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눈을 떠보니 이번 주말이 Memorial weekend, 별로 큰 느낌 없이 ‘당한’, 기분이다. 이런 ‘휴일 주말’이 예전과 같이 기분을 좋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기야 full-retirement에서 특별한 휴일이 따로 있을까? 매일 매일이 휴일일 수도 있고 반대로 남들이 놀 때 일을 할 수도 있는, 그야말로 자유 중의 자유.. 하지만 ‘절제 moderation와 자기수련 self-discipline’이 빠지기 시작하면 이 자유는 완전한 ‘지옥’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만간 早晩間 변한다는 사실, 뼈저린 체험으로 안다. 나는 값 비싼 대가를 이미 지불했기에, 이제는 문제가 없다.
갑자기 ‘여름 같은 밤’이 들이닥친 지난 밤, 오랜만에 아.. 드디어 여름이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습기가 잔뜩 섞인 바람 한 점 없는 안 보이는 air, 피부에서 땀을 날려보낼 기운이 떨어진 듯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공기가 움직여야 땀을 말리고, 이런 바람이 없으면 강제로 바람을 내게 해야 한다. fan 그것도 electric fan, 바로 ‘선풍기’가 필요한 바로 그때가 온 것이다. 밖으로부터 들리는 가라앉은 잔잔한 소음의 a/c compressor소리보다는 ‘앵앵’거리며 귀를 건드리는 귀여운 fan의 소리를 더 원한다. 창문을 열고 바닥에 누울 수 있다는 건 이맘때부터는 ‘특권’에 속한다. 더불어 벼락을 동반한 시원한 오후의 소나기나 소리 없이 내리는 굵은 물방울의 비.. 이것들이 모두 여름의 dreaming of white.. 인 셈이다.
드디어 올해 a/c unit cleanup, tune-up, test-up 할 때가 왔는가?
매일 미사에도 조금 줄어든 사람들을 보며.. 아하.. 휴일에 여행들을 갔구나.. 그래서 더욱 holiday 기분이 든다. 우리는 집을 떠난 지 참 오래된 느낌.. 여행 예찬론을 귀따갑게 듣지만, 우리와는 그렇게 인연이 없나 보다. 여행을 간 듯이 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우리 둘의 지론 持論 이다. 인생 자체가 ‘서사시’ 적인 여행이 아닐까? 새로니는 이제 학교가 방학이 되어서 완전히 몇 달 동안 자유인이 되고, 일 주일 후면 계획을 했던 ‘유럽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고, 덕분에 pet dog Ozzie 는우리 집에서 당분간 살게 된다. 몇 주일 동안 같이 살면 이 녀석 어떻게 변할까 주목이 된다. 항상 바쁜 나라니는 이번 짧은 주말, 친구와 Panama City Beach로 떠났다. 그곳은 우리 가족 오래 전 regular summer place였는데.. 그곳도 많이 변했을 것 같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backyard에 ‘연숙이-오솔길’이 새로 생긴, 우리의 ‘피곤하고 낡은 집, depression-era shack’이 최고의 summer place 다.
오래~ 오랜 만에 이 ‘번쩍거리는 표지’를 가진 책의 먼지를 털고 책상 위에 꺼내 놓았다. 1990년경에 산 책이다. Atlanta 지역으로 이사온 즈음에 산 것인데, Internet 이 일반인들에게 ‘유행’하기 전이고, 그러니까 Amazon.com 같은 것은 물론 없었고, 집 근처에 있는 ‘정다운’ bookstore에서 산 것이다. 당시 나는 Norcorss와 Doraville 이 마주 닿는 곳, Pleasantdale road@I-85 (near Spaghetti junction) 에 직장, AmeriCom 이 있었고 그곳에서 5분 떨어진 Four Seasons Apartment에서 살 무렵이었으니까.. 거의 분명히 가장 가까운 Jimmy Carter Blvd에 있었던 Green’s Corner shopping center에 있던 Green’s Corner bookstore에서 샀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이런 ‘조그만 책방’은 다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big-name bookstore가 나오기 전이었고 비교적 작은 local bookstore 가 ‘동네 근처’에 많았다.
이 guitar에 대한 책을 왜 그때 샀을까.. 아직도 머리를 굴리지만 특별한 기억이 없다. 그때에 나는 분명히 ‘머리를 식히려’ 가끔 ‘고물’ YAMAHA acoustic guitar를 만지작거리며 살았을 것이고, 1969년 부터 연세대 같은 과의 ‘기타 귀재 鬼才’ 심재흥에게 자극을 받아, 등 넘어 배우며 즐기기 시작해서 그런대로 중년 때까지 명맥을 이어온 나의 ‘알량한’ 기타솜씨를 조금이라도 낫게 하거나 잊지 않게 하려는 ‘처량한’ 희망에서 그 glossy한 책을 샀을 듯 하다.
당시에 나는 그 책의 ‘사진, 그림들’을 다 즐긴 후에 곧바로 책을 덮고 서재의 깊은 곳에 내동댕이를 쳤는데.. 이유는 기타 technique 을 다룬 ‘소위’ magic technique 들은, 암만 보고 읽어도 알 수가 없는 난해한 것들 투성이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콩나물 대가리’들로 각종 전문용어를 쓰며 해설을 했던 기타 가르침.. 나에게는 한마디로 무용지물 無用之物 이었다.
그리고.. fast forward해서 25년 뒤에 그 책의 먼지를 털고 다시 나의 시야에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유는 25년 전과 같은 것, ‘혹시, 혹시, 혹시’ 이 책에 무슨 ‘하루아침에 기타 귀재가 되게 하는’ 그런 보물이 없을까 하는 가느다란 희망은 아니고.. 그럴만한 이유가 갑자기 생겼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성당에서 가밀라 자매님의 장례미사 후 식당, 본가설렁탕, 에서 만났던 레지오 은총의 모후 자매님 두 분이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말과 혹시 내가 시간이 될지를 물었었는데, 그 자리에는 진희아빠의 누님인 프란체스카 돼지띠 자매님도 있어서 일언지하 一言之下 로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이 ‘그룹’은 오래 전에 어떤 ‘기타 전문가’ 30대 청년으로부터 9개월 이상 강습을 받았다고 했고, ‘발표회’까지 했다는데 (이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진희아빠가 그 중에 하나였으니까) 아마도 그 이후에는 별로 활동이 없었고 실제로 ‘코드, guitar chord’도 많이 잊은 듯했다. 하지만 다시 도전하고 싶다고 그 관심과 열의 (그들의 gesture나 face expression)를 나도 느낄 수가 있어서 나도 관심이 갔던 것이다.
우리부부의 레지오 ‘활동’도 이즈음에는 조금 덜 바빠졌고, 나도 자꾸만 rusty해지는 손가락이 근질근질하기도 했기에 이번에는 깊이 생각 안 하고 이것도 It’s Now or Never, Before it’s too late 의 하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2주 뒤에 그러니까 지난 화요일 레지오 회합이 있던 날 드디어 ‘동호인’ 2명과 만나서 잠깐 나의 guitar 치는 style (acoustic, picking) 을 보여 주었고 그들도 큰 하자가 없는지 계속해서 모임을 추진하자고 했다.
그날 그 자매들이 가지고 나온 ‘강습 Note, 악보’ 잠깐 훑어보니, 다행히 나에게도 친근한, 생소하지 않은 곡들이 실려 있었다. 그러니까 늦어야 80년대 folk-ballad style 대부분은 아마도 70년대 ‘젊은이들의 노래’가 아닌가 싶었다. 그 정도라면 내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인데, 문제는 과연 이들이 지난번에 어떤 format으로 배웠냐는 것인데.. 아무도 친절히, 자세히 설명하는 자세가 아니어서 조금 실망을 했다. 그러니까.. ‘무조건, 적당히..’ 해 달라는 것인가?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내가 조금 성급하게 승낙을 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걱정이 든 것이.. 내가 반세기 전에 기타를 ‘치기’ 시작한 이후, 남에게 ‘정식으로’ 가르쳐본 적이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대부분 ‘등 넘어 로’ 배웠으니 그들도 등 넘어 로 가르쳐 줄 수가 있는지..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기타 경험자’를 가르칠까 하는 것,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이런 연유로 기타에 대한 개인적 추억과 역사를 더듬게 되었다. 사실, 앞으로 써야 할 memoir blog 중에는 연세대 3학년 시절, 1969년이 다음 차례인데 그 1969년 일년의 대부분이 guitar에 얽힌 것들이다.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들.. YMCA에서 하던 전석환 씨의 Sing-along-Y란 곳에도 갔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전석환씨가 가르치던 YMCA guitar class에서 한 달 강습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그러니까 비록 등 넘어 배웠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정식으로 시작’은 한 셈이었다. 처음에는 통 acoustic기타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electric guitar로까지 발전을 했지만 결국은 통기타로 돌아와서 현재에 까지 이른 셈이다. 그러니까 나는 비록 intensive하게 배우고 멋지게 연주는 못 했어도 그 오랜 세월 한번도 이 것에서 멀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근래에는 즐기는 노래들의 chord를 악보를 안 보고 치는, 그러니까 완전히 ‘외우는’ 는 쪽으로 노력을 해서 많은 성과를 얻었다. 바로 이것이 끈기 있게 guitar를 ‘즐기는’ 비결이었음을 이제야, 황혼기에 깨달은 것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알았으니.. 게다가 나에게 배우겠다는 ‘자매님’들이 생겼으니 이것도 내실 흐뭇한 일이 아닌가? 간바로!!
P.S., 아래에 보이는 video, The ventures의 walk don’t run은 당시 electric guitar를 배우는 사람들의 standard였다. 이들이 rock-style instrumental guitar 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다.
며칠 전 아침,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 집 backyard shed 에서 출산 후에 계속 우리 집 backyard에서 살던 feral shed cat family (1 mom + 4 kittens)… 그날 하루 종일 섭섭하고 우리를 우울하게까지 했던 ‘그 귀여운 녀석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새벽에 쓸쓸한 심정으로 shed에 가보니.. ‘모두’ 돌아와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암만 추측을 해도.. 그들이 어디에 ‘하루 종일’ 갔다 왔는지 알 수가 없다. pet 특히 cat behavior의 ‘전문가’ 인 나라니에게 물어보니, 아마도 주변을 explore를 하려고, kitten들을 ‘훈련 시키려’ 외출을 했을 것이라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떻게 거의 24시간을 밖에서 보냈을까.. 먹이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지만 그런 궁금증 상관없다. 돌아온 것만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우리 집 식구가 돌아온 듯한 기분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안 떠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우리 집을 완전히 떠났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완전히 돌아온 것이 아닐까? ‘공짜’ 먹이가 ‘보장’이 된 곳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 이후.. 이들이 밖에서 ‘활발하게 노는’ 모습을 back porch 안에서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들, 4마리의 모습이 다 다르고, 크기도 차이가 나기 시작하고, 활발한 정도도 다 다르다. 제일 활발한 녀석은 이제 shed옆에 붙어있는 높은 나무를 기어올라 shed roof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놀기도 한다. 제일 작은 두 녀석은 자기의 모습이 비슷함을 알았는지 서로 껴안고 누워있기도 하는데.. 그들의 모습은 정말 너무나 귀엽다.
문제는 이들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는 셈인가.. 아니면 우리 집을 결국 떠날 것인가?
결국, 의견들을 종합하면 아마도 시간이 되면 엄마가 떠날 것이라고, kitten들을 뒤로 두고..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다. 동물들은 거의 모두 그렇게 살지 않는가? 자식들이 자립할 때까지 보아주고 떠나는 것.. 인간도 거의 마찬가지니까. 아니면.. 이 가족이 모두 이사를 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또 없어져서 안 돌아오는 것이다. Case마다 다르니까 자신은 없지만, ‘아마도 당분간’, 식량이 풍부한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도 있고..
우리가 해 주어야 할, 제일 중요한 일은: 이들의 ‘불임수술: neutering, spaying‘이다. 다시는 이들이 kitten을 더 못 낳게 하는 일, 이것이 불필요하게, 비 인간적으로 이들을 ‘죽일 필요 euthanasia’가 없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Internet을 찾아보니.. 이것도 하나의 ‘사회적 정의 운동’으로 되어서.. 정말 많은 사람들, 특히 cat lover 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작은 딸 나라니도 그런 쪽에서 한 몫을 하고 있었다. Kitten들은 최소한 6개월이 되어야 불임수술을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시간이 조금은 있는 편이지만, 문제는 mommy cat이다. 그 녀석, 또 임신을 하면 문제가 아닌가? 그 녀석은 원래 밖에서 살던 녀석이라 trap하는 것도 큰 일이라.. 우리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이 kitten들에게 adopt family를 찾아 주는 것이다. 특히 제일 귀여운 이 때에 이들의 입양 chance가 높을 것 같다. 그래도 주위에 만나는 사람마다 알리고 있지만, 글쎄.. 예상보다 이 것이 쉽지 않다. 모두들 그렇게 바쁜지.. 특히 한국사람들은 그렇게 미국에 오래 살았어도.. 전통적인 고양이에 대한 allergy가 있는 모양이다. 개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이곳의 추세도 모르는가? 먹이와 litter box만 있으면 거의 ‘공짜’로 키울 수 있는 것인데..
¶ Kitten family gone: Backyard shed에서 태어난 4마리 kitten과 엄마 가 갑자기 오늘 아침부터 보이질 않았고, 하루 종일 밥과 물을 살펴보아도 없어지질 않고.. 나의 느낌이 이 5가족이 사라진 듯 하다. 우리 집에서 낳은 4마리 아기 고양이들과 엄마가 모두 귀신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 동안 밥을 엄청 먹기에 거의 바닥이 난 고양이 밥을 사러 내일 Costco에 가기로 계획까지 세웠는데.. 어떻게 이렇게 우리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갔단 말인가?
너무나 화창하고 가을같이 서늘한 일요일, 비가 그친 후 다시 backyard에 나가서 deck, grape trellis 등 일을 하였지만 계속 이 5 고양이 가족이 돌아오나 shed쪽에 신경을 썼지만.. 그렇게 뒹굴며 놀았던 shed 옆 마당은 고요하기만 하다. 너무나 기분이 이상한 나 자신에 내가 놀란다. 몇 주 동안 그 애들 밥을 부지런히 주며 보살폈던 하루하루가 선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왜 갔을까? 왜? 이것이 출산 후의 고양이 일가의 습성일까? 일단 kitten들이 건강하게 크면 이렇게 낳은 곳을 떠나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추측에는 어제 새로니의 pet dog, Ozzie가 들려서 backyard에서 짖어대며 떠들어 댄 것이 화근이었을까?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mom이 용단을 내려서 떠난 것일까? 너무나 서운한 마음, 괴롭기까지 하지만, 다른 편으로 생각하면 그래도 정성스레 먹이와 shelter를 제공한 우리에게 ‘감사’하며 떠났을 것이라는 ‘억지 희망’을 갖는다. 언제라도, 먹이가 떨어지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 New pastor shock: 오늘 모처럼 동네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주일 미사를 보러 갔다. 우리의 지정석이 있고 그 주위의 교우들 이제는 거의 고정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아는 얼굴이 안 보이면 그래도 관심을 가져줄 정도가 되어, 그야말로 정든 ‘미국 본당’의 역할을 유감없이 하는 곳이다. 3주 전에 Irish pastor Father Darragh Griffith 가 본당을 떠난다고 발표를 해서 모두 깜짝 놀랐다. 하지만 10년이 넘게 주임신부로 계셨으니 (50세가 넘은 젊은 신부) 사실 크게 놀랄 것은 없다. 하지만 10년 이상 있었으니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든 것이 문제다. 6월 초에 떠나게 되고 Norcross (Peachtree Corners) 에 있는 본당으로 가신다고 했다.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서 사실 조금은 덜 섭섭하기도 했고, 새로 오시는 주임신부는 누구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오늘 주보를 보니 드디어 새로 오는 주임신부가 소개되어 있었다. 사진과 간단한 약력을 암만 보고 읽어도 시원스럽지 않은 점들이 있었다. ‘전통적인 신부님의 약력’이 아닌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나? Atlanta Metro에서 가장 conservative한 ‘동네’인 이곳 East Cobb에 Cuba 출신인 Father Miguel.. 정말 이제 Irish power는 사라지고 있는가? 가장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얼굴이나 Hispanic 등이 아니고 Greek Orthodox Melkite background란 것이다. 기억에 Melkite 쪽은 celibacy (독신) 제도가 없는.. 그러니까 성공회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이 있는 신부라고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집에 와서 부리나케 googling을 해 보니..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이 새 주임신부님.. 정말 colorful한 인생, 신앙 여정의 소유자였다. Cuba 에서 온 망명인사의 가정에서 자라고, 개신교 (침례교) 출신에다가, 다음에는 Episcopal Church (성공회)의 신부가 되더니, 이제는 Melkite로 변신, 결국은 Roman Catholic으로 오긴 했지만 Melkite의 신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 둘은 이 ‘난감한 소식’에 아연실색.. 어쩔 것인가? Wife가 있고 가정이 있는 천주교신부.. 라니.. 암만 생각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신부님이 아닌 것이다. 대주교가 미쳤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우려하는 것들이 다 이유 있게 설명이 될 것이라는 희망은 가지고 있다.
¶ Rainy May Afternoon:Peaceful easy feeling.. cool, rainy waning May days: 이것이 요새 며칠간의 느낌이라면.. 한때 거의 90도까지 치솟았던 5월 초를 생각하면 요새 흐리고 빗발뿌리는 날씨들은 정말 의외라는 신선한 느낌들을 준다. 성모성월, 어머니 날, 어머니 기일, 온통 포근한 느낌의 5월이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잔잔하게 내리는 물방울들은 정말 peaceful easy feeling, 그 자체다. 다행히 올 들어 한번도 ‘시끄러운’ a/c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고물 중에 고물이 된 이 고철, 올해의 더위에 과연 견딜까.. 지난 몇 년간 이맘때면 항상 ‘점을 치던’ 습관이 올해에도 변함이 없다.
고요히, 잔잔히, 싸늘하게 내리는 5월 비..
저물어 가려는 시원하게 비가 나리는 5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삭신을 쑤시게 하는’ 바깥 일들, 중노동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만 그래도 그런 일들, deck finishing, garden structures, siding repair, new flooring, garage overhaul등등.. 천천히 계획을 세워서 하면 큰 문제가 없을 듯하지만 문제는 expense.. 이것은 budgeting을 하지 않고서는 무리, 무리..
5월 말에는 우리 집의 다른 senior citizen doggie, Tobey의 annual medical checkup이 있는데, 이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 분명히 나이 탓으로 여러 가지 test를 하자고 할 것이고.. 항상 surprise가 도사리고 있음도 경험으로 알기에 신경이 쓰인다. 나와 같이 늙어가는 우리 집 ‘깡패’ Tobey.. 가끔 안아주면 서로가 쳐다보며.. 무언의 대화를 한다. 우리 참 정이 많이 들었다.. 누가 먼저 가던지 가는 곳에서 서로 또 만나자.. 라는 듯. 사람보다 나은 개들도 많은 이 세상이 이런 정든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언제가 서로 헤어져야 할 것을 생각하면 다시 우울해진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법칙이고 순리가 아닐까?
¶ Four Shed Kittens, weeks after:우리 집 backyard에 있는 shed 밑에서 kitten 4마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있음을 지난 5월 초에 알게 되었음을 나의 5월 6일자 blog에 썼지만 그 이후의 ‘발전’에 관해서는 잊고 있었다. 그 몇 주(2주가 훨씬 넘은) 동안 우리의 온통 관심은 그 4마리의 ‘귀여운 (이 나이에 귀엽지 않을 리가 없지만)’ kitten에 있었다. 하루에 몇 차례씩 ‘식사공급’을 하면서 그들을 볼 기회가 있지만 아직도 낯을 가리며 숨기 일쑤다. 항상 엄마를 조심하며 접근을 하지만 생각보다 엄마는 최소한 우리가 ‘나쁜 놈들’이 아니란 것은 아는 듯 하였다. 그들에게 겁을 안 주려고 사진조차 찍는 것을 참고 있다.
밥을 어찌나 많이 먹던지.. 아마도 kitten보다는 엄마가 많이 먹을 것이다. Nursing mom cat은 평소보다 3배를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이해가 간다. 주는 대로 시원스럽게 밥이 없어지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고, 하루 하루 다르게 커 보이는 kitten 4 sister, brother들 서로 장난을 치고 wrestling을 하고 엄마 품에 앉게 노는 모습들.. 나는 느낀다. 우리 집 아이들 세상에 나왔을 때를 생각하지만 그 때와 또 다른 것이다. 나이 탓인가, 신앙적인 믿음 탓인가.. 다르다. Pope Francis의 제2의 회칙 encyclical, Laudato Si(On Care for Our Common Home, Earth, 아씨씨의 성 프란치스코 Canticle of the Sun 에서 나온 말)의 영향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가족이다. 생명이 있는 것이면 더욱 그렇다.
현재까지 우리 집 backyard shed의 밑 바닥을 자기 집으로 알고 편하게 nursing을 하는 ‘엄마’, 평소보다 덜 ‘외출’을 한다. 분명히 편하게 잘 먹을 수 있어서 그럴 것이다. 먹이가 이곳에 없었으면 분명히 ‘산모’의 몸으로 먹이를 찾아 모험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자식들을 챙기는 고양이 엄마의 보호본능.. 그것이 그들의 본능적 사랑일 것이다. 시간이 되면 kitten들을 떠나겠지만 그 때까지는 ‘책임’을 지고 살필 것이다. 이보다 못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 답답해짐을 느낀다. 동물보다 못한 인간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매일 매일 자라나는 아기 고양이들을 보며 많이 배울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Laudato Si 의 정신이고 무엇이 자비, 사랑인지를..
¶ 나르는 엄마 고양이: 고양이, 양양이의 얼굴들이 눈에서 아롱거리는 이때, 1960년 4.19 혁명 당시 미국 사진 화보잡지 LIFE magazine의 ‘이모저모, miscellany’ 란 에서 재미있는 사진과 짧은 기사를 보았다. 이것도 역시 ‘산모 고양이 엄마’에 대한 사진과 기사다. 동물 모성애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극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잡았다.
출산 날짜를 ‘잘못 잡아서’ 어느 테네시주 Tennessee 낙스빌 Knoxville 의 교통순경 patrol man 집 낮은 지붕 porch 위에서 kitten을 낳은 엄마 고양이 Puddy, 이들을 땅에서 보살피기 위해서 ‘공수작전’을 하려는 노력으로 지붕 옆에 있는 나무 가지로 3주된 kitten 한 마리씩, 모두 네 마리, 입에 ‘물고’ ‘비행’하는 장면.. 글에 의하면 그 엄마 고양이는 kitten 4마리 ‘모두’를 안전하게 땅으로 ‘안착’시켰다고 한다. 어머니, 엄마의 계절 5월에 보는 이런 모습들은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 5월 13일.. 2016년 5월 13일 Friday.. 아하 ‘또’ Friday the 13th 인가.. 하였지만 곧 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금요일 13일은 맞았지만 문제는 5월 13일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맞다 바로 Fatima.. Fatima.. Portugal, 1917년 5월 13일인 것이다. ‘묵주의 성모님’으로 일컬어지는 파티마 성모님 정확히 99년 전 5월 13일에 3명의 어린이들에게 발현하셨다. 그리고 확고한 역사로도 자리를 잡았다. 당시 Lisbon의 유력 정부기관지였던 the Seculo에 보도가 되었을 정도로 큰 ‘사건’에 속했다.
기록(그러니까 역사)에 근거한 영화나 책들이 많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흥행성’을 의식한 영화들은 너무나 ‘색깔’들이 끼어있다. 근래에 발견한 ‘고서’ 중에 The True Story of Fatima 가 있는데 이 책은 주로 목격자 중 제일 오래 생존했던 Lucia수녀님의 증언에 의한 것이고 발현 당시 다른 일반인들의 증언에 의한 교회의 치밀한 발현승인 과정을 거친 것이라 거의 정확한 역사서라고도 볼 수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인 발현이었지만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 의미를 주는 것일까? 발현 성모님의 모든 예언들이 역사적으로 다 실현이 된 것을 보면 ‘등골이 써늘해 짐’을 느낄 때도 있다. 일관되게 비교적 간단한 요구사항을 요구하시는 성모님의 message들, 과연 쉽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 message 의 중심에서 초 현대의 세속세계는 내가 보아도 ‘너무나 너무나’ 멀어져 있고 무섭게 멀어져 간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그래도 성모님은 희망의 상징이다. 희망은 원하면 언제나 자비와 함께 우리가 받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닌가?
¶ 마리에타 2구역 점심봉사: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구역미사에 이어서 곧바로 구역이 담당하는 ‘의무적’인 순교자 천주교회 본당 점심봉사 날이 다가왔다. 이것이 주는 stress로 구역장을 못하겠다는 의견도 많이 있을 정도로 사실 이것은 큰 일이다. 200여 개 이상의 serving을 예상하는 것으로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 한마디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서 각가지 knowhow가 축적이 되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 ‘공식’같은 것도 있음 직하다.
우리는 advanced age라는 이유로 봉사의 의무에서 excuse가 되고 있었지만(우리가 희망하기에), 이번에는 조금 사태가 다르게 되었다. 구역이 둘로 나뉘고 우리가 속한 ‘반’은 숫자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특히 형제님의 숫자가 안심할 정도가 못되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이번에는 봉사하기로 하고 준비하는 날, 점심 봉사하는 날 full-time으로 일을 하였다. 솔직히, 기분 좋게 일을 해서 그런지 일은 비록 많았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 동안 못 했던 미안한 심정도 어느 정도 위안을 받게 되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지만 ‘호사다마 好事多魔’라고 하던가.. 모든 것이 끝나고 하얀풍차에 몇 명이 모여서 뒷풀이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즐겁지 않은 뉴스, persona-non-grata 를 접하면서 조금은 흥이 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고 main event자체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이 나서, 이틀간의 service는 우리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 감사합니다, 예수님! 메주고리예: 매달 2일에 메주고리예에서 visionary Mirjana에게 ‘공개적으로 publicly’ 발현하시는 성모님, 이제는 게으르지만 않으면 Youtube를 통해서 주로 Italian pilgrim들과 함께하는 group이 찍은 video를 볼 수 있게 되었다. 5월 달은 초부터 무언가 바빠서 깜빡 하고 이것을 check하는 것을 잊었다. 이제야 보니.. 무언가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렸다. 바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하는 우리말 노래가 아니었던가. 비록 영어 accent가 섞였지만 아주 정확한 우리말 노래, 그것도 통역을 전담하는 형제가 유창하게도 불렀다. 어떻게 이렇게 우리말 노래가 불려지도록 주선이 되었을까? 추측에 대한민국도 ‘메주고리예 신심’이 상당해서 이곳 메주고리예에서도 인정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완전한 나의 상상, 추측에 불과하지만.. 가능성은 상당히 높을 듯하다.
성모님 발현 – 메주고리예 2016년 5월 2일
¶ The Seekers:I’ll Never Find Another You 1967, 우연히 우연히 이 노래 video를 보게 되었다. 요새 비교적 잊고 살았단 나의 지난날의 추억이 나를 아득~하게 만든다. 나에게도 그런 꿈같던 시절이 있었지.. 하는 조금은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나만의 추억들.. 추억의 얼굴들.. 이런 것들이 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것, 특히 ‘유행가’와 연관이 되어서, 뇌세포 깊숙한 곳에서 꺼떡없이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옛 유행가를 그렇게 아직도 좋아하나 보다.
오늘 본 것은 Australian vocal group, The Seekers의 경쾌한 country style ballad ‘I’ll Never Find Another You‘. 가사야 큰 의미가 없지만 이 노래의 lead singer의 목소리가 이 노래의 tone과 style을 그렇게 classic으로 만들었나 보다. Judith Durham, 바로 이 그룹의 간판 격 ‘청순한 tone’.. 몇 년 뒤에 미국의 The Carpenters의 Karen Carpenter 가 바로 이런 독특한 음성의 소유자였고 역시 그녀의 모든 노래들, 주옥같이 역사에 남는다.
이 모두 1960년대 말 경이었다. 그 시절, 그 시절, 어떻게 time travel을 꿈 속에서라도 할 수 있을까? The Seekers의 경우, 그 lead singer, Judith Durham의 얼굴과 자태가 내가 한때 ‘좋아했던’ 어떤 아가씨와 그렇게 닮았다. 키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그 때의 그 노래가 그래서 그렇게 그리운가 보다.
이번 주 수요일 저녁, 초여름 같이 덥던 날 저녁에 오랜만에 마리에타 2구역 미사엘 갔다. 너무나 오랜만에 구역미사엘 가는 기분이 들어서 기록을 찾아보니 마지막으로 갔던 때가 작년 10월 달 C 마르코 형제 댁에서였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그 이후에 구역미사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면 우리는 가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가급적 구역 미사에 가리라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 이유 중에는 (1) ‘비정상적으로, 미친 듯이’ 비대해진 구역이 재 조정되는 사실(2반으로 나누임)이 신부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발표가 되는 중요한 자리라는 점, (2) 평소에 친근하게 느껴지는 돈보스코 형제 댁에서 열린다는 점, 이 포함되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거대, 비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나간 그야말로 sprawling suburb 처럼, 온갖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던 이곳을 나는 멀리서, 가끔은 가까이에서 ‘인과응보 因果應報, 자업자득 自業自得‘의 간단한 진리를 터득하고 터득한 터였다. 이것들은 모두 사람이 만든 재해였다. 저절로 생긴 재해가 아닌 것이다. 그 문제의 핵에는 몇몇 안 되는 사람이 항상 있었고, 그렇게도 우리는 멀리서 ‘무언 無言의 경고’를 했지만 self-correction할 시기를 놓치고, 결국은 갈 때까지 간 것이다. 뒤에 생각해 보니 역시 ‘진정한 기도’가 빠진 group의 말로가 아니었던가? 문제 핵심의 장본인은 결국은 피해자로 (a.k.a, persona-non-grata) 전락을 하고 한 동안 떨어져 나간 듯이 보였고 그 결과 겉으로 보기에는 불안한 평화, 잠잠해진 듯 했다. 하지만 그 문제의 핵은 요사이 다시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다시 이 group 앞날은 불투명해질 수도 있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는 ‘불어난 덩치’에 의한 문제는 비교적 직접적인 조직적인 방법으로 풀릴 수 있겠지만, ‘문제의 핵’에 의한 문제는 그 핵의 중심 인간들이 바뀌지 않는 한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결론이다.
구역의 비정상적인 덩치에 의한 문제는 이날의 미사에서 신부님의 sanction 비슷한 조치로 공식화 되었고, 거의 순간적으로 기본적인 모임에 관한 문제 logistics 는 풀린 셈이 되었다. 훨씬 전에 이런 조치로 문제를 풀 용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이제라도 단계적으로 풀어나간 새 구역장단들, 의미 있고, 큰 일을 했다고 본다.
이제부터는 bubble-era mansion같이’엄청 커다란’ 집들에 비해서 depression-era 를 연상시키는 작은 우리 집에서도 구역모임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감회와 감개무량한 심정까지 들 정도가 되었고, 조금 더 오붓하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신앙중심적인 소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 작은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날 한가지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이날 host, 돈보스코 형제가 연세대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새카만’ 후배 동문이었지만 반가웠다. 어떻게 내가 연세대 출신임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궁금할 것은 하나도 없다. 알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니까.
p.s., 이 모임에서 우리 둘은 jumbo-size 양주 공급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외도를 한 셈이 되었고 다음 날, 하루 종일 nasty hangover로 고생을 해서 쓰라린 교훈을 얻은 셈이 되었다.
¶ 온몸이 쑤신다. 유별나게 예전과 다르게 쑤신다. Tylenol을 계속 먹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진통제 역할밖에 못한다. 진정 나는 70이 바라보이는 늙은 몸의 소유자가 되고 있는가? 60세 만세론 에서 이제는 65세 만세론, 다음은 무엇인가, 70세 만세론 인가? 60세도 못 살고 60세 만세론을 주장한 이진섭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과연 나는 살 만큼 산 것일까?
Gym에서 운동을 하고 느끼는 통증과 완연히 다른 ‘괴로운’ 통증을 이번에 deck을 중심으로 한 육체적 노동을 ‘갑자기’하면서 톡톡히 겪는다. 거기다가 치통까지 겹치면 나는 숫제 화까지 겹치는.. 그런 것들은 과히 평화로운 시간들이 아니다. 어떻게 나는 이런 고통을 manage할 것인가? 기도에 의지하는 것은 조금 쳐지고, 나태한 방법일 듯..
¶ 어제 돈보스코 형제 집에서 구역미사가 있었고, 거기서 예상치 않게 ‘쎈’ 술을 연숙과 같이 마신 것이 또 다른 통증, 피로감을 주고 있다. 기분이 좋게 마셨지만 그것과 상관이 없는가? 왜 이리 몸을 주체할 수가 없는가? 이것도 역시 70에 가까운 나이 탓인가? 조금은 슬프기도 하다. 아니 생각하지 말자.. 그런 생각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3월로 끝이 난 우리의 봉성체 중심의 레지오 활동은 4월로 접어들면서 양상이 바뀌고, 조금 활동이 주춤해진 듯하다. 묵주기도가 이제는 안정적으로 120단을 유지하는 것만이 조금 위안을 줄 뿐이다. 활동은 어디로 갔는가? 어떻게 활동거리를 찾을 것인가? ‘단장’은 별로 그것에 대한 생각을 안 하는 것인가? 개인적인 활동거리를 생각하며 나는 성모님께 ‘가끔’ 기도하고 있다. 아직 분명한 응답이 없다. 나는 ‘여생’을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레지오에는 어떤 일들이.. 2명의 ‘이상한’ 자매들이 갑자기 들어 오더니 한 명은 다른 얼굴을 보이며 나가고 다른 한 명은 정말 ‘해괴한’ 행동으로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며 우리들을 우롱하고 있다. 나의 과잉반응인가.. 아닐 것이다. 나의 레지오 역사도 이제 꽤 되어간다는 증거인가? 어떻게 그런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까? 전혀 성모님의 사업에 도움이 안 될 것이 확실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기다리며 그 이상한 자매가 변하기만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너무나 나는 그런 모습에 실망을 하며 괴로움을 당하니.. 거기다가 최고 연장자라는 자리를 굳게 지키는 분, 여지없이 모든 role model의 인상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기대를 한 것이 잘못이겠지.. 그래 있는 그대로 보고, 큰 기대 하지 말고, 나나 잘하자..
¶ 우리 집 shed 밑에서 새로 태어난 5마리의 양양이(kitten) 가족들, 4마리의 어린 생명을 보며 지나치게 나는 감상적, 철학적 심지어 신학적으로 된다. 내가 오래 전에 괴롭혔던 양양이 에게 사죄를 청하며 산지도 꽤 오래 되었지만 하느님은 나에게 보속으로 ‘양양이를 보면 나를 슬프게 만드는 벌’을 주셨다. 나는 너무나 눈물로 보속을 청하며 이 새로 태어나는 양양이들을 보살피고 싶다. 모든 생명은 다 나름대로 귀중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 가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배불리 먹이고 보호하는 것 이외에는 생각이 나질 않지만..
¶ 또다른 ‘젊은‘ 엄마의장례미사: 오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는 ‘뜻밖의, 급작스러운’ 연도와 장례미사가 있었다. 모든 죽음이 어떤 면에서는 뜻밖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의 죽음은 내 주위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느낌’을 주는 Camilla 자매님의 죽음이었다. 지난 3월 사순절 막바지에 오랜 투병을 끝내고 선종을 한 다른 ‘젊은 엄마’ 보나 자매님의 기억이 생생한 이 마당에 또 한 명 자매님의 선종은 예기치 않았던 글자 그대로 ‘급작스런’ 죽음인 것 같아서 가족들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 같았다.
한창나이 쉰 을 갓 넘은 ‘젊은 엄마’의 죽음.. 불과 3일 전, Mother’s Day 하루 전에 급작스러운 엄마의 타계.. 그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로써는 도저히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학생나이의 두 따님의 심정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사연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고향’같을 수도 있는(견진성사를 이곳에서 받았다기 에) 순교자 성당에서, ‘해맑은’ 한 토마스 신부님의 ‘젊지 않게 깊이 있고, 자상한’ 고별강론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유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으리라..
비교적 앞 자리에 앉아서 고별미사 내내 나는 고인의 사진을 응시하며 생각을 한다. 60/70년대 통기타 folk singer였던 박인희씨를 연상시키는 그런 ‘청초’한 모습, 저렇게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떠나는 것.. 본인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가족들과 지인들의 놀라움과 슬픔을 한동안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우리 부부가 그런 처지를 당하면.. 상상을 한다. 그런 제로가 아닌 가능성을 매 순간 생각하며 살면 비록 피곤은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사랑스런 말이나 표정’으로 서로를 대할 것 같지 않을까?
고인의 큰 따님(순교자 성당 종교학교 교사였다고 함)이 사실 불과 일 주일 전 마지막 고인을 보았을 때 별로 좋은 않은 감정으로 헤어졌다고 후회를 했다는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찌 안 그렇겠는가, 아마도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난 날 다음날이 Mother’s Day임을 생각할 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비록 평소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교우 자매의 고별식이었지만 뜻 밖에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레지오 화요일’ 오후가 되었고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며 가족들끼리 틈이 날 때마다 ‘We love you‘라는 message를 교환하자고 하기도 하였다.
¶ 돼지띠프란체스카: 장례미사가 끝나고 ‘실로’ 오랜만에 가보는 ‘본가 설렁탕’이란 순교자 성당에서 아주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뜻 밖에도 20년 지기 知己, 최형 (a.k.a.진희 아빠)의 누님인 프란체스카 자매님를 만나게 되어서 합석을 하게 되었다. 참 이곳에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때도 오는가.. 최형은 비록 ‘전통적’인 가톨릭 교우이지만 Sunday Catholic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비해 누님인 프란체스카 자매는 매주 화요일 레지오 주회합 우리 바로 옆 방에서 모이는 다른 레지오의 부단장을 하는 비교적 활동적인 교우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최형의 집에서 모임이 있을 때 가끔 볼 정도로 잘 알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주일 마다 얼굴을 보게 되기도 하고 꾸리아 월례회의에서도 우리의 바로 옆자리에 앉는 등 가까워진 느낌까지 들게 되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은.. 이 자매님, 비록 ‘누님’ 격으로 통했지만 나와 띠가 같은 ‘돼지띠’였다. 최소한 나와 동갑인 셈이 아닌가? 깎듯이 누님으로 대하던 것이 조금은 어색해지기도 하고, 이렇게 가까이 앉아서 식사까지 하게 되니 이제는 동갑친구 같은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돼지띠를 만나거나 보게 되면 나는 이상할 정도로 정이 가는 것은 왜 그럴까? 2년 전까지만 해도 ‘전요셉’ 형제가 돼지띠 동갑으로 사귀게 되어서 나를 기쁘게 했지만 사귀자 마자 ‘영구귀국’을 해 버려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차에 돼지띠 ‘누님’이 나의 앞에 등장한 것이다. 친구누님으로 대할 것인가 돼지띠 동갑친구로 대할 것인가.. 조금은 혼란스럽기까지 하지만 이날 동석으로 식사를 하면서 ‘말이 통하고, 재미있는 자매’임을 느끼고 안심을 하였다. 동생 최형과 같이 서울 덕수국민학교 출신 임도 알게 되었는데, 나와 정확히 같은 해에 같은 서울 하늘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만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으니..
이날 같이 합석을 한 ‘자매님’들은 같은 레지오 단원들인데 우연히 이들 group이 몇 년 전 최형과 같이 기타 강습을 받았던 것을 알았는데, 다시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하더니 나보고 가르쳐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글쎄..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잘 모를 텐데, 꼭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것으로 짐작을 하였다. 우선 생각을 해 보자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의 guitar솜씨로 남을 가르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나의 기타 솜씨는 완전히 ‘등 넘어 배운’ 정도인데 어떻게 남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무언가 배우며 살고 싶은 건강하고 멋진 자매님들이 레지오에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고 기쁘기까지 했던 명랑했던 장례미사 후의 식사시간이 되었다.
¶ 성모성월:Vatican Youtube에는 이제 매달마다 교황님의 ‘매달 지향기도 monthly prayer intention‘ video가 실린다. 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개월 밖에 안 되었지만 이제는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한다. 짧지만 아주 심도 있고 호소력이 있는 교황님의 ‘구수한’ Italian comment는 영어자막이 곁들여져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난 달에는 ‘제대로 대우를 못 받는 농부들’ 에 관한 것이고 이달은 ‘별로 인정 못 받고 고생하는 세계의 여성들’에 대한 기도이다. 참 계절적으로 알 맞는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5월과 여성, 특히 성모님은 어쩌면 그렇게 느낌이 일치하는 것일까? 그래서 Mother’s Day, 가톨릭 전례력으로 성모성월, 성모의 밤.. 등등이 모두 5월에 함께 모여있는 것일까?우리 어머님의 기일도 5월에 있음이 한동안 나를 슬프게 했지만 다른 편으로 생각하니 이런 포근한 기분의 5월에 있음이 조금은 나를 위로하는 셈이 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람을 노곤하게 만드는 첫 한가로운 느낌의 더위가 여름의 시작을 알리고, 재수가 좋으면 (나쁘면?) space heater를 켜야 할 정도의 싸늘한 아침도 이때에 꼭 있다. 지난 주말 경에 사실 아침에 central heating 이 요란하게 나온 적이 있었으니까.. 아마도 그것이 올 여름 전에 ‘마지막’ 난방의 소음소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첫 A/C (air conditioner)의 소음 소리를 들을 때가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이미 나의 office에는 ‘돗자리’가 자리를 잡았고 80도 이상을 웃도는 늦은 오후에는 pet dog, Tobey 와 함께 ‘오수 午睡’를 즐길 때가 되었다. 이런 5월의 모습들이 나를 즐겁게 한다.
¶ 성모의 밤: 올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성모의 밤 행사는 우리에게는 조금 느낌이 다른 경험이 되었다. 내가 우리가 몇 년 동안 보았던 성모의 밤은 대개 5월 말 쯤에 있어서 거의 여름 기분으로 바뀐 시점으로 조금은 싱그러운 5월의 향기가 희미해진 느낌이었고, 본당 대성전 안에서 ‘경직된 행사’를 하는 느낌으로 했었는데, 올해는 ‘정식으로’ 본당 성모 동산 앞, 그러니까 야외, outdoor에서 ‘진짜 성모의 밤’을 보게 된 것이다. 커다란 가정집 mansion 뒤뜰에서 결혼식을 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거기다 시간적으로 어두움이 잔잔히 가라앉기 시작하고, 향기로운 5월의 공기까지 성모동산을 신비롭게 감싸는 것, 정말 느낌이 새로웠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자랑스런 유산, 성모동산이 촛불 행렬을 기다리며..
어두움이 깔린 성모동산, 인자로운 눈이 어둠을 밝힌다
열을 지어서 행진하는 장미꽃, 촛불들의 행렬의 위에 인자로운 미소로 내려다 보시는 성모님.. 머리 속으로 ‘분명히’ 성모님께서 지금 이 시간 시공간을 초월해서 우리 앞에 계신다는 것을 그리며 그린다. 비록 본당주최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성모신심의 본향인 레지오 단원들의 정다운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고, 특히 예년에 비해서 더 레지오에 관심을 보이시는 본당신부님들의 모습도 다정한 어머님의 눈길과 더불어 더 5월 초의 향기로운 저녁 하늘을 포근하게 느끼게 했다. Never too late라고 이제나마 ‘진짜 성모의 밤‘을 보게 해 주신 성모님께 다시 한번…
¶ 나의 어머니 날: 2016년 5월 8일, Mother’s Day, 어떻게 올해는 오래~전 어머니 날과 날짜가 같을까? 5월 8일.. 나의 시절에는 어머니 날이었지 어버이 날은 기억에 없었다. 이날은 여러 가지가 겹친 날이기도 했다. 2번째 일요일,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날이라 오랜만에 주일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하게 되어서 비록 몇 주만이지만 새로운 기분으로 본당을 둘러보고 성물방의 도서실도 기웃거리고, 이제는 낯익은 담당 자매님에게 레지오 행동단원 입단도 권유해 보는 등, 기분을 새로이 하는 날이 되었다. 이제는 예의 낯익은 얼굴이 분명히 몇 분이 꼭 있어서 예전에 비해서 마음이 덜 불편하게도 되었다.옆 동네, 마리에타 1구역 담당의 $3 점심도 비록 한 그릇이었지만 맛은 아주 감칠맛나게 좋았다.
날씨도 기가 막히게 화창한 날 예전 같으면 ‘아이들의 강요’에 못 이겨 ‘끌려서라도’ 주인공인 ‘돼지 엄마’를 ‘모시고’ classy한 곳에서 외식을 하기도 했겠지만.. 글쎄.. 이제 모두들 ‘늙었나..’ 움직이는 것 귀찮다는데 거의 동의한 단계가 되었다. 올해는 idea가 바닥이 난 아이들을 ‘구제’하려 내가 volunteer를 해서 집에서 나의 ‘특기 요리’로 이날 오후를 보내게 되었다. 나의 특기요리는 평소에 ‘돼지 엄마’가 좋아하는 ‘lots of, lots of vegetable & ground beef stir fry‘ 라고 내가 이름을 붙인 이제는 거의 classic이 된 나만의 요리이다. 그저 ‘재료만 많으면’ 눈을 감고도 만들 수 있는 요리.. 오늘의 main dish가 되었다. 아이들은 red wine, 손수 만든 chicken wing을 밖에서 grill하고, Doraville H-mart에 있는 ‘빵집’에서 사온 ‘덜 달고, 덜 큰, 알맞은’ cake등으로, 그런대로 ‘초 간단 超 簡單, 초 저가 超 低價’ 였지만 만족스런, 즐거운 Mother’s Day late luncheon이 되었다. 주인공은 아이들의 엄마인 ‘돼지 엄마’겠지만 나의 머리 깊숙한 곳에는 나의 heroine, 나의 어머니가 더 크게 자리를 잡고 있는 화창한 5월 8일 어머니 날이 되었다.
우리 집 뒤쪽에는 ‘손바닥 만한’ open deck (no roof)이 하나 붙어 있다. 처음에 이사를 올 당시 이것을 보고 머릿속으로는 멋진 outdoor chair같은 것을 놓고 시원한 beer나 향기 나는 wine을 만지작거리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위치가 거의 북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아침에 해가 잠시 들고나면 나머지 시간은 분위기가 어두운 곳으로 변하는 흠이 있었다. 가끔 gutter라도 넘치는 폭우가 쏟아지면 그 빗물들이 완전히 마를 시간이 부족해서 제일 deck이 필요한 여름철에 바닥이 새파랗게 이끼까지 끼는 등.. 한마디로 눈의 가시가 되고 식구들의 냉대를 받으며 거의 방치까지 되기도 했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이 위치에 deck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 주인이 그저 ‘생각 없이’ 만들어 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우리가 이 집의 원래 주인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 위치에는 open deck은 맞지 않고 지붕이 있는 porch 형태가 맞는다. 물기가 문제가 되니까. 하지만 그래도 open deck이 필요한 이유는, open fire grill같은 것을 쓰려면 open space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랜 기간 빗물을 제대로 처리 못한 이유로 deck은 차츰차츰 그 윤기를 잃기 시작하고 파랗게 색갈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조금씩 썩는 것도 보였다. 항상 물기를 머금고 있는 표면은 흡사 skate 장 같이 미끄러워서 위험하기도 하고.. 모양새는 그야말로 목불인견 目不忍見.. 4월이 지나가고, 날씨가 풀리면서 ‘운동 삼아’ deck floor board(마루조각) 하나를 뜯어보니..놀라운 사실, 아래쪽 면은 아주 ‘말짱’한 것이 아닌가? 거의 ‘새것’ 처럼 보이고 느껴진 것이다. 그러면.. 다시 모두 뜯어서 뒤집으면 ‘새 것’이 되는 것.. 와~~ 대 발견! ‘공짜’로 새로운 deck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공짜가 세상에 어디 있나? 이것을 모두 뜯어서 뒤집어 다시 만드는 것.. 모두 100% back-breaking hard-labor 임을 누가 모르랴? 하지만 free new deck이라는 꿈을 꾸며 대 장정의 첫 걸음을 내 디디었다. 계획으로는 ‘천천히, 나의 pace’로 하면 일 주일이면 끝 날듯 보였지만 그것은 조금 순진한 희망이었고 실제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남았다. 각가지 hidden surprise를 누가 예상을 못 했으랴?
제일 힘들었던 step은 예상치도 못하게, deck board의 fastener들, 모두 deck screws들을, remove하는 job.. 모두 deck screw로 만들어졌지만, 그 ‘놈’들이 요지부동 unscrew 가 쉽게 될 리가 없다. 세월의 풍상으로 모두 head들이 반들반들 달아서 screw driver가 물리지를 않는 것이다. common nail이면 이럴 때 간단하게 빠질 수 있지만 screw는 요지부동인 것이 태반이다. 결국 deck board들을 pry bar로 강제로 들어올리는 수 밖에 없고.. screw만 남으면 그것을 ‘강제로’ pliers 를 써서 거의 손가락의 힘으로 뽑아낸다. 이 과정에서 나는 ‘처참하게’, 완전히 뻗게 되었다.
결국 다 deck board들은 모두 빠졌지만 그것들은 rough sander로 손을 모두 보아야 하고 좋은 ‘제 자리’를 잡아서 고정을 시켜야 하는데 이 과정 역시 surprise 투성이다. 현재까지 거의 제 자리를 잡고 있지만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deck board 들의 ‘간격 spacing’이 충분해야 빗물이 제대로 빠진다는 ‘자명한’ 사실을 나는 전번에 decking을 할 때 잊고 모두 너무 ‘가까이 붙여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뜩이나 덜 마르는 위치에다 물이 더 빠지기 어렵게 내가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충분한 여유를 두고 충분히 빗물이 빠지게 만들게 되었다. 이것의 ‘교훈’은, 실수를 하더라도, ‘spacing이 넓은 것이 좁은 것 보다 훨씬 낫다’ 라는 사실이다.
이 일을 하면서 이것이야말로 back-breaking job임을 절감하게 되었고 ‘고령의 나이’를 무시하고 너무 빨리 강행한 나의 실수도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짜’로 새 deck를 만들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피로와 고통은 싹 사라진다. 이것도 요새 읽는 ‘안젤름 그륀 의 다시 찾은 기쁨’ 중에 하나가 될 듯하다. 이것도, 시간과 돈을 완전히 바꿔 치기 하는 요새 내가 사는 전형적인 방식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일주일쯤 되었나.. 근래 가끔 우리 집 앞에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최근에는 backyard에서도 보였던 가늘고 까만 색갈의 양양이(고양이)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backyard 이웃 David 집과 경계 fence에 붙어 있는 2010년경 ‘내가 만든’ shed 뒤 쪽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이후 shed에 쌓여있는 ‘공구’ 잡동사니 중에서 무언가 찾으려고 그곳에 가서 혹시나 해서 (직감적인가..) 뒤쪽을 보게 되었는데.. 아니~ 귀여운 kitten 한 마리가 나를 못보고 하품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놀라게 하지 않으려 부지런히 우선 그 자리를 피하고, 이 일을 어쩌나.. 혹시 우리 집에서 kitten을 낳은 것은 아니었던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몇 달 전이었던가.. stray pet animal에 관심이 지대한 나라니(둘째 딸)가 새로 난 kitten몇 마리(4마리, nicknames: A,B,C,D)를 일주일 동안 맡아 달라고 해서 빈 방에서 돌보아 주었던 적이 있었다. kitten들이 얼굴과 색깔에 상관없이 얼마나 귀여운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나의 나이 탓인지, 어찌나 ‘귀엽고, 슬프게’ 보이는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귀엽고, 슬프고.. 라는 상반된 감정, 기분이 특히 이상한 것이었다. 엄마와 떨어진 것,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까.. 하는 우려가 더 나를 생각하게 한 것이다. 나라니의 말이: 너무나 많이 태어나는 양양이들이 우려할 만한 것이라고 ‘경고’를 하며 우리들은 어떡해서든지 그들을 ‘길거리’에서 구해서 더 이상 kitten들이 ‘안락사’를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역설을 한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pro-choice 어쩌구 하며 ‘길길이 날뛰는’ feminist들의 이기적인 궤변과는 대조적인 진정 ‘every life is precious‘, humane advocates의 정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며칠 우리 집 방에서 뛰어 놀았던 그 몇 마리의 ‘아주 작은 양양이’들.. 예상은 했지만 정이 무섭게 들었고 보낼 때 기분은 너무나 쳐지는 것.. 연숙은 더 해서 하루라도 빨리 보내자고 한다. 동감이었다. 더 정이 들면 들수록 이별은 따라서 고통이 될 것이다. 그 후에 adopt가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그저 부디 행복하게 건강하게 수명을 다 살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우리 차례가 된 것이다. 우리 집 property 안 에서 kitten들이 나온 것이다. 처음에는 귀찮은 생각에 안 본 것으로 하며 연숙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그저 kitten을 낳은 어미가 잠시 우리 집에서 쉬는 것으로 ‘희망적인’ 상상을 하려고 했지만.. 역시 그것이 아니고 사실은.. shed의 밑 바닥 crawlspace에서 출산을 한 모양이었다. 그곳은 사실 양양이가 머물기에 안전하고 널찍한 곳이라서 우선은 안심이 되었지만.. 집 안에서 사는 양양이에 비해서.. 축축하고 어둡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원래 그런 환경이 그들에게는 자연적인, 정상이 아니던가?
내가 본 kitten은 분명히 한 마리였는데, 그들이 한번 출산에 몇 마리를 낳는다는 것을 알기에 문제는 과연 몇 마리? 그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집 안에 들어와서 멀리서 shed 주변을 지켜보았더니.. 와~ 아주 귀여운 세(3) 마리가 옹기종기.. 뒹굴며 어미 앞에서 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면 세 마리를 낳았던가? 암만 보아도 세 마리였다. 색깔이 모두 다르지만 같은 검정색 계통이었다. 너무 어려서 사람을 안 무서워 하는 듯하였지만 소리에는 민감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연숙에게 고백을 하고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우선은 ‘먹이, dry food & water 를 주는 것’ 이외에는 뾰족한 장기적인 해결책은 떠오르지를 않는다. ‘산모’의 젖이 가장 중요하니까, 우선은 잘 먹어야 할 것이니까 집안에서 사는 우리 집 양양이 Izzie가 먹는 것을 아주 많이 주기 시작했는데, 내 놓자 마자 금새 밥이 없어졌고 자세히 보니까, kitten들도 같이 먹는 듯 했다. 그것은 ‘어른 밥’인데 어떻게 먹을까 했지만 아마도 먹을 수 있는 이빨들이 나온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이 아닌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침 저녁 밥을 주러 갈 때나, 멀리서 shed 앞에서 엄마가 지켜보는 앞에서 ‘뒹굴고, 엉키고, 매달리며’ 노는 baby 들, 너무나 귀여운 모습들이었다. 문제는 이제부터가 아닌가.. 더 정이 들면 어쩌나, 그러면 보내거나 없어지는 것이 너무나 괴로운 일이 아닌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런 ‘사사로운’ 정에 약해졌나? website를 뒤져보니 우리 같은 situation너무나 많고 그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veterinarian 들과 이들이 더 이상 baby를 낳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며 animal shelter에서 ‘안락사’를 못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등, 정말 humane human들의 모습을 보고 코가 찡해지는 것, 어쩔 수가 없다.
문제는 앞으로 몇 주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어쩔 것인가. Mother’s Day에 애들이 오면 분명히 무슨 좋은 idea를 줄 것으로 기대를 하지만.. 우선 website에서 본 idea, 장기적인 ‘숙박시설’, outdoor shelter를 만들기로 했다. 다행이 요사이 tool들과 아주 익숙해진 관계로 아주 크게 힘들 것 같이 않고, 나중에 얘 (kittens+mother) 들이 갑자기 이사를 가거나 아니면 adopt가 될 때까지는 우리의 책임이라는 ‘사명감’을 느끼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보기로 각오를 한다.
¶ Morning routine gone: 4월보다 더 싸늘한 5월의 어떤 날들을 기억한다. 오늘 2016년 5월 5일이 바로 그런 ‘싸늘한 날’ 이 되었다. 그런 싸늘한 아침에 ‘비상용’ 이불을 더 덮어서 잠은 포근했지만 온 몸은 완전히 권투시합 15 round에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떤다. 아프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였지만 특히 손, 팔, 허리, 이빨 등등이 더 아픈 듯 느껴졌다. 어제 갑자기 ‘남용’한1 나의 근육들이 치열하게 데모를 하는 것인가? 곧바로.. 아하~ 나의 몸이 나에게 ‘오늘 아침 morning routine은 없는 것으로’ 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아~ 미안합니다..
오늘 아침의 ‘regular routine’은 9 AM daily mass와 breakfast@SonataCafe, 이후 곧바로 YMCA workout 바로 그것들인데 이 세가지가 순식간에 없어진 것이다. 이런 routine들, 특히 ‘영육간’에 중요한 routine들, 전부터 둘이서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있다. 얼마 더 남은 인생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절대로 sprinter가 아니고 marathoner라는 생각으로 살자는 것이다. serious Moderation, compromise..하는 기분이 아니면 절대로 한 달도 못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그런 덕분에 ‘좋은 routine’들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최소한 5년 이상 꾸준히 지켜지는 routine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서 지금은 생활, 몸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daily mass를 빠진 것은 아무래도 미안합니다… 라는 말이 귀속에서 맴돈다. ‘성체,성혈’을 놓친다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서 생사 生死같은 큰 차이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인자하신 우리 천상의 어머니께서.. 그래 무리하지 마라.. 오래 오래 뛰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하고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실 것 같다. OK, 간바로, 성모님!
¶ 어린이 날: 5월 5일하니까, 직감적으로 친근한 5/5의 연속.. 아하.. 어린 시절에 제일 좋았던 일년의 하루, 우리들의 날 어린이날이구나! 하지만 지금도 대한민국에 5월 5일이 어린이 날인지는 잘 모른다. 이것도, 아마도 political correctness의 유행으로, ‘일본강점기의 잔재’라고 하루아침에 없애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남는다. ‘조선 어린이를 사랑했다던’ 방정환 선생님, 이 날을 제정하면서 왜 왜 하필 보기 싫은 일본의 어린이 날인 5월 5일을 그대로 답습을 했을까? 다른 의문점은 해방 이후에 일본이라는 생각만 해도 잠을 못 잘 정도로 반일 증오의 표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 이 날을 그대로 놔 두었을까?
상관없다. 우리들 이 어린이날 덕분에 멀쩡하게 한창 화창했던 봄날에 학교공부 완전히 쉬고 하루 종일 선생님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놀았으니까.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물에 빠지면 우리들부터 먼저 구해준다는 등등 참 기분 좋았던 하루를 보냈다. 당시에 불렀던 ‘어린이날의 노래’,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고 가사도 100% 완전히 외운다.
시대적으로 찌들고, 세계에서 모든 ‘좋은 통계’ 에서 거의 바닥에 머물던 조국이었지만, 우리들 눈에 그런 것 크게 상관이 없이 그날 하루는 ‘하루 종일’ 학교에서 골목에서 만세를 부르며 달리고 숨고 웃고 떠들어댔다. 그렇다.. 바로 그 때의 우리 나이가 그런 나이었다. 다른 것 없었다. 그 동안 강산이 다섯 번 이상이나 변했어도 그 당시의 추억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 Cinco de Mayo: 싱코-드-마요, 이곳에 오래 살면서 주변국들에 대한 것들 듣고 배우고 알게 된 지도 꽤 세월이 지났다. 특히 남쪽에 사는 멕시코는 사실 북쪽의 캐나다 보다 더 정이 가고 친근한 느낌으로 관심도 많이 가는 편이다. 우선 역사가 그렇고 종교가 그렇다. Guadalupe 성모님은 물론이고 다수가 가톨릭인 순진한 사람들, 비록 잔인하고 부패한 인간들도 ‘닥상’으로 널린 나라지만 그래도 정이 간다.
오늘은 5월 5일, 바로 멕시코 독립기념일(9월 16일) 다음으로 중요한 명절인 Cinco de Mayo, 글자 그대로 ‘5월5일’이다. 혹시 여기도, 어린이날? 물론 아니고.. 이날은 역사적인 날로 1862년 5월 5일, 멕시코 군대가 프랑스 ‘침략군’을 ‘프에블라 전투, the Battle of Puebla‘ 에서 최악의 여건에도 불구하고 역전승을 한 ‘전승기념일 戰勝紀念日’이다. 우리로 말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이 ‘막강, 기계화 된’ 일본군대를 섬멸한 정도가 될까?
이 전투에서 만약 프랑스군이 승리했다면 미국 역사도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었던 의미가 있었던 전투여서 아주 흥미롭다. 간단히 말하면, 침공을 했던 프랑스군 (나폴레옹 3세의 군대)이 멕시코를 제압했었다면 그들의 다음 목표 중에는 미국의 ‘남부 정권 Confederates’를 돕는 일이었고, 그 남북전쟁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날 승리의 의미는 미래적, 국제적인 것이었다. 독립국가로서의 멕시코는 더욱 확고해졌고, 링컨이 승리한 미국은 초강대국가 superpower로 운명적인 발걸음을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역사는 재미있고도 심각하다.
popup project, 보기흉한 outdoor deck을 고치는 일, 보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
벌써 일년이 되었나.. 작년 5월 2일 아침에 세상을 떠나신 배 베로니카 ‘돼지띠’ 자매님.. 두 장성한 아드님을 남겨두고, 2년 전 먼저가신 남편 형제님의 옆에 나란히 누우신 자매님 부부의 묘소를 오늘 레지오 회합 후에 잠깐 들렸다. 성당에서 가까운 Peachtree 공원묘지, 일년 전 이맘때를 회상한다.
두 아들에게 연락을 해서 같이 묘소에 가자고 하려던 것이 그만 기회를 놓치고 우리 둘만이 가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가까운 오빠, 동생들은 큰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우리들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별로 즐겁게 살지 못하고 떠나신 돼지띠 자매님, 알게 된지 짧은 기간 동안 나와 비록 개인적인 정을 나누지는 못했어도 나는 돼지띠라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깝게 느끼고 있었던 어떻게 보면 ‘불쌍한’ 생의 말년을 보내셨던 배 베로니카 자매님.. 인연은 인연이기에 오늘도 우리 부부는 화창한 5월의 공원묘지를 찾게 되었다.
무심하게만 느껴지는 남아있는 두 아들들.. 모두 30대의 장년에 접어드는 성인이기에 이제는 걱정을 안 하셔도 될 듯 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더 훌륭한 인생을 보낼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이 있기에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기할 수 있는 것이 여기까지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드는 하루가 되었다. 돼지띠 자매님, 부디 빨리 연옥에서 벗어나시어 완전한 자유를 느끼는 영혼이 되소서…
5월 1일의 친구들이여 용현아, 창희야.. 잘들 있었는가? 다시 5월 1일이 일년을 지나서 우리를 이렇게 ‘허공’에서 만나게 하는가? 허공에서라도 큰 문제는 없지 않는가? 생각과 의식적 역학으로 우리는 일년 동안 계속 만날 수 있으니까. 이래서 일년의 흐름을 가늠하며.. 자네들의 지난 지난 일년, 옛 친구의 정을 이런 찬란한 어머님의 계절에 다시 한번 추억하는 것.. 나쁘지 않네..
코흘리개 원서동 개천시절부터 연인들까지 합세한 대학시절들까지.. 우리의 시대, 역사 속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지만.. 사진 같은 그런 추억들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이제는 다시 이 세상의 친구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지나가는 생각이 들 때는 하찮은 ‘느끼고 보여야만 하는’ 이 세상이 지나면 다른 그림들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지난 일년 어디서라도 가족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냈으리라 믿고 싶고, 우리 집도 하느님의 보호로 비교적 건강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 하고 싶다. 너희들은 분명히 출가한 자식들이 있으리라 추측을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모두 single을 고수하는 이상한 풍조에 휩쓸려 편안한 ‘혼자의 인생’을 고집하고 있으니.. 하지만 나는 이것만은 조금 progressive한 쪽인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기들의 인생은 이미 우리에게서 떠난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것인지 그것은 공식이 없지 않은가?
70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자네들은 나머지 세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며 사는가? 나는 아직도 뚜렷한 계획이 없지만 조만간 어떤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예전에 그렸던 노후인생의 모습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예상치 않았던 다른 세계관에 의한 것들이 우리의 앞에 나타나는구나. 아마도 그것이 진정한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아무리 ‘나의’ 세계관이 엄청 변했어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역시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일 것이다. 내년 2017년 5월 1일에 다시 만나자! Adios Amigo!
4월의 마지막 주에 접어들고, 작년 4월 ‘배 베로니카’ 자매님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며 겪었던 바쁜 4월에 비해서, 올해 ‘우리의 4월’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스럽다고 서로의 의견을 모은다. 또한, 올 3월 말 보나 자매님과 영원한 작별을 한 후, 슬프고 바쁘고 정신이 없었던 느낌의 3월에 비해서 갑자기 무슨 휴가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아주 한가한 그런 4월이 거의 가고 있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의 전원 목가적인 박목월 시인의, 낮고 파아란 하늘과 수줍은 꽃들이 핀 파~란 청라 언덕과 이름 없는 항구 같은 것을 생각하곤 했지만 실제로 그런 아련~한 꿈같은 모습은 나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4월의 노래’를 회상하며 이제는 타계하신 가톨릭 음악가, 나의 중앙고 1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그 김순애 교수 작곡의 4월의 노래가 그렇게 맴돌았을 것이다.
올해의 point는 가사 중에 나오는 ‘이름 없는 항구’.. 어찌 그렇게 그 구절이 나를 헤매게 하는가? 암만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아마도,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그런 마음이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분명히 계획 없이 훌쩍 떠난 나그네의 넋두리였을 것이다. 나도 그런 ‘부러운’ 나그네가 되고 싶다면.. 그렇다. 이제 그런 나이도 아니고, 그런 처지도 아니다. 꿈을 깨고 잠을 깨자.. 다시 ‘나를 필요로 하는 항구’로 배를 저어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4월을 보낸다.
몇 년 전 나는 꿈에 대한추억을 회고한 적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한 거의 모든 꿈, 특히 악몽에 관한 것들을 남겨 놓았다. 근래에 특별한 악몽 같은 것은 없는 듯 하지만, 얼마 전에 문득 생각을 했다. 아~~ 요새 나는 꿈을 안 꾸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 그렇다. 별로 꿈을 꾸었던 기억이 나지를 않는 것이고 사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빠른 세월이라는 생각만 하고 산 듯한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전에는, 거의 정기적으로 꿈을 꾸며 살았고 가끔은 ‘기가 막히게 기억에 남는 꿈’을 자랑하기도 했었는데.. 혹시 이것도 나이 탓? 나이를 먹는다는 의식이 이미 잠재의식이 아닌 뒤로는 모든 것을 이렇게 나이 탓을 하는가? 그야말로 ‘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노래 제목 생각이 난다.
꿈을 ‘사랑’하는 나는 침대에 들어갈 때 꼭 ‘화살 기도’를 한다. 오늘 밤에 ‘근사한 꿈을 제게 주세요..’ 라는 애 같은 바람이다. 물론 그런 기도가 들어질 수는 없겠지만 그 정도로 나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 ‘기가 막힌 꿈’의 잔영 殘影 과 느낌을 사랑한다. 어느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가끔 ‘우연히’ 정말 멋들어진 ‘그림들’을 간직하고 깨어나면 하루 종일 그것을 요리하기도 한다. 그 꿈에 어떤 의미라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요새 별로 꿈을 못 꾸다가 며칠 전부터 빚이라도 갚을 양, 생생하게 펄펄 끓는 물처럼 가슴에 남는 꿈을 꾸게 되었다. 며칠 간이지만 나도 놀랄 지경.. 혹시 이렇게 변한 꿈의 pattern에도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암시하시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비약적인 생각도 들 지경이다.
특히 지난 3일 간의 꿈의 천사의 활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너무나 생생한 것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꿈에서 깨었을 때 부터가 꿈의 시작이고 꿈의 상태가 현실 같이 느껴지는 완전히 꿈과 현실이 바뀔 정도로 느껴지는 너무나 너무나 생생하고 기억에 99.9% 오랫동안 남는 그런 것들.. 3일 연속으로 ‘즐긴’ 이런 꿈 뒤에 조금 걱정까지 들게 되었다. 기억에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본 것들의 대부분은 거의 ‘사람들’에 관련 된 것들이다. 무슨 멋진 절경을 본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나 성모님을 본 것도 아닌 그저 mere mortal 들이다. 물론 그들은 내가 어디서 본 사람들, 내가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특이한 것이 ‘절대로 보기 싫은 사람’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그들이 바로 나의 주변에 모두 보이고 말들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중에 제일 웃기는 것은 이것이다. Donald Trump를 꿈에 본 것이다. 이 인간의 ‘쌍판’을 안 보려고 TV나 Internet news까지 ‘완전히’ 끊고 산 지가 몇 개월이 지났는데, 어떻게 이 인간이 꿈에 ‘생생하게’ 보인단 말인가? 웃기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가 그 인간과 ‘어울려 재미있게’ 시간을 보낸 것이다. 꿈 속에서 나의 느낌이 ‘이 인간 내가 본 것 과는 조금 다른 인간이네.. ‘ 하는 것인데.. 내가 하도 이 인간을 love to hate 를 해서 성모님께서 조금 ‘자비심’을 가지라고 이렇게 나의 꿈에 보내주신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며 한참을 웃기도 했다.
개꿈인가? 아니다. 아 나이에 어떻게 애같이 개꿈을 꾼단 말인가? 내가 ‘좋게든 싫게든’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던 영혼들이 나에게 어떤 암시나 의미를 주려고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너무나 선명한 꿈들을 꾸고 나서 나의 두뇌세포가 그렇게 노화가 된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도 들 정도로 선명한 것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본 사람들.. 과 나의 관계를 재 점검해 볼 수 있는 우연히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그 ‘영혼들’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가.. 싫은 영혼들과의 관계는 고쳐질 수 있는 여지는 없을까.. 벼라 별 생각이 다 드는 며칠을 지내며.. 참.. 내가 바로 dream lover가 아닌가.. (1960년대 Bobby Darin의 oldie, Dream Lover란 것이 생각 나지만 이것은 꿈에서나 보고 사귀는 연인에 관한 것이다. 나의 dream lover는 내가 꿈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 날씨가 풀리면서 우리 ‘낡은 집’의 이곳 저곳을 손을 보려고 몸을 움직여보니.. 제일 중요한 tool 중에 하나인 air compressor (4-gallon pancake style) 가 고장 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것은 지난 blog에 나의 ‘각오’와 함께 밝힌 바가 있었다. 각오라 함은 물론 ‘내가 고치겠다’ 라는 각오다. 하지만 고치는 값이 사는 값보다 더 비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악의 경우 이것을 버려야 하는 사태가 오는 것이 나의 ‘악몽’중에 하나다. 보기에 너무나 멀쩡한 것이고, 이것을 버리면 어디로 갈 것인가.. landfill.. landfill, 비싸게 만들어낸 쇳덩어리, 아직도 정상일 수도 있는 electric motor, pump등등.. 한 마디로 너무나 아까운 노릇이었다. 가진 것은 시간밖에 없다는 각오로 시간을 들여서 ‘공부’하기 시작을 해 보니..
이미 밝혀진 사실은, (1) electric motor runs ok, (2) air pump makes air out fine, (3) no visible air leaks outside tank. 이 사실들은 air leak 자체가 밖에 있는 air plumbing의 어디에선가 hole이 생겼다는 뜻이다. 공기가 새는 소리가 들리는 곳은 air pressure switch부근이지만 정확한 곳은 pinpoint를 할 수가 없다.
가급적 disassemble을 피하려고 했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Wrench들을 동원해서 plumbing pipe를 해체하고 자세히 보았지만 공기가 새는 곳이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뜯기 귀찮기만 한 air pressure switch그 자체이다. 이것에서 발견을 못하면 거의 이것을 내가 고칠 가망은 없고 ‘버려야’하는 신세가 된다.
비장한 각오로 air pressure switch를 뜯어내지만 그곳에도 별로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것 자체도 더 분해가 가능하긴 했다. screw로 조립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중단을 하고 최후의 보루인 googling을 하니.. 역시 air leak의 가능성은 이 switch 자체에 가장 많이 있었다. 내가 이것을 고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다음은 이 ‘부품’을 교체하면 될 듯 보였다. 문제는.. price price.. 만약 $20~30 이상이 되면 포기할 단계다. 하지만 여기에 big surprise가 있었는데 이 부품은 처음부터 made in china이기에 거짓말처럼 싼 $7 정도가 아닌가? 이런 복잡한 것을 어떻게 $7 에 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상관이 없지 않은가? 더욱 놀란 사실은.. China에서 직접 delivery가 되면 shipping 도 ‘공짜’… 참 요상한 세상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7 gambling을 하는 셈이라서, 마음도 가벼웠다. 느낌에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날 듯 했고, 결과도 마찬가지.. 이 ‘놈’이 바로 범인으로 들어났고 10년이 넘은 4-gallon pancake air compressor는 ‘완전히’ 고쳐졌다. 내친김에 문제의 air pressure switch를 완전히 해체를 해 보니… 역시 깊숙한 속에 있었던 rubber air diaphragm에 큼직한 구멍이 나 있었다. 10년을 써서 그랬을까, 아니면 불량품이었을까.. 상관없다. 지금은 그것이 새것이 되었으니까.. 이래서 최소한 몇 년간은 거의 새것이 된 air compressor를 쓸 수가 있게 되었다. Landfill 로 갈 뻔했던 tool, 환경보호도 돕고, 나의 주머니 사정도 돕고, 기분도 좋고.. 이것이야말로 win win win, triple win 이 아닐까?
¶ Scope, 사실은 Oscilloscope의 준말로 electrical engineer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instrument중에 하나다. 쉽게 말해서 이것은 electrical signal 중에서 가장 original, physical한 analog voltage를 real-time으로 보여주는 측정기기 測定器機 이다. 온 세상이 온통 digital로 변한 현재에 analog의 밑 바닥을 보여주는 이것이 아직도 필요할까? 물론, 물론이다. 그 ‘깨끗하게 보이는’ digital이란 것도 알고 보며 ‘모조리’ analog에서 출발한 것이니까. 요새 사람들 거의 analog system을 당연히 ‘안 보이는 것’으로 취급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 것이다.
Arduino generated square wave on 25 year old 20MHz Tenma oscilloscope
Arduinosetup for generating a square wave
직장을 떠난 지 꽤 오래 되어서 electronics lab environment도 이제는 생소한 느낌이 들지만 가끔 향수도 달랠 겸 오래 전에 쓰던 ‘고물’ 20MHz ‘analog’ oscilloscope를 먼지를 털어버리고 workbench의 중심으로 옮겨놓았다. 향수, 향수, 옛 생각이 그렇게 날 수가.. 어렸을 때부터 ‘장난’하던 electromagnets부터 시작 vacuum tube radio, stereo amplifier로 시작해서, 8-bit microcomputer를 거쳐서 32-bit microcontroller까지.. 이제는 Arduino나 Raspberry Pi같은 것이 일반화 되어서 ‘어린 여자 애’들까지 이것을 가지고 장난을 하게 되었다. 과연 그 애들이 Oscilloscope가 무엇인지 알까, 관심이나 있을까? 오랜 만에 Scope에 나타난 깨끗한 초록색 square wave 를 보며 생각한다.. 아~~ 정녕 나의 세대, 세월은 이제 완전히 지나가는구나..
지난 4월 17일, 폴란드 Poland 에서 2년 전에 발생한 성체기적 Eucharistic Miracle 이 공식적인 교회(현지 교구, bishop Zbigniew Kiernikowski 주교) 의 승인을 받았다는 뉴스가 catholic blogger, Philip Koloski 의 보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내가 이 소식을 접한 것은 National Catholic Register newsletter 를 통해서였고, 따라서 그것의 source인 website를 통해서 뉴스의 전부를 읽게 된 것이다.
이 성체기적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이 비교적 간단히 보도되었다.
2년 전, Poland의 Legnica 교구 본당에서의 일이다. 성체 분배과정에서 축성된 성체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졌고, 곧바로 다시 집어 올려서 물이 들어있는 그릇에 다시 담겨졌다. 곧바로 성체에서 빨간 흔적들이 나타났다. 법의학 전문가들이 이 성체를 과학적으로 분석을 하니: 그 성체 부스러기 fragments 들은 사람 심장 근육의 조직과 비슷한 것 cross striated muscle로 판명이 되었다. 이 분석은 또한 이 조직, 조각은 사람, 인간의 것이고, 아주 고통을 느낀 그런 것이었다.
Philip Koloski의 성체기적에 대한 논평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의 ‘기적’이 예전의 것과 다른 것은 예전 것들 (예를 들면 Miracle of Lanciano)은 성체가 축성이 되는 과정에서 피로 변하거나, 축성을 하는 신부사제의 믿음이 부족할 때 변하는 것 들이었다. 이번의 case는 성체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생긴 것이니.. 이것은 ‘취급 부주의’에 의한 것이다. 이번의 기적은 우리가 성체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정말로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며, 그에 맞게 조심해서 모셔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교훈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성체가 예수님의 ‘고통 받았던 몸’이라는 사실을 잊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에 의한 예수님의 message는 아니었을까?
나는 이 news를 접하며 또 생각하게 된다. 물론 ‘교리적’으로 분명히 성체는 성체,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안다. 최소한 머리로는 배웠고 인정하고 믿고 안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고해성사와 더불어 이 가톨릭 전통 교리는 나를 항상 더 고민하게 하고 더 생각하게 한다. 영성체를 할 때마다 겪는 고민과 갈등을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집중적인 묵상을 하며 준비한 영성체에는 어렴풋이 강한 느낌이 온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은총인가? 일단 믿는다고 ‘선택’을 한 이상 믿고 싶고, 일단 믿음의 문지방을 넘으니 이런 ‘성체기적’을 믿고 싶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근래에 나에게는 작은 기적이다.
4.19 에 대한 것, 물론 나의 기억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상당한 부분은 news media에 의한 것들이다. 현장에서 목격한 당시 서울의 일간지가 제일 그렇고 나머지 것 중에는 미국의 LIFE magazine도 한 몫 낀다. 특히 당시의 ‘최첨단’ 사진기자, 기술을 자랑하던 잡지라서 그 역사적 가치는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사진, 화보 이외에도 사설, 논설 등도 수준급이었는데, 다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조금은 left-leaning (좌향적) 한 쪽이 아니었을까는 생각도 든다. 4.19 학생 혁명이 난 후 처음으로 기사와 화보를 다룬 것이 5월 9일자였고 거기에는 아주 비중 있는 ‘논설, editorial’이 실렸다. 제목이 바로 The Student Phenomenon, 학생현상(?).. 그 전문을 여기에 발췌하였다.
논설의 주제는 바로 ‘학생’들이다. 한국의 학생을 중심으로 세계도처의 학생들,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분석하였다. 이 논설을 쓰게 된 동기는 ‘분명히’ 한국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곧바로 터키에서 4.19 와 비슷한 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의 친구’ 멘데레스 수상이 실각을 하였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난처한 사태가 아닐 수가 없었다. 두 나라가 거의 같은 미국의 ‘맹방’, 제1의 적인 소련의 공산당과 총칼로 맞선 나라가 아닌가?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돕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보니 나라 안에 조금 잡음이 있어도 외교적으로 무마할 정도였다. 4.19 혁명 당시도 미국은 한국 학생의 ‘유혈사태 희생자’정도에만 관심을 두었다. 만에 일이라도 이 사태를 이용해서 김일성 개xx가 제2의 6.25 라도 꿈을 꾼다면 그것이 진짜 미국의 악몽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맹방의 지도자, 사실 또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터키 또한 비슷한 상황이고 보니 한쪽은 ‘한미 상호 방위조약’, 다른 쪽은 나토 NATO로 묶여 있는 상황의 미국, 참 입장이 어려웠을 듯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각자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태는 흘러갔고 미국의 입장 또한 큰 문제없이 해결 된 셈이다.
이 LIFE magazine의 논설은 다음 사실을 주목하였다.
이 두 나라의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지독하게 심각한 미국 소련간의 냉전상태 라는 사실. 이 편이 아니면 저 편, 중간이 없었던 그런 심각한 냉전 상태에서 ‘약소국’들은 어쩔 것인가? 그러다 보니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권력 남용이 허용되었고, 그들이 독재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을 견디지 못한 첫 그룹이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었다.
미국의 경우,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운동권’ 형성이 이제까지 거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미국이 독립하는 과정의 혁명이 ‘완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문제는 아마도 ‘노예제도의 전통’을 고수하는 주들과 연방정부간의 마찰, 충돌이다.
이어서 논설은 유럽의 사례를 들며, 1848년 Hungary 의 학생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사회주의’ 운동을 예로 든다. 근래의 예로써 1956년 역시 Hungary의 소련침공을 유발시킨 ‘자유운동’을 들었다. 대부분의 학생운동들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갔지만, 극단적인 예외는 세계 제1차 대전을 유발시킨 ‘사라예보사건’ 이었다.
논설은 다시 LIFE magazine의 progressive value를 다음과 같은 ‘미국 흑인차별’의 사건들에서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South (남북전쟁의 남쪽 측)에서 흑인 학생들이 제도적인 흑백차별에 항의해서 식당 같은 곳에서 백인들 옆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데모’를 벌리고 있고 미국 전역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런 ‘남측의 웃기는 전통’에 대항하는 이런 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아마도 신세대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덕이 아닐까.
동정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논설은, 학생들이 정부의 극단적인 탄압적인 정책에 반발을 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서, 정치깡패, 정치경찰들이 얼마나 웃길 정도로 비행을 저질렀던가? 그저 휴전선 넘어 김일성 개xx가 ‘무서워서’ 침묵만 지키던 일반 국민들과 달리 대학생들은 그런 목불인견 적인 꼴들을 못 참았을 것이다. 그런 백주대로 강도 같은 정책을 싫어한 것은 한국 대학생만이 아니었음을 주지하는 논설은 당시의 국무장관 ‘허터 Herter‘와 아이젠하워 Eisenhower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아무리 맹방이고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국이라고 해도 미국의 기본적인 자유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탄압적인 정책이 안보를 위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구적인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국무장관 허터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남미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 대한 것도 거의 같은 ‘미소 냉전’의 산물이었다. 공산당을 잡으려는 부패정권에 대항한 학생들의 데모와 항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는 미국의 기본 자세는 이곳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남미의 좌익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쿠바 카스트로 를 왜 미국에 반대하는가 항의를 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답은 간단했다. 카스트로 Fidel Castro 가 ‘공약’을 어기고 ‘자유를 억압’ 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바로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것의 밑에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논설은 한국과 터키의 학생들을 지지하는 결론을 내린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불만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은 미국만이 아니고 전 세계가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의 credo가 Don’t tread on me! (밟지 마!)라는 사실임을 주지해야 한다.
논설을 4.19혁명이 난지 66년이 지난 뒤에 읽으니 격세지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상황적으로 가치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다는 느낌이니까. 기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면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논설이 조금 과소평가한 낙관적인 분석은: ‘미국 학생들은 절대적 자유가 보장된 덕분에 조용할 것이다’ 라는 것.. 이 논설이 쓰여진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서 미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반정부 학생운동’의 전성기를 겪게 되니까.. 월남전의 정당성에 대한 불만에 의한 것, 이것은 반대로 지나치게 자유가 ‘보장, 허용’ 되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역사적인 irony가 아닐 수가 없다.
There is a fascinating pattern emerging in Latin America, Korea and now Turkey. What is taking place in these widely separated lands is an outburst of resentment by university students against governments which – partly as a result of the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 have become tyrannical. And what the students are proving – which free men must of course welcome – is that young, spirited and determined people can still make tyrants tremble, and even totter.
Political revolt by university students is a well-known story abroad, thought not common to our own land. This may be a reflection on the seriousness and maturity o f U.S. students but, whatever the cause, other students around the world are politically minded by traditional and are accepted as a dynamic political force.
Perhaps the contrast exists because our own revolution was so complete – in establishing the basic freedoms of conscience, press and speech for once and all – that there has been no need to question what it has settled. The greatest challenge was met in our War Between the States which settled forever that no man may be another’s master.
In Europe, where things have been different, it was a young poet, Sándor Petöfi, who in 1848 set off the revolution in Hungary against the tyranny of the Habsburgs, only to be crushed later by the Russian czar. And it was the students of Budapest again in 1956, acting in the name of Petöfi, who overthrew – if only briefly – the czar’s successors. Serious, impassioned Italian students were the backbone of Garibaldi’s Risorgimento. In France, it was students who in 1897 rioted in defense of Captain Dreyfuss. Students were the nihilists, the anarchists, the Marxists of Russia. What all these movements had in common was idealism backed up by willingness to fight. Sometimes this violence was bent to good ends and sometimes ill. It was, we must remember, a Bosnian student named Princip who at Sarajevo lit the fuse which doomed more than eight million men.
Most of these revolts of the young have been beneficial. We are seeing something of that sort now in our own country. By their sit-ins Negro students in the South are demonstrating the silliness of a system which denies the right of humans to eat alongside one another. They are getting an impressive amount of support from which students outside the South. They are getting some, too, from which students in the South, who find they cannot rationalize or defend these paradoxes. The spread of education in the South has produced a force to make men think.
The students who have overthrown the government of Syngman Rhee in Korea have obviously been stirred to the depths by oppressive practices. Rhee’s motives were understandable in a land which has been horribly devastated by Communist incursions and must still live beneath the gun of possible new attacks. This is true in Turkey, which lies immediately beneath the guns of the vast Soviet Union and is subjected to continuous and insidious subversion. Yet, when all is said and one, the fear of losing freedom can never be made an excuse for suppressing freedom – certainly not as a permanent policy.
The demonstrating students who are insisting on freedom have an ally in Secretary of State Herter. In his denunciations of the killings of South Africa and Korea, he has made clear that he will not allow the common interests of defense to put the U.S. in the position of endorsing practices which offend our basic principles. The students have another wise friend in President Eisenhower. On his Latin American visit Chilean students asked him trenchant questions about our alleged hostility to Fidel Castro. The President’s written answer to them left little more to be said: Castro has betrayed “the ideals of freedom of expression, equal protection of the laws, and the right freely to choose a representative government.”
Of course, that is also what Rhee did, and what Menderes is doing in Turkey. Students are letting them know that the time is later than they thought – and are right to do so. And we are right to endorse their legitimate grievances and their right to have them redressed. That is what the world would expect – and is entitled to expect – of a nation born in revolution and whose credo was, “Don’t tread on me!”.
아래의 사진을 보라.. LIFE에 실린 내 또래 아이들의 모습들.. 국민학생, 중학생이 섞인 이 데모는 4.19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송요찬 장군휘하의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시내 중심을 장악했을 때 ‘군인 아저씨 우리를 쏘지 마세요’ 라고 다시 학생들이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외쳤다.
당시 계엄군은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며 자기 국민을 ‘보호’하였다. 1년 뒤 5.16으로 ‘그 고마운 군인아저씨’ 들 자신이 정권을 잡았다. 이 사진을 유심히 보며.. 서울 시청을 뒤로하며 남대문 쪽으로 행진하는 아이들.. 바로 나를 보는 듯 했다. 꾀죄죄한 구제품 옷, 신발, 교복을 ‘걸치고’ 골목 뒤에서 놀다가 나온 모습들.. 바로 나의 모습, 이 사진의 ‘아이’들 다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이 되었을 것인데 그 날 ‘형님 학생’들에게 이끌려 나온 사연이나 기억하고 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