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야, 늦게야.. 오늘이 6월 25일이었음을 실감을 한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되었는가? 다른 날도 아니고… 나는 그래도 잊지 말고 어제부터 이날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느껴야 했었을 것인데, 장구한 세월이 이런 식으로 흐른 것인가? 육이오(박정희 대통령의 발음 ‘융요’를 즐겁게 추억하며) 를 완전히 잊고 하루를 보냈다니… 아~ 빨갱이, 빨갱이들이여~ 역사이래 인류가 고안한 가장 교묘하게 악질적이고 잔인한 ‘사상, 그것을 믿는 집단’들…
푸틴 개XX와 ‘젖먹이 돼지XX’ 김정은이란 X이 만나서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YouTube video에서 흘깃 보며 어휴 저 놈들~ 하며 저주를 하기도 했는데, 참 세상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변하고 있는가? 한때 지구상에서 퇴화, 멸종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이 ‘저주의 사상’이 어떻게 다시 이렇게 고개를 들게 되었는지.. 빨갱이, 빨갱이,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김씨 세습 왕조, 나중에는 ‘친애하는 우리들의 운동권 출신’ 빨갱이들까지.. 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을, 그것도 대부분 동족들을 대량으로 죽이면서까지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었을까? 다른 한편 이들의 유물론이 얼마나 무서운 ‘또 다른’ 사교집단신앙인지 그들은 정말 몰랐을까?
¶ VIGANO, VIGANO…. 이 사진, 언뜻 보기에 양순하고 착하게 보이는 ‘양의 탈을 쓴~~’, 이 인간, 멀쩡한 이력을 지녔는데, 최근에 갑자기 양의 탈을 벗고 또 다른 Trump 개XX 흉내 내는 亞流, 인간, 명색이 대주교, 한 때 바티칸의 미국 교황대사라는 인간 Vigano인가 뭔가 하는 놈, 그렇게 바티칸 교황, 교황을 온갖 중상모략하며 설치던 이 인간, 결국은 파문소송에 걸렸다는 소식.. 어떻게 그런 놈이 대주교였는지.. 교황과 교회를 완전히 매도하고 교회를 분열하려는 그런 놈, 거의 몇 년 동안 할말 못할 말 다 했던 놈, 그 얼굴이 거의 ‘웃는 악’처럼 나에게 보이는데… 2020년 이전까지는 비교적 양순한 모습으로 교회내의 부패, 사제 성추행 사건들을 파헤치던 것은 그런대로 이해를 하지만 이후 그는 완전히 악마의 하수인으로 돌변했으니..
교회를 분열하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가 트럼프 집단의 conspiracy 집단을 아예 부축이고, 그것도 모자라 COVID vaccine 을 ‘검은 집단’의 음모라고 거짓말까지 하고, 나중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정당한 것’이라고까지.. 하니 이것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왜 세상이 이렇게까지 돌아가고 있는가? 가톨릭 교회가 싫고 교황이 싫다면 네 자신이 떠나면 될 것 아닌가? 왜 분열을 시키며 거짓말이나 유포시키고, 그것도 교회 밖에서 떠들어 대는가? 정말 근래에 이렇게 보기 싫은 인간들이 [이 인간, 트럼프 집단, 한국에서는 이재명인가 뭔가 하는 인간] 왜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휘젓는 것들이 용납이 되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인가?
¶ WORD POWER: Bishop Barron, CAVE or SPELUNKER?
WORD POWER라는 말이 자꾸만 추억과 함께 머리 속에 떠오른다. 소싯적 영어 공부할 때 열심히 끼고 다니던 책이 WORD POWER MADE EASY란 것이 있었는데, 오늘 Bishop Barron의 주일강론 중에 나오는 단어 spelunker 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알고 보니 이것은 cave와 동의어였다. 이 신부님의 말씀에는 거의 예외 없이 처음 나오는 잘 모르는 어휘, 단어들이 한두 가지가 있는데, 오늘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나의 영어 어휘력도 긴 세월의 덕분으로 만만치 않은데, 이 신부님은 그것을 거의 항상 초월하는 듯하다.
이것으로 나는 이 분의 기본적 학문적 지성을 짐작할 수 있고, 비약적으로 유추를 해서 신학적인 신비성까지 엿볼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이 신부님의 탁월한 WORD POWER의 힘이 아닌가?
Cave 대신에 spelunker라고 쓰면 조금 더 유식하게 들리는 것, 이것이 인간 속성인가? 이 주교님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 더 큰 뜻이 있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니까.. 이것이 WORD POWER의 위력…
¶ DARKER SIDE OF… 요새 거의 매일 보게 되는 나의 favorite ‘personalized’ YouTube, 3군데, 모두 나의 개성과 흥미를 반영하는 video들이 집결된 곳들이어서 ‘안심하고’ 나의 구미에 맞는 것들을 보는 것은 좋았는데, 가끔 난데 없이 ‘해괴한’ 놀라운 쓰레기들이 끼어드는 경험도 없지 않고, 어제가 그런 예가 되었다. 이것은 100% YouTube의 실수일 것으로, 내가 film noir fan이라는 것 때문인 듯 하다. 1950년 대 초의 영화로 B movie에도 못 미치는 한마디로 쓰레기 급이었는데, 아~ 내용이.. burlesque 어쩌구~ [당시에는 rating이니 X 같은 것이 없었으니] 약간 조심은 했지만 설마 정도로 조금 보았다가 함정에 빠진 듯한 후회로 곧 성모님의 얼굴이 뒤에 보이는 착란~. 너무나 실망한 것은 나의 약점 중의 최악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영상의 위력에 나는 아직도 아직도 속수무책임을 실감한 사실… 이런 것 나이와 절대로 상관이 없다는 것, 재삼 확인을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저 한 가지, 어깨 너머로 성모님의 꾸짖는 듯한 자상한 얼굴을 보면 된다. 그것이 유일한 위로요 해결책인 것이다. 요새 YouTube는 피하고 싶은 정치광고(Trump 개XX의 징그러운 얼굴)로 흡사 지뢰밭을 지나는 긴장 속에서 보는데, 이런 ‘야한 것’들까지 합세해서 놀라게 하니..
¶ 경운혼성합창단 연습 모임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오늘, 처음으로 내가 담당한 tenor part를 조심스럽게 악보로 자세히 보게 되었다. 지난 번 연습 모임에서 반주자가 피아노로 내 part를 친절하게 치며 녹음을 했던 것을 다시 들으니 생각보다 쉬운 것이었다. 이 정도면 며칠만 연습하면 다음 모임에는 자신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을 듯하다. 오늘 악보를 찬찬히 보면서 나의 궁금했던 것들, 높은, 낮은 음자리표의 관계를 처음으로 피아노 건반에 비교하여 알게 되었다. 내가 부를 tenor part가 거의 모두 “낮은 음자리”로 되어 있었기에 오늘은 이런 것들에 상당히 자신을 갖게 되었다.
¶ 나의 여생, 남은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나만의 공간, 서재 오늘 유심히 본다. 이 방으로 이사온 것이 작년 여름 직전이었으니 이제 일년이 되어가고 그 동안 많이 적응도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무언가 불편한 것이 적지 않다는 편치 못한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는 나의 마음이 정리가 안 된 탓은 아닐지.
아마도 50년도 넘었을까, 마지막으로 내가 이 사진, 우리 아버님의 모습을 이 사진에서 보았을 때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보던 ‘조선 에스페란토 학회 단체사진’ 한 장이 digital format으로 오늘 나의 Email InBox에 들어와 있었다. 그 한 장의 사진에 분명히, 나의 뇌리 속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알고 살았던, ‘앞 줄에 앉는 사람 중 제일 작은 남자’ 가 있었다.
이 사진은 연락이 두절된 우리 누님 집에는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세월이 이렇게 깊어지면서 아마도 나는 생전에 다시는 아버지 사진을 못 볼 듯이 살아왔다. 하지만 에스페란토가 인연이 되어서 이렇게 다시 ‘죽기 전에’ 볼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대한민국 에스페란토 친구들…
올해 2020년은 대한민국 에스페란토 창립 100주년이 되어서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준비한다고 작년부터 관계자 분들이 연락을 주셨었다. 6.25 전까지 에스페란토 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아버지, 내가 알고, 기억하고 있는 나의 아버지 ‘이정모’ 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사연이었다.
나와 개인적으로 연락이 된 것은 나의 2011년 8월, ‘회상’ 블로그 ‘아버지와 에스페란토’가 계기가 되었다. 그 블로그는 생전 한 번도 못 보았던 아버님의 그림자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나의 사그라져가는 기억력과 싸우며 개인, 가족, 특히 아버지의 역사를 남기고 싶었지만 6.25 발발 후에 홀연히 납북이 되신 아버님은 어디까지나 나에게는 가상적인 존재였다.
그러다가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어오던, ‘에스페란토’라는 이름이 떠오르고, 그 당시 집에서 보았던 각종 자료 (주로 학회지)등과 어머님의 말씀 등을 시작으로 인터넷을 뒤지고 해서 아주 기본적인 사실들을 찾을 수 있었다. 최소한 아버지의 이름이 이기 저기서 보인 것이다. 그곳에서 6.25때 납북 되신 분들의 이름들이 보였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을 나는 에스페란토 역사에 남기고 싶었지만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 지가 막막했는데, 하늘이 도와서 나의 블로그 가 인연이 되어서 연락이 되어 이렇게 아버님의 사진을 다시 ‘찾게’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사진에 앉아 계신 아버지, 그 당시는 서울 경기고등학교 영어 교사였을 것이다. 이 사진은 에스페란토 정사에도 있듯이 ‘8월에 KEI 제5회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약 30명이 참가하고 서병택, 석주명, 이정모가 지도하였다‘ 라는 구절의 바로 그 역사적 사진이었다. 1949년 8월이니까 일년 뒤에는 민족반역자 김일성 무리들에게 납북되실 운명을 짐작이나 했을 수가 있을까? 한 개인과 가족의 역사는 이렇게 산산이 조각이 났는데, 아직도 그 반역자 세습무리 들이 북녘에서 설쳐대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부조리의 극치’ 가 아닌가?
100주년 기념을 준비했던 관계자 분들, 역시 다른 ‘부조리’인 코로나바이러스로 실제적 기념대회는 무산이 되고 10월에 Online Conference로 대치하는 모양이다. 세계 전체가 불안하게 보이는 이 때에, 세계 평화를 갈망하던 에스페란토 창시자의 꿈의 실현은 아직도 요원한가…
요즈음 ‘심심하면’ 들추어 보는 미국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화보 주간지 LIFE magazine, 그 중에서 내가 태어날 즈음의 것을 보다가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 순천 반란사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2년 뒤에 일어난 6.25 동란부터는 거의 정기적으로 한국에 관한 기사가 실렸지만 그 이전에는 사실 이 반란사건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전에 이런 기사를 보게 되면 그저 ‘분단 역사’의 비극의 하나로 생각하기도 했겠지만 현재의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면 아주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이 기사가 실렸을 때까지의 LIFE 지를 살펴보면 미국의 여론은 압도적으로 ‘반공 중의 반공’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이 거의 갑자기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 속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고 세계 도처에서 공산주의의 확장, 특히 철의 장막에 대한 경계심을 날로 고조되고 있었다.
미국인들, 특히 ‘진보적 성향’의 LIFE 지 조차도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리기 시작하고 나치 독일의 뒤를 이어 나타난 소련의 공포 (특히 스탈린)를 미리 파악하지 못한 미국 행정부의 정책 실패를 비난하고 있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의 공산정권에게 거의 패배하던 마당에 이번에는 한반도에서 이런 사건이 난 것을 LIFE 지는 중요하게 화보로 다룬 것이다.
이 기사를 읽으면 2년 뒤에 일어날 CIVIL WAR, 한국전쟁도 예견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의 2차 대전을 전후로 한 루즈벨트 정권이나 모두 공산주의의 실체를 일시적이나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뒤돌아 본다면 쉽게 말해서 기회가 있을 때 이들의 ‘악의 뿌리’를 제때에 청소를 했었더라면 현재 한반도의 사정은 많이 달라졌을지 않았을까?
REVOLT IN KOREA
AT YOSU IN THE U.S. ZONE, WHERE KOREA’S REBELLION BEGAN
ON OCT 19, LOYAL TROOPS FLUSH OUT COMMUNISTS FOR TRIAL
AFTER RETAKING THE CITY
YOSU’S RECAPTURE was achieved on Oct. 27 by loyal troops. Only their
white helmet bands differentiated them from the rebels, who also used
new American equipment.
TWO OF SUNCHON’S BEREAVED WOMEN MOURN A LOYAL KOREAN WHO FELL BEFORE A REBELE SLAUGHTER SQUAD AS THE REBELLION BEGAN. AN AMERICAN ADVISER, LIEUT. RALPH BLISS LOOKS ON SILENTLY WHERE NO ADVICE WILL HELP
A NEW COMMUNIST UPRISING TURNS MEN INTO BUTCHERS
Sooner or later the cold war in Korea was sure to turn hot, and so it did in late October on a signal from Soviets. The reason were well known: Korea had been split between U.S. and Soviet control at Yalta, and the Soviets obstructed all later efforts to unite it, preferring to establish a Communist “people’s republic” in North Korea and equip it for civil war which would make all Korea Red. The urgency increased in August when the U.S. gave South Korea a government under President Syngman Rhee. When the Red rebellion came, it splattered blood across the new southern nation. It began on the cool night Oct. 19 while the Moscow radio trumped the news that Soviet troops were leaving Korea. Simultaneously a Red cell of 40 soldiers in a regiment of the American-trained Korean national army at the southern port of Yosu killed the regimental officers, gathered the entire regiment in revolt, murdered the local police and quickly captured both Yosu and the city of Sunchon 25 miles to the north. There the rebels, still in American Army uniforms, and followers raised the flag of the North Korean People’s Republic, and for a few bloody days ruled a small chunk of Rhee’s south. Before they melted into the hills, at least temporarily repulsed by loyal troops, LIFE’s Carl Mydans was on the scene with a camera to record the brutal consequences.
HOW DEATH CAME TWICE TO “PEACEFUL HEAVEN”
At Sunchon, which means “Peaceful Heaven,” the rebellion’s Red leaders opened the city jail and let political prisoners lead them through the city from house to house pointing out enemies for revenge. With this help the rebels had slaughtered about 500 civilians and 100 police before the Korean national army retook Sunchon (pop. 60,000) on Oct. 23. Then it was the government’s turn, and LIFE’s Carl Mydans watched with horror as the process of retribution began again. He cabled:
“Now the national army, aided by a few police who had fled to the hills and come back, repaid brutality with brutality. We watched from the sidelines of a huge playground with the women and children of Sunchon while all of their men and boys were screened for loyalty. Four young men stripped to their shorts were on their knees begging. One had his hands up in a symbol of prayer. Suddenly these suppliant hands were crushed into his mouth and nose as a rifle smashed out his teeth.
“Behind them stood two men with clubs. They beat the kneeling group over heads and backs until the beaters, grinning, had to pause for breath. A policeman wearing black glasses and Japanese helmet danced madly before the victims. Uttering staccato barks, he alternately spun his carbine butt forward and smashed a kneeling man in the face, then twirled the gun muzzle downward and feigned shooting. Finally, without missing a stroke, he charged like a goat, helmet lowered, and smashed the steel hat into the begging victim’s head.
“We drove through the city – empty except for bodies – and here we saw the reason for brutal retaliation. Bodies lay just as they had been slain by the rebels – in heaps with hands tied behind backs. In the police compound there were two heaps: 85 corpses, some of them civilian, some police. We found others near the river, tumbled grotesquely down an embankment and on the edges of paddy fields. Some were burned in charred masses on the streets, or lay alone where they had fallen beside looted shops and homes.
“During the first terrible days of Sunchon’s blood bath, no relative dated claim a body for fear that doing so would identify the living with the dead and thus bring quick retaliation from either the Communists or the government. Later, when it was safe, women streamed away from the big playground to poke among the heaps of bloated dead – a scene not easy to watch. When they found theirs, they were stoical at first. Then tears came and they were hysterical.”
DEAD REBELS, their bodies dotted with bullet holes, lie beside a school ground at Sunchon. Other rebels in army uniform (below) are hauled away tightly trussed in army trucks, after their capture by loyal army forces, for trial by a Korean military tribunal.
A CIVILIAN REBEL holds his bloody head after “questioning” by loyal
soldiers who took Sunchon back from the revolting troops. He may
get death sentence. Many Koreans, who traditionally jump at a chance
to attack their police and officials, joined the rebels believing
Red propaganda that all Korea had fallen to the Communists.
또 우연히 (사실 근래 들어서 우연이란 말을 피하려고 하지만)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주일미사에 갔다가 성물방/도서실 (성물 판매와 도서를 같은 방에서 service하는) 을 기웃거렸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그곳에 있는 ‘고서’ 같은 냄새를 풍기는 진열된 책들의 제목들.. 또 우연인가.. 몇 년 전에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서울 재동학교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을 찾았을 때처럼 이번에는 ‘사랑의 地圖– 고 마태오‘ 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현 시점에서 알 길이 없다.
고 마태오, 실제 이름은 고종옥 신부님.. 오래 전의 가물거리는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오래 전, 그러니까 1982년 경이었던가.. 우리 부부가 콜럼버스(오하이오) 한인성당(공동체)에서 왕영수(프란치스코)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던 해, 그 무렵이다. 그 해 부활절에 세례(그 당시는 영세라고 했다)를 받았는데 그 한달 전쯤인가, 세례를 받기도 전에 연숙 홀로 ‘용감하게도’ 신시내티 에서 열리는 성령세미나엘 갔었는데 그 때 왕 신부님은 물론이고 캐나다에서 내려오셨다는 고 마태오 라는 ‘건강하고 풍채가 좋았던’ 신부님도 하셨다. 물론 나는 나중에 연숙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지만 단체사진에서 그 분의 모습을 보았다.
서부 전선 ‘사천강 전투’ 때, 신부 되기를 결정한 직후, 1952
그러면서 이 ‘전설적인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책을 돌려보며 듣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 돌려서 본 책이 바로 오늘 내가 찾고 빌려온 ‘사랑의 지도’가 아니었을까.. 100% 확신은 없지만 거의 분명하게 나는 책 뒤 표지의 사진, ‘멋진 sunglass를 끼고 호탕한 미소를 짓는 군인‘의 모습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연숙으로부터 들었던 것들, ‘6.25 동란을 겪는 영화 같이 파란만장한 과거, 사랑하던 여성, 기적같이 신부가 되었던 이야기’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어떤 영화를 보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들.. 그러고 나서 이 고 마태오란 이름은 30여 년의 긴 인생역마차 바퀴에 치어 나의 관심권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잊혀졌다가 홀연히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Googling으로 본 고 마태오 신부님, 이미 돌아가신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2004년 12월 31일에 선종하셨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풍채 좋았던 몸집’에 걸맞게 역시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고생하시고 75세란 ‘길지 않은’ 생을 마치신 것, 타국 땅 캐나다의 어떤 양로원에서 가셨다는 사실이 그렇게 가슴을 아프게 한다. 유명인사 라고 해도 생각보다는 쓸쓸히 가신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은퇴사제들의 은퇴 후의 option이란 사실 거의 이런 것인가? 그래도 긴 세월 불치병으로 고생하신 것이 아닌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까?
고 신부님의 저서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나는 조금 가슴이 설렌다. 하나, 하나, 하나.. 내가 겪지 못했던 조국의 근대사를 신부님의 눈으로 다시 겪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평화통일을 원하셨다는 것은 이미 가끔 짧은 소식을 통해서 들을 기억이 있다. 그런 노력과 현재 모국의 돌아가는 ‘꼴’을 비교해서 생각하면 정말 한숨만 나온다.고 마태오 신부님의 하느님은 도대체 현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인가?
이제 이 책을 typing (keyboarding)으로 읽기 시작하며, 일제시대와 6.25동란에 얽혔던 생생한 증언을 소설 같은 이야기로 내가 상상하던 당시의 상황과 비교할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1950년대 조국의 모습과, 1980년 초 우리가 세례를 받으며 하느님을 찾고 있었던 시절을 회상할 것이다. Reading by Typing 은 난독, 정독, 완독에 비해서도 훨씬 시간이 더 든다. 그래도 나의 정신건강 상태에 따라 2달 정도 걸릴 것으로 희망을 한다. 이 ‘고생’이 끝나면 그래도 online, softcopy가 ‘영구히’ 남기에 더욱 분발할 것이다.
1982년 3월경 신시내티에서 열린 성령세미나, 고마태오, 왕영수 신부님 그리고 최옥진 데레사 모두 한 자리에.. 왼쪽 제일 뒷쪽에 연숙, 고완석씨 등의 얼굴도 반갑다.
수녀님 옆에 있는 연숙, 이 수녀님은 양수녀로 나중에 아틀란타 성당에서 신부파, 수녀파로 싸우던 그 장본인이다.
전쟁 발발 직후 피난민들이 남하를 시작, 수원 근교를 지나가고 있다 – 1950년 7월 11자 Life magazine
육이오, 융요..유기오.. 6.25.. 1950년, 도대체 몇 년 전인가? 이것도 이제는 쉽지 않구나. 반세기도 모자라서 67년 전이란 말인가? 나에게 이 날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집, 가족의 형체를 철저히 망가뜨린 동족상잔의 시작인 날은 분명하고,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과연 어떤 것인가? 머리 속의 깊은 속에서는 분명히… “김일성 이 X새끼야, 내가 지옥까지 너를 찾아내서 다시 한번 더 확실히 죽여 버릴 거다!!!!”라는 절규가 울리고 있다. 100% 동감하는 나의 심정이다.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저주의 정도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빨갱이들과 민족화해라고.. 허.. 정말 죽여주는 말이다.
아.. 압록강으로 올라가던 MacArthur가 이 개새끼를 잡았더라면, 역사는..
6.25 사변이 정전armistice 으로 끝났던 어렸을 적에는 물론 ‘반공, 멸공,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우리 할아버지’를 따라서 무조건, 무의식적으로 반공, 역적 개새끼 김일성을 외쳤지만 같은 구호를 외치며 경제개발을 시작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독재’ 덕분에 한때는 반공보다는 반독재의 고함소리에 솔깃했고, 거리로 뛰쳐나오기도 했다. 젊은 피가 인생, 삶의 피로 바뀌기 시작한 그 이후의 오랜 인생여정, 내가 살던 지리적 여건으로 ‘탈 脫 사상 思想’ 의 변화의 시기들도 있었다. ‘잊자, 조국’, 대한민국 무관심의 세월이었나? 그 후에는 조국도 변하고 나의 나이도 진전을 해서 세상이 변했던가.. 하지만, 시간의 irony는.. 결국은 ‘박정희 향수’에 젖은 기분도 느낀 것이다.
이런 ‘복잡한’ 나의 조국관 祖國觀 을 정리해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아마도 많은 노력일 필요할 듯 하다. ‘국가’란 것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인가, 하는 단계까지 내려간다. 이런 ‘정치적 인간, 인생’의 차원은 어느 정도 ‘높은’ 것인가?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면 어떤 세상이 보이는 것인가?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나의 고뇌는 이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해괴하기까지 느껴지는 대한민국의 정국, 멀쩡하던 여자 대통령이 갑자기 수의를 입고 나타나고, 그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환호하던 ‘멀쩡한 군중들’.. 이것이 어떤 나라인가? 아마도 현재 조국에서 제일 좋아하는 민주주의의 이상형이 바로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내며 박수를 치는’ 그런 것인가? 세상에 유례가 없는 선진형 민주주의라고? 유례가 없기는 하지만 과연 이것이 advanced, vibrant democracy인지는.. 글쎄올시다.
하지만 나의 문제는, 이런 분석이 모두 내가 피부로 느끼는 ‘추측’이라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으로 바라보았던 그쪽의 정확한 사정을 나는 알지 못하기에 이런 논평 자체가 ‘실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나 ‘빨갱이’란 말이 연계가 되면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6.25 를 연상할 수 밖에 없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된 소위 말하는 ‘progressive 한 정권’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다.
6.25를 맞으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속에는 이런 것도 있다. 이것도 물론 나의 제한된 지식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extreme, mass narcissism에 빠진 ‘집단적 자기 도취’에 빠진,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나의 ‘코끼리 만지는 장님’ 식의 느낌일 수도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1980년대의 일본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원화 평가절상 후 세계를 돈으로 석권하며 자기도취에 빠진, 이제는 지구상 다른 어느 곳에서도 더 배울 것이 없어진 것을 애석해 하던 그들. 그 이후 30년 어떻게 그들은 변했던가? 이제는 당시의 ‘일류 日流’가 ‘한류’로 바뀐 것 뿐.. 그것에 환호하며 ‘자기들이 뽑아놓은’ 현 대통령을 감방으로 보내는 것에 ‘아이들까지 환호’하는 그런 나라.. 가.. 나는 정말 싫다.
통일, 그러면 통일은? 나를 포함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김일성 X새끼가 소련제 tank로 ‘쉽게’ 통일을 하려던 바로 그것, 어떨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나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듯 보인다. 아주 고차원적인 초월적인 도움, 아주 먼 옛날로 갈 필요가 없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민주화’되고 독일이 통일되었던, 그것도 1980년대 이후를 공부해 보면 무언가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이야 말로, 초자연적인 도움1 이 필요한 바로 그런 것이다.
Fatima의 성모님이 예견하고, Saint John Paul Second, Ronald Regan, Gorvachev 등이 주도 했던 소련 붕괴 ↩
서울 특별시 종로구 鍾路區 원서동 苑西洞 비원 秘苑의 서쪽 담장을 따라 맑은 시냇물 (당시에는 개천 이라고 불린)을 따라 아늑하게 남북으로 펼쳐진 그 옛날 1950년대의 종로구 원서동, 전설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나의 기억 제일 깊숙한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곳.. 특히 1954년 경 그 동네의 모습은 아마도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기억하며 그릴지도 모른다.
육이오 6.25란 글자가 보이면 원서동에 연관된 추억들이 왜 그렇게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나를 깨우는가. 이런 이유로 나의 blog 특히 memoir 에는 이곳의 추억이 이곳 저곳 산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나의 추억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곳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것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6.25 동란, 66주년 아침에, 남기려는 것들, 6.25 동란 기록영화의 추억, ‘더 늦기 전에‘라는 말을 되뇌며 생각하고 기억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원서동 극장, 한성택, 조흔파’ 정도가 keywords가 될 듯한 오늘의 추억은 정말로 아련한 추억들이다. 뒤 늦게 연대를 찾아보니 분명히 1954년 에서 1955년 사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6.25 동란이 일단 끝난 휴전 바로 다음해 쯤이었다.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할 수 없었던 때, 전쟁 이후 휴전이 될 무렵까지 우리는 원서동의 아래쪽, 휘문중고교 바로 옆, 동섭이네 집이라고 불리던 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의 주인이 휴전 이후에 피난에서 돌아왔기에 우리 3식구 (아버지는 전쟁 초에 납북)는 가까운 곳, 아주 작은 ‘무당집’ 단칸 방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때의 기억들은 나의 오래 전 blog1에서 이미 회상을 하였다. 그 이후, 우리 세식구는 1954년 초에 이곳, 승철이네 집의 건넌방으로 이사를 왔고 본격적인 ‘재동국민학교 1~2학년’ 시절의 ‘평생 기억’을 만든다.
승철이네 집.. 최승철.. 어찌 잊으랴.. 나보다 2살 밑이었지만 그 나이에 나의 제일 친한 ‘한 집’ 친구가 되었다. 안 방 주인집은 양 부모가 있는 ‘정상적’인 주인이었지만 나는 우리 아버지가 없는 것이 그렇게 부끄럽거나 그 집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집이라고만 생각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비록 큰 집은 아니었어도 승철이네 집에서 보낸 2년 정도는 한마디로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집의 위치도 원서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북쪽과 서쪽은 비원의 담으로 완전히 가로막힌 아늑한 곳, 여름에는 비원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로 잠을 설칠 정도였고, 겨울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개천 (청계천으로 흐르는) 에서 썰매를 타는 그곳은 어린이들의 천국이었다.
승철이네 엄마는 우리 엄마와 나이도 비슷하고 친절한 분이셨다. 큰 딸 시자누나는 나의 누나와 동갑이었는데, 어머님이 재혼을 하셨는지 성이 ‘주’씨여서 원래는 주시자 누나로 통했는데 나중에는 성을 최씨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두 남동생인 승철이와 승관이는 현재 아버지와의 자식인 것이다. 당시에 그런 것이 그렇게 관심은 없었지만 기억에 뚜렷이 남은 것은 왜 그런 것일까?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5명 그것도 두 누나들까지 포함 된.. 그런 승철이네 집은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승철이 아버지는 경찰출신으로 (해방 전에도 그랬는지는 몰라도) 훤칠한 키의 호남형, 하지만 사나운 사나이 기절도 있었다. 일정한 직장이 없으셔서 거의 집에 계신 것이 특이한 점이었지만 그래도 부지런하셔서 놀지는 않으셨다. 항상 무언가 하신 것 같았다. 기계 쪽에 관심과 특기가 있으셨는지, 엔진 같은 것을 집에다가 갖다가 놓으시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얼음을 만드는 냉동기였다. 그것을 가지고 후에는 경기도 연천 인가 하는 곳으로 가셔서 가게를 차리셨다. 물론 아이들은 집에다 두고 부부만 가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그 집에서 이사 나온 후의 일이었지만.
구파발의 추억: 가끔 승철이 아빠는 우리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인 경기도 구파발로 놀러 가시기도 했다. 여름 겨울 모두 갔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즐겁고 신기한 추억이 되었다. 구파발.. 어찌 잊으랴.. 그것이 그러니까 1954, 5년 경이었을 것이다. 서울역 염천교 옆에서 시외 버스를 타고 ‘한없이’ 달려서 간 곳.. 구파발, 구파발.. 그곳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보게 된 ‘시골’이었다. 시골, 시골,.. 처음으로 ‘쌀나무, 벼’를 보았고, 논을 보았고 ‘진짜 초가집’ 안에 들어가서 자 보았다. 처음으로 알았다.. 그곳은 아름답기 전에 너무도 가난한 곳이었음을.. 서울에 비해서 그런 것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원시적’인 것인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아름다운 곳, 진짜 시냇물에서 수영, 미역을 감고, 미꾸라지를 잡고, 차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깜깜한 밤에 술래잡기를 하고, 한없이 많았던 메뚜기를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우리가 가서 자던 초가집이 승철이 아빠와 어떤 친척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 집에 ‘희덕이’라는 우리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남자아이도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져서 그것이 전부다. 겨울에 놀러 갔을 때는 얼어 붙은 논에서 ‘한 없이 하루 종일’ 썰매를 타는 황홀에 빠지기도 했다. 승철이 아버지, 감사 드립니다. 셋방에 사는 아이까지 데리고 가신 것..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 황홀경의 추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억에 뚜렷한 것 중에, 그곳 (구파발)에서 나올 때 어떤 초가집을 지나가는데,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나고 어떤 사람이 승철이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하던 것, 그러니까 그 집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던 것, 그 아내가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승철이 아빠에게 매달리던 것,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 해결이 된 후 그 집을 떠나는데 또다시 그 집 아내는 비명을 지르며 우리를 쫓아오던 모습.. 어린 나이에도 그것은 한마디로 공포의 장면이었다. 그것을 만류하고 해결해 주었던 승철이 아빠.. 존경을 받을 만 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어두운 쪽도 있다. 다른 기억에, 한 때 어떤 ‘장판지 외판원’을 구타했던 사건이 있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을 하는데, 한번 장판을 파는 젊은 청년이 왔었는데, 무언가 잘 못 되어서 승철이 아빠가 그 청년을 거의 구타하다시피 해서 쫓아 낸 것이다. 나는 너무나 혼동스러웠던 것이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어린 나이에 그것은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아버지의 상에 흠이 간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없는 것이 낫다 라는 생각까지도 한 것이다.
작가 조흔파: 집에서 북쪽으로 50m 정도 올라가면 조금 더 좋은 집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바로 ‘작가 조흔파’ 선생의 집이 있었다. 당시에 솔직히 조흔파가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그 집의 둘째 아들 ‘조영환’과 같이 놀았기에 그 집엘 놀러 가며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소설가라는 것, 학생잡지를 보면 그의 이름이 눈에 뜨일 정도였지만 그런 것을 읽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그 집의 큰 아들이 이름, 그러니까 조영환의 형의 이름이 조영수였다. 나중에 휘문중학교에 들어간 것도 기억이 난다. 조영환은 장난이 조금 심한 애였고 우리들을 조금 괴롭힌 기억도 나는데.. 의문은.. 분명히 나와 같이 재동국민학교에 다녔을 텐데.. 졸업 앨범에 그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졸업하기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을 것이다.
그 집에 몇 번 놀러 갔을 때 느낌은..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 다른 집이다.. 그러니까.. ‘작가, 문필가 소설가’의 집이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 아빠 조흔파 씨는 집에 없어서 못 보았다. 그리고 그 엄마도 못 보았는데.. 그 집 툇마루에서 이상한 것을 본 기억, 바로 수영복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남자 수영복을 보았다. 그리고 들었던 소문이 있었다. 그 집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니고, 후처였다는 사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다. 게다가 그 후처는 당시에 숙명여대 학생이었고 조영환이 엄마는 ‘쫓겨 났다’는 이야기도 듣고 자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하~ 그 새 엄마는 조흔파씨가 아마도 숙명여대에서 가르친 학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아마도 맞지 않았을까? 그 이후 ‘사라진’ 조영환이네 기억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TV가 나오면서 가끔 조흔파씨가 출연하는 game show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 집 생각이 나곤 했다. 또한 알게 된 것은 조흔파씨의 이름은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이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김관형, 종맹이 형들: 집 바로 앞, 골목길 건너에 붙어있는 두 집이 있었다. 한 집에는 어머니와 아들, (김) 관형이 형 살고 있었고 (나머지 가족은 기억이 안 남) 또 한 집은 ‘원서동 극장’ 이라고 내가 기억하는 집, 종맹이 형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관형이형, 종맹이 형으로 기억이 나는 두 집이다. 관형이 형, 어린 눈에도 그 형은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형이었다. 말도 부드럽고 우리들, 나와 같은 동생뻘 아이들을 잘 돌보아 준 형.. 가끔, 옆집인 종맹이 형네 집에서는 극장처럼 영화를 상영하였다. 아마도 종맹이 형의 아버지가 기록영화에 관련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심심하면 여름 밤에 우리를 포함한 동네 사람들 몇 집을 불러다가 대청 마루에서 영사기를 돌렸다. 극장가는 것 당시에 그렇게 쉽지 않았는데 ‘활동사진’을 집에서 본다는 것은 참 희귀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영화’라는 것이 모조리 6.25 전쟁 기록영화였다는 사실.. 대부분 모인 사람들이 동네 아낙네들인데 그들이 그것에 열광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아이들은 아주 달랐다. 만화를 보아도 전쟁, 군인들에 관한 것만 보는데.. 실제 전쟁 기록 영화를 집에서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완전히 꿈같은 일이었다. 심심치 않게 많이 보았던 6.25 기록영화들.. 군대 사열식하는 것부터 실제 대포를 쏘는 것, 군인들이 쓰러지는 것.. 그것은 당시 여름 밤을 다시 회상할 수 있는 멋진 추억으로 남았다. 종맹이 형은 그 이후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관형이 형은 나중에 중학교까지 가서도 멀리서 가끔 본 기억이 난다. 나를 특별히 잘 돌보아 주었다는 나만의 상상인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 되었다.
한성택 형.. 집 옆에 흐르는 개천 건너 쪽에 있는 나즈막 한 집들에 ‘한씨 일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나의 다른 기억을 만들어준 성택이 형이 있었다. 그 나이가 얼마 정도 였을까? 아마도 중학생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집에는 사촌으로 알려진 한성우도 있었는데 그는 나와 동갑으로 재동국민학교도 같이 다니고 졸업도 같은 때 하였다. 성택이 형, 전형적인 ‘형 type’ 이라면 어떨까.. 동생뻘 아이들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고 ‘조종’을 하는 type, 나와 승철이는 그를 ‘하느님’처럼 따르기도 했지만 내가 훨씬 더 ‘보살핌’을 받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갖다 바쳤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긴다.. 그 나이에 어떻게 야쿠자도 아니고, 그런 ‘돈 관계’가 있을 수 있었을까? 나의 사고방식은 간단했다. 그 형에게 더 보호를 받고 싶다는 일념으로 내가 받는 용돈을 그에게 바치곤 한 것이다.
덕분에 동네에서 나는 주먹 같은 아이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어린 나이에도 ‘돈의 위력’을 실감하게도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 형만 보면 고맙다고 칭찬을 하곤 했다. 그 성택이 형의 심정은 어땠을까? 돈을 받으니 좋았을 것이고, 졸졸 따라다니며 ‘숭배’를 하는 꼬마가 있었으니 좋았을지 모른다. 한번은 한 겨울에 눈이 왔을 때, 그 형을 따라서 ‘한없이 걸어서’ 썰매를 사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위치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도 삼선교 부근이 아니었나.. 돈화문, 창경원 앞 전차 길을 따라 걸어 간 곳, 눈부신 쌓인 눈을 밟으며 걸었던 그 추억.. 결국 간 곳에서는 썰매를 살 수가 없었다.
6.25의 기억을 다시 생각하면 100% 생각나는 원서동 어린 시절, 그 중에서도 1954년 무렵의 승철이네 집 주변의 추억들은 나의 6.25에 대한 심각한 역사를 조금은 부드럽게, 포근하게 만든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 인물들.. 지금 다 어떻게 살고들 계신지..
¶ 휴우~ 덥다 더워.. 6월 24일! 이렇게 쓰고 보니 조금은 웃긴다.. 임마 (이런 말 아직도 쓰나?) 6월도 24일이면 한창 여름이 무르익어가는데 그것이 정상이지, ‘빠가야로‘! 하는 등뒤의 속삭임에 내가 웃는다. 그렇지, 지금은 더운 것이 정상이지.. 그런데.. 92도 라면.. 어떨까? 아마도 옛날 옛적의 대구더위에 비길 수 있겠지. 며칠 계속된 더위지만 극적으로 때맞추어 ‘내가 고친’ 에어컨 바람이 더 나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물론 오후에 때맞추어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 하지만 느낌에 그런 chance는 거의 zero 인가 보다. 아니면 Johnny Rivers 의 60’s classic oldie, Summer Rain을 연상케 하는 그런 추억의 비는.. 어떨까.. 하지만 이것은 거의 꿈같은 이야기다.
1968년 여름의 추억, Summer Rain – Johnny Rivers
오랜만에 그 동안 바깥 구경을 못하고 살았던 우리 집 두 마리의 ‘재미있는 개’ Tobey & Ozzie, 오늘은 내가 더 쳐지기 전에 용감하게 끌고 동네를 돌았다. 거의 할아버지 나이가 된 우리의 개 Tobey가 언덕을 ‘새로니의 개’ Ozzie를 앞지르며 나를 끌고 올라간다. 얘는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 언덕을 나와 걸었기에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모른다. 공을 던지면 총알처럼 뛰어가는 다리가 긴 ‘젊은’ Ozzie, 2주째 우리 집에 머물며 자기 엄마 ‘새로니‘를 거의 잊은 듯 잘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밤에 ‘혼자’ 자야만 하는 그 녀석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에 이곳을 걸었을 때 내가 열을 받았던 것, TRUMP FOR PRESIDENT,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SIGN이 두 곳에서 나를 자극했던 것.. 오늘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빠가’ 트럼프의 ‘쌍통’을 연상시킨다. 이 두 집이 바로 우리동네의 idiots, white trash인 셈이다. 이곳 East Cobb county는 물론 very conservative한 지역이고 전통적으로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잘 사는 Republican white trash’들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런 쓰레기 같은 SIGN을 본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나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니.. 이건 분명히 내가 over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I CANNOT HELP IT.. 어쩔 수가 없다. 도대체 이 덩치 큰, ‘젊은’ 나라는 어떤 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덥기만 한 날씨에 더 열을 받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래.. 이래 저래해도..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리라..
¶ 6월 24일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오늘 평일미사를 가면서 6월 24일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Solemnity of the Nativity of Saint John the Baptist) 임을 매일 복음묵상 ‘newsletter’에서 보고 알았지만, 사실 그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사건’으로부터 였다. 바로 이날 6월 24일에 발현을 하신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이 ‘대축일’ 때문에 집에서 쉬던 (놀던) 그 ‘애’들이 본 것이다. 그 당시 이 발현 과정에서 이날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임을 누누이 밝히고 있었지만 그 때 나는 그 말의 의미조차 잘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니, 금요일 평일 미사엘 가면 분명히 세례자 성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짧은 강론을 듣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요새 거의 본당신부님 역할을 하시는 방문 신부님 Fr. Joseph, 뜻 밖에도 새로 부임하실 본당 신부님에 관한 얘기를 하며.. 우리의 ‘이해’를 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사연은 물론 본당 Holy Family 성당에 7월 초에 새로 부임할 주임신부님이, ‘부인이 있고 가정이 있는 남자’ 라는 우리에게는 ‘폭탄’ 같이 느껴지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 방문 신부님의 설명과 ‘양해’는 나도 아는 사실이다. 바티칸에 소속된 모든 가톨릭 ‘종파’들이 모두 다른 Rite를 가지고 있는데 현재 우리의 ‘보편 된’ 것이 Latin Rite, 이곳에서는 신부님들이 결혼을 안 하지만 다른 극소수의 종파에서는 성공회같이 결혼을 한다고.. 듣던 얘기다. 이번의 새로 부임할 신부님은 Melkite 에 속한 신부님이라서 신부님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느낌은.. 그래도.. 하필이면.. 왜 그런 ‘소수 종파’의 신부님을 ‘주임신부’로 보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본당 Holy Family는 지역적으로도 보수적이고 Irish Catholic의 전통이 농후한 곳인데..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불만이 적지 않을 듯하다. 그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가족을 주렁주렁 데리고 사제관에서 생활을 하며 가족들과 같이 미사에 들어 온다는 광경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라빌 순교자 성당에서는 구역문제로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 있는 마당에 이번에는 우리의 피난처 같은 미국본당에 부인, 가족을 동반한 주임신부가 온다는 사실.. 참.. 오래 살다 보니..
¶ 성모님, 좀 봐주세요.. 근래 우리부부와 자주 보게 되고, 예전 보다 조금 더 가깝게 지내는 C 자매님,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member를 중심으로 새로 생긴 Guitar Friends 그룹에도 참여 열심히 guitar도 연습하고, Holy Family 미국본당에서는 거의 매일 미사에 보게 된 멀게도 느껴지고 가깝게도 느껴지는 자매님, stress받는 것이 제일 싫어서 많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피하며 조용히 살지만 할 것은 다 하며 열심히 사는 자매님.. 왜 하느님은 어떻게 그런 병고를 주셨을까. 병고라면 이미 오래 전에 가족을 통해서 겪을 만큼 겪지 않았을까, 공평하지 않은가? 모든 아픔이 아물어가며 어떻게 다시 이런 고통을 보냈을까? 오늘 아침 미사가 끝나며 어제 doctor visit의 결과가 조금 짐작이 되었다. 우리 부부, 너무나 안쓰럽고, 미안하며, 어쩔 수가 없어진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기도를 더 열심해 해야겠군요’ 정도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이외에 무엇일까.. 늦은 아침을 먹으며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한다. 성모님, 좀 봐주세요…
¶ 육이오 6.25, 66년: 66년, 허~ 66년이라.. 여기다 6 하나를 덧붙이면 666가 되는구나. ‘악+악+악’, triple ‘악’ 인가? 그래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단어가 육이오, 유기오, 융요 (박정희 대통령의 발음).. 그래, 의식이 살아있는 한 이 단어는 나를 ‘움찔’하게 만들 것이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이제는 ‘사학자’들도 총대를 멜 때가 되지 않았나? 미국의 역사 교과서는 현직 대통령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놓는데.. 우리나라의 ‘병신 사학자님’들은 어떠신가? 아직도, 아직도 빨갱이 운동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 육이오의 노래
요사이 재동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를 읽고 읽고 읽으며.. 다시 느끼는 것, 나도 나도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니 육이오가 없었으면, 아니 김일성 개XX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의 인생은 아마도 김정훈 부제의 ‘사직동 김판사댁‘ 못지않게 ‘원서동 이정모 교수댁‘ 이란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며 컸을 지 누가 알랴? 어떻게 육이오의 몇 개월 사이에 한 가정, 한 가족의 운명이 그렇게 뒤집어 질 수가 있을까? 물론 우리보다 더 ‘처참한’ 인생의 역전을 겪었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죄 없는 동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다. 우리 집은.. 우리 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고 저 세상에 가면 나는 반드시 ‘김일성’을 찾아내리라.. 그 개XX를 찾아 내리라.. 아마도 그 아들 김정일 개XX도 같이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찾기가 힘들 것이 분명히 그들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최소한 한여름의 냄새가 완연히 가신, 하지만 가을의 맛은 아직 덜 익은 듯한 그런 시점이고, 느낌조차 많이 다른 9월과 10월의 사이까지 왔다. 이제는 세월이 빠르다는 둥, 느리다는 둥 하는 말이 지겹게 들려서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올해 여름은 근래에 드물게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을 안 했다. 그 대신 밀려있는 책들을 비록 해변에서는 아니지만 집에서 실컷 읽어서 큰 후회는 없다. 그러다 보니, 거의 무의식 중에 생각을 해오던 1950년, 구일오 인천상륙, 구이팔 서울 수복 기념일들도 다 지나갔다.
만약 그 때의 역사를 계속 따라간다면 조금 있으면 UN군이 한 맺힌 삼팔선을 지나 노도와 같이 북진을 하게 될 것이다. 올해는 어쩐지 그 때의 <1급 전범, 민족반역자, 김일성 개XX>를 ‘죽이거나, 사로 잡거나, 만주로 쫓아내려는 국군과 유엔군을 계속 따라가며 그 당시의 역사를 더 생각을 해 보고 싶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미 해병대의 장진(Chosin Resevior) 저수지 사투와 흥남 철수, 일월 사일 서울 철수(일사후퇴) 등이 포함될 것이다.
며칠 전, 인터넷을 통해서 중앙고 동창 이성복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다시 한번 ‘비대칭적 추억‘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비대칭적 추억이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에 따라서 같은 추억을 서로 아주 다른 정도로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첫 경험한 것이, 10여 년 전, 고교, 대학시절의 친구 이윤기와 연락이 되었을 때였다. 분명히 나의 이윤기에 대한 추억과 그가 간직하고 있던 추억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런 경험을 그 전에는 별로 못 했기 때문에 사실 무척 당황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고 두고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그것은 나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부작용’ 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보다 더 그 당시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 뚜렷하게 기억을 한 것이 사실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습지만 이것은 ‘나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내가 이것을 ‘대칭적인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의 기억과 추억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이번에 이성복을 통해서 조금은 느끼게 되었는데, 이미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것의 극단적인 case는 한번 알던 사람이 나를 완전히 잊은 경우다. 1974년 경에 시카고에서 잠깐 만났던 연세대(철학과) 동문 신경시 씨 부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까이 알고 지냈는데, 나중에 연락을 해 보니,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사진까지 보여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것은 조금 심한 case라서 나는 물론 당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기억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잠깐의 인연을 완전히 무시하며 살아서 그랬을까.. 이것은 사실 조그만 비극이다.
9월 15일,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육이오 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거의 ‘비상식적’으로 적의 후방을 찌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작품이 현실화 되던 날이었다. 그 후방이란 곳이 인천인 것이 그 당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라서 비상식적인 발상이었고, 그런 것이 맥아더장군 특유의 발상이기도 했고, 그것은 사실 아슬아슬한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 건 도박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공담이 되었다. 그러니까 가끔 계산이 깔린 도박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도박이라는 것은 그 뒤에 같은 운들이 따라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들어난다. 그 이후 맥아더의 운은 사라지고, ‘악운’이 따르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맥아더가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적군에 대한 정보에 신경을 더 썼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일 큰 도박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억지로’ 무시했다는 실수였다. 수많은 정보들이 그것을 말해주었지만,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정보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정보들의 신빙성이었을 것인데, 아마도 정보수집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지 않았을까?
며칠 전에 Reading-by-Tying으로 읽고 있었던 한국전쟁(육이오 동란)에 관한 책, Operation Broken Reed (꺾인 갈대 작전)을 간신히 다 읽게 되었다. 이 책도 산지 몇 년째 된 것인데 올 여름, “육체적인 노동 대신 여름독서를”, 이란 목표로 골랐던 도서목록중의 하나였다. 이 책을 읽은 때가 육이오(6.25: 동란 발발)와 구이팔(9.28: 서울 수복) 을 사이에 둔 계절이어서 더 61년 전을 상상하게 되며 읽으니 실감이 더 했다. 이 책은 시간이 나면 자세히 나의 blog에서 소개할 예정인데, 한마디로 이 책의 내용이 ‘진실, 사실’ 이라면 이 ‘믿기 힘든’ 작전은 육이오 동란 중, 가장 비밀에 쌓인 역사였을 것이다. 이 책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거의 ‘허구’라고 단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믿는 쪽에 가깝다. 나도 읽고 나서 생각이, 이것은 사실 일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 작전은 육이오 동란이 휴전회담과 격전을 거듭하기 시작하던 1952년 1월 초에 38선 북쪽, ‘적진’ 속에서 일어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주일에 걸친 미군, 자유중국 군의 합동작전이었고, 비록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그에 따른 희생은 실로 충격적이고 슬픈 것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휴전회담은 가속화 되었고, 확전, 3차 세계대전(심지어, 핵전쟁)은 방지가 되었다.
오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구이팔을 가능케 한 구일오 인천상륙작전이다. 너무나 많이 알려져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이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7년, New York Times best seller였던 David Halberstram의 책, The Coldest Winter, The America and The Korean War라는 책 덕분이었다. 7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육이오 동란을 미국과, 한국 주변국과의 정치적인 각도로 다룬 것이어서 이제까지의 군사적인 각도로만 다룬 책과 다른 맛을 보여준다. 역사를 다룬 책이지만 역시 저자의 정치적 색깔도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어서 흠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인 역사철학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장군에 대한 저자의 거의 ‘혐오’ 적인 인상이다. 물론 충분한 역사적 자료에 의한 저자의 의견이겠지만, 조금은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이 책의 이 부분들을 읽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나는 솔직히 중립적인 입장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맥아더를 옆에서 본 것도 아니고, 이 저자와 같이 충분히 사료를 공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떠한 영웅도 보여주기 싫은 면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진리’는 안다.
이 책의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서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기는 했지만 솔직하게 맥아더의 천재적인 ‘용기와, 지혜’를 인정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거의 부산 교두보 (Pusan Perimeter)에서 바다로 밀려날 뻔 했던 시기에 이 작전이 성공을 한 것이고 보면 그 절묘한 timing의 진가도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작전이 조금만 더 늦게 있었다면 김일성 개XX의 호언장담대로 부산은 괴뢰군 수중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해진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은 이미 지상전에서 유엔군의 압도적인 열세를 만회하는 방법으로 시작이 되었다. 유엔군의 해군, 공군을 포함한 기술적인 면의 압도적인 우세함을 활용하는 방법은 해상으로 적진 깊숙이 대거 병력을 빨리 상륙시키는 방법임은 사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맥아더는 그의 과거 전투경험으로도 생명을 아끼지 않는 무자비한 적군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우회 작전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적진 뒤의 상륙작전의 구상은 서울함락 직후 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남진하기 시작하던 7월 초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
맨 처음 이 작전은 Operation Blueheart 라고 이름이 되었고, 예정 날짜는 7월 22일이었지만 지상전에서 너무나 일방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이 예정은 무기로 연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는 중 맥아더는 그 동안 별로 작전이 없었던 해병대에 이 작전을 맡아주도록 주선을 하며, 본격적으로 목표를 인천으로 굳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목표가 인천이라는 사실이었는데, 사실 표면적으로 인천은 작전하기에 ‘최악’의 자연적 조건만 갖추고 있었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심한 곳이었다. 이 조수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해병대가 기나긴 개펄에서 허우적거리는 최악의 상태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상륙하기에 알맞은 ‘해변’ 이 없고 모두 방파제 같은 시설물로 그득하고, 수뢰와 같은 방어시설이 있으면 더욱 힘들 것이다. 항구에 거의 붙어있는 월미도는 공산군 수비대에게 부두를 방비하는데 좋은 시설을 줄 수도 있다.
이런 불리한 조건들은 물론 해병대를 전함으로 운반해 줄 해군 측에서 강조가 되었다. 해군 함정들이 인천 해안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날짜는 밀물의 주기에 따라 거의 제한이 되었는데, 빠른 날이 밀물의 깊이가 31 feet인 9월 15일 이고 그 다음이 10월 11일이었다. 9월 15일의 아침 밀물의 시간은 오전 6시 59분, 저녁 밀물은 오후 7시 19분이었다. 이래서, 맥아더는 상륙시기를 아침밀물에 맞추는 작전으로 결정을 한다. 이런 결정은 그에게는 사실 간단했지만 해군에게는 상당히 힘들고 복잡한 요구였을 것이다. 이런 결정들은 거의 한결같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것은 맥아더가 충분히 예상한 바여서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도박을 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전략적인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거의 모두 인정을 했지만 문제는 상륙 지점이었다. 왜~~ 그렇게 불리한 조건만 갖춘 인천인가?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던 군산이 훨씬 (해군에게, 해병대가 상륙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닌가? 그런 것들은 사실 맥아더가 설득하는데 거꾸로 이용이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곳이라 적들도 그곳을 충분히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인천의 가치는 사실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도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면 그 상징적인 효과는 대단할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면 낙동강 쪽에 몰려있는 공산군들을 완전히 포위 섬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아더의 뚜렷한 구상은 예상보다 쉽게 반대자들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인천 D-day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정해졌고, 공격준비가 시작이 되었다. 맥아더의 짐작대로, 김일성은 인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모택동은 달랐다. 맥아더를 알았고, 일본에 깔려있던 공산스파이들이 이미 이상한 낌새를 보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후방 깊숙한 곳으로 대거 병력이 쳐들어 올 가능성에 대해서 중공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경고를 했지만, 역시 맥아더에게 운이 좋았는지 그는 듣지 않았다. 그 정도로 김일성은 빠른 승리를 장담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로 보면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공의 지시에 의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밀어부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를 보면 이런 미친 정도로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이해가 간다. 그는 사실 거의 ‘깡패 개XX’ 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상륙작전은 예상대로 공산군의 저항이 미미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13,000명의 해병대가 투입이 되어서 첫날의 전사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을 향한 진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것은 9월 28일까지 계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까지 30마일 정도 진격하는데 무려 13일이 걸린 것이다. 이것은 9월 15일 이후 놀란 김일성이 대거 병력, 2만 이상을 이 지역으로 투입한 까닭이었다. 문제는 사실 서울을 그렇게 빨리 점령할 이유에 있었다. 군사적으로 보면 저항이 치열한 서울을 우회해서 빨리 낙동강으로부터 후퇴하는 공산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것은 후에 ‘맥아더 개인의 영광’을 위한 작전이 아니었던가 하는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서울 탈환의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울 탈환에 소모된 귀중한 시간에, 후퇴하는 공산군이 북으로 탈출할 여유를 준 셈이고, 그것은 두고두고 전쟁을 길게 끈 원인도 되었다. 원래의 계획은 6.25 남침의 3개월이 되던 9월 25일 이전에 서울을 탈환할 예정이었는데, 그 날에는 서울 근교까지 진격을 한 상태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시가전이 거의 3일 걸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맥아더가 거의 혼자 밀어부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한 셈이고, 이로 인해서 파죽지세로 부산을 포위했던 공산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를 시작하게 되고, 전쟁은 완전히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전 성공 이후로 ‘기세가 등등’ 해진 그의 독자적이고, 독재적인 작전은 실패의 연속이 된다.
시기적으로 61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당시 2살 정도여서 직접 보고 들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이것들은 나의 생전에 일어났던 살아있는 역사였다. 이 당시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이 당시 이미 아버지가 끌려 가신 이후였고, 원서동의 어떤 무당집에 숨어 살았다고 했다. 그 동네는 비원 바로 옆에 있었는데, 미군의 비행기가 폭격하는 것도 다 보셨다고 들었다. 그러면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그런 장면을 다 보고 들었을 것 같다. 다만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다. 생각을 한다. 과연 민족 반역자, 역적, 김일성 개XX는 어떤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나? 이 미친놈을 어떻게 역사는 능지처참을 할 것인가? 괴롭다. 괴롭다.
이번 주말에는 아틀란타 본당 레지오 주최 연례 3일간 봉쇄피정이 있어서 연숙과 같이 들어간다. 둘이서 집을 같이 떠나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나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피정(retreat)이라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임은 어쩔 수가 없다. 일년에도 몇 차례씩 이런 곳에 가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노릇이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름이 아주 거창하다. 봉쇄피정이라.. 한자로 읽으면 아마도 완전히 3일 동안 외부와 연락이 차단이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세상만사를 다 잊으라는 뜻일까? 아직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다. 들은 이야기로 이런 곳에 가려면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준비가 잘 안되어 있으면 가기 전에 꼭 무슨 유혹이 생긴다고 들었다. 나는 ‘치명적’인 유혹은 없었지만 비슷한 것은 벌써 경험을 하고 있어서 이런 말들이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다 타당성이 있다고 믿게 된다.
나의 집을 ‘물리적’ 으로 떠나는 것이 거의 일년이 되어온다. 작년 여름 새로니가 살고 있던 Nashville, TN에 한번 놀러 갔던 것이 전부다. 비록 피정은 Atlanta Metro에서 열리지만 좌우지간 집을 떠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피정은 조금 있으면 주임신부에서 물러나시는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이 지도를 해 주신다고 한다. 비록 새 신부님이 곧 오시게 되어서 주임신부직은 물러나지만 아직도 우리들은 그 들이 우리의 ‘영원한’ 주임신부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그분에게서 나 개인적으로 받은 은총이 많음을 느낀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웹싸이트를 보면 그곳 발행,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향잡지가 1900년 초 부터 연도별로 거의 모두 수록이 되어있다. digital scanning을 한 것인데 원래 책의 상태가 안 좋은 것도 있어서 읽기 힘든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특히 해방 전 것들인데 잘 보여도 읽기가 쉽지 않다. 지금의 ‘국어’에 비하면 거의 훈민정음 스타일의 ‘고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실 한글 맞춤법도 없었을 것이고 한자를 많이 쓰고 해서 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고색창연한 천주교 월간잡지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우선 관심이 갔던 때는 해방 후와 육이오 동란 전후, 그리고 1960년대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 것들은 그 당시의 역사를 천주교의 입장에서 본 것을 알게 되어서 그렇고, 육이오 이후는 내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던 때를 다시 간접적으로 보게 되어서 관심이 간다. 1960년대는 조금 다르지만 약간 ‘근대화’한 한국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라 우선은 주마간산 식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조금은 정독을 하려는 희망도 있다.
우선 반가운 그림들을 몇 개 보았다. 광고인 것이다. 천주교 잡지에 광고가 있었다는 사실도 새롭지만 반세기 넘게 잊고 살던 ‘인기 있던’ 상품을 다시 보게 된 것이 더 반가웠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던 것이기도 하다. 우선 조금 웃음이 났던 것은 “살이 찌는 약”에 대한 것이다. 요새의 기준으로 보면 과연 얼마나 이해를 할까? 나도 살찌는 약에 대한 광고를 많이 보고 자랐다. 나도 갈비씨였지만 그 당시는 갈비씨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독일회사 훽스트.. 거기서 나온 ‘고기 먹으면 필요했던’ 훼스탈.. 고기를 많이 못 먹었던 시절 그것을 소화할 효소가 제대로 안 나와서 그랬던 것일까?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부족했던 그 때는 피부염, 종기가 참 많아서 그랬던지 ‘이명래 고약’은 정말 그때의 구세주 였다. 어찌 잊으랴?
나에게는 1983년 서울 학원사(學園社) 발행 넌 픽션, 여류 소설가 박기원씨가 쓴 <하늘이 우리를 갈라 놓을지라도> 라는 긴 제목의 책이 하나 있다. 사실은 나의 책이 아니고 아내 (전연숙)의 책이지만 실제적으로 이제 거의 나의 책이 되었다. 이 책은 1984년 초 연숙이 서울에 갔다 올 때 그녀의 학교선배가 사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이제 거의 30년이 되어오는 준 고서(準 古書)에 가까운 책인 것이다.
나에게는 이 정도의 역사를 자랑하는 책들이 그런대로 있지만 이 책은 좀 특이하다. 우선 내가 산 책이 아니고, 다른 오래된 책들과 다르게 거의 끊임 없이 자주 읽어 온 책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이렇게 읽고 또 읽고 한 것은 이 책이 거의 유일할 case가 된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이 책이 화장실에 항상 있어서 더 도움이 되었다면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거의 수십 년 동안 반복적으로 읽는 새로운 즐거움을 배우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우리가 젊었던 시절 널리 알려진, “직함도 많았던 팔방미인”, 이진섭씨다. 이진섭씨는 아주 유명한 신문인, 칼럼니스트, 방송작가, 시나리오작가로 나이에 상관없이 잘 알려진 분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진섭씨의 부인이자 여류문인 박기원씨로, 그녀가 남편의 타계 직후에 이진섭씨와의 삶에 대해서 평범하고, 진솔하게 쓴 책이다.
보통 부부들이 살다가 배우자가 먼저 타계를 했을 때, 누가 먼저 간 배우자를 그리며 책을 쓸 수 있겠는가? 요새라면 책을 쓰는 것이 비교적 쉬워졌지만 그 당시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진섭씨의 경우는 다행히, 그의 부인도 역시 문단에 잘 알려진 문학가였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문인부부는 뉴스 감도 되고 흔히 말하는 ‘인기, 연예인’ 그룹에 속하기도 해서 신문, 방송 같은 것에서 어렵지 않게 듣고 볼 수 있어서, 나에게도 이진섭씨의 타계(60세를 못 채우시고 비교적 일찍)는 아주 애석한 소식이어서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대하기 시작했다.
신문, 방송을 통해서 내가 아는 이진섭씨는 ‘불란서 샹송’을 좋아하는 박학다식, 재능이 많고 양심적인 언론인, 문인.. 정도일까? 그런 것들은 이 책을 통해서 다 사실임이 밝혀지지만, 가장 가까운 아내의 입장에서 본 것은 어찌 보면 평범한 남편, 아빠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또한 이진섭씨가 그렇게 교과서적인 평범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밝혀진다.
운명적인 만남
조금 놀란 사실은, 저자 박기원여사와의 결혼이 그에게 초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또한 육이오 동란이 남긴 한 부부의 파경임을 알 때, 역시 사상적인 전쟁의 파괴력을 실감한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일명,빨갱이 개xx) 가족 출신인 부인이 육이오 이후 가족을 따라 월북을 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6.25 전쟁! 그 전쟁으로 사실상 우리들의 만남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첫 결혼은 결국 결혼한지 1년도 못되어 전쟁으로 파경에 이르렀다. 그의 첫 번 아내는 폭격이 한창이던 7월에 첫아들을 낳고, 그리고 1.4 후퇴 때 친정을 따라 월북한 것이다. (그녀의 친정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고 고향이 이북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결혼을 파기하고 남편을 떠나 친정을 따라서 월북해 버린 그 여자만이 아는 비애와 깊은 아픔을 알 길은 없지만 이해는 할 것 같았다. (25쪽, 본문 중에서)
새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육이오 동란 때 잠깐 부역 죄로 인천에서 복역한 것이 조금 특이하다. 그러니까 한 때 사상적인 ‘외도’를 잠깐 한 것이다. 경위는 이해가 간다.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인 그의 많은 친구들이 공산주의자로 많이 월북을 했었는데, 전쟁 때 대거 남하를 해서 이진섭씨를 포섭을 했는데, 잠깐 협조를 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사상적이 아니고 실제적인 이유로 이진섭씨의 친형님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의 형님은 그 당시 외교관이었는데 잠깐 귀국을 했다가 6.25 동란을 맞고 곧 바로 납북이 되셨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100% 이해를 하게 된다. 나의 아버님도 외교관은 아니셨지만 그 당시 ‘지식인’이라는 죄목으로 납북이 되셨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이유는 어떻든 간에 부역은 한 걸로 됐죠. 그래서 인천서 재판을 받고 1년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셈이죠.”
다음해 우리가 결혼하기 한 달 전, 수복 후 서울에서 그이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이는 그때 일로 정신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결혼 후에도 그 후유증은 오래 갔었다. (31쪽, 본문 중에서)
나는 어떤 부부들을 만나거나 알게 되면 제일 궁금한 것이 어떻게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가끔 내가 집요하게 그것을 알려고 해서 핀잔을 받을 때도 있지만 별 수가 없다. 그저 궁금한 것을 어찌하랴..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더 궁금할 수 밖에. 그 만남의 역사를 감싸고 있는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이 나는 그렇게 흥미롭다. 이진섭, 박기원 부부의 역사는 민족의 비극, 육이오 동란 때의 피난지 부산이다. 그때 그곳에서 박기원씨의 심정이 이렇게 한 마디로 묘사가 되어있다.
직접 눈으로 목격했던 6.25의 공포, 그리고 아직도 전쟁의 판가름이 안 나 생(生)과 사(死)의 확증이 없는 나날은 슬프고도 우울했다. 이대로는 죽을 수 없을 것 같은 내 25세 청춘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나를 고독하게도 했다. (28쪽, 본문 중에서)
운명의 재회
그곳에서 그들은 ‘운명의 재회’를 하게 된다. 이미 서울에서 거의 타인으로 만났었지만 거의 우연히 피난지 부산에서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 사랑하는 부인과 자식을 잃은 젊은 유부남과 젊디 젊은 신참내기 미혼의 여기자는 여기서 서로 상대의 필요성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문학이라는 공통 관심사와 기혼자였다는 미안함은 있지만 그래도 적극적인 이진섭씨의 구애, 전쟁의 공포 등등이 그런 것들을 더 부축이지 않았을까? 특히 박기원씨는 그 당시의 이진섭씨에 대해서 깊은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왜 나는 그 남자만 보면 비길 데 없는 쓰라림이 오는 것일까? 나는 항상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모든 일은 나하고 만나기 그 이전의 그의 인생이었고, 나는 상관도 동정도 하기 싫은 모두 그의 것인데…
나는 왜 그이만 보면 가슴앓이 같은 아픔이 오는 것일까? 그이는 너무나 지쳐 있었고, 그리고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그것은 그대로 그의 분위기, 그의 체취였는지도 모른다. (35쪽 본문 중에서)
나는 비록 남자이지만 남녀에 상관이 없이 ‘연민의 정’ 같은 것이 이해가 간다. 비록 연민이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의 다른 형태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심정의 박기원씨는 그때 이미 이진섭씨에 대한 사랑이 싹트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소설 같은 논픽션
이렇게 아득한 옛날의 아름다운 첫사랑의 추억에 대한 글은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넘나드는 급박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로 돌변을 하기도 한다. 이런 서술방식은 자칫하면 평범한 전기(傳記)같은 인상을 덜 주고 흥미로운 소설적인 맛을 주어서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고, 내가 20년이 넘게 오랫동안 애독을 할 수 있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저자인 박기원여사는 문인인데다가 매일 일기를 쓰고 있어서 모든 지나간 사실들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진섭씨의 말투, 본인의 말투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것들도 정기적인 일기를 씀으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런 것들을 오래 동안 읽으면서 무의식 중에 내가 배우고 나의 것으로 만든 것 중에 이렇게 매일 삶의 생각을 글로 남기는 것도 포함이 되었다. 꼭 거창하게 ‘일기’까지 안 가더라도 무언가 내 삶의 행적을 짧은 글로 남기는 그런 것이다.
술의 낭만, 갈등과 문화
아깝지만 이진섭씨는 오랜 동안의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그 당시의 풍토는 사실 술과 담배를 못하면 남자로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그런 시대였다. 문제는 그러니까 그 정도에 달렸는데, 아마도 이진섭씨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술로 달랜 듯 하다. 그 괴롭던 시대를 사는 예술인들이 어찌 이런 생명수 같은 술을 피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여자한테서 질투를 느껴 본 적은 없지만 젊어서 술에 대해서는 질투를 했다. 술은 어떤 마력, 어떤 괴력이 있길래 저이를 저토록 사로잡고, 나에게 있어야 할 시간과 정신을 저토록 앗아 가는 것일까?
박기원여사는 아마도 술을 전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술의 맛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이진섭씨는 그것이 조금은 섭섭하고, 심지어는 못 마땅했는지 모른다.
한가지, 가가 나에게 유감스러워했던 것은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나는 전연 못했던 사실이다.
그럴 때 나는”하나님이 잘 조화를 이루어 주셨지, 나까지 술꾼이 돼서 부부가 같이 노상 술판을 벌이고 앉았으면 이 집은 어떻게 되겠우?”
“허허, 그렇게까지는 안되겠지만 적어도 글도 쓰고 술꾼 남편하고 살려면 술 맛 정도는 알아야 할 텐데…”
“걱정 말아요. 나는 마시지 않아도 당신 술 냄새만 맡고도 취한 것 같이 살아 왔으니까요. 술 안 마셔도 마신 것 같은 기분 속에 젖어 산다는 내 고역을 당신은 알아야 해요.”
“알구말구. 그러니까 내 마누라지”
위의 대화를 보면 두 분의 부부금슬은 정말 좋으신 듯하다 비록 술에 대한 불만은 있어도 몸을 생각해서 적당히 드시라는 부부사랑의 다른 표현일지도.. 그리고 핀잔을 받는 이진섭씨의 반응도 어찌 보면 참 유머러스 하지 않은가? 나는 그런 여유를 이 분들께서 배우고 싶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술에 대해서 아주 심각한 때도 있었다.
내 남편 되는 사람이 술에 취해 들어온다는 이 현실에 당혹감과 실망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로맨틱하고 다정한 눈이 뜨물처럼 흐려지고, 정신 없이 쓰러져 잠이 들었을 때, 나는 두렵고도 서러운 마음에 울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술 마신 다음날 아침에는 북어 국이 좋다는 말을 듣고, 어머님께 그 국 끓이는 법을 배워 아침상에 놓기도 했다. …. 남자하고 산다는 현실감에서 오는 놀라움, 그리고 술에 취해 들어오는 그이….. 그 모든 것이 놀랍고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십시일반(十匙一飯)
가슴에 남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결혼식장보다는 초상집에” 라는 소제목의 대목을 보면,
그이는 생전에도 남의 죽음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론이 있어, 결혼식장에는 잘 안 가도 초상집에는 빠지지 않고 가서 뒷일을 돌봐 주었다.
그것은 죽음같이 절대적이고도 엄격한 긍정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정성과 예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60세를 못 채우고 이진섭씨는 타계했지만 그런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죽음에 대한 생각은 담 달리 더 생각을 하며 사신 모양이다. 이런 대목을 사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통해서 읽어와서 내가 죽음을 그때 그때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점검을 하는 좋은 기회도 되었다. 특히 요즈음 들어 나의 “망자의 가시는 길”에 대한 생각도 이런 글들이 음양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카사블랑카
피난지 부산에서 둘만이 결혼의 약속을 한 후 박기원씨 가족은 먼저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서 잠시 헤어지게 된다. 그 당시의 부산역에서 헤어지는 광경은 흡사 영화 카사블랑카를 연상시킨다.
그때였다. 역사(驛舍) 기둥 한 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길고 큰 형체가 보였다. 그는 나와 있었다. 어제의 이별이 아쉬워 그이는 약속도 없이 나와 있는 것이었다.
나는 고함이라도 치며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창 밖을 향해 손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러나 그이는 창가까지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웃으며 손을 크게 한 번 흔들었다. 그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어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차가 떠나기 직전에 그이는 역사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허락 받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가족의 눈에 띄기 싫어한 그의 섬세하고도 단정한 마음이 나를 소리 없이 울게 했다.
육이오 동란 직후의 기억
이 부산역 이별의 광경은 그 당시, 그러니까 육이오 동란의 휴전이 되는 그런 시기를 기억하면서 더 실감이 난다. 비록 그때 나의 나이가 불과 5살도 채 안 되었지만 서울 원서동에서 뛰놀던 생각과 휴전 전후 서울의 풍경들이 아주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때 들은 이야기에 부산은 비도 많이 오고 불도 하루 건너 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우리 먼 친척도 그 당시 그 절망적인 시기에 결혼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나는 더 실감나게 이진섭, 박기원 부부의 연애, 결혼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언제나 책에 묘사된 그 당시 정경을 통해서 나의 ‘어린’ 생각과 기억을 같이 투시하곤 했다.
아버지중의 아버지
이 책을 통해서 이진섭씨의 흔히 알려진 불란서 풍의 섬세함과 학자 풍의 다재 다능한 면이 많이 들어난다. 그 당시 문인들의 풍조였는지도 모르지만 역시 이진섭씨는 이진섭씨만의 자란 배경과 전통적인 집안 내력을 풍기며 그 시대를 살았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양반집안, 족벌의 의미가 거의 퇴색되어버린 일제시대.. 거기서 믿을 것이라곤 아마도 ‘우수한 머리’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진섭씨는 아주 앞서가는 ‘모범적인 아버지 상’을 남기며 사신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역사적 격동기를 비록 술로 삭히기는 했지만 가정을 ‘절대로’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완전히 성공을 했다는 사실.. 두고 두고 나의 가슴에 남아서 내가 배울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곤 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이 책의 제목에는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이진섭” 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100% 수긍이 가는 표현이다. 비록 커다란 식구의 가장으로 경제적인 압박이 그렇게 커도 절대로 돈에 목을 메는 짓은 못하던 그런 면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어떻게 그렇게 멋과 돈의 균형을 잘 맞추며 살았을까? 그것은 이진섭 특유의 타고난 재주였는지도 모른다. 아주 잘 알려진 요절한 ‘천재시인’ 박인환님과의 인연도 그렇다. 그것은 이제 일화가 아니라 역사가 되었으니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술집 문화에서 출발한 이 박인환님의 즉흥시가, 이진섭씨의 즉흥 샹송에 접목이 되어 결국은 불후의 클래식이 된 것은 역시 길이 남을 한국 전후 문화사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동료 극작가 한운사 씨의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을 보면..
빈대떡 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시를 읊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진섭의 머리를 스치는 번개같은 인스프레이션(inspiration, 필자주) 그는 즉석에서 멜러디를 붙여 노래를 불렀다. 우뢰 같은 박수가 빈대떡집 지붕을 뒤흔들었다. 젊음과 낭만과 꿈과 산다는 것의 슬픔을 그가 타고난 재간으로 융합시킨 이 순간은 명동이 기억해둘 영원한 시간이다.
이 최인환 시, 이진섭 곡의 샹송풍의 노래는 곡이 만들어진 때보다 훨씬 뒤에 리코딩이 되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최양숙씨가 제일 먼저 리코딩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샹송 스타일에 제일 잘 맞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제일 먼저 들었던 것은 역시 박인희씨의 곡이 아니었을까.. 기억이 가물거린다.
여기서 어떻게 이 클래식이 출발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이것을 박기원씨의 표현을 통해서 짐작을 하면 이진섭씨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특별한 재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술 한 잔 들어가면 악보도 없는 자작곡에 바이브레이션을 넣어 피아노도 잘 쳤다. 애들과 우리만이 아는 ‘이 진섭 자작곡의 밤’이 수시로 열렸던 것이다. 싫어도 들어야 했는데, 애가 탔던 것은 그이는 술이 들어가면 시간을 초월해서 완전히 그 시간 속에 빠져 든다는 점이었다……
그이가, 시인 박 인환(朴寅煥)씨가 생존 시 명동 술집에서 낭만의 명동이 사라져 가는 것을 서러워하며 지은 시 <세월이 가면>에다 그 자리에서 작곡을 한 것은 지금도 아름다운 일화로 남아있다.
지금 생각나는데, 그날 밤 그이는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내가 시집 올 때 갖고 온 어린이용 장난감 피아노에 키를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오선지에 채보까지 했던 것이 기억난다.
샹송 풍의 그 노래는 당시엔 어려워서인지 그리 알려지지 않더니 10여 년이 지난 후에는 서서히 대학생들간에 유행이 되었고 몇몇 가수가 불러 레코드까지 나왔다……..
그의 영결식에서는……. <세월이 가면>이란 노래를 최초로 불렀던 최양숙(崔洋淑)씨가 그 노래를 다시 불러 그의 마지막 길을 장식해 주었다
12월, 아니 2010년도 열흘 정도 남았나? 나의 마음도 무언가에 쫓기듯이 종종 발걸음이 빨라진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쫓기는 심정이 되는 것일까? 아무리 나의 쫓기는 심정을 분석하려 해도 확실한, 그럴듯한 대답이 없다.올해는 조금 느긋하게 년 말을 보내려고 했지만 여지없이 나는 또 이렇게 2011년을 향해 내몰리는 듯한 심정이 되고 만다. 급기야는 어제 밤에 또 무언가에 쫓기는 꿈까지 꾸고 말았다.캐나다의 친구 정교성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왔다. 수십 년간 꼬박 보내던 그, 최근 몇 년은 소식이 없었다가 올해 다시 그의 카드를 받은 것이다. 언제나, CANANA의 symbol이 꼭 들어간 그런 카드를 보내온다. 언제 한번 그와 그의 새 wife를 만나보게 되려나?
나는 오랫동안 성탄 카드를 친지들에게 보내지 못하고 살았다. 그것이 그렇게 힘이 들게 느껴졌지만, 사실은 역시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내가 소식을 끊어버리고 산 것이다. 그 결과 하나하나 친지들이 주변에서 사라짐을 알았다. 오랜 동안 떨어져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친하던 친지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짐을 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또한 그렇게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과 다시 연결이 되기는 생각보다 쉽지를 않다. 하지만 노력을 다시 하고 있다. 작년부터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성탄카드를 조금씩 보내기 시작했다. 올해도 조금은 늦었지만 이제부터 보내기 시작을 할 것이다.
내일은 정말 오랜만에 ‘한국어 고백성사’를 할 예정이다. 레지오에 입단을 하면서 생각한 것 중에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심각하게 다시 시도할 것도 들어있었다. 최소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하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피할 생각이 없다. 천주교 교리에 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니까 하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근래에는 거의 미국본당에서 미국인 신부님들께 영어로 고백성사를 드렸었다. 비록 형식적인 기분이 많이 들었지만 하고 나면 그렇게 마음이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것 조차도 사실 3년 전부터 못하고 있지만.. 영어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백성사’ 그 자체가 문제였다. 나의 ‘치부’를 들어내야 하는 작업은 사실 쉬운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신자들 중에도 잘못한 것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어떤 때는 나도 이 말에 수긍이 가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함정인 것을 또한 나는 안다. 비록 행동에 문제가 없었다고 해도 나의 마음에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비록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이 남에게도 그렇게 이해가 되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나같이 이렇게 오랫동안 그런 것들이 쌓여가면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참 힘들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그렇게 쌓인 것을 하려고 무척 고생을 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것을 조금 체계적으로 하는 방법이 있었다. 2천년 전통의 가톨릭교에 이미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많은 성인,성녀들이 이미 다 겪었을 것이 아닌가? 그 중에서 ‘양심성찰’이라는 아주 체계적인 이론까지 있었는데, 그것이 고백성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죄’를 찾는 것도 그렇지만 사실 나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고백성사 그 분위기의 ‘어색함’에도 있다. 특히 고백성사를 하기 전에 느끼는 것.. 하지만 또한 안다. 고백성사 후의 그 날라갈 것 같은 그 기쁨.. 죄를 용서 받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얼마 전에 한국 과천에 사시는 평창이씨 익평공파 29세손 종친님(사실은 아주 젊은 entrepreneur) 이종환 님이 족보의 무려 1700여 쪽을 확인하면서 나의 아버님의 성함이 보이는 몇 쪽을 scan을 해서 보내 주셨다. 그 동안 추측으로만 알던 것을 다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직계조부님들의 거주가 경기도 평택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부터 인가.. 해답보다는 의문이 훨씬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 중에 제일 궁금한 것은, 아버님의 사촌들이 거의 6명이나 되는데 그들의 후손들이 전혀 기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 하는 것일까? 물론 나의 이름도 거기에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증조부이신 이종득 할아버지의 후손이 28세손에서 최소한 족보에서는 ‘전멸’인 것이다. 그분들의 ‘남자’ 후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면, 나머지는 역시 동족의 비극 육이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모두 북한에서 사셨을까? 최소한 나의 직계 할아버지 ‘이경호’ 님은 서울에서 사셨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그리고 나의 삼촌 ‘이준모’.. 호적에도 없는 그 삼촌은 사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잠깐 들은 적이 있었다. 육이오 전쟁 때, ‘월북’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의 호적에서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무슨 해괴한 역사일까? 아버지는 공산당에게 당하시고, 그 동생은 빨갱이였단 말인가? 정말 그 짧은 공산당 혁명 역사가 이렇게 한 가정을 파괴할 수 가 있을까? 할말을 잊는다..
오늘 나의 핏줄을 찾는 내 자신의 노력에 커다란 전환점이 왔다. 내 눈으로 나의 아버지의 성함(이정모, 李正模)을 평창이씨 익평공파 족보에서 처음 확인한 것이다. 물론 100%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99.9% 정도는 확실해서 실제로 나는 아버지를 찾은 셈이다.결정적인 단서는 생년월일에 있었다. 어머님으로부터 들었던 희미한 기억에 아버님 태어나신 해가 1910년대 초반이라고 했는데, 족보에 신해년(그러니까 나와 같은 돼지띠!) 3월 11일 생으로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아버지의 성함과 나란히 이준모 라는 성함이 기재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분이 ‘전설적’인 나의 삼촌 이준모..일 것이다. 이 준모 삼촌은 나이가 1914년 생이니까 아버지보다 3살이 아래였다. 이것은 정말 처음 알게 되는 사실이다.
이번의 이 scoop은 한국 과천시에 사시는, 인터넷으로 알게 된 평창이씨 익평공파 29세손이신 이종환 종친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이번에 운이 좋았던 것은 이 종친님이 익평공파 족보를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바쁜 직장생활에서 틈을 내어서 족보의 몇 쪽을 copy해서 보내주신 것이다. 이것을 자세히 보면서 조금 놀란 사실 중에 하나는 아버님의 남자 사촌들이 5분이나 계신데 (그 당시에는 족보에 여자의 이름이 하나도 개재되지를 않았다) 그 후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후손이 없었다기 보다는 기재가 되지를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우선 나의 이름도 아버님 밑에 기재되지를 않았으니까. 왜 그랬을까? 아마도 동족의 비극, 육이오 전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아버님은 내가 2살, 육이오 이후 납북이 되셔서 호적이 올려놓을 시간을 놓치셨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에서 나는 나의 가까운 친척을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움을 느낀다.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나는 나의 아버님의 후손을 족보에서 없애는 불효는 절대로 반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은 “구이 팔”, 9.28, 9/28/1950: 서울수복 60주년 기념일이다. 60년의 강산이 변했고 “역사수정주의자” 들이 판을 치는 고국은 아마도 대부분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를 것이다. 예외는 물론 우리같이 조금은 알고, 기억하는 세대들일 것이다. Mafia 집단으로 변한 김씨 일당들은 “미제의 앞잡이”들이 퍼다 준 밥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김씨 세습을 강행하려 한다고.. 참, 이건 완전히 희극중의 희극이다.
LA area, 그러니까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지역이다. 기온이 120도가, 물론 화씨로, 넘었다고 한다. 올해는 참 기후에 관한 얘기가 끝이 없더니 이것도 한 몫을 한다. 올해는 동부,남부가 완전히 더위로 거의 “익어가는” 과정을 겪었다. Weather Channel 에서는 올해 “최악의 여름” 상은 Washington DC로 정했다. 여러 가지 최고 기록이 있었겠지만 최고,최장의 무더위와 더불어 폭풍 같은 것도 곁들어서 그런 “불명예’를 차지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사는 이지역도 내 기억에 정말 오랫동안 “쉬지 않고” 더웠다. 하지만 오늘은 6월 이후 처음으로 “긴팔, 긴바지” 에다 양말 까지 신고 Tobey와 집 주변을 산책을 했다. 그러니까 가을이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급속도로 단풍이 들 것이고, 첫 얼음이 얼고, 시베리아의 바람이 부는 날이 올 것이다. 특히 을씨년스러운 가을비가 기다려진다.
아주 오랜만에 서울의 처남형님(연숙의 큰오빠)과 email로 연락이 되었다. 2002년에 이곳에서 만나고 그 후에도 조금씩 연락은 하며 살았지만 언젠가부터 거의 연락두절로 살았다. 이건 100% 우리부부의 책임이다. 마음만 먹으면 거의 “공짜”로 연락을 할 수 있었는데.. Skype은 물론이고 Google Voice같은 것을 쓰면 일반전화로도 분당 2 cent 정도로 전화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동안 조카들은 무럭무럭 장성을 해서 둘 다 결혼을 하고 이제는 손주들까지.. 형님말씀대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오래 전 전화요금이 비싸던 때의 말이었던 것 있음을 실감한다.
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 연숙이 이곳의 한인천주교회에서 활동하는 것 중에 레지오(마리애:Legio Marie, 마리아의 군단)가 있다. 성모님을 통한 봉사,기도단체다. 우리가 오랜 전에 영세를 받은 후에 이 단체의 이름이 제일 먼저 들어왔고, 다음이 꾸르실료..하는 “해괴” 한 이름이었다. 오랜 기간 그런 단체에 무관심으로 지냈다. 하지만 현재 연숙은 이것 두 신심단체에서 활동을 한다. 그렇게 된 것이 이제는 몇 년이 되어서 나에게도 그 단체들의 활동에 조금 익숙해진 것이다. 이것이 이제 나에게도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결국은 “결정”을 할 단계가 되었다. 나는 무언가 “큰”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마도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 일단 가입을 하게 되면 3개월의 “대기 기간”이 주어진다. 그 기간이 무사히 끝나면 정식으로 단원이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google earth에 몸을 싣고 “무전여행”을 해 보았다. 우선 우리 집 주변을 선회하며 그 동안 얼마나 변했나 보았다. 내가 만든 green roof shed와 Tobey fence가 뚜렷이 보이고 정문 앞으로 진달래가 만발한 것이 보인다. 그러니까 아마도 2009년 아니면 올해 봄의 모습이다. 그리고 parking garage 앞에는 나라니가 타는 Hyundai Elantra가 보인다. 그런데 그 차의 위치가 조금 이상하다. 이것은 나라니가 이사를 나간 후에 집에 잠깐 들렸을 때의 위치인 듯하다. 그러면 이것은 작년이 아니고 올해인 듯하다. 한마디로 거의 최근의 항공사진인 것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 찍었으면 roof에 무슨 damage같은 것도 보일 지경이다. 참 좋은 건지, 으시시한 건지.. 그런 세상이 되어간다. 이제는 personal privacy란 말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일까.
내친김에 mouse cursor를 Columbus, Ohio로 흘려보았다. 너무나 오랜만이라 많이 잊었다. 목적지는 Ohio State University campus주변이다. 처음 Columbus downtown에서 출발을 하여 I-71를 따라서 올라갔다. 그저 Ohio Stadium만 찾으면 되니까.. 역시 왼쪽 편으로 말굽모양의 football stadium이 보인다. 처음에는campus 바른 쪽의 High Street를 찾았다. Long’s Bookstore와 McDonalds를 찾는다. 그리고.. 잠깐 살았던 “rooming house” Frambes Avenue, Harrison House, Jones Tower.. 제일 마지막에 나의 Department (of Electrical Engineering)가 있던 Dreese Lab, Caldwell Lab을 찾았다. 그런 건물들이 쉽게 변할 리는 없다. 100% virtual bird’s eye tour였지만 그와 함께 time machine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재동”초등”학교가 아니고 나에겐 분명히 재동”국민”학교다. 이름에도 정치, 역사가 있지만 나에겐 100% “초등”학교가 아니었고 분명히 “국민”학교였다. 서기 1954년부터 1960년 초까지 나는 이곳에서 대한민국 어린이의 꿈을 키웠다. 서기 1954년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그때는 “단기” 4287년이었다. 그러니까 단기 4287년부터 4293년 초까지다. 참 오래전. 일이다.
온통 나의 어린 시절은 이곳을 중심으로 이야기들이 만들어 졌다. 서울의 심장부에 속하던 종로구에서 가회동과 계동의 옆과 위에 접한 꿈의 운동장. 이곳에서 얼마나 많이 순진한 꿈을 꾸며 뛰어 놀았던가? 여기서는 누구나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 가 없을 것이다.
취운정 활터에서 힘을 기르고
엣궁의 거문고로 마음을 닦던
빛나는 화랑정신 이어 나가자
우리는 재동학교 나라의 새싹
재동학교 교가 아마도 1~2학년 때 부터 이 ‘새’교가를 불렀지 않았을까? 누가 이 사실을 기억을 할까? 그 당시 이 ‘취운정’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불렀다. 최근에서야 인터넷의 힘으로 옛날 옛적에, 언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재동학교 근처에 있었던 고적지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재동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윤성종’작사라고 보인다. 작곡은 ‘김성태’로 되어있다. 김성태라고 하면 물론 귀에 아주 익은 이름인데 윤성종은 전혀 무언가 떠오르지를 않는구나. 이 교가는 물론 아직도 100% 가사를 안 보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이 그 나이 또래의 기억력이다. 무서울 정도이지 않을까?
입학하기 전부터 생각이 나는 게, 그러니까 아마도 6.25동란이 끝나기 전인 듯싶다. 그때 나는 돈화문 (비원정문)근처의 원서동에서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어머니, 누나와 같이 살았는데 재동학교에서 화재가 나서 전체 건물의 반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생생히 기억을 한다. 그 나이에는 불이 나면 우선 ‘경사’라도 난 듯이 그곳으로 뛰어 가지 않았던가? 그때 재동학교는 아마도 군인병원으로 임시로 씌어졌던 모양인데, 왜 불이 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혹시나 폭격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그때 타버린 건물은 몇 년 뒤에 미군들의 도움으로 새 건물로 태어났고 동시에 나머지 건물들도 한층 씩 더 올려지게 되었다. 5학년 때 갑자기 모두 운동장에 나가서 ‘즐겁게 뛰어놀라’ 는 지시에 전 학년 생과 선생님들 모두 나와 그야 말로 뛰어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미군들이 와서 사진(그리고 아마도 영화도)을 찍고 있었다. 그때는 미군을 보는 게 참 즐거운 일 이었는데 (우리를 공산당으로 부터 구해준 십자군?) 그들이 사진을 찍으니 우리들은 더 신들린 듯이 뛰어 놀았다.
은사님들을 생각해 본다. 교장 선생님. 심원구 선생님이 거의 5년 동안 나의 교장선생님이셨다. 6학년 때에 지금 졸업앨범에 찍히신 윤형모교장 선생님께서 오셨다. 아마도 5학년 중에 부임을 하셨던 게 아닌가. 누군가 이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5학년 때 인천으로 당일치기 수학여행을 갔을 때 사진에 심원구 선생님이 보이시니까 분명히 5학년 까지는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들. 지금 모두 어떻게 지내실까. 혹시나 연로하셔서 타계나 인하셨을까? 이걸 어떻게 알아 볼 수 없을까?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윤원범 (여자)선생님. 졸업앨범에 없다. 졸업 전에 떠나신 것이다. 그 옛날. 1학년 때.. 그때 나는 학교 가는 게 아주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들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엘 오곤 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생활전선에 뛰어든 뒤였다. 옆집 친구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곤 했다. 그 친구는 ‘안윤희’였다. 그런 중에 드디어 대형 사고를 쳤는데. 그만 학교를 안 간 것이다. 원서동에서 재동학교를 가려면 계동을 지나는데 거기에 대동상고가 있었다. 거기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곤 했다. 내가 “깡”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학교가 싫었던 게 아니었을까. 얼마나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리 집의 주인아저씨가 (그때 우리는 세를 들어서 살았다) 나를 보았다고 했다. 들통이 나고 어머니는 장장문의 편지를 써서 나를 학교로 데리고 갔다. 그때 윤원범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아마도 윤 선생님이 나를 조금 더 자상하게 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조금은 무뚝뚝한 여선생님. 한번은 연필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나를 그냥 (다른 아이와 같이)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는 담담히 받아 들였다. 나중에 생각하면 조금 내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만큼 바쁜 탓도 있지만 우선은 나의 잘못이었다. 몇 년 후에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줌마(그때는 모두 식모라고 불렀다)가 알고 보니 그 윤원범 선생님의 집에서 머물며 밥을 해 주었다고 들었다. 참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선생님은 그때 결혼 전이셨는데 그 후에 결혼을 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마지막을 뵌 건 2학년이 되자마자 교과서를 받으러 선생님을 교무실로 찾아간 때였다. 그때는 밝게 웃으시며 공부 잘하라고 격려를 해 주신 기억이다.
2학년으로 올라가며 선생님도 바뀌고 물론 친구들도 모두 바뀌었는데 나는 그때 너무도 놀라고 슬퍼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 내내 울었던 기억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학년이 바뀔 때쯤이면 필요이상의 stress를 느끼곤 했다. 나의 성격이 아마도 수줍고, 조용해서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 들였는지 모른다. 2학년 때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을 못하는데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기억 못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얼굴은 생각이 난다. 유별나게 신경질 적인 여자 선생님.. 대나무로 만든 자로 손바닥을 아프게 맞았던 것도 쓰라린 기억이어서 아주 나쁜 기억이 되었다. 1,2학년 때는 사진도 없었다. 그때는 사진기도 흔치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남는 법인데 그때는 아주 암흑의 학년이 된 것이다.
재동국민학교 3학년 학급사진, 1956년
3학년 때는 학급단체 사진이 아주 잘 남아 있다. 3학년의 담임 배은식 선생님. 앨범에도 남아있다. 참 다정스런 아줌마 타입의 선생님.. 학년이 올라 갈수록 사진은 많아 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4학년 때는 없다. 왜 그랬을까? 4학년 담임 김경구 선생님. 미술이 전공인 담임. 항상 수염자국이 뚜렷한 남자 처음 남자 선생님. 물론 4학년부터 남자, 여자 반이 갈리었다. 모든 게. 우락부락하게만 느껴져서 나도 그곳에 적응을 할 수 밖에. 그때 처음 죽마고우중의 하나 안명성을 만났다. 같은 원서동에 살아서 죽마고우가 된 친구다.
4학년의 기억은 조금 고통스럽다고나 할까. 이 김경구 선생님은 좀 독특한 스타일로 가르치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공부한 시간표’라는 유별난 system을 고집하면서 1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다. 한 마디로 하루에 최소한 4시간 이상 집에서 공부 했다는 것을 증거로 부모님의 도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그 나이에 하루에 집에서 4시간을 꼬박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모두들 ‘거짓도장’을 잘도 받아서 제출을 하였다. 항상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어머니 도장을 몰래 찍는다는 것은 그 나이에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떤 아이들은 3시간 30분이라고 적어 오기도 했는데. 그게 정말로 3시간 30분을 공부 했는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으로 30분을 일부러 뺏는지. 아직도 불가사의다. 결과적으로 김경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회에 나가서 survive하는 예비 훈련을 시키신 셈이다.
5학년때, 인천 만국공원, 1일 수학여행, 1958년
5학년의 추억은 참밝기만 하다. 담임은 이원의 선생님..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선생님은 ‘반 입시형’인 ‘미국식’ 선생님이라고나 할까? 교과서를 줄줄 외우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고 실습과 생활. 탈교과서적인 그런 쪽을 강조하신 선생님.. 그 당시는 아마도 학부형들에게 별로 호응을 못 얻으셨을 지도 모른다. 자연공부도 실습으로 하시고, 음악은 전공 선생님을 불러 오셨다. 여름방학 일기는 ‘일일 일선 (하루에 한 가지 좋은 일 하기)’ 을 주제로 삼으셨다. 그래서인지 외우는 것 같은 것은 거의 배운 기억이 없지만. 아직도 그 선생님의 스타일이 멋지기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그렇다. 그렇게 계속 가르치시면 절대로 우리들을 ‘좋은 학교’로 진학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게 균형이 맞아야 하는 것일까?
5학년말 교생실습후 단체사진
6학년은 5학년 때와 정 반대의 담임선생님이 오셨다. 학부모들은 아마도 ‘구세주’가 오셨다고 했을 듯하다. 새 6학년 담임은 박양신 선생님인데 바로 서울 안산국민학교에서 전근을 오셨다. 무언가 다르다고 모두들 짐작은 했는데 정말 공부시간이 되어보니 정말 완전히 이건 입시준비학원 style로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학부형들은 완전히 무언가를 느꼈는지 치맛바람의 극치를 이루며 교실을 들락거렸다. 아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는 엄마들도 있었고, 공부시간에도 쉬는 시간만 되면 재빨리 들어와 선생님의 책상을 청소하거나 무언가 놓고 가거나 할 정도였다.
5학년 담임선생님 이원의 선생님도 6학년 다른 반의 담임이 되셨는데, 나의 짐작대로 절대로 입시준비를 하는 그런 style이 아니셨고 결과적으로 예상대로 아주 결과는 참담한 듯 했다. 결과란 것은 물론 일류 중학교 합격률을 뜻하는 것이다. 친구 안명성이 그 선생님의 반에 있었는데 항상 부정적으로 선생님을 평하였다. 과장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시간 ‘양호실’에 누워 계셨다고 했다. 그게 게으르다는 뜻인지 정말로 몸이 편찮으셨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6학년의 추억은 아주 또렷하고 생생하다. 처음 겪는 ‘입시’공부였고 이 박양신 선생님은 요샛말로 ‘수험의 신‘ 이셨다. 좋게 말하면 많은 입시용 지식을 그 어린 머릿속에 아주 효과적으로 주입 시키셨다. 나쁘게 말하면 어린이의 꿈의 시간, 공간을 많이 빼앗아 갔다고나 할까. 사실을 말하면 그 중간 정도일 것이다. 한 가지 아주 인상적인 것은 가끔 수업을 ‘정규’시간에서 벗어나 저녁때 까지 연장을 해서 한 것이다. 그야말로 어두워서 책이 안보일 때 까지 하는 것이다. 전등을 킬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인데.. 사실 힘은 들었지만 무슨 캠핑을 간 듯한 기분도 들어서 한편으론 재미있기까지 하였다. 이런 모든 것들은 분명히 학부모들을 아주 만족시켰으리라 짐작을 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또한 다른 6학년 담임들의 선망과 질시를 받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
그때 우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 반에 정말 공부를 잘하는 녀석들이 많이도 모여 있었다. 하기야 반을 가를 때 완전히 random하게 할 터인데 우연이라고 봐야 할 듯 하지만, 우연치고는 참 선생님의 운도 좋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애들.. 이만재, 김두철, 정세종, 조성태, 이정택, 장정석, 전경훈, 이규재, 한윤석, 심동섭, 김정훈, 임한길, 신문영, 유성희, 김승종.. 사실 앨범을 보면서 이름을 떠올리지만.. 이들이 소위 말해서 1분단의 member들인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제일 공부를 잘하는 애들 그룹이다. 나도 나중에는 그 그룹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긴 했다.
이들은 입시에서 거의 경기, 서울, 경복, 용산으로 이루어지는 1류 공립중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세히 누가 어디에 갔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이만재, 김두철, 김정훈은 경기였고, 심동섭은 경복이라는 사실뿐이다. 아직도 궁금한 것은 신문영[나중에 경복중에 간 것을 알았다]과 이규재.. 인데. 알 길이 없다. 이규재는 나의 짝이었고.. 신문영은 내가 혼자 그냥 좋아하던 애였다. 이만재는 나중에 Internet을 통해서 숙명여대 교수인 것과 전자/컴퓨터전공이란 것을 알았다. 신문영은 내가 연세대학에 다닐 때 잠깐 본 듯한데 말을 걸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김두철은 서울공대 입학시험을 볼 때 멀리서 보았는데 아마도 그의 경기고 후배 응원 차 나온듯한 모습이었다.
우리 6학년 1반, 박양신 “사단”의 system중에 독특한 것은 가차 없는 경쟁유도체제 이었다. 그것은 거의 매일 치르는 모의고사의 성적에 의해서 앉는 자리, 그러니까 분단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 당시는 그게 적응이 되어서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아마도 다른 어느 반에도 그런 것은 없었을 듯하다. ‘공부 잘하는’ 1 분단으로 올라가려면 죽어라 시험을 잘 보아야 했다. 1분단에 올라갔으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또 죽어라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데 이상한 것은 그다지 생각만큼 자리가 쉽게 바뀌지를 않았다. 그만큼 성적의 순위가 바뀌기가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잘했고 못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못한 셈이다.
나는 6학년에 들어오면서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쓰셨다. 이제까지는 그다지 성적에 집착을 안 하셨는데 학기가 조금 지나면서 선생님을 만나고 오시더니 한숨 투성 이었다. 물론 나의 성적이 아주 안 좋다는 얘기였다. 1분단은 꿈에도 못 꾸는 처지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 한 고등학생을 데리고 들어오셨는데. 알고 보니 가정교사인 셈이었다. 그 당시는 대학생보다 고등학생들이 과외선생을 많이 했다. 특히 경기고 같으면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김용기라는 경기고 2년생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 부터 나는 학교에서도 공부, 집에 와서도 공부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공부도 점점 재미가 있어졌고 따라서 학교성적도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곧 대망의 1분단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stress가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졸업 할 때까지 다행히 1분단을 고수를 할 수는 있었다.
또 한 가지 잊혀 지지 않는 것. 이것도 다른 반에선 없던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1분단의 반대편에 있는 제일 쳐지는 분단 애들이 있다. 성적순으로 제일 밑인 셈이다. 그들의 심정이야 이해를 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제일 기억에. 그것도 좋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애들은 비록 공부는 힘들었어도 유머와 여유가 있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그들은 group으로 앞에 나가서 코미디를 하거나 유행가를 합창으로 부르곤 했다. 거의 pro의 수준이었다. 그게 그당시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 애들은 입시공부도 거의 포기한 듯한 모습들이었는데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는고..
졸업하면서 거의 영원히 소식들이 끊어진 친구들.. 여기서 몇몇을 회상하고 싶다. 정문신. 정문신. 아 잊을 수 없다. 내가 1분단으로 이사하기 전에 짝을 하던 친구다. 짝이라 친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 애가 그렇게 나는 좋았다. 아주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 정도보다 훨씬 내가 더 좋아했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나는 그 애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여름방학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을까? 그 나이에 동성애였나? 우습기만 하다. 졸업을 하고서 다른 친구 김천일이 그 애 사는 곳을 안다고 해서 솔깃했는데. 그대로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정문신. 어디선가 살아 있다면 그때 내가 그렇게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 당시에 이승만 정권에 식상한 국민의 여론이 서서히 야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리고 정치바람이 학교까지 들이 닥쳤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별로 잘 이해를 못했지만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긴 했다. 하긴 우리나이 또래면 북한(그때는 북괴라고 했다)에 못지않게 이승만대통령을 거의 영웅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반공, 반일로 일관된 교육 속에서 우리들은 자랐다.
그런데 아마도 정부에서 우리또래 학생들에게도 선거운동을 시킨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선거권은 비록 없지만 아마도 부모를 설득하도록 한 것이나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선생님들을 시켜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우리 입시의 아니 수험의 신이신 박양신 선생님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설득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여당은 좋은 사람들이고 야당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비록 선생님은 경기, 서울, 경복에 많이 입학은 시키셨어도 진짜 교육은 못하셨다고 이제껏 확신을 한다.
이렇게 졸업은 해서 재동학교는 떠났지만 그 후 3년 동안 몸은 떠나지 않았다. 집이 바로 재동학교 후문 옆에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3년 다닐 때 까지 옆에서 보며, 야구를 할 때면 운동장을 빌려 놀곤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온통 재동학교가 꽉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그 많은 역사 깊은 국민학교들이 문을 닫거나 이사를 가거나 했다지만 우리 재동학교는 아직도 같은 위치에 건재하다고 들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야말로 모교. 나의 어머니격이다. 그게 아직도 건재하다니.. 부디 오래 오래 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