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위치행 유람선에서의 해프닝 이후
2013.05.28
국내 한 국책(國策)연구소에 재직하던 1980년 가을 혼자 해외출장 중 불란서에서 스웨덴, 이태리를 거쳐 영국 런던에서 일요일을 맞은 적이 있었다. 주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한 후 가능한 주일미사에 참석하려고 여기저기 물어가며 가톨릭성당을 찾다가 제대로 찾지를 못하고 헤매던 중 눈앞에 갑자기 테임즈(River Thames)강이 보이고 그곳 선착장에 각 행선지를 표시한 유람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서 특히 그리니치(Greenwich)행이 눈에 띄자 그냥 배에 올랐는데 아무래도 어릴 적 어느 공부시간에 배운 바 있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문득 떠올랐던 때문이리라.
배는 100명 이상을 태울 정도로 제법 컸지만 승선손님은 15명 정도로 별로 많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되자 배는 제시간에 출발하였다. 얼마 후 손님 중 중년이 넘은 한 미국인 부인이 혼자 여행 중이냐며 말을 걸어와 우리는 자연스레 같이 유람하는 입장이 되었다. 테임즈 강폭 여기저기에 전시해 놓은 Pax Britanica시대의 영국 해군력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큼직한 여러 척의 전시 군함들에 눈길을 주며 이런저런 얘길 하는 사이에 유람선은 유유히 테임즈 강 하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배는 중간 중간에 몇 군데를 들러서 가는 배였다. 중간 선착장에 들릴 때마다 배를 정박시키려고 젊은 배꾼 하나가 배가 육지에 닿기 바로 직전에 뛰어 내려 배를 고정시키려고 선착장 기둥에 밧줄을 재빠르게 묶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눈이 졸려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막 잠에 뻥 떨어지려는 것 같은 깊은 졸음에 취한 상태로 보였다.
그러던 중 한번은 졸음에 거의 감긴 눈으로 선착장을 향해 뛰어내리다가 삐끗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강에 빠질 뻔했다. 나도 모르게‘조심해!’하고 소리를 질렀고, 그 친구는 놀라 깨면서 가까스로 몸을 가누어서 물에 빠지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졸면서 일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영국의 노동법 때문이라며 멋쩍게 웃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는 나의 물음에 그의 대답은, 바로 1년 전 1979년에 수상이 된 대처(Thatcher)가 정부를 출범시키자마자 노조(勞組)의 스트라이크(Strike)를 막기 위한 노동법을 만들었는데, 그 법에서는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는 72시간을 1년에 한번 인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었는데‘오늘이 바로 그 법 첫 시행의 이틀째’라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당시 필자가 직접 확인한 바가 아니고 단지 그 친구의 설명이었기 때문에 그 법적 배경이라든가 논거는 알 수가 없고 또한 지금까지도 그와 같은 법조문이 여전히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때 그 친구가 지난해 언젠가 선주(船主)에게 대들었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그 선주가 노동법에서의 그 취지를 십분 살려 자기로 하여금 업무를 계속하도록 명(命)했고 그래서 48시간 동안 거의 한 잠도 못자고 계속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기간에 선주의 업무명령을 어겨서 해고를 당하면 아무런 법적보호를 못 받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당시 영국은 소위‘스트라이크(Strike)병’을 깊이 앓고 있었다. 그래서 대처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그 치유책의 일환으로 그런 법을 만들었던 것으로 유추되었다. 참으로 노사(勞使) 양측 모두에게 특히 노측에게 극단(極端)으로 치닫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나의 추론은 ‘앞으로는 절대로 선주에게 막 대들지 말아야겠다.’는 그 친구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약 한 시간 반가량 지나 도착한 그리니치에서는 마침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규모 국화(菊花)전시회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었다. 참으로 특이하고 특별하게 3, 4층 높이로 키운 여러 형태의 국화꽃의 대잔치를 내 생애 처음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물론 그리니치 천문대도 들러보고 또 그 드넓은 공원과 우람하게 솟아있는 거목들과 나무의 열매를 따려는 많은 아이들의 여러 가지 몸동작들도 그 미국인 부인과 함께 한가로이 즐길 수 있었다.
그 미국인 부인은 미국의 미시간(Michigan)에서 사는데 마침 텔아비브(Tel Aviv)에 있는 친구한테 가는 길에 잠시 관광하고 가려고 런던에 들렀다는 것이었다. 난 별 생각 없이 그러냐고 받아넘겼다. 시간이 되어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노을 지는 테임즈 강의 정취를 만끽하며 런던으로 되돌아왔다. 도착하여 헤어지기 바로 직전에서야 나는 그녀에게 나를 소개하려고 명함을 막 꺼내 건네려는 순간 그녀는 그럴 필요 없다며‘미스터 김, 난 당신을 잘 알고 있어요, 또 무얼 하는지도 잘 알아요.’하며 악수를 청하곤 뒤도 안 돌아보고 손을 뒤로 흔들며 가버리는 것이었다.
순간 필자는 쇠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띵하고 아찔한 체 온몸이 땅에 붙어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는데 지금까지도 필자는 그런 충격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아니 이 여자가 날 어떻게 알고 있었단 말인가? 같이 구경하는 동안 한 번도 필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고 또 그럴 이유도 없었다.
전혀 뜻밖의 그녀의 말에 필자는 정말 너무나 놀라서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잠시 서서 그녀가 필자를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다. 그러자 필자의 놀람은 더욱 커졌다. 아니 그러면 그 여자가 미 CIA 요원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텔아비브를 꺼낸 걸 보면 혹시 이스라엘 모사드(Mossad)의 첩보원이었단 말인가?
여기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필자의 출장목적과 출장경위를 잠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당시 필자의 출장목적은 원자력발전용 핵연료가공의 상용화를 위한 공장건설과 관련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세계 어느 핵연료가공회사에서든 한국의 핵관련 엔지니어들에게는 일체 접근조차도 막고 있었던 터라 엔지니어가 아닌 필자가 그 미션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필자의 유럽 출장은 기술제공선인 불란서의 핵 엔지니어링회사 생고방(후일 SGN으로 바뀌었음)의 도움으로 유럽 4개국(불란서, 스웨덴, 영국, 이태리)을 방문한 후 주일대사관의 지원으로 일본 도가이무라에 있는 미츠비시 핵연료가공공장을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당시 필자가 사용한 명함은 핵연료개발공단(Korea Nuclear Fuel Corporation: KNFC)의 기획관리이사(Director of Planning & Control)였다.
필자는 출장에 앞서서 출장의 성격상 필요할 것 같아서 한국인삼엑기스 몇 개를 선물용으로 특별히 준비하고 출장길에 올랐다. 첫 출장지인 불란서 생고방에 도착하니 며칠 동안 필자가 사용할 사무실을 지정해 주었는데 사무실 안은 뺑둘러 캐비넷들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Dr. Kahn이라는 표지가 붙은 라면 박스 같은 종이 상자들이 수십 개 얹혀 있었다.
당시 자재담당을 맡고 있다는 한 남자직원이 필자의 카운터 파트너로 정해져 그 친구에게 인삼엑기스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는 아주 친절하게 그리고 덜 공식적이고 자연스레 필자를 대해주며 이런저런 얘기하는 사이가 되었고 그래서 그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전해들을 수가 있었다.
하루는 케비넷 위상자의 Dr. Kahn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파리 시내가 아닌 시골 농촌으로 가서 식사를 하자며 필자를 데리고 간곳은 파리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전형적인 불란서 시골풍의 가옥과 두레박이 매달려 있는 지붕 덮인 우물과 그 곁에 장정 세 명이 두 팔을 벌려야 겨우 감쌀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미루나무 밑에 놓여있는 테이블에서 식사를 즐기는 스타일의 식당이었다. 그러함에도 파리 최고급 식당보다도 더 비싸다는 것이 그곳의 설명이었는데 3시간 이상 이어지는 식사시간에 그렇게 다양한 주제의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실무자급의 해박한 친구에게서 필자는 참으로 남다른 박식함을 느꼈다.
필자가 재차 Dr. Kahn을 꺼내자 자기가 알고 있는 지극히 사적인 정보임을 몇 번씩이나 강조하며 들려준 그의 이야기는 이렇다.
Dr. Kahn은 자기네 생고방에서 기술지원해 주었던 파키스탄의 핵개발 책임자인데 불란서에서 갑자기 추방당하는 바람에 사무실에 있는 박스들을 미처 가져가지 못했단다. 그는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억불과 리비아의 가다피로부터 3억불 총 5억불을 지원받아 소위 이슬람 탄(Islamic bomb)을 개발하고 있던 자로서, 네델란드 소재 유럽 4개국 콘소시엄의 원심분리우라늄농축(centrifugal uranium enriching)공장에 촉탁 임시직으로 취업했다가 17일 만에 해고 되었단다. 우선 그 공장에 취업하려면 반드시 네델란드 인의 신원보증이 필요한데 그는 네델란드 국적을 취득한 한 남아연방출신의 여자와 결혼을 했고 바로 그 결혼한 부인의 신원보증으로 취업을 했었는데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판단되어 17일 만에 짤렸고 그래서 불란서에서 추방되었단다.
그런데 그 17일 사이에 원심분리 우라늄 농축기술의 도면을 이미 파키스탄으로 빼돌린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것이 어떻게 한 사람의 시도로 가능했겠느냐 뭔가 Under table business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게 그의 추측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지금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Dr. Kahn은 그 후 파키스탄에서 핵폭탄을 개발 성공시킨 장본인이 되었고 그 후 그는 몇 번 북한에도 갔다 왔으며 북한에 우라늄 농축기술전수도 시켰다는 외신보도도 수차례나 있었는데 어떤 목적으로 그곳에 갔었는지는 그들만이 알 일이다.
다시 그린위치행 유람에서 있었던 헤프닝 이야기로 돌아오자.
당시 필자의 출장 시기는 지미 카터가 1977년에 미국 대통령이 된 후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막고 인권 신장을 강요함으로서 박정희 정부와 깊은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1979년 10.26 사태 이후 1여년이 지난 때였고, 또한 카터대통령이 이미 주한미군(駐韓美軍) 철수(撤收)를 공식화한 후였다.
그리고 당시 한국은 1960년대에 경제개발의 기반을 갖춘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 들어 강하게 드라이브한 중화학 산업화와 이를 뒷받침할 원자력발전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때였고 그래서 핵연료개발공단 운영도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원자력발전이나 핵폭탄은 다같이 E=mc**2 법칙에 기초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얻는 원리에 있어서는 똑같고 다만 에너지를 몇 년간에 걸쳐 서서히 얻으면 원자력발전이요, 순식간에 사용하면 핵폭탄이 되므로 한・미간의 긴장관계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이 혹시 핵폭탄 제조의도도 가진 게 아닌가하고 의심을 품을 법도 한 미묘한 시기에 필자가 핵연료회사 기획・관리이사 명함을 들고 핵연료가공시설을 찾아다니니 그 뒤를 한번 밟아보았던 것으로 순간 추론되어왔다.
그리고 뒤이어 아아 그래서 그 미국인(?) 여자가 자연스레 내게 접근해 와서는‘우리가 다 훤히 알고 있으니 혹시라도 딴 짓을 말라’는 무언의 협박암시를 던지고 그냥 가버린 거구나 하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갑자기 불안해졌다.
언젠가 런던에서 우산꼭지에 독침을 넣어 스파이를 살해하는 영화를 본 기억도 있고 해서 갑자기 신변에 대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물론 필자의 미션이 별 것 아니란 걸 알고는 점쟎케 경고하고 사라져 간 것을 보면 안심해도 될 것 같은 안도감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필자는 빨리 런던을 떠나고 싶었고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로부터 6년 후 1986년 당시 소련연방이었던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핵발전소 역사상 두 번째 대형사고가 터졌고,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로에서 사상 최대 첫 번째 사고로 기록되는 핵사고가 터졌다.
후쿠시마 사고는 아직도 여전히 심각할 정도로 진행 중이지만 국익이라면 똘똘 뭉치는 일본의 맹목에 가까운 국가주의(國家主義)로 인해 일본의 언론은 이를 일체 보도조차 않고 있다. 허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파국적이라는 세계 핵전문가 집단의 평가가 들린다.
심지어 일본 전역이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의 불모지(不毛地)가 될 것이라며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심각성을 전하는 목소리도 작지만 끊이질 않고 들린다. 물론 핵사고의 피해는 장기간에 걸쳐 엄청난 수준으로 진행되는데도 이렇다 할 별다른 대책이 없다는 것은 30여 년 전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피해가 아직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보여준다.
원자력은 평화적 이용과 전쟁용의 두 가지로 나뉘지만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원자력발전에 있어서도 인류의 평화는커녕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가공할 핵사고 위험이 도시리고 있음을 특히 후쿠시마 사고는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앞으로 많은 원자력발전소가 그 내용연수(耐用年數)에 가까워지면서 혹은 천재(天災)로 혹은 인재(人災)로 아니면 이들이 공교롭게 겹치면서 얼마든지 제3, 제4의 후쿠시마가 발생할 수 있음도 예상케 한다.
이래서 원자력발전은 현재 인류가 당장 오늘을 살기위해 내일의 재앙(災殃)을 감수하는 우(愚)의 아이러니(irony)를 지속하고 있는 무책(無策)의 행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핵의 평화적 이용에 있어서도 점증할 핵사고 피해가 심각할진대 아예 전쟁용 핵폭탄의 피해야 말해 뭐하랴!
필자가 딱히 비관론자여서가 아니라 이러한 핵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는 글로벌 촌의 미래를 낙관으로만 볼 수 없는 상황에서 특히 최근 김정은 등장이후 행해지고 있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발사로 우리의 안보가 크게 위협받는 상황이 현실화되면서 그에 대한 해법으로 우리도 자위(自衛)적 핵개발을 서두르자는 목소리가 점점 형성되어 가는 분위기인 듯하다.
국방에 관한한 자주국방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며 그래서 자주국방을 위해 핵능력을 보유하고픈 열망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그 열망의 강도는 각국의 핵개발 능력유무와 핵개발여건에 따라서 크게 다르긴 하겠지만.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현재 핵무기보유국들이거나 잠재국들은 NPT 가입 5개국 핵무기국가들(nuclearⲻweapon states)과 이스라엘, 남아연방과 인도, 파키스탄, 북한과 과거 소련연방시절부터 보유국이었던 벨루러시,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그리고 NATO 핵무기역량 공유국인 벨기에, 독일, 네델란드, 이태리, 터키 등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위적 핵개발 주장에 앞서서 일반적으로 핵개발의 진정한 목적이 과연 공격용인지 전쟁억제용인지 아니면 체제유지용인지 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물음은 바로 북한의 김정은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이다.
현실적으로 어떤 나라든 핵공격을 한다는 것은 공멸을 통한 자멸을 뜻한다. 물론 비이성적인 인간은 때론 이점을 간과하고 핵공격을 행동으로 옮길 수도 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결국 시차의 문제일 뿐 자신도 자멸할 것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아무리 비이성적 인간일지라도 공멸상황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볼 자는 바로 가장 많이 가지고 가장 많이 향유해 온 독재자 자신이며 바로 이점은 이라크의 후세인과 리비아의 가다피 경우에서도 잘 확인되었던 측면이기도 하다.
김정은도 만약 핵을 사용한다면 자신이 가장 많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만약 핵이 있다면 실제로 사용할 집단은 지구상에서 오직 자살공격단체뿐일 것이다. 왜냐 그들에겐 별로 잃을 것이 없으므로.
가진 게 많은 자는 결코 자멸(自滅)의 길을 자진(自進)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이런 논리라면 핵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핵개발 역량확충을 지속하면서 북한의 재래식 무기에 의한 도발을 박살내기 위한 접근이 우리에게 보다 더 현실적 대안이 될 것이다. 물론 필자의 이런 주장이 너무 나이부한(naive) 대안 아니냐고 볼 이들도 많을 줄로 알지만 현실적으로 핵개발을 강행한다는 것은 지구촌 시민국가로서 공존하는 모든 기회를 상실하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왜, 아직도 세계 3, 4위 강국인 일본도 독일도 핵개발의 모든 역량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핵무장을 못하고 있고 또 안하고 있는가? 결국 핵에 관한한 우리는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도 직시하자. 물론 미국의 국력이 최근 들어 다소 호전의 기미가 있긴 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군사력은 여전히 상위 10개국 다 합쳐야 할 정도로 막강하다. 핵에 대한 미국에의 의존은 사대주의(事大主義) 발상이 아니라 모든 약자(弱者)들의 현실임을 어쩌랴! 자주국방은 꿈이지만 진정 이 꿈을 이루고 있는 나라는 오직 미국뿐임을 어쩌랴!]
글 /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