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평화인가..아니면?

지나가는 달들, 나날들에서 가끔 분명히 느끼는 것.. 이것이 혹시 그렇게 흔한 단어인.. ‘평화’인가? 너무나 조심스럽지만 아마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나는 곧바로 이런 말을 붙인다. 내일 아침까지 만불 빚쟁이들이 들이 닥쳐도 같은 심정일까.. 바로 이것이 신앙적인 평화의 뜻이 아닐까? 이것 저것 나를 잡는 괴로움이 산재하고 남아있고 계속 생겨도 그래도 평화로운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면 이상한 것인가? 아하! 바로 이것이 미사 때 마다 귀 딱지 앉도록 듣는 peace be with you.. 가 아닐까? 이제야 나는 이것을 알아 차리고 있는 것일까? 이것도 나의 ‘신앙, 믿음’의 진화의 과정인가? 어떨 때는 이것도 ‘무서울 정도로 느껴지는 잔잔한 평화’ 로 받아 들여진다. 하지만 현재 연숙과 나는 그런 ‘놀라운 평화’를 느끼며 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4년이 다가오는 레지오.. 현재 나는 이곳이 거의 피난처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오지나 않았을까? 할 것이 없으니까.. 아니면? 아니다.. 이런 기회가 나의 세계관을 얼마나 많이 바꾸어 놓았는지 잊었는가? 나는 분명히 변했고, 변하고 있고 계속 변하고 싶다. 과거의 ‘고립된’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나는 산다. 진리를 향해서 나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일까? 요새 들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면 거의 99% 현재와 미래를 망침을 알기에 그런 것이지만 이제는 4년의 ‘실적과 전적’을 조금은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은 어떨까? 요새 레지오 간부 선출 문제로 신경이 쓰여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 조금은 ‘레지오 fatigue‘란 것을 느끼게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에게 남은 인생에서 ‘레지오’를 빼놓음은 아직 ‘상상’을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모님께 깊이 의탁하고 있고 그렇게 살고 싶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성모님과의 관계를 느끼고 싶고, 아니 관계를 쌓아간다고 조심스러운 희망도 하고 있으니까.. 어떨까? 죽기 전에 나는 과연 ‘레지오 마리애’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회상하게 될 것인가?

 

작년 정도는 아직 아니지만 그런대로 ‘보통 여름’같은 올해.. 참 이것이 자연의 조화일까.. 모든 것이 ‘평균치’를 유지하는 자연계.. 얼마나 이것이 ‘기적’처럼 느껴지는지.. 모든 것들이 extreme으로 치닫고 유행이 되어가는 요즈음 ‘평균’이란 말만 들어도 신선한 것이다. 이제 푸근하게만 느껴지는 여름에도 적응이 되어가고, 그렇게 손에 안 잡히던 ‘일손’에 조금 힘이 생겼다. 몇 년간 방치되었던 집안의 크고 작은 ‘고치는 일’들이 이제는 자신이 생겨가고, 최근 다시 힘이 생긴 YMCA에서의 bench press로 어깨와 허리에 힘도 느끼고.. 이때가 그야말로 chance가 아닌가.. 올 여름에는 무언가 우리집도 변한 모습을 모여 주어야 할 때가 아닐까? 벼랑 끝에서 창으로 무장한  monster들이 나를 기다려도 나는 평화를 ‘죽기 전까지’ 느끼고 살고 싶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성모님이 바로 나의 어깨를 잡아주고 계시지 않은가? 그렇지요.. 어머니? 

smith press

오늘 나는 작은 ‘금자탑’을 쌓고, 하루 종일 그것을 즐거워하며 자축을 하였다. 작은 금자탑이란 85 파운드 barbell 을 bench press로 30번 들어올리기(30 reps)를 했다는 것인데.. 글쎄.. 이것도 그렇게 자축을 할만한 일일까? 나도 우습지만 사실은 나에게는 심각한 milestone 이 되기에 그렇게 우습지만 도 않은 것이다. 하지만 조금 “미안한” 것은 이것이 비록 bench (chest) press이긴 하지만 ‘free weight’ bench press가 아니고 smith press machine 이라는 사실이다. 흔히들 ‘pure’ bodybuilder들은 free weight가 아닌 것은 ‘사이비’라고 일축해 버린다. 그런 말은 부분적으로 나도 동감 하지만 그들은 주장은 과학적인 근거가 거의 없다고 한다. 과학적 연구의 결과는 대부분 smith machine의 효과는 free weight의 95% 에 달해서 사실은 smith machine의 장점을 고려하면 운동하는 환경에 따라서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smith machine은 그 design상, 운동시에 거의 사고로 다칠 염려가 없기에 현재 나와 같은 경우에는 거의 필수적인 것 같다. free weight bench press는 아주 무거운 것을 들 때에는 spotter가 옆에서 지켜 주어야 안전한데 smith press는 그것이 필요가 없기에 나에게는 거의 구세주처럼 느껴진다.

현재 나는 집 근처에 있는 YMCA에 가서 weight lifting을 하고 있는데 이 운동이 나에게는 가장 남자다운 운동같이 느껴지기에 다른 것은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골프, 테니스.. 등등 나이가 들면 거의 고정적으로 하는 운동들이 있지만 나에게 그런 것들은 거의 ‘놀이’ 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나의 생각이 100% 옳은 것이 아닐지라도 나는 그런 ‘놀이’를 배울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저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 때의 희열’과 그 후에 느껴지는 ‘철철 넘치는 adrenalin’ 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는 오래 전 학교 다닐 시절에 이런 운동에 관심도 없었고 사실 ‘갈비씨 신세’에서 그런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대학 졸업 후, 미국에 오기 바로 전에 친구 이경증과 같이 서울 운동장 체육관에서 운동을 시작을 하면서 weight training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health club에 가입을 하고 몇 개월 각가지 weight machine 으로 training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나의 몸을 보니 예전과는 아주 다른 ‘근육’이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사실 다시 이런 것을 할 시간적이 여유가 없이 ‘인생열차’에 실려 세월을 보내다가 10여 년 전 온 가족이 ‘가끔’ 다니던 YMCA에서 다시 weight lifting과 ‘재회’를 하였고 조금씩 시작을 했는데 수십 년 전에 해본 그 경험이 무엇인지 거의 큰 무리가 없이 그 무거운 것들을 올릴 수 있는 것을 알고 너무나 신기했다. 특히 ‘고령’화 되는 나이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대부분 친지들은 나이를 의식해서 이런 것은 꿈도 못 꾼다고 해서 나는 그들을 설득, 해명 시키느라 진땀을 뺀다. 물론 그들은 예전에 이런 것들과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믿기에 그들도 지금부터 시작을 해도 큰 무리가 없음을 안다. 급속히 노화되는 근육을 살리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 암만 달리고, 뛰고, 수영하고, 골프를 치고 해도 이런 근육을 살리는 것에는 시간이 너무나 걸리는 것이다.

근육운동의 효과는 ‘건장한 모습’을 보이는 것 이외에도 집안 일을 할 때에도 아주 유효하게 쓰인다. 예를 들면 집을 고친다거나 할 때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하는 일이 많은데.. 이런 근육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 것인가? 나는 이런 것을 대비해서 더욱 더 이런 운동을 하기도 한다. 특히 나이가 들면 점점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슬픈’ 지경에 이를 터인데 그런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게 하는 것은 자기 몸에 ‘근육’을 살려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60 중반을 지나간 내가 느끼는 ‘근육의 중요 함’의 이유가 될 것이다.

Guest Blog: 김인호의 조갑제 컬럼 4


대한민국 산업화 경험이 계발(啓發)시켜준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2014.06.23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은 지난 반(半)세기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세계 유일의 나라라고들 해외에선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칭송한다. 그런데 민주화에 대해서는 대한민국과 태극기와 애국가를 거부하는 것도 모자라 광화문 한복판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를 수 있어야만 참다운 민주화라 외치는 반국가무리들의 회괴한 주장으로 인해 민주화의 의미가 엄청 변질·왜곡되었다고 보는 이가 국내에 다수인 반면 산업화 성공에 대해서는 국내외 그 어느 누구든 이의(異意)를 달지 않는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는 산업화 성공과 관련하여 참으로 운(運)좋게도 지난 40여년 이상 산업체와 정부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아주 값진 연구기회와 산업연구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는데 이를 잠시 더듬어 보고자 한다.
 

  • 1969년 공군중위 제대를 두 달 앞둔 5월 어느 날 우연찮게 합류하게 된 KIST에서 전문성도 없으면서 당장 POSCO 건설타당성연구의 실무책임을 맡아 수행해야했던 연구경험이 바탕이 되어 필자는 철강에 뒤이어 1981년까지 10여 년간 KIST,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KNFC(한국핵연료개발공단), KAERI(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정부가 주도했던 정보통신, 자동차, 전자, 에너지, 교통, 핵연료 등 중화학관련투자 사업에 대한 타당성연구(feasibility study)를 주도적으로 심도 있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 교직으로 옮긴 후 필자의 손을 거쳤던 투자 사업들이 성공적으로 순항(順航)하고 있음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며 그 성공원리를 이론적으로 구명(究明)하고픈 강렬한 연구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 1980년대 중반 KTA(현 KT의 전신) 장기발전전략연구 책임자로서 ATTACK 전략을 제시했던 필자의 연구경험에 비추어 후속으로 이어진 Harvard Business School의 Michael Porter 교수팀 Monitor Consulting사가 보여준 KTA 전략 연구결과에 대한 실망은 필자로 하여금 감히 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독자적으로 계발하고픈 열망을 강력하게 촉발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ATTACK이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미·소 양극체제 붕괴가 전자통신에 줄 충격과 이에 대해 KTA가 어떻게 적응할 것이냐의 관점에서 제시한 전략으로 이는 ‘Advanced Total Telecom AdvantageCreating KTA: 첨단의 유·무선통신을 통해 우위를 창출하는 KTA가 되라’는 뜻의 이니셜로 표현되는 전략슬로건인데 포터 교수팀의 연구결과를 아무리 뜯어봐도 이런 측면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았음에 필자는 대단한 실망감을 느꼈으며 나아가 독자적으로 연구하고픈 강한 의욕을 갖게 되었다.
  • 1990년대 초반 한국주택은행(현 국민은행과 합병이전의 국책은행) 장기발전전략 연구프로젝트 책임자로서 그리고 뒤이은 3여년 이상 주택은행 사외이사로 활동하며 실물경제와 금융경제와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다소나마 눈뜨게 된 세계금융의 주도세력과 그들의 행보, 특히 1984년 신자유주의의 기치아래 추진된 레이건 정부의 규제완화(deregulation)가 금융업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필자는 궁금증이 컸었다. 왜냐하면 규제완화 이후 재무 분야에서 위험관리(risk management)라는 미명하에 금융공학(financial engineering)이라는 신(新)용어를 들고 위험을 사고파는 희한한 돈놀이꾼들이 등장하여 금융파생상품(이는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제로섬zero-sum이므로 이 시장을 유지하는 비용만큼 사회에 부담을 주는 네거티브 섬 negative sum의 해악상품 임)을 통해 미국경제를 좌지우지하며 월가(Wall Street)를 주도하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한편 1997년 IMF 금융위기로 대기업(재벌) 반(半)정도가 파산한 충격과 그 후 살아남은 기업들이 2008 미국발 경제위기에서 오히려 선방하며 한국경제를 업그레이드 시켜 온 산업화 성공경험은 필자로 하여금 한국 재벌구조(Chaebol Structure)의 진화논리와 기업의 지속번영원리를 보다 일반적으로 이해·설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 정립하고픈 강한 열망을 더해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열망이 생길 때마다 참으로 공교롭고 다행스럽게도 필자에게 기업과 정부의 연구비 지원이 뒷받침 되어주어 필자는 산업·기업·사업연구에 대하여 폭넓고 심도 있는 연구를 그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으며 이런 연구경험을 토대로 세계 석학들과 학문적 교류를 가지며, 다이나믹 매니지먼트(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구축해 올 수 있었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늘 감사하며 대한민국과 우리 기업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다.
 
물론 때론 기업인들 중에서 장사꾼 행태의 일탈을 저지르는 경우를 접할 땐 그래서 더 큰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국력의 원천과 양질의 일자리 진원지는 기업이다. 그런 우리의 기업들이 지난 40여 년간 발전해 온 경험을 토대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를 구축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한마디로 니즈진화에 적응하는 혁신경영이며 이는 니즈맞춤혁신(needs-focused innovation)으로 대변될 정도로 고객니즈 밀착혁신을 강조한다.
 
고객맞춤혁신은 니즈진화가 거의 없는 경우에서건 니즈진화가 빈발(頻發)하는 상황에서건 기업은 언제나 구매력을 지닌 고객 중에서 자신의 니즈충족을 위해 구매/지불의향(willingness to purchase/pay: WTP)을 갖고 있는 바로 그 니즈(이를 현시니즈 explicit needs라 함)를 충족시켜줄 제품·서비스를 혁신을 통해 개발·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식(常識)에 기초한다.
 
그래서 고객이 지불의향을 지니는 경우를 구명(究明)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거래조건과 최대의 지불의향수준(이를 이상적인 모범답안이라는 의미로 Norm이라고 부름)이 어느 정도일가를 탐색(seek norm)하고 기업에서 혁신을 통해 이를 달성하면(get to norm) 언제나 그 기업은 성공한다는 혁신논리를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제공해 준다.
 
‘Seek Norm & Get-to-Norm: 모범답안을 찾고 답안을 써라’는 혁신논리는 기업의 모든 활동은 모름지기 고객으로 하여금 우선 자사의 제품·서비스에 대해 지불의향을 갖게 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는 여타의 기업 활동들이 제 아무리 호소력 있고 사회적 명분과 사회적 공헌이 크다손 치더라도 자사의 제품·서비스를 고객이 사주지 않는다면 기업은 곧 끝장이라는 상식에 기초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명제가 경영학분야에서 그간 왜 크게 강조되지 않아왔던 걸까? 아무래도 그 연유는 경영학의 태동배경이었던 대량생산체제 탓이 아닌가 싶다.
 
개관컨대 20세기 초반 대량수요가 형성되어 있었던 미국의 산업현장에서 태동한 (정태)경영학의 주관심사는 대량생산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운영하는데 있었다. 대량생산시스템에서 각 요소들이 제 기능을 잘 수행해 주기만 하면 전체가 잘 돌아가는 상황(이를 요소환원주의: reductionism라고 함)에서 투입과 산출 비율(input-output ratio) 곧 능률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핵심 관심사였다.
 
1970년대 후반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며 철강산업, 자동차산업, 전기통신산업현장에서 대량생산체제가 유지되어 온 관계로 그때까지 경영학에서의 주된 이론/모델/방법/기법은 요소환원주의에 입각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는데 집중되어 왔다.
그런데 1980년을 전후하여 디지털혁명이 일어나고, 1979년 2차 오일쇼크로 초(超)경쟁상황이 심화되던 산업현장에서는 능률/생산성을 높이는 노력을 계속하되 생존하려면 우선 경쟁자보다 우위를 점해야한다는 목소리가 호소력을 지니면서 경쟁우위 달성을 강조하는 전략경영이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의 경영학에서 전략경영으로 진화했다고 해서 그간 강조되어 온 능률향상을 등한히 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능률향상만으로는 경쟁상황에서 생존이 불투명하므로 우선 경쟁자보다 상대적으로 경쟁우위를 점해야한다는 주장이 강조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러다 2000년대를 전후하여 인터넷시대가 글로벌 차원에서 보편화되고 스마트 혁명이 전개되면서, 더욱이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을 거쳐 만물인터넷(Internet of Everything)으로 진행되어가면서 기업 및 산업시스템은 선형세계에서 비선형세계로 패러다임이동(paradigm shift)이 급전하고, 힘이 기업에서 고객으로 옮아가는 권력이동(power shift)이 심화되면서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이 요구되게 되었다.
 
그간 대량생산체제에서 산업·기업·사업시스템의 각 요소마다마다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 주면 족했던 선형세계에서와는 달리 인터넷/스마트혁명은 산업·기업·사업을 각각 하나의 전체로서(as a whole) 인식(이를 전일주의: holism라고 함)하고 요소와 요소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비선형세계에 부합하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의 등장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으며 또한 고객이 힘을 쥐는 상황이 전개되자 고객이 구매력을 지니더라도 구매의향을 갖는 경우와 구매의향이 갖지 않는 경우를 구분해서 다룰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이 요구되게 되었는데 이를 동시에 충족시키고자 등장한 것이 바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다. 이런 의미에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인터넷/스마트혁명시대에 부합하는 경영패러다임이다.
 
그런데 선형세계란 비선형세계에서의 특수한 한 경우이며, 또한 고객이 힘을 쥔 상황일지라도 고객이 그 힘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라면 이는 바로 기업이 힘을 쥐고 있는 경우와 같으므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선형세계에서건 비선형세계에서건 또 기업이 힘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건 고객이 힘을 쥐고 있는 경우에서건 항상 통하는 이익추구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profit-seeking)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는 혁신의 성공논리로서 그리고 기업의 지속번영원리로서 기업 및 산업현장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될 수 있다.
 
기업레벨에서 이익추구 일반이론을 기초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가 구축된 것은 마치 경제레벨에서 케인즈(Keynes)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기초로 거시경제(macro economics)가 자리자게 된 경우와 비견(比肩)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자족하며 감히 그리 생각해 보기도 한다.
 
현재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중국 북경대 MBA 정규 이수과목으로 가르쳐지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 전역으로 확산 중에 있고, 한편 한국 재벌구조의 진화논리가 영국 Wiley-Blackwell 출판사 경영백과사전 3판(2014)에 실려 전 세계경영학계와 산업계 및 컨설팅업계로 보급되며 글로벌 촌으로 퍼지고 있다.
 


김인호 교수는 서울상대(1965)와 공군장교복무후(1969),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전원자력연료(KNFC),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등 정부출연기관에서 10여 년간의 연구경험을 갖고 1981년 한양대학교에 부임하여 27년간 연구소장·학장·대학원장을 역임하며 주로 기업·산업연구에 전념했다. 2008년부터는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경상대학 경영학부 명예교수로 재임 중이며 현재 다이내믹 매니지먼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교수는 사업과 기업, 기술전략 관련 서적을 수십 권 저술하였으며, 최근 저서로는 2008년에 출판된 ‘Dynamic Management Theory’와 2010년에 출판된 ‘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 그리고 2013년에 출판된 ‘Dynamic Enterprise Strategy (Chinese version)’가 있으며 이들은 현재 amazon.com에서 판매되고 있다.
(자료출처: 동태경영학회 Dynamic Management Society)

 

Do you know where..

Do you know where you’re going to.. 오래 오래 태고적의 미국 pop song, 아마도 Diana Ross의 hit song 제목이었을 것이다. 그 노래는 나도 좋아 했던 기억이다. 멜로디보다도 그 제목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고 현재도 그렇다. 내가 조금만 방황하는 기분이 들면 이 ‘누가’ 이 제목의 말로 나에게 속삭이는 느낌을 받곤 한다. 요사이.. 몇 달간은 더욱 이 속삭임이 나의 귀를 잔잔히 감싼다. ‘경우야.. 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엄마의 자상한 목소리로 들릴 때도 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완전히’ 알고 있는 우리 엄마가 답답하게 느끼셨는가.. 경우야, 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그렇다. 비록 최근에 나는 ‘이상하게 으시시한 평화’를 가끔 느끼곤 하지만 그 뒤쪽에는 항상 이 말이 숨겨져 있다. 너무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일까? 하지만 가끔 만끽하는 ‘평화’는 정말 의외의 것이다. 한달 여 나를 괴롭히던 치통의 고통도 조금 완만해졌고, 익숙해져서 그런가? 아닐 것이다. 지난 3년 넘게 ‘노력’을 한 보람일까? 그것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 성령님의 선물일까? 내일 벼락이 떨어져도 느낄 수 있는 나만의 평화.. 그것의 맛을 조금 보여주시는 것일까?

 

지난 5월 말의 레지오 피정.. 지나간 해 보다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맞았지만, 역시 old wisdom은 맞는가.. 예상보다 양과 질에서 비교가 안 되는 기대 이하의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문제는 안 된다. 내가 그곳에 갔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제 모두 익숙해진 ‘자매님’들을 대하는 것도 조금은 즐거운 일이 되고 있음에 나는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어떨 때는 청춘의 한창 시절 명동의 어떤 곳에서 ‘멋진 아가씨’들을 보고 우리들 끼리 즐거운 상상을 하던 때를 떠올리기도 해서..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지 혼동을 받는다. 나와 하신부님을 제외한 모두가 여성들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가벼운 즐거움이요, 놀람으로 느껴지는 것.. 어떨까..신경을 쓸 것은 많다지만 반드시 나는 솔직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들을 ‘이성’으로 느낀다는 사실은 과연 ‘억제’해야만 하는 ‘죄’일까.. 아니기를 바라지만 이것은 100% 나의 ‘속마음’의 영역이다. 하느님만 아실 것이다.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순간순간의 감정들인 것이다.

싸늘한 5월의 어느 날에..

¶  와~~ 싸늘한 아침.. 부엌의 창문 밖에 있는 온도계를 보니 40도(화씨)도 되지를 않는다. 이 정도면 아마 겨울에나 볼 수 있는 그런 기온이 아닌가? 문제는 지난 1주일 넘게 계속된 80도(화씨)를 훨씬 넘는 ‘초여름’ 같은 날씨에 거의 적응이 되어가고, 서서히 ‘겨울 장비’를 거의 완전히 ‘철거’하고 있어서 어제, 오늘의 ‘추위’는 더 차갑게 느껴진다.

 

여름같은 5월초를 보여 주는 tower fan 옆에는 추위에 떠는 Tobey가..

여름같은 5월초를 보여주는 대나무 돗자리 위의 tower fan 옆에는 추위에 떠는 Tobey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radiant space heater가 closet속 에서 끌려 나왔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radiant space heater가 closet속 에서 끌려 나왔다

 

물론 이것이 ‘또’ global warming의 여파라고 속단하지는 않는다. 경험적으로 나는 5월 달의 깜짝 추위를 많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의 ‘한파’는 1주일의 ‘열파, heat wave’에 바로 이어졌기 때문에 조그만 뉴스 감이 된 것이다. 느끼는, 체감적인 온도는 확실히 5월의 40도와 1월의 40도와 확연히 다른 것이다. 더 춥게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입을 옷도 없었고, 거의 철거되기 직전의 space heater를 다시 가동을 하고, gas 낭비를 없애기 위해서 central heating을 완전히 끄려는 timing등.. 조금은 웃기는 노릇이 아닌가? 아침에는 잠잠하던 central heating이 다시 가동을 하기도 했다. 참.. 재미있는 5월 중순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번 season의 ‘마지막 겨울’이 될 것이고 본격적인 여름 준비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  올해의 Mother’s Day미리 얘기가된 것처럼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했고, 나라니가 사는 apartment에서 ‘아이들’이 준비한 늦은 점심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곳의 ‘전통, 풍습’대로우리는 대부분 밖에 나가서 식사(外食)을하곤했는데 얼마 전부터는조금은검소하고조촐하게 보내기로 합의를 보게 되어서편안하게 집에서식사를 하게된 것이다. 매년 이날, Mother’s Day(5월두째일요일)가 오면 나의머리는 찐~한 생각으로 더 복잡해진다. 우리집 두딸들엄마의 의미와 더불어, Mother란 ‘영어’ 단어가 ‘어머니, 엄마’란 한글말과 거의 같은정도로 가깝게 들리는 ‘비선택적인’ 삶을 살게 된 ‘운명’을 생각하며, 그 운명의 그늘에서 나의엄마, 어머니와의 추억을 더욱 뼈저리게 느낀다. 분명히 인간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있다는 생각, “인생은선택” 이란말의 허구성도 더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KENT STATE

 
‘OHIO’, Crosby Stills Nash & Young 1970

 

KENT STATE.. 1970년 5월 4일, Kent State (University)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기억한다. 이 학교는 오하이오 주 동북지역에 있는 비교적 작은, 알려지지 않던 학교였지만 1970년 5월 4일에 일어난 이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거의 며칠 만에’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그날 이후 역사적인 파장과 의미도 상당하였다. 그날이 바로 1970년 5월 4일 이었다.

1970년 5월.. 기억을 더듬는다. 나의 기억력이 제일 활발하던 22세 시절 그 시절은 어떤 시절이었을까.. 나의 연세대 졸업반 시절, 바로 몇 주전에는 그 유명한 APOLLO 13의 극적인 귀환 뉴스가 있었다. 또한 ‘불도저, 건설 붐’의 서울의 실패작 ‘와우 아파트’ 가 ‘와우~~’ 하며 붕괴를 했었고, 나는 당시 연세대 전기과의 제주도 졸업여행을 ‘반납’하고 창희 용현이와 지리산 장기등반의 희열을 맛 보던 그런 때이기도 했다.

졸업 후의 걱정은 비록 서서히 나의 머리를 누르긴 했지만.. 22세의 나이에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모든 관심은 가능성이 100% 같이 보이는 ‘멋진 인생’에 있었고, 나를 둘러싼 사정들: 정치, 경제, 사회..등등 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먼 걱정’은 당장이라도 탱크로 밀고 내려올 듯한 휴전선 너머의 빨갱이들과, 다른 빨갱이 월남의 베트콩에 ‘밀려서 고전하는’ 우리의 ‘보호자’ 미국의 어려운 사정이었다.

당시 우리와 같은 대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빨갱이를 증오하는 기본자세는 갖추고 있었고, 그 전해에 있었던 박정희 3선 개헌도 데모를 통한 반대를 하긴 했지만 ‘박정희의 명분’은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 이후에 나온 대학생 ‘군사훈련: 교련’도 반대 데모를 했지만 이미 국민정서는 ‘무조건 안정’으로 흐르고 있었다. 낭만적인 대학 캠퍼스 내에서 장난감 총으로 받던 ‘어린애 장난’ 같던 교련을 우리는 별 수 없이 받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런 식의 ‘교련’이 빨갱이를 막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 지는 우리들도 웃을 정도였다.

당시 미국이 고전하던 월남은 한마디로 완전 교착상태였고 미국의 여론도 서서히 ‘철군’ 쪽으로, ‘협상’ 쪽으로 흐르던 때였다. 미국은 비록 기술적, 화력 등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월맹(북 월남)과 베트콩(게릴라)는 ‘민족적 이념’으로 똘똘 뭉친 만만치 않은 적으로 사실은 장기적으로 그들에게 승산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 특히 캄보디아가 바로 옆에서 피신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런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닉슨은 그 때 캄보디아 ‘침투’를 선언하게 되었다. 일방적인 선전포고였다.

전쟁이 끝나가나 희망을 했던 미국 여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고, 특히 군대로 나갈 확률이 더 커진 미국 대학생들이 열을 올리며 데모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전에도 간간히 반전 운동이 있었지만 이번은 달랐고, 특히 KENT STATE 캠퍼스에서 일어난 ‘비극’이 그 도화선이 된 것이다.

우리들도 대학교 주변에서 데모를 한 경험, 특히 3선 개헌 반대 (1969), 교련반대 데모 등을 한 경험이 있었지만 데모저지를 하는 군경찰 들은 4.19때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총기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그저 최루탄과 투석..그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10월 유신 이후에는 조금 달라졌겠지만.. 그런데 인권, 인명을 최 우선시 한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보루인 미국, 그것도 대학교 안에서 군인들이 총을 ‘난사’ 해서 사상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우리도 사실 놀랄 일이었다.

비록 4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가 나온 비교적 작은 비극이었지만 그 뉴스의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들이 총을 쏜 거리는 거의 100m를 넘어서 사실 ‘대치’ 상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고 엄밀히 말해서 ‘실탄’으로 발포할 이유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날의 상황을 wikipedia에서 보면 이것은 거의 ‘순간적인 사고’로 보인다. 대치 상태에서 서로의 의도를 오해한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2차적인 문제였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여론과 정치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반전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미국의 ‘모든 학교’가 데모에 가담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월남전은 점점 증오의 대상이 되어갔고 징집자들은 하나 둘씩 도피하고.. 하지만 이 여파로 ‘데모 진압’의 기술이 연구가 되고 실탄 사용이 억제되는 등..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iconic, Pulitzer-prize winning picture
iconic, Pulitzer-prize winning picture

당시의 현장 사진 중에 하나는 ‘역사 박물관 용’이 될 정도로 유명한 것이 있었다. 입에 M1 소총을 맞고 ‘즉사’한 학생 Jeffrey Miller, 그 옆에서 고함을 지르는 14살의 ‘가출 소녀’ Mary Ann Vecchio의 사진.. 그것은 나중에 Pulitzer상을 받았다. 한 마디로, wikipedia에 따르면 “most enduring image of the events, and one of the most enduring images of the anti-Vietnam War movement” 이 된 것이다. 사진화보 주간지 LIFE는 완전히 cover story로 그것을 다루었고 ‘재수 없이’ 사망한 학생들, 특히 ‘반전’과는 무관한 ROTC 학생, William Schroeder는 데모와 상관없이 강의실로 걸어가다가 ‘횡사’를 한 case를 다루었다.

이 사건 이후 반전운동, 문화가 확산되고 ‘주옥 같은’ 반전 음악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이 사건을 다룬 hit song도 있었는데 바로 Crosby, Stills, Nash & Young이 부른 ‘OHIO‘ 란 노래였다. 당시에 꽤 hit를 한 것이고 이런 영향의 도움으로 여론은 점점 반전으로 기울게 되었다. 당시 우리 입장에서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왜 ‘빨갱이’한테 그렇게 고전을 하고 있는가.. 왜 국민전체가 더 단결을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월남에서 ‘후퇴를 하거나 만에 일 지기라고’ 하는 날에는 김일성 빨갱이들도 ‘한번 더 해보자’ 하는 엉뚱한 꿈을 꿀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도 박정희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향 후 월남에서 ‘패 한’ 결과를 초래했지만 다행히 그 여파가 한반도로 옮겨오지는 않았다. 이미 빨갱이들의 ‘전쟁 능력’에 한계가 들어나기 시작했고 반대로 박정희의 원대한 국력개발의 꿈은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기에 이때 벌써 ‘대세’는 정해지지 않았을까.. 이데올로기와 냉전의 그늘에서 한 세대를 보낸 나로써는 사실 월남전이 어떤 ‘의미’를 주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현재로써는 ‘가끔 감상에 젖고 싶은’ 추억의 일부일 따름이다.

 

kent-21970년5월 15일자 LIFE magazine cover

 

kent-7Kent State campus, 최루탄으로 해산을 시도하는 Ohio National Guard

 

kent-3권총과 M1 소총을 ‘일제히’ 발사하는 주 방위군

 

kent-4

kent-6사망한 Jeffrey Miller 옆에서 비명을 지르는 ’14세 소녀’

First of May, 오발탄, 5.16 박정희 소장

¶  First of May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루 루루루루.. 아련히 Bee Gee’s의 애수 어린듯한 멜로디가 귀를 울린다. 5월 1일이라는 제목의 이 First of May oldie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oldie중의 하나다. 왜 이 ‘명곡’의 제목이 5월 1일인지는 가사를 아무리 읽어도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어린, 소싯적의 꿈과 우정이 세월의 여파에도 빛난다는 것으로 나는 ‘아전인수 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며 산다는 사실이다.

When I was small, and Christmas trees were tall,
we used to love while others used to play.
Don’t ask me why, but time has passed us by,
some one else moved in from far away.

Now we are tall, and Christmas trees are small,
and you don’t ask the time of day.
But you and I, our love will never die,
but guess we’ll cry come first of May.
The apple tree that grew for you and me,
I watched the apples falling one by one.
And I recall the moment of them all,
the day I kissed your cheek and you were mine.

Now we are tall, and Christmas trees are small,
and you don’t ask the time of day.
But you and I, our love will never die,
but guess we’ll cry come first of May.

When I was small, and Christmas trees were tall,
do do do do do do do do do…
Don’t ask me why, but time has passed us by,
some one else moved in from far away.

 

20대 비교적 짧은 시기의 청춘 때 만들었던 작은 우정의 친구들, 청운의 꿈을 안고 헤어졌지만 언제고 다시 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으리라는 꿈도 있었다. 특히 이맘때면 창희와 용현이를 곁들여 생각한다. 식구보다 더 가까웠던 죽마고우 친구들.. 순진했던 꿈은 삶의 세파에 시달리고 거의 잊고 살기도 했지만 사실은 뇌리의 깊은 곳에 그 녀석들은 언제나 생생하게 남아서 나를 반기었다.
특히 그 녀석들과 Bee Gee’s 의 이 명곡을 듣던 때 1970년과 불도저의 소음으로 요란했던 서울 거리를 회상한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서도 우리는 우정에 대한 희망은 잊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우리의 조국, 우리는 운명을 믿지 않을 정도로 젊었었지만 떠날 수 밖에 없었지..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었을까? 친구여.. 잘들 살게.. 1977, 1988, 1999년을 모두 놓치고, 21세기부터는 해가 가는 것을 포기했지 않은가? 잘들 살게.. 어데서고 언제나 언제나..

 

 창희야, 용현아 그립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 오발탄, 전후 문학, 소설가 이범선 작가의 1950년대 소설작품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다. 그 당시면 나는 중학교 1학년 정도의 코흘리개로 만화 라이파이에 더 어울릴 나이었기 때문이다. 그 작품이 그래도 그 당시 나의 귀에 익은 것은 역시 같은 제목의 영화 때문이었다. 극장 포스터에도 보이고 신문광고에도 보여서 더 그랬을 것이고.. 무언가 ‘문제 영화’임도 짐작을 하였다. 간단한 역사극이나 순정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 당시 사회상을 ‘적나라’ 하게 ‘고발’ 했던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그것을 반세기가 지난 지금 70mm 대형 극장 스크린이 아닌 23″ computer monitor로 보고 있는데 1960대 초 기억에도 생생한 서울의 풍경들이 ‘여과’없이 찍혔던 이 영화를 이렇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작은 기적에 속한다. 분실되었던 original film이었지만 미국 San Francisco영화제에 출품을 했던 덕분에 그곳에서 다시 찾았다고 처음 화면에 나온다. 그때 출품을 안 했었으면 이것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특히 5월이 코앞에 다가옴과 곁들여서 5.16 혁명 주체 ‘박정희 소장‘이 생각난다. 한마디로 그가 제시하는 5.16 혁명의 명분이 이 영화 오발탄에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1960년대 초의 분위기를 충실히 화면에 담은 이 영화는 몇 번을 보아도 ‘수준작’이다. 김진규, 최무룡의 연기도 아주 실감이 간다. 비록 중산층이 거의 없던 그 시절이었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중산층같이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고지식하고 도덕적인 자세로 세파를 헤치려는 김진규와 그런 형이 답답하기만 한 동생 최무룡.. 이들은 기본적으로 착하고 도덕적이지만 그들이 몸담은 ‘서울거리’는 그들을 지옥같이 느끼게 한다. 최무룡이 못 참고 최후 수단을 쓴 것은 결국 ‘오발탄’이 되어 형을 더욱 곤경으로 빠져들게 하고.. ‘가자 가자..’ 를 외치는 정신이상의 어머니, 영양실조 상태로 난산하는 아내 문정숙은 허무하게 죽어가고.. 이것이 그 당시 1960년대 초 서울 장안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이런 모든 비극의 기본 뿌리는 역시 6.25를 겪은 후 썩은 ‘민간’ 정권 하에서 계속되는 ‘절대로’ 희망 없는 경제사정에 있었다. 한마디로.. 돈과 희망이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굶주린 배를 해결하기 전에 의미 있는 민주주의는 무의미하다. 우선 배고픈 것을 해결하자.. 아마도 이것이 박정희 소장의 간단한 혁명 논리였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다. 최소한 나는..

 

우울한 자비 주일 2014

성인 요한 23세(왼쪽),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요한 23세(왼쪽),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2014년 4월 27일 일요일.. Divine Mercy Sunday 그러니까 2014년 자비의 주일이다. 교회 전례력으로 매년 부활주일 다음주일이 자비의 주일이지만 올해는 두 명의 새 성인이 탄생하는 날이기도 해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런 ‘경사스런’ 날 아침에 나의 머리는 복잡하고 우울하기만 할까? 나의 무거운 머리 속은 시성식이 거행 되었던 바티칸 시국과 내가 낳고 자랐던 정든 조국의 남쪽바다, 진도의 상상된 광경으로 가득 차있다. 이렇게 대조적일 수가 있을까?

하느님의 자비가 두 명의 성인을 탄생시켰지만, 하느님의 자비가 철저히 비어있던 불쌍한 곳에서는 죄 없는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끝이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구약성서 ‘욥기, Job’의 절규조차 질리게 할 만한 슬픔이 있을 수 있을까? 짧은 생을 살아야만 했던 순진한 영혼들은 다음에 어떤 ‘생’으로 이어질까..여기에도 하느님의 자비가 관계가 되어 있을까? 나는 믿고 싶다.. 이 어린 영혼들의 ‘지상에서의 삶’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의미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내세에서 더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세월호 참극 뉴스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더 피할 뻔뻔스러움이 싫어졌다. 아예 슬픈 감정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것을 알았다. 피하고 피할 수록 더 불안하고 미안한 심정을.. 아예 100% ‘가슴을 열고 슬픔에 동참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Vatican youtube site에서는 이곳 시간으로 오늘 새벽 3시에 거행된 두 분 교황의 시성식이 뒤 늦게 stream되고 있고 다른 쪽 CNN에서는 대한민국 prime minister의 사임 뉴스가 보인다. 청와대 바로 직전까지 불똥이 튄 것이다. 현재의 국민적 심리로 보아서 거의 당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정치적인 여파는 거기서 끝났으면 좋겠다. ‘박’씨라면 이를 가는 ‘빨갱이’들을 위시한 정적 政敵들이 이런 비극을 ‘이용’하는 것은 절대로 추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심정을 아는 듯, 부활절 때 그렇게 좋았던 바티칸의 날씨도 이번에는 흐리고 가랑비까지 내린다. 내가 그렇게 존경했던 20세기의 진정한 거목, 요한 바오로 2세와, 어렸을 때(1960년) 신문에서만 보고 들었던 요한 23세.. 이제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요한 23세는 카리스마는 없지만 천주교를 21세기로 향하는 발판을 마련한 바티칸 공의회 Vatican II를 과감하게 밀어 부친 실로 큰 일을 하였다. 라틴어로 보던 미사가 지역언어로 바뀌는 등 그는 실로 미래를 향한 초석을 깔아 놓고 간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세속화가 가속되는 초 현대를 이해하고 유럽과 남미에 치중된 천주교를 전세계로 그야말로 세계화, 지구화를 시킨,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카리스마의 인물.. 자기의 조국 폴란드에서 시작, 공산당의 그림자를 지구상에서 몰아내는 시발역할을 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는 서서히 21세기의 신앙 주역을 맡기 시작하게 되었다. 실로 이 두 전 교황은 성인의 요건을 100% 이상 가진 인물 들이었다.

자비는 나의 사명: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자비는 나의 사명: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자비의 예수, 상본
자비의 예수, 상본

자비의 주일.. Divine Mercy.. 사실 이것도 ‘성인’ 요한 바오로 2세의 숨결이 느껴지는 그런 축일이다. 자비의 축일의 근원은 요한 바오로 성인의 조국인 폴란드 출신의 ‘못 배우고, 가난한’ 어떤 수녀, 지금은 성녀인 성녀 파우스티나 St. Faustina였다. 20세기 초반, 2차 대전 발발 전까지 살았던 그녀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고 ‘예수님의 자비’를 온 세계에 퍼뜨리라는 사명을 받고 그것을 일기에 모두 적는다. 주위 시기에 가득 찬 동료 수녀들의 방해를 극복하고 그녀의 사명은 세상에 알려진다. 그것이 그녀의 일기였던 ‘자비는 나의 사명‘이란 책이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인간을 사랑하고 싶고 자비를 주고 싶은 예수’가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2000년 초에 그녀는 동족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시성이 되었다. 자비의 축일은 사실은 예수께서 그녀에게 지시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결국 그녀의 일기, ‘자비는 나의 사명’이었다. 몇 년 전에 나는 이 책을 reading by typing으로 모두 읽어 보았는데.. 신체적인 병고를 무릅쓰고 주위 수녀들의 질시, 방해를 극복하던 그 성녀, 수녀님의 모습들이 머리 속에 그려지곤 했다. 성모님의 발현도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서 예수님의 심장에서 찬란하게 퍼져나가는 ‘자비의 빛’을 상본으로 그리라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잘 믿기가 힘들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다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받은 ‘작은’ 은총일지도 모른다.

세월호, 자비 주일, 두 거대한 교황성인.. 이 세가지는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위안을 받고 싶다. 자비가 넘치는 예수님을 필두로 두 분의 성인 교황님들의 전구의 효과 등을 감안한다면 죄 없이 일찍 하늘나라로 간 어린 영혼들과 불쌍한 영혼들은 충분히 위안을 받으리라.. 또한 유족들도 그에 못지않은 천상의 위안을 받으며 슬픔이 치유되리라.. 기도하고 기도한다.

두 장례미사, ‘세월호’ 분향

¶  작은 기적을 낳은 죽음

4월 들어 두 번의 장례미사와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듯한 분향이란 것.. 우울하게만 느껴지는 이 ‘장례와 분향’이란 말들이 4월의 찬란한 태양과 어찌 그리 대조적 느낌을 주는가? 장례식이나 장례미사는 이제 나에게는 그리 서먹한 것이 아니지만 분향은 사실 느낌이 아주 달랐다.

4월이 시작되자마자 오랜 병고 끝에 선종하신 데레사 자매님, 병고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그 자매님이 사랑하셨던 성모님 곁으로 가셨다는 안도감과 그래도.. 여기서 더 보고 싶었을 단출한 유가족 생각이 교차 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오랜 병고를 치르면 사실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을 것 같지만 어찌 그런 감정이 다 똑같을 수가 있을까? 살아온 세월, 사랑했던 가족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다를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인생여정이 아니었던 조금은 독특한 인생여정을 살았던 데레사 자매님, 얼마나 사연이 많았을까? 끝까지 옆에서 묵묵히 그 자매님을 지켰던 독일인 남편과 외동 따님, 예상은 했겠지만 슬픔 감정은 억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데레사 자매님은 1950년대 초 숙명여고, 이화여대를 나오시고 60년대에 혈혈단신 미국에 오신 용감함이 있었고 남과 같은 평탄한 인생을 고집하지는 않으셨던 듯하다. 뉴욕에 사시며 현재의 독일 출신의 남편을 만났고 딸을 하나 두셨다. 가톨릭 신심, 그것도 성모님을 통한 신심으로 일생을 보내셨고 성지순례를 많이 하고 자서전 신앙고백인 책도 남기셨는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그 옆에서 같이 일생을 보낸 남편은 ‘요지부동’으로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고집이 센’ wife의 등살을 어떻게 견디었는지..착한 심성으로 아내를 보살피긴 했지만 아마도 신앙적인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연숙을 통해서 어렴풋이 이 자매님과 남편을 알게 되었지만 가끔 ‘봉성체’ 를 통해서 근황을 알게 된 정도였다. 한번은 그 독일남편과 가까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2차 대전 종전 전후 독일의 사정을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소년이었던 그는 미군 점령지역에 있어서 소련군 지역의 수많은 ‘참상’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 미군이 보여준 ‘인간애’에 감동을 했고 결국은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점령군이 아닌 구세군 격인 미국을 동경하며 왔을 듯하고 정착지였던 뉴욕에서 다른 꿈을 가지고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데레사 자매와 만났을 것이다. 독일과 한국은 사실 판이하게 다른 역사, 문화를 가졌겠지만 둘 다 비참한 전쟁의 후유증을 겪은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조금은 동병상련 의 감정을 가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데레사 자매님의 임종 즈음에 병자성사가 있었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 괴로운 모습이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홀로 남는 사랑하는 남편과 사후에 완전히 이별을 할 것 같은 걱정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것을 간파한 그 남편은 아내와 이별하기 전에 ‘세례를 받겠다고’ 일생일대의 결정을 하고 초 특급의 세례식이 병상 옆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이 끝난 후에 편안하게 선종을 했다.. 고 들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일화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데레사 자매님은 분명히 죽어서 남편과 ‘재회’를 못할지 모른다고 확신을 했던 것이다.

그 남편이 아내가 쉽게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것 만으로 세례를 받았을까? 50년 이상을 버티어 왔는데 말이다. 여기에는 더 한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따님과 같이 마지막 병상을 지키던 중에 그 부녀는 데레사 자매님의 병상주변에서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니까 어떤 ‘에너지’가 병상에 온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나중에 그들은 ‘아마도’ 그 에너지가 그 자매님이 그렇게 사랑하던 성모 마리아가 아니었을까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세례를 받게 된 제일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병원 환경에서는 이런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아주 흔한 이야기라고 한다. 세상을 떠나는 그런 자리에 무언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독일인 남편은 마이클(미카엘)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자가 되었다. 장례식을 거치며 그는 정말 바뀐 듯 했다. 이제야 50년 이상 자기 wife가 무엇을 믿으며 살았는지 늦게나마 알아 차리는 듯했다. 가까운 가족이 거의 없는 상태여서 장례절차가 조금 쓸쓸할 것으로 우려 되기도 했지만 예상을 뒤엎고 그 자매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가는 길이 너무나 훈훈하기만 했다. 이화여대 동창회에서는 막강한 합창단이 와서 멋지게 조가를 불러 주었다. 한마디로 아주 멋진 장례미사가 된 것이고 유가족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경험과 위로를 남기는 그런 시간들이 되었다. 곧 이어서 부활절을 맞이하게 된 그 유족들.. 비록 한인 사회에서 조금은 멀어지겠지만.. 새로 찾게 된 ‘아내의 선물, 하느님’과는 더욱 가까워 지리라..

 

¶  레지오와 신부님, 그리고 작은 장례미사

또 다른 장례미사는 너무나 느낌이 달랐다. 성삼일, 부활절의 연속으로 쌓인 피로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89세 할머님의 선종으로, 또 다른 장례미사 소식이 들려왔다. 이럴 때 우리는 선택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장례미사나 연도의 소식이 전해지만 우선 물어보는 것이.. 이분이 누구일까.. 가족들은.. 경제사정은.. 실제적인 물음이지만 유족들을 잘 알 수 없기에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문제는 레지오 단원인 우리는 의심 없이 ‘무조건’ 장례절차에는 신경을 쓰며 참석하려 노력을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 성당 공동체에 비교적 잘 알려진 가정이면 별로 문제가 없지만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들려오는 소식에 유족의 ‘경제적’인 문제와 친숙한 교우가 아니라는 사실과 조금은 피로했던 때 (부활절 직 후).. 모든 것이 조건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장례식이 또 쓸쓸할 것 같은 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갈 ‘기운’이 나지를 않았다. 혹시 ‘숨었던 유족 친지’들이 의외로 많이 참석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위로를 하기도 했다. 결국은 우리는 못 갈 것 같은 예감이 지배를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 주임신부님이 팔을 걷고 나서서 레지오 단원들을 ‘밀어’ 부치는 ‘의외적인 일’이 벌어졌다. 레지오는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은 4명의 유족들이 홀로 치르게 되었을 뻔했던 쓸쓸한 장례식이 레지오 단원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미사’로 승격되어 진행이 되었고 유족들도 많은 위안을 받았으리라 생각이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군대같은 조직을 가진 레지오의 기동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번 ‘사건’은 사실 주임신부님의 ‘독자적 결단’으로 성사가 된 것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평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부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마도 오랜 전 또 다른 주임신부 같았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명품과 부자와 명예’를 사랑했고 곤경에 처한 사람은 냉대했던 그 다른 신부의 행적을 상기하면 현 신부님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일 정도가 아닐까?

 

¶  머나먼 세월호 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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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들같이 어린 영혼들..어떻게..

이번의 ‘레지오 주동’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오니 장의사 바로 옆에 위치한 한인회관에 한 장의 공고가 붙어있음을 보니.. ‘분향소’라는 글자였다. 자세히 보니 ‘세월호 영혼을 위한’ 분향 공고였다. 그것도 우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부님이 ‘쏘신’ 점심 회식 후에 잠깐 들려서 분향을 하였다. 한마디로 안 할 수가 없었다. 아틀란타와 진도는 물리적, 심리적으로 엄청난 거리였고 느낌도 멀 수 밖에 없었지만 속 마음들은 그것이 아니었다. 할 말을 잊는 우리 심정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이 ‘분향’이었다. ‘추악하고 인간답지 못한 어른들‘의 ‘도움’으로 채 피지 못하고 하늘로 일찍 가버린 어린 꽃다운 영혼 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크고 작은 사연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야만 했을 숨겨진 영혼들.. 육체적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자고 위로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할까? 하지만 ‘정의’는 끝까지 찾아야 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날 수가 없는 그런 살기 좋은 조국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또한 날벼락을 맞은 박근혜 정부도 필요이상의 큰 타격이 없기를 바란다.

 

나를 정말로 슬프게 했던 절망적인 장면.. 할 말을 잊는다

나를 정말로 슬프게 했던 절망적인 장면.. 할 말을 잊는다

이 덩치가 큰 배가 그렇게 순식간에 death trap이 되었을까.. 역시 말을 잊는다.

첫 Holy Triduum

Triduum..트리듐, the Three Days: 부활 일요일을 향하는 목,금,토요일 3일을 뜻한다. 다른 말로 Easter Triduum, Paschal Triduum이라고도 한다. 우리말로는 그저 ‘성삼일’ 정도가 될까? 그 첫째 날 목요일이 바로 오늘이다. 그러니까 2014년 Easter season의 절정 문턱에 있는 첫 날이 되는 것이다. 참.. 세월도 빠르지 엊그제 주님 성탄을 향한 대림절을 지낸 기억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리스도 교의 결정체인 주님의 수난, 묻힘, 부활을 기리는 바로 그날이 코 앞에 온 것이다.

가톨릭 전례에서 성삼일은 성 목요일, Maundy Thursday, 성금요일, Good Friday 그리고 성 토요일 Easter Vigil 로서 정확한 시작은 목요일 저녁 미사로 시작되어 토요일 미사로 끝난다. 인상적인 것은 시작점인 목요일 마사로 전통적으로 이날 신부가 신자 12명을 뽑아서 발을 씻기는 것이 있고 (세족례) 대영광송이 끝남을 시작으로 오르간과 종 소리가 금지되고 부활아침까지 결혼예식도 금지가 된다. 성 목요일 미사의 마침을 기해서 성전 내부 제단 주변의 모든 ‘장식물’이 모두 철거가 된다 (움직일 수 있는 것들만). 처음에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 나는 이런 상징적인 의식들이 하나하나가 모두 성서적, 신학적, 전통적인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고, 너무나 인상적이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예수의 수난 passion의 의미를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금요일 Good Friday는 실제로 예수님이 ‘죽는’ 날로서 전례적인 행사는 거의 없는 것인데 (정확하게 미사는 없는 것이다) 전날 축성이 된 성체를 분배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하며 특히 십자가 경배 veneration of cross라는 것을 통해서 십자가 죽음을 애도하며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 성토요일 밤의 미사는 부활을 기다리는 주제로 깜깜한 밤, 성전의 밖에서 만들어진 ‘촛불’이 성전으로 들어오면 촛불 미사가 진행이 된다. 이런 광경도 너무나 인상적인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원칙적’으로 성삼일을 체험적으로 기리는 것으로 정하고 ‘절대로 빠지지’ 않고 3일 ‘행사, 미사’에 참가를 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큰 부담도 느꼈지만 시간이 가면서 이제는 은근히 기다리게 될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분명히 이 부활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되면서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절감하게 되었다.

작년 2013년의 성목요일은 나의 첫 체험 시도로 성삼일 시작인 저녁 미사 후부터 시작되는 “감실성체조배”에 참가를 하였다.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계속’되는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이었는데 한 사람이 계속하기가 쉽지 않아서 1시간 정도로 시간을 정해서 대부분 레지오 단원들이 책임지고 감실을 지키며 성체조배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정 후 1시부터 한 시간 참가했는데.. 그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글로 쓸 수없이 강해서 오늘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 이후 나는 내년에도 ‘꼭 참가’하리라 각오를 했다. 그 ‘내년’이 오늘 밤으로 다가온 것이다.

작년 성목요일 감실 성체조배 때에는 그 당시 발견한 Dr Eben Alexander의 The Proof of Heaven이란 신간 NewYork Times bestseller를 읽으며 묵상도하고 했는데, 그때 나는 거의 확신을 하게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처럼 ‘이성과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신경외과의 그러니까 자연과학자인 저자의 ‘간증’이 그렇게 나에게 실감 있게 다가온 사실은 정말 나에게도 뜻밖이었는데 아마도 그 때의 성체조배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나는 굳게 믿는다. 그 이후 나는 이성과 신앙만이 아닌 ‘과학과 믿음’의 접근 분야에 대해서 거의 일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되어서 현재까지 이르렀다. 이것의 출발 점이 바로 작년 성목요일이라서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올해는 ‘첫 성삼일’이라고 이름을 부쳤다. 자세히 말하면 우리의 첫 ‘한인 순교자 성당’ 성삼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한국 순교자 성당에서 부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것도 우리에게는 두고두고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해 본다. 암만 동네의 미국본당에서 긴 세월을 보냈지만 어찌 우리말이 울려 퍼지는 고향 같은 다른 본당과 비교가 되겠는가? 아직도 반반 정도 미국본당과 순교자 성당 본당을 번갈아 가지만 조금씩 순교자 성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감을 느낀다. 앞날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더욱 더 한국본당으로 가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추측도 해 본다. 워낙 미국본당에 정이 든 탓에 한국전례문화가 너무나도 생소한 우리 두 딸들을 설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져서 우리의 큰 과제로 남게 되었다.

 

아플 때와 사랑할 때..

4월 초부터 나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서 거의 2주간을 고생을 하였고 사실 지금도 깨끗한 몸이라고 볼 수가 없다. 독감 특유의 패잔병들인 가래가 섞인 기침에 아직도 밤잠을 설치고 사람들 속에서는 기침이 나올까 봐 초긴장 상태가 된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평범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나는 많은 생각과 추억과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가끔 아프기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육체적인 아픔이 남기는 긍정적인 여파일지도 모른다.

흔히 겪는 감기 몸살이었으면 하루 밤 정도 Tylenol 두어 번 먹으면 끝난다. 하지만 flu 독감은 다르다. 기분 나쁜 열이 머리 속을 괴롭히고 각종 allergy 반응으로 정신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의 독감을 나는 근래에 앓아 본 적이 없었다. 기억조차 잘 나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심리적인 여파도 컸다. 아~ 내가 늙었나 보다.. 하는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부랴부랴 독감예방주사를 맞는구나 하는 후회감도 들었다.

비교적 규칙적이고 바쁜 평소 나의 daily routine들이 all stop이 되고 보니 이런 저런 생각들로 더욱 기분이 쳐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나는 ‘남이 아플 때’ 나의 자세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남의 아픔을 실감을 못하며 ‘건성으로’ 그들을 대했던 것이다. 아팠던 기억을 잘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들의 아픔에 동참한 기분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새로 느낀’ 생각을 나는 아마도 이것도 성모님께서 나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닐까 추측도 해 본다. 그렇다면 나는 아픔을 통해서 좋은 것을 배운 셈이다. 물론 독감 정도로 이보다 훨씬 고통이 심한 병과 비교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상상은 하게 되었다.

솔직한 고백으로 나는 주변의 아픔, 특히 육신적인 아픔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저 그들의 아픔을 ‘피하기만’ 하는 자세였다. 동정은 할지언정 적극적인 자세로 사랑으로 동참하며 아픔을 반으로 나누려는 ‘용기’가 나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이런 것으로 나와는 정 반대 스타일인 연숙과 항상 갈등을 빚으며 살았다. 아픔을 나누려는 것과 그저 아픔을 속으로 참으며 ‘없는 것’처럼 행세하려는 것은 사실 정 반대가 아닌가? 나의 변명은 항상 ‘아픔은 속으로.. 참고.. 나타내지 말고..’ 하는 나의 성격 탓이라는 것 뿐이었다.

이번에 느끼는 아픔으로 나는 어릴 적, 태고 적의 아픔을 회상하기도 했다. 희미한 기억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또렷한 기억들이다. 어릴 적 나는 비교적 많이 병을 앓았다. 아직도 그때의 ‘열의 고통’을 나는 또렷이 느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역시 ‘독감’ 종류였을 것이다. 나이 탓인지 사경을 헤맬 정도를 고열로 치솟고 나는 완전히 며칠을 악몽 속에서 헤 매야 했다. 단출한 우리 식구, 엄마와 누나는 초 비상상태가 되고, 100% 나의 고통을 덜어주는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그 때의 그 느낌들은 역시 간단하게 표현해서 ‘사랑’이란 것이었다. 식구간의 사랑이기도 하지만 인간적인 사랑의 표현일 것이다.

내가 제일 사경을 헤맬 정도로 아팠던 것은 내가 원서동에 살았던 국민학교 3학년 시절 그러니까 1956년경이었다. 평소같이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 나는 갑작스레 치솟은 열로 눕게 되었고 그날 밤으로 나는 심한 고열로 집안이 초비상이 되었다. 당시는 양의원과 한의원이 거의 같은 비율로 있었던 시절이었고 대부분은 동네에서 친근한 한의원에서 병을 고치곤 했기에 ‘주사를 맞는’ 의원은 가급적 피하고 살았고, ‘주사의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고열의 밤을 간신히 보내고 나는 역시 계동에 있었던 ‘계산 한의원’으로 가서 약을 지어다 먹게 되었는데.. 그것이 별로 효험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의 한약은 애들이 먹기에 너무나 고통일 정도로 쓴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약의 특성상 ‘급한 병’에는 ‘약초의 효험’이 뚜렷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태로 나는 계속 고열에 시달리고.. 그때 내가 꾸었던 ‘꿈’들과 ‘환시’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고열로 두뇌의 기능이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기억을 못했지만 나중에 들으니.. 내가 벌떡 일어나서 해괴한 행동(하늘을 향한 기도 비슷한)을 했다고 했다. 그 이후 나는 ‘별수 없이’ 가회동에 있는 양의원으로 갔고, 결국은 아프기만 한 주사를 맞고 회복이 되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어머님은 우리 집 터가 별로 좋지 않다고 믿게 되었고, 다른 쪽으로는 ‘급한 병’에는 ‘주사가 최고’라는 경험적 진리도 알게 되었다.

옛날의 미제 깡통 파인애플이 지금은 집에서 만든 해물죽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아플 때의 위안이다.
옛날의 미제 깡통 파인애플이 지금은 집에서 만든 해물죽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아플 때 작은 기쁨이다.

이런 병치레는 나이가 들면서 줄어들었지만 어릴 적의 이 고통스런 병치레는 명암이 교차되는 묘한 추억을 남겼다. 아플 때면 제일 호사스런 따뜻한 아랫목에 누어서 최고의 서비스를 받았던 그 아픈 때는 사실 내가 제일 사랑을 많이 받았던 순간들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모두가 경제적으로 가난하던 시절, 어디서 구해 왔는지 ‘미제 깡통’ 류의 맛있던 snack들, 특히 파인애플의 맛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을 한다. 그런 ‘사랑’ 때문에 나는 우습게도 아플 때를 은근히 기다린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간호적인 사랑을 받기만 했지 주는 방법과 용기를 배우지 못하며 자랐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렇다. 이것은 내가 남은 여생에서 풀어 나가야 할 큰 과제이기도 하다.

아틀란타 부활 영세식 2014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4년 부활 영세, 세례식

 

2014년도 부활절 영세식이 4월 12일에 뜻 깊게 막을 내렸다. 천주교에서 영세, 세례의 의미는 아마도 개신교회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쉽게, 편하게 하느님을 만나려는 그들과 상징, 과정, 연수, 고행이 따르는 우리 천주교의 하느님 만나는 과정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나와 연숙에게 올해의 영세식은 분명히 다른 해와 다르게 가슴으로 찡~ 함을 느끼게 다가왔다. 영세식이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 멀리서 몰래 찍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 설명이 필요가 없다. 한결같이 행복하게만 보이는 이 모습들.. 나이나 성별에 상관이 없다. 세례를 주관하신 주임신부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아마 그런 모습을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30여 년 전을 부지런히 떠올리며 이들의 심정을 헤아렸지만 아무래도 30년의 세월은 조금 긴 것 같이, 자세한 그때의 정경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거의 100% 기억하는 것은 그 때의 우리의 ‘행복한 느낌’이었다. 그 희미한 감정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세례자들도 아마 마찬가지의 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이번 영세식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상당했다. 나와 연숙이 지난 해 8월부터 모두 봉사자란 이름으로 예비자 교리반에 참가하여 무사히 이들을 ‘요르단 강’ 가로 배를 함께 저었다는 느낌이고, 예비자 거의 전부가 끝까지 항해를 했다는 안도감과 자부감등으로 우리가 다시 세례를 받는 것처럼 가슴이 뿌듯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번 교리반 봉사자로 참가해서 우리가 얻은 것은 이 예비자 들에 비해 크게 떨어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많이 얻고 배웠던 것이다.

대부분의 교리는 수녀님과 신부님이 담당했지만, 우리 부부도 두 번 정도 담당할 기회가 있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수녀님과 자유분방한 신부님의 스타일은 정말 대조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균형이 잘 이루어졌다고 할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신부님 스타일이 훨씬 마음에 들고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맡았던 ‘교리 강의’에서 나는 신부님 스타일 흉내를 잠깐 냈는데, 역시 예상대로 수녀님의 재빠른 질책을 받았다. 아직도 나는 그런 수녀님을 이해할 수가 없지만, 그저 그저 benefit of doubt 만 되 뇌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대상한 예비자들은 거의 ‘고학력, 젊은 층’이 대부분이어서 우리와 호흡이 잘 맞았다. 우리에 비슷한 또래들도 마찬가지로 personal chemistry가 좋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신과 용기를 주었던 것은 대부분 예비자들이 봉사자들을 격의 없이 믿어주고 사의를 표하는 자세들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신선한 것이.. 요새 ‘젊은 층’을 많이 보았기에 너무나 비교가 될 정도로, 건전한 말투, 모습들.. 보기만 해도 했다. 중장년 층의 예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머있고, 협조적이고, 한마디로 멋진 신사 숙녀들이었다. 이들이 하느님을 찾으려 8개월 동안 눈이오나 비가오나 매주 목요일 밤에 모였다는 것은 속된말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10대부터 60대까지 비슷한 비율의 남녀 형제, 자매들.. 우리에게는 모두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영혼들이다. 한창 ‘외우는 공부’가 더 쉬울 듯한 15세의 등치가 큰 소녀, ‘마누라’에게 등을 떠밀려 나왔지만 이제는 ‘교리반 재수’을 끝낼 각오로 참여 각가지 유머로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주던 Clint Eastwood를 연상시키는 60세 형제님, 무게가 실려있는 comment로 일관 한 귀공자 스타일, 옛날 알랑 드롱을 닮은 ‘백수’ 형제님, Tom Cruise를 연상시키는 30대 유학생 화학공학도, 항상 질문이 많고 심각하지만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50대 자매님.. 영화배우처럼 멋지게 생기고, 아버님과 같이 교리공부를 한, 멋진 약혼자의 후원을 받았던 (내가 제일 부러운 case) 형제, 20대의 젊음의 향기로 교리반의 공기를 채웠던 몇몇 유학생 자매, 형제들.. 그들을 보면서 우리도 30년 전을 회상하기도 했고, 그들 신앙여정의 앞날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제 세례, 영세식은 끝났지만 사실 학교 졸업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가 진짜가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부터가 이들의 교회생활의 시작인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서..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속사회를 이들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20~30대의 젊은 층은 참 길 수도 있는 ‘파도’길을 가야 한다. 중장년 형제자매들.. 이들은 그렇게 시간이 길지 않다. 사실 내가 제일 큰 관심을 갖는 것이 세례를 받을 때까지가 아니고 이들이 ‘무사히’ 세파를 헤쳐나가는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받고 쓸 수 있는가 하는데 있다. 내가 30년의 세월을 ‘실패’로 보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분 들이 ‘하느님’이 생각보다 가까운데 계시며 그들을 지켜 본다는 깨우침을 하루빨리 가질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 본다..

 

C’est Si Bon 세시봉 아틀란타

C’est Si Bon.. 세시봉..시봉..시봉.. C’est Si Bon은 물론 French jazzy classic.. 1947년에 발표된 이것은 우리에게는 루이 암스트롱과 이브 몽땅 Yves Montand 이 같이 불렀던 것이 익숙한가? 어렸을 때 참 많이도 들었던 이 노래의 멜로디는 아직도 생생하다.1 세시봉의 뜻은 불어101 학생도 알듯이 영어로 하면 It’s so good 정도가 될 것이다. 이 곡을 들으면 나중에 ‘시봉 시봉..’을 계속하는데.. 그것도 so good so good 정도일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 뜻을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살다가 요새야 깨닫게 되었다. 참 오랜 세월이 걸린 French를 모르고, 무시하고 살았던 curse 라고나 할까.

 

 
Louis ArmstrongC’est si bon (1962)

 

하지만 여기 제목의 세시봉은 이미 한글의 ‘고유명사‘가 된 말로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960년대에 서울에 있었던 어떤 ‘음악감상실‘의 이름인 것이다. 반세기 전이면 사실 ‘골동품’ 냄새가 나겠지만 나에게는 과장을 하면 ‘엊그제’ 같은 느낌의 시절이다. 당시 서울은 99% ‘미국 류’를 따랐겠지만 간혹 이렇게 색다르게 ‘불 류’를 더 ‘멋지게’ 보던 ‘지식층’들도 상당했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것들이 그랬다. 그래서 이 말이 음악감상실 이름이 이것이 되었는지는 그때의 사정을 잘 모르니 알 길이 없다. 희미한 기억으로 내가 ‘아직도’ 고등학생이었을 당시 대학생이었던 누나가 그곳을 다녔고 그때 나는 ‘세시봉’의 이름을 들었을 듯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 서울 장안의 ’20세 안팎 특별히 할일 없었던 아이들’2이 이곳에 모여서 한창 유행을 타던 ‘기타’를 치고 배우며 시간을 소일하던 것이 작은 역사가 되었고 그 중에 상당 수는 ‘프로’로 전향.. 반세기 뒤에는 ‘완전한 역사’가 된 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세시봉’이다. 나중에는 여기에 70/80이란 것이 붙는데.. 글쎄, 왜 70/80인지.. 아마도 1970~80년대를 말하는 모양.. 하지만 세시봉에는 60/70이 붙어야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아직도 서울의 세시봉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름의 ‘가게’는 전 세계에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주로 식당의 이름에 제일 많은 것 같다. 그 중에는 아틀란타에 있는 세시봉 을 빼어 놓을 수 없다. 이 blog의 제목이기도 하니까. 이곳이 바로 얼마 전에 개업한 ‘김철환’씨의 60/70/80 style 세시봉 음악 경양식 집이다.

며칠 전, 아틀란타 세시봉 70/80-style music cafe.. 두 번째로 가 보았다. 지난 년 말에 진희네 그룹3과 처음 가보았고 2개월 만에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첫 번째 왔을 때보다 분위기가 익숙해져서 그런지 더 여유 있게 몇 시간을 즐긴 셈이다. 처음에 왔을 때 없었던 새로운 음식 메뉴들이 있어서 모두들 그 중에서 골라 식사를 하였다. 이채로웠던 것은 1970년대 우리들에게 익숙했던 ‘경양식’ 메뉴, 특히 큰 접시에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담아내는 수프 (아마도 portage soup이라고 했을 것이다), 함박스테이크 hamburger steak, 돈카츠 don katzu.. 등등 모두 서울 장안 60/80 style로 추억에 어린 것들이었다. 주인 겸 singer는 ‘김철환‘ 씨인데.. ‘소싯적’에 pan flute 프로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그의 연주 record album이 걸린 것도 보았다. 이채롭고 놀라운 것은 그는 ‘못하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수 많은 악기를 연주 ‘했고’, one-man band의 경지가 digital technology를 총동원 한 효과만점의 연기 실력이었다. 그의 vocal도 세월이나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의 가창력을 보여 주었다.

 

처음 가 보았을 때보다 더 가열된 관심이 생기고 같이 갔던 그룹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가게.. 조금 오래 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요새 한인 business의 수명이 1~2년이 보통이라는데.. 어떨까? 이런 곳이 ‘명소’로 자리를 잡으려면 우선 ‘경제성 사업성’이 절대적인데, 어떨까.. 암만 연기가 좋아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니까.. 나의 생각에는 1) 이곳은 ‘우리 또래를 위해서도’ 오래 지속해야 하고, 2)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또래들이 ‘단골’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전함이 필요하다.. 는 것이었다. 경제성이 맞으려면 기본적인 정기고객이 ‘절대로’ 필요한데.. 아틀란타의 고객덩치가 그것을 가능케 할지는 전혀 idea가 없다. 음식이 약간 pricey하지만 그것이 이곳의 특징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면 문제가 없고.. 70/80 style 을 이곳에 정착시키고 우리 또래의 연령층 이외의 세대들 에게도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는 곳으로 만들게 되면, ‘명소’의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Owner/Performer인 김철환씨의 ‘약력’은 자세히 모르지만 ‘조영남’씨와 관계가 있는 듯 했고, vocal보다는 instrument쪽으로 경력을 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vocal실력은 예상외로 ‘열창’에 가깝다고 할까.. 인상적이었다. 가끔 ‘신청 곡’도 받는데 4 가끔 ‘이것은 잘 모르겠는데..’ 하는 솔직함도 있었지만 대부분 큰 차질 없는 그는 그 신청을 받아 주었다.

 

경제/영업성은 아직 개업한지 1년도 안 되었으니 확실치 않지만.. 현재까지 주위의 ‘여론’을 들어본 바에 의하면 생각보다 빨리 ‘소문’이 퍼지는 것을 알았고, 대부분의 ‘잠정고객’들도 이런 곳을 아틀란타의 ‘명소’로 승격을 시켜가는데 관심을 보였다. 그 정도로 우리 세대들이 갈 곳이 없는 것일까? 하지만 들어보면 ‘서울에 가도’ 그런 곳이 ‘별로’ 없다는 말도 있어서.. 어떨까.. 부활절도 끝났으니, 또 한번 그곳을 찾을 때가 다가오지 않았나..


 

  1. 1960년대에 이 곡은 미국에서 상당히 hit여서 Dean Martin같은 ‘유행가’ 가수들도 많이 불렀다.
  2. 대표적 인물들: 송창식씨, 윤형주씨, 김세환씨, 이들은 나중에 같은 명동에 있었던 OB’s Cabin이란 곳에서 ‘합창, 중창’을 하기도 했다.
  3. 나의 아틀란타 15년 역사의 친지 그룹
  4. 그 옛날 음악다방에 앉아서 이런 ‘짓’을 참 많이도 했는데..

중앙고 동창 차정호

며칠 전에 예기치 않게 (of course!) 나의 모교 중앙고 57회 동창생 차정호와 연락이 되었다. 나의 blog motto 중에 ‘build it, they’ll come’ 이 바로 이런 case인데, 정말 가끔 예상치 않게 이런 기회가 온다. 나의 blog에서 중앙고 회고담에서 짧지 않게 언급이 되었고, 또 한번은 ‘차정호 사진전’ 이란 어떤 인터넷 상의 기사를 보고 그의 ‘사진 활동’ 을 언급을 했었지만 그와 개인적으로 연락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어쩌다 ‘기적적으로’ 연락이 되면 물론 뛸 듯이 반갑다. 하지만 그 다음은 항상 미지수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근래 ‘사회심리’적 연구 대상이라도 될 듯이 흥미롭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남북한 이산가족의 반세기 만의 재상봉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아마도 예상치 못한 심리적인 현상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고 세상이 무지개로만 보이던 시절 같은 시공간을 나누었던 동창 ‘친구’들, 그때의 자연스럽게 형성된 우정은 사실 너무나 순수해서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순수하지만은 않은’ 세상살이에서 너무나 아름답게 남는다. 문제는 각자가 그 순수하던 시절에 얼마나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있는데 이것은 각자가 살아온 긴 인생여정에 따라 모두 다를 것 같다. 반세기 만에 다시 알게 된 오랜 친구들 중에는 나를 너무나 슬프게 한 ‘지독한 변신’ (아니면 나의 비현실적인 기대감) 도 있어서 이제는 이런 때 나를 ‘보호’할 준비를 단단히 하게 되었다. 여기서 ‘준비’란 간단히 말해서 ‘아주 낮은 기대치’를 말한다.

이번에 연락이 된 차정호, 중앙중 1학년 때와 중앙고 3학년 때 같은 반이어서 전혀 낯설지 않은 동창이다. 나와는 다르게 장난꾸러기, 외향적인 친구.. 나는 그런 성격이 항상 부럽기도 했다. 특히 중앙고 3학년 때 백정기 국어선생님께 ‘농담’을 잘못해서 심하게 얻어맞은 ‘사건’은 아직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되는데.. 이 친구도 나의 그 회고담을 보고 ‘너무나 아팠다고’ 해서 미안해지기도 했다. 나도 누구에게 얻어 맞은 기억을 하면 슬퍼지기도 하는데.. 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그런 것들을 높은 차원에서 내려다 볼 정도로 흘렀지 않은가?

 중앙57회-1아직도 활발한 느낌이 드는 그의 ‘글’을 읽고 그 옛날의 그 활달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그의 모습들을 떠 올린다. 어제는 가까이 지내는 동기동창들과 ‘허름한 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담아서 보내 주었다. 그의 ‘자상함’에 찐~한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소주잔’의 모습들은 사실 나는 이제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들이라서.. 너무나 그리운 모습들인 것이다. 몇 년 동안 뜸~ 했던 중앙고 동기동창들 소식.. 이제 다시 찾은 차정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조그만 희망을 보게 된다.

이 친구가 어울리는 동창들은 사실 나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이름들이 그렇지만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한’ 정도의 동창들도 있다. 전영훈, 윤홍섭, 주창모는 ‘100%’ 알겠는데.. 나머지는 정말 미안하게도 기억이 희미하기만 하다. 거꾸로 이 동기동창들도 마찬가지로 나를 기억하기는 정말 힘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월의 횡포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한 때 같은 곳에서 3년 아니면 6년을 본 동창들이 아닌가..

 

날씨가 화제였던 세월들..

지금은 조금 낳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머리 속에는 온통 추운 겨울, 아~ 고뇌..의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1월 28일인가..의 최악, 고통스러웠던 19시간 차 속에 갇혀서 떨던 일과 바로 지나가고 있는 주의 얼음대란 들.. 지나가는 주의 3일간 집에 있어야 했던 시간들은 비교적 덜 불쾌한 것일까.. 우선 밖에 나가지를 않았기 때문일까. 최악의 경우 전기가 나가는 것인데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2주 전의 snow jam은 정말 최악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시카고 시절 고대생 윤근흠이 갑자기 쏟아진 시카고 폭설로 12시간인가 걸려서 집에 왔다고 하는 추억이 생각은 나지만 내가 연숙과 같이 차 속에서 19시간 만에 집에 왔다는 사실은 지금도 믿어지지 않고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이다. 그때 나는 정말 ‘심신’ 모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오랜 세월을 살면서 그렇게 ‘육체적, 물리적’인 위협을 느낀 적이 없었다. 혼자도 아니고 우리 부부가 같이.. 상상으로 가끔 그런 위협을 공포로 느끼곤 하지만 이것은 100% 실화인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무엇일까? 아마도 죽는 것 아닐까? 나는 죽는 것을 지금은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는 것일까? 믿음을 무기로 자신을 가지고 대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언제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만 진리로 알고 살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죽을 준비는 항상 하고 살자. 그것이 전부다.

날씨 이외에는 어떤 것들이 나의 머리 속에 있을까? 아하! 1월 중에 용감하게 실행한 나의 ‘약속’.. 도레미 가라오께에 가족들이 갔던 일.. 이것은 정말 나에게는, 아니 가족들에게는 놀라운 일일 것 같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우리 가족, 정말 같이 이렇게 ‘나가서’ 논 적이 있었던가? 아니 집에서도 그런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조용히 우리는 살았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나는 몸 둘 바를 잊는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나는 내가 가정적이라고 항상 자부했지만 그와 못지않게 나는 재미 지독히도 없이 가족들을 대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아마 우리가족들은 그것에 적응이 되었을 것이고 운명이라고 받아 들였을 것이고 체념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나도 변명의 여지는 없지 않지만 이렇게 가족이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말 없다.

이런 나의 ‘심경의 변화’는 아마도 최근 3년간 나의 out-of-closet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 전에는 꿈도 못 꾸었다. 새 세상을 보는 듯하고.. 어떨까.. 언제까지 그런 새 세상을 알고 즐기며 살 수 있을까? 나는 분명히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정신과 믿음으로 살고 있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묵주기도와 레지오, 최근에는 순교자 성당에 조금씩 관여하는 것.. 이런 것들 때문일 것이다.

항상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그대로 있고 나를 괴롭히지만 그래도 잘 꾸려나가는 내가 어떻게 보면 대견하기도 하다.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99% 노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내고 있다. 혼자만의 노력은 비록 아니지만 분명히 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을 하느님은 아실 것이다. 그러면 됐다. 그러면 됐다.

두 번째 ice, snow day 2014

2 주 전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데 또다시 ‘으시시’한 날씨 경보들이 만발을 하더니 결국은 그들의 예보가 정확함을 또 깨닫게 되었다. Never again의 심리적 도움으로 이번에는 꼼짝도 않고 집에 ‘웅크리고 hunker down‘ 있게 되었고 아마도 그런 식으로 이번의 날씨문제도 해결이 되리라..

두꺼운 얼음위에 밤새 내린 눈, 길이 전혀 안 보인다

아침에 예전처럼 늦은 새벽에 일어나려고 하니 방이 조금은 밝음을 느꼈고 아하~ 밖에 눈으로 ‘하~얀’ 모양이구나 짐작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windows blind를 열자마자 찬란한 하얀 빛들이 눈을 찌른다.

어젯밤 잘 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하늘을 보니 아직도 조금씩 하얀 눈이 뿌리는 중이었다. deck rail에는 명암이 뚜렷이 눈의 ‘높이’가 보이는데 족히 2 inch는 될 듯 싶었다. 하지만 2 inch 의 높이는 어제 이미 얼어 붙었던 ice sheet가 더해진 것이어서 아마도 눈은 2 inch보다는 적을 듯 했다. 2011년의 ‘대설’ 이후 3년 만에 보는 ‘설경’이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흔치 않은 ‘고드름’을 원 없이 많이 충분히 즐기게도 되었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비록 영상 above freezing 으로 올라간다고 하지만 밑에 깔리 얼음 때문에 차도가 다 녹으려면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했더니 결국은 오늘도 우리에게 관련된 business는 cancel되는 것 같다. 우리가 관련된 오늘 business는 사실 순교자 성당의 매주 목요일 저녁에 있는 예비자 교리반 봉사가 전부지만 저녁 미사와 더불어 교리반도 취소가 된 것이다. 또 하루 ‘공을 치는, 아니 쉬는’ 그런 날이 된다. 화요일부터 3일째 계속 집에 갇히게 된 것이지만 사실 별다른 choice가 없는 듯 하다.

2주 전의 snow jam(교통 대란)의 기억이 생생한 듯, 이곳 거의 모든 ‘인간’들 ‘꼼짝도’ 안 하고 집에 있을 것이다. 다행히 걱정하던 것처럼 electric power에 큰 문제가 ‘아직까지’ 없어서 심심하거나 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 또한 예전처럼 ‘어린애’ 같이 신나거나 한 것도 거의 없다. 학교를 다니거나 출근을 꼭 해야 한다면 조금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양 들뜬 기분도 들겠지만 우리는 그런 시절이 ‘다~~’ 지나간 것 같아서 조금은 서글픈 심정도 든다.

차도가 전혀 안 보이게 내린 이월 중순의 눈.. 올 겨울의 마지막일까..


 

꽁꽁 얼어붙은 아틀란타, 2주 전의 교훈으로 재빨리 제설작업에 나섰다.

 

2주 전 worst snow jam과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freeway

안중근, 쪽발이 그리고 짱 깨

오늘 2월 8일자 The New York Times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바로 오래 전 우리들의 영웅 ‘안중근 의사’ 의 커다란 사진이었다.

 

중국 하르빈, 안중근 의사 전시관

 

어떻게 우리에게 그렇게 친숙한 얼굴에 이곳에 실렸을까? 안중근 의사의 기일이라도 되었나.. 하고 보니 그것이 아니고 기사의 실제 주제는 중국과 일본의 불편한, 아니면 추한, 험악한 관계발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안 의사의 흉상과 사진 등은 전시장의 모습이었고 물론 중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 정치적인 각도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 기사는 해석을 하고 있었다.

이 전시장은 1909년 당시 안 의사가 일본의 원로(아니면 원흉)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격하던 바로 그곳 철도 플랫 홈 에 있던 철도역사(驛舍)여서 전시의 의미가 더욱 증폭이 됨을 느낀다. 100여 년 전의 그곳의 지정학적인 역사로부터 지금의 사정은 어떻게 변했나.. 참 100여 년은 길게도 느껴진다. 그렇게 역사적인 강산이 변했나..

이 기사에 의하면 작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짱 깨 정부에 안중근 의사를 기려주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 전시회는 대한민국 정부의 바램에 의한 것이고, 그것을 ‘쾌히’ 받아들인 것은 중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의 표시일 것이다. 여기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다른 민족의 원흉 ‘북괴’ 김씨 왕조의 언급은 없다. 그들의 느낌은 이제 별로 무게가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중국, 일본, 빨갱이 북괴… 이 골치 아픈 족속들을 의식하며, 특히 짱 깨 와 쪽발이의 사이에서 박정희의 큰 딸 박근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거 1960~70년대에 일본 경제 발전을 모델로 하고 그들의 도움을 철저히 이용해서 한국형 경제발전을 이루어내었던 그녀의 아버지를 잘 아는 그녀는 어떻게 과거를 그녀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

과거 전혀 모르고, 아니 피하고 살았던 일본을 최근에 나는 조금씩 ‘문화’를 통해서 접하고 역시 그들도 우리가 배우고 들었던 대로의 monster는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들이었음을 알게는 되었지만 전체적인 집단으로써의 그들은 역시 과거의 monster를 떠올리게 되니..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고치기 어렵고 숨기기 어려운 일단 벌어진 ‘역사’의 문제라서 더욱 골치가 아플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나는 짱 깨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나는 체질적으로 그들이 싫었고 (주로 모택동의 빨갱이 집단에 대한 것)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들의 양심 없는 거짓과 기만, 경험적으로 느껴지는 중국여자들의 해괴한 행동들 등등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그들을 피하고 싫어하게 만든다. 물론 이런 것들은 나의 일방적인 편견이지도 모르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떻게 이런 편견을 없앨 것인가.. 역시 ‘인간적’으로 그들을 접근해야 할 듯 하다. 일본의 경우에서 나는 그것을 배웠기에 여기에도 희망이 있다고 느낀다.

빨간 마후라 red scarf

1964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영화 광고
1964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영화 광고

얼마 전 역시 우연히.. stumbled upon.. ‘재수 좋게’ 이 영화를 정확히 거의 50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된 신상옥 감독, 신필름 제작의 전쟁영화로 당시에 장안의 화제를 상당히 끌었고, 흥행도 대 성공이었던 것도 기억을 한다. cast도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들이 등장을 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전투기, 거의 모두 F-86 Sabre jetfighter 가 대거 등장을 했고 지금 다시 보아도 ‘우습지 않게 보이는’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촬영 기술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혹시 이것도 ‘한국 영상원’ 어쩌구 하는 곳에서 ‘올려 놓은’ 것인가 했지만 정말 다행히도 ‘표준 youtube video protocol’ video여서 부지런히 ‘download’ 를 해 두었다. 이제는 ‘안심하고’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good news였는데 bad news는..  막상 보게 되니.. video quality가 ‘엉망’이었다. 그러니까 VHS video tape보다도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영화 첫 부분에 그 이유에 대한 ‘양해’ 메시지가 나온다. 이것도 역시 빨갱이 탓이었던가.. 신상옥씨가 강제 납북되면서 자신 소장의 original들이 모두 없어졌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 의문은.. 신씨가 납북되면서 왜 그가 만든 영화들을 가지고 갔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북을 간 것인가? 좌우지간 여기에 보이는 영화의 video는 영화를 상영하면서 video camera로 찍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사연을 알고 보니 더욱 이 video가 값지게 느껴졌다. 아차..하면 이것도 못 보고 죽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가끔 이 영화가 생각나곤 하고.. 그 당시 보았던 영화의 장면, 줄거리 등을 머리를 짜내며 생각하기도 했다. 몇 장면과 대사는 아직도 기억을 한다. 또한 당시 인기 4중창단 불루벨즈 가 불렀던 주제곡은 이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렸고 또 영화와 별도로 인기곡으로 남게 되었는데..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이 되었고 상당한 인기였지만 당시 중앙 고교 2학년 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나이에는 ‘외국영화, 미국영화’가 아니면 모두 ‘촌스럽게’ 느껴지고, 사실이 그랬다. 그 정도로 국산영화의 질은 한마디로 저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빨간 마후라‘ (당시 마후라 란 말은 가벼운 느낌의 목도리란 뜻으로 거의 표준어처럼 쓰였는데 알고 보니 muffler의 순 일본식 발음이었다) 는 조금 달랐다. 우선 당시 우리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박택규 화학 선생님이 이것을 보고 와서 아주 인상적으로 ‘선전’을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가 됐다.

그 박택규 선생님은 화학을 ‘대학 교수’ 스타일로 ‘강의’하시던 독특한 선생님으로 역시 수년 후에 대학교로 ‘영전’이 되시어 가시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우리들을 마치 친구처럼 생각할 정도로 화학 과목 이외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시고 자신이 본 영화 같은 것도 감상을 나누곤 했다. 당시 입시위주의 분위기에서 그런 선생님은 참 드문 case였다. 그 선생님이 알려 준 이 영화 장면들 중에서 ‘최무룡’ 이 수송기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구출 되는 것.. 그것은 아직도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다.

나중에 직접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것 중에는 한마디로 모조리 멋진 사나이들.. jetfighter pilot들의 ‘여성 편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런 사실은 아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찬 가지인 모양으로 1980년대 미국 영화 Top Gun을 보아도 거의 비슷한 것이다. 여자들이 그 조종사들을 그렇게 멋지게 본다는 사실이 미국 영화보다 우리가 훨씬 앞서 이 빨간 마후라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신영균, 최은희, 최무룡.. 이 세 최고 배우가 주름잡는 이 영화는 6.25 전쟁 당시 강릉 공군기지를 무대로 펼쳐지는데 나도 당시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강릉 공군기지는 나에게도 친숙한 이름이었고 그곳에서 ‘뜨는’ 공군 조종사들을 내가 9살 쯤인가 원서동 살 당시에 가까이 보기도 했다. 물론 그 조종사도 ‘여자’와의 관계로 더욱 우리에게 알려진 case라서 내가 갖는 이들의 playboy인상은 이 영화에서 재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100% 확실한 기억 속의 장면 중에는 최은희가 고급 술집에서 hostess로 아주 취한 상태로 ‘쉬~ 하러 간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고2의 나이에 이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erotic하게 들렸다. 또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 그룹의 조종사들과 여자들이 모조리 good night ladies’ kiss를 같이 하다가 비행단 최고 상관인 ‘박암’이 자동차 headlight를 키며 노려 보자, 신영균이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노무 새끼..’ 하며 다가가는 장면.. 50년이 되었지만 생생한 기억들이다.

당시 F-86 조종사들은 아마도 군인들 중에서 최고 ‘엘리트’ 급에 속했을 듯 하다. 왜냐하면 영어에 능통을 해야 미군들에 의해서 훈련을 받는데다가 비행기를 이해할 정도면 rocket scientist는 아니더라도 대학졸업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군인들 중에서는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영균, 최무룡 급의 미남들을 아니었어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겠는가.. 하늘을 나르며 조국의 지킨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멋진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것 같다. 최소한 그 당시 이 영화를 본 나의 나이 또래는 그렇게 느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다시 본 느낌은.. 다 좋은데.. 끝 부분이 전체적인 ‘멋진 인상’을 구겨놓았다는 아쉬움이랄까.. 멋진 외국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촌스러운’ 국산영화의 느낌으로 끝을 낸 것이다. 그 장면은 ‘한국적 정서’를 나타내려고 한 듯이 ‘죽은 신영균의 어머니, 한은진’ 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불현듯 나타난 것인데.. 글쎄, 각본 때문에겠지만 이 장면으로 완전히 ‘멋진 꿈에서’ 깨어난 듯 느껴진다.

 

 영화 빨간 마후라, 1964

 

 

Snow Jam, 아틀란타 교통대란 2014

매주 화요일은 예외 없이 우리부부가 레지오 주 회합에 참석하러 30분 freeway 드라이브로 도라빌에 있는 한국 순교자 성당에 나가는 날이다. 주 회합이 끝나고 곧 이어 정오 미사에 참례한 후 부근 Korea Town에서 가끔 shopping 을 하거나 점심을 먹기도 하고 귀가를 하면 보통 6시 정도가 된다. 돌아올 때쯤이면 보통 rush hour에 ‘걸려서’ 30분 드라이브가 1시간 이상 걸릴 때도 있다. mass transit system이 거의 없는 아틀란타 Metro인 만큼 우리 집이 있는 곳이 지역적으로 Korea Town과 꽤 멀리 떨어진 탓에 별도리가 없이 치러야 하는 ‘세금’ 같은 것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화요일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1시간이 아닌, 무려 19시간 걸렸던 인생 최악의 드라이브 경험을 한 날이 되었다.

 

운명의 날, 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오전 11시 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일기예보를 통해서 들었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모두들 ‘안심하고’ 출근해서 그저 집에 조금 일찍 돌아가면 될 것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모두들 학교나 직장에 있는 상태에서 시간보다 빨리 내린 눈을 만난 것이다. 이러한 ‘절묘한’ 시간문제 이외에 설상가상으로 당국(주정부, 시정부들)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집에 빨리 가라고 모조리 ‘풀어놓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였다. 아무리 도로망이 잘 되어있어도 차들이 모조리 길로 나온다면.. 불 보듯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닌가? 이 당국자들은 하루 종일 ‘일기예보’가 틀렸다고 발뺌을 하기에 바빴다가 나중에는 그들이 예보를 잘 못 들었다고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하기도 했다.

 그 비상 퇴근 시간이 점심시간이 바로 지난 때였고, 모든 도로망은 귀가하는 차들로 완전히 묶이게 되었는데.. 여기에 급강하하는 기온 (섭씨 영하 10도까지) 에 쏟아지는 젖은 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교통대란이 시작된 것이다. 얼어붙은 도로에서 차를 그런대로 끌고 가려면 어느 정도 최소한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거의 서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타이어가 traction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 불쌍한 것이 18 wheeler semi들.. 그러니까 tractor-trailer들, 그 공룡 같은 덩치의 고철들이 그런 상태에서는 조금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I-285 west@Buford Hwy에서 시작된 19시간 드라이브의 시작

이때만 해도 모든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이긴 했다

 

결과적으로 worst of worst.. 아틀란타 전체 도로망에는 각종 귀가 차량들이 끈끈이 주걱처럼 모조리 jam에 빠진 상태로 서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최악 중의 최악이 아틀란타의 ‘순환도로’인 I-285 system이었는데.. 바로 그곳에 우리 차 Sonata도 갇혀 있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후 3시에 출발한 우리 차는 다음날 아침 10시에 집에 도착을 해서 19시간의 귀가 드라이브..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 되었다.

 그날 따라 성당에서는 연도와 그에 따른 점심회식이 있었던 탓에 더욱 늦게 출발을 해서 I-285를 타고 보니 그곳은 거의 parking lot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런대로 거북이처럼 조금씩은 움직였다. 비처럼 뿌려대던 진눈깨비가 떨어지는 기온으로 길은 조금씩 빙판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차는 비례해서 더 거북이처럼 기어서 밤 9시경에는 Powers Ferry Road exit 까지 갔지만 그곳에서 모든 차량이 완전히 서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집에 혼자 있을 Tobey(dog)와 Izzie(cat)이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서서히 그 ‘놈’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변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차의 gas는 거의 바닥이 나고 길은 완전히 주차장으로 변한 상태에서 수많은 차들이 버려지기 시작하고 깜깜한 밤은 무섭게 얼기 시작하고.. 나 혼자가 아니고 연숙도 같이 있는 우리의 차 속은 조금씩 공포감이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0% 완전히 정지 된 I-285 traffic

 

이제는 별 도리 없이 정지된 차 속에서 떨며 밤을 새우게 되었다. 1/4 정도의 gas로 출발한 우리 차는 이제 E(empty) 에서 떨고 있어서 gas를 아끼기 위해서 engine을 끄니 추위가 엄습을 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주위를 보니 모든 차량들이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시동을 끄고 쥐 죽은 듯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차를 ‘버리지’ 않고 그저 ‘구원군’만 기다리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우리도 차를 버리고 ‘걷자’는 생각을 했는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난 것이 주위가 평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깜깜한 밤이어서 정말 신변에 위험을 느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가까운 곳에 보이는 건물들.. 호텔.. 주유소 같은 곳으로 간 모양이었지만 우리는 그것도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아틀란타에서 가장 복잡한 freeway가 차들로 100% 주차장으로 변한 얼어붙는 한밤중의 광경은 그곳에 있어본 사람이 아니면 상상이 가지 않을 듯 하다. 배 고픈 것도 잊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일 급한 것이 bathroom문제였던 것이다. 남자는 그런대로 문제가 없지만 여자들은 정말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 많은 차들의 여자들..어떻게 해결을 했을까… 나의 옆에 타고 있던 연숙도 정말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지만 한마디로 별 choice가 없이 해결은 해야 했다. 이런 것들로 며칠 동안 수많은 벼라 별 일화들이 website에 등장하기도 했다.

 시동이 꺼진 차에서 무섭게 추웠던 밤을 지새는 기분은 기가 막혔지만 별 도리가 있겠는가? 제설차 준비가 거의 없는 이 지역에서 재빨리 소금을 뿌려대는 구원군이 그렇게 빨리 올 리가 없었다. 동이 트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고요하기만 했다. 모두들 그저 그저 기다리는 모양.. 그러다가 최소한 밝은 밖을 보니 ‘걸어가자’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보이곤 해서 희망을 갖고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가 발이 묶여 있던 곳에서 우리 집까지는 최소한 10 mile 이상은 되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빙판으로 변한 언덕을 걸어가는 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쪽에 사는 레지오 단원 자매님은 우리보다 먼저 출발을 했지만 역시 어떤 hotel 근처에서 차가 묶여서 그 hotel에서 밤을 지냈다고 했다. 최소한 편한 잠을 잤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걸어가면 그 hotel로 갈 것으로 정했다.

 

하지만 차를 버리는 것도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차를 가지러 와야 하고 안전문제도 있지 않은가? 가급적 차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아침 9시경이 되었다. 그런데 앞 쪽에서 무슨 큰 트럭 소리들이 나기 시작하고 우리 앞 쪽의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였다. 드디어 소금을 뿌리는 트럭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서 거북이 속도로 전진을 해서 나아가니.. freeway는 정말 가관이었다. 움직이는 차들이 거의 없이 길가는 완전히 버려진 차들로 즐비한 것이다. 거의 텅 빈 고속도로를 우리는 가고 있었다. 아무리 빙판이 되긴 했지만 그런 상태에서는 운전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집 앞의 주유소엘 오니 드리어 차의 gas가 바닥이 났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집 앞에는 엄청난 비탈들이 있었지만 역시 차들이 없으니 큰 문제가 없었다. 최소한의 momentum만 유지하면 암만 미끄러워도 control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집에 들어오니 아침 10시가 되었다. 모든 곳에 잠잠한 고요한 아침이었다. 다행히 두 마리 pet들은 잘 견디고 있었고.. 우리는 ‘궁전’처럼 느껴지는 home sweet home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이때처럼 침대의 편안함을 실감한 적은 반생을 살면서 거의 없었다고 할까.. 비록 천재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만든 실수도 무시할 수 없는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되었다. 나중에 뉴스를 들어보니 우리가 경험한 것처럼 수 많은 각종 ‘해괴’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무능한 해당 당국과 특히 담당한 사람을 막연히 믿는다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생각이라는 경험도 했다.

 이번의 ‘교통대란’의 주 원인은 물론 ‘절묘한 시간’에 도착한 얼어붙는 진눈깨비였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첫째는 공식적인 정확한 예보를 무시하고 서로 맞지 않는 지역예보에 의지한 것, 둘째는 주 정부를 위시해서 군소 지역 정부들(이것이 장난이 아닐 정도로 많다)이 ‘전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거나 모른 상태에서 속수무책이었고, 모든 것이 거대한 자동차 도로망에 의존하는 아틀란타 수도권의 갖는 특성이 이런 2″도 안 되는 눈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 나는 freeway system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고 ‘동네 길’을 택할 것이라는 조금은 소극적인 생각과, 자동차 gas가 1/2 이하로 절대로 내려가지 않게 채우고 다닐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더 한가지.. bathroom kit를 차에 가지고 다닐 것도.. 굶는 것은 참아도.. ‘화장실’ 가는 것은 못 참지 않는가?

 

freeway를 벗어난 Cobb Parkway.. 길이 아닌 주차장으로 변했다

차를 버리고 걸어간 사람들로 길은 완전히..

추위, 상도동 종점의 고뇌

cold-jan-2014올해 겨울은 정말 춥다.  아~~ 고뇌.. 이 지독히도 오래된, 아득히 먼 옛날에 내가 자주 되뇌던 표현이 문득 되살아난다.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아주 쓸쓸하고 황량한 시베리아 같은 그 때와 같은 느낌의, 뼈 속 깊숙이 스며드는 추위를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 이런 느낌은 그 ‘때’ 이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그것이 반갑기도 하고 춥고 쓸쓸하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그때’는 거의 45년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고 그 ‘시베리아’는 연세대 재학 시 살았던 상도동 종점 부근이었다.

지금 내가 아틀란타 지역에서 느끼는 ‘연일 계속되는 지독한’ 추위는1 뉴스가 될 정도로 의외적인 기후현상이고 거의 25년간 이곳의 ‘전형적’인 ‘더운 겨울’에 적응이 된 탓에 지금의 지독히 추운 겨울은 바로 ‘그때’ 느꼈던 ‘고뇌’와 비슷한 느낌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해에 발표되었던 북미주 장기 일기 예보가 정말 ‘까무라칠’ 정도로 적중한 것에 나는 놀라기만 한다. 일기예보과학이 참으로 발전을 한 모양이다. 그 예보에 의하면 서부를 제외한 전체 북미주 전체가 ‘더 춥고, 더 습한’ 그런 것이었는데 현재까지 거의 모두 맞고 있다. 이것으로 global warming 같은 ‘정치적’인 것과 연관을 시키는 것은 무리겠지만.. 과연 어떨까?

옛날 ‘그때’는 20세 전후의 팔팔한 젊음을 자랑하던 때였지만 우리세대들.. 6.25이후 잘 못 먹고 자랐는지 신체적으로 별로 건강한 편은 아니었고, 박정희 정부의 요란한 경제발전 소음은 요란했지만 그것에 비해서 ‘따뜻하고 편한’ 환경은 절대로 아니어서 지독한 서울의 매서운 바람은 정말 ‘고뇌’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요새 그 흔한 storm parka같은 것도 없었고 overcoat도 너무나 비싸던 시절..시베리아 성 서울의 1월 맹 추위는 정말 겨울중의 겨울이었다.

특히 데이트 같은 것이 늦어져서 시내버스 막차로 상도동 종점 (숭실대학 입구) 에 내려서 집까지 가는 골목의 맞바람 추위는 정말 대단해서.. ‘그때’ 내가 ‘즐겨 되뇌던’ 말이 바로 ‘아~ 고뇌’였다. 이 말을 ‘계속’ 해서 내 뱉으며 어둠 속의 골목길을 걸으며 집으로 향했던 ‘그때’였다. 그 집이란 것도 당시에는 중류층 수준이었겠지만.. 글쎄.. 연탄이 거의 전부였던 시절, 온돌방과 연탄난로의 난방은 사람을 거의 꼼짝 못하게 만들고, 따라서 이불을 깔고 백일몽을 즐기며 아름다움 추억의 씨를 뿌린 기억들 뿐이다. 하지만 그 느낌들은 지금 ‘절대로’ 재현할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그런 것들이었다.

같은 추위에도 같은 느낌이 꼭 들까? 아닌 것 같다. 이곳 아틀란타 지역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나는 거의 Midwest 지방2에서 살았기에 그곳의 진짜 무서운 눈과 추위를 고스란히 경험하였지만 그곳 추위의 느낌은 ‘절대로’ 서울 1월의 느낌과 달랐고, 지금 느끼는 아틀란타 지역의 느낌과도 다르다.

그 ‘북쪽’의 추위는 심리적으로 너무나 추운 겨울을 예상해서 그런지 느낌이 ‘고뇌’성 같이 괴롭지 않았다. 그런 추위에서 거의 ‘걷는’ 일이 거의 없고 지독히 절연된 난방 된 집과 차에 의지하며 겨울을 나면 별로 추운 느낌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현재 이곳의 ‘겨울 환경’이 아마도 1960년대 말 서울과 거의 비슷한 것은 아닐까..하는 재미있는 추리를 해 본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 Simon & Garfunkel, 1970
classic oldie가 나의 당시 고뇌를 말해 주기도 했다.

 

  1. 최저 섭씨 영하 12도.. 최고는 빙점에서 오락가락..
  2. Illinois, Ohio, Wisconsin같은 모두 Big 10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