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극복을 청하는 기도

 

지난 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신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께 안부, 특히 코로나바이러스를 어떻게 극복하며 지내시는지 알아보고자 연락을 드렸더니, ‘기도문’을 보내 주셨다. 가급적 외출을 자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너무 말초신경만 건드리는 값싼 뉴스에 정신이 팔려서, 사실 기도라는 것을 거의 잊을 정도였는데 이렇게 ‘공식인준 기도문’을 받고 보니 생각이 많이 정리되는 듯 느낀다. 맞다, 역시 이럴 때 기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성모 마리아께 의지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역시 교황님께서도 우리들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특별히 성모님께 드리는 청원기도를 발표하셨다.

 

 

코로나19 극복을 청하는 기도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기도문

천주교 서울대교구청 인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코로나 19’ 확산으로 혼란과 불안 속에 있는

저희와 함께하여 주십시오.

어려움 속에서도 내적 평화를 잃지 않고

기도하도록 지켜주시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코로나19’ 감염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는

의료진들과 가족들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또한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영혼을 받아주시고,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국가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더해주시고,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투신하고 있는 관계자들을 보호해주십시오.

특별히 이런 상황에서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저희가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려운 시기를 이겨서고자 애쓰는 저희 모두가

생명과 이웃의 존엄,

사랑과 연대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고

배려와 돌봄으로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은총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님과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성모 마리아께 의지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역시 교황님께서도 우리들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특별히 성모님께 드리는 청원기도를 발표하셨다.

 

 

O Mary,

you always shine on our path

as a sign of salvation and of hope.

We entrust ourselves to you, Health of the Sick,

who at the cross took part in Jesus’ pain, keeping your faith firm.

You, Salvation of the Roman People,

know what we need,

and we are sure you will provide

so that, as in Cana of Galilee,

we may return to joy and to feasting

after this time of trial.

Help us, Mother of Divine Love,

to conform to the will of the Father

and to do as we are told by Jesus,

who has taken upon himself our sufferings

and carried our sorrows

to lead us, through the cross,

to the joy of the resurrection. Amen.

 

Under your protection, we seek refuge, Holy Mother of God. Do not disdain the entreaties of we who are in trial, but deliver us from every danger, O glorious and blessed Virgin.

 

 

拙譯

 

언제나 구원과 희망의 표징으로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시는 성모 마리아님.

굳건한 믿음으로 예수님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하신, 병자들의 건강이신 당신께 의탁하나이다.

로마인들의 구원이신 당신은

카나의 기적 처럼 이 모든 시련이 끝날 때까지

저희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심을 아나이다.

천상의 사랑이신 어머님,  저희가 하느님아버지와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지고 가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며,

십자가를 향해 부활의 기쁨으로 이끌어 주소서.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당신 아래

피난처를 찾나이다.

영광스러운,  복되신 동정녀시여.

시련 속에 있는 저희의 간청을 물리치지 마시고

저희를 위험에서 보호해 주소서.

 

 

Pandemic! a Chinese Peril..

Where else? from CHINA, stupid!

 

 

Pandemic!!!!   먼데서 난 불구경을 하듯이 몇 주일이 지나면서 오늘은 드디어 한 나라, 바티칸이 있는 이태리, 가 완전히 비상사태에 들어갔음을 보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치사율은 그리 높지 않지만 감염률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폐렴의 일종이기에, 우리들 senior 부류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인터넷, 특히 YouTube를 통해서 피할 수 없게 들어오는 ‘가짜, 과장 뉴스’들은 심리적으로 더욱 몸을 도사리게 한다. 설상가상, ‘비과학적 또라이’ 트럼프는 연상, 걱정 없는 표정으로 일관한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pandemic의 양상이 아닐까…

대도시의 밀집구역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직장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닌데도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우리의 ‘직업’인 레지오 활동에 지장이 오는 것, 또한 밖으로 나가며 사회적인 접촉을 못하게 되는 우려, 이유가 너무나 사치스러운가 미안하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큰딸 새로니는 학교 근무를 해야 하는 입장이어서 ‘아픈 아이들’이 생길까 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인데, 아직도 휴교의 뉴스가 없는 모양이다. 나라니와 Luke는 다행히 장기 출산휴가 덕분에 집에 있으니 큰 문제는 없는 듯.  어쩌다 세상이 이러게 돌아가는 것일까, 생각하면 할 수록 ‘중국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을 누를 길이 없다. 내가 이제까지 생각해온 그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이 적나라 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 갑자기 오래 오래 전, 1665년 영국 런던을 휩쓸던 Great Plague를 피해서 시골로 도망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Isaac Newton의 얼굴이 떠오르니…

 

현재 진행중인 정말 ‘거짓말’ 같은 소설, 연극 같은  코로나바이러스 이야기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거의 피부로 조금씩 느끼면서, 오랜 세월 동안 나의 잠재의식 속에 쌓이고 쌓였던 숨은, 부정적 감정들과 나의 숨은 치부 恥部가 잠재의식의 보호벽을 뚫고 나온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나의 부정적인 중국관 中國觀 에 관한 것이고, 특히 ‘공산당 중국’을 너무나 혐오하기에 감정적 bigotry trap 함정에 쉽게 빠지곤 한다. 한마디로 이 중공의  ‘해괴한 공산당 체제’는 인류사의 관점에서 보아도 ‘필요 없는, 아니 해로운’ 존재라고 굳게 믿는다.

20세기 세계적 골치거리, 우리에게는 영구분단, 자기 ‘인민’ 수백만을 굶어 죽이는 정권욕의 괴수, 이런 ‘해로운 존재’의 문제를 크게 못 느끼고 살았지만 문제는 이들에게 ‘돈’이라는 무기를 가지게 되면서다. 그들의 무신론적 유물론과 인류보편 도덕성이 결여된 비인간적 집단에서 이런 이상한 병균이 이제까지 안 나온 것도 기적이다. 시간문제였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이런 사태에 책임을 질 것인가?  한가지 생각나는 것, 이들에게 일말의 책임감을 느낄 ‘도덕의식’ 이 있다면 이 ‘인재, 人災’에 대한 구체적인 국제적 보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안 되면 피해에 대한 법적 소송은 어떤가? 아마도 ‘법의 정신’이 전혀 없는 그들에겐 ‘소牛 귀耳에 경經 읽기’ 정도밖에는 안 될 것이다.

Spring Forward Sunday

 

¶  Spring Forward!   지나가는 주중에 줄기차게 내리던 비, 그친 지 며칠 째이지만 하도 많이 내려서 마르는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오늘로서 완전히 빠삭빠삭한 땅과 하늘의 느낌을 맞게 되었다.

어느새 그 귀찮은 일, 집안의 모든 시계들을 한 시간 앞 forward 으로 돌리는 날이 되었다. 왜 이렇게 귀찮은 법을 만들었지 어떨 때는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하지만 나의 힘으로 이것을 바꿀 능력은 전혀 없다. 하기야 이 법에도 의도하는 이로운 목적이 있으니까. 갑자기 저녁 시간이 밝아 진 것 daylight saving 은 사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bonus일 것이기도 하니까.  이것을 ‘정상’의 시간으로 바꾸는 fall back,  늦가을.. 이제는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세월은 점점 빨라지고 있으니까. 다만, 다음 시계를 바꾸는 그날까지 우리는 어떤 ‘모양새’의 세월을 보낼 까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  주일미사, 고해성사 깜:  지난 주일 미사에 이어서 이번 주일미사도 사정상 거르게 되었다. 비록 매일미사 참례를 한다고 해도 주일미사는 미사중의 꽃인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도 한심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이 탓’을 안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우리가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그 날’까지 마라톤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상식에 의거한 현명한 판단을 우리는 매일 아침에 해야 하는 것이다. 요즈음 문제의 주범은 연숙의 불면증이지만 그것 외에도 앞으로 나이에 따른 문제가 없을 리가 없다. 이제 우리의 사회생활은 물론, 모든 신심활동이나 신앙생활도 거의 우리의 건강상태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의 비교적 건강함도 무한정 지속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이성적, 상식적으로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보내는 것, 그것이 관건이다.

 

이 사진과 신천지는 무슨 관계?

¶  개신교와 신천지:  요새는 우리 집의 ‘한국소식통’인 연숙을 통해서 그쪽의 소식을 가끔 듣곤 한다. 내가 워낙 그쪽에서 오는 소식을 피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별로 자세한 소식은 모르지만 요새는 조금 예외에 속한다.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그곳이 뉴스의 가운데에 나온 것인가? 그런데 알고 보니 참 기기 막히는 소식은 나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바로 ‘신천지’인지 구천지인지 하는 걸맞지 않은 이름을 가진 ‘개신교’ [가톨릭이 아니면 일단 개신교라고 생각하고] 사교집단에 관한 것이다.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그 집단 신도들에 의해서 그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니 갑자기 뉴스에 나온 것이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이번 한국 바이러스 유포의 일등 ‘공범’이 된 셈이다. 하필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런 나쁜 뉴스에 연루가 되었는지 한심하기도 하지만, 역시 ‘사필귀정 事必歸正’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신천지, 이름도 촌스러운 이것에 대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2013년 경이 아닐까? 아틀란타 도라빌 순교자 성당, 하태수 미카엘 주임신부님 재직시절 예비신자 교리반의 [teaching] staff으로 ‘레지오 활동’을 할 때였다. 부활절을 향한 교리반이 과정의 끝머리 즈음에 하 신부님이 특별강의 시간 하나를 추가해서 강론을 하셨는데 그 주제가 바로 ‘사교집단 신천지의 정체’ 였다.

그러니까 이 집단은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고 꽤 역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예비신자들에게 이들의 정체를 알게 하고 경계심을 일깨워주려는 것이 신부님의 목적이었다.  이들의 특징 중에는 대부분 ‘잘 나가는, 지식적이고 말쑥한’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흡수가 되며 이들의 포섭공작이 아주 조직적이라는 것도 있었다. 특히 ‘성경공부’ 같이 하자면서 접근하는 젊은이들은 십중팔구 그들이라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우리 같이 ‘한 물 간 부류’는 사실 그들의 안중에도 없기에 걱정이 전혀 없다. 하지만 교리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문제다. 그들의 언변과 성경지식은 절대로 못 따라가니까. 그렇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의 고민일 것이다. 거의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를 하는 그들, 이제 조금은 자체적으로  ‘교통정리’를 해야 할 때가 안 되었나?  전통과 초대교계를 완전히 버리고 그저 ‘성경유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  문제없는 교황님: 오늘 지난 주일에 이어 다시 교황청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일요일에 정오에 있는 교황님 주도의 삼종기도의 모습을 보려는 것이다. 이곳에서 교황의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고, 그 바티칸 주변에 모인 순례객들의 동정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지난 주일보다 순례자들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지만 아무도 마스크를 착용하지는 않아 보였다. 아마도 바티칸 주변 로마는 그렇게 바이러스가 심하지 않은 모양인가?

하지만 교황의 동정은 지난 주와 달랐다. 삼종기도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video를 통해서 밖으로 방송을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평상적으로 교황이 군중들을 내려다 보는 것, 바이러스와 큰 상관이 있을까? 하지만 모든 메시지 방송이 끝난 후에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창문으로 나와서 군중들을 축복하는 짧은 시간이 있어서 크게 아쉬움은 없었다.

문제는 이제부터가 아닐까? 분명히 로마 주변에도 감염자 숫자가 늘어날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바티칸의 모든 ‘성사’는 취소가 되는 것은 아닐까? 수요일의 교황님 주재 일반군중과의 만남 시간도 취소가 되었으니, 나머지 행사도 축소가 될 듯..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Relentless Rain, 우리들의 삼일절..

줄기차게 며칠 째 밤낮으로 쏟아지는 ‘사랑하는’ 비…

 

Relentless Rain:  올 들어 늦겨울을 통해서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아니 엄청 쏟아진다. 홍수경보는 이제 눈에 너무나 익은 듯하다. 지난 오랜 기간 겨울은 사실 통계적으로 가뭄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그야말로 끝임 없이 비가 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비, 비, “비가 오도다.. 비가 오도다”… 그 옛날 서울 재동 국민학교 시절에 귀따갑게 들었던 가수 남해 씨의 히트 가요의 제목. 그 당시 특히 비가 올 때 그 노래를 들으면, 참 싫은 노래라고 느꼈다. 그 어린 시절에 누가 비를 좋아하겠는가? 요새라면 아이들, 집 밖보다 집안에서 시간 보내는 것 문제가 없지만 그 옛날에는 집안에서 ‘재미없는 책을 읽는 것’ 이외에는 할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까지도 비는 귀찮은 것, 담배연기 가득 찬 시내버스 속으로 우산을 접고 들어가는 꾀죄죄함, 특히 등산 같은 것을 할 때는 더욱 싫기만 했다. 그것이 나이가 훨씬 들어가면서 ‘세상에서 제일 멋진 것’으로 변해 버렸다.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나는 비가 ‘내려’ 오는 모습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때는 그 이유를 생각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 남달리 비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애석하게도 확실히 그것이 아리송한 것이다. ‘그저, 그저’ 좋은 것이다. 굳이 찾으라면, 아마도 비를 맞지 않고 사는, 그러니까 실내 생활을 더 즐기게 되었다는 것, 그런 것은 아닐까?

 

I don’t like rain! Ozzie의 모습이 바로 그런 표정일 듯…

 

그런 것에도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두 딸애들의 ‘강아지’ 두 마리를 잠시 맡고 있을 때, 비가오면 산책을 하는 것이 조금 불편한 것, 그 두마리들을 비를 맞으며 ‘bathroom‘ backyard 로 내보내야 하는 일, 근래에 와서 자주 조금씩 새는 지붕 등등.. 하지만 그래도 나는 비를 너무나 사랑한다. 나의 장례식 때에도 비를 맞으며 운구를 하는 모습까지…

 

¶ 우리들의 삼일절:  올해도 어김없이 3월 1일을 맞이했다. 하지만 평상의 3.1절이 아닌 우리들만의 3.1 을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유관순 누나의 삼일절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3월 1일에 연관되는 우리가족, 특히 부부에게 너무나 뜻 깊은 날이 되었기에 몇 년 전부터 이날을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것 보다 더 의미를 두며 지내게 되었다. 얽힌 사연들이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아직도 나는 극히 ‘사적’인 것으로 생각하기에 얽힌 뒤 배경 스토리를 밝히는 것은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을 가지고 밝히고 싶은 것 중에는 현재 우리가 사는 집으로 이사온 날,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매일미사’ 의 역사가 이날로 올해 9년째로 접어 든다는 사실, 이것은 당당하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2012년 사순절 3.1일에 첫 매일미사를 시작하게 된 것인데, 솔직히 이 ‘과업’은 우리 둘 다 생각할 수록 놀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우리들이 ‘운전’을 할 수 있는 한 계속될 듯하다. 100% 장담은 물론 못하지만 의지는 있다.  이 비교적 ‘사고적’으로 시작된 결정이 우리 생활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 특히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것도 ‘선택’이라면 선택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은 못 내린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것을 이제야 믿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들의 삼일절’은 집 근처에 있는 Thai restaurant, Lemon Grass 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 반드시 곁들여져야 하는데, 문제는 이 식당이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이 식당은 거의 20여 년의 역사로 지역 사람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는데, 정말 주인부부 꾸준히 성실하게 service를 하는 것, 우리에게도 참으로 인상적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한 세대가 흘러갔을 때…

Welcome, It’s a Boy balloon, at Tucker mailbox post

 

우리의 첫 손자, 새 생명이 태어나는 작은 드라마의 순간들이 며칠 만에 지나가고,  10 파운드짜리  ‘건강한 남자아기’를 안고 아기의 부모가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친정 쪽인 우리 부부는 미리 집에 가서 그들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It’s a Boy!‘ 를 외치는 풍선을 그들의 mailbox post에 달아 놓고서야, 큰 일이 끝났다~ 는 편안한 안도의 심정을 느꼈다. 갓난 아기가 신기하고 예쁘면서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매는 엄마, 아빠를 보며 우리도 저랬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연숙은 비교적 침착하게 첫 애를 다루었지만 나는 ‘어벙벙’ 그 자체였던 희미한 기억이 있다.

산모의 부모로서 우리가 할 일을 제대로 했을까? 우리가 할 일이란 무엇인가?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서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 외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시댁은 전형적인 Caucasian 이어서 돕는 방식도 그들의 전통을 따르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아니다. 주위에서 듣는 소문에 의한 ‘한국식 도움 방식’은 암만 생각해도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숫제 시설의 도움을 받는가 하면 아예 full-time으로 professional helper 흉내를 내는 case도 보았다. 다행히 산모와 애기 아빠가 충분한 출산휴가를 받았기에 큰 문제는 없을 듯하지만, 연숙은 언제라도 20 mile (car) drive를 할 준비가 되어있는 모양이다. 

이번에 산모의 부부가 병원에 머물 때 그 집의 강아지 Senate 는 우리와 함께 큰 딸의 개 Ozzie와 함께 있게 되었는데, 둘의 사이가 아주 좋은 편이어서 우리가 크게 보살 필 부담은 적었고 거꾸로 나는 그 둘과 동네를 걷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도움이 아니었을까 희망해본다.

 

good friends, Senate & Ozzie at Saybrook Home

 

아득한 세월 전 우리들의 첫 생명이 태어났을 때의 모습이 엇갈리는 기분을 느꼈다. 특히  1983년 1월초, 새로니, 그 갓난 ‘어설픈’ 생명체를 꼭 가슴에 품어 안고  제왕절개 수술, 1주일 만에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추억이 안 떠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 딸애의 출산 드라마를 겪으며 우리 둘이 100% 공감한 것이 있다. ‘모조리 잊어 버렸다!’ 라는 탄성.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둘이서’ 그 생명의 드라마 느낌과 경험을 모조리 잊어 버린 것일까? 진화론자들이 즐겨 주장하는 바로 그  ‘세월의 횡포’일지도 모른다. 사실적 기억은 물론이고, 느낌조차 그렇게 희미해졌단 말인가? 유일하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며 물리적 기억인 ‘사진들’ 밖에 없다.  당시의 사진들 몇 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렇다. 조금은 그 신비로운 느낌들과 ‘어벙벙’ 하고 초라했던 나의 자화상들이 조금씩 떠 오른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더니, 정말 그 당시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르고’ 경험한 인생중대사였다. 그러니까 별로 큰 고통과 고민과 고생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 젊음이었다. 젊음이 주는 ‘무식의 용기’를 마음껏 가지고 있었던 그 시절들이었다.

 

첫 애 새로니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생후 11일 째, Buckeye Village Mahoning Court.

아무 것도 모르고 주위 도움 없이 키우기 시작했던 때, 1983년 2월 초

 

세대는 이렇게 흐르며 현 세대가 때를 마치고 떠나면 다음 세대가 등장,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간다. 지극히 순리적인 진리인 것을 잊고 살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새 생명이 태어나는 ‘출산 드라마’를 가까이서 보고 느끼면, 다시금 모든 생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Vatican Angelus

St. Peter’s Square에서 교황님의 삼종기도를 기다리며 운집한 die-hard 순례자들.

예전같이 평상적인 모습으로 기다리는 순례자, face mask가 하나도 안 보인다.

 

Vatican Angelus, 바티칸 삼종기도:   지나간 주에 일어난 딸애의 출산 같은 큰 일들을 때문인지, 모처럼 주일미사를 빠지기로 결정한 ‘우리들의 삼일절’ 일요일 오후에 Vatican Youtube 를 보니까 오랜만에 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삼종기도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 ‘교황님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 이라며 기도를 하자는 text message를 본 직후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기에 사실 여부가 궁금하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의 바티칸 삼종기도에 교황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과연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과연 삼종기도 시간에 맞추어 교황님이 창문으로 나타나셨고,  close-up 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조금 피곤한 것 이외에는 전혀 병색이 없었다. 또한 성베드로 광장에 운집한 순례객은 숫자는 비록 적었어도 얼굴 마스크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태리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율이 아주 높다고 들었는데, 그 지역이 다른 쪽인 모양이다. 하지만 로마나 바티칸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하는 우려는 떨칠 수 없었다.

 

평소와 같이 창문으로 등장하신 교황님, 코로나 바이러스는 헛소문..

역쉬… fake rumor 전혀 병색이 없는 교황님, 평소처럼 삼종기도, 메시지를 바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까.. 과장해서 말하면 심한 flu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문제는 (1) 이 바이러스의 정체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점, (2) 감염률이 높은 듯한 점, (3) 경제, 사회적, 심지어 정치적인 파급적인 불안감, (4) 결국은 사회적인 약자에게 미칠 지나친 피해… 등등을 생각하면 조금은 미리 피곤해진다. 왜 하필이면 성스럽기만 한 사순절에 이런 ‘중국발 대형사고’가 났을까? 

Grandfather, Yellow Perils…

¶  Grandparents at last:   드디어 우리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지난 해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느낌을 생생히 기억하기에 이번에 결국 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느낄 것으로 예상을 했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또 다른 느낌들을 정리하고 처리하느라 사실은 꼭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일들이 작은 딸애의 급작스런 ‘속도위반’성 결혼의 결과임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도 정리를 못하는 정말 ‘모든 것이 늦은’ 인생을 사는 한심한 늙은이라는 생각 뿐이다. 주위의 대강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찾아오는 ‘손주들의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어느 분들은 지나칠 정도로 흥분을 하는데 나는 그때마다 미안할 정도로 묵묵히 응답을 했던 기억이다.

우리 부부의 출산경험은 사실 거의 40년 전에 가까운 태고 太古 적 때의 일이었고, 이번에 다시 가까이 이 출산과정을 지켜보면서, 거의 새로운 것을 보는 듯했다. 오래 전, 두 애 모두 (제왕절개)수술 경험이 있어서 이번의 예정된 수술은 크게 생소한 것은 아니었지만,모든 기억이 사라진 후여서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이 탓인지 정말 필요 없는 것들이 걱정거리로 둔갑을 하는 모양이다.

그 긴 세대차를 통해서 의학도 발전을 했을 것이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이 있을까? 걱정을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을 통한 나름대로의 근심은 떨쳐 버릴 수가 없어서 주위에 기도를 청하기도 했다.  한가지 다른 것은 그 옛날 우리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는 사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기억, 그래서 충분히 즐길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것은 비교적 생각을 할 여유가 있어서 그렇게들 즐겁고 기쁜 것이라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하기도 했다.

아기엄마(작은 딸) 는 이미 내가 할아버지가 되었음을 강조하느라 지난 성탄 때에는 MY GRANDFATHER’S BLESSINGS이란  DR. RACHEL REMEN의 Bestseller 책까지 선물로 주었으니, 별다른 거창한 생각을 안 하며 기다렸던 나도 이제는 조금 ‘책임감’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할은 무엇일까? 나에게 할아버지, 할머니 상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없다.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숙에게는 그런대로 기억에 남는 분들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6.25 발발초기 때 납북되셔서 기억에 남는 아버지가 없었기에 내가 아빠 노릇 하는 것도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할아버지 노릇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난감하기만 하다.

태어난 파란 눈을 가진 건강한 남자아기를 계속해서 보니 시간이 가면서 나의 마음에도 평화와 기쁨이 찾아온다.  또한 주위의 친지들에게 태어난 아기의 사진을 보내주니 그렇게 함께 기뻐할 수가 없었다. 특히 반세기 떨어져 살아왔던 고국의 친구들도 제일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된 것을 축하해 주었다. 그들은 ‘정상적, 모범적 인생’을 살았는지 벌써 중학생까지 된 손주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이번에 겪는 ‘인생사’는 지나간 오랜 세월 동안 내가 예상하며 살았던,  ‘인생에서 거쳐야 할 큰 사건들’ 중에서 거의 마지막에 속할 것이라 생각이 되어서 조금은 의미를 두고 싶지만, 완전히 ‘세계화’된 여건에서 파란눈의 손자, 사돈들과 어울리는 새로운 모험이 시작됨은 우리 평창이씨 족보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지 궁금하기만 하다.

 

¶  Yellow Perils:  Corona Virus, 코로나 바이러스로 주위가 시끄럽다. 이것이 시끄럽게 된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우리야 별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는 많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리도 피할 수 없게 관심을 안 둘 수가 없게 되었다. 당면 문제는 우리가 일 주일에 한두 번은 가야만 하는 ‘도라빌 한국 순교자 성당’이 ‘한국인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도 다른 한국사람들과 잠시나마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암만 생각해도 조금 overacting이 아닌가. 본당에서 공식적으로 ‘자발적 모임 자제’는 물론이고 봉사활동의 첨단위치에 있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모임도 단장재량으로 취소, 연기한다고.. 꾸리아 월례회의, 사순특강 취소… 사순절인데 어쩔 것인가?  이곳 아틀란타에 위치한 CDC에서도 별로 크게 공포감을 주는 발언이 없고, 다른 미국본당들은 전혀 개의치 않음을 알기에 성급한 한국인의 성질이 이곳에서도 역시.. 하는 생각이 든다.

제일 웃기는 것은 역시 그 문제의 다른 쪽 한국인사제, 미사 때 신자들에게 ‘대꾸도 하지’ 말고, ‘기도도 말로 하지 말고’, ‘성가도 부르지 말고’.. 등등 예의 일장 훈시를 한 모양이다. 역시 그 신부의 해괴한 인상 그대로인 듯.

이번 ‘사건’을 통해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 Yellow Peril이란 말을 정말 오랜 만에 떠올렸다. 서양문화가 보는 황화론 黃禍論, 아마도 영국의 역사학 거장 universal historian,  Arnold J. Toynbee가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1 황화론의 현대적 해석은 다음 세계전쟁은 서방과 중국의 종말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중반의 일이었고 당시의 중국은 정말 전 인민이 굶어 죽어가는 한심한 공산독재의 표본이어서 쉽게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 서방에 도전을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50여 년 후에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이제는 이 말이 장난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기본 도덕관념(서구적인)이 거의 ‘의도적’으로 결여된 ‘비정상적 공산주의자’들이 억수로 돈을 벌어서 어떻게 쓰고 있는가. 이런 배경에서 이번의 코로나 전염병을 결과적으로, ‘비밀리에’ 퍼뜨리게 한 짱깨(정부 주도로)들의 행태를 다시 보면서 그들과 함께 춤추는 대한민국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1. 1960년대 말 한국 시사영어주해 잡지, 월간 ‘시사영어연구’에서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Ashes, ashes…

 

2020년의 사순절 Lent가 시작되었다.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  아침 9시 미사엘 가서 이마에 재 灰로 긋는 십자가를 엄숙하고 고맙게 받았다. 문득 ‘아, 또 새로운 사순절이…’ 하는 자괴감 비슷함을 잠깐 느꼈지만, 올해의 사순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생각을 할 여유는 별로 없었다. 갑자기 다가온 ‘손자’의 출산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걱정보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온통 머리 속을 맴돈다.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고?  증손주를 볼 가능성은 제로이므로 이것이 우리가 거쳐야 할 중대사의 거의 마지막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쁨, 후회, 걱정, 안도감들이 완전히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각종 개인적인 관문들, 국민학교입학,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 졸업, 대학교 입학 졸업, 유학출가, 결혼, 출산, 취직, 은퇴, 고아가 되는 슬픔, 자녀 출가, 출산… 70여 년에 걸쳐서 계속되는 이런 일들은 모두가 겪겠지만, 그래도 ‘해 냈다’ 라는 안도감이 앞선다. 전에는 이런 ‘과업’들이 우리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때 늦게나마 이런 모든 것이 ‘안 보이는 은총’의 덕이었음을 알고 가는 것이 제일 다행스럽다.

나를 근원적으로 일깨우고 변화시켰던 2014년 사순절을 사진처럼 기억한다. 워낙 거대했던 깨우침이라서 죽기 전까지는 다시 그런 경험을 못하리라고 거의 확신하지만, 그래도 사순절은 나에게는 신비로운 의미를 주는 40일이다. 또한 올해의 사순절은 이런 큰 가족적 진화과정을 겪으며 ‘사람을 사랑으로 구하시려는 사명’의 예수님의 의미를 다시금 차분히,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 사순절의 결론은 역시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임을 잊지 않고, 사순 40일을 보낼 수 있도록 기도를 하고 싶다.

연세대, 달력, 최인호 선배

 

지난 연말에도 연세대 동창회를 못 갔다. 물론 매년 못 가긴 했지만 더 ‘늦기 전에’ 한번 나갈까 몇 년 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꼭 가야 하나’ 하는 게으름 반, 두려움 반으로 버티고 있다. ‘게으름 반’은 언제라도 극복할 수 있을 듯하지만, ‘두려움 반’은 솔직이 자신이 없다.

20년도  전에 유일하게 한 번 가본  것이 전부였는데 지금 다시 나가면 도대체 어떤 분위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어색할 것 같은 것… 그런 것을 나는 제일 싫어한다.

성당 교우 중에 선배님이 계셔서 가끔 동창회엘 다녀오셔서 ‘연세대 달력’을 챙겨주시곤 했는데 올해도 고맙게 도 하나를 나누어 주셨다. 이 선배님은 비교적 대 선배에 속하지만 친구처럼 자상하신 분이라 아마도 우리가 다시 동창회에 나가면 조금은 덜 어색할 것 같다.

연세대 달력을 걸고 보니 첫 장, 1월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가볍고 아담하게 쌓인 눈을 배경으로 연세대의 ‘다른’ 얼굴, 이공대학 건물이 반갑게 나를 반긴다.  주로 언더우드 동상을 앞세우고 문과대학이 간판 건물로 나오는데, 올해는 어떻게 이런 행운이 있을까? 다른 이공대학과 함께 우리 전기공학과도 이 건물에 있었다. 날씨 좋은 날 이 건물 바로 앞의 bench에 앉아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아 ~~  연세대의 추억이여…

추억, 추억하지만 이제는 추억을 넘어서서 연세대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낸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추억 만으로는 너무나 짧았던 시절이 아닌가…

입학 직후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완전 자유’ 분위기, 이것이 나에게는 조금 문제였고 결국 상처도 입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학 교육의 의미를 느끼게 되었다. 비록 절대자,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지만 이곳에서 조용하게 느껴지는 신앙적인 분위기, 이것도 학교를 떠난 오랜 후에야 감사하게 되었다. 또한 항상 ‘세계를 향한 눈’을 강조하시던 총장님의 말씀도 좁은 곳을 떠나 미국 유학을 꿈꾸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우연히 옛 시사잡지 ‘신동아’를 보다가 소설가 최인호 씨의 ‘연세대 추억’ 글을 읽게 되었다. 이분이 연대 영문과출신이고 나이도 3년 위여서 최 동문, 최 선배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1978년의 글이니까 소설계의 혜성으로 등장한 직후였을 것이다. 최인호 동문선배의 글을 읽고 보니 역시 ‘문과대’ 출신답게 보는 눈, 묘사하는 기술도 색달랐다.  당시의 풍조를 반영하듯 ‘연고대, 서울대’를 중심으로 비교, 분석한 것이 아주 이채롭지만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돈이 생기면) 연대생=구두닦기, 고대생=막걸리, 서울대생=책…  등이 그것이다.

1학년시절 지나친 영화관람으로 인한 낙제, 빠른 결혼, 결국  8년 걸린 졸업.. 등등 조금은 고생하며 보낸 학창시절이었다. 군대에서 보낸 3년 반의 공백과 학생결혼생활 등등은 나로서는 너무 감당하기 힘든 것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밑거름이 되어서 졸업 후에 그렇게 소설계의 혜성으로 등장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도 언급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최인호 선배가 바로 ‘대표적인 연세인’의 모습이 아닐지…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알기 힘들어서, 어떻게 그렇게 한창 일할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 아쉽기만 하다.

 

작가 최인호, 2000년 경

 

延世8年에 배운 眞理

崔仁浩 (作家, 延大 文科大英文學科卒)

 

 

가슴에 새긴 푸른 문장 紋章

 

내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19]64년 3월이었고 졸업한 것은 [19]72년 9월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꼬박 8년간의 아까운(?) 청춘을 대학생활에 바친 셈이다.

그렇게 오래 연세대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학교 1학년 때 철모르고 영화구경 다니다가 학점이 모자라 낙제하여 1학년을 재수하였기 때문이요, 김신조 金信朝 아저씨 덕분에 3년 복무하기로 약속되었던 군생활을 3년 반 꼬박 군대에서 청춘을 바쳤기 때문이요, 거기에다 어영부영 연애랍시고 하다가 에라 이처럼 만나고 헤어질 바에는 아예 둘이서 살림 차려도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진 것은 쥐뿔도 없이 결혼식을 올리고 학생남편 노릇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막상 졸업식이라고 학사모를 뒤집어쓰고 누가 입었던 가운인지 하루만 빌려 입고 “제군들 앞길은 창창하오” 라는 식의 축사를 들으며 졸업식을 할 때 내 가슴은 우라질 학교를 드디어 졸업하게 되었다는 감개와 비애로 찢어지고 있었으며 여편네는 애를 배어 오늘 내일 하는 오똑이 같은 배를 하고서 남편 졸업식을 축하하러 나와 주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지겹기만 했던 연세대학교에 있어서의 학창시절은 내 의식의 녹을 벗기고 날로 푸르게 이끼가 자라고 있으며 연세의 푸른 紋章은 내 가슴에 뚜렷이 인 印 박혀갔다.

나는 연세대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던가. 가끔 나는 돌이켜 생각해 보곤 한다. 배운 것은 술과 담배와 적당한 퇴폐와 적당한 학문과 상식, 절망과 슬픔, 은행의 박한 이자와 같은 욕망과 교활한 이기주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처음 몇 년간은 내 가슴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본다면 연세의 그 깊은 손길은 천천히 다가와 나를 이루고 조각하여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빛깔과 향기를 주어 나를 달성시켜주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4.19 [학생혁명] 직후 한 소설가가 각 대학의 성격을 카리카츄어 하면서 돈 백 원 있으면 서울대학 학생들은 책을 사고 고려대학 학생들은 막걸리를 마시고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구두를 닦는다는 식의 내용을 발표한 뒤 지독한 곤욕을 치렀다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있었다.

어쨌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무지무지 실망해서 그 소설가의 지적이 맞는 표현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었다. 고등학교 무렵에 느끼던 대학생활의 기대는 얼마나 높은 것이었던가.

‘백양’ 담배도 마음대로 피울 수 있으며 술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고 낡은 가방에 염색한 군복바지를 입고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책을 읽으며 예쁜 애인과 연애도 마음대로 걸 수 있다는 대학생활에의 선망은 마악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깨어지고 말았다.

대학생활은 전국 각도에서 모여든 국적 없는 노무자들의 집합소 생활과 다름없었다. 나는 이내 실망을 하고 학교에 나가느니보다는 씨네마코리아라는 싸구려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눈알이 돌도록 영화를 보는 것으로 대학 일년을 보냈으며 번번히 낙제를 하는 비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연세대학교에는 솔직히 서울 문리대생들의 그 악바리같은 엘리트 의식, 겉으로는 만민평등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선민이라는 계급적 모순을 안고 있는 엘리트의식, 혹은 땅 팔아 논 팔아 공부 공부 공부하여 고등고시 합격하려는 끈질긴 완행열차 상경파들의 결심 같은 것도 연세대학교에는 없었으며 그렇다고 고려대학생들의 촌놈의식도 없었다. 민족자본이 만든 학교라는 자부심아래 농악에 막걸리에 여드름 툭툭 불거진 얼굴로 애써 백의민족의 후예라는 전근대적 고집을 내세우려는 촌놈의식 같은 집요한 딴 학교들의 칼라는 연세대학교에서는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연세대학교에 실망을 하였던가. 마치 선교사들의 뜨락만 같던 교정. 찬송가소리. 일주일에 한 번씩 예수그리스도의 고행을 칭송하던 목사님의 열띤 주기도문. 어딘지 매끄러운 집 출신 아이들이 모인 것 같은 친구들. 부모 잘 만나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라난 것 같던 아이들의 반짝이는 구두. 차비도 꿔주지 않던 극도의 이기주의.

나는 허락된다면 학교를 때려치고 싶은 적도 있었다. 이건 대학교도 아니다. 이건 대학교가 아니라 부모 잘 만난 학생들이 모였다가 떠나가는 유치원이다.

그러나 나는 감사한다. 나는 이제 나를 키워준 연세대학교에 감사한다. 아주 먼 훗날에서야 나는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의 강점이라는 것을 배웠다.

연고전 때면 으레 고대에서는 농악을, 연대에서는 서양 나이트기사가 출연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그러나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가 가질 수 있는 유일의 성격이며 특색인 것이다. 나는 연세대학교에서 모난 편견을 버렸다.

 

 

세계 世界를 호흡하는 연세인 延世人

 

나는 ‘용비어천가’ 만이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문학이라는 감정적 차원에서 ‘셰익스피어’와 ‘T S 엘리오트’의 무서운 세계인들의 공통분모를 터득하였다.

연세대학교는 만인이 알다시피 외국선교사가 세운 학교로 어딘지 그런 성격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연세대학의 심장부 문과대학 앞에는 ‘언더우드’ 의 눈 파란 외국인 동상이 우뚝 서 있는데 그리하여 어딘지 영국식 정원 같은 교정을 지나 담쟁이 넝쿨 우거진 서양 목사관 같은 문과대학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왠지 성균관의 문을 드나드는 유생이라는 느낌보다는 갓 유학 떠난 식민지시대 때의 문부대신 이웃 집 서생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가 내게 눈뜨게 해준 의식의 세계였다.

내가 선 땅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극동 그 지역에서 벗어나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민족적 자각과 더불어 지구인 地球人 이라는 범세계적 의식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연세대학생들이 백 원 있다면 꼬옥 책을 사거나 막걸리를 마시지 아니하고 구두를 닦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비난 받아야 할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강점임을 나는 배웠다.

한마디로 연세대학 학생들에겐 이상하게도 스마트한 특색이 있다. 좋은 의미의 개인주의자들이며 구태여 남에서 참견하느니보다는 남의 도움도 외면하고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려 하지 않는다.  혼자의 일은 자기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는 서구적 개인주의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 역시 강점이다.

언젠가 대학시절 연극반이었던 나는 다른 대학 연극반 학생들과 합동 미팅을 한 적이 있는데 다른 대학학생들은 술이 취하자 모두들 ‘두만강’이라든가 ‘타향살이’를 불렀는데 유독 연대생들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캔서스 시티’를 부르는 것을 보았었다.

노래 부르는 것으로 꼭 학교 나름의 특색을 구별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애써 대학생인 만큼 평소 부르지 않던 ‘두만강’을 부름으로써 과잉 대학생 자부심을 만족하려는 위선보다는 나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캔서스 시티’를 부르는 학생들이 더 솔직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홀로 미소를 김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연대 延大의 강점 强點, 연대생 延大生의 특징 特徵

 

지금 내 아내는 연세대학교에서 만난 클라스 메이트인데 간혹 이런 얘기를 하곤 한다.

“남자들은요, 연세대학교 출신들이 제일 좋아요.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우리 친구들은 누구나 그런 말을 한다구요. 연대출신 남자들은요, 다정하구, 모나지 않구, 가정적이며 아내들을 아껴주는 성격이라구요. 우리 친구들은 이런 말을 해요. 가령 봄이라서 대문에 페인트 칠을 하는 경우가 있으면 서울대 출신 남편들은요, 말로는 가정을 가정을 위한다 라고 하면서도 ‘페인트칠 좀 해주셔요’ 하면 사람을 사서 페인트칠을 하구요. 고려대출신 남편들은요, 페인트칠 좀 해달라고 하면 ‘남자가 어찌 가정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당신이 해’ 하고 모른 체 하지만 연대출신 남자들은요, 천천히 일어나 자신이 페인트칠을 한대요. 나는요, 이담에 우리 딸애가 시집갈 때두 연대생 출신 남자에게 시집 보낼 거예요.”

나는 이 말을 참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연대가 맹목적으로 왜소하고 나약하다고 비난 받는 점이기도 하지만, 이 점이 바로 연세대학교 성격의 강점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때문에 감히 단정하건대 연세대학교 출신들은 졸업 후에 별로 크나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 겨울 우연한 기회로 고려대학교 총장이신 김상협 박사님을 만나 뵈온 적이 있었다. 잔설이 쌓인 고려대학교에 김총장님을 만나 뵈러 들어가면서 나는 이 촌놈의 학교를 바라본 순간 가슴이 찡해와서 감격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저 식민지시대 암울한 민족의 의식 속에 통렬한 폭죽을 터뜨린 우리 민족의 학교 고려대학교의 위풍을 보며 아, 그렇구나, 바로 이것이 대학이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오늘날 무엇이든 천편일률로 똑같아지는 이 획일주의적 문화, 철학, 예술 속에 대학만은 그 나름대로의 칼라를 고집해야만 한다고 나는 느꼈었다.

고려대학교는 고대의 특색으로 서울대학은 서울대의 특색으로 연세대학교는 연대의 특색으로 뻗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제발 대학교에게 한가지 빛깔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대학을 자유롭게 하라.

고려대학교에서 김총장을 만나 뵈온 뒤 나는 그 느낌을 신문에 이렇게 썼었다.

 

“대학교문을 들어선 순간 모자를 벗어라. 교문을 들어선 순간 일체의 권위와 일체의 체면을 버려라. 아무도 이곳을 무단침입 할 수는 없으며 이곳에 들어선 순간 경례하라.

이곳은 우리의 미래를 짊어지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진리를 닦고 연마하는 곳. 목소리를 낮춰라. 저 책 속에 파묻힌 젊은이들의 머리를 혼란케 하지 마라. 그리고 용서하라. 그들이 설혹 그릇된 시행착오를 하더라도.

대학교. 이곳은 당신들이 불어나는 이자를 꿈꾸며 사고파는 증권회사가 아니며,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자가용 족이 아니다. 당신의 어깨 위에 빛나는 계급장을 떼어라. 이곳은 신의 은총을 갈구하는 교회가 아니다. 이곳은 당신의 위장을 채우는 음식점도 아니다. 이곳은 돈만 더 주면 탈 수 잇는 일등칸 급행열차도 아니며 또한 어울렸다 떠나가는 대합실도 아니다.

대학은 당신에게 배부르게 하지 아니하며 당신을 편하게 하지 아니하며 당신의 영혼을 채워주지도 않는다.

대학 大學, 이곳은 단지 수많은 눈감은 사람들의 손끝을 위한 점자 點字, 그 진리를 샘솟게 용기 있는 자라면 저 돌계단이 여늬 돌 [石] 이 아니라 수많은 방황하던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때로는 고뇌하고 때로는 두려워하고 때로는 슬퍼하던 청춘의 푸른 문장 紋章 임을 인정하고 풀포기 하나 강의실 벽의 낙서 하나 꺾거나 지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날 김총장은 오늘날 대학교육에 대해 걱정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영국식 교육처럼 사회지도자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할 것이냐, 아니면 미국식 교육처럼 건전한 시민으로 키울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 일선 책임자로서 가장 큰 난점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대학교육이 사회 지도자를 키우고 그 본래의 목적에 치우친다면 그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팽배한 오늘날의 대학교육은 암초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延世가 가르친 眞理

 

나는 여기에서 우리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왜 졸업한 뒤 막상 사회생활에 부딪친 후에도 잘 적응하여 그 본래의 빛깔을 잃지 않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 연세대학교에서 내가 배운 그 진리였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에서 배운 진리는 분명히 말해서 극단의 이상주의적 이론이 아니었다.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사회에 나가서도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적 이론과 사회와의 거리감은 별로 느끼지 않았으며 충격을 덜 받게 되었던 것이다.

타 대학생들이 학창생활에서는 그들이 비난하는 대상을 뚜렷이 하다가도 졸업 후에는 한시 빨리 그들이 비난하던 대상이 되고 싶어 안달을 하거나 막상 그 대상의 일원이 되지 못하면 그저 뒷전에 물러서서 갉아 내리는 열등감 투성이의 지 知적 소모품으로 전락되는 괴리감의 노예가 되는데 비해 연대생들은 대부분 각자 그들이 원하는 분야에 별로 드러남 없이 박혀 있다.

이것이 바로 연세대학교가 입학 때부터 배워주는 그 진리인 것이다.

연세대학교는 바로 학생들에게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책임의식을 처음부터 가르치고 있으며 때문에 4년의 과정 동안 터득한 진리는 바로 타인 위에 있다는 우월의식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그 타인의 구성원이라는 명제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新東亞 1978年 6月號]

On top, Stone Mountain

지울 수 없는 잊혀진 대의명분, Stone Mountain, Georgia

 

미국 조지아 주,  수도 아틀란타, ‘바람과 함께 사라진’  lost cause의 역사, 공립고등교육수준  미국에서 ‘거의’ 최하위,  racist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득실득실, 남북전쟁 전후 노예제도 천국, 깊은 산속에 숨어사는 해괴한 백인들…  알아들을 수 없는 지독한 사투리 southern accent, 이런 모든 조지아 주의 ‘사실이건 아니건’ 불명예는 정확히 30여 년 전에 ‘북쪽’에서 이곳으로 직장을 찾아 온 가족이 내려오면서 어렴풋이 들었던 숨길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들이었다.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조지아와 모든 것이 정 반대의 극에 있는 ‘추운 동네’ Madison, Wisconsin을 떠나 새로 찾은 직장이 바로 Atlanta, Georgia에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대단한 결정을 하게 된 것이지만, 사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대부분 사람들, 남쪽 특히 조지아 주로 가는 것에 대해 불쌍한 듯, 이맛살 찌푸림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치 사회적, 문화적으로 뒤 쳐진 곳’으로 가는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사를 올 당시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것 중에는 ‘무식 無識이 자랑인, 무지랭이 중의 극치 極致’, 감추고 싶은 미국 역사의 수치 羞恥’인  KKK (Ku Klux Klan) 가 ‘패전 敗戰, 조지아 주’와 직접 관련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남북전쟁 패전 직후 테네시 Pulaski, TN 주의 ‘한 동네에서’  갑자기 할 일들이 없어진 ‘패전 남부 confederate 퇴역군인, 동네깡패’들로 로 출발했던 이 hate group은,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급변하는 세상의 불안한 심리[흑인해방, 동유럽 이민, 가톨릭]를 적절하게 이용해서 급성장 수백만 명의 member를 확보하기도 했는데 이 무렵에는 이미 ‘장난적인 hate group’에서 벗어나 당당한 정치적 그룹이 되었고 수 많은 정치인들도 가입을 한 상태가 되었다. 이 재건된 KKK의 시발점이 바로 아틀란타 교외의 Stone Mountain[현재는 州 공원]이란 곳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Stone Mountain [Park]은 사실 이곳으로 이사오자 마자 중앙고 후배 윤주네 집의 안내로 주말에 가끔 놀러 가던 곳이었다.  가족들 picnic장소로 적당하고 거리가 우리 살던 곳에서 20분도 안 걸리는 곳의 위치, ‘세계에서 제일 큰 돌 바위 산’으로 비교적 쉽게 정상으로 hiking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제일 큰 ‘행사’는 Laser Show였다.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남부의 영웅 3명[R. Lee, Jackson, J. Davis]’ 조각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laser image는 어둠이 깔리는 잔디에 누워서 보는 것은 정말 대단한 show였다.

 

3 heroes alive with Laser

 

비록 ‘적진 敵陣’으로 이사온 기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으로 보이는 피해를 본 기억은 전혀 없다. 1990년대 이후의 아틀란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도시 문화를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온 지 몇 년 후에는 올림픽까지 치렀다. 내가 일하던 직장은 대다수가 나와 비슷하게 타 주에서 직장을 찾아 내려온 사람들이고, 최소한 수도권 안에서는 어렵지 않게 많은 이민자들이 정착해 있었다. 그 옛날 유색인 전용 화장실은 전혀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이사온 지 30년이 지난 현재, 서울-아틀란타 비행기가 매일 뜨고 내리게 되어서 이제는 서울의 공기가 지척에서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아직도 조지아는 평균적으로 뒤 떨어진 곳이지만 부분적, 지역적으로는 진보, 발전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비록 평균적인 중고등 교육수준은 최하위에서 맴돌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Georgia Tech이나 Emory University같은 곳은  대표적 예외에 속하는  case다.  온화한 날씨, 경제적인 부동산, 활발한 경제 등으로 이제는 너무나 많은 외부, 타 주 인들의 유입이 문제가 될 정도가 되었으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KKK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세계사를 통해서 이런 ‘반동, 증오’ 그룹은 언제나 있었고 그것에는 분명히 원인과 결과가 교훈으로 남는다. 미개한 것이나 덜 개화된 것이 전부가 아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그 중에서 제일 큰 원인을 제공한다. 미국의 KKK의 교훈을 보아도 분명하다.  노예들 덕분에 편안했던 시절이 끝나게 됨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듯하고, 설상가상 ‘종교가 불확실한, 못사는’ 유럽으로부터의 대량이민, 종교적으로 증오대상이었던 ‘가톨릭’의 출현, ‘보기 싫은’ 유대인들 등등,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을 증오했던 ‘백인우월주의’,  어느 정도 민중의 호응이 없었을 리가 만무하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하면 모든 것은 끝이다.

이런 모든 것들의 실험장이 바로 미국의 19~20세기 역사가 아닐까?  이것은 전형적인 challenge-and-response의 반복 실험이다. 미국은 결론적으로 이제까지 이런 치명적인 도전을  거듭해서 물리치고 있는 형편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지만, 현재 우리의 코앞에 있는 challenge 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위의 교훈들에 비추어 보아서 현재 우리의 ‘우려, 공포, 관심’은 무엇인가? 그것을 자기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거나 잘못 판단하고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이끄는 ‘주체 세력, 정치인’들은 과연 누구인가? 희망과 긍정보다는 불안과 공포를 들추어내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세력, 인간들은 누구인가? 우리와 같은 소수민족을 더욱 불편함과 불안함을 더해 주는 정치인은 누구인가? 그와 반대로 ‘지나친 방종적 자유, 비도덕적에 대한 무감증’을 부추기는, 한 마디로 ‘내가 법이고 도덕’이라고 떠벌리는 한심한 부류들은 누구인가? 이런 것들, 결코 쉬운 도전이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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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서 내가 살아왔던 20세기 중엽을 전후로의 ‘세계, 미국사’를 사회적 관점에서 공부하는 데 안성맞춤인 당시의 미국 주간지 LIFE magazine에서 바로 KKK on the Stone Mountain, 기사를 읽게 되었다. 화보중심의 주간지라서 이곳에 실린 사진들은 과히 역사적 가치가 있었다.  사진기자가 어떻게 ‘변장’을 하고 이들의 ‘행사’에 잠입하여 당당하게 사진을 찍었는지, 과연 LIFE journalism의 우수성이 대단했다.

여기에 보이는 ‘신 단원 선서식’에서 많은 ‘인간’들이 관공서, 경찰 들의 member라는 것으로 당시의 ‘개화된 아틀란타’ 교육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채로운 것은,  이 사진의 설명들에서, 객관성을 자랑하는  LIFE 편집자들의 ‘이 그룹에 대한 혐오감’ 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 anti-Negro, anti-Catholic, anti-Semitic, anti-foreign, anti-union, anti-democratic”, “The ghastly spectacle of hooded human beings”, “Childish ritual”, “march in lock step, like old Georgia chain gang prisoners”, “the mumbo jumbo of initiating”…  이 중에서도 Georgia chain gang prisoners라는 말로 보아서 이들 [북쪽 사람들]이 얼마나 [바람과 함께 사라진] 조지아 주를 경멸, 조롱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On the evening of May 9 [1946] at 8 p.m. a mob of fully grown men solemnly paraded up to a wide plateau on Stone Mountain, outside Atlanta, G., and got down on their knees on the ground before 100 white-sheeted and hooded Atlantans. In the eerie light of a half-moon and a fiery 200-by-300 foot cross they stumbled in lock step up to a great stone altar and knelt there in the dirt while the “Grand Dragon” went through the mumbo jumbo of initiating them into the Ku Klux Klan. Then one new member was selected from the mob and ceremoniously “knighted” into the organization in behalf of all the rest of his fellow bigots. During the two-hour pageant the more privileged members of the Klan padded about with an electrically lighted cross. Said a local Baptist minister of the exhibition, “The ghastly spectacle of hooded human beings trekking…to Stone Mountain to burn a cross…is a sad commentary on the words of the Son of God: ‘And I, if I be lifted up from the earth, will draw all men unto Me.'”.

This was the first big public initiation into the Klan since the end of World War II. It was put on at a carefully calculated time. The anti-Negro, anti-Catholic, anti-Semitic, anti-foreign, anti-union, anti-democratic Ku Klux Klan was coming out of wartime hiding just at the time when the C.I.O. and the A.F. of L. were starting simultaneous campaigns to organize the South and just at the time when Southern politicians were starting their campaign for state and national offices. Georgia’s former “white supremacy” Governor Gene Talmadge is trying a comeback this year and has said that he will “welcome” the support of the Klan. But it is doubtful that the Klan can become as frighteningly strong as it was in 1919. One indication of the Klan’s impotence was its lack of effect on Negroes, who were once frightened and cowed by the white-robed members. More than 24,000 Negroes have already registered for next July’s primaries in the Atlanta vicinity alone, where the Stone Mountain ritual was held.

 

THE KLANS “GRAND DRAGON,” SAMUEL GREEN, AN ATLANTA DOCTOR, IS SURROUNDED BY HIS ASSISTANTS

THE “NEW MEMBERS” march in lock step, like old Georgia chain gang prisoners, up to the Klan’s big altar. The Klan exultingly announced they had initiated 600 new members in one night. But observers’ best guesses were from 150 to 200.

A BURNING CROSS DURING MAY 9 INITIATION, STONE MOUNTAIN CEREMONY WAS PUT OFF MANY TIMES, KLANSMEN SAID, BECAUSE OF WARTIME SHEET SHORTAGE.

BEFORE THE GRAND DRAGON initiates kneel, repeating the ritual. The crowd included some Atlanta policemen. The five Atlanta “klaverns”(branches) are strong because many members of the police force are also members of the Klan.

 

 

 

비 오는 날의 파고다 공원, 오후 3시

‘비오는 날 오후 3시’의 파고다 공원, 1959년

 

파고다 공원, 옛 서울 그러니까 강북이 서울의 전부이던 시절 낙원동 오른 쪽에 있던 유서 깊은 시민의 휴식공간 역할을 했던, 요새 기준으로 보면 정말 아담하고 작은 공원이었다.  역사적으로 까마득한 옛날 옛적에 원각사 圓覺寺 라는 절이 있던 자리여서 그곳에는 절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탑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그런지 일명 ‘탑골공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그곳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는  ‘팔각정’ 과 비슷한 정자 亭子가 [정확히 8각角 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있는데, 그곳에는 그 유명한 3.1 운동의 33인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던 역사가 남아있다. 

얼마 전에 문득 1950~60년대 대한민국 추억의 옛 영화들[한국영상자료원 제공]을 보다가 한 영화 첫 장면에서 그곳, 파고다 공원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오는 것을 보았다. ‘서울의 지붕 밑‘이라는 1960년에 나온, 당시로서는 크게 성공한 조흔파 원작,  신상옥 감독, 제작의 코미디 영화다.  이 영화에는 서울의 중심 세종로 일대와 주택가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보이고, 구형 시내버스, 택시들 특히 시발택시도 보게 되는데, 사실 영화의 줄거리나 배우들 보다는 이런 쪽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역시 ‘못 말리는’ nostalgia 향수병 탓일 것이다.

 

‘서울의 휴일, 1956년’의 파고다 공원

 

다른 추억의 영화들에도 파고다 공원의 모습이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1956년의 ‘서울의 휴일‘, 1959년의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1960년의 ‘로맨스 파파‘라는 영화는 첫 장면 배경이 아니고, 주인공들이 공원 안에서 연기하는 모습까지 나온다. 이런 옛모습들을 보면서 그 옛날을 회상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비오는 공원에서 추억에 잠긴 주인공 ‘이민’

그 5년 전, 비오는 공원 벤치에서 김지미와의 만남

 

처음으로 이 파고다 공원엘 갔던 기억이 60년 이상이 지난 아직도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란다.  재동국민학교 3학년 때 원서동 시절, 동네 골목에서 나를 아껴주던 ‘영순 형’이 있었다. 나보다 몇 살 위였고,  학교는 우리들 모두가 다니는 재동학교와 달리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는,  약수동에 있는 ‘약수국민학교’에 다녔다. 왜 그렇게 먼 곳엘 다녔는지 그 때에도 의아스럽기만 했다. 그 형이 어느 날 나를 비롯한 몇 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간 곳이 바로 파고다 공원이었다.

원서동 골목을 따라 뛰어가서 신작로가 나오면 가회동에서 내려오는 큰 길 어귀에서 남산 을 바라보며 내려가면 교동학교, 문화극장, 덕성여대, 천도교교회 등이  양쪽에 보이고, 더 내려가면 앞에 종로(2가)가 나올 쯤 오른 쪽에 공원입구가 나타난다. 공원이라곤 북악산 쪽으로 산과 숲 속의 삼청공원이란 곳만 알았던 때 이런 시내 한 복판의 공원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들 모두 정신 없이 공원 안으로 뛰어들어서 귀신들린 듯 뛰어 놀았던 기억, 너무나 생생한 것.. 지금도 그 신나게 놀던 우리들 모습,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립기만 하다. 그때 영순형이 공원 안으로  뛰어들어가며 ‘여기 돈 안 받아!’ 라고 소리치던 것도 기억에 너무나 또렷하니… 영순형, 보고싶습니다!

그때는 1956년 경이었을 것이다. 그 해에 나온 ‘서울의 휴일’이란 영화에 나오는 공원의 모습이 바로 이때 내가 보았고 놀았을 때의 모습이었을 듯하다. 팔각정, 원각사 탑(파고다, 탑골), 도처에 있는 추억의 벤치들… 그런 모든 것들은 바로 내가 예상했던 공원의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무직자들이 널려 있었던 당시, 이곳은 그들의 휴식처이기도 했고, 가정불화로 집을 뛰쳐나와 무료로 시간을 보낼 곳이기도 했다. ‘서울의 휴일’에도 영감님이 벤치에 누어 잠에 떨어진 모습도 보이고, ‘서울의 지붕 밑’에서도 주인공 김승호가 시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후 ‘가출’을 한 후에 간 곳,  또 1960년 영화 ‘로맨스 파파’에서 역시 아빠 김승호가 실직을 한 사실을 숨기고 매일 이곳으로 출근하던 것도 바로 이 파고다 공원이었다. 

영화 ‘서울의 지붕밑, 서울’, 파고다 공원, 1960년

시의원 낙선 후 가출, 파고다 공원의 김승호, 서울의 지붕밑 1960년

‘로맨스 파파’, 실직 후 파고다 공원으로 출근하는 아빠 김승호

‘로맨스 파파’ 의 끝 장면, 당시 우리들이 동경하는 그런 가정이었다

1957년 경, 그러니까 재동국민학교 4학년 때, 나는 다시 이곳에 남은 추억이 있다. 담임 김경구 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가정방문을 온다는 ‘통고’를 들은 후에 나는 ‘혼비백산’한 심정으로 방과후에 간 곳이 바로 이 공원이었다. 왜 당시 나는 그렇게 선생님이 집에 온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있었는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속의 공원에서 ‘무직자, 가출자’ 같은 심정으로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던 기억. 집에 내가 없으면 선생님도 돌아가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일까… 그것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그러다가 새로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1959년경의 영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란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하도 영화 보존상태가 나빠서 처음엔 무시하고 넘어갔지만 자세히 보니 이것이야 말로 ‘파고다 공원 영화’였다.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는 바로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이야기였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진흙 속에 감춰져 있던 진주’였다. 기라성 같은 1급 배우들[이민, 최무룡, 김지미, 최지희 등등] 이 총 출연했는데 특히 주인공 이민 씨의 연기가 아주 돋보였다. 그 2년 전에 내가 경험했던 ‘비 오는 공원’이 바로 이곳에서 영화로 재현되고 있었다.

이 ‘오후 3시’ 영화에는 그 유명한 추억의 발라드 ‘검은 장갑’ 을 ‘전설적인 가수’ 손시향이 부르고, 박재란 도 노래를 부르며 출연한다. 그러면서 주제곡인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멜로디를 자꾸 들으며.. 어렴풋이 기억에 떠오른다. 아마도 이 곡, 거의 60년 만에 듣는 것은 아닐까?

 

‘검은 장갑’을 부르는 가수 손시향

 

요새 거의 매일같이 쏟아지는 겨울 비를 창 밖으로 느끼고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래… 나이를 깊이 먹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거리도 깊이 쌓여가는 게 아닐까? 물론 그것이 나만의 특권은 아닐지라도…

‘Sparky’ Fun

지나간 10여 년 이상 나에게 일어난 큰 변화 중, 주변에서 거의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사실은 나도 잊고 사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서 technical book을 거의 산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technical 한 것은 물론 electronics, computer에 관한 것이다. 이 사실은 사실 나도 가끔 놀라는데, 어찌하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쉽게 말해서 나의 주 관심사가 지난 10년 동안 크게 변했다는 사실에 있다. 공학, 과학에서 신학, 인문학, 문학 쪽으로 갔다고나 할까..  신학 중에서는,  전통적 신학이라기 보다는 ‘과학과 종교의 대화’ 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역시 spark가 번쩍이는 ‘전기의 기운’을 보면 본능적으로 흥분이 되고, 본능적인 희열을 느낀다. 어릴 적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것이 나의 일생 직업이 될 것도 의심치 않았다. 비록 전문직종에서 직장생활의 인간관계가 힘들 때가 있어도 일 그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이 극복되곤 했다.

모든 전문성이 사라진 이 나이에서도 나를 제일 흥분시키는 것은 다름이 아닌 spark가 번쩍이는 ‘전류가 흐르는’ 전깃줄 바로 그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혼’, electron들의 마력에 빠진 이후 나는 그것을 즐기는 인생을 살았지만 근래에 들어서 그런 시간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유일하게 그것들을 손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는 가끔 찾아오는 ‘가전제품이 망가지는’ 그런 불편한 때 밖에 없다.

 

부분적 고장이 난 space heater, 타버린 power diode, troubleshooting ready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값싼 parabolic  electric space heater란 것, 이것은 분명히 ‘값싼 중국’에서 온 것이고, 수명이 그렇게 길지 못함은 값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그런 ‘일회용 제품’ 에 속한다.  몸에 직접 햇볕을 쬐는 효과를 최대한 살린 것이라 겨울에 몸으로 느끼는 추위를 순식간에 없앨 수 있는 이점으로 꽤 유행을 했고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 중에 한두 대는 이미 고장이 나서 버렸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고장이 난 것이 아니고 ‘强, 弱’ 중에 ‘弱’ setting에 고장이 났다. 내가 주로 쓰는 것이 바로 ‘弱’인데, 이것이 안 되면 또 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고쳐보기로 해서 결과적으로 $5.00 part와  일주일의 시간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번에 값싸게 ‘강,약’을 조절하는 그들의 방식을 알게 되었다. AC power에 heating element 가 직접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강’ 이고 power (solid state) diode를 통한 것이 ‘弱’ setting이었다. 그러니까, 60 cycle 중에 절반의 power를 쓰는 것이므로 half power를 그야말로 ‘간단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번의 문제는 물론 값싼 diode가 일찍 수명을 다하고 타버린 case였다. 이 diode만 교체하면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인데 이 ‘값싼 중국’제 part를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Corona Virus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쪽에서 이 part를 ‘수입’하는 것, 불가능한 것이었고 할 수 없이 다른 곳에서 다른 part로 대체하는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과 비슷한 power diode는 미국 내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싼 것은 절대로 아님을 알게 되고, 다시 이 heater를  ‘버릴까 말까’하는 선택에 봉착하게 되었다.

 

60 hertz 117V power cycle, diode로 half cycle이 차단 됨

 

문제는 망가진 diode와 specification이 비슷한 것, 아무 것이나 OK라는 간단한 결론이고, 또한 simple diode가 아니고 bridge rectifier diode[diode가 4개나 내장된] 도 ok일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이런 종류의 것은 이곳 미국 내에서도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으로 $5.00 정도로 손쉽게 그것도 그 값으로 2개나 묶음으로 사게 되어, 곧바로 고치게 되었고,  다른 heater에 이 문제가 나면 나머지 남은 part로 문제없이 고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1주일도 못 되는 ‘수리과정’에서 느낀 것은 ‘행복’ 그 자체였다. 멀쩡한 것 landfill로 가는 것도 방지했지만, 전기의 spark가 손끝에 느껴지는 순간들을 오랜만에 맛 보았던 그 사실이 나를 너무나 행복하게 한 것이다. 앞으로 더 신경이 둔화되기 전까지는, 이것도 perfect time-killer가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대체 부품 bridge rectifier diode, 4개 중에서 하나만 사용됨

성모님과 수선화

꽃과 나무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배우자와 오래 살아왔지만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아주 빈약하다. 한때, 태고 적 시절, 정확히 고등학교 2~3학년 때 ‘화훼 花卉’ 라는 책을 열심히 보며 메마른 콘크리트 2층 집 옥상에다 ‘포장마차’같은 화분, 화단을 만들어서 식물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공돌이’ 성향의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한때, 그것도 공부만 해야 하는 고등학교 때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나는 이 꽃과 나무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근래에 나이가 지긋이 들면서 조금씩 나의 눈에 이 꽃과 나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혀 의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저절로 눈이 떠졌던 것이다. 노력을 한 것도 없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하나, 둘, 셋,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들을 보며 흐뭇한 느낌까지 가지게 되었다. 시에서나 보던 그 초목들의 아름다움을 몸소 느끼게 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나의 눈을 끈 것은 그렇게 추운 2월 초에 어김없이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수선화였다. 물론 서정적인 느낌의 classic folk , seven daffodils 를 추억 속으로 연상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추위를 견디며 backyard에서 피어나는 그 모습과 성모님의 강인하고, 변함없는 인자한 미소는 잘 어울림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속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레지오 마리애 주 회합에서는 ‘총 사령관’인 성모님 상 앞에 2개의 꽃이 든 병을 놓게 되어있는데, 매주 이것을 구입하는 것도 사소한 일이 아니다. 요새같이 단원 수가 극소화 될 때는 재정상 더욱 문제가 된다. 이럴 때 집에 꽃을 가꾸는 시절이 오면 조금은 문제가 완화가 된다. 요새가 바로 그런 시즌의 시작인 것이다. 거기다 겨울이 지나가는 때의 청초한 수선화는 성모님과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Surprise snow, after Daffodils…

눈이 쏟아지기 시작, 길에 쌓이기 전

드디어 눈이 온다… 그것도 함박눈이. 비록 땅에 떨어지면서 녹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것이 웬 떡이냐? 하느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제 소원을 풀어주셨습니다. 이런 날을 꿈 속에서만 그렸습니다. 비록 이런 날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Trappists 수도원으로 드라이브 하는 것은 쉽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대숩니까?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 시간이면 우리 동네 Holy Family 성당의 아침 미사가 시작되었을 텐데… 미사를 보면서 유리로 된 제단 뒤쪽,  밖으로 눈 쏟아지는 모습을 보고 있을 우리  ‘매일미사 친구 아줌마, 아저씨’들, 얼마나 한눈을 팔까… 궁금하다. 신부님도 미사 집전에 신경을 쓰는 것이 어렵겠다는 즐거운 생각도 든다.

결국은 나의 소원은 풀어졌다. 작년에 안 왔던 이 하얀 추억의 선물을 나는 얼마나 기다렸던가. 2014년의 괴로운 추억도 이제는 아련하고 포근한 추억으로 퇴색이 되고 있지 않은가? 세월의 마력이고 매력이 아닌가?

 

이번 ‘진짜’ 눈은 거의 2시간 동안 ‘쏟아졌다’. 며칠 전부터 피기 시작한 수선화, 매화 위로 소복한 눈이 쌓인다. 내가 그리던 최소한의 소원은 풀어진 셈이다. 조금만 기온이 더 낮았으면 아마도 불편함을 느끼게 될 정도가 될 뻔했다. 오늘 것은 정말 눈으로, 기분으로 너무나 포근하고 즐겁고 아련한 것이지만 움직이는 사람들에겐 큰 불편이 없는 그런 ‘뜻밖의 사건’이 될 듯하다. 감사, 감사, 감사…

 

 

봄이 오면 나는

2월의 매화, 그리고 수선화, 또 피었구나 올해도… 반갑다…

 

¶  2월로 달력이 넘어가면서부터 나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2월 초면 거의 시계처럼 피어나는 ‘청초하고 노오란 것’,  늦겨울 황량한 우리 집 뒷마당 먼 쪽으로 오롯이 피어나는 수선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매년 이 꽃이 피는 것을 보며 봄이 아주 멀지는 않았음을 느끼곤 하는데, 올해는 왜 유난히도 이 모습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일까? 이런 모습을 앞으로 얼마나 더 보게 될 것인가.. 하는 아주 sentimental 한 느낌도 없지 않다.

올해는 bonus로 그 옆에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매화꽃이 같이 피어 올랐다. 전에 못 보았던 것인데 아마도 연숙이 언젠가 이곳에 심어 놓은 모양인가 보다. 매화꽃, 연숙이 문인화에서 즐겨 그렸던 것, 나는 사실 처음으로 가까이 실물을 보는 셈이다. 그러면서 일본애들의 전통적 ‘화투’의 2월에 이것, 매화가 있었음을 알고 실소 失笑를 금치 못한다. 어떻게 이 나이에야 이런 사실을 깨달았단 말인가?

올 겨울은 나에게는 정말 재미없는 계절이 되고 있다. 비록 12월은 겨울답게 춥고 싸늘하긴 했지만 겨울의 꽃, 눈이나 진눈깨비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평균적으로 한두 번씩 찾아오는 snow day같은 ‘괴롭지만 즐거운’ 그런 긴장감의 기회가 현재까지 전혀 없었다.  올 겨울에 만약 ‘첫눈’이 온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Conyers1 의 수도원을 방문하리라 던 나의 소년 같은 희망도 이제는 포기할 때가 된 듯하다.

 

¶  봄이 오면 나는…  비록 2월 초이긴 하지만 경험상 2~3월은 겨울답지 않아도 겨울이다. 언제고 ‘날씨의 놀람’은 찾아온다. 특히 이때에 느끼는 ‘추위’는 한 겨울의 그것과 질적으로 종류가 다르다. 한마디로 더 ‘심한 싸늘함’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때가 되면 각가지 ‘봄의 기대’ 에 대한 추억과 생각이 떠오른다. 또한 가톨릭 전례로 이때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가 있어서 올해의 부활절을 떠올린다. 이제는 이때가 나의 일년을 돌아보는 시기가 되고 있다.

요새 즐겨보는 이해인 수녀님의 오래된 1990년대 수필집 ‘꽃삽‘, 이곳에서 수녀님이 생각하는 봄의 모습을 본다.

역시 수녀님, 시인답게 ‘봄은 꽃’이라는 서두로 시작한 단상이다.  이 서문을 읽으며 나도 어린 시절의 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나이차이가 그렇게 나지도 않고 그 무렵 서울 가회동에도 인연이 있기에 더욱 그 시절 봄의 정경이 떠오른다.

난방시설이 초라했던 그 1950년대 그 시절, 겨울을 서서히 벗어나던 때는 정말 황홀한 느낌뿐이었다. 수녀님의 묘사, 포근한 흙 내음새, 어김없이 피어나던 각종 꽃들,  어디 있다가 다들 모여왔는지 그 각종 새들, 그 중에서도 나에게 ‘즐거운 추억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역시 ‘이슬비’가 아닐까? 꽃이 피어나는 앞마당으로 잔잔히 내리는 이슬비를 바라보며 내가 하늘로 떠오르는 착각 속에 빠지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동요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단순하면서도 즐겁고 멋지던가.

추위에서 해방이 된 아이들, 갑자기 밖에서 노는 시간이 배로 불어난 즐거움 속에서 얼마나 흙과 나뭇가지를 가지고 놀았던가. 그 시절의 코흘리개 ‘남자’ 친구아이들, 이제는 모두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이 가져다 준 각종 ‘편리함’이 앗아간 것들을 아쉬워하면 다음 세대와 그 다음세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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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나는 – <꽃삽>, 이해인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앓이를 하고 싶다.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안뜰에 작은 꽃밭을 일구어 꽃씨를 뿌리고 싶다. 손에 쥐면 금방 날아갈 듯한 가벼운 꽃씨들을 조심스레 다루면서 흙냄새 가득한 꽃밭에 고운 마음으로 고운 꽃씨를 뿌리고 싶다.

 

 ‘조금 답답하겠지

그렇지만 꾹 참아야 해

땅은 엄마니까

꼬옥 품어줄거야

한잠 푹 자고 나면

우리 또 만나게 될거야’

 

언제 읽어도 정겨운 김교현 시인의 동시를 외우면 흙을 덮어주면 꽃씨들은 조금쯤 엄살을 부리다가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알았어요’ 라고 대답할 것만 같다.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새들의 이야기를 해독해서 밝고 맑은 시를 쓰는 새의 시인이 되고 싶다. 바쁘고 힘든 살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잇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이 오면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이슬비를 맞고 싶다. 어릴 적에 항상 우산을 함께 쓰고 다니던 소꿉동무를 불러내어 나란히 봄비를 맞으며 봄비 같은 이야기를 속삭이고 싶다. 꽃과 나무에 생기를 더해 주고 아기의 미소처럼 사랑스럽게 내 마음에 내리는 봄비. 누가 내게 봄에 낳은 여자 아기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면 서슴없이 ‘봄비’ ‘단비’라고 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풀 향기 가득한 잔디밭에서 어린시절 즐겨 부르던 동요를 부르며 흰 구름과 나비를 바라보는 아이가 되고 싶다. 함께 산나물을 캐러 다니던 동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친하면서도 가끔은 꽃샘바람 같은 질투의 눈길을 보내오던 소녀시절의 친구들도 보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우체국에 가서 새우표를 사고, 문방구에 가서 색연필, 크레용, 피스텔, 그리고 마음에 드는 편지지와 그림엽서를 사고 싶다. 답장을 미루어둔 친지에게 다만 몇 줄이라도 진달랫빛 사연을 적어 보내고 싶다. 동시를 잘 쓰는 어느 시인으로부터 맑고 고운 무리 말을 다시 배워서 아름다운 동심의 시를 쓰고 싶다. 시를 외우다가 잠이 들고, 꿈에서도 시의 말을 찾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모양이 예쁜 바구니를 모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솔방울, 도토리, 조가비, 리본, 바느질 거리, 읽다가 만 책, 우편물 등을 크고 작은 바구니에 분류해 놓고 오며 가며 보노라면 내 마음도 바구니가 되는 듯 무엇인가를 오밀조밀 채우고 싶어진다. 바구니에 담을 꽃과 사탕과 부활달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선물들을 정성껏 준비하며 바쁘고도 바쁜 새봄을 맞고 싶다

사계절이 다 좋지만 가을엔 ‘달맞이 마음’, 봄에는 ‘해맞이 마음’이 된다고 할까? 꽃들이 너무 많아 어지럼증이 나고,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 봄은 힘들다고 말했던 나도 이젠 갈수록 봄이 좋아지고 나이를 많이 먹고서도 첫사랑에 눈뜬 소녀처럼 가슴이 설레인다.

봄이 오면 나는 물방울 무늬의 앞치마를 입고 싶다.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와 연못이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먼지를 털어낸 나의 방 하얀 벽에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 사제가 그려준 십자가와 클로드 모네가 그린 꽃밭, 구름, 연못을 걸어두고, 구석진 자리 한곳에는 앙증스런 꽃삽도 한개 걸어두었다가 꽃밭을 손질할 때 들고 나가야겠다. 조그만 꽃삽을 들고 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름다운 음성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나는 멀리 봄 나들이를 떠나지 않고서도 행복한 꽃마음의 여인, 부드럽고 따뜻한 봄 마음의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1994>

  1. Atlanta, Georgia의 suburb

YAN: Yet Another Nostalgia

Nostalgia, 향수’병’ 鄕愁病… 허~ 이것도 이제 보니 병 病 그러니까 주로 ‘정신 질병’이다. 몸과 마음, 특히 마음이 아픈,  분명한 병은 병인 모양이다. 나에게는 특히 친숙한 이 ‘병’, 약 7 년 전에 우연히 신문기사 New York Times 에서 이것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쓴 적이 있었다. 당시에 이런 것도 연구 대상이 되는구나 의아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유별나게 아련한 감정에 자주 휩쓸리는 나의 모습을 숨기고 사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나의 중년 이후의 모습이기도 했다. 고향도 그렇지만 지난 시절을 유별나게 그리는 것, 간혹 이것 병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긴 했다. 그러다가 그 ‘과학적 연구’의 기사를 읽고 많이 위안을 받고 이해를 하게 되었다. 내성적인 성격과 향수병에 쉽게 걸리는 type은 흔히 우려하는  mental disorder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더욱 재미있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번에는 지나간 Atlantic Magazine 이 그 출처가 되었다. 기사의 제목이 유별나게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이름하여: Study: Nostalgia Makes Us Warm, and Cold Makes Us Nostalgic… 그러니까.. “향수’병’은 우리를 따뜻하게 하고, 추위는 우리에게 향수병은 가져다 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부제 副題다.  ‘쉬지 않고 지나간 12월의 추억에 빠지면 집의 난방비가 줄어든다’. 와~ 과연 무슨 뜻일까…

대강 짐작은 간다. 포근한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에 빠지면, 그러니까 ‘향수병에 빠지면 몸도 따라서 따뜻해 지고,  또한 추위는 우리에게 향수병을 가져다 주고, 따라서 난방비가 줄어든다’ 는 논리다. 조금은 웃기는 듯 하지만 나는 150% 동감이 간다.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하지만 이 Atlantic의 기사는 과학적으로 그것을 증명하고자 시도한 것이고 그들의 가설은 충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이 연구의 결론은: ‘춥거나, 슬프거나 외로울 때, 특히 holiday season에는 지나간 행복했던 시절의 생각에 빠져라’ 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을 즐기며 따뜻하게 살고 싶고 난방비 절약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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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Nostalgia Makes Us Warm, and Cold Makes Us Nostalgic

Lindsay Abrams  December 4, 2012

 

Non-stop reminiscing about December past may cut down your gas bill.

PROBLEM:  Why do we get so nostalgic in December? Smell, touch, and music have all be proven to evoke it, and the holidays have all three (though, apologies if you’re not being touched enough this seasons.) While they can spur us to give love to our fellow men, or remind of us what’s important in life, they may also serve a more utilitarian function.

METHOLOGOGY: Researchers at the University of Southampton recruited college students to participate in five relatively basic studies centering around nostalgia to warmth. Some of them would probably make great holiday party games.

  1. Participants were asked to keep a journal of nostalgic feelings over 30 days, which were then compared to each day’s weather.
  2. Participants were placed in rooms ranging from cold to comfortable to over-heated, and then asked how nostalgic they felt.
  3. In an online study, participants listened to music and were asked about how nostalgic it made them feel, along with how warm they currently felt.
  4. Participants were placed in a cold room and instructed to reflect on nostalgic or ordinary memories, and to then guess the room’s temperature.
  5. After being asked to recall a nostalgic or ordinary memory, participants placed their hands in iced water and were instructed to keep them there for as long as they possibly could.

Different participants were used for each study.

 

RESULTS:

Success on all fronts. The journalers recorded more nostalgic thoughts on colder days. The people in cold rooms rated highest on nostalgia scales. The people for whom the music evoked the most sentimentality reported feeling warmer. The people told to think nostalgic thoughts while in the cold room had the warmest estimates for what the temperate actually was. And the unlucky participants in the ice water experiment lasted longest when they focused on nostalgic memories.

CONCLUSION:  Nostalgia appears to both to be evoked in chilly atmosphere and to have a protective effect against the cold – either by making us feel warmer or at least increasing our tolerance.

IMPLICATIONS: If you’re cold, sad, and lonely this holiday season, lose yourself in memories of happier times. That will take care of at least one of your problems.

 

The full study, “Heartwarming Memories: Nostalgia Maintains Physiological Comfort,” was published in the journal Emotion.

LINDSAY ABRAMS is a former editorial fellow at The Atlantic.

칠십이 년과 마흔 번째..

Ruby Anniversary, 연숙아, 우리들 오래 살았다…

 

¶  지나가는 일주일 동안 나는 칠십이 년을 살아온 ‘태어난 날’ 과, 배우자와 같이 가정을 이루며 산 세월 40년의 기념일을 연속으로 맞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72세 생일, 결혼 40주년 기념일을 4일 간격으로 맞은 것이다.

항상 ‘기념일’로 바쁜 느낌을 받는 1월이어서 솔직히 근래에 들어서는 은근히 스트레스까지 느끼곤 하였다. 그래서 올해는 ‘아이들’에게 모든 기념일 축하는 사절한다고 충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확실히 마음이 조금 편한 듯함을 느낀다.

생일이 그렇게 즐겁지 않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렇게 ‘축하 거부’하는 나 자신도 웃긴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모두 올해는 바쁜 모양이어서 나의 전략은 성공했고 비교적 조용히 ‘미역국만 먹는 하루’를 즐기게 되었다.  진짜 옛날 ‘어렵던 시절’의 생일이 되살아난 듯 해서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이 일흔둘… 허.. 어쩌다가 이렇게 오래 살았는가? 100세 시대라는 말도 웃기지만, 70세면 어떻고 100세면 어떤가?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그렇게 좋은가? ‘적당한 세월을 적당한 건강으로 적당한 모습으로’ 살다 가는 것, 나는 그것을 바란다. 제발 주위에 큰 부담 안 주고 가면 더욱 더 좋고. 이 세상에 있는 기간과 저 세상의 무한한 세월을 어떻게 비교를 할 수 있을까? 이런 사실을 잊고 사는 우리들이 바보가 아닌가?

가정을 이루고 산 세월이 40년, 이것은 조금은 자랑스럽다. 이유는 자명하다. 그렇게 못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렇게 세상이 변하고 있는가?  결혼 초에 40년 뒤를 내다본 적이 있었을까? 없다. 절대로. 그저 미래는 안개 속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간 우리의 인생,  이제는 조금 피곤을 느끼기도 한다. 무언가 쉬고 싶은 그런 것, 이것이 칠십 년 세월의 느낌일까?

생물학적, 육체적 죽음이 진정한 끝이 아님을 안 이후 이제는 마음만은 편하다. 궁극적 희망이라는 것을 찾았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높은 진리를 늦게나마 알게 된 것을 감사하며 일흔두 살의 생일과 마흔 번째 결혼기념일을 조용히 지낸다.

 

연호 친구들, 1968년 9월, 관악산에서..

 

¶  ‘연호 延護’ 옛 친구들:  1월 중순 즈음이 되면 불현듯 떠오르는 옛 친구의 생일 1월 15일이 나를 반세기 전으로 되돌아가, 생일의 주인공인, 잊고 싶지 않은 친구 양건주와 당시 연세대 캠퍼스주위를 중심으로 같이 어울렸던 ‘연호’ 클럽 친구의 모습들이  함께 삼삼하게 떠오른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어서 정확히 1월 14일 저녁, 그러니까 대한민국 시간으로 1월 15일 오전 즈음에 근래에 우리들이 가끔 이용하는 카카오톡으로 생일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솔직히 주인공인 건주의 반응 메시지는 기대했지만 의외로 ‘모두들’이 즉각적으로 생일축하 인사를 보냈고 정말 오랜만에 모두 한마디씩 신년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이런 뜻밖의 ‘모임’은 정말 즐겁지 않을 수가 없다.

반세기를 뛰어넘는 ‘늙은 우정’을 다시 확인한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모두 어떻게 사는지, 어떤 모습으로 70대를 맞이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모두의 정확한 생일날짜도 서로 확인을 하고 최소한 생일날에는 서로 이렇게 축하를 하자고 하였다.

그 옛날의 철없던 시절의 사진을 다시 보며 나는 숙연한 기분에 빠진다. 전보다는 이런 때의 기분을 잘 조절을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유 없이 즐겁게만 느껴지는’ 옛날의 추억을 나는 어찌할 수가 없다. 그저 포근하고 아름답게만 느껴지니…

 

 

¶  오늘은 신년 들어서 첫 ‘등대회’ 월례모임엘 참석을 하게 되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유일한 ‘장년층’ 친목단체인데, 사실 옛날 같으면 ‘노인들 단체’로 분류될 법도 한 연령층인 60~70대가 주 멤버들이지만, 80대 이상의 그룹이 별도로 있기에 ‘노인’이란 말은 피하게 되었다. 우리는 1년 전에 다른 친목단체인 ‘구역모임’을 안 나가게 되었기에 이제는 이곳이 유일한 social group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더 정성 쏟으며 이 단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을 한다. 오늘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1월 달 생일을 맞는 멤버를 축하하는 모임이기도 해서 내가 혼자서 축하를 받게 되었다. 생일을 미역국으로 때우려고 했던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뜻밖으로 이곳에서 정식으로 케이크와 ‘생일축하’ 노래까지 받게 되었다. 멤버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나는 듯한 이 모임, 앞으로 어떻게 변화, 발전이 될 것인지 모르지만 제발 ‘분열과 갈등’이 없이 건강하게 지속되기를 우리는 기도하고 있다.

신년 벽두 장례미사有感

 

장례식, 장례미사, 연령회 연도..  이제 나에게는 너무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 말들은 모두 죽음에 관련되는 말들이다. 불과 10여 년 이전만 해도 나는 이런 것들을 거의 모두 피해가며 살아왔었다.  ‘죽음의 진리’를 요리조리 피하며, 모래 밑으로 얼굴을 파묻고 살았다는 표현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이 ‘죽음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기리며 보내는 것이 거의 습관화가 될 정도로 많아졌고, 나름대로의 ‘망자 亡者와의 이별’ 하는 방법과 철학까지 생기게 되었다. 물론 기본적인 철학은 가톨릭적인 것이지만 이제는 내 생각의 일부가 되었음을 느낀다.

각양 각색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을 보내는 모습도 모두 다르겠지만 그런대로 경건함을 지키는 가톨릭 장례미사는 그 나름대로의 ‘장엄 의식’이 있고 그에 따른 조문객들의 엄숙함이 보인다. 일반 장례식은 물론이고 개신교 의식 조차도 이에 비해서 나의 눈에는 너무도 ‘사회적 모임’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한마디로 고인의 궁극적인 삶의 의미, 목적, 가는 곳, 등등에 대한 것들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은 올해 들어서 첫 장례미사에 가게 되었다. 작년에는 1월 초에 간 기억인데 올해는 조금 늦은 셈인가. 오늘의 주인공은 40여 년 전, 우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창립멤버로 활약을 했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사회봉사활동을 해서 이 지역에선 잘 알려진 분이었다.  지병으로 한국의 어떤 요양원에 계시다 며칠 전, 향년 80대 중반에 선종하시고 유골함이 다시 이곳으로 왔는데, 고인의 경력을 감안하셨는지 신임주임신부님, 최대한의 예우로 장례미사를 거행하셨다. 예를 들면 부활초가 켜지고 제대의 초의 숫자 등, 모두 평소의 장례미사와는 달랐던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생전의 고인을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이런 분의 영결식에 참여하는 것은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의무로도 생각되어서 ‘갈까 말까’하다가 온 것이었고 신부님의 고별사도 다시 기억하고 싶은 ‘신학적 깊이’를 더해 주는 그런 것이어서 ‘오길 잘 했다’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성당을 떠날 즈음의 느낌은 그것이 아니었다.

 작년 이맘때에 있었던 장례미사의 ‘악몽’이 떠올랐고, 그 이전에도 간혹 겪었던 좋지 않던 기억도 되살아 난 경험을 다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지나간 두 가지의 비슷한 경험은 모두 ‘너무나 무리하게, 길고 길었던 미사’라는 것, 놀랍게도 그것이 오늘 다시 찾아온 것이다.

장례미사는 일반 장례식과 조금은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고별식’이란 것, 각종 지인들의 고인에 대한 고별사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짧지 않은 강연을 하기도 하는데 한국말을 모르는 조문객들이 거의 없는데 모든 말을 영어로 번갈아 가며 하기도 한다.  제일 괴로웠던 경험은 ‘정말 보기 언짢은 태도’로 한 없이 계속되는 ‘우리 사상 최고의 영웅’ 아빠에 대한 추억들.. 정말 끝도 한도 없었다. 내가 죽었을 때 딸들이 그렇게 하는 것, 관속에 들어가 내가 듣게 된다면 아마도 관 뚜껑을 열고 나올 정도가 아닐까..  어제도 큰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번엔 ‘반세기 추억의 영화’까지 가미가 된 것이 이채로웠다. 일반 장례식장에 가면 예식 전후에 뒤 배경으로 계속 보여주던 video를 이번엔 성당 미사 중에, 그것도 ‘끝이 안 느껴질 정도로’ 무수한 영상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앉았던 위치로 보아 도저히 탈출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나에게 이것은 완전한 show stopper로 느껴진 셈이고 앞으로 ‘장례미사 공포증’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생긴다.

이래서 크건 작건 성당의 연령 행사는 ‘상식을 가진 책임자’가 책임을 지고 시작부터 끝까지 행사에 참여한 조문객들의 사정도 조금은 사려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애석하게도 이제까지 이런 것들에 대한 책임자의 존재여부는 정말 불확실한 것이었다.  또한 앞으로 장례미사에 올 때는 끝나는 시간을 먼저 확인 받고 싶은 간절한 심정을 뿌리칠 수가 없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Lofty shelf coming down…

몇 달 전부터 생각하던 귀찮은 일을 드디어 해치웠다. 거의 20년 전인 2001년 9.11 테러사건이 난 후에 울적한 심정으로 만들었던 두 개의 giant hanging shelve 중에 하나를 해체한 것이다. 우리 집의 garage ceiling이 유별나게 높기에 이사 오면서부터 항상 그 천정의 공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거의 2층 deck정도의 높이라서  차고 공간의 절반이 ‘놀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storage용으로 거의 다락방 크기로 선반을 만들어서 천정에 매달아 놓은 것이다.  공간 재활용이 목적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의 쓸모가 없이 방치된 상태로 20년이 지나갔다. 방치된 것은 아니지만 storage용도로는 너무나 높고, 깊어서 한번 쓰려면 차를 빼고 사다리를 써야만 하는 불편함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잡동사니를 하나 하나씩 버려야 하는 나이에 이런 bonus storage은 바람직한 것이 절대로 아님을 알기에 미련 없이 없애 버렸고 나머지 하나도 곧 사라질 것이다. 4시간 노동의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冊: 나가사키의 노래

나가사키의 노래, 영문판(원서) 표지

손가락이 저려온다. 아니 가끔씩은 거의 마비가 된 느낌도 든다. 거의 일주일 동안 빠른 속도로 typing을 했던 것에 대한 후유증일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나의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책을 ‘필사’를 하며 읽기 시작해서 이제는 거의 끝이 나고 있다.

‘지난해’  12월 22일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빌려온  제목  ‘나가사키의 노래, 원제 原題: A Song for Nagasaki‘ 라는 300 page가 조금 넘는 결코 짧지 않은 책으로, 저자는 호주 Australia 출신 폴 글린 Fr. Paul Glynn 신부,  옮긴이는 [개신교 신자] 김숭희 씨로 되어있다.

이 책은 한마디로 ‘서양’ 신부가 뒤늦게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  ‘동양인’,  ‘일본의 간디’로 불리며 추앙 받는,  ‘나가이 다카시 永井隆’ (방사선학 의학) 박사에 대한 책이다.

가톨릭 신부가 저술하였으므로 분명히 이 책의 배경에는 ‘가톨릭, 천주교’가 있음이 분명하고, ‘나가사키 長崎’라는 지명이 들어가 있으니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시,  히로시마 廣島에 뒤따른  ‘제2의 원자폭탄 피폭지’가 또 다른 배경으로 깔려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성당 도서실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선뜻 손이 가지를 않았다. 불현듯 느낌에 이 책의 원류에는 ‘엔도 슈사쿠 遠藤 周作’의 책과 그에 따른 Hollywood 영화, ‘침묵‘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했고, 17세기 나가사키의 기독교인 성 ‘미키’를 포함한 26명의 순교자들의 생각도 났다. 일전에 그 책 ‘침묵‘을 빌려 읽었던 연숙의 얼굴표정을 읽었을 때, 나는 그 책에 언뜻 손이 가지 않았다. 순교를 하는 장면을 너무나 실감나게 표현하는 글들을 나는 피하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원자폭탄이 바로 옆에서 폭발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사랑하는 아내가 흔적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들,  그와 관련된 오랜 전 역사적 사진, 실화도 접했을 때, 솔직히 나는 이런 가공할 ‘지옥의 모습’들은 모두 없는 것처럼 피하고 싶었던 역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불현듯 이 책으로 손이 갔고, ‘무조건 읽자’ 라는 생각이 스쳤다. 책꽂이에는 같은 책이 무려 4권이나 있었던 것을 보고 ‘아,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읽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도 도움이 되었다.

성탄절을 며칠 앞둔 날 이 책을 빌려와서 읽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필사’를 하며 읽기 시작한 것은 새해를 맞이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올해 2020년 경자년의 새해벽두부터 나의 머리 속은 1940년대 중반 일본 나가사키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일본 정세 등 자세히 몰랐던 역사의 속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이 책의 특징,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필사’와 완독을 할 수 있었고, 그 이후는 이 책의 내용이 나에게 주는 교훈,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침략적 패전국의 군의관이었지만 그는 적국의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치료를 했으며, 과학자의 입장에서도 용감하게 신앙을 살았고, 대학 방사선과 연구의 후유증과 원폭시의 심한 상처로 백혈병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주위에 버려진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았다. 굽힐 줄 모르는 불굴의 용기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 그에 따른 거의 완전한 인간애, 이 책은 주인공 나가이 다카시는 그야말로 한마디로 전형적인 ‘성인’ 후보감 이었다. 공식적으로 성인의 품에 오르는 첫 단계인 ‘주님의 종’ 이지만 분명히 다음 단계인 ‘가경자 venerable’, ‘복자 blessed’ 을 거쳐 언젠가는 완전한 성인이 되리라 확신한다. 나가사키의 노래,  ‘필사본’은 이곳에 한정적으로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