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15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생각해 본다

피의 혁명이 준 교훈

2013.05.08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가 40대 중반 때, 미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불란서로 출장 갈 때마다 몇 차례 베르사유 궁전에 갈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그곳 파리에 살고 있는 지인 가족들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 뒤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십자형 인공호수의 어느 한편 잔디 위에서 바비큐를 즐긴 다음 궁전 전시관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여기저기 역사미술관을 둘러보다가 어느 전시실 입구에서 주춤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 몇 번을 갔어도 그 전에는 한 번도 본바 없는 전시실에 온통 피를 뿌려놓은 듯한 그림들로만 꽉차있었던 때문이었다.

 특히 콩코드 광장에 설치해 놓은 기요틴(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장면과 목이 잘리려고 쭉 줄지어 서 있는 풀죽은 사람들의 행렬과 잘린 목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가 콩코드 광장을 지나 세느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 제일 소름끼쳤고 또 너무나 사실처럼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방의 전시물이 전하는 시기가 도대체 언제 것들이기에, 온통 핏빛으로 장식되다시피 한 것일까? 도대체 그 시기의 상황이 피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궁금하여 설명을 읽어보니 바로 루이 왕조가 무너진 1789년 불란서 혁명 발발 때부터 나폴레옹이 등장하기까지 10여 년 간의 것이란다.

불란서는 18세기 루이 14세 때 유럽에서 최강의 국가였으나 루이 16세 치하 때인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불란서 혁명으로 왕정을 포함한 구체제(앙시앙레짐 Ancient Regime)가 무너지고, 민간 혁명정부가 들어섰으며 동년 10월 5일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하는 ‘인권시민장정(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the Citizen)’이 선포되었단다. 그러나 얼마 뒤 민간 혁명정부에 의한 교회재산의 몰수, 뒤이은 중과소득세의 징수, 곡물가의 동결, 정부 가격제 불이행에 대한 극형실시, 개인 신분증 소지의 의무화, 이웃상호간의 감시제도 실시, 중상주의에 의한 경제정책의 실패와 지나친 지폐의 남발로 인한 재정혼란 등이 가중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792년에 제1차 공공안전위원회가 발족되자마자 반역자 처단명분으로 피의 학살이 파리 시가를 휩쓸게 되었고 뒤이어 정권이 여러 번 교체되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져갔는데 불란서 대혁명 후 4만 명 이상을 죽인 이 피의 잔치는 1799년 나폴레옹의 독재정치가 등장할 때까지 10년간 지속되었다는 설명이었다. 필자는 바로 그 시기의 미술품들을 전시한 방을 본 것이었다.

 불란서가 220여 년 전 불란서 혁명을 통해 왕정에서 민정으로 또 다른 민정으로 바뀌는 와중에서 무정부 상태와 국가주의를 경험한 후 결국 전체주의의 독재로 옮겨가는 약 10년간 흘린 그 엄청난 피범벅과 살육으로 과연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결국 나폴레옹 독재체제를 얻기 위해 그 많은 피를 흘렸단 말인가?

 그리고 가깝게는 1969년부터 1975년 사이에 캄보디아 폴포트(Pol Pot)가 자행한 인종말살(genocide)획책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해골더미가 보여주듯 그 잔학상이 끔직한데 그들은 이를 통해 또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해골더미가 현재는 관광자원역할(?)을 하고 있는데 과연 지금의 관광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그토록 그 많은 살육을 자행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