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지은이: 안의정

 

 

지은이의 말

 

내겐 한때 미국 뉴욕에서 어렵게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내 삶은 처절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흉악한 무기수를 훌륭한 종교인으로 변모시킨 어느 생쥐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큰 감동을 받았더랬습니다.

그 후 나는 이처럼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해주는 감동적인 사례들을 듣거나 보게 되면, 공책에 몇 줄씩 필기를 해놓곤 했습니다.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은 그렇게 해서 모아진 것들 중의 일부입니다.

내가 뉴욕에서 유학 및 외신 기자 생활을 하면서부터 한국으로 돌아와 생활하는 지금까지 십여 년에 걸친 세월 동안, 주변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을 틈틈이 수집, 기록하다 보니 어느새 두툼한 노트 몇 권 분량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내가 삶에 지쳐 힘들어 할 때마다, 또 나의 주변에서 슬프고 괴롭고 안타까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커다란 위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그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당신과 함께 나눔으로써 그 사랑이, 그 용기가, 그 따뜻함이 당신의 가슴 구석구석에도 전해질 수 있도록 내 마음의 보석상자를 열어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이 당신에게 용기와 꿈과 희망의 약이 되었으면, 그리하여 당신의 삶과 당신의 가족 그리고 우리 이웃을 보다 사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1998년 4월

안의정

 

 

 

“역경을 이겨내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이라는 시험을 이겨내는 사람은 겨우 한 명밖에 없다.”

-토머스 칼라일-

 

 

 

그대를 업고서라도

 

1980년대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눈이 발목까지 차는 다소 추운 날, 나는 뉴욕 맨해튼의 브라이언트 공원 벤치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을 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온 외국 학생들 10여 명이 유엔 본부를 시찰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열서너 살 먹은 필리핀 학생부터 러시아에서 온 60대의 학생도 있었습니다. 칼럼비아, 뉴욕, 뉴스쿨, 포담, 뉴욕 시립대 등에서 언어 연수를 받고 있거나 전공 과목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나를 제외한 또 다른 한국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른 살의 유형은 막 랭귀지 코스에 적을 두기 시작했지만, 다음 학기에는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경영학도로서 농부같이 거친 외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그맣고 깡마른 몸에 등이 조금 앞으로 휘었고, 새까만 얼굴에는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악수를 하고 나눈 짤막한 대화는 나로 하여금 그가 `밥맛 떨어지게 하는 놈`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게 했습니다. 아마도 외모에서 느껴지던 소박하고 겸손한 맛이 지나치게 자신 있는 말투에 묻혀버렸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는 “경영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주일 전쯤에 도미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3개월 먼저 미국에 온 나에게 뉴욕에 대해 아는 것이 무척이나 많은 척을 해댔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화나게 한 것은 토플 시험에서 겨우 480점 정도의 빈약한 점수를 받은 그가, 뉴욕에는 경영학으로 좋은 학교가 별로 없다면서 MIT나 예일 대학으로 전학 가겠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 점수 가지고는 명문 대학 아니라, 사실 B급 경영대학원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정도 영어 실력으로는 도저히 경영대학원 입학의 필수 시험인 GMAT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그를 `웃기는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미국에서 유학생들이 성공적으로 경영학을 전공하려면 영어뿐만 아니라 통계학이나 기본적인 수학 실력도 갖추어야 한다고 약 올렸습니다. 대충 말을 들어보니까 그는 한국 사람들이 여러 과목 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통계학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만남에서 대단히 치졸한 인간이 되어버린 나는 아파트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비록 거북스러운 첫인상을 풍기기는 했지만 유형에게는 매우 정직한 면이 있다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 토플 시험에서 550점 이하를 받았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유학생을 만난 기억이 없었습니다. 460점을 받아도, 500점을 받아도 모두 부풀려 말하며 허풍을 떠는 것이 바로 한국 사람이니까요. 어쨌든 나는 그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그 주 토요일 오후, 나는 소형 카메라를 사러 브로드웨이에 나갔다가 양손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42가 쪽으로 걸어오는 유형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나는 얼굴을 피하고 싶었고, 그도 아마 나의 그런 마음을 알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방향을 틀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와 나 사이에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나와 그는 어색한 눈웃음을 교환하며 형식적으로 아는 척을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는 몇 마디 말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얻어놓은 아파트의 수리가 끝날 때까지 싸구려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말하고는, 별다른 말이 없이 손을 흔들어 잘 가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서너 발자국을 옮기더니 고개를 돌리고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아내가 내일 오니까 다음 주중에 만나서 밥이나 같이 먹읍시다.”

나는 속으로 `저렇게 자신만만해 하는 걸 보니 저 친구가 자랑할 것이 많은 여자를 마누라로 얻은 모양이군.`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친구에 대해 비위 상할 일이 도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은근히 걱정스러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나도 모르게 그러자고 했습니다. 아마도 마음이 쓸쓸하여 대화 상대가 그리웠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42가에 있는 뉴욕 공공 도서관에 들러 자료를 찾아보고는 그가 영어 연수를 받는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약속 시간은 그의 수업이 끝나는 초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보잘것없는 그 대학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 `웃기는 녀석`과 실없는 약속을 한 것이 후회스러워, 커피를 입 속으로 쏟아 붓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리라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유형의 모습은 쉽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장신의 미국 학생들 가운데 파묻혀 다가오는 그는 반 토막 성냥개비처럼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나는 사실 그의 아내가 어딘가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그러지 않은 척하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듯 여겨지는 동양 여자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오른쪽 무릎에 두 손을 대고 안쓰럽게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힘겹게 걸어오는 여인이 보였습니다. 너무나 의외였지만 그녀가 그의 부인임이 분명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순간부터 그와 아주 오랫동안 사귀어온 것처럼 부담 없이 말을 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심하게, 아주 심하게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지만 말에 재치와 교양이 넘쳐흘렀고, 오히려 다른 여성들보다 표정이 더 밝아 보였습니다. 얼굴도 그만하면 미인 축에 든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버거킹에 가서 와퍼 햄버거와 커피로 저녁을 때우고, 허드슨 강변으로 나가 산책을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낭만을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이틀이 멀다 하고 자주 만나 먹고 마시고, 그리고 잡담을 즐겼습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와 그가 사는 아파트의 거리는 걸어서 20분 정도였습니다. 그는 아내가 국수를 삶는다고, 혹은 겉절이를 담갔다고, 아니면 자기 학교에 다니는 한국 학생들이 온다면서 나를 수시로 불러댔습니다. 한끼 한끼를 어떻게 때워야 하나로 고민하던 나는 전화를 받으면 부리나케 그의 아파트로 달려갔습니다.

나는 어느새 허무맹랑하게 비쳐지던, 매사에 자신만만한 그의 말에 독설로 반격해 실망시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그의 말을 듣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말 같지 않은 말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그리 흔하지 않을 테지만, 나는 어느덧 그의 말을 즐겨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번한 회합은 수개월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유형은 봄이 되면서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전화를 받긴 했지만, 유형이 어디 갔는지 말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영어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한국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와서 뇌까리던 그가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중이라고, 그를 아는 유학생들은 입술을 삐죽거렸습니다. 그의 아파트 주변에서 혼자 사는 늙은 유학생들이 주로 그랬습니다. 툭하면 불러서 밥을 먹여주던 짓을 딱 끊어버렸으니 고마웠던 생각보다는 섭섭한 마음이 먼저 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 밤 야채 가게에서 밤새도록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채 가게 일이 얼마나 힘든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해병대 출신의 한 유학생은 두 달 만에 코피를 쏟고, 야채 가게 일에 비하면 군대 훈련은 저리 가라 할 정도라면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그 일이 힘들면 잠시 식당으로 일자리를 옮기기도 했습니다. 손님이 남기고 간 팁을 놓고 다른 직원들과 다투었다고 신경질이 난다면서 나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가 돈에 무척이나 쪼들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구에게도 전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다음 학기 등록 기간에 나는 그의 부인의 손에도 등록 카드가 들려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등록한 후 같이 식사나 하자면서 나를 자신의 학교로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랭귀지 코스를 마치고 경영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동안 아내가 무척 심심해 했다면서, 그녀와 함께 공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랭귀지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두 건씩 뛰고, 그것도 모자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사무실 청소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랭귀지 코스를 거치면 자신과 같은 시기에 졸업할 수 없다면서 학교 당국에 랭귀지 수업을 면제해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학교 당국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으려거든 다른 학교로 가보라는 말을 듣고, 그는 부인의 담당교수를 찾아가 호소했습니다. 그의 진지함과 집요함에 감동한 교수가 랭귀지 코스 담당자를 직접 만나 그녀의 영어 부족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보장해 주고는 바로 정식 과목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42가 부두로 나가 허드슨 강을 따라 맨해튼 섬을 한 바퀴 도는 서클라인을 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부에게는 애틋한 사연이 숨어 있었습니다.

 

유형은 지방의 어느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괜찮은 대학 영어과에 입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서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모 대학 경영학과로 편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하학길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팔 다리가 부러지고 혀까지 말을 듣지 않아 전혀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혼자서 그는 휠체어에 앉아 병원 뜰을 산책하다가 자신처럼 휠체어에 앉아 햇빛을 쬐는 한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파리한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휠체어 바퀴를 굴려 그녀에게 접근해 갔습니다. 그리고 항상 가지고 다니는 메모지에 글을 써서 무슨 일로 병원에 들어왔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았는데 성장해서도 가끔씩 아프다고 했습니다. 고통이 심할 때는 병원에 수개월씩 입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연극 관람을 아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 후로 자주 만났습니다. 병실에 있다가도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밖으로 나와 서로를 찾았습니다. 간호사들은 그들이 병실에 없으면 아예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줄 알고 밖으로 나와 약을 주고, 때로 간단한 주사는 그 자리에서 놓았다고 합니다. 그들 사이에는 자연스레 사랑이 싹트게 되었고,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일찌감치 퇴원하였고, 유형은 그로부터 반 년이나 더 병원에 있다가 퇴원했습니다. 그 동안에도 그녀는 그를 거의 매일 면회 오다시피 하며, 어젯밤에는 무슨 연극을 보았는지 등의 전날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습니다.

유형은 팔다리는 완치되었지만 말은 여전히 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그의 상태가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완벽하게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절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음성학 책을 구입하여 혀의 구조 그림을 보면서 혀 밑에 볼펜을 집어넣고 발성 연습을 했습니다.

그토록 눈물겨운 노력 끝에 그는 1년 반 만에 완벽하게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두 사람에게는 결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더니 그만 만나자는 간단한 편지가 날아들었습니다.

`당신이 싫어졌으며, 생각이 진보적이지 못하고 행동력도 없는 당신 같은 남자에게 인생을 맡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유형은 그 말이 그녀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형은 진보 그 자체라 할 정도로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행동력이 없기는커녕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 나가 골치 아픈 일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형은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자,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를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는 친구로부터 그녀가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그 사람은 얼마든지 건강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맞을 수 있어. 병원에서 한 부질없는 약속으로 그를 붙들어 두고 싶지 않아. 그는 나를 잊어야 해”라고 하면서 울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유형은 그 친구에게 사정을 해서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 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달려가 당장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유형이 자신을 찾지 않을 줄 알았다가 직접 찾아오자,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겼습니다.

유형은 부모의 동의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혼을 발표해 버렸습니다. 부모들은 기절할 듯이 펄펄 뛰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 도망쳐 나와 부모의 허락도 없이 동거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 동안 부모와는 연락이 일절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건강하고 예쁜 딸이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밤 10시경, 유형은 나에게 전화를 주었습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우드사이드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밤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걸어서 그 커피숍으로 갔습니다. 그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아주 못된 성질을 가졌다고 흉을 보았습니다. 툭하면 이혼하자면서 프라이팬 등을 집어 던지며 행패를 부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얌전하고 교양 있는 부인이 그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에는 한국에 두고 온 딸이 보고 싶다면서,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서울로 돌아가겠다며 투정을 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딸은 할머니가 키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는 두 사람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고통도 참아가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그러면 슬퍼진다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사실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자격지심에서 그런다고 했습니다. 특히 유학생 모임에 나갔다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와서 자기와 깔깔거리면서 대화 나누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겐 아내밖에 없으며 죽을 때까지 아내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형은 돈도 별로 없으면서 자주 부인을 택시에 태우고 연극 구경을 다녔습니다. 뉴욕은 연극의 메카로 불리는 곳이니 연극을 좋아하는 그의 부인이 집안에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유형이 학교에 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면 그녀는 혼자 브로드웨이로 가서 몇 시간씩 기다렸다가 할인권을 구해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녀가 쉬지 않고 한 번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겨우 50미터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걸었다 쉬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와 어딜 가려면 시간이 무척이나 많이 걸렸습니다. 그녀는 겨울에도 비지땀을 흘리며 유형과 함께 다녔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연극 관람이 끝난 야밤에 유형은 집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고 5번가를 따라 걷기를 좋아했습니다. 때로는 그리니치 빌리지 안에 있는 커피숍에 가서 분위기를 잡기도 했습니다.

“당신, 여기가 어딘 줄 알아? 그 유명한 에드거 앨런 포가 폼을 잡고 앉아서 글을 쓰던 바로 거기야. 당신, 에드거 앨런 포가 어떤 인간인 줄 알아?”

그러면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는 식으로 무시해 버리곤 했습니다.

그는 아내를 등에 업고 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거리를 쏘다니고 지하철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렸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이고, 이제는 더 이상 못 가겠다… 좀 쉬었다 가자.”

힘이 들면 그는 아내를 계단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빙그레 웃으면서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내곤 했습니다.

 

유형은 부인과 같은 시기에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딸이 보고 싶어 미치겠다면서 졸업식에 참가하지도 않고 바로 귀국해 버렸습니다.

나는 한때 유형이 보고 싶어 그를 찾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등에 업고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5번가를 걷던 그 모습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그를 만난 거나 진배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멀리서나마 그들이 아주 행복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살아주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엘비스의 마지막 선물

 

산새들이 울고 꽃이 피었지만, 카렌은 세상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나무 그늘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의 이 장애아 기숙학교에서는 적어도 3월말이 되어야만 마당에 나와 햇볕을 쬐면서 놀 수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여전히 녹지 않은 눈이 보였지만 아이들은 선생님들, 그리고 면회 온 부모님들과 술래잡기를 하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카렌은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이곳으로 데려다 준 엄마가 요즘 들어서 통 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엄마가 슬그머니 미워지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 미워하고 싶은 엄마의 얼굴조차 아른거렸습니다.

선생님들도 이제는 카렌을 포기했습니다. 심한 뇌성마비, 그것도 상태가 진행되고 있는 심각한 환자라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자격지심으로 선생님들에게 행패를 부리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푼으로 음식을 떠먹여 주는 선생님의 얼굴에 음식을 퉤퉤!하고 내뱉기, 휠체어를 탄 채 옆으로 쓰러지기, 경우에 따라서는 이마로 벽을 들이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도 카렌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습니다. 이곳에 몇 년째 있지만, 여러 선생님이 카렌의 태도를 고쳐보겠다고 나섰다가 일주일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한적한 산골에서도 카렌은 혼자였습니다. 외롭지만 그렇다고 그런 표정을 짓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남들에게 약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요.오늘 처음 온 레나 선생님이 카렌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녀도 다른 선생님처럼 친절한 척하다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겠지요. 아무리 얼굴이 예쁘면 뭐하나요.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야단을 치고 “네 마음대로 해봐!”하면서 악담을 늘어놓을 텐데.

레나 선생님이 다가왔습니다. 학교를 갓 졸업한 그녀는 아주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생기 발랄해 보였습니다. 카렌도 10여 년만 있으면 그녀처럼 장애아를 위한 선생님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 전에 병이 낫는 것이지요.

“왜 저 아이들하고 같이 놀지 않지? 나하고 같이 술래잡기할까?”카렌은 심통이 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버려둬요. 그 아이는 원래 그런 아이예요.”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레나는 다른 아이들에게로 가면서 혼자 눈 덮인 산 정산을 바라보는 카렌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레나는 카렌의 신상에 대해서 대충 들었습니다. 부모가 이혼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머니 혼자서 그녀를 데려왔고, 1년 전부터는 소식이 일절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점점 난폭해지는 것이 다루기가 어렵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레나는 카렌을 자신이 맡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카렌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목욕을 시켜 주었습니다. 카렌은 있는 힘을 다해 반항했지만, 레나 선생님의 고집도 대단했습니다. 카렌이 아무리 음식을 뱉어내도 레나는 기어코 카렌의 입에 음식을 집어넣었고, 그리고 아무리 물벼락을 맞아도 카렌을 씻기고야 말았습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흘러갔습니다. 레나가 며칠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가고, 마침내 카렌도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카렌은 마음의 문을 열면서 펑펑 울며 레나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고, 레나 선생님은 그렇다고 답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단짝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잘 때까지 항상 붙어 있었습니다. 카렌의 학교 생활도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부모님들이 면회 오는 날이었습니다. 카렌은 아침부터 우울해져 있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카렌! 우리 마을로 내려갈까? 쇼핑도 하고 영화 구경도 하자.”

“그, 그랬으면 해요, 레, 레나. 하, 한 번도 마을 구경을 한 적이 없어요, 저는.

카렌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레나는 카렌을 차에 태우고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휠체어에 카렌을 태우고 다니며 상점에서 쇼핑을 했습니다.카렌의 눈이 극장 앞의 영화관에 머물렀습니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마이크를 들고 열정적으로 노래 부르는 간판 속의 사람을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저, 저 사람… 누구예요?”

“응,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아주 유명한 가수지. 우리 들어가서 볼까?”

“아, 아니에요. 저, 저는 여, 영화 싫어해요. 그, 그리고 전 나, 남자 싫어요.”

레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휠체어를 극장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잘 보이는 가운데 자리에 카렌을 내려 놓았습니다.카렌은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카렌도 이제는 남자에게 연정을 품을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레나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사람도 아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른다니…엘비스가 달콤하면서도 슬프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달콤하게 말이에요.

내 곁을 떠나지 말아주세요.

당신이 없으면 나는 불완전하게 된답니다.

그래서 나는 이토록 당신을 사랑합니다.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진실하게 말이에요.

그대만 같이 한다면 내 모든 꿈이 채워진답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그리고 영원히 사랑할 테니까요.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오랫동안 말이에요.

내 마음을 받아주세요.

내 마음은 이미 당신 곁에 있고

결코 멀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진실하게 말이에요.

그대와 같이 한다면 내 모든 꿈이 채워진답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그리고 영원히 사랑할 테니까요.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애틋하게 말이에요.

그대가 나의 여인이라 말하도록 허락해 주세요.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나는 당신의 사람이 될 테니까요.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진실하게 말이에요.

그대만 같이 한다면 내 모든 꿈이 채워진답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그리고 영원히 사랑할 테니까요.

 

레나는 카렌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카렌은 헉헉거리면서 숨을 고르지 못했습니다. 레나는 그녀를 휠체어에 태우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괜스레 극장에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다음, 카렌이 외로워하는 증상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녀는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엘비스 프레슬리를 짝사랑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

“카렌, 엘비스에게 편지를 써보지 그래?”

“그, 그런다고 그, 그 사람이 나 같은 아이에게, 더, 더군다나 이런 환자에게 다, 답장을 보, 보내줄까요?”

“그럼. 엘비스는 너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리고 너를 사랑할 거야.”

레나의 끈질긴 조언으로 카렌은 엘비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매주 한 통씩 보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습니다. 카렌은 우체부가 올 때쯤이면 우체통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있다가 레나가 편지 뭉치를 들고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비가 오고 눈이 와도 우체부는 왔지만, 기다리는 엘비스의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엘비스에게 펴, 편지를 쓰지 않을래요. 그 사람은 나 같은 아, 아이에게는 관심도 없다고요.

카렌은 예전처럼 심한 우울증에 빠져들었습니다.

레나는 엘비스에게 편지를 쓰라고 한 자신의 책임인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엘비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 무척이나 바쁜 사람인 줄은 알지만 뇌성마비 환자인 카렌이라는 소녀가 당신의 편지를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다고, 그녀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도 카렌은 우체통을 지켜보고 있었고, 레나 선생님이 우체부로부터 우편물을 받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우편물을 넘기는 그녀의 표정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담담했습니다. 그녀가 카렌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편지 한 통을 내밀었습니다.

“자, 편지.”

“…”

“편지라니까?”

“누, 누구한테서…?”

레나가 갑자기 카렌을 포옹했습니다.

“엘비스, 엘비스한테서 온 거야!”

두 사람은 너무 좋아서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산속이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자 그 소리가 메아리 쳐 되돌아왔습니다.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편지를 읽는 카렌을 둘러쌌습니다.

“그, 그 동안 너무 바빠… 다, 답장을 쓰, 쓸 수 없었대요. 직접 받을 수 있는 주, 주소가 여기 있어요.”

카렌은 최고로 인기 있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엘비스로부터 편지를 받은 카렌을 무척이나 부러워했습니다. 초콜릿, 인형, 그리고 엘비스의 레코드판이 수시로 배달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몰래 찾아와 자신도 엘비스에게 편지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사정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카렌은, 편지는 마음대로 써도 되는데 답장 받는 것은 장담하지 못하겠다고 으스대었습니다. 레나는 그런 카렌을 보면서 하늘을 훨훨 나는 것 같았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엘비스는 직접 오고 싶었지만 공연 일정이 너무 촉박해 그럴 수 없었다면서, 대신 자신의 사진과 커다란 곰 인형을 보내왔습니다. 카렌은 이제 자랑하는 것에도 세련되어 있었습니다. 호들갑을 떨지 않으면서 자신과 엘비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은근히 과시했습니다.

카렌은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그 선물들을 놔두고 침실에 들었습니다. 기숙사는 조용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과 짐승들이 멀리서 울어댔습니다.

달빛이 유난히 환해서 레나는 눈을 떴습니다. 새벽 2시 경이었습니다.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그녀는 살며시 침실에서 나와 카렌의 방으로 갔습니다. 불을 켜지 않고 카렌에게 다가갔습니다. 카렌은 엘비스가 보내준 곰인형과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레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곰인형과 사진을 카렌의 품에서 빼내고는 그 애의 얼굴에 자신의 뺨을 대보았습니다. 레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카렌의 몸은 바깥 온도처럼 차가웠습니다.

“카렌… 카렌… 카렌.”

작은 목소리로 불러보았지만 카렌은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꿈속에서 엘비스를 만나고 있는지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외로움은 스승

 

뉴욕의 구석진 거리를 한 청년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의 머릿속엔 오늘도 그렇고 그런 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꿈을 꼭 펼치고 말 것이라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별로 크지 않은 키, 매부리코에 호감을 사지 못하는 얼굴, 게다가 그는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는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허름한 건물로 접근해 가면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오늘도 퇴짜를 맞으면 어떻게 하나…청년의 마른 엉덩이를 가려주는 청바지 뒷주머니에는 예외 없이 원고뭉치가 꽂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간만 있으면 쓰고 가다듬던 원고였습니다.

부모님이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그 원고를 썼고, 학교에서 친구들이 여학생과 즐겁게 대화를 나눌 때에도 그는 그들을 부러워하며 교실 한구석에서 원고를 마주했었습니다.

그는 예쁜 여자친구가 하나 생겨 맥도날드에서 빅맥 햄버거를 함께 먹으며 데이트를 즐기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그에게는 꿈 같은 일일 뿐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마저 소외된데다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싸우는 부모님 때문에 소외된데다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싸우는 부모님 때문에 그는 종종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책상머리에 앉아 뭔가를 끄적거리곤 했습니다.

가까스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추잡하기 이를 데 없는 포르노 영화에 출연하며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정식으로 영화계에 뛰어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건물 앞에서 심호흡을 해보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가는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용기를 잃을 것 같아 손을 문에 대고 무조건 안으로 밀고 들어갔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카운터에 앉아 있는 예쁘장한 얼굴의 여자가 물어왔습니다. 무슨 일로 왔느냐니? 청년은 이번에도 실망이었습니다. 그는 이 영화사에서 엑스트라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그가 엑스트라감으로 보이지 않았는지 그에게 찾아온 용건을 물은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조금 창피했지만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얼떨결에 객쩍은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혹시 소형영화 시나리오는 모집하지 않으시나요?”

그러면서 청년은 바지 뒷주머니에 꽂혀 있는 원고뭉치를 꺼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당시의 영화계는 대형영화가 대유행이라서 소형영화를 제작하려는 사람은 눈을 씨고 보아도 없을 때였습니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청년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었습니다. 그때 어떤 중년신사가 들어왔으나, 청년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나와 몇 발자국을 걸어갔습니다.

“여보세요, 잠깐만요.”

여자가 문을 열고 그에게 손짓을 했습니다. 청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지금 막 소형영화 시나리오를 찾고 계신 분이 오셨는데, 만나보실래요?”

청년이 문을 열고 나갈 때 들어온 바로 그 신사였습니다. 신사는 청년이 내민 원고를 슬슬 넘겨보더니 지금 당장 2천 달러를 줄 테니 자기에게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원고는 청년에게 있어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외로움을 그 원고를 쓰고 개작하면서 이겨냈으니까요.

수중에는 빵을 사먹을 돈조차 없었지만 청년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 정도로는 안 되겠습니다/”

청년은 빈민가의 아파트로 돌아왔고, 예전처럼 막노동 일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신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번에도 2천 달러에 원고를 팔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좋습니다. 대신 저를 주인공으로 써주십시오.”

신사는 기가 막힌 지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는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이 차갑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사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시 전화를 걸어와 소형영화 제작에 관심을 가진 제작자를 찾았는데, 함께 그를 만나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신사와 함께 제작자를 만난 청년은 원고를 보여주고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써달라고 무리한 부탁을 했습니다. 그 말에 제작자도 어이없어 하면서 일단 원고를 읽어보겠으니 두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제작자로부터 청년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한번 같이 영화를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너무나 좋아서 심장마비에 걸릴 것 같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습니다.

청년은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았고, 몸과 혼을 다하는 연기로 기라성 같은 헐리우드의 영화배우들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영화는 얼마 들이지 않은 제작비로 공전의 대히트를 쳤고, 아카데미상을 휩쓸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이 바로 (록키)이며, 청년의 이름은 실버스타 스탤론입니다.

그 후 한 인터뷰에서 청년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거둔 대성공에는 사실 운이 따라주었습니다. 골프장에서 홀인원을 거둔 셈이지요. 저는 일단 골프장까지는 갔습니다. 골프장에 가지 않고서는 절대로 홀인원을 거둘 수 없지 않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외로움은 스승이었고, 오늘날의 그가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엄마, 미안하지만 난 갈 수 없어

 

공부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명문 고등학교와 명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인물도 남에게 조금도 빠지지 않는 재원이었습니다.

그녀는 외국에 유학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아와 한국에서 대학 교수를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럴 만한 능력도 충분히 있었고, 또 학교측에서도 학위를 받아오면 자리를 줄 터이니 유학을 가라고 적극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극히 보수적인 부모가 그녀 혼자 먼 유학 길에 오르는 것을 한사코 막았습니다. 결혼한 뒤에 남편의 뒤를 따라가 내조하면서 공부하는 것만을 허락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갑부 집안의, 역시 명문 대학을 나온 아주 잘생긴 남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남자가 유럽의 어느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어, 두 사람은 그 나라로 떠났습니다.

남편이 학업을 시작하자 그녀도 공부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눈치를 보아하니 남편은 아내가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 아내뿐만이 아니라, 그의 입에서는 남편을 따라와 공부하는 여자들을 비난하는 말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보다는 남편은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대학에서 남편과는 다른 학문을 전공했지만, 넓게 보면 같은 사회 계열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학교에 간 사이에 그의 책을 펼쳐보곤 했는데,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남편이 그런 공부에 쩔쩔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녀는 그 나라 말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남편이 다니는 학교 당국으로 자신의 성적증명서를 떼어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잘생긴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미리 전공 과목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공부한다는 사실을 남편이 알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남편이 보지 못하도록 책을 주방의 그릇을 넣어두는 가구 같은 은밀한 곳에 숨기고는, 그가 집에 없을 때만 몰래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윽고 아들이 만 한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자신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공부를 하려는 속셈으로 자신과 결혼한 것이 아니냐면서 성질을 버럭 내고는,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남편은 2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도 석사 학위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공부하고 싶은 열정을 그냥 삭일 수가 없었던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학교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전공하려 하는 학과의 교수를 만나 자신을 소개한 후, 공부하고 싶으니 입학을 허락해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교수는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그 나라에 온 지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은데다 말을 정식으로 공부하지도 않은 사람이 10년간 학교에 다닌 외국 학생보다 더 언어에 능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대학 성적만 좋으면 자기 권한으로 입학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학교 당국에 이미 자신의 성적 증명서가 도착해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자, 교수는 곧바로 행정처에 전화를 걸어 그녀의 성적 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본 교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당장 입학을 허용할 터이니 한 달 후에 시작되는 학기부터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 몰래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침대 밑이나 소파 밑, 텔레비전 받침대 뒤에 숨겨놓고는 남편이 없을 때, 그리고 남편이 있는 밤에는 화장실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그녀는 학교에서 곧 유명해졌습니다. 학과에는 공부 잘하는 한국 학생이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소문이 남편의 귀에 들어갈까 봐 두려웠습니다. 학교에서 남편 친구를 만나면 심심해서 아기를 데리고 산책 나온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아기를 데리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1년 반이 흘렀습니다. 그녀는 벌써 석사 학위를 받게 되었지만 남편은 아직도 석사 과정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이미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남편이 학위를 받을 때까지 일단 공부를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남편이 리포트 타이핑하는 시간을 아끼도록 자신이 타이핑해 주겠다고 하고는 그 과정에서 내용을 수정해 주곤 했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좋아하던 남편이 점점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을, 그것도 그 나라 말을 잘 알 리 없는 아내가 리포트를 수정해 준다는 사실이 이상했던 것입니다.

하루는 남편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 몰래 학교에서 공부했다면서 그녀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 바람에 코뼈가 부러지고. 온몸에 멍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자존심이 몹시 상했는지 그 후로 심심하면 구타를 했습니다.

보다 못한 유학생들이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그 남편과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아내가 공부를 해 이담에 훌륭한 일을 하면 남편도 따라 좋은 것이 아니냐며, 선진국에서는 아내가 박사인데 남편은 고졸에 막노동을 하는 경우도 많지 않느냐고 달랬습니다.

반 년 후, 남편도 석사 학위를 받았지만 한번 불붙은 폭력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3년 반 만에 겨우 졸업했는데 아내는 최고 성적으로, 그것도 1년 반 만에 졸업했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박사 코스에서 당당하게 공부하겠다고 죽을 각오로 선언했습니다. 남편은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성질이 날 대로 난 그녀도 그러자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아들 하나를 두고 너무나 간단히 이혼해 버렸습니다.

그녀는 한국의 친정 집으로 돌아왔고, 남편은 박사 과정을 밟아야 했으므로 그 나라에 남았습니다. 아들은 시댁에 와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아들이 보고 싶어 몰래 시댁 근처에서 맴돌다가 유치원버스에서 내리는 아들을 친정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아들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면서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형사들이 그녀를 찾아와서 유괴 혐의로 체포해 갔습니다. 그녀는 경찰서에서 이틀 만에 나왔습니다. 이혼한 여자가 어린 아들이 보고 싶어 저지른 충동적인 행동을 용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보고 싶어서 밤마다 베개를 눈물로 적셨습니다.

며칠 후, 전 남편이 만나자고 했습니다.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고 귀국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다시 아들을 만나려 하면 죽을 줄 알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하던 공부를 중단해 버렸습니다.

그는 항상 아들 곁에 있었습니다. 공부도 때려치웠고, 직장도 잡지 않았습니다. 집이 워낙 부유한 까닭에 먹고 사는 문제는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볼 수 없는데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다시 그 대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무섭게, 자유스럽게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볼까 몰래 공부했어도 단기간에 최고 성적으로 석사 과정을 마칠 수 있었던 그녀에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녀는 박사 과정 3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아 귀국했습니다.

남편은 4년 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아들의 뒤만 졸졸 쫓아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어느새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학교에 가 숨어 있다가 남편이 아들을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학교로 들어가 담임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아들을 데리고 나와 먹을 것을 사주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아들이 어떻게나 똑똑하고 생각이 깊은지 놀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편이고, 어휘력도 놀라울 정도로 풍부했습니다. 아들은 아빠와 등산도 가고 바닷가에도 놀러 간다고 했습니다. 만화 영화도 같이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박사가 되어 자랑스럽다고 하면서도 아빠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일주일에 서너 번 아들을 만났습니다. 아들을 찾기 위한 법정 소송을 걸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사 학위 논문 주임교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느 개발도상국의 사회 현상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1년 동안 합류하여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물론 기뻤습니다.

세계적인 학자가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아들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슬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일단 교수에게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아들을 데리고 갈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들의 여권을 준비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법적으로 남남이기 때문에 그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엄마와 함께 가자고 말했습니다. 아들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출국해야 할 날짜가 다가와 초조해 하고 있던 그녀에게 전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녀는 불안해 하며 그를 만났습니다. 남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습니다. 이미 그는 박사 학위를 받아와 모교 총장을 하겠다던 포부를 가진, 그런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그 속에는 아들의 여권과 미화 1만 달러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들을 1년만 빌려줄 터이니 데리고 갔다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전 남편은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다방에서 나갔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있는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같이 외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면서 아들의 손을 잡고 운동장에서 팔짝팔짝 뛰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엄마… 미안하지만 난 갈 수 없어. 엄마는 내가 없어도 참을 수 있겠지만 아빠는 그렇지 못하거든. 이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빠는 예전부터… 아빠는 내가 어디로 갈까 봐 매일 밤 내 손을 잡고 잠을 자. 할머니는 엄마 때문에… 아냐, 하여튼 난 가지 못해…”

그녀는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의 말은 남편이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신경쇠약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단호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들에게 같이 가자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우리 준호, 아주 착하구나. 그래, 엄마 혼자 갔다 올게… 그 동안 아빠 많이 기쁘게 해드려, 응? 엄마가 돌아올 때 선물 많이 사올게… 너 게임기 좋아하지?”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녀석은 손을 흔들어 엄마에게 바이바이를 하면서 교문으로 향했습니다. 아빠가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아이들아!

 

영화 (엘리니)를 보면 자녀들을 그리스에서 자유 세계로 도피시킨 죄로 공산 게릴라에게 목숨을 잃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처형당하는 순간, 두 손을 하늘로 들어올리고 “나의 아이들아!” 를 외치며 숨져간 그 여인의 모습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여인의 아들은 미국에서 언론인으로 크게 성공하여 고국인 그리스로 돌아가 어머니를 죽인 원수를 찾아내었고, 그 과정을 책으로 써낸 바 있습니다. 물론 그는 그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어머니도, 살인자도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희생양이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가 있기까지는 제자의 하찮은 재주를 범상히 보지 않고, 능력을 극대화시키도록 인도해 준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니콜라스 게이즈가 뉴욕 항구에 내린 것은 1949년 3월의 어느 흐린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얼굴도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엘리니 가초이아니스는 아들과 딸 4명을 자유 세계로 탈출시킨 후 그리스 공산 게릴라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참하게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습니다. 즉 어머니의 죽음의 대가로 그들이 미국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머니의 희생을 발판 삼아 인생을 아름답고 보람되게 살겠다고 어금니를 깨물었습니다.

머리가 벗어지고 옷을 잘 차려 입은 뚱뚱한 남자가 그들을 마중 나왔습니다.

그는 매우 엄한 외국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니콜라스는 가족을 진작에 그리스에서 탈출시키지 못해 어머니를 죽게 한 그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위해 56세가 될 때까지 독신으로 남아 밤낮으로 일한 아버지를 사랑하고 고마워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오직 자식들을 위해 새벽같이 집을 나가 별이 보일 때까지 일했습니다.

그들은 매사추세츠 우스터의 셋집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니콜라스는 피난민 수용소에 있을 때부터 끼고 다니던 그리스제 노트를 학교에 갖고 다녔습니다. 자기가 수년 동안 그 노트만으로 공부했다는 것을 알면 선생님이 감명을 받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영어를 못하는 자신이 선생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트에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누나들과 그는 영어를 하지 못해 학습 지진아들이 공부하는 반에 배치되었습니다. 영어에 숙달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배려가 미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니콜라스는 열세 살 되던 해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첸들러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전에 다니던 학교와는 달리 그곳의 학생들은 옷도 잘 입고 부자인데다가 머리도 영리했습니다.

그들은 심한 악센트가 들어간 영어를 하고 야릇한 옷을 입고 다니는 그를 무시했습니다. 아버지가 영어를 잘 못해서 제대로 언어 교육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집세 내기도 벅차 새 옷을 살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금요일마다 취미 별로 특별 학습을 받았습니다. 취미나 클럽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그는 반에서 제일 예쁜 여자아이가 선택하는 학습을 덩달아 택하기로 했습니다. 루터교 목사의 딸인 그녀는 수줍어하는 니콜라스를 신문반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어서 자라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발조리 허드라는 여선생님이 그 반을 지도했습니다. 선생님은 무서운 눈을 하고, 본토 보스턴 발음으로 투박스럽게 말을 했습니다. 말을 건네기가 겁이 날 정도였으므로 그 선생님을 만난 것이 일생 중 가장 큰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허드 선생님은 니콜라스에게 `게으름뱅이`라고 야단을 쳐댔습니다. 물론 그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선생님은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여기는 신문반이야. 일하기 싫은 녀석들은 다른 반으로 옮겨버려!”

선생님은 툭하면 야단을 치면서도 신문 제작하는 방법을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선생님이 점점 좋아졌고, 그 반에서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가 영문 구조와 논리를 파악하기 시작할 때쯤 해서 선생님은 독서를 한 후 토론하는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거기서는 그리스 문학도 많이 다루어졌습니다. 그는 비로소 전쟁으로 가난에 찌든 조국 그리스를 자랑하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은 어떻게 글로 써야 하는지도 배웠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각자의 경험을 근거로 수필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특히 니콜라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니콜라스, 네 가족이 그리스에 있을 때의 경험을 쓰렴”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 싶지 않은 과거를 되살리기 싫어 숙제 제출일이 다가올 때까지도 작문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화창한 봄날 오후, 니콜라스는 책상 위에 노란 편지지 한 장과 연필을 놓고 창문을 통해 시야에 들어오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무에 싹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마지막 안녕을 한 것도 바로 그런 봄날이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공산 게릴라가 마을에 쳐들어와서 양식을 약탈해 간 것을 시작으로 한 줄 한 줄 적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자신의 아이들이 공산주의 교육을 시키는 수용소에 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다른 여성들과 공동으로 밀타작 일을 했습니다.

엄마는 우리들을 탈출시키면서 “용감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엄마는 나중에 혼자서 탈출하겠다면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체구가 작은 엄마는 멀리까지 걸어가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붙잡지 않으려고 얼른 몸을 돌려 빠르게 걷다가 산을 돌아 몸을 숨겼습니다. 나는 그것이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와 누이들은 산을 넘고 지뢰밭을 건넜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리스 정부군의 품에 안겼습니다. 우리는 피난민 수용소로 보내어졌습니다. 거기에서 엄마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처형당했다는 가슴 아픈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론 부분에서, 봄이 오면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슬퍼진다고 적었습니다.

니콜라스는 작문을 선생님에게 제출했습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문이 학교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그는 선생님이 주제를 정해준 숙제라서 할 수 없이 그 에세이를 썼을 뿐, 친구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더랬습니다. 그는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동정심을 표하면서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했습니다.

허드 선생님은 니콜라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 글을 `자유재단`이 후원하는 에세이 콘테스트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큰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스터 지방 신문이 그 사실을 보도하면서 니콜라스의 작문에 대해 상세히 소개했습니다. 싸구려 식당의 주방장이던 아버지는 뛸 듯이 좋아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스 교포 사회에서는 축하 파티를 열어 주었습니다.

인쇄된 글의 위력이 어떠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니콜라스는 장차 언론인으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어머니의 죽음을 파헤쳐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써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꿈은 30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서 태어날 아이들이 할머니가 용기 있고 훌륭한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허드 선생님은 강제적 이다시피 하여 점점 그를 문학 쪽에 심취하게 했습니다.

그는 학교 신문인 클래시컬 고등학교 신문의 편집장 일을 맡아보면서, 우스터 지방 신문 텔레그램 앤드 게젯트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했습니다.

그가 보스턴 대학에 입학할 때, 아버지가 대줄 수 있었던 학비는 5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장학금을 받고, 그래도 모자라는 학비는 파트 타임 일로 얻은 수입으로 메워 나갔습니다. 남들처럼 놀러 다니거나 쉴 틈도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는 아버지를 보아서도 그는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필리핀에 평화봉사단원으로 갔다가 대학 언론인들에게 주는 `허스트 대학 언론인 상`을 받았습니다.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자동차와 수돗물을 보지 못했던 피난민 출신의 그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영광이었습니다.

우스터 신문에 니콜라스가 케네디 대통령과 나란히 찍은 사진이 게재되자, 아버지는 옷 가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스 교포 사회가 마련해 주는 축하 파티에 입고 갈 새 양복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전에는 한 번도 새 옷을 사 입은 적이 없었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또 신문에서 그 사진을 오려내 비닐종이로 정성 들여 싼 다음, 양복 윗도리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그의 주머니에는 다 낡아빠진 그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니콜라스의 어머니는 첩첩산골에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사촌에게 뇌물을 먹여가며 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만은 꼭 정규 교육을 받게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자신은 배우지 못해 이런 고생을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가 보스턴 대학을 졸업하던 식장에는 물론 어머니는 없었습니다. 기쁨을 같이 나눈 사람은 아버지와 누나들과 허드 선생님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이 없었다면 대학졸업이라는 기쁨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장학금을 받고 칼럼비아 대학 신문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거기에서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를 만났습니다. 결혼식장에도, 그리고 세 아이가 세례를 받는 교회당에도 허드 선생님은 와주었습니다.

허드 선생님은 나이 사십이 넘어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41년간 학생들에게 영문학을 가르치고는 1981년에 62세의 나이로 은퇴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다 큰 손자들을 돌보면서 남편을 따라 뉴햄프셔로 캠핑 가는 것에 취미를 붙였다고 했습니다.

1987년 12월 10일, 레이건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정상 회담을 마친 후 텔레비젼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자유 세계로 탈출시켰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당하는 순간, 두 손을 하늘로 올리고 “나의 아이들아!”를 외치면서 숨져간 니콜라스의 어머니 엘리니에 대한 영감이 서둘러 무기 협정을 맺게 한 동기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연설이 끝난 후, 허드 선생님이 니콜라스에게 전화를 주었습니다.

“니콜라스! 어머니에게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거야.”

 

니콜라스가 생일을 맞은 파티장에서는 양고기를 굽고, 앞사람의 허리에 손을 대어 길게 줄을 만든 후 빙빙 도는 놀이가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그와 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없는 그 파티가 공허할 뿐이었습니다.

엉치뼈가 아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허드 선생님은 앉아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 놀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니콜라스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자신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어느 날, 선생님은 그에게 전화를 주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추도문을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니콜라스는 물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치코의 작은 부탁

 

한 번은 뉴욕에 사업차 들른 친구를 케네디 공항까지 바래다 주고 지하철과 연계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 11시경이었습니다.

“아녀으 하시무니까?”

큰 키에 말쑥한 차림의 동양 남자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묻지 않아도 그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이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처럼 보였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말을 할 줄 아십니까?”

나는 한국어로 물었지만, 그는 그 이상은 한국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영어를 그런 대로 구사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맨해튼의 한 호텔에 예약이 되어 있는데 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하철은 느리고 택시를 타면 2,30달러면 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으나, 그는 절약하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호텔 문 앞까지 데려다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호텔은 아주 위험한 지역에 있었으므로 지리도 모르면서 그 주변에서 얼씬거리다가는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몽땅 빼앗길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데리고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 구멍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우물쭈물 망설이면서 나를 쫓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내가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 강도짓을 하려는 것으로 알았던가 봅니다. 일본사람들은 겁이 좀 많은 편이니까요.

“당신, 그런 식으로 거기 있다간 강도 만나 죽어요! 바로 그 자리에서만 일주일에 적어도 2명은 죽는단 말입니다.”

내가 그 친구에게 공갈을 섞어 말하자, 그제서야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받아들이며 토큰을 넣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가즈오 라면서 혼자서 여행을 왔다고 했습니다. 늦은 밤에, 그것도 지리도 모르면서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가려는 그의 배짱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와 한참을 걸어서, 친절하게도 호텔 안으로 따라 들어가 체크인까지 해주고는 새벽 2시경에야 아파트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잊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가량이 지났을 때, 가즈오 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애인과 같이 왔는데 한 달 동안 있을 거라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는 일본인 집에 방 하나를 구했다면서 애인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일본에도 저런 미인이 있나 하고. 방송국에서 리포터로 일한다는 그녀는 이름이 미치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부부를 일본 식당으로 초대했고, 그 답례로 우리도 그들을 아파트로 초대해 만두국을 대접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가즈오는 대학을 갓 나온 스물다섯 살이었고, 미치코는 그보다 한 살 아래였습니다. 가즈오는 넉살 좋게 나를 형이라 불렀고, 집사람은 미치코를 동생이라 불렀습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여러 곳을 구경하며 다녔습니다.

한 달 후에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 뒤 몇 통의 전화와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 가량이 지났습니다. 미치코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혼자서 뉴욕에 왔는데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맨해튼 18가의 반슨노블 책방 근처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했지만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영국에 취재차 가는 길에 나에게 할말이 있어서 일부러 뉴욕에 들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일부러 왔다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간단했습니다.

“저와 가즈오는 헤어졌어요.”

“언제?”

“몇 달 되었어요.”

“왜?”

“그 사람이 너무 게을러서요.”

“그것도 이유가 되나?”

“저에게는 되고말고요. 그래서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요, 부지런한 오빠가 가즈오에게 부지런히 살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그가 부지런해지면 저는 그와의 관계를 재고할 수 있어요.”

“내가 부지런하다고? 난 전혀 그렇지 않아. 내가 게으르다는 건 아내도 알고 하느님도 아셔.”

“가즈오는 오빠가 부지런하다고 늘 말했는걸요.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고요.”

참으로 난처했습니다. 나는 무척 게으른 사람이었거든요. 그런 내가 누구에게 게으르지 말라고 충고를 하겠습니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와 그녀는 커피숍 앞에서 손을 흔들고는 헤어졌습니다.

나는 미치코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즈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뉴욕에 온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 그런 부탁을 했겠지요.

나는 물론 국제전화 요금을 물어 가면서까지 구태여 가즈오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미치코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2년인가 3년 후 어느 날 밤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가즈오였습니다. 그는 영어 잘하는 사람을 통해 나의 이전 전화번호를 대고 바뀐 번호를 알아냈다면서 의기양양해 했습니다.

그는 신혼 여행을 왔다고 했습니다. 나는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른 채 미치코 좀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난처한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자신의 아내는 미치코가 아니라 치주루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치주루는 미모로 보면 미치코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수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언론계에서 일한다고 했습니다. 나도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 잘 통했습니다.

맨해튼 거리를 치주루와 내 아내가 앞서 걷고, 나는 가즈오와 함께 뒤에서 걸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미치코는?”

“지금도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어요. 일본에서 한창 날리고 있습니다.”

“미치코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었는데, 미안해. 그 말을 자네에게 하지 않았어.”

“무슨 부탁인데요?”

“자네에게 전화를 걸어 제발 부지런히 살라는 말을 해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자네가 부지런해지면 자네와의 관계를 재고해 볼 수 있다고.”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는 침을 꼴깍하고 삼켰습니다. 그는 여전히 미치코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 후로는 나에게 전화도 편지도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미치코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으로 한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만일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그들은 어쩌면 결혼으로 맺어졌을지 모르고, 또한 나는 그들을 지금도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늦은 밤에 가즈오를 호텔까지 데려다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내가 왜 전화 한 통 해달라는 미치코의 부탁을 소홀히 했었는지… 치주루와 맺어지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고 나 스스로를 위로할 뿐입니다.

 

 

 

테리, 아름다운 마라토너

 

테리 팍스는 세상을 떠난 지 거의 20년이나 되었지만, 북미 대륙에서 아직도 진정한 영웅으로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인물입니다. 승산이 거의 없는 싸움에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채 도전하여 마침내 거룩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거둔 인간 승리는 예전에 살았던 그 어떠한 위인에 비해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말입니다.

테리는 유난히 농구를 즐기던 대학생이었습니다. 그의 미래는 온통 장밋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인지라 그는 열여덟 살 때 암에 걸렸고, 그 때문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 브리티시 칼럼비아의 한 병원에 입원했을 때인 1977년 3월, 그는 뇌리에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을 그냥 흘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해서 마냥 다가오는 죽음만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캐나다 암협회’에 한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암 연구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절단된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달고 전장 5천3백 마일이나 되는 캐나다 국토를 뛰어서 관통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성한 사람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물론 암협회는 테리의 편지를 무시했습니다. 그와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그 제의에 코웃음을 쳤습니다. 부모님도 물론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테리는 하느님이 자신처럼 약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암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셨다고 굳건히 믿었습니다.

테리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보장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온전한 왼쪽 다리로 두 번 가볍게 뛴 후, 의족을 단 오른쪽 다리를 한 번 옮기는 독특한 주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초기에는 하루에 반 마일도 제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초기에는 하루에 반 마일도 제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수시로 발걸음을 멈추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왕 죽을 거면 이렇게 달리다가 죽자는 각오로 덤벼드니 고통이 점점 사그러드는 것 같았습니다.

8개월이 지나자 하루에 23마일을 거뜬히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안쓰럽게 생각한 가족들은 거라지 세일(Garage sale; 이사하거나 할 때 자기 집 차고에서 중고, 정리품 등을 염가로 판매하는 것)로 약간의 돈들 마련해 주었고, 한 동네에 사는 두서너 명의 경영인들도 성금을 약간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라톤이 세상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않았습니다.

테리는 국토 관통 마라톤으로 1백만 달러를 모으겠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자신은 죽지만 과학자들이 그 돈으로 연구를 계속해서 훗날 더 많은 암 환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확고했습니다.

그는 1980년 4월 12일에 세인트 존스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절단된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물집이 잡혔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성금이 들어오기는커녕, 경찰당국에서는 교통에 방해가 된다면서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테리는 쓸쓸해지고 낙담이 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이렇게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나의 뜻에 동참해 주는 사람이 조금은 있겠지, 하는 담담한 마음이었습니다.

퀘벡에 도달했을 때, 뜻하지 않게 미국 시애틀의 한 라디오 방송국이 그와의 인터뷰를 전파에 실어 내보냈습니다. 그런 후, 사람들이 갑자기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언론 기관들이 그의 뒤를 좇기 시작했고, 캐나다 TV 방송국에서는 앞을 다투어 테리의 주행을 매일 저녁 뉴스 시간을 통해 보도했습니다.

캐나다와 미국 시민들은 그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면 일손을 놓고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테리가 사막과 같은 캐나다의 황량한 벌판을 의족을 끌고 혼자서 외롭게 뛰어가는 모습은 가정에서 TV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다리의 염증은 날로 심해지고 고통이 가중되었지만, 그는 그만두라는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테리는 토론토에 도착했습니다. 몹시 따가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1만여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박수로 그를 맞아주었습니다. 전국에서 성금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9월 1일, 온타리오의 선더베이에 도착한 테리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느끼면서 쓰러졌습니다. 급히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암이 폐에까지 번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테리의 마라톤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가 달린 거리는 무려 총 3천3백39마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테리의 마라톤은 실패가 아닌 대성공이었습니다. 성금은 그가 목표했던 1백만 달러의 27배나 되는 2천7백만 달러나 모아졌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비몽사몽간에도 몹시 기뻐하면서 살다 가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1981년 6월 28일, 테리는 스물두 살의 아까운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전국에 조기가 걸리고 국민들은 눈물을 뿌렸습니다. 피에르 트루도 수상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테리 팍스는 진정한 영웅이었다”고 애도했습니다.

테리가 마라톤을 그만두어야 했던 선더베이에는 그가 달리는 모습을 조각한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는 갔지만 그의 이름은 캐나다와 미국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피터 제닝스의 꿈

 

미국의 TV 앵커맨 중에서 매일 저녁 6시 30분부터 7시까지 30분간 ABC-TV의 ‘월드 뉴스 투나잇’을 진행하는 피터 제닝스처럼 신문과 잡지에 많이 소개된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처리하면서 제임스 본드처럼 얼굴이 잘생긴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학구적인 외양과는 달리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시쳇말로 ‘별볼일 없는’ 학력을 가지고도 언론계의 정상에 올라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 관한 기사를 종합해 보면 그의 성공 요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일을 하는 데 모자라는 학력을 핸디캡이라 염두에 두지 않고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둘째, 자신의 모자라는 점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흔히 현실욕을 나타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혐오감을 갖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의 솔직 담백성은 부족한 학력을 오히려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셋째,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여 안주하기보다는 언론 분야 중에서도 가장 언론적인 일을 하길 원한다. 따라서 승진이나 봉급에는 관심이 없다.

넷째, 사회 생활에 바쁘다는 핑계로 가정에 등한시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가정의 행복임을 잊지 않는다.

 

피터 제닝스.

그는 캐나다 사람입니다. 학교 공부는 고등학교 1학년을 마지막으로 일찌감치 중단했습니다.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ABC-TV 네트워크를 통해 뉴스를 전 미국에 소개하는 전국망 취재 기자가 되었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전국 뉴스망의 단독 앵커맨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년 후 다시 전국망 취재 기자로 돌아갔다가 해외 특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83년에 다시 뉴욕으로 복귀하여 지금까지 저녁 세계 뉴스를 단독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는 현재 59세. 전문가의 평가나 시청자들의 앙케이트 조사 결과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주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어린 나이에 직업 전선에 뛰어들게 했고, 그리고 그 후로 승승장구의 성장이 있게 했을까요.

그는 6피트 2인치의 커다란 체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품은 온화하고 겸손합니다.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부인이자 작가인 캐티 말톤, 딸 엘리자베스, 아들 크리스토퍼, 그리고 어머니와 같이 찍은 사진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는 토론토에서 태어나 세인트 로렌스 강이 흐르는 오타와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조력하는 데에서 기쁨을 찾는 순종형이었고, 두 분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따뜻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았으며 해외 여행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는 캐나다 방송국의 뉴스 담당 아나운서였고, 197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낡은 집을 세내어 살았었는데, 집에는 음악가, 신문 기자, 아나운서 등 세계적인 명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피터는 아버지를 방문하는 손님들을 만나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가진다면 계속해서 그렇게 재미있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앵글리칸 교파의 학교에서는 평일에 2번, 일요일에는 3번이나 예배를 보았습니다.

부모가 그에게 가르쳐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용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어 그로 하여금 의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정규 학습을 고등학교 1학년까지만 마치고 그만둔 것에 대해 그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너무나 게으른데다가 공부하기 싫었다”는 것이 중퇴 이유였습니다. 그는 수학 문제를 풀기보다는 운동 시합을 더 좋아했으며,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사람들이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했습니다. 그는 그 때를 회고하면서 아마도 정규 학습에 반발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학교를 떠난 후 망설임 없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3년간 은행에서 출납계원으로 일했습니다. 단조로운 일에 만족할 수 없었던 피터는 그 후 온타리오의 작은 방송국 CFJR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일주일에 15달러의 주급을 받아 그 중 10달러를 하숙비로 지불하는 쪼들리는 생활이었지만, 그때가 어느 시절보다 행복했다고 합니다.

피터는 다시 오타와에 있는 CJOH-TV로 직장을 바꾸어 공동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보조 앵커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자질을 눈여겨 본 ABC-TV가 전국망 취재 기자 자리를 제의했지만 그는 거절했습니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에게 그때의 거절이 큰 실수였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피터는 망설이지 않고 ABC-TV의 회장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렇게 해서 26세에 ABC-TV의 전국망 취재 기자가 된 피터에게 덜어진 첫 번째 취재 명령은 흑인들의 인종차별 시위가 극심한 미시시피 주로 내려가 현지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피터는 공포에 떨면서도 인권 운동가들의 뒤꽁무니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쫓아다녔습니다. 동료 기자들 사이에 “미시시피 주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신속하게 움직이는 기자는 바로 피터 제닝스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쉬지 않고 취재 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활동에 앙심을 품은 백인 우월주의 집단 KKK가 그를 추격하며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피터는 뉴욕 본사 회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화가 난 회장은 즉시 미시시피 주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만일 우리 기자들을 경호하지 않으면 카메라맨 40명을 데리고 내려가 미시시피 주를 발칵 뒤집어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경찰이 항상 피터를 따랐으며, 잠을 자는 밤중에도 호텔 방문을 지켜 주었습니다.

6개월간 취재 기자로 일한 피터는 ‘피터 제닝스 뉴스’라는 프로그램의 앵커를 맡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시청자를 상대로 하는 카메라 앞에 앉은 피터는 두려움과 어리벙벙한 심정이 교차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시청한 아버지가 대로하여 전화를 걸었습니다. 언론인은 현장에서 발로 뛸 때 참다운 보람이 있는 것이지 앵커나 해서는 안 된다는 꾸지람이었습니다.

3년간 앵커로 일한 피터는 1968년에 전국망 취재 기자로 돌아갔고, 1969년부터 1974년까지는 해외 특파원으로 일했습니다. 그가 주로 체류한 곳은 레바논의 베이루트였습니다. 그는 PLO의 야시로 아라파트 의장과 장시간 인터뷰하여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동료 언론인들이 사회 생활에 쫓기느라 가정 교육에 실패하여 자녀들이 비뚤어진 경우를 매우 가슴 아파합니다. 가정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녁에는 자녀들과 함께 꼭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롱아일랜드에 있는 별장으로 갑니다.

그는 지금 또 다른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몇 년 후, 아이들이 다 성장하면 앵커를 그만두고 다시 현장의 취재 전선으로 돌아가리라는 꿈입니다. 그곳에는 자신이 알아야 할 것들이 아직 많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생쥐와 인간

 

그는 무기수였습니다.

흉악한 어떤 범죄를 저지르는 중에 실수로 사람까지 죽였던 그는, 교도소 감방에 갇힌 채 자신의 삶과 세상 사람들을 극도로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친구 하나 없이, 어느 간수와도 친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말썽만 부리던 그는 독방에 갇혀서 짐승처럼 밥이나 축내며 세월을 보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잠을 자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살며시 눈을 떴습니다.

바싹 말라빠진 자그만 한 생쥐 한 마리가 변기통을 뱅뱅 돌더니 죄수 쪽으로 다가오려다가 겁이 나는지 느닷없이 쥐구멍으로 도망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죄수는 아쉬웠습니다. 그 생쥐라도 방 안에 있었다면 덜 심심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생쥐는 그 다음 날에 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녀석은 죄수에게 다가오지 않고 변기통만 몇 바퀴 돌더니 사라졌습니다.

죄수는 그 녀석을 데리고 놀고 싶어 배급된 밥을 다 먹지 않고 그것으로 녀석을 유인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죄수는 공기 돌 만한 밥 덩어리를 변기통과 자신 사이에 놓아두었습니다. 생쥐는 처음엔 상당시간 망설이다가 자신이 없었던지 쥐구멍으로 향하더니, 금방 다시 돌아와 밥 덩어리를 낚아채 가지고 도망을 갔습니다.

녀석은 매일 죄수로부터 밥 덩어리를 받아서 먹었고, 나중에는 밥 덩어리가 죄수의 손 위에까지 올려지게 되었습니다.

죄수와 생쥐는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죄수가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쥐구멍에 숨어 있던 생쥐는 쪼르르 달려 나와 그의 품에 안겼습니다.

죄수는 다른 방으로 몇 변이나 옮겼지만, 그때마다 생쥐는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채 비틀거리면서 용케도 그를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죄수는 다른 지방에 있는 교도소로 이감되게 되었습니다. 다리가 짧은 생쥐가 찾아오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습니다. 간수가 방문을 열자, 생쥐는 그의 몸에 붙어 있다가 쥐구멍으로 몸을 숨기고는 고개만 빼곡이 내밀었습니다. 생쥐와 죄수는 이별이 아쉬운 듯 오랫동안 시선을 주고받았습니다.

죄수는 한동안 그 생쥐가 그리웠지만 결국에는 잊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전 교도소에서 근무했었던 간수가 죄수가 있는 교도소로 전근해 왔습니다. 그는 죄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죄수가 이감되고 근 한 달간 비어 있던 그 독방을 우연히 열어보았는데, 쥐 한 마리가 굶어 죽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죄수가 누워 있었던 자리에 말입니다.

죄수는 자신을 찾아서 온 교도소를 뒤졌을 그 생쥐가 가여워서 언제 마지막으로 흘렸는지 기억조차 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비록 인간으로부터는 아니었지만, 그에겐 난생 처음 받아보는 참다운 사랑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미물도 마음을 열고 사랑해 주니, 그 역시 죽음을 아끼지 않은 사랑으로 보답해 준 것이었습니다.

죄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습니다. 자신도 여생을 그 생쥐처럼 남을 사랑하며 살리라고.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자 간수를 비롯해 다른 죄수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그리고 자신의 삶도 사랑하게 되어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죄수는 모범적인 수형생활 끝에 가석방되었고, 그 후 공부를 해서 훌륭한 종교인이 되었습니다.

 

 

 

 

절망을 버리면 희망이 보인다.

 

화려하게 보이는 연예인들 중에는 의외로 고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일수록 연예인으로서의 수명이 오래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TV 탤런트 C도 그렇습니다. 귀공자 같은 얼굴을 가진 그가 무지막지하게 고생했다고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 남미로 이민을 갔습니다. 부모님은 그곳에서 사업에 성공했고, C는 미국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4학년 때 집에서 꼬박꼬박 송금돼 오던 생활비가 갑자기 끊겼습니다. 집안 사정이 일시적으로 악화된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한 그는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어 간신히 졸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슬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업이 잘못 되는 바람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들어가셨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어머니는 친척집에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라 눈치가 보여 이제는 친구집을 전전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있을 방 한 칸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절망 속에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여관방에라도 모실 수 있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공사판에 나갔습니다. 잠은 공원 벤치나 공사판에 누워 신문을 이불 삼아 덮고 잤습니다. 돈이 조금 모이자 어머니를 여관방에 모신 후, 식사와 약을 사 드시라고 돈을 드리고 나오곤 했습니다.

그는 지쳐 벤치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짐했습니다. 이담에 돈을 벌면 반드시 일정액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리라…

그러나 세월은 마냥 흐르고 아무런 대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생명이 붙어 있으니 악착같이 살아보자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하루는 누가 그에게 영어를 잘하니 개인지도 교사를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했습니다. 그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그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낮에는 공사판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한 어린아이를 상대로 과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 때, 그 집의 주인 아저씨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갑자기 뚱딴지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네 탤런트 한번 해보지 않겠나?”

그가 웃으며 하지 않겠다고 하자 주인 아저씨는 다시,

“돈 벌기 싫나?”

하고 물었습니다. 돈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그는 그제서야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주인 아저씨는 방송국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탤런트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사가 없는 단역을 맡았으나 차츰 주인공 역을 맡는 최고 인기 탤런트가 되었고, 미모의 인기 탤런트인 H양과도 결혼했습니다.

그는 지금, 어려웠던 시절 벤치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짐했던 그 약속을 어김없이 이행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면 일정액을 떼어 없는 사람을 위해 쓰리라는 그 다짐을 말입니다. 그는 소년소녀 가장을 위해 매달 일정액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겐 학원 강사인 친구가 있습니다. 그도 학원 강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바 없었습니다. 그는 수백억대의 재산을 가진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1학년 때부터 운전수가 딸린 자가용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도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형이 막대한 부동산을 은행 등에 잡혀서 아파트를 지었는데, 분양이 되지 않는 바람에 다 날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형은 부도를 내고 도망가고, 어머니는 사글셋방에서 끼니를 걱정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도 신세 한탄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돈을 벌게 해줄 도구가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영어를 가르치면 먹고 살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부산으로 무작정 내려가, 아무 학원이나 들어가서는 선생으로 써달라고 막무가내로 매달렸습니다.

그는 구멍가게 같은 학원에서 먹고 자면서 한 달에 용돈 20만 원을 받으며 서너 달을 지내다가, 그런 식으로는 어머니를 모실 수 없겠다는 생각에 더 큰 학원으로 옮겼습니다. 한 달에 5만 원 하는 사글셋방에 살면서 제대로 먹지를 못해 얼굴에는 황달기까지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낮에 6시간을 가르치고 밤에는 다른 학원에서 또 몇 시간을 가르쳤습니다.

그때부터 과외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야간반을 그만두고 새벽 5시부터 그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무리를 하다가 병들어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겠다는 판단하에 죽을 각오로 덤볐습니다.

그렇게 일한 지 2년 만에 어머니에게 7천만 원짜리 아파트를 사드리고, 다시 2년 후에는 서울에 3억 원대의 아파트를 샀습니다. 그리고 결혼도 했습니다.

지금은 학원 선생으로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가끔, 그때 자신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하지 않았다면 지금 거렁뱅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가슴을 쓸어 내리며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내가 더 어렸을 적에 고생해 보지 않은 것이 한스럽네. 그러나 더 늙어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다소 늦게나마 지독한 고생을 거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네. 나는 두 번 다시 편안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걸세.”

그렇습니다. 젊었을 때의 고생이 큰 자산이라는 말이 진리라는 것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달아집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아이들을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또 부잣집 아이라고 해서 대학 등록금을 덤벙덤벙 대주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학원에 가는 청년, 심지어 결혼한 성인들에게까지 등록금을 대주고 유학비를 대줍니다. 그런 사람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대기업 회장의 자제들이 선진국에 나가 석,박사 학위를 받아서 돌아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요직에 앉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손에 기름때를 묻혀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식 한 트럭은 한 소쿠리의 경험보다 못합니다. 수십 년 땅을 매고 살아온 농부가 던지는 한두 마디의 투박한 말이 어느 석학의 말보다 더 가슴 깊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박차고 올라온 탤런트 C나 내 친구 같은 사람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참새와 죄수

 

로버트 스트라우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살인범으로 캔자스 주의 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성질이 포악한데다가 무뚝뚝하고 사교성도 없었던 그는 동료 죄수들과 자주 싸움을 벌여 교도관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가 집에서 2천 마일이나 떨어진 교도소로 면회를 왔으나 교도관이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버트는 식사 도중에 그 교도관과 다툼을 벌이다, 곤봉으로 머리를 치려는 그를 흉기로 찔러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일로 교수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사형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어머니는 백악관으로, 토머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부인을 찾아가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눈물로 사정했습니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결국 로버트는 교수형을 받기 수일 전에 가까스로 무기형으로 감형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을 때까지 독방에서 살아야 하는 그에게 인생의 의미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자살도 여러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은 살아보기로 마음을 정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루 15분간의 운동 시간을 감방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를 맞으며 운동장에서 산책을 하다가 기운이 없어 울지도 못하는 참새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가여운 생각에 감방으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바퀴벌레를 잡아서 먹이는 등의 지극한 간호 끝에 참새는 건강을 회복하여 날아가고, 그에게는 대신 카나리아 한 쌍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로버트는 모든 정성을 다해 그 카나리아를 번식시켜 다른 감방에서도 새를 키우게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새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교도소에 비치된 관련 서적들을 밤새워 읽고,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각종 약품을 들여보내도록 했습니다. 피눈물 나는 실험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그는 그 질병의 정체와 치료법이 무엇인지를 밝혀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학술지에 논문이 게재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가 박사 학위는커녕 초등학교 3학년을 겨우 끝낸 무식쟁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의 인간 승리는 (캔자스 시티 스타)라는 일간지에 크게 실리면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신문기사를 보고 면회 온 여인과 결혼하는 행운도 얻었습니다. 그는 차후에 책을 써서 세계적인 새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무기형만은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감방 안에서 하는 일 없이 그저 세월만 보냈다면 세계적인 조류 학자로서의 로버트 스트라우드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유언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 미국의 모 대학 도서관 로비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거지처럼 초라한 행색에 지린내까지 풍기는 노파가 검정색 비닐백을 들고 우리 앞을 지나갔습니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 노파가 힘겹게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노파가 어떻게 도서관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생증이나 교직원증 없이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헤이, 친구! 경비원들, 저 할망구한테 뇌물 먹은 것 아냐? 저런 꼬락서니로 어떻게 여길 들어왔지? 안면이 있는 학생이라도 학생증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들여보내지 않으면서 말이야.”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뺨에 칼자국까지 있는 친구는 정말 모르냐는 듯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헤이, 코리언 멍청이! 자네는 우리가 어떻게 이 좋은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는군. 저 부인의 남편이 재산을 몽땅 학교측에 기증해서 이 엄청난 도서관을 짓게 했다는 것도 모르다니…. 저 부인은 그래서 죽을 때까지 이 도서관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거라고.”

“그래? 거 굉장한 사연이군!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도 한심하군그래. 부인이 저렇게 거지 꼴로 지내도록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몽땅 학교에 기증했다니 말이야.”

“그런 게 아니야. 저 부인이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남겨두었는데, 부인은 그것마저 학교에 남겨야 한다면서 저러고 산다더군.”

그 말을 듣자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하고 올라오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뭔가 후손을 위해 좋은 것을 남겨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때로는 이기적이고 패권주의를 지향한다고 욕을 듣기도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는 그런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화자찬하는 한국 사람들 중에는 왜 그런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은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지금 우리 앞에 육신으로 나타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으면서 올바른 삶의 지표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공병우 박사는 1906년에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1995년 3월 7일,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촌음을 아껴가며 한국인의 혼과 글을 사랑하고, 한글 기계화를 위해 치열하게 연구한 사람이었습니다. 생전에 일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절대로 자신의 부귀영화를 도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갔을 때에야 비로소 미련한 우리들은 그의 참다운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독학으로 한국 최초의 의사가 된 그가 한글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38년,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 안질을 치료받으러 그를 찾은 후부터였습니다. 그는 이극로 선생을 통해 한글을 사랑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참다운 한국혼을 가질 수 없다는 것과, 한글 연구가 독립운동 못지 않게 시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글 연구에 몰두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차에 곧 그런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가 서울대 의학부에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일본어로 쓰여진 전공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두 명의 조교에게 원고 정리를 부탁했는데, 능률이 매우 저조하였습니다. 아무리 기록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사람이라도 손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서너 시간만 펜을 쥐고 있어도 팔목이 아프고 글씨가 바르지 않게 됩니다. 결국 그는 기계로 그런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마침 엉성하긴 했지만 한글 타자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로로 찍어서 세로로 읽어야 하는 그 타자기로는 원하는 효율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공병우는 엉뚱하게도 자신이 직접 제대로 된 타자기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따라서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돈 버는 일을 그만두고 연구에 몰두하겠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번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고 마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침식을 걸러가며 연구에만 매달린 지 6개월 만에 마침내 한글 타자기를 개발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 타자기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바람으로 그는 문교부 장관을 찾아갔습니다. 서너 번의 요청 끝에 간신히 이루어진 면담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관은 그가 무슨 돈벌이나 하려는 줄 알고, 타자기를 눈여겨 보지도 않은 채 무시하면서 인격적인 조롱마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가만 있을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환자를 진료하면서 시간이 빌 때마다 계속해서 한글 타자기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한글 타자기의 놀라운 성능을 알아준 곳은 놀랍게도 한국 정부가 아닌 북한 군부였습니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그는 인민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 동안 의사로서 돈을 많이 벌었고, 노동자의 피를 빨며 호의호식했다는 죄목으로 총살형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공산당이 그의 한글 사랑과 검소한 성격을 알 리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신이 도움의 손길을 주는 법인가 봅니다.

한글 타자기의 놀라운 성능에 반한 정치고위부 고위층의 배려로 그는 기적적으로 처형을 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글 기계화 연구를 계속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휴전협정 문서 정본과 1965년의 한일 기본조약 문서도 공병우 타자기로 정리되었습니다. 특히 한일 기본조약시에는 한국측이 단 몇 시간 만에 공병우 타자기로 서류를 정리해내는 것을 보고, 며칠씩이나 걸려야 하는 일본측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1968년, 상공부가 비과학적인 한글 타자기 네벌식 표준자판 시안을 밀고 나오자, 그는 자신이 개발한 세벌식 타자기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역설하면서 정부와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고집을 부린다며 비난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역설해 나갔습니다.

한 번은 정부측에서 그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표창하려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1972년, 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까지 당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표창이 아니라, 보다 효율적인 세벌식을 정부가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한때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사재를 털어 한글문화원을 설립했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한글 연구와 그 기계화뿐이라는 고집에서였습니다. 한글사용의 효율성을 높이지 않고서는 결코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우리 한글에 대한 정부와 식자들의 무관심에 그는 통탄했습니다.

그는 한글 연구에만 미쳤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올바른 지표를 후세들에게 제시해 주는 데에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해외에 갔다 오면서도 국가에 누가 된다면서 절대로 가족들에게 줄 선물조차 사오지 않았습니다. 1952년에는 미국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친지를 위한 선물 대신 시각 장애인들에게 줄 흰 지팡이 한 보따리를 사와 무료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1957년에는 앰뷸런스를 들여와,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을 직접 운전하여 순회하면서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는 지독한 합리주의자였습니다. 구두를 벗고 신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뒷부분을 일부러 찌그러뜨려 신었으며, 낮에는 절대로 결혼식 주례를 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상 작업복 차림이었습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연구에 몰두해야 하는 그에게는 양복 정장 차림이 불편할 뿐이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작성해 두었던 유서에도 그이 철두철미한 합리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절대로 남들에게 알리지 말고, 장례식이나 추도식도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신 자신의 장기를 필요한 환자에게 주고, 나머지는 시체 해부학 교실에서 실습용으로 이용토록 하라고 했습니다. 죽으면 생명이 없다고는 하지만, 선뜻 그렇게 하라고 나서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도 말입니다. 만약 그럴 수 없을 경우에는 사후 24시간 이내에 화장하거나 혹은 수장하라고 했습니다.

또 매장할 경우에는 공동묘지를 이용하되 죽은 곳에서 1백 킬로미터 밖으로는 운반하지 말 것이며, 시신에 수의도 입히지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싸구려 관에 넣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1개월이 지난 후 친지에게 알리되 매장지는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들의 시간을 빼앗지 않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각막은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었고, 시신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실습용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빈손으로 간다. 장기를 기증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흙으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한 평의 묘자리를 쓰는 것보다는, 그 자리에 차라리 콩을 심는 것이 낫다.”

얼마나 후손을 사랑했으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국회의사당 회의장 안의 회의탁자 위에 놓여진 국회의원들의 한자 명패를 볼 때마다 공병우 같은 사람이 계속해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운전병과 연탄 배달원

 

고등학교 선배 중에 영어를 거의 영국인이나 미국인에 가깝게 구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분이 명문대학을 나온 것은 아닙니다.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그것도 삼류 취급을 받는 학교를 거의 말석으로 졸업한 그는 감히 대학 갈 꿈은 꾸지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료하던 차에 그는 우연히 중학생용 영어 참고서를 보게 되었고, 그 길로 본격적으로 영어공부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얼마나 영어를 잘하는 줄도 모른 채 군에 입대 했습니다. 그는 부대장의 운전병을 하게 되었는데, 그 부대장은 직무상 미군을 자주 만났다고 합니다.

하루는 부대장이 “미국의 아이비 리그에 속한 대학을 나온 놈이 영어도 제대로 못한다”고 짜증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부대장은 통역으로 미국의 최고 명문 대학을 나온 장교를 데리고 다녔는데, 그만 통역이 서툴렀던가 봅니다. 선배는 그래도 설마 통역 장교가 영어를 못할까 싶었습니다.

어느 날 선배가 운전하는 차에 통역 장교와 미군이 탔습니다. 통역 장교가 미군이 말하는 것을 부대장에게 통역을 하는데, 선배는 깜짝 놀랐습니다. 통역 장교의 통역에 엉터리가 많다는 점에도 놀랐지만, 그것보다도 미군이 말하는 소리가 선배의 귀에 똑똑하게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선배는 부대장과 둘이서만 있을 때, 통역 장교의 엉터리 통역 중에서 중요한 부분만을 다시 정정해 주었습니다. 부대장은 고등학교만 졸업했을 뿐인 그의 말에 처음에는 의심하는 눈치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선배의 영어실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통역 장교 대신 운전병인 그를 통역으로 데리고 다녔습니다.

선배는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그 부대장의 추천으로 모기업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선배는 그야말로 발군의 영어 실력으로 사장을 모시고 전 세계를 제집처럼 누비고 다녔습니다. 나중에는 더 큰 물에서 놀아보겠다고 이민을 떠났지만, 선배가 그처럼 영어에 능통하게 된 데에는 스스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준비와 노력을 하였기 때문이라 생각이 됩니다.

중학교 실력 정도의 문법을 한 달 만에 마스터한 선배는 70여편이나 되는 영화의 대사를 모두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배우의 특이한 음성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공부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매주 배달되어 오는 (뉴스위크)지를 큰 소리를 내가면서 읽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무슨 큰 기대를 걸고 공부했던 것은 아닙니다. 심심해서 영어책을 펼쳤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영어에 빨려 들었고, 그래서 영어를 필요로 하는 직장에 들어간 것뿐이었습니다.

현재 모 대학교의 미술대학 교수를 지내고 있는 분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20여 년 전에도 교수, 특히 미술대학 교수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습니다. 다른 학과에는 박사 학위 소지 여부 같은 채용 기준이 있지만, 예술계는 학위만으로 실력을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하루 종일 화실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습니다.

작품이 하나하나 완성되어 제법 모여지자, 그는 친구와 공동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하루는 노인 한 분이 그의 그림을 자세히 보더니, 명함 한 장을 주면서 시간 나면 한번 찾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노인이 그림을 사려는 줄로만 알고 그 집을 찾아갔는데, 놀랍게도 그 분은 모 대학교의 학자이었습니다. 기회를 줄 터이니 강의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노인의 제의에 따라 그는 그 미술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또 박정희 대통령 정권하에서 오랫동안 한국의 경제를 담당했던 N씨도 열심히 삶을 준비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 역시 명문 대학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삼류 대학에 다니면서 버스 안에서 중학교 영어책을 크게 소리 내어 읽는 주책을 부리기도 했고, 미국 사람만 만나면 겁 없이 엉터리 영어로 말을 걸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대학생이라면 체면이 있고, 버스 안에는 여대생도 있었을 터이니 중학교 영어책을 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공부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진정한 용기가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아와 대학 교수로 지냈지만, 그때에도 집안 살림이 어려워 부인이 따로 연탄 가게를 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돌아와 연탄 배달을 하던 중에 장관으로 입각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 후 한국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브루클린 브리지

 

자유의 여신상이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면, 그리고 뉴욕 맨해튼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경제력의 과시라 한다면,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브루클린 브리지`는 절대 좌절하지 않는 미국 정신의 결정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다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에 건설된 이래 지금까지 여전히 수많은 교통량을 소화해 내고 있습니다. 훨씬 세련되고 튼튼한 다리들을 제치고 브루클린 브리지가 미국인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그 다리에 미국혼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1841년, 쇠줄을 연결하여 다리를 건설하는 방법이 처음 선보인 후, 존 로블링이라는 사람은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쇠줄 다리로 연결 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바람과 계절의 기후 변화를 견디면서 동시에 전장 1천5백95피트나 되는 다리의 중력을 위에서 잡아당겨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모해 보이는 그의 계획을 만류하고 나섰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 인류에 크게 헌신한 사람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 로블링은 자신감에 넘쳐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웃음이 귀에 들어올 틈이 없을 만치 그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1869년, 시공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연락선이 그가 서 있던 말뚝 재목더미를 치는 커다란 사고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발목이 부러지고 여러 개의 발가락이 절단되는 큰 부상을 입은 그는 결국 파상풍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꿈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워싱턴이라는, 아버지의 고집을 꼭 닮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잠수함을 이용하여 물 속에다 기초를 다지는 방법을 습득했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브루클린 브리지 건설의 배턴을 이어받은 그는 수석 엔지니어가 되어 교각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워싱턴 역시 아버지와 다름없이 미친 사람처럼 일에 달라붙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로블링 집안이 말도 안 되는 다리 건설로 망할 것이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우려가 그대로 들어맞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다리의 완성을 시샘하는 악한 세력이 그를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1872년, 압축 공기실에서 무려 12시간이나 일한 그가 정신을 잃은 채 밖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의 건강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의사는 살고 싶으면 일에서 손을 떼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미 그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몰아 닥친 무서운 시련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역경이야말로 브루클린 브리지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다리가 될 거란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역사에 오랫동안 명작으로 남는 문학,예술,건축,음악 작품 등은 반드시 역경을 수반한다고 믿고, 거기에서 오히려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몸이 자유롭지 못한 그가 다리 건설을 감독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브루클린에 있는 자신의 집에 앉아, 창문을 통해 망원경으로 일의 진척상황을 살피면서 공사를 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을 할 수 없어서 암호를 개발하여 관계자들과 의사 소통을 했습니다. 공사는 무척이나 더뎠지만, 오히려 일이 꼼꼼하게 진행되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공사 감독을 무려 11년간이나 계속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의 환상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세상은 온통 축하 분위기에 싸여 폭죽까지 터뜨렸지만, 그는 미소짓지 않았습니다. 2대에 걸쳐 온몸과 혼을 던져 완성한 다리를 집에서 바라보며, 소리내지 않고 울음을 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 고무가 어디서 날 것 같소?

 

한국전쟁으로 재산을 몽땅 잃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피난 갔다 돌아와 보니 집은 폭격을 맞아 온데간데 보이지 않고, 수중에는 돈 한푼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세 자녀를 집터에 남겨두고 무작정 거리를 헤매었습니다.

“이제 식구들을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한담….”

청량리 근처를 걷다가 지친 그가 길가에 쪼그려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전거에 폐타이어며 다 떨어진 고무신 등의 고무를 잔뜩 싣고 고물상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싱글벙글 웃으면서 돈을 세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든 그는 고물상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사람들이 고무를 들고 들어갔다가 예외 없이 돈을 받아가지고 나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그는 막 고물상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고무는 어디서 가져오는 것이오?”

그 사람은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더니 대꾸도 없이 자전거에 올라타고는 사라졌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고물상 앞에 서서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고무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침내 고물상의 문이 닫힐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고무를 어디서 가져오는 것인지 알지 않고서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결심으로 고물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주인! 저는 부산에 피난 갔다 돌아와 벌써 이틀째 굶고 있습니다. 저는 참을 만합니다만, 집에 있는 노모와 어린 자식들은 굶길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저기 문 앞에 서서 보아하니 사람들이 고무를 가져와 이곳에 파는 모양인데, 도대체 그 사람들은 고무를 어디서 가져오는 것입니까?”

고물상 주인은 매우 불량스럽게 생긴 20대 후반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얌전스레 생긴 방문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식솔을 먹여 살릴 수 있단 말이오? 난 당신이 아침부터 밖에 서서 이곳을 쳐다보는 것을 알고 있었소. 사람들이 고무를 팔아서 돈을 챙겨 나가는 것을 보았으면 즉시 들어와 물어볼 것이지, 하루 종일 머뭇거리다가 이제서야 들어온단 말이오”

주인은 그러면서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고는, 역시 고무를 어디서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청년의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그는 문고리를 붙잡고 통사정했습니다. 그 청년이 그런 자세를 좋아할 것도 같았습니다.

“주인양반! 그러지 말고 죽는 사람 한번 살리는 셈 치고 고무를 어디서 가져오는지 좀 가르쳐 주시오.”

그가 목이 쉬도록 사정하자, 마침내 나이 어린 주인이 문을 열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여보시오, 선생! 고무가 어디서 날 것 같소? 오늘 돈을 받아간 사람들은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면서 고무를 주워 온 것이오. 간혹 홈쳐오는 놈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럼 저도 고무를 주워올 테니 수레 하나 만들 수 있는 바퀴 두 개만 빌려주시겠소?”

그에게는 자전거가 없으니 길에서 주운 고무를 주워 담을 수레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쇼! 여기서 만들어 가쇼.”

주인은 다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고, 그는 고물 더미에서 성한 바퀴 두 개와 나무 판자를 찾아 엉성하게나마 수레를 만들어서 그곳을 나왔습니다.

그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고물을 주워서 그 고물상으로 날랐고, 그로부터 채 5년도 못 되어 상당한 재산을 모아 서울에서는 꽤 유명한 고물상 주인이 되었습니다.

 

 

 

 

외롭지 않은 남매

 

명희와 철희는 고아가 된 지 4년이 되었습니다.

명희가 고등학교 2학년, 철희가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조그만 직장에 다니던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시골의 친척집에 가다가 교통 사고를 당해 모두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남매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세 들어 사는 주인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딸처럼, 아들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집의 문간방에 살게 된 지는 8년이 되었습니다. 의사였다가 은퇴한 주인 아저씨가, 집은 넓은데 식구가 별로 없어 쓸쓸하다면서 사람이 오면 문이나 열어달라며 문간방을 싸게 전세로 내주었습니다. 문간방이라고 하지만 큰 방 하나에 자그만한 방 한 개가 딸려 있고, 부엌과 수세식 화장실이 따로 있기 때문에 별채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 집에는 손님들이 참으로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벨 소리가 나면 철희네 식구들이 달려나가 문을 열어주곤 했습니다. 명희와 철희가 공부를 할 때는 주로 어머니가 나가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방문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가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들어 둘 다 벨 소리를 듣지 못할 때는 주인 아저씨 혹은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었지만, 그 분들은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통장에 겨우 2백만원이 들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전세금을 빼어 달동네로 들어가 남는 돈으로 학교를 마치려고 했습니다.

남매는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그 계획을 말하고는 전세금을 빼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 아저씨는 당장은 돈이 없어서 빼줄 수 없고, 철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빼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남매는 주인 아저씨가 몹시 미웠습니다. 돈 많기로 동네에 소문이 난 노부부가 욕심쟁이처럼 보였습니다.

남매는 새벽2시에 일어나 신문 배달을 했습니다. 그 돈으로 등록금을 내며 간신히 학교에 다녔습니다. 큰아버지, 작은아버지가 한 번도 와보지 않아 섭섭했지만, 남매는 용기를 내어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고생이 끝날 것이라고 서로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명희와 철희는 학교 성적이 항상 1등이었지만, 신문 배달을 하면서 조금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반에서 5등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누나인 명희가 감기 몸살로 코피를 흘리고 열이 40도를 오르내릴 때면 철희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명희는 신문을 배달하러 나갔습니다.

남매는 날마다 보급소에서 신문을 받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아침 공기를 가르며 뛰었습니다. 신문 배달을 끝내면 쉴 틈도 없이 바로 학교로 갔습니다.

명희는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졸업식장에 놀랍게도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꽃다발을 들고 와주었습니다. 명희는 너무 감격하여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평소에 마른 반찬이나 김치를 갖다 주기는 했지만, 전세금을 빼주지 않아 섭섭한 감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찾아온 것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명희에게 직장에 다니면서 방송통신대학에라도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겠다면 학비를 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돈만 알 것 같은 주인 아저씨가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러나 명희는 동생 철희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대신 빨리 결혼하여 자립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명희는 아버지가 다녔던 회사의 경리사원으로 들어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던 대로 스무 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거래업체 사원을 프로포즈를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나이가 무려 서른 살이라고 했지만, 명희는 그 남자를 좋아했습니다.

주인 아저씨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명희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 주었습니다. 알리지 않아 친척들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신 주인집 노부부와 출가 한 그 집 딸들이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와주었습니다.

명희가 딴살림을 차리자 철희는 더욱 외로워졌습니다. 그러나 외로움을 공부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자그마한 방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지만, 주인 아저씨는 여전히 전세금을 빼달라는 말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음식을 줄 때는 고맙기도 했지만, 철희는 대개는 섭섭한 마음으로 그 집에서 살며 공부를 했습니다.

마침내 철희도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그는 주인 아저씨를 찾아가, 창원에 있는 어느 공장의 선반공으로 가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정말로 전세금을 돌려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그제서야 빙그레 웃으면서 장하다고 칭찬하고는, 돈은 당장이라도 돌려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저씨의 돌변한 태도에 철희는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명희를 찾아가 창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철희는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 앞에 무릎을 끓고 눈을 떨구었습니다. 그리고는 형님(주인집 아들)이 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창원에 가지 않고 이 집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 집 딸들은 오래 전에 다 시집을 갔고, 막내인 아들은 군의관으로 복무 중인데 앞으로 1년 반만 있으면 제대한다고 했습니다.

철희는 어젯밤에 매형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철희와 명희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주인집 어른들이 너희를 생각해서 돈을 주지 않은 거야. 달라고 했을 때 냉큼 돈을 내주었으면 그 돈이 지금 남아 있을 것 같아? 그 돈 없어도 그 좋은 집에서 굶지 않고 학교를 졸업했잖아. 그리고 자립심과 생활력도 키웠고. 그게 얼만데… 그 어른들의 깊은 속도 모르고…”

명희와 철희는 그 노부부를 친부모처럼 생각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은인을 찾아서

 

민수는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아프리카 지사에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지사로 발령받으면서, 반드시 그 분을 찾겠다는 오래 전의 꿈이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놓고 성공했다고 자랑할 만한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의 내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민수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어렸을 적에 보육원에서 호적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곳이 하도 험악해서 초등학교를 마치자 도망쳐 나왔고, 그 뒤 도금공장에 들어가 숙식을 해결하면서 살았습니다.

지방 어느 소도시에서였습니다.

그는 낮에는 힘들게 일하고, 밤에는 근처의 야학에 나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주로 대학생들이었지만 미국 사람도 한 명 있었습니다. 제임스 리처드는 영어를 가르쳐 주었는데 평화봉사단원이라 했습니다. 민수는 그 선생님이 좋아서 특히 영어를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야학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그는 새벽 3시까지 공부를 하고 아침 7시에 일어나 작업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힘들어서 종종 코피를 흘리기도 했지만, 공부를 중단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장도 그런 그를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자기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바람에 중학교만 간신히 마쳤다면서, 공부는 젊었을 대 해두어야 한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민수는 야학에 다닌 지 1년 만에 고등학교 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선생님들, 특히 리처드 선생님이 좋아해 주었습니다. 그는 이미 미국으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어떻게 연장하여 한국에 더 있기로 한 모양이었습니다. 리처드 선생님은 민수에게 영어에 소질이 있다면서, 조금만 더 열심히 한다면 영어를 훌륭하게 구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민수의 일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도록 했습니다.

민수는 일요일에는 선생님을 따라 교회에 붙어살았습니다.처음에는 그곳이 싫었지만, 점점 그곳의 친구들과 성격말씀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선생님에게 영어로 된 성경을 선물 받아 열심히 읽고 암기했습니다. 영어 성경 암송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민수는 내친 김에 대학 입학 검정고시까지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경제력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가진 것만으로도 만족할 뿐이었습니다.

하루는 배가 너무 아파 야학에 가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체한 것 같더니 나중에는 고통이 명치에서 아랫배로 옮겨지는 것이, 칼로 생살을 도려내는 것 같았습니다. 민수는 배를 움켜지고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공장에는 민수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민수는 언제나 공장 안에 있는 작은 방에서 혼자 잠을 잤습니다. 그때 누가 공장 문을 두드렸습니다. 민수는 기다시피 해서 가까스로 공장 문을 열고는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하루도 야학에 빠지지 않던 민수가 결석을 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리처드 선생님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민수를 업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먼저 가까운 의원으로 갔지만, 큰 병원으로 가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택시를 불러 종합병원으로 갔습니다. 급성 맹장염이었습니다. 민수에게 돈이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다른 미국 사람들에게 도움을 얻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공장 사장님은 수술비와 입원비를 내겠다고 했지만, 리처드 선생님은 자기가 벌써 지불했다면서 만류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민수가 퇴원하자 리처드 선생님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하면 자기가 미국의 자선단체에 부탁해서 등록금의 절반 정도를 조달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민수는 대학생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터질 듯 기뻤습니다. 민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에게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단 4년간만 등록금의 반을 대주되 반드시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선단체가 기독교 재단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원금을 대주기 어렵다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민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대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황홀해지는 그에게 전공과목은 하등의 관심거리도 아니었습니다.

민수는 서울의 모 신학대학에 입학했고, 리처드 선생님은 그가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던 첫 학기에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등록금의 반 정도가 6개월에 한 번씩 송금되어 왔습니다. 물론 그 재단에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민수는 저녁에는 과외 교사로 일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선생님은 버지니아에 정착해 살고 있다는 편지 한 통만을 보내왔을 뿐, 민수가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웬일인지 답장이 없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조건으로 후원금을 받기는 했지만, 민수는 점점 신학을 공부하기가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선생님에게는 편지로 알리지도 않고 다른 대학의 무역학과로 전학을 갔습니다. 재단에서는 그가 전공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또한 그의 학업 성과를 알려고도 하

지 않았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참으로 허술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4년 만에 후원금이 끊겼습니다. 그렇지만 민수는 큰 기업에 취직을 했고, 따라서 더 이상의 재정적인 도움은 필요 없었습니다. 여전히 리처드 선생님의 행방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수는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비록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늠름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자신을 보면 선생님이 기뻐해 줄 것 같았습니다.

 

민수는 동부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가 그 기독교 재단에 들러 사의를 표명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인간의 도리일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는 뉴욕에 있는 그 재단의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여인이 타이핑을 하고 있다가 낯선 방문객을 맞았습니다.

“어서 오세요.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저는 한국에서 온 정민수라고 합니다. 3년 전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이곳에서 보내주는 후원금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출장 온 김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아, 그러세요! 좀 앉으세요. 목사님을 모시고 나오지요.”

여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역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모시고 나왔습니다. 그는 민수와 악수를 나누고, 그 동안 그에게 얼마큼의 후원금이 지급되었는지를 확인해 본다면서 서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민수에게 후원금은 보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당황하기로는 민수도, 목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타이핑을 하던 여인이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그 내막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결심이 섰다는 듯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생각나는 것이지만, 작년까지 여기서 근무했던 제임스 리처드 목사님이 한국의 한 신학 대학생에게 자신의 봉급을 털어 후원금을 보내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분이 그만두시면서, 혹시 동양 남자가 찾아오거든 ‘나를 찾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는데… 당신을 두고 한 말인가 보군요.”

민수는 여인을 졸라 선생님의 소재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루이지애나 주의 어느 깡촌의 목사로 부임해 갔는데, 정 만나고 싶으면 전화를 하지 말고 바로 찾아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민수는 비행기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그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여기도 미국인가 싶을 정도로 몹시 낙후한 혹인 마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목회를 한다는 교회는 판자로 지어진 엉성한 건물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집 앞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동양 남자가 그 교회당으로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제임스 리처드 목사님이 계신 곳인가요?”

민수가 묻자 교회당 문 앞 의자에 앉아 있던 흑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디서 왔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는 목사를 만나러 한국에서 온 정민수라고 소개했습니다. 흑인 남자는 잠시 기다리라면서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만에 쪽지 하나를 가지고 나와 내밀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민수!

자네가 성인이 되었다니 반갑기 그지없군. 그런데 왜 나를 찾아왔나? 나는 자네에게 더 이상의 신경을 쓸 여력이 남아 있지 않네. 자네도 나 같은 사람을 찾느라 수고하지 말고, 그 시간과 노력을 자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는 없겠는가? 부디 나를 잊어주게. 자네와 내가 만나서 과거의 회포를 풀 만한 여유가 우리에게 있다고는 생각지 않네. 미안하지만 돌아가게.

– 제임스 리처드 –

 

제임스의 반응은 먼 거리를 달려온 손님에게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고 단호했습니다. 제임스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민수는 그에게 환대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양심에 거리끼는 사실만은 꼭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다시 그 흑인 남자에게 사정했습니다.

안타깝게 보았던지 흑인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고, 그런지 얼마 만에 제임스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지만, 그리 반가워하는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민수는 무색해졌습니다. 그 표정을 본 민수는 당장에 마을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양심에 거리끼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 전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2학년 때 무역학과로 전공을 바꾸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지금 목사가 아니고, 무역회사의 지사원에 불과합니다…”

민수는 너무나 미안해서 말을 끝맺지 못했습니다. 제임스가 심각한 얼굴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습니다.

“민수! 괜찮아. 주님의 듯이 계셨으니까 자네가 무역학을 공부했겠지. 다만 어디를 가든, 그리고 어느 때든지 자네가 그리스도의 향기만 뿜어주면 된다네… 그것으로 나는 족하다네.”

제임스는 말을 끝내고는, 민수를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 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는 문을 닫기 전에, 다시는 자신을 찾지도 말고 아주 머릿속에서 지워달라고 했습니다.

민수는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면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낭만과 과거조차 가슴에 품지 않으려 하는 제임스가 얼마나 인생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와 밤새도록 회포를 풀지 못한 채 등 떠밀리듯이 떠나며 그를 잊어야 하는 것이 아쉬워서, 그리고 일순간이라도 허비하지 않으려 하는 그의 철저한 희생 정신에 감동되어 그는 오랫동안 심한 가슴앓이를 해야 했습니다.

 

 

 

 

밀크 커피 한 잔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국문학사의 한 면을 장식하는 양주동 박사. 그는 원래 국문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어느 날, 일본 학자가 신라의 향가 연구서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 사람이 아닌 일본 사람이 향가를 연구했다니… 한국 학자들은 그 동안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그는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해 국문학계의 원로들을 찾아 다니며 관련 서적을 구해 골방에 처박혔습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가는 시간조차 아껴가며 밤이 어떻게 오고 낮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런 지 몇 달 만에 그는 일본 학자의 오류가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놀라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일본의 일간지는 그 일로 ‘마침내 조선인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사설까지 실었다고 합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그 분을 초청하여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친 연구로 폐렴에 걸려 의사들에게서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이 방 안에 화로를 들여다 놓고 그 위에 물을 끓여 김이 콧구멍으로 들어가게 하는, 소위 ‘스팀 요법’을 활용해 주어 나았다고 주장했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명저를 남긴 마르셀 프루스트, 그는 죽기 전 20여 년간을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병상에 누워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병상에서 상반신만 절반쯤 일으켜 집필하곤 했습니다. 죽기 5년 전부터는 하루에 밀크 커피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으며, 죽음을 두어 달 앞두고는 그것마저 끊고 한잠도 자지 않고 집필에만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는 임종하던 날, 그 동안 접근조차 못하게 했던 비서에게 곁에 있어줄 것을 부탁하고는, 교정을 끝낸 후 고개를 떨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얼마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치열하게 살려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매독약 살바르산을 발명한 독일의 과학자 에를리히는 당대의 최고 학자들에게 조롱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영감을 끝까지 밀고 나가 결실을 본 사람입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에는 폐결핵 환자가 많았습니다. 그는 한 의학 세미나에 참석하여 사람에게서 채취한 침 속에 든 결핵균에 색깔을 입히면 더욱 쉽게 결핵균 감염 여부를 알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본 경험이 있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 그만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즉시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결핵균을 발견하는 연구에 몰두했지만, 전혀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망하고 있던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균이 든 유리판을 그 동안 사용치 않았던 난로 위에 내려놓고 거실로 나와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손님 대접을 한답시고 난로에 불을 피우고 말았습니다.

깜짝 놀란 에를리히는 몹시 화를 내면서 연구실로 뛰어들어가 유리판을 들고 현미경으로 달려갔습니다. 연구를 망쳤으리라는 그의 짐작은 잘못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결과가 부인의 실수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매독약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살바르산이라는 이름의 매독약은 무려 606번의 실험을 거쳤다고 해서 ‘606’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는 이 발명으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안면기형 교정수술의 세계적인 권위자 백세민 박사.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에는 물론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196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학 병원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영어도 못하고 의학 지식도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수면을 하루에 2시간 미만으로 때우는 상상하기 힘든 노력 끝에 성공적으로 인턴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는 유명한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끝낸 후, 세인트후이스 대학병원으로 가서 팔레타 교슈에세 미세수술법을 배웠습니다. 나중에는 프랑스의 성형외과 의사인 테지에 박사로부터 안면기형 수술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5년 동안 무려 3백여 구의 시신을 해부하는 노력으로 마침내 안면기형 수술로는 세계 최정상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부터 큰 인물은 하늘이 내리지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큰 인물이 된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큰 인물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노력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비전만 내세우는 사람은 망치기 십상입니다. 비전을 가지되 그만한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유혹

 

아주 부지런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항상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집에 돌아와서는 예습과 복습을 빠트리지 않던 그는 전교에서 수석을 놓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옆방에서 부모님이 텔레비젼을 시청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공부 외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습니다. 그에게는 공부만이 유일한 일거리였고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조간 신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어느 여성 작가가 쓴 콘트가 눈의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게으름에 대한 예찬의 글이었습니다.

어떻게 게으름이 그 유명한 작가로부터 찬사를 듣게 된 것일까? 그는 호기심으로 글을 읽었습니다. 기계 부속품처럼 돌아가는 이 사회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세상을 관조하며 적당한 게으름을 부려보는 것도 인생을 살찌우는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난 그는 존경하는 작가의 주장처럼 적당히 게으름을 부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생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또 멋있게 사는 방법일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 후로 그는 예습과 복습을 그때그때 하지 않고 몰아서 벼락치기로 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고, 텔레비젼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성적이 점점 떨어지더니 급기야는 전교에서 바닥권을 헤매게 되었고, 결국 대학 시험에도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된 원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작가의 글에 영향을 받아 잠시 게으름을 부려보겠다는 것이 아주 습관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게으름을 쫓아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졸업한 지 3년 만에 어느 삼류 대학에 간신히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 성적은 경고를 받을 정도였고, 자격지심 때문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이런 생활이 지속된다면 자신의 미래가 암담할 뿐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게으름이라는 끔찍한 유혹을 떨쳐버리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이 파멸할 수 밖에 없음을 간파했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이야말로 게으름이라는 악마의 달콤한 유혹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종이에 큼지막하게 써서 책상 앞에 붙여 놓았습니다.

“내일 시작해도 충분해. 오늘은 이렇게 누워서 지내고 내일부터 시작해도 나는 얼마든지 일을 잘 끝낼 수 있어. 난 남들보다 머리가 좋으니까…”

이 말에 한두 번 속은 것이 아닌 그는 친구들과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미루어서는 절대로 오를 수 없는 산, 발을 떼지 않으면 결코 오를 수 없는 산이 바로 인생사라는 진리가 뼛속까지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게으름에 대한 예찬을 저주하기 시작하고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비롯한 할일을 미루지 않고 그때그때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 예상보다 어려운 일도 넉넉한 시간을 투자해 훌륭하게 완성할 수 있었고, 몇 달 되지 않아 다시 우수한 학생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게으름의 포로가 되었던 수년간의 공백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보다 성적이 나빴다가 나중에 그를 추월했던 친구들은 어느새 풀브라이트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는 웬만한 회사에는 입사 원서도 내지 못하는 신세에 머물렀습니다.

만일 중학교 시절에 그 글을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읽었어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에 그는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