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가회동

꿈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모습이 생생한 사진으로 나에게… 우리들의 소굴, 골목이 여전히..

거의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  20세기 1960년대 중반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서울 종로구 가회동 집 골목, 그곳의 현재 모습을 사진으로 가까이서 보는 기적을 체험한다. 솔직히 이것은 거의 꿈, 기적 같은 느낌이다. 그야말로 time machine을 탄 기분인 것이, 머리 속에 각인된 기억의 사진과 지금 보는 사진이 거의 비슷한 것이다. 집의 위치들은 변함이 없지만 개량되고 말쑥해졌다. 우리들이 모여서 자치기, 다마[구슬]치기, 딱지치기, 골목야구, 다방구, 찐뽕, ‘왔다리 갔다리’, 말타기, 칼싸움, 술레잡기 등으로 시간을 소일하던 그 찻길과 골목길에는 흙이 전혀 안 보이지 않게 포장이 되어있다. 어쩌면 이런 기적이… 상전벽해 桑田碧海라고 그 자리들이 모조리 ‘도시계획’에 의해서 없어질 수도 있는 강산이 6번 변할 수도 있는 세월이 지났는데 거의 전의 모습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나의 추측에, 아마도 가회동 근처지역이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 특수구역이 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거의 60년 이상 같은 모습을…  또한 다른 기적을 바란다면, 죽기 전에 한번 다시 그 골목을 거닐며 나의 눈으로  보고, 나의 늙어가는 손으로 땅을 만져보고 싶은 것 뿐이다.

6.25 동란 발발 직후 아버지는 3살도 채 안된 나, 누나, 엄마 셋을 남겨놓고 납북, 영영 소식이 없었다. 원산이 고향이셨던 어머니는 거의 혈혈단신 서울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당시 우리는 원서동 ‘병세네 집’ 의 단칸방에 숨어서 휴전을 맞아야 했다. 그렇게 원서동의 추억으로 시작된 우리는 재동국민학교의 인연으로 국민학교 4학년 때 학교 뒷문 쪽에 위치한 가회동 집으로 이사해서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 때까지 살았다. 그러니까 제일 재미있는, 즐거운, 개구쟁이 시절을 이 집에서 보낸 셈이다.  따라서 그때의 추억은 생생하게 나를 오랜 세월 나를 포근하고 행복하게 했다.

 

땅과 흙에서 놀았던 골목이 완전히 돌덩어리로 포장이… 이곳의 애들은 어떻게…

가회동의 추억, 오래 전, 그러니까 거의 10년 전 내가 이곳에 남긴 블로그의 제목이었다. 그 당시 나의 기억력은 그런대로 평균이상으로 꽤 많은 어릴 적의 추억을 거의 사진처럼 그릴 수 있었고, 외롭거나 슬픈 감정이 들면 그 머릿속의 ‘추억의 사진’들을 꺼내 보며 편안함과 행복함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제 나의 기억력도 나이에 비례해서 급속히 쇠퇴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 가회동의 추억이라는 나의 기억은 지금 읽어봐도 아주 상세한 이야기들이었지만, 결국은 이것은 남이 보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죽을 때 가지고 갈 것이었다.

가끔 ‘가회동’이라는 keyword로 이 블로그를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나의 추억을 거의 같이 공유한 분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우리가 살던 집 ‘주인집 누나’의 현재 소재지까지 알고 있던 분도 있었다.  가회동과 재동학교를 나보다 더 자세히 기억하기도 했는데 특히 재동학교 지하실에서 달걀귀신이 나온다는 도시전설을 알려주던 어떤 형제님… 정말 꿈을 꾸는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가회동 같은 골목 자락에 살았던, 재동학교, 중앙중고등학교 10년 후배, 이민우 후배가 연락을 주었다.  이번 case는 그야말로 grand slam격이어서 며칠 동안 나는 행복한 추억을 다시 즐기게 되었다. 내가 알고 지냈던 동네 꼬마들의 소식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야구꼬마 오자룡, 막다른 골목의 윤표네 집 등 이들과는 같은 시절에 놀았던 듯하다. 그러니까 내가 살던 시절보다 10년 정도 뒤에 그곳에서 추억을 만든 경우다. 오자룡은 자기 형과 친했다고 하고… 게다가 골목 막다른 집에 살던 ‘홍윤표’ 란 아이가 나를 따르던 애였는지, 아니면 그 동생인지.. 그 애가 머리가 좋아서 경기, 서울의대, 성형외과의사, 뜻하지 않게 타계를 했다는 소식들.. 정말 이건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느낌들이다.

나와 개인적인 연락이 되어, 지난 밤에 이 가회동 골목 후배의 답신을 받고 잠자리에서 한참을 뒤척거리며 그 동화 같은 시절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것도 향수 鄕愁의 마력 중의 하나다.  홍윤표, 준표 이름을 듣고 당시 그 애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들은 특히 엄마들은 그 골목에서 꽤 오래 남아 살았고 모두들 친하게 지낸 모양이다. 우리나 우리 어머니는 사실 그런 처지가 못되었음을 나는 당시에 실감을 못하며 산 거, 다행인가 아쉬움인가? 그러니까, 내가 알던 추억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을 것이다. 가정주부들, 말 그대로 일을 안 하는 엄마들, 그 당시에는 거의 모두 집에 있었으니까, 그들만의 그룹을 가지고 있었겠지. 우리는 그런 것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어찌 보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일을 하러 하루 종일 밖에 계셨던 엄마를 다시 그려보면…  참, 우리도 너무 철이 없었고, 나이가 먹어서도 하나 나아진 것이 없었으니 울고 싶다…

 

골목 왼쪽 2층집, 198번지.. 이층 위로 거대한 전망대가 올라 섰구나…

이 활달한 느낌의 이민우 후배가 이번에는 사진과 짧은 video file을 보내 주었다. 사진은 high resolution 가회동 골목의 모습을 담았고, 비디오는 ‘북촌계동’ 으로 중앙중고가 있던 계동골목의 모습을 보여준다.  ‘북촌계동’ 비디오, 계동입구부터 중앙중고 교문근처까지 천천히 걸으며 찍은 것이다. 교문부근은 그런대로 알아 보았지만 계동입구는 100% 내가 기억한 모습이 아니었다. 100% 변한 것이다.

핵심은 역시 골목사진,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하나도 차이가 없었다. 너무나 고화질의 사진이라서 거의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자세하기 관찰할 수 있을 정도다.

이민후 후배가 살았던 집, 195번지는 아마도 이희천 3형제가 살았던 그 집인 듯하다. 그 다음 집이 심술 맞은 수학선생 집 이원영이 살던 집을 것이다. 우리가 살던 집 198번지는 거대하게 2층 양옥으로 고급화 된 듯하고, 바로 앞의 한옥, 오자룡의 집은 전과 거의 같은 모습, 막다른 집의 홍윤표가 살던 집도 예전과 거의 비슷하고….. 와! 이런 기적이…

지난 밤에도 머리만 깨어있으면 가회동 골목의 사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time machine을 탄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 골목이 그대로 건재해 있을까? 그곳에서 보내던 그 세월들이 그대로 살아나는 환상에 빠지고 깨어나고 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진의 size [high resolution]가 워낙 크기에 자세히 들여다 보니 골목 끝자락의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아~ 역시 세월의 흐름은… 그곳은 다른 곳으로 변해 있었다. 상가의 간판들이 보이고, 우리의 보금자리였던 2층집은 거대한 구조물로 치솟아 있었다. 유일한 추억의 위안은 앞 쪽으로 남아있는 ‘전통한옥’들 뿐이었다.  궁금한 것 중에는 이곳에는 현재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혹시 옛날부터 계속 살았던 사람들은 없었을까…  이런 추억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나도 참 못 말리는 인간이 아닐까?

 

대한민국의 평화방송 online 매일미사에 낯익은 단어가 보인다. ‘가회동’이란 단어다. 이날 평일미사를 가회동 성당에서 하는 것이다. 물론 놀랍고 반갑고 흥분이 안 될 수가 없다. 이 성당의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거의 즉각적으로 추억의 물결이 밀려온다.  어린 시절의 가회동 성당의 입구에서 본 ‘서양인 성인상’들의 모습이 너무 무서워서 도망쳤던 꿈도 있었던, 어린 시절의 고전적인 가회동 성당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값비싼 느낌’이 요란한 조화를 자랑하는 건물이 보인다. 그야말로 추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왼쪽의 한옥은 무엇이고 오른 쪽의 갤러리, 화랑 같은 구조는 무엇인가? 내가 가서 직접 보기 전에 이런 원색적인 평가를 하는 것, 물론 의미가 없다. 그저, 그저 나는 1950년대의 베이지색 고딕성당을 찾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머릿속을 청소하러 work desk를 의식적으로 피하며 몸을 움직이는 일을 이곳 저곳에서 찾는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머리 속에 한가지가 머물지 않도록 정말 조심하고 싶다. 필요 이상으로 너무 골머리를 썩히지 말자. 덕분에 Birdie nest 9개가 완성되어서 기둥 위 하늘로 높여지고 이제는 오래 전 우리 집을 떠난 Eastern Bluebird의 파아란 생명의 모습을 기다려 본다.

 

Eastern Bluebird Apartment

Under construction

오래 전에 카펫을 제거한 후 노출된 흉한 모습의 중앙계단 main stairway를 결국 현재 편리하게 계속 쓰고 있는 whiskey barrel 이라는 재미있는 색깔로 (이미 porch 와 birdie nest에서도 썼던)  paint하기로 했다. Stain을 하려고 생각도 했지만 너무나 일이 많고 비용도 그렇기에 오래 전에 준범이 엄마가 권한대로 ‘paint하면 되요’라는 말에 힘을 입어 페인트 칠을 하기로 했다. 하기 전에 squeaky nail 문제를 screw로 단단히 고정을 시켰더니 훨씬 나아졌다. 자…이제는.. 페인트를 칠하자… 부디 의외의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수많은 cable/wire 잡동사니들…  결국 오늘 wire/cable rack을 설치, 나의 참을성을 시험하던 그 수많은 비비 꼬인 wire/cable 들을 걸어 놓았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무언가 되는가 봅니다.

 

조시몬 형제와 카톡을 주고 받다가 갑자기 레지오 협조단원 권면 생각이 들어서 거의 ‘장난 삼아’ 제안을 했더니 의외로 수락을 하니… 참, 세상이 이렇게 멋진 사람도 있구나 하는 감탄사가 나온다. 레지오 (봉사) 권면 얘기만 나오면 두드러기가 돋는 사람들이 거의 태반인데… 참, 예전에 나도 그랬지만…  이곳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이 형제님,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되는 것도 매력적인 idea가 아닌가? 이 신심 좋고 성실한 형제가 레지오를 위해 기도를 바치는 것,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성모님, 고맙습니다!

나의 가슴속 깊은 곳의 평화의 샘에 혼란이 올 때, 머리를 식히거나 다른 쪽으로 생각을 바꾸려고 할 때, 역쉬~~~ ‘classic’ TV drama 를 보는 것은 아주 효과적임을 경험한다. 3년 전 ‘레지오 미친년’ 사건 때, 일본드라마 ‘하늘을 나르는 타이어’가 나를 살려주었다. 현재 나는 계속 이 평화교란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이때에 나는 ‘하나무라 다이스케 花村 大介’ 라는 변호사 TV 드라마로 많은 도움을 받는다. 우선 가볍고, 유머러스하고, 끝 맛이 아주 희망적이다. 그래 이런 것도 삶의 지혜가 아닐까?

 

11월로 접어들며, 1일의 ‘모든 성인의 날 All Saints Day‘를 시작으로 2일에는 ‘위령의 날 All Souls Day‘ 를 맞는다. 이 두 날은 모두 ‘가톨릭 천주교 전례력’의 기념일이지만, 11월이라는 ‘깊어가는 가을’을 배경으로, 사실 제한된 시간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한번은 ‘죽음, 특히 자기의 죽음’에 대한 성찰, 묵상을 하고 싶은 때가 아닐까…

작년 이맘때 ‘그리운 친구, 양건주’가 고맙게 보내준, 당시로서는 신간에 속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수필집 <기다리는 행복>을 이제야 다 읽게 되었다. 비록 여백이 넉넉히 있는 각각의 페이지에도 불구하고 전체는 무려 4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으로 ‘필사’는 물론 깊이 소화하는데 무려 일년이 걸린 것이다.

내용 중에 ‘순례자의 영성’ 章에서는 위령의 달, 위령의 날을 묵상하는 시와 글이 실려있다. 역시 수도자답게, 죽음은 끝이 아니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임을, 우리들 모두 인생의 순례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래도 그래도 역시 작은 인간이기에 ‘죽음이 있는 곳’은 안 가보았기에 두려움은 인정을 한다. 얼마나 솔직한 표현인가.

이해인 수녀님의 ‘명성’은 사실 오래 전 연숙을 통해서 익히 듣고 짧은 수필을 읽어 보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아주 heavy weight를 들어올리는 기분으로 책 전체를 읽게 되었고, 근래에 조금씩 ‘시詩의 눈 眼’이 열리는 덕인지 수녀님의 주옥 같은 시에서 영성적 차원의 시상 時相을 얻기도 한다.

수녀님의 이력 중에 나의 관심을 끈 것이 있다면 나이가 나의 누나와 동갑인 닭띠인 것과, 서울 가회동 성당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이 있었다. 상상으로 아마도 나와 같은 시절(1950년대) 같은 동네 (가회동)를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참 놀랍고 즐겁기까지 하다. 혹시 재동국민학교 출신이 아닐까 하는 ‘희망’도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수녀님은 조금 떨어진 ‘창경국민학교’ 를 다녔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가회동성당 주일학교 소풍 1955년, 아마도 수녀님은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아닐까..

안타까운 사실은 역시 수녀님의 건강상태, 몇 년 전 ‘타계’ 라는 오보를 접하고 놀랐던 사실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이 ‘누님’의 안녕을 잊을 수가 없다. 고통은 다른 쪽으로 은총이라는 ‘싫은 진리’도 있기 하지만 아마도 수녀님은 그런 진리를 모두에게 보여주시는 듯 보통 나약한 사람들보다도 더 건강하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니,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가 role model로 삼을 수 있는 case가 아닐까. 자주는 아니더라도 시와 글의 일부분이라도 머리에 떠오르면 반드시 화살기도를 바치리라.. 항상 생각한다.

 

 

순례자의 영성

 

저무는 11월에

한 장 낙엽이 바람에 업혀 가듯

그렇게 조용히 떠나가게 하소서

(……………….)

한 점 흰구름 하늘에 실려 가듯

그렇게 조용히

당신을 향해 흘러가게 하소서

 

죽은 이를 땅에 묻고 와서도

노래할 수 있는 계절

차가운 두 손으로

촛불을 켜게 하소서

 

해 저문 가을 들녘에

말없이 누워있는 볏단처럼

죽어서야 다시 사는

영원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소서

 

– 이해인, <순례자의 기도> 중에서

 

 

세상 떠난 이들을 위해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는 위령의 달, 위령의 날을 나는 좋아합니다.

우리 수녀님들이나 친지들이 긴 잠을 자고 있는 무덤가에 서면 마음이 절로 차분하고 온유해지기 때문입니다. 먼저 떠난 분들에 대한 그리움에 잠시 슬퍼지다가도 그들이 보내오는 무언의 메시지에 정신이 번쩍 들곤 합니다. 지난해와 올해만 해도 여러 명의 수녀님이 세상을 떠났는데 어떤 분은 매장하고, 어떤 분은 화장해서 수녀원 묘지에 모셔옵니다. 비록 육신은 떠났으나 그들이 너무도 생생히 꿈에 보이거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기도 속에 떠오를 때면, 허무를 넘어선 사랑의 현존으로 행복을 맛보기도 합니다. 오래 전 수도공동체의 수련장이었던 노수녀님을 동료수녀와 같이 병간호하러 가서 환자 수녀님과 성가도 부르고 배도 깎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다음 날 새벽 수녀님은 갑자기 살짝 주무시듯이 고요하게 선종하셨습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함께 지켜보던 동료 수녀는 떠나는 수녀님을 향해 “아주 가시는 건가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그 인사말이 어찌나 간절하고 인상적이던지! 잠시 출장을 가거나 지상 소임을 마치고 저쪽 세상으로 이사 가는 이에게 건네는 이별 인사로 여겨져서 슬픔 중에도 빙긋 웃음이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먼저 떠나가서 친숙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은 가보지 않은 세상이기에 두렵고 낯설기도 한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11월, 우리는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가벼움과 자유로움으로 순례자의 영성을 살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아직은 오지 않은 자신의 죽음을 잠시라도 묵상하는 것은 오늘의 삶을 더 충실하게 가꾸는 촉매제가 되어줍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매일 외우는 끝기도의 마무리 구절을 묵상해봅니다. 삶의 여정에서 자존심 상하고 화나는 일이 있을 적마다 언젠가는 들어갈 ‘상상 속의 관’ 속에 잠깐 미리 들어가보는 것, 용서와 화해가 어려울 적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을 겸손히 내려놓는 순례자의 영성을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을 극복하는 작은 죽음을 잘 연습하다 보면 어느 날 주님이 부르실 때, “네!” 하고 떠나는 큰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4월, 四月, April.. 사월이 되었다. 4월은 나에게 어떤 것인가? 70년 동안 쌓인 기나긴 추억을 통해서 올해 4월은.. 태곳 太古 적의 원시적 온돌방에서 화롯불과  이불로 견디던 서울의 겨울을 벗어나 만나는 반가운 손님처럼 느껴졌던, 그것이 바로 4월이었다.

다시 골목으로 나와 하루 종일 놀 수 있었던 찬란한 봄의 시작이 1950~60 년대의 가회동과 삼청동의 4월의 봄이었고, 자그마했던 ‘강북’ 서울이 10~20대의 함성과 카빈총소리로 요란 했던 찬란한 계절이기도 했다.

희미해져 가는 당시의 4월과 봄의 느낌들, 우연히 찾은 김남조 시인의 에세이 집 중의 ‘사월의 연가’ 가 현재 나의 심정과 어찌 그렇게 비슷한가. 어머님이 계시던 곳으로 이제는 편지를 보낼 수 없는 불효자의 심정과 공해 없이 맑던 당시의 ‘시원 始原 의 냇물’의 순수함.. 이제는 도저히 꿈 속에서조차 희미해지는 것들, 김남조 시인의 글 덕분에 조금은 되살아나는 것들.  느낌인가.. 아니면 바램인가.. . 아 사월이여, 사랑하는 사월이여..

 

 

사월의 연가 – 김남조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눈과 얼음이 얹히던 인동 忍冬 의 나무 살갗에 억 천만 만의 더운 손바닥들이 명주 피륙을 감아 훈훈히 속살마저 덥혀냄을 보러 나오세요.

봄을 맞는 나무 옆에 서서, 봄의 기운이 정수리까지 뻗치는 나무 옆에 서서 생명의 축복을 나누어 가지세요.

이슬을 보세요.

올해의 첫 이슬이 태초의 순수 그대로 영롱히 반짝임을 보세요. 다치지 않게 그 한두 방울을 손 안에 담아 보세요. 문득 새파란 하늘을 우러러 보세요. 옛날옛적 동심의 눈물 방울이 거짓말처럼 우리들 눈시울에 다시 치받아 어이없이 후두둑 떨어지는군요.

사월의 수분을 생각하세요.

겨우내 사람의 속 마음이 너무나 메말라 있었다고 여기던 터에 사월의 수증기를 생각하세요. 훈훈하게 축여질 알맞은 습도를 생각하세요.

사월의 아름다움을 누리세요.

단지 화사한 아름다움이 아니고 눈과 얼음에서 뽑아 올린 장한 아름다움을 누리세요. 광야의 기도사같이 인내와 신앙의 승리를 나누어 가지세요.

꽃을 보러 나오세요.

열 가지, 백 가지의 꽃을 보러 나오세요. 모든 꽃이 이 세상 유일한 꽃의 의미로 피어나는 절대의 숭고와 충실을 배우러 나오세요. 그 환희를 배우러 나오세요. 위로 위로 솟구치는 소망을 배우러 나오세요.

꽃을 보러 나오세요.

꽃의 언니들인 보리밭을 보러 나오세요. 삼월엔 땅 속에 벌여 놓던 초록빛 잔칫상을 오늘은 땅 위로 들고 나왔군요. 2월엔 어둠 속의 진통을 견뎌낸 그 갸륵한 것, 설한 雪寒 섣달엔 희미한 꿈이었던 그 눈물겨운 것.

보리밭을 보러 나오세요.

빛과 대기 속에 펼쳐지는 신록의 성찬식 聖餐式 에 참석하세요. 보리가 펴 놓게 될 순서들을 살펴보세요. 영글어서 곡식이 되고 타작마당을 거쳐 나와선 백설 같은 가루로 빻아져 떡과 술과 온갖 것이 되어서 많은 이를 먹이게 될 그 차례들을.

풀잎들을 보아 두세요.

얼음을 뚫어내고, 돌과 아스팔트마저 뚫어내고, 송곳처럼 디밀어 오르는 무시무시한 모가지들을. 어떻게 그 단단한 것을 뚫어내고 땅 위에까지 나올 수 있었나요.

당신은 믿고 계시겠지요.

도시의 봄 경치 속에서도 새싹들이 얼음과 돌과 아스팔트를 뚫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믿으시겠지요. 해빙의 낙수물이 기왓골을 타고 흐르며 그러한 몇 십 몇 백 년의 세월 사이에 마침내 동그맣게 섬돌이 패이고 있는 그 사실을.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꽃을 불러내는 바람을 만나러 나오세요. 피리 구멍으로 숨결을 디밀어 넣어 구슬 울리는 오묘한 가락을 뽑아내는 바람은 마술사랍니다. 사월의 바람을 만나러 나오세요.

사월이다, 사월이다라고 외쳐 보세요.

자신의 내부에 굳게 닫아 두었던 문들을 열고 존재의 골짜기들을 향해 사월이다 사월이다라고 외쳐 보세요. 사월이다 사월이다라고 산울림 돌아 나오게 해 보세요.

사월의 함성을 들어 보세요.

눈 감고 귀 기울이면 영혼이 율연 慄然 해지도록 아름답고 장한 사월의 함성이 들릴 거예요. 이 세상에서 제일로 깨끗한 젊은이의 함성이 뜨겁고 끈적끈적한 피에 섞여 와아~ 와아~ 울려옴을 들을 거예요.

당신은 견뎌낼 수가 있을는지.

목청껏 울어 버리지 않고 참아낼 수가 있을는지. 이십 년 전의 우리 젊은이들이 외치던 4.19 의 함성, 3.1 만세처럼 폐부 속에서 터져 나왔던 정의의 함성, 인권의 함성이 펄펄 끓는 열탕으로 지금도 와아~ 와아~  울려옴을 들을 거예요.

사월의 강가에 나오세요.

아직도 위판은 살얼음인데 그 밑을 흐르는 물 소리를 들어 보세요.

졸, 졸, 졸, 실타래 풀리듯이 끊이지 않는 봄 시냇물 소리를 들어 보세요. 서럽게 허전하던 모든 날에 꼭 들리던 그 개울물 소리가 아닌가요.

물의 시원 始原 을 생각하세요. 삼국유사 때부터, 단군신화 때부터 흐르던 물 소리. 선사시대 때부터 흐르던 물 소리. 조상의 조상처럼 늙고 지혜로운 물을 생각하세요.

불을 생각하세요.

태초의 날, 처음으로 일궈지던 성화 聖火 를 생각하세요. 지존하신 여왕을 사모하여 그 몸을 불태운 지귀 至貴 의 불과, 불타서 새하얗게 잿가루가 되어 버린 열 아홉 살의 쟌다르크를 생각하세요.

불을 생각하세요.

불의 상징인 온갖 신성한 것, 온갖 진실한 것, 순애 殉愛 와 순국 殉國 을 생각하세요. 육체를 불사르어 영혼에 기름 따르던 이 나라의 순교사를 생각하세요.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바위 살갗에 눈 트는 이끼, 진홍과 순백의 꽃들, 햇솜처럼 깔리는 봄 아지랑이, 꿈꾸는 연분홍의 조가비들을 생각하세요. 먼 데서 날아오는 새떼를 생각하세요. 훨 훨 훨 날아오는 빛부신 날개짓을 생각하세요.

땅 속에 뿌려지는 곡식들, 채소와 과일, 꽃씨며 갖가지 구근들…

사월엔 노동하세요.

심고 가꾸고 땀 흘리는 영광을 맛보세요.

나무 옆에 서세요. 주루룩 주루룩 속의 땀처럼 하얀 수액이 흘러 내리는 나무의 생리를 느껴 보세요. 사람의 몸 속에 피가 순환하듯이 나무들의 몸 속에도 수액이 돌아 퍼짐을 느껴 보세요.

거친 나무 등걸에 귀를 대면 똑딱 똑딱 시계 초침 소리를 내는 생명의 맥동, 생명의 울림을 들으세요.

사월엔 편지를 쓰세요.

두고 온 고향에도 편지를 날려 보내세요. 객지의 봄이 찬란하다 해도 어머니의 품과는 다른 점을 말해 보내세요.

사월에 편지를 쓰세요. 말할 기회를 미루기만 했던 사랑의 고백을 적어 보내세요.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이후에도 언제까지나 사랑하리라고 말하세요.

사랑만은 뉘우칠 수 없다고, 그 한 마디 말해 버리세요. 재회의 약속, 방문의 일정을 적어 보내세요. 아아 사월엔 사랑의 편지를 쓰세요.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사월의 보석더미 옆에 서세요.

바라봄으로써만 기꺼운 일, 그렇게 욕심 없는 우리들의 꿈, 소박한 소유.

 

사월의 찬미가를 부르세요.

그리고 사월엔 교회를 찾으세요. 제단엔 성촉 聖燭 을 밝히고 신도들이 기도하고 있으리니.

사월엔 교회에 나가세요.

하나님이 땅에 내려와 사람 손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다시 하늘에 오르시는 예수 부활에 참여하세요.

부활절의 기도를 드리세요. 복받치는 통곡으로 당신도 크게 한번 울음 우세요. 영생의 증거를 눈으로 보면서 주의 기적을 심령의 전부로 신앙하세요.

기뻐하세요. 기뻐하세요. 기뻐하세요.

사월의 보석을 캐러 나오세요.

 

만화, 민족의 비극 표지, 1961

‘민족의 비극’, 1962년 1월..  내가 55년 전에 ‘탈고 脫稿’한 50여 페이지의 ‘먹물로 그린’ 만화 漫畵 의 제목이다. 그러니까 서울 중앙중학교 2학년 시절 1961년에 그렸던 ‘자작 自作 만화’ 인 셈인데 이것이 거의 기적적으로 그것도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이것은 나에게는 ‘가보 家寶’에 상당하는, 돈을 주고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개인 역사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지금 이 만화 책의 ‘외형적, 물리적’ 상태는 그렇게 양호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신경을 안 쓰고 조금 험하게 다루면 망가질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자주 만지지도 않고 ‘신주단지’ 모시듯 모셔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나이에 더 이상 이런 상태로 모셔둘 수가 없어서 결단을 내려서 fully digitized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당시에 그렇게 ‘희귀’했던 stapler, 현재 몇 불 弗이면  살 수 있는 그것을 구할 수가 없어서 나는 역시 전통적인 공구였던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동네가게에서 가는 철사를 사다가 이 책을 엮었다. 그것이 현재 그대로 남아있는데.. 문제는 이 homemade staple에 손을 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1961년 경 서울 가회동 잡화상(철물도 취급하는)에서 산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true antique value가 있는 것, 돈을 주고 어디에서도 살 수 가 없는 것이니.. 쉽게 바꾸거나 손을 대는 것이 망설여진다.

우선 몇 page를 scanner에 책갈피를 강제로 펴서 scan을 해 보았다. 역시 보기가 안 좋다. 하지만 그것이라도 이렇게 55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보았다는데 만족감을 느낀다. 당시 이 만화를 ‘애독’ 해 주었던 몇몇 원서동 苑西洞 죽마고우 竹馬故友 (안명성, 유지호, 김동만 등등) 이 자신들이 직, 간접적으로 관계가 되었던 역사를 재발견하게 되면 감개가 무량할 것이라 믿는다.

이 만화의 그림 technique을 보면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그것들은 거의 99%가 당시 만화계의 영웅 ‘산호‘ (선생님)의 bestseller 우리의 영웅 ‘만화 라이파이‘를 비롯한 다른 ‘전쟁, 역사 물’에서 온 것이다. 24시간을 그런 그림을 보며 살았던 당시에 그것을 흉내 내어 그린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랑스런 일이었다. 문제는 그런 것을 거의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까지 그렸으니.. ‘공부, 공부, 입시’ 지옥이었던 당시, 우리 집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이고 결국은 이 만화가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내가 정말 심혈을 기울여 그렸던 만화가 이 만화 바로 전에 완성이 되었는데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없어졌고 나중에 알고 보니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을 알았다. 어머님의 지나친 간섭이었지만…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서 항변을 할  수 없었다. ‘굶어 죽는 만화가’가 될 것으로 염려가 되셨다는 것을 어린 나이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없어진 그 만화, 나에게는 아련한 아쉬운 추억으로 남았다. 그 없어진 만화작품의 그림 기법, story 같은 것이 나의 머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저 어린 나이에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날랐던  그 만화시절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고 싶지 않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만화책을 완전히 ‘해체’해서 full scanning을 한 후에 pdf book format 으로 바꾸는 것이고 그것이 완성 되면 나의 serony.com blog에 ‘영구히’ 남길 것이다.

 

 

Still, I'm dreaming of white.. in my old dream

Still, I’m dreaming of white.. in my old dream

¶  El Niño Christmas Holidays   한 마디로 ‘따뜻한 성탄절’을 말한다. 지나간 몇 년간 이곳 지역은 아주 추운 겨울을 경험했지만, 그런 weather system이  Northeast지방(I-95 corridors, New York, Boston)에서는 물러가는 모양으로 National news 에서는 온통 ‘따뜻한 겨울’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5년간은 이 지역에서는 희귀한 white Christmas도 보았고 고드름과 폭설 같은 ‘북방’에서만 볼 수 있던 것도 보았던 세월이어서 사실 holiday의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는 있었다. Northeast 지방에서 그런 기후 pattern이 서서히 물러가는 모양으로, 이것이 ‘엘 니뇨‘ 현상이고 하는지 (따뜻한 태평양 수온), 앞으로 몇 년간은 그쪽 지방은 다시 비교적 조용하고 ‘따뜻한’ 성탄절이 되는가 보다. 우리가 사는 Southeast지방은 3개월 장기예보가 ‘wetter, cooler’ 라고 나와서 겨울이 가기 전에 눈(雪)같은 것을 기대해 볼만하지만  이번 성탄절을 즈음한 날씨는 ‘wet, very warm’이라고 예보가 되어서.. 미리 심리적으로 ‘white Christmas는 물 건너 갔다’ 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Advent, advent.. waiting & waiting .. with 4 candles

Advent, advent.. waiting & waiting .. with 4 candles

 

¶  Advent spirits, 2015   나의 전통적인 12월은 한마디로 Charles Dickens 의 classic  A Christmas Carol 에 나오는  Christmas Past 라고 할 것이다. 평소에도 “현재보다는 과거”를 더 많이 생각하면 사는 나에게 12월이 되면 어떨 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감상적 늪에 빠지기도 한다. 설상가상 雪上加霜으로 나이가 ‘고령 高齡’으로 접어들면서는 나이를 더 먹게 되는 년 말이 되면 더욱 축~ 쳐지고, 우울해지기도 하는 괴로운 시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비정상’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분명히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아서, 나의 감정이나 느낌을 남에게 보이기도 싫었다. 한마디로.. 결국 12월은 심지어 즐겁지 않았던 season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서서히, 천천히’ 나는 이런 ‘bad trap’ 에서 벗어나기 시작해서 올해는 현재까지 중에 ‘최고’의 spirit을 찾게 되었다. 그러니까.. Christmas present를 찾게 된 것이다. 거의 “기적”과 같은 이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참 인생이란 오묘하기만 하다.  

예전에 비해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 중에는: (1) Holiday decoration은 빨라도 12월 20일 이후에 하고, (2) Christmas carols, movies 같은 것도 그 이후에 즐기고.., (3) 가급적 holiday shopping같은 것을 피하고 정 필요하면 딱 하루 날을 잡아서 하고, (4) 진정한 성탄 holiday는 12월 25일에 시작이 되어, 다음 해 1월 5일 (12 Days of Christmas) 이후까지 지속된다. 작년에 이런 것들을 부분적으로 단행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나 뒤 느낌이 좋았다. 올해는 ‘모두’ 실천을 해 볼 계획으로 오늘까지 Christmas tree 장식 같은 것을 hold해 오고, carol이나 movie같은 것도 안 듣고, 안 보고 있다. 어떨까? 이것은 사실 ‘교회’에서 오랫동안 권장해 오고 있는 것들이지만.. 이제야 그 참 의도를 알 듯한 것이다.

과거에 성탄 전날까지 요란법석 시끌벅적 하다가 성탄 아침에 무섭게 선물을 나누어 뜯어 ‘버리고’, 거의 거짓말 같이 ‘모든 것’이 끝나던 정말 괴상한 풍습..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보냈을까.. 성탄 씨즌이 성탄절부터 시작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어떻게 그렇게 외면하며 살았는지.  좌우지간 이러한 것이 그런대로 진정한 ‘대림절의 정신’일 듯하다.

 

¶  염경자 누나   바로 얼마 전에, 나의 2011년  blog post: ‘가회동의 추억‘에 누가 찾아와 댓 글 comment를 올려 놓았다. 알고 보니 그 ‘사연’은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고 꽤 놀라기도 했다. California (LA area)에 사시는 나와 같은 재동국민학교 졸업, 6년 정도 후배, 송요한 씨가 그 주인공인데, 오래 전 가회동에 같이 살았기에 나의 글을 찾았고 본 듯하다. 게다가 레지오 단장을 역임한 같은 천주교 교우.. 그러니까 송요한 형제님, 얼마나 반가운 사실인가?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가회동 내가 살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을 곳에 사셨던 듯하지만 내가 더욱 놀란 것은 내가 살던 ‘주인’ 집의 ‘미인중의 미인‘, 막내 따님 염경자 누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참, 인연도 묘한 것이.. 송형제의 wife와 염경자 누나가 같은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이라고 하며 그것도 같은 지역에 사신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연관이 될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희미하게 알고만 있던 ‘주인집’ 소식을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흠뻑 젖었던 그 당시의 한 가족들을 찾은 것이다. 이것으로 tiny blog의 ‘무서운 위력’을 다시 실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추억과 기억이 변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런 것을 나눌 수 있는 ‘인연의 사람’들을 다시 찾는 것은 오래 산 보람이라고 할 것이다.

김용기, 형.. 형은 내가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형이 경기고 2학년 때, 그러니까 1959년 봄, 우리 집에서 처음 만났다. 참 오래 전이었다. 6학년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용기형을 집으로 데려 온 것이고, 그날부터 나는 용기형과 함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용기형은 그날부터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나의 학교 공부를 도와주는 나의 방문 가정교사가 된 셈이다. 그런 단순한 인연으로 만났던 용기형은 사실 그 후로 우리 가족에게도 거의 친척이상으로 가끔씩 왕래를 하며 지냈다. 우리들이 용기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66년 내가 연세대에 입학한 해였다. 그 후로는 완전히 소식이 끊어져서 우리 집에는 거의 ‘전설적’ 인물로 인상이 남게 되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가정교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았다. 대부분 방문, 입주 가정교사들은 대학생들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기형은 불과 고등학교 2학년 생이었지만, 우선 내가 국민학생이기 때문에 큰 무리가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대한민국의 제일 명문고교인 경기고등학교엘 다니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용기형에게도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형의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고학생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사정이 그렇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왜 어머님이 그렇게까지 나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주셨는지는, 사실 그 당시 나의 학교 성적이 중하위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5학년까지는 그런대로 나를 지켜보다가 6학년이 되고, 중학교 입시를 치러야 할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점점 더 심해졌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입시지옥’이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한창 놀기에 바쁜 그 시절이었지만 어찌 우리들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까? 하지만 어머님이 나의 공부를 돌보아 주기에는 너무나 바쁘시고, 누나도 사실 공부에 큰 관심이 없어서 우리 집은 나에게 공부를 분위기를 주질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도, 주위의 ‘놀고 싶은’ 유혹에서 항상 벗어나질 못했고, 그것이 ‘시험위주’의 성적제도에서 항상 중 하위에 머물게 한 것이다. 용기형이 매일 방문 가정교사로 오면서 부터, 바로 옆에 ‘어린 선생님’이 붙어 있으니, 밖으로 뛰어나가 놀고 싶은 유혹에서 비교적 쉽게 벗어날 수 있었고, 곧바로 ‘공부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노력을 한 만큼 결과가 온다’ 라는 간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공부한 만큼 성적이 오르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 몇 시간은 꼭 용기형과 같이 앉아서 공부를 하니 결과가 안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의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고 나라가 조금씩 안정되던 그 당시부터 과외공부라는 것이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조직적이고 상업적인 학원 같은 것은 거의 없던 시절.. 하지만 나같이 개인적인 과외공부보다는 과외선생님 댁에 단체로 모여서 공부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예외적으로 행운아였을지도 모른다. 방과 후에 골목에서 뛰어 놀던 즐거움은 조금 없어졌지만, 용기형과 둘이서 그날 학교공부를 복습하며, 다음날 공부를 예습하는 것은 점점 즐거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거의 그 다음날 시험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6학년, 특히 우리 ‘박양신 사단’ 1반은 가히 시험 전쟁터의 현장을 방불케 해서, 다른 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하루 ‘종일’ 시험의 연속이었는데, 아침 첫 시간부터 시험을 보곤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시험에 의해서 곧 좌석의 배치가 바뀌는, 가히 시험 지옥이었던 것인데, 이것은 우리 반 담임 ‘박양신’ 선생님만의 방식이었고 다른 반에서는 이런 방식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니까 박양신 선생님의 ‘수험의 신’, 에 가까운 선생님이었고, 그렇게 일년 내내 우리는 단련을 받았다.

그 당시 이미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대강 일류,이류, 삼류 등으로 ‘일본식’ 등급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지만)이 형성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학교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고려대 등이고, 고등학교는 경기고,경기여고, 서울고, 이화여고,숙명여고, 경복고,용산고 같이 거의 서울에 있는 학교들이고, 지방에서도 경북, 경남, 대전, 광주일고 등과 같은 일류들도 있었다. 어떻게 이 같은 학교들이 일류로 평가가 되었는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고교는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정도를 보면 될 것이고, 대학교는 취직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민학교도 분명히 이런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일류 중 고교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된다. 하지만 국민학교는 아직까지 별로 등급이 형성되지 않았다. 예외는 덕수 국민학교와 수송, 혜화국민학교였다. 어떻게 이 학교가 그 시기에 이미 일류로 되었는지 과정은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서 ‘부자 집’ 자녀들이 많이 이곳을 다니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돈을 따라서 ‘좋은 선생님들, 수험의 신’ 들이 그곳에서 가르쳤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들이 일류 중 고교에 입학하는 것을 보면 가히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배경에서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는 어땠는가? 일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바로 밑을 맴돌고 있었고, 수험의 신 박양신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일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박양신 선생님이 재동국민학교를 1류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졸업하고 몇 년 뒤에는 정말로 일류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학기 초에 성적이 딱 중간 밑을 맴돌았는데, 용기형과 같이 공부하면서 서서히 오르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거의 10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반에서 자리를 분단 별로 앉게 되는데 이것이 완전히 성적에 의한 배치였다. 1분단은 거의 10등까지 앉고, 다음의 20등까지는 2분단에 앉는 그런 ‘잔인’한 배치였다. 게다가 1분은 딱 가운데 앉혀서 남들이 ‘우러러’ 보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의 잠재적인 심리적 효과를 누가 알겠는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자리의 변동이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시험에 의한 성적이 그렇게 자주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용기형은 나와 ‘궁합’ 이 잘 맞아서, 제일 큰 목적이었던 나의 학교 성적이 오르고 해서, 우리 집에서는 아주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형을 아주 친척같이 따뜻하게 대하곤 했다. 용기형은 절대로 얌전한 학생은 아니었다. 깡패와 같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정도의 ‘깡’은 가진 학생이었다. 용기형이 학교에서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닌 것이 ‘대’ 경기고 학생이니까 그것 만으로 문제가 없었던 것이고, 이때 내가 배운 것은 공부뿐이 아니고, 사실은 조그만 교훈, 모든 일의 결과는 운이나 배경만큼, 노력에도 많이 좌우된다는 간단한 진리였고, 이것은 나중에 내가 사는데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같이 공부하면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기억에는, ‘선거권, 피선거권 논쟁‘, 그것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며 이런 한자로 된 어려운 정치용어로 용기형과 싸운 것이다. 나는 분명히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했는데, 용기형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논쟁이었는데, 누가 보아도 이것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잘못 기억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논쟁’ 자체가 재미 있어서 내 고집대로 밀어 붙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용기형의 ‘깡’을 몰랐기에 계속 ‘똥’ 고집을 부렸다. 결국에는 용기형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자기를 무시 본다는 것이었고, 나에게 따귀를 계속 올려 붙였다. 그 당시는 학교에서도 잘못하면 따귀를 맞는 것은 흔했지만, 가정교사에게 따귀를 맞는 것은 절대적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내가 자기의 ‘고객, 학생’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던 것 같았다. 나도 기가 막혔지만 이것을 집에다 ‘일러’ 바칠 수도 없었다. 그랬으면 그날로 용기형과의 공부는 끝장이 났을 것이고, 사실 관계도 끊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그냥 조용히 잊고 지나서 말썽은 없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용기형은 미안하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아서 더욱 아쉬운 기억이다.

 나의 성적은 계속 1분단의 ‘제일그룹’ 을 유지했지만, 사실 나의 성적은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거의 1~2등까지도 하는가 하면 갑자기 10위로 밀려나는 등 그런 식이었다. 이런 상태로 중학입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용기형은 경복이나 서울 중학교에 응시하라고 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아주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도 사실 ‘모험’을 하는 것이 싫었다. 안전한 것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립 중앙중학교에서 무시험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그리로 가버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원의 반 정도를 졸업성적만으로 뽑던 제도가 있었다. 시험 지옥에서 쉽게 벗어난 것만 해도 나는 너무 기뻤다. 하지만 역시 용기형이나, 어머니는 두고두고 불만이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내가 속했던 1분단의 다른 녀석들이 대거로 경기, 서울,경복중학교에 합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 자신은 후회가 없었다. 재수를 할 가능성보다는 조금은 안전한 것이 편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중학교 입시에 재수생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용기형은 가끔 놀러 왔고 고궁 같은 곳에도 같이 가족과 놀러 가기도 했다. 중학교에서 나의 성적이 좋아서 용기형도 안심하는 듯 했다. 어떨 때는 어머니가 용기형에게 나를 데리고 영화를 보게도 했는데, 그런 시간들이 나는 너무도 즐거웠다. 나에게 형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용기형과 대한극장에서 ‘백사의 결별‘ 이라는 요란한 제목의 미국 영화를 보았는데,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과 데보라 카(Deborah Kerr)주연의 2차 대전 영화였는데,그 것을 보면서 내가 하도 형에게 질문을 해서 조용 하라고 핀잔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용기형을 따라서 경기고교 강당에서 프랑스의 영화,”장 가방(Jean Gavin)” 주연의 ‘잔발잔(Jean Valjean)’을 같이 보았는데,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정말 부자여서 없는 것이 없었고, 심지어 극장수준의 영사기까지 갖추고, 가끔 영화, 그것도 외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용기형은 내가 중학교 2학년(1961년) 때, 경기고를 졸업하고 대학엘 갔는데, 예상을 뒤엎고 서울대가 아닌 고려대엘 갔다. 왜냐하면 경기고생은 거의 서울대를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그 이듬해 연세대 정외과로 편입을 했는데, 사실 편입이었는지 아니면 새로 신입생으로 입학을 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어렴풋이 형이 대입준비를 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게 되어서, 두고두고 나중에 내가 대입 준비할 때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의 입시 문화는 거의 100% 일본식이었을 것이다. 입시준비 잡지도 있었는데, 용기형 시절에는 ‘향학‘ 이란 국내 유일의 입시준비 잡지가 있어서 나도 옆에서 훔쳐보기도 했다. 그때 느낀 것이 대학입시라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정말 ‘전쟁’이었다. 몇 년 뒤에 그 잡지는 없어지고, 새로 ‘진학‘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고3때 나왔다.

 그러다가 내가 중앙중학교 3학년(1962년)이 되고, 고교 입시가 다가 왔을 때, 어머니는 다시 용기형을 부르셨다. 나의 학교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야 말로 ‘일류’ 고등학교로 가기를 원하신 것이다.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다시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3년 전과는 아주 달랐다. 용기형은 이미 대학생(연세대 정외과)이 되었고, 나도 이미 꼬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과 같은 열기는 사라진 것 같고 공부에 불이 붙지를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안전’하게 본교로 진학하기로 결정을 해 버렸다. 이런 나의 결정은 후에도 별로 후회를 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사학의 명문 중앙에 정이 흠뻑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용기형과 의 왕래는 가끔이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용기형은 언제나 자신의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외교관의 꿈인 프랑스 파리에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해도 외교 계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입김이 강했다. 꿈이 있고 계속 좇으면 언젠가는 이루어 진다고 믿었다. 우리는 모두 믿었다.언젠가는 유명한 국제적인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요새로 말하면 반기문 같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잠시나마 용기형이 우리 집에 입주해서 나를 가르치던 시기가 있었다. 기억에 아주 짧았던 기간이었지만, 나와 같이 자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용기형은 ‘가르치는’ 데는 이미 김이 빠져있었다. 별로 열기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공부보다는 인생공부를 많이 한 셈이었다. 나는 몰랐지만 그 당시 용기형은 연세대에서 데모를 주동하는 ‘정치 학생’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연세대에 입학을 하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만나겠구나 생각을 했지만 용기형은 그곳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용기형은 우리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그 이후 항상 ‘얘, 혹시 용기가 죽은 것 아닐까?’ 하시곤 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셨는지는 이유를 모른다. 그리고 세월은 아주 길게도 흘렀고, 1999년 초쯤에 인터넷의 Yahoo! 같은 search engine과 학교 동창회의 website등을 통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용기형을 찾아 보게 되었다. 운이 좋게 연세대 동창회에서 용기형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고, 전호번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개인정보’에 대한 보안이 심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이다. 곧바로 어머님께서 그 전화번호로 용기형과 이야기까지 하셨다. 전화번호는 한국산업정보센터 라는 곳이고 용기형은 그곳에서 고문으로 일을 하셨다. 나와는 곧 바로 email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사실, 나도 어머님과 같이 용기형이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을 하던 참에 소식을 들은 것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고, 옛날의 추억들이 밀물처럼 나를 덮쳤다.

 email에 있는 사연은 간략하지만 그것으로 대강 용기형의 ‘일생’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60년대 중반에 데모주동으로 몰려서, 군대로 ‘끌려’ 갔고, 복학 후에는 그런대로 ‘조용히’ 직장생활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프랑스, 파리의 외교관이 되는 꿈은 접은 듯 했다. 용기형 말씀이, 그런 꿈들을 이루지 못해서 연락을 계속 미루었다고, 참 순진한 말을 곁들였다. 고시공부, 동아일보 입사, 국세청 장기 근무, 대경기계 창업, 한국산업정보센터 고문 등으로 이어지고 결혼을 해서 딸, 아들을 두었는데, 따님은 결혼을 해서 미국 LA에 살고, 작은 아들은 그 당시 (1999년)에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기형의 부인과도 잠깐 전화로 인사를 드렸는데, 까마득한 옛날에 ‘가르쳤던 제자’라고 알고 계셨다.

 하지만 세월의 횡포는 그렇게 그립던 생각을 곱게 보지 않았다. 너무나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 약속을 한 모양이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나에게도 다시 연락을 주지 않았다. 우리가 용기형을 생각하고 안부를 걱정한 것과 같은 정도의 생각을 우리는 용기형으로부터 느낄 기회조차 없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세월의 장난일 것이고,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추억으로 남겨놓을 것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다. 연락이 된 후 10여 년이 또 흘렀으니, 용기형도 나이가 거의 70세로 육박을 하지 않았을까? 부디 건강한 후년을 즐기는 용기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

 

Albert Einstein

Albert Einstein

빛의 속도에 대한 논란: 이 우주에서 제일 빠른 속도는 ‘이론적’으로 정해져 있다. 바로 빛의 속도인 것이고 변치 않는 상수(常數) c 로 표시된다. 이것은 고등학교 물리시간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 을 통해서 배운다. 이것을 배울 때, 대부분은 담담히 받아 들인다. 어찌 의문을 제기할 수가? 상대는 ‘상대성 원리의 천재, 아인슈타인’ 인데.. 말 잘못 했다가는 물리 선생으로부터 면박이나 당할 것이다. 이 우주에서, 어떤 물체가 아무리 빨라도 빛을 따를 수가 없다고 하고 그의 상대성 이론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성립이 되었다. 그리고 100여 년 동안 그의 이론은 실제와 거의 맞아 떨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거의’라는 단서인데, 100% 증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빛의 속도도 마찬 가지다. 만의 일이라도 어떤 것이 빛 보다 빠르다고 판정이 되면: 그것은 판정이 잘 못 되었거나, 상대성 이론이 ‘허구’일 수도 있다는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6개월 이상 실험 끝에 어떤 ‘입자,neutrino‘가 빛 보다 60 ns(nano-second, 1/1000,000,000초) 빠른 것을 발견한 것이다. 대부분은 ‘우선’ 이 실험에 결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실험자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문제는 60ns이면 실험 오차치고는 상당한 오차인 것이고, 그들의 실험이 그렇게 허술했나 하는 것이다. 100여 년 동안 우리의 ‘삶의 철학’ 까지 바꾸어 놓았던 ‘상대성 이론’ 도 조금씩 무너지나.. 그 다음은 어떤 것이 나오려나.. 100년 마다 이렇게 큰 이론의 변화가 나오면 1000,000년 뒤에는 어떨까? 이래서 인간이다. 인간은 역시 신이 아닌 것이다.

 

이성복을 찾았다! 일년도 넘는 비교적 오래된 나의 blog <누가 이성복을 보았는가?> 라는 나의 외침에 대한 답이 온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Google’s indexing power의 위력을 실감한다. 비약적인 생각으로, 우리가 보는 우주 전체를 포함한 하느님의 성역 전부를 indexing할 날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어느 것이 이길까? 하느님, 아니면 Google’s Datacenter? 좌우지간.. 나의 ‘도박’은 일단 성공한 것이다. 이성복의 comment에 의하면, 성복이의 아우가 이 blog을 보게 되어서 나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성복이가 만든 navor blog 을 보게 되었다. 나의 예상을 뒤엎고, 완전히 ‘국어학 박사’ 급의 글들로 가득.. 거기다 저서가 다섯 권씩이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제목을 보니: <한국어: 맛이 나는 쉬운 문장>, <논리적인 글의 요건>, <논문 맵시 내기>, <마침한 말 바른 표기>, <틀리기 쉬운 맞춤법> 등등.. 

이 녀석, 분명히 고대 농대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한)국어학 박사가 되었단 말인가?이 녀석, 요새 흔치 않은 호까지 있다. “조탁(彫琢) 이성복”, 와~~ 근사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조탁’이란 호는 어떤 뜻인가? 새길 조에, 쫄 탁? 암만 생각해도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 이렇게 ‘살아 있는 이성복’을 ‘만나게’ 되었는데.. 현재 나의 의문, 어떻게 농대출신이 국어학박사, 저자가 되었나? 곧 의문은 풀릴 것이지만,그래도 궁금하다. 5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왜 동창회 연락처에 이 친구가 빠져 있었을까? 이런 의문도 곧 풀릴 것이다.

 

가회동.. 이 이름만 들어도 나는 너무나 진한 추억의 감정에 눌려버린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대부분을 가회동이 만들어 주었다. 나의 개인 역사에서, 유치하지만 순진하고 희망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찾던 시절..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조국의 현실도 가식 없는 눈으로 지켜 보았던 시절들이었다.

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나는 정면의 본관 건물의 바로 뒷쪽에서 살았다

 

나는 1956년 가을부터 1963년 봄까지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뒷문 쪽에서 살았다. 학년으로 치면 재동국민학교 4학년 2학기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그곳은 재동과 가회동의 경계선 쯤이었을 것이다. 재동과 가회동은 남북 신작로로 연결이 되어있어서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의 가회동 ‘한옥 촌’이라는 곳이 나오고, 내려 가게 되면 재동으로 이어지면서 창덕여학교를 만나고 다시 가로지르는 더 큰 길을 만난다. 그 당시에는 그 길의 이름들이 없었고, 그저 모두 ‘행길, 한길, 신작로’ 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아마도 율곡로 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자신은 없다.

 우리 집의 본적이 종로구 재동 80번지라서 나는 그곳에 산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본적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짐작을 하긴 했다. 그 전에 우리는 원서동에서 살았는데 사실 그곳이 내가 기억하는 제일 오래된 동네다. 아버지가 육이오 동란 초에 납북이 되시고 누나, 어머니와 정말 험난한 전후 시절을 원서동에서 시작을 한 것이다. 이북(원산) 여자였던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강인한 생활력을 발휘하셔서 원서동에 아주 작은 집까지도 사셨는데, 그것이 도시계획으로 철거를 당하게 되어서 가회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결국 후에 원서동의 “우리 집”은 정말로 철거되고 그 위에는 대로가 생겨서 작았지만 추억이 아롱졌던 집은, 그전까지 원서동을 따라 흐르던 개천이 전부 자취를 감추고 덩그러니 길로 변해버렸다.

놀러온 원서동 친구들 안명성, 김천일과 1962년 2월

놀러온 원서동 친구들 안명성, 김천일과 1962년 2월

원서동 죽마고우들:  새로 이사를 오니까 원서동에서 잔뼈가 같이 굵었던 코흘리개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새로운 곳에 금새 적응이 되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동네친구들을 사귀는 데는 그런 성격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원서동의 친구들은 시간만 나면 ‘장거리 원정’을 오듯이 놀러 오곤 했는데, 그 당시 원서동의 ‘죽마고우’ 친구들; 유지호, 손용현, 박창희, 안명성, 김동만, 최승철, 김천일.. 그 외에도 참 많았다. 우리가 이사온 집은 골목 깊숙이 위치한 아담한 2층 양옥이었는데, 말이 양옥이지 사실은 전통적인 한옥이 아니라는 뜻이고,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일본식 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정도로 ‘기둥들이 약하게’ 보이던 집이었다. 2층집과 1층집이 같이 직각으로 붙어 있어서 두 집에 살기에는 아주 좋았고, 화단이 있는 그런대로 커다란(그 당시 나의 눈에는) 마당까지 있었다. 우리는 1층의 방 두 개에 부엌이 딸린 ‘사랑채’에 살게 되었다.

 

원서동 죽마고우 최승철과, 가회동 1960

원서동 죽마고우 최승철과, 가회동 1960

재동학교:집에서는 재동국민학교 4층 건물의 뒷면 거대한 모습으로 보였고, 집 골목이 재동학교 강당을 끼고 있었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그러니까, 이사오면서 제일 신났던 것은 학교 가는 시간이 5분도 걸리지 않았던 사실이다. 전에 살던 원서동에서 등교할 때는 그때 어린 나이의 걸음으로 30분은 넘어 걸렸을 것에 비교하면 이건 정말 ‘천국’에 사는 기분이었다. 나는 꿈도 못 꿨지만, 그 동네에 사는 어떤 ‘잘살던’ 아이들은 숫제 점심시간에 집에서 식모들에 의해서 학교 교실까지 배달된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즐길 정도였다.

 

함경도 출신 주인집 염씨 가족:  이사온 집의 주인은 함경도 출신, 그러니까 아마도 육이오 동란 때 피난을 온 집일지도 모르는 나이가 있으신 부모님과 시집간 딸, 고등학생 딸,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가족이었다. 주인 어르신의 성함은 아직도 기억을 한다. 염영혁 선생님, 그 당시는 ‘거의’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환갑 정도를 갓 넘기셨을 정도였지 않았을까? 외 아드님은 훤칠한 키의 호남형, 염철호 형이었다. 중앙대를 졸업했다고 들었고, 아이들과 잘 놀아줄 수 있는 그런 쾌활한 미혼 청년이었는데, 대학시절 농구선수였다고 했다. 염철호 형은 나중에 결국은 농구 계로 투신을 해서 방송국에서 농구경기 해설자로 활약을 함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형의 소식을 아주 짧게 들었는데, 나이도 많이 드시고, 부인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정말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 주는 소식이었다.
작은 따님, 염경자 누나는 그 당시 거의 졸업반의 여고생이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아주 얼굴이 예뻤다. 얼마 뒤에 이화여대를 갔는데, 그 당시 최고로 경쟁이 높았던 영문과에 지망을 했는데, 애석하게 제2지망이었던 사회사업학과에 합격을 했다. 하지만 영어를 아주 잘했고, 한때는 어떤 미군을 집으로 데려와서 영어강습을 받기도 했는데, 영어실력과 뛰어난 미모로 역시 나중에, 그 당시 최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항공사 스튜어디스가 되었다.
큰 따님은 그 당시 이미 갓난 딸 둘 (주경아주동원)이 있었는데 남편은 그 당시 육군 대위였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놀러 오면 갑자기 집이 떠들썩 해지곤 했다. 나는 특히 그 대위 아저씨를 좋아했는데, 아주 서글서글하고 친절한 ‘군인 장교’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이 주인집은 함경도에서 오셨는데, 친척들이 근처에 계셨고, 그 중에는 나와 재동국민학교 동창인 ‘황석기’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조금 이상했던 것은 이 주인집이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하는 사실이다. 아무도 바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가지고 있던 돈이 상당히 많았던 것일까?

중앙중학교 뒷산 멀리에 보이는 말바위

중앙중학교 뒷산 멀리에 보이는 말바위

 삼청공원 말바위: 이 집이 있던 골목이 그때부터 나의 천국이 되었고, 꿈 많던 소년시절의 주옥 같은 많은 추억이 이곳에서 형성이 되어 이제까지도 내 추억의 바탕이 되었다. 시대적으로 보아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사일구를 거쳐 오일육으로 박정희 대통령까지 이어졌고,학교 학년으로는 재동국민학교 4학년으로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까지였다. 거리적으로 이 학교들은 정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삼청공원북악산이 있었는데, 이곳들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사시사철 자주 놀러 가던 곳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말바위‘라는 곳은 북악산 중턱에 위치한 곳으로 우리들이 좋아하던 곳이었고, 우리들이 발견한 아주 작았던 비밀의 바위, ‘늑대바위‘도 우리들이 전쟁놀이 할 때마다 찾던 꿈의 거처였다..

가회동 성당: 가회동 큰 길에 나가면 재동학교 주변으로 많은 만화가게들이 즐비했고 그 곳들은 우리들의 꿈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삼청동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가회동 파출소가 있었고, 그 옆에는 가회동 성당이 있었다. 나는 지금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그 어린 시절에 내가 본 성당의 인상은 그리 편한 곳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 입구부터 ‘무섭게 보이는 외국인 성인’들 석고상들의 모습이 으스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동네마다 많이 있던 개신교 ‘예배당’은 친근한 인상이었고,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천주교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지 확실치 않았다. 그 정도로 대부분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가회동 부자들: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그때부터 으리으리하게 우람한 기둥을 자랑하는 깨끗하고 커다란 한옥들이 즐비하게 나타난다. 중앙 중고를 다닐 때면 그곳을 지나서 가곤 했는데, 얼마 전에 ‘겨울연가’를 보면서 다시 한번 그곳 들을 보게 되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그 당시 가회동에는 알려진 부자들도 살았는데, 그 중에 화신 백화점 주인이었던 ‘친일파’ 박흥식씨의 집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정말 집이 으리으리하게 컸다. 우리가 살던 집의 뒤에도 아주 커다란 집이 있었는데, 아직도 거기 누가 살았는지 확실치 않다. 가회동에서 재동 쪽으로 내려가면 물론 재동국민학교가 있었고, 조금 더 내려가면 공립 여자학교, 창덕 여중고가 있었다. 이곳은 여자학교라서 보통 때는 못 들어갔지만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 강당엔 들어갈 수 있었다. 기억나는 것이 사일구 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전 겨울에 동네 사람들을 이곳 강당에 불러놓고 영화를 보여준 일이었다. 나는 국민학생이었지만 따라 갔는데, 가서 보니 영화는 영화인데, 선전용 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드리마 같은 것은 아니었어도 나는 너무나 재미있게 본 기억이다.

박달근:  그 당시 동네 골목은 우리 나이또래들의 천국이었다. 나이에 거의 상관없이 어울릴 수 있던 곳.. 우리 골목도 그랬다. 코흘리개 꼬마부터 중학생들 까지 모두 어울렸다. 많은 애 들이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을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이름까지 기억이 나는 애들.. 골목 바로 건너 집에 살던 박달근,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을 한다. 나보다 한두 살 밑이었고, 공부도 잘했던 애, 나중에 일류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가슴이 좀 아픈 추억을 남긴 애였다. 나와 보통 애들이 하던 싸움을 했는데, 이 녀석은 나에게 아직도 가슴에 남는 욕을 했다. 그 녀석 왈, “우리 아버지가 (너같이) 아버지 없는 애와는 놀지 말랬어!” 라는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는 참으로 슬픈 욕이었다. 그 말로 사실 그 애와는 헤어지게 된 셈이다. 나도 그 녀석과 그 아버지가 보기 싫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나와 같이 아버지가 없는 집이 꽤 많았지만 그 골목에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정상적’인 가정이었던 것이다.

이원영:  우리 집에서 두 집 아래에 이원영 이라는 나보다 아마도 한두 살 정도 아래인 애가 있었다. 그 아버지가 어느 중학교 수학선생인가 그랬는데, 정말로 고약한 성격의 남자였다. 항상 아이들을 보면 험악한 얼굴, 짜증난 얼굴이어서 속으로 저런 아빠라면 그렇게 부럽지 않겠다고 생각도 했다. 이원영의 엄마는 정반대로 항상 친절하게 웃는 안경을 낀 지적으로 생긴 다소곳한 엄마였는데.. 나중에 원영이는 경복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왜 그렇게 생각이 나는가 생각을 해 보니, 이유가 있었다. 어떤 명절날 원영이의 친척들이 놀러 온 모양인데, 그 중에 국민학교 나이의 소녀가 있었는데, 그 애가 너무나 예뻐서 그 나이에 처음으로 ‘연정’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그때 느낀 것이 아하.. 이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연애감정’이란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 ‘예쁜 얼굴’의 그 애를 생각하면 생생하게 나의 감정이 기억된다. 이원영은 헤어진 것이 너무나 오래 되어서 별로 그의 생각을 못하고 살았지만, 그는 어떻게 ‘인생’을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최씨 삼형제:  그 아래 한집건너 어느 날, 갑자기 아들 삼형제 집이 이사를 왔다. 최씨 삼형제 집.. “최희천, 최희춘, 최희승“.. 어떻게 내가 그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나도 놀란다. 그것은 어린 나이의 추억들이 그 정도로 뚜렷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오래 살면서도 그 추억들을 소중하게 기억에서 놓치지 싫었다는 뜻일 것이다. 제일 큰 형이 최희천, 나보다 한두 살 밑, 그 아래가 최희춘, 막내 최희승은 한참 아래인 꼬마였다. 그들에게는 누나가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위였고, 우리또래 아이들이 그녀를 ‘선망’의 눈으로 쳐다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집의 ‘주인’으로 이사를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바뀌고 그 집은 그 많은 식구들이 방하나 문간방으로 옮겼는데, 아마도 사업이 실패를 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집 장사’ 라고 들었다. 요새말로 하면 ‘부동산 업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큰형 최희천은 과묵하고, 성실한 타입이었고, 그 동생 최희춘은 장난꾸러기였지만 그래서 성실한 애였다. 특히 나를 많이 따랐다. 동네의 애들이 모이게 되면 이들이 항상 끼어서 나를 도와주곤 했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이 형제들을 포함한 동네 꼬마 일당을 데리고 삼청공원 위에 있는 ‘말바위’에 놀러 갔던 추억이었다. 나는 이 꼬마 ‘소대’를 데리고 흡사 소대장이라도 된 듯이 그들과 이곳 저곳을 놀러 다녔다. 그 중에 말바위를 포함한 북악산 일대를 누빈 추억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아찔하다. 왜냐하면 무슨 사고라도 나면 내가 ‘소대장’이기 때문에 몽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을 가질 집은 거의 없었다. 사는 것이 더 급한 세상에 귀찮은 꼬마들을 집에서 끌어내어서 놀아 준 것이 더 고마웠을 것이니까..

말바위의 종이비행기:  말바위는 북악산 중턱에 있는 완전히 바위로 된 언덕이고 그곳에서는 서울시내가 거의 다 보였다. 정남쪽으로 남산이 나지막하게 보이고, 그 뒤로 한강, 관악산이 멀리 보이던 우리에게는 거의 환상적인 곳이었다. 아찔한 낭떠러지가 있어서 위험한 곳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 나이 우리에게는 더 재미를 주었다. 한번은 못쓰게 된 책을 한 권 들고 아이들을 몰고 가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렸는데, 골목에서 날리다가 이곳, 거의 완벽에 가까운 ‘비행장’에서 날렸을 때 아이들의 환성을 잊지 못한다. 한번 비행기를 날리면 떨어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낭떠러지가 있어서 더운 기류를 타게 되면 공중에 오래 머물곤 했다. 그때 한 종이비행기가 완전히 뜨거운 기류를 타고 하늘 위로 올랐다. 그것은 전혀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오르며 북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그것을 보며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 비행기는 안 보일 정도로 높이 떠서 북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것을 본 꼬마들.. 아마도 잊지 못할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박달근의 집 앞에서 꼬마친구와, 1962년

박달근의 집 앞에서 꼬마친구와, 1962년

동네 야구:  이 골목에서 나는 야구를 배우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는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은 주로 “찐뽕” 이란 것과, “왔다리 갔다리” 란 것을 했고, 그 때만해도 야구를 하려면 글로브와 ‘진짜 야구공’ 같은 것이 비싸서 아무나 못 하던 시절이었지만, 찐뽕이란 것은 거의 야구와 비슷하지만 모두 맨손으로 받는 것이라 그것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야구’ 가 바로 찐뽕이었다. 이것은 배트도 필요 없이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공을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느 날 어머니가 미8군 암시장에서 ‘미제’ 야구 배트와 공을 사오셨는데, 배트는 진짜 “Louisville”이란 상표가 보이는 것으로 신나게 했지만, 공은 조금 이상하게 생겼다. 보통의 공보다 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소프트볼 이었다. 소프트볼이라고 하지만 공 자체는 더 단단했고, 배트로 쳐도 그다지 빨리도, 멀리도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안전’한 야구 용이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그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고, 진짜 야구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일본에서 쓰이던 ‘중경식‘ 야구공이란 것을 써서 ‘진짜 야구’를 하게 된 것이다.

 야구를 할 때 문제는 동네 골목이었다. 그 좁은 골목에서 야구를 하게 되면 언젠가는 ‘사고’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 사고는 대부분 골목에 있는 집들의 유리창이 깨지는 것들이었고, 가끔가다 공이 사람을 치는 일도 있었다. 또한 가끔이지만 그 골목에 차라도 지나가면 게임은 완전히 올 스톱이 되곤 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악다구니처럼 지치지 않고 즐겼다. 그러다가 바로 코 옆에 있는 우리의 자랑스런 모교 재동국민학교로 야구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이것은 완전한 야구의 천국이었다. 비록 야구장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널찍한 공간이 그 당시 어디에 또 있었겠는가? 문제는 그곳을 아무 때난 쓸 수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학교의 모든 일정이 끝나게 되면 문을 완전히 닫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학생들이 학교를 다 떠나기 전에나 운동장을 쓸 수 있었고, 일요일은 전혀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나마 우리는 그곳에서 야구 연습을 열심히 하고, 실력도 상당히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팀(동네)들과 시합을 하기 시작했고, 어떨 때는 다른 동네까지 ‘원정’ 경기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곳은 삼청 국민학교까지 원정을 간 것이었는데, 그 당시 조건은 진 팀이 이긴 팀에게 야구공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 자리에서 줄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빚처럼 남게 되어서 꼭 갚아야 했다.

 그 당시에 야구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는데, 주로 고교야구가 꽃이었고, 실업야구도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등학교는 야구부가 상당히 활동적이었고, 대회에서 가끔 우승권까지 가기도 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투수 김옥수, Short Stop 하갑득 선배들이 고등학교에서 활동을 했는데, 오후에 학교가 끝나서 운동장을 거쳐서 걸어나올 때면 꼭 그들이 연습을 했는데, 나는 빠지지 않고 그것을 구경하곤 했다. 동네야구만 하다가 그들을 보면 정말 ‘신의 경지’로 까지 보였다. 김옥수 투수의 던진 공을 옆에서 보면 정말 총알같이 느껴지고, 하갑득 선배가 육탄 돌격대처럼 쓰러지며 공을 잡을 때면 그것도 역시 ‘야구의 신’처럼 보였다. 꿈에서도 내가 투수가 되어서 총알 같은 직구와, 기묘한 커브 볼을 던지는 꾸곤 했다. 그 당시 입학시험에는 체력장 같은 시험이 끼어있었는데, 그 중에는 공 던지기가 있어서 이렇게 야구를 했던 것이 나중에 고등학교 시험을 치를 때 큰 도움도 되었는데, 그 당시 나의 공 던지는 실력은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기 멀리 나가곤 했다. 그만큼 던지는 어깨가 발달이 되었던 것이다.

 오자룡:  이 동네야구를 회상하면서 꼭 생각나는 것, 우리 앞집에 살던 ‘오자룡‘ 이란 아이.. 삼국지의 상산 조자룡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고 했나… 나보다 아마 4~5살 쯤 어렸을, 아주 꼬마였다. 야구는 그 나이에 비해서 잘 한 편이었지만 역시 나이가 어려서 실수가 많았다. 어떨 때는 1루에 주자로 나갔다가 홈으로 뛰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 팀에 꼭 끼게 된 이유는 그 녀석의 아버지 (그 당신에는 아빠란 말을 쓰지 못하고 꼭 아버지란 말을 써야 했는데, 아빠란 말은 그 후에나 쓰이기 시작했다.) 때문이었다. 비록 대머리 였지만 비교적 젊은 아저씨였는데, 그 아저씨가 야구광이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오자룡’을 그렇게 참가시킨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것이 너무나도 힘이 되었고, 자랑스러웠다. 다른 아버지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그 오자룡의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옆에 와서 코치까지 해 주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아버지가 없어서 꿈도 못 꾸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진가도 느낄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재동국민학교 운동장이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지만 그 아저씨가 학교 ‘소사’ 아저씨를 구어 삶아서 우리들이 정식 게임을 할 수 있게도 해 주셨고, 게임의 심판까지도 자청하셔서 보아 주셨다. 얼마나 즐거운 광경이고, 추억이 되었던지.. 오자룡,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Oh, Carol by Neil Sedaka

1959년 닐 세다카의 오 캐롤, 이곡은 우리에게는 1960년에 알려지고 따라부르던 노래가 되었다. 하도 따라 불러서, 뜻도 모르고 영어 가사를 모두 외울 정도였다. 가사를 엉터리로 들어서, I’m but a fool이 아앰 빠다빵으로, You hurt me는 유어 할머니로 둔갑 하기도 해서 아주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다.

 

미국의 시대: 나는 가회동 시절, 정치적으로는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삼일오 부정선거, 학생들이 피를 흘렸던 사일구, 장면 내각 (윤보선 대통령)의 짧았던 1년, 그리고 오일육 군사 쿠데타 (혁명)으로 이어지던 비교적 숨가쁜 변화 속에서 살았다. 비록 육이오 동란은 이미 끝나서 전쟁의 잔혹함은 간신히 비켜 지나게 되었지만, 우리 집처럼 아버지가 전쟁으로 없어진 집도 많았고, 길거리에는 전쟁고아, 거지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사실 육이오 전쟁 후의 정말 살기 힘겨운 시절이었다. 철저한 반일, 반공 교육 속에서 위와 아래가 모조리 적국으로 둘러싸인 시절, 그저 믿을 곳이라고는 ‘정의의 십자군’ 미군과 그들의 나라 미국, 그리고 조그만 섬 으로 쫓겨난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 대만 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이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 유지되던 그 시절,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도 전쟁 때 반 이상이 불타버려서, 미군들이 와서 새로 지어주고, 고쳐주었다.

이승만과 멘데레스: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에 나는 국민학생이었는데, 경무대(청와대의 전 이름)와 비교적 가까워서 그랬는지, 가끔 새벽같이 단체로 대통령을 마중하러 나가기도 했다. 제일 기억에 나는 것이 1958년, 5학년 때,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이 왔을 때 환영을 나간 것과, 터키를 방문하고 도착해서 일행이 경무대로 돌아온 때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깜깜한 새벽에 동원되어 나가서 한참 기다리다가, 몇 초 만에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서 태극기를 흔들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그때 모습의 사진이 경향신문 조간에 나왔는데, 기적적으로 내가 거기에 찍혔다. 그때의 신문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묘한 사실은 그때의 그 두 나라의 원수 급,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 비슷한 때에 대중 혁명으로 실각을 한, 조금은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Soviet's Sputnik-1, Oct 1957

사상 첫 인공위성 소련의 스프트닉 Oct. 1957

소련의 스프트닉:  가회동으로 처음 이사를 가자마자 전세계적인 큰 뉴스가 터졌다. 그때가 1957년 가을이었다. 공산당 소련이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그러니까 사람이 만든 위성을 쏘아 올린 것이다. 그것이 그 유명한 스프트닉, Sputnik 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사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 이었다. 비록 지구에서 제일 가까운 우주 궤도였지만 그곳은 분명히 ‘새카만’ 우주 공간이었던 것이고 그곳에 농구공 만한 ‘사람이 만든’ 위성을 쏘아서 지구를 돌게 만든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미국도 못하던 쾌거였고, 이때 소련이 이룬 폭발적인 ‘선전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그들은 분명히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했을 것이니까.. 상대적으로 미국이 당한 ‘수모’도 대단했다. 하지만, 이때의 그런 수치가 미국을 13년 뒤에 소련을 제치고 달에 첫 우주인을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가회동은 바로 아래쪽에 붙어있던 재동과 더불어, 전에 살던 원서동에 비해서 깨끗한 동네에 속했다. 큰 차이는 원서동에는 그때까지도 초가집들이 즐비했었던 것에 비해 이곳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서울에 웬 초가집? 하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조금 나은 가회동, 재동의 행길(맞는 철자는 한길, 부를 때는 행길이라고 불렀는데, 골목을 제외한 길을 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고, 종로와 같은 큰길을 제외하고는 길 이름이 전혀 없었다. ) 조차도 지금에 비하면 아마도 ‘난민 촌’을 연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수많은 ‘잡상인’들이 거리를 완전히 덮고 지나가는 사람을 상대했다. 특히 국민학교 앞에서 코흘리개들을 손님으로 하는 가게는 정말 다양하고, 조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곳은 역시 만화가게, 빙수,국화빵 가게 같은 것이었는데, 텔레비전이 없었던 그 시절에 그곳은 우리들 꿈의 전당이었다. 재동학교 앞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좋던 싫던 나의 어린 시절 6년의 추억을 만들어 준 가회동 시절.. 어찌 잊으랴.. 그때 알고 지냈던 코흘리개 친구들.. 다들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을까 궁금해진다.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 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왼쪽), 박정희(오른쪽)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 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왼쪽), 박정희(오른쪽)

 

오늘아침, 코앞의 달력을 보니 오늘이 5월 16일이다. 무심코.. 아하.. 박정희의 오일육 군사혁명 기념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작년 사일구(4.19)가 50년이 되었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곧바로 그러면 올해의 오일육이 50년이 되는구나 하는 조금은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반세기란 기간의 느낌이 그렇지만, 50년이란 것이 사실 그렇게 긴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늙어가면서’ 새롭게 느끼게 되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인간 10진법의 문화에 울고 웃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다.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며 남산가도를 질주하는 혁명군의 Sherman tank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며 남산가도를 질주하는 혁명군의 Sherman tank

작년 4월 19일 나의 blog은 분명히 4.19, 사일구 학생혁명 50주년을 회상하면서 쓴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중앙중학교 1학년 때였고, 5.16은 그 다음해인 1961년, 내가 중앙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날은 사일구 때와는 달리 아침부터 학교의 문을 아예 열지도 않았다. 사일구 때 최소한 등교를 한 후에 퇴교를 당했던 것에 비하면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일구 혁명은 4월 19일 낮에 그 열기가 절정에 달 했지만 오일육 혁명은 그날 새벽에 이미 일어난 상태였던 것이다.

그때는 ‘아마도’ KBS가 유일한 라디오 방송이었을 것이고, 그 방송에서는 앵무새처럼 군사혁명 공약이 되풀이 되면서 방송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의 나이에 모든 것들이 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기억에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삼고” 라는 혁명공약이었다. 물론 “국시”라는 말이 확실히 이해는 안 되었지만 “반공이 제일 중요하다” 라는 말로 들렸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의 반공국가였는데, 왜 이런 말을 제1의 혁명공약으로 삼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중학교 2학년 ‘어린아이’가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역시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못 가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며 우리들의 영웅, 산호의 라이파이를 보러 만화가게로 갈 수 있는 것만 생각해도 마음이 흥분 되었다. 국민감정을 의식해서였을까, 사일구 때의 계엄령과 다르게 비교적 자유로운 계엄령 치하가 시작되었다 (최소한 아이들의 눈에는).

달력을 다시 보니 역시 5.16에는 아무런 ‘표시’가 안 보이고 그 이틀 뒤인 5.18에는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란 표시가 보인다. 그러니까 5.16 ‘군사혁명일’이란 것은 아예 기념일에서 조차 떨어진 모양이다. 호기심이 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언제부터 달력에서 5.16군사혁명 기념일이 없어지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들어갔을까. 역사는 흐른다. 절대로 멈춘 것이 아닌 것이다.

혁명주체세력 제1인자 박정희 소장, 1961

혁명주체세력 제1인자 박정희 소장, 1961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아하던 “진짜” 탱크가 시내 곳곳에 보였지만 이번에는 아주 평화스럽게 보였다. 처음에는 장도영이란 이름만 요란하게 들렸고 박정희란 이름은 아주 나중에야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우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회전체가 아주 ‘질서정연’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일구 이후에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는 데모대로 조용한 날이 없었기 때문일까. 비상계엄령 속에서 데모를 한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신선한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는 느낀다. 사일구 이후에 전체적으로 퍼지던 지나친 자유의 공기를. 심하게 말해서 방종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해도 법과 질서가 유지가 될까 할 정도였다. 그 예로 내가 다니던 중앙학교에도 지나친 자유의 표현으로 ‘교장선생, 물러가라’ 하는 데모가 있었다. 사일구의 독재정권 타도가 일반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변한 것이다. 그 당시 중앙학교(중, 고교)는 심형필 교장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수학자로서 아주 선비 풍의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에게 ‘비리’가 있다고 데모를 하고 물러가라고 학생들이 요구를 한 것이었다.

물론 나의 나이로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식이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도 일반적인 시민의 자유는 많았다. 그래도 치안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사일구 뒤에는 기본적인 치안에 문제가 보일 정도랄까.. 왜 그랬을까? 결국은 이승만 ‘부패정권’ 뒤에, 거의 통치력이 없는 과도정권에 공권력이 너무나 약했던 것이 아닐까?

5.16 혁명 직후 시청 앞 육사생들의 혁명지지 대회, 1961

제일 극에 달한 것은 사회적인 것 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는 자세히 들 알려지지 않았지만 휴전선 너머의 김일성이 이것을 보고 얼마나 침을 흘렸을까 하는 것은 절대로 지나친 걱정이 아니었다는 것은 후세에 다 사실로 들어났다. 과도정권은 분명히 반공정권이었겠지만 극에 달한 자유의 표현은 결국 남북화해, 남북협상이란 말까지 허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현실적인 반공법 위반이었는데.. 휴전선의 포격사정권에 있던 수도를 가진 정권에게 이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었겠지만 일반 시민의 정서는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결국에는 학생들 조차, “가자 판문점으로!” 라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조용해 졌다. 우리는 며칠 뒤 등교를 한 후에 긴급 혁명공약을 배우게 되었고, 일년 동안 만끽하던 ‘학원의 방종’을 되 돌려 주게 되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가, 그 동안 “스포츠 가리” 이발에서 완전히 “삭발”형으로 바뀐 것..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전통대로 머리를 다 중처럼 깎았다가, 사일구가 나면서 ‘자유’가 주어져서 스포츠머리로 바뀌었는데, 다시 원래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목격한 것이 중앙학교 구내에 하나 둘씩 들어섰던 ‘잡상인’들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들 들면, 이발소, 식당, 문방구 같은 것들이었다. 상인들에게는 큰 일자리가 없어졌겠지만 사실 이것은 잘 된 것 같았다. 학교 밖이면 몰라도 학원 내에 그런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느슨하던 극장의 학생입장도 아주 까다로워져서 웬만한 영화는 거의 다 ‘학생입장불가’가 되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던 깡패들도 줄줄이 잡혀 들어갔는데.. 조금 심했던 것은 일부  ‘정치깡패’들이 사형에 까지 처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대부분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오일육 군사혁명은 정권이 바뀌면서 해석도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짐을 안다. 군사혁명 10년 뒤인 1971년에는 거의 영구집권체제인 유신정권으로 바뀌고, 그 8년 후인 1979년에는 박정희도 부하에 의해서 사망을 한다. 속담에 “때는 때대로 간다” 라는 말로 그의 공과를 한마디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할까? 한때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그가 싫기도 했다. 나는 기껏해야 김신조 사건 이후에 대학에 생긴 교련에 대한 반대데모와 3선개헌 반대데모로 학창생활이 끝났지만 아내 연숙은 70년대의 유신체제를 반대한 거센 ‘운동권’에 끼어들게 되어서 모든 현장을 목격까지 했고, 경찰과 정보부의 감시 속에서 살았던 때도 있었다. 이것 때문에 결혼 후에 나는 사실 고개를 못 들고 살았다. 데모만 나면 나는 ‘신나는’ 등산을 즐겼는데 반해서 연숙은 모든 것 잊고 최루탄 연기를 맞으며 살았던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 운동권 출신들이 줄줄이 현재 모든 정권의 요직에 있다. 심지어 일부는 거의 ‘빨갱이’ 흉내를 낼 정도가 되었다. 오일육에 대한 해석도 극과 극을 치닫고 있다. 그들이 항상 거의 의도적으로 언급을 안 하는 것은 그 동안 그들이 그렇게 동정하던 ‘북녘’ 정권이 어떻게 그들의 ‘인민’들을 통치해 왔던가 하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반대파 탄압을 언급하려면 조금은 그것도 언급하면 조금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 먹고 입기 전에는 의미 있는 민주주의를 뒤로 미루겠다는 말은, 그 당시를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또한 반대로 박정희를 거의 ‘영웅시’하는 극우파들.. 그들이 사실 박정희의 진정한 의도와 업적에 먹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시청 앞에서 박정희와 차지철

혁명 성공 후, 시청앞에서 육사생들의 사열을 받는 박정희 소장과 차지철 공수부대장

오일육 혁명 주체, 박정희 소장

이 검은안경 사진은 후세에 남는 오일육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의 신문으로 보는 오일육 쿠데타 모습들

 

50년 전의 신문으로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 조금 감당키 어려운 감정의 복받침과 싸우기도 했다. 글과 사진들.. 확실히 이것은 이제 역사가 되었고, 교과서에서 다시 배울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 신문들을 다시 보며 뚜렷하게 느끼는 것, 당시의 신문들.. 정말 중학교 2학년 생의 한자 실력으로는 읽고 이해하기에 역부족, 그러니까 거의 문맹에 가까울 정도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여기 나온 신문들을 보라.. 얼마나 많은 한자가 섞여 있는가? 또한 한글조차 50년을 거치며 맞춤법이 많이 변했음을 절감하고, 언어의 변천에 50년은 그렇게 짧은 세월이 아니라는 것도 느낀다. 하지만 그것 보다 사진을 보며 더 깊은 생각을 한다. 50년 세월 동안 내가 기억한 모습들은 너무나 현재에 적응이 되었는지, 그 당시의 모습들.. 너무나 꾀죄죄하고, 볼품들이 없다. 물론 그 당시의 유행과 경제수준을 감안하면 조금 이해는 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당시 신문의 사진기술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잡한 사진 조판에다가, 50년이 지난 신문지.. 그것이 ‘생생하게’ 보일 리가 만무하니까.

 

오일육 당시 경향신문 석간

오일육 석간지는 유동적인 사태로 군 검열을 받지 않았다.

성공적인 무혈 쿠데타

의외로 평온한 전국 주요 도시의 분위기

서울 주요 거점에 진주한 혁명군들

오일육 낮, 어리둥절한 시민들과 군인들, 세종로,시청 근처

생생했던 역사 현장, 희미한 모습으로

그 당시 모습, 사실 이 사진보다 훨씬 더 깨끗했다

육군사관생도 혁명지지 궐기행진

쿠데타 직후 육사생들의 지지 궐기는 혁명성공의 촉진제였다

시청 앞에 집결한 육사생도들과 장도영 중장

시청앞에서 혁명지지 궐기대회, 혁명의 얼굴, 장도영 중장과 육사생들

5월 17일부터 군 검열받던 신문들

계엄령하에서 언론에 대한 군 검열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서서히 등장하는 막후 1인자 박정희 소장

사실상 쿠데타 주역 박정희 소장, 장도영 중장과 기자회견에서

 


그 당시의 사회정서를 한눈에 보려면 영화광고를 보면 간단하다. 유행과 더불어 그 당시 최고 인기배우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서부영화와 대형 종교영화가 판을 치던 그 시절, 한국의 영화풍토는 지금 수준에서 보면 정말 아이들 장난과도 같았다. 한마디로 유치하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매력이었다. 여기의 영화광고를 보면서 손쉽게, 구봉서, 최은희, 신영균, 김진규, 허장강, 김희갑, 김혜정 등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당시 그들이야말로 국민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쿠데타 당시 상영되던 국산영화들

신상옥 감독이 한국 영화를 주름잡던 그 시절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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