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만인가, 사순 판공성사
This is the Day~ 오늘이 과연 이 표현이 제일 적당한 날인가~ 3년 만에 사제와 ‘마주 앉아’ 나의 ‘죄’를 열거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사제를 통해, 사죄를 받는 이 ‘성사 sacrament’….. 3년 동안 거의 피하다시피 한 것인데, 이상하게도 크게 부끄럽지도 않은 것, 이것부터 양심적 죄의 시작일까, 그렇게 ‘흑백 논리’를 적용해야 하는 가톨릭 신자의 수칙, 교리인가? 이 ‘판공성사’는 나에게 긴 세월의 경험도 있는데, 이제는 다 추억으로 넘어간 것, 하지만 대부분 만족스런 것들이기에 결국은 이렇게 다시 ‘도전’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괴롭고 길게 느껴지는 성사 준비단계가, 우습게도 몇 분도 걸리지 않는 실제 성사시간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다는 것도 알기에 이번에는 ‘단단히 벼르고’ 기다렸지만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 까먹고 나서야 ‘불길, 시급함’과 싸우고 있으니, 별 수가 없구나. 근래 나의 삶이 이런 ‘미루는 게으름’의 극치를 맛보고 있으니까…오늘은 결코 마지막 순간에서 cancel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 마지막 순간에 노력한 만큼이나마 남겨야 하지 않을까?
올해 판공성사는 왜 그렇게 신경이 쓰이던지 가끔은 괴로울 정도였다. 하기야 이 성사가 즐거울 수는 없지만 이번처럼 부담을 느낀 적이 있었을까? 강제성을 유도하기 위해서 고해소의 장막을 떠나서 환한 불빛 아래 면담과 고해를 함께 할 수 있는 노력은 보람이 있었다. 특히 새로 부임한 ‘젊은’ 부주임 사제라는 점도 조금은 덜 신경을 쓰게 했다.
3년 만이라서 조금 생소해진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고민은 고해할 죄를 상식적인 수준에서 찾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람관계에서의 죄가 제일 흔한 것인데, 나의 사회반경이 그 동안 얼마나 축소가 되었던가? 다른 쪽, 면에서의 죄는 하느님을 떠나는 듯한, 잊고 사는 생활이 제일 떠오르기에 그것부터 목록에 넣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절대계명에서 출발을 하면 다음은 이웃관계가 아닌가? 나에게 요새 이웃은 거의 떠난 상태이고, 그렇게 된 큰 이유에 대한 나의 노력이 결과적으로 부족하거나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하게 되니, 그것도 죄라면 죄일 거다.
이런 양심성찰에 의한 대화, 면담식 고해를 했고 ‘젊은’ 신부님의 말씀, 권면, 훈계를 듣게 되었다. 역시 조금은 교과서적인 것: “사람과의 관계 이전에 하느님과의 더 깊은 관례를 만들라’는 요지였다. 상투적으로 들렸지만 나중에 묵상을 해보니 그것이 정답이었다. 나중에 연숙이도 같은 반응을 보였으니까… 내가 조금은 지나치게 대인관계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 이제는 나도 인정을 해야 하는지… 이런 성사로 올해 판공성사는 만족, 대성공이라고 자축을 하면 어떨까?
성사 직후 텅 빈 대성전에 잠시 앉아 짧은 보속의 시간, 우람하게 보이는 성체, 십자고상을 보는 시간, 참으로 성스럽고 거룩하게 보였다. 이런 시간을 3년 동안 못했다는 사실이 후회가 되기도~~ 이 고해성사는 사실 성사를 보는 시간 이전에 고민하고 괴롭게 준비하는 자체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우는 기회가 되었다. 이것을 쉽게 자주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우리들처럼 어렵게 정말 필요할 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 성사 직후와 계속된 오후의 시간들, 아니 오늘이 다 지나가는 시간 모두 너무나 자유와 기쁨이 충만 된 감정으로 보냈는데, 이제 또 기억이 난다. 바로 고해성사의 초점은 바로 이 성사직후의 충만감을 느끼는 것을 기대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제 앞으로 이런 사실들을 일깨우며 살고 싶구나…
미리 예정한대로 판공성사 직후에 강남일식집에 가서 편안한 마음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예전에는 ‘우리들의 삼일절’이라고 3월 1일 가까이 외식을 하곤 했다. 3월 1일이 기념할만한 1919 삼일절 이외에 우리들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기념할만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처음 먹어보는 우동스시를 푸짐히 먹었다. 예전의 모듬 도시락보다 훨씬 저렴하고 양도 충분했기에 앞으로 이것을 자주 먹어도 되겠다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가슴 속 깊이 무겁게 느껴졌던 커다란 짐을 내려놓은 듯한 편안한 기분, 이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나머지 시간들, 이것이 최소한 잘못을 인정한 것에 대한 은총의 시간들 아닌가? 신부님 말씀대로 성사의 결과에는 ‘하느님의 선물, 은총’이 포함이 될 거다. 나는 아직도 ‘절대적인 善, 하느님의 정체, 속성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