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기기 싫은 달력, 4월

넘기기 싫은 달력, 4월 달.. 왜 이렇게 올해 4월은 빠르게도 다가오는가?
4월 1일~~ 추억의 그림자가 주마등처럼… 사월의 노래, 사월은 잔인한~ 사일구.. 만우절, tornados, 꽃가루가 쌓인 gutter..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김대붕 선생님~.. 1974 4월초 진눈깨비 쏟아지던 Chicago, Lincoln Ave..

온도 일교차日較差가 30도까지~ 바로 그런 4월 초,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 자연의 순리이니까.. 다시 따뜻한 옷을 찾아 입는 새벽, 하지만 찬란한 태양이 작열하는 대낮, 바로 그런 시절이 또 돌아오는구나… 그래, 시간은 정직한 거야~ 그것에 감탄하는 나 자신이 불쌍한 것인지, 또 변하고 있는 것인지…

자랑스럽지 못한 기록~ 내가 차를 타고 외출한 마지막 날이~ 3월 23일 일요일 주일미사가 마지막이었구나~~ 놀랍다. 그 이후로 나는 오늘까지도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차도 그때부터 계속 운전한 적이 없으니… 거의 열흘 동안 무엇을 했던가? 처음 며칠은 ‘쉬고 싶다’의 날들이었고 마지막 며칠은 연숙의 ‘화초 plant home business’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동안 저녁기도는 물론 없었던 것이고.. 거의 휴가여행 갔다 온 것 같은 생각도 들 정도인데~ 이것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사순절을 너무나 게으르게 사는가? 아침미사는 고사하고 YMCA도 한번도 못 갔고, 산책도… 하지만 앞으로 우리는 이런 작은 휴가의 시간을 자주 경험할 것 아닌가?

하루 두 끼를 먹는 우리 집, 오늘 아침과 점심 메뉴, 비록 한식과는 거리가 멀지만 익숙하고 균형식이며 설거지도 간단하니 얼마나 좋은가?

거의 열흘 만에 외출, 그것도 차를 타고~  간 곳은 의외로 Sam’s Club~  그곳에서 potting soil sale하는 것을 사러 간 것이 주목적이었다. 하지만 나도 어제부터 조금씩 마시고 싶어진 wine을 살 수 있었고, 우연히 발견한 최근 발간된 Pope Francis autobiography ‘HOPE‘를 살 수 있었다. 왜 나는 근래에 HOPE란 단어만 들어도 희망이 생기는 것일까?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 ‘교황님’의 자서전 책에서~~ 그 정도로 나는 현재 (세상에 대한) 희망이 꺼진 듯한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뒤쪽 밭이 화단으로 바뀌는 작업에 열을 올리며 신이 들린 듯하더니 오늘은 앞쪽 죽어가는 잔디를 다른 화단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한다. 솔직히 나는 그런 계획을 전혀 모르고 지냈지만 내가 귀담다 듣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할말을 잊었다. 그 정도로 우리 둘은 대화에 문제가 있는가? 이것 조금 슬픈 현실이 아닐까? 나의 이유는, 너무나 ‘일방적으로’ 퍼붓는 듯이 들려오는 말을 이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흘려 듣는다는 것, 바로 그것인데… 정도가 심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절대로 말을 적게 할 능력은 없는 듯하니 내가 이제부터는 귀담아 듣는 고역일 수도 있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몇 명의 화초 고객들이 다녀갔기에 우리의 하루 생활도 조금은 비정상적인 것이 계속되었다. 앞쪽 잔디들을 새로 깎고, 그쪽의 화단 정지작업을 시작했는데 정말 생각보다 힘든 것이어서 오후에는 완전히 떨어져 낮잠까지 잘 정도….

이제 4월이 시작되었는데, 큰 것은 역시 사순절의 절정 성주간 (성삼일)과 고해성사 준비가 아닐까? 작년에는 그 ‘어려운’ 성사를 피하고 말았는데, 올해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나도 장담을 할 수가 없으니~~ 하지만 공동체와 함께하지는 못해도 집에서 충실히 사순절을 살고 있다고 자신은 하고 있다.

SO WHAT, SO WHAT~

아~ 춥다~ 추워~~ 몸이 오그라든다.. 싸늘한 냉기의 외로움과 괴로움~ 그렇게 추위를 모르며 살아왔다는 나, 이제는 인정을 해야 할 듯.. 나도 춥다는 사실을… 지금 지나가고 있는 나날들, 1월 중순이라는 사실, 조금은 심리적인 것은 아닐지.. 좌우지간 옷부터 시작해서 가끔 얼어붙는 듯한 발과 다리, 완전히 냉동된 듯한 몸으로 따뜻한 잠자리로 들어갈 때의 포근함… 아~ 이것이 실재, 실재, 실재의 모습인데…

오늘 아침 일어나며 갑자기 떠오른 깨달음, 생각, 놀람이라면.. 역시 Ontological Metaphysics에 관한 것… 지난 십여 년 나의 ‘화두와 관심’의 중심에 있는 것… 이것에 나는 빠져있는 듯한데… 문득 생각은.. SO WHAT, SO WHAT? 이라는 것… 그래서 어쨌다고? 바로 이 말… 이것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조금 생각하고 넘어가고 싶지 않은가?
신학, 종교, 교회, 깨달음, 동서양 철학, 인문학… 이런 것들에 이어서 말년에 등장한 ‘과연 존재, 실재는 무엇인가?’로 이르는 이 stuff들~~ IoT, RTOS, Internet, 최근에는 AI같은 것들의 관심과 화제들로부터 나는 도대체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그런데 뒤를 돌아보며 떠난 것인가? 그러니까 오늘 새벽의 SO WHAT SO WHAT의 물음은 적절할 것 아닐까?

정치, 정치적 사회, 문화.. 이런 것들이 현재의 삶에 무슨 의미를 주는 것일까? 생각이나 조금 해 보았는가? 그저 싫은 것으로부터 얼굴을 돌리며 피하고 도망가는 모습은 아닌가? 어떻게 싫은 것을 좋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싫은 것이 좋아 질 수, 아니 그런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이곳이나, 저곳.. 어쩌면 이렇게 피하고 싶은 것들 투성인가? 어린 시절 라이파이 시절의 선과 악의 대결을 보는 듯한 만화 같은 지금 세상의 모습, 내가 제대로 보거나 인지를 하고나 있는 것인가? 모른다, 알 수가 없다. 누구의 말이, 누구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 교과서가 없다… 내가 교과서를 만들어야 하는 세상, 나이를 살고 있는 거다… 괴로운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Holy Family CC, 동네 성당 아침미사, 일주일 만에 다시 가는 이곳, 예전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요즈음의 기준으로 보면 이것은 우수한 성적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월남, 아니 베트남, 신부님 담당이어서 조금은 조심스럽다. 우선 말소리가 똑똑하지 않아서 그렇고 강론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명히 교황님 권고 7분을 넘긴 10분이 넘는 것, 왜 그렇게 심각한 농담을 지나치게 섞는지… 하지만 전체적 내용은 큰 문제가 없으니 다행이구나…

이것이 $300을 넘는 것? 오늘 예정대로 미사가 끝난 후에 Sam’s Club shopping을 했는데 어제 Trader Joe’s와 마찬가지로 조금 지나치게 많이 산 듯한데.. 우리 집 경제사정을 안심하고 맡겼기에 이런 일들은 사실 하나도 관심, 염려를 안 한다. 이것은 정말 나에게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아주 잘 알아서 관리를 해 주니까..
요새 이런 곳에 오면 나는 정말 답답한 것이… checkout counter앞에서 나는 너무나 불편하고 막막한 것, Kiosk화 된 곳에서 제대로 돈을 지불하는 것 등등이 너무나 불안하고 싫은 것.. 앞으로 더 심해질 터인데.. 나 혼자 왔으면 분명히 쩔쩔매는 나의 모습이었을 거라는 상상을 하기도..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오늘 내가 산 것은 firewood와 bird seed 인데.. 전보다 더 비싼 것으로 샀기에 조금 더 참새가 아닌 다른 새들도 기대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현재 먹이가 너무나 빨리 없어지는 것인데, 손쉬운 해결책을 시도하기로 했다. 하루 걸러서 먹이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크다. 매일 신나게 떼를 지어서 오다가 이것이 없어진 것을 보면 얼마나 실망을 할까? 하지만 금세 적응을 할 것이라 희망을 해야지.. 우리도 조금 부담을 덜어야 하니까…

REAL MAGIC, 2nd reading more & faster.. 읽기 시작한 것이 불과 며칠만인가? 벌써 Chapter 4 Origins of Magic을 흥미롭게 읽는 중… Magic의 역사는 인류문화사 그 자체라는 인상을 주는데… 이 책을 읽는 것, 가속도가 붙었다. 읽으며 보니 이 저자의 문체가 정말 편한 것이고, 주제가 흥미로워서 재미까지 있으니… 2nd Reading이어서 이렇게 쉽게 읽히는 것인지도…  점점 저자 Dean Radin의 학자, 저술가적 역량이 돋보이기 시작, 제2의 Kastrup으로 나에게 자리를 잡는 것은 아닐지…
이 두 인물 모두 Electrical, Computer Engineering으로 시작한 경력이어서 더욱 나에게 돋보이는지도 모른다.

Frozen pizza lunch, not good~~ 아침을 이미 Sam’s Club에서 pizza로 해결을 했는데 점심까지 pizza.. 이런 적이 없어서 조금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는데… 아~ 이 pizza는 frozen된 것이어서 집에서 다시 cooking을 하고 보니… crust가 완전히 돌처럼 단단… 망했구나~~~ 앞으로는 절대로 frozen pizza는 조심하기로 했다.

먹음직스레 보이는 이 cooked ‘frozen’ pizza, 어쩌면 crust가 돌처럼 굳은 것일까? 나의 이빨로는 힘든 것, 게다가 맛도 별로… 왜 frozen pizza는 이 모양인가? 다시는 사지 말자고… 결정… 그것에 비해 그곳의 snack corner의 pizza는 정말 soft하고 맛도 있었는데.. Dr. Pepper의 맛도 요새는 작은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되었고…

춥고 깜깜한 1월 중순으로~

춥디 춥고, 깜깜하고.. 이것이 1월의 핵심 정수, 한 가운데로 서서히 지나가는데.. 내일 15일은 분명히 건주의 77세 생일이고, 그 다음 주부터는 ‘우리의 날들’이 연속으로 나타나고.. 게다가 ‘구정’이란 말 대신에 ‘설날’이라고 격상이 된 lunar new year’s day… 그러면… 아하~~ 수선화의 나날들을 볼 수 있고.. 세월은 이렇게 흐르는구나.

현금現今 우리 우리 부부, 가족들에게 당면한 무슨 큰 문제가 없는 듯, 그러니까 ‘잠정적인 평화’를 맛보고 있는데… 이런 시기를 절대로 우리는 이용하고, 활용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밀린 일들을 이런 때 시작을 하고 결말까지 보는 것이 나의 제일 큰 소원이 되고 있는데, 왜 이다지도 힘들단 말인가? ‘내 마음 나도 몰라’ 라는 반영억 신부의 상투구절이 떠오르는구나… 맞아, 내가 나를 잘 모르는 시절을 살고 있는 지도.., 나도 몰라…

‘최첨단, 최근, 아니 지금 현재, 새로운’ 과학적, 철학적 reality 실재론 ontology등등이 코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면서 나의 주된 관심은 역시 역시 ‘교의적 종교와 그것들’과의 관련성을 나름대로 구성하는 곳으로 모아진다. 그것을 위한 주 원전, 교과서는 은근히 피하며 살았던 ‘진짜 교과서’ Dean Radin의 책들, 그 중에서도 2018년 ‘나라니 성탄 선물’ REAL MAGIC… 솔직히 title의 냄새가 나도 역시 거리를 두고 싶은 ‘현대인의 정상적인 편견’에 빠져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도 이들 ‘용감한 선구자’들처럼 조금은 용기를 가지고 ‘나 만의 학설’을 만드는 것도 멋진 일이 아닐까? 하~ 이래서 세상은 새롭고 즐거운 것인가? 감사합니다, 성모님… 하지만 절대로 당신의 망토에서 멀어지는 불행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쳐다보아 주시길~~

[REAL MAGIC SECOND READING, 거의 우연한 시작~~] 왜 이 책에 다시 손이 가게 되었는가… 두 번째 읽게 되는 것, 일부분만 찾아 보다가 아예 처음부터 새로 읽기 시작하는데.. 이 저자, 처음에는 약간 ‘낮게’ 보다가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주 훌륭한 ‘학자’ 중의 하나, 그것도 선구자 적,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닐지… Bernardo Kastrup과 함께 나의 인생 말년의 생각을 이끌고 있는 등대역할을 하고 있구나…

[Off The Left Eye… about reflection & obsession~~]
Swedenborg, Swedenborg… 잠깐, 한동안 잊고 살았구나… 이 ‘선지자, 예언자, visionary, luminary, scientists, scholar, inventor, genius… 근래 나에게 나타난 이 ‘인물’은 과연 나에게 어떤 역할, 도움, 의미를 줄 것인가? 아직도 초기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작은 노력은 계속되고…
오늘 거의 우연히 다시 나에게 나타났다. 오늘은 obsession과 reflection, 지나친 worry에 관한 것이어서 실용성이 있는 화제들… 조금 그들의 말을 믿어보자, 믿어보자… 결국은 Jesus/Christ-centered의 나날들, 삶인 것도 알지만 실제로 실천을 하고 있는가?

나라니의 성탄 선물, DashCam.. 4K video recorder라는 사실 이외 하나도 알 수가 없는 ‘비밀에 쌓인’ 듯한 이것, 현재까지 나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cheap chinese product라는 사실 외에.. 시간을 끌며 아직도 제대로 본격적으로 test를 하지 못하다가 오늘 드디어 첫걸음을 띄고 있는 셈인데… 첫 결과는 예상대로 실망적인 것.. 본격적으로 노력을 하면 다른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큰 기대는 안 하는 것이 좋을 듯…

YMCA, gym flooring work almost done…  지난 번 이곳에 왔을 때 flooring job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 오늘 보니 거의 끝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이곳을 보면 역시 equipment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고, 이 정도의 job은 이제 immigrant (물론 Latino)들도 감당할 수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나의 Latino들에 대한 생각은 이번 대선을 치르며 조금 부정적으로 보게 되기도 하는데… 내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1 오늘 이 flooring job을 보며 걸었던 거리가 1.5 마일, 30분을 걸었는데… 물론 빠른 걸음이어서 가능했다. 45분을 같은 속도로 걸으면 2 마일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게 되어서.. Ozzie와 걷던 산책의 운동량은 이렇게 해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Trader Joe’s] 점심 시간을 기다릴 겸 해서 정말 오랜만에 Trader Joe’s 엘 갔는데, 나에게는 wine이 눈길을 끌었고 연숙이는 이것 저것, ‘기호음식’을 기웃거리더니 예상 밖으로 $100 이 넘는 shopping이 되었다. Wine은 아주 싸지 않은 것으로 사서 26일 홍 후배부부가 올 때 쓰면 될 듯…

[McDonald’s lunch: Big Mac..]  왜 이번에는 그렇게 Big Mac의 맛이 그리웠는가… 우리 모두가… 결론은 역시 Hamburger는 Big Mac이 최고라는 사실… 특히 무섭게 비싼 tip이 없다는 이곳 fast food 가 없었다면 우리는 곤란했을지도 …

  1. 5 마일 walk

‘After Snow Day’ Blues

눈발의 흥분이 서서히 물러가며 느끼는 것, 외로움 쓸쓸함 조용함 등등.. 그러니까 기분이 저하되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거의 정상적인 것인데.. 문제는 하도 오랜만에 보는 눈발이어서 이런 기분도 오랜만, 그래서 조금 더 의아한 것이다. 오늘 내일 성당미사가 정상적으로 있다는 소식도 마찬가지로 조금은 심심하게 느끼게 한다. 나는 영원한 ‘국민학생’인지도 모른다..ㅎ

모처럼 눈발에 의한 포근한 기분을 fireplace, bird feeder, 맛있는 점심 등과 함께 하던 중에 오늘은 그 동안 못해보던 것, 둘이서 fireplace 옆에서 ‘석기시대’ 비디오를 같이 보는 것…  이렇게 둘이 나란히 앉아서 보는 것은 ‘수십 년’ 만 일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드는데, 그것도 조금 미안한,  죄책감과 함께. 그 동안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모든 media 를 소비하며 살았지 않은가? 다른 집은 아마도 우리와 달리 brand-new big & sharp flat screen TV 앞에서 한국드라마를 같이 보며 살았을 것으로 짐작이 되기에 세월이 지나며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이러다가 이렇게 여생을 보내는 것 아닌가?
이것은 ‘나의 문제’라는 것을 내가 알아야 한다. 연숙이는 전혀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내가 인정을 해야 남은 시간 조금이라도 함께 앉아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인데..
해결책은 역시 나에게 달려있다. 연숙이는 잘못이 없다. 비록 내가 바라는 연숙이의 관심, 취미 성향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지금 어떻게 바꾸냐 말이다. 불가능한 것, 내가 이런 문제를 알기에 내가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 내가 맞추려면 어떤 것을 바꾸어야 하는가? 쉽지 않지만, 노력은 해 볼 것이다. 가급적, 아니 기필코~

이번 Snow Day 일기예보는 쉽지 않은 것이지만 아주 정확하게 맞았다. 예보한 그대로 timing까지 정확히.. 물기를 품은 눈이 꽤 많이 왔기에 이제는 간선도로 운전은 가능했지만 작은 길은 그대로 남아서 얼기도 하고.. black ice watch가 나온 새벽이 되었다. 나의 유치한 아동심리 덕분에, 좀더 왔으면~ 하는 아쉬움은 계속되지만, 그래도 이것이나마 웬 떡이냐 라고 위로를 하고… 참, 나도 정말 유치한 ‘꼰대’ 늙은이 중의 하나인지… 엄청 추운 날씨의 영향으로 오늘까지 어제의 멋진 설경은 그대로 유지가 될 듯해서 우리에게는 2nd snow day가 되지 않을지…

대부분의 눈이 아직도 녹지 않는 광경, 이곳에서는 참 보기 드문 것 아닌가? 눈이 온 후 곧바로 기온이 오르면 금세 녹아버리고 흉물로 변하는 것, 추억, 기억으로 아는데.. 이번에는 그 다음날  낮에도 놀라울 정도로 춥구나. 어떻게 아느냐고? 장작을 마련하느라 밖에 잠깐 나가서 mini-tool chainsaw로 쓰려는데, 사실 엄청 추웠기 때문이다. 오늘, 내일 모두 낮 기온이 30도 대에 머문다는 사실도 조금 신선하게 놀랍구나… 그래 올 겨울은 무언가 ‘움직일 것’ 같은 희망적인 예감도 드는데…

[Winter’s Little Girls, 1994년 the storm of the century의 추억]

녹지 않는 함박눈이 Josh네 집 앞 비탈에 쌓인 것을 보며 1994년 The Storm of the Century (1994년 3월 중순)의 모습이 서서히 다가온다. 당시의 눈은 사실 격렬하고 치열한 winter storm이었고 아름들이 키다리 소나무도 우리 집 driveway를 가로막으며 쓰러졌던 때였다. 아이들 모두 elementary school 학생들이었던 때, 그때 앞을 가리는 눈을 맞으며 언덕에서 썰매를 타며 환성을 지르던 그때의 그 광경이 지금 눈앞에 앞집에 재현되고 있는 것, Josh의 두 딸애들 역시 현재 우리 두 딸들과 나이가 비슷한 것까지..  1994년이면 이곳에 이사온 지 2년째가 되었고 나는 Johns Creek에 있었던 Wegener Communication의 staff computer engineer 직장인이었으니.. 지금은 실감조차 나지를 않는다.

이런 날은 책과 Wikepedia, 그리고 ‘다시 보는YouTube’를 마음 놓고 편하게 접할 수 있는 날이 되었다. 모두 가볍지 않은 주제들, 그런 사실이 더 마음에 드는데, 대부분 metaphysics, philosophy of science에 관한 것들:

Decoding Schopenhauer’s Metaphysics
Henri Bergson (Wikipedia),
Analytic Idealism in a Nutshell

YouTube video: DAKARA GOYA, ‘그러니까~ 황야 荒野’, Nagasaki, Atomic Bomb… 
Praying Nagasaki,  지나간 현재 나가사키의 풍경, 모습, 유혹…

Stop the Steal?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아하 그 MAGA ‘개XX’무리들, 2021년 한창 궤변을 토하던 그 시절, 그 집단의 발상이 아닌가? 그것이 왜 지금 서울 광화문 집회에 등장했을까? 이들도 혹시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인가? 이런 것들 때문에 OK Boomer라는 말이 먹히는 것 아닌가? 참, 살기 귀찮은 새해, 세상을 지나가고 있구나, 지나가라, 지나가라… 지나갈 것이다~~ 병신들아~~

Seasonal Early December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대신 기온은 완전한 영하 권, 12월 초에 이렇게 제대로 겨울 맛을 보여주는 것 괜찮구나. 다만 둔해지는 손끝감각 때문인지 옷을 끼어 입는 것이 예전과 같지 않게 걸리적거리는 것이 귀찮고, 특히 pants를 입을 때 균형 잡는 것이 우습게도 어려운 일이 되고 있는데, 사실 정신을 바짝 차리면 큰 문제가 없으니 아직은 OK. 그래, 관건은 매초 매초 정신을 바짝 차리며 사는 것, 그것이구나~~

‘윤석열이 돌았나’ 라는 반응으로 시작된 조금 해괴한 한국의 ‘백치 아다다’ 정치 수준의 사건인가? 종원이와 카톡으로 한국 정치상황에 대한 ‘중론’을 조금 얻어 들으니 조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가 아닐지.. 제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평상으로 돌아가면…

중앙고 동창 차정호의 현재 모습을 동창회 사진으로 본다. 조금 예상한대로 멋진 ‘사진예술가’처럼 보인다. 나이에 비해서 곱게 익은 얼굴도 반갑구나. 제일 부러운 것, 그의 긴 머리는 예술과 어울리는데.. 참, 학생시절 때보다 더 보기 좋은 것 아닌가? 부럽기도 하고..  어제 동창회 연말모임에서 꽤 많은 사진들이 올라왔는데, 졸업 이후 한번도 못 보던 그립기 한량없는 중앙 동창들~ 처음 알아보기는 정말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보이는 것도 사실. 어떤 친구들은 name tag에서 금세 알 수 있고… 이 모습들을 모두 download해서 시간 날 때마다 ‘해석’하는 것도 좋은 여가 활용이 되지 않을까, 특히 연말을 지내면서~~ 시간 ‘활용’하기에 최고의 자료가 될 것 같은데…
중앙고 동창회, 동창회..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던 곳,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고등학교 동창회란 것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꿈도 많이 꾸었다. 내가 그들과 함께 모인 것을.. 한번도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현재를 산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초라하기도..

올해 ‘이런 식’의 long-distance driving을 도대체 몇 번이나 했던가, 특히 8월 1일 ‘큰 차 사고’ 이후로… 1970년대 초 젊은 총각 시절 미국 중서부 장거리 운전 이후 이런 적은 거의 없었는데.. 오늘도 거의 왕복 60마일의 errand, 아니 chauffer job인가… 오늘은 베로니카의 dental implant, dentist에게 가는 날,  왜 하필이면 그 많은 길 중에서 I-285 란 말인가? 익숙해지긴 했어도 이제는 절대로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정말 적지 않은 idiot들이 거칠게 운전하는 살인적 차들이 돌진해 들어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치과’, 이름부터 눈을 끄는 것이.. 혹시 ‘정 齒科’가 아니고 ‘정치 과 政治 科’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인가? 이 젊은 치과의, 처음 보면서 ‘단단한 체구’가 인상적이었지만 보면 볼 수록 ‘믿을만한 치과 의사’라는 생각이 든다. ‘경성시대’를 연상케 하는 전통적 치과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그의 ‘신세대’ 같은 모습이 조금 놀랍기도 한 것이다. 이제 implant하는 것, 오늘은 ‘뽄’을 뜨고, 다음에 작업이 끝난다고.. 복잡한 것보다는 시간이 엄청 드는 것이 바로 implant임을 이번에야 가까이 본다. 이 정 치과의를 미리 알았더라면 나도 혹시 이곳에서~~ 하는 생각도 있지만 이제는 늦었다. 이대로 살다 가는 것이 옳다.
오늘은 기다릴 때 가져간 책 Gary LachmanSwedenborg책을 읽는다.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이 조금 불만이지만… 이유는 필체가 조금 나에게 안 맞는 그런 것이어서 그런데 내용은 기대한대로 흥미로운 것이다. 조금 더 분발을 하면… 그의 ‘신학, 사상’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희망, 희망… 이제는 사후세계에 큰 기대를 하기에..

오늘~도 걷는다~마는… 을 흥얼거리며 오늘도 걸었다, Ozzie를 데리고.. 나도 녀석도 행복하다. 맑은 공기에 운동도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가? 이런 환경이… 어디서 이런 자연을 매일 맛볼 수 있단 말인가?

THE SOUND OF CHRISTMAS, a Christmas movie… good heart.. tears..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이 Hallmark holiday movie.. 그 당시에도 좋았고, 지금은 더 심장을 따뜻하게 하는구나. 이것은 2018년 성탄 무렵 YouTube에서 대거 download했던 ‘free’ movie 들 중의 하나, 그때도 몇 번이고 binge식으로 본 것인데 이것 말고 다른 것도 많았는데… 아~ 그만 hard disk가 ‘나가면서’ 모조리 없어졌으니.. 기억을 되살려 이번 holiday 때 다시 찾아보면 어떨지…

아마도 2018년 이후 거의 만지지 못하며 살았던 것, guitar amp, audio mixer, mic setup, guitar.. 등등이 조금 가까이 다가오는 12월이 되었다. 결국은 5월부터 ‘우연히’ 시작한 경운합창단 덕분이 된 것인가? 하지만 다시 손에 다가온 이것들 언제까지 견딜까? 하지만 현재 다시 guitar를 잡고 싶은 마음이 서서히 나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듯 하니… 이번 기회, 특히 12월을 이것으로 훈훈하게 만들면…

재미 없는 날씨란..

비록 대기온도는 별 차이가 없어도 변함없이 지속되는 이 지역의 독특한 기후pattern의 덕분일까?  갖가지 기후 재난, 뉴스에 너무 안심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이곳이 유난히도 기후, 날씨에 대한 뉴스가 없는 것이 조금 미안할 정도다. 이제 이 지역에서 살아온 지도 35년 째~  아무리 더워 보았자, 추워 보았자 도토리 키 재는 듯하니… 그래서 이제는 아랫동네 Florida보다 이곳으로 snow bird들, 돈 많이 벌어놓고 golf로 여생을 낭비하려는 한인 ‘박사와 전직 의사’들이 몰려오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날씨에는 충격적인 스릴과 재미는 없지만 사시사철 놀기에, 살기에는 최고의 기후가 아닐지, 나는 그것을 가끔 잊고 사는 것 뿐인가.

그렇게 한창 달아오르던 산천초목이 완전히 구름, 비의 덕분으로 시원하게 식은 것이다. 우리의 몸도 식었나, 아예 어떨 때는 싸늘하고 춥다는 느낌, 착각이겠지만, 과연 그럴까?  이제 입추, 말복~ 이 코 앞으로~ 다시 한번 또 ‘그 멋진 계절’이 저 멀리 보이는 듯… 아~ 자연의 기적이여~~ 사랑합니다, 어머니 대자연이여~~

오늘 성경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는 라자로의 부활기적으로부터 나온 것이구나. 아예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의 기념일로 되어 있고…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이제는 기적이라는 진부한 표현 보다는 신, 하느님의 힘이라는 쪽을 택하고 싶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바로 그것의 한가지 예… 불가능이 없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주위의 많은 고통 받고 신음하는 환자들은 어쩔 것인가? 그들에게도 불가능이 없는 기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나 빈약한 것 아닌가?
당장 현재 가까운 곳, 주위에서 날벼락같이 찾아온 불운, 불행, 불치병 판정,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지인 들.. 그들에게도 라자로의 희망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그들에게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닌, 어떤 ‘하느님만의 방식’으로 구원과 희망을 준비하고 계신 것일까,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지난 주 S family medicine clinic에서 regular checkup을 하면서  딸 또래의 ‘귀여운’ NP로부터 ‘쌀밥을 조심하라는’ 권고를 받은 터에 반대로 나는 갑자기 평소에 잘 안 먹던 아침 ‘밥’을 오늘은 그것도 ‘물에 말아’ 먹었으니.. 당뇨의 경계수치를 조심하며 며칠 전의 lab test의 결과를 기다리는 이때, ‘물 말아 먹는 쌀밥’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으니… 그래, 피할 것을 다 피해가면 과연 수명이 얼마나 더 연장이 된단 다냐.. 오히려 holistic 관점에서 보면  별로 큰 이득이 없음도 안다. ‘이성적이지만 상식적인 삶’을 살며 가고 싶다.

대강 7월 말까지 그동안 크게 벌려놓은 upstairs room renovation project를 끝내자고 했는데 이제 이틀을 남겨 놓고 있구나.. 거의 한달 반을 우리는 가장 더운 때에 땀을 흘리고 있는 셈이다. 70/30, 80/20, 90/10의 경험론에 따르면 지금 것은 아마도 70/30 정도가 아닐지. 나머지 30%의 일에 70%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그래도 이번에는 유난히 큰 문제나 이견이 없이 그런대로 일이 잘 마무리되는 확신이 든다. 나머지 70% 시간 중에는 계획에 없던 일, partial laminate flooring 이 있기에 아마도 8월 초순 경에는 다 끝나지 않을까.
올해 제일 큰 house project는 결과적으로 위층의 거의 모든 방들이 활기를 찾고 먼지가 쌓일 시간이 없게 될 것이다. 모든 방들이 새로운 임자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새 임자들은 우리 둘이겠지만…

요사이 부쩍 나의 신경질이 나를 괴롭힌다. 그것도 베로니카에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왜 나의 hot button이 자극을 받는 것인지.. 이것은 내가 생각을 바꾸어야만 해결이 된다는 것도 아는데… YouTube에서 노인들의 우울증에 대한 것을 보니, 첫 증상이 ‘과도의 신경질’이 있구나. 나의 것은 무엇인가? 우울하기 때문에 신경질이 나는가, 아니면 거꾸로 신경질이 나기에 우울한 것인가? 결과는 마찬가지, 내가 우울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꽤 오래 전부터 bidet를 쓰기 시작하면서 toilet 에 앉아있는 경험이 훨씬 편하고 시원한 것인데 근래 언제부터였는지, 그곳에 책들을 water tank위에 갖다 놓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 짧은 독서의 경험이 주는 느낌들이 지금은 bidet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 되었다.
이곳의 독서 특징은 ‘시간이 얼마 걸리더라도’ 결국 ‘완독 完讀’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cover-to-cover reading을 원하면 이곳에 앉아서 읽으면 되는 것이다. 빨리 읽고 싶은 책은 물론이고, 완독하기 힘들거나 싫은 책들도 이곳에 갖다 놓으면 100% 완독을 할 수 있는 아주 묘한 독서 방법인 것이다. 한때 Thomas MertonThe Seven Storey Mountain도 그 중의 하나였다. 주위에서 어찌나 극찬을 하던 책인지, 큰 생각 없이 접한 것이 실수였다. 정말  지루하고 읽기 싫은 그런 종류의 자서전이었다. 다시 읽게 되면 물론 다른 생각이 들 것이라는 예감은 없지 않았지만.
현재 toilet water tank위에는 두 권이 놓여있는데.. 하나는 근래 타계한 Supreme Court justice였던 Antonin Scalia의 biography, 그리고 2018년 고국에서 동창 양건주가 보내준  포근하고 따뜻한 선물, 이해인 수녀님의 수필집 ‘기다리는 행복’ 이다. 전자는 이제 2/3정도 진행이 된 조금은 읽기 지루한 case이고 후자는 빨리 읽고 싶은 것이다.

꽤 오랜 세월 아이들이 집을 떠나면서 하나 둘 씩 빈방들이 생기고 거의 주인이 없는 빈방이 되고… 그것을 다시 새로운 목적으로 쓰려는 room renovation 작업의 결과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 plant room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 한가운데 제일 작은 방, 햇빛이 제일 잘 들어와서 화초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다. 모든 실내 화초들이 모여서 정리가 되면  old audio system으로 old pop 을 들으며 화초들에 둘러 쌓일 상상을 해 보는데… 과연… 어떨지…

Meaning In Absurdity, Again

Absurd, absurdity~~ 이제는 영어 단어의 느낌이 잊혀진 아름다운 한글의 느낌보다 더 실감이 가기에, 오늘은 아예 ‘영한’ 사전을 찾아보았다. 아~ 잊고 살던 이 단어들: 불합리성, 불합리, 부조리, 어리석음, 황당무계, (괴패, 불성설, 탄망) ~~ 이제야 기억 속에 남았던 이 뜻을 알겠다…

This book is an experiment: an attempt to use logic to expose the absurd foundations of logic; an attempt to use science to peek beyond the limits of science; an attempt to use rationality to life the veil off the irrational.
– Bernardo Kastrup, Meaning in Absurdity

보기에도 ‘경쾌하게’ 보이는 124 페이지의 이 귀엽게 작은 책, 서문의 시작이 마음에 든다. 이 저자의 학술적 문장표현력은 또 다른 존경하는 지성 Bishop Barron 에 버금가는 것, 제일 중요한 ‘진정성, 솔직함’ 이 스며 나온다. 진실로 이런 저자들의 책은 읽는 것도 아까울 정도의 보물처럼 느껴진다.
사회, 정치 속의 absurdity에 치중하며 사는 현재의 상황을 떠나 진정한 깊은 철학, 과학적인 absurdity는 반갑게도 신선한 것들이어서 조금 살맛이 난다.

UFOs, fairies, quantum mechanics, analytic philosophy, history, mathematics, and depth psychology.. quantum entanglement, Gödel’s theorems, intuitionistic logic, and the history of science…

세월을 살며 잊고 살았던 것, open-minded skepticism, 이것이 나에게도 필요한 것인가? 무엇이, 어떤 것이 open minded인가?  그리고 skepticism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11시에 YMCA로 가서 예의 운동 routine을 마치고, 오랜만에 Home Depot와 Marshall shopping을 하고, 오는 길에 Wendy’s에서 중식을 하는 것. 일단 내일 아침 미사을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것도 나에게는 작은 심리적 분기점이 될 수도 있는데~~

큰 탈 없이 예정된 일들을 끝냈지만, 약간의 변동 사항이 있었다. YMCA 이후에  Marshall, Kroger 를 가려는 것은 연숙이가 피곤할 것을 미리 예상해서 내일로 미루게 되었다. 이것이 현명한 판단이었을 거다. 오늘 꼭 그렇게 돌아다닐 필요가 있겠는가? 내일 아침에 정말 오랜만에 아침미사엘 가려고 했기에 미사 이후에 나머지 일들을 하면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을 균등하게 나누어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오늘 YMCA에서는 주로 ab과 bicep을 강도 있게 열심히 했고, Home Depot에서는 연숙이 사슴들을 못 오게 하는 chemical을  구입, 집에 돌아오면서 예정대로 Wendy’s에서 big cup으로 Dr. Pepper와 함께 Dave’s Single로 이른 점심을 해결했는데… 오늘 이 hamburger의 맛이 조금 다르게 느껴져서 아마도 너무나 최근에 자주 왔던 것 때문이 아닐까 (조금 맛에 둔감해진 것)?

오후의 시간이 ‘엄청’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안도감을 마음껏 즐기려고 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를 못했다. 거의 PC work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나? 왜 이다지도 문제가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 것인지..
크게 문제가 없었던 Beelink Mini.. Windows 11 pro를 reinstall한 것이 화근이 된 것, 이제는 웃음조차 나지를 않는구나. 왜 문제가 없는 것을 건드렸느냐 말이다, 병신아~~
어차피 언젠가는 reinstall을 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는 reactivation문제가 있을 것을 예상해서 일찌감치 오늘 건드린 것인데.. 완전히 놀라움의 연속이 되었으니..  이제 마지막 남은 문제는 Beelink에서 보내준 activation key (2개)가 모두 실패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결국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은 될 것이겠지만, 참 기분이 좋지 않구나.
그래, 마음을 편하게 먹자, 이 조그만 것이 그렇게 나에게 중요한 것이냐? 최악의 경우 당장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조금이라도 편한 마음으로 가급적 이런 pc work을 즐길 수는 없는가, stupid, 병신아~~~

결국 이 문제는 일단 깨끗이 해결이 되어서, happy ending 으로 끝났다.
11시 30분까지 씨름을 하다가 기적적으로 activation에 성공.. 이유는 알 수가 없으나 일단 새로 샀을 때의 상태로 완전히 복원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Beelink 제품 자체에는 license문제가 없는 것인 모양…

Magic Windows Scale Factor, 110%

나와 함께 여생을 같이하는 것 중에 대부분 시간을 같이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desktop PC의 monitor가 아닐까? 그것이 나와 세상 삼라만상을 연결해주는 제일 중요한 window가 아닌가? 그것도 시각적이기에 제일 민감한 것이니, 그것이 평소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보이면..
Analog video에서 벗어나려고 sub-d vga 에서 HDMI로 switch를 하는 과정에서 겪는 변화 중에 Windows display setting이 제일 신경이 쓰이는 곳, 떨어지는 시력 때문이기에 지금까지 display scale 125% 에 의존하다가 이번에 HDMI monitor (역시 Samsung) 로 바꾸면서 과감하게 100%로 바꾸어 보았는데… 아무래도 무리, 무리.. 나의 시력이 그 동안 좋아졌을 리가 없는데, 이것은 만용에 지나지 않았구나. 그렇다고 자존심 상하게 전으로 돌아가기는 싫고… 100%와 125% 사이의 것이 있다면.. 하고 살펴보니.. 아~ Windows 11 에 custom scale factor가 있지 않은가?  과감하게 110%로 바꾸어 보았더니.. 이것이 바로 magic scale factor로 느껴진다. 이제야 Windows 11에는 모르던 여러 가지 senior 들에게 필요한 feature들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솔직히 Microsoft 에게 감사하고 싶은 심정까지…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것이다.

최근 serony-dot-com blog posting이 거의 중단이 되어서 WP (WordPress) admin page를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는데, 그래도 posting을 하리라는 가느다란 희망을 갖고 가끔 열어보는데.. 이곳은 나의 private area임에도 가끔은 page의 위쪽에 notice정도는 일시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번에 보이는 것은 조금 느낌이 좋은 그림이 아니었다. WPBoutik라는 해괴한 plugin에 관한 것,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는데, 아니다 다를까, 기분이 안 좋더니… 며칠 째 이 보기 싫은 banner ad (사실은 spam으로 보이는)가 나의 신경을 건드리며 나의 참을성을 시험하는 듯했다. 요즈음 내가 참는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듯해서 괴로운 차에 이런 것들은 정말 괴로운  것이 아닐 수가 없는데…
오늘은 아예 단단히 각오를 하고 몇 시간을 ‘낭비’하며 research를 해보았는데..
우선 WPBoutik란 것으로 출발을 해 보니 이미 complain message가 google의 도움으로 보인다. 아마도 내가 이 spam ad를 보기 시작할 무렵의 것이니.. 이 ‘괴물 광고’가 뜬 것이 내가 보기 시작한 그때였던 모양이다.

제일 key data가 WPBoutik이란 것인데, 이것을 찾아보니.. 프랑스에서 만든 WP plugin이고, 그것을 ‘사라는’ 광고였다.
이 고약한 banner ad는 광고를 지우는 plugin조차 제거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한때는 절망적인 기분까지 들었다.  계속 찾아보니 결국 단서를 잡게 되었다. 이 banner ad와 또 다른 plugin, WPS Menu Exporter 와 상관이 있다는 사실! 바로 이 plugin이 이 banner ad 문제의 장본인이었던 것, 나아가 나의 site에도 그것이 쓰이고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 그것을 없애고 난 이후에 결국 그 괴물 ad는 순간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문제는 풀렸지만 내가 화를 참을 수 없었던 이유는 WPS Menu Exporter를 만든 ‘놈’과 WPBoutik를 만든 놈이 같은 놈 Nicolas Kulka란 인간이었다는 사실..   아마도 Menu Exporter 를 upgrade할 때 실수를 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믿을 수가 없다. 그 인간은 완전히 거의 spam성 광고로 plugin을 design했다는 다른 user들의 증언이 있으니… 결국 나는 양심 없는 놈 Nicolas Kulka에게 모든 탓을 돌리게 되었다.
비록 며칠 동안 속을 끓이긴 했지만 happy ending을 맞이하게 된 오늘 오후는 머리도 몸도 가볍기만 했다.

이런 예기치 않은 골치 아픈 것이 해결된 이후 받게 된 Amazon deliveries 4가지 , 거의 $100이나 되는 것이었지만 package 는 가볍기만 했다. 모두 모두 가볍고 작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500GB SSD는 곧 나의 main pc의 예전의 drive D로 설치, 예전의 각종 backup file들을 restore하게 되었고, 다른 한 개는 앞으로 pc system work에서 쓰면 된다.

Meaning in Absurdity, Kastrup의 7번째 책, 놀랍게도 얇고 가벼운 것이었다. 이제는 이렇게 ‘부담이 적은 소책자’가 더 마음에 드니까.. 기대가 된다.

2개의 Bluetooth 5.1 USB dongles, 이것은 어디에 쓸지.. 아직 정하지 못했고… 아하~ 기대가 큰 것은 바로 자동차 scratch 를 감쪽같이 복원, 감추는 nano pad인데, 솔직히 말해서 크게 기대는 안 하지만.. 누가 알랴?

Text message, 새로니의 것, 이번 주일부터 다음 주 수요일까지 Ozzie를 보아 달라고.. Richard 누나 식구가 그때 California 로부터 방문한다고. 그때 아마도 Chattanooga 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아마 이번에 그 빈집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은 아닌지.  Ozzie와 4일간 있는 것, 어찌 내가 마다하겠는가, 어림도 없지.. 가끔 귀찮을 때가 없는 것은 아니나, 99%는 나에게 즐거움과 보람, 행복함을 주는데..

Last Tucker Day

일찍 잠에 빠져들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지난 밤, 혹시나 꼬박 밤을 새우는 것은 아닐까 은근히 걱정까지 했는데, 나중에 보니 기적처럼 분명히 잠이 들었다. 아마도 깊고 긴 수면상태는 아니었을 듯하지만, 상관없다, 분명히 의식을 잃었던 잠이었으니까. 이럴 때 꿈 같은 기억이 되살아나면 확신할 수 있을 텐데, 뚜렷한 것이 없구나. 이제는 심리학, 과학, 철학적인 각도로 보는 ‘진짜 꿈’에 관심이 생기고 있어서 제발 멋진 꿈의 episode를 기다리게 되었다. 아~ 꿈에는 그렇게 엄청난 ‘과학철학영성적’ 사연이 있었다는 사실, 재미있고 흥미롭지 않은가? 더 깊이 공부하고 싶기도…

침실을 나오며 복도에 있는 온도계는 분명히 79도를 표시하고 있었다. 하나도 더운 느낌이 없는데… 그렇다 잠으로 몸이 완전히 적응, 식은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a/c를 모면하는 새벽인데.. 이것 혹시 한 여름의 그런 상황이 아닌가? 벌써~~  원인은 물론 지독한 습도일 것이니까 의아해할 것 하나도 없다. 이제 5월이 지나가며 우리는 거의 여름의 꿈에 취해가고 있는 것일지도..

오늘은 자그마한 금자탑을 상상하는 늘, 우리의 4개월 여의 day job의 마지막 날인 것이다. Day job의 이름은 물론 baby-sitter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번에 아주 값진 경험을 한 듯해서 정말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 그것도 나라니 가족은 물론 연숙을 도왔다는 자부심을 주었기에 더욱 기분이 좋은 것이다. 시원-섭섭함의 전형적인 case가 되는데… 솔직히 말하면 시원한 것이 섭섭함보다 간발의 차이로 크다고 할 수 있지 않을지..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닌 것을 실감하고 있으니까…

나처럼 잠을 설친듯한 연숙이 너무 늦게 일어나는 듯해서 깨우고 보니~~ 아~ 오늘 Tucker day job 은 8~4가 아니고 11~4 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것도 또 다른 ‘작은’ 망각증의 하나였던가? 괴롭구나, 어찌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었단 말인가? 갑자기 아침에 ‘기나긴’ 여유가 생긴 것은 반갑긴 하지만 그야말로 mixed feeling은 피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이 작은 기억력을 되살릴 수 있을까?

어제 Beelink mini-pc를 setup하면서 나의 작은 pc-ecosystem을 reset하는 계기를 맞는다. 제일 시각적인 것이 screen global size, resolution이 그 중의 하나다. 비록 시력이 더 좋아질 리는 없겠지만 아직은 ‘조금 더 작은’ font-size 정도는 큰 문제가 없다. 작아지는 글자들과 함께 한정된 screen에 보이는 object들은 그만큼 많아지는 것, 더 큰 pc-monitor를 구입하는 것에 버금가는 smart한 방법이 아닌가?
결국 나는 이제까지 125% 로 확대된 screen을 원상태로 복귀를 시키고 대신 개별적인 app들의 font size를 알맞게 조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 방법이 remote desktop ecosystem에서 훨씬 매끄러운 screen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현재까지 아주 결과가 고무적인 것이다.

어제 생각지도 않았던 FedEx package가 문 앞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언가 order했던 기억이 우리에게 없었기에 아마도 잘못 delivery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세히 보니.. 아하~ 아직도 노익장(70세?) Delta Airline의 승무원을 일하시는 배 자매님이 보낸 것, 역시 coffee가 들어있었다.
매년 5월이 되면 자매님의 언니 해숙 자매님의 기일을 맞아 묘소 방문한 것을 보고 드리곤 했고, 그 때마다 이렇게 하와이 산 커피를 보내시곤 했었다.
2015년 5월 초에 타계를 하신 배 베로니카 자매님, 올해는 깜빡 잠시 잊고 지난 주일날에야 성묘를 할 수 있어서 솔직히 미안하기만 했는데..  이제 베로니카 자매님이 떠난 지도 9년째… 세월이 이렇게..

현재 ‘난독, 잡독’ 으로 일관한 나의 책 편력을 보여주는 이 모습에서 나는 내가 현재를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찾으려 기를 쓴다. 한때, 아니 거이 10여 년 동안 내가 칩거했던 Universal Church, Catholic Home의 dogmatic tradition에 대한 호기심, 탐구에서 시작했던 일련의 노력이 서서히 조금 답답한 테두리를 벗어나고 있는 한 단면일 거다. 가톨릭의 전통교의의 답답함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 밖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호기심 때문인가? 주로 common-sense, traditional metaphysics가 현재 관심의 거의 전부인데, 궁금한 것은 어느 것이 더 ‘보편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 조금 피곤하구나. 일주일 두 번씩 손자녀석과 놀아주는 것, 행복하고 즐거운 일임은 분명하지만.. 아~ 십 년만 ‘젊었으면’, 아니다 ‘십 년만 덜 늙었으면’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이즈음의 나이에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거의 2시간 worst traffic과 싸우며 drive를 하는 일은 특히 쉽지 않은 것. 2월부터 오늘까지 거의 4개월 동안 정성과 혼신의 힘을 다해서 우리부부가 가족을 위한 헌신적 봉사를 했다는 그 사실로 모든 피곤함을 잊고 싶은데…  역시 귀가를 하는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다음날 아침엔 늦게 자고 싶은 유혹 또한 큰 것이다. 이제는 일단 정해진 일은 큰 문제 없이 끝이 났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다.

다시 찾아온 반가운 꿈

다시 찾아온 꿈, 익숙하고 심지어 이제는 반갑기도 한 종류의 꿈, 이것은 classic 중의 classic으로 죽을 때까지 머리 속에 간직하고 갈 종류다. ‘상당히 수해를 입은 우리 집’의 그림… 어찌해서 이것이 반갑단 말인가? 쉽게 말하면 그것은 꿈에서만 존재했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까.. 깨어나는 기쁨과 만족감, 그것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 아닐까? 이제 Jung’s Metaphysics 책이 오면 그곳에서 조금 꿈에 대한 hint를 얻을 기대를 하니 재미있기도 하구나…

아~ 어제 늦게 들었던 ‘부음, 부고, 장례미사..’ 소식, 어떻게 그것을 까맣게 잊고 어제 일기에서 언급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뭐, 그럴 수도 있는 것 가지고 왜 야단? 아니다, 2010년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같은 레지오 단원이셨던 고렛따 자매님의 선종소식, 사실 83세의 연세도 그렇고 오랜 병세에 대한 것도 알기에 그렇게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내 자신의 반응에 놀란 것… 아~ 나의 심리상태도 조금 복잡하구나… 조금 분석을 하면 어떨지..

이틀 째 1980/1990년대의 대한민국 TV program, [드라마게임] video를 무심코 보고 또 본다. 왜~ 그럴까? 이것은 2000년 대까지 이어진 긴 세월의 고국사회상을 복습하는 나에게는 아주 적당한 교재이기도 하다. 그 이유 중에는 이곳의 이야기 주인공들이 세대적으로 우리들과 비슷한 것도 있다. 거의 사회적 환경에서 겪는 가족, 특히 부부들이 겪는 각종 문제들을 ‘조직적’으로 파헤치며 그것을 편하게 볼 수 있게 드라마화 한 것이 나를 이곳으로 이끄는 듯 하다. 그 나이에 내가 고국에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계속 상상, 비교를 해 보는 것이다.

지금 화장실에 앉아 읽고 있는 ‘toilet’ reader 책, Richard Feynman biography, Genius의 영향인가… 어제 저녁 늦게 보았던 YouTubeFeynman’s Method episode, 나에게는 너무나 새로운 화제여서 신선하고 어린애처럼 신이 나기도 했다. 세기적인 두뇌들이 ‘풀었던’ 물리수학의 수준을 유연하게 쉽게 풀어나가는 과정으로 가늠하는 자체가 그렇게 나를 기쁘게 한 이유, 그것이 나도 궁금하다. 비록 순수, [수학을 위한] 수학이 아닌 물리 응용수학이지만,

Front lawn, 몇 년 전부터 우리 집의 ‘감추고 싶은 모습’ 중의 하나가 되어간다. 그렇다고 $$$ 를 투자할 자신은 없고, 우리의 방식대로 잘 가꿀 수 있는 행운만 찾고 있다. 근본적인 처방대신 자주 깨끗하게 ‘이발’을 해 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정도는 우리, 아니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string trimmer를 smart하게 활용을 하면 되는 것, 나의 건강, 운동에도 큰 도움이 되고..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알맞은 최선의 비법이 아니던가?
오늘 corded trimmer와 trimmer deck를 총동원해서 앞쪽 잔디의 전체를 손을 보았다. 멀리서 보면 다른 집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아니, 아예 잡초가 무성한 어떤 집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정돈된 것이다.

혼자 drive 외출을 하는 연숙이 조금 불안하기에 외출 내내 신경이 쓰인 것은 사실이다. 한때는 ‘아마도 이제 혼자 운전은 힘들지..’ 라는 절망도 있었는데 어떻게 다시 이렇게 오뚝이처럼 되살아났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아픔과 불안을 100% 표현하며 사는 상격을 내가 제대로 ‘그대로’ 읽지 못해서 생기는 나의 과장된 불안 때문일 거다.  오늘 외출, 평상의 모습이었기에 일단 ‘폭풍은 지나간 듯’한 안도감을 감사한다.

Flu 독감의 끝자락에…

끊임없이 비, 가랑비, 이슬비, 굵은 비.. 각종 물기가 거의 이틀 계속 내린다. 집에서 편하게 칩거하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날씨, 솔직히 우리 둘은 고맙기도 하다. 감기의 끝자락에 이렇게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변명, 핑계거리’ 가 생겼으니, 조금 덜 죄송하다고나 할까… 일단 이렇게 ‘장기간’ 쉬는 기회가 오면 솔직히 다시 움직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왜 모르랴~ 하지만 이런 때는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니까 가급적 편하게 쉬는 거다.  이제 완전히 1주일의 ‘휴가’를 보낸 셈이다.

PON, 아예 준말을 만들었다. The Power Of Now.. 이번 ‘칩거’ 중에 이 책, 대량의 text를 소화하고 있다.  일단은 속독을 하고 있는 셈이지만 그런대로 기본적인 idea는 계속 골라내어 얻고 있다. 거의 대부분 내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물론 다시 정독을 해야 조금 저자, Eckhart Tolle의 주장, 의도를 알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이 저자의 생각, 이론은 그의 독창적인 것은 물론 아니고 오랜 인류 전통을 통합, 종합 한 것 위에 그의 독창적인 것도 가미한 것이라서, 우선 ‘안전’하기에 마음에 든다.

새롭게 오늘의 ‘복음 묵상글’ 을 본다. 며칠 동안 이것에 눈이 가지를 않았던 것. 오늘 말씀에 대한 Bishop Barron의 comment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눈에 보인다.  현재 내가 ‘심취된’ Tolle의 책도 흔히 말하는 spirituality without religion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Lots of New Age devotees today want spirituality without religion , and lots of evangelicals want Jesus without religion. Both end up with abstractions. But the one thing Jesus is not is an abstraction. Rather, he is a spiritual power who makes himself available precisely in the dense institutional particularity of his Mystical Body across space and time. [Jesus didn’t come to abolish religion; he came to fulfill it.]

– Bishop Robert Barron (3/6/2024)  [my emphasis..]

요즈음 나의 ‘정체성’을 잃고 있는 듯한 것은 역시 나의 blog posting 의 부재인 것도 이유가 되는지. 지금 현재 나는 이 부재 상태의 최장 기록을 경신하게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 Here & Now의 정신이라면 이것도 현재를 살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표시가 될는지… 과거, 아니 지난 몇 개월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은 ‘분명히’ NOW에 속하는 것 아닐까? 나는 아직도 이 HERE AND NOW 의 ‘철학’에 대해 초보자인지도 모른다. 계속 노력할 수밖에…

줄기차게 내린 비가 서서히 그친 backyard,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봄맞이 준비가 필요한 듯, 연숙이의 꿈이 담긴 역사 깊은 우리 집 뒤뜰, 꽃밭과 텃밭.. 올해는 정말 나도 조금 일을 하며 참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과연 어떨지…

오늘 과연 우리는 ‘완쾌를 선언’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이 없었지만 의외로 나보다 연숙이 그것을 외치며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오늘까지 연숙이 상태를 보기로 했지만 감기 기운이 거의 사라진 듯, 갑갑하다고 순식간에 가방을 챙기고 YMCA gym으로 가게 되었다. 일주일도 넘게 못했던 운동이었지만 사실 힘든 느낌이 하나도 없었으니.. 우리는 완전히 완쾌가 된 것… 아~ 감사합니다. 우려했던 것보다 일찍 벗어난 것이다.  Kroger에 들러서 요새 즐기게 된 homemade  deluxe big hamburger와 작지만 비싼 수박까지 곁들여서 푸짐히 ‘국밥’ 아닌 점심까지 먹었으니~~  날라가는 기분… 아~ 역시 몸이 건강해야~~  내친 김에 둘이서  한 시간 정도의 늦은 낮잠까지 침실에서 잤으니, 이것은 극락이 아닌가?

세찬 바람, 겨울 비 내리던 날

일기예보대로 새벽부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다행히 기온이 조금 올라서 비의 느낌이 그렇게 차갑지만은 않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겨울, 그것도 한겨울 비가 아닌가?
바람을 동반한 세찬 비, porch 안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가며 들이친다. 다행히 젖을 물건들이 거의 없어서 이렇게 쓸쓸하고 멋진 비를 편하게 감상하는 것, 이것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듯하니.. 나는 지독한 구제불능의 감상주의자…

오늘 오후 예정이 된 신부님과의 면담의 주제는 무엇인가? ‘등대회 불미스런 사건’을 비롯해서 성당 공동체 신앙, 친교 활동의 scope 등등인데, 깊은 생각을 정리 못하며 만든 약속이라서 지금으로써는 뚜렷하게 정리를 할 수가 없다. 혼자가 아니고 우리 둘이 만나는 것이라 조금 덜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니까.. 일단 부딪히고 보는 거다.  나 혼자, 아니 우리 둘만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뒤에 ‘성령, 성모’님이 도와 주신다는 것도 잊지 말자…. 어떻게 되겠지, 어떻게…

NDE, NDE, NDENear Death Experience..  요즈음 나의 머리 속에 자리를 꽉 채우고 있다. 2018년 성탄시즌에 선물로 받은 책 Dean Radin’s MAGIC을 읽으며 깨달은 바가 적지 않았는데 2023년 시즌에는 다른 책 Bruce Greyson’s  After, 이것으로 5년 전과 더 다른, 다 강한 과학의 위력을 깨닫게 된다. 한마디로 지금의 추세는 과학이 영성, 신앙, 종교를 도와주고 있는 것, 얼마나 irony한 세계관의 변화인가? 이 사실을 알면 알수록 신나고, 즐겁고, 행복한 것이다. 이 현상이 서서히 주류 과학계에서 언급,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신기하고 신명 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선구적 과학자’들, 특히 quantum physicist들의 용기가 너무나 존경스러운 것, 숨길 수가 없다.

불안, 두려움, 절망감의 정체와 해답은…

예전, 아니 오래~ 전에 스쳐갔던 생각 중에는 ‘현재가 힘들어도 나이가 들면 분명히 도사나 신선처럼 느끼는 잔잔한 평화, 불안이 없는 지혜와 함께 살 것’이라는 뜬구름 같은 희망이었다. 그것이 지금 눈을 떠보니, 어떻게 되었는가~ 별로 아니 전혀 나이와 편안함은 상관이 없음을 깨닫는다. 나이, 세대별로 그 성질이 달라진 차이뿐이다.  그 중에는 불안과 두려움 같은 것은 끈질기게도 따라오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비록 육신의 건강은 점점 내리막 길을 걷게 되어도 머리 속에 펼쳐지는 세상은 점점 편해질 것이라는 희망, 바로 그 희망을 원하며 살았는데… 결과는 거의 참패에 가깝다.

얼마 전,  ‘강산이 99%  변해버린 고향’ 방문 시, 처조카 딸 수경가 선물이라며 수원근교 미리내 성지 내 성물방에서 건네 준 책에서 이 급한 명제에 대한 분석적인 essay를 읽게 되었다. ‘잊혀진 질문’ 중에 하나로 등장하는 이 질문은 바로 ‘불안과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것과 더불어 ‘희망의 부재’까지 함께 다루었기를 바라기도 했다. 과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신부님이 제시할 것인가, 궁금했는데 나에게는 50% 정도의 답은 주신 셈이니까, 이번 고국 방문의 성과 중에 하나라고 기억을 할 것이다.

불안, 초조, 두려움 이런 감정들을 ‘특권’이요 ‘에너지’로 승화하려는 신부님의 ‘성경해법’이 과연 나머지 50%의 해답을 줄 것인가?  모든 것, 아니 이 우주의 모든 것 (없는 것도 포함한)은 궁극적으로 내가 보는 세계관 안에서 내가 가진 생각의 눈으로 보는 나만의 실재, 현실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분명히 해답은 있다. 쉽게 말하면 ‘세상은 생각하기에 달린 것’이다.  코앞에 다가오는 물리적인 위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머리 속 consciousness 의식체계, 아니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일 뿐이 아닐까? 성경 속 예수님의 진복팔단 眞福八端 Beatitudes 도 이런 각도에서 보면 전혀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긍정적인 착각의 영역’인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이 끈질기게 따라올 때 극복할 방법은 있는 걸까요?

 

두려움에 대하여 독일 소설가 장 파울이 위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소심한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기 전에 무서워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무서워한다. 대담한 사람은 위험이 지나간 다음부터 무서워한다.”

이 말은 그대로 진실입니다.

소심한 사람은 위험을 미리 걱정합니다. “어이쿠, 이러다가 뭔 일 터지는 것 아냐? 어떻게 준비해야 하지?” 그러면서 나름 철저히 준비한답시고 우왕좌왕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위험에 직면하여 공포에 짓눌립니다. “우와, 집채만한 호랑이잖아. 이제 나는 죽었다!” 벌벌 떨다가 그만 위험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담한 사람은 위험이 지난 다음 사태를 인식합니다. “이거 뭐야? 돌이 굴러 떨어졌잖아! 하마터면 큰일 뻔했네.” 순간적으로 엄습하는 전율에 식은땀을 흘립니다.

결국 두려움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말인 셈입니다.

 

수천 년 철학사에서 근세기에 등장한 실존주의 사조는 철학적 고민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우주, 자연, 사회 등의 거창한 주제보다 더 시급한 주제가 인간의 실존이며 나아가 인간의 적나라한 감정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 안에도 여러 색깔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꼽는 인간의 숙명적인 문젯거리가 있으니 바로 ‘불안’입니다. 약간씩 의미상 편차가 있습니다만 두려움, 공포, 염려, 걱정 등을 아우르는 ‘불안’이야말로 인간 심리의 표층과 심층을 장악하고 있는 생존 인자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독심술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중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줄을 잇고 있는 통계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취업, 인사포털 인크루트가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 2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 5면 중 4명꼴인 82.1 퍼센트가 졸업을 앞두고 불안함,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일명 ‘4학년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고 응답했다.”

“24일 구직포털 HR KOREA 는 지사 회원 직장인 3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직장생활 스트레스’에 대해 발표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39.3퍼센트가 미래에 대한 (관한) 불안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편의상 젊은층의 ‘불안증후군’에 초점을 맞춰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안이 습관화된 사람들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그 강도가 약해지길 기대하는 것은 경험상 무리일 것입니다. 도리어 나름 탄탄하던 사람들조차 은퇴를 기점으로 불안의 늪에 빠지는 경우를 허다합니다. 불안이야말로 예측불허로 찾아오는 불청객이며, 수시로 변색하며 살아남는 카멜레온입니다.

 

그러면, 이 불안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불안’이라는 것은 ‘공포’와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불안’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상태입니다. 눈앞에 주어진 자극이나 위협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생기는 감정을 ‘공포’라고 합니다. ‘공포’는 동물도 느낄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원초적인 본능’이거든요. 쥐는 눈앞에 고양이가 나타나면 공포에 떨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이것은 사고 작용이 없어도 생기는 일종의 반사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안’은 반드시 생각의 결과로써 생깁니다. 자신의 존재와 관련해서 어떤 위기나 피해를 미리 상상하거나 불길한 일을 예상할 때 그 생각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불안’입니다. 동물은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동물이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불면증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동물이 느끼는 것은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변화에 대한 반응, 즉 공포입니다.

그러므로 불안은 인간 고유의 정서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버드대 정신과 교수인 필레이 박사는 수년간의 뇌 영상 연구를 통해 인간이 공포, 불안, 두려움에 반응하는 독특한 방식을 밝혀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아주 작은 위험도 재빠르게 감지하며 ‘원하는 것’보다 ‘피하고 싶은 것’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도록 진화해왔다고 합니다. 이를 처리하느라 다른 일들을 뒤로 미룬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건 불가능해, 하지만 나는 이직을 하고 싶어”라고 생각한다면 뇌는 이 상충된 메시지를 받고 혼란스러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불가능해’라는 두려움을 먼저 처리하느라 진정 원하는 ‘이직’을 하려는 에너지를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필레이 박사는 그의 저서 <두려운, 행복을 방해하는 뇌의 나쁜 습관>에서 이것이 바로 뇌가 우리를 과잉보호하는 방식이라 설명합니다.

이 통찰은 우리가 두려움을 처리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됩니다. 그르므로 우리는 ‘나’ 자신의 불안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불안의 작동 방식을 확실히 파악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가까이 불안현상을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떤 것에 위협을 느낄 때, 우리 뇌는 0.01초 만에 두려움의 시스템을 작동시킨다고 합니다. 뇌의 편도체가 위험을 감지하고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0.01초에서 0.03초. 이후 의식적인 처리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두려움과 두려움의 대상을 파악하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본래 인간이 진화하는 데 필수 요소였습니다. 두려움을 얼마나 빨리 감지하느냐가 생존과 직결되었기에 뇌는 다른 감정들보다 위협을 먼저 처리하도록 진화한 것입니다.

하지만 역기능도 따랐습니다. 이 예민하고도 무의식적인 두려움에 대한 자각이,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파악하고 위축된 반응을 유발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두려움은 단지 이전에 기억된 정보일 뿐’이라는 자각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 중 더러는 어른이 된 뒤에도 웅덩이의 물만 보면 반사적으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는 어린 시절 편도체가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강하게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뇌에서 일어나는 가상의 반응일 뿐 실제가 아니지요. 다 큰 어른이 웅덩이의 물을 무서워할 이유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생각의 힘만으로도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불안의 작동방식을 잠깐 짚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불안은 없어도 문제고 너무 많아도 문제라는 얘기가 됩니다.

이제 불안의 순기능을 클로즈업해보겠습니다. 심리분석가 프리츠 리만은 ‘불안의 심리’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불안은 우리의 발전에 특별히 중요한 지점들에서 제일 먼저 의식 속으로 온다. 즉 친숙한 옛 궤도를 떠나는 곳에. 새로운 과제를 감당하거나 변화해야 하는 지점에 불안이 온다. 발전, 성장, 성숙은 그러니까 명백히 불안 극복과 깊은 관계가 있다. 어느 연령에서든 그 나이에 상응하는 성숙을 위한 걸음이 있으며, 그 걸음은 있게 마련인 불안을 수반한다. 걸음을 내딛자면 그 불안을 다스려 이겨내야만 한다.”

프리츠 리만보다 앞서 불안의 긍정적 역할을 철학적으로 섬세하게 규명한 사람이 철학자 키르케고르입니다. ‘불안’을 일생의 연구 주제로 삼았던 그는 불안을 도약을 위한 계기로 보았습니다. 사람은 심미적 삶, 윤리적 삶, 종교적 삶의 3단계로 질적 성숙을 이루는데, 불안이 앞 단계에서 다름 단계로 도약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사람은 본능적으로 심미적인 삶을 산다고 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좇아 살거나 환상에 빠져서 삽니다. 삶을 기분풀이로 여기며 쾌락을 탐닉하면서 기분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이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삶은 결국 권태와 싫증에 다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무기력한 자신의 눈에 비친 인생은 무상하며 미래는 불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합니다. 이 절망은 새로운 삶을 찾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절망의 늪을 넘어 윤리적 삶으로 도약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불안으로 말미암아 이제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쾌락만을 좇아 무비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하게 됩니다. 사람은 이제 내면의 양심에 호응하고 의무에 성실하려고 애씁니다. 이제 비로소 인간은 ‘되어야 할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단계도 결국 벽에 부딪치고 맙니다. 높은 도덕에 이르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 그리고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무력함을 절감합니다.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고, 또 윤리적으로 산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 데다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망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맞서서 고뇌하는 인간은 마침내 죄의식과 불안에 빠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 불안과 절망이 다시 도약을 만들어 사람을 신에게로 내몬다고 합니다. 이 현실의 모순을 심판해 줄 하느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불안은 종교적인 삶으로 옮겨가도록 사람들을 이끌어줍니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참된 삶은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된다고 말합니다.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를 때에 인간으로서의 무력감과 허무함을 떨쳐버리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결단과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무리 공부하라고 다그쳐도 정작 학생 자신이 공부하려고 하지 않으면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불안의 역기능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첫째로, 불안은 사람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여 결국 도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공학기술자 헨리 포드의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활동을 제한 받아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라고 했거든요.

나는 해군 출신입니다. 해군 훈련 과정에서 “퇴함 훈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에서 물로 뛰어 내려야 할 유사시를 대비하여, 실내 수영장 10m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입니다. 적음을 위하여 먼저 5미터에서 시작해 다음 7미터, 그 다음 10미터 순으로 진행합니다. 전원이 차례로 뛰어내려야 하기에 줄을 지어서 기다립니다. 자기 차례가 오면 다이빙 대 끝에서 서서 오른손은 코를 쥐고 왼손은 낭심을 잡은 채 호흡을 가다듬고 “000 사후생 퇴함준비 끝!”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지휘관이 “퇴함!” 하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퇴함!” 이라고 복창하고 뛰어내려야 합니다.

사람은 10미터에서 가장 큰 고소공포를 느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높이에서 그냥 뛰어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위에는 구대장 몇 명이 지휘봉을 휘두르며 포진하고 있습니다. 훈련생들에게는 10미터 높이도 무섭지만 그 지휘봉도 만만찮게 무섭지요. 그런데 세 명이 끝내 뛰어내리지 못했습니다. 구대장들이 격려를 하고, 협박을 하고, 떼밀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난간을 붙잡고 있는 힘은 여러 장정이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초인적으로 강했습니다. 결국 그 세 명은 석식 열외에다, 완전군장 차림으로 날이 저물도록 연병장을 ‘평화롭게’ 돌아야 했습니다. 이렇듯 두려워하는 마음을 먹으면 발이 땅에 딱 달라붙고,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요지부동하게 됩니다.

둘째로, 불안은 사람의 심신을 해칩니다. 제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청년의 수가 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남편을 일선에 내보내고, 염려와 불안과 근심에 빠져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 시민이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총탄이 사람을 꿰뚫어 죽인 수보다 불안과 공포가 죽인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다.”

지지 않으려면 정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리처드 바크는 그의 저서 <날개의 선물>에서 인간이 성취를 향하여 전진하는 과정을 수영장의 다이빙대를 예로 들며 설명합니다.

다이빙대에 처음 도전하는 사람은 우선, 며칠 동안 다이빙대를 올려다 만 봅니다. 이는 올라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생각하는 과정입니다. 그 다음 단계로, 그는 드디어 젖은 계단을 조심조심 오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결단을 내리는 단계에 해당하며, 아직 결심을 굳히지는 못한 채 불안 중에 조금씩 전진하는 단계입니다. 셋째 단계로, 그는 높은 다이빙 대 위에 섭니다. 결단 직전, 가장 불안한 단계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두 가지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다이빙을 포기하고 내려오는 길로 이는 “패배를 향한 계단”입니다. 다른 하나는 과감하게 물속에 뛰어드는 길로 이는 “승리를 향한 다이빙”입니다. 다이빙대 끝에 선 그는 두려움에 소름이 끼쳐도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면, 후퇴는 이미 늦었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인생이라고 불리는 다이빙대가 정복되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불안과 두려움의 다이빙대를 한 번 정복한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높은 데서 다이빙을 즐길 정도가 됩니다. 바크는 책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천 번 올라가고 천 번 뛰어내리고, 그 다이빙 속으로 두려움이 사라지고 내가 비로소 인간이 된다.”

 

어떻게 하면 이 불안감을 덜 수 있을까요? 나는 인생의 위대한 멘토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 자체가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방법은 강력한 희망과 꿈으로 불안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인간의 두 얼굴>은 꿈의 한 모습인 ‘긍정적인 착각’의 효과를 밝혀냈습니다. <인간의 두 얼굴: 착각> 편을 제작한 정성욱 PD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국내외 책과 논문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고는 인간의 착각과 행동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줄 실험을 구상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도화지에 손가락 하나를 없는 손을 그리고, 다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묻습니다. “10년 후 이 손가락은 어떻게 될까요.” 일부 아이들은 어른들의 예측을 뛰어넘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손가락이 자라나요!” 라고요. 실험 결과 손가락이 자란다고 대답한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지능지수가 높았다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 착각입니다. 이는 살아가면서 겪는 실패와 좌절의 상황에서 스스로를 감싸는 보호막 역할을 합니다. 정 PD는 말합니다.

“긍정적 착각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발전시킨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울증 환자들은 절대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주변 상황을 냉철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착각을 동반하는 희망과 꿈이야말로 ‘실패와 좌절’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감싸는 ‘보호막’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방법은 불안을 신께 맡기는 것입니다.

토론토대학 심리학과 마이클 인즐릭트 교수 팀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불안과 걱정에 덜 시달린다는 연구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인즐릭트 교수는 “신앙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테스트에서 실수를 하거나 잘 모르는 것이 나와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팀은 그 내용을 2009년 <심리과학> 온라인 판에 발표했습니다.”

한마디로 기도가 불안감을 해소해준다는 얘기입니다. 나 자신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어떤 사람이 옥중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씌어 있는가를 세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꼭 365번이 기록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1년 365일 매일 한 번씩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그럴듯한 수치적 일치입니다. 우연이긴 하지만, 신은 불안에 떠는 우리를 최소한 매일 한 번씩 위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은근히 전해줍니다.

 

뭐니 뭐니 해도 불안을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그 불안을 성장의 계기로 삼는 것이겠지요. 불안하니까 더 준비하고, 불안하니까 더 정진하고, 불안하니까 더 노력하자는 얘기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베로니카 웨지우드의 말을 기억해둘 것을 권합니다.

“불안과 무질서는 절망의 징후가 아니라 에너지와 희망의 징후다.”

체념한 사람에게는 불안이고 뭐고 가 없습니다. 불안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 누리는 특권, 곧 생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양식 아침 한식 점심, 잊혀진 질문

다시 돌아온 ‘내가 만드는 아침’ 고정식, 매일 거의 같은 모습인데 물리지도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지루하게 보여도 맛이 없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가? 너무나 손쉬운 음식재료에다가 하도 익숙해서 힘도 안 들고 영양학전공 연숙의 승인을 받은 것이기도 하고, 이 정도면 오전에 움직이는 에너지는 충분하다.

조개장국, 감자조림, 완두콩 밥, 김과 알맞게 집에서 담근 익은 김치… 이것으로 우리는 이제 제2의 고향 집에 왔다~~ 라고 선언을 한다. 이렇게 먹을 수 있다는 것, 감사하고 감사한다.

이런 맛있는 점심을 먹었던 것도 행복한데 오늘은 특별한 한 때가 있었다. 연숙이와 함께 family room에 편하게 앉아서 Roku Channel에서 크리스마스 영화 하나를 같이 본 것이다. 이것은 근래에 거의 없었던 일이다. 사실 같이 영화를 보는 것을 내가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살았던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무엇인가 불편한 것이.. 영화라는 것에 그렇게 친숙하지도 않고 심지어 이해를 잘 못하는 듯한 표정 등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던 것. 의식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내가 심각하게 하지 않았던 것, 솔직히 후회를 한다. 특히 영어권 영화를 거의 안 보고 살았던 탓인데, 그래도 새로 배우는 것은 나보다 빠른데.. 내가 너무나 일방적으로 무시한 것인지도 모르니.. 미안하기도 하고 후회도 된다.

이것을 같이 보고 나는 그렇게 기다리던 낮잠까지 잠깐 잘 수 있었으니~~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해서 정말 오늘은 하루가 편하고 즐겁기까지 했다. 아마도 Steve Jobs effect라고 부르는 은총이 도움을 주었는지도…

이 내가 좋아하는 format (책 제본)에다가 차 신부님의 멋진 학자 신부다운 멋진 포즈,  책의 표지 때문에 더 관심이 가는 흔치 않는 case인가? 그래서 수원 근교 미리내 성지에 갔을 때 나의 손이 무심결에 이 책에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려고하는 순간 수경이가 재빨리 계산을 해 버렸기에, 이 책은 앞으로 수경이의 선물로 기억이 될 것이다. 내용이 상당히 포괄적, 보편적이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학문적이기도 하다. 그것에 비해서 문체나 설명이 의외로 이해하기가 수월하니.. 이것이 차 신부님의 특별한 능력이 아닐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읽기 시작해서 이제 거의 다 읽게 된 책, 앞으로 이 책을 접할 때마다 생기발랄한 수경이 얼굴이 떠오를 듯하다. 수경아, 고맙고 고맙다… 정말..

ATLANTA OVER-THE-AIR CHANNEL 47.4 KBS: 이제는 거의 안정된 TV reception 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에 한인TV 방송, 많은 사람들이 이미 평소에 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 집은 예외 중의 예외였다. 이 channel의 정체조차 확실치 않았지만 알고 보니KBS AMERICA라고 보인다.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의 출처는 LA 지역인 것이고, 한국 KBS를 재편성 방송을 한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의 방송은 우리 집과 30마일 이상 떨어진 NEW KOREA TOWN (DULUTH)에서 보내기에 우리 집에서 수신상태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근래에 무엇이 변했는지 그 방송의 상태가 안정적이고 선명하게 나오기 시작. 우리 집의 antenna도 upgrade가 되었지만 방송의 출력도 증가하지 않았을까? 결국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정상적인 TV로 ‘하루 종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programming들이 나의 취향에 맞는가 하는 것이다. 아직도 생소한 것 투성이.. 하지만 지난 달 여행으로 꽤 많이 익숙해진 모습들이어서 전과 같은 이질감은 점점 사라지는 듯하다. 솔직히 나도 ‘다른 사람들 처럼’ 재미 있게 보고 싶은 것이다. 내가 무슨 특별한 사람이라고…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된 것, ‘사람들 앞에서 기타를 쳐야만 하는 운명’, 조금씩 이것이 부담으로 다가올 것은 분명한데.. 어쩔 것인가? 과연 내가 전처럼 기타를 치는 것에 무리가 없을까? 많은 코드들은, 노래의 가사들.. 하지만 2016년부터 한때마다 열심히 연습을 했던 경험이 있기에 필요이상 걱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곡을 몇 곡 송년모임에서 ‘선을 보일까’ 하는 것이 더 관심, 신경이 쓰인다. 오늘 아예 서재로 기타를 가져다가 심리적으로 준비를 시작하긴 했는데…

양양이 flea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첫 단계로 나라니가 권해준 ‘목덜미 위에 뿌리는 약’을 order해서 저녁 늦게 도착했다. Made in Germany라는 표시에 우선 신뢰감이 생겼다. 과연 이것이 효과가 있을지는 내일 써보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Madame Anemone at Home Depot

오늘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Home Depot garden center를 둘러보니… 와~ 그 동안 못 보았던 광경을 보게 되었다. 각종 화초들이 모조리 나와 있는 것 아닌가? 오늘 나의 눈에 뜨인 것은 다름이 아닌 ‘아네모네’ 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귀에 익숙한 꽃 이름인데 실제로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아주 귀엽고 예쁜 모습이어서 값만 적당하면 우리 집에도 심자고 의견을 모았다. 아네모네 꽃도 그렇지만 그 이름이 더욱 관심이 간 것이, ‘아네모네 마담’ 이라는 오래 전의 ‘주요섭 문학 소설’ 제목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역시 나는 과거에 얽힌 추억에는 맥을 못 추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인간인 모양인가…
이 ‘고전 소설’을 읽은 적은 없지만 제목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KBS 문학관이란 TV drama로 편하게 보게 되었다. 처음 이것을 보면서 소설 속의 아네모네 마담이라는 것도 사실은 아네모네 다방의 마담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시대배경이 일제시대(요새는 ‘일제강점기’라고 하던가..)인 것은 이 소설이 나왔을 때가 그때였기에 그런 듯하지만 오히려 그 당시 다방의 모습과 우리 시절의 그것과 비슷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씁쓸하기도… 우리는 역시 완전히 지나간 세대의 유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듯 해서 그런가…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야말로 ‘신파조’이지만, 아네모네 마담이 보는 다방 단골 손님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subplot이고 줄거리 자체는 아네모네 마담의 ‘환상적 사랑’의 이야기에 엮여 있다. 어떤 대학생이 마담을 연모하고 있다는 상상에 빠진 것, 결국은 심각한 사연이지만 거의 코믹한 요소까지 곁들여서 전체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신파조’를 초월하는 듯하다.

이 아네모네 꽃은 절대로 얌전한 모습이 아닌 듯 보여서, 혹시 이 꽃의 의미와 이 소설의 이야기에 연관성은 없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저자, 주요섭 분명히 들었던 이름이어서 재미 삼아 ChatGPT로 보니 엉뚱하게도 서울대 법대 교수이름만 잔뜩 뿜어내고 있었으니완전히 우리 세대들은 이런 ‘AI robot’ 조차도 완전히 잊어버린, 옛날 속에서 살고 있는 모양이다.

 

Collage 1968~1970, Penance, Harmony Beckoning…

1968/70 년경의 사진들의 collage, 오늘도 추억의 영상을 담고 싶어서 photo collage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나의 진정한 목표는 YouTube video를 손쉽게 만들 수 있는 utility를 찾는 것이었다.  전에 손쉽게 쓰던 Microsoft Photo Story 3 이외에 오늘은 2012년 마지막으로 나온 그 전통적 classic video editor였던 Microsoft Movie Maker 2012를 찾아서 install을 해 놓았다. 나의 모든 아름다운 추억들이 이곳으로 모여 남을 수 있으면… 이것은 핵전쟁이 나지 않는 한, 어느 곳에건 남아 있을 것이다.
연호회 혼성그룹친구들이 함께 모였던 관악산, 연세대 과 친구들이 모인 덕수궁, 원서동 삼총사가 함께 등산을 했던 지리산, 남녀 4명이 함께 갔던 소백산 연화봉…  다른 것들은 모두 잊어도 이런 ‘흑백 추억의 극치’는 지금은 맛보기 힘들 것 같구나…

온통 나의 머리 속은 모레로 다가온 수요일 오후의 판공성사로 불편하다. 마지막 판공성사를 언제 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가 되었으니… 세월이 갈수록 이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 도망가고 싶은 것, 나 자신도 느낌이 좋지 않다. 항상 뒤끝이 묵직~ 한 것이다. 2014년 전후로 내가 이것에 엄청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것은 아직도 교훈적인 기억으로 남기에 나는 이번에 다시 그러한 시도를 하고 싶은데.. 과연 이번에는 어떤 사탄이 나를 방해할 것인지 궁금하다.

오늘 시간이 났을 때 성사 준비작업에 들어갔는데… 마지막으로 언제 성사를 보았는지조차 확실치 않으니… 하지만 각종 기록을 거의 다 찾아서, 작년 3월 부활판공을 이영석 요한 신부님께 했던 것이 확인 되었다. 기록을 보니 거의 매년 나는 판공성사를 보았지만 2020년은 Pandemic으로 할 수가 없었다. 다음 일은, 작년 고해 이후 내가 어떤 잘못,  소죄를 지었는지 찾아내서 정리를 해야만 한다. 이것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일기와 일지에서 유추할 수 있고, 내가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리하고 글로 써서 고해실에서 고해 신부님과 마주하면~~  2022년은 무사히, 개운하게 넘어가는가? 왜 고해성사를 하는가? 이재욱 신부님 말씀대로 ‘묵은 때를 벗기는’ 것, 그 동안 몸에 때가 많이 낀 것을 목욕하는 기분으로 벗기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가? 다행히 대죄에 해당하는 ‘쉽게 벗겨지지 않는 지독한 때’는 없으니까…

남성 화음의 유혹:  얼마 전인가, 주일 아침미사에 다시 ‘생음악’ 남성 중창단이 등장을 해서 이제야 Pandemic이 지나간 느낌을 보여주며, 덕분에 아주 살아있는 신선한 미사가 되었다. C 베로니카 자매에게 들어보니 그 지난 주에는 4명 남성 이었다는데 2명이 사정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두 명의 형제님을 보니, 둘 다 낯설지 않았는데 한 명은 독서 전례도 하고 하얀풍차 bakery에서도 자주 보았던 부부의 남편이고 다른 분은 조금은 나이가 있는 분이었다. 둘 다 목소리가 우렁차고 화음도 적당해서 듣기가 좋았다.그런데 주보에 성가대원을 모집한다고 난 것을 보았는데, 갑자기 연숙이 나보고 해보라고 뜬금없이 운을 뗀다. 이런 것 잊고 산지가 까마득한 세월[40+년]이었는데, 솔직히 놀란 것이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된다’라는 나의 생각이었는데… 급기야는 연숙이 그들에게 나의 얘기를 한 모양으로 나보고 아침 7시 45분 성가대실로 오라는 것이니…  우선 거절을 해야 하는데.. 미사에 집중을 못하는 것도 그렇고, 다시 교우들과 마주보며 노래를 하는  것이 자신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얘기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를 않았으니.. 오묘한 것 아닌가?

오늘 YouTube에서 한국 수원교구의 주교좌 성당에서 연말 프로그램으로 그 지역(대교구) 신부들로 구성된 ’30년 전통 갓등 OB’ 중창/합창단의 공연이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으니.. 이것이 우연일지, 아니면 무엇인가? 갑자기 우리 성당 생각이 난 것이다. 그렇다, 연숙이 말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성당 봉사에 이것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으니… 그렇다,  급속도로 공동체 내에서 노년으로 밀려나는 느낌도 줄이고 봉사도 할 수 있으니, 절대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현재는 여기에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모든 것을 맡길 수 밖에 없다는 결론…

오늘도 책, Those Who Saw HerGuadalupe story를 (쓰며) 읽는다. 이 story는 물론 거의 전체를 이미 읽어서 아는 것이지만 이렇게 다시 읽는 것은 나의 몸과 마음을  다가올 1월 말 Mexico 성지 순례에 서서히 준비를 시키려는 것이다. 천천히 가급적 가벼운 묵상을 곁들이며 계속 계속 이런 과정을 밟고 싶다. 우연히 나의 등 뒤에 ‘숨어 계셨던’ 이 Guadalupe Juan Diego tilma상본, 그것을 아예 나의 desk 앞으로 옮겨 놓았다. 십자고상과 함께 나를 그곳으로 무사히 인도해 주소서~~

<‘시편으로 바치는 기도’  가장 완전한 기도> 토마스 머튼/오수무 옮김, 100 쪽도 되지 않는 성바오로 수도회 수도자들이 홍보수단으로 제작한 소책자, 발 밑에 있는 책 더미 속에서 발견했다. 저자는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 그런데 이것을 토마스 머턴으로 음역을 했는데, 사실 이것은 머튼이 더 널리 통용되는 것이 아닌지.. 머턴도 보았고, 머톤도 보았는데 머튼이 제일 익숙한 표현일 듯하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책의 제목의 주장이 더 크게 눈에 들어온다. 시편이 가장 완전한 기도… 그것도 그 유명한 영성가 토마스 머튼의 의견이고 주장인 것이다. 2006년 성탄 무렵 순교자 성당에서 최성영 보좌신부님 지도로 시편 전체를 공부한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나의 수준으로 ‘시편’이란 말 조차 고귀하고 별처럼 멀게 느껴지는 때였는데, 이제는 수많은 연도 등을 경험하면서 조금은 익숙해졌다. 하지만 솔직히 이것이 완전한 기도라는 것은 아직도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번 성탄 무렵에 이 책이 나에게 다가온 것, 읽기 시작하니 거의 모든 머튼의 ‘주장’이 손쉽게 머리에 들어온다. 올 성탄의 선물이라면 어떨까?

지난 2주 이상 나는[할머니 고양이]  Izzie와 ‘냉전’ 중이다. 하지만,  ‘미안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라고 계속 나를 세뇌시키며 견디고 있다. 2주 이전에 이 녀석에게 피가 조금 나올 정도로 손을 물린 이후에 크게 결심을 한 것, 일단 이 녀석과 거리를 두며 살아야겠다, 나를 조금은 무서워하게 해야겠다, 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곧바로 [숙적 개] Ozzie가 집에 와서 자연스레 거리를 두며 살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을 수가 있었다. 문제는 Ozzie가 떠나면서부터다. 이제는 우리 둘만의 시간 뿐인데… 하지만 현재까지 나는 굳을 결심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나의 근처에 못 오게 하는’  강 훈련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나도 모른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지… 가슴 속으로 ‘미안해, 미안해’ 일 수밖에 없는데, 나중에 이런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참, 동물친구들과 살기 쉽지 않구나…

기타, 통기타~  guitar, my guitar~~  몇 년, 특히 Pandemic을 포함한 거의 4~5년의 세월 동안 거의 이것을 잊고 살았다. 2016년 성당에서 6 string friends 기타 동호회 모임을 하며 몇 개월 본격적으로 가까이 했던 것과 2018년경 구역모임에서 몇 번 가까이 했던 것이 그야말로  마지막이 된 것이다. 당시 손끝에는 굳은 살이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현재는 거의 사라진 터 [흔적만 겨우].. 다행히 흔한 chord 를 잡는 것은 그대로인데 각종 노래들의 chord progression은 많이도 잊어버렸다. 나이 탓, 세월 탓일 거다.  그래도 아직 손가락의 힘은 크게 빠지지 않은 것에 진실로 감사를 한다. 이것도 세월이 지나면 ‘그때’가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Universal Consciousness, Mind & Matter

희미한 꿈에서 깨어나서 생각을 하니, 그것은 어제 밤에 읽었던 parapsychology researcher, Dean Radin의 책 Real Magic 의 내용에 있었던 Universal Consciousness [C],  Personal Consciousness [c] 가 아니었던가? 한마디로 나는 최근에 ‘철학적, 과학적’ Consciousness 에 관해서 깊이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Mind & Matter 중에서 어떤 것이 더 fundamental 한 실존인가?    현세의 사상은 물론 matter가 mind 이전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이것은 모든 인간적 입장에서 본 우주, 실재관에 깊숙이 관련이 된 것이라서, 이것과 나의 신앙과는 갈등이 없는 것이라 안심하고 묵상,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도 이틀째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아침의 첫 일과로 시작하는데 성공을 하였다. 우연히 시도한 것이 이렇게 큰 문제가 없어서 나는 기쁘고 놀랍기까지 하다. 이것으로 나의 ‘신앙의 허점’ 중 하나였던 ‘멀게만 느껴지는 예수님’ complex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성모님, 도와주십시오, 계속 계속…

드디어 비와 구름으로 덥혔던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햇빛이 서서히 돌아오는 날, 오늘은 어제 같은 늦잠, 불면증의 문제가 없어서 아침미사엘 갈 수가 있었다. 요새는 이곳을 가야 조금 안심이 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왜 그럴까? 무엇을 안심한단 말인가? 아니,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인가? 기도와 복음말씀에 의한 희망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탓인가? 기도를 해도 큰 변화나 응답이 없는 것에 익숙해진 것인가? 왜 이렇게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느낌이 드는 것일까?  멀어지지 않으려 시간을 그렇게 쓰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부정적인 생각만 드는 것일까?

오랜만에 밥반찬 도시락으로 Sonata Cafe를 준비했고, YMCA 에서 운동도 큰 문제없이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Kroger에서 gas를 넣었다. 이곳에서 바라본 shopping center의 모습에 오래 전 Chinese 식당 Formosa의 자리가 그렇게 나의 눈에 들어온다.  1992년 이사올 당시부터 한참 이곳에서 takeout 배달하거나 pickup해서 온 식구들이 모여 family video를 보던 추억, 그것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그때에도 각종 큰 문제를 가지고 살았을 것이지만, 어떻게 좋은 추억만 떠오르는 것일까?

내일 집으로 돌아가게 될 Ozzie녀석과 1시간 코스 동네 두 군데를 걸었다. 이제 걷는 것은 전혀 나에게는 운동의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게 되었다. 나의 하체는 나이에 비해서 아주 건강하리라고 믿는다. 문제는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 그래, 노력을 하며 살자, 크게 무리가 되지 않으며… 적당하게, 알맞게, 현명하게…

 

 

Those Who Saw Her – Guadalupe

Those Who Saw Her, Catherine M. Odell… 2012년 한창 불타오르기 시작하던 신앙의 르네상스를 맞을 당시에 샀던 책…  그 중에서 현재 내가 필요한 부분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이 책은 가톨릭 교회의 공인을 받은 유명한 발현 스토리를 다루고 있지만  현재 관심사는 물론 Guadalupe 성모님 발현에 대한 것이다. 내년 달력에서 그것도 1월 말을 유심히 보며 예정된 Guadalupe 성지순례의 모습을 예상하며 상상을 한다. 과연 우리가 그곳, 인디언 모습으로 발현한 성모 마리아가 원주민 성 Juan Diego 앞에 나타나신 현장 Tepeyac 언덕엘 가볼 것인가? 예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각종 성모발현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읽고 보았지만 지금부터는 사실 Guadalupe에 관한 것만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어떻게 이번 성지 순례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 지금부터 서서히 흥분이 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이 신비중의 신비, 과달루페 성모님 발현에 대해서 공부하고 묵상을 하며 그때를 기다릴 것이다.

 


The Apparitions at Guadalupe, Mexico, 1531

 

Excerpt from Chapter 4,  ‘Those Who Saw Her

 

For fifty-seven years, Juan Diego had lived near the shore of Lake Texcoco in a village hugging Tlateloco, the Aztec capital. As he walked toward that city on a chilly morning in 1531, his thoughts returned to the years of Aztec pagan rites and despicable human sacrifice. Later, the Spanish conquistadors had overwhelmed the Aztec chieftains, who had ruthlessly ruled the Indian tribes. For Juan and fifteen million Indians, a new time and spirit then began in his homeland.

In Juan’s own mind, only the last six of his years had been truly joyful. In 1525, he and his wife, Maria Lucia, had been baptized as Christians Juan, a farm worker and mat maker, had given up his Aztec name – Cuauhtlatoatzin, a word that meant “eagle that talks.” On most days, well before dawn, Juan was somewhere on this road, headed to or from Mass. His village was called Tolpetlac, near Cuauhtitlan. This day, December 9, 1531, was a Saturday, a day on which a special Mass was said in honor of the Virgin Mary.

For some time, his early morning walks had been solitary as he crossed the hill of Tepeyac and the Tepeyac causeway to Tlatelolco, the future Mexico City. Juan’s wife had died. There was only his uncle, Juan Bernardino. Juan Diego thought of his dead Maria Lucia many times as he made his way. There had been no children, and she had been precious to him.

As Juan approached the crest of Tepeyac Hill, he saw a cloud encircled with a rainbow of colors. Then he heard strange music coming from the hill as well. Could it be from some sort of rare bird? He wondered and stared up at the hill with the sun now rising behind it. A woman’s voice was calling above the music. He was fascinated but confused.

“Juanito Juan Dieguito…” the voice came, urging him. Since it seemed to be coming from behind the top of the hill, he ascended to the crest to look. A young woman, strikingly beautiful, stood there, beckoning him. She radiated such light and joy that Juan Diego could think of nothing more to do than drop to his knees and smile at her.

Everything around her seemed to catch the sweet fire she glowed with. The leaves of the plants surrounding her on the hill were aglow; the branches of the trees and bushes shone like polished gold. Around the whole hill, a rainbow of multicolored light seemed to have descended.

“Juanito [Little John], my sweet child, where are you going?” the woman asked him in Nahuatl, his own tongue.

“My Lady and my child,” he replied, in an Indian idiom of endearment, “I am on my way to the church at Tlatelolco to hear Mass.”

Then, with no further introduction, the shining young woman spoke very seriously and yet lovingly to Juan Diego. He listened with intensity born of instant devotion. The woman was so beautiful, so gracious. He could not ignore any request from her:

You must know and be very certain in your heart, my son, that I am truly the perpetual and perfect Virgin Mary, holy Mother of the True God through whom everything lives, the Creator and Master of Heaven and Earth.

I wish and intensely desire that in this place my sanctuary be erected so that in it I may show and make known and give all my love, my compassion, my help, and my protection to the people. I am your merciful Mother, the Mother of all of you who live united in this land, and of all mankind, of all those who love me, of those who cry to me, of those who seek me, of those who have confidence in me. Here I will hear their weeping, and sorrow, and will remedy and alleviate their suffering, necessities, and misfortunes.

And so that my intentions may be made known, you must go to the house of the bishop of Mexico and tell him that I sent you and that it is my desire to have a sanctuary built here.

Joy of Leftovers, Wine & SPAM

몇 년만인가, 우리 집에서(roasted) turkey의 모습을 본 것이… 어제 음식준비를 하면서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던가, 우리 집에서 추수 감사절의 turkey요리 가 없었던 때가 몇 번, 언제였는가..  이것은 우리의 퇴화되는 기억력의 test였다.  총각시절이었던 1974년 감사절 당시 새로 사귄 성성모형  부부의 초대로 Purdue University 어떤 선배 유학생(심리학 전공) 부부 댁에서 처음으로 각종 감사절 음식을 먹었던 것은 아직도 사진처럼 선명하다. 그 이후로는 1980년 결혼 이후 Columbus, Ohio 한인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연숙이 이봉모씨 부인으로부터 recipe를 구해서 turkey를 굽기 시작한 것, 그것이 거의 끊임없이 근래까지 지속된 것이었다.  최근에는 이런 전통이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올해 기적적으로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turkey자체보다 side, stuffing 등이 더 맛있는 것은 아직도 사실이고, 오늘도 그 leftover 가 어제의 main meal보다 더 맛있던 것을 재확인 하는 때가 되었다.

어제 Thanksgiving leftover wine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늦은 저녁의 허기를 이 명콤비 wine & SPAM으로 달랬다. ‘공식 금주’로 이제는 평소에는 이런 사치는 물 건너 간 것이기에 잠정적인 예외인 Thanksgiving 부터 New Years Day까지 이것은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빗소리를 꿈속에서 느낄 것 같은 예감이 또 빗나간 것이 조금 아쉽다. 빗소리, 빗소리… 그것을 은근히 기다렸지만 역시 희망과 기대는 그것 자체로 끝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바깥을 보니 약간 물기는 보이긴 했으니까.. 아마도 아주 가느다란 비가 왔다 갔다 했던 모양이고, 오늘도 그런 날로 끝나지 않을까… 주 관심사는 내일의 ‘점등식’의 성사여부지만 현재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온다던 비는 거의 오지 않고, 거의 어제와 같은 holiday 의 느낌이 사라지지도 않은 날이 바로 Black Friday, 나와 아니 우리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그 다음날’ 정도였지만 그래도 모처럼 wine을 마시며 편하게 지내려고 기를 쓴다. 또한 모처럼 아예 침대로 들어가서 긴 낮잠까지 즐겼으니…  이것으로 어제의 ‘덜 즐거웠던 hangover’들을 잊는 기회로 삼는다.

어제는 분명히 모든 것이 ‘천천히, 예정대로, 문제 없이’ family holiday가 되었다. 하지만 무언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아직도 나의 머리에 앙금처럼 남은 것은 의외다. 별로 즐겁지 않은 감정이 나를 조금 괴롭히고 있으니.. 나의 문제일 것이다. 보기에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을 즐겼던 듯 하니까… 그것으로 만족을 한다.
복잡하고, 시끄럽고, 솔직히 정신이 없었던 나.. 왜 그랬을까? 모처럼 마시는 ‘술: wine, beer’ 때문이었을까? 아이들 둘이 합세해서 그런가?  두 견공 犬公들이 합세한 것, 내가 원했던 것이지만 생각처럼 쉬운 것도 아니었고, 특히 로난의 ‘신경질적인 모습’은 나를 놀라게 했다. 솔직히 정이 떨어질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내가 이런 상황에 잘 적응을 못했던 것으로 결론은 맺자.  은근히 기대를 많이 했던 것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래, ‘일은 치렀다’로 만족하자… 하지만.. 하지만… 성탄 때로 예정된 2차 모임은 이제 ‘절대로 기대는 하지 말자’로 생각을 바꾼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BICS prize winner essay를 읽는다. 특히 Bernardo Kastrup의 것은 정말 인상적으로 학구적인 것이었다. 이런 석학들이 현재 consciousness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쁘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NDE, Swedenborg’s Afterlife, Kastrup, Consciousness…. 모든 것이 함께 나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들… 이것도 분명히 성모님의 손길의 도움이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 모처럼 맛보는 wine과 SPAM combo 의 즐거움과 함께 나는 Swedenborg [그리고 Helen Keller] 가 20년 이상 왕복했던 사후 死後의 세상을 마음껏 상상한다.

 

Nearer Advent, Christ the King of the Universe

Our Lord Jesus Christ King of the Universe..  오늘 축일을 맞으며 다음 주부터 Advent, 대림절이 시작된다는 말에 솔직히 부끄럽게 놀랐다. 대림절… 아직도 몇 주는 남았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살았으니… 그래, 다음 주 일요일이 대림절 Advent시작, 그 전날 도라빌 순교자 성당의 성탄 구유에 점등식이 저녁에 있지 않았던가?  Pandemic 중이었던 2020년 때 마지막으로 갔었던 기억, 그것이 참 인상적이고 좋았다.  당시 혼신의 힘으로 성당을 지키시던 이영석 요한 신부님의 idea였던가, 성당 주차장에 멋진 성탄 구유를 만들고 점등식을 시작했던 것이… 아마도 지칠 대로 지친 신자들의 사기를 힘 실어 주려던 노력이었을 것이다. 2년 밖에 되지 않은 이것도 기억에서 가물거린다.

오늘 그리스도 왕에 대한 강론을 들으며 과연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 성당의 자랑인 ‘초대형 십자고상’을 뚫어지게 정면 가까이서 바라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현재의 ‘실재관’과 관련되어서, 새로운 각도로 본다. 한마디로 실재의 전부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관점… 과연 그럴까? 그것이 Swedenborg 가 실제로 보고 느끼고 내린 결론임이 놀랍지 않은가? 이것은 또한 Teilhard  de Chardin의 사상, 신학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그의 진화론적 그리스도 Omega Point와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오늘은 예상대로 ‘프카’ 자매가 합석을 하지 않았던 하얀풍차 모임이 되었다.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일요일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야 성당에 올 수 있다고 했던 프카 자매의 말이 생각이 나니… 이해는 간다. 그 자매의 ‘수다’가 빠져서 조금 심심할 거라고 생각도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C 베로니카도 화제가 적지 않은 사람이고, 대화를 하는 태도도 만족스러운 것이라서, 현재까지는, 그럴지도. 나도 마음 놓고 참여를 할 수 있으니 솔직히 일요일 이 모임이 우리의 고정된 스타일의 생활에 활력소를 주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지난 주 그 자매의 Swedenborg에 대한 추억담에서 비롯된 나의 새로운 탐구 여정을 중심으로 ‘더 가까워진 영계의 실상’에 대해서 열띤 대화를 나누게 된 것, 이것이 성당 주일강론보다 더 가깝게 다가오는 듯하다. 특히 그 자매의 ‘짧은 탈혼’ 경험담은 정말 흥미로운 것이었다. 나는 물론 많은 책이나 video를 통해서 NDE[Near Death Experience]-like episode를 알고 있기에 모든 것을 열린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 참, 내가 나를 생각 보아도 신기하고 가상하기까지 하다. 간단히 말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신비로움이 나에게 이렇게 늦은 나이에 다가오고 깨닫게 된 것, 속된 말로 우연인가, 아니면…
오늘의 날씨 덕분인지 나의 보금자리에서 편하게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비디오도 보고 하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포근하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친다. 게다가 ‘다음 세상’에 대한 믿음이 점점 깊어지는 것이 아직도 나는 신기하기만 하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까지 ‘발전’을 했을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다음 세상으로 가는 것, 그것을 이제 전보다 더 확신을 가지고 믿게 된 것, 누구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까? 그래, C 베로니카 에게도 감사를… 

오늘로서 Robert Lanza의 Biocentrism trilogy의 1편 Biocentrism 을 다 읽게 되었다. 다음 편 Beyond Biocentrism으로 계속 넘어가게 되었다. 이것과 더불어 새로 읽기 시작한 Why Materialism is Baloney 또한 얼마나 현대의 사상이 위험할 정도로 흔히 언급하는 science, 사실은 scientism 이라는 ‘신흥종교’에 현혹되었는지 실감이 간다. 내가 그렇게 신봉하고 있던 science/engineering/technology는 분명 우리들의 몸을  편하게 해 주었지만 그것의 위력은 자기 밖의 영역까지 간섭을 하고 있는 것이니.. 

뜻밖에 윤기로부터 반가운 카톡이 왔다. 윤기와 인송이 둘이서 건주네 집을 방문했다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 어찌 안 그렇겠는가? 이제 그 친구들이 가서 눈을 목격한 것이니까, 조금은 더 자세한 모습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일주일에 5일씩이나 물리치료사가 집으로 온다는 것으로, 건주의 stroke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위험한 정도까지? 하지만 현재는 많이 나아지고, 자발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반응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이것은 윤기나 인송이로부터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두 친구, 갑자기 고맙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다. 그래, 그래도 우리들의 우정은 식지 않았구나~~ 고맙다, 친구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