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모음
– 기형도 산문집
이봐, 힘을 아껴봐
편지 1
천천히 걸었다. 서울대에서 신림동 4거리 늦가을의 벌판을 지나 어느 야트막한 축대와 이태리풍 가옥의 베란다에 놓인 맨드라미 화분과, 그리고 나는 더욱 천천히 걸어 왔다. 90분간의 긴 노정. 이곳은 신림 4거리 커피숍’ Lux’ 그리고 ‘Yesterday’. 나는 죽은 것처럼 조용히 걸었다. 내일이면 네가 상경하리라. 그리고 며칠 후 귀대하여 나의 이 파충류 껍질처럼 팟팟 부스러지는 나의 죽음을 알게 되리라. Perhaps love. 오, 늦가을의 가난.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메마른 대기 大氣. 그렇다. 나는 죽어 있다. 내 생은 온통 압지처럼 어딘가 빨려 들어가는 것인가.
요즈음은 살아서 걸어 다니는 뭇 인간들을 하나의 외경심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나의 눈의 고요한 침잠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혐오할 뿐이다. 나의 문학과 생활과 시간 속을 조용히 관통하는 어두운 기류 氣流. 계절은 우리에게 변화와 적음과 또한 그 환멸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환멸 또한 소중한 까닭은 우리의 부질없는 희망들 때문이다. 겨울은 올 것인가. 자네가 싫어 하는 릴케식 산문, 모든 세기말 데카당스의 미학적 美學的 예언자의 소비성언어. 지극히 불건전한 릴케, 도스토예프스키를 다시 보고 있다. 그의 심리학과 리얼리즘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언어 역시 건강하지 못하다. 믿음은 값진 것이다. 오 내 친구.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의 형이상학이나 관념들은 얼마나 사소한 고통이나 굶주림, 불만에서 출생하여 지극히 애매하고 신비적인 언어로 치장되는 것이냐. 형이하학적 만족, 그것이 진정한 인간들의 구원이다. 예수가 죽은 까닭은 형이상학을 거부했던 예루살렘의 가난 때문이다. 무릇 형이상학이란 여유 계층의 레저이거나 하학적으로 압제가인 사람들의 아편일 뿐이다. 이것은 삶과 문학과의 사이에도 엄연히 공존한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닌 나의 현실, 그렇다, 모든 욕망 때문이다. 나의 욕망은 너무도 화려하다. 거리는 향락과 더러운 슬픔 따위로 어지러워 있다. 우리가 그곳에 섞여 숨쉬며 믿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모든 형식의 압제에서 풀려날 것. 자네의 진정한 참회와 노력을 청구한다. 자신에 솔직해질 것. 특히 집착하지 말 것. 초연의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스스로 건강해 질 것. 열심히 쓰라. 우리가 문학으로 패배한다면 우리를 치유하는 심리요법으로서의 구원은 문학뿐이다. 모든 통곡들이 거리에서 음산한 하늘로 인다.
1982. 10.25
P.S.: Leonard Cohen을 들으면서.
편지 2
안녕. 방금 심각한 절망을 겪고 난 후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잠’ 속에 도피한 후 깨어났는데 웬일인지 오늘의 ‘잠’은 나에게 손톱만큼한 구원의 가능성조차 제공해 주지 않아 더욱 더 절망에 빠져 이번 절망의 심각성을 심각하게 재고하다가 그 재고하는 지겨운 집착에 다시 배가된 절망을 … 하다가 자네의 편지를 받았다. 네 잎 클로바 고마웠다.
요즘은 오전엔 대개 잠을 자고 오후엔 이빨 닦고 세수, 머리감고 옷입고 대개 안양엘 가. 승현이가 휴가중이고 그가 날 사랑하는가 보아. 신춘용 소설을 쓰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큰 힘이 되고 있어. 원고 교정이나 구성, 당위성의 헛점 등을 집어주고 있어. 오늘쯤 그는 탈고를 끝냈겠지. 그리고 안양 지하상가에서 88올림픽 사격장엘 가서 사격을 하곤 해. 카라멜 따먹기. 그리고 당구를 쳐. 음, 그리고 신축 이전한 ‘안양’다방이나 ‘샘’다방에 가서 빈털털이 될 때까지 차(茶)를 마시고 10시 30분쯤 103-1을 타고 집에 와. 비가 오는 날이 많았고 무력감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한심한 무력감. 집에 와서 혼자 저녁 차려먹고 독서를 해. 신문을 읽고 편지가 와 있으면 꼭 즉시에 답장을 쓰고 새벽 2시쯤 잠을 자.
꿈도 요즘 들어 부쩍 늘었어. 어떤 날은 하루 3번이나 가위 눌리는 꿈을 꾸었어. 한 번인가 크게 비명을 지른 적도 있어. 나답지 않게. 예비군 훈련 끝내고 집에 와서 그날부로 입술 양끝단이 크게 부르터 있다. 이제 얘기할께(물먹고 왔다) 신춘용 소설은 일 주일 전에 완전 포기했고 시 詩는 오늘 잠정적 포기. 원고지에 옮겨보다가 서글픈 생각이 들어 왜 그런가 생각했더니 한 마디로 의욕이 완전히 나가리되어 버렸어. 처참한 기분이다. 그만큼 내 욕망과 수준에 대해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꼴이지.
어쩌면 네가 지적한 나의 나르시시즘의 근거가 묘하게도 델리키트한 문학적 우월감에 근거를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큰 충격이다. 이번 여파는 심각할 것 같다. 욕망이 거세당한 인간의 필연적 도피가 매저키즘이라지만 나의 의존적 절대가 결코 외부에 존재하거나 설령 존재하더라도 나의 시야에 포착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마지막 오기처럼 잔존하므로 참혹한 아나키즘에 걷잡을 수 없이 말려들어. 자네의 소설 축하한다. 이제 내가 할 일을, 할 일은 없다. 신춘은 거의 유보. 안녕. 피노키오. 그럼 또.
1982.11.14
P.S.: 설전 舌戰 은 해보나마나야. 넌 날 만나면 거의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거야.
편지 3
우선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요즈음 병원엘 다니고 있다. 나의 건강은 심각한 사태로 악화되어 있다. 파스칼 자르뎅은 모든 사람은 슬픔 때문에 죽는다고 했지만 그 슬픔의 근원은 사실상 유물론적인 것에 기인한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네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소변검사시에 다량의 백혈구(파괴된 것)가 검출되었다. MG 주사를 맞고 있다. 우선 춥다. 방안은 시베리아 벌판같고 잠을 잘 때 나는 두꺼운 파카를 입고 잔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 한 부근에 얼음을 박아놓은 듯하다. 또 오한과 복통. 놀라지 말라. 내 친구, 준. 너에게만은 사실적으로 얘기하는 게 좋겠지. 백혈병 초기증상.
내가 병원에 들어설 때 갑자기 환각적으로 한 사내가 떠올랐다. 내 소설 주인공 승후와 중2 때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죽음의 어두운 등을 보이고 사라진 급우 김재형, 이름까지도 생생히 기억하는 이 놀라운 예감! 이쯤되면 너도 우울하냐? 이직까지 내가 문장으로 너를 속일 수 있음을 기뻐한다. 안 속았다고? 약간은 놀랐겠지. 그리고 두근거렸지. 요즈음은 이러한 주술적 자살을 운운거리지 않고 살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염세주의 의 ‘ism’자체까지도 염세하는 ‘그것’ – it – 이 되어 있다. 주체의 완벽한 객관화. 하여간 이러한 장난들이 내 무료한 – 포도밭 묘지 같은 – 생을 긴장시켜 준다면 너는 기꺼이 나의 철학적 가사 假死 를 방조해도 좋으리라.
네 편지를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적으로 읽었다. 이건 정말 믿어도 된다. 단 눈물만 빼고. ‘형’의 이야기는 너무도 비과학적이어서, 너는 그 비합리성의 묘한 선험적 의미로서 정당화시키겠지만 그것은 소극적 도피이다. 하기야 어떠한 환상이든 그 주체의 주관적 역동인이 된다면야. 석제가 15일(내일)부터 휴가랜다. 내일 나는 제일 처음 만나겠다고 영광이 되길 바란다고. 전화하라고. 그와 나는 요즘 거의 실존철학에 대해 얘기한 바, 그는 너무도 철학을 조발거려 조금 산만하다. 그리고 뻔한 게 X-mas 함께 지내자 할테데. 안양파 (특히 윤승현의 형도 독점) 와도 잠정적 약속을 해놨으니 이를 어째? 네가 적당한 답을 해주길 바란다.
난 요즈음 조병준이 말은 아주 잘듣기로 했다. 기쁘쟈? 집안 일이 아주 바빠. 돼지의 난산 등. 아 정말 나는 완벽한 형이하학자란다. 안녕. 답장 빨리 서. 형도.
1982. 12.15.
P.S.: 너의 당선을 확신, 확언하며.
편지 4
준(처음이지, 아마 내가 자네의 이름을 첫머리에 쓴 것은). 내가 다소 격앙된 심정을 가지고 너에게 이 못난 엽서를 띄움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자네는 물론(!) 내가 논리주의자나 형식주의자 심지어 형이상학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난 주의자(ist)와는 너무도 관계가 멀어. 처음으로 밤눈 뿌린 소하리 신작로길 위에 찍힌 발자국이나 얼음이 풀리는 한강 기슭에 목이 꺾인 강아지풀을 성에낀 창 밖으로 바라볼 때 그 눈물겨운 종이해라든가 아니면 속물 아니면 조금 지성인이라면 모두 싫증내는 멜라니 샤프카(M. Shafka)의 <The Saddist Thing>을 들으며 하릴없는 슬픔에 젖는 깔대기 종이같이 허약한, 참으로 선천적으로 못난, 아니면 후천적으로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유약한 사내쯤 된다는 것을 자네도 내 친구라면 알고 있겠지.
네게 엽서를 아침에 띄우고 그래도 남아있는 못다한 말들 때문에 삼단요처럼 자꾸만 접히는 눈꺼풀을 재키면서 진정으로 서러운 느낌(!)을 자네께 쓴다. 석제를 만났다. 봉희형도 만나 당구를 4시간 쳤다. 석제 녀석이 자꾸 자고 가라고 하는 걸 뿌리치고 독산동(그 살벌한 이름을) 버스 정류소에서 12시 02분에 택시를 타고 거금 1000원을 뿌리고 집에 와서 홍당무 한 개를 씹으며 편질쓴다.
나는 지금 슬픔에 잠겨 있다. 그러나 슬픔이, 가난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단다. 안다면 미학적이거나 냉정함을 가장한 그것! 네 말에 의하면 허영적 감성! 그런 사람들과 이야길 하다보면 자꾸만 목이 조이는 것 같아. 목도리를 하고 가서 목도리 탓이라고 돌려 버렸지만 그러나 가난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래 가난! 이다. 오해치 말도록. 전번 신림동에서의 가난과는 다른. 가난에 대해선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오늘의 가난은 본질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어눌하고 비냄새 가득한 비닐 같은 추상적 가난의 공감대가 없다는 뜻이다. 너와 내가 같다면 우리는 가난(!)을 호주머니 속에 접어두거나 장롱 밑에 쑤셔박지만 가끔 이삿짐을 꾸릴 때마다 딸려나오는 낡은 사진 같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을 모르는 사람들은 가난을 만날 뿐이다. 그리고 기행할 뿐이다.
갑자기 자네(자네라고 부를 때마다 감정이 이성적으로 되어 참 편하다)가 보고 싶어졌다. 자네가 뭔데? 아무 것도 아닌데. 아무것이라는 말은 이미 그것이 아무 것이 아니라는 건데.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인데. 사실 건강이 좋질 않다. 날 만나면 좀 업어주렴. 책은 다 읽었니? 홍영철의 그것은 불가지론이다. 즉 훗서얼의 현상학, 그러나 본질을 알 수 없는 현상에 괄호를 묶어 본질은 다만 유보하는 것, 어제 엽서를 읽고 편지를 썼다면 또 한통을 쓰렴.
난 네 편지 읽을 때가 제일 기쁘단다. 오늘은 종일 네게 아부만 하는구나. 100만원 타면 시집이나 몇 권 사 주렴. 형도.
1982.12.16.
P.S.: 올라 올 때 내 엽서 시간별로 복사해 갖고 와 줘. 네 장씩 한종이에. 일고 싶다, 갑자기. 미안.
편지 5
안녕 준. 오랜만이군. Piano진도는 어떨른지. 전형적인 엽서, 서신으로 바야흐로 접어들은 기분일세. 먼저 상현 졸업식에 우종과 함께 갔었네만 그는 오지 않았네. 우종과 ‘캠퍼스’ 에서 차 한 잔하고 헤어졌네. 아주 추운 날이었지. 우종은 두꺼운 러시안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그 역시 추운 표정이었다고 기억하네. 복학수속을 했네. 놀라지 말게. 등록금이 57만원일세. 흴더린의 히페리온을 읽고 있어.
나는 다시 출발할걸세. 나는 내 시의 주관을 어렴풋이 감지했네. 나는 그것을 감지함을 감동적인 떨림으로 간직함과 동시에 엄청난 비애를 느끼네. 2월 한 달은 주로 뒤늦은 사회학 공부를 통하여 문예사조를 재정리할 수 있었네. 문학사조는 크게 고정주의의 산문시대와 낭만주의의 운문정신의 변형이라 생각되네.
정신과 물질, 유한과 무한, 이성과 감성의 복잡한 미궁에서 뿌려지는 빛의 명멸들, 지드 Gide의 <배덕자 背德者와 로렌스 David Herbert Lawrence>를 다시 접하게 되었지. 지드는 주인공 미셸 Missell을 통하여 (히페리온과 그가 맥을 잇고 있음을 알고 놀랐네) ‘양피가죽 위에 쓰여진 인쇄를 벗겨내어 나타나는 무늬’를 발견하듯 자연에서 ‘생명 vital’을 보게 되는 거지. 우리들의 감동이란 얼마나 주관적인 것일까. 문제는 베르그송 Bergson 식의 ‘직관’적 마찰이라고 생각하지. 나는 문학을 계몽주의에 입각한 낭만주의라는 기묘한 두 개의 적성층위를 결합하여 부르기로 했네.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것 같군 그래. 하기야 어떠한 개념의 폭을 확대하다 보면 그것의 의미에 포함되지 않을 사상이 어디 있겠느냐. 따라서 언어 한 개와 온 우주는 대응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인식주관이 뒤틀어질 수 있다. 그것이 자연과 교감하는 혼일임을 주장하여 노장 老莊을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는 모은 언어의 폭을 제한하며 그것을 질서라고 부른다고 생각하네. 종진에게 <시도> 20집을 받고 짤막한 촌평을 보냈네. 영웅 행자에게 편지 보냈는지. 도움은 스스로 찾아지니만큼 연락해 주게. 김종훈 병장님께 안부 전하고 자네와 마찬가지겠지만 ‘시간개념의 인위적 구분이 없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질문해 주게.
갑자기 봄이 서러워짐은 왜일까. 미쳤네.
1983.2.27
편지 6
안녕. 반갑다. 추운 날이었다. 내가 너무 일찍 요즈음을 봄이라고 단정 지은 것이 잘못이었다. 예비군훈련 마치고 돌아와서 답장 쓰고 있다. 복학을 드디어 했다. 월요일부터 강의가 있다. 학교다니기 싫어질 것 같다. 그냥 그 긴 신촌시장 초입서부터 지하철 공사장과 쓸쓸한 백양로, 찢겨진 현수막 등과 눈에 살기가 도는 신입생들 – 자세히 보면 그 살기는 얼마나 경박한 것인지 – 과 재학생들. 문제는 나의 윤리관 내지 가치관에 관한 규정 – 파생행위가 퍽 나를 괴롭히리라. 어차피 각오하고 과 科에 들어간 만큼. 스스로 쉽게 패를 써버린 만큼.
그간 영화 <안개마을> – 익명의 섬 -을 보았다. 각본 구조의 불가피한 취약성과 영상이 심리묘사 한계성(결국 정윤희가 나레이터로 나오는데)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면 음악의 상징적 반복과 (묘한 본능과 죽음의 율동을 느끼게 하는 목관악기) 정일성 촬영의 놀랄만한 기법 (‘나자리노’ ‘캣피플’의 환상적 터치 같은). 몇 일 동안 학교에서 그냥 희희낙낙 떠들고 불쾌불쾌하다보니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그래서 외롭다. 너는 무슨 편지를 그렇게 했느냐.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야. 따라서 어떠한 지식이나 논리-체계-사고 분야 등의 인식대상으로서의 학문이 객관적 탈취가 그 목적이라면 그 인식의 해석으로 빚어지는 개인 간의 편차, 따라서 상대주의적 만남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들의 개성과 다양한 이성, 감성의 혼입을 부여한다는 것이야. 말이 자꾸 겉도는데 그 이유는 너도 느끼겠지만 나의 부끄러움이나 너의 과감함을 정면으로 얘기하기엔 그만큼 열린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뜻이겠지.
다른 얘기. ‘지금 없는, 남는 것’은 없어. 있다면 그 노력은 개념의 확장 혹은 축소 혹은 파생적 변형을 요구하는 것 밖에는. ‘찾아본다’라기보다는 ‘선별하여’ 분류 그 이후의 새로운 개념만의 부여일 것이야. 또 한 가지 ‘시간개념의 인위적 구분이 없다면’ 우선 논리적으로 자연적 구분만 잔존하겠지. 그러나 자연적 구분 (일출 등)의 세분화 조직화가 결여되어 있음으로 해서 그러한 자연적 시간은 공간화되는 즉 공간의 하층구조로 전락하겠지. 비가 오던 어떤 날의 해질 무렵 등등의 모든 기억은 비슷한 유형으로 몰려가고 모든 예감이나 확률성은 신비화되어 ‘갑자기’ 영감처럼 들이닥칠 것이며 ‘사랑’은 이미 그 부속성인 ‘축척’의 견고성을 잃게 되어 그것은 사랑의 가장 절대화된 동일화로 이름과 동시에 가장 위험한 허무로 빠져들 건가. 인위란 억압이며 문화이고 아, 기침-감기-욕망 그리고 허물어져.
1983.3.6
편지 7
준아,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엎드려 쓴다. 너에게. 건넌방에선 세든 30대 중년 아주머니와 아이들, 이이들 꾸중하는 소리. 멀리서 교회의 차임벨 소리, 끊어진다. 다시 들린다. 아무도 없는 빈 집과 무서운 공포처럼 엄습해 오는 적요. 부엌 쪽에서 쥐가 남비를 챙기는 소리. 가증스럽게도 이럴 때 나는 신 神을 생각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아버지 다 내려가시고 TV를 볼까 하다가 그만 둔다. 어제부터 완벽한 혼자다. 담배를 껐다. 자꾸만 어디선가 문이 닫히거나 혹은 열리는 소리가 깜짝깜짝 나의 의식을 세게 친다. 사람들. 복학수속이 완전히 끝났다. 수강신청 변경원까지 마쳤다.
오늘은 열쇠를 하나 샀다. 어쩌면 그렇게 신기하게 열리고 잠기는지. 내 일생 처음으로 열쇠를 산 것이다. 그리고 몸이 흐트러진다. 내 의식과 무의식을 잠가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다시 지겹게도 엘리어트를 읽는다. 복학생은 참 피곤하였다. 전공 공부에 충실하기로 한다. 원서 읽기도 열심히 결심해 본다. 그것이 쉽게 재학생으로 섞여버리는 유일한 방법일 거라고 판단하였다. 불안하다. 누구를 만나고 다방에 가서 율무차를 마시고 마지못해 흡연을 하고 술을 건네고 당구를 치든지 결국은 전자오락실이다. 버스 안에 손잡이를 잡고 흔들린다. 걸어온다. 집. 빈 집, 혹은 어머니가 계신 집. 발을 닦기. 엄지 발가락부터 하나하나. 기타를 잡고 튜닝을 한다. 불안하다. 기타를 놓는다. 나의 문학은 영원히 튜닝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이청준의 조율사처럼, 너무나 멀다. 나는 가까이 있다. 남의 시들을 읽고 욕설을 한다. 승용차 한 대가 다가온다. 등 뒤에서 나의 빛의 어망에 걸린다. 타협하자. 어려운 일.
1983.3.17
편지 8
가스라이터 한 개를 주웠다. 아마도 처음으로 갖고 있는 물건인 듯.
옅은 코발트 빛이다. 바슐라르가 그랬던가. 촛불은 ‘타는 물’이라고. 가스라이터는 타는 공기쯤 될까. 윤전기에서 손을 떼면 삽시간에 불은 없어진다.
우리들 사람들의 불이 점화하는 곳은 어디에 어느 것쯤 도리 것인가. 시간 時間과 상상 想像쯤 될까.
승현이가 한번 문학실로 찾아왔었고 어제는 장장 네 시간쯤이나 페퍼포그와 유리의 파편, 호흡장애 등이 있었고 얼결에 본의 아니게 석제도 내 기억 속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태연히 문학의 밤 행사를 가졌고 조세희 趙世熙 선생과의 대화가 있었고 바오밥나무와 장미의 어린 싹이 우리의 귓가에 머물렀었네.
내 마음을 과연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도 알겠지만 난 좀 괴팍한 형식주의자여서 어떤 사고의 틀이나 감상의 공간이 주어지기 위한 내 주위의 여건에 심각한 알레르기를 느낀다.
이제 장례 葬禮란 말은 쓰지 말기로 하자.
그 말이 주는 효용이나 기능 혹은 부수적인 느낌 같은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
어떤 관념의 놀이나 쓸데없는 사유 그 자체내에 고여 잇는 휴지 같은 느낌.
그리고 서울엔 비가 많이 왔다.
1983.8.27
P.S: 시 詩 복사 보낸다.
지금 보니 아주 빈틈이 많군. 안녕.
소리 I
아주 작았지만 무슨 소리가 들린 듯도 하여 내가 무심코 커튼을 걷었을 때 맞은편 3층 건물의 어느 窓門이 열리고 하얀 손목이 하나 튀어나와 시들은 푸른 꽃 서너 송이를 거리로 집어던지는 게 보였다. 이파리들은 空中에 잠시 떠 있어나 볼까 하는 듯 나풀거리다가 제각기 다른 速度로 아래를 향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나는 테이블로 돌아와 지난 新聞들을 뒤적였다. 그가 조금 전가지 서 있던 자리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 조금 고여 있었다. 스위치를 내릴까 하고 팔목 時計를 보았을 때 바늘은 이미 멈춰있었다. 나는 헛일삼아 바늘을 하루만큼 뒤로 돌렸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내가 대답을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을 때 그는 소란하게 웃었다. ‘그냥, 거리로요’ 出入口쪽 계단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 명함꽂이 만년필 재떨이 등 모든 形體를 갖춘 것들마다 제각기 엷은 그늘이 바싹 붙어 있는 게 보였고 무심결 나는 의자 뒤로 고개를 꺾었다. 아주 작았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다시 窓가로 다가갔을 때 늘상 보아왔던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거리의 아주 작은 빈 곳까지 들추며 지나갔다. ‘빈 틈이 없는 事物들이 어디 있을려구요’ 맞은편 옆 건물 2층 창문 밖으로 더러운 분홍빛 커튼이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듯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버려 두세요. 뭐든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는 깜빡 잊었다는 듯이 캐비넷 속에서 장갑을 꺼내면서 덧붙였다. ‘아니, 그냥 움직이고 있는 것일지라두 말이죠’ 먹다버린 굳은 빵조가리가 엄숙한 表情으로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듯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어둠과 거리는 늘상 보던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천장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압핀처럼 꽂혀 있답니다’ 그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 조금 고여 있었다. ‘아무도 없을 때는 발소리만 크게 들리는 법이죠’ 스위치를 내릴 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내 가슴 알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그 소리는 分明히 내게 들렸다.
1983.8.27.
편지 9
좋은 날이다. 바람이 불고 있어. 학생회관 3층 로비에 앉아있다. 우리 학교 도서관은 참 아름답다.
추석이었지. 지난 주일 나는 머리를 짧게 깎았다.
의례적 예식 禮式같은 것이겠지만 외적인 변모를 통해서 그러한 부분적 현상의 변화가 내 의식의 어느 부분에 조금이라도 충격을 주기를 기대하면서.
너의 분석은 참으로 고맙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아마 나를 잘 알고 있는 너이기에 그렇게 훌륭하고 섬세한 비평을 한 것이라 짐작하지만 내 일생에 있어 그렇게 진지하고 정확한 비평을 받은 적은 처음이다. 특히 시 중에서의 ‘그’와 ‘작자’의 ‘내재적 타인의 방생’ 부분이 가장 정확했다. 다른 부분 역시 빛나는 너의 분석으로써 나의 교묘하고 신경질적인 상징과 은유(암유)를 세세히 지적한 자네의 솜씨에 뜻밖의(?) 놀라움을 받았단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시는 아니었으니까. 단 너의 비평에서 빠져 있는 부분 두엇을 간략히 지적하자면,
첫째는: 화지가 자신의 정체성(죽음, 고여 있음, 압핀에 박여 있음) 등에 대한 반응이 사실은 정체성 그 자체로서 대항한 것이ㅏ 아니라 일련의 사소한 행위의 반복이나 점층적 자각으로써 확산되어 간다는 것이다. 예컨대 ‘무심코’ 창가로 다가갔고 신문을 뒤적이고 (지난 신문 신문의 아이러니) 그림자로 인해 ‘고개를 꺾어보고 다시 창가고 다가가고, 천천히 일어나고, 조그맣게 말(!)하고 스위치를 내리고 분명히 들려 옴을 느낀다. 즉 화자의 정체성에의 반발은 점차 심각한 반응양상으로 그 의지의 개입이 더해 간다. 물론 자네도 지적했듯이 그러한 반응의 힘은 ‘그’의 떠남이나 ‘소리’ 등에서 연유되겠지.
둘째는: 선험적 상황이라고 그랬는데 그러한 분석은 인과율에 입각한 산문적 도식화의 위험이 따름을 자네도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셋째는: 구원 내지는 활동에의 해답의 결여는 아주 잘 본 것인데, 좀 미안하고 자네에게 실망을 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해답을 적어도 이 시에서는(그렇다고 소리 II, III 등에서 해답을 줄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릴 능력이 없음을 자인한다. 편법으로서의 해답은 그러한 상황(반복에 따르는 정체성에 대한 비극적 쇠퇴)을 ‘인식함’에 있을 뿐이며 독자가 그것을 인식한 이후의 결정은 나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며 그렇게 될 때 시인은 독자의 미혹적 수준으로 걸어내려가 겸손하게 되며 그러한 겸손이 공감대 형성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너의 긴 편지에 대해 솔직히 미안한 부담을 느낀다. 물로 ㄴ그 부담은 일종의 사랑의 과잉액에서 비롯된다면 내가 너무 행복한 것일까.
시험이 있어. 10월 6일~15일까지니까 좀 바빠지겠지. 올 가을에는 근사한 양복과 면도기 하나를 구입하고 싶은데 욕망은 많고 내 심신은 지쳐 있다. 사실 그러한 욕망이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요즘은 불안하고 혼미한 미래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즐거움이나 행복은 예견하지 못했던 뜻밖의 암흑 속에서의 빛나는 기포 같은 것들을 발견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므로 나는 그런 생각을 좋아하기로 한다.
아주 멀리, 자네가 하루 종일 뛰어도 만날 수 없는 곳.
1983.9.28
편지 10
비가 내리고 있는 대학 정문을 들어설 때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나올 뻔하였다. 베를렌느의 시 詩중에서 ‘비올롱’이라는 악기 樂器가 문득 생각이 났고 뜨거운 햇빛이 비닐처럼 드리워진 긴 담을 기억해 냈다. 여기는 학생회관 옆 간이 휴게실이다. 너도 기억하겠지 대학도서관의 검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앉아 있는 탁자 오른편에는 대학병원이 있다. 맑은 날이면 환자들이 파자마 차림으로 나와서 배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의 경험들과 감각들을 기억했다. 여학생 서넛이 마구 뛰어갔다. 시간은 오후 한 시. 문득 종교 宗敎에 대해서 생각했다. 무엇인가 터득한다는 것이 편리한 일일까. 하지만 나는 나의 습관들을 무시하기로 하였다.
이상하지, 비가 오는 날씨에는 모든 사물들이 검게 보인다. 철저한 감각론자는 아니지만 인간의 내면을 언제나 새로운 느낌으로 채우는 외면적 실체는 존재할 것 같다. 얼마 전에는 길거리에 뛰어 노는 작고 귀여운 애들을 보고 갑자기 네 생각이 났었다. 너를 생각하면 항상 무슨 구름 생각이 나. 가끔씩은 약간의 생각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옆 좌석에서는 두 명의 사내가 역사 歷史를 얘기하고 있다. 기다림이란 얼마나 파괴적일까. 몇 개의 구름들이 지상 地上으로 내려오기 위하여 얼마나 작은 몸들로 찢기워져서 후드득 떨어지는지. 비가 개이면 숲으로 올라가 보면 좋겠다. 사랑은 서로의 그림자를 나눠 갖는 것일까.
1984.4.17
편지 11
이상해. 요즘은 매일 맥주를 마시고 있다. 어제는 국문과 마광수 馬光洙 교수와 ‘장미빛 인생’ La Vie en Rose 인가 하는데서 마셨다. 근우형이 나에게 성격 파탄자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이들은 나에게 왜 머리를 잘랐느냐고 했다. 제임스 띵인가 아니면 마이클 잭스니스트냐고 했다. 나는 너무 중요한 동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도 중요해서 곧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오는데 갑자기 살기를 느꼈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소리를 지를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워져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쉬지 않았다. 손을 들어 심장 가까이 댔다. 미약한 울림이 쓸쓸하게 내 감각을 위로했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얼굴 가득히 땀이 흘렀다. 심장마비란 이런 것일까. 나는 중계역(신도림)에 내려 콘크리트 의자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부끄럼을 잘 타는 편이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슴은 곧 터질 것 같이 팽팽한 풍선처럼 흔들렸다. 내 의식의 등유 燈油가 미친 듯이 출렁거렸다. 나는 아득히 내 아는 이들의 얼굴을 생각하고 천천히 허공을 향해 호명 呼名했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흔들리는 연기처럼 수직으로 일어섰다.
편지 잘 받았다. 이곳은 대학도서관. 네 친구는 아무도 읽지 않는 얇은 책처럼 작은 방 안에 꽂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 意志일 것이다. 나는 요즘 항상 그것만을 생각한다. 모든 것은 믿을 수 없다. 기억도 그렇다.
1984.6.2.
편지 12
몇 개의 비극 悲劇들을 떠올리고 혼자 빙그레 웃어보았다. 쓴다. 너에게. 방금 수강신청을 끝냈다. 학부 學部 생활의 마지막 의무들, 혹은 향유할 수 있는 청춘 靑春의 이름들을 나는 신중하고 깨끗하게 적어 넣었다. 이상하지, 나는 언제나 마지막을 겨냥하고 무엇인가를 집어 던지지만 그것은 언제나 출발에 불과했으니. 마지막이 없다면 출발 또한 무슨 소용일 것인가. 너의 편지를 일고 아직도 나에게 감동이 남아 있음을 신 神에게 감사했다. 너의 그 문장들. 일부러 딱딱하게 기어가는 갑충류와 같던 너의 글씨들. 애정을 담되 그것을 객관적이고 필연적으로 보이게 하려 했던 문장의 어미 語尾들.
도서관에 왔다. 노트를 읽고 있었다. 학생들이 모두 제각기의 일들에 열중하고 있다. 일렬로 길게 늘어선 형광등 불빛들, 아나키즘 Anarchism의 막스 스티르너 Mqx Stirner를 읽다가 갑자기 4층 로비로 나갔다. 총애하는 후배 김군 金君 – 최근 알게 되었다 – 도 참고열람실에서 자리를 뜨고 없었다. 아름다운 굶주림의 빔!
다음 학기의 과목은 네 개뿐이라 얼마나 기쁜지 모를 것이다. <국제정치>, <한국 정치사랑>, <문예사조>, <근대철학> 각 한 과목씩 적어 넣었다. 참 이상하구나. 사실상 나는 도서관에서 종종 답신을 쓰는 편이지만… 갑자기 말테 Malte가 생각이 나서 해본 소리였단다. 그래, 나는 꿈꾸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도어 door의 손잡이 어디쯤에 붉게 녹슬어가고 있는 볼트의 그것처럼. 내가 요즘 사실 事實 들을 믿는 이유는, 내 세계관의 비극성을 의미하고 의지 意志를 신봉하는 이유는 순발력의 공간, 곧 외계관 外界觀 에 대한 힘겨운 노력의 표징 表徵일 것이다. 아듀, 가스등 희미한 겨울 거리의 추억이여.
1984.6.13
편지 13
오른쪽 팔목을 수술했다. 작은 종양이었는데 그것을 떼어냈다. 벌써 일 주일째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대학병원 밖을 나와 소아재활원과 루스채플을 거쳐 청송대 靑松坮 나 우중 雨中의 노천극장을 지나기도 한다. 폭양 曝陽 뒤에, 마치 전쟁과 같은 빗속을 지나 맑게 개인 저녁 하늘의 신선함, 혹은 무거운 청어 靑魚의 은빛과 검정빛의 칼날 같은 비늘, 그것을 연상시키는 구름들과, 그 구름 위에서 빛나는 일몰의 아름다움을 너는 본 적이 잇는지 모르겠다. 요즈음은 온통 불명확한 것 투성이다. 나의 생, 혹은 문학, 진로, 학업, 관계, 사랑, 미래, 시간, 공간… 모두가 알 수 없는 실체들로서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 불명확한 것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어떠한 극복들을 내가 마주서야 할 때 나는 비틀거리는 층계 어디쯤에서 불현듯 위기감을 느낀다. 어떤 확실한 것, 즉 사소한 ‘확실함’이 하나라도 나에게 다가온다면 나는 요즈음의 전 생애를 그것에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 때문에 우울해 하곤 하였다. 편지 잘 받았다.
요즘은 랭보 A Rambaud 평전을 읽고 있다. 모든 신비주의와 신 神을 생각한다. 그리고 랭보와 릴케 Rilke, 구체적으로 <두이노의 비가 悲歌>를 연상해 보고 그들을 연관시켜 본다.
위대한 정신 精神들이란 순수한 관념과 인간의 내면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신성 神性에 있을 것이다. 이번 여름은 가장 위험한 경험들로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것이 예감이므로 나는 조금 안심할 수 있고 멀리서 보고 차라리 ‘기다려’ 불 수 있을 것이다. 부산에는 아마 7월 20일경 갈 것 같다. 내려가면 연락하마. 아직도 나는 작은 충격들만으로 충분히 그곳의 추억들을 호출할 수 있다.
1984.2.7
편지 14
오, 놀라와라. 그대. 장미 薔薇에게 얼음을 넣어주다니.
누가 내 이 끓는 영혼에 얼음 몇 조각을 넣어 줄 수 있다면.
여기는 예의 그 학생회관 간이휴게소 – 비닐로 된 둥근 방갈로 – 그곳에 앉아 있다. 학생회관 잔디 앞에서 얼마 전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한국 대학생들과의 인터뷰가 있었다. 매미가 울고 있다. 곧이어 얇고 투명한 날개 몇 잎이 그의 죽음과 지난 여름의 잔해를 보여줄 것이다.
부산, 성미와 진혜도 잘 있겠지. 글은 많이 썼는지. 이제 곧 개강이니까 또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하겠군. 경신이의 상경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입술에 부딪치는 부드러운 입맞춤이 되어 서울의 깊고 어두운 세계를 차갑게 씻어줄 수 있다면, 너무도 더운 여름이었다. 이 더위와 함께 우리들의 기나긴 사투, 인내심의 기록들은 당분간 우리들의 감각의 사료 史料에 깊은 고통 혹은 긍지로 남게 되겠지. 기회가 닿으면 꼭 ‘송정’에 갔다 오기 바란다. 그리고 그 인상 印象을 나에게 알려주렴. 가능하면 안개가 끼고 바람이 험하게 부는 날이면 좋겠다. 물고기의 뼈, 그물에 걸린 해초의 눈들.
경신이의 텅 빈 우체함을 위하여 엽서를 띄우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여름의 기온 탓으로 돌리려 한다. 요즈음 레온 유리스 Leon Uris의 <트리니티 Trinity>을 읽고 있다. 아일랜드의 정치적 독립을 둘러싼 이야기인데 요즈음의 한국 작가들의 수식어로 점철된 신택스의 얄팍함은 질책을 받아야 한다고 느낀다.
좋은 글 많이 쓰렴. 첫째는 감상 感傷에 빠지지 말것. 그것이 ‘낭만’과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하는 것은 상경한 후 ‘장미빛 인생’ 카페에서 얘기하자. 어둡다. 너무 밝아 눈부시기 때문이다. 꿈이란 현실과 작자가 최소한 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경우의 불가결한 몽상이다. 불꽃은 위로만 솟아오르며 물줄기는 아래로만 떨어진다.
1984.8.10
편지 15
두 통의 편지. 하나는 어떤 결의가 담기 내용이고 또 하나는 그 다음날 부친 것인지 아름답고 힘 센 시 詩 한편 – 맞지? – 그 두 통을 받았다. <불꽃놀이>라는 시는 어떻게 해서 쓴 것인지. 혹시 전날 부친 그 편지를 쓰고 나서 그대가 ‘스스로 선택한 절망 속에서 스스로의 내부의 방 房의 모든 불을 끄고 촛불을 찾은 다음 어둠 속에서 불을 켜려고 성냥을 긋는 순간 시의 착상이 부대꼈는지도 모를 것’ 같다.
첫 번 편지를 받고 나는 괘 당황했었다. 그대의 결의가 어떤 종류인 것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내가 그대에게 어떤 위로나 충고도 줄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측뿐이었다. 왜냐하면 너도 그런 것들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렇게 어렴풋이 혹은 명백히 절망 속으로 걸어 들어 갔다면 출구 또한 그렇게 어렴풋이 혹은 명백히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나의 확신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대는 나의 이와 같이 흐릿한 확신의 불을 켜주었다. 바로 <불꽃놀이>라는 경신의 ‘불’이 그것이다. 이것 봐, 벌써 여름이 지나갔다.
어제는 부산에 거대한 폭풍이 있었다고 했다. 나는 상상 속에 거대한 태풍의 나무를 생각했다. 그 바람으로 만든 둥글고 강철같은 이파리, 구름 사이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너였다. 너는 어둡고 세찬 바람 속에서 작고 가느다란 양초를 들고 있었다. 분명히 불꽃은 심지에서 타고 있었는데 너는 자꾸만 성냥을 그어대고 있었다. 이것 봐, 성냥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중얼거렸다. 너는 그것을 듣지 못했다. 송도(성미)는 피해 없었는지 염려된다. 곡 안부 전해라. 송정은 갔었는지 송정의 안개와 그물은 보았는지 진혜는 안녕한가. 어둡다. 대낮이다. 이봐, 힘을 아껴봐. 난 벌써 잉크가 떨어지고 있다.
198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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