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umn Leaves: 의외로 갑자기 가을의 맛이 눈앞에 다가왔다. 준비도 못한 채 맞게 된 것이지만, 절대로 가을은 반갑다. 황금색으로 바뀌는 나뭇잎을 보는 것도 즐겁고, 차가운 비를 바라보며 움츠려 드는 몸을 따뜻하게 녹이는 진한 커피향도 그렇고, 이것이 앞으로 몇 개월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은근히 기대했던 비는 끈질기게도 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확률적인 수치로 나오는 일기예보는 해석을 잘 해야 한다. 그 확률이 맞는 확률도 있을 것이고 그것은 역시 개개인 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 일기예보는 거의 일부러 안 보는 편이다. 기대도 하기 싫고, 미리 알아 보았자 그렇게 이득이 될 것도 없고, 만의 일이라도 비상 적인 일기가 오게 되면 그것은 주위를 통해서 자연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니까 사실 마음이 편하다. 시간적으로 변하는 날씨에 연연하던 때를 생각하면 왜 그렇게 내가 한가했나 하는 후회도 든다.
내가 사는 이곳의 9월은 사과의 계절이다. 그래서 애들이 어렸을 때는 가족적인 연례행사로 과수원을 찾고 했다. 아이들이 다 떠나면서 그런 행사도 시들해지고 작년부터는 가지 않게 되었다. 이곳에 이사올 당시, 그러니까 거의 20년 전만 해도 그렇게 과수원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인구가 늘면서, 특히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조금은 눈에 거슬릴 정도가 되었다. 특히 단체로 버스까지 타고 오는 것을 보면서 완전히 그곳의 맛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옛날이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이 아닐까.. 모든 것은 모두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까.
일본 TV 드라마: 2007년부터 보기 시작했던 일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특히 그 중에서도 연속극 드라마들 이제는 이미 방영된 것은 다 보아서 새로 나오는 것을 기다리게까지 되었다. 사실상 그것들을 보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프로그램들을 하나도 안보게 되었다. 연숙은 이것을 이해를 못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조금은 실망까지 하는 눈치다. 어찌 그것을 이해를 못할까? 같은 드라마를 보아야 그런대로 얘기할 것도 생기고 하니까.. 이곳에서 가끔 모이는 친지들과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어떤 한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가지도 신나게 얘기를 나누는데, 나는 완전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
일본 프로그램을 보기 전에도 사실 나는 한국에서 나오는 것을 아주 가끔 보는 편이어서,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것들은 내가 보아도 조금은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일본의 드라마를 보는 나는 분명히 목적이 있었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값싸게’ 공부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인터넷의 덕분으로 가능해 졌고, 최소한 듣는 일본어는 많이 익숙해 졌다. 비록 드라마지만 그들의 문화, 생각, 풍습, 역사 등등을 간접적으로 많이 배우게 되었다. 너무나 그들을 모르고, 무시하며 산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래서 올해 초의 지진, 해일, 원전사고 등 재해 때, 그들을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눈으로 그들을 보게 되기도 했다. ‘증오’의 역사로 점철이 되었고, 철저한 반일교육으로 자란 나로써는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것을 새로 보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행히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정치적인 완숙함, 한류의 파급 등으로 그들도 이제는 거의 친구와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어서, 참 세상을 오래 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이미 내가 골라놓은 ‘최고의 일본 드라마’ 목록은 계속 불어난다
평창이씨 시조: 얼마 전에 강원도 평창이 동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고 들어서, 평창이란 이름이 앞으로 귀에 아주 익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평창 이씨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평창이 본관인 성씨가 다른 것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평창 이씨만은 분명하게 그곳이 고향이다. 하지만 평창이씨를 공부해 보면서 평창에 근거를 한 평창이씨는 한가지 파, ‘정숙공파’ 밖에 없고 나머지는 거의 전국에 흩어져 있다. 내가 속한 ‘익평공파’만 해도 그렇다. 나의 바로 위 조상님들의 세거지는 평창이 아니고 평택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평창에 살고 계신 정숙공파 종씨들은 평창이 더욱 알려지게 되면서 조금 더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지 않을까..
현재 평창이씨는 시조 할아버지 문제로 두 개의 파벌로 갈린 상태가 되었다. 서울 흥인동에 위치한 평창이씨 대종회는 시조 휘 ‘광’ 자 할아버지를 시조로 하는데 반해서, 정숙공파는 독자적으로 그 보다 훨씬 위의 조상인 ‘윤장’ 할아버지를 시조로 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2개의 ‘다른’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대종회에서는 광 할아버지 이전의 역사는 상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니까, 최소한 대종회 족보는 전체가 맞는 것이고, 정숙공파 족보는 대종회 족보에 없는 것이 더 들어가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숙공파의 족보는 시조인 윤장이 경주이씨에서 갈려 나온 것까지 밝히고 있어서, 이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그리고 그렇게 오래 전의 사실을 어떻게 몇 가지 남은 사료로써 단정을 지을 수 있을까? 대종회는 ‘정사’를 고수하는 입장이어서 원래 족보가 출발된 시점에서 어떠한 다른 것도 넣을 수 없다는 보수적인 입장이고 보면 그것도 이해가 간다. 어떤 분들 말대로 사실 그것이 대종회가 갈라질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지난번에 우연히 빌려온Esperanto 에 대한 책을 보고, 어릴 적에 본 아버지의 책들과 문서들을 떠올렸다. 사실 에스페란토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랐지만, 그 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육이오 동란 때 납북되시기 전까지 이것에 깊이 관련되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오래 잊고 살았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무언가 큰 가족 역사를 다시 발견한 기분이었다. 에스페란토 그 자체보다 그것에 얽인 아버지의 활동에 더 관심이 간 것이다. 어렸을 때 본 몇 장 되지 않은 아버지 사진 중에 에스페란토 기념사진이 있었다. 무슨 건물 앞 중앙 현관 계단에 모두들 모여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는데, 거기에 에스페란토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제일 앞줄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무슨 에스페란토 연수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세월의 curse가 아닌 그로 인한 technology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역시, googling 으로 한국 에스페란토 역사의 ‘여명기’에 관해서 ‘과거’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나의 ‘희망적 짐작’은 어김없이 맞았을 뿐만 아니라 상상 이상의 수확이었다. 한번도 보지도, 듣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나의 아버지(의 흔적)를 거기서 찾은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육성’ 까지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나와 같은, 아니 훨씬 더 했을 감동을 나누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너무나 늦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에스페란토의 관계를 나는 느끼며 살았는데, 관련 사진과, 책, 서류들 때문이었지만 어머니도 가끔 에스페란토에 대해서 언급을 하신 것을 기억한다. 위에 말한 아버지의 책들과 ‘회보’ 같은 것들은 분명히 ‘영어’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 고등학교 세계(역)사 시간에서 드디어 에스페란토 란 말을 듣게 되었다. 비록 간단히 언급을 했지만 나에게는 남들보다 더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폴란드 출신의 의사, 자멘호프 란 사람이 ‘세계평화‘를 염두에 두고 고안한 사상 처음으로 ‘인공 언어’ 인 ‘에스페란토’ 어를 만들었다는 간단한 구절이었다.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 말고는 더 자세한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그런 것을 더 알려면 국내 유일의 국립중앙도서관에나 가야만 알 수가 있었고, 백과사전은 너무나 비싼 ‘귀중, 사치품’에 속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대로 오래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무한정의 정보망”, 인터넷은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역사를 조금은 더 정확하게 잡아 놓았다. 첫 번째로 우리 (아버지 쪽) 집의 뿌리가 평창이씨, 익평공파, 아버지는 27세 손이고, 전설적으로만 남아 있던 작은 삼촌의 존재, 그들의 정확한 나이까지 알게 되었다. 현재는 이것으로 나는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나의 자식들이 그들의 뿌리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아버지의 ‘업적’까지 덧붙이게 되었으니, 나의 기쁨은 글만으로 표현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연대적으로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은 “한국문학과 에스페란토” 라는 글이다. 이 글은 인하대학교 조성호 교수라는 사람의 학교 웹사이트에 실려 있는데, 이 글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조성호 교수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Google의 indexing을 통하지 않고는 찾기가 힘들게 만들어 놓은 ‘semi-private’한 인상을 준다. 이 저자의 전공이 molecular biology인 것 같아서 조금 의아했지만 사실 생각해 보니 에스페란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닌가 싶다. 문학적인 각도에서 본 에스페란토 어의 유용함을 ‘과시’하듯 한국문학작품의 번역(에스페란토 어로)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이다.
이 글 에서 아버지의 성함이 두 번 언급된다. 첫 번째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홍형의 는 「삼천리」사 편집국에 근무하다 사퇴하고 1937년에 「Korea Esperantisto」지를 창간하였다. 비록 일제에 의해 곧 폐간되어 창간호 밖에는 발행되지 못하였으나 이 잡지는 표지 포함 24쪽 전문이 에스페란토로 되어 있어 우리 운동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창간호에는 월북작가인 이태준(李泰俊)의 장편(掌篇) 소설 「천사(天使)의 분노(憤怒)」(1932)가 이정모(李正模)의 번역(「La Indigno de l’Anĝelo」)에 의해 실려 있다.
그러니까, 1937년에 창간호로 폐간이 된 언급된 잡지에 아버지(이정모)가, 1932년에 발표된 이태준의 꽁뜨, <천사의 분노>를 번역해서 실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나는 아버지가 이시기에 이미 에스페란토 어를 거의 통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어로 된 문학작품을 에스페란토 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1937년이면 아버지의 연세가 26세에 불과한데..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대학(보성전문: 고려대학의 전신)시절에 이미 에스페란토에 심취 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평소 직업은 영어 선생님(선린, 경기고)이었으니까, 어학 쪽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지만 어떻게 에스페란토에 접하게 되었는지는 현재까지 알 길이 막막하다.
이 기사에 의하면 1999년경에 그 동안 에스페란토 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을 총 망라한 anthology, <Korea Antologio>가 출간이 되었는데 이 글의 저자도 이 작업에 관여가 된 모양이다. 그 책에도 역시 아버지, 이정모의 번역작품이 실린 모양인데 그것이 위에 언급된 <천사의 분노>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오래 전부터 한국에스페란토 협회를 중심으로 이종영, 이낙기, 정원조 등 뜻 있는 분들에 의해 우리나라에서도 Antologio 발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으며, 수년 전 드디어 구체적으로 그 뜻을 모으게 되었다. 필자도 이를 염두에 두고 1970년대 말부터 틈틈이 단편소설의 번역 작업을 해 오던 터이라 김우선과 함께 그 편집의 역할을 수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안송산, 허성, 방명현, 권혜영 등과 함께 편집진을 구성하여 기 발표된 작품을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한 지 약 2년만인 1999년 말에 드디어 「Korea Antologio de Noveloj」 (이하 「Korea Antologio」라 함)가 발간되었다.
「Korea Antologio」에는 339쪽에 걸쳐 모두 2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김억의 번역 소설 중 3편, 안우생 번역의 1편, 이정모 번역의 1편, 이재현 번역의 5편, 기타 「La Espero」에 수록된 11편, 「La Lanterno Azia」 수록의 3편과 필자가 번역하여 발표하지 않았던 황석영 원작(1973)의 「삼포(三浦)가는 길(La Vojo al Sampo)」 등 25편의 소설 번역 작품과 부록으로 「La Pioniroj en Vilaĝo」가 포함되었다. 편집 과정 중 가능한 한 원래의 번역 문체를 살리기 위하여 문법적인 오류를 제외하고는 수정을 가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 다음으로 인터넷에서 찾아 낸 것이 <제3장 혼란 속의 재건과 성장(1945~75)> 란 제목으로 시작되는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역사의 일부분이다. 누가 저자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에스페란토의 ‘정사(正史)’ 정도 수준의 글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글의 바로 제일 첫 부분에 아버지의 이름과 ‘육성’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패하고,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되자 새로운 나라를 수립하기 위한 건국준비가 활발하게 추진되었고, 동시에 에스페란토운동에 대한 탄압도 사라졌다. 이 때 주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출신의 젊은 지성인을 총망라한 [건국추진대 본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우선 [평화의 사도] 연합군(미국, 소련)의 서울 진주를 환영하기 위하여 영어와 러시아로 된 환영휘장을 붙이기로 하였다. 이 때 이정모(李正模)가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창조된 국제공통어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고 제의하여 젊은 지성인들은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이들은 즉석에서 주머니를 털어 1천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1945년 8월 하순, 서울 종로에 있는 영보빌딩 정면에 에스페란토로 서울에서 가장 큰 연합군 환영휘장을 붙이고, 가두방송용 확성기를 통하여 에스페란토에 관한 선전을 하였다.
이 글을 찾고 읽었을 때 나는 피가 멈추는 듯한 충격과 감격을 느꼈다. 전설적으로만 느껴지던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로 나는 간접적으로 추측의 나래를 한껏 펴보는 기쁨을 즐겼다. 해방되는 해면 아버지는 첫 딸을 5월쯤에 보았을 젊은 아빠였을 것이다. 그 당시 아버지는 선린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이런<건국추진대> 라는 ‘운동권’에 관계가 되었을까? 전혀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는 없던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로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는 에스페란토의 정신을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분명히 ‘인류평등’, ‘인류평화’를 신봉하던 거의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 본다.
해방 후에 재건된 에스페란토 학회의 창설과정과 후학 연수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때가 아버지의 에스페란토 운동의 절정기가 아니었을까. 이때는 사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서울 중심의 전국적 조직은 흩어진 동지의 규합에 시간이 필요하고, 또 서울에서 사회적, 정치적 혼미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에스페란토운동의 부활이 늦어졌다. 그러나 개혁적인 에스페란티스토와 에스페란토 사상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모여 “약소민족어의 해방 및 에스페란토운동의 재건”을 축하하는 [에스페란토 정치선언]을 채택하고, 이것을 잡지 「혁명」(발행인 김 근)에 게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이어서 1945년 12월 15일 자멘호프 탄신을 계기로 [조선에스페란토학회](Korea Esperanto-Instituto)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창립총회에서 홍명희(洪明憙)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고,2) 홍형의(洪亨義)를 서기장에 임명하였다. 동시에 조선에스페란토학회의 사업계획을 채택하였는데 1) 재정 확립, 2) 기관지 발행, 3) 사전 편찬, 4) 학습 교재 발행 등을 하기로 하였다. KEI창립을 위하여 김억(金億), 백남규(白南圭), 석주명(石宙明), 유기동(柳基東), 이균(李鈞), 이종률(李鍾律), 김교영(金敎瑛), 신봉조(辛鳳祚), 이정모(李正模), 장석태(張錫台), 나원화(羅元和), 송창용(宋昶用), 서병택(徐丙澤), 홍형의(洪亨義) 등 서울에 있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발기하고, 그 외 창립총회에는 홍명희(洪命憙), 이기린(李基麟), 유림(柳林), 곽경(郭敬), 김계림(金桂林), 김명진(金明鎭), 이동각(李東珏), 李正馥(이정복), 박명줄(朴明茁), 이동석(李東錫), 문홍주(文弘周), 한일(韓一), 윤봉헌(尹鳳憲), 홍숙희(洪淑熹), 이기인(李基寅), 이극로(李克魯) 및 당시 아직도 중국에서 귀국하지 아니한 안우생(安偶生), 이재현(李在賢) 등이 참가 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대회가 끝나자 홍형의, 이정모의 지도로 [조선에스페란토학회] 주최 첫 강습회가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다음해인 1946년 2월 16일 서울대 대강당에서 [대학생 에스페란토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100여 명의 수강자에게 석주명, 홍형의, 안우생의 강연에 이어, 석주명, 홍형의 지도로 에스페란토 강습을 하였다. <중략>
1946년 8월 제2회 공개강연회 및 강습회가 홍형의, 이정모의 지도로 개최되었고, 이 때 이극로(李克魯)가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하고,3) 서울 을지로2가에 있는 청목빌딩에 KEI 사무실을 두게 되었다. <중략>
1949년 5월 서울 국학대학 강당에서 약 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3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 및 KEI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KEI 제4대 회장으로 유기동(柳基東, Saliko, 사업가), 부회장으로 백남규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8월에 KEI 제5회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약 30명이 참가하고 서병택, 석주명, 이정모가 지도하였다.
위의 글에서 아버지는 해방 후에 에스페란토 운동의 중심부에서 학회 발기인, 후배 양성에 전력을 쓴 것이 역력히 들어난다. 특히 아버지의 이름이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대부 격인 ‘김억, 석주명,’등과 나란히 나오는 것을 보면 나이로나 정열, 열의, 경력 등으로 보아 중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특히 계속된 에스페란토 강습회에서 강의를 한 것을 보면 아버지의 직업인 ‘학교 선생님’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상주의적인 에스페란토 운동은 사실 사상적으로 조금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었다. 완전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니까, 사실 빨갱이건, 아니건 모두가 참여할 여지가 있었고, 해방 후의 사상대립에서 이것은 정말로 아슬아슬한 운동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구의 남북합작과 같은 정도의 남쪽에서 보면 불온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거꾸로 빨갱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악질반동들이 섞여있는 이런 단체를 곱게 보았을까? 그러니까 양쪽에서 모두 ‘노리는’ 그런 ‘동네 북’과 같은 ‘중립’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에스페란토의 중추적이었던 몇 사람이 납북과, 처형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고..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차츰 정리, 활성화되어 가던 한국 에스페란토운동도 갑작스런 6.25사변으로 또다시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KEI는 1949년 5월 서울에서의 제3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를 마치고 제4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를 1950년 6월 28일 서울 과학박물관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6.25동란으로 서울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따라서 제4차 대회는 개최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석주명은 살해되고, 김억과 KEI 회장 유기동 등 핵심인물들이 동란 중에 납북되었다. 국내에 머물 수 있었던 안우생, 이균, 김교영, 이계순(여자) 등 인사들도 전란으로 뿔뿔이 분산되었다. 그 와중에 한국에스페란토학회(KEI)의 기능이 계속 될 수 없었다.
위의 글에서 왜 아버지의 납북에 관한 언급이 없었을까? 육이오 동란 이후, 국내 에스페란토 관련 인물들이 아버지의 납북사실을 이렇게 전혀 몰랐을까? 나중에 역사를 정리하면서 분명히 ‘이정모’의 실종 사실을 발견하였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에스페란토 정사(正史)’에서 아버지 이름이 슬그머니 사라졌을까? 나는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가족의 역사는 이곳에서도 ‘찾기 어려운’ 그런 사실이 나의 마음을 너무나 무겁게 하고, 내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아버지의 희미한 자취를 찾으면서 에스페란토에 대해서 그런대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그저 막연하게 인공적인 국제 공용어 정도로만 알았을 뿐이다. 언어를 천재적인 용기로 혼자서 150년 전에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안타깝게도 이 언어는 창시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많겠지만, 역시 새로 등장한 영어의 위력 때문이 아닐까? 비록 배우기가 자연언어보다 쉽다고는 하지만 역시 이것을 배우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도 전형적인 chicken-and-egg or Catch-22 problem일 것이다. 어느 정도 쓰이고 있어야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질 터인데 그 단계에 도달하지를 못한 것이다. 15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절대 질량 (critical mass)’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육이오, 6.25, 한국전쟁, 조선전쟁, 해방전쟁, 육이오 동란, Korean War, Korean Conflicts, 심지어 박정희를 위시한 꽤 많은 사람들이 “융뇨” 라는 괴상한 발음으로도 불렸다. 이중에 조선전쟁은 아마도 일본 “아해” 들이 쓴 말이고, <해방전쟁>이란 말은 분명히 전쟁을 도발한 1급 전범, 김일성 빨갱이 개XX들이 부른 이름이다. 우리는 자랄 때, 그저 <육이오 동란>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언제 어느덧 61년이나 흘렀을까..
육이오 동란에 대한 나의 어린, 가장 오래된 기억의 대부분이 1952년부터 1953년 7월 휴전 이후에 해당을 하고 그 때를 어떤 것들은 꿈같이, 어떤 것들은 사진같이 기억을 한다. 하지만 절대로 나는 ‘전쟁이나 전투의 공포’에 관한 것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어떨 때는 한번 쯤 보았었으면 하는 아쉬움 같은 것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조국의 엄청난 격동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제일 많은 피해자는 역시 전투를 해야 하는 군인들일 것이다. 죽거나 다치고 다친 군인들 중, 불구자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비참한 일생을 보내야 한다. 그들을 상이군인이라고 불렀다. 어렸을 적에 참 많이 보았다.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인 그들이 거의 거지처럼 구걸을 하는 것을 보았다. 국가는 그들까지 돌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 다음, 민간인들도 ‘곁다리’로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특히 육이오 같은 사상전쟁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다른 전쟁에 비해서 더 심하다. 사상전쟁은 사실 그 옛날의 종교전쟁과 비슷할 것이다. 무언가 믿고, 홀려서 싸우게 되니 얼마나 더 치열하고 처참할 것인가? 한마디로 증오로 똘똘 뭉친 전쟁인 것이다.
도대체 이 전쟁을 일으킨 사상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평화를 사랑하던 우리 같은 민족끼리 그렇게 저주와 증오로 서로 죽여야 했던가? 전쟁이 없이 해결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역사는 분명히 말을 해 준다. 전쟁의 원인을.. 하지만 그렇게까지 서로 죽여야 했었을까 하는 것에는 역시 대답이 없다. 모든 전쟁이란 것이 정당성과 비정당성을 다 내포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무력으로 짧은 시간에 자기의 체제로 바꾸려고 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공산주의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을 100% 적나라 하게 노출시킬 뿐이다.
50년 뒤에 그들의 체제와 이념은 거의 지구상에서 사라져가고 그들의 주장은 다 허구인 것도 들어났다. 하지만 우리가족과 수많은 동포를 유린했던 제일 범죄자 집단은 아직도 이북에 도사리며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고, 바보 같이 순진한 ‘남조선’의 일부 인사들은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참 이날만 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전쟁 발발 초에 납북되셔서 행방불명이 되신 당시 경기고교 영어선생님,평창이씨 익평공파 27세,이정모, 우리 아버지를 꿈속에 다시 그린다. 답답하셨던 어머니, 점쟁이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끌려가시다 운명하신 것으로 들었다고, 그것이 전부다. 그 이후 나는 아버지 없는 후레자식이 되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어릴 때, 육이오 날이 다가오면 나는 사실 공포에 떨었다. 그때의 반공교육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공산당이 다시 쳐들어 오는 가능성은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을 모르는 어린 우리들은 그저 공산당이 또 6월 25일 날 쳐들어 온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6월 25일 저녁 때 쯤이 제일 무서웠는데, 그 이유는 그때 만약 저녁 노을이 ‘빨갛게’ 져서 서쪽 하늘이 빨갛게 물들면 그것이 바로 공산당의 포격으로 착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우리들은 순진했다. 설마 설마 하지만 그 때 제 2차의 육이오 전쟁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무서운 꿈도 많이 꾸었다. 한번은 꿈속에 남산을 바라보니 그들의 대포가 일렬로 정열을 하고 우리를 향해서 포격 준비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전쟁의 결말이 휴전으로 끝이 나면 역사적인 판정을 누가 내려줄 것인가? 왜 휴전으로 끝을 내어야 했을까? 이것은 암만 역사가들이 머리를 굴려도 명확한 해답을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거의 종교적인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나의 종교관의 변화로 이제는 한 단계 높여서 해석을 하고 싶다. 하느님의 한반도에 대한 원대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바꾸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2011년, 신묘년, 토끼해 새해도 벌써 5일이 지나간다. 1월은 우리 집에선 조금 바쁘게 느껴지는 달이다. 큰딸 새로니와 나의 생일이 있고,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도 있어서 그런가.. 오늘은 1월 5일,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생일이다. 1983년 오늘 Columbus, Ohio의 Riverside Hospital에서 태어났다. 보통 Ohio의 1월은 사실상 거의 옛날 (내가 살던 때) 서울의 겨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추운 곳이다. 하지만 그때는 조금 달랐다. 아주 따뜻했고 눈이 아닌 비까지 내렸다. 머나먼 타향에서 첫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을씨년스럽고, 쓸쓸하게 느껴지는데 날씨까지 추웠으면 우리들의 마음까지 더 쓸쓸하게 했을 것이다. 갓난 새로니가 병원에서 집으로 오던 날, 가깝게 지내던 연세대 후배 김원백씨, 그의 wife, 도성이 엄마가 우리 집 (Ohio State University, Buckeye Village)을 깨끗이 청소를 하고 기다려 주어서 얼마나 포근하게 느꼈는지 모른다. 그것이 인정이라고 하던가.
1월 21일은 나의 생일이다. 1.21 (일-이-일)하면 나의 생일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이 1968년 나의 20세 생일날 에 터진 김 신조 일당의 북괴 무장공비 청와대 기습사건이다. 어쩌다 나의 생일날에 쳐들어 왔을까.. 물론 이것은 조금 우스운 생각이지만 나의 생일과 연관되어서 바로 어제의 사건같이 느껴진다. 지금은 이렇게 여유 있게 회상을 하지만 사실 그 당시는 아주 심각했다. 이것은 요새의 연평도 포격 사건보다 심리적으로 더 충격적이었다. 특히 공비들 중 김 신조가 유일하게 생포 되었는데 사전의 각본도 없이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라고 짙은 북한 사투리로 말을 하는 바람에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몇 년 뒤에 이후락(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에 갔을 때, 김일성이 “나도 모르게 극단분자들이 저지른 망동”이었다고 말 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이는 자기 이외는 모두 바보들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 말을 누가 믿는가?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야, 김일성이 개새끼야, 북괴왕조에서 누가 너의 승인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라고..
곧 뒤이어, 1월 25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 된다. 그것은 1980년이다. 그러니까 올해는 31주년이 되나.. 허~~ 참 세월이여.. 우리는 그 당시 기독교 신자도 아니면서도 서울 명동에 있던 YWCA회관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결혼식 사진을 보면 배경에 크게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다. 그 당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을 하니 그것도 무슨 뜻이 있지 않았을까.. 그때는 정말 아주 매서운 전형적인 ‘서울의 겨울’ 날씨였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보니 결혼식은 ‘아름다운 계절’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황량하고, 춥게 느껴지는 겨울의 결혼식은 크게 매력적이 아니니까. 물론 우리부부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그것이 사실 결혼을 바로 앞둔 사람들의 심정이리라. 31년을 큰 탈없이 같이 살았다는 것을 요새는 조금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앞 날도 기대를 해 본다.
나의 본관인 평창이씨 익평공파의 족보를 통해서 최근에 알게 된 나의 “친 삼촌”, 이준모 아저씨.. “듣도, 보도” 못했던 거의 전설적인 인물, 이준모 아저씨의 생일이 분명히 족보에 1월 10일로 나와있다. 그 당시의 관행으로 보아서 이것은 분명히 음력일 것이라서 언제 ‘연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의 1월은 예년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를까도 생각을 해 본다. 제일 큰 차이는 역시 새로 시작된 나의 레지오 활동에 있다. 큰 문제가 없는 한 1월이 가기 전에 나는 정식단원 선서를 할 것이다. 활동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을 기대해 본다. 본당의 IT support team (전산팀이라 부른다)에 가입이 되어서 이제부터는 실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외부로 나타나는 제일 큰 차이가 아닐까? 올해는 사실상 잠정적으로 일년간의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데, 이것은 레지오 활동을 생각하면서 자극을 받은 결과이다. 시간을 정말 효율적이고, 보람차게, 조금은 높은 뜻에 맞게 쓰려는 노력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12월, 아니 2010년도 열흘 정도 남았나? 나의 마음도 무언가에 쫓기듯이 종종 발걸음이 빨라진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쫓기는 심정이 되는 것일까? 아무리 나의 쫓기는 심정을 분석하려 해도 확실한, 그럴듯한 대답이 없다.올해는 조금 느긋하게 년 말을 보내려고 했지만 여지없이 나는 또 이렇게 2011년을 향해 내몰리는 듯한 심정이 되고 만다. 급기야는 어제 밤에 또 무언가에 쫓기는 꿈까지 꾸고 말았다.캐나다의 친구 정교성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왔다. 수십 년간 꼬박 보내던 그, 최근 몇 년은 소식이 없었다가 올해 다시 그의 카드를 받은 것이다. 언제나, CANANA의 symbol이 꼭 들어간 그런 카드를 보내온다. 언제 한번 그와 그의 새 wife를 만나보게 되려나?
나는 오랫동안 성탄 카드를 친지들에게 보내지 못하고 살았다. 그것이 그렇게 힘이 들게 느껴졌지만, 사실은 역시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내가 소식을 끊어버리고 산 것이다. 그 결과 하나하나 친지들이 주변에서 사라짐을 알았다. 오랜 동안 떨어져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친하던 친지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짐을 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또한 그렇게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과 다시 연결이 되기는 생각보다 쉽지를 않다. 하지만 노력을 다시 하고 있다. 작년부터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성탄카드를 조금씩 보내기 시작했다. 올해도 조금은 늦었지만 이제부터 보내기 시작을 할 것이다.
내일은 정말 오랜만에 ‘한국어 고백성사’를 할 예정이다. 레지오에 입단을 하면서 생각한 것 중에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심각하게 다시 시도할 것도 들어있었다. 최소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하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피할 생각이 없다. 천주교 교리에 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니까 하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근래에는 거의 미국본당에서 미국인 신부님들께 영어로 고백성사를 드렸었다. 비록 형식적인 기분이 많이 들었지만 하고 나면 그렇게 마음이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것 조차도 사실 3년 전부터 못하고 있지만.. 영어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백성사’ 그 자체가 문제였다. 나의 ‘치부’를 들어내야 하는 작업은 사실 쉬운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신자들 중에도 잘못한 것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어떤 때는 나도 이 말에 수긍이 가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함정인 것을 또한 나는 안다. 비록 행동에 문제가 없었다고 해도 나의 마음에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비록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이 남에게도 그렇게 이해가 되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나같이 이렇게 오랫동안 그런 것들이 쌓여가면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참 힘들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그렇게 쌓인 것을 하려고 무척 고생을 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것을 조금 체계적으로 하는 방법이 있었다. 2천년 전통의 가톨릭교에 이미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많은 성인,성녀들이 이미 다 겪었을 것이 아닌가? 그 중에서 ‘양심성찰’이라는 아주 체계적인 이론까지 있었는데, 그것이 고백성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죄’를 찾는 것도 그렇지만 사실 나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고백성사 그 분위기의 ‘어색함’에도 있다. 특히 고백성사를 하기 전에 느끼는 것.. 하지만 또한 안다. 고백성사 후의 그 날라갈 것 같은 그 기쁨.. 죄를 용서 받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얼마 전에 한국 과천에 사시는 평창이씨 익평공파 29세손 종친님(사실은 아주 젊은 entrepreneur) 이종환 님이 족보의 무려 1700여 쪽을 확인하면서 나의 아버님의 성함이 보이는 몇 쪽을 scan을 해서 보내 주셨다. 그 동안 추측으로만 알던 것을 다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직계조부님들의 거주가 경기도 평택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부터 인가.. 해답보다는 의문이 훨씬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 중에 제일 궁금한 것은, 아버님의 사촌들이 거의 6명이나 되는데 그들의 후손들이 전혀 기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 하는 것일까? 물론 나의 이름도 거기에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증조부이신 이종득 할아버지의 후손이 28세손에서 최소한 족보에서는 ‘전멸’인 것이다. 그분들의 ‘남자’ 후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면, 나머지는 역시 동족의 비극 육이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모두 북한에서 사셨을까? 최소한 나의 직계 할아버지 ‘이경호’ 님은 서울에서 사셨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그리고 나의 삼촌 ‘이준모’.. 호적에도 없는 그 삼촌은 사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잠깐 들은 적이 있었다. 육이오 전쟁 때, ‘월북’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의 호적에서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무슨 해괴한 역사일까? 아버지는 공산당에게 당하시고, 그 동생은 빨갱이였단 말인가? 정말 그 짧은 공산당 혁명 역사가 이렇게 한 가정을 파괴할 수 가 있을까? 할말을 잊는다..
오늘 나의 핏줄을 찾는 내 자신의 노력에 커다란 전환점이 왔다. 내 눈으로 나의 아버지의 성함(이정모, 李正模)을 평창이씨 익평공파 족보에서 처음 확인한 것이다. 물론 100%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99.9% 정도는 확실해서 실제로 나는 아버지를 찾은 셈이다.결정적인 단서는 생년월일에 있었다. 어머님으로부터 들었던 희미한 기억에 아버님 태어나신 해가 1910년대 초반이라고 했는데, 족보에 신해년(그러니까 나와 같은 돼지띠!) 3월 11일 생으로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아버지의 성함과 나란히 이준모 라는 성함이 기재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분이 ‘전설적’인 나의 삼촌 이준모..일 것이다. 이 준모 삼촌은 나이가 1914년 생이니까 아버지보다 3살이 아래였다. 이것은 정말 처음 알게 되는 사실이다.
이번의 이 scoop은 한국 과천시에 사시는, 인터넷으로 알게 된 평창이씨 익평공파 29세손이신 이종환 종친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이번에 운이 좋았던 것은 이 종친님이 익평공파 족보를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바쁜 직장생활에서 틈을 내어서 족보의 몇 쪽을 copy해서 보내주신 것이다. 이것을 자세히 보면서 조금 놀란 사실 중에 하나는 아버님의 남자 사촌들이 5분이나 계신데 (그 당시에는 족보에 여자의 이름이 하나도 개재되지를 않았다) 그 후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후손이 없었다기 보다는 기재가 되지를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우선 나의 이름도 아버님 밑에 기재되지를 않았으니까. 왜 그랬을까? 아마도 동족의 비극, 육이오 전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아버님은 내가 2살, 육이오 이후 납북이 되셔서 호적이 올려놓을 시간을 놓치셨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에서 나는 나의 가까운 친척을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움을 느낀다.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나는 나의 아버님의 후손을 족보에서 없애는 불효는 절대로 반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돌아오는 일요일은 이곳의 전통적인 ‘웃기고, 무서운’ Halloween이다. 이 날은 오래 전 내가 처음 보았던 그런 것들 보다 너무나 많이 ‘상업화’가 되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간소하고 소박한 것이 이제는 아주 복잡해졌다. 주로 아이들이 즐기던 날이 어찌된 것인지 어른들이 더 난리를 친다. 조금은 천박하고 시끄럽고, 심지어는 지나치게 장난을 치는 느낌이다.
나는 원래부터 귀신이야기 같은 것을 좋아해서 이 즈음이면 그런 영화도 나오고 TV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분위기를 띄우고 해서 보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 집의 아이들이 한창 이런 날을 즐기던 그런 시절에나 재미있는 법이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니 이제는 분위기가 아주 썰렁해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pumpkin carving도 하고 candy같은 것도 사고 했지만 올해는 “처음”으로 모든 것을 중단하기로 했다.
조금은 기분이 썰렁함을 느끼긴 하지만, 이것도 세월 흐름의 한 표시가 아닐까. 이날의 저녁때 trick or treating하는 아이들이 오면 우리 집의 ‘불’을 모두 끄고 지내기로 했다. 그러면 우리 집은 아이들이 그냥 지나 갈 것이다. 옆집에 사는 오래된 이웃 David이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하리라.. 이제까지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아~~ 이제 우리 집도 ‘늙어’가는 구나..
10월도 3일밖에 남지 않았다. 10월을 되돌아 보니, 갑자기 다가온 진짜 가을날씨로 시작된 10월초에 다시 시작된 laminate flooring job은 며칠도 못 가서 보기 좋게 중단이 되고 말았던 것이 제일 쓰라린 기억이 되고 말았다. 새 마루의 모양새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나는 것일까? 프로였으면 밤을 새고라도 무슨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지만 나는 그럴 의지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중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달에는 Thanksgiving Holiday가 있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때까지는 끝을 내야 한다.지금 마루를 깔고 있는 방에는 덩치가 커다란 가구, 심지어는 피아노까지 있어서 사실 근육이 많이 쓰이는 곳이라 더 힘든 곳이다. 이럴 때마다 간절히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아.. 등치가 좋은 아들녀석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옆집에 마음에 맞고 힘을 쓰는 “남자 친구”녀석이라도 살고 있다면..하는 정말 꿈같은 상상이다. 대가족이 다 모여 살았던 그 옛날이었으면 그런 것이 가능했으리라. 고국도 이제는 핵가족, 소가족, 떨어져 살기..등등으로 많이 변해서 이곳이나 진배없으리라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이곳보다는 낫지 않을까.
며칠 전에 고국의 평창이씨 종친회에서 우편물이 도착했다. 종친회 website에 나의 종파에 관해서 문의를 했더니 친절하게도 종친회 간행물과 편지를 종친회장이신 “이건모” 회장께서 보내주신 것이다. 간행물은 두 권의 소 책자인데 하나는 “백오세록(白烏世錄)” 이란 것이고 다른 것은 비해당소상팔경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 이란 긴 이름의 소책자이다. 백오세록의 백오는 하얀 까마귀란 뜻인데 여기서는 고유명사로써 통일신라시대의 지금의 강원도 평창의 지명이름이다. 이 책은 평창이씨 족보를 전반에 걸쳐서 요약을 한 것이다. 완전히 고어로 되어있는 정식 족보를 이렇게 한글화하고 뜻을 풀어서 쓰려는 노력은 정말 칭찬할만한 노력이 아닐까.
우리세대만 해도 학교에서 기초한자를 배웠다지만 요새 세대는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지만, 우리의 전통이 이렇게 한자로 남아 있는 한 아예 이 한자를 배우는 것이 현명할 듯하다. 나와 같이 족보를 “전혀” 모르고 살고 그것도 영어권 문화에서 오래 산 사람에게 이 족보문화는 정말 culture shock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비교적 빠르게 족보의 기초를 받아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서야 역사 속에 있는 나와 우리가족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족보가 의미하는 진정한 뜻이 아닐까? 아주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부지런히 그런 역사의식을 느끼며 가고 싶은 것이다.
지난 10월 3일은 고국의 개천절이었을 것이다. 아니.. 혹시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한국달력을 보니 분명히 개천절이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다만 일요일이라 빨간 숫자인지 아니면 아직도 국경일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국경일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국경일이던 한글날이 평일로 추락을 한 사실을 오래 전에 보았기 때문이다.
그날을 전후로 거의 우연히 10년 전의 KBS 인기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약 5년 전 고국의 clubbox라는 download site에서 150 편 모두 download를 해서 DVD disc에 copy를 해두었는데, 다시 보려면 그 많은 disc를 찾아서 DVD drive에 넣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그것을 모조리 home server에 copy를 해서 아무 때나 볼 수 있게 하였다. 요새의 hard disk가 커지고, 싸지고..해서 이제는 video file을 번거롭게 optical disc (like DVD)에 “구울(burn)”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 중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열풍”을 다시 보게 되었고 마침 개천절을 맞은 것이다. 요새는 그 당시의 “열풍”이 어떻게 “진화”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1992년에 정말 우연히 임승국씨의 “한단고기”란 책을 사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열풍”의 훨씬 이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환”자를 “한”자로 읽은 것부터 그렇고 또한 그 상고사의 기술자체가 그렇게 자세할 수가 없었다. 흡사 그리스 신화를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KBS 프로그램을 보게 된 것이다. 왜 그 당시에 그 책이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조금씩 거북하게 느껴지던 중국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전문적인 역사학도는 절대로 아니지만 아주 심각한 아마추어 역사 mania 정도는 된다. 작은 딸애가 대학에서 역사전공인 것도 도움이 되었고, 나의 나이도 절대로 도움이 되었다. 나는 확실히 이제 진정한 역사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나의 환단고기에 대한 입장은 어떤 웹사이트에서 읽었던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한단고기의 가치성” 이란 글의 저자 입장과 거의 비슷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의 알려진 여러 가지 “결함” 때문에 일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도적인 입장인 것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연구를 하자는 것이다. 역사도 과학적인 고증 기술의 발달로 어떤 새로운 발굴과 그에 따라서 현재의 정설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까. 완전히 위서라는 것을 증명치도 못하고 그의 반대도 증명을 못하는 마당에 조금 열린 마음으로 연구를 해 봄이 옳지 않을까?
평창이씨…. 몇 년 동안 정리를 못하던 서류들을 정리하던 중에 2004년의 것들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나의 본관 평창이씨에 관해서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고 고국의 관계 웹사이트에서 결국 평창이씨의 족보의 일부를 copy할 수 있었다. 그때의 감격은 사실 대단했다. 나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평창이씨라는 것을 잘 듣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6.25때 납북이 되신 후에 족보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리고 평창이씨가 다른 이씨에 비해서 조금은 희귀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저 강원도 평창에 시조가 있으려니 하는 정도로만 알 정도였다. 아버님은 두 누이동생 (나의 고모님)이 계셨지만 거의 왕래가 없이 살았다. 나도 나의 조상에 거의 관심이 없이 산 셈이었다. 족보를 따지는 시대가 이미 아니었기에 그것이 쉬웠는지도 모른다. 결혼을 할 당시에도 본관, 족보를 따지지 않는 그런 집안과 인연이 되었다.
대학시절, 연호회라는 남녀클럽에서 정말 우연히 평창이씨 여대생(이인자씨, 일명 이재임씨)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별로 많지 않은 종친을 만난 것이다. 그때 우스개 소리로 우리는 인연이 없다.. 결혼을 할 수 없으니까..하면서 웃었다. 그 당시만 해도 동성동본끼리의 결혼은 위법이었다.
우리의 아이들이 태어날 때도 우리의 본관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이 복합문화, 다민족의 미국에서 너희는 평창이씨의 후손이라도 말을 해 보았자 거의 의미가 없었으니까. 한 마디로 우리 집은, 아니 나는 족보가 없었다. 그러다가 1988년 Madison, Wisconsin에 잠깐 살 때 그곳에서 정말 우연히 평창이씨를 만났다. 이번에도 역시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다. 그곳의 유지 격인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강정렬 박사님의 부인이 되시는 분이 바로 평창이씨였다. 그 때 비록 나이차이는 많이 있었어도 친척을 만난 듯 서로 너무나 반가웠다. 그때 처음으로 본관, 동성동본이 아주 먼 친척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 뒤, 일년 후에 아틀란타로 직장이 옮겨져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인연이 이어져서 강박사님 부인의 남동생이 아틀란타에 사신다고 소개를 해 주셨다. 그래서 이곳 아틀란타에서도 평창이씨 가문을 만나게 되었다. 이주황 선생님.. 맙소사.. 이분도 고인이 되셨다. 그 집에 아들 둘(이만수, 이동수)과 따님이 하나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모두 평창이씨의 후계가 되는 것이다.
그 이후로 또 이런 것들을 잊고 살았다. 세파라는 것이 그런 모양이다. 사실 족보가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절대로 생각은 변하는 모양이다. 시간과 역사라는 것이 얽히고 나도 조금씩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감을 느끼게 되었고, 나의 뿌리는 과연 어떤 것인가 정말 자연스러운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결정타는 어머님의 타계였다. 건강이 좋지 않은 누님을 생각하면 정말 나는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이 알고 계시는 평창이씨의 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거의 일생을 남편 없이 살아오셔서 더 그랬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조금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러다 2004년에 처음 나의 족보를 볼 기회가 온 것이었다. 아마도 울진이씨종친회라는 곳에서 만든 excel-format file이었을 것이다. 족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나에게 그것은 조금 생소했지만 항열 같은 것은 조금 들어서 곧바로 아버님과 같은 항열 대를 찾았고 동명을 찾게 되었다. 분명히 이정모 라는 성함이 있었다.
파는 익평공파(翼平公派) 였다. 27세(世)의 항열이 바로 “모” 자였다. 그곳에 정모, 준모 라는 형제가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 형제가 있다는 말을 못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모님은 있었어도. 그래서 동명이인이 아닌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잊었다. 그것을 며칠 전에 다시 서류정리 끝에 찾은 것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에게 친삼촌이 있었을까.. 그런데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 났다. 있었다. 물론 호적엔 없었다. 아버님도 호적에는 사망으로 되어있으니까. 그렇다. 민족분단의 비극이었다. 삼촌은 사실 “월북”을 하신 것이다. 6.25때가 아니었을까. 지식층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론적인 공산주의”에 빠져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많았다. 삼촌은 바로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반공이 국시였고, 연좌제의 서슬이 퍼~렀던 그 시절에 우리의 삼촌은 서류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삼촌이 호적에 있었으면 나는 여권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그런 말씀을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일년 전쯤 나에게 들려주신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본 족보의 “정모, 준모” 형제는 99% 나의 아버지와 삼촌일 것이다. 그 위로 그러니까 나의 친할아버지는 “경호” 로 나와있고 그 할아버지에게 “철호”, “창호”, “천호” 라는 형제가 있었다. 경호 할아버지는 4형제 중에 세 번째였다.
족보에 의하면 아버님은 6명의 사촌들이 계셨다. 모두 “모” 자 돌림이고. 그렇다면 그 분들은 그 동안 어디에 사셨을까. 그 후손들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6명의 사촌들이 계셨으니 분명히 그 후손이 꽤 많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외로운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들만 찾을 수 있다면..
현재 평창이씨는 본관의 시조를 고려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된 이윤장(李潤張) 어른으로 하는 파와 그의 8세손인 이광(李匡) 어른을 시조로 모시는 파로 갈려있는 상태이다. 이윤장 어른이 시조라면 평창이씨는 경주이씨의 분파가 된다. 물론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공부를 더 하기 전에는 할 말이 없다. 다만 내가 속한 (내가 본 족보가 맞는다면) 익평공파(翼平公派)의 종친회는 이광(李匡) 어른 을 모시는 파로 되어있었다.
우리가 속한 익평공파는 파의 시조이신 이계남(李季男) 이신데, 연산조때 이조판서였고,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익평공의 시호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후대에는 조선최초의 천주교 세례신자인 베드로 이승훈이 계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승훈 “할아버지”가 더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그 분의 앞 뒤로 4대가 모조리 신앙을 지키다 참수를 당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몇 번 배교를 선언한 탓에 성인 품열에 못 들어간 사실이다. 정말 안타깝다.
이상이 간략한 최근 며칠 동안의 평창이씨 족보여행의 결과지만 문제는 이제 부터가 아닌가 한다. 어떻게 나의 뿌리를 찾을 것인가….나의 족보를 과연 어떻게 구할 것인가? 그리고 나의 먼 친척들을 어떻게 찾아 볼 것인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노력을 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