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마태오 저, 사랑의 지도, 1968년

 

서부 전선 ‘사천강 전투’ 때, 신부 되기를 결정한 직후, 1952
원산 상륙작전 당시 1950년 10월
카나다 연방정부 복합문화성 장관 스텐리 하이다스와 함께, 1976

<사랑의 지도> 출판기념, 카나다 몬트리올에서 교포들과, 1965

 

 

 

서장(序章)

 

 

노을이 물들었다.

그 노을의 아름다움.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황금의 실처럼 노을의 가는 빛살이 내 몸을 휘감는다.

싱그러운 잎새들의 내음!

그것은 생명의 호흡이요, 찬가(讚歌)다.

저만치 항구 밖으로 뱃머리를 돌린 두어 척의 돛배가 유유히 떠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건 모르지만 지향하는 곳으로 떠나가리라.

 

내 주변에는 지금 아무도 없다. 하지만 조금도 외롭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다.

나는 굵다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연방 연기를 쉴 새 없이 내뿜는다.

보랏빛 연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것은 신기한 흐름으로 내 주변을 돌다 가는 바람결에 따라 어디론가 흘러간다.

잔디밭은 포근하고 따뜻하고, 그래서 그럴까, 내 마음도 한결 고요하고 평화로움을 느낀다.

 

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살고 있는 뭇 생명이 고동(鼓動)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 고요 속에, 이 평화로움에 한 포기 풀도, 새도, 저 바다도 스스로의 생명의 노래를 높이 부르고 있는 듯 하다.

 

“드디어 예까지 왔구나!”

생각하면 할수록 무든 기적(奇蹟) 처럼 느껴진다. 불가능의 일이 불쑥 어디선가 부터 가능의 세계로 들어선 듯하다.

파이프의 연기는 바람결에 따라 날리는가 하면 때로는 원을 그리고 내 눈 앞에서 서성거린다.

두 눈을 감으면 갖가지 회상(回想)의 실마리가 하나 하나 풀려 나오려고 한다.

 

“드디어 예까지 왔구나!”

그렇다. 그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다.

험한 산골짜기를 돌고 돌아온 시냇물이 이제 평탄한 물흐름이 되어 흐르듯이 내 생애도 이제 여기에 이르러 겨우 안정된 자리를 잡게끔 되었지만 여기에 도달하기까지에는 나도 꽤 험한 산골짜기를 돌고 돌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인간은 제 나름의 길을 가기 마련이다. 그 어떤 길을 가거나 원하는 것은 행복, 그것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귀착하는 곳은 ‘행복’이란 종착역이긴 하지만 과연 몇몇 사람이 이 종착역에 트렁크를 내려 놓을 수 있었을까.

그것보다도 도리어 인간은 불행이란 함정 속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방황하는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위치에서 오는 그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신(神)도 아니며 악마(惡魔)도 아니다. 이런 인간은 묘하게도 신과 악마의 중간 위치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만약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의 비극은 훨씬 줄어들 수 있을 것이며, 반대로 악마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런 대로 행복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신도 될 수 없고 악마도 될 수 없는 데에 인간의 영원한 고뇌가 있는 것이며, 또한 그 고뇌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것이 인간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어차피 인간일 밖에 없다.”

이 명제(命題)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탈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이 갖는 신성(神性)과 수성(獸性), 이 양면을 갖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우리들은 이것을 윤리적인 의미로써 선과 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늘 신성과 수성, 선과 악의 중간 위치에서 고뇌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만이 갖는 고뇌이며 인간이 모순과 당착 속에서 방황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것이다.

비록 신은 될 수 없지만 신성적인 인간을 우리들은 볼 수 있으며, 악마는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수성적인 인간을 얼마든지 우리들은 불 수 잇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 어느 편일까.”

곰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돼지에게는 돼지의 사건만이 생긴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인간만의 사건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이 신성과 수성의 양면성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나 역시, 내 생애의 역사도 이 틈바구니에서 고민한 싹이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아무튼 나는 이런 모순과 당착을, 괴로움과 슬픔을 극복하면서 용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드디어 예까지 왔구나!”

이 말은 내가 내 자신에게 주는 말인 동시에 내 자신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말이기도 하다.

내일은 차부제성품(次副祭聖品)의 날이다. 이것은 신부(神父)가 되기  위하여 받는 일곱 개의 계단 중 다섯 번째의 계단으로서 이 품을 받는 사람은 앞으로 동정(童貞)을 지킬 것과 성무일과(聖務日課)를 매일 읽는 두 가지 임무를 갖는 것을 뜻한다.

 

분수령(分水嶺)! 그것은 확실히 내 인생의 분수령이 아닐 수 없다. 나는 6년 동안 온 마음과 몸을 주 예수님의 영원한 영광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고스란히 바쳐 왔다.

이제 내일이면 그 결실의 다섯 번째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나의 서른두 해 동안의 삶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하지만 지내 놓고 보면 비록 쓰라림과 슬픔에 꽉 차 있던 지난 일이긴 하지만 도리어 그립기도 하다.

 

빛나는 내일을 앞두고 노을은 저처럼 아름답고, 잎새는 푸르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 오는 지금 파이프의 연기는 여전히 내 주변에 원을 그린다.

 

“드디어 예까지 왔구나!”

이 말을 몇 번이고 입 속으로 되뇌면 지나온 일들이 눈앞에 지나온 일들이 눈앞에 하나 하나 영화 장면처럼 영상(映像)이 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제 그것들을 하나 풀어 보기로 하자.

비록 그것이 평범한 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신성과 수성의 모순된, 당착된, 그리고 괴로움과 슬픔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겪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유월(六月)의 싱싱한 공기!

나는 신학교 뒷동산에서 이처럼 황홀한 내일을 앞두고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제1장

가난 속에서

 

나는 내 나이 스물 두 살이 될 때까지 단 한번도 신부가 될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배움이라야 고작 국민학교 졸업 정도였다. 그리고 고향이 시골이라 본당 신부님과의 개인적 접촉이 별로 없었던 탓으로 나는 성직(聖職) 생활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를 가져 본 일이 전혀 없었다. 관심이나 이해는 대체로 자주 있는 접촉과 대화라는 경험을 통해서 생기는 법이다.

그런데 신부님들에 대한 내 소년 시절의 인상이란, 봄과 가을, 공소 성사를 주려고 오셔서 아무리 일어 봐도 재미가 전혀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교리문답을 잘 외우지 못했다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꾸지람 주시고 벌 주시던 매우 성가시고 무서운 분이라는 정도였다.

어는 해 가을 공소에서 나는 교리문답 시험에 낙제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글을 암기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시간 낭비인 듯 생각되어 나는 본당 신부님이 지시한 교리문답 암송을 하지 않았다. 다만 형님들의 일본말 교리 해설책을 여러 번 읽으며 교리의 뜻을 알려고 했었다. 당시의 교리 시험이란 교리문답의 뜻을 이해했든 못했든 글 자체만 암송하는 것이었다. 동네 친구 아이들은 문답책을 줄줄 외웠다. 본당 신부님이 문답 제1조목부터 시작하여 40 조목까지 외우라 하셨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부님, 저는 문답책을 외우지 않고 그 글의 뜻을 공부했습니다. 이해하는 것이 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어서였습니다.”

“뜻을 공부했다니…?”

“네,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외운다는 것이 바보스럽게 생각되어 글의 뜻을 공부했습니다.”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내 의견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주저 없어 신부님께 말씀 드렸다. 그러나 신부님의 태도는 나의 기대와는 정 반대였다.

“교만한 녀석. 그럼 내 질문에 대답해 보아라.”

뜻하지 않았던 신부님의 엄한 표정과 냉정한 말씀에 겁이 앞섰다. 나는 긴장한 나머지 올바른 대답을 하나도 할 수 없었다. 뜻을 공부했다는 내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그때 신부님께서는 “원죄는 교만의 결과였고, 교만은 거짓말의 어머니”라고 말씀하시며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다섯 대 때리셨다. 당시 이런 벌은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흔히 있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는 학교 세속 공부에는 우등생인 자녀에게 한 영혼의 구령 문제에 관한 교리공부는 소홀히 시키셨다는 이유로 나의 부모님에게까지 심한 꾸지람을 하셨다. 공부를 잘 못하여 웃어른한테 꾸지람과 벌을 받은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때 나의 어린 자존심은 심한 상처를 받았다. 내 친구들은 킬킬 웃었고 내가 벌 받는 것을 좋아라 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신부님을 피하기 시작했고 불쾌한 존재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 외에 신부님에 대한 다른 인상은 공소에 오실 때마다 내가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진기한 과일과 좋은 음식을 혼자 잡수시던 부러움과, 버드나무 가지로 우물 자리를 찾아내시던 마술사 같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신부님을 성스럽다고 할 때마다 성스럽다는 말에는 늘 하느님을 생각하게 되어 신부님을 하느님처럼 무섭게 여기던 일들이다.

본당 신부님은 내 형님들과 누님들에게 신학교와 수녀원 이야기를 자주 해 주시며 신부나 수녀가 될 것을 권유하신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해 주시지 않으셨다. 아마도 그 이유는 교리시험 때 보인 내 “교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신학교에서는 막내 아들을 잘 안 받아 준다고도 했다. 왜냐하면 막내 아들은 흔히 집안의 귀염둥이라서 버릇이 없게 되고 남에 대한 이해심이 부족하며 또 남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줄만 알고 남을 사랑하는 습관이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신부 생활에는 순명 정신과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정신이 막내 아들에게는 흔히 없다는 것이다. 일곱 남매의 자녀를 가지신 부모님께서도 형제 중 누구 한 분은 신부가 되고 누님 중에서는 수녀 한 분이 나오기를 은근히 기다리셨으나 나에게는 신부가 될 것을 권유하신 일이 없었다.

나의 아버지의 고향은 개성이었고 어머니의 고향은 서울이었다.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국내 각 도시는 물론 지방 촌락에 이르기까지 반일운동(反日運動)이 한창 성한 그 무렵이었다. 당시 18세의 청년이었던 아버지께서는 그 동안 병약(病弱)한 탓도 있었지만 조혼(早婚)하면 단명(短命)하다는 사주팔자(四柱八字) 때문에 미루어 오던 결혼을 두 달 앞두고 고향인 개성을 떠나셨다. 기울어져 가는 조국의 운명을 좀 더 잘 살펴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 오셨다.

서울서 몇 달을 보내시며 정국을 살피셨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의 침략 정책에 휘말려 들어가는 조국의 장래를 위해서는 뜻 있는 젊은이들이 선진 문명국가에 가서 그들의 문명을 배워 와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한다. 어느 날 새로 세워진 명동의 천주당(명동천주교성당)을 구경하시고 그 섬세하고 웅장한 벽돌집에 마음이 끌려 프랑스의 문명을 동경하시게 되었다 한다. 이 정도의 집을 지을 줄 아는 프랑스 사람들의 문명은 과연 배울 점이 많으리라고 생각하셨다 한다. 그래서 프랑스 신부님들과 접촉한 것이 동기가 되어 천주교로 개종하셨다. 그리고 신부님의 소개로 장차 내 어머니가 될 서울 처녀집을 알게 되었고 두 분은 서울에서 결혼하셨다. 신혼 생활에 도취된 아버지께서는 공부에 대한 열의도, 유학에 대한 포부도 다 잊으시고 간단한 상업으로 생활을 계속하셨다.

결혼 2년 후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내 부모님은 고향인 개성으로 내려 오셨다. 어머니께서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안정을 잃은 서울 생활을 두려워하셨다 한다. 그래서 시골 생활을 찾아 개성으로 이사하셨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대접은 냉혹했다. 조상 전래의 종교를 버리고 오랑캐라 불리우던 서양인의 종교인 <천주학(천주학)> 을 신봉할 뿐만 아니라 부모가 정해준 약혼을 파약하고 자유 결혼한 천하의 후레자식이라고 3년 만에 찾아오신 아버지를 집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셨으며 집에서 내쫓았다 한다. 그리고 내 부모님께서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할아버지 집에서 삼십 리 이상 떨어진 곳에 사시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내 부모님으로 하여금 조상들의 산소에도 못 오시게 하셨으며 할아버지의 장례식에도 물론 오시지 못하도록 유언하셨다 한다. 그래서 삼대독자인 아버지께서는 종친회의 참석은 물론 할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셨다.

 

나는 이 두 분의 칠 남매 중에서 막내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내 부모님은 개성에서 경의선(서울과 신의주 간의 철도)을 따라 약 이십여 킬로미터 북쪽, 지금의 38선상에 있는 자그마한 농촌 ‘여현’으로 이사하셨다. 서울서 하셨던 사업 밑천으로 야산과 땅을 사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셨다. 농사에 전혀 경험이 없던 두 분의 농촌 생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무렵에는 우리 집 재산이란 밤나무 산 하나와 6천 평 되는 밭과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논은 소작이었다. 밭은 넓기는 했으나 토질이 박하였다. 일년 간 힘들여 농사 지어 공출에 바치고 나면 많은 식구를 가진 우리 집안의 식량은 늘 부족했다. 춘삼월의 소위 ‘보리고개’ 계절만 되면 식생활의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어려운 살림을 보충하기 위해 큰 형님은 동네에 있던 석회공장(石灰工場)에서 일하셔야만 했다.

대동아전쟁(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던 그 무렵 한국의 농촌이 다 그러했듯이 피땀 흘려 지은 좋은 쌀, 보리, 밀, 콩 등을 공출에 바쳤고 우리는 ‘납작보리’와 콩기름을 짜낸 콩 찌거기를 대신 배급 받았다. 우리 형제의 학비를 위해 얼마간의 곡식을 팔고 나면 우리 가족은 식량난으로 고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봄에는 새싹 나물을 캐어다가 말린 다음 그것을 쌀에 섞어 나물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우리 집만이 아니라 많은 농촌 사람들이 다 그렇게 했다.

한 번은 밀과 보리 공출량을 속이기 위해 뒷뜰 장독 밑을 파서 일종의 땅굴을 만들어 거기에다 밀, 보리 십여 가마니를 감추어 둔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세 명의 일본인 순사들과 두 명의 한국인 면서기가 가택 수색하러 왔다. 대부분의 집에서도 우리 집처럼 밀, 보리를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그 날 ‘살살개’라는 별명을 가진 한국인 면서기가 우리 집 장독 밑에 감추어둔 밀, 보리를 찾아내었다. 그 때 그는 큰 보물이나 찾아낸 듯, 마치 전쟁의 승리자처럼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내 아버지를 조롱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쩔 줄을 모르시는 나의 아버지는 그 면서기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해 달라고 사정했다. 자식들의 학비를 위해 곡식을 감추었다고 변명도 하셨다. 어머니께서도 용서해 달라고 사정하셨다. 그러나 그 면서기는 ‘고노야로'(‘이 놈아’라는 일본말의 욕)라고 욕하며 아버지더러 ‘비국민(非國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갖고 다니던 지팡이로 아버지를 사정 없이 때렸다. 아무런 반항 없이 젊은 동포로부터 매맞고 계시는 아버지가 좀 비굴하게도 보였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그때 나는 내 일생 처음으로 한 인간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마음 속에 느꼈다. 나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으나 참지 못하고 그 면서기에게 달려가 반바지를 입은 그의 종아리를 물어 뜯었다 “이 자식아, 왜 내 아버지를 때렷!” 하며 또 다시 그의 종아리를 힘껏 물어 뜯었을 때 내 입안에는 그 놈의 종아리 살 한 점이 물려 있었다. 그러자 내 눈에서 불이 번쩍하는 듯함을 느꼈으며 또한 눈 앞에 수만 개의 별들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옆에 서 있던 일본 순사가 내 오른 뺨을 힘차게 후려 갈겼고 발로 찼던 것이다. 넘어져 뒹구는 나를 어머니께서 감사 안으시자 그 순사는 나를 때리던 것을 멈췄다. 그 날 잘못 얻어맞은 오른쪽 귀가 점차로 멀어지더니 지금은 오른 쪽 귀로 ‘고백성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청각을 잃고 말았다. 그 날 아버지께서는 공출식량을 감추었던 몇몇 동네 사람들과 함께 일본 주재소에 붙들려가 또 매를 맞고 오셨다. 물론 발각된 밀, 보리는 모조리 압수 당했다.

그 후 밀, 보리 공출을 피하는 방법으로 밀, 보리 대신 감자를 심자고 내가 제안했다. 감자만은 공출 대상이 아니었다. 그 다음 해 우리는 밀, 보리 대신에 감자를 심었고 40 가마니의 수확이 있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본받아 감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감자 농사로 어려운 식량난을 극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관청에서 공출을 피하는 방법으로 감자 농사를 짓는 것을 알게 되자 우리는 강제로 또 밀, 보리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성격이 평화롭고 온화했으나 생활 면에서는 소극적인 분들이었다. 남들처럼 부지런히 재산을 모아 호강할 생각을 아예 안하고 계신 듯했다. 내가 밀, 보리 공출을 피하는 방법으로 감자 농사를 하자고 제안했을 때 나의 그 의견을 일대 혁명으로 여기던 그런 분들이었다. 농사법의 개량이라든가 또는 겨울 농촌의 여가를 이용하여 가난한 살림을 향상시키려는 의욕도 별로 없던, 생활 능력이 약한 분들이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그날을 그날처럼 마음 평화롭게만 살아가시는 내 부모님을 나는 섭섭히 여긴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큰 형님도 아버지와 비슷한 분이셨다. 그분은 우리 형제 중에서 제일 잘 생긴 미남이었으며 성격도 그야말로 무골호인이었다. 형님은 누구에게 욕을 하거나 원망한 일이 없으며 또 누구와 싸움 한 번 안 하신 분이었다. 집안에서도 화내시는 모습이나 불만의 말씀을 나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다. 항상 만족스럽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형님 보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 이라고 했다. 또 천주교 신자가 아닌 분들은 내 형님보고 ‘부처 같은 사람’ 이라고 했고, 신자 어른들은 ‘성인 같은 사람’ 이라고 했다. 나는 이런 별명의 형님을 싫어했다. 그리고 형님같이 생활에 무능력한 사람이 성인이 된다면 나는 그러한 성인이 되기를 거부하겠다고 생각했다. 가난을 만족하며 동생들에게 남들처럼 공부시킬 줄 모르는 큰 형님에게 나는 적지 않은 불만을 가졌었다.

내 둘째 형님은 큰 형님과는 달랐다. 그분은 동네에서 ‘신동(神童)’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머리가 좋은 분이었고 박력도 있는 분이었다. 낮에는 서당(書堂)에 가서 한문을 공부하고 밤에는 일본말을 배우기 위해 20여 리의 산길을 걸어 토성(土城)에 있던 야간학교에 다닐 정도로 학구열도 대단했다. 그리고 때로는 승냥이도 나온다는 산길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담이 큰 분이었다. 이분은 나이 15세 때부터 동네 신자 아이들을 모아 놓고 교리공부를 지도하기도 했다. 서울로 공부하러 가신다고 집을 나가셨고 그 후 만주에서 방랑생활도 하셨으나 만주 안산에서 한 때는 잘 살기도 했다 대동아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 형님이 일하시던 안산 철공소가 미국 B-29의 폭격을 받았고 그 날 형님은 머리에 파편상을 입었다. 그 후 형님은 이상할 정도로 왕성하던 그 생활력을 잃으셨고 고향에 오셔서 평범한 농부가 되셨다. 나는 이러한 작은 형님에게마저 몹시 실망을 느꼈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가 불만스러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가 총명하고 좋은 분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버지는 바보야요.”

아버지께서는 내 말이 뜻 밖이라는 듯이 심히 놀라신 표정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씀 없이 계시더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녀석 봐라, 맹랑한 소리를 한다. 어째서 아버지가 바보란 말이냐?”

“난 위대한 학자나 장군이나 혹은 부잣집이나 그렇지 않으면 독립운동을 하는 훌륭한 애국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해요. 그런데 왜 아버지는 농부가 되셨어요? 그것도 지주도 못되고 가난한 소작인이 되셨어요?”

“그래…? 그건 다 네 어머니 탓이란다.”

아버지께서는 쓸쓸한 웃음을 입가에 띠우고 힘 없이 말씀하셨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말씀하셨다.

“태오야, 물론 아버지는 위대한 학자나 장군까지도 될 수 있었던 분이시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길을 막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농촌생활을 위해 아버지께서는 그 젊음의 의욕과 모든 것을 희생하셨다. 사람이 훌륭해지고 위대해진다는 것, 그것은 학자나 장군이 되는 것만은 아니란다. 좋은 남편으로서 착한 아버지로서 가정을 평화롭게 지키고 착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애국이라는 것도 비단 장군이나 나라 일을 요리하는 정치인들이나, 또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그런 분들만의 일이 아니란다. 천주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평화로운 가정에서 천주님께서 맡겨 주신 자녀들을 잘 키우며 국민된 의무를 다하는 선량한 국민이 되는 것도 애국하는 훌륭한 길이란다.”

어느 날 약주를 잡수신 아버지께서는 내 형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너희들은 나처럼 일찍 결혼하지 말아라. 그리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면 가정에 붙들려 하고 싶은 일을 다 못하게 되기 쉽다. 결혼이란 우리라는 하나의 가정 사회를 위한 것이니 만큼, 나는 나만의 이상을 위하여 너의 어머니의 이상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가족 중심주의를 내세우며 평화로운 농촌생활을 바라던 어머니의 이상과 꿈을 나는 존중해 주기로 했단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아버지께서는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애처가이셨다. 나는 두 분이 서로 말다툼을 하시거나 싸우시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항상 두 분은 다정하셨다. 살림은 가난했지만 평화로운 가정생활 속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심도 매우 두터운 부들이었다.

 

내 고향 여현은 부유한 농촌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교적 신문화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동네에는 당시 국민학교 부속 간이학교가 하나 있었다. 이 간이학교는 2년제로 나이가 많아 국민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큰 아이들을 위한, 일종의 성인교육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 국민학교가 각 면(面) 단위로 하나씩 있었으나 우리 동네에서 그 학교까지의 거리가 5, 6 킬로미터나 되어 어린 소년에게는 학교 통학이 쉽지 않았다. 장마철에는 다리 없는 큰 개울을 건너기 위해 위험한 철교를 건너야만 했으며 또는 산을 돌아가야만 했다. 나의 작은 누님과 형님은 그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나 부모님은 막내인 나를 이 간이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때 신입생이 백여 명 되었으나 대부분 열세 살에서 열일곱 살까지의 서당 출신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결혼한 학생도 더러 있었다. 나 같은 어린 소년은 불과 세 명이었고 그 중에서 나는 나이가 제일 어렸다.

 

일 년 간 재미있게 또 부지런히 공부했다. 일본 말도 상당히 할 수 있어서 동화책도 읽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학년 말에 낙제했다. 이유는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나이가 아직 어리니 일 년 간 다시 1학년을 공부해서 다음 해 국민학교 3학년에 진학시키려는 선생님의 생각 때문이었다. 내 딴에는 잘 알고 있는 공부를 1년 간 다시 하라니 내 어린 자존심과 교만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해에 국민학교 3학년에 진학했다. 오기로 한 학급을 월반하여 진학했다. 그 후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누나나 형님들처럼 일등을 해 본 적은 없었으나 줄곧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내 작은 형님은 공부도 학교에서 제일 잘할 뿐만 아니라 품행도 단정했고 모든 면에서 뛰어났었다. 어느 날 일본 본국으로 영전되어 귀국하는 일본인 후꾸다라는 교장으로부터 “너는 세계에서 제일 훌륭한 소년이 되어라” 라는 이별인사를 겸한 칭찬을 전교생 앞에서 한 일이 있었다. 그 후부터 “세카이 이치노 쇼넹”(세계 제일의 소년)이 내 형님의 별명이 되었다. 나는 이와 같은 별명의 형님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분의 몸은 약했다. 그래서 우리 둘이 싸우면 언제나 내가 이겼다. 형님은 아예 나에게 싸움을 걸어 오지 않았다. 그러나 형님은 좀 미련하긴 해도 황소처럼 힘이 센 나를 늘 자기 호위병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나는 형님을 시기하고 놀리는 사람이 있으면 형님을 대신하여 싸움을 해야 했다. 언젠가 한 번은 형님을 늘 질투하고 괴롭히던 “싸움대장”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형님의 동급생인 리노우에를 불의의 습격으로 논으로 떠밀어 엎어뜨리고 벼포기를 뽑아 그것으로 얼굴을 때려 눈을 못 뜨게 한 다음 주먹으로 무진장 때려 준 일도 있었다. 그 후부터 상급생들도 나를 무서워하여 더 이상 형님을 괴롭히지 못했다.

형님은 모든 면에서 일등이었으나 문학을 더 좋아하셨다. 앞으로 이광수 선생님처럼 훌륭한 소설가가 되겠다는 것이 그분의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당시 총독부가 주관하던 주간지 “소학생” 신문에 형님은 여러 번 작문과 시를 발표했고 상도 여러 번 받았다. 나는 단 한 번 “나기 하하노 오모이데”(돌아가신 어머니의 추억)란 작문으로 상을 받은 일이 있었고 그 글이 “소학생” 신문에 게재된 일이 있었다. 그 외에는 작문이나 시작(詩作)에 뛰어난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일 때에 우리 집에 장질부사가 전염되어 약 5개월 동안 우리 가족 전체가 외출 금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는 집 앞마당에 새끼줄로 경계선을 쳐 놓고 우리 가족은 그 경계선을 넘지도 못하게 했다. 앞마당 모퉁이에는 커다란 물독이 있었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매일 교대로 거기에 물을 길어다 주었다. 물론 농사도 금지되었다. 돈이라도 많으면 개성에 있는 도립병원에 환자를 입원시킬 수도 있었겠으나 그럴 수도 없던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리고 병원 없는 농촌의 국민보건제도란 말도 들어 본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아프기만 하면 약초를 캐어다 끓여 먹었다. 침을 맞기도 했으나 배앓이를 하면 화롯불에 납작한 돌을 따끈하게 달궈 헝겊에 싸서 배 위에 차 주는 것이 고작이었던 농촌생활이었다.

학교에 가는 것은 물론 동네 친구들과 노는 것마저 철저히 금지되었다. 지루한 초여름의 장마철, 친구 없는 방안에 홀로 남아 무료하게 갇혀 있기란 어린 나에게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매일 마루에 앉아 집 앞을 지나가는 기차와 그 차창에 비치는 여행자들의 행복스러운 얼굴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검은 연기를 푹푹 뿜으며 달리는 기차, 거기에 탄 수백 개의 얼굴들, 나에게는 꿈만 같은 존재들이었다.

어느 날 내 동급생들은 학교 관례에 따라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 그러나 나는 “열병쟁이 가족”이란 이유로 집에 있어야만 했다. 그날 내 동급생들이 기차를 타고 우리 집 앞을 지나가며 “다가야마 다가야마” (왜정 때에 창씨 된 우리 집의 성) 하고 외치면서 많은 선물을 던져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주우러 나갈 수도 없었다. 마루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동네 아이들이 다 주워 갔다. 내것을 도둑 맞은 기분이 들자 동네 친구들을 얼마나 저주했는지…

나는 구속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동경했고 끝없이 펼쳐진 저 맑고 푸른 하늘에 유유히 떠도는 구름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열린 창문으로 동네 친구들이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고 울기도 했다. 병들어 우울한 우리 집, 친구 한 사람 찾아올 수 없는 우리 집은 저 고도(孤島)에 세워진 감옥 아닌 감옥이었다. 어쩌다 너무 갑갑하여 대문 밖에 나가 서 있으면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나를 향해 침을 탁 뱉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그들은 열병 환자에게 침을 뱉으면 병균이 옮겨 오지 않는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다. 나는 열병 환자가 아닌데도 병든 집안의 사람이라는 이 사실 때문에 남이 뱉어 버리는 침을 받아야만 했다.

남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버림받는다는 것은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는 나로 하여금 이러한 천시와 버림을 받게 하고 내 주위 세계로부터 나를 완전히 고립시킨 이 전염병을 무척이나 저주했다. 인간 사회의 따뜻한 정을 그리워하면 할수록 내 어린 마음에 스며드는 외로움이 얼마나 컸었는지… 그때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서로 헤어지게 하는 것, 또 사랑하는 사회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키는 일체의 것을 악(惡)이라고 규정지었다. 가고 싶은 학교에 못 가게 하고 친구들과 더불어 놀지도 못하게 하는 이런 전염병은 확실히 악이었다. 밝은 달밤에 홀로 있는 그 쓸쓸함! 말 한 마디, 웃음 하나 없는 죽음과 같은 침묵 속에 싸인 캄캄한 이 방안! 맑고 싸늘한 달빛과 함께 열어 놓은 창문을 넘어 들려오는 꼬마 친구들의 저 즐거운 웃음소리, 행복한 노래 소리는 나를 한없이 한없이 고독하게만 했었다. 그 때 이러한 고독의 고통 속에서 나는 이 다음 의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의사가 되어 단 한 명의 어린이라도 나와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전염병을 이 세상에서 쫓아내어야겠다고 나는 마음먹었다.

나는 수신(修身) 시간에 배운 일본인 의사 노구찌 히데모 선생을 마음 속에 그리고 사모했다. 그분도 나처럼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불행하게 자라났으며 독학으로 공부하여 마침내 성공한 분이 아닌가.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커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사람은 노력만 하면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의사가 되어, 인간의 건강을 해치며 행복을 좀먹는 온갖 병을 이 세상 밖으로 내쫓아 인간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자는 것이 내 어린 마음을 흥분시킨 최초의 이상이었고 삶의 목표였다. 그리고 이 이상은 나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일기장에 썼다.

“태오야, 의사가 되어라. 의사가 되어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독과 고통을 덜어주자. 그리고 내일의 새 아침을 단념한 그들에게 또 하나의 생명인 건강을 가져다 주자. 육신을 죽이는 이 병과 싸워 건강을 보존하도록 하자. 병든 사람에게 위로와 기쁨과 건강이 부활을 주는 의사의 직업만큼 보람 있고 성스러운 직업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래, 태오야 의사가 되어라. 부지런히 노력하고 공부해서 의사가 되어라.”

흥분이라든가 감격이라든가 또는 기쁨이란 것은 흔히 오래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내 어린 마음을 감동시키고 내 고독을 위로해 주던 의사에 대한 꿈은 하루, 이틀, 열흘, 한 달이 가고, 흘러가는 시간과 더불어 차츰 차츰 사라져 갔다. 당시 나는 나와 함께 이야기하고 같이 웃으며 손을 잡고 놀 수 있는 동무들을 절대로 필요로 했다. 의사가 되겠다는 내 이상은 한없이 외로운 나를 간혹 찾아 주는 반가운 마음의 벗이긴 했으나 내 옆에 늘 있어 주는 다정한 말동무 구실을 할 수는 없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자꾸 흘러갔다. 나는 독서의 재미도 잃었고,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푸른 하늘에 유유히 떠돌아 다니는 구름에 대한 부러움도,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상상하던 바다 건너 꿈의 나라도, 심지어는 먹고 잠자는 것마저도 성가실 정도로 극도의 외로움에 지쳐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또 일기장에 썼다.

 

“산다는 것, 그것은 우리 집 담 밖에서 뛰고 노래하며 놀고 있는 내 친구들의 노래소리. 죽음, 그것은 바로 웃음 하나 없는 이 병든 방안에서 심한 열과 고통을 참지 못해 울부짖고 있는 환자의 신음소리. 산다는 것, 그것은 바로 옷깃을 서로 스치며 오가는 사람과 사람의 접촉. 죽음, 그것은 바로 담 밖의 저 사람들과 병든 우리와의 간격. 산다는 것, 그것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는 심정. 죽음, 그것은 옆에 있는 사람마저 보기 싫어하는 것. 산다는 것, 그것은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침침한 석유 등잔불 아래서 저녁 밥상을 받고 앉아 오손도손 얘기하며 기쁨을 나누는 그들의 표정. 죽음, 그것은 바로 병든 사람이나 성한 사람을 막론하고 식욕이 없어서 밥상을 받아 놓고서도 여기 저기 등을 돌리고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우리 가족들의 우울한 표정. 산다는 것, 그것은 웃음과 기쁨 속에 내일의 새 아침이 기다려지는 것. 죽음, 그것은 우울한 가족들의 침통한 얼굴이 보기 싫어 해가 빨리 서산에 지기를 바라고 차라리 내일의 밝은 아침 해가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 산다는 것, 그것은 살고 싶어하는 것. 죽음, 그것은 만사가 다 성가셔서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하는 이 내 마음. 결론, 나는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나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고 죽은 사람.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세상 일에 도무지 흥미가 없는 나. 나는 죽었다. 누가 나를 이러한 죽음에서 부활시켜 줄 수 있을까? 천주님께 기구할 힘도 흥미도 이미 없는 나, 천주님을 생각하는 것마저 성가셔진 나를 누가, 그리고 무엇이 살려 주려는지….”

 

어느 날 나는 하도 심심하여 집안을 구석구석 뒤져 보기로 했다. 여지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나 있을까 하고. 우선 아버지가 쓰고 계시던 사랑방의 다락을 뒤져 보기로 했다. 여름 장마철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매콤한 냄새를 풍기는 먼지를 뒤집어 쓰며 열심히 구석 구석을 뒤졌다. 거기에는 찢어진 갓과 망건을 비롯하여 잡지, 그림 조각, 낡아빠진 옷가지 등 가지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그 잡동사니 속에서 나는 헌 책 궤짝을 하나 발견했다. 몇 자 아는 한문 지식으로 이 큼직한 책들이 우리 집 족보인 줄 알자 나는 갑자기 집안 역사를 알고 싶은 호기심에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순 한문으로 씌어진 이 족보를 읽을 길이 없었다. 물론 국민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바 있는 제주도의 삼성혈(三姓穴)의 신화, 즉 탐라국을 창설한 지신(地神)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의 전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집안의 역사를 알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저 우리 집안은 가난하고 남들처럼 흔한 평민의 자식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그러나 비록 우리 집이 이처럼 가난하기는 하지만 근 2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기쁨이라는 감정이 말라 버린 내 어린 마음을 다시 한 번 흥분시켰다. 나는 당장에 천자문 한 권을 들고 밤낮으로 한문 공부에 정신 없이 지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환자이셨고, 따라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울 수는 없었다. 약 3주일 만에 나는 천자문 한 권을 모두 암기했다. 그리고 한문 사전을 이용하여 족보 첫 권에 씌어진 고을나의 건국 전설을 읽었다. 물론 그 내용을 완전히 해독은 못하였으나 내용만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나는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장군이 될 것을 결심했다. 왜냐하면 잃어 버린 내 조상들의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수만의 대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일기장에 큼직한 글씨로 썼다.

 

“태오야, 장군이 되자. 그래서 잃어버린 내 조상의 왕국을 재건하자. 태오야, 장군이 되어라.”

 

 

그 후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삼국지>나 여러 권의 일본 무사소설을 탐독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몰래 동네 사람들을 피해 앞뜰에 나가 목검을 들고 검술을 연마하기도 했다. 이때 나는 매일같이 밤을 기다리게 되었고, 밤이 되면 이 우울한 집을 떠나 넓은 벌판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구속 없는 자유를 누렸다. 장엄한 밤하늘 밑에 이 넓은 들판은 나에게 둘도 없이 귀중한 세계가 되었다. 그리고 잃어버린 조상의 왕국을 기어이 찾겠다고 이슬 내린 풀밭에 무릎을 꿇고 여러 번 맹세까지 했다. 나는 또 하나의 꿈을 발견했던 것이다. 고독이라는 죽음에서 나를 살려 준 이 꿈은 먼 장래에 대한 희망도 갖게 했다. 장래에 대한 희망이나 이상은 어린이들에게 그지없이 아름다운 것이며 또한 힘을 주는 것이다.

 

약 6개월 간 계속되던 장질부사가 우리집으로부터 완전히 물러섰다. 아무도 죽은 사람 없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약을 쓴 일도 없었는데 모두 무사했다. 앞마당의 새끼줄 경계선도 없어지고 물독도 치우고 우리 가족은 감금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 동안 우리에게 침을 뱉던 냉정한 이웃도 지난날의 따스한 정을 주기 시작했다. 학교 친구들도 나를 환영해 주었다. 악몽이 지나간 밝은 아침에는 지난 밤의 악몽을 잊은 법이다.

그 해의 우리 집 농사는 동네 사람들이 지어 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태풍이었다. 지난 6개월 동안 우리 가족은 동네 사람들의 동정으로 살아 왔었다. 그 은혜도 갚을 겸, 그 해 농사의 반을 동네에 내어 놓아 커다란 잔치를 치른 일도 있었다. 즐거운 잔치 속에 그 동안 있었던 많은 회고담이 오고 갔다.

나는 가끔 병정놀이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앞으로 장군이 될 것을 생각했고 또 병정놀이의 사령관이 되고 싶었다. 동갑인 친구들 사이에는 힘으로나 학교 성적으로나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었는데 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상급생보다는 계급이 낮아야만 했다. 병정놀이를 여러 번 했으나 나는 한 번도 장군은 고사하고 소위인 장교도 되어 보지 못했다. 나이 많은 그들 밑에서 나는 항상 분대장이 아니면 선임하사관인 일본군 계급 <조장>이 될 뿐이었다. 하루는 나 스스로를 소위로 승격시켜 뻐기다가 상급생 중대장으로부터 얻어 맞고 함께 코피가 터질 때까지 싸움을 한 일도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앞으로 장군이 될 내가 시시한 중학생인 상급생 중위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병정놀이로부터 탈퇴하고 말았다.

그 다음 해 내가 소학교 6학년 여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나는 의사가 되겠다는 이상도 장군이 되겠다는 꿈도 깨끗이 잊어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내 <왕국>이었고 나는 그 왕국의 왕자였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나는 무엇이든지 집 안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사랑과 보호 밑에서 나는 집안에서 아무에게나 큰소리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왕자가 자기 왕국을 갖고 있을 때에만 왕자로서의 세도를 부리듯, 왕국을 잃은 왕자는 이미 왕자가 아닌 것처럼, 왕국인 어머니를 잃은 나는 이미 이 집안의 왕자가 아니었다. 지나간 자기의 부귀 영화를 되씹는 망명한 왕만큼 가련한 사람이 다시 없듯이 이제 어머니를 잃은 어린 소년의 마음 만큼 불쌍하고 슬픈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왕국인 어머니를 잃은 다음부터 소년다운 명랑성도 잊고 우울한 소년이 되고 말았다. 당시 나는 홀로 넓은 들을 거닐기를 좋아했고 집안에서는 한 동안 말 없는 벙어리가 되기도 했다.

 

우리 집안은 점점 가난해져 가기만 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작은 형님도 정상적인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고학생이 되었다.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자 중학교 진학을 생각할 우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러나 나는 과외공부라는 입시 준비 없이 개성 송도중학교의 입학시험을 치렀고 무난히 시험에 합격했다. 이것은 중학교 입학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학교 친구들에 대한 내 자존심 때문에 시험에 응시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께서나 형님들께서나 누구 한 사람도 나의 중학교 진학 문제에 관심을 표시하지 않으셨다. 시집간 누님들이 나의 학비를 보조하겠다고 했으나 사돈댁의 동정이 싫어서 나 스스로 누님들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래서 내 나이 만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와 형님을 도와 농사일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읽어 본 일이 있는 <흙으로 된 인간은 흙과 더불어 살며 흙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결국 자기 본 고향인 흙으로 돌아간다> 라는 말에서 나는 새로운 이상을 발견했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의사가 되려는 꿈이나 장군이 되려는 이상을 버리고 현재의 내 처지와 능력에 적합한 농부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수신 시간에 배운 중세기 일본의 대학자이며 농촌 계몽가였던 니노미야 손또구(二宮尊德) 선생을 내 삶의 표본으로 삼았다. 그분도 나처럼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었다. 학교에는 전혀 가 본 일이 없으며 지게 지고 나무를 하면서 독학으로 성공한 분이다. 그분의 성실, 근면, 면학, 애농 정신을 본받아 그분처럼 일생을 농촌에 바쳐 가난 속에서도 자기들의 가난을 개선할 생각 없이 사는 우매한 농민들을 깨우쳐 주자고 했다. 그리고 그분처럼 독학으로나마 공부하여 대학자가 되자고 했다.

별로 똑똑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창조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좋은 것을 본받자는 모방 의식은 강했다. 그래서 새로운 장래의 목적이나 이상을 가질 때마다 나는 으례 그것을 실현 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어떤 훌륭한 사람을 이상의 표본으로 삼곤 했던 것이다. 당시 소학교에서 배운 인물은 모두 일본 사람 뿐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내 부모님 다음에 니노미야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공부란 단지 학교에서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독학으로도 얼마든지 자기 지식을 넓일 수 있다는 것이 공부에 대한 나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산에 가서 나무를 했으며 밭에 나가 김도 맸다. 밭을 갈기도 했으며 달구지를 끌기도 했다. 그러나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형님들이 보시던 책, 서울의 작은 형님이 보내 주는 중학교 강의록, 심지어는 누님이 보시던 부인잡지까지도 모조리 읽었다. 비 오는 날이나 밤이 되면 책을 읽는 것이 나에게 제일 큰 즐거움이었다. 당시 배급제였던 석유가 떨어지면 여름철엔 모닥불을 피우고 그 빛으로 책을 읽었다. 그때 가끔 서울에서 놀러 내려 오시던 작은 형님이나 이종 사촌 형제들의 중학교 교복도 나에게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할 정도로 나는 이미 농사일과 독학에 열중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도 나에게 <황소>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내 몸집이 황소처럼 크고 건강해서 뿐만이 아니다. 황소처럼 미련하면서도 부지런히 일을 잘하기 때문이다. 내 별명이 황소이기 때문에 나는 우리 집 황소를 각별히 사랑했다. 잘 얻어 먹지도 못하면서 죽도록 일하는, 그래도 욕먹고 매맞는 미련한 짐승이 황소란 놈이었으나 나는 황소라는 내 별명에 깊은 애정을 가졌었다. <나도 황소처럼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특히 불평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자.> 이것이 당시의 내 생활 신조였다.

농사 일이란, 실인즉 힘든 일이다. <한 여름 땀 흘려 농사 지어도 간장 값이 부족하다> 라는 말이 증명하듯이 농사일이 요구하는 땀과 노력이란 육신적 희생에 비해 수입이 별로 없는 직업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농부들만이 느끼고 가질 수 있는 거룩한 기쁨이 있다. 지금도 늘 생각하고 있지만 농사 일처럼 신성하고 종교적이며 또 순박하고 인간적이며 시적인 직업은 다시 없을 것이다.

겨울의 사나운 추위도 한 걸음 물러서고 남쪽의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얼었던 땅이 녹아 올 때, 어린이들의 연하고 보들보들한 살결처럼 부풀어 오는 논밭에 갈아 엎으면 땅에서 풍겨오는 그 구수한 흙 내음새! 그것은 저녁 노을이 서산에 물들어도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워지는 흙에 대한 애착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이열 종대로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뽀족뽀족 새싹이 돋고 있는 콩밭이나 조밭의 밭고랑을 바라볼 때 하루의 피곤함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산들바람에 얄밉도록 귀엽고 간지럽게 까불어대고 있는 못자리의 어린 벼 싹! 아, 그것은 나에게 생명의 신비와 힘과 기쁨을 느끼게 했다. 삼복 더위의 그 따가운 햇볕 아래 맥없이 축 늘어진 호박 잎을 볼 때엔 눈물이라도 흘려 목마른 그 잎에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었다. 논에 물이 떨어져 논바닥이 마르고 금이 가기 시작하면 팔이라도 잘라서 그 흐르는 피로 말라 죽어가는 어린 벼 싹들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곤 했었다.

한편 따가운 햇볕 아래 널찍한 밀짚모자를 머리에 ㅆ고 동네 아주머니, 색시, 아가씨 총각들이 한 무리 되어 밭에서 김매며 노래 부르는 재미는 땀 흘리는 고생보다 훨씬 컸다. 더구나 삼복 더위에도 불구하고 뿌옇고 차갑고 시금털털한 막걸리 한 잔에 힘을 얻어 풍년가를 소리 높이 부르며 무릎까지 빠지는 논에 엎드려 논김을 맬 때 젖가슴을 꼭꼭 찌르는 벼잎들의 그 간지러운 촉감! 그런가 하면 넓적한 호미로 논바닥을 긁어 뒤집어 엎으면 코에 확 하고 풍겨오는 썩은 거름 냄새의 구수함! 그것은 일류 요리점의 불고기 냄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된다. 가을은 가을대로 푸르고 높은 하늘 아래 하루 하루 고개 숙여 가며 물결치는 황금색의 벼 바다! 그때 나는 땅에 무릎을 꿇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묘한 솜씨를 얼마나 찬미했었는지…. 그리고 선선해진 저녁 바람에 땀을 식히며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나는 무척 다행으로 생각했고 또 뿌듯한 행복감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열심히 열심히 일했다. 궁색하던 집안 살림도 얼마간 피어났다. 그때 나는 행복했었다.

 

행복이 따로 있나! 행복이란 비단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나 명예나 명예나 또는 높은 지식에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행복이란 끝없는 우리의 원욕(願欲)을 만족시켜 주는 데에 있지 않고 우리가 처해 있는 그 환경 속에서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살아 갈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행복이란 바로 우리 마음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한 행복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우리 삶 주변에 있으며 인간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또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바로 이 가능성과 능력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나는 믿었다.

인간은 사랑할 때 행복한 것이다. 사랑은 행복의 원천이다. 땅을 사랑하고 더운 여름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내 고향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나는 행복했다.

이렇게 농사 일에 열중하며 어린 내 몸도 돌보지 않고 일하던 어느 여름날 저녁이었다. 늦게까지 논 김을 매고 소먹이 풀을 한 지게 베어 가지고 황소를 앞세워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때 별안간 머리가 띵 하더니 붉은 코피가 주르르 흰 와이샤쓰에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지게를 멘 채로 기운 없이 길바닥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 지게에서 빠져 나와 논두렁 흙탕물에 세수하고 쑥 잎을 뜯어 코를 막았다. 그리고 어느 새 찬이슬이 풀잎에 내려 축축한 잔디 위에 길게 누워 초저녁 하늘에 나타나기 시작한 별들을 하나 둘 세어 보고 있었다. 내 자신이 불쌍하게 여겨졌고 슬프기도 했다. 멀리서 뛰뛰 하고 들려오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웬일인지 처량하게 들렸다. 얼마 후 왈가닥 거리며 기차가 지나가자 별안간 내 자신이 참을 수 없이 외로워져 눈물이 양 쪽 뺨으로 흘러 내렸다. 그때 아무리 미련한 짐승이 황소라지만 자기 주인의 딱한 사정을 알아 차림 것 같았다. 풀을 뜯어 먹던 것을 멈추고 내 곁에 다가와, 깊은 동정의 눈길로 조용히 나를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성 없는 동물로부터 이렇게 깊은 동정을 받을 줄이야… 내 외로움은 한층 더 깊어졌으나 동시에 나는 진정으로 나를 위하고 이해해 주는 한 벗을 발견한 기쁨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오, 내 황소야, 그래도 너만은 나를 알아 주는구나. 고맙다, 내 황소야” 하고 중얼거리며 땅에서 일어나 그 목덜미를 끌어 안고 등을 긁어 주었다.

 

 

 

 

 

 

제2장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해 여름에 해박이 되었다. 해방 되기 며칠 전 일본 히로시마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이웃 동네 아저씨 한 분이 얼굴에 간단한 화상(火傷)을 입은 채 돌아왔다. 그 아저씨가 돌아오자 우리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무엇인가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우리 어린 것들이 들으려고 하면 그분들은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우리 집 사랑방에 밤마다 모여 잡담하며 노시던 할아버지들의 표정도 긴장되었다. 나도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요즈음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8월 6일에 있었던 히로시마 원자폭탄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얼굴에 화상을 입고 돌아온 그 아저씨는 자기가 목격한 그 처참했던 원폭 상황을 정신 나간 사람의 헛소리처럼 말하다가는 무서워서 벌벌 떨기도 했다. 그는 이미 잿더미가 된 공장의 허물어진 벽돌 무더기 속에서 용케도 살아난 것이었다. 그날 그가 정신 차려 목격한 수천 수만의 시체, 그것도 반 이상이 타서 죽어 있는 시체들의 참경은 악몽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말을 전해 듣자 세상 종말이 왔다고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 원폭에 관한 전율 속에서도 동네 어른들은 무엇인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아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면 우리나라는 독립이 될 것이라고 그분들은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사랑방 할아버지의 말씀을 통해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박사와 중국 중경에 있는 임시 정부와 김구 선생 이야기, 만주의 독립군 대장이라는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전에도 만주에 있는 형님이나 다른 분들을 통해 독립군의 활동 상황을 다소 들은 일이 있으나 독립투사들의 이름을 들어 본 일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히로시마 아저씨는 주재소 일본 순사에게 붙들려 갔다.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는 이유로 호되게 매를 맞았다. 당시 히로시마 원폭 사건에 관해서는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말한 적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히로시마 아저씨의 원폭 이야기는 일본 순사들에게 일본을 비방하는 일종의 유언비어로 들렸던 것이다. 그 아저씨는 매맞아 반죽음이 되어 그 다음 날 주재소 감방에서 풀려 나왔다. 바로 그날이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날이었고 우리 조국이 해방된 날이었다.

우리 동네에 단 한 대 있었던 찌그러진 라디오를 통해서 일본의 항복을 전해 듣자 온 동네는 발칵 뒤집혔다. 할아버지들은 두루마기에다 갓을 쓰고 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처음 보는 태극기도 갖고 나왔다. 3.1절 독립선언서를 눈물 흘리며 읽는 할아버지가 계신가 하면 소학교 졸업할 때 <호다루노 히카리…>로 시작되던 그 구슬픈 이별곡에 맞추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분들도 계셨다. 그런가 하면 동네 청년들은 그 동안 공출 때마다 숨겨 둔 곡식마저 악착같이 고자질해 찾아내어 공출시키던 구장 집과 반장 집을 때려 부셨다. 물론 면장과 그 악질 면서기 집도 때려 부셨다. 그들의 집에서는 그 무렵 그렇게 귀하던 설탕이 포대로 나왔고 담배도 큰 주머니 채로 발견되었다. 배급 나온 설탕과 담배를 가로채 두었던 것이다. 청년들한테 늘씬하게 매맞은 구장과 반장은 그날 바 어디론지 숨어 버렸다. 구장집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은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날 밤 학교 운동장에 커다란 모닥불을 피우고 학교에 보관하고 있던 <조꾸고>(일본 천황의 유서)와 집집마다 벽에 걸어 두었던 <가미다마>를 떼어 불살라 버렸다.

 

해방 며칠 후 역전 벽보에는 <대한민국, 조선, 동진공화국, 건국 준비 위원회, 인민공화국> 등등의 국호가 나부꼈고 또 건국 위원회니 혹은 뭐니 뭐니 하는 벽보가 매일같이 바꿔 치기를 했다. 대통령 이승만, 총리대신 김구, 외무대신 김규식, 육군대신 김일성이란 이름도 붙였다 떼었다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자가 되어 있었다. 저마다 의견을 갖고 있었고 우리 조국을 위해서는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정치 이론을 내세우며 야단들이었다. 서울서 내려온 작은 형님도 어느 새 정치가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엇인가 열심히 토론하고 있었다.

 

해방과 함께 히로시마 아저씨도 일약 영웅이 되었다. 원자 폭탄에서 살아 나온 그 자체가 벌써 영웅으로 만들고 있었고 또 일본 순사에게 매를 맞았다는 사실이 그를 애국자로 만들었다. 매맞아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그는 몇몇 청년들을 앞세워 일본 주재소를 습격했다. 세 명의 일본인 순사와 두 명의 한국인 순사 보조원을 함성을 지르는 군중 앞에 세워놓고 매질을 했다. 그때 일본인 순사 한 명이 매맞아 죽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스스로를 치안대장이라 불렀고 면(面)내에 치안대를 조직했다. 면 내에는 <삼보광산>이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금광이 있었다. 상당한 일본인이 거기에 살고 있었다. 히로시마 아저씨는 일본인을 총 집합시키고 그들이 갖고 있던 총과 일본 도를 압수했다. 그리고 일본인들로 하여금 매일 도로 작업이나 길 청소를 시켰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개성에서 일본 헌병 10여 명이 특별 기차를 몰고 내려와 기관총으로 위협 사격을 하며 히로시마 아저씨를 찾아냈다. 그리고 헌병들은 히로시마 아저씨를 처참하게 난도질해 죽였다. 그리고 나서 일본인들을 모두 기차 편으로 데리고 갔다. 아직도 소련군이나 미연합군이 우리 고향에 진주하기 전이어서 일본인 군인들의 세도가 당당할 때였다. 우리는 이처럼 해방의 기쁨 곳에 비극을 목격해야만 했다.

 

그 해 9월 초순, 뜻하지 않았던 소련군이 우리 고향에 진주했고 개성 시까지 점령했다. 처음 보는 소련군은 좀 야만스러웠다. 그들의 몸가짐이라든가 또는 때묻어 더러운 군복 주머니 속이나 구두, 각반에 넣고 끼고 다니던 포오크나 나이프로 빵을 베어 먹고 고기를 뜯어먹는 모습이 우리보다 더 문명이 발달된 나라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물품을 강제로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연령의 노소를 막론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동네 부인들은 바깥 출입을 제대로 못하고 집안에서만 한 동안 지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강간 사건은 우리 고향에서는 없었다. 남하하던 일본 여자들은 수없이 소련군에게 모욕을 당했다.

그들은 손목시계를 몇 개씩이나 팔에 차고 다니며 자랑했다. 무지한 놈들이었다. 그들은 시계가 멎으면 죽은 줄 알고 버리기도 했다. 하루는 한 소련 군인이 버린 시계를 주워다가 태엽을 감아 가게 한 후 돌려 주었다. 그때 그는 신기한 듯 한참 시계를 보고 있다가 “시파시버”(고맙다는 소련 말)를 연발하며 나에게 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었다. 처음 보는 백 원 짜리 지폐였으며 당시 백 원 이라면 상당한 것이었다. 황소 한 마리에 2백5십 원 에서 3백 원 할 때여서 나는 그 돈을 받기가 겁이 났다. 그는 주저하고 있는 나에게 그 돈을 손에 쥐어 주고 돌아서서 가 버렸다. 나도 칩으로 뛰어 들어와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그 돈을 감추어 두었다. 소련군들은 처음에는 약탈한 한국 돈의 가치를 몰라 손에 잡히는 대로 지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술을 좋아했다. 심지어는 막걸리도 잘 마셨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개성이나 서울에 다녀오는 것을 싫어했다. <아메리칸스키>(미국인을 뜻하는 소련 말)에서 다녀온다고 그들은 우리보고 야단했다. 그럴 때마다 소주 한 병씩 사다 주고 그들과 타협해야만 했다. 술이라면 만사가 잘 통했다. 그들은 일본 사람과 미국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술만 마시면 <아메시칸스키> 나 <야뽄스키> (일본 사람을 뜻하는 소련 말)를 이렇게 죽인다고 큰소리 하면서 착검(着劍)된 총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시늉을 했다. 소련과 미국은 같은 연합군이었으나 소련군은 미국을 이미 타협할 수 없는 가상적인 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동네에 총 소동이 났다. 어떤 술 취한 소련군이 초가 지붕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박을 따라고 야단이었다. 집 주인이 할 수 없이 따서 그에게 주었다. 그 소련군은 박을 수박으로 잘못 알았던 모양이다. 박을 칼로 잘라 먹어 보고는 그는 노발 대성했다. 박 맛이 쓴 까닭은 필경 자기를 죽이려고 그 박에 독약을 넣은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을 죽이겠다는 것이다. 그 아저씨는 재빨리 피신했다. 동네 사람 15명을 인질로 잡아 놓고 집 주인을 잡아 오라고 야단이었다. 나도 그 인질 중의 하나였다. 해방이 되어 살 길이 생겼다고 우리는 춤추며 노래하고 좋아라 한지도 몇 주일 전인데 나는 뜻하지 않은 일개 소련군에게 총살당하게 되었다. 따발총을 공중에 난사하며 위협하는 그는 술을 사다 주어도 마시지를 않았다. 닭을 잡아 볶아 쥐도 안 먹었다. 집 주인을 죽이고 난 다음에 술을 마시고 닭고기도 먹겠다는 것이다. 일본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해가 지기 전까지 집 주인을 잡아 오지 않으면 우리 15명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그는 협박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오래 살다가 해방과 함께 고향에 막 돌아온 아저씨가 불려왔다. 그분이 그것은 박이지 수박이 아니라고 아무리 소련말로 이야기해도 그는 이해하지 않았다. 수박을 급히 사 왔다. 박과 수박을 비교해 보라고 해도 그는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집 주인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우리 머리 위에 따발총을 난사하기도 했다. 우리는 땅에 엎드려 죽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동네 청년들의 밀고로 주둔 대장인 니콜라예프스키 대위가 말을 타고 달려 왔고 사건은 진정되었다. 그날 밤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해방된 조국을 동정하고 슬퍼했다.

우리 동네에 일어난 이 자그마한 사건, 이것은 해방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할 커다란 비극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에 우리는 벌써 장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과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야만 했다.

어느 날 나는 개성 송도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소학교 동창생인 가네야마 와 아라이 두 친구의 방문을 받았다. 우리 셋은 형제처럼 친한 사이였다. 해방과 함께 그들은 이미 공산주의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김일성 장군이 평양에 입성하는데 환영할 겸 구경가자는 것이었다. 사랑방 할아버지들한테서 들은 바 있는 위대한 애국자 독립군 대장 김일성 장군을 보고 싶은 호기심에 나도 같이 가기로 했다. 일본에서 귀향하는 사람들로 기차는 붐비고 있었다. 우리 셋은 이 혼잡을 이용하여 무료 승차로 평양에 도착했다. 역 부근에 있는 황해여관에 방을 정했다.

시내에는 김일성 장군을 환영하는 군중으로 꽉 메워져 있었다. 비좁은 틈을 헤치고 우리는 맨 앞줄에 나아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실망했다. 그날 내가 본 김일성은 내가 상상하며 기다리던 독립군의 대장인 품위 있고 백발이 성성한 노장이 아니었다. 그는 군복 차림도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을 앞세우고 사열 지이프에 서서 시민들의 환호성에 대답하는 김일성은 겨우 삼십을 갓 넘었을까 생각되는 미남형의 젊은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젊은 나이에, 그 날씬한 몸집으로 수만의 독립군을 거느렸던 것 같지 않았다. 사랑방에서 내가 들은 김일성 장군은 아주 무섭고 호담한 노장군이었다. 일본군마저 벌벌 떨게 하던 김일성 장군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카이제르 수염에 키는 칠 척이요, 몸집은 태산 같은, 백발이 나부끼는 그러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저 지이프에 서있는 김일성은 군인 형이라고 하기 보다는 선비 형이었으며 그의 풍채는 장군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실하고 얌전한 시골학교 선생처럼 보였다. 어쩐지 사기 당한 기분으로 이번에는 만주에서 귀향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집에 돌아왔다.

 

해방 다음 해 3월, 서울에서 미.소 공동회의가 열리고 있을 무렵 미.소 공동으로 38도 경계선 측량을 실시했다. 내 고향 여현은 아슬아슬하게 이남이 되었다. 38선에서 불과 5백 미터의 거리를 둔 이남 땅이 된 것이다. 소련군이 물러가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번에는 동족 간의 총질 속에서 우리는 민족의 비극을 목격하며 살아가야만 했다.

이 38선을 중심으로 양쪽에 남, 북한 경비대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만나면 서로 총질을 했다. 그때 나는 적이란 비단 국경을 달리하는 이민족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은 민족끼리라도 정치 이념이 다르면 용서할 수 없는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얼마 전까지도 소학교 선배로서 다정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38선 이북 경비대가 되어 우리에게 총질을 해 왔다. 그들은 자기들이 애국자라고 스스로 말했다.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말을 들은 지 불과 몇 달 밖에 안 되는데 공산주의의 위대한 사상가라도 된 듯이 뻐겼다. 공산주의 정차만이 가난한 조국과 민족에게 행복을 약속한다고 똑같은 말을 매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는 길만이 동양의 약소민족을 자본주의의 착취로부터 살려내는 길이라고도 했다. 하여튼 그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곧잘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야 우리 민족의 살 길을 찾았다고 좋아했다.

 

또 한 쪽에서는 민주주의와 자유만이 우리 민족에게 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느니 하며 옥신각신 이었다. 해방 전에는 하나였던 조국이 해방이 되자 둘로 나뉘어 서로가 국민에게 똑같은 행복을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이 <두 개의 조국>은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총질하며 죽였다. 그때 나는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으나 해방 전에 들어 보지 못했던 총소리를 38선에서 들으며 어쩐지 그 전보다 더 불행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왜 우리는 서로 욕해야 하며 또 죽여야만 했을까? 똑같은 애국 애족이란 이름 아래 똑같은 열성을 갖고 우리는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여운형씨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진지 며칠 후 서울 작은 형님이 내려왔다. 형님은 몹시 흥분해 있었다.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우리 민족의 지도자 중의 한 분을 잃었다고 말하며 울기까지 했다. 도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해방과 함께 시골에까지 정치 풍년이 들었으나, 나는 물론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지만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왜냐하면 정치라는 이름 아래 동족을 적대시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 정치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을 비방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정치라는 이 비정(非情)! 동족을 죽이는 정치라는 이 사상운동에 나는 커다란 혐오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또 나는 애국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싫어했다. 동족을 죽이는 행위가 결코 애국하는 방법이 아닐진대 애국이란 이 관념은 동족을 죽이라고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의 무식함을 천만 다행으로 여겼다. 나는 내 무식함에 감사했다. 어느 날 내가 유식하게 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정치만은 하지 않겠다고 나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땅만을 사랑하자고 다짐했다. 내 조국은 우리 집의 논과 밭이었다. 그리고 애국하는 길은 부지런히 농사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화롭게만 살아 오시던 내 부모님과 큰 형님의 무능함을 전에는 비웃고 불만스럽게 여겼으나 이제는 그분들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그분들에게 죄송하게 생각되었다.

38선 경계선이 확정되자 우리 고향에 남한 경찰관이 주둔하게 되었다. 밤낮으로 밀려 내려오는 수백 명의 피난민, 38선을 왕래하는 수백 명의 등짐 장사꾼들, 간첩, 혹은 남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왕래 등, 십여 명의 경찰관으로서는 벅찬 임무였다. 개성 경찰서에서는 동네 청년 이십여 명을 선발하여 간단한 무기 훈련을 시킨 다음 경찰관을 도와 38선 야간 근무를 하게 했다.

그때 내 나이 열 일곱.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몸집이 큰 탓으로 청년 취급을 받고 있었다. 나도 38선 경비대원으로 선발되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고 나만은 동족을 욕하고 죽이는 정치인이 되지 말자고 다짐한 바가 어제였는데 정치하는 형님보다 먼저 동족에게 총질하는 경비대원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자기와 정치 이념이 다른 동족을 욕하고 죽이는 일이 정치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또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총을 들고 38선 경비를 보게 되니 나는 민주주의 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내가 경계하고 물리쳐야 할 민족의 적이라고 했다. 이처럼 총은 나에게 하나의 정치 이념을 강요했고 그것을 부득이 선택하게 했다. 내 생전 처음으로 총을 어깨에 메고 38선 경비 보초를 섰을 때 나는 그날 밤 울고 싶었다. 어쩌다가 나이 열일곱 살에 총을 메게 되었는지… 이 운명을 거역하기에는 너무나도 약한 나의 힘! 그때 나는 조국처럼 사랑하겠다던 이 땅에 대한 이상도, 또 내 민족을 사랑하듯이 부지런히 일하자던 농사 일에 대한 내 꿈의 한 모퉁이도 무너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열일곱 살에 인연을 맺은 총은 그 뒤 10년 간 항상 나를 붙어 다녔다.

38선 경비는 나에게 우리 민족의 비극을 마음 아프게 인식시켜 주었다. 어떤 때는 남하하는 청년 학생들이 북한 경비대에 붙들려 매맞고 거의 병신이 되어 넘어오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38선 상에 버려진 청년들의 시체를 보기도 했다. 그들은 북한 경비대의 총에 사살당한 것이다. 남한으로 자유를 찾아 넘어 오다가 공산 경비대의 총에 부상당한 피난민도 있었다. 그 밖에도 38선을 넘다가 북한 경비대에 들켜 도망치던 중 어린 자식을 벌판에서 잃고 미쳐 버린 젊은 아주머니도 보았다. 가지 가지 우리 민족의 비극을 나는 하루 하루 목격하며 지내야만 했다.

북한 경비대만이 자기들과 정치 이념이 다른 동족을 매질하고 죽인 것만은 아니었다. 공작대원으로 남하하던 젊은 남녀 공산당원이 남한 경찰대에 붙들려 모진 매를 맞고 심지어는 옷까지 발가벗겨 고문당하는 것도 나는 목격했다. 평양의 김일성 대학교로 공부하러 가던 남한의 가난한 남녀 학생들이 붙들려 실컷 얻어 맞는 것도 나는 보았다. 또 월북하려던 한 젊은 여학생은 38선에서 붙들린 것이 인연이 되어 어떤 순경과 사랑을 맺고 결혼한 것도 보았다. 그때 나는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기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하루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북한의 한 민족은 이미 같은 한 민족으로 공존할 수 없었고 적과 적으로 대립하고 있음이 분명해져 갔다. 38선 상에서는 총성이 자주 울려 왔고 남북한 양 쪽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정치 사상으로 서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 정치 협상 회담에 참석하러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 들을 위시하여 2백여 명의 남한 정치인들이 38선을 넘다가 38선 군사 경계 표시 말뚝을 손으로 잡고 남북한 두 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다 보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마도 그분들은 거기에서 눈물을 흘렸으리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장애 없이 오고 가던 이 길이건만 생명 없는 이 말뚝은 조국을 두 개로 갈라 놓고 뭇사람들의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다. 조국 양단의 비극과 민족 상쟁의 표시인 이 한스러운 38선을 넘는 그분들의 마음이 편안했을 리 없을 것이다. 공중에 나는 저 새들을 복, 또 하늘에 자유로이 떠돌고 있는 구름을 보며 그때 그분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38선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강이 흐르고 있단 말인가, 혹은 우리 조국 땅이 끊어져 있단 말인가… 4천 년 동안 우리 조상이 살며 오고 간 이 땅!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 없는 이 땅이었건만 이 말뚝을 손에 잡은 그분들에게 이 38선은 일제 시대 조국 광복을 위해 압록강을 넘으며 두만강을 건너고 또 태평양을 건너며 느끼던 그 심정보다 더 착잡한 감회를 주었으리라…

인적이 끊어진 지 벌써 2년 이 넘은, 그 동안 잡초만이 무성해진 이 38선을 그분들은 무거운 발길로 넘어 갔다가 넘어 왔다. 조국을 사랑하고 서로 협조해 독립운동을 벌이던 어제의 혁명 동지들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다는 똑같은 원칙과 목적을 갖고 있건만 단순한 정치 이념의 차이로 상대방을 이미 죽여야 하는 원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침통할 만큼 묵묵히 앉아 계신 우울한 김구 선생의 모습, 그리고 병약한 몸, 파리한 야윈 얼굴에 날카롭게 빛나던 두 눈의 김규식 박사, 평양을 다녀 오신 이 두 분의 모습에서 행여나 하던 한 가닥 조국 통일에 대한 희망마저 우리는 버려야만 했다.

 

사상의 대립으로 서로 총질하고 있는 38선이었지만 38선 시장은 경기가 좋았다. 38선 <등짐장사>로 부자가 된 사람도 상당히 있었다. 남북한의 물가의 차이가 비교도 안 될 만큼 컸었기 때문에 등짐장사로도 단단한 수입을 올릴 수가 있었다. 또 화차 수십 대의 상품이 38선상에서 교환되는 대무역이 번번이 벌어지기도 했다. 남들은 이 38선 때문에 집안이 망하고 가족이 서로 헤어져야만 했으며, 어떤 이는 귀중한 생명마저 빼앗기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장사꾼들은 이 비극의 38선 혜택을 단단히 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와이로를 먹는다>는 말을 들었다. 즉 경찰관이나 기타 관공서 직원들이 공부집행을 빙자하고 얻어 먹는 돈이나 물품이 와이로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었다. 근 1년 6개월 간 경찰관을 보좌하며 38선을 경비하며 남들이 돈벌이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으나 나는 그때 그처럼 흔해 빠졌던 양담배 한 갑 제대로 얻어 피우지 못했다. 어느 날밤 야간 순찰을 같이 하던, 나와 각별히 친한 한 순경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태오, 나는 자네가 똑똑한 줄 알았더니 사실은 그렇지 못하네그려.”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곧 알았으나 정말 바보처럼 히히 웃고 말았다. 그 친구의 말인즉 남들은 38선을 경비하느라 밤잠도 안 자는 값 (와이로)를 버는데 나는 고생만 실컷 하고 담배 한 대 제대로 얻어 피우지 못하니 바보라는 것이었다.

1947년 이른 봄 어느 날, 나는 서울 작은 형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 내용은 개성시 모처로 찾아가면 거기에 두 아가씨가 있는데 그녀들을 무사히 38선 을 넘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녀들은 자기가 존경하는 은사의 두 딸이며 평양으로 가야만 하는 말 못할 사정이 있으니 자기를 믿고 그 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월북시키라는 말이 좀 불쾌했으나 나는 형님의 말을 실행하기로 했다. 형님은 서울에서 무엇인가 정치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한번은 서울로 형님을 찾아 갔을 때였다. 형님의 하숙방에는 5, 6명의 젊은 학생들이 모여 칼 마르크스가 어쩌니, 국민 대중을 위한 복지사회니, 프롤레타리아 해방 운동이니, 또 사회주의니 등등을 말하며 밤을 새우는 것을 보았다. 그때 자기가 하는 정치운동에 참여하라는 형님의 부탁을 내가 단호히 거절하자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오야, 너에게는 혁명가가 될 소질이 다분히 있는데 웬일인지 너는 부르조아적인 도학자(道學者)가 되어 가고 있구나. 나는 너에게 대해 기대가 컸는데 실망했다.”

형님의 정치운동에 동조는 할 수 없어도 나는 형님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했다. 형님은 내가 모르고 있는 세계를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분이 하는 모든 일을 존경했다.

그 무렵 나는 달구지를 끌고 개성을 드나들며 나무장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나무를 일찍 팔고 형님이 알려준 주소로 문제의 두 아가씨를 찾아갔다. 형님의 편지를 보이며 나 자신을 소개했을 때 그녀들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라 나섰다. 달구지에 가마니 몇 장을 깔고 자리를 편하게 만든 다음 그녀들은 거기에 앉았다.

언니는 20세 쯤으로 보였고 동생은 내 나이 또래였다. 언니는 대학생이라 했고 동생은 고등학생이라 했다. 그녀들은 둘이 다 상당한 미모의 아가씨들이었다. 형님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다.

개성 시내를 빠져 나와 한가한 신작로에 들어섰을 때 언니는 형님에 대해 말을 많이 했다. 형님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자기들은 아버지를 찾아 평양으로 가는 길이며, 이남에서는 아버지 때문에 살기 어려운 자기들의 사정을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국 이야기와 정치 이야기도 많이 했다. 내가 그녀들의 말에 별 흥미를 안 보이자, 왜 형님처럼 공부를 안 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공부에 대한 내 소견과 독학으로 크게 성공해 보이겠다고 내 뜻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일생 땅을 조국처럼, 내 민족처럼 사랑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그녀들은 내 말에 깊은 관심을 가져 주는 것 같았다. 그때 언니는 내 뜻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형님의 이상주의와 지능과, 땅에 대한 내 사랑과 노력을 합치면 우리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왕릉 고개를 넘어서자 저 멀리 우리 동네가 한눈에 보였고 38선이 가로 질러 있는 벌판이 보였다. 저 벌판 너머 보이는 마을들의 38선 이북이라고 내가 그녀들에게 손짓으로 알려 주었을 때 어디선가 미군들이 사냥하는 총소리인지 혹은 경비대들의 총질인지 총성이 여러 번 들려 왔다. 그녀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 보았다. 한참 침묵이 흐른 다음 언니가 무엇인가 초조한 기분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태오씨,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나는 형님과는 사상적 동지인 동시에 형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형님도 나를 사랑하시지요. 그리고 난 지금 형님의 아기를 갖고 있어요.”

“뭐, 형님의 아기를 갖고 있다구요?”

나는 나 자신마저 놀랄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뜻밖의 말이라 나는 당황했고 안 놀랄 수 없었다.

“네, 현재 임신 중이에요. 그러나 형님에겐 알리지 않았어요. 형님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계실 거예요.”

언니는 담담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 끝에는 일종의 쓸쓸함이 깃들어 있는 것을 느꼈다. 서울 쪽 하늘을 뒤돌아 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도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달구지 바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왔다.

형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임신 중이란 말이 내 마음을 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내가 아주머니라고 부를 수 잇는 이 여인, 그녀와 나는 남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38선을 넘어 가야만 했다. 그리고 38선이란 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무제한의 시간 속에 어쩌면 형님과 이 여인은 남남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은 슬퍼졌다. 그때까지만 해도38선의 비극은 막연한 민족적 비극인 동시에 남의 일처럼만 느껴졌으나 이 비극은 우리 집안에까지 파고 들어오고 있었다.

“정치가 다 무엇입니까. 난 이처럼 달구지를 끌고 나무장사를 하며 땅을 파고 있어도 형님에 지지 않는 애국자가 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사상이니 정치니 하는 것 다 버리고 형님과 함께 이남에 남아 사세요. 아버지 일 때문에 서울에서 살기 어려우면 시골 아무데서나 나처럼 농사 지으며 살 수도 있지 않아요.”

나는 좀 쓸쓸한 기분으로 말했다. 형님이 사랑하는 이 여인을 떠나 보낼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니 이 여인을 이북으로 보내기가 마음 아팠다.

“태오씨는 순진하시네요.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름 아래 그러한 감상적인 기분으로만 이미 살 수 없어요. 정치를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는 헤어짐의 슬픔도 각오했어요. 어쩌면 이러한 슬픔도 정치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이러한 희생이 바로 우리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밑거름이 될 거예요.”

그녀는 엄숙하게 말했다. 혁명가다운 신념이 그 말 소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그러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혁명이니 정치니 하는 일보다는 그녀가 가정을 더 아끼는 평범한 여인이 되었으면 했다.

“요즈음 너 나 없이 삼천만 동포가 다 정치만 하겠다는 세상인데, 정치는 남들에게 맡기고 두 분이 시골에 가서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평화롭게 사실 수 없어요? 우리 아버지께서도 어머니를 위해 한 때 가졌던 꿈을 단념하신 일이 있는데…. 평범한 국민의 하나에 불과한 우리들에게는 정치보다 사랑과 가정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아버지에 대한 말씀은 형님을 통해 들었어요. 나는 아버지를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러한 생활관을 이제는 버려야 할 때예요. 내가 하지 않아도 남들이 하겠지, 하는 그러한 자기 배제주의와 방관주의가 우리 조국을 망치게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돼요. 보세요, 옛날 정치가들이나 소위 양반 계급의 선비님들은 시국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시골로 피신하여 무료하게 나날을 보내며 시나 읊고 낚시질이나 하며 지내지 않았어요? 그들에게는 투쟁 의식이 없었고 또 <참여>라는 희생을 무서워 했거든요. 그러니까 나라 일이 잘 될 리가 없었지요. 우리는 조국 건설이라는 이 신성한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참여>라는 각자의 위치가 요구하는 희생을 달게 받아야 해요. 이것이 바로 형님과 내가 하고 있는 정치 활동이에요.”

그녀는 한 혁명가의 연설처럼 열띤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녀를 설득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도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바로 그 말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그 참여라는 말입니다. 건설을 위한다는 그 참여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분이 하시는 그 정치도 그 중의 한 방법에 불과하지 않겠어요? 그 많은 방법 중에 유별나게 한 가지에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과도 타협할 수 잇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런 안돼요. 우리 각자에게는 그 어떤 사명이 따로 따로 부여되어 있어요. 태오씨의 나라 사랑이 땅을 파는 것이라면, 형님과 나의 나라 사랑은 정치하는 것이라 하겠지요. 우리 조국의 밝고 공정한 정치를 구현시켜 가난한 우리 백성에게 골고루 잘 살 수 잇는 생활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 것을 사명이라고 해요. 이 사명은 어떠한 이유로서든지 배반해서는 안돼요.”

“그럼 좋습니다. 형님과 당신의 의사대로 오늘 밤 38선을 무사히 넘어가게 안내해 드리지요. 그러나 내 마음은 슬프기만 합니다. 나는 당신이 내 형님과 함께 살았으면 합니다. 서로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서 또 아기까지 갖고 있는 사람이 왜 기약 없이 헤어져 살아야만 합니까?”

“그런 형님과 나만의 비극은 아닙니다. 남과 북으로 양단된 조국의 이 현실이 이미 그것을 전제하고 있지 않아요? 그것은 이 시대의 삶을 이어 받은 우리 모두가 져야 할 하나의 십자가예요. 우리는 이 십자가를 거부해서도 안 되며 또 피해서도 안 돼요. 예수님의 부활이 십자가라는 희생을 전제했듯이 우리가 지고 있는 이 십자가가 언젠가는 우리에게 조국 통일이라는 <할렐루야>를 부르게 할 거예요.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며 참아야 해요.”

 

그날 밤 나는 이 두 여인을 38선을 넘어다니는 등짐 장사군 틈에 끼어 월북시켰다. 나 자신 38선 상까지 따라갔었다. 나는 당시 38선 경비를 하던 덕택으로 등짐 장사꾼들의 비밀 길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남한 경비대만 피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스름 달밤에 산허리를 끼고 비좁은 산길을 10여 명의 일행은 숨을 죽이며 걸었다. 아기 때문에 피곤한 듯한 그 여인의 손을 잡고 산비탈 길을 걸었다. 뒤에는 동생이 따로 오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이남 경비대의 것인지, 혹은 이북 경비대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총성이 들려 왔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총성은 멎었으나 이번에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경비대와 다른 등짐 장사꾼이 마주친 모양이었다. 이때가 기회였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38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때 나는 그녀에게 나도 모르게 “아주머니 몸조심 하세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쥐고 떨리는 잦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고마와요. 태오씨로부터 아주머니란 말을 듣고 싶었어요. 개성에서 형님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형님을 사랑한다는 내 말을 전해 주세요. 그리고 아기도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하더라고 전해 주세요. 나는 도련님을 잊지 않겠어요. 우리는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예요. 도련님도 몸조심하세요”

“몸조심하세요” 하고 동생에게도 말하자,

“태오씨 고마왔어요” 하고 똑바로 나를 쳐다보며 그녀는 대답했다.

장사꾼들의 뒤를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 그녀들이 사라질 때 나는 그녀들이 건너야 할 큰 냇가가 그 앞에 있을 것을 생각해 냈다. 아직도 이른 봄, 물은 찰 것이고 어쩌면 물이 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녀들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또 찬물이 임준 중인 여인에게 해롭다는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그녀들의 뒤를 쫓았다. 이미 38선 이북 땅에 있었으나 그녀들을 업어서 냇가를 건제 주고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냇가 언덕에 주춤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뒤따라온 나를 보자 놀라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세요?” 하고 묻는 언니에게 이 시내를 업어 건네 주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장사꾼들이 한 사람씩 조심스럽게 냇가를 건너갔다. 내 등에 업히기를 주저하는 언니를 등에 업고 냇가를 건넜다. 물이 예상보다 차갑고 깊었다. 나는 뒤돌아온 것을 잘 했다고 생각했다. 동생도 업어 건넜다. 그리고 다시 이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순간 저 쪽 언덕 길에서,

“거기 누구냣! 도망하면 쏜닷! 거기 서 있거랏!” 하는 소리와 함께 3명의 이북 경비대원들이 뛰어왔다. 장사꾼들은 어둠을 이용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고 우리 셋은 붙들리고 말았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잠시 후 우리는 바라크식으로 지은 <하꼬방> 집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경비 초소였다. 다른 두 명의 경비 대원이 졸고 있었다. 밝은 전등 밑에 들어서자 나의 두려움은 한층 더 커졌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리노우에가 있지 않은가! 리노우에라면 몇 년 전에 형님을 위해 내가 물노으로 떠밀어 엎어뜨리고 벼포기로 얼굴을 때려 눈을 못 뜨게 한 다음 내 주먹으로 실컷 때려 준 그자가 아닌가! 그도 내가 누구인지를 당장 알아 차렸다. 그는 경비 반장인 듯했다. 우리를 붙잡아 온 경위를 자세히 보고받자,

“수고했소, 동무들은 이제 돌아가도 좋소> 하고 그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었던 한 경비대원에게는 초소 앞에 나가 보초를 서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는,

“야, 이 자식 누구냐? 너 다가야마가 아닌가?’

득의 양양하게 내게 말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네, 소학생 시절의 다가야마입니다.” 좀 비굴한 듯했으나 나는 그에게 경어를 썼다. 그 때 그는 별안간 내 따귀를 몇 대 갈기며 또 말했다.

“이 새끼, 옛날에도 악질이더니.. 너 이놈의 새끼, 요즘 미제의 개새끼 노릇 하는 이남 경비 대원이 되었다면서?”

그는 내 뺨을 또 몇 대 때렸다. 옛날 일을 회상하며 복수하는 것 같았다. 눈에서 불이 났으나 참기로 했다. 그때 언니가 나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아버지가 누구며 지금 평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내 형님이 서울에서 하고 있는 일과 자기들이 38선을 넘어온 사유를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닥쳐라, 이년아! 이 새끼의 형 놈은 학생 시절부터 나와 원수다. 뭐 그 놈의 새끼가 서울에서 혁명 운동을 하고 있다고? 너 이년 거짓말하면 당장 죽인다. 이년! 너 미제의 밀정이지? 역도 이승만의 스파이지? 이년 바른대로 말해 봐!”

하도 상스러운 리노우에의 말에 언니는 입을 다물고 분하여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무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 보고 있었다. 그때 리노우에는,

“이년 봐라. 그 눈으로 누굴 보고 있엇!” 하며 언니의 뺨을 때렸다. 그것을 보자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너 이 새끼, 펴포기 맛을 또 보고 싶으냐?” 하며 나는 그에게 달려 들어 힘차게 발로 차고 넘어진 그놈의 궁둥이를 발로 또 찼다. 보초 서던 경비 대원이 뛰어 들어와 내 가슴에 총을 겨누며 진정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총부리 앞에서 주먹과 발을 멈추어야만 했다. 리노우에는 마룻바닥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더니,

“강동무, 이 새끼를 그 의자에 앉혀 밧줄로 묶으시오. 그 놈은 옛날부터 워낙 황소 같은 놈이었으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의자에 앉혀진 채로 밧줄에 묶였다. 그리고 또 몇 대의 따귀를 얻어 맞았다. 그때 동생이 자기 몸으로 내 얼굴을 감싸 주며,

“왜 때리세요. 태오씨는 아무런 죄가 없어요” 하고 말했다.

“이년아 비켯!”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동생은 뒤로 넘어져 마룻바닥에 나둥그러졌다. 그녀도 한 대 얻어맞은 것이다. 지금까지 말 한 마디 없이 조용하고 수줍어하기만 했던 어린 그녀에게 이런 용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한참 동안 분을 못 참는 사람처럼 씩씩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던 리노우에는,

“이년들 너희는 미제의 스파이지? 역적 이승만의 지령장을 내놔 봐” 하며 그녀들의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권총을 겨누며 옷을 벗으라고 그녀들에게 강요했다. 몸 안에 지닌 이승만의 지령장을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강제로 옷을 빗기겠다고 했다. 그 당시 남북한 경비대에 절은 여자가 붙들리기만 하면 옷을 벗기는 것이 하나의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언니가 또 사정했다. 아버지의 이름을 대며 자기들은 절대로 그런 스파이거나 그런 지령을 받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때 동생이,

“자, 보세요. 어디에 그런 지령장이 있어요” 하며 옷을 훌훌 벗어 그에게 던졌다. 알몸이 된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무슨 최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리노우에를 죽이고 싶었다. 아니 마음 속으로 그를 수 없이 죽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리노우에 놈은 무슨 예술품을 감상이라도 하듯 벗은 동생의 몸을 찬찬히 바라다 복 있었다. 그녀는 똑바로 서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언니가 니로우에의 눈길에서 동생의 몸을 감싸 주었다. 언니가 옷을 입혀 줄 때 동생은 엉엉 울고 있었다. 그리고 언니가 옷보다리 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리노우에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이것이 내 아버지의 편지입니다. 내 아버지에게 연락이나 해 보시고 나서 우리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하십시오. 그 편지 뒷장에 아버지의 주소가 있으니 연락해 주세요. 도대체 이런 상스러운 짓이 어디 있어요. 이런 못된 짓들 때문에 우리의 신성한 혁명 사업이 욕을 먹고 있지 않아요.”

리노우에는 편지를 몇 번 뒤적거리더니 읽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 점점 긴장되는 것 같았다. 편지를 다 읽은 다음 그는 몹시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담배를 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참 후 옷매무시를 고치고 나서 정중하게 그는 말했다.

“이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여성 동무들,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처럼 훌륭하신 동지의 자녀들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편지를 진작 보여 주셨으면 이런 실례되는 일을 안 했을 텐데… 미제의 스파이 노릇을 하는 젊은 여자들이 하도 많아서… 이거 참 죄송스럽습니다. 여성 동무,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강동무라는 경비대원으로 하여금 나를 풀어주게 했다. 그는 멋 적은 듯 웃으며 손을 내밀어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다가야마, 미안하네. 자네가 우리의 동지인 줄 몰랐네. 용서하게.”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그는 또 말을 계속했다.

“자네의 감정을 이해하겠네. 이 두 분은 내가 잘 모셔 드릴 것일세. 그리고 기차편이 되는 대로 평양으로 보내 드리겠네. 빨리 자네는 이남으로 넘어 가게나. 날이 벌써 밝아 오는데 우리 경비대장 동무가 아침 다섯 시면 꼭 이 초소를 지나가는데 자네가 있으면 우리 서로의 입장이 곤란해지네. 자, 자네는 빨리 떠나게.”

분노에 찬 눈으로 리노우에를 바라보고만 있는 나에게 언니도 빨리 떠나 가라고 재촉했다. 아무 말 없이 참고 나도 이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날이 밝기 전에 나는 이남으로 넘어가야만 했다. 나는 말 없이 고개 숙여 언니에게 인사하고 동생 앞으로 다가 섰다. 그녀에게는 위로의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무슨 뜻에서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때 그녀는 와락 내 품에 안기며 흐느껴 울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러자 참아 오던 울분이 터졌다. 누구에게든지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어서 빨리 떠나라는 언니에게 나는 분풀이를 했다.

“그래 아주머니 이것이 정치입니까? 아주머니 말씀 좀 해 주세요. 이것이 애국하는 길이고 내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아주머니 왜 잠자코 계세요. 말씀 좀 해 주세요. 아주머니..”

그때 그녀는 나에게 잠잠히 타일렀다.

“도련님, 흥분하지 마세요. 우리는 참아야만 하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 엄청난 혁명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실수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그 실수를 반성하고 혁명이라는 목적을 향해 전진해야만 합니다. 도련님, 자, 어서 빨리 돌아가 주세요.”

나는 그 경비 초소를 떠났다. 개 짓는 소리와 함께 첫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쪽 하늘이 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나는 발부리에 부딪치는 돌을 걷어차기도 하면서 시내를 건너 넘어져 가며 미친 사람처럼 38선을 넘어 뛰고 있었다. 그것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이북 경비대가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무엇인가 화풀이하고 싶은 심정이 나로 하여금 미친 사람처럼 뛰게 했다. 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분노가 내 마음 속에 있었다.

 

 

 

 

제3장

달구지의 굴욕

 

 이러한 소란 속에서도 나는 땅을 사랑하는 것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공산주의자도 싫었고 민주주의라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하나의 이념을 선택하면 필연코 그에 반대되는 이념을 배제하고 죽여야 하는 정치라는 것에 나는 커다란 혐오를 갖고 있었다. 하나의 생활관을 선택해도 그것이 남을 미워하게 하거나 또는 제거하려 하지 않고 남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그러한 생활을 나는 하고 싶었다. 바로 그것이 땅이었고 농사 일이라고 생각했다. 땅과 농사 일은 나로 하여금 어느 누구도 미워하게 하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동네에 석회 공장이 하나 있었다. 많은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이 공장에서 일하며 살림을 보충하기도 했다. 나도 남들처럼 농촌의 여가를 이용하여 개성에 있는 석회 상회에 달구지로 석회를 운반해 주고 그 운임이라는 돈을 받기로 했다. 이것도 무시 못할 우리 집의 부수입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가죽 잠바> 라는 별명을 가진 한 개성 사람이 미군에게 허가 받은 트럭 두 대를 갖고 우리 동네로 이사해 왔다. 그는 윤이 번질번질 나는 가죽 잠바를 항상 입고 다녔다. 그는 이사 오자마자 경찰관과 친해졌고 허술했던 경찰서도 수리해 주었다. 그리고 석회 운반을 도맡았다. 아직도 원시적인 운수 방법에 지나지 않던 달구지보다 문명화된 트럭의 운수 방법이 몇 십 배의 효과를 냈다. 물론 트럭의 운수 비용이 달구지의 그것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싸게 들었다. 그래서 석회 공장 주인은 트럭 주인에게 석회 운반을 전적으로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해방과 함께 건축공사가 활발했고 우리 고향 석회질이 남한 제일이라는 소문이 나자 남한 각처에서 석회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래서 석회 공장도 크게 확장 되었고 달구지로 석회 운반하는 것이 사실은 문제가 되고 있을 때였다. 그 많은 석회 주문에 달구지의 수송 방법이 충당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을 보충해 주던 이 부수입의 길이 막히자 우리 달구지꾼들은 곧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때, 나는 서울서 착취당하는 노동 계급을 위해 혁명사업을 하고 있다는 형님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했다. 며칠 후 형님은 장문의 편지를 내게 보내 주었다. 아직 노동 대중을 보호해 주는 법적 제도가 없는 이 남한에서, 특히 내 고향과 같은 무식한 사람들의 마을에서 트럭이라는 엄청난 <자본주의>의 횡포에 맞서 투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형님은 편지에서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밝은 내일을 건설하기 위해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암흑과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나를 격려해 주었다. 당장 눈 앞에 우리 자신만을 위한 이득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이 신성한 투쟁을 포기한다는 것은 오늘과 똑같은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조금도 개선하지 못한 채 우리 자녀들에게 그대로 물려 주는 커다란 악과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오늘의 우리를 희생시켜서라도 우리 자손들의 행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바로 혁명 사업이라고 그분은 강조했다. 이러한 혁명이 이 시대에 사는 우리 모두의 <종교>가 되어야 하며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이 바로 자기의 신앙생활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자기는 정치라는 이 종교의 순교자가 될 각오가 다 되어 있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투쟁에 대한 여려가지 방법을 자세하게 편지에 적어 보내 주었다.

나는 형님의 지시대로 우리 동네 달구지꾼들을 찾아 다니며 이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집회를 가질 것을 호소했다. 그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우리의 권익을 위해 단결할 것도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노동 계급을 위한 투쟁이니, 노동 대중의 단결이니, 동맹파업이니 등등의 말만 들어도 그들은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만 해도 공산주의자로 몰리기 쉬웠고 공산주의자로 인정되면 재미 없는 일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자극적인 말을 피해 동네 달구지꾼들을 설복시키려 해도 그것은 소 귀에 경 읽는 격이었다. 그들은 그 전보다 3배나 더 싸진 운임을 받으며 개성으로 석회를 나르고 있었다. 나만이라도 석회 운반을 중지하겠다고 결심하고 무언의 단독 투쟁을 하기로 했다.

이 사실을 형님께 알리자 형님은 <사보타아지> 하라고 내게 지시했다. 즉 트럭이라는 자본주의의 본체를 파괴해 버리라는 것이었다. 방법은 그 트럭의 휘발유통에 설탕을 한 봉지 넣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찬의 엔진이 금방 못 쓰게 되어 그 차는 폐차가 된다는 것이었다. 며칠 간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이 큼직한 사보타아지를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우선 개성에 가서 설탕 한 봉지를 사 들고 석회상회 부근에 가서 그 트럭이 오기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트럭에는 석회가 가득 실려 있었다. 석회 포대를 트럭에서 내려 석회상회 창고에 정돈한 다음 운전수와 조수와 몇 명의 인부들은 부근에 있던 식당으로 식사하러 갔다. 나는 이 틈을 이용하여 재빨리 그 트럭에 달려가 휘발유통에 설탕 한 봉지를 넣고 달아났다. 다행히도 그때 아무도 나를 본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나는 내 생전 처음으로 죄의식을 느꼈다. 사실은 큰 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폭력이라고 볼 수 잇는 이 사보타아지도 새로운 사회 질서와 정의를 구현시키는 데에 절대로 필요한 불가피한 하나의 <선>이라는 형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내가 트럭을 파괴한 것도 형님이 말한 <약자>를 위해 자본주의의 횡포를 막는 <수술>이라고 나도 동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내가 내 일생 처음으로 참가한 정치적 활동이었다. 그리고 나는 형님이 하고 있는 그 혁명 운동을 얼마간 이해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정치에도 남을 위한 사랑과 약자를 구제하는 희생과 밝은 내일의 창조를 위한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며칠 후 그 <가죽잠바>의 트럭이 엔진이 망가져 폐차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나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가죽잠바>의 자본주의는 그것으로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곧 새 차 한 대를 다시 샀고 석회 운반을 계속하고 있었다. 동네 달구지꾼들은 싼 운임으로 석회 운반을 했고 나는 석회 운반 대신에 나무 장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제2차의 사보타아지를 하지 않았다.

어느 여름 밤, 나는 달구지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누워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달구지의 운명을 생각해 보았다.

해방과 함께 많은 것이 변해가고 있었다. 우선 조국이 38선으로 갈라져 변해 있었고 사람들도 정치니 혁명이니 하며 변해가고 있었다. 동네 앞을 지나가는 신작로도 미군 덕택으로 그 옛날의 모습이 완전히 변한지도 오래였다. 장마철만 되면 온통 진흙 구덩이에 흙탕물로 오고 갈 수 없던 이 신작로… 이제는 그 위에 자갈이 깔려 있고 도로 주변에는 배수를 위한 도랑이 파여 있어 웬만한 장마철에도 길은 좋았다. 지금 그 신작로에는 미군 군용차와 석회 운반하는 <가죽잠바>의 트럭들이 흙먼지를 뿜으며 달구지꾼인 우리들을 조롱하며 지나 다녔다. 달구지꾼들은 그 트럭을 부러워했다. 그런 트럭을 한 대 갖는 것이 그들의 최대의 소원이었다. 동네 젊은이들 중에는 달구지를 버리고 서울에 가서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 <가죽잠바>의 트럭은 여러 면으로 편리했다. 봄에는 바쁜 농가를 도와 밀, 보리도 실어 날랐고 가을에는 벼도 실어 날랐다. 집 짓는 돌도 실어다 주었다. 달구지에 비하면 몇 배의 능률을 올렸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 트럭을 이용해서 바쁜 우리 집 농사 일을 도운 일이 없다. 동네 사람들은 가죽 잠바의 트럭을 하나의 신처럼 섬겼고, 달구지의 사용은 우리 농촌에서 차츰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달구지를 사랑했다. 기계화 되어가는 이 현대 문명 속에 원시 문명의 한갓 잔영(殘影)에 불과한 달구지였지만 나는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달구지의 기원이 언제부터인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이나 우리 조상과 함께 살아 왔을 이 달구지… 거기에는 우리 조국의 기구한 역사 속에서 온갖 가난과 정치적 횡포와 불의의 자연적 재난을 불평 없이 참아 살아 온 우리 조상의 그 숱한 비애와 그들만의 소박한 기쁨이 젖어 있다. 그러나 이 달구지도 변하는 이 시대의 흐름 속에 차츰 자취를 감추어 갈 것이다. 우리 조상들과 운명을 함께 해 온 이 달구지! 나는 여름 밤에 가끔 달구지 위에서 자며 그들의 비애와 기쁨을 생각했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서울 작은 형님이 집에 내려 왔다. 평양에 볼 일이 있어 잠깐 다니러 간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형님이 다시 돌아왔다. 그때 형님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이전과 같은 희망과 야심과 열의에 찬 모습이 형님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어딘지 불안해 했으며 초조한 표정으로 집안을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평양에 간 아주머니는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그리고 장차 조국의 큰 바위가 되라는 뜻에서 우리 집 족보 항렬에도 없는 태암(泰岩) 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했다. 그때 형님은 아주머니의 동생이 나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을 갖고 왔다. 그것은 모란봉 풍경이 들어 있는 작은 액자였으며 그 액자 모퉁이에는 자기의 사진이 붙어져 있었다. 액자 뒷면에는 <태오씨에게, 신애(信愛) 드림> 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신애는 그녀의 이름이다. 여자로부터 처음 받은 선물이었다.

나와 함께 자는 밤 잠자리에서 형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형님은 “이제는 내가 설 땅이 이 조국 안에서 없어져 가고 있구나…” 하기도 했으며 또, “이북 공산주의자들은 나와 같은 인도주의적인 혁명가들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거야” 하기도 했다.

북한도 이제는 제 나름대로의 정치 체제가 확립되어 가고 있었고 형님과 같은 이상주의자들은 이용만 당하고 후에 냉혹한 숙청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형님은 남한의 정치 풍토를 싫어했다.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집권자들은 자기들만의 권력 유지와 확장을 위해 본연의 정치 이념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고 형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고 남북한의 정치인들한테서 진정한 애국심이나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미 찾아 보기 힘들어졌다고 형님은 한탄했다. 그래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기가 서서 일해야 할 땅이 이 조국 안에서 없어져 간다는 것이었다. 형님은 몹시 불안해 했다.

정치고 혁명이고 다 집어치우고 나와 함께 집에서 농사나 짓자고 제의했으나 형님은 며칠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 형님은 이미 관련된 정치에서의 발뺌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또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했다.

그 해 첫눈이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고 생각된다. 오후 2시 개성시에 도착하는 기차편으로 갈테니 달구지를 갖고 자기를 마중 나오라는 형님의  편지를 받고 나는 개성으로 갔다. 나무를 일찍 팔고 개성 역전에서 형님을 기다렸다. 무엇 때문에 달구지를 끌고 개성까지 와 달라고 했을까 퍽 불안했다. 지난 날 형님의 불안해 하던 모습이 떠 올랐다. 그러나 아마도 정치자금을 급히 받으러 오겠지 생각하고 돈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달구지를 끌고 다니며 번 돈을 형님의 정치 비용으로 주고 있었다.

아, 그러나 기차에서 내려오는 형님의 모습은… 매맞아 다 죽다가 겨우 살아난 사람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야윈 몸에 얼굴은 시퍼렇게 부어 있었고 군데 군데 검은 멍이 들어 있었다. 두 팔은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걸어오는 두 다리는 휘청휘청 중심을 잃어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니 형님, 이게 웬 일입니까?”

나는 달려가 형님을 안았다.

“고맙다, 태오야. 내가 예상하던 일을 끝내 당했을 뿐이다. 어서 집으로 가자.” 하시면 형님은 멋 적은 듯한 쓸쓸한 웃음을 고통스럽게 지어 보였다.

나는 달구지에 가마니를 두툼하게 깔고 그 위에 형님을 눕혔다. 그리고 가마니 두 장을 튿어 이불처럼 형님의 몸을 덮어 눈과 추위를 막아 주었다. 자갈길에 달구지는 여느 때 없이 더 심하게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형님은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냈다. 좋은 길을 골라 달구지를 몰아도 흔들리는 달구지에 형님은 고통스러워했다. 길이 좋아져 달구지의 흔들림이 조용해지면 형님은 간간이 말했다.

“이것이 한국이라는 이 현실에서 혁명 운동하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결론이란다. 신애가 불쌍하다. 물론 그런 것이 다 정치의 한 방법이긴 하겠지만… 글쎄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어린 신애를 공작대 훈련을 시켜 사명을 띠어 서울로 파견하지 않았겠니. 그런데 한 배반자의 밀고로 그 애가 경찰에 붙들렸어. 모진 매질과 전기 고문까지 받고도 신애는 나와의 깊은 정치적 관계를 말하지 않았다. 그 애의 이름대로 신의가 있는 아이다. 그래서 나도 매질과 물 고문, 전기 고문까지 받았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신애는 지금쯤 어느 감옥에 있을 거야. 나를 살려 준 그 애가 정말 고맙다. 그러나 그 어린 몸에 그 지독한 고문을 받았으니 불쌍하기만 하구나… 경찰서 고문실에서 잠깐 신애를 만났었다. 그 때 경찰관들의 눈을 피해 너의 안부를 내게 묻더라.”

집에 도착했을 때 가족들의 놀람은 컸다. 그때에야 비로소 아버지께서 형님이 무슨 일을 하시다 그렇게 되었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하시는 것 같았다. 만사 태평이신 큰 형님은,

“못난 녀석 같으니, 그래 그 약한 몸을 갖고 남과 싸움을 했단 말이냐?” 하실 뿐 형님의 정치 활동을 눈치 채지 못하셨다.

동네 사람들도 형님의 정치 활동을 알 길 없었다. 그들은 형님이 서울 깡패들한테 얻어 맞아 병신이 되어 왔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해방 직후, 동네 사람들에게 정치성을 띤 이야기를 한두 번 했을 뿐 정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다음부터는 집에 가끔 내려와서도 정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나에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나도 형님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형님이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정치 운동을 다시금 싫어했다. <가죽잠바>의 트럭 사건 이후 얼마간 정치에 관심을 가졌었으나 이제는 관심의 뿌리마저 뽑아 비리기로 다짐했다. 다만 땅을 내 조국처럼 사랑하고 농사 일을 내 정치처럼 내 혁명 사업처럼 여기며 일하자고 결심했다.

 

나는 형님의 약값을 벌기 위해 부지런히 나무장사를 해야만 했다. 그 무렵 나는 1주일에 두 번씩 있는 38선 경비 당번을 마치면 달구지에 나무를 싣고 쉴 새 없이 개성을 드나들었다. 힘껏 땀 흘려 일하며 내 양심껏 살자는 것이 내 생활 신조였다. 내 노동의 공정한 대가로 얻은 돈을 갖고 양심껏 살자는 것이 어쩌면 남의 눈에는 바보로 보였을지 모른다.

 

나는 그 해 가을에 이북 산간 부락에서 나무를 많이 사 놓고 겨울을 기다렸다. 그 때 이북과 이남 간에 화폐 가치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북에서 나무 한 달구지에 4백 원  하는데 개성에서는 청 5백 환을 넘었다. 그 당시 38선 상에서는 남북 간에 대무역이 성행했으나 이북 사람들이 직접 개성으로 나무장사를 하러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북에서 나무를 사다가 싸 놓고 연중 내내 나무장사를 할 수 가 있었다.

어느 날 큰 눈이 내렸다. 50년 만의 대설(大雪)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개성으로 들어가는 타지방 산간 부락 나무장사들의 길이 막혀 버렸다. 나무 값은 하루 사이에 껑충 뛰어 올랐다. 나는 이 틈을 이용하여 사흘 계속해 왕복 80리 길을 다녔다. 그때 나는 돈이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이 돈을 위해 있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사람은 생활하기 위해 돈을 벌지만 돈 벌기 위해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날 농사일에 대한 내 사랑은 나로 하여금 코피를 쏟으며 땅에 쓰러지게까지 했으나 돈 버는 재미는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 미끄러운 산 고갯길을 사흘 동안 계속해서 왕복했어도 피곤한 줄 모르게 했다. “무리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와 형님을 뿌리치고 나흘째 개성으로 달구지를 몰았다. 그 동안 눈도 녹아 나흘째 날은 나무 시장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여러 곳에서 나무 장사꾼들이 모여 들었다. 이제까지만 해도 나무가 귀해 장사꾼들이 배짱을 부렸으나 오늘은 반대로 나무를 사는 사람들이 배짱을 부리고 좀처럼 사 주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나와 흥정을 했다. 그러나 나무가 좋으니 나쁘니 나무 값이 너무 비싸느니 트집만 잔뜩 늘어 놓고 시비하다가는 가 버리곤 했다. 그때 나는 물건의 가치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드물면 귀해지고 흔하면 천해진다는 것을 경험했다. 하기야 모든 물건이 대개의 경우 자기 고유한 객관적 가치를 갖고 있으나 아무리 흔하고 천한 것이라도 때와 용도에 따라 귀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사막에서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겐 만 근의 금 덩어리보다 물 한 모금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이제까지는 나무장사들이 그리 많지 않아 나무가 귀하고 또 비싼 값으로 잘 팔리었으나 오늘은 나무가 너무 흔해 싼 값으로도 잘 팔리지 않았다.

내 나무를 사 줄 손님을 초조히 기다리면서 사물의 가치 원칙을 생각하던 나는 우리들 인간 사회에도 이 가치 원칙을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들은 성인이나 영웅이나 위대한 학자나 또는 여러 면에 유명한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길이 길이 존경하며 기념탑이나 동상 등을 세워 준다. 흔해 빠진 평민은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다 어떻게 죽었는지를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의 구천이나 사회적 계급은 이렇게 드물고 흔한 것으로부터 구별된 것 같기도 하다.

어제까지 2천 환 하던 나무 한 달구지가 천8백 환에도 안 팔렸다. 겨울의 짧은 해는 벌써 석양 빛을 띠고 있어 돌아가야 할 먼 산길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초조했다. 그러자 깨끗한 옷차림을 한 개성 아주머니가 와서 천7백 환에 흥정이 되었다. 그분을 따라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그분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해가 이미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나무가 팔렸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단을 그 아주머니네 광에 깨끗이 쌓아 놓고 나무 값을 기다렸다. 그런데 내게 주는 돈은 천 7백 환이 아니라 천 2백 환이었다. 나는 아주머니가 돈을 잘 못 세었겠지 생각하고,

“아주머니, 천2백 환 입니다. 혹시 돈을 잘못 세시지 않으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래, 천2백 환이 어쨌단 말이냐?”

아주머니의 싸늘하고 날카로운 음성이 내 고막을 두드렸다.

“아니, 아주머니께서 천 7백 환에 나무를 사시지 않았습니까?”

“뭐라구? 천7백 환에 내가 흥정했다구? 아직 어린 것이 남을 그리 속이려 들다니… 고약한 사람 같으니…”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했다. 가슴 속에 흐르는 분노를 달래 놓고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사유를 따졌다.

“나이 어린 나무장수라고 그렇게 무시하지 마세요. 어제까지 2천 호나에 팔리던 것이 값이 갑자기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갈 길이 멀어 아주머니께 천7백 환에 팔았던 것입니다. 늘 나무를 사시는 아주머니께서 나무 값을 잘 알고 계실 텐데. 그래 요즈음 한 달구지에 천2백 환하는 나무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어린 것이 어른한테 생트집이야. 안 팔리는 나물 불쌍해서 천2백 호나에 산 준 것 만도 고마운 일일 텐데 천7백 환을 내 놓으라니 이런 고약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집 어른이 돌아오면 혼이 날 일을 공연히 생트집을 부리고 있어.”

나는 울고 싶었다. 눈 언저리가 화끈화끈 달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돈이 귀하고 돌아가야 할 40리 길이 무섭더라도, 돈 천2백 환이 말썽을 일으킨 이 불의(不義) 앞에 내 자신을 굽히기엔 아무리 무식하고 천한 나무장사라 한들 내 양심과 사나이로서의 긍지가 용서하지 않았다.

“아주머니, 나이 어린 제가 어찌 아주머니를 속이겠습니까? 나무 한 달구지 값이 천 2백 환이 되는 일은 금년 들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까 시장에서 나무 값을 흥정하실 때 아주머니께서 천6백 환에 이틀 전에 사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한 달구지에 천2백 환이라니 말도 되지 않습니다. 저는 어제 나무 한 달구지에 천9백50환에 팔았습니다”

“저녁 찬거리 보러 나가야 할 사람을 붙들고 왜 이 야단이야? 아침부터 기분이 좀 이상하더라니, 별꼴을 다 보는군 그래.”

이 불의와 굴욕에 대한 분격은 나에게 내 비참함을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착실한 농군이 되겠다던 내 이상이 무너지려는 위험을 느꼈고 또한 내 행복관도 커다란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국처럼 섬기자던 이 땅에 대한 내 사랑도 좋은 일이다. 형님이 몸을 바쳐 하고 있는 정치처럼 혁명 사업처럼 나는 농사 일을 하자던 나의 생활관이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이상이 옳고 나의 행복관도 아름다운 것이었으나, 사람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면 천해지고 남으로부터 이런 모욕과 불의를 당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마루에 나오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여학생처럼 나도 돈푼이나 있는 집에 태어났으면 지금쯤은 원대한 이상과 희망을 품고 중학교에서 책과 씨름하는 행복한 학생이었을 것은 사실이다. 오늘 내가 겪고 있는 이런 불의와 굴욕은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내 이상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이 돈 천2백 환! 좋다! 이 돈 천2백 환에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음을 나는 발견했다.

“아주머니 좋습니다. 이 돈 천2백 환을 도로 받으십시오. 돈도 귀합니다만 이 순간 나는 내 가슴 속에 사무치는, 돈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돈 천2백 환 속에 들어 있는 불의 앞에 내 자신을 굴복시키기보다는 차라리 이 나무 한 달구지를 성(성) 밖 들판에 풀어 놓고 불질러 버리고 말겠습니다.”

안 받는 돈을 아주머니 앞에 놓고 나는 나뭇단을 광에서 끌어내어 다시 달구지에 싣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은 내 태도에 아주머니는 기가 질린 듯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더니,

“철 없는 짓 하지 말고 동정하는 겸 천5백 환을 줄 테니 나무를 그냥 광에 넣어 둬” 하고 말했다.

그러나 천5백 환, 아니 천7백 환을 준다 해도 상한 내 마음을 고치지 못할 것이다. 일단 불질러 버리기로 한 마음이 변하기엔 이미 시간이 늦었다. 나를 조롱하고 모욕하며 또 유혹하고 있는 이 돈을 물리치고 승리하기 위해선 결단성 있게 이 나무를 불질러 버리는 길 밖엔 없었다.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라 울지 않으려 해도 눈물이 두 뺨을 흘러 내렸다. 그 무렵 지나가던 사람 둘이 하나 둘 가던 길을 멈추기 시작했고 그 아주머니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며 나를 욕하고 있었다. 그리고 협박도 했다.

모여든 몇 사람 중에 한두 명의 청년이 있었다. 그 중 험상스럽게 생긴 한 청년이

“임마, 까불지 말고 주는 돈이나 받아 가지고 빨리 집으로 꺼져!” 하며 끼어 들었다.

“여보, 남의 일에 섣불리 간섭했다가는 반갑잖은 화를 당하기 전에 집에 가서 당신 일이나 하시오.”

나는 그 청년에게 응수했다. 그리고 나는 묵묵히 내 일을 계속했다. 나무를 다 싣고 그 집을 떠날 때 점잖아 보이는 중년 신사 한 분이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자꾸,  “학생, 무슨 일인가? 학생,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다. 그때 나는 모든 것이 싫었고 그분의 말에 대답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남의 동정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남으로부터 동정을 받는 일이란 약자들의 일인 듯 생각되었고 동정이란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베풀어 주는 사치품처럼 생각되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인격과 인격이 대하는 일이면 모르되, 강자들의 이런 사치품이나 혹은 어쩌다 그 어떤 기회와 환경이 만들어 주는 동정을 나는 받고 싶지 않았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눈을 딱 감고 내가 결정한 바를 나는 실행하기로 했다. 그 신사 아저씨는 나를 보고

“젊은 사람이 고집이 상당히 세군 그래” 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분의 말씀 속에 어쩔 수 없는 친절이 들어 있어 얼어 붙었던 내 마음이 차츰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도 못했던 굴욕과 곤경 속에서 뜻하지 않게 따뜻한 인정을 대하게 되니 갑자기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사정 이야기를 간단히 들려 드렸다.

“학생, 집안 살림을 생각해서라도 나무를 불태워 버리는 그런 무모한 짓은 말게, 우리 집으로 가세.”

그분은 먼지가 뽀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나를 달랬다. 그분의 어진 말씀과 모습에 감동되어 나는 그분의 뒤를 따라갔다. 곧 그분의 집에 도착하자 그분은 자기 식구들을 모두 불러 내 나뭇단을 운반시켰고 자기 스스로도 일을 도왔다. 그리고서 나에게 따뜻한 세숫물을 떠다가 주게 했고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어서 밥을 한 상 차려 주기까지 했다. 나는 울고 싶었지만 뜨거워 오는 눈시울을 냉정한 마음으로 억눌렀다. 그리고 이분에게 나무 한 달구지를 그냥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갈 길이 멀어 차려 준 밥상을 사양하고 정중히 인사한 뒤 그 집을 나왔다. 사실은 갈 길이 멀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눈물을 보이기가 부끄러워 밥상을 물리치고 자리를 일어섰던 것이다.

그분은 나무 값이라고 말하며 나에게 돈 한 뭉치를 쥐어 주었다. 세어 보지 말라는 돈을 세어 보니 천8백 환이었다. 나는 놀랐다.

“선생님, 제게 베풀어 주신 따뜻한 친절 정말로 감사 드립니다. 선생님의 온정에 감복되어 나무 한 달구지를 선생님께 선사하려 했으나 주시는 돈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 돈을 다 받을 수는 없고 천2백 환만 받겠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6백 환을 돌려 주었다.

“아, 학생,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지 말고 그대로 받아 빨리 집으로 가게. 부모님들이 늦은 밤길이라 무척 염려하고 계실 텐데. 그리고 이 다음부터 혹시 나무가 잘 안 팔려 저녁 늦게까지 있게 되면 서슴지 말고 우리 집에 오게나. 언제라도 학생의 나무를 팔아 주도록 집 사람에게 말해 둠세.”

나는 돈을 안주머니에 넣고 다시 한 번 정중히 인사한 후 그 집을 떠났다. 해는 이미 서산 너머로 사라졌고 어둠의 장막이 오종오종 모여 있는 개성 집들의 추녀 끝에 깃들기 시작했다. 시장하기도 하려니와 40리 밤 산길이 갑자기 무섭기도 했다. 또 아무에게라도 반항하고 싶은 자포자기의 감정이 내 마음을 휩쓸어 나는 길가에 있는 <개성 비빔밥>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 집에 들어갔다. 우선 비빔밥과 간단한 안주에다 따끈한 소주를 반 되 주문했다. 배고픈 김이라 입맛은 여전히 좋았다. 밥 한 그릇에 소주 반 되를 단숨에 해 치우고 밤 길을 떠났다. 개성시를 나와 인적 없는 농촌 산길을 들어설 무렵 나는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술이란 기막히게 이상한 놈이다. 슬픈 사람에겐 기쁨을, 외로운 사람에겐 위로를, 생활에 고달픈 사람에겐 용기를, 가난한 살림에 쪼들려 내일의 희망도 웃음도 잊은 사람에겐 희망과 웃음을 주며 기쁜 사람에게 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이 술이란 것이다. 술은 돈 있는 사람들과 즐거운 경사를 치르는 사람들만의 전용물은 아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 천한 사람, 돈 많은 사람, 가난한 사람, 즐거운 사람, 슬픈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이에게 공통된 기쁨과 힘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술의 차별 없는 너그러움을 나는 생전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동네 어떤 사람은 술을 곤드레 만드레가 되도록 마시고 싸움을 한다든지, 가난한 살림에 술만 마신다고 앙앙대는 자기 아내를 때려 준다든지 또는 가구를 파괴하는 등 사람답지 못한 깃을 하는 것을 몇 번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굴욕과 멸시를 받은 내 마음의 슬픔과 외로움을 다정하게 달래 주는 이 술, 인적 없는 깊은 밤, 도둑놈이 아니면 사나운 짐승들이 가끔 나온다는 이 산길을 가는 나에게 온 세상이 나를 거슬러 덤벼 와도 능히 그를 쳐 이길 듯한 용기를 준 이 술을 나는 이전처럼 가볍게 한 마디로 단죄(斷罪)할 수는 없었다.

멀리 초가집 창가에 비친 불빛은 술 취한 내 발걸음의 율동에 따라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딸랑딸랑 황소 놈의 목에 달린 방울 소리는 벌거벗은 나뭇가지 사이를 달음질치는 바람을 타고 적막한 산골짜기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나는 외로움도 무서움도 완전히 잊었고 어느새 내 입에선 노래소리가 쉴 새 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늦은 밤길을 염려하여 멀리까지 마중 나온 형님과 함께 집에 돌아왔을 때는 동네 사람들은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을 무렵이었다. 아주머니께서 떠다 주는 물에 세수를 대강 하고 따뜻한 온돌 방에 앉아 따뜻한 저녁상을 받았다. 그때 겨울 찬 바람에 얼었던 술기운이 일시에 녹아 밥상 위에 놓여 있는 반찬 그릇과 방안의 여러 가구들이 이리 저리 빙빙 돌고 있는 듯했다. 혀가 꼬부라져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나는 비틀거리며 내 방으로 들어가 아무 말 없이 잠자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차츰차츰 농촌 생활에 대한 애착을 잃기 시작했다. 일생을 농군으로 지낸다 하더라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 갈 기회를 찾고 있었다.

 

 

 

 

제4장

신병생활(新兵生活)의 맛

 

서울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결심까지 했으나 좀처럼 고향을 떠날 수는 없었다. 봄이 되자 밭을 갈고 곡식을 심고 돋아나는 새싹을 볼 때 고향을 떠나자던 나의 결심은 식어져 갔다. 이 밭과 이 어린 곡식의 생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난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배신 행위처럼 느껴졌다.

 

그 무렵 38선 상에서는 남북한 경비대 간에 무장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어느 날 밤, 우리는 이북 경비대의 야간 기습을 받았다. 개성 경찰서에서는 기동 경찰대가 동원되었고 토성 주둔하고 있던 육군도 출동하였다. 38선 상에 있는 고성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밤새 총질을 했다. 그날 밤의 인명 피해는 두 명의 부상자 뿐으로 다른 큰 피해는 없었다. 고성 너머 저쪽 북한 경비대 편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 속에는 리노우에의 그 억센 목소리가 섞여 있는 듯했다.

이것이 내가 내 일생 처음으로 겪은 일종의 전투였다.

 

이러한 사건이 종종 있게 되자 나는 고향을 떠나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땅에 대한 내 애착도, 농사 일에 대한 나의 집념도 이제는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못했다. 고향을 떠나자는 나의 새로운 결심은 남북한 경비대 간에 있었던 무장 충돌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충돌을 뜻 없는 일종의 불장난이며 또한 우리 민족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러한 뜻 없는 싸움에서 죽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속된 말처럼 “개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버젓한 전투도 아닌 사소한 총질의 희생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일종의 내 자신에 대한 모욕감도 느꼈다. 죽기 전에 우리 민족과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고 싶었고, 설사 젊어서 죽더라도 버젓이 당당하게 죽을 수 있는 곳에서 죽겠다고 했다.

 

그 해, 그러니까 1948년 6월 중순,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왔다. 나무장사하여 번 돈의 일부만 갖고 나머지는 아버지와 두 형님에게 드렸다. 돈을 그런대로 충분히 갖고 있었으나 총 사람의 갑작스런 서울 생활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방 하나를 얻었다. 생활비를 절약하는 셈 치고 자취생활을 하기로 했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50세 줄에 들어선 인상 좋은 분이었고 어느 예수교회의 권사님이라고 했다. 마음씨도 착한 분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갖고 있던 돈의 일부를 비상금으로 맡겨 놓았다. 그의 큰 딸은 모 대학 2학년인 대학생이었고 밑으로 두 아들은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각각 다니고 있었다. 주인집 아저씨는 해방 후 돌아가셨다 했다. 나 외에도 회사원 한 명과 대학생 두 명이 하숙하고 있었다.

내 살림도구란, 자그마한 남비 한 개와 식칼과 칼도마, 수저, 양념 간장 그릇과 컵이 전 재산이었다. 아침, 저녁은 집에서 해 먹고 점심 때는 시내에서 15환짜리 우동을 사 먹었다. 밥도 간단한 것이었다. 남비 밥이 다 되면 계란 한 개를 깨어 더운 밥에 비빈 후 김 석 장으로 김밥 세 뭉치를 만들어 양념 간장에 찍어 먹는 것이 나의 일상적인 조반과 저녁식사였다. 때로는 아주머니의 호의로 김치와 고기국을 얻어 먹기도 했다. 주인 아저씨도 옛날에 일본에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며 고생했다 한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이라고 그 아주머니는 나를 격려해 주었다.

낮에는 신문팔이도 하고 닥치는 대로 막노동도 했다. 때로는 서울역에 나가 리어커로 짐 나르는 아저씨를 도와 푼돈을 벌기도 했다. 그리고 밤에는 학원에 나가 대학입시 준비를 했다. 가끔 주인집 딸이 내 공부를 도와 주는 것이 그 당시 단 하나의 따스한 인정이었고 또 유일한 기쁨이기도 했다.

그녀의 친절에 보답하는 뜻으로 나는 그녀의 가족과 함께 여러 번 교회에 나가 예배 본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천주교 신자가 예수교 교회에 나가 예배 보는 것은 큰 죄로 여겨졌으나 나는 별로 죄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나로 하여금 예수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했다. 천주교와 예수교의 교리를 비교하며 장황하게 설명도 했고 천주교회를 비난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중세기 천주교의 고위층 지도자들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교황청을 욕하기도 했다. 그때 그녀가 말하는 부패상을 들으며 나 자신의 천주교 신자임을 얼마간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부패된 사람들이 이끌어 온 이 천주교회가 쓰러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계속 성장해 왔다는 사실에는 생각해 볼 여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전 처음으로 우리 교회의 교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책도 몇 권 사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이었다.

 

그 해 9월 초에 작은 형님이 서울에 올라왔다. 이젠 건강도 완전히 회복되었고 지난날 받은 고문의 상처도 없었다. 고향에 있는 경찰서에서 자기를 감시하는 눈치가 보여 피해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이 생활했다. 그때 형님은 정치운동을 포기한 듯했다. 이제는 정말 한국이라는 조국 땅이 싫어졌다는 것이다. 아직 젊을 때에 좀 더 공부하고 기회 있을 때 조국을 위해 다시 일하겠다고 말했다. 조국에 남아 있는 한, 남과 북 어느 한 쪽에 정치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기 때문에 자기는 일본으로 밀항하여 거기서 공부하겠다는 것이었다.

형님은 서울에 오자 신애의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신애는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개성에 있는 형무소에서 감화교육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 둘은 신애를 방문했다.

그 당시 내가 갖고 있던 38선 경비대 증명서를 보이자 면회는 쉽게 허락되었다. 물론 그때 나는 이미 38선 경비대를 떠나 있었으나 그 증명서만은 갖고 다녔다. 우리 둘은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고 곧 신애가 들어왔다. 간수도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녀는 푸른 죄수복을 입었고 야윈 몸매였으나 그녀의 얼굴은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성숙한 사람의 그런 모습이었다. 신애는 어른스러워 보였다. 뜻 박의 방문이어서 한참 동안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때 형님이,

“신애야, 우리가 왔다. 얼마나 고생스러우냐?”

하고 말하며 그녀를 두 팔에 안았다. 어깨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형부,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형부가 언젠가는 나를 찾아 줄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신애가 어깨를 들먹이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일찍 너를 찾아왔어야만 되는데…. 늦어서 미안하다. 내가 너를 잊을 수 있겠니.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인데”

형님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각오했어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형부는 우리가 시작한 혁명 사업을 위해 똑 살아 일하셔야 할 분이라고 생각했지요.”

우리 셋은 자리에 앉았다. 그때 나는 신애의 왼 손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간간히 떨리고 있는 것을 즉시 목격했다. 그녀는 나의 두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눈치 채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오씨는 나의 이 떨고 있는 왼손을 보고 계시는군요. 고문 받고 나서 이 왼손이 병신이 됐어요. 그러나 심하지는 않아요. 나는 이것을 혁명 전선에서 받은 하나의 훈장이라고 생각해요. 이번에 당한 고통을 통해 나는 정말로 우리가 지향한 혁명을 완수할 때까지 싸워야겠다는 결의를 굳혔어요. 이 떨고 있는 왼손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에게 혁명에 대한 사명을 일깨워 줄 거예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주로 형님과 신애가 말을 주고 받았다. 우리는 사 가지고 온 과자와 과일과 떡을 내 놓으며 신애에게 권했다. 그녀는 사과 하나만 먹고는 떡을 호주머니 속에 넣으며 말했다.

“형부, 이 떡 내가 갖고 가도 되죠. 감방에 나와 같은 동지가 있어요. 그들과 함께 나눠 먹고 싶어요.”

“그래 마음대로 하려무나.”

형님이 말했다.

30분 간의 면회 시간은 금방 끝났다. 간수가 들어와 신애를 데리고 가려 했다. 우리는 그 간수에게 남은 과자와 과일을 주었다. 신애의 불룩해진 주머니 속의 물건이 떡임을 확인하자 그 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신애의 왼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떨고 있는 그녀의 왼손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신애의 이 왼손에서 나는 우리 민족의 비극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내 두 손 안으로 차가왔던 그녀의 손이 따스해짐을 느끼며 나는 기도하듯 마음 속으로 말했다.

“신애씨, 정치라는 것은 이처럼 비정하고 냉혹해도 우리의 마음만은 따뜻하게 보존합시다. 설사 신애씨가 그 혁명 사업을 떠나 살 수 없다 해도 미움 없는 따뜻한 마음만은 지켜 갑시다. 지금 우리 둘의 손 안에 흐르는 이러한 따스함 말입니다…”

그때 그녀도 이러한 내 마음을 알아 차렸는지,

“태오씨의 손은 따스하군요. 떨고 있는 이 손, 슬퍼하지 마세요. 고마와요. 내 손의 신경을 통하여 전해오는 태오씨의 다감한 인정 잊지 않겠어요.”

신애는 간수의 손에 끌려 나갔다. 그때 형님과 나의 두 눈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얼마 후 철창이 닫히는 쇳소리가 들려 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울 생활에 차츰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독학이나 고학이란 말은 젊은 내 마음을 흥분시켰으나 세상 일은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몸도 쇠약했다. 이러던 어느 날 나는 <해군 신병 모집> 광고를 신문에서 읽었다. 해군! 단번에 내 구미가 당겼다. 생활에 어느 정도 지쳐 있었고 살맛을 잃어 가던 나에게 바다는 유혹의 손을 펴 왔다.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바다 사람의 생활이란 어딘지 모르게 모험적이고 동시에 낭만적이고 시적인 듯 느껴졌다. 그리고 해군이 되면 외국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상의 혼잡 속에 대립만 커지고 애국심의 범람 속에 암살만 성행되며 권력의 그늘 아래 부정부패만 창궐하는 이 조국땅을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마음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까짓 것 안 되는 공부에 공연히 힘들일 것 없이 젊었을 때 여행이나 마음껏 하고 실컷 놀자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방랑생활의 첫 발을 들여 놓은 곳이 <진해 해군 신병 훈련소>였다.

 

1949년 1월 초에 서울 해군 본부에서 2일 간 시험을 보았다. 다행히 합격이 되었다. 1월 15일 나는 합격자 백여 명과 함께 진해에 내려갔고 같은 차로 형님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일본으로 밀항할 기회를 찾겠다고 했다.

1월 17일 여학생복 같은 예쁜 해군복에 몸을 담고 3년 간 군에 복무할 것을 선서했다. 그때 우리는 해군 12기 신병들이었다. 그 후 예상 외로 춥고 배고프고 얻어맞는 졸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입대식 전날 저녁이었다. 나는 교관실 임시 당번이었다. 저녁시사 후 교관 휴게실에서 청소하고 있었다. 당시 해군 간부급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이 많았다. 처음 들어 보는 뚝뚝한 경상도 말씨와 어감이 좀 이상하게 들리는 전라도 말에 나는 처음에 속으로 웃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 끈마다 <요>자를 늘 붙이는 개성 말씨가 그들 교관들에게 좀 간사스럽게 들렸는지 모른다. 교환 휴게실을 청소하며 교관들과 얘기하고 있으려니까 저쪽에서 신문을 뒤적거리던 한 교관이 나를 “이 새끼야” 하고 불렀다.

“이 새끼, 너 고향이 어딘가?”

“개성이에요.”

나는 애교 있게 말하며 상냥하게 웃었다.

“이 새끼 이리 왓!”

화난 표정을 하며 그는 험상궂게 말했다.

“왜 그러세요, 교관님?”

“왜라니, 이 새끼 봐라? 이 새끼 오라면 오는 것이얏!”

청소하던 손을 멈추고 겁먹은 얼굴로 그 앞에 갔을 때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뺨을 후려 갈겼다. 그때 눈에서는 불이 나는 듯했으며 수만 개의 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 교관에게 항의 아닌 항의를 했다.

“교관님, 왜 나를 때리세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이 새기야, 황소 같은 사내 새끼가 기생년처럼 <요><요>가 뭣이얏!”

“뭐, 내가 기생년이라고요?”

“또 <요>야, 이 새끼.”

그는 또 내 뺨을 두 대나 후려 갈겼다.

“아니, 이유 없이 나를 왜 자꾸 때리세요?”

나는 불쑥 또 항의했다.

“또 <요>냐. 이 새끼야 고만 닥쳐! 이젠 오장육부가 간질간질해져서 구역질 날 정도다. 이 새끼야 들어 보라. 사내 새끼가 기생년처럼 말끝마다 <요><요> 하니깐 그런단 말이다. 이 새끼 이젠 이유를 알겠나?”

그때야 비로소 나는 뺨 맞는 이유를 알았다. 엄격히 말해서 아무리 군대라 해도 고향 말을 쓴다고 매맞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나 나는 정당한 이유가 통하지 않는 것이 군대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대식을 마친 그날 밤 11시경이었다. 캄캄하던 침실 안에 갑자기 전등이 켜지더니 요란한 호각소리와 함께 “총 기상! 완전 정복 차림으로 충원 집합!” 마치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무시무시한 호령 소리가 들렸다. 선임 교관을 위시하여 다섯 명의 교반장(敎班長)과 조교들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사태가 삼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나는 날름 일어나 정복을 차려 입고 뛰어나와 첫 자리에 섰다. (당시 5백 명의 우리들은 5개 분대(分隊)로 편성되었고 1개 분대에는 백 명의 신병이 있었다. 그리고 1개 분대엔느 20 명으로 편성된 5개 교반(敎班)이 있었다.) 총원 집합하는데 무려 5분이 넘게 걸렸을 것이다.

번호를 붙여 백 명 중 10번까지는 편안히 앉게 하고 11번부터 백번 끝까지의 신병은 소위 말하는 “해군 빼터” 다섯 대씩 엉덩이에 맞았다. 보기조차 무서운 일이었다. 야구 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다섯 대의 빼터를 얻어 맞고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놓고 또 때렸다. 또 넘어지면 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 때렸다. 아마도 우리의 부모님들이 이 광경을 보시면 기절을 하셨을 것이다. 어떤 신병은 매맞기 전에 무릎을 꿇고 교반장의 다리를 잡으며, “형님 살려 주세요” 하며 애원했다. “이 새끼, 군대에서 형님이 어디 있어” 말하며 교반장은 그를 사정 없이 때렸다. 다행히 나는 매를 맞지 않았으나 내 엉덩이가 부풀어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빼터가 끝나자 <찬 바람>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그 선임 교관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했다.

“제군들은 오늘 오후까지 사회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제군들은 3년 간의 군복무를 엄숙히 맹세한 대한민국의 영예로운 해군이다. 그러나 제군들의 정신은 아직도 썩어 빠진 사회인의 정신이므로 훌륭한 해군 정신으로 개조시키기 위해 해군 신병 교육대 전통으로 내려오는 <입대 기념 빼터>라는 적절한 치료법을 제군들에게 베풀어 줄 것이다. 선두에 선 놈으로부터 시작하여 한 놈씩 나왓.”

그 선임 교관가 다섯 명의 교반장 앞으로 우리는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나갔다. 우리는 <인간 정신 개조>를 한다는 그 다섯 대의 빼터를 기념물처럼 받았다.

다섯 대의 빼터를 엉덩이에 맞으니 엉덩이 살은 갈기갈기 찢어져 없어진 것 같았다. 두 눈알은 뛰쳐 나온 듯 앞이 캄캄했고 온 몸에서는 불이 붙고 있는 듯한 확확 달아 오르고 있었다. 이마와 등골에서는 진땀이 방울방울 굴러 떨어졌다. 어찌나 무서웠던지 눈물마저 놀라 달아난 듯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때가 정월이라 감기에 걸려 맹맹하게 얼어 붙었던 코는 녹아서 콧물이 줄줄 흘렀다.

기념 빼터가 끝나자 선임 교관은 우리에게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명령했다. 얻어 맞아 부풀어 오른 엉덩이를 구둣발 뒤꿈치에 얹여 놓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엉덩이를 치켜들고 엉거주춤하고 앉아 있었다. 그랬더니,

“이놈들 여기가 변소간인 줄 아는가? 똥 싸는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앗!”

선임교관의 호령이 내렸다. 이 호령과 함께 이번에는 빼터가 어깨를 내리치며 지나갔다. 우리는 엉덩이의 아픔을 잊고 털썩 주저 앉았다.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으라는 명령이 또 내렸다. 우리는 하라는 대로 했다. 이미 우리는 하나의 꼭둑각시처럼, 또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선임 교관은 또 말했다.

“제군들은 선서식을 마친 군인이라 하지만 군들은 아직 군번을 받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다. 우리 훈련소의 일상생활은 빼터와 함께 해가 뜨고 빼터와 함께 해가 진다. 이러한 생활에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솔직히 손을 들라. 훈련이 시작하기 전에 귀가시켜 주겠다. 잘 생각해 보라. 다음에 후회하면 이미 늦는 법이다. 그럼, 생각을 달리한 놈은 손을 들라.”

꿈엔들 이 빼터의 벼락을 생각해 보았을소냐… 나도 손 들고 집에 다시 돌아갈까 했으나 남자가 일단 선서한 것을 취소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을 고쳤다. 남들이 참아 왔고 참아 받은 이 생활을 난들 못 참아 받겠느냐고 생각했다.

“이젠 됐다. 다들 눈을 뜨고 고개를 들라.”

이번에는 선임 교관이 부드럽게 말했다.

눈을 떠 주위를 살펴 보니 약 20 명이 손을 들고 있었다.

“손 들은 아저씨들 앞으로 나오시죠. 고향에 보내 드릴 준비를 해 드리겠습니다. 어서 나오시죠.”

그들은 앞으로 나와 섰다. 선임 교관은 그들에게 말했다.

“사내놈들이 일단 선서를 했으면 어디까지나 이 신성한 선서를 이행할 것이지, 그래 이 빼터 열 대에 겁을 집어먹고 귀가시켜 달라는 말인가? 이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조국 통일이라는 신성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정신이 썩어 빠진 놈들, 한 놈씩 나왓!”

그들은 또 다섯 대의 빼터를 얻어 맞았다. 그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앉게 한 다음 선임 교관은 말했다.

“아픈가?”

“안 아픕니다.”

우리는 마치 합창이나 한 듯 일제히 소리 맞춰 대답했다. 안 아프기는 왜 안 아파. 그러나 아프다는 이 엄연한 진리가 통할 수 없는 훈련소였다.

“집에 가고 싶은가?”

선임 교관의 그 찬바람 소리가 울렸다.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군들은 이러한 신병교육 생활에 만족하겠는가?”

“넷, 만족하겠습니다.”

“됐다. 제군들은 과연 대한민국의 훌륭한 해군이 될 소질을 갖고 있는 씩씩한 남아들이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자. 피곤할 테니까 1분 내에 총원 취침이다. 알았나?”

“넷.”

“총원 취침!”

이 호령과 함께 우리는 서로 떠밀며 넘어진 친구의 등을 밟으며 잠자리로 뛰어가 머리맡에 정복을 벗어 개어 놓고 자리에 들어갔다. 과연 인간 정신을 개조한다는 빼터의 효력은 백점 만점의 효과를 냈다. 불과 한 시간 전가지만 해도 굼벵이들처럼 느릿느릿하던 우리들은 비호(飛虎)같은 날랜 동작을 하게 되었다.

 

진해는 한국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보다 비교적 덜 추웠으나 1, 2월의 진해의 추위란 그래도 대단한 것이었다. 신병은 약 5백 명, 그 당시 우리들이 있던 병사는 과거에 일본 해군의 병사였다. 넓은 방에서 백여 명이 함께 기식(寄食)을 했으나 불 하나 없는 방은 춥기만 했다. 훈련을 시작한지 며칠 만에 손등이 터지기 시작했다. 당시는 보급 사정이 나빠 세 명이 한 이불 속에서 잤다. 가운데서 자는 사람은 다행히 따뜻한 잠을 잘 수 있었으나 양 쪽 가장자리에서 자는 사람은 팔 하나가 이불 밖으로 나오게 되어 추워 고단한 밤잠이나마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교대로 가운데 잠자리를 차지하기로 했다.  당시 신병 교육대 간부 하사관이나 장교들은 거의 전부가 일본 해군 출신들이라 신병 교육대 훈련 방식도 일본식 그대로였다. 새벽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단 몇 분도 마음 놓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놀 수 없는 숨가쁜 신병생활이었다. 그리고 세 끼 밥을 먹어도 배고프고 꿈 속에서라도 밥이나 실컷 먹어 봤으면 하고 생각했다.

어느 날 우리 중에 한 사람이 교반장 하사관이 먹다 남긴 밥을 몰래 손으로 집어 먹다가 불행히도 들켜 호되게 빼터로 얻어 맞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 하사관이,

“아무리 배고파도 네 인격을 존중해. 남이 먹다 남긴 밥을 먹다니, 개나 돼지가 하는 것 아냐?” 하고 말했다.

자기도 한 때는 신병으로서 이와 같은 경험을 갖고 있으련만… 만일 그가 현재 우리들 신병의 입장으로 되돌아 온다면, 그는 과연 배고픔 앞에 자기의 인격을 존중해 눈 앞에 있는 밥에 손을 안 대려는지… 자기 스스로가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일을 소위 윗사람들은 흔히 자기 아래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배고픈 사람에겐 인격도 체면도 교양도 없어지는 법이다. 자기 인격과 체면과 교양을 존중할 때 인간은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이라면, 배고픈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인격이나 체면이나 교양이란 배고플 때 눈앞에 있는 밥 한 주먹을 집어 먹지 않는데 서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손 앞의 돈을 훔친다든지 배고픈 사람이 자기 눈앞의 음식을 집어 먹는다는 것은 칭찬할 일이 못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가져야 하고 먹어야 할 것을 갖고 있지 못하고 먹지 못할 때 나타나는 인간의 일시적 약점이지, 그것이 결코 인간의 인격이나 교양 전체를 죽이는 것은 아니다. 남을 배 곯리고 자기가 남긴 밥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고 그를 때리는 사람의 인격이나 교양과, 배고픔을 참지 못해 남이 남긴 밥을 손으로 집어 먹은 사람의 인격 중 어느 쪽이 더 인격적인가를 평하라면 나는 서슴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그때 생각했다. 자기 스스로가 참아 받을 수 없는 무리한 일을 남에게 요구하는 사람의 인격보다 나는 윗사람이 요구한 무리한 일을 힘껏 하다가 쓰러진 사람의 편에 항상 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 면회를 이용하여 우리 신병 중의 많은 사람들이 떡이나 돈을 받곤 했다. 떡 보따리를 받으면 그것을 창고 구석이나 사람이 안 드나드는 곳에 감춰 두었다가 기회 있는 대로 한 덩어리씩 얼어 굳어진 떡을 꺼내다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남 몰래 혼자 조용히 먹을 수 있는 적당한 곳이 없어 어떤 사람은 변소간에서 떡을 먹기도 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주먹만한 떡 덩어리를 주며 변소에 가서 먹으라고 장소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하라는 대로 했다. 변소라고 하지만 해방 후 미군들이 살던 곳이라 미국식 변소여서 과히 심한 냄새는 자니 않았다. 내 생전에 이처럼 맛 좋은 떡을 먹어 본 일은 없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돈을 가져다 취사장 사병에게 외출 용돈을 얼마씩 주며 그 대신에 누룽지를 매일 얼마큼씩 얻어다가 역시 변소간에 들어가 먹는다고 했다. 이처럼 변소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빼터와 함께 해가 뜨고 빼터와 함께 해가 진다>는 해군 신병생활은 계속되었다. 당시 교육 원칙에 따라 신병들이나 일반 사병을 구타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격으로 빼터 기합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자기 잘못으로 윗사람한테 꾸지람을 듣는다든가 얻어맞는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나, 단체 생활이란 이름 아래 남의 잘못에 대한 결과적 책임을 우리들은 나눠 받아야만 했다. 해군이란 함정(艦艇)을 타는 해상생활이 주가 되어 있어 만일의 경우 함정이 해상에서 파선되면 다 같이 죽든가 또는 다 같이 살든가 해야 하기 때문에 단체 생활에 대한 가족적 분위기 조성과 특히 연대책임(連帶責任)의식을 상당히 중요시했다. 그래서 남의 잘못에서 오는 벌을 같이 나눠 받아야만 했다. 그때 나는 이 연대책임 의식에 깊은 관심과 이상한 매력까지 느끼고 있었다. 남의 잘못을 나눠 책임지는 이 군인 사회, 그것은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미사 때마다 고백하는 <내 탓이요, 내 탓이요>의 종교 감정과 통하는 것이었다. 남의 잘못을 내 탓처럼 여기고, 실수하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우리 연약한 인간끼리 서로 이해하고 돕고 사랑하며 살자는 이 <내 탓이요>의 신비를 이 빼터 속에서 나는 발견했던 것이다. 군인생활에는 개인 행동이나 이기적 행동은 절대 금물이었다.

<같이 살다 같이 죽자!>

라는 것이 생활 표어였다. 그런데 같이 살고 같이 죽자고 하면서도 서울이나 큰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같은 신병이라 해도 고생을 덜 하는 것 같았다. 반면에 시골에서 온 양같이 순한 사람들은 같은 신병의 공갈이나 협박에 눌려 남의 일까지 해 주면서도 남의 잘못으로 해서 같이 기합 받고 매맞는 일에 대해선 분개할 일이었다. 다행히 나는 몸집이 크고 고향을 개성이라고 했더니 개성 깍정이는 만만치 않다고 서울 깡패 출신마저 나를 협박하지는 않았다.

같은 환경 속에 같은 운명을 걸고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동정과 이해와 사랑이 있어야만 옳은 일일 텐데 어떤 경우에는 번번이 그렇지 못했다. 남보다 약지 못하고 주먹 힘이 약하면 자기보다 약고 주먹 힘이 강한 사람한테 사주(使嗾)를 당하는 것이 인류 역사의 법칙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여러분으로부터 봉사를 받으러 이 세상에 오지 않고 여러분들에게 봉사하러 이 세상에 왔노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혜나 지위나 권리나 힘이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있으며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질까 하고 생각했다.

군대 내에서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남의 속옷이나 양말들을 몰래 훔쳐다가 신병 교육대 안의 건물 수리공사를 하러 온 외부 작업원들에게 돈 몇 푼 아니면 빵 몇 개와 바꿔 먹는 사람들을 보았다. 남의 것을 훔쳐다가 팔아서 빵이나 누룽지를 사 먹은 사람은 잠시 배가 부를지 모르겠으나 속옷이나 양말들을 도둑맞은 사람들은 주말 피복 검사 때에 빼터 몇 개의 달갑지 않은 선물을 엉덩이에 맞아야만 했다. 매주 토요일 피복 검사 때마다 옷도둑 소송이 생겼다.

<군인은 요령(要領)을 본분으로 한다.>

이 말은 신병 교육대에 입대한 이래 교관으로부터 여러 번 들은 말이다. 당시 나는 이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했다. 이 말의 뜻을 자세히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을 때 교관은,

“무슨 일에든지 적당히 요령껏 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적당히 요령껏>이라는 말처럼 애매한 말이 또 있을까?

어느 금요일 밤, 나는 속옷 한 벌과 양말 두 켤레와 그 외 간단한 옷가지 몇 점을 도둑 맞았다. 내일 오후에 있을 피복 검사를 생각하니 우선 얻어 맞을 빼터가 무서웠고 벌써부터 엉덩이가 아파 오는 듯했다. 도둑맞은 옷들을 찾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빼터를 얻어 맞을까, 남의 옷을 도둑질할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만일 내가 남의 옷가지를 훔친다면 도둑맞은 그 사람이 내 대신 빼터를 얻어 맞아야 한다.

“차라리 내가 빼터를 맞자.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몇 시간 후에 빼터 얻어 맞을 생각을 하니 아침 밥마저 맛이 없어졌다. 그 때 나는 별안간 <군인은 요령을 본분으로 한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남의 옷가지를 훔치자.”

나는 옷을 도둑맞아도 빼터의 희생이 되지 않는 사람의 옷가지를 훔치기로 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나는 담장 교과주임(敎科主任) 하사관을 찾아가 몸이 몹시 피곤하니 오전 중 부대 내에서 쉴 것을 요구했다. 그분은 개인적으로 나와 친한 분이어서 웃으며,

“태오, 자네도 꾀병을 부릴 줄 아나?” 하며 실내에 남아 실내 감시나 하며 쉬라고 허락해 주었다. 교관 이하 전원이 훈련장에 나가 있는 사이에 나는 교관실에 들어가 <군인은 요령을 본분으로 한다>고 늘 말하는 조교(助敎)의 옷보따리를 풀어 어젯밤 도둑맞은 옷가지를 훔쳤다. 그 날 오후 나는 주말 피복 검사를 무사히 받았다. 피복 검사가 끝나자 나는 훔친 옷들을 손에 들고 옷 주인 조교를 찾아가 사유를 말하고 옷을 돌려 줬다. 그 때 조교는 옷을 받으며,

“개성 깍쟁이 놈은 과연 남들보다 다른데…” 하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런 벌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후부터 각별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군인 정신이란 참 묘한 것이었다. 이 군인 정신의 이름으로 우리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 흔해 빠진 감기도, 그 어떤 병도 이 군인 정신 앞에서는 기를 쓰지 못했다.

어느 날 식중독이 걸렸었는지 우리 중의 반 이상이 설사를 하며 쥐어 뜯는 듯한 통증을 배에 느꼈다. 나도 환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아프다고 하자 주번 교관은 우리들 환자를 집합시켰다. 병원으로 진찰받으러 간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쉬게 되었구나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나도 나섰다. 그런데 그 교관은 우리 보고 팬티만 입고 옷을 다 벗으라는 것이다. 하라는 대로 우리는 옷을 벗었다. 그 교관은 빨간 페인트 통을 들고 오더니 우리 모두의 배꼽에다 그 빨간 페인트 칠을 덥석덥석 칠하는 것이 아닌가! 배꼼으로 바람이 들어가 배앓이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훈련장을 다섯 바퀴 돌고 선착순으로 이 자리에 집합하라는 것이다. “늦은 놈은 빼터 다섯 대” 라는 그 교관의 말이 훈련장을 향해 뛰어 나가는 우리 등 뒤에서 들려 왔다. 바깥 날씨는 추웠다. 뛰니까 설사가 더 나왔다. 팬티에다 우리 모두는 설사하며 뛰었다. 다리에 누런 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제 자리에 돌아왔을 때 이제는 목욕시켜 준다면서 훈련장 앞 바다로 우리를 끌고 갔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돌격 앞으롯!” 하고 그 교관은 호령을 내렸다. 우리는 바다에 뛰어들 수 밖에… 추위고 설사고 이미 우리 몸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 때 그 교관은 말했다.

“설사고 감기고 정신 문제다. 제군들은 아직도 철저한 군인 정신을 연마하지 못한 탓으로 배앓이를 하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제군들은 설사를 할 것이고 배앓이를 할 것인가?”

“안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설사를 하고 싶어서 우리가 설사를 했던가… 생리적 현상으로 일어나는 이 설사도 군인 정신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날 우리는 정상대로 훈련을 받았고 물론 설사도 배앓이도 멎었다.

 

신병 교육 기간 중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은 목욕탕 이야기다. 우리 신병들은 3 주일에 한 번씩 시내에 나가 목욕했다. 20명의 교반이 교대로 목욕했다. 첫 탕을 하게 되는 교반의 신병들은 맑은 물에 목욕하게 되나 세 번째 탕쯤 되면 목욕물에 때가 끼어 더럽다기보다 오줌 냄새 때문에 아예 목욕물에 들어갈 기분이 안 났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목욕탕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절로 오줌이 나왔다 탕 안에서 장난치거나 말하다가 조용히 웃고 있는 신병은 분명히 오줌 누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다섯 번째 탕을 하게 되는 교반의 신병들은 오줌물에 목욕하는 셈이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80 명의 오줌이 그 탕 안에 있으니 그것은 차라리 오줌물이었다. 내가 소속하고 있던 교반이 제5교반이라 우리는 언제나 다섯 번째 탕인 오줌물에 목욕해야만 했다. 어느 날 너무도 지린내가 나고 물이 더러워 우리 제5교반 20명의 신병은 목욕탕 안에 들어가지 않고 탕 밖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그 때 우리의 동작을 알아차림 담당 교반장이 물통에 그 목욕물을 퍼서 우리 보고 그 물을 마시라고 했다. 누구의 명령이라고 그 말에 거역할 수 있으리…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물을 마시기를 주춤했다. 그 때 그 교반장 하사관은 말했다.

“우리 훈련소에서는 제군들의 목욕값을 미리 지불했다. 그 목욕값은 삼천만 우리 가난한 동포의 세금이며 따라서 이 물은 국민의 세금으로 산 귀한 물이다. 그래 가난한 우리 동포의 피눈물 같은 이 물을 제군들은 마시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빨리 마셧!”

물통을 돌려 가며 한 사람 한 사람씩 마시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그 물통을 목욕탕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교반장님, 이 목욕물은 우리 동포의 세금으로 산 물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물론 귀한 물입니다. 그러나 우리 삼천만 동포 중 누구 한 사람도 이 오줌물을 이리가 마셔야 한다고 마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들은 이 오줌물의 원인을 해결해 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삼천만 우리 동포 편이 되어 우리의 인격을 모욕하는 이 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반면에 교반장님께서 제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기합을 저는 달갑게 받겠습니다.”

그 때 나는 정말이지 그 오줌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아무리 군대라 해도 이러한 모욕스러운 일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빼터를 맞아 죽어도 좋다. 나는 나의 인격을 위해 매맞아 죽기로 하고 이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장내는 숙연해졌다. 모두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나의 반발에 교반장도 기가 질렸는지 묵묵히 서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그는 말했다.

“태오는 과연 남자다. 군인에게는 이러한 대담성과 기백이 있어야 한다. 솔직히 나는 제군들 앞에 내 잘못을 사과한다. 그리고 오늘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음부터는 제5교반부터 목욕 첫 탕을 하도록 하겠다.”

그때 나는 놀랐다. 부하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청하는 아량과 인격, 그의 인간됨에 나는 경의를 품었다. 그리고 인격을 내세웠던 나의 행동이 어쩐지 교만스럽게도 보였다.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교반장님, 나의 교만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청했다.

“우리는 그 교만을 하나의 긍지라고 말하네. 군의 행동과 말은 훌륭한 것이었네. 일어나게.”

 

이 사건 이후 우리 제5교반은 목욕할 때마다 첫 탕을 하게 되었다.

 

5백여 명이 함께 모여 사는 이 신병 교육소 안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대부분이 나처럼 중학교를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가 제각기 자기 딴의 역사와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각자의 행동이나 품행이나 또는 인상 등을 통해 볼 때 그들이 지니고 있는 교양이나 학식이나 생활 정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으나, 이 상한 일은 가난한 집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이처럼 객지에 나오면 거의 모든 사람이 양반집 아들이 아니면 부잣집 아들이 되고, 또 자기 고향의 영웅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지난 날의 가난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런 점으로 보아 나느니 가난이란 하나의 악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가난이 하나의 선이라면 자기 자랑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난을 부끄럽게 여길 리 만무했을 것이고 반대로 남들 앞에서 자기의 가난을 털어 놓고 자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고 숨겼다. 그와 반면에 윤리적 악인 깡패질한 것, 남들과 싸움하고 때려 준 일, 남을 기만한 일, 무질서한 성행위, 심지어는 성병마저 그들은 남들 앞에 자랑했다. 이런 사회에서는 남과 싸움할 때, 매를 맞았어도 남을 멋지게 때려 줬다고 거짓말해야 사람 대우를 받았고 동정(童貞)의 윤리적 의무와 가치를 말했다가는 바보 취급을 받는다.

 군대 생활이란 딴 세상과는 달리 배고프고 춥고, 얻어맞고, 악이 선으로, 선이 악으로, 여겨질 때가 없지 않아 있으나 이런 부정적 사실의 연쇄만은 아니다. 적어도 내 경험을 통해 보면 교관으로부터 얻어 맞아도 원한을 품지 않는 곳이 곧 군인 사회가 아닌가 한다. 빼터를 맞을 땐 화가 나고, 하도 아파서 교관에 대한 불만이 내 마음을 채웠으며 때로는 속 마음으로 그들을 수 없이 죽이기까지 했어도 하룻밤 자고 나면 어제의 빼터를 깨끗이 잊어 버린다. 그리고 빼터를 얻어맞고 “교관님 고맙습니다” 하며 소리 지르고 경례하는 사회는 군인 사회 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신병 중에서 빼터를 제일 많이 얻어 맞은 사람이 영웅이 될 때도 있었다. 이 밖에도 군인 사회처럼 단순하고 솔직한 사회는 아마 없을 것이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다고 솔직히 말하며 서로 기분이 상하며 마음 풀릴 때까지 주먹질을 같이 하고 술 한 잔으로 화해를 했다.

그 날이 그 날처럼 힘든 신병생활을 통해, 이런 인간 사회에서의 생활을 통해, 하루 하루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모르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을 갖고 있다. 남들과 접촉할 때 남의 장점은 나에게 선의의 자극이 되었고 남의 단점은 내가 모르는 내 안의 단점을 알려 주어 내가 일상 접촉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교훈을 받았다. 그 외에 단체생활을 살리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자기 희생 정신, 봉사적 정신, 연대 책임감, 사랑, 관용, 인내, 그리고 남에게 대한 내 의무, 우정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의리, 웃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아랫 사람들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 시간 엄수, 몸 가짐의 단정 등 이루 다 헤어 볼 수 없는 이 많은 인간학(인간학)의 보물을 나는 돈 주고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공짜로 그것도 때때로 빼터를 얻어 맞으면서 배웠던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군인생활 8년 간은 나에게 인간됨을 가르쳐 준 나의 제2의 어버이이기도 했다.

 

 

 

제5장

방황하는 갈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종교 생활에 깊은 애착과 열의를 갖고 있었다. 어머니 무릎에서부터 배운 기도생활은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나에게 마음의 평화와 영원에로의 상상력을 길러 주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 곁에서 기도 드리기를 좋아했고 묵주신공 바치는 어머니 곁에서 잠들기를 즐겨 했다. 밤마다 온 가족이 모여 바치던 만과(밤기도)는 고달픈 농촌의 하루를 지낸 내 육신과 영혼에게 달가운 휴식을 주었다. 그리고 농사 일을 하며 느낀 그 종교적 감정은 이 자연을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오묘하신 지혜 앞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겸허하게 길러 주기도 했다.

나는 천주교회라는 내 종교를 사랑했다. <너의 원수까지 사랑하고 그를 위해 하느님의 축복까지 빌라>는 내 종교를 보람스럽게 생각했다. 하느님 안에 만민이 평등하며,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다 같은 형제라고 가르치는 내 종교를 나는 자랑스럽게 여겼다. 해방 후 그 정치적 혼란 속에 서로가 서로를 욕하고 죽이던 난동 속에서도 미움 없는 내 마음을 항상 평화롭게 지켜 준 내 종교를 나는 고맙게 여겼다. 나는 이러한 종교를 나에게 물려 주신 내 부모님에게도 감사했다. 그러나 내가 이 날까지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온 나의 종교 생활은 마치 온실 속의 꽃처럼 보호된 생활이었다. 그것은 아무런 비판도 시련도 없이 받아들인 내 안에 뿌리 박고 생활한 내 신앙생활이 아닌 내 밖에 있는 남의 신앙생활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믿는다는 <외로움>과 <고통>을 경험 못한 순결한 생활이었다.

서울 하숙집 딸인, 누나 같은 그 여대생을 만날 때까지 나는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종교는 천주교 하나 뿐인 줄 알고 있었다. 물론 아버지나 형님을 통해 예수교라는 신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예수교는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 누나 같은 여대생을 통해 예수교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들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보다 훨씬 단순하고 자유스러워 보이는 그들의 신앙생활을 얼마큼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천주교 신앙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또는 의심하지는 않았다.

서울 하숙집에 같이 살던 두 명의 대학생하고도 나는 친히 지냈다. 특히 불교철학을 공부하고 있던 ‘신’ 이라는 학생과는 형제처럼 친했다. 어느 날 그의 요청에 따라 불국사를 거쳐 통도사와 해인사를 구경하고 돌아온 다음부터 나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불교가 살아온 역사성과 그 예술이 지닌 종교성에 나는 존경과 매력을 느꼈다.

고향에 있을 때 아버지의 친구인 중(僧)이 우리 집에 몇 번 놀러 왔었고 그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나는 불교에 관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에 그 스님을 따라 입산(入山)하고 수계생활(修戒生活)을 할까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그것은 아직 철 없는 시절의 한낱 감상(감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하고 돌아온 후부터 내 마음 안에 신앙상의 동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주교만이 종교가 아니고 거기에는 우리 교회와는 이질적인 다른 종교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약속하는 <구원>에 대한 같은 교리가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짧은 지식이었으나 마 서로의 교리를 비교해 보아도 그것은 대동소이(대동소이)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쯤 생각하니까 예수님도 이 인류 사회에 있었던 그 수 많은 예언자나 선각자 중의 한 분이지 하느님의 아들인 “신”(神)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기 시작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모두 사랑을 설교하고 진리를 말하며 구원을 약속했다. 그래서 나는 천주교와 예수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는 서양인의 종교이고, 불교는 동양인의 종교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우리 조상과 함께 살아온 이 불교, 이 불교 안에 숨쉬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얼,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 어쩐지 조상들에게 죄를 짓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웬일인지 외롭기도 했다. 내가 죽으면 우리 조상들이 있는 극락세계가 아니고 얼마 안 되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그 작은 하늘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쓸쓸한 마음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이 역사와 문화의 세계를 떠나 어느 고도(고도)에 표류되어 온 듯한 느낌이 내 마음을 외롭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천주교회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우리 부모님의 조상 전래의 종교를 떠나 이 천주교회로 오신 거기에는 내가 아직 모르는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회 있을 때 우리 교회의 교리를 공부하기로 했다.

내가 고향을 떠날 때 아버지께서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태오야, 나는 너에게 물려 줄 아무런 명예도 지위도 재산도 갖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너에게 아버지로서 빚만 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천주님께 대한 신앙과 주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물려 주었다. 이 신앙과 이 사랑이 너의 젊은 마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신앙과 사랑을 늘 기억하고 있거라. 이 신앙과 이 사랑이 너에게 구원의 빛과 길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이 <구원의 빛>은 회의의 검은 구름으로 덮어져 가고 있었고 이 <구원의 길> 저 편에는 <신앙생활 간소화>라는 일종의 합리주의라는 <안개>가 서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병 교육대 생활 첫날부터 내 신앙을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우선 첫날 따귀와 빼터를 맞으며 나는 그 교관을 미워했고 마음 속으로 그를 수 없이 죽였다. 배고파서 남의 밥을 탐냈고 교관실 청소하며 거기에 있던 과자와 과일을 여러 번 훔쳐 먹었다. 이 때문에 죄 없는 다른 신병이 빼터를 얻어 맞은 일도 있었다. 도둑맞은 내 물건을 보충하기 위해 남의 것을 훔치기도 했다. 남에게 거짓말을 했고 또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상스러운 말을 듣게 되었고 나는 군인이라는 <인간 구실>을 하기 위해 그러한 상말을 거침 없이 했다. 남과도 싸웠고 비겁한 방법으로 동료 신병을 골탕 먹이기도 했다. 그때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이 모든 것은 심계명 중 어느 한 계명에 꼭 거슬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내 어린 신앙 양심은 몹시 고민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성호(聖號, 천주교 신자들이 이마와 양 어깨에 십자 표시하는 종교적 행위)를 밥 먹기 전에 할 때마다 신병 친구들은 <파리 쫓는 놈>이라고 나를 놀려 댔다. 때로는 예수를 믿는다는 다는 하나의 이유로 남들보다 더 심한 일을 해야 했으며 또 궂은 일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예수 믿는 놈들은 원수까지 사랑하며 궂은 일을 즐겨 하고 자기 희생을 기쁨으로 삼는다지” 하며 한 교관은 나에게 그런 일을 번번이 시켰다.

바울로 사도는 신앙은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신병 훈련소 시절의 내 신앙은 나에게 죄의식을 더 느끼게 해 주었고 이 죄의식은 나의 양심까지 속박하고 있었다. 바로 이 죄의식 때문에 나는 춥고 배고프고 매맞는 고통 이외에 또 다른 고통을 받고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러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 죄의식을 떠나서는 살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몇몇 사람과 깊은 우정을 맺고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열심한 예수교 신자인 김 수병(水兵)과 친형제와 같은 각별한 우정을 맺고 있었다. 우리 둘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종종 놀림을 받았고 궂은 일도 같이 했다. 우리 둘은 훈련의 여가나 또는 일요일 오후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좋아했다.

그러나 그때 내 종교 지식은 아침 저녁 기도문이나 알고 있을 정도였고 성경 지식이란  성경책을 만져 보지도 못한 무식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 날 김 수병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왜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성경 독서를 금하며 성직자(聖職者)들의 독점물로 만들었느냐?”

그때 나는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성경 독서를 금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느 주일날 오후,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김 수병과 같이 따뜻한 양지에서 쉬고 있을 때 그는 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성경을 정신 차려 읽으면 가톨릭 신자는 예수교 신자가 안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교는 신약(新約)의 복음적 교리에 토대를 둔 정신적 교회이지만 천주교회는 신약성경을 갖고는 있어도 구약 이래 유태인들이 갖고 있던 여러 가지 예전(禮典)을 주로 한 교회의 성사(聖事)를 신자들의 개인 신앙생활의 생명으로 삼고 있는 예전적(禮典的) 교회다. 육신과 영혼의 결합체인 인간은 순 정신적이어서는 안되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외부적 행사가 중요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 신앙 정신을 방해하고 죽이는 예전(禮典)이란 생활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유태인들의 위선적 예전을 거슬러 그들이 절대 신성시(신성시)하는 주일날마저 두려워하시지 않으시고 사랑의 영적을 행하셨다. 신앙생활이란 하느님과 나와의 양심적 관계이지 어떤 외부적 예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약속하는 사후(死後)의 영생 영락은 바울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신앙, 즉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다고 고백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볼 때 우리들의 인성(인성)이 얼마나 약한지를 알 수 있으며, 또 선생보다는 악행을 더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죄(原罪)로 말미암아 인성은 타락했으며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자기의 행동상의 힘을 잃고 말았다 원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이 자기의 선행으로 자기의 영혼을 구제할 수 없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의 영혼 구령을 위해 돌아가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죄인들을 구제하기에 족했으며, 따라서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넉넉히 자기의 영혼을 구제하기에 족했으며, 따라서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넉넉히 자기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천주교회에서는 신앙생활에 필요치도 않은 여러 가지 일을 제정해 놓고 그것을 상당히 중요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금요일에 고기를 먹으면 죄가 된다든지, 예수님의 그림이나 상(像)을 걸어 놓고 남의 눈에 우상숭배로 보일 정도로 신성시하며 공경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예수님 이상으로 공경하고 숭배하는 등, 또는 성수(성수)란 물을 뿌리는 등, 인간은 세계 각국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나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세계 각국 말은 물론 각 개인의 은밀한 마음까지도 알고 계시는데, 신자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예배를 보며 찬송가를 부른다든지, 신부 앞에 죄를 고백함으로써 죄의 사함을 받는다는 등,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예식을 정해 놓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조가 된다니 이해하기 곤란하다. 교회의 행사란, 즉 예전이란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도와 주며 우리를 위해 있어야 할 텐데 우리들이 예전을 위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예전이 우리의 신앙 양심을 구속해서는 안 되며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이 열어 준 신앙으로 죄인인 인간은 구령할 수 있다는 간단하고 쉬운 구령의 문을 좁혀서는 안 된다.”

무식 바로 그것이었던 내 교리 지식은 김 수병의 이런 말에 단 한 마디도 나의 가톨릭 신앙을 위해 변호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예수교 장로(長老)의 아들이며 성경학교 출신인 김 수병의 교리 지식을 부러워했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간단하고 쉬운 구령의 문>이라는 김 수병의 말이 내 마음을 강력히 파고 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죄의식으로 고민하는 나의 마음에 그 말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2개월 힘들었던 신병 교육이 끝나자 나는 인천에 있는 해군 제1함정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고생스럽던 이 신병 교육대 생활, 하루 빨리 끝나기를 바라던 이 신병 교육대 생활을 마치고 진해를 떠날 때 9개월  전에 고향을 떠나며 느꼈던 그리움과 외로움을 다시 느꼈다.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 란 노래도 있듯이 정(情)이 있는 곳이 바로 고향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사랑이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인 것처럼. 훈련 중에는 무섭기만 했던 교관 하사관들도, 항상 우리들의 성가시고 보기 싫은  존재이던 조교들도, 정작 떠나 헤어진다니 모두가 그리웠고 정다워 보였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분들이 우리를 성가시게 간섭하고 때로는 여러 종류의 기함을 주고 빼터로 때리기도 했으나 그것이 모두 우리들이 훌륭한 군인이 되어 유사시에 유감 없이 조국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베풀어 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당시 신병 교육대 대장이던 강기천(姜起千) 대위와 내 담당 분대장이던 김용국 소위로부터 실무에 있어서 일 잘하라는 훈시를 듣고 우리 일행은 진해를 떠났다.

신병 교육대 졸업 시 김 수병은 우정의 표시로 나에게 성경 한 권을 주었다.

인천 해군 제1함정 사령부에서 일하며 나는 시간 있는 대로 남몰래 성경을 읽었다. 그때 성경 독서에 대한 나의 열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성경을 읽기 위해 나는 남의 불침번(不寢番) (잠자지 않고 실내에서 병사(兵舍)를 감시하는 것)까지 맡아서 밤잠을 안 잔 일도 몇 번 있었다. 성경을 읽음에 따라 내 개인 신앙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큰 변화는 19년 간 내가 믿어온 교회와 점점 멀어져 가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아무런 교리 지식도, 성서에 대한 예비 지식도 없이 성경을 읽을 때 나는 성경 구절을 내 마음대로, 내 취미대로 이기적 생활에 편리한 대로 해석했다. 그리고 인간 생전의 선행(善行) 여부를 불문하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만 구령(救靈)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자기 영혼을 구할 수 있다면 가톨릭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여러 가지 성사(聖事)나 예전에 참례할 필요조차 없고 심지어는 교회의 존재 이유마저 나는 부정하게 되었다. 그러한 나였지만 주일날이면 마음 편하게 부대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어느 주일날 나는 미사참례를 마치고 곧 예배당으로 갔다.

성당에서는 사제의 신학적인 강론이 어려워 나는 별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성당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성당 문을 나오곤 했다. 그러나 예수교인들의 예배 양식은 천주교 신자들의 미사 참례 양식과 아주 달랐다. 한국말로 성경을 읽었고 기도도 누구나가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단순한 한국말로 했고, 성가도 한국말로 거의 모든 사람이 합창했다. 목사의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설교도 방금 듣고 온 사제의 강론보다 훨씬 알아 듣기 쉬운 말이었다.

이런 일이 있자, 나는 내 친구의 말대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정말로 신자들에게 성경 독서를 금했고 성경에 없는 교리를 만들어 주지 않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교는 그 친구 말대로 신약성경의 복음적 정신 교회인데 반하여 가톨릭 교회는 구약성경에 토대를 둔 예전적(禮典的) 교회가 아닌가도 생각했다. 그 외에 특히 가톨릭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완전한 윤리생활은 나에게 항상 죄의식만을 갖게 했다. 그리고 완전한 신앙생활이 힘든 이 군대생활에서 나는 죄를 짓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다.

 사실에 있어 신자들이 생활 표어는 <죄를 짓지 말라>가 아니라 <사랑하라>인데,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일 때마다 십계명 중 한 계명을 거스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이 군대생활에서 나는 점점 더 심한 죄의식에 눌려 살고 있었다.

그래서 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 남들처럼 하고 싶은 일을 다하며 되는 대로 살다가 예수님을 믿어 내 영혼을 구령하자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는 차츰차츰 교회에 대한 불쾌감을 갖기 시작했다. 이처럼 교회에 대한 반항심이 내 마음에 싹트기 시작하자, 미사참례도, 성모님 공경도, 성인 공경도 일체가 다 우상숭배로 보였고 교회의 여러 가지 예식과 성사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자유로운 성장과 행동을 속박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성당 출입도, 주일 미사 참례도, 점점 나에게 멀어져 갔다. 그 외에도 특히 가톨릭 교회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은 구령할 수 없다고 교리문답 시간에 잘못 알아 들은 내 교리적 지식은 양심적이고 착하고 성실한 신자 아닌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그리고 하숙집 딸과 김 수병과 같은 열심하고 정직한 예수교 신자들을 볼 때마다, 부처나 공자나 노자의 거룩한 생애와 교훈을 들을 때마다 만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자기들의 하느님으로만 여기고 천당을 자기들의 것으로만 독점하려는 가톨릭 신자들의 외고집을 거슬러 나는 반항의 깃발을 들기 시작했다. 모든 선과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가톨릭 교회는 선과 사랑을 자기들만의 전매 특허로 삼고 남들의 선과 사랑을 지옥행으로 단죄하느냐고 나는 사뭇 흥분되어 교회의 교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이런 독선적 교회와 일체 손을 끊고 매일 한두 장씩 성경을 읽으며 그것으로 내 신상생활의 양식과 예수님께 대한 내 신앙의 증거로 삼고 살자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대한 신앙과 선행만으로 얼마든지 영혼 구령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미사참례나 여러 가지 성사, 특히 고백성사 등으로 내 신앙생활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하느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것이며 양심적인 것이므로 하느님의 자비하심만 믿고 내 죄를 마음으로부터 아파하면 그것으로써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이지, 일부러 신부 앞에 나가 죄를 고백을 함으로써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도리어 그런 고백성사는 인간을 위선자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을 다분히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시절의 내 고백성사 생활의 경험을 통해 보면 내 고백을 듣는 이가 아무리 신부라 할지라도 인간 앞에 내 죄를 고백한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뿐 아니라 어떤 죄에 대해서는 그 죄의 결과적 책임을 남에게 혹은 환경에게 혹은 우리 인간성의 약함에 돌리어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솔직성 없는 고백성사는 자칫하면 양심에 괴로움을 줄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솔직한 고백성사를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 어려운 듯 보였고 하느님은 인간에게 무리를 요구하지 않으시니 무리한 고백성사를 포기하고 하느님과 나만의 양심적 생활을 하고자 마음 먹었다. 하여튼 교회가 요구한 복잡한 신앙생활을 떠나 하느님과 나만의 양심적 생활, 그리고 예수님과 그분에 대한 내 신앙과 성경 독서만으로 족한 <신앙생활 간소화>를 실천하기로 했다.

<양심껏 살자>, 이것이 당시 내 생활 표어였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만고 불변의 양심의 소리에 따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성실히 살자고 나는 내 자신에게 타일렀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위선이며, 양심적 생명 없는 종교 생활은 허위이며, 자기 기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양심과 종교를 동의어(同義語)로 여겼다. 양심! 물론 신앙생활이 양심적이 아니라면 그 신앙생활은 이미 죽은 신앙생활이다.

<인간은 남을 속일 수 있으되 하느님과 자기 양심만은 못 속인다> 라는 옛 말이 있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디까지나 양심적이어야 할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성현(聖賢)과 철인(哲人)들은 양심의 소리를 가리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그러나 윤리생활의 확고부동한 경험과 기반을 갖지 못하고 또 객관적 진리에 내전생활의 행동을 순응시켜 사는 훈련이 부족했던 그때의 나에게는 <양심대로 살자>라는 내 생활 표어는 내 종교 교육에 바탕을 둔 지금까지의 윤리관에서 해방되어 내 멋대로 살아 보자는 하나의 변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바이지만, 선과 악을 엄격히 구별하게 될 때 우리들은 흔히 주위환경과 또 우리 자신에 미치는 개인적 이해 관계에 영향을 받아 엄정한 판단을 못 내릴 때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생활에 대한 성실성이 없으면 우리는 올바른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양심이라 것도 우리의 지능처럼 가다듬고 훈련시키지 않고서는 자기의 천부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양심은 또한 우리의 지능처럼 가다듬지 않고 진리를 무시할 때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유와 방종을 혼동하고 동의어로 여기듯이 양심과 자기 이기심에서 생겨나는 주관(主觀)의 소리를 흔히 혼동한다. 이런 점으로 보아 우리는 <양심껏 산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여튼 대체의 경우, 인간의 양심이나 이성이란 결코 절대적인 것이 못 되며 아무리 내 이성과 양심이 잘 훈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진리와 윤리 원칙의 창조자는 아니다.

<양심껏 살자>라는 생활 표어를 세우고 나는 내 취미에 맞지 않고 내 생활에 성가시고 내 마음을 얼마간 괴롭혀 주는 일체의 것을 내게서 배제해 버렸다. 그리고 양심적 생활은 사실상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는 내 멋대로 내 생활을 꾸미고 있었다.

그 후 <충무공정> 이라 이름한 군함에 전속되어 해상생활을 하게 되자 나는 완전히 교회의 성사적 예전생활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황해, 남해, 동해, 할 것 없이 남한의 해안 일대를 항해하며 나는 복잡스럽던 신앙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고 신앙생활의 간소화는 나에게 행복과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고 스스로 믿었다. 그때 교화와 성총의 샘이신 성사를 떠나 멀리 살고 있었던 나는 진정 자유로웠고 나에게 준 행동상의 자유와 마음의 평화는 루가복음 15장 11절에서 24절에 걸쳐 나오는 탕자의 자유와 평화, 바로 그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부친에게 재산 분배를 요구하고 자기 몫을 받아 가진 그는 우선 자기 부모님 슬하에서 가졌던 단조롭고 평화로운 생활을 멸시하고 멀리 방탕의 길을 떠났다.

부모님의 성가신 간섭을 떠나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생활하게 된 그는 진정 자유롭고 행복하고 평화롭다고 대로를 활보하며 노래 불렀다. 그때 세상은 그이 용기를 칭찬했고 부러워도 했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두 팔을 벌리고 환영했다. 이처럼 넓고 즐거운 세상을 모르고 좁은 부모님 집에서 성가신 간섭을 받으며 살았던 자기의 과거를 그는 무척 후회했다.

아무런 구속 없는 이 달가운 세상!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 자유와 행복! 길가의 화초들도, 나비들도, 새들도, 아니 모든 자연이 다 부러워할 만한 그의 자유와 행복과 평화는 결국 그를 돼지를 치게 했고 돼지 죽으로 자기 배를 채워야만 될 남의 집 종이 되게 했듯이, 신앙생활의 간소화로부터 받은 내 자유와 평화와 행복은 갑작스레 맞이한 죽음 앞에 나를 몸서리치게 했고 한없이 울게 했다.

나중에 나는 내 신앙 위기에 진정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로 우리 교회의 교리에 대한 철저한 무지와 나의 교만이었다. 신학을 조금도 알지 못하면서 교리상의 의문을 풀기 위해 나는 신부님께 문의하기를 거부했다. 겸손은 진리와 짝이 되는데 반하여 무지는 흔히 교만을 동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째로, 내 조국에 대한 몽매한 사랑이었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보수적인 정신은 나로 하여금 우리 한국 문명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천주교를 멀리하게 했다. 셋째로, 천주교와 예수교를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는 태도와 그들이 불관용 정신에 대한 나의 불신적 태도였다. 천주교인들과 예수교인들은 주님께 대한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복음적 사랑을 설교하면서도 서로 사랑하지 않고 서로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도덕적이기는 고사하고 부도덕적인 것으로까지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종교와 생활관을 달리할 수 있는 이 복합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 서로의 연대성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조건인 <관용>을 설교하지 않고 반대로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관을 고집하는 광신을 조장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넷째로, 도덕적인 내적 갈등이 내 신앙을 흐리게 했다. 조를 짓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이 인간 조건 앞에 교회가 가르치는 유리관은 젊음이 숨쉬는 <나>라는 자아(自我)와 삶에 대한 기쁨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 마디로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을 몹시 혼란 시키며 괴롭히는 그 죄책감을 물리치기를 원했고, 특히 언제나 당신 법의 계명에 따라 내 행위를 규제하고 단죄할 태세를 갖춘 그 <교리문답의 천주님>의 눈에서 나는 벗어나려고 했었다.

내가 그리스도의 진리를 설교하는 교화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한 동안 거부한 것은 위에서 열거한 그러한 이유 대문만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진정한 이유는 그러한 이유를 구실삼아 내 멋대로의 생활을 꾸미기 위해 진리를 멀리하려는 나의 의도와 태도를 합리화 시키려는 <핑계>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 멋대로의 사고방식을 바꾸라고 하며, 또 내 행동 방식을 간섭하며, 내 뜻대로의 생활을 꾸미기를 탐하는 내 의지를 구속하려 드는 <어떤 이>로부터 나 자신을 멀리하고자 하던 이기적인 계산에 바탕을 둔 내 태도였다. 그리고 내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자기를 따르라고 끊임 없이 권하는 <어떤 이>, 즉 그리스도를 내 일상적인 생활 속에 받아들이기를 나는 무서워했던 것이다.

 

 

 

제6장

죽음 앞에서

 

그 후 나는 비좁은 이 삼천리 강토에서 동포들끼리 서로 욕하고 죽이려 하는 이 소란한 조국 땅을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멀리 오대양을 건너며 세계 만방을 유람할 수 있는 항해사가 되겠다는 로맨틱한 이상을 품고 하사관(하사관) 학교인 해군 항해 학교에 입학했다. 6개월의 교육 기간 중 가지가지의 고생도 많았으나 무사히 졸업했다.

1950년 6월 20일 졸업과 동시에 우리는 하사관으로 진급되었다. 그때 나는 10여 명의 동료 하사관들과 함께 미국으로부터 함정을 인수하기 위해 편성된 특별반에 배속되었다. 태평양을 건너 우리의 군함을 인수하고 망망 대해를 항해하리라고 생각하니 내 꿈의 일면이 실현되는 듯한 기쁨 속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리고 고생스러웠던 지난 6개월 간의 공부와 훈련이 새삼 보람스럽게 여겨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6.25 사변을 맞이했던 것이다. 오대양을 항해하리라는 낭만적인 내 꿈은 전쟁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져 갔다. 처음에 우리는 38선 남북 경비대 간에 흔히 있는 무장 충돌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실상은 사변 발행 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공산군에 함락되어 심상치 않은 전쟁의 위기를 느꼈다. 그리고 우리 일동은 곧 함정에 배속되었다. 내가 배속된 함정은 일본 해군의 유물인 소해정(掃海艇)이었다. 당시 남한 해군이 사용하고 있던 군함은 군함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경비용 소함(小艦)들이었다. 포항 해군기지에 배속된 우리 군함은 동해안의 봉쇄 작적에 참가하여 적의 해상보급지원을 막았다. 당시 북한의 해군 실력은 우리보다 더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원산 앞바다까지 마음 놓고 돌아다녔다.

물론 적의 기뢰탄(機雷彈)이 가끔 해상에 부유하고 있었고 아군의 군함 한 척이 적의 기뢰탄에 폭파, 침몰된 일이 있었으나 그다지 큰 위험은 없었다. 게다가 미 해군의 지원 하에 그들과 함게 행동하고 있으니 해상에서 지는 석양의 자연미를 감상하며 때로는 선체에 부딪치는 파도소리에 장단 맞춰 노래까지 할 만큼 우리들의 해상생활은 여유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상의 경비는 완전무결했으나 7월 하순경 우리의 활동 기지인 포항이 공산군에 함락되고 말았다. 포항을 다시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기지 사령관인 남상휘 중령의 솔선 지휘 하에 우리는 육군과 해군 육상 전투부대원의 지원 사격을 해 주게 되었다. 우선 약 1개 대대 가량의 병력을 포항비행장으로 통하는 해안에 상륙시키자 공산군은 일제히 우리 상륙부대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6.25 사변이 시작한 후 처음 보는 적의 포격이었다.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 수 없이 떨어지는 적의 포탄이 폭발하는 것을 볼 때 내 온 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구 방망이질하는 심장, 너무 긴장되어 후들후들 떨리는 내 두 손과 두 다리, 그리고 공포의 탓인지 이상하게도 오줌이 자꾸 마려웠다. 그때 상륙한 아군을 옹호해 주려고 우리는 포항 항구 가까이 다가가 함포사격을 시작했다. 말이 함포(艦砲)이지 아군의 함포는 적의 지상포에 비하면 극히 미약한 것이었다. 우리가 함포사격을 시작하자 적은 일제히 우리에게 총 집중사격을 했다. 바다 위에 오똑하니 떠 있는 우리 군함은 포탄을 얻어 맞고 연거푸 얻어 맞았다.

여러 발의 포탄을 맞고 보니 배 꼴이 이젠 말이 아니었다. 선수(船首)에 장치되어 있던 5명의 포사수(砲射手)가 피투성이가 되어 갑판 위에 나가 떨어져 딩굴고 있었다. 조타실(操舵室) 바로 옆에서 사격 중이던 또 한 사람의 기관포 사수가 허벅다리에 파편을 맞고 사람 살려 달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무리였다. 정장(艇長)이 후퇴 명령을 내렸다. 선수를 돌려 막 후퇴하려는 찰나에 적의 포탄이 조타실 후면에 명중했다. 얼마 후 내 자신이 뽀얀 연기 속에 파묻혀 조타실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의식했다. 당시 나의 직책은 부조타수였다. 조타실에 있던 사람 중 침실로 도망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마룻바닥에 쓰러졌던 것이다. 정장은 허리에 파편을 맞았고 기관장도 신호(신호) 하사관도 부상당했다. 조타를 잡고 있던 하사관의 다리에서도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친히 작전을 지휘하던 남 사령관도 파편을 몸에 맞았으나 다행히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과 앞가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지갑에 맞아 천행으로 무사했다고 한다.

사령관의 연락병이었던 헌병도 가슴에 파편의 관통상을 입고 조타실에서 상갑판으로 떨어져서 즉사했다. 그 밖에 조타실에서 육.해군 합동 상륙작전을 지휘하던 몇몇 육군 고급 장교들은 적의 포탄이 우리 군함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모두 침실로 재빨리 피해 무사했다. 조타수를 잃은 군함은 갈 방향을 몰라 제 멋대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적의 포구(砲口)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정장이 벌떡 일어나,

“태오 하사관 키 잡지 못햇!”

정장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나려 했으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오른쪽 군복 바지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고 왼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왼쪽 앞 가슴에서 붉은 피가 줄줄 샘솟고 있었다.

“정장님, 나도 부상당했습니다.”

나는 일어나려고 애쓰면서 그에게 말했다.

“너만이 부상당한 것이 아니다. 나도 부상당했다. 너 외엔 키 잡을 사람이 없지 않나? 빨리 일어나 키 잡아랏!”

주위를 살펴 보니 거기엔 정말로 정장과 나 외엔 아무도 없었다. 부상당한 사람은 모두 피신한 후였다.

“넷, 일어나겠습니다.”

대답하고 나는 일어났다. 키를 잡고 선수를 돌려 포항만을 향해 배를 몰았다. 얼마 후 우리는 적의 사격권(射擊圈)을 간신히 벗어나 안전지대로 나왔다. 그때 왼팔이 아래로 맥없이 축 늘어지면서 나는 다시 조타실 마룻바닥에 정신 없이 쓰러졌다.

한참 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침실로 운반되어 응급치료를 받은 것을 알았다. 부상당한 곳은 가슴 뿐만이 아니라 오른쪽 다리에도 파편을 받고 있었다. 진통제 주사를 맞아 아픈 줄은 몰랐다. 얼마 후에 경상남도 구룡포에 와 있던 육군용 부상병 수송선에 옮겨 타고 또 다시 치료를 받은 후에 육군 부상병들과 함께 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부산 육군병원에 와 보니 이름이 병원이지 침대 하나 제대로 없는 국민학교 마룻바닥이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피 묻은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 거의 발가벗다시피 하고 누워 있는 사람, 가지각색의 상처를 입고 향기롭지 않은 냄새가 풍기는 넓은 방에 질서 없이 누워 있는 수백 명의 부상병을 봤을 때 나는 등에 소름이 끼쳤고 식은 땀이 절로 솟았다. 왜냐하면 그들 부상병의 신음하고 있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표정에서 나는 이미 내 죽음을 보았고, 나도 그들과 함께 죽음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내 눈으로 처음 보는 이 인간의 비참, 내 귀로 처음 듣는 인간의 비명, 내 마음 속에 처음으로 느껴진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 나는 차마 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죽더라도 내 집인 해군에서 죽겠다 생각하고 진해 해군병원으로 이송해 줄 것을 간청했다. 때마침 부산에 정박 중인 해군 병원선에 연락되어 나는 그날로 진해 해군병원으로 옮겨갔다. 해군병원도 해병대 부상병으로 만원이었으나 깨끗한 병실에 깨끗한 침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간호장교들의 극진한 간호에 살 만했다. 간호장교는 피 묻은 옷을 벗기고 간단히 목욕을 시켜 주었다. 병원에 입원한 지 닷새째 되는 날 나는 가슴 속에 들어 있는 파편을 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때 군의관은 나의 가슴에 부분 마취를 시키는 것 같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 그때 당한 고통이란… 나는 악을 쓰며 참다가 정신을 잃었고 그런대로 수술을 끝마쳤다. 그리고 나는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7병동으로 이송되었다. 사람들은 7병동을 <죽기 5분 전> 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7병동에는 중환자만이 수용되는 곳이며 일단 이곳에 수용되면 대부분이 죽어서 나가거나 불구자가 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수술 후 치료 효과는 없었다. 그 당시 해군병원도 그 많은 해병대 부상병을 치료할 만한 의료 시설과 약품이 없었다. 수술은 받았으나 가슴의 상처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은 고름이 흐르기 시작했다. 가슴 안이 썩어 가고 있었다. 특히 고통스러웠던 것은 2일 간격으로 군의관의 회진이 있을 때마다 상처 안에 박았던 가아제를 끄집어 내는 일이었다. 피고름에 엉켜 가슴 안쪽 살에 말라 붙은 가아제를 끄집어 낼 때마다 받게 되는 그 아픔이란… 그것은 나로 하여금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라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전신에 진땀을 흘리면서 나는 죽지 않으려고 그 고통을 참았다.

가슴에서 썩은 피고름이 흐를 때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군의관이나 간호장교들의 근심스러운 얼굴을 볼 때 나는 죽음을 예측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당시 아군의 정황은 마산마저 적의 손에 함락되려던 참이라 진해 병원에서 일선의 포성이 똑똑히 들를 수 있었다. 병원 뒷산에 여러 번 적의 포탄이 떨어진 일도 있었다. 그때 아군은 진해마저 포기하고 제주도로 철수하느니, 일본으로 가느니 하는 소문이 떠돌아 심히 불안한 가운데 병원의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이와 같이 나는 전쟁의 뼈아픈 선물을 가슴 한 쪽과 오른 족 다리에 받고 내일 아니면 모레 아침 해를 못 보고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병신의 몸으로 병원 한 모퉁이에서 매일 수십 명씩 모여드는 나와 같은 운명의 동료들 틈에 끼어 남몰래 흐느껴 울었다.

어느 날 나를 가끔 찾아 주던 한 간호장교가 나를 또 찾아 왔다. 그녀도 천주교 신자라고 했다. 그 무렵 나는 천주교회를 떠나 있었으나 환자 카아드 종교란에는 <천주교 신자>라고 기재해 두었다. 간호장교는 그날도 나에게 맛있는 양과자를 사다 주었다 병원 뒤 나무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 과자를 먹으며 우리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과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죽음의 뜻도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왜 이분이 오늘은 기분 나쁘게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간호장교는 자기 말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었다.

“태오 하사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나, 태오 하사관은 자기대로 주님께 나아가는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죽음이란 주님 안에 시작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뜻하니까.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어.”

“뭐, 내가 죽는다구요? 그런 미친 소리 하지 말아요. 왜 내가 죽어요? 천당 같은 것은 이 다음에 늙어서도 갈 수 있지 않아요? 나는 살고 싶어요. 왜 내가 죽어야 합니까?”

죽음을 생각하고 있지 않던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죽는다는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먹고 있던 양과자도 뱉아 버리며 간호장교에게 소리쳤던 것이다.

죽는다! 만 20세도 안 된 어린 몸으로 세상을 떠나 미지의 저승으로 영원히 가야 하다니… 도대체 그것은 말도 안 된다.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는가? 남들은 행복하게 기쁨과 쾌락 속에 살고 있는데 나는 왜 이처럼 불행하게 죽어야만 하는가? 남들은 사지가 멀쩡하여 세상을 활보하고 다니는데 왜 하필 나만은 가슴과 다리에 상처를 받고 내일이면 죽어야 할까? 왜? 무엇 때문에?

그칠 사이 없이 이 <왜>와 <무엇 때문에>의 질문을 반복할수록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내 마음을 불살랐다.

죽는다! 그 때까지 한 번도 죽음을 신중하게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내 어린 나이로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인한 일이다. 나이 20세의 젊음은 살아야 할 권리가 있을 뿐이지 죽어서는 안될 일이다. 그때 내가 만일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해 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혹은 내가 범인(凡人)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범인 중의 범인이었다. 그러기에 내 일상생활을 통해 목격하고 경험한 남들의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슬피 우는 그들의 서러움을 깊이 동정하여 울기까지 했으나 나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일은 조금도 없었다. 반대로 남들처럼 재미 있게 살아 보려는 약아빠진 계산을 내 세우고 신앙생활 간소화를 내세운 것도 결국 죽음보다 삶에 더 큰 애착을 가졌던 때문이다. 죽음이란 연령의 한계에 부딪쳐 하는 수 없이 맞이하는 영원한 휴식인 줄로 나는 알아 왔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휴식보다는 피 끊는 행동을 사랑했고 따라서 하루 하루 남들처럼 내 청춘을 구가(謳歌)했고 앞날에 대한 향긋한 이상 속에서 그날이 그날처럼 힘들고 단조로운 졸병생활을 자위하며 살아 왔었다. 언젠가는 나도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복되고 화려한 미래를 건설하겠지 하고… 용모가 아름답고 마음이 착하고 성실하며 겸허한 여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미자는 것이 단 하나 내가 갖고 있던 인생의 꿈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을 건설하자는 이 이상은 고통스러운 졸병 생활을 참고 이겨내는 힘이 되었고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삶의 이유를 나에게 갖게 했던 것이다. 사실 내일에 대한 이상이나 희망이 없는 인간은 이미 죽은 인간과 같다. 이상은 오늘의 삶의 고통과 실망과 기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내일을 바라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삶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쁨과 힘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 시절 청춘의 이른 새벽, 아침 찬 이슬이 채 마르기도 전에 떨어진 내 청춘의 꽃송이를 손에 들고 나는 한없이 한없이 억울해 울고 또 울었다. 막 피어 오르려던 이 꽃송이에 담겨 있는 향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발산하기도 전에 시들어 없어져야 할 이 꽃송이, 모진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오직 앞날의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해서 부지런히 이 꽃송이를 다듬고 보살펴 왔건만…  곱게 화장하여 그를 기다리던 이 꽃송이는 그를 만나 그 품에 안기기 전에 말라 없어져야만 하는가? 죽는다! 죽음의 사자는 내 삶의 문간에 서서 노크하고 있었다. 아, 나는 그때  나에게 죽음을 주는 이 전쟁을 얼마나 저주했는지! 어릴 적부터 그처럼이나 갈망하고 생각해 오던 이상적 가정을 건설하기 전에 나는 내 몸 속에 피 끓는 청춘을 안고 죽는다.

뜨거운 사랑 속에 결혼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원통하고 분했다. 따뜻이 생기가 돌고 있는 매끈매끈한 내 몸뚱아리를 어루만지며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막을 길 업어 피고름 나는 가슴과 뻣뻣해진 다리를 이끌고 나는 미친 사람처럼 아무 데나 쏘다녔다. 그리고 남들이 잠든 깊은 밤중에 일어나 고함도 쳤고 겨드랑에 끼어 준 내 다리 아닌 나무다리로 아무에게나 버릇 없이 발길질도 했었다. 아! 나는 죽는다. 사랑도, 이상도, 가정도, 고독한 나와 함께 고독하게 죽는다. 왜? 왜?

분분 초초에 분분 초초가 겹치고 시간에 시간, 하루에 하루가 겹치고 있는 사이에 착착 다가오는 이 죽음! 학교를 졸업하자 농사 일에 여념이 없었던 무식한 나에게는 죽음이란 영원한 암흑과 무의 세계로만 보였다. 방금 전까지 팔팔 뛰매 발버둥치던 옆의 친구의 몸뚱이가 싸늘하게 식어가며 뻣뻣해질 때 그것이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생생한 삶의 힘이 약동하던 두 눈알이 시선의 목표를 잃고 흐려져 가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 내 심경은 무척 착잡했다. 내일이면 내 차례! 내일 나는 이 암흑과 무의 세계에 입단할 것이다. 왜 나는 죽어야 하며 무엇 때문에 20년 간 이 세상에 삶을 붙이고 있었던가?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신자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 볼 정신적 여유도 없던 당시의 내 마음 속엔 무턱대고 반항하고 싶은 충동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했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슬픔과 반항의 충동이 어느 정도 가라앉을 무렵 나는 무척 외로웠다. 원죄로 말미암아 천상 낙원을 잃고 죽음과 갖은 고통을 받게 된 원조 아담의 후손들은 선천적으로 외로운 법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객지생활이 호화스럽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초가 삼간 내 고향집이 제일 좋다고들 한다. 하물며 초가삼간이 아닌 지복천국(至福天國) 낙원을 잃었고 화려하고 행복한 객지생활이 아닌 노예생활과도 같은 이 지상 객지이고 보면 어찌 하늘나라를 그리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 선천적 외로움에다 인간으로서의 청춘의 외로움을 겹쳐 등에 지고 있으니 미칠 듯이 외로웠다. 그때 나는 외로움이란 사랑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긍정했다. 왜냐하면 아담이 홀로 살고 있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시고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삶의 동반자인 하와를 만들어 주시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사람이란 본래 남과 함께 결합되어 한 사회를 이루고 그 속에서 행복하게 살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오래 전에 고향과 가정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홀로 살다 홀로 사랑 없이 죽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죽어도 누구 한 사람 내 죽음을 슬퍼할 사람도 없을 것이며 아무렇게나 옷 입혀 차디차고 습기 도는 땅 속에 내 몸을 꽁꽁 묶어 파묻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몸서리치도록 슬프고 외로웠다.

그때 내가 누워 있던 병실은 넓은 방이었다. 약 30여 명의 부상병이 내일의 희망을 가진 채 또는 단념한 채 시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렵 몇몇 어머니, 누나, 아내 또는 애인인 듯한 여인들이 상처 입은 그들의 사랑하는 이들을 자주 찾아와 간호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그들 앞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자기들의 목숨마저 버리기를 사양치 않는 듯한 그녀들의 지극한 정성을 봤을 때 나는 그들 부상병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일 죽더라도 그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넓은 세상 삼천리 강토가 좁은 만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도 죽어가는 나를 찾아 주지 않았다. 왜 이다지도 나는 불행하고 외로울까? 극도에 달한 슬픔과 외로움은 내 눈물과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반항의식마저 고갈시켜 나는 실신한 사람처럼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죽음에서 살려내겠다는 단 하나의 생각만 가진 그녀들의 사랑 어린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것이 죽음의 꼬리표가 이미 붙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사실을 내 주위에서 목격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처 입은 자기 몸을 바라보며 또한 어루만지며 다가오는 죽음 앞에 몸서리치던 그들의 우울했던 얼굴에 웃음의 잔 꽃송이가 피어 오르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우울에서 살아나 웃음의 삶의 세계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죽음이란 비단 육신과 영혼의 이별인 육신의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희망이 없고, 사랑이 없고, 웃음이 없고, 서로 마주 쳐다보며 애정과 애정을 나눌 수 있는 얼굴과 얼굴, 마음과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랑이 없으면 희망도 없고, 기쁨이 없으면 슬픔이, 웃음이 없으면 우울이 있듯이 사랑, 희망, 기쁨, 웃음은 삶을 상징하는 반면에 절망, 슬픔, 우울은 죽음을 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사랑을 통한, 즉 사랑하기 때문에 참아 받는 괴로움, 말하자면 사랑하는 이들을 살리겠다는 단 하나의 집념(執念)을 갖고 자기의 약한 건강을 돌보지 않으며 상처 입은 그들을 간호하고 있는 그녀들은 사실상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행복이란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쾌락 속에 사는 것이 그 자체의 뜻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갖고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사랑할 때,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과 기쁨을 사랑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수고하고 그에게 봉사할 때 사람은 행복한 것이 아닐까?

어머니가 자식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애인에게 베풀어 주는 사랑은 상처 입은 그들에게 생명수가 되어 그들을 죽음에서 살려냈던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죽음에의 승리이며 부활이기도 했다. 사랑과 부활! 죄스러운 인류를 살리려고 온갖 천상 영광을 버리고 지상에 오셔서 고생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며 이 죄스러운 인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바로 그 사랑이 인간 예수를 결국 죽음이 승리자로 부활시킨 힘이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내가 만일 죽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고갈 때문에 목마르고 배고파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고 사랑 받은 사람은 살고, 사랑할 수 업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사람은 죽어도 한이 없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성을 갖고 있어서 죽어도 그들은 사랑 속에 오래 오래 결합되어 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희망도, 절망도, 사랑도, 미움도, 행복도, 슬픔도, 기쁨도, 우울도, 삶도, 죽음도, 일체를 망각하고 깊은 잠에 취해 있는 컴컴하고 넓은 병실 안에 나만이 홀로 깨어 있었다. 그리고 멀리 마산 부근에서 간간이 들려 오는 포성을 들으며 나는 행복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눈물로 뺨을 적셨다.

조용한 마음 속에 내 자신을 다시 찾았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마음이 여유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한 어여쁘고 순진한 소녀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죽음의 검은 손길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듯한 생각에 나는 잠시 한스러운 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진실로 사랑해 준 이는 어머니셨다. 그러나 수년 전에 천국에 가신 어머니의 사랑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으나 썩어 가는 내 몸 앞에 유형화되고 구체화되어 생기 도는 미소와 손으로 나를 어루만져 줄 수는 없었다. 어머니께 대한 내 사랑,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내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찾아 보는 아믐 속의 사랑이었지,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 입으로 말하고,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신과 육신이, 피와 피가 서로 통하는 사랑은 아니었다.

죽음의 초대장을 받아 들고 불가분 20년 간 내가 살아 왔던 이 지상의 집을 떠나야 하는 나에게는 마음의 사랑이란 그다지 힘 있는 것이 못되었다. 지금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썩어가는 이 가슴을 쓸어 주는 어머니의 두 손과, 사랑스러운 그분의 두 시선과, 따뜻한 그 분의 품 안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죽으면 한이 없겠다고 무척 생각했다 가슴에 상처를 받고 살아야 할 한참 나이에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간호하는 어머니의 고통과 슬픔은 죽음 앞에 홀로 선 내 외로움과 슬픔보다 더 크겠지만 병든 나는 어머니에게 힘에 겨운 고통과 희생을 바라고 싶었던 것이다.

애인? 가까이 있을 듯하면서도 단 한 번도 내 앞에 자기 자태를 보여 주지 않는 애인이었다. 이런 애인이 돌연 내 앞에 나타나 나에게 미소를 던져 줄 뿐 아니라 병든 내 몸을 보살펴 준다는 것은 꿈엔들 바라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나는 개성 형무소에 있는 신애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그녀를 나의 애인으로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나는 그녀가 하는 혁명사업이 싫었다 신애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형무소에 있는 그녀가 나를 찾아 올 리는 만무였다.

어떤 날 오후 나는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열에 뜬 꿈이 죽음의 망령으로 인해 뒤숭숭했다. 공산군의 비행기 폭격을 받은 것같이 생각되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나는 병원 안이 의외로 괴괴한 것에 놀랐다. 내 병실 맞은 편 방에서는 군의관과 간호장교 몇 명이 침통한 얼굴로 방금 죽은 내 이웃 중의 한 사람에게 아무 말 없이 옷을 입히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한 정적 속에서 슬픔에 잠기고 놀란 내 동료들의 수백 개의 눈이 죽은 그를 실어가는 수레를 계속 지켜 보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크나큰 혐오감에 사로잡혀 나는 침대에 다리를 쭉 뻗고 누워 두 손으로 머리를 괴고 눈을 감았다. 조용한 병원 안에서는 멀어져 가는 수레의 둔탁한 소리만이 들려오고 또 내 왼쪽 귀 곁에서는 내 팔목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오래 듣자니까 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마치 내 생명의 문을 두드리며 “째깍! 빨리 와! 째깍! 빨리와!” 하고 뇌이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고 몸이 오싹해 왔다. 무슨 짓을 하는지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나는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 내 상처에서는 역한 냄새가 풍겨 왔다. 나는 팔목시계를 낚아 채가지고 창문으로 그것을 내던지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죽음아 귀신한테 물러가라! 귀신한테나 물러가란 말이다!”

그리고는 울화통이 터져서 머리를 배개에 처박고 나는 울었다. 그 동안 내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 침대 시이트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매우 친절하기는 하나 약간 우직한 한 동료가 시계를 찾아다가 내게 주며 말했다.

“태오 하사관, 자넨 점점 미쳐가는구먼. 자네 시계가 뭘 잘못했나? 자네가 그걸 가지고 있기 실으면 기념으로 친구에게 줄 수도 있지 않나?”

그 친절, 죽음 앞에서까지 보여 주는 그 무신경, 그리고 그 상냥한 말씨에 나는 무섭게 신경질이 나서 그 시계를 잡아채어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여러 번 목발로 때려 부셨다. 나는 이렇게 내게 죽음을 뜻하는 것을 모두 파괴하고자 했다. 사실에 있어서 그때 나는 완전히 미친 놈같이 행동했던 것이다.

 

 

 

제7장

어머니를 뒤따라

 

날이 밝자 암흑에 싸였던 병실은 환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 희망의 빛이 도는 얼굴, 절망한 얼굴, 기쁜 얼굴, 슬픈 얼굴, 외로운 얼굴, 성낸 얼굴, 뭇 표정을 한 얼굴들이 하나 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의 시간 속에 우리들은 운명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어머니나 애인이 아니라도 좋으니 누가 나를 찾아 주고 나에게 웃음이라도 좋고 옛 이야기라도 좋으니 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때 나는 병든 사람은 남달리 위로와 애정을 요구하며 또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병든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을 위해 있어 주기를 바라며 남에게 지나친 희생을 요구하는 이기주의자가 된다는 것도 체험했다.  그리고 환자들은 자기들을 동정해 주는 사람에겐 무조건 의지하고 싶은 어린애 같은 심정을 갖고 있으며 그들에게 고독이란 암을 수 없는 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 앞을 지나가다가 가끔 발길을 멈추고 몇 마디 다정한 말과 웃음과 또 농담을 해 주던 예쁜 가호장교에게 매달려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그분이 단 한 마디의 말도, 농도, 웃음도 주지 않고 내 앞에 바삐 지나갈 땐 나는 커다란 허전함을 느꼈고, 그분이 다른 부상병과 오래 이야기하든지 또는 아낌 없는 친절을 베풀어 주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은근히 질투 비슷한 감정까지 가졌다.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외로움과 슬픔을 남도 또한 느끼고 받고 있으련만 나는 그 간호장교가 나에게만 각별한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바랐다. 내가 바라고 필요로 하는 인간의 따스한 정은 남도 또한 필요로 하고 바라고 있으련만 나는 이 인간의 온정을 내 것으로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처럼 병든 사람에겐 커다란 이기심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슬픔과 외로움에 기진맥진하여 눈물의 샘마저 마른 지 오래고 내 두 눈 언저리가 이젠 보송보송 마른 어느 날이었다. 썩어 피고름 나는 가슴과 다리를 상관치 않고 내 다리 아닌 나무다리에 의지하여 나는 병실을 나와 뒷산에 올라갔다. 그 날은 8월 17일! 바로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날이라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였다. 병원 뒷산 푸른 잔디 위에 몸을 길게 눕히고 머리 위의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소리 없이 미끄러져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나는 오래간만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의 왕국으로 되돌아갔다. 어린 시절이란 누구에게나 다 아름다운 추억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남이 보기엔 보잘 것 없는 내 어린 시절이나마 나에게는 둘도 없이 아름답고 그리운 것이었다. 눈에 환히 보이는 고향의 풍경,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 그 중에서도 학교 소녀, 예쁘장하던 이쁜이, 깍정이 옥이, 여우처럼 얄밉던 순이, 마음 착한 숙이들의 모습도 유별나게 그리웠다. 또 한 때는 머리가 깨져 피가 나올 때까지 싸움도 했지만 항상 같이 즐겁게 동네 앞들을 종횡으로 뛰놀던 개똥이, 두꺼비, 너구리, 부엉이, 곰돌이들의 모습도 그리웠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동무들과 함께 길가에 있는 뽕나무 밭에 들어가 나뭇가지에 책가방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정신 없이 오이를 따먹은 일이 있었다. 그때 뽕나무 밭집 할아버지에게 들켜 책가방을 모조리 뺏겼다. 하는 수 없이 우리들은 몇 푼 안 되는 주머니 돈을 모아 막걸리 반 되를 사서 거기에 물을 타 술병을 가득 채워 가지고 그것으로 책가방을 찾기 위해 뽕나무밭집 할아버지와 협상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일을 회상하며 나는 픽 웃었다. 부상당한 이래 처음으로 웃는 웃음이었다. 따가운 여름 햇빛 아래 동네 아주머니, 처녀, 총각 할 것 없이 흥겹게 노래 부르며 밭 김을 매던 일도 그리웠다. 논두렁에 앉아 마시던 뿌연 막걸리의 진미도 한 번 다시 맛보고 싶었다. 창자가 다 얼어 붙을 정도로 시원하던 여름철의 콩국 맛도 입안에 군침이 돌게 했다. 기 겨울 밤 모여 놀던 사랑방의 잡담들도 내 농촌생활의 중요한 한 토막이었다. 동네 사람 중에서 누가 장가, 시집을 가고 올 때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즐거워하던 일은 인정이 메마른 전쟁 중의 병원생활과는 좋은 대조가 되었다.

촌사람들의 후덕한 인간미가 그리웠다.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은 아버지, 형님들, 누나들과 어린 조카들… 그분들은 이 전쟁 중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병원에 입원한 후 처음으로 가족을 생각했고 또 그들을 위해 나는 잔디밭에 누운 채 십자성호를 이마와 가슴과 양 어깨에 그었다. 신앙생활 간소화를 실시한 이래 내가 처음으로 한 성호였다.

그때 나보다 여섯 살 맏이인 누님 생각이 났다. 누님은 내게 있어서 말하자면 둘째 엄마이기도 했고 내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누님에게 가끔 못된 장난을 치기도 했다 소풍을 가던 어느 날 나는 개구리를 몇 마리 잡아다가 누님 책상 서랍에 몰래 넣어 두었다. 누님이 서랍을 열자 개구리들이 누님의 얼굴로 뛰어 올랐다. 누님은 비명을 지르고 까무라쳤다. 사내아이들은 개구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기 대문에 나는 누님이 개구리를 보고 그렇게까지 큰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두가 누님 곁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 나는 <여자들은 겁도 많지!> 하고 생각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누님은 내 장난을 나무라지 않고 용서해 주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벌을 주셨는데, 요가하는 모양으로 벽을 향해 앉아 반 시간 동안을 꼼짝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이런 엄한 벌을 내게 주시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누님이 말씀 드려 내 벌이 10분으로 줄었다.

나는 어렸을 적에 탐정소설을 탐독했다. 그 결과 무서워서 혼자 잠을 자지 못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님에게 내가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해 주거나 무슨 노래를 불러 달라고 청하곤 했다. 누님은 불평 없이 내가 해 달라는 대로 했다. 누님이 곁에 있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안정과 평화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 대신 나도 누님에게 할 수 있는 잔심부름은 무엇이든지 해 주었다. 그러나 내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늘 신중한 일은 못되었다.

오래 전에 내려오는 풍습을 따라 누님은 어느 날 자기 약혼자와 장래의 시부모를 초청해서 자신이 요리한 식사를 대접했다. 누님의 요리 솜씨는 일품이었다. 그런데 내게 도와 달라고 청한 것이 잘못이었다. 나는 어떻게 누님을 곯려 줄까 하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미래의 매부 몫의 음식에 소금, 후추가루, 고추가루 등을 몰래 쳤다. 식탁에서는 극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그가 국 한 숟갈을 삼키자 얼굴이 시뻘개져서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신나게 웃으면서 “많이 드세요” 하고 매형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국을 못 먹게 만들었다는 것을 이내 알아 차렸다. 누님도 얼굴이 빨개져서 실례한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 즉시 은은한 노기가 무섭게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식사 때나 손님 앞에서는 절대로 아이를 나무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연덕스럽게 식사를 계속했다. 내 장래 매형은 내가 짓궂게 청하는 바람에 누님을 위로하러 부엌으로 나갔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버릇 없는 아들을 둔 것이 얼마나 죄스러운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손님들에게 내 장안을 용서해 달라고 빌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여현역 앞에 있는 식당에 가서 손님들에게 식사를 대접하셨고, 그 동안 나는 집에 남아서 벌을 섰다.

결혼한 뒤에 누님은 나보고 자기 약혼자에게 장난을 친 것이 고맙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그 약혼자가 누님에게 몹시 다정한 거동을 보여주고 정다운 말을 해 주어서 생전 잊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누님은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태오야, 네가 나한테 장난을 치는 건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다. 그래서 나는 네 짓궂은 장난이 성공했을 때, 네가 좋아하고 만족해 하는 것을 보면 나는 언제나 기쁘다.”

이 추억을 회상하며 나는 즐겁게 웃었다.

저녁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만과(밤 기도)를 올리던 생각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내 어머니께서는 남이 보기엔 평범한 어머니 중의 평범한 어머니셨다. 서울에서 개성으로 시집 와 촌에서 고생만 실컷 하신 평범하고 조용한 분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 중에서 단 한 분 뿐인 위대한 어머니셨다. 우리들은 누구나가 다 어머니의 아들 딸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우리들 마음의 고향인 것이다. 우리에게 같은 행복을 여러 번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다시 돌려 줄 수는 없다. 이처럼 어머니는 하느님께서 단 한 분 계심 같이 단 한 분 계실 뿐이다. 우리가 가진 단 하나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사랑하려는 애인은 사정에 따라 두 사람도  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갖은 희생을 다 하시는 어머니는 단 한 분 계실 뿐이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어머니의 옛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근 7년의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뚜렷한 모습을 찾기 힘들었으나 내가 어릴 적에 받고 느끼던 어머니의 사랑은 지금도 내 가까이 있는 듯 느껴졌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으레 만과의 묵주신공을 선창하시던 모습을 회상하게 된다. 그 밖에 밤 늦게까지 탐정소설을 읽고 나면 어머니께서 성수(聖水)를 뿌려야만 잠을 잘 수 있던 일이며, 여러 가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으나 그 중에 다음 세 가지만은 잊을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잘 알 수 없는 병으로 6 개월이나 병석에서 고생하시다가 이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웬일인지 곁에만 있고 싶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는 그래도 집안에서 간단한 일을 하실 수 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부엌에 불을 때고 계셨다. 내가 부엌에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입 속으로 무슨 기도문을 외우고 계셨다. 항상 하시는 묵주신공이려니 생각했으나 그날 따라 손에 묵주를 갖고 계시지 않으셨다.

“엄마, 묵주 없이 묵주신공을 할 수 있나? 어디다 묵주를 둿어? 내 찾아다 줄께.”

“태오야, 고맙다. 지금 난 묵주신공을 하고 있는게 아니야. 이렇게 불을 피우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니 불길 없는 내 약한 신앙(信仰)이 부끄러워 이 불길과 같은 신앙의 불꽃을 달라고 천주님께 기구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그때 어머니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했으나 그날 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씀을 큰 글씨로 일기장에 써 놓았다.

신앙의 불꽃 이야기 외에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방을 걸레로 닦으시며,

“주여, 내 마음을 이처럼 조찰케 해 주소서. 내 마음을 닦아 주시고 흐트러진 이 마음에 질서를 주시며 내 영혼을 거룩하게 해 주소서.” 하셨던 이 말씀도 잊지 않고 귀담아 들었고 또 일기장에 써 두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있었던 다음 이야기는 위의 두 가지 하신 말씀과 함께 늘 내 마음에 살아 있는 생생한 추억이다.

어느 비 오던 날, 철 없이 조무래기 친구들을 집에 불러다가 어머니 병실 옆방에서 떠들며 놀고 있었다. 그때 집에 와서 어머니 병환을 간호해 주고 있던 시집간 둘째 누나가 나를 불러 어머니께서는 지금 정양을 필요로 하니 밖에 나가 놀지 않으려면 조용히 하라고 나를 타일렀다.  작은 누나의 이 말을 들으신 어머니는 누나를 불로 놓고 잔잔하게 말씀하셨다.

“아가야, 아이들을 그냥 떠들게 내버려 두려무나. 오래 전부터 이렇게 조용히 방안에 누워 있기만 하니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구나. 죄 없고 천진난만한 저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라도 듣고 있으니까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 같은 것을 느끼겠구나.”

그때 어머니의 이 말씀을 듣고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어머니께서는 누나의 말처럼 정양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철 없는 우리 어린 것들의 마음에 흠 함 점 남겨 주지 않으시려고 우리들의 떠드는 소리를 들으시고도 삶의 기쁨을 갖는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들의 떠드는 소리를 들으시고 필연코 어머니는 고통스러웠을 것이지만 우리들 어린이들의 기쁨을 깨뜨리지 않으시려고 괴로움을 참으셨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또 그 일에 대해 긴 일기를 썼다.

 

어머니께서는 하느님 품으로 떠나 가시던 날, 나는 어머니의 병세에 대한 이상한 예감이 들어 친구들과 병정놀이를 하다가 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방학 중이라 매일 들에 나가 친구들과 병정놀이 하는 것이 일과였다. 집에 들어오니 집안은 텅 비어 있었고 어머니만이 홀로 방안에 누워 계셨다.

“엄마, 오늘은 좀 어때?”

“태오니, 응, 오늘은 많이 나은 것 같다.”

“엄마, 병에서 빨리 일어나 병정놀이 하다가 걱정이 되어 집으로 뛰어왔어.”

“태오야, 다 천주님의 뜻이란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푸른 잔디밭에 누워 어머니를 회상하던 나는 어머니의 그 따스한 손의 생기를 또다시 느끼는 듯했다.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계속하셨다.

“태오야, 오늘도 즐겁게 잘 놀았니?”

“응, 오늘은 대대장인 원순이가 나를 소대장으로 진급을 시켜 줬어.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내가 병정놀이를 제일 잘 한다고 칭찬을 했어.”

“장한 일이다. 그런데 양복 무릎이 해졌구나. 병이 아니면 새 양복을 한 벌 사 줄 수 있을 텐데..”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양복 무릎이 해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 입은 지 1주일도 안 되는 양복바지 무릎이 해져 있는 데 대한 죄의식 같은 것을 느끼고, 어머니한테도 심히 미안스러웠다.

“엄마, 용서해 줘. 사실은 병정놀이 하면서 무릎으로 많이 기어 다녔어. 앞으로는 조심할게.”

“아니다. 태오야, 그런 거이 아니다. 마음껏 즐겁게 놀아라. 나는 네가 나이에 비해 너무 의젓하게 얌전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단다. 모든 엄마들에게는 자기 아이들의 즐거움이 양복바지 해지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란다. 태오야, 항상 즐겁고 명랑하게 놀면서 현명하게 처신해라. 네 기쁨이 바로 이 엄마의 기쁨이란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를 쳐다보시더니 눈을 감으셨다. 말씀하시기가 피곤하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어머니 곁에 앉은 채 뼈만 남은 어머니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슬픔이 어린 애정 속에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이 아름답고, 자비롭고, 거룩한 어머니의 얼굴! 무한한 자랑과 보람이었던 어머니의 얼굴! 그러나 6개월 간의 병고 끝에 메마르고 메말라 수많은 주름살만이 남아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처음으로 어머니를 위해 흘린 눈물이었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아버지와 같이 찍은 30대의 젊고 행복스러운 어머니를 사진 속에서 바라보며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허무감과 슬픔 속에 흐느껴 울었다. 한참 후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태오야,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다음 아주머니와 누나 말씀 잘 듣고 공경해야 한다. 네 아주머니께서는 워낙 착한 분이니 내 마음이 놓인다마는 특히 어린 조카들을 사랑해야 한다.”

“엄마, 엄마는 안 죽는대. 며칠 전에 아버지한테 엄마 죽는 것이냐구 물었더니 엄마는 내가 대학을 나와 큰 사람이 될 때까지 사실 거라구 말씀하셨는데…”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아무렴, 난 우리 태오가 대학교를 나와 정군이 될 때까지 살 뿐 아니라 더 오래 오래 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땅 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고 천당에서 영원히 살 거야.”

“싫어 난 싫어. 엄마 없는 이 세상은 난 싫어. 엄마 천당 가지 말고 우리하고 같이 살어.”

“모든 것이 천주님의 뜻이란다. 태오야.”

“엄마를 천당으로 데려가는 천주님이 난 싫어.”

“태오야, 천주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나는 너와 너희들을 떠나지만 죽는 것이 아니란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분의 사랑 속에 영원히 산단다. 너를 위해 항상 갖고 있는 내 사랑을 통해 나는 천당에서 너와 영원히 같이 살 것이다. 우리 태오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나는 천주님께 기구할 것이며 복되고 오랜 이 지상생활 다음에 너는 나를 만나러 천당에 와야 한다. 천당으로 나를…”

“엄마, 내가 없는 천당이 좋아? 엄마는 우리 없는 천당에 혼자 갈 테야?”

“태오야, 태오야,  나 항상 너와 함께 살리라.”

그리고 한 동안 어머니도 우셨고 나도 울었다. 그날 밤 어머니의 병세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하여 동네 몇몇 교우들이 모여 들었다. 우리들은 어머니 곁에서 조용히 기구를 올리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시선이 흐린 눈으로 우리를 한 번 돌아 보셨고 어머니 곁에 앉아 있던 내 손을 한 번 만져 보신 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움직임이었다. 그 후 한 시간 가량 눈 감고 조용히 계시다가 숨결이 급해졌다가 높아졌다가 서서히 십자가를 두 손에 잡으신 채 숨을 거두셨다.

이와 같이 어머니의 죽음을 회상하고 있던 나는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땅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레 취한 몸가짐으로 찢어진 가슴에선 썩어서 검고 불그스레해진 향기롭지 못한 냄새 나는 피고름이 주르르 흘렀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께서 종부성사를 받으셨던 일과 우리들의 기도 속에 돌아가시던 그 모습 속에서 지금 내 자신이 취해야 할 일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우리들 인간에게는 이 지상 생명을 초월하는 천상적 생명이 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지상적 생명은 유한한 반면에 천상적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이 죽음이란 무(無)나 암흑의 세계가 아니요, 영원한 사랑과 기쁨과 행복만이 있는 천상적 세계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교리 문답 시간에 설명해 주던 천당의 기쁨과 행복을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은 예외 없이 죽는다는 것도 생각했다. 만약 내가 오래 오래 백 살까지 산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좀 더 오래 살다 죽는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인간의 생명이란 참된 뜻에 있어서 잠시 살라 떠나야 할 이 지상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고 죽은 후 우리들이 갖게 될 영원한 이 두 세계 중 하나에 속한다는 것도 알았다. 따라서 이 지상의 생명은 앞으로 있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준비 기간인 동시에 천국이나 지옥을 택해야 할 시련의 기간이란 것도 알았다. 이처럼 죽음이란 우리들을 복된 천국이 아니면 불행한 지옥으로 인도하는 문이란 것을 알았다. 따라서 인생의 참된 행복과 참된 불행은 짧은 이 지상의 생명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 있는 이 두 영원한 세계 속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온갖 영광과 명예를 누렸다 하자. 그러나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지옥으로 가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행한 일일 것이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남들의 눈에는 불행한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불쌍하게 살았다 해도 죽은 후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지상에 있을 때 전력을 다하여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잘 산다는 것, 즉 그것은 주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 자상의 생명은 죽은 후에 있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시련 속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이 시간의 매듭마다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흠숭하며 따라서 영원하고 복된 천상적인 생명을 찾아 얻을 줄 알아야 할 천주교 신자임을 자각했다. 이어서,

<사람은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났느니라> 라는 교리문답의 첫 구절이 내 귀를 후려 갈겼다. 그리고,

<네 주 성부를 만유 위에 사랑하며 공경하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의(義)를 찾으라>라는 성경 말씀도 내 귀를 두드렸다.

너무나도 갑자기 죽음의 사자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고 격분한 나머지 나 자신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에게는 죽음이란 하나의 무(무)도, 끝도 아니며 또 허무와 암흑도 아니다. 그것은 간호장교의 말대로 비로소 시작되는, 우리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던 하느님 곁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영원하고 복된 천상적 생명의 첫 출발인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죽지 않고서는 천상 성부를 뵈옵지 못한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죽음이란 하느님의 품에 안겨 영복을 누릴 수 있는 경사스러운 일이란 것을 나는 믿었다. 그때 나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한 사람이었던 김 수병의 권유로 다섯 번 이상이나 읽어 본 신약성경 구절이 환히 내 마음 속에 떠오름을 느꼈다. 이상한 일은 다섯 번 이상이나 읽어봐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했던 성경 구절이 마치 내가 일부러 외우기나 했던 것처럼, 구절 하나 하나가 내 머리 속에 떠올라 왔다.

<하느님께선 이 세상을 무척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독생성자까지 주사 저를 믿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멸망치 아니하고 오직 영생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을 죄로 판단하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세상이 저로 하여금 구원함을 받기 위함이니라.>

<나는 부활이요,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었을지라도 살아날 것이다.>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지 않고서는 아무도 성부께 나아가지 못하느니라.?

<나는 양우리의 문이니 만일 나를 말미암아 들어오면 구령할 것이니라.>

이외에도 예수님께서 영적을 행하신 일, 예수님이 하느님의 독생성자로 이 세상의 구세주로서 오셨음을 믿는 소경들이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다니고, 나창 든 자들이 나았고, 죽은 사람들마저 부활하고, 도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받은 가지가지의 성경 말씀이 내 마음 안에 샘솟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 자신이 천국과 지옥이란 영원성을 갖고 있는 두 세계의 분기점에 서 있는 것을 알았다. 영원한 구령과 영원한 멸망의 이 두 세계 중 하나를 불원간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 가만히 풀밭에 앉아 있을 수만 없었다. 풀밭 위에 상처로 뻣뻣해진 다리를 굽혀 무릎을 꿇고 나는 주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그렇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고 우리의 철저한 신앙이 우리를 예수님께 나아가게 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아니하고 영복 속에 영생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이며 내 부활 자체이시다.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났고,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구속적 죽음을 통해 내 영혼을 구제받은 것이다. 나는 길이며 진리며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나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사업과 예수님의 구속적 사업에 대한 내 신앙 고백을 하기 위해 사도신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선 세수하듯 늘 조과(아침기도)를 올렸고, 저녁에 밭에서 돌아와 손발을 씻는 것을 잊지 않듯 저녁신공을 했고, 또 하루 세 때 밥 먹듯 올리던 삼종기도(아침, 점심, 저녁에 하는 간단한 기도문)를 통해 사도신경쯤이야 잘 외우고 있었건만 군에 입대한 이래 신상생활 간소화를 실천하며 한 번도 공식적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외울 리 만무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나는 대로 사도신경을 외웠다.

<천주님, 나는 천주님께서 존재하심을 믿으며 천주님께서는 전능 전선하시며 이 우주의 창조자이심을 나는 굳이 믿습니다. 천주님께서는 단 한 분 계시며 당신 밖엔 또 다른 천주가 존재치 않음을 믿습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독생성자를 보내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성모 마리아께 낳으심을 믿으며 죄스러운 인류의 구속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 죄인들 사이에 계시는 단 한 분의 구속의 중개자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죽을지라도 살아남을 믿습니다. 당신은 사랑이시며 우리들이 우리 주 예수님 안에 영원히 살 것을 당신께서 바라고 계심을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끝날 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사,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성신을 믿으며, 그리고 거룩하고 공번 되고 사도로조차 내려오는 교회를 믿으며, 성인의 통공 함을 믿으며, 죄의 사람을 믿으며, 이 다음에 우리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신경을 외우고 나니 주 예수님께 대한 신앙 속에 죽음으로 영생할 수 있다는 희망이 내 마음 안에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엔 잠자고 있던 내 신앙의 갑작스러운 자각을 사정 없이 내리 짓밟는 무서운 힘이 내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아, 조용히 가만히 나를 찾아준 이 어진 신앙의 소리를 마구 후려 갈기는 저주스러운 마귀의 억센 힘! 그때 내 마음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은 인간의 선행과 악행을 사정 없이 저울질하며 정의와 법 앞에 추호의 사랑도 자비도 없는 엄하고 냉혹한 심판관처럼 보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애정과 동정과 이해와 자비 없는 정의일 것이다. 인간은 남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먼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배반한 아담과 하와를 벌하시기 전에 그들을 먼저 사랑하셨고, 요한 사도께서 <추리가 하느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음 과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의 선과 악을 저울질하기 전에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천당에 보내고 우리의 악행은 우리를 지옥으로 보낸다는 기초적 교리 지식 앞에 지금까지 내 나이 스무 살이 되도록 저질러 온 죄의 양과 질을 생각할 때, 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에 앞서 하느님의 노하심을 무서워했던 것이다.

“아,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던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그 길이 좋으매, 그리로 들어가는 자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도 험해 그리로 들어가는 자 적도다.>

시 성경 말씀을 적어도 몇 번 읽어 봤으련만 나는 그 때 이 성경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신앙생활 간소화가 내게 약속한 구령은 지금 어디 있으며 나는 왜 이와 같이 죄 앞에 떨고 있는가? 예수님의 이름 하나를 부름으로써 구령할 수 있다던 종전의 내 신앙은 왜 죽음 앞에 나를 이처럼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가? 신앙생활 간소화로부터 누린 내 자유와 행복은 진정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했을까? 진정 내가 어제까지 행복했다면 어제의 행복이 왜 오늘의 불안과 슬픔과 공포의 원인이 되고 있을까? 신앙생활 간소화가 내게 약속한 자유와 행복은 하나의 방종의 소산이 아니었던가? 자유와 행복은 방종의 소산이 아니며 방종은 성경에서 말하는 그 넓은 문이 아니었을까? 신앙생활 간소화? 그것은 진리의 표준과 내 신앙생활의 기준을 무시하고 내 멋대로의 취미와 기분에 맞는 성경 해석을 하며 내 행동상의 방종한 자유를 가지려 했던 약삭빠른 계산이 아니었던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타락한 인간은 선행으로 우리의 영혼을 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행마저 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만으로 구령할 수 있다는 원칙 하에 내 죄의 결과적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고 이런 일 정도야 상관 없겠지, 저런 일쯤이야 누구나가 다 하는 일이니 난도 해도 무방할 것이고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해 볼 만하다는 약아 빠진 그릇된 계산이 결국 내 신앙생활 간소화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성경을 내 마음대로 해석한다? 내 취미대로 교리적 신앙과 윤리 원칙을 새로 만든다? 남의 말을 올바로 해석한다는 것, 그것은 말한 주인의 뜻대로 알아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과연 성경을 읽고 해석했을 때 주 예수님의 뜻대로 했을까? 나는 주 예수님 자신도 아니다. 또 예수님을 3년 간 모시고 다니던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도 아니다. 성경을 쓴 사람도 물론 아니다. 그런데 나는 무엇에 기준을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내 멋대로 해석했을까? 내 신앙 양심에? 만일 내 개인의 신앙 양심만 이 성경의 말씀을 알아듣고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라면 내 신앙 양심은 절대로 그르칠 수 없는 하느님적 양심이라고 볼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양심은 하느님의 소리라고 말한 철인들도 허다했으나 내 개인의 경험으로 보면 내 신앙생활 간소화의 양심의 소리는 하느님의 소리가 아니었다.

<천상 성부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들도 완전한 자 되어라.>

이 성경 말씀이 하느님의 소리일진대 과연 나는 신앙생활 간소화를 통해 하느님의 이 말씀을 실천했을까? 그리고 나는 천국의 창조자도 아니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죽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내 멋대로 천국을 생각했고 또 내 환상대로 천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약속하신 천국은 하나일진대 만일 내가 건설한 천국이 하느님의 천국과 일치되지 않는 경우, 내 천국은 하나의 허위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멸망 자체가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약속한 천국을 얻기 위해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또 믿으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천국의 길을 걸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천국의 길을 걸어왔을까? <나는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며 또 빛이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나는 과연 따랐는가? 인류 구원의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며, 빛이신 예수님께서 천국으로부터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들에게 천국의 길을 열어 주시고 가르쳐 주신 이상 우리는 그 길을 택하고 걸어가지 않고서는 천국에 도달하지 못할 것 만은 사실이었다.

주 예수님께서 만인을 위해 남겨 주신 이 구원의 길을 나는 택했어야만 했을 것이고 또 그 길을 걸어 왔어야만 했을 텐데… 그러면 그 구원의 길이 무엇일까? 그것이 교회일까? 교회란 집단이 과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구원의 길이었을까? 교회가 참말로 언젠가 한 번 들어 본 일이 있는 예수님의 <신비체>일까? 전능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구속사업을 무질서하게 또 무정부적으로 사도들에게 맡겨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적 진리를 보관하고 구속사업을 인계 받은 것이 교회라면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이 많은 교회 중에 과연 어떤 것이 올바른 교회일까? 이 많은 교회가 다 올바른 교회며 진리라 하면 왜 진리가 서로 갈라져 네가 틀렸느니 내가 옳으니 하고 있을까? 두 개의 대립된 진리 중의 하나는 필연코 거짓일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개의 사실이 진리라면 이 두 개의 사실이 서로 대립되어서는 안 되면 합일해야만 할 텐데 대립된 현재의 이 사실은 그 중 하나가 그릇된 것임을 알리는 것이 아닐까?

이 많은 그리스도 교파 중에서 어느 한 교회도 예수님께서 세우신 절대적 참된 교회의 후계자 구실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들이 서로 대립되고 옳고 그릇됨을 따지면 싸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많은 교회 중에 예수님께서 세워 놓으신 참된 교회에 보다 가깝고 예수님의 진리에 보다 더 성실한 교회가 하나 있을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많은 그리스도 교회가 똑같은 분량의 성실성을 갖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에 그렇다면 거기엔 평등이 있을 것이고, 평등이 있는 곳엔 평화와 사랑과 대립 없는 통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 대신에 미움이 있고 평화 대신에 혼란이 있고 통일 대신에 대립이 있는 이 여러 그리스도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 거기엔 반드시 장단의 차와 진가(眞價)의 차이가 있을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시인하면 과연 이 많은 교회 중에서 어느 교회가 더 참되고 더 성실한 교회일까? 이 많은 교회를 두 개로 대별해서 프로테스탄 교파들과 가톨릭 교회로 나누어 보자. 그러면 내 친구 김 수병이 말한 것처럼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는 루터란 사람이 개혁한 예수교파들이 천주교회보다 더 진실되고 성실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이어받은 교회일까? 만일 예수교가 참되다고 인정 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4억여(1945년에 추산된 숫자)의 천주교 신자들은 과연 더 큰 잘못을 포함하고 있는 진리를 믿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2천 년 간 수 없이 많은 신부, 수사, 수녀들이 자칫하면 자기들의 영혼마저 잃어 버릴 위험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는 동정(童貞) 생활이라는 모험을 해 가며 지켜 온 이 교회가 그릇된 교회라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 신부, 수사, 수녀들은 진실이 아닌 허위를 믿고 그들의 청춘을 희생했다고 볼 수 있을까? 스무 살의 내 청춘의 생리적 경험으로 봐서 동정생활이 얼마나 힘든지를 얼마간 짐작할 수 있는데 2천년 간의 전통적 경험을 갖고 있는 그들의 동정생활은 진리에 대한 보다 확실한 증거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의 이념이나 신앙을 위해 자기 몸을 바친다는 것!

사람은 회의적(懷疑的)인 것을 위해서는 자기의 몸을 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의 이념이나 신앙의 뚜렷한 대상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 몸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동정생활이란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며 밑져야 본전이란 식의 내 신앙 생활 간소화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망하면 망하고 살면 산다는 양자를 택일해야만 되는 모험생활에서 2천 년 간 청춘을 바쳐 온 수 없는 신부와 수사와 수녀들이 결국 멸망을 위해 자기들의 몸을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허위>란 불원간 자기의 그릇된 본 자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2천년 동안 이 많은 신부와 수사와 수녀들이 속아 살아 왔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수백만의 순교자와 성인, 성녀들이 그릇된 천주교회를 위해 자기들의 단 하나인 생명을 바쳤다고는 볼 수 없다. 2천 년의 긴 역사와 그 동안 내 상상적 숫자를 초월하는 성인, 성녀, 순교자, 동정의 신부, 수사, 수녀, 그리고 또한 셀 수 없이 많은 신자를 갖고 있는 이 천주교회가 남이 뭐라 하든 또 김 수병이 무어라고 비난하든 그래도 다른 예수교회보다는 훨씬 참되고 성실한 교회가 아니겠는가!

당시 아무런 신학적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나는 상식적으로, 물론 논리에 모순이 포함되어 있을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천주교회 안에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어머니의 뒤를 따라야만 되겠고 어머니께서 사랑하시고 믿던 교회 안에서 죽어야만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8장

구원의 빛을 안고

 

1년 여의 마음의 방랑을 끝맺고 나는 친가인 천주교회로 돌아왔다. 그러나 빈 손 들고 친가에 돌아온 내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에 돌아온 사실 하나가 과연 20년 간 내가 범한 죄를 사해 줄 것이며 따라서 나에게 영생의 보증을 줄 것인지를 의심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얼마나 내 과거를 후회했는지 모른다. 만일 내가 고향에서 갖고 있던 신앙생활을 계속해 왔다면 지금쯤 나는 내 죽음을 즐겁게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일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 까도 생각하며 이 세상에 삶을 가진 것을 몹시 슬퍼했다. 그러자 나는 다음과 같은 절망의 소리를 마음 속으로부터 듣기 시작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 내 말을 준행치 않느냐?> 란 말씀에 뒤따라 <무릇, 내게로 오는 자 내 말을 듣고 내 말을 준행할지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무릇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당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을 봉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리라> 전에 많은 이가 내게 와 말하되, <주여 우리들이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영적을 행하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리니 그때 나 저들에게 이르되 <나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니 악을 행하는 자 나에게서 물러가라.>

성경을 읽을 때 나는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하느님을 입으로 공경하되 너희들의 마음과 행동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있도다>라고 말씀하시며 바리사이들의 위선적 신앙생활을 나무라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신앙생활 간소화를 실천한 내 신앙생활이 바리사이의 위선적 신앙생활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만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예수님을 본받아야만 했을 나는…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 오고 있었을까?

<너희들은 인자가 어느 때에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으라> 라는 성경 말씀에 왜 진작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까? 남의 집 잔치에 초대받아 집을 비운 주인이 늦게 돌아올 것이라고 약삭빠르게 계산한 후 친구들을 불러 술상을 차여 놓고 마시고 놀다가 뜻하지 않은 때에 돌아온 주인에게 꾸중을 듣고 내쫓겨 바깥 어두운 곳에서 후회의 통곡을 하던 성경의 악한 종의 생활이 바로 내 생활과 내 운명이 되지나 않으려는지? 기름 없는 등만 갖고 신랑을 기다리며 잠만 자다가 아닌 밤중에 돌아온 신랑마저 잃고 어둠 속에 쫓겨난 다섯 명의 미련하고 게으른 성경의 처녀들의 생활 태도가 바로 내 생활 태도가 아니었을까?

<나 진실히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 너희들을 모르노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는 사형선고!

<앙화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악신을 위해 예비한 영원한 불로 가라. 왜냐하면 내가 배 고플 때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집에 대접치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나를 입히지 않았고, 내가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찾아 주지 않은 연고니라… 나 진실히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이 적은 자 중 하나에게 아니 베풀어 줄 때마다 곧 내게 아니 베풀어 줌이니라.>

20년 간 이 세상에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내가 만나고 접촉한 이 모든 사람을 나는 진정 예수님처럼 섬겨 주었는가?

<나 진실히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나 너희들을 모르노라. 앙화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를 위해 마련한 영원한 불로 가라.>

아, 나는 구원에 대한 희망 없는 추상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자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 불쌍한 죄인들의 사정에 추호의 동정을 모르는 지극히 냉정하고 엄정한 심판관과 같은 하느님의 모습…

죽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고 따라서 나는 내 영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아직 완전히 빼앗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심에 이 죄스러운 몸을 던지고 영원히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 손가락을 여러 번 겹쳐 세어 봐도 한없이 한없이 꼬리를 뽑고 달아나는 내 죄상의 번수와 중량은 내 구원에 대한 희망을 발기발기 찢기 시작했다. 고향에 있을 때나 군대에서 신앙생활 간소화를 실천하던 지난 날에도 그다지 악스럽고 흉측하고 난잡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자신하며 살아 왔으나 지금 죽음의 막바지에서 내 20년 간의 지상생활을 모두 청산하려 하니 지난 날의 내 생활 하나 하나가 죄와 관련을 맺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보였다.

<나 진실히 네게 말하노니 나 너를 도무지 모르노라>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노와 나의 이 죄상!

이미 영생의 희망 없이 기울어진 선행과 악행의 저울질!

<나 너를 진실로 모르노라.>

실망! 완전한 실망! 아! 실망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것은 허허 바다에서 파선되어 한 쪽의 나무 조각에 육중한 몸을 의지하고 실날 같은 요행을 바라는 선부(船夫)의 심정보다 더 비참한 것이었다. 실망이란 앞이 딱 막혀 버린 끝이며, 무이며, 죽음 바로 그것이다.

마음이 상하고 불만스러울 땐 막걸리 한 잔으로 자위되었고 격분하고 화나고 억울할 때 미친 짓 한 번 하면 마음이 한결 후련했다. 슬픔은 울음으로 위안이 되었고, 외로울 땐 앞날에 대한 향긋한 희망 속에 고독한 시간을 참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망에는 만약(萬藥)이 무효다. 그때 나는 문득 생각했다.

“격분이나 슬픔이나 외로움이란 건 아직도 여유 있는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감정이다” 하고.

나는 내가 아무리 고약한 놈이었다 한들, 또 내 죄가 아무리 무겁다 한들, 내가 죽기 전까지 내게 남아 있는 이 얼마만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기로 했다. 하여튼 나는 주 안에 사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죄의 종류를 따라 그 번 수를 꼽아 보던 손을 합장하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십이단(열두 가지 기도문), 만과, 조과, 삼종기도 등 몇 가지 기도문을 생각나는 대로 소리 내어 외웠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기 위해선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기도를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나는 십이단, 만과, 조과, 삼종기도 등 몇 가지 기도만을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러 가지 기도문 중에서 특히,

<나 그윽한 곳에서 당신에게 부르짖으니 주여 내 소리를 굽어 들어 주소서. 주여 만일 내 죄를 헤아리면 뉘 능히 당하리이까?> 라는 만과의 구약성경 시편 기도문이 내 마음에 들었고, 그 외에도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으며…> 라는 사도신경의 한 구절이 머리에 떠올라 또  하나의 커다란 힘을 얻었다. 죽음 앞에 나선 나 자신은 내 죄의 수와 양을 생각했을 때 나는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내 죄를 걸머지고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하느님께 내 사정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의 힘을 바라고 찾던 중이었다. 지난 날에는 남에게 기도를 부탁한다든가 또는 남을 위해 기도를 한다든가 를 일체 무시했었다. 또 성인 공경을 우상시까지 한 일이 있으나 지금 나는 내가 무시했던 기도의 힘과 우상시했던 성인의 통공의 신비를 깨닫고 있었다. 이미 천상에서 영복을 누리고 있는 뭇 성인 성녀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며 하느님께 내 사정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차츰 차츰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천상에 잇는 성인 성녀들은 지상에 남아 있는 죄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ㅐㄴ가 알고 있는 여러 명의 성인 성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들께 나를 위한 기도를 부탁 드렸다.

같은 기도문이 한 번 두 번 아마도 수십 번 거듭되는 동안에 여름철의 긴 하루 해는 쉴 새 없이 달려 갔다. 어느 새 내 곁에서 생을 즐기며 노래하던 산새들은 짝지어 사랑의 보금자리를 찾아 저마다 가 버렸다. 우거진 나무숲 사이를 뚫고 들어와 썩어가는 내 몸을 덮어 주던 몇 가닥의 석양의 광선마저 저녁 잠자리를 마련하러 간지 이미 오랜 듯 하늘로 추켜들은 내 열 손가락 끝에는 밤 찬 이슬이 서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다. 나는 기도문의 한 구절에 내 온 몸과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마치 그토록 사랑하던 애인이나 찾아 만난 듯 흥분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해 빌으소서..>

광막한 사막에서 갈증 난 나그네가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이 성모송의 몇 마디 기도문에서 마구 치솟는 희망의 샘물을 나는 마시고 또 마시며 갈증 난 내 구원에 대한 희망에 활기를 부어 주었다.

전에는 성모님 공경마저 우상시하던 나는 지금 성모님을 주 예수님과 죄인인 나 사이에 적절한 중개자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Fiat>(네 말씀과 같이 내게 이루어 지이다)로 말미암아 인류 구원의 새 역사의 아침이 밝았고 원죄(原罪) 이래 전인류의 구원의 희망이던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는가! 그분은 또한 하느님이신 인간 예수님을 기르시고 사랑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까지 예수님을 따라 다니셨다. 이러한 성모님께서는 죄인들의 기도의 전달자로서 예수님께 얼마든지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말을 배우기 시작하자 어머니 무릎에서 성호 긋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배운 이 성모송을 그때가지 나는 적어도 수백 번 수천 번 외워 왔을 거이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께서 얼마나 우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지를 나는 몰랐었다. 또한 이 성모송이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힘과 위안을 주는지를 전연 모르고 그저 습관적으로 성모송을 입 놀려 왔을 뿐이다. 성모 마리아는 성모덕서도문(성모 마리아를 찬미하는 기도문)에 있는 대로 주님의 참된 어머니이기에 능하신 동정녀였다. 그분은 죄인들을 위한 자비의 어머니이시며 우리들 죄인들의 희망의 원인이시며 또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병든 자의 나음이시기도 했다.

이와 같이 생각나는 대로 성모덕서도문을 소리 내어 외우고 있었다.

우리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항상 기도하시는 성모 마리아! 천주의 성모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까지 우리 죄인을 위해 천주님께 기도해 주소서. 천주님 앞에 불원간 빈 손 들고 나서야 할 죄스러운 나는 성모송의 이 몇 마디 기도문에 구원의 희망을 걸고, 억누르는 죄의 무게로 인한 절망에 대결하여 나는 혈투하고 있었다. 나는 억압하는 절망을 밀치고 또 그로부터 얻어맞기를 수십 번!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마지막 분계선에서 살아야겠다는 유일한 욕심을 품고 절망이란 마귀의 억센 손에 얻어 맞아 수없이 엎어지면서도 나는 성모님의 자비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 붙었던 것이다. 자모이신 성모님께 나아가는 자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을 받는다는 철저한 신앙이 내 마음에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다 밀물처럼 밀려 오는 주 예수님의 성총의 힘은 그처럼 지독하게 나를 괴롭히던 절망이란 마귀의 힘을 집어 삼키고 말았다. 죽음을 멀리 물리치고 머리 않아 주 안에 영원한 천상의 생명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내가 그처럼 저주하고 무서워하던 죽음도 이젠 저주스럽지도 무섭지도 않은 존재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멸망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선선한 저녁바람에 쏘이며 말리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선행과 악행을 저울질만 하시는 의(義)의 심판관이 이미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이신 성신을 보내시어 당신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는 자애 깊은 사랑의 아버지이셨다. 집 떠난 탕자가(루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 집을 찾아오기 전에 먼저 그를 기다리고 계시던 그 아버지는 아흔아홉 가지의 온갖 천상적 영광을 버리고 오직 한 마리의 어리석고 길 잃은 양인 나를 찾아오신 착한 목자 예수님이시기도 했다.

<성한 자는 의사가 요긴치 아니하되 오직 병든 자만이 의사를 필요로 하니 나는 의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지 않았고 오직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결국 나는 내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부터 쫓겨나 내 영혼을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의 강생 구속의 은혜를 입고 살아야 할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죄로 심판하러 오시지 않으셨고 오직 나에게 복된 천상적 영생을 주시러 오셨던 것이다.

<나는 죄인을 부르기 위해 이 세상에 왔노라.>

병든 자, 가난한 자, 마귀에 붙들린 자, 죄인들의 벗이라고까지 유태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으시던 예수님께서는 이 죄스러운 나를 버리시지 않으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자기의 죄를 알아 뉘우치며 <주여 당신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생각해 주소서>라고 한 당신 옆 십자가에서 죽어가던 강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사 그를 데리고 천당에 같이 가신 예수님이 아니었던가. 그분은 지금 땅 위에 두 무릎을 꿇고 죄를 마음 깊이 뉘우치며 땀 흘리고 있는 나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그 강도처럼 천국으로 데려가 주시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물론 나는 빈 손 들고 하느님 앞에 나설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를 천국으로부터 내쫓지 않으시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죄스러운 내 영혼을 구령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내가 1년여 전에 떠났던 교회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치심을 겸손 되이 따라 살아가겠다는 내 회심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너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광야의 소리 요한 세자의 말씀에 이어,

<너희들은 회개하라. 대저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란 말을 통해 3년 간의 복음생활을 시작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천국을 얻기 위해 우리 죄인들이 할 바는 우리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께 돌아가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만일 회개치 않으면 망하리라.>

나는 지금까지 내가 범한 온갖 죄를 인정했고 또 내 죄에 대해 마음 아파했다. 나는 내가 떠났던 교회에 다시 돌아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실행할 것을 굳이 내 마음 속에 다짐했다.

앞으로 며칠 동안, 혹은 몇 달, 몇 년이 될지도 모를 내 지상 생명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따라 내 두 발로 용감히 또 성실히 내 구원의 길을 걷기로 했다. 하여튼 나는 살아났다고 확신했다. 죽음에서 해방되었다고 확신했다.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나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 너를 정녕 모르노라>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벌써 컴컴하고 촉촉히 젖는 산 숲을 헤치며 내려오는 내 벗은 때묻은 발은 밤 이슬에 말갛게 씻어지고 있었다. 나무 다리를 어깨에 메고 산을 내려오는 내 모습은 방금 죽음과 싸워 이긴 한 사나이의 장한 모습 그것이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나 슬픔 따위는 이미 내게서 멀리 사라져 갔다. 주의 부르심을 언제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나는 갖고 있었다.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신앙을 갖고 내게 주어진 죽음을 사양 없이 받는다는 것은 나를 영원한 천상적 생명에 인도하는 길이었고 또 부활을 뜻한다고도 생각했다. 사람이 일단 죽어서 부활하지 않고서는 아무나 영원한 천상적 생명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일단 내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죽었고 신앙을 통해 주 예수님께 귀의(歸依)했으니 이는 곧 내 죽음과 부활이었다.

멀리 마산 전선에서 여러 발의 포격의 폭음이 들려 왔으나 이젠 내게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날 밤 병원 입원 이래 처음으로 깊고 편안한 잠을 잤다. 다음날 조용히 어제 내게 일어났던 일을 하나 하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을 때 나는 이미 외로운 사람도 슬픈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절망 속에 사는 사람도 아니었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내 20년 간의 생애는 불행의 연쇄처럼 부였고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외롭고 불행한 사람이 나인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불쌍하고 외롭고 남의 동정과 사랑과 기도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내 주위에 상처받고 누워 있는 부상병들인 것을 알았다.

왜 나를 제외한 다른 부상병들이 나보다 더 불행하고 불쌍할까? 왜냐하면 오늘 저녁 해가 서산 너머로 졌다가 내일 아침 동쪽 산 위에 다시 뜰 것이 확실한 것처럼 내게는 신앙 안에 약속된 영생이라는 행복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 반면에 이 세상에서 나만큼이나 불행한 이 가엾은 부상병들은 내가 믿는 미래의 행복을 과연 믿을는지 의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어떤 사람이 과연 불쌍한 것이며 또 무엇이 불행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불행? 그것은 물질적인 빈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달리 배우지도 못해 천하고 무식한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도 이 세상에서는 하나의 불행이 될지 모른다. 길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아름다운 얼굴과 건강한 육체미를 갖지 못한 것도 말하자면 일종의 불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구의 몸, 병든 몸은 말할 것도 없이 불행한 일이다. 또 보기 흉한 몸 모양을 한 사람도 불행일 것이다. 영광스러운 명예나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것도 경우에 따라 불행일 수도 있다. 남의 욕이나 무시나 경우에 따라선 빼터를 얻어 맞고 배고픈 졸병이 된 것도 불행이라 할 수 있다. 뜨거운 사랑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 흐지부지하게 청춘을 보내고 노경에 임박한 사람도 그들의 향기 없는 추억과 고독 속에 불행할지 모른다. 연애에 실패한 사람도 불행할 것이고 청춘의 힘을 무질서하게 남용한 사람도 어쩌면 그들의 후회나 가책 속에 불행할 것이다. 자기가 꿈꾸며 바라던 아내나 남편을 만나지 못해 불만스러운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자신들을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남달리 아름다운 젊은 아내 때문에 고민이 많은 남편이나, 사람은 잘났는데 불성실한 남편 때문에 걱정이 많은 아내도 불행할 것이다. 자녀를 못 가진 사람도 불행할 것이고, 자녀를 너무 많이 가진 사람도 불행할 수 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불행하고, 영전은 고사하고 운이 나빠 좌천을 당한 사람도 불행할 것이다. 부모를 일찍 잃은 사람도 불행할 것이다. 귀여운 자식을 잃은 부모들도 불행할 거이다. 젊고 아름답고 또 정들고 사랑스럽던 아니나 남편을 잃은 홀아비나 과부도 불행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전쟁으로 인해 죽은 이도, 또 상처받은 이도 불행한 사람들인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일시적 실수로 말미암아 감옥에서 콩밥을 먹고 있는 사람도 불행한 사람들 속에 물론 낄 것이다.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불행이 이 세상에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위에서 말한 사람들만이 진정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이 불행 하다는 것은 물론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만이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엔 그들이 불행보다 더 지독한 불행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들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들보다 더 불행한 것, 그것은 하느님 없는 한 영혼,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구속적(救贖的) 사랑을 모르거나 또는 거부하거나 혹은 아랑곳하지 않고 막 사는 사람의 영혼만큼 더 불쌍하고 불행한 것은 이 세상에서 다시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왜,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지를 모르며 우리들의 생의 시작이며 끝이며 또 만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상태에서 산다는 것은 확실히 불행한 일에 틀림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내세의 영원한 행복과 불행이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천상에 계신 성부를 만유 위에 사랑하고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성부 완전하심 같이 너희들도 완전한 자 되어라. 사람은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났느니라.>

이와 같은 성경 말씀과 교리문답 말이 인간이 할 바 천부적 의무라면 이 의무를 모르거나 무시하거나 경솔하게 취급하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에게 부과된 의무를 알고 완수할 때 인간으로서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갖게 되는 법이다. 만일 인간이 위에 말한 천부적 의무를 모르거나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면 인간은 자기 존재 이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 주위에 누워 있는 이 수 많은 부상병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께 대한 지식이나 사랑이 어느 정도의 넓이와 깊이를 차지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때 마음 아플 정도로 그들이 불쌍하게 여겨졌고 괴로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의 길인 교회 밖에 잇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능하신 하느님께선 사람을 구원하시는데 우리들 인간의 지능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방법을 갖고 계시는 것이지만 내가 보기엔 하느님을 모르며 지금 죽음 앞에 발버둥치고 있는 이 수많은 부상병의 후세가 극히 염려스러웠다. 이 불쌍한 이들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그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으나 아무런 적당한 답을 얻지 못했었다.

지난날의 내 신앙 간소화 생활을 다시 한 번 조용히 살펴 봤을 때 나는 한 사람의 생각이나 이념이란 것이 그 주체인 인간을 생각대로 또 이념대로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일을 자꾸 생각하면 결국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만일 자기가 올바르게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는 자기가 사는 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나쁘고 옳지 못한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합리화시켜 사람들은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

같은 행동이 한 번 두 번 거듭되고 여러 번 반복될 때 사람은 그 행동의 습관을 갖게 되며 습관은 사람의 제2의 본성으로 되어 버려 자기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자기에게 자연스럽고 옳게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좋고 착한 생각이, 좋고 착한 생활의 시작이며 길이며 안내자가 됨을 신앙생활 간소화를 통해 절실히 경험했다. 그리고 선도 인간이 잘못 이용하면 악이 될 수 있고 반면에 악도 인간이 잘 이용하면 선이 된다는 말의 뜻을 절실히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건강은 하나의 선이며 병은 하나의 악이나, 일상생활을 통해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건강이 항상 선이 되지는 않고 병이 항상 악이 되지도 않는다. 건강을 잘 이용할 때 그것이 선이 되며 건강을 잘못 이용하면 악이 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악이라고 볼 수 있는 병을 잘 이용하면 우리들은 정신면으로 많은 선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내가 받은 이 부상이 준 고통과 죽음의 경험으로 보아 사실인 것이다. 만일 내가 부상당하지 않고 또 죽음이란 것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내 영혼은 위험한 상태에 있을 것이 사실인 것이다. 어쩌면 포탄 파편에 맞아 즉사한 그 친구들처럼 내가 즉사했다고 가상해 보면 죽을 뻔했으나 마 가슴에 받은 이 상처가 그지없이 고맙게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이 상처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사랑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와 복음에 바탕을 둔 신앙대로 참되게 살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의 지능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오묘한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우리들이 악으로부터 받고 있는 이 고통이란 것도 하나의 신비라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도 이 세상을 달리 구속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없애지 않으시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고통을 경험케 하셨다. 거기에는 고통과 구원을 연결하는 신비가 있을 것이다. 즉 예수님의 가난한 일생과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이 삶을 살아가며 고통을 받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고통을 통한 사랑의 가능성을, 고통을 통한 신앙의 가능성을, 고통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당신의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제9장

다시 전선(戰線)으로

 

그 후 나는 영적으로나 마음으로나 조용한 병원생활을 계속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신앙 속에 마음의 안정과 영생에 대한 희망을 나는 갖고 있었다.

8월 하순, 미국을 위시하여 국제 적십자로부터 많은 의료품 원조가 도착했다. 즉시 나는 재수술을 받았다. 이번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마취도 잘 되었고 수술은 잠자는 듯 고통 없이 끝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페니실린이라는 약 이름을 들었다. 바로 이 약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부상병이 생명을 잃었고, 또 이 약이 나를 살려 주었다고 군의관이 내게 말했다. 사실 내 가슴의 상처 자체는 내가 그것으로 인해 죽어야 할 정도로 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약이 없어 제1차 수술 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던 거이고 따라서 썩어 가던 상처는 더 도져 가기만 했던 것이다. 이번의 제2차 수술을 받자 가슴의 피고름은 멎었고 며칠 후 그 자리에는 새 살이 돋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죽기 5분 전> 이라는 별명을 가진 7병동으로부터 요양소로 옮겨졌다.

그 무렵 아군의 전세는 우리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수도 서울을 탈환할 그 때였다. 낙동강에 포진(포진)하고 있던 북한 인민군도 한.미 육군의 공격에 완전히 격퇴되어 일로 후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10월 초순 어느 날 나는 해군 원산 전진기지 창설 부대에 편입하라는 인사 명령을 받았다. 나는 이 인사 조치가 대단히 불만스러웠다. 왜냐하면 아직 가슴의 상처에는 가아제가 붙어 있었고 약 70여일 간의 병원생활에 몸은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후방에서 쉬어야 할 몸이었으며, 사실 나는 병원 퇴원과 함께 후방에서 근무하게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나는 <신앙생활 간소화>를 청산하는 고백성사를 보고자 했고 착실한 신앙생활에 대한 꿈을 기르고 있을 때였다. 그 외에도 훌륭한 항해사가 되기 위해 계속 공부할 것을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또 전선으로 출동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북 땅인 원산으로…

 

그 당시 군대 내에서 <빽>이라는 말이 유행되고 있었다. 빽이란 말은 영어의 <빽그라운드> 라는 <배경>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듯했다. 그 말의 뜻인즉, 고급 장교나 정부 고관이 도와 주어 일선으로 출전하기 않고 후방에서 편히 지내는 군인들을 가리켜 <빽 좋은 사람>아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그러한 배경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심지어는 <누님 빽> 이라는 말도 있었다 자기 집 지위는 천하고 가난해 보잘 것 없어도 권력층으로 시집간 누님의 덕을 <누님 빽>이라고 했다. 나는 이러한 빽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때 나는 이러한 빽의 부당한 인사 행정의 희생물로 어쩌면 남 대신 내가 일선으로 출동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당한 인사 조치에 응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장문의 편지를 병원장에게 남겨 놓고 병원에서 도망 나왔다. 즉 해군을 완전히 이탈하여 전시 하의 군인의 의무를 회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허약한 전상자의 몸이니만큼 이번의 출동 명령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한 달 동안만 정양하고 돌아와 그 때 상부의 지시를 따를 것을 맹세한다는 말도 남겼다.

 

그날 오후 진해 시내에 나가 사복 한 벌을 사서 갈아 입었다. 그리고 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용케도 진해 해군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했으나 부산 입구에 있는 육군 헌병 검문소에서 걸렸다. 헌병은 나에게 신분증명서를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해군이라는 내 신분을 밝힐 만한 아무런 증명서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모르나 내가 해병대 장교라고 가장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육군은 해병대 장병이라면 좀 무서워한다는 말을 들은 일도 있어서 내가 해병대 장교라고 하면 육군 헌병쯤이야 겁을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하다.

“나는 병원에서 퇴원한 해병대 장교인데 지금 볼 일이 있어서 부산으로 가는 중이네.”

나는 검은 색안경을 쓰고 태연히 그 헌병에게 말했다.

“해병대 장교님이시라구요? 그런데 왜 사복차람을 하셨습니까?”

“나는 지금 휴가 중일세. 그리고 모종의 일로 부산으로 가는데 사정상 사복을 입고 있을 뿐일세.”

“좋습니다. 그러나 장교님은 휴가증이나 출장증명서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증명서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 헌병은 내게 당당히 겁도 없이 증명서를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래서 나는 좀 더 그 헌병에게 겁을 주기 위해 협박조로 고함을 쳤다.

“임마, 우리 해병대 장교는 그런 것 안 갖고 다닌다. 증명서라면 내 가슴에 있는 이 상처다.”

그때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도 놀라는 것 같았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조용해졌고 나를 호기심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육군 헌병은 태연했다. 그리고 엄숙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장교님, 떠들지 마십시오. 잠깐 내려갑시다. 나는 장교님의 신원을 조사해야겠습니다.”

“이놈, 신원 조사가 무슨 소리냐? 못된 놈 같으니…”

큰 소리를 또 쳤으나 버스에서 내리라는 그 헌병의 말을 나는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일이 재미 없게 되어가고 있구나 생각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이왕에 일이 잘 안 될 바에야 분풀이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나는 그 헌병을 따라 검문소 안으로 들어갔다. 내 신원이 탄로나 벌을 받게 되는 최악의 경우, 그것은 영창생활이 아니면 일선 출동 밖에 더 되겠느냐 하는 배짱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는 몸집도 크고 험상궂게 생긴 일등상사 계급장을 가슴에 단 헌병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나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내가 해병대 장교인 줄 알면서도 태연히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병원생활에서 야윈 내 몸, 불그스레한 소년의 얼굴 모습인 내 얼굴, 게다가 몸에 잘 맞지도 않는 사복 차림의 내가 아무리 봐도 해병대 장교 같지가 않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날더러 앉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그리고 나는 그 헌병이 무슨 말을 해 올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담배 한 대를 입네 물며 거만한 폼을 내게 말했다.

“귀관이 정말 해병대 장교요?”

“그렇다. 해병 중위 마태오다. 그런데 장교를 취조하는 귀관의 그 태도가 무언가?”

나는 그에게 호령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헌병의 기를 꺽어 일단 가장한 해병 중위라는 내 위신을 살려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자세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점점 그의 두 눈가에는 나를 경멸하는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귀관이 해병대 장교라는 신원이 확인될 때 나는 귀관에게 경의를 표하겠소. 귀관의 신원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내어 보이시오.”

“병원에서 퇴원한 나에게 무슨 그런 증명서가 있겠나? 우리 해병대 장교들은 그런 것 갖고 있지 않다.”

“말마랏! 이 자식 너 도망병이지? 뻔뻔스럽게 장교를 가장한 도망병이지? 이놈의 새끼 배짱도 좋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을 손으로 치며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한 행동에 마음 속에 좀 겁이 생기기 시작했으나 내친 김에 끝까지 나도 가자고 결심했다. 그까짓 것 내가 여기서 신원이 탄로되면 매를 좀 맞을 것이고 해군 헌병대에 인계될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나도 그에게 맞서기로 했다.

“이 자식, 이놈 너 군기(軍紀)도 모르는 후레자식이구나. 봐라! 이 가슴의 상처와 이 다리의 상처를! 이것이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 주는 증명서닷.”

아까처럼 그에게 상처를 보이며 나도 고함을 쳤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여전히 태연했다.

“이 자식, 너 인민군 패잔병이 아닌가? 낙동강 전선에서 도망 나온 인민군이 아닌가? 너의 태도가 아무래도 수상하다.”

“뭐, 이놈의 자식, 나를 인민군으로 몰아쳐… 인민군 앞에서 벌벌 떨며 기를 못 쓰던 육군 놈들이… 이 상처는 우리 해병대의 저 유명한 진동리지구(鎭東里地區) 전투에서 받은 것이다. 우리 해병대는 그 전투에서 전쟁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그래서 우리 장병 전원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일 계급 진급을 받았고 훈장도 받았다. 그런데 이 쌍 놈의 헌병 새끼야, 네가 나를 인민군으로 몰아쳐…”

이번에는 나도 책상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항변했다. 내가 말한 진동리지구 전투는 6.25 사변 이래 우리 국군이 세운 최초의 대 전과를 올린 전투였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친히 오셔서 부대장 김성은  중령 이하 전 장병에게 일 계급 특진을 시켰고 부대 훈장까지 수여한 일이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해병대 부상병으로부터 이 전투에 관해서 여러 번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전투 이야기를 해 줌으로써 내가 해병대 장교임을 증명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때 그 헌병도 생각을 달리 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공손한 말로 앉으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도 그에게 타협조로, 나를 정 믿을 수 없으면 해군 헌병대에 인계해 달라고 말했다.

“그건 안 되오. 귀관이 해병대 장교라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때까지는 해군 헌병대에 인계할 수 없소. 나는 귀관을 헌병 본부에 데리고 가겠소.”

이런 말을 하며 그는 나에게 담배를 권했으나 나는 그것을 받아 피우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부산시에 있는 헌병대 본부에 연행되었다. 일이 점점 복잡해지는구나 생각하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있었다. 대합실 같은 큰 방에 잠시 앉아 있다가 어느 헌병 중위 앞으로 안내되었다. 아…, 그런데 그의 가슴에 붙어 있는 “김철구” 라는 이름이 낯익은 이름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름 같았고, 또 나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듯도 했다. 나는 그 헌병 주위가 묻는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나에게 고함을 쳤다.

“내 말을 듣소, 안 듣소? 귀관이 마태오 해병 중위요?”

그때 나는 그가 누구인 줄을 알아냈다. 이제는 살았구나 생각하며 그에게 여유 있는 태도로 말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마태오 해병 중위요. 그런데 귀관은 심문을 받기 전에 사적인 일이지만 귀관에게 물어 볼 것이 하나 있소.”

“지금은 공무 집행 중이오. 사적인 이야기는 이 심문이 끝난 다음 말하시오.”

그 헌병 중위는 엄격히 말했다.

“그 사적인 이야기도 이 심문과 모종의 관련이 있어 보이기에 그것을 먼저 말하고 싶소. 귀관에 대해 물어 볼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주시오.”

“지금 귀관이 나를 취조하고 있는 중이오?”

“취조가 아니오. 귀관과 나와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오. 바로 그 인연에 대해서 한 가지 물어 볼 일이 있다는 말이오.”

그때 그는 나를 잠잠히 한참 쳐다보다가 그 “인연”이 무엇인지를 말해 보라고 했다.

“혹시 귀관이 1947년 12월 말 어느 눈 오던 날, 여현 지방 38선상에서 남한 38선 경비대에 의해 구출된 “김철구”라는 사람 아니오?”

내 말을 들으며 그는 심히 놀라는 것 같았다. 그의 이러한 품이 내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고. 그런데 귀관이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소? 귀관이 그 38선 경비대원이었단 말이오?”

“그때 내가 귀관을 구해 준 사람이오.”

1947년 12월 말, 눈이 내리던 밤이었다.

38선 야간 당번이 되어 두 명의 순경과 함께 38선 상에 위치한 고성(古城)을 통하여 이북 경비대의 동정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저쪽 산 밑에서 몇 발의 총성이 들려 왔다. 긴장된 기분으로 주변을 살펴 보았으나 별 이상은 없었다. 순경들은 본서(本署)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나는 웬일인지 총성이 울린 그 산 밑으로 가 보고 싶었다. 무엇인가 사건이 거기에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순경들도 나의 의사에 따랐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다가 갔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한 명의 시체와 죽기 적전에 있는 또 한 명의 부상자를 발견했다. 이북 경비대가 그들을 총살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몸에 여러 발의 총을 맞았으나 아직 살아 있었다. 우리는 그를 교대로 업고 본서로 돌아왔다. 그리고 응급치료로 지혈시켰고 곧 개성으로 보내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 청년이 바로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김철구 중위였다. 그는 그때 남하하던 이북 출신 청년이었다. 38선에서 이북 경비대에 붙들려 심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은 총살형을 받았으나 용케도 살아 있었고 우리에게 구출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잘 기억할 수는 없었어도 그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뜻하지 않은 자리에서 생각지 않았던 사람을 서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헌병 중위는 나를 얼싸안고 울었다. 자기 생명을 구해 준 나를 곡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신(神)에게 기도했다고도 말했다. 그는 수없이 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정말 기뻐했다. 나도 기뻤다. 그리고 한 인간의 생명을 살려 준 나의 행위를 그지 없이 보람되게 생각했다.

그날 나는 그의 집에 초대되었고 그의 부인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날 밤 우리 둘은 서로가 지내온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그는 개성병원에서 퇴원하자 곧 서북청년단에 가입했고 많은 공산당 공작대원을 잡았다고 했다. 그 후 느는 이미 육군 고위층에 있던 고향 사람을 만나 군에 입대했고 장교가 되었던 것이다. 나도 나에 대해서 고백했다. 병원에서 도망 나온 이유와 내가 해병 중위가 아니라는 것도 그에게 말했다.

나는 김 중위의 생명의 은인이었으나 그는 헌병 장교라는 신분을 갖고 있는 공인(公人)이었다. 이틀 간 그의 집에서 잘 쉰 다음 그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나는 진해로 돌아와 자수했다. 진해까지는 김 중위가 헌병차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러나 나는 벌을 받지 않았다. 즉시 원산 해군 전진기지 부대에 편입되어 며칠 후 나는 전선으로 출동해야 할 몸이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수백 명의 출동 군인과 함께 트럭을 타고 진해 항구를 향해 떠나려는 참이었다. 거기에는 각 연령층의 여인 수십 명이 일선으로 떠나가는 자기들의 아들, 남편, 오빠, 동생들을 보러 와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심한 고독감을 느껴야만 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죽음을 향해 떠나는 나를 위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고독을 달래기 위해 나는 수통에 들어 있는 화랑 위스키를 반 수통이나 들이켰다. 그러는 동안 군중은 내 주위에서 떠들고 노래하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 소한 속에 우리를 실은 트럭이 출발하려는 순간 45세 가량된 여인이 차바퀴 앞에 몸을 던지면서 외쳤다.

“내 외아들을 전쟁터로 데려가려거든 트럭을 내 몸 위로 몰으십시오. 내가 그 애를 가졌을 때 남편을 잃었어요. 20년 동안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과부생활을 하면서 오늘까지 그 애를 기르고 가르치고 사람을 만들었어요. 이제 그 애는 훌륭한 청년이 됐어요. 내 아들은 나의 하나 밖에 없는 희망이고 내 생명입니다. 내 아들을 돌려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트럭으로 나를 치어 죽이시오. 아들 없이 산다는 것은 죽은 거나 다름 없어요.”

이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술기운이  확 깨고 가슴이 사뭇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운전병은 어떻게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헌병 한 명이 와서 비키라고 했으나 그 여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를 발로 차며 거칠게 다루려고 했다. 그것을 보자 나는 참지 못하고 차에서 뛰어내려 그 헌병을 주먹으로 한 대 쳤다. 그는 뒤로 벌러 나자빠졌다. 여인은 깜짝 놀라 벌떡 땅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여인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훌륭한 어머니이십니다. 아주머니가 당신 아들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시는 것을 보고 저는 깊이 감동했습니다. 아주머니의 그 훌륭한 행동에서 저는 오랜 전에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생생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주머니, 제 말씀을 좀 들어 보세요. 아주머니의 귀한 아들의 얼굴과 비슷한 저 수백 명의 젊은 얼굴을 보세요. 아주머니의 아드님처럼 저들도 어머니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국을 위해 전쟁터로 떠나갑니다. 또 우리를 둘러싼 이 여자분들을 보세요. 아주머니와 같이 저분들도 이 젊은 군인들의 어머니요, 아내들입니다. 그분들도 아주머니와 같이 애정이 가득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다른 어머니들의 아들들은 조국을 지키려고 일선으로 가는데 아주머니는 아들을 곁에 붙잡아 두고 혼자만 행복하기를 원하세요? 이 전시에 어머니 노릇 한다는, 같은 고통과 같은 운명을 이 여자분들과 함께하지 않으시렵니까?”

내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는 내게 말했다.

“내 미친 짓을 용서하십시오. 나도 이 훌륭한 군인들의 어머니와 아주머니들과 같이 남아 있겠소.”

그때 트럭이 떠나려 하자 우리를 배웅 나온 여학생들이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소리는 내 신경을 몹시 자극시켰다. 그래서 나는 트럭을 서게 하고 일장 연설을 했다.

“아가씨들, 노래를 불러 주는 여러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못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장래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될 여러분들이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동족이기도 한 공산군에 대한 우리의 증오심을 불러 일으키고 북돋아 주는 그러한 군가를 부른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비난합니다. 그 노래로 아가씨들은 우리들더러 한 어머니의 귀한 자식인 적군을 무찌르라고 하고 있군요. 적군도 우리와 같은 젊은이들이며 또한 우리처럼 그들에게도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들이 저 하늘 밑에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적군인 그네들도 여러분과 같은 젊은 아가씨들의 오빠이며 또 애인들입니다. 남자면 그가 누구든지 간에 여러분의 미래의 남편의 모습이며 동시에 장차 여러분이 가지게 될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한 남자의 죽음이 여러분과는 직접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관계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와 간계된 한 여인에게는 보상할 수 없는 비극이 되는 것입니다. 만세와 박수로 우리를 환영하는 대신 자기 외아들을 데려가는 트럭 앞에 몸을 던진 저 부인을 본받으십시오. 그런 태도는 조국에 대한 배신 행위가 아닙니다. 그 행위는 모성애의 영웅적인 발로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여인의 생활의 본질이어야 합니다. 애국자가 되기 전에 우선 진정한 여자, 진정한 아니, 진정한 어머니가 되십시오. 여러분, 그리고…”

그때 중대장이 내게 외쳤다. “출발이다!” 그래서 나는 트럭에 올랐고 트럭은 전속력으로 항구를 향해 달렸다. 여인들과 학생들은 곧 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의 비통한 얼굴의 영상은 내 머리 속에 오래 새겨져 있었다.

 

그날 나는 파도에 흔들리는 상륙정에 몸을 싣고 싣고 수백 명의 군인들과 함께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깊은 밤 남들은 배 멀미에 취해 정신 없이 잠들어 있을 때 나는 상갑판(上甲板)에 올라와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를 올렸다. 진해 항구를 떠난 지 열 시간이 지난 뒤에는 육지마저 보이지 않았다. 몸과 하늘과 별들 이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이 광대한 사막과도 같은 바다, 뱃머리에 부딪쳐 갈라지는 파도 소리와 배의 기관 소리 이외에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이 적요의 심연 속에서 지금 나는 나의 생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막한 침묵의 대자연 속에 홀로 서서 앞을 내다볼 때 인간은 숭고한 그 무엇에 대한 신비적인 힘을 느끼는지 모른다.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 침묵의 대자연에 비해 형편 없이 작은 나 자신!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는 이 광막한 하늘과 이 출렁이는 검은 바다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나를 비할 때… 비교해 생각하기조차 죄스러운 나였다. 그런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말씀이 또 천주께 계시니 말씀이 곧 천주시더라. 이 말씀이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천주께 계신지라 만물이 다 저로 말미암아 조성함을 받았으니 조성함을 받은 것이 저 말씀을 말미암지 않고 된 것은 도무지 없느니라.>

한 하느님이시며 이 우주 창조의 원인이신 예수님께서 내 이 몸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육신을 가지고도 이 세상에 오셨다가 우리들 인간을 위해 속죄의 죽음을 하셨다. 나는 다시 한 번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 앞에 무언의 찬미와 아낌 없는 마음의 감탄을 올렸다. 예수님께서 생명 없는 이 자연 앞에 무(無)와도 같이 보이는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니, 그 사실은 내 이성으로 감히 믿기 어려웠으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이외에 나는 아무 것도 모르노라> 하신 바울로 사도의 말씀처럼 인류를 위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진리는 우리 인간 사고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신앙의 빛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인류 각자를 위해 죽으셨다면 인류 중의 하나인 나 자신을 내가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되며 내 몸과 내 영혼을 예수님의 죽음에 맞갖게 보살펴야 될 거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내 몸과 내 영혼!

내 몸과 내 영혼은 나라고 하는 하나의 인격체에 속해 있으나 나의 몸 각 지체의 마디마디에 예수님의 속죄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을 문득 기억 해 냈다.

<너희들은 이 잔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새로 언약하는 내 피의 잔이니 많은 이의 죄 사함을 위해 흘릴 내 피니라.> 라는 복음 말씀에 이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저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죄의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바울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했다. 그리고,

<음식은 위장을 위해 있고, 위장은 음식을 위해 있으나, 육신은 음행을 위해 있지 않고 오직 주 예수를 위해 있느니라. 그리고 주께서는 또 우리들 육신을 위해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은 그리스도의 지체니라. 따라서 누가 만일 음행을 하면 그리스도의 지체를 취하며 창녀의 지체를 만드는 것이 되느니라. 그리고 만일 창녀에게 애착하면 그와 함께 한 몸이 됨을 너희들은 알지니라. 대저 성경에 일렀으되 <둘은 한 몸이 되느니라.> 그러나 주께 애착하면 주와 더불어 한 정신이 되리라. 그러므로 음행을 피하라. 음행을 하는 자는 제 본 육신을 거슬려 범죄하느니라. 너의 육신은 천주께로부터 받은 너희 안에 계시는 성신의 성전이며 너희들의 몸은 너희들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그리고 너희들의 몸은 예수님의 속죄적 죽음이 비싼 죄값으로 구매되어 있나니 너희들은 육신을 갖고 하느님의 영광을 현양하라.>

이상의 성경 구절은 당시 생각나는 대로 인용한 것이니 본 성경 구절과 얼마간의 상이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나,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으로 구원받은 내 몸과 내 영혼! 성신의 궁전인 내 영혼과 예수님의 지체인 내 몸!

이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왜 교회에서 여러가지 정결에 관한 윤리적 규칙을 정해 놓고 우리들 신자들에게 마음과 몸의 정결을 까다롭게 요구하는지를 알았다. 이전에 나는 때때로 내 마음을 번거롭게 하던 내 젊음의 욕정은 나도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것이니 만큼 나는 이 본능적 욕정을 따라 살아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본능적 욕정을 무질서하게 만족시켜 줄 때 거기인 하나의 불결의 죄가 성립된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내 몸은 예수님의 지체이며 동시에 성신의 궁전이 되기 때문이다.

<이 미소한 자 중 하나에게 악을 행할 때마다 그것은 곧 내게 악을 행함과 같으며 또 선을 행할 때마다 이는 곧 내게 행함이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깊이 알아 들었다. 결국 내 몸이 성신의 궁전이 되는 것처럼 남의 몸도 성신의 궁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내 몸이 예수님의 피로 구속되었고 그분의 지체가 되는 것처럼 남의 몸도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그분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내 몸을 존경할 때 나는 남의 몸도 겸하여 존경해야 하며, 나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지체인 남의 몸이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의 정의(定議)는 영혼과 육신의 합일체라고만 봐서는 안 되며 적어도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의 정의란 육신과 영혼과 성신의 합일체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상륙정은 여전히 깊은 밤중의 바다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갑판 위에 무릎을 꿇고 성신의 궁전인 내 몸을 깨끗이 보존할 수 잇는 모든 성총을 주실 것을 주게 기도 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북한 땅 전선에서 어떠한 일을 당할지 모르는 나 자신을 하느님의 섭리에 일임했다.

 

원산 해안 상륙에는 희생이 그리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군 육군이 원산시의 일각을 이미 점령한 때였으며, 또 적의 해안 방어선이 유엔군 함정의 포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민군의 저항은 미약했다. 다만 해안지대에 깔려 있던 지뢰 폭발로 몇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시 중심지에서 도주하는 인민군을 소탕하는 시가전을 몇 시간 치른 뒤에 우리는 원산시를 완전히 점령했다. 해병대는 계속 덕원 쪽으로 적을 추적했고 우리 해군 원산 전진기지 창설부대는 항구를 장악했다. 그리고 항구지대 경비를 담당했다.

 

그때 민간인들은 한 사람도 거기에 없었고 굶주린 개들만이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우리는 광견병이 염려되어 개들을 사살했다. 여기 저기서 타다 남은 뼈대만 앙상한 집들이 마저 타고 있어서 몹시 서글픈 광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몇 명의 대원을 데리고 완전히 폐허가 된 항구 지대를 순찰하고 있었다. 피난을 가지 못한 원산 시민들은 집에 틀어 박혀 있었다. 그때 한 젊은 여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우리는 귀를 곤두세웠고 발길을 멈췄다. 주위를 경계하며 우리는 그 비명이 나오는 장소를 찾아냈다. 포탄을 맞아 반쯤 무너지고 새까맣게 타다 남은 집이었다. 나는 그 집안으로 들어가서 회중전등으로 방안을 비추어 보았다. 한 젊은 여인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온돌방에 누워 아파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혼자였고 해산이 임박했었다. 그 여인이 신음하며 고통으로 몸을 뒤트는 것을 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그 여자는 우리를 보자, “국군용사님들, 저를 도와 주세요. 난 죽을 것만 같아요. 국군 용사님들, 가시지 마시고 절 좀 살려 주세요.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아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쳤다. 대원들에게 이웃집을 찾아가 나이 든 아주머니나 할머니를 데려오도록 했다. 나는 그 여자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허사였다. 땀을 온 몸에 흘리며 “죽는다” 고만 소리치고 있었다. 약 15분쯤 후에 대원들이 한 할머니를 데리고 왔다. 내가 방에서 나가려 했더니 그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국군 용사, 제발 나가지 말고 해산 뒷바라지하는 걸 좀 도와 줘요.”

“할머니, 저는 그런데 대한 아무런 경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상관 없어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요.”

“제 대원을 남겨 두지요, 할머니.”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더 힘이 세어 뵈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할머니, 참말이지 전 해산하는 여인을 본 일이 없습니다. 할머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데요.”

“오늘밤에 보면 되지 않아요. 왜 겁이 납니까?”

“예, 겁이 좀 납니다.”

“아아니, 당신 같은 국군 용사가… 사람을 죽이는 병사가 겁이 나다니? 자아, 우물쭈물하지 말고 당신 대원들 보고 빨리 물을 데우고 국을 끓이라고 하세요. 그리고 당신은 이 여자의 두 발을 붙잡아요.”

나는 방에 남아서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 젊은 산모는 점점 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내 이마에서도 땀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뒤에 갑자기 조용해진 가운데 어린애의 조그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 보니 아주 생생하고 피에 얼룩진 살덩어리가 산파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내 온 몸에 잔 소름이 깔리는 것을 느꼈고 몸이 떨려 왔다. 그것은 징그러운 광경이었다. 헝겊으로 갓난 아기를 닦으면서 할머니는 아기를 엄마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예쁜 옥동자일세. 색시는 이 애가 자랑스러울 걸세.”

“할머니, 애기가 어디 병신이나 아니예요?”

산모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좀 불안한 목소리로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닐세, 이 사람아,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예쁘고 성하네.”

“아이구 좋아라! 할머니, 애기를 이리 주세요.”

행복과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져서 산모는 애기를 가슴에 안았다. 그 여인은 고통을 조금도 당하지 않은 것같이 지극히 행복스러워 보였다. 그대 할머니는 짓궂게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젊은 국군 용사, 보았지요! 이제는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엾은 당신 어머니를 얼마나 괴롭게 했는지를, 알았지요.”

“할머니, 여자가 해산하는 것을 보는 건 무섭기도 하군요. 아니, 언제나 그렇게 아픕니까?”

“사람의 생명은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돋아나지만 그것은 어머니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지요. 남자들이 여인이 해산하는 걸 보는 것은 좋은 일이오. 그러면 저희들의 아내가 아기를 낳아 주기 위해 얼마나 고통을 겪는지 알 수 있을 거요.”

“애기 아빠는 어디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데요?”

“그도 전쟁에 나갔다오 그 사람은 좀 못돼 먹은 인민군이야요. 하지만 아기는 언제나 죄 없이 태어나지 않소? 아무도 공산주의자나 민주주의자로 태어나지는 않아요. 이 아이는 제 아버지의 밉살스러운 행동에 관해서는 죄가 없어요.”

“그건 사실입니다. 이 아기는 우리가 보호하고 귀여워해 주어야 하는 우리 조국의 아들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인사를 할 때 젊은 산모는 웃는 낯으로 아기 얼굴을 바라보며 부끄럼 없이 젖을 물리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아무런 고통의 흔적도 없고 기쁨이 활짝 피어 오르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로 모든 것이 어둡고 피로하고 불쾌하고 괴롭고 슬프기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악착같은 전쟁도 사람들의 얼굴에서 기쁨을 완전히 앗아가지는 못했다. 전쟁이 이르는 곳마다 슬픔과 죽음이 있었으나 생명은 기쁨 속에서 창조의 제 갈 길을 계속하고 있었다. 방을 나오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인간 애정의 가장 아름다움 모습 중의 하나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기적인 요소도 없고 다만 순수한 사랑, 즉 삶에 힘을 주고 생명을 주는 희생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당시 해군과 해병대 중에는 소학교를 졸업 못한 무학자(無學者) 신병들이 상당히 있었다. 이들을 위한 “신병 재교육대”가 창설되었다. 나는 몇몇 하사관들과 함께 이 무학자 신병들을 재교육시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곳 항구도시에 상륙한지 며칠이 지난 후 나는 5명의 신병을 데리고 시내로 용무가 있어서 외출했다. 사람들은 피난길에서 돌아와 폭격 맞아 허물어진 가옥들을 수리하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상점도 하나 둘 열리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국밥집” 이란 간판을 보고 원산 국밥맛을 보기로 했다. 6명의 무장한 남한 군인들이 음식집에 들어서자 집주인은 공연히 떨고 있는 듯 보였다. 주인을 불러 공손한 말로 국밥 한 그릇씩 주문했다. 그때 식당 한 구석에 젊은 사람 하나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나를 자꾸 바라보고 있었다. 하도 그의 인상이 고약하여 내 마음이 상했으므로 식사가 끝나는 대로 그 친구의 신분을 알아 보기로 했다.

식당 주인 부부는 해방군 국군 용사들이 누추한 자기들의 집을 찾아 줘서 매우 영광스럽다는 말을 연발하며 우리들에게 깨끗한 그릇에 담은 국밥을 갖다 주었다. 국밥을 먹은 후 밥값을 물으니 백20 원인지 잘 몰라 나는 밥 값을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주인 아저씨는 얼굴을 붉히며,

“밥 값을 안 내셔도 좋습니다. 우리들을 악독한 공산주의 놈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국군용사들에게 어찌 밥 값을 야박스럽게 받겠습니까? 이처럼 저의 집을 찾아 주신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요. 그래서 변변치 않은 국밥이나마 용사들에게 대접했습니다.”

이와 같이 말했다.

“아마도 아저씨께서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우리 국군은 추호의 민폐도 끼치지 않습니다. 남의 밥을 어찌 공짜로 먹을 수 있겠습니까? 실은 밥 한 그릇에 백20 원인지 혹은 여섯 그릇에 백20 원 인지 몰라서 아저씨게 밥 값을 재차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설명하는 나에게 그 아저씨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밥 여섯 그릇에 백20 원입니다.”

밥 여섯 그릇에 백20 원을 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남한에서는 오징어 한 마리에 백50 환 할 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국밥 여섯 그릇 값이 백20 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쌀 한 말에 얼마 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점점 더 떨리는 목소리로 2백 원 한다고 했다. 쌀 한 말에 2백 원 하면 국밥 한 그릇에 20 원쯤 할 만한 가격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저씨, 밥 여섯 그릇에 백20원 하다니, 하도 믿을 수 없어서 밥 값을 여러 번 물었습니다. 이남에서는 오징어 한 마리에 백50 호나 하는데 이곳에서는 쌀 한 말에 2백 원하다니…”

내 말의 결론이 이상해져서 나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천 환짜리 한 장을 꺼내 주었다. 그때 식당 아저씨는 내 돈을 받으려 하지 않으며 자기가 갖고 있는 돈을 다 털어도 내 돈을 거슬러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대접한 것이라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안 받겠다고 하는 돈을 받으라고 호령을 하고 그 식당을 나왔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내게 절을 수 없이 하며,

“대장님, 요 다음에 시간이 있으실 때 곡 저희 식당을 들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하고 여러 번 말했다.

밥 값을 받으라 안 받겠다 하는 바람에 나는 인상이 고약한 그 젊은이의 일을 잊었다. 그런데 그 젊은 사람이 자진해서 내가 다가오며 물었다.

“실례입니다마는 국군 용사께서는 교우(敎友)가 아니십니까?”

나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교우>란 말은 당시 천주교 신자가 아니고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가 교우임을 알았는지 그에게 물었더니, 내가 국밥을 먹기 전에 십자가 성호를 긋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자기도 이 안드레아 라는 신자라고 밝혔다.  그가 교우임을 알자 험상궂게 보이던 그의 인상도 얼마간 변해 보였고 또 특별한 친근감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 항구 도시에도 이 전에는 성당이 있었고, 지난 주일에는 교회가 공산정부에 의해 폐쇄된 이래 처음으로 교우들이 모여 주일 미사참례를 했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그로부터 성당의 위치를 대강 들은 다음 오는 주일에는 시간이 있으면 주일 미사참례를 하러 갈 것을 약속했다.

 

<후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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