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 무엇으로 쓰느냐, 그러니까 붓, 펜, 연필, 만년필 같은 것으로 종이에 쓰느냐 아니면 요새처럼 keyboard로 쓰느냐 하는 것이 나는 솔직히 그렇게 차이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 특히 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미묘하게 차이를 준다고 한다. 얼마 전에 나도 그런 것을 경험하고 조금은 놀랐다. 정말 오랜만에 생각이 잘 정리가 안 되는 것을 우연히 책상 앞에 놓여있는 메모지에 ‘그리기’ 시작을 했는데.. 역시 생각이 모이면서 정리가 됨을 느꼈다. 사람은 역시 ‘기계’가 아닌 것이다.
올해 1월 달도 어제로 끝나고 2월의 첫날이다. 겨울답게 추운 이번 겨울은 고국의 옛 겨울을 연상시켜주어서 사실 포근하게 느껴지곤 했다. 내 생일전후는 1월21일이라서 ‘대한’ 절기가 그날 앞뒤로 떨어진다. 내가 태어났던 서울의 그때 추위는 대단했다고 누누이 들었다. 눈도 많이 왔다고 곁들여서. 상상하며 그려본다. 해방 후, 6.25전의 서울풍경을.. 그때의 풍경이나 내가 처음 기억하던 서울거리나 그렇게 차이가 없다면 대강 그려지곤 한다.
올해 2월은 고국엔 설날이 제일 큰 명절일 것이고.. 이곳은 사실 그 정도 큰 것은 없겠지. 내일은 Ground Hog Day로구나. 이제는 이 날도 조금은 정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소하고 웃기는 날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동양적인 계절적 절기의 하나라고 생각하니 편하게 느껴지고 그 유래 같은 것 등등이 더 정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은 몇 년 전에 영화까지 나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나에게는 Ash Wednesday도 아주 중요한 날이 되었다. 개신교에서도 이런 날이 있는지 모르지만 Roman Catholic에서는 이날로 부터 Lenten season(사순절)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Easter(부활절)까지 40일 (4순)이 시작되는 날인 것이다. 이날은 Mass에서 신부님이 앞이마 가운데 재의가루를 문질러 주신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했지만 이제는 기다려지기도 한다. 그 이유를 이해를 하면 모든 것이 받아들여진다. 올해 사순절은 무엇을 하며 지낼까.. 서서히 생각을 정리해야겠다.
오늘은 12월 12일이다. 이 날짜를 우리말로 읽은 음감이 항상 기억을 더듬게 한다. 그러니까 십이 십이가 아닌가? 이날 전두환이 박정희와 비슷한 무혈혁명을 한 날이 아닌가? 1979년 12월 12일이다. 그렇다. 정확하게 30년 전이다. 아…아…하는 신음소리가 안 날 수 없다. 30년이면 어떤가? 긴 건가, 별로인가. 이제는 세월 감각이 많이 ‘역사적’ 인 단위로 적응이 되어서 별로 긴 듯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60년의 반.. 이 아닌가.
1979년 12월 12일에 우리, 그러니까 나와 연숙은 김포공항에 갔었다. 꽤 늦은 저녁시간이었는데 아마도 그날 밤에 전두환이가 일을 저질렀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날 전혀 그런 것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거의 결혼이 결정된 인생 최고의 기분으로 살던 때였으니까. 그날도 매섭게 바람이 불고 추웠던 기억인데 그게.. 아직도 생생하다. 연숙의 지도교수인 김숙희 교수가 미국으로 가게 되어서 공항으로 배웅을 가게 된 것인데, 아마도 그 교수에게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와 같이 나간 듯 하다. 버스를 너무 일찍 내리는 바람에 공항 터미널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그때 내가 연숙의 손을 처음으로 잡고 갔던 기억이다. 나중에 연숙의 말이 손이 추워서 혼이 났다고 했다. 그저 춥다는 말을 하면 내가 미안 할까 봐 말을 못했다고. 지금 생각하면 그저 아름다운 추억이다. 30년 뒤에 이렇게 회상을 하니까 물론 아름답게 보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때는 구름 위를 걷는 듯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우리에겐 있었다. 그걸 많이 잊고 산다. 너무나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모든 걸 미리 가정해가며 건조하게 우린 살고 있다. 그렇게 살 필요가 없는데. 참 그게 현재 우리의 불행인지도 모른다. 그럴 능력이 모자람 없이 가득한 우리 두 ‘인간’인데. 신앙도 신앙적인 노력도 이것을 극복 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아주 싸늘하다. 아니 숫제 춥다. 이곳은 Cobb Central Library 이다. 조용한 토요일 아침, 비록 추워서 손에 입김을 불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interruption없이 ‘마음대로’ 책을 읽고, 집에서는 도저히 자주 중단이 되어서 하기가 힘들 것 같은 일들을 여기서는 할 수 있으니 어찌 좋지 않으랴. 요새는 돋보기 없이는 책을 읽기가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거의 1년 전 까지만 해도 크게 불편이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 이것을 쓰는 게 익숙해졌다. 이래서 다 살게 되어있는 모양이다. 돋보기로 보이는 나의 손등이.. 이제는 영락없이 늙었다. 그러니까 많이 쭈글쭈글해졌다. 슬프다. 하지만 이게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저 받아 들여야 하지 않을까?
재동”초등”학교가 아니고 나에겐 분명히 재동”국민”학교다. 이름에도 정치, 역사가 있지만 나에겐 100% “초등”학교가 아니었고 분명히 “국민”학교였다. 서기 1954년부터 1960년 초까지 나는 이곳에서 대한민국 어린이의 꿈을 키웠다. 서기 1954년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그때는 “단기” 4287년이었다. 그러니까 단기 4287년부터 4293년 초까지다. 참 오래전. 일이다.
온통 나의 어린 시절은 이곳을 중심으로 이야기들이 만들어 졌다. 서울의 심장부에 속하던 종로구에서 가회동과 계동의 옆과 위에 접한 꿈의 운동장. 이곳에서 얼마나 많이 순진한 꿈을 꾸며 뛰어 놀았던가? 여기서는 누구나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 가 없을 것이다.
취운정 활터에서 힘을 기르고
엣궁의 거문고로 마음을 닦던
빛나는 화랑정신 이어 나가자
우리는 재동학교 나라의 새싹
재동학교 교가 아마도 1~2학년 때 부터 이 ‘새’교가를 불렀지 않았을까? 누가 이 사실을 기억을 할까? 그 당시 이 ‘취운정’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불렀다. 최근에서야 인터넷의 힘으로 옛날 옛적에, 언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재동학교 근처에 있었던 고적지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재동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윤성종’작사라고 보인다. 작곡은 ‘김성태’로 되어있다. 김성태라고 하면 물론 귀에 아주 익은 이름인데 윤성종은 전혀 무언가 떠오르지를 않는구나. 이 교가는 물론 아직도 100% 가사를 안 보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이 그 나이 또래의 기억력이다. 무서울 정도이지 않을까?
입학하기 전부터 생각이 나는 게, 그러니까 아마도 6.25동란이 끝나기 전인 듯싶다. 그때 나는 돈화문 (비원정문)근처의 원서동에서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어머니, 누나와 같이 살았는데 재동학교에서 화재가 나서 전체 건물의 반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생생히 기억을 한다. 그 나이에는 불이 나면 우선 ‘경사’라도 난 듯이 그곳으로 뛰어 가지 않았던가? 그때 재동학교는 아마도 군인병원으로 임시로 씌어졌던 모양인데, 왜 불이 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혹시나 폭격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그때 타버린 건물은 몇 년 뒤에 미군들의 도움으로 새 건물로 태어났고 동시에 나머지 건물들도 한층 씩 더 올려지게 되었다. 5학년 때 갑자기 모두 운동장에 나가서 ‘즐겁게 뛰어놀라’ 는 지시에 전 학년 생과 선생님들 모두 나와 그야 말로 뛰어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미군들이 와서 사진(그리고 아마도 영화도)을 찍고 있었다. 그때는 미군을 보는 게 참 즐거운 일 이었는데 (우리를 공산당으로 부터 구해준 십자군?) 그들이 사진을 찍으니 우리들은 더 신들린 듯이 뛰어 놀았다.
은사님들을 생각해 본다. 교장 선생님. 심원구 선생님이 거의 5년 동안 나의 교장선생님이셨다. 6학년 때에 지금 졸업앨범에 찍히신 윤형모교장 선생님께서 오셨다. 아마도 5학년 중에 부임을 하셨던 게 아닌가. 누군가 이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5학년 때 인천으로 당일치기 수학여행을 갔을 때 사진에 심원구 선생님이 보이시니까 분명히 5학년 까지는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들. 지금 모두 어떻게 지내실까. 혹시나 연로하셔서 타계나 인하셨을까? 이걸 어떻게 알아 볼 수 없을까?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윤원범 (여자)선생님. 졸업앨범에 없다. 졸업 전에 떠나신 것이다. 그 옛날. 1학년 때.. 그때 나는 학교 가는 게 아주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들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엘 오곤 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생활전선에 뛰어든 뒤였다. 옆집 친구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곤 했다. 그 친구는 ‘안윤희’였다. 그런 중에 드디어 대형 사고를 쳤는데. 그만 학교를 안 간 것이다. 원서동에서 재동학교를 가려면 계동을 지나는데 거기에 대동상고가 있었다. 거기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곤 했다. 내가 “깡”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학교가 싫었던 게 아니었을까. 얼마나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리 집의 주인아저씨가 (그때 우리는 세를 들어서 살았다) 나를 보았다고 했다. 들통이 나고 어머니는 장장문의 편지를 써서 나를 학교로 데리고 갔다. 그때 윤원범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아마도 윤 선생님이 나를 조금 더 자상하게 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조금은 무뚝뚝한 여선생님. 한번은 연필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나를 그냥 (다른 아이와 같이)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는 담담히 받아 들였다. 나중에 생각하면 조금 내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만큼 바쁜 탓도 있지만 우선은 나의 잘못이었다. 몇 년 후에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줌마(그때는 모두 식모라고 불렀다)가 알고 보니 그 윤원범 선생님의 집에서 머물며 밥을 해 주었다고 들었다. 참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선생님은 그때 결혼 전이셨는데 그 후에 결혼을 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마지막을 뵌 건 2학년이 되자마자 교과서를 받으러 선생님을 교무실로 찾아간 때였다. 그때는 밝게 웃으시며 공부 잘하라고 격려를 해 주신 기억이다.
2학년으로 올라가며 선생님도 바뀌고 물론 친구들도 모두 바뀌었는데 나는 그때 너무도 놀라고 슬퍼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 내내 울었던 기억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학년이 바뀔 때쯤이면 필요이상의 stress를 느끼곤 했다. 나의 성격이 아마도 수줍고, 조용해서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 들였는지 모른다. 2학년 때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을 못하는데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기억 못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얼굴은 생각이 난다. 유별나게 신경질 적인 여자 선생님.. 대나무로 만든 자로 손바닥을 아프게 맞았던 것도 쓰라린 기억이어서 아주 나쁜 기억이 되었다. 1,2학년 때는 사진도 없었다. 그때는 사진기도 흔치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남는 법인데 그때는 아주 암흑의 학년이 된 것이다.
재동국민학교 3학년 학급사진, 1956년
3학년 때는 학급단체 사진이 아주 잘 남아 있다. 3학년의 담임 배은식 선생님. 앨범에도 남아있다. 참 다정스런 아줌마 타입의 선생님.. 학년이 올라 갈수록 사진은 많아 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4학년 때는 없다. 왜 그랬을까? 4학년 담임 김경구 선생님. 미술이 전공인 담임. 항상 수염자국이 뚜렷한 남자 처음 남자 선생님. 물론 4학년부터 남자, 여자 반이 갈리었다. 모든 게. 우락부락하게만 느껴져서 나도 그곳에 적응을 할 수 밖에. 그때 처음 죽마고우중의 하나 안명성을 만났다. 같은 원서동에 살아서 죽마고우가 된 친구다.
4학년의 기억은 조금 고통스럽다고나 할까. 이 김경구 선생님은 좀 독특한 스타일로 가르치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공부한 시간표’라는 유별난 system을 고집하면서 1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다. 한 마디로 하루에 최소한 4시간 이상 집에서 공부 했다는 것을 증거로 부모님의 도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그 나이에 하루에 집에서 4시간을 꼬박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모두들 ‘거짓도장’을 잘도 받아서 제출을 하였다. 항상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어머니 도장을 몰래 찍는다는 것은 그 나이에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떤 아이들은 3시간 30분이라고 적어 오기도 했는데. 그게 정말로 3시간 30분을 공부 했는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으로 30분을 일부러 뺏는지. 아직도 불가사의다. 결과적으로 김경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회에 나가서 survive하는 예비 훈련을 시키신 셈이다.
5학년때, 인천 만국공원, 1일 수학여행, 1958년
5학년의 추억은 참밝기만 하다. 담임은 이원의 선생님..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선생님은 ‘반 입시형’인 ‘미국식’ 선생님이라고나 할까? 교과서를 줄줄 외우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고 실습과 생활. 탈교과서적인 그런 쪽을 강조하신 선생님.. 그 당시는 아마도 학부형들에게 별로 호응을 못 얻으셨을 지도 모른다. 자연공부도 실습으로 하시고, 음악은 전공 선생님을 불러 오셨다. 여름방학 일기는 ‘일일 일선 (하루에 한 가지 좋은 일 하기)’ 을 주제로 삼으셨다. 그래서인지 외우는 것 같은 것은 거의 배운 기억이 없지만. 아직도 그 선생님의 스타일이 멋지기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그렇다. 그렇게 계속 가르치시면 절대로 우리들을 ‘좋은 학교’로 진학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게 균형이 맞아야 하는 것일까?
5학년말 교생실습후 단체사진
6학년은 5학년 때와 정 반대의 담임선생님이 오셨다. 학부모들은 아마도 ‘구세주’가 오셨다고 했을 듯하다. 새 6학년 담임은 박양신 선생님인데 바로 서울 안산국민학교에서 전근을 오셨다. 무언가 다르다고 모두들 짐작은 했는데 정말 공부시간이 되어보니 정말 완전히 이건 입시준비학원 style로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학부형들은 완전히 무언가를 느꼈는지 치맛바람의 극치를 이루며 교실을 들락거렸다. 아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는 엄마들도 있었고, 공부시간에도 쉬는 시간만 되면 재빨리 들어와 선생님의 책상을 청소하거나 무언가 놓고 가거나 할 정도였다.
5학년 담임선생님 이원의 선생님도 6학년 다른 반의 담임이 되셨는데, 나의 짐작대로 절대로 입시준비를 하는 그런 style이 아니셨고 결과적으로 예상대로 아주 결과는 참담한 듯 했다. 결과란 것은 물론 일류 중학교 합격률을 뜻하는 것이다. 친구 안명성이 그 선생님의 반에 있었는데 항상 부정적으로 선생님을 평하였다. 과장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시간 ‘양호실’에 누워 계셨다고 했다. 그게 게으르다는 뜻인지 정말로 몸이 편찮으셨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6학년의 추억은 아주 또렷하고 생생하다. 처음 겪는 ‘입시’공부였고 이 박양신 선생님은 요샛말로 ‘수험의 신‘ 이셨다. 좋게 말하면 많은 입시용 지식을 그 어린 머릿속에 아주 효과적으로 주입 시키셨다. 나쁘게 말하면 어린이의 꿈의 시간, 공간을 많이 빼앗아 갔다고나 할까. 사실을 말하면 그 중간 정도일 것이다. 한 가지 아주 인상적인 것은 가끔 수업을 ‘정규’시간에서 벗어나 저녁때 까지 연장을 해서 한 것이다. 그야말로 어두워서 책이 안보일 때 까지 하는 것이다. 전등을 킬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인데.. 사실 힘은 들었지만 무슨 캠핑을 간 듯한 기분도 들어서 한편으론 재미있기까지 하였다. 이런 모든 것들은 분명히 학부모들을 아주 만족시켰으리라 짐작을 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또한 다른 6학년 담임들의 선망과 질시를 받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
그때 우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 반에 정말 공부를 잘하는 녀석들이 많이도 모여 있었다. 하기야 반을 가를 때 완전히 random하게 할 터인데 우연이라고 봐야 할 듯 하지만, 우연치고는 참 선생님의 운도 좋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애들.. 이만재, 김두철, 정세종, 조성태, 이정택, 장정석, 전경훈, 이규재, 한윤석, 심동섭, 김정훈, 임한길, 신문영, 유성희, 김승종.. 사실 앨범을 보면서 이름을 떠올리지만.. 이들이 소위 말해서 1분단의 member들인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제일 공부를 잘하는 애들 그룹이다. 나도 나중에는 그 그룹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긴 했다.
이들은 입시에서 거의 경기, 서울, 경복, 용산으로 이루어지는 1류 공립중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세히 누가 어디에 갔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이만재, 김두철, 김정훈은 경기였고, 심동섭은 경복이라는 사실뿐이다. 아직도 궁금한 것은 신문영[나중에 경복중에 간 것을 알았다]과 이규재.. 인데. 알 길이 없다. 이규재는 나의 짝이었고.. 신문영은 내가 혼자 그냥 좋아하던 애였다. 이만재는 나중에 Internet을 통해서 숙명여대 교수인 것과 전자/컴퓨터전공이란 것을 알았다. 신문영은 내가 연세대학에 다닐 때 잠깐 본 듯한데 말을 걸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김두철은 서울공대 입학시험을 볼 때 멀리서 보았는데 아마도 그의 경기고 후배 응원 차 나온듯한 모습이었다.
우리 6학년 1반, 박양신 “사단”의 system중에 독특한 것은 가차 없는 경쟁유도체제 이었다. 그것은 거의 매일 치르는 모의고사의 성적에 의해서 앉는 자리, 그러니까 분단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 당시는 그게 적응이 되어서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아마도 다른 어느 반에도 그런 것은 없었을 듯하다. ‘공부 잘하는’ 1 분단으로 올라가려면 죽어라 시험을 잘 보아야 했다. 1분단에 올라갔으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또 죽어라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데 이상한 것은 그다지 생각만큼 자리가 쉽게 바뀌지를 않았다. 그만큼 성적의 순위가 바뀌기가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잘했고 못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못한 셈이다.
나는 6학년에 들어오면서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쓰셨다. 이제까지는 그다지 성적에 집착을 안 하셨는데 학기가 조금 지나면서 선생님을 만나고 오시더니 한숨 투성 이었다. 물론 나의 성적이 아주 안 좋다는 얘기였다. 1분단은 꿈에도 못 꾸는 처지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 한 고등학생을 데리고 들어오셨는데. 알고 보니 가정교사인 셈이었다. 그 당시는 대학생보다 고등학생들이 과외선생을 많이 했다. 특히 경기고 같으면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김용기라는 경기고 2년생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 부터 나는 학교에서도 공부, 집에 와서도 공부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공부도 점점 재미가 있어졌고 따라서 학교성적도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곧 대망의 1분단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stress가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졸업 할 때까지 다행히 1분단을 고수를 할 수는 있었다.
또 한 가지 잊혀 지지 않는 것. 이것도 다른 반에선 없던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1분단의 반대편에 있는 제일 쳐지는 분단 애들이 있다. 성적순으로 제일 밑인 셈이다. 그들의 심정이야 이해를 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제일 기억에. 그것도 좋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애들은 비록 공부는 힘들었어도 유머와 여유가 있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그들은 group으로 앞에 나가서 코미디를 하거나 유행가를 합창으로 부르곤 했다. 거의 pro의 수준이었다. 그게 그당시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 애들은 입시공부도 거의 포기한 듯한 모습들이었는데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는고..
보고싶다, 친구야.. 정문신
졸업하면서 거의 영원히 소식들이 끊어진 친구들.. 여기서 몇몇을 회상하고 싶다. 정문신. 정문신. 아 잊을 수 없다. 내가 1분단으로 이사하기 전에 짝을 하던 친구다. 짝이라 친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 애가 그렇게 나는 좋았다. 아주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 정도보다 훨씬 내가 더 좋아했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나는 그 애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여름방학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을까? 그 나이에 동성애였나? 우습기만 하다. 졸업을 하고서 다른 친구 김천일이 그 애 사는 곳을 안다고 해서 솔깃했는데. 그대로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정문신. 어디선가 살아 있다면 그때 내가 그렇게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 당시에 이승만 정권에 식상한 국민의 여론이 서서히 야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리고 정치바람이 학교까지 들이 닥쳤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별로 잘 이해를 못했지만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긴 했다. 하긴 우리나이 또래면 북한(그때는 북괴라고 했다)에 못지않게 이승만대통령을 거의 영웅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반공, 반일로 일관된 교육 속에서 우리들은 자랐다.
그런데 아마도 정부에서 우리또래 학생들에게도 선거운동을 시킨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선거권은 비록 없지만 아마도 부모를 설득하도록 한 것이나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선생님들을 시켜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우리 입시의 아니 수험의 신이신 박양신 선생님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설득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여당은 좋은 사람들이고 야당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비록 선생님은 경기, 서울, 경복에 많이 입학은 시키셨어도 진짜 교육은 못하셨다고 이제껏 확신을 한다.
이렇게 졸업은 해서 재동학교는 떠났지만 그 후 3년 동안 몸은 떠나지 않았다. 집이 바로 재동학교 후문 옆에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3년 다닐 때 까지 옆에서 보며, 야구를 할 때면 운동장을 빌려 놀곤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온통 재동학교가 꽉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그 많은 역사 깊은 국민학교들이 문을 닫거나 이사를 가거나 했다지만 우리 재동학교는 아직도 같은 위치에 건재하다고 들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야말로 모교. 나의 어머니격이다. 그게 아직도 건재하다니.. 부디 오래 오래 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도 해 본다.
그 수많은 지난해들 중에서 1962년을 가끔 더 생각한다. 왜 그럴까? 비교적 유쾌한 추억들이 더 많이 기억이 되어서 그럴까? 확실치는 않다. 조금 더 기억이 날 뿐 일지도. 그 당시 알던 사람들 기억에서도 특히 왜 그렇게 이름 황성군이 또렷이 이 나이 까지도 남는 것 일까? 아주 색깔이 바랜 중앙중학교 앨범을 볼 때에도 그 친구의 모습이 더 생각이 나곤 했다. 그것도 근래에 들어서 더욱 그랬다. 사실 나와 그 녀석은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친한 친구들이 따로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기억은 그 친구에 더 많이 머무르곤 한다. 조금은 감정이 찐하게 느껴지는 그런 독특한 추억 때문인 것일까? 황성군. 성은 황 씨이고 이름은 성군. 모든 외모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균형이 잡힌 모습이고, 거기에 걸맞게 ‘멋’을 부린 교복도 기억하기에 더 도움을 주었겠지. 지금 사진을 보면 나는 거의 젖먹이 어린애같이 덜 성숙했고 그 녀석은 나이보다 더 성숙한 의젓한 모습이다. 그런 나를 그 녀석은 잘 대해 주었다. 사실 그는 나의 짝(꿍)이었다.
그해, 1962년은 5.16군사혁명(1961년) 다음해, 모든 것이 긴장, 검소, 절제. 그리고 ‘재건’이라는 구호의 물결인 그런 시기였다. 4.19학생 혁명(1960년)으로 거의 아주 자유를 기치로 건 ‘방종’적인 무질서를 짧게 만끽하다가 이제는 국가재건이라는 기치아래 모두가 숨은 조금 죽이며 살았으나, 신선한 의욕이 넘치던 그런 시기였다. 그때는 거의 모두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빈곤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걸 별로 못 느끼며 살았다. 아마도 최소한 나의 나이에는 그렇게 느꼈다. 말로만 ‘멀리, 시골에서’는 밥을 굶는다는 얘기는 듣곤 했지만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우리는 서울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도심 북쪽 북악산 남쪽에 있는 가회동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이곳은 사실 서울의 알짜부자들의 집이 많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 바로 남쪽이 재동이고 동쪽에는 계동, 또 그 동쪽에 원서동이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사실 거의 이곳에서 보내졌다. 이곳의 기준으로 보면 소위 ‘중산층’집단이 살던 곳이라고나 할까.
1962년은 나의 중앙중학교 3학년인 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별로 가까운 친구가 없었는데 3학년이 되면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같은 반에서 보게 되었다. 2학년 때의 몇 명 안 되는 친구들 중에 ‘문민규’, “이경증”등이 같은 반이 되어서 너무 좋았고, 새로 알게 된 ‘김호룡’, ‘우진규’, ‘채현관’, ‘윤태석’, ‘정만준’ 등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황성군, 1962년
황성군은 사실 3학년이 되면서 나의 짝으로 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억지로’ 사귀게 된 친구인 셈이다. 위에 열거한 친구들 대부분이 3학년이라는 처지를 생각해서 공부들을 열심히 하였다. 요새 발로 study group같은 것이 형성이 되어서 공부를 했는데 한마디로 공부를 이렇게 하는 것은 정말로 효과적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공부까지 더 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의 짝이었던 황성군은 이 group에 없었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학교만 끝나면 사라지고 공부시간도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항상 무언가 다른 것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마음씨도 착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젓하고, 멋쟁이 교복을 입고 (교복이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맞춤복에 가까웠음) 하던 황성군.
그런데 어느 날 부터 그가 점심을 가져오지 않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점심을 굶는 것이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곤 하고 나가지 않으면 자리에 그냥 앉아서 우리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처다 보곤 하였다. 어리고 철없던 우리들이었지만 모두들 언짢은 기분으로 점심을 먹곤 했다. 특히 짝이었던 나는 입장이 아주 거북하였다. 내가 먹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충고’를 하곤 했다. 충고라기보다는 그냥 ‘평’이었다. 나는 그 당시 (지금도 남아 있지만) 밥을 먹을 때 습관중 하나가 반찬보다 밥을 먼저 먹는 것인데 이것은 절대로 반찬이 모자라지 않기 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나의 노력이었다. 황성군은 그런 나의 식습관이 이상하게만 보였던 모양이었다. 꼭 한마디를 하곤 하였다.
채현관, 1962년
하지만 나는 그것 보다는 그가 점심을 굶는 게 더 신경이 쓰였고 주변의 나의 친구들도 거의 무언중에 동감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시골에서 보릿고개라고 해서 봄이 되면 실제로 굶는 농민들이 많다고 듣곤 했는데 서울의 노른자위에 있는 학교에서 점심을 굶는다는 게 사실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리그룹 중에 우진규란 친구가 황성군의 점심을 돌아가면서 가져오자고 제안을 하였다.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못 하였다. 그만큼 성숙치 못했다고나 할까. 우진규는 그런 면에서 확실히 성숙했던 친구였다. 무언중에 조금씩 괴로워하던 친구들이 다 동의를 하고 사정이 되는 대로 교대로 점심을 싸오기 시작하였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황성군은 고맙게 점심을 다시 먹게 되었던 것 같다.
나중에 소문으로 들게는 되었지만 (그는 절대로 자기의 사정을 직접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집안의 사정이 무엇인가 때문에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워 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나이에서는 실감은 잘 가지를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언가 갑자기 커다란 빚을 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얼마나 급했으면 그 당시 담임선생님한테 까지 가서 돈을 꾸게 되었을까? 참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때의 어찌 보면 사심이 없고 꾸밈도 없고, 순진하기만 했던 그 서울 1962년. 나는 그곳으로 부터 얼마나 멀리 흘러 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