교권과 “교전 중” 이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능란한 외교 수완은 적어도 아직 초창기인 조직을 위해 어느 정도 묵인해 준다는 보장을 받았다. 여전히 레지오를 위협하는 폐쇄 위협은 그에게 강렬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사제들이 영혼들을 위해 하고 있는 그 위대한 사업을 의심해 존 적이 없을뿐더러 항상 사제들을 깊이 존경했고, 레지오의 도움으로 사제가 영혼들을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레지오를 하느님의 계획을 망쳐 놓거나, 혹은 적어도 어지럽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의 민감한 영혼에 큰 고통이었다.

많은 시련과 좌절이 없니 않았지만 레지오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확장해 나갔다. 때로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처럼 보여서 프랭크의 유일한 의지 처는 순수한 신앙이었다. “나는 하느님께서 레지오를 원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인내하려고 했으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자기를 죽이는 길고 지루한 과정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좀더 비슷하게 되기 위해서 그는 더 많은 희생과 기도와 인내와 겸손을 가져야 했으리라. 그렇다. 특히 “모든 다른 덕의 가치는 겸손으로부터 파생된다 오로지 겸손이 있을 때에만 하느님은 당신의 은혜를 베푸신다”14고 했다. 그 밖에도 그리스도를 닮고 싶어했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겪어야 했던 굴욕과 좌절을 겪지 않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레지오 교본이 마침내 더블린 교구에서 “교회인가”를 받는 데는 또 여러 해가 걸렸다. 그러는 동안에 프랭크는 성덕에 관한 매우 소중한 교훈들을 배우고 있었고 어려운 길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19 천상의 모후

 

윌리암 코스그레이브 씨는 독립 후 10년 동안 아일랜드 수상 및 아일랜드 자유국의 국무회의 의장이었다. 내각과 의논하여 반쯤은 방치된 구 더블린 시 북부 구빈원 건물을 샛별로 알려진, 가난한 남자들을 위한 기숙사로 쓰도록 프랭크 더프의 레지오 마리애에 맡긴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이 계획이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는 것을 보고 크스그레이브 의장과 내각은 또 다른 건물인 더블린 시 북부 구빈원 종합 빌딩을 가난한 여성들과 미혼모들을 위한 기숙사로 쓰도록 더프 씨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필요한 수리와 수선을 끝내고 천상의 모후 기숙사는 가난에 찌들인 여성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 문을 열었다.

샛별 기숙사와 잠자리와 저녁 식사와 아침을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데 비해, 천상의 모후는 여성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하루 종일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다시 프랭크는 기숙사에 들어온 여성들은 누구든 – 그들을 거주자라고 불린 것이다 – 그 유지를 위해 이름뿐이라 하더라도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되찾도록 도와 주기 위한 의도였다.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샛별 기숙사가 운영하는 특수 제재소에서 일함으로써 최소한의 돈을 벌 기회를 주었다.

물론 기숙사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할 여성 레지오 단원을 구하는 일도 필요했다. 이 레지오 단원들은 “원내 자매들”이라고 불리었다. 그들이 매일 일과는 미사와 영성체, 성무일도와 로사리오 기도와 레지오 기도를 바치는 것을 포함했다. 그러나 그들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특히 적극적인 사도직이었다. 200명의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세탁을 하고 청소를 하며 요리를 하는 등 “다른 수백 가지 일”은 물론, 자신들의 종교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그 여성들의 영적 구원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했다.

어떤 이들은 “그 곳은 여자들의 세상이다!” 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프랭크 더프는 그 곳에서 매우 많은 역할을 했다. 그는 손재주가 있었고 문과 창문, 도자기들, 항아리, 냄비와 “모든 신성한 것”을 고치는 그 곳의 “잡역부”였다. 그는 가구를 사고 싸움을 말리고 여성들을 보호하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우락부락하고 억세게 생긴 남자가 와서 원한을 품었던 한 여성을 때리려고 했다. 그는 프랭크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갑자기 프랭크가 그 곳에 나타나서 한 대 먹이고 그 남자를 내쫓았다.

그런 기숙사의 성공적인 운영에는 물론 많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었다. 프랭크는 십자가의 그림자가 항상 천상의 모후 위를 위협했고 그래서 부딪친 문제는 매우 많았다고 말하곤 했다. 천상의 모후는 정말 신앙으로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기숙사는 살아 남았을 뿐만 아니라 번창했다. 더욱이 그 곳은 대단히 행복한 곳이었다. 몇몇 거주자들은 다루기가 매우 어려운 성격을 가졌을 것이 틀림없었지만 대부분은 정말로 착하고 좋았다. 그들은 아마도 술을 마시는 문제나 “난폭한 운명의 장난”으로 세상에서 “끌어내려졌을 것”이다. 그들은 기숙사에서 매우 만족했다. 그 곳의 분위기는 진짜 가정과 같았다. 그 곳에는 안전함과 친절이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염려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중한 결혼 상담소”가 그 곳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때때로 성실하지만 가난한 젊은이가 그 문을 노크하며 여성 레지오 단원에게 그와 잘 어울리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고자 하는 거주자를 소개해 줄 수 있는지를 묻곤 했다. 보통 서로 원하는 타입을 신청했다. 소개가 이루어지고 얼마 후 그 둘이 서로 호감을 가지면 결혼으로 연결되었다.

거주자들은 매우 열심히 주일 미사에 참석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매일 미사에 참석했다. 그들의 아들은 복사로 교육을 받았다.

천상의 모후의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다. 프랭크와 여성 레지오 단원들이 어린이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일도 큰 결실을 맺었고 국내외에서 온 전문 사회 사업가들은 이 기숙사가 매우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그러한 일등 시민을 배출할 수 있는데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천상의 모후를 “졸업한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비행을 저질렀다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프랭크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묻곤 했다. “우리가 성공한 비결을 알고 싶으신가요?” 그들은 많은 억측을 하게 한 후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린이들을 진심으로 존중하십시오. 각자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이며 따라서 그 지체들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그들을 다루고 양육할 필요가 있습니다.”

4천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그들의 신앙과 조국의 자랑인 천상의 모후에서 자라고 양육되었다.

프랭크는 모든 어린이들의 이름을 알았다. 그는 아이들을 매우 좋아했고 그들과 얘기하고 때로는 그들을 놀려 주기를 좋아했다.

어느 화창한 날 프랭크는 건물 앞에서 놀고 있는 한 떼의 천상의 모후 어린이들을 애정과 긍지를 가지고 내다보면서 천상의 모후의 방 앞에 있었다. 프랭키라는 이름의 11세 된 소년이 그 패의 자칭 대장인 것 같았다. 그 애는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프랭크 더프는 약간 장난을 치고 싶고 또 그 꼬마 대장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천상의 모후의 부엌으로 가서 개수대에서 컵을 집어서 물을 가득 채웠다. 그는 열린 창문을 통해 “노려 보았다.” 그때 그 물이 “목표물”에 확실하게 닿기 위해서는 더 많은 “통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옆 방문을 열고 뒷걸음질쳐서 들어갔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물을 쏟아 부었고” 불쌍한 프랭키는 “물에 흠뻑 젖었다.” 프랭키의 고함 소리는 “무시무시한 것” 이었다고 후에 프랭크는 술회했다. 어린 프랭키가 그 터무니없는 짓을 한 범인을 찾으러 와서 프랭크가 창문 곁에 있는 것을 보고 “더프 선생님, 댈리 양이 그랬어요. 댈리 양이었어요. 제가 보았어요.” 하고 소리치자, 프랭크는 등 뒤에 증거물인 컵을 감추고서 마음껏 껄껄대며 웃었다. 그 댈리 양은 물론 그때 “범죄”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프랭크는 그 장안에 너무 열중해서 그가 옆 방으로 뒷걸음질 쳐서 갔을 때 그곳에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그는 그 방에 혼자 있지 않는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고 쁘레시디움 주회를 한창 하고 있던 한때의 여성 레지오 단원들의 깜짝 놀란 표정들과 마주쳤다. 어색한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는 정신 없이 그 방을 빠져 나왔다.

그 쁘레시디움의 영적 지도신부인 브리안 바이른 신부가 제일 많이 놀랐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본 저 사람은 지난 주일에 꼰칠리움에서 경건한 체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 뒤 몇 년 동안 프래으는 그 사건을 얘기할 때마다 바이른 신부가 한 말을 특별히 힘을 주어 흉내내면서 폭소를 터뜨리곤 했다.

어린이들에 대한 프랭크의 사랑은 매우 깊어서 어느 날 그는 천상의 모후에 있는 레지오 단원 중 한 사람인 매리 로우에게 이렇게 말해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마리아, 내가 만일 결혼을 했다면 종교를 잃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그녀는 놀라서 그를 보았고, “더프 씨,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하고 물었다.

“글쎄, 난 내 아이들에게 너무 정신을 빼앗겨서 틀림없이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거요” 하고 그가 설명했다.

약간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이 말은 적어도 어린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나타낸다.

언젠가 한번은 거주자들 중 한 명이 매우 심하게 아팠다.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았다.

“제발 저를 병원으로 보내지 마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난 낫지 못할 거예요. 내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제발 절 집에서 죽게 해주세요.”

레지오 단원들의 눈에서 기쁨과 슬픔의 눈물이 흘렀다. 그녀를 위한 애도의 눈물과 그녀가 천상의 모후 기숙사를 그녀의 집으로 불렀다는 기쁨의 눈물이 서로 교차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를 병원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마지막까지 따뜻하게 돌보아 주었다. 그녀는 레지오 단원들과 거주자들이 옆에 있는 가운데 행복하고 거룩한 죽음을 맞았다.

그 본보기가 그 뒤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 그들은 거룩하고 애정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품위 있게 죽었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길을 잃었을 영혼들이 안전하게 천상 고향으로 인도되었다.

 

 

 

20 불쌍한 리지

 

프랭크가 지금까지 부닥친 문제들 중 가장 어려운 경우의 하나가 리지 맥더못의 경우였다. 리지는 한대 매춘부였고 끔찍할 정도로 타락했다.

프랭크는 화이트 프라이어 6 거리에서 감시를 하고 있을 때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개종 권유 회관에 접근하고 있었는데 가엾고 불결한 모습이었다. 그의 곁을 지나갈 때 그는 그녀에게 <성심의 사자>라는 작은 가톨릭 소책자를 주었다. 그녀는 받아서 흘낏 보고 나서 그것이 종교 잡지라는 것을 알지 그의 얼굴에다 도로 던졌다. 리지는 정기적으로 그 곳에 왔다. 프랭크는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를 점잖게 불렀다.

“리지, 그 곳에 가서 당신의 종교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신도 알지요?”

그녀는 결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올 때마다 프랭크는 똑같은 점잖은 태도로 다가가 몇 마디 친절한 말로 호소했다. 그녀는 수 업이 계속해서 왔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그에게 대꾸하거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무시해 버렸다.

그는 감시를 설 때 항상 손에 로사리오를 들고 있었고 시간이 나는 대로 “성모송”을 바치고 있었지만, 그녀가 지나갈 때는 그 묵주가 리지 의 팔이 닿지 않는 곳에 두었다 그녀는 가능하면 그것을 잡아채어서 십자가에 침을 뱉기 때문이었다.

몇 해가 지났다. 그때 어느 주일날 아침에 리지 가 평상시와 같이 아침을 먹으러 그 회관에 왔다. 다시 한 번 그녀는 프랭크를 무시하고 그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나타나 그를 향해 곧바로 걸어왔다. 그녀가 공격을 하려 하는 줄로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그의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더프 씨,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예, 리지, 알고말고요.”

“성지주일이죠. 그렇죠, 더프 씨?”

“그렇습니다. 성지주일이에요.”

“저 더프 씨, 방금 저 곳에 갔을 때 그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저 곳에 가지 않을 거예요.”

“오! 리지, 훌륭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그 결심을 지키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결말을 짓지 않아서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는군요.”

“고백성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고백성사를 받지요.”

프랭크는 주님의 자비로운 방식에 감사하면서 리지 를 프란시스 거리 마이러의 성 니꼴라오 성당의 보좌신부인 크레돈 신부에게 데려가기로 했다. 그들이 시가지를 따라 걷고 있을 때 그 둘은 이상한 대조를 이루었다. 프랭크는 단정하고 깨끗해 보이는 데 반해 리지 는 헝클어진 머리에 초라하고 흉한 모습이었다.

그들이 교회에 들어가기 전 프랭크가 말했다. “리지, 오늘 아침을 굶었지요. 나도 그래요. ‘더 코지’ 로 들어가서 함께 아침을 먹읍시다.”

“더 코지” 는 프란시스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가게였다.

크레돈 신부는 체격이 컸고 제의를 입으면 더욱 커 보였다. 프랭크와 리지 가 제의실 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막 미사를 드리러 교회로 들어가고 있었다. 간단한 소개가 끝난 뒤, 크레돈 신부는 리지 에게 말했다. “미사가 끝날 때까지 이 곳에서 기다려 준다면 그때 보겠습니다.” 프랭크는 그녀가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지도 몰라서 함께 기다렸다. 미사가 끝났을 때 리지 는 고백성사를 보았고 하느님과 화해했다. 그는 또한 성 마리아 기숙사에 들어가서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그녀를 설득하였다.

리지 가 밤 사이에 “이리에서 한 마리 양으로”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리라. 그녀의 과거 행동은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항상 문제 거리가 될 것이라고 프랭크는 느꼈다. 또 실제로 그랬다. 그녀는 성 마리아 기숙사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은 너무도 침착하지 못했고 성품은 너무 난폭했다. 그녀는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옮겼고 마침내 크레돈 신부가 천상의 모후 기숙사로 들어가도록 설득했다.

프랭크는 “그것은 천상의 모후를 위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슬픈 날이었다” 고 말했다. 천상의 모후가 특히 가장 궁핍한 여성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세워졌기 때문에 기뻤다. 불쌍한 리지 보다 더 궁핍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외에도 누가 그녀를 받아 주겠는가? 동시에 천상의 모후에게는 “슬픈” 날이었다. 리지 는 상습적인 말썽꾸러기였고 다른 사람들의 생활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요소는 그녀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구원되어야 할 죽지 않는 영혼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리지 는 유리창과 거울을 좋아했다. 그것들을 깨기가 아주 쉬웠다! 그녀는 이 물건들에 그녀의 분노를 터뜨렸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그녀는 매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첫 “희생물”은 프랭크가 경매에서 산 아주 큰 대형 거울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거울이 유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랭크는 싼값으로 그것을 샀다. 그것은 여자들의 오락실 방에 걸려 있었다. 프랭크의 방침은 여성들, 특히 단정하지 못한 여성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어 봄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여성이라는 의식을 회복시키는 첫걸음은 자신의 용모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어느 날 리지 가 큰 거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 이어 행동이 이어졌다. 그 자신의 말을 빌면, “끔찍하게 보이는 여자가 손에 찻잔을 들고 내게로 오고 있어요. 내가 먼저 한 방을 먹이지 않을 수 없었어요” 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했고 거울은 박살이 나버렸다. 물론 그녀가 본 거울 속의 여자는 바로 자신이었다. 이것은 그녀의 성미가 급했기 대문에 생긴 많은 폭력적인 사건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은 그녀의 비행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성모님께서는 그런 불쌍한 사람 안에 있는 당신의 아들을 섬기도록 임무를 부여하셨다.

세월을 흘렀고 그녀의 온갖 비행에도 불구하고 리지 는 결코 쫓겨나지 않았다. 천상의 모후는 그녀의 집이 되었고 그녀가 지금까지 알았던 유일한 진짜 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에도 단 한 번도 그녀는 “감사하다” 고 말하거나 가장 가벼운 감사의 표시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따금 영성체를 했다.

그녀는 나이가 들자 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의식불명인 채로 발견되었고 제임스 가에 있는 더블린 시 남부 구빈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퇴원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그 곳에서 만족했고, 친구들이 찾아오면 항상 기뻐했다. 물론 그녀의 친구는 천상의 모후의 레지오 단원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지 는 큰 은총을 받았다. 그것은 “감사합니다” 하고 말을 하는 은총이었다. 아마 그녀는 그것을 오래 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고집이 세고 거만한 성격 때문에 그렇게 못 했을 것이다.

두 명의 레지오 단원들인 매리 로우와 매이 모텔이 그녀를 보러 왔다. 그녀는 “자신의 자존심을 주머니 속에 넣고” 모든 것, 특히 그녀를 그토록 오랫동안 참아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레지오 단원들은 그녀를 30년 동안이나 도와 주었다.

“난 지금 아주 행복해요. 그리고 난 빠짐없이 영성체를 해오고 있어요. 하느님께서 저를 참아 주셨어요. 난 아주 심하게 아프지만 지금 죽어도 개의치 않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잠시 쉬었다가 다신 겸손하게 말했다. “제 부탁을 들어 주시겠어요?”

“예, 물론이지요” 하고 그들이 대답했다.

“더프 씨에게 불쌍한 리지 맥더못 이 구원될 수 잇는지를 그분을 통해서 듣고 싶어한다고 전해 주세요. 저는 그분께 깊이 감사 드리고 있어요. 그분은 어쩌면 몰랐겠지만 저는 과거에 자주 그분의 마음을 상해 드렸어요.”

“좋아요. 그분께 말씀드릴께요, 리지.”

“더프 씨가 저를 찾아와 주시리라 생각하세요? 그분이 제 침대 곁에만 계신다 해도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분이 올 수 없는 경우에 단 한 명의 영혼도 구하지 못한다 해도, 리지 맥더못을 구한 것만으로도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한 가치가 있었다고 그분께 말해주세요.”

 그 두 여성이 돌아와 프랭크에게 그 말을 전하고 리지 의 소원에 대해 말했을 때 그가 물었다.

“상태가 아주 위험한가요?”

“아닙니다. 더프 씨. 아주 위험하지는 않아요. 금방 죽을 위험은 없어요.”

“좋습니다. 바로 지금 난 아주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만둘 수가 없어요. 적어도 일 주일은 더 걸릴 것입니다. 그때 문병을 가지요.”

프랭크는 자신이 놀란 만큼 그가 관여했던 일이 뜻밖에 다음날 바로 끝났으므로 리지 의 간청을 잊지 않고 즉시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리지 의 병실로 달려간 그는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서 임종기도를 바치는 한 간호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병실에 있는 다수의 환자들이 또한 그 침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렇다. 리지 는 죽어가고 있었다. 프랭크는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도록 이 곳으로 인도되었구나” 하는 완전하고 분명한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그가 그 곳에 있는 동안 리지 맥더못 은 죽었다.

프랭크가 그 가엾은 여인 때문에 수년 동안 겪어야 했던 온갖 모욕과 괴로움들이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의 빛으로 볼 때 감미로운 기쁨처럼 보였다.

 

 

 

21 지구를 일주하기

 

프랭크 더프는 뉴멕시코 주 라톤 시 성 패트릭 성당의 본당 주임 신부로부터 레지오 마리애에 대해 알려 달라는 편지가 왔을 때 굉장히 흥분했다. 이것은 미국에서 온 그러한 문의 중 첫 번째로 온 것이었다. 그 사목자는 1931년 여름 더블린을 방문했을 때 레지오의 활동을 보았던 조셉 드노반 신부가 쓴 <덴버리뷰>에서 레지오에 대한 소식을 알았다. 그래서 그 해 11월 27일 라톤에 미국 최초의 레지오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다.

다음 해 전세계에 주교들과 사제들이 세계 성체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더블린에 왔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 곳에 머무는 동안 레지오에 대해 알게 되었고 돌아가서 자신들의 교구에 그것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레지오는 로스앤젤레스와 세인트 루이스 에 설립되었다. 더블린의 레지오 단원인 실리아 쇼가 쁘레시디움 설립을 돕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그때 샌프란시스코의 부유한 사업가인 바틀리 올리버 씨가 레지오를 미국 전역에 확장시킬 사절을 파견해 주도록 요청했고 모든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제의했다.

최초의 사절로 선발된 메리 더피는 9년 동안 레지오 활동을 하였다. 약간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렬히 자신의 선교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레지오의 조직 체계는 기본적으로 단순하여 자기 본당에 레지오를 설립하려는 사제들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기초를 배울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단원들을 훈련시키기도 쉽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더블린에서 참석했던 최초의 주회 와 아름다운 레지오 제대와 그 중앙에 세워졌던 원죄 없으신 잉태의 성모상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녀는 프랭크 더프가 레지오의 쁘레시디움은 성모님의 나타나심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종종 들었다. 쁘레시디움을 통해 모든 이의 영적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가 당신의 독특한 선물을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 성모상의 중요성은 “그분의 나타나심”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또한 그 주회에서의 엄격한 규율을 기억했다. 그녀는 레지오의 첫 단장인 커윈 여사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그 엄격한 훈련에 어느 정도 놀랐지만 그것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영적 군대였지만 은총과 영혼과 악과 같은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군대였다. 그 규칙이 단지 능률을 위해 도입되었다 해도 정당화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규칙들은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수사들과 수녀들이 성덕의 길로 가도록 돕기 위해 생활의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레지오 규칙은 단원들의 겸손, 복종, 애덕, 자기 희생 등과 같은 덕을 확고하게 발전시키도록 도와준다.

메리 더피는 1934년 6월 3일에 항해를 시작했다. 손을 흔들면서 부두에 서 있을 때 프랭크는 감동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몇 년 내에 두 명의 아일랜드 레지오 단원 존 머레이 와 유나 오바이른이 메리와 함께 레지오 사절로서 일하도록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곧 레지오는 신대륙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 캐나다까지 여행했고 필요한 허가를 받기 위해 주교들을 방문하고 단체들에 연설을 했고 요점을 설명하고 쁘레시디움을 조직하고 간부들을 훈련시키고 더 멀리 움직이기도 하고 재검토를 하고 견고케 하기 위해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어떤 곳에서는 사제들이 서서히 레지오의 진가를 깨닫거나 승인했다 .평신도가 영적 사도직에 참여한다는 개념은 그들에게는 위험하고 혁명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 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30년 전이었다. 30년 후 그 공의회는 “교계 제도와 함께 참 의미에 있어서의 신도단이 존재하여 활동하지 않으면 교회는 참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며 충분히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표시도 아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21). “물론 이 일이 가능한 곳에서는 신도는 교계와 더욱 더 긴밀히 협력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전하기 위하여 또 그 특별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교 21).

그러나 1934년으로 돌아가면, 레지오 사절들은 그와 같은 강력한 후원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많은 사제들이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했고 레지오의 쁘레시디움을 세우도록 초청했다. 미국의 첫 세나뚜스 의 영적 지도자인 찰스 헴싱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난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에게 레지오를 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단순함과 겸손 때문에 그것을 깔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단 한 번 해보십시오.”

레지오 단원들을 통해 사제는 이제 자신을 위한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더 많은 영혼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교회에 속하지 않았거나 종교 생활을 하지 않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많은 교구민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본당에 냉담한 가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은 분명히 이 길 잃은 양들을 “몰아서 모으고” 그 양들을  부드러운 설득으로 우리 속으로 들어가게 할 협력자들을 필요로 하신다. 아마도 역시 방문해서 도와 주어야 할 나이 들거나 의지할 곳이 없거나 병든 사람이 있을 것이며, 이것은 소년 레지오 단원들에게는 놀라운 활동이 될 것이다.

그래서 뉴욕 주, 롱 아일랜드 의 몽포르 신부회의 로저 메리 찰스트 신부는 자신의 격월간 잡지인 <퀸>을 통해 끊임없이 레지오 마리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은 단원들의 성화라는 것을 강조했고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강조했다.

미국에서 레지오의 확장은 굉장했고 큰 열매를 맺었다. 에드워드 코터 신부는 1938년 신시내티 시 세인트루이스 성당에서 쁘레시디움을 출범시켰고 14년간 그 곳에 있는 동안 500명을 교회로 인도했다. 뉴욕 세나뚜스, 코르발에 있는 한 레지오 꼬미시움 은 일 년에 레지오 단원이 257명의 냉담한 가톨릭 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데려왔다고 보고했다. 펜실베니아 주 블랙스의 쁘레시디움은 일 년에 23명을 교회로 인도했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 전역에서 온 그런 수백 가지의 보고들 중의 몇 개에 불과했다.

로스앤젤레스의 몬시뇰 도넬리는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레지오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려는 한가지 목적을 위해 수천 명의 젊은이와 늙은이, 기혼자와 미혼자인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의 군대로 이루어졌다.” 캐나다에서 오블라티회의 고든 대주교는 레지오 단원들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전세계에 걸친 레지오의 엄청난 성장에는 세 가지 근본적 조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원들의 개인적 성덕, 봉헌심, 성모님께 대한 생생한 신심입니다. 레지오는 이 조건들에 의해 성공할 것입니다.”

순례하는 교회는 볼래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마 뒤 미국에서 다수의 레지오 단원들이 그들 교구 밖과 해외 선교사업에서 레지오를 지원했을 때 그것이 전혀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다. 메리 페플리는 펜실베니아 전역에 레지오를 세우는 일에 큰 힘이 되었다. 다른 이들은 중미와 남미로 갔다. 윌리 리안 신부는 로스앤젤레스 세나뚜스에서 소 그룹의 레지오 단원들을 이끌고 러시아로 갔다. 미네소타에서 프란시스 콘리가 프랭크 더프에게 필요한 것이면 어디서든 일하겠다고 지원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 그는 “아이슬란드는 어떻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프란시스와 또 다른 미국 레지오 단원인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시 출신의 아이비토미넥이 아이슬란드에 마리아 정신의 외지 체류(I.M.)로 가는 첫 지원자들 중에 있었다.

사절에 대한 개념은 미국에서 잘 이해되었다. 레지오의 최고 관리기관으로 더블린에 있는 꼰칠리움 은 충분한 기금이 모이면 레지오 사절을 다른 먼 나라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레지오 단원들은 꼰칠리움을 위한 이 기금의 상당한 부분을 부담함으로써 그들을 위해 행해진 일들에 감사를 표했다. 레지오가 지구를 일주하리라는 것은 이제 확실했다.

 

 

영국에서도 레지오는 자라고 있었다. 꾸리아가 런던에 세워질 준비가 되었다. 이것은 쁘레시디움을 감독하고 간부들을 훈련시키며 새롭고 도전적인 사업을 장려하며 레지오를 확장시킬 것이다. 프랭크 더프는 꾸리아의 첫 번째 회의를 위해 런던으로 초청 받았다. 해머스미스 성심 수녀원에 세워진 첫 쁘레시디움의 단장인 필립버 체체바노브스카를 만나는 것은 그에게 큰 기쁨이었다.

꾸리아 회의 후 프랭크는 젊은 여성 레지오 단원인 멕켄지 스미스 부인을 소개받았다. 대화 도중에 그녀는 프랭크에게 자신이 인도로 곧 떠날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녀의 남편이 마드라스의 주장관으로 임명되었다고 했다. 프랭크는 이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았고, 그녀에게 그 곳에 레지오를 세우도록 요청했다. “최선을 다하겠어요, 더프 씨.” 그리고 그녀는 “한가지 큰 걱정이 있는데요. 제 남편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에요.” 라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가 되도록 그분께 권유해 보셨습니까?”

“아니에요, 더프 씨. 제 남편은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종교 문제에 대해서만은 완고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 문제를 의논하기가 아주 어려워요.”

“좋아요. 그렇다면 부인이 인도에 레지오를 세우면 남편이 가톨릭 신자가 될 거예요.”

멕켄지 스미스 부인에게는 이 말이 아주 놀랍고 기쁜 말이었다.

“물론 제가 그런 장담을 할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인이 우리 성모님께 놀라운 일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대신하여 제가 말한 것이 이루어질 거라고 확신합니다. 성모님의 관대함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 그리 오래지 않아 맥켄지 스미스 부인은 마드라스 로욜란 대학의 예수회 신부인 로렌스 머피의 영적 지도 아래 인도에 첫 쁘레시디움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 때가 1931년이었다.

더프 씨의 말에 용기를 얻어 그녀는 남편에게 가톨릭 교회에 대한 교리 교육을 받도록 설득했다. 남편은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도중에 그만두었다.

몇 달이 지났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맥켄지 스미스씨가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와서 미소를 지으며 아내에게, 그 동안 아내 몰래 교리 공부를 다시 시작했으며 어느 날에 영세를 받기로 사제와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남편이 선택한 날은 – 그는 그것을 몰랐지만 = 인도에서 최초의 레지오 주회가 열린 지 일 년 되는 날이었다. 성모님의 자비로우신 손길이여!

 

 

일 년 뒤 맥켄지 스미스 부인은 더블린을 방문한 후 인도를 거쳐 오스트랠리아로 돌아가려는 루이즈 가반 더피라는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그녀의 오빠가 인디아에서 사제로 있었다).

루이즈의 아버지인 찰스 가반 더피 씨는 토마스 데이비스의 친구였다. 또한 그는 아일랜드에서 합병 반대운동에서 다니엘 오코넬을 돕기 위해 아일랜드 청년당이 세운 유명한 주간신문 <민족(Nation)>의 편집자였다. 후에 찰스 가반 더피 씨는 오스트랠리아로 이주했고 그 곳에서 마침내 수상이 되었다.

루이즈는 1923년에 더블린에서 쁘레시디움에 참석했으므로 레지오 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최근의 더블린 방문을 통해 그녀는 프랭크 더프에 대해 다시금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오스트랠리아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그녀에게 더 많은 열성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인도에 머물면서 루이즈는 상황이 아일랜드와 아주 다른 선교 국가에서 레지오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가 오스트랠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닉스 대주교가 멜버른의 배커 신부에게 아스콧 베일 본당에 쁘레시디움을 시작하도록 허가한 후였다. 그녀는 이 사실을 알고 기뻤다. 대닉스 대주교도 역시 성체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더블린을 방문했을 때 프랭크 더프를 만났다. 루이즈는 프랭크 스톤에 두 번째 쁘레시디움을 세웠고 후에 꾸리아의 초대 단장이 되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레지오는 이웃 본당으로 퍼져 나갔다. 오스트랠리아 전역에서 레지오의 성장과 확장이 더블린에 파견된 사절의 도움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오스트랠리아 레지오 단원들의 자랑거리였고, 실제로 오스트랠리아 레지오 단원들은 뉴기니아와 많은 태평양 연안의 섬들에 레지오을 세우기 위해 확장한 일꾼을 파견했다.

 

 

 

 

22 아프리카의 첫 레지오 단원

 

성 패트릭 선교회의 아일랜드 사제인 제임스 모이나 신부는 나이제리아의 캘러바시푸 호에 있었다. 그의 본당은 컸지만 소수만이 가톨릭 신자였다. 사제들과 수녀들은 매우 곤란한 일에 부딪쳤다. 나이제리아의 인구는 3천만 명이었지만 대부분 이교도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이나 신부는 가톨릭 신자들을 평신사도로 동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교회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충만한 진리를 전하는 교회의 선교에서 평신도들을 적극적인 참가자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그때 그의 손에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이 들어왔다! 아직 아프리카에서는 레지오가 시작되지 않았다. 더블린의 꼰칠리움과 서신을 주고받은 뒤 곧 모이나 신부는 레지오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대표자가 필요했고 미카엘 에켕이 그 일에 적임이라는 것을 알았다.

에켕은 서나이제리아 아로추쿠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 형과 함께 노예 상인에 의해 유괴되었다. 노예 상인들은 밤이 될 때까지 그들을 “숨겨 놓았다’가 어둠을 틈타서 카누와 노 젓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크로스 강으로 데려왔다. 카누가 해안을 향해 하류로 가는 위험한 여행에서 두 소년의 울부짖는 소리는 소용돌이치는 물소리 때문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 노 젓는 사람은 익숙한 솜씨였다. 해류와 급류와 악어들을 노련하게 빠져 나왔고 다음날 아침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를 때 카누는 소중한 화물을 싣고 캘러바의 붐비는 교역 도시에 이르렀다.

에켕은 시장에서 팔렸다. 그의 주인은 개신교도였고 친절했으며 노예들에게 잘 대해 주었다. 에켕이 이교도인 것을 알자 주인은 그를 성경반에 보내어 세례를 받게 했다.그 소년은 또한 학교에서 총명하고 근면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가 국민학교에서 시험에 통과하자 계속 공부하여 교사가 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는 여전히 노예였다.

어느 날 에켕은 작은 가톨릭 교회 옆을 자나가고 있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를 슬쩍 살펴보고는 재빨리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느꼈던 평화롭고 행복한 기분은 그를 매료시켰다. 곧 그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한 아일랜드 신부가 그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다음 해 에켕은 “미카엘”을 세례명으로 받으면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미카엘 에켕이 초급학교(국민학교)의 교사 자격을 얻지 정식 봉급을 받게 되었다. 그는 돈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자유를 도로 사려는(!) 한 가지 큰 야망을 가졌다. 충분한 돈을 모으자마자 그는 주인에게 가서 그의 “값”을 치렀다. 미카엘 에켕은 이제 “하느님의 자유인” 이었다. 성 바울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I 고린토 1, 27). 이전에 노예 소년이었던 에켕은 이제 아프리카의 최초의 레지오 단원이 되도록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선택되었다. 그 곳에 최초의 쁘레시디움이 창설된 날은 1933년 9월 7일이었다.

모이나 신부와 에켕은 레지오를 세우고 확장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오고야의 맥게터릭 주교는 에켕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미카엘 에켕이 일을 수행하는 능력은 놀랍습니다. 그는 캘러바에서 새벽 1시에 출발해서 18마일 떨어진 오론까지 카누로 가서 그 곳에서 55마일 떨어진 곳의 레지오 주회에 참석하고 주회가 끝난 뒤 영성체를 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선교회까지 다시 12마일을 자전거로 타고 갔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는 이 여행 동안 내내 단식을 했습니다.”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그 곳에 50개 이상의 쁘레시디움들이 번창하고 있었다. 레지오 단원들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어린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길 잃은 일들을 찾아 나서서 그들을 양우리로 도로 몰아넣고 역시 교리를 가르쳤다. 인근 본당에 있는 사제들이 레지오를 통해 군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특히 그들은 레지오가 그 단원들에게 미치는 놀라운 영적 효과를 보았다.

물론 더블린에서 프랭크 더프는 이러한 진척 상황에 지극히 기뻐했다. 그는 이것이 당시 속담에 “바다의 물 한 방울” 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프리카는 아주 거대했다. 프랭크는 선교사들을 아프리카와 다른 포교지에 파견하는 아일랜드의 신학교를 방문했다. 또한 외국 선교를 맡고 있는 수녀회들을 방문했다. 모두에게 그는 발전소로서의 레지오의 역할에 대해 연설했고 그 곳으로부터 선교사들이 큰 영적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고 선교 일꾼이 적어도 수확은 많은 하느님의 선물이 될 거라고 강조했다.

곧 레지오는 아프리카 남부와 다른 지역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동아프리카에 있는 나이로비에서는 해퍼만 주교가 원거리 선교에 있어 레지오의 효과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그는 더블린의 레지오 본부에 편지를 썼고, 동아프리카 지역에 레지오를 확장할 사절을 한 명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펴지를 보낸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프랭크 더프가 블랙록에 있는 랠로 씨의 집에서 종종 만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은 오핸론 씨였다. 그들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오핸론 씨는 이제 자신의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고 적절한 장소와 훌륭한 비서를 찾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 방을 하나 주었던 랠로 씨는 다소 나쏘 거리에 있는 담배 상점의 맨 위층을 그에게 제공했다.

한 젊은 숙녀가 부드럽게 문을 노크했다. 그녀는 꼭대기 층 사무실로 가는 길을 발견했다. 그것은 월요일 아침이었다. 오핸론 씨가 문을 열었을 때 그 앞에는 18세 된 아름다운 숙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금발머리와 아름다운 얼굴과 크고 푸른 눈을 가진 작은 몸매였다. 그녀의 매력적인 미소는 약간 수줍은 기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수줍어하면서 자신이 로시스 대학에서 상과를 마쳤으며 비서를 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오핸론 씨는 한눈에 그녀가 정숙하고 겸손하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 밖에도 그녀의 행동거지가 저격이 있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집으로 가서 자격증과 증명서를 가지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핸론 씨에게는 서류로 된 증명서가 필요 없었다. 그는 이상적인 비서가 방금 자신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확신했다.

“한 가지 문제는 이제 겨우 사업을 시작하는 중이기 때문에 원하는 봉급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오.” 하고 그가 털어 놓았다.

“오핸론 씨,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세요. 얼마를 주시든 갓에 저는 만족할 겁니다. 이 곳이 저의 첫 직장입니다.”

그 뒤 오핸론 씨의 첫인상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의 새 비서는 정말 유능했다. 그녀의 이름이 에델 퀸 이었다.

 

 

 

 

23 에델 퀸

 

1907년 9월 14일 코크 주 캔터크 시에서 태어난 에델 퀸은 다섯 자녀 중 맏 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매일 미사에 나갔고 영성체를 했다. 에델 퀸은 어려서부터 똑같은 습관을 몸에 익혔다. 대단히 순종을 잘했던 그녀는 항상 가족 중 다른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녀의 온순함과 사심 없는 마음은 동료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그녀의 넘치는 유머감각을 좋아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그녀는 경기를 잘해서 자동적으로, 학교의 주장으로 뽑혔다. 그녀는 타고난 지도자였다. 심지어 비 오는 날에도 그녀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서 친구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었다. 또 그녀는 춤추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어린 나이에 성모 마리아께 대한 그녀의 신심은 매우 깊었고 학교 친구들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17세가 되었을 때 마리아회에서 운영하는 영국 업톤 의 한 학교에 진학했다. 그 곳에서 에델의 친구였던 한 명이 후에 이렇게 말했다. “성모 마리아께 대한 에델의 신심이 얼마나 유별났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어요. 그녀가 성모님께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는 아주 개인적이고 감동적인 어떤 것이 있었어요. 한 예로 우리 중 누가 예델이 있는 데서 성모님에게 대해 말하기만 해도 에델은 흥분되어 귀까지 빨개지곤 했어요.”

학교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에델은 친구인 모나 티르니 의 권유로 레지오 마리애에 들어갔다. 에델의 가족은 이 무렵 더블린으로 이사를 했다. 그녀의 첫 번째 레지오 활동은 혼자 살고 있는 노인들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녀와 함께 간 방문자는 또한 가정에서 성심을 공경하도록 권유할 목적으로 여러 가정을 방문했다. 에델은 결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프랭크 더프는 참으로 큰 레지오 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 어린 레지오 단원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 당시 그는 레지오의 관리기관인 꼰칠리움의 단장이었다. 모든 쁘레시디움 단장을 임명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선서를 하는 레지오 단원들을 지켜보았다. 그는 에델과 함께 가진 회합에서 그를 만나게 됐고 그 후에 그 만남은 “참신한 경험” 이라고 묘사했다. “그녀에게서 자질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의 피난처이신 성모 마리아의 쁘레시디움에 단장이 필요했을 때 난 에델이 적임자라고 확신했어요.” 그래서 곧 그녀는 그 쁘레시디움의 단장이 되었고 그 쁘레시디움의 사업은 더블린 시의 매춘부들을 구제하는 일이었다.

프랭크는 차를 마시도록 에델을 집을 초대했다. 그는 항상 모든 단장을 개인적으로 면담했고 그들을 격려하고 단장으로서의 직책이 성화를 위한 놀라운 기회임을 지적하고 또한 책임감을 강조했다. 그는 항상 성모님께 의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프랭크는 에델이 그녀의 차에 설탕도 우유도 넣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허약해 보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건강을 돌보고 지나친 고행을 삼가 하라고 약간의 충고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설탕과 우유를 넣지 않는 것은 고행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전 단지 차를 이렇게 마시기를 좋아해요. 더프 씨.” 하고 그녀가 덧붙였다.

고행에 대한 에델의 주된 생각은 아주 하찮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한 완벽하게 실천하는 것이며 언제라도 그녀가 관계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완전히 사심 없이 주며 똑같은 태도로 일에 임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소화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을 읽었고 데레사 성녀가 가르친 완덕의 작은 길(Little Way of Perfection)에 매료되었다. 레지오에 입단했을 때 그녀는 모든 세부적인 일에서 완덕을 목표로 하고 복되신 성모님과 일치하여 그렇게 하도록 주장한 몽포르의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을 받아들일 준비가 이미 잘 되어 있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성모님께 의지하여” 가 그녀의 좌우명이었다.

그녀의 레지오 활동은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더블린의 빈민굴로 들어가야 했다. 레지오 단원들은 항상 둘씩 짝을 지어 활동하고 가능하면 에델과 그녀의 동료는 이 사도직에 나서기 전에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곤 했다. 그녀의 전 생애는 기도로 충만했다. 또 종종 그녀는 자신의 영혼의 심연에서 성삼위의 놀라운 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성덕은 슬픔을 의미하지 않는다. 에델은 계속해서 미소 짓고 명랑했으며 즐거운 생활을 했다.

그녀의 고용주인 오핸론 씨는 사업에서 물러나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사업을 이어받은 프랑스 청년에게 에델을 계속 비서로 고용하고 봉급도 더 많이 주도록 부탁했다. 그는 에델과 작별하는 날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고 울었다.

에델의 새 고용주는 에델의 능력을 아주 빨리 간파했다. 더욱이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자질과 따뜻한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청혼을 했다. 그녀는 아주 부드럽게 자신은 수녀가 되기 위해 글라라 수녀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고자 했다.

프랭크 더프는 그녀의 계획에 대해 들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레지오가 그녀를 잃게 된 것에 실망하십니까, 더프 씨?”

“아니오. 난 항상 우리가 잃으면 누군가가 얻을 것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라면, 우리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느님의 계획을 더 잘 안다고 말합니까?”

실제로 하느님의 계획은 누가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났다. 의사는 에델이 중병에 걸렸다고 했다. 그녀는 결행이 심해져 고생하고 있었다. 그녀는 병을 용감하게 받아들였다. 병원에서 18개월 뒤 그녀는 더 좋아지지 않았으므로, 퇴원을 해서 집에서 처방된 치료에 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레지오 마리애에 다시 들어갔고 짧은 시간 내에 이전처럼 바빠졌다.

 

멀리 아프리카에서는 해퍼만 주교가 그의 관구에 레지오 사절을 보내 달라는 요청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랭크 더프는 동료 간부들과 함께 에델의 상태를 의논하고 다각도로 고려해 본 뒤, 그녀에게 레지오 사절로 동아프리카에 가겠느냐고 물어 보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녀의 건강상태를 알았고 아프리카의 위험한 상황을 알았다. 온갖 어려움을 설명했는데도 그녀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그녀는 매우 기뻐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그녀의 출발 전에 생겼다. 그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심지어 레지오 단원들 사이에서도 그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그렇게 약한 여자를 아프리카로 보내는 것은 미친 짓이고 어리석은 것이며 경솔한 짓입니다” 고 말했다. 에델의 절친한 친구인 한 여성 레지오 단원이 어는 날 프랭크를 찾아왔다. 프랭크는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여성은 단호하게 손을 뒤로 돌리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더프 씨, 피로 물든 당신의 손을 잡을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 손은 피에 흠뻑 젖어 있어요.”

프랭크는 그 말에 마음이 아팠다. 그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것 보다는 오히려 몇몇 레지오 단원들에게 있는, 사물을 단지 인간의 눈으로써만 보게 하는 신앙의 부족, 선견의 부족이 슬펐기 때문이었다. 신앙이 약간이라도 적었다면 그 자신도 굴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니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고 계속하기를 원하신다고 확신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깊이 보았다. 그는 에델에게서 비범한 신심과 대담무쌍한 정신과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사도를 보았다.

“그런 야생 새를 새장에 가둘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기회를 부여 받았어요. 에델을 풀어놓아 준다면 역사를 만들 겁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몇 년 뒤 프랭크는 그러한 모험을 하는 데 해해 자신이 어떤 불안을 느꼈는지 자문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에델이 아프리카에 도착한 뒤 곧 죽을 수도 있다.

“아니야. 난 아무런 불안감도 없어. 물론 그녀는 죽을 거야. 그녀가 죽도록 내버려 두자. 그녀가 빨리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면 빨리 가도록 해야 할 거야. 그녀는 더 높은 단계에서 죽을 것이니까. 그녀는 아프리카의 사절로서 죽을 거야. 그것이 그녀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야.”

그것이 그 사람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념은 보상을 받았다. 반대는 없어졌다. 레지오의 관리기관인 꼰칠리움이 정식 승낙을 했다. 그래서 에델 퀸은 아프리카로 떠났다.

산을 옮기는 그런 신앙은 훌륭한 사람들 사이에서조차도 아주 드물다. 그러나 에델같이 감수성이 예민한 영혼에게는 그것은 가장제요 원기를 도구는 것이었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위한 큰 사업에 자신을 던지는 것은 앞으로 그녀에게 영감이 될 것이다. 프랭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건강을 해칠까 봐 염려 했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나 봐요. 그러나 신임을 받는다는 느낌은 좋은 것이며 앞으로 저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고 저에게 기회를 주신 데 대해 제가 감사하게 여긴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 주십시오. 전 그것이 특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또한 당신이 밀고 나가지 않았다면 제가 파견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 다만 제가 레지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위험을 막기 위해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오든 간에 약한 것을 선택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신앙과 용기를 당신이 가졌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어떤 슬픔이 다른 사람에게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이 다른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8년 후 죽을 때까지 아프리카에서 에델의 선교사업은 역사의 훌륭한 위업만큼 가슴 떨리는 모험이었다. 그녀의 허약한 건강과 지독한 여행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케냐의 고원지대, 우간다의 찌는 듯한 태양이 내리쬐는 건조지역, 남아프리카의 밀림지대를 거쳐 인도양 연안의 마오리 섬까지 수천 마일을 여행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모든 사람의 영적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해 얘기하고 그들을 사도로 훈련시키고 레지오 마리애의 쁘레시디움을 설립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그녀는 마을에도, 학교에도, 그리고 문맹자들 가운데도 쁘레시디움을 세웠다. 그녀는 빅토리 호 기슭에도 나병환자들을 위하여 쁘레시디움을 하나 세웠다.

본당에 새로운 생기와 활기가 넘쳤다.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사도직에 초대되었고 모든 사람에 대한 교회의 선교에 참가했다. 말하자면 레지오는 사제로 하여금 그의 광대한 본당 구역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사제의 연장선이었다. 이교도들 사이에서 많은 입교자가 생겼다. 많은 죄인들이나 냉담한 가톨릭 신자들이 다시 신앙생활을 했다. 특히 레지오 단원들의 생활에서 기도와 성덕이 놀랍도록 성장한 것이 주목할 만했다. 한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우리가 이곳에서 시작한 이래 6개월의 짧은 기간 안에 레지오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에델은 계속하여 여행했고 새로운 지단을 세워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그녀가 만나는 모든 사람 위에 빛나는 햇살처럼” 웃음과 유머가 넘쳤다. 그러나 그녀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지고 있었다. 그녀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영혼의 소중함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이 않다는 것도 알았다. 누가 그녀에게, “에델, 당신은 그 여행을 견디지 못할 겁니다.” 혹은 “에델, 밀림을 통과하는 여행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하고 말할 때마다 그녀는 단지 미소를 짓고 “복되신 동정녀께서 저를 돌봐 주실 겁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실제로 에델 퀸의 특별한 성공의 비결은 자신을 성모님께 완전히 의탁하고 매일 성모님과 일치하여 예수님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함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월은 흘러갔다. 프랭크 더프는 그녀와 계속 서신을 교환했다. 그러던 어느 봄날 아침 프랭크는 동아프리카 소인이 찍힌 봉투를 뜯었다. 그것은 에델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는 멍하니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더프 씨, 키수무를 다녀온 뒤 매우 지쳐서 지금은 쉬고 있습니다.” 같은 날 나이로비에서 에델이 죽었다는 전보가 도착했다. 가냘프고 망가지기 쉬운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그의 보호 아래 있었다. 그는 그 꽃이 자랄 동안 기도와 격려와 자극으로 최선을 다해 돌보았다. 그 꽃은 항상 가냘프고 망가지기 쉬운 채로 남아 있었지만 훨씬 더 아름답게 자랐다. 이제 그 아름다운 꽃을 영원히 당신 것으로 삼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꺾으셨다.

 

 

 

 

24 독특한 사람

 

한 젊은 레지오 단원이 클레런던 거리의 성 데레사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는 1934년 10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그녀는 프랭크 더프가 높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가 토요일에 사무실에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종종 이 특별한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날 프랭크가 일어나서 교회를 나왔을 때 그녀를 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메리, 난 그만두었어요” 하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이 공무원 직을 그만두었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날 늦게 그녀는 그 소식을 친구인 실리아 쇼에게 말하려고 했으나 실리아가 먼저 말했다. “그래, 나도 알아. 그 부서의 공무원 한 분이 ‘쇼우 양, 은총이 재무과를 떠났어요. 프랭크 씨가 사직했어요’ 라고 나에게 말했어요.” 그것은 (그가 속해 있던) 부서에 의무감과 엄청난 책임감을 가졌던 한 사람에 대한 진실하고 아름다운 칭찬이었다. 그의 억제할 수 없는 훌륭한 유머와 웃음은 사람들을 자주 즐겁게 해 주었고 그들에게 삶의 밝은 면을 보여 주었다.

얼마 전부터 그는 많은 사도적 계획을 처리하기가 점점 더 어렵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사명은 레지오 마리애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소식을 어머니께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던 대로 그것을 조용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서 달관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옛날로 다시 돌아가기는 어렵지 않겠지.” 어머니는 건강이 안 좋아서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때를 생각하고 말한 것이었다. 이제까지는 공무원으로서 프랭크의 빠른 승진이 가족들의 생활 수준을 높여 주었고 지금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프랭크는 항상 봉급을 전부 어머니께 드렸었다. 이제 프랭크의 수입이 많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거의 “어렵던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더프 여사가 불평이나 푸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것은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솔직한 어머니의 말은 프랭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공무원 직을 그만두겠다는 결정은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들 중의 하나였다. 그 결정은 그가 부양하고 있는 누이동생 이사벨과 어머니에게 이전보다 수입이 줄어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책임 있는 것이었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고 확신한 초자연적 이유로 받아들였다. 그의 양심은 편했지만 그것이 마음의 고통을 덜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쁜 일정 때문에 곧 그런 생각을 잊게 되었다. 그는 집 옆에 있는 천상의 모후 기숙사에 사무실을 두고 남은 45년 동안 그곳에서 널리 팽창하는 조직을 관리했다. 매일 아침 그는 미사에 나가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충실한 자전거를 타고 처어치 거리에 있는 카푸친회 교회를 향하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가 돌아올 무렵 아침 준비를 했다. 그가 매우 아끼는 누이동생 이사벨은 대부분 집에 잇었다. 그녀의 약한 건강 때문에 밖에 자주 나갈 수가 없었다.

아침 식사 후 많은 서신들을 처리해야 했다. 국내외에 있는 레지오 단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써야 할 편지들이 있었다. 또한 한가지 혹은 다른 형태로 그가 돕고 있는 많은 사적인 문제와 관계된 편지들이 있었다. 전세계에 있는 레지오 평의회에 보내는 편지들도 있었다. 프랭크는 오스트랠리아 에 있는 레지오에만도 1932년에서 1956년 사이에 400통 이상의 편지를 썼고 이 편지들 중 대부분이 다섯 내지 여섯 페이지로 빽빽이 타이핑한 편지였다. 그의 생애 동안 쓴 편지는 헤아릴 수가 없다.

주일을 제외하면 프랭크는 저녁 시간을 대부분 주요한 레지오 사업이 처리되는 꼰칠리움 사무실에서 보냈다. 그러므로 그가 자주 만난 동료 간부들은 그 기숙사의 내근 직원들과 함께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들의 생활은 그를 중심으로 맴도는 생활이었다. 어떻든 그들은 프랭크가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특징짓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그에게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끌어당기는 바로 그 “독특함” 이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겸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성 바울로가 “그리스도의 권능의 복음”을 설교할 때 자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II 고린토 4, 7)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 처럼 프랭크도 역시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II 고린토 12, 10) 하고 말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본래 성미가 급했고 때로는 울화통을 터뜨렸다. 그가 그 성미를 억제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은 주님만이 아신다. 사실 그는 그것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아마 그것은 그에게는 성 바울로 를 괴롭혔던 “몸을 찌르는 가시” 와 같았을 것이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II 고린토 12, 7-10).

만년에까지도 프랭크는 성모님이 아니었다면 그의 성급한 성질이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을 거라고 시인했다. 그는 그의 집에 침입했던 어떤 침입자를 큰 막대기를 들고 쫓아갔던 일을 예로 들었다. 그들이 잡기 직전에 그는 침대에서 미끄러져 마룻바닥에 넘어졌다. 만일 그가 침입자들을 붙잡았다면 그 막대기를 가지고 무슨 짓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그 후에 하니 몸이 오싹했다. 그가 넘어진 것은 성모님의 중재 덕분이라고 그는 말했다.

프랭크와 함께 일해 본 사람은 그가 때때로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것을 느꼈다. 동료 간부가 어떤 특별한 방침이나 접근 방법에 대해 그와 의견을 달리하면 프랭크는 감정을 상하고 심지어 성가시게 느끼거나 분노를 나타냈다. 어떤 특정한 방침을 결정하면 그는 상당히 완강했다.

아마 그의 완고함이 유일한 “약점”이 아니었을까? 어떤 사람에게는 그토록 성인 같고 친절한 사람이 상처를 입히고 완고할 수 있다는 것이 모순되게 보릴 수도 있다. 레지오가 초창기일 때 그(프랭크)가 당한 오해와 반대의 오랜 기간이 그를 두렵고 고집 센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그가 알고 있듯이 그는 해야 할 것을 곧고 명백한 길로 이끈 사람이었고 그 길을 과감이 걸어간 사람이었다. 이따금 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특별히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괴로움을 가진 사람들을 상담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 사람에 대한 그의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 정말로 그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섬기느라 시간가는 것을 잊었다. 마찬가지로 기숙사에서, 사회에서 불운했던 사람들을 대할 때도 그는 특별히 온화했고 인내심이 있었다.

이따금 결함이 있는 쁘레시디움이나 평의회에 대한 보고가 꼰칠리움 간부들에게 들어왔다. 프랭크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항상 크나큰 인내심을 가지고 상당을 했고 어떤 결렬한 행동을 고려하기 전에 시도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침을 충고했다. 그러나 만일 어떤 불충한 경우를 만나면 정말 화를 냈다. 그는 약간의 불충도 결코 묵인할 수가 없었다.

1936년 12월 어느 날 더블린의 레지오 단원들은 연차 총친목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레샴 호텔에서 열렸다. 프랭크 더프의 연설이 그 행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는 각 쁘레시디움 주회에 한 시간 반 동안 제대 한가운데 놓여서 성모님이 함께 하심을 상징하는 성모상을 특히 강조하면서 레지오 제대에 대해 얘기했다.

모인 사람들 중에 가장자리에 프랭크를 처음으로 보는 샘 휴즈라는 젊은 레지오 신입단원도 있었다. 장래에 꼰칠리움의 대표가 될 샘은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에 감동되고 열광했다. 곧 그는 쁘레시디움의 단장이 되었고 단시간 내에 프랭크가 얼마나 훌륭한 의논 상대인지 직접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레지오의 몇 가지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충고를 듣기 위해 프랭크 씨를 찾아갔습니다. 그와 오랫동안 면담을 했지만 나중에 돌아왔을 때는 내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실제로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 이유를 점차로 “깨닫게 되었을 때’ 곧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어떤 간부도 ‘과잉보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내 질문에 대답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에, 그분은 분명하고 잘 정의된 원칙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레지오에서 신앙과 초자연의 위치, 그리고 성모님에 대해 오랫동안 말했습니다. 그분이 말한 모든 것은 진지하고 확신이 있었으며 난 아주 행복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했습니다. 난 내 자신이 자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거운 책임감이 내 어깨에 있고 내가 신뢰받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당시 난 수줍음이 많은 청년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내게 아주 큰 용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난 내가 기대했던 것을 얻지 못하고 나왔지만 정말 기분이 좋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분이 나에게 건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일에는 아일랜드의 여러 지역에서 레지오 회의(Legion Congress)가 열리곤 했다. 프랭크는 그 전날 몇몇 경험 있는 단원들과 함께 자동차로 출발했다. 청년 시절 동생의 차를 운전하다 사고를 당한 이후로 결코 운전을 하지 않았다. 그 차는 폭발했었으나 다행히 그때 동생과 그는 모두 심한 상처를 입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갈 때 보통 몇 시간은 걸리며 그 여행은 함께 가는 동료나 자매들에게는 그의 지혜와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한 예로 여행중에 그는 미사에 대한 드 라트레일 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를 하여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미사 참례가 생활화 되게 하였다. 또 어떤 때는 성모님과 성령의 일치에 대해 말했고 그것이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말했다. 때로 그는 “성모님은 마지막 만찬 때에 함께 계셨는가?” 와 같은 문제를 토론하면서 사변적 신학에 대해 말했다.

교회의 위대한 교의에 대한 그의 이해는 매우 풍부했고 그의 열성은 아주 영향력이 커서 후에 한 레지오 단원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더프 씨와 여행을 시작했을 때까지는 종교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나의 이해가 아주 피상적이고 막연한 것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습니다. 난 참으로 더프 씨가 가톨릭 신앙의 놀라운 보물들에 관해 잘 알도록 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대화가 영적 주제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와 일화와 노래도 했다. 프랭크는 이 여행을 영육에 이로운 즐거운 소풍으로 보았다. 그는 그것을 매우 즐겼고 레지오 단원들과의 교제를 매우 좋아했다. 그들이 늙었거나 젊었거나 경험이 있거나 “풋나기” 이거나 간에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신입단원일수록 프랭크처럼 많은 지식과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가 그들처럼 자연스럽고 “평범한”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낸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난 더프 씨가 웃을 때 그 눈을 좋아해요. 그분이 아주 부드럽게 쳐다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즉시 편안함을 느끼게 돼요. 직감적으로 그분이 참된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레지오 단원들을 태운 차가 토요일 오후에 예정된 도시에 도착하면 그곳 지단 간부들은 인사를 하였고 훌륭한 식사를 제공하였으며 함께 예비토론을 가졌다. 프랭크는 지역 간부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했고 특히 영적 지도자 만나기를 좋아했다. 실제로 레지오의 모든 것이 이 간부들과 그들의 헌신적이고 활기찬 지도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들로서는 프랭크를 만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주일 아침 미사 후 회의(Congress)가 시작되고 프랭크 자신도 종종 가장 “평범한” 레지오 단원이 레지오 조직체계 때문에 얼마나 적절하게 신비체와 성모 마리아의 모성과 같은 교의를 토론하고 그것을 일상생활에 관련시키는지에 놀라곤 했다.

프랭크는 항상 레지오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거부한 사제에 대한 말을 들으면 슬펐다. 그는 아주 훌륭한 몇몇 사제들이 철두철미한 영적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보다는 오히려 순수한 세속 단체나 인도주의적 단체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더 좋아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일랜드 국민의 대부분이 특별히 신심이 깊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보통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생활의 진보 문제나 지역 공동체의 영적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어떠한 자극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많은 농촌지역에서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가 애처로울 정도로 적은 것을 예로 들었다.

회의를 마치는 연설에서 프랭크는 항상 노력하는 레지오 단원을 칭찬하며 계속해서 예수님과 마리아와 그들의 본당을 위해 더 높고 큰 계획에 눈을 돌리도록 촉구하곤 했다.

 

 

더블린에 위치한 꼰칠리움은 레지오의 최고 관리기관이다. 월례회의는 매월 셋째 일요일에 개최된다. 프랭크 더프는 첫 단장인 커윈 여사가 사직했을 때 그 꼰칠리움의 단장이 되었고 생애 중에 여러 번 그 직책을 맡았다.

꼰칠리움에 참석하기 위해 더블린에 온 해외 방문객들은 항상 대표들이 파견된 나라가 많은 데 감동을 받았고 그 외 다른 나라들은 꼰칠리움에 의해 임명된 아일랜드인 통신원이 대표했다. 유럽에서 온 방문 레지오 단원들은 물론 멀리 아프리카나 인디아 혹은 필리핀에서 온 레지오 단원들도 있었다.

전세계에서 온 보고서들이 있었고 포교지에 있는 레지오 사절들로부터 온 편지들이 있었으며 최근 아일랜드로 돌아온 마리아 정신의 외지 체류 활동 자들로부터 온 현황 보고서가 있었고 새로운 개발 구상들이 있었고 활발한 토론이 있었다.

새로운 사절이 성모님을 대표하여 먼 나라로 파견되는 순간은 항상 감동적이었다.

물론 프랭크는 그런 토론에서 탁월하게 눈에 띄었다. 그는 많은 것들에 대해 강력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관점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참석한 해외 레지오 단원들에게 흥미 있는 것은 논쟁에서 언제나 그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논쟁이 벌어지면 그는 단지 꼰칠리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개 프랭크가 제안했을 때 그것은 채택되었다. 간부들은 그의 방대한 경험을 기쁘게 존중했다. 또한 그 자신도 레지오가 운영되고 있거나 레지오를 운영하려는 각 나라에 영향을 주는 역사, 지리, 사회적 요소들에 대해 굉장히 많이 알고 있었다. 더욱이 어려운 문제들의 여러 가지 복잡성을 파악하고 실행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그의 능력은 성령께서 탁월한 지혜를 그에게 주셨다는 것을 확신케 했다.

프랭크의 번득이는 재치는 유명했다. 투를스 성 패트릭 신학교 학생인 한 레지오 단원은 꼰칠리움을 방문했을 때 목격한 사건을 얘기했다. 약간 체격이 큰 한 여성 레지오 통신원이 – 그녀의 몸무게는 240파운드 였다 – 레지오 평의회에 어떤 제안을 하기 위해 일어섰다. 그녀는 “더프 형제님께 몇 가지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항상 농담을 좋아하는 더블린의 레지오 단원들은 그 여성이 제안한 것보다는 프랭크나 그 여성이 체격을 비교하면서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프랭크도 그 농담을 즐기면서 그 뚱뚱한 여성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자매님, 당신을 위해 ‘제안’ 할 것이 없어 유감입니다.” 웃음 소리로 회의장은 떠나갈 듯했고 그 마음씨 좋은 여성도 기꺼이 다른 사람들처럼 그 농담을 즐겼다.

또 그 학생은 언젠가 더프 씨가 결혼의 불가사의와 사명에 관해 말했을 때, 그렇다면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던 일에 대해 얘기했다. 더프 씨는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독신으로 있으면 수십 명의 여성에게 희망을 갖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왜 결혼을 해서 한 여성을 불쌍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그래서 심지어 꼰칠리움이 심각한 문제를 다루어야 할 때에도 프랭크는 단원들이 너무 심각해지지 않도록 했다. “하느님은 유머의 대가입니다. 유머는 확실히 인간의 훌륭한 특성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체스톤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그에 대해 농담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종교의 시금석이다.”

꼰칠리움 회의가 끝나면 방문자들은 프랭크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많은 이들은 그와 악수한 것을 남은 생애 동안 기억할 것이었다. 그들은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25 녹의 성모님의 사자

 

 교황 비오 11세는 1939년 2월 10일에 승하하셨다. 3주 후 파첼리 추기경이 비오 12세라는 이름으로 후계자로 선출 되었다. 선출되기 전에 그는 비오 11세의 국무장관이었고 그 자격으로 1931년 로마에서 프랭크를 처음 만났었다. 새 교황은 레지오 마리애에 대해 잘 알았다.

바로 그때 프랭크는 이태리 가톨릭 운동을 책임지고 있는 피자르도 추기경으로부터 로마로 초청을 받았다. 이것은 프랭크가 교황을 알현하고 레지오에 대한 더 많은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로마에서 그에게 모든 문이 열리리라는 보장을 받았다. 전세계의 여러 교황 대사들과 주교들이 레지오 마리애에 대해 보낸 보고서들이 매우 호의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한 가지 문제만 있었다. 세계 대전이 임박했고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여행을 하기에는 매우 위험한 시기였다. 그러나 프랭크는 주저하지 않고 잭 네일을 동반했다.

그가 떠나기 며칠 전 그는 더블린의 교황대사로부터 관저로 와 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아일랜드 서부 교구인 투암의 대주교 길마르틴을 만났다. 인사를 나눈 후 그 대주교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프 씨, 교황대사께서는 당신이 로마로 갈 예정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의 특별한 부탁을 들어 주신다면 아주 감사하겠습니다.”

“도와 드릴 수 있다면 오히려 제가 기쁠 것입니다” 하고 프랭크는 대주교 앞에 놓인 견고한 목재상자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일랜드 서부에 있는 녹(Knock)에서 있었던 성모님의 발현에 대한 것입니다” 하고 주교는 말했다. “아실지 모르지만 1879년 발현이 있은 지 6주 후, 당시 투암의 맥헤일 대주교님은 그 발현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고 그 위원회가 그들의 증인이 ‘신뢰할 수 있고 만족한’ 것이라고 보고했어요.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교회 당국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좀더 확인을 하기 위해 3년 전에 다른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어요. 그 발현을 목격한 세 명의 목격자는 아직 살아 있어요. 이제 이 위원회의 조사가 끝났고 그 결과는 가장 만족스럽다고 덧붙일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조사한 것은 교회의 공식승인을 받기 위해 로마로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무 상자를 가리키면서 대주교는 말했다. “그 발현에 대한 모든 보고가 이 봉인된 상자 속에 있어요. 전쟁에 대한 소문 때문에 우리는 평상시처럼 그것을 우편으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기꺼이 도와 준다면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그러면 당신이 개인적으로 이 문서들을 로마로 가져갈 수 있어요.”

프랭크는 이 추가된 책임에 다소 위압되었지만 대주교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고 특히 그것은 녹의 성모님을 위한 운동에 관한 것이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대주교님, 그 소중한 상자를 제가 가지고 간다면 저로서도 영광일 것입니다.”

 

 

녹은 아일랜드 현대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1870년대는 아일랜드, 특히 농촌지역에서는 빈곤과 재난과 압제의 시기였다.

농지 투쟁이 있었고 소작농이며 소작인 동맹의 창설자인 마이클 데이빗과 위대한 애국자인 찰스 스튜어드 파넬이 지주제의 폭정이 끝날 때까지 강력하게 싸웠다. 대부분 영국에 살고 있는 부재(不在) 지주들의 대리자들은 너무 가난해서 소작료조차 낼 수 없는 수백 명의 소작농들을 쫓아내도 벌을 받지 않았다.  소작농들의 초라한 단층집은 그 대리자들에 의해 무너뜨려졌고 소작농들이 살기 위해 선택하는 유일한 길은 이민선을 타는 것뿐이었다.

서부의 아주 불우한 지역인 마요주 녹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6세에서 75세까지의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 15명이 1879년 8월 21일 저녁 8시경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저녁에 작은 본당 교회의 박공(牔栱, 전재자 주:  gable) 벽에 발현하신 성모님을 보았다. 성모님의 양 옆에는 성 요셉과 복음 사가 성 요한이 서 있었고 그들의 왼쪽에는 속죄양이 있는 제단이 보였다. 그 발현은 두 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녹은 순례지가 되었고 매년 수천 명이 기도하고 영육의 치유를 위해 그곳을 방문했다.

 

 

프랭크 더프와 잭 네일은 처음에는 배로 네덜란드 까지 갔고 다시 파리까지 계속 가서 그곳에서 밤을 보냈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 비행기로 출발했고 로마에 오후 3시 55분에 도착했다.

사전에 프랭크에게 얘기한 대로 모든 문이 열려 있었다. 프랭크는 국무장관인 매글리오네 추기경을 포함한 많은 추기경들과 면담을 했다. 모두가 레지오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미 레지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 없이 만났으니 그것은 기쁜 일이면서도 의미 깊은 일입니다” 하고 후에 프랭크가 말했다.

그러나 프랭크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90명의 저명인사들이 교황님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 알현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약 사무소’의 통고에 잠시 어쩔 줄을 몰랐다. 약간 당황해서 그는 당국자들과 의논을 했다. 그리고 “교황 성하께서는 로마에 있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더프 씨를 만나실 겁니다!” 라는 믿음직한 전갈을 받았다. 개별 알현은 며칠 뒤인 4월 28일로 예정되었다. “놀랍게도 그 날은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의 축일입니다!” 하고 프랭크가 말했다.

지정된 시간에 그들은 교황의 서재로 안내되었다. 큰 책상 앞에 놓인 두 개의 의자는 교황의 의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자신의 약한 청각을 알고 있는 프랭크는 교황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서 말씀하시는 것을 분명히 듣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가 이 곤란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는 두 무릎을 꿇고 교황님의 반지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분이 강복을 주셨고 우리에게 의자를 손짓으로 가리키셨습니다. 그분의 책상은 매우 컸고 내 의자는 그분에게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매우 걱정을 했어요. 교황님과 난 서로 마주 보고 있었지요. 그분의 말씀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어요. 그분의 모습은 천상적인 모습이어서 마치 그 얼굴에서 빛이 비치는 것 같았어요. 나는 용기를 내어 몇 마디 사과의 말과 함께 내 의자를 그분의 의자 옆에 놓았어요. 그리고 그곳에 앉아 가장 감탄할 만한 알현을 했지요. 우리는 마음이 편했어요.”

더욱이 거의 20년에 걸친 그분의 재임 기간 동안 교황 비오 12세는 레지오 마리애를 열렬히 후원하고 격려했다.

아일랜드로 돌아오기 전 프랭크는 8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 프랭크의 첫 로마 방문을 주선한 마르체띠 추기경이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유익한 책을 요청했었다. 겨우 이제서야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로마에 있는 도미니꼬회 수녀들이 개별 알현 때 교황님께 선물할 수 있도록 때맞추어 레지오 교본의 이태리어판 인쇄를 마쳤었다.

마르체띠 추기경은 얼마 동안 건강이 안 좋았지만 프랭크와 네일 형제를 시골에 있는 집으로 초대했고 가장 친절하게 맞이했다.

“추기경님, 저희를 위해 당신께서 해주신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1931년에 추기경님을 뵈었을 때 할 수 있는 한 빨리 레지오에 대한 완전한 자료를 드리겠다고 한 약속을 기억하시겠지요. 이제 방금 발행된 이태리어판 레지오 교본을 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하고 프랭크가 말했다.

프랭크는 그 책에 인쇄된 발행일자를 가리켰다. 그들 둘 모두 미소를 지었다. 그날은 4월 28일이었다!

 

 

소중한 서류가 담겨진 나무 상자는 로마에 도착했을 때 무사히 전달되었다. 장래에 아일랜드인들에게 으뜸가는 순례지임은 물론 세계에서 중요한 마리아 성지의 하나로 인정된 녹 성지를 보게 되는 프랭크에게는 큰 기쁨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그 소중한 상자를 로마로 가져간 지 40년 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께서 친히 순례자로서 녹 성지에 오셨을 때, 실제로 그의 모든 동포들이 그랬던 것처럼 프랭크가 얼마나 기뻤을까! 교황께서는 강론에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오늘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아일랜드 국민들과 나를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시키시는 마리아께 대한 나의 신심을 알리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이 신성한 곳에 서서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님을 우러러보며 말합니다… ‘아일랜드의 여왕’이시여, 아일랜드의 영적 전통과 그리스도교 유산을 지켜 주소서. 그리스도의 빛을 만민에게 전하는 아일랜드의 영웅적 선교에 응답하게 도와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이 아일랜드의 자랑이 되게 하소서.”

 

1949년 6월 초 프랭크는 일단의 레지오 단원들을 데리고 맬러리로 들어갔다. 그는 6월 10일에 그날 밤 천상의 모후 쁘레시디움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더블린으로 돌아왔다.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프랭크, 이사벨이 네가 떠난 뒤 상태가 아주 안 좋았단다. 그 애는 거의 이번 주 내내 아팠단다.”

즉시 프랭크는 위층 침실로 갔다. 이사벨은 그를 보자 매우 기뻐했지만 그녀는 허약했고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얼마 동안 함께 있다가 내려와서 쁘레시디움 주회에 들어갔다. 회합 도중 어머니가 내려와서 프랭크가 쳐다보도록 창문을 두드렸다.

“프랭크, 그 애의 상태가 악화되었어. 그 애가 죽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고 귀엣말을 했다.

슬픔에 젖어 프랭크는 급히 계단을 올라갔다. 정말 이사벨은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무릅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랑하는 누이동생을 안았고 이사벨은 그의 품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프랭크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인 존이 그 뒤 곧 병원으로 옮겨졌다. 성홍열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두 달 내에 죽었다. 병중에 존이 사제의 도움을 받아 죽기 전에 성사를 받은 것이 프랭크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이사벨과 존의 죽음은 불쌍한 더프 여사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때 이미 86세였지만 가사일을 돌보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에 날카로운 관심을 가지면서 원기 왕성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는 건강이 결딴이 났다.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고 그 해 겨울에 영원한 보상에로 불림을 받았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 밤에 프랭크는 톰 도일(샛별 기숙사에 거주하는 형제)과 메리 로우를 데리고 조용히 말했다.

“난 내 생활을 바꾸지 않고 이곳에 머물 겁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좋아요. 더프 씨, 도일 형제님이 오늘 밤 함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메리 가 말했다.

“아니오. 전에 하던 대로 할 겁니다.”

여동생인 모나한 부인이 나반에 가서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단다” 하고 그가 대답했다. “거기에 간다면 큰 위안을 받겠지만 그건 내 인생이 아닐 거야. 내 인생을 무너뜨릴 수가 없어.”

“그렇다면 우리 집 가정부를 보내 드릴께요. 그 사람은 오빠도 아시다시피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그분이 오빠를 잘 돌봐줄 거예요.”

“정말 고맙다. 제랄딘. 하지만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너도 알다시피 정해진 식사시간에 매이는 것은 내게는 맞지 않아. 난 천상의 모후 기숙사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 어쨌든 고맙구나.”

그래서 그녀는 그와 더 이상 논쟁을 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보통 이상의 완고한 결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죽음이 프랭크의 막내 여동생 아이리스의 죽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녀는 영국에서 의사로 크게 성공했다. 그녀가 병이 들었을 때 프랭크는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영국으로 갔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

프랭크 자신은 이 세상에서 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차례로 잃음으로 따라 피폐해졌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나반에 있는 여동생 모나한 부인과 자신뿐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그토록 많은 것을 함께 나누었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그의 으뜸가는 지주였고 확실한 동료였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식욕을 잃었고 체중도 줄었다. 그는 불쌍하게 보였다. 그는 어머니 없이 사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일지적인 이별이라는 것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결코 안락한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괴로움을 받아들일 때 같이 붙어 있는 안락함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솔로몬 왕이 말한 것처럼.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전도서 3, 1-4).

 

멀리 중국에서 레지오 형제 자매들이 심한 박해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프랭크는 여전히 큰 슬픔에 짓눌려 있었다.

 

 

 

 

26 멜러리를 다시 방문하다

 

프랭크가 1919년 그의 첫 방문을 마치고 멜러리 산에 있는 수도자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 그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멜러리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다음 해 성주간 동안 절친한 두 친구 톰 그린과 톰 콜리를 그곳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해마다 몇 명씩을 더 데리고 가서 이제는 작은 그룹이 되었다. 나중에 다수의 여성 레지오 단원들이 합세했다.

프랭크는 매년 일 주일간 멜러리를 방문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 기도를 드리기 위해 흰 칠을 한 텅 빈 복도를 따라 수도사들의 소성당으로 갔다. 소성당은 단순하고 간소했다. 때로는 낭랑하고 때로는 부드럽고 온화한 수도사들의 노래는 모든 것이 고요한 침묵 속에 있는 그 이른 시간에 천상의 가락이었다. 프랭크는 그리스도 당신의 기도였고 당신 백성의 입술과 마음을 통해 계속되는 성무일도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점점 더 잘 알게 되었다. 단원 자격에서 쁘레또리움 등급이 레지오 제도에 삽입되었을 때 성무일도의 암송은 명문화된 규칙의 하나였다.

아침 기도 뒤 미사가 있었다. 프랭크는 종종 수년에 걸쳐 자라고 성숙해진, 미사의 거룩한 희생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멜러리 덕분이라고 말했다. 아침 식사 뒤 정원을 거닐면서 지금까지 그가 듣지 못한 방식으로 미사의 참뜻과 무한한 가치를 설명해 준 브렌단 신부의 은혜를 주로 입었다. 더욱이 미사가 신앙의 위대한 신비라는 바로 그 사실이 신비에 관해 이해를 늘리기 위해 신비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가게 했다. 그는 그에 관한 신학 서적을 읽었고 다른 이들과 토론을 했으며 그 자신이 좀더 쉬운 형식으로 썼다. 그는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가슴 떨리는 모험” 이라고 했다. “미사는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거리와 2천 년이란 시간을 지워 주는 하느님의 방편입니다. 미사는 우리 가운데 갈바리아 산을 현존케 하거나 우리를 우리 주님이 실제로 제물이 되신 그 때와 그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미사를 통해 우리는 실제로 갈바리아 산의 희생의 지사에 참석합니다. 우리는 성모님과 성 요한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있습니다. 햇빛이 빛나는 태양에서 나오는 것처럼 모든 미사는 갈바리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분의 눈은 영원히 계속될 미사에 참석할 모든 사람들을 응시하셨습니다”(Woman of Genesis, 372페이지).

미사에 대한 프랭크의 높은 인식 때문에 미사는 그의 전체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매일 미사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하면 특별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프랭크는 미사가 끝났을 때 소성당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감사를 드리며 남아 있다가 오전 8시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섰다.

한편 여성 레지오 단원들은 수도원 바깥에 있는 객소에 머물렀고 남자들은 수도원 내 특별구역에 머물렀다. 식당에 있는 긴 나무 식탁은 수도사들이 만들었고 간소했다. 음식은 검소했지만 건강에 좋은 것이었다. 수도사들은 직접 빵을 굽고 버터를 만들었다. 그들은 감자와 야채를 직접 재배했다. 프랭크가 식생활에서 절제를 했다 해도 멜러리에서는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신선한 산 공기가 그의 앞에 있는 음식에 식욕을 느끼게 했고 그것을 마음껏 즐겼다.

멜러리 산에서 며칠만 머무르면 누구든 그곳이 몸과 마음과 영혼을 얼마나 새롭게 하고 좋은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기복이 진 언덕배기, 키가 크고 위엄이 있는 소나무들, 보라빛 히드라의 향기, 지친 발 밑에 깔린 연하고 부드러운 촘촘한 이끼, 꿀벌들의 윙윙거리는 소리, 새들의 노래 소리, 소의 울음 소리, 여름의 모든 냄새와 소리는 겨울은 영원히 지나가고 여름이 영원히 지속되는 천상 고향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기쁨을 준다.

프랭크에게는 더블린 시와 끝없는 격무로부터 떠나 있는 것이 훌륭한 원기 회복제였다. 실제로 그가 스트레스와 과로로 기진맥진했을 때 멜러리는 피난처였다. 그곳은 쉴 수 있고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할 수 있고 동료 레지오 단원들과 담소를 즐길 수 있고 교제를 할 수 있는 안식처였다.

휴가 모임은 해마다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서 마침내 매년 수도원 문 앞에 대형 버스가 놓여 있었다.

“휴가” 중에 숲을 가로질러 오랫동안 걸었을 것이다. 도중에 레지오의 기도들을 바치고 가끔 “징검다리”를 건너거나 기도 말마디나 생각보다 머리 위에 있는 가시덤불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는 중단되곤 했다. 그러나 어떻든 그들은 성모님께서 이해해 주시고 심지어 그분이 이 일시적 중단을 기뻐하시리라고 느꼈다.

그리고 나서 휴식을 하는 동안 중간 참이 있었고 그것은 자연히 소풍이 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편안하게 개간지나 강기슭의 바위에 앉았다. 노래와 시 낭송과 촌극이 있었고 모두가 웃고 즐겼다. 프랭크는 매우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때로 그는 레지오의 초창기에 대해 얘기했고 때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즐거운 웃음 소리가 모든 사람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모든 이들은 그의 행복하고 편안한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은 그의 대가족이었다. 그는 그들을 하나하나 좋아했고 그들도 그를 좋아했다.

적어도 그 휴가 기간 중 한 번은, 그들은 노크밀다운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노크나팔리아를 올라가곤 했다. 그 등산은 하루 종일 걸렸고 소풍 도시락을 싸 들고 비올 때를 대비해 수도사들로부터 큰 장화와 우의를 빌려서 갔다. 79세의 프랭크는 31세 때 처음 등산을 한 이래로 48년 동안 빠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중 한 번의 특별한 등산이 가장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애니 큐란이 레지오 일행과 함께 멜러리에 간 해였다.

프랭크의 막내 동생 아이리스가 죽기 전에 애니 큐란과 같은 병원에 있었고 애니와 같은 날에 같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다. 아이리스는 프랭크가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이었다.

애니 큐란은 누이동생과 같은 병을 앓았기 때문에 프랭크는 그녀의 증세에 큰 관심을 가졌다. 애니는 건강이 상당히 잘 회복되었지만 거의 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결코 회복되지 않았고 마침내 그녀가 죽었을 때 프랭크는 크게 상심을 했다. 그래서 그는 애니에 대해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다.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은 그가 사랑했던 아이리스의 기억을 다시 살아나게 했다. 애니는 레지오에 들었고 천상의 모후 기숙사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때로 프랭크가 들어가서 그녀를 볼 때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애니가 그 일행과 함께 멜러리에 올 수 있자 프랭크는 기뻐했다. 그는 그녀를 걱정했고 산보나 소풍 때 친절한 태도로 강을 건너거나 울타리를 넘는 것을 돕겠다고 지원했다. 다른 사람들이 농담으로 프랭크와 그의 “보따리”라고 불렀다. 애니는 “보따리”로 불렸다.

화요일이 되었고 수요일 등산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애니가 함께 가고 싶어하지만 건강이 안 좋아서 전혀 불가능했다. 한편으로 누군가를 남겨 놓는 것은 레지오의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프랭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은밀히 물었다.

“그녀가 갈 수 없을까 봐 걱정이에요. 미치광이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녀를 데리고 가겠소?” 하고 그가 말했다.

애니는 물론 실망을 했지만 이것이 틀림없는 해결책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프랭크는 그녀의 기분을 이해해 다음날 아침까지 결정을 미루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그 문제에 관해 해답을 달라고 기도하러 갈 겁니다” 라고 선언했다.

그는 소성당으로 가서 기도했다. 몇몇 레지오 단원들이 밖에서 기다렸다. 그들 대부분은 애니를 데리고 가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수긍했다. 프랭크가 나왔을 때 그들이 물었다.

“애니를 어떻게 할 겁니까?”

“그녀를 데리고 갑시다” 하고 프랭크가 대답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대답은 그 보따리를 함께 가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보따리” 가 애니를 의미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그래서 그날 애니는 나머지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과연 그 결정이 무분별하고 무모했던 것처럼 보였던 걱정스러운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애니가 그 등산을 끝까지 무사히 마쳤을 뿐만 아니라 그 뒤 그녀의 건강도 좋아진 것처럼 보인 것이 사실이었다.

후에 사적인 대화에서 한 레지오 단원이 그날 아침 소성당에서 그의 “기도와 응답”에 대해 프랭크에게 얘기해 달라고 졸랐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주님과 얘기를 하러 들어갔어요. 기도를 했지요. 그때 내가 다른 때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기분을 느꼈어요. 그건 달콤한 기분이었어요. 난 그분이 ‘모든 것이 훌륭하다’ 는 의미라는 것을 해석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요. 그래서 밖으로 나와서 애니에게 주님게서 내가 그 ‘보따리’를 가지고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그 레지오 단원들 가운데서도 신심이 깊은 사람만이 감히 그런 “미친 짓”을 할 것이라고 인정했다.

언젠가 프랭크가 멜러리에 있을 때 그는 동료 레지오 단원인 브렌단 크롤리가 밤새 그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브렌단은 접대 수사인 니바드 신부에게 그 말을 했다. 니바드 신부는 이전에도 언젠가 그런 보고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프랭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방에 오늘 밤 내가 묵게 해주세요.”

니바드 신부는 그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지금은 다른 방문객들에게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랭크와 브랜단은 다른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을 바꾸었다. 프랭크는 “소리가 나는” 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니바드 신부는 바로 밑에 있는 방에서 잠잘 준비를 했다.

얼마 후 니바드 신부는 프랭크의 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괜찮아요?” 하고 그가 물었다. “무서운 소리를 듣고 당신이 공격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습니다. 제가 잠들기 전에 불쾌한 느낌을 받았던 것을 고백해야겠군요. 소리를 들었지만 귀가 잘 안 들리기 때문에 그것이 내 머리 속에서 나는 것인지 밖에서 나는 것이지 확실히 알 수가 없어요.”

니바드 신부는 매우 불안해서 핀탄 신부를 불렀다. 그에게 모든 것을 설명했고 그가 감시를 하면서 복도에 남아 있기로 했다. 그리고 새벽 1시가 되었을 때 똑같은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핀탄 신부도 같이 들었다.

프랭크가 멜러리에서 기상시간인 새벽 3시에 일어났을 때 니바드 신부에게 이상한 소리가 더 들렸느냐고 물었다. 니바드 신부는 똑같은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고 시인했다.

이상하게도 그 뒤로는 그 소리가 다시 나지 않았다. 수도원장인 프란시스 신부가 수도사들에게 영신 생활에 대해 얘기하도록 그를 초대한 것은 수도사들이 프랭크를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프랭크는 이 큰 명예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 수도원의 오랜 역사에서 단 세 명의 평신도만이 수도사들에게 연설하도록 초대되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세안 오켈리와 암몬 드 발레라로 모두 아일랜드 대통령들이었다. 한 사람은 해방자 다니엘 오코넬이었다.

멜러리에서의 하이라이트의 하나는 레지오 아치에스 행사였다. 레지오의 근본이 되는 이념은 모후이신 마리아와 일치하고 마리아께 의탁하여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프랭크가 그것을 가장 큰 레지오 연례행사로 보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곳 수도원 소성당에서 그는 다른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행렬을 지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차례가 되자 레지오 벡실리움의 깃대에 손을 얹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모후, 나의 어머니시여, 나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며,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나이다.” 앞 좌석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그의 말을 완전히 들을 수 있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보다 더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고 확신했다.

아치에스 행사의 첫 기도는 모두 레지오 회합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령께 바치는 기도이다. 프랭크는 항상 그 기도에 감동되곤 했다. 그들 자신과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다른 지체들의 성화인 그들의 사업이 성령의 작용에 달려 있고 따라서 성령과의 친밀한 결합을 요구한다는 것을 레지오 단원들이 깨닫는 것은 중요했다.

우리가 성령과 정말로 친밀한 결합을 이룩하고, 그리하여 그분의 위대한 목적의 도구가 되고자 한다면, 프랭크는 두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첫째로, 우리는 성령께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로, 성령이 항상 마리아와 뗄 수 없는 결합 속에 작용하는 것처럼 우리도 마리아와 결합해야 한다.

국내외에서 레지오의 놀라운 발전과 레지오를 통해 일어난 무수한 은총이 기적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어떻게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 봤다. 레지오 정신은 충만한 단원들에게는 그러한 보고가 기뻐할 길이기는 하나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레지오 교본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을 원조자로 삼는 이는 전능의 물결을 타게 되는 것이다”(교본 29장). 어느 날 프랭크가 강연을 마친 후 한 신학생이 성령께 대한 신심이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호응을 얻기 여러 해전에 더프 씨가 그 신심을 추진시켜 왔는지 여부를 알고자 질문을 했다.

“더프 씨, 성령께 대한 당신의 큰 신심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우리 성모님께로부터” 가 무의식적인 그의 대답이었다. “성모님께 대한 나의 신심은 성령께 대한 맞갖은 신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충분히 알게 했어요.”

프랭크는 종종 성령강림절에 맞추어 멜러리를 방문할 계획을 짜곤 했다. 그가 어느 성령 강림 주일 저녁에 레지오 조직 체계 안에 “선서” 제도가 있어야 하며 그 선서는 성령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도 멜러리에서였다. 그는 그 생각을 더 발전 시켰고 그것을 동료 단원들에게 얘기했고 레지오 제도에 맞는 형식을 짜냈다. 이후로 신입단원은 이 레지오 선서를 통해 레지오 마리애에 정식 입단하게 했다.

레지오 선서의 기도 형식은 성령과 마리아와 사도적 영혼의 세가지 주제에 대한 그리스도교 문학의 훌륭한 걸작으로 알려져 왔다. 쉬넨스 추기경은 그 선서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 문학에서 나는 그토록 깊이가 있고 그러한 영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기도를 알지 못한다”(사도직 신학: 서문).

로사리오 기도 때 우연히 프랭크 옆에 가까이 앉았던 사람은 그의 로사리오 십자고상 반대 면에 성령의 모습이 새겨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프랭크는 그것을 자신이 직접 새겼다. 그에게 로사리오 기도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그분의 아드님과 그분에 대해 기도하고 대화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구원의 드라마에서 성령의 중요한 중재를 찬양하는 것이 되었다.

레지오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수도사들 중에 한 분인 데클란 신부가 병이 들어서 더블린에 있는 병원으로 보내졌다. 프랭크가 문병을 갔다.

“프랭크, 그들은 친절하게도 나를 이곳으로 보냈지만 보다시피 이 방에는 종교적 상징물이 없어요. 작은 성모상을 구할 수 없을까요?”

프랭크는 기쁘게 그 말에 복종했다. 데클란 신부가 건강을 회복해서 멜러리로 돌아갈 때 그는 그 성상을 가지고 갔다. 몇 년 후 그 사제는 다시 병이 들었고 이번에는 치명적인 페렴에 걸렸다. 그가 죽기 전 그는 새 접대 수사신부를 침대 곁으로 불렀다.

“신부님, 새로 접대 수사가 되었지요? 제가 충고 한 마디 할까요? 레지오 단원들이 멜러리에 오면 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참으시고, 더프 씨의 방 번호가 8번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모든 수도사들은 그 말을 따랐다. 프랭크는 그들의 지지자일 뿐만 아니라 막역한 친구였다. 그들은 매년 그가 오기를 고대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수도원 생활과 영성 생활 문제에 대해 그의 충고를 청했다. 그로서는 그들 모두를 예수님과 마리아 안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들로 애정을 다하여 바라보았다.

그들 중 대부분 – 아마 모두가 – 레지오 마리애의 아듀또리움단원15 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 안에 새 소성당이 세워졌을 때 이 성소에 레지오와 레지오를 통해 내려진 은총을 기념하여 레지오 군기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지성소 벽에 장식하였다.

매일 저녁 식사 후 프랭크와 수도사 레지오 단원들은 수도원 내의 아담한 정자로 갔다. 그리고는 수도원 종이 크게 울릴 때까지 많은 이야기와 회고담을 나누었고 때로 먼 포교지에 있는 레지오 사절들로부터 온 보고서를 읽었다. 그리고 나서 모두 조용히 수도사들이 끝 기도를 드리기 위해 모여 있는 큰 수도원 성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끝 기도 후 그날의 마지막 찬가인 <하늘의 여왕> 을 황홀하고 감동적으로 불러서 그들의 생명이요 단맛이며 희망인 성모님께 다정한 “밤 인사”를 했다.

 

 

 

 

27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

 

아이슬란드의 한 소성당에 사제와 다섯 명의 레지오 단원들이 특별한 행사를 위해 12월 8일에 모였다. 바깥에는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였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실내에는 촛불이 밝게 타고 있었다. 제대에는 성체가 놓여 있었다.

20세 된 한 여성 레지오 단원이 오른손에 촛불을 들고 왼손에 종이 한 장을 든 채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에 든 종이에는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께 봉헌” 이라는 몽포르의 말이 씌어 있었다. 그것은 “마리아의 손으로 육화 하신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께 봉헌 행위” 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었다.

사제와 다른 레지오 단원들이 서서 경건하게 보는 가운데 그 소녀는 무릎을 꿇고 이제 그녀 앞 제대에 계신 영원한 지혜이신 예수님께 첫 둘 절(節)로써

인사하는 봉헌문을 읽었다. 그리고 그녀는 약간 왼쪽으로 옮겨서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의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세례 때의 약속을 새롭게 하고 하느님의 지혜를 소유하려는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욕구를 표하면서 봉헌문의 나머지 부분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사람이 되는 지혜,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드리오니, 이는 평생토록 나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더욱 더 그분께 충실하게 되기 위함이나이다. 하느님의 궁전에서 오늘 당신을 내 어머니, 내 주인으로 택하나이다. 나의 몸과 마음,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 나의 모든 선행,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당신의 종으로서 당신께 바쳐 드리나이다.”

손으로 쓴 봉헌문을 다 읽고 나서 여전히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는 가운데 거기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나서 사제가 그녀에게 성체를 들어 강복을 주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찬가와 레지오 기도를 바쳤다. 후에 작은 축하 만찬이 있었다. 16

간단하지만 감동적인 이 의식은 프랭크가 전세계에 미친 광범위하고 효과적인 영적 영향의 여러 표시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레지오 마리애를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성모 마리아께 참되고 확고한 봉헌을 하도록 고무되어 왔다.

프랭크는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가 20년 전 참된 신심에 대한 논문에서 쓴 “숭고한 영혼” 이었으리라. 그는 “이 작은 책이 고상한 영혼, 하느님의 자녀와 성모님의 자녀의 손에 들어간다면 내 수고는 보상을 받는 것이 될 것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이 책을 읽은 후 내가 서술하고자 하는 마리아께 대한 확고한 신심의 숭고한 가치를 확신한다면 내 시간은 가치 있게 사용한 것이 될 것이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의 시간은 가치 있게 쓰여졌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는 1673년 1월 31일 프랑스의 한 작은 읍인 몽포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가족의 맏아들이었다. 가정의 그리스도교 적 분위기와 특히 어머니의 신앙심은 어린 몽포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신심이 깊은 소년이었다. 12세 때 그는 렌느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8년간 수학했다. 동료학생들은 그의 깊은 애덕과 기도에 대한 열성에 깊이 감동되었다. 사제가 되어 영혼들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소원이었다.

20세 때 루도비꼬는 성 술피스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파리까지 200마일 이상을 걸어서 갔다. 로사리오를 손에 들고 “순례자처럼” 여행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여행 경비로 준 돈은 길에서 만난 불쌍한 거지들에게 주었다. 그는 도중에 구걸로 끼니를 때우면서 열흘 후에 파리에 도착했다.

성 술피스 신학교 옆에 있는 학생 기숙사에 새로 도착한 신학생은 이런 규칙을 보게 된다. “하느님의 은총을 이 집으로 가져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난함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과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그 가난함으로 그토록 큰 영광을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경멸할 만한 천한 집안 일을 기쁜 마음으로 수행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항상 이 집을 보호하는 수호자로 공경하는 동정 성모 마리아께 깊은 신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루도비꼬는 그 규칙에 빈틈없이 충실함을 보였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어려운 고행을 실천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성덕에 있어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그의 의무 가운데 하나는 도서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부들, 특히 성 베르나르도 와 다른 많은 영성 저자들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후에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다룬 책은 거의 모두” 읽었다고 말했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는 1700년 6월 5일 사제로 서품 되었다. 그이 예외적으로 높은 경지의 기도와 고행은 몇몇 동료 사제들에게 불편한 느낌을 불러일으켰고, 그러한 것이 그를 매우 당황하게 만들고 창피를 주었다. 그러나 몽포르의 신부는 항상 십자가를 큰 축복과 승리의 표시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과연 그의 선교활동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굳은 마음들이 풀렸고 죄인들이 회개했고 많은 이교도들이 참 신앙으로 돌아섰다. 그의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마리아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성모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그 봉헌의 정신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즉, “천사들과 사람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나자렛 에서 마리아께 완전히 순종하신 우리 주님의 모범을 따라 마리아의 뜻에 완전히 의탁하는 것이었다.

몽포르의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지혜로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 이름은 그에게는 신약과 구약을 모두 아름답게 요약한 것으로 보였다. “하느님의 지혜는 파트모스 섬에서 불가사의한 황홀경 가운데 복음사가 성 요한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개념이다. 성 요한은 이렇게 외쳤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영원한 지혜인 성자).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다.’ 17

신자들에게 그는 종종 이렇게 되풀이하곤 했다. “영원함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며 모든 것을 알고 그분을 알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18 그 후로도 그는 예수님의 좋으심과 자비, 그분의 아름다움과 온화하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겪으신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해 말하곤 했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설교를 할 때는,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그가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공경과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들은 그가 하느님을 위해서는 어떠한 박해도 기꺼이 감수하려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정말 몽포르의 신부는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바로 그 자신의 생활이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영원한 지혜이신 예수님께 대한 이 놀라운 사랑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하면 그는 이들에게 네 가지의 분명한 수단을 이용해서 그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첫째로, 그들은 하느님의 지혜를 열렬히 원해야 하며 이 욕구는 정말로 열렬하고 진실해야 한다. 그러한 욕구는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 모두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큰 은총이 될 것이다.

둘째로, 끈기 있는 기도가 절대적인 선행조건이다. “만일 여러 분 중에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느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아무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시는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십시오”(야고보서 1, 5-6).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 더 큰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19 “솔로몬은 오랜 시간 열심히 기도한 뒤에 비로소 지혜를 받았습니다.”  20

셋째로, 보편적 치욕은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가 될 조건으로 정하셨다. 하느님의 지혜는 당신께 어울리는 사람을 찾으신다. “그분의 위격, 그분의 풍부함과 그분과의 결합이 마땅할 만큼 세상에 초연하고 내면적이고 절제된 사람이 그토록 적기 때문에 그분은 그런 사람을 찾으신다.” 21 몽포르의 신부는 “십자가는 황의 가장 큰 비결이며 영원한 지혜의 가장 큰 신비라고 나는 믿습니다.”[ 22 라고 말했다. “그분의 죽음으로 십자가의 치욕은 그토록 영광스러운 것이 되었고 십자가에서의 가난과 벌거벗음은 그토록 풍부하게 되었고 십자가의 고통은 달콤한 것이 되었으며 그 쓰라림은 그토록 매력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분은 천사들과 인간들이 하느님으로 모시게 되었고 흠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3 “참 지혜는 십자가에 확고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여러분은 십자가 이외에 이 세상에서는 그분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24

넷째로, “하느님의 지혜를 받고 보관하는 모든 비결 중 가장 훌륭하고 놀라운 비결은 복되신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입니다. 성모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영원한 지혜를 잉태하고 낳을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분께 선택된 영혼들 가운데서 아무도 성령의 작용을 통해 그분께 생명을 줄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25 이것은 훌륭한 충고이며 감탄할 만한 비결입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께 종이며 노예로 남김없이 봉헌함으로써 성모님을 우리 가운데 모십니다… 관대하심 에서 그 누구에게도 뒤떨어짐을 허락하지 않는 이 좋으신 어머니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참되게 주실 것이며 영원한 지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왕좌가 있는 성모님 안에 머무르실 것입니다.”  26

가난하고 영락한 사람들로부터 항상 환영을 받고 사랑을 받았다 해도 몽포르의 신부는 많은 사제들로부터 계속 굴욕을 당했다. 때로 그는 간단히 쫓겨나기도 했다. 파리에 있을 때 그는 완전히 혼자였고 일정한 거처가 없는 영락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행히 어떤 가난한 집에서 하숙을 구했다. 그것은 계단 밑 쓰러질 듯한 “창고”였다. 유일한 가구는 짚으로 된 침대였다.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행복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첫 저서이며 부피는 작지만 내용면에서 대단히 귀중한 책인 <영원한 지혜에 대한 사랑(The Love of Eternal Wisdom)>을 저술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는 풍부한 쓰라린 체험과 강도 높은 기도 생활의 결과들을 글로 쓰고 있었다.

몇 년 뒤 몽포르의 신부는 한 손에 지팡이를 다른 손에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작은 성모상을 들고 십 오단의 묵주를 허리에 걸고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성무일도서와 성가가 그의 유일한 짐이었다. 다신 그는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구걸한 음식으로 연명했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11세로부터 호의적인 영접을 받았고 교황은 그에게 프랑스에서 선교 사업을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그 당시 프랑스 곳곳에서 성장하고 있던 얀세니스트 들과 사우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그의 설교가 필요했다.

그는 프랑스로 되돌아왔고 새롭게 북돋아진 원기와 열정을 가지고 설교했으며 끊임없이 성모님의 도움을 빌었다. 다섯 살 때부터 그는 매일 헌신적으로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다. 이제 그는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사탄과 싸우는 데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동료 사제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거룩한 로사리오에 대한 설교의 효과를 경험하고 그 로사리오가 가져온 놀라운 회개를 내 눈으로 봄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알게 하셨습니다. 로사리오는 하느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신 대단히 귀중한 보물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27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여러분이 매일 로사리오를 바치기를 간청합니다. 죽음이 가까이 올 때, 제가 말한 것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와 마리아의 축복의 씨를 뿌리면 천상에서 영원한 축복을 거두어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28

몽포르의 신부가 그의 유명한 저서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을 저술한 것은 1712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그 책은 의심할 여지 없이 수많은 영혼을 큰 성덕의 좁은 길로 인도했다. <영원한 지혜데 대한 사랑> 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들이고 지키기 위한 모든 수단 중 가장 훌륭한 것은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입니다.” 그는 그 부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서 온갖 정성을 기울여 다듬었다. 그 결과로 <성모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이란 책이 나왔다. 그 책에서 그는 우리가 마리아께 전적으로 봉헌해야 하며 그러면 성모님은 우리를 보다 완전하게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말들 것이라고 감동적인 호소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

“참된 신심”에 대한 몽포르의 논문에 관한 프랭크 더프의 요약 평가는 인용할 가치가 있다. “몽포르는 성모님의 성스러운 개념을 그토록 생생하고 오해의 여지 없이 예언적으로 보여 준 거울이다. 마찬가지로 성모 영보는 성모님의 중요한 위치를 보여 준다. 성모님의 중요한 위치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열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어머니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이상 그분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자녀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성모님 품 안에서 성모님의 끊임없는 모성적 보살핌으로 더욱 더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되어 사람이신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분 없이는 우리의 이 숭고한 운명은 성취되지 않는다.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항구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분께 의지하는 만큼 마리아께 드려야 한다. 이 신심이야말로 마리아는 주님과 일치되어 있다는 뜻이다. “참된 신심”은 마리아의 어머니이심에 대한 충분한 인정이며  또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성모님께 마땅한 최소한의 공경이다. 참된 신심의 실천은 영성 생활의 모든 활동에서 성모님께 대해 하느님께서 지정하신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인정이다.”29

몽포르의 신부가 주장한 것처럼 마리아께 대한 봉헌은 마리아와의 정식계약을 맺는 것을 요구한다. 그 계약은 그리스도와 더욱 완전히 결합되기 위하여 자기 전체 곧 영신적이거나 현세적이거나 를 막론하고 자기의 모든 생각과 소유물,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를 아무리 적고 사소한 것이라도 아낌없이 성모님께 바치는 것이다.30 그것이 첫걸음이다.

두 번째 단계는 매일 생활과 사도직에서 이 봉헌을 실천하는 것이다. 프랭크 더프는 이것을 아주 잘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레지오 기도에도 삽입시켰다. 레지오 단원들이 매일 바치는 사도직 신앙을 위한 기도를 인용한다. 그것은 몽포르의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의 214번을 거의 그대로 인용했다. “오 주님, 마리아의 군기아래 봉사하는 우리에게 용감한 신앙을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주저 없이 큰일을 착수하고 실행하게 하소서…”

몽포르의 신부는 사제들과 수사들을 위한 “마리아의 단체(몽포르의 선교사들)” 31, 수녀들을 위한 “지혜의 딸들” 그리고 “성 가브리엘 수사회(교육 수사회)” 세 가지 신심단체를 만들었다. 그는 1716년 4월 28일 선종했다. 한 손에는 십자고상을 들고 다른 손에는 성모상을 잡고 있었다.

그는 43세의 아주 젊은 나이에 죽었어도 몽포르의 신부는 “15,000마일을 맨발로 걸어 다니면서 7개의 교구를 복음화시켰다. 그는 가장 반항적인 사람들을 복종케 하고 냉담한 사람들의 가슴에 신앙의 불을 지르고 무딘 사람들을 부드럽게 만들면서 백 개 이상의 본당을 변화시켰다. 그는 마음을 움직이는 이 선물을 전하기 위해 많은 순례를 했고 그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잘 들어 허락하셨다.”32

1938년 9월 7일에 교황 그레고리 16세는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를 가경자로 선언했다. 1947년 7월 20일에 교황 비오 1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그를 시성 시켰다. 인사말에서 교황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분의 모든 사도직 임무 뒤에 있는 가장 큰 힘과 예수님을 위해 영혼들을 끌어당기고 정복한 큰 비결은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었습니다.”

몽포르의 “참된 신심”에 대한 논문은 이 놀랄 만한 “예언”을 담고 있다. “성난 짐승 같은 무리들이 미친 듯이 달려와서 그 잔인한 이빨로 이 작은 책과 성령께서 이 책을 쓰도록 이끄신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책을 어두운 궤짝과 침묵 속에 묻어 버려 다시는 나타날 수 없게 만드리라는 것을 나는 뚜렷이 내다본다. 그 무리들은 그 책을 읽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박해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더 “참된 신심” 실천은 빛을 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나의 용기를 북돋아 주며, 더욱 큰 성공을 하리라는 희망을 안겨 준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악마와 세속과 부패에 대하여 싸우게 될 강력한 군단 곧 예수와 마리아의 용감한 남녀 구사들로 이루어진 대군단이 나타나리라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33 그리고 과연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가 죽은 후 그이 원고는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창고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나서 잊혀졌고 실종되었다. 그가 죽은 후 백 년이 지나서야 낡은 궤짝에서 발견되었다!

그때 이래로 “참된 신심” 에 대한 몽포르의 논문은 그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진실로 노력하는 영혼들에게 끊임없이 참으로 놀라운 영향을 주어 왔다. 그러한 영혼 중의 하나가 프랭크 더프였다. 프랭크는 레지오 교본에 주목할 만한 내용을 썼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면 참된 신심의 실천이 프랭크 자신에게 가져온 효과들을 그 구절 속에 반영한 것을 분명히 불 수 있다. “이처럼 참된 신심을 가르치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경험이 모두 믿을 만하다고 한다면, 이 신심이야말로 이기심이 없고 순수한 의향을 지니고 있다는 특성을 보장하고 내면적 생활을 심화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참된 신심을 실천하는 이들은 바른 인도와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곧 그들의 삶이 현재 가장 유익한 일에 쓰이고 있다는 흐뭇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또한 이 신심을 실천하는 이들은 초자연적 안목, 단호한 용기, 확고한 믿음을 지님으로써 어떤 일을 하는 데도 기둥이 된다. 이 신심의 실천자는 그 힘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유연성과 슬기를 가지게 된다. 아울러, 이들 신심의 실천자는 이상 말한 모든 은혜와 덕의 안전장치인 부드러운 겸손의 덕이 자신에게 뿌리를 내린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자격이나 본성적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큰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그런데 그런 일과 함께 영광스럽고 무거운 책임을 낭패 없이 해낼 수 있도록 도움을 또한 주신다. 한 마디로 말하면 참된 심심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일종의 노예로 팔아 넘기는 빛나는 희생을 바친 이들은,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해 자신을 버린 사람들에게 약속된 수 백 배의 상급을 그 대가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 34

 

 

 

 

 

28 락 더그 순례

 

 

프랭크 더프의 헐거운 긴 코트는 오랜 된 것이고 낡았다. 군데군데 기웠지만 아직은 쓸만했고 그 자신도 그것을 버리고 새 옷을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그 옷에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일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는 일이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끈질긴 기도에 답하여 그에게 가난의 참 정신을 넣어 주셨다.

그러나 가족들의 눈에는 그이 코트는 낡았을 뿐만 아니라 구식이었고 기운 곳이 아주 많아서 고대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것이었다.

“프랭크, 샛별 기숙사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라. 너의 낡은 코트를 그들에게 기부하지 않겠니?”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그는 마지못해 그렇게 양보했다.

얼마 후 프랭크는 락 더그로 연례 순례를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낡은 헐거운 긴 코트가 생각났다.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을까! 그는 지금 누가 그 옷을 입고 있는지 궁금했다. 샛별 기숙사를 관리하고 있는 원내 레지오 형제인 톰 도일을 만났다.

“톰, 사실 내 낡은 코트가 없으니까 허전해요. 그 옷은 내게 상당히 적당했는데…” 하고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은 소식이 있어요. 샛별 기숙사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옷을 입으려 하지 않아요. 그 옷이 너무 남루하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니 다시 입으실 수 있어요” 하고 톰이 대답했다.

그래서 옷은 다시 프랭크에게로 돌아왔고 가족들은 아연 실색했다. 프랭크가 락 더그로 출발할 때 물론 그의 오랜 친구인 헐거운 긴 코트를 입고 간 것은 당연하다.

 

멜러리 산이 프랭크가 몸과 영혼을 새롭게 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가는 수도원이라면, 아일랜드 북서부에 있는 락 더그에 있는 고대 수도원이 있던 자리는 그가 고행을 하기 위해 택한 곳이었다.

프랭크는 락 더그에 대해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로 더프 가를 방문하곤 했던 톰 맥케이브로부터 들었다. 사실 톰은 프랭크의 부친이 언젠가 익사 직전에 구해 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고, 그가 락 더그에 대해 얘기할 때 프랭크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도네갈에 있는 락 더그는 눈으로 보기에도 사람이 거주하기 어려운 곳으로 황량한 불모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은 순례와 고행을 위한 장소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호수 가운데에는 스테이션 아일랜드라 불리는 작은 섬이 있고 그 곳에는 한때 수도원이 있었다. 수도사들은 오래 전에 죽어서 천국으로 갔지만 바위 암자와 소성당의 흔적이 남아있고 후세에 “사람의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는 말씀을 상기시켜주는 곳이다.

프랭크가 처음으로 락 더그에 간 것은 1915년 10월이었다. 더블린의 라느래프 에서 온 네 명의 젊은 여성들이 그곳에 순례를 가기 위한 계획을 의논하고 있었다. 프랭크는 그 말을 우연히 듣고 그도 함께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즉시 동의했다. 그 여행은 길고 지루했다. 그 섬에서의 고행은 가혹했다. 그럼에도 프랭크는 다음해 그곳에 다시 갔고 이번에는 20명을 데리고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과거에 락 더그 순례 여행은 아일랜드인들 사이에 인기 있는 것이었으나 20세기 초에 순례자의 수는 상당히 줄어들었고 이 고행은 전통을 충실히 지켜 온 그 지방 사람들의 인내가 없었다면 끊어졌을 것이다. 프랭크가 락 더그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려고 했을 때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 곳 순례를 권장했고 매년 순례 그룹을 조직했다.

1922년까지 그의 그룹은 57명으로 커졌다. 그 해 그 나라의 정치적인 상황이 안정되지 않은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가 조직한 그룹이 유일한 순례 팀이었다. 순례자들이 락 더그에서 약 4마일 떠러진 페티고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남은 여행을 위해 필요한 수송기관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 그들은 트럭 운전사의 도움을 받았다. 트럭 운전사는 숙녀들과 짐들을 호수가 까지 태워다 주었다. 일행 중 프랭크를 포함한 네 명의 남자들은 4마일을 걸어가기로 했지만 숙녀들을 태워다 주고 온 트럭 운전사는 남자 순례자들을 또한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그 지방 사공이 순례자들을 거룩한 섬까지 건네 주었다.

해마다 락 더그에 대한 소식이 퍼졌다. 순례가 다시 시작되고 순례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프랭크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책임감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는 것이 그의 방침이었다. 그러한 방침을 정한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새로운 사업에 집중할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위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일에 적합한 사람이 매우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격려만 해주면 되었다. “책임감은 모래를 금으로 바꾼다” 고 그는 말하곤 했다. 톰 맥케이브는 이미 그러한 순례 여행을 준비하는 책임을 졌고 빈첸시오회의 톰의 동료들은 마침내 아일랜드 전역에서 해마다 락 더그로 순례자들이 여행할 때 큰 지원을 해주었다. 언젠가는 천 명 이상의 순례자가 그 섬을 찾아올 것이다.

많은 청년들이 순례를 떠나는 것을 보는 것은 프랭크에게는 특별한 기쁨이었다. 그는 종종 젊은이들이 이상주의자들이며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할 무해한 운동보다는 그들의 이상주의를 만족시킬 사업에 도전하기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몇몇 사제들이 젊은이에게 도전하도록 제시하는 것은 너무 작은 것이어서, “가톨릭 교” 가 그들에게 제시한 것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자극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명열을 따르는 것도 아니라고, 그는 한탄했다.

어쨌든 오로지 고행을 하기 위해 이 거룩한 곳에 함께 모인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동포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에게는 매우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그 위안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프랭크는 위안을 얻거나 품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행을 하기 위해 락 더그로 갔다.

아일랜드인들은 고행에 대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아일랜드의 수도원 제도는 7세기와 8세기에 절정에 이르렀고 수도자들과 평신도간의 유대는 밀접하고 강력했다. 많은 수도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세워졌고 신앙의 중심지는 물론 교육과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는, 주민들의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실제로 수도를 하는 많은 사람들은 평신도였고 그렇게 남아 있었다. 이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들이 보다 황폐하고 고립된 곳, 혹은 스켈릭 록이나 락 더그 섬 같은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의 영성과 금욕적인 생활 방식은 사람들의 영육에 큰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수도원들의 수가 많고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수도원 생활의 여러 가지 고행이 사람들이 신심 생활 속에 들어온 것은 필연적이었다.

아일랜드에서의 초기 그리스도교의 “황금시대” 이래로 아일랜드인들은 고행에 대해 일종의 친근함 감정을 유지해 왔다. 확실히 그들은 이 고행을 즐기거나 항상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역사와 전통은 고행에 의해 시험되고 저지되지 않으면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고 가르쳐 왔다.

프랭크는 락 더그의 고행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해마다 그 곳에 갔다. 연중 3일 동안의 순례는 그저 그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순례의 중심적 행위는 고백의 성사와 미사, 그리고 영성체이다. 그러나 가시 가운데서 장미꽃이 피듯이 이 전례행위는 기도와 고행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고행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단식이 있다. 락 더그에 오는 순례자는 전날 저녁부터 완전히 단식을 해야 한다. 24시간에 한 번씩만 음식을 먹으며 그 유일한 식사도 마른 빵과 홍차만 허용되었다.

둘째로 순례자는 그 섬에 있는 동안 맨발로 있어야 하며 고행의 순례는 맨발로 해야 했다. 그 순례 혹은 십자가의 길은 순례자들이 각 암자나 이른바 “거처할 곳” 주위의 돌이 많은 땅을 맨발로 걸으면서 많은 기도를 바친다. 각 제 번의 주의 기도나 성모송과 사도신경으로 된 규정된 기도가 끝나면 순례자들은 “거처할 곳” 입구에 있는 날카로운 돌 위에 무릎을 꿇고 그것을 반복한다.  그 다음에 순례자는 같은 기도를 드리면서 “거처할 곳” 안으로 순례를 한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순례자는 “거처할 곳” 가운데에 있는 십자가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반복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첫 단계를 마친다. 각기 다른 아일랜드 성인에게 바쳐진 그러한 “거처할 곳” 이나 암자나 암자의 흔적은 매우 많다. 십자가의 길은 많은 “거처할 곳”을 방문하고 그 곳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서두르는 일은 없다. 순례자들은 이 고행을 실천하는데 하루 종일 혹은 더 많은 날들을 보낸다. 이 밖에도 “운이 좋으면” 잠깐 발을 쉬게 할 수 있는 부드러운 돌을 때때로 발견할지도 모른다!

세 번째 고행은 밤을 꼬박 새우는 것이다. 그것은 순례자가 기진맥진해 있더라도 도착한 날 밤 10시부터 이튿날 밤 10시까지 24시간 동안 자지 않아야 한다.

순례 이튿날에 규정된 네 단계는 밤에 바실리카 성당에서 이루어진다. 이 단계들이야말로 밤새도록 하는 것이기에 순례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밤 내내 잠을 물리치는 싸움은 정말로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의지가 약한 사람들로부터 나는 약간의 코고는 소리에 좀더 의자가 굳은 영혼들의 얼굴에는 호의적인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좋으신 주님은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

두 번째 날 밤에는 6시간 동안 잠을 잘 수 있고 세 번째 날에는 몇 가지 완화된 고행을 마친 후에 순례자들은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날 자정까지 엄격한 단식을 계속해야 한다.

49년 동안 프랭크 더프는 락 더그 순례를 계속했다. 그가 74세가 되었을 때 중병으로 그것을 할 수 없었다.

더블린의 레지오 단원인 매리 로우는 종종 프랭크와 같이 순례를 했는데,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맨발로 바위로 된 잠자리를 돌아다니면서 십자가의 길을 바칠 때 프랭크 씨는 열심히 기도했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잊었어요. 나는 그분의 발이 편하도록 하기 위해 부드러운 편편한 돌을 찾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그분은 날카로운 돌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 가고 있었어요. 철야기도 때도 결코 졸거나 잠을 자지 않았어요. 마치 그분이 고행을 위해 건강을 다시 회복한 것처럼 보였어요.”

십자가의 길과 고행을 하도록 규정된 시간은 그렇다 하더라도 3일간의 순례 동안 “침묵의 규칙”은 없었다. “자유 시간”에 프랭크는 친구들과 잡담도 하고 농담을 하며 웃곤 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휴식”을 즐겼다. 어떤 사람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프랭크 더프 씨의 영성에 대해 나약한 점은 없었어요. 단지 건강함 건전함이 있었어요.”

한번은 순례 때 날씨의 야회 고행을 하기에는 적당치 않아서, 지도하는 사제가 순례자들에게 바실리카 성당에 남아서 그곳에서 십자가의 길을 바치도록 했다. 매리 토우는 바깥을 내다 보다가 프랭크가 날씨를 무시하고 “거처할 곳” 주위를 돌고 있는 곳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기회가 생기나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더프 씨, 레지오 교본에서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어요. 사제가 실내에서 십자가의 길을 하도록 했는데, 왜 당신은 바깥에서 바칩니까?”

“그 말에 무어라고 대답할 수 없지만 실내에서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요.” 하고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과연 지도를 하는 사제도 고행을 하기 위해 락 더그에 온 이 사람이 어떠한 편의도 원치 않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락 더그 순례 마지막에 순례자들이 그 섬을 떠날 때 그들은 모두 성 패트릭의 찬미가를 부른다.

 

영광스러운 패트릭 성인이여, 기뻐하소서.

오 우리 섬의 수호자여,

당신의 불쌍한 자녀들에게 달콤한 미소를 주소서.

이제 당신은 천상 저택에 높이 앉아,

에린의 푸른 계곡을 사랑으로 내려다봅니다.

죄에 대항한 싸움에서, 신앙을 위한 싸움에서

오 성인이여, 당신의 자녀들이 죽기까지 저항하게 하소서.

그들의 힘이 온순함과 기도와 고행에 있게 하소서.

그들이 자랑으로 여기며 짊어지는 십자가가 그들의

군기가 되게 하소서.

 

순례자들은 지치고 허기져 있다. 그럼에도 모두가 가벼운 마음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안고 떠난다. 그들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고 초기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3일 동안 금욕과 단신을 통해 속죄를 해 왔다. 그들은 성령의 선물인 기쁨을 충만하게 받았던 것이다.

그 섬을 떠남과 동시에 그들은 락 더그 순례를 위해 그 섬에 막 도착한 수백 명의 새 순례자들에게 “공감을 나타내는” 미소를 보낸다.

 

 

 

 

 

29 오랜 친구 – 자전거

 

1951년 어느 여름날 네 명의 남자들이 갈웨이 주 투암 역에서 내렸고 그들은 기차 화물칸에서 자전거를 꺼냈다. 철도 짐꾼의 주의를 끌었을 유일한 이유는 이 사람들이 때때로 아일랜드 서부로 자전거 여행을 오는 보통 패거리보다 약간 나이가 더 들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60 고개에 들어선 프랭크는 네 명 중 제일 나이가 많았다. 그의 세 동료 브렌단 크롤리, 톰 도일과 잭 네일 은 그를 함께 데리고 힘든 자전거 여행을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허약하고 병약하게 보였다. 지난 2년 사이에 체중이 많이 줄었다. 그렇지만 그 여행을 제안한 사람은 바로 프랭크 자신이었다.

“난 지쳤어요. 사실 거의 한계에 다다랐어요. 완전한 변화를 위해 더블린을 떠나야겠어요.”

그들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특히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다른 슬픔도 너무 무거웠다. 바로 최근에 중국에서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모든 것뿐만 아니라 더블린에서 프랭크의 일정표는 지나치게 빠듯했다. 매일 새로운 어려움과 새로운 압력이 닥쳐왔다.

 

투암 철도 역 밖에서 그이 충실한 늙은 말인 자전거에 오른 순간부터 프랭크는 지난 2년 동안의 걱정과 골칫거리와 지루함을 벗어 버리기 시작했다. 6세기에 성 잘라드가 수도원을 세운 트암 읍은 좀 느린 생활 속도와 그들의 매력적인 사투리를 흥미 있어하는 방문객들과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프랭크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끊임없이 울려 신경을 써야 하고 귀를 따갑게 하는 전화 벨 소리, 가슴이 터질 듯한 짓밟히고 패배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스도의 가장  보잘것 없는 형제들”과 지구 반대편과 더욱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는 문제들이 얼마 동안 모두 잊혀졌다. 여기는 행복하게 자전거를 타고 있는 네 명의 들든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하느님의 창조물에 대한 놀라움을 “응시할 시간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 후 계속하여 네 명의 레지오 단원들은 자전거를 타고 야생의 장관을 이룬 아름답고 울퉁불퉁한 콘네마라 의 시골을 지나갔다. 저녁마다 그들은 작고 아늑한 여관을 찾아 “잠자리와 아침식사”를 해결하고는 다음날 계속해서 계곡과 산을 지나가면서 자연의 경치를 즐기곤 했다. 노란 금잔화가 있는 언덕, 푸른 산을 비추고 있는 고요한 호수들, 듣기 좋은 소리를 내는 폭포들, 회칠을 한 오두막들 등등.

특별히 경치가 아름답고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오면 그들은 휴식을 취하고 마음씨 좋은 여관 주인이 준비해 준 점심을 먹었다. 대기는 인동덩굴과 야생초롱꽃 향기가 가득 찼고 역시 건강에 좋은 신선한 소택지의 향기가 있었다.

프랭크는 재미있는 얘기를 해 달라고 조르는 말에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때로 그의 이야기는 심각한 사건에 대한 것이었고 즐겁게 하면서도 교훈을 주는 얘기도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그가 목격한 재미있는 사건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했고 듣는 사람들을 더 즐겁게 하기 위해 과장하여 재미있게 만드는 “교묘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또 그의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윤색된 부분을 알아챘지만 얘기할 때 프랭크의 마음에서 나오는 웃음 보기를 더 즐겼다.

그들은 웨스트포트 를 지나 린넨 마을에 이르러 다시 킬모어 수도원을 지나서 클리프덴 까지, 그리고 마암 크로스 와 갈웨이 까지 갔다. 콘네마라 의 동쪽 경계선에 위치해 있고 그것과 마요 주를 가르는 그림 같은 산과 협곡과 호수지대에 붙여진 이름은 “조이스 컨드리(조이스의 고장)”이다. 그들은 로스묵 에 있는 애국자 패드릭 퍼스(Padraig Pearse)의 오두막을 지나갔다. 그곳에서 그는 <소년 예수, 새들의 에오이닌>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썼고 아름다우누 시 <여행자>를 썼다.

 

나무에서 뛰어다니는 다람쥐를 보고,

풀잎 위에 있는 붉은 무당벌레를 보고,

기우는 태양에 의해  다가온 저녁 들녘에서

작은 토끼들을 보고,

그림자가 날려간 푸른 언덕, 산사람들이 씨 뿌리고

수확하는 고요한 언덕을 보고,

하늘과 맞닿아 있고 조수가 물러간 바다 모래사장에서

혹은 코나흐트 의 작은 마을의 거리에서 놀고 있는

맨발의 아이들을 보고

내 가슴은 기쁨으로 떨렸도다.

 

 

 

민족주의자였고 새 나라의 출범 때 아일랜드 지도자들과 아주 가까웠던 프랭크는 외로운 로스묵 에 있는 퍼스의 횟칠한 오두막을 보고 감동했을 것이다. 마도요 의 울음 소리를 빼고는 그곳의 고요를 깨뜨리는 소리는 없었다.

백 개의 작은 섬들이 점점 흩어져 있는 클류 배이는 낯 동안 짙푸른 색과 초록색을 드러냈고 석양에는 마법처럼 은빛으로 반짝였다. 그것은 프랭크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주었다.

킬레모 수도원에서 일행은 이틀간 쉬었다. 마음씨 좋은 수녀들은 프랭크와 “그의 수행원들”이 매일 달린 거리를 알았을 때 깜짝 놀랐다.

프랭크에게 그것은 너무 먼 거리가 아닐까?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프랭크는 오히려 생기가 다신 돌아온 것처럼 보였고 식욕도 나아졌다. 매일 장거리 자전거 여행으로 지치기는 했지만 오히려 더욱 튼튼해졌다.

참으로 멋진 휴일이었고 그는 여행이 매우 좋았기에 기뻤다. 그는 다음해에도 비슷한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고 실제로 다음해 시드 퀸 과 잭 네일 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케리 주를 지나갔다. 자전거 여행은 확실히 오래 계속되어 그의 남은 생애 동안 하나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이 자전거 여행에 참가하는 숫자는 점점 늘어났고 아일랜드의 가장 외딴 곳에서도 남녀 노소가 그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고 열 혹은 열 두 명의 “낯선 사람들”이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그들의 길을 갈 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번은 자전거 여행자들 중 한 사람인 존 가반이 갑자기 안경을 전날 밤에 묵었던 여관에 두고 온 것을 알았다. 바람이 많이 불었고 프랭크는 그 당시 70세의 나이임에도 그것을 찾으러 되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이렇게 사려가 깊은 것이 그이 훌륭한 자질 중의 하나였다.

프랭크는 어떤 상황 아래서도 매일 미사에 빠지는 무모한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때론 자전거 여행 패들은 마을이나 읍에서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 계획의 제한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프랭크는 그 자전거 여행 팀에 친구 사제를 초대했다. 그리하여 어디에 있든 간에 문제 없이 매일 미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예수 고난회의 헤르만 놀란 신부가 “그 자전거 여행(스프로킷)”에 참가했을 때 그들은 자전거 여행 “지도 신부”를 모시게 됐다.

프랭크의 취미 중 한 가지는 사진 촬영이었다. 그는 선물로 받은 좋은 카메라는 소중히 간직했고 항상 여행 때 가지고 다녔다. 그는 조국의 땅 구석구석을 매우 사랑했고 카메라로 아일랜드 시골 지방의 탄복할 만한 아름다운 경치를 포착하려고 했다. 겨울이 오면 그는 자전거 여행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슬라이드를 보여 주곤 했다. 아름다운 경치가 스크린에 비추어 갈 때 그는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곤 했다. 청중들은 그의 비상한 기억력에 감탄하면서 사진들을 감상했을 뿐만 아니라 슬라이드를 설명할 때 기쁜 날을 회상하는 소년 같은 기쁨과 열정을 나타내는 그를 쳐다 보길 좋아했다.

열정이 복받쳐 때로는 그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장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가 자전거 여행에서 돌아올 때 그의 첫마디는 종종 친숙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중에서 최고였어.” 그리고 과연 그가 의미한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아무도 “하지만 더프 씨, 지난 여행 뒤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그 밖에도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시골과 자연에 대한 프랭크의 특별한 사랑을 잘 알았다. 자연은 그 세부적인 면에서 자연스러운 것이 그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일종의 신비이고 우리의 눈과 귀로써 보고들을 수 있도록 모든 것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현존이다. 하느님의 수공품에 대한 프랭크의 이해나 그것을 표현하려는 그의 정열적인 노력은 끝이 없었을 것이다.

자전거 여행 중 한번은 한 레지오 단원이 아름다운 경치를 지날 때 묵상하는 분위기에 빠져있는 프랭크를 관찰하고, 성무일도에서 그토록 자주 나타나는 다니엘 의 찬가가 얼마나 적절한지를 깨달았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시입니다” 하고 프랭크가 대답했다.

 

 

산과 언덕들이여,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께 지극한 영광과 영원한 찬양을 드려라.

땅에서 자란 모든 것들이여,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께 지극한 영광과 영원한 찬양을 드려라.

샘물이여,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께 지극한 영광과 영원한 찬양을 드려라.

(다니엘 3, 75-77)

 

 

“저 멀리 있는 것이 크라프 패트릭 인가?” 이번에 프랭크는 한 명의 사제와 네 멸의 레지오 형제들과 함께 마요 주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멀리서 장엄하게 솟아 있는 원뿔 모양의 산을 보았다.

그것은 정말 아일랜드의 그랜드 모나크 산이었고 때로 아일랜드의 시나이 산으로 불렸지만 크라프 패트릭 으로 제일 많이 알려졌다. 전설에 따르면 위대한 패트릭 성인이 그 산에 올라가서 기도와 고행으로 사순 시기 40일을 지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년 2만 이상의 아일랜드 순례자들이 고행과 기도를 하러 7월 마지막 주일에 크라프 패트릭 산으로 올라간다.

그 산은 해발 2510피트이다. 프랭크는 동료들에게 그 곳으로 가서 순례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한 고상한 제안을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약 세 시간 동안 힘든 등산 후에 그들은 “성” 산의 정상에 이르렀고 1500년 전 패트릭 성인이 기도했던 그 장소에서 기도를 바쳤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땅을 내려다보았을 때 프랭크는 패트릭 성인이 아일랜드 국민을 위해 드린 기도를 회상했으리라. “하느님, 세상 끝 날에 당신이 희생을 치르고 차지하신 백성을 제가 영원히 잃는 일이 없도록 해주소서”(성 패트릭의 <고백>).

프랭크는 크라프 패트릭 꼭대기에서 한 레지오 단원을 만나자 깜짝 놀랐고 매우 기뻐했다. 그녀는 13세 된 소년 레지오 단원으로, 웨스트포트 에 있는 학교에서 방학을 맞아 여동생과 함게 그 산에 등산을 온 것이다. 그녀는 물론 프랭크 더프를 만난 데 대해 너무나 기뻐했다. “레지오의 창설자를 “성’ 산의 정상에서 만나 뵙다니 믿어지지 않아”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웨스트포트 에 돌아가 친구 단원들에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프랭크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와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들 못하랴. 그는 카메라를 일행 중 한 명에게 주며, “내 소년 레지오 단원과 나를 찍어 주시오”라고 말했다.

하산은 등산보다 위험했으나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처음 3/4 마일은 바위가 날카롭고 혈암  위에 발을 디디면 푸석푸석 끼어졌다. 프랭크는 두 번 넘어졌다. 그의 다리를 다쳤지만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 그는 다치고 멍들고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그때 이미 70세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 후유증은 없었다!

그리고 2주 후 마요 주에 있는 어린 여학생이 더블린 시 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를 흥분해서 뜯었다. 프랭크는 그 산 정상에서 함께 찍은 아름다운 사진을 동봉했다. 이제 그녀의 레지오 친구들은 그녀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믿어야 하리라.

 

 

프랭크 더프는 가장 고상한 말로 참된 애국자였다. 그의 애국심은 두 개의 큰 사랑인 종교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

그는 완강하게 메리오 마리애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주장했지만 레지오가 국민들에게 참된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큰 공헌을 하리라는 것을 믿었다. 그는 여러 국가에서 국가가 그 힘을 키우고 기능과 그리스도교가 항상 개인에게 달린 것으로 간주한, 도덕적 의무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아왔다. 그러나 또한 국가의 편에서 보면 이런 경향은 시민들의 타성에도 크게 원인이 있다고 프랭크는 주장했다. 그들 가운데 있는 결함에 대해 심각한 무관심이 만연해 있거나 시민들이 적절한 책임감을 갖지 않는다면 국가가 사실상 간섭을 하게 된다.

프랭크가 본 것처럼, 문제는 시민들의 기획과 창의의 결여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공동체에 만연할 수 있고 결심과 행동을 방해할 수 있는 냉소주의와 회의론이었다. 역시 종종 심각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또한 끈질기게 노력을 기울이는 데 필요한 도덕적 용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의 포괄적인 역할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와 아울러 “공동체 선”의 결여를 포함한 정신적인 것이었다.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가?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책임감을 어떻게 깨닫게 할까? 생활 전반에서 정직과 성실의 개념을 어떻게 적절하게 공동체에 회복시킬까? 사람들에게 그들의 종교가 사회, 문화, 교육, 오락적인 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어떻게 깨우칠 수 있을까? 자기 희생 정신과 참된 이상주의를 어떻게 가르칠까? 한 마디로 사람들에게 참 애국심에 대한 적절한 개념을 어떻게 가르칠까?

“저절로 발전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후원할 어떤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를 위한 내 방침은 훈련된 쁘레시디움 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생각을 <나라에 대한 참된 충성심> 이라 부르는 책자에서 밝혔다. 그 문제에 대한 가장 훌륭한 처방에 있어서 그 책에 필적할 것이 없을 것이다.

프랭크는 나라에 대한 사랑이 충분치 않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올바른 이성에서 나오는 사랑이어야 하며 우리 종교의 일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예수와 마리아는 그들이 사는 곳의 보통 삶을 완전하게 살았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그들이 무관심하거나 냉담했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할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그들의 나라이며 곳곳마다 그들의 나자렛 이다” 하고 느는 지적했다.

프랭크는 그의 폭넓은 경험으로, 단순히 열정에 의지하는 시민 정신은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더욱이 그리스도교의 박애주의에 막연히 호소하는 것은 거의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평범한 가톨릭 신앙은 이상주의와 봉사와 자기희생의 방식에서 그리 큰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사실 공동체 혹은 적어도 그 실체 부분이 신비체에 대한 합리적이고 건전한 이해를 할 수 없다면 최상의 의도와 노력도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애국심을 위해 내가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 내지는 마지막 보루는 신비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교의입니다” 하고 프랭크는 말했다.

그래서 “잘 조직된 쁘레시디움”으로 돌아가 보자. 그것은 이미 이 교리를 단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힘으로써 제시하고 있고 그들에게 모든 사람, 모든 장소, 모든 직업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쁘레시디움은 그 단원들에게 일 주일에 적어도 두 시간의 실제 활동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교리를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 활발한 신경조직이 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적절한 후원으로 점차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교의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부수적으로 참된 애국심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이루어질 수가 있다.

이 분야에서 레지오의 역할은 토마스 오프린 신부에 의해 아주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레지오가 현세에 대하여 제공해야 하는 것은 유별난 전문적 지식이 뛰어난 기술이 아니며, 많은 수의 일꾼들도 아니고, 다만 정신적인 원동력이라는 점이다. 이 정신적인 원동력은 레지오로 하여금 세계적인 힘을 가진 단체로 만들었으며, 또 이 정신적인 원동력은 어느 분야에 속하는 하느님의 백성일지라도, 레지오를 부릴 수 있는 통찰력과 양식을 가진 사람이면, 그들이 덕성을 높이는 데 이용할 수 있다…. 사람은 물질적인 사물 가운데 살아가야 하며 또 구원의 문제도 그런 물질세계와 크게 관련을 맺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레지오 교본 62페이지).

 

 

 

 

 

30 남미의 기적

 

 

프랭크 더프는 레지오 마리애에 대해 연설하도록 더블린 시 마리노 에 있는 아일랜드 그리스도교 형제 수사회 대학에 초청을 받았다. 수사들은 그의 연설에 감동을 받았다. 한 젊은 수련 수사가 깊이 감동을 받았는데 그는 알피 램 이었다. 오팔리 주 툴라모어 시에서 온 알피는 그의 생을 하느님께 그리스도의 수사로 봉헌하고 싶은 큰 소망을 가졌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았기 때문에 그는 수련자 위치를 떠나야 했다. 그리스도교 형제 수사회의 수도원장은 항상 모든 좋은 가톨릭 운동을 장려하는 데 있어 지도적 위치에 섰고 레지오 마리애의 충실한 후원자였는데 알피에게 레지오에 들도록 권했다.

그는 처음부터 열성적인 단원이 되었다. 그의 변함없는 미소, 온순함, 소년 같은 원기 왕성함, 성모님께 대한 부드러운 사랑이 그가 훌륭한 잠재력을 가진 레지오 단원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더블린으로 와서 기숙사 내 레지오 형제들과 함께 샛별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물론 거기서 그는 프랭크 더프와 친밀한 접촉을 했고 큰 도움을 받았다. 따뜻하고 습기가 적당한 땅에 심어진 묘목이 튼튼한 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알피의 영성 생활은 개발되고 성숙해졌다. 곧 그는 아일랜드 전역에 레지오를 확장하는 사업에 임명되었다.

알피의 첫 레지오 조언자 중의 한 사람은 시머스 그레이스 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시머스가 레지오 사절도 자원했고 멀리 남미 대륙으로 파견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깜짝 놀랐다. 자연히 그의 마음도 사절이 되는 쪽으로 기울었다.

프랭크가 후에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그가 진실로 갈망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곤경에 처해있는 영혼들을 찾아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가서 그들을 위해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에 대해 착각하지 말라. 그를 매료시킨 것은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그 정신이었다.”

프랭크는 항상 그러한 놀라운 정신의 개발은 그 사람에게 레지오 단원의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자신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영향을 준 사실을 그는 아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열렬한 신앙, 그의 훌륭한 결실,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정복하려는 꿈, 성모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 무엇보다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한 전적인 확신, 이 모두가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개인에게나 소 그룹에서 얘기할 때마다 항상 천천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고 그의 정신은 감응력이 빠른 영혼들에게 전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이해력이 빠른 사람 중 한 사람이 알피였다. 그에게는 프랭크가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영혼들에 대한 프랭크의 누를 수 없는 갈증, 불길과 같은 열정, 레지오의 힘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그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1953년 4월 꼰칠리움은 정식으로 시머스 그레이스 와 알피 램을 남미의 레지오 사절로 임명했다. 얼마 동안 열심히 준비를 했고 그 일환으로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마침내 7월 15일에 출발하기로 결정되었다. 시머스와 알피는 가르멜 제3회 회원이었으므로 가르멜 산의 성모 마리아 축일인 16일에 출발하고 싶었으나 그날에는 그들을 위한 여객기가 없었다.

프랭크 더프와 다른 많은 레지오 단원들과 친척들이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 샤논 공항까지 갔다. 비행기에 타려고 준비를 하고 있던 다른 여행객들은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갑자기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까데나 를 암송했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실까?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오후 11시 30분에 출발하기로 예정된 비행기는 연기되었다. 마침내 비행기가 출발했을 때는 자정이 지나서였다. 시머스와 알피는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 받았다. 마침내 그들이 바랐던 대로 되었던 것이다. 그때는 가르멜 산의 성모 마리아의 축일인 7월 16일이었다.

여러 시간 뒤 두 사절은 거대한 남미대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탄 비행기가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에 착륙했을 때 호아끼나 루까스 가 기다리고 있었다. 호아끼나는 필리핀에서 온 레지오 단원으로 이미 남미에서 사절로 일하고 있었다. 시머스는 사절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경험이 있다고 생각 되었다. 그는 도시에 배정되었다. 알피는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스페인어를 더 공부하도록 호아끼나와 함께 일하도록 배정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훌륭한 훈련이었다. 그들은 함께 그 나라의 여러 곳을 여행하고 레지오의 지단을 설치하고 하느님의 왕국을 넓혔다. 그 나라는 알피의 모국 아일랜드와는 매우 달랐고 그에 매료되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산들, 바나나 농원, 거대한 원시림, 화려한 야생 식물, 절묘한 색깔의 꽃들.

몇 달 후 알피는 사절로서 그에게 배당된 지역을 책임질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을 쌓았다. 호아끼나는 브라질로 갔다. 알피는 이제 독립하였다. 더블린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에게 진정 수호천사였던 호아끼나를 그가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언급했다. 프랭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생이란 그런 겁니다. 모든 것은 개척되거나 사라지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치는 남습니다.”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에게서는 사제가 매우 부족했고 그 결과 종교에 대한 무지가 만연했고 신심 실천도 별로 없었다. 알피는 여기저기 심지어 외딴 산골마을에까지 레지오 쁘레시디움을 세우며 비버처럼 열심히 일했다. 그가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도 빈틈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에 철저했고 그의 부드럽고 진실한 태도는 어디서나 환영을 받았다.

이웃 교구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에 있는 주교들이 주목을 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태도로 “레지오 마리애는 성교회가 미처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메울 수 있고 발견되지 않은 종교적 에너지원을 찾아낼 수 있고 열성적인 평신도 협력자의 끈으로 사제와 신자들을 하나로 묶는다”35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고 있었다.

1954년 2월에 알피는 꼰칠리움으로부터 에콰도르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에콰도르의 에체베리아 주교가 레지오를 그곳에 소개해 달라고 간청하였기 때문이다. 알피는 시머스 그레이스로부터 신입단원 모집과 레지오를 확장시키는 일꾼들에게 열성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그는 이들을 훈련시켰고 여러 변두리 지역에 배정했다. 그가 그들에게 준 책임은 그들을 아주 “평범한” 레지오 단원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활기찬 일꾼으로 바꾸어 놓았다. 물론 그것은 또한 레지오의 성장을 가속시켰다.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에콰도르에는 400개의 쁘레시디움이 생겼고 그 나라에서 교회는 새로운 성령 강림을 목격하고 있었다.

알피는 남미의 여러 나라로부터 긴급 초청을 많이 받았다. 그는 브라질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세 명의 사절이 있었지만 브라질은 유럽 전체와 거의 같은 크기였기 때문에 더욱 많은 사절이 필요했다.

더블린으로 돌아가 보자. 프랭크는 알피의 여행 일정 계획의 모든 세부적인 것까지 지시하고 안내하고 격려하고 따라갔다. 그 대륙에 지금까지 자신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절과 레지오를 통해 수천 아마 수백만 명의 삶과 운명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다른 결정이 없었다면 알피는 브라질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프랭크는 전장의 노련한 장군처럼 인물과 아울러 상황을 판단하는 데 전문가였다. 그는 일찍이 알피의 영향력 – 성덕과 조직력의 결합에서 나오는 힘 – 이 참으로 굉장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르헨티나는 그런 수완이 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다. 프랭크로부터 암시를 받은 꼰칠리움은 알피에게 아르헨티나로 가도록 지시했고 그곳에서 그는 나머지 짧은 생애를 보냈다.

아르헨티나는 거대한 나라였다. 다신 한 번 알피는 수천 마일에 이르는 그의 선교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결코 튼튼하지 않은 그이 건강은 나빠지고 있는 것같이 보였고 이미 위궤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쉴새 없이 영혼들을 찾는 일을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형제 수도원의 수련 시절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배웠을 것이다.

 

주여, 당신의 거룩한 뜻을 아는 것 이외에는

싸우거나 그 가치를 계산하지 않으며,

수고하고 휴식을 추구하지 않고,

노동하고 상급을 구하지 않는,

은총을 저에게 내려 주소서.

 

 

이 기도는 아일랜드에서 성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소년 소녀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지금도 여전하다.

이 기도는 알피의 소유가 된 영혼들에 대한 열의를 보다 정확하게 나타낸다. 레지오 교본에서 프랭크 더프는 이렇게 썼다. “레지오 단원은 자기 능력을 최대한도로 성모님께 바쳐야 한다…. 마리아 께서는 풍부히 주고자 하시지만, 아낌없이 자신을 바치는 자에게만 그렇게 하실 수 있다… 레지오 단원이 마리아께 의지해야 할 이유는, 자신의 모자람을 기우고, 자신을 순화하고, 완덕을 닦고, 자연 본성을 초자연화하고, 그리고 미약한 인간적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마리아께 대한 의존은 참으로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힘은 결국 산을 뿌리부터 움직여 바다로 내던질 수 있고, 우둘투둘한 땅을 평평하게 할 수 있고, 굽은 길을 바로잡아서 하느님 나라로 똑바로 인도할 수 있다.”36 알피는 이 사상을 참으로 잘 이해했다. 그는 여러 번 “레지오에 살고자” 하는 그이 큰 소망을 나타냈다. 읍에서 읍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한 사제에서 다른 사제에게로, 레지오 마리애를 세우며 다녔고 신심과 겸손으로, 말과 행동으로 설교하면서 그에게 닥친 어떤 어려운 상황에도 느슨해지거나 불평을 하지 않고 받아들였으며 성모님을 무한히 신뢰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소망과 노력을 모두 축복해 주셨다. 남미 여러 나라에서는 물론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주교들과 사제들이 예수와 마리아께 대한 그의 완전한 자기 봉헌과 그의 수고의 성과를 증언했다.

아일랜드 그리스도교 형제 수도회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세워진 것을 발견하고 알피는 대단히 기뻤다.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그곳을 방문했고 더블린에서 몇 년간의 수련시절에 그가 받은 무한한 영적 지도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꼰칠리움은 어느 날 알피에게서 온 펴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그에게 이상한 매력을 주었다. 그는 다음 편지들에서도 여러 번 그 문제를 말했고 마침내 러시아를 방문하게 해 달라고 꼰칠리움에 요청했다. 꼰칠리움은 그가 남미에서 선교를 마치고 러시아가 레지오 사절에게 “문을 열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그를 러시아의 사절로 임명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알피는 암에 걸려 격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1958년 1월 21일 성녀 아녜스 축일에 26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죽기 전날 그는 큰 위안을 받았다. 더블린의 청년 레지오 단원인 노엘 린치가 아르헨티나에서 그를 돕도록 꼰칠리움으로부터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알피는 이제 새 사절을 꼰칠리움이 요청한 대로 훈련시킬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천상에서” 그를 반드시 도우리라는 것을 알았다.

알피에 관한 책에서 힐데 퍼텔은 이렇게 말했다. “알피의 생애는 유성 같았다. 그것은 갑자기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갔고 아찔할 정도로 높이 날아 올랐다. 우리는 그 유성이 지나갔다는 사실보다는 그 광채에 감탄했다. 유성이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 반면에 알피의 업적은 그가 활약했던 모든 나라에서 번창하고 꽃피고 있다. 그 아일랜드인을 태워 버렸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을 붙였던 그 불꽃은 이제 대륙 전체를 덮는 요원의 불길이 되었다.”37

 

 

 

 

31 교황대사들과 사절들

 

 

“더프 씨, 아주 좋은 소식이 있어요.”

그녀는 위클로우 백작의 부인인 엘레노아 버틀로 로 열성적인 레지오 단원이었다.

“저는 막 파리에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레지오 마리애에 큰 관심을 나타낸 교황대사와 장시간 면담을 했어요. 그분은 당신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묻고 당신께 개인적으로 전하라고 저에게 메시지를 주었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프랭크는 이 소식에 열광했다. 그는 그 대사가 언젠가 이스탄불에서 비서인 몬시뇰 톰 리안을 통해 레지오 본부에 레지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요청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뒤에 그 대사는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로 임명되었다.

프랭크 자신은 레지오의 씨를 뿌리는 것을 돕기 위해 여러 해 전에 프랑스에 갔었다. 다행히 “우연의 일치”로 파리의 대주교 추기경과의 면담이 기적의 패의 성모 마리아의 발현 100주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레지오가 천천히 느린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파리의 대주교 추기경을 포함한 몇몇 주교들은 레지오에 열심이었으나 다른 이들은 보다 전통적인 형태의 가톨릭 운동을 선호했다.

“자리에 앉으세요. 이것은 아주 흥미 있는 일입니다. 빨리 얘기 좀 해주세요” 하고 프랭크가 백작부인에게 말했다.

“제가 아일랜드에 돌아가면 프랭크 더프 씨에게 그분의 인사를 전하고 프랑스 주교들이 레지오 문제에 대해 망설인다 해도 그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분은 진심으로 레지오를 지지하며 레지오의 방식을 옳다고 하셨어요. 레지오는 믿음과 사랑의 정신으로 개인들을 열심히 찾아 다니는데 그것이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프랭크는 의기양양해졌다. 레지오가 그토록 훌륭하고 중요한 분의 허락과 인정을 받았다는 소식은 그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프랭크 더프는 끊임없는 성령의 작용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고 그는 “일을 쉬지” 않았고 새로운 상황과 필요한 것을 연구하고 레지오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성인신자 교육제도를 발전 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며 종교적 진리를 제시하고 그것을 사람들의 생활에 적용하도록 상당히 매력적인 방식으로 조정될 것이다.

프랭크는 가톨릭 신자들이 대체로 교회 박에 있는 비 신자들에게 종교에 대해 말을 잘하지 않으며 교회 내에서 신자들끼리도 그런 것을 꺼리는 걱정스러운 현실을 실감했다. 많은 경우 이것은 그들이 종교의 교리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종교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을 부적당하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느끼는 데 그 원인이 있다. 또 다른 경우로는 종교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이고 공개적인 토론을 할 것이 아니라는 그릇된 생각에 그 원인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프랭크의 대답은 빠뜨리치안 이었다. 빠뜨리치안 의 목적은 사람들이 종교적 지식을 늘리고, 자기 생각을 남에게 밝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또한 그들을 사도직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레지오 교분 p.274).

브로피 신부는 빠뜨리치안 의 정신을 이렇게 기술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하느님의 가족에 속한다. 옛날 주님과 사도들이 갈릴래아에서 하루의 선교가 끝날 무렵, 그 날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야기 꽃을 피우던 그 정신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토론하는 것 – 이것이 바로 빠뜨리치안회의 정신이다”(레지오 교본 중 인용문, p.291).

프랭크는 2장(章)에서 빠뜨리치안 회의 가 운영되는 방법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현실 사회의 뿌리이고 종교 교육분야에서 가장 값진 기여를 하는 정신적 심리적 원칙의 윤곽을 다루었다.

 

 

레지오는 전세계에 걸쳐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지역도 몇 군데 있었다. 프랭크는 사절로 갈 지원자를 찾고 있었다.

“더프 씨, 제가 적합하다고 여기신다면 기꺼이 레지오 사절로 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젊은 필리스 도우델 이었다. 그녀는 상당한 경력이 있었고 굉장히 열심히 활동했다.

프랭크는 매우 기뻤다. 베트남에 파견할 사절이 필요한 때에 그녀가 온 것이다. 그래서 프랭크는 그녀에게 영국에 있는 아일랜드 이주민들 사이에서 시험적으로 일을 하도록 제안했다. 영국에 있는 대주교는 프랭크에게 그 특별한 선교를 위해 약간의 레지오 단원을 배정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필리스가 규정된 건강진단을 받았을 때 그녀는 건강하지 않음이 발견되었다. 선교사절이 되는 대신, 그녀는3일 뒤에 더블린의 펨브로크 개인병원에 입원했다.

프랭크는 항상 단원들에게 성실했고 그토록 관대하게 사절이 되겠다고 한 이 여성의 특별한 호의에 대해 빚지고 있었다. 그래서 프랭크는 바쁜 사무실을 빠져 나와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문병을 가곤 했다.

필리스는 그의 방문을 기뻐했고 영광스럽게 여겼다. 더구나 그 뒤 매주 그가 왔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그녀는 정말로 전세계에 걸친 레지오 사업으로 그토록 바쁜 사람이 한 개인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프랭크는 그녀가 입원해 있는 10개월 동안 매주 그녀를 방문했고 매번 적어도 한 시간은 그녀와 함께 보내곤 했다.

프랭크에게 있어서 세상은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고 각 개인은 공경하고 섬겨야 할 또 다른 그리스도였다.

그의 방문은 엄숙하거나 경건한 일을 아니었다. 그는 보통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일화를 얘기했고 농담도 했다. 그는 편안하고 위안을 주며 병자의 기운을 돋우는 자신만의 독특한 부드러운 비법을 가졌다.

필리스와 같은 방에 있던 환자는 에믈리에서 온 리안 부인이었다. 필리스는 그녀를 레지오 협조단원으로 가입시켰다. 어느 날 리안 부인은 레지오의 기도문을 읽고 있었다.

“필리스, 이 아름다운 기도문을 누가 썼죠?” 하고 그녀가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더프 씨예요” 하고 필리스가 대답했다.

“과연 그분은 놀라운 분이에요. 틀림없이 그분은 성인(聖人)이 될 거예요.”

“그분은 매주 저를 방문하러 오시니까 뵐 수 있을 거예요.”

“그분이 오면 내게 알려 줄래요.”

“물론이지요.”

바로 다음날 프랭크가 찾아왔다. 필리스의 침대 끝에는 길고 붉은 실내복이 걸려 있었다. 프랭크는 그것을 입고 큰소리로 껄껄 웃으며 뽐내면서 방을 걸어 다녔다.

“더프 씨, 도대체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내가 추기경처럼 보이는지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옆 침대에는 새 협조단원인 리안 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보고 있었다. 그녀는 “거룩한 창설자”의 성성을 새롭게 통찰하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 프랭크는 의사가 필리스에게 처방한 흑맥주병을 열었다. 그것은 “김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 문제에 그리 전문가가 아닌 프랭크는 거품이 “최대한”으로 솟아오르도록 하기 위해 병을 흔들었다. 훌륭한 거품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카페트와 침대보와 프랭크 자신에게 묻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마음껏 웃었다.

“내가 흑맥주 냄새를 풍기면서 천상의 모후 기숙사로 돌아가면 펙 맥도넬 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그는 항상 자가를 웃음거리로 삼아 농담을 즐겼다.

 

 

1958년 10월 28일이었다. 프랭크는 여성 레지오 단원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천상의 모후의 작은 부엌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추기경단이 새 교황을 선출했다는 소식이 인터폰으로 부엌에 전해졌다. 추기경단의 선택은 다소 놀라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든 군중들이 기쁨과 흥분으로 휩싸여 진심으로 “교황 만세”를 외칠 만한 것이었다.

프랭크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소식은 그를 완전히 놀라게 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즉시 오랜 친구에게 그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그만큼 기뻐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전화가 있는 옆방으로 갔지만 그가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그것은 위클로우 백작 부인인 엘레노아 버틀러  였다.

“정말 놀랐는데요. 방금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어요” 하고 그가 말했다.

“사실 전 더프 씨가 듣지 못했을까 봐 전화했어요.”

 전화를 통해 그들은 거의 10년 전 프랑스의 교황대사가 레지오 마리애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표시했던 그 기쁜 사건을 회상했다. 교황 요한 23세라는 이름으로 방금 새 교황으로 선출된 분이 바로 그 프랑스 대사였던 론깔리 추기경이었다.

그의 선출 후 2년 내에 교황 요한 23세는 레지오에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힘있는 재가를 해주며 이렇게 선언했다. “레지오 마리애는 가톨릭 교회의 참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1960년 7월 13일 프랑스 레지오 단원들에게).

 

 

 

 

 

32 저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에 의해 달성하고 있는 놀라운 일들에 대한 보고가 전세계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끝없는 문제, 걱정, 엄청난 긴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프랭크 더프는 한 수녀에게 그러한 점을 보여주는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X 수녀님,

제 생애 중 많은 부분을 피로한 상태에서 보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녀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신경질적인 성격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억누르는 일들로 인해 이제는 완전히 지쳤습니다.”

 

 

1963년 프랭크는 지금까지 겪은 일 중에서 아마 가장 큰 정신적 고통이었을 법한 일을 겪었다. 천상의 모후 기숙사가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 원래 그 기숙사를 운영하도록 건물을 제공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모두 현직에서 물러났다. 이제 지방정부의 당국자들은 그 건물이 낡아서 거주에 적합하지 않다고 결정했다. 그들은 정부비용으로 수리를 하도록 한 전임자들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중대한 오해가 과거에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더욱 중대한 사실은 레지오가 그 건물을 포기하도록 통고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프랭크는 후에 이렇게 얘기했다. “그 끔찍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우리가 직면했던 것은 250명의 무능력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어요. 그것을 운영하기 위해 33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전념했던 그 사업이 단번에 바람에 날려 가려 하고 있었어요. 그것은 250명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방주를 없앰으로써 미래에 난파될 수많은 군중의 문제였어요. 그러한 예상은 참기 어려웠어요. 난 지금도 그에 대해 생각하면 고통스러워요.”

레지오 초창기에는 큰 위기가 닥치면 모두 랠로 씨와 상의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 적어도 그는 프랭크의 걱정스러운 영혼을 위로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랠로 씨는 오랜 전에 천국으로 갔다. 어디서 프랭크는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굴복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성모님께 봉헌한 자신에게 전적으로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존경할 만하고 거룩한 해결책이 있었다. 프랭크는 그것을 찾아냈다.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

“난 내 자신과 내 고통을 성모께 맡기고 성자의 십자가와 성모의 발치에 똑바로 서서 내 고통을 그분의 것과 합치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눈에 띄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하기가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오래지 않아 물리적 위안을 받았다. 쉬운 그 방법은 적절한 안목으로 내 위치를 낮추었고 내 고통을 줄어들게 했다. 나는 자신을 억제했다.”

구체적인 사실로 그 위기는 마침내 지나갔고 기숙사는 계속 운영됐다. 250면의 기숙사 거주자들은 프랭크와 손을 맞잡고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느님의 은총이 깃드시기를 바랍니다, 더프 씨. 우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당신도 있겠지요?” 그리고 생활은 다시 평온해졌다.

그 날부터 천상의 모후 소성당 벽에 장식된 슬픔의 성모 마리아의 대형 상본이 프랭크 더프가 매일 미사에 가는 길에 특별한 애정의 눈길을 보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성모 칠고의 로사리오 기도는 정식 로사리오 기도에 덧붙여 항상 그가 좋아하는 매일 기도의 하나였다. 그 사건으로 그에게 더 큰 의미가 있었으리라.

 

 

이러한 걱정으로 인한 긴장 때문에 몇 달 뒤 그가 중병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뇌졸증 으로 고생했다.

그는 월요일 아침에 대학 사회과학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침에 그는 아팠지만 미사에 나갈 것을 고집했다. 그리고 나서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그는 아주 힘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그는 샛별 기숙사 사람을 만나 그에게 부축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대학에 도착해서 강의를 시작했다. 몇 분 뒤 그는 잠시 동안 실례하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는 그 강의를 계속할 수 없었다. 프랭크의 절친한 친구의 딸인 블래트네이드 오브로인 이 청중들 속에 있었다. 그의 상태를 보고 놀라서 그녀는 곧바로 그를 태워 집으로 데려갔다.

다음날 아침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애를 썼고 지팡이를 짚고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처어치 거리에 있는 카푸친 교회에 갔다. 미사 후 집으로 오는 도중에 천상의 모후 기숙사에 이르렀을 때 쓰러졌다. 그들은 그를 소파에 눕혔다. 그 당시 천상의 모후의 관리인인 맥노넬 양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로 의식을 되찾았다.

나반에 있는 모나한 의사의 집에 전화가 울렸다. 프랭크의 여동생과 결혼한 그 의사는 처남의 상태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아내인 사라 제랄딘을 데리고 급히 더블린으로 왔다. 그들은 그를 나반으로 데려갔다.

모나한 박사의 의견은 프랭크가 아나 순전히 극도의 피로에서 오는 경미한 뇌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얼마 동안 완전한 휴식을 취하도록 처방을 내렸고 프랭크는 예전의 힘과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면서 나반에서 5개월을 보냈다. 그는 75세였다.

처음에 모나한 박사는 프랭크가 아주 오랜 시간 수면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약간 놀랐다. 그는 아마 프랭크가 죽음 전에 오는 혼수상태에 빠져 들아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랭크를 더블린의 성모병원(Mater Hospital)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보다 철저한 검사가 이루어졌다.

병원에 있는 동안 프랭크는 매일 아침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결연히 침대를 빠져 나왔다. 미사는 항상 그의 삶의 중심이었고 영성체는 자양분이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프랭크가 침대에 남아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하느님을 더욱 기쁘게 해드릴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지 않은가? 그러나 프랭크는 오래 전부터 다른 수준, 즉 신앙의 수준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전사였다. 그는 일생에 걸쳐 여러 번 궁지에 빠졌었다. 그러나 순전히 신앙에 의지하여 이겨냈다. 그는 다양한 위기들과 싸우며 전진했다. 이제 그가 길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를 위한 섭리에 의해 그때 병원에 환자로 있던 신부님이 몇 분 있었고 이들이 작은 복도의 소성당에서 미사성제를 거행했다. 그래서 프랭크는 매일 미사에 참석하여 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복도와 작은 소성당을 걸을 정도의 힘은 있었다.

한편 프랭크가 나반에 있는 여동생 사라 제랄딘과 그 남편 모나한 박사의 집에서 휴양을 하고 있을 때, 그곳 사제인 허버트 신부가 매일 와서 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프랭크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고 그는 깊이 감사했다.

어느 날 아침 프랭크가 너무 힘이 없어서 닥터 모나한은 매우 걱정이 되었다. 허버트 신부가 도착해서 프랭크에게 성체를 주었을 때 모나한 박사는 그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서 말했다.

“신부님, 프랭크의 상태가 아주 허약합니다. 제 생각에는 병자성사를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체할 시각이 없어요. 가서 성유를 가지고 다시 올게요. 프랭크는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아는가요?”

“모르는 것 같아요.”

사실 프랭크는 자신이 그토록 아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같은 날 허버트 신부가 두 번째 오는 것을 보자 그는 매우 놀랐다. 허버트 신부는 잠시 상냥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왔다는 소식을 프랭크에게 어떻게 털어놓아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머뭇거리면서 그는 병자성사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즉, 그것은 산 사람들의 성사이며 자동적으로 죽음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프랭크는 서서히 알아듣기 시작했다. 그의 반응은 조용하고 실제적이었다. 그는 “그것은 하나의 수법이고 난 죽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허버트 신부가 크게 안심하도록 프랭크는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저에게 기름을 바르시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허버트 신부는 그러한 이해와 체념에 안도감을 나타냈다.

“더프 씨, 어떤 사람들은 약간 두려워한다는 것을 당신도 알지요?”

“아닙니다. 저는 아닙니다. 제가 기름을 바를 자격이 있다면 매우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허버트 신부는 병자성사를 주었다. 그때는 성 목요일이었다.

사제가 떠나자 프랭크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후에 그가 다시 회복되었을 때, 그 순간의 느낌을 이렇게 묘사했다.

“난 행복감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난 더 높은 단계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 가족과 다시 만날 생각에 기뻤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 모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느꼈던 기쁨은 매우 커서 건강을 회복한 후, 난 나의 때가 정말 올 때 그것이 경사스러운 것이 되고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기쁨으로 충만해지도록 많이 기도했다.”

 

 

나반의 누이동생 집에서 보낸 5개월의 휴양기간은 평호와 평온의 시기였다. 오랫동안 그는 매우 아팠고 극도로 허약해졌지만 그의 병은 그에게 큰 고통이나 비탄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모나한 박사는 환자의 치료에서 그 사람의 모든 성격을 고려했다. 그는 프랭크에게 절대로 일을 하지 말도록 지시한다면 더 건강에 해로울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계속해서 일어날 불안감은 회복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프랭크에게 침대 위에서 하는 조건으로 원하는 일을 하도록 조치했다. 프랭크는 안심했고 이 처방에 만족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침대에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저술하고 그것을 수정하는 등 상당한 양의 일을 했다. 그는 레지오 교본의 교정을 마쳤다. 그는 다양한 잡지에 많은 기사를 썼다. 그리고 물론 매일 다른 많은 기도와 아울러 성무일도를 바쳤다. 그리고 피곤해지면 그대로 잠을 잤다. 그 처방은 효과가 있었다.

허약하지만 프랭크는 모나한 가족들과의 생활이 그에게 생기를 더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차를 마신 후 매일 저녁 일어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가족들과 어울렸다. 그들은 옛날 일을 얘기하고 회상하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가족들이 함께 모이면 하는 습관이었다. 또 그들은 텔레비전을 보곤 했다. 그들은 차를 더 마시곤 했다. 프랭크는 이전에 겪었던 업무와 걱정에서 해방되어 여유와 휴식을 즐겼다.

그의 건강이 점차로 회복되자 그는 더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모나한 박사는 종종 그를 차에 태워서 4마일 떨어진 곳으로 가서, 보인 강에 놓인 작은 다리에 그를 내려놓고 보인 계속의 끝에 있는 또 다른 다리까지 걷게 했다. 의사는 걷는 것이 건강을 회복하는 최상의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랭크는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시간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많이 걷는 일은 없었다.

보인 계곡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 중의 한 곳이다. 그 길이는 약 4마일 정도이다 프랭크는 강둑을 따라 걷는 것이 몸에 활기를 돋우고 마음의 긴장을 푸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모든 자연을 아주 자세하게 관찰했다. 곳곳에서 보인 강은 천천히 흐른다. 특별히 서두르지 않고 완만하게 굽이쳐 흐른다. 다른 곳에서는 그 리듬이 약간 높은 곳이나 튀어 나온 바위가 있는 곳에서 폭포로 바뀐다. 그러면 잠들어 있던 강은 갑자기 바위에 부딪치면서 성난 듯이 성급하게 큰소리를 낸다. 강둑의 버드나무와 갈대와 애기버들이 시원한 물에 잠겼다 나와서 다시 생기를 얻는다.

친절하게 강가에 나란히 나 있는 작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을 때 프랭크는 아일랜드 중부지방의 고유한 짙은 잔디가 연이어 무성하게 펼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길은 여행자에게는 더 피곤하겠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충분했고 날씨는 화창했기에 그렇지 않았다. 그는 베어 넘어진 그루터기나, 강둑의 자연이 제공한 아늑한 모퉁이에 앉아서 쉬곤 했다. 그는 그의 주위에 있는 크고 작은 생물들, 멀리 둑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와 양떼,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들, 작은 잔디 잎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큰 벌레들 등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때로 연어나 송어가 수면 위로 뛰어 올라와 정확하게 윤기 도는 잠자리를 낚아챘다. 물고기의 첨벙하는 소리에 일순간 고요가 깨어졌다가 다시 평화가 내린다. 조금 뒤 강은 다시 그 독특한 노래로 하느님을 찬미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생명과 쇄신의 상징인 맑은 물! 몇 년 후 프랭크는 나반에서 건강의 회복기가 그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프랭크는 새 사람이 되어 더블린으로 돌아왔고 중단했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더욱이 그의 강요된 “휴가”는 그의 마음속에 많은 새로운 기획을 불어넣었다. 그는 앞으로 더욱 분주하리라고 예감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큰 일과 두려운 책임감이 그 앞에 놓여 있는지는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그것은 뜻하지 않게 빨리 다가왔다. 그는 교황청 공식소인이 찍힌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바티칸 공의회에 공식 평신도 입회인으로 참석하러 로마로 오라는 호출장이었다.

 

 

 

 

33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입회인

 

 

1965년 9월 11일 이른 오후였다.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서 도미니꼬 회의 크로포드 주교와 로난 쿠사크 신부가 더블린 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에 체류할 동안 그들의 손님이 될 중요한 방문객을 고대하고 있었다.

오후 4시에 비행기가 도착했다. 주교들이 연이어 비행기에서 내렸고 활주로를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일랜드,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에서 왔고 모두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를 위해 도착하고 있었다. 그때 비행기에서 단 한 사람의 평신도인 프랭크 더프가 내려왔고 그의 신사복은 고위 성직자들 시야에서 그들 눈에 띄게 만들었다. 그는 크로포드 주교와 쿠사크 신부가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었다. 도착 후 그는 3개월 동안 로마의 도미니꼬 회 수도원에 머물 예정이었다.

로마의 레지오 단원들도 또한 프랭크 더프가 영원한 도시에 온 것을 환영하러 공항에 나왔다. 처음부터 그는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느꼈다.

놀랍게도 공의회 초기에는 다른 평신도들이 초청된 반면에 프랭크는 초청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초청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를 초청해야 한다는 것이 점차로 분명해졌다. 공의회에서는 교부들이 토론하고 장려하고 있는 바로 그것들 중 많은 것이 1921년에 프랭크가 주장했고 실제로 레지오 제도 안에 흡수되었고 레지오 교본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로 출발하기 전 프랭크는 이미 공의회가 발표한 교령들을 살펴보았다. 그가 교회의 교의헌장에 대한 교령과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부분을 읽었을 때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 교령 속에 들어 있는 사상은 그 표현까지도 30년 전 그가 ,몽포르의 망원경> 이라는 책에 쓴 것과 너무도 비슷했다. 그렇지만 그는 공의회가 “마리아가 인류의 어머니” 라는 교리의 실제적 의미와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과 사도직 사이의 필요한 연결에 대해 더 깊이 고려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남은 공의회 회기 동안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을 때 프랭크는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 그는 주저한 것처럼 보인다 – 아무에게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블린에 있는 교황대사는 그 초청에 대해 알고 있었고 프랭크가 그것을 수락했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왜 프랭크는 주저하였던가? 그는 76세였고 중병에서 겨우 회복되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잇는 많은 일로 되돌아가려 했으나 여전히 쉽게 피로를 느꼈다. 의사는 그에게 이번 병이 과로로 생긴 것이라고 했다.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간다면 그곳에서 죽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공의회를 마치고 돌아온 후 한 친구에게 그 때의 소감을 털어놓았다. 그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로마에서 죽는다는 생각과 그때 생길 불편함을 생각하고 큰 걱정을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어쨌든 그는 가기로 결정했다. 로마로부터 온 초청은 그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온 소환장이었다. 그가 로마 행 비행기로 더블린을 떠날 때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마에 도착한 다음날 프랭크는 콜로세움과 포럼을 방문했다. 그 두 곳을 둘러보고 그는 감탄을 했다. 포럼은 고전에 대한 그의 지식 때문에, 콜로세움은 그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숭고한 형태, 즉 신앙을 위한 피 흘림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유일한 로마 관광이었다. 그때부터 꽉 짜인 일정 때문에,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회상하게 할 곳들을 방문할 틈이 없었다.

공의회는 9월 14일에 정식으로 재개 되었다. 프랭크는 그 훌륭하고 장엄한 의식에 깊이 감동되었다. 평신도 청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아주 좋은 자리가 배정되었다.

그러나 대 공의회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라틴어 실력은 우수했지만 고전어로 대화나 연설을 실제로 들은 경험이 없었다. 그는 회의 후 커피 바(다방 겸 경양식 점)에 갔을 때 토론의 요지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리라. 그러나 종종 그는 커피 바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도중에 “불러 세워졌다.” 추기경들, 주교들, 수도원장들이 그를 알아보았고 따뜻한 인사를 하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언젠가 더블린에 가서 프랭크 더프를 만났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교구에서 레지오 마리애를 장려했고 레지오에 열심이었다. 그를 외모로 알아보지 못했던 다른 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프랭크의 옷깃에 달린 금 벡실리나 를 보고 갑자기 멈추어서 “아! 당신이 프랭크 더프 씨 맞지요?” 하고 말하고 했다. 프랭크는 벡실리나 를 선물한 가나의 레지오 단원들에게 감사했다.

“오! 내가 레지오를 대표했기 때문에 지구 끝에서 온 모든 주교들이 열렬히 인사를 할 때 정말 감격적이었어요” 하고 그 후에 말했다.

프랭크는 “사제의 직무와 생활”과 “평신도 사도직” 에 관한 공의회의 심의에 참가하고 이 두 주제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평신도가 사도직을 위해 교육되어야 한다면 사제가 그 일을 맡아야 한다.

이미 어린 시절에 프랭크는 “훌륭한 사제”를 “신자들에게 봉사하고 교회와 본당을 잘 유지하고 미사와 기도를 잘 드리는 사람” 으로 보는 일반적인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랭크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았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가 빠져 있었다. 사제가 자기 신자들을 사도들로 훈련시켜야 한다. 영세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일원이 되며 교회의 선교에 함께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그래서 교황 비오 11세 께서는 이렇게 엄숙하게 선언하셨다. “성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왕국을 온 지구상에 확장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나누어주는 것이다.”(레지오 교본 p. 401).

40년 이상 프랭크는 레지오 마리애와 레지오 교본을 통해 전세계에 신비체의 교리와 사도직에 대한 평신도의 당연한 의무를 수고를 아끼지 않고 끈기 있게 자세히 기술하고 보급시켰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심의 후 공의회 교부들이 다음과 같이 선언했을 때 그의 기쁨이 어떠했겠는가?

“사제들은 교리를 가르치고 설교할 때나, 영적 지도나 다른 사목적 성무를 수행할 때에 사도직을 위한 교육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30). 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성화하는 사도직은 특히 믿는 사람이거나 안 믿는 사람이거나 그들과 대화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양성되어야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 31).

회기 중 적당한 시간에 잉글랜드의 헤넨 추기경이 프랭크 더프의 참석에 대해 2,500명의 주교들에게 알렸다. 이 평신도가 성교회를 위해 한 일에 대해 성직자단으로부터 진실한 감사의 표시로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가 계속되었다.

공의회 회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프랭크는 날마다 기진맥진했지만 도미니꼬 회 친구들이 산 클레멘트로 데려가서 점심 식사와 약간의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수도원장인 안셀모 신부는 그의 오랜 친구였고 그의 체류를 편안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산 클레멘트의 편안한 분위기와 도미니꼬 회 형제들의 호의는 피랭크가 그 힘든 3개월을 견디어내게 한 요소였다. 또한 약간의 초자연적 도움도 있었을 것이다. 프랭크의 일은 매일 공의회 회의가 끝난 후에도 결코 끝나지가 않았다. 어떤 점에서는 그의 주요 사업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레지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32회 이상의 공식 연설을 했다. 도착 후 곧 아일랜드 주교들이 그에게 연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뒤 그는 100명의 영어권 주교들에게 강의를 했다. 프랑스 주교들과 프랑스어 사용권 주교들도 그에게 연설해 달라고 요청했고 통역을 세우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수줍어하면서 통역이 필요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산 클레멘트 로 돌아가서 그의 연설을 완벽한 불어로 썼고 예정된 시간에 강의를 했다.

그는 또한 다른 그룹들, 즉 대학과 신학교와 여러 수도회의 본원에서 강의를 했고 밀힘 주교들과 “거룩한 말씀의 수도회” 주교들에게 강의를 했다.

이러한 강의는 여러 시간 동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 그는 몇 개의 기사와 메모와 200여 통의 편지를 썼고 매우 많은 개인 면담을 했다. 그 공의회에 참석한 어떤 주교도 그 3개월 동안 그만큼 바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는 로마에 있는 그의 충실한 친구들, 즉 레지오 단원들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에게 지극히 친절했고 특히 그는 “마음이 편했다.” 그는 모든 세나뚜스 회의와 몇 개의 쁘레시디움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자신이 네 명의 새로운 레지오 단원을 새로 가입시킨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의 가장 중요한 체험은 12월 11일에 교황 바오로 6세를 개인적으로 알현한 일이었다. 교황 성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더프 씨, 성교회를 위해 당신이 한 일과, 또한 레지오 마리애가 한 모든 것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프랭크는 참으로 친절한 그 말씀에 감사의 말을 더듬거릴 뿐이었다. 그 해 초에 바오로 6세 교황께서 더블린에 있는 프랭크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그 편지의 구체적인 목적은 “레지오 마리애를 치하하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 편지에서 교황께서 레지오가 창안하고 발전시킨 신심 깊은 목적과 많은 사업들은 “가톨릭 사도직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이로써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데 놀라운 힘을 지닌 기구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고 치하했다. 프랭크는 이제 그러한 고무적이고 놀라운 찬사에 대해 교황 성하께 개인적으로 감사를 표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교황 성하께 레지오의 일차적인 목적은 교황께 충성을 바치고 주교들과 사제들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교회가 가장 긴밀히 결합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말했다. 그리고 나서 프랭크는 “우리 단원들이 순교의 순간까지도 이것을 증언하길 바랍니다” 하고 덧붙였다.

교황은 “레지오 마리애가 성교회에 충실히 봉사해 왔지만 이제 성교회는 레지오를 보호할 것입니다” 라고 선언하셨다.

 

 

바티칸 공의회에 따라 교회 내에서는 건전한 쇄신이 이루어졌다. 새 사업들과 방침들, 새로 발견된 의무가 따랐다. 그러나 당시에 변화를 위한 변화를 추구한 사람도 있었고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조직들은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추측한 사람들도 있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레지오이 신입단원을 모집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어떤 이들은 레지오의 통제된 제도와 기도에 대한 강력한 강조가 새 세대에게는 너무 “구식”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것들이 레지오 단원 개인과 그들이 봉사할 영혼들 모두에게 그러한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한 바로 그 요소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프랭크는 이런 현상을 슬퍼했다.

더욱이 그는 이제 전보다 더 분명하게 성교회가 원하는 것을 알았다. 그 밖에도 레지오가 활동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바티칸 공의회가 모두 승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교회의 영적 선교에서 평신도의 바람직한 참가에 대해 공의회가 특별히 강조하고, 특히 평신도가 이웃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해 얘기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고 공의회가 지시하는 것을 주목했다. 공의회는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계시나 교회에 남긴 놀라운 영적 보물을 아직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전세계 수백만 명에게 대규모의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한 그리스도의 당부를 되풀이했다.

마찬가지로 타락했거나 냉담한 가톨릭 신자들과 더욱이 곤경에 빠져있는 모든 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실제적이고 성실한 노력이 있어야 했다. 그렇다.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이 레지오 마리애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프랭크는 실감했다. 레지오 마리애가 있는 곳은 어디나 단원들에게 기법과 영적 훈련을 제공할 수 있고,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병사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한다.

프랭크는 또한 어떤 지역에서는 사제가 레지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슬프게도 레지오를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거나 혹은 아주 불완전하게 나타내는 몇몇 레지오 쁘레시디움들이 있었다. 때로 그러한 쁘레시디움들한테서 온 보고는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다거나 혹은 그 지역 꾸리아가 간부들을 훈련시키지 않는다거나, 그 본당의 더 시급한 일을 내버려둔 채, 소년 단원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사업에 성인 단원들이 틀어박혀 있다거나, 쁘레시디움들이 레지오 교본의 지침에도 불구하고 온갖 핑계를 대면서 소년 쁘레시디움을 시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제는 “내가 본 대로라면 레지오를 믿을 수 없다” 고 말할지도 모른다. 레지오 단원들은 “우리를 지도해 주는 사제가 있다면 확고한 그룹이 되었을 텐데”라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다!

프랭크는 항상 그러한 상황에서 사제가 어쨌든 더 멀리, 더 깊이 보고 레지오가 – 외딴 시골 본당이거나 도시의 본당이거나 혹은 “포교지”이거나 간에 레지오가 적절하게 활동하고 있는 곳에서 –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기를 희망했다. 그는 광대한 지역이지만 사제가 한 명뿐인 동아프리카의 한 본당을 인용하곤 했다. 이 사제는 그의 레지오 단원들을 본당 구역 내 모든 마을과 부락에 보내어 레지오를 세우게 했다. 새 그룹마다 확장의 의무를 강조했다. 곧 그 사제는 61개의 쁘레시디움을 거느렸고 네 개의 꾸리아로 나누었다. 매주일 마다 다른 꾸리아를 방문함으로써 그는 244명의 간부 모두와 정기적인 접촉을 가질 수 있었다. 꾸리아를 “방문”하는 주일에 그는 또한 미사를 거행하고 레지오 단원들에 의해 준비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혼배성사를 거행하곤 했다. 그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영혼들은 매우 많았고 일꾼들도 적지 않았다. 프랭크는 그러한 곳을 “활발한” 본당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렇다. 더욱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는 전보다 더 큰 도전을 받은 시기였다. 레지오는 그 사업을 향상시켰을 것이다. 그것은 특히 종류상 영성적 성격인 사도직에 대해 집중되었을 것이다. 물론 남는 단원이 있었다면 일반적으로 소년 레지오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해도 봉사 사업을 도왔을 것이다. 그 밖에도 다른 조직들이 봉사 사업을 하기 위해 존재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장차 레지오의 역할에 대한 전망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프랭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레지오가 현재의 모습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그 생명력과 성공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더욱 사람들을 개선시킬 것입니다. 제가 보기로는 레지오는 이제 겨우 성인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떤 점에서 레지오가 요람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레지오는 자랐고 미래에 우리가 처하게 될 끔찍한 싸움에 대비해 무장한 군인입니다.”38 

프랭크는 그가 물러난 후에도 레지오가 그 힘을 유지하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지오는 처음부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맡겨져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내가 떠난다고 해서 그분의 손으로 레지오가 치워지지는 않을 것입니다.”39

 

 

 

 

 

34 그리스도를 위한 정복

 

1941년 프랭크 더프와 한 레지오 그룹이 더블린에 머시어 회를 세웠다. 이 회의 목적은 가톨릭 신자와 신교도간에 대화를 할 기회와 광장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40  아일랜드에서 신교의 배경을 형성한 역사적 정치적 요소 때문에 “양측” 에 상당한 편견이 있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간에 종교적 대화는 거의 없었다.

더블린 시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였고 이들은 신심이 깊어도 소수의 타 종교나 그들의 관습에 대해 다소 냉담한 경향이 있었다. 수천 명의 아일랜드 가톨릭 선교사들이 먼 나라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반면에 조국에 있는 그들의 비 가톨릭 형제들에게는 종교적 가치를 설명하거나 나누려고 하지 않는 것이 프랭크에게는 모순된 것처럼 보였다. 프랭크 자신의 경험으로 적어도 가톨릭 교회로 초대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비 가톨릭 신자가 있다고 보았다. 물론 다른 많은 이들은 호의를 가지고 있다 해도 가톨릭 신앙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거나 그들의 신념은 신중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확실히 우리는 이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할 의무가 있고 그들의 신념을 설명할 기회를 줄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프랭크는 생각했다. 친절하고 정직하며 솔직한 토론만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머시어 회(위대한 교회 일치 운동가인 머시어 추기경의 이름을 땄다)가 세워지자, 그 월례회의에 이어 개신교도와 가톨릭 신자 모두 잘 참석했다. 때때로 경솔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분위기는 참으로 정직하고 친밀하고 기분 좋은 것이었다. 그것은 진짜 교회 일치 운동의 모험(제2차 바티칸 공의회 23년 전) 이었고 의심할 여지 없이 훌륭하고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편견은 상호 이해로 바뀌었고 호의를 가지고 되었고 모두가 하느님의 진리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머시어 회는 몇몇 성직자들이 교회 법전에서 이런 종류의 회의와 토론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는 조항을 찾아낼 때까지 몇 년간 계속되었다. 머시어 회는 폐쇄되었다. 그의 교회 일치 운동 기획을 볼 때 프랭크가 “그의 시대에 앞서” 태어난 사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머시어 회 모임에 참석했던 신교도와 다른 종파 사람들은 프랭크의 전적이고 진실한 정직성에 감사했다. 가톨릭의 진리를 공정하고 명료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결코 오만하거나 독선적이지 않았다. 그의 겸손과 순수한 친절은 참석자들의 마음을 샀다. 친절한 프랭크는 참석자들의 호감을 샀다. 프랭크와 “대화” 모임에 많이 참석했던 더블린의 저명한 개신교 목사인 W. 프록토 는, 그의 신학적 견해와 프랭크의 것과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들 사이에 쌓인 두꺼운 우정을 방해하지는 못했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확실히 프랭크와 교제를 할 특권이 주어진 많은 개신교도들이 캐논 의 간단하지만 멋진 찬사를 시인했다. “프랭크의 따뜻한 악수와 호의적인 미소는 나에게 따뜻한 추억이다.”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프랭크의 관심은 그의 생애에서 큰 관심사 중의 하나가 된 복음화에 대한 관심을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여러 해 동안 그는 레지오 단원들에게 교회의 이 주요 선교에 참가하도록 장려했고 과연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렇게 선언했을 때 크게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사제는 신자를 사목함에 있어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려는 열성을 신자들 사이에 환기시키며 그것을 보지(保持)케 하여야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설교에 관한 교령 39).

프랭크는 이미 한국에 있는 레지오 단원으로부터 받은 편지에 큰 격려를 받았다. 한국에서 선교사들은 복음화 사업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중요한 역할을 매우 빨리 깨달았다. 레지오를 한국에 소개한 활동적인 골롬바노 회 선교사인 몬시뇰 헤럴드 헨리(후에 대주교가 됨)가 포교지에 처음 도착했을 때 단지 17명의 가톨릭 신자만을 발견했다. 레지오 단원의 도움으로 그는 진정한 “선교 기적”을 이루었다. 그가 그곳에서 임무를 마치기 전에 그의 선교활동은 네 개의 본당을 세웠고 14,000명의 사도직 가톨릭 신자를 배출했다.

바티칸 공의회가 선교에 대한 교령을 발표한 뒤 몇 달 후 라자리스트 회 토마스 오프린 신부가 아일랜드 교회 당국으로부터 레지오의 최고 기관인 꼰칠리움의 영적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오프린 신부는 프랭크에게 몇 가지 지도를 요청했다. 프랭크의 대답은 솔직했고 포괄적이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복하도록 레지오 단원들에게 촉구하십시오.”

그 무렵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 운동이 이미 확립되었고 프랭크는 그 범위를 확장하고 지역을 넓히도록 촉구하고 있었다. 레지오의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운동은 야만족의 침입 이후 유럽의 암흑을 밝히도록 그리스도의 빛을 전한 6,7세기 초기 아일랜드 수도자들의 위대한 서교 여행에서 이름을 따왔다.

현대의 외지 순방은 그들의 휴가의 일부를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외에 전파하는 데 바친 더블린 대학의 레지오 단원들이 시작했다. 그것은 그 당시는 “휴일 사도직” 으로 불렸다. 몇 년 내에 해마다 외지 순방에 지원한 아일랜드 레지오 단원의 수가 1,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열 두 팀으로 나뉘어 유럽의 모든 나라와 더 멀리 아프리카, 인다아, 미국, 아시아까지 갔다. 이 외지 순방자들의  목적은 교회를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히 알리고 그들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매년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프랭크는 그들에게 연설하곤 했다. 그는 웅변가는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호감이 갔지만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메시지를 약간 특이하게 전달했다. 그의 연설에는 그의 신앙이 드러났다. 그는 레지오 단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하느님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려는 열렬한 열망을 불어넣었다.

어떤 성직자들은 레지오 단원들이 그런 종류의 선교 사업을 착수하기에 적당하지 않으며 그들은 신학적 훈련이 없다(!) 고 단언했다. 프랭크는 이렇게 반박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 활동이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한정되어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기회를 잃기를 원하십니까?” 혹은, 그는 이렇게 주장했을지도 모른다. 레지오 단원들은 매주 레지오 교본에서 교회의 모든 교의(삼위일체, 강생, 그리스도의 신비체, 미사, 마리아의 어머니이심 등과 같은)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르침들의 실제 적용과 실천을 공부해 왔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사실 그렇게 부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거절이 지식보다는 오히려 편견에서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프랭크는 그 비판자들을 초청해서 외지 순방자의 구체적인 보고를 직접 듣게 하고 외지 순방 선교의 놀라운 성과를 칭찬하는 전세계 사제들과 주교들에게 온 편지를 읽게 하기를 좋아했다.

과연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외지 순방자들이 접촉한 많은 사람들이 예리한 관심을 보였고 가톨릭 신앙에 대해 가르치는 교리수업에 참가했다. 많은 냉담자들이 종교 생활을 실천했다. 외지 순방자들의 열성과 본보기에 의해 본당에서 많은 영적 향상이 있었다.

외지 순방에 지원한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16세에서 20세 사이였다. 외지 순방은 그들의 영성 생활에 자극이 되어 왔고, 또한 그들 자신의 신앙에 더 깊은 인식을 하게 했다. 그들이 접촉한 본당의 젊은이들에게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가톨릭의 도적적이고 매력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물론 매년 그 가간이 짧기 때문에 외지 순방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불꽃과 비슷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행동하도록 불을 붙이고 그 사상을 전파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리스도교를 참으로 이해하는 것은 단지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그것을 전하도록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고 프랭크는 말했다.

외지 순방 운동의 또 다른 지부는 “그리스도의 사자”였다. 말과 모범으로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증인이 되기를 열망하는 그 단원들을, 외방 선교에서 재능과 전문지식을 바치도록 신입단원을 모집하고 훈련했다. 몇 년 후 그리스도의 사자는 독립기관이 되고 직접적으로 레지오에 의해 관리되기보다 레지오와 결탁하여 일하기로 결정되었다.

외지 순방에서 개발된 또 다른 것은 “마리아 정신의 외지 체류”로 알려진 운동이었다. 외지 체류 활동자는 일 년이나 그 이상을 해외 복음화 사업을 하기로 지원하는 레지오 단원이다. 프랭크는 외지 체류 탐과 일하고 있던 해외 사제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사제는 이렇게 썼다. “외지 체류(I.M)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오늘날 교회 내 주요문제의 하나인 선교사의 극심한 부족에 대한 해결책일 것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레지오는 아마 많은 수의 외지 체류 활동 자를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레지오는 개종 사업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으며 선교사업에서 개인에게 부드럽고 직접적인 접근을 합니다.

셋째로, 레지오의 방법은 훈련에서 현대 기술의 가치를 과소평가하지 않는 한편 복음의 요점인 신심과 사도적 용기를 강조합니다.

넷째로, 레지오는 이 단계에서 시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모님의 손에서 단원들의 성화와 선교 사업의 전부인 그리스도를 위해서 영혼들을 구하도록 증명된 능력의 무기입니다.

프랭크 더프가 가장 뽐내는 자랑의 하나는 필리핀에서의 레지오의 위업이었다. 그곳에는 사제가 대단히 부족했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명목상으로만 가톨릭 신자였지 신앙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그때 레지오가 소개되었고, 레지오는 명목상으로 가톨릭 신자들인 그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도록 하는 데 대단히 효과적임을 입증하였다. 마닐라의 오도허티(O’Dougherty) 대주교는 프랭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레지오의 도움으로 이곳 필리핀에서의 상황은 가망 있는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난 꿈을 꿀 수 있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우리나라는 동양에서 유일한 가톨릭 국가이다. 따라서 동양을 개종시키지 말란 법이 있는가?'” 이제 필리핀에는 14,000개의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이 있다. 죽기 얼마 전 프랭크는 이드 맥그래스 신부를 오게 했다.

“신부님, 당신이 필리핀에 가는 것이 저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그들에게 동양에서 그들이 우리의 큰 희망이라고 말해 주세요. 우리는 그들이 많은 수의 외지 체류 활동 자를 이웃 나라와 태평양 연안의 수천 개의 섬에 보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곳 교회 지도자들의 놀라운 협력과 격려가 있어야만 레지오가 지향하는 것이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35 그대의 신앙은 위대하도다!

 

 

프랭크 더프의 생애는 역사에서 비슷한 것을 찾기 어려운 놀랍고 생생한 신앙표현이었다.

프랭크는 수세기 동안 고난과 희생을 통해 성숙된 아일랜드 가톨릭교의 깊고 강한 신앙을 이어받았다.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어 본래대로 보관한 복음에 나오는 조심성 많은 사람과는 달리 그는 신앙을 그의 생애에서 강력하고 정복하는 힘이 나올 정도로 키웠다. 그리고 그의 이 신앙은 레지오 마리애를 통해 스며 나왔다.

그가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교본을 쓸 때 그들에게 모든 덕행에서 성모님을 모방해야 한다고 말했고 특히 성모님의 신심을 얻기를 열망하도록 호소했다. 그는 그런 신심을 덕(德)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 덕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와 함께 그는 신심을 쌓기 위해서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 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히브리서 12,1-2)라고 하신 말씀을 수긍한다. 광범위한 영적 독서와 실질적인 기도생활고 정직하고 논리적인 머리 이 모두가 결합되어 그에게 신앙이 정말로 무엇이며 신앙이 낳은 힘에 대해 잘 파악하게 했다. 그는 신앙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조건 없이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았다. 신앙은 산도 움직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두 가지 길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충실히 지키신다. 그러나 신앙은 또한 행동을 의미하며 우리에게는 행동과 용기를 의미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면 어떤 좋은 사업에서든 우리는 기적이 요구된다 해도 하느님께서 나머지를 해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프랭크의 신안의 시금석은 신비체에 대한 이해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활동을 계속한다.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이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이다.

사람들은 종종 아주 평범한 사람을 레지오 마리애에서 사용하는 데 대해 프랭크를 칭찬했다. 그러나 프랭크에게는 평범한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또 다른 그리스도이고 따라서 크나큰 가능성을 지녔고 영웅적 행동을 할 수 있다. 신앙이 적은 사람은 불가능하게 보이거나, 혹은 레지오 단원 마저도 약화시킬 수 있는 그런 위험한 어떤 것을 시도하도록 할 때 열중하지 않는다. 프랭크에게는 우리를 통해 활동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불가능한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분의 손발이다. 위험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언제 위험의 위협 때문에 당신의 선교를 회피하신 적이 있는가?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오셨다.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중국에서 신앙을 위해 순교하고 있다는 소식이 더블린에 들려왔을 때, 프랭크는 깊이 충격을 받고 매우 슬펐지만 동시에 그 레지오 단원들에게 최고의 희생을 바칠 특권이 주어진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몇몇 나라에서 레지오 마리애를 시작하거나 공고히 하기 위해 레지오 사절을 보내 달라고 더블린의 레지오 본부에 요청했을 때 프랭크는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지 않았다. 하느님은 강한 것에 대항하기 위해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사용하신다. 그래서 그는 누구든 훌륭한 레지오 정신을 지닌 단원을 찾았다. 레지오 선서를 한 모든 단원은 자신이 하느님께 맡겨진 도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여,

비오니, 저에게 오시어 당신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의 보잘것 없는 행위가 당신의 힘으로 지탱되어,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연장이 되게 하소서.”

(레지오 선서문)

 

프랭크는 언젠가 사제 직에 대해 투를스 신학교 학생들에게 연설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싫어하지만 어느 정도 제 자신의 배경에 대해 얘기를 해야만 얘기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저의 상당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경험으로 판단할 수 있는 한에서 대부분 그의 목표를 이루었고 겉으로 보기에 성공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해 얘기를 계속했다. 그는 그 성공의 비결이 어디에 있다고 보았을까? 그의 성실한 수고에 있다고 보았을까? 매일 장시간의 수고에 있다고 보았을까? “오랜 세월 동안 저는 참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저는 그보다 더 열심히 일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자신의 성공의 요인으로 지적했던 것은 그러한 활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높은 어떤 것이었다. “저는 열렬히 영적 질서를 믿어왔고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그것을 희생시키지 않았습니다. 제 노력에서 나오는 어떤 좋은 결과는 초자연적인 것을 강조 한데서 오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제가 주님과 성모님께 의지하고 있으며 제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단지 성무일도와 로사리오를 바치고 매일 미사에 참석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매일의 영적 훈련은 그의 생활고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프랭크가 자신에게 요구한 것에 있어서 미봉책이란 없었다.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믿으면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시도하다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를 중단시킬 수가 없었다. 일찍이 그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에게 있어 독신생활은 단지 희생을 위한 희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를 위한 자신의 전적인 약속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약속을 방해할 위험이나 모험이니 비웃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몇 번인가 내게 중요한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위험에 내맡겼어요. 나는 완전히 위험을 무릅쓰고 내 자신을 죽였어요.” 또 다른 기회에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내가 지옥으로 가기를 원하셨다면 난 기쁘게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한 말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프랭크가 얼마나 전적으로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추구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프랭크는 의심할 여지 없이 훌륭한 추리력과 극도의 논리적인 지성을 지녔다. 그러나 실제로 시험이 닥치거나 어려운 문제가 나타난다면 그의 논리를 극도로 단순해진다. 즉, “하느님께서 이것을 원하실까?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전진”은 보통 많은 괴로움을 포함했다. 오해와 저버림과 비웃음과 실패에서 오는 번민과 심신의 피로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신앙은 전력을 다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이 모든 것을 겪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생애의 대부분을 저녁에 늦게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계속 격심한 긴장 속에 있었고 때로는 탈진되기 직전일 때도 있었다. 심지여 새벽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 날에 무슨 일이 생길지를 두려워한 때도 있었다고 그 자신이 시인했다. 레지오에 대한 반대는 가장 큰 십자가였다. 그는 그러한 반대를 달게 받아들였다. “사실 십자가는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하고 그는 단원들에게 말했다.

이런 종류의 신앙, 대가에 상관없이 완전히 자신을 단념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으로 영웅적인 용기를 갖게 했다. 일찍이 두려움이 한 사람의 생활을 방해하여 어두운 효과를 낸다는 걸 알았기에 그에 대항해 단호히 자신을 던졌다. 그는 오랫동안 두려움 속에 살았고 두려움과의 계속적인 싸움은 그에게 많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가져왔다고 시인했다. 그럼에도 그는 두려움에 굴복한 적은 결코 없었다고 단언했다. 두려운 때에 그가 정한 방침은 “의무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하며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성덕(聖德)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덕의 정의는 영웅적인 힘입니다. 그리고 영웅적인 행위는 두려움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힘있고 끈기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달콤함과 부드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강한 성격 위에 있어야 한고 강한 성격으로 굳건하게 되어야 합니다.”

영감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그는 – 종종 그가 “신앙의 표징”이라고 부르는 것에 실마리를 찾으면서 – 놀라운 결과를 보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행동 속에서 신앙을 보았고 열매를 맺었다. 이것은 그에게 좀더 대담해지고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어느 날 저녁 레지오 회의에서 – 레지오는 그 당시 설립된 지 약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 그는 대답하게 예언했다. “레지오 마리애는 지구를 둘러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언했다. 그는 레지오가 상징하는 것을 모두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그 무렵에 레지오 제도의 효과를 알았다.

보통 혁명을 하는 사람들은 서두른다. 그들은 적당한 때를 잡아서 그들의 목적을 빨리 달성하려고 애쓴다. 프랭크는 그러한 의미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참으로 그는 절박한 사명감을 느꼈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레지오 안에 하느님의 손길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돌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천천히 활동하시지만 확실히 활동하신다. 마치 어떤 추진력이 내부에 있는 것처럼 그는 결코 늦추지 않고 확고한 토대를 세우고 모든 실패를 단지 연기된 성공으로 보면서 밀고 나갔고 참으로 초자연적인 힘이 그를 후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레지오에 대한 공식 승인을 받기 위해 어떤 한 나라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실망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올 때 그를 돕기 위해 애쓴 한 여성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는 주교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몇 년 후 그는 그 나라에서 필요한 허가를 받고 레지오를 소개했다. 그러나 그러한 연기는 – 그는 매우 많이 경험했지만 – 기다리는 시간 동안 더없이 소중한 선(善)이 실천되지 않고 남아 있는 사실 때문에 그는 크게 상심했다.

레지오 초창기에 프랭크는 혼자라는 느낌으로 인해 격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의 깊은 신앙이나 넓은 안목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어떤 점에서 그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레지오가 성숙하자 레지오 선서를 통해 그이 견해와 사상을 나누게 된 많은 영혼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

 

 

역사, 특히 교회사에 대한 프랭크의 철저한 지식은 교회가 지나온 여러 위기를 통해 보여 준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게 했다. 교회는 모든 위기들 가운데서도 살아 남았다. 하느님의 섭리로 어떤 강력한 옹호자가 구하러 왔거나, 혹은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셨다. 예를 들면 19세기 중엽에 주로 소위 계몽운동에 의한 신앙의 격심한 위기가 있었다. 무신론이 만연하고 모든 정신적인 가치는 의문시되었으며 기적의 확실성은 부정되었다. 그때 루르드에서의 성모님 발현이 그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었다.

또 다른 신앙의 위기가 닥쳤는가? 프랭크는 그 문제를 심사숙고 해야 했다. 전세계에서 온 여러 보고들은 정말로 신앙의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프랭크의 신앙은 비관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의기소침은 치료에 좋은 자극이 아니다”고 그는 말했다. 나아가, 레지오는 하느님의 손에 맡겨진 잘 준비된 도구이며, 세상을 오염시키는 어떠한 악과 위기가 닥칠지라도 교회는 그에 대항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레지오는 신앙에 대한 그러한 폭풍에 아주 잘 대항한다. 왜냐하면 신앙의 횃불이며 모든 이교를 쳐부수는 마리아께 대한 레지오의 계속적인 기도이다. 레지오가 이 영적 겨울의 위기를 지나 찬란한 봄으로 가도록 교회를 지지하는 일에서 주된 역할을 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는다.”

 

 

 

 

 

36 러시아의 어머니

 

프랭크 더프는 당황했다. 그는 이 유명한 방문객의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를 추측할 수는 없었지만 기꺼이 면담에 동의했다.

드디어 예정된 방문객이 도착했고 자신을 소개했다.

“전 런던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참사관 빅토르 야로츠키 박사입니다. 단신이 프랭크 더프 씨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프랭크 더프입니다. 만나서 기쁩니다.”

인사를 나눈 후 야로츠키 박사는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더프 씨, 소련 정부를 대신해서 당신께 메시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프랭크는 흥분과 호기심을 애써 억눌렀다.

“차마 ‘초청장’ 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모스크바에 오셔서 우리 정부와 협의하기를 원합니다.”

프랭크는 오랫동안 러시아에 관심을 가져왔다. 매우 여러 해 동안 아일랜드의 온 교회에서 주일마다 러시아 를 위한 특별기도를 바쳐 왔다. 그도 역시 레지오가 러시아에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는 레지오 마리애와 러시아 공산주의 간의 상징적 연결을 보았다. 레지오는 소련 공산주의 헌법이 승인되고 비준된 바로 그 해에 세워졌다. 프랭크는 확실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해도 동시에 일어난 두 사건의 날짜까지도 기억했다. 또한 레지오와 소련 공산당이 모두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놀라웠다. 그것은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마이러 하우스로 옮겨지고 최초의  레지오 단원들이 – 그들은 그 당시 레지오 단원이라 불리지 않았다 해도 – 함께 계획을 세우고 활동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의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통합하고 조절하기 위해 최초의 회의가 열린 것도 그 때였다. 이미 시작 단계에 있는 조직의 이상과 방법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물론 1917년은 소련 공산당의 출발점이 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성모님이 파티마에 발현하셨다!

레지오와 소련이 전혀 다른 철학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다양한 조직에 쁘레시디움, 꼰칠리움 등등과 같은 라틴어 이름을 채택했다는 것도 서로 일치하지 않은가? 심지어 그들은 똑같은 붉은 색을 공식 색상으로 채택했다.

프랭크가 야로츠키 박사의 모스크바 초청에 응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그는 기꺼이 갔을 것이지만 그 특별한 때에 그곳에 가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1969년에 러시아는 프랭크의 눈앞에 크게 나타났다. “철의 장막”은 다시 문호가 개방되고 있었고 러시아는 소련으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이제 프랭크는 80세가 되었고 해외여행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더블린의 레지오 단원들에게 러시아로 외지 순방을 가도록 권장하는 연설을 할 때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혹자는 그러한 모험이 너무 대담하다고 여겼다. 또 다른 이들은 레지오가 공산주의자들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프랭크는 모든 것에 공정했다. 물론 그는 결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대화를 믿었다.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데 잃는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그가 반문했다.

그래서 그 해 여름에 일단의 아일랜드 레지오 단원들이 러시아로 떠났다. 그들은 미지의 나라로 모험을 하는 데 대해 약간 염려하면서도 프랭크가 한 말에 용기를 얻어 러시아로 날아갔다. “여러분은 신앙의 정신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수적으로 적고 소련은 2억 6천2백만 명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그곳에 보내는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성모님의 사자(使者)입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정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정치는 우리의 분야가 아닙니다.”

레지오 그룹이 러시아에 도착해서 여장을 풀었을 때 그들은 그 나라의 관대함에 상당히 압도되었다. 거대한 파노라마와 같은 대지와 산과 숲, 이제 대부분이 불행하게도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빛나는 황금 돔이 있는 교회들, 의심할 여지없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이며 그 호화로운 광장과 공원과 넓은 가로수 길의 레닌그라드 등등.

꽤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들은 매우 친절하고 상냥하고 예의가 바랐다.

레지오 단원들은 후한 대접을 받았고 곧 “러시아 여행”은 연례 행사가 되었다. 프랭크는 모든 세부적인 면까지 깊은 관심을 보였고 사실상 러시아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 열렬한 관심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매년 여름에 레지오 일행이 소련으로 출발할 때 프랭크는 그들이 성모님의 보호 아래 신앙을 가지고 그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조언하고 격려하곤 했다.

모스크바와 다른 도시의 소련 정부 대표자들을 의례상 방문했다. 소련 관리들이 이미 레지오 마리애와 전세계에 걸친 그 선교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고 심지어 그 가치를 인정하기도 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멋진 경험이었다. 또한 아마 그들은 버마, 실론, 이집트, 수단 같은 정부가 가톨릭 교회에 대해 호의를 보이지 않는 여러 나라에서 레지오가 그 사업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한 정부들도 레지오가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레지오의 공식 방침이 그 나라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임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1978년 9월 프랭크는 소련 최고회의 서기장인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에게 레지오 마리애를 러시아에 소개하려는 제안을 호의적으로 검토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것은 긴 편지였고, 주로 레지오 마리애가 교회는 물론 정부에 제공할 도움을 밝히는 정중하고 겸손한 편지였다. “귀하께 특별히 레지오의 유용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레지오는 일차적으로 개인의 여러 면에서 그의 이웃을 돕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 원칙에 입각해서 세워졌습니다. 이 원칙은 체계화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존중되지 않을 것입니다. 레지오 방법은 모든 민족과 나라에서 – 선진국이나 후진국, 심지어 문맹국 에서도 – 성공적임이 증명되어 왔습니다. 각 레지오 단원은 매주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활동 배당을 받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보다 간단한 관리기법을 배웁니다. 그들은 또한 문제에 대처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들은 사회 상황을 전망하고 그에 필요한 것을 처리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렇게 활성화된다면 소수로도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줄 것이고 전국에 애국심을 고취하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프랭크는 몇몇 레지오 팀에게 러시아에 체류할 때 미사를 드릴 장소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느냐고 물었다.

“오, 아닙니다. 더프 씨.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우리의 사제들은 매일 아침 호텔 객실 하나에서 미사를 드리는 데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받았습니다. 물론 그 방이 그리 크지 않았고 약간 비좁았지만 꼭대기 층에 가까운 그런 방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어 아주 행복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급 객실이라고 부릅니다.”

나(주: 저자)도 그 팀의 사제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프랭크가 내게 말했다. “브래드쇼 신부님, 제게 몇 년 전 선물 받은 작은 성작 이 있습니다. 그것을 러시아로 가져가서 미사에 쓰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저에게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더프 씨. 저도 그것을 가져간다면 매우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그 뒤 매년 어디를 가든 프랭크의 성작을 함께 가지고 다녔고 소련 전국을 여행할 때, 그것을 거룩한 제물로 봉헌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그 팀에게 프랭크가 정신적으로 함께 러시아의 어머니의 품에 있다는 것을 계속하여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프랭크는 러시아 정교회를 대단히 사랑했고 러시아 역사에서 그 독특한 역할을 인정했다. 그는 정교회를 가톨릭 교회의 자매로 보았다. 러시아 정교회는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과 계율과 풍부한 전례를 충실히 지켜왔다. 그것은 근래에는 다소 상처를 입었고 흔들렸지만 결국 살아 남았고 소련에서 종교의 보존과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확실히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랭크는 이번에는 외부로부터 오는, 정교회에 대한 새로운 위협을 감지했다. 많은 종파의 개신교들이 러시아에서 늘어나는 종교적 자유를 이용해서 “이익”을 얻고” 있었고 정교회와의 연결이 약한 많은 러시아인 들이 개신교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 예로 몇 년 내에 침례교도만도 50만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정교회에 타격을 주면서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프랭크는 정교회가 레지오 마리애를 채택한다면 매우 유익할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그는 이미 교황청으로부터 정교회 당국에 레지오를 제안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는 그 지역에서 레지오에 대한 모든 권한을 정교회 측에 넘겨 주기로 한 꼰칠리움의 뜻을 전했다. 정교회의 신심의 요소를 서구화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했다. 바티칸은 정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려는 의도와 레지오가 그 약속에 충실할 것이라는 뜻을 표했다.

그러므로 프랭크는 이 모든 점에 대해 러시아 정교회와 서신을 교환했고 매년 레지오 팀이 러시아에 갈 때 모리아르티 신부와 내가 러시아 정교회 주교들을 방문해서 그들과 대화를 갖는 것은 당연했다. 어디서나 그들은 주교들로부터 따뜻한 우정으로 영접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 대화를 했다.

레진그라드에서 니코딤 대주교는 두 명의 사제를 정교회의 전례의식에 참석하도록 초청했고 그들은 지성소에 앉는 영예를 누렸다. 대성당은 노소의 신자들로 가득 찼다. 모두가 함게 성가를 불렀고 세 개의 성가대들이 세 시간 반 동안 계속된 그 전례에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더해 주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눌 순서가 되자 대주교는 두 명의 손님 신부에게 말했다. “오늘 여러분이 방문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여러분은 레지오 마리애의 이름으로 왔습니다. 마리아는 여러분의 수호성인입니다. 더구나 오늘은 바로 우리 성모 마리아의 축일입니다. 카잔 의 성모 마리아의 축일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하늘에서 온 표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제들은 그 때까지 그 날이 카잔의 성모 마리아의 축일인 줄을 몰랐다.

그리고 나서 대주교는 그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금십자가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이것을 제게 주셨습니다. 저도 역시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재결합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몇 년 뒤 교황 바오로 6세의 뒤를 이은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를 알현하고 있던 로마에서 니코딤 대주교가 선종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도 역시 신앙의 표징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프랭크가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 가장 아끼는 것의 하나가 니코딤 대주교의 묵주였다. 그것은 가톨릭의 로사리오와 약간 비슷하며 대주교의 후계자가 레지오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랑하는 사람의 기념물로 주었던 것이다.

수년에 걸친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 여행은 소련 전역에 걸쳐 이루어졌다. 카르코프, 오데사, 볼고그라드, 바투미, 로스토프 등등. 어디서나 러시아 정교회 주교들과 사제들은 그들을 따뜻하게 환영했고 레지오 마리애에 대해 기꺼이 경청을 했다.

어떤 도시를 방문했을 때 모리아르티 신부와 나는 주교로부터 시골에 있는 여름 별장으로 방문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것은 여름 태양이 타는 듯한 열로부터 보호해 주는 덩굴 관목과 나무들이 정원에 있는 구식 목조 건물이었다. 주교와 그의 두 손님은 집 앞에 있는 베란다 형태의 발코니에 앉았다. 작은 탁자 위에는 전통적인 러시아의 사모바르(러시아의 차를 끓이는 주전자)와 과일 한 접시가 있었다. 사제들이 친절한 주인에게 레지오 마리애의 이상과 방식을 설명하는 동안에 차와 케이크를 날라왔다.

러시아의 남쪽에 있는 한 도시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들이 그 “레지오” 사제들에게 그들 교구 내에 있는 농촌지역을 방문해 달라고 초대했고 그들은 그 초대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들은 주교의 차를 타고 일곱 개의 외딴 마을을 여행했다.

러시아 남부는 북부보다 산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 과수원과 나무가 우거진 지대를 지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차를 타고 갔다. 길가의 작은 집들은 대부분 목조였고 도시에 있는 것보다는 낡고 초라했지만 매혹적인 고대의 옛 스런 멋이 있었다. 과일나무들, 복숭아, 사과, 체리 나무들이 많았다.

일곱 개의 작은 마을마다 한 그룹의 러시아 농부들이 방문객들을 만나러 그곳 본당 사제와 함께 마을 교회로 왔다. 그 작은 모임은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모든 여자들은 색깔 있는 스카프를 썼다. 그들의 햇볕에 그을리고 비바람에 시달린 얼굴과 고생으로 수척해진 손들은 들에서 하는 일의 단순성과 육체 노동을 하는 생활 방식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품행과 공손한 태도는 깊은 신심을 보여 주었다.

러시아의 이런 외딴 지역에서 아무도 로마 가톨릭의 사제를 만난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 방문에 대해 깊이 감사했다. 환영 연설은 교회 일치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소망을 보여 주었다. 커다란 꽃다발을 주었지만 방문자들에게 가장 의미 깊었던 것은 농부들의 집에서 구운 빵과 소금 한 덩어리를 사제들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러시아의 음식과 생명의 상징인 이 빵은 이제 순수한 사랑과 환영의 따뜻한 손짓이었다.

더블린으로 돌아가 보자. 프랭크 더프는 열심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러시아에서 오는 보고를 들었다. 특히 그는 정교회 신자들이 성모께 대한 참으로 깊은 신심에 대해 들었을 때 몹시 기뻐했다. 그는 조만간 레지오가 하느님의 뜻으로 그 광대한 나라의 가장 외진 구석까지 세워지도록 열심히 기도했다. 그는 한 러시아 신학교의 사제 교수의 말에 큰 격려를 얻었다. “중요한 것은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입니다. 그것은 정교회 신자들의 마음에 큰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37 레지오 마리애 창설 50주년 기념제

 

더블린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50주년 축하 식은 1971년 9월 7일 일요일로 예정되었다. 거대한 나무 제단이 레지오 본부에서 멀지 않은 넓은 공터에 세워졌다. 모두가 분주했고 열심이었다. 혹자는 프랭크 더프가 이날을 열렬히 고대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신경이 예민해졌고 불안했다. “운명의 날” 전날인 토요일 밤에 그는 방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매우 늦은 시각이었다. 마치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때때로 어둠 속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지쳐서 잠이 들었다.

후에 프랭크는 한 친구에게 그 축제 제단이 그날 밤에 불탈 까봐 두려워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 악마가 그것을 방해할 음모를 꾸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오랜 경험과 악의 세력에 대항해서 싸운 경험을 통해 악마가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프랭크는 샛별 기숙사의 문을 열기 전날 밤의 그 몸 속까지 오싹해지던 경험을 생각하면 지금도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일요일 아침은 무사히 밝아 왔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단에는 어떤 성가신 일도 생기지 않았다. 반대로 그 날은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찾다. 태양은 푸른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수천의 군중들이 모였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오래 된 레지오 단원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로즈 딩글리는 레지오가 창설된 후 곧 레지오에 가입했었다. 그녀는 펜을 들어 더프 씨에게 간단한 축하 편지를 썼다. 그녀는 전세계에 퍼진 레지오의 비범한 성장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철의 장막” 뒤에 있는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에 사실상 레지오가 들어갔다. 아무리 낙천직인 사람이라도 레지오가 모든 나라에서 그토록 활짝 꽃을 피우고 많은 영혼을 도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로즈는 몇 년 동안 더프 씨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로부터의 소식을 들으면 프랭크가 기뻐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젊은 레지오 단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에게 프랭크는 단지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레지오 단원들이었고 그 날은 원로들의 날인 동시에 그들의 날이기도 했다. 그들은 존경심과 경외감으로 흥분을 억제했다.

더블린의 존 찰스 맥퀘이드 대주교가 50주년 기념의 장엄미사에 수석 집전 사제였다. 많은 레지오 영적 지도자들이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교황대사인 알리브란디 대주교가 사회를 보았다. 과연 하느님께서 레지오와 50년 동안 레지오를 통해 부여하신 많은 축복에 진심으로 감사 드리는 날이었다.

미사가 끝난 뒤 서로 한담을 나누고 회상을 하며 오랜 우정을 재확인하고 원근의 레지오 단원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미국에서 온 레지오 대표인 빌 톰슨이 외쳤다. “아, 얼마나 멋진 날인가!” 사방에서 미소와 앞날에 대한 신선한 희망이 넘쳤다. 모두가 프랭크 더프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싶어했다. 그는 이 모든 것에 어리둥절했지만 겸손하게 받아들였다. 그가 피곤해지자 그들은 그에게 작은 탁자와 의자를 내놓았고 그는 기꺼이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서명을 해주었다.

오후에 대주교의 비서인 맥마흔 신부가 프랭크에게 다가왔다.

“더프 씨, 미사 후 약간의 성체가 남았습니다. 귀하의 집이 가장 편리하니, 잠시 동안 성체를 모셔 둘 임시 소성당으로 쓸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게는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그것은 큰 은총이었다. 프랭크는 신앙의 눈으로 더 깊은 의미를 보았다. “오! 주님께서 50주년 기념에 내 집에 친히 오시다니 얼마나 큰 은총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 뒤 종종 이 일에 대해 말하곤 했다.

50주년이 지난 후 로즈 딩글리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프랭크 더프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편지와 축하에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이런 구절을 읽었을 때 미소를 지었으리라. “그런데 로즈, 당신응 레지오가 수십 년에 걸쳐 발전시키고 확장해 온 놀라운 방식에 놀랍다고 했어요. 당신은 ‘그런 작은 출발에서 그러한 것이 일어날 줄 우리는 거의 상상할 수 없었다’ 고 말했어요. 하지만 로즈, 당신도 기억하잖소? 우리의 바로 그 최초의 모임에서 모든 것을 성모님께 맡겼던 것을 말이오. 성모님의 손길에 맡길 때마다 일어나는 일에 대해 놀라지 않도록 해요.”

추신으로, “레지오에 언제 다시 복귀할 거요, 로즈?” 라고 덧붙였다. 로즈는 이미 80세가 넘었다. 그러나 다음 금요일에 그녀는 레지오에 다시 복귀했다.

 

 

레지오의 50주년을 기념하면서 프랭크가 지구 구석구석으로부터 받은 수천 통의 축하 편지 중에서 가장 큰 기쁨을 주었을 편지는 조국의 주교들로부터 받은 호의적인 편지였다.

 

친애하는 더프 씨,

레지오 마리애 창설 50주년은 그 본거지인 더블린 시뿐만 아니라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기쁨입니다.

우리 아일랜드 주교들은 처음부터 레지오를 키워온 데 대해 기쁜 마음으로 귀하께 축하를 보냅니다. 귀하는 이 독특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의 놀라운 확장을 목격하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베들레헴과 나자렛에서 우리 구세주의 생활에서 보여지는 어둠과 가난과 헐벗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창설 단원들의 초자연적 신앙과 용기는 인간 세상의 온갖 부침에서 살아 남았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걸친 확장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레지오는 다양한 기후나 민족이나 문화 상황에서도 기도나 활동의 규율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귀하께서 수천 명의 주교들로부터 인가를 받고 교황 성하로부터 재가를 받은 기본 헌장을 확고부동하게 보존해 온 데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초자연적 불변성은 하느님의 권능과 성령의 영감과 성모님의 보호가 아니면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은총의 큰 결실인 성성과 함께 레지오는 초창기부터 은총을 나눠주는 데 있어 하느님의 모친이신 마리아의 독특한 역할을 강조해 왔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구세주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둔 모든 선물의 분배자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 사이에 뜻과 고통이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입니다. 레지오 마리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펴본 사람은 성모님의 중재로 단원들에게 내린 일차적인 은총이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내적 사랑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용기에서 우리는 가장 버려졌거나 무력한 이들에 대한 레지오의 애덕 사업의 기원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관대한 자비로 앞으로도 레지오를 보호해 달라는 복되신 어머니의 끊임없는 기도를 기뻐하시도록 기도 드립니다. 1921년 9월 7일에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기 위해 원죄 없으신 동정녀의 성상 앞에 처음으로 무릎을 꿇은 이래로 그 모습은 단원들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귀하께 초자연적인 성덕의 정신으로 계속 레지오를 이끄는 위안과 상급이 있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주교단 서기

+ 존 맥토맥

+ 유진 오도허티

 

 

프랭크는 주교단의 편지에 답장을 썼고 그 친절하고 용기를 북돋우는 편지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편지 끝에 그는 이렇게 썼다.

“특히 레지오가 교회 당국에 대한 사랑과 복종의 의무를 잘 지켰다는 말씀에 기쁩니다. 그것은 영원히 독특한 특징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레지오는 쓰러질 것입니다.”

 

 

보통 기준으로 프랭크 더프는 이 무렵에 노인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노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 태도, 건강한 웃음, 꽉 짜인 일정 이 모두가 영원한 청년의 인상을 주었다.

여동생 사라 제랄딘이 1975년에 죽었고, 이제 그는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수없이 많은 레지오 친구들이 있고 레지오 활동에 열중해 있다 해도 가족들을 매우 그리워했다는 것을 그도 인정했다. 매일 밤 11시에 레지오 사무실 문이 닫히면, 프랭크는 홀로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왔다. 때로 다른 레지오 단원들이 그를 동정했다. 아마 텅 빈 집으로 가는 동안 외로움에 시달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반면에 그는 시중을 들어주는 신심이 깊고 충실한 레지오 단원인 넬리 제솝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넬리, 매일 밤 집에 와서 문을 닫을 때 내가 얼마나 평안한 느낌을 갖는지 모르지요? 그것을 안다면 아무도 나를 돌봐 주러 오지 않을 거요. 난 그런 평화를 누리고 있어요.”

그리고 그는 자기 방에 갔을 때 변함없이 넬리가 그를 위해 따뜻한 차를 담은 병을 남겨 둔 것을 보곤 했다.

“더프 씨의 좋은 점은 때로 약간 화가 났더라도 매우 인자하고 온화하다는 점이에요. 그분은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를 표시해요” 하고 넬리는 말하곤 했다.

그리고 정말 프랭크는 레지오 단원의 비공식적인 저녁 식사에 초대할 때도 항상 감사했다. 지미 커민과 도린 커민의 가정에서 그는 자신의 슬라이드를 보여 주며 놀았고, 그의 흉내를 내는 지미의 재주에 유쾌하게 웃곤 했다. 또, 엔다 던리비와 마리 던리비가 그를 시골로 데려가곤 했다. 그는 팔에 그들의 아기를 안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의 식성을 아는 마리가 달걀과 토마토를 넣은 샌드위치와 과일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저녁에 던리비 가정에 돌아오면 그녀는 그를 위해 팬케이크와 감자 케이크를 만들었다. 그는 식욕이 그리 왕성하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그를 위해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었던 음식을 즐기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케네디 가와 오브로인 가와 다른 가정들도 정기적으로 프랭크를 초대했다.

프랭크는 여전히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미사에 나갔다. 그는 지구 구석구석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많은 편지를 구술하였다. 그는 회합에서 의논하고 강의를 하고 연설을 했다. 그는 꾸리아 회합과 친목회에 참석했다. 그는 심지어 “모스크바 모멘트” 라 부르는 오페레타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고 지휘를 한 것은 가장 “평범한” 레지오 단원들에게 하느님이 주신 음악이나 드라마나 시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고 개발하도록 고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그룹들과 지내는 것을 프랭크는 매우 “마음이 편하게” 느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완전히 긴장이 풀렸다. 그들이 가락이 맞지 않는 음으로 노래를 하면 그는 나무랐으리라. 누군가 늦게 도착하면 조바심을 냈으리라. 누군가 약속된 어떤 것을 잊고 가지고 오지 않으면 그는 화를 낼 수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좋아했다. 심지어 그들은 프랭크가 때때로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었어도 용서했다. 그는 매우 인간적이고 꾸밈이나 교활함이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는 가끔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역시 기꺼이 그의 고집을 참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그것이 잘못된 노선이라는 다른 사람의 견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연습이나 상연이 실제로 시작되면 그의 얼굴에는 사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것은 동료 단원들의 잠재적 기능을 개발하도록 도운 데 대한 참된 즐거움과 기쁨을 무심코 드러내는 미소였으리라. 물론 프랭크는 음악도 사랑했다. 특히 그는 오래된 고전 노래들을 잊지 않도록 노력했다. 사랑스런 고전 노래들은 어머니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시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매년 동료 단원 몇 명과 자전거 여행을 즐겼다. 모두가 그의 원기와 열정에 놀랐다. 물론 여행 거리는 예전만큼 길지 않지만, 그의 재치 있는 동료들은 그 자전거 여행을 옛날 그들의 자전거 여행보다 더 멀게 보이는 것처럼 만들었다.

멜러리 산 수도원은 매년 그가 가야 할 곳이었다. 수도사들은 그를 자신들의 세계의 한 사람으로 맞아 주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멜러리에서 매우 많은 것을 얻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처음으로 하게 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성령께 대한 레지오 선언문을 쓸 영감을 받은 곳도 이곳이었다. 미사의 기적에 대한 적절한 인식을 처음으로 갖게 된 곳도 이곳이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멜러리에서 그의 사상은 성숙하고 발전되었다. 또 수도사들로서 그가 함께 있는 것이 유익했다. 수십 년 동안 많은 이들이 그에게 와서 상담을 하고 조언을 구했다.

몇 년 전 프랭크는 레지오의 관리기관인 꼰칠리움의 간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젊은 단원들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여전히 꼰칠리움에 고문 자격으로 참석했다. 미묘한 상황이거나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의 충고는 매우 소중했다. 해외에서 온 방문객들은 먼 나라의 종교 문제에 대한 그의 통찰과 이해에 놀라곤 했다.

국재에서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여러 해에 걸쳐 그의 현명함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지혜로운 대답에는 모두가 놀랐다. 그는 오랜 경험과 타고난 천재성뿐만 아니라 성령과의 밀접한 접촉을 통해 지혜로운 대답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본래 그가 독단가였다 해도 항상 순수한 논리로 사건이나 문제를 파악하려고 했고, 결국 해결책은 명확한 것처럼 보였다.

 

 

프랭크는 만년에 두 가지 병을 앓았다. 한번은 네 명의 강도가 물건을 훔치러 들어왔다. 그들이 돈을 요구하자 그는 침대 옆에 있던 큰 막대기로 그들을 내리쳤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그러나 며칠 뒤에 다시 와서 그의 머리를 심하게 때렸다. 그는 병원을 옮겨졌고 거기서 서서히 회복했다.

1979년 초에 그는 다시 심하게 아팠다. 이번에는 마이클 맥기네스 박사가 그를 돌보았다. 프랭크는 맥기네스 박사가 훌륭한 의사일 뿐만 아니라 매우 절친한 친구이며 레지오 단원이었기 때문에 큰 위안을 얻었다.

정말로 매기네스 박사는 프랭크를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잘 치료했다. 그는 성급한 치료를 하지 않고 어느 날 프랭크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더프 씨, 제 집 근처에 작은 개인 병원이 있는데 그리로 옮기시겠습니까?”

프랭크 더프는 의사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마이클, 내가 그것을 거절할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다음 2주간 동안 맥기네스 박사와 그의 친구인 오리어리 박사가 계속 프랭크를 보살폈고 그는 서서히 원기를 회복했다. 의사들은 그에게 완전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문병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런 예외가 있었다. 프랭크는 여인이 문병을 왔을 때 놀라운 사태의 전환에 미소를 지었으리라. 그 사람은 바로 필리스였다. 몇 해 전에 사절로 가겠다고 그에게 왔고 그 뒤 그녀가 입원했던 10개월 동안 그가 매주 문병을 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금 맥기네스 박사의 부인이었다.

한번은 문병을 와서 필리스가 이렇게 말했다.

“더프 씨, 아치에스 행사에 참석하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계신 줄 알아요. 의사들이 참석해도 된다고 했어요. 제가 그곳까지 태워다 드릴께요.”

프랭크는 아치에스 행사에 참석할 수 있다는 말에 감격했다. 아치에스는 그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의미했다. 그뿐 아니라 단 몇 시간이라도 병원을 떠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병원에서는 결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 친한 친구들만 아는 사실이지만 – 병원에 있는 것을 지독히 싫어했다. 사실 그는 모범적인 환자로 어떤 약을 처방해도 불평 없이 받아들였고 지시된 모든 것을 기꺼이 평상시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받아들였다.

아치에스 행사가 끝나자 필리스는 그를 병원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들이 작별인사를 할 때 그녀의 마음이 아팠다. 그것은 마치 방학을 마치고 외로운 어린 소년을 학교에 태워다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프랭크가 퇴원했을 때 그들과 며칠 지내자는 맥기네스 부부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그것은 “원기를 회복할”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 며칠간은 원기를 회복한 기간이었다. 그 가정의 유일한 자녀인 수잔 맥기네스는 이제 10세였다. 어린이를 좋아하고 프랭크는 수잔을 매우 사랑했다. 그는 수잔과 잡담을 하고 함께 놀고 그 애를 놀리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허물없이” 지냈다.

그 뒤 프랭크는 샛별 거리에 있는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때 90세였지만 그의 지성은 예민하고 빈틈이 없었다. 남은 생애 동안 그는 결코 튼튼하지 않았지만 매일 거의 하루 종일 일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식욕은 좋지 않았지만 천상의 모후 기숙사에서 그의 가정부인 제솝 부인이 그를 잘 보살펴 주었고 그의 식욕을 돋구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창고에서 자전거를 타고 미사에 나갔고 그 도시 근교 어디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여름이 오자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자전거 여행을 가겠다고 선언해서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말한 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의 친구가 말했다.

“프랭크, 당신은 타고난 전사야. 당신은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아.”

프랭크는 길고 기운찬 웃음으로 대답했다.

 

 

1979년 8월 10일에 다섯 명의 미국인이 더블린 공항에 내렸다. 그들의 억양, 그들의 사무적인 걸음걸이, 그들의 복장과 큰 가방은 시선을 집중시켰다.

몬시뇰 찰스 못, 월터 브라운, 빌 페플리, 알 노렐과 베아트 리체 플라나건 이 다섯 명의 유명한 레지오 단원들은 프랭크 더프의 비디오 녹화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필라델피아 세나뚜스에서 왔다. 프랭크는 이제 90세였으므로 몬시뇰 모스는 “너무 늦기 전에 해두자!” 고 생각했다.

프랭크는 TV에 이상적인 연기자였다. 몬시뇰 모스의 말에 따르면 “TV에 초대된 명사로서 더프 씨는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매일 라이트 아래 앉아서 30분 동안 시험 녹화를 참았고 그 불빛 아래서 다시 한두 시간 심지어 세 시간 동안 계속했지만 결코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 녹화가 레지오의 미래를 위해 좋을 것이라는 데 그 가치를 확신했습니다. 90세의 나이로 그분은 놀라울 정도로 정정했습니다. 우리가 비디오 녹화를 끝낸 다음날 그분은 아일랜드 서부로 자전거 여행을 떠났으니까요!”

몇 년 내에 몬시뇰 모스는 더프 씨를 직접 만날 기회가 없는 수 천명의 레지오 단원들이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참으로 비범한 지혜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날 이 세상에 레지오 마리애를 아름답지만 강력한 군대로 키운 프랭크의 불요불굴의 정신을 목격할 수 있는 귀중한 녹화 테이프들은 여러 나라에 배포되었다.

 

 

 

 

38 황혼

 

1979년 5월 10일 목요일이었다. 오전 6시가 지나서 곧 택시 한 대가 바티칸의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나선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프랭크와 다른 세 명의 더블린 시 레지오 단원들인 엔다 던리비, 릴리 린치, 지미 커민스 가 교황청 소성당에서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교황으로부터 특별 초청을 받았다.

소성당은 매우 작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제단을 마주하고 있는 기도 대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오랫동안 준비 기도를 한 뒤 교황은 비서인 마기 신부의 도움을 받아 제의를 입었다. 미사 동안 출입구에 서 있는 세 명의 폴란드 수녀들이 아름다운 성가를 불렀다. 네 명의 레지오 단원들은 교황으로부터 직접 영성체를 했다.

프랭크는 그들에게 주어진 큰 특전에 너무도 감격해서 기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미사와 감사기도 후 교황은 프랭크와 악수를 하러 왔고 그에게 따뜻하게 인사를 했다. 마찬가지로 엔다 와 일리 와 지미 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다른 방으로 안내하면서 교황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여러분은 교황의 식탁에 왔습니다.” 아일랜드식 아침 식사를 교황청 가정부가 준비했다.

아침 식사 동안 대화는 당연히 레지오 마리애에 관한 것이었다. 교황은 처음에는 파리, 다음에는 벨기에, 그라고 나중에 폴란드에서 레지오를 접촉했던 일에 대해 얘기했다. 그분은 또한 로마의 여러 본당에서 레지오 단원들과 만났던 일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또 전세계에 걸쳐 레지오의 진전에 관한 더 많은 정보에 대하여 물으셨다. 엔다 던리비 는 후에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그분께 지구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레지오 활동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 만남이 스스럼 없음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마치 장군이 장교들에게 큰 군사작전에 관해 자문을 구하는 것 같았습니다. 교황께서는 우리 레지오가 착수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이날 교황께서 말씀하셨다.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습니다. 바르샤바의 혼드 추기경의 임종 때 한 젊은 사게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어요. 그때는 폴란드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들도 큰 어려움 속에 있었어요. 추기경은 마치 마지막 유언을 하듯이 말했어요. ‘마리아를 통해 승리할 것입니다.'” 교황은 덧붙였다. “그것이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내 메시지입니다. ‘마리아를 통해 승리할 것입니다.'” 그것은 감동적인 메시지였다.

레지오 단원 중 한 명이 교황께 말했다.

“교황 성하, 더프 씨는 몇 주 내에 90세가 될 것입니다.”

교황 성하는 다시 프랭크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당신은 90세까지는 청춘이라고 생각해도 되겠군요.”

놀랍게도 프랭크 더프는 이 말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아마 그에게 그것은 어떤 암시였을 것이다. 어쨌든 레지오 간부 일행이 교황청을 떠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이 아주 짧다는 것을 알겠어요.”

교황께서는 마지막 인사를 하기 전에 다시 말씀하셨다.

“‘마리아를 통해 승리하리라’ 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티퍼러리 주 투를스 시에 있는 아름다운 방갈로에서 데이비드 오키프 와 그의 아니 마리아가 모든 것을 청소하고 닦고 있었다. 그들은 흥분해 있었다. 그 때는 1980년 6월이었다. 프랭크 더프가 그들의 집에서 91번째 생일을 보내러 올 예정이었다.

그 방문은 마이클 케네디의 사제서품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다. 교장인 몬시뇰(후에 추기경) 토마스 오파이아이취 의 격려로 6년 전 메이누드  대학에서 레지오 마리애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 마이클 케네디였다. 프랭크는 그에 대해 깊이 감사하면서, 이제 투를스의 아름다운 주교좌 성당에서 거행되는 마이클의 사제 서품식에 초청을 받아 매우 기뻤다. 그것은 또한 프랭크에게는 국내외에서 레지오에 관대한 후원을 해온 토마스 모리스 대주교께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프랭크는 종종 투를스에 있는 대주교의 신학교가 사제직을 공부하려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권할 만한 곳이라고 말했다.

프랭크는 그곳 레지오 단원들과 그곳의 우르술라회 와 자비 회(정기적으로 레지오 쁘레시디움에 여성 영적 지도자를 보내 주었던) 에서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에 대해 연설하기 위한 전날 저녁에 일찍 투를스로 왔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레지오 활동을 하는 수녀들의 매우 중요한 역할에 깊이 감사했다. 그는 그들의 숭고한 성소와 세상을 영적으로 향상시키는 그들의 생활력에 대해 수녀들을 깊이 존경했다. “수녀들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복은 전도와 애덕의 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 최종적인 결과는 누구나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수녀들은 그를 위해 케이크를 만들고 91개의 촛불을 켰다. 그리고 아직 생일 전야이지만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는 매우 행복했다. 그리고 나서 취침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들이 말했다. “더프 씨, 오늘 밤 일찍 주무셔야 합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일정이 꽉 짜여 있으니까요.”

젊은 오키프 씨 부부에게는 프랭크가 그들의 집에 묵는다는 사실이 영광이었다. 10시에 오키프 부부의 사제 친구가 그들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외국에서 막 돌아오는 길이었다. “신부님, 더프 씨가 방금 침실로 가셨어요. 가서 ‘노크’ 해 보세요” 하고 데이비드 오키프가 말했다. 사제는 프랭크의 문을 두드리고 나서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하느님의 나이 든 사람은 어린이처럼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제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프랭크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해외”에서 온 사제와 그의 오랜 친구인 헤르만 신부가 함께 드리는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그리고 난 뒤 마리 오키프가 훌륭한 아침 식사를 대접했고 모두 주교좌 성당의 서품식에 갔다.

그 서품식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자신을 성화시키는 체험이었을까! 그는 사제직을 무척 사랑했다. 그의 생애 동안, 특히 레지오 마리애 초창기에 몇몇 사제들의 완고한 반대로 크게 어려움을 겪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축성하신 분이다. 레지오 교본에서 프랭크는 벤슨 의 말을 인용했다. “사제들에 대한 헌신과 존경을 드리는 것은,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드리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제의 그 성직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프랭크는 레지오를 이해하고 장려한 수천 명의 사제들에게 고맙게 여겼다. 그들도 역시 자신의 사제 생활이 레지오에 의해 풍부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프랭크는 알았다.

서품 미사의 전례만큼 감동적인 행사는 별로 없었다. 투를스 에서 아침에 서품 미사가 끝났을 때 자신은 엄숙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성사로써 크게 고무되었다고 말했다.

프랭크의 건강이 지난 2년 동안 서서히 나빠져 가고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미사 후 그가 모든 사람들과 얘기를 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고 모두들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그는 매우 상쾌하고 기분 좋고 건강해 보였다. 그 특별한 행사를 즐길 수 있도록 주님께서 새로운 생기를 주신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이클 신부의 강복을 받기 위해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 날이 뜻 깊은 91번째 생일이었다.

 

프랭크는 더블린으로 돌아와 평상시의 일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로 외지 순방을 떠나는 레지오 팀에게 격려 연설을 했다. 또한 여러 나라에 갈 레지오 단원들에게도 연설했다. 그는 항상 그의 지도와 격려를 받기 위해 더블린으로 온 해외 레지오 평의회 대표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엄청난 양의 편지를 교환했다. 또 다른 서품식에 참석할 수 있게 되어 그는 기뻐했다. 이번에는 이전에 레지오 사절이었던 테리 맥구키안 의 서품식이었다.

그러나 프랭크는 활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전에 그를 괴롭히곤 했던 감기를 털어 버리기가 점점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완강하게 싸움을 즐기는 늙은 전사처럼, 용감하게 싸웠고 모든 것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고 기꺼이 그의 능력을 최대한도로 쏟았다. 여전히 매일 자전거를 타고 미사에 나갔고, 매일 저녁 식사 후에 천상의 모후 기숙사 소성당의 감실 앞자리에서 긴장을 풀고 경건하게 앉아서 낡았지만 애용하는 성무일과서를 펼치고 있는 r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죽기 바로 2주 전인 10월 25일에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 할로윈 대회가 열렸다. 아일랜드 전역에서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왔고 외국 여러 나라에서 대표들이 왔다. 원근에서 놀라운 보고와 잠자고 있던 본당에 새로운 생명을 일깨운 이야기, “무력한” 경우에 대한 대화, 은총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한 방문 사제가 표현한 것처럼 그것은 사도행적을 연상케 했다. 더욱이 성령이 권능으로 함께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역시 그런 모든 사건에 성모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프랭크 더프의 마침 연설이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연설이라는 것을 그는 감지했을까? 그는 청중들의 마음을 레지오 초창기와 레지오가 세워진 이상으로 이끌었다. 1921년 바로 레지오의 첫 회의에서 단원들은 성모께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전세계 모든 나라로 단원들을 들어가게 한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고 선언했었던 것이다. 그는 레지오를 통해 이미 성취된 일에 대해 말했다. 그는 신앙과 용기와 일견(一見)에 대해 말했다. 레지오 단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더욱 큰 정복을 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우리가 마리아와 협력한다면 레지오의 전망은 무궁할 것이라고 했다.

강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의 마지막 연설은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그이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불가능한, 영혼들의 세상을 정복하는 일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그 꿈을 실현시켜 주실 것입니다.”

 

 

프랭크 더프는 1980년 11월 7일 금요일 오후에 91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 소식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해 내내 건강이 아주 좋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그가 약해졌고 피로에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랭크는 극도의 피로에도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강철같은 의지력으로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혹사했다. 심지어 죽는 날에도 그는 두 대의 미사에 참석했다. 가정부인 넬리 제솝 부인은 그가 두 번째 미사에 참석하기로 계획한 것을 알고, 아침 식사 때 집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가하고 그날 아침 7시 15분에 그의 침실로 작은 그릇에 담은 죽과 커피 한 잔과 토스트 몇 조각으로 된 가벼운 아침 식사를 가져갔다. 그는 깊이 감사했다. 시드 퀴이 프랭크와 제솝 부인을 카푸친 교회의 9시 미사에 태워다 주었다. 그것은 프랭크에게는 그 달의 첫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아침이었다. 그는 성심께 놀라운 신심과 첫 금요일 신심을 실천했다.

그날 아침은 매우 추웠다. 미사 후 잭 맥나마라 가 플랭크를 차에 태워서 두 번째 미사를 위해 성모 마리아의 임종자의 집에 데려갔다. 그것은 훌륭한 레지오 사절인 조안 크로닌의 장례미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틀 전에 죽었다. 조안은 17년간을 여러 나라에서 레지오를 확장하고 공고히 하는 일에 전념했다. 장례미사와 장지에는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와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에게는 그들 단체의 창설자를 다시 한 번 만나 몇 마디 말을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흔쾌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것이 마지막 작별인사였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더프 씨는 심하게 아팠다.

잭 맥나마라 는 그를 곧바로 집으로 데려갔다. 잭과 프랭크는 50년이 넘게 사귄 절친한 친구였다. 그들이 헤어지기 전에 프랭크가 말했다.

“잭, 난 몸이 별로 좋지 않아요. 제솝 부인에게 내게 와 달라고 말해 주겠소?”

제솝 부인이 곧 서둘러 왔다. 그녀는 그가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넬리, 몸이 아주 좋지 않아요.”

“그래요, 더프 씨. 아주 안 좋아 보여요.”

그녀는 신발과 양말 벗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녀는 과거에 몇 번인가 그의 침대에 전기 담요를 깔자고 했다. 마침내 그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추위를 많이 탔고 따뜻해진 침대에서는 약간이나마 잠을 잘 수 있었다. 다행히 전기 담요는 아직 켜져 있었다. 그가 침대에 누웠을 때 그녀는 담요를 보기 좋게 손잴했다.

“넬리, 따뜻한 침대에 들어가니 아주 좋아요. 오늘은 점심 먹으러 내려가지 않겠소.”

“염려 마세요, 더프 씨. 제가 오후 4시에 차를 가져다 드릴께요.” 그녀가 문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가 불렀다. “넬리, 의사인 오리어리 씨에게 전화하지 마세요. 내가 병원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요?”

제솝 부인이 그날 오후에 차를 가지고 갔을 때 프랭크 더프는 죽어 있었다.

“제가 차를 가지고 갔어요. 문을 열었을 때 난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어요. 난 그분이 가슴에 팔을 포갠 상태로 있는 것을 보았어요. 난 그분이 성심의 성상을 보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 그림은 바로 그분 맞은편에 있었어요. 난 그분의 눈을 감겨 드렸고 도움을 청하러 달려 내려왔어요.”

바로 같은 시각에 살레시오회의 절믕 사제 마이클 로스 신부에게 구걸을 하는 “영락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샛별 기숙사 “거주자” 였고, 그래서 로스 신부는 그를 태워 기숙사로 데려왔다. 기숙사에 근무하는 레지오 마리애 형제들이 로스 신부에게 함께 차를 마시자고 청했다. 그가 막 차를 마시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짧게 긴급한 메시지를 전했다. “더프 씨가 선종했어요. 빨리 사제를 데려오세요.” 프랭크의 집은 단지 두 집 건너에 있었으므로 로스 신부는 즉시 달려가 곧 침대 옆에 가서 강복을 주고 조건부 사죄경을 염해 주었다. 그곳 보좌신부인 멀리건 신부가 곧 병자성사를 거행했다.

프랭크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그대로 받아들였다. 샛별 기숙사의 이 가난하고 “영락한” 사람 안에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주신 일을 완수한 당신의 착하고 충실한 종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려고 당신의 종을 데려간 그리스도 자신의 위격을 볼 수 있다.

레지오 기도가 침대 곁에서 바쳐졌다. 레지오 단원이 그곳에 무릎을 꿇었을 대, 프랭크가 바랐던 대로 조용하고 평화롭게 죽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마 그들은 그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마지막 기도 때, 마지막에 그가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가 종종 말했고 그토록 그리워했던 가족들과의 재결합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를 기다리고 있던 더 큰 가족인 먼저 간 수천 명의 남녀 레지오 단원들로부터 받을 환영을 상상하고 있었을까? 그는 성심의 날인 첫 금요일에 좋으신 주님께서 고향으로 부르신 것을 기뻐하고 있었을까? 그는 항상 예수 성심께 그토록 열렬하게 헌신했다. 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얼마나 확실하게 당신의 “오래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맞이하러 오시는지 놀라고 있었을까? 그는, 그분의 원죄 없으시고 영광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인간이 상상할 수 있었던 그 어떤 것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크다는 것을 알았다. 오,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여!

청년 시절 프랭크는 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영혼을 위한 아름다운 기도문을 썼다. 되돌아보건대 얼마나 의미 깊고 뛰어난 기도인가!

“오 하느님! 저는 선교사나 수도자, 혹은 제 주위 사람들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 훌륭하게 성취한 일과 같은 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것들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나날이 제게 다가오는 평범한 생활을 갈팡질팡하거나 지치지 않고 살아가며, 당신을 사랑하고 또한 당신이 사랑 받으시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만족할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사소한 일을 싫어합니다. 사소한 일들 속에서 위대해지고 평범한 일들을 하는 가운데 영웅이 되기는 매우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삶이 당신의 뜻입니다. 그 안에는 분명 당신의 섭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만족합니다.

사랑하는 당신께 왕관을 씌워 드리도록 저에게 마지막까지 이러한 충성을 허락해주시고, 마지막 부르심이 계실 때 당신 품에 안겨 저의 마지막 희미한 숨을 내쉬게 되기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용감하게 진실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사랑하는 예수여. 단순한 소망이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41

 

 

 

 

 

39 영원한 이별

 

프랭크의 시신은 천상의 모후 기숙사 소성당으로 옮겨져서 안치되었다. 전생애가 바로 이 소성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그 사람의 시신을 안치할 장소로 이보다 더 적합한 곳이 있을까? 그가 매일 성무일도를 바쳤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는 그것을 하느님과의 순수한 친교라고 불렀다. 그가 그토록 많이 미사에 참례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가 그토록 자주 영성체를 통해 영적 자양분을 섭취하고 원기를 회복하고 많은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가 “묵주의 순례”를 할 때 동료 순례자들은 대부분 그와 레지오 단원들이 집 없고 영락한 처지에서 구해 준 가난한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그가 아끼는 기숙사 “거주자”들이었다. 그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은 다소 숭배에 가까웠지만 그의 온화함과 인간성 때문에 가난하나 계층의 사람들만의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무뚝뚝하고 스스럼없는 태도로 그들이 프랭크와 접촉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그가 기도하는 중에 스스럼없이 “더프 씨,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어요?” 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프랭크는 보통 앞자리에 앉아 로사리오를 손가락 사이로 늘어뜨린 채 입술을 항상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성무일도나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지 않을 때는 단지 그곳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감실 을 응시했다. 그렇다. 프랭크는 이 작은 소성당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곳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그곳은 북적거리는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였으며 원기 회복을 위한 오아시스였고 지상에 있는 작은 천국이었다.

이제 그는 마지막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천천히 옮겨진 그의 관은 존경과 특권으로 제단의 강론대 쪽에 놓였다. 관 가까이에는 여성 레지오 단원들이 작은 레지오 제대를 마련했다. 그것은 매우 적절한 것처럼 보였다. 프랭크는 항상 레지오 제대를 성모께서 함께 계시는 상징으로 여겼다.

여러 해 전에 프랭크는, 레지오 교본에 세상을 떠난 레지오 단원들에 관해 아름다운 글을 썼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자신의 묘비명을 썼던 것이다.

“싸움이 끝나면 레지오 단원은 장엄한 최후를 맞는다. 이제 그는 자신이 한 레지오 봉사를 확인 받고 영원의 세계에서 레지오 단원이 될 것이다. 레지오가 그에게 그 영원의 세계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레지오는 영신 생활의 바탕이고 거푸집이다.”42

아헤른(Ahearne: 에이헌 빠가!) 신부가 급히 모여든 슬픔에 젖은 레지오 단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사를 거행했다. 다른 사제들도 역시 미사를 드리러 그곳에 왔다. 다음 며칠 동안 수천 명의 레지오 단원들이 조용한 기도 가운데 행렬을 지어 관을 지나갔다. 조문하는 군중들 가운데는 정부 각료들, 주교들, 사제들, 수녀들과 수사들이 있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병원에서 온 흰 유니폼을 입은 간호원들도 있었다. 남녀 학생들도 있었다. 또, 프랭크의 사랑하는 친구인 천상의 모후 기숙사의 가난한 여자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샛별 기숙사의 “거주자” 도 있었다.

11월 12일 수요일에 시신은 성 안드레아 교회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더블린의 보좌 주교인 제임스 캐브나 주교가 많은 영적 지도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하였고, 프랭크의 오랜 친구인 캐논 프란시스 리뽈리께서  감동적인 강론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장엄 장례미사가 그 교회에서 토마스 오파이아이취 추기경, 더블린의 대주교인 더모트 리안, 캐쉘 과 에블리의 대주교인 토마스 모리스, 투암의 대주교 조셉 커난과 다른 많은 주교들과 레지오의 영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공동으로 집전되었다. 오파이아이취 추기경이 장례미사 강론을 했다.

군중들은 너무 많아서 많은 수가 교회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성체 분배시 바깥 거리에 줄지어 있는 군중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기 위해 4명의 부제가 더 필요했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장례 행렬은 글라스네빈 묘지로 이어졌고 그곳 가족묘지에 매장되었다.

참으로 고상한 영혼이 우리 곁을 떠났다.

 

 

오파이아이취 추기경의 장례미사 강론

 

예수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레지오 마리애 안에서는 모두가 형제 자매입니다. 오늘 레지오의 창설자이며 거의 60년 동안 레지오의 영적 인도자요 철학자였던 분의 시신 주위에 모여, 우리 모두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형제 자매임을 느낍니다.

우리는 오늘 프랭크 더프 씨를 우리 앞에 먼저 간 형제로 애도합니다. “그것은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겸손함을 지닌 사람으로 애도합니다. 그는 교황님과 고위 성직자들의 친구이자 조언자였고, 그럼에도 그는 진정한 더블린 인으로서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을 결코 잃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지구 구석에 있는 사람들과 통신을 주고받았지만, 그럼에도 이곳 고향에서 그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 기울였습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1961년에 교황훈장을 받았고, 1968년 국립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즐겨 입는 옷은 낡아빠진 옷이었고 가장 좋아한 교통수단은 믿음직한 자전거였습니다. 그는 친절과 인간적 매력과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과 완벽함과 굽히지 않는 용기를 지녔고, 허약한 몸이지만 누를 수 없는 정신을 가졌으며 신심이 깊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 특히 마리아의 중재를 통한 기도 없이는 어떤 행동도 착수하지 마십시오”라고 그는 말하곤 했습니다. “어머니, 이는 당신의 아들이십니다. 성자시여, 이는 당신의 어머니이십니다.”

이 겸손하고 성실한 더블린 인은 “이 나라 가톨릭 교회의 생활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전세계에 걸친 그의 놀라운 정신적 영향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분명 그것은 그 자신의 영성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쉬운 그의 신앙과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였습니다. 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도움에 대한 의지, 교황 회칙이 발표되기 수년 전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이해한 그의 자각과, 모든 사람에게 형제 자매로 다가가서 천국으로 향하는 길로 가도록 도와 주려는 지칠 줄 모르는 욕구와, 평범한 남녀도 그들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면 그리스도를 위해 영웅적인 행동을 하리라는 그의 신념, 그리고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만큼 나쁘거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사람은 없다는 그의 확신에 있습니다. 조직가로서의 그의 탁월한 자질과 인간 심리에 대한 풍부한 이해, 조직의 장려에 대한 그의 전적인 헌신과 그 자신보다 적지 않게 헌신한 영웅적 사절들과 협력자들의 사심 없는 수고에 도움을 받아서, 레지오 마리애는 개인적 접촉이라는 비밀무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수백만 명을 정복할 때까지 지구를 일주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편에 함께 계시는데 누가 우리에게 대항할 수 있을까요?”

프랭크 더프 씨가 교황 성하로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청을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돌아볼 때, 레지오 마리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상을 공의회가 소집되기 전에 보급시켜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랭크 더프 씨는 참으로 그의 시대에 앞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안의 자기 만족 경향에 도전하고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며 모두가 그이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며 교회는 단순히 개인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복음화 사업에 평신도가 참가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 단체 내에서 여성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주고 – 성인에 가깝고 지칠 줄 모르는 에델 퀸 을 사절로 보낸 데서부터 가장 외딴 쁘레시디움의 가장 하찮은 단원에 이르기까지 – 개신교와 유대교와의 교회 일치를 위한 논의를 촉진하고, 빠뜨리치안 회 같은 운동을 통해 성인 가톨릭 신자들이 소유한 신앙 지식을 증가시킬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어린이, 병자, 외로운 이, 유학생, 매춘부, 은퇴자, 아주 영락한 사람들, 사회의 특별한 그룹에게 그는 아낌없는 특별한 배려를 기울였습니다. 오늘 2차 독서에서의 성 바울로처럼, 그에게는 이 모든 사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도록 요구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자가 생존해 있는 동안 놀라운 확장은 오늘 우리에게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프랭크 더프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결코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가서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그에게 레지오의 성장은 거의 50년 동안 끊임없는 수고와 어려운 고투를 의미했습니다. 평신도들의 냉담과 성직자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해외의 새로운 지역에서의 승인과 국내에서의 더 많은 승인을 얻기 위해 싸웠고, 항상 교회에 대한 크나큰 복종과 충성심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그의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는 아일랜드의 젊은 남녀들이 매년 여름 소련을 방문해서 불신앙 상태에서 자란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업에 대해 얘기했을 때 러시아에서 레지오의 회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가 살아서 성취된 것을 보지 못한 그의 마지막 야심 중의 하나는 1950년대에 수천 명의 단원들이 순교한 중국에 레지오가 다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특별한 일들과 외국에 보낼 사절 선발과 여름 휴가 동안 해외로 외지 순방을 가는 일에 있어서 레지오 마리애는 특히 아일랜드의 젊은 남녀들에게 의존했습니다. 교회의 문제에 대해 전체적인 전망을 생각하면서도 그는 조국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동포들의 우정을 사랑했고 조국의 아름다움 경치를 사랑했습니다. 패트릭 성인은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에 못지않은 그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영감의 많은 부분은 유럽에서 활동한 초기 아일랜드 선교자들에게서 왔고 그는 레지오 마리애의 사업이 그들이 사업에 뒤지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조국에 대한 참된 헌신> 이란 이름의 그의 책은 우리 아일랜드 인 모두가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애국심에 대한 교본입니다. 그는 앙 레알드 같은 문화 단체의 가능성과 그것을 레지오와 밀접하게 연결할 가치를 재빨리 깨달았습니다.

1976년 프랭크 더프는 “올해의 아일랜드 인” 상을 수여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아마 교회가 그를 “20세기의 아일랜드 인” 으로 선언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의 영원한 인식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께서 보낸 정중한 애도의 말씀을 대독합니다.

 

 

교황 성하의 전문

 

전세계의 레지오 마리애는 그 창설자 프랭크 더프 씨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나는 단원들과 함께 그의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가 창설한 이 단체는 수없이 많은 평신도들에게 복음화와 성화를 위한 그들의 필수적인 임무를 알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들로 하여금 열렬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모든 레지오 단원들에게 교황 강복을 보내며 그를 잃고 마음 아파하는 단원들에게 위로와 앞으로의 사업에 격려를 보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40 마리아의 확대자

 

 

의심할 여지 없이 교회에 대한 프랭크 더프의 가장 큰 공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위대하심과 신자들의 생활에서 그분의 역할에 대해 전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는 것이다. 프랭크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성모님에 대한 교리에 온당한 이해를 하게 하고 이 교리에 어울리는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히 그는 성모님께 대한 참되고 순수한 신심은 어떤 식으로든 그분께 대한 봉사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모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은 성모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우리 이웃 안에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고 이 방법이 이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교리 속에 있어야 한다.

신비체 교리와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의 한통속의 교리 위에 세워진 레지오 마리애는 이 교리들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소개하고 평신도 사제직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보여 주는 프랭크의 방식이었다. 평신도 사제직이 없으면 수백만의 영혼들은 영원한 생명을 일었을 것이다. 레지오 안에서 그는 평신사도의 생활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도전적이며 모험적인지를 보여주었다.

프랭크가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신 마리아”를 레지오 교본과 레지오 기도문에 소개했을 때 몇몇 신학자들은 그것이 확실한 교리가 아니라고 반대했다. 프랭크는 교황 문서와 교회의 성전을 인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 문서들과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탁월한 논리로 그는 신비체 내에서 성모님의 정확한 위치와 영원으로부터 그분께 배당된 역할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마리아는 불가피하고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계획 아래 모든 은총의 중재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한 그의 강의를 기사나 책의 형태로 출판했고 그의 논증에서 틀림 점을 발견한 모든 사람들과 그 문제를 정직하고 진실하게 토론하자고 대들었다. 오늘 전세계의 천백만 명의 레지오 활동단원과 협조단원들이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신 마리아”의 이름으로 매일 성모께 탄원한다.

몽포르 성인의 책은 프랭크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심심 출발점이었다. 프랭크는 그것이 매우 중요해서 더 넓은 세상에 확장되고 설명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몽포르 자신은 “선의를 가지고 있고 보통 학자들보다 깊은 신심을 가진 가난하고 단순한 사람이 좀더 간단하고 가치 있게 믿도록 하기 위해” (참된 신심 26번) 쓴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의 그리스도 중심의 마리아 영성의 신학적 관계에 대해 좀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프랭크 더프는 교본에서 필요한 교리적 배경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밝혔다.

더욱이 그는 독특하지만 단순한 레지오 조직 체제를 고안했고 그것을 통해 마리아에 대한 참된 심심이 이웃에 대한 봉사와 매력적이고 효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했다. 레지오 조직 체제는 (1) 주회 (2) 실질적 사도직 활동의 주간 활동 배당과 (3) 모두가 신비체의 교리와 마리아의 어머니이심의 한통속 교리와 연결되어야 하는 것을 포함한다.

프랭크의 노력은 전세계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몽포르의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을 실천하되 의식화된 모습으로 신심을 실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이것을 교회적인 모습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신심의 실천을 통해 수천 명의 레지오 단원들이 중국, 베트남, 나이제리아 와 다른 곳에서 순교자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치도록 크게 고부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에델 퀴 과 알피 램 같은 사람, 또 다른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탁월한 영웅적 성덕에 이르렀다. 많은 병든 본당들이 다시 건강을 되찾고, 심지어 선교사를 배출하기도 했으며 아일랜드의 외딴 본당과 인디아의 격리된 나환자 촌, 모든 나라의 분주한 도시 본당들에서 신자들이 성모님께 단순한 말뿐인 호의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바치며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의 가치를 지체로 보여 주고 있다. 마리아와 함께 마리아를 통한 기도와 봉사를 통해서 주님이 더욱 크게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의 감정가는 수많은 질이 낮은 반짝이는 돌보다도 하나의 순수한 보석에 더 기뻐한다. 성모님은 확실히 프랭크의 영혼 속에서 보기 드문 품질의 보석을 보았다. 그의 깊고 부드러운 신심에 의해 프랭크는 성모님을 오직 천상에서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전했다. 그리고 그의 신앙, 애덕, 겸손, 영혼들에 대한 그의 열정은 모두 그 신심을 강렬하고 강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물질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레지오를 세우는 데 있어서 프랭크의 성공의 비결이 그의 천재성과 지적 총명함과 조직력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는 확실히 이런 재능들을 풍부하게 지녔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의 성공의 비결은 아니었다. 그는 이 재능들을 사용했지만 그것은 오직 성모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힘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다. 마리우스 맥콜리프 신부가 지적한 것처럼 “하느님은 승부에서 세상이 이기도록 그를 일으켜 세우셨다.”

프랭크에게 마리아는 참된 겸손의 화신이었다. 그의 강렬한 기도 생활을 통해 그는 겸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영혼에 대한 은총의 결여가 죄뿐만 아니라 교묘한 이기심의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기도 생활은 단순히 말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무가치함을 발견하고 인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아와 이기심을 정복하기 위한 싸움, 자신을 전적이고 아낌없이 하느님과 은총 사업에 이용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몽포르 에게서 발견한 마리아의 비밀의 일부는 마리아를 통해서 오는 겸손이었다. 후에 서서히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그 가치를 보다 충분히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그에 대해 레지오 교본에 상세히 설명했다. “영혼들을 위한 레지오의 싸움은 단원 하나하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 각자가 마음속에 있는 교만과 이기심을 단호하게 극복하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엄청난 싸움, 얼마나 고달픈 일인가! 이는 일생을 건 싸움이다. 마리아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한다면 가장 훌륭하면서도 단순하고 완벽한 겸손의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교본 p.108).

프랭크에게 겸손은 “부드러운” 일용품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거칠고 남성적인 것, 자신에 대한 일종의 잔인할 정도의 정직이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인간의 힘은 전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었다. 어떤 실질적인 힘이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여겼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를 통해 역사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다. 친구와 얘기 중에 그는 “내가 작은 것들에 대해 습관적으로 사소한 유혹에 빠지는 경향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 예로 난 예민하고 쉽게 마음의 상처를 받아요. 일생 동안 종종 “방황했고”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난 항상 성인들의 생애에서 보는 것같이 마음 상하는 것을 기뻐했다고는 장담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큰 것에 대해서는 자만심에 빠지지 않았어요. 그것은 내가 주님과 성모님께 의지했지, 나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생기거나 발전이 있으면 그것을 내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어요. 아니, 난 내 위치를 깨달았어요. 잠깐이라도 내가 자신에게 어떤 영예를 주장한다면 난 곧 타격을 입고 말 거요.”

물론 프랭크는 레지오를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그것은 그가 관여해서가 아니라 마리아를 위해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레지오를 칭찬하거나 감탄하면 그는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문제는 선의의 사람들이 꽤 자주 심지어 공적인 모임에서 프랭크를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침묵 속에 그것을 참아야 했다. 한번은 한 동료가 말했다. “프랭크, X신부님이 연설 중에 당신을 칭찬할 때 당신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보았어요. 그건 당신에게 연옥인 것 같았어요.” 프랭크가 침통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것이 내 연옥이지요.”

다른 기회에 한 레지오 단원이 신문을 보고 낄낄 웃는 프랭크를 보았다. 웃은 이유를 알려고 다가갔고 프랭크에 대한 신문 기사를 보았다. 프랭크가 이유를 설명했다. “나 자신에 대한 것을 우연히 보고 자신을 제삼자로 보는 것을 배웠어요. 그게 아주 재미있군요.”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에 관한 토론에서, 프랭크가 몇 번이나 마리아와 함께 하심에 대해 언급했는지를 물었다. 그는 누구나 항상 성모님을 명백히 언급하기는 불가능할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분이 어머니이심을 이해할 때 그분이 그곳에 계시고 항상 가까이 계시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절대적인 관심을 가지고 기꺼이 도우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프랭크 자신의 어머니가 가졌던 모성적 걱정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그가 불규칙하게 들어오건 나가건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에 인내롭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응했다. 어머니는 그가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괴로워하면 어머니도 역시 그러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언젠가 어린 시절 작은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갈 때 어머니가 한 말이 영원히 남아 있다. “프랭크 야, 네 대신 내가 이 수술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구나.”

모성애에 대한 이 행복한 생각은 그가 천상 어머니를 아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놀라운 자질들이 성모님 안에서 모두 발견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지상의 어머니의 사랑은 천상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사랑에 비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성모님과의 친교는 더욱 깊어졌다. 그는 성모님을 항상 가까이 계시고 그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으며 다정히 사랑해 주시는 분으로 보았다. 또한, 성모님이 보실 때 그는 “오래 신뢰할 수 있는” 믿음직한 아들이었을 것이다.

멜러리에서 데클란 신부가 선종했을 때 프랭크에 대한 그의 큰 관심을 알고 있던 수도자들은 프랭크에게 유품으로 줄 것을 찾았다. 그들은 그것이 한때 프랭크의 소유였던 줄을 모르고, 데틀란 신부의 작은 성모상을 주기로 결정했다. 프랭크는 그 성상이 되돌아온 것에 대해 틀림없이 미소를 지었으리라. 그 뒤 항상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것은 작은 성상이었는데 그가 일할 때 항상 옆에 두었다. 이 무렵에는 이미 성모님이 함께 하심을 상기시켜 주는 성상이 그렇게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성모님은 여러 해 동안 항상 “그의 옆에 계셨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일에 성모님을 개입시키고 싶은 마음을 가지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했다. 그가 딕더폰(속기용 구술 녹음기)을 사용할 때, 그 작은 성상은 딕더폰 위에 놓여 있었다. 그가 기사를 쓰고 있을 때, 그것은 노트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가 아침에 편지를 볼 때 그것은 봉투와 편지지들 사이에 있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여행할 때 그것은 그이 주머니나 가방 속에서 쉬고 있었다. 그 성모상에 대한 그의 애착은 유치한 신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상 어머니와의 친밀한 일치의 상징이었다. 혹자는 성모님과 그가 “지극히 친밀한” 사이였다는 것을 감지했으리라.

몽포르는 마리아께 대한 봉헌물에 관한 저서에서, 성모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리아께 대한 총체적인 의탁의 표시로 사슬을 몸에 감을 수도 있으리라고 했다. 사실은 노예를 나타내지만 마리아께 대한 봉헌의 경우에서는 그것은 자발적인 “노예” 이며 기꺼이 사랑하는 봉사이며 완전한 신뢰와 의탁이다. 프랭크는 그러한 사슬을 몸에 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매트 탈보트의 경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랭크는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을 정말로 두려워했다. 어쨌든 그는 효과에 있어서는 사슬이나 다름없는 다른 종류의 사슬을 몸에 둘렀고 그것은 쇠로 된 사슬보다 훨씬 더 많이 그를 속박했다. 그것이 바로 레지오 마리애였다. 그에게 레지오는 한평생 동안 그를 마리아께 묶어주는 사슬이었다. 그것이 그의 단련이었고 그의 사업이었고 소명이었으며 기쁨이었고 때로는 십자가였다. 사실 그것은 그의 삶이었고 그 삶의 짐들은 레지오가 항상 곁에 계시는 마리아의 현존이라는 확신을 통해 다소 쉽게 견딜 수 있었다. 마리아는 당신을 모든 아름다움 가운데 보여 주시고 당신의 아들께 그를 소개하기 위해 천상 고향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도와주고 계신다. 그렇다. 그것이 온갖 수고를 할 만한 가치였다.

레지오 초기에 전 단원들에게 시작 단계인 그 조직에 적당한 이름을 제안하도록 했다. 프랭크는 많은 생각을 했다. 가장 적합한 이름을 찾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일어서서 벽에 걸린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 그것을 성모님을 “샛별”로 묘사했다. 그때 갑자기 “레지오 마리애” 란 이름이 문득 떠올랐다. “바로 그때 이것이 우리가 찾고 있던 이름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졌습니다.” 하고 후에 그가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무(무)에서 마리아를 창조하셨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가장 훌륭한 걸작이었다. 사랑으로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구원하셨다. 하느님은 성모님을 당신의 어머니가 되도록 선택하셨다. 성모님이 가진 모든 것, 성모님이 한 모든 것은 전지 전능하신 분의 영광을 드러낸다. 성모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느님의 놀라운 권세와 좋으심을 찬양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마리아를 크게 드러내는 것은 주님을 크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프랭크의 일생의 사업이었다.

 

 

1956년 12월에, 프랭크는 오하이오 주 데이톤 대학으로부터 “그 대학의 권한 내에서 가장 높은 영예인 마리아니스트 상”을 받으러 미국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도중에 그는 주교좌 성당 소속 고등학교 강당에 모인 많은 레지오 단원들에게 연설하러 뉴욕 시에 잠시 머물렀다. 메리오 뉴욕 세나뚜스 의 영적 지도자인 몬시뇰 로트라우프 가 일어서서 프랭크를 맞아 주었고 단원들에게 소개했다. “더프 씨를 레지오의 창설자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정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최초의 레지오 마리애 회합이 있던 지역에 창의를 가지고 오셨고 그분 주위에 첫 레지오 단원들을 모으시고 사도직으로 부르신 분이 성모님 자신이었다고 자주 말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더프 씨는 “마리아를 크게 한 분”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프랭크 더프는 미소를 지었지만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후에 데이톤 대학에서 마리아니스트 상을 받았을 때 그는 말했다. “제가 성모님을 섬겨 왔다고 말해 주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인사는 없을 것입니다.”

프랭크가 더블린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몬시뇰 로트라우프 의 말을 포함한 모든 것을 그대로 얘기했다. 그리고 새 직함인 “마리아의 확대자” 에 대해 말할 때, 다시 얼굴을 붉히면서 아름다운 미소를 띄웠다. 그것을 본 사람은 프랭크가 매우 행복해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그러한 표현의 영혼에 넘쳐 흐르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평생 동안 성모님을 더욱 잘 알리고 더 사랑 받도록 하기 위해 그가 힘써 왔다는 그런 생각이, 본질적으로 성모님을 위한 그의 끊임없는 수고에 충분한 상급이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프랭크 더프의 연대표

 

 

1889년
6월 7일 더블린에서 출생. 드럼 콘드라에서 생활
1899년
가족이 던 로가레 로 이사. 프랭크는 블랙록 대학에 진학. 첫 영성체를 함
1907년
공무원이 됨. 여가 시간을 스포츠와 운동에 쏟음
1911년
영성에 관한 서적, 특히 성인들의 생애에 관한 서적을 읽는 데 진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함.
1913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가입. 점점 더 종교에 기울었음
1914년
첫 봉쇄피정을 함. 사순절 기간 동안, 그리고 그 뒤 평생 동안 매일 미사에 참례하기로 결심함. 절대 금주 개척자회에 가입함. 타락하고 냉담한 가톨릭 신자에 대한 개인적 사도직을 시작함.
1915년
가르멜 제3회에 가입. 성모 마리아의 소성무일도를 매일 바치기 시작함. 락 더그로 첫 순례를 감.
1916년
첫 번째 소책자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가 아일랜드 가톨릭 진리회에 의해 출판됨.
1917년
몽포르의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 이 발견된.
1919년
멜러리 산 수도원을 처음 방문함.
1920년
아일랜드 협상단이 잉들랜드와 아일랜드 간의 조약을 위한 조건을 논의하도록 영국으로 초청될 때, 프랭크는 두 번째 여행에서 관리자로 그들과 함께 가도록 선출됨.
1921년
9월 7일 레지오 마리애 탄생.
1922년
산타 마리아 기숙사가 세워짐.
1927년
샛별 기숙사가 문을 염.
1928년
레지오가 스코틀랜드 등 해외로 진출함.
1930년
천상의 모후 기숙사가 문을 염. (프랭크의 생활의 대부분이 세 기숙사 주위를 맴돌았다.)
1931년
프랭크의 첫 로마 방문. 교황 비오 11세의 레지오 강복.
1931~1933년
전세계에 레지오의 급속한 확장.
1937년
에델 퀸 이 동아프리카의 레지오 사절로 임명됨.
1951년
심한 스트레스로 고통을 당하는 프랭크가 “자전거 여행”을 하기로 결심함.
1953년
시머스 그레이스와 알피 램이 남미에 레지오 사절로 임명됨.
1963~1964년
프랭크가 중병으로 “5개월”간의 휴양을 함.
1965년
바티칸 공의회에 평신도 입회인.
1969년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단이 처음으로 러시아에 들어감.
1971년
레지오 창설 50주년 기념제.
1979년
프랭크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
1980년
투를스 에서 서품식에 참석하여 91번째 생일을 맞음.
1980년
11월 7일 프랭크 더프가 더블린 시의 자택에서 선종함.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 Finola Kennedy의 John Henry Newman and Frank Duff참고
  2.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프랭크 더프 저, p.7.
  3.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p.14.
  4. 1916년에 조반 센터가 문을 닫자 프랭크는 그 그림을 “보존했고” 마이러하우스(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본부)에 가져갔다. 그래서 프랭크가 1922년 산타 마리아 기숙사로 옮길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기숙사가 “문을 열던 밤” 에 그 그림은 성심 공경을 위한 의식에 이용되었다. 1974년에 기숙사가 문을 닫았을 때 그 그림은 노스 부륜스윅 거리에 있는 레지오 본부로 옮겨졌다. 프랭크는 “이 그림이 레지오의 산 역사를 굽어보고 있었다” 고 말했다.
  5.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p. 16. 44.
  6.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p. 50
  7.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p. 55~56.
  8. 레지오 마리애 교본, p.396
  9. 레지오 마리애 교본, p.333
  10. 레지오 마리애 교본, p.333
  11.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p.85.
  12.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 1장 45번.
  13. Maria Legionis, 1981년, 1번.
  14. 레지오 마리애 교본 p. 174.
  15. 아듀또리움 단원은 협조단원의 하나로 이 단원은 (1) 뗏세라의 기도를 매일 바치고 (2) 성교회가 인정한 성무일과를 바치며 매일 미사 참례와 영성체를 한다.
  16. 어떤 레지오 단원은 이 봉헌을 개인적으로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여기에 기술된 것 같은 엄숙한 봉헌 형식을 선호하기도 한다.
  17. The Love of Eternal Wisdom, 17번.
  18. The Love of Eternal Wisdom, 11번.
  19. The Love of Eternal Wisdom, 184번.
  20. The Love of Eternal Wisdom, 184번.
  21. The Love of Eternal Wisdom, 195번.
  22. The Love of Eternal Wisdom, 195번.
  23. The Love of Eternal Wisdom, 171번.
  24. The Love of Eternal Wisdom, 172번.
  25. The Love of Eternal Wisdom, 180번.
  26. The Love of Eternal Wisdom, 203번.
  27. The Love of Eternal Wisdom, 211번.
  28.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 254번.
  29. <The De Montfort Way> 프랭크 더프.
  30. 몽포르의 가르침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그의 책을 읽음으로써만 가능하다.
  31. 1965년 몽포르의 사제들과 수사들은 그들의 260년 역사에서 첫 명예회원(평신도이든 성직자이든 간에)으로 몽포르의 마리아의 단체인 그들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명예를 프랭크 더프에게 주었다.
  32. <St. Louis-Marie Montfort> 소책자, 몬시뇰 Deery
  33.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 114번.
  34. 레지오 교본, p. 189.
  35. <Alfie Lambe>, Hilde Firtel, p.36
  36. 레지오 교본 p.186
  37. <Alfie Lambe>, Hilde Firtel, p.124
  38. <Frank Duff – a living Autobiography> Msg. C. Moss, p.10, 11
  39. <Frank Duff – a living Autobiography> Msr. C. Moss, p.10
  40. “불기둥” 이라 불리는 동족회는 가톨릭과 유대교 간의 대화를 위해 세워졌다.
  41.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프랭크 더프, p.16-17
  42. 레지오 교본 p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