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고지 전투에서 살아 남은 전우들과 함께. 앞에서 둘째 줄 가운데 흰 머플러를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작자. (1951년 10월)
동부전선에서의 음주당 시절, 동료들과 함께. (1952년 1월)
동부전선 해병 묘지에서 (1952년 3월)
진섭이와 함께 (1952년 5월)
휴전 후 야전 미사를 마치고. 첫 중앙이 작자. (1953년)
고아원에서 (1955년)

 

 

돌아가신 양친과 내 친구 숙과 한국 전쟁에 희생된 모든 이에게, 그리고 우리 조국의 분단을 괴로와하며 그들의 의견 차이를 초월하여 서로 이해하고 존경하는 가운데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려고 애쓰는 남한과 북한의 모든 동포에게 이 책을 바친다.

 

지은이

카나다 몽레알 르아로 750

St. Louis de France 사제관

 

 

제8장

형선이의 조국을 위하여

 

13고지를 점령한 며칠 후 우리 9중대는 목표 17고지를 공학하는 2대대의 지원부대로 출전했다. 우리는 2대대가 17고지를 점령하면 즉시 목표 20고지를 공격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날은 날씨가 맑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대대장 김윤근 소령도 우리와 함께 고지에 올라와 있었다. 미군 전투기 수 대가 17고지 능선을 폭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군 박격포와 중화기 중대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2대대와 우리 9중대는 목표를 향하여 서서히 진격했다. 인민군도 암석 틈에 숨어서 우리에게 맹 사격을 가해 왔다. 적의 박격포탄이 우리 주변에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중대 연락병인 김용성군이 내 옆에서 쓰러지며 소리쳤다. “태오 하사관님! 나 좀 살려줘.” 급히 교통호 로 그를 끄집어내려 상처를 살펴보니 오른쪽 허벅다리에 깊은 파편상을 입고 있었다. 즉시 지혈을 시키고 압박붕대로 상처를 싸매어 주었다. 상처는 컸으나 빼는 상한 것 같지 않았다.

“태오 하사관님,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애….”

“임마, 죽기는 왜 죽어? 너는 복 받은 놈이다. 이 정도의 상처면 정말 부러울 정도다.”

“뭐? 복 받을 상처라고요? 나는 아파 죽겠는데 형은 농담을 하고 있어….”

김군은 인천 출신으로 학도병이었다. 나를 늘 형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동생과도 같은 친한 사이였다.

“임마! 너 생각해 봐. 너는 이 상처 덕으로 후방으로 옮겨갈 것이고, 그러면 살 길이 생기지 않았니?”

“살면 월 해…. 다리 병신이 되어 살면 좋을 게 뭐 있어?…..”

“왜 다리 병신이 돼? 이렇게 다리가 멀쩡한데!”

나는 그의 부상당한 다리를 번쩍 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는 “으악!” 소리를 지르며 연신 끙끙거렸다.

“형, 제발 나 좀 가만 둬! 그런데 정말 내 다리뼈가 안 부러졌어?”

“자식, 엄살이 심하구나. 파편이 깊이 박혀 있으나 다리 뼈는 성해, 임마!”

“그런데 형, 왜 이렇게 다리를 들 수 없고 아프지?”

“아픈 게 당연하지…. 이 아픔은 말이야, 죽음에서 삶으로 부활하는 진통이야. 이 정도의 고통 없이 후방이라는 새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너는 생각하니?”

“그렇군! 형, 정말 이제 나는 후방으로 내려가게 됐지?…. 형, 정말이지 나는 살고 싶어. 죽기가 무서워….”

“그래! 이제 너는 살 길이 트였어. 그리고 너는 경이라는 애인과 만날 수 있을 게고 또 공부도 계속할 수 있을 테지…..”

“경하고 편지 같이 써서 형에게 소식 전할게. 그런데 형, 다시는 제발 그 미친 짓 하지 마. 그 인민군 장교의 무덤을 파 주던 그런 짓 말이야. 나는 형의 그 감상적 인도주의가 걱정이야. 가뜩이나 위험한 이 전쟁터에서 그런 모험을 하다 죽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

“사람이 사람다운 일을 하다가 죽는 건 옳은 일이야.”

“그래도 죽지 마, 형. 이 불쌍한 조국을 위해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이 많잖아? 우리는 민족을 서로 죽이는 이 더러운 전쟁에서 살아 남아 조국의 밝은 내일을 위해 일해야 돼.”
“그래, 살아 남자! 조국의 내일을 위해 우린 죽어선 안 돼.”

김군은 위생병의 부축을 받으며 산을 내려갔다. 그 무렵 병신이 안 될 정도로 부상을 입으면 우리는 그것을 복 받은 부상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만 가는 이 전쟁터에서 죽음이 그림자처럼 우리 뒤를 따르고 있었고, 또 이 싸움터에 남아 있는 한 언젠가 우리는 죽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단한 부상을 당하면 연대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완치되는 대로 또 다시 전선으로 불려 나왔다. 그래서 이왕에 총에 맞을 바에는 병신이 안될 정도의 중상을 우리는 바랐었다. 중상자는 예외 없이 진해병원으로 후송되었다.

2대대와 우리 9중대는 공격 대기선까지 진격했다. 2대대는 이제부터 공격을 개시할 것이고 우리는 그곳에 대기하다가 17고지가 점령되면 즉시 목표 20고지를 공격해야 했다. 2대대의 공격 개시와 함께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적의 포탄 파편이 수없이 우리 위에 떨어졌다. 나는 그때 저만치에서 2대대의 한 대원이 왼팔에 온통 피를 흘리며 바위를 의지한 채 열심히 싸우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왼팔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상처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옆으로 나는 날쌔게 뛰어갔다. 그리고 부상을 알려 줄 셈으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내가 서울형이라고 부르던 최형선이었다. 나는 그를 바위 뒤로 엎드리게 하고 물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아, 태오 하사관님! 이 싸움터에서 또 서로 만나다니…”

“그런데 자네 언제 전선으로 출동했나?”

“며칠 됐습니다. 연대 본부 근무 사병이 거의 모두 보충병으로 출전했습니다.”

최형선은 두 달 전 같이 중동부 전선으로 출동한 사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여러가지 개인적인 사정을 고려하여 연대 본부에 남아 있게 해 주었다.

“자네 부상당했나? 왼팔에 피가 흐르고 있는데…”

“나도 알아요. 인민군 놈 총알이 스쳐 지나갔나 봐요.”

“그래도 치료를 받아야지. 이렇게 피가 많이 흐르는데….”

“방금 우리 소대장이 전사했어요. 그래서 분해 복수하려고 사격 중이었어요.  태오 하사관님, 다시 만납시다. 난 전투를 계속해야 해요.”

그 순간 나는 그이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사람에게는 육감이 있다.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나는 전사한 대부분의 친구들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복수라는 말과 미친 듯이 사격하고 있는 그의  섬뜩한 행동에서 그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이다. 그러자 소름이 쫙 끼치며 나는 오한을 느꼈다. 그를 그냥 두면 이 전투에서 꼭 전사할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이 번개같이 내 뇌리를 스치자 미처 자신도 의식할 겨를 없이 그의 허벅지에 칼빈총 한 발을 쏘았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땅에 뒹구는 그를 일으켜 안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나를 의식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업고, 넘어지고 뒹굴며 교통호로 뛰어 내려왔다.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악쓰듯 소리쳤다.

“태오 하사관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왜 내 다리를 쏘았습니까?”

“이 자식아, 잠자코 있어! 함부로 입을 열면 죽여 버리겠어!”

나도 그의 상처를 압박붕대로 싸매 주며 소리쳤다.

“왜 이러십니까? 태오 하사관님, 왜 나를 쐈어요?”

“방금 나는 너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어. 그래서 너를 살려 주고 싶었던 거야.”

“전투하는 군인이 싸우다 죽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소대장님의 복수도 해야 하고 또 계속 싸워야 하는데 왜 나를 부상시켰습니까? 내 전우들은 지금 저 총성 속에서도 쓰러지고 있을 텐데 왜 나를 낙오자로 만들었습니까? 내 총을 주세요. 그리고 계속 전투하도록 해 주세요.”

그는 미친 듯이 내 팔을 잡아 흔들며 부르짖었다. 나는 그이 뺨을 두어 번 후려쳤다.

“이 자식, 아직도 죽음의 귀신한테 홀려 있군. 이 자식아, 정신 차렷!”

“태오 하사관님, 다시 사우게 해 주세요. 내 전우와 함께 있게 해 주세요.”

“이 자식아, 대학 다닌 놈들은 왜 이렇게 잔말이 많아? 배웠다는 놈들은 이유가 많군. 너는 이 전투보다 네가 언젠가 들려준 또 하나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아 남아야 할 놈이야, 알겠냣?”

“누구나가 다 제 나름대로 조국과 민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나만이 그것을 위해 이 전선을 떠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정말이지 용서받지 못할 비겁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뭣이 어째? 내가 비겁하다고? 너는 지금 나를 욕하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 감사할 것이다. 지난번 편지에서 네게 말한 대로 위대한 애국자가 되어 큼직한 동상의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네 작은 조국과 민족의 인자한 왕이 되란 말이얏. 그리고 그 정도의 가벼운 팔의 상처를 가지고는 후방으로 갈 수 없어. 그래서 네가 후방 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일부러 중상을 입힌 거야. 이제 내 뜻을 알겠냐?”

그는 잠잠히 있었으나 내 심정을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그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태오 하사관님, 감사합니다. 내 부모와 형제인들 이런 일을 감히 생각했겠습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운 괴상한 사람이군요. 나 자신도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이런 일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냈습니까? 당신은 인간이 아닌 신(神)처럼 보입니다.”

최형선을 대대 위생병에게 인계해 주고 나는 우리 9중대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날 2대대가 목표 17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자 우리 9중대는 지체 없이 목표 20고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맑은 날씨 덕택에 아군의 적절한 지원 사격을 받을 수 있어 조직적인 공격이 용이했다. 약 두 시간 동안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우리는 목표 20고지를 무난히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일단 방어진을 치고 다음 공격을 위한 실탄 보급과 병력을 보충 받기로 했다. 그날 밤 나는 깊숙한 벙커 안에서 쉬며 최형선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홍천 전선으로 출동하기 위해 진해 해병대 사령부 출동 장병 대기소에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시내 외출하러 영문을 나서다가 지나가는 군인에게 무언가를 묻고 서 있는 한 젊은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은 교양미도 있어 보였으며 옷차림도 깨끗하고 단정했다. 내가 그녀 앞을 지나가려 할 때 그녀는 다급히 내게로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선생님, 실례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 남편을 찾아 먼 길을 왔는데 제 남편이 지금 출동 장병 대기소에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신병 훈련을 마치고 일선으로 출동하게 됐대요. 그런데, 선생님, 제 남편을 잠깐 만나 보게 해 주실 수 없을까요? 여기를 지나가는 여러 군인들에게 부탁하니 다들 거절하더군요. 출동 사병에게는 면회가 일체 금지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여인은 수심 짙은 표정으로 나에게 애원하다시피 했다. 나는 그녀의 거의 울먹이는 음성과 절망으로 어두워오는 표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장병 대기소로 돌아와 그녀의 남편을 찾아냈다. 나는 그의 아내가 영문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으나 외출이 금지된 몸이었다. 출동 신병들에게는 외출이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도망병을 막기 위해서였다. 나는 여러가지로 생각을 하다 나의 외출 증명서에 있는 마태오라는 내 이름 뒤에 <외 1명>이라고 더 써 붙였다. 나는 그를 데리고 무사히 위병소 영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문제가 생겼다. 이 젊은 부부를 만나게 해 준 것은 잘한 일이었으나 이들을 데리고 갈 곳이 없었다. 나는 마음대로 시내를 다닐 수 있었으나 그는 나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길가에서 마주친 한 여관에 그 부부를 쉬게 했다. 오후 2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 여관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고 나는 시내로 나왔다. 그러나 문제는 연속이었다. 나는 최형선이란 신병을 전혀 몰랐다. 그 부부는 공부깨나 한 사람들처럼 보였으나 그들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가 이 기회를 이용해 도망가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불안해졌다. 그래서 나는 외출을 단념하고 여관 건너편 쪽에 있는 어떤 음식점에 들어가 여관 출입구를 감시하기로 했다. 술 한 병을 청해 놓고 2시까지 거기서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그러자 공연히 나 자신이 짜증스러워졌다. 남을 동정해 주고 도와 주는 것은 좋은 일이나 세상에 이런 싱거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쓴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남의 일에 괜스레 열중하는 자신이 미욱하게 보이기도 했다.

오후 2시가 되자 나는 여관으로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얼굴을 붉히며 방에서 나왔다. 오후 4시에 출동 장병 인원 점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 대기소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의 부인을 3시 버스로 부산으로 돌려보내고 우리 둘은 부대로 돌아왔다. 나에게 고마워하며 손을 서로 마주 잡고 작별의 정을 나누는 그들을 보며 그들을 만나게 해 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오후 홍천 전선으로 떠나는 트럭 속에서 나는 최형선의 기나긴 사연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제 고향은 충청도인데 공부는 서울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고려대학 사학과 3학년이었죠. 많은 서울 시민이 다 그러했겠으나 나도 어리둥절하다 그만 피난길을 놓쳤습니다. 게다가 한강 철교마저 폭파되고 나니 피난길이 막히고 말았지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그 전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던 내 친구 몇 명은 공산당 열성당원이 되어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야단들이었습니다. 나는 볼래 공산주의를 싫어했습니다.

하루는 그들이 하숙집으로 나를 찾아와 자기들이 하는 공산주의 혁명 운동에 협조할 것을 요청했으나 나는 그것을 거절했지요. 그러자 그들은 나를 감시하기 시작했고 협박까지 해 왔습니다. 나는 생명을 위험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로 완전히 전향한 내 친구들의 요구에 응해야만 했었고, 그렇지 않으면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만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내 애인이 나를 찾아왔지요. 그리하여 할머니를 모시고 홀로 살고 계신 자기 고모님 댁으로 나를 피신시켜 주었어요. 고모님이 반대하는 것을 겨우 설복시켜 나는 그 집에 숨어 있게 되었지요. 바로 그 집이 내 애인의 하숙집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도 나처럼 충청도 출신이었고 이화여대 국문과 2학년이었어요. 우리 둘은 일년 전부터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요. 그날부터 나는 그 고모님 집에 숨어 살게 되었는데, 내가 숨어 있던 곳은 창고처럼 쓰던 사랑채 다락방이었습니다.

그 후 내 애인은 인민위원회 여성부 부원으로 공산당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그녀가 공산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우선 내 친구들의 간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고 또 나의 피신을 눈치채고 의심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지요. 여맹원이 된 덕택으로 내 애인은 매일매일 나에게 전쟁 정보를 갖다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강연회니 황영회니 하는 집회에 부지런히 쫓아다녔지요.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나의 생활은 암담해지기만 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으나 들려오는 소식은 인민군의 승리일 뿐, 다락방 생활의 고독과 권태와 더위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맛이란 하나도 없었지요. 독서하던 취미도 또 혹시 하던 내일에 대한 기대도 차츰 잃어갔습니다. 심지어는 먹고 잠자는 것마저 짜증나는 일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나가다가는 인민군의 완전한 승리로 우리 조국이 통일될 것만 같았어요. 그렇게 되면 내가 설 땅은 이 조국 안에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죠. 이런 고독과 권태와 절망 속에서 나는 시간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즉 살아가야 할 시간이 지겨워졌지요. 그래서 한두 번 자살해 버릴까 하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애인과 나는 우연한 기회에 사랑놀이를 하게 됐어요. 이 절박한 상황에서 무언가 살맛을 찾아보자고 서로 이야기하다가 사랑 놀이를 하게 됐지요. 며칠 동안 우리는 이 놀이에 도취되어 있었어요. 이 사랑 놀이가 주는 강렬한 즐거움 속에서 우리는 현실의 고독과 권태와 절망을 달래고 또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참 섹스 생활이란 묘한 것이었지요. 처음에는 그저 현실 도피의 한 방편으로 시작한 이 놀이는 우리에게 내일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안겨 줬습니다. 우리는 이 섹스 생활이 주는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집념을 갖게 되었지요. 그리고 나는 나 뿐만 아니라 애인인 내 아내를 위해서도 살아야 한다는, 말하자면 나에게도 <우리>라는 가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사랑 놀이와 함께 밤마다 애인이 기다려지는 그만큼 내일이라는 시간을 기다리게 됐으며, 이 기다림 속에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섹스란 본래 생명을 창조하는 생의 원천이기 때문에 사랑 놀이에는 삶을 향한 강력한 의지와 희망과 창조의 힘이 있나 봅니다. 그때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섹스란 우리의 식생활처럼 정말이지 우리 인간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요소라고 생각했어요. 이러한 섹스를 주신 신에게 감사했습니다. 사랑 놀이가 주는 이 기쁨 속에, 또 이 즐거움 속에 약동하는 삶의 의지와 희망과 창조의 힘이, 오늘까지 인류를 번식시키고 유지시켜 왔다고 나는 생각했지요. 하여튼 나는 이 섹스 생활과 함께 내일에 대한 새로운 꿈을 설계하며 숨막히는 다락방 생활을 견디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나에게 고독과 권태로부터의 해방 뿐만 아니라 삶의 의욕과 구원까지 갖다 준 애인을 <작은 내 조국>이라고 불렀지요. 조국이 무엇이겠습니까? 조국의 뜻을 여러 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조국이란 국민을 보호해 주고 그들의 내일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실체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 나를 보호해 주는 조국은 없었습니다. 한강다리를 끊어 놓고 시민들을 버린 채 부산으로 도망간 남한 전부가 나를 보살펴주는 내 조국이었겠습니까? 내 조국이 없어진 이 땅 위에서 나는 나를 보호해 주는 새로운, 또 하나의 조국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를 위해 나는 일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애인인 아내였어요. 아마 태오 하사관님은 내 말을 들으며 속으로 <못난 녀석>하고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무사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남이 뭐라고 나를 비난하더라도 내 아내는 나에게는 조국입니다.

유엔군의 서울 폭격이 잦아지던 어느 날 나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 멀리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며 나는 <살아났다> 하는 기쁨 속에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포성과 총성이 가까이 들리던 어느 날 저녁, 아내는 집에 뛰어들어와 유엔군이 서울에 접근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울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인민위원회 간부 전원이 평양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대요. 물론 내 아내도 철수 명령을 받았지요. 나는 살 길이 생겼는데 내 아내는 살 길이 막혔습니다. 참 묘한 운명의 장난이었습니다. 생각타 못해 그날 밤 나는 내 팔을 칼로 찔러 피를 흐리고 그 피를 아내의 종아리에 바르고 붕대로 싸매어 주었지요. 만일의 경우 인민위원회 간부가 된 내 친구들이 찾아 오면 부상당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이른 새벽에 내 친구 한 명이 찾아왔어요. 그때 내 아내는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고모님이 나가 어젯밤 폭격에 다리에 파편상을 당해 걸을 수 없다고 했으나 그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치료해 준다는 이유로 붕대를 풀게 했고 마침내는 우리의 연극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내가 숨어 있는 사랑채로 아내를 데리고 나왔어요. 그리고 아내를 반동부자로 몰아치며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러면서 나의 거처를 대라고 하더군요. 내가 서울 어디엔가 숨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이 집에 피신해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여맹원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하던 이 집이었기에 차마 내가 이 집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 같았어요. 그는 내 아내를 권총으로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다락방에서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때 온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고 속으로는 그를 수없이 죽이고 있었습니다. 나의 거처를 모른다고 잡아떼는 아내에게 이번에는 옷을 벗으라고 강요하지 않겠어요? 치가 떨렸습니다. 내 조국이 침략당하고 있었어요. 나는 내 조국을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권총을 든 침략자를 맨주먹으로 어떻게 해치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나는 신에게 기도 드리며 아내에게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어요. “여보, 옷을 벗어. 빨리 벗어. 그리고 그 놈에게 접근해. 그 기회를 이용해 내가 그 놈을 때려 죽일 테니까.” 그 놈의 총부리 앞에서 아내는 한참 동안이나 옷을 안 벗겠다고 저항하더니 결국 옷을 벗기 시작했어요. 아마 신이 내 마음을 아내에게 전해 주었나 봐요. 나는 다락방 문 틈으로 내다 보고 있었지요. 아내가 옷을 다 벗자 그 놈은 아내를 껴안으려 했어요. 그때 “형선씨!”하는 아내의 비명과 함께 나는 다락방을 박차고 뛰어내려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허리를 내지르고 아내의 치마끈으로 그 놈의 목을 졸라 죽였습니다. 무서운 힘이었어요. 어디서 그런 용기와 힘이 생겼을까 하고 나 자신을 의심할 정도였으니까요. 그것은 또한 순간적인 일이었습니다. 하여튼 나는 내 조국을 구원했습니다. 그 놈을 죽이고 나서 정신을 차리니 좀 끔찍스럽더군요. 그리고 다소 무서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해다 뜨기 전에 나는 그 놈을 모포에 싸서 포탄을 맞아 폐가가 된 이웃집 담 너머로 던져 버렸습니다. 물론 유사시에 이용하려고 그 놈의 권총을 갖고 다시 숨었지요. 유엔군은 벌써 서울에 입성 중이었으며 아주 가까이에서 교전하는 총성이 들려 오기도 했습니다. 다른 내 친구 공산당원들은 내 아내를 데리러 찾아오지 않았어요.

드디어 서울이 유엔군에 의해 탈환되자 우리는 해방이 됐습니다. 근 3개월이나 햇빛을 보지 못했던 나는 고모님 집 마당에 뛰어나와 엉엉 울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한 듯한 그런 기쁨이었어요. 그러나 내 아내의 입장은 나와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유엔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인민군 점령하에서 박해 받던 서울 시민은 소위 말하는 부역자 숙청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어요. 고모님 집은 이웃 주민들에 의해 박살이 났고 아내는 체포되어 경찰서에 구금되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성을 잃은 시민들의 난동, 그것은 바로 폭동이었습니다. 조국을 위한다는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또 많은 시민들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참기 힘든 시련과 수난 중에 있는 <내 조국>이 불쌍했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그녀는 공산주의자로 가장했었고 지난 3개월 간 붉은 손길에서 나를 보호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확실히 내 조국이었습니다. 보호라는 자기 사명을 다하고 희생되어가는 내 조국을 이번에는 내가 보호해 주고 살려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도 무력했습니다.

아니, 그래, 무슨 체면과 권리로 남한 정부는 스스로 한강다리를 끊어 피난길마저 막아 놓고 오히려 적의 손에 넘겨지고 버려졌던 우리에게 사상상의 결백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민족적 양심으로 보면 남한 정부 놈들도 공산주의자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 놈들이 그 놈들이지, 그 놈들이 진짜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놈들입니까? 정부가 정부로서 할 바를 다하지 못한 이상, 백성들에게 점령하에서 조국을 위한 사상적 순교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조국에 충성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또한 쓸 데 없는 희생을 피하는 지혜와 삶에 대한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날 나는 경찰서에 가서 내 아내를 변호하다 경찰관한테 매만 얻어 맞았습니다. 정말이지 조국이라는 이 한국이 저주스러웠고 이 나라 백성들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나를 낳아준 부모님들까지도 미워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고향 사람인 헌병 장교를 만났고 그 분의 도움으로 끝내 아내를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경찰서 감방에서 내 <민족>을 희생시켰습니다. 우리의 첫 아기가 유산되었다는 뜻이죠.

그 후 우리는 각각 고향 부모님 집으로 내려가 있다가 1.4  후퇴를 기하여 부산으로 피난 왔지요. 물론 동거생활을 하며 우리는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월 어느 날 나는 징집 명령을 받고 해병대에 배속되어 신병 훈련소에 입대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날더러 사관 후보생 학교에 입학하라고 권했으나 군인생활이 내 체질에 맞지 않아 장교가 되는 것은 거절했습니다. 사병으로 있다가 기회가 되면 빨리 제대하여 복교하고 싶었어요.

고달프고 배고프고 기합으로 점철된 신병 교육대에서 나는 인간간의 묘한 관계를 체험했습니다. 성장 과정과 교육의 정도와 성격이 다르며 또 서로의 이해관계가 없이 그저 그 어떤 외부 상황에 강요당해 모인 군대생활에서 나는 인간에 대한 동정과 의리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이 전쟁이 파생시킨 가지가지의 악과 비극을 경험한 사람들을 만났고, 바로 이 인간 비극이 나로 하여금 열외시킬 수 없는 인간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식을 갖게 했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인간들의 필연적인 인과관계였지요. 나도 이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살 수 없는, 전쟁하는 이 한국땅에 오늘 여기서 살고 있는 한 인간임을 깨달았지요. 그것은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숙명은 나로 하여금 전쟁으로 희생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리게 하고, 그들을 동정하고 사랑하도록 만드는 내 자유의지를 요구했지요. 그래서 나는 체념적인 태도로써가 아니라, 의지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의식을 지니고 이번에 일선 출동 명령을 받았습니다.

어제 나는 뜻하지 않았던 태오 하사관님의 호의로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정말이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임진 중임을 알았어요. 어제 태오 하사관님과 함께 아내를 버스에 태워 보낼 때 나는 참기 어려운 공허와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읽어 본 적이 있는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참회록의 한 장면이 생각났지요. 아우구스띠노 성인이 십여 년 간이나 사랑하며 같이 살아온 아내를 사정에 의해 고향인 아프리카로 영원히 되돌려 보낼 때 몸 안에 돌고 있는 피가 역류하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성인인 그분의 인간적인 고통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제 여관방에서 아내를 내 메마른 품 안으로 끌어 안았을 때 나는 아내 없이는 살 수 없고 또한 그녀도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임을 강렬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고민했어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아내인 내 조국과,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전쟁이라는 비극을 함께 겪고 있는 인간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식 사이의 고민이었습니다. 아내라는 내 조국과 인간 비극에 대한 이 연대의식,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하라는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괴롭기만 하더군요. 아마 태오 하사관님은 그것을 보고 문화인의 값싼 양심의 고민이라고 하실지도 모르지요. 남들에게는 그것이 쓰레기처럼 무용지물로 비일지라도, 생각하는 갈대인 인간은 대체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사서 고민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 우리는 홍천에 있는 해병대 제1연대 본부에 도착했다. 거기서 나는 내가 잘 알고 있던 김 병조장을 만났다. 그 분은 날더러 연대 본부에서 일하도록 권유했으나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나는 그 분에게 최형선을 소개했다. 그러자 김 병조장은 나에게 딱하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자네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동정심이 많고 희생 정신도 강하군 그래. 그러나 그러한 생활 태도는 생존경쟁이 심한 인생살이에서 항상 밑지는 편에 있게 될 거야. 하여튼 자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최형선이를 자게 대신 쓰기로 하지.”

최형선은 연대 본부 근무 발령을 받았고 나는 3대대에 편입되어 일선 고지를 향해 떠났다. 일선에 배치된 지 이삼 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형선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태오 하사관님! 나에게 베풀어 주신 형의 뜨거운 인간애에 나는 무어라고 감사의 뜻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나는 왜, 또 어떻게 해서 내가 이곳에 남아 있게 되었나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나에 대한 형의 지나친 배려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 형께서 계셔야 할 이 본부 자리를 내가 차지했다면 나는 형의 그 온정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아내와 내 가정을 위해 내 몸을 잘 보호해야 한다고 형이 말한 것처럼 형도 형의 애인을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것처럼 형도 살아 남아야 할 사람입니다. 형이 내 대신 최전선으로 떠나셨다면 나는 이곳에 편안히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나를 아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분의 나를 위한 지나친 호의를, 아니 희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고통입니다. 형, 나를 위해 더 이상 무리한 일을 하지 마시고 나를 형 있는 일선으로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형은 이 본부로 내려와 주십시오. 전시하의 조국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일체의 고역과 희생을 나는 임의로 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들과 함께 이 어려운 시대에 태어난 우리들 젊은 군인들의 운명을 나는 나눠 받고 싶습니다.>

 

나도 다음과 같은 답장을 써서 즉시 그에게 보냈다.

 

<서울 형, 목사님 설교 같은 형의 편지 잘 받았습니다. 형의 지극한 애국심과, 연대의식을 내세우는 형의 까다로운 철학에 나는 그저 감탄하고 있을 뿐입니다. 형의 높은 지조와 지식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내가 형에게 항상 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형의 <작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먼저 위대한 애국자가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서울 형, 우리는 길거리나 공원 구석에 세워진 동상의 주인공인 그런 애국자보다는 우리 서로의 <조국>과 <민족>에게 자비로운 남편과 아버지가 됩시다. 나는 배우지 못해 무식하여 형이 말하는 연대의식이라는 철학은 잘 모르겠으나 나의 우견(愚見)을 형이 참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연대 본부에 남아 있을 만한 사람도 못되고 또 그런 천복도 내겐 없습니다. 지금 나는 습기 찬 땅굴 속 희미한 촛불 아래서 이 사냥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사냥을 통해 나는 수색전의 전법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촛불에 이를 태워 그 오징어 굽는 냄새를 맡으며 화랑 위스키 술잔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낭만과 멋이 내 성미에 맞으니 내 어찌 이 자리를 떠나 연대 본부로 갈 수 있으리오! 더 이상의 설교를 마시고 형의 조국 소식과 목하 형성 중이라는 형의 민족 소식을 시간 나는 대로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형선은 나와 이런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와 지낸 시간은 짧았으나 마음으로 통하는 벗이었다. 실상 마음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영원한 것이 아닐까? 그날 나는 20고지 벙커 속에서 그를 회상하며 그를 부상시켜 후방으로 보내게 한 것은 잘 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분명히 자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연대의식을 자기 삶 안에 잘 조화시켜 보람되게 인생을 살아갈 사람이라 확신했다. 나는 묵주알을 굴리며 그를 위하여 천주님의 축복을 기원했다.

 

 

 

 

제9장

숙에게

 

숙!

숙과 헤어진 지 벌써 8개월이 되었지? 지난 4월 제주, 부산간의 연락선에서 우연히 만난 숙의 고향 친구 옥으로부터 숙이 어머니와 함께 남한으로 무사히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은 하였으나, 그래도 피난생활이라 여러가지로 고생되는 점이 많겠지? 전시하의 이 나라 백성치고 누군들 고생 없이 편안히 지낼까 만 그래도 혹 숙에게 힘에 겨운 고통은 없을까 하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 다행히 숙이 지금 오빠 댁에 있다니 천주님께 감사 드려야 할 일이야. 머지않아 숙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헤어져 있는 나의 고독과 고통을 위로해 주고 있어. 그런데 나는 숙의 소식이나마 듣고 있지만 생사여부마저 알 길 없는 나를 생각하는 숙의 가슴은 무척 괴롭겠지? 숙, 나 여기 동부전선에 아직 살아 있어! 그 숱한 위험 속에서도 용케 살아 남았어. “숙!” 하고 지금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어 봐. 숙은 지금 마음 속으로나마 내 사랑의 소리를 듣고 있으리라 생각해. 숙, 그렇지?

숙, 지금은 22고지 공격 명령을 받고 출동을 앞둔 밤 10시야. 새벽을 기해 우리는 목표 22고지를 공격할 거야. 그 동안 내 일기를 통해 숙에게 들려 준 13고지, 17고지, 20고지 전투 등과 같은 피 어린 싸움이 아마도 다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물론 전시하의 군인의 몸으로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요즘에는 날이 갈수록, 전투가 계속될수록, 심정이 착잡하기만 하고 누구에겐가 반항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해. 정말이지 알 수가 없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이 더러운 전쟁을 하고 있단 말이야?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민족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 이제는 이러한 명제와 이유가 요즘의 내 회의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어. 하나인 조국과 만족을 똑같은 열성과 충성을 갖고 사랑하면서도 정치적인 의견 차이로 갈라져 싸우는 이 우매한 민족을 생각할 때마다, 분통이 터지고 이 아나 백성이 된 자신마저 미워져. 숙, 오늘은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겠어. 그 문제는 벌써 여러 번 일기를 통해 얘기를 나누었으니.

숙, 몇 명의 전선 보초들을 제외하고는 우리 9중대 전원이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벙커 저 구석에는 5명의 대원이 전쟁에 시달린 피곤한 몸을 아무렇게나 눕히고 평화로이 코를 골며 잠자고 있어. 그들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죽음의 위협을 늘 면치 못하는 우리들이라 때로는 미신에 약해. 그래서 몇 시간 후 전투를 개시하게 될 그들의 잠자리가 사납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 꿈 속에서나마 고향의 부모 형제와 애인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어! 과연 이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오늘 아침 애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기뻐하던 저 황 수병은 꿈 속에서 애인이나 만나 보고 있을지… 편지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 눈길은 무척이나 고독해 보였어. 숙, 황 수병이 꿈 속에서나마 애인을 만나 잠시나마 이 한스러운 전쟁을 떠나 있게 되기를 같이 기원해 줘. 저 쪽에서 등을 구부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진 수병은 외로운 사람이야. 전쟁과 함께 고향을 떠나 홀로 남하했지. 이남에는 친척 한 사람도 없는 처지야. 그래서 그에게는 편지 한 통 오는 일 없지. 고아와 다름 없게 된 셈이야. 일 주일에 한 번 배달 되는 편지 받은 시간이 그에게는 제일 고독한 시간이라고 언젠가 나에게 말한 일이 있어. 그래서 지난 번에는 어느 여자 고등학교에서 보내온 위문 편지 중에서 제일 성실하고 재미있고 사랑스럽게 씌어진 편지 두 장을 그에게 주었지. 그는 그것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애인의 편지처럼 읽는다고 했어. 지금 꿈 속에서 그 상상의 애인을 만나 젊음의 외로움을 잠시나마 위안받았으면 해. 황 수병의 발 아래 길게 누워 태평스레 코를 골고 있는 박 수병은 무식한 농촌 사람이야. 평생을 남의 집 머슴살이하다 전쟁에 불려 나왔지. 머슴살이보다는 군대 생활이 더 좋다는, 그야말로 좀 바보스러울 만치 착하기만 해서 때로는 남의 놀림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그에게 깊은 동정을 갖고 있어. 한글마저도 몰라 누구나 다 받아 보는 여학생의 위문 편지도 읽지 못하는 친구지. 그래서 요즈음 나는 틈나는 대로 그에게 한글을 깨우쳐 주고 있어. 빨리 글을 배워 여학생의 위문 편지를 읽는 것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래. 총을 가슴 위에 얹어 놓고 잠자고 있는 홍 분대장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 여학생으로부터 실연을 당하고 홧김에 군대에 입대한 사람이야. 그는 술을 좋아하며 전투에서도 용감한 군인이지. 그러나 사랑에 굶주린 고독한 사람이야. 열렬한 연애 한 번 못하고 죽는다면 그것보다 원통할 게 없다는 그지. 이 구석에 쭈그리고 잠들어 있는 장 수병은 십여 일 전에 일선에 나온 신병이야. 아직 17세의 고등학생이지. 지난번 20고지 전투에서 군복 바지에 오줌을 싸기도 했어. 그만큼 전쟁이 무서웠던가 봐. 신병이나 고참병이라도 처음으로 전투를 하게 되면 흔히 오줌을 싸. 그래서 대원들은 그를 오줌싸개 겁쟁이라고 놀려댔어. 이 오명을 씻기 위해 이번 22고지 전투에서는 자기가 고지 정상에 제일 먼저 올라가겠다면서 전투를 기다리고 있지.

숙, 이들은 내가 부러워할 만큼 평화롭게 잠자고 있어. 어떻게 이런 평화로운 모습으로 잠을 잘 수가 있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평하게 잠자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죽음에 대한 무관심 같은 것을 느끼게 돼. 그런데 숙, 이 무관심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게 해. 17세에서 25세까지의 이 젊은이들! 오직 삶의 기쁨과 행복만을 누려야 할 이 젊은 청춘들! 이들이 과연 죽음 앞에 초연할 수가 있을까? 행복을 파괴하고 기쁨을 몰아내며 삶을 부정하는 이 죽음을 이들은 초인 같은 자세로, 철인 같은 의지로 받아들이고 있단 말인가? 아니야 숙, 이들은 다만 강요당한 죽음에,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이 강요당한 이 죽음에 저항할 수 없어 지쳐 체념하고 있을 뿐이야. 이미 생사(生死)에 대한 권리와 선택권마저 빼앗아간 이 전쟁의 노예가 된 이들은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 자신들의 삶을 내던지고 말았어. 누가 또 무엇이 그들에게 죽음을 강요했을까? 조국과 민족이?…………… 아! 우리에게는 죽음을 강요하는 이 한스러운 조국과 민족! 숙, 나는 반항하고 싶어. 그리고 죽음이라는 이 운명의 신에게 분노의 화살을 쏘고만 싶어. 그래서 나는 남들처럼 자지 않고 이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숙에게 일기를 쓰고 있는 중이야. 죽음을 거부하는 자세로, 운명에 반항하는 의지로, 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증명하기 위하여, 물론 숙을 사랑하니까 숙을 위해 쓰는 것이기도 하지. 이것을 통해 나는 숙과 간단 없이 사랑을 이야기하며 내 한 없는 사랑을 숙을 향해 쏟고 있는 거야.

숙, 포성 없는 조용한 전선의 깊은 밤, 내일의 대전투를 위해 우리도 쉬고 있고 아마 인민군도 잠들어 있을 거야. 보석을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하늘의 별빛과 싸늘한 달빛 아래 잠든 이 대자연! 자연은 이렇게 아름답고 장엄한데 우리들, 인간의 처지는 왜 이렇게 비참하고 저주스러울까? 숙, 전쟁터에서 냉정히 생각해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찬하며 역사와 문명을 자랑하는 인간만큼 어리석고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만물은 없는 것 같아. 그래, 이 의미 없는 전쟁 속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

또한 인간의 역사와 문명은 무슨 값어치가 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전쟁의 역사였고 살인과 파괴와 착취의 문명이었지. 우리 같은 수 없는 젊은이들의 고독한 죽음과 피로써 살이 찌고 생명을 부지해 온 인류의 역사와 문명! 인간의 양심으로 과연 우리는 이런 역사와 문명을 자랑할 수 있을까?

숙, 이 전쟁도 언젠가는 종말이 올 거야. 그리고 한국 민족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거야. 그리하여 그리로부터 이 전쟁의 숱한 진짜와 가짜의 영웅들이 나타날 것이며, 공부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연구랍시고 전쟁의 의의와 과오 등을 분석하며 떠들어대겠지. 그런가 하면 소설가나 시인이라는 작자는 마치 광맥을 찾은 광부처럼 그제서야 창작의 노다지판을 발견했다는 듯 그 돼먹지도 않은 소설이나 시를 쓴다고 밤을 새우겠지. 할일 없는 인간들에게 창작의 소일거리나 제공해 주고 있는 이 전쟁은 아마도 그런 뜻에서 역사와 문명을 이어가게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역사와 문명의 창조자라고 치켜 올리고 있으니. 정말이지 인간들이 하는 꼴이 우습지 않아?

숙, 미약한 지능으로 이것 저것 생각하는 인간이 된 것이 정말 한스러워. 사고(思考)를 통해 자아(自我)를 인식시켜 주는 이 지능이 저주스럽기도 해. 이 자아의식 따위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이야? 그것은 죽음 앞에 나선 나에게 고독과 고통과 반항과 분노 이외에 아무 것도 안겨 주는 게 없어. 죽음만을 인식시켜 주는 이 자아의식! 죽음 앞에 마주선 나의 존재만을 송곳처럼 예리하게 부각시켜 줄 뿐, 이 죽음을 나로부터 제거시켜 줄 수 없는 무능한 사고! 이런 인간이 될 바에는 차라리 정신병자나 천치 바보가 되는 편이 다행스러웠을지도 몰라. 생각하는 것이 난 싫어. 사고하는 특권을 나는 포기하고 싶어. 정말 정신병자나 천치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적어도 사고하는 고통을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또 이 전쟁이 빚어내는 모든 참상에도 무감각한 사람이 될 게 아니겠어? 그렇게 되면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거야. 조국도 민족도 소위 정치한다는 위정자도 군의 상관도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미워하지 않게 될 거야. 그러나 무언가를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것이 미워지고 모든 것에 반항하고 싶어져. 심지어는 천주님에게까지 이런 극단적인 말까지 서슴지 않는 나를 숙은 예전처럼 책망하겠지. <자신의 무지와 무능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조(自嘲)만 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인간>이라고. 그러나 숙, 우리처럼 전쟁터에 나와 전쟁하는 기분으로 한 번 이 역사적인 현실과, 이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과, 이 현실의 모순을 합리화시키는 종교 등을 냉정히 생각해 봐.  그래도 인간은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자조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해? 또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운명에 반항해서는 안 될까? 숙, 잠자코 있지 말고 이전처럼 한 번 예리하게 비판해 봐! 그러나 숙, 지금 나는 숙의 지성적인 판단을 듣고 싶지는 않아. 왜냐하면 나는 나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잘 알고 있으니까. 숙, 이성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심정(心情)의 논리라는 것이 있잖아? 지금 내가 숙으로부터 듣고 싶은 것은 냉철한 이성의 말이 아니라 피가 끓는 숙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마음의 소리야. 바로 이러한 심정의 논리로 죽음의 그늘 아래 서 있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 보란 말이야. 숙, 죄 없는 숙에게 공연히 분풀이만 하고 있지 용서해 줘.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가 누구에게 화풀이를 할 수 있겠어? 내가 숙을 사랑하고 이런 분풀이도 할 수 있는 거겠지. 사랑하는 숙, 나의 이 느닷없는 화풀이를 너그럽게 용서해 줘. 이제 이런 얘긴 그만하고 오늘 오후에 일어난 나의 심리적인 체험을 하나 들려 주지.

숙, 오늘 오후에 나는 몇 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20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시체를 시체 집결소로 운반했어. 거기에는 아직 후송되지 않은 이름 모를 전우들의 시체가 20여구나 있었지. 그들의 처참한 모습이란!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인간이라는 말을 듣지 죽은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야.  시체들은 이미 인간 애정의 대상이 되지 못해. 사랑이란 몸에 피가 돌고 생명이 있을 때의 일이지 이미 생명이 없는 몸뚱아리들에 대해서는 사랑 운운할 수 조차 없어.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기를 바라고 손이라도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겠지. 그러나 피투성이가 되어 그것도 머리가 터지고 가슴이 빠개지고 창자가 터져 나오고 팔다리가 잘라져 달아난 이 몸뚱아리들을 누가 만지고 싶어할 것이며, 도 누가 그들 곁에 있고 싶어하겠는가 말이야!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소름 끼치는 처참한 모습, 그리고 추악한 냄새, 게다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만 마리의 왕파리들이 송장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옆에 빽빽이 들어찬 구더기의 꿈틀거리는 모습이란! 그 송장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란 말이야? 아니야, 인간은 죽으면 이미 인간이 아니야.

숙, 전우들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내 가슴 속에서 이상한 반항의식이 강렬히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꼈어. 그리고 이 송장들도 과연 성경말씀처럼 천주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일까 하는 회의가 전개같이 스쳐갔어. 천주님께서 자기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성경 말씀이 있지 않아? 천주님의 모상, 그것은 사랑이신 천주님의 사랑의 표현 자체를 말하지 않겠어? 그런데 이 송장들의 어느 구석에 천주님의 그러한 사랑의 표현이 있단 말인가? 왕파리와 구더기가 파먹고 있는 송장들, 그래 그 징그러운 모습이 천주님의 모상이란 말인가? 허리가 끊기고 가슴이 빠개지고 창자가 터져 나온 천주님의 모상들, 왕파리와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천주님의 모상들?! 숙, 천주님의 모상이 어떤 연유로 또 누구 탓으로 이런 꼴이 되었을까?

숙은 또 할 말이 있을 거야. 그것은 원죄의 탓이라고. 원죄! 숙, 원죄의 교리를 생각하면 할수록 이제는 천주님의 존재마저 의심스러워져. 왜 천주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원죄라는 실수를 저지르게 내버려 두었단 말인가? 그리고 호랑이는 호랑이를, 소는 소를, 말은 말을 낳는데 어째서 전능하신 천주께서는 자기와 똑같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못하셨는가 말이야?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계명이 아담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은 아담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어? 왜냐하면 계명이란 완전한 질서 유지를 위해 있는 법이니까. 완전하신 천주님께서는 자기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시면서 왜 자기 계명을 어길 만한 불완전한 인간을 만드셨느냐 말이야? 그리고 아담이 원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냐 말이야?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잘못도 죄도 아닌, 아득한 태고적의 한 인간이 저지를 죄를 내가 왜 책임져야 하느냐 말이야? 사랑 자체이신 천주님,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자비로우신 천주님, 그런데 내 잘못도 아닌 아담이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내게도 부과하는 천주님. 숙, 천주님의 용서가 어디 있으며 사랑이 또 어디 있어? 아담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 천주님이 과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내가 원치도 않은 생명을 내게 주고 나서 천주님께서는 왜 나에게도 그런 원죄의 책임을 물려 주시느냐 말이야? 정말 천주님은 너무하셔. 그리고 뭐가 뭔지를 모르겠어. 생각하면 한 없이 천주님에 대한 회의와 반항심만 늘어가고 있어.

숙, 내게 말 좀 해봐! 천주님의 존재를 확신하는 숙의 신앙을 내게 보여 줘 봐. 우리 인간에 대한 천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줘. 천주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을 내게 증명해 봐. 사랑인 천주님이 어디에 계셔? 전선하시고 전지 하시다는 천주님, 그러나 그분이 창조했다는 이 인간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좀 봐. 그리고 의로우신 천주님께서 하신 일이 뭐야? 전능하신 천주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느냐 말이야? 숙, 어디 말 좀 해봐, 제발! 미칠 것만 같아, 차라리 미쳐 버렸으면 좋겠어!

숙, 숙의 침묵은 나에게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어. 말로써 해명할 수 없는 엄청난 천주의 신비! 옛날의 욥 성인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의 고통을 참아내야 하겠지. 그리고 이러한 모순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천주님께 찬미를 바쳐야 하겠지. 왜냐하면 천주님은 내 지능으로 알 수 있고 내 경험으로 깨달을 수 있는 한계 밖에 계시는 분이니까. 그러므로 내가 심지어는 그 존재를 부인하려고까지 하는 천주님을 신앙이란 이름으로 받아 들이고 공경할 거야.

숙, 그런데 무서워. 죽음보다도 이 인간의 원죄를 구실삼아 천주님을 거부하려는 내 심적 변화가 더 무서워. 숙, 기구해 줘. 반항의 유혹과 절망에 바지지 않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줘. 숙, <주의 기도문>의 끝 구절이 있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이 기구를 나를 위해 바쳐 줘. 나는 이미 회의라는 함정에 빠져 반항의 깃발을 들고 절망에 몸부림치며 천주님을 거부하려 하고 있어. 숙, 나를 위해 계속 기도해 줘.

숙, 방금 공격 준비 명령이 내렸어. 이제 두 시간 후면 우리는 총탄과 포연(砲煙) 속에 만사를 잊고 싸움에 미쳐야만 돼. 그럼 안녕! 기구 중에 서로 일치하기를 빌며….

 

 

 

제10장

누구의 탓이랴?

 

1950년 12월 초순, 함흥전선을 철수하기 며칠 전 우리는 몹시 추운 초겨울을 겪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으로 얼어붙은 밤에 전선 보초들을 순찰하고 있었다. 그때 한 대원이 내 시선을 끌었다. 그는 발 끝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무슨 병이라도 났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추운가?”

“네, 춥습니다. 선임하사관님!”

“옷은 두툼히 입었나?”

“별로 두툼히 는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진 것은 충분히 입었습니다.”

“털 내의는 입었는가?”

“안 입었습니다.”

“왜”

“말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 자식 말버릇 봐라. 왜 안 입었는지 말해 봐!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

“선임하사관님,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는 정면으로 나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항의했다.

“이 자식아, 군데에서 특히 이 전쟁터에서 개인적인 문제가 어디 있어? 입으라고 준 옷을 입지 않은 그 이유를 빨리 말해 봣! 명령이닷!”

나는 그의 뺨을 한 대 치려다 그만 두었다. 내 음성이 높아지고 내 태도가 강경해지자 그는 다소 기가 질린 듯 고개를 숙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사로운 일을 선임하사관님께 말씀 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 군인에게는 사사로운 일이란 없어. 너는 우리 대원 중의 한 사람이며 네 건강은 조국의 것이야. 그리고 나는 네 건강에 대해 책임이 있어. 그래서 네가 왜 옷을 제대로 입지 않고 추위에 떨고 있는지 알아야 해. 이유를 말해!”

“제가 말씀 드리면 선임하사관님은 저를 놀리고 제 말씀을 곧이듣지 않으실 겁니다.”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아!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해. 오늘까지 너를 무시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좀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그에게 쏘듯이 말했으나 그에게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발 끝을 내려다보다가 그는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선임하사관님, 제 말씀을 잘 들어 주십시오. 제 나이 지금 스물다섯이고 결혼한 지 삼 년이 됐습니다. 제게는 훌륭한 아내가 있고 또 아이가 하나 반입니다. 둘째 애가 현재 뱃속에 있으니까요. 제 아내는 제게 어울리지 않으리 만치 아름답고 착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선임하사관님은 아내 자랑하는 저를 천하의 못난 녀석이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제 아내는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여잡니다. 저나 제 아내나 서로를 몹시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들처럼 공부를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부부간의 애정과 성실과 순수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그런 대로 살림은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과 함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우리도 남들처럼 피난을 떠나야 했지요. 저는 피난지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군대에 소집되어 입대했습니다. 아내에게 쌀 한 주먹도 남겨 놓지 못하고 떠나왔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객지에서, 그것도 피난지에서, 어린 아이를 데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제겐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아내는 지금 어느 집에서 가정부 겸 일군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그런 고된 일을 하는 것은 난생 처음일 겁니다.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 빨갱이들이 저주스럽고 또 자기 국민을 똑똑히 보호하지 못한 남한의 정치인들이 증오스럽습니다. 그러나 선임하사관님, 지금처럼 추운 밤에 제 아내가 따뜻한 방에서 아기와 함께 편안히 자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 아내가 겪고 있을 고통과 추위를 나도 나누어 갖기로 했습니다. 아내의 고통을 마음 속에서 뿐만 아니라 직접 피부를 통해 느끼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추위와 싸우며 고생하고 있는데 저만 따뜻이 있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털 내의를 벗었지요. 소년 같은 얼굴을 가지신 스무 살의 선임하사관님은 아내에 대한 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언젠가 선임하사관님도 한 처녀를 사랑해서 그녀와 결혼하시겠지요. 그때는 아마 제가 이렇게 추위에 떨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하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털 내의를 아내에게 전쟁 기념으로 갖다 주고 싶습니다. 태오 하사관님, 저는 지금 몹시 춥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속은 춥지 않아요. 지금 불행한 내 아내와 함께 느끼는 이 결합의 감정과 이 사랑의 행복감을 빼앗아가지 마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그는 말을 끝내며 애원하듯 내 팔을 붙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도 깊이 감동되었다. 나는 그렇게도 순수하고 진실하며 영웅적이기까지 한 부부간의 애정을 가진 사람을 여태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특히 전쟁 중에 젊은 군인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그들은 부부 서로가 지켜야 할 사랑의 신의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다. 여자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만 있으면 그들은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나는 우 수병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여보게 우 수병, 나는 항상 자네와 같은 성실한 사람을 만나기를 원했네. 아직도 아내가 없고 부부간의 애정을 경험해 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야. 그러나 나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조금은 알고 있어. 사랑을 조금도 이해 못하는 사람처럼 나를 취급하는 것은 모욕일세. 나도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며 선환 것을 아끼고 순수하고 고귀한 것을 우러러볼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은 갖고 있네. 그러니까 나도 자네를 이해할 수 있고 아내에 대한 자네의 사랑을 존중할 수 있네. 자네 아내는 행복하고 자네가 자랑스러울 거야. 물론 자네는 모든 일에 있어 아내에게 충실해야 하겠지. 그렇다고 자네 몸을 따뜻하게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나? 아내에 대한 사랑도 중요하지만 자네 건강을 어리석게 해친다든가 위태롭게 만들 필요는 없어. 자네가 건강할 때 아내도 기뻐하지 않겠는가? 특히 자네가 그 튼튼하고 힘센 두 팔로 아내를 껴안을 때 아내는 행복할 걸세.”

“태오 하사관님은 나이가 어리신데도 부부간의 애정이 어떠한 것이라는 걸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결코 저는 얼어 죽지는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아내의 고통을 나눠 받고 싶을 따름입니다.”

나는 그때 수통에 든 술 생각이 나서 그것을 풀어 그에게 건네 주었다.

“우 수병, 자네 아내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 주욱 한 모금 들이마시게나. 자네 몸을 이 술로 좀 덥히란 말이야.”

그는 기분 좋게 한 모금 들이켰다.

“태오 하사관님, 기막힌 맛입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 마셔 보는 술입니다. 선임하사관님은 마음이 착하시고 멋이 있군요.”

“이 사람아, 비행기 너무 태우지 말고 내 몫도 몇 모금 남겨 주게나.”

나는 내 털쉐터를 벗었다. 그리고 그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우 수병. 자, 이것을 내 우정으로 받아주게나. 그리고 자네 털 내의는 자네 말대로 전쟁 기념으로 아내에게 갖다 주게.”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는 놀라 나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잔말 말고 받아 뒤! 이것도 명령이야!”

“그럼 태오 하사관님은 어떡하시구요?”

“내 걱정은 말아.”

“아닙니다. 선임하사관님. 이 명령만은 절대 거절하겠습니다. 태오 하사관님이 얼어 죽으시게 요.”

“잔소리 말고 받아 두라고. 내 외투는 모피를 안에 댄 거라 털쉐터가 없어도 견딜 만 해. 그리고 털 내의 한 벌이 또 내게 있으니 염려 마.”

“감사합니다. 그럼 고마우신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서 부부의 사랑과 신의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한 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함흥에서 철수한 후 우리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공산 반란군을 소탕하기 위해 제주도 한라산에 가 있었다. 한 달 동안 계속되었던 제2기 공비 토벌전을 끝마치고 우리는 일주일 간의 휴가를 얻어 제주시로 되돌아왔다. 첫날 저녁 우리는 부대장이 베푼 술자리에 초대받았다.  흥을 돋구기 위해 20여 명의 술집 아가씨들도 불러왔다. 지난 한 달 동안 우리는 한라산 기슭에서 여자란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할 겨를조차 없었다. 아가씨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거의 이상을 잃은 채 그녀들에게 접근하고 싶은 욕정을 느꼈다. 웃음 띤 얼굴, 예쁜 목소리, 매혹적인 눈길, 몸에서 풍겨 나오는 화장 냄새, 그것들은 우리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행복과 기쁨의 상징처럼 보였다. 누구 하나 미워 보이는 여자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들만 모인 것 같았다. 그녀들을 수유하고 싶은 욕정만이 가슴 속에 들끓었다. 그녀들은 이십 대의 젊은 난자들의 욕망을 사정 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그날 밤 그녀들은 우리들을 위로하기 위해 초대되었건만 위로는커녕 고독과 고통만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몸을 비틀며 괴로운 기나긴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우 수병이 찾아왔다.

“태오 하사관님, 저는 아내에게 지켜온 사랑을 배반하고 그의 순수와 진실을 유린했습니다. 어젯밤 그 아가씨들의 춤을 보고 노래를 들으며 저는 정욕에 완전히 사로 잡혔습니다. 난잡스러운 쾌락에 대한 욕구가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수치스런 감정은 결혼하고 처음 있는 일입니다. 결혼한 뒤 저는 순수했었고 제 가슴은 마냥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어젯밤 그 아가씨들을 보고 본능적으로 제 아내 아닌 딴 여인을 원했습니다. 어떤 쾌감조차 맛보았지요. 이 더러운 욕정과 싸우면서 한 잠도 이루지 못했어요. 태오 하사관님께서 고결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제 자신이 사실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이제는 아셨지요? 저는 태오 하사관님의 우정도, 감탄도, 그리고 제 아내의 순결한 사랑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 수병, 자넨 참 훌륭한 사람이야. 자네의 그런 마음의 자세가 부럽네. 아내에 대해 그처럼 성실한 사랑을 갖고 있으니까 말일세. 이 세상에 자네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나? 설사 자네가 상상으로써 부부의 순결을 더럽혔다 하더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으니 훌륭한 일이네. 보게나, 어젯밤 우리와 함께 부대로 돌아와 함께 잠잔 대원이 몇 명이나 되나 하는 걸. 그들 중에는 자네처럼 고향에 아내를 두고 있는 사람이 여럿일 텐데 밖에서 무슨 짓들을 했겠는가 말이야.”

“그렇지만 태오 하사관님, 생각 속에서 저는 다른 여자와 의식적으로 쾌락을 즐겼고 그녀와 동침했습니다.”

“군자나 성인도 하루에 세 번 이상이나 마음 속으로 죄를 범한다고 하지 않나? 하물며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야 오죽 하겠나? 내가 보기에는 자네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인간적인 차원을 초월해 있는 것 같아. 천주님에 대한 내 신앙과 사랑보다 아내에 대한 자네의 신의와 사랑이 더 순결한 것 같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태오 하사관님.”

“아니야, 사실이야, 자네는 사랑의 승리자야.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자네는 어젯밤 아내에 대한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전투를 한 셈이야. 다소 그 전투에서 상처를 입었을지는 모르나 자네는 당당한 승자야.”

“그런 뜻에서 승자일지는 모르지요. 그런데 어젯밤 저는 여지껏 알지 못한 사실을 또 하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내를 변함 없이 사랑하고 또 아내가 당하는 고통을 마음으로나마 함께 나눠 보고자 노력해 왔으나 그 모든 것은 섹스라는 아내가 가지고 있는 성(性)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어젯밤 아내에 대한 강령한 성적 충동이 저를 지배하고 있었어요. 물론 남녀가 결혼할 때 섹스만을 위해 결혼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격과 취미가 다른 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데서 오는 여러가지 갈등과 불만 등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힘도 역시 성의 힘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아내에 대한 이러한 성의 힘이 없었던들 저는 그렇게까지 아내를 사랑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아직 경험이 없어 뭐라고 말할 처지는 못되지만 창조주가 남과 여 라는 두 성을 만든 이면에는 지금 자네가 말한 그런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네. 그래서 이혼 사유 중에서도 부부의 성생활의 부조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것 같아요. 전쟁 전 농촌의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발걸음이 빨라졌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아내의 사랑스럽고 다정한 모습, 그리고 정성되이 준비한 밥상보다는 그녀의 몸 가까이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과 휴식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럴 수 있을 거야. 나도 사실은 언젠가 잠깐 말한 적이 있지만 원산에서 한 처녀를 알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약속했네. 그런데 둘 사이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그녀의 몸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더구만. 이 소유 욕망은 성적 결합을 의미하지 않겠어? 남녀간의 사랑이란 어떤 것이든 성의 결합을 지향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어젯밤 제가 느낀 것은 지금까지 지켜 왔다고 생각한 부부간의 순결은 엄격히 말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내에 대한 제 사랑은 마치 온실 속의 한 포기 꽃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래서 부부간의 순결이란 방금 태오 하사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행동화되지 않은 배신 행위> 정도면 족한 게 아닌가 생각했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리고 말이야,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히 순수할 수도 없어. 그것은 신에게만 합당한 거야. 그러나 인간은 모름지기 성실해야 한다고 믿네. 설사 어떤 경우에 마지 못해 아내 아닌 다른 여자를 탐내고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아내에게 충실 하려는 마음가짐과 그런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으려는 노력을 성실하게 기울여야 할 거야. 이러한 노력이 부부간의 신의를 보호해 주는 힘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노력해야겠지요. 어젯밤 저는 처음으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당장 시내로 달려가 그 술집 아가씨들에게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들끓었으나 입술을 깨물며 참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참으면서 나는 아내를 몹시 질투하게 됐어요. 내 아내도 나처럼 이런 욕정을 마음 속에 경험한 적이 있겠지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아내가 미워지더군요. 참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고, 특히 아내에 대한 남편들의 욕심이란 한계가 없나 보죠….”

우 수병은 아내에게서 온 편지 몇 통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평범한 문체로 씌어진 편지였으나 그 속에는 사랑의 입김이 강렬히 서려 있었다. 나는 그 중 몇 군데를 내 진중일기(陣中日記)에 옮겨 놓았다.

 

<사랑하는 당신, 저와 우리 아기 건강을 걱정하지는 마세요. 산신(산신)님의 은덕으로 아기는 잘 자라고 있어요. 아침 저녁으로 빠짐없이 과일과 냉수를 산신님께 바치며 당신을 잘 보호해 주십사고 빈답니다. 언제나 용감하시고 군인 된 의무에 충실하세요. 그러나 저는 당신께 이렇게 속삭이고 있어요. ‘제 사랑은 당신이며, 당신과 함께, 그리고 당신의 사랑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저를 위해 슬기롭고 조심성 있게 행동하시라고요.’ 우리 귀여운 아기가 엄마하고 무사히 아빠가 돌아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하고 말한답니다.>

 

우 수병을 알게 된 후부터 내 기도 중에 그와 그의 아내를 잊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때때로 그들을 위해 천주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다. 우 수병 같은 사람은 전쟁이 파괴한 이 사회의 풍기와 윤리를 재건하기 위해 절대로 살아 남아야 할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아내가 산신을 믿든 무당을 좇든 남편을 위한 그녀의 사랑은 천주님께 통할 것이며 그들의 부부생활과 가정을 천주님께서는 축복해 주시리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내 이름을 의지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무엇이나 믿는 마음으로 구하면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나는 우 수병이 이 전쟁에서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우 수병을 알게 된 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났다. 목표 20고지를 점령한 며칠 후 우리 3대대는 목표 22고지를 점령하라는 작전 명령을 다시 받았다. 이 22고지가 바로 <토솔산>이었으며 인민군은 이 고지를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이 토솔산은 우리 해병대가 목표한 24개 고지 중에서 가장 험악했다. 인민군은 유리한 자연적 지형을 방패 삼아 견고무비한 진지를 구축해 놓고 우리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당시 해병대 제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3대대장 김윤근 소령을 전화로 불러 목표 22고지를 기필코 점령할 것을 재차 명령하고 <이번의 제1기 작전과 제2기 작전을 토솔산 전투라 명명(命名)한다> 라고 하며 우리를 격려한 바 있었다. 이만큼 22고지는 아군에게나 적군에게나 다 중요한 전략고지였다. 그 유명한 <토솔산 전투>라는 말은 이렇게 유래된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치열한 전투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공격 첫째 날 11중대가 공격해 올라갔으나 성공치 못했다. 다음 날 계속 10중대와 우리 9중대가 합동 공격 명령을 받았다. 전날 밤 우리는 11중대와 교대해서 22고지에 연하는 능선에 배치되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인민군은 쉬지 않고 박격포 사격을 가해 왔다. 벌써 우리 중의 여러 명이 쓰러졌다.

22고지는 몹시 가파라서 정면공격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10중대는 고지 우측을, 우리 9중대는 고지 배면(背面)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멀고 긴 우회작전을 써야만 했다.새벽 5시경 우리는 무사히 22고지 배면 목적지에 도착했고 아군 포부대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지체 없이 공격을 개시했다. 우리의 배면 공격으로 허점을 찔린 적은 당화한 것 같았으나 저항은 아주 조직적이었다. 거의 완벽한 방어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끈질긴 방어와 치열한 공격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점점 더 가열되어 갔다. 인민군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야말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고지 정상을 향해 돌진했다. 처참한 육박전을 약 한 시간 가량이나 되풀이한 끝에 우리는 22고지 정상의 일각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화염 방사기를 앞세우고 적의 참호를 차례로 소탕해 나갔다. 그때 10 중대도 고지 우측을 점령했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인민군 최후의 보루인 22고지는 마침내 좌우 협공 작전에 의해 결국 아군의 손에 완전히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인민군은 손을 들고 항복했다.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적의 야간 기습에 대비하기 위하여 새 진지를 구축해야만 했다. 비는 그쳤으나 짙은 안개가 방금 우리가 점령한 고지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날 밤 우리가 예상한 대로 인민군의 맹렬한 대규모 반격이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지난번 13고지 때와 같은 처참한 전투가 밤새껏 벌어졌다. 기관총열과 박격포 통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우리는 사격을 되풀이했다. 새벽 세 시경 우리는 탄약도 떨어지고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사기도 잃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인민군의 인해전술 앞에  우리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우리 중대의 반수 이상이 전사했거나 아니면 부상당해 있는 처지였다. 내 왼쪽 다리에서도 피가 흘렀으나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그때 짙은 안개를 뚫고 11중대가 용케도 응원부대로 도착했다. 우리는 사기를 돋우며 적의 반격을 결사적으로 막았다. 새벽 5시경 적은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미군 항공기 여러 대가 날아왔다. 그리고 도주하는 인민군 반격부대를 쫓으며 폭탄을 퍼부었다. 우리는 서로 악수하고 얼싸안으며 승리를 축하했다. 그리고서 나는 다른 전우들처럼 극도의 피로로 녹초가 되어 잠에 곯아 떨어졌다.

그날 밤이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우 수병이 전날 밤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즉시 우 수병이 소속되어 있는 3소대가 배치된 능선으로 달려갔다. 나는 달빛 아래서 그의 시체를 찾았다. 포탄에 맞아 반쯤 무너진 벙커 안에서 그의 시체를 마침내 발견해 내었다. 창백한 달빛 아래 비친 그이 시체는… 아, 그것은 너무도 비참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자기 아내에 대해 애정 어린 말을 들려 주던 산 사람이 아니었다. 또 항상 행복한 웃음을 보이던 그도 아니었다. 그때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감정에 사로잡혀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그의 시체를 발로 차며 부르짖었다.

“이 자식아, 왜 죽었어! 이 비겁한 놈아, 어쩌자구 죽었나 말이야!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두고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느냐 말이야. 이 자식아, 말 좀 해봐!”

나는 분노로 뜨거워진 가슴을 억누르고 깊은 회의와 상념에 사로잡혔다.

“우 수병은 죽고 싶어 죽었을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가 죽음을 원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는 그저 죽은 것이 아니다. 무언가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무엇이 그를 죽게 했을까? 이 전쟁일까? 물론 전쟁의 탓이기도 하지…. 그럼 전쟁은 누구의 탓일까? 13고지 전투에서 내 총에 맞아 죽은 인민군 장교의 말처럼 똑 같은 조국과 민족을 같은 정성으로 사랑하면서도 서로 화합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의 우매함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민족을 우롱한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사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우 수병의 시체 앞에서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번개같이 어떤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갔다. “전쟁은 바로 천주님의 탓이다. 호랑이는 호랑이 새끼를, 말은 말 새끼를, 소는 소 새끼를,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와 꼭 같은 존재를 낳는데, 천주님은 어찌하여 자기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면서 원죄를 저지를 정도의 불완전한 인간을 만들어내었단 말인가! 이 전쟁이 바로 원죄에서 파생된 악이라면 원죄를 있게 한 것은 또한 천주님의 탓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자 내 가슴 속은 천주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찼다. 또한 예수님으로부터도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이름을 의지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믿는 마음으로 무엇이나 구하면 아버지께서는 곡 들어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과연 진리란 말인가? 아침 저녁으로 전쟁터에서 바친 수많은 내 고독한 기도는? …. 미친놈이란 전우들의 놀림을 받으면서까지 포탄과 격전 속에서도 잊지 않고 우 수병을 이해 바친 내 희생은? …. 그래, 이런 내 기구와 희생이 천주님의 은총을 받기에 부족했단 말인가! “아니야, 예수님의 이 성경 말씀은 사기야. 온갖 부조리와 비극 속에 억눌린 인류에게 천당이라는 내세를 내세워 인간의 고통을 합리화시키고 달콤한 말로 인간의 비극을 조롱하며 인류를 사기한 사람이 바로 나자렛 예수다.” 그때 예수님은 나의 분노와 배신당한 듯한 허탈감 속에 정말이지 인류의 사기꾼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우 수병의 시체를 끌어 안고 엉 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울음은 우 수병의 죽음이 슬퍼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천주님에 대한 분함과 예수님으로부터 배신당한 기분 때문이기도 했다. 천주님에 대한 내 순진한 사랑과 내 성실한 신앙심이 조롱 받고 배신당한 데서 오는 한 인간의 분노의 울음이기도 했다. 그날 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날이 밝을 때까지 나는 하염없이 우 수병의 곁에 앉아 있었다. 일곱 달 전에 함흥 전선에서 인민군 포로 김상위의 완강한 무신론에 대항하여 전능하신 천주님의 존재와 인간 구원을 위한 그분의 자비로운 섭리를 그렇게 도 열심히 변호했다니… 지금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신앙을 포기한 김상위가 우직하게 신앙을 지켜온 나보다 훨씬 옳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무신론적 인도주의가 나의 그리스도교적 인도주의보다 더 진실한 것 같았다.

그 무렵 나는 원죄에 대한 교리를 생각할 때마다 망부활 미사 예절 중에서 “O FELIX CULPA!(오 행복한 죄여!)” 를 노래하게 한 교회를 비웃었다. 평화와 행복의 시절에는 천주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지상을 내려오게 한 이 <FELIX CULPA>를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아기를 위해서도 살아 남았어야 할 우 수병의 시체 앞에서 어떻게 이것을 노래할 수 있으랴! 우 수병의 죽음은 바로 이 복된 죄라는 원죄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내 영혼은 차츰 더욱 뚜렷하게 천주님에 대한 부정 속으로 미끄러져 갔다. 천주님에 대한 반발과 부정이 이 더러운 전쟁에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동정할 수 있는 유일한 내 양심처럼 느껴졌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 아래 무릎을 꿇고 천주님께 찬미를 드린다는 것은 인간 조건을 거역하는 모순된 행위라고 나는 단정했다. 설사 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천주님이 계신다 하더라도 아담이 범한 원죄라는 이름으로 온 인류를 도매금으로 단죄한 천주님을 우리는 거부하고 이 지상에서 축출해 버려야 한다고 허공을 향하여 외치기도 했다. 천주님에 대한 모든 신앙행위를 거부해 가는 동안 내 가슴 속에는 공허와 허탈감만 가득 차 갔다. 그래서 나는 남에게 선하고 전우들과 다정하게 지니는 것으로만 만족했다. 그리고 술을 대량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때는 주당(酒黨)을 만들기까지 하여 부당수(副黨首)로 뽑히기도 했다. 이렇게 내 두 번째의 신앙의 위기는 나를 종교 면에서 완전히 소경으로 만들고 있었다.

 

 

 

 

 

제11장

귀로(歸路)

 

1. 반항과 숙

 

우 수병이 전사한 뒤 나는 전쟁이 파생시키는 온갖 인간의 비극과 천주님의 섭리에 대해 한번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깊이 파고 들면 들수록 나는 마음 속에 반항의식만이 커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천주님을 본격적으로 증오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부정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참혹한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주님은 그의 지복(至福)의 천당에서 행복만을 누리고 있을 것이며 또한 그는 이 전쟁 하나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하기 때문에 도저히 그를 용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한 현상이 내 내면 속에 일어났다. 내가 천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면 할수록 나는 더 가까이 그분을 느끼니 것이다. 내 양심이 나를 간단 없이 그분에게로 향하게 만들기 때문에 내 마음은 잠시도 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불안한 양심을 달래기 위해 나는 어느 날 일종의 무신론 선언을 함으로써 결연히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일체의 신앙을 배격했던 것이다. 천주님이 설사 존재한다고 다더라도 전쟁의 이 처참함 속에서 그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비극을 목전에 두고 그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 조건>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나는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의 비극을 외면한 채 신에게 찬미를 바치는 인간을 <인류의 반역자>라고 나는 규정했고, 인간 조건의 타당한 행위는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때 나는 내 마음 속에 약간의 평온을 맛보았는데 거기에는 자주 마신 독한 술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평온은 표면상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결코 천주님을 완전히 잊은 적도 없었고, 도 그분을 향한 내 양심에서 완전히 해방된 적도 없었다. 그러면 내가 부정해도 존재하며, 내 생활 안에, 생각 속에 부단히 파고드는 천주님을 거슬려 나는 무엇을 또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그렇게도 많은 불행을 인간에게 퍼붓는 폭군적인 천주님을 공격하기로 했다. 전쟁 하나 제대로 막을 줄 모르면서 자기 피조물들의 고통과 비극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냉정하며, 오히려 그것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는 천주님을 거슬려 싸우며 복수하기로 작정했다.

천주님을 공격하고 복수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가 생각났다. 첫째 방법은 천주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보다 큰 고통과 비극을 야기시킴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해 주자는 것이었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큰 고통과 비극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부정하도록 유인하자는 것이었다. 둘째 방법은 천주님의 섭리야 어떻든 이 땅 위에 평화를 재건하고 모든 인류를 형제애 속에 화해시켜 그분의 질투를 일으켜 주자는 것이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천주님은 질투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천주님을 배반할 수는 있어도 인간을 배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천주님의 질투심을 자극함으로써 그에게 복수하고자 했다. 원죄라는 이름으로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들! 끝없는 비극 속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아야 할 이 불쌍한 인간들! 나는 그들을 해질 수가 없었고 또 그들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 없었다. 앞으로는 일체의 신앙을 배척하며 천주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이름으로 모든 인간을 형제처럼 사랑함으로써 이 당 위에 평화를 건설하자고 다짐했다. 이 인간 사회에서 천주의 이름을 내쫓아 버리고 인간끼리 화목할 때 인간은 원죄를 극복할 수 있고 또 천주를 복수하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나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바칠 각오가 돼 있었다. 하여튼 나는 기어이 천주를 복수하자고 결심했다. 나는 이 복수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종과 사상과 종교의 차별 없이 인간 비극에 대해 나와 공감하는 모든 사람을 모으고자 했다. 그리하여 앞으로 나는 천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과 고통을 서로 나누는 모든 인간 형제들을 위하여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모든 형제들과의 연대의식에 대한 나의 이 엄숙한 의무를 배반할 우려를 없애기 위해 나는 천주에 대한 일체의 사랑과 책임을 배척하기로 했다.

그러나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이 전쟁을 중지시키고, 이 세상에 평화를 호소하며, 정치적인 이념의 차이로 갈라져 사우는 우리 민족을 화해시키고 위해 나는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일개 사병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내 상관이 명하는 것이라면 선악의 구별 없이 모두 복종해야만 했고 살인적이며 파괴적인 이 전쟁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것은 내 의도와는 일치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전쟁이라는 이 거대한 악마 앞에 나는 비참하리 만큼 무능한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자살 이외의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전쟁터에 살아 있는 한 나는 이 전쟁을 계속해야만 할 것이고 다라서 우리 민족의 불행을 연장시키는 데 조력하는 결과만 빚어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살하면 같은 민족인 북한 형제들과 사울 군인 한 사람이 없어질 것이며 도 조국을 헐벗기는 이 전쟁에서 나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었다. 이것만이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공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내 사상에 충실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수가 있었다. 그때는 나는 자살이라는 것이 현실 도피의 비겁한 행위임을 깨닫지 못했다. 아주 그릇된 생각이지만 나는 그것을 용기 있는, 심지어는 고상하고 영웅적인 행동이라고까지 믿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자살을 결심하고 내 진중일기를 펴 들었다. 일종의 유언처럼 숙에게 나의 이 소름 끼치는 감정과 심리적 상태를 적어 내려갔다. 그러자 갑자기 어떤 강한 빛이 번쩍거림을 느꼈다.  마치 이 불행 속에서도 계속 살아 남아 훗날 우리 조국의 구원과 민족의 행복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처럼. 나는 또한 내가 저버릴 수 없는 내 인인 숙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도 문득 깨달았다. 전쟁의 비극에만 내가 미쳐 있을 때 저 편에 한 여인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1년 6월 말경 우리 해병대는 토솔산의 24개 모든 고시를 점령하는데 드디어 성공했다. 이 토솔산 전투에서 우리 해병대의 용맹이 널리 국내외로 알려졌으나 거기에는 근 천여 명에 달하는 희생자의 말 없는 헌신이 숨어 있었다. 우리는 다시 차기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토솔산 일대의 방어 임했다. 거기서 나는 얼마 전부터 휴전 회담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다. 왜냐하면 나는 그 무렵 서로 대립된 양 진영, 즉 소련과 중공으로 대표되는 공산 세계 외 미국과 그 밖의 서구 국가들로 이루어진 자유 민주 세계가 서로 대입되어 있는 한 우리 조국의 재통일은 우리 민족의 의사에 달려 있지 않고 오히려 유엔의 권능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휴전만이 당장으로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유일한 살길을 뜻하는 것이었다. 될 수 있는 대로 휴전이 빨리 조인되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전쟁의 불행을 감수하면서 여전히 전장(戰場)에 살아 남았다.

 그 해 7월 중순경 우리 해병연대는 공동작전을 펴 오던 미 해병사단의 예비연대가 되어 홍천으로 철수하여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병력 보충과 장비 보급을 받고 부대를 재편성했다. 그리고 8월 말 경 우리는 해병대의 가장 빛나는 다섯 개 전투 중의 하나인 <김일성 고지 전투>에 참가하라는 작전 명렬을 받았다. 휴전 조인과 평화에의 우리의 소망에 찬물을 끼얹듯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살육전인 전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휴전회담이 마련해 준 비교적 평온한 기간을 이용해 인민군은 그들의 진지를 견고하게 보강하고 훌륭한 장비를 갖춘 새로운 병력으로 전선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 전선에 걸쳐 총 공격을 개시했고 전쟁은 다시 살인적인 처참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사흘간의 도보행군 끝에 당시 미 해병대의 주 진지였던 <켄자스선>에 도착하여 미 해병대와 임무를 교대했다.  그리고 즉시 김일성 고지 공격 준비를 서둘렀다. 우리 9중대가 연대 첨병 중대로서 첫 공격 명령을 받았다. 우리의 임무는 적의 방위 제일선을 무너뜨려 아군의 공격로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그 날 비는 멈추었으나 짙은 안개가 고지전명을 덮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우리는 행동을 개시해서 김일성 고지 우측으로 우회 공격을 감행키로 했다. 우리가 공격해야 할 전면에는 수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었고 우리 중의 몇 사람은 벌써 지뢰가 발 밑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폭사했다. 그날 이상하게도 나는 죽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전에는 천주님의 정의와 영원한 상벌(賞罰)을 믿었기 대문에 죽음이 두려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이라는 것이 단지 인간 생명의 종식과 소멸에 지난 않았다. 왜냐하면 천주를 거부하고 신앙 일체를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다. 휴전 조인에 대한 희망도 잃고 또 이 다음에 내 조국의 구원과 민족의 행복을 위해 일하겠다는 이전의 결의도 잊은 채 나는 지뢰밭 위를 걷고 있었다.

아침 일곱 시에 우리 중대는 공격대기선인 <T> 지점에 도착했다. 바람이 일자 안개는 고지 정상에서부터 벗겨지기 시작했고 우리의 공격 행동을 이미 알아차린 적은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우리는 엎드려 비에 젖어 질퍽거리는 땅을 야전 삽으로 파서 거기에 몸을 숨기고 적의 총탄을 피했다. 그때 강중대장은 우리의 공격 노상에 깔려 있는 지뢰와 철조망을 폭파시켜 우리의 공격을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대대장에게 인민군의 전초 진지에 포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윤근 대대장은 즉시 사단 본부 작전국에 연락했고 드디어 사단포 전체가 포격을 시작했다. 그런데 수백 개의 포탄이 일시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우리 머리 위에 또 우리 주변에서 굉장한 지진이 일어나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는… 나는 그렇게도 처참한 광경을 실제 경험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 동료 백 여 명의 시체가 배가 갈라지고 머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다리가 잘린 채 땅 위에 깔려 있었다. 관측 장교의 거리 계산 착오로 우리 포병대의 그 수많은 포탄이 적의 전초 진지가 아니라 모두 땅 위에 엎드려 있던 우리 공격부대의 머리 위에 떨어졌던 것이다. 살아남은 우리는 거의 의식을 잃고 있었다. 용감한 강중대장은 대대장에게 즉시 포격 중지를 요청했고 대대장은 우리에게 주 저항선까지 지체 없이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우리는 총 한발 쏘아 보지 못하고 부상당한 전우들을 질질 끌며 처참하게 고지를 뛰어내려 왔고 안개가 완전히 벗겨진 적의 진지에서는 우리에게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사흘간 주야 간단 없이 우리 해병대 제1대대는 김일성 고지를 공격했다. 아직 고지를 점령하지는 못했으나 적은 거의 저항력을 잃고 있었다. 그 동안 우리 9중대는 주 저항선에서 쉬며 병력을 보충하고 중대를 재편성했다. 닷새째 되던 날 우리 3대대는 1대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김일성 고지를 최후로 공격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11중대와 합동 작전이었다. 공격 전날 밤 나는 이상한 고독감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벙커에서 나오 초가을의 찬 이슬을 맞으며 풀밭에 누워 멍청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내 앞에 기도하는 숙의 영상이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나는 현실을 잊고 “숙!” 하고 외치면 그녀를 잡으려고 일어섰다. 그러나 숙의 모습은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울컥 숙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기면 다시 풀밭에 앉았다. 그랬더니 또 기도하는 숙의 영상이 또렷하게 하늘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냥 그 영상을 주시하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한참 후 달이 구름에 가리워서 주위가 침침해지자 숙의 모습도 차츰차츰 흐려져 가기 시작했고 잠시 후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  나는 기도하는 숙의 영상에 이끌려 나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십자성호를 그었다. 내 양심이 천주님께 반항아고, 내 마음이 그 정다운 애인을 잊고, 그 비참한 포격 탓으로 내 정신이 몽롱해져 있는 동안에도, 한 여인은 온 정성을 다해 나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나는 내 개인의 행복을 생각하며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었는지! 그리고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내 생활을 또 얼마나 갖고 싶어했던가!

이튿날 아침 우리는 김일성 고지를 공격해 올라갔다. 이번에는 날씨도 맑았고 아군 포병대의 지원 사격도 정확했다. 닷새 동안 계속된 아군의 주야 공격에 인민군은 거의 전멸해 있었다. 고지 정상 주변에 있던 나무들도 포탄을 맞아 모조리 쓰러져 있었고 그것도 뿌리마저 뽑혀 있었다. 공격노상에 매설되어 있던 지뢰도 다 폭파된 후라 우리는 허리를 펴고 큰 걸음으로 공격에 임할 수 있었다. 우선 고지 정상 일대에 연막탄을 구름처럼 쏘아 놓고 적의 시야를 가린 다음 우리는 일제히 돌격해 올라갔다. 그러나 적은 아직도 거기에 남아 우리에게 사격을 가하며 저항해 왔다. 그들도 용감했다. 우리는 쓰러지는 정우의 시체를 넘으며 돌진을 계속했고 드디어 고지 일각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즉시 화염 방사기를 앞세우며 우리는 적의 벙커를 차례로 소탕해 나가기 시작했다. 화염 방사기의 위력은 언제나 절대적이었다. 이때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강복구 중대장이 파괴된 벙커 안에 아직 살아 남아있던 인민구의 사격으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그는 자기 특유의 그 우람한 목소리로 우리를 격려하며 끝까지 전투를 지휘했다. <강복구 중위가 기합 빠지면 해병대 전체가 기합 빠진다>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는 정말이지 용감한 군인이었다. 얼마 후 우리는 김일성 고지를 완전히 점령했다. 그리고 즉시 2대대가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며 <모택동 고지>라고 불리는 1026고지를 향해 공격해 올라갔다.

그 후 우리 해병대는 1026고지와 1056고지를 계속 점령했다. 2주 간 계속되었던 이번 전투에서 우리는 우리의 작전 임무를 완수했으나 5백여 명의 희생자를 내어야만 했다. 그때부터 1952년 3월 중순까지 우리 해병대는 김일성 고지를 포함한 1026고지를 연결하는 월산령지대(月山嶺地帶)에 새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전을 펴고 있었다. 휴전에 대비한 예비 진지도 구축하면서 우리는 거기서 휴전 회담이 하루 속히 조인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2. 교우와 술

 

우리는 월산령 진지에서 비교적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우리도, 인민군도 대대적인 공격은 서로 피하고 있었다. 다만 적정(敵情)을 살피기 위한 정찰전과 포로 획득을 위한 소규모의 야간 기습 정도로 서로 대진(對陣)하고 있을 뿐이었다.

1952년 2월 하순, 어느 날 우리 9중대는 인민군 전초진지를 야간 기습했고 목적한 포로 한 명을 생포해 왔다. 그러자 포로 획득에 공로가 있는 나 외의 3명의 대원에게 나흘간의 휴가가 베풀어졌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나는 원산 피난민 연락소가 있다는 부산에 내려가 숙의 거처를 찾아 보기로 했다. 서울로 나오는 연변의 농촌과 작은 도시들이 불타고 파괴된 것을 보고 나는 이 전쟁이 가져온 비극을 다시 한 번 아프게 되새겼다. 거기에는 이전의 아무런 행복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하자 나는 이모님을 찾아갔다.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낯선 사람들이 그 집에 살고 있었다. 형수도 이미 거기에 있지 않았다. 선희씨 집에 찾아갔더니 그녀도 집에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맞이하며 자기 딸은 영민을 돌보려고 간호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선의의 지극한 간호의 덕택으로 연민은 불구가 되었으면서도 웃음과 용기를 되찾았다 한다.

나는 또 옛 친구 몇 명을 찾아 보았으나 그들도 집에 없었다. 어떤 친구는 나처럼 군대에 입대해 있었고 어떤 친구는 어디론지 피난을 갔던 것이다. 왜냐하면 서울은 아직도 일선에서 가까웠고 도 지난날의 전투로 몹시 파괴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여러 젊은 남녀들은 쌍쌍이 되어 웃고 사랑을 속삭이며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서울의 이 사랑스러운 연인들의 광경은 고독한 나에게 괴로운 충격만을 주었다. 나는 그때 미친 듯이 숙이 보고 싶었다. 혹시 이 서울 거리에서 그녀를 마주칠 가 하고 길가는 처녀마다 눈 여겨 살폈으나 헛일이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 씁쓸한 고독감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술은 역시 외로운 내 기분을 달래 주었다.

저녁 무렵 나는 매우 피곤하고 다소 술에 취한 몸으로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명동 언덕에 자리잡은 대성당 앞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뾰족한 종각을 쳐다보았다. 푸른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그 첨탑은 내게 그 무슨 추억을 속삭여 주는 듯했다. 그러자 갑자기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무심결에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어떤 신부가 저녁 미사를 드리고 있었고 몇 십 명의 교우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나는 성당 맨 뒷좌석에 앉아 제대 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내 집에 와 앉아 있는 것 같은 아늑한 느낌이 밀려 왔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몇 가지 행복한 종교적 추억이 휙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다가 나는 내 취기와 지금의 나의 무신론이 부끄러워 나오고 말았다. 그때 내 등 뒤에서 신부님의 <도미누쓰 보비쓰 꿈(주께서 여러분과 함께)>이라는 라틴어 기도문이 들려 왔다. 성당 문 앞에서 마주친 거지에게 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돈을 집어 주고 나는 쫓기는 사람처럼 명동 거리로 내려갔다.

두 시간 후에 출발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몸을 좀 쉬려고 다방엘 들어갔다. 다방 안은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여러 그룹의 젊은 남녀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이런 행복한 연애 분위기는 드디어 나의 질투와 분노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나는 선 채로 다방 이 구석 저 구석을 차갑고 악의에 찬 눈으로 오랫동안 휘둘러 보았다. 손님들은 그때 나를 명백히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다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고 싶은 격렬한 충동을 느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행복하고, 평화스럽고, 또 조국을 휘쓸고 있는 이 전쟁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의 행복과 평화가 몹시 부럽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샘이 나기까지 합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오늘까지 내가 서울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고 그 모든 전투의 소음에서 멀리 떨어져 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일선에서 나는 우리 동포 모두가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후방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전선에서 돌아오는 우리를 따뜻하게 환영해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오후 이 서울 거리에서 무관심과 냉담 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일선에서 내 친구들로부터 자주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부 고관이나 상류 사회의 자제들은 후방에 남아있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아들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선으로 출동한다>고. 오늘 저녁 나는 그들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대포와 기관총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내 전우들의 총탄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거나 화염 방사기의 불길에 산 채로 타 버리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그들은 당신들처럼 높은 자리에 있는 아버지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후방에서 편히 삶을 즐기는 당신들, 귀공자들을 위해 그들은 그저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명령을 받고 모든 전선으로 출동했습니다. 그들은 이 처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누구를 위해 또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서울 도련님들인 당신들은 우리가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싸움터에서 죽으면 조국의 수호신이 된다고 예언한 여러분들은 말입니다!

평화가 돌아온 뒤에 여러분은 우리 전투원들 용기를 찬양하는 시를 짓고 전쟁소설을 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의 시와 소설은 여러분들의 이름을 영원히 이 세상에 남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시와 소설의 주인공이며 이 전쟁의 진정한 용사들인 동시에 애국자인 그 전투원들의 이름은 이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되는 날 여러분은 아마 국군묘지를 찾아가서 여러분의 애국심과 동정심을 상징하는 꽃다발을 바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무명 용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여러분의 고상한 행동을 찬양할 것이며 또 여러분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신문을 장식할 것입니다. 진정코 국민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지하에 묻혀 있는데 말입니다.

전선의 포연(砲煙) 속에서 그들이 겪는 괴로움, 고통, 치명적인 상처, 목이 타는 가운데 치르는 그들의 고독한 임종,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은 체험하지도 않았고 그들과 나누어 당하기를 원치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오 함께 여러분이 포탄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한 아예 내 전우들의 무덤에 꽃을 가지고 가지 마십시오. 조국을 지키다가 싸움터에서 쓰러진 내 전우들을 대신해서 나는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여러분이 우리의 불행을 나누어 받지 않는 이상 우리는 여러분으로부터 어떠한 아름다운 찬사도 화관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나는 여기서 일단 말을 마쳤다. 다방 마담과 레지들이 냉소하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빈 구석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한 아가씨를 불렀다.

“뭘 드시겠어요. 손님?”

차가운 목소리가 내 신경을 몹시 건드렸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부들부들 떨면서 고함을 질렀다.

“술 한 병!”

“여긴 술집이 아니고 다방이에요. 그리고 여기 분위기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해요. 술꾼은 우리 다방에서는 받지 않습니다.”

“아아니, 이게 손님을 대하는 태도요? 나도 술집과 다방을 혼동 할만큼 정신 나간 사람은 아냐. 그래도 위스키 티는 있지 않소? 위스키 티 말이오, 응?”

“위티는 술 한 병이 아닙니다요. 손님.”

위티 한 잔 가지고 와요. 잔말 말고!”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일어서며 고함을 쳤다. 그러나 그녀도 내 앞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맞섰다.

“말씀이라도 좀 부드럽게 하세요. 손님은 지금 군인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제기랄,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아? 어젯밤 꿈자리가 더럽더니, 별게 다 야단야.”

“뭐라고요? 뭐, 별거라고요? 말 조심하세요.”

“아아니 요것이, 술맛 없게 깐간이 굴어….”

“손님만 군인이세요? 제 오빠도 군인이에요. 지금 동부 전선에 나가 사우고 있어요.”

“네 오빠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때 아닌 족보를 들치고 야단이야! 나는 이 다방 손님으로 위티 한 잔을 청했는데 무슨 잔말이 이렇게 길어.”

“손님이 우리의 영업을 방해하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요?”

“영업에 방해가 되었다면 잘못했습니다. 내가 사과하죠.”

레지와 이런 시시한 언쟁을 벌이고 있는 게 창피해 사과를 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 아가씨는 커다란 위티 한 잔을 가져 왔다. 그러나 나는 계속 다섯 잔을 더 주문했다. 손님들은 차차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연설에 기분을 상한 모양이었다. 다방 안은 조용해졌다. 다만 애조를 띤 음악만이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사실 나는 술에 취해 있었다. 그러면서 담배만 연거푸 태웠다. 기차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어느 한 아가씨가 계산서를 가져 왔다. 그것을 탁자 위에 놓으며 그녀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손님, 저는 같은 교우라는 입장에서 손님을 동정해요. 그렇지만 전쟁이 손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말씀 드리고 싶어요. 우리 동포 모두가 그럭저럭 조국을 지키는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어요. 물론 손님이 가혹한 몫을 차지하셨다는 건 우리도 잘 알아요. 하지만 방금 여기 있던 손님 중에도 여러 분이 역시 전투원이었다는 걸 손님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손님은 분명 훌륭한 군인이세요. 그렇지만 손님의 행동은 교우답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놀랐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하고 다시 한 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천주교 신자인 교우임을 알았을까…. 나는 의아해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미안합니다. 아가씨, 소란을 피워서…. 그런데 내가 교우라는 걸 어떻게 아셨죠?”

“손님이 위티를 드시기 전에 십자성호를 그으셨어요. 십자성호는 천주교 신자만이 긋는다는 걸 아시잖아요?”

“내가 십자성호를 그었다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천주를 거부하며 교회를 완전히 떠나 있었고 신앙생활 일체를 포기하고 살고 있었다. 그러한 내가 십자성호를 그었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걱정 마세요. 기분 좋은 음료를 앞에 놓고 십자성호를 긋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니까요. 손님이 잘못하신 건 과음하셨다는 것 뿐이에요. 손님이 연설을 시작할 때 전 겁이 났어요. 다른 해병대원들이 흔히 그러듯이 손님도 우리에게 말썽을 부리실 줄 알았거든요. 그리고 손님이 자신을 이 전시하의 한국에 하나 밖에 없는 애국자로 자처하시는 그 교만 때문에 손님을 처음엔 멸시도 했어요. 그렇지만 손님이 십자성호를 긋는 걸 보고는 이내 후회했지요.”

나는 거북해서 거기 계속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폐 몇 장을 탁자 위에 놓고 나가려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그 여자가 내 등 뒤에서 소리쳤다.

“손님, 철모를 놓고 가시네요. 여기 있습니다.”

나는 급하고 창피스러웠던 탓으로 철모도 잊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기씨의 친절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 잠깐만! 여쭈어 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 시간 좀 내 주시겠어요?”

“부산 가는 군인 열차가 곧 도착할 텐데요. 나는 그 그 기차로 부산엘 내려가야 합니다.”

“아직 시간이 충분해요. 잠깐만 앉으세요.”

나는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녀가 말을 꺼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교우 해병대원 한 분을 찾고 있어요. 그래서 이 다방에서 해병대원을 만날 때마다 태오라는 그 해병대원을 아느냐고 물었어요. 태오씨도 우리와 같은 교우랍니다. 그분은 굉장히 열심한 교우래요. 혹시 손님은 그분을 알고 계시나요?”

나는 깜짝 놀랐다. 왜 그녀가 나를 찾고 있나 호기심이 생겼으나 나는 시치미를 떼고 태연히 대답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나하고 아주 친한 친구죠. 그런데 아가씨는 왜 그 사람을 찾습니까?”

“정말 손님은 그분을 아세요? 아이 고마워라! 두 달 전부터 저는 그 태오씨라는 해병대원을 찾았어요. 태오씨를 찾는 건 제가 아니라 제 대녀예요. 이름은 현이고요. 태오씨의 현주소를 가르쳐 주실 수 있겠어요?”

“물론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가씨의 대녀는 지금 어디 있지요?”

“제 집에 있어요. 한 달 후면 미국으로 떠납니다.”

“미국으로요? 왜 미국으로 떠납니까?”

“미국 군인과 결혼하게 되었어요.”

“미국군인과 결혼한다고요?”

“네, 손님. 빨리 태오씨의 주소를 알려 주세요.”

“오늘 저녁이라도 현이라는 그 아가씨를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직접 태오 하사관의 소식을 전해 주지요.”

“물론이죠! 그렇지만 손님의 부산행 기차는 어떡하시고요?”

“아가씨, 내가 바로 태옵니다.”

“네? 어쩌면! 손님이 바로 태오씨세요?”

“그렇소!”

“아아, 그렇지 않아도 조금 집히는 데가 있었습니다만, 손님을 현이 늘 제게 말해 주던 그분의 모습 그대로거든요. 제 집으로 갑시다.”

 

 

 

3. 현과 묵주

 

그날 밤 나는 부산행을 포기하고 경(현의 대모)과 함께 현을 만나러 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경은 내가 함께 왔다는 것을 현에게 서둘러 알렸다. 현은 나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 놀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현, 나야, 나 태오야!”

“아아니, 태오씨, 정말 태오씨세요?”

“그래, 나 태오야. 그 동안 잘 있었어?”

“네, 잘 있었어요. 정말 반가워요. 태오씨를 만나서… 꿈인 것만 같아요.”

현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 오는 것을 느꼈다.

“나도 반가워, 여기서 우리가 서로 만나다니….”

“난 그 동안 태오씨를 얼마나 찾았다구요. 태오씨가 보고 싶었어요.”

“나도 현을 보고 싶었어. 그래서 한 번은 대구 시내를 무작정 헤매기도 했지…”

“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게 꼭 일년 만이군요. 그러데 태오씨는 일선에서 그 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나 봐요. 얼굴 표정이….”

“고생이야 많았지만 살아 남은 게 기적이야. 현도 그 동안 고생이 많았지? 현도 이전보다 많이 성숙해졌어….”

“제 고생이야 일선에서 싸우시는 태오씨에 비할 수 있겠어요? 하여튼 반가워요. 기뻐 눈물이 막 나요.”

경은 우리더러 앉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그녀도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를 현에게 죽 설명했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나갔다. 현은 눈물을 닦으며 “태오씨, 정말 반가워요. 눈물이 자꾸 나요” 하며 울먹거렸다. 나는 잠자코 현을 울도록 놓아 두었다. 잠시 후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현은 입을 열었다.

“태오씨, 오늘처럼 기쁜 날이 제겐 없었어요. 천주님께 감사해요. 그런데 태오씨는 숙씨의 소식을 듣고 계세요.”

“언젠가 우연히 숙의 고향 친구를 만나 숙이 지금 대구에 있을 거라는 정도의 소식을 들었지.”

“대구에요? 제가 있던 대구에요?”

“응, 오빠 가족이 대구에 살고 있대.”

“제가 숙씨를 찾아볼 걸 그랬지요? 사실은 숙씨를 찾아볼까 했었어요. 그런데 숙씨를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오해를 받을까 봐 사실은 두렵기도 했어요.”

“고마워. 그런데 현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지? …. 어떻게 지금 서울에 와 있게 됐어?”

 

“그 동안 기막힌 사연이 제게 있었어요. ….. 그러니까 우리가 이별한 지 이틀 후에 저는 제주시를 떠났어요. 대구에서 편지 드린 것처럼 저는 제 새 생활이 정말 즐거웠어요. 일주일에 세 번씩 동생을 만났어요. 그렇지만 불운은 계속 제 뒤를 쫓아다녔지요. 지난 해 6월 언젠가 대구 시내 어떤 식당에서 동생과 저녁을 먹고 있는데 제가 제주의 그 술집에서 알았던 부잣집 아들인 불량 학생이 옆의 식탁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는 나를 발견하자 자꾸 음흉한 눈으로 나를 쏘아 보았어요. 저는 제 과거 때문에 눈길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를 몰랐어요. 저는 동생이 제가 그 남자 앞에서 거북해 하는 것을 눈치 챌까 봐 겁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동생을 제 애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마침내 그 불량 학생이 제게 추잡스런 말을 걸어 와서 동생이 점잖게 굴라고 말하게 되었어요. 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주먹다짐이 벌어졌어요. 식당 사람들이 말렸지요. 그날 밤 동생은 자기가 군대에 간 이후부터 제가 겪은 일을 전부 말하라고 요구했지요.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털어 놓았어요. 동생은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었고 저도 울었어요. 저는 동생이 저를 불쌍히 생각하고 용서해 준 걸로 알았어요. 그렇지만 동생은 며칠 후에 자원해서 일선으로 떠나 버렸어요. 전선에서 동생은 왜 말 한 마디 만기지 않은 채 그렇게 갑작스레 떠났는지를 긴 편지로 설명해 보냈어요. 편지 내용은 대충 이랬어요.

 

<가엾은 우리 누나, 나는 누나의 비극적인 과거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누나가 용기 있게 살아온 것을 감탄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나는 후방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누나 곁을 떠나고 싶었던 거예요. 누나 곁에 있으니까 괴로운 추억이 너무나 많이 되살아나더군요. 가엾은 우리 누나, 나는 누나를 불쌍히 생각해요. 나는 전보다 누나를 더 사랑하고 누나의 불행 앞에서 죄책감을 느껴요. 누나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우리 조국이며, 우리 민족이며, 이 전쟁이며, 이 사회며,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미워지게 돼요. 나는 일선으로 떠나서 일부러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어요. 나는 포탄이 으르렁거리는 속에서 모든 것을 잊고 싶어요. 이제부터는 운명에 나를 맡깁니다. 나는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 몫으로 받아들여요. 하긴 벌써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참가 했지만….>

 

동생이 떠나고 나서 저는 얼마나 한탄했는지 몰라요. 양심의 가책으로 며칠 밤을 홀딱 새우곤 했지요. 저는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제 자신을 미워했어요. 전에 태오씨가 주신 묵주를 가지고 태오씨가 믿는 천주님께 동생을 보호해 달라고 수없이 빌었어요. 일선으로 떠난 지 석 달 후에 동생은 전사했어요. 그 소식을 들은 날은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지요. 저의 눈물은 울어도 울어도 한이 없었어요. 드디어 저는 자살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이젠 없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저는 부모와 동생의 뒤를 따라 무덤으로 가기를 원했어요. 그것만이 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지요. 그래서 주인 아주머니께 그 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편지로 써서 남겨 두고 저는 집을 나섰습니다. 자살하러요. 가는 도중에 제 신분증을 찢어 버리고 가진 물건을 전부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어요. 그리고 처마 밑에서 비에 젖어 추위에 떨며 동냥을 청하는 거지에게 가진 돈을 몽땅 다 줘 버렸어요. 저는 태오씨께서 우정의 표로 주신 묵주를 빼고는 제 신분을 드러낼 만한 것을 전부 버렸지요. 태오씨가 남겨 주신 그 기념품과 태오씨를 향한 제 사랑만을 간직한 채 죽고 싶었어요.

미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계속 빗속을 걸었어요. 저는 시내에서 벗어나 어느 다리에 이르렀어요. 저는 강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군용 트럭과 민간 차량이 끊임없이 질주하는 다리를 가로질러 저쪽 편으로 건너가려 했어요. 멀리서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오 오른손에 태오씨의 묵주를 쥐고 태오씨 생각을 했어요. 아쉬운 심정으로 태오씨께 제 감사를 드렸어요. 그때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렸지요.

제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저는 어느 병원에 와 있었고 제 침대 곁에는 한 젊은 미국군인이 있더군요. 그분은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 영어로 몇 마디 말을 했지만 저는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조금 있다가 미군 장교 한 분이 동그랗고 하얗고 얇은 빵 같은 것을 한 조각 가지고 왔어요.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왜냐하면 저는 한 번도 천주교 신부를 본 적도 없었고 미사에 참례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매일 아침 그 미군 장교는 그 흰 빵을 갖다 주었어요. 며칠이 지나자 저는 그 작은 빵이 약이 아니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그것을 갖다 주는 분은 의사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어느 날 아침 그것을 안 먹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날 오후 한국 수녀 한 분이 작은 빵을 갖다 주던 미군 장교와 함께 왔어요. 수녀님이 저보고 천주교 신자냐고 묻기에 아니라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그 수녀님은 미군 장교와 한참 동안 영어로 말을 하시더군요. 그분들이 침통하고 심각한 표정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저는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고 짐작했지요. 그러다가 그 미군 장교는 병실에서 나가고 그 수녀님만 제 곁에 남았어요. 저는 수녀님께 제가 그 미군 장교에게 무슨 실수를 했느냐고 물었지요. 수녀님은 대답을 하는 대신 도대체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더군요. 저는 하나도 숨김없이 자살 기도에 이르기까지 제 지난 과거를 낱낱이 말씀 드렸지요. 수녀님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제 말을 들었어요. 내 얘기가 끝나자 그 수녀님은 그 미군 장교가 천주교 군종 신부님이고 내가 먹은 그 흰 작은 빵은 축성된 성체, 즉 예수님의 몸이라고 설명해 주셨어요. 수녀님은 또 제가 종부성사를 받았다는 것도 알려 주었어요. 왜냐하면 사고가 일어났을 때 저는 묵주를 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로 생각했었고 게다가 중상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저는 몹시 놀라서 천주님이 혹 제게 분노하시지 않을까 두려워하기까지 했어요. 그러나 수녀님은 지극한 동정으로 저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어요.

매일 오후 수녀님은 저를 찾아 주셨어요. 그분은 내게 마치 어머니나 언니 같은 분이 되었어요. 하루는 한 젊은 미군이 선물을 잔뜩 사 들고 병원으로 저를 찾아왔어요. 사고 다음 날 제 침대 곁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었어요. 제가 자살하려던 날 현기증이 나서 땅바닥에 쓰러졌을 때 미군 지이프 한 대가 저를 받았어요. 그 차가 바로 그 사람의 차였대요. 그는 그 즉시 저를 대구 미군병원으로 실어 날랐어요. 그의 이름은 존 에프 맥넬리에요. 그 사람은 제게 자주 편지를 했었고 그것을 수녀님이 번역해 주지요. 하루는 그가 저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의 일그러진 과거 때문에 저는 어느 누구의 사랑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그 동안 저는 수녀님에게 교리문답을 배웠어요. 제 건강은 점점 회복되어 지난 성탄절에 영세성사까지 받았어요. 제 본명은 마리안나 에요. 그 동안 수녀님의 격려와 조언으로 존의 사랑도 받아들였어요. 존도 우리와 같은 천주교신자에요. 존의 삼촌은 현재 신부시래요. 지난 성탄절 저의 영세식을 겸해서 저희는 약혼을 했어요. 수녀님은 자기 동생을 제 대모로 택해 주셨고 그래서 저는 지금 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거예요. 대모님은 전쟁 전에는 대학교에 다니셨지만 지금은 이모님이 경영하는 다방에서 일하고 계시죠. 그리고 매일 제게 영어도 가르쳐 주시고요. 존은 곧 병역이 끝나게 돼요. 그래서 저는 한 달 후에 결혼하러 미국으로 간답니다. 저는 이미 결혼과 미국 입국에 필요한 서류들을 다 갖추었어요. 지금까지의 제 지난 얘기는 대충 이래요.   그리고 제 생명을 구해 준 묵주를 주신 태오씨를 다시 만나게 돼서 더할 나위 없이 기뻐요.”

 

현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극적인 이야기를 마쳤다. 말을 끝내자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눈에 서린 물기를 닦아내었다. 그녀의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그녀를 다시 한번 깊이 동정하게 만들었다.

“현, 훌륭해! 현은 참으로 훌륭한 여자야. 나는 현의 앞날의 행복을 기쁜 마음으로 빌어 주겠어.”

“감사해요, 태오씨. 모든 게 다 태오씨의 은혜라고 전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살아온 이 조국땅을 떠나기 전에 태오씨를 한 번 더 만나게 해 주신 천주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려요. 정말이지 태오씨를 보고 싶었어요.”

“현은 이제 멀리 떠나 가는구먼… 미국이라는 땅에는 또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겠지.”

“어디서 살든 삶이란 그 도전과의 싸움 아니겠어요?”

“물론 그렇지. 노력해. 행복이란 노력의 결실이며 또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까.”

“노력하겠어요. 언어가 통하지 않는 미국에 가면 처음엔 생활이 무척 외롭고 힘들 거에요. 태오씨! 저 태오씨를 생각하며 살아도 되죠? 태오씨가 드리는 기구 중의 한 순간 속에 혹은 태오씨 마음의 자그마한 한 구석에 현이라는 이 불쌍한 여인을 있게 해 주세요. 저는 태오씨를 생각할 때마다 삶에 대한 힘을 얻어요. 그리고 마음이 든든해지고요….”

“그러지, 현을 기억하지. 아니 나도 현을 잊을 수 없을 거야.”

“제가 21년간 살아온 이 조국땅을 떠나는 게 무척 섭섭하나 빨리 여기를 떠나고 싶어요. 제 부모님과 동생마저 앗아간 이 땅, 저에게 비극만 안겨 준 조국땅, 여기서 산다는 것은 저에게 큰 고통이 될 거예요. 그러나 제 욕심은 한이 없군요. 태오씨가 계시는 이 땅을 떠난다는 것이 역시 고통스러우니까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현의 말처럼 서로의 가슴 속에서 서로를 위해 가며 살 수 있을 거야.”

“물론 그렇죠.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는 서로 기구하며 살아 가요. 태오씨, 빨리 숙씨를 찾도록 하세요. 참, 미안하네요. 저 때문에 귀한 시간을 낭비하게 해서… 대모님의 아까 말씀으로는 태오씨가 부산에 내려가시는 중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숙씨를 찾으러 가시는 길은 아니었나요?”

“응, 그러려던 참이었어. 하지만 난 현을 만나게 된 것이 기뻐. 현이 미국으로 떠나 버리면 우리는 영영 다시 만날 기회가 없지 않겠어? 그렇지만 숙은 남한으로 피난해 온 이상 또 내가 전선에서 죽지 않는 이상 언제든지 만날 가능성은 있지 않겠어? 그러니 아무 상관이 없어.”

“태오씨, 죽지 마세요. 몸 조심하세요. 그리고 숙씨를 만나 행복하게 사세요. 저 먼 훗날 제가 늙어서, 숙씨하고 행복하고 살고 계시는 태오씨를 한 번 보고 싶어요.”

그때 그녀의 대모가 저녁 준비를 마치고 상을 차려 왔다. 식사를 하며 나는 그 동안 내가 참가한 전투와 수 없는 죽음의 위협들을 들려 주었다. 그녀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얘기를 들었다. 우리는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튿날 아침, 현고 그녀의 대모는 날더러 미사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영성체 바로 직전에 현이 내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태오씨는 제가 태오씨하고 함께 미사참례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짐작하시겠지요? 오늘 아침 저는 태오씨를 위해 영성체 하겠어요. 태오씨도 저를 위해 영성체 해 주시겠어요?”

나는 천주교를 거부하고 교회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의 이 애틋한 희망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무신론적 영혼상태를 과시함으로써 현을 실망시키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현은 나를 여전히 열심한 교우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성체 후에 나는 마음 속으로 독성죄를 범했다는 약간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의젓하게 앉아 묵상하고 있는 척했다. 열심히 기도 드리고 있는 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자신을 다소 부끄럽게 여기긴 했지만….

다시 현의 대모집으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나는 그녀들과의 대화에 거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어젯밤 내 전쟁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나를 위대한 신앙인으로 추켜 올렸던 것이다. 종교문제가 주 화제가 되고 있는 이 좌석에서 나는 점점 몸 둘 곳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이 거북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의 불의, 세상의 부조리, 전쟁의 참상, 인생의 무상 따위에 대해서 열을 올렸다. 그러나 현은 또 내 의도와는 아랑곳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태오씨는 정말 우러러 보여요.  그 수많은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경험하시고도 천주님께 대한 신앙을 여전히 보존하셨으니 말이에요. 저는 태오씨를 알게 된 것이 자랑스러워요. 천주님은 그 영원한 사랑으로 태오씨를 제 인생길에 같이 있게 해주셔서, 제가 교우가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신 거예요.”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등과 이마에서는 땀까지 흐르고 있었다. 대화 중에 자주 헛기침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점점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간이 위선자가 되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들의 순진한 신앙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현에게 실망을 안겨 주고 싶지도 않았다. 현이 지금 나에 대해 품고 있는 그 따뜻한 인상을 그대로 간직한 채 태평양을 건너가 주기를 나는 원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헤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현과 더 오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야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들이 붙드는 것을 뿌리치고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현은 슬프게 가라 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태오씨, 우리는 이렇게 영원한 작별을 하는 건가요? 태오씨는 언제나 저를 급급하게 떠나시는군요.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일선에서 몸 조심 하세요. 숙씨를 위해서 말입니다. 전 태오씨가 주신 이 묵주를 가지고 태오씨를 위해 기도 드리겠어요.”

나는 그녀의 앞으로의 결혼생활에 많은 행복을 기원했다. 그리고 현의 손을 힘 주어 한 번 잡아 주고는 곧장 거리로 빠져 나왔다. 그러자 현의 두 눈에 서린 눈물이 내 가슴 속에서 오래오래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숙을 찾아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단념했다. 나의 이런 심리상태에서 설사 숙을 만난다 하더라도 반가울 것 같지가 않았다. 김일성 고지를 공격하기 전날 밤 나에게 나타난 기도 드리는 영상을 통해 보는 숙과, 무신론을 선언한 내가 서로 만난다는 것은 서로에게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군용 트럭에 몸을 싣고 일선 고지로 다시 되돌아 왔다. 몇 주일 후에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현의 큼직한 엽서 한 통을 받았다.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안녕

1, 바다 건너

산 너머

아주 먼 곳에

나는 동무가 하나 있어요.

2, 구름 너머로

바람을 타고

내 생각은

먼 동무에게로 달려갑니다.

3, 어느 날

늙어 허리 굽으면

나는 내 마음의 동무

다시 만나러 가요.

4, 그 때는 우리의 백발

쓰고 단 추억을 되돌아보며

젊은 웃음을 녹여서

언제나 동무, 언제나 동무,

말하겠지요.

 

 

 

4. 우정과 회개

 

현과 헤어져 전선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여지껏 체험하지 못한 이상한 고독감을 느꼈다. 그것은 현에 대한 그리움 탓만은 아니었다. 또한 숙과 가까이하지 못하는 외로움 때문도 아니었다. 내가 느낀 그 때의 고독은 나의 무신론 때문에 이제는 숙과 마음 놓고 만날 수 없다는 내 심리적 상태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나의 무신론과 천주에 대한 반항심을 정리하지 않는 한 나는 숙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데서 오는 고독감이었다. 현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그것을 명확히 체험했던 것이다. 종교적인 신념의 차이로 또는 정치적인 이념의 갈등으로 진실히 사랑하는 두 남녀가 화합할 수 없는 사랑의 비극을 나는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함흥 전선의 그 인민군 장교 김상위의 경우를 상기해 보았다. 자신의 공산주의 사상 때문에 애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의 태도를 나는 옹졸한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심정과 고뇌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이 얼마나 인간적 사랑의 한계를 모르는 순진한 판단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랑 그 자체는 무한하다. 그리고 어떠한 장애도 초월 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을 사랑을 하는 인간은 유한한 자신의 숙명을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인간적 사랑의 한계를 고려하며 나의 무신론과 신에 대한 반항을 다시 한 번 냉정히 생각해 보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무신론과 신에 대한 반항이 아무리 자신에게는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숙을 떠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도한 숙과의 결혼 문제를 생각해 볼 때 그녀의 신앙 문제를 무시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월산령 전선은 비교적 조용했다. 우 수병이 전사한 이래 천주에 반항하는 동안 소홀히 했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숙과 원산에서 헤어진 이후 부지런히 써 온 일기를 재정리함으로써 나는 사랑, 종교, 선과 악, 천주의 존재, 그의 섭리, 삶의 의의 등등에 대해 숙과 다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천주에 대한 나의 저항도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천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심정이었다.

1952년 3월 하순, 우리 해병대는 미 해병 사단과 함께 동부 전선을 떠나 당시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던 판문점을 중심으로 한 서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한국 육군 제1사단 제15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수도 서울 방어의 새로운 사명을 띠고 사천강(泗川江) 일대에 배치되었다. 이로써 서부 전선에 개입한 우리 해병대는 전사(戰史)에 빛나는 수도 서울 방어의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여지껏 동부 산악 지대에서만 싸워온 우리는 전답(田畓)과 야산(野山)으로 전개 되는 이 사천강 일대에서 수륙(水陸) 양면의 새로운 전투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후퇴한 적은 항상 막강한 군사력을 개성 방면에 집결시켜 서울의 재침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우리 해병대가 수도 서울 방어의 관문인 판문점을 중심으로 한 서부 전선을 담당하게 된 것은 상승(常勝)의 명예를 지녀온 우리 해병대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신임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서부 전선에서 유전 회담이 체결될 때까지 막중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서부 전선으로 이동한 해병 연대는 여단 병력으로 보강되었고 해병 전투단으로 개명했다.

어느 날 나는 천주교 군종 신부 보조원을 만났다. 그는 신부도, 신학생도 아니었고 단지 베네딕또 수도원 수련 수사 지망자였다. 이분은 학식과 교양이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이기도 했다. 그는 자진해서 해병대 군종 신부 보조원으로 일할 것을 자원해 왔고 무보수로 종군했다. 교회나 군 당국에서도 그분에게 월급을 지불한 일은 없으며 다만 식생활 문제만 해결해 주었다.

그는 나를 자주 찾아왔는데 나는 예의상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처음에 나는 그분의 방문을 꺼려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나를 회개시키기 위해 답답한 교리문제를 끄집어낼 것으로 추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나와 신앙의 문제로 토론을 해 본 일이 없었다. 어떤 대는 내가 오히려 교회를 비난하고 교리를 그릇되게 비판해도 그는 조용히 미소만 보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는 생활을 그는 계속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분의 방문을 기다릴 정도로 나는 그에게 애착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정과 인간 애정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마음의 위안과 진정한 이해가 몹시 필요할 정도로 고독했었다. 우리는 이내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있었고 전투하는 데까지 여러 번 나를 따라오기도 했다. 내가 공격이나 기습을 떠날 때면 그는 “천주님께서 그대를 보호하시고 그대와 함상 함께 하시기를”하고 축복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는 조그만 십자가 하나만 들고 우리를 따라왔다. 그는 철모도 쓰지 않고 방탄 조끼도 입지 않은 채 우리를 뒤따라 총탄 속을 뛰어다녔다. 전투를 하는 동안 그는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부상병을 돌보고 운반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신앙 안에서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세를 베풀기도 했다. 그는 부상자들 뿐만 아니라 포로 된 적병들까지도 위로했다. 그는 자기의 음식을 먹지 않고 남들과 나누기까지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기 시작할 때나는 그를 좀 머리가 돈 사람으로 생각하고 놀려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을 비웃으며 그가 전선에서 총탄에 맞아 보기 좋게 전사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가 총에 맞아 죽게 되면 천주의 존재와 섭리를 부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멋진 이유를 내가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의 탄막(彈幕) 속에 전우들은 무수히 쓰러져 가는데 그는 이상하리 만치 파편 하나 맞지 않고 무사했다. 고독함 빛이 감도는 그분의 신비스러운 얼굴에는 언제나 잔잔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분의 이러한 평온한 모습은 죽음 앞에 서성대고 있는 나에게 삶의 신비 같은 것을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천주의 섭리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인 신앙을 보고 마침내 나는 그분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그분을 만나면 만날수록 애착을 느꼈다. 그의 성실, 그의 친절, 그의 우정, 그의 자비심, 그의 성덕(聖德), 이 모든 것이 나를 끌었다. 그분은 아버지와 같은 인내로 내 말을 경청하고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내게 말을 들려 주곤 했다. 그리고 그의 엄격한 개인생활과 모든 사람에 대해 보여주는 이해를 초월한 헌신이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어느 날 나는 내가 그분에게 매혹되어 가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그분의 높은 신학적 지식 때문이기보다는 차라리 그분의 명백한 성덕(聖德)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의 제2의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다. 나는 나처럼 반항과 회의 속에 방황하는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학자보다 오히려 성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프랑소와 모리악 은 어디에선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애덕(愛德)을 떠난 정의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만일 어느 친구가 단순히 나를 그리스도에로 회두시키기 위해 신학과 철학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면 나는 결코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말을 나에게 들려 주기 전에 그분은 자기가 믿는 것을 우선 실천했다. 그분의 이러한 철두철미한 신앙생활은 나로 하여금 내가 아직 체험해 보지 못한 신앙의 경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자 차차 나는 천주에 대한 반항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것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멀리까지 떨어져 나와 있었다. 나는 계속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극히 평온한 어느 날 우리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형의 생각으로는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천주님을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전인류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구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 어떤 학술상의 원리원칙을 믿는다는 것은 아니지요. 물론 아니고 말고요. 그리스도교인은 거기서 진리와 구원을 발견하게 되는 어떤 살아 계신 어른을 믿는 거지요. 말하자면 당신과 같이 살자고 우리를 부르시는 어떤 분을 믿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이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교회가 인류의 평화와 구원을 위해 활동하지도 않고, 그리스도교인들이 세계 각처에서 어마어마하게 빈축을 사는 일들을 저지르고, 또 대부분의 인류가 사회 불의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순간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구원을 내세우는 형의 그러한 태도는 좀 맹신적이며 무사태평한 게 아니겠어요?”

“태오 하사관은 내 말을 잘못 이해하시는군요. 물론 빈축을 사는 짓을 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있지요. 하지만 그리스도교인이 그리스도교 자체는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몇 가지 하고, 악을 피하며 주일날 미사 참례나 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본받는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요컨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럼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분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특히 사랑해야 합니다. 가장 불우한 사람, 가장 타락한 사람들에게서 천주님의 모상을 발견하고 그들을 형제처럼 보살피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인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사명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천주님은 무한히 완전하시다고 하는데 그분에게 어떻게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까?”

“천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천주님을 사랑함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요. 천주님은 우리의 최고선(最高善)입니다. 천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행복이요, 우리의 구원 자체입니다.”

“하지만 인종(忍從)을 가르치는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랑합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고통을 달게 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비겁한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고통은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비입니다. 구원이 우리 주님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왔거든요. 그리스도는 악과 고통을 없애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를 부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고 그 위에서 죽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천주님의 아들인 그분이 당신의 몸과 피를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어요.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희생시키는 것 말고도 달리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를 택하셨어요. 그런데 이 선택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계시적입니다. 고통은 구속(救贖)의 신비임과 동시에 수단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신비를 깊이 파고 들게 하거든요.”

“그런데 바로 이 신비가 지금까지 나를 그리스도에 반항하도록 만들었으니 어쩐 일입니까?”

“그분에게 반항한 것은 태오 하사관이 처음은 아닙니다. 성 바오로는 태오 하사관보다 먼저 그런 일을 했어요. 그에게는 빛이 없었던 거예요. 다마스코로 가는 길에서 그의 문을 멀게 하고 그의 교만을 땅에 내동댕이친 그 이글거리는 빛이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내 이런 처지로 어디 가서 천주님에 대한 지식을 얻어 만납니까?”

“복음 성경에서요. 복음 성경을 믿음과 사랑으로 읽어 보세요. 단지 성경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또 그분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무엇을 계시해주셨는지 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읽으란 말입니다.”

“그래도 천주교 교리가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어요.”

“물론 교리상의 진리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인간 지능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니까요. 아무도 그것을 전부 알 수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의 이성에 모순이 되지는 않아요.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천상 성부 곁에서 보고 듣고 하신 것에 대해 당신 동료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당신 말씀의 신비를 모두 알아들으라고는 결코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단지 그것을 믿으라고만 요구하셨습니다. 신앙, 이 신앙만이 우리가 주일미사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의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수락하기 어려운 것은 신앙상의 교리 자체보다도 겸손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지능을 초월하는 것을 믿는 데 있거든요. 성 요한은 그 복음에서 이런 말을 우리에게 해 주십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은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했다>라고요. 우리는 자기 자신의 구원보다 교만을 더 낫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론적으로는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분의 사상이 조금도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말 속에는 나를 감동시키고 나로 하여금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슨 힘이 있었다.  나는 창피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존경과 우정이 하도 크고 깊어서 내 창피에 반발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분이 말해 주는 것을 모두 고분고분히 받아들였다. 나는 곧 신약성서를 다시 일기 시작했고 거기서 이내 그리스도를 다시 발견했다. 자애롭고 겸손하시고 죄인들의 벗이 되어 주신 그리스도, 가난한 자들을 가까이 하시고, 불행한 자와, 병자와, 또 어떤 모양으로든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의 편에서 그들을 위로하시는,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눠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새롭게 재발견한 것이었다. 그 그리스도는 죄인의 처지를 마다 않으시고 당신의 피조물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셨다.

성서를 읽음으로써 나는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푸시는 인간 예수에게 깊은 애정과 존경을 새삼 느꼈다. 나는 이전에 천주님께 반항하고 예수님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천당에서 만복을 누리시면서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항할 수가 없었다. 천주님께서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예수님이 받으신 그 수많은 고난, 그것은 바로 인류를 위한 천주님의 사랑이었다. 천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저주하며 복수하려고까지 마음먹었으니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이냐!

그때 나는 한 인간으로서 또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내 온전한 삶을 인도하고 내 신앙의 빛이 되고 잇는 내 나름대로의 예수관을 정립시켰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전 생애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하는 신앙과 사랑의 가능성을 증명해 주셨다는 진리였다. 그분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시고,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시고, 또 실천하셨다. 그리하여 당신이 믿는 것이 진실되며 당신이 믿으신 것을 우리도 믿을 수 있다는,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신 것을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 것이다. 말하자면 천주님을 둘러싼 이 엄청난 초자연적 진리가 우리 인간의 지능으로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를 통해 보여 주신 것이다. 마친 컬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옴으로써 그 당시 아무도 믿지 않던 지구는 둥글다 라는 진리를 증명하였고 도 누구든지 대서양을 건너 미대륙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음 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생에로의 항로를 개척하신 분이셨다. 그리고 이 영생의 항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써 신앙과, 사랑의 절대성과, 그리고 이 절대성이 우리 인간의 지능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또 온 인류가 당신 안에 구원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러나 그분은 마치 열차의 기관차처럼 우리를 교회라는 열차에 무조건 태워 일률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분은 당신이 증명한 신앙의 가능성과 사랑의 가능성에 우리가 자유로이 참여하기를 원하고 계시며, 이 참여는 다름 아닌 인간 고통에 대한 이해와 또 이 이해를 실천하는 사랑과 이 사랑의 생명인 신앙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증명해 주신 이 신앙과 사랑의 가능성 안에서 인간 고통의 신비와 교리상의 내 일체의 회의를 푸는 열쇠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는 왜 고통을 당하는가? 그리고 특히 죄 없는 사람들이 왜 악의 희생이 되는가?> 하는 문제를 더 이상 자신에게 제기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아버지인 천주님을 경배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이 창설하신 교회에 나 자신을 일치시키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찾아내었고, 전쟁이 점점 악화되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마음 안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무렵에 나는 이 다음 전쟁에서 살아 남게 된다면 우리 민족의 행복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끔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군목 보조원처럼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내 성소(聖召)문제를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숙에 대한 내 사랑은 더욱 더 뜨거워만 갔다. 나는 어떻게 하면 천주님께 대한 사랑과 숙에 대한 사랑이 알맞게 조화된 삶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고통스럽게 자문하곤 했다. 그러나 천주님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제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나의 아름답고 총명한 애인 숙을 단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수도원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미친 짓이고 이기적인 행동이며 이 전장에서의 괴롭고 비참한 생활에서 솟아난 변덕스러운 심리적 변화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신을 타이르기도 했다. 나는 차라리 내 아내와 손을 맞잡고 서로의 애정 속에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신자로서의 성화(聖化)의 길을 걷고 싶었다.

 

 

 

 

제12장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1952년 판문점을 앞에 두고 있던 우리 해병대의 사천강 전선은 지리상 두 가지 불리한 요건을 갖고 있었다. 동부 전선의 산악지대에서 막 돌아온 우리에게는 전답과 야산으로만 이루어진 지대는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평야전의 경험이 전혀 없는 우리 해병대로서는 이 넓은 광야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임진강을 배수진으로 주 저항선을 구축하고 사천강 유역에 산재하고 있는 31고지, 33고지, 36고지, 37고지, 42고지 등등의 야산을 중심으로 전초진지를 구축했다. 둘째로 지리상 불리한 점은 판문점의 위치였다. 휴전 회담 규정상 판문점으로 통하는 남과 북의 도로는 중립지대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여하한 일이 있어도 중립지대의 이 도로를 공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며 심지어는 전투기의 공중 통과 뿐만 아니라 포탄의 파편마저도 이 중립지대를 침범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규정을 악 이용한 중공군은(당시 서부 전선에는 막강한 중공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개성에서 판문점에 이르는 중립 도로 연변에 막강한 포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으며 주야로 우리에게 포격을 가해 왔다. 그러나 아군의 항공 부대는 휴전회담 규정상 중공군의 이 포진지를 공격할 수 없었다. 적의 포격에 살점이 찢겨 달아난 전우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고 또 운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중곤군의 야간 포격 시에는 포구에서 내뿜는 수백 개의 불길이 손에 잡힐 듯 빤히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갈며 그것을 참아내야만 했다.

그 해 6월 우리 중대는 36고지와 42고지 전초진지를 수비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선임 장교 김창수 중위가 지휘하는 36고지에 있었다. 우리는 고지 둘레에 깊이 2미터의 교통호를 파고 지하 4~5미터 깊이의 벙커를 구축했다. 이 벙커는 일종의 땅굴이며 중공군의 대대적인 인해전술에 대비해서 땅굴을 직선으로 파지 않고 <ㄹ>자 식으로 팠다. 그 외에도 고지 주변에는 삼중의 철조망이 가설되었고 또 수천 개의 지뢰가 매설돼 있었다.

주간에는 적의 포격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벙커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했다. 물론 대소변마저도 이 땅굴 안에서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중공군의 진지는 사천강 건너의 높은 산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거기서 우리의 행동을 샅샅이 감시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눈 아래 보이는 판문점에서는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었고 곧 조인 단계에 들어갈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이 떠돌고 있었다. 우리는 행동의 자유를 잃은 벙커 속의 전초 진지 생활이었지만 휴전회담이 곧 체결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는 날 초저녁, 판문점에서 개성으로 통하는 중립 도로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중공군의 막강한 야포 진지에서 모든 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아, 그때의 그 포격 광경이란! 수백 개의 포탄이 동시에 우리 36고지 전초진지에 떨어졌고 도 계속 쉴 새 없이 날아왔다. 적은 우리가 있는 36고지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약 30분 가량 계속된 포격은 이미 우리 전초 진지 주변에 가설되었던 철조망을 간 데 없이 날려 버렸고 물론 매설해 놓은 지뢰도 다 폭파시켜 버렸다. 그리고 교통호와 사격호는 거의 다 파괴되었고 벙커의 일부도 무너져 내렸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당해 보는 적의 막중한 포격이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아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공연한 적의 포격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서부 전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연이어 중공군은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요란하게 두들기며 소위 그들이 자랑하는 거대한 밀물 같은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다. 우리는 무너진 사격호와 교통호에 의지해 적의 공격에 맞섰다. 그러나 적은 우리의 총탄과 화염 방사기의 불길에 쓰러지는 자기 전우들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그야말로 밀물처럼 줄기차게 진격해 올라 왔다. 불과 백 여명의 우리는 수백 명이 넘는 적을 막아낼 길이 없었다. 그때 36고지 수비대장 김중위는 전투를 중지하고 전원 벙커로 피신하라는 청색신호탄 두발을 공중에 발사했다. 파란 불빛이 보름달에 비친 밤하늘을 더 파랗게 물들이며 포탄에 맞아 풀 포기 하나 남지 않은  대머리가 된 고지 위에 내려 앉았다. 이 두 발의 청색 신호탄은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을 때 벙커로 피신하라는 작전상의 신호인 동시에 <VT탄>사격을 요청하는 신호이기도 했다(이 VT탄은 지상 10미터 상공에서 폭발하는 포탄으로서, 아군 진지가 적의 근접 공격의 위협을 받을 때, 아군이 벙커에 피신해 있는 동안 근접해 있는 적병을 섬멸하기 위해 사용되는 특수 포탄이다). 이번에는 수백 개의 아군 VT탄이 우리 진지 위에 떨어졌다. 아군의 VT탄 사격을 피해 우리가 있는 벙커 안으로 피신해 들어오는 중공군을 우리는 모조리 사살했다. 당굴 입구에 움직이는 물체가 보이기만 하면 우리의 총구는 불을 뿜었다. 약 15분 후 아군의 VT탄 사격이 멎었다. 고지 전면에서는 화약 냄새가 뒤섞인 피비린내만 풍겨올 뿐 포성 하나 들려 오지 않았다. 나는 몇 명의 대원을 데리고 땅굴에서 조심스럽게 기어 나왔다. 벙커 입구에는 십 여 명의 중공군이 쓰러져 있었고, 땅굴 밖 고지 전면에는…. 아, 거기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중공군의 시체들이 널려져 있었다. VT탄 사격으로 몰사한 그들이었다 즉시 나는 김중위를 찾아갔다. 그는 요행히 살아 있었다. 우리는 적의 제2차 공격에 대비하여 교통호와 사격호를 다시 구축하고 무너진 벙커도 다시 수리하기 시작했다. 인해전술에 주로 의지하고 있던 중공군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제3차 공격까지는 시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밤 1시쯤 되자 또 판문점 적의 야포 진지에서는 수백 개의 불길이 솟구치고 연이어 지진 같은 폭음이 우리 35고지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적은 또 나팔 소리와 꽹과리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돌격해 올라 왔다. 이번에는 신호탄 사용 암호 규정에 따라 홍색 신호탄 두 발의 신호 아래 우리는 다시 땅굴로 피신했다. 이윽고 수백 개의 VT탄이 우리 고지 위에 떨어졌다. 아군의 VT탄 사격은 작전상 15분을 넘지 않는다. 아군의 VT탄 사격이 멈추자 살아 남은 우리는 일제히 땅굴 밖으로 뛰어 나왔다. 중공군의 시체, 그것은 그물에 잡혀 갑판에 쌓여 있는 고기 떼 같았다. 그대로 살아 남은 몇 명의 적이 여기저기서 도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 도주하는 중공군들에게 사격을 가하려는 대원들에게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손에 총을 들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엄청난 포격 밑에서 살아 남았다는 사실이 천명(天命)처럼 느껴졌고, 이 천명을 거스르는 것은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해도 무인(武人)의 의리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살아 남은 우리 부대 인원을 파악해 보니 불과 30여 명이었다. 그리고 중대 본부가 위치하고 잇는 42고지와의 유선 전화선이 끊어져 있었고 무선통신기는 파편에 맞아 사용이 불가능했다. 중대 본부나 대대 본부에 우리의 상황을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30여 명의 병력으로 적의 제3차 공경에 대처할 힘도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의 상황을 상부에 알리고 철수 지시가 아니면 지원 병력을 빨리 보충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해야만 했다. 김중위와 상의한 끝에 중대 본부가 있는 42고지에 연락병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는 연락병 차출을 나에게 일임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연락병 임무를 자원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 자신이 그 임무를 맡기로 하고 대원 2명을 차출했다. 우리 36고지에서 42고지까지의 거리는 약 2킬로미터 정도였다. 대원 2명을 인솔하고 고지를 막 내려서려 할 때 김진섭 수병이 땅굴에서 뛰어나오며 나를 찾았다. 그리고는 그 연락병의 임무를 나 대신 자기가 맡겠노라고 제의하였다. 김 수병은 나와 각별히 친한 벗이었다.

“선임 하사관님, 제가 연락병으로 다녀오겠습니다. 제게 그 임무를 맡겨 주십시오.”

“자네가 다녀오겠다고? … 자네는 안돼!”

나는 그의 요청을 한 마디로 거절했다.

“태오 하사관님, 제발 부탁입니다. 태오 하사관님과 우리 전우들을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주십시오.”

“진섭이, 자네는 살아 남아야 할 놈이야. 이 다음 목사가 되겠다는 자네에게 난 죽음의 위험을 부담시킬 수 없네. 이런 상황 아래 연락병으로 42고지를 다녀온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아닙니다. 태오 하사관님, 이제는 제 죽음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보다는 태오 하사관님이 살아 남으셔야 합니다.”

“그럼, 자네가 나 대신 죽어 주겠다는 말인가?”

“선임 하사관님, 이런 상황에서 연락병으로 간다고 곡 죽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설사 제가 이번에 죽는다 하더라도 태오 하사관님을 대신해 죽을 수 있다면 저는 그 죽음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이 사람아 나는 예수님도 천주님도 아닌데 나를 대신해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태오 하사관님과 제 둘 중에 누구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면 제가 대신 죽겠다는 거죠.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태오 하사관님을 위해 드리고 싶습니다. 자, 그러지 마시고 갖고 있는 수통의 위스키나 한 잔 주시고 저를 연락병 책임자로 임명해 주십시오. 태오 하사관님을 사랑하는 한 벗의 의리에서 나온 부탁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태오 하사관님은 중공군의 제3차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이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될 분입니다.”

나는 진섭이를 연락병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리고는 수통의 술을 한 잔씩 나눠 마셨다. 창백한 달빛이 무너진 벙커 틈으로 새어 들어와 진섭이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유난히 빛났다. “태오 하사관님!” 하고 나를 부르는 그의 입가에는 무언지 모를 슬픔의 빛이 감돌았지만 그 어떤 의지와 우정이 조화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진섭이!” 하며 내가 잡은 그의 두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어쩌면 지상에서 마지막 볼지도 모를 이 얼굴! 내 뺨을 그의 뺨에 갖다 대었을 때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의 차가운 뺨에는 땀이 축축히 배어 있었다.

진섭이는 두 명의 연락병을 데리고 42고지를 향해 출발했다. 암호 사용법에 따라 우리는 중대 본부로 연락병을 보낸다는 신호인 백색 신호탄 한 발을 발사했다. 중공군은 간간히 우리 고지 주변에 포격을 가해 왔다. 진섭이가 가는 길에도 여러 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나는 두 손을 합장하고 진섭이의 무사함을 위해 열심히 기도 드렸다. 약 한 시간 후 연락병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신호탄이 42고지에서 발사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연락병이 출발한다는 신호탄이 또 공중으로 솟아 올랐다. 우리는 손에 땀을 쥐고 기다렸다. 예정된 시간에 진섭이는 50여명의 지원병과 함께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연락병 중 한 명은 도중에서 이미 포탄 파편을 맞아 전사했다. 진섭이는 김중위에게 임무 보고를 마치자 땅에 쓰러졌다. 포탄 파편에 맞아 그의 배는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창자가 흘러 내려와 있었다.

“진섭아, 너 부상당했구나?”

나는 그의 몸을 일으켜 안으며 소리쳤다.

“이미 부상 당해 있었어요. 중공군의 제1차 공격 때 파편이 내 허벅다리에 맞았고 또 내 배를 살짝 갈라 놓았어요.”

그는 괴롭게 신음하면서 말했다.

“이 미련한 사람아, 그러면서도 연락병의 임무를 맡겠다고 나섰단 말인가!”

“태오 하사관님, 저는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한 벗을 위해 미련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파편에 맞아 피가 흐르는 허벅다리를 압박붕대로 싸매고 땅굴 안에 누워 있었죠. 그때 꿈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으나 저는 태오 하사관님이 죽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놀라 태오 하사관님을 찾아 나오니 연락 임무를 맡고 42고지로 간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때 나는 선임 하사관님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발견했어요. 나는 하느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태오 하사관님을 살아 남게 해 달라고… 그러자 선임 하사관님을 대신해 내가 그 연락 임무를 맡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어요. 그래서 또 기도 드렸지요. 태오 하사관님을 대신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육신의 힘과 의지와 용기를 달라고요.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상처의 통증도 멎고 평상시보다 더 강한 힘을 전신에 느꼈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부상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여튼 저는 임무를 완수해 더없이 기쁩니다.”

진섭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36고지를 사수하라는 대대장의 명령이 시달되었다. 우리는 지원 부대와 함께 진지 보수공사에 온 힘을 쏟았다. 그날 새벽은 중공군으로부터 아무런 공격이 없었다. 나는 위생 하사관을 불러 진섭이를 치료시킨 다음 그를 간호하고 있었다. 그는 자고 있는지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무너진 벙커 한 모퉁이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으나 벙커 안은 여전히 침침했다. 그러나 촛불에 비친 진섭이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화스럽고 거룩하게 보였다. 얼마 후 그는 눈을 뜨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태오 하사관님, 제 마음이 이처럼 평화스러워 보기는 처음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편안히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해요.”

나는 진섭이가 얼마 후 숨을 거두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았고 터진 창자에서는 냄새가 지독하게 풍겨 나왔다. 이런 상태에서 그가 연락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진섭이, 내 죽음을 자네가 대신 받고 있어…”

나는 두 눈이 뜨거워 옴을 느꼈다.

“태오 하사관님, 저는 태오 하사관님을 대신해 죽을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보람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임 하사관님이 스스로 맡은 임무를 우정의 뜻으로 대신 완수했을 뿐입니다.”

“진섭이 자네가 말하는 <대신>이라는 자네의 그 희생을 평생 잊지 않겠네. 그리고 대신이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사랑의 본질을 나는 방금 이해했네. 인류의 최를 대신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듯이 말이야…. 나를 대신한 자네의 희생, 이런 희생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희생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네는 나 대신 죽어가며, 앞으로 나는 자네 대신 살아가겠네.”

“그래요, 태오 하사관님.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생활은 <대신>이라는 이 사랑의 행위가 중심이 되어야 할 거예요. 나는 <대신>이라는 이 사랑의 지리를 선임 하사관님한테서 배웠어요. 좀 역설적인 말이 되겠습니다만, 이 참혹한 전쟁 속에서 온갖 악의 희생이 되고 있는 불쌍한 우리 민족을 대신해 한때 하느님께 반항한 성임 하사관님한테서 저는 그 <대신>이라는 사랑의 원리를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 <대신>의 진리를 나 나름대로 실천하려고 목사가 되려 했었지요.”

“진섭이, 자네는 살아 남아야 할 사람이야. 자네는 분명히 훌륭한 목사가 될 거야. 우리 민족의 빛이 되어줄 수 있을 걸세. 자네는 치 처참한 전쟁이 초래한 온갖 혼란 속에서 또 사랑의 질서가 파괴된 이 사회에서, <대신>이라는 사랑의 씨를 뿌려야 할 사람이야.”

“그건 제 대신 태오 하사관님이 해 주세요. 이대로 나는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입니다. 제가 죽는다 하더라도 저는 태오 하사관님의 신앙 안에 살아 있을 거예요. 그리고 태오 하사관님과 함께 <대신>이라는 사랑의 사업을 계속할 것입니다.”

“진섭이, 그렇게 하세. 그리고 자네는 항상 내 마음 안에 나와 함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선임 하사관님, 저는 선임 하사관님과 같은 신앙의 동지를 이 지상에서 갖고 있었다는 것을 더 없는 기쁨과 보람으로 여기고 주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진섭이는 말을 멈추고 또 눈을 감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슬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나는 진지를 보수하고 있는 대원들을 보살피러 나갔다. 이미 동쪽 하늘에는 새벽 햇살이 번져 오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후 진섭이가 있는 벙커로 되돌아왔다. 그는 나를 보자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진섭이, 나야, 나 태올세. 지금 뭐라고 말했나?”

“아버지에게 얼마나 불효자식이었나를… 만일 태오 하사관님께서 제 아버지를 만나신다면 이 불효자식 진섭이는 그대로 주님 앞에 회개하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청하며 죽어갔다고 꼭 전해 주세요.”

“그래, 곡 전해 주지. 그런데 자네 부친은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갔다면서?”

“네, 부산에서 그 소식을 들었어요. 혹시 그래도 어느 기회에 제 부친을 만나실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이제서야 저는 아버지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믿기 어려운 신앙의 진리를 설교하고, 또 자기 자신이 실천하지도 못하는 사랑과 정의와 용서를 신자들에게 권고해야만 하는 목사들의 고민을 이제는 이해할 것 같아요. 인간이면서 하느님을 대신해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과 용서를 설교하는 목사들의 행위가 제게는 위선으로만 보였지요. 하느님을 대신한다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불가능을 실현시켜야 하는 목사들의 고민이 오죽하겠어요? 저는 그러한 고민을 <썩는 한 알의 밀알>에 비유해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한 알의 밀알인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의 밀알로 남아 있으나, 만일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니…> 제가 악담하고 저주한 아버지는 저를 위한 <썩는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진섭이는 또 눈을 감았다. 한참 후 그는 목이 마르다 고 했다. 물 몇 모금을 마신 다음 그는 몇 마디 중얼거렸다.

“태오 하사관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목이 마르다 고 했을 때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드렸다고 하지 않아요? 일생을 사랑과 선을 위해 살아오신 그분에게 인간은 마실 수 없는 신 포도주를 드렸답니다. 그런데 태오 하사관님은 제게 이 좋은 물을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물맛이 참 좋군요. 물 좀 더 주세요…”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물을 마시게 해 주었다. 그는 수통의 물을 거의 반 이상이나 마셨다. 그리고 그는 한참 동안 눈을 크게 뜨고 벙커 천정을 바라보고 있다가 기도 드리듯 중얼거렸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로 하여금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죄스럽고 불쌍한 내 이 영혼을 주님의 자비에 맡기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땅에 떨어진 밀알은 썩어야만 했습니다. 골고타 산마루에 떨어진 당신의 밀알처럼 말입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해 주시고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맺는 결실을 태오 하사관님으로 하여금…”

진섭이는 그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숨을 거두며 지극히 평화로이 주님의 품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그의 오른 손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이윽고 그는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 성인들의 죽음이 이 이상 더 평화로울 수 있을까? 그때 포격으로 한 쪽이 무너진 벙커 지붕의 틈으로 새어 들어온 한 줄기 아침 햇살이 진섭이의 얼굴을 비추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얼굴에서 평화스럽고 거룩한 신비를 발견했다. 오랜 방황 끝에 드디어 깨닫고 <주여, 당신의 품에 돌아오기까지 내 영혼은 무한히 불안하고 방황했나이다> 라고 말한 성 아우구스띠노의 기쁨을 진섭이의 얼굴이 다시 고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울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평화로이 죽을 수 있는 진섭이가 오히려 부럽기조차 했다. 이 지상의 삶을 충만 된 신앙 안에서 마친 진섭이가 정말 부러웠다. 나는 그의 시체를 벙커 안에 묻었다. 그리고 그의 무덤 옆에서 그와의 지난 일들을 회상하고 있었다.

 

1951년 7월 중순, 우리 해병대는 저 유명한 토솔산 전투를 끝마치고 예비 연대가 되어 홍천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 전쟁이 가져온 온갖 비극 앞에 천주의 자비와 섭리를 믿을 수 없어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 있었다. 어느 날 김진섭이라는 수병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전쟁 전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군에 입대한 학도병 출신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와 단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대원들은 그를 <목사님>이라고 놀려대기도 했고 <개새끼>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왜 그럴 그렇게 부르는지를 알지 못했다.

“태오 하사관님, 반갑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의미 있는 웃음을 입가에 띠우며 내게 말했다.

“뭐가 반갑다는 말인가?”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 무렵 나는 신앙을 포기한 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마저도 기피하고 있었다. 분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미워하고 있을 때였다.

“선임 하사관님 같은 동지를 만나게 돼서 말입니다.”

“내가 어떤 뜻에서 자네와 동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믿다가 미쳐 버린 같은 처지에서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태오 하사관님의 이유와 교회라는 인간 집단을 부정한 내 동기가 질적으로는 다릅니다만… 태오 하사관님은 이 전쟁이 파생시킨 인간의 비극 앞에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섭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교인들의 독선과 위선적인 생활 때문에 교회를 부정하고 떠났지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네더러 목사라고 부르나?”

“그건 제 아버지가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개새끼라는 별명은 또 왜 붙었나?”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말이 길어집니다만… 나는 목사의 아들입니다만 목사인 아버지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설교하는 아버지는 자기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들에게는 냉정하고 무관심했습니다. 항상 무언가에 바쁘셨고 집안에서는 서재에 들어앉아 성경 공부에만 열중했지요. 그 외에도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다정한 이야기를 들려 주신 일도 별로 없었고, 심지어는 어머니하고도 말이 거의 없었지요. 항상 표정은 근엄했으며 그런 표정 때문에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정을 느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족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교회 일에만 열중하시는 아버지를 교인들은 훌륭한  <사도>라고 치켜 올리더군요. 바로 아버지의 이러한 생활과 신자들의 그런 태도가 난 싫었어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고 생각됩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목하시는 교회에 일대 소동이 일어났어요. 이 일이 일어나자 어머니는 병으로 앓아 누우셨고 원래 집안에서 말이 적으시던 아버지는 아예 벙어리가 되셨어요. 그리고 당신 서재에 기거하시면서 식사도 따로 하셨어요. 언젠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형님이 집에 내려오자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어요. <나는 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런 부정한 여자가 아니다. 나는 하느님께 나의 결백을 맹세한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 죄를 고백하라 하시나 난 정말이지 소문에 떠도는 그런 죄를 진 일이 절대로 없다. 내가 죄를 지었다면 그건 너희들에게 훌륭한 어미 노릇을 못해 보고 죽는 거다.> 그날 밤 어머니께서는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아마도 어머니께서는 자살하셨나 봐요. 어머니의 장사를 치른 며칠 후 나는 형님으로부터 어머니를 병들게 한 그 소동에 대해 얘기를 들었습니다. 내용이란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죠.

어머니에게는 아버지와 결혼하시기 전에 어머니를 몹시 사랑한 남자가 있었대요. 지금 그분은 정부의 고급 관리입니다. 어머니도 그분을 사랑하셨지만 외가댁 할아버지의 강경한 고집으로 어머니는 명문 집안 출신이며 현직 목사였던 아버지와 결혼하셨대요. 외가댁도 열심한 예수교 집안이라 어머니를 반강제로 목사에게 출가시킨 거죠. 목사의 아내가 된 어머니의 생활이 오죽했겠습니까? 무뚝뚝하고 근엄하고 멋 없는 목사인 아버지! 젊은 아내로서 또 한 여인으로서 받아야 할 남편의 따스한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종의 <아기 낳아 주는 기계>에 불과한 생활을 어머니는 하셔야만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목사의 부인이라는 구실 아래 결혼 첫날부터 신자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대상이 되었죠. 목사의 부인이 건방지다는 둥, 사치스럽다는 둥, 화장을 하나는 둥, 혹은 인사성이 불손하다는 둥, 숱한 비난과 비판을 어머니는 들으시며 사셨대요. 어머니는 상당한 미인이셨죠. 게다가 이전(梨專) 음악과를 졸업한 멋장이 신여성이었죠. 그러한 분이 촌이나 다를 바 없는 자그마한 읍으로 시집와 그 질투심 많은 교인들 틈에서 고생깨나 하셨을 거예요. 어머니는 항상 우울한 표정이었고 어떤 때는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며 우시는 모습도 가끔 보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친정인 서울 집에 다니러 가셨다가 정말 우연히도 옛 애인을 길에서 만나셨더랍니다. 반가운 일이 아니겠어요? 그분의 요청으로 어머니는 어느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셨대요. 어머니가 비록 결혼한 몸이라 해도 옛 애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번 한 게 뭐 그리 대단한 부정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아주 공교롭게도 그 식당에서 서울을 드나들며 사업을 하고 있던 아버지 교회의 유장로를 만나셨대요. 그 후 그 장로의 입에서 나온 말이 꼬리를 물고 새끼를 쳐서 온 읍내에 퍼지게 되고 어머니를 그냥 부정한 여인으로 몰아쳤더랍니다. 원래 유장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사목 사업을 좋지 않게 보고 있던 사람이라 아버지를 비난하고 공격하기 위한 좋은 구실과 기회를 잡은 셈이 됐지요. 어머니는 부정한 여인이라 낙인이 찍혔고 부정한 아내를 둔 아버지는 목사직을 사임해야 한다는 말들이 교회 안에 나돌기 시작했죠. 나는 그 때 이런 내용들을 잘 모르고 있었으나 어느 날 아버지 입장을 지지하는 교인들과 반대하는 교인들 간에 일대 소동이 일어났지요. 이것이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어났다는 아버지 교회의 사건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이번에는 유장로를 비롯한 몇몇 교인들은 또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천벌을 받아 급살병으로 죽었다는 거예요. 이 말을 듣고 나는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인간을 미워했고 교인들의 위선과 독선과 더러운 심보를 저주했습니다. 자기들을 죄 없는 성인처럼 치켜 올리는 교인들의 행위와 신앙생활에서 나는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독선을 보았지요.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자처할 때 남을 판단하게 되거든요. 만일 인간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있을 때 어떻게 남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 말씀대로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며 사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병자만이 의사가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바로 인간은 죄라는 병에 누구나가 다 걸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러 이 세상에 오신 거죠. 그래서 <내가 바로 죄인이다>라고 고백하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또 그분의 자비로운 용서와 은혜를 알게 됩니다. 이런 뜻에서 볼 때 <거룩하다>하고 교회에 나와 성도(聖徒)라는 이름 아래 하느님께 예배 드리는 교인들은 사실상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름만의 교인들이죠. 크리스천은 <성도>가 아니고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이러한 신앙관을 벗어날 때 교인들은 위선과 독선으로 떨어집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는 고뇌 속에서 자살한 어머니를 천벌을 받아 주었다고 악담하던 그 교인들, 그들은 교회에서 또는 읍내에서 성도처럼 처신했지요. 참을 더럽고 치사한 인간들이었어요.

예수님께서는 실지로 간음한 여인보고도 죄인으로 판단하시지 않으셨잖아요? 그리고 또 그분은 말하기를 <여러분은 아무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판단한 대로 여러분은 하느님으로부터 판단함을 받을 것입니다.> 하셨잖아요? 이 성경 말씀을 유장로와 그 무리들은 수없이 읽었으련만 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성도라 자처하며 남을 판단하는 무리였죠. 설사 어머니께서 인간적인 약함 때문에 옛 애인과 그 어떤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고 가정하더라도 예수님의 제자인 교인들은 자기들의 스승처럼  어머니를 용서해 줬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 없는 어머니에게 오히려 돌을 먼저 던진 인간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오늘날의 인간들보다 훨씬 더 양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때려 죽이라는 율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죄 없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지시오> 하는 예수님 말씀에 늙은이로부터 시작해서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돌을 던지지 못하고 다들 되돌아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아요?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한 그들의 행위, 그것은 바로 자기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신앙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러데 요즈음의 교인들은 죄 없는 사람에게 먼저 돌을 던짐으로써 자기들은 죄인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고 있지요. 이 얼마나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짓들입니까?

나는 어머니에게 돌을 던진 그 인간들을 본격적으로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용서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용서하고, 어머니의 오명을 참아 받기에는 나의 인간적 감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결백을 교우들에게 증명하지 못한 아버지가 미웠지요. 어머니의 입장보다 교회의 입장을 더 중히 여긴 아버지에게 차츰 반항하게 됐어요. 그래서 나는 바로 아버지의 이 위선이 어머니를 죽게 했다고 판단했지요. 나는 아버지에게 정식으로 반항하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싫어하는 일만을 일부러 골라가며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후 어느 주일날 예배시간에 유장로가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어요.

<주님, 사랑하는 아내를 주님 품으로 떠나 보내시고 홀로라는 고독의 십자가를 지고 계신 주님의 종인 우리 목사님의 외로운 마음과 몸을 주님께서 친히 위안해 주소서. 그리고 당신의 거룩한 성도들인 여기 모인 우리 모두 위에 주님의 풍성하신 축복을 내려 주소서.>

이런 내용의 기도였어요. 나는 그 뻔뻔스러운 기도 소리를 들으며 분통이 터지고 구역질이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기도했지요.

<주님, 주님께서 정말 존재하신다면 주님께서 진정 전지(全知)하시다면, 주님께서 참으로 의(義)로우시다면 여기 모여 있는 인간들이, 특히 방금 당신께 기도 드린 저 유장로란 인간이 얼마나 거짓되고 위선적이고 당신을 욕되게 하는 교인임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들은 위선과 독선으로 매일같이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으며 또 이들의 양심과 신앙은 썩어 구린내가 나고 있습니다. 주님, 옛날 당신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신 그 원자폭탄 같은 불길로 이들을 멸망시켜 주소서. 아~멘.>

그때 교회 안은 발칵 뒤집혀졌지요. 여기저기서 나에 대한 욕지거리가 들려왔고 유장로는 무엇인가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으나 사람들의 소란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화가 단단히 나셨고 몽둥이를 들고 나를 때리려 하셨어요. 나는 집을 뛰어나와 도망쳤으나 아버지는 나를 뒤쫓아 왔어요. 한참이나 달렸으나 아버지에게 붙들릴 것만 같아 좁은 골목으로 꺾어 들며 나는 구두 뒤꿈치로 재빨리 땅바닥에 금을 긋고 소리쳤습니다. <이 선을 넘는 놈은 개새끼다!> 아버지는 그 선을 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그 선을 넘어와 나를 붙잡고 매질하리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위선자였거든요. 아버지는 자기 가족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도 자기 아내를 죽게까지 하면서도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히 여기던 위선자였어요. 아버지가 그 선을 넘음으로써 자기 아들로부터 <개새끼>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용기를 갖고 있었더라면 아버지는 교회를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어머니의 누명을 벗기고 교인들의 잘못을 밝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지가 못했거든요. 자기 아들의 입에서 나온 <개새끼>란 말 앞에 주춤해 섰다가 몽둥이를 버리고 되돌아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위선과 비겁함이 나로 하여금 아버지 집을 떠나게 했습니다. 그날로 나는 어머니의 친정인 서울 외가 집에 올라와 다시는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버지도 나를 찾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이 걔기를 누구에겐가 했더니 이 말이 퍼져 <개새끼>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겁니다.”

 

그는 긴 얘기를 마치고 쓸쓸한 웃음을 입가에 띠우며 담배를 연거푸 피웠다. 나는 처음에 진섭이를 다소 가볍게 대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으며 그에 대한 동정과 친근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진섭이, 자네의 인생 고백은 나를 감동시켰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네의 용기가 훌륭해. 그런데 자네는 정말 아버지보고 <개새끼>라고 말했나?”

“네. 그러나 물론 나에게 삶을 준 아버지에게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지배하고 있던 그 위선에 대해 <개새끼>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미워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위선이었으니까요.”

그때 나는 불현듯 그의 종교관에 대해 알아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진섭이, 자네는 교인들의 위선과 독선 때문에 교회라는 인간 집단을 부정하고 떠났다고 했는데,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신의 존재 같은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볼 수도 없고 그분의 말을 직접 들어 본 적도 없는 그런 신의 존재 따위를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존재만은 부인할 수 없거든요. 그분은 역사 속에서 인간들과 함께 살다 간 분이 아니에요? 나는 그분이 자기의 온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인 성부(聖父)라는 하느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그저 믿고 있을 뿐이에요. 예수님은 성부라는 하느님을 믿으셨고, 나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니까, 그분의 진실성을 근거로 그분이 믿으신 하느님을 그저 그분 따라 믿고 있는 거죠. 그 이상의 것은 난 몰라요.”

“하지만 말일세, 예수의 불가사의한 출생, 그분의 십자가상의 죽음, 또 그분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이치에 어긋난 우스운 일들이 아니겠는가? 원죄와 함께 신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왔다는 예수가, 인류의 죄값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했다는 연극 각본 같은 이 이야기들이 우습지 않느냐 말일세. 원조 아담과 이브의 단 한 번의 죄가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도 위를 대신한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속죄적 죽음은, 그래, 원죄의 힘만 못해 아직도 인간은 악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구원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난 그런 교리들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라. 그래서 나는 천주의 존재도, 예수도, 교회도 다 부정하고 떠나 버리고 말았네.”

“태오 하사관님의 심정을 저도 잘 이해합니다. 그리고 저도 동감입니다. 생각하면 의심만 더욱 일게 하는 문제들이지요. 선임 하사관님이 방금 말씀하신 대로 원죄라는 그 연극 각본 같은 교리, 처녀가 예수님을 낳았다는 그러한 불가사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 신화 같은 이야기, 다 믿을 수 없는 것들인지 모르죠. 그러나 이상하고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은 인간 이치에 반하는 그런 일들 가운데도 웃어 넘길 수 없는 그런 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신지도 근 2천 년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지 못하고 비웃는 그런 교리를 성실히 믿고 있는 교인들의 수가 점점 늘어만 간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목숨까지 바쳐 가며 그 교리를 믿다 간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 거기에는 그 어떤 진실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웃는 교리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진짜 허무맹랑한 동화나 신화였다면 그런 교리는 이 세상에서 벌써 없어진 지 오래일 겁니다. 그런데 시간을 초월해 예수님의 말씀과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인류의 마음 속에 뿌리를 박고 번성해 가고 있으니 거기에는 우리가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없는 그 어떤 진리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나도 이전에는 자네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믿었다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믿지도 않네. 종교란 인간성의 약함에서 생겨난 미신을 논리적으로 미화시킨 일종의 문학이며 또 교리를 합리적으로 체계화시킨 철학이라고 나는 보고 있네.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을 믿어 오다 보니 그것이 사실처럼 느껴지고 마침내 하나의 학설로 발달되어 신학이라는 이름까지 생기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참 이상해요. 종교가 방금 선임 하사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미신에서 시작된 일종의 문학 또는 철학이라면 공자님 같은 성현이나 소크라테스나 칸트나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 또는 셰익스피어나 괴테 같은 문학가들을 위해 죽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엄격히 말해 문학가도 철학자도 아닌 예수님을 위해 죽었다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많지 않아요? 특히 태오 하사관님이 믿었던 천주교에 말입니다. 이것이 참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이야, 남들이 믿고 있으니 나도 믿는다는 그런 안이한 태도로 나는 믿을 수가 없네. 남은 남이고 나는 내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지성으로써 생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진리도 다 해득 못하고 또 실천하지도 못하는 판에 우리의 사고 능력을 초월하는 그런 상상적인 것들을 생각할 필요성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믿으라고 권유하는 종교가 나를 화만 나게 만드네.”

“그래요. 신앙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지성 행위를 무시하는 것만 같지요. 마치 국민학교 선생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아직 어려 이해할 수가 없으니 그저 우리가 가르쳐 주는 대로만 알고 있어라> 하는 식으로 교회도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불교처럼 각자의 깨달음이 종교라면 또 몰라도 그리스도교는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만 믿지 않으면 이단시하니 화가 날만도 해요. 하지만 나는 예수님을 부정할 수만은 없고 그분에게 이상한 매력 같은 것을 느끼고 있어요. 남들이야 뭐라고 하든 나는 내 나름대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고 있어요.”

“그럼 자네는 천당, 지옥 같은 것도 믿고 있나?”

“전 그런 것 믿지도 않을 뿐더러 상관하지도 않아요. 천당과 지옥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건 좀 얌체스럽지 않아요? 그래서 내 양심이 그것을 허락 지 않아요. 그저 나는 예수님이 좋아 그분을 믿고 있지요. 만일의 경우 내가 예수님을 내 나름대로 믿다가 결과적으로 죽은 후에 설사 지옥에 간다 해도 난 후회 안 할 거예요.”

“그건 자네의 자유니까…. 그런데 오늘 나를 찾아온 자네의 목적이 무언가?”

“뭐 목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그저 태오 하사관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선임 하사관님과 이야기 나누고 싶었지요. 남들은 태오 하사관님이 예수를 믿다가 미쳤다고들 비웃고 있으나 나는 미쳤다는 바로 그 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사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착실히 믿으면 한 번쯤은 미쳐야만 되는가 봐요. 내가 보기에는, 좀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선임 하사관님이야말로 진짜로 예수님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 같아요. 왜냐하면 묵시록에 <아주 차거나 뜨겁지 않으면 나는 뱉어 버리겠다> 하신 이 성경 말씀대로 지금 태오 하사관님은 예수님의 입 안에 담겨 잇는 그 찬 맛과 뜨거운 맛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리고 나는 이 찬 맛에 뜨거운 맛을 반항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 번쯤 신에게 반항해 보아야만 신앙의 경지를 알게 되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종교적 반항이라는 말은 값싼 것이 아니라, 믿어야만 하는데 믿을 수 없고 사랑해야만 하는데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의 심저(心底)에서 우러나오는 고뇌와, 믿음과 사랑을 동시에 거부하는 의지의 종합적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러나 이 반항은 예수님의 참모습을 찾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마치 다마스코로 교우들을 잡아 죽이러 가던 바오로 사도처럼 말입니다.”

“진섭이, 자네는 정말이지 목사 같은 설교를 하고 있네 그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교회와 신의 문제 따위와는 이별했네. 다만 이 자상에서 인간만을 위해서 또 인간의 이름으로 살아 남아 일하고 싶은 마음 뿐일세.”

“물론이죠. 저도 찬성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비극을 외면하는 곳에는 종교의 참뜻이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오늘의 많은 교인들은, 심지어는 교회까지도, 인간의 고통과 비극을 외면하면서 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만 드리고 있거든요. 바로 이러한 태도가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의 위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그 후 친한 친구가 되었다. 진섭이를 만나면 만날수록 호감이 더 갔다. 남에게 호감을 주는 매력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다소 우수에 찬 표정이었으나 무엇인가 사색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지적인 모습과 그러면서도 남을 평화롭게 해 주는 다정함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나는 종교의 <종>자만 들어도 화를 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진섭이와 둘이서 종교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싫지가 않았다. 그이 화법(話法)은 참으로 묘했다. 나의 당시의 종교관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고 또 반박하지도 않으면서 그는 나와는  상이(相異)한 자기의 종교관으로 나를 끌어들이는 힘을 갖고 있었다.

천주의 존재를 부인하고 배척하자 내게는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보이던 그때에 진섭이 와의 우정은 내게 일종의 구원 같은 것이었다. 고독하기만 하던 내 마음은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고 진섭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 무렵 내게는 단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진섭이 와의 우정이 제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언젠가 내가 다시 천주께로 귀의(歸依)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며칠 후 진섭이가 또 나를 찾아 왔다.

“태오 하사관님, 내일 연대 본부에 있는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나 보고 옵시다. 겸해서 주보(연대본부에서 경영하는 간식을 겸한 맥주 집)에 들러 술이나 한 잔 하고 옵시다.”

“아니, 이 사람아, 이제 자네는 나를 신에게로 다시 회개시키려 드는가? 신과 종교 따위를 다 팽개친 날더러 예배를 보자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닙니다.  저는 태오 하사관님을 회개시킬 의사는 추호도 없습니다. 선임 하사관님은 나름대로의 삶의 신념과 양심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심심한데 바람이나 쏘일 겸 예배 보러 갑시다. 태오 하사관님은 절대로 실망하지 않으실 거에요. 내일 저도 설교하게 될 테니까요?”

“뭐, 자네도 설교를 한다고?”

“네, 두고 보세요. 저도 선교할 겁니다. 지난 주일 예배 보러 갔더니 그 목사 설교 돼먹지 않았어요. 그리고 설교 후에 우리보고 말하더군요. <여러분 중에 누가 전선에서 받은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이 있으면 내게 말씀해 주십시오. 같은 신자들에게 그 은혜에 대해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라고요. 그래서 그 기회를 이용해 신도들에게 대해서 보다는 그 목사 자신에게 설교를 해 주려고 설교를 하나 준비해 놓았지요.”

당시 해병대에는 연대 본부에 목사님이 한 분 계셨다. 그래서 주일마다 각 대대에서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보았다. 자는 진섭이가 준비했다는 설교의 내용이 무얼까 하는 호기심을 갖고 그를 따라 연대 본부에 갔다. 우선 우리는 주보에 들러 깡통 맥주 두 개씩을 마시고 예배 보는 광장으로 갔다. 거기에는 약 30명 정도의 군인들이 모여 있었다. 예배가 시작되었다.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하더니 드디어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무슨 내용인지 모를 말을 목사님을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벗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랑만큼 큰 사랑은 없다> 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을 보면 아마도 <벗>이라는 조국에 대한 우리 젊은 군인들의 희생과 하느님 나라인 천당에 대해 설교하는 것 같았다. 즉,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는 우리들은 그 <더 큰 사랑>이라는 대가로 천당에 간다는 내용이었다. 설교가 끝나자 목사님은 전선에서 받은 하느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할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 진섭이가 손을 들고 일어섰다.

“목사님, 지난 주일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한 가지 준비해 왔습니다만 먼저 목사님께 질문할 것이 한두 가지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질문을 듣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방금 사랑과 천당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허무감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우리가 죽은 다음 천당까지 가는 데는 얼마나 시일이 걸립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목사님은 진섭이의 질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설교를 들으며 졸고 있던 대원들이 깨어나 일제히 진섭이를 향하여 고쳐 앉으며 호기심 있게 그를 바라보았다.

“말하지만 이 지상에서 천당까지의 거리입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우리가 싸우다 죽으면 그 희생의 대가로 천당에 간다고 방금 목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천당까지의 거리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만 천당 가는 노자라도 미리 마련해 놓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모두는 다 가난한 졸병들이기 때문에 노자가 걱정이 돼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천당에까지 가는 노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천당의 노자는 바로 여러분이 바치는 사랑이라는 희생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당까지의 거리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성경을 읽어보면 천당까지의 거리가 확실한 시일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고민스러워 목사님께 물어 보는 것입니다.”

“지금 군인은 나를 조롱하고 있습니까? 성경 어느 곳에 그런 것이 있습니까?”

목사님은 음성을 높여 진섭이를 꾸짖듯 말했다.

“목사님, 화내지 마십시오. 그 문제에 대해서 저는 저 나름대로 고민스러워 목사님께 질문 드렸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사십 일 간을 같이 지내시다가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성부에게 돌아가서 곧 여러분에게 진리의 성신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라고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곧>은 즉시라는 뜻일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지 만 10일 만에 성신이 내려오셨으니까 예수님께서 5일 간 성부가 계시는 천당에 올라가셨고 또 성신께서는 5일 간 걸려서 이 지상에 내려오셨을 겁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서 천당까지의 거리를 나는 5일 간의 길이로 보고 있는데 목사님은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목사님은 난처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여러 명이 재미있는 듯 웃어댔고 진섭이는 또 목사님에게 말을 건넸다.

“목사님, 말씀 안 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질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교리상의 진정한 질문이라면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모독적인 질문이라면 장소가 장소니 만큼 곤란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어째서 제 질문을 모독적이라고 단죄하십니까? 성경을 읽다 보니 제 어린 신앙심을 괴롭히는 문제들이기에 고민스러워 질문을 드렸는데 목사님은 제 이런 고민을 죄악시 하십니까?”

진섭의 음성이 높아졌다. 목사님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진섭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군인의 신앙을 괴롭히는 진정한 문제라면 무엇이라도 좋으나 그렇지 않다면 군인의 질문은 성경을 모독한다는 말입니다. 하여튼 좋습니다. 군인의 질문을 듣겠습니다.”

목사님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냉정히 말했다.

“목사님은 천당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옥이 더 나을 것만 같이 여겨져 제 어린 신앙은 몹시 괴롭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가리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거기서 이를 갈며 통곡하는 곳이라고 하셨거늘 지옥이 천당보다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목사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러데 말입니다. 목사님, 성경을 읽다 보면 천당에 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즉 앉은뱅이, 소경, 문둥이들, 창녀, 가난한 사람들, 이처럼 인간 사회에서 말하자면 제외되다시피 한 부류의 인간들 뿐인데 그런 인간들이 있는 곳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반면에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부자들과 그들의 예쁜 딸들이 거의 다가 지옥에 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갖고 간 돈으로 지금쯤은 그 사막 같은 지옥이 살기 좋은 곳으로 발전했을 것이고 또 예쁜 아가씨들이 많은 그곳이 우리들, 젊은 군인들에게는 더 살기 좋은 곳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점을 생각할 때마다 제 어린 신앙심은 회의라는 장막에 말려들어 고민하게 됩니다.”

목사님의 얼굴에는 분노의 그림자가 스쳐갔다. 그리고 그는 성경책으로 설교대를 치며 진섭이에게 고함쳤다.

“지금 군인은 이 거룩한 예배장소를 더럽히고 있으며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군인의 독성죄(瀆聖罪)를 범하는 질문을 받지 않겠습니다. 군인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날  예배는 끝맺음도 없이 끝나 버렸다. 주보에 다시 들러 우리 둘은 우동 한 그릇에 맥주 한 병을 마시고 군용 트럭을 타고 부대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나는 진섭이에게 물었다.

“진섭이, 자네는 목사를 왜 그렇게 골탕 먹였나?”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의 실속도 없는 설교가 화만 나게 하더군요. 그래서 야유해 주었지요.”

“하지만 목사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 설교는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나는 그런 것 믿지도 않고, 사실은 또 그 설교를 들으며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사랑을 위해 죽으면 천당 간다는 그런 말이야 목사나 신부들이 늘 하는 말이 아닌가?”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는 뚜렷한 의식 아래 이 전쟁터에서 고독하게 죽을 우리의 죽음은 사랑과 희생의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와 같은 그런 신념에서 비롯한 죽음은 사실이지 위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지요. 그러나 동족상잔하는 이 더러운 싸움터에 우리들 중 과연 몇이나 안의사와 같은 신념을 갖고 이 전선에 나왔겠습니까? 이유와 목적도 잘 알지 못하는 이 강요당한 전쟁터에서의 우리의 죽음은 사랑을 위한 희생이 아닙니다.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벗는 우리의 죽음을 천당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킨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에요. 왜냐하면 그러한 설교는 그 옛날 십자군과 함께 종군하던 신부들처럼 천당이라는 이름으로 순진한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이 더러운 전쟁에 협조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말입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우리의 죽음이 천당 가는 <패스포드>라면 왜 자기는 이 전장에서 죽기를 거부하고 있습니까? 일선에서 싸우는 우리들을 전선 고지로 한 번도 찾아 주지 않는 그런 목사가 무슨 자격과 면목으로 죽음에 대해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인간의 고독과 고통과 사랑을, 또 자기가 확신하지 못하는 신앙상의 진리를 설교한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사기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은 자기가 감당할 수도 없고 심지어는 거부하기까지 하는 진리를 곧잘 말하거든요. 그러한 인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팔아먹고 사는 가장 가증스러운 목사들이죠.”

“진섭이, 자네는 목사들에 대해 너무 심하군 그래. 자네의 이론을 따른다면 어느 신부나 목사가 자신 있게 사랑과 희생에 대해 설교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의 무한성 앞에 나선 인간의 유한성, 이 유한성을 초월하라고 요구하는 신앙, 하지만 초월할 수 없는 인간성에서 오는 고민, 밤잠을 못 자게 하는 회의와 몸부림치는 방황, 그러나 결국은 당신만이 하며 하느님께로 되돌아 오는 겸손, 그리고 사랑의 고독과 희생의 고통, 이런 것들을 목사들은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들은 이러한 것을 경험해 보지도 못한 채, 아니 그러한 경험을 거부하는 삶 안에서 단지 신학교에서 배운 그 신학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절대시하는 습관을 갖게 되오 따라서 거기에는 독선과 위선이 자리잡게 마련이죠. 그래서 나는 목사들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한 인간의 삶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활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들은 지식의 대상인 하느님만을 설교하거든요. 이러한 뜻에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또 사랑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체험한 태오 하사관님이 어느 날 신부나 목사가 되신다면 좋은 성직자가 되실 수 있을 거예요.”

“자네는 나를 아무래도 회개시키려 드는 것 같군. 내가 신부나 목사가 될 수 있다니… 아예, 그런 말 다시는 하지 말게.”

“아닙니다, 선임 하사관님. 저는 태오 하사관님이 존경스러워서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번 소양강 전투에서 저는 태오 하사관님의 인간됨과 민족애를 발견했어요. 적지에 떨어진 미군 비행사를 구출하던 그 전투 때 말입니다. 부상당한 미 비행사와 인민군 장교를 고무 보우트에 싣고 소양강을 건너올 때 적탄에 그 보우트가 파열되자 부상당한 그 둘은 물길 속에 말려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때 태오 하사관님은 그 둘을 함께 살려낼 수 없었던 그 절박한 상황 아래 미군 비행사보다는 적이었으나 동족인 인민군 장교를 살려내었습니다. 그날 연대 본부 작전 장교와 선임 하사관님 사이에 오고 간 흥분된 대화, 그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정말이지 태오 하사관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태오 하사관님의 용기와 애족심에 감탄했습니다.

<총을 버린 이 부상당한 인민군은 이미 우리의 적은 아닙니다. 둘을 다 같이 살릴 수 없었던 그 상황에서 나는 우리 조국의 은인이며 사상의 동지인 그 미군 비행사보다는 적이었으나 마 <피>의의 동족을 선택했습니다. 작전 장교님,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은 변할 수 있어도 그 인간 안에 돌고 있는 피는 영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뜻에서 나는 <피>라는 민족적 양심을 따르기로 했던 것입니다. 작전 장교님, 이 부상당한 인민군은 이민족이 아닌 우리와 같은 조상을 갖고 있는 동족이며 우리가 통일시켜야 할 조국의 아들이 아니겠습니까?>

선임 하사관님의 이 말씀에 모두들 <미친놈>이라고 했으나 나는 선임 하사관님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그날 우리가 선임 하사관님과 그 인민군 장교를 강둑에 남겨둔 채 되돌아갈 때 그 인민군포로와 둘이서 담배를 나눠 피우던 태오 하사관님의 그 모습에서 나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고독과 고통을 마음 속에 강렬히 느꼈습니다. 눈물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남들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이해를 받지 못하는 입장, 바로 그것이 고독이 아니겠어요? 그러면서도 그 입장을 고수하는 의지와 신념, 그것은 일종의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도 마찬가지였지요. 심지어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예수님이 당하신 이 고독과 고통, 바로 그것을 그분께서 말씀하신 <썩는 한 알의 밀알>에 나는 비유하고 있어요. 그리고 또 말입니다. 지난 토솔산 지구 20고지 전투에서 죽은 그 선량한 우 수병의 시체 앞에서 몸부림치며 들고 일어난 하느님에 대한 반항,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에 대한 태오 하사관의 숭고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일로 인해 남에게 받은 수많은 조소와 스스로의 고뇌, 이 모든 것을 통해 지금 태오 하사관님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석고 있는 <한 알의 밀알>입니다.”

나는 묵묵히 있었다. 나를 치켜 올리는 진섭이의 말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에 대한 그의 우정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의 진실과 순수함을 존중해 주고 싶어서였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진실했다. 우리를 실은 군용트럭은 여전히 먼지를 뿜으며 달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담배를 새로 피워 물며 또 말을 계속했다.

“나는 가끔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마다 태오 하사관님을 연상하게 돼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아마도 두 분이 철두철미하게 인간을, 특히 자기 동족을 사랑했다는 점과, 죄를 짓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의 편에 서서 하느님을 대한다는 자세가 공통되기 때문이지 모르죠. 물론 선임 하사관은 인간을 위해 신에게 반항했고 아브라함은 인간을 위해 신에게 순종한 것이 다르긴 합니다만… 결국 신앙적으로 보면 반항과 순종은 동의어인지도 모르죠. 반항의 경험 없는 신상상의 순종은 오히려 독선과 위선을 초래할 위험이 있으니까요. 하여튼 태오 하사관님은 자신의 고통과 비극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비극 앞에 분노했고 드디어 신을 거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선임 하사관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어요. 인간의 비극과 고통 때문에 인간의 편에서,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을 위해서 하느님을 거부한 태오 하사관님의 의지, 좀 역설적인 말이 되겠습니다만 선임 하사관님의 바로 그 의지는 자신이 거부한 신에 대한 사랑 자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볼 수 있는 이웃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볼 수도 없는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라는 요한 사도의 이 말씀처럼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 없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들은 자기가 하느님이 된 양 흔히 구약성경의 그 <율법의 하느님> 편에 서서 인간을 죄인으로 단죄하며 심판하고 있거든요. 아가 예배 때 목사가 나보고 <거룩한 장소>라는 명목으로 나를 죄인으로 몰아친 그 태도도 바로 자기가 하느님이 된 양 인간을 심판하는 태도였지요. 목사는 인간을 죄인으로 심판하는 것이 사명이 아니라 죄인의 입장에 서서 하느님의 자비를 탄원하는 것이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뜻에서 아브라함은 훌륭했어요.”

“난 천주교 신자였지만 아브라함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 그분의 어떤 점 때문에 자네는 나를 연상하게 된다는 말인가?”

“방금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인간의 편에서 인간을 사랑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 수많은 인물들 중 나는 아브라함을 제일 존경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를 하느님께서 멸망시킨 이야기가 있어요. 그 당신의 인간들도 오늘날의 인간들처럼 음탕했고 불의스러웠던가 봐요. 노아의 홍수 때만 보더라도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했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너무 부패했었기 때문이래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십 일 간 주야로 비를 내리게 해서 홍수로써 당신의 인간을 멸망시키신 이야기가 성격에 있지 않아요? 그런데 노아의 홍수 이후의 인간들도 여전히 악하고 음란스러웠던가 봐요. 하루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이번에는 불로써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나눈 대화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아브라함도 자기 조카 롯 가족이 살고 있던 그 소돔 사람들의 부패상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 탓으로 하느님의 노여움을 받아 멸망된들 그것이 아브라함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아마 요즈음의 크리스천들 보고 하느님께서 공산주의 국가가 된 북한이나 중국이나 소련을 불로써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제발  그렇게 해 달라고 애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심정은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의 멸망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가슴 아파했고 그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며 마치 우리가 물건을 흥정하듯 하느님께 협상을 제의했지요. 그때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하느님께 말했어요.

<주여, 의인들을 악인들과 함께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혹시 그 도시 안에 50명의 의인이 있을지 누가 압니까? 이 50명의 의인을 위해 이 도시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주님, 제발 그런 일을 하시지 마십시오. 의인들을 악인들과 함께 죽게 하시지는 마십시오.>

아브라함의 이 간청에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지요.

<그럼 좋다. 만일 네가 이 도시 안에서 50명의 의인을 찾아낸다면 나는 이 도시를 멸망 시키지 않으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50명의 숫자에 에누리하며 또 하느님께 간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그 도시 안에 50명의 의인을 찾아낼 길이 없음을 알았던 모양이죠.

<먼지와 다름없는 제가 자구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 만일 50명의 의인 중에서 다섯 사람이 부족하다면 이 다섯 명의 부족 때문에 주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45명의 의인만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도시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다시 약속하셨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리가 마치 상점에서 물건 값을 깎듯 하느님께 숫자를 에누리해 나갔습니다.

<주님, 제발 화내지 마십시오. 만일 이 도시 안에 40명의 의인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 40명의 의인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의 불길에서 살려 주시겠다고 또 약속하셨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또 숫자를 깎아 내렸습니다.

<주님, 만일 거기에 30명의 의인이 있다면…>

이렇게 에누리해 가는 아브라함의 마음이야 얼마나 송구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을 동정하며 인간을 위해서 염치불구하고 하느님께 어린애처럼 졸라댔던 것입니다. 그때 참을성이 많으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30명의 의인을 위해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또 약속하셨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둡고 초조하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단 30명의 의인조차 자아낼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30명에서 20명으로 또 흥정을 했고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주님, 제발 화내지 마시고 나로 하여금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드리게 해 주십시오. 만일 그 도시 안에서 10명의 의인을 찾아낼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느님께서는 단 10명의 의인을 위해서도 소돔과 고모라 주민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또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10명은 고사하고 단 1명의 의인도 없었습니다. 철두철미하게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 그 다음날 소돔과 고모라는 원자폭탄 같은 불길 속에 멸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멀리서 불타는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고 있던 아브라함의 심정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그는 땅을 치며 통곡했을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물론 불길 속에 타 죽어가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위해서였지요. 그들이 멸망한 것은 자기들의 죄 때문이었으나 아브라함은 그래도 그들을 불쌍히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아브라함의 동정과 사랑, 그것은 자기도 그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그들처럼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 속에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사람이었으나 많은 인간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고 또 비겁한 죄를 여러 번 범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한 죄에 대한 체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이해하게 했으며 또 그들을 동정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가 죄를 범한 그 이상으로 자기 죄를 뉘우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용서라는 은혜를 그는 절실히 경험했지요. 그런 뜻에서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계속하고 있는 목사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라는 은혜를 설교하는 목사들은 자기들의 일상생활을 통해 먼저 그분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 경험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인간성의 약점과, 죄를 짓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인간 조건에 대한 이해가 아니겠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들은 자기들도 죄인이면서 또 죄를 범할 가능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죄인이 아닌 양 죄인 편에 서려고 하지 않거든요. 바로 여기에 목사들의 독선과 위선이 있죠. 그런 뜻에서 아브라함은 참으로 훌륭했어요. 아브라함은 모든 목사들의 사표(師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부대에 도착했다. 진섭이의 이야기도 여기서 끝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진섭이는 김일성 고지 전투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어 갔다. 그리고 나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은 여러가지 사건과 심적 변화를 거쳐 신앙적으로 깊이 회개하고 천주님께 귀의(歸依)하게 되었다.

 

1952년 5월 초 어느 날 수백 명의 신병들과 함께 진섭이가 일선에 재 출 하여 우리 중대에 편입되어 왔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어나는 몹시 반가웠다. 그러나 그의 일선 재 출동에 나는 적지 않게 놀랐고 어떤 불안감까지 느꼈다. 왜냐하면 그는 근 5개월 간이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던 중상자였으며 따라서 그는 후방에서 정양해야 할 몸이었는데도 전선으로 다시 나왔기 때문이었다.

“진섭아, 이게 웬 일인가? 어째서 이렇게 빨리 또 일선으로 출동해 왔나?”

“일선 출동을 자원했습니다.”

“자원했다니?….. 자네를 만나니 반가움보다는 불안이 더 앞서네.”

“태오 하사관님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참 이상해요. 태오 하사관님이 보고 싶었어요. 그 동안 몇 번 오간 서로의 편지로 서로 무사함은 알고 있었으나 선임 하사관님 곁으로 오고 싶었어요.”

“자네 혹시 무슨 일이 있지 않았나? 예컨대 자네의 그 의로운 외고집 때문에 장교와 충돌이라도 있었든지, 아니면 전시하의 후방 국민들의 생활 태도가 자네 비위에 상했다든지, 혹은 공부깨나 했다는 놈들의 그 사치스러운 병인 <형이상학적 고민>이라도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 일들이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런 문제와는 질이 다른 참기 어려운 마음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혼자서 그것을 참아내기 어려워 태오 하사관님을 찾아 일선으로 자원 출동했습니다.”

그럼 언젠가 자네가 말한 애인에 대한 고민인가?”

“아닙니다. 사실은 애인을 찾아 나섰다가 뜻밖의 사건과 부딪쳤습니다. 그 애인 소식은 전쟁이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못 듣고 있습니다.”

“그럼, 자네를 다시 일선으로 불러냈다는 그 고민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태오 하사관님, 오늘밤 저를 위해 술 한 상 차려 주시지 않겠어요?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그 이야기를 모할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우리 중대는 주 저항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앞에 있는 전초 진지 덕택으로 우리는 적으로부터 직접 공격받을 위험이 없어 비교적 안전한 전선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진섭이의 부탁대로 화랑 위스키 몇 병을 마련하고 한 미군 장교가 내게 준 씨레이숀 쇠고기 통조림을 안주 삼아 술상을 차렸다.

그날 밤 진섭이는 물 마시듯 그 독한 화랑 위스키를 두 사발이나 마셨다. 나도 진섭이와 같이 맞잔을 들었으나 술에 취하기는 고사하고 정신만 더 멀쩡해졌다. 술이 거나해지자 진섭이는 말문을 열었다.

“태오 하사관님, 목사들을 비판하고 모욕하고 위선시하던 내가 얼마나 교만한 인간이며 위선적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일선으로 나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자네가 교만하다거나 위선적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네. 내가 자네의 결점 아닌 결점을 하나 알고 있다면 그것은 자네가 목사들에게 너무도 순수한 것을 그리고 인간의 힘에 겨운 진실을 기대했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강은 했네만….”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결점이었습니다. 그 결점이 바로 나의 교만과 위선이 되었지요. 물론 목사들은 평범한 우리와는 달라야 하겠으나 는 선임 하사관님이 방금 말씀하신 대로 그분들에게 인간의 힘에 겨웁고 지나친 그 어떤 절대 순수와 절대 진실을, 즉 예수님 같은 인간성과 진실성을, 또한 기대했다기보다는 강요한 셈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처럼 될 수 없는 인간 조건을 가진 그분들을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안 된다고 위선 시 했으니까요. 이번에 나는 아버지를 통해 목사들이 어떠한 사람들이며 그분들의 고민이 또한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됐어요. 내가 그렇게나 저주하고 증오하던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럼 자네는 부친을 만나 뵈었단 말인가?”

“소식만 들었습니다.”

“그래? 자네 부친은 그럼 이 전란 속에 무사하시다던 가?”

“이 난리통에 무사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께서는 내 고향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지 며칠 후 인민군에 납치되어 가셨답니다. 나는 그 소식을 <청춘극장>에서 들었어요. (당시 해병대 사병은 유곽을 <청춘극장>이라고 불렀고 유곽의 여인들과의 잠을 <고독한 사랑의 배설작업>이라고 했다.) 5개월 간의 병원생활을 끝내고 그 동안 모인 월급과 전상금을 받아 들고 나는 15일 간의 휴가를 떠났습니다. 내 애인이 다니던 Y대학이 피난해 와 있다는 부산으로 애인을 찾아갔죠. 며칠 간을 애인을 찾아 막연히 길거리를 헤매다가 고독하기만 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흔히 남들이 말하던 고독한 사랑의 배설 작업을 한 번 경험하려고 어느 날 밤 청춘극장에 갔었지요.  동정(동정)이라는 순결에 대한 가치 같은 것은 헌옷 벗어 버리듯 내던져 버리고 술에 잔뜩 취한 채 어는 청춘극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미친 놈처럼 밤새껏 그 고독한 사랑의 배설 작업을 했었지요. 그런데 날이 밝자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한 그 여인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젊은 여인은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증오하던 유장로의 딸인 면이었습니다. 면은 나와는 어릴 적 소꿉동무이기도 했지요. 참 기이한 운명이었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있겠어요? 하필이면 왜 그 여인이 면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면은 밤에 내가 방에 들어왔을 때 나를 즉시 알아 보았답니다. 그래서 면은 자기 아버지가 우리 가족과 특히 어머니에게 끼친 잘못을 보상하는 뜻에서 나에게 최대의 써비스를 했다는 거예요. 바로 면을 통해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가 전해 주는 아버지와 고향 소식은 이랬어요.

내가 고향을 떠난 다음 날 우리 읍내에는 아버지에 대한 도 하나의 새로운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답니다. 그 소문은 다름 아닌 내가 아버지 보고 이 선을 넘는 놈은 개새끼라고 한 말이 잘못 전해져 내 아버지는 <개새끼> 목사란 별명을 듣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서울에 정부(情夫)가 있었고 그 정부와의 아들이 나라는 말까지 나돌기 시작했대요. 참으로 무서운 인간의 악담이었습니다. 이 모든 거짓을 꾸며댄 자가 바로 면의 아버지인 유장로였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끝내 단 한 마디의 변명도, 해명도 안 하시고 목회(牧會)를 계속하셨답니다. 밤만 되면 아버지께서는 혼자 교회당 안에서 미친 사람처럼 우시며 기도 드리곤 하셨답니다. 지금 나도 그런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어머니로 하여금 자살까지 하게 한 유장로의 그 비열한 행동을 고발하지 못한 아버지를 나는 비굴하고 위선적인 인간이라고 욕하고 했으나 아버지는 당시 내 어린 마음이 이해 못하는 십자가라는 <구원의 신비성>을 몸소 체험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당신이 인간이 되어 구원하려 오신 백성으로부터, 또 당신의 무수한 은혜를 입은 인간들로부터 배신을 받고서도 단 한 말씀의 변명도, 불만도 표현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그 고독과 고뇌, 바로 그것이 예수님 스스로가 말씀하신 써는 한 알이 밀알이었다면,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의 그 구원의 신비성에 참여하는 써는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포하고 있는 사랑의 고독과 사랑의 고난이 아니겠습니까? 즉 남을 위한 고독과 고난을 사랑 안에서 참아내지 않고서는 우리는 남의 영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을 나는 썩는 한 알의 밀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신비성을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어요.

 

<사랑은 참아 줍니다> 하는 고독과 고통과 너그러움을,

<사랑은 친절합니다> 하는 남을 위한 자상한 마음가짐을,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하는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선심을,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는 허영심을 배제한 겸손을,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는 인격적인 수양과 자제심을,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하는 예의 바른 태도를,

<사랑은 사심을 품지 않습니다> 하는 타산 없는 봉사를,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하는 착한 마음에서 비롯하는 사랑의 의지를,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하는 용서와 자비심을,

<사랑은 악을 보고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하는 정의로운 마음과 순교자의 순절심을,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하는 신앙의 덕을,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고> 하는 희망의 덕을,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하는 사랑의 인내를,

 

사랑은 이러한 요소를 지녀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어요. 이와 같이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여러 모습을 나는 <썩어야 할 한 알의 밀알>이 썩는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비웃었듯이 나도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만 했던> 이 사랑의 신비를 실천하시고 계시던 아버지를 비겁하다고 비난했으며 또 위선자로 단죄했던 것입니다.

얼마 후 6.25 사변이 일어났고 며칠 후 우리 고향은 북한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답니다. 그러나 면의 아버지 유장로는 중학교 동창생으로 남로당 당원으로서 그 동안 지하운동을 해 오던 한 친구의 권고로 공산주의자로 돌변했고 인민위원회 간부가 되었답니다. 명예와 목숨을 위해서는 무엇이나 할 수 있었던 인간이 바로 유장로였지요.

내 고향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아버지는 곧 체포되셨고 인민 재판을 받게 되었답니다. 그때 유장로도 그 재판석에 판관의 자격으로 임석했고 인민에게 저지른 죄상(罪狀)을 고백하라는 재판장에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답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다 죄인입니다. 우선 하느님 앞에 인간은 예외 없이 죄인이며 이웃 형제 앞에 사람은 죄인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뜻에서 나도 여러분과 같은 죄인입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이 아버지께 고함을 치더랍니다.

<여기는 신성한 재판 장소다. 교회당에서 일요일마다 하느님이라는 그 허무맹랑한 교리로 선량한 인민을 기만하던 그런 식의 설교를 할 때가 이미 아니다. 바른대로 빨리 인민을 거슬린 너의 죄상을 고백하랏!>

아버지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대요.

<방금 재판장은 나보고 주일마다 허무맹랑한 하느님의 교리를 갖고 인민을 기만했다고 나를 고발했습니다마는, 사실 나는 교회의 이름으로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도들을 기만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기만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느님의 교리는 참되나 그 참되 교리를 설교하는 나 자신은 참되지 못했습니다. 나도 남들처럼 연약한 한 인간이었으며 어쩌면 남들보다 더 많은 인간적 결함과 타락하기 쉬운 본능적인 욕망을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들 앞에서 나는 하느님의 대리자라는 이 목사 직 때문에 때로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기만하며, 즉 위선자로서의 처신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목사가 된 것을 후회하게도 되었으며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목사라는 이 사도직을 나에게 주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기만하고 살아온 죄인이며, 또한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럼 피고는 목사가 된 것을 후회하는 그러한 심정으로 이제는 신이라는 그 허무맹랑한 교리를 떠나 우리 인민의 대열에 서서 조국 해방과 건설을 위해 우리에게 협력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면의 아버지 유장로의 말이었답니다.

<유장로님, 나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권고합니다. 회개하시요! 당신은 지금 나를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하고 있으나 이 재판은 하느님께서 당신과 나에게 내리시는 재판입니다. 유장로님, 우리 다 같이 회개합시다. 이제야 말로 회개의 시각이며, 주님의 자비로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때입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그 고난의 신비를 깨달았습니다. 나 어찌 그분을 떠나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유장로님, 회개하시오. 주님은 당신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닥쳐라! 여기는 중세기에 있었던 종교 재판소가 아니다. 지금 내가 피고에게 묻고 있는 것은 인민에 대한 피고의 죄지 그런 시시한 종교문제가 아니다.>

재판장이 소리지르며 유장로를 못마땅하게 바라다 보더랍니다.

<네, 물론 나는 인민이라고 말하는 이웃에게도 죄인입니다. 특히 나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내 가족에게, 특히 내 아내와 내 둘째 아들 진섭이에게 죄인이었습니다. 몇 년 전 나를 모함하던 몇몇 신도들이 중상 모략으로 내 아내는 부정한 여인으로 몰렸고 자기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는 고민 속에서 아내는 자살했던 것입니다. 아니 바로 내가 아내를 죽였습니다.>

<그럼 피고는 인민을 죽인 살인범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살인범은 아닙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위선과, 가족보다는 교회를 더 중히 여겨야 한다는 이 사도직과, 또 내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악질적인 중상모략을 한 인간들을 만인 앞에 공개하지 못한 내 인간적인 약함과 비겁함, 당시 나를 지배하고 있던 이 모든 것들이 끝내 아내를 죽게 한 것입니다. 그때 인간적인 나의 분노는 그 더러운 인간들이 드나들던 교회를 불질러 버리고 그 몇몇 신도들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내가 아내를 죽게 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 이 악독한 목사놈! 음탕한 눈으로 여인을 보아도 이미 음행을 범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예수는 말했는데, 그래, 피고는 사람을 죽이려던 마음을 갖고 있었단 말인가?>

면의 아버지 유장로가 노기찬 목소리로 아버지를 고발했대요.

<그렇소, 유장로님! 그때 나는 정말이지 그 사건의 주동자인 당신을 죽여야만 했을 거요.>

<이 가증스러운 목사놈! 오죽이나 못난 놈이기에 아들로부터 개새끼라는 말까지 들었겠는가!>

유장로는 아버지에 대한 인신 공격을 계속했대요.

<내가 내 아내에 대한 당신의 모함을 신도들에게 고발하고 당신을 죽였던들 내 아들 진섭이는 날더러 개새끼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거요. 개새끼라는 진섭이의 말은 당신을 죽이지 못한 비겁과 당신을 축복하고 기도 드려 주던 나의 위선에 대한 고발의 소리였소. 그때 나는 진섭이를 마음 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소.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악과 위선을 고발하고 미워하는 진섭이의 용기와 순수를 나는 부러워했소. 그러한 아들에게 애비 구실을 제대로 못한 나는 진섭이에게 죄인이오. 그리고 이러한 재판을 통해 내 가슴을 오랫동안 괴롭혀 오던 죄를 고백시켜 준 재판관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내 일생 오늘처럼 마음 홀가분하고 기쁜 날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 의해 죄인으로 단죄될 것이며 감옥에 수감되겠지요. 그러나 오늘 나는 내 양심의 죄책감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나는 하느님의 은혜로 받아 들이며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면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께서는 이런 식으로 재판을 받으셨고 감옥으로 넘어가셨답니다. 당시 재판 장소에 있었던 몇몇 읍민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아버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린 명이 전해 들은 이상의 아버지의 말씀만 들어도 나는 아버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존경할 수 있습니다.

태오 하사관님, 이렇게 훌륭하신 아버지께 나는 불효막심 한 자식이었습니다. 나는 인생이 무엇이며 또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부지 반항아였지요. 나는 아버지께 참으로 부끄러운 자식입니다.”

진섭이는 긴 이야기를 마치자 “아버지,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자기 고향을 향해 정좌(正坐)하고 허리를 굽혀 수없이 절을 하기도 했다. 나는 진섭이를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잠잠히 앉아 술만 들이켰다. 재떨이에는 이미 수북이 담배 꽁초가 쌓여 있었다.

얼마 후 진섭이는 울음을 그치고 술을 몇 모금 마신 다음 또 말을 계속했다.

“선임 하사관님! 면으로부터 아버지의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인간적인 면과 또 신앙적인 명에서 두 가지 묘한 인과관계(인과관계)를 느꼈어요. 말하자면 유장로는 내 부모님을 모함하고 희생시킨 장본이었으나 바로 그 유장로의 딸은 자기 아버지의 죄를 보상하기 위해 나를 만나기를 원했고 또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자기로서 할 수 있는 그 보상 행위를 했다는 거예요. 죄와 보상이란 이 인과관계에서, 나는 무엇이라 이론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으나, 원죄 안에 온 인류가 느끼는 죄에 대한 연대의식과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보상의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때 나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고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태오 하사관님이 가끔 기도 드리며 <내 탓이요, 내 탓이요>하면서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것 있지 않아요? 그 기도의 내용을 나는 잘 모르지만 그 기도야말로 죄와 보상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적 핵심을 잘 말해 주는 기도라고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내 탓이요>라는 기도 속에는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뜻과, 또 인류의 죄를 자기 탓으로 여기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의 보상이 있다고 봅니다.

태오 하사관님,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내 심중을 털어 놓을 수 없었던 내 자신이 한편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내 가슴의 진실을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는 가슴 속으로 깊은 감동을 받으며 진섭이의 이 기나긴 고백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한 대원이 술안주를 다시 데워 왔다.우리 둘은 사발에 또 술을 따라 마셨다. 그러자 진섭이는 못다한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아, 참!” 하며 또 말문을 열었다.

“태오 하사관님, 말을 마저 해야겠어요. 면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우리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고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도 격파되어 북으로 쫓겨가고 있을 무렵이었지요. 내 고향에 국군이 예상 외로 빨리 진격하자 미처 북으로 도망가지 못한 유장로는 읍내 청년들에 붙들려 매맞아 죽었답니다. 그때 면은 아버지의 강요로 인민군 의료대의 간호원으로 어느 전선에서 일하다가 도망 나와 살아났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매맞아 죽었고, 그때야 비로소 자기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도 내가 왜 갑자기 집을 떠나 버렸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자기 아버지를 대신해 나에게 사죄해야 할 의무감을 가졌대요.

그 후 면은 고향에서 살 수가 없어 무작정 부산에 내려왔으나 살아갈 길이 막연하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몸을 파는 여인이 되었대요. 나는 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를 불쌍히 여겼고 자기 아버지의 죄를 보상하러 나선 그녀를 동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나는 내가 갖고 있던 적잖은 돈에서 진해까지 가는 여비만 제외하고는 몽땅 그녀에게 주었지요. 면은 그 돈으로 새 삶을 시작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우리 둘은 참 신앙인이 되어서 도 내가 목사가 된 후에 기회 있으면 만나자는 막연한 약속을 하고는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진해로 돌아와 일선 출동을 자원하여 이곳에 왔지요. 선임 하사관님께 나의 회심(回心)의 기쁨을 전해 드리고 싶었고 또 내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진섭이의 지난 고백은 여기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중대는 전초 진지를 방어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나는 진섭이와의 지난날을 마음 속에 회상하며 그의 무덤 옆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내 곁에 없었다. 그러나 <태오 하사관님,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은 썩어야만 해요…> 하는 진섭이의 떨리던 목소리는 내 가슴 속에 메아리 되어 맴돌고 있었다.

 

 

 

 

제13장

목 마르다

 

진섭이가 전사한 며칠 후 우리 중대는 전초 임무를 제2대대 7중대에 인계하고 주 저항선으로 돌아왔다.

당시 우리 중대 분부가 있던 42고지와 내가 있던 36고지에는 수차에 걸친 중공군의 인해 전술 공격으로 말미암아 아군과 적의 인명 피해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42고지를 이름하여 유혈고지(流血高地)라 했고 36고지를 혼비고지(魂飛高地)라 불렀다. 주 저항선은 전초 진지에서 약 3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으며 중공군의 포탄이 심심찮게 떨어지기는 했으나 적어도 적의 야간 기습의 위협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군화를 벗고 오랜만에 잠을 잘 수 있었다.

주 저항선으로 돌아온 이튿날 나는 몇몇 대원들을 데리고 진지(진지) 밑에 버려진 어떤 빈 집으로 내려와 때가 구질구질한 몸을 씻고 군복을 빨았다.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목욕은 물론 세수도, 심지어는 이빨마저 닦을 수 없었다. 그 동안 우리는 단 하룻밤도 군화를 벗고 자보지 못했다. 그래서 군화를 벗으니 양말바닥은 썩어 있었고 발바닥은 무좀투성이였으며 발가락의 뼈가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이 사냥도 했다. 이를 제일 적게 잡은 사람이 술을 한 턱 내기로 하고는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그날 저녁 한 턱은 내가 내야만 했다.

두 주일 동안 우리는 잘 쉬었다. 그러나 7월 중순경에 제2대대의 4개 전초 진지들은 얼마 전에 우리 중대가 겪은 것과 같은 중공군의 맹렬한 공격을 다시 받았다. 2일간 계속된 혈전 끝에 그 진지들은 결국 중공군들에게 점령당하였다. 2대대의 다른 중대가 즉시 반격을 가해 빼앗긴 전초 진지들을 재탈환 하기는 했으나 유혈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적을 격퇴시키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 제3대대가 반격 명령을 받았고 10중대가 그것을 시도했으나 헛일이었다. 마침내 우리 92중대가 공격 명령을 받았다. 당시 9중대는 <또 죽었다, 9중대 빵꾸 때우기 9중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해병 연대에서 최강의 중대로 알려졌으며 마치 터진 곳을 빵꾸 때우듯 다른 중대가 싸우다 적에게 빼앗긴 진지를 재탈환하는 전투를 많이 해 왔었다. 그래서 빵꾸 때우는 9중대라는 별명이 생겼고 이러한 반격 명령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또 죽었구나 생각되어 <또 죽었다 9중대>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날 오후 3시 우리는 출동 준비를 완료했다. 오정근 중대장은 부상당하여 후송되었고 김창수 선임 장교가 중대장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나오 가장 친한 벗 중의 하나인 황태병 소위가 선임 장교가 되었고 나는 중대 선임하사관이었다.

우리는 미 해병대와 우리 해병대의 전차부대의 엄호를 받으며 천천히 전진했다. 그 동안 우리 포부대는 우리가 얼마 전에 구축해 놓기는 했으나 현재 적이 장악하고 있는 벙커들을 포격하고 있었다. 한편 미군 폭격기들도 적의 포부대를 감시하며 휴전회담 규정상 중립 도로를 침범하지 않을 정도의 폭격은 계속하고 있었다. 적은 8.15 해방 경축을 서울에서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서울의 관문인 장단지구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따금씩 내 곁을 걸어가는 대원들을 둘러 복 내 뒤에 따라오는 전우들을 돌아다 보기도 했다. 열여덟에서 서른 살 미만의 이 젊은 얼굴들,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그 젊은 얼굴들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전투가 얼마나 치열할 것인가를 잘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절박한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대원들은 나를 보고 마주 웃어 주었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 “살아 있다는 표시인 저 용감하고 순박한, 그러나 고독한 저 웃음을 어쩌면 내일 아침 다시 보지 못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이 내일 아침 뜨는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어떠면 나 자신도…” 나는  십자성호를 긋고 주님께 우리 모두의 보호와 구원을 위한 자비로운 은혜를 간구하였다. 그러자 내 전우들의 구령 문제가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저들은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알아도 믿지 않는다. 저들이 만일 오늘 죽는다면 저들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 그렇다, 저 용감한 사나이들의 영혼은 어떻게 되겠는가 말이다. 진섭이가 조롱한 그 목사의 말대로 <조국을 위한 희생>이라는 이름 아래 과연 그들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내 친구 박 하사관과 나눈 짤막한 대화가 기억에 떠올랐다. 그는 혼비고지 전초 진지에서 전사했는데 어느 날 이런 말을 내게 했었다. <태오 하사관, 내 생각에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은 아름다운 여인의 뜨겁고 다정한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하고 젊어서 죽는 거야. 나는 이런 사랑을 체험했다면 후회 없이 죽을 거야.> 이 말을 하며 쓸쓸해 하던 박 하사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이 아마 인생에 있을 수 있는 그 많은 불행 중의 하나가 되기는 하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진정한 불행은 천주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 믿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착한 일을 하지 않고 죽는 걸세.> 나도 부상당해 죽음의 선고를 받았을 대 그러했지만 죽음 앞에 나선 우리 젊은 군인들이 가장 억울해 한 것은 한 처녀와의 사랑과 구체적인 결혼의 경험 없이 죽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성간의 사랑과 성경험(性經驗) 이상의 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반드시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전우들의 영생문제를 생각하면 괴로웠다. 그래서 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내 친구들을 천주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맡기는 내 기도뿐이었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우리의 반격을 눈치챈 중공군은 우리의 진로(進路) 주변에 수많은 포탄을 퍼부었다. 이미 수명이 쓰러졌다. 그러는 동안 우리 공격부대는 공격대기선인 경의선(京義線) 철로둑에 도착했다. 우리는 철로둑 뒤에 몸을 눕히고 잠시 쉬었다. 아군의 전차 부대들이 우리의 공격 목적지를 맹타하고 있었다. 나는 땅에 엎드려 마지막 담배를 피웠다. 그 때 오진 수병이 – 그는 몇 시간 후에 전사했지만 – 창백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들꽃 한 옹 큼을 주었다.

“이 꽃이 무슨 소용이야?” 내가 물었다.

“이 꽃이 이 전쟁터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우정의 표로 드리는 겁니다.”

“오 수병 고맙네.”

“그런데 선임 하사관님, 수통에 술을 가지고 계시면 좀 주시겠습니까?”

오 수병은 무언가 초조한 표정이 되어 내게 물었다.

“지금은 안 돼. 하지만 이 전투에 이기고 나면 함께 축배를 드세.”

“선임 하사관님,  무섭습니다.”

“뭐가 무섭단 말인가?”

“죽음이 두려워요.”

“자네는 죽지 않을 거야.”

“저를 위해 기도 좀 해 주시겠습니까? 태오 하사관님.”

“자네를 위해 누구에게 기도를 드리라는 말인가?”

“선임 하사관님이 사랑하시고 믿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요. 저는 아직 그리스도교인이 아닙니다만 태오 하사관님이 믿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좀 알고 있고 그분을 존경합니다.”

“그분의 섭리와 자비에 자네를 맡기네…”

“고맙습니다, 선인 하사관님. 살고 싶어요.”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영원히 살아.”

“천당에 가기 전에 저는 이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저는 아직 스무 살 밖에 안 됐어요.”

“진아! 우리 머리 위로 지금 아군과 적의 포탄이 날아다니고 있지만 죽음보다는 우리가 승리한다는 신념과, 따라서 우리는 살아 남는다는 희망을 갖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 두렵다는 것은 이미 패배를 뜻하니까…”

“선임 하사관님의 그러한 신념이 부럽습니다. 태오 하사관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그것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오 수병은 좀 어려워하며 말했다. 나는 관심 있게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무언데? 말해 보게나. 내 수통의 술을 달라는 부탁이 아니라면 자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 줌세.”

나는 나 자신은 물론, 대원들에게도 공격 전에 술을 마시는 것을 일체 금해 왔다. 왜냐하면 공격 전의 술은 일종의 만용과 자포자기의 감정을 유발시킬 우려가 있으며, 따라서 냉정한 상황 판단을 흐리게 함으로써 오히려 적에게 사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 수병은 엄숙한 표정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있지 않아요? <파리 쫓는 놈> (내가 이마와 가슴과 양 어깨에 십자성호를 그을 때 마다 친구들은 나를 <파리 쫓는 놈>이라고 놀려대었다.) 이라고 남들이 선임 하사관님을 놀려대는 것 있지 않아요? 그것을 십자성호라고 했던가요?

“그래,  그런데 그 십자성호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그 십자성호를 내 이마와 가슴과 양  어깨에 좀 그어 달라는 겁니다. 저같이 아직 정식으로 미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물론! 십자성호는 누구에게나 복되고 성스러운 거야. 자네가 그것을 원한다니 기쁘네. 자, 그럼 우리 같이 십자성호를 그으세. 나를 따라서 내가 하는 기도를 되풀이하며 십자성호를 긋고 주님께 기구하세.”

오 수병은 나를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을 잔잔한 목소리로 읊으며 엄숙하게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주의 기도문과 성모송과 영광송을 나를 따라 바쳤다. 그리고 나서는 그는 아무 말 없이 감사의 뜻으로 미소를 입가에 띠고는 내 손을 힘 주어 잡고 다시 자기가 소속해 있는 3소대로 되돌아갔다.

약 20분 간을 우리는 철로둑 뒤에서 수니 다음 공격 태세로 들어갔다. 사흘 간 계속된 포격으로 말미암아 유혈고지는 폐허상태였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었다. 우리는 전차 부대를 앞세우고 천천히 전진했다. 전차들의 포격으로 적의 참호가 폭파되어 공중으로 흙먼지를 날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군 전차 부대는 이번에는 그 무서운 화염 방사기로 유혈고지에 불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것은 통쾌하기도 했으나 한편 무서운 광경이었다. 저 불바다 속에 한 명의 중공군도 살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리는 단숨에 유혈고지 정상을 향해 돌격했다. 그런데 적은 불타고 있는 참호에서 또 파괴된 사격호에서 우리를 향해 끈질기게 사격을 가하며 수류탄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홍수 같은 불바다 속에서도 그들은 아직 살아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내 곁에 있던 제주도 출신 이우식 분대장과 통영 출신 정진상 선임 하사관과 몇 명의 대원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중공군의 예상 외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그 이상 전진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휴대용 화염 방사기를 가진 한 대원이 과감하게 돌진하며 우리의 공격을 차단하고 있던 적의 참호에다 불을 퍼부었다. 이 영웅적인 감투 정신 덕택으로 우리는 드디어 유혈고지 우측 능선을 점령할 수 있었다. 화염 방사기는 이렇게 백병전에 절대적인 효력을 발생했다. 약 한 시간 동안 계속된 육박전고 소탕전 끝에 우리는 드디어 유혈고지를 완전 점령했다. 그러나 멀리서 쏘아대는 적의 포탄은 쉴새 없이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적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파괴된 교통호와 벙커를 수리하고 진지를 구축해야만 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식량이 떨어지고 특히 물이 바닥이 났다. 또한 탄약도 충분치 않았다. 그러나 중공군은 우리가 점령한 유혈고지를 포위하고 있었고 적의 포부대는 끈질기게 포격을 가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투를 위한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는 허기는 견딜 수 있었으나 목마름은 참을 수 없었다. 그 고통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은 갈증이라고 믿는다. 내 대원 중의 하나인 어떤 결혼한 친구는 <누가 물 좀 갖다가 내 불타는 목을 적셔 주면 내 마누라를 하룻밤 아낌없이 빌려 주겠다>고까지 농담을 할 정도였다. 하여튼 갈증은 무섭게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있는 벙커 안에는 아군인지 적군이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으며, 죽은 지 며칠이 지난 듯한 이 시체들은 석은 냄새를 풍겨 우리를 더욱 숨막히게 하고 공기를 역하게 만들었다. 한편 부상자들은 상처의 고통과 갈증으로 야수처럼 신음하며 울부짖었다. <물을 줘요, 물을!> 그들에게 물을 주 수 없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나는 그렇게도 가슴을 찌른 듯한 고통을 일지기 체험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저 말로만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갈증에는 이러한 말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상처를 입은 부산 출신 장길환 수병이 내게 말했다.

“선임 하사관님, 저는 상처의 고통보다 갈증이 더 괴롭습니다. 제발 물 좀 주이소. 얼른 물좀 주이소. 목말라 죽겠십니더.”

“이 자식아! 우리가 적에게 포위당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아? 나는 너에게 줄 빵도 물도 없다. 하지만 저녁까지 기다려. 그러면 지원 부대도 올 거고 식량도 물도 보급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너는 후방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도 받고 물도 실컷 마실 수 있을 거야.”

“선임 하사관님, 속이지 마이소. 저는 병원에 옮겨지기 전에, 그리고 오늘 서산으로 해가 지기 전에 틀림없이 죽을 겁니더. 저는 이미 살 희망을 버렸습니더. 저는 이 죽음 앞에 한 가지 소원 밖에 없읍니다. 물을 실컷 마시는 것, 그리고 나서 편안히 죽는 것, 그 뿐입니더. 제발 물 좀 얻어다 주이소. 안 그라면 차라리 저를 죽여 주이소. 이  갈증을 이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더.”

“이놈아! 바보같이 굴지 마! 참아! 오늘 저녁까지 참으면 살 길이 생길 테니까…”

“저를 죽여 주기 싫으시면, 한 인간의 마지막 이 우정의 제의를 거절하신다면, 선임 하사관님, 제 총을 주이소! 제가 스스로 죽겠십니더. 제가 나이는 몇 살 위지만, 선임 하사관님을 존경했습니더. 제 총을 주이소.”

“그건 안 돼! 자네만의 갈증이 아니야. 우리모두의 목구멍이 불타고 있어. 참아! 남들이 참는 것을 자네라고 못 참을 리 없네. 참아!”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제가 최후의 순간까지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이 좋으시겠습니꺼? 저는 선임 하사관님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인정이 없는 줄은 몰랐십니더. 제 총을 주이소!”

나는 그가 오래지 않아 숨을 거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내 칼빈총을 집어 들어 그의 갈증과 고통을 끝내 주려 했다. 내 양심은 우정의 이름으로 그를 죽이도록 명령하고 있었다. 또 그렇게 하는 것만이 한 벗에 대해 나의 우정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칼빈총을 그에게 겨누면서도 내 양심은 하등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이 불쌍한 전우를 죽여 주는 것만이 그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선 행위라고까지 믿었다. 하지만 실탄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나는 생각을 달리했다.  처음에는 눈을 크게 뜨고 나의 행동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눈을 감으며 “선임 하사관님, 이미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십니더. 발리 쏘이소. 태오 하사관님, 감사합니더.” 하고 말하는 그를 바라보는 순간 방아쇠를 쥐고 있는 손가락이 굳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포기했다. 그의 눈에 내가 잔인하고 몰인정한 인간으로 비칠 각오를 하고 그를 죽이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그에게 물을 좀 구해다 줄 방법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이윽고 결심했다. 그래서 내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이라는 것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주님, 주님께서 제 벗을 죽이는 것을 금하시니 그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도록 물을 좀 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면서 전초 진지를 한 바퀴 돌아 보려고 벙커를 나섰다. 이 벙커에서 저 벙커로 뛰어다니는 내 뒤를 적의 포탄이 쫓아다니고 있었다. 대원들은 내가 미친 줄 알고 나를 붙잡기도 했다. 내 행동이 그들에게는 영락 없는 자살 행위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 물” 하며 쫓아다녔다. 아무도 물을 갖고 있지 않았다. 물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전사자의 수통에 혹시 물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후딱 떠올랐다. 이번에는 수통을 허리에 매달고 있는 전우의 시체를 찾아 나섰다. 여전히 적의 포탄은 나를 뒤쫓고 있었다. 나는 폭발하는 포탄이 날리는 흙 가루 먼지를 온 몸에 뒤집어 썼다. 마침내 무너진 벙커에서 흙에 반쯤 파묻혀 있는 전우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것을 파헤쳤다. 나는 얼른 수통부터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거짓말처럼 물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내 가슴은 뛰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귀한 물을 얻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내 옆에서 포탄이 작열하고 있는 것도 잊은 채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내 두 눈에서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위생 하사관을 한 명 데리고 내 벙커로 무사히 돌아왔다.

내가 벙커로 들어서는 것을 보자 장 수병은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선임 하사관님! 물, 물, 그렇지 않으면 제발 주여 주이소.”

그 순간 나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망할 자식, 그렇게 짐승처럼 울부짖으면 정말 주여 버리겠다!”

나는 그를 발로 걷어 차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어떻게나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는지 발길질 할만한 자리도 한 군데 없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 수병, 방금 네게 한 욕설을 용서해 주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 했네. 장 수병, 자 여기 물이 있어, 네가 그렇게 찾던 물을 가지고 왔네.”

물을 몇 모금 마시자 기쁨이 그의 얼굴에 다시 찾아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피 묻은 자기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 내렸다. 위생 하사관은 그에게 진통제 주사를 한 대 놓고 수면제를 먹였다. 잠시 후 그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나는 다른 부상자들에게도 물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지쳐서 벙커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이상한 감촉에 잠을 깼다. 어떤 사병이 내 곁으로 몰래 다가와서 그 수통을 훔치려다가 나에게 들킨 것이다. 나는 수통을 잡은 그의 팔을 낚아채고 주먹으로 얼굴을 두세 번 갈겼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그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나는 흥분하여 그에게 소리질렀다.

“이 자식아, 이 물은 내 목숨과 같은 거다.이걸 구하려고 나는 온갖 위험을 무릅썼단 말이야. 그리고 이 물은 우리 부상자들의 것이야.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란 말이야.”

그는 아무 대꾸도 없이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측은하여 할 수 없이 그에게 그 귀중한 액체를 몇 모금 주었다. 이번에는 나 자신도 열로 탄 목을 축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며 수통 뚜껑을 닫았다. 나는 다시 벙커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때 눈을 감고 누워있던 나는 갑자기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고 하시던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아주 생생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골고타 언덕의 정경이 환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매맞아 멍이 들고 채찍질로 얼룩진 예수님의 몸, 가시관을 쓰신 그분의 머리, 거기서 흐르는 피고 물든 얼굴, 못에 박힌 양팔과 발에서 떨어지는 핏방울, 그리고 온 몸의 무게로 지탱하고 있는 그 메마른 양팔… 그런가 하면 무슨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듯 호기심에 찬 로마 군인들, 그리고 야유와 조롱과 저주와 악담으로 아우성치는 군중들… 그 군중들의 미친 듯한 고함소리가 내 귓전에 시끄럽게 들려오는 듯하여 나는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주님, 이 칼빈총으로 당신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있는 배은망덕한 군중들을 한 사람 남기지 않고 모조리 쏘아 죽이게 허락해 주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그 처참한 얼굴을 내게 돌리신 채, <태오야,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목마르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사랑의 절규! 예수님은 진정 목말라 하셨다. 나는 그때 순간적으로 예수님이 <목마르다>하신 뜻을 분명히 깨달았다. 즉 <사랑은 목말라 한다>라는 사랑의 진리를. 남을 위한 착한 마음, 남의 선을 아껴 주는 마음, 인간의 악을 미워하는 마음, 남의 딱한 사정을 동정하고 이해해 주는 마음,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꺼 버리지 않는(마태복음 12장 20절) 예수님의 인자한 마음, 남의 잘못을 대신 해 참아 받는 그 고통스러운 마음, 남의 생명을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시키는 마음, 이러한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한 마디로 <목마른> 사랑의 마음이었다. 예수님은 진정 목말라 하셨다. 아니 지금 이 시간에도 그분은 목말라 하신다. 그러자 나는 <나는 세상 끝날 대까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라는 마태오복음 맨 끝장의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함으로써 항상 함께 계실까? 그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물론 그분은 이 불의한 사회제도 아래서 인간의 존엄성마저 빼앗긴 불우한 인간들과 그리고 착하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마태오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슬퍼하는 사람들과, 온유한 사람들과,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과, 그리고 전쟁이라는 이 거대한 악의 희생이 되고 있는 불쌍한 이 부상병과, 우리 모두와 함께 바로 지금 여기 이 전쟁터에 함께 계신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다.

“주님께서는 포탄에 맞아 몸이 찢어져 목말라 하는 이 불쌍한 전우들과 함께 목이 마르신 것이 아닙니까? 당신은 아직도 골고타 언덕의 그 십자가에 매달려 목말라 하시는군요. 그리고 주님, 당신께서 시작하신 이 인류의 구속사업이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고, 그래서 주님의 갈증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나는 믿어야만 하겠습니까? 주여, 그것이 사실이라면 주님의 갈증을 풀어 드리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이상하리 만치 생생하게 이런 생각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러는 동안 한 대원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내게 물을 좀 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그에게 수통을 내밀면서 “그래, 우리 다같이 한 모금씩 나눠 마시자”고 말하고는 조금씩 물을 나눠 마셨다. 그리고는 벙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벙커 밖에서 작열하는 포성은 끊임없이 들려왔다. 장 수병은 평화로이 잠들어 있었다. 나도 남들처럼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때 개어 있었는지 잠이 들어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의 우물>가에서 주고 받은 <생명의 물>에 관한 성경 말씀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게 되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3~14절)

나는 장 수병 옆에 누워 주님께 기도 드렸다.

“주님, 그 사마리아여인에게 말씀하신 생명의 물을 제게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로 하여금 당신의 영원한 갈증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 주시고 다시는 제 영혼이 목마르지 않게 해 주소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십시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으로부터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입니다.> (요한 복음 7장 37~38절) 이렇게 당신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저로 하여금 당신을 참되게 믿게 해 주시고, 제 신앙에서 당신의 <생명의 샘>이 솟아올라 우리 겨레의 목마름을 조금이라도 적시게 해 주소서.”

그날 저녁 여섯 시쯤 한 20분간 세찬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리는 적의 포격으로 인한 죽음의 위협도 무릅쓰고 그 귀중한 빗물을 철모에 받아 아주 만족스럽게 갈증을 풀었다. 철모의 물을 들고 벙커 안으로 들어가 장 수병을 깨웠으나 그는 이미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는 그 물로 피 묻은 그의 얼굴과 두 손을 깨끗이 닦아 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적의 반격에 대응할 만큼의 충분한 탄약도 갖고 있지 않았다. 적은 우리를 전멸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새로운 반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적의 포탄이 가끔씩 떨어졌고 아군 포부대의 포탄도 우리 위를 날아가 적지에 떨어지곤 했다. 비교적 평온한 틈을 이용해 나는 3소대가 배치되어 있는 능선으로 오진 수병을 찾아갔다. 약속대로 그와 술 한잔 나누고 싶었다. 그때 적의 포탄이 내 곁에서 폭발했고 아주 작은 파편 조각 하나가 술이 담긴 내 수통에 구멍을 내고 말았다. 구멍이 나서 술이 모두 새어나간 수통을 그에게 보이려고 오진 수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림이 아니었다. 그는 그 전날 벌써 전사했던 것이다. 나는 그이 시체 옆에 앉아 이틀 전에 그가 내게 준 들꽃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나는 그 꽃을 그의 싸늘히 식은 가슴에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의 이마와 가슴과 양 어깨에 십자성호를 그었다. 그러면서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그와의 지난 날을 잠시 회상해 보았다.

우리는 유혈고지에서 사흘 간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중공군은 반격을 포기한 듯 사천강 너머로 철수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부상병을 후송하고 식량과 탄약 보급도 충분히 받았다. 그리고 일 주일 후 제1대대 2중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임진강 후방으로 내려와 며칠 간의 휴식을 취했다.

그날 이후 나는 물 마시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또한 나는 목이 마를 때마다 생명의 물에 대한 복음 말씀과,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목마르다>라고 하신 그 처절한 부르짖음을 늘 생각한다.

 

 

 

 

제14장

죽음을 넘어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그 동안 나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부상까지 한 번 당했다. 그러나 대단한 상처로는 생각되지 않았기 대문에 병원으로 후송되기를 거부했다. 그 뿐만 아니라 나만의 편안과 안전을 위해 이 전선을 떠날 수는 없었다. 전시하의 군인으로서의 의무감보다는 이 전선에서 무의미한 희생 속에 온갖 인간고(人間苦)를 겪고 있는 전우들에 대한 동정과 우정을 위해 그들 곁에 남아 있고 싶었다. 전쟁은 살인적인 무기와 전술로 인하여 점점 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고 공격이 잦아지는 그만큼 희생도 매일같이 늘어만 갔다.

비교적 평온한 어느 날, 나는 미국인 군종 신부에게 소개되었다. 3년째 고백성사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죄를 벗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나는 잘 하지 못하는 영어로 고백을 할 수 없었다. 그랬더니 우리 말과 영어가 동시에 씌어진 고백표를 보여주어서 내 죄를 가리키는 번호를 짚어가며 고백을 했다. 그러나 가슴을 툭 터놓고 내 지나온 생활을 자세히 말할 수 없었고, 특히 천주님에 대한 나의 반항의 체험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고백을 불완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내 죄의 사람을 받았다.

1942년 가을 추석 명절을 앞둔 어느 날, 우리는 인민군과 중공군의 대규모적인 합동 공격을 받았다. 일 주일 동안 계속된 영웅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전초 진지를 다시 빼앗겼고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할 용기조차 상실했다. 우리 해병 전투단의 주력의 반 이상이 전멸당했고 살아 남은 사람들도 죽도록 지쳐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주일 동안 거의 먹지도 자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우리 9중대는 또 다시 반격 명령을 받았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나는 모든 시도가 완전 실패로 돌아갈 것임을 너무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 작전 명령은 우리에게는 자살 행위로 보였다.

공격 전날 나는 몹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음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불안과 내일 아침이면 이미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이 전당에서 죽으리라는 것을 예감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숙과 언젠가 꾸밀 우리의 가정을 위해 살아 남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숙과 함께 전쟁으로 상처 입은 우리 조국을 위해 나름대로의 봉사를 해야 한다고 늘 마음 속에 다짐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는 죽음에 대한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깊은 밤중에 나는 이 세상에 하직을 고하고 또 이제 곧 시작될 내 새로운 생명에 인사를 하기 위해 벙커에서 밖으로 나왔다. 나는 잔디가 깔린 나지막한 언덕을 발견하고 거기에 벌렁 드러누웠다. 공산군도 우리도 그 힘든 전투로 기진맥진해 완전한 휴식에 들어가 있었다. 자연은 죽음의 정적에 묻혀 가시지 않은 화약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맑고 밝은 달빛 속에 밤은 매우 아름다웠다. 자연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 같았다. 가을 벌레의 합창도 들려왔다. 그러나 그 합창 소리는 마치 이 세상에 대한 하직의 노래같이 들리기도 했으나 하늘과의 최초의 다정한 접촉인 <레귀엠> (라틴어 장송곡)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천주님에 대한 반항심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죽음이란 어쩔 수 없는 숙명에 대한 체념만은 아니었다. 나는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속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늘에는 너무나 따스한 미풍이 감돌고 있어 마치 초여름의 해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을꽃의 야생적인 향기가 담뿍 스며 있는 대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마시면서,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곧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해지는 기분을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내 친구 전 중위가 죽기 직전에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천국에 있는 복된 사람들은 이 비참한 세상에 돌아오고 싶은 생각은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지금 전쟁과 내 고통에도 불고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몹시 섭섭해.>

게다가 나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이슬에 촉촉히 젖은 풀 위에 누워 나는 뺨을 만져 보았다. 뺨은 매끄럽고 젊음의 힘찬 기운으로 따뜻했다.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심장은 힘차게 규칙적인 율동으로 쉴 새 없이 뛰고 있었다. 손발을 보았다. 그것들은 지극히 싱싱하고 유연히 내 의사대로 움직였다. 나는 내가 몇 시간 후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기운이 펄펄한 내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 움직이지 않는 덩어리로 변하리라는 것을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일 것이다.

나는 달빛이 환하고 별이 총총히 박힌 끝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큰 별들을 골라내어 내 가장 귀한 사람들의 이름을 붙여 주며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기약을 나누고 싶었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고향의 가족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에 가 있을 현을 떠올렸다. 그러나 특히 나는 사랑하는 숙을 부르며 중얼거렸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숙, 숙은 이 순간에 내가 어느 정도의 감격과 사랑의 열정으로 숙을 부르고 있을지를 상상하지 못할 거야. 우리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헤어진 뒤로 몇 번이나 이 전쟁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 내 사랑하는 숙, 내가 숙을 만났고, 숙과 함께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미기를 원한 이 세상에서 숙의 이름을 불러 보는 것도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 거야. 저주스러운 이 전쟁이 우리가 가정을 꾸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구먼.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의 헤어져 있음이 다행인지도 몰라. 숙이 내 아내가 이미 되어 있다고 가정해 봐. 그러면 내가 죽은 뒤에 숙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될까? 나는 자주 우리를 헤어져 있도록 한 천주님을 원망했어.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야. 우리는 결정적인 언약을 하기도 전에 헤어졌어. 숙이 나에 대해 수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숙은 자유의 몸이야. 숙이 원하는 대로 가정을 꾸밀 수 있고 또 꾸며야 해. 이 순간에, 그래도 나는 내 마지막 사랑의 의무를 다해야 해. 숙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겠어. 나를 잊어 줘.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나를 너그럽게 용서해 줘. 내 사랑하는 숙,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 사심 없는 사랑으로 내가 그렇게 빌고 있다는 것을 믿어 줘.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참으로 숙만을 위한 순수한 사랑으로 숙을 사랑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 미구에 나를 거두어 갈 나의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여 줘. 우리의 이별은 영원한 재회를 기약하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니까. 온 힘을 다해 숙을 포옹해. 잘 있어, 아름다운 내 사랑하는 숙!”

나도 모르는 사이에 뜨거운 눈물이 몇 줄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자 갑자기 발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람쥐 한 쌍이 빵 부스러기를 나누어 먹고 있었다! 아아! 나는 얼마나 그들의 평화와 자유를 부러워했던가! 그들은 참으로 자유로웠고 전쟁을 치르는 우리의 불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나는 파스칼의 말을 회상했다. <창공, 별, 지구, 나라 따위 모든 물체는 정신 세계만한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정신 세계는 자기의 운명을 알고 있으나 물체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자신의 운명을 아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꽃 한 포기, 나무 한 그로, 별 하나, 심지어 야생의 다람쥐가 되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비록 자연의 지배자로 자처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기 오만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 괴상한 동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또 구름을 쳐다보며 아버지의 친구이셨던 어느 불교 스님이 전에 가르쳐 준 조그만 글귀를 기억에 떠올렸다.

 

인생은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 것인가?

죽음은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생명은 무엇인가? 아아! 하늘에 피어 오르는 한 조각 뜬구름이로다.

죽음은 무엇인가? 아아! 하늘에서 사라지는 한 조각 뜬구름이로다.

구름은 제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도다. 구름은 다만 하늘에 떠 있게 마련인 것이 아니라 제 본 고향인 땅에 떨어지게 되어 있도다.

오는 생명도 가는 죽음도 구름과 곡 같으니

이승의 우리 목숨은 그 자체에 본질이 있지 않도다.

우리의 목숨은 이승을 위해 뿐 아니라

저승에서 살도록 만들어졌도다.

 

내 나름대로 해석한 이 불교시는 나로 하여금 우리 그리스도교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죽음은 영혼과 육신의 분리가 아니라 인간과 천주님과의 영원한 만남이라는 것을 회상케 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 뿐 아니라 특히 천주님의 나라에서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우리의 지상생활은 천주님의 전능에 의해 변형되고 또 생물학적인 존재의 부패성(腐敗性)에서 벗어난 사후(死後)의 생명에서만 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썩지 않는 영생을 위해 나는 죽음을 달게 받으려는 것이다.

나는 주님께 영원한 생명을 주십사고 기도 드리려고 잔디 위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주의 기도와 성모송과 사도신경을 천천히 읊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라는 성모송의 끝 구절은 나에게 큰 희망과 위안을 주었다.

세상에서는 얼마 후 죽을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형제 자매도 애인 숙도 내가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을 전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께서는 언제나 내 곁에 계시면서 내 재판관이며 구세주이신 분께 나 대신 기구해 주실 것이다. 나는 동정 성모님에 대한 감격스러운 확신으로 성모송을 수십 번이나 암송했다. 그리고는 내 죄를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참으로 나를 실망시켰다. 죄가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천주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천주님이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 복음 3장 16~17절) 하신 성경 말씀을 생각하고 구세주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겼다. <나는 도적처럼 오리라>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러나 죽음이 가까워옴을 신앙 안에서 의식한다는 사실은 벌써 분지가 되어 있다는 뜻이 아닌가? 나는 천주님께로 간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죽는다는 것은 큰 은혜임을 깨달았다.

그때, 그러한 상황 속에서는 매우 이상한 일처럼 보이는 성덕(聖德)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성총과 성령이 그리스도교인의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예외적인 일도 아니고 비상한 일도 아니며 비교적 쉽기까지 한 일처럼 보였다. 성인들은 예외적인 남자나 여자가 아니라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분들은 천주님께로 가기 위해 나보다 더 많이 더 끈기 있고 충실하게 노력한 것 뿐이다. 나도 좀 더 용기 있게 노력했더라면 성덕의 길에 들어서 있을 것이다. 지난 날의 내 비열한 행동과 태만했던 내 신앙생활이 몹시도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천국에 직접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나를 위로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조금이나마 남에 대해 베푼 착한 일, 동정, 한 마디로 말해 사랑이었다. 그렇다. 죽음을 초월해 남는 것은 사랑 뿐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I 고린토 13장 8절) 나는 마지막으로 사랑을 베풀기 위해 내 조국과, 동포와, 가족과, 또한 애인 숙을 위하여 죽고 싶었다. 나는 내 육체와 영혼을 사랑의 제물로 주님께 바치고자 했다. 그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의 정령과 사랑까지 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쏟아 버릴 수 있다면 더 훤할 게 없을 것 같았다. 내 마지막 고백성사가 비록 불완전한 것이기는 했어도 나를 새롭게 하늘나라로 이끌어 주는 힘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천주님은 너무나 자비로우셔서 사죄를 받게 하시려고 나를 그때까지 살려 주셨던 것이다.

우리가 처해 있던 전술적 상황으로 보아 다음 공격에서 죽음을 모면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 거의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죽음이 사랑과 의무의 마지막 행동으로 주님의 속죄하는 죽으심과 합치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내게는 죽음이 피 흘리는 제사요 진정한 순교와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무의미한 이 더러운 동족상잔의 전쟁과 우리 지도자들의 비타협적이고 맹목적인 정치 이념이 초래한 민족 분열의 희생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과, 우리 민족과 전인류의 구원을 위해 깨끗이 죽고 싶었다. 아벨의 피와 같이 우리 죄 없는 젊은이들의 피는 정녕코 우리 민족과 인류를 양심과 이성과 사랑에의 길로 되돌아오게 이끌 부르짖음이 될 것이다. 세상의 구원을 돕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서 순교하려는 그 엄숙한 순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색깔이 바랜 보잘 것 없는 그림처럼 보였다. 쾌락, 여자, 명예, 재물, 학식, 이 모든 것들이 내게는 길 위에 이리저리 굴러 다니는 생명 없는 낙엽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인간적 쾌락을 동경했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인과의 달콤한 결혼생활의 꿈을 여지 없이 빼앗아가는 이 전쟁터에서의 죽음을 나는 가장 증오했고 억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설령 솔로몬 왕처럼 내가 수백 명의 미녀들을 거느리고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22세의 젊은 나이로 몇 시간 후 총탄에 맞아 산화할 나의 이 운명 앞에 그러한 쾌락이 무슨 소용이 잇겠는가! 나는 세속적인 명예를 사랑했었다. 비록 천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였지만 나름대로의 꿈도 컸었다. 하지만 내가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과 같은 세속적인 명예와 영광을 차지했었다고 하자. 얼마 후 미친놈처럼 이성 없이 사우다 팔 다리가 잘려저 죽게 될 나에게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나는 재물도 탐내고 학식도 사랑했었다. 그래서 코피를 쏟으며 농사일에도 열중했었고 달구지를 끌며 나무장사도 해 보았다. 그런가 하면 그 바쁜 농촌의 여가를 이용해 독서하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 천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자기의 영혼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되겠느뇨>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설사 내가 온 천하의 제물을 다 소유하고 또 이 우주의 오묘한 비밀에 정통할 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사형 집행을 몇 시간 앞둔 죄수와 같은 운명을 지닌 나에게 그게 정녕코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초월했고 내 죽음은 나를 이 세상과 그 유혹에 대한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나는 단 한 가지 소망 밖에는 없었다. 당신의 죽음으로 세상을 이기신 주님처럼 천국에 가는 것, 그것 뿐이었다. 이러한 상념들이 지극히 순수한 기쁨으로 나를 가득 채워 주었다.

이튿날 새벽 우리 9중대는 계획된 반격을 위해 출동하는 대신 전투단 본부에 소화되어 갔다. 아침 나절 우리는 작전 계획을 세밀히 재검토 했다. 오후에 있을 공격의 모의 전투 연습을 한 다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차려진 노천연회에 참석했다. 맛있는 음식이 잔뜩 나왔다. 구미를 돋구는 과일,과자, 불고기, 김치, 잡채, 몇 마리 분의 돼지고기 그리고 수십 병의 술까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맛보는 마지막 잔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 닥쳐올 죽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실컷 먹고 마셨다. 보통 나는 전투를 하기 전에는 일체 술을 입데 대지 않았지만 그날만은 마지막으로 맛있는 음식과 술을 골고루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술도 많이 마셨다. 어느 때보다 음식과 술 맛이 좋았다. 잔치가 끝난 뒤 나는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욕설을 던지고 하는 전우들을 벗어나 조용한 곳으로 갔다. 나는 외딴 곳에서 천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그분의 자비를 빌고 싶었다. 어느 큰 나무 뒤에서 우리 대대의 위생하사관 한 명이 묵주신공을 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천주교인인 것을 알고 매우 기뻤다. 나는 항상 외톨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자신이 거나하게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감히 기도를 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와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 기도를 드렸다. 오후 일곱 시 경에 전투단장 김석범 장군이 우리에게 장황한 애국적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말들이 우리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조국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그의 격려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영웅적인 죽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우리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려는 시도는 무익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패전의 망각과 치욕 속에서 죽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곧 출동했다.

우리는 밝고 부드러운 추석 달빛을 받으며 죽음의 길을 향하여 전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내 영세성사의 완성처럼, 내 최후의 파스카 즉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향한 결정적인 걸음처럼 받아들였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그분은 당신의 죽음을 예상하셨으나 그것을 용감히 받아들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씀 하셨다. 그분은 죽음을 두려워하셔서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아버지 이 시간에 저를 구하여 주소서> 하고 부르짖으신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덧붙이셨다. 천주님의 뜻을 따라 그를 붙잡으러 온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시고 십자가에 당신을 바치는 최후의 순간에 이렇게 또 말씀하신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본받고 내 죽음의 언덕에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원했다. < 주님, 주님과 같이 제 죽음을 바치게 도와주소서. 제 영혼을 주님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며칠 전 내린 비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논밭을 우리는 가로질렀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8개 소대로 보강된 근 3백 명의 대원이 소대 단위로 나뉘어 옆으로 나란히 줄지어 전진했다. 밤 10시경 공격대기선에 도착할 때까지 적은 총 한발 쏘지 않았다. 밝은 추석 달밤, 적은 우리의 공격 행동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으련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예상대로 우리가 공격을 개시한 순간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쓰러지는 전우들의 비명소리를 뒤에 들으며 적지를 향해 미친 듯이 돌진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에게는 초인 같은 힘과 용기가 있게 마련이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게 없었다. 우리는 빗발치는 포탄 속에 가슴을 내밀고 달리고 또 달려 단숨에 적지에 올라갔다. 그리고 화염 방사기와 수류탄으로 적의 벙커를 폭파시키고 고지 일각(一角)을 점령했다. 적도 우리 못지 않게 용감했고 결사적이었다. 우리는 치고 박고 쏘고 찌르는 피비린내 나는 육박전을 계속했다. 거기에는 이미 조국 통일이니 민족적 양심이니 하는 따위의 이념과 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상대방을 죽이고 더 많이 죽여야 한다는 차가운 전투법칙만이 재배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살아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우리들 중에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발동 걸린 기계처럼, 총탄이 가슴을 뚫어 우리의 생명이 정지될 때까지 그저 싸우기만 했다. 사정 없이 적을 사살했다. 우리의 가슴 속엔 인간 생명에 대한 추호의 연민의 정도 없었다. 그것은 확실히 지옥이었다.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지옥이라면 그곳은 분명히 지옥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몇 시간이나 싸웠을까?… 동녘 하늘에 엷은 안개 같은 여명이 비치기 시작할 무렵 우리에게는 단 한 발의 실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고지 우측에서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공산군의 반격 부대가 바다 밀물처럼 출렁거리며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대항할 길이 없었다. 중대장은 철수 신호탄을 공중에 쏘아 올렸고 우리는 적의 총탄을 등으로 받으며 고지를 뛰어내렸다. 그리고 휴전회담장으로 통하는 중립지대 도로 주변으로 후퇴했다.

얼마 후 날은 완전히 밝았다. 전투단 본부에서 가져온 조반용 된장국을 한 모금 마셨을 때 입안이 온통 쓰리고 아픈 것을 느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알았다. 전투 도중 악을 쓰고 고함을 지르며 입술과 혀를 깨물어 입안이 완전히 헤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상하게도 살아 있다는 이 의식은 나에게 기쁨보다는 울음을 터뜨리게 했다. 울어야 할 이유도 분명히 모르면서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울음으로써 내 슬픔과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아마 그날처럼 슬프게 운 일이 내 일생 다시 없을 것이다.

그날의 전투에서 우리는 150명의 전우를 잃었다. 김창수 중대장과 내 친구 황태병 선임 장교도 부상되어 내려갔다. 포탄 파편이 내 방탄 조끼의 등 쪽을 내리쳤고 또 철모 모서리를 찢었으나 나는 무사했다.

며칠 후 당시 해병 전투단 부단장이었던 남상휘 대령은 나를 연대 본부로 불러 해병대 최초의 가톨릭 군종인 유신부께 소개해 주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내 자세한 죄의 내용을 종이에 서서 고백성사를 받았다. 그것을 읽고 나자 고해신부는 내게 말씀하셨다.

“장하네! 자네는 벌써 너무나 고통을 많이 당했구먼. 그러니 중한 보속은 필요 없어. 그저 주님께서 자네에게 보여 주신 모든 자비에 감사하는 뜻으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함상 영원히, 아멘> 을 세 번 외고, 도 전쟁에 희생된 모든 이들을 위해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한 번 바치게. 그 뿐일세.”

“그렇지만 신부님, 제 수 없는 죄로 보아 제게 너무 관대하십니다. 공정하게 큰 보속을 주십시오. 저는 일 주일 동안의 금식도 달게 받을 용의가 있습니다.”

“여러 말 말게, 이 사람아.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천주님의 자비와 공으로 주시는 용서를 깨닫게. 그러니 평안히 가게.”

고해신부를 떠나 오면서 나는 크나큰 기쁨에 사로잡혔다. 내 영혼이 순결하게 재생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도 강렬하고 그렇게도 거룩한 기쁨을 맛본 적이 없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천주님을 뵈오리니!> 하신 구세주의 행복은 얼마나 참된 것인가! 3년 동안 나는 천주님께 대한 내 반항과 작죄(作罪)로 너무나 고통을 당했었다.  이제는 이 고뇌들이 사라지고 내 영혼은 수정 같이 맑았다! 그런데 진지에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갑자기 자살을 하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엄습했을까? 나는 나의 온전한 순결을 보존하기가 소원이었다. 그것이 전쟁 중에는 어렵다 못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 어떤 경우를 당하면 전장에서 이성을 잃고 미쳐서 짐승같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때 내 순결을 간직한 채 죽었으면 했다. 그리스도교인에게 자살은 큰 죄악이 된다는 것을 나는 잘 깨닫고 있었다. 나는 나를 즉시 주님 곁으로 불러 주십사고 진심으로 그분께 기도 드렸다. 그러나 <당신의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소서!>하고 덧붙였다.

그날 밤 나는 너무나 기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만일 천주님이 내 목숨을 남겨 주신다면 내 생명에 어떤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제직에 대한 생각이 갑자기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신부가 되어 참회의 성사가 내게 마련해 준 위로와 평화를 죄인들에게 나누어 주리라. 그러나 그렇게 죄 많은 청춘을 보낸 뒤에도 아직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나는 그 고요한 밤의 몇 시간을 할애해서 숙을 위해 진중일기를 썼다.

<사랑하는 숙, 나는 아직 살아 있어. 전우들이 수백 명씩 내 주위에서 죽어가는데 이렇게 죽음을 모면하고 있으니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지! 나는 천주님의 뜻이 내게 무슨 특별한 일을 요구하시리라고 믿기 시작하고 있어. 그것이 사제직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까지 해. 너무 순진한 탓으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만약 신학교에 들어가면 숙의 사랑을 단념해야 하리라는 생각에 내 영혼은 탄식하고 있어.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것은 숙이 잘 상상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천주님의 뜻을 거역할 수가 있을까? 나는 백 번 죽어 마땅했어. 지금의 내 목숨은 천주님의 사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덤으로 받은 목숨같이 생각돼. 만일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숙에 대해 크나큰 추억을 간직한 채 숙을 버리는 희생까지 받을 용의가 있어. 언젠가 숙이 내게 말한 바 있지… “신부나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속에서 살기 어려워서나 도는 세속이 싫어서 피하는 그러한 부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세속을 보다 더 사랑하고 구제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내가 신부가 된다면 그것은 이 비참한 세상과 전쟁을 미워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믿어 줘. 나는 세상을 더 낫게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가고 싶어. 숙은 나의 이 감정들이 진실하다는 것을 충분히 믿어 주리라 확신해. 그리고 마음이 고결한 숙은 내 계획을 찬동해 주리라 생각하고 있어.>

그때부터 나는 숙을 부르는 애칭을 바꾸었다. 내 일기에 숙은 그저 <내 친구>라고만 씌어지기 시작했다.

 

 

 

 

제15장

갈림길

 

1952년 12월 나는 해병대 사령부 근무 발령을 받고 그 당시 해병대 사령부가 있던 부산으로 내려갔다. 일선을 마지막으로 떠나던 날 나는 작별인사를 하려고 참호들을 돌며 전우들을 모두 찾아 보았다. 그들과 악수를 나누며 나는 4년 전 가족들과 헤어질 때보다 더 큰 고통을 느꼈다. 내 전우들은 내게 있어서 친형제 이상의 존재였다. 형제들이 삶의 동반자라면 전우들은 죽음의 동반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함께 죽는 것은 함께 사는 것보다 더 강렬하고 더 감격적인 것 같았다. 며칠 뒤에 전사한 친구 윤 하사관이 우리의 주진지였던 산 밑에까지 나를 배웅하며 말했다. 윤 하사관은 전쟁 전에 정치학을 공부하던 학도병이었다.

“태오, 요새 나는 내 양심에 자주 물어 보곤 하네. 우리 조국과 민족에 엄청난 해를 끼치고 있는 이 전쟁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 고 말이야.  전쟁은 결코 우리 민족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못할 거야. 그리고 우리는 우리 조국의 평화적 통일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할 거야. 우리는 이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살아 남아 우리 자신이 겪은 고통과 전장에서 쓰러진 우리 전우들의 죽음에서 큰 교훈을 얻어야 해. 즉 우리는 이 전쟁을 통하여 평화에 대한 신념을 키워야 해. 그렇지 않으며 우리의 고통이나 전우들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거야. 나는 전쟁의 부조리를 규탄하는 모든 이들의 절규에 내 목소리를 합치며 살고 싶어. 나는 우리 조국 뿐 아니라 온 세계에 우애와 평화를 건설하는 모든 이들과 공동 전선을 펴기 위해 살고 싶어.”

전쟁 동안 남한의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나는 굶주림에 지친 집 없는 피난민들, 수심에 싸인 노인들, 고독에 몸부림치며 도덕적인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전쟁 과부들을 수없이 만났다. 나는 또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며 미군 병사 주변을 서성거리는 처녀들과 걸레조각 같은 옷을 걸친 어린 전쟁 고아들의 걸식 광경도 목격했다. 이런 처참한 모습들을 바라보며 나는 전장에서 목숨을 버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될 지경이었다. 나는 주님께 항의하기 가지 했다. “천주님, 왜  오늘까지 제 목숨을 보전해 주셨습니까? 저에게 우리 민족의 이 모든 비참한 꼴을 보이시려고 그러신 것입니까?” 그러나 나는 우리 동포들의 도덕과 영신적 가치관을 재확립하는데 힘쓰기 위해 신부가 도기로 결심한 것을 기억했다.

사제직에 대한 소망이 항상 나를 떠나지 않아 나는 부산 신학교와 접촉을 시작했다. 그것은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 신학교였다. 신학생들도 역시 전쟁과 함께 장서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잃었고 우리가 군대에서 본 것보다도 더 보잘 것 없는 가건물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의 공동 침실은 교실, 휴게실, 식당 등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신학생들은 명랑해 보였다. 적어도 우리 군인들보다는 그랬다. 나는 그 중 몇 명과 서로 친하게 되었고 이내 뜻이 통하게 되었다.

신학생들의 세계는 군인들의 그것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그들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내 군대 친구들은 몸이 건장하고 성격이 괄괄하며 얼굴이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그리고 솔직하고 직선적이었으며 행동은 소박했으나 말투는 매우 저속했다. 그런데 신학생들은 몸이 가냘퍼 보이고 성격이 온순하며 상냥하고 얼굴이 여자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친절하고 품위가 있었으나 행동이 약간 거만해 보였다. 그들은 우아함을 좋아하는 것 같이 보여서 내 눈에는 양반들 같은 인상을 풍겼는데, 그들이 고상한 문제를 토론하는 것을 들으며 특히 그러했다. 요컨대 그들은 여러가지 점에서 조금도 사내답지 않았다. 그들의 길고 가늘고 예쁜 손을 쥘 때마다 나는 처녀의 가냘픈 손을 만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 양전한 도련님들을 놀려 먹느라고 그들을 <아주머니>니 <아가씨>니 하고 불렀는데, 그들이 긴 수단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더 제격이었다. 어떤 때 장난 삼아 시중에서 화제가 되어 있는 소설이나 영화 이야기를 해 주면 그들은 가엾게도 얼굴을 붉히곤 했다. 당시 나는 해병대 사령부 군종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개신교 목사 세 분과 천주교 신부 한 분이 계셨다.  그들의 생활을 엿보고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개신교 목사의 생활은 인간적임과 동시에 영성적인 기쁨 때문에 더 조화가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하루는 친구인 개신교 목사가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는 조촐하나 잘 정돈되고 쾌적한 집에 살고 있었다. 부인도 약사였다. 그들의 부부생활과 목자생활(牧者生活)이 하도 행복해 보여서 나는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망설일 지경이었다. 나는 감히 바울로 사도를 비판하기까지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분이 성경에서 동정(童貞)을 찬양하신 것은 부부생활의 부정적인 측면 밖에 못 보셨기 때문이다. 결혼은 큰 은총의 샘이 되는 성사(성사)다. 그러니 그것은 훌륭한 성화(聖化)의 방법일 것이다. 따라서 결혼을 단념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개신교 목사의 결혼생활은 결혼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들 부부는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기도를 드리고 함께 하느님께 찬미를 노래하며 함께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찾아 보곤 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즐거움이나 괴로움 속에서도 서로 도우며 사는 것 같았다. 요컨대 그들의 가정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봉사로 스스로를 성화하는 참다운 사랑의 공동체였다.

그와는 반대로 천주교 군종 신부님에게서는 내 마음을 끌게 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보고 느낀 것이 없었다. 그분은 우리가 찾아가는 때 외에는 언제나 혼자였다. 하긴 내가 주주 찾아가기는 했다. 그분은 소박하고 명랑하고 거룩한 분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얼굴 표정에는 우울한 흔적이 자주 엿보였다. 어떤 천주교인의 집에 사시는데 가정부도 없었다. 그분은 병사(兵舍), 식당, 친구 집 등 아무 데서나 식사를 하셨다. 가끔 가서 청소를 해 드리는 나 말고는 아무도 그분의 방을 보살펴 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방 안에는 꽃병 하나, 사진 한 장, 그림 한 폭도 없었다. 십자가 하나만이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먼지 앉은 책꽂이에 꽂힌 따분해 보이는 두꺼운 책 몇 권이 그 방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보통 종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침대 밑에는 더러운 양말이 내동댕이쳐 있고 방구석에는 빨래거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 마디로 그 방에는 아무런 인간적인 즐거움의 흔적도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그런 종류의 생활에 혐오를 느끼게 했다. 어느 날 저녁 잘 아는 어느 젊은 신부 한 분과 식사를 같이 들며 그분을 좀 놀려 주고 싶었다.

“신부님은 외롭고 고통을 당하시는 것 같이 보이는군요.”

“천만에요! 그 뿐 아니라 고독과 고통이라는 말이 불행이라는 말고 같은 뜻은 아니오. 자기들이 왜 외롭고 고통을 당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이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신부가 외롭다는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더 잘 보살피기 위해서요.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고독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오. 뽈 끌로델 이 그렇게도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인간이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워 주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인간적인 사랑과 부부생활을 포기했지만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오. 우리는 천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해요. 우리는 봉사와 희생의 사랑 속에 자신을 꽃피우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훌륭한 행복론에도 불구하고 신부님의 독신생활은 자연적인 관점에서 보나 초자연적인 관점에서 보나 인간성의 조화 있는 발전의 균형을 깨뜨릴 우려가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저는 신부님들에게서 염세적인 태도, 어느 정도의 독선적인 고집, 신경과면, 감정의 메마름 따위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신생활이 신부님들에게 반자연적이 것이 아닙니까?”

“태오씨가 나를 정서의 균형을 잃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은 약간 지나친데요. 하지만 전혀 틀린 말은 아니오. 분명히 성직자의 독신생활은 반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소.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신부, 수사, 수녀들이 성격적인 균형을 잃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오. 태오씨는 결혼한 사람들은 모두가 균형이 잡힌 사람들이라고 믿으시오? 그리스도께서도 육체적으로 결혼을 해 보신 적이 없소. 그분은 30년 동안을 독신생활의 외로움 속에서 부부의 다정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채 사셨소.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신 천주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 이외의 다른 사랑을 아시지 못하였다고 해서 덜 인간적이었다고 생각하시오? 무수한 성인들도 독신 생활을 하셨소. 그러나 그분들은 결혼 생활의 행복 속에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인간적이었고 균형이 잡힌 분들이었소. 우리가 자원해서 택한 독신생활에는 우리의 인간적인 조화와 균형을 저해할 아무런 요소도 들어 있지 않소. 오히려 사랑이신 천주님께서 우리를 독신생활에 부르셨다면 그분은 우리들에게 반드시 원만한 인간성의 조화와 균형 속에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이오.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이기도 한데 이 점은 정신 분석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오. 그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것이지요. 우리의 독신생활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정상적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입니다. 그것이 왜 사제직과 서로 용납이 되지 않습니까? 인간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불가결한 것인데요.”

“나는 인간적인 사랑이 사제직과 서로 모순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제직은 신자 공동체에 바쳐진 기능적인 봉사, 즉 인류 구원을 위한 주님의 말씀과 성사를 위한 봉사요. 옛날에는 교회 안에도 그리스도를 훌륭하게 대리한 기혼 주교와 신부들이 있었소. 교회가 독신제도를 채택한 것은 천주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를 더 능률적이고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소유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선택이 동시에 거부와 희생을 뜻한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흔히 체험하지 않아요? 우리는 한 가지 포기를 요구하는 선택을 했소. 우리는 결혼생활이 의미하는 인간적 애정을 포기했소. 사실 사제직의 성소(聖召)는 초탈과 큰 용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왜 제자의 대부분을 기혼자 중에서 고르셨습니까? 하늘나라를 위해 기꺼이 지켜 나가는 동정이 위대하고 아름답긴 하지마는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의 사제 성소가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결혼의 전적인 포기를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동정의 가치를 인정은 하면서도, 교회는 신부들에게 결혼을 하든지 독신으로 지내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신부들을 보면 독신생활이 자유로이 선택되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회법에 의해 강요된 감당할 수 없는 짐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 개인적인 이견(異見)은 없소. 하지만 사람들은 축성된 독신생활이 희생이기에 앞서 우선 천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요. 사제 성소나 수도 성소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는 천주님의 부르심이오. 우리는 그 부르심에 자유로이 응답한 것입니다.”

“신부님들이 천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었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천주님의 도우심이 있으면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세계 어디서나 사제성소가 부족하다던 데요. 가량 한국에서만 하더라고 개신교 측에서는 매년 3백 명이 넘는 젊은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배출되는데 사제서품을 받는 사람은 일년에 겨우 십여 명쯤 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요(1953년 통계) 입교시켜야 할 사람이 삼천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한 줌 밖에 안 되는 십여 명의 새 신부는 정말 기막힌 숫자가 아닙니까? 교회가 신부들에게 결혼을 허락한다면 분명히 사제가 더 많이 배출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교회 밖에 잇는 사람들을 복음화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될 텐데요. 성직자의 독신제가 세상 사람들의 입교와 복음화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또한 영웅주의에서 비롯하는 은근한 오만은 아닌지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는 성직자의 독신제를 원했소. 천주님과 교회가 세상의 그리스도화를 방해하고자 한다고 생각하시오?”

“아니,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에 뒤떨어진 전통에서 빠져 나오려는 용기의 부족, 시대의 징조를 깨닫는 명석한 두뇌의 결여,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책임 앞에서의 어느 정도의 비겁함 따위가 세상의 그리스도교화를 저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신부님들에게서는 결단과 용기의 한 순간이 있었다는 것과 또한 자신을 온전히 천주님과 교회에 자유로이 바친 행위는 영웅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제생활을 해 나가는 동안에 독신생활이 대로는 너무나 무겁게 느껴지고 너무나 괴로워서 사제직을 떠나는 신부들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들을 <파문>해서 배척하지요. 교회가 인격의 존중과 양심의 자유를 가르치면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사제서품을 받는 날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사제생활 중에 고독과 권태와 실패와 고통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것을 미리 예감하오. 그러나 우리는 일생을 걸어 충성할 것을 약속했소. 이 약손은 어떤 중대한 결정이나 또는 그 원칙에 대한 감정적인 집착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는 천주님께 우리를 영원히 바친다는 충성의 약속입니다. 한편 교회는 아시다시피 모든 종류의 불완전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회요. 교회는 신자들의 영적 보호를 위해 제정된 제도와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소. 파문을 인격의 품위를 해치는 단죄 행위로 봐서는 안 돼요. 그것은 그 공동체의 영적 보호를 위한 교회의 <치료> 행위요.”

“신부님은 우리의 인성이 그렇게도 연약하고 불완전한데 일생을 거는 결정적인 약속을 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우리는 교회의 발전이 느린 것과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이해부족과 비겁함을 흔히 견뎌내지 못하고 어떤 때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하오. 그런데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는 우리는 고통을 당해야 하기도 하고 또 과감히 일을 해야 하기도 하오. 고통을 당하려 하지 않는 자나 과감히 일을 하지 않는 자는 불평할 권리가 없고 진정한 발전은 인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만큼 우리는 교회를 다스릴 책임이 있는 우리 지도자들에 대해 많은 이해와 신뢰를 가져야 하오.”

“신부님 자신은 축성된 독신생활을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까?”

“태오씨는 참말로 이상하군요! 나도 태오씨와 같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매우 감수성이 있는 인간이오. 구약시대 어떤 예언자들이 이미 자기들의 소명에 대해 항의했던 것처럼 신부들도 괴로울 때에는 그들의 성소를 후회하기도 하고 또는 자신들을 위안해 줄 수 있는 다정스러운 여인을 원하기도 하겠지요. 5년 동안의 내 짧은 사제생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신부의 진정한 괴로움과 고민은 육체의 속박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양심의 짐이오. 물론 육체의 속박이 때로는 매우 격렬하고 매우 무겁게 느껴지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뇌우(雷雨)와 같이 빨리 지나가 버리오. 그런데 양심의 짐은 마음 속에 항상 붙어 있는, 마치 어떤 분위기와도 같아요. 자 한 번 봅시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고발하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으이 위선과 허영에 대한 이야기를 복음에서 읽거나 묵상할 때면 그분이 그들에게 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돼요. 나는 사제이니만큼, 나 자신조차 자주 소홀히 하고 잘 실천하지 못하는 진리, 애덕, 가난, 겸손, 정의, 우애 따위를 설교해야 하오. 사실 신자들이 고해소에서 고백하는 것은 모두가 나 자신의 죄요, 나 자신의 비열한 행동이요, 나 자신의 과실에 대한 고발이나 다를 바 없소. 그러나 나는 그들을 권고하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는데, 그것은 나 자신의 권위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리해서 하는 것이오. 지난 주에 나는 그리스도교의 윤리와 성본능과 산아조절에 대해 강연을 했소. 그런데 강연이 끝난 뒤 한 젊은 여자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소. <신부님이 방금 말씀하신 것은 모두 훌륭해요. 그렇지만 신부님이 우리처지에 계신다면 저희보고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실천하고 그것을 생활화하실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 질문에 나는 아무 대답을 못했소.”

“사제생활을 해 나가시는 중에도 가끔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실 때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신부님은 현재의 처지에 완전히 만족하고 계십니까?”

“지금의 내 생활에 완전히 만족한다고는 말 못하겠소. 하지만 내가 불행하지 않은 것만은 확신해요. 나는 내가 갈망하는 행복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아요. 그런 행복이 땅 위에는 없으니까요. 내 과실, 내 비열한 행동, 내 죄에도 불구하고 천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봉사하는 내 사제생활을 충실히 이끌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하면서 내 사제직의 언약을 끝까지 지켜 나가겠소.”

 

하루는 신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 스콜라 철학개론을 친구 신학생 한 사람에게서 빌려 왔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말들 밖에 없었다.  어휘의 반 이상이 내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었고, 더구나 라틴어나 희랍어, 또는 다른 외국어로 된 인용문들은 처음 들어 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모든 것은 신학교에 들어가고자 하는 내 계획을 고무하기는커녕 실망만 안겨 주었다. 또 한국 신학생들은 네 가지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라틴어, 희랍어, 현대 서양어 중의 하나, 그리고 성서의 지식을 넓히기 위해 히브리어도 약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도저히 이런 말들을 배울 능력이 없으리라고 판단해서 사제직에 대한 소망이 환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청춘시대는 우리들 모험과 미지의 세계로 몰고 가는 용기와 영웅적 행동의 시기라는 말들을 흔히 한다. 청춘은 고결함과 위대함을 열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늘 하늘을 쳐다보면 결국은 날개가 생기고야 말 것이라는 말들도 한다. 이런 말들은 모두 아름답고 감격적이다. 물론 청춘에는 이상이 필요하다. 이 이상이야말로 우리들의 생존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이상이라도 품을 수 있을까? 나같이 영리하지 못한 사람이 저명한 학자가 되기를 바랄 수 있을까? 한국인 신부가 언젠가 교황이 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 재능의 뒷받침이 없는 이상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훌륭한 이상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능력과 부합하지 않는 몽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위험한 것이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의 행복의 열쇠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어 거기에서 최선의 성과를 얻어내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무엇이든지 꿈꾸거나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긴 그대로를 감수해야 한다. 요컨대 나는 내가 신부 되기에는 적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착한 뜻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뛰어난 지능과 정확한 판단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없다. 그뿐 아니라 우리 주께서는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이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데 얼마나 비용이 들겠는가를 따져 보고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생각해서 기초를 다 해 놓고도 나중에 그것을 완성할 힘이 없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루가 14장 28~32절)는 훌륭한 충고를 주시지 않았는가? 천주님은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제직이나 수도자 성소를 결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신중을 기하고 자신을 알기를 요구하신다. 사실상 나는 신부가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나는 최소한의 대학입학자격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속세에 남아 유익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하겠다.>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하루에도 수십 명씩의 인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부산은 대포소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마치 먼 나라의 소식처럼 전쟁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부산의 주민들은 새 가정을 꾸미거나 전쟁이 파괴한 가정을 새로이 꾸밀 궁리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잃어버린 사랑과 행복을 도로 찾는 데 급급했다. 내 친구도 하나 둘 결혼하기 시작했고 그들 가정에 늘 행복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친구 영민은 선희와 결혼했고 선희는 벌써 임신 중이었다. 그들은 아주 행복했다. 전쟁 중에는 총탄이 쏟아지는 가운데서까지도 <주여, 나는 주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합니다. 또한 이웃을 내 몸같이 참다운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는 말을 천주님께 드리는 것이 얼마나 쉬웠던가! 그러나 행복을 허락하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모든 것보다도 더 주를 사랑합니다> 하는 말을 천주님께 다시 드리기가 그리 쉽지 않다. 전쟁터에서는 인간의 애정이 덜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마는, 평화 속에서는 남에게 사랑을 받고 자기도 남을 사랑할 필요를 느낀다. 여기서 내 친구 숙을 더 주주 부르고 그의 사랑스런 존재를 더 자주 갈망하게 되었다. 부산에 내려가면서 나는 신학교에 들어갈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하기 전에 숙을 찾지 않겠다는 일종의 서원(誓願)을 했었다. 남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내 사제 성소에 대해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속에 남아서 숙과 더불어 가정을 이루겠다는 결심이 선 것같이 느껴졌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녀를 사방으로 찾기 시작했다. 마치 둑이 일시에 터져 버린 것처럼 나는 그녀를 찾는 데 열중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전쟁통이라 우편 행정과 정보 질서가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를 찾아 나서겠다는 결심이 선 후로는 나는 거의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이전보다 그녀가 더욱 더 그리웠다. 그러나 길이 없었다. 그녀를 찾기 위해 무엇부터 서둘러야 할지를 몰랐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그녀에 대한 그리움, 그렇다, 터질 듯 끓어오르는 갈망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그리움이 컸던 탓일까, 나는 결국 우연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부산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물론 내 머리 속은 숙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거리에서 정말 우연히도 원산에 있을 때 인사를 나누었던 숙의 친구 한 사람을 만났다. 나는 숙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나는 그녀로부터 숙이 육군 대대장으로 대구에 근무 중인 오빠 집에 같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지체할 수 없었다. 즉시 대구로 떠났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결국 그 집을 찾았다. 나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손까지도 떨렸다. 문을 두드리면서 나는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몇 년 만인가, 내가 숙을 만나게 되는 것은, 그리고 그 처참한 전쟁 속에서 피 흘리며 괴로워하고, 또 그러면서 숙을 애타게 찾아 부르곤 하던 숱한 기억이 일시에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조차 지루할 정도였다. 이윽고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바고 숙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둘 다 동시에 놀랐다. 숙은 나를 반신반의하다가 다음 순간 깜짝 놀랐다. 나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숙은 몸을 홱 돌리고 방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엄마! 태오씨가 대문에 와 있어요, 태오씨가 무사히 돌아왔어요!” 그것은 거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달려 나와 나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모두 울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특히 그 전쟁 통에 서로 떨어져 있다가 무사히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우리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날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사이에 겪은 일과 당한 괴로움 따위로 모든 사연을 자세히 서로 이야기했다.

내가 함흥 전선으로 떠난 며칠 후 숙과 그녀의 어머니는 피난 차 배편으로 부산에 갔었다. 어느 날 숙은 그녀의 친척을 통해 오빠의 소식을 들었다. 오빠는 대구 육군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전투에서 부상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숙은 어머니와 함께 대구에서 살림을 차리고 있는 오빠의 집에 가서 같이 살았다. 어머니는 식료품 가게를 내고 숙은 어머니를 도왔다. 몇 개월 후 상처가 다 나은 오빠는 다시 전선으로 떠났다. 대구에서 숙은 내 소식을 수소문해 보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한 번은 오빠와 함께 해병대 사령부에도 갔었다. 그러나 아주 절망적이었다. 태오라는 이름이 전사자 명단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본명(영세명)은 마태오다. 내가 집에서 살 때는 내 호적명인 <종옥>이라는 이름 대신에 <태오>라고 그냥 불렀다. 숙도 내 이름을 태오로 알고 있었다. 그날 충격이 어떻게나 컸던지 숙은 대구에 돌아와서 입원까지 했다. 몇 주일 동안 치료를 받은 후 그녀는 체념 속에서 다시 일상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숙은 내가 어디엔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나를 위해 기구를 많이 드렸다.

비탄에 빠져 있는 숙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그녀의 오빠는 자기 휘하의 중위 한 명을 숙에게 소개했다. 그 청년은 얼굴이 잘 생기고 장래를 촉망 받는 착실한 젊은이였다. 그 청년은 숙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숙은 마음 속에 나와의 사랑의 추억을 간직한 채 그 장교에게 동정 밖에는 나타내지 않았다. <죽었다는 태오>가 내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숙은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숙은 전보다 더 예뻐졌다. 고통과 고독은 그녀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다듬었다. 특히 그녀의 내적 성숙을 더해 주었다. 거의 꺾을 수 없는 사랑의 힘이 그녀의 정다운 눈길과 상냥한 웃음과 귀여운 행동에서 풍겨 나왔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나는 신학교에 가는 것을 단념한 것이 잘한 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렇게도 아름답고 그렇게도 총명한 숙의 사랑을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나는 힘차게 끌어들이는 그녀의 매력을 어떻게 거부한단 말인가?

그날 저녁 나는 기차로 부산에 내려가야 했다. 역에서 숙은,

“태오씨, 저는 오늘처럼 기뻤던 날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태오씨를 꿈 속에서 보는 것만 같아요. 태오씨가 실제로 여기 있다는 걸 실감하게 나를 한 번 껴안아 주세요.” 하고 말했다.

“숙, 나도 한없이 기뻐. 나는 천당이 숙이 내 곁에 있는 것과 숙의 사랑보다 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내가 전장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고민은 이제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모든 것을 잊었다. 전쟁도, 고통도, 반항도, 증오도, 전사했거나 부상당한 친구들도, 조국도, 민족도,  동포들의 비참도, 그리고 또… 이제 내 머리 속에는 숙 밖에 없었다. 그녀와 더불어 내 행복의 가정을 꾸미겠다는 욕망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무사한 숙을 다시 만난 것이 기적처럼 기뻤다. 기차 속에서 나는 숙과의 행복의 설계를 수없이 꾸며 보았다.

내가 이렇게 숙과의 사랑에 도취해 있는 동안 휴전협상은 계속되어 조인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1953년 5월 3일 전상자 포로들의 교환을  끝마쳤다. 유엔군 683명과 공산군 6천 6백 70명이 각각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런데 1953년 6월 18일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 휴전회담을 깰 뻔했다. 공산군 포고 가운데 3만 7천 명 이상은 북한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고 남한에서의 자유를 더 원하는 반공포로들이었다. 이 문제 때문에 휴전회담은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공산측 대표는 모든 전쟁 포로들이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유엔군측 대표는 인도주의적인 배려를 내세워 전쟁 포로들의 망명권을 강조했다. 마침내 1953년 6월 8일 전쟁포로 송환 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본국 송환을 거부하던 반공 포로들을 불안케 하고 위협하는 점이 몇 가지 있었다.

그러자 포로송환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극비리에 반공포로 3만 7천 명을 석방시키라는 명령을 한국 헌병대 최고 사령관에게 내렸다. 6월 18일 자정에 한국 헌병들은 대부분의 반공포로수용소를 점령하고 가시철조망을 파괴하며 포로들의 탈출을 도와 주었다. 도망치는 포로들에게 발포하는 유엔군 헌병들과 한국 헌병들 사이, 피치 못할 작은 충돌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인도주의적인 용기 덕택으로 2만 7천 92명의 반공 포로가 인간의 기본 권리인 자유를 되찾았다. 공산 측 대표는 이 포로 석방에 엄중히 항의하고 석방된 모든 포로의 재 수감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그것을 단호히 반대했고 공산군은 전 전선에 걸쳐 대규모의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리하여 휴전 회담은 다시 한번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게 되었고 평화의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 맹렬한 전투가 밤낮 없이 계속 되어 수백의 인명을 앗아갔다. 1953년 7월 초 나는 다시 출전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떠나 전에 내가 속해 있던 해병 전투단 제3대대 제9중대에 원대 복귀했다. 그러나 전에 있던 전우들은 대부분 이미 거기에 없었다.

1953년 7월 27일 아침 10시 우리 대대장은 우리에게 정전을 명했다. 대포 소리와 기관총 소리가 전 전선에 걸쳐 갑자기 잠잠해졌다.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벙커에서 나와 7월의 아침 해와 맑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우리는 서로 포옹하며 이런 축원들을 주고 받았다. <이제 다시는 우리 조국땅에 전쟁이 없었으면, 우리 동포 사이에 영원히 평화가 깃들었으면.> 우리는 처음으로 벙커 지붕 위에서 마음 놓고 담배를 피우고 음식을 먹었다. 우리는 그때 장래에 대해, 사랑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꾸밀 가정에 대해 즐겁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여기저기에 전날 전투에서 죽은 우리 전우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어 극도로 슬픈 광경을 보여 주었다. 불과 하루 사인데, 나는 이 죽음과 평화, 기쁨과 슬픔의 음울한 대조가 가슴 속에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대 나는 휴전의 성립으로 우리가 맛보는 이 기쁨이 결국은 우리 친구들의 죽음의 대가라는 것을 잘 깨달았다. 그리고 마음 속에 빚진 자가 되었다는 우울한 감정을 느꼈다. 그날 나는 내 인생을 결정짓는 어떤 사명을 받아 내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3년하고 1개월 만에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적 비극의 근원이며 오늘까지도 우리 조국을 두 동강이로 갈라놓고 있는 저 3.8선을 없애지는 못했다. 3.8선은 그저 휴전선으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고 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승리도 패배도 없는 전적인 파괴만 있을 뿐이었다. 3백만 명의 사상자와, 쑥밭이 된 도시와 촌락들, 수백만의 이산가족(이산가족), 수십만의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 무수한 피난민의 판자집, 젊은이들의 품행 타락 등등, 이런 것들이 소위 조국의 해방이라는 전쟁의 슬픈 결산이었다. 전쟁은 조국을 잿더미로 만들고 우리 민족을 불행의 심연 속에 처넣고 나서야 끝이 났다. <정전(停戰)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전 휴전선에 걸쳐 새 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있을 수도 있는 어떤 새로운 전쟁에 대비하는 더욱 조심성 있고 체계화된 준비책이었다. 전쟁 전에는 엄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 3.8선에 걸쳐 왕래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금은 휴전선을 넘나 다닐 수 있는 가능성은 문자 그대로 완전히 사라졌다. 남북한을 분리하는 폭 3 마일의 <중립지대>에는 전면 지뢰가 묻혀 있고 가시 철조망이 둘러쳐 있어 짐승 한 마리도 들어가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역사적인 유전 장소가 된 판문점에서는 포로 교환이 행해졌다. 어느 날 나는 성직 수행을 위해 불린 군종 사제 김 신부님과 함께 판문점에 갔다. 거기에는 두 개의 문이 있어 수백 명의 포로가 그곳을 통과했는데, 하나는 남으로 돌아오는 우리 포로들을 위한 것이고 도 하나는 북으로 가는 공산군 포로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 두 개의 문에는 각기 무슨 표어 같은 것이 씌어 있었다. 한 곳에는 커다란 글씨로 <자유의 문>이라고 씌어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아, 그리운 조국의 회포!>라는 글이, 그리고 다른 곳에는 <우리의 애국 영웅환영>이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울었다. 우리 민족이 이제는 갈라진 두 조국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내게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공산군 포로들이 주먹을 내두르며 우리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고 나는 더 울음이 북 바쳤다.   그들은 살이 찌고 건강이 넘쳐 흐르는 몸에 미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잔뜩 화들이 나 있었다.

<자유의 문>을 통과하기 전에 그들 중의 하나가 명령을 내리니 그들은 모두 옷을 벗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외쳤다. “이 망할 놈의 미국놈 옷을 다시는 안 입겠다!”, “미국놈들 물러가라!”, “미국놈들 뒈져라!” 그들은 바짝 마른 몸에 인민군 복장을 입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다른 <자유의 문>으로 돌아오는 우리 국군 포로들을 보고 더욱 소리를 지르며 야만스럽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승만 타도!”, “조국의 반역자, 미제의 노예를 죽여라!” 이 증오와 절규, 이 비인간적인 외침에 뜨거운 눈물이 내 양볼에 흘러 내렸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들을 경멸하고 증오했다. 나는 그들의 가증하고 광신적인 행동을 용서 할 수 없었다. 나는 공산군 포로들의 증오가 가득 찬 이 절규에서 평화에 대한 위협과 새로운 전쟁의 전조를 보았다. 나중에 1953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 도미니끄 삐르 신부의 <평화의 건설>을 읽으면서 나는 다음 구절에 깊이 공감했다. <평화는 포성(砲聲)의 침묵 이상의 것이다. 한번 무장을 푼 사람이 그로 인하여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손의 무장 해제가 아니라 정신과 마음의 무장 해제라는 것을 누구나 느낀다. 무기를 내려 놓았어도 적의를 품은 채 있는 두 개인이나 두 공동체 사이에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도 격심한 고통을 겪고 그렇게도 철저한 파괴를 눈 앞에서 보았다면 남북한 우리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 해묵은 증오를 서로 청산해야 했을 것이고, 그들에게 전쟁을 교사했던 정치적 환상과 원한의 결과를 적절히 깨달아야 했을 것이며, 모두가 조국의 이익과 통일을 위해 평화에 대한 공통된 관심과 지혜와 상호이해와 존경인 사랑이라는 그 실제적인 힘을 동원하는 것을 배워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들은 그들의 비타협적인 대립과 맹목적인 증오를 점점 더 굳혀갈 뿐이었다.

그날 나는 남북한이 서로 대립하고 서로 미워하는 한, 우리에게 평화가 있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새롭게 가졌다. 우리 민족이 서로 용서하는 것을 배우지 않고, 행복 추구에 대한 방법적인 차이와 이념적인 상위를 서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의 평화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는 걸 나는 깊이 깨달았다. 잘라진 우리 민족을 이해와 양보와 사라이라는 인간 양심의 높은 수준으로 끌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개개인의 양심에 대한 재교육을 먼저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숙고는 나를 차츰 사제 성소 쪽으로 다시 이끌어 갔다. 내 판단으로는 신부들이 개인의 양심을 교육할 수 있는 더 좋은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천주님의 나라 뿐 아니라 천주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더 알 맞는 세상을 건설하는 데 조력하는 설교의 사명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때 나는 내 사명의 전도(前途)인 사제직에 대해 심사숙고 했다. 우리 조국의 평화와 우리 민족의 행복을 위해 몸바쳐 일하겠다는 나의 절대적인 사명감 앞에 숙에 대한 내 사랑은 이기적인 것으로 보였다.

어느 날 나는 숙에게 내 사제 성소에 대한 결심을 알릴 생각으로 긴 편지와 함께 열다섯 권쯤 되는 내 진중일기를 보냈다. 몇 주일이 지난 후 숙은 정답고도 침착한 긴 답장을 보내 왔다. 그녀는 신부가 되겠다는 내 뜻이 고귀함을 인정하면서도 반면 인간 애정의 위대함을 강조했다. <태오씨는 갈라진 우리 민족을 화해시키기 위해 남북한 형제간의 대화를 시작하고 싶은 거지요. 그래서 신부가 되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태오씨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어요. 교회는 인간 공동체의 다른 집단들이 그들의 생활 방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 특유의 교리와 규율과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에요. 그리고 한국 교회의 현재의 실정과 활동으로 보아 신부는 아직도 우리가 사는 이 다원적인 세상에서 종파간의, 또는 인간 대 인간의 대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요. 저도 세상과 교회가 태오씨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변모할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신부는 그의 착한 뜻과 양심에도 불구하고 항상 개인 행동이 장상의 명령으로 제한되고 둘러싸이는 사람일 거예요. 만일 태오씨가 어느 날 신부가 되면 주교님께 종순(從順)의 서약을 바치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야 할 거예요. 그것으로 태오씨는 행동의 자유를 잃을 것이고 그로 인해 괴로워할 거예요. 지금 세상에서는 평신도들이 점점 더 행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어요. 그리고 현세적인 분야에서는 평신도의 위치가 성직자의 그것보다 더 넓고 더 낫게 평가돼요. 태오씨의 조국애와 평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부보다는 평신도의 위치에 있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해요. 저는 태오씨가 가는 곳은 어디나 따라가겠어요. 저도 제 나름대로 태오씨를 돕겠어요. 그러면 우리 둘이서 태오씨가 혼자 하시는 것보다 더 낫게 태오씨의 고귀한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유익한 사업을 추진하는 데에는 착한 뜻만으로는 족하지 않고 지혜와 슬기도 필요해요. 저는 태오씨의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이런 이유로 저는 사제직에 몸을 바치겠다는 태오씨 결심을 재고하기를 청해요.>

이 편지에 뒤 이어 일년 동안 숙과 나는 서로 만나지 않은 채로 편지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여전히 일선에 있었다. 그러나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휴전선의 새 요새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내 결심 앞에 숙은 양보를 하고 내 사제직 성소에 동의를 했다.

1954년 9월 나는 서울에 있는 한국 해병대 사령부에 발령을 받았다. 숙도 서울에 와서 그때 육군 본부에 보직을 가지고 있던 오빠의 집에 있으면서 여전히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신학교 입학 준비를 위해 야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한 고아원엘 가 보았는데 거기서 한 떼의 사내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하며 노는 것을 보았다. 막대기를 가지고 총 쏘는 시늉도 하고 서로 치기도 했다. 그것을 보고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들에게서 아빠와 엄마와 집까지도 빼앗아갔을 전쟁의 직접적인 희생자들인 그들이 전쟁놀이를 하고 있다니 사람들은 그것을 말리지도 않았다. 물론 그들은 너무 어리고 너무 순진해서 자기들의 불행을 깨닫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적인 광경을 신부가 되겠다는, 즉 사람들 사이에 행복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자가 되겠다는 내 욕망을 새롭게 해 주었다. 그렇다, 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폭력이 자리 잡기 전에 사랑을 심어 주겠다. 나는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의 성사인 성체를 나누어 주었다. 그 고아원 방문하는 도중에 나는 한 떼의 어린 소녀들에게 둘러싸였다. 그 중 한 애가 내게 물었다. “아저씨가 우리 아빠야?…. 우리 아빤 어딨어?”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는 그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 아이는 내게 뺨을 갖다 대면서 “아빠, 나하고 언제나 언제나 같이 있어!” 하고 말했다. 나는 그때 하나의 십자군 운동을 시작하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나는 모든 전쟁 고아들을 데리고 세계를 두루 다니며 그들로 하여금 모든 인류에서 <평화! 평화! 평화!> 하고 외치게 할 각오를 했다.

나는 해병대 제복에 몇 개의 군대 훈장을 달고 있었다. 사내 아이들이 그것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고 그 중에 담대한 아이가 “아저씨, 난 이담에 장군이 될래요!”하고 말했다. 아이들을 보살피던 한 부인이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젊은이는 용감한 군인이시군요! 하지만 댁의 훈장 뒤에는 역시 전장에서 죽은 자식과 남편과 아버지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북한의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들도 인간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어요. 우리들은 그리스도 신자이니까 그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훈장을 떼었다. 그때부터 나는 군에서 제대식을 하던 날을 빼놓고는 절대로 훈장을 달고 다니지 않았다.

 

드디어 8년 동안의 내 군대생활이 끝날 때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대학 입학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되는 고등학교 졸업증명서가 없다고 나를 받아 주기를 거부했다. 그뿐 아니라 오랜 군대생활에 내 머리가 녹이 슬어 순 이론적인 공부에는 적합 치 않다고 생각들을 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바칠 훌륭한 건강과 힘찬 두 팔과 굳은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신학교 당국자들은 내가 어느 날  착한 시골 신부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또 서울의 노대주교님의 강력한 추천이 있고 해서, 조용하고 얌전히 그리고 조심성 있게 행동하라는 등의 부탁을 수없이 하고 나서 신학생으로 받아 주었다.

 

 

 

 

 

제16장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날 숙의 어머니는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처럼 가끔 명랑한 빛을 띠는 때도 있었고 농담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는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명랑한 대꾸를 몇 마디 하고 깔깔대고 웃고 난 뒤 우리 위에 갑자기 침묵이 내려앉아서 지극히 거북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몹시 어색하고 서투르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떤 대는 아주 부자연스럽게 웃기도 했다. 그러나 숙은 거의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더러 말참견을 하고 웃기도 하라고 이따금씩 숙을 쳐다보았다. 숙은 너그럽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녀의 쓸쓸한 웃음 뒤에는 고통의 빛이 역력히 감돌았고 그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숙은 산책을 하러 나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행인과 자동차로 붐비는 거리를 걸으며 종내 말이 없었다. 시내의 소음을 피해 우리는 파고다공원 안으로 들어 갔다. 여기저기 젊은이 여러 쌍이 초봄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거닐고 있었다. 나는 우리를 어색하게 만드는 그 침묵을 깨려고 화제를 찾았다. 나는 숙에게 할 말이 태산 같았으나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좋을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았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자 숙이 다정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태오씨하고 산책하는 것이 일년 만에 처음이에요. 그리고 또 이번이 마지막일 거구요. 저는 오래 전부터 태오씨를 만나 태오씨에 대해 제 마음에 느끼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지금 저는 태오씨한테 할 말이 너무도 많아요…. 오늘 오후 엄마하고 저녁을 지으며 태오씨한테 할 마지막 사랑의 말을 생각해 보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쓸 데 없이 보이는군요. 제가 태오씨한테 드리고 싶은 말은 태오씨가 사제생활에서 훌륭한 성공을 거두기를 바란다는 말 뿐이에요.”

“숙, 고마워. 우리는 우리의 감정, 우리의 진실, 우리의 용기, 그리고 천주님 안에서 서로 믿는 마음을 이해할 만큼 서로를 잘 알고 있어. 나로서는 숙의 행복이 언제나 내 행복일 것이고 숙의 괴로움이 내 괴로움일 거야.”

십여 분이 지나도록 또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나도 숙에게 하고 싶은 정다운 말이 너무도 많았다. 그 다정한 말들이 끊임없이 입에까지 올라왔으나 나는 그것을 무자비하게 삼켜 버렸다. 그 말들이 숙의 마음을 더 슬프게 하고 내 의지를 약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숙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뺨에는 두 줄기 눈물이 달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아! 그때 나는 오랫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었고 또 언제나 내 추억 속에 살아 있을 이 아름다운 숙을 얼마나 가슴에 껴안고 위로해 주고 싶었던가! 나는 그 전처럼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으나 그냥 두었다.

“숙, 울어?”

“네, 울어요! 태오씨께 눈물을 보기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는군요. 제가 오늘은 울지만 내일은 울지 않겠어요.”

숙은 구름 속에 가려져 빛을 잃은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숙, 좀 웃어 줘.”

“뭐요?…. 웃으라구요!”

“그래, 나는 숙의 웃는 얼굴, 씩씩한 얼굴을 마음에 간직하고 싶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웃어 줘!”

“오오, 태오씨는 제게 너무도 가혹하세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태오씨께 웃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지만 태오씨가 원하시니 그렇게 하겠어요.”

그리고는 웃음을 지었다. 아아, 그러나 그 웃음이 어떻게나 쓸쓸한 것이었는지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튿날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게 되어 있는지 하는 것도 잊을 뻔했다. 그녀는 여전히 내게 웃음을 보였으나 점점 더 서글픈 웃음으로 변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일어서며 말했다.

“숙, 집으로 돌아가지! 집까지 바래다 줄게. 나는 내일 떠날 준비를 할 게 좀 있어.”

“좋을 대로 하세요.”

우리는 공원에서 나왔다. 나는 택시를 불러 숙에게 타라고 했다. 숙는 택시에 앉자 내게 말했다.

“태오씨 안녕! 집에 혼자 가게 둬 두세요. 천주님의 뜻이 태오씨께 이루어지기를 기구하겠어요.”

“고마워. 숙은 참말 너그러워. 잘 가.”

그녀는 떠났다. 택시는 출발하더니 경주라도 하는 듯 쏜살같이 달렸다. 숙을 태운 채 택시는 어느덧 수많은 흰 불, 노란 불, 빨간 불이 미친 듯이 춤추는 가운데로 사라져 버렸다. 별안간 나는 마치 사막에라도 버려진 듯 무서운 고독을 느꼈다. 손에 들고 있던 담배도 어느새 땅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택시가 숙을 태우고 사라진 쪽을 바라다보면서 다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 곁에서 두 학생이 마주 오다가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야! 너 어디 가니?”

“집에 가. 너는?”

“나도 집에 가는 길이야.”

“잘 가! 내일 또 보자!”

“그래 내일 또 만나!”

그리고 그들은 헤어졌다. 그러나 이튿날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숙을 영원히 떠난 길이었다. 그리고 그 <집>이라는 말이 뼈저린 고독으로 내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내가 집을 떠난 지 거의 십 년이나 되었다. 나는 이미 집 밖에서 사는 데에 지쳐 있었다. 그런데 신학교엘 들어가려는 참이고, 이제는 영원히 내 집을 가지 못하게 되려는 것이니,나는 나를 부르신 천주님의 뜻에 따라 방황할 참이다.

지나는 길에 나는 성당에 들렀다. 그 시간에는 성당이 매우 어둡고 조용했다. 저 안쪽 제대에 있는 예수성심상과 무염시태(무염시태) 상 앞에 가냘픈 불꽃다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 혼자였다. 나는 감실 앞에 무릎을 꿇어 눈을 감고 추억을 더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주님, 숙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그녀를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녀는 제가 천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바치는 제물입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 주십시오. 천주님께서 이 불쌍한 마음을 적절히 조처하지 못하신다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으며, 누가 그렇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주님,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제는 제 생활 속에 무엇인가 제 추리력을 멀리 초월하는 것이 있었음을 참으로 확신합니다. 지금 저는 지난 제 과거의 가 순간들을 통해 주님의 전능과 주님의 은총의 흔적을 밝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저에 대해 너무나 자비로우셔서 저를 여러 번 죽음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너무도 착하셔서 저를 주님의 사랑과 평화의 사도직에 불러 주셨습니다. 저는 약했는데 주님은 강하시고 능력이 있으셨고, 저는 자주 불충실했었는데 주님은 항상 제게 성실하셨으며, 저는 주님을 멀리했었는데 주님은 저를 쫓아다니셨습니다. 제가 숨으면 주님은 저를 찾으셨고 저는 비열했지만 주님은 자비로우셨습니다. 제가 넘어지면 주님은 저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저는 약했는데 주님은 착하셨고, 제가 반항을 했는데도 주님은 부드럽고 참을성 있게 제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을 저주했으나 주님은 제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저의 과실과 범용과 신앙의 위기와 반항을 통해 주님은 제게 인간에 대한 동정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증오와 불의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과, 주님의 손을 잡고 이 세상에 평화를 건설하는 엄청난 직책을 받아들여야 할 것 임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또 내가 사제 교육을 받는 도안 계속 당하게 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동시에 필요한 공부를 해낼 수 있는 지능을 주십사고 주님께 열심히 기구했다. 공부의 어려움이 내게는 큰  걱정거리였다. 그러자 그때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내 사업을 할 참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걱정을 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느냐? 내가 받으라고 너를 불렀고 네가 받겠다고 응한 그 사제직은 내가 떠맡지 않으면 헛된 것이다. 내 뜻에 너를 온전히 맡겨 버림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천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맡길 수 있었다. 나는 성당에서 나와 천천히 숙소로 향했다. 그때 나는 우리가 전선에서 고지를 공격하러 올라가야 할 때마다 느꼈던 엄숙하고 장중한 감정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우리는 죽음의 위험을 환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장난을 치고, 술을 마시곤 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새벽, 승리를 기약하는 마음으로 웃으며 죽음을 향해 전진했었다. 사제직은 이겨야 할 적(敵)이 아니라 얻어야 할 엄청난 축복이니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랴!

나는 여기저기 구름이 가로 널려 있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내가 신학교에서 견뎌내야 할 생활의 전조 같았다. 전쟁에서 여러 번 부상을 당한 나는 종류는 다르지만 내 새로운 소명(召命)에서 피치 못할 상처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무섭게 깨달았다. 날씨가 일년 내내 청명하지는 않은 것처럼 온갖 종류의 구름, 때로는 폭풍우를 동반한 먹구름이 내 하늘을 지나칠 때도 있을 것임을 각오해야 했다. 내가 무절제해질 때도 있을 것이고,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을 것이며 순경과 역경이 갈마드는 것을 경험할 때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천주님은 항상 참을성이 있으시고 착하시고 충실하시며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전선에서 쓰러진 내 전우들이 나를 둘러싸고 외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오야! 네가 천주님과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 가고자 하는 앞으로의 생활을 두려워 말아라. 우리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테니까!”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여전히 행인들로 붐비는 거리를 씩씩하게 걸어가며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주님, 주님의 뜻을 행하려고 제가 여기 대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신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나는 사제(사제)가 되기 위한 7년 간의 수학 과정에서 또다시 다른 차원의 신앙적 시련과 인생을 뼈저리게 경험해야만 했다.

밝은 빛 안으로 들어설수록 그림자의 농도가 짙어지듯, 신학적 지식을 터득하고 수덕생활을 경험할수록 내 존재의 내면 깊이에서 휘몰아치는 신앙의 회의는 가중되어만 갔다. 그런가 하면 사제생활이 요구하는 독신제도의 순결성 앞에 인간적 사랑과 취향을 초극하는 고통은 내 젊음을 불사르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천주님의 뜻을 새롭게 깨닫게 되며, 마침내 나는 그분의 부르심에 나 자신을 아낌 없이 바친다.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다음 <이 세상의 이방인> 편에서 서 보기로 한다.

 

 

** 예수 없는 십자가 (상)은 이곳에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