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비사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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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편 (百濟篇)

 

漢水邊의 創業

沸流와 溫祚

 

  백제(百濟)의 건국은 왕자들의 암투가 빚어낸 결과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고구려(高句麗) 시조 고주몽(高朱蒙)은 북부여(北扶餘)에 있을 때 맞이한 예씨부인(禮氏夫人)의 몸에서 유리(類利)라는 아들을 낳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해서 졸본부여(卒本扶餘)로 망명했을 때 예씨와 유리를 두고 그냥 떠났다.

  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은 그 곳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 새나라를 세우는 한편 다시 아내를 두었는데 장자는 비류(沸流)라 하고 차자는 온조(溫祚)라 했다.

  주몽의 후처와 그 소생인 두 아들에 대해서 몇 가지 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자세한 것을 취하면 이렇다.

  주몽의 후처는 졸본사람 연타발(延 勃)의 딸(또는 졸본 부여왕의 둘째 딸)로서 이름을 소서노(召西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우대(優台)란 사람에게 출가하여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가 우대가 죽은 후 두 아들을 데리고 주몽의 후처가 되었다.

  주몽이 나라를 건국하는데 있어서 소서노와 그의 친정의 협력이 대단히 컸다. 그러므로 주몽은 왕위에 오르자 소서노를 비로 삼고 지극히 총애하는 한편 비류와 온조도 자기 아들처럼 대했다. 그러다가 주몽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西紀前 十九), 북부여에서 예씨 소생의 유리가 찾아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이와 같은 일이 아버지 다른 두 왕자 비류와 온조에게는 큰 불평거리가 되었다.

  어느 날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넌지시 말했다.

  처음에 대왕이 북부여에서 도망해 왔을 때 우리 어머니와 외가에서는 모든 힘을 다 기울여 그 분을 도왔고 나라를 세우는데도 큰 공이 있는데 지금 와서 자기 친아들이 찾아왔다고 나라를 그에게 물려 주려고 하니 이런 섭섭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온조는 원래 침착하고 신중한 인물이었다. 자기로서도 생각은 있었지만 형이 이런 불평을 말하자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차라리 달리 생각을 하는 게 좋을 줄로 안다.

  비류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온조는 비로소 입을 떼었다.

  달리 생각하다니 어떻게 하는 거죠?

  여기를 떠나는 거다. 공연히 여기서 머뭇거리다간 설음만 받을 뿐 아니라 태자가 우리를 의심하고 미워하게 되면 부질없이 목숨이나 잃을 게 아니냐. 그러니 일찌감치 남쪽으로 내려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게 좋을 것 같다.

  온조도 그 의견에는 동감이었다. 그래서 두 형제는 오간(烏干) 등 열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리고 전부터 두 왕자를 흠모하던 백성들도 많이 그 뒤를 따랐다.  따르는 사람이 뜻밖에 많으니 좋은 터전만 장만하면 한 나라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고 두 왕자는 생각했다.

  남으로 향한 두 왕자와 그들을 따르는 여러 백성들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렀다. 한산에는 부아악(負兒嶽)이란 산이 있었다.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저 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두루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신하의 한 사람인 오간(烏干)이 제의하자 여러 사람이 거기 찬동하므로 모두들 부아악으로 올라가 보았다. 내려다 보니 그 고장의 지세(地勢)는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가로 막히고 남으로 기름진 벌판이 펼쳐 있고 서편으로 큰 바닷가 있다. 그야말로 천험(天險)의 지리(地利)를 이루고 있다.

  이 고장이 매우 좋군.

  온조가 이렇게 말하자 신하들도 곧 거기 찬동했지만 비류는 몹시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곳에 도읍할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비류의 의견을 따르는 자는 몇몇 백성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비류는  나는 도저히 이 고장에 도읍할 생각이 없다. 따로 좋은 곳을 찾아갈 테니 나를 따를 사람은 따르고 여기 머물러 있고 싶은 사람은 마음대로 머물러 있거라.

  소리치고는 걸음을 돌려 서쪽 미추홀(彌鄒忽 = 지금의 仁川)로 향했다. 그러나 그를 따른 사람은 역시 몇몇 백성 뿐이었다.

  오간을 비롯한 열 사람의 신하와 백성들의 대부분이 온조 곁에 남게 되어 온조는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한 후 열 사람 신하로서 보익(輔翼)케 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는데 바로 서기전 十八년의 일이었다.

  한편 서쪽으로 향한 비류와 그 일행은 막상 미추홀에 당도해 보고는 크게 실망했다. 바닷가인데다가 지대가 낮은 까닭으로 땅이 습해서 궁궐은 고사하고 민가 하나 제대로 지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어디를 파보나 물이 짜서 식수(食水) 한모금 제대로 구할 길이 없다.

  온조와 갈라져 올 때에는 그래도 새 터전을 잡아서 궁궐을 짓고 나라를 세우겠다는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당장 목을 추길 물 한 모금을 얻기에 바빴고 비와 이슬을 피할 나무 그늘이나 바위 틈을 찾기에 분주한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비류는 백성들과 함께 바위 틈에서 밤을 지내고 날이 새기도 전무터 각처를 싸돌아 다녔다.  어떻게 해서든지 도읍할 터전을 구해서 방황하는 백성들을 안정시키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 보았자 바다를 낀 고장치고 온조가 택한 하남 위례성만한 곳은 없었다.  아니 설혹 그보다도 못하더라도 우선 백성들이 머물러 살 수 있을 만한 곳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곳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백성들은 차차 비류를 원망하게 되었다.

  (나 때문에 공연히 죄 없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구나. 너무 고집을 부리지 말자.)

  비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우가 택한 그 땅으로 돌아가 보자.)

  비류는 백성들 몰래 온조가 도읍을 정한 위례성으로 돌아갔다. 온조는 형을 반겨 맞아 주었다.

  형님 잘 오셨소. 그러지 않아도 미추홀은 땅이 좋지 못해서 형님과 백성들의 고생이 심 하다는 말을 듣고 여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온조는 크게 잔치를 베풀어 형을 환대했다. 열사람의 신하들과 많은 백성들도 비류를 극진히 공대했다. 잔치는 여러 날을 두고 계속되었다.

  형님, 이젠 그런 메마른 고장에 가셔서 고생하시지 말고 여기서 함께 삽시다.

  온조는 이런 말도 해주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저희들도 여간 마음이 든든하지 않겠습니다.

  열 사람의 신하들도 온조를 따라 권했다. 그러나 비류는 그러한 환대나 권유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환대를 받을수록 비류는 자기가 만사에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만사를 얼마나 수월하게 생각해 왔는가, 하며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내가 설 땅은 아무데도 없다.)  고 비류는 생각했다. 미추홀로 가야 굶주림과 고생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이곳에 이 이상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야 너그럽고 현명한 온조는 아마 자기가 이곳에 머물러 있겠다면 끝끝내 형으로서의 대접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택하려면 그 이상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면서부터 왕자(王者)의 자리만을 바로 보며 살아온 비류였다. 부왕(父王=朱蒙) 밑에 있을 때만 해도 응당 다음 왕위를 계승할 자는 자기라 생각하고 임금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만한 모든 힘을 기르기에 골몰했다. 그러자 유리 왕자가 나타나서 그의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아우 온조와 함께 고국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 올 때에도 비류는 응당 자기가 왕이 되리라는 꿈을 안고 만사를 그러한 심사에서 처리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형세를 살펴보니 이번에도 왕이 될 꿈은 깨지고 만 것이다.

  이제 아우 온조가 왕위에 오르면 자기는 그 밑에서 굽실거려야만 한다.

  온조가 형 비류를 위해서 크게 잔치를 베푼 지 며칠 후 였다. 비류가 아무도 모르게 종적을 감추었다.

  위례성은 발칵 뒤집혔다.

  온조는 여러 사람을 풀어 형 비류가 간 곳을 찾게 했다. 얼마 후에 바로 부아악 정상에서 비류를 찾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칼을 물고 쓰러진 싸늘한 시체였다.

  부아악은 비유와 온조가 도읍할 곳을 찾으려고 올라갔던 뫼였다. 그리고 그 뫼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옳은 지역을 택한 온조는 지금과 같은 부강을 이룩했고 판단을 그르친 비류는 실의와 비분 속에 잠기게 된 것이다. 짐작하건대 비류는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새삼 뉘우치고 절망한 나머지 추억 어린 그 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비류가 자결하자 그가 거느리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이 온조의 덕망을 흠모하며 날로 모여들었으므로 국호를 다시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나라의 기틀이 차츰 잡혀가자 무엇보다도 염려되는 것은 인접국가의 침입이었다. 그 당시는 특히 나라와 나라의 관계는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강한 자는 흥하고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히기 마련이었다. 특히 신생국가 백제의 위협이 되는 세력은 북쪽에 있는 말갈(靺鞨)이었다.

  말갈은 사람들이 날래고 꾀가 많으니 마땅히 군사를 정비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그들의 침입을 막는 방도를 세워야 하겠다.

  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막상 적군이 침입했을 때 나라의 안팎 일을 도맡아 처리할 우수한 보필자가 아쉬웠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에게 마땅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했더니 여러 신하들은 입을 모아  족부 을음(族父 乙音)이야말로 지식이 풍부하고 담력이 강대해서 그런 대사를 맡기에 족할 줄로 아오.

  이렇게 진언했다. 왕은 곧 신하들의 진언을 따라 을음에게 우보(右輔=右相에 해당되는官職)라는 벼슬을 주고 병마국사(兵馬國事)를 맡겼다.

  온조의 예견은 들어맞았다. 그 이듬해(溫祚祖三년) 九월 마침내 말갈이 북변(北邊)을 침공했다.  이에 왕은 날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기습하니 적은 대패하고 그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하나밖에 못되었다. 그 후에도 말갈은 자주 침공했지만 백제측의 방위가 견고하므로 번번히 패하여 물러갔다.

  온조는 외적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내정(內政)에도 힘을 기울였다.

  온조왕 十三년에 이르자 괴상한 일이 연거푸 일어났다. 그 해 三월에는 위례성내(慰禮城內)에 살던 노파가 갑자기 남자로 변하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백주에 호랑이 다섯 마리가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거리를 누비며 다녔다. 또 왕모 서소노가 비록 六十一세란 고령이긴 했지만 별로 앓아 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직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굳지 못하고 민심이 완전히 안정되지 못한 터에 이런 괴변이 뒤이어 일어나니 도성 안은 몹시 술렁거렸다.

  물론 냉철하게 판단할 때 이런 일은 모두 우연히 일어난 괴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술렁거리는 민심을 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어떤 획기적인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해 五월,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도성은 동쪽에 치우쳐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항상 강역을 침공하므로 조금도 평안한 날이 없다. 그 뿐 아니라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여러 번 나타나고 국모가 세상을 버리시는 일까지 있어서 민심이 몹시 어지러우니 차라리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왕의 말에 여러 신하들도 모두 찬동했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 도읍을 옮길 후보지였다.

그래서 모두 수군거리고 있는데 왕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지난날 한수(漢水) 남쪽으로 가서 본즉 땅이 대단히 기름지고 백성들이 살기에 족할 것 같으니 그 곳으로 도읍을 옮겨 오래 오래 편히 살 수 있는 계획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그 해 七월 한산(漢山=廣州) 밑으로 가서 성을 쌓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기는 한편 그 해 八월에는 이웃나라 마한(馬韓)에 사자를 파견하여 천도를 알리는 한편 나라의 경계를 확정했다.  즉 북쪽은 패하(浿河)를 경계로 삼고 남쪽은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고 서쪽은 바다까지 뻗히고 동쪽은 주양(走壤=平康)을 경계로 삼았다.

  이로써 새 도성과 강토를 확정하여 하나의 국가로서의 틀을 완전히 잡은 셈이었다.

  온조는 원래 검박한 인물이었다. 천도한 수 二년 동안이나 가궁(假宮)에서 살다가 十五년 정월에 비로소 궁궐을 세웠는데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온조왕은 재위 四十六년 동안 새나라의 기틀을 잡기에 온갖 노력을 다했다. 十八년에는 낙랑(樂浪)의 침입을 막아 새나라의 위기를 모면했으며 二十四년에는 마한(馬韓)과 싸워 국토를 확장했다가 二十七년에는 마한을 멸망시켜 그 국토를 병합했다.

  온조왕 四十六년 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원자인 다루(多婁)가 왕위를 이었으니 바로 제二대 다루왕(多婁王)이다.

  다루왕은 성품이 너그럽고 덕망이 있어서 선왕의 위업을 계승하고 국력을 강서케 하는데 힘을 기울이다다 재위 五十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그의 원자 기루왕(己婁王)이 계승했다.

  기루왕 역시 식견이 넓고 작은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는 인물이었으므로 재위 오십이년 동안 대사를 그르침이 없이 사직을 지키고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그의 아들 개루(蓋婁)가 계승했다.

 

 

  悲運의 都彌夫妻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제 四대 개루왕(蓋婁王)은 성품이 공손하고 조행이 단정했다고 하는데 그런 왕이 도미(都彌)라는 백성에게 자행한 잔인한 처사는 자못 흥미 있는 사건으로 볼 수밖에 없다.

  도미(都彌)는 이 때 백제 서울 한산(漢山)에 살고 있었다. 별다른 벼슬도 없는 서민이었지만 농토도 넉넉히 가지고 있었고 종들도 여럿을 거느리고 부유한 층에 속했다.

  뿐만 아니라 도미는 누구보다도 좋은 아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였다. 비길 데 없이 어여쁜 용모에 남편을 극진히 섬기는 착한 마음씨, 집안에 티끌 하나 보이지 않게 하는 깔끔한 살림솜씨, 어느 구석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좋은 아내였다.

  그러한 어느 날 왕이 도미를 불렀다. 도미는 까닭을 알 수 없어 궁성으로 달려갔다. 임금은 도미를 극진히 대접했다. 산해진미(山海珍味)를 차리고 좋은 술을 손수 부어 주었다.

그러다가

  그런데 도미, 이 세상에 여자처럼 못 믿을 것은 없어.

  임금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도미는 어째서 갑자기 저런 소리를 하나 하고 벙벙히 임금의 입만 바라보았다.

  무슨 정조가 굳으니, 부덕이 높으니 하면서 잘난 체하는 여자가 많지만, 그런 여자들도 으슥한 곳에서 달콤한 말로 꼬이면 엿이 더운 햇볕에 녹아버리듯 마음이 동하는 법이거든.

  마음 깨끗하고 고지식한 도미의 귀에는 임금의 이런 말이 지극히 더럽게 들렸다.

  그럴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 여자는 진실로 정숙하지 못한 여자겠지요?

  도미는 참다 못해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는 소리 말라. 내가 안 여자들은 모두다 그렇단 말야. 그대는 여자를 얼마나 알기에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소인이 아는 여자라고는 소인의 처밖에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다른 여자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소인의 처만은 그 지조가 무쇠보다도 더 굳다는 것을 소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목숨을 끊으면 끊었지 지조를 굽히지는 않을까 합니다.

  도미의 말을 듣자 임금은

  자기 처를 굉장히 믿는 사람이로군.

  비꼬듯 말했다.

  비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 있더라도 소인의 처의 마음만은 굳게 믿습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은 거야. 그대 아내도 여자인 이상 별 수 없지.

  이 말을 듣자, 도미는 불덩이 같은 것이 가슴에 치미는 것을 느꼈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아내를 더러운 임금 입으로 욕보인 것이 분했다.

  대왕께선 저의 아내를 모르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야 그대 아내의 마음을 내가 알 까닭이 있나? 시험해 보지 않고서는. 내가 그대 아내를 만나서 시험해 볼까?

  시험해 보신들 소용없는 일입니다.

  아냐 꼭 시험을 해봐야지. 그대가 이제 와서 내 말이 옳다고 하면 그대 아내를 욕보이는 것이 되고 내가 이제 와서 그대 말이 옳다고 하면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실없는 말을 한 것이 되지 않는가?

  도미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임금은 곧 한 신하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 귀에 대고 무엇인지 속삭였다.

  얼마 후 임금과 꼭 같은 복장을 한 신하가 궁궐을 빠져 나와 도미의 집으로 향한 것을 궁궐 한방에 단단히 갇힌 도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도미의 아내는 남편을 궁궐로 보내 놓고 마음을 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낮이 되고 해가 다 져 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저녁 때가 다 되어서야 갑자기 문밖이 떠들썩했다. 그러더니 한 하녀가 뛰어 들어왔다.

  큰일났습니다. 임금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도미의 아내는 새파랗게 질렸다.

  급히 뛰어나가 맞아들였다.

  자리를 정하자 임금이란 자는 넌지시 도미의 아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내가 몸소 예까지 온 것은 다름이 아니야. 그대가 천하일색이란 말을 듣고 그대 남편에게 그대를 물려 달라고 했더니 그대 남편의 말이 그토록 어여쁜 아내를 내놓기는 아깝지만 높은 벼슬을 준다면 응하겠다고 하지 않겠나. 그래서 그대 남편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그대는 나의 비(妃)로 삼을 생각으로 이렇게 찾아왔단 말야.

  도미의 아내는 이 말을 듣자 그것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도미는 높은 벼슬은 고사하고 임금의 자리일지라도 자기 아내와 바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 그러니 한시라도 속히 소로 아름다운 인연을 맺잔 말야.

  임금이란 자는 도미 아내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러나 영리한 도미의 아내는 곧 기묘한 꾀를 생각해 냈다.

  나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니 어찌 순종치 않겠습니까?

  자 그럼 어서 말을 들어야지.

  그러합니다만 지금 행색이 누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다른 분도 아닌 대왕임을 모시는데 화장도 해야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도미의 아내가 이렇게 간청을 하니 임금이란 자는 그 말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속히 치장을 하고 들어오라.

  볼멘 소리를 하며 겨우 놓아 주었다. 다른 방으로 건너간 도미의 아내는 은밀히 몸종 하나를 불러 들였다.

  그 몸종은 이 집안에 있는 몸종 중에서 가장 어여쁠 뿐만 아니라 용모나 체격이 안주인과 흡사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몸종이 아니라 친동생으로 잘못 볼 지경이었다.

  네게 한가지 부탁이 있다. 나와 똑같이 치장을 하고 나 대신 저 임금이란 사람의 방으로 들어가 다오.

  주인의 명령이면 무엇이나 다 듣는 종이었다. 즉시 도미의 아내와 꼭같이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그 방에 들어가거든 한 마디도 말을 하지 말고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만 해라.

  도미의 아내는 몸종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임금을 가장한 그 신하는 여자가 말없이 들어오자 자기도 아무 말하지 않고 여자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는 급히 옷을 벗겼다. 여자는 하는 대로 맡겨 둘 뿐 꼼짝 을 않는다.  옷을 다 벗기자 그 신하는 여자의 속옷 한 자락을 집어 들더니 벌떡 일어나서 껄껄 웃는다.

  내 임금의 몸으로서 아름다운 인연을 맺는데 훌륭한 궁궐을 두고 어찌 이와 같이 초라한 백성의 집에서 하겠는가? 지금은 그저 그대가 내 말을 듣는가 안 듣는가 시험해 보았을 뿐이다.  내일 다시 사람을 보낼 테니 몸단장 잘하고 궁궐로 들어오도록 하라.

  그리고는 급히 도미의 집을 나갔다.

  도미 부인의 속옷자락을 그 신하가 가지고 가서 바치자 왕은 흡족한 미소를 띠웠다. 그리고 그것을 도미에게 보였다.

  이걸 봐라. 네가 아무리 네 아내의 지조를 자랑하지만 이것은 바로 네 아내의 속옷이란 말야.  내 신하를 임금으로 가장시켜 네 집에 보냈더니 네 아내는 호락호락 몸을 맡기려 하기에 이렇게 증거물로 속옷을 찢어 왔단 말야. 자, 이래도 네 아내의 지로를 자랑하겠느냐?

  도미는 왕의 말을 듣자 눈 앞이 아득했다. 비록 한 나라 임금의 권세로 위압했다 하더라도 그렇듯 자기만을 사랑하던 아내가 몸을 맡기다니…. 도미는 그 속옷자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두 눈은 환하게 빛났다.

  속으셨습니다. 대왕께서 속으셨어요.

  미친 듯이 웃어댄다.

  아니 속다니?

  오히려 왕이 놀라 물으니까

  이것은 제 아내의 속옷이 아닙니다. 바로 제 아내가 부리는 몸종의 속옷입니다. 제 아내는 비록 하잘 것 없는 여인이지만 속옷만은 특별히 고운 감으로 해 입는 걸 소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 칠은 감으로 속옷을 해 입지는 않습니다. 저의 집에서 이런 옷감으로 속옷을 해 입는 것은 종들 뿐 이옵니다.

  이 말을 듣자 왕은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격분했다.

  천한 백성의 몸으로 감히 나라의 임금을 속이고 조롱하다니.

  그러나 왕이 격분한 것은 속았다는 사실보다도 자기의 견해가 여지없이 뒤엎어졌다는 점에 있었다. 겉으로 얌전하고 조행이 바른 사람은 대개 마음이 차고 회의적인 경향을 띠우기 쉽다.

  개루왕이 바로 그런 형의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위해서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는 정렬 같은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로 나타났다. 격분할 밖에 없다.

  내향적인 사람이 격분하면 음산하고 잔인한 행동을 취하는 수가 많다. 개루왕은 자기의 인생관이 허물어진 데 대한 분풀이를 하는데 있어서도 보통 사람과는 다른 방법을 취했다.

  즉 도미에게 애매한 죄를 씌워 그의 두 눈알을 뽑아 버리고 사람을 시켜 강물에 띄어 버리도록 한 것이다.

  대왕, 헛일이오. 나의 눈알을 빼버려도 나의 아내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소. 나는 아내의 아름다움을 얼굴에 달린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깊이 박힌 눈으로 보는거요.

  끌려 나가면서 이렇게 외치는 도미의 말이 왕의 가슴에 송곳처럼 박혔다.

  왕의 분은 그곳만으로 풀리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도미의 아내를 잡아 들였다. 강제라도 범해서 자랑하는 정절을 꺾어버릴 생각이었다.

  이제 네 남편은 소경이 되어 멀리 강물 위를 떠내려가고 있다. 아무리 찾아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단 말야. 자, 이렇게 돼도 내 말을 듣지 않겠느냐?

  도미 부인은 왕의 처사가 물어뜯고 싶도록 미웠다. 그리고 그런 왕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소경이 되어 강물 위를 떠내려 가고 있다는 남편에 대한 심려였다.

  자기가 죽는다면 남편을 구하고 돌볼 사람은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도망해서 남편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도미 부인은 왕을 다시 속이기로 했다.

  이미 남편을 잃고 홀몸이 되어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한데 대왕을 모시라고 하신다면 오히려 고맙고 영광스러울 뿐이옵니다.

  우선 이렇게 말해 보았다. 그랬더니 왕은 아직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이윽히 건너다보며   그렇다면 내 말을 들어야 할 게 아니냐?

 했다.

  그러하오나 지금 몸이 더러워 대왕을 모실 수 없사오니 며칠만 기다려 주시기 바라옵니다.

  즉 월경 중이니 그것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왕은 도미 부인을 놓아 주었다.

  지난번에 속은 사실로 미루어 도미 부인의 말을 의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지만 그것은 왕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도미가 이미 불구자가 되어 멀리 떠났는데도 그의 아내가 남편에게 대한 정절을 지키려고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인간에겐 정절이나 의리가 없다고 믿는 자기 인생관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곁에 있는 동안은 또 몰라도 이제 멀리 떠나간 이상, 소경이 된 남편을 찾느니 보다 임금의 총애를 받아 호강을 하는 편을 택하겠지. 여자라는건 원래 그렇게 돼먹은 것이란 말야.

  이렇게 중얼거리며 도미 부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도미 부인은 물론 궁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 길로 남편을 찾아 한수(漢水)가로 달려갔다.

  강가에 이르러 보니 남편을 따라갈 배가 없다. 남편은 조그만 배에 태워 강물에 띄어 보냈다고 하니 남편을 찾자면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가야 할 텐데 그 배가 없다

  하늘이시여, 어쩌면 이렇게도 무심하시옵니까?

  도미 부인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상류로부터 조각배 하나가 흘러 내려왔다.  하늘이 그 뜻을 가상히 여기어 보낸 것인지 또는 우연히 주인을 잃은 조각배가 떠내려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도미 부인은 그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갔다.

  한수 하류에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이 있었다. 남편을 부르며 거기까지 조각배를 몰고 내려 온 도미 부인은 문득 그 섬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저이가 혹시 남편이 아닐까?

  도미 부인은 급히 그리로 배를 댔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두 눈은 피로 맺혀 있어 지난날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남편 도미였다.

  부인은 남편을 안고 목놓아 울었다. 남편도 부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반가와 했다. 무엇보다도 도미는 몹시 굶주려 있었다. 부인은 우선 풀뿌리를 캐다가 요기를 시켰다.

  얼마 후 도미가 기운을 차리자 두 사람은 앞으로 살아갈 일을 의논해 보았다. 고향 땅으로 돌아가면 왕의 핍박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고향 땅뿐 아니라 백제 어느 곳에 숨어 있어도 집요한 왕은 끝내 자기들을 찾아 가지고 해치고야 말 것이다.

  차라리 이웃나라 고구려로 갑시다. 그 곳 임금은 어질고 인자해서 백성들은 모두 배를 두드리며 편안히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도미가 이렇게 말하자 아내는 즉시 그 말을 따라 다시 배를 타고 고구려 땅으로 건너갔다.

고구려 사람들은 불쌍한 이들 부처를 기꺼이 맞아 주었다. 집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장만 해 주어 그들은 마침내 외롭긴 하지만 조용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도미 부처의 망명사건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렇듯 무도한 임금의 치하에선 살 수 없다고 이웃나라로 도망치는 백성들이 뒤를 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왕은 입맛을 다셨다. 인구가 부족하던 그 당시로서는 백성을 잃는다는 것은 곧 국력의 쇠퇴를 의미하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백성들이 이 이상 도망하는 것을 막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미 도망간 백성들 대신 이웃나라 백성들이 백제로 모여들도록 해야 나라와 임금의 위선이 설 형편이었다.

  개루왕은 그 대책을 강구하느라고 여러 가지로 부심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시적인 술책으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음을 조리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생겼다.

개루왕 三十八년 十월, 신라의 아찬 길선(阿 吉宣)이 모반을 하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백제로 망명해 온 일이 있었다.

  이에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은 글을 보내어 길선을 돌려 달라고 청해 왔다. 이웃나라의 의리로 볼 때 죄인을 은익 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개루왕은 길선을 돌려 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길선의 인물이 쓸 만해서 두둔한 것도 아니었다. 자기 나라에서 이웃나라로 도망해 가는 백성들만 많았는데,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웃나라에서 자기 나라로 도망해 온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이 반가웠다.

  (제 나라에서 죄를 지은 길선을 그렇듯 두호 한다면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넘어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후대할 것인가)

  이웃나라 백성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대거 망명해 오리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길선을 두호한다고 뒤를 이러 망명해 오는 사람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라왕 아달라의 노여움만 샀다.

  이웃나라의 정의를 저버리고 역적을 두호한 백제왕에게 우리 신라의 힘을 좀 보여 주어야겠다.

  아달라왕은 즉시 군사를 내어 백제를 침공했다.

  뜻밖의 침공을 받은 개루왕은 대경실색했다.

  모든 성을 굳게 지키고 소극적은 방어책을 강구할 뿐이었다. 다행히 신라 군사들은 일시적 감정으로 흥분하여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침입한 때문에 얼마 후에 그냥 돌아가기는 했지만 이로부터 신라와의 관계가 대단히 악화되고 말았다.

  개루왕의 이와 같은 처사에 대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도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길선은 간적(姦賊)이거늘 백제왕은 그를 거두어 감춤으로 이웃나라와 화목을 잃고 백성들로 하여금 싸움터에서 괴로움을 당하게 했으니 이는 심히 밝지 못함 처사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일로 심한 충격을 받았던지 개루왕은 그 다음 해인 三十九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초고(肖古)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곧 제 五대 초고왕이다.

 

 

  싹트는 骨肉相殘

  개루왕이 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그 뒤를 이은 초고왕 때에는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초고왕 二년 七월에는 선왕의 유환을 갚는다는 뜻에서 백제측에서 몰래 군사를 일으켜 신라 서쪽 변경 두 성을 습격하고, 남녀 一천명을 사로 잡아가지고 돌아왔다. 이렇게 되니 신라 측에서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 다음 달인 八월 아달라왕은 먼저 흥선(興宣) 등에게 군사 二만명을 주어 백제 동쪽 여러 성을 공략하는 한편 뒤이어 아달라왕 자신이 정병八천명을 거느리고 한수(漢水)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니 백제 측에서는 신라군을 대적할 힘이 없었다. 먼젓번에 약탈한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사과함으로써 신라군을 물러가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의 힘이 두려워 취한 처사였지 진심으로 화친하자는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기회만 있으면 양국은 상대편의 국경을 침공하기에 바빴다.

  초고왕이 재위 四十九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자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곧 제 六대 구수왕(仇首王)이다. 그리고 구수왕이 二十二년 동안 통치하다사 세상을 떠나자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으니 제 七대왕 고이왕(古爾王)이다.

  선왕 구수왕에게는 장자 사반(沙伴)이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으므로 그가 즉위한 것이다.

  고이왕이 재위 五十三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제八애 책계왕(責稽王)이며 그 후 제 九대 분서왕(汾西王), 제 十대 비류왕(比流王), 제 十一대 계왕(契王), 제 十二대 근초고왕(近肖古王), 제 十三대 근구수왕(近仇首王), 제 十四대 침류왕(枕流王),  제 十五대 진사왕(辰斯王), 제 十六대 아신왕(阿莘王)에 이르기까지 왕위계승에는 별 분쟁이 없었다.

  그야 그 중에는 고이왕, 비류왕, 근초고왕, 진사왕과 같이 적자가 아니면서 왕위를 계승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 따르는 분쟁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기록에는 그런 사건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형제간의 불화가 건국의 근원이 된 백제로서는 뜻밖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왕위 계승문제 때문에 혈족간에 피를 뿌리는 사건이 끝까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신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의 원자 전지왕자( 支王子)는 마침 왜국(倭國)에 볼모로 가 있었으므로 아신왕의 중제(仲弟) 훈해(訓解)가 섭정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리게 되었다.

  훈해는 성품이 어질고 착한 사람이라 아무 야심도 품지 않고 태자가 돌아오면 정권을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그의 아우 혈례( 禮)는 그렇지 않았다. 전부터 야욕을 품고 기회만 노리고 있던 혈례는 태자가 왜국에 가 있는 동안에 왕이 세상을 떠난 것을 대단히 다행으로 여겼다.

  (내 뜻을 펼 때는 바로 이때다.)

  이렇게 생각하고 기뻐했지만 자기 야망을 채우자면 무엇보다도 고지식한 훈해가 방해물이었다.  처음에는 훈해를 꼬여보기도 했다. 사람을 시켜 훈해더러 왕위레 오르라고 충동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일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훈해가 만일 왕위를 계승한다면 적자를 제쳐 놓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죄명을 씌워 죽인 다음 스스로 정권을 잡을 배짱이었다. 그러나 고지식한 훈해는 아무리 권해도 왕위를 계승하려고 하지 않았다.

  왕통은 반드시 적자가 계승해야 하는 법이야. 그렇지 않으면 왕실의 기강이 문란해서 대대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피를 보게 마련이지.

  이렇게 말하며 듣지 않았다.

  혈례는 초조했다. 이대로 가다가 전지왕자가 귀국하는 날이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간다.

  한편 전지는 아신왕 六년에 볼모로 왜국(倭國)에 건너간 채, 열한 해가 되도록 고국땅을 밝지 못하다가 부왕 아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訃音)을 들었다.

  태자는 왜왕에게 애걸했다.

  살아 계실 때 모시지 못한 것만도 큰 한입니다만, 이제 세상을 떠나셨으니 그 유해나마 고이 모시는 게 자식 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왜왕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전지태자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그가 지성으로 애걸하는 말을 들을 때 인정상으로는 그 청을 들어 주고 싶긴 하다. 그러나 볼모라는 것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낸 말하자면 담보인데 그것을 아무 보상도 없이 돌려보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태자의 몸입니다. 왕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하루 속히 귀국해서 왕위를 계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왕위를 탐내는 파들의 싸움으로 나라는 위태로워지고 백성들은 공연한 고생만 하게 될 겁니다.

  이 말을 듣자 왜왕은 비로소 태자를 귀국시키기로 마음을 정했다.

  왜국으로선 백제와 화친을 맺고 지내는 편이 어느 모로 보나 유리했다. 그런데 새로 왕이 되는 자가 왜국을 잘 알고 왜국 조정에 친분이 두터운 전지태자라면 힘들이지 않고 화친 을 계속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다른 자가 왕이 된다면 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새로 왕이 되는 자가 전지태자를 아끼는 자라면 또 몰라도 미워하는 자라면 전지를 머물러 두어도 볼모로서의 아무런 가치도 없다.

  태자의 말씀은 잘 알겠소. 속히 귀국하시어 대위를 계승하도록 하시오. 내 힘 자라는 한태자를 도우리라.

  왜왕은 이렇게 말하고 군사 백 명을 딸려 보냈다. 그러나 태자가 고국에 당도하기도 전에 태자가 염려하던 변은 벌써 벌어지고 말았다.

  전지태자 일행이 가락국을 거쳐 백제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성(漢城) 사는 해충(解忠)이란 사람이 마주 오더니

  태자님의 신변이 지극히 위태롭기에 급히 아뢰려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달려왔소.

  이렇게 일러준다.

  내 신변이 극히 위험하다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해충이 알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훈해가 임시로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야욕에 불탄 혈례는 마침내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을 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전지태자는 앞일이 막막했다.

  백명 정도의 군사를 가지고는 어찌하는 수 없구…. 차라리 호젓한 섬에 가서 숨어 있으면서 때를 기다리도록 하자.

  태자 일행은 다시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조그만 섬을 찾아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해충은 다시 왕성으로 돌아갔다. 혈례가 형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있으며 앞으로 전지태자마저 해치려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극소수의 혈례의 심복을 제외하고는 누구 하나 혈례를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골 있는 사람들은 은밀히 모여 전지태자와 연락을 취해서 혈례를 칠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속에 해충이 나타났다.

  여러분, 태자는 지금 무사히 숨어 계시오.

  해충이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뛸 듯이 기뻐하고 은밀히 더 많은 동지를 규합하고 무장을 갖추었다.

  한편, 태자가 귀국할 것을 두려워한 혈례는 주위의 경계를 강화하려 했지만, 심지가 바른 사람은 하나도 모여들지 않았다. 다만 물욕에 눈이 어둔 부량배 몇몇이 모여들 뿐이었다.  그날 밤도 혈례는 여러 심복들과 함께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취흥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궁성밖에 불길이 오르더니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들려왔다.

  혈례를 죽여라!

  형을 해치고 왕위를 찬탈한 놈을 능지처참하라!

  고함소리에 섞인 이런 말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혈례는 이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서 좌우를 둘러보며 소리소리 질렀다.

  거, 뭣들 하고 있는가! 어서 도적을 무찌르라!

  그러나 물욕과 일시적 권세가 탐이 나서 모여 든 자들이 목숨을 내걸고 싸울 까닭이 없었다.  모두들 겁을 먹고 줄행랑을 치고 혈례 곁에는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혈레는 하는 수 없이 이리저리 도망할 길을 찾다가 마침내 몰려 들어온 백성들에게 잡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혈례를 처치하고 난 나라 사람들은 곧 전지태자를 맞아 대위를 계승하도록 했다.(西紀 四五)

  그가 곧 제 十七대 전지왕( 支王)이다.

  왕위에 오른 전지는 이번 난에 가장 공로가 큰 해충(解忠)으로 달솔(達率)을 삼고 한성(漢城)의 조(租) 一천석을 주었다.

 

 

  英主와 暗君

  國手와 道琳

  그 후 전지왕이 재위 十六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나이 十六세로 제 十八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어린 나이로 즉위했어도 구이신왕은 재위 八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비유(毗有)이다.

  비유는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라고도 하고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연령으로 보아 전지왕의 서자로 보는 편이 타당할는지 모른다. 비유왕이 재위 二十九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제 二十대 개로왕(蓋鹵王)이 즉위했다.

  개로왕대에 이르자 백제와 고구려 사이는 대단히 악화되었다. 백제측에서 대륙의 강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를 비방하는가 하면 고구려 측에서는 백제에 간첩을 보내어 국력을 탐지하고 침공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개로왕은 유난히 바둑에 취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바둑 잘 두는 사람이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대국(對局)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둑쯤이나 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궁성 앞에 언제나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궁성 앞에 한 중이 나타났다.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로 도림(道琳)이라고 하오. 내 일찍부터 바둑을 두어 묘리를 깨달은바 있는데 듣자니 대왕께서 심히 바둑을 즐기시고 대국할 만한 자를 널리 구한다고 하십디다.  그래서 한 번 모시고 둘 수 있다면 평생 소원을 이룰 듯 싶어 이렇게 찾아온 것이외다.

  그 말을 들은 왕은 즉시 도림이라는 중을 불러 들였다.

  내가 바둑의 명수를 널리 구하던 참인데 그대가 바둑을 잘 둔다니 한판 두어 보기로 하자.

  왕은 곧 대국해 보았다. 그리고 얼마 아니해서 탄성을 올렸다.

  과연 국수로군.

  감탄한 왕은 곧 도림을 귀한 손님처럼 극진히 대접했다.

  이날부터 왕이 있는 곳에 반드시 도림이 있었으며, 두 사람은 틈만 있으면 바둑판을 놓고 마주앉게 되었다.

  도림에 대한 왕의 신임과 친분은 나날이 두터워 갔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도림이 잔언 하는 말이면 왕은 한 가지도 거절하지 않고 다 들어 줄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림이 정색을 하며 왕께 아뢰었다.

  신이 한가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만, 첫째 신의 본바탕이 딴 나라 사람이오니 대왕께서 신의 말을 들어 주실는지 걱정스럽습니다.

  그러자 왕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릴 하는가. 과인은 그대를 친한 벗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오히려 섭섭하지 않은가?

  황감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신이 아뢰는 말이 대왕과 이 나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는지 염려스럽습니다.

  다름 아닌 대사가 하는 말인데 어찌 이롭지 않겠는가. 그렇게 너무 주저하지 말고 어서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

  왕이 재촉하자 도림은 못 이기는 체하고 입을 열었다.

  이 나라로 말씀하자면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내와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실로 하늘이 베풀어 준 요지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볼 생각도 못하고 있는 판국입니다. 그렇습니다만 바로 말씀 드린다면 하늘이 베풀어 준 요지라는 것만 믿는 나머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에 지나치게 등한 한 듯 싶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보는가?

  신은 이 나라에 와서 여러 곳을 샅샅이 둘러 보았습니다만 모든 성곽(城郭)은 오래도록 손을 대지 아니하여 허물어져 가고 대왕께서 거처하시는 이 궁전마저 비가 오면 여기저기서 빗물이 새어 내릴 형편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하고 도림은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은 흐르는 물처럼 유창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는 선왕님의 능(陵)과 대신들의 묘(墓)까지 허물어져서 뼈가 땅 위에 드러날 지경이며,  강둑이 무너져서 웬만큼 큰 비만 오면 백성들의 집이 마구 떠내려갈 형편입니다. 대왕의 융성한 위세와 이 나라의 풍요한 자력을 가지고서 어찌 이런 일을 그대로 버려두시는지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도림이 말을 마치자 왕은 대답했다.

  큰 역사를 일으키면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단 말야.

  그러자 도림은 정색을 했다.

  대왕께서는 이 나라의 어른이시며 주인이십니다. 그러한 대왕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누가 감히 반대하겠으며 설혹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자는 곧 나라의 죄인입니다. 무엇을 꺼리신단 말씀입니까?

  도림의 말에 왕은 마침내 설복되었다. 우선 전국에서 수많은 장정이 동원되어서 어느 마을 어느 집이고 장정 있는 집치고 동원되지 않은 집이라고는 없을 지경이었다.

  역사는 실로 그 규모가 웅대하고 화려하였다. 높고 긴 성을 쌓고 그 속에는 으리으리한 궁궐을 짓는데 기둥마다 벽마다 모두 눈부신 장치를 했다.

  부왕(父王)의 능을 꾸미는 데에는 한층 더 힘을 기울였다. 전국 각처 산과 내에 사람을 보내어 크고 단단한 돌을 구해다가 관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묻었다. 그리고 강변을 따라 나무 울타리를 만드는데, 그 길이가 또한 어마어마했다.

  이러고 보니 국고(國庫)는 마를 대로 말랐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갖은 명목을 다 붙여서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 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중 삼중으로 곯는 것은 백성들이었다. 장정들은 모두 부역을 나가서 생업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데다가 나라에 바치는 것은 엄청나게 불었다.

  나라 안 방방곡곡에는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고 드디어 백성들의 원성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처음에는 그런 불평분자들을 잡아 가두기도 하고 매질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원성은 더욱 높아가고 마침내는 불온한 기운이 온 나라 안을 뒤덮기까지 했다.

  원성이 높아가고 불온한 기운이 충만하자 개로왕은 겁이 났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권한 도림이 원망스러워졌다. 원망은 차차 미움으로 변했다.

  그놈, 도림을 불러들여라!

  왕은 마침내 군졸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군졸들이 도림의 집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도림의 집은 텅비어 있었다.

  도림은 바로 고구려의 간첩이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은 백제를 정벌할 생각으로 그 나라 국정을 살피고자 좋은 첩자(諜者)를 구하고 있었는데 이때 나타난 것이 도림이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백제의 정세를 살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만약 백제가 군비를 갖추어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백성들은 생업에 충실해서 배부르게 지내고 있다면 간첩을 보내 국정을 살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간첩을 보내되 두 가지 일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한 가지는 그 나라 국정을 은밀한 속에 샅샅이 살필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며 또 한 가지는 만약 그 나라가 부강하면 감언이설로 약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임무를 스스로 맡아 백제로 건너간 도림은 백제 개로왕을 농락해서 마침내 부강하고 검소한 나라를 허황하고 가난한 나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개로왕 二十一년 九월, 간첩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간 도림의 보고를 받자 장수왕은 곧 군사 三만을 거느리고 백제 국경을 넘어섰다. 이 정보를 들은 백제 개로왕은 가슴을 치며 분통해 했다. 그리고 왕자 문주(文周)를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지금 우리의 형편으로는 고구려의 대군을 맞아 싸울 힘이 없으니 신라에 구원병을 청해서 함께 싸우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왕자 문주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말이다. 너는 곧 신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도록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라에서 구원병이 도착될 때까지는 성문을 굳게 닫고 마주 싸우지 마십시오. 되도록 날짜를 끌다가 구원병이 도착한 후에 안팎으로부터 친다면 적을 무찌르기 조금도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문주는 곧 몇몇 장졸을 거느리고 구원병을 청하러 신라로 향했다. 그런 고구려군의 침공은 신속했다. 고구려의 장수 중에는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이란 두 장수가 있었다. 그들은 원래 백제 장수였는데 사소한 죄로 개로왕에게 혹독한 형벌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후 풀려나오자 그들은 개로왕에게 원심을 품고 고구려로 도망쳐 갔던 것이었다.  그들은 이번 싸움에 각각 고구려군의 장수가 되었는데 옛 원한을 풀게 될 때는 바로 이 기회라 생각한 그들은  백제를 치려면 지금 국력이 몹시 쇠약해 있다고 하니 속할수록 좋을까 합니다.

  이렇게 재촉했다. 그 말에 장수왕은 더욱 군사를 독려해서 단시일에 백제 서울 한성(漢城)을 포위했다.

  고구려군 여러 장수들 중에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의 분투는 특히 눈부셨다. 그들은 먼저 북성(北城)으로 침입하여 七일 만에 함락시키고 다시 남성(南城) 으로 돌아가서 맹렬히 공격을 가했다. 백제군은 신라의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리느라고 버틸 대로 버티어 보기는 했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성중으로 뛰어드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개로왕은 하는 수 없이 단기(單騎)로 궁성을 빠져나와 도망치려 했다.

  이때였다. 저편으로부터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고구려 장수가 있었으니 바로 지난날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던 재증걸루였다. 비록 지금은 적의 장수지만 지난 날에는 자기 부하였으니 구정을 생각해서라도 온정을 베풀 것이라고 개로왕은 생각했다.

  개로왕은 급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염치불구하고 재증걸루 앞에 꿇어 엎드려 절을 하며 애걸 했다.

  재증 장군! 나요! 바로 장군이 왕으로 받들어 주던 개로요. 내 목숨 좀 살려 주오. 지난 일을 생각해서라도 내 목숨 좀 살려 주오.

 그러나 재증걸루는 독기가 가득한 눈초리로 왕을 내려다보니

  뭐라구? 지난 일을 생각해서 살려 달라구? 뻔뻔스럽군!

  재증걸루는 애걸하는 왕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나 뱉았다.

  오냐. 지난 일을 생각해서 네게 단단히 맛을 보여 주어야겠다. 지난날 너는 나와 고이 만년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 했으니 이번에는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겠다.

  이렇게 쏘아붙인 재증걸루는 즉시 왕을 결박해 가지고 아차성(阿且城)으로 끌고 갔다가 마침내 참살하고 말았다.

 

 

  사냥터에 흘린 피

  한편 신라로 군원병을 청하러 갔던 문주는 겨우 군사 만 명을 얻어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이미 왕을 죽이고 성을 파괴하고 돌아간 후였다. 왕자는 땅을 치고 통곡했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백제 二十一대 임금이 된 문주왕(文周王)은 마음이 어질고 백성을 극진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의 결함은 마음이 약하고 과단성이 없어서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점이었다.

  지금 서울은 적에게 여지없이 파괴되어 복구하자면 백성들의 고통이 격심할 것이오니 멀리 천도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압니다.

  특히 사나운 고구려 땅에서 멀지 않으므로 언제 또 지난번과 같은 참사를 당할는지 알수 없습니다.

  신하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며 남쪽 웅천(熊川=公州) 땅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하자면 혹독한 국난으로 피폐한 나라를 바로잡고 재건하려는 의욕은 없고 일시적으로 안전한 도피처를 찾아가려는 망국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마음 약한 왕은 그 주장에 귀가 솔깃했다. 그 해 十월 마침내 웅천으로 천도하고 말았다.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자 왕은 더욱 안일한 길을 택하게 되었다.

  힘들고 복잡한 정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들과 산을 쏘다니며 사냥이나 일삼았다.

  즉 二년 九월에는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아 병마의 실권을 맡겨 버렸으며 三년 四월에는 왕제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左平)으로 삼아 내정에 관한 일체를 맡겨 버렸다.

  국운이 피폐하고 왕권이 쇠약해지면 강신(强臣)이 대도하는 것이 고금에 흔히 보는 현상이다.  특히 병관좌평이 되어 군사적 실력자가 된 해구는 야심이 만만한 인물이었다. 기회만 있으면 왕을 없애고 정권을 전담하려고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횡(專橫)을 방해하는 내신좌평 곤지의 존재로 말미암아 일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가 곤지가 우연히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마침내 거사할 것을 결심했다.

  문주왕 三년 九월, 왕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멀리 사냥길을 떠났다. 때는 왔다고 생각 한 해구는 몇몇 심복에게 밀명을 내려 왕을 따라가게 했다.

  해구의 심복들은 왕을 따라 사냥을 하는 척 들과 산을 달리다가 거처를 보아 왕을 쏘아 죽이고 말았다.

  문주왕이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나자 그의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했다.(西紀 四七七)  곧 제 二十二대 삼근왕(三斤王)이다.

  새 왕은 이때 나이 겨우 十三세였으므로 모든 국권은 좌평 해구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해구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스스로 명실공히 임금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봄 연신(燕信)이라는 자와 더불어 대두성(大豆城)에 의거하여 반기를 들었다.  왕은 아직 나이 어리고 모든 권력이 자기에게 집중해 있으므로 한 번 거사하면 쉽게 성공하리라고 해구는 생각했던 것이다.

  해구가 신하로서 국권을 전담할 때는 그의 위세에 눌려 아무 말도 없던 사람들도 그가 공공연히 모반을 하자 의외에도 크게 반발을 보였다.

  역적을 소탕하자 !

  선왕을 죽이고 그것도 부족해서 이제 모반을 하다니?

  정의의 인사들은 어린 왕을 중심으로 굳게 결속했다. 그리고는 우선 좌평 진남(眞男)에게 군사 二천명을 맡겨 해구 등이 의거한 대두성을 치게 했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모반한 역도들의 세력은 만만치 않았다.

  진남의 군사는 오히려 크게 패하여 쫓겨 오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간 해구가 이번엔 우리 왕성으로 쳐들어 올 모양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어린 왕은 겁에 질린 눈으로 신하들을 둘러봤다. 그러자

  어찌 신하의 몸으로 도적의 무리가 왕성을 침범하게 버려두겠소?

  우렁찬 음성으로 이렇게 외치며 나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덕솔 진로(德率眞老)였다.

  그러나 쓸 만한 군사가 이번 싸움에 모조리 상했으니 무엇으로 도적을 토벌하겠소?

  한 늙은 신하가 한숨을 짓자

  도적을 토벌하는데 반드시 많은 병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오. 도적의 허를 찌른다면 불과 수백 명으로도 족할 줄 아오.

  진로는 이렇게 호언하고 남은 군사를 긁어 모았더니 겨우 五백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 五백명은 해구의 반역을 기를 갈며 미워하는 결사의 정병들 이었다. 진로는 진남과는 달리 五백명 결사대를 이끌고 아무도 모르게 간도로 대두성을 향했다.

  대두성에서는 크게 잔치를 벌리고 있었다. 진남의 토벌군을 격퇴시킨 해구는 벌써 왕성을 함몰하고 왕위에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그의 심복들도 각각 높은 벼슬들을 내약 받아 기쁨에 취해 있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함성이 높이 올랐다. 성밖에 숨어서 기회만 엿보고 있던 진로 등 결사대가 쳐들어 온 것이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군사들은 미처 대오를 갖추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모조리 격살되고 해구도 마침내 진로 등의 손에 잡혀 참살되고 말았다.

  이렇게 왕에게로 돌아갔으나 어린 왕은 힘에 겨운 대사를 겪느라고 심려가 심했던지 그 이듬해 十一월, 재위 불과 三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加의 亂

  삼근왕이 세상을 떠나자 어린 왕자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문주왕의 아우 곤지(昆支)의 아들 모대(牟大)가 그 뒤를 이어 즉위했으니 제 二十三대 동성왕(東城王)이다.

  새 임금은 담력이 크고 활을 잘 쏘는 강한 임금이었다. 문주왕이나 삼근왕과는 달리 군사나 외교나 내정에 있어서 적극적인 정책을 취했다.

  해구를 토벌하는데 크게 공로를 세운 진로를 병관좌평겸 지내외병마사(兵官佐平兼 知內外兵馬事)를 삼아 강력한 보필을 삼는 한편 왕 자신도 국정 전반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그 당시 백제에게 큰 위협이 된 것은 여전히 고구려였으므로 왕은 북으로 대륙의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는 한편, 남녘의 강국 신라와도 수교를 하고 남북으로부터 고구려를 협공하는 정책을 취했다.

  특히 신라와의 국교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내어 혼사를 정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정략 결혼에도 손을 쓴 것이다.

  신라의 소지왕은 거기 응하여 이찬 비지(伊 比智)의 딸을 왕에게 시집을 보내니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공고히 되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국사에 정력을 기울이던 왕도 나라 형편이 차차 안정되어 가자 그 강력한 성격은 자만심으로 변해 갔다.

  二十一년 여름, 심한 가물로 백성들은 굶주려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 되었고 가을에는 나쁜 병이 돌아 죽어 쓰로지는 자가 거리에 즐비했지만 왕은 그런 것은 돌보지 않고 유흥과 사치만 일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봄엔 지난 해의 흉작으로 백성들은 생계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고 있는데 왕은 궁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이라는 거창한 전각을 신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둥의 높이가 다섯 길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전각이었으며 정원에는 큰 연못을 파고 전국 각처에서 이상한 새들과 짐승들을 잡아다가 기르게 했다.

  왕의 사치가 극도에 달하자 나라의 앞일을 염려하는 충신들이 간혹 간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충신들이 간하면 왕은 아무런 대꾸도 아니 할 뿐 아니라 그 후부터 더 간하는 자가 있을까 해서 궁문을 닫아버리고 웬만한 사람은 들여보내지도 않았다.

  동성왕이 이렇게 사치를 일삼고 백성들을 돌보지 않게 되자 나라 안은 자연 어지러워지고 민심은 흉흉해지더니 二十三년 정월에는 왕성 안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글세 그럴 수가 있나? 이때까지 멀쩡하던 노파가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가 돼서 도망했다는군.

  여보게 그 뿐인가? 어제는 남산에서 큰 호랑이 둘이 하루 종일 싸웠는데 어찌나 사납던지 아무도 감히 잡으려고 하니 못했다는군.

  이런 괴상한 일이 자주 일어나면 나라에 큰 변이 생긴다는데 또 난리나 나지 않을는지.

  누가 아니래나? 임금이라는 저만 호강 하려구 백성들 생각은 도무지 않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 거야?

  백제 나라 안이 어수선해지자 이웃나라 신라에서는 그 기회를 타서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국경지대에 모으고 있었다.

  아무리 사치를 좋아하는 왕이지만 이웃나라의 침공을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 해 七월 왕은 탄현(炭峴)에 책(柵)을 설비하고 신라의 침공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八월에는 다시 가림성(加林城)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 加)에게 그 곳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백가는 왕의 총애를 깊이 받아오던 총신이었다. 그러므로 갑자기 가림성 같은 외지고 위험한 곳에 좌천된 것이 불만스러웠다. 백가는 왕의 명령이 떨어졌는데도 가림성으로 부임 하지 않고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왕은 크게 노했다. 즉시 백가를 불러들여 호되게 꾸짖었다.

  너는 오늘날까지 내가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나 거역하는 일 없이 고분고분 순종하기에 남달리 사랑하여 왔는데 이번에 명령한 일은 어찌하여 듣지 않고 꾸물거리느냐?

  그러나 백가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외지고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갈 수 없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내 아무리 너를 아껴왔지만, 그렇게 내 말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장차 네 목숨을 참할 줄 알아라.

  왕으로서는 백가에게 위엄을 보이느라고 한 말이었지만 백가는 그 말을 듣고 대단히 두려워했다.  자기에게 한 번도 거칠은 말을 던진 적이 없는 왕이 죽이겠다는 말을 한 것을 보니 필경 자기를 미워하기 시작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나를 사랑해 주어야 왕이지, 나를 미워한다면 원수일 뿐이다. 어디 두고 보자.

  왕에게 두려움과 앙심을 품은 백가는 왕의 시중을 드는 궁녀를 매수해서 왕을 독살시키고 말았다.

  동성왕 二十三년 十二월의 일이었다. 동성왕이 갑자기 암살 당하자, 그의 둘째 아들 사마(斯摩)가 그 뒤를 이어 즉위했으니, 제 二十四대 무녕왕(武寧王)이다.

  무녕왕은 키가 후리후리해서 八 척이나 되며 용모가 그림과 같고 성품이 인자해서 모든 사람들이 흠모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어진 반면에, 악한자는 버려두지 않는 단호한 데도 있었다.

  동성왕을 암살시킨 백가는 시침 뚝 떼고 새 임금 밑에서 권세를 부리려고 했다. 그러나 왕은 무엇보다도 먼저 선왕의 사인을 규명한 끝에 암살의 장본인이 백가라는 것을 캐내었다.  그래서 즉시 백가를 잡아들이려 하니까 눈치 빠른 백가는 왕성을 탈출하여 가림성으로 도망쳤다.  일찍이 자기가 부인할 것을 거부했던 바로 그 성에 백가는 몸을 의탁하게 된 것이다.

  왕은 즉시 병마를 거느리고 백가 토벌의 길을 나섰다. 그러다가 우두성(牛頭城=春川)에 이르러 해명(解明)이란 장수에게 공격을 명하니, 백가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성밖에 나와 항복했다.

  신이 죽을 죄를 졌습니다마는 특별히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분골쇄신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여생을 바치겠습니다.

  백가는 이런 뻔뻔스런 말을 했다. 그러나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 임금이 아니었다.

  신하로서 임금을 해치면 반드시 죽는 것이 예로부터 정해진 법이다.

  이렇게 말하고 백가의 목을 베어 남쪽으로 가지고 가서 백강(白江=白馬江)에 던져 버렸다.

  이 무렵의 백제 왕들은 나라 안팎이 어수선해진 때문인지 비명횡사를 하지 않으면 단명하여 일찍 세상을 뜨는 일이 많았다.

  즉, 무녕왕이 재위 二十三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제 二十五대 성왕(聖王)이 그 뒤를 이어 十六년에는 서울을 사비(泗 =扶餘)로 옮겼으나 三十二년 七월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제 二十六대 위덕왕(威德王)은 四十五년간이나 무난히 왕위를 지켰지만 그 뒤를 이은 二十七대 혜왕(惠王)은 재위 二년 만에 세상을 뜨고, 그 다음 왕인 제 二十八대 법왕(法王) 역시 즉위한 지 二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白江의 落照

  海東曾子의 變貌

  무왕의 뒤를 이은 이는 제 三十대 의자왕(義慈王)이니 이는 곧 백제 최후의 임금이다.

  의자왕은 무왕의 원자로서 뜻이 웅대하고 성품이 대담할 뿐 아니라,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그러기에 즉위 초에는 국왕 외교 내치에 힘을 기울인 흔적이 많다. 즉위한 이듬해 정월에는 사신을 당에 파견해서 외교적인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二월에는 주군(州郡)을 순무하고 억울하게 형을 받은 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그 해 七월에는 선왕 때부터의 숙망인 신라 침공을 시작했으니 이 때 미후성( 彌城) 등 四十여성을 함락시키는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다음 달인 八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파견해서 군사 一만으로 신라의 대야성(大耶城=陜川)을 공격하고 성주 품석(品釋) 등의 목을 잘라 신라 서울로 보내는 한편 천여 명을 사로 잡았다.

  그러나 五 년경부터는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백제군의 예봉이 차츰 꺾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밖으로는 숙적인 신라가 김춘추와 같은 명신의 외교적 활동으로 당에 원조를 청하고 김유신 같은 명장이 군사력의 강화를 꾀하여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성장한 데 비하여 안으로는 거듭된 승전에 자만한 왕이 사치를 일삼게 된 때문이다.

  이 무렵 양국간의 교전 상태를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전하는 것만 보아도 그런 전세의 추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五년 五월 왕은 당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당이 고구려를 치게 된다면 신라를 도울 여력은 없을 것이다. 이 틈을 타서 한숨에 신라를 뭉개버릴 생각을 한왕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칠성(七城)을 공취 하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신라군은 강력히 항전했다.  특히 장군 김유신의 뛰어난 용병술은 오히려 백제의 대군을 어지럽힐 지경이었다. 

  七년 十월에는 장군 의직(義直)을 시켜 군사 三천으로 신라의 무산성(茂山城)으로 진격케 하고 다시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甘勿城), 동금성(桐芩城) 등을 공격케 했다. 그러나 이 때에도 김유신은 결사적으로 싸워 역습하므로 의직은 필마로 겨우 도망해 올 정도였다.

  그 이듬해인 三월, 의직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 변경 요차성(腰車城)등 十여성을 공취하고 四월에는 옥문곡(玉門谷)으로 진격했으나 역시 김유신의 역습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왕은 신라 침공을 단념하지 않았다.

  九년 八월, 좌장 은상(左將殷相)에게 정병 七천을 주어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취케 했는데 이 때 역시 김유신 등의 역습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백제가 신라와 싸울 때 항상 교전의 상대가 된 장수는 김유신이었다.

  그러므로 김유신에 관한 전설이 백제 측에 전해진 것도 적지 않다.

 

 

  桂仙公主의 悲戀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시절이라고 하니 아마 의자왕 四년 九월, 김유신이 백제 국경은 넘어 칠성을 공취했을 때로 짐작된다.

  그 때 김유신의 신라군은 승승장구하여 백제왕성을 향해 진군하다가 작성(鵲城) 근처에서 잠시 군사를 머물게 하고 진을 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서쪽으로부터 큰 까치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진영 위를 돌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아니 이게 웬일일까?

  까치가 울면 불길하다는데(?)….

  신라의 여러 장수들은 불길(?)한 예감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있던 김유신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에 찼던 장검을 뽑아 그 까치를 향해 겨누며 소리쳤다.

  여봐라 ! 네가 어떠한 요물이기에 감히 우리 진영에 날아와서 이렇듯 수선을 피우는고?

  유신이 말을 마치기 바쁘게 그 까치는 거꾸로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달려가서 잡으려 하니까 한 번 재주를 넘더니 그 까치는 허물을 벗고 한 미인으로 변했다.

  여러 장수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 망설이고 있었으나 김유신만이 홀로 태연자약했다.

  너는 어떠한 곡절이 있기에 젊은 여자의 몸으로 이렇듯 내 진중에 날아왔는고?

  점잖게 물으니까, 그 미녀는 한 번 간드러지게 웃고 나서

  신라 장군 김유신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비록 적국이긴 하지만 그 나라의 공주가 몸소 찾아왔거늘 자리도 베풀어줄 줄 모르는고?

  하고 나무랐다. 그 미녀는 바로 백제 의자왕의 딸 계선공주(桂仙公主) 였던 것이다.

  계선공주는 그 당시 절세의 가인으로 백제, 신라, 고구려에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병법에 통달한 점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특히 공주는 신기한 병기를 발명해 내는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용병기라는 것은 지금의 전차(戰車)와 같이 아무리 강한 적군 속이라도 마음대로 돌파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기에 의자왕은 어느 장군보다도 공주의 힘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 온다는 정보를 받자, 왕은 누구보다도 먼저 공주에게 그 대책을 문의 했다.

  그런 일이라면 조금도 염려할 것은 없을 것으로 아옵니다.

  공주는 애련한 외모와는 딴판으로 대담한 소리를 한다.

  아니 염려할 게 없다니? 신하에서 으뜸가는 용장 김유신이 쳐들어 온다는데 어찌 염려 하지 않겠는고?

  김유신이 제아무리 날래더라도 저에게는 자용병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 제가 적진에 잠입해서 적의 군세를 살핀 다음 자용병기로 섬멸해 버릴 것이오니 조금도 염려 마시어요.

  이렇게 호언장담한 다음 역시 발명품의 하나인 인조 까치를 타고(굳이 현대적인 해석을 한다면 일종의 글라이더를 타고) 신라 진중에 날아온 것이었다. 계선공주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엄청난 자기의 재주를 과시하면 제아무리 용감한 김유신이라도 크게 놀라고 두려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공주의 얘기를 듣자 김유신은 껄껄 웃었다.

  그런 것을 바로 여자의 좁은 소견이라 하는 것이요. 나라의 운명을 거는 큰 전투가 그런 조그만 재주로 좌우된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일 줄 아오. 자, 공주의 소원대로 우리 진영을 샅샅이 보여 드릴 것이니 마음대로 구경하시고 공주가 자랑하는 자용병기라는 것으로 격파 할 수 있다면 격파해 보시오.

  김유신은 공주를 데리고 진중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숨김 없이 모두 구경시켰다. 그런 다음 공손히 진영 밖으로 전송했다. 신라 진영밖에 나온 공주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한숨만 쉬고 있었다.

  예로부터 기병(奇兵)은 정병(正兵)을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때까지는 자기가 발명 한 신무기로 기습을 가하면 어떠한 대적이라도 능히 무찌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정도(正道) 로서 훈련되고 당당한 진세를 베푼 신라군의 진법을 보니 자용병기쯤으로 도저히 격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공주를 낙담시킨 것은 신라군의 진세만은 아니었다. 신라군을 거느리는 김유신의 태도에도 심한 패배감을 느꼈다. 얼마나 자신이 만만하면 적의 첩자에게 그렇듯 군사기밀을 낱낱이 밝힐 수 있을 것인가?

  그저 놀랄 뿐이었다. 백제 조정에 설치는 사나이치고 그렇듯 늠름하고 당당한 대장부는 없었다.

  공주는 역시 연약한 여인이었다. 신라군세의 힘과 김유신의 장략(將略)에 위압된 때문이라면 그렇듯 낙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주가 절망에 빠진 것은 어느덧 자기 마음에 싹튼 김유신에 대한 사모의 정을 깨달은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자기는 백제의 공주, 상대편은 숙적의 장군 이런 절망에 부닥쳤을 때 직선적인 여자의 마음이 취할 길은 단 한 길뿐이다. 공주는 다시 인조 까치를 몸에 뒤집어 썼다. 그리고 백제 왕성을 향해 날아가다가 오봉산(五峯山) 기슭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거꾸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것을 바라본 백제 사람들은 신라군을 격파하는데 절망해서 힘을 잃었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라고 수군거렸지만 실은 이룰 수 없는 모정(慕情)을 달랠 길 없어 스스로 추락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肉林 속의 忠言

  이와 같이 군사력으로도 나날이 신라에 뒤져갈 뿐 아니라 외교상으로도 당을 중심으로 해서 신라와 겨룰 때마다 백제측은 불리한 입장에 빠지기만 했다.

  의자왕 十一년, 왕은 사신을 당에 보내어 조공한 일이 있는데 이때 당고종은 사신을 통해서 의자왕에게 글을 보냈다.

  < 해동의 三국이 건국한 후 땅을 접하고 이웃 삼아 온지도 오래이거늘 근자에 와서 틈이 벌어지고 싸움이 잦아 삼한의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무기를 쌓고 평안한 날이 거의 없으니 짐은 하늘의 뜻을 대신하고 땅의 이치를 따져 볼 때 심히 민망할 따름이로다. 지난 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이 아울러 입조 하였을 때 짐은 서로 수원(讐怨)을 풀도록 명하고 다시 화목하도록 말한 일이 있느니라. 그때 신라사신 김법민(金法敏)은  고구려와 백제는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하며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므로 대성(大城)과 중진(重鎭)이 거의 백제에 점거되고 강토는 날로 줄어들어 국력이 자못 쇠퇴하니 부디 백제에 명하시여 공취한 성지를 돌려 주게 하실 것이며 만약 소명을 받들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켜 탈환해 주시기 바라오나 이는 오직 옛 땅을 찾겠다는 뜻 이올 뿐 당장에라도 교화(交和)할 의향은 넉넉히 지니고 있나이다

  이렇게 말하였거니와 짐은 그 말이 이치에 맞으므로 이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느니라.

옛적 제환열사제후(齊桓列士諸侯)는 망국(亡國)에도 상존하였거늘 하물며 짐은 만국(萬國)의 주(主)로서 어찌 위태로운 번국(蕃國)을 다스리지 아니하리오? 그런즉 백제 왕은 일찍이 점거한바 있는 신라의 성지를 마땅히 신라에게 돌려줄 것이며 신라는 또한 전투로 포로한 백제의 군민(軍民)을 그 왕에게 돌리도록 하라. 이와 같이 한다면 환란과 분쟁은 일소되고 군비의 확충은 그칠 것이며 삼국의 전란이 가라앉아 백성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뫼를 쌓는 것 같은 불행은 옛말이 되리로다. 왕이 만약 이 말을 순종치 않는다면 짐은 이미 신라 김법민이 요청한 바에 의하여 그들의 뜻에 맡겨 정당한 결전을 감행토록 하리라. 또 고구려가 짐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즉시 글단(契丹)과 제번(諸藩)에게 명하여 요수(遼水)를 건너 침공케 할 것인즉 백제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복된 길을 구하는 옳은 계책을 강구하여 뉘우침이 없도록 할지어다.>

  당 고종의 유시는 삼국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서 한 말 같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지나치게 신라편을 들은 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는 대당 외교에 있어서도 신라에게 쓴 잔을 마신 셈이었다.

  당이 신라 편을 드는 것이 확실해지자 왕은 그 이상 당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지 十五년 八월, 고구려 말갈과 합세하여 신라의 三十여성을 공취 했다.

  이렇게 되니 새로 신라왕이 된 김춘추(武烈王)는 즉시 당에 사신을 보내어 여제(麗濟) 양국의 응징을 호소했다. 그러자 당 고종은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 소정방(蘇正方)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우선 고구려를 공격케 했다.

  그리하여 정명진 등은 요수를 건너 고구려 군사 천여명을 참살하고 돌아갔는데 동맹국이 이러한 난을 당하는데도 의자왕의 생활태도는 유흥과 사치에만 젖어 있었다.

  十五년 二월에는 태자궁을 수리하였는데 사치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왕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궁녀들과 더불어 주지육림에 빠져 있었다. 왕이 이렇게 나라 일을 돌보지 않게 되자 간사한 무리들은 그 비위를 맞추며 감돌았지만 여러 신하들 중에 강직한 충신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十六년 三월, 좌평 벼슬에 있던 성충(成忠)은 왕의 행동을 보다 못해서 심하게 간하 일이 있었다.

  대왕, 일찍이 해동증자란 칭송을 받던 대왕께서 오늘 이게 무슨 일이시옵니까? 밖으로는 당과 신라가 우리의 사직을 송두리째 쓰러뜨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사오며 안으로는 백성들이 오랜 전란과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도탄에 빠져 있아옵니다. 이와 같은 국가존망지추에 군주 되시는 분은 마땅히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 모든 힘을 기울이셔야 할 것이 온데 간사한 무리를 가까이 하시고 술과 여색에 침혹 하시니 어찌 통탄치 않겠습니까?

  성충의 말을 듣자 왕은 펄펄 뛰며 노했다.

  이놈 ! 네가 감히 누구에게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

  자기의 약점을 여지없이 찔린 왕은 스스로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도 성충과 같은 존재는 큰 장애물이었다.

  그는 즉시 성충이 왕에게 불경한 언동을 농했다는 죄를 씌우고 옥에 가두어 버렸다.

  성충이 옥에 갇히자 그 후부터는 왕의 난행을 간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한편 옥에 갇힌 성충은 나라의 앞일을 심려한 나머지 울화병이 되었다. 그래서 날로 몸이 쇠약하여 마침내 죽게 되었는데 숨이 넘어갈 때에도 그는 나라의 일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붓을 들어 왕에게 글을 올렸다.

  < 예로부터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리고 죽겠사옵니다. 신이 저으기 내외의 형세를 살펴본 즉 몇 해 가지 않아 큰 변화가 일어날 것 같사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당과 신라의 군사가 우리 강토를 참공할 것이옵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그 지리를 살펴 유리한 곳에 처해야 하오며 강물을 의지할 때에는 상류에 처하여 적세를 눌러야 가히 승리를 기할 수 없는 법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의 군사가 우리 강토를 침범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육로(陸路)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도록 할 것이오며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錦江下流)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야 하옵니다.  그리고 그 험난한 곳에서 방어하다가 적세가 누그러진 다음에 치는 것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그러나 충신의 피를 토하는 듯한 마지막 호소도 유흥에 들뜬 왕의 마음에는 한낱 귀찮은 잔소리에 불과했다.

  주제넘은 것이 저 혼자 아는 체하는 군.

  왕은 입맛을 다시고 그 글발을 던져 버렸다.

  그 후에도 왕은 유흥과 음락을 일삼고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운이 날로 기울어지자 우선 나라 안에 가지가지 괴상한 징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泗 城의 異變

  의자왕 十九년 초봄, 궁중에는 괴상한 풍문이 돌았다.

  세상이 망하자니까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구먼?

  궁녀들은 서로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렸다. 그들의 눈은 헤아릴 수 없는 두려움에 가득해 있었다.

  아 글세 어젠 대낮에 여우들이 궁중으로 몰려들어 오는데 흰 여우를 앞장 세우고 열을 짓고 들어오는 꼴이 꼭 적군이 쳐들어 오는 것 같더라니까.

  어디 그 뿐이겠수? 다른 여우들을 거느리고 쳐들어 온 흰 여우가 쓱 한 번 둘러보더니 상좌평 어른의 책상에 떡 올라앉지 뭐유?

  상좌평이란 좌평의 우두머리로 곧 수상격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징조일까?

  큰 소리론 말할 수 없지만 나라가 다 망해가는 징존지도 몰라요.

  그건 또 왜?

  여우 같은 적군이 궁중에 쳐들어 와서 그 우두머리가 상좌평이 된다면 나라 꼴이 다 돼지 뭐유?

  그 해 四월, 이번에는 태자궁에서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태자궁 앞뜰에서 큰 암탉 한 마리가 조그만 참새와 교미를 한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징졸까?

  거듭되는 이변에 민심은 흉흉했다.

  큰 새가 작은 새와 교미를 했으니 장차 큰 나라가 작은 나라와 합친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큰 나라는 어느 나라구 작은 나라는 어느 나란구?

  큰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당나랄 거구. 작은 나라는 우리 백제가 아니면 고구려겠지.

  그러니까 당나라가 고구려나 백제와 합친다는 뜻이요? 그렇게 되면 오죽이나 좋겠소.

그 힘을 빌어서 저 원수 같은 신라를 쳐 부실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게 아니요. 당나라는 원래 우리를 미워해 왔으니까 신라와 합쳐서 우리를 치겠다는 징조겠지.

  해석은 구구했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한결같이 검은 구름이 드리웠다.

  이변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 해 五월, 왕성 서남쪽 사비하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그 큰 고기가 곧 백제의 임금을 뜻하는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그 해 九월, 가을이 깊어지자 궁중의 느티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려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는 마치 백제의 최후를 슬퍼하는 곡성같이 들렸다.

  그러한 속에서 해가 바뀌었다. 그러나 이변은 역시 계속되었다. 추위가 채 가시기 전 二월 왕성안의 우물들이 모두 핏빛으로 변하고 사비하 흐르는 물들도 모두 핏빛과 같았다.

  장마철도 아닌데 어째서 강물이랑 우물물이 핏빛으로 물들었을까?

  이제 난리가 나서 그렇게 피를 흘리게 된다는 징조겠지.

  이젠 어떠한 징조든지 불길한 것으로 말 돌리려고 했다.

  그 해 四월에는 두꺼비들이 수만 마리나 나무위로 올라갔고, 五월에는 푸우가 사납게 이어나서 천왕사(天王寺) 와 도양사(道讓寺) 두 절의 탑이 진동하고 검은 구름이 용과 같이 일어나서 동서로 갈라져 서로 싸웠다.

  六월에는 개 모양을 한 들 사슴 한 마리가 서쪽 사비하 언덕에 와서 궁성을 향해 짖다가 간 곳 없이 사라졌고 그를 따라 왕성안의 많은 개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울부짖다가 흩어졌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모두 다 흔히 있음직한 현상일는지 모르지만 한 번 어수선해진 민심에는 그것들이 모두 깊은 뜻을 지닌 것처럼 두려울 뿐이었다. 백성들의 마음이 어수선해지니 조정의 대신들과 왕의 마음 역시 편할 리가 없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한 궁인이 달려 들어오며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 귀신이 나타났습니다.

  궁인은 샛파랗게 질려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귀신이라니,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나?

  왕은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궁인의 말을 물리쳤다.

  아니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사와요. 저뿐 아니라 다른 궁인들도 다 같이 보았사와요.  갑자기 궁궐 담 위에 머리에는 뿔이 달리고 입이 귀까지 째진 것이 나타나더니 백제가 망한다. 소리치고는 땅속으로 들어갔 사옵니다.

  왕은 이 소리를 듣자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이 세상엔 귀신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밝혀 들뜬 민심을 가라앉히자는 생각이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귀신이 들어갔다는 곳을 파보도록 해라. 그 곳에서 귀신이란 것이 나오면 네 말이 옳을 것이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네가 잠깐 허망한 꿈을 꾼데 지나지 않을 게다.

  이렇게 말한 왕은 즉시 사람을 시켜 귀신이 들어갔다는 자리를 파보게 했다. 깊이 석자 쯤 파내려 갔을 때였다. 땅 속에서 거북 한 마리가 나왔다. 그리고 그 거북의 등에는 이런 글이 써 있었다.

  <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 >

  왕은 그 글의 뜻을 얼핏 새기기 어려워 무당을 불러 물었다. 그 무당은 고지식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달이 둥글다는 것은 곧 보름달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보름달은 곧 이즈러지고 초승달은 점점 둥글게 되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이치옵니다.

  그러니 결국 백제는 망하고 신라는 흥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다 왕은 크게 노하여 그 무당을 죽여버렸다. 민심을 가라앉히겠다고 한 일인데 오히려 소란하게 만들어 놓은 셈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민심을 가라앉혀 보려고 뇌심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첨 잘하는 한 신하가 나타나더니 왕의 비위를 맞춘다.

  대왕, 조금도 심려하실 것은 없을 줄로 아옵니다. 그 글발은 불길한 것이 아니오라 오히려 크게 길한 것인 줄로 아옵니다.

  크게 길한 말이라니?

  둥근 달은 왕성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오며 초승달은 쇠미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오니, 곧 백제의 국운은 날로 왕성해지고 신라의 군운은 날로 쇠미해진다는 징조인 줄로 아옵니다.

  그 해석을 듣고 왕은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는 그 뜻을 즉시 많은 백성에게 알리도록 명했다.

 

 

  興首와 階白

  그러나 아무리 해석을 좋게 한다고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백제 침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당고종은 의자왕 二十년 三월,  좌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신라의 김인물을 부대총관으로 삼고 군사 十三만으로 백제를 정벌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또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우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 당군과 합세하도록 명했다.

  이리하여 五월 二十六일, 신라왕 김춘추는 김유신 등 장병을 거느리고 서러벌을 출발하여 六월 十八일에 남천정(南川停=利川)에 이르렀다. 그리고 소정방은 수많은 전선(戰船)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德積島)까지 왔다. 이런 정보에 접하자 백제의 의자왕은 그제서야 크게 당황했다. 그래서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방어책을 물으니 좌평 의직(義直)이 먼저 한 계책을 진언한다.

  당병은 멀리 바다를 건너오는 것이므로 물에 익숙치 않은 군졸들은 반드시 뱃멀미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런 즉 그들이 처음 육지에 내려 미쳐 기운을 돌리지 못했을 때 급히 공격한다면 섬멸할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대국의 원조만 믿고 허세를 부리는 터인즉 만일 당군이 불리한 것을 알면 반드시 두려워 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니 무엇보다도 먼저 당군을 공격하는 것이 급선무인 줄 압니다.

  의직은 일찍이 신라의 김유신과 여러 번 싸운 일이 있는 역전의 노장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의견도 들을 만한 의견이었으나 거기 대해서 달솔사영(達率常永)이 반대하고 나섰다.

  달솔은 좌평 벼슬보다 하위의 관직이었지만 그는 좌평인 의직의 의견을 근본부터 반대한 것이다.

  그 계책은 가당치 않은 것으로 아옵니다. 당병은 먼 길을 온 까닭에 지루한 나머지 속히 싸우고자 할 것이오니 그 예봉을 당하기 어려울 줄로 아옵니다. 그와 반대로 신라군은 전에 여러 번 우리에게 패한 쓰라림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 군사를 대하면 두려워서 제대로 싸우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온 즉 당병에 대해서는 쳐들어 오는 길을 막으면서 신라군을 먼저 격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군도 자연히 기세가 꺾이어 물러갈 줄로 압니다.

  정 반대되는 두 가지 의견이었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도 이 두 가지 의견으로 갈리어 서로 굽힐 줄을 몰랐다.

  아 ! 이럴 때 흥수가 여기 있었더라면.

  하며 왕은 탄식했다. 흥수(興首)는 좌평 벼슬을 하던 중신으로소 식견이 넓고 포용력이 있어서 이렇게 국사를 논할 때 의견이 분분해지면 그 의견들을 잘 종합하고 거기에 자기의 독창적인 의견을 첨부해서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흥수는 그 얼마 전에 왕의 방종한 거동을 간하다가 멀리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長興)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수의 의견이 아쉬운 왕은 즉시 사람을 그에게 보내어  사태가 심히 위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흥수는 이런 의견을 진술해 보냈다.

  < 당병은 그 수가 많고 기강이 엄할 뿐만 아니오라 신라와 합세해서 대거 침공해 오므로 넓은 들에서 대진하고 싸운다면 그 수로나 진법으로나 우리의 군세로는 당적 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하오나 백강(白江)과 침현(沈峴)같은 요지에서 지키고 있다가 섬멸하면 적을 무찌르기도 어렵지 않을 줄로 아옵니다. 즉 그곳에서는 한 장부가 창을 휘두르면 만 사람도 당하기 어려울 것이오니 마땅히 용사를 뽑아 당병은 백강에서 막고 신라군은 침현에서 막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형세를 살피시다가 적군의 군량이 다하고 군사들이 피로한 기색이 보이거든 수하 장졸을 거느리고 진격하도록 하십시오. >

  지난날 성충의 의견과 비슷하면서도 더 구체적인 대책이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은 흥수의 탁견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 귀양간 흥수의 의견이 채택되어 그가 다시 요직에 앉게 될 것을 몹시 시기했다.

  그래서 말을 아름답게 꾸며 그의 의견을 반박했다.

  흥수는 오래도록 귀양살이를 하는 중이므로 대왕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니 어찌 대왕을 위해서 이로운 말을 하겠습니까? 흥수의 말과 같이 당병을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인한다면 적은 거스리는 물에 배를 부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또 신라군을 침현에서 막을 것이 아니라. 그 곳을 넘도록 버려 둔다면 길이 좁아서 군마가 한꺼번에 지날 수 없을 터인즉 이때를 타서 맹렬히 공격한다면 울 안에 들어 있는 닭을 잡는 격이요 그물에 걸린 고기를 주워내는 격이 아니옵니까?

  왕은 이번엔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이와 같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헛되이 시일을 보내고 있는데 벌써 당병은 백강으로 들어오고 신라군은 침현을 넘었다는 보고가 이르렀다.

  이제는 더 공론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왕은 즉시 달솔 계백(階白)에게 적군을 막도록 명했다. 왕의 명을 받은 계백은 결사대 五 천명을 뽑아가지고 떠나게 되었는데 그는 떠나기에 앞서 자기 처와 어린 자녀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좌우 사람들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비창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맞아 싸우게 되니 국가의 존망을 나로서도 예측할 수 없구료.  그런즉 장차 내가 싸움에 패했을 때 처자가 적들에게 욕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요.

  오늘의 윤리관으로 따진다면 비판의 여지가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 당시로는 일종의 미거(美擧)였다.

  계백 장군의 각오가 저렇듯 장하신데 우리들인들 어찌 부모처자에 대한 정에 마음이 끌릴 까보냐!

  五천 용사들은 이렇게 외치고 용약 전선으로 진격했다. 계백이 거느리는 백제군은 황산(黃山)벌에 이르자 진을 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는데, 이때 계백은 전 장졸을 향해 이런 말을 격려했다.

  옛날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은 군사 五천으로 오(吳)의 七十만 대군을 격파한 일이 있다.

그런즉 우리 모든 장병들은 각각 분발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계백의 격려에 용기백배 된 장졸들은 적군과 대전하게 되자 일기당천의 기세로 진격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실로 눈부신 승리였다.

  바로 이 싸움에 저 유명한 신라의 청년 장수 반굴(盤屈)이 전사했으며 관창(官昌) 또한 사로 잡혔다가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워낙 병력의 차이가 나는데다가 지리적 조건이 이롭지 못했던 백제군은 나중에 가서는 결국 신라군의 반격을 받아 장군 계백은 전사하고 상영(常永) 등 二十여 장수는 포로가 되는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한편 백제의 다른 부대는 지벌포에서 소정방이 거느리는 당군을 맞아 항전했으나 역시 대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나당 양군은 합세하여 백제 서울을 향해 진격해 들어왔다.

 

 

 落花三千

  적군이 왕성으로 접근해 오자 백제 측에서는 최후의 결전을 시도했다. 즉 남은 군사를 총동원해서 적군을 맞아 싸워 보았다.

  그러나 적은 승승장구해 온 강병이며 이편은 만신창이의 약졸들이다. 필사적인 분전에도 불구하고 사상자 만 여명을 내고 완패했다. 만사가 다 틀리고 말았다. 백제왕 의자는 가슴을 치고 탄식했다.

  어리석었느니라 ! 내가 어리석었느니라 ! 일찍이 성충과 흥수가 간하던 말을 들었던들 오늘의 이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을…

  그러나 뒤늦은 뉘우침이었다. 七월 十三일, 왕은 태자 효(孝)를 비롯해서 여러 왕자와 왕족들을 불러놓고 마지막 의견을 물었다.

  적군의 공세가 하도 사나우니 이 이상 이곳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즉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재기할 기회를 기다릴까 하는데 너희들 생각이 어떠냐?

  그런즉 만사에 고분고분한 태자 효는

  부왕이 그렇게 뜻을 정하셨다면 그 뜻을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여러 아우를 불러 모았다. 그랬더니 둘째 왕자 태(泰)가 눈을 부라리고 음성을 높이며 외쳤다.

  아무리 부왕의 말이라도 나는 그대로 좇을 수는 없소 !

  왕자와 왕족들은 모두 태왕자에게 눈길을 모았다.

  왕성을 버린다는 것은 곧 나라를 버린다는 뜻이요. 재기를 음모하겠다고는 하시지만 한 번 버린 물건을 찾는다는 건 끝까지 지니고 버티는 것보다 몇 갑절 더 어려운 일로 아오.

하물며 우리 군사는 모두 적에게 섬멸되고 남은 병력이라고는 지금 왕성을 지키는 자들 뿐인데 웅진성이로 피신한다고 무엇을 믿고 재기 한단 말이요?

  이렇게 되니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왕과 태자는 어디까지나 웅진성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네가 끝내 사비성을 지키겠다면 지켜 보아라. 나와 태자는 웅진으로 가서 전국의 의병을 모을 것이니 후에 합세해서 적을 물리치도록 하자.

  마침내 왕은 이런 결론을 내리고 그날 밤으로 태자와 함께 사비성을 탈출했다.

  그러나 왕자 태는 성을 빠져나가는 부왕과 형에게 거의 증오에 가까운 눈초리를 보내며 투덜거렸다.

  임금이란 백성들과 고난을 같이 해야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인데 백성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은 이미 임금의 자리를 내놓은 것으로 아시오.

  왕과 태자가 떠나자 사비성 모든 궁인과 백성들은 땅을 치고 통곡했다.

  왕과 태자까지 성을 버렸으니 누구를 믿고 산단 말이냐?

  이젠 꼼짝없이 적군에게 잡혀 죽거나 욕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구나.

  그 중에서도 동요가 가장 심했던 것은 왕의 총애를 받던 궁녀들이었다. 나라를 잃게 된 슬픔,  하늘같이 믿어 오던 왕을 잃은 절망감, 적군이 쳐들어 왔을 때 당해야 할 능욕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으로 마음 약한 궁녀들은 울부짖다가   죽자 ! 적에게 잡혀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우리 스스로 깨끗이 목숨을 끊자 !

  한 궁녀가 부르짖고 나서니까

  죽자 ! 깨끗이 죽자 !

  모든 궁녀는 그 뒤를 따랐다. 죽더라도 깨끗이 죽고 싶은 궁녀들은 부소산 서쪽 백마강으로 내민 큰 바위로 몰려갔다. 지난날 왕을 모시고 노래와 춤으로 흥겹게 놀던 바위였다.

  앞장 서 가던 궁녀가 바위 끝으로 가 두 손을 모아 궁성을 향해 읍하더니 치마를 뒤집어 쓰고 백마강 푸른 물을 향해 떨어졌다. 그러자 다른 궁녀들도 뒤를 이어 떨어졌다.

  전하는 말에는 이 바위에서 강물로 떨어져 죽은 궁녀가 三천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토록 많은 궁녀가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수많은 궁녀가 앞을 다투어 벼랑에서 떨어지는 광경은 비참하다기보다 차라리 꽃같이 찬란한 정경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岩)이라고 불렀다.

 

 

 泗批城의 民族魂

  왕과 태자가 웅진(熊津) 으로 피신하자 태(泰)왕자는 스스로 왕을 칭하고 남은 병력을 동원해서 끝끝내 성을 고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당 양군의 공세는 날로 치열해져서 언제 성중으로 쳐들어 올는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때 성중에는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와 왕자 융(隆), 연(演) 등이 남아 있었다.

형세가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워져 감을 느끼자 문사는 융왕자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숙부,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융왕자도 불안해서 어찌할 줄 모르던 참이었다.

  글세 말이다. 이럴 줄 알았더면 부왕과 형님을 따라 웅진으로 피신하는 편이 좋을 뻔했구나.

  그건 지난 일이니 이제 뉘우쳐도 소용 없구요. 앞일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세, 장차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부끄러운 말이지만 적에게 항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적에게 항복하다니? 차마 그럴 수도 없지 않으냐?

  아닙니다. 지금 항복한다면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지만 끝내 버티다가 적군이 쳐들어 와 보세요.  왕과 태자가 없는 성에서 굳이 항전을 했다고 적장의 노여움을 더 살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끝내 버티다가 요행히 적을 물리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숙부(泰)가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나라 안은 다시 두 동강이 나서 싸움이 시작될 게 아닙니까?

  문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융왕자에게는 느껴졌다. 그래서 융왕자는 문사와 대좌평 전복(千福) 및 몇몇 시신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니까 싸움에 지친 백성들이 그 뒤를 따랐다.

  융왕자가 항복하자, 신라 태자 법민(法敏)은 그를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지난날 너의 아비는 내 누이 동생을 참살했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 묻어 놓아 二十년 동안이나 내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너도 그만한 응보를 받아야 할 줄 알아라.

  일찍이 법민의 누이는 김품석(金品釋)에게 시집을 갔는데 품석이 대야성의 도독으로 있을 때 백제 장군 윤충(允充)의 침공을 받았다. 이때 검일(黔日)이란 자의 내통으로 성이 위태롭게 되자 품석은 윤충의 권하는 말을 믿고 항복하려 하다가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처자를 죽이고 전사한 일이 있다. 이 일이 누이를 사랑하던 법민에게는 뼈저리게 원통했던 것이다.

  융은 이미 항복한 몸이었다. 법민한테 어떠한 욕을 당해도 항거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피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융왕자가 항복한 후에도 태는 남은 군사를 모아 더 버티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남은 병력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소정방은 전군에 호령하여 최후의 공격을 가하니 당군은 노도처럼 성벽을 넘어 마침내 성 위에 당기(唐旗)를 꽂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마지막이로구나!

  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그리고는 결국 성문을 열고 나와 적군 앞에 구명을 청하게 되었다. 일시 웅진으로 피신해서 재기를 도모하던 왕과 태자는 일이 뜻대로 되지도 않고 그렇듯 강경히 사비성을 지키던 태 왕자까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해 七월 十八일,  마침내 적군 앞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는 온조가 건국한 후 三十一왕 六七八년 만에(西紀 六六0년) 멸망한 것이다.

  백제왕이 항복했다는 보고를 받자 신라왕 김춘추는 곧 금돌성(今突城)으로 부터 사비성에 와서 제감 천복(弟監天福)을 당나라로 파견해서 전첩을 보고 하는 한편, 八월 二일에는 크게 잔치를 베풀고 모든 장병을 위로하게 하였다.

  이때 김춘추는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을 당하(堂下)에 앉힌 다음 갖은 모욕을 다 가했으며 취흥이 도도해지자 당상으로부터 손을 내밀어 당하에 앉은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도록 했다고 한다. 원래 아무리 적의 왕이라도 일단 항복하면 예대(禮對)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렇게 욕을 보이는 것을 보고 백제의 여러 신하들은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았다.

  김춘추는 원래 견문이 넓고 대인관계에 능한 인물인데 의자왕을 이렇듯 냉대했다는 것은 얼핏 수긍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굳이 이유를 붙인다면 품석의 아내 즉,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죽인 데 대한 사감이라고나 할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왕성한 백제 국민들의 저항 의식을 위압으로 꺾어 보려는 술책이었을까? 지금 와서는 가려낼 길이 없다.

  그 후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문무 고관 八十八명과 백성 一만二천八백七명을 포로로 삼아 당나라로 보냈고 그 후 의자왕은 당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의자왕이 항복한 후에도 백제의 왕실과 장수들과 백성들 중에는 도처에서 항전을 계속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의자왕에게는 풍(豊)이라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볼모가 되어 일본으로 가 있었는데 백제가 멸망하자 종실 복신(福信), 중 도침(道琛) 등은 광복의 뜻을 품고 그를 왕으로 삼고자 사람을 보내어 귀국을 종용했다.

  풍왕자는 비분강개해서 일본 왕의 허락을 받고 급히 바다를 건너 고국으로 돌아왔다.

복신 등은 주류성(周留城)에서 풍왕자를 맞아 왕으로 세우고 전국 각처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자 서북부가 이에 호응하여 군세가 제법 강성해졌으므로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지키고 있던 사비성을 포위했다.

  갑자기 포위당한 사비성은 함락이 경각에 달한 듯 보였으나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의 원군이 도착해서 전세는 역전하고 일단 광복군은 임존성(任存城)으로 퇴진했다.

  이때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칭하고 복신은 상금장군(霜芩將軍)이라 칭하고 의병을 더욱 모아 들이니 그 세력이 날로 강성해졌다. 이렇게 되니 의기중천 한 광복군측에서는 당장 유인궤에세 사자를 보내어 호언장담했다.

  듣건대 당은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체 살육한 연후 나라를 신라에 귀속시키겠다고 하니 그렇게 죽음을 당하느니 보다 어찌 싸워서 죽는 편이 떳떳치 않으랴, 이에 우리는 더욱 단결해서 최후의 일인까지 싸울 따름이다.

  이 말을 들은 유인궤는 여러 가지 좋은 말로 항복할 것을 달래었으나 광복군측은 코웃음으로 대할 뿐이었다. 이렇게 위세를 떨치던 광복군도 차차 내분을 일으켜 붕괴하기 시작했다.  즉 복신과 도침은 전부터 서로 맞서서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복신이 마침내 도침을 죽이고 임금으로 세운 풍을 누를 기세를 보인 것이다.

  이렇게 되자 민심은 날로 이탈해 가고 광복군의 군세는 차츰 쇠약해 갔다. 이 틈을 타서 유인원, 유인궤 등이 일대 반격을 가하니 광복군은 웅진 동쪽에서 대패하고 다시 진현성(眞峴城)에 웅거하게 되었다.

  이제 백제 광복군의 섬멸로 마지막 고비라 생각한 유인원은 당고종에게 구원병을 더 청하니 고종은 다시 원군 七천명을 보내어 나당의 병력은 한층 더 강해졌다.

  이와 반대로 광복군측에서는 다시 내분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복신과 풍이 서로 다투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그 자를 없애야 나라를 도로 찾을 수 있겠어.

  이렇게 생각한 복신은 병이라 칭하고 굴방 속에 누워 풍이 위문하러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풍이 굴방 속에 들어오기만 하면 잡아 죽이려는 심사였다. 그러나 복신의 이러한 계교는 사전에 풍에게 탄로되었다.

  저런 괘심한 놈이 있나? 그렇다면 제가 먼저 죽어야지.

  풍은 즉시 단단히 무장을 한 심복을 거느리고 복신을 찾아가서 오히려 그를 죽여버렸다.

복신을 죽이고 난 풍은 나당 양군과 마지막 결판을 낼 생각으로 고구려와 일본에 구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일본의 구원병도 백강(白江) 어귀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풍은 몸을 빼어 도망치고 얼마 동안은 그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후에  고구려에서 풍왕자와 같은 귀인을 만났다.

  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 유민의 가장 강력한 광복운동도 좌절된 셈이지만 그 후에도 산발적인 항전은 계속되어 백제 사람의 강인한 민족혼을 과시하고 있었다.

 

— 백제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