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5일, 나를 낳아준 조국 대한민국은 치욕적인 36년간의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날, 광복절이지만 오늘 나에게는 다른 의미로 ‘빛을 다시 보는’ 그런 날이 되었다. 33일 간의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는 여정이 끝나고 그 봉헌식이 오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정오 미사 중에 있었고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작년 이맘때에도 나는 그 더웠던 삼복더위 중에 33일간의 긴 여정과 함께 했지만, 33일에서 3일 모자란 30일째 포기하는 불상사를 겪었다. 물론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다. 무언가 나를 유혹한 것임을 알기에 올해 광복절을 향한 여정은 각별히 신경을 쓰고 조심을 하였다. 하지만 거짓말같이 올해도 3일 정도를 앞두고 다른 형태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지만 결사적으로 나는 빠져 나왔다. 이것은 아주 감미로운 경험이 되었다.
작년에 경험했던 것을 journal로 남겼기에 나는 그것을 기억하며 다시 journal을 남겨 두어서 이곳에 남기기로 하였다. 아직은 기억이 생생한 편이지만 아마도 수년 후에 다시 보면 감회가 새롭고 내가 그 동안 어떤 변화를 했는지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록이 되리라 믿는다.
나에게는 금메달 같이 소중한 스카풀라와 봉헌초
매일 드리는 기도문
성령송가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은총의 주님 오시어 마음에 빛을 주소서.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생기 돋워주소서.
일할 때에 휴식을, 무더울 때 바람을, 슬플 때에 위로를.
지복 의 빛이시여, 우리 맘 깊은 곳을 가득히 채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면 우리 삶 그 모든 것 이로운 것 없으리.
허물을 씻어주고 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 고치소서.
굳은 맘 풀어주고 찬 마음 데우시고 바른길 이끄소서.
성령님을 믿으며 의지하는 이에게 칠은 을 베푸소서.
공덕을 쌓게 하고 구원의 문을 넘어 영복을 얻게 하소서.
묵상 전 기도
죄에 물듦이 없으신 성령의 짝이 시요, 예수님의 어머니시며
저의 어머니 시요, 주인이시며, 모후이신 마리아님,
저를 온전히 당신께 드리며
또 당신을 통해 예수님께 온전히 속하여 있기를 원하오니
성령으로부터 제게 영광과 힘을 간구하여 주시고
세속 정신으로부터 저를 깨끗하게 해주소서.
오소서, 성령님!
저의 마음을 당신으로 채워주시고
제 안에 세속적인 정신을 없애주소서.
아멘.
바다의 별
바다의 별이요,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평생 동정이시며, 하늘의 문이시여, 하례하나이다.
죄인의 사슬 풀고, 선을 구해주소서.
기묘하신 동정녀요, 가장 양선 하신 이여.
저희를 죄에서 구해, 착하고 조찰케 하소서.
하느님 아버지께 찬양과
그리스도께 영광과
삼위이신 성령께 같은 존경 있어 지이다.
33일 매일 실천 사항
- 하느님과 성모님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그날의 주어진 내용들을 주의 깊게 읽고 그날의 주제에 따라 묵상하도록 한다.
- 그날의 주제에 따른 자기 성찰을 철저히 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덕을 닦도록 노력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한다.
- 해당 주간에 매일 드릴 기도 중 ‘성령송가’와 ‘바다의 별’을 제외하고는 매일 드리지 않아도 된다.
- 대죄는 물론이고 아무리 사소한 잘못이라도 범하지 않도록 적극 노력한다.
- 될 수 있는 한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영성체를 하도록 한다.
- 묵주기도를 매일 바친다.
- 적어도 하루에 1시간은 이 봉헌 준비에 할애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침에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거나 텔레비전 등을 보는 시간을 줄이고 봉헌 준비에 필요한 기도와 묵상시간을 마련하는 확고한 결심을 해야 한다.
- 그날의 묵상 내용이나 성찰한 것들과 결심사항 등을 노트에 옮겨 적는 습관을 들이도록 한다.
- 자신의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끊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도록 노력한다 (TV를 비롯한 매스미디어의 절제, 흡연과 음주의 절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장소의 출입을 삼가 함).
2017년 7월 12일 저녁, 이것이 나에게 조용히 하루 전에 다가왔다. 우연 반, 필연 반.. 왜 성모님은 나에게 이것을 권하시는 것일까? 왜 이곳으로 부르시는 것일까? 성모님, 저는 이미 이 길이 하느님께 가는 최선의 방법이란 것을 배웠고 실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봉헌을 하게 되면 2번째 봉헌갱신을 하게 된다. 작년 같은 때에 시도한 것, 정말 순조로웠지만 기가 막히게도 마지막 3일을 남기고 포기를 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지금 기억을 하려고 해도 자세한 상황이 가물거린다.. 나의 자제력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사실 후회도 안 했던 기억까지 나니.. 성모님, 무슨 악이 나를 덮쳤습니까?
올해는 사실 별로 큰 생각을 안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이것을 해야겠다, 아니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다시 봉헌을 위한 노력을 하면 또 다른 진리를 찾을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도 생긴다. 귀찮은 생각이 없을 리는 없지만 그래.. 이번 2017년 복더위를 이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이 찾아낸 마리아의 진리를 찾으며 이겨보자!
첫째 시기 12일: 세속 정신을 끊음
첫 12일 동안 자신 안에 있는 세속 정신을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 매일 매일 자신을 성찰하고, 세속에 대한 인식을 구하고, 세속을 지겨워 하며, 자기부정, 가난을 사랑, 침묵, 은둔, 겸손, 순결, 정직, 절제, 순명의 덕을 실천하도록 노력한다.
제 1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당신 제자로 부르심
2017년 7월 13일 (목요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가장 완전하고 빠른 길은 성모님에게 우리가 온전히 봉헌되는 것이다.
독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 16, 24)
1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
예수를 따르는 누구나 를 당신의 제자라고 부른다면, 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십자가의 신비를 깨달아야..
용기와 결단성 있는 영웅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모든 일을 참아 받기로 결심한 사람..
이러한 결심이 없는 사람은 십자가의 벗 가운데 있을 자격이 없다
2 “자기를 버리고“
가난과 십자가의 굴욕과 고통만을 영광으로 여기고 자신을 끊어 버려야 한다.
교만, 지식과 재능, 위대한 철인, 자유사상가 모두 멀리해야 한다
거만한 신심가나 세속주의자, 모두 쫓아내야 한다.
3 “제 십자가를 지고“
나 만에게 맞추어진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나만의 십자가에서
무게는: 매일 겪어야 하는 물질적 손해, 굴욕, 고통, 질병 정신적 고통 등이다.
길이는 중상모략에 시달리고, 병으로 눕고, 동냥할 처지가 되고 유혹과 냉담과 마음의 권태, 정신적 고통으로 신음하는 나날의 연속.
넓이는: 친구들, 가족들, 친척들로부터 받는 냉대와 괴로움.
깊이는: 주님이 주신, 누구에게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내적 괴로움.
4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그것을 정복자의 무기와 왕의 지팡이로 삼아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것 보다 더 필수적이고 유익하면서도 감미로운 것이 없고 영광스러운 것이 없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 12)
그리스도의 생활과 행실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쓸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함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충분히 알아듣고 맛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그 일생을 그리스도와 맞추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통을 따르라는 첫 날의 주제는 사실 매력적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영광을 위한 현세의 고통, 하지만 현재도 중요하지 않을까? 세상 것을 미워하라는 말을 해석하는 것, 나는 아직도 거부감이 드는 것, 부정할 수가 없다. 세속적인 것을 전부 버리라는 것도 그렇다. 그만큼 나는 세속적이기에 그런 충격적인 느낌을 받는 것일까?
아하! 이 고통이란 바로 세속적인, 쾌락적인, 달콤한 것들을 멀리하는 데에서 오는 고통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고통이다. 세상사 만이 고통이 아니다. 이것이 고통이다. 아니 고통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다.
나를 조금이라도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실질적인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현재 하고 있는 일상적인 신심활동 이외에 더 활동을 늘리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대로 친교를 이루거나, 여흥을 하거나 놀러 다니거나 (그런 것이 거의 없는 우리들은?) 하는 것들을 더 줄이라는 것인가? 예수님, 성모님, 과연 무엇입니까?
제 2일, 양 진영
2017년 7월 14일 (금요일)
그리스도의 진영, 선 善 과 루치펠의 진영, 악 惡 중에서 나는 어느 진영에 서있는가?
독서:
구원의 문은 좁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우리의 적은 권세, 세력의 악신들, 암흑세계의 지배자들, 하늘의 악령 들이다. 이에 진리와 정의로 무장, 복음과 믿음의 방패를 잡고, 성령의 칼을 쥐어야 하며,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편과 세상의 편:
나의 잔치, 천국의 월계관, 에 자리를 같이 하겠다는 벗들은 많으나 내 십자가, 고통과 굴욕, 와 함께 하겠다는 벗은 적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순수하여야 하며, 한번도 위안을 못 받는다고 하여도 항상 예수님을 찬미하고 항상 감사하여라.
묵상과 생활실천:
선과 악의 세계, 분명히 알고, 보이고 존재하는 것들.. 이런 이원론적인 생각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그 중간은 없나? 9/11 직후 Bush의 경고: Either You’re with us or against us.. 이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는데..
오늘도 오늘의 말씀들도 어제의 것들과 거의 같은 것인가. 쾌락적, 육감적 같은 세속적인 것들을 피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영생의 길인 것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면 충족한 것인가? 분위기에 휩쓸려 감상에 젖고 그것을 즐기는 것도 세속적인 것인가?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말씀을 믿으며 실천하고, 영생의 희망 속에 살아가는 것, 나는 이제 조금은 자신이 있다.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이거나 나는 모두 믿으며 아니.. 믿고 싶다. 1%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나는 하느님의 ‘물리적 현존’ 과 역사적, 신학적인 예수님의 존재를 믿으며 믿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나를 세속적인 인간으로부터 믿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나의 최후의 노력인 것이다.
제 3일, 결단
2017년 7월 15일 (토요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결단: 재물, 명예, 권력, 지식 등의 세상적인 가치를 거슬러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다.
독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은 좋지만 모든 것을 참아 받겠다는 각오 없이는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인자하신 아버지의 매질도 영광으로 여기십시오.
때때로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좋은 십자가를 보내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더 이상 돌보시지 않는다는 표시입니다.
어느 조물에 아직도 얽혀있는 이는 하느님의 사정에 자유롭게 참석치 못하나이다.
관상기도에 제일 크게 방해되는 것은 표적과 감각물에만 정신을 몰두하고 자기를 완전히 이기는 일에 진실히 마음을 쓰지 아니하는 것이옵니다.
묵상과 생활실천:
분명히 이 세상에 하루하루 살고 있으면서 세상적 가치: 재물, 명예, 권력, 지식 같은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가치를 넘어서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음도 인정을 해야 한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분명한 고통일 것이지만 이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 고통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나만의 십자가가 없다는 것은 고통이 없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분명한 함정일지도 모른다.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훨씬 쉬운 것이다.
오감에 모든 판단을 맡기는 것, 정신을 쏟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그러한 유혹을 거슬러 자기를 이겨야 한다.
제 4일, 권력과 명예
2017년 7월 16일 (일요일)
권력과 명예, 우리 자신도 이것을 탐하는 기질이 없지 않지만, 그분을 따르는 데 있어 이 세상에서의 이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독서:
선택된 이들은:
첫째, 외적으로 큰 일을 한다 해도 내적으로 성모 마리아와 일치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거룩하신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기들의 어머니로서, 여왕으로서 진정으로 공경한다.
셋째, 성자께서 공생활 전 30년 동안 어머니 마리아에게 완전히 순종한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본받아 마리아에게 순종하고, 마리아의 권고를 정확히 따른다.
넷째, 사랑하올 어머니 마리아의 인자와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다섯째, 마리아의 길을 따르고 덕을 본받는다.
영원한 것이 아니면 큰 것도 없고, 기묘한 것도 없고, 무슨 가치를 줄 만한 것도 없는 줄로 생각하라.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전능하신 분의 분노를 무서워하라.
묵상과 생활실천:
세상적인 것들 중에서도 권력과 명예는 중요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자. 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이것들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에 생각을 고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항상 영원한 것을 생각하며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네, 순례자의 삶임을 잊지 않도록 노력을 한다.
제 5일, 우상화된 육욕
2017년 7월 17일 (월요일)
인간의 본능적 욕망으로부터 거룩하고 순결한 삶으로써 자기 영혼을 보존해야 한다.
독서: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음행을 물리치십시오. 음행 하는 자는 제 몸에다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우리가 이런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마리아에게 더욱 의지해야 하는 까닭은:
- 우리는 연약하고 불안정하기에 하느님의 은총과 선물을 보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약한 육체와 교활한 악마의 엄습, 이런 것으로부터 마리아는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 우리의 겸손의 부족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자기의 은총의 보고가 안전하다고 믿었지만 악마 때문에 그것을 쉽게 잃는다. 그 보고를 마리아에게 맡겼다면 안전했을 것이다.
- 세상은 악마 때문에 크게 부패했기에 이것에 전염이 되지 않으려면 사탄도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유일한 분인 마리아에게 의지해야 한다. 마리아는 당신께 완전히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는 자에게 이런 기적을 행하신다.
교만한 사람과 인색한 사람은 한 번도 평안히 있을 때가 없고,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은 평화가 충만한 중에 산다.
사욕을 쳐 이김으로써 마음에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으며, 그 사욕을 따름으로써 평화를 얻지는 못한다.
묵상과 생활실천:
어릴 적에 이미 이런 음란물에 오염이 되었다고 나는 자책하고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는 그 오염된 것을 해독하고 깨끗이 씻어내는 일 밖에는 없다. 이제 10년도 넘은 이 과정의 시작은 우리 어머니 마리아께서 사랑으로 보호해 주셨기에 이제는 자신한다. 완전히 그 악의 뿌리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절대로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유혹을 받으며 살고 죽을 때까지 갈 것이다.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만나는 상대들이 모두 자매님들이고 나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갈등과 싸움을 하며 산다. 나의 속 마음은 성모님이 잘 아실 것이다. 그저 그저 나를 보호해 달라고 청하고 청한다.
제 6일, 지성주의
2017년 7월 18일 (화요일)
지식과 교양만으로 오만한 자는 결코 하느님의 여러 가지 신비를 받을 수 없다. 겸손 되이 주님을 믿고 의탁하는 사람만이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다.
독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니면 마귀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마리아의 가장 강렬한 원의는 우리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또 성자의 가장 강한 원의는 당신의 거룩하신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가 당신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남보다 박학하고 지혜롭다는 말을 들을 마음으로 아무 글도 읽지 마라.
나는 겸손한 자의 정신을 잠세에서 들어올려, 학업을 십 년간 학교에서 연구한 것보다도 더 많은 영원한 진리의 이치를 삽시간에 통달케 하리라.
묵상과 생활실천:
작년에 써 놓았던 묵상.. 다시 읽으니 올해의 것으로 만들어도 큰 문제가 없어서 그대로 같이 묵상을 한다.
박학다식.. 이것이 과연 그렇게 조심해야만 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누누이 이것을 경계하라고 하는 것일까? 나 자신은 사실 학문적인 것을 너무나 좋아하고 또한 그렇게 죽을 때까지 배우는 자세로 살고 싶은데, 이런 경고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 믿음이 없는 지식, 사람이 만든 지식, 겸손 됨이 없는 지식은 꼴불견일 수 있고, 위험한 것일 수 있다. 도덕적 제한과 신앙적 제한이 없는 그런 지식과 학문을 경계하라는 것일 것이다. 수많은 천재적 학자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자인가? 그들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오늘의 ‘세속정신’을 공부하고 묵상한다.
제 7일, 집단적 인간성
2017년 7월 19일 (수요일)
그리스도의 제자는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지닌 열린 사람이어야 한다.
독서: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에사오와 야곱의 대조적인 점으로 세속적인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자녀들의 상징이며, 에사오는 세속적인 사람들, 즉 하느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세속의 자녀들은 세상의 일에 자신의 능력과 재치를 신뢰하며 세상 일에는 매우 강하고 재치 있고 현명하나 천상의 일에는 약하고 무지하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영혼 속에 머물고, 피정이나 내적 및 영신적 신심을 좋아하며, 세속을 멀리하고 내적으로 생활을 한다.
어떠한 조물로부터 위로를 찾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면 완전히 만족하게 된다.
항상 종말을 생각하라. 냉담하기 시작하면 괴롭기 시작한다. 조그만 과오를 피하지 않는 사람은 차차 더 큰 과오에 떨어진다. 하루를 유익하게 보냈으면 저녁 때에는 항상 즐거워하리라.네가 힘을 쓰는 그만큼 진보한다.
묵상과 생활실천:
세상의 유행을 거슬러 살라.. 지금 이 나이에 나에게 세상의 유행이나 흐름은 과연 무엇인가? 상관이 없지 않을까? 과연 그럴까?
모여서 놀고 유행처럼 유람선이나 타고 큰 의미 없는 여행으로 시간을 죽이고, 지나치게 끼리끼리 모이는 모임들, 동창회, 술친구.. 이런 모임들.. 도 지나친 세속정신에 속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큰 걱정이 없을지도..
세속적인, 현실적인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세상을 떠난 듯한 방식의 삶을 산단 말인가? 항상 이것이 나에게는 풀리지 않는 해답이 없는 그런 난제였다.
능력 있다고 믿는 자신감은 항상 나쁜 것인가? 그런 능력이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문제가 없는 것인가?
에사오, 야곱의 이야기는 3번째 읽어도 나에게는 석연치 않은 그런 이야기다. 어떻게 루도비코 성인은 이 이야기에 그렇게 중점을 두었을까? 평범한 가치에도 이 이야기는 어려운 비유가 아닐까? 에사오가 세속적임은 어렵게 이해가 가도 그가 하느님에게 버림을 받은 부류라는 것은 암만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다시 신중히 위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아니 원전인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읽고 판단을 해 보자…
작년에 묵상한 위의 글, 아직도 같은 마음이라서 그대로 남기기로 한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세속을 거슬러 사는 것, 나에게 아직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고백, 나의 과제는 이 용기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성모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면서…
제 8일, 쾌락
2017년 7월 20일 (목요일)
그리스도인도 기쁨을 경시하지 않지만,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기에 언제나 새로운 자극으로 자신을 마비시킬 필요가 없다. 나는 내면의 소리보다 세상적 즐거움에 더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가?
독서:
거지였던 라자로는 부자 집에서 구걸을 하며 살다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죽어서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았다.
세속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의 어머니인 마리아 공경을 위해서는 별로 노력하지 않는다.
에사오로 대표되는 세속인들은 흥청대고 먹고 마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축복받기 위해서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너는 모든 일에 끝을 생각하라. 지엄한 판관 앞에 신문을 당할 것을 생각하라.
지금 네가 너를 아껴 네 육신을 섬길수록 후에 엄한 벌을 당할 것이요, 불에 탈 자료만 더 할 것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즐거움, 쾌락.. 같은 것을 그렇게 조심시키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말초신경을 건들이고 자극하는 쾌락은 분명히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즐거운 것이 아니다. 많이 먹고 마시고 놀고 하는 것.. 어느 정도까지가 옳은 것일까?
나는 과연 쾌락이란 것을 추구하고 있을까? 나에게 알맞은 정도의 쾌락은 현재 무엇일까? 과거의 부끄러운 ‘말초 신경적인 쾌락’을 경험한 나로써는 다시는 그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마음이 없다. 혼자 힘으로 안 되는 이것도 성모님께서 도와 주신 것.. 2007년 초를 어찌 잊으랴.. 성모님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저를 암흑의 세계로부터 보호하여 주소서!
작년에 묵상했던 것을 다시 읽는다. 위의 묵상, 지금도 ‘절대로’ 유효하다. 쾌락 중에서도 어두운 쾌락은 아마도 먼 옛 이야기가 되었다. 이것은 거의 신비에 속한다. 어떻게 나는 그런 어두운 것에서 멀어질 수가 있었던 것일까? 성모님의 손길과 입김을 안 느낄 도리가 없다.
앞으로 얼마나 살 날이 있을까마는 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서도 안락과 쾌락의 시간과 유혹이 있을 것이다. 단단히 무장을 하고 조심을 하지 않으면..
제 9일, 거짓과 위선
2017년 7월 21일 (금요일)
정직이 푸대접 받고 있는 세상이고, 거짓과 위선이 당연시 된 이세상, 우리는 어떠한 때라도 그리스도의 깨끗함을 따르며 살아야 한다.
독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일부러 남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지 말아라.
기도를 할 때는 남이 보는 앞에서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
단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말아라.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사람이 세상을 떠나 위로 오르는데 두 날개, 순박과 순결의 날개: 지향에는 순박이, 감정에는 순결이 있어야 한다.
묵상과 생활실천:
예 하고 말할 때 나는 과연 예를 했는가? 반대로 아니오 할 때 그랬는가? 솔직히 확실하지 않다. 자신이 없다. 옛날 보다는 조금 더 신중하게 대답하고 결정을 하려 하지만 아직도 자신이 없다.
내가 제일 위선자, 그것도 ‘전통적인 위선자’를 싫어하지만 과연 나는 어떤가? 나의 인생을 거의 파멸의 시작으로 만들었던 일련의 ‘거짓말’과 ‘위선’은 어떤가? 왜 그것을 나는 과소평가하려는 것인가? 그것이 우리 가족에게 오랜 세월에 걸쳐 미친 악영향은 어떠한가? 나는 괴로워하긴 했지만 진정으로 반성을 했던가 확실하지 않다.
말과 행동을 같게 하는 것, 그것이 위선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말할 때 조심하고 결정하면 그대로.. 항상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겸손하게 그의 아들 예수님께 나아가면 이제는 예전에 겪었던 뼈저린 실수와 죄를 다시 범하지 않을 것, 이라는 자신이 있다. 이제는 자신이 생긴 것이다.
제 10일, 자유에 대한 무절제한 갈망
2017년 7월 22일 (토요일)
세상적인 욕망에 대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를 상실하는 것이다. 자신을 자유로이 하느님께 맡기고 드리는 것이 최상의 자유이다.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
독서: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던 아담과 하와는 결국 자신들의 수치를 알게 되었다.
너희가 내 말에 산다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육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재물, 자애심, 탐욕, 호기심, 방랑생활, 항상 재미스러운 것만 찾는.. 이런 모든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아직도 너는 버릴 것이 많다. 네가 이 모든 것을 내게 맡기지 않으면 네가 구하는 바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자유, 자유, 속박으로 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 돈에 대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육정으로부터의 자유,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던 자유는 위에 말한 자유가 아님을 알고 나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비록 오랜 세월을 ‘교회정치’에 억압되어서 살았고 그것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잊고 인간이 하느님이 되겠다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의도임을 나는 때 늦게 깨닫게 되었다. Humanism의 그늘진 의미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자유롭게 되려면 하느님의 권능과 예수님의 가르침 아래에서 모든 것이 가능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전체이신 하느님이 그가 창조한 우리들을 속박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란 것은 의미가 단계가 있는 것이다. 낮은 단계의 자유에서 ‘초월적’인 단계의 자유.. 이것을 우리들은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그저 자유란 마음대로 나르는 새 같은 그런 ‘마음대로 하는 그런 자유’를 연상하며 환호했을 것이다.
자유가 방종이 안 되려면 나는 역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사는 것이 제일 안전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정수가 아닐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아멘..
제 11일,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2017년 7월 23일 (일요일)
사람들은 삶에 대한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돈과 재물을 모으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을 청하며 평화와 기쁨 중에 살아간다.
독서:
자기를 위해서 재산을 쌓아 둔 부자에게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 만으로 족하다.
아들아, 네가 나와 더불어 길을 가려면 즐거운 일을 만날 때 좋아함과 같이 괴로운 일을 당할 때에도 좋아할 것이다. 모든 일이 원만하고 풍족하게 될 때에 좋아함과 같이 궁하고 가난하게 될 때에도 좋아할 것이다.
생명의 책에서 제 이름을 지우시지만 않으시면 아무리 어떤 괴로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해 될 것이 없겠나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걱정, 근심.. 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삶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정상인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인생의 질은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저 괴로워 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그 괴로움에 의미와 목적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내가 자주 겪는 걱정 근심들은 사실 너무나 자질구레한 것들이다. 의미와 목적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것들.. 그래도 나는 그것들에 공격을 받고 괴로워한다. 이것은 별 수가 없다. 노력을 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그저 시간과 세월이 지나면 되는 그런 것들이다.
진정한 존재적인 고통에서 나는 서서히 벗어났고 이제는 조금 자신이 있다. 나 이경우라는 이 고독한 영혼은 절대로 죽지 않는 하느님의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성모님.. 저는 당신을 기대며 삽니다. 나의 어머니라고 자꾸 자꾸 나를 위로합니다. 당신의 손을 잡고, 그 옛날 나의 어머니의 손이 이끌려 가듯이 나는 포근한 안내를 받고 하루하루 보냅니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생에서 빼 놀 수 없는 것임을 알아갑니다. 즐거움에도 고통에도 모두 의미가 있다는 것도 배워갑니다. 다만 다만 고통은 아직도 무섭고,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제 12일, 생의 마지막 것들
2017년 7월 24일 (월요일)
자기 생의 마지막을 예견하고 준비 없이 기습을 당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때 비로소 이 세상의 헛된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독서:
노아의 홍수 때처럼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어라…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네가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고 곧 죽음을 당할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큰 위험을 면하며 얼마나 큰 두려움을 면하랴! 이제부터 너는 후세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기 위하여 세속에 대하여 죽기를 배워라.
하루라도 더 살 줄을 분명히 모르면서 모든 사람들이 죽음으로 끝을 맺으니, 사람의 생명은 그림자와 같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네가 죽은 다음에 누가 너를 기억하여 주며, 누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랴! 사랑하는 이여, 네가 무엇이든지 할 만한 것이 있으면 지금 하라. 이는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또한 네가 죽은 후 사정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너는 이 세상을 지나는 순례자와 나그네로 여겨 세상의 모든 사정에 상관치 말아라. 네 마음은 아무것도 거리낌없이 자유스러이 보존하고 하느님께로, 위로 향하여 둘 것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산 근래에 나는 공공연히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라고 감히 말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이 그럴까? 나의 깊은 속에서는 ‘그래도 내일과 모래는 괜찮을 거야’ 하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그래도 나는 많이 바뀌었다. 죽음이 나에게 있어서 모든 우주의 마지막이 아님을 믿기로 했기 때문이고, 그렇게 믿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 현세에 있어서의 마지막을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실제적으로 나는 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오늘 죽게 된다면.. 내가 지금 죽게 된다면.. 준비를 할 겨를이 없다면..
이런 심정으로 다시 내일을 살게 되면 나는 무엇을 먼저 준비를 해야 하나? 가족, 친척, 조국, 나를 나아준 나의 세상.. 에 대해서 무엇을 남기며 준비할 것인가?
저 세상에 가면 분명히 우리 어머니를 만날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죽기 전에 한번 엄마의 추억을 서울에서 더듬고 싶고 아마도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가능하다면 일생의 숙제가 되고 있는 누나의 식구들과 화해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아마도 성모님의 도움을 넘어야 할 마지막 산이 될 것이다. 성모님, 시궁창에서 구해 주셨듯이 저희의 손을 잡고 마지막 봉우리를 넘게 해 주소서!
작년에 했던 묵상:
아! 과연 나는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죽음에 대해서: 모르는 체하고, 피하고, 진정으로 무의미한 것에 슬퍼하며 살았던가? 그것이 나의 모든 불행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먼 곳을 절대로 안 쳐다보고 피하고 무서워하고.. 불안과 근심이 나를 완전히 마비시켰을 때도 허다하다.
모든 것은 나의 손에 달려있다는 허망 된 생각, 나는 그런 ‘자력, 자주’를 지향하였는지는 몰랐지만 설마, 초자연적인 사랑의 손길이 온 우주에 가득 차 있었다는 진리를 모르며 죽을 뻔 했다.
어떻게 그런 진리가 나에게 다가왔는지.. 모든 피조물은 이것을 알아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을진대.. 어찌하여 나보다 더 늦은 피조물이 그렇게 많던가? 나는 그것을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 죽음을 알라고.. 죽음이 생의 마지막이 절대로 아니라는 진리를..
둘째 시기 제1주: 자기 자신을 알기
제1주 묵상 주제: 죄가 우리 영혼을 짓밟아놓은 여러 가지 황폐상을 밝혀 내고, 자기 인식과 자기 죄에 대한 통회 를 위해 모든 기도와 선행을 겸손 된 마음으로 바친다.
매일 바칠 화살기도: “주님, 저로 하여금 제 자신을 알게 하소서.“
우리는 성모님께 피신처를 얻고 모든 다른 은총의 전제조건이 되는 이 은총(즉, 나를 알게 하는)을 얻어주시도록 성모님께 간구한다.
성모님의 발 앞에서 매일 성실히 기도와 성찰을 하고,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통찰한다.
제1주 동안 매일 드릴 기도: “성령송가, 바다의 별, 성모 호칭 기도“
묵상 전 기도:
죄에 물듦이 없으신 성령의 짝이시요, 예수님의 어머니시며
저의 어머니시요, 주인이시며, 모후이신 마리아님,
저를 온전히 당신께 드리며
도 당신을 통해 예수님께 온전히 속하여 있기를 원하오니
성령으로부터 제게 영광과 힘을 간구하여 주시고
저로 하여금 제 자신을 알고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저의 모든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게 하소서.
오소서, 성령님!
저의 마음을 당신으로 채워주시고
저로 하여금 제 자신을 알고 하소서.
아멘.
제 1일, 자신에 대한 인식
2017년 7월 25일 (화요일)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나와 주위의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창조물,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감사의 삶을 살고 있는가?
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 그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제 영혼이나 육신이 가진 그 모든 것은 본성으로나 초성으로나 다 당신의 은혜이오며, 이 모든 좋은 것이 다 당신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게 되나이다.
당신은 각 사람이 무엇을 가져야 좋을는지 아시나이다… 당신은 각 사람이 무엇을 가져야 좋을는지 아시고, 이 사람은 왜 적게 받고 저 사람은 어째서 많이 받았는지 아시나이다. 각 사람의 공로는 다 당신이 한정 限定 하셨사오니, 이 모든 것을 분간하는 것도 저희가 할 것이 아니요, 당신이 하시는 것이옵나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비록 나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극히 작은 존재이지만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며 사랑으로 나를 내셨다고 한다. 정말 일상생활에서 이런 것을 느끼며 사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이 복잡하고 무질서적인 세상의 한 모퉁이에 있는 나를 하느님이 사랑의 눈으로 아신단 말인가? 시간, 공간의 저편에 계신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에게 이런 것 절대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제는 믿으려고 하고 믿고 싶습니다.
작년의 묵상:
나 평창 이씨 이경우 라는 인간이 비록 대한민국 서울에서 이정모 양점순 부부에 의해서 태어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나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창조한 생명이라는 사실.. 믿기 힘든 이 진리를 아는 데 일생이 걸렸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그런 인생을 허비한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나의 머리카락의 숫자까지도 아시는 성삼위시여.. 저에 대해서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저의 생각, 행동, 앞으로 다가 올 일도 모두 아십니다. 저는 성령의 도움으로 최선을 다해서 남은 인생을 보낼 각오가 서 있기에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저를 주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제 2일,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
2017년 7월 26일 (수요일)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내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를 깊이 깨닫도록 해야 한다. 자신이 지은 죄의 추악함과 그에 따른 파괴와 파멸을 깨닫고 아파하고 부끄러워하며 죄에 대한 혐오감을 느껴야 한다.
독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주십니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선행도 마음 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나쁜 바탕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썩는다.
우리 자신에게서 이탈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나쁜지, 선행을 함에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지, 모든 일에 있어서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참을성이 없는지, 은총을 받을 자격이 얼마나 없는지, 또는 모든 것에 있어서 얼마나 악한지를 성령의 비추심으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허무와 죄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하느님의 분노와 영원한 지옥밖에는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다.
아무 유혹이 없어 좀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며 어느 틈에 벌써 조그마한 욕망으로 거의 패하게 됨을 깨닫게 되나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원죄.. 원죄..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쉽게 이해하면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성악설..이 아닌가? 원래는 선했는데 아담과 이브의 죄 이후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가만있으면 저절로 죄를 짓게 되는 것, 그래서 부단히 이것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하느님은 그것을 원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을 마련하셨다.. 이제 나는 이렇게 교리에 의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작년의 묵상:
나는 인간이 이렇게 원죄에 심하게 물들어있는지 깨달은 적이 없었다. 사람은 원래 죄가 없이 태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은 것임에 의심을 한 적이 없었다. 이제 바뀌고 있는 나의 세계관은 이것을 수정할 필요가 생긴다.
‘말씀’대로 우리는 원래가 죄인인가보다. 싫지만 어쩔 수가 없다. 성경을 비롯 모든 말씀이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그 죄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님, 그러니까 성령을 포함한 성삼위의 도우심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한다. 내 자신이 죄를 피하거나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것, 내 생각에만 의존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 한 것.. 이것은 너무나 커다란 생각의 변화를 요구한다.
내 자신은 무엇인가?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 이렇게 바뀌어야 하다니? 그렇다 믿어보자. 이 말씀을 모두 믿어보자. 그야말로 ‘손해 볼 것 하나도 없다’는 이기심을 이용하자..
제 3일, 내적 죽음
2017년 7월 27일 (목요일)
내적 죽음으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악과 죄가 소멸되고 더 선한 것, 즉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새로운 인간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독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재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에게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어떻든 날마다 자기 자신에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능력과 육체적 관능의 활동을 단념해야 할 것이며, 무엇을 보아도 보지 않는 것처럼, 들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또 세상 것을 사용하여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다.
저의 하느님이시여, 영혼을 낫게 하시는 천상적 의사이신 당신 외에는 하늘 밑에 있는 그 모든 이 중에서 아무도 저를 위로할 수 있는 이가 없나이다.
제 등과 제 목을 때리시어 저의 비꼬인 마음을 당신 의향대로 꾸부리게 하소서.
당신 의향대로 저를 지도해주시고,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잘 아시는 저의 죄 많은 인생을 멸시하지 마옵소서.
묵상과 생활실천:
오늘 묵상하려니.. 적시를 놓친 기분이 든다. 밤늦게 산란한 마음으로 이런 거대한 주제를 어떻게 묵상한단 말인가? 용서하소서.. 우리 동정녀 마리아님!
자아를, 내 고집을, 내 주장을 죽이고 살아라.. 남에게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다른 잡스러운 것이 무엇 더 필요합니까.. 나보다는 하느님의 뜻으로 무장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며 나를 죽입니다.
작년의 묵상:
나를 죽여야 산다는 역설적인 말은 무엇인가? 나 보다는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인가? 죄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우리들이기에 항상 깨어서 죄를 짓는 자신을 누르며 하느님을 향한 커다란 문을 열고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나는 받아드린다.
한번의 세례로 모든 죄가 씻어졌을 리가 없다. 계속 때가 끼듯이 쌓이는 죄.. 큰 죄, 작은 죄, 내가 알지도 못하는 죄.. 우리의 힘으로 이것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초자연적인 보호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의 묵상으로 나는 어떤 생활실천으로 나아가야 하나? 엄청난 죄를 범할 자신, 깡, 시간이 없지만 그래도 항상 조심, 하느님을 거역하는 쪽은 바라 보지 말아야 한다. 성자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 다시 생각하며 살자. 물론 우리 어머니 성모님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다. 더욱 깊은 기도를 시도하자.. 반복 기도 중에서도 더 깊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자. 세상의 편한 것들, 눈요기 감들, 간혹 느껴지는 유혹들.. 이런 것들 기도의 힘, 성모님의 도움으로 물리치자.
제 4일, 이기심
2017년 7월 28일 (금요일)
이기심, 교만, 나태함: 내적 죽음에 이르기 위하여 싸워야 할 대상이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 자신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며 이를 위하여 우리는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아야 한다.
독서: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나에게 해 준 것이 없는 자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사람들의 눈길이나 자기의 지식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느님의 시야 안에 감싸서 숨겨두기” (시편 31, 21참조) 원하시는 것을 놀랍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들(사람들의 눈길, 자기의 지식)을 숨겨두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굴욕을,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어떠한 유혹이라도 당하게, 어떠한 불안, 암흑, 그리고 고독에 내버려 두게 하십니까!
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얻기 위하여 너를 완전히 내게 맡겨야 할 것이고, 아무것도 네 것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네가 가지지 못할 것은 탐하지 말라. 네게 방해되고 내적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지지 말라.
왜 헛된 근심으로 몸과 마음을 소모하느냐? 왜 쓸데없는 걱정으로 번뇌하느냐? 나의 뜻을 따라라 그러면 아무 해도 없을 것이다. 편함을 취하고 무엇보다도 네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려고 이런 것 저런 것을 찾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려면 도무지 평안할 수 없다.
네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변할 수는 있어도 나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작년 묵상 이후 나는 어떻게 변했을까?
이기심, 교만, 나태함.. 흠.. 이기심은 다행히도 나에게 그렇게 괴로운 문제는 아닐 듯하지만 이것도 교만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는 그렇게 심한 case는 아닐 것이다. 남을 우선으로 하는 것, 나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교만, 내 자신을 남에게 자랑하거나 뽐내거나.. 하는 것도 사실 외적으로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모든 것을 나타내지 못하는 나에게는 그것이 함정이다. 겉으로 친절하고 속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것, 나도 이제는 싫다. 겉과 속이 같아지면 나도 더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나태함, 아하! 이것은 나의 고질병이었고 현재도 진행 중일 것이다. 예전보다는 나아지고는 있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에서 나는 주춤하며 결과적으로 나태함을 보인다. 자신이 없을 때, 나는 그저 그저 세월을 보낸다. 저절로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라고 상상을 하면서, 그 중에서 요행을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나는 마음의 깊은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 매사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사는 것, 아직도 나는 서툴다, 서툴러… 이것이야말로 우리 어머님의 전구가 필요한 것이 아닌지…
작년의 묵상:
나에게는 어떠한 이기심이 있을까? 언뜻 생각하기에 별로 없는 듯 싶은 것이.. 바로 나의 교만일 것이다. 내 것만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남에게 별로 신경을 못 쓴 것이 이기심의 일종임을 어찌 이제야 깨닫게 되었을까? 별로 남까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나의 자신에게 얽매어 살았기 때문이고, 여기에는 각종 나태함이 크게 나를 붙잡고 있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남까지도 아니다.. 가장 가깝다는 나의 혈육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어찌 여기서도 우리 것에만 신경을 쓰는 나태함이 있단 말인가? 가장 가장 수치스러운 것, 엄마를 그렇게 보내 드린 것.. 이것은 나태와 이기심의 극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 나름대로 이유를 찾는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은 역시 나의 교만이다.
현재 이런 것들을 조금은 여유롭게 성찰하고 반성한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족할까? 절대로 아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나는 다시 그 과거의 잘못을 그대로 아니 더 크게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나는 안다. 나 자신을 알기에..
앞으로 어떻게 살까? 역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오늘의 묵상 주제에 나와 있다. 하느님의 그늘, 날개 밑으로 숨어들면 된다. 그곳에서 절대로 멀리 벗어나지 말도록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 바로 그것이다.
제 5일, 교만
2017년 7월 29일 (토요일)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볼 줄 알며 자신의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알고 그분께 다시 돌려드릴 줄 아는 사람이다. 교만은 죄의 시작이며 죄의 뿌리이고, 모든 덕을 일시에 잃게 한다.
독서: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성모)마리아는 일생 동안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지극한 겸손으로 숨어 살기를 원하였고 오직 하느님께서 자신을 알아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였다.
이런 마리아의 청을 허락하시어 마리아의 잉태와 탄생, 삶과 모든 신비들, 그리고 마리아의 승천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숨기셨다.
마리아는 새로운 아담의 지상 낙원으로서 그 안에서 성령의 권능으로 새로운 아담이 사람이 되셨고 불가사의한 기적이 일어났다.
저는 무슨 은혜를 받기에 부당하오나 당신은 고상하시고 한없이 착하시므로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항상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당신을 싫다고 멀리 달아나는 사람들도 돌보아주시니 당신은 찬미를 받으심이 마땅하옵니다.
묵상과 생활실천:
교만과 겸손.. 교만의 반대가 겸손이라면 특히 그것이 하느님께 대한 것이라면.. 나는 어떠한가? 하느님께 대한 나의 태도는 교만.. 특히 예전에는 정말 교만하였다. 비웃기도 하였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난으로 일관하기도 하였다. 나는 나.. 너는 너.. 극히 개인적인 교만으로 살았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겸손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특히 겉으로 보이는 나의 태도는 겸손하게 하려고 하였지만.. 이것은 사실 겉과 속이 다른 때가 적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것만이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나를 은밀히 보고 있는 절대자 하느님을 나는 절대로 의식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살았다. 그래도 지금은 나를 보아주는 성삼위의 현존과 특히 성모 마리아의 은밀한 도우심을 받아들이기에 전에 비하면 덜 위선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너무나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우리 어머니 성모님 덕분이다. 성모 마리아 어머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제 6일, 나태
2017년 7월 30일 (일요일)
일곱 가지 죄: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 이웃을 구원까지 우리가 해야 할 몫이지만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너무나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나태함은 자신의 영성생활의 진보가 없게 하며 다른 이들의 구원에도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독서:
종들이 재산을 맡아서 간수를 할 때,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의 가치를 늘린 종들과 안전하게 땅에 묻어두고 아무 일도 안 한 종들, 하늘나라는 일을 열심히 한 종에게 상을 주지만 일을 안 하고 놀았던 종들에게는 벌은 주었다.
세상과 지옥에 대해 더 강하고 더 무서운 정신과 마음의 일치로 단단히 단결하십시오.
여러분은 십자가 안에 숨겨진 영원한 보화를 얻기 위해 여러분의 노력을 하나로 뭉치십시오.
네게 재미있고 편한 것을 구하지 말고, 내 뜻에 맞고 내게 영광이 될 것을 구하라.
아직까지는 싸울 때이며 수고와 시험을 당할 때다. 너는 지금 지극히 높은 선을 누리고자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내가 바로 그 지극히 높은 선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나를 기다려라.
본성에 반대되는 것을 참는 일과 행하는 일에도 굳세고 용감 하라. 너는 반드시 새 사람을 입고 나서 다른 사람으로 변하여야 한다. 너는 가끔 네가 싫어하는 일도 하여야 하고, 좋아하는 일도 그만두어야 한다.
묵상과 생활실천:
나의 나태는 주로 ‘무서움과 용기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주 많다. 당신 동정 성모님의 절대적 ‘밀어 줌’으로 인해선 나는 전에 비해서 훨씬 ‘덜 나태’해 졌다고, 자만 같은 느낌이 있지만 아직도 나는 믿는다. 싫은 것을 덜 싫게 느끼려 노력하며, 덜 즐거운 것도 반대로 그것이 궁극적으로 즐거운 것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면 살아간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나는 ‘돈을 굴리는 일’에 별로 호감이 가지를 않았지만 그것을 다른 쪽을 생각하면 ‘일을 열심히’ 했다는 것에 중점을 두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머리와 몸이 제대로 움직이는 한 그것을 절대로 쉬게 하거나 놀리는 것은 나도 너무 싫어한다. 예전에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싫은 것은 죽어도 피하며 안 했으니까..
재미있는 의미 없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쏟았던 것도 나는 부정할 수 없는 나의 과거였다. 더군다나 남의 구원을 위한다는 일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며 살았다. 나의 구원을 위해 근래에 나는 각별한 노력을 하긴 했지만, 이것도 주로 나는 도움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2007년부터 시작된 작은 불씨, 매일 묵주기도는 연숙의 기도의 덕분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2010년 레지오를 시작한 것은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의 손길에 의한 것이었다. 2014년의 ‘대 사건’은 100% 어머니 성모님의 도우심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받기만 한 것일까.. 그래도 나는 이런 도움으로 열심히 연숙과 같이 뛰었다. 열심히 뛰었다. 뒤를 안 보고 앞으로만 갔고, 절대로 두 번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려 애를 쓰며 살았다. 충분한가? 절대로 아니다.. 나와 연숙은 할 일이, 그것이 아직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많다. 그래서 나태 같은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발을 못 붙이게 만들어야 한다. 성모님의 전구와 도움이 있으면 절대로 가능한 것들이다.
제 7일, 애덕이 없음
2017년 7월 31일 (월요일)
다른 계명을 어긴 것은 고해하면서 주된 계명인 사랑을 거슬린 일에 우리는 거의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은가? 주님의 참된 제자인지는 그가 사랑이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독서: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온 계명의 말씀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나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가 얻은 것과 죽을 때까지 얻을 모든 보속의 가치를 마리아에게 맡겨 그것을 죄인들의 회개와 불쌍한 영혼들이 연옥에서 구원되는 데 사용하시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이웃을 위한 완전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죄인들의 회개와 연옥의 한 영혼의 구원은 한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것보다도 더 훌륭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 선행이다. 이 선행은 동정 마리아의 너그러운 손길을 거쳐 지나감에 따라 더 깨끗해지고, 따라서 보속과 대신 간구의 가치를 더 많이 받게 되어 죄인을 회개시키고 연옥 영혼을 구하는 데에 더욱 큰 힘을 갖게 되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사람의 본성이란 너무나 죄에 떨어지기 쉽고 너무나 나약하고 변덕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만 믿고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는 데에서 불행이 오는 것이다.
사랑이 없이 겉으로 하는 일은 아무 소용이 없고, 애덕으로써 하는 일은 아무리 작고 천한 일이라도 모두가 유익하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일을 얼마나 많이 하였는지 살피시지 않고 얼마만한 열정과 사랑으로 하였는지를 헤아리시는 까닭이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일을 많이 한다. 일을 잘하는 것이 일을 많이 하는 것이다.
참다운 애덕이 있고 완전한 애덕이 있는 사람은 무슨 일에든지 자기를 찾지 않고 모든 일에 다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만 원한다.
묵상과 생활실천:
사랑이 없음을 슬퍼해야 한다. 이것은 진리일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어렵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조건’ 사랑은 어렵다. 조건이 없는 사랑을 나는 해 보았을까? 이웃이나 가족이나 나아가서 국가나 인류를 위한 사랑에 대해서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싫은 사람, 좋아할 만한 값어치가 없는 사람, 떨어져 있는 사람, 나를 괴롭혔던 사람, 근처도 가기 싫은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 아~~ 얼마나 사랑을 하는 것이 힘든가? 맞다.. 이것도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하려니 어려운 것이다. 성모님께 의지하고 성삼위 특히 성령님께 의지하면 쉽다고 하지 않는가?
아직 원수를 사랑할만한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도움으로는 가능할 수 있음을 이제는 압니다. 그 길로 저를 인도해 주소서!
또한, 새로 깨달은 사실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는 것, 기도를 통하던 선행을 통하던 상관이 없이.. 연옥의 영혼들을 위한 기도, 이러한 우리들의 보속행위를 성모님을 통해서 바치는 것,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둘째 시기 제2주: 성모님을 알고 사랑하기
매일 바칠 화살기도:
“오 마리아님, 저는 제 자신을 온전히 당신께 맡겨 당신의 소유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제2주 동안 매일 드릴 기도:
성령 송가, 바다의 별, 성모 호칭 기도, 루도비코 성인의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
+ 성령송가: 오소서 성령님…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은총의 주님 오시어 마음에 빛을 주소서.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생기 돋워주소서.
일할 때에 휴식을, 무더울 때 바람을, 슬플 때에 위로를.
지복 至福 의 빛이시여, 우리 맘 깊은 곳을 가득히 채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면 우리 삶 그 모든 것 이로운 것 없으리.
허물을 씻어주고 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 고치소서.
굳은 맘 풀어주고 찬 마음 데우시고 바른길 이끄소서.
성령님을 믿으며 의지하는 이에게 칠은 을 베푸소서.
공덕을 쌓게 하고 구원의 문을 넘어 영복을 얻게 하소서.
묵상 전 기도
티없으신 동정 성모 마리아님,
당신은 성부의 선택된 따님이시고
지극히 정결하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성령의 충실한 짝이시나이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당신은 또한 저의 어머니시고
주인이시며 모후이시니
저를 위하여 성령의 비추심과 사랑을 빌어주시어
저로 하여금 당신을 더욱 더 잘 알고
더욱 사랑하도록 해주소서.
제가 온전히 당신께 속하게 되면
또한 예수님께 온전히 속하기 때문이나이다.
오소서, 성령님!
저의 마음을 당신으로 채워주시고
제 안에 천상 사랑의 불을 붙여주소서.
아멘.
마침 기도: 바다의 별
바다의 별이요,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평생 동정이시며, 하늘의 문이시여, 하례하나이다.
죄인의 사슬 풀고, 선을 구해주소서.
기묘하신 동정녀요, 가장 양선 하신 이여.
저희를 죄에서 구해, 착하고 조찰케 하소서.
하느님 아버지께 찬양과
그리스도께 영광과
삼위이신 성령께 같은 존경 있어 지이다.
제 1일,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와 마리아
2017년 8월 1일 (화요일)
삼위일체 신비에 마리아만큼 깊이 다가가고 받아들여진 조물은 마리아 이외는 없다. 이것을 사랑을 가지고 몰두하는 사람은 그 관계에 대한 새로운 깊이와 아름다움을 찾아 얻게 될 것이다.
독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인 것입니다.
성자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그러나 마리아 안에서, 마리아를 통해서 되셨다. 성령께서도 성자를 마리아 태중에 잉태게 하셨으나, 먼저 당신의 첫 번째 사신을 보내어 마리아의 승낙을 받으셨던 것이다.
예전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브라함이 이사악 을 제헌 하셨음 과 같이 마리아의 동의로 영원하신 성부께 제헌되기 위하여 마리아가 지켜보게 된 당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올 동정 마리아에게 순종함으로써 당신의 완전성과 존엄성을 드러내셨다.
영원하시고 완전무결하신 하느님께서 미천한 조물인 마리아에게 순종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도 기묘한 일인가!
30년 동안 마리아께 순종하며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마리아께 우리 자신을 예속 시킴은 얼마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되겠는가!
마리아가 말을 하자마자 엘리사벳 의 태중에 있던 요한이 거룩해졌는데 이것이 은총계에 있어서 예수님의 첫 기적이고 다음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은 자연계에서 첫 번째 기적이다. 모두 마리아를 통하여 일어난 기적이었다.
성령께서는 어떤 영혼 안에 당신과 떨어질 수 없는 충실한 정배 마리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 영혼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영혼을 낳기 위하여 더욱 많고 더욱 훌륭한 활동을 그 영혼 안에서 하신다.
남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당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성령이셨지만 마리아를 통하여, 마리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체들을 낳으심으로써 당신의 생산 능력을 발휘하셨다.
성인들은 마리아를 두고 우리 모든 인간이 풍성한 보화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하느님의 보고(寶庫)” 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당신의 자비를 잔잔하고 풍성하게 쏟아 흘려 보내 주시는 통로이면서 신비스러운 운하이신 분은 바로 마리아 이시다.
묵상과 생활실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비록 성경에는 이런 자세한 것들이 다 숨겨져 있지만 성인들, 특히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모든 숨겨진 신비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우리들은 쉽게, 큰 노력을 하지 않고 알 수 있게 되었다.
레지오 교본을 통해서 익히 들었던 표현들이 다시 원전에 의해서 큰 힘으로 다가온다. 왜 그렇게 성경에는 빈약하게 남아있는지 이유를 알려면 알 듯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 모두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주 요점은 이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성경에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은총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피조물, 성인 중이 성인, 게다가 유일하게 원죄 없이 잉태되신 죄 없으신 인간이라는 사실.. 그 어머니에게 의탁을 하며 예수님을 찾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 방법인가? 왜 그렇게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못 마땅해 하는 것일까?
나는 이제는 짧지 않은 경험에 의해서도 이런 ‘무서운 진리’ 를 큰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나는 지난 몇 해 동안 엄청난 어머니의 인도와 위로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성모 마리아님, 이제는 감히 나의 천상의 어머님, 제2의 지상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따르겠습니다.
제 2일, 성령의 정배이신 마리아
2017년 8월 2일 (수요일)
마리아의 전 생애는 늘 성령의 인도 하에 있었다. 마리아께 대한 참된 사랑과 성령께 대한 참된 흠숭은 서로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독서: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께서 한 영혼 속에 뿌리를 내릴 때, 마리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은총의 기적들이 그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마리아께서는 다른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순결과 출산 능력을 지니고 있는 영광스러운 동정녀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성령께서 영혼들 안에서 놀라운 기적들을 많이 행하시지 않음은, 당신의 충실하고 떨어질 수 없는 정배이신 마리아와 긴밀히 일치하는 영혼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우리 안에 성령께서 활동을 하시게 하려면 마리아를 받아들여 우리의 어머니가 되게 해야 한다는 사실, 이제는 완전히 믿으며 살게 되었다. 이제는 절대로 성모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일은 없으리라 확신하고 희망을 한다.
성령의 정배이신 마리아..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간다. 성령과 마리아의 특별한 관계를. 성령의 역사하심을 이제는 나도 조금은 이해를 하기 때문일까? 나의 안에 성령이 오셨다는 현존느낌은 한 번도 없었어도 이제는 기대를 할 정도로 가슴이 열렸다. 이것은 분명히 나의 손을 잡고 이끄시는, 그리고 수 많은 일들로 우리를 ‘살려주신’ 우리 어머니 성모님을 통한 작은 기적들을 내가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되어 성령으로 끝이 나는, 신약의 ‘빈약한’ 마리아에 관한 얘기들, 얼마나 웅장한 이야기인가? 어머니 마리아를 내가 그렇게 개인적으로 받아 들이고 느끼고 기대고 이끌리는 것은 실로 나 이경우 개인에게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나는 어머니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해도 큰 무리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성모, 마리아여.. 저로 하여금 당신을 더 가까이 느끼고, 믿고, 따르고 이끌리게 저를 더욱 더 잡아 주소서!
제 3일,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며 그 신비체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2017년 8월 3일 (목요일)
마리아의 위대함과 존귀함은 무엇보다도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 시라는 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마리아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어머니도 되시기에 그분의 지체들도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야 할 것이다.
독서: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세상에서 아들이셨던 것처럼 하늘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마리아의 아들일 것은 틀림이 없다.
하느님 대전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천사들과 성인들의 기도와 전구보다도 더 힘이 있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겸손한 마리아의 기도는 하느님의 분노를 진정시킨다.
마리아는 하늘과 땅의 모후로, 당신 군대의 사령관으로, 당신 보고의 관리자로, 당신 은총의 분배자로, 당신의 위대한 신비를 행하는 일꾼으로 인류 구원의 협조자이며 중개자로, 하느님의 원수들에 대한 승리자로, 그리고 당신의 위업과 개선의 충실한 협조자 이시다.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이단자를, 또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를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표지는 마리아에 대한 자세와 태도이다.
신비체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면, 그분의 지체들도 마땅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야 할 것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예수님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여.. 올해 이렇게 다시금 당신의 은총으로 어머니에 대한 공부를 하고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계속 앞으로도 도와 주소서.
레지오 교본을 통해서 누누이 들었던 성모마리아의 진정한 위치와 의미를 다시 공부한다. 신비체의 머리이신 예수님, 하느님을 생산하신 성모 마리아를 어떻게 ‘일반적 여인’으로 깎을 수가 있을까?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도 그렇고, 예수님의 존경을 받은 어머니, 겸손하셔서 거의 알려지지도 않은 어머니.. 누가 마리아를 존경 우러러 보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를 포함한 우리 ‘인류’를 그렇게 가까이서 계속 바라보시며 급기야는 거의 정기적으로 (초)자연적인 상태로 나타나시는 기적의 어머니를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이제 나는 죽을 때에도 어머니의 도우심을 부르며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경우에 나는 어머님께 도움 청하는 것을 잊고 산다. 오늘이 그런 예가 아닐까? 너무나 연숙의 ‘관공서 서류처리’에 나는 노심초사를 하면서 어머님의 손길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내가 왜 이렇게 자상한 어머님의 도움을 못 믿고 사는가? 나는 더욱 더 어머님의 도우심을 청하고 어머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하여야 한다… 도와 주소서 어머님!
제 4일, 은총의 중개자이신 마리아
2017년 8월 4일 (금요일)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고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리아를 통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가장 올바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독서: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개자로 오신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이 중개자를 무시하고 직접 지존하신 성삼위의 어좌에까지 접근한다는 것은 분명 겸손의 부족이며, 지존하시고 엄위 하신 하느님께 대한 흠숭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가 중개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또 다른 한 중개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분이 바로 마리아 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으므로, 우리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마리아는 당신의 전구하심을 청하는 어떤 죄인도 내치지 않으실 만큼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시다.
하느님께로 올라가기 위한 세 계단:
첫째: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우리의 능력에 가장 알 맞는 마리아이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셋째: 하느님 아버지
묵상과 생활실천:
성모님의 놀라운, 숨겨진 각가지 엄청난 비밀들, 루도비코 성인이 말씀하신 것들, 믿건 안 믿건 상관없는 사람들 많겠지만 나는 너무나 우연히 다가온 이 엄청난 은총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의 성삼위께로 이끄신다는 것, 신앙의 신비로 나는 받아들이고 믿는다. 믿습니다. 죽을 때까지 믿으며 살겠습니다, 성모님!
예~ 알겠습니다. 성삼위 은총계의 구조를 이해하니 왜 마리아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분이시며 가장 효과적인 첫 계단임이 이해가 간다. 개신교의 ‘예수님께로 직접 가는 것’ 을 누누이 들었기에 잡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benefit of the doubt의 원리를 따른다. 나는 그들 보다는 ‘치열한 크리스천’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말씀을 더 믿고 신뢰한다. 이것도 도박이라면 도박이겠지만 아주 현명한 도박인 것이다.
그것 뿐인가.. 나는 체험적으로 이 전구자 마리아의 능력과 역할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이런 ‘논리’는 나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들이다. 우리 어머니 마리아님께 모든 희망과 운명을 걸어보자.
제 5일, 사도의 모후이신 마리아
2017년 8월 5일 (토요일)
사도직은 인류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사명이다.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책임을 이행치 않으면서 마리아께 대한 감상적인 열심만을 지닌 사람은 아직 마리아께 대한 참된 사랑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독서:
그들 (사도들) 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존엄한 모후이시며 충실한 어머니에게 합당하면 할수록 모든 일에 날마다 더욱 순수한 신앙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순수한 신앙이라는 것은 감각적 위안이나 초자연적 은혜에 집착하지 않고, 순수한 사랑의 동기에서 그대의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사랑에 의해 고무된 생활 속의 신앙이며, 거센 풍랑과 심한 불안 속에서도 안전하고 확고하게 머무를 수 있는 바위같이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굳은 신앙이다.
누구든지 마리아와 친밀히 일치하고 마리아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일치와 성령께 대한 완전한 순응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마리아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 베르나르도는 성령의 감도에 따라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가장 부유한 이들은 세세 대대로, 특히 세상 끝 날 때에 마리아의 얼굴에 대고 애원할 것이다. 그때 가장 위대한 성인들과 은총과 덕행이 가장 충만한 영혼들은 마리아에게 끈기 있게 간청하며, 자신들이 본받을 완전한 모범으로서 그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힘있는 협조자로서 마리아를 늘 곁에 모시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신앙의 신비는 이렇게 신비롭고 무궁무진한 새롭고 놀라운 진리를 나에게 숨겨 놓았을까? 왜 이제 나는 이 신비한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달아 가게 되었을까? 바로 성모님에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일까?
사도들의 모후이시니까, 역시 이런 놀라운 진실을 ‘모르는 영혼’들에게 알려 주어야 하는데, 어쩌면 이런 일들이 나에게 그렇게 어려워만 보이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성령의 도우심이 부족한지도 모른다. 더욱 더 나를 죽이고 담대하게, 부끄러움 없이 이런 나의 깨달음을 주위에 한 영혼이라도 더 전해 주어야 하는데.. 성모님, 성령의 이끄심을 저에게 허락하여 주소서!
성모마리아, 처음에 그렇게 어색한 느낌을 주었던 ‘성경에 가끔 나오던 여인, 예수님의 어머니’,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처음에는 덤덤한 느낌으로 받아 들였던 성모신심이 이제는 연륜이 더하여 조금은 더 풍성하고 기름진 느낌을 주게 되었다.
나의 천상의 어머니로써 기대고 싶었지만 너무나 그런 것들이 어색하기만 했지만 당신을 총사령관으로 모시는 레지오 마리애를 통해서 이제는 습관적인 면도 있지만 자연스럽고 편하게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성모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내가 싫어 하고 싶어지게 되었다.
역시, 이 독서의 글들, 루도비코 성인의 선견지명은 특이하지만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의 어머니를 통하여 하느님께 가는 것은 사실 너무나 인간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신심이 아닐까?
제 6일, 묵시록의 여인
2017년 8월 6일 (일요일)
마리아는 인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시며 마리아의 능력과 사명은 세상 끝 날에 가장 명백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독서:
그리고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 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인류구원은 마리아를 통하여 시작되었고, 또 마리아를 통하여 완성되어야 함에 틀림없다… 예수 탄생 이후 하느님은 마리아를 일부러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을 허락하셨다.
세상 마지막 시기에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만민 앞에 드러내 보이기를 원하시는 7가지 이유는:
- 마리아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지극히 겸손하여 숨어 살았다.
- 마리아는 하느님 은총의 걸작품이므로 세상이 이 업적을 칭송 받기를 원하신다.
- 마리아는 예수의 태양을 앞서 비추는 샛별로서 알려지고 보여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를 통해서 왔고, 재림도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오실 것이다.
- 마리아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발견하는 확실한 방법이며, 안전하고도 빠르며 티없는 길이시다. 마리아를 찾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확실히 찾게 되기 때문이다.
- 마리아는 세상 마지막 시기에 자비와 권능과 은총에 의하여 더욱 뚜렷이 나타날 것이고 하느님의 적들과 싸울 때 마리아는 용기를 북돋으며 우리와 함께 싸울 것이다.
- 마리아는 마지막 시기에 악마와 그 앞잡이들에게 질서정연한 군대처럼 무서운 존재일 것이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악마들은 천사나 인간만이 아니라 오히려 어느 면으로는 하느님보다도 마리아를 더욱 무서워한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악마들을 쳐 이기는 크나큰 능력을 주셨다.
루치펠이 교만으로 잃었던 것을 마리아는 겸손으로 회복하였고, 하와가 하느님께 대한 불순명으로 지옥에 떨어뜨리고 잃어 버린 것을 마리아는 순명으로써 구원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와 악마 사이에 뿐 아니라, 마리아의 자녀들과 악마의 자식들 사이에도 원수 관계를 맺어주셨다.
겸손하신 여종 마리아는 언제나 교만한 사탄을 눌러 놀라운 승리를 거둘 것이며.. 세상 끝날 때까지 당신의 충실한 사도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악마에 대항하는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을 얻어 발꿈치와 같은 겸손과 마리아와의 일치로 악마의 머리를 으스러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승리로 이끌어가시게 할 것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생각한다.. 루도비코 성인의 ‘마리아 교의’는 어느 정도 교회의 정식 교의에 포함이 되었을까? 무려 200년도 넘은 이 놀라운 마리아론, 너무나 훌륭한 성인 교황님들이 신봉하는 교리이므로 안심하고 우리가 받아 드리는 것이 그렇게 조심스러운 것인가?
루도비코 성인이 갈파하신 대로 이 놀라운 비밀 같은 진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했고 현재도 주위에서 흔히 목격하는 것인데, 어떻게 이 진리를 그들에게 (최소한 나 정도의 신심까지) 설득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나의 남은 생에 한 가지의 과제가 되기를 바라며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고 싶다.
묵시록에 나오는 여인을 마리아라고 한 것, 예전에는 왜 그럴까.. 과연 이것은 교회의 공식적인 해석일까 했지만 아마도 그것이 맞는 다고 인정을 해야 할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루도비코 성인의 모든 말씀을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이 아직도 나에게는 생소하고 심지어는 우스운 것처럼, 아이들 이야기처럼 느껴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직도 그 수준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노력한다. 레지오의 기본 핵심신앙이 다 이런 ‘논리’에서 출발했기에 더욱 나는 분발해야 한다.
마리아가 그렇게 그 정도로 은총을 받은 ‘존재’라면 나는 더욱 희망을 감출 수가 없다. 현재 나는 어머니 마리아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부정하는 인간들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칭한 것이 아직도 놀랍고 당황되지만, 그것이 아마도 사실이 아닐까? 주위에 그런 인간들 부지기수로 많지 않은가?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역시 역시 우리 어머님의 조언과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제 7일, 마리아 공경의 필요성
2017년 8월 7일 (월요일)
마리아는 교회의 신비 안에서 탁월하고 독자적인 모범을 보여 줌으로서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마리아의 4대 교리(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 원죄 없으신 잉태, 육신과 영혼의 하늘로 들여 올려짐) 등의 마리아공경의 근거를 생각하며, 나는 과연 마땅한 공경을 드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독서:
마리아께서 누리시는 영광스런 특전 (마리아 4대 교리)
-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로 들어올려지신 마리아
마리아는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혼을 다스리는 권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셨다…. … 예수께서 하느님으로서 또 구세주로서 하늘과 땅의 왕이듯이, 마리아는 은총에 의해서 하늘과 땅의 여왕이시다.
마리아가 하느님께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의 특별한 뜻에 따라서 마리아는 하느님께 필요하게 되었다… … 다른 성인들과 달리 마리아 신심은 우리의 뜻에만 맡길 수 없는 훨씬 필수적인 것이다.
수많은 교부들 성인들의 가르침에서 마리아 공경은 인간의 구원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마리아께 대한 진실하고 완전한 사랑과 신심은 구원 받는 확실한 표지가 된다고 단언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오, 거룩한 동정녀시여, 당신께 대한 사랑과 신심은 하느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무기입니다.” 라고 천명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탈혼 중에 하늘에 닿은 높은 사다리를 보았고 그 꼭대기에는 마리아가 서 계셨는데 이는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도미니코 성인의 전기에는 마리아께 대한 신심에 마귀들이 마지못해 찬사를 보내는 이야기까지 나오며 이것은 찬사와 기쁨의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마리아 공경의 필요성은 나에게 지금 거의 불필요한 것이 되고 있다. 은총이다, 은총! 다만 그래도 가끔 마리아가 나의 어머니 임을 잊고 사는 순간순간들이 있음이 부끄럽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나아지고 있다.
나를 크게 실망시키는 것 중에는 성모신심이 없거나 반대로 공격을 하는 주위의 많은 건강하고 신심 좋은 영혼들이다. 그들을 어떻게 최소한 나의 수준으로 올려놓을 수 있을까? 망설여진다. 나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진을 친 군대처럼 무서운’ 용기로 그들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참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 오늘 것은 중요한 것 중에서도 중요한 결론에 속한다. 마리아의 중요성,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아주 어렵다는 사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교부 성인들 특히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은 깨달았을까?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누구를 믿느냐 하는 것이 나의 몫이다. 나는 루도비코 성인의 말을 믿기로 결정을 한 이상 ‘의심 없이’ 믿을 것이다. 일단 믿는다고 결정한 것이니까 성인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믿을 것이다.
성모 마리아님.. 저희 죄인들을 일깨워 주소서. 정말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 입니다. 저의 두 딸들이 그 중에 있습니다. 저희 사랑하는 딸들을 구해 주시옵소서.. 마리아님…
둘째 시기 제3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기
매일 바칠 화살기도: “오 주님, 저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3주 동안 매일 드릴 기도: “성령송가, 바다의 별, 예수 성심 호칭 기도, 루도비코 성인의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 마리아 안에 살아계시는 주 예수님.”
제 1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
2017년 8월 8일 (화요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과 치유와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셨다. 특히 예수님은 죄인을 회개시키시려고 오신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독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우주 만물의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아무 부족한 것이 없으시면서도 성체성사로써 저희와 더불어 사시고자 하셨나 이다.
내 영혼아, 이 눈물의 골짜기에 있는 네게 남겨주신 고귀한 예물과 특수한 위로를 생각하고 즐기며 하느님께 감사하라. 내가 이 성사를 거듭할 때와 그리스도의 성체를 영할 때마다 구속의 사업을 거듭함이요, 그리스도의 모는 공로에 참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드디어 goal-in 근처에까지 도달하였다. 이제야 본론의 시작이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제까지의 모든 ‘준비’는 사실 오늘부터 시작되는 것을 위한 것.. 나는 또 마지막 7일에서 휘청거리려 하는 것인가? 성모님 저를 잡아 주소서.. 작년과 같이 악마의 유혹에 지면 안 됩니다. 내주 화요일까지 저를 이끌어 주소서, 우리 어머님 성모님!
예수그리스도.. 하느님.. 성모 마리아의 아드님.. 우리를 구하시려 태어나신 인간적으로 너무나 불쌍한 하느님의 분신..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인가? 사랑의 화신이신 예수님, 나는 과연 그 사랑을 느끼기나 하는 것인가? 없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없는 것 같은 이 절대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드려야 하는 것인가?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나에게 깨끗한 대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따르며 살 각오는 되어있다. 성모님, 지켜봐 주시고 이끌어 주소서..
제 2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2017년 8월 9일 (수요일)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이 드러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내가 구원되었음을 깊이 인식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묵상하자. “십자가 아래에서 당신 아들 예수님의 희생과 똑같은 희생을 드리신 통고의 성모님, 저희가 이토록 비싼 값을 치르고 구해졌음을 결코 잊지 않게 하소서.”
독서: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사람이야말로 죄 없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너도 그렇게 매일 미사 때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하여 너 자신을 모든 능력과 정과 더불어 결정하고 거룩한 제물로 삼아 나에게 바쳐라.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루카 14, 33) 한 말은 확실한 말이니, 네가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너 자신을 네 모든 정과 더불어 나에게 바쳐라.
묵상과 생활실천:
이제 조금 더 이해를 하게 된다. 하느님, 하느님은 인자하시고 사랑이시지만 그와 똑같이 정의의 하느님이 시라는 사실, 인간의 죄는 역시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은 예수님을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인간에게 보내셨고, 죄 없는 예수님이 인간의 죄로 돌아가신 것, 그것은 또한 우리 성모님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는 것… 이것이 진리라는 것… 이제 조금 체계가 잡힌다. 감사합니다, 성모님!
우리의 죄를 씻으시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 머리로는 하도 들어서 이해가 가나, 인간적인 논리로는 잘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이것이 나의 큰 걸림돌이다. 왜 아직도 인간적인 논리를 이 고귀한 은총계에 나는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그저 무조건 믿고 감사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그 높은 진리는 그렇다 치고라도 그런 끔찍한 사건들을 일일이 조용히 고통으로 바라보고 계셨던 어머님 성모 마리아는 이제 가슴 깊이 나에게도 고통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그런 고통을 견디셨을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은총의 여인, 고통의 여인, 결국에는 하늘의 여왕이 되신 우리 어머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제 3일,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
2017년 8월 10일 (목요일)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두 가지 사랑의 선물은 1. 성체성사, 2. 예수님의 어머니 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과연 그분을 참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빵으로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
독서: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영성체 준비가 되면: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하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께 3번 말하라. 덧붙여서, 그대가 그분을 주님의 어머니이면서 또한 그대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집에 모시겠음을 말씀 드려라. 성 베르나르도와 같이: “마리아께서는 저의 모든 희망의 근원이시니, 저는 마리아에게 저의 모든 신뢰를 두나이다” 하고 성령께 말씀 드려라!
예수님, 참으로 당신은 제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니 당신 안에 지극한 평화와 참된 안정이 있고, 당신 밖에는 수고와 고통과 한없는 불행이 있나이다.
네가 나와 더불어 있고자 하면, 내가 너와 더불어 있으리라.
주님, 제가 즐겨 당신과 더불어 있고자 하오니, 은혜로 이 저희와 더불어 머물러 계시옵소서. 제 마음이 당신과 결합되는 것이 저의 모든 원이옵나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오늘의 독서내용들, 무언가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이 하루 종일 나를 우울하게 한다. 왜 이 뜻들이 잘 들어오는 것이 아닐까? 성체신비와 성체신심에 대한 것들, 오늘 영성체를 하며 계속 생각하려 노력을 하였다. 아직도 나는 멀었다. 영성체의 느낌이 아직도 부족한 것이다.
아래의 문단의 글, 작년의 것인데 그때도 나는 이렇게 방황을 했던 모양이다.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이 왜 이렇게 명확하지 못할까? 너무나 너무나 흔히 듣는 말들이어서 그런 것일까? 나의 노력이 부족한 것일까?
마리아님, 당신의 모든 것을 받아 들이오니 당신 마음을 제게 주소서.. 란 말이 나를 조금은 포근하게 한다. 나의 어머니, 우리 구세주의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은 얼마나 나를 편안하고 즐겁게 하는 것인가? 어머님을 통해서 예수님께 간다는 어떻게 보면 단순한 이 논리, 진리를 나는 어떻게 더욱 더 크고 심각하게 받을 들일 수 있을까?
나도 성 베르나르도와 같이 ‘마리아께서는 저의 모든 희망의 근원이시니, 저는 마리에게 저의 모슨 신뢰를 두나이다!’ 라고 성령께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우리 어머님.. 저와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 자애롭고 힘찬 사랑으로 저와 저희들을 보호하고 이끌어 주소서..
이제 33일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작년의 ‘사고’처럼 올해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나는 그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다. 일요일에 있을 꾸리아 부단장 선거가 나의 발목을 잡을 듯 노려보고 있다. 성모님, 어머님, 저를 잡아 주소서!
작년의 묵상:
왜 이렇게 잡념이 드는 것일까? 암만 읽어도 계속 잡념이 나를 괴롭힌다. 왜 이럴까? 너무나 흔히 들었던, 익숙한 글들이라 그런가? 그러면 문제다. 이것이 33일 중에 절정에 달하는 심각한 의미를 가진 글들이 아닌가?
영성체 할 때 나의 태도, 겉으로 보기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참 많은 때에 별 생각을 못한 적이 많았다. 심지어는 감정이 오를 때로 오른 채로 나는 습관적으로 성체, 성혈을 받았다. 더 노력을 해서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지 않도록 성모 마리아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성체 성혈을 통한 성삼위와의 결합이란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을 비롯한 3위에 대한 흠숭인가.. 아니면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려 애 쓰지만 요새 나를 따라다니면 괴롭히는 잡념들, 불순한 생각들, 잡다한 현실적 문제들이 이런 것을 너무나 방해를 한다. 나는 100%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더 노력을 해야 한다. 성모님, 저를 호숫가의 언덕으로 손을 잡아 끌어주소서..
제 4일, 모든 신심의 궁극 목적이신 그리스도
2017년 8월 11일 (금요일)
그리스도는 알파요 오메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으로서 성모님께 대한 신심, 성모님께 의 봉헌 역시 그 귀결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독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주겠다.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신심의 궁극 목적임에 틀림없다.
하늘 아래에 예수님의 이름 이외에 다른 어떠한 이름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면, 우리는 어떠한 저주나 영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만일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오히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놓게 된다면 그것은 곧 마귀의 술책으로 알고 물리쳐야 할 것이다.
너는 무엇이든지 좋은 것을 네게 돌리지 말고 또 무슨 덕을 어떤 사람에게 돌리지도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라. 하느님 없이는 사람이 무엇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우리가 찾아야 할 궁극적인 곳은 바로 예수님을 믿고 찾는 그곳이다. 그곳에 안전하게 100% 확실하게 인도하시는 분이 우리 어머니 성모 마리아 님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Father Donald Calloway conversion story를 책으로 읽었다. 2년 전에 이미 직접 그 신부로부터 들었던 것이지만 책으로 다시 읽으니 완전히 느낌이 다르다. 더 확실한 것, 자세한 경위를 알게 되니 눈물까지 쏟아짐을 참을 수가 없다. 어떻게 마리아님, 그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까? 한 영혼을 파멸의 길에서 구해 주시고 다시 예수님을 위한 도구로 써주시니 그 사랑과 자비하심에 할 말을 잊습니다. 성모님, 저도 또한 방황과 좌절의 길로 가게 되면 저를 구해 주시고 예수님께 인도하여 주소서! 작년의 묵상이 아래 있습니다. 지금도 같은 마음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항상 어머니로 여기며 신뢰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듯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모님을 통해서 우리의 진정한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님을 찾기 위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독서의 말 그대로 그런 성모 신심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데 방해가 되거나 걸림돌이 된다면 나의 성모신심도 다시 고쳐서 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독서의 말대로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성모님이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을 어찌 방해를 한단 말인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에 일이라도 ‘악마’가 나를 지배한다면.. 끔찍한 생각이다. 항상 긴장하면서 성모님께 의탁을 하며 살면 악마의 그림자가 나를 비켜 갈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는 악마는 어떤 놈들일까? 쉽게 생각나는 것은 역시 감각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놈들일 것이다. 하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절대로 나는 선을 넘을 수는 없다. 아니 못 넘는다. 성모님의 묵주를 나는 거의 하루에 수십 번 잡고 있으니까.. 성모 마리아 님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게 하소서!
제 5일, 세례성사의 갱신인 그리스도께의 봉헌
2017년 8월 12일 (토요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세례성사를 통해서 무죄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가? 세례 때의 약속을 우리는 성모님을 통한 봉헌으로 세례성사를 갱신하는 고귀한 효과로 다시 찾을 수 있다.
독서: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애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은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성사와 달리 이 마리아께 드리는 봉헌은 이것을 통하여 마리아의 손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명백하게 봉헌하고 우리 성행의 모든 가치를 바치게 된다.
세례 때의 ‘마귀와 그의 유혹을 끊는 약속’을 우리는 계속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 현실적인 대책으로 세례의 갱신이 필요하고, 특별히 마리아를 통하여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완전한 방법이다.
이렇게 마리아를 통한 봉헌이 우리의 부모, 친구, 은인들의 영혼을 도울 수 없게 된다고 하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2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그들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것은 예수님과 마리아의 능력, 자비를 모욕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 이런 것은 마리아의 손에 달려있지만, 우리의 기도를 마리아는 방해하진 않으며 오히려 더 큰 신뢰를 가지고 기도하도록 이끌어 갈 것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작년에 했던 봉헌 시도는 어제로 끝이 났고 오늘부터의 묵상은 올해 처음 하게 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성모님.. 오늘까지 무사히 끌어 주심에 당신의 응답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계속, 계속 다음 주 화요일까지 저의 손을 이끌어 주소서!
수십 년 전에 ‘일어났던’ 우리의 세례성사.. 얼마나 깊은 생각이 없이 받았던 은총인가? 나의 신앙여정은 정말로 힘없고 맥없고 불충하고 생각이 없었던 오랜 지루한 세월이었다. 어떻게 나는 그렇게 얕은 마음을 유지하며 살았던가? 은총의 느낌조차 거부했던 저.. 성모님, 이제야 저를 찾고 받아 주셨고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부디 저 세상에서 받아 주시는 그날까지 부디 부디 이끌어 주소서.
33일의 여정은 해를 거듭할 수로 새로운 느낌을 받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분명히 나는 변하고 있고 그것도 그곳에 가까이 가는 쪽을 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것,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 우리 어머니 성모 마리아님께 안기는 것이라니.. 이것은 나에게 얼마나 포근하고 안심이 되는 그런 일인가? 절대로 저는 어머님의 품에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으렵니다. 절대로 저에게서 떠나지 마세요, 저의 어머님과 함께 성모님을 의지하며 이끄시는 길로 가렵니다.
마지막 언덕배기를 제가 무사히 넘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제 6일,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
2017년 8월 13일 (일요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욱 충실히 따르고자 하면 점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변화되어 가며 이를 위한 우리의 영적 사정과 성장에 대해 마리아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독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여러분이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욕심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잘 순종하는 자녀로서 하느님께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은 각자의 업적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늘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그대의 영혼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너무나 약하다. 그러나 마리아의 티없이 깨끗한 길을 걷고 내가 가르치는 이 신심을 충실히 실천하면 한낮에 힘들이지 않고 거룩한 장소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인들은 마리아라는 거푸집에서 형성된다고 말하는 것에 유의하기 바란다.
내가 제시하는 이 은총의 비밀을 택하는 사람은 하느님으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신 마리아라는 아름다운 주형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그 주형의 우수성에만 의지하여 마리아 안에서 그대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기 위하여 마리아 안으로 뛰어들어 사라져버린다.
녹아서 액체가 된 것만이 주형에 부어 넣어지며 쇠가 불에 녹아 액체가 되는 것처럼, 마리아 안에서 새로운 아담이 형성되려면 그대 안에서 낡은 아담을 녹여버려야 한다.
“주님은 저의 영광, 제 마음의 기쁨, 저의 희망, 어려움을 당할 적마다 저의 피난처” 로소이다.
사랑이란 위대한 것이요, 극히 좋은 보배다. 이것만 있으면 모든 짐이 가벼워지고, 모든 고리지 않은 것도 고르게 되어 잘 참게 된다.
사랑이 있는 자는 날아가고 달음질하고 즐거워하며, 자유스럽고 또 거리낌에 붙잡히지 않는다. 모든 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고 모든 일에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고요히 잠겨 있는 까닭이다.
묵상과 생활실천: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면 나는 과연 현재 어느 정도나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삶을 살고 있을까?
물론 오래 전보다는 분명히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다고 확신은 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 보다는 과정과 열심함을 더 보시는 주님이라고 나는 믿기에 희망은 항상 있고 하루하루가 그런 희망의 은총 안에서 산다고 생각한다.
내가 믿고 따르는 나의 보호자 성모님께 나를 전부 봉헌하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가야 할 길의 방향만은 잊지 않을 각오가 되어있다.
어제, 오늘은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넘어가고 있었다. 작년 같은 때 나는 ‘무슨 큰 사고’ 였는지 모든 것을 일 순간에 33일 과정의 마지막에서 무참히 포기하는 잘못을 저질렀는데, 올해 거의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의 농간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제 내일 하루 남았다. 그리고 모래를 맞이하면 33일의 모든 과정은 끝난다. 올해의 봉헌에 나의 남은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지는 장담 못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낳은 영향을 남길 것이라고 희망한다.
제 7일,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2017년 8월 14일 (월요일)
이제 봉헌을 위한 최종적인 준비단계에 이르렀다. 마리아께 봉헌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언제나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가는 은총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독서:
십자가의 예수께서는 마리아께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신심 중에서 가장 완전한 신심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따르며,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께 자신을 봉헌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봉헌은 마리아께 전적으로 봉헌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몸과 몸의 모든 기능, 우리의 영혼과 영혼의 모든 능력, 우리의 외적인 재화, 물건 재산들, 우리의 내적이고 영적인 재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공로와 덕행과 선행들, 이것들을 우리는 마리아께 완전히 바쳐야 한다.
우리가 마리아에게 보속과 선행을 드리는 것은 그것을 마리아께서 당신이 원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이런 마리아께 대한 봉헌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결과가 나온다.
첫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모든 것들은 마리아를 통해서 드리기 때문에 더 완전하게 드린다.
둘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아니라 마리아의 것이 되고,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게 된다.
셋째:
결과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께 동시에 봉헌하게 된다.
묵상과 생활실천:
이제 33일의 마지막 날에 도착하였다. 나는 그 동안 어떻게 이 놀라운 신비의 체험을 하였는가? 이미 3번이나 보았던 것들이지만 역시 올해의 것은 조금 더욱 신선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목표는 단 한가지 나의 어머님, 성모님께 100%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는 너무나 포근하고 편안한 각오를 하는 것이었다.
루도비코 성인의 말씀을 더 공부하는 것 보다는 무조건 이 성인의 말을 믿는 것이 더 목표를 향한 빠르고 안전하고 완전한 길임을 또한 알게 된다.
이제 이 성모신심을 안고 어떻게 나의 매일 일상 생활, 죽는 그날까지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매일 매일 묵상하며 살아야 할 때의 과제일 것이다.
지난 이틀 간 저는 또 ‘악마’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누구의 탓도 아니요 이것이 이 세상의 현실임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한 때 또 무방비 상태로 손을 놓을 뻔 했습니다. 누구의 도움일까, 저는 다시 이렇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내일 있을, 비록 형식적이고 예상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가겠습니다. 그리고 외치겠습니다… 우리 어머님, 원죄 없으신 동정 성모 마리아님을 저의 어머니 품에 안기듯이 나머지 남은 생을 살겠습니다… 라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성모님!
2017년 8월 14일, 오후 8시 31분: 동정 성모 마리아 승천 대 축일을 하루 앞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