半島の春, 반도의 봄

1941년 영화 '반도의 봄'
1941년 영화 ‘반도의 봄’

얼마 전에 근래 자주 찾아가는 인터넷 ‘한국영상자료원‘에 새로 ‘올라’ 온 옛 영화1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것이야말로 옛 것 중의 옛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진규, 문정숙, 최은희, 신영균, 신성일, 엄앵란 등이 주름을 잡았던 신상옥 전성시절 60년대 중반의 차원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 바로 1941년 영화,반도의 봄, 半島の春2 이였고, 여기의 반도는 지리적 반도, peninsula가 아니고 일본이 조선을 칭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완전히’ 일제시대 (요새는 일제 강점기라고 하던가..)에 나온 것..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일본영화가 아니던가. 물론 ‘조선인’들이 만든 영화니까 일본영화는 절대로 아니다. 영화의 기법, 영상, 배우 등을 보면 사실 내가 보았던 50년대 초의 영화3와 별 차이가 없지만 나에게는 특별히 커다란 감정의 물결로 다가왔다.

나는 일제시대를 겪지 못했지만 나의 부모님 세대는 그 속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고, 결혼을 했었기에 그 시대의 영향을 우리도 간접적으로 ‘고스란히’ 받았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고, 그 ‘숨기고 싶은’ 영향의 원류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당시 사회상은 교과서에조차 묘사가 된 것이 없고4, 영화는 커녕 가족 몇 명을 제외한 흑백사진 조차 본 적이 없었기에5

사실 나에게 그 당시는 완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일제시대에 조선에서 어떠한 ‘말’을 쓰며 살았는지, 그러니까 우리 말과 일본어 등이 어떻게 섞여서 쓰였는지 나는 궁금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조금 이해가 갔다. 일본어를 쓰는 대목에서는 한글 자막이 없었고, 우리말이 나오면 일본어 자막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역시 그 당시의 공식언어가 일본어 였었다는 것을 이것으로 실감을 하게 된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그런 것을 물어보면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는데, 그런 혼합 언어 정책이 그런대로 큰 무리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영화를 자세히 보면 어떤 부분에서 일본어를 쓰고 어떤 부분에서 우리말을 썼는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영화의 캐스트나 스탭 진들의 이름을 보면 대부분이 우리 이름이고 간혹 일본 이름이 보이는데, 그것은 1941년 때만 해도 창씨개명6 이 널리 퍼지지 않아서 그랬는지 궁금하다.

3.1운동, 유관순 같은 애국지사에게 행한, 잔학했었다는 일제시대에 대한 ‘일방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어렸을 적에는 빨갱이 이상으로 ‘죽음을 불사한 학대’를 ‘매일’ 받았던 것으로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 역시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일교육의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고스란히 경험을 한 어머님께 물어보면, 아주 다른 반응을 보곤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각도로 이 영화를 보면 우리의 반일교육이 완전히 일방적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춘향전 영화 같은 ‘민족적’인 영화를 찍는 조선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1941년이면 일본제국이 한창 진주만을 습격, 미국에 도전을 하던 살기등등하던 시절인데, 춘향전과 연애를 하는 ‘조센징’ 영화를 찍게 허가를 하였을까..

이 영화에서 일제시대의 다방과 서울의 풍경들이 나오는데,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 부모님들이 어떻게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하고 했을 까 조금은 궁금증도 풀리는 듯 했다. 그러니까 백문이 불여일견, 이렇게 보니까 이해가 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를 보면 ‘목포의 눈물‘ 이 아코디언 연주로 구성지게 흘러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한 서린’ 노래도 자유롭게 부르고 듣고 했던 시절이 아니던가?

1930~40년대의 미국영화와 이 영화를 비교해도 사실 기법이나 연기 등이 큰 차이가 없이 보였다. 아마도 그 당시 일본의 영화 수준이 이 정도였을 것이라 추측도 한다. 비록 해방 후, 6.25 동란으로 우리 영화가 타격을 받았을 지라고 그때의 수준이 있었기에 곧 바로 60년대의 영화 전성기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마지막 장면이 ‘성공을 위해서’ 동경유학을 떠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방 후 영화에서는 ‘성공을 위해서’ 미국유학을 떠나는 것을 바뀐 것.. 참 시대와 역사의 요술이 아닐까?

 

 spring-peninsular-2서울역, 서울은 케이죠, 경성으로 불리지만 그래도 한글로 쓰였다

 

spring-peninsular-6이 귀여운 여자가 50년대 영화에 많이 출연한 친근한 ‘할머니 배우’ 복혜숙씨였다.

 

spring-peninsular-11이것을 보면 일제시대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 그때도 이런 멋쟁이가 있었구나..

 

spring-peninsular-4너무나 익숙한 50~60년대의 가정집 마당을 연상케 한다

 

spring-peninsular-5학생이 살던 방, 이것도 너무나 친숙한 광경이다

 

spring-peninsular-8영화 속의 영화, 춘향전.. 태극이 선명하고 춘향이도 예쁘다.

 

spring-peninsular-7경양식점, 이런 류의 ‘양식’은 아마도 일본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spring-peninsular-10아저씨와 어르신, 대청마루에 앉은 모습도 전혀 낯설지 않다.

 

spring-peninsular-3당시 소설에 많이 나오는 동경유학생들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1. 새로 올라온 것 중에 ‘미몽’ 이라는 1930년대의 영화도 있지만 그것은 거의 무성영화 수준이었다.
  2. 이것은 공식적인 영화제목이고 개봉된 이름은 ‘아름다운 청춘’ 이었다고 한다.
  3. 예를 들면 1954년 영화 ‘운명의 손‘이나 ‘과부의 눈물‘과 같은…
  4. 이것은 공산주의와 비슷하게, 완전히 정책적이고 의도적이었다.
  5. 우리 가족은 6.25를 겪으며 거의 모든 역사적 유물들이 분실되었다.
  6.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선이름을 일본 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던 것.

영화 자유부인과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1956

영화 자유부인, 1956

얼마 전에, 어렸을 적에 귀따갑게 들었던 1950년대 화제의 영화, 자유부인을 기적적으로 보게 되었다. 기적적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닌 것이 이 영화는 1956년에 나온 것으로 그 바로 전에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같은 이름의 정비석 원작의 신문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고, 그 당시에 불과 국민학교 2~3학년 정도였던 나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반세기가 지난 뒤에 실제로 그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surreal한 기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화제의 단계를 넘어서 그 소설, 영화는 ‘문제작’의 수준까지도 올랐던 것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자유’라는 단어가 붙었던 그 당시였다. 당시의 이승만 여당도 자유당이고, 대한민국은 자유란 말만 붙으면 모든 것이 ‘멋지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급기야 ‘자유부인’이란 말까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자유와 부인“은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던 비교적 엄격한 ‘남녀 유별’의 전통이 있었다고나 할까.. 지금 보면 간단히 말해서 ‘남녀차별, 남존여비’의 전통이다. 나와 같은 세대는 그런 ‘구식 전통’을 보며, 느끼며 자란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개XX’의 도움으로 6.25 사변을 거치며 거대한 미국의 ‘신식 문화’가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런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일까.. 그것을 timing좋게 당시 유명했던 대중 소설가 정비석 씨가 인기소설로 이끌어내고, ‘폭발적’인 화제가 되자 곧바로 영화가 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서로 바람 피는 대학교수 부부의 주변을 그린 것이지만, 특히 교수부인, 춤바람 난 아내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결과는 비교적 예상하기 어렵지 않게 끝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바람 피는 여자’에 대한 질타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여자의 권리’ 같은 것도 나란히 잘 그려낸 듯 하다.

한태석 역의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한태석 역의 김동원, 1956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긴장을 하곤 했는데, 이 영화에 보이는 location(로케, 촬영 장소)들이 너무도 눈에 익었던 곳이어서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우선 시청과 국회 의사당 주변에서 당시의 차들이 오가는 거리 풍경은 정말 내가 보고 기억한 것과 100% 일치하였다. 특히 행인들의 옷차림: 중절모의 남자, 한복의 여자들을 보면서 ‘맞다, 그때는 그랬다’ 하는 탄성이 나오곤 했다.

시발 택시도 나오기 전 차량들은 거의 ‘미제 시보레’ 급의 세단들과, 일본이 남기고 갔거나, 수입했던 ‘동글 동글한’ 시내 버스들.. 물론 그립던 ‘귀여운 에노 전차’들이 명동, 미도파 앞에서 굴러가는 모습들은 사진처럼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동화 백화점, 남대문 시장입구, 미도파.. 심지어는 화신백화점 옆에 있었던 ‘신신백화점’이 깨끗이도 보인다. 이 영화의 보존 상태는 정말 어제 찍었던 흑백 사진과도 같이 좋았다.

1967년 용가리의 김동원
1967년 대괴수 용가리의 김동원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민 이란 남자배우를 보게 되었다. 귀에 많이 남았던 배우였는데, 자세히 보니 참 잘생겼다. 왜 그 이후에 큰 스타가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모든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간판배우 박암,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한 그의 연기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특징이 없다. 여자 주연인 ‘김정림‘.. 정말 모르겠다..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어떻게 그녀가 주연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도 깜깜 이다. 구닥다리 안경과 새카만 콧수염의 ‘주선태‘.. 좋은 역으로 나오긴 힘든 배우고 배역이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 중에 하나다.

문제는 이곳에 나오는 ‘연극배우’ 김동원.. 나는 그가 이런 ‘대중영화’에 그것도 초창기에 출연했는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저 사람이 내가 기억하는 ‘연극배우’ 김동원은 아니겠지 할 정도로 조금 닮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문제는 머리칼 머리 숱.. 내가 아는 김동원씨의 머리는 절대로 ‘대머리, 반대머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당시의 가수였고, 배우 황해씨의 부인이고 전영록의 어머니

나의 머리가 빠지다 보니, 더욱 호기심이 나서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분명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연극배우’ 김동원이 분명했다. 그의 머리 스타일은 반 대머리.. 훨씬 이후에 보이는 김동원씨의 모습은 절대로 대머리가 아니고 숱이 많은 모습들이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원래 대머리였고, 그 이후에는 ‘가발’이었을 가능성과, 영화 자유부인에서 ‘역할에 의한 삭발’의 가능성..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물론 100% 확신을 할 수 없지만 나는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유부인 이후의 김동원씨, 가발 수준은 정말 수준 급이라고 해야 할 듯하고, 많은 fan들에게는 그렇게 상대적으로 ‘젊은’ 모습을 남기려 했던 그 노력은 참 상당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렇게까지 한 것에 100% 공감을 하지는 않지만, 직업상 어쩔 수 없었을지 않을까.. 그저 benefit of doubt을 주고 싶어진다.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1956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자유부인 1956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바른쪽 끝에 가수 김세환씨가 보인다

 

True Love – Bing Crosby & Grace Kelly, 1956
그 당시 유행하던 영화 High Society의 주제곡

Come September

중학교 (서울 중앙중학교) 때 나온 미국영화, Come September의 주제곡을 수십 년 만에 들었다. 거의 분명히 타향살이를 시작하면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중학교 때의 영화니까 분명히 ‘학생입장불가’로 볼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고, 영화자체도 그 나이에 보기에는 너무나 ‘지겨운’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주연배우는 Rock Hudson(록 허드슨)과 이태리의 Gina Lollobrigida(지나 롤로브리지다) 등의 그 당시 최고 정상급 국제 스타들이었다. 그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의 주제곡 때문이다. 영화 내용은 모르지만 그 주제곡은 그야말로 ‘경음악’의 진수를 보여주는 정말 경쾌한 것이었다. 그것이 왜 9월과 연관이 있는지, 그러니까 그 영화의 제목이 왜 ‘9월이 오면‘ 이었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9월이 오면 생각나는 ‘음악’ 중의 하나라는 , 그것이 더 중요하니까.

 

 

Come September: 9월이 오면, 1961

어제, 9월 1일은 3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나의 인생 반려자로 살아온 아내 연숙의 생일이었다. 원래 내가 우리 둘의 아침식사를 준비한 것이 이제 몇 년째가 되어서, 이것으로 생일의 “깜짝 서비스” 를 할 수도 없고, $$$도 그렇고, 너무나 흔한 ‘생일 축하 메시지’ 를 만들기도 낯 가렵고.. 그래서 요새는 생일이 맞거나 축하해주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은 부담이 되어간다. 그저 한마디로 XX 년 전에 ‘인간으로 세상에 나온 신비’ 를 서로가 생각하면 어떨까? 그렇게 요란하게 노래를 부르며, 먹으며, 선물포장을 뜯어야만 할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올해는 작은 딸 나라니 가 ‘먹는 생일’을 마련해 주었다. Cumberland Mall에 있는 커다란 Italian restaurant, Maggiano’s (Little Italy) 에서 오랜만에 ‘밀가루 음식’ 과 bottle of wine으로 포식을 시켜주었다. 이태리 사람들이 ‘많이’ 먹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음식의 크기 (flat dish가 아니고 bowl)에 먹기도 전에 질려버렸다. 우리는 원래 저녁식사를 거의 안 하고 살아서 아마도 위장이 꽤 놀랐을 것이다. 거기다가 음식값에 carry-out 메뉴가 덤으로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까지 하면 그리 비싼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봉’에 시달리는 작은 딸의 저금 통장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이래서, 우리도 이제 오래~~ 살았구나.. 실감을 했다.

 

Try to RememberThe Lettermen

9월과 12월 사이의 감정을 보여주는 멋진 시

오래된 추억의 9월은 어떤 것들일까? 그 중에서 추석이 으뜸일까? 타향살이에서 제일 그리운 것이 ‘추석의 느낌’ 이다. 이것은 타향에서는 ‘절대적으로 느끼기 불가능’ 한 것 중에 하나다. 그러니까 추억이던가. 실제로 그 추억이 현실적인 추석보다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것들이 ‘느리기만 하던’ 시절.. 시간도 느리고, 버스도 느리고, 비행기, 기차도 느리고, 전화도 느리던 그 시절.. 그런 명절은 정말 천천히 즐기는 느린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설날과 달리 날씨가 알맞게 따뜻해서 얼마든지 밖에서 ‘딱총과 칼’로 무장을 해서 전쟁놀이로 뛰어 놀고, 뛰어 들어와서 송편, 고기 등 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골목으로 뛰어나가던 그런 추석.. 그날 밤에 재수가 좋으면 어둡기만 하던 동네를 완전히 대낮으로 바꾸어 놓았던 보름달 아래서 골목 이웃들이 몰려나와 수다를 떨던 아저씨, 아줌마들.. 세월을 따라 모든 것들이 빨리 움직이면서 그런 순진함 즐거움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대학 다닐 때, 갈비씨(skinny people, 이런 말을 요새도 쓰나?) 인 신세로 주눅이 들었던 시절, 9월은 희망의 계절이었다. 모든 신체 부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짧은 팔에서 조금은 가려주는 긴 팔의 옷으로 천천히 바뀌던 첫 달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지만, 그 당시는 상당히 심각했다. 아마도 뚱뚱한 것이 마른 것보다 ‘가치가 떨어진’ 요새 사람들은 절대로 상상을 못할 듯 하다. 분명히 그 당시는 ‘살이 찐 것’이 마른 것 보다 더 멋있게 보였다. 아마도 마른 사람의 대부분이 가난했던 사람들이라 그랬나?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건가? 가난하게 보이게 노력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가족이 생기고, 대부분 가장이 겪게 되는 세파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9월과 가을을 거의 잊고 살게 되었고, 그에 따르는 추억도 메말라 가게 되었다.그러다가 50대에 접어 들면서 우연히 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詩)에 눈을 뜨게 되었다. 거의 완전히 메말랐던 감정들이 이 신기한 것을 통해서 조금씩 스며 나옴을 느끼게 되어서, 나이와 감정, 감상이 꼭 반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9월은 그런 찐한 감정의 보물창고인 가을과 겨울의 입구와 같은 때인 것을 매년 조금씩 실감해 가게 되었다. 올해는 과연 어떻게 그런 감정의 보고(寶庫)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가을 그림자

 

가을은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창.

흘러온 시간들 말갛게 비치는

갠 날의 연못.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찾으러

집 나서는

황혼은

물빠진 감잎에 근심들이네.

가을날 수상한 나를 엿보는

그림자는 순간접착제.

빛 속으로 나서는 여윈 추억들 들춰내는

가을은

여름이 버린 구겨진 시간표.

 

김재진

 

 

9월의 노래

누가 처음 발표를 했는지는 몰라도 9월의 classic은 바로 곡이 아닐까? 패티킴의 version이 바로 그것인데 아깝게도 그것은 이마 유튜브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에 버금가는 ‘연숙’을 닮았던 “혜은이”의 것이 건재하니까..라고 했지만 다시 찾게 되었다. 멋진 패티김의 pose와 함께… 감사합니다~~

 

남과 여, 42년 후

man-woman-movie
당시 우리가 보았던 영화, 신문광고 1968년 4월

1966년 불란서 칸느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불란서 영화 “남과 여” 를 4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처음 그 영화를 나는 1968년 봄에 죽마고우 친구 안명성과, 그 당시 바로 얼마 전에 알게 된 어떤 여대생 2명과 같이 개봉관인 서울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double date를 하면서 그 영화를 본 것이었다. Francis Lai의 영화 주제곡이 먼저 히트를 해서 더 인기를 끌었던 영화였다. 불란서 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을 마음껏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full color와 black & white가 교차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사실 “남과 여”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에는 턱없이 덜 성숙된 ‘아이’들에 불과 했다. 그저 멋진 Monte Carlo와 race car driver 가 더 머리 속에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화 속의 남과 여는 사회적인 angle 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남녀의 사랑과 그들의 심리적인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그 때, 영화를 본 다음 바로 옆에 있던 빵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 2명의 여대생 중의 한 명이 영화제목이 왜 “여와 남” 이 아닐까..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남과 북, 북과 남”, “한일관계, 일한관계” 같이 조금은 유치한 우열의 순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나이었다. 영화 원래의 제목은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 (Un Homme et Une Femme)”였다.

그런 순진한 남녀관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사회적인 angle로 본 남녀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다른 인생을 보냈을까 하는 아주 비약적인 상상도 해 본적이 있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절대로 다행이었다는 결론이었다. 분명히 종속적인 남녀의 관계가 거의 법적으로 인정이 되던 그런 시절에서 나는 자랐다. 점차 법적인 남녀평등이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이었다. 절대로 남자들이 자기들이 즐겨온 위치를 곱게 넘겨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어떠한가? 근래에 들어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요새 남자들.. 참 불쌍하게 되었다는 한숨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여자들이 ‘덜’ 불쌍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누가 더 불쌍할까. 아주 해괴한 문제일까? 하지만 그렇게 해괴하지도 않다. 그런 추세는 꽤 오래 전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남자의 한 사람으로 조금 더 불쌍해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은 4명인데, 그 중에 여자가 무려 3명이나 된다. 비록 나는 불쌍한 한 남자지만 나머지 가족 3명은 상대적으로 덜 불쌍한 사람이 되니 그것으로 조금 위안을 삼을지.나의 전 세대에서 이런 구성(딸만 둘)이었으면 아마도 조금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학생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고 하고, 직장에서도 드디어 남자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여성학이란 조금 생소한 단어를 듣게 된 것도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아주 단단한 기반 위에 자리를 잡은 듯 하지만 남성학이란 것이 없듯이 이제는 여성학의 의미도 필요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그 만큼 전반적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똑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는 나의 눈 앞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뺏는 것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남녀평등은 어떠한가? 물론 일단은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문제의 본질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이렇게 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간혹 여장부 스타일의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남자의 밑에 있어서. 사회적인 역할도 거의 태어나면서 정해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게 사실은 사회적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교육을 잘 받는 목적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 좋은 결혼상대자를 만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적인 여성의role model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고등교육이 거의 확실하게 결혼 후에는 쓸모가 없어지곤 했다.

오랜 역사를 굳이 따질 것도 없이 사실 남녀의 차이는 성경부터 확실히 밝히고 있다. 아담과 하와(이브)의 role model이 그것이 아닐까? 성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문화와 문명은 어떠한가? 한결같이 남녀의 차별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Amazon같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 위에 군림을 했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과 싸우면서 이어지는 농경사회에서 힘에 필요한 근육이 모든 가치가 되면서 더욱 남자의 가치가 올라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남녀차별의 근원은 분명 물리적인 생존경쟁을 배경에 두고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출발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 미국에 와서 지금도 인상적인 것이 역시 미국여성의 눈부신 사회진출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직업 구석구석에 진출해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써 Janet Guthrie라는 여자 race car driver가 있었다. 남자의 영역에 당당히 도전한 그녀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또 거기에 비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나아졌고 현재도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그만큼 남자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권위는 떨어 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급기야는 근래 몇 년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직장여성의 숫자가 남자를 역사상 처음으로 능가를 하게 되었다. 여대생의 숫자가 남자를 능가한 지는 그 훨씬 이전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추세를 반영해 주고 있기도 하다. 바보 남자의 숫자가 바보 여자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의 구조가 산업혁명의 기간산업에서 거의 완전히 지적인 산업으로, 그것도 컴퓨터,인터넷의 도움으로 무섭게 바뀌고 있고 더 이상 근육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의 비애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 아내, 딸들이 다 여자이니까 그들의 지위가 높아짐은 환영하나 나 자신을 생각 할 때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같은 어정쩡한 세대인 것이다. 남녀차별을 뼈저리게 보고 자란 세대, 하지만 자식세대에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 했던 세대, 그 사이에 sandwich가 된 우리세대, 이제 우리가 남길 legacy는 과연 무엇인가?

이상적인 사회적 남녀관계는 무엇일까? 이제는 이런 문제에서 남녀만 따지는 것도 유행에서 지나가고 있는가. different life style?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different lifestyle? 정말 웃기는 세상이 된 지금 남녀의 차별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자체가 그른 것이 되어가는 묘한 세상이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이 세상, 선택의 많음이 최선이 된 이세상, 결국은 자신의 저 깊은 속에서부터 울어나 오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 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