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의 지혜
M. 토케이어 Marvin Tokayer
이준호 李俊鎬 譯
라비 마빈 토게이어
이 책은 유태인의 지혜의 결정체인 분말과 같은 것이다. 우선 시식해 보고 만일 구미가 당기면 일상생활에서, 직장, 가정에서 매일 마음대로 이용했으면 한다.
예수 그리스도,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처럼 모든 분야에서 샛별처럼 성공자를 배출해온 유태인의 힘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유태인의 지혜의 전부 전부!!
유태인은 우수하고 무서운 민족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유태인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 만큼 알고 있는가? 이 책은 유태인의 민족성을 알아 그 수수께기를 푸는 절호의 안내서이다.
유태인을 단련시킨 전통의 저력
* 세계의 모든 나쁜 것, 그리고 모든 진보는 유태인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라고 오해할 정도로 유태인은 우수하다.
* 그러나 유태인은 태어날 때부터 우수한 것이 아니라 교육과 계율을 쌓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 이 책은 상상을 초월하는 박해 속에서 오늘까지 독자성을 잃지 않은 유태인의 힘 – 영지 (靈智?) 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대명사 大明社
1. 유태민족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유태인에 얽힌 신화
당신은 유태인을 싫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편견이다. 서구화된 사회, 또는 가톨릭교 선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회일수록 유태에 대한 편견이 강하다.
우선 당신은 유태인을 잘 알고 있는가?
어떤 사람이 유태인에게 빈정댔다.
“이 세상의 나쁜 짓은 모두 유태인이 저지른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전거 탄 사라도 우리와 마찬가지지요.”
그 말을 들은 유태인이 대답했다.
“어째서 자전거 탄 사람도 그런가?”
“그렇다면 유태인이 어째서 그런가?’ 하는 물음이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유태인만큼 독특한 민족은 없다. 독특함을 다른 민족이 왜 싫어하는 것일까? 유태인은 그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지금도 변한 게 없다. 그러면 과연 어떤 것이 다른 민족과 차이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대답을 하기 전에 당신에게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유태인은 지구상에 대관절 몇 명이나 될까?
1억? 아니면 8천만? …. 5천만?…..
나는 유태인 인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몹시 아프다. 2,000여 년 전 예수가 탄생했을 당시에도 유태인의 인구가 당시의 일본 인구보다 많았다고 생각된다. 어느 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를 통해 볼 때 유태인에 가해진 학살과 박해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유태인의 수는 2억은 충분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불과 30년 전[필사주: 이것으로 이 책은 1975년경에 쓰여진 듯] 의 일이지만 나치스 독일인의 계획적인 손에 의해 유럽에서 6백만 명의 학살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유태인의 수는 2천만 명도 채 안 되는, 겨우 1천3백만 명이 조금 넘을 뿐이다. 이 가운데 2백 80만 명 정도가 유태인의 새로운 조국 이스라엘에 살고 있으며 그 나머지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1천 3백만 명이라고 하면 뉴욕이나 도쿄, 파리와 같은 한 도시의 인구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유태인이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면, 세계각국의 인구 순으로 나열해 간다면 중간 정도의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위치일 것이지만, 그러나 유태인은 세계의 자연과학, 사회과학, 정치, 예술, 음악, 문학, 상업, 저널리즘 등의 각 분야에게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스포츠 종목에서만 신통치 않다. 다른 분야에서는 제1위가 아니면 제3위 정도의 사이에 들어가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예수,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베르그송 … 오펜하이머, 로스챠일드, 하이페츠, 트로츠키, 디즐렐리, 키신저. 더 이상 이름을 열거하다가는 끝이 없다. 무슨 전화번호부 같을 테니 말이다.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긴 유태인 중 누구나가 다 잘아는 사람의 이름만을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1천 페이지는 순식간에 메울 수가 있을 것이다.
유태인이 없었다면 모르긴 해도 세계의 사회과학이나 과학기술은 오늘날만큼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며 나치 독일의 과학기술의 수준도 극히 낮은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성공한 유태인은 흔히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국적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인슈타인 – 독일국적을 갖고 있었으나 나치에 쫓겨 미국에 망명했다 – 은 이렇게 말했다.
“유태인이 커다란 업적을 남기게 되면 ‘그 사람은 독일인이다’ 라고 말하며 어쩌다 나쁜 짓을 하게 되면 가차없이 ‘그 놈은 유태인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유태인은 곧잘 ‘레닌이 유태인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다’ 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물론, 지금 같은 문명의 발달이 유태인에 의해 이룩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 심한 과장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유태인은 그 수가 적은 데다가 이 세상에는 유태인이 아닌 다른 많은 민족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지금 같은 문명의 발달을 유태인이 독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분명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유태인이 세계의 정치 금융 상업을 지배해서 이끌고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도 유태인이 지금의 문명발달에 이바지했다는 말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심한 과정이다.
히틀러는 유태인이 독일의 정치,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여 반 유태주의를 선동했다. 그런데 얼마 전 뉴욕에 있는 강사 한 사람이 강연에서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
“독일 국민 6천5백만 명의 1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독일에 있는 유태인 65만 명이 우수민족으로서 내외에서 공히 인정하는 독일 민족을 압도할 수가 없지 않은가?”
1934년의 일이다. 히틀러는 독일인이 세계의 최우수민족임을 요란하게 선전한 일이 있었다.
환경의 작품, 유태민족
유태인이 세계를 비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심한 과장이긴 하지만 흔히 그렇게들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다른 뜻에서는 유태인에 대한 찬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오해를 낳을 만큼 유태인이 우수하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유태인은 훌륭한 사람을 낳는 확률이 가장 높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태계 미국인이므로 곧잘 야구 이야기를 예로 들지만, 만약 세계의 모든 민족을 야구팀으로 친다면 유태인은 가장 타율이 높은 민족인 것이다. 인류 최고의 야구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30년도 채 안 되는 이민의 나라인데도 들과 모래의 사막국에다 푸린 땅을 일구고 공업화를 촉진시켜 주변을 에워싼 1억인 이상의 아랍제국으로부터 몇 차례에 걸친 전면전을 치렀지만 1967년 6일 전쟁에서 본 것같이 눈부신 승리를 거둔 사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도 한 가지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유태인은 미국인구의 3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유태인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을 보면 4분의 1이 되는 것이다.
역사에 나타난 유태인의 업적을 생각해 보자. 7일을 1주일로 정한 사람은 누군가? 후에 그리스도교, 회교가 파생된 일신교 一神敎를 고안해 낸 것은 누군가? 맨 처음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것은 누군가? 민주주의를 고안한 것은 누군가? 이것들 모두가 고대 유태인인 것이다. 해부학, 의학에서 복지, 재판제도도 고대 유태인이 기초를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유태인이 지은 집 속에 그리스도교나 회교, 의학, 민주주의 등의 가재도구가 늘어서 잇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찌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유태인은 다른 민족보다도 머리가 좋다든가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과신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검다든지 또는 눈이 파랗다든지 키가 크다든지 하는 따위의 신체적인 것은 혈통이 결정한다. 그러나 한 민족의 우월이나 민족성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이 아니고 어느 한 민족이 지녀온 역사 가운데 배양되는 전통과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연이며 다른 민족도 유태인과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라면 유태인과 같은 성과를 올리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우수 優秀라고 말할 때, 발명이나 발견 또는 새로운 학설을 내놓거나 아니면 예술을 창조해 내는, 개인으로 말할 때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고 높은 수입을 올리는 것에만 국한시켜 하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어떤 특정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도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느 민족은 나무에 올라 열매를 따는 일에 능하며 또 다른 민족은 입으로 불어 쏘는 화살로 먼 데 있는 새들을 잡는 것에 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엇이 뛰어나고 무엇이 떨어진다고 하는 기준은 민족에 따라, 또는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개인에 따라서도 다른 것이다.
만약, 한 가지만을 가지고 그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고 한다면 올림픽에서 한 가지 종목에 언제나 우승하는 민족이 있다고 할 때, 그 민족이 세계에서 제일 우수민족이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독일은 확실히 제복을 만드는 기술은 뛰어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민족이 세계에서 최우수민족이라고 세계 각국에 자기 소개를 한 것은 순전히 독일인의 착각에서 온 것이다.
세계의 모든 민족의 선천적인 능력에는 큰 차가 없다. 이것은 올림픽경기를 예로 들어 보다오 각 민족이 공히 그렇게 큰 능력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태인이 뛰어난 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 많다. 유태인의 피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약 늑대소년과 같이 늑대의 무리 속에서 자라난다면 늑대와 같이 이를 드러내어 짖어대거나 두 손도 발로 사용해 손을 발로 만들게 될 것이며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이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의해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태인이 우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유태민족의 환경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그러나 문화나 전통,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소프트웨어 이어서 몇 천 년이나 걸려서 개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인의 문화나 전통은 상업에서나 사생활 면에서 가장 성공률이 높은 인간을 낳는 소프트웨어 라 할 수 있다.
절대의 진리 유태교
여기 이 책은 유태인의 노하우 know-how 를 팔려고 하는 것이다. 유태인 격언에는 이 노하우[역자주: ‘하는 방법에 관한’ 지식, 기술] 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술 術을 밝히기 위해서는 유태 민족의 발상으로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유태교와 유태문화가, 배우는 일을 최상의 것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은 유태교가 유태문화이면 유태문화가 유태교인 것이지만). 둘째는 유태인이 오래 역사를 통해 갖가지 박해를 이기고 생존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세 번째의 이유를 들려고 한다. 그것은 유태인이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언젠가 일본이 학생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네? 구약성서 舊約聖書 라고요?”
이 일본 학생은 이렇게 되물으며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이것을 가지고 놀라는 것을 볼 때, 세계의 다른 민족이 유태인에 관해 너무 모르고 잇는 것이다. 그는 유태인이 이미 수 천년 전에 쓴 구약성서를 마치 2~3일 전에나 출판된 것같이 생활의 일부로서 삼고 있는 것이 놀랐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구약성서는 뭔가 곰팡내 나는 책으로만 지금껏 비쳤던 모양이다. 유태교는 구약성서에 그 그분을 두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유태인에게는 구약성서가 매일 아침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저네 배달되는 조간신문만큼이나 신선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편의상 구약성서라고 부르고 있지만 구약성서는 그리스도교의 호칭일 따름이다. 유태인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유태인에 있어서 성서는 하나밖에 없다. 구약성서가 바로 유태인에 있어서 유일한 성서인 것이다.
성서 – 히브리어로는 ‘트라’ 즉 가르침이라고 한다 – 는 유태인의 역사책이리고 하다. 이 안에는 유태민족이 어떻게 발상하고 세계의 많은 여러 민족이 모두 태양이나 달이나 또는 산이나 짐승을 신으로써, 많은 신을 믿고 있었을 때 신은 하나밖에 없다고 일신교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 신이 유태인을 선민 ‘선택된 민족’으로 택해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는 것 등이 적혀 있다.
유태인은 오늘날까지 ‘성서’의 가르침을 굳건하게 지켜왔다. 유태인은 기원 전 18세기경, 현재의 이스라엘의 한 곳에 이주해 온 유목민이었다. ‘성서’에 최초의 유태인으로서 등장하는 유태인 아브라함은 이 무렵에 생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태인은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정착한 후에도 이집트에 노예로 끌려가거나 비빌로니아로 납치되어 갔다. 또한 이 사이에 유태인의 왕국이 흥했다가 붕괴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기원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때부터 유태인은 조국에서 추방되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후 1천 8백 년 이상이나 이어진 디아스포라 이산 離散 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다. 다아스포라 는 유태인이 세계에 흩어진 것을 의미하는 말이며 희랍어의 어원으로는 ‘남김없이 흩어지다’라는 뜻이다.
유태인이 어떻게 세계각국으로 흩어져 갔느냐 하는 것은 이미 7세기 초 서기 6백 4년 경 중국대륙에 몇 군데 유태인 사회가 건립되어 있었던 것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1605년에 이에즈스회 의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하남성 개봉 에 유태인의 사회가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개봉의 유태인 사회는 잡혼 잡혼에 의해 인종적으로나 생활습관적으로 상당히 중국화되어 있었지만 아직 시나고오그 祈禱所 synagogue 가 존재하고 있었고 유태교의 계율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스와이에’ 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기록에는 7세기 무렵부터 유태인이 각지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유태인은 ‘쥬프 求忽 구홀’ 라고 불리어졌었다.
조국으로부터 추방된 대부분의 유태인은 유럽으로 건너갔다. 중근동에 남은 유태인은 아랍인과 터키인에 의해 2등 시민으로 취급 받긴 했지만 그렇게 가혹한 박해는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유랑의 역사가 시작돼 유럽으로 건너간 유태인은 그리스도교도의 손에 의해 집요한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왜 박해를 받아야만 되었는가?
이것은 절대로 유태인의 혈통 때문이 아니었다.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유태인은 우생학적 優生學的인, 다시 말한다면 한 핏줄을 나눈 민족은 아니다. 유태인은 유태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만 하면 그리스도교 사회 안으로 흡수되어 박해를 받지 않아도 됐다. 가량 학자 가운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개종 改宗 한 유태인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다. 이 이야기는 개종한 유태인이 많다는 증거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유태인은 소수민족으로서 타국에 머물러 살면서 많은 박해를 받았으면서도 유태교를 버리지 않았었다. 그 까닭은 유태인에 있어서는 유태교가 절대의 진리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세계 도처로 흩어져 있으면서도 1천8백 년 이상이나 동화되지 않고 유태인의 독자성을 지켜왔다고 하는 것은 다름 민족에게는 놀라운 일이며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유태인이 성서를 오늘날의 것으로 삼고 그 가르침을 정신과 생활의 지주 支柱로서 굳게 지켜왔기 때문이다. 유태인에게 있어서 성서는 다른 민족이 생각하는 것 같이 절대로 낡은 책이 아닌 것이다.
배움의 민족 유태인
유태인이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자 게토로써 알려져 있는 유태인가 街 라든지 유태인부락이 스페인으로부터 러시아, 터키, 중국에까지 온 세계에 탄생하게 되었다. 하나의 민족이 멸망한다고 하는 것은 보통 나라를 잃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더욱 정확히 말한다면 자기의 종교나 문화를 빼앗기고 강한 민족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유태인은 국토는 잃었지만 유태민족은 멸망하지 않았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1천8백 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유태인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칼이나 창을 갖고 있지 않았다. 습격으로부터 유태인가를 지키기 위해 높은 벽을 간혹 쌓긴 했지만 나라가 없었던 유태인은 지켜야 할 땅이나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태인이 자기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무기는 오직 배움 그것 뿐이었다. 성서를 배움으로써 유태인이 되고 아이들에게 성서를 가르치는 것으로써 유태인임을 가르쳐왔다.
유럽에서는 중세 중세로부터 교육이 없는 유태인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유태인 이외로 길러진 유태인 외에는, 하는 말이 있을 정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이 유태인이 이스라엘로부터 추방당한 후 유태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비롯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유태민족은 원래 학문을 가장 숭고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라비 (유태교 지도자)는 유태 사회에서 가장 존경 받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태인 아이들의 동화 속에 나오는 영웅은 용감한 군인도 왕자도 아니다. 유태인 동화 속의 영웅 그것은 바로 현인 賢人이다. 유태인에게 있어서는 성서를 배우는 일, 곧 신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태인 남자는 고대부터 12세기 바 미츠바 (成年式)가 되면 성서나 기도서를 읽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유태인은 모두 글을 읽을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유태인은 이 지구에서 맨 먼저 민주주의를 실현한 민족이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철저한 평등주의의 사회가 이룩된 것이다. 고대 유태인사회부터 이 평등주의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리만큼 성서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배움과 생활이 하나가 돼 버린 것이다. 유태인은 <성서> 외에도 좋은 책이 있는데 그것은 성전 聖典 인 <탈무드>가 바로 그 전형적인 것이다.
<탈무드>는 <위대한 연구>라는 뜻이다. 이것은 2백50만자로 이룩된 유태민족 5천 년에 이르는 생활규범의 방대한 집대성이며 수백 년 걸쳐서 편집된 것이다. <성서>를 바탕으로 연 수만 명의 라삐들의 토론이 여기에 수록된 탈무드는 유태인의 사고방식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유태인은 한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 관점과 각도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유태인은 한 인간의 생명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긴다. <탈무드>를 펼쳐보면 <성서>에 아담이 최초, 왜 한 사람뿐이었느냐에 대한 토론이 나온다. 답은 처음 아담이 단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것은 한 사람의 인간을 죽이는 것이 전 인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아담 이후에도 어느 한 사람에게 있어서나 그의 세계는 단지 하나밖에 없다. 그를 멸망시키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신학적인 논쟁을 소개하는 것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나 자신 옛날의 유태인의 끈질긴 인내력에 손을 들 정도의 대단한 논쟁이 많다. 그와 동시에 <탈무드>에는 간단한 지혜가 수없이 기록돼 있다. 그 예를 들면,
“인간은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두 개다. 어째서일까?” 하고 라비가 묻는다. 그러면 한 사람이 대답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갑절을 듣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 검은 부분으로 보는 것일까?”
“그것은 세계를 어두운 면으로 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밝은 면만 보 너무 낙관적으로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처인 것이다.”
경건한 유태인 남자는 오늘날에도 ‘키파’라고 하는 조그마한 둥근 모자를 쓴다. 시나고그에 들어와 기도할 때는 반드시 키파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외국인 관광객도 쓴다.
“키파를 어째서 쓰는가?” 라는 물음에 <탈무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에게 자기보다 더 높은 것이 있다는 것을 항상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헤브라이>라고 하는 낱말은 헤브라이어로 <또 한편에 서다>나 <상대하다>라는 뜻이다. 요컨대 유태인은 항상 또 한 가지의 관점을 찾는 것이다. 이와 같은 훈련에 의해 만들어진 지적 호기심에 차 있는 민족인 것이다. 이 지적인 호기심은 몇 천 년의 배움의 전통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3일 ‘탈무드’를 대하지 못한 자는 유태인이 아니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다.
이스라엘에는 많은 경건한 유태교도가 있다. 유태인은 유태교에 의해 매일 성서를 공부할 의무가 지위지며 미국에도 이와 같은 경건한 유태인이 많다. 단 내 자신에게 누가 당신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미 계율을 지키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유태인의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여 유태인의 전통을 잃은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배우는 것은 유태인의 민족적인 전통인 것이다. 배운다는 것, 즉 교육이야말로 유태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유태교가 유태인을 만드므로 유태인은 배우지 않으면 유태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박해 아래서 얻어진 자신과 지혜
유태인은 역사를 통해 볼 때 많은 박해를 받았고 여러 번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집이 불태워지고 조국에서도 추방당하는 운명이었지만 그래도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이 교육 덕분이었다. 죽음을 당하기 전에는 교육으로 얻은 지식은 결코 빼앗기지는 않는다.
유태인이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얼마나 박해당했는지는 나치스에 의한 대량 大量 학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나치스의 대량학살은 그리스도교의 세계에서 비로소 가능했다. 그 까닭은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는 오랜 세월 동안 질병으로부터 기근에 이르기까지 나쁜 일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유태인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유태인 6백만 명 한꺼번에 살해한 것은 처음 잇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토양 土壤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스와 유태인의 싸움은, 히틀러가 뮌헨의 비어 홀에서 나치스 당 黨을 만들고 나서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유태인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유태인에게 있어서 천주 天主, 예수, 마리아와 같이 많은 신성 神性을 띤 신 神들이 있는 그리스도교는 다신교이었을 따름이었다. 유태인에게 있어서의 신 神은 유일신 唯一神 인 것이다.
단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마녀 魔女 재판에 의해 14세기로부터 18세기 사이에 수백만 에 이르는 유럽인들을 죽였다. 하기야 우리들도 일상생활에서 뭣인가 나쁜 일이 생기면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많은 민족주의 나라에 있어서와 같이 <공산주의의 탓>이라거나 <정치가 나쁘다>라고 하여 퍽 마음 편하게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성향이 있다.
<유태인이 나쁘다>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전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고대 희랍인은 1년에 한 번 아테네의 시가 市街를 노예 한 사람을 끌고 다니며 모든 죄과 罪過를 뒤집어씌운 다음 죽여 없앴지만 고대 유태인은 1년에 한 번 축제일에 한 마리의 산양 山羊에 모든 죄를 덮어 씌우고 예루살렘에서 사해 死海 쪽을 향해 사막으로 내쫓았다. 이것이 <속죄의 산양>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전 인류의 죄를 혼자 뒤집어 쓰고 죽었다는 것도 같은 생각인 것이다.
고난은 인간을 단련시키고 갈아서 빛나게 한다고 한다. 유태인이 다른 민족에서는 볼 수 없는 상상을 절 絶한 박해에 견디고 끝내 유태인임을 감추지 않았던 것은 1천8백 년 이상이나 되는 긴 세월에의 시련에 견뎌 이겨냈다는 걸 말해 주고 있다. 재산 財産이나 생명 生命의 위험에 직면한 유태인이 살아남는 길은 크나큰 지혜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긴 역사를 돌아볼 때 유태인은 지혜가 뛰어난 자가 생존해 남을 수 있다는 법칙 法則에 의해 어리석은 자는 도태되고 유태인 가운데에서도 지혜가 뛰어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유태인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 (유태교가 절대라고 생각하는) 과 힘이 생겼다. 유태인들이 자기들의 문화 文化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가졌기 때문에 저력 底力이 있었던 것이다.
유태인을 다른 민족이 부를 때 <책의 민족>이라 부른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교육이 높은 민족이 유태민족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오늘날 유태인은 전 미국 인구의 3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데 대학의 진학률은 7.8퍼센트라는 것이다. 지루하지만 좀더 숫자를 살펴 본다면 미국의 정신분석의 精神分析醫 의 14.3 퍼센트, 변호사의 8퍼센트, 수학자 수학자의 7 퍼센트가 유태인인 것이다.
유태인은 모두가 자기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이 사명감은 <성서>에서 나온 것이다. 유태인은 <성서>의 창세기에서 신은 인간에게 미완성의 세계를 부여하고 모든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도록 하기 위해 보다 나은 세계를 이룩하도록 명 命 했노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유태인은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그 사명을 부여한 것이라고 믿어오고 있다.
이 민족의 전통은 신을 부정한 마르크스에게 있어서조차 살아 있었다. 사회과학, 철학, 자연과학과 같은 그 모든 영역에 있어서 발전을 시키려고 하는 욕망은 유태인의 피 한가운데 역력히 흐르고 잇는 것이다. 물론 전통 위에 박해 받아 온 유태인이 자기들을 못살게 군 그와 같은 사회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된다는 생각이 정열을 불태웠던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마르크스는 나쁜 관습에 따르는 유태인의 계율과 전통을 싫어했지만 그도 유태인이 상식 常食 하고 있던 피클스 [필주: 절인 오이, pickles] 만큼이나 유태인의 전통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태인은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점령지역에 있었던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의 수인이 되고서도 이 책의 첫 장에 실은 <애니 마아민>이라고 하는 노래를 지었다. <나는 내일을 믿고 있다>라고 하는 노래다. 이것은 곧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수인이 만들었고 죽어간 수인들의 입에 오른 노래였다. 멜로디도 아름답다. 그들은 밝은 내일과 보다 나은 세계가 반드시 올 것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독자성을 지킨 유태인 정신의 벽
유태인가 街를 둘러싼 벽은 돌과 흙이었으나 이 벽보다 더욱 견고한 벽은 유태인 만이 지닌 정신적인 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적의 敵意에 찬 주위의 그리스도교도가 시가 市街의 벽을 부수려고 한다면 언제고 부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러한 일은 너무나 빈번히 일어났었다. 유태인이 오늘날까지 유태인으로서 독자성을 잃지 않았던 것은 돌과 흙으로 쌓은 벽이 견고해서가 아니라 유태인 마음속에 새워진 정신적인 벽이 얼마나 견고했었나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에 있어서 봉건제도로부터 인간해방을 목표로 한 시대가 오고 유태인은 겨우 유태인가로부터 해방되어 돌과 흙으로 쌓은 벽이 헐어져 나간 오늘날까지도 유태인의 정신적인 벽만은 계속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매주 금요일 해질녘부터 다음날인 토요일의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는 유태인의 안식일 安息日의 계율을 이미 많은 유태인이 지키지 않는 것을 본다. 유태인으로서 어리석은 일이다. 안식일에는 어떤 일이나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이 날에는 쇼핑이나 요리마저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부는 금요일의 낮에 모든 음식을 장만하여 해지기 전에 붙인 불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 점화 點火 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부터 불도 켠 채로 그대로 두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담배도 피워서는 안 된다.
유태인은 금요일 밤에는 흔히들 유태인이 아닌 친한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그런데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유태인이 기도문을 노래하며 식사를 하는 것이 아무리 신기하다 하더라도 가지 않는 편이 좋다. 불이 없는 곳에서는 연기가 나질 않으니 말이다.
또한 유태인은 안식일에는 가족과 함께 지내며 함께 신을 공경하고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준다. 이 때도 글씨를 써서는 안 된다.
안식일에는 이밖에 차 같은 것을 타서도 안 된다. 물론 엘리베이터도 마찬가지다.
경건한 유태인교도라면 이와 같이 안식일의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평소 식사 때 지켜야 하는 계율이 있다. 새우, 낙지, 패류 貝類, 돼지고기는 금식으로 되어 있으며 라비 rabbi 가 계율에 따라 도살 屠殺 하여 고기를 처리하지 않은 소, 양, 닭고기도 금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음식물이 닿은 접시에 다른 음식을 담아 먹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유태인은 유태인 이외의 곳에서는 식사를 할 수 없게 된다.
유태인은 얼굴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되므로 수염을 깎을 수도 없다. (단 전기면도는 허용된다.)
식사의 계율은 아마도 뜨거운 사막에서 식중독 食中毒 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지혜에서 나온 것 같으며 얼굴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스스로 얼굴이나 몸에 상처를 내는 아프리카 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인류학자가 말하는 신체변용 身體變容이 성서시대에 아프리카에 널리 퍼져 있는 것에 대한 경고라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엄격한 계율을 유태인이 디아스포라의 시대를 통해 지켜왔다고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계율이 유태인을 계속 유태인으로 남아 있도록 지켜져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군인은 군대적인 동작을 하는 것으로 해서 스스로를 납득시켜 군인답게 되는 것이며 자그마한 집단은 다른 집단과 다르다는 것을 몸짓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자기의 집단이 다른 집단과는 다르다는 것을 서로가 확인사여 단결을 굳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율을 버리더라도 유태인은 다른 민족과 달라 좀 독특하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동안의 습성과 발상이 하루 아침에 쉽사리 지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태인은 세계의인간을 유태인과 타민족과로 나누어 생각한다. 아무리 해도 유태인 세계 대 다른 세계로 되어지는 꼴이 된다.
광신 狂信을 배척, 적도 적도를 존중하는 유태인
유태인이 강건한 정신의 벽을 허물지 않았다고 한다면 유태인은 하느님에 의해 지시된 정의 正義를 지키고, 보다 훌륭한 세계를 만드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다고 하는 광신적인 사람들의 집단인 것처럼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도대체 그렇게 박해를 받고도 생존해 나온 1천8백 년 이상이 어떻게 광신만을 가지고 정신적으로 버틸 수가 있었을까? 인간은 살기 위해서는 즐거워하고 슬퍼할 필요가 있다. 유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핍박 받은 민족이었던 까닭에 그만큼 희로애락 喜怒哀樂을 풍부히 지니고 왔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언제나 긴장만 하고 있다면 쉽게 좌절하고 말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원래 유태인은 디아스포라[필주: Diaspora] 의 생활로 들어서기 전부터 생활에 있어서의 균형이라는 것을 중요시해 왔다. 유태인은 광신자는 없다. 예루살렘의 한탄의 벽 앞에서 몸을 가늘게 흔들며 기도에 열심인 유태교 신자들의 모습이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의 눈에는 광신적으로 비칠지 모르나 그렇다고 그들의 광신자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유태교 자체가 광신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탄의 벽은 기원 70년에 로마 군에 의해 예루살렘의 신전 신전이 파괴되었을 때 오직 하나 남은 서쪽의 벽 壁일 뿐이며 디아스포라 의 생활 중 유태인은 조석 朝夕의 기도를 <내년이야말로 이스라엘에서>라는 말로 끝냈기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이 상징인 한탄의 벽 앞에 선다는 것은 격한 감동을 유발 받게 되는 것이다. 한탄의 벽은 언젠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되돌아갈 날이 올 조국의 상징이었다. 유태인에게는 고대로부터 은자 隱者가 없었다. 하느님을 위해 쾌락은 물론 가족이나 생활을 버리고 산에 파묻히는 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일 – 사업이나 연구라도 좋다 – 을 위해 가정생활과 인생의 즐거움을 모두 희생해 버리는 유태인은 없다.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마는 것을 유태인은 미덕 美德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태교의 라비는 학자,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써, 모든 사람의 의논상대를 겸하고 있지만 대처 帶妻[필주: 아내가 있음] 하고 있으며 보통의 인간생활을 하고 있다. 가톨릭의 신부라든가 이승 尼僧과 같이 생애, 이성 異性을 알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유태인이 볼 때 비인간적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성 性을 부여한 신 神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 된다. 유태인은 어떤 사람이건 독신으로 있는 것은 신의 뜻에 위배된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 생각 또한 옳은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교도와 비교하는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독자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터이므로 서로 대비해 보는 것으로 해서 유태인을 쉽게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태인은 성 性을 그리스도 신자와 같이 불결한 것으로 멸시하지 않는다. 신이 인간에게 성의 쾌락을 부여한 이상 그것이 종교에 따라 나쁘고 좋고 할 까닭이 없다. 이성을 보고 마음속으로 은밀히 욕정을 일으키면 육체가 간음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은 유태인에게는 전연 무관한 일이 된다. 반대로 유태교는 부부라도 쾌락을 동반하지 않은 성교섭 性交涉 을 갖는 것을 금하고 있다.
유태인의 금전에 대한 견해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금전을 성과 마찬가지로 죄악시하고 불결시하여 백 보를 양보한다 하더라도 필요악 必要惡으로 밖에는 생각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태인은 이와 같은 터부에 의해 얽매어 있지는 않다. 여기에서도 돈은 성과 마찬가지로 사용여하에 따라 좋게도 되고 나쁘게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유태인은 금전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으로 고대로부터 생각해 왔다. 유태인 세계에서는 가난이 불명예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신자처럼 깨끗한 것이라고 드러내어 코에 걸고 자랑할 만한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유태인은 식욕, 음주, 성 性, 금전에 한하지 않고 모든 것에 대해 과도 過度한 것을 싫어한다. 유태인은 적도 適度라고 하는 것을 전통적으로 몸에 익혀왔던 것이다.
돈에 대해 말한다면, 유태인은 돈이 모인 만큼 자선을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유태인 사회는 무엇보다도 자선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유태인은 자녀가 어릴 적부터 자선용 저금통을 줘서 가르친다.
유태인과 자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 본다면 영어로 (다를 유럽어로도) 자선은 ‘채리티’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베푼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자선과 정의는 같은 <째다카>라고 하는 말이 된다. <성서>에는 노아는 <째다카 (정의의 사람)>였다는 것이 되풀이해서 나온다.
꿈 많은 낙관주의자
유태인은 지식을 소중히 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지혜를 존중한다. 유태인에게 있어서 지혜가 없는 지식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지식편중 지식편중의 흠이 있는 것 같다. 과학이 가장 발달된 나라였던 독일에서는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V1, V2와 같은 로켓에서 제트기까지 만들어 냈다. 그런데도 나치스의 광신자들을 총통관저의 주인공으로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도대체 인간을 잡아먹는 아프리카 식인종과 인간을 죽여서 비누를 만들었던 독일인과 어느 편이 문명적 文明的이었을까?
유태인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해학을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유태인만큼 유머가 많은 민족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는 박해를 견뎌 살아가지니 웃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웃음은 피난처이며 상대방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웃음의 대상으로 삼으므로 써 상대방에 대해 순간적일망정 우월한 지위 地位를 되찾고 또한 자기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면을 본다면 짧은 이야깃거리로써의 유머로부터 생기는 웃음은 극기 지적인 것이다. 유머의 웃음은 사물을 한 발자국 비켜서서 생각하지도 않은 다른 각도로부터 바라보는 것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히브리>의 뜻이 <또 한 편에 서다>라는 뜻임을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능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웃음이 나올 것이다. 그것은 위트이며 기지인 것이다.
유태인은 가정에서나 회합에 모이게 되면 곧잘 유머를 주고 받는다. 이것은 하나의 머리의 순환체조이다.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은 두 사람 다 유머의 명수였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도 뛰어난 유머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진리에 대한 모색의 방편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유태인이 웃음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유태인이 낙관주의자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마크 샤갈의 그림은 유태인가에 살고 있는 유태인의 인생관을 전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하늘을 떠도는 연인 戀人들이라든가 가축 家畜, 달콤한 꿈, 꽃다발과 같은 것은 유태인가의 세계이다. 더구나 유태인은 살고 있는 땅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샤갈의 그림의 세계는 동시에 슬라브인의 농민의 로맨티시즘을 다분히 나타내주고 있다. 유태인은 꿈 많고 낙관적이다.
유태인을 오해하는 근원과 진상
유태인만큼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뭐라 해도 그리스도신자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불어 유태인에 대한 편견을 널리 펼쳤기 때문이리라. 그리스도 신자는 강자였고, 그 강자의 음성은 멀리 크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20세기에 들어서자 독일에서 유태인은 가슴에 유태인을 나타내는 기장 記章을 달고 다녀야 했다. 이것이 하등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로마 교황 敎皇은 1215년에 제4회 라테란 Lateran 회의에서 유럽에 사는 전 유태인에게 황색 黃色의 모자를 쓰고 다닐 것과 배지를 달고 다닐 것을 명 命했었던 일도 있다.
나치스는 유태인이 쓴 책은 모두 불살랐다. 이것에도 많은 전례가 있다. 1239년에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모든 <탈무드>를 몰수하여 불태울 것을 명했다.
독자는 파리라든가 로마에 가게 되거든 단지 그곳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것이 아니라 그 광장에서 매일 <탈무드>가 연기를 뿜으며 불태워졌었다는 사실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유태인은 돈에 관해서도 편견을 받고 있다. 돈에 대해서 <더럽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유태인은 빈틈없는 장사치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특히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책에 의해 널리 퍼졌다.
우선 객관적인 사실부터 이야기해 가겠다. 유태인은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기 그 이전에 영국에서 추방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을 쓸 때에는 영국에 단 한 사람의 유태인도 있었을 수가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유태인에 대한 편견을 무턱대고 믿고 있었다고 하겠다. 도 금전에 대해서 더럽다고 하지만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금전을 멸시하고 있었을 때 대체 對替 라는 은행제도를 만들어 냈던 것은 유태인이었다는 것을 독자들도 알아야 할 것이다. 유태인은 그리스도교가 금리 金利를 죄악시하고 있었을 때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오늘날 모든 은행이 금전에 더러운 사람들에 의해 경영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편견인 것이다.
기원 70년에 이스라엘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유럽에는 유태인의 농민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중세 유럽에서는 유태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법률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태인은 제조업자의 조합인 길드에 가입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조업에도 종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태인은 오직 상인이 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런데 유태인은 그리스도 신자의 대부분이 글도 읽지 못하고 겨우 자기의 손가락으로 셈을 할 때 이미 모든 유태인은 높은 교육을 쌓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에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왕후들은 다투어 유태인을 상점의 관리인으로 고용했었다. 그것은 언제나 교육을 받은 유태인 상인 쪽이 우수했었으므로 그리스도 신자의 상인은 거의가 유태인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리스도 신자는 영주 영주를 부추겨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장사에서 진 이유를, 상대방이 정직한 데다가 10 이상을 헤아릴 수 잇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엉뚱하게 유태인이 교활해서 그랬다고 둘러대는 것이 보통이었다.
만약에 유태인이 금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일을 했다고 한다면 왜 그리스도교도로 동화하지 않았을까? 유태인의 신 따위는 1센트도 되지 않는 것이다. 1096년에 제1차의 십자군이 팔레스티나로 향했을 때 유럽의 각지를 통과하는 대군은 가는 곳마다 유태인에게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할 것을 강요했다. 그때 몇 만 명이라는 유태인이 집단자살을 했었다. 물론 이때에 십자군에게 습격 당하지 않은 유태인가도 있었다. 유럽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개종한 유태인은 박해를 받지 않아도 됐었다.
유태인은 모두가 돈이 많다고들 말한다. 이것 역시 잘못된 이야기이다. 유태인은 유럽에서는 거의가 유태인가에 처박혀져 살고 있어 빈민이었다. 유태인가는 빈민가였다. 그 후 유태인이 유태인가로부터 해방되고 똑같이 시민권이 부여되고부터는 유태인은 근면한데다가 교육수준이 높았으므로 사회의 상부로 옮아가는 데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리지를 않았다.
미국에 있는 유태인만해도 유태인 이민은 거의 모두가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중산계급 中産階級 이상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대도시의 빈민가에서 유태인을 찾는 것은 나비를 찾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 모두가 부자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태인은 유태인종에 속해 있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말이다. 인종학상 人種學上 으로 말해서 유태인이라고 하는 인종 人種은 존재하고 있지 않다. 유태교를 믿는 자가 바로 유태인이 되는 것이다. 유태교를 인도인, 멕시코인, 인디언인, 일본인이 믿는다면 지금부터라도 유태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유태인은 세계에 흩어져 있다. 동유럽으로 흩어져 간 유태인은 독일어가 섞인 이디쉬Yiddish 어를 말한다 (이디쉬 Yiddish문학도 있다. 카프카도 이디쉬Yiddish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이디쉬 Yiddish 어 에도 독일, 폴란드, 루마니아, 에스파니아, 우크라이나에서는 작기 다른 방언이 있다. 이와 같이 세계각국에서 유태인은 그 나라 피가 섞이고, 풍토 문화, 습관에 의해 그 나라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 앞서 샤갈의 그림을 예로 들었지만 러시아에 살고 잇는 유태인은 다분히 슬라브 농민과 같이 사람이 좋고 로맨틱하다. 이탈리아의 유태인은 역시 이탈리아적이라고 하겠다. 유태요리조차 지역에 따라 조리법이 다르며 그 나라의 사람들의 식성의 영향을 다분히 미치게 마련이었다.
온 세계에서 유태인이 이민해 온 이스라엘을 보면 된다. 예멘에서 온 유태인과 독일에서 온 유태인이 함께 서 있으면 머리, 눈을 색깔, 골격까지가 달라서 같은 유태인 같지가 않다. 다만 이들이 유태인이라고 하는 것은 유태교라고 하는 종교를 믿기 때문에 유태인이라고 할 따름이다.
유태인을 구별하려면 코를 보면 된다. 매부리코를 하고 있다, 고들 흔히 말한다. 이것도 틀린 말이다. 곧잘 매부리코를 하고 잇는 유태인이 만화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릇된 표현이다. 매부리코를 하고 있는 것은 서부 러시아의 유태인과 근동에 있는 유태인 뿐이다. 그러니까 육체적 특징으로 유태인을 구별하려고 해도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유태인은 아시아인이므로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잇는 사람이 많다. 물론 금발도 있고 빨간 머리카락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외견상으로 어떻게 유태인을 구별할 수 잇는가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그 방법이란 바로 유태인은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눈매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의 박해 때문이다. 오늘날 생존하고 있는 유태인 가운데 나치스에게 학살된 유족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나도 많은 친척을 잃고 있다. 이 세상의 유태인 가운데 세 사람에 한 사람은 나치스에게 희생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국가 國歌 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 슬픈 국가의 선율을 듣고 눈물이 나지 않을 사람도 드물 것이다. 거기다 유태인의 역사를 알고 나서 듣는다면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마음이 저려올 것이다.
유태인은 배타적이라고 하는 말에도 오해가 있다. 유태인가에서 폐쇄집단을 만들어 그 안에서 무엇인가 은밀한 일을 하고 있어 외국인에게는 들여다 보지 못하게 한다고 하는 식의 이미지는 괘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유태인은 결코 그와 같은 일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랫동안 유태인을 유태인가에 처박아 놓고 밖에서 안으로 찾아들 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유태인은 독특한 계율이라든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다. 독특하기 때문에 폐쇄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니 않은가? 게다가 유태교는 종교인 동시에 유태인 생활의 전부인 것이다.
유태인의 종교의식이나 생활을 보고 싶으면 외국에 나가는 길에 호텔 가까이 잇는 시나고그 synagogue 에 가보면 된다. 기꺼이 보여 줄 것이다. (도쿄에도 하나 있다). 유태인 가운데에는 당신을 가정에 초대해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유태인은 이름만 보면 바로 알 수가 있다고 비법 아는 체하는 사림도 있다. 그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유럽의 유태인이 어떻게 해서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알고 잇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제2장에 잠깐 언급해 놓았다). 그렇더라도 이름난 봐도 당장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겠다. 유태인이 세계를 정복할 음모를 꾀하고 있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20세기 초에 유포된 <시온의 의정서 의정서>를 주된 근거로 하고 있다. 이 <시온의 의정서>에 의하면 1897년에 스위스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 시오니스트 회의에서 유태인이 세계를 정복하려고 하는 비밀회의가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이전에도 세계의 유태인 대표가 프라하의 유태인 묘지에서 1백 년 간에 1회 정기적으로 세계지배를 꾀하는 회의를 가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것은 반유태인주의를 정책으로 하고 잇는 제정 러시아 정부의 비밀경찰에 의해 날조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유태인은 세계를 지배하려고도, 도는 세계를 유태화하려고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첫째 유태교에는 선교사가 없다. 유태인은 오랫동안, 하느님에게 선택된 민족으로써 자기 민족만이 자기들의 신의 명령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믿을 뿐이며 다른 민족에게 유태교를 강요하거나 팔아 넘기려고는 하지 않았다. 만약 유태인이 세계 정복을 노리고 있었더라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세계 정복계획도 있었을는지 모른다.
유태인 격언은 유태인의 지혜를 결정 結晶 시킨 분말과 같은 것이다. 먼저 맛을 보고 난 뒤에 만약 그 맛이 마음에 든다면 일상생활에 놓고 직장이나 가정에서 매일 마음껏 뿌려 사용해 주길 바란다. 유태인의 힘을 나누어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2 돈 金錢 의 가치 價値
√ 돈이 많이 든 지갑이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텅 빈 지갑은 좋지 않다
“빈 것은 빈 것인데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빈 지갑이다.”
“물건이 가득찬 자루는 무겁다. 그러나 빈 자루 쪽이 더 무겁다.” 라는 속담도 있다.
유태인 사회에서는 돈에 대한 속담이라든가 잠언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도 너무나 많다. 돈은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돈, 돈, 돈, 우리들은 돈 없이는 도저히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돈, 금, 돈, “<성서>는 빛을 던지고 돈은 온기 溫氣를 던진다.”
이런 것은 어떨까?
“이 세상에는 세 가지의 중대한 것이 있다. 돈, 돈, 돈”
돈은 중요하다
“돈은 아무리 더러운 때도 깨끗이 벗겨내는 비누이다.”
돈의 힘은 한정이 없다.
“금화가 소리를 내면 욕이 가라앉는다.”
돈은 지갑이 무거운 것만큼 가볍다.
“무거운 지갑을 무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탈무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몸은 마음에 의존하고 마음은 지갑에 의존하고 있다.”
유태인은 신이 날 때 “아이, 이, 이”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힘들 때는 “오이, 오이, 오이”라고 한다.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언제나 아이, 이, 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언제까지나 오이, 오이, 오이이다.
말하면 잔소리겠지만, 돈이란 정말 좋은 것이다. 도학자 道學者 연하여 돈이 더럽다거나 인간을 타락시킨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두자. 돈은 인간이 필요해서 만든 것이다. 그 돈에 의해 타락할 만큼 약한 인간이어서는 될 법이나 한 말인가?
√ 돈이 저주 받아야 할 이유도 없고 돈이 악 惡 또한 아니다. 돈은 인간을 축복하는 것이다
부호 富豪와 현인 賢人과 어느 쪽이 더 위대할까? 라고 어느 라비의 제자들이 생각해 보았지만 그 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한 제자가 라비 에게 물어 보았다.
“물론 현인이지.”
라비는 한 마디로 대답했다.
“그런데 라비 님, 그렇다면 왜 큰 부잣집에는 학자나 현인들이 많이 드나드는데 현인의 집에는 부호들이 드나들지를 않습니까?”
그러자 라비가 제자에게 말했다.
“나의 제자들이여. 현인은 똑똑하기 때문에 부가 필요한 것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부자는 단지 돈만 가지고 있을 뿐 현인으로부터 지혜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 돈은 무자비한 군주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유익한 종이기도 하다
다른 민족이 나라를 세우고 역사를 만들고 있을 동안 유태인은 그늘에서 줄곧 박해를 받고 있어야만 했다. 유태인은 유태인가에 처박혀져 법률에 의해 토지를 소유할 수도 또는 제조업에 종사할 수도 없게 되었다. 또한 살고 있는 유태인가에서 언제 추방당할는지도 알 수 없는 운명이었다.
자기의 나라를 갖고 있는 민족이라면 자기 나라에 있는 동안 나무, 또는 내 川 를 자기와 가까운 것으로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유태인에게는 그렇게는 생각되질 않는다. 그것은 길고도 슬픈 역사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유태인이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에 기댈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오직 돈이었다.
그런데다가 원래 유태인은 그리스도 신자와 같이 돈을 멸시하거나 죄악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돈은 사용 방법에 따라서는 좋은 것도 되고 나쁜 것도 되는 것이다. 돈 그 자체에는 책임이 있을 수 없다.
‘돈은 기회를 제공한다’ 는 것으로 유태인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돈은 인간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유태인은 돈을 좋다거나 도는 나쁘다고 말하질 않는다. 돈이 있으면 인생에 이어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이름에 있어서도 그렇다. 유럽의 유태인이 이름 – 성 성을 갖게 된 것은 약 1백 50년 전의 일이다. 그때까지는 이스라엘 수상인 다빗 벤 그리온 (그리온 아들의 다빗)과 같이 누구 자식의 어느 누구라고 하는 식의 이름이라든가 칸타 (歌手), 슈피겔 (거울집), 왈샤프스키, 클라인 (꼬마) 등과 같이 직업, 거주지, 외견상의 특징 등이 성명 대신 쓰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가 되자 오스트리아의 요셉 2세,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 프러시아 정부에 연이어 유태인 등록부를 만들기 위해 유태인에게 성을 가질 것을 강요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좋은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갖다 붙일 수는 없었다. 각국 정부는 유태인으로부터 수탈하기 위해 이름을 팔았다. 좋은 이름은 비싼값에 그리고 좋지 않은 이름은 헐값으로.
비싼 이름에는 꽃이나 귀금속 명이 붙었다. 로젠타알(장미), 아이젠버그(철 鐵) 등등. 동물 이름에서 딴 울프슨(늑대) 등은 값이 쌌다. 힌터게시츠(볼기) – 도 주어졌지만 오늘날에는 개명 改名하여 이러한 이름은 불 수 없게 되었다.
단, 모든 나라에서 이름까지 돈으로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돈은 확실히 보다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확실하다.
√ 가지고 있는 물건을 필요로 한 사람에게 판매하는 것은 상술이 아니다. 자기가 갖지 않은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판매하는 것이 상술이다
엽총을 갖고 싶어하는 에스키모에게 자기가 구입해온 엽총을 파는 것은 참다운 비즈니스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너무 쉬운 일이다.
참다운 비즈니스란 자기가 제빙기 따위는 전연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제빙기가 전혀 필요 없는 에스키모에게 제빙기 여러 대를 팔아 넘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입한 사람이 만족하게 생각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장사의 길은 준엄한 것이다.
유태인은 중세 유럽에서 오랫동안 압박만 받았지 정업 정업 에 취업하기 못한 관계로 유태인가의 유태인 대부분이 브로커 가 되었다.
그들은 비즈니스의 준엄성에 의해 단련돼 왔다. 유태인가에는 없는 것을 권해 팔고 난 다음 다급하게 그 물건을 찾아나서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많다. 많은 유능한 비즈니스맨은 이와 같이 하여 생겨난 것이다.
√ 돈을 벌기는 쉽다. 그러나 사용하는 방법이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돈을 어떻게 해서 벌어들이는가를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돈을 잘 쓰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인간이 돈의 주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돈에는 이상한 마력 魔力이 있다. 이 세상에 대개의 모든 물건은 사용함으로써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돈은 자기가 직접 만들어 보지 않고는 그 진가를 알 수가 없다.
비슷한 속담이 있다.
“돈을 갖고 있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 사용법을 알고 있으면 더욱더 좋다.”
그러나 누구라도 돈이 전부가 아님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인간은 돈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일까?
“돈으론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단 좋은 취미 이외는” 이라든가 “돈이란 현인에게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예쁜 옷을 입혀 주는 역할 정도밖에 소용되지 않는다”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돈을 악 惡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유태인은 생각한다. 그것은 사람이 돈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돈은 선 善도, 악 惡도, 그리고 만능 萬能도 아니다. 선악의 판단은 돈을 사용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유태인은, 이 책 속에서 여러 번 되풀이하고 있지만 중용 中庸일 것, 즉 생활에서 균형이 잡혀 있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 균형 가운데에서도 돈에 관한 균형을 잡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돈을 벌기란 쉬운 일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정말로 어려운 말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돈을 <다리 足>라고 한다.
유태인의 속담에도 비슷한 발상이 있다.
“은화는 둥글다. 이쪽으로 굴러오는가 싶으면 곧 또 저쪽으로 굴러가 버리고 만다”
우리들은 매일 돈을 쫓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그 밖에 쫓아야 할 것이 많은 것이다.
√ 돈은 모든 것을 좋게만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돈이 모든 것을 부패시키지도 않는다
돈은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돈이 인생의 모든 면을 밝게 하거나 빛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잘못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돈은 수단의 하나이지 목적은 아니다. 인간답다고 하는 것은 돈에 지배되지 않고 돈을 지배하는 일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가장 힘이 세다 <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신은 인간이 지상을 지배하고 인간이 지상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하여 세계를 인간에게 부여해 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돈은 인간보다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유감스럽다.
또 한 편에서는 돈을 필요 이상으로 천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돈은 사용방법만 좋으면 정말 좋은 것이고 사용방법이 나쁘면 돈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다만 사용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돈은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돈이란 더러운 것이니 관심이 없노라고 결백을 내세우고 소홀히 하는 사람이 있다. (단 유태인은 그런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도 따지고 보면 돈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옳고 돈이 많은 사람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미드럿슈>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두 사람의 사나이가 당신 앞에 나타나서 각기 다른 말을 했다고 가정하자. 그 중 한 사람은 부자이고 또 하나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때, 당신은 어느 사람을 믿을 것인가? 답은 부자라고 해서 거짓말을 한다고만 은 할 수 없듯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옳다고 할 수 없다. 도한 이 반대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 돌과 같은 마음은 황금 黃金 의 끌로써만 열 수 있다
이것은 돈의 위력에 관한 속담이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사회에서 돈이 가지고 있는 힘은 실로 크다 하겠다.
돈은 모든 문을 연다고 생각한다.
집안에 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어느 편이 좋을까?
“집안에 돈이 있으면, 집안에는 평화가 있다.”
확실히 돈이 있는 편이 집안에 평화가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돈이 없는 집안에는 불평이나 다툼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1565년에 출판된 <유태인율령집>은 “인간은 본성으로 부를 축적할 것을 희구한다” 라고 적혀 있지만 이것은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 國富論>을 쓰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유태인은 오랫동안 돈에 대해 생각해 왔다. 그것은 돈은 인생 최대의 문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라삐나 거리에 나서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설교하느니보다 10달러를 건네주는 편이 훨씬 효과가 있다. 돈을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의 한 가지 차이는 사람은 돈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 부자를 칭찬하는 사람은 부자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가진 돈을 칭찬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높은 지위에 올라 있는 사람을 그렇지 못한 사람이 공경할 때는 그 사람을 공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권력이나 지위에 대해 경의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나이 두 사람이 어느 날 라비를 찾아왔다. 한 사람은 그 고울에서 제일가는 갑부이고 또 한 사람은 가난한 사나이였다.
두 사람은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갑부가 조금 일찍 왔으므로 먼저 라비의 방으로 안내됐다. 그 후 한 시간쯤 지나자 갑부는 라비의 방에서 나왔다.
가난한 사나이가 다음 차례여서 라비 방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가난한 사나이와의 면담은 단 5분으로 끝났다. 그러자 가난한 사나이가 라비에게 항의했다.
“라비님? 갑부와의 면담은 당신께서 한 시간 동안이나 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 5분입니다. 그게 공평한 것입니까?”
사나이의 항의를 받은 라비는 바로 대답했다.
“나의 형제여! 당신의 경우엔 가난한 것을 당장 알아차렸지만, 그 갑부는 자기의 마음이 가난한 것을 깨닫기까지 한 시간이나 걸렸단 말이오.”
√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아들이 없다. 오직 상속인만 있을 뿐이다
돈은 옛날부터 금이나 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원래 차디찬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는 여름에 동전에 손을 대보라, 동전은 냉기가 돌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줄곧 손에 꼭 쥐고 있어 동전에 사람의 따뜻함을 전한다.
부자는 금고나 은행에 돈을 잔뜩 저장해 둔다. 그 돈은 사람들의 손에 좀처럼 닿을 기회가 없으므로 돈 자체의 차가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돈은 그 주인에 따라 온기 溫氣가 돌거나 냉기 冷氣가 감돌게 된다. 돈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 것이다.
부자는 돈에 묻혀 있으므로 금, 은이 지니는 냉기가 자기 자신이나 가족에게 옮겨지는 경우가 많다. 금, 은에 의하여 피 血과 마음이 차가워지게 된다.
그런 관계로 돈이 많은 사람은 자식이 있어도 그 자식은 자식이 아니라, 오직 상속인일 따름이라고 한다.
√ 재산이 많은 사람은 거기에 따른 근심도 많지만 재산이 없는 사람은 근심이 더욱 많다
그리스도 신자는 돈이나 물질을 천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것을 경원한다.
가톨릭 신부를 보면 가난을 상징하는 검은 옷과 흰 칼라를 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가톨릭에서도 세계의 가치관의 변화에 맞추어 결혼하는 승려가 나타나거나 흰 칼라와 검은 복장을 착용하지 않고 보통 신사복을 입은 신부가 늘어났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에서는 돈이라든가 물건을 많이 갖는 것을 죄악시하고 있는데 때로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지상에 있어서의 사치를 즐기는 경향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리스도교는 돈이라든가 부를 멸시하는 것일까? 청빈 淸貧 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는 미덕 美德으로 되어 있다. 얼마만큼, 돈이라든가 섹스라든가 물질에 의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가가 그리스도교의 자랑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나 쾌락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부나 쾌락이 너무 가까이 있게 되면 자기들이 지배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러나 유태인은 항시 과도 過度한 것을 경고하는 것이 율법에 의해 자기에게 규율을 가하고 있으므로 부나 쾌락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가 율법에 의해 규율 바르게 확립하고 있으므로 부나 쾌락을 스스로 지배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탈무드>는 “바다의 가장자리에 서는 자는 다리를 꼭 붙이고 서 있으면 파도에 휩쓸릴 리가 없다. 그러나 다리가 불안하면 파도에 휩쓸리게 된다” 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돈과 섹스에 대한 멸시로 말미암아 충분한 자산을 만들지 않거나 인생에 있어서의 즐거움을 놓치고 만 사람이 그 얼마나 될까? 이것도 인간이 자기에게 자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 가난이 수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명예 名譽로는 착각하지 말라
유태인은 그리스도교에서나 또한 동양에서와 같이, 청빈 淸貧이란 관념은 없다. 유태인은 돈을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돈은 기회를 제공한다’ 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이 있으므로 해서 많은 것을 실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가난은 시 詩 속에서는 아름다울지 모르나 집안에서는 추한 것이다. 설교 說敎에 사용되면 – 유태인은 가난을 찬양하는 설교는 하지 않는다 – 깨끗한 것으로 들리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비참한 것이다.
돈을 칭송해서는 안 되지만 멸시해서도 안 된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교가 돈을 더러운 것으로 또는 죄악시하고 잇는 것을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은 더럽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이다. 돈은 인간생활의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돈은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도구이므로 될 수 있으면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훨씬 낫다. 그 돈이라는 도루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소유한 사람의 지성 知性과 지혜에 의한다.
√ 돈은 좋은 사람에겐 좋은 결과를 주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결과를 준다
유태인은 그리스도교와 같이 육체 肉體에다 특별한 높은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육체는 육욕 肉慾의 원천 源泉이며 따라서 육체는 죄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유태인은 육체를 정신을 담아두는 그릇이니 소중히 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만 육체 그 자체가 죄를 범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돈에 대한 유태인의 행동도 같은 것이다. 돈은 그 자체가 좋은 짓도 나쁜 짓도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교도는 줄곧 돈을 악 惡이라고 생각하여 죄악시 해왔다.
이와 같은 견해는 유태인에게는 그들이 자신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육체나 돈이 인간보다도 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육체나 돈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써 지나치게 이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 돈이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옷이 인간에게 베푸는 것과 같을 뿐이다
돈은 과연 만능일까? 돈이 만능이라면 의복도 만능이다.
돈이 제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제 아무리 값비싼 아름다운 의복으로 자기를 감싸더라도 의복이 인간의 마음까지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 自身 뿐인 것이다.
물질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 돈을 숭배하는 자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은 물질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숭배하고 있는 것에 되도록 가까이 가려고 마음먹고 동시에 거기에 동화해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물질을 숭배하는 자는 자기도 물질이 돼버리고 만다. 인간은 돈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었기 때문에 돈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양복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의복이 인간을 필요로 한다면 인간은 옷걸이가 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 빚을 지는 것은 가려운 데를 긁는 것과 같다
피부병에 걸리거나 종기가 나게 되면 그곳이 가렵다. 가려운 곳을 긁기만 한다고 낫는 것은 아니다.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은 그 때문이거나 때에 따라서는 질환을 악화시킨다. 긁게 되면 그 당장에는 쾌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때만 얼버무릴 수가 있을 뿐이다.
빚을 얻는다는 것은 이와 비슷하다고 하여, 빚을 얻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역시 근본적으로 뿌리부터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가난한 사람에게서 돈을 빌리는 것은 추한 여자와 키스하는 것과 같다
유태인은 오랫동안 가난했으므로 돈을 서로 융통해 썼다. 그 때문에 돈을 빌고 빌리고 하는 데 대한 속담이 많다.
이 속담에 대해서 새삼스런 설명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돈을 차용 借用하는 데 관한 유태의 속담에는 돈을 꾸거나 꿔주는 데 대한 가르침보다는 돈을 꾸는 그 자체 自體가 좋은 일이 못되므로 이의 경고가 많다. 유태인은 중세의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돈을 무조건 더러운 것으로 규정해서 멸시하거나 돈을 꿔주고 받은 이자를 나쁘다고 생각한 일은 없었다.
나는 이 책에서 유태인과 그리스도교도의 금전과 섹스에 대한 문제를 서로 비교했지만 돈이나 섹스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꼭 소용이 되는 것이다. 유태인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쁜 것일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유태인에게 돈놀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그리스도교회가 그리스도교도에게는 이자를 받고 돈을 꿔주는 것을 금 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을 빌거나 빌려주는 일이 결코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돈을 빌거나 빌려주는 것만큼 불유쾌한 일은 없다.
“친구를 적 적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빌려주는 일이다”
이 속담을 우리는 명심해야겠다.
√ 매춘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녀는 비가 오고 있다고 말한다
매춘부 賣春婦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성서>를 읽어 보더라도 매춘부는 빈번이 나오게 되며 또한 중세의 유태인가에도 매춘부는 많았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유태인도 노력한 보람이 나타나 모두가 풍족하게 살고 있으므로 유태인 매춘부를 발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매춘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녀가 “어머, 비가 오네요”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매춘부는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모도 감수한다는 뜻이다.
꼭 매춘부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돈이라면 갖은 나쁜 짓도 서슴지 않고 하는 인간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우화적 寓話的 으로 하는 말이다. 1달러를 주고 얼굴에 침을 뱉고는,
“비가 오는데” 한다면,
“글쎄요, 비가 오는군요” 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만약 그 돈이 1달러가 아니고 1천 달러나, 혹은 1만 달러라면 당신은 어쩌겠는가?
√ 돈을 꿔줄 때는 증인 증인을 세워라. 그러나 자선을 베풀 때는 다른 사람 모르게 하라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라비 앗시는 언젠가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리게 되었다. 그 아는 사람은 차용증을 쓰고 증인을 세워 서명 서명 해 달라고 요구했다. 라비 앗시는 놀라서 말했다.
“당신은 나를 믿지 못합니까? 나는 율법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그 권위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라비가 말하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걱정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당신은 율법공부만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율법으로 가득 차 돈을 꾼 것을 잊어버리지 않겠습니까?”
또한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라비가 거리를 지나다 거지에게 돈을 주었다. 그것을 본 또 한 사람의 라비가 말했다.
“그처럼 사람들 앞에서 돈을 주려면 주지 않는 편이 낫소.”
더 나아가 <탈무드>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남에게 물질을 베푸는 자는 모세보다도 위대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언 附言
“많은 수입만큼 좋은 약은 없다”
“지식이 과분하면 사람은 늙지만 돈이 과분하면 사람은 젊어진다.”
“돈이란 자기가 갖고 있지 않으면 무척 귀중해 보인다.”
“돈은 어떠한 문도 열 수 있다. 돈은 황금의 열쇠인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의-식-주 외에 돈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 돈이 당신을 사랑해야만 가능하다.”
“자기가 갖고 있는 돈을 벌 수 있을까. 벌 수 있다. 쓰지 않으면 된다.”
“부자가 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내일 할 일을 오늘 하고 오늘 먹을 것을 내일 먹는 것이다.”
“겨울에 땔 나무를 사야 할 돈을 여름에 노는 데 쓰지 말라.”
“아무도 개처럼 가난해지는 일은 없으며 돼지처럼 부자가 되는 일도 없다.”
“부자가 굶을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의사가 굶으라고 했을 때이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적이 적으며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친구가 적다.”
“돈으로써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식이다.”
“만약에 부자가 돈을 가지고 자기 대신 죽을 사람을 살 수가 있다면 가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금은 가장 유능한 브로커이다”
“상인이 되거든 이 말을 기억하라. 나는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현금으로 지불해 주십시오” <탈무드>
“절약 하지 않은 상인은 털이 안 난 양과 같은 것이다.”
“곰이 아직 숲 속에 있을 때 그 가죽을 팔아서는 안 된다.”
“꾼 돈을 갚는 사람은 신용을 배로 한다.”
“꾼 돈을 갚지 않는 사람은 도둑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떠한 차용금도 입구는 넓으나 출구는 좁다.”
“고기를 먹고 빚쟁이를 피해 다니느니보다는 채소를 먹고 당당히 시내를 걸어 다닐 수 있는 편이 훨씬 낫다.”
“꿀 때 웃지 말라. 만약 웃으면 갚을 때는 울게 된다.”
“남에게 돈을 꿔 주고 그 사람이 정말 갚을 길이 없음을 알게 되거든 그 집 근처엔 가선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은 사계절밖에는 고생하지 않는다. 즉, 춘, 하, 추, 동 이다.”
“의학은 가난 이외는 뭐든지 고칠 수가 있다.”
“가난을 견딜 수 있는 미모 美貌란 없다.”
“밭에 돈을 뿌리면 어리석은 자를 거두게 된다.”
3 마음의 양식
√ 하늘이나 땅을 웃기고 싶거든 고아 孤兒를 웃겨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따라 웃는다
히브리어에 <훗파>라는 말이 있다. 훗파를 한 마디의 외래어로 번역하기란 어렵다. 무례 無禮의 극 極이나 ‘이 이상 사람을 우롱하는 일은 없다’ 라는 뜻이다.
다음과 같은 예를 흔히 설명한다.
부모를 살해한 한 소년이 있다. 그 소년이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소년이 재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재판장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지금 고아입니다.”
물론 이것은 조우크 joke다.
롯드 공항에서 있었던 난사사건의 일본인 오카모토 고조가 재판에서 ‘별이 되고 싶었다’라고 말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가 ‘훗파’ 였다고 생각했다.
하늘과 땅을 웃기고 싶거든 고아를 웃기라고 한 것은 절대로 ‘훗파’를 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어두운 곳에도 웃음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고아란 불행한 사람들의 상징이다. 불행한 사람을 웃길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이 밝아진다는 뜻인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포근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 이 세상을 밝게 한다.
유태인은 육친 肉親이 사망해도 한달 이상 슬퍼해서는 안 된다. 유태인의 신은 밝음과 즐거움과 웃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은 죄를 언제까지나 후회만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우울에 빠져들어 신의 뜻에 이바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깊이 반성하여 두 번 다시는 죄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한 번 맹세하고 나서는 기쁜 마음을 갖고 신의 뜻에 따라야 한다.”
이 밖에도 <탈무드>에는 쾌활해야만 한다는 많은 가르침이 나온다.
또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재판소에서 벌금을 물었더라도 휘파람을 불며 문을 나서라.”
이 때문에 유태인은 외국인에게 흔히 뻔뻔스럽다고 오해를 받는다. 그런데 그 이면 裏面에는 이와 같은 인생철학이 유태인에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눈물로 일생을 보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웃기만 하면서 일생을 보내서도 안 된다.
이 속담은 앞의 경구와는 모순되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속담이란 절대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힌트인 것이다.
나도 여기에서 다만 생각할 소재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신은 인간을 좌우대칭 左右對稱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동물이라든가 물고기들도 좌우대칭이다.
<탈무드>에 의하면 인간은 반은 하늘에, 반은 땅에 속해 있다고 한다. 사람은 천성 天性 과 수성 獸性이 있다.
인간은 여러 가지 요소로 성립되어 있다. 희로애락 喜怒哀樂… 즉 웃고 울고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낙관 樂觀 하고 비관한다. … 그 어느 면만을 두드러지게 해서도 안 된다.
결국, 인생은 균형인 것이다.
항상 울거나 항상 화를 내거나 터무니없이 기뻐하거나 웃어서도 안 된다. 균형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유태인은 광신자 狂信者를 싫어한다. 아무리 정의 正義를 위한다 할지라도 처자 妻子를 돌보지 않는 자나 금욕 禁慾하는 사람 등, 맹목적인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으며 인간답지 않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균형, 균형… 균형. 이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신은 명랑한 사람에게 축복을 내린다. 낙관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밝게 만든다.
유태인은 슬픈 눈매를 하고 있지만, 그러나 터무니없이 밝다. 슬픔을 알고 있으므로 해서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 있고 밤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태양의 고마움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비관은 좁은 길이지만 낙관은 넓은 길이다.”
낙관은 많은 것을 포용할 수가 있지만 비관은 모든 것을 거부한다.
라비 한 사람이 자기 마을사람인 코오헨이 메일 밤을 새워 노름을 한다는 다른 사람의 고자질을 듣고
“그래요?” 하고 라비는 눈을 빛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 참 좋은 일이군. 노름으로 밤을 새워봤으니 이젠 <성서> 공부와 하느님을 칭송하는 일에도 밤을 세울 수가 있지 않겠소.”
이렇게 낙관은 관용이기도 하다. 낙관에는 포용력이 있다. 그래서 낙관은 자기는 물론 훌륭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모두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그렇게 가혹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자기를 잃지 않은 것은 낙관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 햄을 이왕 먹을 처지면 맛있게 먹는 편이 좋다.
유태인의 특징은 이 책에서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낙관적이라는 것이다.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왕 인생을 살려면 즐겁게 살라는 뜻은 아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세계를 즐겨야 한다는 것이 유태인의 생각이다.
유태인이 햄을 먹는 것은 절대로 금기다. 그렇지만 햄을 꼭 먹어야 할 입장이면 탄식하며 억지로 먹지 말고 즐기며 맛있게 먹으라는 것이다. 유태인다움 속담이다.
√ 남을 즐겁게 하는 일은 향수 香水를 뿌리는 것과 같다. 향수를 뿌리면 자기에게도 몇 방울은 튀게 된다.
유태인은 남에게 선물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유태민족이 자선을 베푸는 것이 의무처럼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히브리어로는 자선과 정의 뜻이 <째다카>라고 앞에서 말했지만 영어로 자선을 뜻하는 <채리티>의 어원은 라틴어로 <그리스도 교도의 사랑>이라는 말이며 이것은 <베푼다>라는 뜻이다.
유태인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닌 응당 해야 할 당연한 행위인 것이다. 유태인은 어떠한 가정이라도 어릴 때부터 조그마한 저금통을 부모에게 받게 되는데 이 저금통이 바로 자선용 저금통인 것이다. 이 저금통에 돈이 가득차게 되면 시나고그를 통해 자선을 돌리게 된다.
그런데 자선에도 한도가 있다. 수입의 어느 일정 한도 이상을 자선에 쓰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풍부한 사람이면 자기수입의 10분의 1을 자선에 써야 하고 보통가정이면 자기 수입의 10분의 1인 것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은 받는 입장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와 같은 유태교의 율법에 의해 복지제도 복지제도가 이미 확립됐던 일은 오늘날의 복지제도의 시초가 된 구빈법 救貧法이 영국에서 제정된 것이 17세기였던 것을 돌이켜 볼 때 유태인은 <째다카>의 관념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유태인은 모든 유태인을 형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 형제가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을 때 돕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유태인은 지역사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각자 수입에서 얼마씩 거두어 생활을 돌보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탈무드>에서는 다름 사람의 자선에 의지해 살아가는 일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타이르고 있다.
친절해서든가 아니면 선행을 해서 남을 기쁘게 할 때가 자기도 기뻐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 행복을 좇으려면 만족에서 멀어지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사람은 행복해지지 않는 한, 만족할 수 없다. 이것은 독자들도 다 잘 알고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이란 과연 어떠한가? 행복이란 어떤 상태이냐? 도대체 행복이란 어떻게 가늠하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그 해답은 다를 것이 틀림없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면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당연하다. 인간은 일생 동안 이 문제를 풀면서 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나도 이것이다 하고 한 마디로 말 할 수가 없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알지 못하는 행복, 그것은 우리 인간이 영원히 추구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행복을 측정할 수 잇는 한 가지 힌트를 주겠다.
행복은 얻는 것에 의해 가늠된다고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은 얻는 것에 의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얻는 것과 반대인 잃는 것으로 측정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건강과 병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우리들이 건강할 때는 이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고 지낸다. 그러나 건강을 잃었을 때에 비로소 건강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 수 있고 그 건강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병은 아픔과 고통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다. 그렇지만 건강한 몸으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행복도 이와 마찬가지로 행복할 때는 그 행복을 직접 느끼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잃었을 때 비로소 아픔과 고통을 맛보게 되므로 행복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을 당하고 나서야 곧잘 ‘나는 그때가 행복했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 지금보다 더한 불행이 항상 있다고 생각하라.
어느 가난한 사나이가 라비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하소연했다.
“라비님! 우리 집은 좁은데다가 애들이 많고 또 여편네라는 여자는 정말 이 이상 더 악처 惡妻일 수가 없습니다. 아마 우리 고장에서 가장 지독한 여편네일 것입니다. 라비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유태교에서는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이혼은 허용된다. 아무리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라비의 허가를 얻으면 된다.
“산양을 기르고 있소?”
사나이의 말을 듣는 라비는 이렇게 물었다.
“물론입죠. 유태인이 산양을 기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읍니까요? 이튿날 그 사나이가 또 다시 찾아왔다.
“라비님! 라비님이 시키는 대로 했읍니다만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악처에다 산양까지입니다! 이젠 모든 게 틀렸습니다.”
사나이가 말하자 라비가 다시 물었다.
“집에서 닭을 기르고 있소?”
“물론 있읍죠.” 사나이는 대답했다. “도대체 닭을 안 가르는 유태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유태인이 닭고기를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닭도 전부 집안에서 기르도록 하시오.”
사나이는 다음 날도 또 라비를 찾아 왔다.
“라비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젠 전 세상이 종말입니다!”
“그렇게 절박한가요?”
라비의 물음에 사나이가 대답했다.
“절박한 게 아닙니다. 악처인 아내, 거기다가 산양, 또 닭이 열 마리! 아아.”
사나이의 대답에 라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산양과 닭을 처음같이 기르도록 하고 내일 다시 한 번 찾아 오시오.”
다음 날 사나이가 다시 찾아왔다. 그런데 사나이는 혈색도 좋고 마치 황금의 산에서 오기라도 한 듯 눈이 만족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라비님! 라비님 말씀대로 산양과 닭을 집안에서 내보냈습니다. 라비님에게 1천 번 축복이 내리시옵기를! 우리 집은 그야말로 이제 궁전 과 같습니다!”
√ 실패한 일을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지도 못하고 후회하는 것이 훨씬 더 바보스럽다.
이미 일을 시작해서 실패한 것과 하고 싶었지만 해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과는 그 어느 편이 미련이 더 많이 남을까?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의 경우이다.
인생은 실패에 의해 큰 돈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에 맞는 큰 경험과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지도 못했다면 그것은 가능성을 잃은 것이 된다.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실패는 유한이지만 가능성은 무한한 것이라고 하는 인간의 낙관적인 본능의 힘이 움직이고 있다. 인간은 지나치게 낙관적일까? 그러나 인간의 발전은 가능성을 믿는 낙관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잘못해서 그르치게 하고 만 것 – 실패 – 은 경험이 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가 실패를 후회한다 하더라도 경험과 교훈을 얻은 것을 알고 있으므로 가능성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매장해 보리고 만 것보다는 미련이 적은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토양을 일구는 데 많은 경험이 되지만 후자의 경우 가능성이라고 하는 토양 그 자체를 잃은 것이 된다.
√ 초면인 사람에게 친절히 하는 것은 천사에게 친절한 것과 같다.
유태인가에 유명한 라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라비에게는 한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도 아버지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경건하고 정직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성서에 나오는 ‘현인이나 성인을 한 번이라도 만나 뵙고 싶습니다’ 하고 말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고대의 사람들도 현인이나 성인들이 한 해에 며칠씩을 지상에 내려 온다는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비는 아들에게 ‘네가 경건하고 올바르게 생활한다면 반드시 만나 뵐 수 있게 해 주겠다’하고 조건을 붙여 약속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아들은 모든 행동을 올바르게 했다.
한 달, 두 달, 아니 반 년이 흘렀지만, 라비는 성인이나 현인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러자 라비는 ‘인내력, 인내력을 가져라’ 고만 되풀이 말할 뿐이었다. ‘아침에 옳은 일을 했다고 저녁에 모세를 만날 수야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한 해가 지났지만 아들은 성인이나 현인을 만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아들이 예배소에 있는데 다 떨어진 옷을 걸친 거기 한 사람이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기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아들은 거지에게 여기는 호텔도 레스토랑도 아닌 예배소라고 거지의 청을 거절했다. 그렇다면 먹을 것이라도 좀 보태달라는 거지를 아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쫓아버렸다.
그날 밤, 라비는 아들에게 항상 하는 것과 같이 ‘오늘은 어땠었느냐’ 하고 물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거지가 왔었는데 그냥 쫓아버렸다고 말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을 우러러 탄식을 했다.
“그 거지가 네가 오랫동안 그렇게 기다렸던 성서의 인물이었다.”
라비의 말에 아들은 다급히 말했다.
“아버님, 저는 일생 동안 오늘 일을 후회하며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다시 돌이킬 수 잇는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라비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아마 다시 찾아오실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찾아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남이 시켜서 행한 선행은 스스로 행한 선행의 반 가치밖에 없다.
<미드럿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눈먼 거지 한 사람이 시가의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곳을 두 사람의 사나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나이가 동전을 한 닢 적선했다. 그런데 또 하나 사람은 그냥 지나쳤다. 그러자 두 사나이 앞에 사신 死神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거지에게 자선을 베푼 자는 나를 두려워할 일이 앞으로 50년 동안은 없을 것이지만 자선을 베풀지 않은 사람은 곧 죽게 될 것이다.”
사신의 말을 들은 적선을 하지 않았던 사나이가 황급히 말했다.
“지금 곧 그 거지에게 자선을 베풀고 오겠습니다.”
“안 된다.” 하고 사신이 말했다. “배를 타고 항해를 해야 할 때, 그 배 밑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지 않고 바다에 나서서야 물이 샐 때 고치려 해서 되겠는가?”
√ 포도송이는 무거워질수록 아래로 처진다.
이 말은 인간도 겸허한 만큼 허리가 낮아진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유태민족에게는 이런 옛 이야기가 있다.
솔로몬 왕이 어느 날 주신 主神에게 그야말로 훌륭한 선물을 받게 되었다. 비단으로 짠 주단이었는데 이것을 타면 하늘을 날아 어디라도 마음대로 갈 수 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선물이 솔로몬 왕을 아침 식사는 다마스커스에서 하고 메디아에서 저녁식사를 들게 하는 등 꿈과 같은 생활을 할 수가 있게 만들었다.
솔로몬 왕은 현명한 사람이었으므로 모든 동물과 벌레의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
어느 날, 솔로몬 왕이 이 주단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을 때, 땅에서 개미들이 저희들끼리 얘기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왕 개미가 부하들을 향하여 위에 솔로몬 왕이 날고 있으니 모두들 굴속으로 숨으라는 명령을 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솔로몬 왕은 땅에 내려와 여왕 개미를 잡고 그대는 무엇 때문에 나를 피해 모두들 숨으라고 명령했는가 하고 다그쳐 묻자,여왕개미가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몹시 무섭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은 여왕 개미의 이야기를 듣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대는 이렇게 작다. 거기다 내가 하늘을 나르는 만큼 그대는 높이 날지도 못한다.”
그 말을 들은 여왕 개미가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당신의 주단에 나를 한 번만 태워 주십시오.”
솔로몬 왕은 여왕 개미를 주단에 태워 하늘로 높이 날아 올랐다. 하늘 높이 주단이 날을 때 여왕 개미는 솔로몬 왕의 머리 위를 날았다. 그리고 솔로몬 왕을 향해 말했다.
“자아 보십시오. 제가 더 높이 날지 않습니까?”
“………”
√ 최고의 지혜는 친절과 겸손이다.
어느 점잖은 사나이가 라비에게 말했다.
“나는 신을 칭송하기 위해 내 자신의 능력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아무런 발전도 없었습니다. 나는 처음과 달라진 게 조금도 없는 하찮은 인간일 뿐 아니라 무지 덩어리입니다.”
라비는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당신에게 1천 번의 축복이 내리옵기를. 당신은 처음과 다름없는 하찮은 사람은 아니고 무지덩어리는 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커다란 예지 叡知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도대체 겸손이란 무엇일까? 겸손이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바라는 것을 될 수 있는 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친절과 겸손은 쌍둥이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친절할 수 없고 친절하지 않으면 겸손해질 수가 없다.
√ 손님이 식탁에서 헛기침을 하거든 수저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라.
집으로 초대되어온 손님은 예의를 지키려고 하는 법이다. 손님은 자기 앞의 식탁에 스푼이 놓여 있지 않더라도 차마 스푼이 없으니 스푼을 주십시오, 라고 는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은 물이나 포크, 나이프나 컵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잘 표현한다는 것이 기껏해야 헛기침 정도의 힌트를 주인에게 줄 수밖에는 없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있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모두 손님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손님은 인생에 있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속담은 결국 자기와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세심한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 스스로의 결점을 찾으려고 열중하는 사람은 남의 결점이 보이지 않는다. 남의 결점을 찾으려는 사람은 자기의 결점을 찾을 수 없다.
<탈무드>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을 과신하는 사람’ 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의 실패를 남이 비웃고 있다고 언제나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며, 남이 하루 24시간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착각하고 있는 자는 감내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을 과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일아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오만한 것이다. 너무 지나친 자만심에서 오는 착각인 것이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 인간은 철 鐵 보다는 강하지만 파리보다 약하다.
뉴욕의 맨해튼에 솟아오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보게 될 때 사람의 지력 知力 은 철 鐵보다도 강한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철을 녹이고 늘여서 거대한 빌딩을 만들 수 있는 인간도 파리나 모기에 뜯기게 되고 그 자그마한 벌레가 옮기는 균 菌에 의해 3개월이나 또는 3년 씩 누워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속담은 유태인이 아이들에게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게 보이지만 파리나 모기 같은 보잘것 없는 벌레에도 몹시 약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인간이 자기보다도 허약한 것이나 아니면, 아주 작은 벌레에까지도 두려움을 가지게 해서 결코 오만하지 않게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오만해지기 쉽다. 오늘날 문명이 발달하고 그에 따른 인간의 생활이 많은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래도 인간은 작은 것에도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파리보다 약한 인간이 성공했다고 오만해져서는 안될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인간은 누구나 겸손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길을 가다 넘어지면 우선 돌을 탓한다. 돌이 없으면 고개를 탓하고 고개가 없으면 신발을 탓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좀처럼 시인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옳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옳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면 옮은 일을 한 누군가의 한 사람이 잘못한 것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하려는 일은 언제나 옳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고 세상의 모든 인간이 서로 고집한다면 우리가 사는 지상에 어떠한 사회가 생길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이와 같은 함정에 빠져들기 쉽다.
그러나 우리들은 보다 나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가 겸손해지고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 우리가 사는 사회는 좀 더 발전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거나 잔소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 인간이 저지른 행위는 변치 않고 남지만 행위를 저지른 인간은 나날이 변해간다.
이것은 <탈무드>의 말이다. 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사람이 저지른 죄를 미워할 수는 있어도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은 이미 뉘우치고 회개했을 터이므로 그 인간자체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성서>는 인간이 노력하면 하는 만큼 향상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에의 신뢰와 낙관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변에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신의 선물이다. 인간도 자꾸 새롭게 변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일이든 체념해서는 안 된다.” 고 말하는 것이다.
√ 천지 창조를 할 때 인간이 맨 마지막 날에 만들어진 것은 오만성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모든 생명, 식물을 만들고 난 후 마지막으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만들었다. 인간을 만든 것은 6일째이다. 7일째에는 하나님은 쉬셨다. 이것이 안식일 安息日의 시초이다.
나는 독자 여러분께 성서는 꼭 한 번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만약 전부 읽을 수가 없거든 첫 부분이라도 좋다. 당신은 많은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고대 라비들은 어째서 하나님이 맨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탈무드>는 이러한 토론집인 것이다. 지금이라면 브레인스토밍[필주: brainstorming] 이라고나 할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겸손함을 가르치기 위해 인간의 창조를 마지막 날까지 미루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 定說 로 돼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식물에 대해 자기를 선배라고 뻐기는 일이 없이 자연에 대해 겸손해지도록 맨 마지막 날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 마음을 닦는 것은 두뇌를 개발하는 것보다도 더 소중하다.
이 말은 ‘옳은 일을 배우는 것보다도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 더욱 좋다’ 고 하는 속담을 가르치고 있다. 어느 라비가 제자 한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런데 라비가 이 제자에게 ‘와인 앞의 기도문을 외워라’ 하고 말하자 제자는 처음 몇 줄밖에는 외우지를 못했다. 화가 난 라비는 다른 기도문을 외우게 했다.
그러나 제자는 다른 기도문에 대해서도 모두 처음과 같았다. 이제까지 가르친 것도 거의 외우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라비는 이 제자들 몹시 꾸짖었다. 젊은 제자는 식사를 마치고 머리를 떨군 채 돌아갔다. 그 후 라비는 이 젊은 제자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도와주고 가난한 자가 있으면 자기가 일해서 번 돈을 보태 주곤 하는 등, 많은 선행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나선 라비는 제자를 꾸짖은 자신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라비는 제자들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바로 행위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만권 萬卷의 책을 읽고 많은 것을 알고 있더라도 마음을 닦지 않으면 알고 있는 것에 머무르고 만다. 알면서 실천하지 못하면 그것은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
√ 하나님은 먼저 사람의 마음을 보고 그 다음 두뇌 頭腦를 본다.
인간은 그 마음을 보고 알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마음이 아름다워야 한다. 지성 知性은 그 다음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학식을 많이 쌓은 대학자라 하더라도 마음이 가난하면 마음이 아름다운 노동자보다도 낫다고 못할 것이다. 신은 사람의 지성보다도 마음을 먼저 본다. <탈무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탈무드> 모두들 외우는 것보다는 하나의 작은 덕을 몸에 지니는 것이 훨씬 낫다.”
“지혜가 덕 德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엔 지혜조차도 잃고 말게 된다.”
√ 비누는 더러워진 살갗을 씻기 위해 필요하고 눈물은 마음을 씻는 데 필요하다.
사람들은 비누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눈물로는 마음을 씻는다. 또 한 가지 아름다운 속담이 있다.
“천국에는 한 구석에도 기도할 수 있는 곳은 없지만 울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장소는 마련되어 있다.”
희로애락 喜怒哀樂 , 울어보지 못한 사람은 기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밤이 없으면 밝은 낮도 없다.
우는 것을 부끄럽다거나 창피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기뻐할 때도 진실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기쁜 체하고 있을 뿐이다.
울고 난 다음에는 마음이 후련해진다. 마치 목욕을 마치고 난 후처럼 상쾌하다. 하나님은 마치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듯, 인간에게는 눈물을 주셨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비가 내려 땅이 적셔지고 씨앗에 싹이 트고 푸르름이 짙어지는 것이다. 인간에게 눈물이란 이것과 같다.
오늘날의 사회가 기계화되어 가장 위험한 것은 눈물이 쓸모가 없게 되고 그로 인해서 눈물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점이다. 사람이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메마르기 때문이다. 울고 싶을 때 실컷 울어야 한다. 그것은 남을 위하는 것이고 또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 빌어도 빌어도 효과가 없을 때는 정성을 다해 다시 한번 빌어보라.
라비 코렛츠어는 말하고 있다.
“금과 은銀은 열이 가해질 때 순화된다. 만약 당신이 기도해도 자신의 발전이 없다면 그것은 자신이 값싼 금속이거나 기도에 정성이 모자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가 다 금은 金銀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축복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이야기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성취될 수 있는 것을 열의 熱意가 모자라 스스로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 인간이 죽으면 그 육신은 벌레에게 먹히고 만다. 그러나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근심 걱정에게 먹히고 말 때가 있다.
이 말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대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풀이한 것이다.
너무 걱정해서는 안 된다. 걱정이란 정신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롭지 않은가?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모세는 친구인 아브라함한테서 1백 코펙의 돈을 빌려 썼다. 갚을 날짜는 이미 지나 내일 아침이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돈을 돌려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수중에는 1코펙도 없었다.
모세는 그것을 생각하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침대 속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치락거리다 못해 침대에서 다시 일어나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심란한 마음으로 방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때였다.
“여보, 당신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에요. 그만 주무세요.”
아내인 레베카가 침대에 누워서 말을 건넸다. 모세는 아내에게 내일 아브라함에게 꾼 돈을 갚지 않으면 안 되는데 수중엔 1코펙도 없어서 그런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참 당신은 딱하시기도 하시구려. 그렇다면 오늘 밤 잠을 자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해야 할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겠어요?”
“…………..”
√ 내일 닥칠 일을 너무 걱정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 일어날 일 조차 당신은 모르고 있지 않는가?
인생살이를 너무 걱정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앞을 내다볼 만큼 위대하지는 못하다.
너무 지나치게 비관하거나 너무 지나치게 낙관하면서, 자기가 앞을 완전히 내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자기가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인간은 지나치게 낙관할 만큼 도는 지나치게 비관할 만큼 위대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저 사람은 운이 좋다, 운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엇이 일어날는지 전연 모른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낙관이나 비관이나 인간의 힘이 내일에 미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내일의 일을 너무 지나치게 근심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 너무 지나치게 낙관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당신의 한 발짝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 매일 조금씩 자살 自殺을 해 가는 사람은 이승이나 저승이나 속할 곳이 없다.
조금씩 자살을 한다고 하는 것은 몹시 우스운 표현이겠지만 이 속담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매일 조금씩 자살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에나 너무 지나치게 고민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후회하여 기 氣를 잃고 이로 인해 서서히 정신적인 건강과 육체적인 건강이 허물어져 마지막에는 시들대로 시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유태인은 매일을 즐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은 매일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매일 이 새로운 기회에 의해 제공되는 도전에 충만 돼 있다. 이 말은 하루하루가 각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비관하거나 후회하거나 괴로워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매일 조금씩 자기를 죽여가는 사람은 이와 전연 정반대의 생활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태인 사회에서는 자살만큼 큰 죄는 없는 것이다. 한 때 유태민족은 자살한 사람을 묘지에 파묻지도 못하게 했다. 묘지에 묻히질 못한다고 하는 것은 유태인 사회에서 완전히 말살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매일 조금씩 자기를 죽여가는 자는 이 세계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한 자살한 사람은 말살돼버리기 때문에 저 세상에도 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는 데는 순간의 일이지만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는 시간은 영원할 때도 있다.
사람이 행복의 결정에 있다 하더라도 고난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데는 순간의 일이다. 그러나 불행한 사람이 행복을 얻는 기간은 어쩌면 일생이 걸릴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어 웬만해서는 만족감 즉 행복을 쉽사리 얻지 못하며 자기의 주위나 환경에 만족하는 법을 일생이 걸려도 배우지 못하는 경우조차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따금 부부 싸움을 하고 나를 찾아와 의논하는 내외가 있다. 그 가운데에는 이혼까지 불사하겠다는 심각한 부부도 있다. 그런 경우, 나는 하루 또는 1주일 동안 잘 생각한 끝에 다시 찾아오라고 말하는 대신 3년 생각 끝에 다시 찾아오라고 말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불행에서 행복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오랜 세월이 걸리거나 또는 영원에 버금갈 만한 시간에 걸쳐 사람은 그 방법을 체득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 신 神은 옳은 자만을 시험한다.
이 말은 <성서>에 있는 말이다.
<미드럿슈>에는 라비 요나탄이 “도기 陶器를 만드는 사람이 깨진 도기를 손으로 두들겨보거나 잘됐는가를 시험해 보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좋은 도기가 만들어졌을 때는 손가락을 써 튀겨 보는 것이다. 신도 마찬가지다. 나쁜 자를 시험하지 않고 옳은 자를 시험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라비 벤 허니너는 “마지 麻紙 를 파는 자는 만약 그 마지가 좋은 것이라면 마구 두들겨 댄다. 마지는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좋아지고 빛을 더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마지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는 마지 를 두들기려고 하지 않는다. 잘못 두들겼다가는 찢어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옳은 자만을 시험대 위에 서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라비 엘레아잘은 ‘어느 사나이가 두 마리의 소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한 마리는 강하고 한 마리는 약하다고 할 때 어느 소에다 쟁기를 매려고 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힘이 센 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옳은 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부언 附言
“마음의 문은 입이고, 마음의 창은 귀이다.”
“마음에 바르는 약은 없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당신이 남에게 복수를 하고 나면 좋은 기분은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남을 용서하고 나면 기분이 몹시 좋아질 것이다.”
“남을 중상하는 자는 남을 구타하는 자보다 죄가 더 무겁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옳은 사람보다도 자기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악인이 더욱 소중하다.”
“남을 속이기보다 자기를 속이는 편이 훨씬 쉽다.”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는 지성 知性이며 최대의 적은 욕망이다.”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은 소홀히 하고 갖지 않는 것은 탐을 낸다.”
“악은 처음엔 달콤하고 나중에는 쓰나, 선은 처음엔 쓰고 나중엔 달다.” <탈무드>
“천국의 문은 기도에 대해선 닫혀져 있지만 눈물에 대해선 열려져 있다.” <탈무드>
“병을 앓고 있는 자가 다른 병자를 위해 기도할 대 그 기도의 효력은 배가 된다.”
“한쪽 다리가 부러지거든 하나님께 두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데 대해 감사 드려라. 만약 두 다리가 다 부러지거든 하나님께 목이 부러지지 않은 걸 감사 드려라. 또 목이 부러지거든 그 다음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부자는 호주머니 속에 신 神을 챙기려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마음속에 신을 챙기려고 한다”
“와인을 미시고 있는 시간을 낭비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그 시간은 당신의 마음이 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 같다. 가려운 곳을 긁으면 더욱 가려워지며 싫은 사람을 생각하면 더욱 싫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거울 속에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본다.”
“인간은 자기의 피부병은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남의 피부병은 더럽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얼굴이 제각기 다른 것과 같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밀도 제각기 다르다.” <탈무드>
“어느 사람은 정직한 사림이라고 말하지만 다만 그 사람은 훔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선인의 나쁜 면이 악인의 좋은 면보다도 낫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어딘가는 잘못된 약점이 있다.”
“영웅이 되기 위한 첫 조건은 용기를 갖는 일이다.”
“아무리 수 手 가 없을 때, 단 한 가지 쓸 수 있는 수 手는 용기라는 수다.”
“비록 노예라 할지라도 현상 現狀에 만족하면 자유인과 같으며 자유로운 인간이라도 현재에 만족할 수 없으면 노예나 마찬가지다.”
“돈이 떨어졌을 때는 인생의 반을 잃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용기가 떨어졌을 대는 인생의 전부를 잃고 있는 것이다.”
“지나친 후회는 금물이다.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실패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보다 못하다.”
“자신의 의지의 주인이 되고 자신의 양심의 노예가 되라.”
“미래를 생각하되 과거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겸손은 오만과 다를 것이 없다.”
“당신이 거들지 않아도 태양은 스스로 저물어간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왕이 있다. 땅을 지배하는 왕, 사람을 지배하는 왕, 그리고 자신을 지배하는 왕이다.”
4 가르침의 길
√ 이상 理想이 없는 교육은 미래가 없는 현재와 같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과 같이 세계를 변혁 變革 한 유태인들의 이름을 들춰가면 유태인은 개혁자가 많음을 곧 알 수 있다.
유태인은 과학의 정설 定說을 크게 바꾼 사람이나 사회개혁자 가 많다.
이러한 유태인의 이상은 무엇일까?
유태인은 <성서>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의 손에 세상을 맡겼을 때, 세상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드는 책임을 부여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성서>의 세상이란 정의 正義가 행하여지는 세상인 것이다. 지상에서 사람들이 풍요하고 평등하며 평화로워 신이 칭찬하는 세상인 것이다. 신이라고 하는 것은 정의인 것이다.
이 가르침을 어릴 때부터 되풀이하여 몇 번씩이나 듣게 됨으로써 성장해감에 따라 강한 바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종교는 보수적이다. 그렇지만 유태교에 있어서는 가르침을 지키고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갈고 닦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유태인은 온 세계에 흩어져 있고, 유태인가에 처박혀져 있어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서 천대받고 압박 당한 사실이 이 전통에 추가됨으로 유태인에게 정의가 행해지는 공평한 사회를 더욱 강하게 꿈꾸게 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많은 사회개혁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 收容所에서 수인 囚人들이 만들어 이를 모두의 입에 오른 노래는 “나는 믿노라….항구평화의 시대가 오는 것을”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다른 민족이었더라면 이런 노래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유태인인 것이다.
√ 돈을 빌려 주는 것은 거절해도 좋다. 그러나 책을 빌려 주는 것은 거절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탈무드>에 실려 있는 율법의 하나이다.
유태인은 예부터 <책의 민족>, <학문의 민족>이라 일컬어져 왔다. 인간에 비유한다면 학문은 피와 같다. 피가 흐르지 않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이 없는 유태인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아마도 배우는 것을 종교적인 의무로 삼은 민족은 세계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말을 배운다. 그런데 세계의 각 민족을 보면 근대가 시작되기까지 엘리트 이외에는 대부분이 읽고 쓰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태인은 말을 배움과 동시에 성서나 <탈무드>를 읽기 위해 읽는 것과 쓰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학문은 신의 말씀이므로 모든 사람의 공유물 共有物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유태인에게는 오늘날까지 이 전통이 맥동하고 있는 것이다.
√ 책은 지식을 주고 인생은 지혜를 준다.
지식과 지혜가 다르다는 것을 현대인은 잊고 있는 것 같다. 5백 년, 아니 1천 년 전과 비교할 때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의 양은 방대한 것이고 너무나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탈무드>를 비롯하여 유태인의 고전 古典을 읽노라면 인생의 지혜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 같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1주일에 하루 또는 안식일에는 가족들이 모여 앉아 아버지가 아들에게 <성서>나 <탈무드>를 가르친다. 안식일은 가족의 날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태인은 안식일에는 좀처럼 여행을 하지 않는다. 비즈니스맨도 이날만은 피해서 여행한다.
유태인은 교육이라고 하면 학교라고 하는 공공 公共의 교육시설보다도 가정을 먼저 머리에 떠올린다. 그만큼 가정교육을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는 지식을 배우지만 가정에서는 지혜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생활 중심은 가정에 있다.
아랍에 고용된 일본인 테러리스트 오카모토가 롯드 공항에서 난사사건을 일으켜 체포되었을 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일본 청년에 대해 “아마도 대학에서 지식만 가르치고 지혜는 가르치지 않았나 보다” 고 모두 생각했다.
지혜가 <탈무드>를 낳고 지식이 ICBM (핵탄두가 달린 대륙간 유도탄)을 낳은 것이다. 유태인은 지식은 많이 쌓았지만 지혜는 옛날과 다름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5천 년 전에 나온 <성서>나 <탈무드>를 존중하는 것이다. 지식이 들어 있는 책과 지혜가 들어 있는 책은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다. 지식의 책을 읽을 때 지혜의 책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유태인의 고전은 지혜는 책으로 읽는 것보다 부모가 자녀에게 전하는 것이 더욱더 효과적이라고 가르치고 있고 실제 더 효과적이다.
√ 많은 사람들은 사고 思考가 싫어서 그 도피의 일환으로 책을 읽는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로써 이러한 말이 이미 수천 년 전에 씌어졌다고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유태인은 고대부터 <책의 민족>이라 다른 민족에게 알려져 왔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세계에서 가장 교육에 중점을 둔 민족이었다.
물론 옛날에는 책의 종류가 적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훌륭한 경구가 태어날 만큼 유태인은 책을 떠나서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책을 읽는 것과 책에서 지식을 배우는 것과는 서로 다른 것이다. 가령 <성서>는 읽는 것이 아니고 배우는 것이다.
현대인은 수많은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책에 둘러싸여 생활하고 있다. 이것은 정보의 범람인 것이다. 현대인은 책을 읽어도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려 들지를 않는다.
“책을 읽을 뿐이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책을 읽더라도 당나귀(어리석은 자)가 많은 책을 싣고 다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탈무드>는 말하고 있다.
√ 지식은 물과 같은 것이다.
<탈무드>에는 라비 하니나-바-이디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서>를 펼치면 이사야서에는 “자, 목마른 자 모두 물로 오라” 라고 씌여 있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어째서 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일까. 답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식은 있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향하여 흐른다. 또한 지식을 쌓은 인간은 겸허해진다. 그러므로 지식은 물과 비슷하다 하겠다.
또한 <탈무드>에서는 지식을 물로만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와 우유로도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어째서일까. 라비 옷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서>에는 포도주와 우유를 사들여라…그러면 당신들은 살 수가 있다 라고 씌어져 있다. 그러면 어째서 <성서>가 포도주와 우유로 비유되는 것일까. 포도주나 우유는 보잘 것 없는 독 안에 들어 있다. 이것은 참다운 가르침은 마음이 가난한 자 안에만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 기도는 짧게 배움은 많은 시간을 걸려서 하라.
이것은 유태인이 배움이라고 하는 것이 신을 칭송하는 기도 그 자체라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신은 가장 위대하다”라고 하는 민족이 어찌하여 “기도는 짧게, 배움은 많은 시간을 걸려서 배우라”라고 했을까?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는 인간이 하나님께 이야기를 드리고 있는 것이며, 진리를 추구하여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배우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올바른 정신과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짧은 시간 동안 기도할 일이며 다른 시간은 하나님이 지시한 여러 가지 진리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그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또한 하나님을 청송하는 일이 되는 것이라고 유태인은 생각해왔던 것이다. 유태인이 오랫동안 지식을 존중하고 또한 지혜를 존중해 온 것은 배운다는 것이 신을 찬양하는 기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은 유태인이라도 이 오랜 정통에 의해 학문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 옛날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교육이 나빴기 때문이다.
유태인은 어떤 경우든지 실패했을 때, 교육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먼저 생각한다. 그 이유는 오랫동안 신을 칭송하는 것이 곧 배움이었기 때문이다. 배우는 것으로써 유태인은 신을 찬양하고 또 신의 뜻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멸망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로마 군대에 의해 멸망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교육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 고을에 고명한 라비 한 사람이 찾아 들었다. 고을 책임자는 라비를 안내하여 자기 고을의 경비 상태를 보여 주었다. 요새가 있는가 하면 또한 어느 곳에는 목책이 둘러쳐져 있었다. 고을 책임자가 라비를 모시고 숙소로 돌아오자 라비는 “나는 이 고을이 어떻게 방비되고 있는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고을을 지키는 것은 병사가 아니라 학교입니다. 어째서 나를 제일 먼저 학교로 데리고 가지 않았던가요?” 했다. 학교는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만약 학교가 없어서 유태인의 가르침이나 전통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병사를 세워 지키려 하더라도 지킬 것이 없고 마는 것이다. 우선 지킬 것을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비인 것이다.
√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뺏지 못하는 것은 바로 지식이다.
유태인은 오랜 세월을 두고 불태워지고 땅을 빼앗겼으며 재산이 몰수되었을 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쫓겨 다녀야 했다. 그런 관계로 최근까지 유태인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빼앗기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고 ‘돈’이라거나 ‘다이아몬드’ 라고 대답하면 어머니는 “아니다, 그것은 지식이다”라고 가르쳐왔다.
나도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랐다. 유태인은 옷을 입은 채 그대로 도망치게 될 때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지식임을 오랜 역사와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 때, 배 안에 한 학자가 타고 있었다. 학자는 같은 배 안에 타고 있던 상인들로부터,
“도대체 당신은 무엇을 파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내가 파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물건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상인들은 그 학자가 잠들고 있는 틈에 그의 집을 조사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자 모두가 이 사람은 좀 돈 사람이 아닌가 하여 학자를 비웃고 있었다.
오랜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배가 난파됐다. 배에 탔던 상인들은 짐을 잃고 가까스로 육지에 닿게 되었다.
학자는 그 마을의 시나고오그에 가서 말을 했다. 학자는 그 마을의 어느 사람보다도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 아주 극진한 대우를 받아 현자로서 부를 이룩했다.
이것을 본 상인들은 감탄하며 말했다.
“당신은 우리가 생각한 미친 사람이 아니었소. 우리들은 바다에서 모든 상품을 잃었지만 당신이 가진 지식이란 상품은 살아 있는 한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것이었소.”
√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도시와 탑 塔을 보기 위해 내려 오셨다.
이것은 <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말이며 탑이란 바벨탑을 가리킨다.
옛날의 라비들은 하나님이 어째서 일부러 지상까지 바벨탑을 보기 위해 내려오셨느냐 에 관해서 토론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이 바벨탑이 있는 도시를 불태워버리고 탑도 파괴하게 된다.
라비들은 이렇게 결론 지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어떤 결단을 내리기 전에 자기의 눈으로 뚜렷이 확인한 다음에 행동하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 당신의 혀 [舌]에게 “나는 모른다”는 말을 열심히 가르쳐라.
아는 체하는 자는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헤엄칠 수 있다고 물속에 뛰어드는 자와 같다. 이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배우면서 정신적인 성장을 한다. 배운다고 하는 것은 우선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성장할 수가 없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만큼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바른 것을 배우는 일보다는 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비슷한 속담으로 ‘행동은 말보다 더 웅변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논리나 학문은 잘 생각해 보면 행동을 위해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속담도 있다.
“최고의 지혜는 친절과 겸손이다. 똑똑하기보다는 친절한 편이 낫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고 가르치는 유태인의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옛날 이스라엘의 어느 학교에서 라비가 제자에게 “2분의 1 보태기 2분의 1은 얼마인가?” 하는 문제를 냈다. 그러나 그 반에서 제일 성적이 좋은 제자가 바로 대답하기를 “선생님, 답은 2분의 1입니다.”라고 말했다.
제자의 말을 들은 라비가 놀라서 물었다.
“2분의 1과 2분의 1을 보태면 어째서 2분의 1이 되는가. 반과 반을 보태면 얼마가 되는지 다시 한 번 계산해보도록” 하고 다시 계산해보게 했다. 그러자 학생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선생님, 역시 2분의 1입니다.” 라고 말했다.
라비는 약간 어리둥절해서,
“그렇다면 앞에 나와서 계산해 보렴.” 하고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학생은 종이 위에 “1/2 + 1/2 = 1/2″이라고 썼다.
“어째서 2분의 1이 되지?” 하고 라비가 물었다.
“그렇잖아요. 위의 1과 1을 보태면 2, 아래의 2와 2을 보태면 4가 되잖아요. 그것을 둘로 나누니까 2분의 1이 되지요.” 라고 학생은 대답했다.
라비는 놀라서 이번에는 사과를 가지고 나와 둘로 자르고
“여기에 반 개의 사과와 반 개의 사과가 있다. 이것을 보태면 도대체 어떻게 되지?” 하고 물어 보았다. 학생은
“한 개의 사과가 됩니다.” 라고 대답했다.
“사과의 경우는 한 개고, 계산을 할 때는 어째서 2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건가? 1/2 + 1/2 = 1 이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하고 라비가 말하자 학생은 또 종이 위에 “1/2 + 1/2 = 1/2″이라고 쓰고 난 다음,
“실제로는 확실히 한 개가 되지만 종이 위에서 이론적으로 증명하면 2분의 1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계산을 볼 때 독자 여러분은 이론과 실제가 어떻게 틀리는가를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의 쪽이 항상 우리에겐 소중한 것이다.
√ 자기의 결점을 고치지 못하더라도 자기를 향상 向上 시킬 노력을 단념해서는 안 된다.
유태인 고전의 하나인 <미드럿슈>는 “좋은 곳에는 반드시 자그마한 악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완전한 선을 이룰 수는 없다. 그런데 완전한 선인이 되지 못하다고 하여 자기를 향상시키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으며 단점도 있다. 물론 단점을 고치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결점을 극복하는 일이 어렵다고 하여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단점을 가지고 있듯이 장점도 가지고 있다. 완벽한 현자 賢者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우자 愚者 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도 단점보다는 장점을 계발해야 할 것이다. 장점이 당신에게 빛을 말할 때 단점이 그 빛을 잃게 되고 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점을 계발하는 일은 단점을 작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생물 가운데 인간만이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다. 인간 중에서도 똑똑한 자일수록 잘 웃는다.
유태인만큼 농담을 중시하는 민족은 없다. 괴로울 때에 웃을 수 있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유태인은 웃음에 커다란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지식하고 얌전함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무 융통성이 없이 경직 경직 해버리면 한 가지 견해밖에는 있을 수 없고 사고의 폭이 좁아진다.
유머나 위트 그리고 농담은 외곬수적인 면에서 벗어나 사물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 과학이나 사회 과학의 발전은 항상 연상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가지 문제를 놓고 무엇인가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연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조우크를 이해하기 위해선 재빠른 두뇌의 반응 – 연상력과 다각적인 폭넓은 지식이 요구되어서 끊임없는 훈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담을 우습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어리석은 사람 중에 세 가지 형이 있다. 스스로 어리석음을 알고 있는 사람,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도 남도 똑같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
유태인은 지식이 많다 적다 를 따지기 전에 우선 현명한 사람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인가를 본다. 현명한 사람이란 선인 先人의 가르침을 잘 지키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영리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영리하면서도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현명하다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사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탈무드>를 읽게 되면 앞에서 말한 세 가지 타입 중에서 ‘자기가 어리석다고 알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고 현명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보다는 반 半 쯤 어리석은 사람이 더 어리석은 사람이다.
“완전히 침몰한 배는 다른 배의 항해에 방해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 쯤 침몰해 있는 배는 다른 배의 항해에 방해가 된다” 라고 <탈무드>에 나와 있다.
이 세상에 완전히 어리석은 자는 있을 수 없으며 스스로 자기는 완전히 어리석다고 자인하는 자도 없다. 인간이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고 자존심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자기는 소중한 것이다.
이 속담은 얼치기 지식을 휘두르면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다칠 수가 있다는 것을 타이른 것이다.
“가득 채원진 독은 반 밖에 차지 않은 독보다도 운반하기 쉽다”는 말도 이와 비슷한 말이다.
√ 산양의 턱에 수염이 달렸다고 산양이 라비가 될 수는 없다.
필자도 수염을 기르고 있다. 라비는 대부분 수염을 기르는 사람이 많다.
이유는 성서에서 얼굴을 비롯하여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을 금 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면도기를 쓸 수가 없어서 수염을 깎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전기면도기가 발명되고서는 얼굴의 수염을 깎아도 괜찮게 되었다. 당신은 전기면도기로 면도를 하다가 얼굴에 상처를 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라비는 히브리어로 ‘나의 선생’ 이란 뜻인데 지역사회의 현자이며 지도자이다
앞의 속담은 아무리 모양을 내더라고 내용이 뒤따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수염의 풍채로 현인을 뽑는다면 산양이 세상에서 가장 현인이 될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필자가 수염이 있다고 하여 산양이 될 수는 없다.
√ 당나귀는 예루살렘에 가더라도 당나귀다.
예루살렘은 옛날부터 이스라엘의 수도 首都이며 성도 聖都였다. 오늘날 프랑스의 파리나 미국의 뉴욕, 일본의 도쿄와 같이 한 때는 모든 문화의 중심지였다.
당나귀는 중동 중동에서 오랫동안 가장 일반적인 하역 하역을 위한 가축이었고 또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나귀는 어딜 가도 당나귀라는 속담이 생긴 것 같다. 어리석은 자는 뉴욕이나 파리, 런던에 다녀왔더라도 어리석은 자라는 뜻이다.
당나귀에게 대학생의 옷을 입혀 가슴에 배지를 달고 귀에 황금 리본을 매단다 하더라도 대학생이 아닌 당나귀임에는 틀림없지 않은가? 사람 가운데에도 실력은 없으면서 외모만 번지르하게 꾸며 남에게 으스대려는 사람이 있다. 고급 옷을 몸에 걸치고 높은 직함을 가지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인 양 꾸며대다가 당나귀가 귀에 리본을 매고 있는 꼴이 되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번쩍이는 금고 안이 늘 비어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한 가지 당나귀와 인간이 다른 점은 사람은 예루살렘에 갔다 오면 무엇인가를 배워 가지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스스로 시범을 모이는 일이다.
19세기, 유태인의 현인 야라슈닐 은 이렇게 말했다.
“유태인의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이 교양을 쌓고, 경건한 유태인으로 자라기를 희망한다. 그 아들이 성장하여 아버지가 되면 또한 그 아들도 훌륭한 유태인으로서 자랄 것을 소망한다. 그런데 자기가 교양을 쌓아 경건하고 훌륭한 유태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아버지는 자식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 자식에게 일하기를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자식이 도둑이 되기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 말도 <탈무드>에 있는 말이다. 어느 날 라비 마이야에게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자식에게 일하는 존귀함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어째서 자식을 도둑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까?”
라비는 대답했다.
“자식에게 일하는 존귀함을 가르치는 부모는 자식에게 포도원을 남겨 주는 것과 같다. 포도원은 반드시 울타리가 쳐져 있기 때문에 소나 여우가 안 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그릇된 생각이 자식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언제 어느 곳에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머니를 주셨다.
이 말은 정말 아름다운 말이다.
<탈무드>에서는 라비 요셉이 자기 어머니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경의 敬意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령 聖靈이 가까워진다. 나는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어머니는 애들에게 있어서는 전부인 것이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호주일 뿐 아니라 위엄을 갖춘 가정의 지도자이지만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하는 역할은 너무나도 크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쏟는 애정은 끝이 없을 만큼 길고 넓은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 이 얼마나 귀에 익은 따뜻한 말인가.
어머니에 대한 속담도 많다.
“어머니가 없는 아이는 손잡이가 없는 문과 같다”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을 필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위대함을 뜻하는 것이지만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어리석음을 나타낸 말도 많다.
“어머니는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은 자식의 결점이 결점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어머니가 걸치고 있는 에이프런은 넓다.” 자식의 결점을 감싸주고 있다는 뜻이다.
“어머니는 자식의 결점을 감추는 베일이다.” 이런 말은 어릴 적에 많이 들었을 것이다.
√ 사람은 누구나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아이가 나이를 먹을 뿐이다.
서른 살을 먹은 아이, 마흔 살을 먹은 아이, 예순 살을 먹은 아이. 조금 어색한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가 아이들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어린 아이처럼 자기 본위로 제멋대로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다 어릴 적에 귀하게 자랐는가, 고생하며 자랐는가, 부모에게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일생을 따라다닌다.
만약 어떤 사람의 성격을 조사해 보고 싶다면 어렸을 때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가를 연구해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사람은 어릴 적에 이미 성격이 완성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어릴 때 애정을 쏟고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 왜 필요한가 잘 알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나 이 책을 쓰는 필자나 모두가 아이들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기분이 나쁘겠는가? 수염을 기른 아이, 얼굴이 주름 투성이인 아이, 지팡이를 짚은 아이, 애들이 어른으로서 혹은 노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다 훌륭하고, 모두가 어른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 어릴 때는 부모에게 두통 頭痛을 안겨 주지만 성장하며 심통 心痛을 안겨 준다.
아이들은 잘 운다. 자기 자식이라서 아무리 귀엽다 하더라도 아침부터 밤중까지 울어대기만 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그렇지만 이것은 부모에게는 즐겁고 기쁜 두통 頭痛이다.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온 집안을 뛰어다니게 되고 형제끼리 싸움을 하고 호기심에서 온갖 질문을 하여 부모에게 두통을 안겨 준다.
그렇지만 이것은 즐겁다. 이것은 자식을 키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감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곧 당신은 두통에서 해방되리라. 당신은 그 자식들이 훌륭한 청년이 되겠지 하는 바램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지금부턴 당신에게 심통 심통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의 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이것이 당신이 사는 인생인 것이다.
인생, 인생…. 이것은 당신의 자식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유아 乳兒는 부모를 재워주지 않는다. 애가 성장하면 이번엔 두통과 심통을 선물한다”라고 하는 속담도 있다.
√ 어리석은 사람에게 노년 老年은 겨울이다. 현자 賢者에게는 노년이 황금기 黃金期 이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를 먹어간다.
그러면 우리가 젊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대의 라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머리 않아 자신도 나이를 먹고 노년에 들어 선다는 것을 깨닫고 그때를 대비해서 심리적인 준비를 하는 일이다”라고. 이것은 노년을 대비해 자기 자신을 창조해 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짐으로 해서 젊어서부터 노인을 공경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하는가 보다는 인간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소비만능사회 는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는 무엇을 하는가 하는 쪽을 더욱 존중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적인 쪽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의 커머셜이나 잡지 도는 신문에 실려 있는 광고만 하더라도 젊음과 활동적인 것에 과도한 칭찬을 보내고 있다. 젊으이 강조되는 문명사회인 것이다.
장년기에 들어서나 노년에 달하더라도 오직 젊음과 활동적인 건강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와 같은 사회구조에서는 노년은 허무한 패배를 느낄 것이며 계절로 따질 때 겨울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What I do의 쪽이 What I am보다도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노년이 반드시 허무한 패배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는 너무나 가혹한 사회가 아닐는지?
이 속담이 옳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
√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젊은이에게 행복한 노후 老後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에게 ‘점점 젊어지십니다’ 라는 말을 들을 땐 이미 노년에 들어 섰다는 뜻이다.
조금 더 나이를 먹게 되면 화장실에 다녀올 때 바지의 지퍼를 올리는 것도 잊어버린다. 그리고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지퍼를 내리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유태인의 농담이다. 노인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에는 침착성이 있다. 그 이유는 노인은 귀찮을 만큼 잔소리는 하지만 조용하기 때문이다. 또, 노인은 젊은이들에게 착한 일을 권한다. 노인이 선행을 권하는 것은 스스로 나쁜 짓을 하거나 나쁜 본보기를 나타낼 만한 힘이 없어서이다. 그렇게 때문에 노인을 공경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노인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공경하는 자만이 자기도 나이가 들었을 때 남에게 존경 받고 공경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참한 노년을 바라지 않거든 지금이라도 노인을 공경해야 할 것이다.
노인을 소중히 하지 않는 자는 자기도 늙어서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없다.
이것은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부언 附言
“체중은 달 수가 있지만 지성은 달 수가 없다. 체중에는 한도가 있다. 그러나 지성에는 한도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 사람이 현인에게 현인이 된 비결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현인 왈 “나는 오늘날까지 식용유 보다는 등유에 더 많은 돈을 들였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사람은 책에서 가장 큰 지식을 얻는다.”
“사람에 따라서는 공부를 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써서 진실을 알 짬이 없다.”
“스승에게 배우기보다는 동료에게 배우는 쪽이 효과적이며 그보다는 제자로부터 배우는 쪽이 더욱 효과적이다.” <탈무드>
“학교가 없는 마을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탈무드>
“우선 알고 나서 남을 가르쳐라.”
“비만 肥滿한 것과 돈, 만심 慢心 은 기억력에 나쁘다.”
‘귀머거리는 정말 귀머거리가 아니다. 써 놓은 것이라면 읽을 수가 있다. 정말 귀머거리는 남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학자도 당나귀와 비슷한 자가 있다. 그들은 다만 책을 나르고 있을 뿐이다.”
“학자 중에는 값비싼 비단을 잔뜩 싣고 있는 낙타로 비유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낙타와 값비싼 비단은 아무 관계가 없다.”
“게으른 자에게 있어서 두뇌는 장님이 횃불을 들고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무의미한 무거운 짐의 가치밖에 없다.”
“글을 쓰는 것은 수표를 발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상 思想이 없는데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은 은행에 잔고가 없는데 수표를 발행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뱀에게 한 번 물린 사람은 새끼줄 보고도 놀란다.”
“물에 빠진 사람은 칼 끝을 내밀어도 붙잡는다.”
“밖이 안보다 좋아 보여서는 안 된다.”
“현인은 일곱 가지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1.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 앞에서는 듣고 있는 점.
2. 남의 이야기를 가로채지 않는 점.
3. 대답을 하기 전에 생각하는 점.
4. 화제와 관계 있는 질문을 하고 논리에 맞는 답을 하는 점.
5. 할 일은 순서대로 차례차례 처리하는 점.
6.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하는 점.
7. 진실을 늘 존중하는 점.
이 일곱 가지가 현인이 지키는 장점이다.”
“국왕은 나라를 지배하지만, 현인은 국왕을 지배한다.”
“현인은 돈의 고마움을 알고 있으나 부자는 지혜의 고마움을 모른다. 어느 쪽이 위대한가 하면 현인 쪽이 분명히 더 위대하다.”
“현인에게 맞는 것이 어리석은 자에게 키스 받는 것보다 낫다.”
“다섯 사람의 유능한 자가 오백 사람의 무능한 자보다도 낫다.”<탈무드>
“현인은 빵을 자를 때 열 번을 재고 자르고 어리석은 자는 열 번을 자르고도 한 번도 재지 않는다.”
“어떠한 현인이라도 제자의 의견을 듣지 않는 자는 더 이상 새로운 발전은 가져올 수 없다.”
“열매를 많이 맺게 한 나무는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독 안에 금화를 한 개 넣으면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만 가득 차 있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탈무드>
“진주는 진흙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고목은 바람이 불게 되면 큰 소리를 낸다.”
호두나무에서 사과를 따려 착각하지 말라.”
“개를 의자 위에 오르게 내버려 두면 식탁 위에까지 올라오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구두와 비슷한 인간도 있다. 갑이 싸면 갑이 쌀수록 크게 삐걱거린다.”
“동물은 태어날 때 이미 완성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났을 대는 원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원료를 써서 어떻게 훌륭한 인간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부모를 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부모의 교육이 나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한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후에 자식이 생기면 그 자식이 또한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게으른 젊은이는 불평만 늘어놓는 아버지가 된다.”
“한 아버지가 열 명의 자식을 기를 수 있지만 열 명의 자식은 한 사람의 아버지도 보살피지를 못한다.”
“똑똑한 자식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어리석은 자식은 어머니를 슬프게 한다.”
“자식이 학자 앞에 나서면 어리석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현인이다.”
“사람이 아무리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단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자기의 부모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자식한테도 배울 것은 있다.”
“어린아이는 어째서 모두가 좋아할까. 그것은 결점을 지적하는 일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성장하지 않은 어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탈무드>
“적이 되고 만 형제는 그 어떤 적보다도 그 도가 심하다.”
“한 사람의 손자는 세 사람의 자기 자식보다도 귀엽다.”
“나이를 먹고 싶지 않거든 목을 매어라.”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젊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자기가 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젊은 사람은 자기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노인이 집에 있다는 것은 큰 짐이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집에 있는 것은 보배이다.” <탈무드>
‘말과 소는 논과 밭을 갈거나 사람을 태우고 마차를 끌게 하는 것을 가르친다. 나이든 소나 말은 가르칠 수가 없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어린 나무는 바람에 견딜 수 있지만 고목은 바람에 꺾인다.”
“일곱 살 때는 일곱 살답게, 일흔 살 때는 일흔 살답게 행동하라.”
“인간이 태어나면 우리는 축복한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슬퍼한다. 그런데 이것을 바꿔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태어났을 때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을 때는 그가 이룩한 업적이 있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스럿슈>
5 남자와 여자 사이
√ 연애 戀愛가 아무리 멋있더라도 테니스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연애는 멋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특히 청춘 남녀 여러분! 연애는 골프, 낚시, 야구, 입학시험, 비행기의 조종, 저금, 스케이트에는 직접 소용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일상생활에도 소용되지 않는 것이다.
연애는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사랑은 생활의 모든 것을 채운다고?
설마! 연애가 인생의 전부라면 비가 내리고 있는 날에 천정이 없더라도 지붕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추운 겨울 이불 대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랑을 하고 있는 에스키모는 물개의 모피나 얼음 집을 짓지 않고서도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처럼 지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는 빵이나 생선, 야채 또는 커튼, 구두, 전기기구, 칫솔, 월급봉투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생활도구가 필요하다.
이 말은 연애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에 대한 깨우침이다. 유태인은 상식가이므로 연애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며 더구나 정사 情死 를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 정열로 결혼한다 하더라도 정열은 결혼만큼 오래 가지는 않는다.
유태인은 열렬한 연애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유태인의 결혼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태교에서는 성서의 창세기 가운데 신이 인간에게 “낳아라, 늘어나라, 땅에 차거라”라고 명 命한 후, 결혼은 모든 유태인에게 성스러운 의무가 되었다. 히브리어로 결혼은 ‘기도우신’이라고 하는데 ‘성스러운 것’과 똑같은 뜻이다.
“신은 은혜를 대처자에게만 내린다” 고 <탈무드>에 적혀 있다. 그 이유는 독신자는 반 사람 몫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유태교는 ‘율법의 종교’인 것이다. 비행기나 기차도 규칙에 따라 운행된다. 인간도 누구나가 인간의 공동특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기차나 비행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에 있어서 ‘사랑’과 ‘율법’은 어느 쪽이 실패나 좌절을 피하는 데 실질적일까?
선인이 남긴 교훈에 따라 일정한 제약 가운데 살아가는 편이 실패나 좌절을 피하는 데 안전하다는 것이 유태인의 해답이다. 유태인의 지혜와 생활 태도의 기본은 여기에 있다. 유태인은 인생의 삶을 지혜를 가지고 살려고 하는 것이다.
결혼반지는 유태인이 만든 것이다. 이것은 결혼이 시작도 끝도 없을 만큼 길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유태인의 결혼식에서는 신부가 신랑의 둘레를 일곱 번 돌게 돼 있는데 이것도 반지와 마찬가지로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유태인의 속담에
“결혼은 연애의 사발시계이다.”
라고 하는 말이 있다.
결혼은 그리스도 교도가 말하듯 두 사람의 남녀가 하나로 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이 현실을 직시하는 편이 낫다.
√ 금과 은은 열 속에서 제련 製鍊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빛을 발한다.
이 말은 “정열 때문에 결혼한다 하더라도 정열은 결혼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속담을 부연해서 설명하는 데 곧잘 쓰인다.
확실한 것은 금과 은이 열에 의해 달구어져 녹여지지 않으면 아름다운 금기나 은기 銀器 를 만들 수 없다. 만약 열에 의해 녹여서 써야 할 상태가 아니라면 실생활에서 금과 은은 아무런 값어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결혼을 하면 정열보다 차가운 금기 金器나 은기 銀器와 같이 냉정을 되찾아 현실에 대처해야만 즐거운 일생을 보낼 수가 있다.
√ 신은 새로운 부부가 탄생할 때마다 새로운 말을 만든다.
“한 쌍의 남녀가 결혼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세계가 하나 생긴다” 는 속담이 있다.
이 세상에는 두 사람만의 새로운 말이 탄생하는 것이다.
결혼하면 남자는 잃는 것이 있다. 이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탈무드>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있기 때문에 여자가 잃는 것의 이야기는 실려 있지 않다.
어느 때 로마의 황제가 라비 가브리엘에게 물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어느 정도 소중한가? 유태인의 신은 아담을 잠들게 하고 갈비뼈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자는 도둑이 아닌가.”
<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고 되어있다. 라비는 황제에게 그때 누가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면 마땅히 경관을 불렀어야 할 것이라고 대답한 후 덧붙여 말했다.
“어젯밤 저의 집에 도둑이 들어 은수저를 훔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도둑은 금 그릇을 놓고 갔습니다.”
“호오, 아주 운이 좋았네 그려.”
하고 황제는 창세게 때, 처음으로 태양이 떠오른 듯이 눈을 빛냈다.
“네,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어 주신 것도 이와 똑같은 이치입니다.”
남자가 결혼을 하면 잃는 것이란, 수입이나 홀가분한 자유가 없는 것이 잃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가벼운 것을 잃은 대신에 당신은 황금에 비유되는 반려자를 얻은 것이다.
√ 결혼식장의 웨딩마치는 신명이 나는 군가와 비슷하다.
결혼식에 초대되면 경건히 귀를 기울이자. 웨딩마치가 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결혼식일 때는 더욱 잘 듣도록 하자.
결혼식은 두 사람의 군인이 싸움터에 나서는 것과 같다. 결혼식이 시작되면서 이 두 사람은 싸워야 하고 싸우면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리고 늙어가면서 두 사람은 상이용사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살게 될 것이다. 웨딩마치가 화려하고 씩씩한 군가와 비슷한 것은 두 사람이 세상이란 싸움터에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 정렬이란 인간에게 불과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 되지만 한편으로는 불과 같이 위험한 것이다.
불은 인간에게 추위를 쫓아 주고 음식을 익혀 주기도 하고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도구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전기가 발명될 때까지 불이 없었다면 밤에는 책을 아예 읽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은 집을 태우고 파괴하고 전쟁에 사용된다.
사랑, 분노, 일 등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정열은 불과 같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정열은 이따금 자기 자신이나 가정, 그리고 사회를 파괴하고 말 때가 있다.
“정열은 또 하나의 불” 이기 때문이다.
정열이라는 불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 갈 수가 없다. 정열은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정열이라는 불이 인간의 몸을 망치기 때문인 것이다.
옛날에는 유럽이나 일본에서도 해가 지고 난 후 잠들기 전에 방범대원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불조심!’ ‘불조심!’ 하고 외치고 다녔었다.
인간은 매일 정열의 불을 태우고 있다. 그러므로 ‘불조심!’ ‘불조심!’ 하고 자기를 향해 조심할 것을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사랑은 잼과 같이 달콤하긴 하지만 빵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유태인은 결혼하기 전에 우선 자기가 살 집을 마련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결혼 초 처음은 부모가 금전적인 지원을 해 준다.
유태인은 실생활을 대단히 중시한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신이 매일 하늘과 땅 빛과 어둠 같이 두 개의 대립된 것을 만들었던 것은 두 개 모두가 다 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그리스도 교도와 같이 정신생활만을 중시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이 잼만 먹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안 된다. 또 빵만으로는 맛이 없어 안 된다. 이런 속담도 있다.
“사랑은 버터와 같다. 버터를 빵에 바르면 맛이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신은 인간에게 사랑을 부여하였다.
√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도 올바로 보지 못한다.
“질투가 없는 사랑은 진실된 사랑이 아니다”라고 <탈무드>는 가르친다. 그렇다면 에덴 동산에서 단 둘이 살았던 아담과 이브는 질투를 느꼈겠는가?
<탈무드>는 율법집 임과 동시에 ,성서>의 해설서이다. 해설서라고 하기보다는 해석집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라비들이 모여서 <성서>의 뜻을 토론한 것을 녹음기로 녹음해 둔 것과 같다 하겠다. 물론 5세기경엔 녹음기가 없었기 때문에 종이 위에 기록했던 것이다.
그런데 라비들은 질투라는 문제를 토론할 때 창세기가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이브도 아담에게 질투를 느꼈을까?”라고 한 사람의 라비가 의문을 던졌다.
오랜 토론을 거쳐서 나온 결론은,
“이브도 질투를 느꼈다. 질투가 따르지 않는 사랑은 있을 수 없으며 질투를 하지 않는 여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브는 아담이 돌아오면 항상 갈비뼈의 수를 셋 던 것을 상기시켰다.
√ 부드러운 흙으로 만들어진 남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 딱딱한 뼈로 만들어진 여자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이 말은 <탈무드>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지고, 아담의 갈비뼈로서 이브는 만들어졌다.
여가를 기쁘게 해 주는 데 힘이 든다고 하는 것은 남자보다도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여자가 까다롭다는 뜻이 아니다.
남녀가 베드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차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 부부는 성생활을 하는 데 안식일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유는 섹스의 최대의 적은 긴장이기 때문이다.
√ 결혼이란 사슬은 대단히 무겁다. 때로는 부부 두 사람뿐만 아니라 자식들까지도 거들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사람과 한꺼번에 교제하기란 쉬운 일이다. 자기가 싫은 사람은 피하면 되는 것이고 비록 싫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몇 백 명 또는 몇 십 명 중에 하나이므로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만화 –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어 있는 성인 만화 – 에 <피넛 Peanut>이 있다. 일본에서도 스누피 Snoopy라는 개로 유명한 만화이다. 이 만화에서 작가는 스누피 Snoopy의 주인인 찰리 Charlie 브라운 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인류는 사랑해도 인간은 싫어”라고.
대인관계에서 1대1의 교제가 가장 어렵다. 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함께 지내노라면 상대방의 단점이 눈에 두드러지게 띄게 되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가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므로 상대의 단점이 1대1로 나타난다. 그렇게 때문에 자신의 단점도 상대방의 눈에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결혼만큼, 미화하여 전해지고 또 이야기되는 것도 드물다. 결혼이 두려워서 결혼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질까 봐 그런 것일까?
설마! 그렇기야 하겠는가.
한 쌍의 남녀가 공동생활을 영위한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중대사에 있어서 대단한 것이다.
자식들은 부모를 얽어 맨다.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이 성스러운 의무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겠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공동 관심의 대상이다. 부부 사이에 자식이 있음으로써 부부가 1대1의 관계에서 복수의 관계로 변하는 것이다.
자식은 결혼이라고 하는 황금의 ‘사슬’을 함께 날라 주는 것이다.
√ 훌륭한 말[言]에는 뼈가 있다. 현인에게는 충고가 있다. 마음씨가 아름답고 재능이 있는 여자에게 남편이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국왕에게는 왕관, 개미에게는 설탕, 여치에게는 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이 세상에는 무엇이나 짝이 있는 법이다. 이 말은 그 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생각해 볼 때 속담에 설명을 붙인다는 것은 신통한 짝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속담이라고 하는 것은 힌트이다. 힌트에 설명을 길게 하는 것은 “여기에서 한 가지만 힌트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유태인 사회에서는 남자나 여자가 결혼할 연령이 지나도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남자나 여자나 완전한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여성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세계의 공통점인가 보다.
왜?
다음의 속담이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여자가 남자보다도 일찍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여자의 나쁜 짓은 남의 눈에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 남자가 결혼하면 신부에게는 계약서를 안겨 주고 모친에게는 이연장 離緣狀을 내야 한다.
유태인은 공리적 公理的인 민족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유태인의 지혜는 오랜 경험에 의한 것이다.
유태인은 결혼해선 부모와 한집에 살지 않는다. 그 대신 부모는 신혼부부가 살 새로운 보금자리를 장만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살지를 않는다.
그것은 고부간 姑婦間이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편이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부간엔 원활한 대화가 오고 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자면 “왜?” 하고 반문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물은 위에서 밑으로 흐른다 – 는 법칙과 같은 것이다.
“한집에 고부가 함께 사는 것은 두 마리의 고양이를 하나의 가방 속에 넣어 기르는 것과 같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지붕 밑에 같이 살 수 있을까. 이것은 한 오두막에 호랑이와 산양을 넣어 기르려는 것과 같다.” 라는 속담도 있다. 더욱 강한 경우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한 차에 타서는 안 된다.” 라는 속담도 있다.
이 속담은 남자들이 하는 재미있는 속담이다.
“아담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운아였다. 그것은 장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 결혼을 할 때는 이혼도 생각해야 한다.
이 속담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태민족에게는 한 가지는 앞에서도 한 이야기지만 “자식이 결혼할 때는 먼저 어머니에게 이연장 離緣狀 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룰이다. 즉 아내를 맞아 결혼을 할 때는 자기 어머니와 인연을 끊어도 좋을 정도의 여성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자기가 맞은 신부와 장래엔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결혼이란 언제나 이혼이라는 소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유태인의 이혼율은 대단히 낮다. 이것은 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충고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한 사람의 라비로써 오랫동안 여러 가지 부부간의 문제점을 상담해 왔지만 이혼의 가장 큰 원인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그 하나가 고부간의 문제로써 시어머니에 대한 불평이 이혼에 많은 문제점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부부가 서로 철이 없다고나 할까, 몸은 성장했으나 정신이 성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한 경우이다. ‘철이 없다’ 는 것은 서로의 기대만 클 뿐, 책임감이 없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결혼할 때는 이 두 가지 외에도 신중히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초혼은 하늘에 의해 맺어지고 재혼은 인간에 의해 맺어진다.
유태교는 이혼은 허락이 된다. 물론 이혼은 좋은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이혼을 해야 하는 부부는 라비를 찾아가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부부로써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만 받게 되면 이혼이 허용된다.
결혼 – 누구나 하는 것이지만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불행을 감수하면서 결혼생활을 계속할 필요는 없다. 좋은 만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날개를 얻는 것과 같지만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이 진실로 서로가 서로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가를 잘 생각도 해 보지 않고, 반려자를 고독을 내쫓는 문지기로서 생각하기 쉽다. 유태인은 남녀가 20대 중반에 이르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성서>에는 “낳아라, 늘려라” 라는 명령이 적혀 있는 것이다.
결혼은 의무인 것이다. 결혼은 여섯 가지 요소로 성립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 중 하나가 애정이며 나머지 다섯 가지는 신뢰라고 한다.
인간이 결혼을 하게 되면 첫 3주간은 서로가 관찰하고 그 다음 3개월간은 서로가 사랑하며 그 다음 3년간 서로가 싸움을 하고 지내며 그 다음 30년간은 서로가 용서하며 산다고 한다. 이런 말이 있다. 독신자는 공작새, 약혼한 남자는 사자처럼 굴고 결혼하면 우마 牛馬가 된다.
왜 결혼하면 우마가 될까? 그것은 여자의 책임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할 때에는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결혼을 할 때는 걸어야 하고 이혼을 할 때는 뛰어야 한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 – 이 말은 유태인의 말이 아니다. 그러나 유태인 속담에 “결혼은 연애의 사발시계(잠을 깨우기 위한)” 라고 하는 말이 있다.
“결혼이란 맥주를 마시고 맛있다고 탄복한 사람이 그 맥주를 제조하는 양조장에 취직하러 가는 것과 같다” 라는 말도 있다.
거듭 중복되는 이야기다. 결혼상대를 고르는 데에 있어서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법이란 없다. 결혼을 하기 위해 뛰어서는 안 된다. 천천히 걸어라. 그러면 여유가 생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너무 급히 서둘러 결혼을 하는 남녀가 의외로 많다. 너무 성급하면 실수가 뒤따른다.
유태교는 현실적인 까닭에 그리스도교처럼 이혼을 금하거나 죄악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태교가 이혼을 권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이혼이란 말할 것도 없이 불행한 일이다. 그렇게 때문에 부부가 노력한다.
어차피 헤어져야 할 불행한 결합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는 것이 낫다. 이혼을 할 때는 뛰어라 는 것은 빠를수록 좋기 때문이다.
결혼은 쉽지만 이혼은 어렵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결혼을 할 때는 뛰어가고 이혼을 할 때는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다.
√ 성생활은 내[川]와 같다. 너무 격렬하면 범람하고 생명을 파괴한다. 적당할 때 생의 풍요함을 맛볼 수 있다.
이 말은 <탈무드>에 기록돼 있다. 유태인의 속담에는 내[川]로 비유한 것이 많다. 유태인은 중용 中庸을 소중히 생각한다. 냇물도 적당히 흐르고 있지 않으면 둑이 무너지고 홍수가 나는 것이다.
<탈무드>는 인생도 내로 비유한다. 균형이 잡혀 있어야 섹스나 인생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중용을 소중히 하는 것은 현실적이며 어느 의미에서는 지혜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 이상적인 남성이란 남자의 힘과 여자의 상냥함을 겸비한 사람이다.
유태인은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것을 싫어한다. 신이 하늘과 땅, 그리고 빛과 어둠 같이 대립되는 것을 만든 것은 균형의 조화를 이루려는 뜻과 인간이 항상 대립하는 것을 갖추고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이려고 한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이 사는 지구는 항상 두 가지가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균형을 잡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 나는 이 책에서도 몇 번씩이나 이 말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인 남자란 그 남자에게 남자의 씩씩함과 여자의 상냥함이 공존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 때문인 것이다.
√ 남자는 양쪽 뺨 사이와 두 다시 사이에서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양 볼 사이에는 입이 있다. 그러면 두 다리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지 당신도 잘 알 것이다. 입이 가벼운 사람은 자신을 망친다. 누구나 입을 조심하지 않으면 스스로 파멸하게 된다. 뒤의 이야기도 똑같은 것이다.
<성서>에는 맨 처음 인류의 남자와 여자가 만났을 때 “아담은 이브를 안았다”라고 씌어있다. 히브리어로는 ‘섹스’와 ‘안다’ 라고 하는 말은 같은 것으로 ‘야아다’라고 한다. 즉 섹스를 하는 것과 상대를 안는 것은 같은 말이다.
말하는 것과 안는 것은 공히 지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 여자와 싸움을 하는 것은 우산을 받고 샤워를 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심리학의 최고 권위자 프로이트도 유태인이다.
프로이트 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30년간, 여자의 마음을 해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직 그 해답을 얻지 못했다…. 최대의 질문은 이렇다. 도대체 여자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몇 만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성서>의 창세기에서는 신은 아담이 잠들고 있을 때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빼서 인류최초의 여성인 이브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고대의 라비들은 이마를 마주 대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신은 아담이 잠들고 있을 때 무단히 갈비뼈 한 개를 빼낸 것이다. 이것은 ‘도둑’이 아닌가? 어찌하여 신이 아담의 갈비뼈를 훔쳐서 이브를 만들었을까? <성서>에 신이 훔친 일을 한 것은 1회밖에 씌어져 있지 않다.
드디어 나이가 제일 많은 라비가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하나님이 도둑의 결과는 시원찮다 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이 말은 여자를 시원찮다 고 하는 거 같지만 토론의 결과이다.
여성독자 여러분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이다.
부언 附言
“첫사랑의 여성과 결혼하는 것만큼 운이 좋은 사람도 없다.”
“인간에게 늦어도 상관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결혼과 죽음이다.”
“미인이란 보는 것이지 결혼할 것은 아니다.”
“남자가 여자를 꾀는 것은 당연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꾀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 이유는 남자는 자기가 잃은 것을 되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탈무드>
“신부는 아름답게 보이며 사자 死者는 거룩해 보인다. 그렇다고 모든 결혼이 경사롭고 모든 주검이 경건한 것은 아니다.”
“남자는 우선 집을 세우고 밭에다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원을 만들고 난 후 아내를 맞아야 한다. 이 순서를 바꿔 해서는 안 된다.”
“아내는 남편에게 신혼 초에는 창부 娼婦와 같이, 그 다음에는 비서 비서와 같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간호원과 같아야 한다.”
“신은 여자의 눈물을 헤아린다.”
‘남성이 여성과 관계를 가지고 기뻐하거나 슬퍼하면 그것은 남자가 젊다는 증거이다. 중년이 되면 어떤 여성과도 즐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과 만나서 즐거움이나 슬픔이 없으면 남성이 노년에 접어든 증거이다.”
‘열 나라를 아는 일이 자기의 마누라를 아는 것보다 쉽다.”
“남자를 늙게 하는 것이 네 가지 있다. 불만과 분노, 그리고 자식과, 악처이다.”
“아무리 사랑이 소중하다 하더라고 사랑할 상대가 없으면 아무런 뜻이 없다.”
“열렬한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때는 자기에게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에게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유리 눈을 끼고 있다.”
“인간은 세 가지를 숨길 수가 없다. 그것은 기침과 가난과 사랑이다.”
“사랑을 하고 있는 딸을 집안에 붙잡아 두는 것은 백 마리의 벼룩을 우리 안에 가둬두는 것보다 어렵다.”
“여자는 여섯 살이 되거나 예순 살이 되더라도 웨딩마치 소리가 들려오면 들뜨기 시작한다.”
“여자를 아는 데는 세 가지가 있다. 요리와, 복장과 그 남편이다. 이 세 가지는 여자가 만든다.”
“딸을 학자에게 시집 보내기 위해서라면 당신의 재산을 몽땅 들여도 좋다.”
“서로가 재혼인 사람끼리 결혼하면 침대에는 네 사람의 남녀가 자게 된다.” <탈무드>
6 구설 口舌 의 화 禍
√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은 문이 닫히지 않은 집과 같다.
“유태인이 두 사람 모이면 세 사람 몫의 의견이 나온다”는 속담이 있다. 유태인에게 질문을 하면 질문으로 되돌아온다고 말할 만큼 유태인은 호기심이 많다. 어쨌든 유태인만큼 잘 지껄이는 민족도 없다.
이 경구 驚句 는 <탈무드>에 실려 있지만 기원 전 5백 년부터 기원 후 5백 년 사이에 수만 면의 라비가 토론한 과정이나 그 결과가 수록된 이 성전은 혼자서는 평생을 읽어도 다 읽지 못할 만큼 방대한 양이라 말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탈무드>에는 입에 대한 경구가 많다. “조심해서 말하라” “비밀을 말하지 말라” “잘 들어라” 라고 하는 것들이다.
유럽의 어느 유태인가에 수다쟁이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말을 꺼내면 청산유수 격으로 잠시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상대방에게는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느 날, 이 사나이가 이웃 유태인가에 찾아가 라비를 방문하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마을의 라비가 당신을 욕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럴 리가 있나!”
라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몇 번이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바로 이 귀로 들었습니다.”
사나이도 지지 않고 목청을 돋구어 말했다.
“거짓말이다! 자네 하고 있었으면 그 라비는 한 마디도 말할 틈이 없었을 텐데 무슨 소리냐.”
이 이야기는 유태인의 조크 이다.
√ 새장에서 날려 보낸 새는 다시 잡을 수가 있지만 입에서 한 번 나온 말은 다시 담을 수가 없다.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비밀을 지키고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어느 현인이 받았다. 비밀을 비밀로 간직하는 일이란 현인이라도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이 질문에 현인이 대답했다.
“나는 나의 마음을, 비밀을 묻는 무덤으로 삼고 있다.”
비밀은 금전처럼 간직해도 조금만 방심하면 새나가고 만다. 돈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순간까지 잘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비밀은 돈보다도 위험한 것이다.
비밀을 지켜야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요주의 라고 쓴 빨간 딱지를 붙일 것을 명심하라. 다른 사람과 만나 그 비밀을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거든 이 빨간 딱지를 생각해내야 하는 것이다.
남의 욕이나 중상도 마찬가지이다. 말이란 마치 날이 시퍼렇게 선 칼 같은 것이므로 자기를 다치게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당나귀는 긴 귀를 보고 알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긴 혀를 보고 알 수 있다.
당나귀는 길다란 귀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당나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당나귀는 오랫동안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가 되어 왔다.
어리석은 사람의 최대의 적은 누구인가, 바로 그 자신이다. 또 자신이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남이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당나귀의 귀와 같이 긴 혀를 써서 이야기를 꺼내게 되므로 남이 어리석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혀는 쓰면 쓸수록 길어진다고들 하는데 아무리 써도 현명한 자가 이야기할 때와 달라서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 당신의 혀는 뼈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이 말은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하지 말라는 경구이다.
혀에게 재주를 가르치는 것은 어렵다. 너무 말을 많이 하지 말아라, 비밀을 지켜라, 혀를 움직이기 전에 잠시 생각해 보아라 하는 말을 항상 혀에게 가르쳐도 혀는 어느새 그것을 잊고 만다. 그것은 혀에는 뼈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혀는 당신 생애의 운명을 지배하는 중요한 몸의 부분이 연체동물 軟體動物 임을, 항상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입을 잘못 놀렸기 때문에 비밀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침묵을 지켜야만 할 때 혀를 놀렸기 때문에, 인생에서 커다란 손해를 본 사람이 많다. 당신은 일생을 혀와 함께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혀는 마치 자기의 의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저절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인간의 ‘제2의 얼굴’이라고 말한다. 너무 입을 오래 벌리고 있으면 자기의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된다. 자신을 상실할 위험이 있지 않는가?
말을 아껴두면 언제든지 필요할 때 사용하지만 한번 뱉어버린 한 마디 말을 주워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 입보다도 귀를 높은 자리에 앉혀라.
인간은 입 때문에 망하는 수가 종종 있지만 귀 때문에 망하는 일은 없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독자 여러분들은 말 수가 많이 줄어질는지 모른다. 유태인에게는 말이 많은 것을 금하는 속담이 꽤 많다. 이러한 속담이 너무 많다고 하여 귀찮게 생각하기보다는 말을 조심하라는 속담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야만 옳을 것이다.
입은 스스로를 주장한다. 귀는 다름 사람의 주장을 듣는다. 물론 이것은 필요이상의 말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지 해야 할 말까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의사를 남에게 밝히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 인간의 에고 – 자기를 남에게 눌러 붙이려고 하는 힘 – 는 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말이 많아진다. 따라서 말이 많은 것을 자꾸 타이른다 하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동물은 입이 하나밖에 없는데 귀와 눈이 두 개씩 있는 것은 주위의 것을 잘 보고 소리를 듣지 않으면 생존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잘 보고, 잘 들을 것. 이것이 동물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울들의 일상 생활에 좋은 교훈이 될 것 같다.
√ 어리석은 방언은 장례식장에서 화려한 음악이 들려오는 것과 같다.
유태인 세계는 말이 범람하고 있다. 그렇다고 유태인은 말에만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쟁기와 가래와 기관총이 만든 나라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노인은 <성서>에 매달리고 젊은이는 소설에 매달리고 있다고도 한다.
말로써 사람을 1백만 명을 모일 수 있게 한다 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담배갑은 한 치도 움직이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네 이스라엘에서는 동시에 사막 위에 비닐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야채나 과일을 재배하고 넓은 사막을 녹지로 바꾸는 일과 같은 것도 해낸다. 유태인은 어떤 어려운 일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유태인은 잘 떠들고, 말이 많다고들 한다. 그러게 때문에 경구가 많은 것이다.
√ 인간은 태어나서 바로 말을 배우지만 침묵은 처음부터 배우지를 않는다.
이 말도 그렇다.
유태인은 토론이나 논쟁을 좋아하고 말을 잘한다. 한 마디면 족할 것을 아마 열 마디도 더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변 多辯에 대한 경구가 많다. 이것은 꼭 유태인에 한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필요 이상의 말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약점일 것이다.
“지혜를 지켜주는 담은 침묵이다.”
이 말은 누구나 명심해야 할 처세의 기본이다.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입을 함부로 열었거나 쓸데없이 한 마디 더 한 것을 뉘우치는 일은 많아도 침묵했던 것을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지혜를, 말한다는 것은 뉘우침을 가져오는 수가 허다하다.
침묵도 하나의 언어이다. 이 말을 배우는 것은 어휘를 풍부히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많이 알고 있더라도 침묵하지 못한다면 “네”나 “아닙니다”, “좋다”, “싫다” 라는 기본적인 언어를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아첨에 속하는 말은 고양이와 같이 남을 핥는다. 그러나 그 말은 언젠가는 자기에게 되돌아 온다.
현인이며 유명한 라비 슈멜케를 어느 도시에서 초청했다. 그것ㅇ느 그 도신의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초대였다.
라비 슈멜케가 그 도시에 도착하여, 여관에 들어가선 방안에 들어박혀 몇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나오지를 않았다. 환영회의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 환영회의 절차에 대해서 의논을 해야 했다. 슈멜케를 기다리다 못한 그 소시의 대표가 걱정되어 슈멜케의 방을 찾았다.
도시의 대표가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슈멜케는 방안을 왔다갔다 하는 것 같더니 소리 높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라비 슈멜케, 당신은 훌륭하다! 라비여, 당신은 천재이다! 당신은 우리들 평생의 지도자이다!” 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10여분을 듣고 있던 도시의 대표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 대표는 라비가 어째서 이러한 기묘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묻게 되었다. 슈멜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자신이 빈말이나 추켜세우는 말에 약한 것을 잘 알고 있소. 오늘밤은 모두가 나에게 최대의 찬사로써 추켜세울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난 그에 익숙하게 되려고 하는 것이오. 인간은 또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는 우스꽝스러움은 알고 있는 법이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지금 한 말을 오늘밤 또 듣게 된다면 내가 그 칭찬에 약해지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소.”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너무 추켜세워서는 안 된다. 남을 칭찬할 때는 그 사람이 없는 데서 해야 한다.” 이 속담은 칭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진실도 말을 해서 안 되는 것이 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누구나 어릴 때부터 수백 번은 들어서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진실만 이야기해야 한다고 당신은 교육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진실 가운데에도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해치는 진실이다. 진실은 분명히 진실인데도 거짓말보다도 못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못생긴 여성 앞에서 “당신은 정말 못 생겼다.” 라고 말해서는 되겠는가? 종기가 난 사람 앞에서 종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안 된다. 남편의 사업이 도산된 집에 가서 그 부인에게 사업에 실패한 화제를 꺼낼 필요가 어디 있는가.
도 한가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진실은 비밀이다. 자기의 비밀, 남의 비밀을 말해서는 안 된다. 진실로 거짓말과 거의 같을 정도로 위험한 것이다. 진실로 면도날 같이 주의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 거짓말쟁이는 뛰어난 기억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유태교는 <율법의 종교>이다. 물론 계율을 지키는 경건한 유태인이라면 율법은 신의 명령이므로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태인은 옛날부터 어찌된 영문인지 지극히 현실적이며 타산이 강했다. 모세가 시나이 산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천주의 십계” 도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라는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가장 살기 좋다고 하는 것을 경험에 의해 발견했으므로 성스러운 가르침으로 삼았을 것이다. 사실 <성서>는 의학이나 섹스의 구체적인 하우 투 How to로 가득 차 있다. <성서>는 처세술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이 <탈무드>의 말도, 거짓말쟁이는 계산이 안 맞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진실로 말해서 어떤 득이 있는가. 진실을 얘기하고는 무엇을 말했는지 외워둘 필요가 없다”라는 속담도 있다.
도덕은 어느 나라에서나 불타는 정의감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생활의 도덕을 지킬 때 모든 게 편리하므로 생겨난 것이다. 유태인은 특히 현실적이므로 그리스도교와 같이 추상적이고 애매한 도덕을 앞세우기보다는 율법에 의해 구체적으로 인간의 올바른 행동을 정한 것이다. 율법에 의해서 정해진 도덕이 훨씬 실질적인 것이다. 거짓말을 하면 그 당장에는 얼마간의 득이 있을지 모르나 긴 안목으로 볼 때 거짓말은 경제적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망치게 되는 것이다.
√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할 말을 못하는 고통이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남이 모르는 비밀을 자기만이 알고 있다는 것은 우선 우월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비밀이 상대방에 관계돼 있는 데도 상대방은 그것을 모르고 있을 경우엔 더욱 우쭐할 것이다.
인간은 우월감을 갖고 싶은 욕망은 몹시 강하다. 비밀을 지키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인간의 우월감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인간은 고독에서 해방되고 싶은 강한 욕망도 있다. 혼자라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남에게 애기할 성질이 아닌 것을 다 털어 놓는다는 것은 남과 얘기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처한 고독에서 빠져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직접 사물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읽고 듣고 하는 것에서도 경험하므로 남에게 얘기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자기의 경험을 함께 나누어 갖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한 사람에게 얘기할 수 없는 것 같이 큰 고통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시간이나 소유물이나 아니면 정보를 서로 나누어 갖기 때문에 친해져 가는 것이다. 친근함이란 서로 나누어 갖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간에 사람은 비밀을 혼자만 간직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 당신의 친구는 또 다른 친구가 있으며 그 친구는 또 친구가 있다. 그 친구 또한 자기 친구가 있으므로 친구에게도 말을 조심해서 해야 된다.
자기가 들은 비밀을 남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은 어느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성서>의 잠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똑같은 말을 여러 사람에게 되풀이하는 사람은 친한 친구를 떨어져 나가게 한다.”
비밀은 어떠한 경우라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의 입은 금고라 할 수 있다. 금고를 너무 자주 열어서는 안 된다.
입을 금고로 비유한다면, 그 금고를 여는 회수에 따라 그 사람의 경제적 사정을 알 수 있다. 자주 금고를 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며 그 반대인 사람은 부자가 아니겠는가? 입도 마찬가지다. 가끔 열어야 좋을 것이다.
이 경구 또한 남의 말을 입에 담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중상이나 험담은 가까운 친구의 입에서 또 다른 친구의 입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당신은 험담한 사람의 원한을 사게 되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누에이다. 항상 입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지도를 펴 보라. 이스라엘은 지중해 연안에 벌레와 같은 형상으로 길게 누워 있다. 옛날 이스라엘도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입을 움직이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항상 기도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경건한 유태인일수록 열심히 기도를 한다. 유태인에게 있어서는 배우는 것이 신에 봉사하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태인은 교육에 열심이었다. 다른 민족이 신들에게 기도를 하고 있었을 때 유태인은 배우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일상생활 자체가 배우는 생활이었기 때문에 유태인의 교육수준은 언제나 높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교육을 받아온 덕택으로 오늘날 유태교를 떠난 유태인이라 하더라도 배운다는 것은 수천 년 동안에 몸에 밴 습성이 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태인은 똑똑하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것은 머리가 우수해서라기보다는 항상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면 알기 마련이다. 소금도 먹은 놈이 물을 켠다고 하지 않는가?
√ 물고기는 언제나 입에 낚시 바늘이 걸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입 때문에 난처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누에이다. 항상 입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앞에서 말한 것은 유태인이 항상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것을 나쁘게 본다면 잘 떠벌린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탈무드>는 이 속담 뒤에
“한 번 낚시에 걸렸던 물고기는 두 번 다시 낚시에 걸리지를 않는데 어리석은 인간은 또 다시 걸려 든다”
라고 적고 있다.
부언 附言
“현인은 자기 눈으로 본 것을 말하고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귀로 들은 것을 남에게 말한다.”
“귀는 소리를 듣고 눈은 사물을 본다. 그러나 스스로의 의지로는 정할 수 없다. 그러나 입은 자기의 뜻대로 된다.”
“혀는 마음의 펜이다”
“남의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자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잘 들어라.”
“자기의 말은 자기가 건너는 다리라고 생각하라. 튼튼한 다리가 아니면 당신은 건너려 하지 않을 테니까.”
“질이 좋지 않은 혀는 질이 좋지 않은 손보다도 더 못하다.”
“현명한 말도 현명한 행동에게는 진다.”
“한 가지 예를 드는 것은 한 가지 예를 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이란 말을 듣거든 그것은 예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말이란 약과 같은 것이다. 신중하게 재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얻어 맞은 아픔은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모욕 당한 말은 영원히 남는다.”
“생각 없이 하는 말이 사람의 귀에 거슬리는 것이 많다.”
“급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잘못을 많이 저지른다.”
“말이 당신의 입 안에 들어 있는 한, 말은 당신의 노예이지만 일단 입밖에 나오게 되면 당신의 주인이 된다.”
“당신이 비밀을 숨기고 있는 한, 비밀은 당신의 수인 囚人 이다. 그러나 당신이 비밀을 말하고 난 순간부터 당신은 비밀의 수인 囚人이 된다.”
“밤에 말할 때는 목소리를 낮추어라. 낮에 이야기할 때는 주위를 잘 살펴라.”
“사방이 훤히 보이는 허허벌판이라도 흙더미가 조금이라도 쌓인 곳이 있거든 비밀을 말하지 말라.”
“여자에게 비밀을 말하기 전에 여자의 혀를 잘라라.”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보다는 낫다.”
“중상은 어떤 무기보다도 무섭다. 화살은 나르는 범위가 한정돼 있지만 중상은 아무리 먼 곳도 파괴할 수 있다.”
“선인도 입이 더러운 사람은 질공장 옆에 세워진 궁전과 같다. 아무리 장려 壯麗한 궁전이라도 이 한 가지 결점으로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고 만다.” <탈무드>
“한 번의 거짓말과 두 번의 거짓말은 분명한 거짓말이나, 세 번의 거짓말은 정치적인 것이다.”
“거짓말이란 거짓말은 모두 금지되어 있으나 단 한 가지 거짓말을 예외가 있다. 그것은 평화를 가져다 주게 하는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중매쟁이가 될 수 없다.”
“그 어머니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이웃의 말을 믿어라.” <탈무드>
“너무 많은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너무 지나치게 물어대면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게 알고 싶거든 천국으로 오라'”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로 우는 새라도 식사할 때는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침묵도 한 가지 답변이다.”
“웅변스러운 침묵도 있을 수 있다.”
“침묵은 현자를 더욱 현명하게 한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침묵은 금보다 더 중요하다.”
“어리석은 자가 현인인 체하기는 매우 쉽다. 그것은 침묵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도 침묵을 지키면 현명한 사람으로 보인다.”
“어리석은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방법은 너무 쉽다. 그 사람의 입 [말 수]을 보면 안다.”
“너무 떠벌리는 사람은 고장 난 시계가 맞지 않는 시간을 가리키고 잇는 시계와 같다. 말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고장이 나서 움직이지 않는 시계와 같다. 둘 중 어느 것이 나은가? 그것은 뒤의 경우가 한결 낫다.”
“우리의 혼 조차 휴식이 필요하므로 사람은 잠을 잔다. 입에게도 휴식할 시간을 주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싸움을 끝내는 데 제일 좋은 약은 침묵이다. 약으로선 최고이다.”
‘만약 인생을 즐겁게 살고 싶거든 코로 공기를 마시고 입은 똑 다물어두라.”
7 사교술
√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지나치게 가깝겐 하지 말라.
“친구란 석탄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탈무드>에 있는 말이다. 타고 있는 석탄이 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따뜻할 리가 없다. 그러나 석탄불에 몸이 닿으면 타버리고 만다.
이 말은 아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사람이 인간을 독점하려 들어선 안 된다.
√ 애매한 벗이 되기보다는 뚜렷한 적이 되어라.
사람이 가장 다루기 힘든 것은 애매한 친구이다. 과연 참다운 친구인지, 아니면 적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정말 난처하다. 사람은 누구나 친구를 만나게 되면 경계심을 풀게 된다. 그러나 상대방이 뚜렷한 적인 것을 안다면, 이적행위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친구를 사귈 때 애매한 행동은 금물이다. 애매한 친구가 되느니 뚜렷한 적이 되는 편이 훨씬 낫다.
√ 어떠한 사람도 접근하면 작아진다.
이스라엘 벤 애라이저는 18세기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위대한 유태인 사상가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람이 물가에서 물을 들여다보면 처음은 자기 모습이 크게 비친다. 점점 허리를 굽혀 물과 가까워지면 자기 모습은 실물의 크기와 비슷해진다. 이것과 같이 어떠한 사람이라도 가까이 가면 작아지는 법이다.” 왕이나 독재자라도 잘 알고 있으면 등신대 等身大로 보이는 것이다. 자기가 남과 비교해서 작게 보이는 것은 자신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술 파는 여자와 키스를 했거든 그 즉시 이빨을 세어보아라.
산양은 앞에서 접근하지 말고, 말은 뒤에서 접근하지 말라. 그것은 산양의 앞으로 접근하면 그 뿔에 받힐 것이고 말이 서 있는 뒤로 접근을 하면 뒷발에 차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술집여자는 그 어느 쪽으로라도 접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사람에게는 착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다. 착한 마음이 움직일 때는 남을 이해하고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는 사이에 자기도 그 사람의 몸이 되어 생각하게 되는 수도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착한 마음씨도 칼날과 같은 것이어서 자기를 해치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악인 악녀와 교제하게 되면 반드시 상실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이 속담은 좀 단순한 것이지만, 나쁜 곳에 갔거든 호주머니를 잔뜩 움켜쥐어라 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흔히 경계심을 가져야 할 때도 자기의 착한 마음씨만 믿고 경계를 잃을 때가 있다. 무엇이나 잃고 나서는 이미 늦은 것이다. ‘술집여자’는 대체고 생각할 때 악녀의 상징이다. 술집 여자라고 다 악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비록 그 안에 착한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쁜 환경에 처해 잇는 여자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흘을 굶고 남의 집 담을 안 뛰어넘을 자가 많은 인간 중에서 몇 사람이나 될까?
√ 선인이 술집에 간다고 악인이 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배당에 간다고 하여 악인이 선해질 리는 없다.
이 말을 굳디 따진다면 앞의 속담과는 모순된다.
우리는 곧잘 속담을 들어 이야기한다. 그런데 속담 그 자체를 절대적인 진리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단,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려고 할 때는 속담을 인용하는 것만큼 편리한 것은 없다. 그런 만큼 속담이란 설교할 때나 결혼식의 주례사에는 곧잘 인용한다.
그러면 한 가지 유태인의 일화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어느 고을에 경건한 신자인 체하며 매주 예배당에 다니고 있는 품행이 좋지 못한 사나이가 있었다.
어느 날 라비가 그를 불러 품행을 좀 올바로 갖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그 사나이의 대답이
“나는 정해진 날에 반드시 예배당에 가는 경건한 신자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나이의 대답을 들은 라비는 그를 타일러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동물원에 매일 간다고 하여 동물을 사랑한다고는 말하 수 없지 않소.”
√ 노인이 젊은 아내를 얻으면 노인은 젊어지고 젊은 아내는 늙는다.
이 말은 ‘꿀을 다루고 있는 사람이면 꿀의 맛이라도 볼 수가 있다’ 라고 하는 이야기와 향수점에서 일하던 향수냄새가 풍긴다고 하는 속담과 같은 류의 속담이다. 사랑이 함께 살다 보면 상대방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나이 먹은 남편이 젊어지지 않고 아내가 언제까지나 아이들처럼 새파랗게 젊어있다면 이 결혼은 잘 되어 갈 수가 없지 않은가?
“시대사조 時代思潮”란 말이 있다.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헤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사람은 시대의 수인 囚人인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다. 주위와 발을 맞추지 않고 살아가기란 힘들다.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한다.
자기가 교제하는 친구의 범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시대사조”, 이 것은 “우인사조 友人思潮”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태어난 시대와 마찬가지로 교제하는 범위의 사람들의 수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생을 편안히 살아가자면 모든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 꿀을 다루면 맛이라도 볼 수 있다.
나쁜 환경에 처한 사람은 아무래도 나쁜 영향을 받기 쉽다.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환경은 인간에게 협조성이 있어 극히 높은 적응성이 있기 대문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교제할 때는 그 사람이 몸을 두고 있는 환경이나 그 사람의 전신 前身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 사람은 자기가 자라온 세계나 그 시점에서 몸을 두고 있는 환경의 척도를 몸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누구나 착한 것은 부인할 수 없겠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승원 僧院 에서 자란 사람이나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자가 무신론자이거나 악인이 되는 일이 드물듯이 술집 여자나 도박장 – 카지노에서 일하는 자기 정직하다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다.
자기가 올바로 살며, 가족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확립이 돼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부단한 노력으로 꿋꿋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 향수 香水 를 가까이 하면 향 냄새가 옮긴다.
앞의 두 속담과 마찬가지로 좋은 친구를 골라라. 인간은 누구나가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권유하는 것이다.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고,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인간됨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반대되는 속담이다.
“빗자루는 우리 주위를 깨끗이 할 수 있지만 빗자루 자체는 더러워진다.”
이것은 현명하고 고결한 라비가 악인을 선도하고 있는 사이에 라비 자신이 악인을 닮아간다고 한다. 그러므로 범인 凡人이라면 친구를 사귈 때는 좋지 못한 일에나 나쁜 것에 물들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밀가루 장수와 굴뚝 청소부가 싸움을 하게 되면 밀가루 장수는 검어지고 청소부는 하얗게 된다.
현인 賢人이란 범인 凡人과 달라 싸움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일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재산은 무엇일까? 친구이다. 인간은 누구나 일생 동안에 만나는 사람의 수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좀 있지만, 한정돼 있다.
싸움은 자기의 재산을 줄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싸움을 해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싸움은 졸렬한 자기 주장의 하나다. 현인은 자기를 주장할 때는 좀더 온건한 방법을 취한다.
감정에 휩쓸려 자기를 내세우려 할 때 싸움이 일어난다. 지혜를 갖고 상대를 설득하려고 하는 사람은 감정을 나타내지를 않는다. 어느 한 쪽이 감적을 내세우면 상대방도 감정을 폭발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인은 상대가 감정적으로 나오더라도 자기의 감정을 좀처럼 나타내지 않는다.
싸움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 식객 食客과 생선은 3일만 되면 악취가 풍긴다.
남의 집에 초대되어 그 가족들에게 대환영 받는다 하더라도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된다. 탈무드에
“손님은 비와 같다. 비가 적당히 내리며 모두가 좋아하지만 계속 내리면 실증이 난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와 같은 속담은 많다.
“손님에게 첫날에는 닭을 잡아 대접하지만 이튿날에는 계란을, 삼 일째에는 콩이 대접된다.”
지금은 바야흐로 스피드 시대이다. 옛날의 하루는 오늘의 2~3시간이 돼버리고 만 것이다. 주인 측에도 문제가 있다. 찾아오는 손님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쉽지만 돌려보내고 싶은 손님에 대해 문을 여는 것은 힘들다. 그리고 그 동안에 집안 사람들의 표정은 시계 대신이 돼버린다.
그렇다고 초대를 받은 이상 너무 일찍 돌아서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중용 – 즉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어쨌든 간에 사람은 극단을 달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 평판이 최고의 소개장이다.
아키바는 탈무드에 나오는 위대한 라비였다.
이 아키바가 임종할 무렵 그의 아들이 말했다.
“아버님, 아버님 친구분들에게 제가 얼마나 학문이 높은 자,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이 아들도 아버지를 닮은 아버지 못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키바는 아들이게 대답했다.
“내 아들아, 나는 너를 추천하지 않겠다. 내가 너를 추천하지 않아도 너의 평판이 최고의 소개장이다.”
이 이야기처럼 평판은 항상 수천의 소개장이 이 세상 앞으로 발급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업적이 갖는 목소리이다. 또한 업적만큼 설득력 있는 대변자도 없다. 업적이 남기는 목소리는 높고 널리 아주 멀리 전해진다.
√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진정한 화해는 이뤄질 수 없다.
이 말은 고전인 <미드렷슈>에 있는 가르침이다.
화해를 하는 마당에 이따금 한 사람만이 잘못을 인정할 때가 있다. 이것을 화해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타협에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쌍방이 같은 처사를 하고 대립하고 있는 관계가 대등한 관계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싸운 사람은 서로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자기에게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도 그것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화해의 법칙인 것이다.
상대방의 잘못만을 인정하면 화해를 하더라도 줄곧 상대방의 잘못을 비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다운 화해는 이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서로가 사과하는 것이 최선의 화해법이라 하겠다.
√ 어떤 중상 中傷보다도 친구가 하는 무심한 한 마디 말에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누구에 의해 구성되어 잇는 것일까. 가장 이상적인 답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구성돼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사는 사회는 모두가 친구로 이룩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친구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인간에게 친한 친구가 없다고 하면 사회에서 살아갈 힘을 잃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남에게 받는 중상은 그다지 타격이 크지 않으마 친한 사람에게서 들은 말은 비록 그것이 사소한 말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크게 마음을 상하게 되는 것이다.
√ 하나님 앞에서 울고 사람 앞에서 웃어라.
하하하…. 웃는 일이란 즐거운 것이 아니겠는가.
웃음은 유태인의 힘의 원천의 하나이다. 지혜나 지식도 웃음을 모르는 사람에겐 허약한 것이 되고 만다.
유태인은 “책의 민족”인 동시에 “웃음의 민족”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웃음은 낙관인 동시에 또한 여유이다. 웃을 여유도 없는 자는 늘 무엇엔가 쫓기어 몸이 움츠러들고 만다.
웃음은 유태인에게는 지성을 가는 숫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웃음은 서로가 크게 나누어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 홀로 울어야 한다.
슬픔은 남에게까지 나누어 줄 것이 못 된다.
√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남에게 비웃음을 당하지 않는다.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자기를 제 삼자인 입장에서 냉철하게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자기 자신을 냉철히 바라볼 때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이나 또는 단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남의 비웃음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는다.
너무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을 남과 마찬가지로 냉정하게 볼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일수록 남의 단점은 쉽게 찾아내지만 자신의 단점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남을 비웃기를 잘하지만 남에게 비웃음을 사게 되면 당장 화를 내게 되고 자신의 그런 단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자기의 단점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 단점을 고칠 수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남이 자기를 비웃을지라도 그 비웃음을 수긍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비웃음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즐거울 뿐 아니라, 공평한 웃음이란 여유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곤경에 빠뜨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남을 비웃을 때도 건전하다. 비웃는다고 하더라도 그 웃음에 의해 남이 상처 입는 일이 드문 것이다. 어쨌든 자신을 냉철히 판단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 표정 表情은 최악의 밀고자 密告者 이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의 일이다. 장병이 군사령관에게 달려와 적에게 중요한 요새를 빼앗겼다고 말했다.
사령관의 당황한 표정이 뚜렷이 얼굴에 나타났다.
그것을 본 사령관의 아내는 그를 방으로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당신에게 지독한 꼴을 당했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저는 당신의 표정에서 당신이 당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새는 비록 빼앗겼다 하더라도 다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용기를 잃는다는 것은 당신의 부하를 전부 잃는 것보다 더 나쁜 일입니다.”
√ 요리는 남비가 만들고 칭찬은 접시가 듣는다.
이 속담은 칭찬을 받을 것은 딴 것인데 엉뚱한 것을 칭찬하게 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최근 내가 이스라엘에서 들은 조크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언젠가 예루살렘에서 한 유태인 남자가 버스에 오르자 뚱뚱한 미국인 부인이 푸들(개의 일종)을 데리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푸들이 한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태인 남자는 몹시 피로했다. 그래서 부인에게 영어로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푸들이 앉은 자리를 좀 비워 주시겠습니까?” 하고 말을 했다.
그런데 부인은 들은 제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태인 남자는 재차
“죄송합니다만 이 푸들 대신에 제가 좀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때야 부인은 머리를 완강히 가로저었다. 유태인 남자는 화가 나서 푸들을 집어 들어 차창 밖으로 내던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옆에 있던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쁜 것은 푸들이 아니고 저 부인이 아닌가요.”
이 이야기는 사람이 화가 나면 자칫 엉뚱한 것에 분풀이를 한다는 이야기다.
√ 보잘것 없는 독 안에서 값비싼 술이 만들어진다.
이 속담은 사람을 외모나, 가지고 있는 소지품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옛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몹시 초라한 복장을 한 두 사람의 젊은 학자가 여행길에 올랐다. 로디밀의 마을에 닿았을 때 그들은 우선 부잣집 문을 두들기고 하룻밤 잠자리를 청했다. 그런데 부자는 두 사람의 옷차림을 힐끗 훑어 보고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그 마을의 라비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 두 사람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고명한 학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또 다시 여행길에 올라 10여 년 전과 같이 로디밀 마을에 닿게 되었다. 그래서 10여 년 전에 신세를 졌던 라비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려고 생각하고 라비 집을 찾아 가다가 옛날, 한 마디로 거절했던 그 부자를 만나게 되었다.
부자는 두 사람이 탄 말이 훌륭함에 놀라고 또한 두 사람이 고명한 학자라는 것을 알자 굳이 자기 집에서 머물기를 고집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이를 고명한 학자 두 명이 부자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부자가 자기 집은 이 마을에서 제일 훌륭하며 이 마을을 대표하여 손님들을 목어가게 한다고 덧붙였다. 부자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이 말들은 댁에서 묵어가게 하지요.”
“말이라니요? 선생들께서는 대관절 왜 저의 집에 묵으시지를 않으려 하십니까?”
“말씀 드리죠. 10여 년 전에 우리 두 사람이 가난하고 이름도 없었을 때 이 마을을 지나게 되어 댁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려고 당신께 간청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들의 옷차림과 훌륭한 말을 보시고 당신이 우리를 재워주시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두 마리의 말을 하룻밤 묵어가게 해 주십사 고 말씀드렸습니다.”
“……………”
부잣집 주인은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절대로 외모나 소지품을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 지성만을 가지고 칭찬을 들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사막에서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사막에서 고기를 잡으려고 한다는 말은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헛된 일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을 많이 갖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남이 우러러 본다. 그 까닭은 아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식이 많은 사람을 우러러 보는 것은 지식이 많기 때문이지 인간으로서 존경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은 인간적으로 남에게 존경을 받는다. 우리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 마음씨 좋은 사람보다 더 존경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사람이 아름다운 마음씨에다 풍부한 지식을 겸비하고 있다면 더 바랄 것은 없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지도자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라면 사막에 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가져다 줄 것이다.
부언 附言
“친구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로 음식과 같은 친구로서 매일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친구, 둘째는 약과 같은 친구로 있어서 좋을 때 있어야만 하는 친구, 셋째는 병 病과 같은 친구로서 있어서는 안 되는 친구다.”
“바늘 구멍이라도 두 사람의 친구가 빠져나가기에는 좁지는 않지만, 원수가 돼버린 친구라면 이 세상도 너무 좁다.”
“싸움은 내[천]과 같다. 한 번 자그마한 내[천]가 생기면 큰 내가 도어 다시 작은 내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싸움을 하고 나서 먼저 타협하는 사람의 인격은 높아진다.”
“친구와 돈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친구를 잃지 않는다.”
“친구가 꿀을 가지고 있다고 그 친구까지 핥아버려서는 안 된다.”
“상대방을 물어 뜯을 수 없으면 이빨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 앞에서 남을 창피 주는 것보다는 단 둘이 있을 때 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편이 낫다.”
“친구의 결점을 들춰내는 사람은 친구 복이 없다.”
“파리와 같은 인간은 남의 상처에 달라 붙기를 좋아한다.”
“한 손으로 사람을 밀쳤거든 또 한 손으로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라.”
“라이벌에게 숨겨야만 할 일은 친구한테도 숨겨라.”
“위대한 인간에게는 위대한 적이 있다.” <탈무드>
“나쁜 친구는 당신의 수입은 계산하지만 당신의 손해는 계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겠거든 말이라도 좋게 하도록 노력하라.”
“말을 부리려면 먹이로 꼬는 편이 매로 다스리는 편보다 더 낫다.”
“아무에게나 이유 없이 상냥한 사람은 조심하여라.”
“친구인 체하는 사람은 철새와 같다. 기후가 변하면 날아가버리고 만다.”
“친구가 없어도 혼자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그런데 친구가 없으면 혼자서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고 자기가 없으면 친구가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큰 잘못이다.”
“사람은 혼자서 식사는 할 수 있지만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다.”
“모두가 서 있을 때 자기만 앉아있지 말라. 모두가 앉아 있을 때 자기만 서있지 말라.”
“모두가 웃고 있을 때 자기만 울고 있지 말라. 모두가 울고 있을 때 자기 혼자서만 웃고 있지 말라. 이유는 환경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경의를 표하라. 경의를 표한 만큼 그 사람을 의심하라.”
“사람을 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라비와 같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도둑과 같이 의심해야 한다.”
“좋은 손님은 올 때부터 기뻐하고 싫은 손님은 문을 나설 때부터 기뻐한다.”
“손님이란 비와 같다. 적당히 오는 것은 좋으나 계속 오면 곤란하다.”
“어리석은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어리석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똑똑해 보이는 것이다.”
“똑똑한 라이벌은 당신을 현명하게 만들지만 어리석은 당신은 친구도 어리석게 만든다.”
“한 사람의 오랜 친구가 열 사람의 새 친구보다 낫다.”
“만약 자기를 평가 받고 싶거든 이웃 사람들의 소문에 귀를 기우려 라.”
“상대에게 한번 속았을 땐 그 사람을 탓하라. 그러나 그 사람에게 두 번 속거든 자신을 탓하라.”
“이웃은 소중하므로 친절해야 한다. 설혹 그 이웃이 시끄럽게 트럼펫을 불더라도.”
“마늘을 먹을 때는 혼자서 먹지 말라.”
“예의란 무엇일까. 남의 나쁜 예의를 용서하는 일이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가 없고, 사람은 예의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탈무드>
“세상을 살면서 질문을 해서는 안될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여자에게 자기 친구에 관해 묻는 것. 둘째 겁쟁이에게 전쟁에 관해 묻는 것. 셋째 상인에게 이익에 관해 묻는 것.”
“남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첫째가 지성이다. 지성이 없다면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돈이 없고 훌륭한 아내를 가졌다면 결점을 숨길 수가 있다. 만약 아내가 훌륭하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침묵도 할 수 없으면 그는 바보들과 살면 존경을 받는다.”
8 생활 生活의 지혜 智慧
√ 칼리플라워 에 살고 있는 벌레는 칼리플라워 가 전세계라고 생각한다.
세계는 대단히 넓다. 제트기를 타고 뉴욕까지 열 시간쯤이면 갈 수 있다지만 그래도 세계는 너무 넓은 것이다.
이것을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마을 또는 자기 나라,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의 작은 세계가 전세계인 양 착각하기 쉽다. 작은 자기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습관이나 사물의 평가기준이 최고인 양 판단해버리고 만다.
사람은 자기 마을이나 또는 자기나라 안에서만 생활하는 것이 아니다. 칼리플라워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유폐시킴으로써 바깥 세계를 모르고 사는 것이다.
유태인은 전세계에 흩어져 오랜 방랑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라를 가진 민족과 같이 자기 나라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이 속담이 있는 것을 볼 때 역시 유태인에게도 칼리플라워가 상당히 많이 존재해 왔던가 보다.
칼리플라워에 안주하는 것도 인생이다. 그 속을 빠져 나오는 데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칼리플라워에 안주하는 것이 좋은 사람은 노인이면 족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넓은 세상을 주시할 때다.
√ 인간의 생 生과 사 死는 책의 앞 표지와 뒤 표지 같은 것이다.
유태인을 타이르는 다음과 같은 옛날 이야기가 있다. 당신의 주위에서, 나는 어느 사람의 몇 대 자손이오 하고 자기의 조상을 들춰서 아니꼬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거든 곡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 것이다
한번은 집안이 좋은 여우와 집안이 천한 여우가 길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당신은 여우가 무슨 집안이 좋은 여우와 집안이 좋지 못한 여우가 있느냐고 따지지 말라. 이것은 한의 이야기일 뿐이다. 사람에게 혈통이 좋은 사람이나 혈통이 나쁜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래서 집안의 배경이 좋은 여우는 집안이 나쁜 여우에게 우쭐거리며 자기 집안을 자랑했다.
그러자 듣고만 있던 집안이 좋지 않은 여우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집안은 당신에게 끝나지만 우리 집안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에게 태생과 죽음의 그 배경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장식과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그 사는 방법에 있어서 얼마만큼 자기의 환경에 최선을 다해 살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지금 당신의 처지를 한탄만 하지 말라. 늦었다고 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다.
√ 휴일은 인간이 정해놓은 것이지 휴일이 인간을 만든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마지막 25년간은 전세계는 더욱 풍요해지고 휴일은 더욱더 늘어갈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 또는 선진국에서는 지금까지와 같이 일하기 위해 산다고 하기보다는 편안히 살기 위해서 일한다는 견해가 많아졌다. 그 결과 노동이나 일은 자기 자신을 상실케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는 쉬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 급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휴일을 맞이해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자기를 되찾거나 스스로를 창조하는 것보다 어떤 취미나 쾌락에 깊이 빠져 자기를 마모시키고 자기를 잃어 버리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일을 하든지 놀든지 간에 앞에서도 논한 바와 같이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What I do 보다는 자기가 무엇 What I am 인가가 한층 더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일이라고 하는 괴물에게 내던져진 먹이가 아닌 것과 같이 휴일이라고 하는 괴물에 내던져진 먹이는 더욱 아닌 것이다. 휴일이야말로 값진 시간이다. 보다 나은 자기를 만들기 위해 값진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노는 날에서 사고 思考 하는 날로 모두가 생각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길을 모르면 열 번이라도 물어 가라. 한 번도 묻지 않고 길을 못 찾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 속담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유태인은 “율법의 민족” 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율법이란 누구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삶의 기본 법칙이다.
사람은 기본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동물에게도 자기들만이 살아가는 법칙이 있는 것이다. 법칙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걷는 법이나 뛰는 법, 먹는 법과 앉는 법에서부터 사는 법 등 기본이 되는 것은 사실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진 것이 없다. 한번 일어났던 일과 똑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들 흔히 말하고 있지만 사람은 어느 시대나 다를 바가 없으며 오랜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결국은 똑같은 일이 형태를 바꾸어 일어날 따름이다. 수천 년 전 유태인이 만든 탈무드가 가르치는 것을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한 몸에 모으는 것도 그 기본적인 가르침이 오히려 지금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최고로 발달된 미국이지만 미국의 우수한 시장조사회사 나 여론조사기관이라 할지라도 과거 수천 년 전으로 되돌아가 그때의 사람들을 만나서 통계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유태인의 율법이 가르치는 것만은, 조사비로 수천 만 달러를 들여서도 할 수 없다.
기본이 얼마나 중요하느냐 하는 이야기가 <탈무드>에 실려 있다.
어느 마을에 똑똑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닭이 알을 품어 새끼를 부화시키는 것을 보고 만약 어미 닭이 알을 품었을 때의 온도만 유지한다면 얼마든지 기계로써도 병아리를 부화할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한꺼번에 많은 닭을 팔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간신히 연구를 마치자 그 부화기계 안에 갓 사온 달걀을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실수하여 달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똑똑한 그였지만 달걀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기본을 잊고 만 것이다.
“젖소에게서 아무리 많은 젖을 짜낸다 하더라도 젖을 담은 그릇을 잃어버린다면 모두가 허사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진리 즉 기본은 변할 수가 없다.
√ 먼저 작은 시내를 만들고 나서 그 다음 바다를 만들어라.
바다를 한꺼번에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바다를 만들려고 한다면 먼저 작은 개천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바다를 일시에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개천이 나아가 강이 되고 강이 넘쳐서 비로소 바다가 되는 것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결코 일확천금이 손에 들어올 수 없다.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면과 성실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성공으로 가는 길에는 절대 절약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극히 드물게 행운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자기에게 이러한 행운이 찾아 오기를 바라는 것은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져 입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또 교통사고를 당할까 봐 미리 겁을 먹고 목을 매 자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어리석은 짓인 것이다. 무엇이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이 순서를 뒤바꿀 때 결코 성공이라는 당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 오늘이 당신의 최후의 날이고 오늘이 당신의 최초의 날이라고 생각하라.
이 말은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사람은 60~90년간을 살 수 있다. 그런데 1백 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일시에 1백 년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초가 일분이 되고 일분이 모여서 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한달, 이렇게 사람은 60~90년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최후의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은 매일을 가장 충실하고 가장 풍부한 결실의 하루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최초의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힘이 충만할 뿐만 아니라 신선한 하루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지금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모여서 일생이 되는 것이다.
√ 0에서 1까지가 1에서 1천까지의 거리보다도 멀다.
많은 사람들이 1천을 구하는 나머지 하나를 경시하고 결국은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천을 필요로 하는 당신은 1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절대 1천을 구할 수 없다.
일확천금을 노려서는 되는 것이 없다.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꾸준히 참는 인내력이 필요하다. 무에서부터 하나를 만들고 하나를 얻었을 때의 그 소중함을 배우게 되면 1천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것이다.
위대한 상인을 보게 되면 모두가 0 으로부터 하나를 만드는 일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것이다. 0으로부터 하나를 만드는 것이 하나로부터 1천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자기의 목표인 성공을 쟁취할 수 있다.
근검절약하고 근면하면 당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 너무 앉아 있으면 치질에 해롭다. 너무 오래 서 있으면 심장에 해롭다. 너무 많이 걸으면 눈에 나쁘다. 이 세 가지는 적당히 조절해야 한다.
이 말도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너무 많이 걸으면 눈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독자들은 잘 이해 못할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사막의 나라인 관계로 너무 오래 걷다 보면 모래가 눈에 들어오고 만다.
유태인의 처세술은 “모든 것은 적당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태인의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가끔 이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
물음에 대한 답은 많다. 그렇지만 답의 핵심은 모든 생활에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 것이 힘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삶의 비결인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양식 良識 이라고 하는 것이다.
√ 유태인이 안식일을 지켜왔다고 하기보다는 안식일에 유태인을 지켜왔다.
이 말은 유태인의 유명한 속담이다.
유태인은 착실하게 축제일을 지켜왔다. 전 세계에 널리 흩어져 이민족 사이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유태인임을 잃지 않았던 것은, 유태인이 유태교의 교리를 지켜 나왔기 때문이다.
유태인이 이와 같은 유태교리를 지키지 않았다면 단순히 나는 유태인이다 하는 생각만으로는 유태인임을 지켜오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유태인답게 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유태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세계의 모든 바닷물이 잉크라고 가정하고 온 세계의 갈대가 펜이라고 할 때 전 인류가 유태인이 받은 박해를 일년 동안 글로 쓴다 하더라도 그것을 모두 쓰기란 힘들다 <미드렷슈>.”
“유태인은 올리브나무에 비유된다. 이유는 올리브의 열매는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기름이 나오기 때문에 유태인은 압박을 당하면 압박을 당할수록 더 큰 것을 이룩해 왔기 때문이다.”
“유태인을 박해한 나라는 오래 번영하지 못한다.”
“이 세상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유태인이 제일 먼저 그것을 알짐만 이 세상이 잘 돌아갈 때, 유태인은 마지막으로 그것을 안다.”
“유태인은 비둘기로도 비유된다. 그것은 다른 새들은 지치면 나뭇가지에 앉아 휴식을 취하지만 비둘기는 지치면 한쪽 날개로 날고 한쪽 날개는 쉬기 때문이다.”
“나라는 흥했다가 망하는 것을 되풀이하지만 유태인은 역사를 통해 볼 때 멸망한 적이 없다.”
√ 다시는 먹지 않는다고 우물에 침을 뱉는 사람은 또 다시 그 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 때 라비가 거리를 걷고 있자니 자기집 뜰에 있는 잡석을 길가에 내다 버리는 사내가 있었다.
그것을 본 라비는 “당신은 왜 그런 짓을 하고 있소?”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웃고만 있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자 그 사나이는 자기의 집을 팔게 되었다. 그런데 집을 팔고 이웃마을로 이사를 가려고 걸음을 내딛는 순간 옛날 자기가 버린 돌에 발이 채여 넘어지고 말았다.
이 속담은 자기가 행한 행위는 잊고 있어도 반드시 자기가 한 일은 자기에게 되돌아 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은 교훈에
“자기가 마시게 될지도 모를 우물에 침을 뱉지 말라”
“화살을 만드는 자는 화살에 맞아 죽게 되는 일이 많다”는 말이 있다
√ 이상주의자 理想主義者 란 장미꽃 향기를 맡아보고 그 향기에 취해 캐비지 보다도 맛있는 수프를 만들 수 있다고 지레 짐작하는 자이다.
이것은 극단이나 과격을 삼가라는 경구 驚句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중용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양식이며 안전한 것이다. 무의미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현실 세계나 생활은 갖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장미를 먹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은 모두에게 웃음을 사게 되는 것이다.
젊은이들 중에서 이상주의자가 많고 노인들 중에서 보수주의자들이 많은 것은 경험의 양에 비례하고 있는 것이다.
유태인이 <탈무드>나 유태인의 고전을 곰팡이가 슬은 고서 古書와 같이 다루지를 않고 마치 엊그제 발행한 책과 같은 신선미를 가지고 읽은 것은, 오랜 역사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교훈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인간은 캐비지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유태인이었던 그리스도가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고 한 말도 있다
√ 기적을 바라는 것은 좋다. 그러나 기적을 믿어서는 안 된다.
이 말도 <탈무드>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라비가 바라던 것을 신이 행하면 사람들은 흔히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신이 바라던 것을 라비가 행했다면 그것은 정말 기적이다.” 하는 조크가 있다.
라비를 놀린 것 같은 이런 속담은 유태인 사회에 많다. 아마도 근엄한 얼굴을 하고 그늘에서 나쁜 짓을 하고 있던 라비가 많았던 모양이다.
하여튼 유태인은 합리적이므로 기적을 믿지는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적과 같은 행운을 바라고 비는 것은 아마도 인류공통의 염원일 것이다.
다른 속담에
“행운을 바라는 것이 좋다. 그러나 행운을 믿어서는 안 된다”라고 타이른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행운이 찾아오겠지만 행운을 기다리고 있는 게으름뱅이에게는 가난이 찾아올 뿐이다.
√ 행운을 믿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행운에 협력해야 한다.
행운 – 세계를 방랑하며 살아야 했던 유태인만큼 행운을 갈구했던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나라가 있고 자기가 살 집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행운이 그렇게 절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압박 당하는 가난한 유태인들은 일정한 직업도 갖지 못했으므로 유태인은 행운을 몹시 바랐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행운은 나비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 스스로가 행운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행운을 아름답고 진기한 나비에 비유하는 것은 가까이 다가왔다가도 그것을 붙잡지 않으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행운이 자기에게 다가왔을 때 그 행운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역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행운이 찾아온 것을 식별하는 데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막연히 행운을 기다리고 앉아 있어서야 행운이 당신 손아귀에 찾아들 것인가? 행운은 만인의 곁으로 찾아 들지만 그 스스로는 만인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잠깐 스쳐갈 따름이다.
유럽의 가난한 유태인가의 주님들은 행운을 어떻게 해서 잡아두어야 하는가에 대해 부심했다.
그래서 생긴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센스가 둔한 사람이 행운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구멍 난 그물로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 재수가 없는 사람은 넘어져 등을 부딪치고도 코를 다친다.
등을 부딪쳤는데 코가 다친다고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마치 피카소의 그림자처럼 돼버릴 것이다.
유태인 세계에 무엇을 하든 운이 나쁜 “슐레밀” 이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슐레밀은 채플린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모양 무슨 일을 하든 되는 일이 없었다. 예를 들어 그가 빵을 떨어뜨리면 버터나 잼을 칠한 쪽이 반드시 땅바닥에 떨어지고 또 슐레밀이 우산을 가지고 집을 나서면 하루 종일 햇빛만 쨍쨍하고, 초 장사를 시작하며 그날부터 해가 지지를 않을 만큼 재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불운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누구나 자기 위안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놈이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속담은 운이 나쁠 때는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유태인은 너무 오랫동안 남의 나라에서 가난하고 박해 받는 생활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유태인가는 슐레밀로 너며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유태인 얘기에는 슐레밀의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유태인은 운이 없다. 종기가 났을 때는 약이 없고, 간신히 약을 구했을 때는 종기가 아물고 난 후다.”
√ 선행, 그 최대의 대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른 선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쁜 짓을 싫어하는 사람도 한번 나쁜 짓을 저지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나쁜 짓을 하기가 쉽다.
인간은 무슨 일에나 적응성이 높다.
한동안 못 보던 사람이 전연 딴 사람이 돼 있는 경우가 있다.
“아니, 자네가 말야.”
“그 사람이 설마.”
“아주 몰라보게 변했던데.”
이와 같은 대화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인간은 나쁜 짓을 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과 같이 착한 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선행이란 어려운 것이 아닐까?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닐는지. 나 같은 사람이 선행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뒤꽁무니 질 친다.
그러나 선행도 하면 간단한 것이다. 다음 선행을 할 때에는 기쁜 마음으로 쉽게 할 수 있다.
당장 당신도 실천에 옮겨보심이 어떨는지.
√ 선행보다 악행이 더 빨리 알려진다.
<탈무드>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 라비가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경건한 사람이 하나님께 빌어 사람들 모두가 올바른 행위를 하도록 강력히 권유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제자의 말을 들은 라비가 반문했다.
“무슨 말인가? 우리들이 항상 좋은 일을 하도록,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긴 합니다만 선한 사람을 나쁜 사람이 유혹하는 것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며 도한 선한 사람을 유인하여 자기들의 패거리를 늘리려고 할 때 우리들보다 더욱 열심일 뿐 아니라 결과도 낫지 않습니까?”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패거리가 필요 없다. 그런데 나쁜 짓을 하고 있는 사람은 혼자서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은 <성서>에 나오는 말이다.
유태인이 같은 유태인을 속여 1만 파운드를 사취했다고 가정하자. 오늘날에도 유태인은 재판소에 가기보다는 당사자 두 사람이 라비를 찾아간다 (아니면 가해자가 라비에 의해 호출된다). 라비가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지역사회의 재판관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라비는 당연히 1만 파운드를 되돌려 주라고 판결을 내린다. 만약 1만 파운드가 없을 때는
“그러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칙에 따라 1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다른 것으로 되돌려 주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1만 파운드에 해당되는 것을 돌려주면 가해자의 죄는 완전히 씻겨진다. 정신적으로도 그는 흰 린네르 시트 모양 완전하게 그것을 잊어버린다. 그는 원래의 그로 되돌아가 아무도 그를 죄인 취급하지 않는다.
일단 청산만 하고 나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유태인의 정의의 관념인 것이다.
그러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고 하는 말이 외국인들에게는 잔혹한 법칙이라고 잘못 해석되고 있다. 실제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만약 상대의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한 개 망가뜨렸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돌려줘라 하는 것이다. 가량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를 깨뜨렸는데 벤츠 자동차 한 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발사가 잘못해서 귀를 잘라버렸으면 그 손님이 이발사의 팔 한 개를 요구하거나, 밭에 있는 올리브 나무를 한 개 꺾었으면 상대방의 전 재산을 빼앗으려 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보상이란 타당해야만 된다고 하는 것을 풀이한 말인 것이다.
이것은 복수를 권유하는 뜻이 아니고 제 정신을 잃고 혈기 하나로 복수를 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 말이다.
√ 많은 사람들은 돈을 시간보다 소중히 여기지만, 그러나 시간을 돈으로는 살 수가 없다.
일생 동안에 사람이 쓸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은 돈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인 것이다. <탈무드>에는 인간은 무한히 돈이나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지만 일생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탈무드>에는 “제한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과 시간인 것이다. 돈보다 시간이 더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을 사용할 때는 몹시 신중하지만 시간을 쓰는 데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남의 돈을 맡아 사용할 때는 긴장하여 세심한 신경을 쓴다. 그것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막상 약속시간에 한 시간 이상 늦게 나오거나 아니면 하찮은 용건으로 상대를 붙잡고 오래 주저앉아 남의 시간을 빼앗거나 낭비하게 하는 일 따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것은 한 마디로 사람들이 시간보다는 돈을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시간과 돈을 둘 다 모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중 시간이 돈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간 부자, 시간 가난뱅이라는 관념이 생겼으면 좋을 것 같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는 없지만 시간으로 돈은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이 있으므로 돈을 벌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 악인은 눈[雪]과 같다. 처음엔 순백 純白으로 아름답게 보이지만 금세 진창으로 변한다.
질이 나쁜 사람은 처음에는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낸다. 그것은 마치 은백 銀白의 눈으로 뒤덮인 광경과 비슷하다.
그러나 현실이라고 하는 태양이 비추게 되면 눈은 녹아 온통 흙덩어리의 추한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악인이 아름다운 세계를 당신 앞에 만들어 내더라도 당신은 속아서는 안 된다. 내일 눈을 뜨게 되면 그 아름다운 세계가 흙탕물이 튀기는 상태로 변하기 때문이다.
라비 리치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자기 스스로 자기가 눈과 같이 깨끗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눈이 녹으면 흙탕물로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 뜰을 보면 정원사 庭園師를 알 수 있다.
사람은 모두가 정원을 꾸미는 정원사와 같다. 정원에는 수목이나 관목이 우거지고 춘하추동 계절에 따라 꽃이 피는 화단이 있다. 그곳에 작은 못이나 내[川]를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잔디나 나무는 항상 손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입으로만 자기의 업적을 뽐내고 자기를 유능하게, 도는 위대하게 보이려고 하는 일은 쉽지만, 그러나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오직 실적밖에 없는 것이다. 정원은 정원사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곳이다. 미완성된 정원이라 하더라도 그 정원을 보면 믿을 만한 정원사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 위대한 학자라도 상인은 못 되며 유능한 상인도 학자는 못 된다.
이것은 한 가지 일에 뛰어난다고 해서 다른 일에도 뛰어난다고 할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탈무드>에 통달한 똑똑한 라비도 때에 따라서는 깜박 잊고 대문에 열쇠를 잠그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 부럽지 않는 부富를 자기 한 손에 쥐고 있는 거상 巨商도 장사를 떠나선 다른 분야에는 전연 백지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과 같이 인간은 그 능력에 한도가 있는 것이다. 자기가 맡은 한 가지 일에 통달하였다고 하여 다른 일도 똑같이 잘해낼 수 있다고만은 할 수 없다. 자기의 전공에 뛰어난 사람도 다른 것을 물었을 경우엔 대답을 못할 때가 많다.
이것을 볼 때 자기의 전공에 뛰어난 실력이 있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자기 과신을 해서는 안 된다는 속담이다.
√ 없어서는 안될 훌륭한 쇠사슬도 한 개의 고리가 부서지면 제 기능을 잃고 만다.
이것은 유태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속담의 하나이다.
유태인은 <성서>의 가르침을 수천 년 동안이나 꿋꿋이 지켜왔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수천 년 전과 똑같은 유태인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만약 유태인이 성서의 가르침을 포기했다면 유태인이라는 민족이 아무리 훌륭한 쇠사슬과 같다 하더라도 한 개의 고리가 고장 난 쇠사슬과 같이 유태인임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유태인은 온 세계에 흩어져 있더라도 유태인의 대가족으로서 단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도 유태인으로선 커다란, 그리고 훌륭한 쇠사슬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몇 사람만 유태인님을 포기할 때 쇠사슬의 고리가 부서져버리는 것과 같이 더 이상 유태인의 대가족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유태인은 어릴 적부터 이 속담을 배우고 경험하며 자라나는 것이다.
√ 사람은 자기의 마을에서는 평판에 의해 판단되고 다른 마을에서는 의복에 의해 판단된다.
이 말은 <탈무드>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어느 날 라미 히야 바 아바가 같은 라비인 앗시에게 물었다.
“바빌로니아의 학자들은 왜 그렇게 호화호운 의복만을 입고 있는 것일까요?”
라비 앗시는 대답했다.
“그것은 바빌로니아 학자들이 이렇다 할 학자가 아니기 때문일세. 그들은 훌륭한 의복으로나마 사람들을 위압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곁에서 듣고 있던 라비 요하난이 말했다.
“당신들은 잘못 알고 있소. 그들의 그토록 훌륭한 의복으로 몸치장을 하는 것은 그들이 이웃나라에서 들어온 이민이기 때문이다. 자기 마을에서는 평판으로 사람을 저울질하지만 밖에 나가면 의복에 의해서 저울질 되기 때문인 것이오.”
√ 술이 창자로 들어오면 마음에 숨겨둔 비밀이 입 밖으로 나간다.
<탈무드>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으려고 할 때 사탄이 찾아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사탄이 거듭
“포도나무란 무엇을 하는 나무인지요?” 하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란 과일인데 아주 달고 또한 적당한 신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발효시키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이라는 것이 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탄은
“그렇게 좋은 나무라면 나도 거들어 드리지요.” 라고 말하므로 노아는 사탄에게 감사했다.
사탄은 양, 사자, 돼지, 그리고 원숭이를 잡아와서 피를 땅에 뿌려 비료를 대신했다.
그 후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자 우선 양처럼 순해지더니 조금 더 마시자 사자처럼 힘이 세지고 더욱 더 마시자 이번에는 돼지처럼 더러워졌으며 거기서 더 취하게 마시자 원숭이처럼 시끄럽게 떠들며 날뛰게 됐다고 하는 이야기다.
하나님에 의해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노아 조차도 포도주를 마시고 이런 상태였으니 만약 보통 사람이 마셨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감히 짐작이 갈 것이다.
√ 식사는 자기 식성에 맞춰 하고 옷은 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입어라.
사람이면 누구나 잘 사고 싶은 욕망에 끝이 없다.
남조다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평균적인 생활 수준의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과 남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타산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비슷한 집이나 가구, 가전제품 또는 자동차 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기만이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짓을 하게 되면 사회가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고 배척당하게 된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남과의 균형을 맞추는 편이 현명한 것이다. 기인 奇人 또는 괴인 怪人 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 사람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 그래서 무엇무엇 ‘다운’이나 진지함 같은 것은 덕성 으로서 일컬어지지만 실제로는 자기 보존을 위한 처세술인 것이다. 그렇지만 개성은 의복이나 머리형과 같은 말초적인 하찮은 표면적인 것으로써 만족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뚜렷한 자기 개성이 없는 사람일수록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개성적인 것처럼 꾸며대는 것이다. 이상한 복장이나 외모로써 남들의 눈길을 끌려고 하는 것보다는 내적인 충실을 기할 수 있는 자기의 개성을 살려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은 식사의 기회에 대해서만은 관대한 것이다.
이것도 따질 때 그 사람의 건강과 관계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관대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 값비싼 시계라고 한 시간의 길이가 더 길지 않다. 아무리 값비싼 시계라 할지라도 한 시간의 길이는 똑같다. 훌륭한 사람의 한 시간이나 어리석은 사람의 한 시간의 길이는 똑같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유태인이 맨 처음 실시한 것이다.
유태인은 일반적으로 정장이 아닌 간편한 복장을 즐겨 입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의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경우는 정부고관 중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다.
모세 다얀은 6일 전쟁 (1967년에 6일 동안에 주변의 제국군을 격파했다)의 영웅이며 국방상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국방성에서 자기를 모시러 온 차에 오르면 젊은 운전수가 이렇게 말한다.
“모세, 오늘 아침에는 어디부터 가죠?”
유태인은 딱딱한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버릇이 없다는 말을 곧잘 듣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이상도 인간 이하도 아닌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전통인 것이다. 게다가 외계로부터 격리된 유태인가에서는 해방 당하기까지 모두가 한 뿌리로서, 영주나 지주도 일반인과 같은 대우를 받은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 열쇠는 정직한 사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집을 비울 때, 문에다 열쇠를 잠그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핀잔을 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이것은 도둑을 경계하는 것은 될 수 없다. 정직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도둑이 집안에 들어가 물간을 훔치려 든다면 문에 열쇠가 잠겨져 있든 열려 있든 상관없이 그 집에 들어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직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약 문이 열려 있으면 순간적으로 유혹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집을 비울 때나 차를 세워둘 때나 차를 세워둘 때 열쇠를 꼭 채우는 것을 정직한 사람이 나쁜 짓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억설일까?
일상생활 가운데 사람을 유혹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해서는 안 된다. 유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열쇠를 채울 필요가 있다. 속담에 도둑놈보다도 도둑을 맞은 사람이 더 나쁘다는 이야기도 있다.
√ 따분한 사람이 방에서 나가면 새로 사람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따분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이 문제를 가지고 옛날의 라비들이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어떤 해답이 나왔을까?
따분한 사람이란 결코 교양이나 학문과는 관계가 없다. 독자들도 알고 있겠지만 학식이 풍부한 사람도 몹시 따분한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을 따분하게 하는 사람이란 남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비들은 따분한 사람이란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 그것을 무시하고 남의 기분은 아랑곳하지도 않아 남의 기분을 맞출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 定義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대 학자라도 만약 남의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따분한 사람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에 관하여 전혀 무지상태인 사람을 만나 상대성원리에 관하여 많은 시간을 일방적으로 이야기했다고 하자, 아인슈타인과 헤어진 사람은 누군가를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분명히 들 것이다.
이 속담의 뜻은, 좋은 손님은 들어와서 집안을 밝게 하지만 따분한 소님은 돌아가자마자 집안을 밝게 한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경험이 없으신지?
√ 성공의 반 半은 인내이다.
유태인이 이 말을 들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렇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이와 동시에 인내만으로는 성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고 말이다.
유태인은 지적으로는 솔직하지 못하다. 유태인은 항상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물을 여러 각도로 분석한다. “헤브라이”의 의미는 “또 한편에 서다”라고 하는 것이다.
유태인을 질문을 잘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조크가 생긴 것 같다.
“유태인은 어째서 그렇게 질문을 많이 하는가?”
“질문을 많이 하면 어째서 안 되는가?”
실제로 유태인에게 질문을 하면 질문으로 되돌아올 때가 많다.
인내심을 가지고 많은 질문을 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을 뿐 아니라 성공 또한 그와 비례하는 것이다.
√ 성공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밀거나 당겨야 한다.
빌딩의 문이 자동이 아닌 경우 ‘미시오’가 아니면 ‘당기시오’ 라는 표시가 있다 성공의 문도 자동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성공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자기가 밀거나 당기거나 해야 한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 는 우리의 속담과 일맥 상통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가만히 앉아서 행운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스스로 행운을 찾아나서야 행운을 잡을 수가 있다.
부언 附言
“한 척의 배에는 한 사람의 선장이면 족하다” <탈무드>
“이미 훌륭한 지도자가 있으면 지도자가 되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나 훌륭한 지도자가 없다면 지도자가 되도록 노력해도 좋다.”
“세상은 두 사람 이상으로써 이루어진다.”
“개 두 마리이면 사자도 죽일 수 가 있다.”
“말이 마차를 끈다. 소도 마차를 끈다. 그러나 소와 말을 같은 마차에 붙여서는 안 된다.”
“신의 뜻을 거절하는 것은 죄악이다.” <탈무드>
“하나님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네 가지 죄가 있다.
1. 한번의 실수를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
2. 같은 죄를 되풀이하는 것.
3. 되풀이하기 위해 죄를 범하는 것.
4.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
“마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육체는 푸줏간의 은혜를 입고 있다.”
“인생에는 언제나 좋은 장소와 나쁜 장소가 있다.”
“레스토랑에 가거든 될 수 있는 대로 웨이터와 가까운 곳에 앉아라.”
“땅바닥에 누워 있으면 넘어지는 일은 없다.”
“높은 곳에 오르지 않으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다.”
“무작정 너무 멀리 가서는 안 된다. 되돌아올 길이 멀어지기 때문이다.”
“배가 고플 때는 노래를 하라. 다쳤을 때는 크게 웃어라.”
“튼튼한 끈이라도 너무 잡아당기면 끊어지고 만다.”
“술, 자신, 반성, 이러한 것은 적당히 사용하면 활력소가 된다.”
“비산 유리잔에 너무 찬 것을 넣거나, 너무 뜨거운 것을 넣으면 깨어지고 만다.”
“돈이 너무 많게 되면 무엇인가를 잃게 된다.”
“물고기가 잡히는 것은 낚싯대 때문이 아니다. 낚시 바늘에 매달린 먹이 때문이다.”
“법은 존중하되 재판관은 존중하지 말라.”
“쥐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쥐구멍 탓으로 돌려라.”
“나쁜 짓을 하면서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되지만 좋은 일을 하는 데는 남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낫다.”
“사람은 어두워지면 빛을 그리워한다.”
“인생은 어두운 밤과 같은 것이다. 앞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촛불은 앞에 있어야 필요하지, 뒤에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속도가 필요한 것은 오직 파리를 잡을 때뿐이다.”
“시계란 일어날 시간을 알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자는 시간을 알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잠꾸러기는 모포를 두르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당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계획하라. 그리고 저 세상을 위해서는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여 계획하라.”
“좋은 일을 하려면 우선은 가시밭을 걷는 것과 같지만 이윽고 나중에는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다. 나쁜 일을 하게 될 땐 처음은 평탄한 길이지만 얼마 가지 못해 가시밭 길을 걷게 된다.”
“선 善을 알고 있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알고 있으면 행동에 옮겨야 한다.”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못 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첫째 돈이다. 그 다음이 친구와 친척과 가족이다. 그렇지만 선행의 업적은 가져간다.”
“사람은 세 가지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자식과 부 부, 그리고 그의 선행이다.”
“오르막길이 높은 고개일수록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 있다.”
“천사의 장점은 결점이 없는 것인데 단점은 발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장점은 결점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는 낮고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높다.”
“천사도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미드럿슈>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이미 하나를 고른 것이 된다.”
“작은 불씨가 큰 것을 태울 수 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천 마리의 새보다도 새장 속에 갇혀 있는 한 마리의 새가 낫다.” <미드럿슈>
“1온스의 행운이 1파운드의 황금보다 낫다.”
“행운을 낮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 없다. 그러나 행운을 잡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신은 아버지이고 행운은 어머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이 행운을 맞는 것은 구멍이 뚫린 단지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
“행운과 불운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러나 불운과 행운은 너무 거리가 멀다.”
“건강만큼 귀중한 보배는 없다.”
“충분히 자는 잠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
“저녁밥을 먹지 않으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위의 3분의 1은 음식으로 채우고 또 3분의 1은 음료수와 같은 마시는 것으로 채우라.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비워놓아라. 위는 두뇌와는 달라 무제한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당신에게 누군가가 ‘당신은 당나귀’라고 하더라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두 사람 이상 당신에게 당신은 당나귀다라고 말하거든 자기를 위해 안장을 사러 가라.” <미드럿슈>
“한 사람이 ‘당신은 취해 있다” 고 말하거든 주의해야 한다. 만약 두 사람이 그러거든 마시는 양을 줄여라. 그리고 세 사람이 그러거든 그 자리에 드러누워라.”
“술에 취한 사람이 뭣인가를 팔았다고 해도 그 행위는 효력을 갖는다. 도 술에 취한 사람이 뭣인가를 샀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술에 취한 사람이 살인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 행위는 벌을 받아야 한다.”
“브랜디는 좋지 못한 사자 사자이다. 그것은 분명히 위로 보냈는데 어떻게 머리 위로 올라가는가.”
“알코올은 정신과 몸을 꽁꽁 얽어 맨다.”
“이 세상에는 그릇된 생활을 하고 있는 세 가지 형의 인간이 있다. 갑자기 화를 내는 인간, 간단히 사람을 용서하는 인간, 너무나도 완고한 인간이다.” <탈무드>
“인생은 현인에게 있어서는 꿈이며 어리석은 사람에겐 게임이다 부자에겐 희극이고 가난한 사람에겐 비극이다.”
“현인이란 누구인가? 누구에게나 배우는 사람이다.”
“강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풍부한 사람이란 어떤 자인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다. 남에게 사랑 받는 사람이란 어떤 자인가? 모든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다.”
“석연찮은 삶이 셋이 있다. 첫째로 남의 동정으로 사는 인간, 둘째로 아내에게 쥐어 사는 인간, 셋째로 항상 몸에 고통을 느끼며 사는 인간이다.” <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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