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비사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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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편 終

 

끝없는 戚臣勢道

 

비단 폭에 서린 꿈

 

제 이십이대 임금 정조(正祖)는 학문을 좋아했다. 그래서 학문에 대한 정열은 수많은 편찬 사업을 해서 문운(文運) 발전에 공헌이 컸다. 그러나 문약(文弱)으로 왕실중흥(王室中興)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영조가 일생을 두고 금지하려던 당파싸움도 완전히 없애지 못한 끝이어서,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卽位)할 때부터 다시 발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척신(戚臣)에 의한 전형적(典型的)인 세도정치로서 모양을 달리하고 나타나게 되었다. 그 뒤의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은 인물부터가 무능하거나 무식한 임금으로서 조선 역대를 통해서 척신들의 발호와 왕기쇠미(王氣衰微)를 가져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철종(哲宗)은 강화도에서 글도 배우지 못하던 빈농소년(貧農少年)이었다. 열강(列强)의 세력이 조선에 밀려 들어서 중대 사건이 많이 발생한 것도 이때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웅 대원군(大院君)과 여걸(女傑) 민비(閔妃)가 이런 거센 외국의 폭풍을 가로맡아 막기는 했지만 대원군과 민비를 중심으로 한 싸움이 척신 암투와 바꿔짐에 따라서 그 영향도 커지는 동시에 결과적으로 이씨 왕조를 멸망의 길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정조는 영조가 뒤주에 넣어서 참살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외아들이었다. 영조의 재위(在位)시에 세손(世孫)으로 책봉되어서, 부친과는 반대로 어려서부터 조부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

부친 사도세자가 어느 날 밤에 자다가 용꿈을 꾸었다. 세자가 창공을 나는 용으로부터 찬란한 주옥(珠玉)을 받은 꿈을 꾸고 잠을 깨자 혜빈(惠嬪) 홍씨(洪氏)에게 기이한 꿈 이야기를하고

백견(白絹)을 내주오.

왜요?

하도 훌륭한 용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니 그림으로 그려 두어서 이 대몽(大夢)을 기념하겠소.

그림을 잘 그리는 남편의 취미려니 했으나 그 이상으로 기뻐한 세자비(世子妃)는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동궁(東宮)께서 제 대신 태몽(胎夢)을 꾸셨으니 장차 나라에 경사가 있을 징조인가 하옵니다.

허허 부부일신이니까, 남편도 태몽을 꿀 수 있겠지.

하고 흰 비단 폭에 생동하는 용을 꿈에 본 모습대로 그려서 벽에 걸고 기뻐했다. 그리고 각별한 감명으로 동침한 그날 밤에 과연 잉태해서 낳은 것이 세손(世孫)으로서 나중에 조부영조의 대를 이어서 임금이 되었다.

용의 태몽으로 탄생한 세손은 과연 용안(龍顔)이 준수했고 어진 웃음소리도 종소리같이맑게 울렸다. 그런데다 그 얼굴이 미인이던 모친의 모습을 닮으므로 모친의 기쁨은 더욱 컸다. 그리고 기질은 부친을 닮아서 백일 전에 일어섰고 돌이 되기 전에 걸음마를 했다.

말을 하기 전부터 글자를 보면 좋아했으며 네 살 때는 글자를 곧잘 외었다. 영조와 글 선생은 세손의 글 재주가 차차 비범한 것을 보자 동국성인(東國聖人)이 될것이라고 기뻐했다.

정조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일류 학자의 실력이 있었고 재위 이십사 년 동안 역사와 문학을 학자들에게 편찬시키는데 온 정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정치문제는 신하들에게 맡겼다. 이 때문에 척신들의 세도정치를 조장하는 폐단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정조는 임금이 되었어도 학문에 흥미를 가졌기 때문에 정사에는 도대체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권을 노리는 무리들은 정조의 이복형제(異腹兄弟)들을 추대해서 임금으로 세우고 정조를 몰아내려는 반역 음모를 여러 번 일으켰다.

정조에게는 이복형제가 셋이나 되었다. 즉 영빈 임씨(英嬪林氏) 소생의 은언군(恩彦君),숙빈 임씨(肅嬪林氏) 소생의 은신군(恩信君), 귀인 박씨(貴人朴氏) 소생의 은전군(恩全君)이다.

정조가 임금이 된 원년(元年)에는 홍상범(洪相範) 등이 은전군 이찬(李 )을 임금으로 세우려는 반란을 음모했다. 홍상범의 부친 홍술해(洪述海)는 황해감사(黃海監司)로 있다가 재물을 탐낸 죄로 먼 섬으로 귀양을 가자 그의 일족인 홍상간(洪相簡)이 원한을 품고 역적음모를 하다가 잡혀 죽었다. 그리고 그의 일족은 모두 귀양을 가거나 폐적을 당했다.

홍술해의 아들 홍상범과 홍상길(洪相吉)은 전주에 귀양가 있다가 부친과 일족의 원수를갚으려고 서울로 잠입해서 홍필해(洪弼海), 강용휘(姜龍輝), 전흥문(田興文) 등과 결탁하고, 궁녀들과 짜서 정조를 침전에서 시역하고 은전군을 왕으로 세울 흉계를 착착 진행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홍술해의 처와 첩은 무당에게 정조가 망하고 은전군이 왕이 되도록 저주의 굿까지 했다.

그 후 장정 오십여 명에게 무장을 시킨 뒤에 홍술해는 추석이 가까운 밝은 달밤에 궁중 기습(奇襲)을 하려고 복면을 한 후 밤중에 행동을 개시했다. 홍술해와 전흥문과 강용휘 세 명이 맨 먼저 궁궐의 담을 넘었으나 파수병에게 들켜서 죽음을 당했다. 사건에 격분한 대신들과 대사헌(大司憲) 및 종친관(宗親官)들은

은전군을 법대로 다스려서 이런 흉계의 근본을 없애야 하옵니다.

하고 은전군에게 독약을 내려서 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음이 온순하고 우애가 두터운 정조는

은전군이 불우한 환경에서 곤궁히 지낸다 하나 과인이 후히 대접 못한 것이 후회되오. 더구나 이번 음모사건은 은전군의 본의가 아니고 오직 흉한 자들이 명목상 업고 나섰을 것이니, 은전군을 처형하는 것은 형제지정에서 차마 할 수 없소.

하고 반대했다.

국가의 대죄를 사친(私親)의 정리로 용서하면 금후에 이런 변이 그치지 않을 것이니 안됩니다.

정조를 옹위하는 신하들은 자기들의 반대세력에 이용될 은전군의 처벌을 강경히 주장했다.

아아, 사실 여부를 막론하고 왕위 다툼으로 형제 지간에 이런 불행이 있다니 참으로 조상열성(列聖)에 대한 면목이 없소.

정조는 은전군을 미워하기 전에 자기의 권한으로 형제에게 독약을 내리는 것이 슬펐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신하들의 주장대로 독약을 내려서 은전군의 목숨을 끊게 했다.

이런 역적사건이 있은 후에도 당파싸움으로 몰린 불평파에서는 경향 각처에서 때때로 역적음모 사건을 일으켰다.

충주에 사는 이술조(李述祚)는 홍인한(洪麟漢)일파가 정권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반대파를 역적으로 몰아 죽인다고 분개하고 대담하게도 충주 목사에게 직접 장담을 하고 나섰다.

조정에 역적 홍인한이 제 마음대로 학정을 하면서 유능한 충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있소. 그 놈을 없애려면 그 역적을 신임하는 암군(暗君)을 갈아 치워야 하겠으니, 나는 군사를 일으켜서 의병대장이 되어 대궐을 쳐들어 가서 나라를 바로잡겠소. 목사도 언제 역적으로 몰려 죽을지 모를 사람이요. 나의 의거에 찬동하시오. 성사 후엔…

하고 목사를 꾀이는지 위협하는지 모를 소리로 호언장담을 했다. 충주 목사는

(이자가 미쳤나? 정말로 반란군을 일으킬 생각인가? 당파적인 불평의 발악인가?)

그리고 목사는 그 사실을 곧 나라에 밀고했다. 조정에서는 깜짝 놀라 어사를 보내서 이술조를 잡아 처벌했으나 아무런 군사 모집의 사실도 없고 단순한 당파적인 불평임이 밝혀졌다. 이런 불평 언동은 각처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숙청당한 홍국영(洪國榮)의 잔당은 수령의 제도가 놀라왔던 만큼 잔당들의 세력도 아직 남아 있어서 시국을 비방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홍국영에게 등용되었던 송우암(宋尤庵)의 후손 송덕상(宋德相)은 평산(平山) 땅의 신형하(申亨夏)와 함께 소론파를 누르려는 음모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런 역적의 무리는 귀양으로 부족하니 응당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득세한 소론파에서는 불온한 말 한 마디만 해도 잡아 죽여야 한다고 왕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파쟁에 골치를 앓던 정조는

북은 칠수록 소리가 나는 법이요. 이런 불평이 자꾸 나는 것은 나의 부덕의 소치요. 또 노론 소론이니 시파(時派)니 벽파(僻派)니 하는 파벌 싸움의 여파요. 그러나 파벌 싸움부터 없애야 하오.

정조 즉위 당시에 세도를 소론파가 부리고 있었으나 왕의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런 문제가 날 때마다 마치 학자 모양으로 너희들 소론파는 불우한 노론파를 너무 학대하지 말라는 정도로 설교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왕의 설교에 귀를 기울일 신하들은 아니었다.

충주와 평산에서의 반란 문제는 세력도 없는 자들의 작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조정안에서도 정조를 비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지평(持平) 지위에서 쫓겨난 이유백(李有白)과 공조참의(工曹參議) 이택징(李澤徵)은 공론했다.

임금은 규장각(奎章閣)에 벽파(僻派) 놈들만 모아놓고 국정을 그르치고 있다. 규장각을 때려 부셔야 하오.

놈들 세력을 무슨 방법으로 때려 부수겠소. 말만 들어도 시원하지만 공연히 또 역적으로 몰리게.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죽는 것이 두려워서 의로운 일을 못하겠소? 방법이야 합법적으로 상소를 해서 상감의 잘못을 깨우쳐 드리는 데서부터… 그래도 효력이 없으면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그들은 은근히 실력 행사도 사양치 않겠다는 음모를 했다. 그리고 이택징은 곧 시폐(時弊)를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으로 역적에 몰리는 일이 많았으므로 그들은 죽을 각오로 그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

< 근자에 규장각은 승정원(承政院) 이상의 집정(執政) 기관으로 변해서 모든 국정이 거기서 논의되고 집행되니, 앞으로 규장각은 본무(本務)로 돌아가게 하셔야 합니다. 만일 지금과 같이 하실 바에는 규장각과 승정원 둘 중의 하나를 없애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규장각은 본시 상감께서 사사로이 학문을 연구하시는 곳입니다. 학문을 숭상하고 학자를 대우하시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만일 중대한 국사를 규장각의 신하들로 하여금 처리케 한다면 상감은 결국 규장각의 사신(私臣)으로 하여금 국정을 요리하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금후로는 전교(傳敎)를 비롯한 모든 국정문제는 승정원을 통해서 하시기 바라옵니다. >

이런 상소문의 내용은 국왕을 간(諫)하는 신하의 말로는 과격한 표현이었고, 은근히 규장각에서 과분한 총애를 받는 벽파에 대한 독설이었다. 정조는 이에 대해서 노하지 않고 여러 가지로 알아듣도록 이야기했다.

규장각과 승정원은 물론 성격이 다른 기관이지만, 규장각의 사신(私臣)이라도 좋은 인물은얼마든지 승정원의 공신(公臣)으로 등용하겠으며, 그것이 오히려 당파를 초월한 인물 중심의 인사정책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규장파의 인물은 벽파 중심으로 되어있었고 승정원의 고관도 거의가 벽파일색 이었다.

그러나 대사헌(大司憲)은 이택징을 반역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이에 대해서 이유백은 이택징의 상소를 옹호하는 상소문으로 대항했는데, 그 내용은 더욱 용감하게 청풍김씨(淸風金氏)의 중전(中殿)에게까지 미쳤고, 중전의 친정 출신인 김시묵(金時默)의 죄상까지 들추어서 그를 숙청해야 한다고 극언(極言)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택징과 이유백을 귀양 보내라는 왕명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겁낸 이유백의 아우 이유원(李有遠)은 자기만 살아나려고 형까지 파는 비굴한 행동을 했다. 그것은

이유백과 이택징은 반역의 뜻을 품고 공모해서 상소문을 전후로 올렸습니다. 사전에 그런 일을 알고 미리 보고하지 못한 속죄를 하기 위해서 늦게나마 사실을 아룁니다.

하고 사헌부(司憲府)에 밀고한 것이었다. 따라서 귀양갈 형과 이택징을 결국 사형시키게 하고 말았다.

(내게 그런 비겁한 동생이 있었으니 누구를 탓하랴. 나를 죽이고 너만 살면 얼마나 좋을 것이냐?)

형 이유백은 탄식하면서 조용히 사형을 받았다.

(그 놈도 우리와 뜻을 같이 했습니다.)

하고 아우를 고발했으면, 아우 이유원도 사일등(死一等)을 감해 받더라도 귀양살이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 격으로, 형은 아우에 대하여 보복 밀고는 하지 않고 죽었다.

그러나 반대파에서는 이 사건을 발전시켜서 귀양 보냈던 송덕상, 신형하를 비롯한 일파 등 일곱 명도 완풍군(完豊君)을 임금으로 내세우려는 음모를 했다고 역적으로 몰아서 모조리 사형에 처했다. 이들은 모두 득세한 소론파에 몰린 노론파들 이었으므로 노론파의 불평과 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중 정조 팔 년에 소용 서씨(昭容徐氏)가 정조의 아들을 낳았다. 서자였지만 왕세자(王世子)로 책봉했다. 중전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 원자(元子)를 왕세자로 삼은 것이다. 장차 임금이 될 중대한 자리였다. 왕실에서는 이 경사를 영희전(永禧殿)에 봉고(奉告)하는 식전(式典)을 올리게 되었다. 고백헌관(告白獻官)인 김하재(金夏材)는 직무상 하는 수 없이 제전을 집행하였으나 예방승지(禮房承旨) 이재학(李在學)에게 정조를 비방했다.

죄 없는 노론파를 모조리 잡아 죽이더니, 인젠 젊은 중전이 세자를 낳을 때도 기다리지 않고 서실 소생을 왕세자로 봉하니 나라 꼴이 어찌 될지 걱정이요. 충신들은 이때 일어서서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하오.

그는 믿는 친구라 이런 불평을 말했다. 그러나 이재학은 그런 말을 듣고 그냥 있으면 나중에 자기도 역적으로 몰려서는 죽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곧 친구를 배반하고 왕에게 밀고했다. 왕은 김하재를 잡아다가 직접 심문했다. 그러나 김하재는 왕에게 당당히 소신을 진술했다.

왕은 당파싸움을 말로만 금하면서 실제로는 소론파만 중용하고, 소론파가 날조한 반역죄로 노론파의 충신을 얼마나 죽였는가. 중전이 아직도 젊은데 왜 좀 생남을 기다리지 않고 서실 소생을 왕세자로 봉하느냐고 공박했다.

이 대역무도(大逆無道)한 놈을 처치하라.

왕은 대로했다. 그러나 김하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은 죽겠으나 억울한 충신을 죽이는 것은 신으로 그치시기만 바랍니다.

하고 조용히 형장으로 끌려나갔다. 김하재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죽은 뒤에 정조는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김하재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처음에는 노론파의 유력한 집안으로 역적죄로 끌려서 죽은 사람을 세어보고 몸에 소름이 끼쳤다. 다음에는 소론파의 대가집을 생각해 보았다. 역시 역적에 몰린 자가 많았다.

(이러다가는 어느 파를 믿어야 할까. 모두 저희들끼리 세력싸움으로 죽이고 죽는 미친 짓이 아니냐?)

정조는 그런 생각을 심각하게 했다. 그래서 원로대신들과 상의한 뒤에

선왕 때부터 국사범으로 죽은 자는 할 수 없으나 귀양 간 자들은 전부 용서해 돌려보내라.

하는 국법의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그 덕택으로 거의 다 풀렸고, 중한 죄로 멀리 귀양 갔던 김구주(金龜柱)와 화원옹주도 가까운 곳으로 옮긴 뒤에, 그들도 적당한 시기에 용서를 하였다. 그러자 반대파에서는 이에 대해서 또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아아, 선왕께서 일생을 두고 막지 못한 당파싸움을 어찌 내 힘으로 막겠는가?)

정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양위할 세자(世子)가 있으면 정치에서 떠나서학문에만 전력을 기울이고 싶었다.

 

 

 

설레는 伏魔殿

 

정조는 재위 이십사 년에 학문을 위주로 한 소위 문치(文治)에는 많은 공적을 남기고 사십칠세 칠월, 전신에 종기를 앓다가 백약무효(百藥無效)로 승하하고 말았다. 이때 세자는 겨우 열한살의 소년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이 임금이 순조(純祖)다.

새로운 임금이 어렸으므로 궁중에서 제일 어른 되는 영조의 미망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섭정(攝政)이 되어서 소위 수렴정치(垂簾政治)를 했다. 이때부터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척신세도(戚臣勢道)를 부리는 동시에 반대파 숙청의 풍파를 일으켰다. 정순왕후는 임금 순조의 증조모 뻘이라 대왕대비(大王大妃)라고 불렀다.

늙은 대왕대비가 친정 일가만 내세우니 인젠 경주 김씨 천하가 되었구나. 늙은 암탉이 조정에서 활개를 치니 우리 나라는 이제 망했다.

그런 욕을 하면서도 불우하게 내쫓기는 소위 시파(時派)에서는 전전긍긍했다.

대왕대비는 선왕(先王) 때 역적으로 몰려서 죽은 김구주(金龜柱)를 복권(復權)시키고 이조판설 추증까지 했다. 이것은 경주 김씨가 속하는 벽파(僻派)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다 마침 천주교가 시파 중심으로 전파되어 있었으므로 벽파에서는 사학(邪學) 추방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사학의 괴수 정약종(丁若鐘)과 그 도당을 잡아서 처단하라.

대왕대비는 이런 엄명을 내리는 동시에 사학 반대에 철저한 목만중(睦萬中)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정약종, 정약전(丁若銓) 및 그의 아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이가환(李家煥), 이존창(李存昌), 홍교만(洪敎萬) 등이 맨 먼저 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서양학문을 연구하는 자유와 종교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학문까지 당파 싸움의 희생으로 악용한다고 반박했다.

어느 편이 당파싸움을 일삼느냐. 너희들이 그 따위 역설을 하는 것부터가, 학문이니 종교니 하는 명목으로 당파 음모를 하는 사학의 본색을 스스로 폭로하는 증거다.

우리가 배우려는 학문은 결코 사학이 아니고 정학(正學)이요. 정학은 공자님의 유교 뿐이다. 공자님보다도 서양 오랑캐들의 예수가 정교란 말이냐?

유교보다도 예수교가 전 인류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정교(正敎)라고 믿소.

너희들은 임금도 없고 조상도 없단 말이냐?

하나님이 우주의 임금이시오. 인류의 아버님이요.

그래서 불충 불효하는구나. 그래서 제 할아비 제사도 지내지 않는구나. 그 대답으로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대죄가 성립된다.

그런 위협과 고문으로도 그들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은 그들을 사형에 처하거나 귀양 보내는 것을 할 수 없었다.

이때 정약용도 형들의 관련으로 잡혀서 문초를 받았는데

나는 소년시절에 천주교를 한 때 믿었던 것이 사실이요. 그러나 중년 때 종교적인 신앙은 버렸기 때문에 그 당시에 이미 나라에 나의 태도를 상소하였소. 다만 서양의 학문만은 우리가 취할 바가 많기로 지금도 연구하고 있소.

그러나 너희 형 약전은 독신자가 아니냐?

하고 신문자는 추궁했다. 정약용은 정색을 하고

당신은 인륜 도덕을 주장하면서 아우가 형의 죄를 증명하라고 하는 거요? 당신이 그럴 경우엔 어떤 대답을 하겠소?

신문하는 자도 더 추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형제는 사형을 면하고 귀양 정도의 벌로 그쳤던 것이다.

섭정하는 대왕대비가 그렇게도 엄금하는 천주교였으나 불우한 왕족들 가운데서도 천주교에 의탁해서 고민을 위로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도세자와 영빈 임씨(英嬪林氏) 사이에 출생한 은언군(恩彦君)의 부인인 송씨(宋氏)와 송씨의 며느리 즉 상계군(常溪君)의 처 신씨(申氏)는 천주교 신부 집을 찾아가서 영혼의 구원을 호소했다.

시아버지는 역적으로 끌려서 강화도로 귀양 가서 빈농(貧農)으로 몰락했고, 신씨 남편도 역적으로 몰려서 독약을 먹고 죽었던 것이다.

신부는 불우한 왕족을 위로하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모든 불행과 고민에서 구원 받는다고 설교했다. 그들은 그 후로 천주교 예배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거기 모이는 여자들의 친절에도 감명을 받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천주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기도 때만은 당파싸움에 대한 저주도 잊었다.

은언군의 부인 송씨는

신부님, 또 악착스러운 당파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천주교 탄압은 소위 남인(南人)파를 잡아 죽이려는 핑계입니다. 신부님은 위험하오니 어디로 피하십시오.

라고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일렀다.

아니요. 다른 신도의 죄를 대신해서 내가 희생되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한 신도가 달려와서 신도 중에서 배반한 자가 있어 천주교의 모든 신도들을 관가에 밀고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주신부는 의금부(義禁府)로 자수해 나가서 천주교도를 죄인으로 몰지 말 것을 호소하고, 그 책임은 자기 하나에게만 지워 주면 십자가를 지고 달갑게 희생되겠다고 말했다.

의금부에서도 대국(大國)으로 섬기는 중국 사람을 소홀히 할 수 없어서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에게 보고했다. 영의정도 청국을 두려워하는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였으므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상국인(上國人)이라 특별대우를 하겠소. 그러니 신자들 소재만은 정직하게 말하오.

남자 신자는 이번에 모두 잡혀서 처형되고 두세 명의 여자 신자밖에 없소.

중국인 신부는 남은 신자들을 보호하려고 한말이었다. 그러나 영의정은

여자 신자의 신분을 밝히시오.

여자까지 처형하시겠소?

처형은 않더라도 알아는 두어야겠소.

처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말하겠소.

신부는 공연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으나 꺼낸 말을 부인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여자를 무슨 처형을 하겠소. 어서 말하시오.

송씨와 신씨는 불우한 왕족이요, 김씨는 나를 구해 준 여인이요.

왕족의 송씨와 신씨?

영의정은 곧 은언군의 미망인과 며느리라고 깨달았다. 그는 곧 그 사실을 확인하고 대신들을 데리고 궁중으로 들어가서 대왕대비 김씨에게 의외의 사실을 보고했다.

역적의 내실이었지만 여자라고 용서했더니 또 역적 무리와 야합했구나. 그년들을 엄중히 다스리게 하오.

대왕대비의 명령으로 송씨와 신씨를 잡아다가 신부와 대질시켰다. 주문모 신부는 그들이 여자신자라고 시인했다. 혹시나 하고 의아하던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임금 순조의 삼촌댁인 숙모와 사촌 형수가 죄인으로 걸려 들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체통과 법을 핑계로 내세우는 당파심은 몰락 왕족의 미망인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은 역적의 과부들이 반성치 않고 또 역적의 온상인 천주교를 믿었을 뿐 아니라 외국인 신부와 만나 풍기도 문란시켰으리라는 조건을 들어서 엄벌해야 한다고 대왕대비의 뜻에 맞는 말을 공식으로 제기했다.

대왕대비는 곧 사형선고를 내리고 사약(賜藥) 집행을 명령했다. 송씨와 신씨는 대왕대비가 내린 독약을 받고서 천국으로 갈 것을 믿으면서 기도한 뒤에 그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벽파에서는 두 여자를 처형한 뒤에 다시 송씨의 남편을 또 죽이려는 좋은 구실로 이용했다. 송씨의 남편 은언군은 글도 잘했고 또 인품이 온후해서 강화도에 귀양 보낸 후에도 종종 서울집에 와서 처자와 상봉하는 특전을 베풀어 준 것이 선왕 정조의 아량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아내와 며느리로 하여금 역적음모를 시키기 위해서 천주교와 결탁시켰다고 몰아서 그까지 독약을 내려서 죽여 버렸다. 이렇게 해서 대왕대비는 친정 척신(戚臣)의 김씨 일파로 완전히 정권을 농락하게 만들었다.

손자 내외와 증손자 며느리를 죽인 대왕대비 김씨는 악독한 여자다. 그렇게 극성 맞은 경주 김씨 세도가 오래 갈까?

궁중과 항간에서는 이렇게 저주하는 소리가 높아 갔지만, 권세에 취한 김씨 중심의 벽파귀에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이에 불평을 말했던 자는 모조리 역적으로 몰아서 죽였는데 천안(天安)의 윤가기(尹可其)와 임시발(林時發)이 처형되었으며, 그들의 불평을 무마시키려던 선왕의 공신(功臣) 윤행님(尹行恁)까지 역적으로 몰아서 죽였다.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한 벽파와 세도정치는 정적을 가혹하게 숙청하는 동시에 자기 일파만 벼슬을 하도록 노력했다. 벼슬만 제대로 했으면 백성에겐 상관 없었으나 그들의 부패는 국고를 좀먹고 각종 명목의 중세(重稅)로 민간재물을 취해 사복을 채웠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민심은 흉흉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악이 쌓이고 쌓인 끝에, 순조 십일년에는 마침내 관서지방(關西地方)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반란이 폭발했다.

이 영특한 야인(野人)은 부패한 세도정치에 반기를 들고 민중을 선동해서 강력한 반란군을 조직했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소위 정당의 파벌과는 직접 관계가 없이 부패한 관권에 대하여 초보적인 민권(民權)을 주장하는 일종의 혁명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반란의 또 하나의 특이성은 조선 건국 이래로 서북인사를 벼슬 시키지 않는 차별대우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홍경래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서북지방을 휩쓸어서 각 읍의 수령을 무찔렀고, 그 후에는 충청도 일대에까지 파동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이년 동안 끌었다.

시파로 몰린 남인파에서는 큰 기대를 걸고 은연중 이에 호응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홍경래 반란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었다.

김가 놈들의 세력이 너무 극성을 부리더니 이번엔 망하고 말 것이다. 홍경래는 제갈량의 꾀에 관운장의 용맹을 겸한 영웅이란다. 하루에 천리를 자유로 날아 다니는 둔갑술도 있다더라. 벌써 개성이 함락되었다니까 서울 입성도 시간 문제다.

하는 풍문에 서울에서도 피난 가는 사람이 생기는 소동을 일으켰다. 이런 때를 이용해서 홍경래의 밀령을 띤 건달 유한순(兪漢淳)이 서울로 잠입해서 민심을 선동하고, 김씨 일파에 몰린 불평 정객을 규합해서 서울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영조 때 일시 명 어사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던 박문수(朴文秀)의 집안은 그 일대로벼슬줄이 그치고 말았는데, 그의 증손이라는 박종일(朴鍾一)은 자기가 직계의 증손이면서 겨우 봉사(奉事)라는 나으리 노릇밖에 못한다고 불평만했다.

그는 건달 친구로부터 홍경래의 밀사로 서울에 잠입한 유한순을 소개 받고 함께 거사할 것에 뜻을 모았다. 박종일은 유한순보다는 유식했으므로 민심선동의 격문도 써 주면서 반란 음모에 참가했다. 그리고 순조를 갈아치우고 새로 들여 놓을 임금으로는 역적으로 몰려서 죽은 은언군의 아들을 추대하기로 했다.

은언군은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죽었지만, 다행으로 아드님이 강화도에 건재하고 있다.

왕실의 정통은 그밖에 없다. 지금 임금은 가짜다. 천의(天意)와 민심은 은언군의 아드님을 새 임금으로 등극시킬 것이다.

이런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격문으로도 써서 서울거리에 붙였다. 이런 풍문이 나돌자 자기가 은언군의 아들로서 거사하려고 서울로 잠입했다는 거짓 인물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그들 가짜 왕자와 혼란 통에 한몫 보려던 건달들을 잡아서 처단했다.

유한순만은 도망쳐 버렸으나 강화도에서 영문도 모르고 있던 은언군의 진짜 아들 해동(海東)은 또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은언군의 자식 해동을 잡아 죽여 없애야지. 그 놈이 살아 있기 때문에 놈들이 추대하려고 한다.

조정의 강경파는 은언군의 유족까지 멸종시키려는 구실을 삼았다.

순조 십이 년에 홍경래는 싸우다가 잡혀 죽었고 반란도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대원수 홍경래가 살아서 피신 중이며, 병자년(丙子年=순조 십육 년)에는 다시 난리를 일으키고 새 임금을 맞아서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심지어는 가짜 홍경래까지 가끔 나타나서 조정의 신경을 어지럽게 했다.

 

 

 

虛弱靑春의 노래

 

순조(純祖)가 사십오세로 승하하자 겨우 팔 세의 헌종(憲宗)이 제이십사대 임금으로 등극했다. 그래서 조모 되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섭정이 되어서 수렴정치(垂簾政治)를 칠 년 동안이나 했다. 선왕 순조가 어렸을 때는 영조의 왕후가 척신세도정치(戚臣勢道政治)의 신례(新例)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동 김씨 출신의 순원왕후가 섭정이 되었기 때문에 그 친정일파가 전보다도 강력한 척신정권을 차지하고 들어 앉았다.

그렇게 되자 그전의 경주 김씨와 섭정이 되지 못한 헌종의 모친(순조의 왕후) 풍양 조씨(豊壤趙氏) 친정과 안동 김씨 삼파전(三巴戰)의 암투가 벌어졌다. 경주 김씨의 세력은 헌종 육 년에 안동 김씨의 김홍근(金弘根)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어서, 십년 전에 생긴 경주 김씨 김노경(金魯敬)의 벼슬을 추탈(追奪)함으로서 종지부를 찍었다.

안동 김씨의 이런 가혹한 처사는 헌종의 외가 풍양 조씨가 점점 왕의 세력을 믿고 안동 김씨를 싫어했으므로 그것에 대한 위협수단이기도 했다.

경주 김씨 시대는 벌써 지나 갔다. 풍양 조씨가 아무리 외척이지만 안동 김씨가 있는 동안엔 꿈쩍 못한다.

섭정 순원왕후의 세력을 믿고 하는 장담이었다. 헌종의 나이 십오 세가 되자 과부 조모의 섭정을 거두라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런 여론으로 순원왕후도 자기의 노령을 빙자하고 헌종의 친정(親政)에 동의하고 후궁으로 물러났다. 오랫동안 정권을 독점해 오던 경주 김씨는 자기들 정권이 다시 튼튼해질 것이라고 과신하고 헌종의 친정을 환영(?)했으나 그것이 큰 실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헌종이 친정을 맡은 다음 해인 칠 년부터 임금의 외척인 풍양 조씨가 점점 득세하기 시작했다. 경주 김씨가 세력을 만회하려고 당황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어서 경종의 외증조부 조인영(趙寅永)이 영의정으로 올라 앉았고 이어서 외사촌 형 조병구(趙秉龜)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서 국권(國權)을 장악했다. 경주 김씨는 한 때 눈부신 세도를 했던 만큼 그 몰락의 속도도 빨랐다.

세불십년(勢不十年)이라더니, 경주 김가도 인젠 풍양 조씨에게 몰려났다.

궁중 치맛바람에 따라서 영의정 이하의 재상이 갈리고, 국정이 그들 외척의 손에 농락되니 한심하다. 그래 인물은 외척에서만 난단 말인가. 척신세도가 없어져야 나라 꼴이 된다.

척신의 발호를 욕하는 것은 불평 정객들만이 아니고 선비와 백성들의 탄식이기도 했다.

민심이 이렇게 어수선하게 되자 불우한 몰락 왕족은 새 임금이 되리라는 미신 같은 풍문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역적으로 몰리기도 했고 뜻하지 않은 대우도 받았다.

조석도 제대로 끓이지 못하는 가난한 전계군(全溪君) 이광은 그전의 정치적 관계로 언행을 삼가고 있었다. 그런데 의술을 비롯한 관상 등의 술법으로 행세하는 이원덕(李遠德)이 전계군에게 왕운(王運)이 있다고 예감(豫感)하고 그의 곤궁한 생활을 도와 주었다.

이씨 왕실도 외척등살에 다 망해 가고 있습니다. 전계군 만하신 왕실 정통(正統)이 없으니까 미구에 대통(大通)의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사람 그런 무엄한 소리 말게. 누구를 또 역적으로 몰리게 하려고 그런 경솔한 소리를 하는가?

전계군은 속으로는 은근히 바라는 일이었지만 그런 소문이 퍼지면 자기에게 큰 화가 미칠것이 두려워서 이원덕의 호의를 경원해 했다. 그러나 전계군은 왕운의 대통을 보지 못하고 곤궁 속에서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뒤에 남은 아들이 어렸으나 이원덕은 그 소년의 장래에 왕운이 있다고 내다 보았다. 전계군의 큰 아들 이원경(李元慶)은 자기를 도와 준 이원덕의 은혜를 고맙게 여기고 외로운 마음을 의지했다.

이원덕은 불평 정객인 민진용(閔晋鏞), 박순수(朴醇壽) 등과 만나기만 하면 그들을 선동했다.

김가의 세도정치로 나라는 곧 망합니다. 나도 지금은 관상쟁이라고 천대를 받지만 새 세상이 되면 대감쯤 지낼 것입니다.

자네 자기 관상만 자랑 말고 우리 관상도 봐주게.

보나마나 멀지 않아서 두 분 다 대감이 되실 좋은 상입니다. 관상 말이 났으니 말입니다마는 전계군 큰 아들 원경의 상이 금년 안으로 대통할 운수입니다. 그래서 김가를 미워하는 몇몇 대감들에게 잘 말씀해 두었습니다. 새 세상이 되면 그 분들이 새 임금을 돕기로 하고요.

세상이 바뀔 수 있긴 해.

그야 전계군 아들이 임금 될 수도 있지. 홍경래가 살아 와서 세상을 뒤집더라도 누군가 이씨 왕족에서 새 임금을 세워야 할 테니까 말야. 그러고 살펴 보면 전계군 아들보다 가까운 종친도 없구만.

민진용과 박순수도 이런 맞장구를 쳤다.

영감들도 불평의 탁상공론으로만 말고 동지들을 규합해 두시오. 그러다가 세상이 바뀌면 한 몫 보셔야 합니다.

기왕이면 직접 일을 하지. 남의 힘으로 바꾸어질 때를 기다려?

그들의 불평은 이런 적극적인 음모로 발전했다. 민진용은 이종락(李鍾樂)을 죽산(竹山)으로 찾아가서 세도 부리는 김가 일파와 외척에 휘둘리는 무능하고 어린 임금을 몰아내고 전계군의 아들 원경을 임금으로 추대하자는 음모에 동지가 되라고 권했다. 그리고 또 포천(抱川)의 서광근(徐光近)도 권해서 충의계(忠義契)에 기명(記名)하게 한 뒤에 서울서 거사할 때에 폭도를 몰고 상경하라고 일러 두었다.

그러나 서광근은 서울의 거사를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중에 조부 서기순(徐箕淳)에게 들켰다. 그는 충의계의 음모 사실을 말하고 조부에게도 협력을 권했다. 그의 조부는 한때 승지벼슬까지 했으나, 김씨 세도로 몰려나서 시골에 내려와 있었으므로 이번 경주 김씨와 풍양조씨의 외척을 몰아내는 혁명운동엔 으례 찬성하거나 묵인해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감투 욕에는 부자간의 정의도 조손간(祖孫間)의 의리도 없었다. 서기순은 손자가 가담한 음모를 밀고하고 상으로 큰 감투를 쓰는 것이 더 빠르고 안전하다는 야비한 계산에서 손자를 팔았다. 그는 곧 서울로 올라가서 헌종의 장인 조만영(趙萬永)에게 충의계의 반란음모를 밀고했다.

이 밀고로 이원덕을 비롯한 관계자는 일망타진되어서 참형을 당했고, 밀고한 서기순의 손자 서광근은 고문 중에 매 맞아 죽었다. 그리고 왕족 원경도 십팔 세의 소년으로 사형되었다.

그러나 외척들에게 세도정치를 내맡긴 헌종은 허위(虛位)의 임금으로서 국정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또 왕자(王者)의 능력도 없었다. 자기의 임금자리를 노리는 반란 소문조차 모르고 오직 여러 비(妃)와 빈(嬪)과 무수한 궁녀들의 치마폭에 싸여 과음(過淫)으로 청춘의 혈기를 탕진해서 육체까지 허약해졌다.

이십이 되도록 많은 여자를 관계했으나 세자가 될 아들도 딸도 낳지 못했다. 그러자 조모, 모친 등 과부만 득실거리는 궁중에서는 자꾸 빈궁(嬪宮)만 늘였다. 그래도 소생은 없고 젊은 왕의 청춘만 병들어서 마침내 과음으로 인한 부족증이 걸렸다. 현대 의학으로는 일종의 폐병의 증세였을 것이다.

이십 세가 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이, 삼 년 동안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심한 불면증까지 겸해서 밤에도 잠을 자지 못했다. 피골이 상접하도록 수척할 뿐 아니라 체온까지 낮아졌다.

상감마마, 몸이 얼음장같이 찹니다.

밤낮으로 안기는 후궁들도 허약한 왕의 정력에 불안을 느꼈다. 그런 왕에게 생남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여자의 죄라고 탓하면서 양가(良家)의 딸을 자꾸 빈궁으로 끌어들였다.

이런 문제로 부사과(副司果) 이승헌(李承憲)은 상소를 올리다가 화를 입었다. 왕후 김씨,계비 홍씨의 나이가 아직 젊은데 또 빈궁을 모실 것이 아니라, 중전의 태후(胎候)를 돕기 위하여 경도(徑道)를 보강하면 될 테니 좋은 약을 쓰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이런 왕자 출생을 위한 의학적인 상소도 기이한 현상이었지만 이에 대해서 부수찬(副修撰) 윤경선(尹景善)은 불경한 상소문을 올린 이승헌을 처벌하라는 상소문으로 반박했다. 이것도 실은 당파가 빚어낸 소동이었다. 그러나 손을 보려는 대왕대비는 김재청(金在淸)의 딸인 십오세의 소녀를 맞아들여서 경빈(慶嬪)으로 봉했다. 이것으로서 젊은 헌종은 정식부인만도 세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마음대로 관계하는 궁녀가 수십 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린 소녀의 경빈의 몸에서 요행히 태기가 있었다. 궁중에서는 큰 경사라고 생남기도를 하고 기다렸으나 아기는 왕세자가 될 아들이 아니고 딸이었다. 그 공주마저 왕의 허약한 혈통 때문이었는지 곧 죽고 말았다.

궁중 과부 왕비들의 실망은 컸고 헌종의 허약한 부족병은 점점 중해지기만 했다. 혈통을 남기지 못한 젊은 왕은 언제 세상을 떠나버릴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당파싸움은 날로 심해 가기만 했다.

헌종 십삼 년에는 십 년 동안 세도한 풍양 조씨의 세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이 맹렬해졌다. 헌종의 외조부 조만영의 부자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가까운 외척으로는 조인영(趙寅永) 부자만 남았기 때문이다.

대사헌(大司憲) 이목연(李穆淵)까지 조병현(趙秉鉉)의 비행을 열거했다. 즉 외척의 위복(威福)을 방자하게 남용해서 매관매직으로 뇌물을 받아 거만의 사재를 축재하였다고 폭로하고 그런 무리는 숙청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대사헌의 이런 상소에 대해서 헌종은 일을 무마하려고 했으나 대사간(大司諫)까지 들고 일어섰다.

그러자 헌종도 하는 수 없이 그를 귀양 보냈다. 얼마 후에 철종(哲宗)이 등극하자 새로 득세한 안동 김씨가 그를 사형에 처해 버렸다. 헌종이 이십이 세로 승하하는 동시에 외척풍양 조씨의 세도도 완전히 끝났던 것이다.

 

 

 

江華 道令

 

헌종이 이십이 세로 세자가 없이 승하하자 후계 임금문제가 급하게 되었다. 이때 강화도에서 귀양살이로 상일을 하던 고아(孤兒) 이원범(李元範)이 뜻하지 않게 임금이 되었다.

이원범의 조부와 부친과 형제들은 모두 역적으로 몰려서 죽거나 귀양살이를 했다. 그의 조부는 사도세자의 이복형제 은언군(恩彦君)으로 역적이란 누명을 쓰고 죽었다.

그에게는 아들 삼형제, 즉 상계군(常溪君), 풍계군(豊溪君), 전계군(全溪君)이 있었다. 이중에서 상계군은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고, 풍계군은 은전군(恩全君)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전계군은 귀양살이를 하다가 빈궁 속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이 전계군에게 또 아들이 삼형제 있었다. 맏아들 원경(遠慶)은 술객 이원덕(李遠德)의 허황된 음모사건에 이용되어서 역적으로 죽었고, 둘째는 일찍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원범만 살아 남았는데 그는 후처의 소생이었다.

그의 모친 염씨(廉氏)도 세상을 떠났으므로 원범은 사고무친한 몰락 왕족의 고아가 되었다. 헌종과의 촌수는 칠촌 숙질간이어서 가까운 집안이었으나 역적의 후손이라고 생활도 돌보아주지 않았다.

강화도 섬에서 농사지을 땅 하나 없는 십사 세의 가난하고 무식한 고아는 강화도 성 밖의 오두막집에서 홀로 살면서 나무를 해다 팔기도 하고 남의 집의 농사 일도 거들어서 겨우 살아갔다. 먼 친척은 있었으나 도와 주기는커녕 냉대만 했다.

그러나 섬 사람들은 이 고아를 왕족이라고 놀려댔다. 강화도령이란 대명사는 우대하는 편이었다. <총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범아. 너도 왕족이면 양반 씨로선 제일인데 글이라도 배워야 하지. 그런 일자무식으로 아주 섬 상놈이 될 거냐?

밥 먹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글 공부를 해요.

그럼 내가 가르쳐 주마. 작대기를 땅에 놓으면 한일(一)자요. 네 낫은 정음의 기억(가)자다. 하하하.

불쌍한 왕족을 울리지 마라. 그러다가 왕의 용꿈이라도 꿔서 등극하면 경 친다.

핫핫핫.

동네 악동(惡童)들이 놀려대면 원범은 자기의 몸에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저주스러웠다. 그는 다른 총각들과 떨어져서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상놈의 총각들도 열대여섯 살이 되면 장가를 들었다. 원범은 그들이 부러웠다. 열일곱 살의 사춘기가 되어도 장가들 가망이 없었다. 섬 상놈이라도 그를 사위로 삼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고생을 할 바엔 상놈의 집에 데릴사위로라도 들어가고 싶다.)

원범은 그런 생각까지 해보았다. 그러나 그런 처복조차 없었다.

야 쇠돌아. 너 장가든 맛이 어떠냐?

원범은 새로 장가든 친구에게 농을 걸었다.

이놈아. 어른에게 쇠돌이가 뭐냐? 서방님이라고 해야지.

장가든 상놈의 청년은 원범을 호령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장래에 무슨 큰 꿈도 꾸어 보지 못하는 원범은 세상이 야속하고 두렵기만 했다. 가족이 모두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그 참상만 듣고 보면서 자란 소년의 마음에는 장래에 대한 꿈은 싹조차 트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십칠 세 쯤 되자 힘도 농사를 지을 만큼 되었다. 사고무친한 그는 자기의 육체 노동만 믿고 살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산비탈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고, 나무도 해다 팔고, 품팔이도 했다. 거친 밥이라도 제 힘으로 벌어 먹게 되자

(임금이니 벼슬이니 보다 이런 농사꾼 팔자가 편하다. 조부나 형제들 같이 역적으로 몰려 죽을 염려도 없고…)

이런 체념의 철학까지 체험한 그는 글 배울 욕심도 없어졌다. 오직 어떤 상놈의 딸이라도 아내만 얻으면 즐거운 가정을 이룰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가난은 면할 수 없었고 열아홉 살이 되어도 남루한 옷에 머리를 땋아 내린 외로운 섬 총각의 때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헌종 십오 년 유월, 헌종이 세상을 떠났으나 강화도의 고아 총각 이원범은 국상이 났다는 소문을 늦게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촌수로는 칠촌 아저씨인 왕이 승하했어도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다. 건너 마을에 살던 아는 상놈이 죽었다는 소문보다도 관심이 없었다. 장가를 못 들어 갓을 쓰지도 않았으므로 다른 백성들처럼 검은 갓을 흰갓(白笠)으로 바꿔 쓰는 그런 형식적인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었다.

궁중에서는 다음 임금을 모시는 문제로 중대한 회의가 중희당(重熙堂)에서 열렸다. 궁중의 어른인 대왕대비 안동 김씨는 옥새를 가지고 발친 상좌에 나와서 중신들의 회의를 주관(主管)하고 있었다.

어떤 왕족을 새 임금으로 모셔 들어야 할까.

대신들도 창졸한 문제라 대왕대비의 의중을 몰랐다. 그러나 안동 김씨파의 고관 몇몇만은 대계(大計)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대왕대비께서 종사(宗社)에 대한 분부를 정해 주십시오.

일시도 보위(寶位)를 궐 할 수 없사오니 대왕대비 어명을 바라옵니다.

원로 정원용(鄭元容)과 좌의정 김도선(金道善)이 재촉했다. 대왕대비는 울음 섞인 음성으로 그러나 기정 방침대로 말했다. 대신들의 귀에는 울음 섞인 낮은 말이 들리지 않았다.

글자로 알려 주십시오.

대왕대비의 울음소리와 함께 헌종의 모친 대비도 또 왕비도 눈물을 흘리며 울었기 때문에 좌중은 비창한 가운데 숙연했다. 왕대비는 정음으로 영묘(英廟)의 혈손(血孫)으로는 원범밖에 없으니 그로 하여금 종사를 잇도록 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의향은 어떠냐는 의미의 글을 써서 내렸다.

안동 김씨의 몇몇 신하를 제외한 여러 신하들은 뜻밖의 이름에 놀랐다. 그때서야 전계군의 막내 아들 원범이가 아직도 강화도에 생존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당하온 말씀이옵니다. 곧 승지에게 교서(敎書)로 번역(한문으로)해서 선포하고, 새 상감을 강화도에서 모셔 오겠습니다.

원로인 판부사가 직접 영접사로 가서 모셔오시오.

예, 망극하옵니다.

정원용은 대사가 간단히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안동 김씨들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헌종이 승하하자 전격적으로 임금을 정한 것은 안동 김씨 일파의 계략이었다. 이 문제를 국상 뒤로 미루고 질질 끌면 각 당파에서 신왕 추대의 암투가 벌어져서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대왕대비와 사전에 결정하고 곧 절차를 밟았던 것이다.

이런 벼락 임금의 희소식도 모르는 원범은 그날도 폭양 볕을 쪼이며 지게를 지고 들로 풀을 베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영접사 대시들보다 먼저 달려 온 교군(校軍)들은 신왕의 집을 찾아서 헤매다가 동리 사람의 안내로 초라한 초가삼간 집으로 달려갔다. 이웃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불쌍한 원범이까지 또 역적의 씨라고 잡아 죽이려고 서울서 병정이 몰려 왔구나. 원범이 신세가 가련하다.

하고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이 댁 도련님께서 어디 가셨소?

모릅니다. 산으로나 들로 꼴비러 갔겠지만요.

빨리 불러 오시오.

우리가 어디 간지 알아야지 불러 옵죠.

교군들도 동리 사람에겐 임금으로 모시러 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신성한 기밀은 대신들이 직접 예를 갖추어서 할 절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황송한 줄 알면서도 도련님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 때문에 꼭 잡으려고 온 군사인 줄만 알았다.

원범의 동무되는 총각들은 그에게 이 변을 알리고 어디로 도망을 보내려는 우정에서 몰래 그를 찾아서 들로 뛰어갔다.

원범아, 너 여기서 꼴 베고 있었구나. 큰일났다.

헐레벌떡하고 찾아온 친구 총각은 원범을 발견하자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무슨 큰일이냐?

원범은 태연한 태도로 반문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또 나를 놀리려는 장난이구나.

서울서 병정 수십 명이 와서 네 집을 포위하고 동네 사람더러 너를 찾아내라고 야단이다.

또 무슨 난리가 나서 너를 역적으로 몬 모양이다. 잡히면 죽을 테니, 빨리 도망쳐라.

원범은 깜짝 놀라서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죄 없이 죽었구나 하는 절망으로 눈 앞이 캄캄했다.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놈아, 정신 차리고 빨리 도망쳐야 산다.

빨리 알려줘서 고맙다. 그러나 이 섬에서 도망하면 어디 숨겠니? 네 집에 숨겨 달래도 겁나서 못 숨겨 주지 않겠느냐? 숨을 곳도 없고 숨겨 줄 사람도 없다. 조상의 죄를 지고 죽을 뿐이다.

그러나 제발로 걸어가서 잡히기도 싫어서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땅 속으로 그대로 들어만 가고 싶었다.

이때 다른 친구가 또 달려왔다.

원범아, 너한테 큰 운수가 티었다. 서울서, 아니 궁중에서 너를 데리러 왔다. 잡으러 온 줄 알았더니 병정들 말이 서울 데려다 왕족 대우로 잘 살게 해준다는 거다.

원범아, 그 놈들이 너를 잡으려고 꼬이는 수작이다. 속지 말고 어서 도망쳐라.

먼저 왔던 친구가 그럴싸한 말을 했다. 원범은 반신반의로 한숨만 쉬었다. 잡아가거나 모셔가거나 제 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도망할 기력도 없었다.

그래서 운명만 기다리고 있을 때 들로까지 찾아 나온 교군들이 저쪽에 보였다. 그들은 세 명의 총각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 중에는 분명히 대신같이 풍채도 좋고 비단 관복을 입은 노인이 교군과 함께 오더니

어떤 분이 강화도련님이신지요?

하고 세 명 총각에게 물었다. 세 명 중에서 제일 남루한 옷을 입은 원범이 풀밭에서 일어 서면서

대감, 제가 이원범이온데 무슨 죄로 잡으러 오셨습니까?

황공하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늙은 대신은 원범에게 공손히 읍하고

실은 대왕대비의 어명입니다. 곧 서울로 행차하십시오.

원범은 역적으로 잡으러 온 것이 아닌 것만은 알았다. 그러나 대신도 임금으로 모시러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민심을 자극시키지 않으려는 방법인 줄을 짐작할 원범도 못되었다.

원범아, 너는 서울로 잘 돼 가니 다행이다. 그러나 언제 만날지 모르는 작별이 섭섭하구나.

이놈들 무엄한 소리 말고 저리 비켜라.

상놈 총각들이 <너>라고 하는 수작을 망극하게 여긴 교군들이 원범의 친구들을 호령하고 대령한 남녀(藍輿)에 원범을 태워 모셨다. 원범은 꿈만 같았다.

너희들 우리 집과 논밭 좀 보살펴다오.

아, 그런 걱정 말고 잘 가거라.

원범은 집에 들려 갈 필요도 없었거니와 교군들도 남녀를 메고 그냥 큰 길로 향해서 강화읍으로 직행했다.

궁중으로 들어 온 원범은 대신들이 시키는 대로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대보(大寶)를 받고서 철종(哲宗)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글자 하나 모르는 야생아(野生兒)의 강화도령은 왕으로서의 호의호식이 도리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대궐이라는 감옥에 갇혀 죄수처럼 자유가 없는 것이 제일 고통이었다.

고추장에 비벼 먹은 꽁보리 밥이 꿀맛 같았고 그것이 술술 소화되어서 건강하던 몸이, 임금이 된 후로 먹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운동부족으로 소화가되지 않아서인지 게트림만 나는 위장병에 걸려 버렸다.

임금으로서 선정(善政)을 하려면 글을 배워서 덕을 닦아야 합니다.

신하들은 무식한 왕에게 글공부를 권했다. 이십 세나 된 임금이 천자문(千字文)의 주먹 같은 글자들을 보며

하늘천(天)

따지(地)

하고 읽는 것은, 배우는 왕이나 가르치는 학자나 민망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철종은 글읽기를 제일 싫어했다. 그러나 그런 무식한 철종이 정치에 무능하고 흥미조차 느끼지 않는 것이 세도정치를 하는 안동 김씨에겐 매우 편리했다. 처음부터 그런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는 왕의 결재를 취하는 형식을 밟았다. 대신들이 무슨 문제를 보고하고 의견을 말하면 내용도 모르고, 또는 알려고 조차 하지 않고, <좋소, 그대로 하오.> 하는 식으로 일체를 안동 김씨 일파가 하는 대로 방임했다.

 

 

 

임금에게 投石하는 民心

 

이십 세의 임금 철종(哲宗)은 아직도 여자를 모르는 강화도령이었다. 어서 대가 집 미모의 규수를 왕비로 삼아서 장가라도 들여 주었으면 했으나 헌종의 국상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운 궁녀들이 밤낮으로 시중하는 남치마 바람에 그는 청춘의 피가 끓어 올랐다. 그래서 왕후를 맞는 대혼(大婚)이 있기 전에 철종은 궁녀들에게 동정(童貞)을 바치고 여색을 향락하게 되었다.

강화도의 나무꾼 총각으로 시골 색시의 손도 잡아 보지 못하던 철종은 고운 궁녀들을 누구든지 수청들일 수 있는 것이 임금의 호강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에도 상관 않고 글 공부도 하기 싫은 그로선 궁녀들과의 유희가 유일한 기쁨이었다.

임금이 된 만 일년 이 개월 만인 철종 이년 팔월에 대왕대비는 안동 김씨 김문근(金文根)의 딸 십오세 소녀를 왕후로 간택해서 대혼례를 거행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대왕대비는 형식적인 섭정을 그만두고 친정(親政)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무식한 철종으로서는 친정할 능력도 없었다.

상감의 뒤엔 국구(國舅)가 있으니 나는 안심하고 거북한 수렴정치를 그만두겠소.

대비는 이 같은 말을 대신들 앞에서 했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친정이지만 실지로는 철종의 장인 김문근에게 섭정의 권한을 물려 준다는 선언이었다. 이 순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완전무결한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철종은 실제의 정치를 장인 일족이 하게 되자 할 일이 없었다. 철종의 일과는 오늘은 어떤 궁녀를 데리고 자느냐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궁녀들과 접촉에 말썽이 많던 대왕대비가 칠십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자 철종은 아주 마음 놓고 무수한 궁녀들을 모조리 범 하는 난음 생활에 빠져버렸다.

무능하던 선왕 헌종도 과색(過色)으로 이십이 세의 단명을 했고, 허약 때문에 자녀도 남기지 못했다. 그 덕택으로 임금이 된 강화도령도 그 길만은 선왕의 전철을 밟아서 더욱 철저했다. 왕비 김씨와 그 밖의 여러 궁녀가 십여 명의 자녀를 낳기는 낳았으나 모두 건강하지 못한 태아였기 때문에 모조리 일년을 못 살고 죽었다.

왕은 과음으로 양기가 부족해져서 성한 아기를 낳지 못한다.

시의들은 왕의 양기를 보충하려고 인삼, 녹용의 보약을 장복시켰으나, 약에서 얻는 양기보다는 소비하는 양기가 많은 왕의 몸은 쇠약해지기만 했다.

궁녀들의 치맛바람에 임금의 생명이 슬어진다.

이런 경멸적인 조롱이 궁중에서 공공연히 떠돌았다. 강화도령으로 이십이 되도록 여자를 모르고 건강하던 청년이었으나 임금이 되어서 궁녀들에게 그 야생적 본능을 탕진하자 삼십 전에 노쇠한 몸이 되어서 허리를 못 쓰고 수족이 찼다. 그리고 뼈만 남은 몸은 홀로 지탱을 못했다.

철종은 권력에는 처음부터 인연이 멀었지만 여색으로 육체까지 이렇게 쇠약해서 거의 폐인이 되자 처가인 안동 김씨의 세도만 극도로 번성했다.

재상급만 치더라도 영의정 김좌근, 이조판서 김병기(金炳冀),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 예조판서 김병지(金炳地)와 김병필(金炳弼), 형조판서 김영근(金泳根), 판서 김병주(金炳주)와 김대근(金大根) 그리고 김병국(金炳國)과 김병학(金炳學)도 차례로 영의정을 지냈던 것이다.

철종은 궁중에 선대의 과부 왕비들과 궁녀들 뿐이로서, 종친 왕족도 없고 외로운 존재였다.

다만 가까운 종친(宗親)으로는 사촌동생 경평군(慶平君) 뿐이었다. 철종은 역시 핏줄이 닿는 경평군을 때때로 궁중으로 불러서 서로 고독한 심정을 위로하곤 했다.

경평군은 철종과는 달리 글도 잘했고 인품도 늠름해서 왕의 대리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처가인 안동 김씨들은 철종이 가까이 하는 경평군까지 시기하여 궁중출입을 못하게 했다.

이씨 왕조는 김가 세도로 망한다. 금극목(金克木)이라더니 김성(金姓)이 목성(木姓)의 이씨(李氏)를 누르고 왕기(王氣)까지 범하는 말세가 되었다.

백성들은 이런 오행설(五行說)까지 들추어서 극성맞은 김씨 세도를 욕했다. 이런 풍설이 돌던 중 철종 십일 년 구월에는 돈화문(敦化門)에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타성(他姓)이 왕위를 범하므로 빨리 화근을 없애지 않으면 말세가 온다는 흉서가 붙었다.

이것은 세도하는 김씨를 욕하는 동시에 왕을 위협하는 정치적 모략이었다. 이런 흉서사건으로 궁중은 궁중대로 안동 김씨는 안동 김씨대로 그 음모자를 잡으려고 했으며 민심수습을 위한 대책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경평군은 관직도 없는 몸이라 그런 각의(閣議)에는 참가할 자격도 없었다. 그러나 평상에 품었던 안동 김씨에 대한 불평을 털어 놓았다.

이 나라는 이씨의 것이냐? 김가의 것이냐? 왕족은 모두 쫓겨나가고 김가만 세도를 부린다. 외척이 물러나야 나라가 바로 된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은 김씨파에서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임금 철종까지 무시하는 그들의 세도 앞에 경평군 정도를 숙청하는 것은 여반장이었다. 그들 일파는 직접 철종에게 경평군의 망동을 규탄하고 처벌을 주장했다.

돈화문에 붙인 흉서도 경평군의 소행이 분명하오. 옛날부터 종친은 궁중에도 정원(政院)에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법입니다. 상감의 지친일수록 언행을 삼가야 하는데 도리어 상감을 욕되게 하고 국정을 혼란 시키기 위해서 영부원군 김좌근을 비롯한 현관(顯官)들을 모함하는 망동은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철종은 하는 수 없이 경평군의 궁중출입을 금하겠다고 하고 그 정도로 무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씨의 재상들은 모두 결속해서 불충 무능한 우리는 국정에서 손을 떼겠으니 경평군같이 충성되고 유능한 자에게 국정을 맡기시오. 우리는 자퇴하고 성 밖으로 나가서 근시 하겠습니다.

이렇게 철종을 위협했다. 경평군을 처벌하지 않으면 철종에게도 협력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시위행동이었다. 왕도 척신의 세도에 굴복하고 경평군을 전라도 신지도(薪智島)에 귀양 보낸 후 그 배소(配所)에서 나오지 못하게 엄중한 경계를 하여 신변 구속을 했다.

사형 다음 가는 이런 처벌에도 분을 풀지 못한 김씨들은 그의 군호(君號)를 삭탈하고 서민(庶民)으로 강하(降下)시킬 것을 요구했다. 철종은 너무 심한 왕족 모욕이라고 분하게 생각하면서도 외사촌 동생을 서민으로 강하했다. 그래서 경평군은 칭호를 삭탈 당하고 서민이 되어 이세보(李世輔)로 명백만 보존했다.

왕의 위신으로 사촌동생을 억울하게 죄 주는 위인이 무슨 왕이냐. 궁중에선 궁녀에게 사족을 못쓰고, 국정에선 처가 등살에 사족을 못 쓴다. 이씨 왕조도 말세가 되었구나.

못난 임금의 소행은 항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위신이 떨어진 철종에 대해서 백성들은 경멸과 반감을 품어 거동할 때에 어떤 백성이 돌을 던져서 왕이 탄 덩으로 날아드는 불상사까지 생겼다.

임금에게 백성이 돌을 던진 것은 유사 이래의 처음이다. 유사 이래로 못난 임금이니까 당연한 대접이다. 민심이 천심이매 나라는 망하고 말 거야.

임금에 대한 백성의 투석사건은 장안에 큰 화제가 되었다. 그 화제 끝에는 으레 철종의 난잡한 사생활을 본 것처럼 들추었고, 세도 부리는 김씨에 대한 불평이 따랐다.

조정에서는 돌을 던진 백성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 배후를 캐서 김씨 반대파를 얽어 넣으려고 했으나 범인은 순진한 백성으로 자연발생적인 반발이었으므로 관인이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못난 임금 체면을 유지하려고 했다.

언젠 임금이 실지 정치를 했나? 재상들만 잘 골라서 충성되고 유능한 신하를 쓰면 되지 임금은 바보만 아니면 신하의 공로로 현군(賢君)이 되는 법이야.

그러나 지금 세도 김가에겐 나라에 대한 충성도 백성에 대한 책임도 없으니 탈이다. 거기다가 임금은 바보에다 과색으로 부족병에 걸려 있다. 백성의 돌벼락을 맞아도 싸다.

이런 투로 철종과 외척 안동 김씨의 폭정을 비난했다.

나라가 그 꼴이니 하늘도 노해서 흉년만 든다. 이렇게 살기 어려운 세상은 뒤집어 엎어야 한다.

근년에는 한발과 홍수가 잦아서 흉년이 자주 들었다. 거기다가 백성이 초근목피로 연명 할 때도 탐관오리는 가혹한 수탈로서 사복을 채웠다. 못 살겠다는 민심 소동을 이용해서 불평 정객과 정치 건달들은 반란 음모를 꿈꾸었다. 그리고 각처에서 기근으로 농민들이 산적으로 화해서 세상을 어지럽혔다.

이런 때 별로 벼슬이 높지 않은 김순성(金順性)과 전현감(前縣監) 이긍선(李兢善)은 몰락 왕족 이하전(李夏銓)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잡혀 죽기도 했다.

김순성은 기해년(己亥年)에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몰아서 축출한 때에 천주교에서 전향해서 신도 동지를 오위장(五衛將)의 무관 감투를 썼다. 그러나 명색만 오위장이지 궁정근무에는 참여하지도 못하였고 규칙적으로 봉록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생활이 곤란했다.

따라서 그는 경향 각지로 돌아다니며 호언장담을 일삼는 정치건달이 되었다. 김순성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으로서 완창군(完昌君=李時仁)과 친하게 지냈다. 완창군은 가난한 왕족으로서 당시의 임금 철종과는 촌수도 아득한 먼 종친에 지나지 못했다. 이 완창군도 철종과 세도 부리는 김씨 일파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만나면 정치적 불평을 했다.

그런데 완창군의 아들인 이하전(李夏銓)은 똑똑하여 소년 때부터 글재주도 좋고 기품이 강직하며 용모도 준수했다.

도련님 글재주가 놀랍다지요?

김순성은 완창군 집에 들리면 주인의 보비우겸 아들 이하전의 칭찬을 했다.

소년 과거라도 시켜볼 생각이요.

도련님은 과거만 보면 실력으로 장원급제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족을 배척하는 김가패가 방해나 하지 않을까요?

급제한대야 김가 세상에선 행세 못하겠지만 공부 실력이나 겨누어 본 뒤에 세상이 바뀌면 써 주겠지.

세상이 바뀌는 것을 기다리다간 또 딴 놈들이 세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들고 일어 서서 뒤집어 엎어야 합니다.

김오위장, 그런 소리하다 목 달아나려고. 나야 다 본 세상이라 아무렇게 죽어도 좋지만 아들만은 공부를 시켜야겠네.

그럼요. 장차 대통(大統)을 이어 받더라도 강화도령같이 일자 무식으로선 나라의 수치거든요.

허허, 이 사람 누구를 역적으로 몰리게 하려고 그런 소리를 하나. 강화도령이 그렇게 무식할까?

저보다 잘 아시면서 무슨 딴청을 쓰십니까? 천자(千字) 책 한 권을 몇 해 두고 배워도 못 떼었다는데야 알 것 아닙니까?

천자 책은 본디 어려운 글이거든. 그 천자의 글을 짓느라고 옛날 유명한 학자도 머리가 희도록 오랜 세월 고생해서 백수문(白首文)이라고 하지 않는가?

주인 완창군도 철종을 조롱하는 농담을 했다.

그래서 재주 좋은 강화도령도 한평생 천자와 씨름하는 모양이죠. 핫핫핫.

김순성 오위장도 농을 했다.

그런데 완창군이 자랑하는 아들의 글재주도 과거에는 보기 좋게 낙방거사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과거 본 글이 시관의 심사에서 낙방이 된 것이 아니라 과거 보는 시장(試場)에서 안동 김씨 자제들의 시기로 굴욕을 당하고 스스로 붓을 꺾고 퇴장해 버렸던 것이다.

완창군의 아들 이하전은 글을 잘못 지어도 이미 급제로 예정되어 기세 등등한 안동 김씨 청년들을 알았다.

완창군 댁 도련님이 왜 우리들 백성과 함께 과거를 다 보러 왔나? 왕족이면 양반 중에서도 양반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과거로 벼슬을 하려고 하지? 자고로 임금의 종친은 벼슬을 않고 점잖게 봉군(封君)의 국록만 먹을 것이지. 벼슬은 해서 백성의 재물을 긁어 먹을 야망인가.

이놈들. 내가 벼슬하려는 것은 너희들 김가 모양으로 조정의 세도를 잡고 사복을 채우려는 야망에서가 아니다. 임금을 돕고 백성을 편히 살게 하려는 포부에서다.

이놈. 먼 촌 종친이라고 우리 안동 김씨를 모함하느냐? 당장 사과하라. 사과하지 않으면 역적 다음 가는 관가모욕 죄로 다스리겠다.

세도 김씨의 청년들은 과거장에서 이하전을 공박했다.

너 같은 놈들과 한자리에서 과거 보는 것이 창피하다.

하고 이하전은 붓을 꺾어 버리고 퇴장해 버렸다.

하하하, 그 놈 과거에 자신이 없으니까 생트집을 하고 쫓겨 가는구나. 그렇게 벼슬이 하고 싶거든 너의 조상 능의 능참봉이라도 시켜주마. 핫핫핫.

안동 김씨 청년들은 과거장을 박차고 나가는 이하전의 등뒤에서 웃어댔다. 그러나 이하전은 그 뒤에도 공부를 열심히 했고, 몇 해 후에는 온후한 그의 인품도 세상에서 인정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부친 완창군이 세상을 떠난 뒤에, 왕족을 너무 냉대한다는 비난도 막기 위해서 한직 돈녕 도정(敦寧都正)을 시켰다. 그러나 그는 일체의 정치적 분쟁에선 멀리 하려고 조심했다.

 

 

 

비틀거리는 王孫

 

철종의 무능과 척신(戚臣) 안동 김씨 파의 세도에 불평하는 민심소란에는 으레 이것을 이용하려는 반란음모가 수반했다. 그리고 새로 추대해서 명분을 세우는데 이용할 인물에는 언제나 몰락한 왕족 이씨(李氏)가 선택되었다.

세도 김씨에게 역적으로 몰려서 귀양살이를 하거나, 아주 평민이 되어버린 몰락 왕족도 한번 원한을 풀고 임금이 되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겠지만 숨어서 사는 그들을 충동하여 한몫 보려는 정치 건달들의 음모도 작용했다. 그러다가 그 음모가 실패하면 왕족들까지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숙청되어야 했다.

강화도의 나무꾼 총각이 임금이 되었으나 나약하고 무능해서 척신 김가에게 휘둘리고 있다. 그러나 이번엔 초도도령님(椒島道令任)에게 왕기(王氣)가 비쳤다. 초도에 사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후손이야말로 왕실의 정통(正統)이다.

이런 풍문이 황해도 일대에 유포되었다.

소현세자는 인조(仁祖)의 맏아들이었는데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 아들과 손자들은 여러 명이 역적으로 몰렸다. 그 후손에는 이명섭(李明燮)과 이영섭(李永燮)이 있었는데 글도 잘하고 인물도 잘 생겨서 초도에서 인망을 받고 있었다. 다 같은 운명으로 귀양 간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임금이 되어 있는 철종보다는 인물이 월등 나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추대해서 왕을 갈아치우려는 책동이 <초도에 왕기가 있다.>는 정치적 유언비어를 퍼뜨렸던 것이다.

황해도 연안(延安)에 살며 정치적으로 불평객이던 진사(進士) 김응도(金應道)는 이명섭의 부친 이정현(李庭賢)과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가끔 초도로 가서 세상 이야기를 하면서 비분강개(悲憤慷慨)했다. 그들은 부친이 죽은 뒤에도 가끔 찾아와서 위로해 주는 김진사를 고맙게 대했다. 그런데 한번은 김진사가 찾아와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도련님 형제는 귀한 혈통의 후신으로서 앞으로 반드시 귀하게 되실 것입니다. 무식한 가짜 왕족이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이 꼴로 망해 갑니다. 지금 초도에 왕기가 비치기 시작했으니 시운이 오기만 기다리시오.

이명섭 형제는 꿈 같은 말에 우선 두려운 생각이 들었으나 부친과 막역한 친구요, 유식한 김진사의 말이라, 그런 행운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김진사의 말을 못 알아 들은 척했다. 그 후로부터 초도와 황해도 일대에는 < 초도에 새로운 왕기가 돈다. >는 풍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명섭과 이영섭 형제는 그런 풍문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또 임금 철종에 대한 반역의 꿈도 꾸고 있진 않았다. 그보다도 선대들이 역적으로 몰려서 강화도에 고아로 고생 끝에 임금이 된데 대해서는 오히려 축복을 했다. 같은 처지에서 고생하는 자기들도 무슨 덕을 볼 희소식이 있으려니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은언군 댁도 이제 역적의 누명을 벗고 참 잘 되었습니다.

그래 다행한 일이다.

하고 형제는 기뻐했다.

새 임금과 우리와는 촌수가 어떻게 되지요?

형 명섭은 오랫동안 족보를 따지고 나서

십육촌간인가 보다.

그렇게 멀어요?

십촌만 넘으면 남이라니까, 그냥 먼 촌 일가지 마…

형제는 좀 실망해서 쓸쓸히 웃었다.

그러나 불우한 왕족에겐 동정하시겠지.

그러나 그들에겐 새 임금이 들어선 뒤에도 아무런 기쁜 소식이 없었다.

우리 형제는 먹고 지낼 걱정은 없으나, 선친님들 누명이나 씻어 주시는 분부나 내렸으면 좋겠는데…

형제는 이렇게 은근히 불평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황해도 본토에 사는 불평객 채희재(蔡喜載)가 초도로 와서 이명섭 형제의 집을 찾아왔다.

댁에서 과객에 대한 대우가 후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하룻밤 신세 지려고 들렸습니다.

이런 섬까지 오셔서 얼마나 불편하시겠소. 누추한 집이나마 쉬어 가십시오.

주인 형제는 풍채도 근사한 선비차림의 과객을 맞아들였다. 그날 밤에 채희재는

나는 채제공(蔡濟恭) 종손으로서 이 나이까지 공부는 했으나 김가들의 세도정치가 남인(南人)으로 모는 바람에 과거도 단념하고, 이렇게 산수를 찾아서 돌아다니며 세월을 보냅니다.

신세한탄 겸 자기 소개를 했다. 그리고 주인 눈치를 보면서 세상에 대한 불평을 늘어 놓았다. 이명섭 형제는 그를 경계하면서 그의 정치 불평에는 관심이 없는 듯이 지나는 말로 흘려 듣고만 있었다. 신분도 모르는 사람의 이런 불평에 맞장구를 치다가 화를 입을까 두려웠다. 혹 자기들의 내심을 염탐하려고 온 밀정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도련님들은 나를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하는 것 같은데, 실은 연안 김진사하고는 생사를 맹세한 동지입니다. 김진사가 요전에도 댁에 들려서 세상 이야기를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하고 채희재는 갑자기 친밀한 표정을 지으면서 음성을 낮추었다.

김진사의 뜻이 바로 내 뜻입니다. 김진사가 도련님 선친과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예, 김진사는 선친과 친하셨고, 선친이 돌아가신 뒤에도 가끔 들려서 외로운 우리 형제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김진사는 우리들 동지와 함께 큰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요전에 와서도 초도에 새로운 왕기가 돈다는 말을 하셨죠?

네. 그러나 그게 정말입니까?

이명섭도 안심하고 채희재의 말에 끌려 들었다.

지금 임금이 무식한데다가 몸도 나약해서 멀지 않아서 병몰하겠지만 살아도 없애야 할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뜻있는 동지들은 멀지 않아서 도련님을 신왕으로 모시려고 전국의 충의지사(忠義之士)를 규합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뜻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런 큰 일이 어찌 쉽겠습니까?

도련님은 이 조그만 섬에 계시니까 서울사정과 전국의 민심을 모르실 겁니다. 그러나 시운은 무르익어 거고 있습니다. 우리 동지의 의거(義擧)를 믿고 기다리십시오. 모든 일은 우리 동지들이 하겠으니…

이명섭도 자기를 임금으로 추대해 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전에 김진사가 하던 말 보다도 확고한 태도로 다짐하는 채희재의 말에 세상형편이 그렇게 돌아가는 듯하기도 했다.

직접 행동으로 나와서 모험을 하라면 겁이 나서 거절 하겠지만, 그 비밀만 알고 기다리라는 말까지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일이 실패하지 않도록 잘해 주시오.)

하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동했다. 채희재는 그런 이명섭 형제의 심중을 살피자 무릎을 탁 치고 자신만만하게 역설했다.

염려 마시고 기다리시오. 우리도 일을 섣불리 하다간 역적으로 몰려서 죽을 텐데 조심 않겠습니까. 그리고 시운과 실력에 자신이 없이 어찌 경거망동을 하겠습니까?

하고 밤이 늦도록 철종의 욕과 척신 안동 김씨 타도를 역설하고 이튿날 아침에 그 집을 떠났다. 이명섭 형제는 멀지 않아서 임금이 될 듯해서 흥분했다. 좁은 섬에서 육지에도 가 보지 못한 그들은 글은 읽었지만 정치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위험한 것을 모르는 순진한 청년들이었다.

(무식한 강화도 나무꾼 원범이도 되는 임금이라면 우리 형젠들 못 될 법이 있으랴.)

하는 기묘한 망상조차 하게 되었다. 그리고 채희재는 연안으로 가서 진사 김응도에게 풍을 쳤다.

이번엔 초도로 가선 이명섭 형제에게 우리 뜻을 털어놓고 얘기해서 잘해 달라는 부탁까지 받았소. 관상을 보니 그만 인물이면 훌륭한 임금입니다. 역시 김진사 눈이 높아요.

이제 동지를 모아 자금을 조달합시다.

하고 두명은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무식한 시골 부자들에게 새 세상이 되면 큰 벼슬을 시켜 준다고 돈을 받아내고, 중병자에겐 병을 고쳐 준다고 속여서 정치 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채희재는 대담하게도 친구 사이인 구월산성의 별장(別將)에게까지 군사비 중에서 돈을 대고 병력도 협조시키라고 권하다가 코만 떼고 말았다.

내가 친구로 알고 한 말이니 비밀만 지켜주게.

채희재는 애걸했다.

친구를 고발해서 죽게야 할 낸가? 그러나 그런 허무맹랑한 음모는 그만두어야 하네.

그만둔다는 약속을 하면 고발만은 않겠네.

산성별감은 위협조로 충고했다.

허허허, 자네도 아다시피 내가 홧김에 해본 소리지, 그런 무모한 짓이야 어찌 하겠나?

그만두고 말고 할 것이 있겠나? 농담이니 염려 말게.

그런 수작으로 산성별장의 고발만은 모면했다. 그러나 자금이 조달되자 불량배의 장사(壯士)들을 매수해서 폭력으로 세상을 뒤집어 엎을 모의를 했다.

그런데 이들 중의 한 명으로 그전에 포교를 지낸 고성욱(高成旭)이라는 자는 문화현(文化縣)에서 행동대 병력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갈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내막을 알고 보니 허장성세(虛張聲勢)의 협잡성을 알게 되자 겁이 났다.

(에라 언제 볼 작자들이냐. 공연히 역적으로 잡혀 죽느니보다 이 기회에 벼슬이나 하자.)

하는 생각으로 몰래 서울로 가서 포도청에 밀고했다. 포도청에서는 대사헌(大司憲)에 보고하고 곧 황해도로 병력을 출동시켜서 김응도, 채희재 외 주동자와 그 부하들을 일망타진했다. 그리고 그들이 초도의 이명섭을 추대한다는 내막이 드러나자 그들 형제도 잡아들였다.

이로써 초도의 왕기는 사라졌고, 음모를 고발한 고성욱만 상으로 오위장(五衛將) 벼슬을했다.

전에는 철종의 사촌동생 경평군(慶平君)이 희생되었고 이번에는 십육촌의 이명섭 형제가 희생되었다. 다음에는 완창군(完昌君)의 아들 이하전(李夏銓)이 또 희생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하전을 추대하려던 김순성과의 관계는 앞에서 본 바와 같았으나 그 뒤에 이하전은 돈녕도정(敦寧都正)의 한직에 있었고 당시의 종친으로서는 유일한 관직자로 남아 있었다. 그는 왕족이 반란음모에 이용되는 폐단을 알고 있었으므로 모든 언행을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하전이 모르는 동안에 김순성 오위장은 이하전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준히 해왔다. 그는 그전에 현감(縣監)을 지내다가 김씨 세도의 여파로 몰려난 후에 불평을 품고 있던 이긍선(李兢善)과 의기가 투합(投合)했다. 시골로 돌아다니며 불평객 친구들과 연락하고 서울로 돌아온 김순성은 우선 이긍선의 집을 찾아갔다.

영감, 시골 다니면서 동지들과 연락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지방민의 인심도 모두 김가 세도에 진저리를 내고 있으며 병신 임금을 몰아내고 새 세상이 돼야 살겠다고 아우성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거사할 시기가 왔다고 봅니다. 새 임금으론 전에 다 말씀 드렸지만 돈녕도정 이하전, 그 분을 모시면 정계에서도 세상에서도 환영할 것입니다.

그야, 지금 왕족으론 그 분밖에 없으니까 그분을 추대하는 건 좋지만 우리 둘 힘으로야 어찌 세상을 둘러 엎겠는가? 일할 행동대가 있어야지.

지금 장사로 유명한 자로선 네 명이 있는데 모두 협력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들의 부하가 또 각각 많으니까 문제 없습니다.

오위장으로 행새하는 김순성은 건달 두목들과 안면이 넓어서 임일희(任馹熺), 이재두(李載斗), 고제유(高濟儒), 정유성(鄭裕誠) 등과 손을 잡게 되었다고 자랑했다.

허어 자네 활동이 놀랍군.

그래서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가서 정유성을 만났고, 전라도 해남으로 가서 임일희도 만나고 왔습니다.

음, 그러나 거사할 시기는 더 두고 연구해 보세. 그러는 동안에 실력이나 더 길러 두기로 하고…

아닙니다. 우리가 안 해도 딴 패가 일어설 것입니다. 기왕이면 먼저 해야지 늦으면 다음 세상도 딴 놈들 세상이 됩니다.

그럼 거사할 준비를 하세.

그들은 장사들을 매수해서 그들 부하의 부랑배를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그들이 사용할 무기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사들에게 칠월 오일에 궁중으로 쳐들어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병력 모집이 여의치 않아서 팔월 십일로 연기했다.

그러나 음모 내용이 허술한 것을 알게 된 장사의 하나인 이재두가 김순성의 협잡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우선 현재 진행 중인 음모의 내용이 이상했다. 일을 연기하는 것도 실력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그가 오위장으로 출세한 것도 그전에 천주교도를 팔아 먹은 배신행동으로 이룬 것이 꺼림했다.

(저놈이 이러다가 일에 자신이 없게 되면 또 우리를 팔아 먹을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팔아 먹으려고 꾸민 협잡인지도 모른다. 그 놈 장단에 춤추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고 그 놈만 출세시켜 주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장사 임일희에게 상의했다.

설마 그럴 리야 있나. 더 참고 있게. 내가 자네보다 더 가까우니까 잘 알아 보겠네.

그가 배신할지 모른다는 의심만으로 자네가 배신하면 그보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나. 죽어도 의협심을 지킬 자네가 그런 비겁한 행동을 해서야 되겠나.

하고 이재두를 타일렀다.

그럼 기다려 보죠.

이재두는 임일희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번 의심한 그는 점점 불안해지기만 했다. 그는 임일희도 모르게 포도청에 밀고했다. 포도청에선 곧 김순성을 잡아서 엄중한 고문을 했다.

이때 이미 영남지방에서는 조정을 규탄하는 행동과 재물을 강탈하는 등의 민란(民亂)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서울에서 이런 흉계를 꾸민 음모사건은 본보기로서도 엄단해야 한다고 김씨 일파에서 들고 일어섰다.

고문 결과 완창군의 아들 이하전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던 내막도 드러났다. 영문도 모르던 이하전은 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이십이 갓 넘은 이하전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무죄를 주장했다. 김순성은 부친 재세시에 집에 온 것을 본 일은 있지만 그 후 수년 동안 만난 일조차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저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전연 모릅니다. 그자들이 흉계를 꾸미느라고 혹 내 이름을 팔았다 하더라도 나로선 모르는 일이니까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그자들 중에서 나를 만나서 그런 모의의 말 한마디라도 한 사실이 있는지 그 자들이나 철저히 조사해 주시오.

추관(推官)이 김순성 등을 조사한 결과 자기들 마음대로 이하전을 추대하려고 했을 뿐 이하전과의 접촉은 없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추관도 이하전에게는 오히려 미안하게 여기고 일단 석방하고 근신하라는 훈계를 받았다.

그러나 김순성, 이금선 등을 역적죄로 참형한 뒤에, 김씨 일파는 이하전을 없애 버려야 금후에는 그런 추대음모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사건에 관련시켜서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철종도 마지 못해서 이하전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이하전은 소년 때부터 우리 김씨 일문을 원수로 삼아왔다. 과거 때도 우리 김씨 일문을 욕한 일이 있었다. 이번 일도 그 놈이 주동이 되진 않았더라도 정(情)을 알면서 성공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좌우간 그 놈은 우리 김씨의 적이다. 이 기회에 없애 버려야 한다.

귀양 보냈으면 됐지 억울한 종친은 그 이상 벌할 수가 있느냐?

온건파에는 이런 주장도 했다. 그러나 김씨파에서는 직접 철종에게 대들었다.

이번 역적음모도 이하전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상감께서 종친이라고 사정을 두고 살려두시면 또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그는 또 종친의 세를 믿고 충성된 척신을 타도하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런 자와는 같은 하늘 밑에서 상감을 보필하기 어려우니 불신 받는 우리는 조정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내야 종친이라고 무슨 두둔을 하겠소. 귀양 보내는 것이 옳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을 뿐이요. 귀양이 경하다는 경들의 의견이라면 적당히 처분하시오.

그전에도 이런 식으로 사촌동생 경평군까지 희생시킨 철종이었다. 그런데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이하전은 촌수도 먼 일가로서 개인적으로도 정이 들지 않은 왕족이었으므로 김씨 주장에 맡겨버린 것이다.

상감께서 이하전을 대역죄(大逆罪)로 사사(賜死)하라시는 엄교(嚴敎)가 내리셨다.

김씨 일파는 곧 이하전에게 독약을 내리는 절차를 취했다. 그래서 제주도로 귀양간 이하전은 목숨만 산 것이 다행이라고 체념하고 있다가 왕이 내렸다는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김씨 일파는 이로써 왕족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고도 분을 풀지 못했는지 서울에 남았던 이하전의 모친과 아내까지도 그가 죽어 없어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안동 김씨의 행패가 너무 과격해서 왕실의 인륜까지 끊으면서 자파와 정권연장에만 급급하다는 비난이 높아갔다.

(왕족도 우리 앞에 맥을 못 춘다. 하물며 불평정객이나, 성명 없는 백성이 김씨 세도에 반대하겠느냐?)

하는 김씨 일파의 기세는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천운(天運)과 민심은 이미 철종과 안동 김씨한테서 멀어지고만 있었다.

철종은 얼마 후 삼십삼 세의 청년으로서 후계 시킬 아들도 없이 과음(過淫) 여독의 부족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철종의 승하를 계기로 척신세도로 극성(極盛)을 부리던 안동 김씨도 급전직하로 몰락해 버렸던 것이다.

 

 

 

雲峴宮의 봄

 

샘물 잃은 갈대

 

사사로운 집안에서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하면 가정불화가 생기기 쉽다.

더구나 왕실(王室)에서는 더욱 심하다. 세자가 없어서 종친(宗親)의 소년을 맞아 임금으로 세우는 수가 있을 때 이런 양자임금을 가리켜서 입승 대통(入承大統)이라고 한다.

철종(哲宗)의 선왕(先王) 헌종(憲宗)이 무후(無後)해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강화도에서 곤궁히 지내던 빈농소년(貧農少年)을 맞아서 임금을 삼은 것은 앞에서 본바와 같이 소위 강화도령(江華道令)으로서 등극한 철종이었다. 선왕 헌종이 이십삼 세의 청년임금으로서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듯이 철종도 삼십삼 세의 단명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역시 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헌종과 철종 이 대의 임금은 모두 무능한 임금이었다. 헌종 시대에는 모친 신정후(神貞后) 조대비(趙大妃)의 수렴정치(垂簾政治)로서 외척(外戚) 조씨가 세도를 부렸다. 그리고 철종시대에는 외척 김씨(金氏)가 세도를 부렸는데 이 두 국척(國戚) 사이의 추잡한 파쟁 속에서 철종은 무위 무능한 임금으로 치맛바람에 취하여 스스로 젊은 생명을 소모해 버렸던 것이다.

일개 무능한 임금의 죽음은 인간적으로 동정이나 해주면 족했지만 지존(至尊)한 그 임금의 뒤를 잇는 자리다툼에는 실로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다음 임금을 모시는 문제로 세도하던 외척의 김씨와 조씨 사이에는 치열한 경쟁의 암투가 있었다.

결국 조대비는 흥선군(興宣君)의 둘째 아들을 맞아서 고종(高宗)으로 등극시켰다. 그 뒤로는 흥선군이 어린 임금을 대신하는 영악한 집권자(執權者)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흥선군이 바로 조선말기(朝鮮末期)의 역사를 뒤흔들고 민비(閔妃)와 함께 나라를 망쳐버린 대원군(大院君)이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양자임금으로 들어선 시기는 조선왕운(朝鮮王運)이 이미 기울었고 백성은 부패한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지칠대로 지쳐서 생활이 말 아닌 상태에 있었다. 위로는 왕위 쟁탈과 당파의 알력으로 집권층의 암투가 계속되어서 암살이 횡행했고 아래로는 병란(丙亂)과 민란(民亂)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조선의 정치가 이처럼 부패 문란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밖의 세계는 십팔 세기부터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경쟁이 치열해서 식민지 확장정책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구미(歐美) 열강의 세력은 점점 동양으로 손을 뻗어 왔다. 중국은 서양 열강의 강요로 굴욕적인 개항(開港)과 할양(割讓)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본도 삼백 년 동안의 봉건전제(封建專制)의 막부정권(幕府政權)이 무너지고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해서 서양문물을 수입 활용하여 근대국가(近代國家)로서의 새 출발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실과 위정자들은 이러한 동서양의 국제정세와는 고립해서 오직 왕위와 정권의 쟁탈에만 몰두하면서 소경 제 닭 잡아 먹는 우거(愚擧)만 일삼고 있었다. 그러나 거센 외세(外勢)의 바람은 우리 한반도(韓半島)에도 불어와서 마침내 외국 군함에서 쏘는 대포소리에 놀라게 되었다.

대원군은 이에 대한 자위(自衛)로 쇄국(鎖國) 정책을 단행했으나 결국 방안의 호랑이 노릇에 지나지 못했다. 그와 호적수였던 민비는 교묘한 외세 이용의 번복으로 자파 세력 유지에 급급했으나 결국 제 꾀에 빠져서 죽은 여우에 지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63년(哲宗 十四年) 봄에 아직도 삼십삼 세의 젊은 임금으로 거품 꺼지듯이 허약해진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궁중과 집권층 양반들은 임금의 죽음보다도 자파(自派)의 세도를 유지할 수 있고 또는 부활시킬 수 있는 임금을 택하기에 골몰했다.

세자를 정하지 못한 채 승하(昇遐)하셨으니 어떤 분으로 입승대통(入承大統)해야 좋을까.

모두 왕실을 위하는 충성스런 말을 수색 띤 얼굴로 걱정했다. 그러나 검은 뱃속에선 (이 기회에 꼭 우리 파에 유린한 분을 업고 들어가야겠다.)

하는 야심으로 암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항간에서는 쉬쉬하면서도 철종이 일찍 죽는 병인(病因)에 대한 화제에 더 흥미를 느꼈다.

흰 것을 쓰고 흰 옷을 입는 국장(國葬)은 단순한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백성의 존경을 받지 못한 임금이었다. 국상이 났다는 소문으로 비로소 철종이라는 임금이 있었던가 하는 반응밖에 없었던 항간에서는 쉬쉬하는 풍문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궁중에서 밤낮 한 일이란 허리 운동밖에 없었다니 무쇠 허리라도 병이 날 것 아닌가.

오랫동안 허리를 못 쓰고 누워서만 지냈다네.

허리 운동은 본디 누워서 하는 게 아닌가?

젊은 분이 요통으로 죽다니.

죽을 정도로 색에 곯으셨으니 염복도 많은 임금이셨군.

술자리에서 시정천민(市井踐民)들까지 이런 무엄한 흉을 볼 만큼 철종은 여색으로 몸이 허약해서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리 궁중 침실의 허리 운동이라도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비밀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왕자교육(王子敎育)도 받지 못했던 무식한 강화도령에게서 명군(名君)의 치적을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결국 등극 동기부터가 당파들의 이용물로 시작된 철종에게는 우선 왕의 실권을 행사할 만한 소양과 능력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외척 안동 김씨가 국권을 좌지우지 했으므로 한 일도 없고 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궁중에서 주색의 환락에만 빠져서 짧은 인생을 취생몽사(醉生夢死)한 젊은 임금이야말로 인생으로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철종이 강화도의 도령. 아니 나무꾼 총각으로 도민(島民)의 처녀와 가정을 이루고 빈한한 농부의 생활을 계속하였으면 아마 평범하고 건강한 몸으로 육, 칠십의 수명을 누렸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철종은 정비(正妃) 이외에도 무수한 궁녀들과 애욕의 생활을 누린 젊은 임금이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밤낮으로 정력을 소모한 젊은 임금은 몸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서 허리까지 제대로 쓰지 못해서 요통증이라는 병명으로 용미봉탕(龍尾鳳湯)의 천하 보약을 썼으나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정확한 현대의학으로 진찰했으면 폐병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여색의 중독 환자에게는 보양(補陽)하는 정력제도 소용이 없다. 약으로 보충한 이상의 정력을 계속 소모한다면 무슨 선약이 소용 있을 것인가? 몸이 허약해서 여자와의 동침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허양(虛陽)만 동해서 죽는 순간까지 궁녀의 치마폭을 잡고 놓치 못했다 한다. 궁녀들로부터 새어 나온 말이지만 결코 소박 맞은 궁녀가 꾸며낸 질투의 거짓말은 아니었다.

철종은 허리를 못쓰고 누워서만 지냈다. 궁녀들이 좌우에서 부축해 일으켜도 머리가 어찔어찔하고 눈에서 오색 불똥이 빙빙 돌다가 눈이 먼 듯 앞이 캄캄했다. 누워 있기에 지루해서 앉아 있으려 해도 혼자는 몸을 가누지 못해서 등뒤와 좌우에 궁녀들을 앉히고 기대 있어야 했다.

젊고 탄력 있는 궁녀의 몸에 기대어 있으려면 젊은 임금은 또 허양이 동해서 성적 유혹을 느꼈다. 그러면 궁녀 중 하나의 치마끈을 잡고 바르르 손을 떨었다. 치마끈을 풀 기력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궁녀들이 자리를 비켜서 그 방에서 나간다. 치마끈을 잡힌 궁녀는 남아서 이미 남자 구실도 못하는 임금을 만족시켜 주지만 궁녀 자신은 아무런 쾌감도 느끼지 못하는 순간적인 봉사를 해주어야 했다.

아아, 내가 이렇게도 허약해졌을까. 너를 마음으론 귀여워하면서 몸으론 귀여워할 힘조차 없구나. 이러다가는 아들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상감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송하오나 쾌차하실 때까진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마옵시면 어떠세요?

궁녀로서도 상감의 건강을 염려하고 말했다. 여자로서도 무의미한 육체의 봉사가 쑥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너까지 나를 실망시키느냐?

임금은 노염과 탄식 섞인 음성으로 궁녀의 허리를 껴안았으나 팔에는 힘이 없었다.

그런 말이 아니오라…

아, 다 듣기 싫다. 너는 나보다도 힘차게 오래 안아 줄 하인 놈이 더 좋단 말이 아니냐?

바른 대로 말해라.

임금이 이렇게까지 애원하듯이 추궁하면 궁녀는 의무적으로라도 갖은 성적아양과 기교를 부려서 무능한 임금을 위로하고 자극해 주었다. 이래서 임금의 정력은 더욱 소모되고 생명은 단축되었다.

나는 너를 안은 채 죽어도 좋다. 너희들 없이는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풍류탕아(風流蕩兒)는 남자의 죽음은 여자와 동침 중에 복상사(腹上死)가 제일 좋은 인생의 최후라고 한다지만 이 젊은 임금의 건강은 이미 복상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러면서도 여색을 단념하지 못하고 환락의 습성도 버리지는 못했다. 철종 자신으로도 너무 여색을 탐하는 것이 건강에 좋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런 반성 정도로는 여자의 치마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야속했다.

아들 하나 두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하는 철종의 탄식은 왕위를 자기 혈통에게 이어주고 싶다는 희망 이외에 본능적인 고독감이기도 했다. 철종의 환경과 능력과 성격이 정치에 열중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밤낮으로 궁녀들과 성적유희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치에 대한 아무런 실권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정력은 어느덧 여색에 빠져서 무료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고, 그것이 습성의 중독이 되어서 마침내 정력과 생명을 단축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명예롭지 못한 병인(病因)의 화제만 남기고 아들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승하해 버리자 왕실과 세도 정치가들에게는 왕위 계승이란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가 닥쳤다.

이때에 정권을 전횡한 파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일족이었다.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은 세상에서 보통 생각할 수 있는 가까운 종친(宗親) 중의 인물(소년)로서 전계군(全溪君)의 아들영평군(永平君)과 풍연군(豊燕君)의 아들 완평군(完平君), 그리고 흥녕군(興寧君) 아들의 사 형제 가운데서 임금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외척으로서 가장 발언권이 강했던 국구(國舅) 김문근(金汶根)이 작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큰 타격이었고 그때까지 치밀한 사건 공작을 하지 못했으므로 매우 당황했다.

자칫하면 조가들이 무슨 음모를 할지 모르니 그쪽 동정을 살펴보라.

김좌근은 정적(政敵)의 움직임을 경계했다. 조가라 함은 조대비(趙大妃)와 그의 조카 조성하(趙成夏) 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조대비와 조성하는 안동 김씨 세도에 불평을 품고 철종이 승하하기 전부터 세자책립(世子冊立)에 관한 공작을 은연중에 해왔다. 조대비는 이 기회에 자기 파에 유리한 종족을 다음 임금으로 삼으려는 종전의 계획을 급속히 진행시켰다.

이런 문제에 대해선 조대비가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이 궁중 관례(宮中慣例)였기 때문에 아직 준비도 없고 발언권도 약한 영의정 김좌근파에게는 불리했다. 더구나 조대비 일파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에도 아직 어두었다. 한편 조대비파에서는 전격적으로 이 문제를 당행 하려고 했다.

 

 

 

잠자는 사자

 

왕위 계승에 관한 발언권은 혈통문제 인만큼 왕실과 외척(外戚)에 있고 대신들은 의견을 말할 정도이지 결정권은 없었다. 당시의 사정으로 발언권의 순서를 보면 조대비를 비롯한 과부(寡婦) 삼대(三代)의 왕후가 첫째요, 외척의 세력과 관계로는 철종비(哲宗妃)의 외척인 안동 김씨파가 둘째요, 익종비(翼宗妃)의 외척인 풍양 조씨(豊穰趙氏)가 셋째, 헌종비(憲宗妃)의 외척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못했다.

철종이 승하하자마자 조대비는 궁중의 최고 위의 권한으로 중신들을 창덕궁 안의 중희당(重熙堂)으로 소집하고 긴급회의를 열었다. 발을 늘인 상좌에는 신정후(神貞后) 조대비와 익종비와 철종비의 삼대 과부가 차례로 앉고,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와 남양 홍씨 출신의 중신들이 연석했다.

이 중대회의의 중심격은 물론 조대비였다. 조대비는 비로소 마땅치 않던 외척 김씨의 거두(巨頭)들을 멸시하는 권력의 쾌감을 느끼면서, 다음 임금으로 어떤 분을 모시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 자리에서 응당 강경한 복안을 주장할 영의정의 아들 김병기 이하의 안동 김씨들은 신통한 대책이 없었으므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면서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조대비는 외척들을 비롯한 중신들에게 아직 이렇다 할 안이 없는 것을 알아채고 자기 생각대로 결정해 버릴 결심을 했다. 만일 시간의 여유를 두고 생각해 보자고 하면 암투와 잡음이 생길 것을 두려워한 조대비는 당황하는 중신들에게 명령하듯이 독촉했다.

나 같은 미망인이 이런 망극한 국상을 당하여 원통한 중이나, 지금 나라 사정이 일시의 여유를 허락치 못할 중대 시각이니, 이 자리에서 속히 종사(宗事)의 대계(大計)를 결정하고, 이 전국대보(傳國大寶)를 계승케 하오.

하고 그 자리에 모셔 내놓은 옥새를 가리켰다. 조대비로서는 계획한 대로의 일대 연기를 한 셈이다.

그러나 김씨 일문을 비롯한 세도가들은 사건이 중대한 만큼 준비 없는 대답을 경솔히 할 수 없어서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것은 침울한 권력투쟁을 내포한 무거운 침묵이었다.

이때 정계에서는 오히려 세력이 미약하던 팔십 노신(老臣)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는 이미 조대비와 연락이 되어 있었으므로 역시 예정대로의 역할을 맡고 나섰던 것이다.

여러 중신들이 별로 아뢸 의견이 없는 것은 자성(慈聖)의 명지(明旨)를 기다리는가 하옵니다. 그러하온 즉 이 문제는 역시 자성께서 책정하시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이 말에 당대의 세도가 김씨 일파는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대의명분으로 조대비의 독단을 막을 준비도 없었다. 한층 더 침울한 공기가 흘렀다. 조대비는 이 중대한 문제가 뜻밖에도 자기의 생각대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그러나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중대 결정을 발표했다.

그러면 흥선군(興宣君)의 제이자(第二子) 명복(命福)으로 익종(翼宗)의 대통(大統)을 이어받도록 하고 싶소.

하고 당당한 선언을 했다. 김씨 일파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지금까지 멸시해 오던 흥선군이 이 순간에 득세하고, 김씨 일파를 조정에서 축출할 뿐 아니라, 보복적인 살육과 투옥을 감행할 것 같은 공포로 몸이 떨렸다. 흥선군이 자기 아들을 임금으로 등극시키면 곧 제일의 권력자로서 등장해서 어린 임금의 이름으로 무소불육의 괴완(怪脘)을 발휘할 인물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대왕대비의 말씀이 지당한 분부로 아옵니다. 황공하오나 후일의 증거로 친히 그 뜻을 글로 써서 내려 주십시오.

하고 정원용이 요청했다. 이 중대회의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대비와 정원용의 문답으로 된 연극이요, 다른 대부분의 중신들은 불평을 품은 침묵의 관객에 지나지 못했다. 조대비는 발 안에서 한글의 친필로 한 장의 선언문을 썼다.

<흥선군의 제 이자로 익종의 대통을 잇도록 하라.>

정원용은 자기가 미리 조대비의 뜻을 받아서 하는 연극이라는 눈치를 채이지 않기 위해서 심중한 태도로 일을 진행시키려고 도승지(都承旨) 민치상(閔致庠)에게 부탁했다.

도승지, 이 교서(敎書)를 한문으로 번역해서 좌중에 들려 주시지요.

한문으로 번역된 조대비의 교서 낭독을 들은 안동 김씨들은 과부인 조대비의 말로 들을 때보다 글로 되자 자기들에게 내린 냉혹한 사형선고문 같이 무서워졌다.

(이제 흥선군 손에 우리 안동 김씨는 다 죽겠구나!)

하는 한숨이 여기 저기서 새어 나왔다.

대왕대비께 아뢰오. 사왕(嗣王)은 아직 봉군(封君)하지 않고 계시오니 먼저 봉군하도록 분부를 내리시오.

역시 정원용이 절차순서를 요청했다.

과연 그렇소.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곧 궁중으로 모셔드리도록 예를 갖추어 마중 가게 하오.

조대비가 봉군(封君)의 칭호까지 그 자리에서 지어서 발표하는 것을 본 중신들은 미리부터 치밀한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더욱 놀랐다. 그리고 흥선군 – 즉 신왕(新王)의 생부(生父) 이하응(李昰應)의 야망이 번개같이 성공한데 놀랐다.

세도 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 일족은 임금으로 왕실에 들어앉은 이명복(李命福)이라는 소년이 문제가 아니고 그의 생부인 흥선군 이하응이 섭정세도(攝政勢道)로 정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흥선군 이하응은 그때까지 관도령(官道令)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온 몰락왕족(沒落王族)으로서 세도하던 안동 김씨의 멸시를 받아 왔었다. 일반 양반사회에서도 그를 장안의 부랑자(浮浪者)로 여기고 교제조차 하기를 꺼려했던 사람이었으나 아들이 고종(高宗)으로 즉위(卽位)하게 되자 일약 대원군(大院君)이 되어서 정권(政權)을 장악해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국사를 요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던 운현동(雲峴洞)의 집도 운현궁(雲峴宮)으로 존칭하게 되었으니 이때야말로 운현궁은 꽃피는 봄을 맞아 최고의 행운으로 빛나게 되었던 것이다.

흥선군은 1,820년, 즉 순조(純祖) 이십 년에 안국동(安國洞)에서 종친(宗親) 이병원(李秉源)을 조부로 남원군(南原君) 이구(李球)를 아버지로 하여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인은 민씨(閔氏)였다. 영조(英祖)의 현손(玄孫)뻘이 되고 자(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대담한 성격으로서 기국(器局)이 크고 호탕했다. 헌종(憲宗) 구 년에 흥선군으로 봉군(封君)되었고, 같은 십삼 년에 중국으로 가는 동지사(冬至使)의 물망에 올랐으나 실격(失格)하고 말았다. 그는 이때부터 관운이 비색했으며 동시에 세도가들에 대한 불평객이 되었다.

그 후에도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이니, 또는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니 하는 미미한 한직(閑職)에서 썩고 있는 신세에 지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헌종과 철종의 시대에는 외척 안동 김씨가 정권을 독점하고 왕족의 유능한 인물일지라도 정계 진출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가 놈들이 왕실과 국가를 망쳐버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그 놈들 역적을 소탕해 버리겠다.

불우한 시대에 태어난 흥선군은 시정의 부랑배와 불평정객들과 막걸리 타령을 하는 자리에서 이런 소리를 탕탕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는 이런 몰락 왕족의 불평을 문제도 삼지 않고 무시해 버렸다.

외척의 세도가 우리 왕족을 다 역적으로 몰아 죽이더라도 나는 놈들의 손에 죽지 않는다. 놈들의 원수를 갚지 않고는 죽지 않는다.

대감께서 그런 큰 소리 하는 것도 우리들 같은 서민과 술친구가 된 덕분인 줄 아시오.

만일에 그자들이 두려워할 만한 세력이라도 있어 보시오. 당장에 도정궁(都正宮)과 경평군(慶平君) 같은 참변을 당하실 게 아니요?

하하하, 그러니까 자네들과 술타령하는 것이 역시 제일이야.

하고 흥선군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흥선군도 세도하게 되면 우리들 막걸리 친구를 잊으실걸요.

그땐 기생집 유흥비며 노름 돈 걱정은 시키지 않을 테니 염려 마라. 큰 감투는 자네들 머리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적당한 호강을 시켜 줄게 두고 보아라.

흥선군의 시중의 서민 부랑자들과도 이렇게 친한 교제를 하고 취중 농담으로 정치적인 세력의 씨를 뿌리면서도 심중의 큰 야심은 숨기고 있었다. 불평과 고민을 이런 부랑자들과의 술타령으로 잊으려고 했으며 유명한 난초그림(蘭畵)의 청아(淸雅)한 풍류로 고독을 위로했다.

그리고 무슨 일을 몰래 꾸미는데도 뒤에서 기안묘책(奇案妙策)으로 동지를 지휘했다.

헌종 때에는 세도하는 외척 김씨 때문에 왕족들이 숨도 못 쉬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철종 십삼 년에는 도정궁 이하전(李夏銓) 사건이 발생했다. 왕족 이하전은 기개가 높은 인물로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지지를 받고 철종 대신으로 왕위계승(王位繼承)의 후보자로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외척 김씨들은 그런 유능한 인물을 임금으로 맞아들이면 자기들의 세력에 방해가 되리라는 생각에서 반대하고 무능한 강화도령을 철종으로 맞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으로 무사했으나 이하전을 지지하는 영의정 권돈인을 몰아낸 뒤에는, 이하전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대역죄(大逆罪)로 몰아 없애고 연루자 이긍선(李兢善)과 김순성(金順性) 등도 처형하였다. 이 사건도 그들을 배척해 버리기 위하여 김씨 일파가 꾸민 연극임을 세상에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 사건보다도 이년 전인 철종 십일년에도 왕족 경평군 이호(慶平君 李皓)도 세도하는 외척을 비난했다는 설화(舌禍)로 원도(遠島)로 귀양을 갔다.

경평군도 김좌근, 김문조 등 세도 외척의 욕을 하다가 그런 봉변을 당했으니 대감도 말조심하시오.

하고 술친구들이 충고하면 흥선군은 껄껄 웃으면서

그 분은 같은 말을 해도 상대자가 자네들 같은 무식쟁이 망나니가 아니고 꽁한 샌님들과 찬물만 마시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했으니까 무슨 음모라도 한 것처럼 몰아대기 쉬웠던 거야.

그렇지 않소. 경평군의 말동무가 우리들보다 유식한 양반이래서가 아니라 대감이 경평군만도 못하게 김씨 일족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허긴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놈들에게 철봉을 가할 순간까지 내가 무능력한 주정뱅이로 인정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대감의 신변보호를 하는 광대란 말인가요?

그러니까 내가 막걸리라도 사는 게 아니냐? 아무튼 이런 시절엔 술이나 먹는 게 제일이다. 그런 얘기를 하면 술 맛이 쓰다. 자! 잔이나 들까.

그런 농담을 하면서도 그는 경평군이 세도가 김좌근의 욕을 한 죄로 작호(爵號)를 박탈당하고 귀양까지 갔던 사실에는 항상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후일의 대망(大望)을 도모하기 위해서 우선 생명의 안전만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정계 진출의 뜻을 일단 단념했

다.

그래서 모략과 살육을 일삼는 정계(政界)를 멀리하고 세상을 버린 풍류객, 또는 타락한 유야랑(遊冶郞)을 가장(假裝)하고 시정(市井)의 부랑아와 어울려서 막걸리 타령으로 세월을 보냈다. 취하면 세도 김씨의 욕도 안주 삼아 탕탕했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 한 말을 문제 삼기엔 영의정 김좌근은 너무도 위대한 권력자였고, 흥선군은 너무도 타락된 관도령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심중에 원수로 여기는 세도가의 집을 직접 찾아 다니면서 비참한 구걸행각까지 했다. 모든 자존심과 체면도 버린 그런 행색도 그의 도량이 큰 원모(遠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우선 빈한한 그로서는 그들의 동정을 빌어서 당장의 실리(實利)도 취하고 그들에게 자기의 야심을 숨겨서 안심시키고 겸해서 그들의 동정을 염탐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대감, 큰 아들 놈이 빈들빈들 놀고 있어서 꼴이 보기 싫으니 무슨 일자리 하나 생각해주시오.

하고 엽관운동도 아닌 밥벌이의 취직운동을 했다.

대감, 좋아하는 술은 해야겠으니 술값을 좀 주시오.

하고 용돈 구걸도 했다. 재상 김좌근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비롯한 여러 재상집을 이런 구걸로 무상 출입했다.

하하, 관도령님이 헌신짝을 질질 끌면서 재상집 구걸을 다니시니 상당한 술값을 얻으셨겠군요.

재상집 큰 사랑에 우글거리는 문객(門客)들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멸시하는 태도로 조롱했으나 관도령은 조금도 개의(介意)하지 않았다.

마침 병풍을 꾸미게 됐으니 관도령님 난초 그림이나 몇 폭 그려 주고 가시오. 그림 값은 생각하리라.

하고 돈을 거져 주기가 아까워서 그런 청을 조롱하듯이 하는 재상도 있었다.

대감, 나는 이래도 환쟁이는 아니니까 그림 값은 싫소. 그림은 선사할 테니 대감도 술값을 선사하시오. 하하하.

하고 관도령은 난초 그림을 신나게 휙휙 그려 주고 그 그림 값의 몇 분의 일도 못 되는 술값을 주면

아아, 대감댁 인심이 제일야.

하고는 술집으로 갔다. 이런 흥선군의 탈속한 태도에 정객들은 그를 위험한 정적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면으로는 귀신도 모르게 세력의 줄을 잡으려고 비밀 운동을 하고 있었다.

궁중에서 제일 어른으로 있는 익종후(翼宗后) 조대비(趙大妃)와 그의 조카 조성하(趙成夏)가 세도 김씨에 대한 불평을 품고 있는 것을 안 그는 우선 조성하와 친분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는 그 풍류객다운 가야금 솜씨와 난초그림 솜씨와 술과 말재주로 조성하와 인간적인 친분을 맺었다. 인간적으로 친해진 뒤에서야

대왕대비께 있어서나 조공에게 있는 부당한 고적감과 불우한 사정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나야 세상을 버린 몸이라 세도고 벼슬이고 다 구역질이 나서 입에도 올리기 싫지만 공이야 대비님의 어엿한 조카로서 왜 관운이 이렇게 비색하오?

그것이 모두 김좌근을 괴수로 한 김씨 일족의 횡포한 세도 때문이 아니요? 나는 내 야심이 아니라 자유롭게 행동 할 수 있어요. 만일 조공과 대비님을 위한 일이라면 우정으로 무슨 도움이라도 되겠소.

또 그 세도 김씨를 타도하는 일이라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칠 셈이요. 다행히 놈들은 나를 몰락왕족의 타락분자로 멸시하고 조금도 경계하지 않으니 뒤에서 돕는 데는 편이한 일이요.

이러한 말로써 조성하와는 김씨 타도의 동지가 되었다. 그는 감히 궁중에 출입할 자격이 없는 미미한 신분이라 조대비와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조성하를 통해서만 깊은 궁중에 있는 왕실의 제일 어른인 조대비와도 연락을 자주 취할 수 있어 김씨 타도의 먼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면서 장차 천하를 잡을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대원군에게 뜻밖의 행운이 빨리 왔다. 그것이 바로 철종의 승하로 아들이 없던 철종의 뒤를 이을 임금을 종친 중의 인물에서 구하는 문제가 난 것이다.

조대비, 조성하, 대원군, 정원용은 김좌근 등 김씨일파의 세도를 꺾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고 기뻐했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임금으로 세우자는 계획이 전격적으로 성공한 것도 이러한 흥선군의 치밀한 예비공작 때문이었다.

 

 

 

攝政 大院君

 

새로운 임금을 정하는 중신들의 긴급회의가 조대비의 이름으로 소집된 날, 아직 관도령의 조롱받는 신분인 흥선군은 운현궁에서 외출하지 않고 초조한 마음으로 대망(大望)의 기쁜 소식이 예정대로 오기를 기다렸다.

(김가놈들이 무슨 수작으로 대비님 의향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만일의 경우엔 어찌할까?)

만일 자기 둘째 아들이 이번에 임금이 되지 못하면 어찌 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었다. 오직 비는 것은 이 문제에 한해서 제일 강한 발언권이 있는 조대비의 용단만 바랄 뿐이었다. 문제가 미묘하게 발전해서 권력으로 쟁탈전을 벌리게까지 된다면 영의정 김좌근을 영수로 한 김씨의 세력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보, 궁중에서 무슨 기별이 없소?

흥선군은 부인 민씨에게 자주 물었다.

아무 기별도 아직 없습니다.

형님한테서도? 명복이 유모한테서도?

예.

그의 형님은 종척회(宗戚會)에서 일을 보고 있었으므로 조대비의 뜻을 미리 알려고 궁중에 보냈고, 임금이 될 명복의 유모도 연락 차 형님에게 딸려서 궁중에 보냈던 것이다. 흥선군은 일말의 불안감이 섞인 초조한 마음으로 혼자서 술만 마시며 기다렸다. 그답지 않게 어젯밤에 꾼 꿈도 되 생각 하면서 쓴 웃음도 지어 보았다. 이른 봄의 햇빛은 뜰에서 밝게 빛났고 남산 위에는 흰 구름이 가볍게 흐르고 있었다.

운현궁 뒷뜰 공중에는 조그만 구름 조각 같은 연 두 개가 경쟁하듯이 깜쭉 깜쭉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임금이 될 대명(大命)이 내린 명복이가 형과 함께 연을 띄우며 무심히 놀고 있는 것이다.

올 봄에 열두 살 된 명복의 모습이 갑자기 거인(巨人)의 환상(幻像)으로 흥선군에게 보이기도 했다. 이 순간에 흥선군은 영달(榮達)의 신(神)과 같이 보이는 어린 아들의 뒷모습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부디 임금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빌었다. 아들을 위한 마음보다도 아들을 미끼로 자기의 영달을 위한 야망이었다. 난초그림을 그리며 가야금을 즐기던 풍류객의 심정과는 딴판이었다. 천하를 호령할 호랑이가 숲에서 튀어나오려고 그 출발 시각을 기다리는 순간의 심정이었다.

그런 초조한 때에 운현궁과 문 밖에서

쉬위!

하고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앗, 그러면 그렇지!

흥선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가 안심한 듯이 웃음을 짓고 다시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팔십 노인의 정원용이 청지기의 안내로 사랑 마루에 올랐다. 흥선군이 방문을 열고 나가서 공손히 읍하고 모른 척하는 인사를 했다.

원로(元老)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대비님 명으로 왔소이다.

무슨 분부로?

하고 물으면서도 흥선군은 낯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은인인 동지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약간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았다. 역시 피차의 체면을 존중하는 정원용은 공식적으로 정중한 음성을 내어

대감의 둘째 아드님을 익성군(翼成君)에 봉하시라는 분부올시다.

황공하온 분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주(嗣主)로 모시게 되어서 곧 궁중으로 모시고 오라는 분부올시다.

네에.

하고 흥선군은 정원용에게 칙사에 대한 감사의 읍을 다시 했다.

잠깐 편히 앉아 계시오. 곧 차비를 시키겠습니다.

흥선군은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용도 이번 일에 성공한 공으로 앞으로 흥선군의 덕을 후하게 받을 것으로 짐작하고 마음이 흐뭇했다. 주인이 안으로 들어간 뒤에 혼자 사랑방을 둘러보니 집 꼴과 방안 광경이 말이 아니었다. 집만은 큼직했으나 기둥이 기울고 벽이 터졌으며 몇 해 묵은 도배지도 그을고 군데군데 찢어져서 밖의 화창한 봄 햇살과는 달리 우중충한 찬 바람이 돌았다. 오직 소박한 병풍에 주인이 그린 난초그림만이 싱싱한 향기를 피울 듯이 살아 있었다.

(폐옥 같은 운현궁에도 저 병풍의 난초가 봄을 맞았구나)

정원용의 노안(老眼)에는 유명하다는 흥선군의 난초그림이 오늘따라 더욱 명화로 보였다.

흥선군은 내실로 들어가서 부인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뜰에서 연 날리기에 열중해 있던 명복이를 불러들였다. 십이 세의 소년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의아한 얼굴로 부모의 웃는 낯을 쳐다보았다.

명복아, 네가 임금이 되어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네 이름을 불러 보는 것도 오늘뿐이다. 네가 임금이 되면 우리 부모도 네 신하가 되어 충성을 바치게 된다. 임금이 되면 지금까지의 개똥이 짓 장난을 해선 안 된다. 임금답게 될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

개똥이는 명복의 별명이었다. 이것이 그에 대하여 생부로서 사사롭게 타이르는 최후의 훈계였다.

오오, 우리 상감님, 축하 올리오.

하고 모친 민씨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는 비록 임금으로 지존(至尊)의 영위(榮位)에 오르지만 오늘부터 아들을 빼앗긴다는 어머니로서의 슬픔이 섞여 있었다.

좋은 영광의 날에 왜 눈물을 보이는 거요?

부인을 충고하는 흥선군에게는 아들을 빼앗긴다는 기분은 조금도 없었다. 아들이 임금이 되어서 궁중으로 들어가면 그 궁중이 곧 자기의 집으로 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린 임금의 실권을 자기가 대신 맡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할 야망은 이미 달성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아들로서 명복아, 개똥아 하고 불러 보는 것도 오늘 뿐 내일부터는 지존한 나랏님이며 우리 부모도 나랏님을 섬기는 백성이요. 그러나 역시 사친(私親)은 다른 백성과는 달리 친근하게 대해야 인륜에 어긋나지 않으니 앞으로도 잘 요량해 주시오.

모친은 이런 말까지 했다. 그것은 부친 흥선군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부친의 그런 심정은 모친의 단순한 애정의 호소와는 달리 세도에 대한 야망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임금이 되시더라도 부모의 정은 잊어선 안 되지요.

하고 부친도 모친의 말에 얼른 맞장구를 쳤다.

아버님, 어머님, 무엇을 벌써부터 저에게 그런 공대 말씀을 하십니까?

그 인륜의 효성은 감사하나 역기 지금부터 임금으로 대접해 올리는 것이 백성 된 도리요.

그러나 일단 귀한 자리에 앉으시면 조정의 권력을 쟁탈하려고 임금을 둘러싼 추악한 음모가 극심한 법이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부모의 정을 저버리는 일에는 귀를 기울이지 마시기 바라오. 이것이 등극을 앞둔 임금에게 아비로서 부탁하는 말이요.

흥선군은 아직 어린 아들이지만 왕좌(王座)에 오르는 그에게 위협의 주사를 미리 놓아 주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아버님, 제가 입궁하는 것부터가 아버님 덕택인데 어찌 부모님 은혜를 잊겠습니까. 앞으로도 공사나 사사나 모두 아버님 뜻에 맞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 덕택으로 임금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임금이 된 소년이 자기를 임금으로 세우는데 치밀한 정치적 공작을 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몰랐다. 오직 왕족인 부친의 혈육을 타고 났기 때문이라는 의미에서 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흥선군은 공사간의 문제를 부친의 뜻에 맞도록 하겠다는 말에는 매우 만족했다.

자아, 그럼 대비께서 기다리시겠으니 어서 궁중에서 보내신 이 옷을 입고 입궁해 가시오.

모친 민씨는 궁중에서 보낸 홍포(紅袍)를 입히고 복건을 씌워서 사랑에서 기다리는 원로 정원용에게로 보냈다. 명복은 사랑으로 가서 팔십 노인 정원용에게 할아버지를 대하는 존경의 마음으로 절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원용은 깜짝 놀라 말리면서 익성군님, 이번 대경(大慶)을 축하 아뢰오.

하고 정중한 읍을 먼저 했다. 궁중예법에 능숙한 그는 이미 정계의 실권자로 등장한 흥선군 앞에서 [상가마마]라고 아첨해 보이고 싶기까지 했으나 공직으로는 아직 등극대례를 올리지 않은 임금 후보자였기 때문에 지금 봉해진 익성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럼 노신(老臣)이 궁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정원용은 흥선군 부자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왔다. 대문 밖에는 남여(藍輿)가 대기하고 있었다.

가마에 오르시오.

정원용은 가마 문을 열면서 소년에게 타라고 공손히 권했다. 소년은 배웅 나온 부모에게 하직 인사의 절을 하려고 했다.

아니올시다. 지존(至尊)은 사친에게 절하지 않는 법이요.

하고 아들이 부모에게 절하려는 것을 막고 못하게 했다. 그러자 부모가 도리어 허리를 굽히고 아들이 가마에 타기를 기다렸다.

오오, 잘 가시오.

모친이 목멘 소리의 인사를 했다.

어머니!

어린 소년의 음성이 가마 안에서 들렸다.

정원용은 전격적인 조대비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운현궁에 왔으나 소년 신왕(新王)을 실은 남여가 떠날 때는 벌써 부근의 시민들이 소문을 듣고 문전에 몰려와서 이 놀라운 경사스런 가마가 떠나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허허, 사람팔자는 모르겠다. 외입쟁이 관도령의 아들 개똥이가 새 임금이 됐다!

관도령도 이젠 임금 아들을 업고 관재상(官宰相)이 되겠군. 용꿈 꾼 건 아들보다 아버지다. 

백성들은 감히 부러워할 수도 없는 이 사람 팔자의 용꿈으로 수군거렸다.

어느덧 운현궁에서 창덕궁까지의 길에는 구경 나온 백성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개똥이가 임금이 돼서 궁중으로 들어가는 가마다.

개똥이가 어떤 아인데. 그 이름이 천해서 천하 제일로 귀하게 된 모양이다. 이젠 쇠똥이가 영의정이 될 판이군.

정치에 무관심한 백성들도 그 이름만 듣고 이런 농을 했다. 그들은 쇠똥이가 될 흥선군 곧 대원군으로 세도를 부릴 인물의 존재조차도 몰랐다.

쉬이, 길 비켜라!

신왕이 탄 남여의 전후에는 동원된 친군영(親軍營)의 병정들이 호통을 치면서 혼잡한 군중을 정리했다.

개똥아, 너 임금이 되었으니 나도 벼슬 한자리 부탁한다.

어제까지 이놈 저놈하고 흙투성이가 되어 싸우던 동무 아이들이 부러운 듯이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가마에 탄 소년 임금은 그런 소리에 무슨 대꾸를 할 자유도 없었다. 그는 가마 속에서 그 정답던 아이들과 다시는 놀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섭섭했다. 어쩐지 겁만 나서 몸이 덜덜 떨렸다. 자기가 임금이 되어서 궁중의 주인으로 들어간다는 기쁨보다도 무서운 임금 앞으로 잡혀 가는 죄인 같은 공포심이 앞섰던 것이다.

궁중에서는 만조 백관들이 모여서 신왕이 될 익성군의 입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가마가 도착해서 정원용이 어린 익성군을 조대비 앞으로 인도해 가자 조대비는 영의정 김좌근 이하 고관 대작이 도열(堵列)한 앞에서

오오, 익종의 뒤를 이을 내 아들이 왔구나.

하며 소년의 손을 잡고 반가와했다. 앞서 익성군을 봉한 것이 바로 조대비 자신의 양자로 삼아서 왕을 삼으려던 계획이었음을 이제 분명히 알게 된 김좌근 이하의 김씨 일파는 아연실색하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세도만 믿고 나를 무시하던 너희들 안동 김가는 새 임금이 내 양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두어라.)

하는 위협이 조대비의 말고 행동에 여실히 나타났다. 조대비는 당황해 하는 김씨들 면전에서 예정대로 봉군식(封君式)을 그 자리에서 재빨리 거행하였다.

어느덧 황혼이 되고 곧 어두워졌다. 큰 촛불이 켜진 뒤에 궁중에서의 첫 수라상을 받은 익성군 옆에서는 따라온 유모 박씨와 처음 보는 궁녀들이 깍듯한 시중을 했다. 오늘 하루의 일이 아직 꿈만 같은 소년은 배가 고팠으나 진수성찬이 목을 넘어가지 않았다.

몸이 그냥 공중에 떠 있는 것만 같았고 정신이 없고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런 어려운 왕 노릇은 곧 그만두고 동무들과 장안 골목에서 술래잡기나 하고 노는 편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유인(自由人)의 언어와 행동을 할 수 없이 임금이라는 울에 갇힌 소년이었다.

시장하실 테니 어서 많이 드십시오.

궁녀들이 좌우에서 권했으나 소년은 그러는 등살에 먹을 것도 먹지 못하는 것이 화가 났다. 혼자 내버려 두면 오죽 잘 먹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점씩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으로 많은 반찬이 큰상에 가득한 것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난한 살림에서 어머니가 고생해서 차려 놓던 아버지 진지상의 무김치와 된장찌개만을 생각하니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빈상(貧相)이 밴 순진한 소년이었다.

유모, 다음부터는 내 밥상엔 이렇게 여러 가지 반찬을 놓지 못하도록 전하오.

네.

유모는 무심코 그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한 궁녀는 아첨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곧 조대비에 그 소식을 전했다.

어쩌면 어린 임금의 말씀이 그렇게도 현명하시게 지당합니까?

그러니까 내가 고른 아들 새 임금이 아니냐? 이제 나라가 바로잡히겠구나.

조대비는 나라가 바로잡힌다는 것은 으레 하는 형식상의 칭찬이요, 궁녀들로부터 칭찬해 주는 것이 기뻤던 것이다.

이것이 모두 대왕대비님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궁녀들은 조대비의 세력이 오늘부터 강해진 눈치를 알기 때문에 침이 마르도록 조대비의 비위를 맞추려고 새로운 임금의 칭찬에 정신이 없었다.

다음 날에는 임금의 생부에 대한 대우 문제가 각의에 올랐다. 조대비와 그 일파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라는 칭호로 승격시키려고 했다. 임금의 생부에게는 자고로 대원군의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일찍이 생존한 임금의 생부로서 대원군이 된 사람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 영의정 김좌근이 비로소 신왕 섭정에 대한 불만의 일단을 들고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미 소를 잃은 외양간을 고치려는 어리석은 짓이었으나 흥선군이 임금된 아들을 업고 정계에 등장하는 것을 막아 보려는 차선(次善)의 행동을 개시한 셈이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생존한 대원군이 없었습니다. 익성군의 생부를 대원군으로 봉하면 혹시 정치운동에 관여할까 두려우니 대원군 칭호는 그이 생존 시엔 보류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익성군의 생부가 혹시 정치운동에 관여할까 두려워하는 영의정의 뜻은 잘 알겠소. 그러나 영의정도 아다시피 흥선군은 그림과 술만 즐기는 세상이 다 아는 풍류객이니 번거로운 정치엔 뜻이 없을 분이요. 전례가 없다고 대원군을 봉하지 않으면 그 분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해서 어린 임금의 효성으로는 송구스러워 하겠으니 그것도 딱한 일이요.

조대비는 인정론(人情論)도 꺼내서 영의정을 괴롭혔다. 그러나 김좌근은 그 말은 못들은 척했다. 대원군이 될 흥선군은 김좌근의 그런 소견에 분격했으나 실권만 잡으면 그만이지 대원군 칭호는 실권을 잡은 뒤에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원군의 봉작(封爵)은

나 스스로 원하지 않으니 사양한다. 다시는 그 문제를 입에 올리지 말라.

하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조대비를 비롯한 일파에서는 정식으로 중지된 대원군 칭호로 흥선군을 불렀다. 김좌근은 명분만 얻고 실속을 잃었다. 이 문제에서도 그는 대원군에 게 진 셈이 되고 말았다.

대비께서는 그 문제보다도 빨리 신왕의 즉위식을 올리도록 하시오.

대원군은 조대비를 충동 였다. 조대비는 김좌근을 불렀다.

미망인으로 나는 세상 일을 모르오. 익성군을 좋은 임금으로 기르는 것만 즐거운 희망이요. 임금으로 기르기 위해서도 빨리 즉위식을 올리도록 제반 절차를 빨리 갖추게 하오.

즉위식의 시기는 잘 생각해서 아뢰겠습니다.

영의정 김좌근은 기정사실이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신왕의 즉위식만은 될 수 있는 대로 지연 시킬 전략을 세웠다. 어린 익성군이 정식으로 국왕 자리에 앉게 되면 대원군이라는 무서운 호랑이 역시 정식으로 정권을 뒤흔들고 나설 위험성이 빨리 노출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대비는 며칠 후에 또 즉위식의 재촉을 했다. 익성이 정식으로 임금이 되기 전에 김씨 일파에서 무슨 음모를 꾸밀는지 몰랐다. 김좌근도 성화 같은 조대비의 재촉은 그냥 묵살하고 연기만 할 명분도 서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곧 기일을 정하고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이래서 어린 임금은 조선(朝鮮) 제 이십육 대 고종(高宗)으로 등극했다.

아들을 고종으로 정식 등극시킨 대원군은 완전히 정권장악의 정치무대를 완성시켰다. 이제는 그가 복면을 벗고 그 정치무대에 주역배우로 등장만 하면 되었다.

음, 이젠 김씨에게 사원(私怨)도 풀 기회가 왔다. 아니 사원보다도 썩은 종래의 파당정치를 숙청하고 서정(庶政)을 일신하고 나라에 봉사할 기회가 왔다.

대원군은 세도하던 김씨에게 학대 받던 불평을 풀 수 있다는 것을 통쾌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정치적인 포부와 용기도 새롭게 갖게 되었다.

(미미한 존재로서 아들을 임금으로 등극시키는 첫 번 난관을 무난히 돌파한 내다. 이제야 무슨 일인들 못하랴. 알고 보면 김가에게도 수완 있는 정객은 없다. 모두 쓸개가 빠지고 머리까지 썩은 놈들이었구나)

대원군은 이번 왕위계승문제로 김씨의 세력단결이 대단치 않은 것을 실지로 알았다. 더구나 세도가 중에 중요한 한명을 자기 파로 무난히 매수해 버리기까지 할 만큼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던 것이다. 김씨 일족의 거물 중에서도 김병학(金炳學)은 비교적 당파성이 적고 관용성이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왕위계승 문제가 나오기 전부터 인간적으로 접근해서 친분을 맺고 지냈다. 그래서 대원군은 불우한 시절에 적지 않은 도움을 물심양면으로 받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왕위계승 문제가 나자 대원군은 김병학에게 자기의 의중을 털어놓고 찬성해 주기를 원했다.

이 일이 성사되면 대감께도 서운치 않은 대우를 하겠소.

허어, 그게 무슨 말이요. 이런 중대한 국사에 우리들 개인의 이해가 개입돼서야…

하고 김병학은 점잖은 미소를 띠웠다.

이런 말까지 하는 나의 심정은 대감이 찬성하건 반대하건 비밀을 지켜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한 것이니 그것만 알아 주시오.

음, 그런 신의가 없을 사람 같이 보였다면 섭섭한데요.

김병학은 역시 친구답게 웃었다. 대원군은 그가 적극 후원하지 않더라도 김씨 일족과 함께 반대하지 않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종친 중에서 어떤 한 분을 모실 문제니까 흥선군의 아들인들 물망에 오르지 말란 법이야 있겠소. 왕비와 충신들의 공의로 정할 문제니까 흥선군도 낙관은 못하겠지만, 과히 비관도 할 필요는 없어요.

김씨 일파의 거물로서 이런 이해와 동정을 해주었으므로 대원군은 큰 힘을 얻었다. 김병학의 이런 호의를 받게 되자 대원군은 그의 독특한 매력 있는 교제술을 발휘하면서 무릎을 치면서 바싹 다가 앉았다.

기왕 말을 했으니… 대감 잠깐 귀를…

하고 김병학의 귀로 입을 가져갔다.

내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대감의 따님을 꼭 왕비로 맞도록 힘쓰겠습니다.

음, 흥선군이 나를 그렇게까지 믿소?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믿으면 나도 흥선군을 믿어야 하겠군요.

김병학은 허허 하고 웃을 대목이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도 임금의 장인이 된다는 뜻밖의 유혹에는 정치적인 욕망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감, 고맙습니다.

김병학이 체면상 차마 확약은 하지 못하고 빙그레 웃기만 할 때 대원군은 그의 확답을 들은 듯이 감사의 뜻을 표하고 표연히 자리를 떴다. 그 뒤에 김병학은 다른 김씨들이 대원군의 아들 왕위계승에 반대하는데 동조(同調)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원군은 약속했던 김병학의 딸을 고종의 왕비로 맞아들이지는 않았으나 그가 집권하던 모든 김씨를 관직에서 숙청해 버릴 때도 이 김병학만은 전보다 중용(重用)해서 그때의 호의에 보답했다.

대원군은 김씨 일파의 일부를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 중립파로서 비교적 덕망이 두텁던 원로 재상(元老宰相)의 정원용과 박규수(朴珪壽)가 고종 즉위를 지지하도록 하는데 성공한 것도 그 당시의 정세로는 비상한 수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이면공작과 함께 조대비를 전면에 내세운 대원군은 뒤에서만 비밀 공작을 해서 소기의 대망을 달성했다.

실질적으로 궁중의 제일 어른이요, 형식상으로 섭정(攝政)이던 조대비는 영의정 김좌근의 집권당 일파의 세도를 무시하고, 대원군에게 실질적으로 국정을 요리할 수 있는 실권을 위임했다.

내가 미망인으로서 정치에 어둡고 국왕이 또한 어리니 대원군이 뒤에서 보아 주어야 하겠소.

이것이 대원군에게 물려 준 이유였다. 김좌근도 대원군 칭호를 봉하는 형식적인 반대엔 명분을 세웠으나 조대비가 비공식으로 개인적 고문을 삼겠다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졌다. 조대비와 고종을 사사롭게 돕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정권을 잡는 첫출발이 되었던 것이다.

사태가 이쯤 되자 이번에는 김흥근(金興根)이 또다시 조대비에게 직접 항의했다.

상감의 생부는 일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중대한 국정문제에 상감의 뜻과 생부의 뜻이 다를 경우에 상감께서는 부자의 도리로 뜻대로 하시지 못하고 생부의 뜻을 따를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卿)의 그 말이 옳은 줄 나도 아오. 그러나 정치문제가 아닌 상감의 건강문제, 교육문제로 지도해 올리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까지 막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무정한 일이 아니겠소?

조대비는 이렇게 김흥근의 화살을 피했다.

그리고 나로서도 상감으로서도 그 분에게 어떤 상당한 대우를 하고 자주 만나서 가정적인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 이것은 정치와는 관계 없는 인정상 문제가 아니겠소?

하고 조대비는 불쾌한 안색까지 보였다. 여기엔 좀 거북한 표정을 하던 김흥근은 일부러 웃는 얼굴을 하면서

예. 그런 의미의 대우문제로선 그 분과 나라의 체면을 유지할 정도로 적당한 땅과 돈을 하사(下賜)해서 생활을 편하게 하고, 그 분은 오직 나라의 태공(太公)으로서 전과 같은 풍류생활을 한가롭게 즐기게 하면 족하옵니다.

그러기에 그 분 자신이 전번의 대원군 봉하겠다는 말이 났을 때도 스스로 사양했으니 경들이 염려하는 정치관여는 없을 줄 아오.

조대비도 여자의 앙큼한 마음으로 솜에 비수를 싼 듯한 말로 빈정댔다. 그러나 대원군이 자주 궁중에 출입해서 그의 정치적 세력이 강화되기 시작하자 영의정 김좌근이 또다시 조대비에게 항의했다.

흥선군의 궁중출입이 너무 번거로운 듯해서 세상에 많은 오해가 생기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 분의 궁중출입을 삼가케 하고 천륜의 정의를 위해서는 상감께서 한 달에 한번씩 운현궁으로 행차하여 근문(覲問)하시면 될까 합니다.

대원군의 궁중출입을 금지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자 자리를 같이 하고 있던 대원군파의 조두순(趙斗淳)이 접적으로 이것을 반박했다.

대원군이…

이 첫마디부터가 김좌근과는 달랐다. 김좌근은 공식으로 대원군을 봉하지 않았으므로 흥선군이라고 했는데, 조두순은 대원군 파가 궁중에서 공공연히 부르는 대원이라 했던 것이다.

김좌근은 조두순이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조두순은 슬쩍 대원군의 궁중출입 가부는 피하고

대원군이 아무리 상감의 생부일지라도 상감 앞에선 사친(私親)의 신하에 지나지 않소.

그런 신하에게 친히 행차해서 볼 의무가 어디 있단 말이요?

그러면 흥선군에게 한 달에 한번씩만 궁중에 들어와서 상감을 뵙게 하고, 정사(政事)는 대비께서 수렴청정(垂簾聽政)하십시오.

하고 김좌근은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것으로 조대비는 정식으로 섭정(攝政)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렇다고 조대비가 지지하는 대원군의 정치에 대한 이면활동을 막을 수는 없었고 대원군을 한달에 한번만으로 궁중출입을 보장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좌근은 적어도 대원군의 궁중출입 제한과 감시를 제도화(制度化)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대원군도 김씨 일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궁중출입을 되도록 피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세력은 이미 확고부동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궁중에 자주 들어 가지 않더라도 그의 정치활동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조대비는 대원군이 궁중에 출입할 때는 장수 한 명과 군사 다섯 명을 출동해서 시위(侍衛)케 했다. 중요대관들은 자진해서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찾아서 문안하고 정치문제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결국 정치의 중심무대가 궁중보다도 대원군의 사저(私邸)인 운현궁으로 옮겨진 역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의 특별 통용로(通用路)와 통용문을 만들고 고종과 대원군만이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그리해서 처음에 삼가던 대원군의 궁중출입도 자연 무시되고 창덕궁과 운현궁은 한집안의 안채 사랑채처럼 되었다. 조대비는 국정(國政) 전반을 대원군에게 맡겼다.

따라서 대원군은 정식적인 관직명을 바라지 않고 이면에서 조대비의 교명(敎命)이나 고종의 왕명(王命)으로 자기 뜻대로의 독재정치를 감행했다.

이처럼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무서운 호랑이로 활약하게 되자 그처럼 오랫동안 세도가 드세던 영의정 김좌근 이하의 김씨 일파의 거물 정객들도 스스로 위축되어 자연히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대원군의 민완(敏腕)과 세력으로는 김씨 일파의 정적(政敵)을 무슨 역적의 죄명으로 몰아서 몰살할 수 있었고 귀양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런 옹졸한 방법으로 후환을 남길 작은 인물은 아니었다.

무용지물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가을을 맞은 낙엽은 바람이 안 불어도 우수수 떨어지고 만다.

대원군을 지지하는 조급한 자들이 김씨 일파를 엄중히 처치하자고 건의하면 대원군은 이렇게 여유 있는 태도로 회심의 민소(憫笑)를 띠우고 정적들의 자멸을 기다렸다. 그것은 그의 인간적인 관용성(寬容性)에서가 아니라 당파 싸움의 세도정치로 나라가 망하려는 것을 구해 보려는 그의 정치적 탁견(卓見)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세도 부리던 김씨 일파가 자연 위축되어서 자멸적 후퇴를 하는 동시에 그들 때문에 불우하던 유능한 인물을 초당파적으로 새로 등장시켜 청신한 공기를 정계에 일으켰다.

그것이 또한 일반 국민이 갈망하는 여론인 것을 그 자신이 천대 받을 때 시정을 배회하면서 직접 보고 느낀 체험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대원군의 독재적 세도정치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당시 민심에 환영 받을 근대적(近代的)인 정치를 그는 정책면에서 용감히 개척해 나갔다.

아, 그 놈의 지긋지긋한 김씨 세도의 세상이 망해서 시원하다.

이런 백성의 환호는 간접적으로 대원군의 정책을 지지했으므로 대원군도 더욱 자신을 얻고 종횡무진으로 혁신 정책을 실천하게 되었던 것이다.

운현궁 자리에서 왕기(王氣)가 서리고 이 나라에 성현이 나신다더니, 아이들까지 동요(童謠)로 부른 그 예언이 이제야 맞았구나!

하고 운현궁에서 고종이 나서 등극하고 대원군이 집권한 것을 마치 나라의 큰 경사처럼 찬양하는 소리가 장안에 퍼지기도 했다. 이것은 대원군에게 아첨하려고 꾸며진 선전만도 아니고 실은 철종 초년(初年) 때부터 동요로 불려진 예언이었다. 그러나 이런 예언이 공교롭게도 적중한 것은 대원군에게는 큰 힘이 되고 복이 되었다.

 

 

 

沒落하는 金氏勢道

 

대원군이 득세하게 되자 오랫동안 세도를 부리던 김씨 일문에 낙엽을 재촉하는 가을 바람이 쓸쓸히 불어 왔다. 그들에게는 < 김씨가 망해서 시원하다. 이젠 나라가 제대로 되고 백성도 편히 살게 되었다. >하는 백성의 소리가 더욱 무서웠다.

이런 판국이라 속으로는 전전긍긍하면서도 자기들끼리 모이면 대원군을 미워하고 욕했다.

그러면서도 대원군의 혹독한 숙청에서 구명(救命)되기를 은근히 바랐다. 세도 부릴 때는 안하무인으로 강하다가도 한번 세도가 꺾이면 비굴하게 약해지는 것이 당시 양반들의 특징이었다.

이들 안동 김씨가 득세한 것은 김조순(金祖淳)이 순조(純祖)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된 때부터였다. 그 뒤로는 순조, 헌종(憲宗), 철종(哲宗) 삼대에 걸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국정을 요리해서 일족 영달의 사욕에만 급급했다. 따라서 매관매직(賣官賣職)하는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백성을 수탈해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정치는 썩을 대로 썩었다.

김조순이 국구가 된 이후에 그의 일족에 있던 영의정과 좌상(左相)의 재상 노릇을 한 이름만 보더라도 좌근(左根), 병기(炳冀), 병주(炳注), 홍근(弘根), 응근(應根), 병시(炳始), 병덕(炳德), 달순(達淳), 수근(洙根), 병학(炳學), 병국(炳國), 이유(履裕), 이교(履喬) 등이다. 그리고 그 이하의 판서(判書)와 참판(參判)은 수십명에 달했고, 지방장관인 감사(監司)와 군수(郡守) 현감(縣監)까지도 모두 김씨 일족이거나 그들에 추종하는 사람들만 등용했다.

안동 김씨가 아니면 능참봉 감투 하나 못 쓰는 세상이다.

하고 불우한 정객과 선비들은 한탄했다. 그뿐 아니라

안동 김가가 아니면 인간이 아니다.

하는 교만한 소리가 그들의 입에서 서슴지 않고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세도가 당당하던 김씨 일파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등극하는 동시에 고종의 생부 대원군이 집권한 순간부터 추풍낙엽처럼 처량하게 시들어 버렸다.

처량한 신세가 된 김씨와 거두들은 북문 밖 삼계동(三溪洞)에 있는 호화로운 김홍근의 별장에 모여서 서로 신세한탄을 하면서 대원군이 자기들에게 어떤 숙청방법을 쓸까 하는 정세 판단을 하면서 화풀이로 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전 득세 시기에 이 별장에서 흥겹게 진탕 놀아나던 잔치의 술 맛과는 딴판이었다.

그까짓 망나니가 무슨 정치를 하겠소. 그 망나니 일당이란 기껏해야 천하장안(千河長安)의 잡것들이 아니요?

김홍근은 대원군을 망나니라고 멸시해 불렀다. 천하장안의 잡것들이란 천가, 하가, 장가, 안가들로서 그들은 모두 궁녀들의 오라비로서 신분이 천한 서울의 부랑자였다.

대원군은 그의 불평시대에 그들과 함께 항간을 헤매면서 주색잡기의 친분을 맺어왔으며, 천하를 호령하게 된 오늘도 그들과 그전 친분을 그대로 계속하면서 역시 시중 밤거리를 취해 돌아다녔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중요한 염탐에 이용하고 있었다.

그럼요. 그 따위 천하고 무식한 부랑배 일당만으론 정치를 감당 못할 것이요.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라도 우리 김씨의 힘을 빌지 않고는 일을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김씨에게 아직도 거친 손질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그런 협력을 구하면 못 이기는 척하고 자리를 지키면서 적당한 기회에 우리 세력의 만회를 도모합시다.

김병기는 비겁할 정도로 낙관론을 말했다. 그러나 김병학은 대원군의 인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의견에도 찬동하지 않았다.

그는 전부터 대원군과 친했고 고종 등극문제에도 다른 김씨들처럼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동족들 중에는 병학이 놈은 집안을 배반하고 대원군 덕을 볼 놈이다. 그러나 그 놈도 딸을 고종의 왕후로 시켜 준다는 꼬임에 속은 놈이니까 가엾은 놈이다.

하고 욕을 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조금도 동족을 팔아 먹을 마음도 없었고 그런 행동을 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은 받지 않았다.

대원군은 권력을 잡은 이상 나라가 흥하든지 망하든지 좌우간 큰일을 저지를 인물입니다. 우리 김씨 뿐 아니라 노론파(老論波)를 꺾고 새로운 서민적(庶民的) 정치를 해보고야 말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김씨만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일은 않을 것입니다.

자네는 중용될 테니까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자네 딸과의 국혼문제는 어떻게 됐나?

하고 김병기가 빈정거렸다.

그야, 흥선군이 낭인시절에 그 다운 농담이었지 지금 와서 어찌 우리 안동 김씨와 국혼을 하겠어요?

하고 병학은 겸연쩍게 웃어 넘겼다.

좌우간 그 천하장안의 잡것들과 막상막하(莫上莫下)한 망나니 보잘것 없는 자니까 그래도 나라 일을 해보려면 역시 우리 힘을 빌어야 할 거야.

병기는 아직도 정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자기들의 힘을 과신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형님, 그러나 그들 너무 얕잡아 봐선 안 됩니다. 앞으로 보시오. 그가 성미는 괴팍하지만 민심의 동태엔 우리보다 밝고 더 정확히 알고 있어요. 시중의 천한 무리와 간격 없이 주색 타령한 것도 실은 위장 호신술이었구요. 그 덕택으로 민심의 기미를 체험했고 백성에게 친밀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단순한 오입쟁이가 아닙니다. 앞으론 아무래도 백성을 떠난 양반정치론 민심을 수습할 것 같지 않습니다.

자네는 그 놈 덕을 볼 테니까 칭찬만 하는 게 아닌가?

아니올시다. 막말로 그가 무식한 망나니라 할지라도 미친 망나니가 권력의 칼을 함부로 쓸 때는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경계하시란 말입니다.

병학은 동족에게 배신자 취급을 당하기 싫어서 이런 말까지 했다. 이 말에 잠시 좌중은 침울해졌다. 자기 이외에는 천하에 인물이 없다는 자존심이 강한 병기도 목에 비수가 스치는 듯한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그래, 그 놈이 우리에게 미친 놈의 칼 장난을 해오면 어쩔까?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하지.

누군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병학은 일동을 위안시켰다.

그러나 그가 당장에 우리 김씨에게 잔인한 행동은 안 할 것입니다.

음, 세상은 이미 망나니의 것이 됐으니 패군지장의 우리들이 원망하고 욕하면 소용있나?

이런 때는 몸조심 하는 것이 제일이야. 아무튼 병학이, 자네가 그의 동정을 잘 아니까 무슨 수상한 눈치가 있거든 잘 연락해 주게. 미운 일가도 고운 남보다는 핏줄이 가깝지 않은가.

원 형님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만일 제가 그와 가깝다면, 그럴 경우에 동지 구실을 할 거 아닙니까?

대원군을 제일 멸시해 오던 병기가 이번에는 제일 그를 무섭게 생각하고 일종의 구명운동(救命運動) 같은 말을 했기 때문에 병학은 이런 말로 일동을 안심시켰다.

자, 그럼 피차의 몸조심을 위해서 마지막 잔을 들세.

하고 그들은 삼계동 김홍근의 별장을 나왔다. 초승달이 희미한 봄밤의 산길에는 세도를 잃은 정객들이 남의 눈을 피하듯이 뿔뿔이 떨어져서 내려갔다. 그 한 명 한 명의 희미한 그림자는 봄밤을 즐기며 거니는 이름 없는 백성들의 모습이 부러울 정도로 쓸쓸해 보였다.

며칠 후에 김병기는 자기 집에 잔치를 차리고 대원군을 초대했다. 그의 불안한 마음은 대원군이 자기들에게 대하는 태도를 은근히 떠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족들에 대한 명분이요, 역시 그 새로운 권력자의 호감을 사려는 비굴한 교제술이기도 했다.

그가 거만해져서 우리 집에 와 줄까? 그전엔 오는 걸 귀찮게 여기고 푸대접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오지 않을지도 몰라.

그는 대원군이 오지도 않을 것이 걱정스러웠다.

와도 좋고 안와도 좋다. 안 오면 그것으로 그의 태도를 알게 되니까. 초대한 것이 무의미하진 않다.

그는 또 이런 허세를 부려보기도 하면서 초조하게 대원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전 낭인 때와 같은 허술한 옷차림으로 청지기 한 명 거느리지 않고 표현이 나타났다. 큰 가마를 타고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위엄 있게 올 줄 알고 딴 방에 차려 놓은 요릿상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주인 김병기를 비롯한 일족들은 대원군의 단신(單身) 내방에 도리어 위압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역시 자기들을 경계하지 않는 태도 같아서 고마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주인 김병기는 옛날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문객방에서 푸대접해 보냈지만 이번에는 진수성찬을 자기 사랑방에 차려 놓고 기다리다가 그가 대문에 들어서자 마당까지 뛰어 내려가서 칙사 대접으로 모셔 올렸다.

대감께서 이런 누추한 집에 와 주셔서 황송합니다.

대감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집보다 훌륭한 고래등 같은 재상집인데 누추한 집이라니요.

전과 다름 없는 호탕한 농담이었으나 주인 병기에게는 가슴이 뜨끔했다. 우리 집이라는 운현궁은 이름이 궁이지 최고의 득세를 한 오늘까지도 폐옥을 면할 정도로 간소하게 수리했을 뿐 이 재상집에 비하면 오히려 누추할 정도였다.

(너희들이 얼마나 국고를 좀먹고 백성의 고혈을 빨아 모았기에 이런 으리으리한 고대광실에 떵떵거리고 살아 왔느냐?)

하고 질타하는 듯이 (자격지심이지만) 대원군의 말이 들렸던 것이다.

대원군은 권하는 대로 윗자리에 앉고 배빈(陪賓)으로 온 김병학과 그의 일족이 열석했다.

이 초대연에 대원군과 친한 김병학을 꼭 참석시킨 것도 이 자리의 공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생각에서였다. 서로들 인사를 마친 뒤에 병학이 먼저 잔을 들어서 대원군에게 권했다.

대감 한잔 드십시오.

이 댁에 올 적에 웬일인지 전과는 달리 다리가 떨리더군. 어디 술 기운으로 떨리는 마음을 달래 볼까?

대원군은 역시 뼈 있는 농담을 하면서 잔을 받아서 마신 뒤에

자아, 대감도 드시오.

하고 병학에게 잔을 돌렸다.

대감, 요즘은 얼마나 분망하십니까?

병학이 무심코 물었다.

아아, 나야 예나 지금이나 종로 뒷거리 상술지에서 탁주타령하기에 바쁘지요. 그밖에 바쁠 일야 있어야죠.

하고 아예 정치 이야기는 듣기도 싫어했다. 사실 지금도 그는 역시 밤이면 종종 옛날 부랑자 친구들과 어울려서 싸구려 주색을 적당히 즐기고 있었다.

대감, 제 술도 한잔 드십시오.

하고 주인 병기가 술잔을 권했다.

주인 대감의 잔은 못 받겠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술에 독이 들어 있지 않소? 나도 죽기는 싫으니까요.

넷?

병기는 안색이 창백할 정도로 초풍을 했다.

지금 잡수신 술과 같은 주전자에서 따른 술이 아닙니까?

허어, 아까 것과 잔이 다르지 않소?

그러면서도 대원군은 심술궂게 웃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 제가 먼저 시음(試飮)하고 드리겠습니다.

병기는 그 술을 쭉 마신 뒤에 다시 술을 부어서 대원군에게 권했다.

허허허, 이제 됐소. 주인이 먼저 하시고 객에게 주는 것이 주법(酒法)의 예절입니다.

제가 워낙 주법을 몰라서 실례했습니다.

대원군은 자연스런 태도로 이런 종류의 농담을 탕탕 해서 가끔 좌중이 서먹서먹해졌다.

아무래도 주인 병기의 정책적 초대연에 대원군은 흥이 나지 않는 듯 싸늘한 분위기였다.

이럴 때는 김병학이 웃으면서 부자연한 공기를 완화시키고 기생에게 눈짓하여 술을 권하게 했다. 기생은 좌석의 공기를 눈치채고 아양을 떨면서

대감님, 한잔 더 드십시오.

하고 잔을 두 손으로 들어서 공손히 올렸다.

이년, 기생노릇을 하는 너까지 주법을 모르느냐? 나는 역시 상술집 작부의 막걸리 잔이 구미에 맞더라.

하고 술잔 든 기생의 손목을 탁 쳐서 물리쳤다. 술잔이 나르고 술인 주인 얼굴에 튀었다.

기생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고 주인은 얼굴에 튄 술은 닦을 경황도 없이 대원군의 얼굴만 옆 눈으로 살폈다.

(또 왜 노했을까?)

그런 불안으로 등골이 서늘했다.

너,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아느냐?

죄송하옵니다.

잘못도 모르면서 무엇이 죄송하냐. 술좌석에 무슨 대감이 있느냐. 술 먹을 때는 재상도 망나니요. 정경부인도 화냥년이다. 그래야 술의 진미가 나는 법이다.

망나니 별명을 내가 너희들 대감들보다 낫다는 비꼬는 수작이었다. 이런 수작은 다른 재상 양반들은 도저히 몽상도 못할 명기(名技)의 농담이요 또 풍자였다. 이런 면이 대원군의 진정한 인간면이었다. 주인 병기 같은 양반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망나니의 명기였던 것이다.

네 알아 모셨습니다.

그 알아 모셨다는 말도 틀렸다.

망나니 이 술 한잔 드세요.

오냐. 먹고 말고. 하하하

대원군은 웃으면서 기생의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고

요 귀여운 화냥년의 기생아. 너도 한잔 들어라.

하고 대원군은 손수 술을 따라 기생에게 권했다.

호호호, 참 재미있는 술꾼이셔.

너 그렇게 반하단 몸선도 보여야 한다.

모르겠어요.

그래 그래, 알면 망나니한테 혼날 테니 모르는 게 좋으리라. 핫핫핫

대원군은 망나니 노는 꼴을 대감님들에게 보여 주려는 수작이었다. 덕분에 좌석에서 웃음 소리가 터졌다.

허허허, 여러 분의 그 웃음 소리를 들으니까 비로소 술맛이 나는군요.

너 이름이 뭐냐?

하고 이번엔 기생에게 물었다.

화냥년이요.

그렇지, 화냥년, 노래 하나 들어보자.

기생이 노래를 부르자 좌석은 더 한층 화기가 돌고 주인도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네 소리를 들으니까 거문고를 타주고 싶구나.

하고 옆에 있던 거문고를 잡아서 스르릉 줄을 훑어 유명하다는 거문고의 풍류객 솜씨를 자랑했다.

어쩌면 그리 잘 타세요? 저 같은 것은 어림도 없는 솜씨입니다.

기생도 정말 탄복해서 칭찬했다.

거문고하고 난초 그림으론 청나라에까지 유명한 분인 줄 모르냐?

김병학이 기생에게 대원군의 명기 소개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좌석의 흥이 높아졌습니다.

주인 병기도 대원군에게 치하했다.

자아, 나는 주량이 크지만 주인도 술을 하셔야 연회가 어울립니다.

예, 저야 얼마든지 하겠으니 대감도 좀 더하십시오.

허허허, 또 대감이 나더러도 대감이라는군요. 전엔 그렇게 인색하시던 술을 오늘엔 왜

이렇게 권합니까?

전 보다는 누그러진 말이었으나 또 가시 돋친 말이었다.

용서하시오. 그때는 그때요, 지금은 지금이 아닙니까?

주인도 솔직히 그전의 푸대접을 인정하고 취담(醉談)처럼 가볍게 사과했다.

허허, 피장파장이지. 나도 입으론 험담도 잘 하지만 건망증이 있어서 지난 일엔 구애하지 않는 사람이요. 산천도 변하는데 어찌 인심이 변하지 않겠소? 인심은 자꾸 새롭게 변해야 살맛 있는 세상입네다.

대원군은 이런 농담으로 주인의 초대연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주인도 이 말에 적지 않은 안도감을 느꼈다.

연회가 파한 뒤에 병기를 비롯한 안동 김씨 고관들은

알고 보니 대원군도 독종은 아니다. 김씨 일문이 참화까지는 받지 않을 것 같다.

하는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김홍근만은 너무 호화로운 삼계동의 별장을 짓고 호강했기 때문에 대원군보다 애교 있는 수단에 걸려서 골탕을 먹고 그 별장을 몰수 아닌 진상을 고종에게 자진해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계동 막바지 북악산 남쪽 기슭의 좋은 산수, 넓은 정원을 꾸민 그의 별장은 장안에서도 유명한 명승(名勝)이었다.

어느 날 대원군은 소탈한 평복으로 김홍근의 집에 표연히 나타났다. 그전 같으면 청지기나 문인들이 적당히 대하고 돌려 보냈으나 이번의 예고 없는 그의 방문에는 주인도 깜짝 놀라서 당황하게 사랑으로 맞아 올렸다.

아, 대감께서 미리 기별도 없이 웬일이십니까?

주인이 황송하게 물었다.

대감에게 청이 있어서 왔지요.

저에게 무슨 청이십니까?

주인은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실은 술친구들과 한적한 곳에서 하루 놀고 싶은데 대감의 그 유명한 별장을 하루만 빌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전 같으면 대원군도 감히 하지 못할 청이었고 설사 하더라도 당장에 당신 그게 무슨 망령된 소리요. 장안의 잡놈들과 술주정해서 남의 별장 망쳐버릴 생각이요? 원 별소리를 다하오.

하고 펄쩍 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달랐다.

대감이 쓰신다면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요즘은 통 나가 보지도 않아서 지저분할지도 모르니 며칠 여유만 주시면 소재도 하고 정돈해서 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올시다. 내일 쓰겠으니 그러실 여유도 없습니다.

그럼 오늘 중으로라도 소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빌려 쓰는 것만도 황송하온데 그런 폐까지 끼쳐선 내가 나쁜 사람이 됩니다. 정 그러신다면 그만두겠습니다.

허허허, 대감님 성미를 짐작하니 그럼 그대로 나가셔서 노십시오.

네 고맙습니다.

그의 집을 나온 대원군은 김홍근의 굽실거리던 광경이 우스웠다.

하하하, 김홍근이도 졸장부로구나. 그전엔 나를 그렇게 멸시하고 푸대접하더니 이젠 내 앞에 설설 기면서 살려 달라는 시늉을 하는구나. 가엾은 친구지만 이런 것이 세상 인심이다. 홍근이나 병기에 비하면 그래도 김가 중에선 병학이 의리 있는 친구다. 내가 곤궁할 때는 그렇게 전곡(錢穀)을 보내서 도와 주더니 내 형편이 달라진 오늘엔 아첨도 않고 친구로서 충고까지 해준다. 그는 역시 사람이 됐어.

대원군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튿날은 천하장안(千河長安) 등의 네 명의 유명한 부랑자 친구를 비롯한 천민(賤民) 출신의 옛날 술친구 십여 명을 데리고 삼계동에 있는 김홍근의 별장으로 놀러 나갔다. 장안의 망나니 일당이 별장으로 가니 오늘따라 굉장한 잔치가 준비되어 있고 장안의 일류 기생이 모여 와 있었다.

대감, 오늘은 웬일입니까? 마치 칙사 도임상 같은 진수성찬이 아닙니까? 대감 취미답지도 않게…

너희들을 위한 도임상이 아니다. 칙사를 보내시는 분께서 행차하신다. 너희들은 그 분이 퇴 하신 뒤에 이 상을 그대로 받고 진탕 놀아라.

일동은 깜짝 놀랐다.

그럼 상감께서 오늘 여기 행차하십니까?

대감, 이런 날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하고 일동은 긴장했다. 그러면서도 그전엔 자기들에게

아저씨, 엿 한 가래 사 줘요.

하고 졸라대던 그 개똥이 시절의 초라하던 소년 모습이 눈에 선해서 꿈결 같은 감회를 금하지 못했다.

이 별장의 여러 체 집과 정자들 가운데서도 제일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유관재(幽觀齋)는 실로 선당(仙堂) 같은 별천지였다.

대원군도 다른 정자에 간단히 차려 놓은 주석으로 술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일렀다.

여기서 두서너 잔만 먼저 하자. 상감이 오실 때까지 낯이 붉지 않을 정도로 하면서 놀고 있어라. 나는 잠깐 궁중으로 가서 상감을 모시고 나오겠다.

대원군은 궁중으로 급행하더니 이윽고 고종의 미행(微行) 행차를 인도하고 돌아왔다.

어린 임금은 유관재에서 유곡(幽谷)의 산수미(山水美)를 구경하면서 오찬을 하고 이내 환궁(還宮)했다. 그 뒤에 대원군은 밤이 늦도록 장안 오입장이들과 전과 다름 없는 잡스러운 유흥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에서 멸시 받는 이 천민 상인(商人)들의 잡놈들에게 자기의 정치적 포부의 일관을 피력하면서 그들의 협력을 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라를 구하는 정치란 별 것이 없다. 세력 없고 가난한 백성을 잘 살게 해주는 것이 바로 요순(堯舜) 시절의 선정(善政)이다. 민심이 천심(天心)이기 때문에 임금도 대신들도 백성을 하늘로 섬길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지금 같은 김씨 일파의 양반정치엔 민심이 따르지 않는다. 누가 저를 못 살게 하는 세도 정치를 신뢰하겠느냐? 백성을 위한 정치에 백성의 심정과 살림을 알아야 하고 백성 자신도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은 앞으로 내 수족이 돼서 높은 감투를 씌어 준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너희들에게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고관들은 뒤에서 감시하는 직책을 너희들에게 맡기겠다. 중앙에서 지방에까지 공정하고 치밀한 마패 없는 암행어사가 돼서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탐관오리의 죄상을 염탐해서 직접 나에게 보고하라.

이것은 민심의 동향과 관리의 행동을 정확 신속히 알기 위한 대원군의 정보망(情報網) 조직을 위한 중대한 포부였던 것이다.

대감, 그런 일엔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을 적소(適所)에 등용하는 거다. 그러나 만일 사원(私怨)으로 허위 보고를 하면 너희들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그런 중대한 공사의 죄악은 나의 우정으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허허허, 좌우간 너희들의 분투를 위해서 축배를 들자.

대원군의 지기(知己)에 감격한 일동은 간달다운 의협심으로 대원군에게 신의를 맹세하는 잔을 들었다. 대원군은 누구에게나 이런 식으로 솔직한 심정을 독특한 변술로 토했으므로 인간적 매력을 상대방에게 주어서 신임을 얻고 대소(大小)의 정치문제에도 큰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감님 이 김가 놈의 별장이 참 훌륭합니다. 이것도 모두 국고를 좀먹고 백성의 재물을 훔쳐서 지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이다. 앞으론 일체의 벼슬아치가 이따위 짓 못하게 너희들이 잘 감시하란 말이다.

우선 이 별장부터 대감께서 몰수하십시오.

이놈, 그런 생각이 바로 김가들이 지은 죄가 아니냐? 내가 왜 남의 재산을 빼앗겠느냐.

지난 일엔 나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겠다. 앞으로만 잘해 볼 생각이니라.

그럼 김가가 제물로 바치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 네 놈 눈치가 됐다. 그런 눈치로 모든 일을 염탐하면 된다. 실은 김가들이 나의 관용(寬容)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새 임금과 나를 깔보고 반성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 반성을 촉구시키려고 오늘 상감을 이 별장에 행차하시게 한 거다.

대원군은 그들에게만 그런 복안을 말했다. 그러나 상감의 행차와 이 별장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허지만 암만해도 이 별장을 김가들에게 그냥 주어 둘 수는 없습니다. 대감의 별장이 돼야지 우리도 종종 와서 이렇게 놀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너희들이 아다시피 돈이고 땅이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다. 나에게 대원군이란 허명(虛名)을 주기도 아까와하고 두려한 영의정 김좌근이가 그 대신 돈과 땅을 하사해서 편히 살게 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대왕대비께서 상당한 돈과 땅을 하사하겠다 하셨지만 나는 사양했다. 그런데 내가 이까짓 김가의 별장을 탐내겠느냐?

저라도 내일 가서 대감께서 이 별장을 퍽 좋아하시더라고 슬쩍 인사를 하면 곧 바칠 건데요. 김홍근은 대감께 아첨하려고 오늘도 선뜻 빌려준 거니까요.

허허허 진상 받으실 분은 따로 계시니 걱정 마라.

알았습니다. 그럼 김홍근이가 이 별장을 상감께 바쳤군요. 옳아, 그래서 상감께서 아까 첫 행차를 하셨군요.

허허허, 아직 바치진 않았지만 상감이 한번 노시고 가셨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그 자는 지금 억지로라도 반성하고 있을 것이다.

하하하, 대감님 장난은 이제 알았습니다. 상감께서 행차까지 하신 곳에서 제가 주색 향락의 장소론 쓰지 못하겠지요.

거참, 통쾌합니다. 그러나 상감께 진상되면 우리는 이번이 첫 번 구경이요. 마지막 구경입니다.

이런 별장 놀이가 있는 며칠 후에 김홍근은 정사(政事)로 고종을 뵈었을 때에 큰 충성이나 하듯이 공손히 아뢰었다.

상감께서 전날 삼계동 소재 신(臣)의 유관재에 나가 노셨다 하와 감격하였나이다. 경치 좋다고 칭찬하셨다 하오니 앞으로 종종 소풍하시면 좋을까 하옵니다. 그런 장소를 신의 도리로서 그냥 있을 수 없사오니 상감께 바치겠습니다.

김홍근은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 마음에 없는 충성을 보였다. 자고로 임금이 놀던 장소는 신하가 소유하지 못하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이런 수단으로 김홍근에게 억지 충성을 시켜서 그 자신의 생색을 내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화제도 장안에서 사라질 때쯤 되어 고종은 그 별장을 대원군에게 내려 주었다. 그때는 아무도 대원군이 김홍근의 별장을 빼앗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이 별장문제 이외에는 안동 김씨에게 아무런 정치적 보복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을 전부 요직에서 물러나게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초당파 인물중심의 대의명분에서 단행한 조각(組閣) 방침에 따른 인상을 일반에게 주었다.

뿐만 아니라 김씨 중에서도 몇 명의 인물을 중용하는 아량과 인정도 베풀었던 것이다.

하루는 대원군이 김병학의 집을 밤중에 혼자 찾아갔다. 김병학도 대원군이 밤중에 남 몰래 찾아왔으므로 약간 뜻밖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우정을 서로 믿는 사이라 반갑게 맞았다.

밤중에 웬일입니까?

실은 대감에게 쑥쓰러운 청이 있어서 왔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사이니까 거두 절미하고… 아시다시피 지금 초당파 인물중심의 조정을 꾸밀 준비중입니다. 어떤 한 개의 당파나 또는 양반만이 벼슬을 하는 폐단을 없애고, 어느 정도 똥상놈까지도 공평하게 등용할 결심입니다. 나라와 나라 일을 하는 벼슬 자리는 어떤 일파나 양반만의 농락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감의 그 개혁취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똥상놈까지 고관에 등용하면 역시 종래의 지배층이던 양반 관료와 유림(儒林)에게 지나친 충격과 반발을 일으키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만은 좀 서서히 하면 어떨까요?

일리 있는 신중론입니다. 그러나 독초는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것이 혁신정책이니까 다소 잡음이 있어도 구폐는 이때 단연 일소 해야하겠습니다.

대감의 용단이라면 하실 수 있겠지요마는…

내가 듣고 싶은 건 그 점입니다. 용단을 내릴 결심도 방안도 서 있지만 나에게 그 용단을 내린 후의 문제를 수습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솔직히 의견을 말해 주시오.

글쎄요. 아니 대감에겐 그 능력도 계십니다. 그러나 좀 어렵겠지요.

나도 그 어려울이라는 점을 잘 압니다. 그래서 실은 대감의 힘을 빌리려고 청하러 왔습니다. 대감은 계속해서 국사를 봐 주시되 이번 새로 조직하는 내각의 좌의정(左議政)을 맡아 주십시오.

김병학으로서도 뜻밖의 후대(厚待)였다.

대감의 호의에는 감격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선 우리 김씨를 모두 죄인 취급하고 있으며 또 당연히 삼가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또 나로선 친척들이 다 몰려난다고 비탄하고 있는 이때에 나만 그런 영전을 하면 친척들에게도 미안하니까 사양하겠습니다.

허허허, 세상 잡음과 인정만 생각하면 크고 어려운 일은 못합니다. 내가 몰아내지 않는데 김씨 일문이 왜 몰려난다고 야단들입니까? 다만 관계(官界)에 이동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선 김병기 대감과 나하고 사이가 제일 나쁘다고 하지만 그 분도 유임을 청하겠고 김병국 대감도 그냥 유임을 청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김씨 중에서 대감만 운운의 말씀을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대원군도 중대한 인사문제를 상의하는 자리라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대감의 지기지정(知己之情)에 감격합니다. 그 문제는 더 좀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그러나 혹 대감도 나와의 종래의 우정에 끌리지 않는가 하는 점을 재고(再考)해 주십시오.

하고 김병학도 냉정한 태도를 피차가 취하자는 말을 했다. 그러자 대원군은 껄걸 웃으면서 김병학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았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큰 일일수록 사람끼리 서로 믿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선 우정이 가장 중할지도 모릅니다. 내 진정을 탁 털어놓고 말하면 이제 나도 대감의 종전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내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네, 알 뿐입니까.

김병학도 가슴이 뭉클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새로운 조정 조직 명단에 요직을 차지하게 된 것은 김병학의 우의정 한 명 뿐이요, 김병기와 김병국은 유임이 아닌 감등 좌천으로 남았을 뿐 영의정 이하의 여러 판서들을 지내던 김씨는 모두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두 명을 다시 승진시켜서 준 것은 후일의 일이요, 김병학만은 뒤에 영의정까지 시켜서 대원군의 우정의 표시를 보았다.

 

 

 

天下를 두 손에 쥐고

 

一 대담한 人材登用

 

나라를 바로 잡으려면 모든 파벌을 초월해서 유능한 인재를 적소(適所)에 등용하는 것이 기초가 된다.

이것이 대원군이 주장하는 정치조직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믿을 만한 인물이어야 했고 또 한번 등용하면 자기가 더욱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난한 솜씨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대원군은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워 준 조대비에게 감사를 느꼈으나 수렴섭정(垂簾攝政)의 과부 조대비 치맛바람 밑에서 일하는 것을 거북스러 했다. 그래 고종이 열다섯살 되던 고종 삼 년 이월에 조대비의 수렴섭정을 폐지하고 국왕친정(國王親政)이라는 명복 밑에서 대원군이 직접 정치에 손을 대고 자기 마음대로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이때서야 그도 비로소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를 비롯한 대신의 요직을 그의 마음대로 쓰게 된 것이다. 이 당시 조정의 요직을 보면 영의정이 조두순(趙斗淳), 좌의정이 김병학, 우의정이 유후조(柳厚祚)였다. 조두순과 김병학은 종천의 관록으로나 대원군과의 관계로 보아서 당연한 인사였다. 그러나 우의정에 유후조를 등용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허어, 죽어 지내던 남인파(南人波) 유후조가 우의정이 됐어!

하고 대원군의 대담한 인사문제에 또 한번 놀랐던 것이다. 또 한번이란 이에 앞서서도 북인파(北人波)의 임백경(任百經)을 우의정에 등용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남인 유후조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기용한지 불과 일 년만에 일약 재상을 시켰기 때문에 정계에 큰 화제가 되었다.

대원군은 그 뒤에도 남인의 한계원(韓啓源)을 우의정으로 삼았고, 북인의 강로(姜老)도 좌의정으로 삼았던 것이다. 노론파(老論波)만 벼슬을 하던 구폐(舊弊)를 타파하고 남인파, 북인파에게도 환심을 샀다.

이제 남인도 북인도 사람 행세를 하게 되었다.

하고 사람들은 환영했다. 그 파에서 한두 명이 대관에 등용되어도 그 파에 속하는 많은 선비들까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적어도 세도파에 의한 멸시나 탄압을 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은 퍽 컸던 것이다. 과거의 그런 당화(黨禍)로 억울하게 정치범(政治犯)으로 처형 또는 박해당한 이백 명 가까운 사람도 모두 탕척(蕩滌)하고 복권시켰다.

그전에 유명했던 이하전(李夏銓)의 역적사건으로 고생하던 사람들도 옥에서 석방되었고 경평군 이세보(慶平君李世補)도 귀양을 풀고 벼슬을 시켰다. 특히 그전에 반감을 가졌던 이장렴(李章濂)을 위험성 있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한 사실은 대원군의 허심탄회하고도 대담한 인재등용이라고 큰 화제에 올랐다.

옛날 적에게 역적질 하기 제일 좋은 칼을 주었으니, 대원군이 어느 사이에 이대장을 그렇게 심복부하로 만들었을까? 정말 귀신이 곡할 인물등용의 요술이다.

그보다도 조선(朝鮮) 건국(建國)이래 처음으로 서북인(西北人)을 참판(參判)에 등용해서 지방차별을 철폐하고 본보기를 증명한 것은 사백년 이래의 처음 보는 일대 영단이었다. 그것도 고려왕실(高麗王室)의 후손인 왕정양(王庭陽)이있기 때문에 더욱 대담하고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상은 소위 양반 중의 파벌을 타파하고 지방차별을 철폐한 인사행정이었다. 그것보다도 대담한 것은 아전, 평민, 천민들 중에서도 유능한 심복 인물을 등용해 정보기관의 관원으로 경향 각지에 배치한 것이었다.

대원군 치하에선 상놈도 기를 펴고 살게 됐다.

이런 덕을 본 사람은 대원군 방랑시절에 친교한 <천하장안(千河長安)>의 난봉꾼을 비롯한 아전계급이었다. 즉 궁녀(宮女)의 오빠들인 천희연(千喜然), 하정일(河靖一), 장순규(長淳奎), 안필주(安弼周)를 비롯하여 환관(宦官) 이민화(李敏化), 가령(家令), 이속(李屬)의 이승업(李承業), 유재소(劉在韶), 윤광석(尹光錫) 등 이십여 명에 달했다.

이러한 인사문제 하나만으로도 대원군의 인물 된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 외국인 헐버트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는 지배자로서의 위엄이 있는 개성(個性)과 백절불굴하는 강한 의지(意志)의 소유자로서 한국 근세사상(近世史上)에서 가장 뚜렷한 성격의 인물이다. 그는 여러 가지로 평가되었는데 어떤 자는 한국의 위대한 정치가였다고 생각하고 어떤 면에서는 일개의 민중선동가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대원군을 민중선동가로 본 점이다. 이 말은 다른 의미에서는 민심을 제일 잘 알고 또 소중히 여긴 정치가요, 민중을 위한 자기류(自己流)의 민주주의 방법을 처음에 시도(試圖)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二 당파소굴의 書院撤廢

 

나라를 망쳐버리는 것은 부패한 벼슬아치의 죄 뿐 아니라 조상 뼈다귀 자세만 하는 양반의 족속들이다. 나라의 덕을 제일 보면서 나라의 대한 의무도 이행하지 않고 정치에 대한 불평만 하는 것이 양반들이다. 놈들은 일도 안하고 세금도 내지 않는다. 양반의 부당한 기세를 꺾고 일반 대다수의 민중의 사기(士氣)를 돋구어야겠다. 양반이고 상놈이고 모두 백성일 바엔 공평한 대우를 나라가 보장해야 한다.

대원군은 이런 선언을 하고 지방까지 뿌리 깊이 박힌 토반(土班=지방양반)의 허리에 철퇴를 내리기 시작했다. 우선 평민에게만 물리던 세금과 부역을 양반에게도 물리게 세제개혁(稅制改革)을 단행했다.

그리고 양반의 평민 학대와 수탈의 구악을 엄중히 금했다. 그러자 일반 백성들은 양반 압제에서 해방된 만세를 불렀다. 이에 대해서 양반의 대변자인 각지방의 유림(儒林)들이 반대 여론을 일으키고 탁상공론(卓上空論)의 상소문을 계속 올렸다.

에잇, 식자우환(識字憂患)의 유림이 입만 살아서 모든 당파 싸움을 조종하고 있다. 놈들의 소굴인 전국의 서원을 일제히 폐쇄하라.

대원군의 말은 곧 법령이었고 이 법령은 철저하게 신속히 단행되었다. 그리고 시정(時政)을 비판해서 상소하는 선비는 용서 없이 귀양을 보냈다. 서원에 모여서 천하를 논란하던 유림들은 대단한 불평을 품었으나 그들은 반대운동을 표면화시킬 용기도 없는 문약자(文弱者)들이었다. 다만 뒷공론만으로 불평을 했다.

대원군은 진시황같이 선비를 탄압하고 학문 연구의 자유를 박탈하는 폭군이다.

사실상 서원은 처음의 목적대로 지방의 청소년에게 한문과 도덕을 가르치는 순수한 사립학교의 구실은 않고 정치 불평을 하는 소굴로 타락되었다. 심지어 사원에서는 묵패(墨牌) 통문(通文)을 돌려서 지방민에게 각종명목의 금전을 수탈하는 원부(怨府)로까지 부패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대원군은 그들 기생충 선비들에게 철퇴를 내렸던 것이다.

아, 그 지긋지긋하던 서원의 행패가 없어져서 잘됐다. 학자님 생원님들의 유흥비 생활비를 대느라고 백성의 갈빗대가 부러질 뻔했는데 이젠 허리를 펴고 살게 되었다.

백성은 이렇게 좋아했으나 세도와 밥줄이 끊어진 서원 중심의 선비들에겐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그 중에서도 기개가 있는 지방 대표들은 서울까지 원정해서 대궐 앞에서 항의했다. 오늘로 말하면 서원폐지에 대한 선비들의 시위였다.

교육 기관인 서원을 폐지하는 것은 이 나라를 미개지로 만들 위험을 초래한다. 한문과 학자를 탄압하는 것은 최대의 학정이다.

하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대원군은 코웃음을 쳤다.

서원에서 성현의 교육이 끝난 지 오래고, 글 읽는 소리가 취흥방가(醉興放歌)로 변해 버렸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피해는 서원의 세도로 양민의 금품을 수탈하는 행동이다. 그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을 잡아서 한강 이남으로 몰아내라.

대원군의 명령을 받자 군사들이 동원되어 시위하러 올라온 삼남(三南)의 유림대표들을 개 끌 듯이 잡아서 한강 너머로 쫓아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각 서원에 국가에서 허용했던 일체의 토지를 몰수해서 완전히 서원의 기능을 박탈해 버렸다.

이런 서원들 중에서도 가장 부당한 세도를 부린 대표적 서원이 청주(淸州)에 있는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이었다. 이 서원은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의 유지(遺志)에 따라서 명말(明末)의 신종(神宗), 의종(毅宗)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 화양서원을 근거로 삼고 행패를 부린 유림들은 중앙의 세도가들과도 결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이 강대했다.

< 모월, 모일에 제향을 올리겠으니 제수전(祭需錢)을 얼마씩 봉납(奉納)하라. >

는 묵패라는 고지서를 발송하면 관리고 백성이고 땅을 팔아서라도 기부하지 않으면 서원마당에 잡혀가서 볼기를 맞고 주리를 틀리는 사형(私刑)을 받았다. 이런 악폐에 대해서 대원군이 전에도 관령으로 단속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세도를 부린 화양서원이라 제향 올리는 규모도 호화스러워서 일종의 문화명물(文化名物)로 유명했다.

대원군 자신도 낭인 시절에 청주까지 가서 그 제사 지내는 광경을 구경하다가 큰 봉변을 당했으므로 다른 일반 백성이 두려워한 것은 물론이었다. 대원군은 수수한 낭인으로서 제사 구경을 갔다가 무심코 손에 부채를 든 채 서원의 돌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저런 불경(不敬)스러운 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무엄하게 부채를 든 채 올라가느냐?

하고 유생(儒生)과 서원 청지기가 달려와서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

네가 어떤 놈이냐? 성명을 대라.

성명이랄 게 있는 사람도 못되오.

뭐, 성명 삼자도 없는 놈이냐? 성명도 모르는 무식쟁이 놈이 감히 부채를 든 채 이 서원의 층계를 올라!

성명을 대라, 보아 하니 상놈은 아닌데 어디서 온 누구냐?

서울서 이 서원의 제향이 유명하다기 에 구경 왔소.

대원군은 마지 못해서 대답했다.

이놈아, 제향구경을 하다니, 네 조상 제사도 구경만 하느냐? 성현의 제향엔 경건히 참배하는 법이다.

하고 유생은 대원군의 뺨을 갈겼다. 그러나 대원군은 분한 마음을 꾹 참고 그들의 행패를 피해서 도망치듯이 서원을 뛰어나왔다. 그때 그가 왕족이라는 신분을 밝혔으면 봉변을 안 당했을지도 몰랐다. 설사 몰락한 낭인 왕족의 신분을 밝혔더라도 가짜라고 추궁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며 혹은 왕족이 그런 예법도 모르냐고 모욕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때도 자신이 평민으로 자처했고 또 세상의 갖은 모욕을 꾹 참는 인내성이 있었다. 그러나 천하를 호령하게 돼서 백성의 원부가 된 서원을 때려 부시는 이때, 그 당시의 봉변을 회상하고 쓴 입맛을 다셨다.

 

 

三 웅장한 景福宮 재건

 

대원군은 자기 자신의 사생활은 여전히 풍류객답게 간소한 것을 좋아했으므로 절제해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것을 피하고 재물에 대한 태도도 담백했다. 그러나 그의 웅장한 정치적 포부를 펴기에 앞서서 왕실의 권위의 상징이요, 자기의 친아들 고종왕이 새로 들어앉을 웅장한 궁전을 지을 결심을 했다. 경복궁은 조선 건국시에 건설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적의 병화로 타 버렸다. 그 치욕의 흔적이 이백 년 동안이나 그대로 폐허로 남아 있어 낮에도 산짐승이 우글대고 밤에는 귀신이 나올 듯한 흉한 궁터가 되어 있었다. 대원군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이백 년 동안 재건하지 못한 경복궁은 내가 꼭 전보다 훌륭한 규모로 재건하겠다.

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건축 사업에 필요한 막대한 자재와 재정과 인력 동원이 큰 난관이었다. 다른 왕의 시대에도 경복궁 재건 문제가 나올 때마다 그것의 가능성이 없어서 항상 중지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하고자 해서 못할 일이 없다고 스스로의 힘을 믿는 대원군이었지만 이 문제는 중신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므로 의견을 물었다.

지금 국고의 재정이 미약하고 백성의 힘도 약한데 어찌 그런 거대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까? 공연히 무모한 공사를 일으켰다가 민원(民怨)을 사거나, 중도에서 기진맥진해서 완성하지 못한다면 왕실과 대원군의 수치가 될까 두려워합니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못됩니다.

하고 중론이 반대했다.

어려운 일인 줄은 나도 아오. 그러나 나라의 부흥을 위해선 우선 나라의 근본이요, 상징인 왕궁이 부흥해야 하오. 내 설계가 비록 우리 나라 조선 최대의 규모라 하지만, 그래도 청나라의 궁궐에 비하면 문제도 안 될 소규모요. 그러나 외국에 대한 우리 나라의 위신을 지킬만한 궁궐로서 경복궁 재건만은 꼭 해야겠소.

대원군은 끝내 주장했다.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의 반대하는 이유에도 나라를 위한 고충에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자면 결국 남의 집을 짓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왕족인 대원군으로는 불타버린 조상의 집을 다시 짓고 싶은 생각이기도 했다.

더구나 새로 된 임금 내 아들에게 훌륭한 궁궐을 지어 주고 싶은 것과 내 집에 대한 욕망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은 현재의 국가재정의 실정을 방패로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 대원군은 마침내 귀신의 힘을 빌려서 일반 민심을 납득시키려는 기계(奇計)를 안출했다. 다시 말하면 미신의 효력을 이용할 음흉한 모략이었다. 그는 이에 앞서 조대비의 여자다운 허영심을 충동하여 그 찬성을 얻으려고 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창덕궁은 경복궁이 전화로 소실된 후에 임시로 지은 가궁(假宮)에 지나지 못했습니다. 지금 나라를 번영시킬 이 기회에 우선 왕실의 위엄을 백성에게 보이고 외국에 대하여 위신도 세워야 하겠습니다. 세도하던 일개 대신들의 집도 굉장히 크고 호화로운데 궁궐이 이렇게 초라해서 되겠습니까? 청나라에 갔다 온 사신들이 그 나라의 궁전이 얼마나 굉장한가는 대비께서도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또 선성(先聖)께서 나라와 함께 건설한 경복궁을 저런 폐허로 버려 두는 것은 왕실의 후손으로도 죄송한 일입니다.

조대비는 결국 자기 집을 훌륭히 지어서 호강시켜 준다는 대원군 말에 혹 반해 버렸다.

대원군의 말이 옳소. 대원군 계획대로 해 보오.

대원군은 그전에도 서로 상의했던 조대비의 찬성을 다시 다짐하고

조대비께서도 경복궁 재건을 열심히 바라고 계시다.

하는 소문을 퍼뜨리고 반대하는 중신들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완고한 그들은 종전의 태도에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대원군은 운현궁으로 돌아가서 지금은 운현궁에 데려다 두고 직접 청지기로 부리고 있는 천가, 하가, 장가, 안가 네 명을 함께 불렀다.

이크, 우리 네 명을 함께 부르시는 것을 보니 무슨 기쁜 소식이 있나 보네.

하고 그의 앞으로 나갔다.

대감, 무슨 분부이십니까?

음, 너희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 이리로 가깝게 오너라.

이번에 경복궁을 재건하게 되었다…

완고파들의 벽창호 콧구멍을 뚫으셨습니까?

아직 멀었다. 그 막힌 콧구멍을 너희들 힘으로 뚫어야겠다.

저희들이?

그래, 코를 뚫기 위해서 우선 그 자들의 눈을 속이고 입을 막는 비결을 써야겠다.

그리고는 퇴침만한 청석(靑石) 돌을 주었다. 그리고 그 돌을 갖다가 이리 이리 하라고 비밀지령을 내렸다. 그들은 대원군 앞을 물러나와서

이것이 뭘까?

하고 궁금증이 났다. 청석 돌멩이에는 이상한 체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비방이라시더니 이것이 무슨 주문(呪文)인가 보다.

하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싱긋거렸으나 무식한 그들의 눈엔 한문으로 쓴 글 내용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지난 뒤에 창덕궁 의정부(議政府)의 청사를 수리할 때, 땅 속에서 청지기들이 몰래 묻어 두었던 그 돌멩이가 두 군데서 나왔다. 역사하던 인부들이 무슨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을 수상스럽게 여기고 흙을 털고 공사 감독에게 갖다 보였다.

이런 돌이 땅속에서 나왔습니다.

공사감독도 이상히 여기고 자세히 본즉 한문으로 다음과 같은 예언(豫言)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癸末甲元 新王雖登 國嗣叉絶 可不懼哉

景福宮殿 更爲 建 寶座移定 聖子神孫 繼續承承 國祚更延 人民富盛

東方老人秘訣 看此不告 東國逆賊

[ 계해년 말에서 갑자년 초에 걸쳐서 새 임금이 등극하더라도 나라를 이을 자손이 또 끊어질 운수이매 어찌 송구스럽지 않으랴.

그러나 경복궁을 다시 짓고 보좌(寶座)를 옮기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대를 이어 번성해서 나라의 경사가 무궁하고 백석이 부성(富盛)하리라. 이 글은 동방노인(東方老人)이 예언한 비결이라 만일 이 비결을 발견하고도 이대로 아뢰고 실행하지 않으면 나라의 역적이다. ]

 

공사감독은 깜짝 놀라서 이 비결의 돌을 임금께 바쳤다.

경복궁을 짓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이 비결대로 하지 않는 신하는 나라의 역적이다.

하는 천명(天命)을 빙자한 대원군의 모책이었다. 그러나 경복궁 재건을 반대하던 대신들도 그것이 대원군의 장난일지 모른다고 추측했으나 그런 증거를 폭로할 수도 없었고 이 비결을 미신이니 묵살하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는 국왕의 손이 끊이고 나라가 망해도 좋다는 불경 죄로 몰려서 그야말로 역적의 누명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청석명(靑石銘)의 예언은 궁중을 비롯한 야반 백성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는 화제가 되어서 전국에 유포되었다. 아직도 미신을 믿는 일반 민심은

그런 비결까지 나왔으면 경복궁을 지어야지. 반대하는 대신은 역적이지.

하면서 경복궁 재건은 당연한 일이라는 편으로 민심은 움직였다.

조대비는 고종 이년 사월 삼 일에 현임(現任) 대신들과 전임(前任) 대신들을 모두 희정당(熙政堂)에 불러 놓고, 경복궁 재건에 대한 최후 결정을 내릴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경복궁 재건에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인 이유원(李裕元)과 물러난 영의정 김좌근도 참석했으나 대원군은 보이지 않았다. 발을 늘인 저쪽 섭정(攝政) 자리에 앉은 조대비가 입을 열었다.

국초(國初)에 국가와 왕실의 지초로 세운 경복궁을 적국의 병화에 태운 채 이백 년이나 그대로 폐허로 버려 둔 것은 열성(列聖)에 대하여 황송하고 백성에 대해서도 위신이 서지 못했소. 선대(先代)도 이 문제가 한두번 논의 되었으나 왕실에 그만한 일을 감당할 중심이 없어서 중지되어 왔으나 이젠 책임지고 일할만한 대원군이 있으니, 이 기회에 경(卿)들은 대원군과 상의해서 재건공사를 일으키도록 하기 바라오.

이 말을 들은 이유원은 모든 것이 대원군의 연극임을 알았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고 간단한 심중론을 말했다.

경복궁의 재건 취지에야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오직 걱정되는 것은 막대한 경비와 부역 동원의 문제입니다.

나도 잘 아오. 그런 점을 대원군과 잘 상의하면 될 줄 아오.

이런 압력에 대해서 대원군의 힘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해서 가장 연장자인 원로 중신 정원용이 또 대원군에게 찬성했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궁궐을 재건하는 것은 가장 큰 경사로 생각하오. 모든 힘을 기울여서 신하와 백성의 충성을 다할 기회라고 믿습니다.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고 좌중이 잠잠했다. 좌의정 김병학도 대원군 편을 들고 나왔다.

역대에 못한 큰 사업을 지금 하는데 성대(聖代)의 뜻이 있습니다. 대원군이 총책임을 지고 하시면 될 것입니다.

김병학의 말이 있은 뒤라 말하기 쉽다는 듯이 김좌근이 입을 열었다.

막대한 재정이 첫째 문제요. 아직도 삼남지방의 유림과 백성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이때라 시기가 아직은 이른가 하옵니다.

시기상조(時機尙早)론으로 소극적 반대를 한 것이다. 이때 영의정 조두순이 간단하나 결정적인 찬성을 했다.

큰 일을 하는 데는 다소의 난관이 있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경복궁을 재건하지 못한 것은 신들의 불찰이었습니다.

반대론의 대표적인 이유원도 하는 수 없이

재정이 준비되는 대로 착수하기로 우선 정해 두고…

하는 말로 중신회의는 침울한 공기 가운데 끝났다.

이런 결정이 내리자 대원군은 그날로 활동을 개시했다. 조대비의 교서(敎書) 형식으로 세상이 깜짝 놀랄 대 계획을 발표하는 동시에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했다. 대원군의 총지후 하에 도제조(都提調)에 영의정 조두순, 제조(提調)에 열두명의 고관을 임명했다. 그리고 가장 중대한 재정문제는 우선 거국적인 원납금(願納金)제도를 활용하기로 했다. 나라의 궁전을 이룩하는데 충성을 표시하는 기부금을 자원해서 내라는 대원군의 명령을 거역할 신하와 백성은 있을 수 없었다.

우선 그 본보기로 궁중에서는 조대비의 명의로 십만 냥의 국고금을 하사했다. 오랫동안의 세도로 거부가 된 안동 김씨 일파에서는 사과하는 의미와 구명하는 운동비로서도 남보다 거액의 원납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원군의 부하들은 반 위협적으로 장안의 부호가들을 찾아 다녔다. 타의(他意)겸 자의(自意)에 의한 원납금은 막대한 금액으로 모여 들었다. 김병기는 이만 냥을 내었고, 김병학도 만 냥을 냈다. 원납금을 모으러 다니는 대원군 부하들은

예전엔 세도가가 백성의 돈을 강제로 빼앗아 갔지만 이번에는 자기 형편에 따라서 양심 껏 나라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면 된다. 마음에 없으면 내지 않아도 좋다. 절대로 강제가 아니다.

이런 권유는 강제보다도 더 무서웠기 때문에 더 큰 효과를 거두었다. 원납금 운동이 시작 된지 며칠이 안 되어 벌써 사십만 냥이라는 거액이 모였다. 대원군은 만족한 표정으로 종친(宗親)들을 모아 놓고

백성의 경복궁 재건에 막대한 원납금을 바치고 있는 이때 우리들 왕족으로서 그냥 있을 수가 있겠소? 우리 종친 중에는 가난한 사람도 많으니 내지 못하거나 적게 내는 사람의 체면도 생각해서 개별적 원납은 그만둡시다. 그리고 형편대로 낸 원납금을 모아서 종친 일동의 명의로 내면 좋을까 하오.

대감의 말씀이 고맙소.

하고 가난한 왕족들이 기뻐했다. 대원군은 그 자리에서 제일 많은 금액을 발기장에 적었다.

그래서 모은 돈 사만냥을 원납해서 빈한한 왕족들의 체면도 세워 주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원납금을 내기가 어려울 테니 공사장에 나와서 부역으로 충성을 다하면 좋다.

이런 지시도 내렸다. 부역도 결국은 재정의 일부를 부담하는 것이지만 농민들에게는 관대한 처치였다. 사월 십오 일을 기해서 경복궁의 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안의 빈민들이 모여 와서 신속하게 기초공사가 진행되었다.

시작이 반이다. 대원군의 수완이 굉장하다.

터가 닦아지는 공사판에선 신들이 났다. 밥도 술도 잘 나왔으므로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서울부근의 성 밖에 농민들의 자진 부역 부대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때가 마침 농사를 시작하기에 바쁜 시절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속으로 원망했던 것이다. 그 기미를 알게 된 대원군은 지령을 내렸다.

지금은 농사를 다 지은 뒤에 하도록 하라.

역시 백성의 사정을 잘 알아 주는 대원군이다.

순진한 농민들은 당장의 사정만 봐 주어도 고마웠다. 대원군에 대한 인기는 또 올라갔다.

그래도 장안의 빈민을 비롯하여 원납전을 내지 못할 가난한 양반들까지 모두 부역에 나와서 공사장은 활기를 띠었다. 하루에도 천명 가까운 장안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경복궁 기지(基地)안에는 임시로 휴게소와 숙소가 늘어서고 막걸리 집도 생겼다.

대원군은 그 삯 없이 일하는 부역꾼들의 식사를 위하여 삼시로 따뜻한 밥을 지어서 배부르게 먹였다. 그 쌀은 물론 호조(戶曹)의 창고에서 나오는 나라의 쌀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원군은 민심을 사면서 일을 시켰던 것이다. 이런 활발한 역사는 빠른 성과를 올려서 한 달도 못 가서 그 넓은 궁궐의 터전이 잘 닦아지고 주추가 놓여질 단계가 되어서, 전국에서 목공과 석공(石工)이 동원되었다.

그들에게는 물론 공전을 주었다. 그리고 부역 부대가 점점 늘게 되자 그들에게 식사를 지어 줄 수 없게 되어서 밥값 정도의 일당을 내주었다. 그러자 경복궁 공사장 외곽에는 밥장수 술장수가 번성했다. 밤으로는 창녀들의 매춘행위도 놀음판도 벌어졌으나 대원군은 그 노역하는 자들을 위안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금하지 않았다.

의기가 양양해진 대원군은 점점 욕심을 부려서 예정보다도 궁궐의 수를 늘이고 목재와 석재도 더 좋은 것을 택하게 되었다. 목재는 서울에서 가까운 능림(陵林)에서 베어 쓰다가 그것이 부족해서 역시 민간 산림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다.

석재는 멀리 강화도에서 떠왔으므로 수륙의 운반에도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처음에 환영하던 백성들에게서도 점점 원망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대원군은 예정대로 밀고 나갔다.

그래서 그 해 구월에 벌써 경복궁의 광화문을 비롯한 동서남북 네 궁문(宮門)이 상량식을 올리게 되었다.

경복궁 서쪽에는 큰 못을 파고 그 안에 옛날 있었던 석경루(石瓊樓)를 재건하려고 땅을 파다가 박경회(朴慶會)라는 인부가 동제(銅製)의 옛날 보기(寶器)를 파냈다. 공사를 감독하던 참찬관(參贊官)  김태욱(金泰郁)이 뚜껑을 보니 수진보작(壽進寶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안에 옛날 상감님아 쓰시던 보배(寶盃)가 들어 있구나.

하고 열어 본즉 안에는 과연 금동제(金銅製)의 술잔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잔에는 칠언절귀(七言絶句)의 한시(漢詩) 한수가 새겨져 있었다.

華山道士袖中寶, 獻壽東方國太公. 靑牛十廻白己節, 開封人是玉泉翁.

[ 화산도사(華山道士)의 소매 속에 들었던 이 보배를 동방의 국태공(國太公)의 손을 빌어 바치노라. 도사가 푸른 소를 타고 돌아오는 이날에, 이 보배를 발견해서 열어 보는 사람, 옥천옹(玉泉翁)일러라. ]

이런 비결의 보물 발견은 처음에 발견했던 청석명(靑石銘) 보다도 큰 반향을 일반 백성에 일으켰다. 국태공이란 대원군의 공식칭호(公式稱號)였던 것이다. 대원군은 점점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의 원납전과 부역의 고통을 느끼게 된 백성들이 원망의 소리가 높아지자 또 이런 모략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대원군의 연극이라는 것을 유식한 사람들은 곧 알았지만 감히 입 밖에 내서 욕하지 못했다. 대원군은 그런 소수의 빈축을 살 것은 물론 처음부터 알고 한 계략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믿는 일반 대중에게 지지를 받을 목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전의 청석명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대원군 자신의 위대성(偉大性)을 화산도사의 이름으로 찬양한 점이다. 이제는 그만큼 그의 세력은 확고 부동하다는 자신을 갖고 구차한 복면은 벗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경사가 없다. 이 보물을 발견한 인부 박경회가 바로 옥천공이매, 누명(樓名)도 그의 이름을 따서 경회루(慶會樓)라고 하자.

하고 대원군은 명명(命名)했다. 대원군은 아마 처음부터 이 누명을 미리 생각하고 그 인부에게 그런 가명(假名)을 자백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 비결의 보물이 진짜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발견한 인부에게 당장의 오위장(五衛將) 벼슬을 시키고 나중에는 중추부사(中樞府事)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나서는 대원군의 연극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의 경지로 되었다. 날마다 삼천 명이나 되는 부역 인부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 경복궁에는 무대가 만들어지고 대규모의 흥겨운 연극이 벌어졌다. 열명 일반(一班) 열반 일대(一隊)의 집단은 삼백이나 되었다. 그들의 대마다 서민자래(庶民自來)라는 깃대를 세우고 농악을 잡혀서 공사장으로 출동시켰다. 대 앞에는 화려한 의상을 입힌 소년을 장정 어깨에 무동세우고 대원들은 머리에 종이로 만든 꽃벙거지를 씌웠다. 그리고 일을 하는데도 농악을 이용해서 사기를 돋우는 동시에 그들의 피로를 덜어 주었다. 그리하여 일의 능률을 올리는 동시에 고역에 대한 불평을 무마시켰던 것이다.

큰 토목을 운반할 때나 터를 다지는 공동작업에는 으레 한 명의 고수(鼓手)가 북을 치면서 합창지휘를 했다. 이것이 유명한 경복궁타령이다.

한양천도(漢陽遷都) 오백 년에…

하고 고수가 북을 치면서 첫마디를 메기면 대원들이 일제히 줄을 잡아 당기면서 힘찬 노래를 불렀다.

한양천도 오백 년에 천하영웅 국태공이

천우신조 복받으며 국태민안 경복궁을

백성들의 충성으로 구름높이 이룩하네

에엘루야 상사디야 에엘루야 상사디야

한 노래가 끝나면 고수가 덩덩 북을 치면서 또 다른 노래의 첫마디를 메긴다.

이궁 뒤를 우러보면…

이에 따라서 대원들이 또 합창하면서 신난 듯이 줄을 끈다.

이궁 뒤를 우러보면 삼각산도 높을세라

이궁 앞을 내다보면 한강수도 푸를세라

이 경치에 복을 받아 궁 이름도 경복일세

에엘루야 상사디야 에엘루야 상사디야

이럴 때 대원군도 공사장으로 가끔 나와 보았다. 그는 일을 독려하려고 하지 않고 위로의 말만 했다.

수고들 한다. 그만 쉬고 술이나 한잔씩 하라.

하고 돈을 주며 돌아 다녔다. 그래서 공사장에서는 대원군이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그래도 확대만 시켜 가는 공사로 막대한 재정 부담과 부역에는 백성들의 불만이 점점 늘어갔다. 공사를 시작한지 만 일년이 되는 고종 삼 년 삼월에는 공사장에 산적했던 목재에 원인 모를 화재가 나서 전부 태워버렸다. 이때가 마침 천주교도(天主敎徒)를 박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천주교도가 원한을 품고 방화했다.

는 소문이 퍼졌다. 사실이 그럴는지도 몰랐으나 범인은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풍문은 천주교도 박해를 더 가혹히 하는 구실을 주었을 뿐이다. 재목이 부족해지자 민간 소유 산림에 원납목(願納木)을 갖다 쓰게 되었다.

이크, 이제 양반이 죽을 판났다.

큰 재목이 될 만한 산림은 양반들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백성의 산을 공으로 빼앗은 것을 나라에 좀 바친들 억울할 게 뭐냐.

양반의 압제를 받아 오던 백성들은 대원군의 가혹한 원납목 방법을 좋아했다.

대원군의 수완으로도 오 년에 걸친 거대한 경복궁 공사에는 진땀을 뺐다. 재정이 어려워 지자 상경하는 지방인 에게 남대문을 비롯한 성문(城門)에서 통문세(通門稅)까지 받았다. 그리고 전에는 평민만 물던 나라에 대한 세금을 양반에게도 물게 했다. 이 점에는 일반 백성이 통쾌해 했다. 그래도 건축비가 딸리자 화폐개혁까지 해서 당백전(當百錢)을 새로 만들어내서 통화가 팽창하게 되었다.

자연 물가가 앙등했고 사주전(私鑄錢)의 피해가 심했다. 사주전을 막기 힘들게 된 대원군은 청나라의 동전(銅錢)을 썼으므로 그 폐단도 막고 차차 물가가 안정되긴 했지만 이때만은 대원군도 당황했다.

그러나 빈약한 국가 재정을 기울이고 광범한 민폐를 끼치면서도 처음 계획보다도 웅장한 규모의 경복궁 재건을 완성시킨 것은 대원군의 굳은 의지와 인내와 수단을 가리지 않는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몽상하지 못할 큰 공사였다.

 

 

 

우물 안의 큰 개구리

 

대원군은 경복궁(景福宮) 재건의 무리한 사업을 단행했을 뿐 아니라, 사민평등(四民平等)으로 양반 세도의 신분제도(身分制度)를 개혁하고, 국민의 의식주(衣食住)에 이르는 생활양식(生活樣式)과 풍속까지를 개량했다. 그런 움직임에서 세금제도(稅金制度)도 개량했고 군역(軍役)의 불공평도 혁신해서 군기(軍紀)를 확립하고 국방태세도 튼튼히 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에서 가장 물의를 일으킨 두 가지 큰 사건은 안으로 천주교도에게 가혹한 탄압을 내린 것이요, 밖으로는 여러 외국의 군함을 무력으로 물리치고 엄격한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변동동기는 기묘한 것이어서, 하마터면 대원군이 천주교도의 큰 원수가 되지 않고 도리어 큰 은인이 될 뻔한 미미한 여자의 애처러운 일화도 숨어 있었다. 그것은 어린 고종의 유모 박소사(朴召使)가 천주교 신자였고, 이 유모를 통해서 대원군의 부인 민씨도 반신자(半信者) 정도로 동정했기 때문이다. 유모 박소사는 고종이 어릴 때부터 충실한 유모 노릇을 했으며 임금이 된 뒤에도 궁중에 따라 들어가서 측근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마님, 아드님께서 임금이 되신 것도 모두 천주님께서 거룩한 은총을 내리신 덕택입니다.

제가 천주님께 기도할 때는 언제나 상감님의 복을 먼저 빌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천주님 가르치심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외국끼리도 서로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자는 주의입니다. 지금대로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하면 나라가 망하고 탄압한 사람들은 죽어도 지옥에 가서 고생합니다. 상감님은 천주님의 축복으로 지존의 몸이 되셨지만 완고한 대신들 때문에 만일 상감님께까지 천주님의 노염이 미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대원군 대감께서는 본디 모든 백성에게 인자한 정치를 하시려고 하는데, 다른 완고한 대신들이 천주교도를 이 나라 백성이 아닌 오랑캐라고 몰기 때문에, 양반 세도에서 상놈까지 자유롭게 해주신 대원군 대감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마님께서 대감님께 잘 말씀하셔서 천주교 탄압을 못하도록 완고한 대신들을 타이르게 해 주십시오.

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유모 박씨를 신임했고 그 말이 옳은 듯도 했다. 무엇보다도 임금이 된 아들과 남편 대원군이 지옥에 갈까 두려웠다.

마님, 그뿐입니까? 만일 천주교 선교사인 서양 사람을 박해하면, 그들 나라가 노해서 강한 군대로 쳐들어 와 이 나라를 단번에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큰 청나라도 천주교를 반대하다가 경을 치고 굴복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국제 정세와 천주교와를 연결시킨 정치문제까지 설명했다.

그런 변이 나면 큰일나게.

민씨는 겁이 났다.

그러니 마님께서 대감께 잘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우리 천주교도가 대감을 하느님의 사도(使徒)로 추앙할 것이요, 여러 서양 나라에서도 고마워하고 상감님 부자님과 우리 나라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내가 잘 말해 봄세.

민씨는 남편을 설복해 볼 생각이 들었다. 유모 박소사가 이런 웅변을 토한 것은 역시 천주교도인 남편 홍봉주(洪鳳周)에게 얻은 지식이요, 또 그가 아내를 통해서 천주교도의 구명운동을 시켰기 때문이다.

홍봉주는 삼대를 통한 천주교도로서 남인파(南人波)의 거물이기도 했다. 그가 천주교도이기 때문에 아내가 임금의 유모이면서도 불우한 처지에서 전전긍긍하며 지내고 있었다. 박소사는 곧 남편에게 대원군 부인의 호의와 대원군에게 간곡히 청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알렸다.

아, 고마운 소식이요. 인제 우리가 상감님 유모 덕을 보는가 보오.

하고 아내의 공을 칭찬했다. 기뻐한 홍봉주는 곧 신도이며 친구인 남종삼(南鍾三)에게 연락했다. 남종삼은 전부터 대원군과 친한 사이였다. 그 후에 남종삼은 대원군을 찾아가서 흉금을 털어 놓고 대원군에게 천주교의 포교 자유(布敎自由)를 호소했다. 그는 국내 정세에서 국제 정세에 이르기까지, 세계태세와 역사의 앞길을 내다보는 열변을 토하는 동시에, 그 인식을 깊이 하기 위해서 글로 쓴 논문까지 전했다.

문명국들의 종교자유와 민권 존중의 대세 이외에도, 우리 나라로선 지금 우리 나라를 넘보고 남하정책(南下政策)에 급급한 아라사(노서아)를 막으려면 불란서와 독일의 힘을 빌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 현재의 힘만으론 당하지 못할 것은 대감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위급한 국제 정세에 불란서와 독일을 천주교 탄압으로 노하게 해서 적국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외교정책이기도 합니다. 나 자신이 천주교라 구명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영감도 아시다시피 나 자신은 신앙의 양심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을 지언정 비겁한 구명 운동만으론 대감께 이런 청은 않습니다.

음, 자네 기질은 내가 아네.

하고 대원군의 마음은 움직였다. 천주교를 반대한 순조(純祖) 이래의 탄압 정책은 따지고 보면 완고한 양반들의 유교사상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 양반들의 부패에 철추를 내린 대원군으로선 천주료를 해방해 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자기의 지지파를 더 얻고도 싶었다. 그리고 남침(南侵)하려는 노서아를 막을 수 있다면 그런 다행이 없었다.

알았어. 허나 이 오랜 유림(儒林)들의 정책은 내 힘만으론 어려우니 반대하는 대신들의 양해를 구해 보겠네. 그러고 불란서 선교사가 누구던가?

베르누 선교사입니다. 우리 나라 이름으론 장경일(張景一)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와도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자네가 연락해 주게.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도 기뻐할 것입니다. 공교롭게 지금 지방에 내려가 있으니 상경하는 대로 소개하겠습니다.

남종삼은 이젠 천주교도들이 살았다고 감격하면서 재삼 당부하고 운현궁을 나왔다.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완하하면 어떻겠느냐고 대신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대신들은 대원군의 태도에 놀랐다. 그러나 이 문제에만은 강경히 반대하자는 암계(暗計)가 순간적으로 통일되었다. 원로 정원용이 맨 먼저 발언했다.

순조대왕 이래로 천주학은 엄금한 전통입니다. 신유사옥(新酉邪獄)의 잔당이 또 준동하는 모양이니 차제에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대원군은 도리어 처음부터 혹을 얻어 붙인 꼴이 되었다. 이에 이어서 영의정 조두순, 좌의정 김병학, 영돈녕(領敦寧) 김좌근이 천주교의 철저한 탄압을 주장했다.

세계 대세로 봐서 서양 각국에 반감을 살 위험이 없을까요? 청나라도 그들에게 혼나고 있는 판국인데 천주교를 묵인함으로써 그들과 친하는게 어떨까 하는데요.

대원군은 남종삼에게 들은 말도 해봤다.

우리 나라 국교(國敎)는 주자학(朱子學)이 있을 뿐입니다. 기타의 사교(邪敎), 이학(異學)은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탄압하긴 쉽소. 그러나 만일 이 문제로 서양 제국에게 화를 당하면 그 책임을 질 수 있겠소?

천주학 무리가 목숨을 걸고 저희들 사교에 충실한데, 우린들 그만 각오가 없겠습니까?

그보다 대원군은 우리의 결의와 천하의 유림들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대원군다운 용단으로 철추를 내려 주기 바라오.

원로 정원용이 대원군에게 채찍을 가하는 기세를 보였다. 대원군은 자기의 경솔을 깨달았다. 그는 이 순간에 번의( 意)하고 천주교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결심했다. 그리고 즉시로 철저한 천주교 거물급의 검거선풍(檢擧旋風)이 일기 시작했다. 장경일 등의 외국인 선교사도 일망타진 되었다. 고종의 유모 남편 홍봉주도 잡혔다. 이 검거된 사람들은 정치범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포도청에서 의금부(義禁府)로 넘겨서 엄중한 문초를 했다. 대원군은 직접 의금부로 나가서 장경일을 문초했다.

그대의 국적(國籍)은?

불란서 사람이요.

그는 유창한 조선말로 대답했다.

본명은 무엇이고 언제 우리나라에 왔는가?

불란서 이름은 베르누고, 조선에는 십 년전에 왔소.

주소는?

홍봉주 집에 유숙하고 있소.

고종 유모의 남편 집에서 그는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갑자기 온순하고 충실한 유모 박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사사로운 인정은 무시하려고 했다.

천주교 선교사로서 무슨 일을 했는가?

천주님의 뜻을 받들고 이 나라에 와서 천주교의 사랑으로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을 천주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해 왔소.

우리 나라에 공자님 유교가 있는데 왜 남의 나라 종교를 방해했는가?

유교를 방해할 의사는 없습니다. 다만 유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유교와도 비슷한 도덕을 가르쳤을 뿐이요.

불란서 선교사는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이 침착한 태도로 당당한 대답을 했다.

제 조상의 제사도 안 지내는 것이 무슨 도덕인가?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관대하게 석방 할테니 빨리 돌아가라.

아직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길 잃은 양떼와 같은 신도를 버리고 나만 편하게 갈 수는 없소.

대원군은 이 외국인 선교사의 강한 태도가 마음에 들기도 했다. 부인 민씨의 청도 있었기 때문에 이만은 용서해서 귀국시킬 생각이었다.

우리 나라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외국 사람은 후대할 용의가 있소.

그러나 이 나라는 나의 제이의 고국이며 친구와 교도가 많이 있어서 떠나기 싫소.

이 나라에 그냥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죽어도 있겠소. 이 땅에 뼈를 묻을 각오로 있소.

대원군은 자기보다도 뱃심이 강한 그가 미워졌다. 아무에게도 저 보지 않은 그가 일개 선교사에게 지고는 싶지 않았다.

(이놈 죽고 싶으면 죽어 봐라!)

대원군은 마침내 외국인 선교사도 국내 신도와 함께 학살할 결심을 했다.

대원군의 명을 받고 천주교도 학살의 책임을 맡고 활약한 이경하(李景夏)는 고종 삼년 이월 십삼 일에 외국 선교사와 남종삼, 홍봉주 등을 체포하여 삼월 팔 일에 전부 사형에 처했다.

이 때 서울에서 학살된 천주교도의 시체는 수구문(水口門) 밖에 산같이 쌓여서 버려졌다.

그리고 대학살의 선풍은 전국 지방에 걸쳐서 단행되었다. 이때 불란서 선교사도 세 명이나 죽고, 삼십여일 동안에, 삼만 명의 천주교도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실로 세계적으로도 드문 천주교도 학살사건으로 대원군의 일대 실정(一大失政)인 동시에 그의 잔인성을 일면에 폭로한 비극이었다.

그가 만일 처음 생각대로 천주교의 자유도 허용하고 그것을 계기로 서양의 신문화를 수입하여 개화(開化) 정책을 섰다면, 결코 일본의 신문명에 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마침내 불란서를 자극시켜서 연이은 외국의 군사적 침범 행동을 유발시켰다.

이 학살의 위기를 모면해서 청국으로 탈출한 불란서 선교사 리델은 중국 지부(芝 )에 머물고 있던 불란서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대원군의 천주교도 대학살 사건을 보고했다. 그러자 로즈 제독(提督)은 분격하고 군함을 몰고 와서 조선에 항의하고 그것을 구실로 침략하는 기회를 삼으려 했다.

북경주재 불란서공사는 조선을 공격하려는 예비 공작으로 청국의 간섭을 막으려고 청국을 위협했다.

조선의 국왕이 불란서인을 학살했으니 불란서는 군대를 보내서 응징하겠다. 작은 나라가 감히 이런 불법 행동을 자행한 것은 청국의 보호를 믿고 한 소행이니 청국도 응분의 연대책임을 져야 하오.

이에 대해서 청국은 당황했다. 조선문제로 연대책임은 피해야 하겠으나, 조선에 대한 청국의 권익을 잃을 것 같았다.

조선은 독립국이니 그 나라에서 행한 불란서인 학살 사건은 청국이 알 바 아니요. 그러나 출병 문제만은 삼가고 사건 경우를 심중히 조사한 뒤에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라오.

청국으로서도 불란서 함대에 대해서 큰 공포를 느꼈다. 청국은 바로 육 년 전에 영불 연합군에게 큰 패배(敗北)를 당하고 권익을 양도했으므로 조선 문제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로 나설 수가 없어서 이 이상의 간섭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불란서 함대는 군함 세척을 거느리고 구월 이십일 태안반도(泰安半島)의 당진만(唐津灣)에 침입해 왔다. 함대는 거기서 군함 한 척을 강화도(江華島)로 보내고 로즈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군함 두 척은 한강을 칠십 여리나 거슬러 올라와서 서울을 위협했다.

이에 놀란 조야(朝野)는 물끓듯 당황해 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일체의 외교교섭 대신 무력으로 대항했다. 이십오 일에 어재연(魚在淵) 장군이 거느린 삼천 명의 군대가 한강에 올라온 불란서 군함 두 척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은 전사했으나 적함도 손해를 입고 후퇴했다.

대원군은 곧 애국심을 선동하고 외국침략에는 전쟁의 실력으로 물리치자라는 호령을 내렸다. 그는 종로에 배외주전(拜外主戰)의 비석을 세워서 경종(警鐘)을 울렸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 서양 오랑캐가 우리 나라를 침입해 왔다. 전쟁이냐 화해냐의 두 길밖에 없다. 그러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행동이다. ]

 

대원군은 이런 강경한 태도로 국내의 평화해결론을 억압하고 주전론을 선동했다. 그리고 삼만 명의 군대를 모집해서 훈련하는 동시에 경기 일대에 방비를 강화하고 평안도 포병부대 일천 명을 파견해서 국방을 굳게 했다.

처음 싸움에 뜻밖의 실패를 한 불란서 함대는 청국에 있던 전 함대와 일본에 있던 불란서군 육백 명까지 동원한 아홉 척의 군함으로 아산만(牙山灣)에 침입했다. 그리고 강화 해협으로 포선(砲船) 두척과 상륙대(上陸隊)까지 출동해서 본격적인 조선 침공을 했다. 그 전투에서 강화도 포대(砲臺)가 함락되고 십오일에는 강화도가 적군에게 점령되었다. 이 패전으로 성중(城中) 창고에 있던 무기 전부와 사십만 냥이나 되는 금은과 사고(史庫)에 있던 귀중한 서적 전부를 약탈 당했다.

대원군은 적군에게 안심시키려는 전술로 군대 철수의 공문서를 보냈다. 문서가 왕래하는 동안에 이쪽의 공격 태세를 갖추려는 수단이었다. 이 대원군의 요구에 대해서 적군 사령관은 선교사 살해에 대한 손해 배상금과 사과를 요구하고 이 교섭을 위해서 책임 있는 강화사절(江華使節)을 보내라고 회답했다.

대원군은 그 동안에 군대를 정비해서 적군의 본거지인 정족산(鼎足山)을 급습해서 적병 삼십여 명을 사상시키는 맹공격을 가했다. 로즈 제독도 하는 수 없이 전함대를 거느리고 도망해 버렸다. 불란서군을 두 번이나 격퇴시킨 장병은 의기 충전해서 서울로 개선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미국과도 싸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1,866년에 미국 기선 셔만호가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으므로 대원군의 배외국방(拜外國防)의 정책에 따른 평안감사 박규수(朴珪壽)가 군민(軍民)을 파견해서 그 기선을 태워 버리고 선원과 승객 전부를 잡아 죽였다. 이에 격분한 미국은 셔만호 사건의 손해배상과 통상조약을 강요하려고 해군소장 로저스가 군함 여섯 척을 거느리고 1,871년 오월 이십삼 일에 영정도(永定島)에 이르렀다. 그리고 유월 이 일에 군함 두 척과 기선등으로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들어오려고 강화도에 침입했다.

이때 대원군은 강화도 수비장병에게 끝까지 싸워서 적군을 물리치라는 엄명을 내렸다.

먼저 불란서 함대를 격퇴하듯이, 이번의 미국 함대로 보기좋게 물리쳐라. 서양 오랑캐는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아서, 우리 나라에는 감히 접근할 생각을 못하게 하라.

강화도 포대에서 적함을 공격하자 미국군의 육전대 육백오십 명이 상륙해서 우리 포대를 점령하는 등 한때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우리 장병은 끝까지 악전고투해서 유월 십일일 밤중에 육박전으로 적군을 무찔러서 대승했다.

조선 군대가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미국함대 사령관 로저스 장군은 하는 수 없이 함대를 거느리고 도망해 버렸다.

이처럼 불란서 함대와 미국 함대의 침공을 격퇴시킨 대원군은 자신의 힘을 과신(過信)하고 또 세계 문화의 진운(進運)에 어두었으므로, 소위 양이쇄국(攘夷鎖國) 정책을 더욱 엄중히 했다. 오랑캐를 물리치고 나라에 성문을 굳게 닫는다는 정책이었다.

외국의 선전포고도 아닌 일부 병력의 격퇴에 만심(慢心)을 일으킨 대원군은 결국 방안에서 호랑이 잡는 격의 큰소리를 치면서 스스로 우물안 개구리가 된 것을 깨닫지 못했다. 양이쇄국에 시종하려는 그는 이웃 나라 일본과도 교류하기를 꺼려했다.

일본은 대원군의 쇄국정책보다도 먼저 삼백년 동안이나 도꾸가와(德川) 봉건군벌정치(封建軍閥政治)를 해왔다. 그러나 일본은 명치 초년(明治初年)에 외국에 문호(門戶)를 개방하고 서양의 문명을 수입해서 근대국가(近代國家)로서 착착 새로운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있어서 조선은 일본이 버린 쇄국정책을 새로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일본이 조선에 사신을 보내서 새로운 국교를 맺으려고 서로 수교(修交)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이것을 거절했다.

양놈들이 우리를 넘보더니 이제는 왜놈까지 우리를 넘보려고 한다.

하고 대노한 대원군은 동래부사(東萊府使)에게 명하여 일본 사신은 쫓아 보내고, 전국에 명하여 일본과의 왕래를 일체 엄금해 버렸다. 그리고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에게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기회를 또 노리는 일본의 책동을 각별히 경계하라는 명령과 함께 임진왜란 때 쓰던 갑옷까지 보내 주어서 사기를 돋았다.

조선의 강경한 배일 태도에 모욕을 느낀 일본에서는 한때 정한론(征韓論)까지 일어났다.

그 주장의 대표자는 사이고오 다까모리(西鄕隆盛)였다. 그러나 당시 서양의 추세(趨勢)로 보아 일본의 국내혁신이 시급하다는 이유로 식자들이 이에 반대했기 때문에 소위 정한론은 꺾이고 말았다.

이때에 만일 일본이 전쟁을 걸어 왔더라면 어떠했을까. 불란서나 미국이 동양 파견 함대의 일부로 위협한 정도로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전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점을 두려워했던 대원군은 밀정을 보내서 일본의 동향을 살핀 결과 일본의 일부 정한론이 중지되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서야 안심했다.

그러나 세계와 담을 쌓는 고립적인 외교정책은 도리어 외국의 원한을 사서 본격적인 침략 전쟁을 자초(自招)한다는 식자들의 여론이 비등했다. 그리고 오랜 대원군의 독재정치에 대하여 백성들도 염증을 일으킨 기호를 타서 반대 정객들이 이 대외정책의 실패를 구실로 대원군을 공격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것이 대원군 실각(失脚)의 한 도화선(導火線)이 되었다.

대원군이 십 년 동안 섭정(攝政)으로 독재정치를 하는 동안에 고종도 이제 청년으로 장성했으므로

이젠 상감도 연장했으니 대원군이 섭정할 시기도 지났다. 빨리 친정(親政)으로 복귀시켜야 한다.

이런 여론이 일어나는 동시에 고종왕후(高宗王后)인 민비(閔妃)의 세력이 이미 대원군과 대립할 정도로 커졌다. 즉 민비는 시아버지와 정권쟁탈에서 강적으로 된 것이다.

민비는 대원군의 세도를 자기가 잡으려는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민비는 자기의 일당인 간관(諫官) 최익현(崔益鉉)에게 밀령을 내려서 대원군의 무모한 배외정책 특히 당시에 문제된 배일정책에 대하여 반대운동을 전개시켰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고종에게 배일정책의 위험성을 논하고 대원군의 배일정책의 선봉장이던 동래부사 정현덕과 안동준(安東晙)을 사형에 처하라라는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이때는 고종도 대원군의 말보다도 왕후인 민비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되어 있었다. 고종은 민비가 시킨 최익현의 상소를 옳게 여기고 정현덕은 귀양 보내고 안동준은 참형(斬刑)에 처했다. 이것은 대원군의 세력이 무력해진 증거였다. 십 년 동안 천하를 호령하던 대원군의 위력도 마침내 며느리 민비의 치맛바람에 서리를 맞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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