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65년 전.. 눈 깜짝할 사이에 인간들이 ‘증발, 소각’ 되고 날라가 버렸다. 현재의 기준으로는 거의 장난감같이 작은 것이었지만 그 심리적 효과는 아직까지도 다른 핵무기 사용을 저지해 오고 있다. 불쌍한 것은 아무 죄 없이 증발해 버린 ‘재수없이 그곳에 살던’ 민간인 들이다. 물론 그 당시 군사시설에 관련된 민간인도 많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던가?
며칠 전에 오랫동안 우리와 같이 산 어항속의 물고기가 죽었다. 두 마리 중의 한 마리였다. 나라니가 학교기숙사에서 기르던 것이니까 최소한 3년은 되었을 것이다. 다른 것들은 훨씬 오래 전에 사라졌는데 이 두 마리는 나와 같이 몇 년을 산 것이다. 그래서 더 정이 갔다. 나머지 한 마리를 가만히 보니 그 녀석도 조금 움직임이 느려졌다. 혹시 이 녀석도 곧 따라서? 새로니가 부리나케 같은 종류의 것으로 팔팔한 2마리를 사 왔다. 아.. 그 젊음이여.. 젊은이 둘과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이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태어나고, 사라지고.. 젊음이 늙음으로..그게 자연과 신의 섭리일 것이다.
이대 총학생회 친구들과, 아래 왼쪽이 김선욱씨, 1980년
연숙의 대학시절 buddy가이화여대 총장으로 선출이 되었다. 아.. 세월이여.. 어느새 그런 나이들이 되었는가. 연숙은 총학생회에 단과대학회장이고 그 김선욱 총장 선출자는 총 학생 회장이었다고 한다. 우리 결혼식에도 왔었다. 나도 그 당시 조금은 기억을 하고 있다. 결혼식에 온 그녀 친구들 중에 한 팀이 총학생회 임원그룹이라고 들었던 기억, 와~~ 그것이 1980년.. 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 이질적인 두 문화의 틈바구니에서 필요이상의 고민 거리를 짊어지고 stress받는 어깨들을 보며 미안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솔직히 우리자식들을 포함해서 ‘마음에 드는’ 녀석들을 이제까지 살면서 거의 본 기억이 없다. 아마도 대부분 공개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가슴 속 깊이 나의 말에 동감을 할 것이다. 최소한 우리세대는 그렇다는 말이다. 반대로 그들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드는 부모를 많이 못 보았을 듯 하다. 구체적으로 열거를 하기 시작하면 뜨거운 화제가 될 가능성이 많다. 언젠가는..
러시아의 heat wave 를 보면서 조금 우려가 생긴다. 다른 곳이 더운 것은 조금 이해를 할 수 있는데, 그곳은.. 러시아.. 이건 조금 생각을 하게 된다. 지독하게 stupid 한 conspiracy, contrarian buffs들과 그와 버금가는 republican gang들, 조금은 과학을 정치에서 떼어놓고 생각하는 최소한의 양심이 없는가. 너희들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더 그렇다. 그렇게 pro-life라면 더 그렇게 노력을 할 이유가 있고 장기적으로도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또 한 명의 U.S. supreme justice가 탄생을 했다. ‘역시’ 또, 여자다. 크게 놀랄 것도 없다. 이제 여성의 관심을 대변할 최고의 법관이 한 명 더 늘어난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기뻐할 것이다. 모두 여자들이니까. 나는 어떠한가. 이제는 거의 중립적인 입장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는 아마도 여자의 세상이 오지 않을까..
A Day in the life – The Beatles
대학시절 한때 Beatles의 이 노래.. 참 많이도 들었다. 꼭 좋아했었다고 말을 할 수는 없는 곡이었다. 그 당시의 짧은 영어실력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그랬을까? 그 보다는 이 노래가사의 배경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랴? 그 당시에는 가사보다는 ‘겉 멋’이 더 중요하니까.. 이 곡에서 John Lennon특유의 목소리를 맛볼 수 있었다.
미치 밀러.. 어렸을 적에 많이도 들었던 이름이다. 그 당시 그의 합창단 (Mitch Miller & Gang)이 부른 영화 주제곡이 있었다.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1962년) 쯤이었을까. 그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라는 영화의 주제곡 콰이강의 행진, The River Kwai March. 가사가 있는 노래가 아니고 완전히 남자들의 휘파람 합창이었다. 그들이 바로 Mitch Miller 합창단이었다.
그 당시 그의 합창곡들은 거의 유행가처럼 불려졌었다. 그들의 영향이었을까.. 곧 이어서 한국에도 Sing Along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전석환씨가 이끌던 Sing Along Y (YMCA)도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한결같이 노래들은 밝고, 복고적이고, 심지어 가정적이었다. 한마디로 나중에 classic으로 남을 만한 그런 곡들이었다.
99세로 세상을 떠난 Mitch Miller,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 어린 주옥 같은 미국적인 노래를 남겨 주었다. 그 많은 곡 중에서 아직도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몇 곡만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르라면 아마도 다음이 아닐까. RIP.. Mr. Miller….
콰이강의 행진, 영화 “콰이강의 다리” 주제곡영화속의 거의 비참한 행진과는 달리 아주 경쾌한 곡이다. 그 당시 아주 유행을 한 멜러디,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교에서는 그 당시 이곡을 등교시간에 맞추어 계동골목을 향해서 아주 우렁차게 들려주었다. 그 긴 계동골목을 걸어서 등교하던 우리들은 이것을 들으며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져을 것이다.
The Yellow Rose of Texas, 전통 미국민요: 텍사스의 전통민요인데, 전설에 의하면 텍사스가 멕시코에서 독립할 당시 텍사스 leader였던 Sam Houston이 전쟁 상대였던 멕시코의 General & President Santa Ana에게 비밀리에 보냈던 (spy?) 텍사스의 여자가 바로 Yellow Rose of Texas였다.
1966년 불란서 칸느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불란서 영화 “남과 여” 를 4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처음 그 영화를 나는 1968년 봄에 죽마고우 친구 안명성과, 그 당시 바로 얼마 전에 알게 된 어떤 여대생 2명과 같이 개봉관인 서울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double date를 하면서 그 영화를 본 것이었다. Francis Lai의 영화 주제곡이 먼저 히트를 해서 더 인기를 끌었던 영화였다. 불란서 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을 마음껏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full color와 black & white가 교차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사실 “남과 여”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에는 턱없이 덜 성숙된 ‘아이’들에 불과 했다. 그저 멋진 Monte Carlo와 race car driver 가 더 머리 속에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화 속의 남과 여는 사회적인 angle 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남녀의 사랑과 그들의 심리적인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그 때, 영화를 본 다음 바로 옆에 있던 빵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 2명의 여대생 중의 한 명이 영화제목이 왜 “여와 남” 이 아닐까..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남과 북, 북과 남”, “한일관계, 일한관계” 같이 조금은 유치한 우열의 순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나이었다. 영화 원래의 제목은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 (Un Homme et Une Femme)”였다.
그런 순진한 남녀관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사회적인 angle로 본 남녀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다른 인생을 보냈을까 하는 아주 비약적인 상상도 해 본적이 있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절대로 다행이었다는 결론이었다. 분명히 종속적인 남녀의 관계가 거의 법적으로 인정이 되던 그런 시절에서 나는 자랐다. 점차 법적인 남녀평등이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이었다. 절대로 남자들이 자기들이 즐겨온 위치를 곱게 넘겨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어떠한가? 근래에 들어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요새 남자들.. 참 불쌍하게 되었다는 한숨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여자들이 ‘덜’ 불쌍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누가 더 불쌍할까. 아주 해괴한 문제일까? 하지만 그렇게 해괴하지도 않다. 그런 추세는 꽤 오래 전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남자의 한 사람으로 조금 더 불쌍해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은 4명인데, 그 중에 여자가 무려 3명이나 된다. 비록 나는 불쌍한 한 남자지만 나머지 가족 3명은 상대적으로 덜 불쌍한 사람이 되니 그것으로 조금 위안을 삼을지.나의 전 세대에서 이런 구성(딸만 둘)이었으면 아마도 조금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학생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고 하고, 직장에서도 드디어 남자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여성학이란 조금 생소한 단어를 듣게 된 것도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아주 단단한 기반 위에 자리를 잡은 듯 하지만 남성학이란 것이 없듯이 이제는 여성학의 의미도 필요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그 만큼 전반적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똑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는 나의 눈 앞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뺏는 것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남녀평등은 어떠한가? 물론 일단은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문제의 본질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이렇게 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간혹 여장부 스타일의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남자의 밑에 있어서. 사회적인 역할도 거의 태어나면서 정해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게 사실은 사회적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교육을 잘 받는 목적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 좋은 결혼상대자를 만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적인 여성의role model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고등교육이 거의 확실하게 결혼 후에는 쓸모가 없어지곤 했다.
오랜 역사를 굳이 따질 것도 없이 사실 남녀의 차이는 성경부터 확실히 밝히고 있다. 아담과 하와(이브)의 role model이 그것이 아닐까? 성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문화와 문명은 어떠한가? 한결같이 남녀의 차별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Amazon같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 위에 군림을 했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과 싸우면서 이어지는 농경사회에서 힘에 필요한 근육이 모든 가치가 되면서 더욱 남자의 가치가 올라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남녀차별의 근원은 분명 물리적인 생존경쟁을 배경에 두고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출발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 미국에 와서 지금도 인상적인 것이 역시 미국여성의 눈부신 사회진출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직업 구석구석에 진출해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써 Janet Guthrie라는 여자 race car driver가 있었다. 남자의 영역에 당당히 도전한 그녀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또 거기에 비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나아졌고 현재도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그만큼 남자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권위는 떨어 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급기야는 근래 몇 년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직장여성의 숫자가 남자를 역사상 처음으로 능가를 하게 되었다. 여대생의 숫자가 남자를 능가한 지는 그 훨씬 이전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추세를 반영해 주고 있기도 하다. 바보 남자의 숫자가 바보 여자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의 구조가 산업혁명의 기간산업에서 거의 완전히 지적인 산업으로, 그것도 컴퓨터,인터넷의 도움으로 무섭게 바뀌고 있고 더 이상 근육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의 비애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 아내, 딸들이 다 여자이니까 그들의 지위가 높아짐은 환영하나 나 자신을 생각 할 때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같은 어정쩡한 세대인 것이다. 남녀차별을 뼈저리게 보고 자란 세대, 하지만 자식세대에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 했던 세대, 그 사이에 sandwich가 된 우리세대, 이제 우리가 남길 legacy는 과연 무엇인가?
이상적인 사회적 남녀관계는 무엇일까? 이제는 이런 문제에서 남녀만 따지는 것도 유행에서 지나가고 있는가. different life style?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different lifestyle? 정말 웃기는 세상이 된 지금 남녀의 차별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자체가 그른 것이 되어가는 묘한 세상이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이 세상, 선택의 많음이 최선이 된 이세상, 결국은 자신의 저 깊은 속에서부터 울어나 오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 닳는다.
와.. 이게 장난이 아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글거리는 아침 해를 보며 오늘은 heat index(불괘지수)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지난 겨울이 그렇게 춥더니 여름은 그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무척 덥다. 올 여름의 전기료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대개는 1층의 에어컨은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올해는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니까 거의 보통 여름의 2배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다. 이렇게 에너지를 더 쓰면 그만큼 CO2가 더 유출될 것이고, 그것은 더 지구를 덥게 한다.. 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왜 더울까 암만 생각해도 이건 바보 같은 질문이고 불평이다. 그저 Mother Nature가 가끔 하는 경고이거나 장난하는 그런 것일 것일지도 모르니까. Weather person들도 해답이 없는 모양이다. 예보는 하고 있어도 왜 올해는 이럴까 하는 해답은 ‘절대로’ 안 한다. 모르니까. 과학이 설명을 못하는 것이다.
올해의 특징은 온도, 습도가 같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하면 밤에도 별로 시원하지를 않다. 결국은 그때에 에어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사실 무척 고물에 속해서 사실 언제 고장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별로 신경을 쓰지를 않았는데 요새는 조금 걱정도 된다. 제일 더운 날 이것들이 stop working을 한다면 그야말로 ‘비상’ 일 것이다. $$이 많으면 이럴 때 brand new energy efficient model로 바꾸면 전기료도 덜 들고 더 시원할 것이지만..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추억에 남을만한 더위가 몇 번 있었다. 아마도 1972년 쯤이 아니었을까? 그 해 서울의 여름은 정말 지독하였다. 1973년에 고국을 떠났으니까 그 후에도 그런 더위가 또 있었을 듯 하다. 그때가 특별히 왜 기억에 남는가 하면 밤에 잠을 전혀 못 잤기 때문이었다. 그때 서울의 민가나 아파트에는 에어컨이 거의 없었다. 사실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날이 일년에 며칠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보통 밤에 잠은 잘 수 있었는데 그 해는 예외였다. 그때 조금 겁이 났다. 밤에 잠을 못 자게 되면 이건 큰일이 아닌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경증이와 새벽같이 연세대로 테니스를 치러갔던 확실한 기억이다. 그 다음은 1975년 초여름 (6월 초였나?), 시카고에 열대야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때 알고 지내던 일본인의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역시 밤을 거의 꼬박 새웠다. 아마도 그때의 밤 기온이 80도(화씨)가 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잠은 설쳤으니까..하고 Lake Michigan으로 갔는데.. 그렇게 차게 느껴지던 곳이 그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그 정도였다. 그때 시카고의 많은 집에 에어컨이 없었고, 사실 필요한 곳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지독한 더위가 여기 저기서 더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래서 global warming의 경고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별히 이런 ‘설’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극단적인 기후(extreme high & low)가 자주 나타남은 믿는다. 올해가 바로 그런 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불쾌지수가 높다 함은 기습적인 폭우의 가능성이 많다는 뜻도 된다. 오늘, 아니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하루 종일 찌더니 급기야 오후 늦게 터지고야 말았다. 우박과 더불어 폭우가 쏟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여름의 즐거움이다. 이런 더위에 이렇게 폭풍과 같은 빗소리를 듣는 즐거움은 상당하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특별히 싸늘한 가을 비였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서 부터는 이런 열대성 여름 비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이럴 때, 태고적 시절 (고2) 여름방학 때 서울 남영동시원한 마루바닥에 누워 ‘삼국지’를 읽던 것을 회상하면 더욱더 시원해짐을 느낀다.
Whooooa… it’s hot, hot and very hot & humid even from Atlanta’s standard. Is it the infamouse Bermuda High again? This year’s hot weather really is testing the stress limits of everything, A/C for one thing. So far our two trusty electric fans got broken (from contant running).. what’s next victim(s)
Even moreannoying is the WordPress’ trouble with uploading meager 16M pdf file (via PHP of course). Our home has 64M allowance which I have set myself (being located at home), but not with hosted, shared production servers (at GoDaddy). Currently it boasts 8M upload size limit. How can I make it larger from web host console (at GoDaddy)? Is it even possible? Another dog day annoyance. By the way, being desperate, I bypassed php upload limit by ftp’ing the file, but strange enough, the WordPress’ media window even didn’t recognize it. A perfect dog day afternoon, bravo!
Contacting godaddy for help brings this concise response:
Thank you for contacting online support. By default, PHP limits scripts uploading files to 8 MB. To change the limitation, edit the following values in your /php.ini file for PHP4 or /php5.ini file for PHP5:
The above settings change your PHP upload limit, allowing you to upload files up to 10MB in size.
The maximum upload value that you can specify for upload_max_size and post_max_size is 192M.
If you are running Hosting Configuration 2.0, you can create custom .ini files for both PHP 4 (php.ini) and PHP 5 (php5.ini) in the root directory of your site. Please note that php.ini and php5.ini files must be in the root directory to function properly. These files will not work if placed in subdirectories, whether or not they are aliased to the root directory. Unfortunately, we cannot help create a php.ini file. we do not provide technical support with third-party scripting issues. We regret we can not assist you further with this issue and thank you for your understanding in this matter.
Which ‘root’ folder are they talking about? Hosting Configuration 2.0 allows you to modify the root foler’s php.ini file? Never knew about it. Are there someone who tried this?
I’ve beeing using Chrome for 2 weeks now without any major hiccups.. until now. It consistently fails to render pdf file (only 2 pages out of 99 displayed).. Firefox & IEx had no problems with this particular pdf file. Someone out there had some experience like this? Dog day afternoon continues..
얼마 전에 YouTube에서 60년대 Instrumental group, The Ventures를 video clip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정말 감회가 깊다고 할까. 나의 60/70 moment인 것이다. 특히 Ventures가 일본에서 맹활약을 하던 60년대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 당시 (rock) guitar를 배운다고 하면 사실 거의 이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물론 그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Ventures는 한국에 한번도 오질 않았다. 그 정도로 우리는 $$$가 없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비쌌던가. 그러니 다 해적판 (그때는 우리나라에 license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LP 로 그들의 연주를 즐기는 정도였다. 그때 나의 주위에는 아주 상당한 수준으로 그들의 연주를 흉내 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요즈음 일본의 TV drama를 가끔 보면 그 당시 그들의 대중문화를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들은 정책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그런 것들을 거의 모르고 지냈지만 그것은 사실 눈 가리고 아웅.. 식 이었다. 어떠한 식으로든 간접적인 영향은 상당히 받았던 것을 지금에야 실감을 한다. 한국이나 일본에 모두 상당한 미군이 주둔을 하고 이어서 그들로부터 직접 받는 것 이외에 우리는 일본을 통한 여과된 미국문화가 또 유입되고 있었던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당시 이미 경제발전이 상당히 진행이 되고 있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구미의 연예인들을 마음 놓고 불러다 공연을 시킬 수 있었다.
일제강점의 심리적 영향과 그들의 일방적인 경제부흥은 사실 그들의 ‘왜색문화’를 우위에 있다고 단정을 하고 완전히 차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까? 사실은 그 당시 일본문화라는 것은 거의 구미의 것을 흉내 내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소위 대중음악, 혹은 전통가요라고 하는 트로트풍의 노래들은 사실 일본의 엔카와 같은 것이다. 그 이외에 미국 folk song의 영향을 받은 젊은 층의 노래들 (통기타 그룹이라는) 조차도 일본이나 한국이 거의 같았다. 그러니까 정책적으로 막았다 해도 실제로는 거의 같은 것들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경제수준이 상당히 나아진 지금에서 조금씩 일본문화가 유입되고 있으나 이제는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이 들어올 것도 없을 듯 하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숙명적’인 관계라고나 할까.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The Ventures의 Forever (and ever) with You를 들으니 기분이 조금 새로워 진다. 60/70의 nostalgic한 기분도 나고 또 다른 미래의 양국관계의 한 chapter가 보이기도 하기 때문일까.
어제는 새로니가 Nashville로 떠났다. 차로 이곳에서 4시간 정도의 거리여서 전에 있던 Washington DC 보다 너무 편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리하지 않고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이다. 내일은 새로니 이사 짐의 대부분을 우리의 mini-van에 싣고 우리가 다녀 올 차례가 되었다. 계획은 그곳에서 자지 않고 밤에 돌아올 생각이다. 우선 집에 있는 Tobey와 Izzie (dog & cat)가 조금 마음에 걸리고, 새로니가 살 곳이 studio apartment라서 분명히 방이 좁아서 자는 것이 조금 불편할 거 같아서이다. Google Map을 보니까 direction이 아주 간단했다. I-75 North로 90 마일 가면 Chattanooga, TN가 나오고 거기서 I-24W를 타고 135 마일 정도 가서 Nashville metro가 나오면 I-440 (toward Memphis) 로 갈아타고 6 마일 정도 가면 Vanderbilt University가 나온다. 새로니가 살 곳은 학교에 바로 옆에 있었다. 아마도 걸어서 다녀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새로니가 갈 곳은 Peabody College of Education인데 사립학교라 학비가 무척 비싸다. 하지만 1/3 정도는 각종 장학금으로 충당이 될 듯하고, 나머지는 거의 loan으로 될 듯. 이래서 요새 대학 졸업생들은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빚쟁이 신세가 되고 있다. 거의 그게 정상일 정도로. 우선 2년 course에 도전을 하고 여력이 있으면 더 공부할 생각도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본인 조차도.
김수근교수님댁 가족들과 1973년 Sherman, Texas
Vanderbilt University..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김수근 교수(님).. 대구 계명대학출신으로 그곳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마도 지금은 한국의 어느 학교에서 가르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내가 미국에 처음 온 1973년 여름에 Sherman, Texas에 사시던 김교수 가족을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Oklahoma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이 Texas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서 Dallas에 가끔 놀러 나가곤 했다. 그 가는 길 (US-75) 에 Sherman 이라는 조그만 town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Austin College라는 조그만 사립대학이 있었고 그곳에서 김교수는 강사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당시, 김교수의 박사학위과정이 아직 덜 끝난 상태였고. 다니던 학교가 바로 이 Vanderbilt University였다. 나는 사실 한국에서 그 대학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와서야 사립명문대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김교수님 댁에 놀러 가면 우선 그 귀한 한국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김교수님 부인의 음식솜씨가 상당하였지만 그것 보다도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당시 어린 딸 두 명이 있었고 한국에서 아버님이 방문 중이셨다. 나는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를 않아서 모든 것이 불편한 때에 내가 차를 사는 것을 도와 주셨다. 그래서 김교수님의 도움으로 그 당시에 산 차가 69년 형 Volkswagon Beetle이었다. Semi-automatic의 그 차는 사실 그 당시 나에게 과분한 차였다.
Nashville하면 미국 country music의 수도나 다름이 없다. Grand Ole Opry 란 country music전당이 그곳에 있다. 일주일에 한번 country music stage concert가 그곳에서 열린다. 가장 기억이 나는 것 중에 하나가 The Carpenters가 그곳에 왔을 때다. 아마도 1973년 정도였을까.. 갑자기 인기절정에 오르면서 (Top of the world) 이곳으로 날라와서 공연을 했고 완전한 top country pop stardom에 오르게 되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하면 한번 그 유명한 Grand Ole Opry공연을 보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작은 딸, 나라니가 이사를 나가면서 방이 비게 되었다. 그 방은 동북쪽으로 창이 있는, 여름에는 비교적 시원한 방이고 나의 전 office 보다 조금 더 넓다. 단점은 조금 어둡고 겨울에는 조금 더 춥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은 두 딸들이 얼마 동안(mostly during elementary school years) bunk bed를 놓고 같이 자던 bedroom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난 6월초부터 방을 옮기기 시작해서 거의 한 달을 걸려서 끝이 났다. 이렇게 오랫동안 방을 옮겨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나이에 의해서 느려진 동작, 짐을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 (이럴 때 많이 버려야 한다),6월 달의 ‘살인적’인 더위.. 등등으로 나름대로 핑계가 있다.
짐을 정리한 것은 단순히 책이나 서류 같은 것들을 내다 버린 것 이외에도 등치가 아주 큰 computer work desk 두 대를 해체하는 작업도 있었다. 이것은 particle board로 만든 정말 신경질 나게 무거운 monster급인데 disassemble자체는 비교적 간단하나 그것들을 garage로 옮기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 weightlifting이라도 가끔 해둔 것이 이럴 때 톡톡히 도움이 되었다. 그것 두 대가 빠져나가니까 방들이 비교적 크게 보였다.
new ‘lawyer’ office
이래서 나의 new office는 정말 무슨 lawyer office같이 단정한 desk하나만 중앙에 놓인 그런 아담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monster tube(glass) monitor가 flat screen monitor로 바뀌어서 더 그런 것이 가능했다고나 할까. 3 unit book shelves, drawer chest, file drawer 그것이 전부가 되었다. desk를 벽에 붙이지 않으니까 computer wiring이 조금 문제가 되었다. 절대로 pc box를 desk 옆에 놓기 싫었기 때문이다. 보기에도 그렇고, fan의 소음도 그렇고, desk를 조금씩 옮길 때도 지장이 있다.
Desk 가 과히 넓지를 않아서 가급적 pc peripherals의 크기가 작으면 좋다. pc monitor는 이미 17″로 고정적이고 mouse도 마찬가지다. PS/2 connection도 거의 모두 usb로 대체가 되어서 과제는 조금 간단해 졌다. usb hub을 monitor뒤나 옆까지 끌어오면 된다. 그래서 이제까지 쓰던 ps/2 keyboard를 정말 small footprint usb keyboard로 바꾸었다. 이것은 정말 작아서 보통의 laptop keyboard보다 작다. 나머지 할 일은 video(VGA) 와 usb cabling을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pc box에서 desk/monitor까지는 비교적 가깝지만 만일을 위해서 12′ 정도는 필요하다. usb의 경우는 이미 16′ active extension cable이 있어서 해결이 되었고, 문제는 long VGA cable인데.. 이번에 googling을 해보니 classic한 thick vga cable 외에도 impedance matching vga-to-CAT5 converter가 보였다. idea가 좋았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vga cable 대신에 Ethernet cable을 쓰는 것이다. pricing이 눈을 끌었다. $20~$30 range였다. high quality vga cable과 큰 차이가 없었고 cabling range도 보통 20’가 넘는다. Too good to be true.. 임에 분명 하지만 모험을 하는 셈 치고 order를 하고.. 써 보았는데, 역시 too good to be true ..였다. 문제는 connector가 너무나 motion sensitive한 것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video가 흔들렸다. 웬만하면 ..하고 생각했지만 역시 안되겠다 싶었다. 결국은 12′ classic thick vga cable을 쓰게 되었다. 이것은 예상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은 혹시 그 converter가 1280×1080이하의 resolution에서는 ok일까..하는 것이다. return하기 전에 한번 test를 해 보아야겠다.
kitchen Summer office
이런 작업이 끝나고 새office에 앉아 보니 경치가 훨씬 좋았고, 조금은 덜 더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미 더워진 날씨에는 새 office도 마찬가지.. 2층 이라 더위를 피할 도리는 없다. 6월 달 거의 3주간 계속 최고온도가 95도(~35C?)였다. 이것은 조금 예상을 했던 것이다. 지난 겨울이 유난히 추웠기 때문이다. 평균온도를 유지하려면 이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피난을 간 곳이 역시 아래층의 kitchen이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옆이 있고,밝고, pc/tv monitor가있다. 그러니까 TV도 볼 수 있고, home server에 있는 video를 볼 수도 있다.
현재 나의 laptop pc는 사실 prime time이 훨씬 지난, 그러니까 ‘고물’에 속한다. 나라니가 쓰던 것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겨우 1.5GHz/768MB 정도.. 겨우 mid-size video를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desktop replacement로는 사실 horsepower 가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good news는 이 정도면 소위 말하는network thin client로는 적격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client-server/remote desktop mode를 쓰는 것이다. 물론 network speed가 관건이지만 이미 우리 집은 이미 gigabit Ethernet network이 깔려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현재 우리 집에는 physical pc (laptop포함) 7대가 gigabit network에 연결되어서 돌고 있다. 그 중에 3대는 server closet에 있고 하나가 연숙의 office, 또 하나가 나의 office, 그리고 kitchen에 하나, 그리고 나의 mobile laptop이다. Server closet(at garage)에 있는 3대 pc server는 모두 VMware server 가 각종 virtual machine을 가지고 있다.
home server closet
여기서 핵심은 이곳 virtual machine에 있다. 나는 99.9% 이 virtual pc를 main desktop pc로 쓰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도합 8대의 virtual machine이 항상 running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Asterisk pbx도 포함되어있다. 이 Asterisk pbx는 우리 집의 phone (including VOIP phones) 전체를 control하고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Microsoft Windows XP, English & Korean 이고, Ubuntu Linux도 있다. 그리고 각각 virtual pc는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email 전용이고, 어떤 것은 web browsing, 어떤 것은 download전용, media server, Photoshop editing 이런 식이다. 이런 approach의 특징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like malware, spam, worm, virus infection etc) 그 특정한 virtual pc를 지우고 다시 만들면 된다. 이것은 사실 요새 많이들 말하는 cloud computing과 다름이 없다. 다만 public이 아니고 private, home cloud인 것이다. 이 home cloud 덕분에 out-of-office에서도 별 문제없이 ‘같은’ computer를 쓸 수가 있게 되었다.
제목을 달아놓고 보니 오래 전의 미국소설과 영화: “Goodbye, Columbus” 와 비슷해졌다. 사실 우리 집도 Goodbye Columbus의 경험이 1988년에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와 똑같은 Goodbye Columbus, Ohio였다. 그때 우리가족이 나의 새 직장을 찾아서 Madison, Wisconsin으로 이사를 갔다. 그게 1988년 여름,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해.. 와.. 벌써 22년이 되어가나.. 그 일년 뒤에 Goodbye Madison을 이어서 단행했고, 앞으로는 아마도 Goodbye Marietta정도가 기다리고 있을까?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물론 제로는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높아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한 이사’가 아니면 더 이상 Goodbye Someplace..는 피하자고 결심을 했다.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완전한 이사”란 어릴 때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Driving along Shenandoah Valley to DC
그러니까 이번의 Goodbye Washington, DC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이야기다. 새로니는 2006년에 용감하게 ‘분가’를 단행, 집을 떠나서 그곳으로 갔다. 나는 천성적으로 ‘이별’이란 걸 지독히 싫어한다. 가능하면 가족은 모여서 사는 걸 원한다. 나의 인생이 그런 것과 반대로 엮어졌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큰 곳’을 찾아가는 것을 막을 용기는 없었다. 처음에는 federal government의 job이 되어서 집을 떠날 구실을 주었다.
내가 보기에 그 position은 절대로 glamorous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젊은 나이에 말이다. long term job security가 가장 좋은 곳이니까,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젊은 나이에 맞는 곳은 아니란 뜻이다. 예상대로 얼마 못 가서 not-for-profit position을 찾아서 옮겼다. 물론 같은 town에서. 이곳보다 훨씬 liberal,, progressive하고 trendy한 그곳은 그 나이에 잘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career에는 불안정한 시기가 계속되고.. 그러니까 무엇이 새로니에게 perfect (or near perfect) career job인가 하는 그런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었다.
Mother & daughter reunion at DC
이런 문제를 가지고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세대에서도 이런 문제는 적지 않았다. 대학교를 갈 때부터 고민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럴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솔직한 바램보다는 장래성(돈과 지위)과 부모,선배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보았다. 이때 만약 잘못 고르면 여러 가지 문제가 그때부터 시작된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집사람 연숙의 case가 그렇다. 부모님의 의견과 적성검사를 자기의 솔직한 바램보다 더 따른 것이다. 분명 연숙은 인문,사회 쪽이지 절대로 자연과학이 아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100% 가깝게 뚜렷했다. everything Electrical..(like Thomas Edison)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고민들이 나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새로니의 짐을 가득 싣고 Washington DC를 떠나기 전..
새로니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대학엘 갔는데.. 조금은 심한 편이 아닐까? 사실 아직도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자신이 없는 듯하다. 나는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지만.. 들리는 말에 요사이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듣기는 했다. 이제는 그런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예를 많이 보았으니까. 지금은 자신의 passion이 teaching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듯하고.. 결국은 다시 시도를, 그러니까 teaching degree에 도전을 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이 불경기에 그런대로 안정된 직장을 떠나서 학교에 간다는 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이해하기 힘 들었다. 하지만, 요새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결국은 이번 가을부터 Nashville, Tennessee에 있는 Vanderbilt University 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2 year Master’s course인데 우리는 잘 하리라 믿는다. 졸업 후의 진로는 아직 모른다. 현장에서 teaching을 할지 아니면 higher degree를 따라갈지.. 한가지 좋은 것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5시간 미만 drive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주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 갈 수가 있게 되었다.
As of yesterday, Atlanta’s 3 week long mid 90s heat wave came to end, hopefully.. This morning is more promising, heavy downpour under cooling air over. This force of nature almost instantly cooled down home servers inside a small closet in garage.
Then the heat wave got started 3 weeks ago, I measured the closet temperature at evening, was shocked to see 100 degree mark on the Honeywell’s round thermostat. Brought down small electric desk fan near the servers (4 of them), kept it turned on. But it didn’t seem temperature inside the closet coming down as much as I hoped. Then the fan stop running, apparently the motor got over-heated.
Time to do something more drastic.. open up the garage windows risking the possibility of intruders or robbers, putting electric fan on it, controlled by x10 appliance switch running timer. This made huge difference~ the garage got significantly cooler, then closet followed its cooling nicely. But still the closet temperatures stayed over 90s.. Unless spending $$$, that’s the best I could do for this summer. Amazingly the servers run flawlessly during the time.
Just moved my home office to a slightly bigger room recently. Now, I can maneuver my main work desk more freely into center as an island. No more wall to hide some ugly pc related stuffs around my beautiful desk! Hiding this mess is no easy task at all, needing some $$ to buy cable conduits, etc. But real annoyance is that fact that the pc hulk has to be as near to the desk as possible: video monitor plus mouse & keyboard, that’s problem!
Solution by chance was in using a product called usb & vga extender. For usb extender, I already had it being used for printer connection. It just worked even though sometimes presented some mysterious hiccups. It would take care of extending keyboard & mouse. Real task is to extend ‘fragile’ analog vga signals beyond 10’. Well, the proliferation of big screen lcd type monitors, extending it already in mature stage with very very reasonable cost.
One I googled today was vgatovideo.com’s very reasonable product called ‘VGA to Video Extension Kit’. It looks like a perfect product for my situation. Only at $33 for 10’ CAT6 version, that’s a perfect fit. Now, question is this: how ‘good’ is this type of product? I would guess it contains some active components like balun(i.e., impedance matcher). Has anyone has some experience with this kind of product?
Follow-up on this blog:
This product turns out too good to be true. After thoroughly having tested this product, I concluded this is not working as advertised at least for my application. I needed to place 1280×1080 resolution LCD monitor at least 12’ from pc box. It initially worked fine at least an hour.. then display turns unstable like flickering. They specified this particular product as resolution up to 1280×1080 at over 12’ distance. I gave up on this so called vga-to-CATx product solution, gone back to ‘classic’ vga coaxial cable which many time supports up to 16’. Too bad, too bad.. I will have to return this ‘bad’ product soon.
휴.. 덥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6월 달에 over 90 (아마도 섭씨32도?) days가 며칠째 행진을 하고 있다. 별로 반갑지 않다. 아마도 내가 젊었으면 좋았을지 모르지만 이 나이에는 아니다. A/C(에어컨)로 식혀주는 시원함은 정말 ‘강제’적이다. 찐득거리는 피부를 조금 편하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머릿속을 편안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조금 오래된 것들이라 energy 를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는 것을 아는 한 더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이런 high humidity에는 no choice.. 더구나 2층에 있는 home office에선 이런 날씨에 거의 필수적이다.
이런 날씨에 제일 신경이 쓰이는 곳이 바로 2-car garage에 있는 home server closet이다. 이 조그만 closet에는 freezer와 함께 home network hub(Internet router, switches, VOIP devices etc)와 함께 3 physical servers가 있다. 거기서 나오는 heat가 장난이 아니지만 보통 때는 별로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우려가 되어서 온도를 재어보니 95도까지 치솟았다. 부랴부랴 방에서 쓰는 값싼 box type electric fan을 갖다 놓았다. 물론 공기온도는 별 차이가 없지만 server같은 hardware들은 stress가 덜 하리라 생각을 한다. 그래도 좋은 쪽을 생각하자. 이런 날 뒤에 오는 선선함의 즐거움은 어떠한가.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6월 달도 절반이 지나간다. 어느새 이렇게 되었나. 4월부터 시작된 physical work이 계속되고 있다. 요새는 더위 때문에 조금 주춤해졌지만 끝이 난 것은 아니다. 바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pet flap(door)와 Jacuzzi remodeling이다. 둘 다 energy saving과 직접 관련이 있다. 6개월째 같이 살고 있는 Izzie, the cat이 back porch의 view를 너무나 즐기는데, 요새 같은 더위에 일일이 문을 열어 놓을 수가 없어서 pet 전용의 ‘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Home Depot에서 작년에 $30주고 산 pet flap이 있는데 그것은 standard door에 맞게 된 것이라서 standard 2×4 wall에다 설치하기에는 맞지를 않는다. 2×4 wall에 맞게 설치하려면 내가 따로 framing을 해야 한다. 나의 carpentry skill이 그 정도가 아닌 모양이다. 대강 design은 해 놓고 벽도 뚫어 놓고 했는데 framing work을 아직 시작 못했다.
Jacuzzi remodeling은 사실 re-purposing에 가깝다. 거의 20년 동안 그 ‘멋있는’ 곳에서 bath를 한 것이 불과 몇 번이 되지를 않는다. 그러니 그 space가 너무나 아깝다. 더욱이 그곳의 ceiling에는 skylight까지 있어서 view는 아주 멋있을지 몰라도 사실은 여름에 2층 전체를 더 덥게 만든다. 그럴 바에는 아야 storage closet정도로 쓰는 것이 나을 듯 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이것도 framing work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비교적 쉽다. Rigid insulation board와 drywall로 사실상 새로 벽을 만들어야 한다. 천정의 skylight도 마찬가지다.
Wow.. it’s getting hotter and hotter by days for almost 4 days in this Atlanta metro area. Of course, our clunky central a/c is in full force for days only for the living area, not including 2 car garage where our home server closet located.
Now, the small 6×3 closet is in trouble. The garage as well as the closet is not insulated at all. But the closet usually maintains ‘good’ temperature during the whole seasons except this kind of oppressive high heat and humidity condition. Only solution is good ventilation which the closet lacks. The currently the closet’s temperature has reached lower 90s. It has 3 main pc servers which runs NAS, 7 virtual machines (most of them runs desktop pc’s), virtual Asterisk pbx(PIAF), as well as various network devices. So far, they seem functioning normally.
I moved box-type electric fan inside the closet hoping ease down the heat, but thermometer shows almost no difference! This means that somehow the whole garage must be ventilated through window which I did reluctantly last night. I can feel some ‘freshness’ inside the closet but still no temperate moderation. Just hoping everything is alright during this time.
I’m thinking about adding insulation around the server closet. Also adding small opening (with ventilation fan) on the closet wall in future. My only question is this: over 90 (lower 90s) temperature inside this small server closet is acceptable or not? If not, what kind of air temperatures are acceptable?
All Politics Is Local — Thomas Phillip “Tip” O’Neill, Jr.
오래 전에, 그러니까 1970~1980년대에 미국 연방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 or just House) 국회의장 (Speaker of the House)을 했던 사람의 경험에서 나온 명언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 같지만 가끔 잊고 살 때가 많다. 이 명언을 거역하는 추세가 인터넷으로 더 가속화 되는 networked, wired, globalization trend가 아닌가..local becomes global, global becomes local.. 어느 것이 사실인가? 거의 모든 것들이 ubiquitous Internet때문에 virtual & remote 한 것들 투성이로 많이도 변해 버렸고 급속도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Internet speed가 점점 빨라 짐에 따라서 이러한 virtual & remote한 것들이 사실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날도 그렇게 멀지 않은 듯 하다. 심지어, remote medical diagnoses & treatment까지 거론이 된다. 2008년의 미국 대선을 보면 위의 Tip O’Neill의 명언이 얼마나 많이 의미를 상실 했는가 알 수 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 전국적, 그러니까 non-local적인, 인 빠른 속도로 생겨난 massive Obama grass-roots support groups 의 형성은 global적인 network structure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McCain camp는 그 사실의 중요성을 조금 덜 인식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한다. 아무리 internet으로 news같은 것을 보고 Skype phone으로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본 것과 들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들은 virtual한 것들이다. 아무리 virtual reality가 reality 가 된다 해도 인간이란 동물은 face-to-face contact으로 사회적 활동이 됨을 가끔 간과할 때가 있다. 가장 뚜렷한 예 중에 이런 것도 있다. Digital Economy craze가 한창일 때, auto dealerships이 가장 위험한 business로 지목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car sales를 오로지 website에서 하겠다는 ‘숭고’한 희망이었다. 결과는 어떠한가.. 물론 제로는 아니지만 거의 제로에 가까운 결과였다.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저런 것들을 생각하며 이제까지 잊고 살던 나의 locale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거의 local interest 를 잊고 살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global reach가 keystroke away인데 구태여 내가 있는 곳을 찾는 게 조금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그것이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가까운 곳으로 돌려보니.. 이게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나의 peers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숨어있는가? 나의 peers라고 하면 나이도 비슷하고 관심도 비슷한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그들의 대부분이(만약에 있다면) 아직도 digital communication에 생소하거나 이것을 잊고 살거나.. 그런 것들이 아닐까? 제일 걸림돌이 write in keyboard가 아닐까 한다. 아직도 불편한 것이다. 젊은 아이들이 mobile phone으로 texting하는 수준은 멀었다고 하더라도 desktop pc에서 keyboard 를 생각대로 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technology로는 keyboarding이 가장 걸림돌이 되는 길목이다.
그래도 생각한다. 이곳에 그런대로 많은 young Old (young Senior, 50~60) Korean speaking people들이 있을 것 같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virtual socialize를 하면 어떨까? 그러면 local interest를 서로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 blog을 보게 된다면.. 그리고 keyboarding에 큰 문제가 없다면?
오늘은 2010년 5월 31일, 월요일.. 이곳은 한국의 현충일 (그곳은 아마도 6월 6일이었던가?) 격인 Memorial Day, 휴일이다. 비공식적인 여름의 시작이다. 이날 neighborhood swimming pool이 열리고.. 거의 졸업과 방학이 이어진다. 그래서..4월과 5월이 다 지나간다.
그 2개월 동안 별로 이전과 같이 쓰지도 읽지도 못했다. 대신 겨울 내내 별로 쓰지 못했던 몸의 근육을 많이 쓰게 되었다. 작년 이맘때는 별로 집 밖에서 일을 못했다. 고작 한 것이 4개의 4×4 posts위에 birdie condo를 만들어 달아 놓은 것 뿐이었다.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1983년 이후 최악의 불경기로 인해 예상이 되는 cash crunch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년으로 모든 것을 미루자고 은연중에 합의가 되었다.
Expanded vegetable garden
그 “내년”이 올해가 되었다. 올해는 조금 사정이 나아진 듯 서로 느끼고 (이것, home finance,은 절대로 exact science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날씨가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home depot로 향하게 되었다. 몇 년 전, back porch의 lattice board work을 할 때의 아찔한 기억을 떠 올리면서 lumber hauling에는 각별하고, 지나친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때 lattice board를 minivan위에 싣고 오다가 길에서 모조리 차에서 떨어진 아주 무서운 경험이 있었다. ‘역학’을 100% 무시한 아주 무모한 잠깐의 결정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우선 연숙의 ‘자랑스러운’ vegetable garden을 더 넓히는 작업이 있었다. 원래도 좁은 곳이 아니지만 더 욕심을 부려서 넓힌 것이다. 매일 먹는 야채는 거의 다 심을 예정이란다. 최근 몇 년 지독한 가뭄 때문에 예상보다 수확이 좋지를 않았다.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Mother Nature는 역시 fair한 듯, 그 동안의 ‘비의 적자’를 채워 주실 듯 정말 흡족한 비의 잔치가 이어졌다. 그런 것들에 힘입어 더 늘린 것이다. 현재의 plot은 아마도 이 subdivision에서 top class에 속할 듯 하다.
나라니가 이사간 집
주기적인 흡족한 비는 지독한 정도로 예상되던 pollen 의 공포도 많이 잠재워 주었다. 주변의 잔디들도 아마도 이제 까지 중에서 가장 싱싱한, 정말 건강하게 파~란 색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와중에 나라니 가 드디어 ‘분가’을 단행하였다. 실의로 찬 몇 달을 보내더니 그것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독립’을 선언하고 30분 정도 drive거리로 house mate 와 같이 집 한 채를 rent해서 나간 것이다. 이런 불경기에 대부분 부모가 사는 집으로 들어와 산다던 20 something young adults들.. 우리 나라니 는 거꾸로 나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라니 의 성격일지도..
4월15일.. tax day. 올해는 지난해 산 Hyundai Sonata가 큰 효자 노릇을 하였다. 그것을 의식하고 산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가끔 우리도 이렇게 돈이 관련된 일에 ‘현명’한 선택을 할 때도 있구나 생각하니까 조금 우습기도 하다. 그런 쪽에 우리 둘은 너무너무 ‘무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니 는 그렇게 lucky하지 못한 듯.. 올해는 처음으로 tax refund가 아니고 tax due로 바뀌어서 없는 saving에서 돈을 Washington에 지불하는 ‘불상사’가 난 것이다. 처음에는 internet tax site가 무언가 잘못하는 듯 해서 다른 두 곳에 똑같이 해 보았지만 결과는 정확하게 똑 같았다. 작년에 열심히 뛰며 $$을 벌었지만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찔한 사다리 오르기..
사다리에 오르다. 2006년 사다리에서 떨어진 (정확하게는 사다리가 떨어짐) 사고 이후 처음으로 다시 그곳에 오르게 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지난해 겨울 바람이 불던 어느 날 나의 home office storm window가 땅으로 떨어졌다. 2층에서 땅으로 떨어 졌는데 기적적으로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 무슨 운명같이 느끼고 그것을 고치기로 마음을 먹고 노력을 해서 결국은 다 고치고 paint까지 했더니 전의 상태보다 더 보기가 좋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다리가 없으면 그것은 그림의 떡이 아닌가. 전에 떨어진 악몽을 잠재우면 천천히 과거에 ‘바위’를 타던 때의 ‘용기’를 회상하며 올랐다. 결과적으로 다시 사다리를 타게 되었다. 2층 지붕에 있는 gutter를 고치거나 청소를 하려면 사다리는 정말 필수도구가 아닌가.
Pergola’s early structure
4월 중에 2개의 backyard structure를 만들었다. 둘 다 size가 아주 작아서 ‘몸을 풀기에’ 안성맞춤의 project였다. 거의 2년 동안 잠자던 tool을 모두 찾아서 oil을 치고 tune-up을 하고 쓰는 법을 다시 익히고 해서 큰 문제없이 며칠 안에 끝을 냈다. 그렇게 “준비운동”을 한 것은 사실 더 큰 structure를 내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pergola였다. 이것을 한국말로 무엇이라고 하나.. 모르겠다. 그냥 퍼골라.. 라고 해야 하나. 주로 backyard에 화분도 걸어놓고 넝쿨도 올라가고, 심지어는 빨래도 걸어놓을 수 있고.. 햇볕이 적당히 차단이 되어서 여름엔 조금 시원한 곳.. 그런 것이 아닐까. Costco에 아주 ‘근사한’ 것이 있었는데 가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거의 $1000정도였는데 그것은 물론 pro들이 만들어 놓은 정말 웅장한 그러니까 아주 필요이상으로 큰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것이 필요가 없었다. deck이 12’x12′ 정도 이니까.
2주일의 중노동. 5월 초부터 일을 시작해서 거의 2주일이나 걸렸다. 물론 하루 종일 한 것은 아니었다. 제일 힘든 것은 실제로 build한 때가 아니고, 우리 집에 맞게 design을 하는 것과 lumber를 Home Depot에서 차에 실어오는 일이었다. 주로 4×4, 2×6 lumber가 많아서 더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면서 이 나이에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이 나이면.. 손주들과 방에서 놀 그럴 나이가 아닌가. 일단 만들어 놓고 보니 그렇게 삭막하던 deck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장식 (화분 같은 것)을 하는가에 더 신경이 쓰일 것이다.
completed pergola
곧바로 pergola와 걸 맞는 cute picnic table을 만들었다. 이건 internet에서 design을 얻었다. 그래서 거의 시간이 걸리지를 않았다. 100% 2×4 lumber 12개를 45 or 30 degree angle cut을 하면서 끝이 났다. 그러니까 design한 사람의 노력 때문에 그렇게 쉬웠던 것이다. 크기가 정말 pergola의 크기에 맞춘 듯 한 것이 놀라웠다. 마지막 Mickey Mouse project가 compost bin인데 이것도 역시 build하는 시간보다 design한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문제는 cover structure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였는데.. 역시 vinyl corrugated board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removable roof (with hinge) 로 위를 덮은 것이다. 비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composting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제 부터는 kitchen waste의 대부분은 그곳으로 가서 recycle이 될 것이다. 나중에 compost 가 되면 물론 바로 옆에 있는 vegetable garden에서 쓸 것이다.
cute picnic table under pergola
이래서 4월과 5월이 다 지나갔다. YMCA의 exercise도 많이 빠지고 했지만 다른 방법으로 muscle을 썼으니까.. 그렇게 큰 문제는 없을 듯 하다. 며칠 전에는 드디어 망가져서 방치해 두었던 gas grill을 꺼내어 gas mechanism을 모조리 뜯어 내고 charcoal grill로 바꾸었다. heat proof spray paint까지 했더니 거의 새 것처럼 되었다. 오늘 저녁 드디어 그것을 쓸 때가 되었다. Memorial Day barbecue, pergola, picnic bench, renewed grill.. 3 박자가 맞아 떨어진 것이 아닐까? 이래서 4월과 5월.. 안녕. 4월과 5월..하면 젊었던 시절 통기타 그룹이 생생하게 생각이 난다. 백 순진과 김 태풍 이었던가. 아 좋았던 시절이여..
I feel so stupid after realizing that stupid Google Voice password was the one that the trunk went silent after placing a call. Again and again, the ‘great’ Nerd Vittles’ instruction turns out 99.999% correct, my following it was miserably inadequate. All in all, my home office’s Asterisk pbx now boasts a full carrier grade Bellsouth PSTN trunk for 911, fax, majority of inbound calls, and now 100% free local, long distance mostly outbound calls from this wonderful Google trunks. Thanks Google, you’re my only hope these days, knowing of increasingly arrogant Apple$, and M$ enough by now.
아.. 아틀란타에 정녕 봄이 오고 있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고3때 국어책에서 본 시의 제목처럼.. 이번 겨울은 동서남북의 구별 없이 무차별하게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하기야 Florida와 Hawaii를 제외한 전역이 눈이 덮여 있다고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런지 Obama의 global warming agenda도 따라서 조금 잠잠해졌나 할 정도다.
공식적으로 춘분이 거의 열흘이나 지나고 내일은 사월이다. 진짜 봄인 것이다. 새벽에 아직도 central heating이 나오긴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주 따뜻한 낮과 아주 싸늘한 밤이 계속되는 건조한 그런 나날이 되지 않을까? 4월.. April shower brings May flower라고 오래 전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서 나에게 써 먹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 만큼 싸늘한 4월의 비도 연상이 된다.
하지만 나에겐 한국가곡 “사월의 노래”가 더 생각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1963년 서울 중앙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자 음악 선생님이셨던 김 대붕 선생님이 좋아 하셨다던 가곡, 사월의 노래.. 우리들에게 정성스레 가르쳐 주셨다. 특히 작곡가이신 김순희교수님을 잊지 않을 정도로 언급을 하셨다. 혹시 그 교수님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나곤 한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에 편지를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 노라
돌아 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없는 무지개 계절아
노래와 함께 가사까지 또렷이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지금 연세가 어느 정도나 되셨을까? 짐작에 아마 여든을 바라보실 연세가 아니실까. 그렇다면 요새 같은 세상에서는 건강만 좋으시면 큰 문제가 없으시리라. 기억에 선생님은 해방 직후에 고등학교 학생이셨다. 어떤 글에서 (아마도 중앙학교 교지에서) “국대안 반대 데모 때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서 뒤떨어 졌던 성적을 올렸다” 라고 하셨는데 그때는 내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그때 고등학생이셨으면 최소한 나보다 15살은 많았을 것이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 가톨릭 성가 집에서 우연히 선생님의 이름을 보았다. 그래서 선생님이 천주교 신자임을 알았고 성심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음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중앙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실 당시에도 천주교 신자였을 것 같다. 물론 100% 확실치는 않지만.
Who designed Artisteer? What kind of software engineers are behind this otherwise excellent software? Ideas behind this are really simply brilliant. This is an example of expert system for website frontend design. It simply added an ‘expert’ layer on top of ‘standard, ordinary’ web design software. Unless you want minute controls over very detailed cosmetic details, this software’s included ‘expert’ layer simply shows you not-too-many features and choice without overwhelming user. Then, what’s annoying? Simple. When it opens first time, it always does as maximized taking up all the screen. Why? I don’t know. Usually windows software remembers previous window size before closing. This simply ignores, forget everything! Why did you do that? Utterly stupid! One more thing, whenever upgrading to newer release, it stupidly demands to enter license key, pretending know nothing about already installed and running version… it amazes me dearly.. what’s kind of software people behind this stupid logic?
I’m back to Joomla! to understand more about it. Previously, DotNetNuke was my choice for my experimental website for some time before I totally abandoned it for its complexity and instability. I’m not sure why it was so unstable, frequently crashed exposing ‘ugly’ asp.net error codes. Then I found this LAMP (Linux, Apache, MySQL, PHP) open source blog and CMS software like WordPress, Joomla!. Miraculously, these software never crashed while on operation! I was hooked very much since, never looked back especially to ASP.NET based bloatware.
Already understanding CMS in general, I dived directly into Joomla! hoping to setup a working website in few days but didn’t work out that way. The system itself was solid-rock stable but it was not as easy as I hoped to learn. So called, steep learning curve fits to this system, so I bought a Joomla! book to jump start my project. The book was <<Joomla! A USER’S GUIDE, Building A Successful Joomla! Powered Website>> by Barrie M. North. Presumably, it appeared to be a good book from Amazon’s review. How wrong I was… In short, this is one of the worst book I’ve ever read. It, however, did a very good job to confuse me. I seriously doubt the author actually followed the example screen shots against sample code. They simply didn’t match! Let me show some example of what I said on my coming 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