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CTICING THE POWER OF NOW
Copyright (c) 2001 by Eckhart Tolle
스스로 ‘생각하는 자’가 아님을 자각할 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기 시작하는 순간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깨어난다.
이제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생각 너머에는 광대무변한 앎의 영역이 존재하며
생각이란 그 방대한 앎의 아주 작은 조각임을.
아름다움과 사랑, 창조, 기쁨, 내면의 평화와 같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은
모두 마음을 넘어서 일어난다는 것을.
지금 그대는 깨어나고 있다.
Eckhart Tolle
차례
들어가는 글 | 즐기듯 이 순간을 살아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이 있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라
무의식에서 깨어나라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귀를 기울여라
지금 이 순간은 내 손 안에 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자유롭다
모든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진다
지금 그대는 깨어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여라
고통조차도 당당히 마주하라
들어가는 글
즐기듯 이 순간을 살아라
1997년에 처음으로 출판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The Power of Now>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이들의 집단 의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덕에 현재 15개 국어로 번역 출간되어 세계의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의 가르침으로 인해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했다는 감사의 편지들도 매일 받고 있습니다.
에고가 만들어낸 미친 마음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무언가 새로운 흐름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태곳적부터 많은 이들이 인간을 고통의 굴레에 묶어놓는 집단 무의식에서 벗어나려고 정진해왔지만, 오늘날처럼 많은 이들이 의식의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던 적은 한번도 없었지요. 새로운 깨달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이미 겪을 만큼 겪었으니까요.
이 책은 여러분 자신은 물론 타인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는 자유로운 삶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은 여러분의 내면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지요.
많은 독자들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에 나온 가르침에 따라 직접 수행을 해보고 싶어했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직접 실천할 수 잇는 보다 쉬운 형식의 실용서를 원했던 것이지요.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독자들의 이런 열망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이 책에는 수행법과 더불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의 핵심적인 내용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의 사상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매일 매일의 수행 지침서로도 활용할 수 있지요.
이 책의 많은 구절은 명상에 특히 적합합니다. 책을 읽는 자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수행 과정이 될 수 있지요. 책을 읽는 동안, 새로운 정보의 수집 차원에 머물지 않고 좀더 높은 차원의 의식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구절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어도 좋습니다. 그 깊이와 의미가 새롭게 가슴에 와 닿을 테니까요. 깨어 있음의 상태에서 쓰여진 글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 독자들의 현존을 일깨우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 책은 천천히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읽다가 ֎ ֎ ֎ ֎ ֎ ֎ ֎ ֎ ֎ ֎ 표시가 있는 곳에서는 잠시 고요한 반성과 침묵의 순간을 가져보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손 안에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듯이 읽으세요. 그 순간, 지금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짚이는 대로 아무 장이나 펴 들고, 몇 구절만 읽어도 좋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신 애독자 여러분에게 이 책이 수행의 지침서로서 많은 도움이 되길 빕니다.
에크하르트 톨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영원한 현재야말로
삶이 펼쳐지는 무대이며,
영원히 존재하는 시간이다.
삶은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이 아닌 삶은 이전에도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이 있다
이제 비로소 깨어난다
삶과 죽음을 넘어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나 현존하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신’이라는 말로 이를 설명하려 했지요. 그러나 저는 ‘존재’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존재라는 말 또한 신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뜬 구름과 같은 것이지만요.
하지만 존재라는 말은 신이라는 말과 달리 열린 개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함을 제한된 실체로 축소시키지 않으니까요. 존재라는 말에는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불가능합니다. 존재란 특정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니까요. 존재란 여러분의 진정한 본성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누가나 ‘나는 있다’는 느낌과 함께 이 존재를 이해할 수 있지요. 존재라는 말에서 여러분은 무한한 존재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경험할 것입니다.
존재는 저 너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존재는 모든 생명체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 불멸의 그 무엇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여러분의 진정한 본성을 느낄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머리로 헤아리지 마십시오. 이해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존재는 마음이 고요할 때만 지각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 머물면서, 살아 숨쉬는 이 순간에 완전히 집중할 때 비로소 진정한 존재를 느낄 수 있지요. 존재란 결코 머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인적인 성취’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자아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니까요.
그러나 깨달음이란 그저 ‘존재’와 하나 됨을 느끼는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입니다. 무한히 존재하는,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 여러분 자신인 동시에 여러분보다 훨씬 위대한 그 무엇과 하나로 연결된 상태, 깨달음이란 여러분의 이름과 모습 저 너머에 존재하는 여러분의 진정한 본성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존재와의 연결을 느끼지 못할 때, 자신의 순수한 본성으로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환상이 생깁니다. 자각하든 못하든, 스스로를 동떨어진 섬처럼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두려움이나 갈등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존재와의 연결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는 ‘마음’을 ‘자신의 본성’과 동일시하는 태도입니다. 이 때문에 생각의 지배를 받게 되지요.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지만 대부분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겪고 있는 일이라 이를 오히려 당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존재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내면의 고요한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그칠 줄 모르는 생각인데도 말입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형렬은 또한 생각이 꾸며낸 거짓 자아를 만들어내 두려움과 고통의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면서 ‘생각’이라는 장막이 생겨납니다. 이 장막은 말이나 이미지로 한정하고, 판단하고, 구분하고, 규정함으로써 모든 진정한 관계를 방해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순수한 본성 사이를, 친구들과 자연과의 사이를, 신과의 사이를 이 장막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스스로 세계와 분리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생각의 장막 때문입니다. 요컨대 생각이라는 장막 때문에 스스로 ‘다른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라는 환상을 갖게 되지요. 그 결과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생명체들의 밑바닥에 있는 본질, 즉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경이로운 진리를 잊게 됩니다.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훌륭한 도구가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아주 위험합니다. 엄밀히 말해, 마음을 잘못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되고 말지요. 마음을 부리지 못하고 부림을 당하는 것은 곧 병입니다. 마음을 여러분 자신이라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말 그대로 주객이 전도된 꼴이라고나 할까요.
이는 알지도 못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실체를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유를 향한 첫걸음은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실체, 즉 ‘생각하는 자’가 자신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자신을 점령하고 있는 실체를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기 시작할 때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깨어납니다.
생각 너머에 무변광대한 ‘앎’의 영역이 있으며, 생각이란 그 방대한 앎의 영역에서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아름다움과 사랑, 창조, 기쁨, 마음의 평화 같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은 마음을 초월해서 일어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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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다행히도 마음만 먹으면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지요. 바로 이 순간, 여러분은 자유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음성에 귀 기울이세요. 가능하면 자주 자신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되풀이되는 사고 패턴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오랜 세월 동안 지겹게 반복되고 있는 낡은 녹음테이프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라’는 말은 바로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관찰자로서 그 자리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에는 아무런 견해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들은 것에 대해 판단하거나 비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판단하고 비난해봤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억눌린 목소리만 듣게 될 테니까요.
여러분은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나는 ‘여기’ 머물며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를 듣는 나의 모습을 지켜본다. 이것이 ‘나는 있다’는 깨달음, 나의 깨어 있음에 대한 자각이다. 이런 깨달음은 생각이 아니며 마음을 넘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생각에 귀 기울일 때, 여러분은 그 생각은 물론 그 생각을 지켜보는 자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새로운 차원의 의식은 바로 이럴 때 깨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여러분은 생각을 넘어서 있는 존재, 저 밑바닥의 의식 있는 존재, 즉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여러분의 본성을 느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점령하고 있던 생각이 힘을 잃고 사라져버립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마음에 동화되어 마음에 힘을 실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의식적이고 강박적인 생각도 사라져버립니다.
생각이 사라지면, 생각의 흐름이 중단된 ‘무심 無心’의 찰나를 경험합니다. 처음에는 불과 몇 초밖에 지속되지 않지만, 차츰 길어지지요. 무심의 순간이 찾아 들면, 한 없는 고요와 평화를 느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순수한 본성, 즉 진정한 ‘존재’와 하나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마음이라는 장막에 가려져 보지 못하던 존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면 이런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는 더욱 깊어집니다. 사실 그 경지의 깊이에는 끝이 없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기쁨, 존재의 기쁨이 미소처럼 번져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본성과 연결되면,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 했을 때보다 훨씬 더 또렷이 깨어 있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 더욱 충실하게 되지요. 또한 에너지 장의 진동 주파수가 높아지면서 몸도 활력과 생명력으로 넘치게 됩니다.
동양에서 흔히 말하는 무심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가면, 순수 의식의 경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살아 숨쉬는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강렬하고 기쁘게 느껴져 생각과 감정, 자신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외부 세계가 상대적으로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런 순수 의식의 상태는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예전에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존재를 넘어서는 거지요. 이러한 현존이야말로 여러분의 진정한 본성이며, 동시에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입니다.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는 대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흐름을 멈출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렇게 마음의 흐름으로부터 의식을 거두어들이면, 무심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팽팽히 긴장한 상태에서 활짝 깨어 있게 되는 거지요. 이것이야말로 명상의 핵심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일상의 삶 속에서 명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하는, 사소해 보이는 일상적인 활동에도 집중할 수 있지요.
이 모든 일들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집안에서 혹은 직장에서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놓는 동작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기쁜 마음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말입니다.
손을 씻을 때도 물 흐르는 소리와 물이 손에 닿는 느낌, 손의 움직임, 비누의 향기 등 세세한 모든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자동차를 탈 때도, 문을 닫은 후 잠시 모든 동장을 멈추고 자신의 숨결을 느껴 보세요. 고요하지만 강렬한 현존의 느낌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평화로운가요? 이는 명상 수행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확실한 기준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마음을 자신의 본성과 동일시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마음의 흐름 속에서 문득 무심의 순간을 경험할 때마다, 깨달음의 경지로 성큼 다가설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소 짓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 마음의 목소리가 아이의 재롱처럼 여겨져 실소를 머금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본성은 마음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기에, 더 이상 마음의 소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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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라
성장하면서 여러분은 개인적 상황과 문화적 환경에 따라 자기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이런 거짓된 자아를 흔히 ‘에고’라 하지요. 에고는 마음의 활동으로 만들어지므로, 끊임없이 생각을 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에고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데, 제가 말하는 에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는 데서 생기는 ‘거짓된 자아’를 의미합니다.
에고에서 현재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만 중시되지요. 이처럼 완전히 진리를 거스르고 있기 때문에 에고의 상태에서는 마음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에고는 언제까지나 과거를 살아 움직이도록 만듭니다. 과거가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여러분을 미래에 투사시켜서 계속 살아남으려 하지요. 안도감과 만족을 그 속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면 행복할 텐데, 저런 일이 생기면 마음이 평화로워질 텐데’ 하고 말하지요.
현재에 관여하고 있는 것 같은 순간에도 사실 에고가 보는 것은 지금이 아닙니다. 에고는 결코 지금 여기의 순간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과거의 눈을 통해 현재를 보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현재의 의미를 축소합니다. 그 목적은 언제나 마음이 만들어내는 미래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유심히 들여다보세요. 이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시작은 오직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에 머무는 한, 지금 이 순간을 결코 발견할 수 없지요.
깨달음이란 생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물론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생각하는 마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집중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생각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면의 중얼거림, 즉 무의식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부리게 되는 거지요. 특히 독창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경우에는 생각과 생각 없음 사이를, 즉 유심과 무심 사이를 몇 분 간격으로 오갈 수 있게 됩니다.
무심이란 ‘생각에서 벗어난 의식 意識’입니다. 창조적인 생각은 무심의 상태에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합니다. 무심의 상태에서만 생각이 진정한 힘을 갖게 되니까요. 무변광대한 의식의 영역과 연결되지 않으면, 생각은 어느새 부질없고 어리석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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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만나는 감정을 느껴라
마음은 생각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은 물론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정신적, 정서적, 무의식적인 반작용까지 포함합니다. 감정은 마음과 몸이 만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감정이란 마음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요컨대 몸에 드리워진 마음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 곧 감정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판단하고 해석하고, 그러한 생각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면, 즉 지켜보는 의식으로서 깨어 있지 않으면, 감정적인 에너지 손실은 그만큼 더욱 커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을 느낄 수 없거나 완전히 감정에서 벗어나면, 감정을 단지 몸의 문제나 증상으로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느끼기가 어렵다면, 몸 안의 에너지 장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내면 깊숙한 곳에서 몸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알고자 한다면, 몸 안에서 생기는 감정을 관찰하고 느껴야 합니다. 몸은 언제나 충실하게 마음을 반영하니까요. 마음과 감정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면, 마음이 거짓이고 감정이 진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 순간 순간의 마음 상태에 대한 상대적 진실이지요.
무의식적인 마음이 생각의 형태로 자각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은 언제나 감정으로 우리 몸에 나타납니다. 때문에 언젠가는 이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관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생각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같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생각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감정은 물리적인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어서 주로 몸 안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이제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감정을 허용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감정 자체가 아니라, 지켜보는 자이며 관찰자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내면의 무의식적인 어둠은 모두 의식의 빛으로 화하고, 마침내 진정한 존재에 이를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나의 내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런 성찰은 여러분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줍니다. 하지만 분석은 하지 마세요. 그냥 지켜보는 것입니다.
내면에 주의를 집중하고, 감정의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느껴지는 감정이 없다면, 내면의 에너지 영역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세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존재로 향하는 입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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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두려움은 마음이 만든 상상일 뿐이다
두려움이라는 심리적 상황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위험과는 다릅니다. 두려움은 불안이나 근심, 초조, 긴장, 두려움, 공포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심리적 두려움은 대개 현재의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어날지도 모를 미래의 일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미래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조바심도 그래서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은 자신의 본성과 동일시한 결과 ‘지금’의 힘과 단순성을 느끼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그런 조바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만날 수 있지만, 마음이 만들어낸 상상일 뿐인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자신의 본성과 동일시하는 한, 에고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에고는 본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정교한 방어기제에도 불구하고 매우 연약하고 불안해 하며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자신감에 넘쳐 보이는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감정이란 마음에 대한 몸의 반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에고, 즉 마음이 만들어낸 거짓 자아는 우리 몸을 향해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위험해. 나는 위협받고 있어.’ 계속해서 이런 메시지를 받다 보면 누구라도 두려워질 것입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상처 입는 것에 대한 두려움 —. 하지만 모든 두려움은 결국 죽음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에고에게 죽음은 언제나 바로 코앞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는 상태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논쟁을 하면 누구나 자신이 옳고 남이 그르다고 주장하지요. 아주 흔한 일입니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런 일도 실은 죽음에 대한 뿌리를 두고 있지요. 마음을 자신의 본성과 동일시할 때, 자신의 주장이 그른 것으로 드러나면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는 에고는 심각한 위협을 받습니다. 자연히 에고로서는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일 수 없지요. 옳지 않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요.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무수한 인간 관계가 허물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아서, 자신이 옳든 그르든 그것이 자신의 본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면, 자신이 반드시 옳아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생각, 즉 일종의 폭력과도 같은 이런 강박관념은 사라집니다.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확고하게 말하지만,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태도는 사라집니다. 여러분의 자의식이 마음이 아닌 내면의 더 깊고 순수한 곳에 뿌리를 두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온갖 방어기제를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방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허구의 자기, 마음속에서 꾸며진 이미지, 거짓된 실체일 뿐입니다. 눈을 뜨고 지켜봄으로써 이러한 패턴을 자각하면, 더 이상 어리석은 동일시는 하지 않게 됩니다. 환한 의식의 빛 속에서 무의식의 어둠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인간 관계를 해치는 모든 논쟁과 파워 게임도 사라집니다. 타인들을 지배하려는 욕구는 힘을 가장한 나약함이지요. 진정한 힘은 내면에 있으며, 그 힘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언제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지금’을 부정하려 듭니다. 한사코 지금 여기에서 달아나려 하지요.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할수록 괴로움은 더욱 커집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에고가 만들어낸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자신과 타인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면, 내면에 잠자고 있는 과거의 고통에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다면, 망상의 시간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시간도 필요 이상으로는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유일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세요.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과거나 미래에 살면서 가끔씩만 ‘지금’을 방문했다면, 앞으로는 ‘지금’에 살면서 나날의 삶에 필요할 때만 잠깐씩 과거나 미래를 방문하도록 하세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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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망상에서 벗어나라
시간의 망상에서 벗어나세요. 여기에 열쇠가 있습니다. 시간과 마음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마음에는 시간을 제거하면, 마음은 멈추어 버리지요. 마음과 동화된다는 것은 시간의 덫에 갇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로지 기억과 기대감에만 의지해서 충동적으로 살아가게 되지요.
과거와 미래에 얽매여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존중하지 않으면, 존재를 허용하지도 않게 됩니다. 과거가 정체성을 확인시켜주고, 미래는 어떤 식으로든 구원과 성취를 약속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는 모두 환상일 뿐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에 집착할수록 가장 소중한 시간인 ‘지금 이 순간’은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한 것일까요?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영원한 현재’야 말로 삶이 펼쳐지는 무대이며, 영원히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삶은 ‘지금 이 순간’ 입니다. ‘지금’이 아닌 삶은 이전에도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지요.
‘지금’ 이 소중한 두 번째 이유는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만이 시간도 없고 형태도 없는 ‘존재’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지요.
‘지금’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거나 생각하거나 느껴본 적이 있나요?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지금’이 아닌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요? 대답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세상의 과거 속에서 일어난 일은 없습니다. 과거의 일도 ‘지금’ 속에서 일어난 것이지요. 미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의 일도 미래의 ‘지금’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말하는 내용은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여러분은 시간을 벗어나 ‘지금’으로, 마음을 넘어서 ‘존재’의 영역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살아 숨쉬고, 생명력을 내뿜으며 진정한 존재를 노래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금 이순간에 머물러라
지금 이 순간으로 들어가라
시간을 초월한 차원으로 들어가면, 다른 종류의 앎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앎 속에서는 살아 숨쉬는 만물의 영혼을 만날 수 있지요. 만물의 신성함과 생명의 신비를 해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깊은 사랑과 존경을 품게 됩니다. 이는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새로운 앎의 영역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오랜 습관을 깨뜨려야 합니다.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과거나 미래로 달아나지 않도록 하세요. 그리고 가능하면 자주 시간의 차원에서 한 발 물러서 보세요.
곧장 ‘지금’ 속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면, 자신의 마음이 습관적으로 ‘지금’에서 달아나려는 것을 지켜보는 일부터 시작하세요.여러분이 그리는 미래의 모습은 늘 현재보다 더 좋거나 나쁘기 마련입니다.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상상할 때는 희망과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고, 지금보다 나쁜 미래를 상상할 때는 근심과 걱정에 잠기지요. 그러나 모두 환상일 뿐입니다.
마음을 지켜보는 연습을 하면, 자신의 삶 속에 현존하는 기간이 더 길어집니다. ‘지금’에 머물지 않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지금’에 머물게 됩니다.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마음의 덫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을 초월한 어떤 존재, 즉 지켜보는 자가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하는 거지요.
마음을 지켜보는 자로 ‘지금’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저런 상황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세요. 자기 행동의 원인이 되는 사람이나 상황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자주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히는지 살펴보세요. 그러나 관찰한 것을 판단하거나 분석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냥 생각을 지켜보고, 감정을 느끼고, 행동을 관찰하세요. 이런 것들을 개인적인 문제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 저 너머의 무언가 강력한 존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넘어선 곳에 고요히 머물며 지켜보는 자, 침묵의 관찰자를 느끼는 것이지요.
자아상이 위협받거나 어려움에 직면해서 두려울 때,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지난 일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힐 때가 간혹 있습니다. 이처럼 격한 감정을 유발하는 상황에 빠질 때일수록 강력한 현존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쉽사리 무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 상황에 대한 반응이나 감정에 지배 당하면, 여러분은 점점 감정 자체가 되어, 그런 감정을 행동으로 보이게 됩니다. 스스로를 합리화하거나 일을 그르치고, 공격하거나 방어하지만, 여러분 자신이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저 여러분의 행동 방식, 마음의 습관적인 생존 방식일 뿐이지요.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면 마음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을 관찰하면, 마음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지요. 마음과 동일시할수록 망상이 더 많아지지만, 마음을 관찰하면 ‘시간 없음’의 차원에 눈뜨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거두어들인 에너지는 깨달음을 위해 쓰여집니다. 깨어 있다는 느낌에 눈뜨면, 여러분은 시간의 차원에서 벗어나 더 깊이 ‘지금 이 순간’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지금’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과거나 미래의 시간을 사용하는 능력이 손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사용하는 능력 또한 손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날카롭고 집중력 있게 향상되지요.
깨달은 이들은 항상 ‘지금’에 집중하며 시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물리적인 시간을 사용하긴 하지만 심리적인 시간으로부터는 자유로운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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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은 시간에서 자유로워져라
나날의 삶에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사용하되, 문제를 해결하는 즉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심리적인 시간’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있지요. ‘심리적인 시간’이란 끊임없이 자신을 과거와 동일시하거나 강박적으로 미래를 투사하는 시간입니다.
목표를 세우거나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이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가고자 하는 곳을 명확히 알되, 바로 이 순간에 내딛는 발걸음에 최대한 집중해야 합니다. 목표에 집중해서 먼 미래의 행복이나 성취, 자기만족만을 추구한다면, ‘지금 이 순간’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지요. 현재는 미래로 가는 징검다리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심리적인 시간으로 전락하고 말지요. 그 결과 삶의 여정은 모험에서 도달하고 획득하고 성취해야 하는 강압적인 욕구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더 이상 길가의 꽃을 볼 수도, 그 향기도 맡을 수도 없게 됩니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함으로써 맛볼 수 있는 삶의 기적과 아름다움을 놓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요? 여러분이 하는 일의 대부분이 단지 방편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언제나 섹스나 음식, 술, 마약 혹은 스릴의 순간이 주는 즐거움에 얽매여 있지는 않은가요? 항상 무언가가 되려 하고 있나요? 오로지 무언가를 성취하고,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새로운 스릴이나 쾌락을 좇고 있지는 않은가요? 더 많이 얻으면 더 행복하고 더 평온해지리라 믿고 있지는 않은가요? 삶에 의미를 가져다 줄 필생의 아름다운 인연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과 동화된 의식 상태로 인해, ‘지금’ 속에 숨겨져 있는 힘과 무한한 창조 가능성을 심리적 시간으로 완전히 가려집니다. 그러면 삶은 활기와 신성함, 경이로움을 잃고 시들어버리지요. 사고와 감정, 행위, 반작용, 욕망 등의 낡은 습관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마음속의 각본이 ‘지금 이 순간’의 현존을 왜곡하고 덮어버립니다. 그러면 마음은 불만족스러운 현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더더욱 미래에 집착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현재 의식 상태 속에는 미래에 대한 인식이 들어 있습니다. 마음속에 과거의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있다면, 과거와 같은 경험을 더 많이 할 것입니다. 현재에 존재하지 않으면 과거가 계속해서 그 영향을 미칩니다. ‘지금 이 순간’의 의식 수준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미래 또한 ‘지금’으로서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의 의식 수준이 미래를 결정한다면, 그 의식 수준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얼마나 순수하게 깨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본성에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고, 과거의 업장을 녹일 수 있는 곳은 ‘지금 여기’ 뿐입니다.
‘시간’이 모든 고통과 번민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삶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에 집착해서 문제를 만들어내는 마음의 부작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전까지 문제는 그대로 남지요.
모든 번민과 고통, 불행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기적적으로 깨끗이 제거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머물지 못한다면, 깨어 있지 않다면, 얼마 안 있어 똑같은 고통과 번민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시간에 묶인 마음에 있는 것이지요. 시간에 얽매여 있는 한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자유를 향한 열쇠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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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자체에 주목하라
여러분이 흔히 ‘삶’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삶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삶의 상황’이란 결국 과거와 미래라는 심리적 시간이지요. 과거의 일들 중에는 여러분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일에 저항하면, 지금의 존재 상황에도 저항을 하는 것입니다. 희망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미래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힘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끊임없이 ‘지금’을 부정하면,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삶의 상황은 잊어버리고 삶 자체에 주의를 기울여보세요. 삶의 상황은 시간 속에나 존재할 뿐, 삶은 곧 ‘지금’ 입니다. 삶의 상황은 마음이 꾸며낸 허구지만, 삶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삶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 바로 ‘지금’이라는 문을 찾으세요. 여러분의 삶을 지금 이 순간으로 좁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상황은 고민으로 가득 차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순간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세요. 내일이나 10분 후가 아닌 바로 지금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나요?
골똘히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무언가를 받아들일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 해결의 여지가 없지요. 그러므로 언제든 가능할 때마다 여유를 갖고 삶의 상황에서 그 밑바닥에 흐르는 생명력을 찾도록 하세요.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놓으세요. 지금 여기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해석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온갖 빛과 형태와 색채, 질감을 보세요. 저마다의 고요한 현존에, 저마다의 공간에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소리에 귀 기울여보세요. 판단하지 말고, 소리의 밑바닥을 흐르는 고요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무엇이든 만지고 느끼면서 그 ‘존재’를 자각하세요. 호흡의 리듬을 지켜보며, 들이마시고 내쉬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세요. 몸 안의 생명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몸 안과 밖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현존’을 지켜보며, ‘지금 이 순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추상적이고 죽은 세계, 시간의 세계를 뒤로 하고 떠나세요. 생명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서서히 지구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미친 마음을 벗어 던지는 것입니다. 시간의 꿈에서 깨어나 ‘지금 이 순간’ 속으로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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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만든 환상에서 벗어나라
온전히 ‘지금‘에 집중하세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해보세요.
물론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지금’에 온전히 집중한다면, 문제가 있을 리 없으니까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어떻게든 해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제를 만들려 드나요?
마음은 무의식적을 문제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지요. 흔한 일이지만, 이는 미친 짓입니다. ‘문제’란 무엇일까요? 지금 어떻게든 진지하게 해결해보려는 생각은 않고, 무의식적으로 문제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상황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의 상황에 짓눌린 나머지 자신의 본성, 즉 현존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지금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대신, 미래에 해야 하거나 하게 될 수많은 일들로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문제를 만들면 고통이 따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더 이상 고통을 만들지 않겠다. 더 이상 문제를 만들지 않겠다’ 고 스스로에게 다짐하세요. 그렇게 선택하고 결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선택은 극히 단순하지만 획기적인 결정입니다. 진정으로 고통 받지 않는 한, 대부분이 이런 선택을 하려 들지 않으니까요. ‘지금’의 힘을 깨닫지 않고서는 이런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면, 타인들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게 됩니다. 부정적인 문제를 만들어 아름다운 지구와 자신의 내면, 고결한 정신을 오염시키는 일도 더 이상 안 하게 되지요.
당상 손을 써야 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 깨어있다면, 분명하고도 예리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과거의 상황에 비추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상황에 따라 직관적으로 반응할 테니까요. 또한 시간에 얽매여 반작용하려는 마음이 들 때도, 아무 행동 없이 그냥 ‘지금’에 집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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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만으로도 기쁨이다
스스로 심리적인 시간에 얼마나 많이 지배당하고 있는지 경계하기 위해 다음의 기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지금의 일에서 기쁨과 편안함, 유쾌함을 느끼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시간이 현재의 순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삶을 투쟁적으로 부담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는 일이 기쁘고 편안하고 유쾌하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일을 바꾸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 일의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요. ‘어떻게 하는가’는 항상 ‘무엇을 하는가’보다 중요합니다. 그 일의 결과보다 그 일을 하는 행위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 일에 온전히 집중하세요. 지금의 일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거부하면서 온전히 집중할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 이 순간을 존중하면, 모든 불행과 갈등은 사라지고 삶은 기쁨과 편안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 무슨 일을 하든 가장 단순한 움직임 하나에도 고결함과 봉사와 사랑의 의식이 스미지요.
행위의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행위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그러면 열매는 저절로 열립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영적 수행입니다.
‘지금’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그만둘 때, 모든 일에 존재의 기쁨이 흘러들 것입니다. ‘지금’에 집중하는 순간, 스스로 깨어 있음을, 고요와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만족과 성취를 미래에 기약하거나, 미래에서 구원을 기대하거나,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성공이나 실패가 내면의 ‘존재’를 바꾸는 것은 아니니까요.
심리적인 시간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본성은 영원한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려는 욕구는 절로 사라져버립니다. 요컨대 삶의 상황 속에서 부자가 되기를, 지식이 많기를, 성공 하기를, 이런저런 일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랄 수도 있지만, ‘존재’라는 심오한 차원에서 보면 지금 있는 그대로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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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넘어 깨어나라
온몸의 세포들이 활짝 깨어나 생명력으로 떨릴 때, 매 순간 진정한 존재의 기쁨을 느낄 때, 비로소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지배를 받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과거’를 필요로 하고, 성취를 위해 ‘미래’를 필요로 하는 심리적 욕구가 있지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이처럼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힌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의식의 변화입니다.
시간을 초월한 의식 상태를 처음으로 경험할 때에는 시간과 현조 사이를 오갈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자신이 ‘지금’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입니다. 불과 몇 오 동안 지속될 뿐이겠지만, 이러한 앎에 눈뜨는 것이 바로 현존이지요.
이렇게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순간에 의식을 집중하는 일이 점차 잦아지면, ‘지금 이순간’을 일어버렸다는 자각이 들 때마다 ‘지금’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몇 초 정도가 아니라 더 긴 시간 동안 ‘지금’에 머물 수 있게 되지요.
현존의 상태에 확고히 머물기 전에는, 다시 말해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가 되기 전에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현존의 상태와 마음을 동일시하는 상태를 오락가락하게 됩니다. 현존의 상태에서 벗어났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대부분의 시간을 깨어 있게 됩니다.
무의식에서 깨어나라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힘을 길러라
모든 일이 비교적 순조로울 때 좀더 자주 깨어 있도록 노력하세요. 이런 노력 속에서 현존의 힘은 자라납니다. ‘지금’ 속에서 깨어 있을 때, 우리의 내면과 주위에는 고주파의 에너지장이 형성됩니다. 빛 속에서는 어둠이 존재할 수 없듯이, 깨어 있는 의식의 영역에는 무의식적이거나 부정적인 것, 불화, 폭력 등이 끼어들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지켜볼 줄 알게 되면, 자신의 내면에 일상적인 무의식이 요지부동의 배경처럼 깔려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무의식의 상태에서는 한 순간도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지요.
자신의 생각을 지켜보는 동안, 여러분은 판단하고 불평하고 ‘지금’과는 먼 상상에 사로잡히는 등 끊임없이 현존에 저항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끊임없는 불안과 긴장, 권태, 초조함이 감정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것도 발견하게 되지요. 이 모두가 마음의 습관적인 저항일 뿐입니다.
불안과 불만, 긴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관찰하세요. 불필요한 판단과 있는 그대로에 대한 저항, ‘지금’에 대한 거부가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그런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의식의 빛을 비추면, 무지의 어리석음은 눈 녹듯 사라져버립니다.
일상의 무의식에서 벗어나는 법을 터득하면, 현존의 빛은 더욱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러면 무의식이 여러분을 끌어내릴 때에도 더욱 쉽게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일상의 무의식은 너무 익숙해져서 처음에는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 관찰을 통해 자신의 정신과 감정 상태를 파악하세요. 자신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던져 보세요.
지금 이 순간 나는 편안한가?
지금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외부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세요. 내면을 올바르게 파악할 때, 외부의 일은 저절로 제자리를 찾습니다. 가장 소중한 본성은 내면에 있으며, 외부적인 상황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질문에 즉시 답하지는 마세요. 관심을 내면으로 돌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세요.
나의 마음은 어떤 종류의 생각을 만들고 있나?
어떤 느낌이 드는가?
그리고 자신의 몸 속으로 주의를 돌려, 자신의 몸이 긴장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감정의 밑바닥에 불안이 흐르고 있으면,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삶을 회피하거나 거부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지금’을 부정하고 있는지 잘 살펴보세요.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현존의 순간에 저항합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더욱 예리하게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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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곳에 온전히 머물러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으세요? 그렇다면 현재를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축소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스트레스는 ‘여기’ 있으면서 ‘저기’를 바라기 때문에, 말하자면 현재에 있으면서 미래를 그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까요. 요컨대 내면의 분열 상태에서 스트레스는 생깁니다.
계속 과거에 집착하고 있나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나요? 과거의 성취나 모험, 경험, 피해를 당하거나 피해를 준 일,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거나 말할 때가 많은가요? 죄의식이나 자부심, 원망, 분노, 후회, 자기연민 등을 자아내는 생각을 많이 하나요? 이는 그릇된 자의식을 강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마음속에 과거를 축적함으로써 신체의 노화를 재촉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면, 이 말의 진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 과거를 떠나 있으세요. 과거는 필요 없습니다. 현재와 관련해서 꼭 필요할 때만 과거를 돌아보세요. 지금 이 순간의 힘을, 스스로 충만한 존재임을 느껴보세요.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나요? ‘만일 그렇게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자주 드세요? 그렇다면 이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공의 미래 상황에 대해서는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마음의 환영에 불화한 것이니까요.
지금 이순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건강을 해치고 삶을 좀먹는 이런 어리석은 짓은 간단하게 멈출 수 있습니다.
호흡에 집중해서, 들이마시고 내쉬는 공기의 흐름을 느껴보세요. 내면의 에너지 장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만들어낸 가공의 미래가 아닌 현실의 삶에서 마주해야 할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내년도, 내일도, 5분 후도 아닌 바로 이 순간, 나의 문제는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바로 이 순간에 무엇이 문제인지.
현재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손을 쓸 수 있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으며 그래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삶의 해답과 용기와 적절한 행동을 원한다면,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이 순간에 있습니다.
혹시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나요? 지금까지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낭비한 시간이 얼마나 많은가요? 우체국에서, 혼잡한 거리에서, 공항에서 줄을 서 기다리거나 누군가가 도착하기를,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다음 휴가를 기다리고, 더 나은 직장을 기다리고, 아이들이 어서 자라기를 기다리고, 진정한 인간 관계를 기다리고, 성공과 부와 명예를 기다리고, 깨달음에 이르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시작하려고 기다리면서 평생을 허비하고 있지요.
기다림이란 마음의 상태입니다. 기다림은 근본적으로 현재가 아닌 미래를 원한다는 의미지요. 지금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없는 것을 원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종류의 기다림은 그래서 원치 않는 ‘지금 여기’와 원하는 미래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되면 현재를 잃어버리고 삶의 질도 크게 떨어져버리지요.
많은 이들이 행복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행복은 미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사람이든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하고 완전히 받아들이세요. 자신이 가진 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때,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존재하는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현재의 순간에 감사하면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입니다.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행복이 여러분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지금의 가난에 좌절과 분노를 느끼고, 부자를 꿈꾸며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허전함은 그대로이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돈으로 여러 가지 흥미로운 경험을 살 수는 있겠지만, 이런 순간적인 즐거움은 언제나 더욱 큰 공허함만을 느끼게 만들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더 많은 육체적, 심리적 만족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지금 이 순간에 머물면서 삶의 충만함을 느끼는 진정한 행복은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기다림이라는 마음의 상태에서 벗어나세요. 다시 무언가를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재빨리 그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하세요.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 그냥 머물면서 진정한 존재를 즐기는 것입니다. 현존의 순간에 머무는 한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음 번에 누군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괜찮아. 기다리지 않았어. 그냥 여기 서서 나 자신을 즐기고 있었는걸. 내 안의 기쁨을 느끼고 있었어.”
습관적으로 현존의 순간을 부정하려는 마음은 일상적인 무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끝없는 불만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인 무의식을 당연한 듯 지나쳐버리기 쉽지요. 하지만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지켜보는 연습을 계속하면, 자신이 과거나 미래의 덫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문득 시간의 꿈에서 개어나 현존의 순간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그러나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만들어진 거짓 자아는 시간에 지배되어 살아갑니다. 거짓 자아는 현존의 순간이야말로 자신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깨어 있음을 매우 위협적으로 느끼지요. 그래서 여러분을 시간에 붙들어 두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존의 상태는 기다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기다림이지요. 온전히 깨어 있는 상태의 기다림입니다. 어느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활짝 깨어 완전한 고요에 머물지 않는다면 현존에 머물 수 없습니다. 현존의 상태에서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됩니다. 백일몽이나 생각, 기억, 기대 따위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긴장도 두려움도 없고, 생생한 현존만이 존재할 뿐이지요. 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까지 완전한 존재로 현존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가진 ‘나’, 개성 있는 인격체로서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지요.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이때보다 더 완전하게 자기 자신인 적도 없습니다. 진정 자기 자신이 되는 유일한 시간은 오직 ‘지금’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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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벗어나 지금으로 들어가라
내면의 무의식적인 과거를 일일이 알고자 하면, 현재의 삶만 고달파집니다. 과거에 집착할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를 파는 것 같은 느낌만 강해집니다. 과거를 이해하거나 과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미래에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리라 기대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는 환상입니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니까요. 시간이 지난다고, 시간에서 자유로워지는 건 아닙니다.
‘지금’의 힘에 다가서세요. 이것이 열쇠입니다. ‘지금’의 힘이란 현존의 힘, 모든 망상에서 벗어난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현존의 차원에서 과거를 생각하세요. 과거에 집중할수록 과거는 더욱 큰 힘을 갖게 되고, 점점 더 과거를 자아와 동일시하게 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주의 깊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과거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현존의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세요. 바로 지금의 행동과 반응, 기분, 생각, 감정, 두려움, 욕망에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과거는 물론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이나 분석 없이, 아무런 판단도 없이, 충분한 현존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본다면, 현존의 힘을 통해 과거를 생각하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과거에 얽매인 상태에서는 결코 자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들어가세요.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귀를 기울여라
깨어 있는 본성은 아름답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 신성함에 깨어 있기 위해서는 현재 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맑은 날 밤하늘의 무한한 공간을 응시하면서 그 완전한 고요함, 그 광활함에 압도된 적이 있나요? 숲 속을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진정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 적이 있나요? 평화로운 여름날 저녁 해질 무렵의 찌르레기 노랫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이러한 아름다움에 끼여 있으려면 먼저 마음이 고요해야 합니다. 잠시 과거나 미래에 대한 사사로운 고민을 내려놓고, 모든 지식들도 내려놓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모든 형상의 외적인 아름다움 너머에는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깊고 신성한 내면의 본질이 있습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는 내면의 본질이 빛을 발합니다. 여러분이 깨어 있을 때 그 아름다움과 여러분의 본성은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이 형언할 수 없는 본질과 현존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 아닐까요?
깨어 있지 않는 한 진정한 존재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내면의 본질로 깊이 들어가, 여러분의 본성을 찾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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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깨끗한 의식을 자각하라
마음을 관찰하면, 마음이 지어내는 형상으로부터 의식이 자유로워집니다. 이때 여러분은 지켜보는 자, 관찰자가 됩니다. 형상을 초월한 순수 의식으로서 여러분은 더 강해지고, 마음은 그만큼 힘을 잃게 됩니다.
마음을 지켜보는 자가 된다는 것은 사실 우주적 의미를 지닌 중대 사건을 개인적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의식이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환상에서 개어나 형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먼 미래의 연대기적인 시간이 정지하는 사건을 암시하는 것이며, 이미 그 사건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물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타성을 지닌 마음의 급류에 휩쓸리게 됩니다.
이 말은 곧 자신의 몸에 온전히 깃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항상 의식의 일부를 몸 안의 에너지 장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면으로부터 몸을 느끼는 것입니다. 몸을 의식함으로써 계속 깨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지금’에 머물 수 있습니다.
보고 만질 수 있는 몸은 여러분을 진전한 존재로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몸은 껍데기에 불과하므로, 보다 깊은 실재를 제한하고 왜곡해서 지각할 뿐이니까요. 진정한 존재와 연결된 본연의 상태에서는, 내면의 존재가 활짝 깨어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몸, 즉 진정한 존재를 매 순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몸 안에 깃든다는 것’은 안으로부터 몸을 느끼고 내면의 생명을 느낌으로써 자신이 외적인 형태를 넘어서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에 사로잡히면 진정한 존재와 단절됩니다. 대부분이 항상 그렇듯, 이런 때에는 몸 안에 깃들지 못하지요. 마음이 모든 의식을 사로잡아 망상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면 결국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진정한 존재에 깨어 있으려면 마음으로 가려진 의식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적 성장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질없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관심을 생각이 아닌 몸으로 향하는 순간, 여러분은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에너지 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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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 머물러라
지금 해보세요. 눈을 감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다 ‘몸 안에 머무는 것’이 자연스럽고 쉬워지면, 더 이상 눈을 감지 않아도 됩니다.
몸 안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안으로부터 몸을 느껴보세요. 살아 있는 게 느껴지나요? 손과 팔, 다리, 발, 배와 가슴에서 생명을 느껴보세요.
몸 구석구석까지 모든 기관과 세포 하나하나에 활기를 불어넣는 오묘한 에너지 장을 느껴보세요. 몸의 모든 부분을 아우르는 그 에너지 장이 느껴지나요?
잠시 내적인 몸의 느낌에 집중해보세요. 생각은 말고, 그냥 느끼는 것입니다.
주의를 집중할수록 몸의 느낌은 더 분명하고 강렬해질 것입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시각적으로 민감하다면, 몸에서 빛이 발하는 걸 그려볼 수도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도움이 되지요. 하지만 어떤 영상을 떠올리기보다는 느낌 자체에 더 집중하도록 하세요. 영상이란 아무리 아름답고 강렬해도, 이미 형상화된 것이므로 더 깊은 감동은 주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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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으로 깊이 들어가라
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면 명상을 해야 합니다. 10분에서 15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우선 전화벨 소리나 다른 사람으로 인해 방해 받지 않도록 외부를 차단시키세요. 의자에 앉되, 등을 기대지는 말고 척추를 곧게 폅니다. 특별히 편안한 자세가 있으면 그 자세를 취해도 좋습니다.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은 다음, 몇 번 심호흡을 하세요. 그러면서 아랫배로 숨을 쉬는 자신을 느껴보세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아랫배가 어떻게 불러오고 가라앉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이제 몸 안의 에너지 장을 느껴보세요. 생각하지 말고 그냥 느끼세요. 마음으로부터 의식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도움이 된다면 앞에서 설명한 ‘빛’의 시각화를 이용해보세요.
몸 안에서 분명한 하나의 에너지 장이 느껴지면, 모든 시각적 이미지를 버리고 오로지 느낌에만 집중하세요. 가능하면 육체에 대한 마음의 영상들도 모두 버리세요. 그러면 모든 것을 포용하는 깨어 있음, ‘있음’의 느낌만 남게 됩니다. 내면의 몸에 경계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입니다.
이제 그 느낌 속으로 좀더 깊이 집중하세요. 그 느낌과, 그 에너지 장과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지켜보는 자와 보이는 자, 여러분과 여러분의 몸이 동떨어진 존재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안팎의 차이가 없어지면서, 내면의 몸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지요. 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몸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가능한 편안하게 순수 존재의 영역에 머물도록 하세요. 그러다 몸과 호흡과 몸의 감각을 느끼며, 다시 눈을 뜨세요. 그리고 잠시 명상의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세요. 마음의 차원에서 주위 상황을 분별하지 말고, 계속 내면의 몸을 느끼세요.
진정한 자유로움이란 이처럼 형상을 넘어선 영역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더 이상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죠. 이를 우리는 ‘드러나지 않는’ 세계, 만물의 보이지 않는 근원, 만물의 내면에 있는 진정한 존재라고 부릅니다. 이는 깊은 고요와 평화의 영역이며, 기쁨과 생동감으로 충만한 공간입니다.
깨어 있을 때마다 여러분은 이 근원에서 발산되는 순수 의식의 빛으로 조금씩 투명해질 것입니다. 또한 이 빛이 여러분의 존재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여러분의 본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지요.
의식이 외부를 향하면 마음과 세상이 생겨나고, 내면을 향하면 의식은 보이지 않는 근원을 깨달아 드러나지 않은 세계로,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의식이 다시 가시적인 세계로 돌아오면, 여러분은 잠시 떠나 있던 형체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게 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진정한 존재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보게 된 것입니다 (본래 여러분 자신은 물론 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도 아니지만, 마음의 장막에 가려 보지 못했던 진정한 존재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수행을 해보세요.
나날의 삶에 충실하되, 외부 세계와 마음에 완전히 집중하지는 말고, 일부는 내면을 향하도록 하세요.
일상적인 활동을 할 때, 누군가를 만나거나 자연을 만날 때, 내면의 몸을 느끼세요. 내면 깊이 고요를 느껴보세요. 언제나 문을 열어두라는 의미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외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저 밑의 어딘가에서 결코 여러분을 떠나지 않고 있는 평화와 고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드러난 세계와 드러나지 않은 세계, 신고 이 세상 사이의 다리가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이처럼 진정한 근원, 자신의 본성과 연결된 상태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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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 깊이 뿌리내려라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내면의 몸과 영원히 연결된 상태로 있으면서, 언제나 내면의 몸을 느끼는 것. 스위치를 올려 전력을 증가시키면 빛이 점점 밝아지는 것처럼, 내면의 몸에 집중할수록 의식의 주파수도 점점 높아집니다. 이런 높은 에너지 차원에서는 부정적인 사고나 감정이 더 이상 해를 끼치지 못하지요. 더불어 높은 주파수를 반영하는 새로운 상황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계속해서 내면의 몸에 온전히 집중하면, ‘지금’에 닻을 내리게 됩니다 외부 세계나 마음의 작용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게 되지요. 사고나 감정, 두려움, 욕망은 여전하겠지만, 더 이상 이런 것들에 지배를 당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세요. 여러분은 지금 제 말을 듣고 있거나 이 책을 읽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혹은 주변 상황과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듣거나 읽은 내용을 놓고 마음이 논평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중 어느 한 가지 일에만 완전히 집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면의 몸에도 동시에 의식을 집중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얼마간의 관심은 내면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관심을 바깥으로만 흐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온몸을 하나의 에너지 장으로 느껴보세요. 그러면 마치 온몸으로 듣거나 읽는 것 같은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앞으로 며칠, 혹은 몇 주일 동안 이런 수행을 해보세요.
관심을 온통 마음과 외부 세계에 빼앗기지 않도록 하세요.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가능할 때마다 내면의 몸을 느껴보세요. 내면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의 의식 상태와 여러분이 하는 일이 질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는지 관찰해보세요.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지 말고, 여러분이 직접 경험해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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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 체계를 강화하기
면역 체계를 강화시켜주는 간단하고도 강력한 자기치유 명상이 있습니다. 초기 증상을 느낄 때 사용하면 특히 효과적이지요. 병이 이미 진전된 경우에도 집중해서 자주 사용하면 효과가 있습니다. 어떤 부정적 감정이나 생각으로 인해 에너지 장이 파괴되는 것을 막아주니까요.
그러려면 매 순간 몸 안에 머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시적인 효과로 그치고 말 테니까요. 그 명상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잠시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특히 잠들기 전이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기세요. 눈을 감고, 등을 바닥에 대고 똑바로 눕습니다. 그런 다음 손이나 다리, 팔, 발, 배 가슴, 머리 등 의식을 집중할 부위를 선택해 각 부분의 강렬한 생명력을 느껴보세요. 약 15초 정도씩 주의력을 집중하면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물길이 흐르듯, 몇 차례 온몸으로 의식을 흘려 보내세요.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반대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1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 다음 몇 분 간 몸 전체를 하나의 에너지 장으로 느껴보세요.
이렇게 하는 동안,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활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따금 마음이 관심을 몸에서 끌어내, 다른 생각 속에 빠뜨릴 수도 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를 자각하면, 다시 내면의 몸으로 주의를 돌리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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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가라
내면의 몸에 집중하기 어려울 경우엔 먼저 호흡에 집중하는 편이 쉽습니다. 호흡은 그 자체로도 효과적인 명상이 됩니다. 의식적인 호흡은 여러분을 천천히 여러분의 몸과 만나게 해 줍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호흡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복부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미세한 움직임을 느껴보세요.
눈을 감고, 빛에 둘러싸여 있거나 의식의 바다로 일컬어지는 발광체에 잠겨 있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 빛 속에서 호흡을 하며, 그 발광체가 여러분의 몸을 가득 채우고 빛나게 만드는 것을 느껴보세요.
서서히 그 느낌에 집중하되, 어떤 시각적 이미지에도 집착하지 마세요.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 속에 있습니다. ‘지금’의 힘에 다가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내 손 안에 있다
사랑이란 깨어 있음의 상태
사랑은 밖이 아닌, 내면 깊은 곳에 있다.
사랑은 잃어버리거나 떠나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타인이나 외부의 형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므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자유롭다
업장은 에고로부터 시작된다 [필사주: 업장 業障 불교 삼장三障의 하나, 전생에 지은 허물로 이승에서 받는 마장 魔障. 말, 동작 또는 마음으로 지은 악업에 의한 장애를 이른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마음이 삶을 지배하는 한 고통은 계속해서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고통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있는 그대로’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저항은 생각의 차원에서 보면 판단의 형태로 나타나며, 감정의 차원에서는 부정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고통의 강도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저항의 정도에 달려 있으며, 자신을 마음과 얼마나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마음은 언제나 ‘지금’을 부정하고 여기서 벗어나려 합니다.
요컨대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할수록 더 많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반면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할수록 고통과 괴로움, 에고의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모든 고통은 궁극적으로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진리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 말이 여러분 자신에게도 진리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냥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평생 동안 고통을 겪으면서 그 고통이 환상이라고 우길 건가요? 말로만 환상이라고 되뇐다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제가 여기서 말하려는 내용은 진리를 깨닫고 몸소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는 한, 무지의 어둠에 머물러 있는 한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주로 감정적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감정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이나 죽음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죠. 원한이나 증오, 자기 연민, 죄의식, 분노, 우울, 질투, 약간의 조바심도 일종의 고통입니다. 쾌락이나 감정의 도취도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그 본색을 드러내는 고통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지요.
황홀한 ‘극치감’을 위해 마약을 복용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입니다. 순간적인 고양 상태에서 금새 나락으로 떨어지며, 쾌락은 고통으로 바뀌지요. 쾌락을 추구하며 빨리 쉽게 뜨거워진 관계는 오래지 않아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 역시 대부분이 겪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보면, 좋고 나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어느 쪽이든 마음과 동화된 에고의 의식 상태에 머무는 한 근원적인 고통을 잉태하고 있으니까요.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 만들어내는 고통, 몸과 마음속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과거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그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힘에 연결되지 않는 한, 여러분이 경험하는 모든 감정적인 고통은 앙금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 앙금은 계속 여러분의 내면에 남아, 이미 자리하고 있는 과거의 고통과 함께 몸과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물론 그 중에는 세상에 대한 무지로 인한 어린 시절의 고통도 있습니다.
이렇게 축적된 고통은 부정적인 에너지 장을 만들어 몸과 마음을 지배합니다. 만약 이 부정적인 에너지 장을 자기 나름의 권리를 지닌, 보이지 않는 실체로 바라볼 줄 안다면, 어느 정도 진실에 접근한 것입니다. 감정적인 업장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요.
감정적인 업장은 활동 상태에 있기도 하지만 잠복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의 90퍼센트 정도는 대개 잠복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상황에 놓인 사람의 경우엔 100퍼센트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삶의 대부분을 업장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이도 있는가 하면, 절친한 사람의 배반이나 상실, 버림받음과 같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만 업장을 경험하는 이도 있습니다.
업장은 무엇에든지 자극 받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건드릴 때는 더욱 그렇지요. 잠복 상태에서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나 가까운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에도 업장은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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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장에서 벗어나기
업장은 여러분 ‘있는 그대로‘ 업장을 관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업장을 관찰하고 내면의 에너지 장을 느끼는 순간, 여러분은 업장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현존’이라고 부릅니다. 현존의 상태에서는 업장을 관찰하고 지켜보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업장은 더 이상 동일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가장하거나, 힘을 충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여러분은 비로소 내면의 강인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떼를 쓰는 아이처럼 짜증스럽지만 별로 해를 끼치지 않는 업장도 있습니다. 사악하고 파괴적은 괴물이나 악마처럼 덤벼드는 업장도 있고요. 육체적으로 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주위 사람이나 가까운 이를 공격하는 경우도 있고, 여러분 자신을 공격하는 업장도 있지요. 이런 업장과 마주칠 때, 여러분은 매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됩니다. 질병과 사고는 대개 이런 상태에서 일어나지요. 심지어는 업장에 짓눌려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갑자기 험악하고 이질적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여러분 내면 속의 업장을 지켜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안에 업장을 불러오는 어떤 징후가 도사리고 있는지 잘 살펴 보세요. 불안이나 초조, 우울, 폭력성, 분노, 원망, 좌절, 인간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려는 욕구 등 어떤 형태로든 업장은 잠복해 있습니다. 그것이 깨어나는 순간을 잘 포착해야 합니다.
업장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무의식적으로 업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안에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런 동일시의 순간, 업장은 깨어나 여러분을 지배하고, 여러분 자신이 되고, 결국은 여러분을 통해 살아남게 됩니다. 요컨대 업장은 여러분을 통해 그 먹이를 구하지요.
업장은 자신과 같은 종류의 에너지와 공명하며, 분노와 파괴, 증오, 슬픔, 감정적인 사건, 폭력, 질병 등의 형태로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들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는 순간, 자신의 에너지 주파수를 반영하는 상황을 여러분의 삶 속에 만들어내죠.
고통은 고통만을 먹고 살아가지, 기쁨을 먹고 살지는 못합니다. 고통은 기쁨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업장이 여러분을 점령하면, 여러분은 더 많은 고통을 원하게 됩니다. 업장의 희생자나 하수인이 되어, 고통을 가하거나 스스로 고통받고 싶어하게 되지요. 두 가지 모두를 원하기도 합니다. 사실 고통을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이를 의식하기 못하기 때문에 자신은 고통을 원치 않는다고 극구 부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을 향한 것이든 타인을 향한 것이든 계속해서 고통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를 분명히 깨달으면, 고통을 용해시켜버릴 수 있습니다. 더 많은 고통을 원하는 건 미친 짓이며, 의식적으로 미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요.
에고의 어두운 그림자인 업장은 의식의 빛을 두려워합니다. 업장이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업장은 여러분이 무의식적으로 업장에 동화될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고통과 직면하기를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할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지요. 그러므로 고통에 직면하면서 고통을 향해 의식의 빛을 비추지 않으면, 업장은 계속 살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업장’ 하면 흔히들 쳐다보기조차 두려운 위험한 괴물처럼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한, 업장은 허깨비 같은 환영에 불과합니다.
동일시에서 벗어나 지켜보는 자가 되어도, 업장은 계속 작용하면 여러분을 다시 자신에게 동화시키려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구르던 바퀴는 밀지 않아도 얼마간 그 관성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더 이상 동일시에 힘을 실어주지 않아도 업장은 어느 정도의 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 머물면서 깨어 있으세요. 내면을 빈틈없이 지켜보며, 똑바로 업장을 직시하도록 활짝 깨어 있는 상태에서 업장의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그러면 업장은 더 이상 여러분의 생각을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업장의 에너지 장에 이어지는 순간, 여러분은 다시 그 업장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이런 여러분의 생각으로 다시 업장을 먹여 살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분노가 업장의 에너지 진동을 주도하고 있다 합시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화를 내면서 그가 여러분에게 한 일이나 장차 그에게 할 보복을 곰곰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곧 무지의 어둠에 휩싸이고, 업장이 곧 여러분을 집어삼키게 됩니다. 분노의 자리에는 항상 고통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기 마련이지요.
우울해지면서 마음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혐오가 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곧 업장으로 이어지고, 무의식적으로 되어 업장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무의식적’이라는 말은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지켜보는 자로서의 진정한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뜻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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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음으로 거듭나기
업장이 생각에 끼어드는 과정을 꾸준히 지켜보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때 고통은 연료가 우리의 의식을 더욱 밝게 타오르도록 하지요.
이것이 바로 고대로부터 은밀히 전해져 온 연금술의 비밀입니다. 쇳덩어리가 황금으로 변화하듯, 고통이 의식적인 깨어 있음으로 거듭나는 거지요. 분열된 내면이 치유되어, 다시 흠 없는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더 이상 고통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업장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업장을 느껴보도록 하세요. 생각하거나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합합니다. 업장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말고, 지금에 머물면서 계속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세요.
감정적인 고통을 자각하고, 관찰하는 자, 고요히 지켜보는 자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힘이죠. 생생하게 깨어 있는 의식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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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자신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앞에서 설명한 방법은 간단하지만 매우 효과적입니다. 어린아이라도 배울 수 있지요. 언젠가 아이들이 학교에서 이런 과정을 주요 과목으로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단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지켜보는 자로서 깨어 있음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 체험을 통해 깨어 있음을 이해한다면, 진정으로 거듭할 수 있는 도구를 손에 쥔 셈입니다.
그러나 자신과 업장의 동일시에서 벗어날 때에는 강력한 내면의 저항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평생 업장울 짊어진 채 그것이 곧 자신이라고 굳게 믿어 온 사람이라면, 특히 그 저항이 심하겠지요. 업장의 무게에 눌려 불행을 자초하고, 마음이 만들어낸 허구를 진정한 자기라고 믿을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 저항하는 거지요. 불행한 자기에 익숙해져서, 그런 자신을 변화시키는 막연한 모험에 뛰어들기보다는 차라리 고통 속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업장’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것이지요.
내면의 일렁이는 저항을 지켜보세요. 고통에 대한 여러분 내면의 집착을 지켜보세요. 불행이 주는 기이한 쾌감을 지켜보세요. 그 쾌감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가만히 지켜보세요. 깨어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자각하면, 저항도 곧 멈추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업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업장을 지켜보는 자가 되어, 현존의 기쁨을 누리게 되지요. 변화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일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이 일을 대신해줄 수 없지요. 다행히 강렬하게 깨어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와 더불어 깨어 있음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면,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의식의 빛을 재빨리 타오르게 할 수 있지요. 이제 막 불이 붙기 시작한 장작을 활활 타오르는 장작 곁에 두었다가 잠시 후에 꺼내보면, 훨씬 더 강렬하게 타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스승이란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지요. 영적 스승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차원을 넘어서 강렬한 의식의 현존 상태를 만들어내고 유지시켜주는 사람입니다. 심리치료사들 역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지요.
자신을 업장과 동일시하는 한, 업장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감정적 고통에 동화되어 있는 한, 고통을 치유하려는 모든 시도에 무의식적으로 저항할 것입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자의식을 손상하고 싶지 않을 뿐더러 고통은 이미 뗄 수 없는 여러분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무의식에 휩싸여 있는 거지요. 무지의 어둠을 극복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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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남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거 혹은 지금 고통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문득 깨닫는 것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이런 자각의 순간, 집착을 끊을 수 있게 되니까요.
업장이란 하나의 생명체처럼 여러분의 내면에 일시적으로 깃드는 에너지 장입니다. 더 이상 흐르지 않고 덫에 갇혀있는 생명 에너지입니다. 물론 업장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 때문에 그곳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업장이란 여러분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과거인 셈이지요. 그러므로 업장에 동화되는 것은 과거에 동화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업장은 과거가 현재보다 더욱 강렬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감정적 고통에 얽매여 진정한 자신의 본성을 찾지 못하게 도니 것은 자신에 대한 타인들의 행위에 그 책임이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생기는 것이지요.
사실 존재하는 유일한 힘은 지금 이 순간 안에 있습니다. 일단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지금 자신의 내면에 대한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있으며, ‘지금’의 힘 안에서 과거는 빛을 잃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의식이 업장을 만들고, 깨달음은 업장을 본래의 상태로 돌려놓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주의 이런 원리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모든 것은 빛을 받아 드러나고, 빛을 받아 드러나면 빛의 세계에 속하게 된다.”
어둠과 싸울 수 없는 것처럼 업장과도 싸울 수는 없습니다. 싸우려 들면 내면의 갈등이 일어나, 더 많은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그냥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지켜본다는 것은 그 순간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모든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진다
사랑은 지금의 힘이다
의식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모든 인간 관계, 특히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져서 마침내 허물어지고 맙니다.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은 그 관계가 완벽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름다운 외모가 손상되면서 점점 말다툼이 잦아지고, 갈등과 불만만 쌓여갑니다. 심지어는 감정적, 신체적 폭력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연인들이 애증 관계로 변질되고 말지요. 사랑은 격렬한 공격과 적대감으로 변하고 한 순간 애정이 식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사랑과 그 반대 감정인 공격성, 감정적인 폭력 등을 함께 경함하고 있다면, 이는 에고의 집착과 중독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상대방을 사랑하고 다음 순간에는 그를 공격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고통을 주지 않으니까요. 만약 여러분의 사랑이 반대 감정을 포함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좀더 완전하고 확실한 자의식을 필요로 하는 에고의 강한 욕구일 뿐이지요. 상대방은 잠시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상일 뿐입니다.
에고가 구원 대신에 선택한 거짓 사랑은 잠시 진짜 구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 상대방의 행동 방식이 에고가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때가 오고 말지요. 그러면 그 동안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포장되어 있던 두려움과 고통, 결핍감 같은 느낌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합니다. 다른 모든 중독과 마찬가지로, 약효가 있는 동안에는 기분이 고조되지만, 약이 듣지 않는 때가 반드시 오기 마련이지요.
이렇게 다시 고통이 찾아들면, 그 고통은 전보다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이제 그 고통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때문에 잔인한 폭력성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공격은 상대방의 고통을 자극하여, 상대방도 공격적으로 만들어버리지요. 이떼 에고는 그런 공격이나 처벌로 인해 상대방의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고, 자신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그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중독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데서 생겨납니다. 때문에 모든 중독은 고통으로 시작해서 고통으로 끝나지요. 알코올, 음식, 약물, 사람 등 무엇에 중독되건, 중독은 고통을 감추기 위해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연인관계에서 처음의 황홀함이 지난 후에 더 많은 불행과 고통이 남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 관계 자체가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여러분 안에 있던 고통과 불행을 끌어냈을 뿐이니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가 아닌 미래에서 구원을 찾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금’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가장 먼저 직면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고통이니까요. 이것이야말로 두려운 것이니까요.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현존의 힘에 다가서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깨닫는다면, 과거와 과거의 고통을 끊고 미래의 환상을 던져버리는 일이 얼마나 간단한지 안다면, 한 순 간도 망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존재로 깨어 있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신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운 존재인지를 안다면 말이지요.
고통을 피하기 위해 관계 자체를 피하는 것 역시 해답은 아닙니다. 어차피 고통은 있게 마련이니까요. 3년 동안 세 번이나 실연을 당한다 해도, 3년 동안 무인도에서 살거나 방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것보다 더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강렬한 현존을 경험할 수 있고, 그러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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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는 것이다
독신이든 누군가와 함께 살든 핵심은 ‘지금‘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현존을 강화하는 것.
사랑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현존의 빛을 강화하여 생각이나 업장에 지배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자신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하지요.
생각하는 자로서, 내면 깊은 곳의 진정한 존재로서, 시끄러운 마음의 소리 밑바닥에 있는 고요함으로서, 고통의 밑바닥에 있는 사랑과 기쁨으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요 구원이요 깨달음입니다.
업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고통 속에 깨어 있음으로써 고통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자신을 생각과 동일시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생각과 행동을, 특히 에고 에 의한 반복적인 마음의 패턴을 조용히 지켜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근본적으로 판단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있는 그대로에 저항함으로써 갈등과 사건,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런 충동적인 마음의 성질은 사라집니다.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으로써 판단을 중지하는 순간,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세요. 그런 다음 상대방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세요.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변화시키려 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게 필요합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에고를 초월하게 됩니다. 한 순간에 모든 마음의 게임과 중독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는 거지요. 그러면 희생자도 가해자도 없으며, 비난하는 자도 비난받는 자도 없어집니다.
더 이상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고, 상대방의 무의식적인 생각에 휘말려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일도 없어집니다. 떨어져 있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고, 함께 ‘지금’ 속으로, 진정한 존재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너무나 간단하지 않은가요?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사랑은 진정한 존재의 상태입니다. 사랑은 외부가 아닌, 여러분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사랑은 다른 사람의 몸이나 외부의 어떤 형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현존의 고요함 속에서 형상도 없고 시간도 없는 자신의 본성을, 여러분의 육체를 살아 숨쉬게 만드는 ‘드러나지 않은 생명’을 느낄 수 있습니다.
타인들을 포함한 모든 삼라만상 속에도 동일한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눈에 보이는 모습 너머의 것들을 바라보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 됨’에 대한 자각, 사랑입니다.
마음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업장을 녹일 만큼 강렬하게 깨어 있지 않는 한, 적어도 지켜보는 자로서 깨어 있지 않는 한, 사랑의 빛을 잠깐 엿볼 수는 있어도 사랑을 꽃피우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활짝 깨어 있으면, 업장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사랑을 파괴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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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수행자로서의 관계
날이 갈수록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연히 진정한 존재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고통과 갈등으로 얼룩지는 간계들도 그만큼 많아집니다.
에고를 강화하고 확대하며 업장을 활성화시키는 관계라도, 그 상황에서 도망치기보다는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세요. 관계를 회피하거나 자신의 문제에 해답을 주고 행복을 느끼게 해줄 이상적인 상대를 찾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인정하도록 하세요.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어느 정도 그 상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자각’을 유지한다면, 그런 자각이 만들어낸 무언가로 인해 둘 사이의 불협화음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평화롭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여러분의 불안을 사랑과 포용으로 감싸는 고요한 공간으로 만들어, 불안을 평화로 바꿀 수 있게 됩니다.
내면의 변화와 관련해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은 물론 반려자나 다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지요.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 즉, 자비와 사랑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관계가 삐걱거릴 때마다, 서로의 내면에 ‘미친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반갑게 이를 맞이하도록 하세요. 무지의 어둠에 싸여 있던 무언가(진정한 존재)가 빛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기회입니다.
맨 순간 자신의 내면 상태에 깨어 있으세요. 분노가 일어나면 그 분노를 자각하세요. 질투, 방어, 말다툼, 합리화, 사랑과 관심을 바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모든 종류의 고통스러운 감정이 일어나려 하면, 무엇이든 그 순간에 알아차리고, 그 자각의 상태를 유지하세요.
깨어 있어야만 인간 관계를 사다나 (Sadhana; 탄드라 불교에서 명상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 옮긴이), 즉 영적 수행의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반려자가 무지의 어둠에서 비롯된 행위를 하거든, 그 행위에 반작용하지 말고, ‘자각’으로 그것을 다정하게 껴안아주세요.
무지와 앎은 오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적개심과 공격 뒤에 숨은 에너지는 사랑의 현존 앞에서 견디지 못합니다. 반려자의 무지에 반작용을 하면, 여러분 역시 어둠의 무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에 깨어 있다면, 다시 무제에 사로잡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인간 관계가 문제와 갈등으로 점철된 적은 없었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관계가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관계를 통해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계속 환멸만을 맛볼 것입니다.
관계가 행복이 아닌 깨우침을 위한 것임을 이해한다면, 관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더 높은 차원으로 날아올라, 장차 이 세상에 오게 될 깨달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낡은 습관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폭력, 혼돈과 광기만이 점점 더 증가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영적인 수행의 장으로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할까요? 반려자가 협조적이지 않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온전한 의식으로 깨어 있음은 오직 여러분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깨닫기에 앞서 세상이 온전해지기를, 누군가 다른 사람이 깨우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러다가는 영원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무지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마세요. 말다툼을 시작하는 순간,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가짐과 자신을 동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마음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지요. 에고에게 스스로 항복하고, 무지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지요.
때로는 상대방 행위에 대해 지적을 해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활짝 깨어 지금에 머물러 있다면, 에고를 관여시키지 않고, 즉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책망하거나 헐뜯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반려자가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경우, 어떠한 판단도 하지 마세요. 판단을 한다는 건 타인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그의 본성과 혼동하거나, 자신의 무지를 타인에게 투사하여 그 무의식적은 행동을 그의 본성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타인의 문제점과 무지를 자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반작용으로 심판관이 되지 말고, ‘자각의 상태’에 머물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여러분을 완전히 반작용을 하지 않거나, 반작용을 해도 자각의 상태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허용해야 하는 이유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과 싸우는 대신 빛을 가져올 수 있게 되지요. 기만적인 생각에 반작용하는 대신, 그런 망상을 지켜보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꿰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자각의 상태에 머물 때,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현존을 사랑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납니다. 변화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요. 여러분 스스로 이렇게 한다면, 반려자 역시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관계를 영적 수행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다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매 순간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솔직히 표현하게 되고, 정체 모를 감정에 느닷없이 사로잡히거나 슬픔과 불만이 자랄 수 있는 망상의 시간을 만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비난하지 않고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세요. 자신을 방어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세요.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지금 현재에 깨어 있으면, 비난과 방어, 공격 등 에고를 강화하고 방어하면 만족시키려는 모든 방식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여유를 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을 꽃 피울 수 없습니다.
인간 관계를 파괴하는 두 가지 요인을 제거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업장을 소멸시키고 더 이상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반려자도 그렇게 된다면, 사랑을 활짝 꽃피우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상대방에게 자신의 고통과 무지를 투사하거나 중독된 에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 들지 않게 되지요.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사랑,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한없는 사랑을 주고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청정무구한 사랑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마음과 업장에서 벗어나 있는데 반려자가 여전히 업장에 동화되어 있을 경우, 여러분보다는 상대방이 더욱 힘들 것입니다. 깨달은 이와 함께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아니 그보다는 너무 쉬운 나머지 상대방의 에고가 심각한 위협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에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분리감을 강화시켜줄 고민과 갈등과 적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저항이 없어지면, 깨닫지 못한 상대방의 마음은 심한 좌절감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마음이 약해질 뿐만 아니라 마음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도 흔들리게 되지요. 마음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무너지면, 자연히 자아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을 갖게 됩니다.
업장이란 주고받음을 필요로 하는데, 이제 그렇지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업장이 요구하는 말다툼이나 드라마, 갈등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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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의 관계를 버려라
깨달았든 아니든, 여러분은 누구나 남성이나 여성이지요.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은 반쪽인 것입니다. 이러한 불완전함은 깨어 있음의 정도와 무관하게 남녀의 이끌림, 즉 반대 극을 향한 끌림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연결된 상태에 있으면, 이런 끌림을 표면적이고 주변적인 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타인이나 연인과 깊이 연결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사실 자신의 진정한 존재에 깨어 있을 때 타인들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지요. 형상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 속에서 남성과 여성은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형상은 계속해서 어떤 욕구를 갖고 있지만, 진정한 존재는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 본성은 이미 완전하고 온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욕구가 충족되면 좋겠지만, 충족되지 못한다 해도 깊은 내면 상태에는 차이가 없지요.
그러므로 이성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도, 깨달은 이는 외적으로는 결핍이나 불완전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얼마든지 완전하고 충만하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 편안하지 못하다면 그러한 불안을 감싸줄 어떤 관계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관계 속에서 또 다른 형태의 불안이 생겨납니다.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에서 자신을 편안히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런데도 자신과 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될 수는 없나요? 자신과 관계를 가진다는 건 자신을 ‘나’와 ‘나 자신’으로, 주체와 객체로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공연히 삶이 복잡해지고 온갖 번민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의 ‘본성’과 여러분의 ‘자아’가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자신을 판단하지도 않고, 자기연민에 빠지지도 오만하지도 않으며, 자신을 사알하지도 증오하지도 않게 됩니다. 자의식에 의한 분열이 치유되고, 그 저주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더 이상 보호하고 방어하고 만족시켜야 할 ‘자아’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이르면, 자신과의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과의 관계를 끊는 순간, 타인들과의 모든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질 것입니다.
지금 그대는 깨어나고 있다
있는 그대로에 순응하면서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과거가 그대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비로소 마음으로 가려졌던 존재의 영역이 보이게 된다.
그대의 내면에는 한없는 고요와
깊은 평화가 자리한다.
평화 안에는 크나큰 기쁨이
기쁨 안에는 사랑이 있다.
가장 내밀한 존재의 중심부로 들어가면
신성하고도 무한한 그 무엇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여라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일이 잘 풀려 번창할 때가 있는가 하면, 실패를 거듭하면서 시들고 무너질 때가 있지요. 새로운 것과 변화의 여지를 만들려면 옛 것을 떠나 보내야 합니다. 그 시점에서 매달리고 저항하는 것은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며, 흐름을 따르지 않으면 고통을 겪게 되지요. 새것이 자라나려면 먼저 소멸이 필요합니다. 소멸 없이는 생성도 있을 수 없지요.
영적인 깨달음에는 하강주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영적 차원으로 들어가려면 실패와 깊은 상실감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지요. 성공 자체가 공허하고 무의미해져서 실패로 변할 수도 있고요.
모든 성공 안에는 실패가 숨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의 차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 누구나 언젠가는 실패하고, 성취는 결국 헛된 것이 되고 말지요. 형상 자체가 덧없는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의욕적으로 새로운 형상과 환경을 만들고 창조합니다 하지만 그런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자의식을 위한 부질없는 것입니다. 삶이 아닌 삶의 상황에 불과한 것들이지요.
살의 주기는 몇 시간에서 몇 년까지 지속될 수 있습니다. 큰 주기가 있고, 그 안에 다시 작은 주기가 있습니다. 질병은 흔히 낮은 에너지 주기와 맞서 싸울 때 생깁니다. 그러나 재생에는 반드시 침체기가 필요한 법이지요. 그러나 마음과 동화되어 있는 한, 언제나 성공과 같은 외부 요인들을 통해 자존심과 정체성을 확인하려 들 것입니다. 이 때문에 침체기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지요. 그래서 몸이 자기방어 수단으로 질병을 일으켜 우리를 쉬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휴식을 취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말이지요.
인간 관계나 재산, 사회적 지위, 신체적 모습 등의 상호아이 ‘좋다’고 판단될 경우, 마음은 이에 집착해서 그 상황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자신에 대해 만족하게 됩니다. 그 상황이 자신의 일부이며, 그 자체로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변하거나 끝나거나 완전히 뒤바뀔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좋았던 조건이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서서히 나빠질 수 있지요. 행복하게 했던 조건이 급기야는 불행을 불러오는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부자가 내일은 빈털터리가 되고, 행복했던 결혼과 허니문이 이혼이나 불행한 동거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조건 자체가 사라져, 불행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애착을 갖고 동화되었던 조건이나 상황이 변하거나 사라지면,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마음은 사라진 조건에 매달리고 변화에 저항합니다. 몸에서 잘려나간 사지처럼 아픔을 느끼는 것이지요. 시간이라는 환상이 구분을 지어놓았을 뿐, 사실 행복과 불행은 같은 것입니다.
삶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건 고요와 평화와 빛 속에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게 됩니다. 그런 것에 좌우되지 않게 되지요.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형상에 의존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현실적인 삶의 상황, 즉 외적인 모양새는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물이나 사람,조건들이 아무런 수고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여러분에게 다가옵니다.
물론 이것들 역시 덧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왔다가 가버릴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것들에 의존하지 않으면,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삶은 그저 편안하고 순조로워집니다.
상황에서 비롯된 행복은 깊지 못합니다. 아무런 저항 없이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발견하는 한없는 평화와 존재의 기쁨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존재를 깨달으면, 행복과 불행을 넘어, 눈에 보이는 형상에 의존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주위의 모든 것이 스러지고 무너져도, 깊은 내면의 평화를 느낄 수 있지요. 행복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언제나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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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감정을 이용하라
내면의 저항은 항상 부정적인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부정적 감정은 곧 저항하는 마음입니다. 부정적 감정은 짜증이나 조바심에서 격심한 분노에 이르기까지, 우울한 기분이나 시큰둥한 원망에서 자살에 이르는 절망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저항의 마음이 감정적 업장을 자극하면, 대수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분노나 절망, 슬픔과 같은 강렬한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지요.
에고는 부정적 감정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통해 원하는 상황을 끌어오면, 나쁜 상황이 해소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불행이라는 감정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불행을 만들어내겠습니까? 물론 부정적 감정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부정적 감정은 바람직한 상황을 유도하기는커녕 방해만 될 뿐입니다. 나쁜 상황을 몰아내기는커녕 더욱 확고히 자리잡도록 합니다. 부정적 감정은 오로지 에고의 강화에만 도움이 됩니다. 에고가 부정적 감정을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어떤 부정적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하면, 여러분은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무의식 깊은 속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원치 않으니까요. 우울이나 분노, 고통을 겪은 사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삶의 긍정적인 면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거부하지요. 미친 짓이지만, 아주 흔한 현상입니다.
동물이나 식물을 보세요. 동물이나 식물들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지금 여기’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지혜를 배우세요. 그들의 현존 방식을 가만히 지켜보세요. ‘하나 됨’의 지혜를 배우세요.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하나가 되고, 자신의 본성과 하나가 되고, 진정한 존재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세요. 그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지, 삶과 죽음을 넘어 깨어 있는 모습을 보세요.
질병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감정에는 흔히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직업이나 인간관계, 주변 환경과 관련된 어떤 일이든, 의식의 차원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표면적인 변화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인 변화에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지요. 어느 정도 깨달음의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삶의 상화에서 무엇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게 됩니다. 부정적 감정은 더 이상 필요치 않으니까요.
그러나 부정적 감정이 생길 경우, 그 감정을 이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좀더 깨어 있으라는 신호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자신의 생각이나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또는 자신도 모르는 어떤 요인으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이 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 감정을 ‘주의하라. 지금 여기를 보라. 깨어나라. 마음에서 벗어나 깨어 있으라’는 주의의 목소리로 받아들이세요.
아주 가벼운 짜증이라도 놓치지 말고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작용이 축적될 테니까요.
내면에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 쌓이는 것을 원치 않고, 그것이 아무 쓸모 없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부정적 감정은 저절로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떨어져 나갔는지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부정적 감정을 끊을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 느낌에 주목하세요.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리는 대신, 그런 반작용의 원인이 되는 외부적 요인에 대해 투명해지는 자신을 상상함으로써 그것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일부터 연습하세요. 집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데, 길 건너편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자동차의 경적이 들려옵니다. 짜증이 나겠지요.
그 짜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아무 목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짜증을 내었을까요? 짜증은 여러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완전히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음은 왜 짜증을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부정적 감정이나 불행이라는 형태 등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이 경험하는 저항을 짜증이 해소해주리라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물론 착각이지요. 마음이 만들어내는 분노와 짜증 등의 저항은 원래 해소하고자 했던 원인보다도 훨씬 더 골치 아픈 문제를 만들어내니까요.
이 모든 부정적 감정은 영적 수행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 자신이 투명해짐을 느껴보세요. 이 딱딱한 물리적인 몸이 없는 상태를 느껴보세요.
소음을 비롯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모든 원인이 그냥 여러분을 통과해 가게 내버려두세요. 여러분의 내면이 더 이상 딱딱한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먼저 작은 일부터 시작하세요. 자동차 경적이나 개 짖는 소리, 아이들 울음, 교통 혼잡 등 일상의 일들이 끊임없이 여러분 내면에 있는 저항의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하세요. 모든 일이 그대로 여러분 자신을 통과해 가도록 하세요.
누군가 무례하고 가슴 아픈 말을 하더라도 공격이나 방어, 회피와 같은 무의식적인 반작용과 부정적 감정으로 빠져들지 마세요. 그 말이 그냥 여러분을 지나쳐 가도록 하세요. 아무런 저항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도 다치지 않습니다. 용서란 바로 이런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상대방에게 그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세요. 그는 더 이상 여러분의 내면을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힘이나 여러분의 마음에 지배를 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날카로운 자동차 경적을 듣거나, 무례한 사람을 만나거나, 홍수나 지진을 겪어나, 재산을 다 잃어버릴지라도, 저항이 작용하는 원리는 항상 똑같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여러분은 아직도 외부에서 평화를 구하고 있으며, 그런 방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 번 명상 수련회에서 해답을 찾을지도, 새로운 방법을 배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평화를 추구하지 마세요. 지금이 아닌 다른 상태를 구하지 마세요. 지금 속에 머물지 않으면, 내면의 갈등을 겪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게 됩니다.
평화에 머물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하세요. 스스로 평화롭지 못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면의 불안은 평화로 변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를 완전히 받아들일 때, 진정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내맡김의 기적이지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할 때 매 순간이 최상의 순간이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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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심은 우리를 평화롭게 한다
마음이 만들어낸 온갖 부정적 감정을 초월하면, 깊은 호수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일상의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외부적인 삶의 상황은 호수면과 같아집니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때로는 잔잔하고 대로는 바람이 불어 거칠게 파도가 일기도 합니다.
그러나 호수 깊은 곳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호수면이 아니라 호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고요한 내면 깊은 곳과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삶의 상황에 연연하여 변화에 저항하는 일도 없어집니다. 내면의 평화는 외부적 상황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시간과 죽음을 넘어 영원히 진정한 존재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행복과 성취도 더 이상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세계에 의존하지 않게 되지요. 변화무쌍한 세상을 즐기면서, 세상과 더불어 놀고,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 무엇에도 집착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지요.
진정한 존재에 깨어 있지 않는 한, 타인들의 본성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본성조차 발견하지 못했는데 어찌 타인의 본성을 볼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타인의 형상에 대해 좋거나 싫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형상이란 그들의 몸은 물론 마음도 포함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관계는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깨어 있으면 타인의 몸과 마음이 하나의 장막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느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장막 너머에 있는 그들의 실체를 느낄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고통이나 무의식적인 행동에 직면했을 때도, 깨어 있으면 그들의 본성을 볼 수 있습니다. 형상을 넘어서 바라보고, 자신의 존재를 통해 그의 찬란하고 순수한 존재를 느끼게 되는 것이죠.
깨달음의 차원에서 보면 고통은 환상입니다. 고통은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이런 자각은 준비된 사람들의 ‘존재 의식’을 일깨워 치유의 기적을 낳기도 합니다.
자비심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나는 이 사람과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사실 그와 공통점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2년 후든 70년 후든 누구나 썩어가는 시체로 변할 테니까요.
이것이야말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지하고 겸손한 자각입니다. 결코 부정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의 사실일 뿐이지요. 엄연한 사실인데 왜 외면하려 하나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른 모든 피조물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장 강력한 영적 수행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포함한 모든 물질적 형상의 죽음에 대해 깊이 명상하는 것입니다. ‘죽기 전 죽음의 명상’이 바로 이런 것이지요.
그 명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보세요. 여러분의 육체는 녹아 형체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마음이 만들어낸 모든 형상과 생각도 사라져버리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여전히 거기에 존재합니다. 있는 그대로 신성한 존재로서의 빛을 발하며 완전히 깨어 있지요.
진정한 존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헛된 이름과 형상과 환상만이 죽을 뿐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자비심은 넓은 의미의 치유가 됩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치유력을 갖지요. 행위로써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여러분의 깨어 있음을 느끼고, 여러분이 발산하는 평화로움의 빛에 감동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이 사실을 알 수도 모를 수도 있습니다. 완전히 깨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무지한 행동을 해도 여기에 반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평화는 아주 넓고 깊어서 평화가 아닌 것은 마치 존재한 적도 없었다는 듯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비로소 인과의 고리가 끊어지고, 업장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동물이나 나무, 꽃은 여러분의 평화를 느끼고 여기에 반응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순수 의식을 발산하는 ‘세상의 빛’이 되어 고통을 뿌리부터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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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먼저 내맡겨라
미래를 결정짓는 것은 이 순간의 의식 수준입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내맡김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행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맡김이 없는 의식 상태에서는 진정한 긍정적인 행동이 나올 수 없으니까요.
내맡김이라고 하면, 패배나 포기, 즉 삶의 도전 앞에서 무기력하게 물러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떠올리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내맡김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내맡김이란 어떠한 상황이든 수동적으로 참고 견디면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계획을 세우거나 긍정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지요.
내맡김이란 삶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지혜입니다. 삶의 흐름을 경험하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뿐이므로, 내맡긴다는 건 지금 이 순간을 기꺼이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의미입니다.
있는 그대로에 대한 내면의 저항을 포기하는 것이지요.
내면의 저항이란 마음의 판단과 부정적 감정으로 있는 그대로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마음이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과 현재 사이에 격차가 생길 때 그런 말을 하게 되죠. 이 틈을 비집고 고통이 들어옵니다.
어느 정도 세상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내맡김의 수행이 필요한 때는 바로 이런 때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고통과 슬픔을 겪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을 내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이 주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순간,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진정한 존재와 만날 것입니다.
내맡김은 순수한 내적 현상입니다. 그렇다고 외부적으로 행동을 취하거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내맡긴다고 해서 모든 상황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지요. 단지 ‘지금’이라는 아주 작은 조각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예컨대 진흙탕 속에 빠졌을 때, ‘좋아, 그냥 진흙탕 속에 빠져 있겠어’ 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맡김은 단념과는 다른 것이지요.
불유쾌하고 달갑지 않은 삶의 상황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속이면서 진흙탕 속에 빠져 있어도 좋다고 말할 필요도 없지요. 거기서 빠져 나오고 싶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분류하려 들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요. 그러면 저항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단 지금 이 순간의 ‘있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 그 상황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처를 취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행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긍정적인 행동은 분노나 절망, 좌절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행동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지금 이 순간’ 을 판단하지 말고, 계속 내맡기는 연습을 하세요.
이해를 돕기 위해 시작적인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밤길을 걷는 중이라고 가정합니다. 손전등이 안개를 가르며 여러분 앞에 좁다랗게 밝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개는 곧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삶의 상황이고, 손전등은 여러분의 깨어 있는 현존이며, 밝은 공간은 ‘지금’ 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맡기지 않으면, 여러분의 심리적 형상, 즉 에고의 껍데기가 딱딱하게 굳어져 단절감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세상과 주변 사람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죠. 판단을 통해 타인들을 파괴하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이 일고, 경쟁하고 지배하려는 욕구가 생깁니다. 자연조차도 적이 되죠. 여러분은 두려움으로 그 모든 지각하고 받아들입니다. 편집증이라는 아주 흔한 병은 이처럼 장애가 있는 의식 상태가 좀더 심화된 상태일 뿐입니다.
저항을 하면 심리적인 형상뿐 아니라 물리적 형상, 즉 그대의 몸도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몸 전체가 긴장되고 위축되지요. 건강에 꼭 필요한 생명 에너지의 흐름이 저하됩니다. 운동과 물리 요법이 에너지의 원활한 흐름을 회복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켜줄 뿐입니다. 나날의 삶 속에서 내맡김을 실천하지 않는 한, 저항의 마음도 결코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의 내면에는 삶의 상황을 구성하는 일시적 환경에 따라 영향 받거나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는 내맡김을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지요. 이는 바로 여러분의 생명, 여러분의 진정한 존재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현존의 영역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불만스럽거나 견딜 수 없다면, 무엇보다 먼저 내맡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적인 저항이 지속되고, 결과적으로 그 상황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맡김은 행동을 취하고, 변화를 도모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일과 얼마든지 병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맡김의 상태에서 하는 행위에는 완전히 다른 에너지가 흐릅니다. 내맡김은 여러분을 진정한 존재의 근원적인 에너지에 연결시켜 좁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행위에 진정한 존재에 대한 자각이 더해지면, 나날의 행위가 생명 에너지로 활기를 띠게 되고, 여러분은 ‘지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지요.
저항을 버림으로써 더 높은 의식 수준에 이르면, 무엇을 하든 무엇을 창조하든, 그 수준이 더욱 눈부시게 향상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이 절로 성취되고, 그 수준도 높아지죠. ‘행동함이 없는 행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맡김의 상태에 있을 때,여러분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분명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번에 하나씩 집중할 수 있게 되지요.
자연에서 배우세요. 스스로 성취하는 그 모습들을 보세요. 어떻게 생명의 기적을 펼치는지, 불만족스럽거나 불행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두고, 예수는 이렇게 말했지요.
“들에 핀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라. 길쌈도 아니하고 수고도 아니하느니라.”
현재의 상황이 불쾌하거나 불만스럽다면, 지금 이 순간을 따로 떼어 있는 그대로 내맡겨보세요. 손전등으로 안개를 가르듯, 그러면 여러분의 의식이 외부 상황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무의식적인 반작용을 보이거나 저항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연후에, 그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개선하려면, 또는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적절한 행동을 취하면 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세요. 미래의 계획이나 해야 할 수많은 일들에 관심을 두지 마세요.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계획을 세우는 일이 지금 할 수 있는 그 한 가지 일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계속해서 마음의 활동사진을 켜놓고 미래에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현재를 잃어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지금 하는 일이 금방 결실을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결실을 맺을 때까지 지금의 상황에 저항해서는 안 되지요.
어떤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지금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다면, 더 깊이 자신을 내맡겨보세요. 지금 속으로, 진정한 존재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영원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노력하지 않아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삶이 여러분의 편에 서서 여러분을 따뜻하게 대해주지요. 두려움이나 죄의식, 무기력과 같은 내면의 요인들이 행동을 방해해도, 생생하게 깨어 있기만 하면, 그것들은 깨어 있는 여러분의 존재의 빛 안에서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내맡김의 상태를 ‘더 이상 신경 쓸 수 없다’거나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다’는 식의 태도와 혼동하면 안 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태도는 은근히 원망이 담긴 부정적 감정으로 얼룩져 있지요. 내맡김이 아니라 내맡김을 가장한 저항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내맡기고 싶다면, 내면으로 눈을 돌려 저항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세요.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한 줌의 저항이 생각이나 감정의 형태로 어딘가 어두운 구성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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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깨어나라
먼저 저항의 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저항이 일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게 저항을 만들어내고, 상황과 자신을, 자신과 타인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입니다. 저항과 함께 일어나는 생각들의 변화를 들여다보고, 그 감정의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이렇게 저항을 관찰하면, 저항이 백해무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면, 무의식적인 저항은 곧 의식으로 변화하지요. 그러면 저항은 자연히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의식이 깨어 있으면, 불행하거나 부정적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형태의 고통과 불행, 부정적 감정들은 곧 내면에 저항의 마음이 있다는 표시이지요. 저항은 언제나 무의식적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불행을 선택한 적이 있나요? 여러분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불행이 생겨난 것일까요? 무슨 목적으로 불행이 생겨난 것일까요? 누가 불행을 살아 있게 하는 걸까요?
불행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어도, 여러분은 사실 그 불행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그 불행의 과정을 지속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의 의식이 진정으로 깨어있다면, 완전히 ‘지금’에 머물러 있다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즉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현존 속에서 부정적 감정은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부정적인 감정은 여러분의 의식이 잠자는 동안에만 활개를 칩니다.
진정으로 깨어 있으면, 업장도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불행에게 머물 시간을 주는 것은 사실 여러분 자신이지요. 시간은 불행의 생명줄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강렬한 자각으로 망상의 시간을 제거하면, 불행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정말로 불행의 소멸을 바라고 있을까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한 적이 있나요? 불행이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될까요?
내맡김을 실천하기 전까지 영적인 차원에 대해 끊임없이 읽고, 듣고, 글을 쓰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고요. 그러나 그렇게 하든 안 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온전한 내맡김이 이루어져야 영적 차원이 여러분의 삶 속에 열릴 수 있습니다. 내맡김을 실천하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마음의 에너지보다 훨씬 더 높은 주파수의 에너지를 발산하게 되지요.
내맡김을 통해 영적 에너지가 이 세상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영적 에너지는 여러분 자신은 물론 세상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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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도 나를 내맡겨라
무의식적인 사람만이 타인들을 이용하거나 기만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사람만이 타인들에게 이용당하고 속아넘어가지요. 타인들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저항하고 맞서 싸운다면, 여러분 자신도 무의식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맡김은 무의식적인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용하도록 허락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게 아니지요. 완전한 저항 없음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누군가에게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상황에 빠지지 않고 당당히 걸어 나올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관계 속에서의 진정한 내맡김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아니오‘ 라고 말할 때, 반사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순간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명히 파악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아니오’ 라고 말하더라도, 저항에서 비롯되지 않은 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더 이상 고통을 만들지 말아야 하지요.
내맡길 수 없다면 즉각 행동하세요. 솔직히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거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세요.
여러분 내면의 찬란한 존재와 이 지구를 부정적인 감정으로 오염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내면에 어떤 행태의 불행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예를 들어 감옥에 갇혀 있는 것) 저항을 하거나 온전히 내맡기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요. 외부 상황의 구속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내면의 자유를 누릴 것인가. 고통을 받을 것인가, 내면의 평화를 누릴 것인가.
내맡김을 실행하면 인간 관계도 크게 바뀝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타인들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여러분은 타인들을 판단하거나 비판하고, 구분하고, 거부하고, 변화시키려 들게 됩니다. 게다가 ‘지금’ 을 미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경우엔, 만나는 모든 이들과의 관계 역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지요.
그러면 인간은 물론 관계 자체를 덜 중요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물질적 이득이나 권력, 육체적 쾌락, 에고의 만족 등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존재 자체보다 더 우선하게 되지요.
내맡김이 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봅시다.
배우자나 가까운 누군가와 다투거나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면, 상대방이 공격을 가할 경우 자신이 얼마나 방어적이 되는지, 타인들의 입장을 공격할 때 여러분이 얼마나 공격적이 되는지 관찰해보세요. 그리고 자신의 관점과 의견을 얼마나 고집하는지, 자신이 옳고 상대방이 그르다는 주장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정신적, 감정적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에고의 마음이 내뿜는 에너지, 이 에너지를 인정하고 충분히 느낌으로써 의식에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말다툼을 하다가 문득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자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런 반작용 없이 그냥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게 되지요. 이것이 진정한 내맡김입니다.
반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말로만 ‘좋아, 당신이 옳아’ 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저항의 자리에 에고의 우월감을 앉힌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내면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마음의 간정 에너지를 전부 떠나 보내야 합니다.
에고는 교활합니다. 자신이 진정 마음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났는지, 마음을 끊고 자유로워졌는지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갑자기 한없이 강렬하고 깊은 평화를 느낀다면, 이는 진정한 내맡김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신호입니다. 이제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에서 벗어나, 타인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지켜보세요.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진정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저항하지 않음이란 아무것도 안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떠한 행위를 하든, 무의식적인 반작용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하지요. 동양에서 무술 연마의 지침으로 삼고 있는 ‘상대의 힘에 저항하지 마라. 이기려면 유연해져라’ 는 경구에는 심오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강렬한 현존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과 상황을 변화시키고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보통의 의식 상태, 즉 깨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두려움이나 무기력, 우유부단함 때문에 행동하지 않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지요. 진정한 무위는 저항하지 않음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활짝 개어 잇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떤 행위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마음이 부리는 대로 반작용하는 대신 의식적인 현존 상태에서 반응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은 모든 개념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심지어는 비폭력이라는 개념으로부터도 자유롭지요. 이제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에고는 저항이 곧 힘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항은 진정한 힘의 유일한 근원인 존재와 단절되도록 만들지요. 에고는 천진무구하고 진정한 힘인 참된 존재를 나약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에고가 강하다고 믿는 것은 오히려 나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고는 끊임없이 저항하는 상태에 머물면서, 기만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려 합니다.
온전히 내맡기기 전에는 대부분의 인간 관계에서 무의식적인 역할극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내맡기게 되면, 에고의 방어와 거짓 가면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집니다. 여러분 스스로 아주 단순하고 진실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에고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건 위험한 일이야. 상처받고 결국 힘을 잃게 될 거야.”
말할 나위도 없이 에고는 진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저항을 버리고 부드러워질 때에만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진정한 힘을 갖게 된다는 진리를.
고통조차도 당당히 마주하라
질병에서 깨달음으로
내맡김이란 있는 그대로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의 조건이나 환경, 즉 삶의 상황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자체, 이 순간입니다.
질병은 삶의 상황을 이루는 일부입니다. 의식적인 현존을 통해 ‘지금’의 힘을 활성화하지 않는 한, 과거와 미래는 언제까지고 이어집니다. 알다시피 삶의 상황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삶의 상황을 구성하는 수많은 상황의 밑바닥에는 더 깊고 본질적인 무언가가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생명, 시간을 초월해서 ‘지금’ 속에 머물고 있는 여러분의 존재 자체이지요.
‘지금’ 에 머물러 있는 한, 문제될 것이 없으므로 병 또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상황에 누군가 갖다 붙인 이름에 대한 믿음이 질병이라는 상황을 있게 한 것뿐이지요. 그 상황에 힘을 부여해서 일시적인 불균형을 확고한 현실처럼 믿게 만든 것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병은 현실성과 실체성, 영속성을 얻게 되지요.
병이라는 명명을 그만 두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 병은 그저 육체의 통증, 허약함, 불편, 기능 장애 등 몇 가지 증상에 불과한 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병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느끼는 증상 자체에,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을 내맡기도록 하세요.
고통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속으로, 강렬한 현존의 느낌 속으로 들어가세요. 고통을 통해 깨닫는 것입니다.
내맡김은 지금 있는 그대로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직접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내맡김은 여러분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이 바뀔 때, 여러분의 세상도 전부 변화합니다. 세상이란 한갓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병은 문제가 아닙니다. 에고의 마음에 지배당하는 여러분 자신이 문제인 거지요.
병이 나거나 불구가 되더라도 실망하거나 자책하지 말아야 합니다.여러분 자신을 탓하지도, 삶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지도 마세요. 이 모든 것은 저항입니다.
중병을 앓고 있다면, 그 병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세요. 살다가 나쁜 일이 생기면 그 일을 깨달음을 위한 기회로 이용하는 겁니다.
질병으로부터 시간을 거두어들여, 질병에 과거나 미래를 부여하지 마세요. 강렬한 현존의 깨어 있음 속으로 들어가는 기회로 삼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하세요.
여러분 스스로 연금술사가 되어, 평범한 쇳덩어리를 황금으로, 고통을 깨어 있는 의식으로, 재난을 깨달음으로 바꾸는 겁니다.
정말 견딜 수 있을 만큼 아픈데 이런 말을 들으니 화가 난다고 말하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이는 그 병이 이미 여러분 자의식의 일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자아와 동일시를 유지한 채, 질병 자체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지요.
‘질병’이라고 이름 붙여진 상태는 여러분의 진정한 본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재난이 닥치거나 심각하게 일이 잘못 되었을 때, 병에 걸리거나, 불구가 되거나, 집과 재산 또는 사회적 지위를 잃었을 때,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가 깨지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고통을 받을 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도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기억하세요. 한 발짝만 다가서보세요. 경이로운 무언가가 있습니다. 연금술처럼,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쇳덩이를 황금으로 바꾸는 무언가를 만날 수 있지요.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행복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두려움과 고통은 드러나지 않는 아주 깊은 세계로부터 솟아나는 내면의 평화와 고요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의 평화’입니다. 이에 비하면 행복은 아주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의 차원이 아닌 깊은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라는 깨달음이 찬란한 평화와 함께 찾아 듭니다. 이는 단순한 믿음이 아닙니다. 외부적인 증거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인 확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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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서 평화로
극한 상황에서는 ‘지금’ 을 받아들이는 일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언제나 내맡길 수 있는 두 차례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첫 번째 기회는 매 순간 그 순간의 현실에 내맡기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태를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로,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늘 수용하는 상태에 머문다면, 더 이상 부정적 감정이나 고통, 불행을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항 없이 축복과 빛 속에서, 투쟁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기회를 놓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의식적인 습관적 저항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깨어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나치게 극단적인 상황이어서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형태로든 고통이나 아픔을 만들어내게 되지요.
상황이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여러분의 저항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두 번째 내맡김의 기회는 ‘지금 여기‘ 입니다. 외부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내면의 것을 받아들이세요. 고통에 저항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통이 그곳에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지요.
슬픔이나 절망, 두려움, 외로움 등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 그 고통에 스스로를 내맡기세요. 고통을 명명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며 고통을 껴안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깊은 고통을 한없이 평화로 바꾸어놓는 내맡김의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내맡기라는 말이 어쩌면 부질없고 의미 없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깊을수록, 그 고통에 내맡기기보다는 탈출하고 싶은 충동이 더 강할 테니까요. 지금 느껴지는 것을 느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탈출한 방법은 없습니다.
일이나 술, 마약, 분노, 은폐 등 여러 방법으로 거짓 탈출을 시도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것들은 여러분을 고통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고통은 여러분이 눈을 감는다고 해서 그 강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니까요. 감정적인 고통을 부정하면, 여러분의 행동과 생각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까지 모든 것이 오염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알게 모르게 타인들에게 전해집니다. 그 에너지를 받는 사람이 깨어 있지 못할 경우, 그 에너지를 반작용해서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을 공격하거나 괴롭히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분이 자신의 고통을 무의식적으로 투사함으로써 그들을 괴롭힐 수도 있지요. 여러분은 자신의 내면 상태에 부합되는 것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표출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빠져나갈 길이 없을 때도 뚫고 나갈 방법은 있습니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지요. 당당히 고통과 마주하세요. 고통을 느끼되, 그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마세요. 필요하다면 그 고통을 표현해도 좋지만, 마음속으로 각본을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고통의 원인으로 보이는 사람이나 사건, 상황이 아니라 고통 자체에 주의를 집중하세요. 마음이 고통을 이용해서 여러분 자신을 희생자로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세 한탄을 하고 넋두리를 늘어놓으면, 계속 고통 소에 머물게 됩니다. 고통의 느낌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지요. 그러지 않고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느낌에 완전히 집중하면서, 마음이 고통에 이름을 붙이지 않도록 하세요. 느낌 속을 들어갈 때는 활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곳이 어둡고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뒤돌아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지켜보면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마세요. 고통엘 주목하면서 슬픔이나 두려움, 공포 외로움을 계속 느껴보세요. 주의를 집중하고 몸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깨어 있으세요. 이렇게 어둠 속으로 빛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불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더 이상 내맡김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이미 내맡겼으니까요. 완전한 집중은 완전한 수용이며 내맡김입니다. 완전하게 집중할 때, 여러분은 ‘지금’의 힘, 현존의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는 한 줌의 저항도 살아남지 못하지요. 현존은 망상의 시간을 몰아냅니다. 망상의 시간이 없으면, 어떠한 고통이나 부정적 감정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입니다.
당당히 고통과 마주하고 고통을 허락하면서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러한 죽음을 경험하면, 죽음이 없다는 것을, 그러므로 두려워할 게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오직 에고만이 죽는 것입니다.
한 줄기 햇살이 태양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태양이 아닌 다른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생존을 위해 태양과 싸워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이러한 착각이 사라진다면 진정 자유롭지 않겠습니까?
편안한 죽음을 원하세요? 고통없이, 아무 번민 없이 죽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지나간 모든 순간을 떠나 보내야 합니다. 깨달음의 빛으로, 시간의 굴레에 사로잡힌 자신을, 자신의 본성과 동일시했던 거추장스러운 자아를 떠나 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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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통한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은 깨달음에 이르는 오래된 방법입니다. 최근까지는 사실 유일한 길이었지요.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을 버리지도 말고, 그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아직도 유효한 방법이니까요.
십자가의 길은 내맡김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신을 내맡김 속으로, 죽음 속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자신을 무 無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 가장 나쁜 일, 즉 자신의 십자가를 좋은 일로 바꾸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길은 또한 여러분을 신이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신 역시 무 無이기 때문이지요.
고통을 통한 십자가의 길은 발버둥치고 비명을 지르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고통을 참을 수 없어 내맡기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극에 달할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깨달음을 선택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지금’을 삶의 구심점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시간에 머물지 않고 깨어 있음의 상태에 머물기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고통을 원치 않는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 어떠한 고통도, 괴로움도 만들지 않겠어’ 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요? 얼마나 더 고통을 겪어야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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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내면에는 기쁨과 사랑이 있다
선택이라는 말은 높은 수준의 의식 상태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의식 수준이 높지 않으면, 선택을 할 수 없으니까요. 마음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순간, 개어 있게 되는 순간, 선택은 시작됩니다.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는 영적인 의미에서 무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요. 마음이 조종하는 대로, 정해진 방식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혼돈과 갈등, 고통을 선택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광기를 선택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과거를 녹여버릴 만큼, 빛이 어둠을 몰아낼 만큼 충분히 깨어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틀에 박힌 마음이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갈등이 있다면, 부모가 여러분에게 한 일이나 해주지 않은 일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직도 부모에게 선택권이 있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이생은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착각이지요.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데 무슨 선택을 하겠습니까? 마음과 동화된 상태는 대단히 혼란스럽습니다. 일종의 광기 상태나 마찬가지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원망을 안 하겠지요. 병에 걸린 것을 놓고 어떻게 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비심만이 병자를 대하는 적절한 태도입니다.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면, 여러분이 선택한 것이 아니어도 무의식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받을 것이며, 더 많은 고통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이 쌓이면 결국 무의식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진정으로 자아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과거로부터 자의식을 끌어내는 한, 여러분은 자신이나 타인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힘, 즉 본성에 접근해야만 진정한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진정한 존재에 깨어 있으면, 과거는 무력해지고, 여러분 스스로 했던 일이나 당했던 어떠한 일도 여러분 자신의 찬란한 본성을 털끝만큼도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에 자신을 내맡기고, 온전히 깨어 있으세요. 그러면 과거는 힘을 잃습니다. 더 이상 과거가 필요치 않게 되지요. 열쇠는 현존입니다. ‘지금’ 이 바로 열쇠지요.
저항은 마음과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항을 버리면, 여러분의 주인 노릇을 하며 거짓 신을 연기해온 마음의 역할 역시 끝나게 됩니다. 모든 판단과 부정적 감정이 녹아 없어지게 되지요.
그러면 마음으로 가려져 있던 존재의 영역이 활짝 열립니다. 그 순간 여러분의 내면에는 한없는 고요가, 더할 수 없는 평화가 자리잡게 됩니다.
그 평화 안에 크나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 안에 사랑이 있지요.
가장 내밀한 존재의 중심부로 들어가면, 신성하고도 무한한 그 무엇,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 최근 떠오르고 있는 인류의 영적 교사 중 한 사람인 에크하르트 톨레는 불교철학과 명상법 등을 배우고 익히며 열정적인 내면 여행을 해오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상담자이자 영적 지도자로서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작은 모임을 이끌고 있는 그는 1996년부터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를 집필했다. 이 책을 통해 그의 가르침이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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