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王國의 發展

建國神話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가 각각 왕국(王國)으로서 삼분천하(三分天下)의 삼국시대를 이루기 이전에 이들의 건국은 신라가 가장 빨랐다. 삼국시대 이전에 남반도(南半島)에는 삼한시대(三韓時代)로서 북쪽에 진한(辰韓), 서쪽에 마한(馬韓), 그 동쪽에 변한(弁韓)이 있었다.

  진한 남부 현재의 경주(慶州) 지방에 서라벌(徐羅伐)이라는 소부락국가(小部落國家)가 생겼다가 그것이 신라 왕국으로 발전됨에 따라서 변하 전체(현재의 경상도)가 영토로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신라의 영토는 진한 일부와 변한 전체에 미쳤던 까닭에 진변(辰弁)의 부락국가는 신라의 왕국으로 발전했다.

  진변지방은 기후가 온난(溫暖)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인심이 순박해서 풍부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또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대륙의 한(漢) 나라로부터 침략 지배도 받지 않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비교적 보수적이어서 강력한 국방력과 중앙집권(中央集權)을 필요로 하는 왕국(王國) 으로 발달함이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었던 것이다.

  원시신라(原始新羅)에 있어서는 신라왕국의 모체(母體)인 서라벌이 진한의 일부에 형성되어서 부락협의체(部落協議體)로서 자치(自治)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여섯 개의 마을로 구분 되어 있었으므로 육촌(六村)이라 하였고 육부(六部)라고도 했다. 이 마을은 군(郡)보다는 작은 정도의 면적을 가진 단위부락이었으며 그 중심은 오늘의 경주였다.

  서라벌의 六촌은 지리적 단위였을 뿐 아니라 여섯 가지 성(姓)을 가진 주민으로 배정되어 있는 씨족부락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대인(古代人)에게는 성이 없었는데 같은 성의 주민을 한 부락 한 부락으로 모아서 살게 하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필경 각 부락의 원주민에게 같은 성을 붙여서 불렀던 것이 아닐까.

  그것도 그 당시라기보다는 후세의 전사설화(傳史說話)가 윤색(潤色)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각 마을에 유력한 어른(首長)의 성을 따라서 그 자손과 일족(一族) 뿐 아니라 그의 낭도(郎徒)까지 한 성(姓) 으로 대표해서 불렀을 것이다. 따라서 < 육촌을 육성으로 배정했다. >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기록은 약간 이해하기 어렵다.

 

  서라벌 육촌(육부)의 육성(六姓)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었다.

  (一) . 알천 양산촌(閼川陽山村)은 담암사(曇岩寺)부근의 지역이다. 알평(謁平)이라는 어른이 표암봉(瓢岩峰)에 강하해서 양부(梁部)의 이씨(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양부에는 파체(波替), 동산(東山), 피상(被上), 동촌(東村)의 부락들이 속해 있었다.

 

 (二) .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어른은 소벌도리(蘇伐都利)로서 형산(兄山)에 강하하여 사량부(沙梁部)의 정씨(鄭氏)의 시조가 되어 나중에는 남산부(南山部)라고 일컬었는데 구량벌(仇良伐),  마등조(馬等鳥),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의 남부 촌락이 이에 속해 있었다.

 

 (三) .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어른은 구례마(仇禮馬)로서 이산(伊山)에 강하하여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의 손씨(孫氏) 시조가 되었다. 나중에는 장복부(長福部)라고 일컬었는데 박곡산 등 서부의 마을들이 이에 속해 있었다.

 

 (四) . 취산 진지촌(嘴山 珍支村)의 어른은 화산(花山)에서 강하한 지백호(智伯虎)로서 본피부(本被部) 최씨(崔氏)의 시조가 되었다. 나중에 통선부(通仙部)라고 일컬었는데 시파(柴巴) 등의 동남부의 부락들이 속해 있었다.

 

 (五) .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은 명활산(明活山)에서 강하한 지타(祗 )가 어른으로서 다스렸는데 한기부(韓岐部)의 배씨(裵氏)의 시조가 되었다. 나중에 가덕부(加德部)라고 일컬었는데 상서지내아(上西知乃兒), 하서지내아(下西知乃兒) 등의 마을들이 속해 있었다.

 

 (六) .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어른은 금강산(金剛山)에서 강하한 호진(虎珍)으로서 습비부(習比部)의 설씨(薛氏)의 시조가 되었다. 나중에 임천부(臨川部)라고 일컬었는데 물이촌(勿伊村),  잉구진촌(仍仇珍村), 갈곡(葛谷) 등의 마을이 이에 속해 있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서라벌 여섯 마을을 다스린 어른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덕 높은 인물로서 신격화(神格化)되어 있다. 그리고 이 여섯 마을의 명칭을 육부(六部)로 고치고 육성(六姓)을 명한 것은 서러벌의 후신(後身)인 신라의 삼대왕(三代王)인 유리왕(儒理王) 九년의 일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중흥부(中興部)를 머리라 했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비라 했고, 임천부(臨川部)를 아들이라 했고, 가덕부(加德部)를 딸이라고 했는데, 그런 말이 왜 생겨났는지 알수 없다. 신라 왕국에서 또 다른 신화적(神話的)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한 땅의 일부였던 여섯 마을은 무슨 공동적인 문제가 있으면 마을 어른들이 모여서 협의하고 부락사회를 다스렸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점점 진하의 지배에서도 떠나고 마한의 지배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북쪽과 서쪽과 남쪽 나라에서 침략해 오거나 교섭이 있을 때, 이에 대한 대책이 문제였다.

  또 육촌 가운데서도 서로 이해가 충돌되는 경우도 있었다. 평화와 풍류생활에 지나쳐 민심이 방종해지고 도의가 문란해지는 경향도 있었다.

  우리 육촌도 한데 뭉쳐서 나라를 세우고 덕 있는 어른을 뽑아서 임금으로 모시자.

  드디어 이런 여론이 마을 어른(首長)을 비롯한 유력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갑자기 훌륭한 임금을 어디서 맞아 오겠소. 우리들 가운데서 상의해서 뽑으면 어떻겠소?

  마을 어른들은 오랫동안 큰 숙제로 삼고 상의해 왔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있어야지요?

  아냐, 모두 왕의 자격은 있지만 친한 친구 사이가 어찌 군신(君臣)의 상하로 갈리겠소?

  하긴 왕이 되는 사람 하나는 좋을지 모리나 신하 되는 사람들은 불평이 있을지 모르겠소?

 그러나 말로는 그러면서도 사실은 아무도 왕이 되려는 욕심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가 왕의 자격에는 부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또 친구를 신하로 거느리게 되면 우정에 배반되는 행동이라고 사양할 만큼 그들은 순진하고 예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비밀투표로 여섯 명이 호선(互選)을 해보았다. 그러나 당선된 사람은 굳이 사양하고 왕이 되기를 거절했다. 그들은 여러 번 비밀선거를 했고 여섯 명이 다 한 번씩 왕의 자격을 얻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말았다.

  우리들 여섯 명은 결국 왕의 자격이 없는 모양이요?

  운이 없는지도 모르지.

  왕이 될 욕심이 서로 없기 때문에 여섯 마을이나마 평온 무사하게 지낸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한 번씩 왕이 되어본 셈이요. 그러나 우리보다도 훨씬 훌륭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는 이대로 지낼 수밖에 없을 것 같소.

  하고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서 왕을 뽑는 것은 단념하고 새로운 인물을 맞아서 왕을 삼고 나라를 세우려는 꿈만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인물은 좀체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건국과 초대왕(初代王) 추대문제를 토의하려고 각각 아들을 데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알천(閼川) 언덕에 모였다. 계절은 삼월 초하루 화창한 보철이었고 연대로는 전한(煎漢) 지절 원년(地節元年)이었다.

  그들은 시냇가에서 천렵을 하면서 상의했으나 결론은 덕이 높은 분을 모시자는 막연한 방안밖에 없었다.

  하늘이 우리에게 좋은 분을 임금으로 보내주실 것이니 높은 산에 올라가서 천기를 봅시다.

  하고 그들은 높은 산 위로 올라가서 사방을 살펴 보았다. 기름진 경주분지(慶州盆地)의 평야에는 보리밭이 푸르고 울창한 숲에도 새로운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마을마다 복사꽃, 오얏꽃이 붉고 희게 핏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오 이 아름다운 강산에 새 나라를 세우려는 우리들에게 하늘께서는 빨리 새로운 왕을 보내 주십시오.

  하고 가장 연장자의 마을 어른이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이때 눈 밝은 한 사람이 놀라는 소리로 외쳤다.

  앗, 저 남쪽 땅에 오색 안개가 덮이고 번갯불 같이 번쩍이는 것이 보인다.

  모두 그 쪽을 내려다 보았다.

  허어 이상한 서기(瑞氣)다. 저기가 어디쯤 될까?

  양산(楊山) 곁 계림(鷄林) 속 나정(羅井) 근처가 아닐까요?

  음, 나정에서 무지개가 솟다가 그냥 퍼져서 땅을 덮고 있군. 그런데 저 은빛을 내며 움직이는 것이 말일까 사람일까?

  백마가 분명하다. 그런데 앞다리를 꿇고 자꾸 절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상하니 다들 가봅시다.

  그들 일행은 무슨 상서로운 징조가 있을까 기대를 가지고 계림의 나정 샘터로 내려갔다.

그들 일행이 나정 샘터 가까이 가자 무엇을 향해서 꾸벅꾸벅 절하고 있던 은빛 백마가 놀란 듯이,

  오호흥 !

  한 마리가 크게 울더니 날개를 펴고 하늘로 올라 가 벼렸다.

  아마 하늘께서 귀하신 아드님을 천마(天馬)에 태워서 강하(降下)시키신 모양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임금을 보내신 모양이다.

  모두들 가슴을 두근거리며 가보자, 계수나무 밑에 커다란 박모양으로 생긴 붉은 알 한 개가 잔디 위에 놓여 있었다.

  아마 이 알에 무슨 기적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마을 어른들은 나정물에 손과 발을 씻고 정성껏 그 큰 알을 가르자 속에서 훌륭한 옥동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기뻐하며 옥동자를 곧 신성한 동천(東泉) 물에 목욕시키자 순간, 눈부신 광채가 전신에서 발해서 온 세상이 환해졌다.

  그와 동시에 봉황(鳳凰)을 비롯한 각종 새들이 공중에 모여서 기쁜 합창을 하듯이 울면서 빙빙 돌았다. 그리고 기린(麒麟)을 비롯한 각종 짐승도 주위에 모여들어 춤추며 돌아다녔다.

  이 옥동자는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이오. 우리가 원하는 새 나라의 왕으로 보내셨군요.

  우리 왕으로 잘 길러 모십시다. 이름을 무어라고 지어 올릴까?

  육촌의 어른들은 왕의 이름을 상의한 끝에 알이 박 모양 같았으므로 성은 박씨(朴氏) 로 정하고 광채가 세상을 밝게 했다고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정했다. 그리고 왕의 위호(位號)를 옥동자가 입을 열고 처음 말한 [거서간]을 따서 거서간(居西干)이라고 지었다. 그 후로 신라 초대에는 왕을 거서간이라고 하게 되었다.

  하느님 아들이 강하해서 이 나라의 왕이 되셨다.

  여섯 마을의 백성들은 모여 와서 경축의 풍악을 올리면서 성대한 하례식을 올렸다.

  하느님의 아들 왕께 덕 있는 처녀를 맞아서 왕후를 삼아야겠는데 어떤 복 있는 처녀가 뽑힐까?

  길쌈 잘하고 노래 잘하는 미소녀들의 가슴은 왕후의 꿈으로 부풀었다. 그러나 지상의 인간은 하느님 아들의 배필이 될 자격이 없었다.

  마침 그날 사량리(沙梁理)의 알영정(閼英井) 샘터에 계룡(鷄龍)이 나타나더니 왼편 옆구리에서 아름다운 소녀가 탄생했다.

  같은 날 두 샘터에서 기적같이 생남 생녀를 했으니 천생연분(天生緣分)이다.

  하고 경희(驚喜)한 백성들은 이 용녀(龍女)를 박혁거세왕의 왕후로 삼았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흠은 이 아름다운 용녀의 입술이 계룡을 닮아서 닭의 부리와 같이 뾰족하고 딱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흠은 월성 북천(月城北川) 물에 목욕시킨 순간에 곱게 떨어지고 붉고 부드러운 입술로 변해졌다. 그래서 그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러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름은 알영 샘터에서 탄생했으므로 알영이라고 지었다.

  육촌의 백성들은 초대의 왕과 왕후를 모실 왕도를 현재의 경주에 정하고, 대궐을 남산 서편 기슭의 명당에 웅장하고 호화롭게 지었다. 이 궁전 안에서 박혁거세와 알영을 곱게 봉양한 뒤에 열세 살이 되자 대혼식(大婚式)과 함께 왕의 즉위식(卽位式)을 올린 후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하고 정식으로 건국했다 (西紀前五十九).

  종래 육촌의 어른들은 대신이 되어서 어린 박혁거세왕을 보필했다.

  이렇게 건국된 서라벌 나라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 혹은 계림국(鷄林國)이라고 했다.

이 서라벌의 국세(國勢)가 점점 커짐에 따라서 신라(新羅)로 국명을 고치고 변한 전체를 국토로 확장해서 오랫동안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를 이루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해서 단일민족에 의한 단일국가인 대신라(大新羅)의 통일위업(統一偉業)을 이룩했고 동양에서 으뜸 가는 찬란한 불교문화를 빛냈던 것이다.

  이러한 대신라와 건국시조(建國始祖)인 박혁거세왕은 六十一년 동안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서 태평세월의 복을 누리게 했다. 왕이 승하하자 오체(五體)가 각각 떨어져 버리자 대신들이 송구히 여기고 오체를 모아서 함께 장례 지내려 하자, 왕후가 천의(天意)라 하고 탐암사 북쪽 명당에 오체를 따로 따로 묻어서 다섯 개의 능을 일렬로 썼는데 이것을 총칭해서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길게 늘어선 배열이 뱀 모양 같았기 때문이다.

 

 

 

  龍卵에서 脫解된 四代王

  초대 임금 박혁거세가 승하한 뒤에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 임금이 제 二대 남해왕(南解王)이다.  이 왕은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이라고도 했지만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차차웅은 신라의 말로 큰 어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신라왕 가운데서 차차웅이라고 불리운 것은 남해왕 뿐이다.

  왕비는 운제산(雲帝山) 성모(聖母)의 딸로 운제부인(雲帝夫人) 또는 운제(雲梯)부인이라고 했다.  운제산은 영일(迎日) 땅에 있었는데 그 산에 사는 운제성모는 비를 다스리는 덕이 있어서,  날이 가물 때 농민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비를 내려서 풍년을 들게 했다.

  남해왕 때 신라로서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낙랑(樂浪)의 군대가 쳐들어 와서 서울인 금성(金城)까지 한 때 점령당하는 국난(國難)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신라 육부의 백성들은 남녀노소가 모두 나서서 민병으로 무장하고 용감히 싸웠다.

  낙랑의 군대는 비록 한민족(韓民族)의 피를 받았다는 탈을 썼으나 이족(異族) 한(漢)나라의 종 노릇 하는 놈들이다. 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면 외적의 종의 종 노릇을 하게 된다. 육부의 백성이 전부 죽을 때까지 용감하게 싸우자.

  이런 각오와 단결로 싸워서 마침내 남침해 온 낙랑군을 물리쳐서 신라의 국위를 인접 나라에 떨쳤다. 일본의 해적단도 연해지방을 노략질했으나 모두 물리쳤다.

  신라의 이러한 위엄과 덕치(德治)에 감동한 고구려의 비속(裨屬) 일곱 개 소국(小國)이 천봉(天鳳) 五년에 스스로 귀순해 왔다. 그 이유는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는 것보다 신라에 신부(新附)하는 것이 잘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나 낙랑은 무력으로 남의 나라를 강탈하려고 하지만 우리 신라는 덕치(德治)의 인정(仁政)이 그리워서 스스로 오는 타국의 백성을 받아서 애호한다.

  하고 남해왕과 그 밑의 대신들이 자랑할 만큼 국내 질서가 잡히고 여유 있게 되었다. 남해왕이 二十一 년 동안 부왕(父王)이 세운 국기(國基)를 튼튼히 다져 놓고 승하하자 다음 임금의 자리에 오를 태자 노례(努禮)는 자기보다도 매부 탈해가 덕이 더 많다고 그에게 왕위를 양도하려고 했다.

  매부가 나보다 덕이 많아서 나라를 잘 다스리겠으니, 왕이 되어 주게.

  아닐세. 자네는 정통(正統)의 태자인데 나보다 덕이 높으니 으레 자네가 왕통(王統)을 이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면 누가 덕이 더 있는가 시험해 보세.

  덕을 무엇으로 잴 수 있는가?

  덕 있는 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하니, 이빨수효를 비교해 보세.

  왕위를 서로 사양하던 처남과 매부는 흰떡을 물어서 잇자죽 수효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태자의 이빨 수효가 많았으므로 왕이 되었는데 이가 三代 유리왕(儒理王)이다.

  약속대로 내가 먼저 왕이 되네마는 내 다음에는 자네가 되어야 하네.

  유리왕은 탈해와 이렇게 약속을 했다.

  그런데 이 약속대로 제 四대의 왕이 된 탈해의 신분과 경력이 실로 기이했다. 그는 남해왕의 공주와 결혼한 행운아로서 유리왕과 우애가 지극히 좋은 처남 매부의 사이였다.

  남해(南解)의 용성국(龍城國)은 용왕(龍王)이 다스리고 있었다. 이 나라의 다파나왕(多婆奈王)은 여자만 사는 적녀국(積女國)의 공주를 맞아서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첫아이를 갖고 七년만에야 비로소 산기(産氣)가 있었다. 대신들은 속으로는 해괴한 일이라 걱정했으나 왕을 안심시키려고 위로의 말을 했다.

  자고로 큰 인물은 어머님 태내에 오래 있는 법이니, 이번에 귀한 왕자를 얻으실 것입니다.  훌륭한 태자를 얻으시면 나라의 큰 경사올시다.

  그러면서도 그런 축하의 말이 빈말에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해산을 하고 나자 궁중의 모든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어머나, 왕비께서 七년 만에 아기가 아니고 큰 알을 낳으셨다니!

  궁중에서는 쉬쉬하고 해괴한 해산을 숨기려고 했으나 궁녀들의 속삭임은 곧 대신들의 귀에 들어갔고 이내 모든 백성들까지 알게 되었다.

  이게 무슨 망측한 일이냐!

  다파나왕은 창피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아들 운수의 반 책임은 자기에게 있었으므로 산모만을 책망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왕은 대신들에게 명령했다.

  해괴한 알을 빨리 바다에 던져버려라!

  그러나 왕비의 슬픔은 여간 크지 않았다. 비록 해괴한 알을 낳았지만 七년 동안이나 배에서 키워온 혈육(?)이라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비록 알이라도 생명이 있는 것을 어찌 바다에 던져서 죽일 수가 있으랴. 혹시 알에서 자녀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궁녀들과 상의했다. 그러나 그 알에서 왕자가 탄생할 것이라고 그냥 궁중에 두자 할 용기도 염치도 없었다. 왕비는 왕도 모르게 큰 궤짝을 짜서 그 알을 넣고 일곱 가지 보물과 비단과 양식까지 담아 배에 싣고 두 명의 시녀까지 따라가게 했다.

  너희들은 이 알을 잘 모시고 어딘지 모를 나라로 가거라. 필경 이 알에서 훌륭한 왕자가 탄생할 것이니 궤 속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나거든 너희들이 잘 길러 모시거라.

  네

  시녀들은 왕비의 명령대로 궤짝을 안고 바다 쪽으로 향했다. 왕비는 궤짝을 붙들고 이별을 슬퍼하면서

  내 아들아, 네가 알을 깨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먼 나라로 배에 실어 보내는 이 어미의 딱한 사정을 용서해라. 어떤 좋은 나라에 가서 사람으로 화한 뒤에 훌륭한 인물이 되어 다오. 나는 네가 인간으로 훌륭한 성공을 하도록 바다 신령과 하느님께 빌겠다.

  (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이것도 모두 운명입니다. )

  왕비는 궤속 알이 이런 대답을 하는 것만 같았다. 왕비는 산후의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바닷가까지 나가서 알을 떠나 보내며 섭섭한 전송을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분명히 말소리가 들려왔다.

  왕후님,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제가 용왕님 분부를 받았습니다. 복 받을 나라로 가서 뒤에 그 나라의 임금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왕비는 그런 말을 듣고 반신반의 했으나 마음이 좀 놓였다. 이윽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배는 동북쪽을 향해서 점점 해변에서 멀어갔다.

  바람 부는 방향과 다르므로 이상히 여기고 자세히 본즉, 뱃가에 붉은 용(赤龍)이 헤엄치면서 배를 끌고 가고 있었다. 왕비는 두 손을 모아 용왕님께 빌었다.

  용왕님 감사하옵니다. 제 혈육이 또한 용왕님의 외손주이니 부디 좋은 나라로 가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왕자 구실을 하게 해주십시오.

  신비한 알을 실은 고운 배가 가락국(駕洛國)의 해변(金海地方)을 지날 때, 마침 그곳에 행차했던 수로왕(首露王)이 발견하고 신하들에게 명했다.

  저렇게 곱게 단장한 배는 처음 보았다. 필경 귀한 인물이 탔거나, 귀중한 보물이 실려 있을 것이니 딴 나라로 가기 전에 빨리 영접선을 타고 가서 우리 나라로 맞아 오거라. 실례가 되지 않게 국빈으로 정중하게 모셔라. 내 간곡한 초청 인사를 하고…

  신하들은 곧 영접선을 타고 환영의 북을 쳐서 배가 머물도록 신호를 하며 그 배를 향해서 갔다.  그러나 그 배는 가락국 해안을 그냥 지나서 신라의 해안으로 빨리 가고 있었다. 수로왕의 영접선은 기를 쓰고 쫓아갔으나 붉은 용이 인도하는 배를 따를 수가 없었다.

  허어, 내 덕이 부족해서 귀한 손님이 그냥 가버렸구나!

  가락국의 수로왕은 그 배를 맞아들이지 못한 것을 매우 섭섭히 여겼다. 알을 실은 배는 서라벌 동해안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오늘의 영일만)에 도달했다.

  이때 동해를 파수 보고 있던 해척지모(海尺之母)의 아진의선(阿珍義善) 노파가 그 기묘한 배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외국의 침략선(侵略船)이 아니면 해적선(海賊船)만 경계해 오던 아진의선 노파도 이렇게 곱게 단장한 꽃배는 본 일이 없었다. 필경 이 나라에 귀한 손님이 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배는 점점 해안으로 가깝게 왔으나 배 앞뒤에는 뱃사공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고운 배는 해안으로 오고 있었다. 마침 아침 해가 동쪽 수평선에 솟아올라 황금빛 잔잔한 물결에 떠오는 배는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바다에는 없는 까치떼가 배 위를 빙빙 돌면서 깍깍 울었다.

  난데 없는 아침 까치떼가 환영하는 저 배는 분명히 귀한 손님이 타고 오시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한 노파는 어촌 사람들을 데리고 배를 끌어다가 해안에 매었다. 그리고 배안에 들아 가 본즉 화려한 선실 안에는 궤짝 속에 어린 귀공자가 있고 좌우에 한 명씩 시녀가 옹위하고 있었다.

  어디서 오신 귀한 손님이십니까?

  해척지모의 노파가 공손히 물었다.

  용성국의 왕자입니다.

  사공도 없이 어떻게 모시고 왔소?

  붉은 용이 이 나라로 인도해 왔습니다.

  노파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시녀의 말에 놀랐다. 어린 왕자는 물론 항해 줄에 알 껍질을 깨뜨리고 탄생한 용성국 다파나왕의 왕자였다. 아무 말없이 미소를 짓고 있던, 알에서 탄생한 왕자는 선실에서 나와 성큼성큼 걸어서 육지로 올라갔다. 그리고 노파에게 물었다.

  이 나라가 서라벌인가요?

  도련님, 이 나라가 분명히 서라벌입니다. 처음부터 서라벌을 찾아오셨습니까?

  용왕께서 서라벌이 복된 나라니 그 나라에 가라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늠름한 소년의 모습은 범하기 어려운 왕자의 기상이 있었으나 모르는 나라에 온 손님답게 노파에게도 공손한 말씨로 대했다.

  용성국은 어디 있는 나라입니까?

  노파는 시녀에게 들은 귀공자의 본국을 물었다.

  용성국은 용왕이 다스리는 해국(海國)으로 일본 나라 동북쪽 천리밖에 있는 큰 섬나라입니다.  사람으로 환생한 二十八명의 용왕이 있습니다. 우리 용성국의 왕자는 五,六세만 되면 완전한 어른이 되어서 왕위에 오릅니다. 나는 이 서라벌에 올 운명이었기 때문에 七년 동안 왕후인 어머님 뱃속에서 자라서 이 서라벌 나라로 오게 되었습니다.

  어머님께서 七년만에 낳으신 아드님을 먼 나라로 보내셨어요?

  노파가 또 놀랐다.

  소년은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알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왕이 추방한 것을 어머니의 정성과 붉은 용의 인도로 인연의 땅 – 이 서라벌까지 왔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말했다.  항해 중에 알에서 탄생했다는 소년의 말에 사람들은 경이(驚異)의 귀를 기울였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상륙시켜 준 은혜는 훗일에 갚겠습니다.

  소년은 인사를 한 뒤에 시녀 두 명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

  도련님, 누추하지만 우리 집에 가서 기다리시지요. 임금께 알려 드리면 서울로 모셔갈 것입니다.

  아니올시다. 내가 이 나라에 아직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는데 어찌 왕의 호의를 받겠습니까?

  하고 두 명의 시녀를 데리고 어디로인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소년은 시녀들의 앞장을 서서 사방 지세(地勢)를 살피며 가다가 어떤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소년의 비범한 용모를 보고서 귀공자로 짐작하고 물었다.

  도련님은 어디서 온 누구로써 어디로 가오?

  소년은 자기의 내력을 사실대로 말했다.

  허어, 참 기이한 도련님이군. 이름은 무어라 하오?

  소년은 비로소 자기의 이름이 없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름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느낀 그는 조금 생각한 뒤에, 스스로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대답했다. 얼핏 생각해서 알에서 까 나왔다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는 곳은 아직 정처가 없었으므로

  이 나라에 처음 왔으므로 우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두루 구경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탈해는 노인과 헤어진 뒤에 시녀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살 집을 마련해야겠는데 우선 집 지을 명당자리를 잡기로 하자.

  탈해는 멀리 바라보다가 높은 산을 보고 방향을 점쳤다.

  저 산을 넘어야 서라벌 서울로 가겠으니 저리로 가자.

  네.

  시녀들은 탈해를 따라서 토함산(吐含山)으로 올라갔다. 토함산에 올라간 탈해는 자기가 항해해 온 동해를 내려다 보고 서라벌 평야를 굽어 보았다.

  이 산이 명산이다. 이 산중에서 좋은 집터를 잡자.

  하고 七일 동안이나 나무 밑과 동굴 속에서 자면서 낮이면 복 받을 집터를 찾아 다녔다.

그러다 초승달같이 묘한 모양의 산봉우리가 있고 그 밑에 좋은 집터가 있을 듯한 것을 발견했다.

  저 산봉우리 밑이 명당 같다.

  탈해는 시녀들을 데리고 그 장소로 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경치가 좋고 양지 바른 평지가 있었다.

  저 곳에 왕기(王氣)가 돌고 있다. 저 곳에 집을 짓고 살면 나도 장차 서라벌의 왕이 될 것이다.

  시녀들은 고생 끝에 주인 소년의 그런 말을 들었으므로 여간 기쁘지 않았다. 왕이 될 집터가 아니라도 어서 정착하여 집을 짓고 편히 살고 싶었던 것이다.

  왕자님, 그럼 어서 가서 집을 짓도록 하세요.

  이런 희망으로 무거운 다리에서 피로가 풀려 산비탈을 올라갔다. 그러나 그 곳에 가본즉, 그 좋은 집터에는 이미 절간 같은 집 한채가 서 있었다.

  아차, 내가 늦었구나!

  탈해는 낙망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이 집을 빼앗아 살 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산밑으로 내려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산봉우리 밑에 있는 절간 같은 집에 누가 살고 있나요?

  호공(瓠公)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지.

  호공이라, 그가 그 집에 살면 장차 서라벌의 왕이 될 인물이구나. 무슨 방법으로든지 그 집에 내가 살아야 하겠다.

  탈해는 달밤에 대장간에서 쓰고 버린 쇠똥과 숯 부스러기를 한 부대 메고 가서, 그 집 뒷마당을 판 후 묻어두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튿날이 되자 그는 그 집을 찾아가서 엉뚱한 요구를 했다.

  이 집터는 우리 조상 때 소유지요. 내가 그 집문서와 증거를 갖고 왔으니 당장 집터를 내 놓으시오. 집을 팔기 싫으면 집을 뜯어다 다른 터에 지으시오.

  아니, 어디서 온 어린 놈이 내 집터를 빼앗으려고 엉뚱한 거짓말을 하느냐. 어디 집문서를 보여라.

  탈해는 가지고 온 거짓 집문서를 보였다.

  이 따위 종이 문서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믿을 수 없으니 못 내놓겠다.

  그럼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오면 내놓겠죠?

  무슨 증거냐?

  우리 조상이 이 터에서 대장간을 내고 대대로 업을 삼아 왔소?

  그 증거가 있느냐?

  증거가 나오면 집터를 내놓아야 하오. 당신도 글을 읽는 선비로서 신의가 있어 보이니까 약속은 지킬 것 같은데 어떻소?

  탈해는 은근히 호공의 도의심을 추켜 올렸다. 호공도 도학을 닦는 인물이라 소년의 사리 밝은 말에 꿀리고 싶지 않았다.

  좋다. 내가 어찌 남의 집터를 탐내서 안 주겠다 하겠느냐? 만일 이 집터가 네 조상들의 대장간 터였다는 증거만 나오면 선뜻 내놓겠다.

  좋습니다. 그럼 이 집 뒷마당을 파봅시다.

  탈해 소년은 집주인 호공을 입회시키고 괭이로 뒷마당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호공은 코웃음을 치면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아, 이 쇠똥과 숯 부스러기를 보시오. 이래도 대장간 터가 아니라고 우겨대겠소?

  탈해 소년이 파낸 증거품을 본 호공은 비로소 놀랐다.

  음, 나도 청렴한 선비, 신의를 아는 선비다. 네 말대로 네 조상 때 집터이니 내가 이사 하겠다.

  하고 선뜻 약속을 지켰다. 탈해는 자기의 꾀가 성공한 것을 기뻐했으나 속인 자기보다도 속는 호공의 태도가 훌륭한 현사(賢士)의 도량이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조상의 유산을 찾으려는 나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이 집은 후한 값으로 사겠습니다. 다른데 가서 터를 사고 이보다 나은 집을 지으시오.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벗이 되면 어떻습니까?

  허허허, 동생 같은 네가 이렇게 영리하고 사리에 밝아, 집을 쫓겨 나는 분한 생각도 없다.  나도 다른 집을 장만해야겠으니, 후한 값은 필요 없고 이만 정도의 집을 지을 경비나 내라.

  고맙습니다.

  탈해는 자기의 전신(前身)인 알과 함께 뱃속에 싣고 왔던 보물로 호공에게 후한 집값을 주고 그날로 그 집에서 살았다. 이때가 서라벌 초대 임금 박혁거세 재위(在位) 三十九년 되는 해였다.

  탈해가 이 집에서 살게 되자 그는 밤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낮에는 농사와 사냥과 고기잡이를 부지런히 했는데 뜰 앞의 죽순(竹筍)처럼 빨리 자라서 키가 구척장신(九尺長身)에 이르렀다.  힘센 장수, 지혜로운 학자, 덕 있는 현사로서 그의 이름은 서라벌에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서라벌의 풍속에는 이름 뿐 아니라 성(姓)도 있어야 행세했는데 탈해는 이름만 자기가 지었지 성은 아직 짓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의 고국 용성국에는 성이 없었으므로 조상에게서 물려 받을 수도 없었다. 역시 스스로 정하는 것이 좋으나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한참 안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옳지 내가 처음 서라벌 해안에 이르렀을 때, 아침 까치 떼가 배 위를 날면서 환영했다. 까치는 경사스러운 새니까 까치 성으로 하자. 그러나 사람의 성이 까치작(鵲)으로 하면 좀 이상하니 새조(鳥)자를 떼고 옛석(昔)자로 성을 삼자

  그리해서 그의 성명 三자가 완성되었으므로 석탈해(昔脫解)라고 했다. 신라 왕조의 박석김(朴昔金) 삼성은 초대의 혁거세왕이 박씨였고 四대의 탈해왕이 석씨였으며 十三대의 미추왕(未鄒王)이 김씨였기 때문이다.

  석탈해는 점점 성년이 됨에 따라서 학문과 도술을 연구했으므로 천문 지리와 각종 술법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이 뜻대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때 그는 동악(東岳)에 사냥 갔다가 목이 몹시 말라 데리고 다니는 하인 백의(白衣)에게

  너 물 좀 얻어 오너라.

  하고 명했다. 백의는 주인의 명을 받고 산골짜기 밑에 있는 샘물로 내려가서 그릇에 물을 떠가지고 오다가 목이 말라서 주인 모르게 한 입 훔쳐 먹었다. 그러자 주인 먹을 물을 먼저 마신 벌로 물그릇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인 백의는 주인에게 발각 될 것이 두려워서 물그릇을 입에서 떼려고 아무리 잡아 당겨도 떨어지지 않았다.

  (주인이 벌써 알고 이런 벌을 주신 것일까, 하늘에서 내리신 벌일까.)

  백의는 주인의 한 때 꾸중은 용서 받겠지만 입에서 그릇이 붙은 채 떨어지지 않으면 평생 두고 해괴한 병신이 되어야 할 것이 큰 고민이었다.

  산신령님, 제가 주인 잡수실 물그릇에 먼저 입을 댄 죄를 용서하십시오. 물은 다시 정한 물을 떠다 드리겠습니다.

  백의는 겁이 나서 다시 골짜기로 내려가서 다른 그릇에 물을 떠가지고 주인 석탈해 앞으로 갔다. 석탈해는 입에 물그릇을 혹으로 달고 온 꼴이 우스웠으나 억지로 참고

  사람은 정직하고 제 분수를 지켜야 한다. 네 입을 보니 나를 속이려다가 벌을 받았구나.

  도련님, 금후호는 도련님이 보시는 곳에서나 안 보시는 곳에서나 결코 속이는 행동을 않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맹세하오니 이번만 용서하시고 도련님 도술로 입에 붙은 그릇을 떼어 주십시오.

  석탈해는 하인이 알아듣도록 잘 타일렀다.

  자기 주인을 성심성의로 속임 없이 섬기는 것이 충복(忠僕)이다. 그리고 임금에게 성심성의로 모든 것을 바쳐 섬기는 것인 충신(忠臣)이다. 그러므로 충신과 충복의 도리는 같다.

사사로운 주인의 충복이 나라에 봉사하면 충신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직하고 맡은 직책에 신의 있는 덕행이 바로 충복과 충신의 길이다.

  앞으로 그런 말씀을 명심하고 실행하겠으니 이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석탈해는 하인의 맹세를 받은 뒤에 주문을 외워 입에 붙은 그릇을 떼어 주었다. 이때 백의가 물을 떠온 샘은 먼 곳에 있었다 해서 원내정(遠乃井)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고 석탈해가 산명당 집터는 초승달 같은 산봉우리 모양이었기 때문에 월성산(月城山)리라고 불려졌다.

  석탈해의 덕행과 도술이 유명해지자 서라벌 二대왕 남해왕(南解王)은 재위 五년 되는 해에 그를 아효공주(阿孝公主)와 결혼시켜서 부마를 삼았다. 부마가 된 석탈해는 남해왕 七년에는 대보(大輔), 즉 총리대신이 되어서 나라를 잘 다스렸다. 남해왕의 태자요, 석탈해의 처남인 노례(弩禮)는 왕위를 매부 석탈해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그것을 사양한 것은 이미 앞에서 소개하였다.

  처남인 유리왕 밑에서 보필한 석탈해는 문학을 장려해서 신라가악(新羅歌樂)의 시초인 도솔가(도率歌)를 창작하게 했고 농공을 장려해서 보습과 호미 등의 농구(農具)를 발명했으며 수레(車)와 빙고(氷庫)까지도 제작해서 신라 초창기의 문화건설에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군비도 강화해서 고구려의 침입을 물리쳤고, 서쪽 마한(馬韓)의 일국(一國)인 이서국(伊西國)을 합병했는데, 이것이 서라벌로서는 최초의 전쟁에 의한 국토 확장이었다.

  유리왕이 승하하자 석탈해는 유리왕과의 약속에 따라서, 전한(前韓) 광호제(光虎帝) 중원(中元) 二년 六월에 나이 七十二세로 四대왕에 등극했는데, 그전에 집터를 양도 받은 호공을 재상으로 등용했다. 그는 시조 박혁거세 이후의 제 二의 명군(明君)으로서 재위 二十三년 동안에 정치와 산업과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가 九十二세의 천수(天壽)를 마치고 승하한 뒤에 하늘에서는 그의 영혼의 분부가 있었다.  이것을 신조(神詔)라고 했는데

  내 뼈를 땅 속에 묻지 말라.

  하는 이상한 분부였다. 국상을 준비하던 대신들이 당황했다.

  성골(聖骨)을 묻지 말라는 분부이시다. 그러면 성육(聖肉)은 어찌 하오리까?

  대신들은 탈해왕 유해 앞에 제사 지내면서 제문(祭文) 으로 물었다. 그러자 구척 장신의 유해 전체가 백골로 화해서 또다시 대신들을 놀라게 했다. 뼈의 굵기는 석자 두치(三尺二寸)요,  길이가 아홉자 일곱치(九尺 七寸)나 되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 장사뼈를 어떻게 모셔야 좋을지 몰랐다. 땅에 묻지 말라는 영혼의 분부는 알았으나, 어떻게 둘지가 문제였다.  그래서 유명한 도술가에게 물었다.

  거룩한 뼈에 대왕의 생전 모습을 조각해서 대궐 안에 안치하십시오. 그러면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수호상(守護像)이 되실 것입니다.

  왕실에서는 이 도술가의 점괘에 따라서 등신대(等身大)의 골상(骨像)을 만들었다. 미망인 아효왕후는 매달 기일(忌日)에 이 골상에 제사 지내서 부왕(夫王)의 영을 위로했다. 그러다가 미망인이 세상을 떠나자 그 골상이 또 신조로 분부했다.

  이제 내 뼈를 동악(東岳)의 아효능 옆에 묻어라.

  대신들은 이 분부에 따라서 왕비 옆에 쌍능(雙陵)으로 모셨다.

 

 

  朴氏 昔氏 뒤의 金氏 王室

  신라 초창기에 왕실은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이 계승(繼承)했는데, 이것은 혈통직계가 아님을 뜻한다. 그러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의한 왕권쟁탈의 유혈극을 벌린 결과도 아니었다.  신라의 역사는 고대 신화적인 유덕자위왕(有德者爲王)의 미담(美談)으로 이루어진 역사였다. 

  서라벌 시조의 혁거세왕부터가 신화적 인물로서 성이 박씨였고 제 四대 왕인 탈해왕도 신화적 인물로서 성이 석씨였다. 그리고 제 五대의 왕태자(王太子) 알지도 신화적 인물로서 성이 김씨였던 것이다. 왕태자 김알지는 태자였지만 왕의를 사양하고 그의 六대손 김미추(金未鄒)가 제 十三대 왕으로 등극해서 경주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탈해왕 시대는 왕 자신부터가 명군인데다가 애보0大輔) 호공(瓠公)이 명신이라 태평성세(太平聖世)를 구가(謳歌)했다.

  전한(前韓) 영평(永平) 三년 八월 四일에 호공은 월성 서리(月星西里)의 계림(鷄林) 숲 옆을 지나고 있었다. 가을 바람에 단풍이 들기 시작한 계림의 경치가 곱고도 맑았다.

  이때 계림에 갑자기 밝은 빛이 눈부시게 발산 하면서 오색 구름이 모여들었다. 이상하게 여긴 호공이 숲으로 가까이 가본즉 계수나무 가지에 황금 궤가 걸려 있었는데 눈부신 광채는 그 궤에서 발하고 그 나무 밑에서 흰닭(白鷄)이 울고 있었다.

  이것은 나라의 큰 경사올시다. 곧 거동하여 친히 보십시오.

  호공은 곧 왕에게 아뢰었다. 탈해왕이 예복을 갖추고 계림으로 거동한 뒤에 나무 위의 황금 궤를 내려서 열어 보자 그 궤 안에는 옥동자가 벙실벙실 웃고 있었다.

  상감, 이 옥동자는 하늘이 보내신 귀인입니다. 시조 박혁거세왕께서도 큰 박 같은 알 속에 이 모양으로 강림(降臨)하셨습니다.

  하고 호공은 왕에게 잘 양육할 것을 아뢰었다.

  알지(閼智)

  금 궤 속의 옥동자는 울음 대신에 이런 첫말을 했는데 알지는 서라벌의 말로 아기라는 뜻이었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김씨(金氏)라고 정했다. 그리고 길일을 택해서 이 김알지를 태자로 봉했다. 그러나 탈해왕이 승하한 뒤에 왕권(王權)을 유리왕의 아들에게 사양하니 이가 五대 파사왕(婆娑王)이다.

  저는 신하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더 큰 일을 하겠으니 지존(至尊)의 보좌(寶座)는 삼가 사양하겠습니다.

  하고 겸양(謙讓)의 미덕을 발휘하고 동시에 권력 암투에 대한 교훈을 천추 후세에 남겼던 것이다.  그 김알지는 二백살이나 살면서 다섯 임금 밑에서 가장 높은 벼슬로 충성을 다했다.  그러다가 제 十二대 이해왕(解王)이 승하한 뒤에 김알지의 六대손 김미추(金未鄒)가 즉위했는데 이 미추왕이 비로소 신라왕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왕비는 제 十一대 조분왕(助賁王)의 공조 광명랑(光明娘)이었고 광명랑은 이름 그대로 달같이 얼굴이 곱고 마을이 명랑한 공주였다.

  그리하여 신라 초기에는 박, 석, 김 삼씨는 혈연(血緣)으로도 왕권(王權)으로도 왕연일체의 가족적 왕실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추의 능은 처음에는 조당(祖當)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김씨로서 처음된 임금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추왕 이후에는 김씨의 자손이 세습(世襲)으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제 二十九대 태종(太宗) 무열왕(武列王) 김춘추(金春秋)가 처음으로 삼국통일의 대위업(大偉業)을 이루고 통일신라(統一新羅)를 이룩했다.

  그리고 제 五十六대 경순왕(敬順王)이 신흥고려(新興高麗) 태조 왕씨(王氏)에게 나라를 내어 줄 때까지 김씨가 왕실을 이어 왔던 것이다.

 

 

 

  敵國에 人質로 갔던 두 王弟

  신라는 건국 이래 비록 국토는 넓지 못했으나 평화를 사랑하고 외국에 대하여 침략의 야심을 품지 않았다. 오직 안으로 화목해서 육부의 중심을 문화의 화원으로 만들고 덕화(德化)를 사모하고 귀화하는 인접 나라의 백성을 포섭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북쪽의 고구려와 서쪽의 백제가 가끔 국경을 침범하고 불의의 습격을 가해 왔다.

그때마다 왕실과 군신(君臣)과 백성들은 혼연일체(渾然一體)로 단결해서 아름다운 나라를 지켰다.  인심이 순박한 신라인들은 비록 나라로는 갈렸으나 동족(同族)끼리 피를 흘리고 살육하는 전쟁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배를 조종하는 일본의 해적단과 군대가 동해안과 남해안을 침범하면 외적에 대한 민족적인 분개를 금하지 못했다. 그러나 항상 외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급급할 뿐 수군(水軍)을 동원해서 그들의 본거지를 공격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공격해 온 일본군을 결사적으로 싸워서 물리쳤으나 그럴 때마다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막심했다. 그래서 일본과는 항상 전투가 아니면 화평교섭이 그치지 않았다.

  제 十七대 내물왕(奈勿王) 三十七년 일본의 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신라를 속이려는 간계였다.

  < 귀국과 우리 일본은 비록 바다로 격해 있으나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입니다. 과군(寡君)은 대왕의 성명(聲明)하심을 듣고 항상 흠모하여 마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피차의 오해로 불미한 사건이 양국 사이에 있었지만 앞으로는 서로 이해(理解)를 증진시키고 국교를 두텁게 하며 문화의 교류를 시켜서 피차 은혜를 입고자 하오니 과군의 성의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건대 귀국과도 적대관계에 있는 백제야 말로 과국(寡國)과 공동의 적이오며 앞으로는 백제에 대한 대책도 공동으로 세우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즉 백제에 대한 군사동맹 등을 협력할 겸 사절로서 대왕의 왕자 한 분을 과국으로 파견해 주시면 얼마나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내물왕은 일본왕의 이러한 평화제의와 공동의 적국인 백제에 대한 군사동맹을 맺게 된다

면 신라로서는 매우 좋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일본왕의 요청대로 셋째 왕자 미해(美海)를 사절로 일본에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왕자를 보내라는 것은 형식상의 예의를 갖추기 위한 데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미해왕자는 나이가 열 살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어린 왕자를 보호하고 가게 된 부사(副使)인 내신 박사람(朴娑覽)이 실질적인 외교를 담당했던 것이다.

  내물왕이 일본과 화친하고 백제에 대한 군사동맹까지 맺을 희망으로 왕자까지 보냈지만 결과는 일본의 모략에 속은 데 지나지 않았다.

  일본은 속여서 끌어간 미해왕자를 돌려 보내지 않고 인질(人質)로 잡아 두었다. 만일 신라가 일본에 대해서 불리한 행동을 취하면 미해왕자를 살해할지도 모른다고 공포감을 주기 위한 간악한 술책이었다.

  왕자를 인질로 빼앗긴 내물왕은 일본의 배신에 분노했으나 할 수 없이 여러 번 왕자를 돌려 보내라고 요구하면서 일본의 반성만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요구는 번번이 무시된 채 세월은 三十년이나 흘러 버렸다. 열 살 때 일본에 간 미해왕자는 四十이 되도록 이역(異域)에서 고독한 인질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 十八대 눌지왕(訥祗王) 때에도 미해 왕자의 경우와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의 상대는 일본이 아니라 고구려였다. 눌지왕 三년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사신을 보내서 두 나라의 친선관계를 도모하자고 꾀었다.

  장수왕이 보낸 국서(國書)에는 다음과 같은 왕제(王弟) 초청이 겸해 있었다.

  < 귀국과 과국(寡國)은 옛날부터 가장 친한 이웃나라로서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 왔습니다. 간혹 주위의 사정이나 오해로 사소한 분쟁도 있었지만 그것은 우리 두 나라의 본의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분쟁의 원인도 모두 우리 양국의 공동의 적인 백제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과군(寡君)은 앞으로 귀국과 뜻과 힘을 합해서 백제를 견제하려 합니다. 듣잡건대 대왕의 왕제 보해공(寶海公)이 매우 영특하다 하오니 대왕의 대리로 과국에 보내 주시면 두 나라의 친선문제를 의논하고자 하오니 과인의 청을 허용하여 주십시오.>

  눌지왕은 고구려와 화친해서 북방의 근심을 덜게 되면 다행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우 보해공을 정사(正使)로 내신(內臣) 김무알을 부사(副使)로 하는 사절단을 고구려로 보냈다.

  비록 친선이라고 하지만 외교에는 복잡미묘한 이해문제에 따르는 흥정이 있으니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우리 나라에 이롭도록 잘 교섭하고 오라. 외교는 칼 대신의 입의 전쟁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상대국의 위협에 굽히지 말고 감언이설에 속지도 말라.

  눌지왕은 아우 보해공에게 잘 일러서 보냈다. 그러나 보해공이 고구려에 가서 속기 전에 보해를 고구려에 보내는 자체가 속는 일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친선 사절단으로 간 보해를 인질로 잡아 두고 신라에 돌려 보내지 않았다. 

  아차, 장수왕의 간악한 술책에 속아서 아우를 적국의 포로로 보냈구나!

  눌지왕은 후회하고 곧 돌려보내도록 요구했으나 요구나 보낸 사신도 잡아 두고 아무 회답도 않는 무례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 문제로 곧 전쟁을 할 사정도 못되었다.

  신라의 국시(國是)인 국제평화는 또 한 번 고배(苦盃)를 마셨다. 제 十七대 내물왕 때에는 왕자 미해를 일본에 속아서 인질로 빼앗겼고 이번에는 고구려에 왕제 보해를 빼앗겼다. 이 처럼 거듭되는 왕족의 수난은 신라의 국제관계가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던가를 증명하는 불행한 서건이었다.

  미해를 일본에 속아서 보낸 것은 부왕(父王) 내물왕이었으나, 눌지왕으로서는 두 명의 아우를 일본과 고구려에 각각 인질로 잡혀 두고 있었으므로 골육과 우애로서 나라의 체면으로서도 참을 수 없는 치욕이요, 고민이었다.

  눌지왕은 아우 보해를 고구려에서 돌려 보내기만 기다리는 중에 어느덧 七년의 세월이 흘렀다.  눌지왕 十년에 마침 왕실에 경사가 있어서 큰 연희가 열려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군신 동락(君臣同樂)의 술잔이 돌며 풍악이 화락하였다.

  성수무강을 빕니다. 성수 만세 ! 신라 만세 !

  신하들은 왕과 나라를 축복했다. 그러나 그런 신하들의 축하를 받던 눌지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상감, 이 경사스러운 날에 왜 그리 슬퍼 하십니까?

  기쁜 마음으로 술과 풍악을 즐기던 백관이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간신히 상감에게 여쭈었다.

  경들은 나의 두 아우가 적국에 사로잡혀서 고생하는 사실을 알지 않소? 전에 성고(聖考=父王)께서는 백성을 아드님같이 사랑하시는 뜻에서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고 아드님을 일본에 보내신 채 귀국을 못 보시고 돌아가셨소. 그리고 내가 왕위에 오른 지도 어언 十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으로 전쟁이 되풀이 되어서 백성이 고생해 왔구료. 七년전에 다행히 고구려가 화친을 청해 왔으므로 나는 백성을 전쟁의 고통에서 구해 주려고 아우 보해를 사신으로 보냈다가 속아서 인질로 제공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지금 내가 본국의 궁전에서 경들과 함께 이런 잔치를 베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아우들은 각각 적국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구출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소. 이 어찌 인륜의 정의 뿐이요? 나라의 위신에도 큰 치욕이라 나의 무력함을 슬퍼 할 뿐이요.

 그런 불행도 당시의 국운(國運)이오니 멀지 않아서 국운이 돌면 두 아우님을 반갑게 맞게 될 것입니다.

  어떤 대신은 왕을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을 했다.

  아아, 언제까지나 운수가 돌 때만 기다리란 말이냐. 미해가 일본에 간 뒤에 四十년이나 기다렸고 보해가 고구려로 간 뒤로 七년이나 기다리지 않았느냐. 내 신하 문무 백관은 나라의 운수가 저절로 돌기만 기다리고 나라의 어려운 운수를 충성으로 돌려 볼 용사는 없단 말이냐!

  눌지왕은 비장한 이 말에 신하들은 큰 책망을 당한 꼴이 되었으므로 모두 머리를 숙이고 침묵 할 뿐이었다.

  이제 만일 어떤 용사가 나와서 두 아우를 적국에서 구해 오면 선왕(先王) 영전에 사죄하고 백성에게 맹세코 그 공에 보답하겠소. 그러나 지금은 역시 전쟁을 일으킬 사정이 못되니 어떤 꾀로서 탄환해야 할 것이요.

  신하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특별 회의를 열고 심중한 토의를 한 끝에 그 결론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지금까지 왕제(王弟) 두 분을 일본과 고구려에서 구해 오지 못한 것을 신들은 모구 황송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매우 어려운즉 이 어려운 일을 감당할 사람으로는 비상한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하겠는데 다행히 삽라군 태수(揷羅郡太守)로 있는 박제상(三國遺事는 金堤上으로 되어 있다)이 있사오니, 그로 하여금 가 일을 시키면 성공할까 하옵니다.

  왕은 신하들이 추천하는 박제상을 불러서 보기 전에 추천하는 신하들에게 먼저 다짐했다.

그 일은 보통 인물로서는 어렵다는 것을 왕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 아직 일군(一郡)의 태수 정도인 박제상이라는 자가 어찌 그만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을 것이다.

  금수의 야욕을 가진 완강한 적국의 왕들과 교섭해서 성공하려면 외교적인 지혜와 용맹과 위변이 필요하고 이에 앞서서 나라를 위해서 백골을 적국 땅에 묻을 각오와 충성이 있어야 한다.  태수 박제상이 과연 그만 실력이 있느냐? 자신 없는 사람을 적국에 보내는 것은 삼가야 한다. 또 한 명의 신하를 희생시키는데 그치면 이것 또한 나의 잘못이 된다.

  저희들 인선으로는 박제상이 제일 적당한 인물에 올랐사오니, 직접 인견(引見)하시고 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박제상이 그만 인물로, 국난에 몸을 바치겠다면 얼마나 좋을까?)

  눌지왕은 그런 기대로 박제상을 불렀다.

  박제상은 파사왕(婆娑王)의 오대손으로서 조부는 아도(阿道)요, 파진찬(波珍 +官名) 물품(物品)의 아들이었다. 박제상은 이미 왕이 부른 이유를 알고 왔으므로 감격한 말로 자기의 각오를 왕에게 아뢰었다.

  두 왕제님이 적국에 인질로 억류되어 계신 것은 나라의 큰 불행이요, 치욕입니다. 이런 근심을 임금께 하시도록 함은 신하 된 저희들의 도리가 아닌 줄로 압니다. 임금과 나라에 대해서 쉬운 일에는 공을 다투고 어려운 일에는 목숨을 아끼는 것은 결코 충신이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용기가 없는 비겁한 행동입니다. 소신이 비록 재주가 부족하고 어리석으나 이러한 의로운 일에 목숨을 걸고 전심 전력을 다해서 국은(國恩)의 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할까 하옵니다.

  왕은 박제상의 굳은 각오와 뜨거운 충성을 기뻐하고 친히 술잔을 권하며 손을 잡고 중대한 임무를 분부했다.

  박제상은 곧 변복을 한 후 단신으로 동해안으로 가서 배를 타고 북상(北上)하여 고구려로 갔다.  이미 집을 나설 때에 사랑하는 아내에게 비장한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난 것이었다.

  이번에 적국 고구려에 밀행해서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다행히 보해왕제(寶海王弟)를 구하는데 성공하면 돌아와서 또 만날 것이요, 불행히 실패하면 적국의 땅에 뼈를 버리게 될 것이요.  내가 죽더라도 충신의 아내로서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슬픔을 이겨 나가야 하오.

  당신의 그 용기와 충성으로 꼭 성공하실 텐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라에 바치신 몸이니 집안 걱정은 마시고 잘 다녀 오세요.

  부인도 충신의 아내답게 남편의 장도(壯途)를 빌면서 이별의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박제상은 고구려 땅에 들어가면서부터 신라의 밀정 혐의를 받을까 염려해서 고구려의 행인처럼 변장을 하고 고구려의 서울 왕검성까지 갔다. 그는 왕검성에서야 비로소 예복을 갖추어 입고 신라의 사신으로서 고구려왕을 만나고 신라 눌지왕의 친서를 올렸다. 그리고 눌지왕의 아우를 돌려달라고 간청했다.

  황송한 말씀이오나 이웃나라끼리는 서로 신의와 신의로써 친선을 도모하여야 할 줄 믿으며 대왕께서도 그러한 뜻으로 계실 줄 아옵니다. 소신이 본국을 떠날 때까지도 우리 왕의 아우 보해공을 감금하여 두지나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왕의 허가를 얻기 전이라 아직 만나 보지는 못하였습니다마는 보해공을 국빈으로 대우하시고 자유롭게 궁중출입을 시키면서 애호해 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대왕의 인후하신 덕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하고 우선 외교적인 칭찬을 했다.

  그러지 않아도 보해공도 본국에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기뻐하며 살면 고향이라고 하면서 나와 좋은 이야기 벗이 되어 있으니 안심하시기 바라오.

  감사하옵니다. 그러나 형왕(兄王)께서 오래 만나지 못하셔서 오매불망으로 아우님 환국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대왕께서는 보해공을 잘 대우해 주셔서 보해공의 심중에는 가족과 고국을 그리워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대왕께서 신라의 왕제를 인질로 十년 동안이나 잡아 두고 있다는 오해를 할 것입니다.

  박제상은 고구려 왕이 노하지 않을 정도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인질이라니?

  고구려 왕은 기분이 나쁜 듯이 반문했다.

  옛날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다섯 나라의 패자(覇者)들이 권모술수로 인질정책을 쓴 사실이 있었는데 실로 말세의 불미한 일이었습니다. 관후하신 대왕께서는 인륜의 본연지정(本然之情)을 이해하시고 소신이 안동하고 귀국하도록 만반의 편의를 보아 주십시오.

  허허허, 나의 호의를 인질이라고 오해하는 모양이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옛날의 예를 들어서 그런 오해가 있을까 두려워 했을 뿐입니다.

  하고 박제상은 은근히 고구려왕의 양심을 자꾸 건드렸다. 고구려 왕은 보해를 못 돌려 보낸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므로 적당히 넘기려고 했다.

  잘 생각해 보겠으니 경은 조급히 생각하지 말고 모처럼 온 김에 우리 나라 명승지나 구경하면서 기다리시오.

  네, 수일 내로 귀국하게 하여 주십시오.

  박제상은 그날은 그냥 대궐에서 물러나왔으나 일이 틀렸다는 것을 눈치 채었다. 그는 그 길로 보해공을 찾아보고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

  이번에 모시러 왔으나 고구려왕의 눈치가 수상합니다.

  음, 역시 돌려 주지 않을 거요. 자칫하면 박공(朴公)도 인질로 잡히거나 암살당할지 모르니 내 걱정은 말고 유람 도중에 국경을 넘어 가시오.

  보해는 자기 환국은 단념하고 박제상의 신변 위험을 염려했다.

  안 될 말씀입니다. 제가 이번에는 꼭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제가 바보처럼 왕을 안심시키고 있을 테니 저하고 탈출할 준비를 하십시오.

  보해도 박제상의 충성에 감격하고 탈출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박제상은 명승지를 유람하고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으나 왕과 관리들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유산(遊山)과 주흥(酒興) 으로 며칠을 보냈다. 제상은 왕이 자기를 경계하지 않게 한 뒤에 보해에게 탈출 계획을 말했다.

  제가 유람 핑계로 먼저 떠나서 고성(高城)에 가 있다가 성문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보해공께서 변장을 하고 五월 十五일에 그 곳까지 몰래 오십시오. 거기서는 국경이 가까우니 제가 잘 모시고 국경을 넘어 귀국하겠습니다.

  음, 그럽시다.

  그럼, 그날 다시 뵙겠습니다.

  제상은 굳게 비밀 약속을 하고 먼저 왕검성을 떠났다. 제상은 이번에는 버젓이 왕의 허락을 받은 유람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왕은 국빈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신하 두 명을 감시 차 붙여 보냈다. 제상은 뜻하지 않은 방해라고 생각했으나 사양하지 않았다. 사양해도 들어 줄 것이 아니요, 도리어 의심만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상은 그 두 명을 잘 대우해서 만일의 경우에는 매수할 계획을 세웠다.

  五월 十五일에 제상은 고성에 이르러서 성문 밖의 경치를 구경하는 척하고 보해가 탈출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허술한 행상인 차림의 보해가 왔다. 제상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나 보해가 먼저 알아보고 제상 옆으로 다가왔다.

  아, 잘 오셨습니다. 하늘이 도와주셨으니 이제 반 성공을 했습니다.

  모두 박공의 덕이요. 무사히 귀국하면 왕께 아뢰어서 박공의 생명의 은혜를 후하게 갚겠소.

  저에게 두 명의 감시원이 따라다녔으나 약속한 오늘 해질 시각에 저 혼자 오려고 술값을 후하게 주어서 방심시키고 여관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들이 저를 찾기 전에 어서 도망치십시다.

  하고 그들은 남쪽 국경을 향해서 빨리 걸었다. 그러나 보해가 왕검성에서 자취를 감춘 것을 알게 된 고구려 왕은 곧 활 잘 쏘는 포리 열명으로 추격하게 하였다. 보해는 그들이 벌써부터 변복을 하고 앞뒤로 포위하면서 따라온 것도 몰랐다. 그들은 왕의 명령대로 어디서든지 박제상과 만나서 신라로 탈출할 것이니 두 명을 함께 잡으려고 따라왔던 것이다.

  고구려 왕의 추측대로 추격하던 포리들은 고성 성 밖에서 보해가 박제상과 만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보름날 밤을 택한 것은 밝은 달밤을 이용해서 국경을 넘을 생각에서 정한 날짜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추격대가 뒤에서 따르고 있었다.

  앗, 우리를 발견한 포리가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빨리 저쪽 숲 속으로 숨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숲은 멀었고 추격대의 걸음은 빨랐다. 보해는 갖고 오던 돈 자루 세 개를 길에 떨어뜨리면서 도망쳤다. 추격대는 그 돈자루를 세 번 줍는 사이에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나 포리의 두목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 놈들을 생포하려다가는 놓칠지도 모른다. 사정 없이 활로 쏘아 죽여라.

  대장의 명령에 열명이 쏘는 화살은 탈출하는 두 명의 앞뒤에 떨어졌다. 그러나 포리들은 보해의 인덕을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국경이 목전에 있는 그들을 무사히 귀국시켜 주려는 동정심에서 활촉을 뽑고 댓 살만 쏘아 보냈다. 그리고 두목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쏘는 시늉만 했다.

  앗…

  박제상이 등에 화살을 맞았다. 그러나 약간 아프기만 하고 화살이 툭 떨어졌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화살을 집어 보니, 촉이 빠진 댓살이었다. 다른 화살도 줏어 보았더니 모두 촉이 없었다.

  보해공, 안심하십시오. 적병도 보해공의 인덕에 감복해서 이런 화살로 쏘는 시늉만 합니다.  빨리 저 숲까지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은 포리들의 호의로 사경을 면하고 요행히 국경을 탈출해서 이튿날 새벽에는 그리운 신라 땅에 도착했다. 안전한 고국 땅을 밟은 순간 그들은 긴장이 풀려서 길가에 주저앉아 벼렸다.  보해는 十년 만에 보는 본국의 흙 냄새가 마치 어머니 가슴에서 풍겨 나오는 젖 향기 같이 흐뭇하고 반가왔다.

  이번 탈출 성공은 보해공 평소의 덕행 때문입니다. 사람은 적국이나 지옥에서도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적국의 군대까지도 보해공의 인덕에 감화해 있었기 때문에 촉 뺀 화살만 쏘고 빨리 추격도 않고 보내 드렸으니까요.

  十년 동안이나 적국의 억압에 복종해 있던 내게 무슨 덕이 있었다는 말이요. 나는 경의 용기와 지략이 아니면 죽을 때까지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을 비겁한 위인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괴로운 억압을 오랫동안 참고 자유의 날을 기다리신 것도 역시 인내의 덕입니다.

  보해와 박제상은 서로 탈출의 공을 사양했다. 그들이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자 백성들의 환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눌지왕도 박제상을 고구려로 보낸 뒤에 그가 무사히 아우 보해를 데리고 귀국할 지 어떨지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그립던 아우를 만나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을 못했다. 왕은 박제상의 큰 공을 높이 표창하고 궁중에서 성대한 환영잔치를 베풀었다.

  제가 고구려 땅에서 죽을 줄만 알았더니 형님의 구원으로 다시 오늘의 자유를 맞았으니 감개무량(感慨無量)합니다.

  그러나 기쁜 축배를 몇 잔을 마신 눌지왕은 또 다시 새로운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다.

  오늘, 고구려에 잡혀 있던 아우 보해를 十년만에 만나니 기쁨이 한량없다. 그러나 이 기쁜 반면에 四十년 가깝게 일본에 잡혀 있는 아우 미해 생각이 나서 새삼 슬프구나!

  저보다 미해 형님이 먼저 귀국해야 할 것을 그랬습니다. 고구려는 적국이지만 말이라도 통하는 같은 민족인데 말도 다른 이민족의 나라에서 고생하는 미해 형님을 생각하니 죄송합니다.

  보해도 이제는 어렸을 때에 본 미해형님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왕과 함께 탄식했다.

  두 아우 중에서 아직도 한 명을 만나지 못하니 마치 팔 하나를 잃은 듯하고 눈 하나를 잃은 듯하다.

  눌지왕 형제는 아직도 일본에 인질로 잡혀 있는 미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박제상은 옆에서 왕 형제의 골육에 사무치는 한탄을 듣고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이윽고 결심한 바를 아뢰었다.

  소신도 할 일을 아직 절반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남은 절반의 일을 일본에 가서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눌지왕 형제는 박제상의 용기와 충성에 감격했다.

  오오, 경이 또 미해를 구하러 일본까지 가주겠는가?

  예,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제 목숨이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왕은 박제상에게 일본 갈 모든 준비를 상의하려고 했으나 박제상은 왕 형제에게 간단한 하직인사를 하고 말을 타고 단신 항구를 향해서 달렸다.

  박제상은 아직 자기 집에도 들리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기도 어려운 먼 일본으로 또 떠났다.

  박제상의 아내는 기뻐하던 순간에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놀라면 슬퍼했다. 그러나 태연한 얼굴로 남편의 일이 성공하기만 빌었다.

  나라에 바친 몸이 어찌 사사로운 집안 일에 사로잡힐 수 있겠어요.

  박제상의 아내는 위로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대답을 했다.

  그러나 처자를 만나서 이별인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급한 경우도 아닌가…

  이 의문을 아내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로서도 남편을 만나서 또 일본까지 단신으로 가겠다면 응당 말려 보고 싶었고, 적어도 눈물은 흘렸을 것이다. 그래서 박제상은 자기를 만나지 않고 떠나 갔으리라고 짐작되었다. 그리고 보면 자기로서도 만나지 않은 것이 도리어 장도에 오르는 남편을 위해서 좋았으리라고 도 생각되었다.

  (그러나 다시 못 볼지도 모를 그이를 한 번 보고 눈물 아닌 격려의 말이라도 해주자.)

  하고 아내의 도리를 차리려 말을 타고 남편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아내가 해변에 이르자 남편은 이미 율포(栗浦)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 순간이었다.

  여보세요!

  하고 아내는 큰 소리로 배에 오른 남편을 불렀다. 그러나 박제상은 손을 흔들어 이별을 고하고는 배를 저어 떠나버리고 말았다. 만리 길을 떠나는 남편을 멀리서 손만 흔들어서 이별한 율포 해변의 백사장은 이때부터 원하도 긴 모래밭이라는 의미에서 장사(長沙) 해변이라고 불려졌던 것이다.

  일본에 도착한 박제상은 여러 가지 방면으로 일본 정계의 정보를 염탐해 보고 외교로는 도저히 미해를 구출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여기서도 계략을 꾸미고 미리 일본 조정에 나아가서 자기가 신라에서 일본으로 오게 된 사실을 거짓으로 얘기 했다.

  나는 신라의 하급관리로 있었던 사람인데 폭정에 견디지 못해서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귀국에 망명해 왔습니다. 부모가 죄도 없이 관헌에 잡혀서 죽었고 나도 잡혀 죽을 직전에 탈출해 왔습니다. 앞으로 일본이 신라와 전쟁이라도 하게 되면 일본군에 종군해서 부모의 원수를 갚겠으니 보호해 주시오.

  일본에서는 박제상의 거짓말을 믿고 의식주의 편까지 제공하면서 잘 대우했다. 그리고 그는 글을 잘했기 때문에 궁중시회(宮中詩會)에도 초청을 받고 자주 궁중출입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궁중에 연금상태(軟禁狀態)로 있는 미해공과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박제상은 이 정도로 행동할 수 있음을 반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계획에 더욱 자신을 가졌다.

  그러나 미해공이 어릴 때 일본에 와서, 인질의 몸이라고는 하나 四十년 동안 일본왕의 회유정책에 넘어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의심도 해본 박제상은 처음에는 자기가 일본에 온 비밀을 숨겼다. 여러번 만나서 서로 친해지고 믿게 되자 미해공이 먼저 신라왕실의 친척들을 그리워하면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억울한 신세를 한탄하게 되었다.

  박제상은 비로소 미해공을 구출하려고 일본에 와서 지금 기회를 노린다는 비밀을 알렸다.

이에 감격한 미해공은

  고맙소. 나도 고구려에 잡혀 있던 보해 형처럼 고국으로 데려가 주시오.

  하고 박제상에게 간청했다.

  제가 일본까지 온 목적이 그것이니 미해공께서도 다소의 모험을 각오하고 기회를 기다려 주십시오.

  그럼 언제든지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도록 경이 나 있는 집에 와서 동거 하시오.

  외국의 일개 민간인인 나를 궁중에 계시는 미해공 거처에 있도록 일본왕이 허락하겠습니까?

  박제상은 그 가능성을 의심하고 반문했다.

  지금 일본 조정에서는 경을 신라를 저주하고 망명한 사람으로 믿고 있고 나도 의심은 하지 않으니 내가 글벗으로 함께 있고 싶다면 허락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편리하니 왕에게 잘 말해 주십시오.

  이런 상의 끝에 미해공이 일본 왕에게 청해서 마침내 박제상은 궁중에 있는 미해공의 저택에서 동거하게 되었다. 모든 계획이 그들의 뜻대로 진행되었으므로 점점 희망이 커졌다.

  그러나 미해공과 박제상이 함께 궁중에서 빠져 나가기는 어려웠다. 미해공이 외출할 때는 언제나 보호와 감시를 겸한 수행원이 따라 다녔다. 그리고 이미 얼굴이 상당히 알려진 박제상이 미해공과 함께 탈출하면 그들에게 들킬 위험성도 컸던 것이다. 그래서 박제상은 다른 동지 한 명을 구했다.

  당신이 내 대신 미해공을 모시고 일본을 탈출해서 신라로 돌아가시오. 성공하면 큰 상을 받고 상당한 벼슬도 할 수 있을 것이오.

  하고 신라 사람인 강구려(康仇麗)에게 부탁했다.

  강구려는 자기에게 그런 중대한 임무를 위임해 주는데 감격하여 죽음으로 맹세했다.

  어느날 밤 드디어 짙은 안개가 끼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이 되자 박제상은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는 미해공에게 탈출을 권했다.

  오늘밤에 탈출을 하십시오. 궁문 밖에서 강구려가 일본인으로 변복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도중에서 잘못해서 잡히면 죽을 각오를 했소. 그러나 박공 혼자 남아 있다가는 나를 탈출시킨 혐의로 잡혀 죽을 것이 아니오 어찌 나만 귀국하려고 박공을 이국에서 죽게 하겠소. 귀국을 같이 못하면 함께 죽더라도 혼자는 갈 수 없소.

  저는 처음부터 죽을 각오로 온 몸입니다. 오직 걱정되는 것은 제가 죽고도 미해공을 귀국시켜 드리지 못할까 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저와 다름없는 동포 강구려를 동지로 구했으니, 이안개 낀 밤에 탈출하십시오.

  박공은?

  저는 이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해공께서 탈출한 것을 숨길 수 있고 결국 발각되겠지만 수도 근방에서 멀리 가실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탈출하겠지만, 발각 될 때까지 박공이 이 집에 있다가…

  물론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므로 달게 죽겠습니다. 인명은 재천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미해공이 안심하고 떠나도록 재촉했다.

  그러나 박공을 죽게 하고서 나만 떠날 수는 없소.

  미해공도 단독 탈출을 끝까지 거부 했다.

  그러시다면 계획을 바꾸겠습니다.

  어떤 계획이오?

  내일 공께서 사냥을 나가셨다가 혼자 짐승을 쫓는 척하고 말을 달려서 해안으로 가서 배를 타십시오. 제가 강구려를 시켜 내일 저녁 때쯤 그 곳에 배로 대기하도록 준비시켜 주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모레 아침에 그 곳으로 가겠습니다. 저와 함께 행동하면 위험하니까

요?

  음, 그럼 모레 아침까지 배에서 기다리겠소.

  네 꼭 저도 가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제가 탈출하다가 무슨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제가 모레 아침까지 배에 도달하지 못하면 공께서는 강구려의 인도로 빨리 귀국하십시오.

  그런 약속으로, 혼자는 안 가겠다는 미해공의 탈출을 승낙 시켰다.

  이튿날 미해공은 사냥을 나가서 예정대로 지정한 해안으로 말을 달려갔다. 시각을 맞추어서 강구려가 대기하고 있던 배에 올랐다.

  그날 발에 돌아온 사냥 수행원들은 미해공의 행방을 잃고 돌아와서 겁을 집어 먹고 왕에게는 보고하지 못하고 박제상에게 와서 그 사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상의했다.

  왕이 알면 당신들이 큰 벌을 받을 것이니 그냥 있으시오. 내 추측으로는 울적을 풀기 위해서 어떤 요정에 들르셨다가 취중에 밤이 늦어서 그냥 주무시고 오실 모양이니 내일 하루만 기다렸다가 나와 함께 찾기로 합시다.

  이런 임기응변으로 수행원들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 왕의 부하가 문안 차 찾아왔다.

  어제 늦도록 사냥을 하고 돌아오셔서 피곤하시기 때문에 아직 주무시고 있소.

  박제상은 그런 말로 속여 보냈다. 왕의 사신은 오정 때 또 미해공을 찾아왔다. 왕이 부른다는 전갈이었다.

  아까 잠깐 기침을 하셨으나 사냥 여독으로 몸살이 나서 또 자리에 누셨습니다. 약도 써야겠으니 그리 여쭈어 주시오.

  하고 거짓말로 또 돌려 보냈으나 저녁 때 와서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미해공이 병이라면 문병하겠다고 방으로 들어왔다.

  실은 미해공은 이미 신라로 돌아갔습니다.

  그제야 제상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왕의 신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놈 네가 신라에서 온 첩자였구나. 미해공을 탈출시켜 놓고 우리를 속였구나. 이 대담 무례한 놈!

  이미 죽을 각오를 한 박제상은 아무런 변명도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가 미해공에게 오늘 아침에 자기도 탈출해서 미해공이 미리 타고 기다릴 배로 가겠다고 약속한 것은 미해공을 혼자 탈출시키기 위한 핑계였다.그리고 오늘 아침에 떠나지 않고 집에 있었던 것도 자기마저 나가면 우선 사냥 수행원부터가 의심할 것이요, 하룻동안 추격을 연기시키지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배가 서투른 강구려가 해안에서 벌리 가지 못했을 때에 배에는 귀신 같은 일본의 수병(水兵)에게 추격당하면 곧 잡힐 것이다. 그래서 박제상은 하루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의 길로 자신을 몰아 넣었다.

  목적을 달성한 이 순간에 박제상은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가벼운 마음으로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고 곧 죽어도 좋다는 태도로 자기의 계획을 당당히 밝혔다.

  나를 어서 죽이시오. 그러나 신라에는 나라와 임금을 위해서 나 같이 죽음을 달게 받는 충신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신라를 넘보지 마시오. 그리고 신라에서는 비록 적국의 충신이라도 예로서 죽이고 예로서 장사 지내는 미풍이 있으니 나를 욕된 방법으로 처형하지나 말아 주시오.

  박제상은 일본 왕 앞에 끌려 가서도 이렇게 당당히 말을 했다.

  장한 각오다. 신라에 너같은 충신이 있다는 사실은 나로서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네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내 죄명이 신라의 충신이매 달게 사형을 받겠소. 이미 죽으려고 목욕재계했으니 어서 내목을 베이시오.

  제상의 이와 같은 충사(忠死)로 말미암아 미해공은 四十년의 적국 인질에서 해방되어서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왔다.

  박제상이 죽음으로 미해공을 귀국시켰다.

  이 소문이 퍼지자 왕실을 비롯한 온 나라 백성은 크게 감격했다. 그러나 박제상의 귀국을 기다리던 그의 처자식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제상의 아내는 먼 눈으로 남편이 떠나는 배만 전송한 그날로부터 딸 三형제를 데리고 바닷가 내려다보이는 치술령( 述嶺)에 올라가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외국에서 충사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단정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종용(從容)히 독약을 마시고 순사(殉死)해서 남편의 뒤를 따랐다.

  과연 충신의 아내다운 열녀다!

  세상 사람들은 치술령에 사당을 짓고 박제상 아내의 영혼을 치술신모( 述神母)로 모신 뒤에 춘추로 제향을 지내고 그 거룩한 덕을 길이 추앙했다.

 

 

 

  巨人에 智證王 이하 三代王의 中興

  제 二十二대의 지증왕(智證王)까지를 신라의 고대사(古代史)로 한다. 이 고대사 마지막인 지증왕 때에 와서 서서히 발전해 오던 신라는 모든 국가제도가 정돈되고, 국토도 안정되었으며,  문화도 불교의 번영으로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왕의 뒤를 이은 二十三대의 법흥왕(法興王)과 二十四대의 진흥왕(眞興王) 삼대(三代)에 걸쳐서 눈부신 발전을 보았다. 그러니까 고대사에서 중고사(中古史)로 넘어오는 시대에 신라는 중흥기(中興期)를 맞은 셈이다.

  지증왕은 청년 시절까지도 보통 왕족으로서 지냈다. 태자(太子)책봉을 받기 전에는 유명한 거인(巨人)이로서 퍽 고민을 했다. 그는 내물왕의 증손이며 습보(習寶)의 아들이었다.

그는 왕이 될 때까지으 이름은 지도로(知度路)라고 불리웠다. 부모는 아들 지도로가 수십척 장신의 거인이라 나이 三十이 되도록 결혼시킬 처녀를 구하지 못해서 큰 걱정으로 지냈다.

  그 이유는 보통 여자로서는 거인 지도로리 배필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키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보통 의미가 아니고 더 심각한 생리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로 장사의 음경(陰莖)이 한자 다섯 치나 되니 보통 여자는 첫날밤에 죽어버릴 거다.

적어도 八척 장신의 여장부라야 그의 아내로서 부부생활을 감당할 거야.

  사람들은 동정겸 호기심으로 수군거렸다. 부모는 왕족의 위신을 내리더라도, 거인 아들의 배필이 될 만한 거인 여자만 있으면 귀족가문의 딸이 아니고 평민의 딸이라도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여장부도 구하지 못해서 아들을 노총각으로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 거인 노총각 지도로가 장가들 운이 생겼다.

  어느날 사냥꾼이 무량부(牟梁部)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떤 시냇가에 이르렀다.  그는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시내로 내려갔다가 빨래터에서 큰 자루와 같은 것을 발견했다.

  누가 빨래를 잊어버리고 갔군.

  하며 집어서 펴본 즉 그것은 자루가 아니고 굉장히 큰 여자의 속옷(下內衣)이었다.

  허어, 어떤 여자가 이렇게 큰 속옷을 입을까? 보통 여자 둘은 충분히 들어가겠다.

  사냥꾼은 호기심을 느끼고, 그 속옷을 들고 주인을 찾았다. 마침 어떤 소녀가 빨래를 하려고 왔으므로 물었다.

  색시, 이 빨래터에서 누가 빨래했는지 모르겠소?

  모르겠는데요.

  실은 이렇게 큰 속옷을 주웠는데 하도 이상도 하고 해서!

  아, 그럼 저 건너 마을 상공댁尙公宅) 아가씨 옷이군요.

  상공댁 아가씨라고? 아니, 그 아가씨가 그렇게 몸이 큰가?

  그럼요, 키가 八척이나 되는 여장사인데요.

  사냥꾼은 그 여장사 아가씨를 만나 보고 싶었다.

  오늘 사냥에 큰 수확이 될지 모른다.

  이런 생각으로 그는 건너 마을로 상공댁을 찾아갔다. 그가 대문에서 안을 들여다본 즉 과연 八척 장신의 큰 처녀가 빨래 줄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높은 장대로 중간을 고여 놓은 빨래줄이 처녀의 턱에 닿을 정도로 키가 켰다. 키만 큰 것이 아니고 손이 짚신만 하고 코가 주먹만 하고 입이 송아지 입만이나 했다. 그는 그 여자의 입이 큰 것을 보고 번 듯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입이 저만큼 크면 딴 곳도 상당할 것이다. 지도로의 음경이 한자 닷치 라지만 저 처녀면 아내 구실을 할 것이다.

  사냥꾼은 빨래터에서 생각한 오늘 수확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지도로에게 알맞는 처녀를 중매해 주면 큰 사례를 받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집 지체가 상공을 지낸 집안이라면 왕족과 혼인하는 데도 알맞을 지체다.

  사냥꾼은 처녀의 선을 몰래 본 뒤에 들고 왔던 그 처녀의 속옷을 대문 턱에 얹어 놓고 돌아섰다.  처녀의 속옷을 주어 왔다고 알리고 주기는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그 길로 지도로의 부친 습보를 찾아갔다.

  소인은 모량부 시골에 사는 사냥꾼입니다. 댁을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아, 무슨 일로 왔나. 어려워 할 것 없이 말해보게.

  실은 오늘 사냥을 다니다가 우연히 댁의 도련님께 알맞을 좋은 규수를 발견했습니다.

  지도로의 부친은 듣던 중 반가운 말이라 귀가 번쩍 띄었다.

  그래, 대관절 키가 얼마나 되던가?

  팔척 낭자라는데 제 사냥꾼의 눈으로 재어 보아도 여덟자 키는 충분합니다. 풍문에 듣기에는 댁의 도련님은 십척 장신이라는데 정말입니까?

  그쯤 될 거야. 그래서 지금까지 배필을 못 구하고 있었네. 그런데 그렇게 몸 큰 처녀가 어디 있나.

  네, 이야말로 천정 배필입니다. 몸 크기로나 지체로나 댁과는 아주 좋은 혼처입니다.

  그 말은 알았으니 어서 규수집을 알려 주게.

  지도로의 부친은 그런 규수집이 궁금해서 재촉했다.

  제가 사는 무량부 땅의 박상공댁 규수입니다.

  정말이겠지?

  주인 습보는 또 다짐해 물었다.

  제가 감히 왕가(王家)댁을 속이겠습니까?

  됐네, 곧 왕께 아뢰고 그집 규수와 혼인할 것을 허락 받겠네. 자네에겐 좋은 중매를 해 주었으니,  비단 한 필과 슬값을 주겠네. 혼인때는 와서 그 규수댁에 가서 잘 일을 봐드려야 하네.

  네, 폐백짐은 제가 꼭 져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습보는 중매한 사냥꾼을 보낸 뒤에 곧 궁중으로 들어가서 소지왕(炤知王)에게 자기 아들의 혼인 허락을 청했다.

  상감, 신의 자식이 몸이 너무 커서 배필을 구하지 못해서 三十이 넘도록 성혼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왕손으로서 이런 일은 일찍이 없어서 황공하옵던 차에 마침 알맞은 배필감을 발견했습니다.

  어오 그것 참 경사요. 그래 그 규수는 어떤 가문의 딸이오?

  박상공 집이라, 그럼 내가 알아서 그 집에도 분부하겠으니 혼인 준비를 하도록 하오.

  하고 왕도 기뻐하면서 예물을 하사했다. 그리고 소지왕은 특지(特旨)를 박상공에게 내려서 그의 딸과 지도로의 성혼을 성립시켰다. 소지왕은 지도로의 장사 힘과 슬기를 특히 사랑했으므로 이 혼인에는 매우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소지왕은 마침 아들이 없었으므로 지도로를 태자로 맞아 들였다. 그러나 소지왕이 장수하고 승하했으므로 六十세에 제 二十二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리하여 거인으로 왕이 된 지도로는 만년에 왕이 되었는데 지증왕이라 일컬었고 그전 이름대로 지도로왕이라고 불렀다.

거인의 아내다우너 거인 왕후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라고 했는데 생리적으로 왕의 총애를 독점하였고 금실도 좋았으며 왕업(王業)의 내조(內助)도 많았다.

  지증왕은 평생을 거의 평민으로 시정에서 생활했으므로 백성들의 실제 생활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이 부패한 관리들을 원망하는 사실도 잘 알았으므로 관기를 속청하고 반성을 하며 선왕(先王)시대까지 있던 순장법(殉葬法)을 폐지해서 시신들의 억울한 죽음을 구제했다. 종전에는 왕이 승하하면 죽어서도 충성 껏 모신다는 취지에서 시신들이 왕을 따라서 죽었던 것이다.

  인명에는 귀천과 군신(君臣)의 차별이 없다. 임금이 죽었다고 신하가 따라서 산 목숨을 끊는 것은 첫째 천도(天道)에 어긋난다. 그리고 신하를 사랑하는 어진 임금의 뜻에도 어긋난다.  이런 폐습은 지나친 형식적 충성에 지나지 않으니 일종의 위선이다.

  이런 교서가 내리자 신하들과 백성들이 지증왕의 처사에 탄성을 올렸다.

  대왕은 옥체가 거대해서 힘만 세신 줄 알았더니 역시 큰 그릇에 관용(寬容)의 덕이 담겨 계시다.

  시신들과 비복(婢僕) 계급의 천민(賤民)들은 생명의 은인이라고 추앙했다. 양반을 상전으로 모신 남녀 종들은 상전이 죽으면 순장법에 따라서 생매장되었던 것이다. 이 순장법의 폐지는 노예에게까지도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는 인도적인 영단이었다.

  이렇게 지증왕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이 잘 살수 있는 국법(國法)과 제도(制度)를 새로 만들었다.  백성들은 왕의 이러한 인정(仁政)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애군애국(愛君愛國)의 충성을 다했으므로 완만하던 신라사회의 발전이 급속도로 중흥(中興)의 기운을 발휘하고 모든 부면이 활기를 띠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은 종래의 농사짓는 법을 개량하고 소를 이용해서 논밭 가는 방법을 발명 장려해서 농부의 노력을 덜어 주고 경작 면적을 확장해서 양곡생산을 증가시켰으므로 백성의 생활이 넉넉해지고 나라 전체가 부해졌다. 그리고 제도상에 큰 변화는 재위 四년에 종래의 서라벌이라고 부르던 국호(國號)를 비로소 정식으로 신라(新羅)라고 개칭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六년에는 이사부(異斯夫)를 변방 주군(州君)의 지방장관으로 정하고 군사권까지 이양(移讓)해서 자주적(自主的)으로 외적의 침입에 대한 국방력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문화정책의 일대 전진으로는 신라에서 비로소 중국 북위(北魏)에 학자를 문화사절로 보내서 한문화(漢文化)를 수입했다. 그리고 국토확장 면에서도 특기 할 것은 十三년에 동해에 고립해 있던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을 싸우지 않고 지혜와 덕망으로 합병했다.

  지증왕은 재위 十四년 동안에 많은 치적(治績)을 쌓아서 중흥의 기초를 놓은 뒤에 七十四세로 승하하고 연제부인 소생의 세자가 법흥왕으로 등극했다.

  법흥왕은 부왕의 뒤를 이어서 국가체계의 모든 법령과 제도를 새로운 시대에 알맞도록 새로운 법도 제정했다. 법흥왕 四년에는 국방군을 강화하고 통솔 계통을 조직화해서 병부(兵部)에 둘 장관을 병부령(兵部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어서 무관(武官)의 계급과 직제를 정하고 모든 문무관리에게 복색(服色)으로 표시되는 관복을 제정 착용케 해서 관리의 사기를 돕고 기강을 확립했다.

  이러한 정치혁신과 산업부흥의 결과로 군대가 강해지고 백성의 살림이 풍부하게 되었다.

한문의 수입은 유교(儒敎)를 보급시켰고 거의 전후해서 들어온 불교문화는 순박한 신라 민족의 심심을 배양했으며, 그 후 선덕왕(善德王) 시대에는 예식화(禮式化)된 세속오계(世俗五戒)의 국민 도덕율(道德律)이 이미 실천되어서 화랑도(花郞道) 발전의 기초를 이루기 시작했다.

  법흥왕 十九년에는 대신라(大新羅)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가야국(伽倻國)을 합병해서 낙동강 유역에서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대했다. 법흥왕은 대신라의 웅지(雄志)를 장식하는 패기에서 신라왕국으로서는 최초의 연호(年號)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한무제(漢武帝)가 사용한 건원(建元)을 가지고 뽐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나라를 위한 중흥의 웅도(雄圖)를 펴기 시작했으나 만년에는 왕위와 중흥사업을 다음 왕에게 물려 주고 자신은 불교의 신앙 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왕관을 고깔로 바꾸어 쓰고 법공(法空)이라는 승명(僧明)으로 중이 되었다. 그리고 천경림 숲 속에 정사(精舍)를 짓고 신앙삼매(信仰三昧)로 여생을 보냈는데 이 정사가 유명한 흥륜사(興輪寺)의 전신(前身)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절에 유명한 순교자(殉敎者) 이차돈(異次頓)과도 친한 도우(道友)로 지내며 불교문화 발전에 공헌했으나 이차돈이 순교의 수난으로 죽은 뒤에는 인생의 무상을 슬퍼하고 이차돈의 명복을 빌면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냈다.

  나도 이차돈과 신앙과 학문이 같았다. 그런데 왜 이차돈만 사형에 처하고 나는 살려 주느냐.  이차돈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도 같은 죄가 있을 것이다. 그는 일개 승려라고 죽이고 나는 전왕 예우(前王禮遇)로 살려 둔다면 법자체가 무력한 공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차돈은 부처님의 대자비한 진리를 가르쳐서 중생을 구제하려고 했을 뿐 조금도 죄가 없었다.  죄가 있었다면 법은 만인(萬人)에게 공명해야 하니까 나도 그와 같이 죽여라.

  하고 그는 이차돈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차돈은 내가 왕이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영혼의 왕자였다. 그가 죽고 내가 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렇게까지 이차돈의 순교를 슬퍼한 그는 죽을 때까지 이차돈의 영을 사모하면서 명복을 빌었다.

  전왕이 법공대사로 흥륜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게 되자 왕비였던 파도부인(巴刀夫人)도 법류(法流)라는 승명으로 비구니(比丘尼)가 되어서 영흥사(永興寺)에서 수도하는 동시에 승니(僧尼) 양성에 헌신했다. 법류 비구니는 율법(律法)을 행하고 남녀 신자에게 도첩(度牒)을 주어서 많응 승니를 양성했다.

  법흥왕이 왕관을 벗고 중이 되자 왕위를 물려 받은 왕이 제 二十四대의 진흥왕(眞興王)이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외손(外孫)으로 선마로(立宗)의 아들이다. 진흥왕은 나이 겨우 七세의 어린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攝政)을 하게 되었다. 이 진흥왕 때에 뎌자가 바로소 어린 왕의 대리로 국정을 맡으므로 그후 세 번이나 여왕(女王)이 등장하는 예비적 전례를 이루게 되었다.

  진흥왕 六년에는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신라에서는 최초로 역사를 편찬케 할만큼 나라의 규묘가 대신라로서의 기틀이 잡혔고 또 문화가 발달하였다. 거칠부는 진흥왕의 충신으로서 대신라 건설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가 아직 벼슬을 하기 전에는 수도승(修道僧)이로서 각처를 다니며 스승을 찾고 불도를 배웠다.

  그는 적국 관계에 있던 고구려 유명한 혜량법사(惠亮法師)까지 찾아가서 고구려의 수도승처럼 그의 절에서 강화(講話)를 들었다. 다른 고구려의 젊은 수도승들은 그가 신라에서 온 사람인 줄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어느 날 밤 혜량법사는 거칠부를 조용히 자기 방으로 불러서 물었다.

  너는 신라에서 온 사람이냐?

  아니올시다. 고구려의 수도승입니다.

  내 눈은 속이지 못한다. 그러나 너를 해치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구해 주려는 생각에서 그러니 바른대로 말하라.

  거칠부는 마치 부처님의 눈같이 밝고 자비로운 말에 신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신라 사람이지만 나랏일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수도승의 불제자(佛弟子)입니다. 스님의 고명하신 가르침을 받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와서 스님의 설법(說法)을 듣고 이미 깨우친 바가 적지 않습니다. 신라와 고구려는 비록 딴 임금이 다스리는 두 나라로 되어 있지만 백성은 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사해평등(四海平等) 으로 인자하신 부처님 눈에는 신라와 고구려 두 나라도 같은 민족이니까 더구나 부처님의 도(道)에 따라서 좋은 한나라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의 두 나라의 관계는 아다시피 적대 관계로 전쟁이 그칠 새 없다.  너는 여기 더 머물러 있다가는 간첩으로 잡혀서 아까운 목숨을 잃을 것이니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고구려에 대한 나의 배반이 될지도 모르나 장차 큰 장군이 될 너의 장래가 아까워서 특별히 충고한다.

  스님, 제가 무슨 그런 인물이겠습니까마는 스님의 말씀대로 귀국하겠습니다. 저를 고구려 관현에게 불법 입국자로 고해서 악형을 받지 않도록 살려 보내시는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가르침을 더 받지 못하는 것이 유감입니다.

  너는 내 가르침을 더 받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비전(秘傳)의 경문을 기념으로 주겠으니 열심히 연구하라.

  거칠부는 혜량법사가 주는 책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가지고 귀국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가 법사의 방을 나오려 하자 법사는

  잠깐만…

  하고 다시 불렀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만났다 헤어지는 것도 불연(佛緣)이다. 네가 장차 장수가 돼서 고구려를 쳐들어 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어려울 경우가 있거든 잘 부탁한다.

  스님, 그럴 리도 없겠으나 만일 그럴 경우에야 어찌 이번 은혜를 갚아 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럼 조심해서 국경을 넘어 가거라.

  거칠부는 그 길로 국경을 넘어서 무사히 귀국했다. 귀국한 거칠부는 과연 혜량법사의 예언대로 진흥왕에게 등용도어서 상대등(上大等)이 되고 장군의 직도 겸하게 되었다.

  진흥왕 십이년에 백제의 제이십육대 성왕(聖王)은 제이십일대 개로왕(蓋鹵王)때에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국토 한산주(漢山州) 이북을 탈환하려고 큰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백제의 성왕은 신라에게 군사동맹을 간곡히 청해 왔다. 고구려를 함께 치자는 청병에 신라가 응하자 거칠부는 대장이 되어 구진(仇珍) 등 팔장군(八將軍)과 군사를 거느리고 죽령(竹嶺) 이북의 십개군(十個郡)의 광범한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북진하는 신라군에게 쫓기는 고구려의 피난민이 이리 저리 몰려 다니고 있었다. 그 때 승려(僧侶)의 일행이 침착하게 남쪽을 향해 오더니 그 일행은 대담하게도 거칠부의 마전(馬前)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승의 일행이라도 대장군 앞으로 가진 못한다.

  하고 호위 군졸이 그들을 막았다.

  우리는 거칠부 장군을 만나려고 왔소.

  앞장 선 늙은 중이 말했다.

  이때가 어느 때라고 무슨 일로 만나려는 거야?

  호위병들 눈에는 적국의 중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지만, 나는 거칠부 장군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왔소.

  평화? 너희 나라 왕이 항복한다고 너희들을 사절로 보냈다는 말이냐?

  그런 건 아니고 나는 장군과 만날 약속이 있었소.

  안 된다. 우리 신라 군대가 무고한 피난민에겐 관대하지만 너희들 중과 만날 시간은 없다.  어서 물러나지 않으면 군령으로 다스리겠다.

  너희들이 장군의 충실한 부하라면 먼저 장군의 뜻을 물어보고 그런 소리를 하라.

  노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승리군의 오만해진 태도를 꾸짖었다.

  허어, 이따위 건방진 중이 어디 있어!

  하고 병졸은 노승에게 달려 들었다. 이때 그런 승강이를 저만치서 보고 있던 거칠부가 말을 몰아 달려왔다.

  왜들 이러느냐?

  마상(馬上)에서 묻는 거칠부 장군의 말을 들은 병졸들이

  이 중들이 장군님을 꼭 만나겠다고 해서 물리치는 중입니다.

  노승은 왜 나를 만나려고 하오?

  거칠부가 물었다.

  장군은 나를 알아보겠소?

  글쎄올시다. 채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거칠부는 자기의 수도승 시절을 생각하고 이 위엄 있는 노승에게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혜량이오. 언젠가 이런 때 만나자고 약속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요.

  거칠부는 깜짝 놀랐다. 곧 말에서 내려서 합장 배례하고

  스님,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번 싸움으로 스님 계신 절에 피해는 없으십니까?

  절 안부를 물으니 고맙소. 실은 지금 고구려의 사정은 불도를 펴가기가 어렵게 되었소.

장군의 호의로 우리는 이 길로 신라에 가서 불도를 펴고자 하오.

  스님, 고맙습니다. 우리 대왕께서는 불도를 믿으심으로 크게 환영하고 국사(國師) 대우를 하실 것이니 잠시 불편하시나 진중에 유해 주십시오. 제가 개선할 때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로써 옛날 사제지간의 은혜는 보답하게 되었다. 거칠부는 고구려의 땅 열 개 군(郡)을 얻은 것보다도 고승(高僧) 혜량법사가 제자 일행을 거느리고 신라에 귀화(歸化)하는데 더 큰 기쁨을 느꼈다.

  거칠부는 개선과 함께 혜량법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궁중으로 가서 진흥왕을 뵙자 왕은 기뻐하며 혜량법사를 국사로 삼고 극진히 대우했다. 그리고 혜량법사에 의해서 팔관회(八關會)라는 포교제전(布敎祭典)이 비로소 신라에 창설되어서 더욱 불교가 왕성해졌다.

  그리고 진흥와 삼십칠 년에는 유명한 화랑(花郞)제도를 창설해서 청년들의 덕체지(德體知)의 훈련을 장려했는데, 이 제도는 중세기 서양에서의 기사도(騎士道)와 같은 것으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이때 시작된 화랑도(花郞道)는 많은 신라의 영웅을 배출했으며 다음 시대에 올 통일신라(統一新羅)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삼국통일 위업(偉業)에서 무열왕 김춘추(武烈王 金春秋)의 수족이 되어서 활약한 김유신(金庾信) 장군도 화랑출신의 영웅이었다.

  진흥왕 때에는 중흥의 사업이 거의 완성되어서 통일신라의 기초가 될 대신라(大新羅)가 건설되었다.  국토도여러 차례 전쟁의 승리로 확장되어 북으로는 한강유역을 지나서 북한산까지,  다시 동북쪽으로는 원산(員山) 지방으로 백제와의 국토을 삼게 되었다. 이리하여 삼한시대(三韓時代)의 변한(弁韓) 전 지역과 이와 거의 비등한 국토를 동북쪽으로 확장했다.

당시의 국경표지(國境標識)였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오늘날까지 각지에 네 개나 남아서 역사적 금석문(金石文)인 동시에 신라서예사(新羅書藝史)의 보물로 되어 있다.

  진흥왕은 국토를 확장하고 문화를 진흥시켜서 마침내 대신라를 이룩하고 그 정력과 풍류는 백제왕의 공주를 소비(小妃)로 까지 삼았다. 그러나 불교를 독신(篤信)한 나머지 역시 전왕처럼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서 법운(法雲)이라고 칭했고 왕비 식도부인(息道夫人)도 여승(女僧)이 되었다.

  그러나 영주도 왕승(王僧)도 허무한 인생의 수명은 어찌할 수 없어서 장년기(壯年期)인 사십일세로 입적(入寂)했다.

 

 

女人天下의 아롱진 花園

 善德女王의 豫言

 

  남자를 양(陽), 여자를 음(陰)이라고 하는 데서 천지조화(天地造化)를 논하는 학문을 음양학(陰陽學)이 생겼다. 해는 남성의 정열을 의미하고 밤의 달은 여성의 미색(美色)을 뜻한다 할까.  그리고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겠지만 달과 별의 세계를 여신이 주재(主宰)한다면 밤에 이루어지는 역사의 주인공은 여성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라의 왕궁에는 세 명의 여왕이 나타나서 어떤 여왕은 낮의 태양같이 빛났었고 어떤 여왕은 밤의 별처럼 요기를 피우기도 했다.

  신라의 첫 번째는 제 이십칠대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요, 둘째 번은 제이십팔대의 진덕여왕(眞德女王)이다.

  본장(本章)에서는 연대순으로 기술해 오던 왕궁비사(王宮秘史)로서 마침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대목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대(後代)의 진성여왕의 비화까지 여기서 함께 이야기하고, 겸해서 공주들의 연애관계도 본장에 함께 소개하려고 한다.

  제이십육대 진평왕(眞平王)은 삼대 선왕(三代先王)들이 대신라로 중흥(中興)시킨 뒤를 이어서 태평세월을 누릴 수 있었을 뿐 이렇다 할 치적(治蹟)도 없는 평범한 왕이었다. 선왕들이 이룩해 놓은 부국강병(富國强兵)으 덕택으로 고구려와 백제도 감히 넘보지 못했으므로 전쟁도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국내가 평온하고 생활에 여유가 있었으므로 풍류적인 문화가 발달했는데 특히 불교가 전정해서 중국으로 불교를 연구하러 가는 유학승(留學僧)이 많았다. 

  진평왕 재위 사십 년에 중국에서는 수(隨)나라가 망하고 당(唐)나라가 일어났으므로 신라에서는 새로운 당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기고 조공사(朝貢使)를 보냈다.

  왕은 왕위에 오른 지 반세기(半世紀) 이상이나 되는 오십사년이나 되었으나 별다른 역사적 사건도 없이 승하했는데 왕자가 없고 공주들만 있었으므로 맏딸 덕만공주(德曼公主)가 최초로 여왕(女王)이 도어서 제이십칠대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라고 칭했다. 이 해가 당나라 연호로는 정관(貞觀) 육년이었고 서기(西紀)로는 六三二년이었다.

  이 여왕은 슬기와 덕이 있어서 남왕(男王)에 못지 않은 훌륭한 임금 노릇을 해서 신라 여성을 대표할 여걸이라 하겠다.

  이 시대에는 역대 불교사에 빛나는 고승(高僧)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에 유학을 갔었고 김유신 장군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경 너머의 일곱 개 성(城)을 점령했다.

그리고 불교문화의 번영은 자연 사찰 불상을 만들기 위한 건축물과 조각 회화 등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유명한 황룡사탑(皇龍寺塔)이 세워졌던 것이다.

  여왕이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다음의 세가지 일화로도 알 수 있다.

  당나라의 태종(太宗)은 신라에서 보낸 사신이 돌아오는 길에 신라 왕실에 대한 답례물 가운데 홍자백(紅紫白) 세가지 종류의 모란꽃 그림과 함께 모란꽃씨 석 되를 보내왔다. 그 당시 신라에는 아직 그 소담스럽고 고운 모란꽃이 없었다.

  우리 나라에는 없는 모란이란 꽃은 그림만 봐도 흐뭇합니다. 꽃송이가 이렇게 크고 빛이 이렇게 고우면 향기도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어서 궁중 화원에 심어서 꽃도 보고 향기도 맡고 싶습니다.

  궁녀들은 그림을 보면서 떠들썩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모란꽃 그림을 자세히 보고 있다가 빙그레 웃으면서

  이 모란꽃을 당나라에서는 제일 소중히 여기고 국화(國花)로 정했다지만 한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빛도 곱고 꽃송이도 소담스러워서 복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향기가 없는 꽃은 맛없는 술 같지 않으냐?

  여왕의 말을 듣고 의아해 한 궁녀들은 반문했다.

  그림으로 그린 꽃에서 어떻게 향기가 납니까? 저 난초꽃 그림 병풍에서도 향내가 안 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너희들에게 코만 있지 눈이 없기 때문이다.

  호호호. 왜 저희들 눈이 없습니까?

  있어도 볼 줄 모르면 없는 거와 같지 않으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눈이 없고 어리석다는 것이다. 저 병풍 그림의 난초에는 나비가 쌍쌍으로 날아들고 있지 않으냐. 그것은 난초꽃에 향기가 풍기기 때문에 나비들이 모여든 것이다.  그러나 이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꽃 그림에는 나비가 한 마리도 없다. 이것만 봐도 모란꽃에는 향기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냐?

  그럴까요?

  궁녀들이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 중의 하나가 머리를 흔들다가

  나비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그리기 싫으면 안 그리니까 모란꽃에 향기가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하고 제법 영리한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붉은 꽃, 보라 꽃, 흰꽃, 세 폭 그림에 모두 나비가 없지 않으냐? 그림에는 사실에 없으면 없는 대로 그리고 있으면 있는 대로 그리는 법이다. 너희들 말이 맞나, 내 말이 맞나, 이 씨를 심어서 꽃이 핀 뒤에 알아 보자.

  네, 그때 의문은 풀릴 것입니다.

  궁녀들은 모두 여왕의 예언을 믿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 모란꽃 수수께끼는 고관들 사이에도 유명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여왕의 기발한 착상(着想)에 놀라면서도 여왕의 의견에 찬동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나라에 가서 직접 그 꽃을 보고 온 사신에게 물어보자.

  그들은 당나라에 다녀온 사신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도 식물학적 관찰을 하지 않았으므로 자기가 모란꽃을 보았을 때에 나비가 꽃 근처에 나르고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 수수께끼는 씨를 심어서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수수께끼 화제도 시일이 흐르는 동안에 모두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계절은 바뀌고 모란꽃이 자라서 꽃이 피었다. 소담스러운 꽃이 곱게 피었으나 과연 모란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아, 여왕께서 하신 예언이 맞았다.

  그때야 신하들과 궁녀들은 여왕의 슬기에 다시 감탄했다는 좀 싱거운 이야기보다도 성적

(性的) 흥미를 겸한 이야기도 있다.

  선덕여왕도 그 시대의 왕실 습관대로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 여왕은 신심(信心)으로 훌륭한 영묘사(靈妙寺)를 세웠는데 절 경내(境內)에 옥문지(玉門池)라는 아담한 연못도 마련했다.  옥문은 여자의 국부라는 뜻인데 무슨 까닭으로 그런 선정적(煽情的)인 이름을 붙였는지 전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어느 해 겨울에 이 옥문지에 이상한 징조가 나타나서 중들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화제가 되었다.

  영묘사 옥문지 얼음장 위에 흰 개구리떼가 나와서 밤낮 사흘 동안이나 울어댔다. 철 아닌 개구리가 우는 것도 괴이하지만 백색 개구리가 또한 흉조(凶兆)야. 세상에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른다.

  이런 소문이 점점 켜져서 유언비어(流言蜚語)로 화하자 인심이 흉흉해졌다. 선덕여왕은 이 소문을 듣고 조용히 생각했다.

  이것은 길흉간에 중대한 신불(神佛)의 계시(啓示)다. 이 계시의 뜻을 미리 판단해서 알면 흉조도 길조(吉兆)로 이용해서 복이 될 수 있다.

  하고 일관(日官)에게도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겨울에 흰 개구리가 나와서는 우는 것은 흉조입니다.

  라고만 말할 뿐 그 흉조가 어떤 사건의 예시(豫示)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개구리의 백색(白色)을 백제(百濟)라는 뜻으로 풀고 백제군이 기습해 온다는 징조로 판단했다.  그래서 알천 각간(閼川角干)과 필향 각간(弼香 角干)에게 긴급 군사동원령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왜 갑자기 군사를 동원합니까? 백제도 고구려도 공격해 올 기미는 전혀 없습니다.

  장군들도, 나도 모르기 때문에 신불께서 백제군의 기습을 알려 주신 것이니, 내 말대로 빨리 동원준비를 하시오.

  네.

  장군들은 곧 전쟁 준비를 하고 다시 물었다.

  어느 방면으로 적군이 기습할 것 같습니까?

  여근곡(女根谷)으로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복병했다가 안심하고 기습해 오는 백제군을 역습하시오.  그러면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올 것이요.

  여왕은 여근곡이라는 말을 여성으로서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정색을 하고 냉정하고 사무적으로 명령 내렸다.

  여근곡은 경주 서쪽 부산(富山) 밑에 있는 요새(要塞)이다. 이천 명의 신라군은 그 곳에 미리 가서 복병하고 있다가 밤중에 기습해 온 오백 명의 백제군을 독 안에 들어온 쥐처럼 포위하고 몰살시켜 버렸다.

  그때야 비로소 두 명의 대장도 자기들이 전투직전까지 선덕여왕의 명령을 비웃은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백제군의 후속부대가 천이백 명이나 되었으나 초전에 기세를 올린 신라군은 용기백배 해서 역시 전격적으로 전멸시켜 버렸다.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한 두 장군은 여왕에게 물었다.

  어떻게 여근곡으로 백제군이 기습해 올 것을 미리 아셨습니까?

  남자인 장군들에게 말하기는 거북하오. 그러나 천기(天機)와 군기(軍機)에 관한 중요한 문제니까 거리낌없이 알리겠으니 장래의 참고로 삼으시오.

  하고 태도를 단정히 하자 남자의 장군들이 도리어 수줍어 하며 옷깃을 여미고 경청했다.

  옥문지의 옥문과 여근곡의 여근이 같은 뜻이고, 흰 개구리의 백(白)은 서쪽 방향이며 백은 또 백(百)과 음이 통하기 때문에 백제군대로 판단했소.

  ….

  두 장군은 못 이름과 골짜기 이름이 모두 여자의 국부를 뜻하였기 때문에 감탄하는 웃음도 웃을 수가 없었다.

  그야 저희들도 싸우면 이길 자신은 있었습니다마는, 이번 전쟁에 아군에겐 거의 피해가 없을 정도로 대승리를 했습니다. 이 승전을 미리 말씀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좀 이상스러운 설명이 되오마는 남근(男根)과 여근이 싸우면, 처음에는 남근이 공격해오지만 결국 여근에게 포위되어서 죽고 마는 법이요…

  두 장군은 여왕의 설명이 점점 해괴해지므로 송구스러워 했으나 여왕의 표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여왕인 내가 다스리는 우리 나라 땅 여근곡에 남왕(男王)의 백제 왕이 보낸 군대가 패하는 것은 음양지리(陰陽之理)가 아니겠소.

  결론이 이쯤 되자 단순히 선정적인 해자법(解字法)이라기 보다는 여왕의 자기 앞에는 온 세계의 남자 왕들이 굴복해야 한다는 여강남약(女强男弱)의 위엄까지 엿 보이 듯하여 두 장군은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다.

  이처럼 예언을 잘하던 선덕여왕은 자기가 죽을 날도 예언하고 그날이 되자 모든 준비를 하고 자는 듯이 극락왕생(極樂往生)했던 것이다.

  여왕은 모년 모월 모일(某年 某月 某日)에 자기가 승하할 것을 예언하고 장지(葬地)까지 지시했다.

  내 능은 도리천( 利川)중에 정하고 곡을 하지 말고 장례 지내라.

  신하들은 도리천이 처음 듣는 지명이라 어리둥절하였다.

  도리천이 어느 산지(山地)에 있습니까?

  낭산(狼山) 남쪽에 가면 보리수(菩提樹) 숲이 있다. 그 숲 윗 자리가 도리천의 위치이다.

  신하들이 낭산 남쪽을 답사해 본즉 과연 보리수 숲 위의 지점에 보통 사람이 보아도 명당자리가 있었다. 그래서 여왕 생전에 미리 훌륭한 능을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몇 해 후에 예언한 그 날이 되자 앓지도 않고 여왕은 잠든 채 그냥 극락왕생했다. 국상은 미리 준비한 능소의 봉분만 파고 쉽게 거행되었다.

  선덕여왕의 유해를 안장한 후 십년 만에 문호왕(文虎王)은 그 낭산능 밑에 큰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사천왕의 부처를 모셨다. 이때서야 낭산능의 장소가 도리천의 명당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깨닫고 또 한 번 놀랐다. 사천왕위가 도리천이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극락 도리천으로 되셨다. 그래서 그 능소 밑에 사천왕을 모신 절이 설 것까지 미리 아셨다.

  하고 사천왕사의 승려들도 선덕여왕의 능소를 불연성지(佛緣聖地)로 숭상하고 잘 모셨다.

 

 

 眞德女王과 瑤石公主의 競艶

  선덕여왕의 다음 임금도 여자로서 제이십팔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등극했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사촌 누이동생으로서 이름은 승만(勝曼)이었다.

  진덕여왕은 미인인데다가 글을 잘하는 재원(才媛)으로서 당나라 황제에게 지어 보낸 송가(頌歌) 태평가(太平歌)로 유명하다. 신라에도 이렇게 한시(漢詩)를 잘 짓는 여왕이 있는가 하고 당나라의 시인들을 놀라게 했다.

  여왕은 태평가를 친히 지었을 뿐 아니라 손수 짠 비단에 그 태평가를 써서 보냈으므로 그것을 받은 당나라 황제는 멀리서 연모(戀慕)의 정까지 느꼈던 것이다.

  자고로 미인인 재원에게는 염문(艶聞)이 따르기 마련인데 진덕여왕의 경우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진덕여왕은 불교를 독실히 믿는 터라 가끔 분황사(芬篁寺)로 유명한 자장법사(慈藏法師)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럴 때에는 왕족의 요석공주(瑤石公主)를 데리고 다녔다. 그 당시 분황사에는 원효(元曉)라는 젊은 학승(學僧)이 수도(修道)와 저작(著作)을 하고 있었다.

  젊은 진덕여왕은 이 키가 후리후리한 미남자 원효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분황사로 행차가 더 잦았다.그것은 짝사랑하는 원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동행하는 요석공주도 또한 원효를 사모하였다. 진덕여왕은 천하가 자기 뜻대로 되는 임금의 권력이 있었으므로 원효 하나쯤 유혹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이었다.

  미혼의 여왕으로서 원효를 파계(破戒)시키고 남편으로 삼는다 하면 원효의 스승인 자장법사도 반대는 하지 못할 것이었다.

  여왕은 원효를 궁중으로 자주 불러들였다. 설교를 듣겠다는 핑계로 부르는 왕명을 거역 할 수 없는 원효는 부를 때마다 궁중에 들어 가서 단정한 태도로 설교만 했다. 진덕여왕의 귀에는 염불이 들리지 않고 원효를 그리워하는 마음에만 쏠려서 노골적인 추파를 자주 보냈다.  그러나 원효의 도심(道心)은 목석같이 전연 반응이 없었다. 여왕은 간장이 녹을 듯이 초조했다.

  설교 장소를 침실로 정하고 불러들여도 원효는 서슴치 않고 들어가서 설교와 독경(讀經)만 했다. 아름다운 여왕의 유혹과 육체의 향기에도 그의 마음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원효

  예

  독경은 그만 두고 나하고 이야기를 해요.

  마마님, 말씀하십시오. 소승은 독경하면서 귀로 듣겠습니다.

  내가 안 듣는 독경을 누굴 위해서 하겠소.

  들으시지 않아도 여왕께 공덕이 됩니다. 그리고 소승 자신의 수업입니다.

  여기는 원효가 공부하는 승방이 아니에요. 젊은 여자가 자는 분내 나는 침실이에요.

  제가 있는 곳은 지옥의 수도장입니다.

  어마! 내 침실을 지옥이라고!

  여왕은 빨끈 화를 냈다. 그러나 사랑에 애타는 여왕은 마침내 노여움 대신 애원의 고백을 했다.

  원효, 내가 얼마나 원효를 사모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요. 알면서도 내가 싫어서 냉정한 거요?  아마 요석공주 침실에서 이렇게 밤에 단둘이 있으면 그렇게 목석같이 굴지는 않을걸.

  여왕님 소승은 온 생명을 불도에 바친 불제자 올시다. 남녀간의 애정문제는 소승에게는 인연이 없습니다. 요석공주가 소승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제가 알 바도 아닙니다.  요석공주 말씀은 당치도 않은 오해이십니다.

  그러나 요석공주도 원효를 짝사랑하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여왕은 역시 여자다운 질투가 없을 수 없었다. 자기처럼 공공연히 불러다가 침실에서 유혹할 자유도 없는 공주의 입장도 알았으나 아무리 짝사랑일지라도 요석공주와 같은 경쟁자가 있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원효, 중으로 파계 당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워요. 내가 자장법사에게 말해서 명예의 환속(還俗)을 시키겠어요?

  명예의 환속이라뇨?

  여왕을 정복하는 사나이라면 명예스럽지 않아요? 명예가 못되더라도 인생의 행복 적어도 내 행복을 위해서 환속하고 혼인해 줘요. 나도 원효와 혼인만 하게 되면 이까짓 왕관을 벗어 버리고 자유로운 아내로 남편 된 원효를 섬기겠어요.

  원효는 사랑이란 무서운 힘이라고 느꼈다. 한낱 수도승인 자기의 애정을 얻기 위해서 왕관을 버리고 평범한 여자로서 자기를 남편으로 섬기겠다는 고백이 아닌가.

  그러나 원효는 미인의 유혹도 최고 권력자의 위협에도 파계승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 일신의 영달과 행복보다도 온 세계의 중생(衆生)의 행복을 위해서 봉사할 자기의 사명감(使命感)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또 자기가 여왕의 애정을 받아들이면 여왕 한 사람의 행복은 보장된다 할지라도 여왕 한 명의 행복 때문에 자기가 불도(佛道) 로서 구원해야 할 중생을 죄악의 구렁에 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효 자신도 진덕여왕과 요석공주의 애정의 협공(挾攻)을 받으면서 애욕의 충동을 받고 고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의 수업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영혼과 육욕(肉慾)이 내부에서 싸우고 있었다.

  흥, 원효도 역시 속세의 명예욕과 같은 명예욕 때문에 그러는 위선자로군요.

  위선자라뇨?

  자장법사의 수제자로서 장차 자장법사 이상의 유명한 스님이 되고 싶은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파계승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요!

  그것이 속세의 명예욕과 같을지 모르더라도 소승이 한 번 불도에 두고 수도하는바 에는 적어도 학덕이 자장법사 경지에는 이르러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중생구원의 길로 갈 수 있으니까요.

  학문으로서 불학(佛學)을 연구하는 데는 나도 지금 같은 후원을 아끼지 않겠으니 승속(僧俗)을 초월해서 내 이 여왕의 고독감만은 구원해줘요.

  (승속을 초월한다.!)

  원효의 머리에는 이 여왕의 이기적 애욕에서 나온 말에 무슨 새로운 진리의 계시를 받은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승속의 이중생활을 해서 비밀로 여왕의 정부(情夫)가 되라는 의미로도 해석되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왕으로서 체통 없는 짓이라고 비웃어도 좋아요. 나는 원효의 마음이 돌 때까지 언제까지든지 단념하지 않겠어요.

  이처럼 애정을 호소하는 진덕여왕은 원효의 눈에는 항간의 미천한 여자와 조금도 다름없는 여성의 육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호의와 동정의 마음도 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왕의 애정 요구에는 응하지 못할 승려의 계율(戒律)이 그의 마음을 채찍질했다.

  진덕여왕은 자기의 애정으로 원효를 환속시키려고 갖은 성의와 유혹을 했으나 원효는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불심(佛心)으로 파계하지 않았다. 진덕여왕은 원효의 생활비와 연구비를 풍부하게 대주어서 후원했는데 그 결과가 도리어 그의 불도정진(佛道精進)으로 속세의 애정을 멀리 하는 역효과를 내기도 했던 것이다.

  진덕여왕은 천하에서 못할 것이 없었으나 원효의 마음만은 점할 수가 없었다.

  여왕은 얕은 이기심으로 원효가 유명한 중이되는 동시에 자기의 비밀 정부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효는 진덕여왕의 애정에 홀려서 파계하지 않았고 그보다 젊고 매력 있는 요석공주의 유혹에도 넘어가지는 않았다.

  진덕여왕은 원효를 짝사랑하다가 평생에 남성을 모르고 재위(在位) 팔년만에 아직도 젊은 나이로 승하했다. 여왕은 운명할 때에 요석공주에게 안타까운 유언을 했다.

  내가 죽은 뒤에는 네가 원효 스님의 뒤를 잘 받들어라. 나도 원효 스님을 사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같은 여자의 심정으로 너 역시 원효 스님을 사모하는 것을 동정한다.

앞으로는 내 고민을 네가 대신하겠거니와 스님으로 계시든지 환속하든지 잘 돌봐 드려라.

  여왕은 이미 죽는 몸이라 원효에 대한 자기의 정신적 애정과 함께 물질적인 봉사까지 솔직하게 요석공주에게 물려 주었다. 이로써 요석공주는 종래 여왕에게 사양해 왔던 원효에 대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어느 초여름 날 요석공주는 요석궁 정원에 곱게 피어 오르는 모란꽃을 보고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을 느꼈다. 그 정열은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의 불길이었다. 공주는 손수 짠 붉은 비단으로 가사(袈裟)한 벌을 새로 짓고 거기에 모란꽃다발을 곁들여 원효에게 선사하면서 애절한 사연의 편지까지 보냈다.

  원효는 진덕여왕의 승하 원인이 자기의 냉정한 애정거부에 있었다고까지 생각되었으므로 인생의 무상을 느꼈다. 그러나 요석공주가 또다시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취하게 되자 더욱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서울에서 떠나 버리자. 요석공주에게 단념시키는 수단으로는 내 행방을 감추는 것이 우선 상책이다. 나로서도 요석공주의 자태를 아주 잊어버리려면 몸을 멀리 해야겠다.)

  그는 이런 결심을 하고 십년 동안 수업하던 분황사와 스승 자장법사와도 이별하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문수사(文殊寺)에 숨어 버렸다.

  그가 행방까지 숨기게 괸 직접 동기는 진흥왕 뒤에 임금이 된 무열왕 김춘추(武烈王 金春秋)기 요석공주의 비련(悲戀)에 동정하고 왕명으로 원효에게 압력을 가해 왔기 때문이다.

  원효, 이것은 왕으로서의 명령이 아니라 친구로서 하는 청일세. 요석공주가 원효만 사모한고 다른 남자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괴로워하니 나로서도 딱해서 볼 수 없네. 부디 환속해서 공주와 결혼해 주게.

  김춘추는 왕족이었으나 왕이 되기 전까지는 서로 하게를 하는 친구지간이었다. 그러나 김춘추가 무열왕이 된 이후에는 군신(君臣)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상감, 소승이 불제자로 전 생명을 바친 것을 잘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공주의 호의 왕 상감의 권고는 감사하오나 결혼문제로 파계 환속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변화가 있는 법인데 속한이 승되는 거나 승이 환속하는 거나 무엇이 달라서 그런 고집인가?

  그러나 속세의 의리보다도 불문(佛門) 계율은 신성하고 엄격합니다.

  하고 원효는 거절했다. 그러나 공주와 왕은 단념하지 않고 원효에게 환속하고 결혼하기를 강요했으므로 마침내 행방을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요석공주의 애정 유혹을 피해서 서울 부근의 분황사를 버리고 산 속의 문수사에 숨었으나 마음의 안정을 잃고 수도에 전심하기가 어려웠다.

  (마음이 왜 이렇게 어지러울까?)

  원효는 요석공주의 몸을 멀리 하자 도리어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 듯 했다. 속세를 멀리하자 속정(俗情)이 더 아쉬워진 듯하기도 했다.

  (내 수도가 아직 부족하다. 이래서 어찌 해탈 하겠는가?)

  그는 눈을 감고 좌선(坐禪)에 들어갔다.

  이때 승방 밖에서 음성은 늙었으나 경쾌한 염불 소리가 들렸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내가 너희들 너구리 엄마다… 하하하.

  그 염불투로서 원효는 감은 눈 앞에 대안대사(大安大師)의 모습이 완연히 보였다. 대안대사는 술도 먹고 오입도 하는 중으로서 민중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자장법사는 정통적 보수파의 고승(高僧)이요, 대안대사는 승속을 초월한 기승(奇僧)으로서, 정통파에서는 막나니 파계승이라고 경멸했다. 그러나 민중에 대한 봉사의 공덕은 자장법사에 못지 않았고 서민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의 존경을 더욱 받았다.

  원효는 승방을 나와서 대안대사의 뒤를 따라 갔다. 대사는 다 해진 승복(僧服)에 새끼로 허리를 매고 헌 짚신을 신고 산 속으로 걸어갔다.

  내가 너희들 너구리 엄마다. 엄마가 먹을 것을 얻어 왔다.

  대안대사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어떤 바위굴로 들어갔다. 굴은 깊지도 않아서 밖에서도 들여다 보였다. 대사는 너구리 새끼들을 무릎에 올려 놓고 얻어 온 밥을 먹이고 있었다.

  원효는 굴 앞으로 가면서 웃는 소리로 인사했다.

  대안스님, 오늘은 너구리 새끼들하고 노시는군요.

  노는 게 아닐세. 무자비한 사냥꾼이 어미 너구리를 잡아갔기 때문에 내가 이 가엾은 새끼들의 어미 노릇을 하고 있네.

  원효는 대안대사다운 공덕에 감탄했다.

  대안스님 공덕이 짐승에게까지 미치시니 참으로 거룩하십니다.

  공덕이라니 내가 즐거워서 이럴 뿐일세.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

  사정이 있어서 문수사에서 홀로 수도하고 있습니다.

  거 잘했네. 궁전 같은 분황사에서 금란가사(金蘭袈裟)를 입고 귀족행세 하는 자장법사에게 배울 게 없다는 것을 인제 깨달았나. 무인산중의 초라한 암자에서 수도하고 깨달은 뒤엔 더 좋은 수도장으로 내가 안내하겠네.

  더 좋은 수도장이 어디 입니까?

  그것 농부집 소외양간야. 그리고 장(場)거리 뒷골목의 술집야. 때로는 이런 너구리굴이기도 하고 … 하하

  원효는 전부터 대안대사를 사모하였지만 승속과 인수(人數)를 초월한 이러한 태도에 도통의 경지가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진덕여왕도 승속을 초월하라고 했겠다.)

  하하하. 원효가 이 산속으로 피해 온 것은 요석공주의 미색이 겁나서지. 그런 옹졸한 도량으론 몸은 피해도 마음은 사로잡힐 걸. 핫핫핫.

  대안대사의 마음 눈총은 원효의 심장의 비밀을 찌르는 듯했다.

  스님, 지금까지 대궐 같은 절에서 왕실의 덕으로 호강하며 공부하던 제가 대안스님의 해탈하신 경지에 대해서 부끄럽습니다.

  자네가 요석공주의 사랑을 받느냐, 거절하느냐, 파계하느냐 않느냐가 문제는 아닐세.

중생과 더불어 고락과 선악을 체험해야 자연스러운 인간의 선지식(善知識)이 되는 법야.

  예,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밤에 내가 인간의 삼악도(三惡道)를 구경시켜 줌세. 악을 알고 악을 행하면서도 악에 지지 않는 경지를 시험해 보게.

  원효는 대안대사의 설법에 이상한 감명을 받고 대안대사를 따라서 서울 뒷거리의 선술집을 향했다.

  술집은 초라하고 더러웠다. 원효는 당황했으나 대안대사가 권하는 술잔을 생전 처음으로 입에 대했다.

  원효스님이 술로 파계했으니 이젠 술 먹는 중생도 구원 받게 되었다. 이젠 사랑으로 고민하는 여자도 구원해야 할 거 아닌가.

  대안대사가 농담만도 같지 낳은 농담으로 원효에게 술을 많이 먹였다. 정신 모르게 취한 원효는 대안대사가 끄는 데로 방향도 모르고 끌려 갔다.

  대안대사는 원효를 데리고 요석궁 앞에 가서 큰소리로 물었다.

  원효, 여기가 어딘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지옥일세. 지옥 기분이 어떤가?

  술에 취한 기분입니다.

  맞았네… 인제 지옥을 지났고 극락일세. 기분이 어떤가?

  역시 술에 취한 기분입니다.

  맞았네. 그리고 자네가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는데 신분이 무엇인가?

  소승은 중입니다.

  그럴 거야. 그런데 색시집에서 술에 취해서 밤거리를 헤매는 중을 세상에선 무어라 하지?

  파계승이라고 합니다.

  자네가 바로 그 파계승일세 그려.

  예, 파계승이라도 대안스님같이만 되면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런 허튼 수작을 하면서 대안대사는 밤이 늦도록 요석궁 주위만 빙빙 돌고 있었다.

  교군들 그 가마에 타신 분이 공주시오?

  아, 대안스님이 또 술 하셨군요. 이 가마는 빈 가마 올시다.

  그럼 잘 됐네. 마침 원효스님이 파계를 하고 술에 취해서 오늘 밤 주무실 집이 없으니 적당한 곳으로 모셔다 드리게.

  원효스님께서…

  그래 분명히 원효스님이 오늘밤부터 내 제자가 되었네.

  실은 공주님께서 오늘밤에 꼭 모셔오라는 분부시라 분황사로 갔다가 안 계셔서 그냥 되돌아 오는 길입니다.

  하하하, 내가 그럴 줄 알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네. 자아 이분을 가마로 모셔다가 공주님께…

  하고 대안대사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인들은 술에 취해서 정신 모르는 원효를 가마에 태워서 요석궁으로 운반해 갔다. 그날 밤에 요석공주는 취한 원효를 침실에서 간호하면서 최초요 최후인 단 한 번의 원앙의 정을 맺었다.

  왜냐 하면 원효는 요석공주의 남편 노릇을 하룻밤만 하고 명실공히 파계승이 되었으나 천하를 방랑하며 끝내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끊고 승속 초월한 원효교리(元曉敎理)를 개척한 고승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룻밤 원앙의 꿈으로 사랑에 성공한 요석공주는 다음날부터 남편 원효를 기다리는 생과부가 되었다. 요석궁 정원의 모란꽃은 만발했으나 향기가 없는 꽃인지 나비가 날아 오지 않았다. 향기 있는 공주에게도 원효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모란꽃에도 씨는 여물 듯이 요석공주의 몸에도 원효의 씨가 자라나서 열달만에 옥동자를 낳았다. 이 아이가 자라서 신라의 삼대학자의 하나인 설총(薛聰)이 된 것이다.

 

 

 

 善花公主와 薯董의 사랑

  신라 서울 남쪽 교외에 남지(南池)라는 큰 못이 있었다. 이 못가의 초라한 집에 신분 모르는 처녀가 홀로 살고 있었다. 외롭고 가난한 처녀는 자기의 조상의 내력도 몰랐다.

  세상에서는 물론 천한 집의 계집애로 경멸하고 웬만한 평민의 총각도 아내로 데려가려고는 하지 않았다. 남의 집에 가서 빨래와 바느질을 해주면서 살아갔는데 제 또래 여자들이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아이에게 젖을 물려 안고 있는 것이 부러웠다. 외딴 집에 혼자 자는 밤이면 뼈에 사무치게 쓸쓸함을 느꼈다.

  그런데 집 앞의 못에서 밤마다 용이 나타나서 이 외로운 노처녀를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에 친해져서 동침의 정을 맺은 결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인제 내가 할 일은 다했으니 이 아들을 잘 길러요. 그러면 장차 복을 받고 귀하게 될 거요.

  용은 이 노처녀에게 아들을 점지해 주려고 잠시 이상한 남편 구실을 했던 것이다. 용의 피와 정기를 타고 난 아이는 병도 없이 자랐고 지혜가 밑상했는데 어려서부터 특히 시(詩)를 잘 짓는 재주가 있었다. 홀어머니의 고생을 덜어 주려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은 소년 때부터 집 앞 뒤 땅에 밭을 일구고 감자 농사를 지었다. 그가 가꾸는 감자는 다른 농민들보다 배나 크고 맛이 좋았으며 같은 면적의 수확도 세배나 되었다.

  저 집 애는 감자 귀신이다.

  이런 소문이 퍼진 덕분으로 어느덧 그의 이름까지 서동(薯董)으로 불러졌다.

  서동은 그 감자를 찌거나 굽거나 해서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거리로 다니면서 주로 아이들 상대로 팔아서 모자의 생계를 유지했다.

  서동의 감자는 꿀맛이다.

  서동의 감자는 서울서도 명물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서동이 읊은 노래는 아무도 모르게 입에서 입으로 불려졌다.

  감자 사려!

  하고 외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길가나 장에서 서동이 노래를 부르면 사방에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날마다 서울 거리를 장사하려 돌아다니기 때문에 세상 소문도 빨리 들었다. 서동의 모친은 밤마다 아들에게 세상 소문 듣는 것이 하나의 낙이었다.

  어머니, 오늘은 이상한 소문을 들었어요. 진평왕(眞平王) 셋째 따님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신라 제일의 미인이래요.

  그야 공주님이니까 미인이겠지.

  공주면 다 미인인가요. 선화공주 언니는 곰보라 시집도 못 간다는데.

  너 그런 소리하다 큰일난다.

  그런데 선화공주는 너무 미인이라 시집을 못 간대요.

  그건 또 무슨 까닭이냐?

  하기야 미인이라 귀공자들의 청혼이 많지만 선화공주가 너무 미인이라 그런지 신랑감마다 마음에 안 든다고 퇴짜를 놓는대요.

  호호호, 딸 둔 부모는 못나도 걱정 잘나도 걱정이란다. 나도 이런 처지로선 네 장가 들일 것이 걱정이다.

  어머니 제 장가 걱정은 마세요. 아무리 못나서 제 아내 하나 못 얻겠어요?

  혼인이란 공주님들도 그렇게 어렵듯이 첫째는 연분이 맞아야 한다. 그러나 너에게 연분이 맞는 처녀가 있어도 혼수할 힘도 없으니 어찌 걱정이 아니랴.

  모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잔 그날 밤에 서동은 용꿈을 꾸었다.

  나는 네 집 앞 남지못에 사는 용이다. 엄마한테 들었겠지만 네 아버지다. 너도 인제 장가를 들어서 엄마를 안심시켜야 한다. 지금 마침 천하미인 진평왕 셋째 공주가 마음에들 낭군을 찾고 있으니 네가 공주의 마음을 끌어서 부마가 돼라. 그러면 장차 귀하게 된다.

  서동은 놀라며

  제가 어떻게 선화공주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까? 공주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도 없고 방법도 없습니다.

  아니다. 네가 동요를 잘 지으니 그 동요의 재주를 잘 활용해 봐라.

  이런 아버지(?) 용의 계시(啓示)를 꿈꾸고 나서도 서동은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론 동요 재주를 이용할 생각도 먹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사흘 밤을 계속해서 같은 용꿈을 꾸었다.

  같은 꿈을 세 번이나 꾼 용꿈이니 한 번 시험해 보자. 실패하면 그만이지.

  드디어 서동은 동요를 세상에 퍼뜨려서 선화공주의 마음을 끌어보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는 마침내 이상한 동요를 짓고 곡을 붙여서 장안의 소년 소녀에게 가르쳤다.

  너희들 중에서 이 노래 배워서 제일 잘하는 애에겐 수박만큼 한 감자를 상으로 준다.

  하고 선동했다. 서동에게 재미나는 노래를 배우는 것도 기쁜데다가 상까지 준다 하니 모두 신이 나서 그 노래를 배웠다. 그리하여 며칠 안 가서 장안에는 이 서동가가 퍼졌고 방방곡곡을 흘러갔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은 가사(歌詞)였다.

 

천하에서 제일미인

선화공주 아가씨는

잘난 신랑 없다하고

시집 안 갈 핑계더니

알고 보니 아니더라

알고 보니 아니더라

낮이면 새촘 빼고

일락서산 해가 지면

남짓가의 용자(龍子)하고

닭울도록 잔다더라

 

  유행가는 당시 풍류생활을 하는 신라사회에서 한 번 유행해서 인기만 얻으면 열병같이 퍼져서 관가에서도 금할 수가 없었다. 예술 문화를 숭상하고 그 표현도 자유로웠던 신라에서는 남녀의 애정을 노래한 노래가 원시적인 노골적 표현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동요는 왕실의 공주가 바람을 피운다는 노골적 내용이라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동요로서 아이들만 불렀지만 점점 어른들까지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남지 못가에 산다는 용왕의 아들을 잡아서 벌할 수는 없었다.

  이건 필시 공주에게 실연당한 많은 청년들이 질투 끝에 공주를 욕하기 위한 장난이다.

  대신들도 그런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진평왕은 하는 수 없이 죄도 없는 줄 아는 선화공주를 귀양 보낸다는 명목으로 먼 섬으로 보내게 되었다. 많은 돈과 비단과 양식을 실어서 보내면서

  네 억울한 누명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그런 불미한 노래가 나도는 이상, 우선 네 마음이 괴로울 거다. 멀리 떨어진 한가로운 섬에 가서 편히 지내라. 풍문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니,  세상에서 그 오해를 잊어버리는 대로 환궁시키겠다.

  선화공주는 실제야 어떤 대우를 받든지 그런 누명을 쓰고 먼 섬으로 귀양 가는 것이 여간 억울하고 슬프지 않았다. 그러나 부왕(父王)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끝까지 거역하면 부왕의 노염을 사서 진짜 귀양을 갈 것이며 결과는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서동은 자기가 지어서 퍼뜨린 노래가 이런 효과를 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구중궁궐에서 많은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곱게 자란 선화공주가 귀양 간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의 죄가 무서워졌고 공주의 수난(受難)을 동정했다.

  (그러나 내 용꿈이 반쯤은 맞은 셈이다. 앞으로 공주의 고생을 덜어 주어야겠다. 그러다가 요행히 공주의 호의를 사면 부부의 인연이 맺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으로 서동은 공주가 향해 가는 길을 앞질러 가 어떤 험한 고개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공주의 일행이 산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전곡(錢穀)을 실은 말은 세필이나 되었으나 초라한 이인교(二人轎)는 빈 가마로 오고 공주는 가마에서 내려 다리를 절면서 허덕허덕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이미 공주의 위엄이 사라지고 죄인의 신분이므로 가마꾼도 비탈길이라 사람을 태우고는 못 가겠다는 핑계로 공주를 학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보통 때의 공주 행차라면 사인교(四人轎) 꽃덩에 시녀들을 거느리고 사령소리도 요란하게 지나갔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비록 이인교라도 하인들은 어깨가 으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잘 태워서 모시고 올라갔을 것이다.

  서동은 숨어서 기다리던 숲에서 뛰어나와서 보행으로 고통을 겪는 공주를 자기 등에라도 업어 모시고 싶었다. 그리고 전날까지도 공주에게 굽실거리던 종들이 불우해진 오늘의 공주를 업신여기는 것을 분해 했다.

  그러나 서동은 자기가 취할 행동을 침착히 생각하고 일행이 보이는 거리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숨어서 공주의 동정을 살폈다.

  (저 하인 놈들이 말에 실은 전곡까지 빼앗고 도망칠지도 모른다.)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그날 해도 저물어서 어둑어둑해졌다. 그러나 하인들은 공주를 걸리고 산중으로 들어가고만 있었다. 이때부터 서동은 긴장하고 만일의 경우 공주를 구출할 각오를 했다. 그리고 공주를 자기가 구해 줌으로써 공주와 가까워지고 호의를 받게 될 무슨 사건이라도 발생했으면 좋겠다는 기대조차 품어보는 것이었다.

  불손한 하인 놈들이 배반하든지 아니면 산적이라도 나타나면 자기의 화랑도다운 의협심을 발휘하려는 용기를 다졌다.

  이런 의협심의 용기는 이미 직전까지 생각하던 공주 접근에 대한 야심이나 모략적 성질과도 딴판으로 약한 여자를 보호하려는 인륜에 따른 분발심이었다. 해가 지자마자 산중의 밤은 빨리 와서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지는 듯했다.

  선화공주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고 아픈 다리가 천근같이 무거워서 땅에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다. 어두워진 험한 산길의 돌뿌리를 차고 엎드려진 공주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서 비틀거리다가 또 돌뿌리를 차고 쓰러졌다.

  그러나 지쳐서 쓰러진 공주는 그래도 공주의 체모를 지키려고 입을 악물고 터져 나오는 통곡을 참았다. 길은 이미 급한 경사지를 지났으나 가마꾼 두명은 태우려고도 않고 모른척하고 앞서 가고 있지 않은가.

  하인들은 우직(愚直)하기만 해서 그런지 몰라도 빨리 산을 내려 가서 인가를 찾을 생각은 않고 점점 깊은 산 속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공주님, 빨리 걸으시오. 어서 산을 지나서 마을에 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산적이나 범이라도 나오면 어쩔려고 그럽니까?

  내 걱정 말고 너희들이나 어서 안전한 곳을 찾아 가거라.

  공주도 참다 못해 절망해서 소리를 지르는 모양이었다.

  마침 그때 길가 숲에서 산적 세 명이 뛰어 나오며 일행의 앞을 막았다. 모두 키가 장승같이 크고 손에는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너희들 목숨이 아깝거든 말에 실은 물건을 고스란히 바쳐라!

  공주의 벌벌 떠는 전율(戰慄)이 숨어서 보는 서동의 몸에 그대로 전해지듯 애처로웠다.

  예, 다 가져가고 목숨만 살려 주시오.

  하인놈들은 기절한 듯이 땅에 쓰러진 공주도 버린 채 저희들만 산 밑으로 도망쳐 버렸다.

산적들은 하인들이 달아난 뒤에 말에 실은 짐을 풀러 내리고 쓸 만한 것만 고르는 모양이었다. 

  야, 이것은 금자루다!

  금자루라니? 어디 불을 켜봐라.

  한 놈이 불을 켰다.

  얏, 정말이다. 오늘밤엔 산적 몇 해 동안에 처음으로 큰 횡재했다.

  멀리 떨어져서 보는 서동에게도 불빛에 번쩍이는 황금덩어리의 누런 빛이 보였다. 산적들은 금자루를 둘러 메고 가려다가 비로소 길가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젊은 여자를 발견하고 다시 기성(奇聲)을 올렸다.

  야, 이게 웬 계집애냐. 곱기도 하다.

  허어, 이 여자의 행장이었구나. 하인 놈들이 가마까지 버리고 도망쳤다. 우리보다 나쁜 놈들이다. 약한 여자 상전을 버리고 저희들만 도망친 비겁한 놈들!

  산적들까지 하인들의 배신에 욕했다. 그러나 저희들 산적이 하인들보다 나은 마음으로 공주를 대해 줄 것인가?

  네가 죽은 척해도 속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하고 가자. 순순히 말 안 들으면 여기서 그냥 요절을 내버린다.

  당장 죽이겠다는 위협인지, 겁탈하겠다는 공갈인지, 공주의 운명은 풍전등화 격이었다.

서동은 더 참을 수 없었다. 강도들과 싸워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공주를 구원할 자는 자기 뿐이오,  그것이 또한 하늘이 마련해 준 귀중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공주를 아내로 삼으려고 모략의 노래를 유행시켰기 때문에 죄 없는 공주에게 이런 끔찍한 봉변을 당하게 했다는 가책을 느끼자 역적의 죄를 진 것만 같았다. 그 속죄를 하려면 생명을 내놓고 공주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순간 서동은 성낸 범처럼 그곳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이 무도한 짐승 같은 도적놈들! 그 분이 누구신데 감히 이러느냐!

  불의의 호령이 내렸으므로 산적들은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았다.

  이놈! 네가 어떤 놈이냐?

  산적들도 곧 대항하여 서동을 노려 보았다.

  어서 무엄한 행패를 그쳐라. 이 분은 궁중의 금지옥엽 선화공주님이시다. 약탈한 금자루를 놓고 썩 물러가거라!

  이 여자가 공주라고?

  그렇다.

  공주면 처녀겠구나. 공주라고 XX 없을까? 그러지 말고 타협하자. 너에게도 금맛도 공주 맛도 한몫 나누어 주마. 핫핫핫.

  상대방이 한 놈이라 다른 놈이 해괴한 말로 서동을 야유했다.

  이 무례한 놈들, 점점 짐승의 보색을 나타내는구나. 너희들 내가 혼잔 줄 알고 그러지만 산 밑 마을에서 저녁 먹고 올라오는 호위병 이십 명이 오면 사지를 찢어서 죽이겠다.

  서동은 임기응변으로 산적들을 위협했다. 그러면서도 산적이 방심한 순간에 한 놈의 팔목을 작대기로 후려갈겨 칼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 칼을 재빨리 집어 든 서동은 높은 바위 위로 뛰어 올라서 산 밑을 향해서 높이 외쳤다.

  야아, 호위병들! 여기서 공주님이 산적을 만나셨다. 하인놈들이 겁을 내고 도망쳤으니 빨리들 올라오라. 산적놈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진을 치고 오너라.

  산적들은 겁을 집어먹고 금자루만 둘러메고 도망쳐버렸다. 산적들은 그것으로 제 벌이는 했고 서동도 공주를 구하려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피를 흘리지 않고 잘 된 셈이었다.

  서동은 공주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공주님, 큰일날 뻔했습니다. 도적들을 쫓아 버렸으니 어서 마을로 내려가서 편히 쉬십시오.

  하고 위로했다. 공주는 산적에게 잡혀갈 위기에서 구해 준 서동을 생명의 은인처럼 고마워했다.

  고맙습니다. 위급한 몸을 이렇게 구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존함이 누구십니까?

  선화공주는 궁중에서 추방된 첫날 저녁에 이런 봉변을 당했으므로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는 동시에 세상이 험악하고 무서운 것을 느끼고 몸서리가 났다. 지금 구해 준 은인의 청년만 또 그냥 가버리면 약하고 세상 모르는 자기로서는 한시도 살 것 같지 않았다.

  공주는 서동의 말대로 서동을 따라서 빨리 마을로 내려가려고 애를 썼으나 발이 부르트고 피로 해서 엉금엉금 기는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그 발로는 못 가십니다. 황송하오나 제 등에 업히십시오.

  하고 공주 앞에 등을 대고 허리를 꾸부렸다.

  여자로서 실례인 줄 아오나 위급한 경우니 꾸중치 마시오.

  공주는 서동의 등에 업혔다. 처음으로 청년에게 몸을 대고 업혔으므로 수치심으로 바르르 떠는 감촉이 서동의 전신으로 느껴졌다.

  서동은 부드럽고 탄력 있는 공주의 체온에 황홀할 뿐이었다. 그는 조금도 체중을 느끼지 않고 나는 기분으로 산중의 밤길을 내려왔다.

  그날 밤을 주막에서 지낸 공주는 이튿날 아침에 길을 떠나기 전에 서동에게 상의 했다.

  암만해도 앞으로 갈 길이 위험하니 이 동네에서 착실한 인부를 구해 주세요. 돈은 다 도적 맞았으나 몸에 지닌 패물을 드리겠으니 좋은 인부 두 명만 사 주세요.

  예, 물론 공주님 혼자는 먼 섬까지 가시지 못합니다. 응당 충실한 인부라도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공주님이 제 성의와 수완을 인정해 주신다면 제가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어젯밤 일만 해도 송구하거늘 어찌 또 도련님 신세를 지겠어요. 그야 도련님이 보호해서 데려도 주시면… 실은 저도 그런 청을 드리고 싶었으나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공주는 서동이 평민의 총각인 줄 알면서도 도련님이라고 깍듯한 공대를 했다. 은인에 대한 태도이기도 했지만 자기는 이미 공주가 아닌 죄진 처녀라는 자각에서 주막 심부름꾼에게도 겸손한 말공대를 했던 것이다. 이런 태도로도 공주의 교양이 높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선화공주는 생명을 구해 준 서동이 귀양가는 천리길을 보호해 주며 동행하게 되었으므로 마음으로 고맙게 여기고 기뻐했다. 그날부터 두 남녀는 고락을 같이 하면서 길동무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애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자 괴롭던 길이 즐거워져서 도리어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세상에서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그들은 마침내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바쳤다.

  나는 당신과 이런 인연이 맺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귀양가게 된 것이 도리어 다행이었어요.

  하고 공주는 기뻐했다.

  나는 공주와 부부가 될 용꿈을 꾸었는데요.

  서동은 수수께끼 같은 말로 받으면서 빙그레 웃었다.

  무슨 용꿈을 꾸었는데요?

  공주가 물었다.

  그건 공주가 궁중에서 쫓겨난 사건과 관계가 있으니 공주가 이렇게 귀양 오게 된 경과부터 말해봐요.

  다 아시면서 또 물으세요. 그러나 나에게 청혼하다가 거절당한 청년들이 질투를 하고 내가 어떤 총각하고 사랑하고 궁중을 나와서 밤잠을 잔다는 거짓말을 노래로 지어서 퍼뜨렸다지 않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 얄미운 청년이 도리어 고마워요. 그 때문에 지금 당신과 이렇게 맺어졌으니까요.

  그들은 마치 행차하는 듯한 즐거운 걸음으로 공주의 귀양 길을 가면서 지난 날의 비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 유명한 노래를 듣지 못했어요. 당신 아시거든 한 번 들려 주세요.

  그럼 내가 그 노래를 불러서 우리 사랑을 축복해 볼까

  네, 어서 들려 줘요. 우리로선 축복할 노래니까요.

  서동은 시치미를 떼고 잘하는 노래 솜씨로 자작자곡(自作自曲)인 문제의 유행가를 불렀다.

 

천하에서 제일미인

선화공주 아가씨는

잘난 신랑 없다 하고

시집 안 갈 핑계더니

알고 보니 아니더라

알고 보니 아니더라

낮이면 새촘 빼고

일락 서산 해가 지면

남짓가의 서동하고

닭 울도록 잔다더라

 

  어마! 그런 노래였어요. 아바마마가 노해서 귀양 보낸 것도 무리는 아니었군요. 그런데 서동은 당신 이름 아니예요? 호호호, 그 구절만 바꿔 부른 당신 장난이 얄미워요.

  이름은 바뀌었으나 본인은 같었거든. 본 노래에는 용자라는 익명(匿名)으로 돼 있지만 내가 용의 피를 타고 났다는 이야기는 이미 하지 않았소. 그리고 실은 그 노래는…

  하고 자기가 선화공주를 안으려던 동기와 유행가를 지어서 퍼뜨린 경과를 자세히 고백했다.

  아아, 이제 내 운명의 비밀을 다 알았어요. 그만한 재주와 수단이 없는 사람이 아니면 내 배필로 몸을 맡기겠어요. 호호호.

  그러니까 우리는 천생배필이지.

  하고 서동은 길가다가 공주를 포옹하고 입을 맞추었다.

  아이, 누가 보지 않아요?

  이 산길에서 보긴 누가 봐.

  저기 하늘의 구름이 시기하지 않아요. 호호호.

  허나 범이 시기하고 나올지 모르겠군.

  농담을 하면서도 서동은 공주를 포옹한 채 나무 그늘 밑으로 가서 쉬었다.

  그들은 신혼여행(新婚旅行) 기분으로 귀양지인 섬까지 갔다. 거기서 공주와 서동은 지위가 박쥐같이 변하는 이중생활(二重生活)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섬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낮에는 서동이 충실한 종 구실을 하고 밤으로는 정다운 남편구실을 했다.

  한 자루나 되는 금은 도중에서 산적에게 털렸으므로 두 식구가 살아가기 위해서 서동은 섬에서도 따비밭을 이루고 유명한 그 감자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고기도 잡아서 열심히 일했다.

  궁중에서 아무 일 않고 금의 호식하던 때보다 땀 흘려서 일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는지 모르겠어요.

  공주는 서동의 일을 몸소 도왔으므로 일의 기쁨과 가치를 비로소 알았던 것이다. 궁중의 공주 생활보다도 서동과 이룩한 섬에서의 귀양살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그러나 귀양살이 이년 만에 해신(海神)이 그들의 행복 된 애정을 시기했는지 태풍이 계속 불어서 집이 날아가고 어선이 떠내려갔다. 감자를 비롯한 농작물도 전멸해 버렸다.

  날만 개면 내가 해녀(海女)가 돼서 조개라도 주어다 먹을 테니 걱정 마세요.

  공주는 생활의 책임감을 느끼고 걱정하는 남편을 위로했다.

  그러나 당신이 경멸하는 황금을 이번만은 이용하겠어요. 우선 쓸어진 집을 다시 짓고 살아야겠으니까요.

  나는 황금 소리만 들어도 귀가 더러워지는 것 같소. 그런데 황금은 산적에게 다 빼앗기지 않았소.

  한 개만 몸에 지녔던 것을 당신에게도 모르게 감추어 왔어요. 이런 급한 재난 때 쓰려고요.

  하고 공주는 누런 광채가 나는 묵직한 금덩이를 내 주었다.

  허어, 이것이 황금이요? 나는 이런 누런 차돌은 많이 보았지만 황금인지도 몰랐소.

  이런 것이 누런 차돌이라고요? 호호호, 이런 것을 어디서 많이 보셨어요.

  남짓가 집 앞 뒤 밭엔 얼마든지 있소. 감자 농사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몇 삼태기씩 골라서 땅 속에 깊이 묻어 버렸지?

  어머나, 그럼 어서 돌아가서 그 황금을 캐내세요.

  황금은 나에겐 소용 없소. 그것이 있으면 사람이 게을러지고 오만해지고 방탕해진다는데.  그래서 성현들이 더러운 보물이라고 가른 친 모양인데 내가 다행히 모르고 묻어 버린 것을 왜 캐라는 거요.

  당신에겐 필요 없어도 나에겐 필요해요. 아니 우리가 정식으로 부부가 되는데도 그것만 많으면 돼요. 황금만 많이 부왕께 바치면 내 귀양도 풀리고 당신과의 결혼도 허락해 주실 테니까요.

  정말!

  이 말에는 서동은 놀라며 귀가 솔깃했다.

  그럼요, 캐내기만 하세요. 다른 사람이 알고 캐 가기 전에 어서 가서 캐요.

  남의 밭에 있는 걸 누가 캐 가겠소.

  강도도 있는데 밭에 묻힌 건 캐는 사람 차지가 아니겠어요? 꼭 황금덩어리만 몇 삼태기 캐낸다면 나도 안심하고 같이 서울로 가겠어요.

  상감님 허락도 없이 갈테요. 공주는 상감님 허락 있을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오. 내가 먼저 가서 금을 캐 가지고 올 테니…

  서동은 우선 공주가 내 준 금덩어리 한 개를 장터에 가서 팔았다.

  웬 돈을 이렇게 많이 주시오.

  서동은 장사치가 헐값으로 쳐서 주는 금값을 받고서도 뜻밖에 엄청난 액수라 깜짝 놀랐다.  금을 산 사람은 너무 값이 적어서 빈정대는 줄 알고

  후한 값을 놓았는데 더 내란 말이오?

  장사꾼은 능청맞은 흥정을 했다.

  아니, 돈을 너무 많이 주기에 미안해서 그러오.

  서동의 바보같이 순진한 진심을 알게 된 장사꾼은 속으로 웃었다.

  잘 해줄 테니 또 있거든 나한테 파시오.

  장사꾼은 뒷 재미까지 보려고 부탁했다.

  이런 건 서울 우리 집에 가면 감자섬으로 서너섬은 있소. 오늘 급한 경우에 이렇게 도와 주었으니 요다음에 한 관쯤 선사하겠소.

  서동은 진심으로 선사할 생각이었다. 그에게 받은 돈으로 우선 태풍에 날아간 집을 마련하고 당분간의 식량을 장만하고도 자기가 서울 갈 노자까지 될 것 같았으므로 여간 고맙지 않았던 것이다.

  서동은 그 돈을 가지고 돌아와서 그전 정도의 오막살이집을 사고 남은 돈으로 식량까지 준비해 준 뒤에

  공주 그럼 내가 금을 캐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려요. 외로운 섬에 혼자 두고 가려니 발이 안 떨어지지만 공주를 서울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 혼인을 허락 받을 희망이 있다니 다녀올 수밖에 없소.

  서동은 공주와의 이별이 여간 괴롭지 않았다.

  당신 말대로 꼭 금덩어리만 몇 섬 캔다면 나도 이번에 아주 서울로 돌아가도 좋지만…

아니,  역시 혼자 가세요. 의심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금을 많이 캐거든 당신은 이 섬까지 오실 것 없어요.

  왜?

  서동은 불안한 듯이 놀라며 물었다.

  생각해 보세요. 그 황금을 쓸 곳은 서울인데 왜 여기까지 그 무거운 금바리를 가져와요?

  참 그렇군.

  공주는 서동에게 황금의 용도를 자세히 일러 주었다.

  서동은 서울 교외 남짓가 집으로 돌아와서 밤낮으로 아들인 선화공주와 백년가약을 맺도록 불공을 드리고 있는 모친을 이년 만에 만났다.

  어머니 너무 상심치 마십시오. 선화공주와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아니 상감의 허락도 없이 그게 무슨 경솔한 행동이냐?

  공주의 곤경을 구해 주고 단 둘이 지나는 동안에 자연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소문이 나면 너도 공주도 극형에 처해진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으냐?

  걱정 마세요. 섬사람도 우리 비밀은 아무도 모릅니다. 낮에는 제가 공주님을 상전으로 충실히 모시기 때문에 다들 주종간(主從間)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비밀은 결국 탄로되는 법이다.

  모친은 아들의 경솔에는 혹시하는 기대도 걸었으나 그 비밀이 탄로되면 왕이 노해서 극형에 처하게 될 장래만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런 염려도 없이 공주와 정식결혼을 특별히 허락하는 왕의 분부가 곧 내릴 것입니다.  실은 이번에 그 일로 왔습니다.

  너 그게 정말이냐?

  모친은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를 않았다.

  너무 제가 하는 일이 잘 되도록 빌어 주세요.

  그야, 네가 하는 일이니까 틀림은 없겠지만 일이 너무 분수에 넘쳐서…

  모친의 의구심은 좀체로 풀리지 않았다.

  어머니, 저를 따라와 보세요. 감자밭에서 황금을 캐내겠어요.

  황금을?

  누런 차돌, 그것이 모두 황금덩어리거든요. 그것만 캐서 진평왕께 봉납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거든요.

  서동은 괭이를 메고 나가서 집 앞의 감자밭부터 파기 시작했다. 땅 속에서는 그가 감자 농사에 방해라고 묻어 두었던 <누런차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묻은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땅을 팔수록 황금덩어리는 속속 나왔다. 앞 밭을 뒤집은 뒤에 뒷밭에서도 역시 많은 황금을 캐냈다. 섬에 담으니 모두 합해서 열 섬이나 되었다.

  이것이 정말로 그 굉장한 보물이냐? 이런 걸 모르고 가난으로 고생만 했구나?

  모친은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이것이 비록 황금인 줄 알았어도 공주만 아니면 나는 역시 이것은 거름으로 삼고 감자 농사만 지겠어요.

  모친은 아들의 무욕한 마음씨가 대견스럽다는 듯이 웃으면서 끄덕였다.

  어머니, 잠깐 용화사(龍華寺)에 다녀 오겠어요.

  오냐, 용화사는 네 아버지 용왕이 수호하는 절이니 부처님께 돌아온 인사기도를 드려라. 잘 생각했다.

  네, 기도도 올리고 주지스님 지명법사(知命法師)도 뵙겠어요.

  아무렴 지명스님께도 인사 드려야지.

  서동이 용화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는 것은 선화공주가 시킨 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명법사를 만난 서동은 우선 누런 금덩이 몇 개를 시주하고 선화공주으 부탁을 했다.

  허어, 기특한 일도 있는 세상이군.

  지명법사는 감탄하면서 선화공주의 부탁대로 황금 열섬을 진평왕에게 바치고 선화공주를 귀양보내라고 강경히 주장한 대신들에게도 몇덩이씩 선사했다.

  왕은 백제 및 고구려와 싸울 준비가 부족해서 고통을 겪던 참에 그 나라의 영토를 전부 살 수도 있는 막대한 재정이 생겨서 기뻐했다. 그리고 선화공주의 귀양을 풀고 환궁(還宮) 시키는 동시에 공주의 은인이요 나라에 공이 큰 서동과 혼인식을 올리게 했다. 이리하여 일약 부마가 된 서동은 재상의 큰 벼슬까지 했다.

  왕은 별궁 하나를 공주에게 주어서 서동과의 신혼가정을 꾸미게 했다. 서동과 며느리 공주는 모친을 그 별궁에 모셔다가 노후를 편히 지내게 했다. 그러나 모친은 그것을 사양하고 그전 집에서 혼자 살았다.

  나는 궁전보다도 이 정든 초가 삼간 이 좋다. 아버지 계신 남지못가를 떠날 수 없다.

  이런 모친의 말을 들은 서동은 자기들 부부의 애정으로 미루어 봐서, 모친에게도 역시 부부의 애정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강권하지 않았다.

  그 해 사월 팔 일에 서동 부부는 용화사에 참배하고 어머니 집에 들렸다. 어머니도 아들 부부를 맞으려고 간소한 상을 차려 놓고 기다렸다. 세 가족이 상을 받기 전에 모친은 먼저 아무 말 없이 남지못 물에 흰 밥 세 수저를 떠서 던졌다. 남편 용에게 올리는 정성 이었다.

  조금 지난 뒤에 연못 한 복판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의 금부처가 쑥 솟아 올랐다.

  나무아미타불, 미륵 보살님. 아버님이 미륵보살로 화하셨습니다.

  불교신앙이 두터운 일가족은 모두 합장 배례했다.

  이 못이 미륵성지(彌勒聖地)다. 절을 새로 세울 명당터다.

  이렇게 깨달은 서동은 못을 메우고 큰 절을 세울 발원(發願)을 했다. 곧 터를 닦으려고 인부 백여 명을 들여 한달 동안이나 돌과 흙을 날라다 메워도 깊이가 한없는 못은 메워지지 않았다. 

  서동은 용화사 지명법사의 도통력을 빌려서 못을 메우려고 간청했다. 지명법사도 그 못물 위에 큰 금부처가 떠 있는 것을 본 뒤로 그 부처와 절터를 탐했다. 신심(信心)의 열망이었으나 서동의 발원을 기특히 여기고 참아왔던 것이다.

  스님, 남지는 분명히 미륵명당이었습니다.

  그야 해동(海東) 제일의 성지니까 미륵 금부처님이 솟아서 물에 계시죠.

  제 힘으로는 아무래도 못을 메워서 터로 만들 수 없습니다. 스님께서 맡아서 새 절을 지어 주십시오. 건럽정재(建立淨財)는 제가 시주하겠습니다. 스님께서 찬성하신다면 용화사 이전 신축이로 하여도 좋을까 생각합니다.

  고맙소. 그 안에는 나도 대 찬성이오. 그러나 대감의 설계도대로 대가람(大伽藍)을 신축하려면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데 그 방안은 어떠하오?

  우리 감자밭 땅 속에는 아직도 황금이 무진장 남아 있습니다. 요전에 파다가 진력이 나서 남겨 두었는데 그것도 새절 건축 비용을 남겨 두라는 부처님 계시(啓示)였던 모양입니다.

  흠, 대감의 공덕이 비상하오. 용화사 신축 감독을 소승이 맡아서 대감의 발원을 성취시켜 드리겠소.

  이래서 남지를 메우고 새 절을 지었다. 그러나 절을 완성한 뒤에 지명법사는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로 하고 다른 고명한 주지 스님을 추천한 뒤에 자기는 그대로 용화사를 지켰다. 

  소승이 어찌 자기 절을 버리고 좋은 새 절을 탐내겠소. 공사전에 용화사를 그리로 옮겨도 좋다는 대감 말에는 너무 감격도 했고 대감의 그 호의를 거부하면 실망하실까 두려워서 본의 아닌 방편으로 일단 찬성했을 뿐입니다. 훌륭한 새 절은 앞으로 자꾸 늘어야 합니다.

미륵 금부처님이 솟은 성지의 절은 역시 미륵사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소승보다 덕이 높은 스님을 추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동은 후에 백제 망명 왕족의 후손이라는 것이 밝혀져 백제 이십육대 무왕이 되었다.

  (遺事)

 

 

 

 眞聖女王의 愛慾三昧

  제 사십구대 헌강왕(憲康王)의 삼형제는 모두 왕 노릇을 했다. 제오십대가 아우인 정강왕(定康王)이오,  오십일대가 매제(妹弟)인 진성여왕(眞聖女王)이다.

  여왕의 이름은 만(曼)이며 당희종(唐僖宗) 광계(光啓)이며 십일년 동안에 나라를 망쳐버릴 뻔했다.  여왕은 신라 여왕으로는 마지막 여왕이었는데 왕실을 음란의 소굴로 만들어서 애욕삼매(愛慾三昧)의 추문이 높았다. 그러니 국내가 어지러웠고 외적이 침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과 왕자들이 있는 여왕이 처음으로 사련(邪戀)의 손을 뻗힌 상대 남자는 유모 부호(鳧好)의 남편 위홍(魏弘)이었다.

  위홍은 나이가 여왕보다 훨씬 많았으나 그 남성적인 정력에 혹해서 음탕한 성욕을 만족시켰다.  그렇게 되자 여왕의 총애를 육체적으로 받는 위홍은 마치 여왕의 남편 같은 세도를 부려서 당파를 만들고 국정을 제멋대로 좌우했다.

  유모는 제 남편을 딸같이 젖을 먹여서 기른 진성여왕에게 빼앗겼으므로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나 왕의 권력 밑에서 불평의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못했다. 그 대신 남편 못지 않은 세도를 궁중에서 부렸다.

  색에 미친 요사한 여왕이 유모의 남편과 간통을 하고 밤낮으로 해괴망측한 짓을 하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여왕이 유혹하더라도 잡간( 干)까지 지내고 있는 위홍이 여왕을 범하고 있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요왕(妖王)과 간신(姦臣)이 애욕삼매에 빠져 있으니 나라가 잘 될 리가 있으랴.

  사대부(士大夫)에서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여왕은 조금도 반성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여왕이 즉위한 다음 해 봄에는 소량리(小梁里)에 있는 부동석(不動石)이라는 큰 바위가 저절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이것은 큰 이변(異變)이라고 세상이 놀랐다. 특히 이 바위에는 부동존(不動尊)의 불상(佛像)이 새겨져 있어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워졌던 것이다.

  부처님이 망국(亡國)을 경고하는 계시(啓示)다. 여왕과 위홍의 간신도배가 죄를 뉘우치고 정도(正道)로 돌아서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이런 종교적인 유언비어까지 돌아서 인심이 흉흉했다.

  그러나 위홍으 일당은 여론의 화살이 자기들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간신다운 흉계를 꾸몄다. 위홍은 일관(日官=길흉화복을 판단하는 궁정복술사)을 매수해서 이 부동석 이동의 점괘풀이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시켰다. 일종의 정치적 음모를 꾸민 것이다.

  부동석이 자리를 움직인 것은 자연스러운 음양(陰陽)의 발동이다. 이 부동석은 본래 음석(陰石)으로서 양석(陽石)과 사랑하여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지귀(地鬼)가 그 애정을 질투하고 음석을 양석과 떼어다 먼 자리에 놓고 다시는 양석 근처에 가지 못하게 중력(重力)으로 금주(禁呪)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부터 천년을 지낸 오늘까지도 부동석은 양석에 대한 애정을 잊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운 땅귀신의 금주의 중력을 물리치고 양석을 향해서 이동한 것이니 결코 불길한 징조가 아니고 세상 일이 이처럼 모두 자연의 이치대로 발전할 길한 징조다.

  이렇게 음양론(陰陽論)을 날조하기까지 이르렀다. 그 저의(底意)는 음석인 부동석을 진성여왕에게 비유해서, 여왕이 남자를 그리워하고 애욕삼매의 향락생활을 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실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마치 땅귀신의 질투와 같이 부당하다는 것을 암시한 점괘 풀이였다.

  여왕은 이런 점괘로 부동석의 이동을 길조(吉兆)로 푼 일관을 불러서 좀 더 현실적인 의미를 물었다.

  일관의 예언은 언제나 잘 맞았으니까 이번 부동석이 이변도 좋은 징조로 알겠는데, 왕운(王運)과 국운(國運)의 관계는 어떠한가? 어떤 불경(不敬)한 무리들이 내 침전(寢殿)의 사생활을 비난한다는 풍문도 있는데… 그런 점도 기탄 없이 판단해 주오.

  여왕은 그 본능적으로 색정이 동하는 요염한 눈을 가늘게 뜨고 일관에게 물었다.

  황송한 말씀이오나 피도 발도 없는 돌까지도 애정을 찾아서는 움직였습니다. 더구나 인간은 귀천을 막론하고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자연의 천리(天理)올시다. 천리를 막는 것보다 더 무리한 죄는 없습니다. 그런 고로 여왕께서도 그 지존(至尊)의 권세와 천리로서 거리낌없이 좋아하시는 남성이 있으면 자유롭게 총애하십시오. 만일 그 남성이 미천한 신분이라도 높은 자리의 벼슬을 시켜서 체면을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아직 관직 대우가 낮은 분이면 올려 주시고…

  이것은 위홍을 더 높은 벼슬로 승진시키라는 의미까지 포함한 간사스런 꾸밈이었다. 여왕은 일관의 아첨을 그대로 믿고 위홍을 대신직인 각간(角干) 벼슬로 승진시키는 동시에 대궐 안에 살게 하고 공공연한 음란 행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깊은 정신적인 애정이 아니고 단순한 육욕의 향락으로 상대하던 위홍에게도 권태증을 느낀 젊은 여왕은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장년기를 넘은 남성의 구수한 애무에도 정력부족의 불만을 느낀 젊은 여왕은 미청년에게로 어색(漁色)의 방향을 돌렸다. 그것도 일시에 용모가 잘난 무명 청년을 여러 명 후궁에 숨겨두고 그들을 차례차례 범했다(?).

  너희들은 내 궁녀들이다.

  여왕은 그런 농담도 했다. 남자 왕이 궁녀를 많이 두고 난음(亂淫)하는 것이 상례라면 여왕은 왜 미청년들을 후궁에 두고 애욕을 만족시키지 못하랴 하는 왕자(王者)로서 당연한 주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침전에서도 능동적인 여왕은 자기를 남성의 위치에 두고 싶은 변태적 우월감에서 그 젊은 정부들을 궁녀 취급했던 것이다.

  (내 치맛바람에 정복되지 않는 자가 어디 있느냐. 권력으로는 물론, 미인의 매력으로도 그렇다.)

  이런 자부심을 가진 여왕이 다스리던 그 당시의 신라는 명실공히 여인천하(女人天下)였던 것이다.

  여왕에게 내 소박을 맞고 여왕의 침실에 출입금지를 당한 위홍은 그 불만을 여왕에게 떠뜨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후궁의 궁녀로 있는 무명 미청년들을 질투하게 되었다.

  너희들은 무엄하게도 여왕을 유혹해서 지존의 몸을 더럽혀 드리지 말고 물러나거라. 만일 이대로 대죄를 계속하면 법으로 다스리겠다.

  그는 당당한 각간의 권력으로 그들을 훈계하고 위협했다. 그러나 여왕의 총애를 받는 그들에게는 각간의 위협은 코웃음 감이었다.

  각간도 노망했군요. 부인이 있는 당신의 몸으로는 지존의 몸을 더럽혀 드리지 않았던가요.  우리를 죄로 다스릴 법이 있으면 당신부터 자복(自服)하시오. 흥, 질투를 하려면 여왕께 하지 왜 충성된 봉사자 우리를 질투하는 거요?

  이론으로는 대항하지 못하게 된 위홍은 노발대발하고 칼을 뽑아서 궁녀 청년 한 명을 찔러 죽이려다가 도리어 그 청년의 칼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그 추문이 두려워서 호소할 곳도 없이 숨어서 치료했다.

  그러나 궁중의 비밀을 아직 모르는 백성들은 위홍이 여전히 궁중에서 살고 있으므로 여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세도를 부리는 줄만 알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여왕에게 내 소박을 받은 뒤로는 그의 불평과 정력을 정적(政敵)에게 집중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홍으로는 그가 각간에게까지 올라서 세도를 부린 것은 오로지 여왕에게 육체적 총애를 받은 대가였는데 여왕에게 그방면의 신임을 잃고 보니 정치적 세도까지 잃을 위험성이 커졌다.

  그러므로 아직 권력의 칼을 잡고 있는 동안에 정적을 숙청해 버리려는 초조한 광증(狂症)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공포에 떠는 충신들도 최후의 방위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파쟁은 격화되었다. 이때 충신들의 대표격인 왕거인(王居仁)이 가장 용감히 위홍의 죄악을 규탄하고 있었다.

  정계가 흉흉한 가운데 불온문서의 방이 서울 각처에 나붙었다.

  南無亡國 刹尼那帝…. 鳧伊娑婆訶

  이 조정 공격의 격문(檄文)은 진성여왕과 위홍부처가 나라를 망친다는 뜻이었다. 찰니나제(刹尼那帝)는 여왕을 암시한 것, 부이(鳧伊)는 여왕의 유모 부호(鳧好)와 그 남편 위홍의 일당을 암시한 것이었다.

  위홍은 이 기회에 그 죄를 왕거인에게 뒤집어 씨워서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위홍은 곧 왕거인의 소행으로 몰아서 왕을 욕하고 저주한 역적의 죄로 잡아 옥에 가두었다.

  왕거인은 옥중에서 나라의 운명을 탄식하고 자기의 억울함을 시로 지어서 하늘에 호소했다.

 

  충신의 피눈물이 해를 태울 듯하나

  역적의 권세는 여름에 서릿발을 내린다.

  아아 내가 지금 억울하게 죽어가는데

  황천은 무심하게 돌아보지 않는구나.

 

  왕거인이 이 시를 읊고 통곡하자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벼락이 옥을 부셔서 왕거인을 해방시켜 주었다. 왕거인은 또 위홍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산 속에 숨어서 그의 세도가 망하기를 빌면서 조정에 다시 발을 들일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거인이 숨어 있는 동안에 위홍은 전에 칼을 맞은 여왕의 젊은 정부와 싸운 끝에 또 다시 청년의 칼을 맞고 앓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여왕은 성가신 존재가 없어졌으므로 도리어 시원히 생각하고 살해한 청년의 죄는 불문에 붙였을 뿐 아니라 그 용기를 칭찬하고 더욱 사랑했다.

  이번에 늙은 위홍이 죽은 것은 질투의 보복이다. 너희들은 질투하지 말라. 내가 만일 남왕(男王)이라면 삼천 궁녀를 총애했을 것이다. 너희들은 질투하지 않고 나를 섬기는 것이 충성이다.

  여왕은 위홍의 죽음을 단지 젊은 미청년들을 훈계하는 재료로 이용하는데 지나지 않았을 뿐 애처러운 빛은 조금도 없었다.

  만일 진성여왕의 이런 음란생활이 계속됐다면 신라는 이 여왕 때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국운이 아직 남았던지 이 여왕을 애욕삼매에서 구출하는 이적(異蹟)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진성여왕은 애욕삼매로 <남자궁녀>까지 두고 향락에 빠져 있었으므로 국내의 정치는 혼란과 극도의 부패에 빠져 있었다. 백제의 견훤(甄萱)이 공격해 왔고 궁예(弓裔)의 반란도 겪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당나라에 예물 보내는 것도 게을리하였으므로 형식적으로라도 종주국(宗主國) 지위에 있던 당나라 황제는 신라의 무례를 책하고 위협했다.

  여왕은 그제야 국제적 친선을 회복하려고 왕자 양패(良貝)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사신에게는 예물을 주어서 보냈는데 명목이 예물이지 당나라에서는 속국(屬國)의 조공물(朝貢物)로 당연히 요구할 성질의 막대한 특산물(特産物)이었다.

  이에 대해서 불평을 품은 백성들은 당나라에 조공물 보내는데 반대하고 일어섰다. 그것은 당나라가 신라를 속국 취급한다는 국가적, 민족적 의미에서 한 것이 아니고 부패한 진성여왕의 국내정치에 대한 불만의 폭발이었다.

  제 나라 백성이 탐관오리의 수탈과 흉작(凶作), 흉어(凶漁)로 다 굶어 죽게 된 판국에 여왕은 자기의 지위 유지에만 급급해서 귀중한 재산을 조공물로 보냈다. 그것으로 우선 굶어 죽어가는 빈민구제라도 하라.

  하고 해안으로 몰려와서 양패를 비롯한 사절단 일행이 배를 타고 출국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여왕은 군대를 동원해서 사절단과 조공물을 보호해서 배에 싣고 출항시키는 동시에 모여든 백성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일부 어민들은 배를 타고 해적단으로 화해 버렸다.

  남의 나라 왕에게 진상하는 조공물을 해상에서 탈취하고 사절단 일행을 몰살시켜 버리자.  그러면 몇 달 후에 태풍으로 조난당한 줄 알 것이다.

  이러한 계략을 꾸민 해적단은 서해(西海) 진부(陳鳧) 섬에 진치고 입당선단(入唐船團)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오합지졸(烏合之卒)의 해적단은 사절단의 선단을 공격하려다가 호위병 궁사(弓士)들의 화살에 접근도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이놈들 바다 중간쯤 가다가 태풍에 침몰하든지 벼락이나 맞아 죽어라.

  해적단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이런 저주를 하면서 해안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해적의 저주가 주효(奏效)했었는지 배가 혹도 부근에 이르렀을 때 큰 풍랑을 만났다. 당황한 배는 필사적으로 배를 저어서 혹도로 피난했다. 그러나 태풍이 며칠을 계속했으므로 다시 항해를 하기는커녕 해안에 매어 둔 배까지 한 두 척씩 흘러가 버렸다. 왕자 양패는 일행을 거느리고 섬에 상륙해서 민가에 유숙하면서 바람이 자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풍랑은 언제 잔잔해질지 몰랐다. 지루하고 불안해서 유명하다는 점장이를 청해다 항해의 운수를 물었다.

  이 섬 신지(神池)에 사는 용왕에게 치성하면 태풍이 자고 항해도 안전할 것입니다.

  양패왕자는 목욕재계하고 제물을 융숭히 차려서 신지의 용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서해 혹도 신지에 계신 용왕님, 신라 왕자 아찬(阿 =벼슬이름) 양패는 진성왕의 대리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도중 서해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서 항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빨리 당나라에 가서 황제께 예물을 진상하고 양국간의 친선을 도모하고 귀국하도록 이 심한 풍랑을 재워 주시고 항해중에 모든 재난이 없도록 배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오, 신라 사신의 정성을 알았노라.

  그런 소리가 공중에서 들리더니 못 가운데서 짚동 같은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그 후 풍랑이 차자 가라앉고 해면(海面)이 거울같이 고요해졌다.

  양패왕자가 그 신복(神卜)에게 많은 돈과 비단을 예물로 주고 배에 올라 떠나려 하자 그는 다시 주위를 시켰다.

  아직도 용왕에 대한 제물이 부족합니다. 그냥 떠나시면 해중에서 또 한 번 태풍을 만나서 파선할 것입니다.

  그럼 어떤 제물을 더 올려야 무사히 항해할 수 있소?

  실은 차마 말씀 못하였습니다마는 선원 중 한 명을 신짓가에 인질(人質)로 남겨 두고 가십시오.

  인질로?

  예, 그러면 용신이 잡아 잡수실 것입니다.

  인자한 양패왕자도 하는 수 없이 한 명의 희생으로 수십 명의 생명을 구하려고 신복의 말에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누구를 희생물로 지목할 수는 없었다.

  너희들 누가 희생이 되어서 일행을 구하겠느냐?

  그러자 신라 화랑도의 훈련을 받은 호위병 오십 명이 모두 지원했다.

  제비를 뽑을 것 없이 제가 제물이 되겠습니다. 저 한 목숨으로 여러 목숨을 구하면 나라에 충성이 되고 전우를 사랑하는 도리가 될 줄 아옵니다.

  하고 죽기를 자원하는 경쟁이 벌어졌다. 신복도 그 호위병들의 의협심에 감격하고  기왕 모두 자원한다면 활을 제일 잘 쏘고 가장 용감한 병정이 남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만일에 경우 그 무술로 생명을 구할지도 모릅니다.

  이 말을 듣자 모두 용사로 자부하는 호위병들은 역시 자기를 뽑아 달라고 청했다.

  아아 신라의 화랑들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를 가진 신라가 위에서만 정치를 잘하면 난국을 통일하겠는데 아까운 시운입니다.

  신복은 은근히 진성여왕의 음란한 궁중생활을 비난했다. 그리고 희생자 선발은 제비로 뽑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권했다.

  호위병들은 각각 나뭇조각에 자기 이름을 써서 바다에 띄우고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물 속에 가라앉은 사람이 섬에 남기로 했다. 그 결과 궁사(弓士) 거타지(居陀知)의 명패가 맨 먼저 물에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 거타지가 제일 활을 잘 쏘는 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신복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예감했다.

  용사 거타지는 혼자 섬에 남으면서 일동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사신 왕자님을 비롯한 여러분, 제 걱정은 마시고 평온한 항해를 하셔서 임무를 수행하십시오.  저는 죽어서 충성이 될 경우에는 즐겁게 죽을 것이오, 혹은 사는 길이 충성일 경우에는 싸워서라도 이기고 반드시 살 것입니다.

  전우들은 일단 희생물로 결정된 거타지가 혼자 섬에 남게 되자 감사와 함께 그를 아끼는 전우애로서 눈물을 흘렸다.

  제 목숨을 희생해서 전우를 살리려는 너야말로 신라 화랑의 모범이다. 네가 비록 운이 불길하더라도 내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면 용사비를 세우고 네 가족의 일생이 편히 지낼 수 있는 상을 내리게 하겠다.

  양패왕자는 거타지를 위로하고 그 공에 보답할 것을 다짐하고 당나라를 향해서 뱃길을 떠났다.  동료를 태운 배가 서쪽 지평선에 사라질 때까지 배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손을 흔들고 전송하던 거타지는 마지막 배 그림자가 사라지자 갑자기 고독감에 사로잡혀서 멍하니 바닷가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이때 인자한 얼굴의 백발 노인이 홀연히 가타지 앞에 나타났다.

  아, 존장은 누구십니까?

  거타지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우선 반가웠던 것이다.

  나는 이 섬에 사는 해약(海若)이라는 불행한 늙은이요. 당신의 모습을 보니 신라 왕자의 용사 같은데 우리 가족의 운명을 구해 주시오.

  하고 청했다. 거타지에게는 그 노인의 모습이 아무래도 보통 사람 같지가 않아 보였다.

  불행한 사람을 돕는 것은 우리 화랑의 본분입니다. 제 힘으로 도울 수 있으면 영광입니다.  존장의 집은 어디십니까?

  하고 따라 가려고 바위에서 내려왔다.

  나는 신지 물 속에 살고 있소. 그런데 악마 사미(沙彌)가 용왕을 질투하고 용왕의 신하인 우리를 저주하고 있소. 해 뜰 시각이 되면 그 사미가 날마다 와서 타라니(咤羅尼)의 주문(呪文)을 외우면 그 마력에 끌려서 우리 식구가 한 명씩 물 위로 솟아오르게 되는데, 그러면 그 놈이 무자비하게 잡아 먹소. 그래서 식구가 다 희생되고 인제 딸과 나만이 남았소.

내일 아침에는 나나 딸이 또 잡혀 죽을 차례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다.

  당신의 그 힘센 화살이면 그 사미를 쏘아 죽일 수 있을 테니, 우리 부녀의 생명을 구해 주시오.

  내 재주로 해보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내일 아침에 꼭 부탁하오.

  해약 노인은 신신당부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거타지는 그 이튿날 새벽에 신지로 가서 주위의 신림(神林) 속에 숨어서 사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동쪽 수평선이 휜 해지면서 해가 솟아 오르기 시작하자 과연 휙 하는 소리가 나더니 공중에서 무서운 모양의 거인(巨人)이 못 가로 내려왔다. 사미는 내려오자마자 주문을 외우면서 못 가를 돌기 시작했다.

  거타지는 큰 활에 독약 바른 활촉의 화살을 먹여서 핑 하고 쏘았다. 그가 겨냥해 쏜 첫 화살은 보기 좋게 사미의 목통을 뚫었다.

  깨갱! 깽!

  하고 쓰러져 죽은 거인은 꼬리가 아홉이 달린 흰 여우였다.

  그 순간 해약 노인이 못 속에서 솟아 올라서 거타지 앞으로 왔다.

  거타지 화랑 고맙소. 이 부녀 생명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나의 자랑은 당신이 구해 준 딸 하나 뿐인데 서해 용궁에서는 첫째 가는 미인이며 신라 서울에 가도 계림(鷄林) 제일의 미인이 될 거요. 딸 자랑 같지만 그 위에 재주가 있고 정숙한 부덕이 있으니 당신의 아내로서 내조(內助) 를 할 줄 믿소. 사양 말고 신라 서울로 데리고 가서 부귀다복하고 백년해로(百年偕老)하시오.

  ….

  거타지가 어리둥절해서 대답도 하기 전에 노인은 못 속을 향해서 딸을 불렀다.

  해선(海仙)아! 해선아!

  네.

  고운 음성의 대답과 함께 우아한 소녀가 연꽃이 피어 오르듯 못 속에서 솟아올랐다. 거타지는 대번에 눈이 황홀해졌다.

  자아, 맞선을 보았으니 어떻소?

  노인은 웃으면서 물었다. 해선 소녀는 얼굴 빛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귀한 따님을 저같은 자에게… 저는 그러한 자격도 없는 일개 병정에 지나지 못합니다.

  그럼 됐네. 지금부터 내 사위니까 하게 하네. 부디 잘 데리고 가서 아껴 주게.

  그리고 장인 노인은 약혼한 한 쌍을 데리고 바닷가로 갔다. 거기는 훌륭한 배가 한 척 준비되어 있었다.

  자아 어서 이 배를 타고 사신의 배를 쫓아가게. 그러나 타국에까지 여자를 데리고 가면 지장이 있겠으니…

  하고 노인은 딸을 해당화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지 가슴에 꽂아 주었다.

  자아, 이러면 남도 모르게 가볍게 데리고 갈수 있네. 내 딸이 변한 이 해당화는 시들지도 않고 밟아도 죽지 않으니 안심하고 품에 안고 가게. 신라 서울에 가면 다시 사람으로 변할 것일세.

  장인님,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떠나면 언제 뵙겠습니까?

  하하하 만나면 이별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그러나 저보다도 따님께서…

  딸은 크면 낭군 따라 가는 법이다. 그럼 잘들 가거라.

  하고 노인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인사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고 거타지를 태운 배는 좌우에서 용이 호위하면서 끌고 갔는데 그 속도가 번개 같았다. 거타지의 배는 순식간에 사신의 선단을 쫓아갔다.

  야아, 거타지가 용이 안내하는 배를 타고 왔다. 만세!

  사신의 선단에서는 전우들이 환성을 올리면서 맞았다.

  지금까지 거타지를 안내해 온 청룡(靑龍)과 황룡(黃龍)은 전체 선단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서 순식간에 당나라 항구에 닿았다. 영접 나왔던 당나라의 고관과 민중들은 신라 사신의 선단을 청룡 황룡이 호위하고 번개같이 입항(入港)하는 광경을 보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신라는 용왕도 돕는 나라다!

  하고 사신 일행을 전의 사신 때보다도 정중히 환영했다.

  당나라에서 나라의 위신을 높이고 돌아온 사신 양패왕자는 거타지의 신기한 공적을 왕에게 보고하고 큰 상금을 내리는 동시에 대장으로 승진 시켰다.

  거타지는 가슴에 품고 온 해당화를 부모 앞에 놓고 말했다.

  해선이 양친께 인사 드리게.

  순간 절세미인이 나타나서 새 며느리로서 큰 절을 올렸다.

  용궁 출신의 해선은 신라 제일의 미인이다.

  이런 소문이 서울에 퍼지자 기적의 신부 구경을 오는 사람으로 거타지의 문전은 혼잡을 이루었다.

  그러나 해선의 미모를 본 권력가와 부호들은 금력과 세도로 해선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여왕을 비롯한 상류계급의 풍기 문란은 유부녀를 농락하는 것이 예사로운 풍조로 아는 경향을 나았기 때문이다. 병졸에서 하급장교로 승진한 거타지는 고관들 앞에서는 서민이나 다름 없었다. 거타지는 언제 아내를 빼앗길지 모를 위기에 봉착해서 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왜 용사답지 못하게 우울한 낯을 하고 계셔요?

  해선은 남편의 고민의 이유를 물었다.

  해선이가 너무 미인이라 그렇지.

  호호호. 그런 농도 좋으니 제발 우울한 얼굴은 보여 주지 마세요.

  실은 해선이 너무 아름다운 것이 원망스러워.

  거타지는 다시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세도 부리는 고관대작이 남의 집 유부녀도 종첩을 삼는 세상이라 해선에게도 갖은 유혹이 있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 따위 유혹이나 위협에 내가 넘어가겠어요. 나는 당신의 아내로서 정조를 지킬 테니 안심하세요.

  해선의 정절은 나도 믿어. 그러나 음란으로 타락된 세상의 더러운 꼴도 보기 싫으니 우울해질 수밖에 있어야지.

  내 염려는 말고 당신이나 조심해요. 남자만 남편 있는 여자를 유혹하는 세상이 아니라 여자도 아내 있는 남자를 유혹하는 해괴한 세상이니까요.

  해선은 간접적으로 진성여왕을 비롯한 상류사회 유부녀들의 치맛바람을 경고하듯 말했다.

  해선이가 종조를 지키듯이 나도 해선에게 정조를 지킬 것을 맹세해요. 적어도 우리 부부만은 진실한 남녀의 덕을 지켜서 음란한 풍조에서 벗어납시다.

  나보다도 당신이나 조심해요. 잘 난 남자를 침실로 잡아 가는 여왕이 언제 당신을 끌어 갈지 모르니까?

  어찌 내가 그런 유혹과 위협에 넘어가겠소. 적어도 해선의 지아비가 아니오.

  거타지와 해선 부부는 그들이 미남의 용사요, 절세의 미인이기 때문에 다 같이 정조의 위협을 받는 해괴한 세태였다.

  어느 날 거타지의 상관은 장군의 생일 잔치를 앞두고 부하들의 아내를 그의 집으로 불러서 준비를 시켰다. 거타지의 아내 해선도 이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장군은 해선의 미모에 당장 미쳐서 손목을 잡고 골방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이 미친 개가 내 손목을 물었다.!

  하고 부엌칼로 행패 부리려던 장군의 가슴을 찔러서 죽여 버렸다. 이 놀라운 살인사건의 소문이 퍼지자 방탕한 남자들은 가슴이 선뜻했다. 그러나 일반 선량한 백성들은 해선의 행동을 열녀의 거울이라고 찬양하여 마지 않았다.

  열녀 해선을 살인범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권력으로 유부녀의 정조를 유린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는 법을 세워라.

  하고 학자와 승려와 양민(良民)들이 해선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러나 해선은 물론이요, 그의 남편 거타지까지도 잡혀서 옥에 갇혔다.

  마침내 판결의 날이 되자 해선과 거타지는 왕 앞으로 끌려 나왔다. 그러나 그들 부부를 보는 백성들은 측은히 생각하며 구원할 길을 열고자 했다.

  해선을 사하고 열녀비를 세워서 표창하라! 거타지는 명궁(名弓)의 용사요, 나라에 공을 세운 영웅이다. 미인 열녀의 남편 된 것이 죄가 되느냐? 제 아내를 상관에게 바치지 않은 것이 죄란 말이냐?

  진성여왕은 해선이가 얼마나 잘난 미인이기에 계림 제일이라는 평판이 있는가 하는 흥미와 얼마나 표독한 여자이기에 구애(求愛)하는 장군을 칼로 찔러 죽였는가 진술을 들으려고 친히 해선을 불러 들였다. 그러나 여왕은 해선의 선녀같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쩌면 자렇게 절묘(絶妙)한 미인이 있을까? 나 같은 여자는 저 해선에 비하면 추녀에 지나지 않는구나!)

  하고 스스로 얼굴이 붉어지는 동시에 질투까지 느꼈다. 그러나 나중에 끌려 나온 해선의 남편 거타지의 얼굴과 체격을 보고서는 더욱 놀랐다.

  (내가 지금까지 데리고 논 미남자들은 저 남자에 비하면 추하고 나약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황홀한 눈으로 거타지를 보고 있는 동안에 음탕한 색정이 동해서 가슴이 타올랐다. 그래서 여왕의 귀에는 해선이가 장군을 살해한 끔직한 이야기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재판은 일단 그치고 내일로 연기되어서 그들은 또 옥으로 끌려 갔다. 그러나 여왕은 거타지만은 궁중으로 끌어들였다.

  거타지는 줄곧 음탕한 시선만 자기에게 보내고 있던 여왕이 궁중으로 불러들였으므로 앞으로 당할 광경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진수성찬(珍羞盛饌)의 저녁상을 받았으나 옥중에서 소금 밥을 먹을 해선의 생각을 하고 수저도 들지 않았다. 시녀들이 권하는 술잔도 받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되자 궁중에는 큰 촛불로 휘황하여졌다. 그러나 거타지는 여왕의 요기(妖氣)와 싸울 마음만 가다듬고 있었다.

  여왕님께서 부르십니다.

  시녀가 와서 알렸다. 거타지는 침착한 표정으로 시녀를 따라갔다. 그가 안내된 방은 호화롭고 요기가 풍기는 여왕의 침실이었다. 휘황찬란한 침대에는 반나체의 여왕이 엷은 속옷만 미끄러져 내릴 듯이 걸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해 온 시녀는 문턱에서 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름이 거타지라지?

  예.

  오늘밤에 내 말만 잘 들으면 네 아내의 살인 죄도 용서해 주겠는데 어떠냐?

  황송하오나, 무슨 말씀이옵니까?

  밤에 내 침실로 부른 의미는 알겠지?

  모르겠습니다.

  거타지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나는 오늘밤만은 여왕이 아닌 여자의 몸으로 너를 대하겠는데… 해선과 같이 고운 여자하고 사는 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너 같은 남자를 처음 보았다. 내 호의를 무시하진 않겠지. 이리 와서 내 몸을 힘껏 껴안아봐라…

  여왕은 천박한 여자처럼 갖은 몸짓으로 거타지를 유혹했다.

  그러나, 여왕님…

  오늘밤은 여왕이라고 부르지 말고… 어서 이리와!.

  거타지는 여전히 부동의 자세로 서서 천정만 쳐다보고 있다가 돌연 여왕의 눈을 쏘는 듯이 훑어 보았다.

  저는 남자의 정조를 단 한 명의 아내에게만 바치는 남편입니다. 비록 여왕의 명령이라도 제 정조는 지켜야 할 각오입니다. 비록 목이 떨어지더라도 다른 분과 정을 통해서 정숙한 아내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천하 여자의 표본이 되실 여왕께서 이런 불의의 욕정으로 천하의 풍기를 문란케 하는 장본인이 되어서는 장차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습니다. 저를 빨리 죽이든지 무죄한 아내와 함께 석방시켜 주시든지 하십시오.

  진성여왕은 일개 궁사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리라고는 천만뜻밖이었다. 왕으로서 처음 당하는 대담한 불경한(不敬漢)이었다. 그리고 일개 여자로서도 이런 목석(木石)의 불상(佛像)같은 남자는 처음 당했던 것이다. 여왕은 이상하게도 왕으로서 또는 여자로서의 모든 권위와 자신을 일시에 잃은 듯이 풀이 푹 죽었다. 도덕적 반성보다도 인간적인 허탈감에 빠져버린 것이다. 용기를 내서 노한 호통을 치려고 해도 거타지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었다.

이때 청명하던 밤 하늘에서 뇌성 벽력이 일어났다. 여왕 침실의 창이 울리고 촛불이 훅 꺼졌다.

  여왕님, 하늘이 왜 노하셨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왕 한 분의 영욕(榮辱)과 생사(生死)보다 더 저는 삼국을 통일한 이 대 신라의 운명이 지금 꺼진 촛불과 같이 망할 것이 두렵습니다.  지금이라도 여왕께서 반성하고 새로운 여성으로, 새로운 임금으로 돌아가시면 신령님도 노염을 푸시고 지나간 잘못을 깨끗이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신라 나라도 백성도 다시 여왕을 중심으로 소생할 것입니다.

  거타지는 어두운 침실에서 마치 천둥의 뜻을 통역하듯이 엄연한 설교를 했다.

  여왕은 죽은 듯이 말이 없다.

  거타지는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밖에서 여왕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튿날 해선과 거타지는 풀려 나오게 되었다. 여왕도 반성하고 우선 지금까지 허수아비처럼 내 소박한 남편에게 사과하고 정숙한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당나라 유학에서 귀국하고 나라를 걱정하던 거유(巨儒) 최치원이 올린 재무십여조(財務十餘條)의 건의(建議)도 받아들여서 인륜도덕과 국정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국교(國敎)로 되어 있던 불교세상에서 비로소 유학자(儒學者)인 최치원을 아손(阿飡) 벼슬에 등용해서 정계에서의 일체의 당파싸움을 금지했다.

  그러나 거타지는 여왕의 침실에 있었던 사건을 비밀에 붙이고 여왕의 위신을 존중하는 동시에 자기의 공을 알리지 않았다.

 

 

 

  偉大한 統一과 虛無한 亡國

  꿈을 사서 王妃가 된 文姬

  왕족의 김춘추(金春秋)와 화랑 출신의 김유신(金庾信)이 아직 총각 시절에 그들은 장래의 큰 꿈을 겨루는 용과 같은 친구 사이였다. 인물로서도 쌍벽(雙璧)이었고, 무술로도 그랬고 풍류로도 그랬다.

  신라(新羅)는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해서 한민족(韓民族)역사상 최초로 단일민족(單一民族)의 단일국가(單一國家)를 이루어 통일신라(統一新羅)의 뜻을 키우고 있었다.

  후에 김춘추는 제이십구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명군(名君)이 되었고, 김유신은 그를 도와서 싸운 명장(名將)이 되었다.

  이 명군과 명장이 소년시절부터 친한 글동무였던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었으며 그 친구 이상으로 처남 매부(妻男妹夫)의 관계가 된 기연(奇緣)이 또한 양가(兩家)와 국가를 위해서 다행한 일이었다.

  즉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와 김춘추가 사랑을 맺음으로써 그들의 단결이 더욱 굳어졌던 것이다. 이 두 영웅은 공적으로는 군신(君臣)관계요, 사적으로는 죽마고우(竹馬故友)인 동시에 처남 매부 사이였던 것이다.

  김유신에게는 아름다운 여동생이 두 명 있었다. 언니를 보희(寶姬)라 불렀고, 동생을 문희(文姬)라고 불렀다. 춘추와 유신은 어려서부터 서로 두 집으로 놀러 다녔기 때문에 가족과 같이 지냈다.

  그러는 동안에 보희와 문희는 모두 춘추를 사모하여 은근히 자매(姉妹)가 사랑을 다투게 되었다.  언니는 동생에게 사양하고 동생은 언니에게 사양하는 우애였지만 이 애정 문제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다만 보희는 성격이 온순해서 그 애정 표현이 소극적이었고, 문희는 성격이 쾌활해서 춘추에 대한 태도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보희는 두 집 사이에 혼담이 생기면 자기가 언니니까 문희보다 먼저 시집 갈 수 있으므로 춘추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문희는 자기가 사모하는 춘추를 결코 언니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자기의 매력으로 언니보다 먼저 춘추를 사로잡으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 자매는 알 듯 모를 듯 춘추를 중간에 두고 사랑의 경쟁을 했다. 그러나 그 문제로 서로 들어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보희와 문희는 바느질을 하다가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보희가 꿈 이야기를 했다.

  문희야, 나 어젯밤에 아주 괴상망칙 한 꿈을 꿨다. 호호호

  무슨 좋은 꿈을 꾸었기에 그렇게 웃어. 좋은 꿈이었다면 엿이라도 사야지.

  그런데… 호호호.

  왜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만 해?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꿈이야.

  알았어. 언니 좋아하는 사람한테 시집 가는 꿈이었군. 흥 자랑하고 싶어서 튕기기만 하지마.

  문희는 새침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불현듯 언니가 김춘추와 꿈 속에서 무슨 좋은 약속이라도 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떠올랐다. 그러나 보희는  너야말로 실성했니. 시집이니 뭐니, 머슴아이 같은 애는 할 수 없구나.

  그럼 왜 운만 떼고 얘기 않는 거야.

  너 아무한테도 얘기 않는다는 약속하면 들려주마.

  약속하겠어.

  그래. 그렇지만 웃지는 말아.

  하였으나 보희는 역시 꿈 이야기를 하기가 퍽 거북한 모양이었다.

  글세 내가… 너 같으면 그런 짓도 하겠지만 너도 아닌 내가 말야. 서악산(西岳山) 상봉에 올라가서 치마를 훅 걷고 오줌을 쏴아 누지 않았겠니… 후후후.

  후후후, 그러다가 누구한테 들켜서 봉변을 당했군. 아아 고소해라 대갓집 규슈가 그런 행실이 어디 있어.

  문희는 자즈러질 듯 웃으며 보희를 놀렸다.

  봉변보다도 놀랐다. 글세 내가 눈 오줌이 폭포처럼 흘러서 산 밑의 서울 장안이 오줌바다 속에 잠겨버리지 않겠니, 참 이상한 꿈이야.

  분명히 이상한 꿈이었다. 문희는 언니를 놀리다가 그 큰 꿈에 놀랐다. 그러나 조금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잠시 생각하다가

  언니 그 꿈 내가 샀다. 얼마면 팔겠어?

  엉뚱한 수작에 이번에는 보희가 어리둥절했다.

  너 정말로 그 꿈 사겠니?

  보희는 보희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이런 해괴한 꿈이 꺼림칙했기 때문에 팔아 버리면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 귀가 솔깃했던 것이다.

  너 얼마에 사겠니? 제 값만 내면 팔아도 좋다.

  보희는 사겠다는 문희에게 농담조로 흥정을 했다.

  언니두 욕심장이야. 그런 더러운 꿈, 오줌에 젖은 꿈자리를 씻어 준다는데 비싸게 팔겠다니…

  흥, 싫거든 그만 둬라. 내가 언제 꿈장수 했다더냐.

  보희도 웃으면서 튕겼다.

  기왕 내가 한 말이니 사겠어. 비단 치마 한감 줄게 팔아.

  그것도 될까.

  아아 언니 오줌꿈 그렇게 비싸게 팔려는 욕심 보니까, 오늘밤에 꿀 똥꿈은 더 비싸게 팔겠네.  호호호.

  문희는 언니를 또 놀렸다.

  넌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그럼 그만 둬. 그 대신 그 꿈 얘기 온 동네에 퍼뜨려서 언니 망신을 시킬 테니까.

  문희는 토라지듯 말했다.

  네가 살 때야 좋은 꿈인 모양인데 너는 왜 그 꿈을 사려고 그러니?

  농담 끝에 한 실언이었어. 실언은 했지만 책임을 져야겠기에 그러지 나같이 신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은 손해만 본다니까…

  보희가 팔지 않으면 신의가 없다는 투기이기도 했다.

  그래, 비단치마 한 감에 내 길몽을 팔겠다.

  그럼, 내가 그 꿈 분명히 샀어.

  문희는 한 번 다시 다짐하고 혼숫감으로 떠 두었던 비단 치마 한 감을 언니에게 주었다.

이때 보희는 길몽을 판다고 말했으나 사겠다는 문희가 있으니까 그냥 해본 말이지 결코 길몽으로는 판단하지 않았다. 도리어 흉몽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에 문희에게 비단 치마 한 감에 판 것이 큰 횡재라 생각하고 속으로는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희는 그 꿈이 장차 서울을 지배하는 따라서 신라 전체를 지배할 여왕이나 왕비가 될 용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샀던 것이다. 꿈을 산 뒤로 문희는 모든 일에 자신을 갖게 되었다. 장차 여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큰 희망까지도 품어 보았다. 그러나 우선의 희망인 춘추에 대한 애정이 성공될 듯하기도 했다. 춘추는 잘난 왕족의 청년이다. 자기가 여왕이 되는 것보다도 더 실현성이 큰 것 같았다.

  춘추가 왕이 된다면 그와 결혼한 자기는 자연 왕비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춘추를 남편으로만 삼는다면 자기가 여왕이 되는 것보다도 춘추가 왕이 되어서 왕비가 되는 편이 더 행복할 것 같았다. 문희는 언니에게 산 꿈으로 다시 이런 자기의 꿈을 꾸고 있었다.

  문희가 산 꿈은 꿈 자체의 영험보다도 그러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에 타고난 적극성에 또 하나 신앙적인 믿음까지 얻었다. 우선의 목표인 춘추에 대한 사랑을 성공시키려고 모든 힘을 기울였다. 이미 큰 꿈을 자기에게 판 보희와의 경쟁에서도 이길 것만 같았다.

  그 해가 저물고 새해가 왔다. 신라에서는 그 때 풍속으로 정초에 공차기 유희가 청소년 사이에 유행되었다. 공으로는 쇠털(牛毛)같은 짐승의 털을 뭉쳐서 만든 국(鞠)이라는 것이 쓰였다.

  김유신은 자기 집 사랑 마당에서 김춘추를 비롯한 귀족 청년들을 초청해서 공차기 유희를 하고 놀았다. 두 편으로 갈려서 싸우는 이 공차기 놀음을 하였는데 얼마 후에 보니 춘추의 옷고름이 떨어져 있었다.

  유신은 미안히 여기면서 안으로 들어가서 고름을 달아 입으라고 권했다. 춘추가 사양해도 유신은 억지로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신은 이 친한 친구요 왕족 청년에게 누이동생둘 중의 하나와 결혼을 시켜서 처남매부지간이 되고 싶었던 고로 이런 기회에 누이동생들의 선을 그에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춘추가 보희와 문희를 한 번 보기만 하면 호감을 갖고 애정을 느끼리라는 자신이 유신에게도 있었다. 그만큼 처녀 자매는 미인이었다.

  자네 정초에 옷고름을 떼서 안 되었네. 안으로 들어가서 달아 입게. 그냥이야 집까지 갈수 있겠나.

  그렇지만 미안해서.

  춘추는 사양했으나 유신은 자기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보희야 손님 옷고름을 달아 드려라.

  하고 오빠가 말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잘 타는 보희는 사양했다.

  어떻게 귀하신 남자분 옷에 서투른 바늘을 대겠어요?

  그럼 문희야, 네가 달아라.

  네.

  문희는 김춘추의 옷을 자기 손으로 정성껏 고쳐 주고 싶었다. 보희에게 이 기회를 빼앗길까 마음을 조리고 있던 참에 보희의 수줍은 성격이 망설였으므로 얼른 춘추의 옷을 받았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받은 자기의 동작이 얌통머리 없는 짓 같기도 했으나 이런 점이 언니를 이기는 첩경이리라고 생각했다.

  춘추는 문희가 정성껏 고름을 단 옷을 받아 입으면서 진정을 느끼는 듯했다. 그 뒤로 춘추는 고운 문희의 얼굴과 친절에 매혹되어서 서로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다.

  유신은 춘추와 문희가 서로 좋아하는 눈치를 알게 되자 되도록 그들이 밀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춘추는 거의 날마다 유신의 집을 찾아왔다. 놀러 다니기만 하면 주위의 눈이 수상스럽게 여길 것을 두려워한 춘추는 자기 집에다 유신의 공부방에 가서 공부한다는 핑계를 하고 다녔다.  춘추는 날마다 와서 유신의 공부방에서 밤 늦도록 있었다. 공부를 하기도 했으나 마음은 문희에게만 쏠려서 초조하게 타올랐기 때문에 책이 문희의 얼굴로 보이고 글자가 문희의 눈동자로 보였다.

  유신은 밤참 심부름 같은 것을 문희에게만 시켰다. 문희가 하녀들을 제쳐 놓고 공부방에 드나든 것이 결국 춘추와 가깝게 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보희는 자기도 사모하는 춘추를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깨달았으나 이미 때가 늦어서 완전히 문희에게 지고 말았다.

  어쩌면 양갓집 계집애가 고렇게 얌전치 못할까?

  보희는 문희를 빈정거렸다.

  유신은 자신도 천관(天官)이라는 동기(童妓)와의 사랑에 빠져 있었으므로 밤이면 자기 공부방을 춘추에게 지키게 하고 천관의 집으로 가기가 일쑤였다.

  춘추, 오늘 밤엔 또 천관하고 만날 약속을 했네. 자네 미안하지만 내 방을 지켜 주게.

어머니가 나 없는 줄 알면 또 천관네 집에 갔다고 꾸중하실 테니까. 그 대신 자네는 문희에게 글씨라도 가르쳐 주게. 문희는 자네하고 단 둘이 있고 싶어하거든. 실은 그래서 내가 천관네 집으로 피해 주는 거야.

  유신은 친구에게 이런 농을 했다. 그러므로 유신이 천관에 미쳐 다니는 밤은 춘추와 문희가 유신의 공부방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밤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사랑의 씨가 잉태되어 문희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오빠 유신도 문희와 춘추와의 결혼을 바라고 그들의 밀회의 기회까지 마련해 왔으나 결혼도 하지 전에 문희가 임신한 눈치를 채고서는 당황하기 않을 수 없었다. 귀족의 딸로서 이런 불미한 행실이 탄로나면 세상에 대해서도 면목이 없었다. 유신은 세상의 풍문보다도 문제가 시끄러워지면 임신시킨 문희를 그냥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유신은 자기도 책임을 느끼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도적 역할을 맡고 나섰다.

  (사정이 급해졌다. 쉬쉬하면서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문제를 명백히 하고 춘추가 책임을 지고 빨리 결혼하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 계략을 세웠다. 그것은 문희의 결혼 전 경솔을 추궁하면서 엄격한 처벌을 하겠다고 얼러 댔다. 문희를 괴롭히기 위해서보다는 김춘추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오빠 용서하세요. 모두 제 잘못입니다. 상대가 누군지는 묻지 마세요.

  상대자가 네 남편으로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도 춘추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바란다.  문제는 결혼 전에 네 몸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선 아직 그 분과 저 사이를 모릅니다. 그 분의 명예가 손상돼서는 안 되니 모든 것은 저 혼자 지겠어요. 만일 그 분이 이 문제로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으면 저는 자결해버리겠어요.

  음, 죄를 따지자면 처음부터 내게 있었다. 실은 춘추와의 혼사를 빨리 실현시키기 위해서 내가 일을 꾸밀 터이니 너는 좀 괴로워도 잠깐만 참고 기다려라.

  유신은 일부러 소문을 퍼뜨렸다. 실로 대담한 모험이었으나

  김춘추가 문희를 유혹해서 임신까지 시켰다. 그도 체면을 아는 왕족이니까 물론 결혼할 각오로 그랬겠지만 딸 가진 우리 집이 좀 창피하다. 허긴 춘추가 자기 집에서 문희왕 결혼시켜 주지 않을까 봐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한지도 모른다.

  유신은 다른 화랑에게 자기의 고민거리를 털어 놓듯이 얘기했지만 실은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장안에 퍼뜨리려는 심신이었다. 유신은 이런 소문을 퍼뜨리는 동시에 마음이 인자한 선덕여왕(善德女王 二十七대)에게 호소해 어명으로 춘추와 문희의 결혼을 빨리 시키려고 생각했다.  마침 선덕여왕이 산놀이 차 유신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여왕의 행차가 그의 집 가까이 다가오자 유신은 바깥 마당에 장작더미를 높이 쌓고 불을 질렀다.

  저 집이 김유신 집이 아니냐? 행차를 멈추라. 나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너희들 인부와 호위병은 빨리 가서 저 집의 불을 끄고 오너라.

  그러자 수행하던 신하가 여왕에게 그 불이 화재가 아니라고 아뢰었다.

  “실은 김유신의 누이 문희라는 처녀가 김춘추와 약혼한 사이였으나 결혼 전에 잉태했기 때문에 유신이 분개하고 그 누이를 화형(火刑)에 처해 버리려고 장작불을 놓았다 하옵니다.

  유신의 누이와 춘추와의 혼인은 두 집의 문벌로나 본인들의 인물로 보나 경사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비록 약혼한 남녀간에 경솔한 허물이 있었다고 해서 어찌 잉태한 여인을 불에 태워 죽이겠느냐. 그런 참혹한 형벌이 도리어 천도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니 곧 중지시켜라.

  이 행차에는 김춘추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안색이 변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춘추, 그런 사정이 있었으면 왜 미리 나에게 말해서 창피한 소동이 일어나기 전에 성혼하지 않았느냐? 어서 빨리 가서 너 때문에 희생되는 처녀의 목숨을 구하고 위로해라. 그리고 내가 유신의 가족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성혼케 하겠다.

  춘추는 황송한 가운데서도 인자한 여왕의 분부에 감복했다. 그는 곧 유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장작더미의 불길이 충천하는 화형장(火刑場)에는 소복한 문희가 끌려 와서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았으며, 칼을 짚고 선 유신의 준엄한 사형선고의 설교가 장황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춘추는 노한 듯한 유신을 황망히 뜯어 말리고 그에게 조용한 음성으로

  유신, 참아주게. 나의 경솔을 사과하겠으니 문희를 탓하지 말게. 자네가 노한다면 문희 대신 내가 화형을 당해도 좋으이.

  자네에게 무슨 죄가 있나? 내가 동생을 잘못 가르쳤으니 세상에 대한 면목이 없네. 자네는 어서 여왕님 행차를 모시고 가게.

  실은 여왕께서 가서 문희를 구하고 빨리 성혼하라는 분부가 내리셨네.

  여왕께서 그런 분부를 하셨나?

  유신은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으나 짐짓 놀란척하면서 반문했다.

  곧 정식으로 자네 집에 분부가 내리시겠지만 여왕님 인자에 나는 감격하고 달려왔네.

  어명이시라면 문희 처형은 잠시 보류하겠네.

  하고 유신은 문희를 안으로 돌려 보냈다.

  장안에서는 이 문제가 큰 화제였다.

  김유신의 집안 가헌(家憲)이 놀랍게 엄격하다. 그러나 약혼 남녀간의 그만한 경솔을 화형에 처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

  여론은 도리어 김유신을 칭찬하는 동시에 문희를 동정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선덕여왕의 후원과 함께 춘추와 문희의 결혼식은 온 장안 백성의 축복 가운데 곧 거행 되었다.

 

 

 

  妹夫와 妻男의 新羅國

  김춘추는 제 이십오대 진지왕(眞智王)의 손자로서 부친은 각간(角干) 김용춘(金龍春)이요,

모친은 제이십육대 진평왕(眞平王)의 천명공주(天明公主)였다. 그는 선덕여왕의 특허로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 결혼한 후 유신과 함께 삼국통일(三國統一)의 큰 포부를 품고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춘추는 큰 왕기(王器)요, 유신은 화랑 출신의 명신이다. 이 두 인물이 장차 삼국을 통일하여 대신라를 이룩할 것이다.

  신라의 국민은 모두 그들 두 젊은 영웅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진덕여왕이 선덕의 뒤를 이었다가 병약한 몸으로 승하하자 김춘추가 제 이십구대의 무열왕(武烈王)으로 등극했다. 이로서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는 언니 보희에게 산 꿈의 해몽처럼 왕비의 몸이 되어서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되었던 것이다.

  무열왕이 된 김춘추는 처남 김유신과 더욱 군신(君臣)의 의(義)를 굳게 하고 청년시대에 품었던 삼국통일의 위대한 사업을 착착 준비해 갔다.

  김유신은 처음부터 신라 귀족은 아니었다.

  그의 신분은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십이대 후손이었다.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된 때의 가락국 구행왕(仇幸王)이 김유신의 증조부였다. 신라와 합병한 뒤에 가락국의 왕족은 신라 귀족으로 귀화(歸化)해서 벼슬을 했다.

  김유신의 조부 무력은 진흥왕(眞興王) 때에 신주군주(新州軍主)가 되어서 백제와의 국경지대의 방어군 대장으로 통수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는데 백제의 침략군 삼만명을 전멸시키고 백제의 임금 성왕(聖王)을 잡아서 죽인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인 서현(舒玄)도 그 뒤 백제와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유신은 이런 귀족 명장의 피를 타고 났을 뿐 아니라 소년 때는 신라의 화랑(花郞)으로서 스스로 무술을 연마하는 동시에 많은 낭도(郎徒)를 거느렸기 때문에 용병 지휘(用兵指揮) 체험을 소년 때부터 지니고 있었다. 모친은 신라의 공주 만명부인(萬明夫人)으로 부친 서현이 만노군(萬弩郡-지금의 鎭川地方)의 태수(太守) 시절 즉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십이년에출생했다. 

  모친 만명부인은 아들 유신을 통일신라의 제일공로자의 명장으로 기르는데 현모(賢母)의 정성을 다했다. 유신이 기생 천관(天官)에게 반해서 공부를 소홀히 할 당시에 준엄한 훈계로서 책하여 유신이 습관대로 천관의 집으로 가려는 말을 그 마상(馬上)에서 칼로 목을 잘라 죽인 유명한 일화까지 낳게 한 모친이었다.

  유신은 모친이 북두칠성에 치성을 들여서 넣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몸에 칠요성(七曜星)의 별무늬가 문신(文身) 처럼 박혀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기상과 총명한 두뇌를 발휘했으므로 소년 영웅으로 추대 받아 화랑 중에서도 으뜸이었고 그를 사모하고 모여든 소년용사들은 용화향도(龍華香徒)라 일컬었다. 유신은 십칠세의 화랑시절에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신라의 이름으로 한반도(韓半島) 전역을 통일하려는 큰 뜻을 품고 중악산(中岳山) 암굴 속에 들어가서 홀로 삼국통일의 기원을 하면서 무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불면 불휴로 단식기도를 올리자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백발노옹으로 화한 신령이 홀연히 나타났다.

  너는 신라 화랑 중의 화랑이다. 아직 어린 나이로 조국에 대한 충성이 갸륵하고 삼국통일의 뜻이 장하다. 너의 그 장한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이 보검(寶劍)을 준다. 앞으로도 더욱 정신과 무술을 수련함에 있어서 이번 기도와 같은 심정으로 자중해서 처음 뜻대로 성공하라.

  이에 감격한 유신은 신령이 주는 보검을 받아 가지고 삼국통일의 자신을 굳게 하고 수도 하던 산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고구려의 첩자(諜者)가 유신이 명장(名將)이 되기 전에 없애버리려는 흉계를 꾸몄다.

  첩자 백석(白石)은 가면을 쓰고 낭도(郎徒)로 변해서 부하가 되어 남다른 신임을 받고 있었다.  유신의 비밀을 염탐하고 암살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가면 쓴 충성을 다해 왔으므로 유신도 그를 심복 부하로 사랑해 왔던 것이다.

  도련님이 이번 산중 기도에서 보검을 얻으셔서 축하합니다. 그러나 실제 전쟁에 있어서는 신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적국의 정확한 정보입니다. 적국의 군사력과 민심동향의 실제를 잘 알아야 백전백승하는 법입니다. 적의 강한 점과 약한 점을 알고 우리의 약한 점이 적에 비해서 무엇인가를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도련님은 지금 마침 수업도중의 화랑이시니 나무꾼 총각으로 변장하고 고구려에 잠입해서 적정(敵情)을 염탐해 두시면 장차 전쟁 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길도 안내하고 신변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절대 비밀을 요하는 이번 고구려 잠행은 친구 김춘추공에도 알리지 마시고 오늘 밤에 몰래 떠나갑시다.

  김유신은 백석이 흉계를 꾸미는 줄도 모르고 흥미를 느끼기까지 했다.

  그래, 너 참 좋은 생각을 했다. 전략상 필요한 지식을 얻을 뿐 아니라 이러한 모험은 하나의 좋은 연마가 될 듯하다.

  유신은 그날 밤으로 고구려 잠입의 길을 떠났다. 고구려의 첩자 백석은  (인제 내 목적을 이룰 기회가 왔다. 신라에서 제일 가는 화랑 김유신만 고구려로 유인해서 죽이면 나는 큰 상을 타고 출세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백석은 속으로 만세를 부르면서 김유신을 국경으로 끌고 갔다. 며칠 후에 그들은 국경선인 골화천(骨火川)이라는 강가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그날 밤은 저녁 때부터 부슬비가 내려 고향을 떠난 유신은 서글픈 향수를 느끼었다. 하루라도 더 고국 땅에서 자고 가고 싶었으나 백석은 일시가 바쁘게 골화천을 건너서 고구려 땅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도련님, 인제 이 강만 건너면 고구려 땅입니다. 궁금하던 적국의 땅이 빨리 구경하고 싶으니 오늘밤으로 넘어갑시다.

  비도 오고 피곤도 하니 오늘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로 하자.

  마침 비가 와서 국경을 넘는 데는 더 좋습니다.

  하고 백석은 유신을 졸랐다. 그러나 유신은 어쩐지 하룻밤을 더 고국 땅에서 자고 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 강가에서 자던 김유신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세 명의 선녀같이 고운 여자가 나타나서 유신에게 놀라운 말을 들려 주었다.

  화랑 김유신 도련님, 지금 당신이 충복으로 믿고 따라가는 백석이란 자는 흉악한 고구려 첩자입니다. 당신의 용맹과 충성을 시기하여 고구려 땅으로 꼬여다가 암살하려고 합니다.  어서 백석을 잡아서 처단하고 서라벌로 돌아가십시오.

  위급한 때에 이런 중대한 비밀을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아가씨들은 누구신데 어리석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십니까?

  우리는 신하 수호신(守護神)의 삼형제 딸들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유신은 깜짝 놀라서 꿈을 깨었다. 몸에 땀이 쭉 흘렀지만 벌벌 떨리는 오한을 느꼈다.

  날이 샌 뒤에 백석은 국경 넘을 준비로 혼자 흥분해 있었다. 강만 건너면 자기의 공이 고구려 왕에게까지 알려져서 큰 상을 받을 생각을 하면 자기의 계획에 속아서 사지(死地)로 넘어가는 김유신이 가엾게 까지 보였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까지 속고만 있는 바보 같던 김유신이 돌연 태도를 변하고

  백석아!

  하고 날카롭게 불러 세웠다.

  이 간악한 놈. 너는 고구려의 첩자로서 나를 속여 끌고 가서 암살하려고 했지?

  도련님,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지금까지 바쳐온 충성을 그렇게 모르십니까?

왜 그런 끔찍한 오해를 하시는지요. 저는 도련님을 모시고 고구려 땅으로 모험하려고 가는 그야말로 신라의 첩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고구려 첩자라고 의심하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

  이놈, 내가 속을 줄 알고 또 그런 변명을 하느냐? 나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 너 같은 놈에게 속아서 생명을 잃을 위인이 아니다. 네가 자백을 하지 않아도 좋다. 나를 속인 죄까지 합해서 처단하겠다.

  도련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백석은 유신의 확고한 태도에 더 변명할 수 없었다. 자백하고 빌면 혹시 용서라도 받을까 하여 범행을 자백했다.

  음, 나는 내 개인의 부하로서는 네 죄를 용서하겠다.

  도련님, 이 은혜는 백골난망(白骨難忘)하겠습니다.

  백석은 용서 받은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적국의 첩자는 국법이 용서하지 않는다. 이 칼은 네 주인의 칼이 아니고 국법의 칼이다.

  유신은 단호히 선언을 하고 신령에게 받은 보검으로 백석의 목을 베어서 골화천에 던졌다.  그리고 발을 돌려서 서라벌로 돌아갔다.

  소년시절에 이미 이런 신비한 신령의 보호를 받은 유신은 자기의 생명이 결코 자기 개인의 소유가 아니고 나라를 위해서 하늘이 아껴주는 것이라고 자각하고 자중하는 동시에 그 사명감(使命感)을 느꼈다. 더욱 처남 김춘추가 왕이 되어서 자기를 중신으로 등용하자 그를 도와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하려고 모든 정력과 충성을 기울였다.

  무열왕은 그 몸부터가 구척 장신의 거인(巨人) 으로서 힘이 세고 도량이 컸다. 그의 대식(大食)은 유명해서 하루에 서 말 밥을 먹었으며 밥 반찬과 술안주로는 꿩고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한끼에 꿩 세 마리씩 먹었으므로 하루에 아홉 마리의 꿩을 먹었다.

  신라의 꿩이 씨가 없어지기 전에 빨리 삼국통일을 해서 고구려 꿩과 백제의 꿩을 잡아먹어야겠다.

  신하들에게 농을 했다. 그런 농 끝에도 그는  고구려 꿩과 백제의 꿩을 마음대로 사냥할 수 있게 할 포수는 누구겠느냐?

  하여 삼국통일의 뜻을 암시 하였다. 그러면 모든 신하들은

  그 포수의 대장은 김유신공입니다.

  라고 말하며 정당한 여론으로 김유신을 추천했던 것이다.

  한편 언니 보희의 용꿈을 사서 왕후가 된 문희는 부왕(夫王)을 잘 섬겼고 금실이 좋았는데 자복도 커서 유능한 인물을 많이 낳아서 왕실을 번영케 했다. 태자 법민(法敏)을 비롯해서 인문(仁問), 문왕(文王), 노단(老旦), 지경(智鏡), 개원(愷元) 등 훌륭한 아들들을 두었다. 

  김춘추가 아직 태자로 있을 때 그는 김유신과 통일 방안을 세우고 고구려와 백제와의 빈번한 싸움을 군사훈련으로 삼아서 신라의 화랑들의 활약 무대로 활용했다.

  신라에 김춘추와 김유신이 있는 이상 신라를 넘보기 어려울뿐더러 우리 나라가 먹힐지도 모른다.

  고구려와 백제 장수들은 자신을 잃기 시작했다.

 

 

 

  三國을 統一한 新羅 花郞道

  태자시절에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큰 계획을 세웠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려면 어떤 방법으로 싸워야 할까?

  태자가 김유신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 신라에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화랑도 정신과 무력을 당할 자 없나 봅니다.

그러나 한 나라만 상대하면 문제 없지만 두 나라의 연합군을 한 번에 물리치기는 힘에 겨운 일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래서 무슨 묘안이 없을까 궁리 중일세.

  태자 김춘추도 동감이었다.

  만일 당나라를 우리편으로 권유해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으로 여제연합군(麗濟聯合軍)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하고 삼국 통일의 숙원을 우리 대(代)에 이룰 수 있습니다.

  음, 그럼 누구를 청병사(請兵使)로 당나라로 보낼까?

  동궁(東宮–太子)께서 직접 가셔야 성공할 것입니다. 일이 너무 중대하고 비밀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다른 신하를 보내는 것보다 동궁이 제일 좋습니다. 장차 등극하실 동궁께서 당나라의 왕실 규모와 선진 문화를 배워 두는 의미에서도 한 번 여행을 하고 오십시오. 등극하신 후에는 여행을 하실 기회가 없습니다.

  유신은 적극적으로 태자에게 직접 청병사로 가라고 권했다. 춘추는 그의 권고에 따라서 당나라로 가서 군사동맹의 비밀외교를 했다.

  그러나 당나라 황제는 태자가 장차 왕위에 오른 뒤로 미루고 우선 김유신으로 하여금 화랑도 정신으로 강병을 양성하라는 충고를 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당시의 진덕여왕이 약해서 제대로 정치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리 태자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이 있더라도 한반도를 통일할 시기가 못 된다고 단정했기 때문에 태자가 왕이 된 후로 미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자 김춘추의 인품이 비상함을 알고 그는 당나라에 두고 열렬한 친당파(親唐派)로 만들려고 했다.

  삼국통일의 큰 포부를 위해서는 우선 왕자(王者) 로서의 대기(大器)를 이루어야 하오. 그러니 우리 나라에 몇 해 머무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요.

  당나라 황제가 간곡히 청했다. 그러나 김춘추는 이러한 황제의 호의를 여러 가지 구실로 사양하고 귀국했다. 그 자신도 당나라에서 적어도 왕자학(王者學)을 연구하고 돌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일국의 태자의 몸으로서 정치적 인질(人質)이 될 위험성을 경계했던 것이다.

당시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정세는 복잡미묘했다.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는데 성공한 나라가 한반도의 통일 왕국이 될 수 있다는 공산(公算)은 거의 상식적인 정세에 놓여 있었다.  고구려도 백제도 신라 못지 않게 군사동맹의 비밀교섭을 하고 있으리라고 판단한 그는 자기가 당나라에 오래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 만일 국제정세가 신라에게 불리하게 되면 속절없이 인질이 될 것이 냉혹한 국제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당군사 동맹을 자기가 왕이 된 훗일로 미루고 귀국했다.

  무열왕으로 등극한 후에 그는 김유신과 더불어 모든 정치를 삼국통일의 계획 밑에서 쌓아 올렸다.  그리고 역사적 일대비약의 시기만 노리고 있었다.

  천운은 신라에게 유리하게 돌아서 우선 백제가 병들어서 망국징조를 계속 나타내고 있었다.  백제 제삼십일대 의자왕(義慈王)은 태자 시절에는 문무에 뛰어나고 부왕(父王)에게 효성이 지극해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는 칭찬까지 받았다. 그러나 호왕(虎王)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뒤에는 사람이 돌변해서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주색에 빠져서 나라 일을 완전히 돌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관기가 문란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이런 세상이 망하지 않은 역사가 없다.

  백제의 식자들은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상태에 있음을 한탄했다. 그리고 망국의 해괴한 징조가 계속적으로 일어나서 민심이 각박해졌다. 이 때 백제의 좌평(佐平=총리대신) 성충(成忠)이 의자왕에게 궁중의 음란을 규탄하고 백성의 도탄을 구제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왕은 도리어 충신의 말에 노해서 그를 잡아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죽음을 무릅쓴 성충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백제의 망운(亡運)을 걱정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자기의 잘못을 간하는 충신의 말이 듣기 싫어서 성충을 잡아 죽였다.

그 후로는 감히 왕의 잘못을 말하는 자가 없었고 궁중은 마침내 주색의 마굴로 화해 버렸다.  성충의 억울한 처형 이후 이년 동안이나 해괴한 흉조(凶兆)가 나타났다.

  오회사(烏會寺)에서는 붉은 말이 일주야 동안 절 주위를 돌면서 부처에게 절을 했다. 그 정상은 마치 불에 타는 말이 구원을 청하는 듯했다. 여우가 조정에 침입해서 성충이 앉아 정사를 보던 책상 위에 올라 앉아서 캥캥 울고 똥오줌을 쌌다. 태자궁에서는 암탉 꼬리에 참새가 올라 앉아서 해괴한 교미(交尾)를 했다. 그것은 한 궁녀를 부왕과 태자가 서로 번 갈아서 희롱하는 꼴과도 같았다. 사자수(白馬江) 강가에는 삼십척이나 되는 괴어가 나타나서 죽었으므로 굶주린 백성이 다투어 뜯어다 먹고 모두 중독이 되어서 죽었다. 내궐 안의 느티나무 고목이 밤중에 여자의 곡성을 내고 밤새도록 울었다. 백제 안의 우물이 모두 피빛으로 변해서 사자수 강물도 피빛으로 변해서 백성을 공포에 떨게 했다. 두꺼비떼가 수만마리 모여와서 나무위에 오르고 인가 지붕에 오르므로 이에 놀라서 도망하던 백성이 혼란통에 밟혀 죽는 자가 속출했다. 산위에 있는 왕흥사(王興寺) 절 문턱까지 바닷물이 밀려들고 큰 배가 절문 안으로 들어와서 중들이 부처를 업고 도망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어느 날 밤에는 귀신이 궁중에 나타나서

  백제는 망한다. 음락가무(淫樂歌舞)의 삼천궁녀 젊은 몸도 일조에 물귀신이 된다.

  하고 노골적인 저주도 퍼부었다. 저주하는 소리가 난 장소를 파고 보니 거북의 등에  백제는 보름달이요,신라는 초승달이다.

  하는 수수께끼 같은 글자가 무늬로 새겨져 있었다.

  의자왕은 그 괴상한 글자풀이를 명했더니 점장이는 그것이 < 백제가 신라에게 망할 징조라 >고 고지식하게 말했다.

  왕은 점장이의 이런 판단에 분개하여 그를 잡아 죽인 뒤에 다른 점장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는 또 바른 대답을 했다가는 자기도 죽을 것이 두려워서 왕이 기뻐하도록 거짓말을 했다.

  보름달은 왕기(王氣)의 충만을 상징하고 초승달은 희미한 왕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백제의 위엄이 태양이라면 신라의 기상은 희미한 초승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차 싸움이 일어나면 백제가 신라를 통합해 버릴 것입니다.

  의자왕은 크게 기뻐하고 종전의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고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다.

  신라의 무열왕은 백제에서 의자왕의 정치가 문란해서 민심을 잃고 천재지변(天災地變)의 흉조가 계속된다는 정보를 듣고 곧 김유신과 상의 했다.

  백제가 극도로 부패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모양이니 이때 일거에 멸망시키고 그 여세(餘勢)로 고구려를 공격하면 우리 평생 소원인 삼국통일을 성취시킬 듯한데 어떤 전략을 쓰면 좋겠는가?

  때가 왔습니다. 역시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연합군으로 백제를 쳐야 합니다. 청병사(請兵使)로는 왕자 인문(仁文)을 모시시오.

  김유신은 자신 있게 말했다.

  당나라에서도 내가 태자 시절에 약속한 것이 있으니 이번에는 우리 청에 호응하리라.

  무열왕도 자신을 갖고 인문을 당나라로 보냈다.

  그러나 당나라는 당나라대로 한반도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 당나라는 한반도의 세 나라를 모두 속국 취급으로 조공을 받았으나 때에 따라 모두 충실치 못하기도 했고 세 나라를 상대로 하는 외교관계가 복잡 불편했다. 그래서 신라의 국세가 가장 강해진 이 시기에 신라로 하여금 한반도를 통일토록 도와주고 그 뒤에 신라 하나만 완전히 감시하고 신복(臣服) 시키면 편리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당나라의 직할 속국으로 만드는데도 신라 하나로 통일된 경우가 좋았던 것이다. 신라를 앞세워 삼국통일 한 뒤 신라를 그들의 수중에 넣을 생각이었다.

  당나라에서는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과 우위장군 빙사귀(憑士貴) 등에게 삼십만 대군을 주어서 신라를 도와 백제를 치게 했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동서에서 협공(挾攻)해 오자 백제는 비로소 당황하였으나 극심한 문란으로 갈피를 못 잡고 상하가 혼란에 빠졌다.

  소정방의 대군은 서해를 건너서 백제의 덕물도(德勿島)까지 육박해서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신라의 정병 또한 김유신 장군 지휘로 질풍 같은 공격을 개시했다.

  백제의 의자왕은 조정에 문무 백관을 소집하고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이 자리에서 좌평(佐平) 의직(義直)과 달솔(達率) 상영(常永)이 전술상의 의견 대립으로 격론을 벌렸다. 의직은 당군을 먼저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당군은 대군을 거느리고 만리 항해를 해와서 피로해 있습니다. 그들은 해전(海戰)에 미숙하니 그들이 피로를 풀고 상륙하기 전에 먼저 치면 승전할 줄로 압니다. 당군만 물리치면 당군을 믿고 오만해진 신라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져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군은 만리원정의 기백이 바야흐로 클 것입니다. 그리고 동원된 군대가 삼십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라군은 종전의 싸움에서도 우리에게 항상 패해 왔으므로 당군이 상륙해서 저희들을 돕기 전에 신라군만 먼저 전멸시키면 지리에 어두운 당 군은 당황할 것이요, 우리가 그들을 희롱하면서 장기전을 꾀하면 그들은 보급물자가 떨어지고 지루한 싸움에 염증이 나서 전멸하거나 도망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연합된 힘을 충분히 발휘하기 전에 약한 신라군을 먼저 공격해서 한 팔을 꺾어버려야 합니다.

  의자왕은 작전에 어두운데다가 우유부단한 성격이라 이 문제도 결정하지 못하고 일각이 급한데도 우물쭈물하고만 있었다.

  이럴 때 충신 성충을 죽이지 않았더면 능히 국난을 타개했을 텐데… 그를 죽인 뒤에 나라의 운수가 기울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이런 최대 국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말한 대로 육로의 신라군이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의 당군이 기벌포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양면 작전을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한 신하가 이렇게 말했으나 의자왕에게 아첨하는 간신이  성충은 국왕이 저를 사형에 차하시게 되자 그 보복을 제가 죽은 뒤에 하려고 그런 필패(必敗)의 용병술(用兵術)로 저주했습니다. 만일 그 놈의 말대로 싸우다가는 큰일 납니다.그 놈의 말을 반대로 듣는 것이 상책입니다. 즉 신라군은 탄현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기벌포 이쪽으로 끌어들인 뒤에 복병했던 아군이 일제히 공격하면 양군 모두 그 요해(要害)에서 퇴로가 막혀서 독 안에 든 쥐 모양으로 전멸하고 말 것입니다.

  의자왕은 성충의 유언을 반대로 해석하는 간신의 말에 찬성하고 나당의 대군이 백제의 요해지를 넘어오기까지 기다리는 어리석은 전술을 쓰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당의 대군이 충분한 휴양을 하고 요해지인 탄현과 기벌포를 지나서 부여에 가깝게 온 뒤에야 작전을 개시했다.

  이 때 신라군을 거느린 김유신 장군은 질풍같이 진격해서 이미 황산(黃山) 벌판에 이르렀다.  백제의 오천 정병을 거느린 계백(階伯) 장군은 황산 벌판으로 급거 출동해서 김유신의 공격군과 맞서서 일대격전을 전개했다. 계백장군도 당대의 명장으로서 김유신과 상대가 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 싸움에는 네 번이나 이겨서 백제군의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군사는 적고 지쳤으며 끝끝내 그 사기를 계속하지 못했다.

  김유신은 처음에는 고전했으나 부하에는 화랑출신의 젊은 용사가 많아서 일당백(一黨百)의 용기로 사기를 돋우어서 마침내 백제군을 전멸시키고 계백 장군까지 전사하여 신라군은 크게 이겼던 것이다. 황산 벌판의 싸움에서는 신라의 화랑도를 천추에 빛낸 여러 가지 용사의 여담을 남겼을 뿐 아니라 백제에는 결정적인 패인(敗因)을 가져왔다.

  동쪽 적진을 돌파한 김유신의 신라군은 백마강가에서 소정방의 당군과 합해서 일격지하에 백제의 도읍지를 점령할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복병의 돌연한 기습에 소정방은 짐짓 물러서고 말았다. 능글맞은 당군의 장수들은 힘 드는 싸움은 신라군에게 미루고 자기들의 희생은 내지 않으려는 야비한 꾀를 부리고 있었다.

  김유신 장군은 불만이었으나 멀리서 온 동맹군의 기분을 상하지 않으려고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이때 마침 괴상한 검정 새가 소정방의 본진(本陳)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당군은 진중(陳中)에서 미신을 믿는 습관이 있었다.

  저 검정 새가 우리 진지 위를 날고 있는 것이 웬일이냐?

  하고 본국에서 데리고 온 종군 복술자(從軍卜術者)에게 점치게 했다.

  검정 흉조가 본진 위를 돌고 있는 것은 불길한 징조입니다. 잠시 이 지점을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정방은 이런 점괘가 나왔으므로 모처럼 점령한 좋은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당나라의 대군을 통솔하는 유명한 장군이 미신에 좌우되어서 중대한 작전을 변경하려는 경솔한 판단에 놀랐다. 그리고 그의 후퇴를 극력 말렸다.

  소장군, 지금 백제군이 아군의 진격으로 당황해 있고 대세가 또한 순천응인(順天應人)해서 결정적 승리가 눈 앞에 보입니다. 그런데 그까짓 괴조 한 마리로 후퇴를 꾀하려 합니까?

  그러나 흉조가 불길한 징조를 나타낸 이상 신중을 기하는 것은 결코 적군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에 따르려는 것이요.

  소정방 장군은 매우 주저하는 빛을 보였으나 유신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소장군, 소인이 저 새를 화살로 쏘아 떨어뜨리겠습니다. 만일에 저 새가 내 화살을 피하면 후퇴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날면서도 소인의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맞아 떨어지면 진중의 먹을 것을 노리러 온 주린 새에 불과하니 후퇴하시지 마십시오.

  소정방은 김유신의 말에 일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장담하는 김유신이 새를 쏘아 맞추지 못한다면 그의 자부심을 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허락했다.

  좋소. 어디 김장군의 활 솜씨를 보여 주시오.

  그러나 혹 실수해도 비웃지는 말아 주시오. 한 번 실수는 병가(兵家)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허허허

  김유신은 여유 있는 농담을 하고 활을 당겨서 나는 새를 쏘았다. 화살은 보기 좋게 검정새를 맞추어서 소정방 발 밑에 떨어뜨렸다.

  흠, 과연 신라의 궁술(弓術)이 놀랍소.

  소장군, 이 새가 비록 흉조라 해도 인제 액운을 제거 했으니 아무런 걱정 마십시오.

  아 고맙소, 액운이 이걸로 풀렸으니 후퇴하지 않겠소.

  김유신은 당군을 후퇴시키지 않는 작전상의 우세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신라를 도와 주러 왔다는 거만한 태도에 일침(一針)을 준 것이기도 했다.

  자아, 연합군으로 총 공격을 개시하십시다.

  유신은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기개로 소정방을 격려했다. 그래도 소정방은 선봉으로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장이 선봉을 맡고 쳐들어 가겠습니다. 귀국 군대는 좌우에서 포위태세로 적군의 도망을 막고 추격전을 가해 주시오.

  좋소.

  이리하여 나당연합군은 수적으로도 압도하는 대 병력으로 물밀 듯이 백제의 도읍지를 향해서 당당히 쳐들어갔다. 이때 백제군은 감히 출격해서 막지 못하고 도성(都城)으로 후퇴 집격해서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籠城) 방위의 소극적 태도밖에 취하지 못했다.

  이 전쟁터에서 백제군은 만여 명이나 전사하고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서 자멸의 운명을 기다리게 되었다. 의자왕도 도저히 나당연합군을 막을 수 없다고 단념하고 비로소 충신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아, 내가 일찍이 성충의 충간(忠諫)을 들었더면 이런 망국의 대환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

  의자왕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버리자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왕위만 탐내고 왕의 허락 없이 왕을 자칭했으나 물론 적군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나라가 다 망하는 판국에, 왕과 태자가 도망친 틈에 왕이 되려는 태의 역적행위는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군대도 백성도 이 태의 허울좋은 왕좌를 비웃고 모두 달아났다. 그리하여 백제는 결국 망하고 왕실의 추태까지 연출하여 세인의 빈축을 사고 말았다.

  소정방은 백제의 항복을 받고 의자왕, 태자 그리고 잠시 왕을 자칭한 태까지 모조리 잡고 장수 팔십팔 명과 국민 사만삼천백칠 명과 함께 당나라 서울로 납치해 갔다. 실로 사상 최대의 포로였다.

  백제의 항복을 받은 뒤에 당나라는 임시로 백제에 무인 정치를 베풀고 있었다.

  신라의 무열왕과 김유신은 백제의 영토와 백성을 신라에서 통치하려고 했으나 소정방 장군은 그러한 신라의 뜻을 알면서도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신라로서는 아직 고구려라는 적이 남은 이때 전리품을 다투려고는 하지 않고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물론 고구려를 쳐들어 가는데 있어서도 당군이 주동적 역할을 하고 신라군이 응원하는 태세가 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무인정치를 실시한 소정방은 이번 전쟁으로 고구려까지도 자기나라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래서 고구려 점령 시에는 되도록 신라군은 발언권을 주지 않으려고 주동적인 작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김유신은 대군의 선두에 서서 직접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싶었으나 소정방이 그의 전공(戰功)을 시기하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신라군은 후방에서 주로 당군의 보급임무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당군이 평양 근처까지 육박하였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포위당하고 식량마저 떨어져서 전멸할 상태에 빠졌다. 당군은 신라군에 시급히 막대한 군량을 공급해 달라고 호소 해 왔다. 이런 급한 호소를 받은 무열왕은 막대한 군량을 당군진지까지 운반할 용장을 누구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적진을 뚫고 군량을 나르는 데는 용병(用兵)의 자유가 있는 전투부대 투입보다도 열 배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동맹군 군대가 아사할 위기를 구제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능히 용감 신속히 이 임무를 수행하겠느냐?

  이때 아무도 말하는 장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유신이 무엇을 결심한듯한 비장한 얼굴로

  소신이 이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소신도 김장군을 도와서 같이 가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왕자 김인문이 따라 나섰다.

  김유신의 용맹과 김인문의 지혜가 합쳐진다면 이 왕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대들이 신라의 체모를 살리는 구료… 군량 이만석을 당군에 운반해 주오.

  김유신은 수만 명 부하 장병 가운데서 가장 용감한 열기(裂起)와 병천, 두 장수를 군량운반의 선두 장군으로 기용하여 행장을 수습했다.

  군량 수송을 하는 신라군은 엄동설한(嚴冬雪寒) 중에 지나친 강행군으로 많은 전사자와 동상자(凍傷者)를 내었으나 끝까지 싸우며 북진을 계속했다. 이때 소정방의 부대는 평양성을 점령했으나 고구려군은 초토작전(焦土作戰)으로 성내의 식량과 가옥을 전부 불살라 버리고 나와서 당군이 성안에 들어간 뒤에 주위를 포위하고 당군을 굶겨 죽이려는 작전을 하고 있었다.

  김유신의 군량 수송이 평양에 접근했을 때는 평양성내의 모든 당군은 기아와 혹한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쇠퇴한 병력을 감추기 위하여 성의 주위에는 깃발을 높이 올리고 북과 피리의 군악을 울려서 성안의 군대가 사기왕성 하다는 위계(僞計)를 쓰고 있었다.

  마침 대동강에 이른 김유신은 그날밤이 새기전에 군량을 평양성으로 보내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던 신라군은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아 수천 명이 몰살당하고 후퇴했다. 그 뒤로는 감히 강을 건너 가려는 군사들이 없었다.

  많은 병사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와서 목적을 포기하면 전우의 영혼에 부끄럽다. 그뿐 아니라 남은 부대도 여기서 전멸당한다. 강을 건너 가면 신라의 신의를 빛내는 동시에 너희들도 살지만 여기서 겁을 내고 주저하다가는 나라의 신의도 잃고 너희들도 개죽음을 당한다.  최후의 용기로 활로를 개척하자!

  김유신은 진두에 서서 질타했다.

  이때 열기와 병천의 두 용사가 칼을 빼어 들고 적국을 향해서 돌격을 감행하자 다른 군졸도 용기를 회복하고 진격을 개시했다. 김유신 장군은 그들 진두에 서서 대항하는 고구려 군대를 차례로 몰살시키면 진격해 나갔다. 드디어 군량은 평양으로 반입되었고 소정방이 거느린 수만 명 군대는 아사를 면했던 것이다.

  김장군, 장군과 무열왕은 동맹국의 신의를 훌륭히 지켰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구해 준 의인(義人)이며 은인(恩人)이오.

  하고 소정방은 감격적인 치하를 했다. 이리해서 고구려도 완전히 항복했다. 그러나 소정방은 김유신에 대한 생명의 은혜도 일시적인 치하였을 뿐 그가 신라의 독립성과 민족성을 주장하는 충신이라는 것에는 처음부터 경계하였다. 앞으로 한반도를 당나라 마음대로 하려 하는데 김유신과 무열왕은 눈의 가시같이 귀찮은 존재다.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 승전후 의 군정을 영속화하고 장차는 신라까지 직접 지배하려는 소정방의 야심을 채우는데 누구보다도 김유신이 방해물이었다. 형식으로는 나당연합군이었지만 소정방은 사실상 나당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런데 총사령관인 소정방에게 김유신은 국가체면 문제는 물론 작전상 문제 등으로 소정방과 여러번 대립해 왔었다.

  그들이 처음 격론을 한 것은 백제를 칠 때 진중에서 일어난 김문영(金文潁) 장군 문제였다.  소정방은 황산 벌판에서 적국의 저항이 치열해서 그것을 전멸시키기까지 시일이 걸렸으므로 당군과 합세할 기일을 부득이 며칠 지연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책임으로 김문영의 목을 베겠다고 호령했던 것이다.

  김유신 장군은 소정방의 무책임하고 오만한 태도에 격분하여 과격하게 항의했다.

  장군은 황산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완강한 적의 대항을 마침내 전멸시키고 전쟁의 태세를 이미 유리하게 전개시킨 그 황산 전투를 치하하지는 않고 합군 기일을 다소 지연시킨 것만을 무자비하게 책하고 공 있는 장수를 죽이겠다는 것은 천만부당하오. 만일 김문영을 사형에 처하겠다면 그의 수령인 내 목을 대신 베시오.

소장군이 만일 그러한 태도로 우리 신라군을 대우한다면 군동맹도 당장 파기하겠소. 그 뿐 아니라 우리는 당군과 먼저 싸운 뒤에 백제군과 싸울 셈이요.

  김유신의 정의감으로는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도 두렵지 않았다. 김유신은 허리에 찬 보검의 칼자루를 잡고 결투의 자세로 당군의 장수들을 호령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당군의 장수 동보량(董寶亮)이

  김장군 말씀대로 황산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한 고통과 전공이 컸으니 김장군의 실수는 불문에 붙이는 것이 전우(戰友)의 정의일까 합니다.

  라고하여 소정방의 양해를 구해서 김유신과의 충돌을 무마시켰던 것이다.

  소정방은 싸움의 공을 김유신에게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김유신을 항상 경원했다. 그러나 그의 공이 위대했기 때문에 당나라 고종 황제도 백제를 정복한 뒤에 김유신의 공을 높이 칭찬하고 백제 땅의 일부를 김유신의 식읍(食邑)으로 주겠다는 특지(特旨)까지 내렸다. 그러나 김유신은 나라를 위해서 싸운 공으로 사사로운 영지(領地)는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던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뒤에 소정방은 군대를 한반도에 영주시키고 침략하려는 근성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신라에 대해서도 모든 제도를 당나라 식으로 고치라고 강요하는 동시에 그 전에 없던 내정간섭까지 하는 소정방은 마치 당나라에서 파견된 총독 행세를 하고 있었다.

  무열왕은 이런 예상치 않은 중대 문제를 토의하려고 중신회의를 열었다.

  삼국통일을 하려는 데만 급해서 외국군을 국내로 청해 온 것이 잘못이었소. 우리가 동족의 피를 흘린 결과가 당나라의 영토를 확장시켜주는 것이 된다면 어찌 본래의 통일 이상에 부합되겠소.  빨리 당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켜야 하겠는데 화전(和戰)간 좋은 방책을 강구해야겠소.

  그러나 무열왕의 본심은 비록 승전은 했으나 백성이 전쟁으로 피로한 이 때 또 다시 당나라의 대군과 싸운다는 비상수단은 취하고 싶지 않았다. 일시의 민족적 감정이나 국가적 체면으로 옥쇄(玉碎)하려는 것은 도리어 나라와 백성의 근본까지 멸망시키는 경솔하고 위험한 결백성이라고 경계했던 것이다. 되도록 평화적으로 당군의 철퇴, 또는 당군의 내정간섭을 피하는 길로 낙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왕실의 주인이오 신라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일시적 민족 감정으로 통일 신라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우행(愚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충신 다미공(多美公)과 명장 김유신 장군은 감정적인 명분론(名分論)에 급해서  당군과 일전(一戰)하더라도 소정방의 오만한 꼴은 보기 싫습니다. 그들이 비록 대군이지만 후속부대와 무기 군량의 보급이 없는 고립상태에 놓여 있으니 장기전으로 임하면 격파할 자신이 있습니다.

  김유신이 군사적 견지에서 주전론(主戰論)을 내세웠다.

  김장군의 실력과 충성을 나는 잘 아오. 그러나 그것으로 당나라와의 전쟁은 끝날까?

장군은 바다를 건너서 당나라를 정복하고 개선 할 자신과 포부가 있소?

  무열왕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는 당나라의 침략을 막을 뿐이지 당나라까지 쳐들어 갈 야심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황제의 항복을 받지 못하면 열명의 소정방을 잡아 죽여도 당나라의 간섭은 막지 못하고 도리어 심한 압제를 자초(自招)하는 결과밖에 안 될 것이오. 참는 것도 용기니까 참는 용기로 소정방을 구실러 보내고 안으로 목전에 닥친 통일사업에 힘쓰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소?

  무열왕의 이런 의견에 대해서 강경론자인 김유신도 다미공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김장군도 다미공도 그 일전을 사양치 않겠다는 각오는 버리지 말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만반의 태세는 갖추는 것이 좋을 줄 아오.

  무열왕은 주전론자의 체면도 세워 주는 동시에 그러는 것이 또한 필요했으므로 격려했던 것이다.

  대왕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이런 긴급회의의 결과는 곧 소정방의 치밀한 정보망을 통해서 그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신라와 싸우려면 당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사실 그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소정방은 공연히 신라의 미움을 받기도 싫었으므로 개선장군으로서 당당히 본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 뒤에 김유신은 다음 임금 문무왕(文武王)때에야 고구려를 완전히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위업(偉業)을 완성했다.

 

 

 

  元聖王의 登極夢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소위 통일신라 시대가 와서 한반도에는 비로소 통일된 민족이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전에 신라, 고구려, 백제로 갈려서 동족끼리 피를 흘리고 싸우던 민족의 비극은 그 몇 백 년 동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전쟁의 피해를 면한 평화시대가 온갖 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문화가 난숙해짐에 따라 문약(文弱)의 폐단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진흥왕(眞興王)때에 시작된 신라의 화랑제도(花郞制度)도 점점 쇠퇴해졌다. 화랑제도는 마치 삼국통일을 시키기 위해서 생겼던 모양으로 그 전성기에 통일 위업을 이룩하고 그 목적이 달성되자 차차 그 열이 식어진 듯하기도 했다.

  통일사업의 대부분은 무열왕 김춘추 시대에 그 기초를 확립했고 형식적인 결실(結實)은 그 아들 문무왕 시대에 완수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 일곱 대의 왕을 거쳐 오는 동안에 왕실에서도 기강이 문란해서 마침내 왕위쟁탈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悲劇)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 왕실에서는 건국 이래 중고(中古)시대까지도 왕위에 대한 쟁탈 소동이 거의 없었다.

왕위는 덕 높은 사람이 앉아야 한다고 하는 대전제(大前提)에서 왕족끼리도 서로 덕있는 인물에게 사양하는 아량과 미덕이 전통을 이루었던 것이다. 초기에 박, 석, 김(朴昔金) 삼씨가 왕이 되었던 것도 그것이 신화적(神話的)이긴 했지만 <덕 있는 자가 임금이 된다.>는 원칙하에서 사양하는 정신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제 삼십칠대 선덕왕(宣德王)에게 태자가 없었던 것을 기회로 종래의 덕 있는 자가 임금이 된다는 원칙은 무너지고 모략에 의한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종전의 관례에 의하면 태자가 없을 때에는 덕 있는 왕족이나 덕 있는 대신 가운데서 다음 왕이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다음 임금의 자리는 상재(上宰) 김주원(金周元)과 각간(角干) 김경신(金敬信) 둘 중의 하나가 앉게 되리라는 것이 일반의 관측이었다. 그들은 모두 왕족의 혈통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욱 확실한 후보자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주원과 김경신은 서로 왕이 되려는 경쟁만 했지 양보하려는 생각을 조금도 갖지 않았다.

  상재 김주원은 각간 김경신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어서 좀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김경신은 왕운(王運)이란 거룩한 천기(天機)에 속해 있기 때문에 관위의 일계급쯤 높고 낮은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경쟁의식을 일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낮에 골몰했던 생각은 으레 밤에 꿈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김경신은 어느 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는 자기의 뜻과는 전연 반대로 고관의 감투를 벗어 버리고 풍류객이 되어서 십이현금(十二絃琴)을 안고 천관사(天官寺)의 천관정(天官井) 우물 속으로 들어가 버린 꿈을 꾸었던 것이다.

  (허어, 내가 아무래도 왕이 될 운이 없나 보다.)

  그는 크게 실망했으나 이런 실망의 꿈을 누구에게도 알리고는 싶지 않았다. 꿈 하나로 왕의 욕심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심중은 점점 우울해져서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짜증을 내다가는 자기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알고 돌이켰다. 평판이 나빠지면 왕이 될 가망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 꿈이 정말로 악몽(惡夢)이다.)

  세도를 버리고 풍류객이 된 꿈 자체는 흉몽이라고 할 수 없으나 왕이 못 된다는 의미에서는 저주할 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그 꿈이 왕이 못될 징조라는 판단을 내릴까 두려워서 해몽가(解夢家)에게도 물어보기를 꺼려했다. 나쁜 꿈이라면 액운을 방지하는 무슨 방법이라도 문복가(問卜家)에 물을 겸 유명한 문복가를 불러서 상의 했다.

  내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장래의 길흉을 정직히 해몽해 주게. 그러나 이런 내 꿈 얘기를 다른 사람에 알려선 안 되네.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복채를 후하게 줄 테니 맹세하겠나?

  대감님, 안심하십시오. 길흉간에 꼭 맞도록 풀어 드리는 동시에 절대로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그대신 만일 흉한 점괘가 나오더라도 노하시지 마십시오.

  그야 왜 노하겠나. 내 꿈이 나쁘다고 해몽가를 탓하겠나.

  그럼 꿈을 말씀해 보십시오.

  김경신은 꿈 얘기를 자세히 들려주고 문복가의 해명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감투를 대감 머리에서 벗으신 것은 벼슬에서 파면될 징조입니다.

  음

  김경신도 놀라지는 않았다. 자기도 그런 해몽은 이미 골백번 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몽가의 입으로 단정적인 선언을 받자 기분이 매우 나빴다.

  거문고를 안으신 것은 거문고 판과 비슷한 큰칼(刑具)을 쓸 징조입니다.

  으음

  김경신은 신음했다.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흉괘(凶罫)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물 속에 들어가신 것은 옥에 갇힐 운수입니다.

  …

  김경신은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감았다.

  대감님 황송합니다. 제 해몽에 실망하셨을 줄 아오나 앞으로 조심하시면 모르고 계신 것보다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실 것입니다.

  해몽가는 그런 말로 김경신을 위로하고 많은 채돈이 미안한 듯이 돌아갔다. 김경신은 충격적인 흉한 해몽으로 완전히 실망하고 그날부터 조정에도 출근하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그리고 병이 중하다는 핑계로 찾아오는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상한 꿈 때문에 상심하고 있다는 비밀은 집안 여자들의 입에서 새어나가고 말았다. 이런 소문을 전해 들은 도술가 여삼(餘三)이 해몽을 다시 해주고 큰 보수를 받으려고 밤중에 찾아갔다.

  대감님 꿈은 좋은 꿈인데 전번 해몽가가 어떤 사람에게 매수되어서 거짓 해몽으로 대감께서 임금 되실 대운(大運)을 잃도록 저주하고 갔습니다. 제가 사리에 맞는 해몽을 해 드리면 대감께서도 안심하시고 심화병을 상쾌하게 씻어 버리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인은 이 말에 솔깃해서 이불을 쓰고 누운 남편을 졸라댔다.

  이번 도술가는 풍채로나 언변으로나 전번 해몽가보다 권위가 있어 보입니다. 한 번 만나서 해몽을 들어 보시는 것이 좋아요. 공연히 길몽을 흉몽으로 믿고 대운을 잃지 마세요.

나는 대감이 왕이 되시지 못하는 것보다도 울화증으로 고생하시는 것이 더 딱합니다.

  그럼 만나보지만 전번 해몽이 아주 이치에 맞는데 그 꿈이 어떻게 좋게 해몽이 될 수 있겠소?

  좌우간 만나보세요.

  도술가 여삼은 하기 어려운 면회허락을 받고 김경신의 방으로 들어오자 면회를 애걸하던 때와는 달리 갑자기 뽐내기 시작했다.

  죄송하오나 마님께서도 나가 주십시오. 대감님께만 여쭙겠습니다.

  부인은 작가 가까스로 면회를 시켜주었더니 건방진 수작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거짓말로라도 좋은 해몽을 해서 남편을 위로시켜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걸면서 방을 피해 나왔다. 부인이 나간 뒤에 여삼은 주인에게

  소인은 대감께서 공연한 심환(心患)으로 괴로워하시는 것을 풀어 드리려고 밤중에 찾아 뵈었습니다.

  고맙소. 내 꿈을 다시 해몽해 주겠다는 호의가 고맙소.

  네, 그 천하에서 다시 없는 대길몽(大吉夢)을 축하해 드리고자 왔습니다.

  나는 그 흉몽 때문에 두문불출인데 대길몽이라니 어떻게 해몽하고 그런 말을 하오.

  제 해몽대로 장차 귀하게 되시면 오늘밤의 제사소한 호의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허허허. 내 고민을 풀어 준 공을 잊을 리가 있겠소.

  김경신은 도술가가 으레 장담하는 상투수단이라고도 생각했으나 그런 여삼의 다짐에 역시 기대를 걸고 다짐했다.

  그러자 여삼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공손한 절을 하고 정좌한 뒤에 옷깃을 여미고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 얹었다. 주인 김경신도 마음이 좀 긴장되었다. 그리고 이 도술사가 전에는 흉몽으로 풀어 준 꿈을 어떤 길몽으로 풀어 주나 하고 귀를 기울였다.

  대감께서 감투를 벗었으니 머리에는 하늘밖에 없습니다. 하늘을 관으로 쓰셨으니 지상최대의 관  즉 왕관이 아니겠습니까?

  음

  김경신은 귀가 번쩍 뜨였다.

  열두 줄의 거문고를 품었으매 십이 대 자손이 귀하게 되실 징조입니다.

  여삼은 한 술 더 떴다.

  음, 그도 그렇군.

  그리고 대감께서 들어가신 천관사의 천관정 우물은 보통 우물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말씀입니다.  그러니 아까 말씀한 하늘의 관을 쓰시고 궁전으로 들어가실 대문입니다.

  음, 듣고 보니 그럴 듯한 해몽이오. 그러나 내 위에는 김주원이 있소. 그도 다음 왕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를 물리치고 내가 등극 할 수 있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그의 왕운을 꺾는 예방으로 알천(閼川)의 용신(龍神)께 그를 저주하는 제사를 지내 두십시오. 그러면 만일의 경우에도 그에게 왕위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김경신과 왕위를 다투는 김주원의 집은 그 알천을 건너 이십 리 밖의 교외에 있었다. 김경신은 새로운 희망으로 알천 용신에게 김주원의 왕운(王運)을 저주하는 제사를 크게 지내고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다시 조정에 출근했다.

  그런데 그 여름에 선덕왕은 재위(在位) 불과 오 년 만에 급한 병으로 갑자기 승하했다. 아직 태자를 책봉(冊封)하지 않았던 왕실과 대신들은 다음 왕으로 상재 김주원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결정적이었다. 장안의 백성들도  이번에는 김주원 상재께서 새 임금으로 등극하시게 되었다.

  하고 새벽부터 새 임금의 등극을 축하하려고 궁전 앞으로 모요 들었다.

  당시 신라의 왕실에서는 왕이 승하하면 즉시로 신왕(新王)이 등극하는 관례로 되어 있었다.  선덕왕은 지난 밤에 급히 승하했으므로 김주원을 추대하는 당파에서는 밤중에 알천 건너 김주원의 집으로 가서 기별하고 이튿날 아침 일찍이 등극 차 대궐로 급행했다. 그러나 알천에 물이 갑자기 불어서 건너는데 시간이 지연되었다.

  왕의 돌연한 승하도 이상하지만 비도 오지 않은 알천에 큰 홍수가 난 것이 더 이상하다.

  김주원의 일행은 일시를 다투는 등극 행차에 물로 막혀서 초조해 하면서 벼락 홍수를 원망했다.

  알천 물은 서울(경주)에 비가 오지 않아도 물이 붓는 수가 없는 예는 아니었다. 상류지방에서 비가 오면 그럴 때가 간혹 있었다. 그러나 이번 홍수는 상류에서 비가 온 때문도 아니었으며 보통 비로는 이런 큰 홍수가 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김경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가 용왕에게 김주원의 왕기를 꺾어 달라고 제사 지낸 영험이라 믿었던 것이다.

  대궐 근처에 집이 있던 김경신은 재빨리 대궐로 들어가서 왕의 빈 자리 — 옥좌(玉座)에 앉고 용포에 왕관을 쓰고 등극을 선언하고 일찍 달려온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김경신의 선배요 제일 후보자인 김주원 상재를 제쳐놓고 염치 없이 왕위를 새치기하고 들어 앉았다. 그런 야비한 자를 몰아내고 김주원 상재를 신왕으로 모셔야 한다.

  이러한 사태에 김주원 일파에서는 당황해서 김경신 타도의 흉계를 꾸몄다. 그러나 이미 왕권을 잡은 김경신은 제 삼십팔대 원성왕(元聖王)으로서 자리를 확보하고 김주원 지지자를 역적 죄로 몰아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그러자 겁을 집어먹은 반대파도 곧 태도를 바꾸고 원성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미 시기를 잃은 김주원은 자기를 지지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무마시키고 그전에는 하관이었던 원성왕에게 신하로서의 축하를 올렸다.

  경은 전왕께 바치던 충성으로 역시 상제로서 나라에 봉사해 주시오.

  하고 원성왕은 최대의 아량을 베풀었다. 김주원도 하늘이 자기에게 때를 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지 않고 종전대로 나라에 봉사했다.

  김주원 상재는 역시 사사로운 욕망에 구애치 않는 위대한 인격자다.

  사람들은 덕으로는 역시 왕이 된 김경신보다도 낫다는 암시를 하면서 경의를 표했다.

 

 

 

  王이 되려면 먼저 公主를

  화랑 김응렴(金應廉)은 각간(角干) 김계명(金啓明)의 아들로서 조상은 왕족이었다. 그는 덕행이 높은 삼선설(三善說)의 인연으로 부마(駙馬)가 되었고, 나중에는 제사십팔대의 경문왕(景文王)이 되었다.

  화랑시대 김응렴의 삼선설과 삼복설(三福說)은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했다.

  제사십칠대 헌안왕(憲安王)은 어느해 구월 구일 중양절(重陽節)에 문무백관을 국화로 유명한 임해전(臨海殿)에 소집해서 연중행사의 관국연(觀菊宴)을 베풀고 임금과 신하들이 한자리에 가을을 즐겼다. 이 연회에는 십오 세의 미소년 화랑 김응렴도 참가했다.

  여러 백관들은 김응렴을 귀엽게 여기고 여기저기서 불러 음식을 권했다. 술잔까지 권하면서 노래도 청했다. 김응렴은 노장들 자리에서도 노래나 시조에 능수능대(能手能對)했다.

  헌안왕도 김응렴의 의젓한 태도를 기특히 여기고 친히 앞으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는 화랑이 되어서 수학유람차 천하를 두루 다니느냐?

  예, 명산 대천과 고적을 대개 찾아보았습니다.

  세상 물정도 두루 살폈느냐?

  예, 빈부 귀천의 여러 풍습과 선악의 인심도 견문하고 깨달은 점이 적지 않습니다.

  나쁜 풍습도 보았겠지만 네가 본받을 만한 선행(善行)도 보았느냐?

  예, 제가 특별히 감명 받은 세 가지 착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 김응렴은 왕의 하문(下問)에 명확한 대답을 올렸다.

  허허, 세가지 선행(善行)은 무엇 무엇이냐? 말하자면 네가 보고 느낀 삼선설(三善說)이구나…  참 영리하고 의젓한 소년이로구나. 역시 국선(國仙=화랑의 별칭)으로 뽑힌 소년은 다르지 않소?

  왕은 옆에서 같이 귀엽게 보고 있는 왕후에게 속삭였다. 왕후 흔명부인(昕明夫人)은 왕자가 없었으므로 이런 아들을 하나 두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첫째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언행이 지극히 겸손해서 결코 남의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고 남을 존경하는 태도를 보고 본받을 인격이라고 감동하였습니다.

  음, 다음에는?

  세도와 영화를 가진 사람으로서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남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인품에 감동하였습니다. 만인은 모두 신불의 앞에 서면 평등한 사람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런 사람은 경건하게 믿는 모양이었습니다.

  왕은 감탄하였다. 그 선한 것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는 총명에 놀랐다.

  또 하나는 부유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사치로운 생활을 하지 않고 검약한 금품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보고 감사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왕이 특히 감동한 것은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얘기에서 스스로 지도자로서 배울 점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장차 화랑으로서 큰 인물이 될 그릇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무엇인지 왕후와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왕은 저쪽 자리에 앉아서 자기 아들이 혹 실례 되는 말이나 하지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응렴의 부친 각간 김계명을 불렀다.

  왕은 그들 부자들 번갈아 보면서

  김각간, 아다시피 나에게 왕자가 없고 공주가 형제 있는데 공주와 성혼시켜서 응렴을 부마로 삼고자 하는데 경의 뜻이 어떠하오?

  응렴은 수줍어서 고개를 숙였으나 부친은 공손히 배례하고

  황공하온 분부 소신의 가문에 더 없는 영광이옵니다. 다만 미련한 소신의 자식이 부마 될 자격이 있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건 경의 사양의 말이고… 응렴아, 너의 생각은 어떠냐?

  하고 넌지시 응렴에게 물었다.

  …

  왜 대답이 없느냐? 공주가 네 아내로 부족하냐? 부족하면 화랑답게 대답하라. 왕이라고 어찌 인륜대사를 명령으로 정하랴. 네 생각이 제일 중요하니 꺼림 없이 대답하라.

  너무 황공하올 뿐이며 이런 문제는 부모가 정하실 성질이라 저로서는 무어라 봉답할 수 없습니다.

  허허허, 옳은 말이다. 네 부친은 지금 찬성했으니 집에 돌아가서 네 모친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예

  하고 응렴은 부끄러운 듯이 왕과 왕후 앞에서 물러나왔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응렴의 부친은 응렴과 함께 부인과 상의 했다. 부마가 된다는 데는 모두 감격했으나 두 공주 가운데서 맏공주를 택하느냐 둘째 공주를 택하느냐가 문제였다. 그것만은 신랑집에서 선택할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께서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신다면 아우 공주를 며느리로 맞으십시다.

  모친이 남편에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그야 며느리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하지만 장래의 길흉 문제도 알아볼 겸 흥륜사(興輪寺) 스님께 여쭈어 보고 정합시다.

  참, 그러는 것이 좋아요.

  그럼, 응렴이 네가 스님을 찾아 뵙고 여쭈어 보고 오너라.

  예

  응렴은 모친 의견대로 둘째 공주와 결혼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둘째 공주는 신라 제일의 미인이란 평판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륜사 스님을 찾아가는 길에도 부친의 심중론이 원망스러웠다. 스님이 만일 둘째 공주와는 궁합이 맞지 않으니 맏공주와 결혼하라는 말이 나올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흥륜사 스님은 응렴의 공주와의 혼담을 듣고 우선 축하한 다음에 한참 공주들의 나이와 응렴의 나이를 비교하고 생각하다가,

  맏공주는 용모가 미인은 아니지만 부덕(婦德)이 높으며 그 분과 결혼하면 장차 삼복(三福)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만일 아우 공주와 결혼하면 장차 삼화(三禍)가 있을 것이니 미(美) 보다는 덕을 취하시오.

  응렴은 순간 실망했으나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고 물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삼복은 무엇 무엇입니까?

  첫째는 왕과 왕후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서 총애를 더 받을 것이오. 왕께서 두 공주 중에서 자유로 택하라 하신 데는 부왕으로서 딱한 고충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미인이 아닌 맏딸을 먼저 보내고 싶으시면서도 차마 말씀 못한 사정을 살펴드리고 맏공주를 택하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그리고 맏공주가 얼마나 감격하고 현처(賢妻) 노릇을 하시겠소?

  예, 그 점을 저는 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일에 맏공주의 용모가 아우 공주만 못해서 결혼을 뒤로 미루게 되면 심정이 얼마나 슬프고 그 슬픔은 왕실 전체의 슬픔이 되겠으니 충성된 신하로서는 깊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겠소?

  예, 알겠습니다. 다음의 복은 무엇입니까?

  겸손한 덕에는 만복(萬福)이 따르는 법이요. 지금 왕실에는 태자가 안 계신데 부마 중에서 왕을 삼는다면 우선 맏사위가 우선권을 갖게 되겠고 더구나 미인 공주를 사양한 덕으로 왕과 왕비의 총애를 받게 된 맏 부마가 틀림없이 왕위를 이어 받을 것이요.

  응렴은 너무 황송한 복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왕위에 오른 뒤에 만일 그 때까지 미인인 둘째 공주가 미혼 중이면 그분마저 차비(次妃)로 맞을 수 있으니 이것이 맏공주와 결혼하면 얻을 수 있는 삼복설(三福說)이요.

  응렴은 스님의 권고대로 맏공주인 문자공주(文資公主)와 결혼할 결심을 했다. 그 당시의 신라 왕실에서는 한 집의 딸 형제를 정비(正妃)와 차비로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응렴은 자기의 삼선설로 맺어진 인연을 흥륜사 스님의 삼복설에 따라서 맏공주인 문자공주와 결혼하기로 정하고 대궐로 들어가서 그 뜻을 아뢰었다. 이에 대해서 왕과 왕비는 매우 기뻐하면서 응렴을 칭찬했다.

  우리가 간택한 부마는 보통 경박한 미소년이 아니다. 응렴인들 용모가 아름다운 처녀가 싫을 리 있겠느냐? 겸양의 미덕과 인륜의 질서를 지켰을 뿐 아니라 왕실의 체면까지 세워주었으니 실로 기특한 마음씨다.

  왕실에서는 곧 혼인 준비를 하고 응렴을 맏사위로 삼았다. 맏사위가 된 응렴을 왕자처럼 총애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헌안왕은 재위(在位) 불과 오년만에 병으로 승하했는데 그때에 유언 하기를

  나는 경들의 충성에 보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오…

  군신들이 울음을 터뜨리자 왕은 쓸쓸한 미소를 짓고 말을 이었다.

  슬퍼들 마오. 나보다 덕이 많은 신왕을 맞아서 나라가 크게 일어날 것이니 한결 같은 충성으로 신왕을 보필하기 바라오. 마침 세자가 없으므로 부마 김응렴에게 왕위를 계승시킬 생각이오. 응렴은 아직 연소하지만 신라 화랑의 모범으로 세상이 다 인정하므로 장차는 영명(英明)한 임금이 되리라고 믿소.

  유언을 마치고 승하한 헌안왕의 뒤를 이은 김응렴이 제 사십팔대 경문왕(景文王)이다.

  문자공주와 결혼한 덕으로 왕이 된 응렴은 마침내 삼복설의 마지막 셋째 복까지 맞는 몸이었다.  경문왕으로 등극하니 삼 년째의 겨울에는 복사꽃이 궁중 비원에 만발했다.

  재봉춘(再逢春)의 서조(瑞兆)다. 나라에 반드시 경사가 있을 것이다.

  겨울의 궁중 비원에 복사꽃이 만발했다는 소문만 듣고도 세상에서는 왕실의 경사를 빌며 기다렸다.

  경문왕은 흥륜사 스님이 예언한 삼복설을 상기(想起)하고 미인으로 유명한 왕비의 아우를 둘째 왕비로 삼아서 염복(艶福)까지 누렸다.

 

 

 

  新羅의 最後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三國)의 하나로 맨 늦게 발전하기 시작해서 서서히 나가던 신라가 중기(中期)에 와서 마침 삼국을 통일하고 대 신라를 건설하고 신라문화의 황금시대를 동방천지에 자랑했다. 그러나 역사는 무상(無常)해서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이후 오십육 대의 경순왕(敬順王)으로 망했는데 위대한 신라 왕조도 일천 년을 채우지 못한 구백이십이 년으로 허무하게 끝났던 것이다.

  신라 말기의 왕조에는 영특한 왕도 나지 않았고 위대한 인물의 신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국운이 쇠망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북쪽에서는 궁예(弓裔)가 반란을 일으켜서 신라를 위협했고 그의 부하로 있던 왕건(王建)이 마침내 송도(松都)에 고려(高麗)라는 왕조를 수립했다.  또 서쪽에서는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점령하고 경애왕(景哀王)을 자결(自決)토록 강요했던 것이다.

  이제 신라왕궁의 비사(秘史)를 끝내는 대목에서 망국의 경위를 살피기로 하자.

  노대국(老大國) 신라 말기의 왕대(王代)에는 여러 가지의 흉한 징조가 나타났다. 그것들은 마치 불치(不治)의 노환자(老患者)가 꾸는 악몽의 연속과 같았다.

  제 오십이대 효공왕(孝恭王) 광화(光化) 십오년에는 봉성사(奉聖寺)에까지 소동이 일어났다.

  봉성사 외문(外門) 이십일간에 까치가 떼로 몰려와서 밤낮으로 울었다.

  제오십삽대 신덕왕(神德王) 사년에도 영묘사(靈廟寺) 지붕에 까치떼와 까마귀떼가 와서 밤낮으로 울었다. 그리고 오월에 서리가 내리고 유월에는 참포(斬浦)의 강물이 바닷물과 맞부딪쳐서 사흘 동안이나 노도격랑(怒濤激浪)으로 싸웠다.

  제오십사대 경명왕(景明王) 정명(貞明) 오년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壁畵) 속의 개가 사흘 동안이나 짖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월에는 황룡사(皇龍寺)의 탑 그림자가 금모사지(今毛舍知) 집 뜰에 한달 동안이나 거꾸로 비쳤다. 그리고 그해 십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끊어졌고 벽화 속의 개가 나와서 황룡사 뜰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림으로 들어갔다.

  제오십오대 경애왕(景哀王)은 역대 선왕들 때부터 이변(異變)이 잦아서 민심이 흉흉했으므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큰 불공을 올렸다.

  동화(同化) 이년 삼월 십구 일에 황룡사에 백좌(百座)의 설경(說經)을 베풀고 전국에서 유명한 선승(禪僧) 삼백 명을 초청해서 환대했다. 그리고 경애왕이 친히 분전에 향을 피우고 치성을 올렸다. 이것이 신라에서 시작된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였으나 불교 신라로서 마지막 대제전(大祭典)의 영험도 망국의 운수는 구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천성(天成) 이년 구월에 경애왕은 포석정(鮑石亭)에서 비빈(妃嬪)과 왕족들과 함께 단풍놀이 연회로 세상을 잊고 중흥(中興)에 취해 있었다.

  역적 견훤(甄萱)의 반란군이 비록 고울부(高鬱府)를 점령하고 행악을 하지만 고려(高麗) 구원병 일만 명이 곧 경주로 올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

  경애왕은 이렇게 자위(自慰)를 하면서 마음 놓고 잔치 술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귀신도 모르게 잠복해 왔던 견훤의 반란군이 전격적으로 왕족의 연회장을 기습했으니 일망타진(一網打盡)된 왕족의 면목은 국민 앞에 여지 없이 되었다. 이 봉변은 체면문제가 아니라 왕 자신의 비참한 자멸의 술자리였던 것이다.

  이 용열 하고 죄 많은 자야. 지금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너는 나의 의거(義擧)를 고려 왕건의 군대에 맡기고 이런 주색에 빠져 있으니 하늘이 너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하늘을 대신해서 너의 죄를 다스리려고 나타났다. 너도 명색이 왕이었다면 네 체면을 세워 주려는 내 호의를 받아라. 호의는 다름 아니라 네 손으로 자결하라. 만일 자결도 못할 비겁한 자라면 능지처참해서 거리로 끌고 다니며 장안의 구경거리로 삼겠다.

  경애왕은 역적에게 이런 모욕의 호령을 당하고 하늘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고려 왕건의 구원병이 당장 땅에서 솟아나지도 않았으므로 왕은 마침내 자기 칼로 목을 찌르고 엎으러 져 죽었다. 역적 견훤의 칼에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견훤은 경애왕을 자결시킨 뒤에 왕궁에 침입해서 금은 보화를 약탈하고 왕족과 귀족들의 부녀자를 잡아서 능욕하고 부하들에게는 승리의 선물로서 능욕하게 하는 무도한 행패를 부렸다.  견훤은 자기가 신라의 왕위를 찬탈하고 궁전의 주인이 되고 싶었으나 곧 구원병을 거느리고 경주에 진주해 올 고려의 왕건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경애왕의 아우 김부(金溥)를 장차 자기의 괴뢰로 삼으려고 왕으로 삼았다.

  김부는 형왕(兄王)의 원수인 견훤이 은혜나 베풀 듯이 시켜 주는 왕위기 탐탐치 않았으나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이 왕의 자리를 빼앗고 앉지 않은 것이 천의(天意)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견훤이 시키는 대로 왕이 되었다. 빨리 고려군이 응원해 오면 견훤을 소탕하고 형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굴욕을 참았다.

  이래서 왕이 된 김부는 제오십육대의 경순왕(敬順王)이로서, 신라의 마지막 왕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형이던 경애왕이 없어진 후에는 신라의 대신들도 아우 김부를 왕으로 추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록 견훤이 괴뢰로 세웠어도 별다른 경멸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순왕은 지혜가 있고 침착했으므로 기왕 기울어서 망하는 신라의 최후를 백성의 피를 강요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온하게 처리하려 했다.

  최후의 신라 왕으로서 새로 일어난 고려의 태조(太祖) 왕건에게 자진해서 양국(讓國)한 애화(哀話)의 일단은 다음과 같다.

  왕을 죽이고 신하들을 서당(西堂)에 모아 놓고 당면한 왕실의 비극과 비상시국의 수습을 의논했다.  그 자리에서 대신들은 김부의 신왕 즉위를 찬성하고 성왕의 국상을 통곡 속에 거행했다.  고려의 왕건은 사신을 보내서 경애왕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경주로 진주했다.

  경순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성 밖까지 나가서 고려 태조를 영접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큰 환영잔치를 베풀어서 신라를 도와주는 호의에 감사의 성의를 표했다. 경순왕은 고려태조 왕건에게  과인이 부덕하여 견훤의 반란을 막지 못하고 선왕이 참환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태조의 응원으로 역적은 일단 후퇴했으나 앞으로 이 어지러워진 나라를 어찌 수습할지 앞이 캄캄합니다.  태조는 선왕과의 우의를 계속 베풀어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과인의 응원병 출동이 늦어서 이런 불의의 화를 입으신 귀국 왕실에 대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앞으론 견훤 등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과인의 미력을 아끼지 않을 테니 과상(過傷)하시지 마십시오.

  왕건이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으므로 경순왕 이하 백관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왕건은 여러 달 동안 서울에 머무르면서 반란군을 평정해 주고 고려로 돌아갔다.

  견훤은 야수같이 침범해 왔으나 왕건은 은인 같이 와서 도와주고 아무런 요구도 없이 돌아갔다.

  백성들까지 왕건의 덕을 칭송해 마지 않았다.

  그는 새 나라를 창건(創建)할 만한 왕기(王氣)를 담은 덕 있는 대기(大器)로서 신라의 왕실과 국민에게 큰 감명을 주고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망국의 시운을 맡은 경순왕의 이력으로는 나라를 구하기 어려웠다. 사방의 국토는 적들에게 침식을 당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서 언제 나라가 망할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경순왕은 비상한 각오를 하고 군신들을 대궐로 불러 들였다.

  내가 뜻하지 않은 왕위에 올라서 부족한 힘으로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잡으려고 했고 여러 신하의 충성도 비상하나 하늘이 아마 신라의 종말을 고하게 하시는 모양 같소…

  경순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며칠 밤 잠을 자지 못하고 생각한 끝에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물려 주면, 우선 백성이 편하게 살 것 같소. 이 중대한 문제로 나 자신은 종묘(宗廟)에 대한 죄인이 되려고 각오했소.  다만 신라의 귀족 및 여러 신하들은 양국(讓國)한 후에도 전관예우(前官禮遇)를 태종에게 당부하겠으며 태종의 인덕으로는 제공(諸公)들을 잘 대우하리라고 믿소…

  신하들은 왕의 비장한 마지막 말에 대해서 모두 통곡을 하고 한동안 아무런 의견도 말하지 못했다.

  이윽고 회의가 진전됨에 따라서 왕의 의견대로 고려에 합병하자는 논과 신라의 주권통을 지키자는 양론으로 갈렸다. 이때 왕 다음 가는 발언권을 가진 태자가 비장한 결심을 피력했다.

  한 나라의 존망은 천운이요, 인력을 다하여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끝까지 싸우고 건설 해 보다가 그래도 안 될 경우에는 국운에 순(殉)해서 옥쇄(玉碎)할 것이지 어찌 건국 이래 번영해 온 천 년의 사직(社稷)을 가볍게 남의 나라에 물려 주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충을 말했다.

  그러나 지금 나라의 형편은 노쇠한 몸에 백공천창을 입은 격이다. 명분을 지키다가 옥쇄하면 몇 명의 충신이 청사(靑史)에 빛날 수는 있다. 그러나 망하는 나라를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몇 명의 충신의 이름을 사기 위해서 무고한 군대와 수만 명 백성의 피를 흘려야 하겠느냐?  그러고라도 얻는 것이 있으면 모르되…. 기왕 망하는 국운 때문에 무고한 백성을 이 이상 더 괴롭힐 수는 없다. 옥쇄라 하지만 욕된 망국보다는 평화롭고 영광스러운 양도가 나으리라…

  부왕의 뜻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소자는 고려왕의 호의로 구차한 신부귀족(新附貴族)의 대우를 감수(甘受)할 수 없습니다. 아주 세상을 버리고 산 속으로 숨어 버리겠습니다.

  네 뜻을 나도 알겠다. 너도 내 뜻을 알겠다니 너는 네 뜻대로 하여라. 나는 어쩔 수 없구나.

  왕은 또 눈물을 흘리면서 끝을 맺고 마지막으로 시랑(侍琅) 김봉휴(金奉休)에게  고려 태조에게 양국(兩國)의 왕실과 국민의 장래를 위해서 양국(讓國)하겠다는 국서(國書)를 초안 해 올려라. 내가 보고 날인하여 곧 고려에 사신을 보내겠다.

  이리해서 신라는 고려에게 지진 합병을 원하게 되었다.

  태자는 그런 국론(國論)이 결정되자 태자의 용포(龍袍)를 마의(麻衣)로 갈아 입고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풀뿌리를 캐고 나무 열매를 따서 먹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서 애처로운 마의태자의 일화를 남겼다. 태자가 금강산으로 숨어 버리자 아우 왕자도 머리를 깎고 범공(梵空)이라는 승명(僧名)의 중이 되어서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버렸다.

  고려 태조는 신라 경순왕의 양국친서(讓國親書)를 받고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서 신라의 왕족과 귀족과 고관들을 환영했다. 이때의 왕 일행의 행차는 망국행렬로서는 너무도 호화로운 광경이었다. 향차(香車)와 보마(寶馬)의 행렬이 이십 리나 길게 행진해서 북으로 향했는데 그것은 마치 고려의 신랑집으로 가는 신라의 신부 행렬도 같아서 연도에 도열해서 구경하는 백성들은 감개가 무량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의 일행을 송도 교외까지 나와서 환영하고 대궐 동쪽의 정승원(正承院)에 들게 해서 왕족의 대우를 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경순왕의 비(妃)로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관위(官位)는 태자보다도 높은 정승(正承)을 봉하고 봉록을 일천 석 내리는 동시에 경주일대를 그의 식읍(食邑)으로 정해 주었다.

  왕건으로서는 경순왕에게 최대의 대우를 한 셈이었다. 그리고 신라의 다른 왕족과 귀족들에게도 모두 상을 내리고 고관에 등용하는 아량을 베푸는 동시에 고려 왕업(王業)의 기초를 튼튼히 했던 것이다.

  신라의 경순왕이 자기의 제오십육대를 최후로 구백이십이년의 왕조(王朝)의 전통을 국토와 함께 고려에 양도 한데 대해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著者)는 사론(史論)의 말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신라의 박씨(朴氏) 석씨(昔氏)는 모두 알(卵)에서 나고 김씨(金氏)는 금궤에 담겨서 하늘로부터 강하해 왔다 하며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 하니 이는 해괴한 말로서 믿을 바 아니나 지금 이것을 사실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윗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검박하고 남에게는 너그럽고 설관(設官)과 행사가 간략하여 중국(中國)을 섬기고 사신이 연락부절하였다. 항상 자제들을 중원(中原)에 보내서 숙위(宿衛)케하여 수학(修學)하게 하였다. 그래서 옛 성현의 교화를 본받아서 거친 풍습을 고치고 왕사(王師)의 위령을 빙자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신라의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그 시절에는 진실로 성대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도(浮 =佛道)의 법을 받아 들여서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고 절과 탑을 세우고, 백성으로 하여금 중이 되게하여 군사와 농사가 피폐해지고 나라가 날로 쇠약해졌다. 그러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런 시절에 있어서 경애왕은 주야로 음황(淫荒)하여 궁인좌우(宮人左右)와 포석정(鮑石亭)에서 술을 즐기며 견훤이 가까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그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말을 더 하랴. 경순왕이 우리 태조께 귀순한 것은 가상 한 일이다. 만약 힘껏 싸우고 죽기로 지켜서 왕사를 대항하다가 역궁세진(力窮勢盡)하기까지 이르렀다면 그 가족이 자멸되었을 것이요. 무고한 백성들까지도 큰 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에 나라를 들어서 바쳤으니 그는 조정에 공이 있고 백성에게 대한 덕이 또한 크기 이를데 없다. 옛날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에서 송(宋)나라로 들어온 것도 소자첨(蘇子瞻)이 충신이라고 일컬었는데, 지금의 신라의 공덕은 그것보다도 훨씬 크다. >

 

  이상의 사론은 물론 고려의 입장에서 평한 것이지만 일리가 없지 않은 의견이다.

 

 

  新羅篇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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